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8/ 국방7/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1/ (1) "백 장군이 나서주시오" - 25 국군과 미군은 전쟁 전부터 중공군에 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28/ 국방7/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 조선일보 2015
2015.03.05 "조선일보와 나는 동갑내기… 같이 나이 들지만 신문은 항상 신선해야"
[1920년에 태어난 創軍 주역 백선엽 장군]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우리 軍은 초고속 성장
국민 교육의 道場 역할하고 산업의 기초, 군대서 나와
윤일병 사건·防産비리 유감… 信賞必罰 엄격히 해야 예방
"키 리졸브 연습한다니까 어제 또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면서?"
'6·25전쟁의 살아있는 영웅' 백선엽(95) 예비역 대장은 조선일보 창간 95주년을 맞아 3일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전날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문제에 대해 먼저 운을 뗐다. 백 장군은 "지난 70년간 우리나라와 한국군이 성공적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우리 국민들의 노력과 한·미동맹 덕택"이라고 강조했다. 창군(創軍) 멤버인 백 장군은 6·25전쟁 때 1사단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백장군은 100세를 눈앞에 둔 고령인데도 인터뷰 내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광복 70년, 분단 70주년을 맞는 소회를 1시간 가까이 또박또박 말했다.
백선엽 "조선일보와 나는 동갑내기…같이 나이들지만 신문은 항상 신선해야"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며 미사일 도발을 하고 있다.
"건군(建軍) 이래 북한의 도발은 계속 있어왔다. 북한을 믿을 수가 없지 않나. 말과 행동을 정반대로 하니. 핵무기와 미국까지 도달하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
―김정은이 올해를 '통일대전 완성의 해'라고 주장하는데.
"도발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고 봐야 한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다. 반면 우리는 나라를 지키는 데 수세로(방어적으로) 생각하지 않느냐. 우리는 북한을 강제로 흡수 통일할 능력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나라인데…. 한·미 훈련을 해도 방어 연습을 하지 않나."
―창군 멤버로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6·25전쟁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제대로 못 먹는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나라였다.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겨우 알려진 나라가 오늘날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는 수준이 됐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여기에는 위대한 우리 국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또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해서 안보·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도움을 받은 덕택도 컸다."
―지난 70년간 한국군도 많이 성장하지 않았나.
"한국군은 초기에는 아주 보잘것없는 군대였다. 장비·훈련 면에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화가 됐다. 제가 참모총장으로 있을 때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늘어났다. 예비 10개 사단을 포함하면 30개 사단을 완성했다. 오늘날 한국군의 토대가 된 것인데 다른 나라 군대 역사를 봐도 이는 상당히 성공한 스토리다. 우리 군대는 국민교육 도장의 역할도 했다. 여러 산업의 기초가 군대에서 나왔다. 베트남전, 중동 건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여순반란사건 등 군 내부에 큰 진통이 있었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만으로는 수습이 안 돼 군 병력을 증파했는데,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군대 내의 좌익 분자들을 그냥 둘 수 없어 내가 정보국장으로서 숙군(肅軍)을 했다. 당시 약 10만 병력 중 약 5%를 숙군했다."
―당시 좌익 의혹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구명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박 대통령이 소령이었는데 군법회의에서 극형을 선고받았다. 박 대통령이 군내 남로당 조직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아주 명백히 해 내가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미국 유학이나 장군 진급 때도 보증을 서줬다."
―지난해 윤일병 사건과 방산비리 등으로 군에 대한 신뢰가 크게 추락했다.
"군에는 군기(軍紀)와 풍기(風紀)가 있다. 군풍(軍風)이라고 할까. 교육과 신상필벌의 방침을 엄격히 해서 예방해야 한다. 건전한 군대, 봉사하는 군대, 정예화된 군대가 돼주길 기원한다. 각 가정에서 나온 국민의 군대인 만큼 국민들도 성원을 해주시길 바란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 대박'을 강조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통일의 길로 가려고 하고 국민들도 거기에 도움이 돼야 하는데 문제는 상대방(북한)이 문제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무기 연기됐는데 한·미동맹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 유지돼야 하는가.
"전작권 재연기는 잘한 일이다. 한·미동맹은 우리 국방의 기초다. 북한이 저렇게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는데 우리에게도 핵우산이 필요하다. 누구를 믿겠나. 통일 등 긴 장래를 봐서라도 한·미동맹은 지속돼야 한다."
―조선일보가 창간된 해에 태어나셨는데. "조선일보와 나는 동갑내기다. 같이 늙어가지만, 신문은 늙으면 안 된다. 항상 신선해야 한다.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지 조선일보가 과거 70년 역사에서 막대한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
양승식 기자
★ 백선엽의 6ㆍ25 징비록
(1) "백 장군이 나서주시오"
CIA 한국지국장의 은밀한 정권장악 권유
60여 년 전 6.25 전쟁의 시공에서 가장 빛났던 별. 백선엽(93) 예비역 대장에게 따르는 수식이다. 그로부터 ‘전쟁의 철학’을 듣고자 한다. 우리는 잘 싸웠던 민족인가, 우리는 잘 싸우고 있는 민족인가, 그리고 우리는 잘 싸울 민족인가를 새겨보기 위해서다. 6.25는 무수한 상처를 남겼던 전쟁이었다. 우리는 그 전쟁이 남긴 참혹한 폐허를 딛고 일어섰다. 아울러 우리는 앞으로도 쉽지 않은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이 싸움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이번 기획은 그런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6.25 전쟁의 야전 명장이자 한국군 전력 증강의 주역으로 북한의 적화야욕을 막아냈던 노병의 눈에 비친 한반도 싸움의 모든 것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며
380년 전 출간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지금도 유효하다. 불과 60여 년 전의 전쟁을 우리는 많이 잊고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우리가 보였던 진짜 모습을 바로 적어 다스리고(懲), 후대가 이를 참고함으로써 스스로의 결점을 극복해 후환을 경계토록(毖)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60여 년 전의 전쟁에 용감히 나섰다. 그러나 스스로 드러낸 단점도 적지 않았다. 전쟁 이후의 고단한 역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직접 지휘한 야전의 경험자로서 내 눈에 비친 한반도 사람들의 싸움 기질을 여기에 적는다. 노병이 적는 이 ‘징’과 ‘비’의 기록이 앞으로 우리가 헤쳐가야 할 많은 싸움의 과정에서 튼튼한 초석의 역할로 작용한다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겠다.
2000.11
은밀하게 찾아온 미 CIA 지국장
/백선엽 장군
일찍 피어났던 꽃은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보다 늦게 피어난 꽃들은 혹심했던 겨울을 견뎌낸 남산의 북사면 자락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나는 4.19가 벌어지던 1960년 4월의 봄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다.
6.25전쟁 3년 동안 분주히 야전의 싸움터를 오갔고, 그 이후 줄곧 대한민국 육군의 전력 증강에 쉴 틈이 없었던 나는 1960년에 접어들어서는 이미 ‘현장’으로부터 비켜 서있던 군인이었다. 지금의 합동참모본부(합참) 격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던 연합참모본부의 총장이었다. 내가 출근하던 연합참모본부의 사무실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가 들어섰던 자리에 있었다. 당시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서 남산 북녘 자락의 내 4층 사무실에서는 경무대 쪽의 광경이 눈에 잘 들어왔다. 학생들의 데모는 늘 이어졌고, 그를 막으려는 경찰들 역시 분주히 시내를 오갔다.
/ 1960년 4.19 당시 적선동 해무청 앞에서 데모대에 쫓기는 경찰의 모습.
‘서브 로자(Sub Rosa)’라는 단어가 있다. 라틴어라고 한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under the rose’, 즉 ‘장미 밑에서’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옮기자면 ‘은밀하게’, ‘비밀스럽게’다. 그 라틴어를 직접 제목으로 사용해 1978년에 출간한 책이 있다. 저자는 피어 드 실바(Peer de Silva). 그는 1959년 한국에 부임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국 책임자였다. 강인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길고 넓은 이마에 움푹 들어가 있는 눈매가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냉정한 정보통’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한국에 부임한 뒤 꽤 열심히 한국의 정가를 누비고 다녔다.
/(왼쪽부터)피어 드 실바 美 CIA 한국지국장, 그가 1978년 펴낸 저서 '서브 로자'(장미 밑에서)'
‘장미’의 그늘을 헤치며 문을 노크한 사람
나중에 드러난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피어 드 실바는 요동치는 한국의 정계 판도에서 이승만의 반대편에 서 있었으나 당시 정국에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장면(張勉) 부통령에 크게 주목했던 인물이다. 그는 장면 부통령과 자주 만나면서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장면 부통령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승만 대통령 말년에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던 한국의 정치판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듬해 벌어진 5.16의 여러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거사를 주도한 5.16 진영의 의도를 미국에 전달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조금씩 알려진 내용들이다. 그는 어쨌든 1960년 3.15 선거가 부정의 의혹에 휩싸이다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던 한국 정가의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누비고 다녔다.
저 산 멀리에 조금씩 모여들던 구름은 이제 점점 짙은 색깔을 띠어가면서 거센 비를 내릴 먹구름으로 변했다. 그에 앞서 거대한 소나기를 예고하던 바람은 이미 경무대와 남산 자락을 넘어 서울,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을 가득 채우던 무렵이었다. 나는 ‘이 혼란이 언제 막을 내릴까’라는 우려 때문에 연합참모본부 내 사무실의 창가와 책상 사이를 서성이고 있었다.
피어 드 실바 지국장은 그런 무렵 나를 몇 차례 찾아왔다. 그는 여러 소식을 정탐하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연합참모본부에 부임한 이래 한국의 정가와 군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워낙 한직이었던데다가, 정국(政局)이 일으키는 소용돌이 자체가 내 호기심을 생래적으로 자극하는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속히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우려만을 품고 있었을 뿐이었다.
피어 드 실바는 그런 내게 정국의 동향과 주변에 관한 소식을 자주 묻곤 했지만 나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몇 차례 내 사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오는 사람 굳이 막을 필요는 없는 법이다. 나도 그를 맞아 여러 가지 주제의 대화를 나누면서 정국을 걱정하고 있었다.
CIA 지국장이 불쑥 던진 제안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사무실을 찾아온 피어 드 실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4.19가 벌어지기 며칠 전쯤으로 기억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의표를 찔렀다. “백 장군…, 나서지 않으시겠느냐?”
나는 즉답을 피했다. 그는 분명히 의미심장한 제안을 내게 꺼냈던 것이다. 창군의 멤버로서 미증유의 동족상잔이었던 6.25전쟁을 치르며 군문(軍門)에서만 14년의 풍상을 겪어왔던 나는 그 의미를 잘 알았다. 그의 발언은 ‘군사적 개입’을 통해 난국을 풀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미군이 한국 군대의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미군이 한국군의 누군가를 내세워 정국에 개입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그 일의 성사는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미군은 당시 서울 북방의 의정부 라인을 포함해 수도권 일원을 모두 통제하고 있었다. 병력의 이동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전선 또는 후방의 한국 군대가 서울에 드나드는 길목을 마음껏 막거나 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군사 개입’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거부감이 앞섰다. 한국의 정치에 군부가 파고든다는 점을 나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은 정치의 바람을 타서는 안 된다’는 내 평소의 원칙도 그에 한몫했다. 그러나 나는 착잡하기만 했다.
내가 그의 말이 ‘의표를 찔렀다’고 표현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1기 육군참모총장 때 전쟁을 휴전으로 마감한 뒤 1954년 병력 40만 명을 거느리는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어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때는 1957년이었다. 당시의 집권 자유당은 말기적 증세를 아주 짙게 드리웠다. 나는 군복을 몸에 걸친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어떻게 부패하고, 부정을 저지르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유당 말기의 증상은 매우 심각했다. 누구라도 ‘이대로 가다가는…’ 식의 우려를 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을 이끄는 참모총장으로서 그런 생각을 구체화한다면 군의 정치 개입이라는 선례를 남기는, 그래서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머릿속으로 그저 스쳐 지나갔던 상념은 있었다. ‘군대가 나서서 장택상 박사, 조병옥 박사 등 명망 있는 분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한 다음 물러나면 좋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사라진 가느다란 생각의 한 줄기를 피어 드 실바라는 미 CIA의 지국장이 건드리며 다가선 것이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이제 곧 흘러지나갈 1960년의 봄이었다. 남산 북사면의 응달 깊숙한 곳 여기저기에 자줏빛 진달래는 마치 산속의 복병(伏兵)처럼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1960년의 어지러운 봄은 그 진달래의 자줏빛 그늘 깊은 곳 어딘가에 제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어느덧 피어 드 실바가 불쑥 건넨 “나서지 않겠느냐”는 그 말을 곰곰이 되씹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약력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1940년 3월 평양사범학교 졸업
1941~1945년 만주 봉천군관학교 졸업, 만주국 군관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졸업, 국방경비대 입대 중위 임관(군번 54번)
1946년 9월~1947년 4월 제5연대(부산) 1대대장, 연대장, 제3여단 참모장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장
1948년 11월 대령 진급
1949년 7월 제5 사단장
1950년 4월 제1 사단장
1950년 7월25일 준장 진급
1951년 4월 소장 진급, 제1 군단장
1951년 11월 백(白)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
1952년 1월 중장 진급
1952년 4월 제2 군단장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1953년 1월 대장 진급(한국 최초)
1953년 5월 육군대학 총장(겸직)
1954년 2월 창설 제1 야전군 사령관
1957년 5월 육군참모총장
1959년 2월 연합참모본부 총장
1960년 5월31일 전역
1960년 7월 주 중화민국 주재 대사(1년)
1961년 7월 주 프랑스 대사(13개 국가 대사 겸임, 3년)
1965년 7월 주 캐나다 대사(4년 4개월)
1969년 10월 교통부 장관(1년 3개월)
1971년 6월 충주, 호남비료 사장(2년)
1973년 4월 한국종합화학 사장(7년)
2007년 2월~ 대한민국 육군협회 회장
(2) "아! 모든 것이 끝났구나…
이기붕 의장집 부엌에 몰려든 장군의 아내들? 무너지는 간성(干城)
(1) 군은 어떤 존재인가
총소리에 무너진 4월19일의 봄
전쟁의 총소리는 1953년 7월 이 땅에서 멈췄다. 나는 1952년 육군 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이듬해 7월 27일 휴전 협정이 맺어진 뒤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어 1957년 5월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흔히 군대를 국가의 간성(干城)이라고 부른다. 적이 들이미는 날카로운 창과 칼끝을 막아내는 방패(干), 그리고 대규모의 적이 우리를 치며 몰려왔을 때 그를 막아내는 견고한 성채(城砦)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의 간성은 그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까.
/군수품을 전선으로 운반하기 위해 창설된 국군 '지게 부대'가 51년 4월20일 대구훈련소에서 임무수행에 앞서 훈련을 받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군대였다. 적이 어떤 모습인지, 그들이 어떤 힘을 갖췄는지를 우선 몰랐다. 아울러 적의 정체를 알았더라도 제대로 그들을 막아 세울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했다. 군 병력의 일부가 새로 상륙한 미군으로부터 M1 개런드와 카빈 소총을 받아 무장을 했을 뿐이지, 나머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갔던 38식과 99식 소총에 그들이 종아리에 맸던 ‘각반(脚絆)’을 두르고 출범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군은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전쟁 중에 시작한 전력 증강 사업으로 미군의 무기를 대량으로 넘겨받아 강력한 화력을 지닌 6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물질적 토대를 갖춘다고 해서 강군(强軍)의 꿈은 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우리 군대는 이미 불과 몇 년 전에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내가 두 번째로 육군참모총장을 맡았을 때 집권 자유당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과는 별도로 이기붕 당시 민정의원 의장(지금의 국회의장)이 권력의 핵을 형성하고 있었다.
권력자의 부엌에 모여든 장군의 아내들
이기붕 의장이 살고 있던 서울의 서대문은 그런 권력의 향기를 맡으며 몰려든 여러 타입의 사람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한다. 그 정치인이 어떤 행태를 보이든 나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거기에 내가 무어라 말을 보탠다면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군이 그런 권력의 향배를 좇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왼쪽) 1960년 3.15 선거에서 제5대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부통령이 3월18일 오후 서대문 자택에서 국회및 정당기자단들과의 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 오른쪽) 60년 3월 5일, 제 4대 대통령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부통령후보의 선거 벽보.
나라와 민족, 사회를 지키는 방패는 그런 부나비와 같은 정치적 군인들에 의해 좀이 슨다. 아울러 나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성채는 그 틈새를 파고든 정치적인 군인의 준동으로 인해 조금씩 틈을 넓히다가 무너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보면 1957년 이후의 대한민국 군대의 움직임은 불길했다.
서대문 이기붕 의장의 집 부엌에는 군 고위 장성 마나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한동안 우리 군대의 고위 장교 부인들은 상급 장교의 부인을 따라 다녔다. ‘남편의 진급은 그 아내가 하기에 달렸다’는 말은 거저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 원조의 모습은 1957년 이후 서대문 권력 2인자의 주방으로 모여든 부인네들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밴드 오브 브러더스(Band of Brothers)’라는 미국 TV 드라마가 있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도 방영해 큰 인기를 모았던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다룬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주연급 부대로 등장하는 군대가 미 101 공수사단이다. 노르망디 작전에서 101 공수사단을 이끌었던 사단장이 바로 맥스웰 테일러(Maxwell Davenport Taylor)다.
그는 1953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해 테일러는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일어와 중국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갖춘 군정가(軍政家) 스타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한국에 주둔하면서 몇 마디 한국어를 익혔다. 그 가운데 한국군 장교들을 모아놓고 늘 그가 강조하던 한국어가 있다. “여러분, 군대는 절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됩니다”였다.
미 사령관의 충고, “정치에 개입 말라”
테일러 이후 부임한 미 8군 사령관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라이만 렘니처(Lyman L. Lemnitzer)는 테일러 직후에 한국 주둔 사령관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그 역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고위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강조하곤 했다.
건국 이래 쉴 틈 없이 전쟁을 벌여온 군대가 미군이다. 테일러는 한국에서 이임한 뒤 미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두루 거치고 주 베트남 대사로까지 활동했다. 렘니처 또한 이력이 화려하다. 대장 출신으로 테일러와 비슷한 직위를 거쳤던 미군의 최고위 장성이다.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한 미군, 그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던 그들이 왜 한국 군대에게 늘 ‘정치 개입 불가’를 강조했던 것일까.
우리 한국군의 민감한 정치적 성향에 주목했던 것일까. 우리의 어떤 면모가 그들에게 불안감을 안겼던 것일까. 우리는 실제 그런 움직임을 보였던 것일까. 그 대답은 내가 다 할 수 없는 의문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우리 군대의 고위 장성들이 정치권력에 휩쓸리는 장면은 자주 드러났다.
군령(軍令)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적지 않은 군 고위 장성들과 그 부인들은 권력자의 저택과 주방을 아슬아슬할 정도로 넘나들었다. 연로한 이승만 대통령 주변을 에워싼 권력 그룹은 그의 어두워진 청력(聽力)과 시력(視力)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군대의 인사는 그 몇몇의 권력자들이 좌지우지했다.
전쟁은 잊혀진 게 아니라 우리가 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4.19를 앞둔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은 기어코 무슨 일을 내고서야 막을 내릴 것 같은 혼란의 극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산 연합참모본부 4층 창가로 내다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말이 아니었다. 1960년의 봄은 서울 남산의 북사면에 피어난 진달래의 모습처럼 그렇게 가련하면서도 어두웠다.
“조금 더, 3일만 기다려 보자”
『서브 로자』의 저자이자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피어 드 실바가 던진 말, “나서지 않겠느냐”는 제언은 날카로운 비수와 같았다. 그의 발언은 6.25전쟁 3년, 40만 병력의 첫 1야전군 사령관으로 4년을 보냈던 내 마음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맞았던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간신히 적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를 육성하는 데 청춘을 다 바친 나로서는 이 상황이 아주 심상찮게 보였기 때문이다.
연합참모본부 내 4층 사무실의 창은 그 무렵 내가 자주 서성이던 곳이다. 참모본부 총장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부하 장군이 문을 두드렸다. 피어 드 실바가 그 말을 던지고 돌아간 직후였다. 그는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몇 마디 말이 오갔고, 어떤 경위에서인지는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그에게 실바의 제안을 말했던 모양이다.
/전쟁 중의 백선엽 대장(왼쪽)과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장은 내 말을 듣더니, “각하, 실바의 제안을 받아들이시죠”라고 했다. 그 역시 당시의 상황을 우려했던 점에서 나와 입장이 같았으리라. 나는 다시 창가를 서성였다. 군이 개입을 한다면 어떨까. 명망 있는 인사들을 정국 혼란의 수습 책임자로 자리 잡게 한 뒤 빠지는 것은 어떨까. 미군이 돕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최선일까. 군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창밖을 바라보는 내 뒤에서 비서실장은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내 시원한 답을 그는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머릿속으로는 군의 정치개입을 경고했던 미군 사령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군은 국가의 간성, 아울러 국가가 지닌 모든 것의 가장 견고한 토대여야 한다. 안보는 군의 엄정한 중립으로 인해 제 틀을 튼튼하게 갖출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서도 나는 비서실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좀 더 기다려 보자. 3일만 더 기다려 보자….” 그 3일의 대답이 어떻게 나왔던 것일까. 나도 어느새 실바의 제안에 기울었던 것인가. 뚜렷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 때 어떤 결심을 했을까.
/ 4.19 당시 종로5가에서 경찰의 제지망을 뚫으려 격렬하게 시위하는 데모대.
“아, 모든 것이 끝났구나”
그 날짜를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실바가 그런 제안을 건넨 게 4월19일로부터 하루, 또는 이틀 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던 모양이다. 4.19는 그렇게 내 앞에 왔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남산 사무실로 출근했다. 일도 별로 없었지만,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나는 버릇처럼 사무실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또 그 며칠 사이의 버릇처럼 창가를 자주 서성였다.
책상의 의자에 앉았는가 싶었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창이 조금 흔들렸다. “따다당, 땅, 땅…” 그 소리는 경무대로부터 들려왔다. 이 땅에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바람을 몰고 왔던 6.25 전쟁의 총소리가 다시 내 귀를 울리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시 다가섰다. 총소리는 계속 울려댔다. 분명한 발포 소리였다. 장미의 숲을 헤치듯 은밀하게 다가섰던 실바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무심코 뱉듯이 던졌던 “3일만 기다려보자…”던 내 말도 생각이 났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아, 모든 것이 끝났구나”라는 탄식이 내 입속에서 흘러나왔다.
(3) 이승만이 백 장군을 애타게 찾았으나
1) 군은 어떤 존재인가
하야하던 이승만, “자네, 어디 있었는가”
총을 잡은 쪽은 군대가 아니었다. 경찰이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과 시민에게 총격을 가했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거대한 혼란의 전주곡(前奏曲)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시위에 나선 시민들 덕분에 허정 내각에 이어 장면 총리의 정부가 들어선 점은 다행이었으나, 국가와 사회의 근간을 수호하기 위해 경찰 병력에 쥐어진 총이 마침내 불을 뿜었다는 점은 여간 우려스러운 게 아니었다.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방법은 없는가에 대한 고민은 이제 끝이었다. 정국은 더 큰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 과정이야 여기에서 새삼 다시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여 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5.16이 벌어졌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4.19로부터 1주일 뒤, 12년 동안 집권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있었다. 나는 경무대에서 물러나온 이 대통령이 하와이로 출국할 때 그의 거처였던 이화장을 찾아가 배웅했다. 이화장에서 걸음을 옮겨 내려오던 대통령은 길에 서 있던 나를 보자 “자네, 어디 있었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 직후 시위대의 거리 행진.
4.19가 벌어진 지 꽤 지난 뒤였다. 박찬일이라는 인물이 나를 남산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이기붕의 사람’이었다. 이기붕이 발탁해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로 기용했던 사람이다. 이기붕의 후원을 받아 그는 자유당 말기에는 이 대통령의 최고 실세 측근 비서라는 평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4.19로 인해 사형대에 올랐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와 쌍벽을 이루는 권력의 실세였다.
나보다 몇 살 정도 아래였던 그가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 차 떠난 뒤에 사무실로 찾아온 이유야 별 게 없었다. 권력의 정점 근처에 머물다가 졸지에 그 위상을 잃은 사람이었다. 정국의 전개에 민감했으니, 평소 알던 사람들을 한 둘 찾아다니며 이런 저런 사정을 탐문하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경무대 비서관이 전한 말
그가 자리를 뜨기 전에 내게 이런 말을 꺼냈다. “백 장군님, 왜 가만히 있었습니까. 이승만 대통령께서 하야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십디다. ‘백선엽 장군 형제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그 때 동생 백인엽 장군이 포천에 있지 않았습니까. 왜 나서지 않았던 겁니까.”
박찬일 비서관이 ‘그 때’라고 언급한 시기가 바로 4.19 직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찾았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들었다. 그래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기 위해 이화장 길을 내려오던 이 대통령이 나를 보자 “자네, 어디 있었단 말인가”라고 했던 모양이다.
박 비서관이 내 동생을 함께 언급했던 대목도 눈길을 끈다. 나와 내 동생 인엽은 6.25 이후 줄곧 ‘형제 장군’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별 넷 대장, 동생 역시 화려한 이력으로 별 셋의 중장에 올라 4.19 무렵에는 포천에 주둔하는 6군단의 군단장을 맡고 있었다.
박 비서관의 발언에는 ‘사태가 혼란으로 치달을 때 왜 동생인 백인엽 장군의 6군단 병력을 이끌고 사태 정리에 나서지 않았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서울 인근인 포천에 동생이 이끄는 6군단이 있었는데, 왜 개입을 피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는 나름대로 음미해 볼 대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말기에 이르면서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정치적 바람을 타기 시작한 군대의 일부 장성들도 엉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는 쿠데타의 조짐까지 보이면서 정치적인 행동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군부의 실력자’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에의 의지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박 비서관은 그 점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던 날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부정부패가 심하면 학생들이 당연히 일어나야지. 애들이 죽었다면 내가 물러나야지”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측근들의 장벽에 둘러싸여 눈과 귀가 멀어 있었고, 사태가 벌어지자 재집권 욕심을 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빨리 정국을 안정시키려면 강력한 군 부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권력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권력을 손에 거머쥘 마음도 없고, 그를 뒤에서 조종할 만한 배포도 없다. 나는 겁이 많다. 적이 내 앞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내가 지닌 몫 이상의 자리와 힘을 먼저 탐내거나 바라지 않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피어 드 실바 지국장의 제안을 들었을 때도 그저 ‘혼란스러운 정국만 수습한 뒤 빠지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군대는 나라와 사회에 어떤 존재일까. 동양에서는 그에 대해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갈림길’이라고 했다. 병법의 대가인 손자(孫子)의 표현대로라면 ‘사생지지, 존망지도(死生之地, 存亡之道)’다. 군대가 내뿜는 살기(殺氣)는 본질이 흉(凶)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살의(殺意)를 품고 다가서는 적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극도로 삼가야 할 일이다. 나는 그 점을 우려했기 때문에 4.19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피어 드 실바라는 인물이 내게 의미심장한 제안을 꺼냈지만, 그는 나에게만 그리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는 정보공작의 일환으로 나 외의 다른 군인에게도 같은 말을 던지며 의중을 탐색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복잡한 생각 때문에 결국 4.19의 봄 정국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정국은 아주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갔다. 결국 이듬해에 5.16이 왔다. 당시의 대한민국 사람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은 그를 두고 ‘올 것이 결국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1980년 다시 정치무대에 선 군대
박정희 소장이 이끌었던 5.16과 그 이후의 여러 전개 과정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건군에 참여한 뒤 6.25 전쟁의 주요 국면을 대부분 이끌었던 나로서는 그런 군의 정치개입이 왜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대한민국 군은 6.25 전쟁 때 연 병력 150만 명이 상륙한 미군으로부터 행정을 배워 효율성으로 무장한 집단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수준에서는 최첨단의 행정적 능력을 지닌 곳이 군대였다.
