대한민국29/ 국방8/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2/ 26 "이들은 도대체 누구냐" - 50 김일성, 펑더화이 낙마에 쾌재,
대한민국29/ 국방8/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2/ 조선일보
26 "이들은 도대체 누구냐"
중공군은 손자병법 이상의 군대, 현실적이고 영리하고 교활했다
(6) 중공군은 강했다
“지긋지긋했던 군대”
중국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전쟁을 겪은 나라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은 크고 작은 전쟁을 셀 수 없이 많이 겪었다. 중국은 그래서 병법(兵法)이 아주 발달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요즘에도 언급하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이 대표적인 경우다.
2500년 전 나온 그 병법에 관한 모색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는 다른 문명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그만큼 중국은 오래 전에 전쟁을 생각했고, 전쟁을 벌여왔으며, 전쟁에 대비하며 깊은 생각을 키워왔던 곳이다.
중국 사람들은 그 점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2500년 전의 군사적 사상인 <손자병법>이 아직도 유효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세계 최강의 미군 군대도 이를 중요한 군사 교재로 지정한 뒤 연구를 거듭한다고 자랑한다. 일부 중국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이 <손자병법>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소개한다.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는 중공군 병사들을 위해 중국 군악대가 환송곡을 연주하는 모습.
그렇다. 중국인들이 내세우는 대로 <손자병법>을 필두로 한 중국의 병법서가 다른 세계 어느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군사 철학의 뚜렷한 흐름을 이룬 점은 맞다. 중국인은 분명히 <손자병법>이 나온 중국의 계승자인 만큼 전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고, 전쟁에 나서서도 그 특유의 전통에 따라 매우 잘 싸울 줄 알았다.
1950년의 상황도 그 점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중공군의 전법은 매우 특이했다. 누구도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실제 전선에 나선 중공군의 움직임은 늘 우리의 예상을 비켜갔고, 의외의 상황을 연출하면서 우리를 당황케 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싶을 만큼 그들의 공격은 항상 우리의 의표를 찌르며 펼쳐졌다.
미군은 특히 그들의 전법에 매우 당황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군대냐’는 탄성이 흘러 다녔다. 그들은 밤에만 공격했고, 이상한 나팔과 꽹과리 소리를 울려대며 다가왔다. ‘세계 최강’이라던 미군이 상대하기에도 매우 거북한 군대였다. 당시의 여러 증언들은 그 때 우리가 지녔던 당혹감을 잘 말해준다.
1950년 10월 말 평북 운산에서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의 노무자로 근무했던 한 전직 목사는 당시의 중공군에 대해 “마치 굿판을 벌이는 무당집 분위기 같았다. 한 밤 중의 적막감 속에서 기괴하게 들려오는 피리소리, 이어 울리는 꽹과리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오싹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는 등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나팔과 피리를 불며 공격 신호를 하고 있는 중공군.
미군은 특히 더 당황했다. 처음 마주친 중공군의 군대는 그들에게 매우 고약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어두운 밤에만 공격을 벌이며, 정면보다는 측면과 보이지 않는 구석을 따라 다가온다는 점에서 그랬다.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에는 휴식에 들어가는 미군의 전투 관행으로 볼 때 그들은 아주 낯설고 두려웠다. 어느 한 미군은 중공군을 “정말 지긋지긋한 군대”라며 넌더리를 쳤다.
교묘한 싸움꾼, 중공군
한반도 전쟁에 뛰어들던 1950년 10월 말 무렵의 중공군은 그런 점에서 매우 두려운 군대였다. 적어도 이듬해 1·4 후퇴로 서울을 내주고 아군 전체가 북위 37도선에까지 밀릴 때는 그랬다. 그들은 늘 화려한 공격술을 선보였다. 저보다 강한 상대는 피하면서, 아군의 시야가 어둠에 묻혔을 때 제가 제압하기 쉬운 상대를 골라 은밀하면서도 강력하게 공격을 벌여왔다.
중공군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은 공군이었다. 그들은 당시 전투기를 제대로 몰 만한 파일럿이 없었다. 따라서 공군 비행기도 운용할 만한 게 없었다. 대부분 소련의 공군 지원을 받아야 했는데, 당시 소련을 이끌던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공군력을 지원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따라서 중공군은 미군의 공군력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키고, 병사 한 사람씩 야산의 나무를 베서 등에 지고 이동하다가 미 공군기가 뜨면 그 나무를 세워놓고 주저앉는 방식으로 공습을 피했다. 아울러 산 가득히 나무를 태워 그 연기로 연막(煙幕)을 형성해 미군 조종사의 시야로부터 숨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줄기차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 병사들이 나무를 베어 멘 채 이동하고 있다. 미군 공군 정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다. 아군은 계속 밀리면서 순식간에 서울까지 내줬다. 월튼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한국 전선에 온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눈부신 작전을 펼친 끝에 겨우 그들의 공세를 꺾은 뒤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중공군으로부터 입은 아군의 피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중공군의 당시 싸움 방식이 뛰어났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일부 자료에서는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미군이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밀리면서 그들의 전법을 연구하는 데 골몰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에서는 중공군의 전법을 알기 위해 중국인 전문가들을 불러 특유의 전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그리고 잘 알려진 <손자병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연구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내용을 들은 바는 없다. 혹자는 그런 당시의 중공군이 남긴 강력한 인상으로 인해 미 육군사관학교가 <손자병법>을 중요한 교과서로 지정해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소개하고 있다. 미 웨스트포인트에서 <손자병법>을 참고 교재로 지정한 것은 맞다.
그러나 중공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손자병법>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손자병법>이 매우 뛰어난 고전이기는 하지만 그 책 한권이 전쟁의 실체를 모두 다 커버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나도 그 책을 연구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결론이기는 하지만, <손자병법>의 귀결점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가능하면 싸우지 말자”는 게 결론이다.
‘현실’에 충실했던 군대
아울러 정규 병력의 육성을 강조는 하고 있지만 이 책의 주안점(主眼點)은 어찌 보면 비정규적인 병력과 전법의 운용에 있다. 책에서는 정규전의 요소를 정(正), 비정규전의 요소를 기(奇)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책의 논지는 대부분 비정규전의 기(奇)를 중심으로 풀어간다는 느낌을 준다.
인상으로 볼 때 1950년 한반도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은 그와 닮은 점이 많다. 정면보다는 측면을 노렸고, 우회와 매복에 중점을 두고 공격을 펼쳤으며, 낮보다는 밤 시간을 이용하기 좋아했다. 그런 점을 “병력의 운용은 흐르는 물처럼 해야 한다”는 손자(孫子)의 가르침과 직접 연결하는 게 바람직할까.
/인해전술을 펼치고 있는 중공군.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2500년 전 위대한 군사 사상가 손자의 계통을 이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들의 전법이 손자의 그것을 그대로 따랐다는 시각에는 반대한다. 손자의 가르침은 원론(原論)에 불과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는 식의 가르침은 군사적 충돌의 현장에 선 지휘관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손자가 말하는 나머지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원론에 가깝지, 그를 실전에 응용해 실제 전쟁터에서 써먹을 수는 없다. 당시 중공군의 강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우선 손자를 비롯한 병법 사상가들이 펼쳤던 ‘원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병법에 나오는 그런 원론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강점은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미군에게는 있으나, 당시의 중공군에게는 없었던 게 있다. 없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미군의 그것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장비(裝備)와 화력(火力)이었다. 이 둘은 현대전의 핵심이다. 이제는 첨단 과학기술이 합쳐져 아주 빼어난 군사 기술이 등장하고 있는 시점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런 점에서 큰 불균형이었다. 세계 최강의 미국은 그를 이미 갖춰가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중공군은 그렇지 못했다.
그 점을 만회하기 위해 중공군이 선택한 것이 바로 야밤의 기습이다. 아울러 피리와 꽹과리를 동원했으며, 작전을 정면에서 펼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펼치는 우회와 매복 전법을 구사했다. 그들은 그 점에서 매우 철저했다. 아주 영리하고 교활했으며, 매우 침착했다. 전쟁을 잘 이해하는 사람만이 펼치는 그런 전법이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당시의 중공군을 사람 머릿수만으로 밀어붙이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의 군대로만 이해한다. 과연 그런 인식이 옳을까.
27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깔본 60년간의 오해와 편견,
그들은 기본적인 무기와 보급품을 다 갖추고 치밀하게 넘어왔다.
(6) 중공군은 강했다
‘인해전술’에 대하여
내가 이 자리를 빌려 60여 년 전의 중공군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려는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편견이 제법 깊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는 그 당시의 전쟁이 어떤 국면의 연속으로 펼쳐졌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당시의 중공군이 펼쳤던 전법(戰法)을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이해한 채 그냥 넘어간다. 일부는 그런 인해전술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무기와 장비를 제대로 지니지 않은 중공군이 엄청난 병력만 내세워 전면적인 공격을 벌였다는 식의 이야기다. 심지어는 “중공군 일부는 총도 없어 손에 몽둥이만 들고서 덤벼들었다” “병사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사람 수만으로 밀어붙였다”는 말도 나돈다.
인해전술은 중국이 원래 그렇게 불렀던 게 아니다. 짐작컨대, 미국을 비롯한 당시 유엔군의 일부가 새카맣게 몰려드는 압도적인 병력의 중공군을 human-wave strategy라고 표현한 뒤 우리식의 ‘사람이 바다를 이룬다’는 한자 ‘人海’의 용어로 정착한 듯싶다. 상대에 비해 제가 가진 것이 낫다고 할 수 없을 때, 종국적으로 선택하는 마지막 전법이 그처럼 사람의 수만으로 밀어붙이는 것일 수 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실제 당시의 중공군은 화력과 장비 면에서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지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병력 수에서만큼은 아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런 병력을 구성하는 인원들이 대개가 10년이 넘는 항일(抗日)전쟁과 국민당-공산당 사이의 국·공 내전을 겪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중국 지도부가 당시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병력의 압도적 우세를 기반으로 삼아 그런 식의 전쟁을 벌였다는 점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손에 몽둥이를 쥐고서 전장에 나서지는 않았다. 아울러 중국 지도부 또한 전장의 위험을 완전히 무시한 채 병사들을 하찮은 소모품으로만 다루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완간한 우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11권짜리 <6.25 전쟁사>는 당시 전쟁을 겪은 노병인 내 입장에서는 여간 자랑스러운 작업이 아니다. 오랜 자료 수집과 분석, 연구를 통해 당시 전쟁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소 인원들의 치열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아주 정밀하다.
그에 따르면 1950년 10월 말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전선에 나선 중공군은 미군에 비해 무장상태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몽둥이가 아니라 근접전에 탁월하게 유용했던 ‘따발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1인당 100여 발의 총탄과 4개의 수류탄, 여분의 철모 1개, 곡괭이 등을 지니고 있었다.
/6.25 때 중공군 의료 인력이 백신 접종을 하는 모습. 방한복이 두툼해보인다.
다음 보급 때까지 먹고 견뎌야 할 식량도 휴대하고 있었으며, 1950년 10월 북진할 때 국군과 유엔군 등이 갖추지 못했던 겨울 대비용 방한복도 입고 있었다. 한반도 북부의 혹한(酷寒)에 대비하기 위해 솜으로 누빈 두툼한 복장이었다. 방한복은 한쪽은 카키색, 다른 한쪽은 흰색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눈이 쌓인 곳에서는 흰색 쪽을 겉으로 뒤집어 입음으로써 아군의 눈을 피하도록 했다.
중공군의 한국어 학습 붐
따라서 압록강을 넘는 중공군들은 군관의 경우 25㎏ 정도의 개인 장비와 물품을 휴대했으며, 사병의 경우 35~45㎏의 결코 가볍지 않은 군장을 지니고 다녀야 했다. 화력에서는 유엔군에 비할 바 없었으나, 그래도 전선에서 후방을 받쳐줄 고사포와 박격포를 어느 정도는 확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말을 아는 중국 내 우리 동포인 조선족도 대규모로 동원했던 흔적이 있다. <6.25 전쟁사>에 따르면 옌볜(延邊)의 조선족 자치주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동포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인원이 한반도에 참전하는 중공군을 지원했다.
이들은 특히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중공군의 통역 요원으로, 또는 길을 안내하는 요원으로 참전했다. 이들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길이 없으나 중국 측 자료엔 700~2000명 선으로 돼 있다. 숫자는 많지 않았어도 역할은 작지 않았다. 이들은 단순한 통역 요원이나 길을 안내하는 향도(嚮導)의 역할에 그치지 않았고 중공군 간부들에게 전투 또는 민사(民事)작전에 필요한 한국어 회화 교사 노릇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옛 소련이 촬영한 중공군. 손수레에 탄약을 실어 운반하고 있다.
<6.25 전쟁사>에는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당시 중공군 진영에서 한국어 학습의 붐이 일었던 것으로 나온다. 한반도에 참전한 뒤 벌어지는 각종의 상황에서 최소한의 언어 소통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특히 자신이 가장 절박한 상황에 놓였을 때를 대비해 한국어 익히기에 집중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가장 위급하다고 하는 경우라면 전선을 훌쩍 넘어와 시도 때도 없이 강력한 폭탄을 떨어뜨리고 가는 미군의 공습을 만날 때였을 것이다. 그에 대비해 “방공, 방공~비행기가 왔소, 빨리 뛰시오”라는 식의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학습했다고 하는데, 이를 한국어 발음에 가까운 중국어로 “팡쿵, 팡쿵~피엔지와싸요, 파리파리카”식으로 적어 보급한 뒤 이를 익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책은 당시 중공군 진영의 장병들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죽어라고 이를 외워댔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또 중공군을 수행하면서 군대가 묵어야 할 곳, 즉 숙영지(宿營地)를 물색하는 작업에도 나섰던 것으로 알고 있다. 크고 작은 적정(敵情) 탐지에도 나섰는데, 이를테면 정찰(偵察) 임무를 띤 병력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는 얘기다. 이런 조선족 청년들은 보통 중공군 중대에 2명 정도가 배치됐다고 한다.
결코 허술하지 않았던 군대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한반도 전쟁에 참전키로 결정한 중국 수뇌부의 태도도 매우 신중했다. 그들은 미군의 북진으로 인한 중국의 피해를 가장 먼저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략 구성의 기본적인 목표가 김일성의 북한을 돕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북진으로 인한 중국 동북3성 일대의 안전을 지키는 데 있었다는 얘기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전선에 서서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피는 모습.
그런 점 때문에 중공군은 일찍이 압록강을 넘어 적유령산맥 일대에 안개처럼 조용히 포진했다. 아군이 북상하는 평북 일대의 전면 북쪽에 숨어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는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적이 있는 곳에 미리 전선을 설정해 자국의 경계를 안전하게 뒤로 남겨두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19일 경 압록강 도하를 시작한 중공군 병력 약 25만 명은 한반도 깊숙이 들어가 앉아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공중을 오가는 미군의 정찰 시야를 피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 비결은 온갖 위장과 은폐, 밤 시간만을 활용한 병력 이동 등의 다양한 방법이었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앉았던 산맥의 이름을 우리는 한자로 狄踰嶺(적유령)으로 적는데, 한반도에서 대륙 군대의 침략을 맞았던 일부 고개의 명칭에서 발견되는 ‘되너미 고개’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온 사람들을 낮춰 부르는 ‘되X’이 넘어오는 고개라는 뜻이다. 이들은 그러나 단순하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주 깊은 경계심과 스스로를 감추려는 용의주도함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1950년 11월 24일 '크리스마스 진격작전'을 명령한 뒤 도쿄로 돌아가는 도중 압록강 상공에서 한만 국경지대를 내려다보는 맥아더.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중공군은 이미 크게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이 적유령 산맥 곳곳에 포진하던 때는 일부 국군 사단이 성급하게 “압록강 물을 먼저 뜨자”며 경쟁적으로 행군을 하던 무렵이었다. 중공군은 연기를 피우다가 미군 공군기에 발각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볶음밥과 건량(乾糧)으로 1주일을 버텼으며, 부대와 부대를 오가는 통신도 모두 사람이 오가는 인편(人便)으로 해결했다. 혹시 미군에 의해 통신선이 도청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부대와 부대 사이의 모든 교통도 자제했다. 그들은 대개 간단한 수송능력을 갖추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조그만 지프 형태의 차량 이동도 금지했으며, 오토바이에 해당하는 모터사이클의 운행도 자제했다고 한다. 대신 자전거를 타고 움직였으며, 웬만한 교신은 모두 사람이 움직이며 해결했다.
모두 작전의 다음 단계를 대비하려는 차원이었다. 공중을 오가는 미군기의 감시를 피해 자신의 존재를 가려 상대가 포위와 매복의 깊은 그물 속으로 걸어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차원이었다. ‘인해전술’이라는 막연한 용어는 이런 중공군의 진짜 모습을 모두 가린다. 그들은 결코 허술한 군대가 아니었다.
28 마오는 미군의 접근을 두려워했다.
중국 지도부가 몹시 두려워했던 두 가지
(6) 중공군은 강했다
참전을 예감했던 변방군 배치
전쟁이란 무엇일까. 몇 마디의 말로는 결코 정의하기 어려운 게 전쟁이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그 답은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을 직접 이끄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상대를 꺾어야 하는 싸움일 뿐이다. 패전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참혹함을 안긴다. 이끄는 장병들의 목숨, 수많은 장비와 물자를 잃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지켜야 하는 나라의 산하(山河)마저 잃는다. 따라서 장수는 반드시 이기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1950년 10월 한반도에 뛰어든 중공군을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약했지만 강했다. 물자와 장비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들의 싸움에 관한 의지는 매우 강했다. 먹는 음식과 손에 쥔 무기는 두드러진 게 없었지만 그 부족함을 메우는 전략과 전술에서는 아주 뛰어났다.
우리 학자들의 분석 내용을 보면 그들은 일찌감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을 필두로 한 중국의 지도부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싸움이 자신에게 번져올 것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다. 강 너머의 불을 관찰하는 시선을 우리는 성어로 ‘격안관화(隔岸觀火)’라고 적는다. 중국에서도 쓰는 성어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그저 ‘남의 집 불구경’으로 알고 있지는 않은가.
/2010년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경축행사 참석차 방북한 중국공산당대표단이 김정은에게 준 선물. 마오쩌둥 전 주석과 김일성 주석이 환담하는 모습이 액자에 담겨 있다./조선중앙통신
그러나 이 말은 당장 나와 관련이 없더라도 사태가 어떻게 번질지를 주시하는 전략적 시선이 담겨 있는 말이다. 모든 상황은 변수의 연속이다. 특히 전쟁의 경우는 더 그렇다. 따라서 강 너머에 난 불이라도 그것이 어떻게 번질지에 대한 관심과 주의는 잃지 않아야 한다. 1950년의 중국 지도부가 그랬다.
그들이 적은 전사(戰史)를 살펴보면 중국은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이 기습적인 남침을 벌이자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10여일 뒤인 7월 7일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편성했다. 우리가 만주라고 부르는 지금의 동북지역 일대에 병력 25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바로 그해 10월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의 주체다. ‘변방군(邊防軍)’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자리 변(邊), 즉 국경 지역을 지키는 군대라는 뜻의 명칭이다. 이 시점은 마오쩌둥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한반도 전쟁에 참가하는 결정을 내린 10월 초에 비해서는 석 달 정도 앞선 무렵이었다.
/한반도 전선으로 가는 중공군 장병들이 기차역에서 환송을 받고있는 모습.
중국이 동북지역, 특히 랴오닝(遼寧)과 지린(吉林) 일대에 이런 대규모의 국경 방어 병력을 배치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7월 초 이 변방군을 배치할 무렵의 중국 수뇌부는 한반도 참전에 대해 아무건 결정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한 뒤 이를 변방군이라 불렀던 이유는 자명하다. 그들은 압록강 너머에 번지는 ‘불길’을 남의 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김일성이 남침을 하기 전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했다. 고심 끝에 지원을 약속하면서도 마오 등 중국 지도부는 미국이 참전해 중국의 동북 3성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만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김일성이 ‘미국 참전 가능성이 없으며 미국이 병력을 동원하기 전에 남한을 완전 장악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김일성과의 연대의식 보다는…
마오쩌둥이 왜 참전 결정을 내렸을까에 관한 추정은 여러 가지다. 김일성의 북한과 공산주의 연대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아주 작은 요인에 불과할 것이다. 그보다는 더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미군의 공격력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향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봐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편성한 군대, 즉 ‘변방군’의 이름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내 나름의 생각이다.
게다가 그들은 10월 16~19일 경 압록강을 건넌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그들은 자국 국경을 넘어 남하한 뒤 평북의 적유령 산맥 곳곳에다 전략적 방어선을 설치한다. 그 때 마오쩌둥의 중국 지도부는 한반도 참전 군대의 이름을 ‘抗美援朝義勇軍(항미원조의용군)’으로 지었다. 먼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대목이 ‘抗美援朝’다. 이 말은 ‘미국에 대항하면서(抗美) 조선을 지원한다(援朝)’는 뜻이다. 순서를 보자면 미국에 대항한다는 ‘抗美’가 앞이고, 북한 김일성을 돕는다는 ‘援朝’가 뒤에 있다. 중국 지도부가 전쟁에 뛰어든 본질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는 옌징대(현 베이징대) 학생들이 학우들로부터 헹가래를 받는 모습
김일성과의 공산주의 연대의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이 참전의 명분과 대의로 분명히 꼽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미국에 대항한다는 차원의 ‘抗美’보다는 뒤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선은 미국에 대항하자는 얘기였고, 그에 더불어 같은 공산권의 북한 김일성을 돕는다는 취지다.
중국 지도부가 참전한 중공군 병사에게 내건 구호도 마찬가지였다. 우선은 ‘抗美援朝’였고, 그 다음이 ‘保家衛國(보가위국)’이었다. 뒤의 말은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역시 내 나름의 풀이인데, 앞의 ‘抗美援朝’는 전쟁의 큰 명분을 이야기하고, 뒤의 ‘保家衛國’은 참전의 실질적인 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런 구호를 전파하는 대상이 참전한 중공군 장병이라면 더욱 그렇다.
1950년 10월 한반도의 북쪽 경계인 압록강을 넘었던 수많은 중공군은 아마 이로써 묶였을 것이다. 중국은 그런 수사법(修辭法)을 잘 구사한다. 몇 글자, 특히 네 글자로 만든 성어 방식의 구호와 지침으로써 명분을 나타내고, 실질을 담는 방식이다. ‘抗美援朝, 保家衛國’라는 두 묶음의 성어는 연 인원 200만 명이 넘는 참전 중공군의 전투력 제고를 위한 중국 지도부의 정밀한 설계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그런 정황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마오쩌둥의 두려움’이다. 마오를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당시 적잖은 당혹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우선 한반도에 올라선 미군의 향배(向背)를 누가 주도하는지 잘 몰랐다. 미국 대통령이던 트루먼인지, 아니면 미 합참을 이끌고 있던 오마르 브래들리인지, 그도 아니면 도쿄에 머물고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인지를 알 수 없었다.
/유엔 결의에 의해 한반도에서 침략군을 격퇴하기 위한 통합군이 구성되었다. 1950년 7월 14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왼쪽)으로부터 유엔 깃발을 전달받고 있는 맥아더 원수.
세 경우 모두 중국 지도부에는 위협적이었겠으나, 중국은 특히 일본의 심장부에 들어가 전쟁을 직접 끝냈던 맥아더를 가장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소개를 하겠지만, 맥아더는 실제 그런 군인이었다. 적(敵)이 있는 곳에 끝까지 쫓아가 상대를 완전하게 허문 뒤에 항복을 받아내는 스타일이었다.
중국 내 북한 망명정부 제안
아울러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중을 아는 일도 마치 안개 속을 더듬는 것과 같았다. 스탈린은 한반도에 뛰어들어 미군과 대적(對敵)하기를 꺼려했으며, 중국 지도부의 거듭된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참전의 전제로 내걸었던 공군 지원에도 인색했다. <6.25 전쟁사>에 따르면 스탈린은 그에 덧붙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밀려 패퇴를 거듭하던 김일성의 망명정부를 중국 동북지역에 세우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다.
이는 중국 지도부가 가장 바라지 않는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김일성의 망명정부가 중국 동북지역에 들어설 경우, 자칫 잘못하면 전쟁은 중국 전역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다. 아울러 김일성의 망명정부가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유대가 깊은 만주지역에 근거지를 둘 경우 생길 적잖은 소요와 분란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참전 결정을 내린 마오쩌둥(오른쪽)과 진두에서 싸움을 지휘한 펑더화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중국 지도부는 그런 두려움에 젖었으리라 보인다. 그 두려움은 싸움에서의 동력(動力)이기도 하다. 두려움이 없어야 싸움을 잘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두려움은 신중함을 키우고, 방만(放漫)과 오만(傲慢)을 잠재운다. 그래서 적을 우습게 보는 자세도 막을 수 있다.
