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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13/ 한반도 외교6/ 유주열의 외교 칼럼2/ 2017.01.26 ‘설날에 젓가락을 떨어뜨리면 운수 대통’ - 12.18 왕후닝(王滬寧)과 남만왕 맹획

상림은내고향 2021. 6. 28. 19:50

대한민국13/ 한반도 외교6/ 유주열의 외교 칼럼2/  중앙일보

2017.01.26 ‘설날에 젓가락을 떨어뜨리면 운수 대통’

/실내에 거꾸로 걸린 복 (福) 자. [중앙포토]

 

사드의 후폭풍을 맞은 설날 아침(元旦)

설 명절 연휴다. 음력 새해 아침인 우리의 설 명절은 중국의 최대 명절 춘제(春節)연휴와 겹쳐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국을 찾아오는 유커(遊客)들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금년에는 사드 후폭풍으로 유커가 끊긴 화장품점이나 관광지의 한산한 모습이 보도되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이 더욱 노골화되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의 중국 공연마저 취소되었다. 중국이 2년 전 스스로 초청한 베이징 상하이 등 순회공연이 느닷없이 취소되자 한중간의 사드 갈등이 갈 때까지 가는 것이 아닌지 아연할 따름이다. 이러한 가운데도 우리의 전통 명절 설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설은 그 해 최초의 태양이 뜨는 ‘첫 아침’ 즉 원단(元旦)을 말한다. ()의 글자를 보면 지평선에서 태양이 오르는 모습이다. 설날을 정월 초하루라고도 한다. 중국은 하() () () 시대부터 새해 첫 달을 정월(正月)이라고 불렀다. 그 후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서만 정월을 부르지 못하고 단월(端月)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진시황의 이름 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설 명절, 춘제(春節) 그리고 테트()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사회는 농사와 관계되는 달()의 주기에 의해 결정되는 음력(陰曆)을 사용하였다.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음력이 좀 더 과학적인 양력(太陽曆)으로 바뀌어 새해 첫날인 설도 양력에 양보해야 했다. 과거의 설은 구정(舊正)이 되었다.

중국을 위시하여 화교권인 타이완 홍콩 그리고 민속을 중시하는 한국 베트남 등은 음력설을 쇤다. 베트남에서는 설을 테트()라고 부른다.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에 베트콩(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의 주요시설을 점령한 ‘테트 공세(구정 공세)’는 설 연휴 기간의 대공세였다.

새롭고 낯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전통 ‘설’은 과거에는 구정으로 불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도 줄곧 양력설(新正)을 쇠다가 민주화와 함께 국민들의 민속 전통명절이 중시되어 다시 음력설을 쇠고 있다.

중국은 신해혁명으로 양력을 공식화하고 1913년부터 새해 첫날 원단을 양력에 따르고 과거의 음력 원단은 시기가 입춘과 비슷하다고 하여 춘제(春節)로 고쳐 불렀다. 지난 2013년은 중국으로서는 춘제 제정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중국에서는 춘제를 맞아 고향방문을 하는 민족 대이동을 춘운(春運)이라고 부르고 있다. 


()을 받으려면 복자를 거꾸로 붙여라

우리의 설 명절을 맞이하면서 필자가 홍콩과 중국에서 지낸 춘제가 생각난다. 춘제가 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것이 ‘(恭喜發財)’다. 문자 그대로 ‘돈 버는 것을 축하 한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역시 ‘비단장사 왕 서방‘의 나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새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춘제에는 새해 다복하기를 바라는 의미의 ‘신니엔 콰이러(新年快樂)’라는 인사를 하면서 세배(拜年)도 빠지지 않는다. 세배를 받는 손위 사람은 세뱃돈(야수이첸 壓歲錢)을 주게 되는데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붉은 봉투(紅包袋)를 준비하여 그 속에 정성들여 넣어 주어야 한다. 붉은 색은 축하의 의미와 함께 악귀를 쫓아낸다는 미신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맘때 시골에 가면 집안에 복()자를 붙인 것을 가끔 보게 된다. 중국에는 그 복자가 대부분 거꾸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특히 시골의 대문짝에 붙어 있는 상하(上下)가 바뀐 복자를 보고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잘못 붙였거나 누군가가 장난으로 글자를 돌려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뒤집혀 걸린 복을 중국어로 ‘다오푸(倒福)’라고 한다. 뒤집힌다는 다오()는 도착을 의미하는 다오()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다오푸(倒福)’는 ‘다오푸(到福)’가 된다. 복이란 글자가 뒤집혀야 복이 나에게 실제로 도착한다는 현실적 의미로 바뀐다.
 

‘설날에 젓가락을 떨어뜨리면 운수 대통’

중국에는 긍정의 발상이 강하여 나쁜 말도 같은 발음의 좋은 뜻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동음연상(同音聯想) 습관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숫자 8을 좋아하는 것도 8의 발음이 돈은 번다 발재(發財)의 발()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2008 8 8일 오후 8시에 개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새해에 젓가락을 떨어뜨리면 운수대통이라는 말이 있다. 언젠가 베이징에서 지인 부부와 신년에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식사를 하다가 잘못하여 손에 쥔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당황하여 복무원을 부르려고 하고 있는데 지인 부부는 ‘신니엔 콰이러’(新年?)하고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새해에 젓가락(?)을 떨어뜨린다()는 ‘신니엔 콰이러(新年?)’는 새해 다복하기를 바란다는 ‘신니엔 콰이러(新年快樂)’와 발음이 같다. 따라서 새해에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으로 한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운수 대통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축하해 준 것이라고 한다. 


금지된 바오주(爆竹)

중국의 춘제 분위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오주(爆竹)’라하여 화약으로 연결된 불꽃놀이다. 이맘때면 온 마을 이 바오주 터지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룬다. 바오주는 바오주(報祝)와 같은 발음으로 축복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옛날 대나무를 태울 때 나는 소리로 악귀를 쫓아냈다는 풍습에서 유래한다.

최근에는 바오주가 터질 때 나오는 연기가 미세먼지가 되어 도시의 스모그를 악화시키고 화재의 우려도 있다고 하여 베이징을 위시하여 대도시에는 바오주 금지령이 내려져 있다. 실제로 2009년 중국 중앙텔레비전(中國中央電視臺 CCTV) 신축 본사건물의 화재는 바오주의 불꽃이 건축자재에 옮아 붙어 발생된 것이었다


정유년 닭의 해는 한중 양국의 길상의 해

새해 음식으로 자오즈(餃子)라는 만두를 빚어먹는 습관이 있다. 자오즈의 모습이 반달 모양으로 옛 중국의 돈의 모습이라 하여 돈을 많이 벌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지만 새해가 지난해와 교차한다는 의미의 자오즈(交子)와도 발음이 같아 자오즈를 즐겨 먹는다고 한다.

 

자오즈와 함께 닭고기()와 생선()이 빠지지 않는다. 닭고기의 계()는 길상(吉祥)의 길(), 생선의 어()는 여유로움의 여()와 발음이 같아 두 음식을 먹음으로서 한 해 좋은 일과 풍요로움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중국과 사드 문제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미국을 겨냥하여 한국에 소리 지르는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 보였는데 최근에는 살계경후(殺鷄儆? 닭을 죽여 원숭이를 훈계한다)의 저의가 있다고 본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등장으로 동아시아의 지정학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아 미국과 주변국을 훈계한다는 것이다.

금년은 붉은 닭의 해이다. 중국은 고유의 긍정적 연상(聯想) 마인드를 살려 수교이후 25년간 한중 양국이 협력하여 이루어 낸 수많은 성공사례를 기억해야 한다. 한국을 살계의 닭으로 보지 말고 길상의 닭으로 연상하여 금년 한해 한중 양국 국민의 길상의 한 해가 되도록 특단의 외교노력을 기대해 본다.

 

02.22 정유재란을 다시보자

/영화 '명량' 스틸컷.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설명절과 보름을 거치면서 명실 공히 정유년(丁酉年)을 느낀다. 금년은 12지 간지로 60년 만에 찾아오는 정유년으로 420년 전 정유재란(1597) 7주갑이 되는 해이다. 얼마 전 한국의 KBS에서 ‘임진왜란 1592’ 라는 TV 드라마를 방영하여 임진왜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임진왜란(1592-1596)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유재란(1597-1598)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일부로 생각하여 관심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임진왜란은 일본군에 의해 침략을 당한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 낸 승리의 전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중에 일어난 전쟁이다.

1592
4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20만 명의 일본 육군을 부산에 상륙 한양(서울)을 향해 북상시키고 수군으로 하여금 보급물자를 싣고 남해와 서해를 돌아 강화도와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 육군은 계획대로 파죽지세로 북상하였으나 수군은 한산도 해전 등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대패하고 만다. 한반도 육지의 지형은 첩자에 의해 파악되었으나 남해안의 양()이라는 조류가 빠른 좁은 수로에 대해 사전 지식이 부족하였다.

육군은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조총이란 개인 화기로 우세하였지만 수군은 거북선 등 특수전함과 천자(天字) 또는 지자총통(地字銃筒) 등 조선의 화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활약으로 제해권을 유지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서진을 막고 있었다. 한양을 함락시키고 평양성까지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수군에 의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조명(朝明)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성을 지키지 못하고 한양으로 퇴각한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휴전협상을 제의하고 1593 4월 점령지 한양을 버리고 전군을 남하시켜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에서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4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일본과 명은 협상에 진전이 없자 상대가 항복하였다면서 자신들의 조정을 속이기로 결론을 내고 협상을 종결시켰다. 명의 대표 심유경(沈惟敬)은 만력제(萬曆帝)를 속였으나 일본 대표 고니시는 도요토미를 속이는 데 실패하였다. 협상의 진실을 알게 된 도요토미는 크게 분노하여 재침을 명령한다. 해가 바뀌어 정유년(1597) 1 15만의 일본군을 다시 조선 침략에 투입한다. 


정유재란과 남해안 왜성

임진왜란이 경상도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전라도(호남) 전쟁이라고 한다. 조선 재침을 명령한 도요토미는 반드시 전라도를 점령할 것을 강조하였다. 임진년의 실패는 군량미 보급을 위한 한반도의 곡창 호남 점령의 실패로 분석되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신념으로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의 호남 진입을 막았다. 육지에서는 김시민 장군이 호남의 관문 진주성에서 일본군을 좌절시켰고, 북으로는 전주 인근의 이치(梨峙) 전투에서 권율 장군이 일본군을 대패시켰다.

일본군은 재침하자마자 정보전을 통해 조선 조정을 교란시켜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키는데 성공한다. 일본 수군은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대패시키고 일거에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 전라도를 통한 한양 진격에 나선다.


일본군은 계획대로 남원과 전주성을 함락 호남을 점령하였으나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에 의해 북상이 저지되었다. 임진년과는 달랐다. 조선은 귀순한 왜군(降倭)의 도움으로 신무기 조총제작에 성공하였고 명나라로부터 본격적인 지원군이 파견된 상황이었다.

전쟁이 뜻대로 안되자 일본군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양민을 납치 학살하고 전승의 증거로 코와 귀를 베어가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 교토(京都)의 귀무덤(耳塚)은 대부분 전라도에서 베어 온 코와 귀를 묻은 곳이라고 한다. 전라도에서는 정유재란을 큰 재앙을 가져다 준 정유재란(丁酉災亂)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유재란의 승기를 잡은 명량해전 

1597년 음력 9월 전사한 원균에 이어 이순신 장군은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鳴梁)해전에서 소수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막아내는 기적적인 승리로 일본군을 다시 공포에 떨게 하였다. 사실 선조는 원균에 의해 수군이 궤멸된 것을 전해 듣고 수군의 해체를 지시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유명한 장계로 선조를 설득했다.

이순신 장군은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하면 살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리더십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명량해전은 2014년 영화화 되어 1761만여 관객을 동원, 당시 세월호 참사로 집단 우울증과 절망감에 빠진 한국 국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제해권을 빼앗긴 일본군은 서울 진격을 포기하고 유사시 퇴각하기 유리한 남해안에서 왜성(倭城)을 쌓고 군사력 방어에 치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왜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사천왜성에서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왜성에서 각각 장기 농성을 도모하였다. 


정유재란 전적지 탐방

명나라는 병부상서 형개(?)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육군은 조선의 권율 장군, 수군은 이순신 장군과 각각 연합육군과 연합수군을 결성, 농성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는 ‘4로병진(四路竝進)’의 전법을 구사하였다.

마귀(麻貴)를 울산왜성을 공격하는 동로(東路) 사령관, 동일원(董一元)을 사천왜성을 공격하는 중로(中路) 사령관, 류정(劉綎)을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서로(西路)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수로(水路) 사령관인 진린(陳璘)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광양만 해전에 투입하였다.

지난 해 말 필자는 정유재란의 현장인 순천왜성과 노량해전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역사탐방의 기회를 가졌다. 우리 일행은 버스로 서울을 출발 4시간여 만에 순천에 도착하여 일박을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조명연합 육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검단(劍丹)산성을 올랐다. 백제시대 쌓은 산성의 일부인 검단산성은 해발 138m의 야산으로 버스에 내려 산성까지는 도보로 20분정도의 거리였다. 1598 9월부터 2개월간 도원수 권율 장군과 명나라 류정 장군이 지휘하던 서로(西路) 사령부를 상상하면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니 2.7km 떨어진 광양만이 펼쳐진다.