5.16은 그런 대한민국 군대의 약진(躍進)이었다. 더구나 박정희 소장은 5.16에 성공한 뒤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도약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 점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아울러 강병(强兵)의 토대는 부국(富國)이다. 경제적인 실력을 쌓아야 나라의 군대를 튼튼히 키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로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드리워지는 법이다. 역시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군대, 그를 키우며 함께 성장했던 창군의 주역으로서 볼 때는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을 엄정하게 정치적인 중립으로 육성했느냐는 점이다.
4.19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다. 나는 1960년 군문을 나와 중화민국(당시에는 대만을 이렇게 불렀다) 대사를 역임한 뒤 5.16이 벌어지고서는 다시 주 프랑스 대사를 지낸다. 이어 캐나다 대사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 정부의 교통부장관을 맡았다가, 역시 박 대통령의 배려로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낸다.
1970년대의 우리 군대는 어느덧 다시 정치적인 기운에 휩싸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두 번째의 참모총장을 맡았을 때 목격했던 군의 ‘정치 바람’이 다시 불고 있는 듯했다. 군 내부에 ‘하나회’라는 모임이 들어서고, 이에 속한 고위 장교들은 정치적 움직임에 분주했다.
/10.26 사태 현장 검증.
하나회라는 군대의 사적인 조직이 들어선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적인 조직이 군의 기강을 흔든다는 점은 반드시 고려해야 했던 대목이다. 군의 기강이 흔들리면 유사시에 제대로 적을 맞아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서거했다. 그 사건이 10.26이다. 이어 그해 12.12사태가 벌어졌다. 군의 하나회를 통해 성장한 고위 장성 그룹이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일이다. 그 상황 역시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 새삼 적지 않기로 한다. 이어 이듬해인 1980년에는 소위 ‘신군부’가 등장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그룹이다.
군부가 다시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김종필과 김대중, 김영삼 등 이른바 ‘3김(金)’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생긴 정치적 공백을 향해 열심히 뛰고 있었고, 대학가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태 때 잠시 모습을 보였던 군부의 동향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이미 퇴직한 군의 원로였다. 그럼에도 한국 주둔 미군과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전쟁 때 쌓은 미군과의 우정 때문이었다. 1979년 12.12 사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미 8군을 이끌고 있던 사령관은 존 위컴이었다. 그 무렵 개인적으로 그를 만날 일이 있었다. 위컴은 아주 흥분한 표정으로 ‘육두문자’를 사용하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4) 북한에 쏘랬더니 왜 서울서 총질이야!"
미군 장성들, 12·12 군사행동 격렬히 비난
(1)군은 어떤 존재인가
흥분한 미8군 사령관의 욕설
존 위컴 미 8군 사령관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이 자리에서는 다 옮길 수 없지만, 꽤 강한 욕설을 섞어서 군인으로 정치적 행동에 나선 한국군 고위 장성 두 사람을 비판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분이 참 묘하다. 위컴은 30년 전에 벌어진 6·25전쟁에서 이 땅에 올라와 전선을 지휘한 미군 장성들의 새카만 후배다. 우리식으로 조손(祖孫)의 관계를 따져 물으면, 위컴 사령관은 맥아더의 손자, 밴 플리트 장군과 테일러 장군한테는 아들 쯤에 해당하는 군 후배였다.
30년 전 벌어진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서 밴 플리트와 맥스웰 테일러 장군 등은 현대적인 군대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대한민국 군대의 고위 장교들에게 “군은 절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밴 플리트와 테일러의 새카만 후배가 30년 뒤의 상황에서도 한국 군대의 정치개입을 성토하는 장면이었다.
/전두환대통령은 1984년 3월 28일 팀스피리트84 훈련에 참가한 이기백 합참의장과 3군 참모총장등 한국측 71명과 위컴 美육참총장, 세네월드 한미연합군사령관등 미국측 인사 90명에게 만찬을 열었다.
그는 특히 사태를 주도한 사람보다, 그를 도와 병력을 전선으로부터 빼낸 장군을 겨냥했다. “주도한 사람은 주도한 사람이라고 칩시다. 전선의 사단을 담당했던 장군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한국군의 이 전선 사단은 유엔군의 전투 서열에 들어있는 군대입니다. 그런 군대가 어떻게 쿠데타 대열에 상부의 명령 없이 나설 수 있는 겁니까?”
그가 지목한 사단은 서울의 북방인 일산 일대에 주둔하는 군대다. 북한의 도발이 있을 경우 전선의 1사단과 25사단을 대체해 개성으로 진공(進攻)해야 하는, 작전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 중요성이 아주 큰 부대였다. 그런 부대가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의 양해 없이 쿠데타에 나섰다는 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의 흥분은 좀체 가라앉을 줄 몰랐다. 위컴은 이어 “군대가 쿠데타에 나서는 일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미군은 쿠데타를 벌이라고 해도 절대 나서지 못 합니다. 미군은 법이 규정한 엄정한 틀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설 뿐입니다.”
그의 말이 틀릴 수 없다. 그것이 군대다. 엄정한 법의 틀을 넘어선다는 일을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 위컴이 허세를 부려 꺼내는 내용도 아니다. 그들은 군대라는 존재를 안다. 함부로 법과 규정의 틀을 넘어서면 그 스스로가 지닌 엄청난 폭력이 무엇을 부르는지 말이다.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미 70의 고령에 들어섰지만, 전쟁의 모질고 험한 풍상을 고스란히 겪은 나로서는 그 점을 모를 수 없었다. 내가 무안을 넘어, 창피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그 말은 거짓이다. 대한민국 군대 창군의 멤버로 미군의 도움을 힘겹게 얻어가며 북한의 위협을 돌려 세우기 위해 고심했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북한에 쏘랬더니, 왜 서울서 총질이야!”
또 그 무렵이었다. 12·12가 벌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그 때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만난 장성이 존 베시 대장이었다. 그는 존 위컴에 앞서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 미 8군 사령관을 역임한 뒤 미국으로 귀국해 육군참모차장을 맡고 있었다.
/ 1979년 7월 이임하는 존 베시 유엔군사령관을 맞는 박정희 대통령.
그는 1978년 지미 카터 행정부가 미군의 철수를 추진할 때 미 의회에 출석해 “북한군의 침략에는 미군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경력 때문에 그는 대한민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하려 했던 지미 카터 행정부와 반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는 미국의 지휘관으로서 북한 김일성 군대의 도발 가능성에 주목했고, 따라서 한국 군대의 역량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장성이었다.
그런 그는 12·12를 어떻게 지켜봤을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존 위컴 당시 미 8군 사령관 못지않게 한국 군대의 정치개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함께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의 거친 흥분에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다.
“도대체, 당신 나라의 군대는 어떻게 굴러가는 곳이냐. 국민들이 돈을 모아서 준 돈으로 무기를 사서 위협적 도발을 일삼는 북한을 향해 쏘라고 했는데, 당신 나라 군대는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을 하느냐. 이게 말이 되느냐. 이런 군대는 정신이 나간 군대다.”
힐난이었다. 마음 구석구석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파편처럼 날아와 박혔다. 군은 그렇게 정치와 거리를 떨어뜨린 채 서 있어야 한다. 그 군대가 지닌 제어할 수 없는 힘이 틀 밖으로 마구 번진다면 그것은 자칫 내란(內亂)을 불러 혼란(混亂)으로 치닫는다. 자칫 자멸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다.
존 위컴과 존 베시. 둘은 한국의 안보 상황을 일선의 지휘를 통해 체험한 인물들이다. 당시 한국의 안보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 그가 내뿜는 왕조 식의 방자한 권력 욕심과 대한민국 적화(赤化) 야욕은 그칠 줄 몰랐다. 그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했던 우리 군대가 지닌 ‘성역(聖域)’으로서의 의미를 그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불과 30년 전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을 겪은 나로서는 말이다.
군의 정치개입은 5.16만으로 충분했다
내 짧은 소견으로 보자면, 대한민국 군대의 역사에서 군인의 정치적 개입은 5·16 한 번으로 충분했다. 4·19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무너진 뒤 우리에게 닥쳤던 것은 매우 심각한 혼란이었다. 정부는 무능했고, 자유당 말기에 발호했던 인사들도 주눅 들지 않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부패와 무능의 정권을 몰아낸 대학생들의 순수한 뜻은 4·19 직전까지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불과 10년 전에 한반도를 동족상잔의 참극으로 몰아넣었던 북한 김일성 정권을 낭만적 시각으로 보는 우를 범하면서 도를 넘어서고 말았다. 모든 게 혼란의 연속이었다.
/ 1961년 6월 29일 이임 퇴역하는 전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장군이 한국을 떠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박정희 부의장을 만났다.
박정희 소장이 나서지 않았다면 혼란스러웠던 정치는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았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에 앞서 ‘거사’를 꿈 꿨던 군인들이 있었다. 겉으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4·19에 뛰어든 대학생과 시민들의 분위기에 편승하면서 노골적으로 권력을 바라보던 정치적 군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동태에도 관찰을 멈출 수 없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은 카터 매그루더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극도의 혼란기에 빠지던 4·19에 이어, 군정이 들어서던 5·16까지 격동의 세월을 지켜보던 미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는 ‘야전’이라는 항목이 빠져 있었다. 거친 전쟁터를 사납게 오간 야전의 맹장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는 보급전문가였다.
나는 4·19 와중에 그를 남산의 내 사무실로 오게 해 의견을 전달한 적이 있다. 사무실에 찾아온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정치에 노골적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군의 움직임이 분명히 있다. 이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단단히 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가 나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이력 탓인지는 몰라도, 위기시 재빨리 상대를 제압하는 단호함은 그에게 기대할 수 없었다. 군은 4·19 이전과 이후에도 역시 정치적 행보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통제할 어떤 권력의 중추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이 이끈 5·16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권력 자체를 손에 거머쥘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와중에서는 누구라도 군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만큼씩은 예견할 수 있었다. 혼란의 상황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힘이 가장 비밀스럽게 뭉쳐져 있는 곳, 즉 군대에 시선을 돌리게 마련이다. 군은 그런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결국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일부 그룹이 거사에 나섰던 것이다.
/ 1995년 10월, 12·12 및 5·18사건 관련 첫 공판에 출정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서 타고온 호송차량에서 내려 서울지법 구치감으로 향하고 있다./김진평 기자
그에 비해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생겨난 공백이 군의 개입을 부를 만큼 혼란스러웠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 젓는다. 박 대통령의 산업화 추진으로 경제적으로는 이미 토대를 닦은 대한민국이었고, 그의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 속에 관료의 힘도 크게 성장한 대한민국이었다. 정치권 또한 유신시절의 시련기를 거치면서도 4·19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량을 키운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하나회 출신 장성들이 정치 일선에 나섰다. 12·12에 이어 이듬해 5·18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5공화국이 출범하고 말았다. 한국 정치사의 역정을 여기서 다 회고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출범하고 난 뒤 나름대로 결실을 맺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대, 국가의 간성으로 작용해야 할 대한민국 군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5)12·12 직후, 전두환 소장의 저녁 초대에 갔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일 때 육사생도였던 그사람, 전두환….
(1) 군은 어떤 존재인가
낯선 후배 전두환, 그와의 어색한 만남
1979년의 해도 어느덧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10·26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 뒤로 정국은 잠잠한 가운데 그 무엇인가가 머지않아 닥치리라는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12·12 사태’였다.
그로부터 1주일이 흘렀던 모양이다.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맡고 있던 내게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12·12사태의 주역인 전두환 소장이 초청한 자리였다. 나는 이미 1960년 옷을 벗고 군문을 떠난 신분이었으나, 그들이 나를 우리 군의 창군 멤버로 전쟁까지 겪은 원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인근에 있던 한식집으로 기억한다. 나와 군 원로 몇 사람이 초청 대상이었다. 내가 가장 선임이었고, 후배이자 전선을 함께 오갔던 원로 후배들 셋이 함께 참석했다. 12·12의 주역이자 당시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던 전두환 소장은 우리 군 원로들을 초청해 자신들이 벌인 사건의 배경을 알리고자 했다.
/ 1979년 10월28일 오후4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결과에 관해 중간발표를 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그와는 사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전 소장은 육사 11기로 군문에 들어선 인물이다. 그가 육사에서 사관생도로 교육을 받고 있을 무렵, 나는 이미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있었다. 한참 차이가 나는 터라 그와는 만날 인연이 전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풍문으로는 그의 됨됨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차분하며 정중하게 왜 12.12 사태를 벌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을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혼란한 정국에 대처해야 한다는 게 전두환 소장과 12·12사태 거사를 이끈 그룹이 내건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정작 정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위기는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설명에 화답하는 동료 원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주고받는 덕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다. ‘또 군이 정치에 나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짓는 불쾌한 표정이 그의 예민한 정치적 촉각을 비켜 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조금 서글펐다. 자리에 동석했던 후배 원로 둘은 한참이나 아래인 전두환 소장의 행위를 칭찬했다. 그의 거사를 “아주 잘 한 일”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고, 그가 12·12의 타당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마음에 없을지도 모를 추임새를 넣으며 그에 화답했다.
식사 시간은 거의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일반적인 식사 자리에 비해서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내게는 매우 길게 느껴졌다. 어느덧 식사를 마칠 시간이 왔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 자리를 털고 나왔다. 동석자 중 한 사람은 김성은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한 후배다.
/전직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원로들이 2006년 10월 12일 서울 송파구 향군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핵 실험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에 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논의를 재검토할것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한 가운데, 김성은 전장관(오른쪽)이 모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조인원 기자
그 또한 식사자리가 매우 거북했던 모양이었다. 식당을 나서면서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상황의 여러 세부적인 모습은 달랐으나, 나는 내가 몸소 겪었던 4·19 정국의 어두웠던 풍경을 기억 저 멀리서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군은 정국의 혼란기를 타고서 어느덧 다시 몸을 정치의 한복판에 깊숙이 들이밀고 있었다.
전쟁의 교훈을 잊었던 우리
이듬해인 1980년의 봄은 예상대로 시끄러웠다. 급기야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유혈의 참극마저 빚어졌다. 군이 손에 쥔 병기, 그런 흉(凶)함이 다시 무서움을 드러냈던 것이다. 군사의 병기가 적(敵)이 다가서는 바깥을 향하지 않고, 우리 내부의 어느 누군가를 겨눈다면 반드시 무의미한 폭력과 희생을 부르고 만다.
그 이후의 정국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후 들어선 정부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나중의 역사가들이 엄정하게 다룰 일이다. 내가 당시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을 언급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일 뿐이다.
단 한 가지, 내 소견을 덧붙일 게 있다. 군(軍)을 떠난 민(民)이 있을 수 없고, 민을 떠나 군이 바로 설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국가의 간성(干城)인 군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도 민이다. 그러나 민간의 일각에서도 문제는 늘 벌어지게 마련이다. 군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군이 지닌 무기는 살상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군이 병을 움직일 때는 태산(泰山)과 같은 신중함을 지녀야 한다.
나는 6·25 때 김일성의 야욕에 맞서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내부에 숨어 있던 적,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등을 토벌했다. 아울러 무수한 대민(對民) 작전을 벌인 경험도 있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쌓였던 것은 아니다. 전쟁을 치른 우리 대한민국 군대의 공통적인 체험이었다.
그럼에도 그해 봄, 우리가 어쩌면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했을 수도 있었을 상황에서 결국 피가 번지고 말았다. 혹심했던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적과 싸우며 쌓았던 우리 군의 경험적 토대가 송두리째 버려진 게 아니었을까. 지금도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전쟁은 한 민족이 품고 살아야 하는 가장 참혹한 기억이다. 우리는 그런 기억을 늘 헤집어 보면서 교훈을 살려야 한다. 그 ‘민족의 경험’, 6·25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되살려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전쟁을 잊었다. 적어도, 1980년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 들었다. 전쟁은 참담한 기억이지만, 그의 교훈을 되살리느냐의 여부가 어쩌면 그 민족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부인 이순자(가운데) 씨가 1995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예불을 올리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전쟁을 잘 알까
여담 하나 붙이자. 전두환 소장이 12·12 직후 초청했던 식사자리에서 나와 함께 침묵으로 일관했던 김성은 전 국방장관과의 이야기다. 우리 둘은 그 때 전두환 소장의 설명에 화답하며 성원까지 보냈던 나머지 두 동료가 그 후 ‘잘 나가는’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 전두환 대통령이 이끄는 5공화국 정부의 지극히 높은 위치에 올라선 그 둘을 보면서 후배 김성은은 내게 이런 농담을 던지곤 했다.
“형님, 우리는 아무래도 낙제생 아니겠습니까? 그 때 전두환 소장한테 덕담이라도 건넸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몰라요….” 그는 농담조로 그런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 나는 “실없는 소리 말라”며 핀잔했고, 둘은 결국 허허로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도 ‘잘 나가는 군인’이었다. 32세에 한국 최초의 별 넷 대장을 달았으니까 그렇다. 40만 병력의 1야전군을 창설해 이끌면서 한국군 전력 증강을 이끌었던 점도 자랑스럽다. 그렇다면 나는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군인이었던가. 그렇지만은 않았다.
내가 1957년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직을 맡았을 때다. 나는 모든 군무(軍務)가 귀찮아진 적이 있다. 군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인사가 정치권의 개입으로 비뚤어졌다. 부하 장성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서대문의 제2 권력자 이기붕 의장의 말을 더 들었다. 일부는 노골적인 정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개월 동안 6·25전쟁 참전 16개 우방국을 순회하는 일정이었다. 나는 내 어깨에 단 별의 무게만큼, 아니 그보다 더 일을 부지런히 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게 병사(兵事)다. 이어지는 변수에 대응하며 아울러 그런 다양한 변수가 빚어내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게 군사(軍事)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6·25전쟁 이후 쉰 적이 별로 없다.
그런 내가 비행기에 몸을 싣고 두 달 여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는 당시 마음이 울적했다. ‘우리는 벌써 전쟁을 잊었는가…’. 내 마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아주 강한 그 의문 때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 때 이미 전쟁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 초입에 내가 마주쳤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우리는 전쟁의 기억을 제대로 복원하며 그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살리고 있을까. 역시 그 점이 미덥지 않다. 우리는 어쩌면 그 잊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시작한 게 이 연재다. 이제 그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직접 넘어가 보자
(6) "중공군이 공격해오면 밥 먹던 국군은 숟가락 던지고 도망쳤다"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은 실제 이순신 모습 아닐 것
(2) 중공군과의 전쟁
소설『칼의 노래』를 읽으며
조선 500년, 아니 어쩌면 한반도가 유사 이래 맞은 전쟁터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를 꼽으라면 이순신 장군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훌륭한 장수, 즉 명장(名將)이라는 말로도 싸움터에서 거둔 그 전과를 형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부는 이순신 장군을 성장(聖將)으로도 적는다.
이순신 장군의 당시 싸움 모습을 그린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칼의 노래』라는 이름의 작품이다. 한 때 우리 사회의 중장년 남성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소설이다. 나도 그런 책의 명성 때문에 직접 읽었다. 작가의 심리적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긴박감 있게 구성한 솜씨도 아주 빼어났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슬며시 웃음을 지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작가가 소설에서 장군의 심리를 묘사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죽음 앞에 선 장수의 심리를 작가는 바람과 칼, 떨림, 두려움과 불안 등으로 그렸다. 충분히 그러리라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 뛰어난 작가가 실제로는 전쟁을 겪지 않았구나,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다가오는 적에 맞선 적은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2009년 전남‘명량대첩축제’를 맞아 진도대교 근처 울돌목에서 특수효과를 동원해 명량해전이 재연되는 모습.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133척의 왜군과 맞서 싸워 1척의 배도 잃지 않고 이겼다.
비록 적의 위협은 상존하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평화를 구가하는 요즘의 우리 군대 장군들도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다. 지금 사회를 이끄는 세대 모두 그런 전쟁을 밑바닥에서 체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그런 전쟁의 직접적인 경험을 요구하면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칼의 노래』가 그 빼어난 문장과 뛰어난 구성으로 우리 사회의 많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그런 점이 보였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전쟁터의 장군과 실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에 선 장군은 매우 다르다는 점 말이다.
실제 전쟁터에 선 장군은 사실이지,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그 나머지의 여러 사념(思念)들에 휩싸일 여유가 없다. 그만큼 바쁘고 분주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상상을 펼치면서 불안감에 싸이는 장수가 이끄는 군대라면, 그 군대는 적 앞에 제대로 나서서 싸울 수가 없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처럼 모든 전투에서 이긴 경우라면 그 전승(全勝)의 비결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
장수의 승패
장수는 외로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외로움에 더해 죽음마저 떠올리며 내 안의 불안을 반추하거나 사색할 여지는 더욱 없다. 작가의 상상력이 빛을 낸 대목이기는 하지만, 격렬하면서 참혹했던 전선을 직접 이끌었던 내게는 그런 점이 ‘옥에 티’로 보였다. 전쟁에 나선 장수는 어떻게 보면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앞에 둔 외과 의사와 흡사하다.
피가 쏟아져 나오는 곳을 우선 막고, 그 상처의 뿌리를 찾아 약을 넣고, 흘러넘치다 맺힌 곳에 부종(浮腫)이라도 생기면 그를 가라앉혀야 한다. 곪은 곳은 째고, 터진 곳은 꿰매며, 무너진 곳은 일으켜 세우고, 헤진 곳은 조심스레 어루만져야 한다.
/대동강 다리에서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평양 탈환작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
전선은 줄곧 요동친다. 싸움이 붙을 때의 그 격렬함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싸움 속의 장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전선을 떠받쳐야 한다. 전선이 요동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식량을 챙기고, 무기를 점검하며, 병력의 보충을 생각해야 한다. 전선으로부터 나아갈 때를 상정하고, 후퇴를 대비해 방어선을 살펴야 한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 빼면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 시간을 쪼개서 수많은 업무를 챙겨야 한다. 그나마 이는 일상(日常)이라는 단어에 묶이는 작업들이다. 전세(戰勢)를 살펴 전략과 전술을 가다듬는 일은 늘 머릿속을 오가는 주제들이다. 날씨는 어떨까, 전선의 지형은 우리에게 유리할까, 예하 부대의 지휘관들은 연락 체계를 잘 운용하고 있을까, 전황 보고서에 거짓은 없었을까…. 이런 문제가 숱하게 이어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적정(敵情)의 문제다. 적의 동태와 보급 및 무장 상황, 그들 머리 위로 뻗은 구름, 적 장병이 입고 있는 복장도 전선의 장수가 늘 살펴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주시하면서도 전선의 장수는 예기치 않은 변수에 늘 대응해야 한다. 수많은 병력이 집결해 있는 상황이라면 어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아군의 요소에 적군의 요소를 더해 모두 고려하고,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려면 전선의 지휘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정상이다. 일과가 끝난 뒤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에 그런 삶과 죽음, 불안과 희망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지만 그나마 피곤에 절어 군화를 신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게 정상이리라.
/평양 탈환을 목전에 두고 탈환작전을 최종 검토하는 백선엽 준장(오른쪽)과 미 제1기갑사단장 게이 소장.
승장(勝將)과 패장(敗將)-. 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승장이고, 그 반대의 경우가 패장이다. 그렇듯 가혹한 싸움이 벌어진 뒤 승과 패로 갈리는 전쟁의 마지막 책임은 장수에게 있다. 그래서 승리가 장수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이고, 패배는 반대로 장수에게 씻을 수 없는 오욕이다. 그래서 장수는 싸움에서 이기려 절치부심(切齒腐心)을 반복한다.
1953년의 중공군
돌이켜 보면,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참혹한 6.25전쟁은 사실 중공군과의 싸움이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김일성의 군대가 적화의 야욕으로 38선을 넘은 것도 사실이고, 우리를 낙동강 전선의 막바지 보루에 몰아넣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전 초 3개월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 김일성의 군대는 중공군의 ‘향도(嚮導)’에 불과했다. 한반도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리는 핵심 영역인 부산과 서울, 이어 다시 평양과 신의주로 이어지는 축선에서 그들은 사라졌다. 대신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일부 중공군의 공격로 앞에서 방향을 안내하는 향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개전 초 3개월이 지난 뒤 우리의 진정한 싸움 대상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진출한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강했다. 화력에서는 대한민국 군대를 돕기 위해 이 땅에 올라선 미군과 유엔군에 미치지 못했지만 내전과 항일전쟁의 10년에 걸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술을 펼치며 다가서던 군대였다.
그들과의 싸움은 격렬했다. 미군과 유엔군에 비해 대한민국 군대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착잡하기만 했다. 대규모의 전투에서 그들을 꺾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국군은 사실 그들의 우회와 매복, 기습과 야습 등의 현란한 전술 때문에 기록적인 패배에 직면하곤 했다. 실제 군단 전체가 무너지는 참패를 두 번이나 당했다.
/중공군 지휘관이 육박전이 벌어지기 직전 날라리를 불며 돌격을 명령하고 있다.
그들과의 싸움을 다시 회고해보자. 우선 휴전을 눈앞에 둔 1953년의 초여름이었다. 잠깐 찾아왔던 봄이 여름으로 바뀌던 무렵이었다. 5월에 들어서 강원도를 비롯한 중부의 산간 지역은 해토기(解土期)에 접어들었다.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흙이 물러지는 무렵이었다. 그러다가 땅이 조금이라도 굳어지면 군사의 기동이 가능해진다.
