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 한반도 외교3/ 한중 외교2/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2 - 2017.12.28 “삼전도(三田渡)의 치욕, - 12.29 “대학생들, 반중(反中) 감정 높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10/ 한반도 외교3/ 한중 외교2
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2 신동아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2018.02월 호
■울루스부카의 아들 이성계, 조선을 개국하다
이성계 일가는 원나라 지방군벌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하면서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1392년 조선 건국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면서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한 것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중국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은 원나라를 중국 왕조의 하나로 보나, 몽골은 원을 유라시아 대부분을 지배한 칭기즈칸 제국의 일부로 본다. 몽골족이 세운 여러 나라 중 원나라만 하더라도 중국 본토뿐 아니라 몽골과 만주, 티베트, 북베트남, 고려 등을 직·간접 지배했다.
1) 원나라가 중국 왕조라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청말(淸末) 황흥, 장병린, 추용 등 많은 한족 출신 혁명가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국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나라 또한 중국이 아니라 몽골 왕조의 하나로 봐야 한다. 중국은 아전인수(我田引水)에서 벗어나 원과 요(遼)의 역사를 몽골에 돌려줘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베이징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도 거란족의 요나라나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해 역사적 권리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다. 요나 금(金), 원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부를 영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전 화북을 정복한 흉노, 선비, 저·강 등과 달리 몽골인은 중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중앙아시아 문명국 호레즘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대도시를 보고 온 후 중국에 진입한 까닭에 중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갖지 않았다. 몽골족은 오히려 ‘땅에 엎드려 밭이나 가는’ 한족을 경멸했다. 4세기 모용선비 전연(前燕) 황제 모용준이 생포한 한족 염위(冉魏) 황제 염민을 노복하재(奴僕下材)라고 경멸했듯이 몽골족도 한족을 멸시했다.
쿠빌라이(1215~1294)는 몽골인을 1등급, 서역인을 2등급, 한인(거란, 여진, 금나라 치하 한족)을 3등급, 남인(남송 치하 한족)을 4등급으로 구분하는 등 민족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장관에는 몽골인이 임명되고, 차관에는 서역인이 임명됐으며, 한인이나 남인에게는 말단직만 주어졌다. 유교(儒敎)의 정치·사회적 지위도 격하됐다. 한화파(漢化派)가 권력을 잡았을 때만 겨우 몇 번 과거가 치러졌다. 이처럼 민족차별 정책은 소수 몽골인이 다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몽골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단이었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 간 차별도 심했는데, 이는 남인의 수가 한인의 7~8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옌징(베이징)에 막부(幕府)를 차린 무칼리는 잘라이르부 살레타이에게 고려 공략을 맡겼다. 무칼리는 칭기즈칸과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을 함께 마신 사구(四狗), 사준(四駿) 중 하나로 칭기즈칸에게는 형제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사구, 사준은 충견 넷과 준마 넷을 뜻하는 말로, 칭기즈칸을 도와 몽골제국을 이룬 8명의 장수를 가리킨다.
2) 몽골어로 말한 ‘고려 王’
고려는 결국 몽골에 항복해 쿠빌라이가 세운 원(元)에 편입됐다. 쿠빌라이는 만주 일대를 영지(領地)로 받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 가문 세력을 견제하고자 남쪽의 고려를 이용했다. 충렬왕 이후 고려왕들은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았으며, 원칙적으로 정비에게서 난 아들을 왕세자로 봉했다. 고려 왕들은 세자 시절 대도(베이징)에서 인질로 체류하다가 즉위했다. 고려 왕들은 몽골식 이름을 갖고, 몽골식 변발에다 몽골어를 주로 사용했다. 충렬왕의 아들 이지리부카(충선왕)는 원나라 내부 권력투쟁에도 가담했다. 몽골 지배기 고려의 왕은 제후왕으로 격이 낮아졌다. 제후왕으로 전락해 조(祖), 종(宗)을 붙여서 묘호(廟號)를 지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처럼 왕호에 ‘충(忠)’을 덧붙였다.
원은 고려 영토 내에 쌍성총관부(함경도 일대), 동녕부(평안도 일대), 탐라총관부(제주도)를 뒀다. 원나라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瀋陽王)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다.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한 데는 남만주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고려인 통제에 편리했을 뿐 아니라 만주의 지배자인 테무게 가문과 고려왕을 동시에 견제하는 목적도 있었다. 고려왕과 심양왕은 수시로 대립했다. 이는 원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제대로 기능했음을 말해준다.
등뼈 꺾인 壯士
/홍건군의 우두머리를 그린 중국 그림.
원나라 지배기 고려는 등뼈를 꺾인 장사(壯士)처럼 독자성을 잃어갔다. 원나라 말 고려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수용하면서 고려와 뒤를 이은 조선의 한족 중심적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가 심화됐다.
원나라 시기 중동-중앙아시아로부터 선진 과학기술이 도입됐다. 역학(曆學)과 수학에도 괄목할만한 발전이 이뤄졌다. 강남에서 생산된 쌀과 소금, 직물이 운하와 바다를 통해 대도로 운송됐으며, 이에 따라 조선과 항해술이 크게 발달했다. 명나라 초기 정화의 인도양 항해(航海)도 이때 발전한 조선과 항해술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쿠빌라이를 계승한 황태손 성종 이후 제위(帝位) 다툼을 둘러싼 권신(權臣)들의 발호로 인해 원나라 궁정은 음모의 소굴(巢窟)이 됐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지도부는 제대로 된 통치철학을 갖지 못했다. 몽골족은 싸우고 빼앗는 데는 천재적이었으나, 1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다스리는 데는 금방 무능을 드러냈다. 쿠빌라이 재위 기간 이미 허난과 안후이(安徽)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원나라는 재정 담당에 압둘 라흐만, 상가, 아흐마드 등 상인 기질의 중앙아시아인을 주로 기용해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으로 세금을 거뒀다. 거의 착취 수준이었다. 그들은 원(元)이라는 대제국을 공공(public)이 아니라 사업(business)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았다. 한마디로 통치철학 부재였다.
수·당(隋·唐) 이래 화이허(淮河) 이남이 경제중심지가 됐으며, 인구도 강남이 화북에 비해 월등히 많아졌다. 남·북조(南北朝), 수·당, 5대 10국, 송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의 중심이 황하 상류 시안과 뤄양에서 카이펑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류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창장 하류로 옮겨온 것이다. 특히 항저우(杭州)를 수도로 한 남송은 강남을 집중 개발했으며, 이후 왕조들인 원· 명·청 등은 국가 재정을 주로 강남에 의존했다.
1351년 황허 둑 쌓기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농민들이 백련교(白蓮敎) 주도로 허난에서 봉기했다. 원나라군은 송(宋) 휘종의 후손을 자처한 백련교 교주 한산동(韓山童)이 주도한 농민 반란군을 공격해 초기에 격멸했으며 한산동을 붙잡아 처형했다. 백련교는 조로아스터교를 개혁한 마니교(摩尼敎)의 중국 버전으로 명교(明敎)로 불렸으며, 허난과 안후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백련교도 봉기군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하고 있어 홍건적(紅巾賊)이라고 불렸다.
3) 홍건軍, 고려를 침공하다
홍건군의 봉기를 필두로 반란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소금거래업자인 저장(浙江)의 방국진(方國珍)에 이어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과 장사성(張士誠), 후베이의 서수휘(徐壽輝) 등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빈농 출신 걸승(乞僧) 주원장(1328~1398)은 1351년 곽자흥 군단에 가담했다. 주원장은 고향 안후이성 후저우(濠州)에서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죽마고우들을 포함한 지휘관급 병사 700여 명을 모집했다. 영민한 자질에다가 우수한 장교까지 거느린 주원장은 곧 두각을 나타냈다. 원나라군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백련교도 유복통은 1355년 안후이의 박주(亳州)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추대해 송(宋)을 세웠다. 홍건군 본류에 속한 곽자흥과 주원장 등은 형식적으로나마 송(宋)을 받드는 모양새를 취했다.
원나라 조정은 유복통, 한림아의 반란을 원의 국기(國基)를 흔드는 중대사로 판단했다. 원 조정은 톡토와 차칸테무르를 사령관에 임명해 반란에 대처하게 했다. 원나라군과 한족 지주들은 연합군을 편성해 홍건군을 공격했다. 유복통은 원나라군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는 4로(路)로 분산해 대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잘못 판단했다. 유복통은 자신이 중로(中路)를 맡아 허난을 점령하는 한편, 제1로의 관선생(關先生)은 허베이, 제2로의 모귀(毛貴)는 산둥, 제3로의 대도오(大刀敖)와 백불신(白不信)은 관중으로 진격하게 했다. 관선생이나 대도오, 백불신을 비롯한 홍건군 지도자 다수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가명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복통은 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그는 이런 이유로 원 조정의 목표가 돼 당대 제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나라 정규군의 공격을 받았다. 1359년 카이펑이 차칸테무르군(軍)에 점령되자 유복통은 한림아와 함께 벽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허베이로 진출한 관선생은 타이항 산맥을 넘어 산시성 다퉁(大同)을 약탈한 후 동북진(東北進)해 원나라 하계 수도인 개평부(금련천)를 점령했다. 관선생은 원나라군이 추격해 오자 동쪽으로 달아나 랴오양(遼陽)을 함락하고, 압록강을 건너 1359년과 1361년 2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했다. 홍건군은 베이징 부근을 우회해 근거지인 허베이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으로 탈출로가 막히는 바람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남하한 것이다. 홍건군의 제2차 침공 시 고려는 개경을 빼앗기고, 왕(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해야 했다. 고려는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이 모집한 의용병의 분전에 힘입어 겨우 개경을 탈환했다.
개경 탈환戰 참가한 元지방군벌, 이성계
고려 동북면의 원나라 지방군벌 이성계(1335~1408)도 기병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성안으로 돌입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홍건군은 4로로 분산된 끝에 봉기 10여 년 만에 소멸됐다. 홍건군은 통일된 이념과 군율을 갖지 못했다. 홍건군이 급히 소멸된 것은 △당대 제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군의 공격도 공격이지만 △홍건군을 4로로 나눈 유복통의 전략적 실수와 함께 △뚜렷한 이념을 갖지 못한 홍건군 지도자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괴작용(自壞作用) 때문이었다.
특히 산둥 지난(齊南)에 일시적으로 뿌리내린 모귀 군단의 자괴작용은 목불인견이었다. 모귀는 부하인 조균용에게 살해당했으며, 조균용은 속계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모아놓은 미인과 재산을 차지하고자 싸운 것으로 보인다. 톡토가 이끄는 원나라군은 장사성과 서수휘를 비롯한 반란군에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톡토는 권력투쟁에 패배해 실각하고 반란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세를 불려나갔다.
1356년 안후이, 허난, 양저우 등에 큰 흉년이 들었다. 장사성 군단은 원나라군의 공격에다가 기근도 겹쳐 강남으로 탈주했다. 운 좋게도 그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 등 강남의 경제중심지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장사성과 방국진은 유사시에 대비해 고려에 조공했다. 쑤저우와 항저우는 곡창지대이자 상공업도 발달한 ‘천하 2개의 과실’이었다. 곽자흥이 죽은 후 그의 군단을 이어받은 주원장도 남쪽으로 탈주해 장쑤성의 중심지 집경(난징)으로 들어갔다. 유기(劉基)와 이선장(李善長) 등 명망 있는 지식인을 거느리게 된 주원장의 위세는 집경 입성 후 한층 더 높아졌다.
1360년 서파(西派) 홍건군의 수장이던 서수휘의 부하 진우량(陳友諒)이 후베이, 후난을 포함한 창장 중류 지역에서 한(漢)나라를 건국하고, 창장의 흐름을 따라 동진하기 시작했다. 중국 통일의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천하는 ①창장 중상류의 진우량 ②중류의 주원장 ③하류의 장사성 등 3자 대결로 판가름 나게 됐다.
4) 건곤일척, 포양후大戰
/강화도 마니산.
원나라가 경제중심지 강남을 잃고 겨우 버텨가는 가운데 우창(武昌)의 진우량과 쑤저우의 장사성에게 에워싸인 난징의 주원장은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쑤저우와 항저우를 점령한 장사성은 당초의 기개를 잃어버리고, 향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사성은 정치를 동생 장사신에게 맡겼으며, 장사신마저 부하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향락을 추구했다.
장사성에 비해 진우량은 상관 예문준(倪文俊)과 서수휘를 차례로 살해하고 서파(西派) 홍건군을 손아귀에 넣을 만큼 과감하고 의욕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서수휘가 살해되자 부하 명옥진(明玉珍)은 쓰촨을 배경으로 독립해나갔다.
이 무렵 원나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홍건군에 항복했다가 다시 원나라에 투항한 자들에게 속아 산둥 익도(益都)에서 암살됐다. 이로써 화북의 원나라 영토는 강남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웅할거 각축장으로 변했다. 강남·북 공히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동근상전(同根相煎)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주원장은 서쪽의 진우량과 동쪽의 장사성에게만 신경 쓰면 됐다. 주원장에게 거듭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주원장은 창장 중상류로 서진하고 진우량은 창장 중하류로 동진해 같은 홍건군 출신인 2개 세력권이 겹쳤다. 중원의 사슴(패권)을 목표로 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1363년 진우량은 동진해 주원장의 세력권이던 포양후(鄱陽湖) 남안(南岸)에 위치한 홍도(난창)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주문정과 등유 같은 주원장의 장군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홍도 구원에 나섰다. 주원장이 직접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진우량은 60만 대군을 동원해 포양후 입구에 위치한 후커우(湖口)로 진격했다. 주원장의 20만 대군과 진우량의 60만 대군이 포양후에서 총 36일간에 걸친 수전(水戰)을 벌였다. 주원장과 진우량이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향락에 빠진 장사성은 움직일 줄 몰랐다. 주원장은 유기, 유통해 등 부하들의 활약과 화공 전술에 힘입어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보급 문제에 시달리던 진우량군을 대파했다. 전투 중 함선을 바꾸어 타던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죽는 바람에 전투는 끝났다.
‘明’ ‘마니산’ 유래
포양후 대전 후 주원장의 패권은 확고해졌다. 포양후 전투 2년 뒤인 1365년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동원해 창장 남북에 걸친 장사성의 영토를 빼앗아 나갔다. 주원장 군단은 항저우와 후저우(湖州), 우시(無錫)를 점령해 장사성의 도읍으로 동양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물과 비단의 도시 쑤저우를 고립시켰다. 쑤저우를 포위한 1366년 12월 주원장은 부하 장수 요영충을 시켜 송나라 황제 한림아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 주원장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 모두 치워졌다. 주원장은 1367년 쑤저우마저 점령하고 장사성을 포로로 잡았다. 쑤저우 함락 직후 일사천리로 서달과 상우춘이 지휘하는 25만 명의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도를 향해 진격했다.
주원장은 북벌군이 대도를 향해 진격하던 1368년 1월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명(明)이라 했다. 이는 주원장 자신이 명교(마니교) 출신인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라크 북서부에서 시작된 마니교(摩尼敎)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분파로 중국에서는 끽채사마(喫菜事魔)로 불리기도 했으며, ‘광명의 신’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이라크의 앗시리아인들이 믿는 예지디교와 유사한 점이 있다. 대한민국에도 마니교 전래의 흔적으로 보이는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이 있다.
명나라군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원나라는 우유부단한 황제 토곤테무르(순제)와 그의 아들 아이유시라다라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순제는 황자 시절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으며, 고려 출신 기씨(奇氏)를 황후로 맞이하는 등 고려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원나라 조정은 몽골 지상주의자(국수파) 바얀과 한화파 톡토 간 대립에다가 황제파 볼로드테무르와 황태자파 코케테무르(차칸테무르의 아들) 간 대립도 격화돼 온갖 난맥상을 다 연출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이래 일본, 베트남, 참파, 버마, 자바 등으로 해외 원정이 계속돼 국가재정도 붕괴된 지 오래였다. 강남으로부터 쌀과 소금이 오지 않을 경우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달과 상우춘이 지휘하는 25만 명나라 대군이 북진해 오는데도 군벌 간 대립이 계속됐다.
이제 명나라군을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달은 1368년 8월 대도를 점령했다. 일체의 저항 없이 대도성을 내준 순제 토곤테무르는 북쪽으로 도망하다가 내몽골에서 병사했으나,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라다라는 외몽골로 도피하는 데 성공해 원나라를 이어갔다. 원나라는 멸망한 것이 아니라 크게 팽창했다가 다시 수축된 것이다.
5) 테무게 왕가 가신, 이자춘
/명 태조 주원장. [위키미디어]
명나라 건국 후 고려 공민왕은 난징으로 축하 사신을 보내기는 했으되 중국 정세 변화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1370년 이성계와 이인임, 지용수 등이 1만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함경도 지역)에서 출발해 강계를 지나 압록강을 도하해 혼란에 처한 랴오둥에 진입했다. 고려군은 랴오둥의 중심도시 랴오양을 점령했으나 보급 문제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테무게 왕가 영역 내에서 실력을 길렀다. 원나라 시대 만주 일대를 지배한 테무게 왕가는 나얀 시기 원나라 대칸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에 실패한 후에도 제후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실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고려 ‘무신란’ 주역 중 하나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인 이안사는 1255년 테무게 왕가로부터 천호장(千戶長) 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아 두만강 하류 일대를 지배했다. 이안사를 고조부로 하는 이성계 일가는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해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따라서 1392년 조선 건국은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 간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위화도 회군 현장에 있던 장수 셋의 초상. 화면 중 3인은 훗날 역성혁명 주역이다. 가운데가 이성계(1335~1408)라고 한다. 좌 이지란(1331~1402), 우 심덕부(1328~1401)가 호위하고 있다. [뉴시스]
원말(元末)-명초(明初) 만주의 몽골 세력을 대표하던 나하추(무칼리의 후손)는 1375년 랴오둥반도 남부 일대를 공격하다가 대패했다. 나하추는 1387년 풍승(馮勝)과 남옥(藍玉)이 이끄는 20만 명나라 대군이 다링허-랴오허 유역 근거지 금산(金山)을 압박하자 명나라에 항복했다. 나하추 일가는 명나라에 항복함으로써 명나라가 주도하는 질서하에서 제한된 권력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1388년 3월 남옥에게 10만 대군을 줘 북원(北元)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남옥은 만주라는 옆구리를 상실한 북원군을 내몽골 부이르호(捕魚兒海) 전투에서 대파하고, 북원을 외몽골로 축출했다. 이로써 북원(北元)과 고려 간 연계는 끊어졌으며 왕실을 포함한 고려 기득권 세력은 비빌 언덕을 잃어버렸다. 이에 앞선 3월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평안도 북부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나라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해 고려는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으로 대표되는 대명(對明) 강경파와 이성계, 조민수, 정몽주 등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분열됐다. 이성계 일파는 그해 5월 우왕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치러 출격했다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회군해 대명(對明) 강경파를 숙청하고,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를 구축했다.
6)불패 명장, 조선을 열다
/2017년 10월 21일 조선 건국 설화를 바탕으로 이성계의 군대 행렬이 승전을 알리는 취타대를 시작으로 장군을 호위하는 무사단, 신인, 선녀와 금척무 공연 등이 재구성돼 전북 진안군 홍삼축제장에서 재현됐다. [진안군제공]
천호장 겸 다루가치 울루스부카(이자춘)를 승계한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투를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성계는 빛나는 군사 실적을 기반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우뚝 섰다. 이성계는 몽골식 평지전과 산악전에 모두 능숙했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군단은 다른 고려 군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최영, 최무선 등과 함께 일본 가마쿠라 막부 말기 남·북조(南北朝) 내전에 패배한 규슈의 사무라이 위주로 구성된 왜구의 침략을 진포와 운봉(남원) 등지에서 격퇴하고, 신흥 사대부의 대표 격인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 즉 조선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승리와 조선 건국은 고려의 부패한 친원(親元) 기득권 세력을 밀어냈다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한족 문명을 절대시하는 나약하고 폐쇄된 나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03월 호
■만동묘 복원과 중화주의
明황제 숭앙 송시열, 최익현… 중국 향한 사대주의의 부활
1704년 조선 성리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이유로 만력제를 숭앙하는 만동묘를 세웠다. 유생(儒生)들의 골수 중화주의는 1865년 대원군에 의해 철거된 만동묘를 10년 후인 1875년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표출됐다. 1942년 일제(日帝)가 철거한 만동묘가 최근 복원됐다. 중화사상이 중화제국(中華帝國) 개념으로 나아가는 국면에서 한국 사회 일각에 뿌리 박힌 중화주의는 치료 불가능한 고질병인 것으로 보인다.
/티무르 동상.
1) 칭기즈칸의 2남 차가타이는 1227년 현재의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 분지(盆地) 알말릭을 수도로 차가타이 칸국(Khanate)을 세웠다. 차가타이 칸국은 13세기 중엽 칭기즈칸의 3남 오고타이의 후손 카이두가 원(元) 세조 쿠빌라이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에 연루돼 원과 킵차크 칸국의 협공을 받은 데다 일 칸국과도 분쟁을 겪은 끝에 13세기 말부터 약화했다.
튀르크 계통의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이 톈산산맥을 경계로 동부(모굴리스탄·신장)와 서부(우즈베키스탄)로 분열된 기회를 틈타 1360년 서부에 속한 고향 샤흐리샤브즈(史國) 일대를 확보한 후 1370년에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점령하고 대칸이 됐다.
티무르는 현재의 카자흐스탄, 이란, 이라크, 크리미아반도를 포함한 남부 러시아를 차례로 정복해 대제국을 세웠다. 중앙아시아-중동 핵심부를 장악한 티무르는 1398년 4월 인더스강을 건너 힌두스탄 평원에 진입했으며 같은 해 12월 델리를 약탈했다. 1400년 10월 시리아의 알레포를 점령하고 1401년 3월 다마스쿠스를 함락했다. 이로써 티무르의 적수는 전 세계를 통틀어 오스만튀르크와 명나라만 남았다.
티무르는 시리아 정복을 끝낸 후 1401~1402년 겨울 남부 코카서스에서 전열을 정비해 1402년 6월 오스만튀르크 공격을 개시했다. 40만 티무르군은 1402년 7월 20일 앙카라 대회전(大會戰)에서 역시 40만 규모로 편성된 오스만튀르크군을 섬멸했다. 티무르군은 서진을 계속해 마르마라해 연안에 자리한 오스만튀르크의 수도 부르사를 약탈하고 1402년 12월 성(聖) 요한 기사단 치하의 난공불락 해안도시 이즈미르를 단 2주 만에 함락했다.
1405년 티무르는 70만 대군을 편성해 숙적 명나라 정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티무르는 명나라로 진격하던 도중 키르키스의 숙영지(宿營地)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2) 몽골의 再등장
티무르의 굴기에 앞서 중원에서 축출된 몽골도 명나라에 도전했다. 몽골의 부흥은 신속했으며 명나라의 대응도 빨랐다. 북원군(北元軍)이 명나라 남옥(藍玉)의 군대에 패배한 1388년 부이르호(湖) 전투 이후 칭기즈칸 가문 등 할하족이 주류를 이룬 북원은 약해지고 타타르족(러시아 거주 튀르크 계통 타타르와는 다르다)이 대두했다.
티무르 제국의 지원을 받은 타타르족 수장 벤야시리는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도전했다. 1402년 ‘정난의 변’을 감행해 조카 건문제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주원장의 넷째 아들 영락제는 구복(丘福)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벤야시리를 치게 했으나 명나라군은 1409년 케룰렌강 전투에서 타타르군에 전멸당했다. 이듬해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해 오논강에서 타타르군을 격파했다.
타타르족이 약화되자 몽골 서부를 근거로 하는 오이라트족이 등장했다. 1414년 영락제는 다시 24만 대군을 동원해 몽골로 친정했으나 오이라트 세력을 뿌리 뽑지 못했다. 영락제는 1420년 난징에서 연경(베이징)으로 천도했다. 이로써 명나라는 몽골과 만주, 조선의 정세 변화에 극히 민감할 수밖에 없게 됐다.
걸승(乞僧)이자 명교(明敎) 신자 출신인 주원장은 나라가 체제를 갖춰가자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부하 위관(魏觀), 이선장(李善長), 호유용(胡惟庸), 육중형(陸仲亨), 부우덕(傅友德), 풍승(馮勝) 등 숱한 공신숙장(功臣宿將)을 살해했다. 주원장은 신하들을 가급적 죽이지 말 것을 호소하던 황태자 주표(朱標)에게 가시가 붙은 탱자가지를 쥐여주면서 “너에게 가시 없는 탱자를 남기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나라 조정의 관리들은 “매일 아침 입궐 시 처자와 이별 인사를 하고 저녁에 무사히 돌아오면 서로 기뻐했다”고 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주원장은 재상 호유용을 처형한 다음 후임 재상을 임명하지 않고 황제가 내각을 직접 통할하는 황제독재국가를 만들었다. 주원장은 황태자 주표가 죽은 후에는 황태손 주윤문의 미래를 위해 공신들을 살육했지만 건문제 주윤문은 4년간의 내전 끝에 숙부인 연왕 주체(朱棣)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세조·영락제 닮은꼴 정권 찬탈
1399년 주체가 연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선도 명나라 내전에 휘말렸다. 여진족 출신 명나라 장수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는 1만 5000여 명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조선 입국을 요청했다. 임팔라실리를 따르는 1만 5000여 명 중에는 최강(崔康)을 포함한 랴오둥(요동) 조선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주체와 충돌하지 않으려고 임팔라실리 등 주모자들을 주체에게 넘겨줬다. 조선은 주체가 일으킨 내란이 4년이나 지속됐는데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요동 정벌을 주장한 정도전을 살해하고 집권한 이방원으로서는 정권 안정을 위해 중국 정권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주체든, 주윤문이든 어느 한쪽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주체의 쿠데타가 일어난 50년 뒤 조선에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세조(이유)는 주체의 사례를 통해 정권 찬탈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영락제로 등극한 주체의 후궁 가운데 하나인 한씨(韓氏)의 조카가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 이혈의 어머니 인수대비다.
태조 주원장이 농본주의적 한족 민족국가를 목표로 한 데 반해 영락제는 세계제국을 지향했다. 영락제는 몽골 정벌을 시도하면서 환관 정화(1371~1434)를 기용해 남중국해-인도양 항해에 나섰다. 정화의 아버지는 윈난(雲南) 출신 이슬람교도 무함마드다. 그의 가계(家系)는 이란 또는 터키계로 추정된다. 제1차 대항해는 1405년 창장 하구의 류자허(劉家河)에서 출발했다. 난징에서 건조한 300~2000t급 대형선 62척에 2만 7800명의 장병이 승선해 푸젠-베트남 중부(퀴논)-자바(수라바야)-수마트라(팔렘방)-스리랑카(갈레)-인도(캘리컷) 항로를 총 2년간 항해한 끝에 1407년 귀환했다.
정화의 대항해가 있은 지 60년 후인 1492년 제노아 공화국 출신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때 승무원 88명이 250t급 산타마리아호 등 3척에 승선해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에 도착한 것과 1497년 포르투갈 출신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항해 때 120t급 선박 3척이 사용된 것에 비춰 볼 때 명나라의 조선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정화의 대항해는 남중국해-인도양 연안 국가에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정난의 변’ 와중에 행방불명된 건문제의 행방을 수색하고 후추와 각종 진귀한 물품을 입수하는 것도 항해 목적 중 하나였다. 당시 수마트라 팔렘방에는 이미 상당수의 화교가 살고 있었다. 명나라에 적개심을 갖고 있는 티무르 제국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항해 목적 중 하나였을 것이다.