마오쩌둥은 급기야 참전을 결정했고, 일찌감치 동북지역에 배치했던 변방군을 움직였다. 그들은 수많은 장병을 ‘抗美援朝, 保家衛國’이라는 구호로 묶었다. 중공군은 그런 급조된 명분을 가지고 급하게 압록강을 넘었던 것이다. 싸움에는 정도(正道)가 달리 없다. 장비와 화력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 지도부가 택한 명분은 분명히 당시 한반도 싸움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정보가 통제된 상태의 중공군 장병 대다수는 마오쩌둥을 믿고 싸움에 나섰다. 제 나라와 제 가정을 지킨다는 생각에 묻힌 중공군들은 마오쩌둥의 또다른 말 한 마디를 그대로 믿었다고 한다. “미군은 종이호랑이다.”
29 아군을 속속들이 알았던 중공군,
청천강 넘을 때의 그 불안감…중공군 선혈로 물든 전차
(6)중공군은 강했다
정보전에서 먼저 이긴 중공군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는 아군의 상황은 언론 매체의 보도로 외부에 잘 알려지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자신감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어느 부대가 한반도 어느 지역까지 진출했는지에 관한 사항은 물론이고, 앞으로 어떤 진로를 선택해 공격을 벌일 것인가에 관한 내용도 알려지고 있었다. 그에 관한 언론 통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한반도 참전을 앞둔 중공군이 우리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적어도 전선이 형성되는 지점에서 적장(敵將)이 어떤 성격과 경력의 장군인지에 관한 내용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 점은 중국 측의 자료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베이징(北京)에 머물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전황을 시시각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중공군이 진출할 한반도 지형까지 꿰뚫고 있었다. <6.25 전쟁사>에는 마오쩌둥이 북한에 주재했던 중국대사관 직원, 화교, 그리고 정찰병 등이 보내오는 자료에 입각해 곧 중공군이 나서서 미군과 싸워야 하는 지역의 상세한 정보까지 파악했다고 한다. 지형(地形)을 잘 알고, 그곳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와 그 지휘관에 관한 정보까지 파악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곧 싸움을 벌일 미군과 유엔군, 그리고 국군은 그렇지 못했다. 평양을 넘어 북진할 무렵 중공군이 압록강으로부터 남하해 적유령 산맥 가득히 매복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북진하는 국군 1사단이 청천강을 넘어 영변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이 때문에 앞으로 싸울 적의 동향은 고사하고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성격의 부대인지, 그들이 북쪽의 지형을 어떻게 이용하고 나올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상대는 나를 알고, 나는 상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싸움은 승패가 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군 1사단장인 나 또한 그런 상황에서 길을 나섰다. 평양을 선두 탈환한 부대였지만 우리 1사단은 곧이어 벌어질 미 187 공수연대의 숙천 공습강하 작전을 뒷받침해야 했다. 역시 나아가는 길에 어떤 적이 버티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서 압록강까지 진출해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특히 숙천을 넘어 청천강을 건너야 할 때였다.
청천강이 유독 차가웠다
청천강은 고구려 때의 살수(薩水)다. 그 살수는 을지문덕 장군이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100만 대군을 맞아 거대한 승리를 이끌어 냈던 곳이다. 내가 건너던 당시의 그 청천강은 물빛이 아주 차가웠다. 강폭이 제법 큰 그곳은 10월 말에 접어들면서 가을을 넘어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다.
/1950년 10월 북한 해안을 따라 도보로 북진하는 국군.
청천강을 넘어가면 평안남도에서 평안북도로 들어서는 셈이었고, 크게는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한 국면을 마감하고 다른 한 국면을 열 수도 있었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가능성과 새 변수가 끼어들면서 전쟁이 복잡한 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모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당시 청천강을 넘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사안이었다.
국군 지휘관 일부도 청천강을 넘지 말고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에서 전선을 형성하자고 미군 지휘부에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은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자신감에 취해 있었다.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전선을 직접 지휘하는 입장에서 그 점이 마음에 걸렸으나 역시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이끄는 1사단은 영변에 주둔했다. 사단본부를 영변의 농업학교에 차려두고 연대 일부를 전진 배치해 전선 앞의 상황을 다시 살펴야 했다. 그러면서도 청천강을 넘을 때의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강을 넘어 영변농업학교로 가는 길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길을 갔지만 좀체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중공군 장군 양더즈(楊得志)가 망원경으로 전선을 시찰하고 있는 모습.
다시 길을 가다가 두 촌로(村老)를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왜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되X들이 왔다”고 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당시의 국군 1사단장인 나로서는 이 말을 듣고도 달리 취할 조치가 없었다. 영변에 사단본부를 차렸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수색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그곳에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북진하는 아군의 행렬에 오히려 뒤처지기도 했다.
길에서 마주친 북한군은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군대였다. 국군이 지나는 길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으려고 머물던 북한군 낙오병들은 국군과 미군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줄행랑을 치곤 했다. 그런 북한군은 이미 아군의 북진을 제지할 만한 힘이 없었다.
수색 전차는 핏빛으로 돌아오고
앞에서도 잠시 소개했지만, 국군 1사단은 프랭크 밀번 중장이 이끈 미 1군단에 배속해 있었다. 미 1군단으로부터 막강한 화력을 지원받고 있었다. 미 1군단 예하의 전차 대대 1개 병력이 뒤를 받쳐줬으며, 미군의 1개 고사포 여단도 1사단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북진 행렬은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점은 큰 다행이었다.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관계로 적유령 산맥 곳곳에 새카맣게 매복해있던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어 들어가는 속도도 더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수색을 강화하면서 몇 가지 조짐을 발견했다.
중공군과의 본격적인 접전이 벌어지기 전에 15연대 수색중대가 운산 북방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았다. 당시 중공군의 정황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아군의 정보망에 걸려들었으나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인 참전이 아니라 정찰병력 정도가 한국전선에 남하한 정도로만 간주했다.
나는 다급하게 연대 수색중대가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데려오도록 했다. 이동해온 곳을 먼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만주 군관학교에서 배운 중국말을 활용했다. 그들 중 하나는 내 질문에 “하이난(海南)에서 이동했다”고 대답했다.
몇 가지 정황을 더 묻고 난 뒤 나는 중공군의 참전이 대규모로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포로가 대답한 ‘하이난’은 중국 최남단의 섬이었다. 그는 원래 공산당 군대가 아니라 국민당 군대 출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울러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왔다면 제법 오랜 기간을 이동한 셈이었다. 따라서 중국 수뇌부에 의해 중공군이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한국 전선을 향해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더 짙어졌다. 12연대 김점곤 대령은 전차 수색을 한다고 내게 알려왔다. 미군 전차를 앞세워 전방지역을 정찰하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에게 미군 전차 소대를 배치했다. 그곳에서도 일이 벌어졌다.
김 대령은 미군 전차 4대를 전방으로 보냈다. 그들의 복귀를 기다리던 김 대령의 눈에 아주 놀라운 모습이 들어왔다. 전차 4대 중 2대가 색깔이 완전히 변한 채 부대로 귀환한 것이다. 핏빛이었다. 수색에 나선 전차는 중공군 매복에 걸렸고, 선두 전차 2대 위로 수를 알 수 없는 중공군이 뛰어올랐다는 것이다. 전차 2대는 신속하게 서로 마주보며 기관총으로 전차 위의 중공군을 사격했다고 한다. 전차에 중공군 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어렵사리 중공군 매복 지역을 벗어났다
/북진 당시 국군 1사단이 지원받은 미 전차. 수색에 나섰던 미 전차 2대는 핏빛으로 변해 돌아왔다.
나는 청천강을 넘을 때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을 언뜻 생각했다. 그래서 불안감이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나의 뇌리에는 ‘평형관(平型關)’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평형관은 중국 산시(山西)에 있는 옛 군사 요새로 구불구불한 길이 발달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1937년 9월25일 공산당 군대 매복에 걸려 1000여 명이 사망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청천강의 차가운 물빛을 보면서 강을 건너던 내게는 그 ‘평형관’이라는 세 글자가 문득 떠올랐다. 우회와 매복에 뛰어난 중국 군대의 이미지도 그 때 떠올랐다. 강을 넘은 뒤 중공군 포로가 잡히자 내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30 내 손 잡은 맥아더 "백 장군,
"맥아더는 위대한 군인이었지만 세련되고 치밀하지 못했다"
(6) 중공군은 강했다
참담했던 중공군 앞 후퇴
60여 년의 세월을 지나 그 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그저 담담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중공군의 물밀 듯한 공세에 내가 이끄는 1사단의 ‘전멸(全滅)’까지를 생각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미 내가 적은 회고록에 그 내용은 자세히 적었다. 여기서 그 일을 다시 반복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단지 그 상황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사실을 알아 직속 상관인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과 긴급하게 논의한 뒤 후퇴를 허락받았다. 이어 1사단을 지원하던 미 10 고사포단 윌리엄 헤닉 대령에게 모든 포탄을 적진에 퍼부어달라고 부탁했다.
/운산 북방의 중공군을 앞두고 긴급히 헤닉 미 10고사포단장(오른쪽)과 후퇴 작전을 논의한 백선엽 장군.
헤닉 대령은 하룻밤 사이 1만3000발의 포탄을 쏘아 적진에 연막(煙幕)을 형성했고, 우리는 그 틈을 타서 큰 피해 없이 중공군의 공세에서 벗어났다. 다행이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제대로 가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전쟁 와중에서 그 둘을 선택하는 일은 생사의 두 갈림길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들에게 밀려 내려오면서도 참담한 심정까지야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전장에서 물러선 일은 한번이 아니었다. 가장 참담했던 후퇴가 6·25 개전 초반 김일성 군대에 쫓겨 내려갈 때였다. 우리 1사단이 청주를 지나 백마령 터널을 지날 때였다. 굵은 장맛비가 내렸다. 나는 사단장이라서 사단에 겨우 한 대만 있던 지프에 앉은 채로 잠을 잤다. 그러나 진창에서 뒹굴며 잠을 자는 병사들을 보는 내 심정은 아프고 쓰라렸다.
/미 10고사포단의 포격 장면. 중공군 전면에 1만3000발의 포탄을 쏴 연막을 형성해 국군 1사단의 후퇴를 돕고 있다.
중공군에게 밀려 내려오던 그 때의 심정도 그 참담함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청천강을 건넜고, 평양을 지나 입석이라는 곳에 도착해 겨우 사단을 정비할 수 있었다. 역시 미 1군단장 밀번 장군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때 돌이켜 왔던 그 길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를 뒤적이다 보면 그 때의 아픔이 되살아온다. 책에는 중국 지도부가 참전 초반에 상정한 전선 이야기가 나온다. 책의 저자들이 중국 자료를 입수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후방에서 전쟁을 총괄해 지휘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 직후의 주(主) 전선을 평양 이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平元線)에서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과 국군이 전선을 형성할 것으로 봤고, 그에 따라 자국 군대를 평북의 덕천 이남으로 섣불리 내려 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군이 당연히 평양과 원산을 사수할 것으로 보면서 그 상황에 따라 평북과 함경도의 원산 이북에 중공군을 배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대동강 다리에서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평양 탈환작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
중국도 평양까지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북진을 서둘렀던 당시의 아군 사정이 통한(痛恨)으로 남는다. 우리가 좀 더 침착할 수 있었다면, 청천강 너머 적유령 산맥 일대의 이상한 기운을 좀 더 면밀히 관찰했다면, 그래서 북진을 멈추고 평원선을 견고하게 지켰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길이 270㎞에 불과한 평원선에서 숨을 고르고 먼 시각으로 한반도의 전쟁을 저울질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적어도 평양과 원산을 대한민국의 품 안에 안고 있지 않을까.
역사적 가정은 아무래도 부질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쉬움만큼은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 때의 상황을 거론할 때는 늘 맥아더를 떠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군을 모두 지휘했던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방심과 자만, 미군 최고의 엘리트라는 의식으로 무장해 적정(敵情)을 간과했던 오만함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요즘도 나를 찾아오는 미군 고위 장성들한테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맥아더 장군은 실제 어떤 지휘관이었느냐”는 것이다. 맥아더에 관한 평가가 미군 사이에서도 분분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몇 가지 중대한 실수가 있었지만, 그는 위대한 군인이었다”라고. 이는 내가 미군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실제 내가 만났던 미군의 장성들 가운데 맥아더를 가장 스케일이 큰 장군이었다고 생각한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켜보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 맥아더와 파안대소하는 참모들.
중공군은 직접적으로는 맥아더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에 올랐던 매슈 리지웨이 장군을 높이 평가했다. 앞서 소개한대로 그의 빼어난 전술과 냉정한 판단력, 가공할 화력을 능수능란하게 조직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략과 전술의 운용 차원이었다.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중국 지도부가 진짜 두려워했던 인물은 맥아더였으리라고 본다.
맥아더는 ‘국가’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스케일의 군인이었다. 리지웨이가 미국 행정부의 명령에 따라 그 틀 안에서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선보인 장군이라면, 맥아더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미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협하는 적만을 상정하지 않고, 더 넓은 차원의 싸움을 내다본 사람이었다. 그는 늘 공산주의와의 거대한 대결을 염두에 두었고, 실제 그에 따른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었던 사람이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맺어진 1953년 이후에도 나는 미국을 방문할 때면 늘 우리와 함께 전선을 지켰던 미군 전우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같이 싸웠던 미 장성과 고문관, 직접 살을 부대끼며 전장을 누볐던 초급 미군 장교들도 만났다. 맥아더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휴전 직전인 1953년 5월, 그리고 한참 뒤인 1958년에도 미국에서 그를 만났다.
1958년 워싱턴 방문 길에 나는 그를 찾았다. 그는 아주 유명한 호텔의 스위트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가 6.25전쟁 때의 나를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두 세 차례의 만남으로 어느덧 나를 반겼다. 그는 이미 78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언뜻 키가 작아 보였다. 전쟁의 와중에서는 거대한 산맥처럼 느껴졌던 그의 어깨는 이미 기울었고, 키도 퍽 줄어든 느낌이었다.
/1951년 3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된 뒤 정일권 총참모장(왼쪽)과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이 반격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노년의 맥아더가 내게 한 말
이런저런 안부를 물은 뒤 환담을 나누던 그가 내 손을 잡고서는 베란다 쪽으로 이끌었다. 수행했던 우리 장교들을 제외한 채였다. 그리고서는 그가 내게 머뭇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백 장군, 그 때 내게 힘이 좀 있었더라면…전쟁이 많이 달라졌을거요….” 그가 직접적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나는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 뜻을 잘 헤아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큰 인물이었고, 큰 군인이었다. 그러나 너무 커서 조략(粗略)함을 피하지 못했던 게 흠이었다. 세련되고 치밀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주역으로서의 자부심이 너무 컸다. 이런 그의 개인적인 요인에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100개 사단이 넘는 병력을 급격히 해체하면서 생긴 미군의 전력 공백과 나태함이 겹쳤다. 이는 1950년 말 중공군 공세에 미군이 맥없이 물러선 원인들이다.
전선을 이끄는 장수는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세밀한 구석까지 미쳐야 한다. 기백과 담략(膽略)도 갖춰야 하지만, 제 스스로의 약점을 살피는 세심함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싸움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피할 수 있다. 맥아더에 관한 평가가 분분하지만, 내가 볼 때 1950년의 맥아더는 작음과 큼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장수의 ‘능소능대(能小能大)’라는 덕목에서 앞의 하나, ‘능소(작은 것에 능함)’를 갖추지 못했다.
중국은 그 와중에도 제 갈 길을 잘 찾았다. 맥아더가 이끄는 전선의 빈 구석을 봤고, 전선을 일단 평양과 원산 이북으로 설정하는 노련함도 보였다. 누가 약한지를 금세 간파했고, 자신의 주력을 약체인 국군의 전면에 집중할 줄 알았다. 앞서 소개한대로 그들은 미군이 압록강을 쉽게 넘어서지 못하도록 평북 일대에 진출한 뒤 전략적인 방어선을 설정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손자(孫子)의 ‘지피지기(知彼知己) 원칙’에도 매우 충실했다.
그러나 내가 “중공군은 강했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한반도 참전을 통해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메울 줄 알았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줄 알았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키울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점이 중국의 강점이다.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안목이 없다면 결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31 북한군 휴전회담 대표의 얼굴에 똥파리가
북한군과 중공군, 같은 공산주의자면서 왜 그렇게 달랐을까
(6) 중공군은 강했다
‘매복’에 강했던 중국 군대
중국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은 쉽게 패하지 않았다. 그래서 1937년 일본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던 무렵에는 “일본군은 결코 지지 않는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일본 군대 스스로가 그런 말을 했고, 번번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중국의 군대도 그런 속설에 전전긍긍하며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일소하는 데 꽤 큰 역할을 한 게 1937년 벌어진 ‘평형관(平型關) 전투’다. 이곳은 예로부터 군 요새가 들어섰던 험지(險地)다. 높고 험한 준령(峻嶺) 속에 구불구불한 길이 발달했고, 공격하는 공자(攻者)에 비해 방어하는 하는 방자(防者)에게 아주 유리한 지형이었다.
이곳 일대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으로 나서서 전투를 벌였다. 대오를 이끈 것은 평형관의 험로에 진출한 공산당 팔로군 소속 115사단의 린뱌오(林彪)였다.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병력은 모두 10만 명에 달했으나, 이곳에서 승리를 거둔 115사단 병력은 1만 2000명이었다고 한다.
/중국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평형관.
이 전투 결과로 일본군 수송부대 병력 1000여 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다수의 무기와 차량도 빼앗겼다고 한다. 이 전투의 큰 특징은 매복(埋伏)이었다. 일본군 수송 병력이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폭우(暴雨) 등 열악한 기상조건에도 불구하고 팔로군이 먼저 평형관 동남 쪽에 매복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군 수송 대열 후미가 포위권에 들어올 때까지 중공군은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반나절에 걸쳐 공격을 벌여 일본군에 막심한 피해를 안겼다. 중공 팔로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나, 어쨌든 이 평형관 전투로 인해 ‘불패(不敗)의 군대’로 인식됐던 일본군의 명예는 크게 추락했다.
/평형관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중국측의 유화작품
1950년 10월 청천강을 넘으며 ‘혹시 중공군이 참전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나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은 바로 이 평형관 전투다. 중국 군대는 그런 ‘매복’의 이미지와 함께 내 뇌리에 남아있었다. 제 것은 철저하게 감추면서 남을 시야에 고스란히 노출시킨 뒤 공격을 가하는 그런 군대 말이다.
중공군을 실제 이끌었던 덩화
평형관 전투를 이끌었다는 린뱌오는 나와 인연이 없다. 중국 지도부가 중공군의 한반도 전쟁 참전을 결정하던 무렵 스스로 전쟁 지휘를 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사람 기록해 둘 인물이 있다. 펑더화이(彭德懷)를 보좌하면서 실질적으로 중공군의 한반도 참전을 직접 지휘했던 덩화(鄧華)라는 인물이다.
/6.25전쟁 때 중공군 제1 부사령관으로 참전해 대규모 공세 등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한 덩화.
그는 펑더화이 밑의 2인자였다. 중공군 제1 부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1910년 출생으로 나보다는 나이가 열 살 위였다. 그 또한 중공군 소속 고위직 장성들이 대개 그렇듯이 아주 일찍이 군사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는 17~18세에 이미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 세력에 가입해 군사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에 따른 항일전쟁, 그 뒤에 벌어진 국민당과의 수많은 내전에서 다양하게 전쟁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1937년 벌어진 평형관 전투에도 115사 정치 주임 신분으로 참여했다.
전쟁 중에 적장(敵將)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덩화는 나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 한반도의 그 참혹한 전쟁이 크게 밀고 밀리는 긴박한 다툼을 다소 벗어난 때였다. 나는 1951년 7월 벌어진 최초의 6.25전쟁 휴전회담 한국 대표로 개성에 갔다. 앞에서 먼저 소개한 내용이다.
그 때 공산 측 대표는 아군 측 대표와 동수(同數)인 5명이 나왔는데, 중공군을 대표해 회담에 나선 이가 바로 덩화였다. 그는 나중의 중공군 측 자료에도 자세히 나와 있듯 아주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쓰며 전쟁을 이끌었던 중공군의 실제 지휘관이었다.
/첫 휴전회담 때의 공산측 대표. 왼쪽부터 셰팡, 덩화, 남일, 이상조, 장평산.
휴전회담 직전까지의 전쟁 국면은 이 자리에서 여러 번 소개했다. 중공군은 한반도 참전 직후 아주 빼어난 매복 작전을 선보였다. 그들의 매복에 걸려 미군을 비롯한 아군의 희생이 참담할 정도로 컸다. 막후에서 그런 모든 중공군 공세를 실제 계획하고 집행했던 사람이 덩화였다. 그런 중공군의 공세가 리지웨이의 강력한 반격으로 꺾인 뒤 첫 휴전회담 자리가 마련됐다.
나는 개성에서 열린 공산 측과의 첫 휴전회담에서 묘한 기분에 젖었다. 내 나름대로의 관찰에서 오는 뚜렷한 인상 때문이었다. 북한군을 대표한 사람은 남일과 이상조, 그리고 장평산이었다. 중공군 쪽에서는 덩화와 함께 참모장인 셰팡(解方)이 나왔다. 다섯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그들은 국적이 다를 뿐 생각과 관념은 다를 게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중공군 회담대표 셰팡. 일본 육사 출신의 참모장.
그러나 테이블에 앉았던 북한 대표와 중국 대표는 아주 달랐다. 공산 측 수석대표는 남일이었다. 당시 그가 회담 테이블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우선 골초였다. 늘 담배를 피워 물고 험악한 인상을 지었으며, 욕설에 가까운 발언으로 상대를 윽박지르기에 골몰했다.
규정 때문에 회담 테이블에서의 발언은 양측 수석대표만 가능했다. 아군 측에서도 터너 조이 제독이 수석대표로서 발언했다. 나머지는 모두 그냥 앉아서 상대방을 마주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북한 대표와 중국 대표는 분위기와 태도 등에서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차이
남일은 아마 정치적인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회담 수석대표로서 정치적인 발언과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던 부담 말이다.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상조와 장평산도 남일과 같은 분위기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이상조는 내 정면에 앉아 늘 나를 째려보며 이상한 동작 등으로 신경전을 걸어왔다.
나를 자극하려고 계속 애쓰는 그에게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어느 날 아주 자극적인 행동을 보였다. 나를 한참 째려보더니 갑자기 종이에다 무엇인가를 끼적인 뒤 그 종이를 나를 향해 들었다.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속으로는 우선 화가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기껏 상대를 자극하려는 의도를 저런 유치한 방식으로밖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싶었다. 나는 잘 참는 성격이다. 그런 인내력 덕분인지 몰라도, 보잘 것 없는 국량(局量)으로 테이블에 버젓이 대표 자격으로 나와 있는 그가 가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이미 펴낸 회고록에서도 이상조를 자세히 묘사한 적이 있다. 잠시 소개를 하자면, 그렇게 도발적이었던 이상조의 얼굴에 어느날 하루 큰 똥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파리는 이상조의 얼굴을 이리 저리 기어 다녔다. 그러나 남을 압박하려고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이상조는 파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6.25 60주년인 2010년, 군사전문잡지 플래툰의 군사자료 수집가인 이준규씨가 공개한 6.25 전쟁 휴전회담 관련 사진. 1951년 11월 30일 판문점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유엔군 측 휴전회담 대표단의 모습이다. (왼쪽부터) 하워드 터너 미 공군 소장, 한국 육군 이형근 소장, 회담 수석대표인 터너 조이 미 해군 제독(중장), 알 리비 미 해군 제독(소장), 헨리 호데스 미 육군 소장, 알레이 버크 미 해군 제독(소장).
그 파리는 몸집이 꽤 컸었다. 그래서 이상조 얼굴에 기어 다닌 파리의 모습은 아군 측 대표 다섯 명의 눈에 다 들어왔던 모양이다. 회담이 끝난 뒤 자유마을로 돌아온 우리 대표단의 최고 화제는 ‘이상조와 파리’였다. 모두들 똑같이 생각했던 모양이다. ‘공산주의 북한은 지독하다. 가려움과 더러움을 그렇게 참아가며 독한 인상 짓기에 골몰하다니…’라는 느낌이었다. 터너 조이, 알레이 버크 제독 등 아군 회담 대표 등은 이후에도 열심히 당시 상황을 입에 올렸다.
덩화와 셰팡은 그들과 달랐다. 그들 역시 말이 없었으나, 특유의 웃음을 입가에 짓고 있었다. 우리 회담 대표 중 일부는 그를 ‘차이니스 스마일(chinese smile)’이라며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미군을 비롯한 아군 진영을 공격해 몰살시키기 위한 싸움을 지휘했던 제1 부사령관답지 않게 덩화는 신중한 표정으로 제 속을 꽁꽁 감췄다.
셰팡은 아군의 로렌스 크레이기 미 극동공군사령부 부사령관이 사전에 내게 배운 중국어 인사말 “니하오(你好)?”를 건네자 아주 반갑다는 듯이 웃으면서 “하오(好), 하오(好)”를 연발했다. 그리고 특유의 차이니스 스마일을 입가에 걸치면서 회담에 임하곤 했다.