그들이 노리는 먹잇감은 늘 국군이었다. 미군은 화력이 강했고, 중공군에게는 부족한 막강한 공군력이 있었다. 유엔군 또한 그런 미군의 옆에서 강력한 전력을 발휘하던 군대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중공군 개입 이후 국군은 그들에게는 늘 허약한 상대였다. 자주 궁지에 몰렸고, 초반에 힘겹게 버티다가 공세를 지속한 중공군에게 등을 보이며 쫓겼던 군대였다.
해토기를 지나 땅이 굳어질 무렵인 1953년 5월 중공군이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여긴 국군의 전면에 다시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어 6월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병력을 더 집중해 국군의 전면을 압박하고 있었다. 장소는 중부 전선인 강원도 금성 돌출부였다. 1951년 봄 중공군 초기 공세 때 역습을 시도해 전선을 밀고 올라간 적이 있던 곳이었다.
북한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그 중간을 금성천이 동서로 지나는 지역이었다. 1951년 때의 역습으로 길이 30여㎞, 종심의 깊이가 10㎞에 이르는 지역이 옆의 전선에 비해 북쪽으로 솟아 있어 ‘금성 돌출부’로 불렀던 곳이다. 그곳에 다시 중공군의 대규모 부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대구의 육군본부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공군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할 수 없었다. 휴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 중 가장 민감한 현안으로 꼽혔던 반공(反共) 포로 석방 문제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국군을 다시 노리고 덤볐다. 6월 10일이었다. 금성 돌출부 전면을 기습적으로 때리기 시작한 중공군은 여느 때처럼 캄캄한 야밤에, 강렬한 사전 포격을 벌이며 기습을 벌였다. 빈틈을 노리고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중공군은 이번에도 작전에 성공하는 듯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시의 전쟁터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중공군이 공격해 오면 밥을 먹던 국군이 숟가락을 던지고 도망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도 처음에는 그랬다. 국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전선의 부대는 빠른 속도로 전면을 내준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7) 어느 하사의 분노 "나는 60년째 달아난 분대장을 찾고 있다"
2) 중공군과의 전쟁
새카맣게 몰려든 중공군
중공군은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데 명수였다. 5월의 해토기 뒤 병력을 움직여 이곳저곳을 탐색하는가 싶더니 아군의 허점을 제대로 짚어 그곳으로 기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전선은 크게 요동쳤다. 국군 2군단이 그곳을 막아서는 주력이었다. 사령관은 정일권 군단장이었다. 적은 아군의 깊은 곳까지 진출했다. 13㎞에 달하는 전선에서 4㎞를 밀고 내려왔다. 와해라고 할 수는 없었어도, 상황이 심각했다.
6월10일의 중공군 공세는 1주일 이어지다가 멈췄다. 그보다 더 기록적인 중공군의 공격은 한 달 여 뒤 다시 벌어졌다. 우리 전사(戰史)에서 ‘중공군의 최후 공세’ 또는 ‘7·13 전투’로 기록하는 싸움이다. 1953년의 6월10일 벌인 공세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큰 중공군의 공격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행렬. 1951년 1.4후퇴는 6.25 발발 직후의 피난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혹한 속에서 훨씬 먼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해 7월13일 시작한 중공군의 최후 공세 때 그 전선 가장 앞에 섰던 노병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그의 이름은 권길성, 현재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85세의 전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당시 전장에서 도망쳤던 분대장을 60년동안 찾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사연은 이렇다. 1953년 7월13일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그는 금성돌출부의 왼쪽 어깨 쪽, 즉 좌견부(左肩部)를 맡고 있는 국군 6사단 19연대 2대대 7중대 로켓포 사수였다. 장마철이라 두터운 구름이 낮게 깔려 아주 어두웠던 밤, 최전선 사주방어(四周防禦)형 고지의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그에게 후방의 소대본부 전령이 다가왔다. 전령은 “적이 막 공격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진지에서 사병들이 잠을 자도록 만들었던 취침호(就寢壕) 속 대원들을 모두 깨워 전투 위치에 서도록 했다.
이어 적의 포성이 주변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고지의 안팎은 격전장으로 변했다. 고지의 뒤쪽에 있던 권길성 하사는 계속 앞으로 이동했다. 고지 전면에서 죽어가는 동료가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 때 “더 앞으로 나가라”며 권 하사의 등을 떼밀었다. 분대장이었다. 그는 권 하사의 카빈총을 달라고 하더니 “지원 병력을 이끌고 돌아올 테니 싸우고 있어라”면서 고지를 빠져나갔다. 기관포 탄통에 담긴 수류탄 10여 발을 통째로 들고 어둠 속으로 기어갔다.
/금성전투 참전 용사 권길성옹.
8권 하사는 고지에서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후방으로 빠졌던 분대장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호 속의 아군은 거의 사망한 듯했다. 뚜껑이 있는 참호, 유개호(有蓋壕) 형태의 진지는 아주 캄캄했다. 포탄이 작렬하면서 생기는 섬광이 번뜩일 때 그는 참호 구멍 밖에 매달린 중공군의 얼굴을 봤다. 그 중공군은 캄캄한 참호 안쪽을 볼 수 없었다. 수류탄을 굴려 그와 주변의 중공군을 폭살(爆殺)했다.
내 손으로 죽인 신병
참호 안쪽에 이미 들어선 중공군이 눈에 들어왔다. 급한 나머지 수류탄을 들어 그의 얼굴을 찍었다. 상대가 넘어졌다. 그리고 옷 안에 수류탄을 밀어 넣었다. 이어 그는 진지가 적에게 모두 점령됐다고 판단했다. 진지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기관총 사수의 총소리도 멎었기 때문이다.
진지 뒤쪽으로 돌아 나오던 그의 앞에 누군가가 움직였다. 마침 그 뒤로 포탄의 섬광이 번쩍였다. 섬광에 비친 상대의 모습은 ‘까까머리’였다. 당시 국군 장병은 대개가 긴 머리였고, 적인 중공군의 머리는 바짝 깎은 상태였다. 권 하사는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쾅’하는 요란한 폭발음 뒤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 2010년 5월 26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지평역 인근에서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육군 7군단 추최로 프랑스. 미국 참전용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지평리전투 재현행사'가 열렸다. 각각 연합군과 중공군 역할을 담당한 7군단 예하 20사단 장병들이 전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중공군을 또 하나 쓰러뜨렸다고 여긴 권 하사는 그의 품으로부터 ‘따발총’이라도 빼앗아 진지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엎어진 상대를 돌아 눕혔다. 순간 그의 입으로부터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아…살려줘….”
“…, ….”
권 하사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폭탄을 던져 쓰러뜨린 사람은 훈련소에서 막 전입했던 무반동포 탄약수 ‘엄 일병’이었다. 엄 일병은 곧 숨을 거뒀다. 그리고 권 하사는 무사히 진지를 빠져나와 후방의 소대와 합류했다. “싸우고 있어라”고 했던 그 분대장은 훈장을 탔다고 한다.
권 하사, 이제 90을 바라보는 노년의 권길성씨는 엄 일병과 그 분대장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하나에 대해서는 죄책감, 다른 하나에 대해서는 분노 때문이다. 권길성씨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엄 일병의 유해를 직접 수습하는 일, 그리고 도망친 분대장을 찾아 죄를 묻는 일을 여생의 마지막 바람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나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7월13일 오후 9시 30만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 공세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튿날인 14일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오후 4시쯤 서울 동숭동의 미8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에게 “전선이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테일러 사령관은 “아직은 괜찮다. 좀 지켜보자”고 했다.
15일 새벽 1시 경이었다. 총장 관사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내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테일러 사령관이었다. 그는 “백 장군, 당신이 나가줘야겠소”라며 “전용기를 대구로 보낼 테니 곧장 전선으로 가 달라”고 했다. 그가 보낸 대형 전용기 C-47을 타고 나는 여의도로 비행했고, 이어 지프로 서울~춘천 국도를 달려 아침 8시 경에 금성돌출부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2군단의 소토고미 사령부에 도착했다.
일선에 선 육군참모총장
권길성씨가 고립된 채 진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간신히 빠져나와 숨을 돌리며 후퇴를 거듭하던 무렵에 나 또한 그와 함께 전선에 섰던 셈이다. 당시의 내가 최전선 진지를 지키던 권 하사의 사정을 들었을 리 없다. 그로부터 57년 뒤 나는 회고록을 적으면서 그의 사연을 처음 알 수 있었다.
/유엔군측 대표들. 1951년 7월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유엔군측 대표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데스 소장.
중공군은 6·25전쟁 중 2년 8개월 동안 내내 국군의 ‘악몽’이었다. 그들이 다가오는 상황에 접하면 국군은 대개 겁을 먼저 집어먹고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내용이다. 그렇듯 중공군은 국군을 얕잡아봤고, 국군의 방어지역을 집중적으로 골라서 공격을 펼치는 군대였다. 그 점에서 이 금성돌출부를 두고 벌인 중공군과의 싸움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로부터 10여 일 뒤인 7월27일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따라서 금성돌출부 전투에서마저 중공군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면, 국군은 6·25전쟁 내내 우리를 짓눌렀던 중공군의 그림자를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용문산 전투 등에서 중공군에게 승리한 경우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우리는 중공군에 맞서 싸워 이긴 적이 별로 없다. 이 때문에 휴전 직전에 다시 중공군에 크게 패전한다면 우리는 줄곧 큰 심리적 상처를 안아야 했다는 얘기다.
금성돌출부를 공격했던 중공군의 초기 공세는 대단했다. 앞에 적은 권길성씨의 체험에서 알 수 있듯이, 30여㎞에 달하는 국군의 전선은 중공군의 격렬한 포격, 빈틈이 없어 보였던 현란한 기만(欺滿) 전술, 우회와 기습의 다양한 변조(變調)로 일거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권길성씨가 겪은 참담함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국방부가 펴낸 전사(戰史)는 당시의 초기 중공군 공세를 ‘봇물이 터지듯 밀고 내려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공군은 일선의 국군 진지를 몇 십분 만에 돌파했다. 이어 공격 요로(要路)를 제대로 잡은 뒤 국군의 중대와 대대, 나아가 연대 본부까지 침투했다.
7월13일의 공격이 있기 한 달 전에 벌어진 중공군의 6월10일 공세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중공군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국군의 한 대대본부에서 대대장을 비롯한 장교들이 포위를 당하자 마지막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항전의 의지를 다졌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해질 정도로 유명하다.
문제는 그 짧은 시간에 소대와 중대의 저지선을 넘어 대대까지 중공군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근접전에 유리한 ‘따발총’으로 무장했고, 휴전 막바지에 국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김으로써 6.25전쟁 자체를 자신이 승리한 전쟁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막대한 화력을 투입했다. 그래서 국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거에 전선의 대부분을 내주고 후방의 대대와 연대가 중공군 총 끝에 놓였던 상황을 어찌 봐야 할까. 애국가를 부르면서 마지막 항전에 나섰던 국군 장병의 용기는 물론 대단히 훌륭하다. 그러나 전선의 적으로 하여금 일거에 전투 지휘본부까지 내닫게 내버려두는, 6·25전쟁 내내 노출했던 우리의 약점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7월15일 아침 금성돌출부 전투를 지휘하는 2군단에 내가 도착하던 무렵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8) 승승장구하던 정일권, 중공군 공세에 무너지며 "여긴 내가 있을 곳 아닌가…."
고립 상황에서 아군에 대한 믿음 없으면 전선은 무너진다
'프로' 중공군 VS '농민군' 국군, 좁혀지지 않는 싸움의 격차
집요한 싸움꾼 중공군
중공군은 ‘프로’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군대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홍군(紅軍)에 속해 내전을 벌였으며, 그 전에는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항일 전쟁을 펼쳤던 장병들이다. 따라서 싸움에는 이골이 나 있던 군대였다.
그에 비하면 국군은 ‘아마추어’였다. 대한민국 건국 2년도 지나지 않아 맞이한 김일성의 남침에 주섬주섬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나와 싸움에 뛰어 든 상태였다. 전쟁 초기에는 조직도,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농민군(農民軍)’의 수준이었다면 과한 말일까.
그나마 전쟁 기간 3년을 거치면서 국군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적이 밀려와도 제 자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싸우려는 의지를 보였고, 중공군만 보면 도망치던 허약함도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깊이 남아 있는 약점이 있었다. 늘 ‘고질(痼疾)’이라 지적할 수밖에 없었던 증상이 하나 있었다. 고립(孤立)의 상황에 다가설 때다. 앞 회에서 소개한 권길성씨의 사례도 그 하나다. 적을 맞이해 싸우다가 상황이 불리해져 제가 고립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접어드는 상황이 문제였다. 이 경우 국군과 국군 사이에는 신뢰와 유대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중공 정규군 침입' 보도한 조선일보 50년 12월11일자.
‘내가 고립되더라도 아군이 언젠가는 와서 나를 구해준다’는 믿음이 있는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는 달라도 아주 다르다. 두 군대가 보이는 전력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아군끼리의 그런 신뢰가 만들어진 경우 그 군대의 장병은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선다. 그렇지 않은 군대는 고립의 상황에 닥칠 때 정신없이 후퇴하며 흩어진다.
중공군은 아군의 3배 이상에 달하는 병력으로 당시 금성 돌출부의 좌견부(左肩部)와 우견부(右肩部)를 밀고 내려왔고, 아군의 초기 저항에 직면해서도 압도적인 병력으로 같은 곳을 거듭 세차게 때리며 치고 들어왔다. 역시 국군의 고질적인 병증이 다시 도진 형국이었다. 한 번 밀리면서 중공군의 포위에 말려들자 국군은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7월14일 대구의 육군본부에 앉아서 파악했던 내용은 아군이 벌써 10여 ㎞에 달하는 금성 돌출부 종심을 모두 내주고 금성천 너머의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심각했다. 중공군은 금성천 남쪽을 더 치고 내려와 그로부터 한참 떨어진 화천저수지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곳은 남한의 유일한 수력 댐이었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는 등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나팔과 피리를 불며 공격 신호를 하고 있는 중공군.
화천저수지를 넘본 중공군
금성 돌출부에 이어 화천저수지까지 내줄 경우 그 전 3년 동안 벌였던 전쟁의 최종 승리자는 중공군으로 변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이승만 대통령이 6월18일 전격적으로 감행한 반공포로 석방에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보다는 눈앞에 닥친 휴전 상황에서 최후의 공세를 벌여 3년 동안의 전쟁을 자신의 승리로 선전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 그 마지막 공세가 펼쳐지던 곳이 바로 금성 돌출부였고, 그들의 밀물과 같은 공세 때문에 금성천 이남의 화천저수지도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긴급 요청으로 15일 새벽 3시 경 대구 비행장을 출발해 여의도에 내린 뒤 마중 나온 지프차를 갈아타고서 부리나케 2군단 사령부가 있던 소토고미에 도착했다. 아침 8시 경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이 전선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2군단 간부들이 대거 마중을 나와 있었다.
먼저 2군단장 정일권 중장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나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지역은 달랐지만 만주에서 군관학교를 다녔고, 졸업 뒤에도 여러 차례 만났으며, 해방정국에서는 평양에서 함께 지냈던 사이였다. 1917년생인 그를 나는 형으로 불렀고, 정 장군 또한 나를 살갑게 대했다.
/백선엽 소장과 정일권 중장.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던 사이였으나 이후 백선엽이 정일권을 앞질러 처음으로 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나와 함께 군사영어학교를 수료한 창군 멤버이기도 했다. 정일권 장군은 창군 멤버 중에서도 매우 화려한 이력을 보였던 사람이다. 그는 만주군관학교를 다니다가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 육사 과정을 수료했고, 이어 엘리트만이 입교할 수 있는 고등군사학교를 나왔다. 고등군사학교는 일본 군부의 엘리트 양성소인 육군대학과 같은 교과과정을 이수하는 곳으로, 한국인 중에서는 정일권 장군이 유일하게 그곳을 다녔다.
국군 장성 중에 일본 육사를 졸업한 사람이 꽤 많은 편이지만, 정 장군처럼 최고위 일본 장교 양성 과정을 거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창군 초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그 또한 타고난 총명함과 빼어난 사교 능력 덕분에 그런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했다. 특히 건국 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다. 그는 우선 미남자였다. 잘 생긴 외모에 부드럽고 편안한 화술이 돋보였고, 빼어난 매너와 영어 실력 때문에 미군도 그를 신뢰했다.
김일성이 전격 남침한 전쟁의 초기에 그는 낙동강 전선을 지휘했다.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던 터라, 그의 활약은 상당히 빛을 발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을 때 그는 계급은 소장, 직위는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개전 초 가장 승승장구하던 한국군 장성이었다. 그러나 그 뒤 정 장군은 주춤했다.
그가 소장일 때 대령에 불과하던 나는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를 앞질러 한국군 최초의 대장 계급을 달았고, 1953년 7월 중공군의 금성 돌출부 공격 때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2군단장인 그를 지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계급과 직위가 앞선다고 옛정을 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소토고미 2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뒤 차에서 내리자마자 영접 대열의 앞에 서있던 정일권 장군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형님, 이제 마무리를 잘 해야 합니다. 힘을 내서 중공군을 막아야 할 상황입니다. 이제 내가 왔습니다.”
/인해전술로 달려 오는 중공군에게 맹사격으로 응하고 있는 기관총 사수.
패한 장수의 뒷모습
그러나 정일권 장군은 내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적의 공세에 무참하게 무너진 심리적 부담감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 동생. 잘 왔어, 고열이 심해서….” “좀 쉬십시오. 제가 전선을 맡겠습니다. 어서 들어가 쉬세요.”
내 말을 들은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이네. 그냥 나가서 지사(知事)라도 할까, 아무래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정말 힘이 없어 보였다. 평소 활달하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 마음을 잘 알았다. 다른 무엇보다 위로만이 그에게 필요했다.
“그런 약한 마음 잡숫지 마시고, 그냥 들어가 쉬십시오. 어서 들어가세요.”
2군단 지휘본부가 있는 막사로 그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 나는 군단 참모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바로 전황을 챙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금성돌출부 북방 지역 진지에서 땅굴을 파는 중공군. 미군의 막강한 공습을 피하기 위해 중공군을 기를 쓰고 땅굴을 팠다.
당시에는 무너진 전선을 수습하느라 정일권 장군의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패전을 기록한 장수의 마음 말이다. 그것은 이루 다 말로써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에 다름 아니다. 몸이 무너지고, 마음까지 무너진다. 혼절하는 일도 예사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다. 나 또한 평양 이북의 영변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 심리를 잘 알고 있다.
아울러 장수의 능력은 패배해서 적에게 밀릴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공세(攻勢)에 올라타 적의 뒤를 쫓을 때 장수의 능력은 별반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적에게 밀릴 때는 상황이 다르다. 훈련과 경험을 쌓고, 후퇴를 예상하면서 많은 준비를 한 장수와 그렇지 않은 장수는 역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낸다.
당시의 정일권 장군은 아쉽게도 야전에서 쌓은 경험이 매우 부족했다. 낙동강 전선을 지휘했지만 야전의 맹렬한 싸움터는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참모 스타일의 군인이었다. 후방에서 싸움을 관리하며 최고 지휘관에게 전황 파악을 위해 자료를 올리는 그런 참모형 군인이었다.
그만의 경우는 결코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 군대의 지휘관은 그런 경험과 자질을 쌓고 닦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창졸간에 밀어닥친 김일성의 군대를 맞아 정말 정신없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온 ‘농민군’처럼 싸움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국군을 먹기 좋은 먹잇감으로 여기며 늘 다가서던 존재가 중공군이었다.
여기서 다시 밀려 화천저수지까지 내준다면 우리는 중공군으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씻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한반도가 대륙의 군대에 늘 밀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역사를 떠올릴 여유는 없었지만, 나는 다시 중공군에 밀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9)육군참모총장 신분으로 다시 전선에 서다
부사단장과 연대장도 적의 총구 앞에
부사단장이 중공군의 기습 부대에 붙잡혔다. 연대장 한 사람은 전선을 깊숙이 뚫고 들어온 중공군 부대의 사격에 사망했다. 대대장 역시 중공군 습격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전선을 맡고 있던 국군 수도사단의 피해 상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부사단장은 사단장 바로 밑의 지휘관이다. 중공군 공격 부대가 공격을 벌여 사단 본부 근처까지 내달아 결국 최고 지휘관 급인 아군의 부사단장을 체포한 일은 충격적이었다. 일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그 상위(上位)의 전술 차원을 이어주는 곳이 연대다. 그 연대의 지휘관인 연대장이 적의 사격에 몸을 드러내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는 점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2군단의 본부인 소토고미에 도착해 전선의 피해상황을 파악하면서 이런 여러 충격적인 소식들을 접했다. 급격한 와해의 조짐이었다. 중공군은 ‘악몽’처럼 다가와 또 한 번의 ‘악몽’으로 기억에 자리 잡을까. 휴전은 눈앞에 닥친 상태였으나 그런 중공군의 공세에 다시 좌절한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압록강 다리를 건너 한반도로 진군하는 중공군.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은 팽덕희를 사령관으로 한 지원군을 한반도에 파병한다.
한국군의 작전을 직접 지휘하고 있던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의 초조감도 매우 깊었다. 이 상징적인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에 꺾인다면 그 또한 자신이 쌓아왔던 장군으로서의 화려한 이력에 커다란 오점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3년 동안 벌어진 6.25전쟁의 막바지에 결정적인 패전을 기록한 지휘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그의 초조감은 결국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인 나로 하여금 일선의 지휘봉을 쥐게끔 했다. 그와 더불어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은 2군단의 와해를 막기 위해 ‘행잉 샘(Hanging Sam)’을 국군 2군단의 부군단장으로 급파했다. 이 ‘행잉 샘’이라는 인물은 독특한 장군이었다. 사병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각 전장을 누비며 승승장구해 장군의 계급까지 단 사람이었다. ‘행잉 샘’은 물론 그의 별명이다. 당시 그는 미 25사단을 이끌고 있었다.
본명이 사무엘 윌리엄스(Samuel T. Williams)인 그에게 ‘행잉 샘’의 별명을 붙인 이유가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戰犯)들을 수용했던 뉘른베르크 수용소의 소장을 지냈다. 전범에게 단호한 자세를 취하면서 얻은 별명이다. 전범들에게 그는 ‘목을 매다는(hanging)’ 역할을 했던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이를 테면 그는 전범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교살자(絞殺者)’였던 셈이다.
/ 1990년에 출판된 '행잉 샘' 사무엘 윌리엄스 장군의 자서전.
교살자 ‘행잉 샘’ 급파
나는 휴전 뒤에 그로부터 커다란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미 8군 사령관의 요청으로 내가 병력 40만 명을 이끄는 최초의 1야전군 사령관을 맡았을 때다. 나는 그로부터 방대한 야전군을 창설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있다. 그는 수 천 페이지짜리의 ‘체크 리스트’를 구성해 부대와 구성원들의 모든 면면을 점검하며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야전의 부대에서 모든 상황을 한꺼번에 점검하며 대책을 마련하는 데 적합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사병에서 출발해 각종의 야전을 거쳐 장군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에 긴급한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사람이기도 했다. 테일러 사령관은 급한 대로 우선 ‘행잉 샘’을 정일권 2군단장 곁으로 보냈고, 이어 그마저도 안심을 할 수 없어 내게 소토고미 군단 사령부로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상황이 그만큼 아주 급했던 것이다.
내가 한 일은 우선 무엇이었을까. 나는 굳이 표현하자면 ‘현장형’ 지휘관이다. 나는 싸움이 벌어지는 곳의 ‘현장’이 풍기는 냄새를 믿는다. 지휘본부가 차려져 있는 장수는 막사에서만 머물 게 아니라, 그런 현장의 냄새와 분위기를 반영해 전술과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아울러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누구도 거역하기 어려운 대세(大勢)라는 게 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제대로 보려고 하면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는 게 그 세(勢)다. 그것은 날씨로부터도 나오고, 지형(地形)과 지물(地物)로부터도 나온다. 또한 나와 같이 싸움에 나선 동료와 지원군으로부터도 나오고, 전선을 파고드는 적으로부터도 나온다.
/김일성의 딸 김경희. 1958년 당시 평양제일중학 인민반 5학년이었던 김일성의 달 김경희가 조중친선 꽃다발을 중공군 전투영웅 이영재에게 달아주고 있다.
나는 우선 현장을 돌았다.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면서 금성 돌출부의 주요 국도로 몰리기 시작했다. 아주 혼란스러운 모습이기는 했어도, 그나마 내게 위안으로 다가왔던 것은 국군이 전쟁 초기에 중공군과의 싸움에서처럼 마구 적들에게 등을 내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차분하게 후퇴 대열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소토고미 군단 사령부에서 차츰 북상하며 각급 사단의 연대장들을 먼저 만나고 다녔다. 그들로부터 전선의 직접적인 상황을 충분히 들었다. 반나절쯤 그렇게 다녔던 것 같다. 지프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은 지프로 옮겨 다녔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지프에서 내려 걸었다. 때론 산길을 걸어 올라가고, 장마 때문에 생긴 진창도 부지런히 걸었다.
단지, 내가 결코 잊지 않았던 점은 미군 군사고문단장 고든 로저스를 수행케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일부러 그랬다. 그는 지휘계통으로 볼 때는 나보다 밑이지만, 연령에서는 나보다 위였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함께 현장을 누볐다.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마침 날씨는 개고 있었다. 장마철의 낮게 깔린 구름 아래에서 적의 행동은 비교적 자유스럽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공군력에서 압도적인 미군의 공습이 제대로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매우 다행이었다. 금성천의 물도 여름철의 장마로 인해 크게 불어난 상태였다. 적이 금성의 돌출부를 대규모 기습으로 잠식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돌출부의 남단을 동서로 흐르는 금성천을 넘으려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불어난 물이 그들의 도하(渡河)를 곱절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터에서 ‘형세’를 읽는 방법
나는 그 싸움터가 만든 당시의 형세(形勢)를 그렇게 읽었다. 전선에서 밀려 내려오는 아군의 대열을 거슬러 오르면서 만났던 각 연대장들로부터는 ‘우리가 아직 싸울 의지는 갖추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고, 금성천의 불어난 물에서는 ‘적의 지속적인 공격이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아울러 점차 맑아지는 하늘의 기운을 보면서는 ‘공습으로 적의 피해를 최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현장을 나와 함께 누볐던 미 군사고문단장 로저스 소장을 보면서는 ‘미군의 창고를 활짝 열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꿩을 잡는 새는 매다. 중공군은 병력 상으로 우리를 압도했지만,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보급의 문제였다. 그들은 늘 뒷심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화려하게 전선을 돌파하는 기습과 야습, 매복과 우회에 뛰어난 면모를 보이기는 했으나 결국 보급의 한계에서 오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해 공세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와 펼치던 공격, 이듬해 봄에 보였던 춘계공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법과 전기(戰技)는 화려했으나 늘 거기서 멈추던 군대였다.