3) 정화의 大항해, 일대일로로 부활
명나라는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조선, 몽골, 오키나와, 신장의 도시국가, 동중국해-인도양 연안 다수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은 명나라는 성리학에 기초한 화이관(華夷觀)과 조공무역의 힘으로 중국 중심 질서를 만들어갔다.
7회에 걸친 정화의 대항해는 대체로 평화리에 실시됐다. 제3차 항해 시 조공을 거부하는 스리랑카 왕과의 싸움이 거의 유일한 전투다. 3차까지는 인도의 캘리컷, 4차부터는 호르무즈해협까지 항행(航行)했다. 분견대(分遣隊)가 예멘의 아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케냐의 마린디까지 나아갔다.
정화 함대는 기린 등 당시 기준으로 기이한 짐승을 잡아왔다. 1431년 제7차 항해는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 시대에 이뤄져 메카까지 항행했다. 성화제 시절 환관들을 중심으로 대항해가 다시 추진됐으나, 농본주의적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보수적 관료들은 정화가 남긴 보고서를 모두 파기했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이나 항해술도 이때 모두 사장(死藏)됐다. 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상공업 진흥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시기에 명나라는 쇄국주의(鎖國主義)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정화의 대항해는 최근 시진핑 정부에 의해 일대일로(一帶一路)로 되살아났다.
연왕으로서 베이징을 다스려본 영락제는 몽골과 중원의 분리가 야기한 몽골 부족의 경제난이 몽골과 명나라 간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몽골 원정을 통해 원나라처럼 막남(중국)과 막북(몽골)을 다시 통일할 계획이었다.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는 정벌전쟁에도 불구하고 몽골 세력이 꺾이지 않자 주원장의 건국이념으로 돌아가 수축형 민족국가를 지향했다. 그는 난징 재천도(再遷都)를 시도했다. 홍희제의 재위 기간이 매우 짧은 까닭에 재천도는 이뤄지지 못했다. 홍희제를 계승한 선덕제는 주원장의 수축형 민족국가와 영락제의 확장형 세계제국 사이의 중간을 선택했다. 재천도는 중단했으나 몽골 쪽 국경수비대를 허베이성 중북부까지 후퇴시키고 반란이 잦은 베트남은 포기하기로 했다.
몽골 군단, 베이징 압박하다
선덕제가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한 것이 그의 아들 영종 시대에 재앙으로 다가왔다. 영종은 사부(師父)인 환관 왕진(王振)을 중용해 2인자로 삼았다. 왕진의 위세는 상서(장관)의 무릎을 꿇릴 정도였다.
명나라에서 영종이라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등장한 때 몽골에서는 오이라트족 출신 에센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몽골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계속 압박했다.
몽골은 마시(馬市)라는 조공무역을 통해 명나라에 말을 비롯한 가축을 수출하고 대가로 식량과 차 등을 수입해 살아갔다. 조공무역은 경제적으로 약자인 몽골에 유리하게 진행됐다. 조공무역이 국가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왕진의 사익(私益)에도 해가 되기 시작하자 명나라는 교역량을 제한하려 했으며 에센은 1449년 랴오둥에서부터 간쑤까지 동-서 국경 전체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에센의 주력군이 산시성의 요충지 다퉁(大同)마저 공격하자 왕진의 사주를 받은 영종은 친정(親征)을 결정했다. 에센 군단의 위력을 잘 알던 병부상서(국방장관) 광야(鄺埜)와 병부시랑(국방차관) 우겸(于謙)이 친정을 만류했으나 영종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영종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기로 하고 동생 주기옥을 감국(監國)으로 삼아 우겸과 함께 베이징을 지키게 했다.
영종의 친정은 비극으로 끝났다. 명나라 대군은 장거리 행군 끝에 물이 거의 없는 베이징 교외 토목보(土木堡)에서 4만 오이라트 기병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포위된 명나라군 수십만 명이 학살됐다. 영종은 포로가 됐으며 왕진과 광야 등은 참살당했다. 에센은 곧바로 베이징성을 포위했다. 우겸은 주기옥을 황제로 추대하고 22만 병력과 각종 화기(火器)를 곳곳에 배치해 5일간의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에센은 조선군을 포함한 지원군에 의해 퇴로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해 몽골로 퇴각했다.
4) 조선이 요동 점령 못 한 까닭은…
/우암 송시열 초상. 18세기 문인이자 화가인 김창업이 그렸다. [국립춘천박물관]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 건국세력은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이 한자로 화림(和林) 또는 화령(和寜)으로 표기된다는 것에 착안해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중 하나를 나라 이름으로 선택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명나라로 하여금 만주를 영유한 적이 있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 왕과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觀)에 깊이 물들어갔다.
오이라트가 대명(對明) 동맹을 요청하고 베이징성을 포위하는 상황임에도 세종 이도의 조선은 압록강이나 두만강 건너편 어느 한 곳도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명나라가 조선 대군의 랴오둥(요동) 주둔과 여진족 준동 억제를 요구한 기회마저 활용하지 못했다. 조선은 오이라트군의 압록강 도하에 대비해 강계에 대군을 주둔시키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앞서 1433년과 1435년 4군(四郡)·6진(六鎭)을 개척한 것이 조선이 얻어낸 전부였다.
이도는 1433년 최윤덕(崔閏德)에게 1만 5000여 명의 병사를 줘 서북면(평안도)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했다. 최윤덕은 여진족을 몰아낸 곳에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武昌), 우예(虞芮) 4군을 설치했다. 이도는 1435년 김종서(金宗瑞)를 동북면(함경도)으로 파견해 경원(慶源), 경흥(慶興), 온성(穩城), 종성(鍾城), 회령(會寧), 부령(富寧) 등 6진을 개척하게 했다. 당시 조선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이라트와 손잡고 랴오둥을 점령했어야 했다. 베이징과 가까운 랴오둥 공략이 부담스러웠다면 6진 사령관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적어도 지금의 지린성과 연해주 일대를 점령하게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조선과 명, 몽골, 일본 간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명을 하늘로 생각하고 명나라에 외교·국방을 맡기다시피 한 조선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와 세조 주도의 계유정난 이후 거듭된 정변과 사화(士禍)는 조선의 왜소화를 가져왔다. 성종 이후 성리학자들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면서 조선의 독자성은 계속 약화됐다.
조선의 또 다른 문제는 왜구 출몰이었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기에도 이어졌다. 개국 초기부터 조선은 총포를 장착한 전함을 개발하는 등 해군력을 증강하는 한편, 왜구 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아시카가(足利) 막부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1419년 상왕(上王) 이방원의 명을 받은 이종무는 함선 227척과 군사 1만 7000여 명으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토벌했다. 조선은 류큐, 샴, 자바 등과도 교류했다.
5)몽골, 야성 잃고 無力化
/왜구의 침략을 그린 16세기 명나라 그림.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 해안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알마 제공]
에센은 칭기즈칸 가문인 황금씨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대칸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후손 톡토아부카를 대칸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2인자인 태사(太師) 자리에 머물렀다. 에센의 매부이기도 한 톡토아부카는 에센이 베이징을 칠 때 만주와 몽골을 경계 짓는 싱안링(興安嶺)을 넘어 여진족 건주위와 해서위 등을 공격해 승리를 맛보았다.
톡토아부카가 에센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실력을 갖추자 명나라는 두 사람을 이간시키는 작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톡토아부카와 에센 사이에 대립이 심화됐다. 톡토아부카는 에센의 누이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다. 참을 수 없게 된 에센은 1451년 톡토아부카 일족을 학살하고 자립했다. 칭기즈칸의 후손을 죽인 데 대한 반발로 많은 몽골 부족이 에센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세력을 잃은 에센은 1454년 부하에게 피살됐으며, 이로써 서북 만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를 영역으로 하던 오이라트 제국도 붕괴하고 말았다.
오이라트족이 약화되자 할하족이 대두했다. 에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할하족 출신 바투멩게, 즉 다얀 가한(大元可汗)은 1493년 이후 마시(馬市)를 둘러싼 긴장이 발생할 경우, 산시와 허베이 등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명나라가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다얀의 손자 알탄 가한 시대에 이르러 마시를 둘러싼 명나라와 몽골 간 갈등은 도를 더해갔다. 당시 명나라 변경에서는 군대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반란군 일부는 몽골로 도피했다. 알탄은 이들에게 내몽골의 토지를 내주어 경작하게 했다. 이들은 알탄을 부추겨 명나라를 침략하게 했다. 알탄은 1542년 산시성 태원 등을 공격했으며, 조선 명종 이환(李峘)이 집권하던 1550년에는 베이징 교외 고북구와 통주를 함락시키고 베이징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알탄은 명나라 각지로부터 지원군이 당도하자 베이징성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이때도 조선은 중국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1570년 이후 알탄은 명나라보다는 중앙아시아, 신장, 티베트에 더욱 관심을 뒀다. 그는 몽골, 신장, 칭하이, 티베트, 중앙아시아 일부를 통합해 대제국을 세웠다. 알탄은 유목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티베트로부터 라마불교를 받아들였다. 유목민족이 종교의 영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후돌궐(後突厥) 빌게 가한의 동생 퀼테긴(Ku‥ltegin)과 재상 톤유크의 업적을 새긴 오르콘 비문(731)에 잘 나타나 있다. 톤유크 비문에는 “이질적인 종교를 받아들이지 말고 돌궐 정신을 보존하자”는 문장이 새겨졌다. 알탄의 라마불교 귀의는 톤유크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언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몽골의 오이라트, 타타르, 할하족은 급격히 라마불교화됐으며, 몽골족은 야성을 잃고 무력화(無力化) 되어갔다.
대재앙 서곡, 왜구
명나라는 몽골(北虜)에 이어 일본으로부터 기원한 왜구(南倭)로부터도 시달림을 받았다. 전기 왜구는 원나라와 고려의 쇠퇴 및 남북조(南北朝)로 나누어진 일본의 정치적 혼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기 왜구에는 일본인과 함께 소수 탐라인(제주도인)도 참가했다. 1563년 이후 발생한 후기 왜구는 일본의 상공업 발달로 인한 화폐경제의 발달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후기 왜구는 일본의 조공무역 사절단이 닝보(寧派)에서 해적행위를 한 데 대한 보복으로 명나라가 조공무역을 중단시킨 폐관절공(閉關絶貢) 이후 창궐했다. 왜구는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낼 정도로 잔인한 행동을 다반사로 했다.
명나라 정규군마저 왜구를 무서워하게 되자 중국인 중 왜구 집단에 들어가거나 스스로 왜구를 자처하는 자가 늘어났다. 왜구의 70~80%가 중국인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왜구는 산둥부터 하이난까지 중국 해안 곳곳을 약탈했다. 해안지방 밀무역 업자들은 왜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왜구 대책은 밀무역을 겸하던 지방 호족들에 대한 대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방 호족들은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고, 왜구에 강경책으로 맞선 관료들을 적대시했다.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취한 주환(朱紈)이나 호종헌(胡宗憲) 같은 관료들은 안후이(安徽)의 대재벌 신안상인을 비롯한 호족(豪族)들과 부패한 중앙정부 관료들에 의해 자살로 내몰리기도 했다. 지방의 대재벌이 베이징 중앙정부를 흔든 것이다. 훗날 복명운동(復明運動) 주동자가 되는 중·일 혼혈 정성공 집안도 푸젠에서 밀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16세기 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식될 기미를 보이는 등 일본 정세가 안정되고, 유대유(兪大猷) 척계광(戚繼光) 등 무장들의 활약으로 왜구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기 왜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대재앙의 서곡에 불과했다. 동아시아의 변방이던 일본이 역사무대의 중심으로 뛰어오르는 순간이 다가왔다.
6)충북 괴산군 화양동 ‘만동묘’
/충북 괴산군 만동묘.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됐다. [뉴시스]
명나라 관료들의 녹봉은 심할 정도로 적어 부패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가정제 시기의 엄숭(嚴崇) 엄세번(嚴世藩) 부자의 부패는 악랄 그 자체였다. 무능한 가정제와 융경제를 거쳐 융경제의 3남 주익균(朱翊鈞)이 10세 나이에 만력제로 즉위했다.
만력제 때 일본의 조선 침공(임진왜란), 만주의 부상(浮上) 등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만력제는 아편 상습 복용자였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만력제가 조선에 파병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再造之恩·재조지은)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그를 자자손손 숭앙(崇仰)했다. 1704년 송시열과 권상하 등이 만력제와 그의 손자인 숭정제를 숭앙하기 위해 충북 괴산군 화양동에 세운 만동묘(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뜻하게 된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유래)도 그중 하나다. 만절필동은, 황허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항로(李恒老)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한 조선 말 유생(儒生)들의 골수 중화주의는 1865년 대원군에 의해 철거된 만동묘를 그 10년 후인 1875년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표출됐다. 1942년 일제(日帝)에 의해 완전 철거된 만동묘가 최근 복원됐다. 우리 사회 일각에 깊이 뿌리박힌 중화주의는 치료 불가능한 고질병으로 생각된다. 한족 우월주의 성리학은 명나라 초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했으며 반동적(反動的) 성격을 띤다.
중화사상은 중화제국(中華帝國) 개념으로 발전했다. ‘중화제국’은 동으로는 서해, 서로는 타클라마칸사막, 남으로는 남중국해, 북으로는 고비사막 범위 내에 있는 모든 민족과 국가가 중화권에 속한다는 정치·사회·문화적 개념이다. 중국의 동북아 및 서남아 공정도 중화제국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이 재조지은이라는 표현으로 숭앙한 만력제 초기 장거정(張居正) 주도로 실시된 토지개혁 결과 감춰진 토지가 환수되고 조세가 늘어나 명나라는 상당한 재정흑자를 달성했다. 만력제는 장거정이 남겨놓은 400만 냥의 저축 가운데 아들 주상순의 결혼식에 30만 냥이나 썼으며, 남은 돈은 주로 자신의 무덤 조성에 사용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사대부 동림당(東林黨)과 동림당을 반대하는 환관당 간 대립은 한층 더 격렬해지고 만주와 일본은 나날이 강성해졌다.
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해 100여 년간 지속된 전국시대를 끝장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조선 침공을 개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원정군은 평양과 회령을 점령했다.
04월 호
■순(順), 명(明) 황제 아들을 삶아 먹다
반란군에 무너진 조선의 ‘부국(父國)’
미국이 혼란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키웠다가 고생한 것처럼 명나라도 몽골의 굴기를 저지하고자 누르하치를 지원했다가 나라가 멸망하는 비극에 처한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 팔기군의 말발굽소리가 시시각각 베이징으로 다가오는데도 동림당과 환관당 사이의 당쟁은 더욱 격화했다.
그들은 반대 당 사람들을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 증오했다.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데도 당파 다툼이 끊이지 않는 21세기 한국의 모습과 유사하다.
/영화 ‘최종병기 활’. 만주에서 궐기한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차지한다.
임진왜란 이후 부녀자를 중심으로 강강수월래 놀이가 유행한다. 강강수월래는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군이 무리를 지어 “지금 막 순찰 돈다(剛剛巡邏·gang gang xun luo)”고 외치던 것이 기존(旣存)의 놀이와 결합해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막 순찰 돈다(剛剛巡邏·gang gang xun luo).”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파견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쫓겨 명나라 국경을 지척에 둔 의주까지 도주한 조선왕 이균(李鈞·선조)은 명(明)에 줄기차게 사신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했다. 이균은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1592년 9월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설번은 조선과 요동(만주)이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임을 들어 파병 불가피를 주장했다. 병부상서 석성도 동의했다. 명나라는 북부와 서부에서 몽골과 투르판 위구르가 침공하고 농민반란이 일어나던 상황이었는데도 고려인 이천년(다정가를 지은 이조년의 형)의 후손인 이성량(1526~1615)의 장남 이여송(李如松)을 사령관, 낙상지(駱尙志)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해 4만3000명 대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추가 북상을 저지하게 했다.
1593년 1월 이여송은 포르투갈 대포와 화전(火箭) 등 신무기를 보유한 절강군(浙江軍)을 동원해 조선군과 함께 고니시가 점령한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이후 기병 위주의 직할부대 요동군만을 이끌고 한양으로 남진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이여송은 1593년 말 명나라로 돌아가 군단장급인 요동총병으로 승진했으나 1598년 4월 타타르(몽골)군과의 요동전투에서 전사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 원군과 조선 해군사령관 이순신의 활약에 더해 곽재우, 정인홍, 조헌, 고경명 등 사대부 출신이 주축이 된 의병의 분투로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일본군의 침공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조선이 쇠약해진 이유는 중화(善)-오랑캐(惡) 흑백논리의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과 함께 단종(端宗) 이홍위(李弘暐) 집권 1년차인 1453년 발생한 계유정난부터 선조 집권기인 1589년부터 1591년까지 3년간 계속된 기축옥사에 이르기까지 140년간 사대부 엘리트들이 수천 명을 서로 죽이고 죽는 자괴작용(自壞作用)을 일으킨 데 있다.
2) 6·25전쟁 때 미군, 국군·인민군, 중공군 비율과 유사
일본은 1596년(정유년) 12월 14만2000명 대군을 동원해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일본군은 경상·전라·충청 등에서 조·명 연합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598년 9월 명나라군 14만4000명과 조선군 2만5000명, 일본군 14만2000명(6·25전쟁 때 미군, 국군·인민군, 중공군 비율과 유사)은 울산, 순천, 고성 등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결전을 벌였다. 울산성 등지에서 악전고투하던 일본군은 1598년 9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조선 침공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충격을 가했다. 연인원 21만 명, 은(銀) 883만 냥 등 국력을 쏟아부은 명나라는 멸망을 향해 달려간 반면 일본은 100년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강화된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등 명나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갖게 됐다. 에도(도쿄) 중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군마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면 전쟁의 승패는 달랐을지 모른다. 당시 일본은, 인구는 조선의 2배인 2000만 명, 경제력과 군사력은 조선의 3배가 넘었다. 일본은 30만 정예군 가운데 절반인 15만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조선 정규군은 4만~5만 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세계 최강 육군국(陸軍國)으로 유럽대륙이 보유한 전체 총기 수를 능가하는 50만 정의 조총(鳥銃)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 간 국력 차는 더욱 커졌다.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는 18세기경 100만 인구의 세계 최대 도시였다. 당시 베이징과 파리 인구는 약 50만 명, 한양 인구는 3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19세기 말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데는 이러한 경제·군사적 배경이 자리한다.
누르하치, 만주를 석권하다
일본의 조선 침공은 몽골의 동진(東進)이라는 명·몽골 분쟁의 그늘에 숨어 세력을 키워온 여진 건주위(建州衛)에 드러내 놓고 숨 쉴 공간을 제공했다. 동아시아는 더 이상 명과 몽골, 조선이 아니라 변경의 만주(여진)와 일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명나라는 몽골의 만주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요동 동부의 건주위를 강화했다. 당시 명나라는 요하 유역을 포함한 만주 일부만 직접 통치했다. 다른 지역 대부분은 자치 상태였다.
여진족은 ①초기 고구려의 중심을 이루던 랴오닝성 동부-지린성 서부 건주여진 ②부여의 고토(故土)이던 창춘·하얼빈 지역 해서여진 ③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하던 헤이룽장성·연해주 지역의 야인여진으로 3분돼 있었다. 명과 조선에 가까운 건주여진은 상대적으로 발달한 문화와 경제구조를 가졌으며 해서여진은 예헤부, 하다부, 호이화부, 우라부 등 4부로 구성됐는데, 모두 금(金)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중 예헤부와 하다부가 해서여진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거란의 후예로 보이는 예헤부는 내몽골에서 이주해온 부족으로 반명(反明) 의식이 매우 강했다. 명나라는 하다부를 지원해 예헤부를 누르려 했다. 하다부는 명나라에 반대해 봉기한 건주여진 출신 왕고(王杲)가 도망쳐오자 그를 명나라로 넘겨주는 등 친명정책(親明政策)으로 일관했다. 명나라는 몽골을 의식해 여진 여러 부족을 지원했으나 여진족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명 조정은 여진족 내부 상황을 잘 알던 요동 담당 이성량으로 하여금 여진족 대책을 총괄케 했다. 이성량은 여진 각 부족이 서로 싸워 지나치게 약화되자 1개부를 지원해 다른 부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이에 따라 선정된 것이 젊고 유능한 아이신고로 누르하치(1559~1626)였다. 이성량의 지원을 배경으로 강력해진 누르하치는 곧 소극소호, 혼하, 완안, 동악, 철진 등 5개 부를 모두 장악하고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예헤부와 하다부 간에 벌어진 해서여진 내란으로 인해 누르하치는 한층 강력해졌다. 해서여진 영향 아래 있던 국제시장 개성(開城)이 폐쇄돼 인삼과 모피 등 교역상품이 건주여진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명, 조선, 몽골 각 부 상인들이 모두 건주여진에 모여들게 됐으며, 건주여진은 한층 부유해졌고 조선과의 직접 통상로도 확보했다.
탈레반 키운 미국처럼 누르하치 지원한 明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그들의 신앙 대상인 문수보살의 ‘문수(文殊)’에서 차용해 만주(滿洲)로 부르기로 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누르하치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해서여진 4부가 예헤부를 중심으로 백두산 인근 여러 부족을 끌어들여 건주여진(만주)을 공격했다. 역시 거란의 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시보족(錫伯族)도 만주에 반대하는 동맹군에 가담했다. 누르하치는 이들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군에 가담한 백두산 지역 수사리부와 눌은부를 합병하는 등 만주 전역을 통일해나갔다. 1597년 4년간의 싸움 끝에 만주와 해서여진 4부가 평화조약(和約)을 체결했으나 만주와 해서 간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층 강력해진 만주는 1599년 기근에 처한 하다부를 합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후에야 명나라는 만주의 팽창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만주는 1607년 호이화부를 멸망시키고, 1613년에는 우라부마저 멸망시켰다. 이로써 예헤부를 제외한 해서여진 3부가 모두 만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누르하치는 산하이관(山海關) 이서(以西) 중국을 점령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국이 혼란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하기 위해 탈레반을 키웠다가 고생한 것처럼 명나라도 몽골의 강화를 저지하기 위해 누르하치를 지원했다가 나라가 멸망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도요토미는 누르하치를 잘 몰랐겠으나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누르하치의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명나라의 쇠퇴는 선덕제, 홍치제를 제외한 중기 이후 황제 대부분이 무능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황제 독재체제 명나라는 어리석은 황제가 계속 집권하자 요동의 한 부족(部族)에 불과하던 만주의 공격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에다가 정덕제 시대 유근(劉瑾), 천계제 시대 위충현(魏忠賢) 등 대환관들이 잇달아 등장해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철학 과잉도 문제지만, 철학이 없는 무절조(無節操)한 황제와 고위 관료들은 더 큰 문제였다.
명나라의 멸망은 황궁 뒷방에 틀어박혀 늘 마약에 취해 있던 만력제(萬曆帝)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그의 손자들인 유약한 천계제(天啓帝)와 의심만 많던 숭정제(崇禎帝)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공예를 특히 좋아한 청소년 황제 천계제 시대 최대 권력자가 환관 위충현이다. 일자무식 위충현은 장래가 불투명하던 황손(皇孫) 주유교를 충직하게 모신 공로로 그가 천계제로 즉위한 다음 유모 객씨와 결탁해 비밀특무기관 동창(東廠)의 책임자가 됐다.
3) 北京으로 다가온 팔기군의 말발굽소리
/누르하치.
위충현은 권력을 장악하고 난 7년 동안 동한(東漢)의 십상시(十常侍)나 당나라의 이보국, 정원진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국가에 큰 해악을 끼쳤다. 고병겸, 위광징, 반여정, 장눌, 육만령 등 반동림당(反東林黨) 인사들은 당파싸움 끝에 동림당 인사들을 박멸하기 위해 일자무식인 위충현을 공자와 맞먹는 성인(聖人)으로 받들었다. 고헌성(顧憲成)이 재건한 장쑤성 우시(無錫)의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한 양련(楊漣)과 좌광두(左光斗) 등 동림당 사대부들은 위충현을 탄핵했으나,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했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 팔기군의 말발굽소리가 시시각각 베이징으로 다가오는데도 동림당과 환관당 간 당쟁은 더욱 격화했다. 그들은 반대 당 사람들을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 증오했다.
만주족은 수렵민이었다. 포위해 공격한다는 점에서 수렵과 전쟁은 같은 패턴으로 진행된다. 만주족이 뭉치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누르하치는 300명을 1니르(화살이라는 의미)로 하는 군사·행정조직을 만들었다. 5니르를 1자란으로, 5자란을 1구사(旗)로 편성했다. 니르는 중대, 자란은 연대, 구사는 사단과 같은 개념이다. 누르하치는 가한(可汗)으로 즉위하기 전 이미 8기, 400니르를 확보했다. 즉 12만 대군을 보유한 것이다. 기(旗)는 군사조직인 동시에 행정제도이기도 했다. 400니르 가운데 만주·몽골 혼성 니르가 308개, 몽골 니르가 76개, 한족 니르가 16개에 달하는 등 만주는 초창기부터 다민족적(多民族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어 외에 몽골어와 한어도 구사할 수 있는 다언어 구사자였다.
누르하치 세력이 통제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커지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와의 교역을 중단하면서 예헤부를 지원해 누르하치에 맞서게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압력에 맞서 독립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수도를 랴오닝성 동부 허투알라(興京)에 두고는 요하 유역 푸순(撫順)을 공격해 명나라 장군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곤 추격해온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의 1만 군을 대파했다. 누르하치는 새로 통합한 해서여진 하다부 땅을 집중 개간하는 등 자립 태세를 갖춰나갔다. 누르하치는 1618년 자기 가족을 포함한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탄압 사례를 일일이 열거한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해 명나라의 군사력에 힘으로 맞설 것임을 공언했다. 누르하치에게 공포를 느낀 명나라는 1619년 병부시랑 양호(楊鎬)를 요동경략, 즉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양호는 선양(瀋陽)에 주재하면서 누르하치군에 대처했다.
명나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양호는 1619년 12만에 달하는 명나라-예헤부-조선 연합군을 4로(路)로 나눠 누르하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李如栢)을 부사령관인 요동총병에 임명하는 한편, 두송(杜松)과 왕선(王宣), 마림(馬林), 유정(劉綎)으로 하여금 각 1로를 담당하게 했다. 양호와 유정은 조선에 출병해 일본군과도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예헤부가 1만5000 병력을 파병했으며, 광해군 이혼(李琿)도 지지 세력 북인을 포함한 사대부들의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강홍립(姜弘立) 지휘하에 1만 병력을 파병했다.
明軍 3만 명 전멸한 사르허 전투
4로 장군들 가운데 누르하치를 경시한 두송은 무공(武功)을 독점하기 위해 총사령관 양호가 내린 명령을 어기고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먼저 훈허(渾河)를 건넜다. 누르하치는 아들 홍타이지, 도르곤 등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선허(瀋河) 하안(河岸) 사르허에서 시커먼 흙비(霾)를 정면으로 마주한 두송 군단을 대파했다. 두송의 명나라군 3만 명은 전멸했다.
