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1-06/ 06-01(화) ‘백신 복권’ - 06-30(수) 코로나發 귀농귀촌 바람
횡설수설 2021-06/ 동아일보
06-01(화) ‘백신 복권’
코로나19 백신 접종은 필요하지만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다. 시간을 내야 하고, 교통비가 들고, 통증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접종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보상이 필요할까.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설문조사에서는 25달러라는 응답이 28%, 100달러라는 응답이 34%였다. 접종률을 높이려고 이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당근’을 제시하기도 한다. 미 오하이오주에선 최고 당첨금 100만 달러(약 11억 원)인 백신 복권 덕분에 접종자가 33% 늘었다고 한다. 각국 정부와 기업은 경쟁적으로 접종 인센티브를 쏟아내지만 찬반 논란은 남아있다.
▷현재까지 공개된 백신 경품 중 가장 액수가 큰 것은 미국 뉴욕주의 백신 복권이다. 최고 당첨금이 무려 500만 달러(약 55억 원)다. 주택난이 심각한 홍콩에서는 부동산 기업들이 나서서 1080만 홍콩달러(약 15억5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백신 경품으로 내걸었다. 앞으로 백신을 맞은 덕분에 부자가 되는 사람이 나오게 된 것이다.
▷소박한 경품으로 접종을 유도하기도 한다. 인도 서부 라지코트에서는 접종을 받은 여성에게 금으로 만든 코 장식품을 제공하고, 동부 비지아나가람의 한 음식점에선 접종자에게 전통 요리 비리야니를 공짜로 대접한다. 태국에선 송아지를 경품으로 내건 지역도 있다. 미 백악관은 접종자에게 더 많은 소개팅 기회를 주는 방안을 업체들과 협의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하는 형국이다.
▷백신 경품이 다른 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구시는 어제 접종자에게 건강검진권 등을 주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축구 경기 관람권 제공, 온라인 쇼핑몰 할인 등을 검토하는 지자체도 있다. 잔여 백신을 맞으려는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생뚱맞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백신 접종률·예약률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현재 예약이 진행 중인 60∼74세의 예약률은 68.5%에 불과하다. 11월까지 접종률 70%를 달성하려면 더 적극적인 접종 참여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경품 제공만이 능사는 아니다.
▷경품 제공은 백신에 대한 신뢰 저하 등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UCLA 조사에서 응답자의 15%는 돈을 주면 오히려 접종하기 싫어질 것이라고 했다. 백신이 얼마나 위험하면 돈까지 줘가면서 접종을 독려하겠느냐는 이유에서다. 한번 경품을 주기 시작한 이상 추가 접종이 필요할 때마다 경품을 주지 않으면 접종률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경품은 ‘덤’일 뿐이다. 경품 유무보다는 코로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가족, 친구, 사회를 지킬 유일한 방패가 백신이라는 시민의식이 접종의 진짜 이유가 돼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02 ROTC 창설 60년
손자병법은 장수들에게 “명령은 문(文)으로 하고 통제는 무(武)로 하라”고 했다. ‘문무겸비’ 군사교육이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가장 효율적으로 적용된 사례가 학생군사교육단, 즉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가 아닐까 한다. ROTC로 선발되면 대학 3, 4학년 때 군사학 교육과 훈련을 받은 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다. ROTC가 어제 창설 60주년을 맞았다.
▷ROTC의 원조는 전쟁을 자주 치른 미국이다. 직업 군인은 아니지만 ‘평시 교육, 전시 장교’ 필요성을 절감하고 창안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ROTC 훈련을 받은 초급 장교 15만 명이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 6·25전쟁 때도 ROTC 출신 장교 1만8000여 명이 무장 소집에 응해 한국 땅을 밟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미 동맹의 연결고리였던 셈이다.
▷1960년대 초반 우리 군은 역량 있는 장교가 턱없이 부족해서 골치를 앓았다. 그나마 있는 초급 장교들 중에는 한글로 쓰인 야전교범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이런 배경 아래 1961년 6월 1일 탄생한 ROTC는 그동안 22만여 명의 장교를 배출하며 군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엔 임관 소위의 73%, 전방 경계 소위의 70%를 차지했다. 여군 장교도 2210명이나 나왔다.
▷ROTC는 3무(無), 1존(存), 3례(禮)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 3무는 ‘학연, 지연, 정치와 종파 초월’, 1존은 ‘오직 기수만 존재’, 3례는 ‘선배에게 존경, 후배에게 사랑, 동기에게 우정’을 의미한다. 자부심과 결속력이 강해 스스로 ‘알오티시안(ROTCian)’이라 부르기도 한다. 합참의장을 2명 배출했다. 남영신 대장은 첫 ROTC 출신 육군참모총장이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구자용 LS네트워크 회장,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등 많은 기업인들도 ROTC에서 문무 리더십을 익혔다.
▷대한민국ROTC중앙회는 어제 기념식에서 “100년을 향해 힘차게 도약하자”고 했다. 그러나 회원들은 요즘 걱정이 많다. 갈수록 지원자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경쟁률이 6 대 1 수준까지 오를 정도였지만 지난해는 2.23 대 1로 떨어졌다. 이유는 복무 기간과 복지 문제 등이다. 병사 복무 기간이 18개월까지 줄었지만 ROTC 장교는 28개월로 변함이 없어 취업 걱정 등으로 우수 자원들이 지원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 일선 병사들과 동고동락해야 할 초급 장교들의 자질이 떨어지면 전체 군사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복무 기간을 갑자기 줄이면 장교 수급 문제가 발생한다. 복무 기간의 합리적 조정, 미 대학과의 ROTC 교환 프로그램 확대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6-03 北 2인자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권력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고 믿는 곳에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권력은 살아 움직이는,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치명적 생물체와도 같다. 권력 2인자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위협하거나 역린을 건드려 죽임을 당한 사례는 숱하다. 허수아비 통치자를 세워놓고 실질적 권력을 행사한 인물도 적지 않지만,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주역에 ‘임금을 보필하는 건 호랑이를 동반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다. 2인자의 가장 큰 덕목이 절대적인 충성심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 개국 초 정도전과 달리 천수를 누린 하륜처럼 말이다. 최고의 한 자리를 향한 권력 의지, 즉 발톱이 아예 없거나 이를 끝까지 숨겨야 한다. 김종필 전 총리가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을 홍곡(鴻鵠)으로 치켜세우고 자신은 연작(燕雀)으로 낮췄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되지만, 끝내 팽을 당한 것을 보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북한은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권력 2인자들의 부침이 심하다. 아니, 2인자가 있긴 했나 싶기도 하다. 장성택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조카 김정은의 집권 후 2인자 행세를 하던 장성택은 “건성건성 박수치며 오만불손하게 행동했다”는 등 불충에 대한 책임으로 전격 처형됐다. 이후 김정은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미 대통령이던 트럼프에게 참수된 시신을 전시해 간부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져 또 한번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북한이 1월 8차 노동당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당 총비서로 추대하면서 총비서 바로 밑에 ‘제1비서’ 직책을 신설했다고 한다. 특히 당 규약에 “제1비서는 노동당 총비서의 대리인”이라는 내용이 추가됐다는 것. 북한 노동당 규약에 ‘대리인’ 조항은 처음 등장한다. 이를 놓고 “2인자 자리를 공식화한 것이다” “‘잠재적 후계자’ 지명 근거를 마련한 것일 뿐이다” 등 갖가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장성택 처형 후 확고한 권력을 구축한 김정은 체제에서 그나마 2인자 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인물은 여동생 김여정이다.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상징적 수반이었고, 이 자리를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이어받았지만 역시 공식 서열 2위일 뿐이다. 백두혈통 김여정을 위한 자리라는 관측과 함께 조용원 당 조직담당 비서를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조용원은 최근 김정은을 밀착 수행하며 새로운 실세로 떠올랐다. 통치 스트레스 분산용인지, 향후 정책 실패를 전가시키기 위한 희생용인지 전문가들 해석이 분분하다. 아직 공석이든, 누가 자리를 맡았든 분명한 건 그 대리인에겐 ‘신기(神技)의 처세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6-04 고스트 건
‘GST-9 권총 80% 키트 799.99달러. 쉬운 조립. 설명서 제공.’ 미국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이런 상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총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완제품 총을 사려면 절차가 까다롭지만 부품이나 완성률 80% 이하의 키트는 총기로 간주하지 않아 구입에 제한이 없기 때문. 부품이나 키트를 사서 조립만 하면 아무런 기록이 남지 않는 ‘고스트 건(ghost gun·유령 총)’이 되기 때문에 미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DIY 총’이라고도 불리는 고스트 건은 1990년대에 등장했지만 이른바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의 취미 정도로 여겨졌다. 고스트 건에 대해 경고등이 켜진 건 2013년이었다. 범인을 포함해 6명이 목숨을 잃은 샌타모니카대 총기 사건에 고스트 건이 사용된 것. 이후 2019년 캘리포니아에서 16세 고교생이 같은 학교 학생 2명을 살해한 사건 등 고스트 건을 이용한 총기 사고가 잇따랐다. 미 법무부에 따르면 2016∼2020년 당국에 적발된 고스트 건은 2만3000정이 넘고, 고스트 건을 이용한 살인·살인미수 사건은 325건이나 된다.