그런 중공군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힘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모슬포의 1훈련소와 논산 2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병력을 춘천으로 이동시키고, 우리가 지니고 있던 화력과 물자를 전선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로써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막강한 미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적 사정은 여기에 다시 적을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미군의 힘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점을 고려해 나는 처음부터 고든 로저스와 함께 전선을 누볐던 것이다.
/ 1971년 12월9일 월남파견 청룡부대가 귀국. 부산항에서 열린 범국민환영식에서 개선한 청룡부대장 박태선중령이 김종필 국무총리(가운데)와 유재흥 국방장관(왼쪽)의 영접을 받았다.
현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는 ‘동원’이다.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곳으로 모든 병력과 물자, 화력을 실어다 날라야 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 동원이 이뤄질 경우 적을 압도할 수 있다. 금성 돌출부에서의 싸움은 그래서 한국군에게는 또 하나의 커다란 시험장이었다.
나는 전선을 두루 살핀 다음 소토고미 군단본부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나는 대구의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유재흥 육군본부 참모차장을 찾았다.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모든 창고를 개방해 전선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병력의 이동도 함께 명령했다. 이어 나는 고든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에게 “미군의 창고도 모두 열어 전선으로 화력을 올려 달라”고 요청했다.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재흥 참모차장은 즉각 내 명령을 실행에 옮겼고, 고든 로저스 군사고문단장도 군사고문단(KMAG)에 전화를 걸어 내 요청을 전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국도가 곧 붐비기 시작했다.
(10) 전쟁터에서 수많은 국군 지휘관이 '허리가 빠진' 이유
전장에 달려간 이승만 "책임자 포살하라"며 호통
'다운(후퇴)' 국면에서 실패한 정일권
(2) 중공군과의 전쟁
안간힘으로 맞선 거대한 대륙군대
서울 미아리 고개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국도는 아예 일반 차량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혔다. 군용 트럭과 군대가 징발한 민간의 물자 운반 차량이 국도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서울의 남영역에도 화물 열차가 가득 늘어섰다. 모두 ‘금성 돌출부(화천저수지 북방 김화일대)’의 전선으로 향하는 물자를 싣기 위해서였다.
서울 지역의 병원들도 비상이었다. 모든 병원은 전선에서 심하게 부상당한 장병들로 북새통이었다. 병실이 부족해 몸을 다친 수많은 장병들을 다 누일 데가 없었다. 그들은 복도에, 현관에, 그리고 병원 뜰에 여기저기 누워서 부족한 의료진의 손길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소토고미 2군단 사령부에서 이런 상황을 다 들었다. 시시각각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광화문 옆 옛 기무사령부가 있던 육군병원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장병들이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 마당에 여기저기 누워있는 것을 보고서는 그만 화가 치밀어 “책임자를 포살하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중공군 공세에 밀려 수많은 국군 부상자들이 생겨났다.
대통령은 그런 말을 잘 썼다. 화가 극도로 치밀 경우 “포살하라”고 늘 외쳤는데, ‘잡아다가 죽이라’는 뜻의 ‘포살(捕殺)’이라는 한자 단어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 그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우리 현실이 너무나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물자는 미아리를 출발해 춘천으로 가득 밀려들었고, 제주도 모슬포와 논산의 훈련소에서 막 훈련을 마친 신규 병력은 열차편을 통해 전선으로 북상했다. 고든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던 미군의 물자도 국도와 열차편으로 속속 전선에 닿고 있었다.
금성천 이남 훨씬 아래 쪽으로 밀렸던 상황에서 나는 아군의 전투력과 전투 의지가 아직 남아 있음을 파악한 뒤 최후 저지선과 주저항선을 다시 설정해 전선을 북상시키는 데 주력했다. 미군의 공습은 다시 벌어졌고, 충분한 후방 물자와 병력의 잇따른 도착으로 아군의 힘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역시 공세를 지속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전선을 밀어 올리다
나는 우선 전투력을 상실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의 일부 병력을 뒤로 뺐다. 그 자리에는 새로 도착한 증원군을 신속하게 배치했다.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자면, 국군은 금성 돌출부를 위해 11개 사단을 전진시킨 상황이었다. 아군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한 중공군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중공군은 국군의 신속한 병력 이동과 물자 수송이 이뤄지면서 차츰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한국군의 반격 시작을 알리는 1953년 7월 17일 경향신문 기사.
서울에서 포천 이동으로 직접 와서 전선을 시찰하는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에게도 찾아간 적이 있다. 테일러 대장은 그 때 경비행기 L-19와 L-20 등을 동원해 새로 전선에 투입하는 국군 11사단의 병력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경비행기에 올라 탈 수 있는 병력은 기껏해야 1개 분대였다. 중무장을 한 경우라면 1개 분대가 타기에도 벅찬 비행기였다.
그러나 다급했던 테일러 대장은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국군 사단 병력을 경비행기에 실어 전선으로 향하도록 했다.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이런 농담을 했다. “장군, 평소 미국 국민의 성스러운 세금을 아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데, 이렇게 해도 좋으냐?” 그러자 테일러는 “지금 상황이 이런데 무슨 소리냐”면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 전투는 국군에게는 일종의 가혹한 시험이었다. 우리가 만약 금성 돌출부를 모두 내주고 화천 저수지까지 중공군에게 빼앗겼다면 미군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로튼 콜린스 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금성 전투에 대해 “한국군이 전쟁을 통해 이렇게 성장한 줄은 몰랐다”고 평가했다. 미군 수뇌부가 이 전투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 국군은 대륙의 군대, 중공군의 공격에 밀리기는 했지만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부리나케 전선으로 모여든 국군 11개 사단의 모든 장병이 그 싸움의 주역이다. 내가 정일권 2군단장을 대신해 급박한 시점에 전선을 지휘했다는 점은 중요한 사실이 아닐 것이다.
/국군에게 붙잡힌 중공군 병사들이 애원하는 모습. 당시 국군 모 연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중공군은 잡혀서도 쇼를 잘 했다고 한다. "담배 한 대 주면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는 식의 너스레를 떨며 애걸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수로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일권 2군단장은 단지 몇 가지 단점을 노출했다. 전쟁의 장수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업(up)과 다운(down)의 두 형세 중 앞의 경우보다는 뒤의 상황에서 제 실력을 드러낸다. 승세(勝勢)를 의미하는 ‘업’의 상황에서는 대개가 다 비슷하다. 그러나 후퇴를 가리키는 ‘다운’의 전황에서 장수가 드러내는 차이는 매우 크다.
결국은 준비의 부족이다. 공황의 상태에서 어떻게 국면을 수습할 것인가는 장수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그야말로 눈사태로 모든 것이 무너져 사라지듯 많은 것을 잃는다. 공황의 심리는 더욱 커져 제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가 많다.
무기력한 패배는 많았다
전투에서 자주 드러나는 전선 지휘관의 상황 가운데 “허리가 빠졌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갑자기 지휘관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때다. 적의 공세에 당황해 어느 것부터 손을 댈지를 몰라 거의 혼절에 이른다. 우선 몸이 빳빳해져 움직일 수 없고, 마음은 극도의 혼란에 접어든다. 그러는 사이 적의 공세는 더욱 거세져 국면을 수습할 방법을 찾지 못해 결정적인 패배에 직면한다.
고열에 시달리던 정일권 2군단장의 상황이 아마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어디 정일권 군단장 혼자만의 일이었을까. 당시의 각 제대(梯隊)의 전선 지휘관 중에 상당수가 ‘허리가 빠졌다’는 경험을 해야 했다. 설령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혼절의 상황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비슷한 공황의 심리에 잡혀 적 앞에서 몸을 움츠리거나 뒤로 내뺀 사람은 아주 많다.
결국 싸움의 기술, 즉 전기(戰技)를 연마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철저한 마음 수련이다. 그 마음 수련이라는 것은 혼자 가부좌를 틀고 정신적인 수양에 몰두한다고 얻어지지는 않는다. 늘 전법을 연구하고, 현장을 돌아다니며 전세를 파악하고, 장병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 준비가 부족한 장수에게는 후퇴의 국면이 아주 두렵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신분으로 금성 돌출부 전투를 4~5일 동안 지휘했다. 참모총장이 일선에 선다는 일이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 때 대한민국 국군의 상황은 이것저것을 모두 따지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어쨌든 중공군의 최후 공세를 막았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나는 중공군이 국군의 거센 반격에 밀려 금성천 이북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군단 참모의 보고를 통해 들은 뒤 대구의 육군본부로 돌아왔다. 전선에는 곧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하리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 고령의 이 대통령이 2군단을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정일권 2군단장에게 “힘을 다 해 싸워줘서 장하다”는 내용의 격려를 했다고 한다.
/미군들에게 체포된 중공군 병사들.
최후의 전투 의지가 반전의 계기
그리고 이듬해 정일권 장군은 내 뒤를 이어 대장으로 진급한다. 그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었다. 거듭 부연하지만, 그가 소토고미 2군단 사령부에서 잠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은 우리 국군 장군들이 자주 보였던 모습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전선에 나가 휘하의 장병들을 거느리고 적과의 싸움에 나서려고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내 이름이 당시의 금성 돌출부 전투 지휘명단에 오르지 않은 점을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싸움은 어느 누구의 개인적인 공로로 치부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금성 돌출부의 대규모 전투는 한반도의 싸움 기질이 거대한 대륙의 군대에 맞부딪쳤으면서도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고 살아났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1개 사단에 이르는 대한민국 병력은 혼신의 힘을 다 해 대륙의 군대에 맞서 싸웠고, 마침내 그런 감투 정신은 ‘이 정도면 한국군을 증강시켜도 좋겠다’는 미군 수뇌부의 판단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 휴전이 벌어졌고, 이어 병력 40만을 거느리고 휴전선 단독 방어에 나서는 국군 1야전군 창설로 현실화했다. 금성 돌출부의 싸움에서 맥없이 물러났다면 국군에게 그런 신속한 전력 증강사업은 이뤄지지 않았거나, 적어도 시기가 훨씬 뒤로 밀렸을 것이다.
(11) 김일성의 제의를 받은 정일권에게 "형님, 저들은 잔인합니다. 남쪽으로 갑시다."
전쟁 후 16년, 총리 정일권을 만났으나 패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야전의 실패는 그의 개인적 실패가 아니다
(2) 중공군과의 전쟁
김일성이 “함께 일하자”고 했던 사람
이 자리를 빌려 1953년 중공군 최후 공세 때 정일권 장군이 고전했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을 따져 그 이력에 그늘을 드리우고자 남기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이제 다 묻어두고 가야 할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에는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은 우리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 때 벌어진 여러 싸움의 겉과 속에 숨겨있는 이야기를 후세에 자세히 알리고자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앞으로 우리가 또다시 맞이할지도 모를 전쟁에서 제대로 싸우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지닌 장점과 단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선, 당시 정일권 장군이 드러냈던 약점은 그 한 사람에 국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선에 선 우리 군 지휘관에게는 그런 실패와 좌절이 수시로 닥쳤다.
다행히 1953년 7월 14일 시작한 중공군의 최후 공세는 꺾였다. 2군단장으로 전선을 지휘했던 정일권 장군과 국군 지휘부, 크고 작은 싸움에서 늘 열과 성의를 보였던 미군의 분투로 이뤄낸 성과였다. 아울러 지휘부의 명령에 목숨을 걸고 나섰던 국군 11개 사단 장병의 노력은 그런 눈부신 성과의 진정한 토대였다.
정일권 장군은 앞에서도 잠시 소개를 했지만 아주 탁월한 인물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의 고급군사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다. 언변이 뛰어났고, 재치가 돋보였다. 화술이 좋았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교에 빼어났다. 영민했고 친화적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 뒤 펼쳐진 군대라는 영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미군은 일찌감치 그에게 주목했다. 특히 김일성 군대가 무모할 정도의 야욕에 빠져 벌인 6.25전쟁 초반 국면에서 그는 원활한 소통 능력을 발휘하면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던 대한민국 국방을 이끌었다.
/휴전 뒤로 추정되는 중공군 환송식에 섞여 있는 김일성 모습(중국 측 자료 사진).
감춰진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다. 그는 미군에 앞서 북한의 김일성이 주목했던 사람이었다. 정 장군은 나와 같은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가 1945년 12월 무렵 내가 머물고 있던 평양에 들른 적이 있다. 당시 김일성은 이미 북한의 새 권력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북한 전역에 진주한 옛 소련군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였던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내고 있었다. 정일권 장군은 그때 해방정국의 이모저모를 따지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면식이 있는 사이라 우리 두 사람은 평양에서 몇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하루였다.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두던 정일권이 정색을 하며 “상의할 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김일성이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정일권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 지역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 말고는 그가 정치적으로 과연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고민을 거듭했던 듯 정일권은 내 의견을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정일권에게 “형님, 그런 생각은 얼른 접으세요. 소련을 등에 업고 있어서 저들은 공산주의를 할 겁니다. 그들은 잔인합니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마시고 남쪽으로 가시는 게 좋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권유로 월남길에 오르다
김일성은 사실 그런 사람이었다. 나중에 드러난 그의 정치적 행적으로 보면 그는 우선 필요한 사람을 다 끌어다 쓴 뒤에 그 소용이 다 하면 가차 없이 제거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전통적인 인간의 의리를 철저히 부정하는 공산주의자 아닌가. 김일성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사실 믿기 힘든 내용들이다. 대개의 경우는 김일성이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세를 규합하기 위해 벌인 대중적인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일권은 당시 김일성으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북한의 실권자로 부상하고 있던 김일성이 직접 주목할 만큼 정일권은 당시 매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정일권은 월남의 대열에 올랐고 나의 경우처럼 창군 멤버로서 대한민국 군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한민국 군대의 초반기 역사에서 정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아(寵兒)이기도 했다. 돋보이는 사교력에 빠른 두뇌 회전, 회화에 지장이 없을 만큼의 영어실력 등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그런 사람을 매우 총애했다. 그에 힘입어 정 장군은 개전 초반기의 암울했던 상황을 이겨내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 1963년 12월17일에 탄생했던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인 최두선 내각이 1964년 5월9일 재임 144일만에 총사퇴, 박정희대통령은 두시간 후에 새 총리로 정일권 외무장관을 임명했다. 사진은 후임 총리로 임명된 후 장관 공관에서 축하전화를 받고있는 정 총리.
여러 가지 자부심이 가득했을 정 장군은 만주군관학교 후배이자 아무리 봐도 두각을 나타낼 상황이 아니었던 나를 의식했을 리 없다. 그러나 6.25전쟁이 벌어진 뒤 내가 전공(戰功)을 쌓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는 나를 의식했던 듯하다. 같은 창군 멤버로 전선을 함께 누볐던 유재흥 장군(2011년 작고)의 회고록에 그 대목이 보인다.
유 장군은 1953년 1월31일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와 정(일권) 중장은 군단사령부 안에서 숙식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다음날(1월31일) 백선엽 중장이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잠자리에 들었던 정 중장은 몹시 기분이 언짢은 모습이었다….” 당시 정 장군은 2군단장 취임을 위해 전임자인 유재흥 장군과 함께 군단 본부가 있던 소토고미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1994년 출간한 유 장군의 회고록을 보고서야 그 내용을 비로소 알았다. ‘아, 그랬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당시 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성(四星)장군인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대한민국 군대를 통솔했던 정 장군의 입장에서는 계급으로는 두 단계나 아래인 내가 자신을 앞질러 최초의 사성장군에 오른 점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1953년 7월의 중공군 대공세에서도 그와 나 사이는 미묘했다. 사성장군으로 육군참모총장인 내가 전선에 도착해 그가 맡았던 2군단을 잠시나마 대신 지휘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거센 파도와 같았던 중공군의 공세를 일단은 막고 봐야 하는 상황이었던 까닭이었다.
‘밴드 마스터’로 변신했던 총리
그로부터 16년의 시간이 흐른 1969년 말이었다. 당시에 정일권 장군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는 국무총리의 자리에 올라있었다. 나는 1960년 예편 뒤 대만 대사에 이어, 프랑스와 서유럽 및 아프리카 포함 19개 국가 겸임대사, 캐나다 대사를 마친 뒤 귀국해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교통부 장관에 취임한 상태였다.
/ 1967년 1월 19일 연두교서를 마친 후 국회의장실에 들른 박정희 대통령이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과 악수를 하고 있다. 가운데는 정일권 국무총리.
자리로만 따지면 ‘역전에 역전’의 형국이었다. 정 총리는 내게 “저녁이나 먹자”며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12월쯤이었던가 보다. 종로의 한 요정에서 그와 나, 총리실 직원 등이 함께 앉았다. 정 총리는 나를 매우 따듯하게 대했다. 술을 좀체 하지 않는 그는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그가 흥이 날 때 보이는 버릇이 하나 있었다. 요정이어서 식사자리에는 늘 악대가 들어왔다. 얼큰해져서 흥이 도도해지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밴드 마스터’로 돌변한다. 그리고서는 매우 정교한 솜씨로 밴드를 지휘한다. 그날도 그랬다. 그는 내가 기분 좋도록 밴드 마스터를 자청했다. 그 덕분에 분위기가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10년 동안 해외 공관장을 맡고 돌아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그의 심성도 내게는 아주 고마웠다. 라이벌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한 때는 그런 심리에 젖어서 계급과 군공(軍功)을 다퉜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나에 비해 다양한 재주를 지닌 인물이었다.
/ 1969년 10년 동안의 해외 공관장 시절을 마치고 귀국한 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교통부 장관 임명장을 받고 있는 백선엽 장군.
나는 ‘당연히’ 전쟁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1953년 7월 중공군 공세를 언급해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말이 없다고 했나. 실제 경험해 보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장수가 전쟁에서 지면 그 참혹한 심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 만큼 전쟁에서 패배하고 좌절했던 경험은 아픈 상처로 마음 아주 깊숙한 곳에 도사린다.
그 또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때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자리에 올라 7년 동안 ‘장수’하던 실력자였기 때문일까. 여하튼 그는 저녁 식사자리 내내 즐거워했다. 전쟁이 남긴 어두운 그늘을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는 훌륭한 참모 스타일의 군인이었다. 실제 그 영역에서 드러낸 실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단지, 그에게는 야전의 맹렬함과 끈기가 부족했다. 아울러 현장에 매달려 적과의 싸움에 골몰하는 집요함이 적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단점을 덮고도 남을 화려한 재기(才氣)가 많았다.
문제는 그저 헐벗고 굶주린 당시의 대한민국이 그의 장점과 단점을 가려 적소(適所)에 그를 두고 활용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만큼 경황없이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이었다. 사람도 적었고,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모든 것이 결여(缺如) 상태였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면서 일어섰다.
(12) '신(神)'이었던 맥아더, 그러나 노쇠했던 그가 범한 실수들
지프에서 내리지 않았던 71세의 노장 맥아더
미군이 시키는대로 했던 국군, 이젠 독자 생존 찾아야
(3) 압록강 물 떠오기
맥아더는 그 때 이미 ‘신’이었다
1945년 도쿄 비행장에 커다란 C-54 전용기를 타고 모습을 드러낼 때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미 ‘신(神)’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결사항전을 벌이던 일본군의 막바지 공세를 모두 꺾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에 도착할 때 그의 그림자는 아시아의 모든 지역을 덮고도 남았다.
5년 뒤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전쟁의 초반 10개 월 동안 그는 유엔총사령관으로 도쿄에 머물며 연합군과 국군의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내가 본 군인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큰 사람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이미 고령이었다는 점이다.
6.25전쟁 초반에 그는 북한군의 허리를 끊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역량을 다시 선보였으나, 어쩌면 그것은 석양의 막바지 광휘(光輝)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뒤에 몇 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이승만과 맥아더 장군.
우선 중공군의 참전에 관한 여러 정보를 간과했다. 아울러 한반도에 올라선 미군의 지휘권을 통합해 운영하지 않는 실수를 보였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있다. 이 점은 맥아더 사령관을 별도로 회고할 때 다시 언급할 작정이다. 우리 국군은 어쨌든 그의 지휘를 받아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해 압록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50년 10월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유엔군을 모두 이끄는 최고 사령관이었고, 한국의 미군은 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중장, 미 10군단장이었던 에드워드 아몬드(Edward M. Almond)가 나눠서 지휘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맥아더의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세계가 주목할 만한 작전이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인천 앞바다에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상륙작전을 벌임으로써 김일성 군대의 보급선을 일거에 끊어버리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 점은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상륙작전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는 ‘점프(jump)’를 즐겨 사용했다. 일본군에 밀려 오스트레일리아에 쫓겨 간 뒤 다시 뉴기니 등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건너뛰면서 결국 필리핀을 수복했고, 급기야 막바지 공세로 막강한 일본까지 함락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상륙작전의 명수였다. 태평양 뉴기니 섬 등을 수복할 때 여러 차례의 상륙작전을 벌이면서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전격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의 군대가 벌인 전쟁의 국면은 급격히 뒤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겠으나, 그는 인천 상륙 뒤 1개 해병 사단을 빼서 원산으로 상륙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 점은 아주 커다란 실수였다.
원산은 동해안 북녘의 가장 큰 항구다. 그러나 동부전선은 그렇게 시급히 해병 사단을 상륙시킬 만큼 격전장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주전장(主戰場)은 신의주와 서울, 이어 부산을 잇는 선이다. 이곳에 집중해야 할 병력을 동해안으로 빼서 상륙시킨 점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관련 보도들.
그러나 국군의 힘은 보잘 것 없었다. 미군의 작전에 “감 놔라, 배 놔라”할 자격이 아예 없었고, 심지어는 토씨 하나 달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 당시의 국군은 ‘미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그런 군대에 불과했다. 모든 작전 지휘권은 이미 유엔사령관에 넘어가 있었고, 미 8군 사령관이 그를 받아 지휘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전쟁 와중에 그 맥아더 장군을 가까이서 몇 번인가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북진이 끝난 뒤 우리가 중공군에 밀려 다시 남하했던 ‘1.4 후퇴’ 뒤였다. 안성까지 밀렸던 아군은 가까스로 중공군 공세를 막아낸 뒤 서울까지 수복한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국군 1사단장으로 프랭크 밀번(Frank W. Milburn) 소장이 이끄는 미 1군단에 배속해 있었다.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우리 1사단은 만리동의 한 초등학교에 CP(전투지휘부)를 차려두고 있었다. 갑자기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전갈이 왔다. 1사단장인 나와 참모들,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이 모두 CP 앞에 도열해 있었다. 흙먼지를 날리며 맥아더 장군 일행이 교문을 들어섰다.
맥아더의 후의(厚意)…그러나
선두에 섰던 호위 차량 뒤로 맥아더 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프 앞자리에 타고 있었다. 그의 차량이 사단장인 내 앞에 멈춰 섰다. 군례(軍禮)에 따라 우리는 맥아더에게 경례를 했다. 그는 앉아서 우리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상했다. 지프 앞자리에 앉은 맥아더 장군이 도통 차에서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백선엽과 맥아더. 맥아더는 지프에서 내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그냥 자리에 앉아 내게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전황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맥아더는 내게 “장병들의 급양(給養) 상황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으나 나는 “쌀은 나름대로 잘 공급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감미품(甘味品)이 모자라 애를 먹고 있다”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곧 행렬을 몰고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1사단 선두를 이끌고 다시 북상하던 나는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맥아더 장군이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감미품을 후방의 우리 국군에게 보내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미품이라는 게 요즘 말로 하자면 ‘단 식품’이다. 당시 국군의 형편으로서는 쌀과 된장을 구해 콩나물 등 야채로 국을 끓여 식사를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다보니 열량이 높은 단 식품을 먹는 것은 언간생심이었다. 그를 단번에 해결한 사람이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는 도쿄 유엔사령부에 지시해 사탕과 통조림, 말린 오징어 등을 산더미처럼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런 맥아더의 후의를 즐기지 못했다. 전선을 관리하느라 일본에서 공수해 온 그 감미품을 즐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수세에 몰린 북한군은 후퇴 도중 대전형무소에서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 땅에 파묻었다. 확인된 피살 민간인 수는 무려 6000여명.
우리는 그만큼 모든 분야에 걸쳐 미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 몸뚱이만 빼놓고 입는 것과 먹는 것, 적과 맞붙어 싸울 때 필요한 총과 탄약 등 모든 것을 미군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미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국군의 당시 진짜 모습이었다.
맥아더는 전성기가 지난 늙은 장군
내가 1.4 후퇴 뒤 서울을 다시 수복했을 때 맥아더 장군과 만난 일화를 소개하려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그가 당시 매우 늙어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1880년생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비해 다섯 살 아래다. 전선의 험한 풍상을 거친 뒤 1945년 도쿄 공항에 내릴 때 이미 ‘신’이었기는 하지만, 그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미 71세의 고령에 접어들었던 당시의 맥아더는 지프에서 내려 전선의 지휘관과 얘기를 나누기가 귀찮을 만큼의 상태였다. 아울러 일선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체크하고, 그곳 지휘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대의 사기를 직접 확인하는 일 등은 이미 그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속옷바람으로 이동 중인 북한군 포로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둔 12일 뒤 유엔군은 남한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했다. 1950년 9월 김포부근.
맥아더는 미군 역사에서도 손으로 꼽을 만큼 위대한 장군이다. 그러나 65세에 도쿄에 도착했고,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이끌 때는 70세에 이른 상태였다. 1.4후퇴 직후 서울에서 잠깐 만났던 그로부터 나는 맥아더가 왜 위대한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 뒤에 몇 가지 패착을 둘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영광과 자신감에 도취해 있었고, 늙은 나이는 그 점을 가속화시켰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보는 일, 즉 성찰(省察)에 게을러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장의 여러 정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장수는 패착에 직면할 수 있다. 맥아더는 1950년 말에 이미 그런 여러 가지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듯하다.
문제는 우리 국군이었다. 미군은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국군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다. 물자와 화력은 물론이고, 갑자기 닥치는 전선의 상황을 타개할 전기(戰技)와 전술(戰術), 나아가 전략(戰略) 등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아 움직여야 했던 국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까. 우리 앞에는 많은 시련이 버티고 있었다. 1950년 북진 때의 상황이 특히 그랬다
(13) 부끄러운 고백…"중공군의 대공세에 전화기를 떨어뜨리고…나는 넋이 나갔다"
"그 사람 후퇴할 때 제 위치에 있었느냐", 냉정한 미군의 지휘 방식
(3)압록강 물 떠오기
미군은 어떤 군대일까
미군은 ‘측량(測量)’과 ‘개척’의 전통을 지닌 군대다. 그들의 성장 역사가 광활한 미국 대륙을 끊임없이 측량하고 개척하는 과정을 거듭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미군은 남북전쟁과 그 뒤에 벌어진 수많은 싸움을 통해 성장한 군대다. 아울러 미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앵글로 색슨(Anglo-Saxon)은 철저한 이해타산을 바탕으로 깔고 몸집을 키워왔던 사람들이다.
