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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23/ 국방2/ 호국의 전사들1/ 오준 대사의 명연설 - 나라를 지킨 사람들

상림은내고향 2021. 7. 21. 19:18

대한민국23/ 국방2/ 

2016.03.18 새삼 생각나는 호국 영웅 진두태 삼촌

삼촌! 세월이 가면 점차 잊힐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라가 여러모로 어수선하고 북한의 태도는 갈수록 더하니 삼촌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60여년 전, 해병대 창립 멤버인 삼촌이 휴가받아 집에 왔을 때 가방에 적힌 '해병대'라는 글을 보고 "해병대가 뭐예요?"하고 묻던 나는 열 살이었지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저, 이렇게 세 식구뿐이고 6·25전쟁은 한창이었습니다. 마당 가운데에 서서 "진두태, 죽지 않고 돌아왔습니다"라고 경례하고, 돌아갈 때는 "진두태, 죽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외치던 모습이요. 저는 '왜 저렇게 인사할까'하고 의아했습니다.

 

할머니가 "좋은 혼처 있다"며 결혼을 권했을 때 "지금은 전쟁 중이라 내가 죽으면 과부가 되니 전쟁 끝나고 살아서 오면 하겠다"고 하셨지요. 얼마 후 전사 소식을 들었는데, 몇 달 뒤에 살아서 오셨어요. 팔과 허벅지에 총상 자국을 남긴 채 힘겹게 걸으며 "더 가까운 길은 없냐?"고 묻던 삼촌.

 

병원에 입원해서도 강원도 어딘가에 해병대 지휘관이 없다는 말에 "내가 가겠다"며 불편한 몸으로 나서시더니 그 후 얼굴을 못 뵌 지가 64년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를 더 사랑한 그 마음을 지금 온 국민이 가졌다면 방위산업 부정도, 권력에 눈먼 정치인들도 없을 텐데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삼촌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국립묘지 해병대 묘역 1번에 안치된 것을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다들 친척이나 지인들 도움으로 도시로 나가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는데 저 혼자 남아 농사지으며 삼촌 몫인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제가 군에 자원입대하려고 하자 혼자뿐인 할머니는 삼촌 생각에 "군대 가면 죽는다"며 술 자시고 온 동네 울며불며 돌아다니셨고, 저는 두 번이나 입대를 포기했습니다. 대신 일찌감치 결혼한 다음 할머니를 처에게 맡기고 입대했습니다. 복무 중에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만 장례가 끝난 후였습니다.

 

삼촌! 그 뒤로도 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삼촌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가는 세월 막을 수 없으니 머잖아 삼촌을 뵙겠지요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더 보고 싶습니다.

 

☞진두태

1927년생. 경남 함안 출신의 해병대 중위. 원산상륙작전과 함흥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대관령 공격 때 포위되자 부하들을 대피시킨 후 단독 교전해 적군 수명을 사살하고 1951 3 8일 전사했다. 정부는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2015 '호국 영웅 10'으로 선정해 우표도 발행했다.

 

2016-06-25 6·25전쟁 추념공원 만드는 碑木의 소대장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예술원 회원인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이하 경칭 생략) 1964년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ROTC 2기로 입대했다. 편하게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그는 사단장에게 요청해 위험한 수색중대 GP(비무장지대 경계 초소장) 근무를 자원했다.

 

한명희 소위가 근무한 곳은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백암산 고지였다. 불과 11년 전 국군과 인민군, 중공군이 치열하게 전투한 곳이다. 땅을 조금만 파면 백골이 나오고 녹슨 철모와 수통, 혁대가 나뒹굴었다. 이 격전의 현장에서 전사한 희생자를 돌로 묻은 가묘(假墓)와 막대기를 꽂아둔 비목(碑木)을 그는 수없이 마주했다. 

 

국민가곡 ‘비목’은 6·25전쟁의 슬픔과 아픔을 절절하게 담았다. 1967년 동양방송(TBC)에서 국악담당 PD로 일할 때다. 전란이 할퀴고 간 참혹한 1950년대를 넘어 1960년대 후반부터 젊은 세대들은 포크송 팝송 등 서양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는 외롭게 우리말 노래와 국악 보급에 힘썼다. 함께 가곡 프로를 진행하던 작곡가 고 장일남의 끈질긴 권유로 비목 가사를 쓰게 된다. “달밤에 순찰 돌면 전사자의 원혼이 허공을 떠다니는 듯해 소름이 돋았다. 궁노루 울음소리도 이름 없는 병사의 피어린 절규로 들렸다.” 이때의 체험으로 무명용사의 한을 씻김굿 하듯 그렸다. 

 

PD를 그만둔 뒤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꼬장꼬장한 남산골 딸깍발이 선비를 연상케 하는 한명희는 1997년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낸 바 있다. 2004년 서울시립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뒤에도 열정이 식지 않았다. 지금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와 전통음악 교류에 힘을 쏟는다. 거주지인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6000m² 대지에 ‘나라사랑 물망초예술제’ 행사를 주도하는 이미시문화서원을 세워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문화사업을 펼친다 

 

‘이미시’의 자음인 ㅇ은 하늘, ㅁ은 땅, ㅅ은 사람을 뜻한다. 한명희는 이미시를 통해 전통적인 선비정신의 선양과 풍류문화의 중흥을 추구한다. 호국영령을 기리는 그의 활동은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것이다. 6년 전부터 이미시 앞마당엔 영원의 불, 호국의 불, 평화의 불이 한시도 꺼지지 않은 채 활활 타오르고 있다. 

 

호국의 불은 2010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화천 비목공원에서 올린 ‘호국영령진혼제’ 향불에서 채화했다. 영원의 불은 같은 해 개천절 화천 해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담아왔다. 그는 이때 경이로운 체험을 한다. “천제를 올리는데 마른하늘에 갑자기 돌풍이 몰아쳐 불가사의한 기적(奇蹟)의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평화의 불은 2013년 정전협정 60주년 양구 도솔산 격전지 진혼예술제 후 옮겨왔다 

 

6·25, 6·25 호들갑을 떨지만 어엿한 추념공원 하나 없는 나라”라고 개탄하는 그는 6·25를 추념하는 공원과 문예관 등 ‘6·25추념 문화성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김동호 부산영화제위원장, 이인호 KBS이사회 이사장이 그와 함께 한국전쟁추념문화성소조성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영원한 청년’ 한명희는 6월만 되면 추념공원을 채울 콘텐츠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6·25 1·4후퇴, 백마고지, 다부동전투, 9·28수복, 국제시장, 단장의 미아리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

 

2016.10.06 한 해군 제독의 애도…"세월호·백남기 빈소는 북적, 순직 군인 빈소는 쓸쓸…눈물이 난다"

/김혁수 전 제독 페이스북 화면 캡처

 

"사고로 죽은 세월호 사망자와 시위 현장에서 죽은 백남기에게 정치권과 수많은 단체들이 찾아가지만 나라를 지키다 전사와 순직한 군인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유가족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해군 제독이 지난달 26일 동해상에서 헬기 사고로 순직한 군인들을 추모하며 올린 글이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 해군 초대 잠수함 전단장을 지낸 김혁수 예비역 준장(해사25기·68)이 한미 연합훈련 도중 헬기 사고로 순직한 해군과 유가족의 의연한 모습을 소개한 글이다.

 

순직한 해군들은 대잠수함헬기 ‘링스 헬기'의 정조종사 고(故) 김경민(33) 소령, 부조종사 고 박유신(33) 소령, 조작사 고 황성철(29) 상사로, 이들은 동해에서 밤에 작전 도중 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모두 숨졌다. 이들의 영결식은 지난 2일 해군장으로 치러졌다.

 

/지난 2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체육관에서 해군장으로 엄수된 '북 도발 대응 한미 연합 해상무력시위작전 순직자 고 김경민 소령, 박유신 소령, 황성철 상사 합동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 및 분향을 마친 후 경례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김 제독은 지난 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 계정에 “후배들의 빈소를 조문하고 왔다”며 남편과 아버지, 애인을 갑작스럽게 잃고 빈소를 지키던 유가족들의 모습과 빈소 풍경을 전했다.

 

“목사인 한 조종사의 부친은 목사님으로, 교인들이 찾아와 찬송하고 기도하며 위로하고 눈물을 흘리고 갔다. 한 조종사에게는 네 살짜리 애기와 부인의 뱃속에 둘째가 있다고 했고, 조작사는 미혼인데 약혼녀가 와서 빈소를 지키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김 제독은 “유가족 누구도 소리내어 울거나 해군에 떼를 쓰는 사람이 없었고, (재야시민단체인) 군인권센터에서 와서 원인 규명 전까지 영결식을 거부하도록 선동했으나 유가족은 거절했다”고 전했다.

 

그는 “천안함 유가족도 (실종 군인들의) 생존 가능성이 없자 바로 선체 인양에 동의하고 선체 인양 후 8명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산화 처리해달라고 했다”며 “좌파들이 영결식을 서울시청 광장에서 하자고 선동했으나 자녀들이 근무했던 2함대에서 하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적었다.

 

그는 이어 “얼마 전 잠수정 사고 때 순직한 김예빈 대위의 누나 김예은씨가 오히려 해군을 위로하고 격려한 사랑의 메일을 보내와 온 해군과 많은 국민이 감동했었다”며 “차를 운전해 오면서 유가족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는 ‘군인은 전쟁을 하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지키는 자다. 군인은 죽이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죽는 자다’라는 자신이 생도 시절에 책상에 써두었던 글을 소개하며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후배들이여 이제 안식하시라~!!’라고 글을 맺었다.

 

/연합뉴스

 

김 제독은 순직 해군들의 영결식이 치러진 2일에도 “군인권 센터는 당일까지도 유가족이 영결식을 반대하고 있다는 광고를 했으나 유가족 누구도 항의를 하지 않았고 그들의 회유와 선동을 단호히 거절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김 제독은 “김경민 소령의 아버지는 목사님으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했고, 1030m나 되는 깊은 수심에서 내 아들을 찾아 준 해군이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 순교한 자랑스런 아들을 만날 날을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기다리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본지와의 통화 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항공 특기를 선택하는 군인들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며 “야간에 작전을 하다보면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안 되기도 하고 바다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뿐만 아니라 기체에 결함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제독은 “이들은 평화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권선미 기자

 

2016.10.08 나라에 목숨 바친 군인들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

동해에서 대(對)잠수함 훈련 참가 중 순직한 해군 링스헬기 정조종사 김경민 소령, 부조종사 박유신 소령, 조작사 황성철 상사의 영결식이 지난 2일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러졌다. 그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安葬)됐다. 하지만 김혁수 해군 예비역 준장이 SNS에 올린 추모사가 아니었으면 세 군인의 죽음도 그냥 잊히고 말았을 것이다. 김 전 준장은 1일 빈소에 조문을 다녀온 뒤 "시위 현장에서 죽은 이에게 정치권과 수많은 단체가 찾아가지만 나라를 지키다 전사와 순직한 군인들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탄식했다.

 

헬기 추락 사고가 있기 전날, 서울 도심 시위 도중에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혼수상태로 있던 백남기씨가 사망했다. 정치권과 좌파·시민단체 진영 전체가 백씨 죽음으로 들끓었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백씨 죽음에 정치인들은 물론 일반인 조문도 이어졌다. 반면 순직 군인들의 빈소는 친·인척들과 군 동료 외에는 한산했다고 한다. 여야 주요 정치인들이 왔지만 기록을 남기기 위한 형식적 조문이란 인상이었다고 한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시위를 하다 사고를 당한 사람과 나라를 지키다 1000m 바다 밑에 가라앉은 군인들에 대한 대접이 이처럼 대조적인 것은 결코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모든 죽음은 애통하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내가 아니라 남, 우리 집단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죽음을 모든 사회 구성원이 진심으로 기리지 않으면 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이나마 지탱되고 있는 것은 밤 바다에 목숨을 바친 이런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 전 준장은 유가족 누구도 소리 내 울거나 해군에 떼를 쓰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경민 소령의 부친 김재호 목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훈련 관련) 군인들이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지 무슨 죄가 있겠나"라고 담담하게 얘기했다. 군 관련 시민단체가 사고 원인 규명 전까지 영결식을 거부하라고 유가족을 부추겼다고 한다. 불행한 사고를 정쟁화시키려는 전형적 행태다. 유가족들은 이들의 부추김을 거절했다. 천안함 폭침 때는 일부에서 영결식을 서울시청 광장에서 하자고 했지만 유가족들이 거절한 적이 있다. '의연하다'는 것은 이들 유가족을 가리키 는 말일 것이다.

 

링스헬기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다른 군인들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 유가족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라고 한다. 순직 군인들이 남긴 자녀가 있다. 아직 엄마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있다. 이 아이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우리가 그 아버지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인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2016-10-08  순직 헬기 장병들의 爲國 헌신과 유족의 눈물겨운 절제

지난달 26일 동해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벌이다 추락 사고로 숨진 링스헬기 조종사 김경민 소령, 부조종사 박유신 소령, 조작사 황성철 상사의 해군장이 2일 엄수됐다. 김혁수 예비역 준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조문 후기에서 “유족들 중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울거나 해군에 떼를 쓰지 않았다. 시민단체인 ‘군 인권센터’가 원인 규명 전까지 영결식을 거부하자고 제의했으나 유가족들은 거절했다”고 전했다. 김 소령의 아버지는 “아들을 수장시키지 않고 1000m 수심에서 찾아준 해군에 감사하다”고 밝혔다.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한 유가족들이 이렇게 슬픔을 절제하는 모습은 숙연한 감동을 자아낸다.

 

 유가족들은 1인당 3억2000만 원 정도의 정부 보상금 중 일부를 해군 순직 유자녀들을 위한 ‘바다사랑 장학재단’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사망 사고가 나면 일부 유가족과 단체들이 과도한 요구를 하며 생떼를 쓰는 세태와는 대비된다.

 

 그러나 순직 장병들의 위국(爲國)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하려면 사고 원인 규명은 철저히 해야 한다. 김 소령의 아버지는 “(헬기를 운용한) 류성룡함 총책임자를 보는 순간 울컥함이 있었지만 거기 있는 군인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라면서도 “링스헬기의 볼트에 문제가 있었다는 보도를 들은 뒤엔 인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어제 국방부 국정감사에서도 사고 원인이 불량 볼트 때문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한민구 국방장관은 “(사고 원인이) 볼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답변했다.

 

 사고기는 1999년에 도입했고 수명이 30년 이상이어서 노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링스헬기는 1993년과 2010년 두 차례 추락 사고로 17명이 숨졌고 2010년엔 서해에 불시착한 적도 있는 만큼 기체 결함, 정비 불량 등 모든 가능성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만일 고질적 방위사업 비리 때문에 억울한 희생자가 생긴 것이라면 책임자들을 의법 처리해야 한다.

 

 최근 잇단 지진, 태풍과 안보 위기로 군인 소방관 경찰 등 제복을 입은 공무원(MIU)들이 순직하거나 부상하는 사태가 빈번하다. 온갖 내우외환(內憂外患)에도 대한민국이 침몰하지 않는 것은 이들의 희생 덕분이다.

동아일보 사설

 

2016년 10월 10일 ‘링스 헬기’ 유족 節制와 국가의 도리

초대 잠수함전단장, 잠수함연맹 회장 

 

누가 무슨 말로 위로를 해도 그들의 슬픔과 아픈 마음은 치유될 수 없다. 크게 통곡하며 울부짖고, 해군에 사소한 문제가 있어도 따지고, 내 아들과 내 남편 살려내라고 항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배들의 희생에 조문하러 갔을 때 유가족들은 너무나 의연했다. 조문하러 간 이 못난 선배에게 그저 고맙다는 말만 했다. 아버지와 유가족의 손을 잡고 위로해 드렸다기보다 내가 오히려 위로와 감사를 받았다. 김경민 소령의 부친은내 아들은 나라를 지키다 순교한 자랑스러운 순교자라고 했고끝까지 내 아들을 찾아준 해군에 감사한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 살배기 아들과 뱃속 아기까지 가진 박유신 소령의 부인, 해군의 가족이 되겠다고 장래를 약속한 황성철 상사의 약혼녀는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정치권과 시민단체, 국민의 무관심이었다.