사르허 전투는 명과 만주(후금)의 세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이를 이여백과 나머지 3로군 장수들에게 일제히 통지했다. 이는 명나라군의 사기만 떨어뜨렸다. 마림은 도주하고, 유정은 전사했으며, 이여백은 휘하 병력이 함몰된 데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양호는 참형을 당했다. 만주군은 명나라군을 분산·고립시킨 후 각개격파했다. 명나라군은 군율 이완에다가 지나치게 분산돼 있어 집중돼 있던 만주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조선군은 강홍립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만주군에 투항했다. 누르하치는 승세를 타고 예헤부도 평정했다.
만주(청나라)가 명을 멸망시켰다기보다는 명이 자멸의 길을 걸었다. 천계제 재위 7년간 명나라는 남은 활력을 모두 갉아먹고, 멸망의 저편으로 급히 달려갔다.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의심이 많고,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한 인물이었다. 나라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잘 알던 그는 조급하게 행동했다. 잘 안되면 부하들을 파면하고 처형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의 재위 기간 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주원장이 봉기한 안후이는 물론, 허난과 산시(陝西) 등에서 일어난 기근으로 인해 민란이 빈발했다. 숭정제는 후금(청나라)과의 전쟁비용을 염출하고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관영 역참제도를 폐지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역졸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전국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실직한 역졸들이 농민군에 가세했다.
4) 멸망의 저편으로 달려간 大明天地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유민(流民) 지도자 중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이 가장 유력했다. 만주의 공세와 농민봉기로 인해 명나라는 질풍노도의 태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명나라 조정은 만주의 공세에 대항하고자 군사력 증강을 꾀했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했으며, 이는 결국 증세로 이어졌다. 여기에다가 왕가윤(王嘉胤)을 우두머리로 해 고영상(高迎祥)과 장헌충 등이 가담한 유민군(流民軍)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했다.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증세를 해야 한다. 그런데 증세는 민심 이반을 가져와 봉기군의 세력을 키우는 악순환을 야기한다.
순(順)나라를 세우는 이자성은 산시(陝西)성 옌안(延安) 출신으로 고영상의 부장이자 처조카다. 왕가윤의 농민군은 1630년 산시성 부곡현을 함락시켜 명나라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긴장한 명 조정은 홍승주와 조문조 등을 파견해 왕가윤 집단을 진압케 했다. 왕가윤이 전사했는데도 봉기군의 수는 늘어만 갔다. 1637년 재상 양사창의 전략에 따라 홍승주, 웅문찬, 손전정 등의 명나라 장군들이 산시와 허난 등에서 고영상과 장헌충 등이 거느리는 유민군단을 집중 공격해 일패도지(一敗塗地)시키고 고영상 등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이 무렵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도 푸젠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명 조정으로부터 관작(官爵)을 받고 항복했다).
고영상이 처형되자 이자성은 기근이 격심하던 허난으로 이동해 유민을 흡수한 끝에 다시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됐다. 이때 흡수한 우금성(牛金星) 부자와 이엄(李嚴) 등 지식인들의 지도로 이자성 집단은 조직력까지 갖추었다. 이자성은 후베이의 우창을 점령하고, 쓰촨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허난으로 들어가 1641년 뤄양을 함락했다. 이자성은 그곳에서 만력제의 아들 복왕 주상순(朱常洵)을 생포했다. 이자성의 부하들은 살해된 주상순을 사슴고기와 함께 삶아 먹었다. 그만큼 부패로 이름난 주상순에 대한 증오심은 격렬했다.
이자성의 뤄양 함락에 부응해 장헌충은 명나라 서부 군사기지 샹양(襄陽)을 점령했다. 이자성은 1642년 황하 중하류 카이펑(開封)을 점령한 후 샹양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신순국(新順國)을 세웠다. 이자성이 정권 수립을 공표하자 숭정제는 봉기군 진압 실패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는 신하들을 처형하는 등 극도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1644년 1월 1일 이자성은 시안(西安)에서 즉위식을 열고 순(順)을 건국했다. 그러곤 동정(東征)을 개시했다.
이자성군의 주력은 산시(陝西)→허난→허베이 루트가 아닌 산시(陝西)→산시(山西)→내몽골 루트로 베이징을 탈취하기로 했다. 이자성은 먼저 산시성 타이위안을 점령해 석탄의 베이징 반출을 막았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식량은 주로 강남에, 석탄은 주로 산시(山西)에 의존했다. 이자성의 타이위안 점령이 명나라 정부에 미치는 타격은 매우 컸다. 그는 이어 다퉁, 양화, 선부, 거용 등 베이징 인근 산시와 내몽골 군사요충지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군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이자성의 순나라군을 막을 군대는 베이징 부근 어디에도 없게 됐다.
5) 대청제국의 서막
/만주족 기병이 명나라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이자성은 타이위안에서 다퉁, 선부를 거쳐 베이징에 육박했다. 명 조정에서는 난징천도론도 제기됐으나 이자성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이자성은 3월 18일 명나라 관료와 환관들의 환영을 받으며 베이징에 입성했다. 숭정제는 태자 등 어린 세 아들을 황족 주순신(朱純臣)에게 맡겨 외가로 도피하게 한 후 자결했다. 주순신과 숭정제의 장인 주규, 대학사 위조덕 등은 이자성에게 항복해 숭정제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을 기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자성은 이들의 뻔뻔함에 화를 내고 유민집단으로 이뤄진 유종민(劉宗敏) 군단에 넘겨 모두를 살해케 했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지방 곳곳에서 항복해왔다. 최전선 산하이관의 요동 방위사령관 오삼계(吳三桂)는 장병과 주민 50여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 베이징을 향해 오다가 롼저우(灤州)에서 베이징 실함(失陷)과 숭정제 자결 소식을 들었다. 순나라와 만주 쪽에서 사절이 오고간 끝에 오삼계는 순나라가 아닌 만주를 택했다. 만주에 투항해 있던 그의 외삼촌 조대수가 투항을 권유했다. 오삼계가 만주에 투항한 데는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오삼계의 아름다운 첩 진원(陳沅)을 탈취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오삼계가 대군을 이끌고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청나라의 중국 본토 점령이 용이해졌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염원하던 입관(入關)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졌다. 만약 오삼계가 이자성에게 항복했다면 순(順)과 청(淸)이 병립해 중국과 만주는 완전 분리됐을 가능성이 크다. 퇴락하는 명나라와 달리 새로 들어선 순나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조선과 몽골은 만주의 속국이 됐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구가 적은 만주는 조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고 만주와 몽골은 결국 조선에 동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삼계의 청나라 투항과 청나라의 산하이관 돌파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홍타이지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이자 실력자 도얼곤은 중국을 지향했다. 도얼곤은 오삼계로 하여금 산하이관에서 출격해 이자성군(순나라군)을 공격하게 했다. 사르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흙비(霾)와 돌풍이 청나라군 쪽에서 순나라군 쪽으로 불어 순군(順軍)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오삼계군의 뒤를 이어 청나라군이 돌격했으며 순나라군은 대패하고, 무질서하게 서쪽으로 패주했다.
05월 호
■‘明의 은덕 저버린’ 광해와 조선의 ‘꺼삐딴 리’들
亡國 재촉한 중화숭배… “우리는 明의 유민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명나라의 정신적·문화적 식민지를 자처했다. 명·청 교체기 명(明)과의 의리 고수는 조선의 국익과 배치하는데도 어떻게 하는 게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길인지 몰랐다. 사대(事大)만이 유일한 외교이던 조선 앞에 만주와 일본이라는 신흥 세력이 나타났으며 그 틈새에서 줄을 타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조선 중기 이후 심화된 중화숭배주의는 자주의식을 약화시켰으며 변화에 대한 대응력을 떨어뜨려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동문(좌익문)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644년 4월 청(淸) 실권자 아이신고로 도르곤(도얼곤·1612~1650)에게 투항한 명나라 요동방위사령관 오삼계(吳三桂)는 2만 대군을 동원해 베이징 방향으로 도주하는 이자성의 순군(順軍) 추격에 나섰다. 이자성은 4월 29일 베이징에서 다시 한번 황제 즉위식을 치른 후 이튿날 베이징을 탈주했다. 청나라군은 5월 1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병자호란(1636~1637) 이후 청나라의 인질이 된 조선 소현세자는 청군-오삼계 연합군과 이자성군 간에 벌어진 산하이관 전투를 참관하고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입성했다. 청군에게 격파당한 이자성은 부하들과 함께 산시(山西)를 출발해 산시(陕西), 후베이, 후난을 거쳐 창장 유역 주장(九江)까지 도주했으며 1645년 5월 그곳에서 죽었다.
명나라 말기로 돌아가보자. 명-해서여진, 예헤부-조선연합군이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군에게 대패하자 만력제는 전략가 웅정필(1569~1625)을 요동방위사령관에 임명했다. 웅정필은 부임하기에 앞서 만력제에게 상소해 언관(言官)이 자신의 전략(戰略)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줄 것을 간청했다.
속보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은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에 대한 보도와 논평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중장기적 시각에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 하는 관료들은 보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황제 독재국가인 명나라에서 황제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전선의 장군들은 언관들에게 휘둘려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유민 속에 섞인 만주 밀정
요동의 중심 도시 랴오양(遼陽)에 부임한 웅정필은 어렵게 모은 18만 명의 병사를 철저히 훈련해 강군을 만들었다. 그는 지키고 싸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때로는 누르하치의 소부대(小部隊)를 습격하고, 농사일을 방해하는 등 만주(후금)를 압박했다. 누르하치도 웅정필군이 두려워 1년 넘게 명나라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1620년 만력제가 죽은 후 단 29일간 재위한 태창제에 이어 유약한 천계제가 즉위했다. 천계제 즉위 후 대환관 위충현(魏忠賢)이 권세를 잡자 고조와 요종문 등 언관들은 웅정필이 만주군이 무서워 성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비난했다. 진저리를 낸 웅정필은 사직했으며 후임에는 원응태가 임명됐다. 원응태는 유능한 행정관리였으나 군략(軍略)은 모르는 인물이었다.
1621년 초 몽골에서 기근이 발생해 유민(流民)이 랴오양과 선양으로 흘러들었다. 원응태는 이들을 모두 수용했는데, 유민 속에 만주 밀정이 섞여 있었다. 1621년 3월 누르하치가 랴오양과 선양을 공격하자 이들이 호응해 두 성 모두 쉽게 함락됐다. 누르하치는 허투알라(興京)에서 랴오양으로 천도했다.
랴오양과 선양 함락에 놀란 명나라 조정은 그해 6월 웅정필을 다시 요동방위사령관으로 기용했다. 웅정필은 요서(遼西)로 줄어든 방어선을 지키게 됐다. 웅정필은 명 조정에 ①산하이관 포함 요서의 명나라 육군 ②발해만과 서해의 명나라 해군 ③측방의 조선군을 활용해 후금의 공격을 저지하는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건의했다. 이는 나중 만주가 조선을 침공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
위충현은 부사령관 격인 광닝순무(廣寧巡撫)에 왕화정을 기용해 웅정필을 보좌하게 했다. 왕화정 역시 사르후 전투 때 두송과 같이 이번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누르하치를 얕잡아 보았다. 왕화정은 1622년 만주에 투항한 이영방군과 조선의 평안도 가도(椵島)에 주둔한 모문룡군(毛文龍軍), 몽골군 등 40만 명의 지원을 확보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16만 대군을 이끌고 다링허(大凌河) 서안(西岸) 광닝에서 출격해 서평보를 공격했다. 웅정필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광닝 전투는 명나라의 참패로 끝났다. 후금군은 베이징의 관문 산하이관까지 육박해 들어왔다. 웅정필과 왕화정 두 사람 모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웅정필만 1625년 사형에 처해졌다.
“광해는 明의 은덕을 저버렸다”
누르하치는 수도를 랴오양에서 선양으로 옮겼다. 누르하치군이 요서에서 활동했으나 베이징의 관문 산하이관 80㎞ 전방에는 영원성(寧遠城)이 버티고 있었다. 광닝 패전 후 대학사 손승종(孫承宗) 추천으로 산하이관 진장(鎭將)으로 기용된 원숭환(1584~1630)이 부하장수 조대수(祖大壽)를 독려해 개축한 성이다. 원숭환은 지방의 중하급 관리에서 고위 장령으로 파격 승진했는데, 총병 만계(滿桂), 조대수, 하가강 등과 함께 영원성을 철저히 수비했다. 그는 푸젠에서 들여온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성곽에 배치해 밀집대형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누르하치군을 집중 포격했다. 누르하치는 생애 처음으로 패전했다.
생애 첫 패전 탓에 심신이 허약해진 탓일까. 1626년 누르하치가 사망했다. 영원성 승전에 고무된 위충현은 원숭환을 요동방위총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나중 숭정제 즉위 후 원숭환에게 재앙으로 돌아왔다.
만주 최고 명문으로 인정받던 예헤부 출신 어머니를 둔 홍타이지(皇太極)가 누르하치를 계승했다. 후금은 홍타이지를 수장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다. 홍타이지(태종), 다이샨, 망구얼타이 등 누르하치의 아들들과 조카 아민(누르하치의 친동생 슈르하치의 아들) 등 4명이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홍타이지는 범문정(范文程) 등 요동 한족(漢族)을 중용해 행정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산하이관 돌파 의지를 분명히 했다.
1621년 후금이 랴오양과 선양을 포함한 요동의 수십 개 성을 점령하자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2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도피했다. 광해군 이혼(李琿)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생각했다. 모문룡이 ‘요동 수복’을 주장하면서 후금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모문룡을 평안도 앞 가도(椵島)로 보냈다. 그런데 1623년 4월 서인 세력이 무력을 동원해 이혼 정권을 무너뜨렸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것이다.
인조반정은 국왕 교체 정도의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이혼이 집권 북인(北人)들의 반발까지 무릅쓰면서 추진한 명-후금 간 균형외교의 종말을 의미했다. 광해군 폐위를 명령한 인목대비의 교서(敎書)는 서인 성리학자들의 중화숭배주의가 얼마나 뼛속 깊이 박혔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우리가 명나라를 섬긴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로는 군신 사이요, 은혜로는 부자 사이다. 임진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선조께서는 42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겨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는 명(明)의 은덕을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했다.”
책봉 문제로 전전긍긍하던 인조 이종(李倧)은 가도의 모문룡을 지원해 후금을 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하는 등 명 조정, 특히 위충현의 환심을 사려 했다. 위충현 역시 이종의 약점을 이용해 조선을 후금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종이 모문룡 송덕비까지 세우는 등 저자세를 보이자, 모문룡은 조선에 군량과 군마, 조총, 병선 등을 요구했다. 요동 한족이 계속 가도로 모여들자, 후금은 모문룡을 비호하는 조선에 분노했다.
이괄의 난
/삼전도비는 조선 인조 17년(1639)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청나라의 승전비로 우리나라 외침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즈음 반정군을 지휘한 이괄은 좌포도대장에 임명돼 한성부 치안을 담당했다. 반정 정권의 핵심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은 이괄을 배척했다.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괄은 김류와 이귀, 김자점보다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봉해지는 데 그쳤다. 그는 반정 후 2개월 만에 후금이 침공할 우려가 있다면서 도원수 장만(張晩)의 추천 형식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돼 평안도로 떠났다. 이괄은 영변에 주둔하면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다. 문회와 허통 등이 이괄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귀는 이괄을 잡아다 문초할 것을 극력 주장했다. 이종은 타협책으로 이괄 대신 그의 아들 이전을 잡아 오게 했다.
이괄은 1624년 3월 13일 금부도사 고덕률과 심대림을 죽이고 반기를 들었다. 이괄은 구성부사 한명련과 함께 항왜(降倭·항복해 온 일본인·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투항한 왜병은 1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100여 명을 앞세워 개천, 순천, 중화, 황주, 개성을 잇달아 점령하고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3월 26일 이괄의 군대가 예성강을 건넜다는 급보가 올라오자 인조는 명(明)에 원군을 요청하고 공주로 피난했다. 3월 29일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이어진 길마재전투에서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했다. 이괄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이천 방면으로 도주했다. 4월 1일 이괄의 부하 이수백, 기익헌이 그를 살해했다. 이종은 4월 5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평안도-황해도 방어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괄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일족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쳤다. 한윤과 한택은 조선팔기 지휘자로 무공을 세워 청나라에서 고관으로 승진했다. 조선군과 모문룡군이 합세해 배후를 공격할까 두려워하던 홍타이지는 한윤으로부터 조선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1627년 1월 대페이러(大貝勒) 아민으로 하여금 한윤, 한택과 김여규 등 조선팔기가 포함된 3만 대군을 인솔해 조선군과 모문룡군을 치게 했다. 홍타이지의 첫 번째 조선 침공(정묘호란)은 경제위기 타파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만주는 명(明)의 경제 제재로 인해 식량난 등 극도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다.
아민은 철산에서 모문룡군을 격파하고, 의주와 정주, 안주 등 여러 성과 평양을 점령한 다음 대동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이종은 신하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다. 이괄의 난 이후 다시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던 이종은 군사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후금의 기병에 맞설 조선군 주력은 조총부대였는데 연습을 제대로 못했기에 조총의 이점을 살릴 기회를 잃었다.
조선-만주 ‘형제의 약조’를 맺다
산하이관의 원숭환과 조선군의 합동 공격을 우려한 후금군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투항해 있던 강홍립이 후금과 조선 사이를 중재했으며, 온건한 내용의 조약이 체결됐다.
①후금군은 즉시 철병하며
②후금군은 철병 후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③후금-조선 관계는 형제국으로 하며
④조선은 후금과 조약을 맺되 명나라와는 적대하지 않는다는 게 요지였다.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데도 조선 사회는 중화존숭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성들도 후금을 오랑캐로 여겨 멸시했다. 조선 서당과 서원의 교육이 성리학 위주 중화숭배론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호란 이후 나온 박씨전과 유충렬전, 조웅전, 신유복전 등에는 조선인들의 후금에 대한 적개심과 명나라 존숭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백성들은 후금이 인종적으로도 조선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묘호란 후 서인 정권은 “조선군의 배신으로 인해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강홍립이 호란(胡亂)을 야기했다”고 강변했다. 병자호란 후에도 똑같은 행태가 되풀이되었다.
평안도의 섬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가도를 중심으로 해상밀수 활동을 하는 한편, 이따금 압록강 수로를 따라 올라가 후금군 진지를 기습했다. 모문룡은 위충현에게 뇌물을 상납해 총병에 이어 좌도독으로 승진했다. 그는 명과 조선으로부터 군자금도 받았다. 인조는 그를 위해 특별세 모세(毛稅)를 신설했다.
요동방위총사령관 원숭환은 1629년 6월 모문룡을 유인해 황제에 대한 기망(欺罔) 등 죄목으로 목을 잘랐다. 원숭환의 모문룡 처형은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그 1년 전인 1628년 숭정제 등극 후 명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즉위 후 숭정제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환관 위충현 타도였다. 숭정제가 원숭환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홍타이지는 반간계를 이용해 원숭환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홍타이지는 숭정제에게 ‘원숭환이 만주와 내통(內通)해왔다’고 의심케 만들었다. 원숭환이 직무상 누르하치의 상(喪)을 조문하고, 홍타이지의 즉위를 축하한 것을 모두 내통으로 몬 것이다. 이와 함께 후금은 극심한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러허(청더)를 통한 샛길로 베이징 인근과 산둥성을 집중 공격해 약탈했다. 이는 원숭환에 대한 숭정제의 의심을 한층 키웠다.
나라의 운명이 남한산성에 갇혔다
/청(淸) 황제 홍타이지.
1629년 12월 원숭환이 산하이관 병력을 동원해 베이징성까지 진출한 청나라군을 물리쳤는데도 숭정제는 그를 소환해 투옥했다. 숭정제는 다음 해 원숭환을 사지를 찢고 살을 발라 죽이는 책형(磔刑)에 처했다. 요동방위총사령관에는 손승종이 임명됐다. 그는 조대수 등과 함께 산하이관 전방의 금주, 송산, 행주, 탑산 등 4개 성을 겨우 확보했다. 조대수는 1631년 10월 살아 있는 병사가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잘라 먹을 정도로 참혹했던 다링허성 공방전 끝에 1만1000기를 거느리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후 통제할 사람이 없게 되자 모문룡의 옛 부하들은 제멋대로 행동했다. 공유덕과 경중명은 1631년 반란을 일으켜 산둥성 덩저우와 라이저우를 점령한 후 그곳에 진을 쳤다. 그들은 명나라 총병 조대필에게 패해 서해 도서 여기저기를 도망다니다가 1633년 요동반도 근해 장쯔다오(獐子島)로 들어갔다. 가도 지배자 심세괴와 조선 해군이 협공해오자 궁지에 몰린 그들은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전함, 30문(門)의 홍이대포를 갖고 후금에 투항했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해군을 동원해 공유덕, 경중명군을 추격하고 후금군과도 전투를 벌였다. 이는 만주와 형제의 약조를 맺은 정묘화약의 파기를 의미했다. 모문룡의 부하였던 상가희(尙可喜)도 1634년 요동반도 근해 광루다오(廣鹿島)에서 만주에 투항했다. 만주는 공유덕 등이 가져온 홍이대포를 모방해 대포를 자체 제작했다.
청사(淸史) 전문가 멍싼(孟森)의 말과 같이 조선인, 일본인과 함께 퉁구스계에 속하는 만주족은 영민한 종족이었다. 양질의 해군과 대포를 확보한 후금은 산하이관을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홍타이지는 1635년 이복동생 도르곤으로 하여금 칭기즈칸의 후손 알탄칸이 도읍했던 내몽골 후호하오터까지 원정케 했다. 후금은 몽골 대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차하르부는 물론, 투메트부와 오르도스부도 복속시켰다. 내몽골을 평정한 홍타이지는 다음 해(병자년)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권력을 강화한 홍타이지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황제로 섬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은 청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해 11월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하는 청나라 10만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사르후 전투와 이괄의 난 이후 포로 또는 투항한 조선인으로 구성된 조선팔기를 앞세운 청군은 쉽사리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를 남한산성에 몰아넣었다.
한국史 3大패전 중 하나인 쌍령전투
/명나라 장수 웅정필(그림)은 언관들에 휘둘리다 후금군에 체포돼 처형됐다.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농민반란에 시달리던 명나라는 구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인조를 구원하고자 경상 좌·우병사 허완(許完)과 민영(閔栐)이 군사를 모집해 북상했다. 모집된 조선군 숫자는 4만여 명이었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이들은 1637년 1월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도착했으며 쌍령 양쪽에 진을 치고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6000명의 청군이 곤지암을 점령한 뒤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고자 30여 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척후대를 보냈다. 청의 척후병들이 허완 부대 목책에 다다르자 조선군은 즉시 발포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총으로 무장했으나 아직 사격에 익숙하지 못한 병사가 다수였던 조선군은 첫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탄환을 거의 다 소진해버렸다. 조선군 진영은 탄환 보급을 요구하는 병사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이 조선군의 목책을 넘어 급습했으며, 이에 놀란 조선군은 조총을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반대쪽 고개에 진을 친 민영 부대는 청군의 공격에 그런대로 잘 대응하고 있었으나 탄환과 화약을 다시 분배하기 위해 진영 한가운데 모아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불꽃에 닿아 폭발했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조선군은 우왕좌왕했으며, 청나라군 300여 기(騎)가 돌진해 조선군을 짓뭉갰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칠천량 해전 △6·25전쟁 때의 현리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의 하나인 ‘쌍령전투’다.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지원할 병력은 조선 어디에도 없게 됐다.
남한산성에서는 최명길 주도 주화파와 김상헌 주도 척화파가 소모전을 벌였다. 40여 일을 버티던 이종은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됐다. 나라 자체를 빼앗긴 한족의 명나라보다는 나은 처지라고 할까. 중화주의의 미몽에 사로잡힌 조선 성리학자들의 어리석음이 조선의 속국화를 가져왔다. 800만 인구의 조선이 무능한 지배층으로 인해 120만 인구의 만주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만주의 핵심을 이룬 건주위 오도리부는 15세기까지만 해도 김종서, 이징옥, 남이 등에게 힘없이 굴복하던 여진 1개 부락(部落)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해 30만~40만 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가고, 인조 이종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청나라는 조선의 풍습을 존중해 변발(辮髮)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병자호란 발생 원인은 다양하다.
첫째, 모문룡의 부하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가 해군을 이끌고 만주에 투항함으로써 동북아 군사 균형이 만주에 크게 유리하게 변했다.
둘째, 정묘조약에서 형제의 맹약을 맺은 만주가 조선에 군림하면서 반발을 샀다. 정묘조약은 병자호란을 향한 시한폭탄이었다.
셋째, 모문룡의 가도 주둔과 웅정필의 삼방포치책에서도 알 수 있듯 명나라는 조선을 요동 수복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모문룡의 경우 요동 한족을 끌어모으고 ‘조선과 함께 요동을 수복한다’는 격문을 돌리는 등 만주를 자극했다.
넷째, 홍타이지가 칭기즈칸의 후예인 몽골 차하르부 링단칸으로부터 대원옥새(大元玉璽)를 확보함으로써 황제인 동시에 대칸으로 등극해 제국을 건설할 정치적 명분을 얻었다.
다섯째, 군사·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황제를 칭한 청나라의 세계관과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드는 조선의 세계관은 양립할 수 없었다.
조선 사대부들의 중화 숭배 …“우리는 명나라의 유민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한 서인 세력은 중화 숭배를 고집했다. 청나라에 대한 철저한 항전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진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 가운데 특히 윤집은 척화론(斥和論)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조국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였다. 그는 “명(明)은 우리의 부모이나, 만주는 명의 원수이니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하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돼 부모를 버리겠습니까.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명과의 의리는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열하일기와 허생전 등으로 유명한 박지원(1737~1805)조차 출신 가문인 노론의 당론(黨論)에 따라 “효종(孝宗)의 임금은 명나라 천자이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효종에게 하듯이 명나라 천자에게 충성을 다했고, 우리는 명나라의 유민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서인·노론 사대부들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과의 의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리학자들은 명나라의 정신적·문화적 식민지를 자처했다.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와의 의리 고수는 조선의 국익과 배치하는데도 성리학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길인지 몰랐다. 사대(事大)만이 유일한 외교였던 조선 앞에 만주와 일본이라는 신흥 세력이 나타났으며, 조선은 그 틈새에서 줄을 타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불구대천(不俱戴天) 원수’가 된 일본은 정묘·병자호란을 계기로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위기에 처한 조선에 조총과 화약 등 무기를 원조하겠다고 접근하는가 하면 조선의 곤경을 활용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얻으려 했다.