끊임없었던 측량과 개척, 아울러 부단하게 벌어진 싸움에서 쌓은 전통, 철저한 실용성과 이해의 저울질을 통해 사고(思考)의 토대를 구축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어떤 특성을 보이는지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게다. 미군은 냉정하고 엄격한 군대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얼버무림은 허용되지 않는다.
각 전장(戰場)에서 드러나는 지휘관과 일반 병력의 전과(戰果)도 매우 분명하게 체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실(情實)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를 최소화하는 내부 메커니즘이 강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각 전장에 나서는 지휘관들을 체크하는 방법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다.
미군은 동양 군대가 지니지 못한 또다른 장점이 있다. 바로 ‘신념’이다. 아메리카합중국, 즉 미국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적 지향이 뚜렷하고, 이를 군대의 하부조직에까지 철저하게 구현한 부대다. 그들은 그런 신념과 미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1950년 한반도 전장에 발을 디딘 것이다.
/유엔의 결의에 의해 한반도에서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한 통합군이 구성됐다. 1950년 7월14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유엔 깃발을 전달받고 있는 맥아더 원수(오른쪽).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이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하고 진격을 준비 중이던 1사단에 갑자기 들이닥쳤던 얘기는 지난번에 소개했다. 사실, 당시의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감미품(甘味品)이 필요하다”고 했다가 궁지에 몰렸다. 맥아더는 내 말을 들은 뒤 고개를 돌려 뒤에 타고 있던 도쿄 유엔군최고사령부(GHQ)의 경제과학국장 마케트 소장을 흘끗 바라봤다.
마케트 소장은 지프 뒷자리에서 미8군 사령관이던 매슈 리지웨이와 함께 맥아더를 수행 중이었다. 마케트는 맥아더가 뒤를 돌아보자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맥아더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일본의 패전 뒤 모든 물자를 관리하며 일본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마케트도 맥아더 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 일행이 나와의 간단한 대담을 마친 뒤 우리 1사단 CP를 떠나자마자 당시 사단 군사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가 대뜸 나를 험악하게 다그쳤다. “누가 당신더러 보급품 문제를 사령관께 얘기하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 1950년 9월29일 수도탈환식 식장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는 이승만 대통령.
그의 논리인즉슨, 당초의 협약대로 국군의 보급은 한국 스스로 챙겨야 하는데 그 문제를 왜 사령관 앞에서 제기했느냐는 것이다. 먼저 내가 그 문제를 먼저 꺼낸 것도 아닌데 그는 규정과 약속을 거론하며 나를 비판한 것이다. 미군은 그렇게 냉정했다.
나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사령관한테 거짓말을 하라는 얘기냐” “먼저 묻길래 솔직히 대답한 것일 뿐인데 왜 화를 내느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미군 군사고문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냥 물러섰다. ‘사령관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는 나의 명분에 그로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후퇴 때 내 등에 꽂힌 미군의 시선
미군은 규정과 틀을 매우 중시한다. 규정과 틀을 벗어나면 엄격하게 따지고 또 따진다. 명분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그들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51년 중공군에게 다시 서울을 내준 1.4후퇴 직전이었다. 나는 평양 너머의 청천강 이북 전선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국군 1사단이 임진강 방어선에 도착한 무렵이었다. 이곳을 내주면 서울을 또 적의 수중에 내줘야 할 판이었다. 나는 임진강 율포리에 있던 사단 CP에서 적의 공세를 맞고 있었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우리가 쳐놓은 철조망에 담요를 걸친 뒤 거침없이 그곳을 돌파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을 CP에서 보고받으며 절망에 빠졌다. ‘이제 결정적인 패배를 맞는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그 상황을 몰랐지만 당시 통신참모를 맡고 있던 윤혁표 중령은 “마치 넋이 빠진 사람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나는 전선 지휘관과 통화를 한 뒤 수화기를 여러 번 놓쳤다고 한다. 거의 혼절에 가까운 상태였던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던 듯하다. 그 때 미군 고문관 메이(May) 대위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메이는 “전투에서는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다”고 달래면서 지프에 나를 실어 후방으로 옮겼다. 지금도 그 때의 상황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패배는 늘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다음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게 관건이었다. 문제는 그런 나를 체크하는 미군의 ‘눈길’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 1952년 무렵이었던 듯하다. 미군 장교 한 사람이 그 때의 비화(秘話)를 내게 살짝 들려준 적이 있다. 나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서늘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였다. 나를 들쳐 업고 지프에 올라타 후방으로 물러난 뒤 메이 대위는 당시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메이에게 “백 사단장이 후퇴할 때 어느 위치에 있었는가? 정위치에 있었는가?”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백선엽 장군과 리지웨이 장군.
전선을 제대로 지휘하다가 후퇴를 했느냐, 아니면 엉뚱한 곳에서 한 눈 팔다가 후퇴에 직면했느냐를 물었던 것이다. 메이는 당시 상황을 가감 없이 전달했던 모양이다. 내게 그 말을 전한 미 장교는 “지휘관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리지웨이가 철저하게 체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은 후퇴의 긴박한 와중에서도 지휘관이 마지막으로 어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를 체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미군을 어떻게 상대하느냐. 이 문제는 6·25전쟁 3년 내내 매우 중요한 물음이었다. 물론, 명분에 따라 지휘관이 제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임무를 다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전쟁에서는 당연히 승리를 거두는 지휘관이 가장 빛을 발한다. 명분, 나아가 제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군대를 건사해 승리까지 거두는 게 당연히 최고의 과제였다. 그러나 그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통일이 눈앞에 있다”는 설렘
그 점에서 1950년 10월 말, 압록강을 향해 우리가 진군할 때의 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 국군은 당시 미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천변만화(千變萬化)와 같은 전선의 상황은 우리 국군의 입지를 좁혔다. 앞에 늘어선 적의 상황도 제대로 몰랐다. 돌이켜보면, 미군이 계획한 대로 그냥 전투를 수행하더라도 상황 변수는 우리 스스로 감안했어야 옳았다.
/리지웨이 장군(오른쪽).
미군은 적을 경시하고 있었다. 유엔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개입에 관한 많은 정황을 무시했다. 그를 둘러싼 도쿄 유엔군총사령부의 참모들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전쟁을 끝내고 귀국할 수 있다”는 소문이 미군 내부에서 흘러다녔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압록강까지의 진격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고요에 싸여 있었다.
서부 축선에서는 프랭크 밀번 소장이 이끄는 미 1군단이 주력을 형성했고, 그 상부는 월턴 워커 중장이 지휘부를 이루고 있었다. 동부전선은 아몬드 소장이 이끄는 미 10군단이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적유령산맥 여기저기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은 미군 지휘부와 지휘부 사이의 공백을 날카롭게 노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압록강을 넘어 적유령산맥 여기저기에 매복한 중공군 병력은 우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각자의 진격로를 따라 미군과 국군은 북진을 멈추지 않았다. 10월 25일 중공군의 공세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해 10만 군중을 모아놓고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 통일이 눈앞에 닥친 듯한 분위기였다.
/ 1950년 10월 27일 김일성광장에서 평양탈환축하회와 국군-유엔군환영시민대회가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했다.
국군 1사단이었으나, 미 1군단의 지휘 아래에 있었던 우리는 신속하게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 점이 어쩌면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이 지원한 막강한 포병 4개 대대와 전차 1개 대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동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적에게 공격을 당하는 상황까지 감안해야 했다. 따라서 매우 신중한 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기동력이 좋은 인접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 산하의 6사단은 특히 기동력이 국군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다. 전쟁 전의 6사단 주둔지는 강원도 춘천과 영월 일대였다. 그곳에는 많은 탄광과 석회광이 있어 그 광물회사가 보유한 트럭 등을 징발하기가 수월했다.
(14)평양 인민군 총사령부에 "김일성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우리도 모른다"
(3) 압록강 물 떠오기
“이제는 압록강이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처음부터 압록강 진격을 구상했던 것은 아니다. 유엔군 총사령부는 북진을 시도하면서 자연스레 한반도 지형에 주목했다. 전쟁에서 공격하는 쪽은 공자(攻者), 방어하는 쪽은 방자(防者)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두 가지의 경우가 완전하게 분리될 수는 없다. 공격하면서도 방어를 상정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1950년 북진 때의 우리가 그랬다.
한반도 지형으로 볼 때 평양과 원산을 잇는 이른바 ‘평원선’은 방자의 입장에서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의 방어 폭은 270㎞에 이른다. 그러나 그 북쪽으로 올라갈 때 방어 전면은 훨씬 넓어진다. 압록강과 두만강에 도달하면 그 방어 폭은 평원선의 거의 3배에 달하는 765㎞로 벌어진다.
/포로로 잡히는 북한군.
따라서 평원선 이북으로 진격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을 튼튼하게 다진 뒤 북진을 할 것이냐, 아니면 방어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북진을 계속하느냐의 두 가지 상황을 놓고 유엔군 총사령부가 고민을 했던 흔적은 뚜렷하다. 적어도,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전까지 유엔군 총사령부는 매우 신중했다.
그러나 사령부는 결국 북진을 결정했다.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북한군의 저항이 매우 변변찮았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이미 와해에 이른 면모를 보였다. 마치 가을바람에 맥없이 휘날리는 낙엽과도 같다는 느낌이었다. 북한군은 평양을 내줄 때 나름대로 강력한 저항을 펼쳤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탈환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 뒤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그런 판세를 보면서 유엔군 총사령부는 급기야 전격적인 압록강 진격을 결정했다. 나는 평양 탈환 후 이승만 대통령이 그곳을 방문하는 현장을 지켜봤다. 분위기는 매우 감격적이었다. 10만 평양 군중을 모아놓고 벌인 이 대통령의 연설 현장은 통일을 바라는 북녘 동포들의 열기로 금세 달아올랐다.
/평양 북방에서 실시한 미군의 공정(공수)부대 낙하. 도주하는 북한군 포위 섬멸을 위해 유엔군총사령부가 숙천에서 실시한 작전이다.
이에 앞서 내 나름대로 북한군이 싸우려는 의지가 어떤지를 알아본 적도 있다.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은 평양 진격 선봉에 서 있었다. 평양 탈환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북한군의 저항을 꺾을 무렵이었다. 산발적인 저항을 벌이는 북한군이 황급하게 도망치다 남긴 통신선을 통신참모였던 윤혁표 소령이 발견했다. 그는 “평양 인민군 총사령부 교환대를 호출했는데, 아무래도 평양 출신인 사단장께서 직접 통화해 보시는 게 어떠냐”고 했다.
형편 없었던 북한군의 저항력
나는 전화기를 들고 평양 사투리 어조를 살려 강하게 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교환원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전차 수 백 대를 몰고 쳐들어온다”며 숨이 넘어갈 듯이 대답했다. 나는 내친 김에 “김일성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교환원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도 가야 한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더 다그치듯 물었다. “최후까지 저항해야 하지 않는가?” 교환원은 내가 누군지조차 확인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저 “빨리 후퇴해서 우리라도 살아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들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김일성도 급히 평양을 빠져 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타고 북상하다가 결국 청천강 변에 자동차를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도망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김일성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중공군 사령부를 방문한 김일성(중앙)과 팽덕회 중공군 사령관(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월간조선
나는 전쟁의 총소리가 멈춘 뒤 40여년이 흘렀던 1990년대 말에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적이 있다. 중국 측의 초대에 의해서였다. 당시 베이징에서 내가 만난 사람은 차이청원(柴成文·1915~2011)이라는 인물이었다. 나보다 5살 많았던 그는 중공군으로 6·25에 참전했으며, 후에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외사국장까지 지냈다.
그는 전쟁 중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의 중국 측 비서장이었고, 그 전에는 초대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의 참찬(參贊·참사관급)을 맡기도 했다. 그는 김일성이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하염없이 도망치던 상황의 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만났을 때 차이청원은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일성은 평양을 내준 뒤 압록강변의 만포진 등에 쫓겨와 있을 때 몰골이 매우 초췌했다고 했다. 탄광 등 땅속 깊숙이 파고 들어간 곳에 거주하며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생활했던 김일성은 이미 전의가 꺾여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고도 했다. 그는 특히 미군의 공습을 매우 우려해 땅속 깊은 곳에 거주지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 참찬으로서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 지도부와 함께 붙어 있었던 그의 증언은 매우 믿을 만했다. 차이청원의 시선에 드러난 김일성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거듭해 평양 이북으로 진격할 무렵에는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은 결국 당시 전쟁의 커다란 국면(局面)이 실제 어땠는지를 읽게 해주는 좋은 그림이기도 했다.
/ 1950년 포로가 된 북한 인민군.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런 국면을 간파했던 것이다. 북한군은 앞뒤 돌보지 않고 내빼는 상황에 들어섰고, 따라서 북한군의 저항 자체는 아주 미미하거나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고 본 셈이다. 그 점에서 1950년 10월 말에 압록강을 향해 진격에 나서라는 명령을 내린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부의 결정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통일 눈앞에 온듯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 시민 10만 명 앞에서 감격적인 연설을 했고, 김일성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를 정도로 행방이 묘연했다. 북한군은 추풍낙엽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치기에 급급해 평양 이북의 전선에 나서는 국군과 유엔군의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통일은 곧 눈에 닥친 현실처럼 비쳤다. 유엔군은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고, 국군은 조국과 민족의 갈라진 틈을 메운다는 꿈에 빠졌다.
/중공군으로 6·25에 참전했던 차이청원 전 중국인민해방군 외사국장.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은 압록강의 수풍호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쪽으로 인접한 같은 미 1군단 소속의 미 24사단은 신의주를 향해, 동쪽으로 인접한 국군 2군단 소속의 6사단은 압록강 초산과 벽동으로, 같은 2군단의 8사단은 김일성의 지휘부가 있었을 만포진과 중강진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흥분으로 들떴던 분위기
당시의 나는 옆 사단의 진격로 등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수풍호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이상한 명령이 상부로부터 내려왔다. 1사단 지휘를 부사단장에게 넘기고 동쪽으로 인접한 2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2군단장을 맡고 있던 유재흥 장군은 서울에서 육군참모차장을 맡는다고 했다. 이상한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명령에 따라 2군단 사령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넘었던 청천강을 다시 남쪽으로 건너 사령부에 왔다. 나는 새로 맡은 2군단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6사단의 조짐이 좋지 않았다. 6사단은 당시 국군에서 명성을 드날리던 사단이었다. 김일성 군대가 전격 남침을 벌인 직후 춘천지역에 주둔하면서 분전해 인민군의 발길을 묶었던 부대였다.
아울러 김일성 군대가 전선을 돌파해 남진을 지속할 무렵에도 6사단은 분전을 거듭했다. 특히 7연대를 이끄는 임부택 대령은 충청도에서 인민군 부대를 전멸시키는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7연대를 비롯해 6사단 전체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 51년 1월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총살된 이 손의 주인은 결국 눈을 떨고 일어서지 못했다. 이 사진을 찍은 맥스 데스포 AP통신 기자는 "사망자가 잠시 숨이 붙어 있었는지 코와 입 근처에 눈이 녹아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6사단에는 다른 사단이 갖추지 못한 장점이 있었다. 기동력이 아주 뛰어났다. 앞에서도 잠시 소개했지만, 6사단은 춘천과 영월지역에 산재해 있던 광산회사로부터 트럭 등을 징발하기 좋았다. 다른 사단에 비해 민간회사로부터 다량의 트럭을 징발해 병력 수송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6사단은 늘 바람처럼 이동했다. 전 부대 병력이 거의 모두 트럭에 올라타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점은 다른 국군 사단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도보로 힘겹게 종일을 걷는 국군사단과 트럭에 올라타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는 6사단의 형편은 달라도 아주 달랐다. 높은 사기에 발 빠른 기동력, 6사단으로서는 남들 앞에 자랑스레 내놓을 수 있는 특징이었으나 이것이 거꾸로 발목을 잡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새로 자리를 옮긴 2군단의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곳곳에서 “중공군이 출몰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6사단 7연대의 사정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은 군단장인 내게 급한 목소리로 험악한 현장의 사정을 전하고 있었다. “탄약과 보급품이 모두 바닥났다, 급히 공수해 달라.” 절규에 가까운 소리였다.
(15) 방만해진 국군, 압록강의 물 뜬 뒤 중공군에 궤멸
장교는 차량에 여인 태우고, 헌병은 보급차에 뇌물 요구
(3) 압록강 물 떠오기
권총을 잃어버렸던 지휘관
나는 3일 만에 다시 1사단장으로 복귀했다. 2군단장으로 있다가 육군참모본부 차장으로 갔던 유재흥 소장이 불쑥 돌아와 “그냥 있던 데로 돌아가라고 그러네”라고 했다. 다급한 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매우 이상한 인사 조치였다. 당시로서는 그 영문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급했던 2군단의 상황을 유재흥 군단장에게 넘기고 다시 1사단으로 돌아왔다.
압록강의 물을 뜨는 일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압록강 물 뜨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 상징적인 의미야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전쟁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자리다. 그 전쟁을 다루는 군사(軍事)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압록강 물 뜨기는 민족통일을 실현했다는 감격과 흥분만으로 다룰 일이 절대 아니다.
6사단 7연대의 진격은 바람처럼 신속했다. 당시 국군 일반 사단의 입장에서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트럭을 보유했던 까닭에, 6사단 7연대는 빠른 속도로 압록강에 닿았다. 내가 유재흥 군단장의 후임으로 잠시 2군단장으로 가 있던 10월 26일 무렵, 6사단 7연대의 본대는 압록강 남쪽 6㎞의 초산에 도착해 부대 일부가 먼저 압록강에서 물을 뜬 뒤였다.
/1950년 10월 25일 한국전쟁에서 반격에 나서 초산까지 진격해 들어간 육군 제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사진. 최근 이 사진이 연출에 의해 다른 곳에서 다시 찍은 장면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날카로운 비수처럼 다가와있던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든 상태였다. 처음 2군단장으로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은 마치 절규하듯 군단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바람처럼 그곳에 다가갔던 6사단 7연대는 적의 공세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지휘관의 뒤를 따라 용맹스럽게, 그리고 민족통일의 거대한 꿈에 젖어 전선으로 향했던 수많은 장병이 중공군의 파도와 같은 공세에 직면했다. 그들 장병의 가상한 뜻을 누구도 탓할 수는 없다. 단지 문제가 있었다면, 냉철하게 전선의 승패를 가늠하는 지휘관의 역량 부족이었다. 내가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의 전면에 있던 12연대의 김점곤 연대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앞으로 진격해 압록강에 도착했다는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중공군 포위에 말려 결국 도망치다가 12연대로 넘어왔다.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우리 연대로 왔다는 얘길 듣고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연대장이 지니고 있어야 했던 권총마저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다 총을 빼놓은 모양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그에게 나는 농담으로 ‘물 떠오는 것도 좋지만, 총은 왜 빼놨느냐’고 물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 가운데 가장 먼저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것으로 알려진 육군 6사단(사단장 조병오)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2008년 6월 13일 부대내 연못에서 어린이들과 압록강 물 채수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압록강에 선봉으로 도착한 6사단 7연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주 많다. 그들은 압록강 물을 뜬 뒤 애국가를 함께 불렀다고 한다. 감격에 겨워 서로 얼싸안으며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그런 감격이야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앞장서서 맛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전장이었다.
중공군을 또 경시한 유엔군사령부
2군단은 6사단이 무너짐으로써 더 큰 위기에 직면한다. 미 1군단 예비로 있던 국군 7사단을 급히 국군 2군단 예하로 돌려 군단 재편에 나서야 했고, 이는 곧 닥칠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서 큰 위기 요소로 남는다. 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6.25 초기 큰 전적을 보였고, 북진 때도 지휘력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시 2군단장을 맡을 무렵에는 작전지역의 동굴을 시찰하다가 부상을 입고 몸져누운 상태였다.
압록강을 넘어와 산맥 속에 도사리고 있던 중공군의 10월 말 공세에 찢겨 6사단은 마침내 후방으로 내려와 2군단 예비로 남는다. 타격이 매우 컸기 때문에 취해진 일시적인 보완 조치였다. 그러나 2군단의 주력 사단으로서 6사단이 전방에서 물러남으로써 군단 전체의 전투력은 현격하게 떨어진 상태였다.
곧 이어 닥칠 불운은 더 컸다. 청천강 이북의 운산 지역에서 미군의 연대 병력이 중공군에게 혹심한 공격을 당했고, 국군 6사단이 압록강에 접근했다가 막심한 타격에 밀려 예비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이끄는 도쿄 유엔군총사령부는 막바지 진격을 명령한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다.
/ 1950년 10월 11일 개성에 입성하는 미 제1기병사단 부대를 환영하고 있는 주민들 모습. 특히 전쟁 전 38선 이남에 위치했던 개성 시민들은 북진하는 유엔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압록강까지 다시 밀어붙여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전쟁을 끝낸다는 게 이 작전의 요지였다. 역시 중공군의 위력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잘못된 작전이었음이 후에 드러났다. 이때는 유엔군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귀국해서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장병들이 들떠있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는 증언들에 따르면 일부 미군 장병들은 도쿄의 백화점이 인쇄한 크리스마스 선물 카탈로그를 들여다보기에 바빴다고 한다. 전쟁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일본 도쿄의 백화점에 들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런 부대가 전쟁을 어떻게 치를지는 불문가지다.
상대적으로 물적 지원이 더 궁핍했던 대한민국 군대는 막대한 물력(物力)과 화력(火力)을 보유한 미군과 유엔군보다 작전에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역시 진공(進攻)의 대열에 덩달아 오르면서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25일 맥아더의 사령부로부터 ‘크리스마스 공세’의 진격이 벌어졌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대세를 결정짓고 크리스마스 때는 귀국하자는의미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라는 이름이 나왔다. 국군 1사단은 앞서 10월 25일 이후 벌어진 중공군 1차 공세 때 우선 남하해 평양 인근의 입석에서 사단을 재정비한 뒤 압록강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사단은 우선 중공군의 공세를 경험했던 덕분에 작전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 1950년 11월 말 군우리에서 미 2사단 2개 연대 이상이 전멸하다시피했던 일명 '죽음의 계곡'. 이른바 '인디언 태형'이라는 별명의 중공군 공격이 벌어졌던 곳. 미군의 장비 등이 널브러져 있다.
11월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드러낸 결과는 참담했다. 미 2사단의 피해는 막심했다. 2개 연대 병력이 골짜기에 몰려 이른바 ‘인디언 태형’을 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인디언이 포로를 잡았을 때 이들을 한 줄로 늘어놓고 돌아가면서 매질을 가하는 게 그 ‘인디언 태형’이었다. 미 2사단 2개 연대는 좁은 골짜기에 진입한 뒤 협곡 양쪽에 매복했던 중공군 병력에게 그런 ‘매질’을 당하면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국군 2군단이 무너지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 예하 7사단은 덕천으로, 8사단은 영원지역으로 진출했다. 중공군은 미군에게 막심한 타격을 가했지만, 그들이 정작 노린 곳은 허약한 화력을 지닌 국군 2군단 지역이었다. 이는 나중의 중공군 전사(戰史)에 분명하게 나온다. 그들은 참전 초기 화력이 빈약한 국군을 본보기 삼아 집중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어 ‘곰보 장군’으로 불렸던 훙쉐즈(洪學智)가 이끄는 막대한 중공군 병력이 7사단과 8사단 정면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 거센 소용돌이가 휩쓸어 닥치는 와중에서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천강 이북의 운산에서 중공군과 조우한 뒤 대대 급 병력을 잃은 뒤 후퇴했고, 그에 따라 10여 일 동안 평양 인근의 입석에서 부대 상황을 점검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막강한 화력을 지닌 미 1군단에 배속해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벌이는 공격의 칼날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압록강국경철교의 중국 측에 세워진 철교 연혁비. 2004년 10월 1일 세워진 이 비에는 '1950년 10월 11일 중국인민지원군 42만명이 이 다리를 건너 조선으로 들어가 항미원조전의 위대한 승리를 이뤄내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새겨져 있다./독자 김찬호
그러나 우리 국군은 쉽게 흥분했고, 아울러 자만했다. 그리고 그런 단점을 채울 만한 경험도 없었고, 전장에서 패할 때 피해를 최소화할 노련함도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몇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아주 방만했다. 낙동강에서 김일성 군대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고 북진할 무렵에 그런 현상은 자주 나타났다.
북진하는 국군의 뒤를 받쳐주기 위해 올라가는 보급 차량이 중간 중간의 아군 헌병초소를 지날 때 ‘통과료’를 물어야 했다는 얘기, 북진하는 장교의 작전 차량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들이 함께 타고 다녔다는 풍설 등이 전해졌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뒤에 그런 군기 문란현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중공군이 새카맣게 도사리고 있는 적유령 산맥 속의 깊은 정적 속으로 함부로 내달렸던 것일까.
바람처럼 떠도는 그런 이야기들을 다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국군의 장병들은 나름대로의 충정을 가슴에 안고, 최선을 다해 압록강을 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시의 크리스마스 공세에서 씻을 수 없는 패배를 기록했다.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의 전격적인 남침으로 벌어진 전쟁에서 처음 맞는 국군 군단의 와해였다.
(16) 戰史에도 안나오는 부끄러운 진실
국군 2개 사단 중공군에 하룻밤 새 와해, 지휘관들은 전장을 버리고 팽개치고….
(3) 압록강 물 떠오기
방심이 낳은 참담한 결과
이 자리에서 거듭 말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참전과 대규모 공세 때 맞이한 국군과 유엔군의 전반적인 후퇴상황에서는 그랬다.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미군 1군단에 속해 있으면서 그들로부터 막강한 화력을 지원받았고, 그들의 작전 통제에 따라 움직이면서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1차 공세 때 국군 1사단은 포로로 잡은 중공군의 진술 내용, 4개 대대에 이르는 미 고사포단의 화력 지원, 나와 함께 중공군 포로를 심문한 뒤 중국의 참전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은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의 신속한 판단 덕분에 큰 피해를 보지 않은 채 후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불렸던 국군 및 유엔군의 진격과, 이를 정면으로 치고 들어온 중공군의 2차 공세였다. 1950년 11월 24일 맥아더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재차 압록강을 향한 진격에 나섰다. 중공군의 참전 사실과 그들의 공격력을 터무니없이 낮춰 본 맥아더 사령부의 실책이었다.
/ 1950년 크리스마스 공세 때 미군을 공격하는 중공군 모습
전쟁에서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이 병력의 분산(分散)이다. 특히 방어 또는 후퇴 때 적에게 어느 한 구석을 뚫릴 경우 병력은 쉽게 흩어진다. 적이 밀고 들어오는 경우 아군의 병력이 분산의 조짐을 보일 때 그 뒤의 결과는 아주 참담하다. 2차 크리스마스 공세에 나선 우리 1사단도 그런 상황을 맞이했다.