 

어느 한 시민단체는 유가족들이 원인 규명이 될 때까지 장례 절차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으나 유가족들은 이에 현혹되지 않고 절제(節制)했다. 과거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도 당시 정부로부터 무관심과 냉대를 받았지만 크게 원망하지 않았고, 천안함 유가족들도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자 선체 인양에 동의했으며 선체 인양 후에도 8명의 시신을 찾지 못했지만 전사(戰死) 처리해 달라고 해서 입대 시 보관한 손톱과 머리털로 장례를 치렀다. 그때도 일부 시민단체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영결식을 하자고 했으나 내 아들이 근무했던 2함대(평택)에서 하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민평기 상사의 모친 윤청자 여사는 위로금 중 1억 원을 기부해 해군 함정에 기관총을 설치했고, 정범구 병장의 모친 심복섭 여사도 아들의 모교 강원대에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얼마 전 잠수정 사고로 순직한 김예빈 대위의 누나 예은 씨는 해군에 보낸 편지에서군인은 직업이 아니라 명예이며 대한민국 해군이 얼마나 멋진 직책인지, 내 동생이 그런 해군의 일원이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오히려 해군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번 링스 헬기 유족들도보상금 일부를 순직한 유자녀들을 위한바다사랑 장학재단에 기부할 예정이라니 더욱 송구스럽고 마음 아프다. 해군의 유가족 역시 해군임을 실감했다.

 

선진국에서는 제복을 입은 군인·경찰·소방관을 존경하고 사랑을 보낸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번에 SNS에 올린 글로 일시적인 관심을 갖는 것보다, 정치적 이슈가 될 만한 사건에 대한 관심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의로운 죽음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과 국민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문화일보

 

2016-10-12 ‘링스헬기 순직’ 故김경민 소령 부친 김재호 목사, SNS 추모글 김혁수 前제독과 대담

“나라 지키는 의무 다한 아들… 떼쓴다고 살아 돌아오나”

《 “국민이 장병들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보여 줬으면 좋겠다.”(김혁수 전 제독·예비역 준장) “군인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자원인지 국민이 알도록 해 달라.”(고 김경민 소령의 부친 김재호 목사) 지난달 26일 한미 연합 해상작전 도중 링스 헬기 추락 사고로 김경민 소령과 박유신 소령, 황성철 상사가 순직했다. 이들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김 전 제독은 1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일보는 11일 김 전 제독과 김 목사의 대담 인터뷰를 했다. 순직 장병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김 목사는 자신을 위로하는 김 전 제독에게 “아들이 군에 입대한 순간부터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라를 지키는 게 의무였다”고 담담히 말했다. 김 전 제독은 “희생 장병들의 헌신이 제복 입은 공무원(MIU)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침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순직 장병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소리 없는 영웅들”이라고 말했다. 대담 인터뷰는 동아일보사에서 2시간 동안 진행했다. 》

 

/두 손 꼭 맞잡고… 지난달 26일 해군 링스 헬기 추락 사고로 순직한 김경민 소령의 부친 김재호 목사(왼쪽)와 순직자들을 추모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된 김혁수 전 제독이 11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이날 두 사람은 동아일보와의 대담에서 “제복이 존경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조문을 다녀와서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  

▽김 전 제독(이하 제독)=조문을 가서 목사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데, (목사님이) 계속 “감사하다”고 하더라.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 울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글을 올렸는데 반응이 놀라웠다.

 

 ―부친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고마웠나.
 ▽김 목사(이하 부친)=사고 현장에 가 보니 수심이 1000m가 넘는다고 했다. 여기서 시신을 찾는다는 건 모래알 속에서 밥알 하나 찾는 것보다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수장(水葬)시킬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시신을 찾아 준 게 너무 감사했다. 경민이는 안전띠를 맨 상태로 조종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헬기 고도를 올려 보려고, 책임을 완수하려고 노력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들을 잃고도 시신을 찾아 줘 감사하다고 말한다는 게 놀랍고 더 마음이 아프다.  

▽부친=왜 아프지 않겠나. 하지만 장례식 내내 해군 동료들이 와서 고생했다. 만약 다른 장병이 사고를 당했다면 우리 경민이도 여기 와서 수발을 들 것 아니냐. (부친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뒤에) 그러니 고마울 수밖에 없지 않나. 우리가 떼쓰면 높은 사람들은 우리를 피하면 그만이다. 그럼 누가 괴롭겠나. 결국 내 아들 같은 동료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거다.

 

 ―부친께서 사고 현장에 갔다가 금방 돌아왔다고 들었다.  

▽부친=사고 현장에서 울고불고해 봐야 살아오는 게 아니지 않나. 우리가 함대(서애류성룡함)에 있으면 장병들이 우리 수발을 들어야 하니 시신 수색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독=오늘 처음 듣는 얘기다. 수색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돌아온 것이나 다른 장병이 사고를 당했다면 내 아들도 똑같이 밤을 새웠을 거란 생각에 오히려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셨다니 숙연해진다.  

 

김 전 제독은 “해군 헬기 조종사가 전투기 조종사보다 훨씬 힘들다”며 작전 환경을 자세히 소개했다.  

 

▽제독=해군 헬기 조종사들의 함상(艦上) 작전 일수는 1년에 150여 일이나 된다. 바다에선 주간에도 수평선이 안 보이는 날이 65% 이상이다. 수평선이 안 보인다는 건 바다와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특히 대잠(對潛) 작전은 최저 고도 30m 해상에서 진행된다. 더욱이 헬기 안은 한겨울에도 난방이 안 된다. 그런데도 야간작전을 하고 나면 긴장을 해 비행복이 땀에 다 젖을 정도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칠흑 같은 밤에 작전을 하다가 희생됐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프다.(김 전 제독은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부친=헬기 조종이 더 힘들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만약 이 얘기를 진작 들었다면 아들을 제대시켰을지도 모르는데….

 

 ―부친께선 보상금 중 일부를 장학금으로 내놓겠다고 하셨다.  

▽부친=해군에 순직 장병의 유자녀를 위한 ‘바다사랑 장학재단’이 있는데, 장학기금이 목표치의 절반도 안 된다고 하더라. 미혼인 경민이는 자녀가 없지만 장학기금 마련에 조금이라도 보태기로 세 가족이 약속했다.

 

 ―제독께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세월호 사망자와 시위 현장에서 죽은 백남기(농민)에겐 정치권과 수많은 단체가 찾아가지만 나라를 지키다 순직한 군인들에겐 관심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부친=우리 애들은 몸을 바쳐 국가를 지켰다. 이제 국가가 그 아이들을 지켜 줘야 한다. 장례식장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고인에게 빚을 졌다”며 온 시민이 두 분 있었다.  

 

▽제독=할리우드 여배우인 에이미 애덤스는 비행기에서 군인을 보고 자기 1등석을 내줬다고 한다.(당시 애덤스는 “내가 주목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군인들이 주목받게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제가 올린 글에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 MIU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보여 줬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MIU로, MIU의 가족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제독=사관생도 시절 읽은 책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군인은 전쟁을 하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지키는 자다. 군인은 죽이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죽는 자다.’ 이게 군인의 사생관이다. 김 소령 등 순직 장병들은 평화를 위해 죽은 것이다. 이런 군인에 대해 국가와 국민은 끝까지 보살펴야 한다.

 

 ▽부친=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전쟁은 위정자들이 일으키지만 희생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전쟁을 막으려면 상대가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힘을 가져야 한다. 이 땅에 태어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국가가 없으면 나도 없다.  

 

해군중앙교회 장로인 김 전 제독은 김 목사를 자신의 교회로 초청하고 싶다고 했다. 설교도 듣고 위로도 하는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는 “시간도 조정해야 하고…”라며 즉답을 피했다. 김 목사는 아들의 순직 이후 “교회 이름을 알려 달라는 분이 많은데 밝히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또 다른 아들들인 ‘대한민국 MIU’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는 듯이 보였다.

이재명 egija@donga.com

 

■호국의 전사들

2014-12-21 자유북한방송을 만드는 '자유의 전사(戰士)'들을 만나다

 

북한이 지상 최악의 독재체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가장 큰 동력(動力)이 바로 외부정보의 차단에 있다. 정보의 차단과 군대라는 폭력 수단이 있는 한 북한 정권의 내부 변화나 붕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난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남북 상호비방 중지를 가장 먼저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2000년 6월 이후 대북(對北)방송이던 KBS사회교육방송을 한민족방송으로 바꾸고 북한 체제비판을 중단하였고, 삐라를 비롯한 모든 대북 선전물 발송도 중지했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의 모습.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북한의 요청으로 우리 정부와 군이 모든 대북 방송을 중단하자 2004년 탈북자들이 모여 자유북한방송을 설립했다.  

 

2004년 6월에는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때 상호비방방송 중지를 전면 합의함에 따라 그나마 휴전선 일대에 울려 퍼지던 국방부가 운영하던 ‘자유의 소리 방송’까지 중단되었다. 자유의 소리 방송은 휴전선의 확성기와 가청 거리가 50km인 FM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다. 이로써 북한 주민들은 외부정보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대북 방송의 맥을 잇는 자유북한방송

당시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반발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북한 체제의 취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탈북자들이었다.

 

정부가 대북 심리전을 중단하자 탈북자들이 스스로 삐라를 만들어 북에 보내는가 하면, 인터넷 매체나 방송을 만들어 자유와 진실의 목소리를 북녘 땅에 전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북 관련 매체나 단체 가운데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자유북한방송’이다.

 

2004년 설립된 자유북한방송은 방송과 인터넷매체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방송을 통해서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 사상을 전해 그들을 각성시키고, 인터넷을 통해서는 남한 주민들에게는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전달하여 올바른 대북 정책을 펴도록 돕는 두 가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1999년 탈북한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 대표는 “나 자신이 북한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대북방송을 많이 들었던 것이 탈북을 결심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며 “외부세계와 완전하게 고립된 북한 주민에게 현재로서는 삐라와 대북방송이 유일하게 외부 세계의 소식을 알려주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자유북한방송의 직원은 김성민 대표를 비롯하여 이석영 국장과 아나운서, 영문 번역을 맡고 있는 서강씨, 총무 1명 등 7명의 정직원과 기타 탈북자로 구성된 수명의 기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3월 13일 자유북한방송을 찾아 ‘자유의 전사’(戰士)로 활동하는 이들의 사명감을 들어보았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북한 곳곳에 우리 통신원 활약 중"

 

먼저 2004년부터 자유북한방송을 이끌고 있는 김성민 대표를 만나보았다.

 

김 대표는 “2004년 6월 6ㆍ15 후속 조치로 열린 남북장성급 회담에서 남북이 상호비방 방송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보도를 보고 탈북자들이 경악했다”며 “북한에 그나마 전해지는 유일한 외부 소식이 남한 정부와 군(軍)이 보내는 라디오 방송과 삐라였는데 이것을 그만둔다니까 기가 찼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에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 탈북자들이 방송을 만들기로 결심했다”며 “탈북자들이 모금한 돈과 남한에서 사업하시는 삼촌이 지원해준 1억5000만원으로 방송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아래는 김성민 대표와 일문일답(一問一答)이다.

 

-자유북한방송에서 어떤 내용이 전파를 타는지요.

“탈북자 대담을 10년째 진행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북한에 대한 생생하고 방대한 증언이 쌓여 있습니다. 또한 탈북자들이 함께 만드는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 ‘탈북대학생의 남조선 이야기’ 등의 코너도 계속 제작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김성욱 리버티헤럴드 대표와 김필재 조갑제닷컴 같은 젊은 대북 전문가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남북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숫자로 보는 남조선’, 주요일간지 사설이나 논설 소개, ‘북한 인권이야기’ 같은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정부의 관계 기관에서 우리 방송을 벤치마킹하기도 하고, 우리 사무실을 수시로 방문해서 정보를 얻기도 합니다.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것이 큰 자부심이죠.” 

 

북한의 내부 소식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확보

/자유북한방송이 <조선pub>에 공개한 북한 내부의 정보원들로부터 입수한 각종 북한 관련 원문자료들. 자유북한방송은 이런 1차 원문 자료를 통해 최대한 정확하고 신속하게 북한 관련 정보를 분석 보도하고 있다.

 

-최근 자유북한방송은 북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보위사령부에 체포되어 사실상 실각한 것 같다고 보도한 적이 있는데, 그 보도가 나가고 나서 곧바로 북한이 최룡해가 건재한 모습을 TV에 방영했습니다.

“최룡해가 잡혀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정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노동신문을 분석하면, 올해 2월 16일 이후 노동신문은 최룡해 부친(최현) 띄우기를 더는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최룡해가 공석에서 한동안 사라진 것도 확인된 사실입니다. 북한이 최룡해가 건재하다며 방영한 조선중앙TV 동영상은 짜깁기 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하지만 장성택에 이어 최룡해까지 곧바로 처단하면 김정은이가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망가지고, 국제사회로부터 망신을 당할 게 뻔하니까 일단은 최룡해를 다시 세워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진실은 곧 밝혀질 것입니다.”

 

-장성택 처형 과정에서 자유북한방송이 여러 차례 특종과 단독보도를 했는데, 그러한 정보는 어떻게 수집하는 것인지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북한의 각 지역에 통신원들이 있습니다. 북한 내에서 직접 전화로 정보를 주는 정보원도 있고, 탈북자 주변의 인맥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장성택 처형 사건 시점에 제가 한국 언론과 북한과 관련해 정확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정보원들로부터 받은 최신 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실례로 우리는 김정일의 후계자에 대해 세계 언론이 주요 이슈로 다루기 전에 이미 김정은이 후계자라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외에도 모든 분야에 걸쳐 많은 양의 정보를 북한으로부터 들어오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북한에서 올해부터 의무 교과에 편입시킨 한문 교과서를 단독 입수해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자료는 어떤 식으로 전달받습니까.

“대부분 북한에서 직접 온 원본 자료를 토대로 보도합니다. 공개처형 동영상이나, 수많은 북한 내부 사진들이 그동안 우리가 입수했던 원본자료들입니다. 요즘은 북한에서도 행정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합니다. 그래서 바로 컴퓨터로 만든 1차 자료가 우리한테 곧바로 파일 형태로 전달됩니다.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의 숙청 사건도 그 세부 상황을 자유북한방송이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어느 날 북한에서 온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까 ‘리영호의 사진을 모두 내리라’는 명령이 있었고, 또 다른 자료에는 ‘반역자 리영호’라는 문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수의 정보를 종합해서 남한 언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북한의 내부 상황을 최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겁니다.”

 

"우리를 도와주다 탈북하는 정보원도 많아"

 

/자유북한방송이 확보한 북한의 최신 전자 도서자료. 1500여권의 도서가 DB화 되어 있다국내 도서관에 서도 보기 힘든 각종 북한 서적을 간단하게 컴퓨터 하나로 바로 검색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자유북한방송은 수많은 북한 원문 도서와 백과사전류를 확보하고 있다.

 

김성민 대표는 “동영상 자료의 경우 공개 총살 동영상을 촬영한 내부 정보원이 북한 보위부에 체포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동영상 확보에는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했다.

 

“2009년 함흥에서 인민재판 후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당시 공개처형이 끝나고 출구를 하나만 남긴 채 현장을 봉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참관한 사람들을 전부 몸수색했는데, 당시 4명이 몰래 현장을 촬영하다가 걸렸습니다. 다행히 우리측 정보원들은 아니지만, 북한 동영상을 구하려다 사람 죽이겠다 싶어서 동영상 촬영 시도는 더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2005년 북한 국경 군인 초소의 군인이 잡혀온 탈북자를 구타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는데, 당시 좌파 매체에서 그 화면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었는데요.

“그 동영상은 구타를 하는 소대원을 소대장이 직접 찍어서 보내준 겁니다. 그 후 그 소대장은 목숨의 위협을 느껴 탈북했습니다. 조작 운운하는 것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자유북한방송을 음해하기 위한 세력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도와주다 본의 아니게 탈북하는 정보원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남한 홈페이지를 해킹하는 북한 요원이 도리어 저에게 북한의 자료를 넘겨준 경우도 있었고, 방송을 듣고 북의 보위지도원이 직접 엄청난 정보를 주기도 했습니다.

 

북에서 직접 보내온 이런 정보들이 북한을 변화시키는 거름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 정보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지난 10년간 북한 주민들을 향해 외친 자유에 대한 의지가 신뢰라는 결실을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방송을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어서 무척 아쉽지만, 미국 국무부가 탈북자들과 중국에 출장 나온 북한 주민 약 200~300명을 대상으로 매년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응답자의 30% 이상이 KBS, 극동방송, 자유아시아방송, 미국의 소리 방송 등 외부의 방송을 듣는다고 대답했고, 우리처럼 민간 단파방송 중에는 자유북한방송이 항상 1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국내 탈북자들이 2만5000명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약 4000~5000명이 우리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엇보다 탈북자들이 만든 방송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고, 또한 북한말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설득력도 강하고, 친밀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자금이 없어 방송 시간을 더 늘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2006 4월 미국에서 열린 자유북한방송 주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간 김성민 대표는 백악관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기념촬영을 했다. 국내 대통령이 북한 인권문제로 탈북자들을 만나는 것을 회피하고 있지만부시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정치범수용소 출신 탈북자 신동혁씨를 만나는 등 북한 인권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의 위협과 남한 좌파들로부터 방송 중단 협박도 많이 당하지 않았나요.