남일은 매일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상조는 변함없이 도발적인 얼굴로 나를 째려봤고, 그 옆의 장평산은 딱딱하고 험악한 인상으로 앞만 열심히 바라봤다. 그에 비해 덩화와 셰팡은 회담장 분위기를 ‘회담장처럼’ 이끌어가는 데 열심이었다. 이 두 그룹의 공산주의자들은 왜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일까.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휴전 첫 회담은 진전이 없었다. 두 달 여 동안 회담에 참석했던 내 머리 속에는 늘 그 궁금함이 줄곧 맴돌았다.
32 휴전회담 38년 만에 다시 만난 북한 협상대표 이상조, 김일성 맹비난
북한 대표들은 모두 비참한 말로, 중국 대표들은 안온한 여생
(6) 중공군은 강했다
북한군 대표 세 사람의 말로
회담 대표로 나섰던 남일은 1970년대에 비명(非命)으로 세상을 떴다. 교통사고였다. 겉으로는 그렇다. 북한에선 요인(要人)들이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발표가 많다. 그러나 자동차가 별로 없는 북한에서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가 김일성으로부터 정치적 견제를 받아 사망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부산 동래 출신으로 회담 현장에서 늘 험상궂은 얼굴로 도발을 일삼던 이상조의 말로도 그리 편치 않았다. 그는 소련주재 대사를 맡다가 망명했다. 그는 말년에 벨라루스 민스크의 한 연구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보냈다.
또 한명의 북한군 대표 장평산은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그는 중국 팔로군(八路軍)에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공산주의 및 항일 투쟁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연안파(延安派)’로 통했다. 1950년대 말에 김일성이 주도한 연안파 숙청 과정에서 장평산도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김일성(왼쪽)과 남일
그에 비해 중공군 대표로 나왔던 사람들의 운명은 순탄했다. 덩화(鄧華)는 비록 장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 참전 때 그의 상사였던 펑더화이(彭德懷)가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의 견제로 문화혁명 기간 중 모진 굴욕을 당하다가 숨지면서 그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유지하면서 말년을 마감했다.
미군 대표의 “니하오(你好)”라는 인사말에 밝게 웃었던 중공군 대표 셰팡(解方)도 마찬가지다. 그는 동북지역의 군벌 군대에서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지만 결국 항일전쟁과 국민당 군대와의 싸움, 나아가 한반도 참전 등의 경력을 쌓으면서 명예롭게 은퇴한 뒤 평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참전을 지휘한 펑더화이로부터 “비상한 판단력과 뛰어난 사고력을 갖춘 훌륭한 장수감”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첫 휴전회담에서 만난 공산군 측의 대표들이 나중에 어떤 인생의 길을 걸었느냐는 내 관심거리였다. 북한과 중국은 정전 뒤에 비슷한 길을 간다. 북한은 김일성이 연안파 등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면서 본격적인 개인숭배의 길로 치달았다. 중국 또한 비슷했다. 마오쩌둥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져 그와 유사한 형태의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장평산(왼쪽)과 정율성. 정율성은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조선족 음악가였다.
중국은 그 과정에서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과 문화혁명 등의 정치적 풍파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왕조식의 통치체제로 흐르지는 않았다. 그 점은 북한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북한이 정전 뒤에 걸었던 길은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또 하나의 왕조를 건설하고 말았다.
김일성을 따라 남침을 벌인 군대의 선봉은 마오쩌둥이 6.25전쟁 전에 김일성에게 보내준 중국 홍군(紅軍) 소속 한인(韓人) 병력의 부대였다. 숫자는 어림잡아 5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김일성의 의도에 따라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들어온 북한군의 주력이었다. 그럼에도 그 병력을 이끈 지휘관들은 김일성이 벌인 연안파 숙청과정에서 대부분 비명으로 생을 마감했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뒤 홍군에서 활약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인물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 뒤의 결과는 오늘 우리가 지켜보는 그대로다. 불과 30여 년의 개혁과 개방을 통해 이른바 ‘G2’라고 이야기하는 세계 2강의 위치에 올랐다. 특히 그들은 경제발전과 함께 우선 국방력의 신속한 확장에 성공했다. 전쟁을 늘 회고하는 내 시선으로 볼 때 그들은 ‘싸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북한의 공산주의와 중국의 공산주의를 비교하는 일은 거창한 주제다. 여기서 내가 자세히 다룰 항목은 아니다. 그럼에도 전쟁을 겪은 내 입장에서는 둘이 겉은 비슷해 보여도 어딘가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남일과 이상조, 장평산이 풍기는 분위기와 노련한 전략전술가였던 덩화와 셰팡이 주는 느낌이 달랐듯이 말이다.
/남일(오른쪽)과 덩화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1980년대 후반으로 기억한다. 이상조는 그 때 이미 소련으로 망명한 뒤 벨라루스에 정착해 한 대학연구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인가 한국을 방문했다.
언론사가 자리를 마련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분명하진 않다.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나는 그와 두 차례 정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꽤 늙어 보였다.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당시 한국 언론을 접촉하면서 김일성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했다.
서울에서 처음 나와 마주쳤을 이상조는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신의 신분이 어색했을 것이다. 북한군을 대표해 휴전회담에 나왔던 사람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자신이 옹호했던 북한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방문했으니 그랬을 법하다. 게다가 그는 한 때 자신이 따랐던 김일성을 비난하는 입장이었다. 쑥스럽고 민망한 심정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서울서 다시 만난 이상조
우리는 거의 38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이었다. 전선에서 지휘관을 지냈던 군인들은 서로 만났을 때 제가 치렀던 전쟁 이야기를 먼저 입에 올리기를 꺼려한다. 특히 전선의 양쪽에서 서로 적대(敵對)하며 죽느냐 사느냐를 다퉜던 사이의 군인들은 그 전쟁 이야기를 꺼내기가 아주 어렵다.
/1953년 4월 21일 문산 휴전 천막에서 유엔군 측 회담 대표인 백선엽 육군소장이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가 고 임인식씨가 촬영한 작품./경기문화재단 제공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뻔히 아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슴에 지니고 있는 상처도 깊은 법이다. 그래서 섣불리 전쟁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1980년대 말 서울에서 이상조가 그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극력 피했다. 그는 전쟁 이야기를 피하는 대신에 김일성을 언급했다.
“김일성이가 개인숭배 벌이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와 의견이 갈렸어요. 주체사상이고 뭐고 하는데, 다 같은 짓입니다. 김일성에게 개인숭배는 해선 안 된다고 여러 번 말을 했는데, 결국 먹히지 않았어요….”
그는 북한군 부참모장을 지냈고, 전쟁 뒤 고위직을 거쳤던 사람이다. 김일성을 수시로 접촉하는 위치에 있었을 테니 그의 말이 거짓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러면서 김일성에 대해 가시 돋친 비판을 털어 놓았다.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노년에 들어서는 인상이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주름이 늘었고, 머리에는 어느덧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으니 그랬다. 그는 1915년 출생했으니, 나보다는 5년이 연상이다. 당시 70대 중반에 접어들었던 그의 표정은 1951년 휴전회담장에서 마주 앉았을 때보다는 풀이 꽤 꺾여 있었다. 험상궂기만 했던 인상이 그래서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나는 어느덧 그의 얼굴을 기어다녔던 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파리에 관한 일화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고 했던 대목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내 장난기가 슬쩍 동했던 모양이다. 왜 그가 그랬는지를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 망명객으로 서울을 방문한 이상조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첫 휴전회담 때 당신이 나더러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써서 내게 보여준 일 기억하느냐?”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이상조가 자세를 고쳐 앉는 듯했다. 조금 어색했던 모양이다. 이어 그는 마른기침을 한 두 번인가 하더니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그는 1996년에 타계했다. 그에 앞서 남일과 장평산 모두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와 정치적 숙청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말년도 좋지 않았지만, 1951년 휴전회담장에서 마주했던 그들 셋의 자세는 한결같이 딱딱하고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에 비해 중공군 대표 덩화와 셰팡은 그들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느긋했고, 여유가 있었으며, 아울러 매우 냉정했다. 회담을 이리저리 저울질하는 분위기도 역력했다. 기싸움과 말싸움은 남일에게 맡겨 놓고서 냉정하게 판을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취했다.
실제 휴전회담의 막후에서는 중국의 입김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나는 기싸움을 시도하는 이상조나 남일, 장평산보다는 왠지 모르게 덩화의 냉정함, 셰팡의 여유로움에 더 눈길이 미치곤 했다.
33 민가에 머물면 화장실 청소하고 떠났던 중공군,
중공군은 교묘했고 유엔군은 그들의 기만에 빠져 들었다
(6) 중공군은 강했다
대민 폐해 적었던 군대
참전했던 중공군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공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한반도 주민들이 그들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물론 그들과 싸웠던 국군과 유엔군의 기억을 제외하면 말이다. 가장 뚜렷했던 인상은 그들 중공군의 대민(對民) 폐해가 적었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우선 기율이 엄격했다. 여러 가지 행동수칙이 있었겠지만, 우선 민가 등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꽤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또 실제 그렇게 행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점령지에서 가능한 한 민가에서 숙영(宿營)하는 일을 피했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가에 숙영하더라도 머문 뒤의 장소를 깨끗이 정리했으며, 반드시 화장실을 청소한 뒤 떠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국 지도부가 참전 전과 후에 철저하게 시행한 내부 교육 때문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6.25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이 북한쪽 농민을 도와 밭을 갈고 있다. 중공군은 강한 기율로 대민 폐해 최소화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인으로 구성한 군대의 인상은 6.25전쟁 참전 이전까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부패하기 쉬웠으며, 그에 따라 기강이 없었다. 만주사변 당시의 상황은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최정예 2개 사단은 무기를 시장에 내다 팔다가 그 약점을 노리고 들이닥친 일본군 1개 대대에게 일거에 사라지고 말 정도였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도 부패와 무능의 덫에 걸려 있다가 마오쩌둥(毛澤東)이 지휘하는 소수의 홍군(紅軍)에게 밀려 하루 사이에 수십 만의 병력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니 중국 군대라고 하면 우선은 그런 부패와 무능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950년 한반도 전쟁에 뛰어들었던 중공군은 그들과 많이 달랐다. 중국 지도부는 특히 참전 뒤에도 중공군 각 부대에 지속적으로 작전 수칙(守則)을 보내 예하 장병들을 교육했다. 그 내용 중에는 ‘현지 인민의 풍습과 습관을 존중한다’ ‘학교와 문화, 교육기관, 명승지와 유적지 등을 보호한다’ ‘사사로이 민가에 들어가지 않는다’ ‘인민의 것은 하나라도 들고 나오지 않는다’ ‘교회나 사찰 등에 간섭하지 않는다’ 등이 들어 있다.
/참전 뒤의 전황을 설명하고 있는 마오쩌둥. 치밀한 전략가의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베이징(北京)에서 전쟁을 모두 지휘한 마오쩌둥의 군사사상 중에 돋보이는 내용 중의 하나가 이른바 ‘물과 물고기’에 관한 이론이다. 그는 홍군을 물고기에, 그 바탕을 형성하는 인민을 물에 비유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홍군은 인민의 토대 위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내용이다.
중국 공산당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작전의 토대를 인민 위에 둠으로써 부패와 무능의 가능성을 막았고, 그로써 다시 내전과 항일전쟁에서의 ‘정의(正義)’를 선점할 줄 알았다. 6.25전쟁 참전 뒤에도 그런 기강은 그대로 살아 있었고, 참전 중공군 장병들은 그에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다.
/마오쩌둥이 1951년 1월 19일 펑더화이 중공군 사령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가필한 메모. 중공군과 북한군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사병들에게도 작전계획 고지
1950년 10월 말 운산에서 전면의 15연대 수색대가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심문할 때 나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중공군 포로가 일개 사병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부대 이동과 배치, 병력수 등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사(戰史)를 보면서 나는 그 궁금증을 풀었다. 중공군 지도부는 싸움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작전에 관한 고급 정보를 알려줘 함께 공유토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공군의 단점이기도 했다. 중공군이 포로로 잡힐 경우 제법 많은 정보가 상대 진영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곧 중국으로 번질 것이라며 保家衛國(보가위국: 집과 나라를 지키자는 뜻) 식의 구호를 만들어 위기의식으로 무장했고, 당시에는 없었던 계급 때문에 아래 위가 한결 강한 동료의식으로 묶였다.
아주 단일한 명령체계와 기율, 그리고 가정과 나를 지킨다는 식의 단순한 목적의식으로 중국인들이 한 데 묶일 경우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당시 중공군의 한반도 참전 상황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배후 지휘자 마오쩌둥은 그 점에서 매우 대단한 전략가였다. 그는 명분을 만들고, 그를 집행할 세부의 틀을 조작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의 중공군 작전 스타일은 우직하다기보다는 교묘했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힘차게 내지르는 타입은 아니었고, 대신 상대의 빈 구석을 파고들어 화려한 기만(欺瞞)과 변칙(變則)을 구사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미군의 정면에 나서 총을 뽑아들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그런 기만과 변칙 스타일의 중공군에게 미군이 번번이 당했다는 점이었다.
/1952년 중공군이 비무장지대 북쪽에 구축한 총연장 4000km의 지하갱도. 그들은 일명 '지하만리장성'이라는 이 갱도 요새를 만든 뒤 그 속에서 생활하며 작전을 펼쳤다./눈빛출판사 제공
중공군 참전과 1차 공세가 벌어진 때는 앞서 소개한 대로 1950년 10월 말이었다. 국군 1사단장이었던 나는 당시 평북 운산에 진출해 있었다. 전황(戰況)이 아주 급박해 당시로서는 중공군 지도부가 어떤 기만을 펼쳤는지 제대로 살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를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기만과 변칙의 깊은 덫
중공군은 1차 공세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따라서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다수의 유엔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로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일부러 풀어줬던 것이다. 그냥 풀어주지는 않았고 ‘교육’해서 석방했다. 그 핵심은 “우리는 곧 돌아간다” “식량이 부족해서 귀국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중국 지도부는 1차 공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11월 초에 접어들어 전군(全軍)에 유엔군 추격 금지 명령을 하달했다. 지도부가 추격을 금지하면서 중공군은 느닷없이 전선 곳곳에서 사라졌다. 아군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51년 3월 7일 수원에서 논란거리가 된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는 맥아더. 그는 "병력 지원이 없는 한, 중공군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한, 아시아에서 중공의 공격력을 저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공군 1차 공세 때 붙잡혔다가 아군 진영으로 살아 돌아온 포로는 국군 76명, 미군 27명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중공군 진영에 붙잡혔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던 모양이다. “중공군이 곧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일부러 도주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한다.
별로 쓸모가 없는 물자 등을 배낭에 넣어 길가에 버렸고, 역시 용도가 별로 없는 구식 중소화기(中小火器) 등을 도로 등에 내던지고 도망쳤다. 산발적 전투에서 그런 중공군의 모습을 지켜봤던 아군 장병들이 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면, 이는 정보형태로 상부에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 여러 조각 정보가 모이면서 아군 진영을 이끌었던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어떤 판단을 했을지는 분명해 보인다.
<6.25 전쟁사>에 따르면 아군 포로가 중공군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상황은 서방 언론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흥미 있는 뉴스거리였다. 특히 전쟁 당사자로 나선 미국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했다’ ‘중국은 인권을 중시한다’ 등의 내용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마오쩌둥의 기분이 이 때문에 크게 좋아졌다고 한다. 미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포로 석방 소식을 전하자 그는 베이징에서 “300~400명을 더 풀어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마음씨 좋은 척 선심을 베푸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서방 언론이 그 안에 담긴 전략적 의도를 읽었을 리 없다. 그들이 칼로 두드리는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에 바빴을 뿐이다.
중국은 그 때 이미 12월 들어 벌이는 2차 대규모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만주지역으로부터 압록강을 도하한 후속 부대의 한반도 진출로 중공군의 병력은 크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40만에 달하는 중공군이 차분하게 강을 넘어와 적유령과 낭림산맥 일대에 포진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군을 유인하고 있었다. 포로를 풀어주고, 산발적인 전투에서 등을 보이며 쫓겨 가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말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미 워싱턴 행정부,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런 중공군의 의도를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은 중공군 병력을 “특수부대 형태의 1만5000~2만 명의 중공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고, 주력은 아직 만주 일대에 남아 있다”고 파악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지휘부나 언론 등은 모두 그런 중국의 덫에 빠져들고 있었다. 깊고 복잡한 기만과 변칙의 덫 말이다.
34 저우언라이 총리도 직접 소매 걷어붙이고 콩을 볶았다
애병필승 교병필패(哀兵必勝 驕兵必敗)
(6) 중공군은 강했다
맥아더가 착각한 엉뚱한 적장(敵將)
맥아더 장군은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세월이 꽤 지난 뒤 회고록을 집필할 때까지 1950년 10월에 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의 총사령관을 린뱌오(林彪)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가 소개한 것이다. 나는 그 대목을 읽을 때 ‘이게 정말 사실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믿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앞섰다.
노년의 맥아더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세월의 무게 때문에 역시 아주 노쇠했을 것이다. 아울러 흐릿해지는 기억력으로 인해 자신이 마주했던 적장(敵將)을 다른 인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당시 중공군을 이끌었던 펑더화이(彭德懷)를 린뱌오로 잘못 기억했을 수 있다.
어쨌든 1950년 10월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을 향해 진군하던 미군은 중공군의 여러 정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점만은 분명하다. 그들이 어떤 군대인지, 그리고 병력을 이끌고 있는 장군은 어떤 인물인지를 전혀 몰랐다. 몰랐다고 하기보다는 어쩌면 알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전쟁 당시 지게는 미군이 갖고 있던 배낭보다 훨씬 효율적인 운반수단이었다. 1950년 12월 미군 2명이 지게에 매트리스와 배낭 등 개인 장비를 지고 평양을 뒤로한 채 후퇴하고 있다.
동양의 병법 사상에는 애병(哀兵)과 교병(驕兵)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앞의 애병은 누군가에, 또는 어떤 상황에 눌려 비분의 심정을 지닌 군대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상대에 비해 열세(劣勢)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떨치고 일어나 싸울 수 있는, 분투(奮鬪)의 가능성을 보이는 군대다.
그 반대의 개념이 교병이다. 쉽게 풀자면 ‘교만한 군대’다. 상대에 비해 우세(優勢)를 보이며, 따라서 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군대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적을 깔보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단순하게 믿고 있는 군대다. 이는 외형적인 조건이 뛰어난 군대가 흔히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1950년 말 한반도 전쟁에 뛰어는 중공군과 그를 맞아 싸웠던 미군이 꼭 그렇다. 중공군은 애병에 해당했고, 미군은 교병이었다. 중공군은 여러 가지 조건에 있어서 미군에 견줄 군대는 아니었다. 식량과 보급이 그랬고, 화력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미군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있어서도 ‘세계 최강’의 이름을 달기에 손색이 없었다.
哀兵과 驕兵이 드러낸 차이
중공군은 그러나 장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병력이었다. 방대한 인구에서 뽑아내는 병력이 우선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동양의 병법에 아주 밝은 마오쩌둥(毛澤東)은 자신의 군대를 위기의식으로 똘똘 뭉치도록 만드는 재주를 보였다. “미군이 중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강한 위기감을 불어넣어 휘하 수많은 장병들이 전선에서 상대를 향해 힘껏 내달리도록 ‘최면’을 걸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중공군은 애병이었다. 그에 비해 미군은 새로 나타난 적의 존재조차 확인하지 못했고 그들이 은밀하게 다가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집요한 공격력을 선보일 때도 그 현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병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싸우려는 의지가 확실한 애병은 반드시 이긴다고 했고, 적을 깔보면서 자신의 우월함만을 믿는 교병은 반드시 진다고 했다. 즉 ‘애병필승 교병필패(哀兵必勝 驕兵必敗)’다. 적을 얕잡아 보는 이른바 ‘경적(輕敵)’의 사고는 아주 위험하다. 군기가 풀어지면서 위험한 상황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은 참 묘하다. 전략과 전술이 아주 중요해 보이면서도 때로는 그런 게 필요 없는 경우도 생긴다. 한 쪽의 힘이 압도적일 때가 그렇다. 소련과 일본 관동군이 맞붙었던 1939년의 ‘노몬한(Nomonhan) 전투’가 그랬다.
만주와 몽골 접경 지역의 노몬한(중국 동북부 외몽골과의 국경에 가까운 할하 강변에 있는 지역)에서 벌어진 양측의 충돌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나름대로 공격력을 갖춘 관동군이었으나 수많은 전차와 강한 화력을 갖춘 소련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때는 전략과 전술이라는 게 없었다. 소련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상대를 그대로 밀어붙여 버렸다.
소련군의 당시 특징이 그랬다. 상대를 압도하는 병력과 화력으로 별다른 전략과 전술 없이 힘으로 밀어내는 식이다. 미군도 그런 군대였다. 그보다 더 탁월한 화력과 장비로 상대를 우직하게 밀어내는 군대가 미군이었다. 맥아더는 그 점을 믿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중공군은 일본군과 조금 달랐다.
/중국에서 보내온 미숫가루와 현지에서 조달한 감자 고구마 등으로 끼니를 때웠던 중공군의 식사 모습.
미군이 지닌 힘의 크기를 정확히 파악했고, 치밀한 전술을 개발해 싸움에 나설 줄 알았다. 싸움에 나서는 명분을 그럴 듯하게 조작해 전 장병을 무장시켰고, 궁핍한 가운데서도 대대적인 동원으로 물자를 만들어 전선으로 보내는 기민함도 보였다.
중공군의 식량은 일종의 미숫가루가 주를 이뤘다. 밀가루가 70%를 차지했고, 콩과 옥수수 또는 수수를 30% 못 미치게 섞은 뒤 소금을 조금 가미한 가루가 주식이었다. 1950년 9월부터 중국이 만주 지역 일대에 비축한 전쟁 식량은 3384만 톤에 달했으나 이는 오래 버틸 양은 아니었다.
미군엔 6배, 국군엔 3배 병력 투입
중국 전역에서는 참전 뒤에 전선에 보낼 식량을 모으는 운동이 벌어졌다. 중국은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까지 직접 나서서 팔을 걷어붙인 뒤 가루식량으로 만들 콩과 옥수수 등을 직접 볶으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등 총력을 기울여 전쟁을 펼쳤다.
/참전 중공군 지원을 위해 직접 콩을 볶았던 저우언라이(오른쪽). 왼쪽은 김일성.
그러나 중공군의 무기 체계는 형편이 없었다. 전차와 야포 등 크고 굵직한 화력을 선보일 수 있는 무기가 미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현대전의 총아라고 할 수도 있는 야포는 전체 보유 대수가 미군의 45%에 이르렀지만, 질이 매우 낮았다. 러시아,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9개 국이 만든 구식 야포가 뒤섞여 있었다.
병사들이 손에 쥐고 싸워야 하는 소총이나 권총, 기관총 등도 소련제와 옛 국민당 군대 것, 일본군이 대륙에서 패퇴할 때 남기고 간 것, 그리고 중국이 만들어 낸 것 등이 두루 섞여 있었다. 따라서 탄약도 다양했다. 무전기의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 1개 군단이 겨우 69대만을 보유하는 곳도 있었으며, 수송 차량 또한 절대적인 부족에 허덕였다.
중국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역시 병력이었다. <6·25 전쟁사>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압도적인 병력을 활용하되 ‘선택과 집중’에 철저를 기했다. 특히 중공군은 미국 군대에 비해 현격하게 화력과 전기(戰技)가 떨어지는 국군의 전면을 노리고 들어왔다.
/9개국이 만든 다양한 화포로 무장했던 중공군 포병.
국군과 싸울 때는 대개 3배의 병력을 투입했고 미군과 싸울 때는 약 6배의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오쩌둥이 참전 초기의 중공군에게 지시한 작전의 목표는 ‘섬멸(殲滅)’이었다고 한다. 상대 병력과 화력의 50%를 없애는 게 자신들이 설정한 ‘섬멸’의 수준이라고 했다.
그들은 1950년 10월 말과 11월 초에 벌인 참전 뒤 1차 대규모 공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우선 중서부 전선에서 가장 돌출해 있던 국군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들어와 압록강 근처까지 올라갔던 국군 6사단을 와해시켰으며 덕천과 영원으로 진출한 국군 7사단과 8사단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아울러 국군 1사단과 어깨를 함께 하고 북진했던 미 1기병사단의 8연대가 중공군의 기습과 우회, 매복에 걸려 처절하게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중공군의 수뇌부는 거기서 잠시 멈추는 전략을 구사했다.
/미국 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저서 '더 콜디스트 윈터'.
앞 회에서 소개한 내용처럼 그들은 잠시의 성과에 만족치 않고 포로 등을 일부러 놓아주면서 거짓 정보를 흘리는 기만과 변칙을 선보였다. 그런 심상찮은 조짐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총사령부는 12월 대공세를 기획하고 있었다. 자신의 불리한 여건을 철저하게 파악해 기만과 변칙의 수로 나서는 애병, 중공군의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그해 12월 한반도 북부 전선은 피의 냄새가 가득했다. 국군과 미군, 그리고 참전 우방의 유엔군은 중공군이 도사린 적유령과 낭림산맥 속으로 행군했다. 그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서부 전선은 급격히 무너졌고, 장진호의 미 1해병사단은 눈 덮인 계곡에서 중공군의 매복에 걸렸다. ‘더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가장 추운 겨울)’. 당시 상황을 묘사한 미국의 책 제목이다. 그 해 겨울은 말 그대로 아주 추웠다.