▷총기 보유를 적극 옹호했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총기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그 핵심은 위험인물이 총기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붉은 깃발(red flag)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스트 건은 구매자에 대한 배경조사(background check)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주인이 위험인물인지 파악할 수조차 없다. 이에 미 정부는 총기 부품을 사기 전에 배경조사를 받게 하는 등 고스트 건을 규제하는 행정명령을 먼저 준비하고 있다.
▷다른 나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고스트 건이 한국에도 처음 상륙했다. 자동차나 장난감 총의 부품이라고 속여서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온 뒤 조립한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총을 만들면 적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치안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파괴력도 강해 인명을 해칠 수 있다. 고스트 건이 범죄조직이나 흉악범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도심 밤거리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한국은 세계적으로 치안이 안정된 나라로 꼽혀 외국인들이 부러워한다. 여기에는 총기를 금지한 것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고스트 건을 막지 못한다면 한국은 ‘총기 청정국’이라는 명성을 잃게 되고 치안에는 큰 구멍이 뚫린다. 3D프린터로 총기를 만드는 기술도 이미 인터넷상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총기 확산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력을 기울여 막지 않는다면 영화에서나 보던 도심 총격전이 한국에서도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05 네이버 사옥 반사광
가을볕이 좋던 2013년 9월 영국 런던 도심에서 주차 중인 자동차가 녹아내렸다. 고무나 플라스틱 재질에선 타는 냄새가 났다. 원인은 신축 중인 빌딩에서 반사된 태양 빛이었다. 다음 날부터 주민들이 프라이팬과 날계란을 들고 모였다. 반사광으로 만든 계란프라이로 빛 피해 시위를 한 셈이다.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된 워키토키빌딩 얘기다. 당시 건축주는 급히 외벽에 그물을 둘렀지만 현지 언론의 ‘올해 최악의 건물’ 선정을 피하지는 못했다.
▷국내에서도 빛 피해 분쟁이 잇따르고 있다. 대법원은 이달 3일 경기 성남시 분당 정자동 네이버 본사 인근 주민들이 네이버를 상대로 제기한 ‘태양 반사광 손해배상 및 방지청구’ 소송에서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네이버에 책임이 없다는 원심을 깬 것. 재판부는 “빛이 유입되는 강도 시기 기간 위치 등을 종합적으로 따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빛의 차단 여부만 따지는 일조권 침해 기준으로 반사광 피해를 판단한 2심이 잘못됐다는 의미다. 유사 소송이 줄을 잇게 됐다.
▷재판부는 “아파트에 유입되는 빛은 시각장애를 일으키는 기준치의 440배 이상”이라고 지적했다. 기준치는 m²당 2만5000cd(칸델라·양초 1개 밝기)이다. 실내에 양초 수천만 개의 빛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대법원은 올 3월에도 부산 해운대아이파크 아파트에서 반사된 빛 피해에 대해 시공사가 인근 주민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인근 아파트에서 측정된 반사광은 기준치의 2800배에 달했다.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껴야 할 정도다.
▷건축가들은 “국내 건축주들은 유리에 대한 환상이 있다”고 말한다. 통유리 건물을 유독 선호한다는 뜻인데, 보기에 시원하고 깔끔한 게 사실이다. 사옥이라면 개방적이고 투명한 기업 이미지도 줄 수 있다. 하지만 여름철 냉방비가 많이 들고 겨울에는 열손실이 크다. 게다가 고층 건물이라면 일조권 침해와 빛 반사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 일조권은 법으로 규정돼 설계에 반영되지만 빛 반사에 대한 규정은 없다.
▷네이버 사옥은 빛의 내부 유입량을 조절하는 ‘루버’가 설치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외부로 반사하는 빛은 고려하지 않았다. 법원 판결로 외벽에 루버를 설치하거나 필름을 입혀야 할 상황이다. 런던 워키토키빌딩의 반사광은 건축주 수익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임대료가 비싼 고층부를 넓히려고 가분수 모양으로 짓다 보니 건물 외벽이 오목해져 거대한 렌즈가 됐다. 두 곳 모두 건물을 짓는 입장에만 집중해 외부 피해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건물이 밀집된 곳에서는 안쪽 못지않게 바깥도 살피라는 게 대법원 판결의 의미일 것이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6-07(월) 또 바뀐 국정원 원훈
각국 정보기관의 모토엔 ‘혼’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모사드의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가 대표적이다. ‘4000년 디아스포라’의 고통이 스며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본부 벽에 새겨놓았다. 10일로 창설 60주년을 맞는 우리 국가정보원 원훈(院訓)이 5년 만에 또 바뀌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다.
▷1961년 ‘한국형 CIA’를 표방하며 출범한 중앙정보부의 모토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은 “응달에서 묵묵히 일하는 걸 몰라줘도, 국정 책임자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쓰면 그게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다”는 취지였다고 했다. 애초 최고권력자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JP는 뒤늦게 회고록에 “음지와 양지 정신이 훼손됐다”며 책임을 느낀다고 했지만, 태동할 때부터 나쁜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이종찬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은 CIA 분석국장을 지낸 셔먼 켄트의 ‘정보란 지식이다’라는 정의를 본떠 ‘정보는 곧 국력이다’로 원훈을 바꾸겠다고 보고했다. DJ는 ‘곧’을 빼고 휘호를 써주었다고 한다. 또 휘호 아래 ‘대통령 김대중’이라는 글을 새기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실제 원훈석에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 당장 지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름은 빠졌지만,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원훈이 바뀔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DJ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교체된 데 이어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또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바뀐다. 딱히 바뀐 원훈에 심오한 메시지가 담긴 것 같지도 않다. DJ 정부의 원훈석도, MB 정부의 원훈석도 모두 폐기됐다.
▷이번에 바뀐 원훈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 바로 국정원의 본령”이라고 한 발언을 압축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이른바 ‘신영복체(어깨동무체)’를 썼다고 한다. 문 대통령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과 같은 서체다. 스파이 활동을 ‘비밀절도’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이중 스파이를 ‘두더지’라고도 한다. 목숨을 걸고 일한다. 또 그래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원훈이 바뀌니 사명감을 주기보다 묵묵히 일하는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6-08 따로 사는 노인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밀라노 할머니)를 운영하는 장명숙 씨(69)는 2030세대가 열광하는 멋쟁이 할머니다.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다녀와 패션 바이어로 활동했던 경력을 살려 패션과 인생 상담을 해주는 채널인데 구독자가 81만 명이 넘는다. 미혼인 아들 둘이 있는 그는 “며느리가 생긴다면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며느리는 손님, 내 아들과 같이 사는 여자죠.”
▷40년 넘게 유럽을 오가며 ‘왜 유럽엔 없는 고부 갈등이 우리에겐 있지?’ 자문하다 내린 결론이란다. 밀라논나처럼 ‘힙’하지 않아도 요즘 노인들은 자녀와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가 65세 이상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녀와 동거를 원하는 비율이 2008년 32.5%에서 지난해엔 12.8%로 줄었다. 노인 단독 가구(부부 또는 1인 노인 가구) 비율도 같은 기간 66.8%에서 78.2%로 늘었다. 개인소득이 연간 1558만 원으로 증가한 데다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노인들의 ‘독립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자녀와 독립해 사는 쪽이 삶의 만족도도 높다. 2018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노인 부부만 따로 살 경우 만족도가 가장 높고 △노인 부부와 자녀가 함께 사는 가구 △배우자 없이 자녀와 사는 노인 △홀몸노인 순으로 만족도가 떨어졌다. 특이한 점은 남성 노인은 1인 가구로 살 때, 여성은 배우자 없이 자녀와 살 때 만족도가 가장 낮다는 사실. 남성은 혼자 사는 삶에 취약하고, 여성은 남성보다 경제력이 떨어져 자식에게 의존하는 것에 더욱 미안함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복지부 조사에서는 자녀와의 왕래는 줄어든 반면 친구나 이웃과의 교류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년의 사회적 관계망이 가족에서 벗어나 다각화하고 있다는 뜻인데 사회적 관계망이 두꺼워야 행복해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집안일을 부탁하거나, 많은 돈을 빌리거나, 이야기 상대가 될 사람이 3명 이상인 노인은 한 명도 없는 노인보다 행복도가 18.2∼22.1% 높다.