“북한 정권에서 ‘죽여버리겠다’는 직접적인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2004년 2월 시험방송을 할 때부터 한총련과 통일연대 사람들이 회사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는 등 물리적인 충돌도 많이 겪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런 시위 때문에 건물 주인이 자꾸 나가라고 해서 4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스튜디오 한번 옮기는 데 2000~3000만원이 들어가는데 이사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당시는 정말 여기가 북한이 아닌데 우리가 이런 협박을 받으며 이사를 해야 한다는 것과 정부, 경찰 어디 하나 기댈 곳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많이 서글펐습니다.”

 

-방송국 운영 자금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정말 십시일반(十匙一飯) 모아준 돈으로 운영합니다. 방송을 하려면 외국의 민간방송 주파수를 사야 하는데 방송 시간에 따라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현재는 그동안 도와주던 미국 국무부의 지원이 끊겨서 재정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가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영리를 취하려고 했다면, 북한에서 장교로 재직해서 남보다 훨씬 많은 정착금과 남한의 삼촌께서 주신 돈, 아시아 민주인권 상으로 받았던 10만 달러와 국경 없는 기자회의 상금 등으로 다른 곳에 투자를 했지 뭐 하려고 돈도 안 되는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하면서 이 고생을 하고 있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단체에서 지원하는지요.

“하루 한 시간 방송을 하는데 전파임대료가 월 500만원입니다. 현재는 일본과 미국의 민간단체의 후원회에서 주로 지원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와 부산온천교회, 과천교회 북한선교부, 영락교회가 지원을 해주는 데 이 기회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여전도회와 과천제일교회는 방송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후원해준 유일한 곳입니다.

 

그리고 국내 언론사 퇴직자분들과 알게 모르게 지원해주는 개인들도 있습니다. 자금이 좀 더 있으면 방송 시간을 더 늘리고 싶습니다. 지금은 하루 평균 두 시간 방송을 내보내고 있는데, 자금이 빠듯해서 하루 한 시간 정도로 방송을 줄일 때도 많습니다.”

 

"자유통일을 이루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

-얼마 전 탈북자들이 의존하는 대북 소식통의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객관적인 북한 정세 평가에 장애가 된다는 칼럼을 언론에 기고한 교수도 있었는데요.

“김근식 경남대 교수가 <중앙일보> 시론을 통해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소위 북한전문가라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한심한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은 북한의 특수성을 말하면서 북한독재체제의 반동성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자기들이 북한 정보를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김근식씨는 ‘탈북자들이 북한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정치군사적 고급 정보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누가 자기에게 대북 정보를 검증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런 궤변으로 고향마을의 오솔길까지 어느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탈북자들을 모욕하고, 죽음까지 각오하고 북한의 내부정보를 보내는 북한 주민들의 열정을 농락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탈북자들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북한을 말하고, 북한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성민 대표는 “우리도 사람이니까 실수를 할 때도 있지만, 북에서 목숨을 걸고 보내온 이야기를 남쪽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책상머리에 앉아서 추상적인 분석이나 하고 양비론(兩非論0을 펴는 일부 북한 전문가들보다 훨씬 유용하고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계획은.

“북한은 극심한 언론탄압 국가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보가 절대 부족합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에게 인권이 무엇인지 알리고, 자유와 민주가 무엇인지 인식시킬 필요성이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자유, 민주, 통일에 대한 의식을 각성시켜 그들 스스로 일어서고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북한 군인들을 상대로 방송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에게 자유의 바람을 넣어 독재정권에 저항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 방송은 과거 북한군에 복무했던 탈북자들이 진행하는데 방송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된 군인들이 저항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실 계획인지요.

“물론 처음 시작한 것은 대북방송의 맥을 잇기 위한다는 측면이 있었지만, 10년이 지나면서 우리만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 정권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남쪽 좌파들이 기를 쓰고 우리를 없애려고 하는 것을 보고 ‘이게 정말 중요하니까 저들이 저렇게 기를 쓰고 막으려 하는구나. 정말 이 일을 목숨을 걸고 해야겠구나’하고 다짐했습니다. 오기와 투지로 이 일을 하다 보니 저도 어느 순간 북한 해방을 위한 투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유통일을 이루는 날까지 방송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자유북한방송 영문 홈페이지 운영하는 서강씨,

"나의 작은 일이 북한주민에게 자유를 주는 큰 일이 될 것"

 

자유북한방송의 중요 뉴스는 영문(英文)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 북한관련 단체와 주요 언론사에 제공된다. 이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서강(33)씨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서강씨는 졸업 후 미국 뉴욕주에 있는 시라큐스대에서 국제관계학(석사)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자유북한방송의 영문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각종 북한관련 영문을 번역하거나, 해외인사의 방한(訪韓) 시 통역을 해오고 있다.

 

특히 미국의 북한인권운동가인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가 방한할 때마다 서강씨가 단골로 통역을 맡고 있다. 필자도 작년 10월 방한한 슈잰 숄티 여사를 서강씨의 통역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서강씨의 말이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했던 지역이 전 세계 난민들이 많이 정착한 곳이었습니다. 이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까 난민문제에 관심이 생겼고, 이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졸업 후  김성민 대표 등 탈북자들을 만나 같이 활동하면서 지금까지 북한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면 대기업과 같이 안정되고 보수가 높은 직업을 찾지 않나요.

“물론 이 일을 해서 돈을 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부터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귀국 후에도 북한의 상황을 외부에 알려서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찾아 주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통역 일은 제가 영어를 할 수 있으니까 부수적으로 하는 것이고, 주요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고, 북한의 인권 상황을  세계에 알려서 개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은 어떤 계기로 가게 되었는지.

“평소 여성이나 아동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그 분야를 공부하러 미국에 갔는데, 우연하게 제가 간 지역이 미국에서 난민이 많이 정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난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아가 북한의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이런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공부를 시킨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지금 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배워서 남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 온 것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 때문에 저도 그동안 제가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 희생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난민들과 만나면서 이 세상의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내가 평화를 누리고 살았으니까 그들도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면 돈보다는 남을 위해 살고 싶은 생각입니다.”

 

-북한 소식을 번역해서 해외에 알리는 것이 왜 중요한지요.

“저는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북한에 관심을 가지도록 가교(架橋)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해외에 알려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높이고, 이것이 북한 정권에 압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북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상황을 외부에 알려서 북한이 열린 사회가 되는데 일조(一助)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자유북한방송만큼 적당한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북한방송처럼 생생한 북한 정보가 오가는 곳이 드물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 김성민 대표나 슈잰 숄티 같은 훌륭한 분들과 일하게 된 것도 행운이고요.”

 

▶이석영 국장, "우리가 쓰러지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독재자 김정은"

 

자유북한방송의 이석영 국장은 원래 북한전문 매체인 <데일리NK>에서 기자활동을 하다가 3년 전부터 자유북한방송에 합류했다. 그는 “북한 이 워낙 통제된 사회이다 보니까 주민들이 외부 소식에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라디오를 통해 바깥의 소식을 접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북한에서 남한 방송을 많이 들었는데, 남한의 대북방송에서 김정일 독재의 실상을 알려주고, 김정일을 가차 없이 비판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리만족감을 느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며 희망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여기에 더해 남한마저 자기들을 버렸다는 데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통일을 하려면 남한 사람들이 독재에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북방송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에서 단파 라디오는 구하기 어려워서 많이 듣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북한이 워낙 폐쇄된 사회이다 보니까 많은 사람이 단파 라디오를 통해 바깥의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실제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 중에는 자유북한방송을 듣고 왔다며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북한이 방해전파를 쏘고 있는데, 우리가 주파수를 바꿔가면서 방송을 내보내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북한주민들이 단파라디오를 구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요.

“첫번째 방법은 시장에서 암거래하는 방법입니다. 공개적으로 사고팔지는 못하지만 수요가 많기 때문에 언제든지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습니다. 2002년 전 까지만 해도 이른바 ‘적지 물자’(적의 진지로부터 유입되는 물자)물자로 아리랑 담배나 ‘불티나 라이타’보다 라디오가 더 많이 들어왔다고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국장은 탈북자들, 특히 북한민주화운동본부(대표 강철환)와 극동방송, 국내외 북한민주화 단체들에서 비공식루트로 보내는 라디오도 북한주민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밝혔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지요.

“정부의 지원이 없다는 겁니다. 예산이 부족하니 방송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예전에는 하루 2시간씩 두 번 방송을 송출했는데, 지금은 한 시간씩 2번밖에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산이 더 있다면 유능한 기자를 좀 더 많이 쓰고 싶은데 이것도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예산이 없어서 자발적으로 쓰러진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없애 버린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남한 정부와 국민은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통일과정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요.

“북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워낙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에 북한 사회가 어디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깨닫기가 힘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 탈북자들이 하는 방송을 들으면서 북한 권력층의 비리와 체제의 부조리를 깨달으면서 북한 당국의 거짓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살았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의 심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내보낸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고향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로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북한이 김성민 자유북한방송에게 보낸 공개협박 보도문이다. 북한 정권이 김성민 대표를 왜 그토록 싫어하는 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는 글이라 이곳에 게재한다. 글에는 김성민 대표가 '동까모'(김일성 동상 까부수기 모임) 라는 조직을 만들어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죄악 우()에 죄악을 덧쌓는 인간쓰레기들 

주체102(2013) 10 29일 《통일신보》

죽어 묻힐 곳도 없다

예로부터 충신은 되지 못할망정 역적질은 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하지 못할 가장 추악한 짓으로 여기는 역적질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는 물론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죄악중의 죄악이다. 하기에 사람들은 일신의 안락과 치부를 위해 부모를 버리는 것과 같은 초보적인 도덕륜리마저 상실한 채 나라와 민족의 리익을 해친 역적을 인간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인간으로 여기고 있다.

 

더러운 역적질로 민족의 저주와 손가락질을 받는 인간오물들 중에는 남조선에서 그 무슨 《자유북한방송》대표라고 자처하는 김성민(본명 김진)도 있다. 따지고보면 김성민의 가족은 일찌기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공화국의 혜택을 많이 받아왔다.

 

김성민의 아버지 김순석은 나라없던 그 세월 극심한 생활난으로 이역땅에서 정처없이 헤메이며 불우한 인생살이를 하였다. 그는 815해방후 공화국의 품에 안겨 시인으로서의 자기의 재능과 희망을 마음껏 꽃피웠다.

 

공화국에서는 전후복구건설이 한창인 때에 대동강반의 풍치수려한 곳에 새 살림집을 남먼저 안겨주었으며 그의 자식 6남매가 부러운것없이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온갖 은정을 다 베풀어주었다.

 

그 은정이 너무 고마와 김순석은 생이 지는 마지막순간 자식들에게 나라의 은덕을 한시도 잊지 말고 대를 이어 충정을 다해나가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공화국에서는 김성민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민군대의 전문예술단체에서 창작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 작가로 내세워주었으며 대학까지 졸업시켜 아버지가 못다 한 일을 다하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었다.

 

그런데 김성민은 대를 이어가면서도 다 갚지 못할 크나큰 사랑, 고마운 은덕에 보답하기는커녕 몇 푼의 돈에 환장이 되여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국가재산을 훔쳐내며 저 하나의 향락과 부귀영화만을 추구하였다.

 

지어 남이야 어떻게 되든 극단한 개인 리기주의에 빠져 부패타락한 생활만 일삼으면서 공화국에 썩어빠진 부르죠아 생활풍조를 퍼뜨리는 범죄도 저질렀다.

 

그 죄가 두려워 남조선에 도주한 김성민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북민전》과 《자유북한방송》이라는 《대북심리전방송》의 대표까지 겸임하고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의 돌격대가 되여 동족대결책동에 분별없이 날뛰고있다. 그가 2004년부터 《민간방송》의 탈을 쓰고 공화국에 대한 삐라살포에 그 누구보다도 극성을 부린 것은 그 실례이다.

 

특히 김성민은 한푼의 가치도 없는 어중이 떠중이들을 긁어모아 《동까모》라는 조직까지 내오고 무엄하게도 공화국의 최고 존엄을 해치려는 특대형 범죄행위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다.

 

말 못하는 짐승도 자기를 키워준 주인의 은혜를 안다고 하였지만 은혜에 보답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배반하고 심지어 물어뜯겠다고 날뛰는 김성민이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너절한 인간쓰레기이다. 아마도 수십년전에 땅속에 묻힌 김성민의 부모도 이 소식을 들었다면 역적을 낳은 자신들을 저주하며 통한에 몸부림칠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김성민의 죄행에 남조선인민들까지 얼마나 분격하였으면 언제인가 그에게 《북의 최고 존엄을 상대로 주둥이를 놀리는자, 그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며 살기를 바라는가.》라며 《민족의 반역자, 시대의 반역자인 김성민은 민족의 이름으로 기어이 처단되고야말것이다.》라는 협박장까지 날아들었겠는가.

 

종개 한마리 온 강물을 흐린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련한 처지에 있는 민족반역자, 인간쓰레기가 감히 공화국의 최고존엄을 모독하려고 하는것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역적은 죽어서도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묻힐 곳이 없다. 

본사기자 리광성

월간조선 이상흔

 

■2013.11.30 북한이 비난한 '모략 언론인' 18명

/북한이 체제선전과 북한 소식 전파 등을 목적으로 운영 중인 인터넷 사이트 《우리민족끼리》

 

지난 10 28일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용 인터넷매체 《우리민족끼리》가 글을 하나 올렸다. ‘남조선언론문제연구원 최득필’이란 이름으로 쓴 것이었다. 북한의 선전 매체는 설령 개인 이름의 기고라 하더라도 모두 북한 당국의 뜻과 배치되는 내용을 싣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글 또한 북한 당국의 의견 그대로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최득필’이란 사람은 어디에도 등장한 적이 없는, 인터넷 은어로 말하자면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란 뜻)’ 인물이다. 실제 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조차 판별이 불가능하다. 통일부는 확인 요청을 한 기자에게 “직책이나 이름 모두 확인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 기사는 제목부터가 섬뜩하다. ‘괴뢰보수언론의 나팔수, 매문가들은 명심해야 한다’가 그것이다. 내용 중에도 “…악질 극우분자들이 거짓과 허위로 일관된 모략물을 밥 먹듯이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자들의 원고를 가지고 출연하는 방송원 나부랭이들까지 상전의 눈 밖에 날세라 광기를 부리고 있다”, “이자들이 만드는 모략물, 내뱉는 악담들은 우리 공화국에 대해 ‘폐쇄국가’ ‘병진로선의 실패’ ‘북에서 통일의식의 희박’ 등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공화국의 최고 존엄까지 걸고 드는 천하 망동 짓도 서슴지 않고 있다”, “《조
동》 자체가 력대적으로 권력에 빌붙어 남조선에 파쇼독재의 광풍을 몰아오고 북남 간에 리간을 조성시킨 대가로 살아가는 악명높은 보수매문지들이다”는 등 입에 담지 못할 막말들이 많다.
 
 
북한은 그러면서 왜 굳이 이들만을 지목해 협박과 비난을 퍼붓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이 지목한 ‘언론인’ 중에는 KBS의 정다은 아나운서도 들어 있다. 도대체 이들의 어떤 점이 북한 당국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이렇게 섬뜩한 협박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북한이 지목한 ‘언론인’들이 북한의 신경을 건드리는 어떤 일을 했는지 자료를 찾아봤다. 우선 《우리민족끼리》가 보도한 내용 전문을 먼저 보자.

《우리민족끼리》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인터넷 선전 및 선동 매체다. 북한 조평통은 간혹 직접 성명 발표 등을 통해 입장을 내놓기도 하지만 인터넷매체 등을 통해서도 당국 입장을 선전하고 있다. 2003 4 1일부터 운영을 시작한 《우리민족끼리》는 조평통의 담화·성명을 싣고 수시로 자체적으로 만든 기사와 사진을 올리고 있다. 간혹 동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정치적인 기사만 다루는 게 아니라 북한이 발행한 책자, 화보는 물론 유물, 유적지 소개, 북한 요리, 게임과 전자도서관 코너도 만들었다. 2010 8월부터는 트위터와 유튜브 계정도 운영하고 있다. 한때 페이스북 계정도 개설했지만 현재는 폐쇄된 상태다.
 
 
본사는 중국 선양(瀋陽)시에 두고 있다. 북한이 발행하는 《로동신문》, 《통일신보》, 《민주조선》의 기사와 북한 잡지인 《조선청년》 기사도 게재하고 있다.

 괴뢰보수언론의 나팔수, 매문가들은 명심해야 한다

 보수언론들의 모략방송이 날이 갈수록 도수를 높여가고 있다.
 