평양 인근의 입석에서 10여 일의 재정비 기간을 거친 뒤 1사단은 평북 태천을 넘어 압록강 진격에 다시 나섰다. 박천에 도달했을 때다. 11월24일 중공군이 전면에 나타나는 듯했고, 이어 다음날에는 저들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가해졌다. 나는 전선 바로 뒤에 작은 ‘전방 지휘소’를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1사단 2개 연대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으로 급히 내달렸다. 각 연대의 예하인 대대본부를 마구 뛰어다녀야 했다. 전선의 장병들은 벌써 상당수가 적에게 등을 내보이면서 달아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급히 뛰었다. 각 대대를 찾아가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장병들을 향해 “이러면 못써,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끝이야!”라고 절규하듯이 외치며 그들을 막아섰다.
그래도 상황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고 또 뛰었다. 각 부대와 부대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밀리면 우리는 끝이다”라고 독전을 거듭했다. 그러자 조금씩 대열이 안정을 찾았다. 급히 밀리던 상황이 차분하게 후퇴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었다. 밀릴 때 밀리더라도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가하면서 후퇴하는 식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던 것이다.
병력의 분산이 가장 두려운 일
동요하지 않는 전열(戰列)은 그래서 필요하다. 전선에 선 장병은 옆에 선 부대와 동료의 신뢰를 뒤에 업고 싸운다. 따라서 전열의 한 곳이 무너지면 바로 옆의 부대가 심각하게 동요한다. 그 열(列)을 유지하면서 공격을 벌이거나 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전열 한 구석이 맥없이 무너지면 금세 인근 부대의 전투력 상실로 이어진다. 이런 때가 오면 공격이나 방어 모두가 불가능하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뒤 벌인 중공군의 공세.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전투를 지휘해 본 지휘관이 결코 모를 수 없는 싸움의 기본에 해당한다. 전선의 지휘관은 그런 ‘분산’의 상황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따라서 지휘관은 한 군데에 그저 앉아있을 수 없다. 전투 지휘소에서 전황을 파악하더라도 늘 현장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급한 경우는 직접 전선을 다니면서 싸움의 의지를 되살리는 ‘독전(督戰)’을 펼쳐야 한다.
다행히도 국군 1사단의 2개 연대는 무질서한 후퇴를 멈추고 전열을 곧 가다듬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차분하게 반격하면서 사흘 정도를 버텼다. 그 뒤에 한국 전선으로 부임해 전쟁을 이끌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그 점을 늘 강조했다. 후퇴하면서도 항상 적에게 반격을 가하는 ‘후퇴이동’, 즉 retrograde movement였다. 당시 1사단은 전열을 허물지 않았고, 그에 따라 차분한 반격도 펼칠 수 있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국군 1사단과 나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동쪽으로 진출한 미 9군단 소속 미 2보병사단은 문제였다. 이들은 길고 좁은 골짜기에 들어가 길 양쪽에 매복한 중공군에게 아주 모질고 혹독한 공격을 당했다. 앞 회에서 소개한 이른바 ‘인디언 태형’이었다. 미군의 2개 연대와 공병대대, 사단 직할부대, 포병부대가 아주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2개 연대 이상의 병력 대부분이 무너지는, 미군의 전쟁사에서도 기록에 남을 만한 패배였다.
/ 1951년 9월14일 9사단의 포병 시범을 참관하는 이승만 대통령(왼쪽 앉은 사람)과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가운데), 그리고 이기붕 국방장관. 밴 플리트 사령관 등 미 군부는 미 국무부보다 이승만에 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국군 2군단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덕천과 영원으로 진출한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과 8사단은 하루 밤 사이에 사단이 주저앉았다. 전투력을 거의 상실할 정도의 막심한 타격이었다. 앞에서 미리 소개한 대로 2군단의 주력이랄 수 있었던 6사단은 압록강에 선착해 물을 뜨다가 적의 포위에 말려 사단이 무너졌다. 한 달 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는 나머지 2개 사단이 전력을 상실함으로써 2군단 전체가 없어지는 결과를 빚은 셈이다.
미 2사단을 이끈 사람은 로런스 카이저 소장이었다. 그는 공격을 펼칠 때 여러 가지를 놓쳤다. 우선 퇴로(退路)를 상정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았지, 뒤로 물러설 때의 위험을 간과했던 것이다. 아울러 적이 이미 매복했을지도 모를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야간에 부대를 이동시켰다. 아주 커다란 실책이었다.
부대의 후퇴 시간이 낮이었다면 미군은 뛰어난 화력으로 적에게 맞설 수 있다. 그러나 밤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박격포탄에 맞설 수 없을 만큼 시야가 묶이고, 그만큼 두려움이 늘어난다. 공격을 펼치는 공로(攻路)에서의 방심, 후퇴하는 길인 퇴로에서의 조급함이 결국 재앙과 같은 미 2개 전투연대의 와해로 이어졌던 것이다.
서울로 도망친 전선 지휘관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우리 국군이었다. 7사단과 8사단은 덕천과 영원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하룻밤 사이에 와해됐던 것이다. 우리의 전사(戰史)는 이를 올바로 적고 있을까. 정부가 간행한 공적인 역사 기록을 우리는 공간사(公刊史)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가 전쟁의 기록을 펴낸 공간사에는 7사단과 8사단의 피해 상황이 자세히 적혀져 있지 않다.
나 또한 당시 국군 1사단을 이끌고 있던 일개 전선지휘관이었던 까닭에 옆 사단인 7, 8사단의 피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만큼 모든 전선의 상황은 매우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공간사를 이리저리 뒤져도 그에 관한 기록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나는 중공군 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내줬던 1.4 후퇴 무렵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한 나는 당시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싸워도 좋을까’라는 생각이 우선 앞섰다. 다음에 찾아든 것은 ‘내게도 그런 경우가 닥치면 안 되겠다’는 깊고 뼈저린 자성(自省)이었다.
/중공군 공세에 결국 평양을 내주고 후퇴하는 국군 대열
전선에서 무너진 두 사단의 최고 지휘관과 관련해서다. 둘은 아주 유감스럽게도, 서울 거리에서 우리 군에 붙잡혔다. 중공군에게 서울을 빼앗기기 직전이다. 아마 헌병이 그 둘을 체포했을 것이다. 왜 아군의 헌병이 전선에 섰던 두 지휘관을 체포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거느렸던 병력을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탈은 무엇을 의미할까. 1만 명이 넘는 사단 병력의 목숨을 져버리고 도망쳤다는 뜻이다.
사단장은 이른바 ‘지휘관의 꽃’이라고 불린다. 자신이 거느린 병력의 인사권과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을 손에 쥔 사람이다.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부하 장병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사단장이 비록 패했다고는 하지만 전선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제 부하들을 놔두고 그로부터 한참 떨어진 서울의 거리를 배회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 둘은 결국 군법재판에서 아주 무거운 판결을 받았다.
지휘권을 포기하고, 군을 함부로 이탈했으며, 그로써 자신들이 거느린 수많은 장병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죄다. 지휘관으로서 그 이상의 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문제는 그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두 지휘관은 어쩌면 당시의 국군 지휘관이 지닌 일반적인 모습을 말해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쟁은 매우 잔혹했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제대로 몰랐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전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을 이해하는 과정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덧없이 반복하기에는 전쟁이 던지는 상처가 너무나 깊고 컸다.
(17) 미국서 만난 '군우리 패전'의 패장 카이저는 말이 없었다
미군이 자세하게 다루는 패전의 기록, 우리는 제대로 적었는가
(3) 압록강 물 떠오기
이런 지휘관은 전쟁에서 진다
평북 군우리(軍偶里)에서 이른바 ‘인디언 태형’을 당함으로써 막대한 인명과 물적 피해를 낳은 미 2사단장 로런스 카이저는 좀 특별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와 전쟁터에서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다. 따라서 그의 사람 됨됨이와 군 지휘관으로서 자질을 자세히 관찰할 순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역사에서 기록적인 참패(慘敗)로 여겨지는 군우리 전투를 놓고 볼 때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아무래도 크게 떨어지는 군인이었던 것 같다. 앞에서 적은대로 그는 후퇴의 길을 잘못 선택하는 우를 범했고, 아울러 야간 후퇴를 결정해 피해를 배가시켰다. 지휘관으로서의 가장 큰 책무인 자신의 부대와 화력, 장비의 보호에서 실패했다. 부대와 장비 등을 적의 손쉬운 공격 영역으로 몰고 간 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때 50대 중반의 소장이었다. 자신의 동기인 로튼 콜린스는 이미 대장 계급을 달고 미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대를 이끌고 분전했던 경력은 있으나, 그 이후의 전적은 별반 내세울 게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마구잡이식 해체의 길을 걸었던 미 육군의 한 구석에 살아남아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한 뒤 미 2사단장을 맡았다.
/로런스 볼턴 카이저 소장
6·25전쟁이 벌어진 뒤 낙동강 전선에서 막바지 저항을 펼칠 때 그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 지역 일부를 맡아 2사단을 이끌었으나, 잦은 실책으로 당시 미 8군을 지휘하던 월튼 워커 중장으로부터 여러 번 호된 질책을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 6·25전쟁 중 북진과정에서 보인 미군의 실책을 다룬 책 『콜디스트 윈터』(데이비드 핼버스탬 저)에는 그에 관한 묘사가 자주 나온다.
전쟁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지휘관이었고, 현장을 꼼꼼히 살피는 타입이라기보다 작전 지휘소에 앉아 막연한 생각에 빠져드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진로와 퇴로의 결정에서도 막연하게 운 또는 종교적 신념에 따르는 사람이었다고도 했다. 실제 그런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책을 펴낸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다.
지휘관은 현장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누구라도 어길 수 없는 철칙(鐵則)이라고 해도 좋다. 현장을 떠나면 지휘관은 많은 것을 잃는다. 우선 자신이 거느린 장병의 사기(士氣)를 전혀 읽을 수 없고, 싸움을 벌이는 지형에 둔감해진다.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응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 지휘관은 작전지도에만 매달리는, 때로는 그래서 교범에만 충실하려는 스타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성격까지 덧붙여지면 그 부대는 전쟁에서 참혹한 국면을 피할 수 없다.
동양에서는 그런 스타일을 ‘지상담병(紙上談兵)’이라고 적는다. 교범이나 전법을 다룬 책에만 의지해 전쟁을 논하는 타입이다. 나는 전쟁 중에 그런 지휘관을 여러 번 봤다. 배워서 익힌 것에만 탐닉하면서 실제 총알과 포탄이 넘나드는 전쟁터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꽁무니를 빼고 전쟁터를 떠나는 지휘관들이다.
승전 기쁨을 만끽한 중공군
카이저 소장도 아마 그런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 미국 방문길에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들렀을 때 미군 장성으로서는 유일하게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휴전 뒤 석방된 윌리엄 딘 소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왔고, 카이저는 딘 소장을 따라 우리 만남에 동석했다.
포로로 잡혔으나 사단장으로서 끝까지 저항을 펼쳤던 딘 소장과는 달리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저는 만남 내내 침울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전쟁에서의 참패는 그 부대 지휘관에게는 아주 오래 남는 악몽이다. 심지어는 그 밑에서 싸웠던 장병들도 그런 심리에 젖는다. 지휘관은 그 정도가 아주 심하다. 그 때 카이저의 눈에는 아주 암울한 빛이 담겨 있었다. 군우리의 참패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했다.
/김일성의 승용차. 이 승용차는 6·25전쟁 당시 북진하던 국군 6사단 제2연대가 1950년 10월 22일 평남 군우리 부근 청천강변에서 황급히 도망가던 김일성이 버리고 간 것을 노획한 것이다. 하지만 같은해 11월 군우리에서는 퇴각하던 미군 2사단이 중공군에게 대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일성의 승용차를 6·25전쟁에서 사망한 워커 장군의 부인에게 기증했다.
미군 2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입장에서는 참전 뒤 거둔 첫 대첩이나 다름없었다. 미 2사단은 많은 것을 빼앗겼다. 군우리의 그 험악한 골짜기에서 생명을 앗긴 미군의 희생이 우선이다. 아울러 그들이 남겨두고 간 막대한 양의 물자는 중공군 사이에서 내내 화제였다고 한다. 트럭과 장비, 야포와 각종 무기는 물론이고 미군이 지니고 다녔던 막대한 양의 전선 물자가 그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그 물자는 한국전을 지휘했던 펑더화이(彭德懷) 사령부에 바로 전달됐고, 이어 그 중 상당수가 압록강을 넘어 베이징(北京)의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있는 최고 지도부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 베이징의 지도부는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세계 최강의 미군에게 대승을 거뒀고, 그들의 막대한 물자까지 확보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카이저는 현직에서 바로 물러났다. 참패가 너무 기록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그런 미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비슷한 전쟁터에서 카이저보다 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던 국군 사단장 2명은 나중에 군에 복귀한다.
한 사람은 계급 강등에 이어 병종(兵種)을 바꿔 현역에 복귀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정 유예기간을 거친 뒤 다시 육군 지휘관으로 돌아왔다. 미군처럼 패장을 단숨에 내치기에는 우리의 실제 상황이 너무 어려웠다. 군을 이끌 만한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이 현업으로 복귀하게 된 상황은 이해를 할 수도 있다.
/1950년 12월 12일 6·25에 참전한 터키군의 알리 야쯔츠 준장이 워커 중장으로부터 군우리 전투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고 있다.터키군은 군우리 전투에서 740여명이 전사했으나 끝까지 부대건재를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육군제공
그러나 사람은 용서하되 그들이 범한 실책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하고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만 향후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제대로 된 교훈을 남길 수 있다.
일본의 틀에 빠진 전쟁사 서술
미군의 전사(戰史)는 군우리에서 2사단장 카이저가 범한 실수를 아주 상세하게 적고 있다. 왜, 어떻게, 그 전투에서 패했는가를 아주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군사(軍史)는 일본을 닮았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 전쟁이 러·일 전쟁이고, 그에 앞서 청(淸)나라와 싸운 전쟁이 청·일 전쟁이다. 그 둘 모두에서 일본은 승리했지만 세부적으로는 패배도 많았다. 일본의 전사는 그러나 그런 패배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싸움에 나선 지휘관들의 복잡한 인정(人情) 관계를 두루 고려했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군 역사 기록은 그런 틀을 옮겨왔다. 싸움을 적되 싸움의 모습을 낱낱이 담지 않았다. 두루 원만하게 적었고, 작고 보잘 것 없는 인정의 세계에 가로막혀 우리가 싸웠던 진짜 싸움의 모습을 적는 데는 실패했다. 후대의 많은 군사 전문가들이 그런 단점을 깨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아직 구태를 확연히 벗어던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은 싸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일지 모른다고 얘기했다.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왜곡된 기록 문화다. 우리가 겪었던 불과 60여 년 전의 전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엄청난 피와 땀으로 깨우친 고귀한 교훈을 후대에 넘겨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
(18) 당황한 미군 수뇌부 "유엔군은 일본, 한국군은 남쪽 섬들로 철수한다"
(4) 지평리 전투
수류탄 차고 나타난 새 사령관
그는 한국 땅에 도착하면서 실망을 금치 못했던가 보다. 아니, 실망이라기보다 허탈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내가 왜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의 독백 속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매슈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리지웨이는 대한민국이 김일성 군대의 공세에 낙동강까지 밀렸던 시절 분전을 거듭해 전세를 만회한 월턴 워커 중장에 이어 2대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인물이다. 1895년생으로, 그 후임 8군 사령관으로 왔던 밴 플리트 장군에 비해 오히려 나이가 세 살 적은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우리나라 밭과 논 등에 뿌려진 강한 인분 냄새를 맡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그의 첫 인상은 고약한 그 냄새와 함께 시작한다. 나중에 펴낸 회고록에서 리지웨이는 “왜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푸념부터 털어놓고 있다.
/막 부임해 전선 상황을 시찰 중인 리지웨이(오른쪽). 한쪽 가슴에 보란 듯이 수류탄을 차고 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그런 생각을 빨리 정리할 줄 알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회고록에서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을 털어놓는 푸념과 함께 이런 내용의 말을 하고 있다. “미국의 합법적인 정부가 내린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뎠고, 적과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얘기다.
그랬다. 리지웨이는 늘 그런 점을 강조했다. “미국 정부가 내린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라는 그런 말 말이다. 회고록에서도 그랬고, 1951년 내가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로 나섰을 때 판문점 인근에서 잠시 회담에 참가하는 아군 대표들을 모아놓고 구수회의를 하면서도 그랬다. 그가 싸움의 명분을 이야기할 때 늘 입에 올리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는 명분에 충실한 군인이었고, 그런 명분을 이루기 위해 열과 성을 모두 바치는 그런 군인이었다.
그는 공수작전의 베테랑이다. 적진에 강하(降下)해 상대의 요부(要部)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는 특수작전의 명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는 유럽의 각 전선에서 공수군단을 이끌며 작전을 벌였고,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을 공격할 때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습(空襲) 강하 작전을 주도했다.
본인이 강인하고 모질지 않으면 수행하기 힘든 작전들이었다. 그런 싸움을 여러 차례에 걸쳐 펼침으로써 리지웨이는 명성을 얻었던 장군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항상 상의 앞주머니에 수류탄을 매달고 다녔다. 자신의 강인함을 과시하려는 일종의 장식품이었을텐데, 어쨌든 그와 수류탄은 잘 어울렸다. 그게 멋져 보였는지 우리 군의 일부 장성들도 그를 흉내 내 수류탄을 주머니에 매달고 다녔다.
워커와는 조금 달랐던 리지웨이
그는 월턴 워커 중장과 달랐다. 워커 장군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 막바지 김일성 군대의 공세를 막아낸 명장이지만, 리지웨이는 그보다 더 강인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그런 성격의 새 사령관이 부임했다는 점은 어쩌면 1951년 중공군의 공세에 다시 서울을 내주고야 말았던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큰 요행이었을지 모른다.
/낙동강 교두보에서 김일성의 막바지 공세를 꺾었던 월턴 워커(지프차에 서 있는 사람).
최근 11권을 완간(完刊)함으로써 ‘대한민국 전쟁기록 집대성(集大成)’이라는 대장정의 정점을 찍은 <6.25 전쟁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월턴 워커는 낙동강에서 김일성 군대를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으나, 그 후 벌어진 중공군의 참전과 대규모 공세에 따른 아군의 후퇴 국면에서는 전세(戰勢)를 조금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리면서 서울을 내주는 상황이 닥치자 워커는 부산으로의 철수를 제안했다고 한다. 우선 축차적으로 방어선을 형성하면서 후퇴하되, 마지막 방어선은 ‘부산 교두보’의 북방인 낙동강 전선을 준비하자는 내용이다.
/월턴 워커 장군
당시의 미8군 방어계획에는 최종적으로 낙동강 전선에서도 밀려 부산 교두보를 내줄 경우 미군을 일본으로, 국군은 한반도 남단의 각 도서(島嶼) 지역으로 철수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 직전인 1950년 12월 4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도쿄에서 급히 만났다. 추가적인 파병이 불가능하다는 성안(成案)을 지닌 채 도쿄에 도착한 콜린스와 중공군 참전에 따른 국면 악화에 달리 묘안(妙案)을 낼 수 없었던 맥아더의 회담은 결론이 뻔했다.
방어선을 한반도 남북으로 여러 개 설치한 다음 그에 따라 차츰 후퇴해 결국 낙동강 전선, 나아가 해안 교두보로 내려오자는 내용이었다. 12월 7일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그런 후퇴 방침을 결정한 뒤 유엔군과 국군 전체에 그 내용을 명령으로 시달했다. 그런 와중에 워커 사령관은 12월 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으며,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신임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모두가 중공군이라는 커다란 물결에 밀려 떠내려가는 형국이었다. 작전계획에 따라 각급 부대가 나름대로 저지선에 서서 중공군에게 타격을 가하려고 시도했으나, 웬만해서는 뒤집기를 허용하지 않는 전세의 큰 형국은 유엔군과 국군의 후퇴를 더욱 가속화할 뿐이었다. 그 흐름을 뒤집기란 보통의 강단(剛斷)과 의지로는 이뤄지지 않는 법이다.
/참전 초반 무서운 기세로 유엔군과 국군을 압박했던 중공군.
중공군에게 ‘벼락’을 꽂아라
대규모 공습 강하작전의 명수, 그래서 적의 후방에 강한 칼을 꽂는 데에 탁월한 기량을 보였던 리지웨이의 진가는 그 때 드러난다. 그는 미 정부가 내린 “가서 적과 싸우라”는 명령에 매우 충실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대규모 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 역전의 노장답게 아주 용맹했다. 그는 현장형 지휘를 강력하게 선보였다. 당시 중공군에 밀린 미 8군의 사령부는 대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최후 저지선 밑에 바짝 붙어 현장을 지휘했다.
그 점에서 그는 탁월한 전선사령관이었다. 아울러 그의 강인함을 설명해주는 대목도 있다. 우선 그는 부임과 함께 “전열을 다시 정비한다. 미 8군은 철수하지 않고 적에게 공세를 펼친다”고 강조했다. 수류탄을 가슴에 달고 현장을 누비면서 마구 밀리는 아군 대열을 향해 반격을 강조하고 다니던 그의 모습이 당시 우리 국군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음은 물론이다.
그는 적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의지와 그에 못지않은 용맹함도 갖췄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단도 대단했다. 그 강단이란 게 뭔가. 마땅히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추호의 망설임 없이 단안(斷案)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지웨이는 당시 매우 위급했던 한국 전선의 상황을 관리하기에는 어쩌면 안성맞춤의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 1·4 후퇴 이후인 1951년 1월 28일 수원으로 날아온 맥아더(가운데)와 함께한 매슈 리지웨이 중장(오른쪽)./스트레이트마이어
그런 강단의 성격을 보였던 일화가 하나 있다. 리지웨이가 예하 부대의 작전계획을 보고받는 자리가 있었다. 미 1군단의 한 작전참모는 반격에 대한 리지웨이의 열정을 무시한 채 후퇴 위주의 작전계획을 내밀었다. 리지웨이는 그를 그 자리에서 경질해 버렸다. 매우 전격적이면서도 매정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로서는 반격을 향한 빈틈없는 자세를 강조하기 위한 조치였고,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제스처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리지웨이가 중심을 이룬 미 8군의 분위기가 싹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부산으로의 후퇴에 이어 유엔군을 일본으로, 국군을 남해안 도서지역으로 철수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던 미군 수뇌부 또한 그를 유심히 지켜봤을 것이다. 그가 유엔군과 국군에게 하달한 작전의 핵심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했다.
그는 두 가지 지침을 내렸다. 저지선에서 틈을 파고들어 우회와 포위를 노리던 중공군에 맞서기 위해 아군끼리의 간격을 좁히도록 했고, 각급 지휘관은 ‘2단계 하급 제대(梯隊) 지휘’를 이행하도록 명령했다. 사이를 좁히라는 말은 지향이 분명했다. 느슨한 방어선을 철통같이 다시 엮으라는 얘기였다. ‘2단계 하급 제대 지휘’는 연대장일 경우 밑으로 두 단계인 대대와 중대까지 관리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현장에 붙어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내린 작전명은 ‘Thunderbolt’, 즉 ‘벼락’이었다. 그리고 작전의 구호는 ‘Shoulder to shoulder’, ‘어깨를 나란히’였다. 매섭게 상대를 찌르는 벼락처럼 적을 밀어붙이자는 취지였고, 그 전제가 아군의 간격을 좁히면서 쇠사슬과 같은 전투대형을 유지하라는 지침이었다. 전선의 국면이 조금씩 달라질 기미가 보였다.
중공군의 공세는 여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지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조금씩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군의 방어선은 어느덧 평택과 안성, 원주와 삼척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온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전선은 서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19) 리지웨이 사령관, 이승만 대통령에게 "강력한 지휘력 안보이면 지원 없다" 협박
승리감에 도취된 중공군, 서울 점령 후 병력·물자 부족에 빠져
(4)지평리 전투
이승만을 닦달한 리지웨이
중공군 진영에 뭔가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서울을 점령하면서 중공군은 완연한 승세(勝勢)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 이남의 전선에서는 멈칫거리는 기색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전 이래 전선을 하루 평균 10㎞씩 밀고 내려왔다.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 따르면 압록강에서 수원~강릉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오는 데 38일이 걸렸다.
대나무에 칼집을 낸 뒤 그를 쭉 갈라 곧 쪼개는 그런 모습, 이른바 ‘파죽지세(破竹之勢)’와 다름없는 공세였고, 그에 밀려 유엔군과 국군은 제대로 반격도 펼치지 못한 채 후퇴만을 거듭했던 상황이었다. 중공군을 지휘하던 펑더화이(彭德懷)는 1951년 2월 무렵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전황에 관한 보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 전선 부임 직후 이승만 대통령(왼쪽)을 방문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오른쪽). 잦은 불만을 토로해 이승만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사실 중공군은 그 무렵 기고만장(氣高萬丈)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일방적인 공세를 펼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했으니 그럴 만했다. 그러나 중공군 전사(戰史)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는 아주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전선을 남하시키는 과정에서 입은 손실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이미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들은 서울을 점령한 1월4일로부터 나흘이 지난 1월8일 경 중동부 전선의 부대를 제외한 전 병력에게 추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공격을 펼치다가 입은 손실이 매우 컸다는 얘기다. 중공군은 휴식기에 들어갔다.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음은 물론이고, 바삐 쫓겨 내려오던 유엔군과 국군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매슈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26일 한국에 부임했다. 그는 도착 즉시 부산 임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을 반드시 격멸하고야 말겠다”고 말했다. 신임 미8군 사령관의 그런 굳건한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꽤 위로를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 단호하며 매정한 미 야전 장군의 혹독함에 치를 떤다.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란민의 행렬./미 국립문서보관소
리지웨이는 부임 직후 의정부 전선을 시찰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전선을 지키던 국군이 맥없이 중공군에게 쫓겨 물러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압록강에서 쫓기기 시작해 제대로 반격을 펼치지도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의 무기력함에 그는 화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리지웨이는 그 직후 다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각하가 강력한 지휘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군을 지원하지 않겠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거의 협박수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리지웨이를 매우 괘씸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 이후 이 대통령은 리지웨이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대통령은 자존심이 강했던 인물이다. 대통령인 자신의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해대는 리지웨이가 편하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리지웨이는 공격적이고 매정했다.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에는 조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병력 섬멸 위주의 리지웨이 공격법
리지웨이는 반격을 시도하면서 전임 지휘관들과는 다른 곳에 주안점을 두었다. 전임 지휘관들이 지역을 많이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면 리지웨이는 적의 병력을 타격하는데 주력했다. 적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해 병력과 물자, 장비 등을 최대한 많이 섬멸하고 파괴하는 전법(戰法)이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설치한 포항의 구호품 배급소에서 옷가지와 신발, 장난감 등을 한두 점씩 받아 든 피란민 아이들. 1·4후퇴 직후인 1951년 2월15일 촬영된 사진이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한국에서 전선을 이끌고 공격에 나선 중공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는 그 누구보다도 당시의 중공군이 지녔던 힘의 한계를 절감한 인물이다. 그는 베이징에 돌아가 전선 상황을 마오쩌둥에게 설명하기 전에도 이런 문제점을 보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력 손실이 매우 크고, 전선의 연장으로 보급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과 동상자(凍傷) 등 질병으로 인한 병사들의 사기(士氣) 저하 등도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 수뇌부는 한반도 전쟁 참전 성과에 도취해 있었던 듯하다. 특히 청천강 유역의 군우리 등 지역과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자국군이 세계 최고라는 자만에 젖어 중립국과 서방 국가들이 제안하는 휴전 방안을 드러내놓고 무시했다. 1951년 1·4 후퇴 직후의 상황이었다.