▷해외의 경우 생애주기별 삶의 만족도는 나이가 들수록 떨어져 중년에 바닥을 찍은 뒤 올라가는 ‘U’자형을 그린다. 하지만 한국 노인들의 행복도는 확실한 U자형으로 반등하지 못한다. 노인 빈곤율이 4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4.8%)의 3배로 높은 것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노인 인구 비중이 2025년이면 20%가 된다. 모든 늙어가는 부모들의 바람대로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년을 위한 경제적 사회적 안전망을 튼튼히 짜야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09 일대일로 맞불 놓기
역사에는 늘 맞수가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고대 로마 시대에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맞수였다. 프랑스 혁명 후 나폴레옹 시대에는 프랑스가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맞붙었다. 프랑스의 세력이 약화되자 독일이 유럽 대륙의 새 강자로 부상해 두 차례 세계대전의 불씨로 자라는 가운데 중동과 아시아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충돌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과 소련이 맞수였다. 오늘날은 미국과 중국이 맞붙고 있다.
▷중국은 동쪽과 남쪽으로 태평양에 면해 있고 북쪽과 서쪽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이어져 있다. 청나라 때는 바다 쪽 방어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해방파(海防派)와 대륙 쪽 방어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새방파(塞防派)로 나눠 다퉜다. 수세적이었던 청나라와는 달리 오늘날의 굴기하는 중국은 바다 쪽으로는 군사력을 앞세워, 대륙 쪽으로는 경제력을 앞세워 진출하고 있다. 후자가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이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중국 자금을 대고 인프라 건설 등을 지원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으로 중국의 서진(西進)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군사적 동진과 남진은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 충돌,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난사군도 충돌로 나타났다. 홍콩 접수와 대만 위협은 중국의 군사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군사적 진출을 막기 위해 일본 호주 인도와 인도태평양 동맹을 강화했다. 미국은 그동안 자국과 관련되지 않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일대일로 정책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기로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5일 일간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세계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은 중국에 대한 높은 수준의 대체재(代替財)를 제공할 것”이라며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선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세계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은 주요 7개국(G7)을 말한다. 11∼13일 영국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에서 일대일로에 대한 대체재로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G7의 협조융자 시스템이 논의될 것이라고 외신들이 보도하고 있다.
▷미국은 냉전 시대에 소련과 동유럽 국가를 향해 봉쇄 정책을 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가 군사적 경제적으로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막은 것으로 궁극적으로 공산권의 몰락을 초래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동맹과 함께 중국의 경제적 서진에도 맞불을 놓기로 한 것은 중국을 동쪽 남쪽 서쪽에서 유연하게 봉쇄하는 신(新)봉쇄 정책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는 점점 더 깊이 신냉전 시대로 빠져들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6-10 구급차 양보 의무
5분. 노래를 한두 곡 듣거나 그저 멍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는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소방차·구급차 등 긴급자동차엔 인명을 구하고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 ‘골든타임’이다. 소방관과 구급요원들은 출동시간을 당기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장 도착시간을 좌우하는 것은 교통 상황이다. 그런데 도로는 꽉 막혀 있기 일쑤다. 결국 운전자들이 얼마나 양보하느냐에 따라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미국과 캐나다에선 긴급자동차에 대한 양보를 규정한 법을 ‘move over law’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이 앉을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자리를 이동하는 것을 ‘move over’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긴급자동차가 나타나면 양보해야 하고 정차 중인 긴급자동차를 보면 차선을 바꾸거나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구급차가 출동하자 차들이 조금씩 이동하면서 길이 쫙 열리는 장면을 뉴스나 동영상에서 종종 보게 된다. 이를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해외에선 양보 의무를 어기는 운전자를 무겁게 처벌하는 곳이 많다. 미국 오리건주는 최대 720달러(약 80만 원), 캐나다는 최대 490캐나다달러(약 45만 원)의 벌금을 물리고 러시아에서는 면허정지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긴급자동차가 접근했을 때 비켜주는 것은 도로교통법에 적시된 ‘의무’이다. 하지만 위반에 대한 범칙금은 3만∼7만 원에 불과해 실효성이 낮다. 이에 경찰은 지난해 9월 범칙금을 상향하겠다고 밝혔지만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지난해 6월 발생한 ‘구급차 막은 택시’ 사건 이후 양보 의무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기사를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70만 명 이상이 동의했을 정도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긴급자동차에 양보를 하지 않아 적발된 건수는 2019년 8건에서 지난해 29건으로 오히려 크게 늘었다. 올해 4월에도 택시 기사가 응급환자를 태운 구급차와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5분이나 지체되는 아찔한 일이 벌어졌다.
▷응급실로 가는 도중에 숨지는 사람이 1년에 2만 명이 넘는다. 골든타임 내에 더 많은 환자를 이송했다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처벌 강화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일선 소방관들은 “내 가족이 아프거나 내 집에서 불이 났다는 생각으로 양보하는 시민의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호소한다. 구급차·소방차가 출동했다는 것은 급박한 상황이 벌어져서 누군가는 발을 동동거리며 1초라도 빨리 차량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헤아릴 시민의식을 갖고 있다면 양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11 ‘끝없는 변경’
미국 상원이 8일(현지 시간) 찬성 68표, 반대 32표로 통과시킨 ‘미국 혁신·경쟁법’이 올해 4월 발의될 때 붙었던 원래 이름은 ‘끝없는 변경법(Endless Frontier Act)’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7월, 미국이 전후에도 과학 최강국 자리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제시한 버니바 부시의 보고서 ‘과학, 끝없는 변경’에서 따왔다. 부시는 레이더, 페니실린, 원자탄 개발에 참여해 전쟁 승리에 기여한 미국 과학연구개발국(OSRD) 총책임자이자 ‘과학영웅’이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토드 영 공화당 의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은 향후 5년간 2500억 달러(약 279조 원)를 산업기술 분야에 투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어 하원 통과가 유력하다. 영 의원은 이날 “미래 세대가 새로운 ‘변경’을 바라볼 때 (중국의) 붉은 깃발이 꽂혀 있을 것인가. 우린 오늘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21세기에도 승리하기 위한 경쟁을 하고 있고, 이제 출발의 총성이 울렸다”며 환영했다.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등 신기술 연구개발에 1000억 달러(약 111조6000억 원), 반도체 제조능력 확대에 520억 달러(약 58조 원) 등을 투입하도록 한 법안은 바이든의 대중(對中) 견제 전략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8일 백악관이 공개한 ‘공급망 회복력 구축과 미국 제조업 활성화, 광범위한 성장 촉진’이란 제목의 250쪽 보고서에 중국은 458차례 등장했다. 100일 전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제약 등 4개 분야에서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할 방안을 만들라는 바이든의 행정명령으로 만들어진 보고서다. 기술·경제 분야에서 펼쳐질 미중 신(新)냉전의 작전지도인 셈이다.
▷보고서는 ‘한국’을 74번 거론했다. 80여 차례씩 등장한 일본, 대만보다 적지만 동맹국이자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인 한국은 중국을 배제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새로 짜려는 미국에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다. ‘삼성’ ‘LG’ 등 한국 기업 이름도 50번 넘게 나왔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44조 원 들여 미국에 반도체, 배터리 공장 등을 짓기로 약속한 데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바이든 정부의 강공에 중국은 역습을 준비 중이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반(反)외국 제재법’ 통과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중국을 부당하게 대우한 국가와 해당국 기업에 보복 수단을 마련하는 법안이라고 한다. 철저한 대비와 냉철한 판단이 없으면 한국이 한순간에 경제 전쟁의 파고에 휩쓸릴 수 있는 상황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6-12 백신 접종 1000만 돌파
“한국은 집단면역까지 2년 7개월이 걸릴 것이다.”