요컨대 조선 중기 이후 심화된 중화숭배주의는 자주의식을 약화시켰으며 변화에 대한 대응 능력을 떨어뜨려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조선은 108년 전 멸망했으나 한국 사회 일각에는 중화숭배주의가 변형된 형식으로 살아 숨 쉰다.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의 처세가 말해주듯 숭배 대상만 명(明)에서 청(淸), 일본(혹은 러시아), 미국(혹은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06월 호
■백두산정계비와 ‘잃어버린 땅’ 간도
‘토문강’은 두만강인가 투먼장인가
19세기 말까지도 조선과 청은 국경을 두고 다퉜으나 1909년 일제가 청과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는 중국 땅이 됐다. 1962년 북한-중국 국경협정이 체결됐으나 통일 후 압록강에서 랴오닝성 펑황(鳳凰)까지의 영유권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백두산 천지(위)와 조선-청 국경을 표시한 정계비의 받침돌(왼쪽). 흰색 표석은 정계비의 원위치를 표시하고자 북한이 1980년대 세운 것이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고 명(明)나라 숭정제가 목을 매 죽었다. 명나라 유신(遺臣)들은 난징에서 주유숭을 임시 황제로 옹립하고 남명(南明)을 세웠다. 난징에서도 베이징 시절처럼 동림당과 환관당 간 정쟁이 벌어졌다. 남명(南明) 정권의 실력자 펑양(鳳陽) 총독 마사영과 환관당의 완대성은 사가법(史可法)과 전겸익(錢鎌益) 등 동림당 인사들이 반대하는데도 이자성에게 살해된 복왕의 아들 주유숭을 임시 황제를 뜻하는 감국(監國)으로 옹립했다. 주유숭은 문제아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환관당과의 정쟁에서 패배한 사가법은 창장 이북에 위치한 난징의 울타리 양저우(揚州)를 방어하고자 북상했다. 청나라군이 난징을 향해 내려오는데도 주유숭은 미녀를 선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했다. 청(淸) 실권자 아이신고로 도얼곤은 금(金)나라가 그랬듯 화이허(淮河) 이북만 차지할 생각이었으나 남명 정부가 뿌리째 썩은 것을 알아채고는 중국 전체를 장악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南明 정벌 참전 조선팔기軍
도얼곤은 1644년 10월 친형제 아지거와 도도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명 정벌군을 출정시켰다. 정벌군 주력은 오삼계, 경중명, 공유덕, 상가희 등이 인솔하는 한족 부대였다. 조선팔기도 정벌군에 포함됐다.
남명 정부는 유택청, 고걸, 유량좌, 황득공 등 강북 4진 주둔 장군들로 하여금 남하하는 청나라군에 대응하게 했다. 고걸은 농민군에서 이자성의 부하로 있던 인물이다. 이들도 원나라 말기 장군들과 같이 상호 세력 다툼에만 골몰했다.
청나라군은 허난을 쉽게 평정하고 양저우로 진격해 내려왔다. 주유숭은 고걸이 지휘하던 10만 대군으로 하여금 사가법의 지휘하에 들어가도록 명령했으나, 마사영은 사가법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이 두려워 고걸의 군대를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가법 휘하에는 2만 병력밖에 남아있지 않게 됐다. 1645년 4월 청나라군의 맹공으로 양저우가 함락되고, 주민 70여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어 난징도 무너졌으며 주유숭과 마사영은 도주했다. 전겸익은 항복하고, 임시 황제 주유숭은 난징 근처 우후(蕪湖)에서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베이징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노왕 주이해, 당왕 주율건, 영력제 계왕 주유랑(朱由榔) 등이 명나라 유신들의 지원을 받아 푸젠, 광둥, 광시, 윈난 등에서 망명정권을 수립했으나 그것은 폭풍 앞에 놓인 명나라의 마지막 불꽃일 뿐이었다.
쓰촨의 지배자 장헌충은 1646년 11월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패망했다. 장헌충 군단은 공산주의적 성격을 지녀 중소 지주와 지식인을 적으로 간주해 모두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다.
푸젠의 무역 군벌 정지룡은 청나라에 항복했으나 정가(鄭家) 세력은 유지되고 있었다. 1650년 푸젠 앞바다 아모이섬(샤먼)의 대안(對岸) 고랑서(鼓浪嶼)에 주둔한 정지룡의 아들 정삼(1624~1662)은 아모이를 습격해 6촌 형제 정채, 정련을 죽이고 정가군단(鄭家軍團)을 장악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타이완 점령한 明부흥군
어머니가 일본인으로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정삼(정성공)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랐다. 정성공은 아모이를 중심으로 8년간 일본, 류큐,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군사력을 키웠다.
정성공은 1658년 17만 대군을 동원해 명나라 부흥에 나섰다. 정가군단은 일본에서 수입한 장비로 무장하고 창장 하류 양산(羊山)까지 진격했으나, 엄청난 풍랑을 만나 실패하고 원저우(溫州)로 후퇴해 군비를 재건했다. 1659년 정성공군은 원저우에서 함선을 넉넉하게 건조한 다음 닝보(寧派)를 함락하고 북상해 상하이 앞 주산열도(舟山列島)를 점령한 후 난징을 공략했다.
청나라군 상당수가 남중국 각지에서 망명정권을 세운 영력제군과 교전 중이었기에 정성공군은 창장 하류 대부분을 손쉽게 장악했으나 난징 공략은 쉽지 않았다. 정가군단 장병들은 지나치게 쉽게 전공(戰功)을 올려온 터라 무리한 작전을 펴곤 했다. 난징성 남쪽 신책문에서 청나라군이 갑자기 뛰쳐나오고, 충밍다오 주둔 청나라군도 배후를 찔러 들어오자 정성공군은 대패했다.
정성공은 결국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정성공은 푸젠성 대안 타이완(臺灣) 점령을 결심했다. 타이완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1661년 3월 정성공은 수백 척 함선에 병사 2만5000명을 태우고 타이완으로 향했다. 정가함대는 4월 제란디아 요새가 있던 타이난(臺南) 앞바다에 상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지원군과 함께 제란디아성에서 농성(籠城)에 들어갔으나 1662년 2월 항복했다. 포위된 지 6개월 만이었다. 1624년부터 38년간 이어진 네덜란드의 타이완 지배가 끝났다. 정성공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필리핀 정복을 계획했으나 1662년 6월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아들 정경은 그 후 20여 년간 타이완을 근거로 반청운동을 벌였다.
영력제 주유랑은 광시와 윈난 등에서 복명(復明) 활동을 계속했다. 가톨릭에 귀의한 주유랑은 로마교황청에까지 사신을 보내 원군(援軍)을 요청했다. 이정국과 손가망이 지휘한 영력제군은 1654년 광시성 구이린에 주둔한 공유덕의 8만 청나라 대군을 전멸시키는 등 한때 중국 남부 7개성을 영향력하에 뒀으나 마길상, 이정국, 손가망 등 유력자 간 내분으로 곧 멸망의 길을 걸었다.
버마로 도주한 영력제의 최후
영력제는 1659년 최후의 근거지 윈난성 쿤밍(昆明)이 청나라군에 점령되자 마길상의 주장에 따라 버마로 도주했다가 1661년 5월 퉁구 왕조 수도 아바에서 버마군에 사로잡혀 추격해온 오삼계에게 인도됐다. 그는 정성공이 사망한 1662년 쿤밍에서 처형됐다. 한족 주력의 청나라군은 사분오열된 명나라 부흥세력을 비교적 쉽게 각개 격파했다.
영력제 정권이 패망기에 접어든 1659년 3월 조선에서는 효종 이호(李淏)가 산림(성리학 사대부 세력)의 거두 송시열과 단독면담(己亥獨對)해 북벌 문제를 논의했지만 그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그해 5월 재위 10년 만에 사망했다.
청나라 조정은 중국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상가희를 광둥에, 경중명의 아들 경계무를 푸젠에, 오삼계를 윈난에 분봉(分封)했다. 평서왕 오삼계는 티베트, 버마 등과의 교역 및 광산 개발 등을 통해 영지를 발전시켰다. 상가희, 경계무, 오삼계의 삼번(三藩)은 독자적인 인사권과 군대를 갖고, 국방비 명목으로 청 조정으로부터 매년 2000만 냥의 보조금을 받는 등 독립국으로 행세했다.
‘삼번의 난’은 평남왕 상가희가 아들 상지신과의 불화로 은퇴를 신청한 데서 비롯됐다. 1673년 3월 상가희는 랴오둥 귀향(歸鄕)을 요청하면서 아들 상지신에게 왕작(王爵)을 세습해줄 것을 요청했다. 20세의 청년 황제 강희제(1654~1722)는 귀향은 허락했지만, 왕작 세습은 거부했다. 이에 놀란 오삼계와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도 청 조정의 의지를 시험해보자 철번(撤藩·번왕국을 폐지함)을 신청했다. 청나라 조정은 철번을 받아들이자는 소수 강경파와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다수 온건파로 나뉘었다. 강희제는 철번 신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에 반발한 오삼계는 1673년 반란을 일으켜 윈난-구이저우에서 북상해 쓰촨을 장악하는 한편, 창장의 남쪽 지류 샹장(湘江)을 타고 올라가 우창과 장링(형주)도 점령했다. 오삼계가 중국의 거의 절반을 손아귀에 넣자 광시장군 손연령(孫延齡)이 투항하고, 산시(陝西)제독 왕보신(王輔臣)은 반란을 일으켰다.
일부 한족 호족(豪族)들도 오삼계에 동조했다. 청나라 조정은 상지신과 경정충을 오삼계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광둥과 푸젠의 철번을 취소했다. 분할과 지배(Devide & Rule) 작전을 취한 것이다.
조선, 북벌을 논하다
/1674년 북벌을 주장한 윤휴.
오삼계는 명나라 후예 중 한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으나 응하는 자가 없었다. 영력제를 잔인하게 처형한 일로 인해 오삼계는 한족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 1674년 경정충이 오삼계에 합류했다. 타이완의 정경은 해협을 건너와 푸젠성의 장저우를 공략하고, 하이징성을 함락한 다음 촨저우성을 포위했다. 1676년 초 상지신도 오삼계에 합류했다. 삼번이 모두 반란에 합류했으나, 이해관계 차이로 인해 뭉친 효과는 크지 못했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도 북벌 주장이 다시 대두됐다. 현종 집권기인 1674년 7월 남인 계열 윤휴(尹鑴)는 비밀 상소를 올려 “조선의 정병(精兵)과 강한 활솜씨는 천하에 이름이 있으며, 화포를 곁들이면 진격하기에 충분하다. 베이징으로 군대를 보내는 한편, 타이완의 정가군단과 힘을 합쳐 청나라의 중심부를 흔들어야 한다. 그리고 남중국과 일본에도 격문을 보내어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중국에서 삼번이, 타이완에서 정가군단이 반청 군사 활동에 나선 상황에서 조선도 북벌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휴의 북벌론은 남인을 포함, 성리학 사대부 거의 모두로부터 비현실적 주장으로 간주됐다. 윤휴 역시 ‘명나라는 우리의 은인’이라는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觀) 틀에서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북벌 주장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또는 정쟁 차원에서 생명력을 지녔다.
중국의 민심은 한족 오삼계가 아닌 오랑캐 만주족 강희제를 지지했다. 청나라 통치가 명나라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오삼계는 군대를 서부 윈난→쓰촨→산시로(路)와 동부 윈난→구이저우→후난로(路) 두 갈래로 나눠 진격하되 서북부 산시(陝西)와 동남부 저장 2개의 날개로 베이징의 목을 조르려 했으나 경제 중심지 장쑤, 장시, 저장 등을 장악한 청군의 저항은 강력했다. 청군은 오삼계군의 중심부로 돌입해 양 날개를 잘라내는 전술로 나아갔다. 중심부를 돌파당한 오삼계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1676년 말 경정충과 상지신이 청나라에 항복했다. 오삼계는 세(勢)를 과시하고자 1678년 장링에서 주(周)나라 황제에 즉위했다.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오삼계는 즉위 직후 죽고, 그를 계승한 손자 오세번도 1681년 쿤밍에서 자결함으로써 삼번의 난은 종식됐다. 상지신은 앞서 베이징으로 소환돼 처분을 받았으며, 경정충은 살해됐다. 1683년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도 펑후다오(澎湖島)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에 대패하고, 정지룡의 부하였던 해군제독 시랑(施琅)에게 항복했다. 중국 사상 최초로 중원 정권이 타이완까지 차지한 것이다.
4000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융성한 시기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청(淸)나라 강희, 옹정, 건륭 3대 130년간이다. 건륭제 집권 시기 청나라는 세계 산업 생산액의 33%를 차지했다. 청나라는 쓰촨성 서부 · 몽골 · 신장 · 타이완 · 티베트를 정복하고, 조선과 베트남 · 버마 · 네팔 · 태국 · 라오스 등을 위성국으로 거느렸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1150만㎢의 영토를 차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청이 만들어놓은 제국의 판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960만㎢(한반도의 44배)의 영토는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보다 훨씬 넓다.
투먼장 아닌 두만강이 국경으로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여지도. 1790년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는 두만강과 토문강원을 뚜렷이 구분해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님을 강조했다.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정복한 후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 40~50㎞까지는 공한지로 설정됐다. 17세기 말, 18세기 초 조선과 청나라 간 조선인에 의한 청나라 관리 습격, 주민 살해 등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종종 분쟁이 일어났다. 1711년 청나라 관리 목극등(穆克登)이 압록강 대안 만주 지역에서 조선 관리와 함께 조선인 월경 현장을 조사한 일도 있다.
1712년(숙종 38년) 청나라는 범법 월경 사건을 문제 삼아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에 포함하려는 의도로 백두산 부근 국경 획정(劃定) 계획을 세웠다. 청나라에서 백두산 부근을 측량하고자 목극등을 보냈다. 조선은 접반사 박권, 함경감사 이선부 등으로 하여금 목극등과 함께 국경을 측량케 했다. 이들은 늙었다는 핑계로 사양하고 접반사 이의복, 순찰사 조태상, 거산찰방 허량, 역관 김응헌과 김경문 등 6명만 동행해 목극등의 요구대로 정계비의 위치를 정했다. 백두산 정상 동남쪽 약 4㎞ 지점(해발 2200m)에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정계비가 세워졌다. 조선·청 간 정계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조선이 독립국이었다는 뜻도 된다.
백두산정계비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경계를 정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토문강’이 두만강(豆滿江)을 말하는 것인지 ‘투먼장(土們江)’을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정계비가 세워진 위치를 놓고 볼 때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어 백두산과 천지가 우리 영토 밖에 놓인다는 해석을 낳을 여지를 남겨둔 게 화근이 됐다.
1885년(고종 22년), 1887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의 제의로 조선과 청나라 대표가 회동해 정계비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우리는 조·청 국경선으로 두만강 상류 홍토수를 주장한 반면, 청은 홍단수-석을수를 주장했다.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뒤인 1909년 9월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다롄-선양) 부설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청나라 측 해석을 인정해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 제1조는 ‘청·일 정부는 두만강을 조·청 경계로 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잇는 선을 국경선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쑹화장의 상류인 투먼장이며, 간도는 조선 땅이라는 우리 주장은 무시됐다.
압록강선(線)에서 랴오닝성 펑황(鳳凰)까지의 영유권 문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압록강 너머 180리까지 공한지다. 연산파절까지 가야 명나라 초병이 보인다’고 기록한다. 명나라 초기인 1480년 이전까지 만주 쪽 압록강 이서(以西) 180리(72㎞)는 명나라 영토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펑황 부근 책문(柵門)이 조·청 국경이었다고 한다.
이순신 활약 ‘녹둔도’는 러시아령으로
/두만강 하구 녹둔도.
1715년(숙종 41년) 헤이룽장성 등을 관할하는 청나라 영고탑(寧古塔) 장군의 두만강 인근 군(軍) 막사 설치, 1731년(영조 7년)과 1746년(영조 22년) 랴오닝성 등을 관할하는 선양장군의 검문소 설치 및 책문을 압록강 쪽으로 이전하려는 시도 등이 조선 정부의 끈질긴 항의로 이행되지 못했다. 조선 후기까지 조선 백성들이 압록강 우안(右岸) 조선-청나라 공유지(condominium)에서 농사를 지었다. 압록강 우안 공유지는 19세기 들어 청나라가 조선을 압도하면서 청나라 영토가 됐다. 두만강 하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이순신(李舜臣)이 활약한 녹둔도(鹿屯島) 등은 러시아령이 되고 말았다. 1960년대 북한과 중국 간 국경협정이 체결됐다.
16세기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해양강국들은 필리핀과 베트남, 타이완, 일본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고, 헤이룽장과 지류(支流)인 쑹화장의 흐름을 타고 북만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청나라 정부는 만주 중·남부가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만주팔기(滿洲八旗) 영지인 까닭에 봉금(封禁)해 특별구역으로 지정했다.
헤이룽장과 그 지류인 쑹화장, 우수리장 등이 흐르는 북만주 일대는 퉁구스-몽골 계통 여러 부족이 유목이나 수렵에 종사하며 살던 곳이다. 청나라는 그들을 수시로 징발해 전쟁에 소모된 만주팔기를 충당하면서도 자치에 맡겼다. 이 땅에 갑자기 러시아인들이 나타나 원주민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15세기 이후 모스크바공국이 중앙집권을 강화하자 일부 세력이 반발했다. ‘무장한 자유인’을 뜻하는 코사크가 반발 세력의 중심을 이뤘다. 코사크는 남러시아 킵차크 평원에 거주하던 그리스 정교도(正敎徒) 슬라브족이 투르크족과 혈연적·문화적으로 융합되면서 형성됐다.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낸 예르마크는 볼가강과 돈강 상류 지역에서 비적(匪賊)으로 살다가 이반 4세의 토벌을 받고 카마강 상류 페르미의 스트로가노프가(家)의 보호를 받게 됐다. 스트로가노프가는 예르마크에게 시베리아 정복을 맡겼다. 예르마크는 코사크군을 지휘해 1581년 우랄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진격했으며 오브강의 지류 이르티시(Irtysh)강 중류의 투르크-몽골계 시비르칸국 군대를 격파했다. 예르마크는 1582년 시비르칸국 수도 시비르를 일시 점령해 이반 4세에게 바쳤다. 시베리아라는 말은 바로 이 ‘시비르’에서 나온 것이다.
시비르칸국, 모스크바로 진격하다
/일제강점기 간도 용정의 장터 모습. 용정은 한국의 망명 동포들이 개척한 도시다.
세력을 회복한 쿠춤 가한(可汗)이 이끄는 시비르칸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쫓기던 예르마크가 1584년 8월 이르티시 강물에 빠져 익사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동진은 잠시 멈췄다. 이후 쿠춤 가한은 모스크바 인근을 공격했으나, 이반 4세의 러시아군에게 패배했다. 1598년 러시아인들은 마침내 숙적 쿠춤 가한을 살해하고, 시비르칸국을 멸망시키는 등 투르크-몽골계 주민들과 싸움을 계속하면서 동진을 이어갔다. 러시아인들은 1604년 톰스크, 1632년 야쿠츠크, 1638년 오호츠크, 1648년 캄차카 기지를 차례로 건설했다.
러시아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헤이룽장을 따라 남하, 조선군(변급, 신유)이 포함된 청나라군의 거듭된 저항에도 불구하고 1666년 헤이룽장 유역에 알바진 기지를 건설했다. 강희제는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면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사절을 보내 선물을 진상하고는 무역 외에는 다른 뜻이 없음을 천명했다. 러시아인들은 이후 쑹화장 유역까지 남하해왔다.
강희제는 러시아가 서북 몽골과 칭하이, 신장, 티베트 등을 영토로 한 오이라트 계통 중가르칸국과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가르칸국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 청나라는 1683년 헤이룽장 연안 아이훈(愛琿)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청나라는 1689년 7월 러시아로부터 알바진을 탈취하고,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라틴어와 함께 만주어, 러시아어, 몽골어 등 4개 언어로 작성됐는데, 이는 청나라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확인한 구체적 사례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청·러 국경이 외싱안링(야블로노이와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확정됐으며 러시아의 남하는 저지됐다. 당시 러시아는 제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표트르 1세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국내외 정세가 매우 불안했기에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외몽골에는 칭기즈칸 가문을 재흥시킨 다얀 가한 계통 할하족이 자리 잡았고, 서북몽골에는 다얀 가한의 손자 알탄 가한에게 밀려난 에센 계통의 오이라트족이 살았다. 1634년 오이라트족 초로스부(몽골화한 투르크족)의 카라쿠라가 오이라트족 대부분을 통합해 몽골어로 ‘왼쪽’이라는 뜻의 중가르칸국으로 묶어냈다. 손자 갈단(도솔천이라는 뜻)은 제2의 칭기즈칸 제국 건설을 꿈꾸었다.
러시아제 총포로 무장한 칭기즈칸의 후예들
중가르칸국은 1682년 신장의 위구르족을 복속시켰으며 갈단은 1688년 러시아제 총포로 무장한 군대를 거느리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 동진해 외몽골을 공격했다. 외몽골 할하부는 청나라에 의지하고자 전 부족이 내몽골로 피난했다. 강희제는 할하부 지도자들을 친견(親見)했으며 서양 선교사들이 제작한 총포로 무장한 청군은 1690년 시라무렌강 유역 내몽골 쯔펑(赤峰) 회전(會戰)에서 중가르군을 물리치고 외몽골을 청에 복속시켰다. 1696년 갈단이 다시 외몽골을 침공하자 강희제는 친정해 울란바토르 인근 차오모도에서 갈단을 격파했다. 갈단은 1697년 4월 알타이 산록에서 병사했다.
중가르가 약화된 후 할하부는 외몽골로 돌아갔으며 청나라는 외몽골을 이번원(理藩院) 관할하에 뒀다. 칭하이에 진출한 호쇼트부 중심 중가르는 재기해 1717년 쿤룬산맥(崑崙山脈)을 넘어 티베트를 점령했다. 이듬해 1718년 청나라군이 티베트를 침공해 티베트로부터 중가르군을 몰아내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2년 뒤인 1720년 청나라군은 칭하이와 쓰촨 2로(路)로 티베트를 공격해 중가르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강희제는 지주의 착취로부터 소작인을 보호하고자 토지와 소작인을 묶어 매매(賣買)하지 못하게 했으며, 흉년기에는 소작료를 감면해주도록 했다. 민심이 따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는 내치를 단단히 해 아들 건륭제가 적극적인 외치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줬다. 건륭제는 막대한 흑자 재정을 갖고 통치에 임했다. 건륭제는 재위 중 중가르(1755~1758), 위구르(1758~1759), 대금천(1747~1749) 티베트(1771~1776), 버마(1758~1769), 베트남(1788), 타이완(1788), 네팔(1791~1792) 등 인근 국가와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총 10회나 출정했다.
건륭제는 원정 기록을 십전기(十全記)라는 이름으로 비석에 새겨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 언덕에 있는 강희제의 평정서장비(平定西藏碑) 옆에 나란히 세웠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강한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약한 소수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해 한족에게 몽땅 갖다 바친 결과물이다.
건륭제의 첫 번째 원정은 1747년 대금천 티베트족 토벌로 시작됐다. 청나라는 쓰촨 서부에 위치한 작은 땅을 얻기 위해 3년간에 걸쳐 당시 재정 2년 치에 해당하는 7000만 냥의 거금을 썼다. 대금천을 완전히 정복하기까지는 30년의 세월이 더 소요됐으며, 수많은 장병의 목숨도 바쳐야 했다.
뿌리째 썩어가기 시작한 대청제국
청나라의 버마, 베트남 원정은 실패한 전쟁이었다. 국내 문제를 안고 있는 교전 상대국이 화평을 요청해 체면을 세운 정도였다. 1758년부터 1769년까지 이어진 버마와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청나라군은 콘파웅 왕조 신뷰쉰 왕과 마하티하투라 장군이 이끄는 버마군에게 참패했다. 청나라군의 버마 침공으로 인해 버마에 점령당한 타이가 독립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청나라군은 1788년 북베트남 홍하(紅河) 전투에서 완문혜(阮文惠)가 지휘하는 베트남군에 섬멸됐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외정(外政), 팔기군의 무능과 부패, 니오후루 화신(和珅)의 천문학적 부정축재 등 청나라 내부가 뿌리째 썩어가기 시작했다.
07월 호
■아편전쟁과 광저우 앞바다의 유니언잭
“이렇듯 불명예스러운 전쟁은 없다”
백련교도의 난, 정비의 난은 청(淸)의 몰락을 예견하는 비바람이었다. 광저우 앞바다에 대영제국 깃발이 펄럭였다.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 민초의 거센 저항에도 대청(對淸)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의 후예 장동(壯洞) 김씨가 장악한 조선 조정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샤먼 전투(Battle of Xiamen)에서 청군을 물리치고 샤먼을 점령하는 영국 육군 제18보병연대.
중국 서부 신장(新疆)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톈산산맥 북쪽에 중가르 초원지대가 있다. 중가르 서쪽은 이리분지(伊犁盆地)다. 1634년 초로스부(몽골화한 투르크족) 출신 카라쿠라가 오이라트족(초로스, 도르베트, 토르구트, 호쇼트부) 대부분을 묶어 이리분지를 중심으로 중가르 칸국을 세웠다. ‘중가르’는 몽골어로 왼쪽이라는 뜻이다.
새로 얻은 땅, 신장(新彊)
카라쿠라의 손자 갈단(1649~1697)은 ‘제2의 칭기즈칸제국’ 건설을 염원했으나 청(淸) 강희제와 치른 전쟁에서 패한 후 알타이 산록에서 병사했다. 청은 옹정제 시기에도 중가르를 계속 공격했다. 그만큼 중가르는 청에 위협적이었다. 건륭제가 1754년과 1757년 두 차례 출병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오아 조혜(烏雅兆惠)가 지휘한 제2차 중가르 원정 시 그때까지 살아남은 중가르인 60만 명 거의 모두가 청군과 전투하다가 죽거나 천연두로 사망했다.
중가르인이 사라진 후 톈산산맥 이남에 거주하던 위구르족이 이리 지방으로 넘어왔다. 이리 지방에 살다가 17세기 초 중가르 칸국에 밀려난 토르구트족(케레이트부의 후손)은 카스피해 북서부까지 이주, 러시아연방 칼믹 공화국의 기원이 됐다.
톈산산맥 북쪽이 라마불교 중가르의 세계라면, 톈산산맥 남쪽은 이슬람교 위구르의 세계였다. 이곳에는 9세기 중반부터 몽골고원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이 종족 단위로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이뤘다.
청군은 중가르 정복의 여세를 몰아 1758년 다시 출병해 톈산산맥 이남 위구르 국가들을 모두 정복했다. 건륭제는 톈산남북(天山南北) 영토를 새로 얻은 땅이라 해 ‘신장(新彊)’이라 이름 지었다. 건륭제는 이닝(伊寜) 주재 이리장군(伊犁將軍)으로 하여금 신장을 통치케 했다.
건륭제 시기 조선 왕은 영조 이금(李昑)이다. 이금은 청나라 초기 조선팔기를 이끌던 김여규의 손자 김상명(金常明)의 도움을 받아 소론·남인이 반대했는데도 세제(世弟)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김상명은 군기대신(軍機大臣) 등 최고위직까지 올랐는데, 어머니가 세조 순치제의 유모인 까닭에 순치제의 아들 강희제와 친구처럼 지냈다. 김상명의 친족 김간(긴기얀·金簡)은 청나라 상서(上書)가 됐으며 조선과의 외교에도 관여했다.