1·4후퇴는 서울과 인근 지역의 220만 명에 달하는 피란민, 그리고 전국적으로는 700만 명이 넘는 남부여대(男負女戴)의 대열을 낳았던 사건이다.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다시 내줌으로써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국군 일부에는 ‘계속 중공군이 남하해 공격을 벌여온다면 그저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패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 6·25 당시 미군 탱크를 방망이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중공군 특공대.
그런 분위기를 일신한 주인공은 역시 리지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버르장머리 없이’ 싫은 소리를 마구 해대기는 했지만, 공격적이고 단호한 그의 면모는 당시 전선 상황에서 아군에게 매우 절실한 요소였다.
당황한 펑더화이, “서울만은 사수”
펑더화이가 자군 병력에게 추격 정지 명령을 내려 중공군은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음에도 중부 전선은 위태로웠다. 서부전선에는 미군이 버티고 있었으나 중동부 전선의 주요 지역에는 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중공군은 전반적인 공세를 잠시 멈췄음에도 그 지역만큼은 모질게 파고들었다. 강원도 원주가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중공군은 그곳을 돌파해 아군의 후방으로 우회하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듯했다.
/구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 초상화 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유엔군 병사들./ 춘천박물관 제공
그곳의 중공군 돌파구를 점차 축소하는 데 일단 힘을 모았다. 미군은 리지웨이의 지시에 따라 그곳으로 병력을 집중해 일단 원주의 돌파구가 커지는 상황을 막았다. 1월12일 무렵이었다. 그 후로는 이상하게도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이 사라졌다. 새로운 공격을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리지웨이는 위력수색을 시도했다. 위력수색은 적의 병력이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펼치는 수색작전의 하나였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적이 먼저 아군을 향해 공격을 벌이도록 유도하면서 상대의 병력 배치, 화력 규모 등을 알아보는 작전이었다.
서울 이남까지 펼쳐진 그 위력수색의 결과,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은 서울 이남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에 따라 리지웨이는 전선을 북상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그는 각급 부대에게 적의 병력과 물자에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지역의 확보는 둘째였고, 우선은 날카로운 공격으로 적의 희생을 극대화하라는 지시였다.
베이징에 있던 마오쩌둥은 춘계공세 준비를 명령했다. 2~3개월 집중적으로 유엔군과 국군을 밀어붙이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그 배경에는 참전 초반 2개월에 걸친 공세와 승리로 인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펑더화이의 고민처럼 중공군은 이미 병력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2월 들어서면서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이 가시화했다. 중공군은 서울을 내주지 않기 위해 총력전을 펼쳐왔다. 서부전선에서는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기 위한 피의 혈전이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20) 중공군, 리지웨이의 강력한 사슬에 말려들다
1개 연대 병력으로 중공군 8개 연대 공세 꺾어
미군의 실력 오판한 중공군 지휘부 치욕적 패배
(4) 지평리 전투
베이징의 무리수
마오쩌둥(毛澤東)은 현대 사회주의 중국 건국을 이끌었던 큰 인물이다. 비록 한국전 참전을 결정함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커다란 충격과 아픔을 던진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는 현대 중국의 건국과 그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시각에서 볼 때 그에게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마오쩌둥은 정치적인 싸움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싸움터의 큰 방략을 읽는 점에서는 어쩐지 정치적 성공에는 견주기 힘든 면모가 눈에 띈다. 그 역시 대규모의 싸움을 직접 이끌었던 전선 사령관은 아니었다.
그는 6.25전쟁에서 전선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현장의 문제점 등을 거론했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 ‘춘계 대공세’에 관한 지시를 내린다. 앞 회에서 적었던 대로 초반에 미군을 상대로 올린 승리에 도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그에 따라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중공군은 2월 들어서 다시 공세에 나선다.
/지평리 전투가 벌어진 지역
그런 상황에서 미군은 리지웨이 신임 8군 사령관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체력을 다소 회복한 미군과 초반의 승세에 빠져 자국 군대가 빠진 객관적 조건의 불리함을 무시한 중공군이 이제 본격적으로 크게 싸움을 벌일 상황이었다. 그 싸움의 현장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砥平里)였다.
양평의 지평리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지역이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한쪽의 다부진 전의(戰意), 다른 한쪽의 방심과 우연에 가까운 접근으로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다. 미군은 리지웨이가 전선에 부임한 이래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준비에 몰두했다. 그런 기회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리지웨이의 지시에 따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위력수색에 계속 나섰다. 그러나 중공군의 자취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엔군은 리지웨이의 지시에 따라 차츰 한강과 서울을 향해 다가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내가 이끌었던 국군 1사단도 미군 1군단에 여전히 속해 있으면서 한강 남안을 향해 조금씩 진출하고 있었다.
1월 초 휴식기에 접어들었던 중공군은 중국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다음 단계 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차츰 중부지역의 전선에 출몰하면서 다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먼저 중부 전선이 출렁거렸다. 횡성에서 국군 8사단이 전멸의 상태로 다시 중공군에 무릎을 꿇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서술할 대목이다.
횡성 싸움은 리지웨이 부임 후 다시 공세를 벌이려던 중공군이 작심하고 나선 작전이었다. 먼저 강력한 전투력의 미군들이 버티고 있던 서부전선을 피해 상대적으로 화력 등이 열세인 국군의 지역을 공략하려는 의도에서 펼쳐졌다. 그에 따라 중공군은 횡성의 국군 8사단과 평창의 국군 3사단을 먼저 공격했다. 8사단은 특히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6·25전쟁 중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치욕스런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상대의 상황에 둔감했던 중공군
그를 우회한 중공군이 다음 지역으로 노린 곳이 지평리였다. 먼저 국군이 지키는 중동부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은 뒤 그 병력을 서쪽으로 우회시켜 북쪽으로 진출한 미군을 공격한다는 작전 의도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지평리에서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선 기본적인 체력이 매우 떨어진 상태의 중공군 전투력이 문제였고, 아울러 그들은 치밀하지 못한 적정(敵情) 탐색과 상황에 대한 오판 등의 실수를 저질렀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에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틀 전인 2월11일 횡성에서 국군 8사단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중공군의 공격이 벌어진 4시간 뒤에 벌써 와해의 조짐을 보였고, 하루 만에 사단 전체가 무너지고 말았다. 병력의 3분의 1만 잃어도 그 부대는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기록에 따르면 8사단은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철저하게 와해된 셈이다.
그렇게 전선을 몰아친 중공군이 다음에 다가선 곳이 바로 지평리였다. 그곳에는 평북 군우리에서 중공군에게 처참하게 당한 미 2사단의 23연대가 지키고 있었다. 폴 프리먼이라는 연대장이 이끄는 부대였다. 그는 군우리에서 운 좋게 중공군의 매복로를 우회했다. 그런 그가 몇 개월 뒤 자신의 사단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중공군을 지평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의 연대 병력에 랄프 몽클라르라는 인물이 이끄는 프랑스 1개 대대가 가세했다. 그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러 전장을 다녔던 직업 군인이었으며, 원래는 중장의 계급이었으나 한국에서의 전쟁을 위해 대대급의 파견 부대 지휘관 계급에 맞춰 중령으로 스스로 계급을 낮춰 한국에 온 사람이다.
/지평리 전투에 나섰던 프랑스 대대 부대원들이 전투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렵 찍은 사진. 프랑스군은 몽클라르 장군의 지휘로 미 2사단 23연대와 함께 압도적 병력의 중공군 공격을 막아냈다.
그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의 활약상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피리와 꽹과리로 상대의 심리를 교란하면서 다가오는 중공군에 맞서 더 큰 소리로 외치며 반격을 했다거나, 머리에 빨간 천을 두르고 혈전을 피하지 않았다는 등의 일화가 전해온다. 몽클라르 장군의 분투도 함께 거론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지평리의 주역은 프리먼이 이끌었던 미 2사단 23연대다. 그리고 그를 강력하게 뒷받침했던 사람이 리지웨이다.
/랄프 몽클라르 장군
리지웨이는 아예 작정하고 지평리 싸움에 나섰다. 그는 불퇴전의 각오로 미군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발휘했다. 우세한 공군력을 최대 한 동원했고, 강력한 화력으로 전선을 지원했다. 그런 그의 강력한 지원으로 프리먼은 놀라울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한다.
프리먼은 다리에 중상을 입고도 후송을 거부했다. 그는 사주방어(四周防禦) 진지를 좁게 구축한 뒤 혈전을 직접 지휘했다. 지평리 일대는 100~400m 높이의 야산이 발달한 지역이다. 그를 활용하면 지름 5~6㎞의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으나, 프리먼은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그를 1.5㎞의 진지로 좁혔다. 그러고서 그는 적을 맞았다.
현대전과 재래전의 차이
중공군 병력은 적어도 8개 연대였다. 일부 다른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4~5개 사단에 이르는 병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초반부터 여러 측면에서 우를 범했다. 지평리를 지키는 상대의 병력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상대가 지닌 전투력의 크기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중공군 공세의 지휘부는 나중에 개성과 판문점에서 열렸던 양측 휴전회담의 중공군 대표 덩화(鄧華)였다.
/B-26 경폭격기(미군)의 비행 장면. 미군은 중공군에게는 없는 공습 능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노련한 전선 지휘관이었음에도 그는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성급한 공격을 벌였다. 참전 초반의 날카로운 공격력도 이때는 발휘할 수 없었다. 좁게 구축한 사주방어형 진지에서 견고하게 싸움을 이끄는 폴 프리먼 23연대장, 그리고 강력하게 그를 뒷받침하는 리지웨이의 승부수를 읽지 못한 탓이다.
지평리 전투는 몇 가지 점에서 상징적이다. 전격적인 중공군 참전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미군이 체력과 정신력을 제대로 회복해 그 특유의 장점인 현대적 전술과 장비를 모두 동원했으며, 중공군은 승세에 취해 매복과 우회 및 기습의 전통적인 전술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공중에는 아주 많은 미군 공군기가 떴고, 155㎜의 강력한 화력을 지닌 미군의 포가 전선에 다가오는 중공군을 유기적으로 맹폭했다. 수적인 우세에 의존하던 중공군의 전법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첨단의 무기와 전술에다가 조직적으로 나서는 미군의 맹위는 시간이 갈수록 빛을 더했다.
/미군에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의 모습
승패는 금세 갈라졌다. 2~3일이 경과하면서 중공군의 인명 피해가 막심해지고 있었다. 기습과 우회, 매복의 전통적인 중공군 전술이 한계를 보였던 것이다. 미군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그런 강력한 전의에 현대적 장비와 무기까지 동원했으니 중공군은 그때까지는 만나지 못했던 상대와 조우한 셈이었다. 현대전을 치르는 미군의 군대가 전통적인 전술에 의존하는 중공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준 점에서 이는 상징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전세(戰勢)의 전환점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공군의 공세는 이로써 결정적으로 꺾였다. 이후에 중공군은 거듭 공격을 벌여오지만 지평리 전투를 전환점으로 예전과 같은 물밀 듯한 공세에 나설 수 없었다.
리지웨이의 강인한 성격과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한 공격력, 군인으로서의 매서운 싸움 의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지휘관의 후원을 받아 폴 프리만의 전투력이 역시 빛을 발했고, 몽클라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전세가 뒤집어진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이를 것이다. 그렇게 1951년 2월 중공군의 공세가 꺾이고 있었다.
21 중공군 꺾은 리지웨이, "내가 주도한 작전을 맥아더가 자랑하고 다녔다"
리지웨이는 명장이었지만 '싸움의 본질'에 소홀
(5) 리지웨이의 빛과 그늘
맥아더를 시기한 전선사령관
1951년 1월4일 내준 서울을 다시 되찾은 때는 같은 해 3월15일이었다. 그 서울 탈환의 선두에는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도 함께 섰다. 우리는 영등포에 진출해 한강을 넘었다. 사전에 중공군이 서울 일원에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 땅에 와서 살고 있었던 중국인, 즉 화교(華僑)들을 아군 병력으로 확보해 먼저 영등포의 한강 북안으로 침투시킨 일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서울을 탈환했다. 감격스러운 작전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서울 탈환의 일대 공로는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돌려야 마땅하다. 그는 강인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장군이었고, 아울러 매섭고 강한 공격력으로 군대를 이끌었던 야전형 지휘관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중공군 참전 뒤 마구 무너져 내리던 전선을 쇠사슬처럼 단단하게 묶은 뒤 병력과 화력을 요령 있게 집중해 인해전술(人海戰術)을 펼치전 중공군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런 리지웨이가 강하게 불만을 표출한 적이 있다. 그 무렵이었다. 서울을 탈환하기 직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도쿄에서 수원으로 날아와 기자회견을 했다. 맥아더는 그 자리에서 서울 탈환을 목전에 둔 반격과 전세(戰勢)의 역전(逆轉)이 마치 자신의 공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발언을 했다.
/해임되기 직전 한국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오른쪽)와 그 뒤에 탑승한 리지웨이.
리지웨이는 그런 발언에 몹시 기분이 상했던 듯하다. 나중에 펴낸 그의 회고록에서 리지웨이는 “내가 주도한 작전인데, 맥아더가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자랑하고 다녔다”라며 매우 못마땅해 했다. 전공(戰功)에 관한 문제였다. 이는 늘 다툼이 벌어지는 대목이다. 싸움 뒤의 전과(戰果)가 과연 누구의 것이냐를 두고 벌이는 경쟁적인 심리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두고 보면 리지웨이의 그런 불평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다. 우선 맥아더 장군은 리지웨이와 15년 터울이 지는 ‘대선배’였다. 맥아더가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교장을 맡고 있던 시절 리지웨이는 그 밑에 있던 체육 교관이었다. 나이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또는 군에서 쌓은 경력으로 보나 리지웨이는 맥아더와 함께 견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울러 한국 전선으로 리지웨이를 보내자고 주장한 사람도 맥아더였다. 당시 미 본토의 육군본부 작전부장으로 있던 그의 탁월한 지휘 능력에 주목했던 맥아더의 추천에 힘입어 그는 한국 전선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도쿄에 머물고 있던 맥아더는 미 합동참모본부에 서신을 보내 리지웨이가 한국 전선을 이끌 적임자라고 추천했다. 또 리지웨이가 전선에 부임하기 위해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를 찾았을 때 “미 8군은 자네의 것(8th Army is your's)”이라며 강력한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유엔군과 국군의 1·4후퇴 뒤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당시 중앙청 앞에서 환호하는 모습.
그전까지 미 8군은 서부 전선을 담당했고, 미 10군단이 동부 전선을 맡았다. 이렇게 나눠진 지휘권은 중공군 참전 뒤 효과적인 대응을 어렵게 했다. 그런 문제를 봉합해 리지웨이의 지휘력에 힘을 실어준 사람이 맥아더였다. 따라서 유엔군이 1951년 초반의 중공군 공세를 꺾은 데에는 맥아더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미국의 이익에만 집착했던 사람
리지웨이는 공을 세워 스스로를 과시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이 점은 리지웨이가 ‘우리는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결여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당시 한반도 상황의 본질은 대한민국과 서방국가가 공산진영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리지웨이는 상황이 다급했던 한국 전선에 뛰어들어 찬란한 빛을 발했던 지휘관이었다. 꺼져가는 대한민국의 생기에 불을 지폈고, 그의 용기 있는 결단과 강인한 의지 덕분에 파죽지세 중공군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
/1951년 3월 영등포와 흑석동에서 마포 쪽으로 건너 서울 탈환에 나서고 있는 국군 1사단의 선두 부대. 백선엽 장군이 지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지웨이는 ‘직업으로서의 군인’이라는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가 ‘미국의 합법적인 정부가 내린 합법적인 명령’에만 유독 집착하고, 그 이상의 싸움에는 전혀 나서려 하지 않았던 점이다. 그는 4개월 동안 한국의 전선사령관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훌륭히 막아낸 다음, 미 정부가 해임한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도쿄의 유엔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951년 여름에 접어들어 중공군 공세가 완연히 꺾인 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은 처음 휴전을 위한 회담 테이블에 앉는다. 그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그 휴전회담에 직접 간여했고,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 국면을 관리했다. 모든 싸움의 규모와 틀이 직접적으로는 그로부터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당시 휴전 회담의 가장 큰 주제는 전선을 어떻게 설정한 뒤 휴전에 들어가느냐는 것이었다. 회담에 나선 유엔군 사령부는 우선 평양과 원산을 잇는 이른바 ‘평원선’을 1차 방안, 현재 싸움이 붙고 있는 접촉선을 유지하는 2차 방안, 38선을 경계로 하는 3차 방안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동부전선을 시찰하면서 지프에 올라 즉흥연설을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기파랑 제공
나는 휴전회담의 첫 한국 측 대표로 당시 현장이던 개성을 드나들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유엔군 회담 대표인 터너 조이 미 극동해군사령관을 비롯한 우리 측 대표의 복안은 ‘현재의 접촉선 유지’였다.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의 1차 방안은 공산 측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압도적인 제공권(制空權)과 제해권(制海權)을 앞세워 그를 주장했다.
그 뒤에 아군과 적군의 접촉선을 경계선으로 한다는 방침이었고, 38선은 마지노선이기는 했으나 우리는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이 휴전회담을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엔 서방과 공산 진영 모두가 휴전 회담을 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계획 자체를 버리고 현 상황에서 전쟁을 끝낸다는 생각이 앞섰고, 소련의 스탈린 등도 더 이상의 확전을 바라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그런 분위기와 상관없이 줄곧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을 보는 이승만의 시각
그런 이 대통령이 전력이 다소 기울어진 공산 진영의 휴전회담 제안, 그리고 이를 덥석 받아들인 미국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이 대통령은 휴전회담의 날짜가 정해지자 “북녘에 중공군 100만 명이 있는데 무슨 회담을 벌인다는 얘기냐”면서 아주 날카롭게 반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대통령은 휴전회담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시종일관 굽히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초반의 휴전회담 이후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미국과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휴전회담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벌어질지에 대해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유엔군 측 대표들. 1951년 7월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유엔군측 대표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데스 소장.
나는 한국의 첫 회담 대표로 나서면서 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했다. 대통령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휴전회담에 한국 대표로 나서는 입장이 참으로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휴전회담이 열리기 전 부산의 임시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 “각하께서 반대하신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회담에 나서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어색한 듯 잠시 침묵하던 대통령이 “그래도 미국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 나가보게”라고 말했다. 76년 풍상(風霜)을 독립과 건국으로 일관한 대통령의 노련함이 묻어나오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회담의 분위기에 대놓고 찬물을 끼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휴전회담의 큰 주제인 경계선 설정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우리 대한민국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대목이니 어느 누군들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은 특히 공산 측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평양~원산’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알았고, 그 대안으로 ‘예성강 확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38선 이남에 있는 개성(開城)의 확보 문제 때문이었다. 개성은 고려 500년의 수도였고, 김일성 남침 이전에는 대한민국에 속한 지역이기도 했다. 500년 왕조의 도읍이었으니, 그 문화와 전통의 상징성만 해도 대단한 지역이었다. 대통령은 이미 적의 수중에 있던 개성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의지에 가장 큰 방해자는 바로 중공군의 예봉을 꺾었던 리지웨이였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22 미국 이익에만 충실했던 리지웨이…
개성 방어와 금강산 일대 공격' 통한의 좌절
예성강 이어 금강산 확보도 저지, 밴 플리트가 통탄했던 '고저 작전' 무산
(5) 리지웨이의 빛과 그늘
개성 확보를 위한 전제
개성에 대해 새삼 설명을 늘어놓는다면 군소리가 될 것이다. 이곳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김일성이 기습
적으로 남침을 벌이기 전 엄연한 대한민국의 땅이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부대도 국군 1사단이었다. 나는 당시 1사단장이었으나 전쟁이 벌어지기 10여일 전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지휘관 교육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김일성 군대의 공격이 펼쳐질 당시에는 서울에서 시흥으로 출퇴근을 하던 교육생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잘 알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여 전인 1950년 4월 23일 1사단장으로 부임해 그곳의 지형을 살핀 뒤 나름대로 참호를 파서 주(主)저항선을 설정하는 작업에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국군 1사단이 맡았던 전선은 너무 넓었다. 개성의 북방으로 90㎞에 이르는 전면(前面)을 담당해야 했다. 1만 여명이 조금 넘는 사단 병력으로 지키기에는 턱없이 넓었다. 따라서 나는 그 때 임진강 유역의 파평산을 주저항선으로 설정해 그곳에 긴 참호 진지를 구축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개성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선과 개성시, 개성공단
김일성의 군대는 그런 약점을 잘 알고 남침을 벌여왔다. 그들은 개성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철도의 폐선(廢線)을 복구해 기습적으로 열차에 병력을 태워 시내로 순식간에 몰아닥쳤다. 개성은 전선 전면이 너무 넓은 까닭에 적의 침투가 매우 용이했던 까닭이다.
그 개성을 대한민국이 강력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었다. 우선 개성의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예성강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이곳을 방어 전선으로 설정해 진지를 확보한 다음, 개성 북방 4~5㎞에 있는 송악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방어선을 구축하면 개성을 지킬 수 있다.
이 예성강에 관한 논의가 있었던 때는 1951년 7월이었다. 나는 당시 한국의 휴전회담 첫 대표 자격으로 개성의 내봉장(來鳳莊)이란 곳에서 벌어지는 회담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이 예성강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예민하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리지웨이와 논의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앞서 벌어진 중공군 춘계 공세를 막아낸 뒤 승진해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있었다. 휴전회담이 벌어지면서 그는 현장에 자주 왔다. 그는 총사령관의 신분 때문에 개성으로 가지는 않았다. 대신 우리 대표진이 머물고 있던 지금의 판문점 남쪽 자유마을을 자주 찾았다.
/리지웨이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 이취임식 (1951년 4월 14일)
나는 리지웨이에게 “개성을 모두 내준다면 서울의 한강은 죽은 강으로 변한다. 반드시 예성강까지 진출해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때마다 리지웨이의 답은 한결 같았다. 그는 “나는 그런 제안을 반대한다. 교량과 보급의 문제 등이 있어서 예성강까지 진출하는 것은 절대 반대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 의중에는 없었던 예성강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전에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우리 군대의 전략적 입장에서 볼 때 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 먼저 예성강에 진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은 내가 휴전회담 대표로 있다가 떠난 뒤 후임으로 회담에 나섰던 이형근 장군을 통해서 미국 측에 전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성의 상징적인 의미에 매우 집착했던 듯하다. 대통령은 회담에 나선 이형근 대표를 통해 그런 의중을 미국 측에 여러 차례 전달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모두 같았다고 한다. 리지웨이는 예성강 진출을 아예 생각지도 않았고, 한국 측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미국의 분위기는 제한적인 전쟁을 펼치다가 휴전을 맺는 방향으로 이미 변해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전략적 토의는 미국의 합동참모본부(합참)가 진행한다. 군사적 판단을 내려 미 행정부의 재가를 얻어 집행하는 절차였다. 따라서 합참이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면 예성강까지의 진출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 미국의 합참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이었다.
/6·25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
리지웨이는 그런 합참의 결정에 100% 복종하는 스타일의 지휘관이었다. 그가 어떤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마다 입에 올리는 “합법적인 미합중국 정부의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 식의 사고와 행동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는 미국 정부, 나아가 그의 상관이 버티고 있는 미 합참의 의견에 매우 충실하게 따르며, 그 점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 충실한 미국 군대의 장성이었다.
리지웨이는 분명히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한국 전선에 부임한 뒤 전선에 서서 날카로운 판단력과 과감한 공격력을 구사했다. 중공군의 공세에 맥없이 밀려난 유엔군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미국 합참은 당시 상황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유엔군 철수를 위해 함정을 준비하도록 지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전세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며 지평리 전투를 이끌어낸 주역이 리지웨이다.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절망의 분위기에 젖어있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도 아주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미 합참의 지시에 충실해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한반도의 전쟁을 관리하는 역할에만 몰두했다.
리지웨이는 4개월 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해 자리를 옮겼고, 그 뒤를 이어 미 8군을 맡은 사람이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소개를 하겠지만, 그는 가장 어려운 때의 대한민국에 나타나 한국 군대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금강산 확보 계획도 물거품
그가 부임했을 때 나는 삼척에서 국군 1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중공군 공세가 또 있었고, 밴 플리트는 단호한 지휘력으로 그를 막아냈다. 그 직후였다. 1951년 5월 말 경으로 기억한다. 그가 내게 작전명령서를 하나 보냈다.
국군 1군단으로 하여금 고저(庫底)를 공격토록 하는 내용이었다. 강원도 통천군 고저는 옛 조선 시절 이곳 북쪽에 큰 창고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국군 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고저에 직접 진격하고, 동해에 떠 있던 미 7함대는 미군의 상륙작전을 돕고, 중부 전선의 미 군단 병력이 동북쪽으로 공격해 이곳 일대를 점령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밴 플리트는 동해안 상륙을 위해 국군 2개 사단에 미군 2개 전투사단으로 구성한 16군단을 만들려고도 했다.
/1950년 청진 앞바다에서 함모 사격을 하고 있는 미 전함.
신설 16군단은 거제도를 출발해 고저 북방의 동해안에 상륙시킨다는 계획도 잡았다. 이런 작전이 펼쳐지면 동부 전선은 현재의 위치보다 훨씬 북상해 금강산 일대를 대한민국의 품안에 안을 수 있었다. 당시 제해권(制海權)을 철저하게 장악했던 미 해군의 능력으로 볼 때 결코 어려운 작전이 아니었다.