국내 코로나19 백신 접종자 수가 총 19만 명이던 4월 22일 미국 블룸버그가 내놓은 전망이다. 당시 하루 평균 접종 인구는 7만6000명. 그런데 백신 물량이 풀리고 일일 접종 인원이 수십만 명에 이르면서 블룸버그의 전망이 기분 좋게 빗나가게 됐다.
▷어제까지 1차 접종자는 1056만 명. 2월 26일 예방접종을 개시한 지 105일 만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추세라면 이달 말까지 목표치인 1300만 명보다 많은 인원이 1차 접종을 마치게 된다. 하루 100만 명 이상 접종이 가능한 든든한 의료 역량을 감안하면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4월 국회에서 공언한 대로 당초 목표보다 2개월 빠른 9월까지 3600만 명의 2차 접종도 기대해볼 수 있다.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건 백신 리스크보다는 효과가 훨씬 크다는 과학을 신뢰한 성숙한 국민들 덕분이다. 우선 접종 대상인 고령층은 방역당국의 우려와는 달리 “손주와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않겠다”며 적극적으로 접종에 나서 첫 단추를 잘 끼웠다. 덕분에 코로나 치명률은 1.35%로 낮아졌고, 부모 세대의 성공적인 접종을 목격한 중장년층은 “가족과 회사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잔여 백신 접종 대열에 합류했다.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가도 해야겠다 싶으면 무섭게 불이 붙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상반기 접종률 목표 25%를 초과 달성한다면 얀센 100만 명분의 기여가 적지 않다. 접종 대상의 특성상 ‘예비군과 민방위 한정판’ 백신으로 불리는 얀센은 1일 예약이 시작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완판’됐다. 1차 접종으로 끝나는 데다 “더운 여름 마스크 벗고 지내자”는 수요가 몰렸다. 얀센 접종 100만 명은 숫자는 적어도 방역에서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접종 대상이 이동량이 많은 젊은층이어서 감염 규모를 줄이는 효과가 크다.
▷일상 회복도 속도를 내고 있다. 14일부터는 야구장을 포함한 실외 경기장과 공연장의 입장인원 제한이 완화된다. 다음 달부터 1차 접종자들은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 5인 이상 모임 금지와 식당 영업시간 제한도 풀릴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감염 규모가 다른 나라보다 적은 현실을 감안해도 마스크 규제 완화는 이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4월 가장 먼저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을 때 접종률이 61%였다.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까지 마스크를 벗고 다닐 가능성도 있다. 자율에 맡긴 만큼 집단 면역에 이를 때까지는 마스크 쓰기에 정직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14 한일 약식정상회담 무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합병해 미국과 러시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인 2014년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미-러 정상이 깜짝 조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다른 정상들이 모인 방으로 몇 분 늦게 들어서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먼저 손을 들어 인사를 한 것. 푸틴 대통령이 다가가면서 두 정상은 7, 8분간 짧은 대화를 나눴다. 양국 관계가 껄끄러운 만큼 비공적인 ‘풀어사이드 미팅(pull-aside meeting)’으로 격을 낮춘 대화가 이뤄진 것이다.
▷풀어사이드는 ‘(대화를 위해) 불러낸다’는 뜻으로 보통 다자회의 중간에 회담장 한편이나 회담장 밖에서 열리는 비공식 약식 회담을 말한다. 국기 설치 등 격식을 차리지 않고, 수행자도 1, 2명에 그치거나 통역만 배석하기도 한다. 시간도 통상 20분을 넘기지 않는다. 일본어로는 ‘다치바나시(立ち話·서서 이야기함)’라고 한다. 우리말에는 정확한 표현이 없어 풀어사이드 형식의 약식 회담 정도로 풀어서 설명한다.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처음 대면했다. 12일 정상회의장에서 양 정상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어 같은 날 만찬장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숙 여사를 손짓으로 불러 함께 스가 총리 부부에게 먼저 다가가 1분 동안 대화하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포착됐다. 문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인 제스처를 보였지만 한일 정상 간 약식 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201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회담장에 도착하자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고 권해 돌발 회담을 이끌어냈다. 영어 통역관만 있어 아베 총리 발언이 영어로 옮겨지면 이를 다시 한국어로 바꿔 전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마련된 자리였다. 11분간 격식 없는 대화는 다음 달 두 정상의 정식 회담 성사로 이어졌다. 과거사 갈등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당시엔 한일 정상이 직접 만나서 문제를 풀어보자는 의지를 보여준 때였다.
▷약식 회담은 혈맹 간에 이뤄지면 홀대 논란이 나오기도 하지만 경색된 국가 사이에서는 관계 유지나 개선의 표시로 보통 해석된다. 이번에 한일 약식 회담도 열리지 않은 것은 답답한 양국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미일 정상은 이번에 10분의 약식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기대했던 한미일 약식 회담도 없었으며, 한미는 외교장관 회담에 그쳤다. 북핵 문제 해결이나 한일 관계 개선에 있어 한국과 미일 간에 온도차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6-15 공천 자격시험
비밀의 화원(Secret Garden)…. 정치학에선 공천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랜 역사의 서구 정당들도 공천 과정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점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너무 점잖은 것 같다. 특정 소수가 공천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거나 계파 나눠먹기, 줄 세우기가 횡행해온 우리 정치판에선 차라리 ‘살생(殺生)의 화원’ 정도가 더 적확한 표현 아닐까 싶다.
▷이런 공직 후보자 선출 과정에 한국 정당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이 도입될지도 모른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공천 자격시험’을 내년 지방선거 때부터 적용하겠다고 밝힌 것. 이 대표는 “공천을 받으려면 기초적인 자료해석 능력, 표현 능력, 컴퓨터 활용 능력, 독해 능력 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과 비슷한 자격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일부 아프리카 나라 정당이 “교육 수준 미달 및 문맹인 자는 후보 자격이 없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고 하지만, 직무 능력을 테스트하는 공천 자격시험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NCS는 National Competency Standards의 약자. 산업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지식, 기술, 태도)을 국가가 표준화한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의 필수 코스다. 이를 원용해 공직 후보자가 갖춰야 할 기본 능력에 대한 문항을 설계해 필기와 실기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게 이 대표 구상이다. 다만, 성적순이 아니라 운전면허 시험처럼 커트라인만 통과하면 된다는 것. 서너 차례 응시 기회를 주고 그래도 통과하지 못하면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얘기다. 현직 단체장이 다시 출마하는 경우에도 예외 없이 시험을 봐야 한다. 컴퓨터 활용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의 ‘컴맹’ 후보들 사이에선 당장 “정치와 컴퓨터 시험이 뭔 상관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 대표는 일단 자질 논란이 끊이질 않는 지방의원 등을 정조준한 것으로 보인다. 공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지역 유지로 행세하기 위해 지역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에 줄을 대 공천을 받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을 걸러내고 젊을 때부터 정치권에 진입할 의지가 있는 2030세대에게 길을 터주자는 취지라면 이 대표가 주창한 공천 자격시험 논의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자격시험이라는 용어가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해 서울과학고를 거쳐 미 하버드대를 졸업한 이 대표의 ‘실력 지상주의’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정의당에선 “시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반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이 대표의 발상은 관심을 끌 만하다.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되든, 지금까지 해오던 관행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6-16 ‘구하라법’
“피 묻은 손은 상속재산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게르만족의 법률 격언이 있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상속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유언을 통해 자녀의 상속권을 제한하고, 프랑스는 피상속인을 살해한 사람 등에게는 상속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상속권이 박탈되는 중대한 결격 사유들을 민법에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도는 아니지만 재산을 물려주기에는 괘씸한 경우가 종종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공산권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옛 소련도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8년 상속제를 폐지했다가 1922년 부활시켰다. 북한은 2002년 제정한 상속법에서 주택, 도서, 화폐, 승용차 등 구체적으로 상속을 인정하고 있다.
▷각국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직계존속이나 피상속인 등에 대해 살인, 살인미수 등 범죄를 저지르거나 유언장을 위조한 사람 등이 대상이다. 하지만 피상속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거나 부양 의무를 위반하는 등 사회 통념상 상속이 부적절해 보여도 직계존비속, 배우자, 형제자매의 상속권은 일정 부분 보장된다.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연락을 끊고 살던 희생자의 친모가 나타나 사망보상금의 상당부분을 가져가는 등 논란이 제기되는 사건이 여럿 있었지만 법은 바뀌지 않았다.