구미국가(歐美國家)들은 청 왕조를 중국 왕조로 생각하나 한국, 북한과 몽골 등은 동의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만주족 청나라가 한족 명나라를 정복했으므로 청과 조선, 몽골, 베트남 간 관계는 중국과 조선, 몽골, 베트남 간 관계가 아니라 만주와 조선, 몽골, 베트남 간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그레이트 티베트’ 초석 놓은 치송덴첸
티베트는 1911년 신해혁명 직후 혼란기에 독립해 1951년 중국군에 점령당할 때까지 독립국 지위를 유지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1911년 이전에도 티베트의 국가 정체성은 유지되고 있었다.
7세기 초 티베트 고원을 통일한 송첸간포 찬보(찬보는 티베트어로 왕이라는 뜻) 시기 중국과 인도를 통해 들어온 불교가 밀교(密敎)로 발전했다. 8세기 치송덴첸 찬보는 티베트가 오늘날의 시짱(티베트) 자치구뿐만 아니라, 칭하이와 서부 쓰촨, 남동부 간쑤, 서부 윈난을 포괄하는 그레이트 티베트(Great Tibet)로 발전하는 초석을 놓았다.
안·사의 난으로 당(唐)나라가 혼란에 처한 763년 티베트는 장안을 점령했다. 신장과 네팔, 파키스탄 일부를 차지한 후의 일이다. 티베트불교는 쇠퇴하다가 11세기 인도 출신 승려 아티샤의 쇄신 운동으로 부흥했다. 이후 아티샤 직계 제자들을 카담파라 했으며, 기존 계열을 닝마(홍모)파라 했다. 카담파, 닝마파 외에 카규파와 샤카파라는 종파가 새로 생겨나 4개로 갈라졌는데, 신흥 종파들은 닝마파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밀교의 성격을 혼합한 교리를 발전시켰다. 현재 티베트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겔룩(황모)파는 카담파 계열로 14세기 후반 새로 생긴 종파다.
13세기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 집권기 파스파로 대표되는 샤카파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정교일치(政敎一致) 정권을 수립했다. 이 시기 티베트 고승과 원나라 황제 사이에 종교적 지지와 정치·군사적 원조를 교환하는 최왼(단월·檀越) 관계가 맺어졌다. 최왼 관계를 통해 몽골은 티베트를 몽골제국에 편입시켰으며 샤카파는 티베트에서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5세기 칭기즈칸 가계를 부활시킨 다얀 가한과 여걸(女傑) 만투하이(1448~1510) 부부의 손자 알탄 가한(1507~1582)은 1578년 새 정복지 칭하이로 티베트불교 제3대 고승 쇼냠 갸초를 초청해 ‘달라이 라마’로 존칭했는데, 달라이는 ‘큰 바다’라는 뜻의 티베트어 갸초(Gyacho)를 몽골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정(政)·교(敎) 일치 통치자가 됐다.
달라이 라마 계승은 전생활불(轉生活佛)이라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부처가 사람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내려오며, 달라이 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고,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이들의 육신이 사라지면 다른 사람의 육신으로 영혼이 옮겨간다.
17세기 라마 계승법(繼承法)을 두고 닝마파와 겔룩파 간 분쟁이 생겼다. 겔룩파는 중가르 칸국의 무력을 배경으로 새로 계율을 정하고 닝마파를 몰아냈다.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를 최고 지배자로, 판첸 라마를 다음 순위 지배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이들 2대 활불(活佛)에게 종교와 세속을 모두 관장하게 했다.
‘중세 교황’과 비슷한 영향력 행사한 ‘달라이 라마’
/현 달라이 라마(82)는 14세다. [위키피디아]
달라이 라마는 몽골, 신장, 티베트, 칭하이, 윈난, 간쑤 등에 거주하는 몽골계 부족 사이에 중세 가톨릭 교황에 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됐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 계통 국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자 중가르 칸국 등 많은 나라가 이를 이용해 제2의 칭기즈칸제국 건설의 꿈을 키웠다. 청나라는 몽골계 부족들의 무력과 달라이 라마가 가진 종교적 통합력이 결합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옹정제는 티베트 주재 주장대신(駐藏大臣)으로 하여금 달라이 라마를 감시하게 했다.
건륭제 시기 달라이 라마 후계자 문제를 두고 티베트에 내분이 일어났다. 네팔 구르카족까지 개입해 혼란이 가중됐다. 네팔은 1788년, 1791년 2차에 걸쳐 판첸 라마가 거주하는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 소재 타시룬포 사원을 침공하는 등 티베트 내정에 간섭했다. 1790년 청나라 군대가 라싸에 진입했으며, 1792년에는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육박했다. 네팔은 평화조약 체결을 간청했다. 건륭제는 내정 불간섭 정책이 오히려 분쟁을 조장한다고 생각해 주장대신으로 하여금 티베트의 행정·군사권을 장악하게 했다.
‘가망 없는 나라’ 조선
/베트남 해적을 묘사한 그림.
18세기 조선으로 가보자. ‘송자(宋子)’라고 불린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는 1709년 보령 한산사(寒山寺)에서 인성(人性)·물성(物性) 동질 여부에 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주도했다. 호락논쟁은 훗날 노론이 인성·물성 간 차이점을 강조한 벽파와 인성·물성 간 동질성을 강조한 시파가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호락논쟁은 오랑캐 만주족도 문명을 이룩할 수 있느냐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호(湖·충남)를 대표한 한원진(韓元震)과 달리 락(洛·한강지역)을 대표한 이간(李柬)은 만주족 청나라도 문명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간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박지원, 홍대용 등을 중심으로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북학운동이 일어났으나 북학파도 성리학의 테두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명나라에서 주류이던 양명학조차 조선에서는 18세기에 시작돼 19세기나 돼서야 심도 있게 연구됐다. 조선은 맹목(盲目)의 산림(山林·성리학자)이 국가 경영을 주도하는 가망 없는 나라가 됐다.
1786년 발생한 타이완 토호 ‘임상문(林爽文)의 난’은 삼합회(三合會)라고도 부르는 천지회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임상문의 난은 만주팔기가 아니라 채대기·손사의가 지휘하는 한족 녹영(綠營)의 힘을 빌려 2년 만에 진압됐다. 임상문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저민(浙閩·저장과 푸젠)에 주둔하던 팔기군은 무기력의 극치를 보여줬다. 채대기는 공을 세우고도 건륭제의 총신(寵臣) 니오후루 화신의 중상모략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팔기의 전력 약화는 오삼계 주도 ‘삼번(三藩)의 난(亂)’ 때 이미 드러났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일어난 백련교도의 반란을 토벌한 것도 팔기가 아니라 향용(鄕勇)을 앞세운 녹영(綠營)이었다.
만주족의 나라가 한족 군대가 없으면 유지되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금성에서는 한어(漢語)만 들렸다. 만주족은 스스로 해체했다.
건륭제는 1789년 서산당(西山黨) 완문악·완문혜 형제의 반란에 직면한 베트남 여씨(黎氏) 왕조의 지원 요청을 받고,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가 지휘하는 대군을 파병했다. 청나라 20만 대군은 홍하에서 베트남군에게 섬멸됐다. 버마 원정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서산당 정권을 수립한 완문혜와 그의 아들 완광찬은 해도입국(海盜立國) 기치 아래 해적질을 적극 지원했다.
淸 몰락 예견한 ‘봄비’
베트남 해적은 광둥·광시·하이난뿐 아니라 푸젠과 저장에도 출몰했다. 이를 전기(前期) 정도(艇盜·해적)라 하는데, 베트남이 국가 사업으로 운영한 만큼 대형 선박인 데다 탑재한 대포도 많아 청나라군은 대처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청나라와 베트남의 충돌은 메콩 델타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어온 프랑스와 태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완복영이 1802년 완광찬을 죽여 서산당 정권을 멸하고, 베트남 최후의 완(阮)왕조를 수립하면서 끝났다. 완복영이 정권 안정을 위해 청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후기 정도(艇盜)는 채견(蔡牽)이 중심이 돼 일어났다. 채견이 단순한 해적인지 반(反)만주주의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푸젠 제독 이장경(李長庚)은 1803년 동중국해 딩하이(定海) 해전에서 채견을 격파했다. 채견은 선단을 재건해 타이완과 푸젠 해안을 계속 습격하는 등 맹위를 떨쳤으며 1804년 원저우(溫州)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을 대파했다. 이장경이 1807년 타이완 해전에서 전사하고, 채견 역시 1809년 동중국해 위산(漁山) 해전에서 전사해 ‘2차 정비(艇匪)의 난’은 막을 내렸다.
육지에서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과 함께 정비의 난은 다가올 서양의 침공과 청나라의 몰락을 예견하는 봄비와 같은 사건이었다.
나가사키(長岐)만 개항한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마찬가지로 청나라도 광저우(廣州)만 개항했다. 서양 문물 유입에 숨통을 틔워놓은 일본·청나라와 달리 조선은 문을 걸어 잠그다 못해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 등 17세기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들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청의 경우 외국인은 호부(戶部)에 소속된 월해관(粤海關)이 관할하는 이관(夷館)에만 광저우 체류를 허용했다. 외국인 접촉은 무역 허가를 받은 민간 조직인 행(行)이 전담했다. 즉 외국인↔행↔월해관을 연결하는 구조였으며, 13개 행은 민관 사이 완충 장치였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상사(商社)가 외국인과 거래해 결과를 관세청에 보고하고, 관세청의 지시를 외국인에게 통보하는 형태로 무역이 진행됐다. 다만 청나라는 상하 관계의 조공만 있을 뿐, 대등 관계의 통상은 없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도자기·茶 수출로 번 ‘銀’, 아편 수입으로 탕진
/18세기 중국에는 아편 중독자가 창궐했다.
산업혁명 덕분에 국력이 증강된 영국이 청나라 진출을 노렸다. 조지 3세는 1793년 매카트니로 하여금 건륭제를 알현하게 했다. 매카트니는 청더(承德)에 머물던 건륭제를 찾아가 조지 3세의 친서를 전했다. 영국은 △상관 설치 △상하이 앞바다 주산열도(舟山列島)와 톈진에 상선을 정박할 권리 △기독교 포교 권리 등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건륭제를 계승한 가경제는 1796년 아편 수입을 금지했다. 아편 수입량에 비례해 은의 유출이 극심해지자 청나라 경제의 근간이던 은본위제(銀本位制)가 붕괴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차(茶)와 도자기 수출로 유입된 은이 아편 수입 때문에 거의 다 유출됐다. 단기간에 은가(銀價)가 2배나 상승해 동전 가격이 급락했으며, 은을 갖고 국가 전매품 소금을 사서 동전을 받고 팔던 소금 상인들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농민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다. 살길이 없어진 백성들은 백련교 등 비밀 종교 단체에 가입해 반란의 불길을 당겼다.
1796년 1월 후베이성에서 백련교도의 반란이 최초로 일어났다. 반란은 산시(陝西)성과 쓰촨성으로 번졌다. 청나라 정부는 향용(鄕勇)을 앞세워 반란 발생 10년 만인 1805년에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백련교도 반란은 팔기의 군사적 무능을 다시 한번 폭로했다.
소금을 밀거래하던 사염(私鹽) 상인이 아편도 거래하기 시작했다. 국가에서 엄금하는 아편을 목숨을 걸고 거래한 이들은 악명 높은 갱 조직인 삼합회(三合會)의 전신인 천지회(天地會)와 연결됐다. 아편 중독으로 인한 사회문제와 함께 은의 유출로 인한 경제 위기는 국가 안위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했다. 가경제를 이은 도광제가 아편에 중독된 적이 있을 만큼 아편 중독은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만연했다.
아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온건론과 강경론이 제시됐다. 허내제(許乃濟)의 이금론(弛禁論)과 황작자(黃爵滋)의 엄금론(嚴禁論)이 그것이다. 후광총독 임칙서(林則徐)도 엄금론을 주장했다. 이금론은 아편을 금지할수록 밀수가 늘어나고 관리의 부패도 심해지므로 아편 수입세를 부과하는 동시에 수입량을 줄이기 위해 양귀비 재배도 허용하자는 주장이다.
대청제국, 대영제국에 굴복하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는 조선 철종 13년을 배경으로 삼았다. 조선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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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네덜란드와 미국 일부 주(州)는 대마초 흡연을 허용한다. 독일은 마약중독자가 주사기를 여러 번 사용함으로써 AIDS 등 치명적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한 통제하에 1회용 주사기를 제공한다. 이는 이금론의 일종이라고 하겠다.
아편 중독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도광제는 엄금론에 기울었다.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해 아편 문제에 대처하게 했다. 임칙서는 아편의 해악을 잘 알았으며 이론뿐 아니라 실무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 광저우 지사(支社)는 아편도 거래했다. 광저우에 부임한 임칙서는 1839년 영국 상인들이 보유한 아편 1425t을 몰수해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호수에서 소석회와 섞어 용해시켰다. 임칙서는 압수한 아편에 대해 차엽(茶葉)으로 보상했다.
임칙서는 아편은 엄금했으나 통상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국제법도 잘 알았다. 스위스의 저명한 국제법학자 에머리히 드 바텔의 ‘국제법’을 한어(漢語)로 번역하게 하는 등 법률 논쟁에도 대비했다.
아편 상인들은 임칙서의 조치를 악의적으로 영국에 보고했다. 1840년 영국 자유당 내각은 청나라 원정을 결정했다. 아편 무역의 비도덕성을 두고 비난이 제기됐으며 거대한 청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도 의회는 내각이 제출한 군비 지출안을 찬성 271표, 반대 262표로 통과시켰다. 윈스턴 처칠과 함께 위대한 총리 중 하나로 평가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이 반대 토론을 했다.
“원인이 이렇게도 부정한 전쟁, 이렇게도 불명예가 되는 전쟁을 나는 여태까지 알지 못한다. 광저우 앞바다에 휘날리는 유니언잭(Union Jack)은 악명 높은 아편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펄럭이는 것이다.”
전쟁은 당초 예상과 달리 영국의 일방적 승리로 진행됐다. 함포를 앞세운 영국 해군이 상하이 앞 주산열도(舟山列島)를 점령하고, 동중국해와 황해를 거슬러 올라가 보하이(渤海)만 톈진 앞바다까지 진격했다. 청나라 정부는 영국의 위세에 겁을 먹고 임칙서를 파면했으며 베이징 부근을 관할하는 직례총독 아이신고로 기선으로 하여금 영국과 교섭하게 했다.
홍콩 섬 할양 문제로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포틴저 제독은 1841년 광저우를 공격했으며 1842년 주산열도를 다시 공격하고 대안(對岸)에 위치한 닝보와 진하이 등을 점령했다. 이어 창장과 강북 운하로 연결되는 요충지 진장(鎭江)을 인도 식민지군이 포함된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점령했다.
영국군은 난징에 육박할 기세를 보였다. 청은 결국 영국군의 공세에 굴복했으며 1842년 8월 콘윌리스호 함상에서 난징조약에 조인했다. 청나라는 전비(戰費)와 아편 몰수 대금을 배상해야 했으며 홍콩 섬을 할양하고, 광저우와 샤먼(아모이),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해야 했다.
亡國으로 가는 열차
건륭제 중기 이후 관료와 팔기·녹영의 부패, 토지제도 붕괴로 인해 농촌 사회의 위기가 극단으로 치달았다. 토호(土豪)인 신사(紳士), 대지주와 부상(富商) 등이 토지를 집적해 4억 인구의 3분의 2가 한 뼘의 토지도 갖지 못한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일반 농민은 전체 농경지 중 겨우 30%만 차지했으며 생산한 곡물의 50% 이상을 지대(地代)로 납부했다.
농민의 몰락은 사회 불안의 근원이 됐다. 농촌 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강희·옹정·건륭 3대의 성세(盛世)를 배경으로 급격히 늘어난 인구다. 조세 경감, 농업 기술 발달과 함께 신대륙으로부터 감자와 옥수수가 도입돼 벼 또는 밀농사가 불가능하던 땅에도 농사를 짓게 된 것도 인구 증가의 원인이다. 18세기 중엽 1억8000만 명이던 인구가 19세기 중엽에는 4억 명으로 급증한 데 반해 경작지는 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아편의 급격한 유입에 따라 은이 해외로 유출돼 은의 가치가 급상승했다. 납세 수단으로 사용되던 은과 거래 수단으로 사용되던 동전의 교환가치가 1대 2에서 1대 3으로 상승했다. 동전을 취급하던 중소상인을 중심으로 피해가 속출했다. 피해를 본 이들은 반체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련교도의 난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한 무렵 조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평안도 출신 몰락 양반 홍경래가 1812년 1월 가산에서 봉기했으나 그해 5월 정주에서 정부군에 패배했다.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을 포함한 민초들의 거센 저항에도 대청(對淸)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의 후예 장동(壯洞) 김씨(구안동 김씨와 구분되는 신안동 김씨는 서울의 서촌인 장동에 대대로 살아 ‘장동김씨’로 불렸다)가 장악한 조선 조정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국 서남부 오지(奧地) 광시(廣西)에는 다양한 종족이 섞여 살았는데 민족 간 대립이 생겨났다. 첫째, 토착 한족과 중원에서 이주해온 하카(客家)가 대립했다. 둘째, 한족에 의해 산악 지역으로 밀려난 좡족(壯族)·야오족(瑤族) 등 소수민족은 한족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지방 통치자들에게 극도로 분노했다.
태평천국 주모자 중 하나인 석달개(石達開)의 어머니는 좡족 출신이다. 철제품이 대량 수입되면서 철광석 광부와 숯구이 등이 실직했다. 상당한 무력을 갖고 있던 이들의 불만은 혼란에 기름을 끼얹었다. 해산된 향용(鄕勇)이 각지에 방치돼 있었으며 반체제 천지회는 주장(珠江) 델타의 해적들과도 연계됐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목표로 한 천지회의 반란으로 광시의 혼란은 더욱 심화됐다.
1836년 야오족 출신 백련교도 남정준의 난과 1847년 역시 야오족 출신으로 백련교 및 천지회와 연계된 뇌재호의 난이 후난, 광시, 구이저우 등지를 휩쓸었다. 명·청 시기 야오·먀오족 등 소수민족 봉기는 홍콩 영화 ‘동방불패(東方不敗)’에 잘 소개돼 있다.
태평천국, 나라를 세우다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 Taiping Rebellion)은 1850~1864년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교전 상대는 만주족 황실의 청나라 조정과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이었다.
아편전쟁 패배로 상하이와 닝보 등 5개 항구가 개항되면서 무역의 중심이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옮겨갔다. 그 여파는 광시에까지 미쳤다.
태평천국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은 1814년 광저우시 화현(花懸)에서 출생한 과거 낙방생이었다. 홍수전은 1840년대 고종사촌이자 친구인 풍운산(馮雲山)과 함께 광시성 계평현에서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창시하고, 은광 광부들을 대상으로 포교에 나섰다. 숯구이 양수청(楊秀淸), 빈농 소조귀(蕭朝貴), 지주 위창휘(韋昌輝), 부농이자 지식인 석달개(石達開) 등 태평천국군 핵심 간부가 된 인물이 모두 이 시기에 배상제회에 가입했다.
행동가형 양수청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배상제회는 반란의 색채를 나타냈으며 천지회와 결합해 파괴력을 키웠다. 계평현을 중심으로 반란의 불길이 번졌다. 청나라 조정도 이들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1850년 초 임칙서를 다시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배상제회 진압을 명했다. 임칙서는 광시에 도착하기도 전인 1850년 10월 사망했다. 임칙서의 후임으로 임명된 양광총독 이성원(李星沅)도 곧 사망하고, 후임에는 대학사 새상아(賽尙阿)가 임명됐다.
1850년 12월 배상제회를 중심으로 봉기한 태평천국군은 1851년 9월 광시성 영안주성(永安州城)을 점령한 후 통치제도를 갖췄다. 홍수전은 천왕(天王)을 칭했으며, 동왕 양수청,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翼王) 석달개 등 5명의 왕이 임명됐다. △성고(聖庫)라는 공동 소유제 △엄격한 군율과 금욕주의 △여성차별 및 전족(纏足)을 비롯한 악습 폐지 등 경제·사회 개혁도 추진했다. 홍수전과 농민반란군이 세운 태평천국은 14년(1851∼1864)간 국가로 존속했다.
광시성에서 나라를 일으킨 태평천국군은 창장의 남쪽 지류 샹장(湘江) 흐름을 타고 우창(武昌) 방향으로 북진하기 시작했다.
08월 호
■제주도 1.5배 크기 오키나와 열도 집어삼킨 日
대청제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베트남은 청불전쟁을 거치면서 청(淸)의 조공국에서 프랑스의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청의 국력이 소진할 기미가 보이자 류큐를 복속시킨다. 조선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청일전쟁의 전운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청불전쟁 기록화. [위키피디아]
1851년 1월 광시성 구이핑(桂平)에서 봉기한 태평천국군은 창장(長江) 남쪽 지류 샹장(湘江) 흐름을 타고 북진해 창장 중류 요충인 우창(武昌)을 거쳐 1853년 3월 대도시 난징을 점령한 후 수도(천경)로 정했다. ‘멸만흥한(滅滿興漢)’을 슬로건으로 내건 태평군은 10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랑(侍郞) 출신 증국번(曾國藩)이 향토의용군 상용(湘勇)을 조직해 태평군 토벌에 나섰다. 만주팔기, 녹영(綠營) 등 정부군이 부패해 전투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청(淸) 정부는 상용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증국번은 태평군이 토지 균분, 사당(祠堂) 파괴 등 기본 질서에 어긋나는 주장을 한다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한족 기득권층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태평군의 약점은 면(面)은 확보하지 못하고 점(點)과 선(線)만 점령한 것이다. 약점을 잘 알고 있던 태평천국 2인자 양수청은 난징 점령 직후인 1853년 5월 이개방, 임봉상, 길문원이 지휘하는 북벌군 5만 명을 난징에서 출정시켜 베이징을 곧바로 공격하게 했다. 북벌군은 5월 안후이성 자오저우(펑양·鳳陽)를 점령했으며 6월에는 허난성 카이펑을 확보했다. 7월에는 황허를 건너 허베이 평원에 들어섰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해 10월 북벌군이 톈진(天津)을 공략했으나 몽골 코르친족 출신 셍거린전(僧格林枕)이 지휘하는 청군에 패배했다. 북벌군은 1855년 길문원, 임봉상, 이개방 순으로 차례로 함몰됐다. 북벌군과 거의 같은 시기 출발한 석달개의 서정군(西征軍)은 성공적이었다. 증국번의 상용으로부터 우창을 탈환하고 초용(楚勇)을 이끌던 강충원을 죽였다. 안칭(安慶)과 주장(九江) 등 난징의 울타리 도시도 점령했다.
태평천국서 벌어진 ‘왕(王)’들의 권력 다툼
/일본에 복속당해 450여 년 왕조가 끝장난 류큐 왕국의 ‘슈리성’. [동아DB]
하나님(上帝)의 뜻을 대신 전한다는 천부하범(天父下凡) 권력을 행사한 양수청은 태평천국의 2인자 동왕(東王)이었다. 양수청이 힘을 얻으면서 1인자 천왕(天王) 홍수전과의 갈등이 벌어졌다. 양수청이 홍수전을 밀어내려는 상황에서 익왕 석달개가 지휘하는 태평군은 1856년 6월 청나라군이 천경 공략 목적으로 설치한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을 괴멸시켰다. 청 황제가 파견한 흠차대신(欽差大臣) 상영은 패주 후 사망했다.
양수청의 도전에 위협을 느낀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를 사주해 양수청을 치게 했으며 양수청을 살해하는 데 성공한 위창휘는 세력을 강화하고자 석달개마저 숙청하려 했다. 석달개는 도피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을 포함해 2만~3만 명이 학살당했다. 위창휘는 1인자가 되고자 1856년 11월 천왕부를 공격했으나 홍수전 측의 반격을 받고 붙잡혀 극형을 당했다. 배신에 지친 홍수전은 홍인발 등 친형제를 요직에 기용했다.
1856년 12월 증국번에 의해 우창이 다시 함락됐다. 홍인발 형제에게 우창 함락 책임을 추궁당한 석달개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떠났다. 위창휘에게 살해된 양수청의 잔당을 흡수함으로써 세를 키웠다.
청군은 천경을 정벌하고자 다시 강남대영을 설치했다. 태평군은 충왕 이수성과 영왕 진옥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홍수전은 홍인발 형제가 뇌물을 받는 등 문제를 일으키자 그들을 해임했으며 1859년 일족 홍인간이 홍콩에서 건너와 천왕을 보좌했다.
석달개는 1859년 자립을 선언했으나 1861년 창장 대도하(大渡河)에서 강을 건너 북상하는 데 실패한 후 부하들을 구하고자 스스로 청군(淸軍)의 포로가 됐다. 석달개는 1863년 청두에서 살을 발라 죽이는 책형(刑)에 처해졌다. 2차 아편전쟁이라고도 하는 애로호(청-영국 간 분쟁) 사건이 진행 중이던 1860년 태평군은 충왕 이수성과 영왕 진옥성의 분전 덕에 ‘천하의 2개 과실’ 쑤저우와 항저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862년 1월 태평군은 상하이 공격에 나섰다.
英佛이 약탈한 淸 보물 루브르·대영박물관으로
영국, 프랑스 등 외세는 상승군을 조직해 청군을 지원했다. 상하이가 태평군에 떨어지려는 상황에서 난징이 청군에 거꾸로 포위당했다. 홍수전의 재촉을 받은 이수성은 상하이 공격을 중지하고 쑤저우와 난징을 오가면서 난징의 포위를 풀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군은 1863년 12월 쑤저우를 잃고, 1864년 초에는 항저우마저 상실했다. 1864년 7월 난징도 함락됐다. 홍수전은 난징 함락 1개월 전 음독자살했다. 난징에 입성한 상용은 학살·약탈을 자행했다.
태평군 진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증국번, 좌종당(左宗棠), 이홍장(李鴻章·1823~1901) 등 한족 출신 인사들은 무력을 배경으로 해 청 말기 권력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홍인간은 자정신편(資政新篇)에서 기독교 교리에 기초해 중앙집권과 함께 은행, 철도, 우편제도 도입 등 서양 문물 수용을 주장했다. 그만큼 태평천국은 혁명적 측면이 있었다. 태평천국과 동학 봉기가 종종 비교되나, 동학이 근왕(勤王·임금을 위해 나라 일에 힘씀) 등 반(反)서구, 보수적 색채를 띠었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난다.
애로호 사건은 태평천국전쟁이 한창이던 1856년 10월 일어났다. 청나라 침략을 노리던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구성해 그해 12월 광저우(廣州)를 공격했다. 영·불군은 1858년 4월 톈진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 러시아 함선 1척도 합류했다. 애로호 사건은 톈진조약으로 이어져 외교사절의 베이징 주재까지 허용되는 등 청나라가 대폭 양보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톈진조약 기록화. [위키피디아]
톈진조약 비준 문제와 관련해 톈진 외항(外港)에서 청군과 영국군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져 영국군이 패하는 바람에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 1860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군함 100여 척, 병력 1만5000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파견했다. 영·불 연합군은 1860년 톈진을 거쳐 베이징을 점령했다. 영·불 연합군은 그해 10월 자금성의 이궁(離宮) 원명원(圓明園)에 난입했다. 병사들은 보물을 대거 약탈했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의 전시실이 이때 약탈한 보물로 채워졌다.