35 '진주만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는 장진호 전투,
"미군 꺾었다"고 자랑했던 중국지도부, 거대한 새로운 두려움에 직면하다
(6) 중공군은 강했다
장진호 전투와 군우리 전투의 차이
중공군 2차 공세가 벌어진 1950년 11월 말~12월 초, 서부전선에서 아군의 참패는 아주 기록적이었다.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미 2사단은 11월 말 크리스마스 공세 뒤 중공군에게 밀리다 평북 군우리 남쪽 계곡에서 집중적으로 당했다. 전선을 우회해 이곳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에게 이른바 ‘인디언 태형(笞刑)’이라는 이름의 공격을 받고 2개 연대 병력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당시의 피해가 얼마나 혹심했는지는 이미 소개했다. 그런 서부전선의 피해보다 더 상징적으로 언급되는 전투는 중동부 전선의 장진호(長津湖·함경남도) 일대에서 벌어졌다. 미군은 1해병사단이 주축을 이뤘고, 중공군은 9병단 소속 7개 사단이 뛰어들었다.
그곳은 낮 기온이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보였다. 상대도 상대지만 우선 추위와 싸우는 게 다급한 곳이었다.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벌어진 이 장진호 전투에서 사람들은 미군의 정예인 1해병사단의 피해를 우선 떠올린다. 미국의 한 언론은 이 전투를 두고 “진주만 피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고 비판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1해병사단 장병들이 눈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그러나 전쟁을 다루는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장진호 전투는 군우리 남쪽에서 미 2사단이 보였던 전투와는 달랐다. 공격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적어도 적의 공세에서 제 병력을 보전하며 후퇴하는 데는 성공한 전투다. 아울러 자신을 공격했던 중공군에게도 막심한 피해를 안긴 전투였다.
군우리 남쪽에서 부대 병력의 3분의 2를 잃은 로런스 카이저 당시 미 2사단장의 이야기는 앞서 소개했다. 그는 후퇴의 시점을 결정하면서 주저했고, 공격을 벌이면서도 반드시 챙겨야 할 퇴로(退路) 확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에 비해 장진호 전투의 미 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아주 달랐다.
맥아더 사령부의 막료로 있다가 전선으로 부임해 당시 동부전선 전체를 이끌고 있던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 장군은 북진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했으나, 스미스 사단장은 원칙에 충실했다. 원산에서 장진호 쪽으로 진출하면서 그는 곳곳에 거점을 마련하는 데 신경을 썼다. 혹시 있을지 모를 후퇴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은 변수와의 싸움
전쟁은 이론과 계획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전선에 서서 싸움을 벌였던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전쟁은 변수(變數)의 연속이다. 도상(圖上)에서 마련한 계획으로는 천변만화(千變萬化)라고 해도 좋을 전장에서의 무수한 변수에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선의 중공군이 입을 누비옷을 만드는 중국 민간인들.
따라서 전장에서 싸움을 잘 이끄는 지휘관의 성품은 신중할수록 좋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사람, 혹시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 조그마한 위기 요소에도 주목하는 사람이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높으며, 패해도 커다란 패배에 직면하는 일은 피할 수 있는 법이다.
스미스 미 1해병사단장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유엔군 총사령부가 내린, 물밀 듯했던 북진의 흐름 속에서도 혹시 있을지 모를 위기의 요소에 충실히 대비했다. 진출하는 곳에 사단 자체가 보유한 항공대의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을 닦았고, 거점 형성을 위해 부대 일부를 그곳에 잔류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 장진호 전투를 여기에서 다시 상세하게 다루는 일은 불필요하다. 그 전투의 전개 과정은 여러 기록에 풍부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 국면으로 볼 때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사단의 눈물겨운 분투와 지휘관의 용의주도함이 빛을 발한 전투다.
그 해 12월 초까지 벌어졌던 아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그리고 중공군이 그에 맞서 벌인 ‘2차 공세’의 결과는 잘 알려진 그대로다. 중공군의 매복과 우회는 빛을 발해 아군의 전선이 크게 밀렸다. 이는 아군이 다시 서울을 내주고 북위 37도선으로 밀리는 이른바 ‘1.4 후퇴’로 이어지고 말았다.
/한반도 전선의 중공군에게 보내는 중국 민간의 위문품.
중공군을 원거리에서 조종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이 2차 공세로 의기양양했다. 서부전선에서는 미 2사단에게 사단 병력 3분의 2를 잃는 치욕적인 참패를 안겼고, 중동부전선에서는 막강한 미 1해병사단을 꺾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사단을 물리쳤다는 점에 더욱 흥분했다고 한다.
역사적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 벌어진 8국 연합국 군대의 베이징(北京) 점령 사건은 중국인들이 결코 잊지 못하는 치욕이다. 외세 배척을 기치로 내걸었던 의화단(義和團)의 활약으로 베이징의 외국 사절들이 습격을 받자 영국과 프랑스, 일본과 미국 등 8개 국가가 군대를 톈진(天津)에 상륙시켜 베이징을 점령했던 사건이다.
당시 미군이 파병한 군대가 해병대였다. 그 해병대가 미 1해병사단의 모체는 아닐지라도 50년 전 자신들에게 치욕을 안긴 미 해병대에 앙갚음을 했다는 점에서 중국 지도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모양이다. 관영 언론 등을 통해 중국 지도부는 이를 대내외에 알리기에 바빴다.
/한반도 참전 직후, 마오쩌둥이 중국 고전을 읽고 있는 모습.
그러나 그런 행위는 전쟁의 ‘실(實)’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을 비롯한 1900년도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감성적으로 벗었을지는 모르나, 실제로는 그들이 당면한 제국주의시대 이후의 서방 세력이 지닌 ‘실력’에 눈을 떴어야 했다.
중공군을 덮은 새 불안감
미 1해병사단은 자신의 5배에 달하는 중공군 병력을 맞아 처절하게 싸웠다. 기록에 따르면, 미 1해병사단은 약 3700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중공군이 장진호에서 입은 손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중공군의 2차 공세에서 아군과 중공군의 피해 상황이 대략이나마 나와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1950년 11월 말~12월 11일까지의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는 약 1만 7000명이다. 그에 비해 중공군은 2차 공세에서 10만명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온다. 전사자 약 3만 700명, 동상자(凍傷者) 5만 여명으로 기록돼 있다. 미군 사상자 중 상당수도 동상 피해자다. 그러나 동상에 의한 환자, 그로 인해 전투력을 상실한 사람의 수가 중공군에 훨씬 많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요란하게 선전전을 펼친 중국 지도부의 속내도 결코 편치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전쟁을 막후에서 이끌었던 마오쩌둥의 당초 계획은 아군 병력을 ‘섬멸’하는 데 있었다. 한 부대의 전력 중 50% 이상을 상실토록 하는 게 자신들이 정한 ‘섬멸’의 개념이었다.
/프랭크 밀번 소장.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전투력이 약한 국군 2군단을 주저앉히는 것에서만 달성됐다. 미 2사단이 전력의 3분의 2를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그를 이끈 프랭크 밀번의 미 1군단은 멀쩡하게 전력을 유지한 채 후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부전선의 미 8군에게 중공군이 가했던 공격은 그들이 설정한 ‘섬멸’ 수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투를 통해 미국이 상징하는 서방의 힘을 꺾었다면서 “공미(恐美·미국을 두려워함)를 극복했다”고 자랑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상대를 압도하는 무기와 장비, 체계적인 훈련에 따라 차분하게 방어전을 펼치며 후퇴했던 미 해병대를 바라보는 중공군 전선 지휘관들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졌다.
‘이 전쟁에서 미군을 이기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점차 움트고 있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마오쩌둥은 그 점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았겠지만, 한반도 참전과 그 직후의 공세를 잇따라 펼쳤던 펑더화이(彭德懷)의 눈에는 그 점이 뚜렷이 보였을 것이다.
/중공군을 지휘한 펑더화이의 전선 시찰 모습. 그는 2차 공세 뒤 '미군을 이길 수 없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 앞 회에서 소개한 책이다. 미군을 비롯한 아군이 맞았던 1950년 12월의 겨울은 그렇게 혹독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그 해 겨울도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거대한 새로운 두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현대화한 군대의 위력을 직접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를 비롯한 중공군의 전선 지휘부는 그 점을 체감하고 있었다.
<6·25 전쟁사>는 중공군 부상자의 입원 비율이 4.5%였다고 소개한다. 이는 후방의 병원이 없었다는 얘기와 같다. 27군단 94사단의 소대 간부는 그런 두려움에 쫓겨 그만 탈영했다. 전선을 이탈해 도망친 소대장급 이상의 간부는 188명, 그 가운데 옷을 벗은 사람은 67명이라고 책은 소개했다. 상대를 전선에서 밀어내기는 했지만 중공군은 아주 큰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던 것이다.
36 대한민국이 잊을 수 없는 장군 워커,
(6) 중공군은 강했다
월튼 워커 장군의 인상
손자(孫子)가 강조했던 몇 가지 중요한 개념 중에는 세(勢)라는 게 있다. 크게 보자면 이는 전쟁 등의 국면에서 함부로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한 번 이뤄진 기운이 줄곧 이어지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기는 기운이면 승세(勝勢), 그 반대의 경우라면 열세(劣勢)다.
중공군은 2차 공세를 펼치고서도 잠시 사라졌다. 공세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그들의 2차 공세 때는 알기 힘들었으나, 그 이후 벌인 여러 차례의 공세에서도 그런 특징은 반복됐다. 보통 5일에서 1주일 정도 이어지던 공세는 거짓말처럼 곧 끊어지고는 했다.
그들은 보급에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1950년의 10월 말에 펼친 1차 공세, 그리고 한 달 뒤에 벌인 2차 공세를 볼 때 중공군은 분명히 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아울러 그들은 펼쳤다가 다시 접는, 전술적으로는 공세의 강약(强弱)을 구사하고 있기도 했다.
다 지나간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대목이 우리 아군에게는 아쉬웠다. 중공군의 특성을 재빨리 간파했다면 우리는 그에 맞춰 다른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여지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중공군의 그런 약점을 들여다 볼 여유는 당시로는 없었다. 아군 지휘부도 중공군이 느닷없이 나타나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강공을 펼치는 통에 아주 당황하고 있었다.
/월튼 워커 장군.
미 8군을 이끌고 서부전선의 주공(主攻)을 담당했던 월튼 워커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차전(戰車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명망을 얻은 조지 패튼 장군의 적자(嫡子)라고 봐도 좋을 경력의 소유자다. 그 패튼의 지휘 아래에서 그는 군 경력의 큰 부분을 이룬 사람이다. 그 패튼의 불도저와 같은 강공(强攻)을 직접 배우고 익힌 사람이다.
그는 우선 매우 강인한 군인이었다. 워커 장군과 내가 처음 만난 곳은 1950년 7월의 낙동강 전선이었다. 우리는 그 때 김일성 군대의 기습 남침에 밀려 낙동강까지 밀린 처지에 있었다. 워커는 미군 지휘부의 결정으로 급히 부산에 도착한 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던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의 현장을 늘 누비고 다녔다. 지뢰의 위험 때문에 자신이 타고 다녔던 지프에 철판을 하나 더 부착한 다음 부지런히 현장을 쫓아 다녔다. 그는 일본에서 급히 부산으로 도착해 낙동강 전선에 섰던 미군 장교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그가 즐겨 하던 말이 하나 있다. “Stand or die!”였다. 우리식으로 풀자면 “버텨라, 아니면 죽어라!”였다. 한자로 풀면 바로 죽음으로써 지키는 사수(死守)다.
/2010년 용산 미8군 부대에서 제막된 워커 장군의 동상.
그는 심할 경우 지니고 다니던 지휘봉으로 미군 장교의 철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조금이라도 허물어진 모습을 보이면 특유의 강인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 보면서 “Stand or die!”를 외치곤 했다. 그런 대단한 파이팅 덕분에 미군을 비롯한 아군은 힘을 얻었고, 마침내 막바지 안간힘을 쏟던 김일성 군대를 물리치고 전선을 북상시킬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인물이다.
“평양을 너무 빨리 내줬다”
워커 장군은 그 해 12월 말 의정부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고인(故人)에게는 다소 미안한 표현이겠으나, 그는 인상이 마치 사나운 불독을 연상케 했다. 눈빛도 그랬고, 전선을 분주히 오가는 활력 넘치는 자세 또한 그랬다.
나는 조지 패튼 장군의 활약상을 그저 풍설로 들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워커 장군을 보면서 나는 불리한 전장(戰場)에서도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군인의 기개를 읽었고, 그로써 조지 패튼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강인한 지휘관이었던 워커 또한 중공군이 펼친 2차 공세에서는 많이 당황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중공군 공세에 밀려 38도선으로 병력을 후퇴시킬 때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는 이 대통령에게 “곧 부산으로 내려가거나, 마지막에는 제주도 등으로 피해야 할 것”이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6·25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이 워커 장군과 함께 이야기하는 모습.
물론 이 대통령이 그런 건의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 대통령은 “절대 못 간다” “대한민국 땅을 내주고 내가 어디를 가겠느냐”면서 워커 장군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런 건의까지 한 것을 보면 워커 장군은 전세(戰勢)를 매우 비관적으로 봤음이 분명하다. 미 8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까지 축차적으로 후퇴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국군을 남해안 도서(島嶼) 지역으로, 미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킨다는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앞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우리 국방부의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 역시 미 8군의 당혹감을 전하고 있다. 책은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린 아군의 전술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6·25 전쟁사>는 우선 평양에 주목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군은 너무 빨리 평양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아군이 지닌 압도적인 공습력(空襲力), 그리고 탁월한 전선 물자 보급력 등을 두고 볼 때 평양으로부터의 철수는 너무 성급했다는 얘기다.
/1950년 12월 평양 외곽으로 대동강을 건너 철수하는 국군 1사단 행렬.
따라서 평북 일대에서 중공군에게 밀린 뒤라도 전열(戰列)을 가다듬어 평양 고수 작전을 벌였다면 중공군을 그 북쪽 전선에서 막아낼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책은 아울러 당시 미 8군의 일부 장군들은 평양을 왜 빨리 포기하는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숨이 차오르던 중공군
그 때 평양에는 많은 전선 물자가 있었다. 화물 열차에 실린 전차도 있었으며, 막대한 물량의 보급 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시 나는 휘하의 국군 1사단을 이끌고 평양의 외곽을 돌아 대동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은 그 때 시커먼 연기로 자욱했다. 미군의 전선 물자를 태우는 연기였다. 산더미와 같았던 물자가 불길에 싸이면서 검은 연기를 뿜고 있었으며, 간혹 그 연기 사이로 미군 물자를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기계화한 수송 능력이 절대 부족했던 중국이 동원했던 지게부대 군중 환송대회.
나는 후퇴에 전념하느라 당시 평양을 사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뒤에 그 당시의 전쟁을 들여다보면서 늘 찾아들었던 생각은 책이 지적하고 있는 내용과 같다. 전쟁은 사람의 기대 또는 예상과는 달리 벌어질 때가 많다. 따라서 진로(進路)가 있으면 퇴로(退路) 또한 있음을 늘 기억해야 좋다.
아군이 강력한 공세를 펼치며 북한군을 밀어붙일 때 우리가 퇴로를 미리 상정했다면 평양은 크게 주목할 만한 곳이었다. 그곳은 산악이 아닌 너른 평원이 펼쳐진 곳이다. 북쪽의 산악에 전선을 형성한 뒤 공습의 장점을 살리고, 물자의 보급을 더 원활히 했다면 중공군 공세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시 사후 생각에 불과하다. 당시에는 아군 모두 공황(恐慌)의 심리에 젖어 있었다. 중공군은 두 차례의 기습적 공격으로 분명한 승기(勝機)를 잡았고, 그렇게 부풀려진 분위기는 일정하게 세(勢)를 형성하고 있었다. 패튼의 강인한 돌파력을 사사(師事)했던 워커도 그만 그런 세에 눌리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이 한반도 전쟁에 참전한 뒤 각종 물자 동원에 나선 중국의 한 기계공장 모습.
그나마 중공군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던 점은 아주 다행이었다. 매우 미약한 보급력이 때로 바닥을 드러내면서 공세가 간헐적으로, 또 주기적으로 끊기는 약점을 노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에서는 상대가 누군지 몰라야 무서운 법이다. 상대의 모습을 파악하면 파악할수록 그 두려움은 크게 잦아든다.
나는 국군 1사단을 이끌고 평양 외곽을 돌아 남하했다. 우리가 진지를 형성해야 할 곳은 임진강의 고랑포였다. 그때 워커 장군의 전화를 받았다. “그곳에서 후퇴하는 아군 병력을 수습하라”는 명령이었다. 임진강은 천혜의 요새와도 같았다. 그곳을 의지해 제대로 싸워보자는 생각도 굳어졌다. 중공군은 그곳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공세는 막바지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여세(餘勢)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37 참담했던 후퇴, 나는 아이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후퇴 명령을 내리고 잠시 정신을 잃다
(6) 중공군은 강했다
임진강에서의 후퇴 작전
1950년 8월의 다급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나와 어깨를 함께 하고 김일성 군대의 막바지 공세를 이겨낸 사람이 있다. 그는 당시 미 27연대 연대장 존 H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그는 나중에 대장까지 승진해 1970년대 초반 주한 미 8군 사령관까지 역임했다.
그는 나와 낙동강의 다부동 전선에서 김일성 군대를 막아낸 인연으로 아주 친한 사이로 변했다. 나는 휘하의 국군 1사단과 함께 1950년 12월 임진강으로 후퇴할 무렵 다시 그를 만났다. 아마 12월 15일 정도였으리라 기억한다. 사리원 남쪽에 있던 1사단 사령부를 그가 찾아온 것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는 내가 전쟁 중에 만났던 미군 지휘관 중에 가장 빼어난 미남이었다.
영화배우를 연상시키는 듯한 외모에 미 웨스트포인트의 엘리트답게 예의와 범절이 아주 좋았으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신중함과 묵직함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전선에서 생사(生死)를 넘나들며 쌓은 우정은 보통 이상의 것이다. 그는 다부동 전투 이후 몇 차례 만날 때마다 격의 없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철수할 가능성도 있다는데….”
/미 27연대를 이끌고 낙동강 전선 방어에 나섰던 존 마이켈리스 대령. 나중에 대장으로 승진해 1970년대 초반까지 미 8군 사령관을 맡았다.
나는 속으로부터 ‘아…!’하는 탄식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삼켰다. 그가 말하는 철수는 낙동강 전선으로, 더 나아가서는 한반도 밖으로의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마이켈리스는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전선에서 방어선을 펼치는 동료인 내게 자신이 전달받은 극히 중요한 정보를 흘려줘 참고하라는 의미였으나, 나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내 표정을 알아챘던 모양이다.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그래도 최선을 다 하는 수밖에 없다. 힘을 내자”라며 다독였다. 나는 마이켈리스가 다녀간 무렵에 다시 말라리아를 앓았다. 힘겨운 전쟁터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왔던 병이었다. 한낮에도 오한이 오고, 가끔은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다.
마침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의정부 인근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함께 참전 중이었던 미 24사단 소속의 아들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고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마음은 더 어두워졌다. 6.25가 벌어진 뒤 직접 그의 지휘를 받으면서 4번을 직접 만났던 장군의 타계 소식에 몸은 더 떨리고 있었다.
/6.25 전쟁 전선을 시찰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맨왼쪽)에게 아들 샘 워커 중위(왼쪽에서 세번째)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워커 미8군 사령관(왼쪽에서 두번째).
말라리아는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아다녔다. 그때는 오한이 더욱 자주 찾아왔다. 중공군의 대병력은 곧 우리 눈 앞에 나타날 게 분명했다. 여기저기서 그들의 동향이 전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몸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마음도 약해질 태세였다. 어떻게든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새 김장김치까지 받았으나…
그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12월 31일 오후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한국은행 이사로 재직 중이던 장기영(한국일보 창업주)씨와 나중에 재무장관을 역임하는 송인상씨 등이었다. 모두 한국은행에 몸을 두고 있던 분들이었는데, 전선의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갓 담근 김장김치를 큰 항아리 2개에 담아서 부대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 김치를 각 부대에 골고루 나눴다. 장병들의 분위기가 잠시 환해졌다. 그러나 전선의 불안감은 높아만 가고 있었다. 나는 오한 와중에도 전선의 갖가지 상황을 열심히 챙겼다. 그러나 겨울에 앓는 말라리아는 고약하기만 했다. 후퇴를 거듭하던 시점에 찾아든 말라리아여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휘소 한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으면 꼭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해 7월 경 미군 고문관으로 국군 1사단에 파견나와 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메이 중위였다. 그는 키가 훌쩍 컸다.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벌써 머리에 은발이 가득했다. 그는 다양한 군사적 도움을 주고자 정성껏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말라리아의 오한으로 몸을 떨 때마다 조그만 버너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버너 아래 부분에 있는 작은 펌프를 밀었다가 당기면서 불을 붙인 뒤 신속하게 물을 끓였다. 버너 위의 코펠에서 물이 끓으면 그는 곧 능숙한 솜씨로 커피를 진하게 한 잔 타 내게 건넸다. 그는 늘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면 오한이 멈출 것”이라는 말로 나를 진정시켰다. 오한과 함께 찾아오는 불안감도 많이 줄었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라도 그런 떨림과 막연한 불안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메이는 늘 그렇게 내 곁을 지켰다.
장기영씨와 송인상씨 일행이 돌아가고 부대는 다시 분주해졌다. 적정(敵情)에 관한 보고가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저녁에는 드디어 평양에서 후퇴한 이후로 잠잠했던 중공군의 공세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펼치는 3차 공세였다. 아주 많은 병력의 중공군이 부대 전면을 강하게 때리고 들어왔다.
/중공군이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진격하는 모습.
그들은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빈 곳을 찾아냈다. 1950년 10월 말 펼친 1차 공세부터 그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끄는 1사단과 인접 6사단의 경계가 있는 지경선(地境線)이 밀렸다. 중공군은 역시 그 틈을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우회와 포위의 명수였다. 우선 틈을 찾아내 그곳을 밀어붙인 뒤 깊게 종심을 뚫고 들어와 아군의 후방을 포위할 참이었다.
1사단 12연대가 먼저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투 지휘소에 들어오는 다급한 보고를 통해 중공군이 막대한 병력을 앞세워 전선을 돌파하는 정황이 잡히고 있었다. 15연대를 예비진지에 투입한 뒤에도 상황은 나아질 줄 몰랐다. 15연대와는 아예 통신 자체가 끊기고 말았다. 다급한 나머지 나는 공병대와 통신대 병력까지 투입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우리가 쳐놓은 철조망을 쉽게 넘었다. 앞의 동료가 쓰러지면 그를 밟고, 때로는 자신들이 지닌 담요를 철조망에 올려놓고 그 위를 넘었다. 전형적인 인해전술(人海戰術)이었다. 나는 우선 후퇴 명령을 내렸다.
한강을 넘을 때의 심정
지휘소를 이루는 참모들과 미 고문관들에게 모두 후방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나는 주요 참모 몇몇과 지휘소에 남아 후퇴상황을 점검했다. ‘승패병가상사(勝敗兵家常事)’는 말이 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군대가 늘 맞이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치는 패배 앞에서는 누구라도 담담해질 수 없다.
/중공군 3차 공세 때 전선인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던 백선엽 장군과 백 장군을 돕던 미 고문관 메이 중위.
앞에서도 잠시 소개를 했던 장면이다. 나는 그 때 정신을 잠시 잃었던 듯하다. 내 옆을 지키던 통신참모 윤혁표 중령은 그 때의 나를 “전화기를 손에 쥐어주면 통화를 한 뒤 제자리에 놓지 못하고 떨어뜨렸고, 무전기를 내려놓은 뒤에는 했던 말을 반복해서 했다”고 기억했다. 나는 당시의 내 모습에 관한 기억이 없다. 그저 머릿속에 ‘우-웅’거리는 소리만이 울렸고, 그저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할 만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때 나를 번쩍 들어 올린 사람이 메이 중위였다. 말라리아를 앓던 내게 늘 버너를 들고 와서 따뜻한 커피를 끓여주던 메이였다. 그는 “전투를 하다보면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법”이라며 나를 들어다가 지휘소 밖에 있던 지프에 앉혔다. 그렇게 나는 다시 후퇴했다. 파주군 법원리의 한 초등학교에 마련했던 지휘소를 빠져나와 우리는 한강까지 내려왔다. 그곳에서 다시 한강을 건너 시흥에 마련한 지휘소에 도착해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서울을 또 내주는 상황이었다. 평양을 내주고 다시 서울까지 적의 수중에 넘겨주는 현실이 참담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1951년 1월 4일, 1.4 후퇴 당시 얼어붙은 한강을 앞에 두고 피난민 무리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겁에 질려 울고 있다./미 국립문서보관소
한강에는 미군이 설치한 긴 부교(浮橋)가 놓여 있었다. 추운 겨울이라 강에는 10~13㎝ 정도로 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러나 전차와 야포가 지나갈 만큼 단단하지는 않아서 미군이 그 위에 부교를 설치한 상황이었다. 사단장이 탄 차라서 미군이 통행을 통제해줬다. 6·25 개전 초기 서둘러 한강 다리를 끊는 바람에 생겼던 혼잡함은 없었다.