광양만과 함께 고니시가 축조한 왜성의 잔재도 보였다. 기록에 의하면 왜성은 바다로 둘러 싸였다는데 모두 매립되어 산업단지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육지의 일부가 되었지만 순천왜성과 가까운 광양만의 장도(獐島 노루섬)에는 광양만 해전을 지휘하고 고니시군의 출로를 봉쇄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제독의 수로 사령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소재 순천왜성으로 내려갔다. 왜성을 축성할 때 고니시는 인근 야산의 흙을 파내어 축대를 쌓고 해자(垓字)를 만들어 바닷물을 끌어넣었다. 순천왜성은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근세 성곽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해자 위에 다리를 놓아 밤이면 다리를 끌어 올려 왜성을 섬처럼 만들었다. 순천왜성이 다리가 보이는 왜교성(倭橋城) 또는 끌어 올리는 다리가 있는 예교성(曳橋城)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고니시의 특별한 축성에 기인한다. 순천왜성은 외곽의 산노마루(三の丸) 니노마루(二の丸)와 함께 중심이 되는 혼마루(本丸)와 천수각이 축조되었다.

천수각은 우리나라 성곽에 없는 일본 특유의 구조물이다. 16세기 전국(戰國)시대의 일본을 찾아 온 그리스도 선교사의 영향으로 교회의 천주당 모양으로 지어 처음에는 천주각(天主閣)으로 불리었다가 천수각(天守閣)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무장들은 축성할 때는 주변을 관찰할 수 있는 망루 역할을 할 수 있는 천수각을 반드시 지었다.

순천왜성은 여수반도의 좌우 광양만과 순천만을 연결하는 잘록한 허리에 축조된 성으로 바다와 육지를 양쪽에서 막아내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다. 순천왜성은 직산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고니시 군대는 구례를 거쳐 순천에 내려 와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일본군 1 3천 여 명이 주둔했다는 순천왜성의 건물은 물론 남아 있지 않지만 성의 진입로와 천수각 기단은 보수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의 천수각 기단에서 올라서니 광양만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악명 높은 고니시는 오사카(大阪) 근처 사카이()의 약재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장이라기보다 상인이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독교 교인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세스페데스’ 스페인 신부를 종군시키기도 하고 싸우는 것보다 협상에 능하여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철군과 노량해전 

일본군이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방어에 진력하는 사이 해가 바뀌어 1598 8월 도요토미의 사망소식과 함께 전군 철수의 명령을 받는다. 고니시는 안전한 철군을 위해 육지에서는 류정 장군, 바다에서는 진린 제독에게 뇌물을 주어 협조를 요청한다.


류정과 진린은 고니시의 무혈 철군을 보장하려고 하였는지 모르지만 이순신 장군의 강력한 반대로 조명연합군은 광양만을 봉쇄하고 고니시 군대의 철군을 막았다. 고니시는 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인근 사천왜성의 시마즈 군대의 엄호지원이 필요했다. 시마즈 군대는 고니시의 철군을 지원하기 위해 광양만으로 향하였다. 광양만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좁은 수로인 노량(露梁)을 통과해야 한다.

광양만에서 퇴로를 막고 있던 진린 제독과 이순신 장군은 일부 봉쇄를 풀고 노량에서 멀지 않은 남해 관음포(觀音浦)에 매복하여 시마즈 군대의 노량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1598년 음력 11 19일 자정을 넘긴 야음을 타서 시마즈 군대가 노량으로 진입하였다. 조명연합수군은 시마즈 군에 일제히 공격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쟁은 한낮이 되어서야 시마즈 군이 많은 전사자를 버리고 퇴각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등자룡 대교’와 정유년 합동 진혼제 

전쟁의 와중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流彈)을 맞아 쓰러졌다. 적의 포위에 빠져 전사하게 된 진린 제독의 부장 등자룡(鄧子龍) 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나섰다가 유탄을 맞았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쓰러지면서 “전황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유언을 남겼다.

진린 제독은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의 공적을 “천하를 경륜할 인재로 그의 전공은 하늘을 메울 만큼 크다(有經天緯地才 補天浴日之功)”고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진린 제독의 후손 3000명 정도가 광동 진()씨로 살고 있다. 명이 망하자 청()군의 추적을 받은 진린 제독 손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명연합수군과 시마즈 군이 싸우고 있을 때 고니시 군은 여수 앞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빠져 나가 일본으로 달아났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등자룡 장군을 포함하여 이름 모를 조선과 명의 수군 그리고 침략군인 일본의 수군이 전사하였다.

우리 일행은 남해 고속도로를 통해 광양만 위에 건설된 이순신 대교를 건너 경상도로 향했다. 버스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섬진강 다리를 건너 노량해전의 전적지 노량대교를 건넜다. 노량은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말 그대로 큰 별이 떨어진 곳이다.


다리를 건너면 남해 충무사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가묘를 모신 곳이다. 고금도(지금의 완도)에 장군의 시신이 옮겨 가기 전에 일시 머문 곳이라고 한다. 조명연합수군이 기습을 위해 전함을 숨겨 둔 남해의 관음포로 갔다. 인근의 전망대에서 보면 멀리 광양만과 순천왜성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것 같다. 남해와 순천이 전연 딴 곳처럼 생각했는데 같은 바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순직한 노량해전은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 해전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2012년 여수 세계 박람회를 계기로 광양만을 가로 지르는 2개의 대교가 건설되었다. 하나는 ‘이순신 대교’이지만 하나는 광양만 묘도(猫島 고양이섬)의 이름을 따서 ‘묘도 대교’로 부르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순국과 함께 칠순의 나이에 이국(異國)의 겨울바다에서 목숨을 던진 등자룡 장군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묘도 대교’를 순직 420주년이 되는 내년(2018) 한 해만이라도 ‘등자룡 대교’로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현지에서 만난 향토 사학자들은 420년 전 한중일 동아시아 국제전에서 숨진 조선 중국 일본 병사들의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 선조들의 고혼을 위해 합동 진혼제(鎭魂祭)를 올리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서 용감히 싸운 조선 병사와 함께 이국의 땅에서 지원군 또는 침략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들을 위한 진혼제이다.

정유재란 때 희생된 병사들을 위해 금년 정유년에 길일(吉日)을 잡아 합동 진혼제를 올려 한중일 삼국의 희생자 후손들이 화해의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420년 만에 정유재란을 재조명하면서 한중일 삼국이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와 번영의 미래 건설을 바라는 마음을 안고 서울로 돌아 왔다.

 

03.30 사드 보복의 출구를 찾아라

/중국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져 한산해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중앙포토]

 

중국의 사드 보복

지난 해 7월 사드(THAAD 薩德反導系統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가 결정된 이래 중국은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국은 대통령이 탄핵 심판으로 임기 중에 파면되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정국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한국으로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은 고통을 주고 있다.

중국내에서는 한국 상품의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유커(遊客 중국관광객)로 사람이 발붙일 곳이 없던 서울의 면세점은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다. 최근 제주도에 기항한 크루즈 선박에서 하선이 예정된 3400명의 유커들이 ‘애국적이고 문명적 행동’이라면서 하선을 거부하였다. 수많은 버스가 공치고 유커들 맞을 준비에 바빴던 관련 업체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금년 8월이면 한중 수교 25주년이 된다. 25년이면 강산도 몇 차례 바뀌는 세월이고 그동안 두 나라 사이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것을 생각하면 중국의 사드 보복은 상상이 안 될 정도이다. 경제적으로 많은 피해를 본 한국인들은 황당하고 허탈해 한다. 


불가피한 자위 조치

2015 10월 중국의 전승절 천안문 열병식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서방국가 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한국의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한중관계는 밀월(蜜月)관계로 표현되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한국의 지나친 중국 경사에 우려의 소리마저 나왔다한중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오랜 친구(라오펑유 老朋友)관계가 된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북한의 도발이었다. 북한은 2016년 한해에만 두 차례의 핵실험을 했고 24번의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여 한국을 위협하였다. 중국만이 북한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크게 믿은 한국으로서는 실망과 함께 신뢰도 무너졌다. 특히 북한 미사일의 고각도(lofted) 발사가 성공하여 한국과 미국은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도 없는 사드 포대를 들여오기로 결정하였다. 


사드 보복에 대한 낙관론과 현실

과거 '마늘파동'을 통해 중국의 경제보복을 경험한 한국 기업들은 사드 배치 결정으로 중국의 ‘사드 보복’을 우려하고 있었으나 중국이 쉽게 보복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도 강했다. (필자가 2016 725자 본란에 기고한 “사드 문제로 중국이 경제보복을 못하는 3가지 이유”참조)

 

 

사드 문제로 중국이 경제보복을 못하는 3가지 이유

지난 사드(THAAD 薩德反導系統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가 결정되자 중국은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대중 수출이 전체 수출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경제에 대한 영향과 재중 100 교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작년 박근혜 대통령이 자유세계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천안문 열병식에 참석

 

http://news.joins.com/article/20354846

 

우선 한중 양국은 ‘마늘파동’때와는 다른 환경에 있다. 양국은 WTO(세계무역기구)의 가맹국이고 더구나 한중간에는 한중 FTA(자유무역협정)가 체결되어 두 나라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영향으로 세계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무역으로 경제를 성장시킨 중국으로서는 남중국해에 대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 판결에 따라 미국과 일본 등 서방국가와 사이가 틀어진 마당에 한국과 같은 무역과 투자에 있어 최선의 파트너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두 번째는 ‘차이나 플라스 원’이다. 중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인건비의 상승 등으로 투자환경이 나빠져 우리 기업은 ‘차이나 플라스 원’(언젠가 중국에서 물러날 때를 대비 중국 이외의 베트남 라오스 등 투자처를 물색)의 방침으로 이미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반도체 산업 등 중국으로서도 불가결한 핵심 산업뿐이다.

마지막으로 양국의 의존적 무역구조이다. 한중간에는 서플라이 체인(부품 공급망)이 되어 있어 한국의 설비 중간재 등 부품을 수입하지 않는다면 중국 기업은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기가 어렵다. 한중경제는 23각 경기의 선수들처럼 한 사람이 무너지면 다른 사람도 따라서 무너지게 되어 있는 상호 의존구조이다.

흔히들 농담반 진담반으로 중국은 불의(不義)는 참아도 불이익(不利)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중국도 한중 양국의 경제 협력이 서로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경제보복으로 판을 깨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중국의 사드 보복이 한창이었던 지난 3월에 반도체와 철강을 중심으로 한 대중 수출은 오히려 16% 정도 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이 한국의 부품소재 수입을 봉쇄한다면 중국산업의 폐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부품 소재는 사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수입이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자국의 이익과 관계가 비교적 적은 유통산업과 한류 등 문화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양국 간 불요불급한 교류를 차단하고 한국으로의 단체관광 송출을 막은 것이다. 이것은 양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더라도 일반인들에게는 피부로 직접 느끼는 분야로 충격의 감도는 훨씬 높다


대북 제재에 실패한 중국

사실 사드 배치 문제가 거론 된 것은 3년도 넘었다. 그 동안 한국은 중국이 북한의 김정은 정권을 철저히 제재하여 핵 포기를 끌어내어 사드 배치가 필요 없게 되기를 바랬다. 따라서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중국을 믿고 ‘불요청-불협의-불결정’이라는 3불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중국도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따라 북한을 제재하기 위해 나름대로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기술이 점차 고도화 되고 김정은 정권은 더욱 호전적이 되어 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최근 자신의 트위트에서 “중국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China has done little to help!)”라는 평가를 하였다.


중국이 우려하는 사드 레이더

사드는 탄도탄요격미사일(Anti-Ballistic Missile ABM)의 일종이다.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는 상승단계(Boost-Phase), 중간단계(Midcourse-Phase) 그리고 종말단계(Terminal-Phase)가 있다. 사드(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THAAD)는 이름 그대로 종말단계에서 요격하는 것인데 PAC-2 또는 PAC-3처럼 낮은 단계가 아니고 높은 단계에서 요격한다. 사드는 탐지 시스템인 AN/TPY-2 레이더(고성능 X밴드)에서 보내 온 정보를 통해 표적을 수색 파편탄두 방식이 아닌 직격(Hit to Kill) 방식의 운동에너지로 적의 탄도미사일에 충돌 파괴시킨다.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드의 눈이라고 부르는 AN/TPY-2 레이더이다. 우리는 종말모드(Terminal Mode)로 운영되어 600km 정도밖에 탐지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전진배치모드(Forward Base Mode)로 바꿀 경우 최대 2000km 떨어진 중국 내륙을 탐지할 수 있고 이것이 미국의 글로벌 미사일 방어(MD)체계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가 사드 탐지 시스템은 종말 모드이기에 중국이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누차 강조해도 중국은 믿지 않는다. 일본이 동해안에 2대의 AN/TPY-2가 전진배치모드로 중국을 탐지하고 있는데도 항의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없다.

유독 한국의 탐지 시스템을 불신한다면 사드 포대를 직접 운용하는 미국과 담판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4월초 개최 예정인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 간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군사적 상호 신뢰를 구축하면 풀릴 문제로 본다. 


왕창령의 일편빙심(一片氷心)

중국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고 중국에 많은 지인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은 오해에서 비롯된 중국의 일방적 사드 보복을 납득하지 못한다.