▷2019년 11월 가수 구하라 씨 사건은 이 문제가 크게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구 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12년 만에 나타난 친모가 상속권을 주장했고, 친모의 상속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구 씨의 오빠가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구 씨 부친에게 60%, 친모에게 40%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구 씨를 키우는 데 아버지가 기여한 점이 참작됐지만 친모의 상속권을 아예 뺏을 법적 근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에는 28년 만에 나타난 친모가 숨진 딸의 유산 대부분을 가져간 일이 있어 ‘제2의 구하라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부모 등에게 법원 결정을 거쳐 상속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민법 개정안이 어제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이른바 ‘구하라법’이다. 국회에서 이 법이 통과되면 앞으로 구 씨 모친 같은 경우는 상속을 받기 어렵게 된다. 법제를 손질하더라도 재물에 대한 사람의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상속 관련 분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법치의 기본원칙은 상속 문제에도 적용된다. 그 원칙은 자신의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면 법치국가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17 “여행, 참을 만큼 참았다”
여행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작가 김영하는 저서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막혔다가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내는 요즘엔 이런 이유도 있겠다. “이젠 코로나를 잊고 싶다. 참을 만큼 참았다. 일단 나가자.”
▷해외여행이 중단된 동안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던 유사(類似) 여행이 있었다. 올해 말까지 1년간 한시적으로 운행 중인 무착륙 국제관광 비행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반년간 1만6000명이 이용했다. 타국 땅은 밟지 못해도 면세쇼핑을 할 수 있는 ‘어쨌든 여행’이다. 이들의 면세점 구매액은 228억 원. 1인당 평균 142만 원을 썼다. 면세한도(600달러)를 초과하는 면세품을 사고 당당하게 관세를 낸 탑승객이 전체의 46%다.
▷하도 해외여행을 못 하니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 그리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온 게 편의점에서 파는 기내식 도시락이다. 제주항공과 GS25가 만든 도시락 뚜껑에는 항공권 형태의 설명서가 붙어있다. 해외여행 분위기를 내보겠다고 이 도시락을 집에 사와 일렬로 앉아 먹었다는 어느 가족의 얘기는 눈물겨울 정도다. 젊은층을 겨냥해 뉴욕과 프라하의 기내식 감성을 내세운 이마트24 도시락도 있다.
▷최근 트래블 버블(Travel Bubble·여행안전권역) 추진 계획 발표도 여행 욕구에 불을 지폈다. 트래블 버블은 협의 국가끼리 격리 없이 여행하는 것이다. 각 여행사는 백신 접종 고객 대상의 여행상품을 내놓기 시작했으며 아시아나항공은 1년 넘게 중단했던 인천∼사이판 노선을 다음 달 24일 재개한다. 여행과 소비는 심리다. 백신을 맞으면 어디든 해외로 떠나 쇼핑하고 싶다는 얘기들이 들린다. 백신 접종률 50%를 넘긴 미국에서 여행 수요로 샴페인 드레스 콘돔 매출이 급증하듯 국내에서도 최근 립스틱과 수영복 판매가 호조를 보인다.
▷일상으로의 회복을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주요 지표가 해외여행이고, 여행의 부수적 즐거움 중 하나가 쇼핑이다. 트래블 버블 시행을 앞두고 국내 면세제도를 이참에 손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내국인 면세 한도가 600달러에 그치고 면세품도 공항 인도장에서만 받아야 한다. 반면 중국은 하이난 특구의 면세쇼핑 한도를 10만 위안(약 1745만 원)으로 높이는 등 파격적인 지원으로 지난해 세계 면세점 시장 1위(중국면세점그룹)로 올라섰다. 그동안 글로벌 명품업계를 키운 게 여행자들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었다. 이 돈의 힘을 무시하면 안 된다. 참고 참았던 여행 욕구는 강력한 소비로 분출될 것이 분명하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6-18 서울문고 부도
미국의 대형서점 체인 반스앤드노블은 지난달 말 워싱턴주 커클랜드에 새 오프라인 매장 문을 열었다. 1994년 아마존의 등장으로 타격을 입어 1996년 1046개였던 매장 수는 현재 607개. 2년 전 취임한 제임스 던트 최고경영자(CEO)는 코로나19로 서점 문을 닫아야만 했던 기간을 지역 맞춤형 매장으로 변신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동네와 주민 특성에 맞게 서가의 구성을 다르게 하고 올여름에는 3개의 매장을 추가로 더 낸다는 계획이다. 오프라인 서점의 경영난이 갈수록 심해지는 한국으로선 먼 나라 이야기다.
▷그제 반디앤루니스 서점을 운영하는 국내 오프라인 3위 서울문고가 최종 부도 처리됐다. 서울문고는 1988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무역센터 지하 아케이드에 1587m²(약 480평) 규모로 처음 선보였다. 1980년대 김홍신의 ‘인간시장’ 등 밀리언셀러의 등장과 함께 교보문고(1981년) 서울문고 영풍문고(1992년)가 들어서던 시기가 국내 서점업계의 황금기다.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등 유명 예술단의 내한공연 주요 예매처도 서울문고였다.
▷국내 오프라인 서점은 갈수록 퇴조하고 있다. 책 8000여 권을 터널로 꾸며 복합공간을 표방했던 서울 을지로의 ‘아크앤북’마저 지난달 16일 경영난으로 영업을 종료했다. 서울 망원동의 중형서점 한강문고, 배우가 운영하던 합정동의 ‘책과 밤낮’도 폐업했다. 한강문고가 문을 닫으며 걸어둔 안내문에는 ‘시장 변화와 오프라인 독서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쓰여 있었다.
▷오프라인 독서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건 사실이다. 지금은 책도 독자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다. 아마존이 ‘항생제, 전기와 함께 인류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라며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내놓은 게 벌써 14년 전이다. 20, 30대는 모바일 기기에 수만 권의 책을 넣어 들고 다닐 수 있는 전자책을 선호한다. 요즘엔 오디오북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 책을 귀로 ‘듣는다’. 운동하거나 이동 중에 들으면 책 한 권이 뚝딱이다.
▷그런데도 세계의 이름난 서점들이 집중하는 부분은 ‘온라인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오프라인 경험’이다. 1906년 문을 연 포르투갈 포르투의 렐루 서점은 입장료가 있는데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끼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일본 쓰타야 서점은 철저한 데이터 분석으로 지역마다 최적화된 콘텐츠를 큐레이션한다. 오전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문을 여는 도쿄 다이칸야마 쓰타야의 음반코너 소파에서 LP음반을 듣는 것은 ‘나만의 경험’이 된다. 국내에도 서울 스틸북스와 속초 동아서점 등이 나만의 특색을 시도 중이다. 사람이든 서점이든 ‘나다움’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6-19 델타 변이의 습격
마스크 없는 여름을 기대하던 코로나19 백신 접종 선진국들이 복병을 만났다. 코로나 변이 중 전파력이 가장 센 델타 변이 바이러스다. 지난해 말 인도에서 처음 발견된 델타 변이는 하루 6만∼7만 명을 감염시키며 인도를 초토화한 후 전 세계 80여 개국으로 번져 나가고 있다. 올가을 델타 변이가 북반구에서 또 한 차례 대유행을 일으킬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델타 변이는 지난달 중순 세계보건기구(WHO)의 ‘우려 변이’로 지정됐다. 알파(영국) 베타(남아공) 감마(브라질)에 이은 4번째 우려 변이다. 백신 접종을 가장 먼저 시작한 영국은 성인의 60%가 2차 접종까지 마쳤지만 델타 변이가 우세종이 되면서 일일 확진자 수가 1만 명대로 폭증했다. 영국 정부는 21일로 예정된 방역규제 전면 해제를 4주 연기했다. 중국 광저우는 델타 변이 확산으로 이달 초 봉쇄됐으며, 미국은 델타 환자 비중이 10%가 되자 15일 델타 변이를 미국 내 우려 변이로 지정했다. 한국은 변이 바이러스 감염자(1964명) 가운데 델타 환자가 155명으로 알파(1663명) 다음으로 많다.
▷델타 변이는 알파 변이보다 전파력이 30∼100% 강하고 중증도 이행률은 알파의 두 배다. 증상은 코로나보다는 독감에 가깝다. 백신 접종에서 제외된 학생들과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델타 변이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데 독감인 줄 알고 방심하다 피해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독일은 어린이 델타 변이 환자가 나오자 학교 부분 봉쇄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도 젊은층의 백신 접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고심 중이다.