 
《조·중·동》을 비롯하여 KBS, MBC, YTN, 《데일리NK》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이 현 집권세력의 독재부활책동과 동족대결정책을 정당화하고 우리 공화국의 존엄 높은 영상을 훼손하는 데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른바 기자, 전문가, 교수, 박사의 탈을 쓴 악질극우분자들이 거짓과 허위로 일관된 모략물을 밥 먹듯이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자들의 원고를 가지고 출연하는 방송원 나부랭이들까지 상전의 눈 밖에 날세라 광기를 부리고 있다. 특히 방송원 것들은 몸짓과 손짓, 그럴듯한 흉내를 내며 대본 내용의 반동성과 궤변을 가리고 사람들의 심리를 마비시키고 있다.
 
 
모략질에 이골이 난 자들 속에는 KBS의 정다은, 소현정, TV조선의 박종진, MBC의 김현경 방송원들도 있고 SBS의 안경식이라는 이른바 대북관계박사라는 자도 있다. 우리의 존엄 높은 체제를 헐뜯는 데는 《매일경제》 주필 김세형, 《련합뉴스》 기자 리경태, 《조선일보》 론설위원 김태익, 《동아일보》의 인간쓰레기 기자인 주성하, 《세계일보》 론설위원 옥경대 등을 비롯한 많은 모략전문가들이 가담하고 있다. 한편 북남 간에 불신과 대결을 고취하는 데서는 《세계일보》 기자 김상협, 론설위원 조정진, 고려대학교의 김성환, 남성욱, 《조선일보》 국제부장 강인선, 기자 황대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문순보, 《련합뉴스》 기자 홍제성 등이 가장 악질적으로 놀아대고 있다.
 
 
이 자들이 만드는 모략물, 내뱉는 악담들을 보아도 우리 공화국에 대해 ‘폐쇄국가’, ‘병진로선의 실패’, ‘북에서 통일의식의 희박’ 등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대화평화의지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살라미전술’, ‘틀에 박힌 위장공세’로 비하하고 ‘《우리민족끼리》 구호는 기만적인 표어’라느니 뭐니 하는 해괴한 말만을 늘어놓고 있다. 우리 공화국의 최고 존엄까지 걸고 드는 천하 망동 짓도 서슴지 않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구령에 합창하여 동족대결과 독재체제구축 책동에 적극 편승하고 있다. 오늘날 남조선보수언론은 객관성, 공정성을 모조리 상실하였으며 오직 모략과 날조만을 업으로 삼는 어용언론, 반동언론으로 철저히 전락되었다.
 
 
보수언론들이 집권세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데는 그럴 만한 리유가 있다.
 
 
《조·중·동》 자체가 력대적으로 권력에 빌붙어 남조선에 파쇼독재의 광풍을 몰아오고 북남 간에 리간을 조성시킨 대가로 살아가는 악명 높은 보수매문지들이다. 그러기에 보수패당은 3개의 언론사들에 대한 자금지원은 다른 50여 개의 언론사들을 합친 것보다 곱절이나 많이 조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리명박 집권 시기에는 악명 높은 ‘언론관계법’ 개정안을 조작하여 남조선의 거의 모든 언론을 한 손에 거머쥐었으며 언론사 사장 자리에는 능력도, 경험도 없는 저들의 끄나풀들을 들여앉혔다. 하여 극우보수언론사들에는 량심과 의리도 없고 진리와 애국과는 거리가 먼 자들, 부귀영달과 출세를 위해 집권세력의 하수인으로 될 것을 맹약한 어중이떠중이들이 기자, 전문가, 방송원의 탈을 쓰고 기어들었다. 거기에 종편특혜까지 주어 보수언론들에 황금날개를 달아주었다.
 
 
이에 대해 남조선언론들 자체가 ‘전 정권의 언론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종편 재승인국면을 리용해 종편을 길들이는 동시에 시민사회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고 하였는가 하면 ‘정권이 만들어준 방송사가 정권이 원하는 문제들을 터트리며 정권과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박근혜 정부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하며 계속 보도하면 사람들은 반복되는 얘기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까밝히고 있다.
 
 
남조선의 보수언론들이 더욱 반동화의 길로 줄달음치고 있는 데는 현 집권세력이 추구하는 유신 독재부활책동과도 관련된다.
 
 
현 보수집권세력은 남조선사회를 지난 유신 독재시대 때와 같은 암흑시대로 몰아가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그때에나 볼 수 있었던 극악한 탄압행위가 공공연히 감행되고 있다. 수하졸개라 하더라도 저들의 통치지반 구축에 저해가 되거나 불리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가차없이 목을 떼버리는 무지막지한 행위나 정보원을 동원하여 반대파세력을 종북, 간첩으로 몰아 탄압하는 수법, 또 동족에 대한 대결모략책동에 몰두하고 친미친일 사대매국에 광분하고 있는 것이나 신통히 유신 독재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2의 유신 독재체제의 구축을 위해 괴뢰패당은 어용언론들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리용해 먹고 있는 것이다.
 
 
현 보수집권세력에 의해 남조선에서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한 진보적인 언론활동은 무참히 탄압당하고 괴뢰보수언론들만이 살판치고 있다.
 
 
하지만 남조선인민들은 결코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각계 언론단체들을 비롯한 남조선인민들은 ‘우리는 여론의 왜곡과 조작으로 국민을 기만한 무소불위의 언론권력체의 퇴출을 요구하고 그 행동의 시작을 선포한다’, ‘각계 민주세력과 련대해 《조·중·동》 구독거부와 불매운동 등 범국민적 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하면서 ‘어용언론사들을 부추겨 독재를 미화하고 남북대결을 조장하는 정부에 진리의 힘으로 본때를 보일’ 결의를 피력하고 있다. 력사는 집권세력의 조종 밑에 진실을 가리고 온갖 모략보도를 일삼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한 번 언급하건대 2차세계대전 후 히틀러 파쇼도배들이 전쟁범죄로 준엄한 판결을 받기에 앞서 나치즘을 설파하는 데 앞장섰던 방송원들과 기자들이 더 먼저 심판대에 올랐다는 사실을 괴뢰보수언론의 매문가들은 명심해야 한다

남조선언론문제연구원 최득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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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김세형 주필, 개인 블로그 글 때문인 듯

《매일경제》 김세형 주필.

 

  신문사 주필은 주로 사설(社說)을 책임진다. 그런데 김세형 주필은 회사 일과 별개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 블로그에는 본인이 쓴 칼럼 외에 여러 북한 관련 기사들이 눈에 띈다. 여기저기서 퍼온 글이다. 그중에는 ‘北 망하게 내버려둬라’, ‘북한, 10년 못 버틴다’, ‘김정은 권력 물려받아? 택도 없을걸…’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적지 않다. 북한에선 당연히 ‘처단 대상’이 됐을 기사들이다.
 
 
그는 《매일경제》 칼럼을 통해서도 북한을 비판했다. 지난 10 10일자 ‘북한경제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그는 개성공단에 갇힌 정부의 근시안적 시각을 비판했다. 그는 잇속에 영리해진 북한 주민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적었다. 또한 북한 정권의 젊은 지휘부가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선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북한 내부의 주체사상과 통일정신이 희미해져 간다고도 주장했다. 뒤이어 ‘관시(關係)’와 부패로 물든 중국의 상황을 언급하며 북한도 시장경제란 대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8 8일에는 ‘개성공단, 중국의 훈수’란 제목의 칼럼에서 개성공단을 둘러싼 중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는 당시 베이징 당국자의 말을 인용하며 김정은이 고위 간부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꼬집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눈치를 본다는 등의 표현은 북한에선 불경죄(不敬罪)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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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남북의 창> 진행하는 정다은 아나운서

/KBS 시사프로그램 <남북의 창>을 진행 중인 정다은 아나운서

 

  정다은 아나운서는 2008 KBS 34기 공채로 입사했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남북 관계의 현안을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인 〈남북의 창〉 진행자다. 정 아나운서가 직접 북한에 관해 자극적인 발언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우리민족끼리》가 〈남북의 창〉이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비난하기 위해 진행자인 정 아나운서의 실명을 거론한 것으로 추측된다.
 
 
〈남북의 창〉은 김정은이 제1위원장으로 집권한 이후 북한의 사치품 수입이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을 10 19일 뉴스로 전했다. 리포터의 보도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이 이른바 ‘선물 정치’를 확립한 이후로 북한 사람들은 최고지도자로부터 고급 사치품을 선물로 받는다.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김정일 시대에 연간 3억 달러 내외였던 사치품 수입액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집권한 2010년에 44천만여 달러, 2011년에는 58천만여 달러로 31% 급증했고, 2012년에는 64천만여 달러로 증가했다. 리포터는 UN의 수출 제재에도 불구하고 사치품들이 꾸준히 북한으로 유입되는 이유를 중국과의 교류에서 찾았다. 나아가 사치품 유입이 북한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심화되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남북의 창〉은 또 9 28일 방송에서 북한 예술단원들이 대대적으로 공개처형당한 사실을 보도하며 북한의 인권 문제를 조명했다. 사건의 요지는 북한의 은하수 관현악단 단장인 문경진 등 유명 예술인 9명이 음란물을 제작·판매한 혐의로 8월에 공개처형당했다는 것이다. 방송은 국제인권 조약에 가입되어 있으면서도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리포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건 국가나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마무리 멘트를 했다.
 
 
〈남북의 창〉 보도였지만 실제 리포트는 기자들이 했다. 정다은 아나운서가 직접 리포트를 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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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보도 많은 KBS 소현정 기자

  소현정 기자가 현재까지 보도한 기사 중 상당수가 북한과 관련된 내용이다. 2010 3 9일부터 통일부와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롯해 북한의 상황과 동태 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주로 국제 이슈를 다뤘다.
 
 
올해 10 24일에는 이산가족 상봉 연기 이후 대남 비난 수위를 높여오던 북한이 갑자기 유화적인 행보를 보이는 의도에 대해 분석했다. 소 기자는 ‘김정은이 경제개발을 위해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말한 북측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경제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유화정책의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핵을 통해 억제력을 강화한다는 북측 외무성의 담화도 있는 만큼 북한의 의도에 면밀히 대응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지적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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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며 한 대북 발언들에 대해 북한 측이 담화와 논평을 통해 비난했다고 전했다. 보도에서는 ‘치맛바람’, ‘추태’, ‘괴뢰집권자’ 등 북한 측이 사용한 원색적인 단어들을 그대로 인용했다.
 
 
소 기자가 보도한 기사 중에는 진실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사도 없지 않다. 소 기자는 2010 10 14일에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그해 8월에 중국에서 아버지를 만난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동생인 현 북한 제1위원장 김정은이 “천안함 사태를 일으켰는데 왜 묵인했나”고 강하게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중국 정부 내에 있는 김정남 측근의 발언을 토대로 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김정남은 아버지 김정일에게 동생 김정은의 행동을 질책하며, 아버지가 계속 묵인하면 자신도 제 길을 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한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이 기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북한 집권층의 대화 내용을 모두 도청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이런 일을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북한이 말하는 이른바 ‘최고 존엄’의 대화를 이처럼 보도한 것은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임에 틀림없다. 북한은 어떤 기사보다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건드리는 문제에 민감하다. 허락없이 게재할 경우 호의적인 기사라도 북한은 위협을 일삼은 사례가 많다.
 
 
한편 소 기자의 보도에 대해서는 《한겨레신문》 게시판, 민주언론시민연합 블로그 등에서 “대결적인 보도를 많이 한다”, “분석이 부족하다” 등의 비판을 많이 받은 적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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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통일전망대〉 진행 김현경 기자와 SBS 안정식 기자

 / MBC 북한전문기자 김현경.

 

김현경 기자는 1986 MBC에 입사했다. 1995년부터 통일부를 주로 취재했으며 현재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통일전망대〉를 진행하고 있다. KBS 프로그램 〈남북의 창〉과 비슷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다.
 
 
〈통일전망대〉에서 김 기자는 진행을 맡을 뿐 직접 리포트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KBS 정다은 아나운서와 마찬가지로 최근에 직접 북한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한 사례는 없다. 가장 최근이라고 해야 올해 4 26 MBC <뉴스데스크>에 출연하여 북한이 개성공단에 폐쇄 통보를 내린 의도를 분석한 경우다. 김 기자는 당시 “어떻게 보면 북한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은 예고된 수순과 결과라고 할 수 있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개성이 달러박스이기 때문에 북한은 결코 개성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우리 측 언론의 보도를 인용했다.
 
 
그러나 김 기자가 통일부를 출입할 당시에는 북한이 싫어할 만한 각종 보도를 많이 했다. 이번에 북한이 김 기자를 지목한 것은 과거 김 기자의 기사가 아니라 아마도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MBC KBS에서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사람을 모두 ‘매문자’로 규정한 것이다. 북한이 이 프로그램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짐작게 한다.


SBS안정식 기자

  /SBS 안정식 기자.

 

SBS 안정식 기자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 후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민족끼리》가 ‘이른바 대북관계박사라는 자도 있다’고 한 것은 그를 가리키는 말이다. 북한은 ‘안경식’이라고 잘못된 이름을 썼다. 안 기자는 SBS에서 남북관계 보도를 하는 것과 별개로 ‘북한 포커스(www.e-nkfocus.co.kr)’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10 22 SBS ‘취재파일’을 통해 문수놀이장을 7번이나 찾은 김정은의 계획을 집중 분석했다. 문수놀이장은 김정은의 지시로 평양의 대동강변에 10 16일 준공된 대규모 물놀이 시설이다. 안 기자는 최고지도자가 관심을 갖는 곳에 자원이 우선적으로 배분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위락시설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의 현지 지도에 대해 토를 다는 일은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그가 한국과 미국에 대해 비난을 쏟아내는 북한의 의도를 분석한 10 15일 기사도 북한에는 거슬렸을 것이다. 안 기자는 북한 국방위 대변인 성명에 대해 ‘다분히 수사적인 표현으로, 과격한 표현을 하기로 유명한 북한의 언급 하나하나에 과도하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논평했다. 또한 김정은이 야심 차게 준비해 온 사업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대외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도 긴장 고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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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박종진 앵커와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채널A 시사프로그램 <박종진의 쾌도난마>를 진행 중인 박종진 앵커.

 

  북한은 《우리민족끼리》에서 TV조선 박종진이라고 표현했다. TV조선에는 박종진 기자가 없다. 따라서 이는 채널A에서 시사프로그램 〈박종진의 쾌도난마〉를 진행하고 있는 박종진 앵커를 잘못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 박 앵커는 2000년에 《매일경제》, MBN》 정치경제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북한이 시비를 걸 만한 그의 발언은 여러 건이다. 9 27일 김성만 전 해군사관학교 교장이 출연하여 “복지 예산을 줄이면 안 되니까 다른 방향으로 북한이 빨리 무너지도록 군사적으로 조치해야 한다”고 말하자 박 앵커는 “군사 인사를 잘하면 북한을 금방, 몇 년 안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씀이냐”며 그의 발언을 재차 확인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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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프로그램 오프닝에서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해 “왜 이러십니까, 무슨 그리 좋은 일이 있다고 잇몸이 보이도록 환히 웃어 보이십니까”라고 조롱하는 말투로 말한 적도 있고, 이 의원을 포함한 통합진보당원들을 가리켜 “당신들”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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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에는 박 앵커가 패널들에게 ‘개성공단이 정상화될 것이다’, ‘북한이 제대로 훈육이 되도록 단전단수해야 한다’는 질문에 OX를 들게 한 적도 있다. 이 또한 북한으로선 괘씸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주성하 기자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 소식을 전달하고 있는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탈북자 출신이다. 탈북하기 전에 붙잡혀 정치범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98년 탈출했다. 《우리민족끼리》가 그를 가리켜 ‘《동아일보》의 인간쓰레기 기자’라고 악담을 퍼부었는데, 이는 그가 탈북자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2003
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국제부 기자로 활동 중이다. 현재는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란 제목의 블로그에 북한의 실상을 알려주는 글을 주기적으로 올리고 있다. 그는 취재기사보다는 《동아일보》의 ‘뉴스룸’ 코너를 통해 북한의 실태를 평가하는 칼럼을 주로 쓰고 있다. 주 기자가 올해 9 24일에 작성한 ‘이산가족 상봉이 북한은 반갑지 않은 이유’란 제목의 칼럼을 살펴보면 이산가족이 북한 당국에 의해 적대계층으로 분류된다고 나와 있다. 그는 북한에 있어 이산가족 상봉이란 인륜의 문제가 아닌 대남 전술적 차원의 일환일 뿐이며, 적대계층에게 어쩔 수 없이 베푸는 호의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 이산가족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북한은 반기고 있다고 말한다. 북한으로선 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주 기자가 10 25일 블로그에 올린 ‘북한 보위부가 삭제한 ‘부적절한 사진들’, 그 이유를 알고 보니…’란 글에서는 사진을 검열하는 북한 세관의 실태를 폭로하고 있다. 그 증거로 한 스웨덴 기자가 촬영했지만 삭제당한 사진을 함께 실었다. 그러면서 군인 네 명이 전방을 주시하는 사진, 군인 한 명이 경계를 서고 있는 사진, 군인이 여권을 검사하는 사진 등은 군인을 찍지 말라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삭제당했다고 이유를 적고 있다.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 위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세워진 모습을 찍은 사진도 올려놓았는데, 그것이 검열에 걸린 이유에 대해 주 기자는 “전봇대가 김일성과 김정일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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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선 김태익·강인선·황대진 3명 지목

《조선일보》 김태익 논설위원

 

  북한이 지목한 《조선일보》의 3명은 김태익 논설위원, 강인선 국제부장, 황대진 정치부 기자이다.
 