나는 사실 그 때 가슴이 부풀었다. 대한민국 땅을 한 치라도 늘리는 일이 국가의 군인인 나의 임무라고 생각했고, 한반도의 절경인 금강산을 우리가 안을 수 있다는 점도 매우 상징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전 역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밴 플리트의 왕성한 공격 의지는 꺾였고, 그 선두에 서서 진군하려던 국군 1군단의 희망도 물거품으로 변했다.
역시 리지웨이의 결정이었다. 그는 이 작전 자체를 반대했다. 정해진 작전선 이북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미 합참의 재가를 받아야 했으나, 도쿄 유엔군사령부 사령관인 리지웨이가 그 전의 단계에서부터 막아섰던 것이다. 그는 한국군이 현 전선에서 북상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6ㆍ25 전쟁이 계속되던 1952년 7월 3일 제주도 제1훈련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뒷줄 오른쪽), 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왼쪽 두번째) 등과 함께 지프를 타고 시찰하고 있다./정부기록보존소
당시 미 7함대는 원산의 앞 바다, 그리고 청진, 나아가 마음만 먹으면 그로부터 훨씬 북쪽의 한반도 북부 지역 바다를 누빌 수 있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미 해군은 적진을 유린할 수 있었다. 공산진영의 주력이었던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에 묶여 있었다. 동해의 연안 지역에는 주력으로 치부할 수 없는 중공군 병력과 개전 초기 거의 무너져 전투력이 크게 떨어진 북한군만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부 전선을 마음껏 북상시켜 적을 압박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 점은 북한군은 물론 중공군 수뇌부도 매우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런 이유로 전선 북상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고, 고저 공격 계획은 그가 나름대로 앞뒤 사정을 세심하게 고려한 뒤 만들었다. 그럼에도 우선 그 앞을 막아섰던 사람이 리지웨이였다. 좀처럼 자신의 상관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밴 플리트였지만 고저 공격이 좌절하자 아주 커다란 불만을 쏟아냈다.
나와는 가장 사이가 가까운 미 지휘관이 밴 플리트였다. 그는 나중에 고저 작전이 중도에서 취소됐던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분노를 표출했다. 웨스트포인트 후배이자 당시로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리지웨이를 향해서였다.
23 무자비했던 리지웨이,
교통사고 당한 나에게 "지금 6사단장 뺄 때 아니다"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했던 그는 약소국 한국의 입장을 듣지 않았다
(5) 리지웨이의 빛과 그늘
중공군이 두려워 한 지휘관
리지웨이 장군이 수류탄을 상의 한 쪽에 매달고 다녔다는 점은 앞에서 먼저 얘기했다. 일부 한국군 장성들도 그를 흉내 내 수류탄을 상의에 달았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러나 그런 한국군 장성들이 간과한 게 있다. 리지웨이가 수류탄을 매단 다른 한 쪽 상의에는 붕대가 달려있었다는 점이었다.
전선의 최고 지휘관이 상의에 매단 수류탄은 적의 공격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상징하는 장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류탄 못지않게 붕대도 중요하다. 리지웨이의 상의 다른 한 쪽에 동그랗게 말린 형태로 달려 있는 붕대 역시 막바지 싸움의 현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상징적인 물품이었을 것이다.
/1951년 4월호 라이프지 표지에 실린 리지웨이 장군. 양쪽 가슴에 수류탄과 붕대가 달려 있다.
수류탄과 붕대는 리지웨이가 최후의 싸움까지 상정하는 지휘관임을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동원된’ 장치였을 테다. 그리고 그 둘은 리지웨이가 적의 배후에 침투해 강력한 공격력으로 적진을 교란하는 공수작전의 베테랑임을 과시하는 장식품이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정교하게 꾸미는 리지웨이의 성품은 공수작전의 지휘관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상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읽은 뒤 적진에 뛰어들어 최소한의 물자와 화력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일이 공수작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거대한 병력과 물량, 화력을 동원해 적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그런 타입의 지휘관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우직하다기보다 영리했다. 적도 잘 읽었고, 그가 한국 전선에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워싱턴의 육군본부 분위기도 매우 정교하게 읽었다.
중공군은 그런 리지웨이에게 커다란 약점을 읽혔다. 그것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한국 전선에 뛰어든 뒤 보였던 공격의 ‘주기(周期)’였다. 일종의 패턴이랄 수도 있었다. 중공군은 공세를 강하게 펼치다가도 그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길어야 1주일 남짓이었다. 대부분 5~8일 정도 공세를 펼치다가 계속 끊겼다. 보급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였다.
리지웨이는 그 점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가 부임한 이후 북위 37도 선에 최후 저지선을 정한 다음 반격을 펼치는 과정에서 이는 아주 큰 관찰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이는 사실 한반도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들은 ‘보급’을 제대로 이해한 군대가 아니었다.
/중공군에 대한 총 반격을 진행 중이던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오른쪽에서 셋째)이 당시 미 주요 지휘관과 국군 일부 장군들을 여주로 불러 작전회의를 마친 뒤 기념촬영했다. 오른쪽에서 다섯째가 백선엽 장군.
중공군은 한 명의 병사가 많아야 10일 치의 식량을 배급받은 뒤 공격에 나섰다. 10일 치 식량이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보통은 1주일 남짓의 식량을 짊어진 뒤 공격에 뛰어들었다가 그 식량이 떨어지면 다음의 배급을 기다린 뒤 움직여야 했다. 후퇴했던 미군이 남긴 물자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미군은 후퇴한 뒤 바로 폭격기 등을 동원해 자신이 남긴 물자와 식량 등을 모두 폭격해 불태워 버렸다.
중공군 지휘부의 회고록 등을 보면 리지웨이의 전법에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상당히 잘 드러난다. 그들은 대개 리지웨이의 전법을 강한 결집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성(磁性)’이라고 표현했으며, 강력한 공격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불바다, 즉 ‘화해(火海)’라고 적었다.
교통사고 당한 내게 “지금 뺄 수 없다”
실제 싸움을 독려하는 리지웨이의 자세는 뭔가 달랐다. 그는 부지런히 전선을 다니면서 일선 부대의 싸움 의지를 부추겼다. 자유와 민주라는 거창한 이념적 메시지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적을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 역설하고 다녔다. 이는 무너진 유엔군 전선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의 반격 작전에 따라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제법 심각한 사고였다. 나는 한강 남안을 공격하던 무렵 부대를 찾은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과 함께 미 1군단 사령부로 향하고 있었다. 지프차 앞자리에 신 장관이 앉았고 나는 뒤에 있었다. 지프는 앞에 있던 미군 트럭을 비켜 지나가려다가 뒤집혀졌다.
/백선엽 장군이 1.4후퇴 후 수원에서 반격전을 펼칠 때 당한 교통사고 사진. 백 장군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 사진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누군가가 찍었다.
신 장관 등은 무사했으나 나는 허리와 안면에 부상을 입었다. 나는 바로 수원의 이동외과 병원에 옮겨져 입원했다. 소식을 듣고 리지웨이 장군이 달려왔다. 군의관들은 내 상태를 그에게 설명하면서 “당분간 입원이 불가피하다. 지금은 병원에서 치료를 당분간 받아야 할 상황이라서 후방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지웨이의 반응은 단호했다. “지금은 전선에서 사단장을 뺄 때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전선에 나가 계속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허리의 통증이 심했지만 역시 전선에서 내가 빠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싸울 수 있다”고 얘기했고, 리지웨이는 ‘그래, 그래야지’라는 표정으로 만족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1951년 3월15일 신성모 국방장관(왼쪽에서 둘째)이 서울 탈환을 위해 흑석동에서 마포로 건넌 뒤 작전을 수행한 국군 1사단 장교들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 끝이 백선엽 당시 1사단장.
나는 부상한 몸을 이끌고 다시 전선에 나섰고, 1951년 3월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탈환하는 작전에 선두로 나서 영등포와 흑석동에서 마포 쪽으로 건너 서울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나중에 내가 펴낸 회고록의 서문을 적으면서 ‘백선엽은 미군의 가혹한 검증과정을 거치고 또 거쳤다’고 표현했다.
중공군에게 서울을 내준 1.4 후퇴 과정에서 나는 국군 1사단장으로 임진강 유역을 지키다가 후퇴한 적이 있다. 앞에서도 적은 내용이다. 리지웨이가 그 때 국군 1사단에 와있던 미 고문관에게 “백 사단장이 후퇴할 때 정위치에 있었느냐”를 물었던 점, 그리고 수원에서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다시 전선에 서도록 한 점이 아마 그가 거론한 ‘가혹한 검증’에 들어 있었던 체크 리스트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런 그의 단호한 자세는 전선에서 아군의 활력을 결집해 일으켜 세우는 데 아주 그만이었다. 리지웨이는 부지런히 전선을 돌아다니며 사기를 진작하는 한편, 미군 화력을 모두 동원해 전선을 뒷받침했다. 그런 그의 면모가 적군인 중공군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성(磁性)’과 ‘화해(火海)’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미미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미국 정부가 보낸 군인으로서의 프라이드가 강했다. 지나칠 정도였다. 오만(傲慢)으로 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자신이 돕는 한국에 대한 편견(偏見)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공산 측과 첫 휴전회담을 벌일 때였다. 앞에서도 소개했던 내용이지만 그는 회담장에 자주 날아왔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으면서도 처음 벌어지는 휴전회담에 그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아군의 회담 대표단이 개성으로 향하기 전 지금의 판문점 남쪽에 있는 자유마을에 찾아와 자주 회의를 소집했다.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3일 미군 관계자들이 임진강 부교를 수리하는 모습. 유엔군 정전 협상단이 개성 회담장으로 가려면 매일 이 다리를 지나야 했다./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그런 무렵의 어느 하루였다. 우리는 개성으로 가기 위해 헬리콥터 3대에 분승해야 했다.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에 어느 미국 기자가 리지웨이에게 “적진에 있는 개성으로 대표단을 보내는 게 위험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망설임 없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강하다(We are strong)”.
아울러 그는 우리 회담 대표단에게도 자주 그런 메시지를 던졌다. 대표단과 사전에 회의를 할 때도 리지웨이는 “우리는 세계 최강이다. 상대에게 절대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주문했다. 아울러 “미국은 세계 최고의 나라다” 등 표현은 리지웨이가 작전 지시 등을 내릴 때 자주 떠올리던 말이었다.
그런 리지웨이가 이승만 대통령과 잘 맞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강한 자부심을 내세우며 미국 정부의 이익만을 위해 한국 전선을 ‘제한적으로 관리’하려던 리지웨이와 남침을 감행한 공산 측과 끝까지 싸워 분단된 조국의 상처를 일거에 만회하려던 이승만 대통령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기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리지웨이를 비롯한 미국의 수뇌부가 공산 측과 휴전회담을 벌이면서 한반도 전선을 미봉(彌縫)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크게 반발했다. 이 대통령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북진해서 통일을 이루자”였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런 호소였다. 김일성의 야욕 때문에 뿌려진 피와 눈물을 따져볼 때 특히 그랬다.
그러나 전선은 냉정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제한적인 관리 방침은 더 확고해져갔고, 공산 측도 휴전을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가 그런 모든 상황에서 주(主)를 형성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군 지휘관으로서 큰 자부심에 젖어 있던 리지웨이는 그런 틀을 견고하게 쌓아갔다. 상황을 되돌리기에 대한민국의 힘은 아주 미미했고, 미국은 아주 강했다.
24 "내가 만주국 군관으로 있을 때의 중국군과 1951년의 중공군은 달랐다"
항일전쟁과 내전을 거친 중공군은 '당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6) 중공군은 강했다
중국 군대의 면모
우리는 그들을 때로 ‘당나라 군대’라고 부른다. 기율도 없고 기백도 없으며, 그래서 적이 나타나면 오합지졸(烏合之卒)로 뿔뿔이 흩어져 내빼는 그런 군대 말이다. 아울러 책임감도 없어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항상 잊는다. 그러니 적에 맞서 싸울 역량은 물론이고, 그럴 마음조차 내지 못하는 군대다. 중국인의 군대 얘기다. 그러나 그런 ‘당나라 군대’가 정말 중국의 군대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60여 년 전에 맞아서 싸웠던 중국의 군대는 절대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싸움의 때를 가려 나설 줄 알았고, 또 적절한 시점을 선택해 물러설 줄도 알았다. 약한 상대를 고를 줄 알았으며, 강한 상대를 피할 줄 알았다. 전략의 운용은 매우 신중했으며, 아울러 용의주도했다. 그 전략을 펼치는 전술 또한 강하고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적을 면밀히 살피다가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골라 사정없이 때릴 줄 알았다. 화력이 강한 미군에게는 은폐와 엄호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으며, 전투력이 허약한 국군에게는 마치 사나운 맹수가 온 힘을 기울여 달려들 듯이 덮쳤다.
/6.25 참전을 위해 1950년 10월 경 압록강 도하를 기다리고 있는 중공군 모습.
나는 만주국의 군관으로 있을 때 중국, 즉 우리로서는 늘 ‘대륙’이라고 부르던 그 곳의 군대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들은 우선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해 면밀하게 그 틈을 헤집던 일본 군대에 매우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아마 ‘당나라 군대’라는 인식 쯤으로 대륙의 군사적 수준을 폄하하는 버릇은 당시의 일본 군대로부터 비롯했을지 모른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중국 대륙을 삼키려는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이 처음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일본은 우선 류타오후(柳條湖)라는 곳에서 철도를 폭파해 이를 중국인의 소행이라고 몰아간 뒤 당시 펑톈(奉天)이라고 부르던 지금의 선양(瀋陽)에서 군사 행동에 들어갔다.
당시 그 일대 중국의 군대는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라는 군벌(軍閥)의 병력이었는데, 상당한 세를 구축해 중국 전역의 군벌 중에서 손에 꼽을 만한 실력을 갖췄던 부대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1개 대대에 불과한 일본의 병력에게 아주 무참할 정도로 깨지고 말았다.
그 과정은 이렇다. 당시 만주에 주둔 중인 일본 군대는 관동군(關東軍)이었다. 일본이 아직 만주에서 본격적으로 야욕을 펼치기 전이었다. 관동군은 일본이 그곳 일대에 건설한 만주철도(滿鐵)의 간선을 지키기 위한 철도 호위 병력이 전부였다. 만주 전체에는 8개 대대 병력이 주둔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만주사변 속 군벌의 군대
군벌 장쭤린은 1928년 일본이 꾸민 ‘황구툰(皇姑屯) 열차 폭파 사건’으로 살해됐다. 관동군은 그 여세를 몰아 만주를 본격적으로 집어삼킬 준비에 들어갔다. 관동군에서는 여러 사람이 그런 계획에 간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작전 참모였던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좌였다. 당시 일본군에서는 전략통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그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만주 자체를 일본군의 수중에 두려 했다.
/작전 회의중인 중공군. 치밀한 전략과 전술로 초반 공세를 밀어 붙였다.
일본군은 류탸오후 인근의 철도를 폭파한 뒤 이를 빌미로 중국 군대를 공격했다. 야밤을 틈 타 1개 대대 병력이 당시 장쭤린 군벌 병력 1만5000명이 주둔 중이던 북대영(北大營)과 동대영(東大營)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일본군 1개 대대 병력과 장쭤린 군벌 중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났던 펑톈의 북대영 및 동대영의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벌인 이 싸움에서 중국 군대는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군은 1개 대대 병력, 약 800명 정도의 부대였다. 게다가 중무장한 병력이 아니었다. 철도 수비대의 성격이었으니 경무장 정도의 부대였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1만5000명의 중국 부대는 일거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당시 장쭤린 군벌의 군대에는 일본 고문관이 있었다. 그는 유심히 중국 부대의 동향을 살폈다. 중국 군대에는 아주 커다란 결점이 있었다. 장병들이 주말에 부대 밖으로 외출할 때 무기를 들고 나가 판매해 돈을 번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방지하고자 군 지휘부는 주말마다 장병들로부터 무기를 모두 회수해 창고에 넣은 뒤 이를 이중 삼중으로 닫아걸었다. 장병들이 제 무기를 팔아먹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육책(苦肉策)이었다.
/중공군은 미군의 공습에 대비, 장병들에게 식량자루를 나눠준 뒤 각자 출발해 목표지점에 집결토록 했다. 식량자루엔 쌀, 미숫가루 등이 들어 있었다.
일본 고문관은 이런 상황을 일본 지휘부에 보고했다. 전략, 나아가 술수에 능했다는 이시하라 간지 등 관동군 지휘부는 이를 십분 활용했다. 무기가 없는 중국 병력 1만5000명은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했고,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은 경무장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충분한 살상력(殺傷力)을 지니고 있었다.
무기를 창고에 이중 삼중으로 가둔 채 빈 손으로 적을 맞았던 중국 군대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고, 일본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심각한 부패와 횡령 현상은 중국 군대의 또다른 특징이었다.
린뱌오 대신 나선 펑더화이라는 인물
그로부터 약 20년 뒤 한국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은 뭐가 달라졌을까. 문화적 동질성이 만주사변을 맞았던 장쭤린 휘하의 병력과 한국 전선에 나선 중공군이 다를 리 없다. 그들은 모두 같은 문화적 기질을 가진 같은 중국인이었고,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군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쭤린 부대는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지방 군벌의 병력이었고, 중공군은 중국 대륙을 석권한 뒤 강력한 명령체계를 가동하고 있던 공산당 휘하의 부대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1951년의 중공군은 일본이 벌인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에 맞서 오랫동안 항일(抗日) 전쟁을 펼쳤고, 이어 벌어진 국민당군과의 내전에서 풍부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군대였다. 한국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이 공산당 군대 출신의 병력 뿐 아니라, 그에 쫓겨 대만으로 패주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 출신 병력까지 아우르고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 군대에서 전투 경험이 가장 풍부할 뿐만 아니라, 핑싱관(平型關)이라는 곳에서 일본군 수송 병력을 크게 꺾었던 경력의 린뱌오(林彪)는 한국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중공군 내에서 가장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린뱌오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을 잘 이해했던 만큼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과의 싸움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북한 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
그의 대안으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택한 인물이 펑더화이(彭德懷)였다. 그는 중국 해방군의 10대 원수(元帥) 중 한 사람이다. 군에서의 명망이 높기는 마찬가지지만, 전력(戰歷)의 화려함과 다양함 등에서는 린뱌오에 못 미치는 인물이다. 그러나 펑더화이 역시 일본군과의 치열한 싸움을 거친 몇 안 되는 중공군 장수의 하나임에 틀림없으며, 국민당과의 싸움에서는 대단한 전과를 올렸던 장군이다.
1898년에 출생한 펑더화이는 빈농(貧農) 집안 출신이다. 따라서 어렸을 적의 배움이라는 게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절의 사람답게 호(號)를 가졌다. 그 호가 ‘석천(石穿)’이다.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펑더화이가 취한 그 호의 뜻을 짐작할 것이다. 물방울이라도 계속 떨어지면 바위를 뚫는다는 의미다. 한자로는 ‘水滴石穿(수적석천)’이라고 적는다.
펑더화이는 물방물이 끊임없이 바위에 떨어지듯 싸움의 의지가 한결 같은 사람이었다. 꾸준하고 집요했다. 그는 전장을 잘 알았고, 야전 장병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신망도 높았고, 휘하 장병들의 신뢰도 높았다.
25 국군과 미군은 전쟁 전부터 중공군에 지고 있었다"
김일성의 애절한 참전 요청에 마오쩌둥 거듭 고심, 중국 수뇌부는 치밀한 전략적 판단
(6) 중공군은 강했다
이순신 ‘운주당’과 싸움의 전략
싸움에는 ‘셈’이 반드시 등장한다. 이를 고전적인 용어로는 산(算)이라는 글자로 적고, 현대적인 용어로는 책략(策略) 또는 전략(戰略)으로 부른다. 싸움의 큰 틀을 살피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상대를 맞아 싸울 것인가, 그리고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최대의 승리를 이끌어 낼 것인가 등에 관한 종합적인 모색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기울어가던 조선의 명맥을 일으켜 세웠던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전쟁을 지휘할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곳을 지었다. 아마 작전 사령부에 해당하는 건물이었을 것이다. ‘운주(運籌)’라는 말은 셈을 할 때 사용했던 ‘가지(籌)’를 이리저리 늘어놓으며 움직여본다(運)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쟁철학의 대가였던 손자(孫子)의 병법서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말이다.
‘운주’라는 과정은 전쟁을 치르는 지휘관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상대를 맞아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에 관한 이른바 ‘승산(勝算)’이라는 것도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셈 가지를 늘어놓으며 이 궁리 저 궁리를 다 해 보는 ‘운주’의 과정이 신중하고 치밀할수록 싸움에 나서는 채비는 충분하게 갖춰지는 법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제 나라 군대를 참전시키는 문제, 아울러 그 이후에 벌어지는 싸움에서의 방략(方略)을 살피는 중국의 태도는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은 과거 10여 년 동안 제국주의 일본의 군대, 그리고 국민당 군대와 치열한 싸움을 치렀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참전을 결정하는 과정 전부터 매우 치밀한 전략적 사고를 보였다.
/1950년 10월 중공군 참전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던 마오쩌둥(왼쪽)과 저우언라이.
1949년 10월1일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건국 1주년 기념행사가 있던 날 북한으로부터 긴급 요청을 받는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 무렵 낙동강 전선까지 치고 내려갔다가 맥아더 장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과 그 뒤의 북진작전으로 쫓기며 아주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가 애절하게 보낸 긴급 지원요청이 건국 1주년 행사를 마친 마오의 손에 전달됐다.
마오는 고민을 거듭했던 모양이다. 중국에서 나중에 내놓은 자료 등에 따르면 그 또한 섣불리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기 힘들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주더(朱德) 등 최고위 인사들과 협의를 거듭했다고 한다. 세계 최강의 미군과 싸움을 벌이는 게 두려웠고, 막 건국한 중국의 사정도 고려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반대 또는 소극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며칠을 고민한 뒤 결국 참전 결정을 내렸다.
그는 그 참전 결정을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뜻의 순망치한(脣亡齒寒), “문이 없어지면 집이 위험하다(門破堂危)”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는 소련 스탈린의 원조를 전제로 했으며, 무엇보다 압록강 및 두만강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만주 일대의 안전을 따졌다.
중국의 으름장, 미국의 무시
마오쩌둥의 중국 지도부는 사전에 미국을 향해 던지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1950년 10월 초에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망설이던 미군에게 그곳을 넘어서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던진 것이다. 당시 제3세계 외교를 지향하던 인도를 통해서 워싱턴으로 전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50년 10월 말 야간에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공격한 중공군의 전법은 아군에 매우 낯설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중국의 경고를 귀담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전쟁은 김일성이 도발했던 것이고,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그 원흉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중국의 군대가 그리 대단치 않으리라는 인식도 한 몫 했으리라는 점이다.
중국 군대는 그 때까지의 명망이 아주 형편없었다. 오랜 항일전쟁과 내전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인이 펼치는 중국식 싸움은 어딘가 부족했고, 허술하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점은 당시 미군을 전체적으로 이끌고 있던 조지 마셜을 핵심으로 한 미군 수뇌부의 공통적인 인식이기도 했다. 마셜은 중국에 주둔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1930년대 중국 톈진(天津)에서 주둔하던 미군 연대의 부연대장을 맡은 적이 있다. 그 밑에 대위로 있던 사람이 바로 매슈 리지웨이다. 마셜은 후에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군대를 원조하는 일도 직접 지휘했다. 특히 그는 장제스 정부가 막대한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주력 4개 사단에 불과한 마오쩌둥의 홍군(紅軍) 부대에 맥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도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중국인과 중국 군대를 매우 불신했다.
나중에 미국이 장제스의 한국전 파병 제안을 거부한 이유에도 중국 군대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장제스 총통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밀려 대륙을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대륙 수복에 혈안이었던 장제스는 6·25전쟁이 벌어지자 바로 파병 의사를 밝혔고, 마오쩌둥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자 재차 파병을 제안했다.
/장제스 전 대만 총통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셜 중심의 미군 수뇌부는 대륙을 석권한 중국 공산당 군대를 우선 낮춰 봤고, 지원 병력을 보내겠다는 국민당 군대의 실력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국민당 군대의 파병 제안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이승만도 장제스 파병 제안에 냉담
미국 수뇌부와 이승만 대통령의 시각은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둘 모두 국민당 군대의 파병으로 인해 한반도가 중국인끼리 세력을 다투는 전쟁터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차이도 있다. 미국은 중국인의 전쟁 수행 능력을 믿지 않았던 데 비해, 이 대통령은 중국의 세(勢)가 한반도에 올라서는 것 자체를 꺼렸다.
마오쩌둥 등 중국 지도부는 참전 결정을 내리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했을 법도 하다. 예를 들자면, 비록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곳에는 장제스를 따르던 옛 국민당 군대의 인원과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때라도 공산 중국을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면서 마오쩌둥은 그런 옛 국민당 군대의 인원 등을 전선에서 소진시킬 수 있었다.
/6·25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이 귀와 뺨을 가리는 방한모를 쓰고 워커 장군과 이야기하는 모습.
일부는 “그런 점에서 마오쩌둥이 한반도 전선에 뛰어든 것 아닐까”라는 추정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점은 불분명하다. 그 속내를 짐작할 만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니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다. 또 건국 직후의 혼란기를 한반도 전쟁 참전으로 묶어갈 요량도 없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역시 추정에 불과하다.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중국은 38선을 분명히 중시한 것 같다. 중국은 참전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를 미군의 38선 이북 지역으로의 진격에 두고 있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미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만주 지역에만 머물면서 사태를 관망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반면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이 현실화한다면 참전키로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참전 직전에 중국 수뇌부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를 알리는 자료는 꽤 많다. 그러나 내밀한 자료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수뇌부가 참전 여부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던 점만은 분명하다. 일설에는 마오쩌둥이 참전 결정을 내리기까지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으며, 그에 반대하는 참모들과 적잖은 논쟁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6.25 전쟁 참전 뒤 마지막으로 귀국한 중공군 일행을 환영하는 1958년의 마오쩌둥.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서 중국은 결국 1950년 10월 참전을 결정했으며, 이어 대규모 군대를 압록강 북녘으로 움직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공의 군대를 살피고 경계하는 아군의 시선은 미약했다. 우리 국군은 전혀 생소한 싸움터에 적응하기에 바쁜 형편이었으며,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은 지나친 자부심으로 스스로의 눈을 가렸던 탓인지 그들의 동정을 지혜롭게 살필 수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이 현실화하는 1950년 10월 말 무렵 미군과 국군은 우선 싸움터의 ‘셈’에서 상대에게 지고 있었다. 중공군은 면밀한 검토를 진행하면서 전략의 궁리를 거듭했고, 열악한 전비(戰備)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만(欺瞞)과 은폐(隱蔽)부터 펼치면서 나왔다. 아주 낯선 군대가 한반도 북녘에 나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