“淸이 망하고 나면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잇는 유일한 나라”
아편전쟁을 겪은 도광제의 후계자 함풍제는 베이징 북방 청더로 도주했으며 영·불에 합세한 러시아는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연해주 영유권을 확보했다. 러시아인들은 함경도 경흥에 나타나 조선에도 통상을 요구했다. 러시아의 집요한 통상 요구는 1866년 병인년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공으로 이어졌다.
1864년 아들 고종의 즉위와 함께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집권 초기 조선 천주교도의 주선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천주교를 적대시한 성리학 세력이 반발하자 권력 유지를 위해 프랑스인 신부(神父)와 천주교도를 대거 처형했으며, 이는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야기했다.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소각된 사건을 핑계로 미국 동아시아 함대가 1871년 신미년에 강화도를 침공했다. 이 사건 후 조선의 대외 폐쇄 및 고립은 한층 심화됐다.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1864년 7월, 당시 최강의 무력집단이던 상용을 장악한 증국번은 동생 증국전과 팽옥린 등으로부터 새 나라를 세우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전쟁을 오랫동안 치르는 동안 상용도 부패해 전투력이 약화됐으며, 좌종당 이홍장 등 부하들의 마음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증국번은 난징 점령 후 상용을 해산하고 일부 우수한 간부만 이홍장에게 넘겨줬다.
신장 ‘삼키려던’ 영국·러시아
이홍장은 증국번의 유산을 기초로 회용(淮勇)을 만들었다. 이홍장은 회용을 배경으로 직례총독을 여러 차례 역임하는 등 청나라 말기 최고실력자로 군림했다. 이홍장 이후 허베이·허난·산둥·산시 4개 성을 관할하는 직례총독이 군기대신을 대신해 청나라 정부의 최고실력자가 됐다.
아편전쟁, 태평천국 봉기, 애로호 사건, 러시아의 연해주 점령 등 청나라의 몰락이 가시화되는데도 조선은 외부 세계 변화에 눈을 감았다.
이항로, 기정진, 유인석, 최익현 등 성리학자들은 제비집이 매달린 초가에 불이 나고, 아래에서는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는 연작처당(燕雀處堂) 상황에서도 “청이 망하고 나면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잇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조선이 멸망한 1910년에도 1644년 멸망한 명나라 연호 ‘숭정(崇禎)’ 사용을 고집했다.
애로호 사건을 통해 청나라 인사들은 구미(歐美) 제국주의 세력이 영토를 노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청나라 실력자들은 외세의 침입을 방어하는 방책과 관련해 임칙서와 좌종당 중심의 새방파(塞防派)와 이홍장 중심의 해방파(海防派)로 나뉘었다. 새방파는 육지로부터의 침략, 해방파는 바다로부터의 침략을 우선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편전쟁 발발 책임을 추궁당해 신장으로 좌천당한 임칙서는 러시아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영국과 미국은 영토 할양이 아니라 조차(租借)나 통상 이익을 원하는 정도인 반면 러시아는 영토 점령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좌종당의 견해 또한 임칙서와 같았다.
새방파가 친미·친영적 색채를 띤 반면 해방파가 친러적 색채를 띤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새방론과 해방론은 지정학에 기초했으며 현재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안보정책을 관통하는 핵심 논쟁점(Key Words)이다.
러시아는 1868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등을 영토로 한 부하라칸국(汗國), 1873년 아무다리야 하류를 중심으로 한 히바칸국, 1876년 페르가나 계곡과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한 코칸드칸국을 차례로 점령했다. 코칸드칸국 장군이던 야쿠브벡은 러시아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신장으로 근거지를 옮겨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동진을 막고자 야쿠브벡을 지원했다. 나중에는 신장 침투를 노리던 러시아도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야쿠브벡을 도왔다.
1875년 새방파 좌종당은 흠차대신(欽差大臣) 자격으로 정예부대를 이끌고 야쿠브벡 군대에 맞섰다. 해방파 이홍장은 야쿠브벡 군대와의 전쟁이 임박했는데도 프랑스와 일본 등 해양세력과의 싸움에 대비해 증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홍장이 보기에 신장은 중국의 지엽말단에 불과한 땅이었으나 좌종당은 신장은 몽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고, 몽골을 유지하는 것은 수도 베이징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논리로 맞섰다.
좌종당은 1877년 증국번이 식량을 포함한 군수물자를 충분히 지원해준 데 힘입어 야쿠브벡군을 격파했다. 위구르족의 집단거주지면서 남신장(南新疆)의 중심인 카슈가르, 야르칸드, 호탄 등을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던 영국이나, 북신장(北新疆)의 이리 지방을 점령했던 러시아도 삼켰던 이권(利權) 대부분을 토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좌종당이 야쿠브벡군을 군사력으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조공 질서 붕괴
신장과 중앙아시아는 인종(페르시아 및 투르크)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연결돼 있다. 8세기 당나라 현종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 안록산의 아버지는 사마르칸트(康國)의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는 돌궐인이었다.
중앙아시아 최대 상인 집단 소그드인은 사마르칸트에 본부를 두고 동쪽으로 신장-중국-만주에 이르는 강력한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소그드인은 동족 안록산의 반란을 적극 지원했다. 그들은 안록산을 통해 중국 내 상권을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록산(Roxan)’은 소그드어로 ‘빛나는(光明)’이라는 뜻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소그드인 부인 이름도 록산네(Roxane)였다.
청나라의 시각에서 볼 때 세계 질서는 힘이 미치는 정도에 따라
①각 성(省)과 만주(滿洲)
②소수민족 통치지역인 번부(藩部)와 쓰촨 서부, 구이저우, 윈난, 칭하이 등의 토사지역(土司地域·소수민족 자치지역)
③조선, 베트남, 류큐(오키나와), 버마 등 조공국(satellite)
④일본, 중앙아시아, 여타 동남아시아 등 반(半)조공국
⑤인도, 중동, 유럽 등 외연으로 구성돼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무기력이 드러나자 대청제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럽과 일본은 청의 적대세력이 돼 기존의 동아시아 질서를 해체해나갔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침공으로 베트남이 가장 먼저 조공국 대열에서 이탈했다.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이던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사 살해를 구실로 1858년 필리핀 주둔 스페인군과 함께 베트남에 출병해 중남부 항구도시 다낭을 점령했다. 다낭은 2018년 3월 초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이 기항한 천연의 양항이다.
프랑스군은 4년간의 공방 끝에 메콩델타(코친차이나)를 점령했으며, 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으로부터 메콩델타의 3개 성을 할양받았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지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은 1873년 송코이강(紅河) 통항권 확보를 위해 하노이를 포함한 송코이델타(통킹)를 점령하고, 베트남 정부에 제2차 사이공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는 메콩델타 총독 뒤프레 제독이 중앙정부 승인도 없이 독단으로 수행한 작전이었다. 프랑스는 제2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베트남으로부터 송코이강 통항권은 물론, 메콩델타의 3개 성을 추가로 할양받았다. 청나라도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했다.
베트남, 淸 조공국에서 佛 식민지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 국내외 상황이 안정되자 베트남 전체의 식민화를 시도했다. 베트남 총독 빌레는 송코이델타 점령을 위해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1882년 4월 프랑스는 송코이델타 일부가 태평군 잔당 유영복의 흑기군(黑旗軍)에 의해 장악돼 통항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핑계로 리비에르 대령이 지휘하는 600명의 병력으로 하여금 하노이를 점령케 했다. 리비에르는 후에(順化) 소재 베트남 정부에 송코이델타 할양을 요구했다.
베트남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며 청나라는 프랑스군이 북진할 것을 우려해 장지동(張之洞)을 사령관으로 베트남과 접한 국경에 부대를 파견했다. 청나라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프랑스는 송코이강을 경계로 세력권을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 1883년 2월 새로 집권한 식민지주의자 페리 총리는 이 제안을 취소해버렸다. 청나라·흑기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하노이를 점령했으며 리비에르 대령은 전사했다.
프랑스는 1884년 육·해군으로 구성된 1만6500명의 병력을 증파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증강된 프랑스군은 송코이델타 주둔 청나라·흑기 연합군을 격파해 베트남 영외로 퇴각시켰다. 이어 프랑스군은 후에로 진격했다. 프랑스는 베트남군을 항복시킨 다음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홍장은 1884년 5월 프랑스와 톈진조약을 체결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했으나 그해 6월 프랑스군이 철군을 지체한다는 이유로 송코이델타 주둔 청나라군을 공격해 전쟁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프랑스 함대가 푸젠 앞바다에까지 나타났다. 조선장관(船政大臣) 하여장은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푸젠을 지키던 청나라군에 프랑스 함대에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프랑스 함대는 푸젠의 마웨이 군항(軍港)을 공격해 양무파(洋務派)가 건설한 조선소를 파괴했다. 마웨이 조선소가 파괴됐다는 소식을 접한 청 정부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쿠르베 프랑스 해군 제독은 함대를 지휘해 창장 하구와 타이완을 봉쇄하고, 펑후열도(澎湖列島)를 점령했으나 저장성을 공격하다가 청군의 포격으로 전사했다.
1885년 3월 청-흑기 연합군은 송코이델타의 랑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랑썬 패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페리 내각이 붕괴했다. 프랑스군은 소극적 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으로서도 펑후열도를 잃고, 타이완에 대한 통제도 상실한 상태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는 1885년 파리 조약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했다.
조선 女人 셋을 첩으로 둔 위안스카이
/프랑스 식민지 시기 하노이.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열도, 즉 류큐(琉球)는 일본 규슈 남부에서 타이완까지 활 모양으로 점점이 퍼져 있는 총면적 2712㎢(제주도 1.5배 크기)의 열도다. 류큐는 조선, 중국, 일본과 교류하면서 발전해 1429년 오키나와섬을 중심으로 통일왕국을 세웠다. 16세기에는 쇄국정책을 취한 명(明)과 일본, 조선 간 중계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으로 이어진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가고시마)이 3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해 류큐를 점령했다. 사쓰마번은 가까운 아마미(奄美) 제도는 직접 지배하는 대신 류큐의 명목상 독립은 유지했다.
류큐는 이후 청나라와 사쓰마번 모두에 조공을 바치는 양속국(兩屬國)이 됐다. 청나라만 이를 몰랐다. 류큐는 1847년 영국, 프랑스에 개항했으며, 미국과는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국제정세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청나라의 국력이 소진될 기미를 보이던 1879년 류큐를 병합했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외세 및 국내 반란 세력과의 싸움에 정신이 없던 청나라는 일본의 류큐 합병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공체계로 불리는 청(淸) 중심 동아시아 질서의 한 축에 금이 간 것이다.
청·불전쟁의 여파는 조선에도 미쳤다. 일본은 1884년(갑신년) 12월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청나라의 허를 찔러 김옥균과 홍영식 등 소장 개혁파를 부추겨 친청(親淸) 민씨 정권을 반대하는 정변을 일으키게 했다.
일본의 예상과 달리 이홍장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조선 주둔 청나라군을 빼내가지 않았다. 청군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연계된 임오군란(1882)을 진압한 뒤에도 2000명 정도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하응은 1873년 왕비 민씨에 의해 실각당한 후 임오군란 직후 혼란기에 잠시 권좌에 복귀했으나 청군에 의해 납치돼 3년간 베이징 인근 바오딩에 유폐된 바 있다.
24세의 청군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병력을 동원해 정변 발생 3일 만에 조선의 개혁파 세력을 제압했다. 위안스카이는 당시 조선 여인 3명을 첩으로 들였는데, 그중 하나인 안동 김씨의 손자 위안자류(袁家)는 세계적 물리학자가 됐다.
바람 앞의 등불
/동학을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를 주도했다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되는 전봉준. [동아DB]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 우위가 확고해졌다. 청은 일본과 톈진조약을 체결해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거나 파병할 때 사전 통보 의무화에 합의했다. 일본이 조선에서 철군하기로 한 것은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청나라에 비해 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을 포함한 대형 함선을 보유한 청나라 해군이 일본 해군을 압도했다.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한 후 청나라 정복 계획을 수립하는 등 군비 증강에 전력을 다했으나 청나라는 북양함대 증강에 사용할 예산을 시태후(西太后) 환갑 축하를 위한 이화원 공사비로 돌려놓았다. 일본이 신형 함정을 발주하는 등 해군력을 크게 증강하는 동안 청나라는 10년간 단 한 척의 함정도 추가로 확보하지 못했다.
1894년 3월 조선 정부가 파견한 홍종우가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가 보내온 김옥균의 시신에서 목을 떼어내어 양화진에서 효수(梟首)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이 한층 고조됐다.
1894년 2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동학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봉기했다. 동학군은 5월 10일 정읍시 황토현에서 이틀간에 걸친 처절한 전투 끝에 조선 정부군에 대승을 거뒀다. 황토현 참패는 조선 조정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은 5월 28일 전남 장성(長城)에서 동학군과 접전했으나 대패했다. 5월 31일 동학군은 장날 장사꾼으로 변복하고는 순식간에 전주성을 점령했다. 낫과 쇠스랑 등 농기구로 무장한 동학군의 전주 점령은 외세가 개입하는 국제전쟁으로 비화했다.
민영준(민영휘로 개명) 일파는 동학군이 이하응과 연결돼 민씨 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커지자 정권 상실을 우려한 나머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정부가 조선 파병을 결정했으며 일본 군부는 조선에서 청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계획했다. 일본은 조선으로 출병할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었는데 동학 봉기로 인해 기회를 잡았다. 일본은 일본군과 청군이 동시에 조선에 출병하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먼저 군대를 파병했다. 청·일군이 파병돼 군사 충돌 위험이 높아지자 동학군은 외세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고자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해산했다.
조선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청일전쟁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09월 호
■中, 親소련파 ‘만주왕’ 제압 왜?
1894년 청·일 양국의 선전포고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군(淸軍)은 아산 앞바다와 평양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펑황을 점령했으며 뤼순도 함락했다. 북양함대는 산둥반도에서 궤멸했다. 종전 협상은 랴오둥반도·펑후제도·대만 할양이 핵심이었으나 3국(러시아·프랑스·독일)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잃는다. 3국간섭은 1904년 러일전쟁의 서곡이다. 러시아와 볼셰비키의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도 만주에 군침을 흘렸다. 1928년 9월 소련군이 소·만 국경을 돌파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도 소련은 뤼순·다롄과 남만주의 이권을 가졌다.
/청불전쟁 기록화. [위키피디아]
19세기 중엽 일본 상황을 들여다보자. 초슈번(야마구치) 하기(萩)와 사쓰마번(가고시마) 가지야(加治屋)를 대표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1868년 3월 도사번(고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주선으로 삿초(薩長·사쓰마-초슈)동맹을 결성했다. 삿초동맹은 에도-아이즈(도쿄-후쿠시마)가 주력인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복고, 개혁·개방을 요체로 하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장편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당시 일본 국내외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청(淸) 실력자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은 조선의 친청파 민영준의 요청도 있고 해 1894년 6월 4일 청군의 조선 출병을 명했다. 일본은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해 전쟁을 준비했다. 정한론자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무장관과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중장 등 개전파가 대청정책(對淸政策) 주도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에서 인천까지가 자국에서보다 훨씬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 청군이 출병하기 이틀 전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가 지휘하는 1개 대대를 출발시켰다.
청의 녜스청(士成)은 선발대 800명을 거느리고 6월 8일 아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6월 9일 인천에 상륙했다. 조선 정부는 조선 영토가 전쟁터가 될 것을 우려해 6월 11일 동학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했다. 청·일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다.
日,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리훙장. [위키피디아]
오토리 공사는 많은 병력이 조선에 주둔하면 청나라와 군사 충돌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필수 병력만 남기고 쓰시마(대마도)로 철수하자”고 건의했으나 무쓰 외무장관과 가와카미 중장은 무조건 전쟁으로 나아가려 했다. 일본은 전쟁 구실을 만들고자 일·청 공동으로 조선의 정치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청나라는 6월 21일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한양 주둔군을 동원해 조선 왕궁과 4대문을 장악하고는 조선 정부에 청과의 국교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해양강국 영국의 1차 관심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것이었다. 남진 저지에 도움이 된다면 청이든 일본이든 상관없었다. 영국의 2차 관심은 영국 회사가 대거 진출한 경제 중심지 상하이를 포함한 창장 하류로 전쟁이 확대되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7월 18일 존 킴벌리 영국 외무장관은 청과 일본에 서울을 경계로 조선반도 북쪽은 청, 남쪽은 일본이 점령할 것을 제의했다. 임진왜란 시 명나라와 일본은 ①대동강 이남 일본 할양안 ②충청·경상·전라 3도와 경기 일부 일본 할양안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청나라 군사력이 일본에 비해 열세인 현실을 잘 알던 리훙장은 킴벌리의 제안을 환영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개설되지 않아 러시아가 대군을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서제는 주전론을 고수했다. 후광총독 장즈퉁(張之洞)과 호부상서 웡퉁허(翁同) 등 리훙장 반대파가 이에 동조했다. 북양함대는 청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리훙장의 사병처럼 운용됐는데, 최근 10여 년간 신형 함정을 한 척도 구입하지 못해 일본 해군에 비해 열세였다. 포탄도 크게 부족했다. 여기에다가 청나라 해군은 각 성(省)에 소속돼 군령도 일원화되지 않았다.
리훙장은 7월 29일 황제에 대한 상주문(上奏文)에서 청과 일본의 해군력을 비교해 승산이 없음을 밝혔다. 리훙장은 끝까지 일본과의 전쟁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일본은 조선에 경부전신(京釜電信) 가설권과 조·청(朝淸) 조약 폐기 등 최후통첩을 내놓고는 조선 주재 청나라 총리공서를 공격하는 등 한양을 점령했다.
고종은 7월 24일 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일본은 대원군에게 청군 격퇴를 요청한다는 요지의 국서(國書)를 보내줄 것을 강요했으나 대원군은 주저했다. 청과 일본, 어느 쪽이 승리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이다.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상대에게 선전포고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는 무쓰 외무장관에게 아산 공격 중지를 지시했으나 무쓰는 일본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호지세(騎虎之勢) 상황이라고 판단해 전쟁으로 밀고 나갔다.
전봉준에게 봉기 촉구한 이하응
/1894년 일본 군함이 청나라 북양함대를 공격하고 있다.
리훙장의 생각은 평양에 청군을 집결시켜 한양의 일본군 8000명과 맞서는 것이었다(1대 1 전선). 리훙장은 예즈차오(葉志超)가 지휘하는 2000명의 아산 주둔 청군을 평양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전선의 예즈차오는 리훙장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평양의 청군을 증강하는 한편 아산의 청군 병력도 증원해 한양 주둔 일본군을 남북에서 포위·협격하자고 주장했다(2대 1 남북 포위).
리훙장은 임차한 영국 선박에 추가 병력을 태워 아산으로 보냈다. 일본 해군은 7월 25일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청군이 탑승한 영국 선박을 기습 공격했다. 탑승한 청나라 병사 1200명 모두가 익사했다. 사기가 떨어진 청군은 7월 29일 벌어진 천안시 성환(成歡)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했다. 일본은 9월 13일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전진시켰다. 예즈차오는 성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거짓 보고하고는 충주, 춘천을 우회해 평양으로 도주했다. 리훙장은 평양의 청군 지휘관들이 불화한다는 보고를 받고 성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예즈차오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평양의 청군 지휘부는 리훙장의 조치에 실망했다. 예즈차오는 압록강까지 후퇴해 일본군의 보급로가 길어진 틈을 타 공격할 것을 주장했으나, 다른 장군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월 15일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1만7000명이 청군 1만4000명을 포위했다. 평양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일본군이 탄약이 떨어져 후퇴하려는 순간, 예즈차오의 명령에 따라 청군이 평양 성곽에 백기를 내걸었다.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청군은 조선에서 퇴각했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예즈차오에게 보낸 밀서는 일본군에게 노획됐다. 예즈차오는 나중에 참형을 당했다.
이하응은 경상·전라·충청 유력 양반 및 동학 지도자에게 밀사를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했다. 이하응은 1894년 8월 선무사를 파견해 전봉준·김개남 등 동학군 지휘부와 접촉해 봉기를 논의했다. 대원군이 선무사로 보낸 이건영은 전봉준에게 “왜구가 궐내를 범하고 종사에 화가 미쳐 나라의 명맥이 조석에 달렸으니 너희들이 서울로 북상하지 않으면 화가 닥칠 것”이라는 내용의 밀서를 보였다. 김개남에게는 “기병(起兵)해 한양으로 올라오라. 이것이 바로 대원군의 진의”라면서 궐기를 호소했다.
전봉준은 10월 중순부터 동학 남접(南接) 전라도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했다. 남접의 봉기에 자극받은 손병희 등 북접(北接) 지도부도 전봉준을 지원해 함께 궐기했다. 11월 7일 17만 명의 동학군이 논산에 집결해 북진을 시도했다. 일본은 9월 하순 대원군과 동학지도부 간 비밀 접촉 사실을 파악하고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하응을 두둔한 오토리 공사가 소환되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가 10월 27일 부임했다.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파병된 1000여 명의 중무장 보병을 동원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다. 동학군은 11월 18일~12월 31일 공주와 천안 사이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을 맞아 혈전을 벌였으나 참패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12월 4~7일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화력의 절대 열세로 인해 다시 한번 참패했다. 동학군 전사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지방이 산야를 덮어 눈이 온 것처럼 보였다. 이하응은 퇴진을 강요당했다.
북양함대, 전멸하다
이에 앞선 9월 평양 전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청나라는 뤼순항을 통해 함대를 추가 파견했다. 북양함대는 9월 17일 압록강 하구 하이양다오(海洋島) 인근에서 일본 함대와 조우해 5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참패했다. 패배한 북양함대는 뤼순 인근 다롄만(大連灣)으로 귀환했다. 일본군 제1군은 10월 압록강을 건너 펑황을 점령했으며 제2군은 11월 뤼순을 점령했다. 북양함대는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도주했다. 제1군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사령관은 베이징 공격을 주장했다. 야마가타의 폭주를 우려한 대본영은 야마가타를 노즈로 교체했다. 야마가타는 해임되기 전 선양(瀋陽), 랴오양(遼陽) 남부 군사요충지 하이청(海城) 점령을 명령했으며 일본군은 12월 하이청을 점령했다.
남방에서는 일본 해군이 대만의 부속도서인 펑후열도(澎湖列島)를 점령했다.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군사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일본은 근위사단과 북해도 둔전병까지 동원했다. 본토를 지킬 병력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됐다. 외부의 간섭에 취약해진 일본으로서는 적절한 시점에 전쟁을 종결해야 했다.
곤궁하기는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는 영토에 대한 이해관계가 비교적 미미한 미국에 종전 협상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은 군사력이 바닥나고 있었는데도 웨이하이웨이로 도주한 북양함대를 전멸시킨 다음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해군사령관은 딩루창(丁汝昌) 북양함대 사령관에게 항복을 권고했으나 딩루창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 해군은 1895년 2월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하고 류궁다오(劉公島)에서 북양함대를 전멸시켰다. 딩루창은 자결했다.
이토와 리훙장은 미국의 주선으로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정전 교섭을 했다. 일본에 의한 황화(黃禍·Yellow Perill·황인종에 의한 백인종 말살)를 우려한 독일은 일본이 청나라 영토 할양을 요구할 때 간섭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은 영국에 청·일 협상에 함께 간섭할 것을 제의했으나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면 일본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독일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본은 청나라에 톈진과 산하이관 등의 할양을 요구했으며 뤼순에 정청대도독부(征淸大都督部)를 설치할 의사를 표명하는 등 강경하게 나갔다.
러시아 품에 안긴 ‘Port Arthur’ ‘Port Dalian’
/시모노세키조약은 1895년 조인됐다. [동아DB]
크리미아 전쟁(1853~1856)에서 영국, 프랑스, 터키, 사르디니아 연합군에 패배한 러시아는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렸다. 러시아는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헤이룽장-우수리장 이동(以東) 청나라 영토 150만㎢ 이상을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은 동해 출구를 상실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현재 북한의 나선항 등을 통해 동해로 나아가려 한다. 러시아는 영·미와 연결된 해양세력 일본의 굴기를 저지하려 했다. 청나라는 열강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러시아군 3만여 명이 북만주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오자 정전을 반대하던 일본 군부도 입장을 바꿨다.
일본은 청나라에 조선의 완전한 독립, 랴오둥반도와 대만 및 펑후열도 할양, 배상금 3억 냥 지불 등을 요구했다. 협상 끝에 일본의 요구 조건이 다소 완화된 시모노세키 조약이 4월 17일 조인됐다.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은 4월 23일 일본의 랴오둥반도 영유를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 주재 3국 공사는 일본 외무부에 랴오둥반도 영유를 반대한다는 자국 정부의 뜻을 전했다. 일본은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①3국간섭 거부 ②열국회의(列國會議) 개최 ③3국간섭 수락 등 3가지 방안을 놓고 논의한 끝에 ②안으로 결론을 내렸다. 요양 중이던 무쓰 외무장관은 문병 온 이토 총리에게 열국회의가 개최되면 열강의 간섭으로 시모노세키 프레임 자체가 깨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면서 열국회의 개최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무쓰는 러시아를 상대할 힘이 없으면 분하더라도 3국간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4월 29일 일왕 메이지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개최돼 랴오둥반도 반환이 결정됐다. 3국간섭은 러·일 전쟁으로 가는 서곡이었다. 일본에 대항하려면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리훙장은 1896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해 유효기간 15년의 청·러 비밀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 러시아를 침략할 경우 상호 지원한다는 게 조약의 요지였다.
러시아는 청나라를 보호해주는 대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청나라 동부 철도라는 뜻·만저우리-하얼빈-쑤이펀허) 부설권을 획득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랴오둥반도 할양’ 요구를 무산시킨 대가도 받아냈다.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로터 랴오둥반도 남단에 위치한 뤼순항(Port Arthur)과 다롄항(Port Dalian) 일대를 조차(租借)했다.
쑨원 “청조(淸朝)를 뒤엎자”
전쟁에 패배한 청나라는 충격에 휩싸였다. 광서제를 포함한 국가 지도부는 물론 일반 사대부도 패전 소식에 분노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베이징에 모인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 등은 공동 상소를 통해 개혁을 청원했다. 이대로 가서는 나라의 앞날이 없다는 데 조야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두 갈래의 개혁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나는 황제가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개혁 운동이다. 다른 하나는 청조(淸朝)를 뒤엎자는 밑으로부터의 개혁 운동이다. 밑으로부터의 개혁 운동은 쑨원(孫文)과 루하오둥(陸皓東) 등 광둥 출신이 주도했다. 흥중회(興中會)를 구성한 이들은 1895년 9월 광저우(廣州)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계획이 사전 누설돼 실패했다.
청나라 체제의 위기를 감지한 광서제는 1898년 6월 캉유웨이, 량치차오, 탄시퉁(譚嗣同) 등을 기용해 △정치개혁 △산업진흥 △군제개혁 △학교 설립을 중심으로 대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개혁에 호의적인 인물은 호남순무 천바오전(陳寶箴)과 공부상서 쑨자나이(孫家) 등 소수에 불과했다. 변법이라고 불린 이 개혁은 천바오전의 후원을 받은 후난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보수파 실권자 서태후(西太后·함풍제의 후궁 출신으로 정식 명칭은 자희태후)는 권력을 잃는 게 두려워 개혁에 반대했다. 서태후는 군대를 통제하는 직례총독 자리에 조카 구왈기야 룽루(瓜爾佳榮祿)를 임명했다.