 
이 중 김태익 위원은 올해 3 14일 《조선일보》의 ‘만물상’ 코너를 통해 걸핏하면 욕설을 퍼붓는 북한 정권을 꼬집었다. 그는 ‘북한식 욕설’이란 제목 아래 이명박 정부의 비핵(非核) 3000 통일정책에 대해 북한 조선중앙TV가 “미국의 식민지 예속(隸屬) 경제 주제에 남의 국민소득 문제를 가지고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은 삶은 소대가리가 웃다가 꾸레미(꾸러미)가 터질 노릇이다”고 말한 것을 비판했다. 또 관영방송이나 당 기관지가 너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쥐새끼’라고 표현하거나 ‘역도(逆徒), ‘부정부패 왕초’, ‘협잡배’, ‘사대매국노’, ‘정치매춘부’, ‘문민 괴수’, ‘괴뢰 통치배’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김 위원은 지난 10 1일에는 무단으로 방북해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고 각종 행사에 참석한 조모씨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이 ‘참배는 무죄’라고 선고한 것을 비판했다. 사실 이 기사는 김 위원뿐 아니라 우리나라 거의 전 언론이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왜냐하면 당시 판사가 김일성 시신 참배에 대해 동방예의지국 운운했기 때문이다. 김 위원은 이 칼럼에서 김정은이 할아버지뻘도 더 될 것 같은 북한 고위층 수행원들에게 담배를 물고 지시를 내리는 모습의 사진을 지적하기도 했다. 북한에 무슨 예의가 있느냐는 투였다.


강인선 국제부장

《조선일보》 강인선 국제부장.

 

강인선 국제부장의 경우에는 북한 관련 논평이나 글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주로 국제 문제에 대한 칼럼을 쓰고 있다. 그래서 당사자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최근 2년 동안 그가 쓴 글 중에 북한이 딱히 시비를 걸 만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올해 9 27일 ‘미국의 시리아 사태 대처법을 보며’란 칼럼에서 미국이 북핵문제를 다룰 때 핵폐기보다 핵확산 방지에만 중점을 두는 것 아니냐고 비판한 정도가 고작이다. 북한이 펄펄 뛸 사항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황대진 기자의 경우에는 현재 통일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북한과 관련해 여러 비판적 기사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그가 최근에 쓴 기사를 보면 정말 북한이 문제를 삼을 만한 기사들이 수두룩하다. 그는 10 24일 중국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진 김일성의 1965년 ‘제2의 한국전쟁’ 기도 계획을 어느 매체보다 앞장서 단독 보도했다. 6·25 남침조차 인정하지 않는 북한인데, 2 6·25와 관련해서는 더욱더 거짓이라고 잡아뗄 것이 뻔하니 황 기자가 얼마나 미웠겠는가.


황대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황대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황 기자는 김정은이 추진 중인 경제개혁안이 기득권층의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다는 내용도 10 15일 단독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6월에 김정은은 북한에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6·28조치’를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연구 기관들이 ‘토지를 개인이 소유하고 기업도 개인이 경영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하자 해당 연구원들이 모두 사상 검열과 처벌을 받았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9 5일에는 김정은이 통치력 과시를 위해 추진한 마식령 스키장, 평양 미림 승마장, 잔디 심기의 3대 역점 사업이 북한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의 역점 사업은 대부분 재원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기한 내 완공만 강요하다 보니 그 부담이 모두 주민들에게 돌아가면서 내부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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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이경태 기자와 홍제성 기자

  《연합뉴스》는 통신회사이다. 각 언론사에 기사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에 특별히 주장이란 것이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연합뉴스》의 두 기자가 북한의 지목 대상이 된 것은 의외다. 실제 조사를 해봐도 이들 두 기자가 북한을 자극할 만한 기사를 쓴 것이 없다.
 
 
이경태 기자는 올해 10 5일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한 북한의 새로운 경제개혁 방안을 보도했다. 그는 보도에서 북한이 처음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한 2002년의 7·1조치와 현재의 경제개혁 방안을 비교하며 시장경제에 개방적으로 변한 북한의 정책을 보여줬다. 동시에 “김정은의 권력체제가 안정화되려면 경제적인 성과를 올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분석까지 제시했다. 그야말로 중립적인 보도다. 다만 이전까지의 경제개혁 방안에 대해 ‘땜질식’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이 표현은 이미 10여 년간 여러 차례 여러 매체에서 언급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홍제성 기자는 국제뉴스부에 근무한다. 부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북한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도 아니다. 눈에 띄는 기사라면 2010 5월 중국 단둥에 1급 경비체제가 가동된 가운데 도착한 북한의 여객열차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탑승한 특별열차였다는 기사를 쓴 정도다.
 
 
최근에 홍 기자가 쓴 기사는 “영변 원자로 재가동은 북한식 ‘대화와 압박’의 한 전략”이라는 정도의 논평과 분석이었다. 이를 두고 북한이 매문자, 거짓말 운운하며 흥분할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실제 이들 기자의 기사를 분석한 전직 통일부 고위간부도 “북한이 평상시 위협하고 시비를 거는 기사와는 완전히 다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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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옥영대·조정진 논설위원

/《세계일보》 옥영대 논설위원.

 

《세계일보》에선 논설위원 두 명이 대상이 됐다. 조정진 위원의 경우에는 몇몇 칼럼의 북한 관련 대목이 눈에 띈다. 우선 10 30일 ‘남북통일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제목의 칼럼에서는 한반도 통일을 직접 거론한 외신들을 예로 들며 한반도 통일이 멀지 않았으니 미리 대비하자고 주장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필자가 북한 정권 붕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칼럼은 그러나 《우리민족끼리》 보도 다음 날 나온 것이다. 이전 글을 찾아보면, 9 25일에 실린 ‘길들이기’란 제목의 칼럼이 눈길을 끈다. 조 위원은 남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도발을 시도하는 북한의 계략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 예로 김영삼 정부 때의 서울 불바다 발언부터 천안함, 연평도 사건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 북한이 갑자기 중단을 선언한 것도 류길재 통일부장관을 길들이려는 전략에 불과하다고 했다.

 

9 16일 ‘태극기’란 칼럼에서는 평양의 아시아 역도선수권대회 입장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된 일을 언급한 뒤 북한 인공기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국기에 비해 태극기가 지닌 우수성을 예찬했다.


《세계일보》 조정진 논설위원.

  《세계일보》 조정진 논설위원.

 

한편 《우리민족끼리》는 《세계일보》의 또 다른 논설위원으로 ‘옥경대’를 지목했는데, 이는 옥영대 위원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옥 위원의 경우에는 왜 지목됐는지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그가 쓴 글을 보면 북한이 문제 삼을 만한 대목이 거의 없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북한의 신뢰를 전제로 한 대북정책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무기한 연기하는 등 현 정책하에서도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속된 말로 북한을 꼬시지 못하면 효과를 낼 수 없다’”, “우리 언론의 보도와 달리 중국이 북한 핵실험을 근본적으로 저지할 수 없다. 북한 정권의 붕괴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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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살라미 전술 언급한 《문화일보》 김상협 기자

  《문화일보》 김상협 기자

 

《우리민족끼리》는 18명을 언급하면서 거짓을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거론한 ‘거짓 글’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언급한 것이 자신들의 대화의지를 ‘전형적인 살라미 전술’이라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살라미 전술이란 얇게 썰어 먹는 이탈리아 소시지 ‘살라미(salami)’에서 따온 말로 하나의 과제를 여러 단계별로 세분화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협상전술의 한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민족끼리》가 살라미 전술을 언급한 기자로 지목한 이가 바로 《세계일보》 김상협 기자다. 김상협 기자는 《세계일보》에는 없다. 아마도 《문화일보》에 근무하는 김상협 기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정치부 차장을 맡고 있는 《문화일보》 김 기자는 10 2일의 ‘꿈쩍않는 韓·美 겨냥한 흔들기… 전형적 살라미 전술’이란 기사를 썼다. 그는 이 기사에서 10 1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이 밝힌 요구사항을 나열하며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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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에는 ‘대기업 해외법인 北사이버 공격 먹잇감’이란 기사를 썼다. 그는 이 기사에서 ‘대기업의 해외지사들이 북한 사이버 공격의 상대적으로 쉬운 희생양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살라미 전술이란 용어는 북한 관련 보도를 할 때 기자들이 흔히 쓰는 용어다. 외교 관련 기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도 북한이 이런 식으로 공격 대상에 넣었다는 점은 아무래도 최근 북한이 국제적인 고립 속에서 예민해진 것 아닌가 하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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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김성한·남성욱 교수, 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북핵 관련 대담 중인 남성욱 고려대 교수(오른쪽)와 김성한 교수.

 

  김성한 교수는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차관으로도 근무한 학자다. 북한은 또 그의 이름을 ‘김성환’으로 잘못 적었다. 그는 대선 당시 MB캠프 외교안보정책 자문을 맡으며 원칙과 유연함을 겸비한 대북정책을 요구해 왔다. 합리적 보수학자로 알려져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 대북정책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는 동시에 방송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어떤 일 때문에 북한의 지목을 당했을까.
 
 
김 교수는 9 26일 《조선일보》에 ‘시리아 사태의 성찰을 통한 북핵 해결’이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칼럼에서 핵개발용 원자로를 공격받자 화학무기를 만든 이라크와 시리아가 결국 정권 붕괴 위기에 처했다고 언급하며 북한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핵실험을 세 번씩이나 강행한 북한에 예방적 대응책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대북 압박의 끈을 더욱 조이는 ‘적극적 대응’은 외교적 해법의 진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적었다.
 
 
김 교수가 4 30일 채널A에 출연, 개성공단 사태를 바라보는 북한의 속내를 묻는 앵커의 질문에 “북한이 개성공단을 통해 1억 달러가량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이 정도의 금액과 관련해 우리와 북한 사이에 상당한 비중 차이가 있을 것이다. 북한은 개성공단으로부터 상당한 혜택을 보고 있는데 그 혜택을 하루아침에 던져버리기에는 북한 당국도 어렵지 않을까.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 북한은 상당히 심사숙고할 것”이라고 답한 것도 북한으로선 듣기 불편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대학의 남성욱 교수 또한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을 역임한 학자다. 그는 북한과 관련한 칼럼 기고, 연설 등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북한이 왜 그를 지목했는지는 그의 최근 활동만 봐도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는 10 24일자 《중앙일보》에 ‘김정은 2년 통치의 3대 키워드’란 시론을 실었다. 그는 여기에서 김정은을 선대 통치의 영향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불안한 권력자’라고 표현했다. 칼럼에서 제시한 김정은 정권의 키워드는 숙청과 호전성, 놀이공원과 위락시설 건설, 그리고 핵·경제 건설 병진노선 세 가지다. 북한의 이른바 ‘최고 존엄’을 ‘무참하게 능멸한’ 것으로 북한은 봤을 것이다.


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이뿐만이 아니다. 남 교수는 한반도미래재단(이사장 구천서)과 조선비즈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10 16일에 연 한반도미래포럼에서도 “5년 정도는 김정은 체제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년 후에는 재정난, 핵 문제, 권력투쟁 등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경제 개발을 위해 개혁개방을 감행하면 북한 세습체제를 담보하지 못하고, 개혁개방을 하지 않으면 경제 개발을 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는 등 북한 체제의 앞날을 암울하게 예측했다.
 
 
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역시 북한 관련 칼럼을 많이 기고하고 있다. 그 또한 북한 체제의 아픈 점을 자주 거론한다.
 
 
문 위원은 ‘북한의 기만전술을 경계한다’는 《세계일보》 9 23일자 칼럼에서 북한이 최근에 취했던 일련의 유화조치를 위장 평화공세에 불과하다고 못박았다. 7 9일 《서울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는 “북한까지 ‘국정원 죽이기’에 나선 마당에 국정원 조직을 폐지하자는 논의는 부당하다”고 썼다. 북한 ‘최고 존엄’을 건드린 칼럼도 눈에 띈다. 《동아일보》 칼럼에서 그는 “북한은 지도자로서 업적이 전무한 20대 청년을 정권의 최고지도자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비용을 들인 것이다”라고 했다. 북한 같았으면 벌써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을 법한 내용이다.

<월간조선 12월호> 공성윤 월간조선 인턴 기자

 

■386 시인, 김일성·정일·정은을 쏘다

/386세대의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인 최영미(52)의 풍자 화살이 이번에는 북한의 3대 세습을 과녁으로 삼았다. 시인은 2일 펴낸 자신의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에서 '돼지의 죽음'이란 시를 통해 북의 세습을 통렬하게 조롱한다.

 

'할아버지도 돼지,/ 아버지도 돼지,/ 손자도 돼지,// 돼지 3대가 지배하는 이상한 외투의 나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과 당시 북한의 기이한 풍경을 최 시인 특유의 시어(詩語)처럼 쓰이는 '돼지'와 다른 동물에 빗대 조소하고 있다. '꽃 속에 파묻힌 아버지를 보며/ 꼬마 돼지가 눈물을 흘린다/ 돼지가 울자/ 농장의 모든 동물들이 통곡한다/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더 울고 싶지만 배가 고파서// 혁명사상으로 불룩한 배를 우러러보며/ 뚱뚱한 수령의 말씀을 받드느라 삐쩍 마른 염소들,/ 영양실조에 걸린 사슴과 강아지들이 격한 울음을 토하고/ 때마침 눈이 내려(…)'

 

2014.12.29 오준 대사 '명연설'

지난 22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 북한 인권 상황이 최초로 정식 의제로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말미에 오준 주유엔 대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그냥 아무나(anybodies)가 아닙니다. 우리 국민 수백만명의 가족이 북한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이제는 헤어짐의 고통을 냉엄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겨우 수백km 거리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북한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한)유엔 북한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며 가슴이 찢어지고,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같은 비극을 겪은 듯 눈물 흘립니다. 안보리를 떠나며, 우리는 북한에 있는 무고한 형제자매들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북한 인권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부디 훗날 우리가 오늘을 되돌아볼 때 북한 주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그들을 위해 말입니다.”

 

불과 3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연설이었지만, 회의장은 숙연해졌다. 서맨사 파워 주유엔 미 대사가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울림은 회의장 밖으로도 퍼졌다. 연설 내용이 보도되자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큰 관심을 끈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연설 동영상(https://www.youtube.com/embed/pQEy9IBehfA)을 공유하며 북한 주민들의 아픔에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2030세대 사이에서 ‘이상열기’를 불러 일으킨 오 대사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뉴욕에 있는 그는 28일 본지와 전화인터뷰에서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이 회의는 최초로 북한 인권 상황을 안보리의 공식 의제로 올리는 역사적인 자리였다”며 “이날따라 15개 이사국 말고도 60여개국 대표가 회의에 참석했길래 많은 회원국을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인데, 국내에서도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다니 다행스럽다”고 설명했다.

 

SNS를 통해 오 대사에게 직접 소감을 전한 이들만 몇백명이라고 했다. 800명 정도였던 오 대사의 페이스북 친구는 사흘만에 1200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원래 알던 분들의 친구신청만 받는데, 이번에는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 가져주시는 게 감사해서 신청한 분들을 다 친구로 수락했다”고 설명했다. 또 “신청자 대부분이 학생, 군인 등 젊은이들이었다. 흔히 젊은층은 북한 문제에 무관심하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점을 느꼈다. 반응들을 보니 이들은 남북간 대립적 상황이 싫은 것 뿐이지, 북한 주민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 연설은 원고도 없이 한 것이었다고 오 대사는 전했다. 실제 동영상을 봐도 오 대사는 5분 정도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읽다가 이후부터는 원고를 보지 않은 채 다른 이사국 대표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연설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특별한 감정, 그 절박함을 전달하기에는 공식입장만으론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에게 북한 인권 문제는 많은 국제 인권 문제 중에 하나, 많은 인권불량국가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 북한은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서 마지막 연설이었는데, 한국이 이사국 임기를 북한 문제로 마무리한다는 것이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가슴아픈 우연인지를 알리고 싶었다.”