나는 지프에 탄 채 한강을 건넜다. 날씨가 매우 추웠다. 피난민 행렬이 옆에 있었다. 지프 앞자리에 앉은 나는 그들을 무심코 바라봤다. 귀마개를 한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스치는 듯 마주친 꼬마의 눈을 그저 바라보기가 쉽지 않았다. ‘저 아이의 눈에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나는 그저 앞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38 내가 있던 조만식 선생 사무실에 느닷없이 나타난 김일성
"김일성 장군을 지지하라"는 소련 장성 발언에 군중들 야유
(7) 김일성에 대하여
그 생가가 있는 대동군
평양의 외곽을 두르고 있는 행정구역이 대동군(大同郡)이다. 그 서쪽에는 강서군(江西郡)이 있다. 같은 평양 권역에 있지만,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대동군은 전체적으로 볼 때 평양 시내에서 평균 12㎞ 정도 떨어져 있다. 강서는 그 거리가 28㎞에 이른다. 평양으로부터 가까이 있어서 대동군이 좀 더 대도시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들을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대동군은 강서에 비해 조금은 덜 개방적인 곳이었다.
강서에는 고구려 고분(古墳)이 많다. 고구려 도읍인 평양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곳에 무덤을 많이 써서 그랬다. 내가 어렸을 적 ‘서양 문물에 어느 정도 눈을 떴느냐’를 가늠할 때 ‘개화(開化)’라는 개념이 하나의 기준이었다. “이 지역이 어느 정도 개화했느냐”는 식의 말이 자주 등장했다. 그런 ‘개화’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대동군은 강서군에 많이 뒤졌던 지역이다.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대동군은 강서군에 비해 개화의 정도가 많이 떨어졌던 곳이다.
그 대동군에 속해 있던 만경대가 김일성의 생가로 알려진 곳이다. 지금은 북한 왕조 정권에 의해 성역 중의 성역으로 떠받들어지는 곳이다. 북한이라는 왕조의 창업자가 바로 김일성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생가라고 알려진 만경대로부터 훨씬 서쪽에 있는 강서군 출신이다.
/젊은 시절의 김일성.
나는 그곳 강서에서 7살 때까지 살았다. 그러고서는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를 따라 3남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강서에 대한 기억은 강렬하지 않다. 그러나 평양에서 살 때 그곳 분위기를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강서에는 일찌감치 기독교가 자리를 잡았다. 신자들이 꽤 많았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뜬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강서 사람들은 도시에 적응하는 속도도 비교적 빨랐다.
반면 대동군 사람들은 좀 더 투박했다. 그 대동군의 만경대라는 곳에서 태어난 김일성의 생년은 1912년이다. 내가 1920년생이니 그가 나보다 8살이 많다.
나는 평양에서 줄곧 자랐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 사범학교에 진학한 뒤 군문(軍門)에 들어가고자 만주군관학교를 지망했다. 그리고 만주군 장교로서 약 3년간 일한 뒤 1945년에는 해방을 맞이해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김일성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원산항에 상륙한 뒤 소련군의 보호를 받으며 평양에 나타나면서 평양 시내 분위기가 변했다. 그는 새로운 실력자로 행세했다. 당시 남쪽은 미군이 장악했고, 38선 이북은 소련이 접수한 상태였다. 따라서 소련이 대리 집정자로 누구를 내세우느냐는 꽤 큰 관심거리였다.
공설운동장에서 비웃음을 사다
평양에서는 당시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해방 뒤 2개월이 지난 10월 14일 무렵이었다. 소련 군정이 개최하는 김일성 환영 군중행사가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여 들었다. 그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당시 북녘의 정국(政局)은 어디로 흐를지 몰랐다.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서는 나도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평양공설운동장 군중행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꽤 소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였다. 시간은 몇 시였는지 기억이 별로 없다. 밝은 대낮임에는 분명했다. 가운데에는 무대가 차려져 있었고, 연단에는 소련 군정 장성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소련군 장성 하나가 무대에 서더니 통역을 통해 “여러분이 이제는 김일성 장군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어 나타난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예상보다는 아주 젊은 사람이 무대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군중을 향해 인사를 했다. 연단 아래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허탈하다는 듯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에이~뭐 저래” “야, 좀 이상하다”는 말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대개가 웃음기가 담긴 말들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으나, 당시 평양 사람들 사이에는 ‘독립투사 김일성’에 관한 이미지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 당시 평양 사람들이 생각하던 김일성 장군은 적어도 나이가 70은 넘었어야 했다. 그런 대중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아주 젊은 김일성이 무대에 등장하자 사람들이 일종의 야유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젊은 김일성의 등장은 심상찮은 신호의 하나였다. 당시 평양을 비롯한 38선 이북의 모든 지역은 소련군의 장악 하에 있었다. 소련군은 좀 특이한 군대다. 그들이 지닌 막강한 힘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미군으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독일과 일본을 차례차례 무릎 꿇렸던 군대였다.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
그 뒤에서 무대 총감독을 맡아 전략을 구사한 사람이 바로 이오지프 스탈린이었다. 그는 미국 중심의 서방진영에 맞서 치밀한 전략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새로운 냉전 구도의 한 축을 만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런 스탈린 밑의 소련군은 욕심이 많은 군대였다.
소련군은 자신이 사용하는 많은 물자를 현지에서 최대한 조달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이 방침에 따라 그들은 북한에 진주한 뒤에도 현지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들을 만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다. 기차의 여객들을 검문하면서 승객들의 시계를 빼앗아 팔뚝에 여러 개 걸고 다니면서 전리품(戰利品) 쯤으로 과시하던 행동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내용이다.
조만식 선생 사무실을 찾은 김일성
그런 소련군이 진주한 평양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밤에는 시내에서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이튿날 그 총소리의 연유를 캐물어 보면 반드시 소련군이 개입해 있었다. 그들이 민가에 들어가 물건을 빼앗는 과정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민심은 흉흉해졌다. 소련군에 의한 물건 강탈이 제법 이어지면서 평양의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서서히 움직였지만, 그에게 모이는 힘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을 제법 민감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내 외종사촌인 송호경 형은 당시 조그만 사업을 벌여 부유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정치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은 당시 평양에서 민족주의 진영의 가장 확실한 지도자로 떠올랐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1945년 광복 직후 만들어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고당 조만식 선생.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 모습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 선생은 1932~1933년 조선일보사 사장을 지냈다.
나는 해방정국에서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런 내 처지를 알았던 송호경 형은 내게 “함께 조만식 선생을 모시자”고 권유했고, 나는 그에 응해 선생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이 공설운동장에 나타나 새로운 지도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나는 매일 양복을 입고 산수(山手)소학교에 있던 평양시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출근했고, 아울러 조만식 선생이 거주하던 고려호텔에도 왕래해야 했다.
당시 김일성은 여기저기를 분주히 다니면서 자기 세력을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 있으면서 그런 동향을 주의 깊게 살필 수 있었다. 공설운동장 무대 위에 그가 나타났을 때 나는 속으로 ‘생김새로 봐서는 한가락할 사람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보였다. 속을 감추고서 여러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해방 뒤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이 처음부터 줄곧 강한 이념성을 보였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을 감추면서 민족주의 진영을 비롯해 자신과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포섭하는 데 열심이었다. 누구든 만나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하고 다녔다. 평양에 잠시 들렀던 만주군 선배 정일권과 김백일 등도 그의 포섭 범위에 들어 있었다. 대부분은 그런 김일성의 권유에 귀가 솔깃하는 편이었다.
그런 김일성이 서서히 조만식 선생을 포섭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의 실체는 분명치 않았다. 소련을 등에 업어 공산주의를 내세우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으나, 정국을 이끌면서 자신과 이념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전혀 미지수였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있던 조만식 선생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39 한강을 놓쳤던 김일성, 그는 전쟁을 잘 몰랐다
(7) 김일성에 대하여
제스처가 컸던 사람
내가 평양의 조만식 선생 사무실에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그는 별로 뚱뚱하지 않았다. 키가 훌쩍 컸고, 다소 말랐다는 인상을 줬다. 그러나 말수가 많았으며 아주 활달한 기운을 자랑했다. 조만식 선생 사무실을 들어설 때의 김일성은 일행 몇 명인가를 데리고 나타났는데, 행동거지나 말수라는 면에서 단연코 다른 이들을 압도했다. 아무래도 그가 당시 지녔던 정치적 위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그래서 곧 북녘의 정치권력을 손에 쥘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나는 그들이 사무실에 들어설 때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면서 얼마 전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처음 봤던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기도 했다. 젊은데다가 활력이 꽤 넘쳐 보였다. 말수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제스처가 제법 크다는 인상을 줬다. 말을 할 때 손짓을 크게 하는 점도 따라서 눈에 자주 띄었다.
나는 그들을 사무실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만식 선생이 있는 쪽이었다. 나는 김일성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들이 조만식 선생을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먼저 조만식 선생께 여쭙지도 않았고, 조만식 선생 또한 우리에게 그들과 나눈 대화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처음 만든 따발총을 인민군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단지 분위기로 미뤄 볼 때 김일성은 조만식 선생을 자신의 진영에 포섭하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만식 선생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로서의 지향을 보이고 있어서 어떤 다른 이념적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김일성은 그 이후로도 열심히 조만식 선생 사무실을 찾아왔다. 나는 그런 김일성의 일행을 계속 안내해야 했다. 그는 늘 활기찬 모습으로 조만식 선생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성과 없이 돌아가면서도 풀이 죽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숙소
나는 조만식 선생 사무실의 용무 때문에 김일성 밑에서 일하고 있는 소련군 소속의 한인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들은 당시 산수(山手) 거리에 있는 예전 일본군 장교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한낮이었다. 정확히 그 때의 용무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단지 무엇인가를 전달하러 갔던 듯하다. 마침 그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길을 돌려 그곳에서 나오는데, 들어갈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그들의 표어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조선 공산당의 규율은 강철과 같다’
붉은 천에 시커먼 색의 글자였던 듯하다. 건물 정면에 그런 표어가 걸려 있었다. 그랬다. 새삼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은 ‘김일성이나, 그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나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아직 충분한 인생의 숙성기를 거친 연령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나는 공산주의를 믿지 않았다. 내 유년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모친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데다, 인생의 학습기를 거치면서 나는 어쩐지 공산주의의 신념을 믿지 않았다.
나는 그해 12월 28일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에 앞서 12월 17일에는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北朝鮮分局)의 책임비서 자리에 올랐다. 실질적인 권력 1인자 자리에 올라서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리고 그를 지원하고 있던 소련 군정은 조만식 선생을 연금했다. 신탁통치안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를 모시고 있던 우리들은 조만식 선생에게 “이제는 남쪽으로 내려가셔야 합니다”라고 간곡하게 설득했으나 선생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의 건의가 이어질 때마다 “그렇다면 수많은 북녘 동포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나 혼자 이들을 두고 갈 수는 없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나는 그에 앞서 서울을 다녀온 적이 있다. 북녘에 들어서는 공산주의 정권에 비해 남쪽의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월남을 결행했다. 그리고 마침 그곳의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군문(軍門)에 몸을 담았다.
그로부터 약 5년 뒤에 벌어진 비극이 6.25전쟁이었다. 김일성은 전광석화와 같은 정권 장악, 그로부터 숨 돌릴 틈도 없이 벌인 전쟁 준비를 끝내고 마침내 1950년 6월25일 새벽, 38선을 기습적으로 넘어 한반도 전역을 거칠고 피비린내 풍기는 전화(戰火)의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내가 그 때의 전쟁에 나서면서 느꼈던 참담함, 그리고 국군 장병들의 분투는 나중에 소개할 작정이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김일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가 벌인 전쟁의 초입에 국군 1사단을 이끄는 사단장이었다. 방어지역은 아울러 임진강이었다. 느닷없이 벌어진 전쟁이라서 당시의 나는 김일성을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우선은 막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국면으로 들어설 때마다 나는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공설운동장 무대에 섰던 홀쭉하고 키가 컸던 그의 인상으로부터, 조만식 선생 사무실에 들어서던 말수가 많고 제스처가 컸던 그 김일성이라는 사람의 됨됨이 등을 말이다.
전략에 둔감했던 김일성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권력에는 매우 민감한 인물이었을지는 몰라도 전쟁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선 전쟁의 두려움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그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제대로 항일 무장운동을 펼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만 하다가 소련에 붙어서 권력을 탐했는지는 학자들이 제대로 진상을 규명할 영역이다.
그러나 그는 대규모 전쟁이 몰고 오는 재난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알았든 몰랐든 그는 전쟁을 벌임으로써 한반도의 무수한 생령들에게 거대한 고통을 안겼다는 점에서 ‘민족의 죄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다음 눈길이 가는 대목이 그의 전쟁에 대한 이해다. 나는 그 점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의 군대와 맞서 싸움을 펼쳐야 했던 대한민국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두가 잘 알다시피 1950년 6월25일 일찍이 없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다. 기습적인 남침이었고, 당시 대한민국의 군대는 그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상태였다. 전쟁 초반에 벌어진 국면은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그러나 눈에 띄는 점이 있다.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는 이미 폭파된 한강 인도교.
한강 방어선에 관한 문제였다. 대한민국은 급히 서둘러 후퇴를 하면서 한강의 유일한 인도교를 먼저 끊었다. 이는 중대한 실수였다.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내 지휘 하의 국군 1사단은 이 때문에 중화기와 장비를 하나도 가져올 수 없었다. 국군 1사단뿐 아니라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다른 아군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한강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뼈아픈 실수였다. 그러나 이 점은 김일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한강의 전략적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전쟁 초반의 주도권을 쥐었던 처지에 있었다. 만약 그가 전쟁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한강에 먼저 주목해 그곳을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점을 고스란히 놓쳤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에도 그 대목이 나온다. 김일성에게는 고속 기동부대가 있었다. 제105 전차여단이었다. 그들은 전쟁 이틀째인 6월27일 한강 인도교 점령을 목표로 움직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 김일성으로부터 돌연 “한강교 점령 대신 중앙청을 비롯한 서대문형무소와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탱크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북한군 전력의 핵인 소련제 T34 탱크부대에 힘없이 무너져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앗겼다.
실제 105 전차여단은 그렇게 움직였던 모양이다. 일찌감치 국군이 대적하기 힘들었던 T-34 전차를 몰고 기동한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한강 인도교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북한군은 한강 이북에 남아 있던 국군 전력을 모두 없앨 수 있었다. 아울러 서울 점령 이후의 작전 전개도 한결 쉬워진다.
당시 북한은 커다란 강을 건너는 도섭(渡涉) 장비가 없었다.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했는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도착했던 소련제 도섭장비는 하나뿐이었다. 적어도 둘은 확보해야 한강을 건너 서울 남쪽으로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서 많은 피해를 내기는 했지만 국군 지휘부는 결국 북한군이 도착하기 전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고, 그 때문에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뒤 적어도 나흘 이상을 서울에서 지체해야 했다. 전쟁 초반에 드러난 여러 상황 중에서 북한군의 ‘서울 체류 나흘’은 가장 커다란 미스터리였다.
40 김일성의 무지…기동과 집중, 포위, 보급 등 전쟁을 이해 못해
그냥 밀어붙이면 될 줄 알았던 김일성의 단순함
(7) 김일성에 대하여
한강서 머뭇거리다 미군 상륙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침을 시도한 김일성의 군대가 서울을 수중에 넣은 때는 1950년 6월 28일이다. 인민군의 주력이 서울 시내에 들어왔고, 대한민국 국군 지도부는 이미 한강을 거쳐 수원으로 밀려 내려가 있었다. 북한 인민군은 이로부터 짧게는 나흘을 서울에서 지체했다. 그들이 한강을 넘어 수원을 공격한 때는 7월4일 아침이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김일성의 군대는 서울에서 머뭇거리다가 한강을 넘지 못해 결국 약 1주일가량을 지체하면서 시간상의 불리함을 자초해야 했다. 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했다. 여러 증언과 역사 연구가 밝히고 있듯이, 당시의 국군은 전력이나 전술 운용 등 모든 면에서 김일성의 군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울을 내주는 과정에서 급히 한강 인도교를 끊는 바람에 한강 이북의 국군 1사단 등 보유 전력을 철수하지 못해 손실이 아주 컸다.
김일성이 서울 점령에 이어 당초의 기세대로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면 상황은 대한민국에게 아주 불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행이랄까, 김일성은 결국 거기서 주춤거리고 말았다. 그가 왜 한강을 신속하게 넘지 못했는지에 관한 진정한 이유는 학자들의 연구 등을 통해 더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나이 어린 소년도 많이 섞여 있었다.
어쨌든 김일성의 머뭇거림은 국군에게는 아주 다행이었다. 국군은 시흥사령부 사령관 김홍일 장군의 지휘 아래 튼튼한 한강방어선을 구축한 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더 큰 변화가 있었다. 국군이 신속하게 재편에 착수했다는 점,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미군 전력의 희생 가능성을 알면서도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한국 전선에 급파(急派)했다는 점이다.
국군은 개전 초 8개 사단이었으나 이미 3개 사단 병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국군은 제1군단을 평택에서 창설한 뒤 막 도착한 미군에게 한반도 전선의 축선인 서부지역을 인계하고 중부전선으로 방어지역을 변경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주공(主攻)이 닥치고 있던 서부 축선은 일본에 주둔하다가 부산에 상륙한 미 24사단이 맡았다.
한반도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축선은 신의주~평양~서울~대전~대구~부산이다. 이는 예로부터 벌어진 한반도 전쟁에서 늘 가장 중요한 축선에 해당했다. 이곳을 차지하는 쪽이 한반도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교통이 가장 발달했고, 따라서 인구가 가장 밀집해 있으며, 곡물을 비롯한 물자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어서 그렇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급히 배편으로 부산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일본 주둔 미군의 모습.
국군이 맥아더의 결정에 따라 급히 상륙한 미 24사단에게 서부의 축선을 내준 것은 당연하다. 적의 가장 강한 공격력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국군은 대신 숨을 돌려 적의 주공에 못 미치는 차하(次下)의 적 병력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 24사단은 그를 이끄는 윌리엄 딘 소장이 개전 이후 첫 북한군 포로로 잡히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2주 정도의 시간 동안 적 주공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국군도 재편에 성공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말이 사단이지, 사실은 ‘유랑 극단’과도 같았다. 임진강에서 적의 예봉을 4일 동안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후방의 한강 인도교가 끊기면서 우리 사단 전원은 개별적으로 강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뿔뿔이 흩어졌다가 시흥에서 모인 병력이 2000명을 넘지 못했다.
수원 육군본부에서 나는 1사단과 5사단을 함께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군 재편에 따른 조치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렇게 큰물에 떠밀리듯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1사단 및 5사단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충북 증평과 음성을 거쳐 경상북도로 내려갔다가 8월에는 낙동강 전선에 도착한다.
/6.25전쟁 첫 선발로 한국에 도착한 미 24사단 소속 스미스 부대가 바주카포로 북한군에 맞서는 모습.
7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김일성 군대는 다급함을 보이고 있었다. 미군의 본격적인 상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로써 볼 때 김일성 군대가 서울에서 미적거리며 한강을 넘지 못했던 점은 전략상의 매우 중대한 실수였다. 김일성은 작전의 가장 큰 요체인 승기(勝機)의 신속한 장악에서 중대한 결함을 드러냈음이 분명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부는 김일성에게 작전에 신중을 기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특히 중국 지도부는 개전 후 김일성 군대가 서울 남쪽으로 깊숙이 내려가는 일에 강한 경계심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국 지도부의 우려는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북한 군대가 서울을 넘어 깊숙이 진격할 경우 전쟁의 종심(縱深)이 길어져 반드시 미군이 이를 차단하려는 상륙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런 중국의 경고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하루속히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한반도 전역을 적화(赤化)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의 불을 붙이면 한반도 전역이 일거에 타 들어가는 것쯤으로 전쟁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아예 무시했다.
/1950년 8월18일 벌거벗겨진 인민군 포로가 유엔군 작전에 협조하고 있는 모습./눈빛출판사
“미 상륙 가능성” 중국 충고도 무시 그에 비해 중국 지도부는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높게 봤고, 그를 움직이는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의 명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비친 김일성 군대의 동향은 매우 불안했을지 모른다. 그 때문에 김일성에게 서울 이남 지역의 공격에 신중을 기하라고 충고를 건넸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서울에서 머뭇거렸다. “전쟁을 벌이자마자 남한 전역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남로당의 봉기가 있을 것”이라는 박헌영의 과대망상적 자신감을 섣불리 믿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련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한강 도섭(渡涉) 장비를 기다리느라고 지체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김일성 본인이 전쟁을 잘 이해하지 못한 점도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강 도하 이후 남쪽으로 계속 진군을 명령하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전쟁 자체에 무지(無知)한 면모를 드러내고 만다. 그는 단순히 국군과 급히 부산에 상륙한 미군을 밀어 붙이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서울 점령 이후, 그리고 1950년 한강을 마침내 도하한 뒤 수원을 공격해 오던 1950년 7월4일 이후, 북한군 전체가 노정한 전투의 고정적인 패턴 하나가 있었다. ‘독전(督戰)에 의한 신속한 공격’이었다. 김일성이 열심히 독전을 하는 장면은 여러 기록으로 나타난다. 서울에도 왔고, 수안보까지 내려와 남진하는 북한군을 열심히 독려했다. 그러나 전체 상황의 전개,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전쟁 지휘자로서의 면모는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때의 김일성./한국학중앙연구원
그는 남한의 점령지에서 젊은이들을 대거 강제 징용해 남쪽에 형성되는 전선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뒤통수에 총을 들이대고, 기관총 사수의 발을 쇠사슬로 묶으면서 말이다.
김일성은 그런 원시적인 방식의 독전을 거듭했다. 그로 인한 한반도 주민들의 인명 손실이 얼마나 막심했는지는 많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김일성의 전쟁 계획은 단순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에 따르면 그는 개전 초기 한강까지의 종심 90㎞를 5일 만에 뚫고, 다음 2주 동안은 140㎞, 다시 이후의 10일 동안 80㎞를 돌파해 남해안의 모든 항구를 접수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전쟁이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는 과정이라는 ‘기본’을 안다면 그런 계획을 세우기가 매우 어렵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T-34전차와 각종 무기를 앞세우고 그저 진군하면 승리를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의 극치다. 종심이 깊어져 보급에 문제가 생기는 점을 전혀 고려치 않은 구상이다.
전투방식도 변화가 없었다. 그냥 밀면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대담한 기동(機動)이 없었으며, 부대를 집중해 운용하는 안목도 없었다. 그러니 재편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혼란스럽기만 했던 국군 병력을 포위해 섬멸하는 작전 방식은 아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나 작전 단계마다 김일성은 반드시 나서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당시 벌어진 북한군의 작전 모두가 김일성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그런 김일성은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 며칠 뒤 나타났다. 7월 초로 추정할 수 있다. 한강 도하를 망설이고 있던 북한군에게 그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는 분명치 않다. 빨리 강을 넘으라는 독촉이 있었을 법하다. 그런 김일성이 보인 특이한 면모가 있다. 그는 전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권력에는 매우 민감했던 듯하다.
41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쳤다는 소문의 진실
서울 점령한 김일성이 경무대에 손을 대지 않은 이유
(7) 김일성에 대하여
바빴던 전쟁터 속 상념
나는 6·25전쟁의 한복판을 누비면서 싸움 외에는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개전 초에는 임진강 전선의 국군 1사단장으로서, 이어 이듬해에는 강원도 삼척의 1군단장으로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의 ‘백 야전사(Task Force Paik)’ 사령관으로서, 그리고 휴전에 임박해서는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전쟁에 임했다.
전선은 늘 분주하다. 그곳의 아군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많은 일을 챙겨야 한다. 불붙고 있는 전선부터 시작해 수많은 인사와 병참의 업무까지 모두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전선에 서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거나, 적어도 적의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적진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을 머리 속에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그를 차츰 떠올렸던 것은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 막을 내린 뒤였다. 그는 왜 이 전쟁을 벌였을까,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그는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참혹한 전쟁을 벌였던가 등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한복판에서 김일성을 떠올린 적이 한 번 있다. 국군이 김일성의 초반 공세에 낙동강 전선으로 몰렸다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의 대열에 올라 서울에 들렀을 때였다. 나는 국군 1사단장으로서 예하 병력을 이끌고 북진의 선두에 섰다. 그 과정은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국군 1사단은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김일성의 최정예 3개 사단이 벌인 막바지 총공세를 잘 막았다. 이어 북진대열에 올라 대전과 청주를 거쳐 서울에 입성했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고 강원도 양양에서 기념촬영을 한 제23연대 장병들.
서울은 많이 무너져 있었다. 눈에 띄던 높은 건물들은 주저앉았고, 일부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평양을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서둘러야 했던 나는 서울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하루를 머문 뒤 곧장 임진강 문산 일대에서 벌어지는 미군 공정대(空挺隊) 공격의 후방을 받쳐주기 위해 길을 떠났다.