▷델타 변이는 백신 1차 접종으로는 부족하고 2차까지 완료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 공중보건국에 따르면 화이자 2차 접종을 끝낸 경우 델타 변이에 감염될 확률은 79% 줄어들었다. 아스트라제네카(AZ)의 감염 방지 효과는 60%였다. 잉글랜드 공중보건국이 델타 변이 환자 1만4000명을 대상으로 백신의 중증도 이행 방지 효과를 분석한 결과 화이자는 96%, AZ는 92%였다. 백신을 두 차례 다 맞은 사람은 델타 변이에 감염돼도 가볍게 앓고 지나간다는 뜻이다.
▷바이러스는 대개 전파력이 강하면 치명률은 떨어진다. 영국에서는 14일까지 델타 변이 사망자가 42명 나왔는데 이 중 23명은 백신 미접종자이고, 7명은 1차 접종자, 12명은 2회 접종까지 마친 사람이다. 사망자 수가 적은 데다 2차 접종을 마친 사람은 대부분 고위험군이어서 확대 해석은 무리다. 지금으로선 델타 변이가 따라잡기 전에 서둘러 2차 접종까지 마치는 수밖에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1(월) 로톡 갈등
크고 작은 다툼이 법적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1년에 약 50만 건의 고소·고발이 벌어지고 500만 건 가까운 민사 소송이 제기되는 게 현실이다. 송사에 얽힌 시민의 눈에 법조문은 암호처럼 어렵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도 막막하다. 변호사와 상담하고 싶어도 얼마나 달라고 할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걱정이다. 변호사 3만 명 시대를 맞았지만 아직 변호사와 시민 사이의 거리는 가깝지 않다. 그 틈을 로톡 등 법률 플랫폼이 파고들고 있다.
▷시민들이 법률 플랫폼을 찾는 이유는 단순하다. 편하고 싸기 때문이다. 로톡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이혼, 성범죄, 임대차 등 70여 개 분야별로 변호사들이 등록돼 있어 원하는 변호사를 찾기 쉽다. 각 변호사는 다양한 방식의 상담을 제공하는데 15분 전화상담의 경우 최저 2만 원이다. 사건을 맡게 될 경우 수임료는 얼마인지도 공개하고 있어서 수임료를 놓고 ‘밀당’을 하지 않아도 된다.
▷로톡에는 약 4000명의 변호사가 활동하고 있는데 젊은 변호사가 많다. 인맥과 평판이 있는 전관 출신 변호사나 대형 로펌과 달리 젊은 변호사들에겐 로톡이 수임의 중요한 통로가 된다. 반면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변호사들은 로톡이 달갑지 않다. 법률 플랫폼이 커질수록 수임 경쟁은 치열해지고, 변호사 수가 늘면서 하락 추세인 수임료는 더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법률 서비스의 수준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변호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한변호사협회는 ‘로톡 등에 가입한 변호사는 8월부터 징계한다’는 취지의 규정을 만들었다. 징계가 현실화돼 변호사가 대거 탈퇴하면 법률 플랫폼은 생존하기 어렵다. 로톡은 헌법소원을 내고, 대한변협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면서 맞서고 있다. 여기에 대한변협을 감독하는 법무부가 이 규정을 직권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논란은 확산 일로다. 정보기술(IT)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서비스와 기존 사업자들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갈등을 ‘제2의 타다 사태’로 표현하기도 한다.
▷변호사는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고 법에 규정돼 있고, 공적인 기능도 하는 만큼 사회적 존중을 받을 필요가 있다. 반면 소비자인 시민으로서는 보다 낮은 비용으로 법률 서비스를 이용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여전히 수임료는 부담스럽다. 민사 본안 소송의 70% 이상이 변호사를 쓰지 않는 ‘나 홀로 소송’으로 진행될 정도다. IT와 법률이 접목된 ‘리걸 테크’가 확대되고 있어 대한변협과 로톡 간의 갈등과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 수 있는 만큼 충실한 논의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단, 해법의 중심은 국민의 편익이 돼야 할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22 집안일의 값은?
요즘 남성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는 재미가 쏠쏠할 뿐 아니라 유익하기까지 하다. 텃밭에서 직접 키운 로메인과 수제 리코타 치즈를 넣어 샐러드를 만들고, 두부와 콩가루를 갈아 홈 메이드 콩국수를 요리해 주말 가족메뉴로 내놓는다. 토종 오이를 구해서 항아리에 오이지도 담근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껴서일까. 많이 안 해봤던 집안일이 새삼 소소한 행복감을 주는 것일까.
▷통계청이 집안일의 경제적 가치를 어제 발표했다. 음식준비, 청소와 정리 등 61개 무급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했더니 그 가치가 연간 490조9000억 원(2019년 기준)이었다. 정부가 2018년 최초로 집안일의 가치를 발표했던 361조5020억 원(2014년 기준)보다 35.8% 증가한 수치다. 가사 부담의 남녀 비중은 약 3 대 7로 여성에게 치우쳐 있지만 그래도 큰 변화가 있다. 5년 전과 비교해 여성의 가사노동 가치가 30.4% 늘어난 데 비해 남성은 52.3% 급증했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가 늘면서 남성의 집안일 참여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무급 집안일은 무엇인가. 통계청은 집안일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생활시간조사’ 항목을 활용했다. 그중 제3자가 대신 해줄 수 없는 활동, 돈 받고 하는 일과 학습 등을 제외했다. 이렇게 나온 집안일은 시대 변화상을 반영한다. 반려동물 및 식물 기르기는 2014년에 단독 집안일 항목으로 분류됐다. 건조기를 쓰는 가정이 늘면서 세탁뿐 아니라 세탁물 건조도 집안일의 한 항목이 됐다.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 대화하기도 무급 집안일이다.
▷집안일은 가계생산 위성계정으로 평가된다. 국민계정의 틀 속에서 세부 내용을 반영하기에는 구조가 맞지 않는 특정 분야를 집중 분석하려고 만드는 계정이 위성계정이다. 하지만 집안일의 가치는 시장가치로 환산되는 것을 넘어 화폐로 교환되는 단계는 아직 아니다. 통계청 관계자도 “집안일의 경제적 가치가 현실지표로 활용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전 세계 여성들의 무급 가사노동 가치를 최저임금을 적용해 계산해 보도했다. 연간 10조9000억 달러(약 1경2379조 원·2019년 기준)다.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살림하는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집에서 논다”는 말을 농담으로라도 해서는 안 된다. 손자들을 돌봐주는 조부모 세대에게도 가능하다면 적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드려야 한다. 이번 통계청 발표치를 반영한 집안일의 평가액은 시간당 1만3891원. 하루 6시간 일한다고 가정해 계산하면 월 250만 원 상당의 노동이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6-23 온라인 흔드는 ‘부머쇼퍼’
서울 마포구에 사는 주부 장모 씨(54)는 코로나19가 터진 후 오프라인 쇼핑을 줄였다. 그 대신 야채와 과일은 생협의 주간배송, 일반 장보기는 쓰레기 배출량이 적은 업체의 당일배송 서비스를 이용한다. 명절에는 부모님께 모바일 쇼핑 앱에서 홍삼과 화장품 선물세트를 골라 보내드렸다. 장 씨 같은 5060 베이비붐 세대가 ‘부머쇼퍼’로 불리며 온라인 시장의 큰손으로 주목받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한국인 6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온라인 쇼핑 이용률은 69.8%로 전년도보다 5.8%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50대(60.2%)와 60대(31.4%)의 이용률 증가폭이 16.1%포인트와 10.6%포인트로 두드러졌다. 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부머쇼퍼가 지난해 온라인에서 결제한 금액도 전년보다 29.6% 늘어났다. 같은 기간 2030세대의 온라인 지출액 증가율(15.4%)의 배가 되는 규모다.
▷부머쇼퍼는 전후 출산율이 급등할 때 태어나 인구비중(28%)이 높고, 고도성장기에 청장년기를 보내 자산을 가장 많이 축적한 세대다. 기대수명 연장으로 스스로를 3040세대로 여긴다. 그래서 자식이 쓰는 제품을 따라서 쓰는 ‘대올림’ 소비를 한다. 부머쇼퍼는 아날로그 세대지만 컴퓨터로 직장생활을 하고, PC통신으로 연애하며, 삐삐 시티폰 폴더폰 스마트폰을 두루 섭렵한 덕에 디지털 기술에도 익숙하다. 두둑한 지갑과 디지털 마인드가 코로나를 만나 홈쇼핑 고객에 머물던 부머쇼퍼를 온라인 시장의 주력부대로 밀어올린 것이다.