 

이를 위해 오 대사는 굳이 원고를 만들지 않고 마음 속으로 대략의 내용만 생각한 뒤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다른 국가들이 북한 인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먼저 들은 뒤 우리나라의 소회를 밝히고 싶어서 발언 순서도 일부러 의장국을 제외하면 맨 마지막인 열네번째로 신청했다”고도 했다.

 

오 대사는 개인적으로도 실향민의 아픔을 이해할 기회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이 개성이고, 장인어른이 함경도에 살다 6·25 전쟁 때 월남하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인께서는 계속해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셨지만, 끝내 북에 있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0년 전 쯤 작고하셨다.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 대사의 ‘진정성’에 다른 나라 대사들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제라르 아로 프랑스 대사는 회의장에서 오 대사에게 감동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서맨사 파워 미 대사는 오 대사의 연설 내용을 즉시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다음날에는 오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직원들 전부에게 연설 동영상을 꼭 찾아보라고 했다”고 했다. 본부에서 연설을 생중계로 지켜본 반기문 사무총장도 나중에 오 대사를 따로 만나 잘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이사국 임기는 끝났지만, 북한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이제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오 대사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인권 문제 해결이 필수적 조건이란 인식을 북한 당국에 지속적으로 심어줘야 한다”며 “국제사회가 압박을 시작했고, 북한도 과거에 보여주지 않은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1978년 외교부에 입부한 오 대사는 외교관 생활의 3분의2 이상을 유엔 등 다자외교 분야에서 근무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 유공자로서 외교부의 창설 멤버이기도 한 오우홍 미국 초대영사이며, 어머니는 건국대 학장을 역임한 진인숙 여사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2014-12-30 "대한민국에게 북한 주민은 '아무나'가 아니다"

지난 12월 22일 오준 UN 주재 한국대표부 대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한 연설이 화제다. 이날 미국 뉴욕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북한 인권 결의안이 정식 의제로 상정된 가운데 오 대사는 북한 인권 개선을 호소했다. 이날 투표 결과 찬성 11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찬성표가 채택기준 9표 이상 나옴에 따라 안보리는 북한 인권상황을 정식 안건으로 다루게 됐다.

 

경기고와 서울대 불문과 출신으로 외무고시 12기인 오 대사는 국제연합과장, 싱가포르 대사 등을 거쳐 지난 해 8월부터 유엔대사로 근무해왔다. 주위에서는 조용하지만 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장관감으로 꼽힌다.  이번 유엔 연설 동영상은 언론 보도 이전에 SNS에서 먼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은 오 대사의 연설 중 세계인의 감동을 자아낸 북한 주민에 관한 부분 영상 및 영문 연설문 과 번역문.

 

"2년 전 한국이 유엔 안정보장 이사회의 비상임 이사국으로 처음 회의에 참여 했을 때 북한의 미사일과 핵 문제를 논의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이어 오늘 이 마지막 회의에서도 북한 인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연의 일치겠지만 제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은 그저 아무나(anybodies)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에겐 아직 북쪽에 그들의 가족이 남아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고, 그 분단의 고통은 엄연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겨우 수백 Km 떨어진 그곳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에 적힌 인권침해의 참상을 읽으면서 우리 가슴도 찢어지고 탈북자의 증언을 들으면서 마치 우리가 그런 비극을 당한 것처럼 같이 울지 않을 수 없고, 슬픔을 나누게 됩니다.

 

먼 훗날 오늘 우리가 한 일을 돌아볼 때, 우리와 똑같이 인간다운 삶을 살 자격이 있는 북한 주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영어 전문

When we first came to the council two years ago,

 

one of the first issues we tackled was the DPRK's missile, nuclear issues.

 

Our term on the council started and is ending with the North Korean issue.

 

This must be just coincidence, but I'm saying this with a heavy heart.

 

For the South Korean's people in North Korea are not just anybodies.

 

Millions of South Koreans still have our family members and relatives living in the North.

 

Even though we naver hear from them,

 

even though by now the pain of the sepration has become the cold factor of life,just a few hundred kilometers away from where we live.

We cannot read when this is described in the COI report, without it, breaking our heart.

 

We cannot listen to the stories of North Korean defectors without sharing in their tears, without feeling as if we are there with them, experiencing their tragedies.

 

We only hope that one day in the future, when we look back on what we did today,

 

we will be able to say that we did the right thing for the people of North Korea, for the lives of every man and woman, boy and girl who has the same human rights as the rest of us.

 

Thank you.

 

 http://www.youtube.com/watch?v=aj6nslhCDq0&feature=player_embedded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4.11.28 대북인권 전사 하태경, 유엔의 北인권 실태조사에 '숨은 역할'한 데 이어 통진당에도 '타격'

27일 ‘통합진보당 내 비밀활동가 조직의 교육자료’를 입수했다며 자료를 전격 공개한 하태경(46) 새누리당 의원은 대표적인 북한인권 운동가로 손꼽힌다. 당초 그는 386 운동권으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범청학련(청년학생 통일운동연합체 격) 등에서 활동했으나, 1990년대 말 사상 전향한 뒤 북한 민주화 및 인권 운동에 매진해왔다. 지난 2012년 총선에 당선되기 전까지 그는 열린북한방송 대표로 활동했다.

 

부산 출신인 하 의원은 1986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을 하면서 지난 1989년과 1991년 두 차례 투옥됐다. 1991년 투옥은 평양청년축전에 전대협 소속원 2명을 참가시킨 사건에 연루된 건이었다. 당시 그는 북한과의 팩스 교신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학생 운동을 하면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상당수 야권 386 정치인들과도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 의원은 지난 2012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정희 대표가 당신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편지도 보냈다고 들었는데, 맞느냐”라는 질문에 “면회도 한번 왔었다. 그때는 친하게 지냈다. 착하고 차분한 학생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개인주의가 강한 사람과 집단주의가 강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는 이정희는 후자”라며 “집단이 잘못 가면 빠져나와 싸워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착해 시키는 대로 간 것”이라고 했었다. 하 의원은 지난 1993년에는 고(故) 문익환 목사가 주도했던 ‘통일맞이’의 정책연구원으로 들어가 통일운동을 했지만, 1994년 북측이 문 목사를 ‘안기부의 프락치’라고 공격하는 걸 보면서 북한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1998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 다니면서 미국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가게 됐던 첫 미국 방문이 결정적인 전향 계기가 됐다고 한다. 미국에서 중국 천안문 사건(1989년)의 주역인 왕단(王丹)을 만난 것이다. 비슷한 나이에다 서로 옥살이한 공통 경험이 있어서 대화를 나누다 ‘뭔가’를 느꼈다고 했다.

 

다음은 하 의원이 지난 2012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왕단과의 대화 내용이다.

 

“왜 감옥살이 했나?”(왕단)

“친북 통일운동 하다가 감옥 갔다.”(하태경)

 

“민주화운동이라면서 어떻게 친독재운동을 할 수 있느냐.

나는 중국에서 친미(親美)운동했다. 자유의 여신상이 나의 이상형이었다.”(왕단)

“나는 반미(反美)와 친(親)모택동을 우상으로 삼았다.”(하태경)

“친모택동은 친독재다.”(왕단)

 

하 의원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 대화를 소개하면서 “그의 말이 맞았다. 솔직히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뒤 그는 본격적인 북한인권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하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북한인권운동을 하게 된 데 대해 “예전에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한 것처럼 지금도 똑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단지 그 민주화 운동의 대상이 북한으로 바뀐 것뿐”이라고 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달 23일 국회 국토교통위 국정감사에서 최근 철거된 애기봉 등탑과 관련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이후 그는 대북방송인 열린북한방송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정보를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런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시상하는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았다.

 

또 그해 유엔의 북한인권실태 조사를 위해 구성된 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ICNK)의 발족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휴먼라이츠워치와 세계인권연맹 등 전 세계 15개국 45개 인권단체가 참여한 이 ICNK는 유엔이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를 꾸려 북한의 인권실태를 조사하도록 하는 국제 로비를 벌여왔다. 그런 만큼 최근 유엔이 COI 보고서를 토대로 북한 최고위층에 의해 자행되는 북한 내 반(反) 인권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북한인권 결의안을 채택한 걸 놓고 “ICNK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 하 의원은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는 다른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유엔을 끌여들여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토록 하는 방안을 기획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하 의원은 지난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고 부산 해운대기장을(乙)에 출마했다.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국회 입성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북한 문제가 시민운동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상당히 제한돼 있다”며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정치영역에서 제 꿈을 펼치기 위해 국회 진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었다.

 

하 의원은 새누리당 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과거의 ‘동지’였던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으로부터 “하태경 변절자 새끼, 내 손으로 죽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지난 2012년 6월 임 의원이 술을 마신 상태에서 한 탈북 대학생과 말다툼을 벌이다 탈북자들과 하 의원을 함께 겨냥해 한 말이었다. 이 자리에 하 의원은 없었지만, 이 탈북 대학생이 임 의원을 말을 SNS에 올리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 밖에도 하 의원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5·18 기념식에서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이제는 포용하자”, “사전 예고하는 대북전단 살포는 북한민주화운동에 오히려 방해”, “우리 군 당국의 애기봉 등탑 철거를 북한에 대한 ‘과잉 충성’” 등 소신 발언으로 줄곧 눈길을 끌어왔다.

조선일보 김봉기 프리미엄뉴스부 기자 

 

■나라를 지킨 사람들

★채명신 초대 駐越 한국군 사령관,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

 

사령관의 영정 앞에 헌화를 마친 부하들이 마지막 경례를 했다. 베트남전(戰) 초대 주월 사령관, 고(故) 채명신 장군은 "병사 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대로 2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제2묘역'에 잠들었다.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화장을 하고, 유골만 안장됐다. 월남전 전사 병사들이 묻힌 제2묘역의 맨 앞열, 3.3㎡(1평) 남짓한 공간에 높이 76㎝의 화강암 비석만이 세워졌을 뿐이다.

 

영하 5도의 한파에도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권오성 육군참모총장, 박승춘 보훈처장, 박세환 재향군인회 회장을 비롯해 500여명의 군인과 참전 용사들이 모여들었다. 권 육군참모총장은 조사(弔辭)를 통해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 채명신 장군님, 깊이 흠모합니다"라며 "장군님은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조국을 지켜낸 호국의 간성이셨고 혼돈의 시기에 올곧은 군인의 길을 걸어오신 참 군인이셨다"고 했다. 그는 "장군님이 몸소 보여주신 위대한 실천과 본(本)은 후배 장병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가르침으로 기억될 것"이라면서 "장군님께서 물려주신 뜨거운 나라 사랑의 마음과 군인 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겠다"고 말했다.

2013-11-29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RcSIMFdmwJY 

 

★故 채명신 장군에 대한 추억과 김대중(DJ)

월남 주둔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던 蔡命新(채명신) 장군이 87세를 一期로 별세하였다. 월남전에 참여한 한국군은 연 30만 명이었다. 이들은 지금 60~80代이다. 채명신 장군과 함께 ‘맹호는 간다’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세대이다.

 

“자유통일 위하여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

 

2001년 8월23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방한중이던 월남의 찬 둑 루옹 대통령에게 '불행한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하여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사실상 사과를 한 셈이다. 그 직후 만났던 채명신 장군이 화를 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金 당시 대통령의 발언은 정통 역사관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과도 맞지 않았다.

 

첫째, 대한민국이 국군을 월남전에 보낸 것은 월남의 자유뿐 아니라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고 우리의 체제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빼내 월남에 보내려고 했다. 이것을 간파한 朴正熙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견제하기 위하여 전투 사단 파견을 결심했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 정부는 월남파병을 계기로 하여 많은 實益(실익)을 챙겼다. 월남특수란 것이 일어났다. 월남에 많은 한국 회사가 진출하여 돈을 벌었고 미국 존슨 정부는 한국에 많은 원조를 주었다. 한국의 공업화에 큰 기여를 한 KIST, 즉 한국 과학기술원은 월남전 파병에 대한 존슨의 선물이었다. 월남전에 진출한 장병들과 노무자들이 벌어들인 돈과 배운 건설 기술이 경부 고속 도로 건설에 투입되었다. 월남전선에서 한진, 현대 같은 회사들이 성장했다. 특히 건설회사들이 이곳에서 기술을 터득하여 70년대에 중동으로 뛸 수 있었다.

 

셋째, 월남전에 대한민국이 파병한 것은 정의로운 일이었다. 미군은 6.25전쟁 때 5만 명의 젊은이를 희생시켜가면서 한국을 구해주었다. 그 미국이 파병을 부탁하는 데 혈맹인 한국이 의리를 지킨 것이다. 이 일 덕분에 韓美 동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월남전쟁의 도발자는 17도선 이북의 공산 월맹이었다. 그들은 국제협정을 무시하고 정규사단을 17도선 남쪽으로 내려보내 공산혁명을 노린 게릴라 전을 주도했으며 월남의 베트콩 부대를 부렸다. 명백한 남침이었다. 이 침범행위에 대해서 자유세계가 군대를 보낸 것이다. 호주, 필리핀 등도 파병하였다. 1975년 월남 전역이 공산화되면서 미군 편에 섰던 한국은 勝戰國(승전국)이 되지는 못했으나 결코 사과할 나쁜 일을 한 적은 없다.

 

넷째, 한국군은 국제법을 위반한 월남 공산군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 바로 우리가 피해자인 것이다. 그들은 전쟁규칙을 위반하여 군인 복장을 하지 않고 민간인으로 행세하면서 우리 국군을 괴롭혔다. 약 5000명이 전선에서 죽었고 1만 명 이상이 다쳤다.

 

나는 당시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상의 관점에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일방적 사과를 반대하고 규탄하는 바이다. 김대중 개인이 사과하는 것도 문제인데 하물며 국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보위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자랑스런 과거를 무효시하는 사과를 국민과 국군의 동의 없이 했다는 것은 중대한 과오이다.

 

그의 사과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이 사과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월남참전은 자랑해야 할 일이었지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일부 언론과 좌파에서 검증도 되지 않은 학살설을 들고 나와 월남파병을 죄악시하는 주장을 폈으나 다수 국민과 국군의 생각은 월남파병이 우리나라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이런 역사관을 바꾸려면 많은 논의와 토론을 거쳐야 하고 아주 조심해서 해야 할 일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김숙희 장관이 월남파병에 대해서 용병 운운 했다가 군 장교들의 반발로 사직했던 적이 있다. 이번 김 대통령의 발언이 가진 무게는 김 장관과 비교할 바 아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든 것이다. 공산 국가의 원수한테 그 공산 국가의 불법적인 침략행위-혁명기도를 막으려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과한 셈인데, 그렇다면 공산화를 당연한 것으로 본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월남의 공산통일이 월남 사람들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 불행을 가져다 주었는지 아직은 속단할 일이 아니다. 공산화 후 발생한 보트 피플의 비극은 공산통일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경제를 낙후시켰음을 증명한다. 뒤늦게 월남정부가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받아들여 개혁 개방에 나서고 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공산통일은 善(선)이고 이를 막으려고 했던 자유세계의 反共(반공) 행동은 사과할 만한 惡(악)이란 느낌을 줄 가능성도 있다.

 

셋째, 김 대통령의 사과는 1960년대 - 1970년대를 살았던 세대로부터 추억을 빼앗아가는 행동이다. 젊은이들이 월남에 가서 고생하고 있으니 국내에 있는 우리도 더 열심히 일하자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었다. 전선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늘 긴장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긴장을 국가 건설에 잘 활용한 경우이다.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는 '용사는 말없이 바다를 건넜다. 자유보다 더 귀한 것, 있으면 말하라'는 軍歌(군가) 가사처럼 우리도 이제 다른 나라의 자유를 지켜줄 만큼 컸구나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이 자랑스럽고 영광된 시절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월남전 세대의 자부심과 추억을 앗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제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담으려면 새로운 물을 길어와야 한다. 우선 월남참전 단체와 제대 군인들이 김 대통령의 사과를 취소시키는 방향으로 의견과 행동을 모아야 할 것이다. 월남전 세대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이하의 글은 필자가 쓴 박정희 傳記(전기) 중 관련 부분이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미군 지휘관 회의에서 소신표명을 계속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을 존경합니다. 한국전 때 웨스트 장군은 제82공정사단의 대령으로서 북한 순천 상공에서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용맹을 떨친 지휘관이십니다. 저 분의 지휘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저 분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군 지휘관들도 이해하는 분위기로 돌았다. 이로써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월남측과 협의하여 행사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 채명신 소장은 육군본부에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일하면서 월남전을 연구했는데 비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월남전의 작전개념을 수립하면서도 나 자신은 월남에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디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베트콩은 군복을 입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간인 행세를 하는 게릴라들이었습니다. 월남정부는 민심을 떠나고 있었고 월맹 지도자 호지명의 인기는 높아가고만 있었습니다. 아홉 살짜리 꼬마의 호주머니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고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의 옷속에 권총이 숨겨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미군의 작전개념인 '수색 및 섬멸작전'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만 생겼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작전개념은 ‘분리 및 섬멸’이었다. 민간인 속에 숨어 있는 베트콩들을 대민심리전을 통해서 분리하여 산속으로 격리시킨 뒤 군사작전을 통해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보니 그들이 아시아의 역사 문화에 얼마나 미숙한지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1964년 월맹은 정규군을 월남의 중부고원지역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월남에서 조직된 베트콩을 지원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무기표준화를 통해서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같은 공용화기를 쓰게 되었다. 1965년 초 미국은 월맹의 4개 정규 사단이 월남에서 작전중임을 확인하고 '롤링 선더'(Rolling Thunder) 작전을 시작했다. 이는 정규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북위 19도선 이남의 월맹 군사기지들을 폭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정규사단의 남침은 계속되어 1965년말 현재 6만4000명이 월남에서 작전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월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을 가졌으나 공산당의 위장조직에 불과했다. 혁명당 당수는 구엔 반 린.