()대의 문인으로 왕창령(王昌齡 698-755)의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이라는 시()가 있다. 왕창령이 강소성 진강(鎭江)에서 친구(辛漸)를 떠나보내면서 낙양의 지인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전해 오해를 풀고자 지은 시로 생각된다. 

한우연강입오(寒雨連江入吳)
차가운 밤비 강물을 따라 오나라 땅으로 흐르는데
평명송객초산고(平明送客楚山孤)
이른 아침 친구 떠나보내니 초나라 산이 외롭게 보이는 구나 낙양친우여상문(洛陽親友如相問)
낙양의 벗들이 내 소식을 묻거들랑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항아리에 담겨있다고 전해주게

사드 배치가 중국을 겨냥하여 위해(危害)를 주는 것이 아니고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비한 순수한 자위 조치라는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一片氷心)’을 중국의 벗들이 알아주어 오해를 풀기를 바라는 것이 한국인들의 심정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된 중국의 출구전략

중국의 사드 보복에 대한 미국은 매우 비판적이다. 미국의 틸러슨 국무장관은 대국답지 않은 치졸한 조치라고 하였고, 미국의 하원에서는 중국의 사드 보복 철회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하였다. 세계 주요 언론들은 사드 보복은 중국으로서도 자해행위(self defeating)로 제 발등을 찍는 일로 보고 있다.

사드 보복으로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던 한국이 오히려 스프링처럼 더 튀어 오른다. 한국의 국회에서도 여야 각 당의 원내대표가 모여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조치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중국의 고사성어 ‘살계경후(殺鷄儆猴 원숭이를 경고하기 위해 죄 없는 닭을 죽인다)’가 떠오른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한국은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에 죄 없이 죽어야 하는 닭의 처지가 된 셈이다.

중국은 그간 한국인에 대한 공공외교로 따놓은 점수를 다 잃고 있다. 사드 보복이후 한국에서는 ‘치졸한 대국’ ‘소아병적인 대국’이 중국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중국은 사드가 한국에게 주는 의미를 잘 못 파악한 것이다. ‘경제는 먹고 사는 것이지만 안보는 죽고 사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몰랐던 것이다.

미중 정상 회담을 앞두고 중국은 사드 보복의 출구전략을 찾는 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의 자칭궈(賈慶國)원장의 사드 보복 신중론이 언론에 공개되고, 왕잉판(王英凡) 전 외교부부장이 방한하여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나 사드 보복은 ‘전략적 실수’라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사드 보복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중국정부도 “사드 보복은 정부차원이 아니고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중국정부는 오히려 말리고 있다“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민간차원’이기에 사드 보복의 속도를 조절하거나 중단하는 출구를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애국무죄’라는 말처럼 애국에 열성적인 중국 사람들도 사드 보복이 장기적으로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되지 않아 진정한 애국이 아님을 알게 되면 사드 보복도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다

 

미래지향적 한중관계

북한은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시험발사가 임박했다고 예고하는 등 끝을 모르는 도발로 한국의 사드 배치는 더욱 명분을 얻어 가고 있다. 중국이 주권국가의 방어용 무기에 보복하는 것은 주권국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국제사회의 여론도 좋지 않다.

G2
국가의 하나인 중국은 대국답게 미국과 통 큰 협상을 통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한국에 대한 일방적 경제 보복으로 한중 양국민의 감정의 골이 더 깊기 전에 출구전략을 찾아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한중 양국은 미래지향적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가일층 발전시켜 김정은 정권이 핵과 미사일을 결국 포기하는 것만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속에 살아 나가는 길임을 깨닫게 하여 사드가 필요 없는 한반도가 되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05.01천리포와 남이섬의 우정(友情)

계절의 여왕 5월에 가 볼 만 한 곳

5월이다. 그리고 긴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된다. 5월이면 중국과 일본에서도 노동절 연휴와 골든위크의 황금연휴가 시작된다. 예년 같으면 중일 양국에서 경쟁하듯이 관광객이 물밀 듯 들어 왔겠지만 금년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한다.

‘사드 보복’ 조치로 유커(遊客 중국관광객)들의 발길을 끊어진 지 오래고 일본의 관광객도 최근 한반도 위기설로 한국방문을 꺼리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들은 해외관광을 잠시 중단하고 노동절과 골든위크의 황금연휴 특수가 사라진 국내 관광지를 찾아봄이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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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벚꽃 등 봄꽃으로 화사했던 자연은 꽃이 지면서 잎이 나오기 시작한다. 싱그러운 신록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어디를 갈까 망설인다면 푸른 바다를 낀 서해안의 천리포 수목원과 맑은 강물이 풍요로운 북한강 상류의 남이섬을 찾아 가보기를 권한다. 두 곳에는 수목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의형제로 맺어진 미국인과 한국인과의 우정의 스토리가 있다


천리포를 찾아 온 미국의 해군 중위

1945 7 26일 연합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일본이 주저하자 미국은 8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일본은 드디어 8 15일 천황의 육성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이 물러가는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였다. 9 8일 미국의 하지 장군의 24군단이 인천으로 들어왔다. 미군정의 시작이다.

1946
년 칼 밀러(Carl Miller 1921-2002)라는 25세의 미 해군 중위가 일본 오키나와로부터 서울로 배속되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으로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콜로라도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워 해군의 일본어 통역장교로 임관되었다.

밀러 중위는 군정 업무를 끝내고 귀국 후 대위로 제대하고 1953년 다시 서울을 찾아온다. 이번에는 민간인으로 한국은행에 입사한다. 밀러는 여름이면 서울의 무더위를 피해 서해안 태안군 소원면 소재 해수욕장을 찾았다. 소원면은 태안반도의 가장 서쪽에 소재하면서 천혜의 해수욕장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해안선의 길고 짧음이 있어 북쪽에서부터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 해수욕장이 이어져 있다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천리포 수목원 [중앙포토]

 

밀러는 사람이 많이 북적거리는 만리포 해수욕장을 피해 천리포 쪽을 좋아했다. 그가 천리포에 자주 내려가자 그곳의 주민들과 사이가 좋아져 주민들의 권유로 해안가 버려진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당장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고 현금이 부족한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입장에서 1962년부터 월급을 털어 땅을 구입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한다. 1970년대는 서울의 집을 정리하여 천리포에 한옥을 준비하고 본격적으로 각 종 나무을 심고 화초를 가꾸자 제대로 된 수목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무지 같은 빈 땅에 나무를 심고 관리하다 보니 16만평의 규모에 수목 13,200 종류의 손색없는 수목원으로 발전하였다. 공익법인 천리포 수목원(Chollipo Arboretum)은 국제수목학회(International Dendrology Society)로부터 아시아 최초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되고 한국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민병도와 민병갈 의형제

/칼 밀러(Carl Miller, 민병갈 1921-2002) [중앙포토]

 

천리포 수목원에 가보면 설립자 밀러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다. 독신이었던 밀러는 미국에 사는 어머니를 모셔오고 1979년에 한국인으로 귀화하였다. 그의 한국이름을 민병갈이다. 밀러가 한국은행 입행이후 형제처럼 지낸 민병도(閔丙燾 1916-2006)의 영향을 받아 그의 성()과 항렬()을 따라 지었고 마지막 글자 ‘갈’은 ‘칼(Carl)’의 유사음이다.

민병도의 할아버지 민영휘(閔泳徽 1852-1935)는 명성황후의 집안 조카로서 조선 말기 고관을 지낸 귀족이었다. 민영휘는 이재(理財)에도 밝아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되어 국방헌금 등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협조하였다고 한다. 독립된 조국에서는 친일파로 분류되어 재산 환수 대상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가 1906년 세운 휘문학교는 그의 이름 ‘휘’에서, 그의 부인은 1944년 풍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풍’은 부인의 이름(安遺豊)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민병도(閔丙燾 1916-2006) [중앙포토]

 

민병도는 일본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 입행하였으므로 밀러의 상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5살 아래인 밀러를 동생처럼 아끼고 한국 정착을 도와주었다. 밀러가 천리포의 버려진 땅을 구입할 때와 나무를 심을 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민병도는 밀러를 통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나무를 심어 국토를 아름답게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젊을 때부터 출판사 설립 등 해방된 조국의 문화 창달을 위해 애써 온 민병도는 밀러처럼 나무 심고 가꾸어 아름다운 국토를 만들 수 있는 버려진 땅을 찾았다


남이 장군의 전설이 깃든 남이섬

1944년 일제는 경기도 가평군 북한강에 수력 발전소를 짓기 위해 청평 댐을 건설하였다. 댐 건설로 인공 호수 청평호가 만들어지고 북한강 상류의 마을들이 수몰되었으나 수몰되지 않고 섬처럼 남아 있는 ‘남이섬’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왕조 시대 억울하게 죽은 남이 장군의 묘소가 있다고 하여 남이섬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 초기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은 무예가 출중하여 16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한다. 당시 국왕 세조의 총애를 입어 세조의 함경도 차별정책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킨 이시애 일당을 평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는 무인 최고의 지위인 병조판서(국방장관)에 제수되었다.

세조의 총애를 받은 남이 장군은 주변의 질시를 피할 수 없었다. 세조가 죽자 그의 아들 예종은 부왕이 총애한 남이 장군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침 유자광 같은 간신의 이야기를 듣고 남이 장군을 역모죄를 씌워 처형한다. 처형된 장소가 지금 서울 시청 건물이 들어선 군기시(軍器寺)였다.

그가 죽은 후 그를 애석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그의 옷가지 등을 수습하여 여기 저기 무덤을 만들어 추모하였다는데 그 중 하나가 북한강 상류의 남이섬에 있었다. 남이섬은 겨울에는 강 위로 섬처럼 보이지만 여름 장마철에는 물에 잠기도 하는 쓸모없는 땅이었다고 한다.
 

푸른 섬과 맑은 강물의 한류관광 1 번지

/남이섬 [사진 한국관광공사]

 

한국은행에서 제 7대 총재를 역임하고 퇴직한 민병도는 밀러처럼 나무를 심고 개발을 할 수 있는 땅으로 북한강 상류의 남이섬을 생각하였다. 당시 강남 개발을 위한 땅 투기가 성행하고 있을 때 민병도는 1965년 퇴직금과 전 재산을 쏟아 넣어 13만평의 불모지 남이섬을 구입 메타세쿼이아 등 다양한 수종의 육림을 시작하였다. 강남이 아니고 멀리 남이섬에 돈을 쏟아 붓는 민병도를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밀러와 민병도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서해안 천리포에서 때로는 북한강 남이섬에서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두 사람의 집념으로 오늘날 서해안 천리포는 아시아 유수의 수목원으로 발전하였고 북한강 상류의 남이섬은 문화독립국 ‘나미나라 공화국’이라는 아시아 제일의 관광 휴양지가 되었다.

행정구역상 춘천시 소속인 남이섬은 이곳에서 촬영된 TV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4년 일본에 방영된 이래 한류관광의 1번지로 자리 매김하였다. 관광 성수기인 5월 사드 후폭풍을 피해 갈 수 없겠지만 꾸준한 관광객의 다양화로 지난 해 남이섬을 다녀간 사람의 국적은 127개국이 된다고 한다.

2002
년 밀러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민병도는 그의 유언대로 천리포 수목원 내에 수목장(樹木葬)으로 장례를 치루어 주고 4년 후인 2006년에는 자신도 세상을 떠난다. 한국 전쟁 후 황량한 한국의 산하를 푸르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민병도 민병갈 의형제의 거룩한 신념이 그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고 있다.

 

05.16 연해주와 한민족 ‘디아스포라’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크라스키노는 발해 사신들이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던 항구였다. 김현동 기자

 

발해의 옛 땅 연해주

‘디아스포라’라는 그리스어가 있다. 민족 집단이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민족이산의 의미이다. 우리민족이 과거 소련의 연해주에 많이 건너가 뿌리를 내렸다.

연해주는 우리 선조가 세운 발해의 옛 땅으로 간도와 함께 우리 민족의 생활터전이었다. 일제 강점 시대에는 일본이 접근하지 못하는 보호지역(sanctuary)이 되어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우수리 강을 건너 만주 지역의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고 연해주로 몸을 피하였다. 1909 10 26일 안중근 (1879-1910)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저격에 성공한 것도 연해주를 근거로 한 최재형 등 독립투사들이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연해주에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늘어나자 1937 10월 구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스파이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의 한인 20만 명을 강제로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 65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금년이 강제이주 8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카레이스키(高麗人)는 대부분 연해주 출신이다. 


김일성과 연해주

그 후 스탈린은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에 위협을 느끼고 항일 빨치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40년 초 소련 극동군은 하바롭스크 북쪽의 ‘비야츠코예’와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의 ‘라즈도리노예’라는 작은 마을에 남북으로 야영소를 만들어 일본 관동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온 중국과 조선의 항일부대를 수용 게릴라 훈련을 시켰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 항일 빨치산 부대도 관동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 비야츠코예 야영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소련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 가 조선 노동당 위원장이 되었다.

연해주(沿海州)는 문자 그대로 바다에 연해 있는 지역이다. 러시아에서도 ‘바다()’라는 의미로 ‘프리모르스키’라고 부르고 있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처음으로 만나는 바다가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동해이고 연해주는 동해 연안의 지역을 말한다. 