청일전쟁 시 보급을 담당한 위안스카이는 신건육군(新建陸軍)을 편성해 훈련시켰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군사력이 필수인데도 캉유웨이, 탄시퉁 등 개혁파는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다. 광서제가 개혁파 인물을 군기대신 장경(보좌관)에 임명하자 서태후가 행동을 개시했다. 서태후는 자파(自派) 장군들에게 병력을 황궁 부근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위기를 감지한 탄시퉁은 신건육군이라는 최강의 무력을 보유한 위안스카이와 담판했다. 탄시퉁은 위안스카이에게 휘하 군대를 동원해 시태후가 거주하는 이화원을 포위해줄 것을 요청했다. 수일 동안 고민한 위안스카이는 변법파의 요청을 거부한 후 탄시퉁을 구왈기야 룽루에게 밀고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광서제는 위안스카이의 힘을 빌리고자 9월 16일 그를 시랑(侍郞)에 임명했다. 상황 전개를 주시하던 서태후는 9월 17일 친위 쿠데타(무술정변)를 일으켰으며, 9월 20일 광서제를 유폐했다. 탄시퉁과 캉광런(康廣仁) 등 변법파들은 처형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아래로부터의 혁명만 남았다
/의화단이 외국인 거주지를 공격하자 일본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등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위키피디아]
1897년 독일은 산둥성에서 자국 출신 가톨릭 신부(神父) 두 명이 살해된 것을 기화로 청나라를 협박해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권과 함께 철도부설권을 빼앗았다. 독일 교회는 무력을 배경으로 산둥성 지역에서 포교해 중국인 신자를 다수 확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안(敎案)이라고 하는 반(反)기독교 민중운동이 빈번히 일어났다. 배외단체인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걸고 외국인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배외적인 만주족 출신 위시안(毓賢)에 이어 산둥순무(山東巡撫)로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외세의 호의를 얻고자 철도나 학교 등 서양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던 의화단을 탄압했다. 위안스카이에 의해 산둥에서 쫓겨난 의화단은 인접한 허베이로 들어갔다.
서태후는 의화단을 이용해 서양 세력을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1900년 6월 청 정부의 호응하에 의화단원 20만 명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서태후는 무술정변 시 광서제를 유폐하는 일에 동원된 반외세적인 둥푸샹(董福祥)의 감군(甘軍·간쑤성 군대)도 불러들였다. 의화단과 감군은 배외운동을 실행에 옮겨 베이징에 거주하는 공관원과 그 가족 등 외국인을 무차별 살해했다. 청나라는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지방관들에게는 의화단과 함께 외세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대부분의 지방관들은 정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의화단이 베이징의 외국인 거주지 동교민항(東交民巷)을 집중 공격하자 일본,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총병력 2만 명이었으며 일본군이 다수를 차지했다. 러시아의 반대에도 영·미는 일본이 대군을 파견하는 것을 지지했다. 일본 외에 공사가 살해당한 독일이 파병에 가장 열성을 보였다.
8개국 연합군은 8월 14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서태후는 베이징이 함락되기 직전 광서제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도주했다. 1901년 9월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는 의화단운동을 이용해 만주에 대군을 진주시켰다. 이로써 아래로부터의 혁명만이 남게 됐다.
浪人 동원해 중전 閔氏 시해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조선으로 돌아가보자. 집권 민씨(閔氏) 일파는 3국간섭에 성공한 러시아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친러 정책을 밀고 나갔다. 러시아 세력의 조선 침투에 초조해진 일본은 1895년 10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로 하여금 미야모토 다케다로 등 일본군과 사무라이(浪人)를 동원하고, 친일 장교 이주회·이두황·우범선 등을 사주해 중전 민씨를 시해하게 했다. 중전 민씨가 시해당한 것은 △일본의 모험주의 △일본-러시아 간 세력경쟁 △조선 내 친일파-친러파 갈등 △민씨를 포함한 조선 지도부가 민심을 상실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망명하는 등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다소 줄어들었다.
러시아에 밀린 일본은 절치부심했다. 일본은 1892년 2월~1893년 8월 1년 6개월간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한 적 있는 정보장교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政) 등의 노력으로 개정된 영일동맹 조약에 힘입어 영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04~1905년에 걸쳐 조선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러시아를 제압한 일본은 남만주에 관심을 보인 미국의 간섭마저 뿌리치고 1910년 조선을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19세기 중엽 만주 유일의 개항장이던 랴오허 하구 잉커우(營口)에 영사관을 설치할 만큼 만주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욕구는 소련으로 이어졌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9년 7월 소련은 레프 카라한 외무장관을 통해 ‘소련은 러시아가 중국에서 획득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이른바 ‘카라한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서진하던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주도의 혁명간섭군과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白軍)의 공세로 고전하고 있었다. 적군이 1920년 백군을 격파하고 반혁명 국제연합군이 철병하는 등 상황이 안정되자 소련은 만주 이권 포기를 거부했다.
1928년 국민당에 의한 중국 통일 후 장제스의 지지를 확보한 장쉐량(張學良)의 펑톈(奉天)군벌은 대(對)소련 강경책을 취했다. 만주 일대를 장악한 펑톈군벌은 1928년 7월 중동철도(중국 동쪽 철도라는 뜻·동청철도에서 개칭)를 접수하고 소련인을 추방했다. 소련은 펑톈군벌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그해 8월 ‘원동군’을 조직해 소련-만주 국경 일대에서 대규모 무력시위를 벌였다. 개전 시 소련군 병력은 8만여 명으로 확대됐다.
美 중개로 장제스-스탈린 우호동맹 맺어
소련군은 1928년 9월 소·만 국경을 돌파했다. 소련군 아무르함대는 10월 공군기 엄호하에 헤이룽장-쑹화장 합류 지점에서 펑톈군벌 해군 함대를 섬멸했다. 소련군은 10월 말 하얼빈에 접근했으며 11월에는 내몽골 최북단의 만저우리 방면으로도 공격을 개시했다. 펑톈군벌은 전차와 공군기를 동원한 소련군의 공세에 괴멸되고 말았다. 소련군은 만저우리를 점령한 후 공격을 멈추었다. 펑톈군벌은 12월 항복과 다름없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소련은 미국의 중개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14일 장제스 정부와 중·소 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해 러·일 전쟁 패배로 상실한 뤼순·다롄 일대와 남만주철도 운영에 관한 권리를 회복(30년 기한)했다. 중국이 6·25전쟁 때 대군을 파병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을 등에 업고 별도 통화를 발행하는 등 ‘만주왕(滿洲王)’이 돼가던 중국공산당 동북국(東北局) 제1서기 가오강(高崗)을 제압하고 뤼순-다롄을 포함 만주 전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10월 호
■만주에 군침 흘린 美, “조선은 가장 못난 민족”
러일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과도기적 전쟁’이었다.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을 생각까지 했다. 만주에서 러시아가 확보한 기득권을 부정했으며 ‘오렌지 작전’이라는 명칭의 대일(對日) 군사작전도 계획했다. 만주를 둘러싼 미·일 대립은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어진다.
/‘르 프티 파리지앵’에 실린 러일전쟁 풍자삽화
쑨원(孫文·1866~1925)은 1900년 10월 발생한 광둥성 후이저우(惠州) 봉기 이후 청나라 안팎에 알려졌다. 후이저우 봉기에는 야마다 요시마키, 히라야마 슈를 비롯한 일본 혁명가도 참가했다. 장빙린(章炳隣), 주룽(皺容) 등 한족(漢族) 민족주의자들은 쩡궈판(曾國藩·증국번), 쭤쭝탕(左宗棠·좌종당), 리훙장(李鴻章·리홍장) 등 권력자에 대해 만주족에 한족(漢族)을 팔아넘긴 한간(漢奸)이라고 비난했다. 중국 혁명은 이렇듯 한족 민족주의 색채를 띤다.
1904~1905년 조선·만주 이권을 놓고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청일전쟁이 동아시아 지역 전쟁(Regional War)이라면 러일전쟁은 영국·독일·프랑스·미국 등 열강 모두의 이해관계가 걸린 유라시아 전쟁(Eurasian War)이다. 열강 모두 전쟁의 추이를 심각하게 관찰했다.
조선 외무대신대리 뺨 때린 독일공사관 1등서기관
/경부선 철도 공사 현장을 그린 기록화. [국립중앙박물관]
청일전쟁 후 러시아는 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를 좌절시키고(삼국간섭), 러청 비밀동맹조약을 체결했으며 동청철도(東淸鐵道·만저우리와 쑤이펀허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한 독일의 산둥반도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에 대항해 1898년 랴오둥반도 남단 뤼순(旅順)·다롄(大連)을 25년간 조차하는 등 만주 전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시도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부터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까지 조선은 영국, 미국과 일본, 러시아 간 세력 균형 아래 ‘무기력한 평화’를 누렸다. 조선 주재 독일공사관 1등서기관이 조선 외무대신대리의 뺨을 때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고종의 특사 호러스 알렌에게 미국은 ‘일격도 못 날리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절 지원해줄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루스벨트는 조선 정부와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못난 정부, 못난 민족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왕비 민씨가 시해된 1895년 10월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사건)을 성공시킴으로써 조선 정부를 친러화했지만,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 타협하는 정책을 취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1896~1898년에 걸쳐 체결한 베베르·고무라(Weber·小村) 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 협정, 로젠·니시(Rosen·西) 협정은 두 나라가 타협한 대표적 사례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만주까지 번지자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난이 진압된 후에도 철군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팽창에 대항하고자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는 것과 러시아와 협상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다가 영일동맹(1902년 1월)으로 방향을 잡았다.
러시아는 1902년 러불동맹 적용 범위를 동아시아로 확대하려 했지만 프랑스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후 러청 철군협정(露淸撤軍協定)을 체결하는 등 극동에서의 이권 강화와 관련해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듯했으나 제1기 만주 주둔군 철군까지만 진행했을 뿐 제2기 주둔군 철군 대신, 도리어 랴오닝성 남부와 지린성 전역을 점령했다. 러시아가 갑자기 정책을 바꾼 것은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받은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를 비롯한 강경파가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압록강 유역으로 병력을 파견한 후 삼림 벌채권 이행을 명목으로 신의주 부근 용암포를 군사기지화하는 등 조선 영토에도 야심을 보였다. 러시아는 19세기 말에도 함경도 경흥과 원산, 부산 영도 등에 욕심을 드러낸 바 있다.
日,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 극동함대 기습
/도고 헤이하치로 함대. [위키피디아]
온건파 세르게이 비테가 재무장관에서 해임되고 뤼순에 극동총독부가 신설되는 등 이른바 신(新)노선에 따른 강경책이 이어졌다. 독일은 러시아가 발칸·중동 방향으로 남진하는 것을 막아야 했기에 러시아의 동진은 받아들일 만했다. 국내 반란 위기를 외부 문제로 희석하려 한 니콜라이 2세의 책략도 러일전쟁 발발 원인 중 하나다.
1903년 8월부터 1904년 2월 개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와 일본은 여러 차례 만주 및 조선 문제를 두고 교섭했다. 일본의 견해는 조선을 일본의 보호령으로 삼는 대신, 러시아의 만주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균등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의 만주 독점과 북위 39도선 이북 조선반도를 중립지대로 설정하는 등 일본이 군사적으로 조선반도를 이용해선 안 된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일본의 제1차 협상안은 ①청·조선 양국의 독립 보전 ②상업상 기회 균등 ③조선·만주에서 러일의 상호 이익 보장이 골자다.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일본 외무장관은 10월 1차 수정안에서 조만교환론(朝滿交換論)을 명백히 하면서 일본의 조선반도 파병권은 물론 조만 국경 중립지대 설치를 요구했다. 12월 중순에야 제시된 러시아의 수정안은 청나라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없이 조선 북부의 중립지대화 및 조선 영토의 군사적 사용 금지 등 조선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12월 하순 제시된 일본의 2차 수정안과 1904년 1월 초 러시아의 답변도 기존 태도를 되풀이함으로써 타협의 여지가 사라졌다.
일본은 1904년 1월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러시아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기로 했다. 일본은 자국의 최후통첩에 대한 러시아의 답변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2월 임시각의에서 전쟁을 결정했다.
1904년 2월 6일 사세보항을 출항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함대가 2월 8일 러시아 극동함대 근거지 뤼순항을 기습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2월 9일 일본군은 다른 함대를 동원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했다. 그러곤 2월 10일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하얼빈 집결 러시아軍 반격 노리다
조선은 러일전쟁 발발 이전인 1904년 1월 전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러일 어느 쪽도 조선을 존중해주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 반(反)러시아 동맹조약(조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도고 함대가 뤼순항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으며 4월 말 조선반도를 거쳐 북진한 일본군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하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제2군은 다롄의 난산(南山)을 점령해 러시아군의 근거지 뤼순을 고립시켰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기항하던 러시아 함대가 6월 쓰시마해협까지 남하해 일본 육군수송선을 격침했으나 일본은 같은 달 만주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5개 사단으로 이뤄진 일본군이 9월 랴오양을 점령했다. 사무라이 스타일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지휘한 제3군은 1905년 1월 1일 3만~4만 명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른 끝에 요충 중 요충인 뤼순 203고지를 점령했다. 일본군의 203고지 점령은 뤼순항에 갇힌 러시아 극동함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오야마 이와오(大山嚴) 육군 총사령관이 지휘한 25만 일본군은 1905년 3월 알렉세이 크로파트킨 극동지역 총사령관이 지휘한 32만 러시아군을 선양 전투에서 격파해 육전을 마무리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병력은 120만 명에 달했다. 해군은 전함 7척, 순양함 8척, 경순양함 17척, 구축함 19척, 어뢰정 28척, 포함(砲艦) 11척으로 이뤄졌다. 대다수 함정을 뤼순항에 기항시킨 러시아 극동해군은 전함 7척, 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 포함 7척을 보유했다. 개전 직전 러시아 극동군은 정규군 10만 명을 보유했으며 철도수비대 2만4000명은 동청철도 부근 지역에 분산돼 있었다.
만주에 진입한 일본군은 대부분 1905년 이동했으며 40여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일본은 전투 여력을 상실했다. 1년 전비를 4억5000만 엔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년간 19억 엔이 투입됐다. 보급로가 길어져 일본군의 전술상 취약점이 노출되자 러시아는 주력 부대를 하얼빈에 집결해 반격 기회를 노렸다.
선양전투 이래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능력을 잃어 종전을 서둘러야 할 처지가 됐다. 러시아 역시 1905년 1월 발생한 반란(피의 일요일) 탓에 전쟁을 계속할 능력을 상실했다. 두 나라는 강화가 불가피함을 인식했다.
돈스코이호, 울릉도 앞바다서 自沈
/랴오둥반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일본은 결정적 승기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했다. 모항(母港) 라트비아 리바우항을 떠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오느라 전력이 약해진 발틱함대와 벌인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은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러시아 해군은 △발틱함대 △흑해함대 △극동함대로 구성됐다. 흑해함대는 오스만투르크 해군을 견제해야 했기에 해군력 전부를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없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4시 진해만 인근에서 기다리던 도고 함대는 24시간 계속된 쓰시마 해전에서 정자전술(丁字戰術)을 써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을 포로로 잡았다. 탈주한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일본 해군에 나포당하지 않고자 울릉도 앞바다에서 자침(自沈)했다.
쓰시마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도 만주의 러시아 육군은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으며 보급도 비교적 원활하게 유지됐다.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러시아 대표 비테가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04년 4월~1905년 5월 미국과 영국이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 제공한 차관 4억1000만 달러 중 40%가량이 전비로 충당됐다.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러일 교섭 시 제3국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일본의 요청을 받은 영국은 프랑스 외상 테오필 델카세와 러시아 외상 람스도르프의 중재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또한 러시아 함대에 대한 제3국의 석탄 공급을 저지하는 등 일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러시아를 경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가 만일 다시 간섭할 경우, 즉각 일본 편에 가담하겠다고 공언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에 대해서는 전쟁터를 확대하지 말고, 북중국을 포함한 중국 영토 불가침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러시아의 만주 기득권을 부정했다. 미국이 조선반도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을 생각까지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 편을 든 배경에는 개전과 동시에 루스벨트의 하버드대 동창생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특사로 파견해 친일 여론을 일으키게 한 데도 원인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향한 ‘과도기 전쟁’
러시아와 동맹이던 프랑스는 영국과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러일전쟁에 말려들지 않고자 중립을 선언하고 4월 8일 영불협상(Entente Cordiale·우애협약)을 체결했으나 러시아 함대에 석탄을 공급해주는 등 동맹국으로서 의무는 다했다.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발칸·중동이 아닌 극동으로 돌리고자 한 독일은 러시아가 ‘극동에서 공격받을 시 독일의 지원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을 1903년 7월 이후 여러 차례 암시했다. 그러면서도 1904년 1월 일본에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으며 실제로 개전과 함께 중립을 표명했다. 다만, 영러 간 도거뱅크(Dogger Bank) 사건(러시아 해군이 어선 등 영국 민간 선박에 포격한 일) 때 보인 독일의 노골적 러시아 지지는 여타 열강의 불신을 가중했다. 러일전쟁이 영불협상과 영러협상으로 이어지면서 대(對)독일 포위망이 구축된다. 러일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과도기적 전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쓰시마 해전 직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의뢰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잠재적 적국 독일을 견제하려면 러시아 군사력이 지나치게 약해져서는 곤란하다고 봤다. 미국 또한 일본이 동아시아 강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위험시했다.
러일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열강은 하나같이 자국 이익을 확보하려 들었는데 △러독 뵈르케(Koivisto) 밀약 △영일동맹 조약 개정 △미일 태프트·가쓰라(Taft·桂) 밀약 등이 모두 이런 목적에서 체결됐다.
러시아와 일본은 1905년 6월 8일, 10일 각각 루스벨트의 제의를 수락했다. 미국은 6월 12일 강화를 알선할 것임을 공표했다. 강화회담 장소 선정과 대표 선임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일본은 7월 7일 사할린 상륙을 결행해 러시아를 압박했다.
일본을 대표한 고무라·다카히라(小村·高平)와 러시아를 대표한 비테·로젠이 8월 9일~9월 5일 진행한 강화교섭은 일본이 제시한 12개 제안을 토대로 이뤄졌다.
러일 양국은 △조선에서 일본 우위(paramount) △랴오둥반도 (일부) 조차 △창춘-뤼순 간 남만주철도 및 지선(支線) 관할 문제에는 쉽게 합의했으나 ①사할린 문제 ②전비 배상 문제 ③중립국에 억류된 러시아 군함 인도 문제 ④러시아 극동해군 제한 문제에는 이견을 조율하지 못했다.
일본은 ①·②항을 합쳐 북위 50도 이북 북사할린을 러시아에 돌려주는 대가로 12억 엔을 내놓으라는 새로운 요구안을 제시했다. 회의가 결렬될 위기에 놓이자 일본은 배상금 문제는 철회하고 남사할린 할양을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나라가 타결한 것이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다.
조선 왕족·귀족 76명 賣國 대가로 훈작·상금 받아
러일전쟁 결과로 조선반도는 물론 남만주에서도 일본군의 지배력이 확고해졌으며 일본은 열강으로 인정받는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을 청나라에서 보상받으려 했다. 고무라·우치다-경친왕·위안스카이가 1905년 12월 체결한 만주에 대한 청일조약은 지린-창춘 및 신민툰-펑톈(선양·瀋陽) 철도에 대한 비밀 합의가 포함돼 있다. 이 합의는 1930년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일본은 그간 주장해온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 원칙을 파기함으로써 열강 대부분을 적으로 돌렸다. 미국·영국이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일 간 상호 견제를 통해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는 데 있었기에 남진 위협이 사라진 후 일본의 만주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 확보 시도는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미국은 오렌지 작전이라는 대일(對日)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만주 관련 미·일의 대립은 1941년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시아와 타협의 길을 택하는데 그것이 1907년 러일협상이다.
미국과 화해하고 러시아와 타협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1910년 조선을 무혈 병탄했다. 조선 왕족·귀족 76명이 매국(賣國) 대가로 훈작과 상금을 받았다. 부일 왕족 외에 숭명(崇明)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노론(老論) 57명, 소론(小論) 6명, 북인(北人) 2명이 매국 대열에 포함됐다.
러일전쟁 패전으로 조선반도로의 남진이 좌절된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발칸으로 진로를 바꿨다.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진출 시도는 1907년 영국과 협상으로 성사됐으나 이해관계가 쉽게 조정될 수 없었던 발칸반도 남하 시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투르크와 분쟁 소지를 남겼다. 청나라는 러시아와 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러일전쟁 중 러시아를 일절 지원하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의화단의 난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가 만주 대부분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건국
1902년 직례총독이 된 위안스카이는 신건육군과 북양군을 통합해 북양상비군으로 개편했다. 위안스카이는 부하 돤치루이(段祺瑞), 차오쿤(曹), 펑궈장(馮國璋) 등으로 하여금 북양상비군을 지휘케 했다.
위안스카이가 군부를 장악하자 만주족 중신들은 위협을 느꼈다. 위안스카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시태후(西太后)가 일찍 사망하는 것이었다. 시태후 사망 시 권력을 회복할 광서제가 자신을 배신한 위안스카이를 처형하려 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시태후는 1908년 광서제와 거의 동시에 죽었다.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아이신고로 자이펑(載)의 아들 푸이(溥儀)가 광서제의 뒤를 이었다. 푸이는 만 3세의 유아(乳兒)였으므로 자이펑이 섭정을 했다. 자이펑은 만주중심주의자였다. 집권한 그는 형 광서제의 원한도 있고 해 위안스카이를 처형하려 했다. 자이펑은 위안스카이를 직접 죽이려 하면 내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장즈퉁의 충고를 받아들여 암살 전문가를 고용했다. 이를 눈치 챈 위안스카이는 도주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쑨원, 황싱, 장빙린, 숭자오런, 왕자오밍 등 한족 혁명가들은 1905년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조직했다. 혁명을 향한 불꽃이 재점화한 것이다.
황싱이 주도한 창사(長沙) 봉기, 류다오이가 주도한 제2차 후난사건, 위지청이 주도한 황강(黃岡) 봉기, 친저우(欽州) 봉기 등 폭동이 끝없이 일어났다. 판촨자가 주도한 1908년 10월 안후이 신군사건(新軍事件)은 군대마저 청나라에 등을 돌렸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안후이사건 이후 신군 지휘관 상당수가 혁명에 동조한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 주둔 군부대에서 일어난 총성이 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의 불길이 쓰촨과 후베이, 후난, 장시 등으로 번졌다. 혁명군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리위안훙(黎元洪)을 반강제로 도독에 취임시켰으며 각 성은 독립을 선언했다.
혁명파는 유감스럽게도 우창치이(武昌起義) 이후 상황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청나라가 쪼개질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쑨원이 귀국해 대총통에 추대됐다. 1912년 1월 1일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이 마침내 건국됐다.
마지막 황제, 푸이
/푸이 황제. [위키피디아]
우창치이(신해혁명)가 전국으로 파급된 데는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이라는 경제·사회적 배경이 있다. 자이펑을 지도자로 한 청나라 조정은 외국에서 차관(借款)을 들여와 철도를 부설해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국민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혁명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이는 장즈퉁의 아이디어로 장즈퉁 사후에는 성쉬안화이(盛宣懷)가 이어받았다.
청(淸)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은 지방 유력자들의 이해관계와 정면 배치됐다. 1911년 6월 우전부(郵傳部) 장관 성쉬안화이가 전국 간선철도 국유화를 선언하자 쓰촨성 유력자들이 가장 먼저 이 조치에 반대하고 나섰다.
쓰촨 폭동은 다이너마이트 심지에 불이 붙듯 인접한 후베이로 번졌다. 쓰촨 폭동이 신해혁명의 부싯돌 구실을 한 것이다.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사태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자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총리로 기용했다. 섭정 자이펑의 ‘자기를 벌하는 조서’도 나왔다. 이는 청 왕조의 조종(弔鐘)을 뜻했다.
/위안스카이. [동아DB]
청나라 정부가 기댈 곳은 북양상비군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밖에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이펑에 대한 반감도 있고 해 곧바로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않고, 부하 탕샤오이를 시켜 쑨원과 협상하게 했다. 협상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조정이 몸 달기를 기다린 끝에 11월이 돼서야 베이징에 들어가 총리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군과 타협이 이뤄지지 않자 돤치루이와 차오쿤 등 부하들로 하여금 혁명군을 공격하게 했다. 쑨원을 지지하는 혁명군과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군벌 사이에 내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티베트, 몽골, 신장 등이 떨어져 나갈 움직임을 보였다. 나라 전체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자 쑨원은 위안스카이와 타협하기로 했다.
1912년 2월 위안스카이의 강요로 선통제 푸이가 퇴위했다. 건국 294년 만에 청이 멸망한 것이다. 나라 멸망에 항의해 수백 명의 만주족과 몽골족, 한족 관료가 순사(殉死)했다. 쑨원의 양보로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곧 독재를 강화했다. 중국동맹회를 전신(前身)으로 창당한 국민당은 위기를 돌파하고자 세력 확장에 나섰다. 위안스카이는 당세를 키우려고 동분서주하던 국민당 당수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을 암살하고, 군사력을 보유한 장시도독 리러쥔(李烈鈞), 광둥도독 후한민(胡漢民), 안후이도독 바이원웨이(柏文蔚)를 다른 성(省)으로 전임시켰다.
11월 호
■몽골 지방군벌 조선 개창 닮은 김일성 북한 정권 장악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을 도와 맹활약한 이들이 북한군 중추가 됐다. 국·공내전 때 조선인들은 주로 제4야전군에 소속돼 랴오선 전투, 쉬저우 전투, 창장 도하, 하이난다오 공략에 투입됐다. 동북항일연군 및 소련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김일성의 북한 정권 장악은 외세 영향 아래 성장한 지도자가 한반도 정권의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몽골 지방군벌 이성계의 조선조 개창과 비슷하다.
/베이징에 입성한 중국공산당 군대.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의 부일(附日) 왕족·귀족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무혈 병탄(倂呑)했다. 이로써 일본 영토는 조선반도, 류큐열도, 타이완, 남사할린, 남쿠릴열도, 관동주(다롄), 태평양 도서로 확장됐다. 일본의 조선 병탄을 전후해 조선인 일부가 만주와 연해주, 중국 본토 등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했다. 안동의 이상룡 가문과 이육사(이원록) 가문, 서울의 이회영·이시영 가문, 의열단의 김원봉과 김상옥, 이태준, 안중근, 김좌진, 홍범도, 최재형, 김구, 윤봉길, 이승만, 신채호, 김무정(김병희), 김두봉 등이 대표적이다. 최용건, 김책(김홍계), 강건(강신태), 김일성(김성주), 김일(박덕산) 등 코민테른의 영향 아래 있던 동북항일연군 세력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김좌진, 홍범도, 최진동 등이 지휘한 독립군 부대는 체코군단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갖고 1920년 북간도 허룽(和龍) 일대에서 벌어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혁명 계속하라” 유언 남긴 쑨원
/황포군관학교.