 

1964년 월맹은 구엔 치 탄 장군을 남파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사부문을 총지휘하게 했다. 린은 탄 장군의 보좌관이 되었다. 월남전을 하노이에서 지휘하고 있던 월맹 국방장관 지압은 시간이 공산군 편이란 확신하에서 월남전을 정치전쟁적인 성격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전쟁에서 승패는 전장이 아니라 여론과 언론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국내정치 무대에서 결판난다.

 

국제법상 월남전은 월맹에 의한 불법적인 남침이란 성격을 지닌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월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월맹은 17도선을 무시하고 군단 규모의 정규군을 남파했던 것이다. 남파의 방식이 김일성의 남침처럼 기습적인 총공세가 아니라 장기간의 위장침투였기 때문에 국제여론의 반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베트콩이 월남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반정부 세력인 것처럼 선전했고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월남정규군의 명백한 남침'을 경시하는 보도 태도를 취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을 위반하여 자유진영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남침한 공산세력을 물리치는 데 파병할 도덕적이고 국제법적인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월남파병을 통해서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리려는 미국측의 의도를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과 국군현대화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을 고루 갖춘 파병이었던 것이다.

 

그 뒤 월남과 미군이 졌고 월남이 월맹에 흡수통일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파병 이유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과 국제법,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여야 하는 것이다. 통일된 월남이 이제 와서는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월맹이 승자였다고 해서 월맹의 공산혁명노선이 옳았고 그에 반대한 한국의 파병은 나빴다고 해석하는 것은 승패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논의가 될 것이다.

 

1965년에서 70년까지의 6년간 월남파병에 따른 미국측의 대한 지원총액은 9억2700만 달러였다. 그 주된 내용을 보면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미군과 맺은 구매 또는 공사계약이 3억500만 달러로 가장 많았다. 미군에게 한국측이 공급한 물건값이 1억4400만 달러, 미군이 부담한 한국군에 대한 각종해외수당지급액이 1억3000만 달러, 월남파병을 계기로 유보되었던 군원이관 계획(한국측이 분담해야 할 군사비)액수가 9300만 달러, 한국군의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미군측의 지원이 5000만 달러 등등.

 

1966~71년간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5억3700만 달러에 달했다. 공사 및 용역제공, 한국인 기술자들의 송금, 그리고 군수물자 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이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엔 1억1340만 달러, 69년엔 1억420만 달러, 70년은 9700만 달러에 달했다.

 

최성기엔 80여개의 한국회사와 1만6000명의 기술자들이 주로 미군과 계약하에 활동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의 경우 무역외 수입으로 분류되는 공사-용역 등 월남으로부터의 각종 외화가득은 그해 상품수출액의 36%나 되었다.>

 

채명신 장군은 5.16 군사혁명 때는 5사단장으로서 병력을 이끌고 박정희 지지에 나섰던 사람이다.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 소장 아래서 참모로 일하였고 육사 5기 생도로서는 박정희 중대장으로부터 배웠다. 채 장군은 한국전 때 유격부대를 지휘, 敵陣(적진)에 침투, 많은 공을 세웠다. 월남전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轉役(전역) 후 좌파정권 시절 애국운동에도 앞장섰다. 평생을 對共戰線(대공전선)에서 보낸 분이다. 冥福(명복)을 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조선일보  조갑제·조갑제닷컴대표

 

★"나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해 이곳에 묻힌다"

장군 유언 따라 병사묘역에

 

1966년 7월 20일자 중앙일보 1면에 게재된 고 채명신 장군의 사진(위). ‘도착 즉시 국립묘지로’라는 제목 아래 ‘파월전몰장병영령 앞에 눈물을 글썽이며 헌화하는 채명신 장군’이라는 사진설명이 붙었다. 사진 옆 기사에는 ‘20일 귀국한 채명신 주월남 한국군사령관은 이날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방문, 월남전 현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중장으로 승진한 채 장군에게 새 계급장을 달아주었다’라고 씌어있다. 당시 채 장군은 청와대로 가기에 앞서 국립묘지(현 서울현충원)를 먼저 방문해 참배했다. ‘죽어서도 월남전 참전 전우들과 함께하겠다’던 채 장군은 오늘 이곳 병사묘역(아래)에 묻힌다. [김성룡 기자]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2번 병사묘역. 1033명의 병사가 잠들어 있다. 이 중 971기가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의 묘다.  

 

28일 오후 3시 이곳에 채명신(1926∼2013) 예비역 중장이 묻힌다. 고인은 1965년부터 69년까지 초대 주월(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냈다. 병사묘역에 예비역 장군이 묻히는 건 건군 사상 최초다. 장군묘역이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가는 이유는 25일 별세한 고인의 유지에 따른 것이다.  

 

이날 서울 아산병원 빈소에서 만난 부인 문정인(84) 여사는 “평소에도 남편은 입버릇처럼 집(용산구 동부이촌동)에서 한강 건너 동작동을 가리키며 ‘여보, 나 말이야 전우들과 함께 묻혀야겠어’라고 말해 왔다”고 전했다. 유가족들은 비석 뒷면에 ‘나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해 이곳에 묻혔다’는 글귀를 새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 생략하고 담담하게 여백으로 남겨놓는 방안도 논의했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묘지와 비석 크기는 여느 병사들과 똑같이 만들어진다.  

 

서울현충원에 따르면 고인은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2번 묘역 맨 앞 열의 3.3㎡(1평)에 안장된다.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정책과 김흥남 과장은 “고인의 비석(’육군 중장 채명신의 묘’)도 병사들과 똑같이 높이 76㎝, 폭 30㎝, 두께 13㎝의 화강암으로 세워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장군묘역으로 간다면 26.4㎡(8평)의 묘지 공간을 할당받고 그 위에 봉분을 올릴 수도 있었다. 비석도 병사보다 큰 높이 91㎝, 폭 36㎝, 두께 13㎝짜리다.

2013-12-02 조선일보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 박홍 교수

http://www.youtube.com/watch?v=EFnTOc_ei1U&feature=player_embedded 

 

http://www.youtube.com/watch?v=EFnTOc_ei1U&feature=player_detailpage - 1부

http://www.youtube.com/watch?v=YMVQacWmooo&feature=player_detailpage - 2부

 

★2015.10.08 親盧와 상극, 고영주 스토리

노무현 전 대통령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표현해 야당으로부터 거센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고영주(66)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釜林) 사건’을 담당한 대표적인 ‘공안(公安) 검사’ 출신이다.

 

부림 사건은 1981년 9월 부산 지역 지식인·교사·대학생 22명이 국가보안법 및 계엄법·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피고인 중 다섯 명의 변론을 맡았다. 1982년 대법원은 "(부림 사건) 피고인들은 자유민주주의 현 체제를 뒤엎어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면서 원심 유죄 형량을 확정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과거 시국 사건들이 재심(再審) 과정을 거치며 판결이 뒤집어졌지만 부림 사건의 보안법 유죄 혐의는 유지됐다.

 

고 이사장은 충남 보령 출신으로 경기중·고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지검 검사, 대검찰청 공안기획관, 청주지검 검사장, 대검 감찰부장, 서울남부지검 검사장 등을 거친 대표적인 ‘공안통’이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고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 천정배 법무장관 시절인 2006년 1월말 고검장 승진에서 제외되자 서울 남부지검장을 끝으로 옷을 벗었다. 당시 고 이사장은 공식적으로 “후배 검사의 길을 터주기 위해서”라고 사퇴이유를 밝혔지만, 측근들에게 “권력 코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안검사들이 찬밥 신세로 전락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한다. “공안딱지가 붙어 있는데 더 남아 뭘 하겠느냐”는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통’으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던 황교안 국무총리도 당시 검사장 승진 인사에서 탈락했다. 그는 2005년 안기부·국정원의 도청 사건을 처리하고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구속을 강력히 주장했었다. 당시 검사들은 고 이사장과 황 총리의 승진 탈락을 ‘정통 공안 검사의 몰락’으로 받아들였다. 국가보안법 및 검찰 공안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무현 정권 출범 후 어느 정도 예상됐던 일이었다.

 

고 이사장은 2006년 5월 노무현 정부가 주도해왔던 과거사 진상 규명 활동에 맞선 민간 차원의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자 자문위원을 맡았다. 위원회는 출범식에서 “정부 차원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좌파(左派)적 시각에서 과거사를 다루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법적 결정을 공공연히 뒤집고 있어 민간 차원에서 위원회를 조직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 변호사)가 2010년 3월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에 수록될 1차 명단 100명을 발표했다. 가운데가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

 

고 이사장은 “광범위한 국가 정체성 훼손행위를 조사해 비정상적인 대한민국을 조속히 정상화시키겠다”는 취지로 2008년 6월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추진위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자 2010년 3월 ‘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 편찬 사업을 벌이고, 강정구 동국대 교수와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 등 인명사전에 수록될 1차 명단 100명을 발표했다. 추진위는 2011년 6월엔 민주노동당 해산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했고, 2012년부터는 당명(黨名)을 변경한 통합진보당 해산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법무부에 거듭 제출하는 등 통진당 해산에 앞장섰다.

 

고 이사장은 방문진 감사를 거쳐 지난 8월 이사장에 선임됐다.

 

고 이사장은 1995년 홍조근정훈장, 1997년 황조근정훈장을 받았고 ‘반(反) 헌법적인 정치 집단 등을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고, 친북인명사전 편찬 작업 등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지난해 8월 제7회 우남 이승만 애국상을 수상했다.

안준호 기자

 

2015.10.08 조총련 스타 변호사 구양옥이 한국에 전향 선언한 이유는...

▲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9 16일 서울 중구 순화동 라마다호텔&스위트에서 드디어 구양옥(33) 변호사를 만났다. 거의 일주일 전부터 수차례 전화를 하고 이메일 문답을 주고받았지만 얼굴은 처음 봤다. 구 변호사는 작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앳돼 보였다. 다소 날카로운 눈매를 제외하면, 일본 법정에서 일본 극우파들을 매섭게 몰아치던 전사(戰士)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구 변호사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3세지만 한국말이 유창했다. 이날 오전 오사카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탄 그는 “아이가 어려서 공항에서 바로 호텔로 왔다”며 인터뷰에 빨리 응하지 못한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구 변호사는 일본인 남편(40)과 두 살배기 딸 유나와 같이 왔다.

 

2005년 대학 졸업여행을 포함해 세 번째 한국 방문이지만 이번에 찾은 한국은 그에게 이전 두 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난 30여년 남한과 북한 모두를 조국으로 생각하며 살아오다가 얼마 전 진정한 하나의 조국으로 선택한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새로운 조국’을 보여주기 위해 나이 어린 딸도 데려오지 않았나 얼핏 생각이 들었다. 구 변호사는 “사업을 하는 남편은 아이를 봐주기 위해 함께 왔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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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로스쿨에서 열리는 세계한인변호사회(IAKL·Inter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Lawyers·회장 최병선) 정기총회 및 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을 찾은 구 변호사는 숨은 ‘뉴스의 인물’이다. 그는 일본의 재일동포 사회, 특히 조총련 사회에는 청천벽력의 뉴스를 품고 이번에 한국에 왔다.

 

그가 지난 6 30여년간 유지해온 조선적(朝鮮籍)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조선적은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에 살던 조선인 가운데 1945년 이후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이나 북한 국적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3~4만명이 있는데 성향상 조총련계가 많다.

 

구 변호사는 “조총련은 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을 아직 모른다”며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한국 국적 취득 소식이 이번 인터뷰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임을 밝혔다. 그는 “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얘기를 접하면 조총련에서 놀랄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정부의 한 관계자로부터 구양옥 변호사가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의아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과거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011년 한국을 방문하려다 좌절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법률(Law Asia)대회에 참석하려고 오사카 주재 한국영사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가 발행한 그의 외국인등록증에 국적이 ‘조선’으로 기재돼 있다는 점이 문제가 돼 한국 정부가 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했다.

 

당시 그에 대한 입국 거부는 국내서도 논란이 일어 기사화됐다. 과거 두 번의 한국행을 이미 허가한 마당에 그에 대한 입국 거부가 너무 자의적이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여행증명서 발급은 정부의 재량이라는 게 정부의 논리였다.

 

당시 구 변호사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적을 ‘조선’으로 유지한 이유에 대해 “전후 배상이 매듭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인등록증을 1965년 배상을 끝낸 한국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이르다고 생각해 각종 어려움을 견뎌왔다”고 말했다. 그의 이 발언을 접하며 한국 진보진영에서도 주목해온 조총련의 젊은 변호사가 한국을 하나의 조국으로 흔쾌히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구 변호사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총련이 자랑하는 스타 변호사로 화려한 조명을 받아왔다. 그는 작년 말 일본 극우단체인 재특회(在特會·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와 사쿠라이 마고토 재특회 회장을 상대로 한 5년간의 손해배상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다. 재특회 회원들은 2009 12월부터 2010 3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교토 조선학교 부근에서 확성기로 “조선학교를 일본에서 쫓아내라” 등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증오 발언)’를 했는데 교토 조선제일초급학교가 이를 문제삼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원고인 조선학교 측을 대리한 구 변호사는 ‘1200만엔 배상’과 ‘학교 주변 반경 200m 이내 시위금지’라는 판결을 이끌어내 ‘일본 사법 사상 우익 단체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긴 첫 재일동포 변호사’가 됐다. 당시 승소를 계기로 구 변호사는 조총련 사회에서 스타로 떠올랐고, 조총련은 ‘조선신보’ ‘이어’ 같은 기관지에 구양옥 스토리를 대대적으로 실으면서 그를 신세대 조총련 지식인으로 선전했다.
   
   
그는 2008년 변호사 시험 합격 때부터 화제를 뿌렸다. 교토 조선중고급학교와 오사카시립대 법대와 로스쿨을 나온 그는 ‘재일동포 최연소 변호사’이기도 하다. 법대와 로스쿨 시절 “머리가 연해질 정도로” 공부에만 전념해 26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불과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던 조선적 변호사 명단에 한 명을 더 추가하는 쾌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변호사의 길을 걸은 게 ‘숙명적’이라고 얘기했다.

 

 “어릴 때부터 살던 교토 우토로에서는 가난한 한인 세입자와 일본인 지주 사이에 충돌이 자주 있었습니다. 시위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일본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죠. 왜 우리 문제를 일본인 변호사에게 맡기느냐는 생각을 했었고, 결국 약자가 불합리한 일과 싸워 정의와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법정에서 이기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처음부터 변호사를 목표로 길을 걸었습니다.
   
   
구 변호사는 3대에 걸친 조총련 집안 출신이다. 부친(66)은 조선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이며, 어머니(64)도 북한에 가서 조선학교 교과서를 만든 조선학교 국어교사 출신이다. 구 변호사에 따르면, 경북 달성 출신인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이와테현 광산노동자로 일본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이런 뿌리 깊은 조총련 집안 출신이, 더욱이 조총련 내부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둔 그가 왜 뒤늦게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일까.
   
   
구 변호사는 자신의 한국 국적 취득이 오랜 고민의 결과였음을 밝혔다. 2008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부터 사실 망설이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조선적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가보자고 했었는데…. 저는 조선적으로 겪을 수 있는 제약과 편견들을 제 몸으로 실증했습니다.
   
   
그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재특회 소송 승리와 딸 유나의 출산이었다. 작년 봄 재특회와의 2심 소송 최후 변론을 쓸 때 그는 유나를 뱃속에 갖고 있었다. 7월 출산이 예정돼 있는 무겁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는 밤을 새워가며 변론을 썼다. 1심 승소라는 소중한 성과를 끝까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1심에서부터 ‘1200만엔 배상’과 ‘조선학교 반경 200m 이내 시위금지’라는 판결을 이끌어낸 데는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2013 6 1심 최종 법정 변론 때 그는 “한번 이유 없는 민족 차별이나 공격에 노출되면 안심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은 위험한 전쟁터로 변해 버린다”며 재특회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역설했다.