경무대와 김일성
그때 나는 개전 초반 서울에 왔던 김일성이 어디에 머물렀을까를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답을 찾기 힘든 때였다. 일설에는 북한군의 지도부가 용산에서 사령부를 운영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울을 점령한 뒤 얼마 머물지 못하다가 남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그 흔적을 확인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길을 떠나야 했다. 자세히 헤아려 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김일성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딱히 내세울 만한 정설이 없다. 용산에 있었을지도 모를 북한군 사령부가 그의 숙소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승만 대통령의 숙소인 경무대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다. 1953년 초로 기억을 하는데, 그때 서울에서 김일성이 보였던 면모를 이야기하는 내용이 내 귀에 들려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거론했던 이야기다. 여사는 김일성의 미묘한 행동을 거론했다. 경무대에 관한 내용이었다.
/경무대 연못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여사가 외빈을 만나면서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경무대를 다녀간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경무대의 모든 것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더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테면, 경무대의 아주 사소한 집기부터 중요한 물품, 가구와 건물의 안팎을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경무대 살림을 직접 이끄는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김일성의 그런 행태가 큰 다행이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묘한 감정에 젖었다. 김일성은 추측건대, 아마 경무대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는 권력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내가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할 때 그를 서너 번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는 권력을 자신의 몫으로 쟁취하기 위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당시 북한을 접수했던 소련군 지도부에 김일성이 취한 비굴하다 싶을 정도의 처신(處身)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다.
/6.25 남침 직전의 김일성 모습.
전쟁 전 소련의 스탈린을 찾아갔을 때 그가 보인 행각도 그랬다. 그는 스탈린의 눈에 들기 위해 아주 낮은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북한이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환심을 사야 했던 당시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자세는 지나칠 정도였다고 한다. 권력을 손 안에 넣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김일성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 뒤 함께 싸웠던 지휘관들을 모두 잔인하게 숙청하고 북한을 강력한 1인 지배 체제로 묶은 점도 마찬가지다.
권력에 밝은 자의 불장난
그런 그가 서울에 머물면서 경무대를 거의 완벽하게 보존했다는 이야기는 뭘 의미할까. 전쟁을 다루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김일성의 서울 점령은 그가 벌인 당시의 싸움에서 일단 확실한 승기(勝機)를 잡았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김일성이 서울을 들렀을 때 머물렀거나, 아니면 적어도 직접 와서 살폈을 경무대를 ‘이제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프란체스카 여사가 경무대의 완벽에 가까운 보존을 다행으로 생각한 점은 그곳 살림을 주무르는 주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생각해 그곳을 보존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동물적으로 권력에 민감한 김일성이 ‘경무대가 곧 내 차지’라는 생각에서 그를 아끼고 보존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남북한을 제외하고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떠도는 곳은 중국일지 모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혁개방 뒤의 중국 사람들이 김일성을 보는 시각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중국에서는 6·25전쟁 중에 한반도에 참전한 병력을 이끌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김일성의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참전 중공군의 총사령관이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의 뺨을 때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더구나 내 경험으로 볼 때 중국인들은 화가 치밀어 상대를 가격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얼굴을 때리지는 않는다. 얼굴이 곧 체면(面子)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문화적 이유 때문이다.
/6·25 전쟁 중의 펑더화이(왼쪽)와 김일성.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가 떠도는 것은 김일성과 펑더화이를 비롯한 참전 중공군 지도부와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황이 유리할 때는 그런 마찰과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반면 전황이 기울면서 패배의 참혹함에 직면할 때 그런 갈등이 터져나올 수 있다. 이는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자료를 읽었다. 김일성이 종종 펑더화이 등 참전 중공군과 적지 않은 갈등을 벌였다는 내용이다. 펑더화이는 젊은 시절 지방 군벌(軍閥)의 하급 장교로 출발해 적지 않은 전장(戰場)을 전전했던 인물이다. 그 밑의 덩화(鄧華)와 훙쉐즈(洪學智) 등 고위 지휘관도 다 마찬가지였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 전쟁을 잘 알았고, 전쟁을 잘 이해했다.
문제는 김일성이었다. 그는 전쟁을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 전술과 전략의 구상에 있어서도 중공군 지도부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참혹함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였다. 중공군 지도부는 그 점에 매우 신중했다.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역력했다.
김일성은 전쟁에 무지한 반면 아주 모질었다. 내가 마주쳤던 북한의 군대는 그의 독한 독전(督戰)에 밀려 전선을 내달렸다. 뒤로 물러서는 장병들의 머리를 뒤에서 직접 총으로 겨냥하는 방식의 독전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머물다가 수안보까지 내려와 독전을 거듭했다. 그런 김일성의 성정(性情)을 어떻게 표현해야 옳을까. 나는 ‘잔인(殘忍)’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잔인하고 권력에 집요한 인물, 그러나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
42 워커 장군, "정말로 뚫었나! 어떻게 뚫었나!"…
전쟁의 참혹함을 간과한 김일성, 물에 빠진 생쥐처럼 도주
(7) 김일성에 대하여
비겁한 도망과 후퇴
적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때와 적을 두고 등을 보일 때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공격할 때와 후퇴할 때의 차이다. 전쟁에서는 둘 다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상대를 밀어붙여 승패를 가르는 일은 매우 드물다. 힘의 일방적인 쏠림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은 공방(攻防)이 갈마들며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일성은 개전 초반에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의 공격력을 보였다. 1950년 6월25일 전쟁 도발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막바지 공세를 벌일 때까지 그랬다. 그러나 낙동강에 도달할 무렵 김일성의 군사 전력은 이미 ‘바닥’에 다가서고 있는 상태였다. 힘이 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쟁에서의 세(勢)라는 것은 함부로 몸체를 드러내지도 않지만, 일단 드러나면 곧바로 없어지지도 않는다. 김일성 군대가 보인 개전 초의 막강한 공격력은 국군의 한강방어선 구성과 병력 재편, 이어 벌어진 지연전, 곧바로 상륙한 미 24사단의 2주 동안에 걸친 저항으로 다소 꺾이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쟁의 주도권은 여전히 그가 쥐고 있었다. 그의 군대가 장악하고 있던 그 주도권이 바로 전쟁의 세(勢)였다. 그러나 미국의 힘은 강했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00개가 넘었던 사단을 10개 이하로 줄이면서 체력이 많이 약화됐으나 최고 지휘부를 이루고 있던 고위 엘리트 장교들은 건재했다. 그들은 발 빠른 조직력, 물자 동원, 화력의 재구성을 통해 신속하게 미군의 ‘실력’을 한반도 남단 부산항에 올리고 있었다.
/북한군은 북으로 퇴각하면서 수많은 남한의 지식인과 학자, 공무원, 종교인들을 죽이거나 납치해갔다.
그 다음의 전황(戰況)은 다 아는 사실이다. 국군은 미군의 힘을 빌려 낙동강 전선에서 분투를 거듭했고,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도 전선 곳곳에 신속하게 당도했다. 이어 벌어진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은 김일성 군대의 허리를 끊고 말았다.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은, 단호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작전이었다.
그 때 김일성은 등을 보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양측이 치열한 공방을 벌일 때 그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수안보에 내려와 독전(督戰)을 거듭했다. 내가 듣기로 김일성의 조바심은 그때 극에 달했다. 그는 당시 “8월 15일 해방 기념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는 최고의 작전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전선은 그의 뜻과는 달리 움직였다. 국군의 저항이 날로 강해졌고, 부산에 오르는 미군의 병력은 나날이 증가했다. 낙동강 전선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뚫리지 않자 그는 마구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다급했던 김일성은 휘하 지휘관들에게 “큰 길만 다니지 말고 소로(小路)를 활용해 어떻게 해서든 공격을 펼쳐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적의 전선을 넘었을 때
전세가 뒤집어진 것은 결국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때문이었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직접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이 미군과 국군으로 넘어왔던 것이다. 수안보까지 내려왔던 김일성은 급기야 등을 보이며 북쪽으로 내달렸다. 김일성은 당시 북한 공세의 최고 지휘탑이었다. 그러나 일선에서 모든 전투를 지휘한 전선사령부는 김책이 맡고 있었다. 김책은 낙동강 전선의 북방인 김천에 내려와 있었다. 그 또한 등을 보이고 마냥 북쪽으로 내달린 흔적이 있다. 전선의 공세에 모든 역량을 투입했으나, 나머지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처음 만든 따발총을 인민군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나는 당시 낙동강 전선 다부동에서 방어전을 마친 뒤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해 대구 북방 팔공산에서 사단을 이끌고 전선 돌파를 감행하고 있었다. 나는 치열했던 북한의 전선 공세를 직접 몸으로 막았다. 따라서 그들의 후방이 몹시 궁금했다. 격렬했던 전선 공세 못지않게 그 후방에 도사리고 있는 적의 병력이 만만찮게 반격을 펼칠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군대는 전쟁의 모든 구석을 관리하며 싸움을 벌였던 군대는 아니었다. 아주 허탈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반격은 보잘 것이 없었다. 당시에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떠올릴 여유는 없었지만, 북한의 군대가 최소한 전쟁을 제대로 알고서 싸움을 벌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휘하 1사단의 12연대가 과감한 포격과 진격으로 적진을 뚫고 나가면서 과분할 정도의 칭찬을 들었다.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국군 1사단 12연대가 낙동강 전선의 아군 부대로서는 최초로 북한의 방어선을 뚫고 진격에 성공하자 내게 두 차례나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로 뚫은 것이냐” “어떻게 뚫었다는 말이냐”는 내용이었다.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미군이 M-26 퍼싱 전차에 올라타 북진하고 있다./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이로써 인천에 상륙한 미 10군단의 뒤를 받쳐주기 위한 아군의 링크업(link-up) 작전이 9월19일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병력은 남쪽 낙동강 전선에 있던 아군 병력이 신속하게 뒤를 받쳐주지 못하면 후퇴하는 북한군 병력에 의해 고립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낙동강 전선의 아군 병력이 북상하는 일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중요했다.
나는 곧장 북진 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전선 후방의 북한군 진지와 상황이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기대 밖이었고, 아울러 커다란 다행이었다. 그들은 일거에 모두 무너진 상태였다. 전선 지휘부만을 중심으로 그대로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는 인상이 역력했다.
한심했던 적진(敵陣)의 풍경
나는 지프로 길을 지나면서 몇 가지 광경을 목격했다. 곳곳에 남아 있던 북한군은 결코 저항을 하지 않았고, 적이 주둔했던 진지와 부대 지휘소에는 중화기와 탄약, 그리고 보급품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황망하게 도망을 쳤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포로로 붙잡힌 북한군은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군 지휘부가 장병들의 사기가 꺾일까 두려워 전황 자체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9월19일 북한군의 한 전방 진지에 들어섰을 때 직접 목격한 일이다. 적의 기관총 사수들은 밀어닥치는 아군에게 순순히 항복을 했다. 아주 고분고분하기까지 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최초 공격 목표였던 월미도를 28분만에 점령하는 등 신속하게 진행돼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다수를 생포했다.
살아 있던 다른 병력은 도망을 쳤는데 그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발목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기관총 사수들의 발목에 쇠사슬을 묶어놓고 도망친 북한 김일성 군대의 진면목(眞面目)이었다.
그들의 공산주의는 적어도 사람을 살리는 주의(主義)와 이념(理念)이 아니었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과 동포라는 것도 결국은 공산당 집권을 전제로 한 허울뿐이었다. 그들은 민족과 동포를 이야기하기에는 매우 이기적이었고, 아울러 잔인하며 무도(無道)했다. 전쟁을 직접 지휘한 내 경험상 그 점은 분명했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사(生死)를 다루고, 남느냐 없어지느냐의 존망(存亡)을 다루는 영역이 바로 군대다. 따라서 군대가 나서서 치르는 전쟁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그런 전쟁에 나서면서 김일성 군대가 보였던 허술함은 그 이후 펼쳐진 전쟁터의 곳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전쟁의 가혹함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펼치면 이룰 줄 알고 전쟁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펼쳐진 상황은 기회가 닿으면 나중에 소개하기로 하자.
/1950년 9월 서울 수복 작전 때 미 해병대가 서울 시내에 진입해 전투를 벌이는 모습./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북진은 그렇게 이어졌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북진 대열 선두에 서서 평양에 처음 입성했다. 그 과정 역시 피와 땀의 노력으로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허망함인지는 모르나 북한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평양 탈환까지의 과정은 미군과 국군이 북한군의 저항을 염려하면서도 벌인 속도전에 가까웠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북한군은 한 번 등을 보인 뒤 그저 도망치기에 바빴다는 얘기다.
김일성이 선두에 섰고, 그 뒤를 북한 왕조 권력의 초반 기틀을 형성했던 북한군 지도부가 따랐다. 수안보에서 호통을 쳐댔던 김일성의 쫓기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증언은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는 물에 빠진 생쥐와도 같았다.
전선 사령관 김책도 김천에서 조치원을 통해 황망하게 도주하기에 바빴다. 그들 중 자신이 거느린 장병들과 물자 또는 화력을 제대로 건지면서 도망친 지휘관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전쟁을 쉽게 생각한 자들이 벌인 지리멸렬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이 땅에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겼다.
43 김일성의 평양 집무실 가보니, 김일성은 달아나고 서류만 어지러이
(7) 김일성에 대하여
어지러웠던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
내가 국군 1사단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할 때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가 그곳에서 황급히 빠져나갔던 정황은 앞서 소개한 내용 그대로다. 나는 평양 도착 전 북한군의 통신선 하나를 잡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내가 직접 북한군 사령부의 통신 교환원과 통화를 하면서 들은 내용이다.
그때 김일성은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타 청천강을 넘은 뒤 자동차를 버리고서는 도보로 산길을 헤쳐 압록강으로 도망쳤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의 공중 폭격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김일성의 주변을 형성했던 수뇌부 모두가 그런 발걸음으로 황망하게 도주했다. 그들은 방송 등을 통해 평양 시민들에게 “우리는 평양을 사수한다”고 공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나는 대동강 철교를 넘어 평양에 입성했다. 그곳으로부터 더 북진을 하기 전에 평양 만수대에 있던 인민위원회의 김일성 집무실에도 들렀다. 그는 짐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것 같았다. 스탈린과 자신의 커다란 초상이 걸려 있던 사무실 여기저기에는 서류 등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도주할 당시의 다급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1950년 10월 국군입성 환호하는 평양 주민들.
김일성의 군대도 제대로 후퇴하지 못했다. 그의 휘하 군대 중 병력과 화력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퇴한 군대는 없었다. 지리멸렬(支離滅裂)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형편없이 무너진 채 그저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 위해 내뺀 부대와 부대장이 대부분이다. 내가 세세한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북한군은 당시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6·25 전쟁 3년여 동안 북한군이 전쟁의 핵심 전력으로 활동했던 기간은 그때까지였다. 김일성 군대가 1950년 10월 이후부터 휴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 7월까지 맡았던 역할은 ‘중공군의 향도(嚮導)’에 불과했다. ‘향도’라는 명칭도 과할 정도다. 그들은 10월 이후 한반도에 참전한 중공군의 길잡이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방호산의 부대만 제대로 후퇴
김일성의 무너진 군대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병력은 방호산(方虎山)이 이끌었던 6사단이었다. 방호산의 6사단은 개전 초기에 내가 임진강에서 이끌었던 국군 1사단의 전면을 치고 들어온 부대였다. 또 다른 인민군 1사단과 함께 기습적으로 개성을 넘어 임진강으로 남하한 뒤 다시 한강을 건너 김포에 밀려든 군대였다.
그들은 이후 충청도를 거쳐 전라남북도를 휩쓸었다. 이어 진주와 마산을 향해 공격을 펼치면서 결국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 방호산은 중국 공산당 계통인 팔로군(八路軍)에서 10여년 간 있으면서 전쟁의 경험을 쌓았던 인물이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양해에 따라 팔로군에 있던 한인(韓人) 병력의 166사단을 이끌고 북한에 들어가 6사단장을 맡았다.
/평양 입성 직전 백선엽 장군의 참모진이 타고 있던 지프가 지뢰를 밟아 뒤집어져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전남북 일대를 휩쓸면서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전쟁의 측면에서 보면 방호산은 그나마 싸움에서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잘 이해했던 사람이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에 밀려 후퇴할 때 거의 유일하게 제 병력을 건사해 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상했다. 그런 공로로 그는 그 직후 군단장으로 승진했다.
중국 팔로군에서 전투 경험을 쌓았던 일부 북한군 지휘관도 사정은 비슷했다. 김일성이나 소련 출신 북한 장성들과 달리 팔로군 출신 지휘관의 ‘후퇴 성적’은 비교적 괜찮았다. 1951년 첫 휴전회담에서 나와 마주쳤던 장평산(張平山)도 제법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했던 지휘관으로 꼽힌다. 그 역시 팔로군 경력자였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마흔에 채 미치지 못한 나이였으나 그는 아주 영리했다. 단지, 그가 아주 빼어난 재주를 선보인 영역은 전쟁이 아니라 정치였다.
그는 자신이 결정한 모든 일의 결과를 농단(壟斷)할 줄 알았다. 농단이란 자그마한 언덕에 올라서서 이쪽과 저쪽의 이해(利害)를 따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행위다. 그는 우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잘 알았다. 책임을 남의 어깨에 교묘히 얹는 재주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가 떠안아야 했던 책임은 여러 가지였다. 전쟁을 무모하게 벌인 점,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무시한 점, 전쟁의 이치를 미리 깨닫지 못한 채 초기 공세를 주도한 점 등이 모두 그렇다.
/평양 시내에 들어선 아군이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쟁 도발 직전에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초기 공세의 개념을 ‘상대의 유생(有生) 역량 소멸’에 두도록 충고했다. ‘유생 역량’은 살아서 전쟁을 펼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초기 공세에서 상대의 저항능력을 없애는 일에 주력하라고 충고한 셈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오로지 ‘땅’에만 관심과 욕심이 있었다. 영토를 재빨리 점령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생각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무모한 집착이었다. 단견(短見)이기도 했으며, 대롱으로 하늘을 살피는 관견(管見)이기도 했다. 아주 작은 규모의 병력을 운용하며 상대의 거점을 잠식해 뺏는 비적(匪賊) 수준의 싸움만을 이해하는 사람의 특징일 수 있다.
권력의 농단에는 뛰어났던 김일성
김일성은 전세 역전의 책임을 남로당 지도자로 있다가 월북해 당시 북한 권력 서열 2위를 차지하고 있던 박헌영(朴憲永)에게 모두 뒤집어 씌웠다. 아군의 북진에 밀려 압록강으로 도망쳤을 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책임문제를 놓고 서로 다투다가 김일성이 박헌영을 향해 재떨이까지 던졌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김일성은 당시 박헌영에게 “전쟁을 일으키자마자 남한 전역에서 남로당과 인민들이 모두 봉기해 우리를 맞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책임을 물었다고 한다. 박헌영도 김일성의 오류를 지적하며 맞섰으나 결국 김일성이 추후에 벌인 정치적 공격으로 ‘미제의 간첩죄’를 덮어쓰고 처형당했다.
/전쟁 직전의 김일성과 박헌영, 허헌(왼쪽부터).
그 뿐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참전이 결정된 뒤 자리에서 쫓겨난 무정(武亭)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와는 팔로군에서 함께 지낸 각별한 사이였다. 무정의 결혼도 펑더화이가 주선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무정을 2군단장 직위에서 해임했다. 중국과 가까운 팔로군 소속, 흔히 연안파(延安派)라고 불리는 북한권력 내 친(親)중국계에 대해 김일성이 벌인 첫 솎아내기 작업이었다. 무정 외에 당정(黨政)의 여러 실력자들도 같은 이유로 쫓겨났다.
김일성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땅’에 집착했다. 서울 점령 후 전선 상황에 진척이 없자 수안보까지 내려가 “작은 길을 이용해 빨리 쳐라”고 다그쳤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아군의 북진에 밀리자 모든 책임을 박헌영과 무정 등에게 전가했다. 자신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을 옮기면서 김일성은 끝내 전쟁 전과 개전 초기에 빚고 말았던 자신의 커다란 실책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 손에 넣을 수 있는 권력에는 매우 민감했던 자가 김일성이다. 아울러 교묘한 술책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져야 할 책임은 가급적 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벗어날 갖가지 아이디어와 배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일성은 살아남았다. 중공군이 참전을 결정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자, 자신의 잘못을 성찰해 인정하지 않는 자, 그러면서 권력으로부터 오는 사리(私利)를 지독히 탐했던 자, 아울러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정도로 간지(奸智)에 뛰어났던 자-. 김일성은 이런 면모를 다 지녔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을 벌였다. 전쟁 자체의 참혹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44 "중공군 참전" 소식 접한 김일성, 술 석 잔 잇따라 원샷
이승만은 김일성을 입에 담지 않았다
(7)김일성에 대하여
이승만은 ‘김일성’을 입에 담지 않았다
60여년 전 신생 대한민국을 이끌고 북한이 일으킨 전쟁의 참화 앞에 서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김일성을 가능한한 언급하지 않았다. 아주 신기할 정도였다. 김일성이라는 이름 자체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고, 설령 북한 사정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능했던 조선말의 풍진 가득한 세상에서 개혁을 외치다 사형수로 갇혀 죽을 뻔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을 위해 힘을 다했으며, 결국 대한민국을 가까스로 건국하는 데 성공했던 그에게 김일성은 도대체 어떻게 비쳤을까.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일 게다. 그 대상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그를 언급함으로써 본인이 불리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감(情感)적인 측면에서 상대를 굳이 거론하기 싫은 경우도 있다. 상대가 인격(人格)이나 품격(品格) 등에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가능하면 그에 관한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다.
이승만 대통령이 김일성의 이름 석 자를 가능한한 입에 올리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후자에 속할 것이다. 소련을 등에 업은 정체불명의 젊은 공산주의자, 급기야 신생 대한민국과 한반도 전역에 전쟁의 참화를 몰고 온 자, 경솔함에 야비함과 잔인함을 지닌 인물….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는 김일성이 이런 정도로 비쳤으리라는 게 내 개인적인 추측이다.
/전쟁 도발 전의 김일성(왼쪽)과 그 아들 정일(가운데), 아내 김정숙.
김일성은 위기에 몰렸을 때 아주 간절하게 제 몸을 굽힐 줄 알았다. 다른 말로 우리는 그런 행위를 ‘비굴(卑屈)’이라고 한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후(戰後)에 연안파 등 잠재적인 정치 맞수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조의 권력을 세웠으니 비굴하게 굽히는 일뿐 아니라 펴는 일에도 능했다고 볼 수 있다. 굽히고 펴는 일, 즉 굴신(屈伸)이 자유로웠던 인물이라는 얘기다.
그가 납작 땅에 엎드려 누군가의 도움을 청한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해방 시기의 북한 권력을 쥐고 있던 소련군정(軍政)의 장군들에게 그랬고, 전쟁을 벌이기 전 소련 지도자 이오지프 스탈린을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향해 북진을 거듭할 때도 그랬다.
비굴과 군림에 다 능했던 사람
1950년 10월에 접어들면서 김일성은 공황(恐慌)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군의 공세가 거세져 평양을 더욱 옥죄고 들어갈 때였다. 김일성 정권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 가능성 때문에 직접적인 개입을 계속 회피하고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지도부도 북한의 이어지는 참전 요청에 고민만 거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49년 3월 북한 수상 김일성(가운데)과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김일성 뒤), 부수상 홍명희박헌영 뒤 검은 옷) 등 북한정부 대표단이 스탈린을 방문하기 위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들어서는 모습.
김일성은 당시 평양에 주재하고 있던 중국의 대사관을 통해, 종국에는 측근 박일우를 베이징에 보내면서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의 참전을 요청하고 나섰다. 그 시기는 아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시점인 1950년 10월1일 전후였다. 특히 김일성이 측근 박일우를 베이징에 급파해 자신의 친필 서한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박일우는 급히 평양을 떠나 10월 2일 베이징의 중국 지도부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에 도착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수집한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박일우에게 전달토록 한 친필서한에서 다급하게 중국의 참전을 요청했다.
“적이 38선을 넘어올 경우 우리의 불리한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면 적의 기도가 성공할 것”이라며 “이 때문에 중국인민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일설에는 박일우가 중국 지도부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는 소문도 나온다. 어쨌든 베이징 중난하이에 급히 특사를 보낸 김일성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진다.
박일우가 베이징에 도착하는 시점을 따져 보면 김일성이 당시 얼마나 급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때 소련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자국의 병력을 파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고, 중공군이 참전할 경우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군 전력 또는 화력 지원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의 의사결정과는 상관없이 먼저 베이징에 박일우를 보냈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끝내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미리 준비시킨 동북지역 변방군(邊防軍)과 다른 병력을 동원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은 이미 소개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려진 중국의 참전 결정은 전보(電報)로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 전해졌다. 이를 다시 김일성에게 직접 통보한 사람은 당시 북한 주재 중국 대사 니즈량(倪志亮)과 참찬 차이청원(柴成文)이었다.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기 직전의 마오쩌둥(오른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그 대목이 생생하게 나온다. 니즈량과 차이청원은 10월8일 마오쩌둥이 보낸 전보를 지참하고 김일성이 머물던 모란봉 밑의 지하 지휘소를 찾아갔다. 그 둘은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아울러 “박일우를 선양(瀋陽)으로 보내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등과 협의하라”는 마오의 지시도 전달했다.