모피 사냥을 통한 러시아 극동진출

유럽의 강국 러시아가 극동의 연해주를 차지한 것은 유럽 귀족사회에서 인기 있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난방장치가 제대로 안된 유럽 사회에서는 모피 외투로 겨울을 견딜 수 있어 모피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모피 사냥꾼은 용맹한 코사크 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아무르(黑龍) 강을 따라 남하 처음으로 중국의 청조를 만난다. 만주족 청조는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하였지만 명()의 잔존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그 진압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과 러시아의 전쟁

청조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의 지원이 필요했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나선정벌’이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항복의 치욕을 당한 인조의 둘째 아들 효종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청조에 사신으로 다녀 온 신하가 조총을 잘 쏘는 군인 100명을 뽑아 나선 남하를 막는데 지원하라는 청조의 요구가 있었다고 복명한다.

오랜 기간 형님 소현세자 부부와 함께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하여 청국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한 효종도 ‘나선(羅禪)’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1654년 조선의 장군 변급이 인솔한 100명의 무사들은 아무르 강에서 코사크 군대와 조우한다. 코사크 군대는 아무르 강에서 전함을 띄워 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변급은 코사크 군대를 육지로 유인하여 사령관을 전사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린다.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군과 조선군의 전투에서 조선의 승리였다. 조선은 청조의 요청으로 한 차례 더 신유 장군을 파병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다


러시아와 중국과의 국경

청조는 조선의 지원으로 간헐적으로 남하하는 러시아군을 막아내면서 시간을 끌어 오다가 반란군을 평정한 강희제(康熙帝)는 코사크 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남하를 좌절시켰다. 청조의 반격에 부딪친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에서 국경을 정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천하의 땅이 천제(天帝 중국의 황제)의 땅으로 생각하는 ‘천하개념’으로 국경이 없었던 중국이 러시아와 국경조약을 처음으로 맺게 된 것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에서는 아무르 강 이북을 러시아 령으로 인정하고 아무르 강 이남과 우수리 강 동쪽 즉 연해주는 중국의 영토로 남았다.

사실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부동항을 노린 러시아가 정작 필요한 곳이 연해주였지만 강력한 청조의 기세에 억눌려 어쩔 수 없었다. 청조는 강희-옹정- 건륭제로 이어지는 최성기를 끝내고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쇠퇴해 가는 청조를 시험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청조와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는다. 러시아는 허약해진 청조를 위협 1858년 아이훈 조약을 체결했다. 연해주를 공동관리하자는 내용이다. 러시아는 ‘공동관리’라는 중간 단계를 두어 다시 기회를 기다렸다.

 

연해주 할양과 러시아의 동방정복 

청조가 영불연합군이 일으킨 2차 아편전쟁에서도 패하자 러시아는 재빨리 강화를 주선하고 그 대가로 청조로부터 연해주 할양을 받아낸다. 아무르 강 이남과 우수리 강 이동의 연해주가 드디어 러시아 땅이 된 것이다.

두 강이 만나는 아름다운 하바롭스크가 이 때 러시아 영토에 편입된다. 러시아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딴 하바롭스크는 고대 한민족의 일부였던 예맥(濊貊) 두 부족이 살던 곳으로 지금도 하바롭스크 시의 문장(市旗)에는 두 부족을 상징하는 호랑이() 토템과 곰() 토템이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들어 있다.

1860
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중국은 연해주를 완전히 잃어 동쪽 바다(東海)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해 연해주 최남단에 제국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을 건설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보스토크)을 정복(블라디)’는 말 그대로 러시아인의 꿈이 서려있는 항구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2 9 APEC 정상회의 개최 등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연해주 발전을 위해 한국에 손짓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을 생각한다면 한민족 디아스포라 발상지 연해주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본다.

 

06.12 실리콘 밸리 스토리

/실리콘 밸리 [중앙포토]

 

황금을 가져오는 골든 게이트

샌프란시스코의  북 캘리포니아는 지형이 특이하다. 태평양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해협을 통하여 내항으로 들어 가면 남북으로 길다랗게 베이(bay)라고 부르는 만()이 있다. 북쪽으로는  와인 산지 라파 밸리가 있는 노스 베이에서 , 남쪽으로는 스탠퍼드 대학이 있는 팰로 알토로 연결된 사우스 베이로 이어진다.

/이스탄불.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혼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엔 성소피아 성당ㆍ블루모스크등 비잔틴과 이슬람 문화의 정수가 모여 있다. [중앙포토]

 

이 통로는 터키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 가는 통로와 유사하다서양에서 일반적으로 한 바다에서 다른 바다로 들어 가는 좁은 해협을 ‘골든 게이트’ 또는 ‘골든 혼’이라고 부른다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러한 통로를 ‘골든 게이트’(Golden Gate金門)라고 부르지만 1840년대 이 지역에  황금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몰려 든 ‘골드 러시’ 이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이곳을 탐험한 유럽 사람들이  비잔틴 시대의 보스푸루스 해협을 지나 이스탄불의 내항을 ‘골든 혼(Golden Horn 金角 灣)’으로 부른 것을 연상하여 ‘골든 게이트’라고 불렀다고 한다‘골든 게이트’와 ‘골든 혼’의 의미는  좁은 해협을  통해  무역에  의한 골드()가 축적 될 것으로 예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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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은 블라디보시토크의 좁은 해협을 보고 보스푸루스와 같은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골든 혼’ 즉 금각만으로 불렀고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 있다.

샌프란시스코 항은 ‘금문’의 덕분인지 부가 축적되어 왔다. 부가 축적되자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는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캘리포니아 공화국의 국기에는 연어를 잡는 곰을 그려 넣었다그 후 캘리포니아 공화국은 미연방의 일부인 캘리포니아 주로 편입된다. 캘리포니아 주기에는 공화국 시대부터 내려 온 곰의 깃발을 그대로다. 


캘리포니아의 유레카

캘리포니아 주의 모토가 특이하다. 그리스 어인 ‘유레카(Eureka)’이다. 그리스의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물질의 밀도에 따라 비중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내고 기쁜 마음으로 맨몸으로 뛰쳐 나와  ‘유레카! 유레카!’하고 거리를 돌아 다녔다고 한다. ‘유레카’는 그리스어로. ‘나는 찾아냈다( I have found it)’라는 의미다.

‘유레카’의 모토처럼  캘리포니아가 찾아낸  것이 많다. 우선 황금을 찾아 내어 골드러시를 이루었고 그 후 석유를 찾아냈다. 지금은 뭣을 찾아 냈을까? 실리콘 밸리를 통해 4차산업혁명을 이루면서 미래  먹거리 를 찾아 내고있다.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퍼드 지사와 스탠퍼드 대학

/스탠퍼드 대학

 

샌프란시코 항구 안쪽의 사우스베이 근처에는 거대한 분지가 있다. 그곳에는 여름에  덥지 않고 겨울에는 비가 오면서 온화하다.  과거 스페인 사람들이 ‘랜초’라고 부르는 목장과 과수원이 많았던 곳이다.

이곳에  정치인으로서 영향력을 이용하여 태평양 연안까지 철도를 끌어 와 버려진 땅값을 올린 사람이 있다. 스탠퍼드(1824-1893)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그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다늦은 나이에  태어난 외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자랐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했다. 스탠퍼드 부부는 아들을 위해 유럽여행을 자주 다녔다. 외아들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  부모는  외아들이 좋아하는 그리스 로마의 고대 유럽을  답사하고  토로이 전쟁의 전설을 찾아 발굴 중이었던 터키까지 찾아갔다.

외아들은 터키에 서 로마로 돌아 오는 여객선에서 티푸스(typhus)에 걸렸다. 바닷바람을 잘 못 씌었는지 티푸스의 발진과 고열을 이기지 못하고 이탈리아 프로렌스에 도착하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외아들을 잃고 한동안 망연자실한 스탠퍼드 부부는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캘리포니아주의 모든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아들의 이름(Leland Stanford Junior)으로 학비 전액면제의 대학을 세웠다.  1891년 설립된 스탠퍼드 대학이다.  많은 돈을 투자하여 학비 면제의 대학을 세우니 미국 전국에서 인재가 모였다. 스탠퍼드 대학  주변의 팰로알토는 대학촌이 되었다. 팰로알토(Palo Alto)는 스페인 이름으로 ‘ 키 큰 나무’의 뜻이다. 근처에 지금도 하늘로 높이 솟은 나무들이 많다. 세쿼이어(美國衫)의 일종으로 측백나무과에 속한다


실리콘 밸리와 트랜지스터

세계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에게는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동맹관계였던 소련이다. 미국과 가치관이 전혀 다른 소련에 대한 적대관계는 과거 나치 독일과 제국 일본을 능가하였다. 미국은 소련과 경쟁해야 했다. 군사무기로 레이더에는 컴퓨터가 들어 간다. 증폭시설은 진공관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부피가 어마 어마 하였다. 레이더가 필요한 잠수함에 컴퓨터를 실으면 잠수함이 꽉 차기 때문에 승조원이나 무기를 실을 다른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미국의  학자들은 부피가 적은 진공관 대용품을 찾아야 했다. 미국 격언에  ‘창조를 자극하는데는 위기만한 것이 없다. (Nothing  stimulates  creativity like a good crisis.)’는 말이 있다.  1957년 벨 회사의  실험실에서 윌리암 쇼클리(1910-1989)와 동료들은 거대한 진공관을 대체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  트랜지스터는  이동(transit)을 제어(resister)하는 소자라는 의미의 조어이다쇼클리는 규소 결정체에  불순물을 넣으면  전도성이 급격히 변화하는 것을 알아 냈다.  온도에 따라 도체(導體)가 되었다가 부도체(不導體)가 되는 반도체(半導體)는 규소 즉 실리콘으로 만들어진다.

1957
  스웨덴의  노벨심사위원회는 쇼클리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했다. 쇼클리는  반도체의 상용화를 목적으로 벨 회사를 나와 실험실을 따로 준비했다. 어릴 때 자랐고  몸이 불편한 모친이 거주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멀지 않은 산타 클라라 군의  마운트 뷰에서 실험실을 열었다.  팰로알토 인근이다.

쇼클리의  실험실에는 인재들이 몰려 들었다.  인재들은 쇼클리의 천재성을 존경하지만 그의 편집증 과 괴팍한 지도 스타일을 싫어하였다. 그중 8명의 과학자들이 페어차일드의 자금 지원을 받아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이다. 쇼클리는 그들을 ‘8인의 배신자(traitorus eight)’라고 불렀다.

그 무렵 소련은 큰일을 낸다. 인공위성 소프투니크  발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소프투니크 쇼크’였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를  미국 우주항공 산업 발전을 위한 중심회사로 지명한다.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는 승승 장구한다.  쇼클리는  실의에 빠져 실험실을 닫고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가  된다. 


팰로알토의  창업자들

팰로알토에는 파크(PARC)가 있다. 뉴욕 주에 있는 복사기 회사 제록스의 연구기관이다. 제록스는  그리스 어  자이러그라피(zerography)에서 나왔다. 풀이하면 ‘마른 글쓰기(dry writing)’라는 뜻이다.  복사 기를 말한다. 제록스의 젊은 학자들은 연구실을 본사 근처에  두기를 거부하였다. 기계를 잘 모르는 본사  간부들로부터 미주알 고주알 간섭을 받기 싫어 했다그들은 본사에서 3000마일 떨어진 캘리포니아 주의 팰로알토에 연구실을 차렸다.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곳으로 이만 한 곳이 없었다.

부동산 개발로 스탠퍼드 대학은 돈이 많다.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팰로알토며 마운트 뷰 그리고 로스 알토스 등에는 스탠퍼드 대학 소유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이다. 값 비싼 땅에 집을 지어  렌트 수입이 만만치 않다.  스탠퍼드 대학은 이 돈으로 기금을 만들어 졸업생들의 창업 지원에 물 쓰듯이 한다.

컴퓨터 제조회사인 휴렛 팩커드사는 스탠퍼드 대학 졸업생 윌리암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스탠퍼드 대학 의 창업기금으로 대학인근의  차고를 빌려 설립한 회사이다. 회사 이름을 결정할 때 서로 자신의 이름이 먼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사람이 동전을 던져 결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팩커드가 이겼지만 양보하여 친구의 이름을 앞에 나오도록 회사명을 정했다고 한다.
 
1971
1월 미국의  어느 주간지의 기자가 스탠퍼드 대학  주변 사우스베이의  분지에 실리콘밸리라는 말을 처음으로 붙였다.  과거 목장이 있었던 랜초가 반도체(실리콘) 산업의 메카가 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휴대전화와 컴퓨터로  유명한 애플사를 창립한 스티브 잡스가 팰로알토에서  뿌리를 내리고 최근에는 전기자동차로 유명한  엘론 머스크가 창립한 테슬라가 이곳에서 사업을 키우고 있다. 팰로알토를 중심으로 하는 실리콘 밸리에는 인종에 관계없이 천하의 글로벌 인재들이 몰려든다후진국의 두뇌유출(brain drain)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실리콘 밸리는 국적이며 출신과 관계없이 재능(탤런트)만이 존경 받는 곳이다.  트럼프 신임 대통령이 이민 규제를 한다고 해도 실리콘 밸리는 예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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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산업혁명과 실리콘 밸리

이곳에서 돈을 많이 번 회사들의 기부행위도 대단하다.  팰로알토의  공립 중고등학교에는 현지 회사들이 낸 기부금이 쌓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공립학교는 의무교육으로 학비가 면제된다. 그러나 학교가 돈이 많으므로 우수한 교사를 채용하고 실험 기자재가  풍부하여 높은 교육 수준은 동부의 사립학교가 부럽지 않다. 따라서 명문대학에의  진학율도 상당히 높다.  이는 실리콘 밸리 매력의 하나로 자녀 교육을 걱정하는 글로벌 인재를 끌어 오는 호재가 된다. 실리콘 밸리는 여름에 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 않아 일년 내내 야외 운동이 가능한 곳으로 살기에도 쾌적하다

 

팰로알토 시내에는 구굴의 무인자동차(self-driving)가 다니고 있다.  인터넷으로 유명한 구글 본사도 인근 멘로파크에 있다. 앞으로는 기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이 그러 했듯이 자동차가 스스로 운전하여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 주게된다. 아빠가 하루 종일 운전대 잡느라고 지쳐서 휴가를 망치지 않아도 될 날 도 머지 않았다. 식구들이 자동차 안 테이블을 둘러싸고 사이 좋게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드라이브를 즐길 날이 머지 않다.