▷부머쇼퍼는 서른이 넘도록 독립하지 못하는 ‘캥거루족’ 자식을 품고 살고, 따로 사는 노부모를 ‘원격 부양’하는 낀세대다. 3년 전 조사이기는 하지만 5060 10가구 중 7가구가 성인 자녀와 함께 살고, 5가구 중 2가구 이상이 노부모에게 월평균 36만 원의 경제적 지원을 한다. 손주가 있는 5060의 절반은 황혼육아를 한 적이 있다(미래에셋 은퇴라이프트렌드 조사보고서). 다 큰 자식과 노부모를 동시에 건사하느라 씀씀이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 사는 자녀가 온라인 최신 트렌드를 알려주는 ‘멘토’ 역할을 한 것도 부머쇼퍼의 이커머스 진입을 도왔다고 한다.
▷유통업계에선 부머쇼퍼가 저출산 저성장 기조의 장기화로 침체된 소비시장에 활력을 주리라 기대한다. 2030을 겨냥하던 업체들이 건강식품과 명품으로 품목을 늘리고, 모바일 앱의 글자를 키우고, 시니어 모델 대회를 개최하는 이유다. 나이 들어서도 대접받는 게 싫을 건 없겠지만 언제까지 부머들이 주역이 돼야 하나. 소비시장에도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4 의경 40년
‘다섯 걸음이라는 간격을 두고 이곳은 전쟁터였는데 저쪽은 우아한 일상의 한순간이었다.’ 2016년 처음 시위 현장에 출동한 의무경찰(의경)이 바로 옆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적은 글이다(금중혁, ‘금수저 의경 일기’). 얼마 전까지 평범한 시민이었다가 어느새 시위 진압의 최전선에 선 젊은이의 고충이 담겨 있다. 의경은 시위대에게는 ‘적’이지만, 의경 지망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의경이 탄생한 것은 1983년이었다. 기존의 전투경찰(전경)을 작전전경과 의경으로 나눠서 선발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의경은 교통, 방범 등 업무를 주로 하다가 2013년 전경이 폐지된 이후에는 시위 대응까지 도맡게 됐다. 시위 관련 임무 중에서도 차벽 위에 서서 시위대를 막는 게 가장 힘들어서 여기에 투입된 의경들을 ‘죽음의 조’라고 부른다고 한다.
▷처음부터 의경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것은 아니다. 2011년 이전까지는 경쟁률이 매년 2 대 1 미만이었다. 전·의경부대에는 특정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깨스’와 구타 등 가혹행위가 만연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1년 전·의경 제도 폐지를 권고하기도 했다. 이에 경찰이 기수 문화 타파, 가혹행위 부대 지휘관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의경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의경 고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모집 정원이 줄어들기 전인 2016년에도 의경 경쟁률이 18 대 1을 넘었을 정도다. 정기 휴가 외에도 주 2회 휴무 등 복무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고, 민간 지역에서 복무하는 것을 선호하는 지원자들도 적잖다. 인기가 치솟으면서 특혜 선발 논란까지 일자 경찰은 2015년 선발 방식을 면접에서 추첨제로 바꿨다.
▷문재인 정부는 군 병력 부족 현상 등을 완화하기 위해 의경 폐지 방침을 정했고 2018년부터 정원을 줄여 나갔다. 2017년 말 2만5900명이었던 의경은 올해 5월 말 6300명으로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2012년 2만 명을 넘었던 모집 인원도 올해는 985명에 불과하다. 이달 7일부터 마지막 의경 기수인 1142기 선발이 진행 중이다. 2023년 이들이 전역하면 의경 40년 역사가 막을 내린다.
▷의경의 빈자리는 직업 경찰관이 대체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 뽑는 경찰관 수는 기존 의경 규모의 3분의 1 정도다. 경찰은 집회 대비용 펜스를 비롯한 장비를 보강하고 있지만 시위 대응 역량 등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경찰관을 더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시위를 막기 위해 경찰관을 대규모로 동원하지 않아도 되게끔 시위 문화를 바꾸는 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25 특이한 ‘知의 巨人’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형의 언론인이자 지식인이다. 한편으로는 ‘일본 공산당’ ‘종합상사’ ‘농업협동조합’ 등 문과적 주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뇌사’ ‘원자력’ ‘우주’ 등 이과적 주제로 종횡무진 글을 썼다. 문과적 주제는 장기적 관점이 필요해 신문 기자가 파고들기에는 부담스럽고, 이과적 주제는 한참 발전하고 있어 대학교수가 다루기에 조심스러운 주제다. 그는 신문 저널리즘과 대학 아카데미즘 사이에 놓인 방대한 틈을 파고들어 특이한 지(知)의 거인(巨人)으로 인정받았다. 도쿄대 교양학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다치바나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다치바나는 1964년 도쿄대 불문학과 졸업 후 잡지사 문예춘추에 입사해 주간춘추에 배치됐으나 관심이 전무했던 프로야구 취재를 맡게 되면서 2년여 만에 퇴사하고 말았다. 다만 이때 한 선배의 영향으로 논픽션 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는 1967년 다시 도쿄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대학이 전공투 사태로 휴교에 들어가자 잡지 ‘제군(諸君)’에 ‘생물학혁명’ ‘석유’ 등의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잡지 저널리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다나카 가쿠에이, 그 금맥(金脈)과 인맥(人脈)’이란 글은 1974년 월간 문예춘추에 실은 글이다. 이 글은 일본 국민들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돈으로 정계를 주물러온 다나카 총리 퇴진의 계기가 됐다. 검찰은 다나카가 퇴진하자 총리 재임 시 미국 항공기 제작사 록히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자민당 내 다나카파는 반발해 다른 파벌까지 규합해 검찰 수사를 막지 않는 후임 미키 다케오 총리를 해임하기로 합의까지 했다. 하지만 나중에 검찰총장이 된 요시나가 유스케를 주임검사로 한 도쿄지검 특수부는 다나카를 전격 체포하고 결국 기소하기에 이른다. 일본 현대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이다.
▷다치바나가 올 4월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뒤늦게 사망 사실이 알려졌다. 그는 한 주제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수십 권의 책을 읽고 취재에 나섰다고 한다. 생전에 읽은 수많은 책을 도쿄에 있는 지상 3층, 지하 2층짜리 빌딩에 보관했다. 그는 국내에도 번역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란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대학은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는 곳이 아니다. 대학은 스스로 배우는 곳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바보 같은 대학생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자신이 알고 싶은 모든 주제에 관해 스스로 배워 글을 쓴 사람의 말이니 귀 기울여볼 만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6-26 마지막 신문 앞의 긴 줄
레닌이 1917년 10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시정부를 전복한 이튿날 내린 첫 번째 조치는 당시 1위 신문인 사회혁명당(SR) 계열 ‘볼랴 나로다’의 폐쇄였다. 이 신문은 다음 날 ‘볼랴’로 이름을 바꿔서 나왔고 편집진이 체포된 이후에는 ‘나로드’로 이름을 바꿔 나왔다. 레닌은 작가 막심 고리키의 신문까지 폐쇄하는 건 주저했으나 그마저도 이듬해 여름 폐쇄하고 말았다. 비판 언론이 사라진 곳에 관영 ‘프라우다’의 세상이 펼쳐졌다.
▷북한 노동신문이 1997년 5월 26일자에 3개면에 걸쳐 ‘대남공작 영웅1호 성시백’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해방 정국에 신사복에 중절모 차림으로 명동 일대를 휘젓고 다녀 ‘명동백작’으로 불린 성시백은 공작자금으로 ‘조선중앙일보’ ‘광명일보’ 등 10여 개 신문을 만들어 선전활동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전에는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이용한다. 레닌도 그랬다. 그러나 혁명에 성공하자 돌변해서 언론의 자유를 짓밟았다.
▷중국 ‘런민(人民)일보’도 관영이다. 이때 관영은 정부에 속한다는 의미의 관영이 아니라 당에 속한다는 의미의 관영이다. 공산 국가에서 정부와 구별된 당의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가 선전이다. 런민일보와 그 계열인 ‘환추(環球)시보’ 등의 기자는 다 공산당원이다. 지방 신문도 마찬가지다. 공산당원이 아니면 기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의 머릿속에는 통치자를 비판하는 언론(press)이란 개념은 없고 통치자를 선전하는 매체(media)란 개념만 있다.