다른 두 성격의 도망(逃亡)
당시 김일성의 나이 서른여덟. 김일성은 그들의 얘기를 들은 뒤 옆에 있던 술을 따라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켰다고 한다. 자세한 그의 발언은 전해지지 않지만,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술부터 찾아 마셨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당시 자신이 후퇴할 곳을 미리 물색했다. 중공군이 참전하는지 마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가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은 압록강 변의 강계였다.김일성의 발길은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중공군 참전 통보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일성은 정확하게 10월13일 평양을 빠져나와 도망쳤다. 그에 앞서 김일성은 10일 밤과 11일 이틀 동안 평양에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끝까지 저항하라”는 방송을 했던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전쟁을 직접 계획하고 집행했던 김일성의 도주였다. 앞서 1950년 6월25일 그로부터 기습 남침을 받았던 대한민국 정부도 며칠 뒤 서울을 빠져 나와 남하했다. 후퇴와 도망이라는 점에서 당시 남북한 지도부가 보인 행동은 같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간 경우와, 김일성이 아군의 북진에 밀려 평양에서 도망친 상황은 다르다.
적에게 사로잡힐 가능성이 있으면 최고 지도부가 우선 그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그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단지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전면 기습을 예상치 못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국군의 평양 탈환 후 현지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이 화동들로부터 꽃을 받고 있는 모습.
이 대통령은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뒤 유엔 안보리의 참전에 관한 결의를 듣고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전화 녹음을 통해 자신의 육성을 서울 시민과 국민 전체에게 내보냈다. 유엔 안보리 결의와 미 해군·공군의 한반도 지역으로의 작전지역 확대에 관해 설명하면서 국민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내용이었다.
지울 수 없는 실책이 있었다면 대통령의 육성 녹음 방송에 이어 공보처가 “정부는 수원으로의 이동을 중지하고 중앙청에서 근무 중”이라는 방송을 거듭 내보냈다는 점이다. 이는 명확한 거짓이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도망치면서 서울 시민을 사지(死地)에 버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것은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드러낸 대표적인 무능과 안일함이라고 해야 한다. 그저 비겁함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일성은 제가 기획하고 벌인 전쟁의 주체였다. 그러면서도 아군에 밀리자 결국 평양의 사수를 촉구하면서 먼저 그곳을 빠져 나갔다. 그가 중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술을 석 잔 연거푸 들이켰다는 것은 한반도의 명운을 건 대참극을 촉발시키면서도 중국이라는 외생 변수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30대의 무모하고 치기(稚氣)어린 모습이 겹쳐진다. 그런 면모에다가 자기가 벌였던 전쟁의 후과(後果)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의 평양 탈주가 보인다.
그런 김일성의 인격과 품격을 당시로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겠으나,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김일성이라는 사람의 여러 면모에서 드러나는 어떤 분위기가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 대통령은 정말 이상하리만큼 김일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입에 담지 않는 일은 한자 단어로 ‘불치(不齒)’다. 이 대통령의 그 리스트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
45 북한군 지휘권을 중공군에 몽땅 넘겨준 김일성, "빨리 공격하라"며 불만 표출
7) 김일성에 대하여
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이해는 깊이가 없다. 전쟁 도발을 하던 상황, 전쟁이 벌어진 뒤 벌였던 단순한 행동, 후퇴에서 쫓기며 갈팡질팡하던 모습이 다 그랬다. 그 말고도 더 있다. 나중에 공개한 중국 측 자료가 그를 잘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앞서 잠시 소개를 했지만, 중공군은 스탈린의 교묘한 부추김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고민 끝 결단에 의해 1950년 10월 한반도에 뛰어든다. 그 뒤 중공군이 벌였던 공세는 앞서 소개한 내용 그대로다. 그 해 10월 말과 11월 초까지 벌인 1차 공세, 11월 말부터 12월 초순까지 벌인 2차 공세에서 중공군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압록강으로 진군하는 국군과 유엔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했고 결국 평양을 회복했으니, 세계 최강의 미군이 주축을 이룬 유엔군을 상대로 초기에 제법 멋진 승리를 거뒀던 셈이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한때 자신을 유린했던 막강한 미군을 물리쳤다는 승리감에 도취했다고 한다. 마오는 멀리 떨어진 베이징(北京)에서 전세(戰勢)를 관망하며 전선의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지속적인 공세를 주문하고 있었다.
/초기 공세에 나선 펑더화이가 전선을 시찰하면서 병사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그 무렵 북한과 중국 사이에서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중공군 참전 뒤 그들이 줄곧 해결을 요구했던 통합 지휘권에 관한 문제였다. 이미 지리멸렬해서 전투력을 상실했던 북한군을 중공군이 통합적으로 지휘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 작전 통합 지휘권에 관한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된 계기는 12월 9일의 ‘조·중(朝中) 연합사령부’ 설립이었다.
북한은 중국의 이 구상에 합의함으로써 북한군 전군의 지휘권을 연합사령부 최고 사령관인 펑더화이에게 넘겨줬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은 제대로 남아 있는 부대가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아군에 밀려 지리멸렬의 상태로 쫓기면서도 목숨을 부지한 많은 북한군 장병, 그리고 새로 징모(徵募)한 병력들은 대개 압록강 너머의 중국 동북지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북한군 병력은 부대 재건(再建)을 위한 교육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나머지 극히 일부 병력이 중공군과 함께 전투에 나섰는데, 당장 이들을 통합적으로 지휘하고 나아가 길게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건제(建制)를 회복한 북한 병력까지 이끌기 위해 중국은 이 통합지휘체제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중공군의 초기 1~2차 공세가 승리로 이어지자 북한도 아무런 군말 없이 북한군 병력의 지휘권을 중국에 넘겨줬던 것이다.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이견
중공군과 북한군을 모두 이끄는 전선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펑더화이다. 그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호(號)를 石穿(석천)으로 적는 사람이다. ‘바위를 뚫는 물방울’이라는 뜻이다. 그는 강렬한 성정(性情)이 돋보이는 중국 후난(湖南)성 출신답게 직선적이면서 할 말은 하고 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중공군 참모장 셰팡(가운데)이 부상한 병사를 위문하는 모습. 중공군은 초기 승세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보급력과 화력으로 사상자가 아주 많았다.
멀리 떨어진 베이징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마오쩌둥, 그리고 1~2차 공세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전선의 혹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펑더화이는 그 무렵 작은 갈등을 빚는다. 이 역시 앞서 잠시 소개했던 내용이다. 마오쩌둥은 일선의 전쟁을 치러본 적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권모(權謀)에는 매우 뛰어나 전쟁의 큰 판을 요령 있게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펑더화이는 권모와 술수(術數)에서는 뒤떨어지지만 크고 작은 전쟁터를 무수하게 누볐던 중국 공산당 군대, 홍군(紅軍)의 핵심 지휘관이었다. 둘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보는 시각에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큰 싸움의 판세를 읽는 데서 둘의 차이를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으나, 마오쩌둥은 공격 스케일을 크게 짰다.
전쟁을 다룬 기록들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한반도 전쟁 개입 초반부터 아군을 공격할 때 ‘대단위 섬멸(殲滅)’을 지시했다. 전력이 약한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전쟁 개입 초반에 “한국군 몇 개 사단을 없애라”는 지시였다. 그에 비해 펑더화이는 훨씬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국군 몇 개 사단을 한꺼번에 없애는 건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대신 펑더화이는 국군의 연대 단위를 공격해 상대의 피해를 점차 확산시키려는 전략으로 나왔다.
/아군의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장악한 북한군이 독립문에 인공기를 붙이는 모습.
결과적으로 볼 때, 마오쩌둥은 큰 전쟁의 흐름을 주도했으나 초반 공세에서 그가 구상한 ‘대단위 섬멸’은 불가능했다. 중공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화력과 보급에서 열세인데다 충분한 공군력을 갖추지 못했다. 마오쩌둥이 개입 초반의 전술을 그렇게 상정한데는 까닭이 있다.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정부와의 국공(國共) 내전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운이 좋게도, 당시 부패와 무능에 절어 있던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 단 며칠 만에 국민당 군대 20개 사단을 무너뜨린 경험이 있다. 중공군이 잘 싸운 측면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국민당 군대의 무능 때문이라고 봐야 옳다.
마오쩌둥에 비해 펑더화이는 전선 사령관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한 편이었다. 당장에는 승리를 거뒀으나 그 안에 숨어있는 전쟁의 진짜 요소(要素)를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습과 매복, 우회 등의 전술에 익숙하지 않아 미군이 전선에서 밀리기는 했으나 그들이 지닌 고도의 현대화한 역량을 봤던 것이다. 1~2차 공세에서 드러난 중공군의 피해 또한 막심했다.
우세를 점했던 병력으로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구사하긴 했으나 뒤떨어진 무기체계, 낙후한 보급 능력 등으로 병력의 사상(死傷)과 이탈이 혹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차 공세를 마친 뒤 펑더화이의 고민은 매우 깊어갔다. 12월 초 공세 후 그는 급히 베이징에 ‘공세 지속’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란민의 행렬.
마오쩌둥은 노련한 인물이었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보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승세(勝勢)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인 공세를 주문한다. 공산 진영의 사령탑이었던 소련의 이오지프 스탈린도 공세 지속에 손을 들어줬다.
펑더화이에게 불만 품은 김일성
그렇게 해서 벌어진 게 중공군의 3차 공세였다. 우리는 당시 서울을 내주고 북위 37도인 평택과 안성으로 밀렸다. ‘1.4 후퇴’였다. 그러나 중국이 나중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펑더화이는 서울 점령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의미 없는 점령에 불과하며, 결국 그 너머의 남쪽으로 진격할 경우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미군의 ‘허리 자르기’에 또 당할 수 있다고 봤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마구 밀어붙이면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고 본 마오쩌둥에 비하자면 그렇다. 마오는 그나마 베이징이라는 먼 곳에 떨어져 있으면서 전쟁을 보고 있던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전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그 안에 담긴 여러 요소를 관찰하지 못했던 김일성이다.
그는 1950년 6월25일 전쟁을 도발한 뒤 한반도에서 펼쳐진 싸움의 이치를 그때까지도 잘 알아채지 못했다. 눈에 드러나는 세(勢)가 있으면 그것이 고정적이라고 봤으며, 그에 따라 맞춰 행동하면 그만이라고 봤던 것이다. 내가 김일성을 언급하면서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전쟁 직전 군복을 입고 연설하는 김일성.
싸우면 싸울수록 고민이 깊어지던 펑더화이였다. 아군이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37도 선으로 후퇴했던 1951년 1월8일 무렵이다. 그냥 그대로 밀어 붙이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봤던 김일성이 펑더화이를 찾아갔다고 했다. 펑더화이는 임진강 근처의 군자리에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의 총사령부였다. 김일성은 평양에서 직접 그곳으로 갔다고 했다.
김일성은 평양을 떠나면서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중국대사관의 차이청원(柴成文) 참찬에게 잔뜩 불평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도대체 왜 망설이고 있는 것이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펑더화이를 향한 불만이었다. 당시 펑더화이는 53세였고 김일성은 39세였다. 펑더화이는 때마침 참모로부터 전선의 피해 상황을 듣고 난 직후였다.
46 전쟁을 알았던 펑더화이와 전쟁을 몰랐던 김일성…둘의 충돌
"적을 많이 죽여야 한다" vs. "땅부터 많이 빼앗자"
(7) 김일성에 대하여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김일성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어디까지나 군인 신분이었고, 김일성이 벌였으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전쟁을 돕기 위해 한반도에 뛰어들었던 중공군의 최고 책임자였다. 따라서 그가 김일성의 여러 가지 면모를 다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보았다 하더라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영역에서는 그가 김일성을 평할 수 있다. 대단히 많은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한반도에 들어와 북한군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입장이었으니 그렇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벌이는 게 전쟁이다. 병사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긴박한 전시에는 서로 간에 양보라는 것을 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펑더화이는 김일성의 여러 면모를 파악해가면서 때로 불만을 표출하거나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두 사람의 알력과 갈등이 크게 두드러졌던 경우는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였다. 서울을 뺏은 중공군의 공세는 제3차 공세였다. 앞 회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당시의 중공군은 겉으로 서울을 점령하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골병을 앓고 있었다.
/6·25 전쟁 중의 펑더화이와 김일성(오른쪽).
병력 손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보급력이 떨어져 전선의 장병들은 기진맥진할 정도로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자신의 상관이자 막후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베이징(北京)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급히 보고한 뒤 전 부대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펑더화이 본인은 중공군이 3차 공세에 나서는 것에도 상당한 불만을 지녔다. 그는 2차 공세 뒤 마오쩌둥에게 병력 운용상의 여러 문제점을 들어 3차 공세를 늦추자고 건의했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건의가 현장의 문제점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3차 공세에 나서도록 지시했다. 자국 군대가 38선을 넘는 일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 드러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당시 펑더화이의 판단이 옳았다. 현장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으로 그는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마오는 정치적 판단이 앞섰다. 마오는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중시한 반면 펑더화이는 실제 전황에 대처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1.4후퇴 때 중공군의 서울 점령을 피해 화차에 오른 피란민들 모습.
상징성만 앞섰던 중공군 서울 점령
당시 중공군의 서울 점령, 우리 입장에서의 ‘1.4 후퇴’는 사실 상징성이 돋보였다. 우리에겐 수도를 다시 빼앗겼다는 상실감에 이어 수많은 사람들의 피란 파동이 뒤따랐다. 그렇다고 중공군은 승리 분위기를 만끽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도 뭔가 석연찮은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국군과 유엔군의 신속한 후퇴 때문이었다. 펑더화이는 상대의 병력을 충분히 없애야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리지웨이 신임 미8군 사령관이 부임한 뒤 전쟁의 양상은 중공군 1~2차 공세와 달라졌다. 리지웨이는 신속한 판단력으로 후퇴 후 강력한 반격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이 3차 공세를 벌이자 신속하게 남쪽으로 물러나면서 병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펑더화이는 그 점이 못내 불안했을 것이다. 등을 떼밀려 3차 공세에 나서기는 했으나 실익이 별로 없는 공격이었다. 그는 결국 전군에 추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필수 병력 외에는 모두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는 약 3개월 정도를 쉬면서 병력과 화력을 보충해야 한다고 봤다.
/중공군은 초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951년에 접어들면서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사진은 중공군 위문공연단의 공연 모습.
마오쩌둥 또한 그런 펑더화이의 고충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서울 점령 뒤 전군에 내려진 휴식 명령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강력한 불만을 품은 사람은 오히려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그에 앞서 1월3일 펑더화이로부터 “공세로 얻은 게 별로 없다. 적이 신속하게 후퇴했기 때문이다. 포로 3000여 명이 전부다. 서울과 인천, 수원, 이천을 잇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이제 휴식과 보충이 정말 필요하다”는 내용의 전황보고를 받았다.
이런 내용은 중국 자료에 제법 상세하게 나온다. 중국 정부가 펴낸 것은 아니지만, 선즈화(沈志華)라는 중국학자가 오랜 기간 공을 들여 발굴한 자료에는 이런 곡절들이 구체적으로 들어있다. 그는 정부의 공식 문건, 보고자료, 개인 회고록을 모두 수집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연구 결과는 매우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은 ‘노동신문’ 등을 통해 중공군을 압박하는 조치를 취한다. 당시 외무상을 맡고 있던 박헌영과 평양 주재 소련 대사의 명의로 “적극적인 추격전이 필요” “결정적인 전투를 벌여야 한다” 등의 내용을 발표토록 한다. 펑더화이가 주장하고 있는 ‘몇 개월간의 휴식과 보충’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의도였다.
/병력은 많았으나 화력과 장비, 보급의 열세를 극복치 못한 중공군은 많은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미군이 중공군 시신 매장 현장을 바라보는 모습.
그러나 펑더화이는 그런 김일성의 의도는 무시한다. 그리고 1월8일에는 전군에 휴식과 보충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김일성은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펑더화이가 머물고 있던 평안남도 성천군 군자리의 연합사령부로 급히 찾아간 것이다.
이 군자리라는 곳은 중공군 참전 병사의 기록으로 보면 조그만 광산이 있는 곳이었다. 미군의 가공할 공습(空襲)을 피하기 위해 중공군은 참전 초기부터 광산이 있는 곳에 사령부 자리를 만들었다. 군자리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미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산속에 들어있는 곳이다.
땅에만 관심 쏟았던 김일성
김일성은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의 차이청원(柴成文) 참찬을 대동하고 왔다. 1월 10일 밤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처음엔 점잖게 펼쳐졌다. 펑더화이는 중공군이 맞닥뜨린 상황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전군에 휴식과 보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토를 달기 시작했다. “우선은 휴식과 보충에 동의한다”면서 말을 꺼낸 김일성은 “그러나 일부 병력만 후방에 남겨두고 1개월 정도 쉬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즈화 교수의 자료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자세히 나온다. 그 부분을 여기에 옮겨본다. 구체적인 표현은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논지다.
펑더화이(이하 펑):“지금 출동해봐야 적군에게 지역 일부를 포기하게 하는 정도의 효과만 거둘 수 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적군을 부산 등으로 몰아가면 분할해서 섬멸하는 작전을 펼칠 수 없다.”
김일성(이하 김):“적을 섬멸할 수 없다면 땅이라도 늘려야 하지 않나?”
펑:“땅 늘리기보다는 적군을 없애는 게 먼저다. 적군을 없애야 땅을 얻는 것 아니냐?”
김:“당장은 땅을 더 점령하고 인구도 늘려야 한다. 정전 뒤의 선거에도 유리하다.”
펑:“그런 걸 지금 따질 때가 아니다. 당장의 핵심 목표는 승리를 많이 거두면서 적군을 없애는 일이다.”
두 사람은 전쟁을 보는 시각에 많은 차이가 있다. 김일성이 언급한 ‘정전 뒤의 선거’는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점령지 확대와 인구 확보에 혈안이었다. 전쟁의 성격을 잘 모른다는 방증이다.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으나 정작 뭍에 올라온 미군의 성격을 전혀 헤아릴 만한 안목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중의 백선엽 장군(왼쪽)과 신성모 국방장관.
그에 비해 펑더화이는 미군의 의도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쟁이 주는 참혹함을 잘 이해해 늘 위기에 대비하려는 신중함도 보인다. 나중에 드러난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신임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37도 선으로 신속하게 물러나 강력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은 타협할 수 없었다. 땅과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 신속하게 공격을 펼치자며 계속 우기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보내온 전문을 꺼내 보였다고 한다. 휴식과 보충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내가 말한 내용도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다. 노동당 정치국의 전체 의견이다”라고 반박하고는 박헌영에게 전화를 걸어 “급히 오라”고 했다.
47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 일으켰나"…中 펑더화이(팽덕회), 김일성 질타
(7) 김일성에 대하여
중국의 6·25전쟁 연구 권위자인 선즈화(沈志華) 교수가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박헌영을 평남 성천군 군자리에 있던 펑더화이(彭德懷)의 사령부에 불러들여 이튿날인 1월 11일 회의를 다시 이어갔다. 이 자리에서는 전날의 다툼이 더 번지고 말았다. 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11일 황혼 무렵에 다시 열린 펑더화이·김일성·박헌영의 3자 회동은 초반부터 분위기가 냉랭했다. 박헌영은 특히 소련 측이 제공한 정보를 들어 “미군이 곧 철수할 것”이라며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추격을 하지 않으면 미군이 철수 계획을 철회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펼쳤다. 미군에게 한반도에서 철군할 핑계거리라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급히 추격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미군이 철군할 요량이라면 우리가 추격하지 않아도 물러날 것”이라며 전날과 같은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다. 박헌영은 남로당 총책답게 공산주의자의 논리로 맞섰다고 한다. 그는 “추격을 펼쳐야 미국의 자산계급 내부의 모순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펑은 “미군 몇 개 사단이라도 없애고 나서야 그런 미국의 모순을 심화할 수 있는 법”이라며 단순하게 땅을 확보하는 전략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맞섰다. 아울러 펑은 “지금은 우리 군대가 휴식과 보충을 취해야만 전장에 나설 수 있다”며 다시 선을 긋고 나섰다.
/펑더화이와 김일성.
그러자 김일성이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는 “당장에 3개 군(軍)을 진격시켜야 한다. 다른 부대는 한 달 정도 쉬게 한 다음 공격에 나서도록 하자”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면서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졌다는 것이다. 펑은 앞서 소개한대로 중국 후난(湖南)성 출신이다. 지역적 특성으로 볼 때 그곳 출신 중에는 대체로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후방만 방어하겠다”
결국 펑더화이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냈던 모양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을 혹독하게 몰아세웠다고 한다. 선즈화 교수는 펑더화이가 김일성 등에게 퍼부은 발언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대개 이렇다.
“당신들의 관점은 틀렸다. 모두 기대와 바람에서 출발하고 있다. 당신들은 예전에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최소한 미국이 개입한다면 어쩔 것이냐를 전혀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미군이 반드시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역시 미군이 물러나지 않을 경우에는 어쩔 것이냐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전쟁에서 빨리 승리를 거두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아 결국 전쟁을 연장시켜 놓지 않았느냐. 당신들은 전쟁을 요행(僥倖)으로만 보고 있다. 국민들을 가지고 도박을 벌이는 일과 같은데, 이러면 앞으로의 전쟁을 또 실패로 몰고 갈 공산이 크다. 우리 군대는 앞으로 두 달을 휴식하며 보충할 예정이다. 하루도 줄일 수 없다. 그 기간이 3개월에 이를지도 모른다. 상당한 수준의 준비가 없으면 우리는 1개 사단도 남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단코 적을 우습게 보는(輕敵) 당신들의 착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 펑더화이가 직무에 충실치 않는다고 하면 심판해라, 그리고 나를 죽여라!”
/박헌영(1900~1955)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이어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자신에게 보낸 전문을 꺼내 들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그의 발언 내용이다. “인천으로부터 양양 선 이북까지 전체 해안 경계와 후방 교통 유지는 우리 지원군이 담당하겠다. (북한) 인민군 4개 군단 12만 병력은 이미 두 달 동안 휴식을 했으니 당신들 지휘로 돌리겠다. 미군이 정말 당신들 상상처럼 한반도에서 철군한다면 나는 당연히 조선의 해방을 축하할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물러나지 않으면 지원군(중공군)은 우리 스스로가 미리 정한 계획에 따라 작전을 펼칠 것이다.”
펑더화이와 김일성, 그리고 박헌영까지 참석한 면담에서 나왔던 대화 내용들이다. 펑더화이는 매우 화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명색이 그래도 북한의 정부 수반인데, 아무리 지원군 총사령관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김을 몰아붙였다는 점이 신기하다 싶을 정도다. 전선의 상황 대문에 그랬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펑더화이의 고민은 매우 깊어지고 있었다. 상징적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강력한 미군의 공격력을 직접 체험한 것도 한 원인이 됐으리라. 그는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사정 또한 훤히 꿰고 있었다. 나아가 당시의 전체적인 정황으로 볼 때 미군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또 자신이 이끄는 장병들의 희생이 점차 늘어가고 보급력과 화력에서 뚜렷한 열세가 드러났음에도 당장의 개선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빨리 공격하면 이긴다”고 철부지처럼 우기는 김일성에게 화가 치밀 법도 하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이유로 펑더화이가 북한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에게 “요행에만 기댄다”며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중공군 장병들을 위한 동굴 도서관.
1월 11일의 펑더화이와 김일성, 박헌영의 회동은 우직하면서 불같은 성격을 지닌 펑더화이의 압승이었다. 김일성은 더 이상 펑더화이를 설득할 수 없었다. “전쟁의 ‘전’자라도 좀 알고 다녀라”는 식의 면박까지 하는 펑더화이에게 맞설 수 있을 만큼 김일성은 전쟁을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작전을 펼칠 병력과 화력에 관한 지휘권은 엄연히 펑더화이의 수중에 있었다.
여기다 국제 공산진영의 최고 지도자인 이오지프 스탈린이 펑에게 큰 힘을 실어줬다. 그는 전문을 통해 “아무런 의심도 할 수 없을 만큼 진리는 펑더화이 동지의 손에 있다”며 펑이 1~2차 공세에서 미군을 격퇴한 공로를 칭찬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동향에 민감했던 마오쩌둥 또한 그런 내용의 전문을 김일성에게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스탈린을 제외한 소련 고위급은 사실 김일성을 도왔던 듯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군 사령관 테렌티 슈티코프(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는 김일성의 편을 들어 “더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모양이다. 아울러 펑더화이의 진격 정지에 관한 조치를 스탈린에게 보고도 했다. 그 말고 베이징주재 소련대사도 중국 군부를 찾아와 “진격 중지 명령이 합당치 않다”며 김일성의 입장을 지원했다.
/전선의 중공군을 위문하러 온 중국 전통 오페라 최고 스타인 메이란팡(梅蘭芳)의 공연 모습.