과학발전의 시대에 사람들은 많은 꿈을 꾸고 있다. 미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실리콘 밸리에    보면 ‘미래를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는 미래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라는  격언이 생각난다.

4
차산업혁명이 화제이다.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인공지능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운송수단(항공기, 자동차)등 새로운 기술혁신이다. 미국의 4차산업혁명이 실리콘 밸리에서 시작되고 있다. 실리콘 밸리는 간섭과 규제를 피해 온 과학자들의 피난처(sanctuary)에서  출발하였다. 4차산업혁명을  정부가 주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자유로운 영혼의 과학자들이 마음대로 연구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분위기 제공만이 정부가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07.04 러시아의 ‘아무르’ 강변에서

/아무르강.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잠재력 높은 미국과 러시아

19세기에 들어와서 세계는 대영제국의 흔들림 없는 패권 하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나라로 미국과 러시아를 꼽았다. 미국은 광활한 서부 개척을 앞두고 있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거쳐 북미의 알라스카까지 확장된 국토의 잠재력을 믿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의 내전을 극복하고 서부 개척과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 마저 구입하여 예상대로 세계 일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시베리아 개척을 위한 철도를 부설하였음에도 러일전쟁 패배와 1차 세계대전 참전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 등 다사다난한 국내외 사정으로 시베리아의 개척이 늦어지면서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나라이다. 러시아의 큰 도시의 하나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2 시간 거리이고 북한에서는 두만강만 건너면 바로 러시아이다. 국토가 좁고 남북으로 갈려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한반도와 육속되어 있는 러시아의 시베리아에 진출하여 언젠가 찾아 올 통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1882
년 청국의 일본 공사관 참사관 황준센(黃遵憲)은 ‘조선책략’을 통해 러시아를 ‘地球之上 莫大之國 爲曰 俄羅斯’라고 소개하면서 조선에게 러시아의 잠재력에 경각심을 준 것이다. 러시아의 비밀병기로 불리는 시베리아는 ‘잠자는 땅(sleeping land)'의 의미이다. 아직도 시베리아는 한국인들이 깨워주기를 기다리는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 인지도 모른다. 


러시아 제국의 기원

6세기 동유럽의 볼가 강과 도네프로 강변의 평원에 사르마트(Sarmat)라는 유목민이 한가롭게 살고 있었다. 북유럽의 용맹한 고트(Goth)족은 조용한 사르마트 족을 납치하여 비잔틴(동로마)제국에 노예로 팔았다. 착하고 순종적인 사르마트 족은 로마인의 노예로 인기가 높았다. 그 후 사르마트 족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노예라는 의미의 슬라브 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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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경 사르마트 즉 슬라브 족이 사는 동유럽에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족의 일파인 바랑기아인이 나타난다. 바랑기아인은 볼가 강과 드네프로 강의 물길을 이용 발틱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비잔틴제국과의 무역에 종사하였다. 슬라브 족은 강을 따라 뱃길을 잘 아는 바랑기아인을 ‘루시’라고 불렀다. ‘루시’는 ‘배를 잘 타는 뱃사람‘이란 의미이다.

슬라브 족은 외부 민족의 침입과 부족끼리 갈등을 바랑기아인 수장인 류리크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 슬라브 족을 위탁 지배해 외부의 침입을 막아 달라는 의미이다. 류리크는 슬라브 족을 모아 새로운 왕조를 결성한다. 바랑기아인(루시)과 슬라브 족의 이중구조의 왕국이 860년에 세워진다. 류리크 왕조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키에프를 중심으로 대공국을 세우고 기타 지역에 루시 귀족이 지배하는 공국을 만들어 분할 지배하도록 하였다.

키에프 대공국의 블라미드르 대공은 슬라브 족의 다신교와 태양 숭배 신앙에 가름하는 선진적인 일신교를 도입하여 통치의 안정을 취하고자 하였다. 주변에는 비잔틴 제국의 동방정교와 이슬람교가 있었다. 긴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는 보드카를 버릴 수 없는 슬라브족에게는 금주를 해야 하는 이슬람교는 맞지 않았다. 반면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의 찬란한 빛에 현혹된 블라미드르 대공은 동방정교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988년경이다.

동방정교를 받아들이기 전에도 키릴로스라는 선교사가 찾아와 문자가 없는 슬라브 족을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이용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성서를 번역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때 만든 문자가 지금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는 키릴 문자이다.

1240
년 중앙아시아의 몽골족은 류리크 왕조의 키에프 대공국을 멸망시킨다. 류리크 왕조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토가 몽골족과 타타르(돌궐족)의 지배를 받는다. 몽골 지배 300 여년 후 1552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카잔의 타타르 세력을 물리치고 류리크 왕조를 복원한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양파 모양의 지붕을 한 바실리 대성당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가 카잔을 정복한 기념으로 세운 성당이다.

바실리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 이반 4세는 같은 성당을 다른 곳에 못 짓게 하기 위해 건축가의 눈을 뽑아 버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만큼 이반 4세는 잔혹한 군주로 폭군 이반(이반 뇌제)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

1453년 비잔틴제국은 오스만 터키에 의해 멸망된다. 류리크 왕조의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질녀와 결혼하여 비잔틴제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의미로 비잔틴제국의 문장인 쌍 독수리를 채용하고 비잔틴 황제의 이름 차르(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발언)를 사용한다. 이반 3세는 동방정교의 보호자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처하였다. 러시아 말에 고맙다는 ‘스파시바’의 의미는 ‘구해주세요(스파시’)와 ‘신(神 바)’의 합성어로 ‘신이여 (고맙게 해준) 당신을 구해주세요’라는 의미라고 한다.

1610
년 이반 4세 사후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어지면서 이반 4세의 처가 가문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에서 차르에 선출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될 때까지 300년간 이어 갔다. 러시아는 류리크와 로마노프 2개 왕조 1100년의 왕조 역사가 끝나고 공화정 역사가 이어왔다. 금년이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하였지만 5대 표트르 대제는 유럽에 가까운 발틱해 연안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1712년 천도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새로운 러시아 제국을 열었다. 성 페테르(베드로)의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로 수도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불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듬해 1918년 모스크바로 환도될 때까지 200여 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흔히 러시아를 대륙민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러시아는 바이킹의 후예 루시가 만든 해양민족이다. 러시아의 지배층인 루시들은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모험심으로 시베리아 초원의 바다와 삼림의 바다를 개척한 것이다. 진취적인 루시와 순종적인 슬라브족의 조화를 통해 오늘날까지 강대국 러시아가 이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시베리아 발견과 황금 같은 모피

러시아는 항해를 잘하는 뱃사람이라는 이름대로 초원과 삼림의 바다를 항해하여 시베리아를 발견한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유럽 뱃사람들이 지리상의 발견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유럽은 중남미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가져오고 인도에서는 향료를 가져와 큰 수익을 올렸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개척 담비 수달 밍크 등 모피를 사냥하여 유럽시장에 팔아 국부를 키운다. 당시 유럽은 소빙하기로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러시아의 모피가 절대 필요했다. 


알라스카 진출과 매각

황제가 지원하는 모피 사냥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하고 베링해협을 건너 알라스카까지 진출한다. 국력을 키운 러시아는 오스만 터키의 내정에 간섭하다가 터키를 지원하는 영불 연합군과의 크림전쟁(1853-56)에서 패배한다.

러시아는 전비 지출에 따른 재정문제로 알라스카를 미국에 매각하게 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알라스카 매각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하지만 러시아로서는 실익을 챙긴 성공한 거래였다.

캐나다 등 북미대륙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영국은 떠오르는 미국의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령인 알라스카를 확보하여 캐나다를 보호하고 미국의 기를 꺾어야 했다. 크림전쟁이 좋은 기회였다.

영국은 캐나다를 통해 군대를 파견 알라스카 점령계획을 세웠지만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패배하여 알라스카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는 어차피 빼앗기게 될 알라스카를 미국으로 하여금 구입하도록 제안한다. 한 푼이라도 받아서 전비 조달에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무장관 월리암 슈워드가 국내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매계약을 성공시켰다. 


유라시아의 미래는 우리의 기회

우리나라는 1990년대 북방정책에 의해 공산권인 소련(1990. 9) 및 중국(1992. 8)과 수교하였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지도자를 만나 정치가 안정되면서 개혁 개방정책이 순조롭게 성공하여 한중관계는 최상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로 바뀌는 과정에서 혼란이 가중되어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것이 이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중국과는 금년이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사드배치 문제 등으로 한중관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고도화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이 한중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사드배치 문제가 아니더라도 차이나 플러스 1 (중국이외 한 곳에 투자) 또는 포스트 차이나(중국이 산업화를 완성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유라시아 대륙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국내외 여러 사정으로 연해주 등 유라시아가 아직 덜 개발된 것이 우리에게 블루오션을 제공하는 행운이 될 수 있다. 다만 푸틴 대통령이 개방을 말로만 하지 말고 러시아의 덩샤오핑이 되겠다는 각오를 보여야 한다. 


아무르 강변에서

최근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라고 불리는 미항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이 만나는 하바롭스크를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 사이의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초원이 인상적이었다. 하바롭스크는 우리 민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예맥(濊貊)족의 발상지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흑수 또는 흑룡강으로 부르는 아무르 강의 ‘무르’가 퉁구스(東胡)말로 ‘물’이라고 하며 몽골어의 ‘뮤렌’ 일본어의 ‘미즈’ 등도 어원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1917
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후 아무르 강을 둘러 싼 러시아 적군(赤軍 볼셰비키 혁명군)과 백군(白軍 반혁명 황제파)의 내전이 치열했다. 일본군은 백군을 도와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 전투에서 러시아 적군과 싸웠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일본군은 최재형 등 독립운동을 하는 한인과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하바롭스크에는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1885-1918)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조선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로 볼셰비키 혁명 후 극동 소비에트 외무위원장이 되었다가 하바롭스크를 점령한 백군과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어 아무르 강에 수장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처형되기 전에 아무르의 강변의 모래를 밟으면서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였다고 한다. 하바롭스크를 탈환한 볼셰비키 적군은 그녀를 추모하여 아무르 강의 물고기를 2년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2009년 김 알렉산드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중국의 대흥안령 산맥과 러시아의 스타노보이 산맥에서 발원한 아무르 강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을 적시면서 2824km 흘러 사할린과 마주하는 타타르 해협을 빠져 나와 오츠크 한류(리만 해류)와 함께 동해 바다로 흘러온다.

 

08.02 홍콩의 추억과 홍콩의 미래

 

‘징역 3년에 벌금 3천만’의 도시

 

3년간 홍콩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선배들은 ‘3년 징역에 3천만 원 벌금’이라면서 홍콩 근무를 걱정해 주었다. 홍콩섬에 아파트를 얻어 살면서 집과 사무실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보면 주말이 되어도 도시 국가인 홍콩에서는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홍콩은 쇼핑과 관광의 중심지이니 서울에서 찾아오는 손님은 늘고 생활비는 비싼데 씀씀이는 커지고 그래서 3년 근무기간에 빚도 상당히 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당시 ‘홍콩은 동서양이 만나는 매력적인 도시’로 홍콩의 인기가 대단했던 것도 사실이다.

 

홍콩의 3년 근무를 회상해 보면 생각보다 손님이 많이 찾아오지 않았다. 직전에 베이징 근무 후 홍콩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쓰는 중국어(보통화)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비싼 홍콩 물가를 피해 주말에는 이웃 광동성 선전에 가서 식사도 하고 귀로에는 값싼 야채를 사오기도 하였다.

선전에 가면 홍콩에서는 통하지 않던 보통화도 잘 통하고 음식도 맛있어서 하루 편하게 지내다가 홍콩으로 돌아 온 기억이 있다. 그리고 중국 국내 여행을 할 경우 홍콩 공항을 이용하는 것 보다 선전 공항을 이용하면 항공료도 훨씬 저렴했다. 그래서인지 3년 근무기간 빚도 그렇게 진 것 같지는 않았다. 