 

당시 냉정하고 객관적인 변호사의 모습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는 변론을 하며 울었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방청객들도 울었다. 당시 그의 울음에는 자신이 겪은 차별과 설움이 녹아 있었다. 재특회로부터 괴로움을 당한 교토 조선제일초급학교는 사실 그의 모교이기도 하다.

 

“아직도 어느 날 등교 때의 일을 기억합니다. 감색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통학 전차를 기다리다가 전차를 타려고 하는데 줄의 맨 뒤쪽에서 ‘조선인 주제에 먼저 타지 마!’라는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제 머리채가 잡혀 플랫폼으로 끌려내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재특회 습격 동영상도 쉽게 볼 수 없더군요. 일주일 정도 마음을 굳히고 깊은 밤 가족이 모두 잠들었을 때 동영상을 봤는데 5분가량 보니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분노로 주먹이 떨려서 몇 번이나 멈추었어요.
   
   
그는 1심 최종 변론에서 자신이 초등학교 6학년 때 겪은 이른바 ‘치마저고리 사건’도 언급했다. 치마저고리 사건은 1994 5~6월에 걸쳐 조선학교 여학생의 교복이 찢기는 피해가 일본 각지에서 발생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경찰에 접수된 피해 신고는 22, 조총련이 밝힌 피해 건수는 124건이었다.

 

당시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조선학교를 향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전국의 조선학교는 치마저고리가 아닌 ‘제2교복’, 이른바 ‘보통 교복’을 만들어 입게 됐다. 그는 “그런 사건이 벌어지면 학교 전체가 얼마나 긴장에 빠지는지, 얼마나 부모들이 가슴 졸이고 아이들이 불안에 떠는지 제 경험을 솔직하게 담아 변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재특회와의 재판은 특별히 피해자가 조선학교였기 때문에 내가 나섰던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조선학교든 한국학교든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 인종차별적인 범죄는 용서하지 못할 일입니다. 재특회는 조선인이든 한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코리안을 향한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조선인부터 건드렸지만 그게 지금의 혐한시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들과 싸워서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작년 봄, 서면으로만 대체한 2심 변론을 마친 후 그는 판결을 기다리며 몇 개월간의 휴식기를 가졌다. 그런데 그때 ‘언제까지 조선적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변호사 초기의 고민이 다시 살아났다. “일본에서의 내 법정 경험을 한국에도 알리고 싶었는데 한국은 머나먼 나라였습니다. 조선적을 유지하면서 변호사를 하는 게 너무 불편하고 힘든 일이었죠.
   
   
그는 2011년 봄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통역을 겸해서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의 형사소송제도를 참관하면서 한국의 선진적인 사법제도와 상대적으로 인권 후진국인 일본의 사법제도에 놀랐다. 그때 여행증명서를 내준 한국 영사는 그에게 “이번의 특별허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얘기했다. 다음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해야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영사의 말대로 2011년 가을 한국 입국 요청은 앞서 썼듯이 논란 속에 거부됐다.
   
   
그에 따르면, 일본에서 조선적을 유지하는 것은 뿌리가 없는 회색인으로 사는 것과 다름없다. “조선적은 일본 여권도, 한국이나 북한 여권도 없는 처지입니다. 일본에서 해외로 나가려면 임시 여권에 해당하는 (일본)재입국허가증을 받고 방문하는 나라의 영사관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변호사로서는 활동에 근본적인 제약인 셈이죠.
   
   
부모가 40년 넘게 종사해온 조총련과 조총련이 떠받드는 북한에 대한 환상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 북한에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순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맞지 않는 사회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핏줄로 후계자가 결정되는 북한의 현실에 절망한 동포 청년들이 많다”며 “조총련이 북한만 바라보고 가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데는 딸 유나의 미래도 결정적이었다. 자신은 일본인과 결혼했지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나온 그로서는 딸이 일본 국적을 갖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고 조선적 부모를 둔 다른 동포 3, 4세들처럼 그냥 회색인으로 살게 하기도 싫었다. 그는 “사생아나 다름없는 조선적으로 딸이 살아갈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결국 그는 자신과 딸의 미래를 위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번에 그는 대한민국 여권을 손에 쥐었고, 한국에 오기 전 오사카 영사관에 자신을 호주로 하는 대한민국 호적도 신청했다. 그는 이번 행사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호적에 딸 유나 이름부터 올릴 계획이다.

 

그는 “남편도 딸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을 허락했다”며 “결혼 전 자식의 교육과 국적은 내가 결정한다는 다짐을 남편한테 받았다”고 했다. 혈통주의를 따르는 일본의 경우 부모의 국적이 서로 다를 때 자녀가 22세가 되는 해 국적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는 “유나가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하기를 바라고 아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버린 또 다른 조국 북한과 이를 추종하는 조총련이 닫히고 낡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조총련은 초심(初心)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우경화하는 일본 사회에 실망하고, 민주적인 선거가 아니라 핏줄로 후계자가 결정되는 북한의 현실에 절망하고,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한 채 결국 일본으로 귀화를 선택하는 동포 청년들을 보면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총련이 북한만 바라보고 가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처럼 중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유일지도체제이기 때문에 동포들의 의견을 조직 전체의 방침으로 반영시킬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조선학교만이라도 살려보기 위해 교과서의 내용도 바꾸고 선생님도 한국에서 데려오고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보내자는 말도 있지만 현장 교사들이 공개적으로 조직에 건의할 수 없는 분위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조총련 허종만 의장 등이 빚을 갚으려고 그러는지 동포 1세대들이 물려준 조선학교 부지 등 재산을 팔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조총련의 미래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맞는 조총련은 크게 흔들리는 분위기다. 한때 재일 한인의 80%를 차지하던 조총련계 한인들은 현재 그 비중이 20%대로 줄었다.

 

 일본 당국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 영주권을 갖고 살고 있는 재일 한인은 434000명으로, 이 중 조총련계는 86000명 정도다. 조총련이 한 해 40~50억엔씩 북한에 보내던 대북 송금액도 2000년대 후반부터 2억엔 정도로 급감했다. 2013년 조총련은 도쿄 중심지에 있는 본부 건물과 토지를 담보로 일본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78000만달러를 갚지 못해 본부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는 일도 당했다.

 

조총련으로서는 2002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을 가질 때 김정일이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인정한 것이 결정적 타격이었다. 구 변호사는 “조총련과 조선학교는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동포들의 생활과 교육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재일조선인연맹’(조총련의 전신)과 ‘국어강습소’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총련은 ‘공화국 해외 공민단체’와 ‘차별 속에 살고 있는 동포를 보호하고 지키는 대중조직’을 스스로의 목적으로 내세우는데 나는 지금까지 정치조직으로서의 조총련의 방침은 따랐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따라갈 의사가 없다. 조총련의 직책을 갖고 조총련 활동을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낡고 닫힌 북한과 조총련에 비하면 자신이 선택한 한국은 열리고 미래지향적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선진국 중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은 상태이고 재일동포 사회에도 여전히 남존여비 풍조가 남아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 재일동포 여성으로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박근혜 대통령과도 만나 여성으로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사회를 포함한 해외 민족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은 없을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의 변호사가 된 것을 계기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싶어했다. 특히 한국 기업과 재일동포 젊은이들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고 싶어했다.

 

“제가 보수적인 일본 법정에서 우익단체를 상대로 승소한 경험을 살려 한국 최고의 로펌인 김앤장 같은 곳에서 로펌 생활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그후 한국 기업의 일본 진출을 법적으로 지원하면서 새로운 재일동포 변호사의 역할을 개척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일본의 법적·제도적·사회적 장벽에 막혀 가장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 시장 진출 기회를 놓쳐온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한국과 일본을 모두 아는 재일동포 청년세대와 손을 잡고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한국 기업, 한국 제품에 대한 편견과 장벽을 돌파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국 국적을 얻었지만 여전히 조총련계 젊은이들도 돕고 싶어했다. “조총련계 젊은이들은 일본 기업에는 취직도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한인들이 하는 파친코나 불고기집에 취직하면 됐지만 요즘에는 장사도 안 돼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절망 속에 일본으로 귀화하는 동포 젊은이들이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는 지금도 조총련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제기한 조총련 고등학교 무상화 제외(조선학교라는 이유로 학비 등 무상지원에서 제외하는 조치) 취소 소송과 지자체의 조선학교 지원 중단 취소 소송의 대리인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그는 “제가 속한 변호사 사무실 소장이 소송을 맡아 저도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앞으로 한국 생활을 하게 되면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망설인 이유 중 하나인 일본의 전후배상 문제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난 게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 국적을 얻는 순간 할아버지 세대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우리 일가의 희생에 대해 일본 정부에 책임을 추궁할 피해자로서의 권리가 역사 속에 묻혀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조선적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지금은 국가가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에는 시효가 있어서는 안 되고 국적에 따라 책임을 추궁할 권리가 소멸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적이든 조선적이든 관계없이 국가가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행한 반인도적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시효에 관계없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합니다.
   
   
구 변호사는 “길거리에서, 인터넷상에서, 그리고 SNS를 통해 표출되는 일본 보수세력의 재일동포 차별행위 확산이 아베 정권 출범과 분명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며 “일본 우익의 차별은 ‘좋은 한국인도 나쁜 한국인도 모두 죽여라’와 같은 직접적 증오 표현에서 재특회 같은 넷우익(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우익단체)들처럼 보다 교묘하고 고도화된 형태로 재일동포에 대한 편견와 오해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했다.

 

구 변호사는 이번 세계한인변호사회 학술대회에서 일본 우익과 싸운 자신의 법정 경험을 기반으로 ‘인터넷상의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글을 발표한다.

출처 | 주간조선 2375호   글 | 정장열 주간조선 부장대우

 

★ 종북 척결이 목적인, 블루유니온

문제는 교과서가 아닐지 모른다. 지난 10 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선동, 편향 수업’ 사례 발표회가 열렸다. 블루유니온(Blue Union)이라는 단체가 주관한 행사였다. 블루유니온은 ‘선동편향수업신고센터’라는 사이트를 개설해 학생들로부터 직접 제보를 받아왔다. 주로 수업시간에 정치적으로 과도하게 편향된 발언을 일삼거나, 북한을 미화하는 등 사실관계를 왜곡해 가르치는 교사가 제보 대상이다. 제보 사이트가 개설된 2012년 이후 현재까지 제보된 468건 중엔 충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왜 북한이 핵을 가지면 안 되나. 북핵에 반대하는 나라는 다 핵 보유 중이면서”라고 발언한 교사도 있었다. 블루유니온이 만든 사이트가 교과서 문제와 별개로 교단 자체에 편향과 왜곡이 만연하다는 걸 학생들 스스로 교단 밖으로 알릴 수 있는 장()이 된 셈이다

 

/권유미 블루유니온 대표 /이경민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직원들 신변 우려해 CCTV 설치하기도

블루유니온의 사무실은 서울 연남동의 한적한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문으로 다가가자 덩치 큰 개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나와 기자와 인사를 나누니 곧 잠잠해졌다. 개를 경계하며 집 안으로 들어서니 CCTV 영상을 보여주는 모니터가 눈에 띄었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건 주택 바로 앞 골목. 권유미 블루유니온 대표는 “직원들의 신변 보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권 대표를 제외한 3명의 직원들은 언론 등에 얼굴이 노출되는 것도 피한다.


“종북 성향 논란으로 저희와 소송까지 갔던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어요. 그곳의 회원들은 ‘블루유니온이라면 이가 갈린다’고 한다더군요.


권 대표가 블루유니온을 설립한 건 2011. 일반 시민들이 ‘안보의식과 올바른 국가관’을 갖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주 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나라사랑교육 ‘안보콜’을 운영 중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신청이 들어오면 학교로 찾아가 안보 교육을 해준다. 강연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여주는 식이다. 올해만 70회 넘게 진행했다. 신청하는 학교는 그보다 더 많은데 예산이 그에 미치지 못해 일부 학교밖에 가지 못한다고 한다. 예산은 매년 행정자치부의 사업 공모를 통해 지원받는다. 3개 학교에서 ‘파랑새봉사단’도 조직해 운영 중이다. 창의적 재량학습 시간을 이용해 체험학습을 하는데, 주로 전쟁기념관, 현충원, 독립기념관 등지에서 진행한다.


둘째, 선동편향수업신고센터 운영이다. 인터넷 사이트(http://abschool.org)에 접속만 하면 쉽게 제보를 할 수 있다. 학생들이 신분이 노출될 걱정 없이 제보를 할 수 있는 사이트로는 사실상 유일하다. 2011년에 ‘에듀리크스’라는 웹사이트가 개설돼 활발히 운영됐지만, 운영자였던 곽도훈씨의 개인 사정으로 지금은 운영되지 않는다.


셋째, ‘블루투데이’라는 사이버 안보 관련 인터넷 언론도 운영한다. 온라인 매체이지만 오프라인으로 일종의 ‘호외’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석기 내란 선동’ 특집과 ‘통합진보당 해산’ 특집이었다.


네 번째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관련 기관에 문제 제기를 하는 식의 활동이다. 종북 성향을 보인 매체였던 ‘자주민보’ 문제를 서울시에 제기해 해당 매체의 폐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자주민보’는 김정은을 ‘원수’라 호칭하고, 발행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기도 한 매체다. 블루유니온은 서울시청 앞에 자주민보 폐간을 촉구하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외에도 대북 전단을 담은 풍선을 날리거나 국회 의원실과 공조해 안보 관련 법안도 발의한다.


‘블루아이즈’ ‘레이디블루’ 등 안보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와 연계해 활동하기도 한다. ‘블루아이즈’는 사이버 안보감시를 목적으로 하는 커뮤니티다. 6000명이 넘는 회원 중 다수가 학생 등 젊은층이다.<②편에 계속

 

박정희 일찍 죽었어야 한다는 교사 여전히 강단에서 교육 중

<①편에서 계속>


아이들 제보에도 무관심한 정부

설립된 지 5년 남짓된 단체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활동을 해올 수 있던 것은 권 대표의 ‘출신’ 덕이 크다. 권 대표는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1992년에 전역했다. 2003년부터는 재향군인회, 국민행동본부 등의 우파 성향 단체에서 활동을 해왔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국민행동본부 대북 풍선단을 이끌기도 했다. 풍선 날리는 ‘노하우’를 익힌 것도 그때다. 흔히 말하는 ‘아스팔트 우파’ 출신인 셈이다. 권 대표의 설명이다.


“국민행동본부 등의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다른 성격의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기존의 단체들이 열심히 하고 있지만, 좀 더 젊은층과 공감하며 활동하고 싶어서였지요.


안보의식 교육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현장에서 보고 겪은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2003년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습니다. 국보법을 방어해야 하는 건 정부인데, 저희 우파 단체가 했어요. 이건 분명한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8년에 ‘광우병 쇠고기 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선동되고 분열될 수 있나, 현장에서 지켜보며 참 착잡했습니다. 올바른 국가관 고취가 절실하다고 느낀 이유예요.

 

/6 24일 서울 광화문역 5번 출구 인근에서 6·25 전쟁 65주년을 맞아 블루유니온 주최로 열린 북한 실상 바로 알기 전시회. /조선일보 DB

 

권 대표는 “안보 문제에 무관심한 사회 분위기도 문제지만, 관련 기관의 직무 태만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의 제보가 들어올 때마다 내용을 확인한 다음 교육부 해당 부서에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교육부나 교육청과는 전혀 협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고성만 오갑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심지어 학생이 직접 교육청에 제보했다가 신상이 알려져 혼이 난 경우도 있습니다. “이승만은 세월호 선장, 박정희는 일찍 죽였어야 했다”는 발언이 나오는 동영상을 튼 서울 압구정동 H 고등학교 영어교사가 최근에 문제가 됐지요? 아무 일 없이 아직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희가 2013년에는 ‘범죄단체해산법’을 제정하자는 취지의 입법 청원서를 냈어요. 심재철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지요.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단체를 강제로 해산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었어요. 즉 ‘이적단체해산’이라는 개념을 국가보안법에서 따로 빼서 형법으로 다스리자는 취지였습니다. 지금까지도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어요.


블루유니온의 사례는 아스팔트 우파가 사이버 세계로 건너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예라 할 수 있다. 중·고등학생들이 능동적으로 판단해, 유해 사이트나 편향 교육 사례를 제보하는 게 성공의 방증이다. 우리 사회 한편에 ‘풀뿌리 안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권 대표는 그러나, “여전히 아스팔트 우파들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스팔트 우파들은 누구보다 국익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지만 그만큼의 대우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좌파 단체들과 대조되지요. 우파 단체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보수 진영 내에서 단결이 잘 안 되는 탓도 있을 겁니다.”◎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