펑의 뿌리 깊은 불신
그럼에도 펑더화이는 김일성의 주장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말았다. 전사(戰史)의 여러 구석을 훑다 보면 펑더화이의 김일성에 대한 시각은 일찌감치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펑더화이는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면서 북한 수뇌부가 어떤 실력을 바탕으로 이 참혹한 전쟁을 벌였는지를 두고 깊이 회의(懷疑)에 젖었던 흔적이 나타난다.
중공군이 한반도 전쟁에 뛰어든 초기에 평양과 베이징을 오가면서 분주하게 양국 수뇌부의 의사를 소통시킨 사람이 중국의 초대 평양 대사관 참찬 차이청원(柴成文)이다. 나는 전후에 그와 두 차례 만났다. 군인 출신인 그는 당시 김일성을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내게 “당시 가장 무서웠던 것은 미군의 공습”이라고 회고했다. 자신의 아내가 개성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직접 경험한 미군의 공습이 두려움 그 자체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각종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전쟁 전과 그 이후의 중공군 참전 과정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부상병 수송하는 국군.
따라서 그의 관찰과 증언은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다. 김일성이 아군에 밀려 압록강 부근으로 도망칠 때 차이청원도 함께 있었다. 아울러 김일성이 간절하게 요청한 중공군 파병도 그를 통해 베이징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쟁 자체를 단순하게 봤던 듯하다.
그는 김일성이 중공군 참전을 요청하면서 “그냥 군대를 보내줘서 전선을 막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고 했다. 자신의 요청에 따라 중공군이 오면 전선에 나가 미군의 공세를 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몇 십만명의 ‘대군’을 보낸다는 점을 알고 당황했다고 한다. 전면전을 작은 국지전 정도로 생각했던 김일성의 한계가 엿보인다.
48 "김일성 군대는 지휘력이 너무 유치해"…
(7) 김일성에 대하여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었던 시점은 1950년 10월 하순이었다.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파견하기까지 베이징(北京)의 마오쩌둥(毛澤東)이 심사숙고한 흔적은 역력하다. 아주 신중하게 참전 문제를 고민했다는 점은 앞에 소개한 그대로다. 그 상황은 국방부의 <6·25 전쟁사>가 생생하게 그려냈다.
외국의 군대가 내 땅에 들어오는 일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나라의 주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외국의 군대다. 이념적으로 동맹 또는 그에 준하는 관계가 있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그 군대가 자국의 영토에 들어올 때는 민감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1950년 10월의 김일성은 그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스스로 다급하고 간절하게 중공군의 참전을 요청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앞 회의 말미에서 잠시 소개했듯이 김일성은 그 점을 충분히 고려치 않은 듯하다. 그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서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해주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을 했던 정황이 드러난다.
/중공군이 진격하며 공세를 펼치는 모습.
중공군은 당초 김일성이 예상한 규모보다 더 거대한 병력으로 이 땅에 들어섰던 모양이다. 당연히 그 뒤를 따라 생기는 문제가 지휘권에 관한 사안이다. 몇 차례 설명했듯이, 당시의 김일성 군대는 아주 철저하게 무너져 있었다. 개전 초기에 파죽지세의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들어왔으나, 그 후에 벌어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아군의 북진으로 위기에 몰려 있었다.
급히 바람처럼 왔다가 또 그런 바람처럼 휙 사라지는 군대의 모습이었다. 질기고 모진 싸움의 속성을 아는 군대라기보다 ‘한반도 적화(赤化)’에 혈안인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바람처럼 그저 오락가락했던 군대였다. 최신예 소련제 T-34 전차 등 고급 무기와 소총으로 무장은 했지만 전쟁을 충분히 이해하며 전장을 내달린 군대는 아니었다. 특히 그 지휘부에게서는 막연한 야욕 말고는 전쟁의 숙련성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일성은 그래도 오기(傲氣)가 남아 있었던 듯하다. 처절하게 제 부대가 무너졌음에도 그는 중공군의 개입 뒤 군사 지휘권을 두고 좀체 양보할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워낙 다급했던 10월 말의 상황은 중공군의 기습과 매복 등 전술로 인해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차이청원.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서서히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누가 북한군과 중공군을 함께 지휘하느냐’는 사안이었다. 중국 지도부와 김일성 사이의 의견소통을 중계하던 중국의 북한 주재 대사관 참찬 차이청원(柴成文)의 목격담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김일성이 중공군의 참전 자체를 단순하게 생각했음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김일성은 한반도로 뛰어든 중공군을 자신이 지휘할 수 있다고 봤을 가능성이 있다.
통합지휘권을 둘러싼 갈등
중공군을 지휘했던 펑더화이의 총사령부는 처음 평북의 대유동에 있었다. 이곳에서 10월21일 펑더화이와 김일성이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둘은 북한군과 중공군 통합 지휘권에 관해서는 의견을 나누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일성에게는 건제(建制)를 유지한 부대가 거의 없었다. 아군의 북진에 밀려 쫓겨 흩어진 병력은 대부분 중국의 지린(吉林)성 등지로 넘어가 재편(再編) 과정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중공군 참전으로 벌어진 공산군의 1~2차 공세는 모두 중국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차 공세가 끝난 뒤인 11월에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펑더화이와 김일성 사이에서 민감한 현안으로 등장한다. 그에 앞서 김일성은 중공군 최고 사령부를 자신이 있는 곳에 함께 두자고 요청하면서 통합 지휘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는 뜻을 여러 번 내비쳤다고 한다.
/6.25 참전 초 촬영한 중공군 수뇌부 모습. 오른쪽 세번째가 김일성과 통합지휘권 경쟁을 벌였던 펑더화이.
그런 김일성의 의도를 중공군 최고 사령관 펑더화이는 어떻게 봤을까. 역시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선즈화(沈志華) 교수를 인용키로 하자. 그는 펑더화이가 압록강을 넘은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공산당 중앙의 군사위원회에 이런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고 했다.
“북한의 징병 문제가 아주 이상하다. 16~45세의 남성들을 모두 징병하고 있다…대부분은 밥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있다.” “군사적인 지도 역량이 아주 유치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10월 19일 (유엔군에 밀려) 평양을 내줄 때 부하 장병들에게 사수(死守) 명령을 내려 3만명 정도의 병력이 빠져 나오지 못했다.”
차이청원은 당시 펑더화이가 자신에게 “나는 중국과 조선(북한)의 인민, 그리고 수십만 명의 장병들에게 책임을 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펑더화이 역시 ‘통합 지휘권’에 대해 어떤 우려를 담아 김일성을 견제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 중앙 군사위원회에 보낸 펑더화이의 전문에 들어있는 “군사적 지도 역량이 유치하다”는 표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시의 김일성.
평양을 사수하라고 부하 장병들에게 지시해 놓고 자신들은 허겁지겁 평양을 빠져 나온 점에 주목했던 것이다. 아울러 전체적으로 북한 지도부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도 느껴진다. 일거에 바람처럼 몰려갔다가, 일거에 다시 바람처럼 몰려 나가는 북한군의 전쟁 방식에 대한 강한 불만으로도 보인다.
욕심만 앞섰던 김일성
그런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지휘 아래에 놓이는 상황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달갑기는커녕 전술과 전략의 부재로 갈팡질팡하면서 무모한 전쟁을 벌였던 김일성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김일성에게 통합 지휘권을 넘겨주는 일은 펑더화이에게는 일종의 악몽이랄 수밖에 없었을 테다.
김일성은 그럼에도 여러 차례 통합 지휘권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다. 주로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사령부를 설치하라”는 권유를 통해서다. 그러나 김일성을 결코 좋은 눈길로 보고 있지 않았던 펑더화이는 그런 제의에 응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으로 무게를 더해 간다. 그러나 ‘대세’는 김일성이 손을 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김일성이 통합 지휘권에 연연하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전쟁 자체에 대한 이해는 없더라도 권력에는 매우 민감하다는 점이 그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두고 소련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의중을 잘 읽지 못했으며, 아울러 중국의 공식적인 언급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이 결국 김일성으로 하여금 통합 지휘권 장악에 대해 환상을 갖게 했을 수도 있다는 게 선즈화 교수의 분석이다.
/6.25 참전 직전에 담소를 나누는 마오쩌둥(왼쪽)과 마오안잉 부자. 마오안잉은 한반도 참전 직후 대유동에 있던 사령부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중국은 참전 뒤 김일성으로부터 “이 사실을 대내외에 공표해 사기를 진작토록 하게 허용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중국은 대외적으로 이 사실을 공표하기를 꺼려했다. 대신 중국의 인민들이 자원해서 조선(북한)을 도우러 나섰다면서 중공군을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으로 표현했다.
김일성의 요구를 받은 중국 지도부는 그 문구도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조선 인민군 총지휘부의 지휘에 따라 참가해 작전을 벌였다”로 한정했다. 김일성은 이 점을 오해했던 모양이다. ‘조선 인민군 총지휘부의 지휘에 따라…’라는 표현 말이다. 그러나 이는 중국이 한반도에 개입하는 모양새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동원한 레토릭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이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일성의 앞에는 고집 세고 소신 강한 펑더화이가 버티고 있었다.
1차 공세를 끝낸 뒤인 11월 15일 김일성은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를 대동한 채 대유동에 머물고 있던 펑더화이의 중공군 총사령부를 방문했다고 한다. 중국 동북 지방을 책임지고 있던 가오강(高崗)이라는 인물도 선양(瀋陽)에서 급히 대유동으로 왔다. 가오강은 협소하지만 산악이 매우 발달한 한반도에서 작전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통합 지휘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슈티코프 또한 “북한군은 우수한 소련의 무기로 무장했으면서도 결국 이런 지경에까지 몰리지 않았느냐”며 “중공군은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1차 공세에서 미군을 물리쳤다”고 말했다. 사실상 모스크바에 있던 스탈린의 의중을 담아 중국의 통합 지휘에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단지 현재 북한군의 사정만을 설명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렇게 집요한 사람이었다. 펑더화이와의 관계는 그러면서 점점 멀어졌다.
49 "그 사람은 몇백명 데리고 싸움한 사람 아닌가?"…
7) 김일성에 대하여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와 김일성 사이에 벌어진 틈이 당시 전쟁터에 섰던 내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중국에서 나온 자료 등을 보면서 그때 벌어진 둘 사이의 갈등과 마찰이 심상치 않았다는 점을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군의 입장에서 그 어느 누구도 적군의 지도부에서 일기 시작한 그런 문제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흐름에서 적군, 특히 중공군 주도의 공산군 진영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관찰한 사람은 매슈 리지웨이였다. 그는 앞서 소개한 대로 교통사고로 사망한 월턴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국 전선의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한 뒤 그때까지 벌어진 중공군 공세의 몇 가지 특징을 재빨리 파악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중공군의 공세가 1주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보급에서 우선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낸 중공군의 정체를 정확히 본 셈이었다. 아울러 화력도 크게 달리는 중공군의 문제점도 명확히 봤다. 그래서 그는 아군을 안성의 북위 37도선으로 신속히 후퇴시킨 뒤 조직력을 재정비하면서 반격의 칼을 벼리고 있었다.
/랄프 몽클라르 장군.
역시 미리 소개한 내용이지만, 경기도 지평리에서 벌어진 미군 2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몽클라르 대대가 중공군 몇 개 사단을 상대로 싸워 이긴 전투는 당시 중공군 공세를 크게 꺾어 전체 국면을 전환하는 싸움이었다. 중공군은 그 전투로 인해 사실 전의(戰意)가 크게 꺾이고 말았다. 그로써 아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서울 탈환 작전에는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도 선봉에 섰다. 우리는 수원을 거쳐 영등포와 흑석동 방면으로 진출한 뒤 강을 넘어 서울에 입성할 계획이었다. 그때 1사단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 화교(華僑)들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이들을 서울로 잠입시켜 도심에 중공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951년 3월14일 우리는 흑석동에서 서울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강을 미리 넘었던 화교 정보원들이 보내온 소식은 놀라웠다. 중공군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정보에 따라 미군이 보내준 상륙주정(上陸舟艇)을 타고 마포나루 쪽으로 병력을 올렸다. 화교 정보원들이 보내준 정보 그대로였다. 서울은 텅 비어 있었다. 중공군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급히 귀국한 펑더화이
펑더화이는 당초에 3차 공세를 벌여 서울을 점령하는 일이 군사적으로는 전혀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울러 자신이 이끄는 대병력의 머리 위로 곧 닥칠 리지웨이의 칼날이 얼마나 가혹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했다. 따라서 서울을 점령한 뒤에도 펑더화이는 매우 전전긍긍했다고 알려졌다.
/펑더화이(왼쪽)와 마오쩌둥.
일부 자료에 보면 펑더화이는 중공군의 3차 공세에 이은 서울 점령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일에 아주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별로 의미도 없는 일을 과대하게 외부에 알릴 경우 군사적 행동에 불필요한 제약을 가져온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펑더화이의 우려는 합당했다. 그는 군사(軍事)의 흐름을 잘 알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역량으로 미군을 제압한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초기 공세에서 깨달은 사람이었다. 전술적 우세를 통해 초반의 승리를 일궜으나, 그는 전쟁에서 거둔 잠깐의 승리 뒤에 가려진 싸움의 실(實)에 주목해야 했던 입장이었다. 허상에 취하다가 결국 전선 사령관으로서 그가 맞아야 할 현실은 매우 혹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펑더화이는 2월 말에 급히 베이징(北京)으로 귀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막후에서 모든 사안을 지휘하는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전선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가 전선 상황을 뒤로 두고 비행기를 탄 시점은 1951년 2월21일이라고 했다.
/소련의 지원 아래 중국은 군장비 현대화에 절치부심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공군 기갑부대 사열 장면.
우선 지금의 압록강 너머 단둥(丹東)에 도착한 펑더화이는 비행기 편으로 선양(瀋陽)을 경유해 베이징으로 곧장 날아갔다.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뒤에 가라는 주위의 권고를 모두 뿌리쳤다고 했다. 전선의 상황을 다른 누구보다도 암울하게 보던 그의 심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 지도부가 머무는 곳인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로 곧장 찾아간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교외의 한적한 곳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고 했다. 펑더화이의 성정(性情)은 그랬다.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쏟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는 마오쩌둥이 머무는 교외의 별장으로 직접 향했다고 한다.
경호원들이 펑더화이를 당연히 제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곧장 마오쩌둥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방문을 직접 열고 들어갔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같은 고향인 후난(湖南)성 출신으로 대장정(大長征)과 국민당과의 내전 등을 함께 겪은 사이라는 점을 펑은 믿었던 모양이다.
/마오쩌둥은 1951년 한반도에 전 부대를 차례대로 투입해 미군과 전투를 치러 경험을 쌓도록 하는 구상에 매달렸다. 전황을 보고하고 있는 마오의 모습.
마오쩌둥은 장기전 구상
방문을 불쑥 열고 들어오는 펑더화이의 출현에 마오쩌둥도 놀랐을 법하다. 관련 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바짝 야위었을 뿐 아니라 피로와 고심으로 눈까지 빨개진 펑더화이를 보고서는 먼저 식사를 한 뒤에야 대화를 나누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둘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펑더화이는 그 전에 수차례 전문보고를 통해 중공군 보급의 문제와 사상자 및 이탈자 증가 등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3차 공세가 벌어졌고, 서울 점령은 이뤘으나 곧 미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해 커다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이런 속사정을 마오쩌둥에게 직접 알린 뒤 당시까지 나타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를 스케일이 크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인명(人命)의 희생에 둔감하다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쨌든 마오쩌둥은 한반도 전쟁의 장기화를 내다보면서 자국의 군대를 현대전에 적응하게끔 하려는 구상을 펑에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죈쪽)과 마오쩌둥.
자료에 따르면 이는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직보를 하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인 1951년 2월7일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이미 결정한 내용이었다. 중국 내에서 훈련 중인 보병과 소련으로부터 장비를 받아 교육 중인 포병, 제한적이나마 역시 소련의 지원을 받아 훈련 중인 공군 등을 축차적으로 한반도 전선에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마오쩌둥은 한반도 전쟁을 장기전으로 보고 자국의 병력을 나름대로 훈련시킨 뒤 전선의 병력과 교체하면서 전체 병력의 대부분을 한반도에 보내 미군과 싸워보도록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점에서 펑더화이의 직접 보고와 작전 계획 변경은 수포로 돌아간 듯하다. 별로 소득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서울을 내주고 다시 38선 이북으로 물러난다는 점에 대해서는 양해가 이뤄졌던 듯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평리에서 당시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패배를 맞이했고, 아울러 계절도 좋지 않았다. 곧 봄이었다. 겨울 내내 얼었던 땅이 풀리는 초봄에는 병력의 이동이 쉽지 않았다. 무거운 장비를 끌고다니기 힘들 뿐 아니라, 병력의 이동에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었다. 펑더화이는 결국 서울을 쉽게 아군에게 내주기로 했던 모양이다.
/백선엽 장군과 미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
펑더화이가 베이징에 가기 한 달 전인 1951년 1월25일 평남 성천군 군자리에 있던 중공군 사령부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가 모두 참석하는 합동회의가 있었다. 향후의 양측 협력문제 등 전쟁 전반을 다루는 자리였다. 중공군 측이 자신들의 작전 계획을 두루 설명하고, 북한 측은 보급과 철도 및 비행장 보수에 관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등을 설명했다고 한다.
한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5일 동안 열린 이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김일성을 겨냥해 심상찮은 발언을 했다고 한다. 펑은 “일본군과 싸우던 시기에 나는 팔로군의 부사령관으로 병력 3만2000명을 데리고 싸움에 임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 시기에 부대를 이끌었다고 하지만 병력이 350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내용의 발언이었다.
이 내용이 정확히 맞는 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이라면 펑더화이는 군사 분야에서 김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자신과 격이 다른 사람으로 치부했으며, 따라서 그의 군사적 판단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런 발언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은 전쟁 초반부터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거리는 전쟁을 수행해가면서 점점 더 벌어졌다.
50 김일성, 펑더화이 낙마에 쾌재,
7) 김일성에 대하여
전쟁을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지휘관도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취향을 보인다. 내가 60여년 전 전선을 두고 마주했던 펑더화이라는 인물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오랜 기간 다양한 전선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싸움을 몸소 겪었던 사람답게 그는 전쟁이 가져다주는 참혹함을 잘 알았던 듯하다.
펑더화이는 일시적인 싸움의 승리 뒤에 가려진 전쟁의 요소에 먼저 주목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전쟁은 상승(上昇)과 하강(下降)을 반복하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싸움에서 늘 이긴다는 상승(常勝)은 말만 그럴 듯하지 실제는 이루기 힘든 일이다. 전혀 예기치 않은 우연, 상황의 변수(變數)가 어딘가에는 늘 잠복하고 있다가 돌연 닥치는 게 전쟁이다.
늘 승리를 꿈꾸는 지휘관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보다는 수시로 닥칠지도 모를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 확보하는 신중한 사람이 전쟁에서 크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지휘관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 토대는 병력과 화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지휘관은 수하 장병들의 손실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펑더화이.
펑더화이는 그런 지휘관의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뒤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 사람은 어떤 성격의 인물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전장을 누비면서 형성한 나름의 관상법(觀相法)이 있었다. 나는 펑더화이의 사진을 통해 ‘말을 많이 해서 일을 불러들이는 사람일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내가 말하는 관상은 운명론이 아니라 나름의 인상 관찰법이다. 나중에 밝혀진 내용들을 보면 펑더화이에 대한 관상 예측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심한 막말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실수를 저지른 부하에게 특히 그랬던 모양이다.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 말로 뱉어내는 스타일.
그의 혹독한 질책은 유명했다고 한다. 참모들에게도 그랬고, 일선 지휘관에게도 그랬다. 그러나 뒤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솔직하고 담백하면서도 불의(不義)라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합당치 못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는 불같은 성격으로 마음에 담은 생각을 말로 쏟아내는 사람이었다.
/6·25 전쟁 중의 김일성(왼쪽)과 펑더화이.
그런 펑더화이의 눈에 김일성이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 전쟁을 모르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에 담긴 그 복잡한 요소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정치적 헤게모니에 유독 관심이 많았으니 말이다. 같은 공산주의자라 하지만, 아마도 펑더화이의 눈에는 그런 김일성이 결코 좋은 인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낙마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말로(末路)는 비참했다. 휴전 뒤 그는 귀국해 국방부장에 오르면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1959년이 문제였다. 그해 장시(江西)성 뤼산(廬山)에서 중국 공산당의 이른바 ‘뤼산회의’가 열렸다. 공산당 최고 의결기구인 정치국 확대회의이자 중간 당대회였다. 그 자리에서 펑더화이의 솔직하고 우직하며, 그러나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당시 마오쩌둥이 추진하고 있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병폐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얘기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당시 마오의 1인 지배 체제는 아주 견고했다. 펑의 의도는 마오를 쫓아내려는 정도는 아니었고 그가 추진한 극좌(極左)실험 대약진운동의 참화(慘禍)를 있는 그대로 밝혀 시정해보자는 것이었다.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굶어죽은 사람이 수천만 명에 달한다는 내용은 나중의 이야기다.
펑의 발언은 결국 화를 불렀다. 마오의 강력한 역공을 받아 정치 위상이 일거에 추락하고 만다. 그는 결국 마오가 뒤이어 벌인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된다. 마오를 따르는 극좌 홍위병(紅衛兵)들이 그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모진 굴욕과 고초를 가했다.
중국 현대사의 여러 장면을 여기서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다. 단지, 내가 전선에서 마주쳤던 적장(敵將)의 운명이 아주 모질고 험했다는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마오와 펑이 권력의 자장(磁場)에서 벌인 갈등도 우리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국외(國外)의 일이다.
그러나 펑더화이에게 닥친 운명과 관련해 김일성의 사연은 부연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앞에서 줄곧 소개했듯 한국 전선에 뛰어들었던 펑더화이와 열심히 대립각(對立角)을 형성했다. 전쟁을 벌였으면서도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로부터 책망 같은 걸 받았고, 제 뜻대로 펼치려다 그의 제동에 걸려 전쟁의 흐름을 좌지우지하지도 못했다.
그런 김일성은 활달한 겉모습에 아주 잔인한 성정을 감춘 사람이다. 펑더화이의 정치적 부침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에 그의 성정이 드러난다. 펑은 휴전협정이 이뤄진 이튿날인 1953년 7월28일 협정 조인식에 사인을 한 당사자다. 이어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조선인민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는다. 귀국 뒤의 관운은 좋았다. 앞서 적은대로 국방부장을 맡았다.
김일성이라는 인물의 그릇
그는 한반도 전쟁에 뛰어들면서 어느 누구보다 자국군의 약점을 잘 살폈다. 그래서 군 근대화에도 열심이었다. 가장 크게 드러났던 약점, 즉 낙후한 보급력을 개선하기 위해 분주했고, 현대전에 필요한 무기 체계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1954년에는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의 원폭(原爆)실험을 지켜보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의 뤼산회의가 열렸던. 장시성 뤼산의 기념관.
1959년의 뤼산회의가 있기 전까지 그는 그야말로 중국 국방의 주역으로서 흠잡을 데 없는 활동을 펼쳤고, 그 점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 문제였다. 뤼산회의에서 그는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에게 반당(反黨)분자로 몰렸다. 김일성은 그런 펑더화이의 낙마(落馬)를 흐뭇하게 바라본 흔적이 있다. 6·25 전쟁 전문가 선즈화(沈志華) 교수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 외교부에 축전(祝電) 형태의 전문을 보냈다. 내용은 “펑더화이에 대한 처리는 아주 합당하다. 마오쩌둥 주석을 직접 만나고 싶다. 그(펑더화이)에 대해 더 할 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펑더화이는 1974년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모진 고초를 당하다가 세상을 떴다. 그는 죽기 전까지 줄곧 가혹한 마오쩌둥의 정치적 공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를 만난 뒤 펑에 대해 ‘더 할 말’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성정으로 미뤄 짐작컨대 무슨 메시지를 전하기는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의견의 엇갈림은 있었을지 몰라도 펑더화이는 김일성에게는 고마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밀려 곧 없어질지도 모를 북한의 운명을 살린 인물이 펑이었다. 전쟁의 방식을 두고 벌인 논쟁에서 비록 자신의 입장을 관철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김일성이 선즈화 교수의 증언대로 ‘축전’과 같은 내용의 전보로 기쁨을 표시했다면 이는 우리가 새삼 살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일성은 사실 펑더화이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전쟁의 가혹함, 전쟁의 어려움, 그 밑에 따르는 부하 장병들이 지닌 목숨의 소중함 등을 말이다. 아울러 전쟁을 벌임으로써 닥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도 숙연해져야 했다. 그러나 김일성에게는 그런 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순간에 도와줬던 사람이 커다란 곤경에 처하는 장면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은 김일성이라는 사람의 내면이 어떤 요소로 이뤄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김일성이라서 전쟁의 참혹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아울러 전쟁이 번지는 참혹한 지경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권력을 탐했다. 휴전 뒤에 벌어진 상황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활동해 이름을 얻었던 연안파(延安派)와 박헌영 계통의 남로당 소속 인원 등이 그에 의해 모두 숙청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그 잔인한 성정은 끝이 없었다. 전쟁의 막바지, 휴전을 앞두고 벌인 중국 및 소련과의 협상에서 그가 드러낸 성격도 다를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