홍콩 트레일

3년 징역’이라고 할 정도로 갈 곳이 없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홍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갈 곳이 많았다. 홍콩 전체의 40% 이상이 야외공원(country park)로 이루어져 있고 주요 야외공원에는 트레일 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어 등산(하이킹) 코스로는 최적이었다. 내쇼날 지오그래픽에서도 홍콩의 트레일 코스를 세계 20대 베스트 트레일(World's Best Hikes: 20 Dream Trails)의 하나로 선정하고 있다. 세계적 미항인 홍콩은 다른 미항과 달리 산을 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드니도 미항이지만 산을 만나려면 80km 이상 내륙으로 들어가야 한다.

홍콩은 높지 않은 산과 아름다운 남중국해 그리고 파란 하늘 그 속에 수 십 층짜리 고층건물이 밀집해 있다. 이러한 홍콩의 풍경도 아파트 안에서는 잘 안 보인다. 트레일 코스를 따라 탁 트인 산을 오르면 파란 하늘 아래 멀리 바다가 보이고 그사이로 장난감처럼 홍콩의 마천루가 눈에 들어오면서 홍콩에 사는 실감이 난다.

홍콩에서 3년을 근무하면서 시간이 나면 사무실 동료와 함께 각종 트레일을 답사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건강도 챙겼다. 트레일에서 만나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홍콩의 자연 지리 그리고 역사를 알아갔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기 전의 홍콩의 옛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홍콩을 공간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홍콩의 기원

홍콩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홍콩섬과 주룽(九龍 Kowloon)반도 그리고 신계(新界 New Territory)이다. 홍콩섬과 주룽반도는 19세기 중반 제1, 2차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중국()으로부터 할양받아 사실상 영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신계는 다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배하자 영국은 홍콩섬과 주룽반도를 지키기 위해 주변의 신계가 필요했다.


1898
년 영국은 중국에 압력을 넣어 홍콩섬과 주룽반도의 6배가 되는 신계를 99년간 조차하였다. 영국으로서는 영구 조차의 효과를 기대하였는지 모르지만 세월은 흘러 99년이 되는 1997년이 다가왔다.

당시 영국의 대처 수상은 조차 연장을 요청해 놓고 중국이 쉽게 응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집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달랐다. 신계의 조차 연장은커녕 홍콩섬과 주롱반도도 불평등 조약으로 빼앗은 것이니 반환하라고 주장하였다.
 

일국양제의 기발한 착상

덩샤오핑은 홍콩섬과 주룽반도를 돌려주지 않으면 신계에서 홍콩 쪽으로 가는 수도관이며 전력 등을 모두 끊겠다고 얼음장까지 놓는 한편 ‘일국양제(一國兩制 One country, Two systems)’라는 절묘한 해결 방안을 내놓고 영국을 설득하였다.

1984
년 홍콩반환협정이 발표되었다. 신계를 포함 영국령인 홍콩섬과 주롱반도를 모두 중국에 반환하고 그 대신 홍콩은 ‘홍콩인 통치(港人治港)’를 원칙으로 현재의 시스템을 2047년까지 50년간 유지하는 홍콩 기본법을 제정하기로 합의하였다.

1997
6 30일 밤 영국을 대표하는 찰스 왕세자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에게 주권을 반환(hand over)하고 크리스 패튼 총독과 함께 왕실 전용 요트를 타고 홍콩을 떠났다. 7 1 0시를 기해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트럭을 나누어 타고 홍콩으로 진입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영국 식민통치 치욕을 씻어주는 비라고 했다.


1841
년 아편전쟁 당시 영국인이 홍콩섬을 점령하자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영국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홍콩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대륙으로 탈출할 것인가의 고민을 했다고 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1997년에도 홍콩 주민들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일부 홍콩인들이 캐나다 밴쿠버로 대거 탈출(移民)을 한 것도 그러한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베이 에리어 경제권’

지난 7 1일로 홍콩의 주권반환 20 주년인 동시에 홍콩기본법에 의한 홍콩특별행정구(SAR) 출범 20주년이 된다. 홍콩의 여성 최초 행정장관(Chief Executive)인 캐리 람(Carrie Lam) 장관의 취임을 축하하고 주권반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이 홍콩을 찾았다.

지난 20년간 홍콩은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주권 반환 직후 아시아 외환위기 그리고 10년 후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금융위기 등 세계 경제는 크게 출렁거렸지만 홍콩은 위기를 피해갔다. 홍콩정부의 부단한 노력과 중국 경제가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기 때문으로 본다.

홍콩 반환 당시만 해도 중국의 경제는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중국의 홍콩화를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중국경제는 매년 GDP 7-8%의 고도성장을 통하여 세계 2위의 경제로 도약하면서 오히려 외부 환경에 취약한 홍콩 경제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중국은 다시 한 번 경제 도약을 위해 일대일로 (一帶一路 Belt and Road) 정책과 함께 주장(珠江) 삼각주 지역 내의 경제통합을 목표로 홍콩 정부와 함께 ‘베이 에리어(Bay Area)경제권’을 추진하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주하이를 연결하는 40km의 해상 교량이 건설되고 있으며 선전에서 끝난 중국 대륙의 고속철이 홍콩까지 연장되어 홍콩은 도로와 교속철로 대륙과의 연결을 앞두고 있다.

‘베이 에리어 경제권’은 홍콩 및 마카오와 중국 광동성 9개 도시를 포함 인구 6,600만 명 이상의 광대한 시장이 된다. 홍콩은 바다의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중국을 포함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글로벌 슈퍼 커넥터(super-connector)의 역할도 하게 된다.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홍콩은 완전히 반환되어 중국의 일부가 된다. 2047년까지 홍콩과 중국은 하나의 경제로 동반성장의 길로 들어선다. 수도 베이징에서 보면 남동쪽의 상하이, 남서쪽의 홍콩을 중심으로 각각 창장(長江)과 주장을 끼고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중국 경제를 끌고 가는 모습이 될 것 같다.

 

홍콩의 매력과 기회

자유(free) 발전(progress) 동력(dynamics) 동반(together) 기회(opportunity)로 상징되는 홍콩의 미래는 밝다. 홍콩의 반환 20주년을 맞으면서 떠오르는 중국의 위세에 홍콩이 중국화 되지 않았을까하는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730만의 인구를 가진 홍콩은 미국 헤리티지 재단에서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 순위에서 20년 이상 연속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다수 홍콩 주민이 바라고 있는 행정장관 직접투표 문제에 대해서도 캐리 람 장관은 인터뷰를 통해 행정장관 직접투표 추진을 매우 낙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도 30년의 시간이 있다. 중국의 발전과 함께 홍콩은 아시아의 보석으로 더욱 빛날 것으로 본다.

홍콩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도 홍콩의 매력과 기회를 적극 활용하면 동반성장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특히 홍콩에서 환영받고 있는 한국의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음악 멀티미디아가 홍콩에서 꽃을 피우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뻗어 나갈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08.18 ‘덩케르크’와 ‘군함도’

 

8월의 위기설과 두 편의 영화

 

8월의 위기설로 8월의 폭염은 더욱 뜨겁다. 극장가에도 8월의 열기처럼 뜨거운 두 편의 영화가 대박을 터트리고 있다. 미영 합작 영화 ‘덩케르크’와 한국 영화 ‘군함도’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40대 젊은 감독의 야심작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47) 감독의 ‘덩케르크’는 1940 5월 덩케르크의 철수의 역사 현장을 1억불의 제작비로 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맥스 스크린은 관객을 현장에 끌어넣어 실감을 더하고 있다.

류승완(43) 감독의 ‘군함도’는 220억 원의 제작비 중 70억 원을 군함도 실물과 비슷한 세트장 만드는데 사용될 정도로 현장감이 뛰어났다. 영화를 통해 군함도내 탄광의 열악한 환경을 리얼하게 보여 주어 징용된 조선인 노역자의 고통이 관객에게 그대로 와 닿는다. 후반에는 람보 같은 영웅이 나타나 실제 없었던 징용된 조선인을 집단 탈출시키는 액션 영화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역사 왜곡의 논란을 불러왔다.

 

‘모래언덕 위의 교회’

덩케르크 철수는 2차 세계대전 초기 서부전선에서의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으로 1940 526일 시작하여 64일 끝난 전쟁이다. 다이나모(발전기) 작전은 도버성 지하의 발전실에서 작전이 보고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덩케르크는 칼레와 가까운 프랑스 최북단 해안으로 벨기에 국경과 인접해 있다. 현지어로 ‘모래언덕(dune)위의 교회(kerke)’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4년 후인 1944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었던 노르망디는 덩케르크보다 훨씬 남쪽 해안으로의 파리와 가깝다. 노르망디는 영국 해안에서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파리 탈환을 목표로 한 상륙작전이었다.

1939
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1940 5월 독일이 서부전선을 돌파하자 영국은 원정군을 파견 프랑스군을 지원하지만 오히려 독일군의 측면 공격을 받아 연합군이 양분된다. 프랑스 육군은 북부에서 포위되고 영국 원정군과 일부 프랑스군은 도버 해협의 덩케르크 쪽으로 밀린다.

 

윈스턴 처칠과 ‘덩케르크 정신’

네빌 체임벌린이 사임으로 국왕 조지 6세로부터 1940 510일 수상으로 임명된 윈스톤 처칠은 덩케르크 철수를 명령한다. 독일군은 영국군이 탈출하기 전에 항구를 점령 영국과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거나 섬멸코자 하였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태풍처럼 몰아붙이던 독일군의 전차대가 진격을 정지한 것이다.

미스터리 같은 기적이 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갈랐다. 독일군이 계속해서 진격했다면 연합군은 괴멸하였을지도 모른다. 왜 진격이 정지 되었을까? 이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히틀러가 다음해 계획하고 있는 동부전선(소련침공)에 대비 전차 부대를 아끼기 위해 괴링 공군장관의 호언장담을 받아들여 공군력에 의존했다는 설도 있다.

처칠 수상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호소에 수백 척의 민간선박이 자발적으로 동원되어 33만 명의 영국군의 철수가 성공하였다. 영국인은 단합을 호소할 때는 ‘덩케르크 정신’을 말한다. 지난해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도 ‘덩케르크 정신’을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인연

영국인의 아버지와 미국인의 어머니 사이에서 런던에서 태어나 장성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국 해안에서 40km 가까이 떨어진 덩케르크 해안을 아내와 함께 가끔 요트를 타고 놀러 가면서 기적의 덩케르크 철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놀란 감독은 노르망디 작전과 달리 덩케르크 철수에 대해서는 허리우드 대작이 없는 것은 미국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덩케르크 철수작전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전이었기에 미국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전쟁이었다.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많은 영화에 성공한 놀란 감독은 허리우드 영화사를 움직여 영화 ‘덩케르크’를 만들었다.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라기보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더라고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휴머니즘이 물씬 풍기는 영화이다. 당시 상황을 지상에서 바다에서 공중에서 에피소드 스타일로 단편적으로 소개하였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알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영화만 보아서는 33만의 군인들이 철수되었다고 믿기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철수 당시 인도 군인 2만 명이 철수 작전에 참여했는데 영화에는 인도 배우 한사람 안 나왔다고 항의마저 있었다


영화 ‘군함도’의 양면성

류승완 감독은 영화 군함도를 통해 조선인이 강제 징용된 군함도의 역사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제작비를 아끼지 않고 군함도 세트장을 만든 것도 열악한 환경을 영상을 통해 고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스펙타클한 영상으로 집단 탈출극이 나온다. 강제 징용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징용자를 말살하려는 일본 측의 기도를 미리 알고 총격전을 통해 일본 경비병을 죽이고 징용자들을 석탄 운반선에 태워 집단탈출 시킨다.

역사 왜곡이며 ‘상상적 한풀이’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사를 다루는 영화가 기록대로 그려진다면 다큐멘터리를 보면 되지 굳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겠느냐며 영화는 영화로 즐기면 된다면 의견도 있다. 영화는 투자자를 고려한 상업성이 있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군함도 역사 탐방

군함도는 2차 세계대전 중 최대 800명의 한국인(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해저 1000m의 심해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희생된 곳이다. 일본은 중일전쟁 발발 후 1939년 강제징용령을 내렸다. 1939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140만의 젊은 한국인이 일본 전역에 강제 징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해 군함도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군함도는 1890년 일본의 재벌회사 미쓰비시(三菱)가 채광을 시작하였고 1916년경에는 콩크리트 방파제를 만들고 광부는 물론 석탄 채광 관련 사무인력과 그 가족을 거주시키기 위해 일본 최초의 철근 콩크리트 고층 아파트를 지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채광하였으나 기름과 가스가 에너지 공급원으로 대체되자 1974년부터 완전히 폐광되면서 지금은 무인도로 남아있다.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에서 18.5 km 떨어진 군함도를 관광선을 타고 가까이서 보았을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 앞 바다에 떠 있는 감옥섬 알카트라즈가 연상되었다. 군함도 근처는 파도가 심해 탈출하였다 해도 살아남기 어려워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운 실제 감옥섬이었다.

관광 선박으로 섬 가까이 가도 파도가 높아 상륙을 못할 때도 많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다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건물 붕괴의 위험으로 극히 일부만 관람이 허용되었다.

군함도는 본래 지금의 섬보다 1/3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이름 그대로 나가사키 반도의 작은 끝섬(端島 하시마)이었다. 그러나 석탄이 발견되자 인근 바다를 매립하여 3배로 키웠다고 한다. 철근 콩크리트 고층 건물에 방파제가 휘둘러 싸고 있어 멀리서 보면 일본 군함의 실루엣을 보여주어 1930년대에 군함도(軍艦島 군칸지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섬 전체는 20만평 정도로 여의도의 1/5 정도 밖에 안 된다. 군함도는 식물이 살지 않은 섬으로 풀포기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60년대까지 탄광도시로 사람이 많이 살았으나 가스 석유가 일반화 되면서 석탄수요가 줄어들자 폐광이 되었다. 지금은 사람이 모두 떠나고 버려진(abondoned) 아파트 건물만 남아 있다. 