▷홍콩의 대표적 반중(反中) 신문인 타블로이드판 핑궈(빈果)일보가 폐간됐다. 핑궈는 사과란 뜻이다. 창립 당시 금지된 과일인 선악과를 생각하며 사과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성역 없는 비판이 이 신문의 사시(社是)나 다름없었던 모양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많은 홍콩 언론이 중국 자본을 받아들이며 중국 비판을 외면했지만 핑궈일보만은 비판의 각을 세웠다. 하지만 중국이 지난해 10월 통과시킨 홍콩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사주와 편집국장을 체포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하는 상황에 이르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핑궈일보의 일일 발행 부수는 통상 7만 부였다. 그러나 홍콩 당국이 12일 사주를 연행하고 신문사 압수수색을 실시하자 이후 구독 수요가 치솟아 55만 부까지 팔렸다. 24일 폐간호는 100만 부가 발행됐다. 많은 홍콩 시민들은 가판대에서 마지막 신문을 샀다. 가늘게 오는 빗속에서 누구는 비를 맞으며, 누구는 우산을 쓰고 한 부의 신문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선 모습이 마치 소리 없는 자유의 아우성처럼 들려 가슴이 먹먹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6-28(월) 치매의 다른 이름
대한정신분열병학회는 2007년 환자 가족 동호회로부터 건의서를 전달받았다. ‘정신분열(精神分裂)’, 즉 정신이 갈라지고 찢어진 병이라는 이름이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며 병명을 바꿔달라는 주문이었다. 학회는 병명 개정에 뜻을 함께하는 단체들과 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한 끝에 2010년 ‘조현(調絃)병’으로 바꿔 부르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명칭 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학회 이름도 ‘대한조현병학회’가 됐다.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는 뜻이다. 마음이 엉켜 정신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의 은유적 병명이다. 개명 과정에서 “너무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렇기 때문에 낙인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반론이 우세했다. 같은 이유로 간질은 뇌전증, 나병은 한센병으로 오래전부터 바꿔 부르고 있다. 환자의 인권을 위한 병명 개정은 치료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일본에선 2002년 정신분열병을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으로 바꾼 뒤 병명을 당당히 밝히고 치료받는 환자들이 늘었다고 한다.
▷주로 20대에 증상이 나타나는 조현병과 달리 치매(癡呆)는 노년에 시작되는 뇌질환이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어리석은 미치광이’라는 뜻의 ‘치매’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3.8%였다. 대체 용어로는 ‘인지저하증’이 일순위로 꼽혔고 이어 ‘기억장애증’ ‘인지장애증’ ‘인지증후군’ ‘인지증’ 순이었다. 일본에선 2004년부터 인지증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병명이 바뀌면 교과서 질병분류표 관련법도 모두 바꿔야 하므로 개명엔 시간이 걸린다. 환자의 인권과 함께 병명의 활용도도 감안해야 한다. 복지부는 2014년에도 같은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용어 변경(21.5%)보다는 유지(27.7%)를 지지하는 비율이 높다. 널리 알려진 용어를 바꾸면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45%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의견이다.
▷65세 이상 고령자 가운데 치매 환자는 75만 명으로 10명 중 1명꼴. 3년 후엔 1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치매란 단어를 쓸 일이 많아질 테니 ‘삶의 위엄을 내려놓아야 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개명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만하다. 얼마 전 치매를 일으키는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 치료제 ‘아두카누맙’이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앞서 FDA의 승인을 받은 4종과 달리 병의 근본적 원인인 인지능력 감소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1년 약값은 5만6000달러(약 6300만 원). 싸고 효과 좋은 치료제가 치매를 바꿔 부르기 전에라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9 학력차별금지 논란
학력에 따라 채용과 승진의 기회가 달라지는 건 공정한가. 학력차별을 금지하는 문제를 놓고 국회와 정부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되자 교육부가 “과도한 규제”라며 반대 의견을 낸 것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나이 인종 학력(學歷) 등을 이유로 고용 등에서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안도 학력에 따라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두 법안 모두 악의적 차별에는 손해액의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물리는 규정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학력은 성 연령 국적 등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요소와 달리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고 △학력을 대신해 개인의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표준화된 지표가 없는 상황이라며 ‘학력’을 뺀 수정안을 냈다가 논란이 되자 “재검토하겠다”고 한 상태다.
▷학력차별을 없애자는 주장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제기돼 왔다. 학력은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으므로 사회적 불평등이 대물림되고, 10대 때 얻은 학력이 평생을 좌우함에 따라 대학 간판을 위한 소모적 경쟁이 벌어지며, 중고교 교육마저 입시 위주로 왜곡된다는 논리였다. 서울대 폐지, 공공기관 학력규제 완화 등의 제안이 쏟아졌고,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엔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개정돼 학력차별 금지 조항이 처벌 규정 없이 들어갔다.
▷학력차별 금지가 진보정부만의 어젠다는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대학 진학률이 80%로 너무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학력차별금지법안을 냈다. 그때도 인재 채용은 기업 고유의 권한이고, 학력과 실력이 무관하다고 볼 수 없으며, 좋은 대학에 가려는 개인의 노력과 좋은 대학을 만들려는 대학들의 노력을 부정하는 법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돼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4년엔 고용정책기본법에 학력차별 금지 조항이 처벌 규정 없이 신설됐다.
▷현 정부 들어 공공기관들은 학력을 가리고 보는 블라인드 채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 후에도 신입사원 중 이른바 ‘SKY’ 출신 비율엔 큰 변화가 없고, 단순 업무에 고학력자를 배치하는 기관과 입사자 간 미스매치로 신입사원 이직률만 높아졌다고 한다(한국조세재정연구원 6월 발표). 학사·박사학위를 얻기까지 들인 노력과 비용과 시간이 같을 수 없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차별금지법은 ‘노력금지법’이 된다. 기회는 평등해야 하지만 결과가 같기를 바라는 건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30(수) 코로나發 귀농귀촌 바람
교사였던 신하연 씨는 꽃을 좋아해 플로리스트로 변신했다가 아예 꽃 농사꾼이 됐다. 귀농 7년 차인데 꽃을 찾는 벌에 착안해 양봉도 한다. 전주희 씨는 부모님의 양계장 일을 돕다가 구운 계란 등을 판다. 신선 계란을 바로 가공하는데 연매출이 10억 원을 넘는다. 둘은 강원도에서 꽤 성공한 청년 농부다. 아이디어와 의욕이 넘치고 온라인 활용도 익숙하다. 이런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농촌으로 가는 젊은층이 늘고 있다.
▷지난해 귀농귀촌 인구가 전년 대비 7.4% 증가했다. 49만4569명이 농촌으로 갔는데 서울 관악구나 경북 포항시 인구와 비슷한 규모다. 눈에 띄는 것은 젊은층의 귀농이다. 30대 이하 귀농 가구는 1362가구로 역대 최대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 농촌 생활에 관심이 많아진 데다 취업난으로 농업에서 기회를 찾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도 귀농귀촌을 증가시킨 요인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내놓은 ‘농업·농촌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도시민 41.4%가 귀농귀촌 의사를 갖고 있다.
▷기대와 달리 현실은 만만치 않다. 귀농귀촌 인구의 30% 이상이 5년 이내에 도시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고 한다. 귀농귀촌 2∼3년 차가 최대 고비다. 가진 돈은 줄고, 수입은 기대에 못 미치고, 현지인과의 갈등도 커지는 등 악재가 겹치는 때다. 농림축산식품부의 ‘귀농귀촌 인구의 정착 실패’ 보고서는 귀농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가족 갈등을 꼽고 있다. 주로 아내는 원치 않는데 남편이 귀농을 밀어붙인 경우다. 부부 싸움이 잦아지면 ‘역귀농’은 예정된 수순이다.
▷젊은 귀농인들은 첨단 농기계를 전기차 테슬라에 빗대 ‘농슬라’로 부른다. 실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한 자율주행 트랙터까지 나와 있다. 정보기술(IT)을 접목한 스마트 농업도 확산되고 있다. 민승규 전 농식품부 차관은 “과거처럼 노동집약적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젊은 세대가 귀농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대기업의 스마트 농업 진출이 번번이 좌절된 것은 아쉽다. 기업 투자로 첨단 농업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농촌 생활을 경험하는 ‘농촌에서 살아보기’ 사업을 올해 88개 시군에서 내년 100개로 늘릴 예정이다. 전국의 모든 지자체가 귀농귀촌 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런 곳을 적극 활용할 만하다. 1인 귀농가구 비중이 2018년 68.9%에서 지난해 74.1%로 증가했는데, 가족 중 한 명이 먼저 귀농해서 정착 준비를 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먼저 가든 같이 가든 가장 중요한 귀농귀촌 준비는 가족 간 합의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