덩케르크 정신과 군함도의 징용자

“저는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되고 다음 차례는 영국입니다. 저는 국민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에게 요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영국인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의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독일이 영국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이 돌파되자 대독 유화론(appeasement)을 고수하던 체임벌린 수상이 사임하고 뒤를 이은 윈스턴 처칠의 취임 후 3일 만인 1940 513일에 나온 연설문 요약이다.

핵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성공시켰다고 주장하는 북한 김정은에 의해 촉발된 8월 위기설 속에서 영화 덩케르크와 군함도를 보면 처칠의 ‘덩케르크 정신’과 ‘군함도의 징용자’ 모습이 오버랩 된다. “나라를 잃으면 ‘군함도의 징용자’가 되는 것이야!“ 어느 관객의 말이 귀에 맴 돈다.

‘덩케르크의 정신’은 영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많은 희생을 각오하면서 항복을 거부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정신이다. 영국과 달리 독일에게 항복한 프랑스는 배상금 지불은 물론 150만 명의 프랑스인이 나치 독일에 강제 징용되어 희생된 치욕을 겪었다고 한다.

 

09.29 류큐(琉球)의 종소리

/슈리성 정전. [사진 슈리성공원 홈페이지]

 

만국진량의 종

최근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과거 류큐(琉球)국의 왕궁이었던 슈리성(首里城)을 가 보았다. 1941년 오키나와 전쟁 통에 불타고 지금 건물은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 슈리성에는 특별한 종()이 걸려 있었다는데 전쟁 통에 미군의 공격을 받고 불타 종의 기능을 잃고 현재는 오키나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슈리성 내에는 모조품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 종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첫 구절이 이러하다. “류큐(琉球)라는 나라는 남해의 아름다운 경승지로 삼한(三韓)의 우수함을 모두 갖추었고, 중국(大明)과는 보차(輔車 아래턱뼈와 잇몸)관계이고, 일본(日域)과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관계로 두 나라 사이에서 솟아난 봉래도(蓬萊島 신선이 사는 낙원)이다. ()와 노()로서 만국의 가교(津梁)가 되어 각종 물산과 보물이 가득하다 ” 

琉球國者南海勝地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以日域爲脣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以舟楫爲萬國之津梁異産至寶充滿

류큐국 건국 30 1458년에 주조되었다는 이 종은 명문을 따라 ‘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이라고 부른다. 류큐국이 섬 전체를 통일하여 칼과 창을 녹여 만든 평화의 종이라고 한다. 이 종의 명문 첫 구절 첫 문장에 중국과 일본에 앞서 삼한(三韓)을 먼저 내 세웠다.


류큐국은 남북으로 중국과 일본과는 비슷한 거리에 놓여 있지만 한반도와는 두 배 이상의 먼 거리에 있음에도 명문에 삼한의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삼한 출신의 한 사람으로 류큐국과 특별한 인연을 느꼈다. 


삼별초와 류큐국

류큐국에 우리 선조들이 일찌기 정착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조선조 500년간은 바다를 기피하였으나 우리 민족은 본래 해양민족이었음이 여러 역사 자료에 나온다. 통일 신라의 어수선한 시기에 한반도 남해와 일본 연안에는 항해 기술이 높은 신라해적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것도 이러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류큐국이 만국진량의 종을 통해 삼한과 특별한 관계를 밝힌 것으로 보아 삼한 출신이 통일 류큐국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류큐국과 고려 말 삼별초(三別抄)와의 관계에 대해서 들은 것 같기도 한다.

1231
년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여 강화도를 근거로 항몽을 계속하던 고려의 무신정권이 1270년 원종이 귀국하면서 원에 복속, 개경으로 환도하려고 하자 무신정권의 엘리트 근위병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였다.

원종에 대한 설득이 실패하자 삼별초는 새로운 왕을 추대하여 강화도의 각종 재물과 사람들을 실은 대 선단을 이끌고 남해안 진도로 이동했다. 삼별초는 해상력을 기반으로 제주도를 포함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여 항몽 항쟁을 하였다. 1271년 새로이 조직된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진압되자 삼별초 잔존 세력이 제주도(탐라)로 건너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삼별초는 당시 일본의 가마쿠라 무신 정권에 외교서한을 보내 항몽 공동전선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73년 삼별초는 제주도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여몽연합군에 궤멸되었다.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실패였다. 역사는 거기까지다.


바다에 익숙한 삼별초가 쉽게 항복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제주도로 몸을 피했으나 여몽 연합군에 맞설 수 없음을 알고 대 선단을 준비 진도와 제주도 사람들을 싣고 남중국해의 갈라파고스로 알려진 류큐로 집단 이민을 하였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더욱이 오키나와에서 출토 된 고려기와에 제작연대(계유년 1273)와 함께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명문(高麗瓦匠造)이 새겨져 있다. 연도로 보아서는 삼별초의 세력이 류큐에 도착한 시점과 비슷하기 때문에 삼별초와 류큐를 연결하는 실마리가 된다.


고고학의 발달로 더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 좋겠지만 전문 작가들은 이 정도의 단서만으로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삼별초의 집단 이민과 류큐국의 관계를 대하드라마로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과문한 탓인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동중국해로 뻗어 나간 한인(韓人)

오키나와는 청정 바다에 둘러싸인 낙원으로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만국진량의 종 명문속의 삼한에 생각이 꽂혀 아름다운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날 저녁 호텔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백제를 건국한 동생 온조에게 패배하여 역사에서는 사라진 비류의 무리들이 일본으로 건너 가 오늘의 일본 건국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삼별초의 무리들이 역사에서는 사라졌지만 이곳으로 내려 와 류큐국 건국의 기원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려의 정예무인 집단인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에서 밀리면서 제주도로 후퇴했지만 제주도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진도를 떠날 때 류큐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흑조(黑鳥 구로시오) 해류를 통해 멀리 이슬람과 동남아 제국과 무역을 하였고 후에는 류큐인이 동남아와 고려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을 담당하였다.


강화도는 예성강 하구 벽란도와 마주보고 있다. 항몽 40년의 강화도 시대에 고려무신 정권은 류큐인과의 교류가 많았을 것이다. 무역상 류큐인 속에는 한반도 출신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삼별초의 지도자들은 먼 남쪽 바다에 류큐가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신라에 의한 3국통일로 백제가 멸망되면서 해양강국이던 백제인들은 신라의 통치를 거부하여 대거 중국의 동남해안에 이주 신라방을 만들었다. 중국의 산동성과 강소성이 중심이었지만 남쪽으로 절강성과 복건성까지 신라방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류큐에도 신라방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 어렵지 않다.

지구의 무역풍은 위도 0도에서 30도까지는 북동쪽에서 남서쪽로 바람이 불고 30도가 넘으면 편서풍 영향으로 바람이 바뀌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다. 무역풍으로 한반도에서 류큐로 내려가고 류큐에서는 흑조와 편서풍으로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다. 


탐라(제주도)에서 기획이민

탐라는 류큐까지 한결 가까운 길목이다. 삼별초로서는 여몽연합군에 밀려 어차피 탐라를 떠나야 하므로 탐라에서 집단 기획이민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조선 기술을 가진 고려 장인들이 튼튼한 배를 준비하고 백공(百工)이라고 부르는 수 백 명의 각종 전문가들을 배에 태웠을 것이다. 물론 집을 짓는데 필요한 기와 장인은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들이 류큐에 도착했을 때 류큐는 지방 호족이 난립하고 있었다. 고려무인의 무예와 선진 기술을 갖춘 고려 이민집단은 간단히 지방 호족을 제압하고 한 지역을 차지했을 것이다. 고려와 무역을 주도했던 류큐의 신라방 출신들이 삼별초의 집단이민을 맞이하고 그들의 정착을 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류큐에는 고기잡이 방식과 돼지 사육에 제주도 풍속이 많이 엿 보인다고 한다.

1392
년 본국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고려 무인의 한사람인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다. 삼별초의 후예들은 여기에 자극을 받았다. 몽골()이 약해지면서 친원의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었으니 산재하고 있는 류큐도 통일해 외적의 침공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당시 류큐는 삼산(三山)시대였다. 오키나와의 특산물 고야(여주)처럼 길쭉한 섬에서 북산 중산 남산 세 나라가 정립(鼎立)되어 있었다. 


류큐국의 친한(親韓) 외교

삼별초의 후예들은 중산(中山)의 호족 상(尙 일본어로 쇼)씨를 도아 중산에 의한 통일 왕국이 건국되는데 일조를 한다. 1429년도 였다. 상씨는 중국에서 건너 왔다는 설이 다수설이지만 신라의 통일로 백제가 망하면서 백제의 명문가 목천 상씨들이 백제 부흥 운동을 한 기록이 있어 목천 상씨들이 부흥운동에 실패하자 류큐에 이주하였을지 모른다. 어쨌든 상씨가 전국을 통일하고 류큐국을 세웠다.

류큐국은 독립왕국으로 조선에 조공을 보내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왜구에게 팔려 온 포로들을 보내주기도 하고 조선 초 1416년 류큐국에 파견된 통신사 이예(李藝)를 통해 조선인 포로 44명을 쇄환시켰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웃 일본과 중국과는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포르투갈인 등 서양인이 들어오기까지 중계무역으로 다대한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국제정세는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하여 대륙 침략의 야망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면서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도요토미는 류큐국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류큐국은 조선과 교린국 사이임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당시 명의 무능한 황제는 조선을 불신하여 조선이 일본과 함께 명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있었다. 베이징에 체류중이던 류큐국의 사절이 일본과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여 황제의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명의 항왜원조(抗倭援朝)의 참전을 끌어내어 멸망 직전의 조선에게 재조(再造)의 기회를 준 것은 류큐국의 친한 외교의 결과인 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류큐국 징벌(懲罰)

임진왜란 당시 류큐국의 친한 외교를 불편하게 생각한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이 끝나자 류큐국에 대한 징벌전쟁을 일으켰다. 도요토미 이후 일본을 지배한 도쿠가와 이예야스(德川家康)는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현)에 지시하여 류큐국을 침공 징벌하도록 하였다. 1609년의 일이다. 일본군은 7년간 조명 연합군과 싸운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류큐국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중국과 함께 일본에게도 조공을 바치는 중일양속(中日兩屬)관계가 된다.

 

류큐국의 내정은 사쓰마 번이 계속 장악하다가 1867년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유신이 일어나고 사쓰마 번이 가고시마현으로 바뀌는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년 시행된다. 1879년 류큐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오키나와현으로 바뀌면서 450년간의 류큐왕국은 막을 내린다

 
만국진량의 오키나와

아침에 눈을 떴으나 지난 밤 꿈속의 류큐국은 사라지고 오키나와의 깨끗한 공기와 밝은 햇살이 눈부시다. 오키나와에 과거 누가 살았는지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여러 민족이 각자의 사유로 각지에서 흘러들어 와 훌륭한 섞어찌개가 되어 오키나와를 발전시켜 온 것을 틀림이 없다. 지금도 오키나와의 무공해 자연의 아름다움에 일 년 내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700년 전의 예언대로 만국진량의 오키나와는 세계인을 서로 연결하는 가교가 되고 파라다이스(현대판 봉래도)가 되었다.

 

10.03 韓中관계와 ‘달빛기도’

/추석. [일러스트=김회룡]

 

한반도 위기설로 무더위가 더욱 덥게 느껴진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로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이 되니 우리의 큰 명절 한가위 추석이 찾아온다. ‘가을의 한가운데 큰 날’의 의미라는 ‘한가위’는 설날과 함께 우리의 큰 명절 중 하나이지만 설날과 달리 좋은 날씨에 햇과일이 넘쳐나는 풍성한 명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석 명절을 맞아 “온 집안이 보름달 같은 반가운 얼굴들로 환하기를 기원한다“면서 이해인 시를 낭송하며 추석인사를 하였다. 인천 등 주요 공항에서는 유례없는 열흘간의 황금연휴를 맞아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 한가위 명절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지난 93일 북한이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5배 이상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의 실험성공을 주장하고 921일에는 김정은이 성명을 통해 미국이 상상하지 못할 보복을 하겠다고 선언하여 추석 연휴나 그 직후에 추가 도발이 예상된다 하여 한가위 추석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

실제로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최근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방중 시 밝힌 북한과의 대화채널이 모두 닫히고 군사적 긴장이 다시 높아지지 않을까하는 우려로 모처럼 단란하게 모인 가족들의 화제가 김정은의 핵미사일 규탄과 함께 전쟁 가능성에 관심이 쏟아 질 것 같다.

해외 근무를 주로 하는 외교관 생활에서 한가위 등 국내 명절에 대한 추억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가까운 중국에 몇 차례 근무하다보니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중국 추석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중국은 추석을 중추제(中秋節)라고 부른다. 춘하추동 4계절을 초() () ()으로 구분하여 가을의 경우에도 초추(初秋) 중추(仲秋) 만추(晩秋)로 나누어 부른다. 중추제는 음력 815일 가을의 한 가운데를 기린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때가 농업사회에서는 수확의 시기와도 겹친다. 중국에서 중추제는 춘제(春節 1.1설날) 위안샤오제(元宵節 1.15 정월대보름)과 함께 3대 명절의 하나로 친다.

중국에서는 민족 대이동을 하는 춘제와 달리 중추제는 비교적 간소하게 위에빙(月餠)을 주고받으면서 명절 기분을 내는 것 같다. 그 무렵 위에빙을 구해 먹어 보았는데 특이한 모습에 단팥소가 너무 달았던 기억이 난다.

위에빙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가끔 뇌물로도 사용되어 최근에는 부패 근절 방침으로 고급 위에빙은 못 만든다고 한다. 위에빙의 기본은 밀가루 빵에 단팥소, 대추 등 말린 과일을 넣어 둥글게 만든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의 송편처럼 위에빙을 먹어야 중추제를 느낀다고 한다. 우리의 송편과 위에빙은 달()의 모습을 했는데 위에빙은 둥근 달이고 우리의 송편은 그믐달이나 반달모양이다.

중국 사람들은 가득 찬 것을 좋아하여 달도 보름달(滿月 full moon)을 좋아하는 것 같다. 중국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술잔의 술이 줄어들면 반드시 첨잔을 해서라도 가득 채워 놓는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원만(圓滿)’라는 말은 둥글고 가득 찬 모습을 말한다. 가족의 화목이나 회사의 발전도 ‘원만’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중에서도 벤츠나 아우디가 특히 인기 있는 것은 브랜드 로고가 원()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에빙에는 한족(漢族)의 저항정신을 담겨있다. 14세기 몽골의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 끊임없는 한족의 저항을 받아 결국 100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당시 몽골의 압제에 신음하던 한족들은 몽골인은 먹지 않는 위에빙 속에 반원거병(反元擧兵)의 비밀 메시지를 넣은 특별한 위에빙을 만들어 몽골 관헌의 눈을 피해 집집마다 돌려 무장 봉기를 하였다고 한다.

금년의 추석 명절에는 중국의 경우에도 국경절과 겹쳐 장기 연휴에 들어간다. 이맘 때 매년 20만 명 정도가 방한했던 중국인 관광객(遊客 유커)이 ‘사드 보복’ 여파로 절반이하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되어 면세점이며 식당들이 한숨을 짓고 있다.

한중관계는 지금으로서는 백약(百藥)이 무효라고 한다. 10월에는 중국 공산당의 제 19차 당 대회가 개최된다. 5년 마다 개최되는 중국의 큰 행사가 잘 마무리되어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의 집권 2기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 헤아려보다)의 마음이 되도록 이해인 수녀의 시처럼 ‘달빛기도’를 해본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11.13 시모노세끼의 中日전쟁

/시모노세키 · 조약 유적지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왼쪽) 무쓰 무네미쓰 흉상. [중앙포토]

 

일본판 ‘왕과 나’

얼마 전 일본의 시모노세끼(下關)을 다녀왔다. 메이지 유신 150주년 기념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2018년이면 일본 메이지 유신 150주년이 된다. 메이지 유신은 미국 매튜 페리(1794-1858)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 구로후네)의 내항으로 촉발되었다. 1853 6월 흑선의 내항에 당황한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막부는 미일 통상조약(1858)을 맺는 등 문호개방에 힘쓰지만 막부를 반대하는 도막파(倒幕派)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막부파와 도막파의 끈질긴 내전 끝에 1868 5월 도막파의 에도 무혈입성으로 에도막부를 전복 왕정을 복구된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도막파는 중국()이 영국 등 서구 열강에 의해 분할되는 것을 보고 일본이 똑 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기 위해 빨리 서양화할 것을 다짐하였다. 미국 영화 ‘왕과 나(King and I)'에서 샴(타이)의 국왕이 서양의 식민지화를 막기 위해 후궁들에게 드레스를 입게 하고 왕자들에게 영어 교육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메이지 신정부는 녹명관(鹿鳴館)이라는 사교장을 만들어 귀족들은 양복을, 부인들은 롱 드레스를 입고 서양인들과 춤을 추도록 하였다. 달력도 양력으로 바꾸었다. 상복(喪服)도 과거 흰색에서 서양식으로 검은 색으로 바꾸었다. 결혼한 부인이 자신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씨를 따르게 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서구 열강은 일본을 야만국이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얼굴은 동양인이지만 행동은 서양화하여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의 핑계를 빠져 나갔다. 일본은 단지 식민지 지배를 빠져 나가는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시모노세키의 슌반로우(春帆樓)

메이지 정부는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적 정부형태를 만들어 나가면서 대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섬나라 콤플렉스를 극복하기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 진출을 도모하였다. 1592년의 임진왜란도 ‘정명가도(征明假道 중국을 정복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의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이다.

한편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는 등 한반도로 내려오려고 하였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으로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조선을 자신의 세력하에 두기 위하여 한일수호(강화도)조약(1876)으로 조선에 접근하였다.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청과의 마찰은 불가피하였다. 1884(갑신년) 조선에서는 김옥균 등 친일인사에 의한 정변이 일어났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국의 세력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한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85년 갑신정변 수습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해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재 파병 시는 서로 통보한다는 텐진(天津)조약을 맺는다. 10년 후 1894(갑오년)에 조선에 동학농민운동(東學亂)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동학난을 막지 못해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도 대군을 보낸다. 청일 양국은 인천 근처에서 충돌한다. 예고되었던 전쟁이 일어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1895 4월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시모노세끼(下關)는 일본의 관문이다. 일제강점 시대부터 부산과 연결되어 왔으며 지금도 부관(釜關) 페리가 다니고 있다. 시모노세키는 바칸세키(馬關)라고도 불린다. 12세기 말 일본 중세 무사(武士)들의 난(源平戰)에 휘말린 어린 국왕 안도쿠(安德)가 근처의 단노우라 해전에서 익사하였고 그 후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이 세워졌다. 붉은 색깔의 신궁은 안도쿠가 머물고 있으리라는 용궁의 모습이다. 이곳의 세키쇼(關所 세관과 검문소)를 아카마가세끼(赤間關)라고 불렀고 이것이 와전되어 아카마가세키(赤馬關), 이를 줄여 바칸세키라고 불리는 유래이다.

청국의 요청으로 시모노세키에서 1895 3월부터 청일전쟁을 종결짓는 강화회의가 열렸다. 슌반로우라는 언덕위의 작은 목조가옥이 회담장이었다. 당시 이토 히루부미가 단골로 찾아가는 요정으로 이토 히루부미에 의해 맹독성이 있는 복어요리가 공식적으로 허가된 1호점이었다. 지금은 개축하여 자료관이 되었고 인근에는 같은 이름의 복어전문 레스토랑이 영업을 하고 있다.

이곳은 본래 후지노라는 안과의사가 개업한 병원이었으나 그가 죽은 후 미망인이 고급 요정을 개업하였는데 간몬(關門)해협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위치로 이토 등 당대의 일본 정계인사들이 자주 들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강화조약을 위해 이 요정에서 청국의 전권대표로 리훙장(李鴻章)을 맞이했다. 


1억 량의 총알 값’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모노세키를 찾아 온 리홍장에게는 굴욕적인 강화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오둥 반도와 타이완 등 영토할양과 은 3억 량의 배상금이었다. 3억 량은 당시 청나라의 4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일본은 대군을 산하이관(山海關)에 집결시켜 베이징(北京)공략을 앞두고 청국에게 항복 같은 강화 조건을 제안하였기에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리홍장은 영토할양은 언어도단이고, 배상금도 1억 량이 최대한이라고 버텼다.

일본의 여론은 강화조약을 반대했다. 중국과 강화회담을 할 것이 아니라 베이징으로 바로 진격하여 30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원했던 중국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모노세키 주민들도 강화회담은 필요 없으니 리홍장은 돌아가라고 아우성을 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회담이 시작된 나흘 만에 슌반로우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숙소 인죠지(引接寺)로 돌아가는 노상에서 리홍장에게 한 발의 총알이 날라 왔다. 인죠지는 시모노세키를 경유하는 조선 통신사의 숙소로도 제공된 유서 깊은 절이다.

1895
3 24일 오후 4시였다. 다행히 총알은 리홍장의 눈 밑에 박혔다. 피가 온 얼굴을 덮었다. 순간 리홍장은 ‘이 피가 조국을 살리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총알이 리홍장의 시신경도 훼손하지 않았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일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에 설치되어 있던 대본영의 메이지(明治) 일왕은 크게 놀라 어의를 보내고 리홍장에게 깊은 사과와 함께 위로를 전했다. 이 사건을 핑계로 리홍장이 회담을 결렬시키고 귀국해 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일본이 대국을 가지고 논다고 불만을 가진 서구 열강이 간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을 우려하였다.

부상에서 가까스로 회복한 4월 일본은 리홍장에게 ‘총알 값’으로 1억 량을 깎아주어 배상금 2억 량으로 회담 종결을 제안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4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조약 제1조는 조선의 독립자주국임의 선언이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원해서가 아니고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끊어 조선을 삼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은 조선의 침탈 과정을 착착 밟아 10년 후인 1905 11월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위협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12.18 왕후닝(王滬寧)과 남만왕 맹획

19차 당 대회에서 결정된 중국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에서 왕후닝에 대한 인기가 높다. 왕후닝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중앙 판공청주임(비서실장) 리잔수(栗戰書)와 함께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고 있다. 중국 최고 지도부 진입 조건인 지방행정 경험이 전혀 없이 책사 역할만을 해 온 왕후닝의 발탁은 이례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하이 푸단 대학 교수 출신으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왕후닝의 성공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왕후닝은 1955년도 상하이 태생으로 이름도 상하이의 번영을 기원하는 후(滬 상하이의 별칭)(寧 안정과 번영)이다.

왕후닝은 상하이의 화동사범대학 불문과와 푸단 대학을 졸업하고 나이 30세에 푸단 대학 법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동 대학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젊고 재기 발랄한 창의력의 소유자 왕후닝 교수는 푸단 대학 학생들을 이끌고 싱가폴에서 개최된 세계 대학생 중국어 토론 대회(Debate Contest)에서 종합 우승을 거두어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일까. 왕후닝 교수는 상하이 출신의 정치인으로 후에 국가 부주석을 역임한 쩡칭홍(曾慶紅)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을 역임한 우방궈(吳邦國) 등의 추천에 의해에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에 의해 발탁된다.

왕후닝은 장쩌민, 후진타오(胡錦濤)를 거쳐 시진핑 주석에 이르기 까지 역대 국가주석을 골고루 잘 모시는 ‘중난하이(中南海) 최고의 지혜 주머니(智囊)’ 또는 삼조제사(三朝帝師 세 황제의 스승)라고 불리었다.

왕후닝은 장쩌민 주석을 위해서는 ‘3개 대표론’을, 후진타오 주석에게는 ‘과학적 발전관’을 성안하였고 시진핑 주석은 왕후닝의 머리를 빌려 ‘중국몽’을 끌어냈다. 또한 왕후닝은 일대일로(一帶一路)와 함께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시진핑 사상)’을 입안하여 시 주석의 신임을 받았다. 시 주석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네비게이션 같은 책사 왕후닝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하였는지 모른다.


왕후닝은 중국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밑으로부터 개혁보다는 위로부터 (top down)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후진국이 짧은 기간에 많은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이른 바 개발 독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여 왔다.

왕후닝은 짧은 기간이지만 미국 아이오와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UC 버클리)의 방문교수 경력으로 미국을 예리하게 파헤친 ‘미국 대 미국 (America against America)'이라는 저서를 발간하는 등 누구보다도 미국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인물로 ’중국의 키신저‘ 또는 ’현대판 제갈량‘이라는 별명도 얻고 있다.

외교 중시의 왕후닝은 이번 당 대회에서 중국 최고의 미국통으로 알려진 양제츠(楊潔箎) 국무위원이 25명으로 구성되는 권력 최고 상층부인 정치국원으로 승진되는데 분위기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제츠 정치국원은 내년 3월에 열리는 전인대에서 첸치천(錢其琛)이래 14년 만에 외교 담당 부총리로 임명 될 전망이다.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함께 쑹타오(宋濤) 당 중앙대외연락부장도 왕후닝과 양 부총리를 도와 새로운 세계 전략과 함께 중국 외교를 이끌어 나갈 것으로 보인다.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고도화 시켜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안정과 번영을 위협하는 북한은 중국에게도 큰 부담이다.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북한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국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신고립주의 공백을 채워 가며 포스트 미국의 세계 지도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트러벌 메이커가 된 북한의 관리가 중요하다. 중국이 북한을 제대로 관리하는 지혜로운 전략을 짜내는 일이 왕후닝 앞에 놓인 과제이다.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괴롭힌 남만왕(南蠻王) 맹획 같은 인물이다. 제갈량이 출정에서 남만인의 머리(蠻頭)대신 밀가루 반죽의 만두(饅頭)를 이용하여 폭풍우를 물리치고 맹획을 사로잡은 이야기가 있다.

왕후닝이 칠종칠금 (七縱七擒)으로 맹획을 굴복시킨 제갈량의 지략으로 김정은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시킨다면 동북아는 물론 세계가 평화로워지면서 중국은 명실공히 존경받는 새로운 세계 지도국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