일본의 만주 진출이 계속되면서 더 많은 수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으로 가보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사망해 중국 본토가 축록전(逐鹿戰·제위, 정권을 얻기 위한 다툼) 상황으로 바뀐 1917년, 쑨원(孫文·1866~1925)은 망명지 도쿄에서 돌아와 광저우를 수도로 하는 광둥군정부(廣東軍政府)를 세웠다. 일본인 미야자키 도텐(宮岐滔天)과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 형제 등이 쑨원을 지원했다. 쑨원이 주도한 광저우 정부와 돤치루이(段瑞) 등이 주도한 베이징 정부 간 대립이 격화했다. 쑨원은 광저우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좡족(壯族) 군벌 루롱팅(陸榮廷)의 공작으로 상하이로 쫓겨났다.
1917년 11월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은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중국의 견해는 무시됐다. 이에 분노한 학생, 노동자, 상인 등이 5월 4일을 기점으로 중국 대도시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노동자의 역할에 주목한 리다자오(李大釗)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등 13명의 지식인이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CCP)을 창당했다. 그해 5월 쑨원은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 정부 총통에 취임했다. 루룽팅이 베이징 정부와 모의해 광둥 정부를 붕괴시키려 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쑨원은 루롱팅의 쿠데타를 저지했다. 쑨원은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참모본부를 북상시키는 등 북벌을 시도했으나 광저우에 남아 보급을 담당하던 천중밍(陳炯明)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쑨원은 간발의 차이로 반란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시 도쿄로 망명했다.
러시아 혁명이 궤도를 찾아가자 쑨원은 공산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쑨원은 레닌이 파견한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헨드리퀴스 마링을 만나 혁명 수행 방법을 문의했다. 마링에 설득된 쑨원은 공산당원의 국민당 개별 입당을 허용하는 등 국민당을 좌경화했다. 세포조직이 만들어지고, 국민당은 전투조직이 됐다. 리다자오와 마오쩌둥 등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 간부로 선출됐다.
쑨원은 장제스(蔣介石·1887~1975)를 소련에 파견해 군대 조직과 훈련 방식을 배우게 하고, 샌프란시스코 화교 출신 랴오중카이(廖仲愷)로 하여금 광저우 교외에 황포군관학교를 세우게 했다. 프랑스에서 막 귀국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황포군관학교 주임대리에 취임했으며, 예젠잉(葉劍英)과 조선인 최용건 등이 교관으로 부임했다. 의병장 허위의 종질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하게 되는 허형식과 김원봉이 입교했다. 두위밍(杜聿明)과 린퍄오(林彪)는 가장 우수한 생도였다. 쑨원은 연소용공(聯蘇容共)을 통한 북벌을 추진했다. 국민당의 좌경화를 위협으로 느낀 기업가들이 별도 무장집단을 만들려 했으나 쑨원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쑨원은 베이징 군벌과 담판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은 1925년 3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쑨원은 부인 쑹칭링에게 “혁명을 계속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좌·우 갈등 속에서 군대를 장악한 장제스가 국민당 핵심으로 부상했다.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에 북벌을 명령했다. 국민혁명군은 예상외로 단 9개월 만에 창장 이남 9개 성(省)을 석권했다. 북벌 과정에서 공산당이 지도하고, 노동자·농민이 참가한 대중운동이 폭발했다. 이들은 토호(土豪) 타도와 토지 분배를 요구했다. 공산당 세력이 창장 중류 한커우(漢口) 조계 강제 회수를 시도하자 열강의 국민당에 대한 압력이 강화됐다.
군벌 농민 착취가 공산당 세력 배양
장제스는 1927년 4월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대거 숙청했다. 이로써 1차 국공합작은 실패로 끝났다. 국민당에서 축출당한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허룽(賀龍) 등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1927년 8월 장시성 난창에서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927년 12월 예젠잉과 최용건, 김산(장지락), 김성숙 등이 주도한 광저우 봉기도 실패로 끝났다.
장제스는 1928년 제2차 북벌을 감행했다. 군벌 군대는 민족주의로 의식화된 국민혁명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만주 군벌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국민혁명군에 항복했다. 만주에도 국민당의 청천백일기가 나부꼈다. 1928년 정식 발족한 국민정부는 입법·사법·행정·고시·감찰 등 오원제(五院制) 정부를 구성하고, 경제 개발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 중심의 독재가 더욱 강화됐다. 국민정부는 1931년 5월 약법(約法)을 공포해 대중운동을 억압하고, 국민당을 제외한 여타 모든 정당의 정치 행위를 금지했다. 부패한 군벌이 정권에 합류하고, 군벌 추종자들이 고위직을 차지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혁명성을 상실했으며, 부정부패가 일상화했다.
장제스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백색 테러조직 남의사(藍衣社)에 의한 반대파 암살과 납치, 고문도 자행됐다. 군벌 주축의 지방정부가 토지세를 거두고, 국민당 주도 중앙정부는 상공업세와 관세를 거두는 이중구조가 됐다. 군벌의 농민 착취는 공산당 세력을 배양하는 온상(溫床)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경제 분야에서는 다소 성과가 있었다. 철도와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됐다. 하지만 10년간 계속된 공업화 노력에도 농업 분야가 국내총생산(GDP)의 65%나 차지했으며 제조업 비중은 2.2%에 머물렀다. 일본, 소련 등의 외침(外侵)과 공산당 봉기에도 대비해야 했기에 예산은 대부분 국방비로 지출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세계경제공황(1929년)으로 농촌경제는 붕괴 일보 직전으로 내몰렸다.
‘꼭두각시’ 만주국 세운 日
/장쉐량.
만주군벌 영수이자 한족 민족주의자 장쉐량은 만주의 이권을 독점하던 일본에 대항해 새로운 만주철도 부설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일본은 1931년 9월 선양 인근 철도를 폭파시킨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은 손쉽게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를 내세워 괴뢰(傀儡) 만주국을 세웠다.
중국공산당은 장시성 루이진(瑞金)과 장시-후난성 경계에 위치한 징강산(井岡山) 등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했다. 공산당은 만주사변으로 중국혁명군(국부군)의 공격이 약화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점령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1930년경 공산군(홍군)은 15개 소비에트, 6만 병력으로 성장했다. 국부군은 여러 차례 홍군을 공격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1931년 11월 마오쩌둥을 수령으로 하는 중화소비에트 임시중앙정부가 루이진에 수립되고, 보구(본명 친방셴(秦邦憲))의 공산당 임시중앙도 상하이로부터 옮겨왔다. 김무정과 김산 등 조선인들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위기를 느낀 국부군은 70만 대군을 동원했다. 국부군은 1933년부터 독일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포위 압박 전술인 토치카 전술을 구사하면서 루이진 소비에트를 포위해 들어갔다. 장기간에 걸친 국부군의 압박으로 루이진 지역은 생필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받게 됐다. 공산당 지도부는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새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국부군은 1934년 10월 텅 빈 루이진을 점령했다. 포위망이 약한 지역을 돌파한 8만6000명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부군과 적대적 군벌들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서북쪽으로 행군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덩샤오핑, 린퍄오, 펑더화이(彭德懷) 등이 이끄는 홍군은 구이저우성 쭌이(遵義)를 경유해 양자강 대도하(大渡河)를 건너 1935년 10월 목적지인 옌안에 도착했다. 홍군이 행군한 거리는 9600㎞나 됐으며, 옌안에 도착한 인원은 출발할 때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7000여 명에 불과했다. 마오쩌둥은 쭌이회의에서 소련파 왕밍(천샤오위)과 보구 등을 제압하고 중국공산당 지도권을 확립했다.
중농 출신 마오쩌둥은 독서인이었다. 마오쩌둥이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다는 점에서 곧잘 조조(曹操)에 비견된다. 마오쩌둥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마오쩌둥이 1925년 32세에 지은 사(詞) ‘심원춘, 장사(長沙)에서’ 일부를 소개한다.
獨立寒秋 (스산한 가을)
湘江北去 (상강이 북으로 흐르는)
橘子洲頭 (귤자주 어귀에 홀로 섰노라)
看萬山紅遍 (바라보니 온 산을 덮은 단풍)
層林盡染 (우거진 숲까지 물들였구나)
漫江碧透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엔)
百爭流 (오가는 배에 부딪힌 강물만 출렁이네)
鷹擊長空 (솔개가 하늘 높이 날아가버린 뒤엔)
魚翔淺底 (물고기 떼 한가롭게 노니나니)
萬類霜天競自由 (만물이 이토록 다 자유로운가)
廖廓 (이내 가슴에 슬픔만 차오르네)
1936년 말 국부군은 20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옌안의 홍군을 공격했다. 장제스가 추진한 ‘배일(排日)과 반공(反共) 동시 수행 정책’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산시(陝西)성 실력자로 한족 민족주의자인 양후청(楊虎城)은 홍군 토벌에 소극적이었다. 만주를 일본군에 빼앗기고, 부사령관으로 부임해온 장쉐량도 항일 우선을 주장하는 홍군에 동정적이었다.
장제스, 감금되다
/시안사건 속 국민당원. 앞줄 가운데가 장제스.
양후청과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독전(督戰)을 위해 시안(西安)을 순시한 장제스를 체포·구금하고, 항일과 내전을 종식할 것을 강권했다. 홍군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까지 협상에 참여한 결과 양후청과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장제스는 석방될 수 있었다. 이로써 1937년 9월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홍군 3만은 국민혁명군 8로군(八路軍)으로, 중·남부 유격대는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됐다.
일본은 1937년 7월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어난 국부군과의 충돌을 핑계로 중국 본토를 공격했다. 일본은 전쟁 초기에는 파죽지세를 과시했으나,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대도시와 주요 도로만 점령하는 데 성공했을 뿐 시간이 지나면서 힘의 한계를 드러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지원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과 함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중국에서 열세를 보였다. 일본이라는 외적(外敵)과 싸우면서도 만주족이 잃어버린 ‘중원의 사슴’을 차지하기 위한 장제스와 마오쩌둥 간 경쟁은 계속됐다. 홍군은 일본군에 밀린 국부군이 후퇴한 농촌지역에 침투해 권력 공백을 메워나갔다. 1936년 초반 1만 명 수준이던 홍군은 1945년에는 근 100만 명을 헤아리게 됐으며, 당원 역시 4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지배지역은 100만㎢, 인구는 1억 명을 넘어섰다.
일본이 패배할 조짐이 보이자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 재발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국민당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했다. 이 회담 결과 1945년 10월 10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부강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충칭 시대의 국민당 정부는 관료 부패 이외에도 장(蔣), 안(安), 쿵(孔), 천(陳) 4대 가문으로 이뤄진 정권 핵심 세력의 전시치부(戰時致富)로 악명을 떨쳤다. 화폐 남발이 가져온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 불만이 높아갔다.
국부군은 미국의 원조와 소련의 중립적 태도에 힘입어 홍군에 대해 4대 1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10월 10일 협정’을 파기했다. 1946년 6월 26일 장제스가 홍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함으로써, 국부군과 홍군은 내전에 돌입했다. 홍군은 각개격파 작전을 해나갔으며, 점령지역 내 토지개혁을 실시해 정치·군사적 기반을 확대했다. 또한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해 국부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전술을 추진했다. 부패한 국민당은 민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1947년 말부터 국민당, 공산당 간 세력관계가 역전됐다.
한강 이북 통제하려 한 장제스
당시 가장 공업화된 만주는 국·공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곳이었다. 만주에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건설한 상당한 규모의 공업시설이 있었다. 만주의 전력, 제철, 시멘트 생산량은 본토 전체를 합한 것의 몇 배에 달했다(1943년 기준 중국 전체 석탄생산량의 49.5%, 제철 87.5%, 시멘트 66%, 전력 72%, 철도 50%). 1930~40년대 만주(다롄-선양-창춘-하얼빈-치치하얼 지역)는 세계에서 공업이 발달한 지역 중 하나였다. 만주에서의 승패가 국·공 내전의 승부를 가를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1945년 6월 11일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우리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승리의 토대를 확보하는 셈이고, 승리는 결정된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장제스 역시 “만주가 없으면 중국도 없다” “우리가 만주를 점령하지 않으면 중국이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 2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고위간부 2만여 명과 최정예 20만여 병력을 투입했다. 장제스 역시 ‘동북행영 정치위원회’와 ‘동북보안사령부’를 설치해 슝스후이를 주임, 두위밍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베이징 북부 청더(承德)를 통해 최정예 기계화사단 포함 13만7000명을 투입했다. 미군도 톈진항, 다롄항 등을 통한 국부군의 만주 투입을 적극 지원했다.
이보다 앞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을 전후해 장제스는 한강 이북을 국부군 통제 아래 두려 했다. 그만큼 만주와 한반도는 중국 처지에서 순치(脣齒)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만주 쟁탈전은 중국 내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 미·소는 물론 남·북한 문제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 만주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남북의 운명이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총력 다해 中공산당 지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 행사(왼쪽)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동아DB]
국부군이 만주를 차지하면 북한은 남북 양쪽에서 포위당하고, 공산군이 승리하면 한국의 안보 부담이 가중된다. 특히 북한은 만주에서의 승패가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전쟁 진전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코민테른 계열 동북항일연군과 강한 연계를 가진 김일성은 “조선혁명의 입장에서 만주가 장제스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승만은 “중국이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북한 정권 기관지 ‘민주주의’는 “미국이 해로(海路)와 공로(空路)를 통해 수십만 명의 국부군을 만주로 수송해 중국의 내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혼란 상태이던 한국이 장제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공고히 한 북한은 공산군을 적극 지원했다.
/마오쩌둥 옆 김일성. 1954년 10월 1일 중국 톈안먼 광장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5주년 기념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는 마오쩌둥 중국 주석(오른쪽)과 김일성 북한 주석. [징화시보]
만주에는 1936년 조직된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해 10만 명 넘는 사회주의 계열 무장 세력이 있었다. 만주 조선인들은 대거 공산군(인민해방군)에 가담했다. 만주 조선인들이 공산군을 지지한 주요 이유는 공산군이 토지개혁을 실시한 데다가 민족 차별을 하지 않아서다. 훗날 지린성 당서기까지 승진하는 청주 출신 자오난치(趙南起·조남기·1926~2018)도 이때 공산군에 가담했다. 강건, 김무정, 박일우, 김광협, 김웅, 최광, 이권무, 방호산(이천부), 전우 등이 조선의용군을 지휘했다. 만주지역 전투 과정에서 공산군에 입대하는 조선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만주에 잔류한 140만 조선인의 5%인 6만2942명이 입대했다. 1948년 랴오선(遼瀋)전투 후 방호산의 제1지대는 공산군 제166사단으로 재편됐다.
국·공내전 초반 국부군과 북한경비대 간 충돌도 발생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1946~1947년 5월간 국부군은 16차례 불법 월경을 했으며, 17차례 북한 쪽에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中共·중공)은 전쟁 초기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을 후방기지로 활용했다.1946년 봄 동북민주연군(공산군의 일부) 부총사령관이자 백족(白族) 출신 저우바오중은 김일성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중공은 1946년 7월 평양에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사무소)를 설치해 전략물자 공급, 남만주-북만주 간 교통·통신선 확보, 각종 물자 구입 업무를 수행했다. 중공은 남포와 신의주, 만포, 나진에 4개 분소도 설치했다.
1946년 가을 국부군은 만주 토벌전에 나섰다. 린퍄오의 제4야전군은 전쟁 초기 연전연패했다.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은 신생 북한 정권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중국 내전 결과에 정권의 존망이 달려 있다고 본 김일성은 총력을 기울여 공산군을 지원했다.
1946년 국부군이 선양과 창춘 등을 점령하고 주요 철도와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공산군은 남만주와 북만주로 분리된 채 고립됐다. 국부군에 속했다가 공산군에 투항한 1만8000여 명 약 2개 사단 병력이 부상자와 함께 전쟁 물자 2만여t을 갖고 단둥과 지안에서 북한 내부를 거쳐 북만주로 이동했다. 공산군은 물자는 물론 병력 이동도 불가능하게 돼 국부군에 의해 각개격파 위기에 처했는데, 북한을 교통로로 활용함으로써 패전 위기를 극복했다.
민족의 비극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
만주의 조선인들은 대도시로 도망해 생명을 부지했으며 북한은 일제가 남겨둔 기차 2000대분 군수물자를 공산군에 제공했다. 1947년 북한-중공 간 ‘중국동북물자북조선통과협정’이 체결돼 1947년 10월부터 1년간 나진항 등을 통해 총 1435만t의 물자를 공산군에 수송했다. 북한은 국부군에 의해 고립된 만주 내 해방구에 식량, 석탄, 의약품, 소금 등을 1948년 1년간 30만t 이상 지원했다. 여기에는 화약 420t, 초산 200t, 고무신 15만 켤레가 포함돼 있다. 산둥성 등 여타 지역에도 원조 물자를 제공했다. 공산군의 북한 내 통로는 2개로, 육로는 ①단둥→신의주→투먼으로 연결되는 선과 ②지안→만포→투먼을 연결하는 선이었으며, 해로는 ①다롄→남포 ②다롄→나진이었다. 중공은 1948년 말 랴오선 전투 승리 후 북한의 지원이 더는 필요 없게 되자 설치 2년 7개월 만인 1949년 2월 동북국사무소와 분소를 폐쇄했다.
이렇듯 만주의 조선인들은 공산군의 내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공산군은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 소수민족의 땅 신장과 티베트를 유혈 점령했다.
조선인들은 주로 제4야전군에 소속돼 랴오선 전투에서부터 쉬저우 전투, 창장 도하, 하이난다오 공략까지 투입됐다. 하이난다오 공략 전투는 조선인 장교의 아이디어(트럭 엔진 장착 보트로 초신속 접근)를 활용해 쉽게 승리로 끝났다. 동북항일연군 및 소련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김일성의 북한 정권 장악은 외세의 영향 아래 성장한 지도자가 한반도 정권의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몽골 지방군벌 이성계의 조선조 개창과 비슷한 점이 있다.
국·공내전 말기 김책이 마오쩌둥에게 공산군(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 조선인 대원의 북한 귀국을 요청한 결과, 이들은 1949년 말부터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군의 중핵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군 4, 5, 6, 7사단 등에 편입됐다. 마오쩌둥으로서는 인민해방군 내에 대규모 조선인 무장 세력을 안고 갈 이유가 없었다. 김일성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인 3개 사단(북한 육군의 47% 차지)과 남일, 알렉세이 허(허가이), 박창옥 등의 기여로 고려인 1개 연대를 확보하고 난 다음 남침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4사단 18연대가 제일 먼저 서울에 입성하는 등 조선인 부대가 남침 선봉에 섰다. 북한군 중 최초로 한강을 건너 김포와 영등포를 거쳐 경기 서부와 충남, 호남, 경남 지역을 석권한 북한군 6사단 주력도 국·공내전 시 명성을 얻은 사단장 방호산 휘하 조선인으로 구성돼 있었다. 중국에 잔류한 조선인들은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인민지원군) 38, 39, 40, 42군에 집중 배치돼 한반도에 투입됐다. 북간도(옌볜)는 6·25전쟁을 전후해 북한의 충실한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12월 호
■조공 질서 부활 꿈꾸는 中…韓은 사면수적(四面受敵)
自强 의지 없으면 미래도 없다
미·중이 대립하는 현재 동아시아 구조는 한민족 생존에 불리하다. 중국의 흡인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앞두고 숨을 몰아쉬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다. 우리가 살길은 독자적 세계관과 외부 침공을 방어할 군사력,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내부 통합이다. 내부를 통합해야 민족 통합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자강(自强)을 이뤄낼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인구 100만에 불과한 칭기즈칸의 몽골이 유라시아를 제패했다. 인구 10여만에 불과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만주를 통합하고 거대한 명나라를 쓰러뜨렸다. 고주몽이 이끌던 예맥인(濊貊人) 수천 명이 수·당에 맞선 대제국 고구려를 세웠다.
/2008년 4월 27일 베이징 올림픽을 맞아 서울에서 성화봉송 당시 중국 학생들이 모여서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뉴시스]
중국 지배권을 놓고 벌인 국민당과의 축록전(逐鹿戰·패권 다툼)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했다. 중국 공산당은 신(新)중국 수립을 전후해 신장과 티베트를 유혈 점령했으며 6·25전쟁에도 개입했다.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전통 중원 왕조의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8500만 한민족(韓民族)은 22.1만㎢ 면적의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고유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산다. 한민족과 달리 한때 동아시아를 주름잡은 흉노(匈奴), 선비(鮮卑), 티베트계 저·강(氐·羌), 위구르, 거란, 만주족은 한족(漢族)에 동화됐거나 동화되고 있다. 한국, 북한과 북간도(北間島)에 삼분된 채 살아가는 한민족이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랜 세월 고구려와 발해·거란(요)·여진(금)·몽골(원)·만주(청)가 한족의 영향력이 한반도로 넘어오는 것을 저지한 데 있다.
한족의 팽창과 시진핑의 一帶一路
기원전 1046년 황하 상류 ‘빈(豳)’의 유목 부족 주(周)가 황하 중류 ‘은(殷·安陽)’을 중심으로 한 동이계(東夷係) 상(商)을 정복·통합함으로써 한족의 원형인 화하족(華夏族)이 탄생한 이후 지금까지 한족은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확장했다. 중국이 현재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도 한족의 정치·경제·사회적 팽창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주(周)와 춘추전국(春秋戰國), 진(秦)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나라는 한족의 고향이 됐다. 서한(西漢) 무제는 기원전 2세기 말 북방 흉노 정벌을 추진했다. 서한은 대(對)흉노 전쟁의 일환으로 기원전 107년 흉노의 동쪽 날개인 랴오허-다링허 유역의 조선을 정복했다.
한(漢)과 위(魏)에 제압당한 흉노·갈, 선비·오환족 등은 삼국-서진 분열기를 틈타 한족과 북방민족 간 경계지대로 대거 남하했다. 산시(山西)에 주로 거주하던 흉노가 남하해 뤄양을 수도로 하던 서진을 정복(316년 영가의 난)했다. 1000만 명 이상의 한족이 흉노·갈(匈奴.羯), 선비, 저·강 등에게 쫓겨 창장(長江) 이남으로 이주했다. 남방으로 이주한 한족은 그곳 소수민족과 혼화돼 난징을 중심으로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세웠다.
흉노의 중원 정복은 우리의 고대 국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기간 계속된 중원 전란의 결과 한족과 선비족 일부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유입됐다. 흉노에 이어 중원을 점령한 선비족은 한족과 섞여 북위(北魏)와 북주(北周)·북제(北齊), 통일왕국 수(隋)·당(唐)을 세웠다. 우문씨(宇文氏)의 북주는 북제를 멸해 화북을 통일했다. 보륙여씨(普六茹氏)의 수나라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북주를 대체했다. 수나라는 곧 강남의 진(陳)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저(氐), 선비, 거란을 비롯한 비한족(非漢族)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를 융합해 호한(胡漢)체제라는 독특한 정치·사회·문화체제를 만들어내는 등 중국 문명을 동아시아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조공체제 아래 무기력한 평화 누린 조선
/중국 베이징 자금성. 명대부터 청대까지(1420~1912) 중국 황실 궁궐이었다. [위키피디아]
4세기 말 저족 출신 전진(前秦) 황제 부견과 한족 출신 재상 왕맹에 의해 틀을 갖추기 시작한 호한체제는 북주의 창업자 선비족 우문태(宇文泰)와 한족 관료 소작(蘇綽)에 의해 완성돼 수·당 대에 결실을 보았다.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해 663년 백제-왜 연합세력을 제압하고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몽골고원의 돌궐도 제압했다. 당나라는 톈산산맥을 넘어 키르기스-우즈베키스탄을 흐르는 탈라스강과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다리야는 투르크어로 강을 의미)까지 영향력을 넓혀 세계제국으로 발전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 됐다.
고구려의 멸망은 만주의 핵심 랴오허 유역과 한반도 간 제1차 분절(分絶)을 의미한다. 10세기 초 몽골계 거란이 퉁구스계 발해를 정복한 것은 한반도와 만주 간 연계가 더욱 약화되는 계기가 됐다.
당나라는 755년 중앙아시아 출신 안록산-사사명의 봉기와 몽골고원 최후의 투르크계 제국 위구르의 압박, 역시 투르크계인 사타돌궐(沙陀突厥)의 남하, 황소(黃巢)의 난 등으로 인해 멸망했다. 당 멸망 뒤 중원에는 5대(五代), 강남과 산시(山西)에는 10국(十國) 왕조가 세워졌다. 사타돌궐, 거란, 탕구트, 한족 등이 몽골과 만주, 중원, 신장을 분할해 점령했다. 사타돌궐은 화북에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3개 왕조를 세웠다.
시씨(柴氏)의 후주(後周)를 계승한 한족 출신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북송(北宋)은 10세기 초 화북을 근거로 중국을 통일했다. 북송의 중국 통일은 북방의 강국 거란에서 내분이 일어났으며 동쪽의 고려가 거란을 견제해줬기에 가능했다. 이 무렵 티베트계 민족이지만 알타이(선비)계 언어를 사용한 탕구트족 서하가 중국 서북부를 점령했다.
중원은 여진족 아쿠타가 북만주에서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 칭기즈칸이 세운 원나라 손에 차례로 넘어갔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몽골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축출하고 중원을 장악한 14세기 말이 돼서야 한족은 다시 중국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몽골의 침공으로 쇠약해진 고려는 몽골 지방군벌 출신 이성계가 세운 조선에 자리를 내줬다. 조선 건국의 분수령이 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조선의 철저한 신복(臣服)을 뜻한다. 송시열 등 조선 성리학자 대다수는 위화도 회군을 극찬했다.
명나라의 중국 지배가 17세기 중엽 끝났다. 랴오둥에서 일어난 만주족 아이신고로 누르하치를 시조로 하는 청(淸)나라가 중국 전체를 점령해 20세기 초까지 지배했다. 일본이 굴기한 16세기와 만주가 흥기한 17세기, 명나라 중심 조공체제하에서 무기력한 평화를 누리던 조선은 차례로 일본과 만주의 침공을 받아 등뼈가 꺾이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에 병탄당하고 말았다.
한민족은 9세기 당나라 혼란기, 14세기 원·명 교체기, 15세기와 16세기 두 차례에 걸친 몽골의 베이징 포위 시기 등 여러 차례 압록강-두만강 너머로 진출할 기회가 있었으나, 단 한 차례도 대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명나라 전성기 같은 조공 질서 구축 꿈꾸는 中國
/일본군의 만주 침공. 일본군이 1931년 9월 18일 선양 을 행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20세기 이후 중국은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대기근(大飢饉)과 전쟁 등 거듭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몸집을 계속 불렸다.
한족이 탄생한 서한(西漢)부터 만주족의 청(淸)에 이르기까지 2000여 년 긴 세월 동안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은 8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한(西·東漢), 송(宋), 명(明)이 장기 존속한 한족 왕조다. 한족은 20세기 초 중국 지배권을 회복하지만 중국은 19세기 초·중엽부터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imperialists)의 침략을 받아 누더기와 같은 상태였다.
19세기 말 시작된 일본의 중국 침공은 한족이 겪은 큰 위기 중 하나다. 일본은 타이완과 관동주(뤼순·다롄)를 병합하고 만주를 위성국화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일본이 미국과 타협했다면 만주는 한반도와 함께 일본 영토가 됐을 공산이 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기에 한족이 부흥할 수 있었다.
중국은 1978년부터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개혁·개방 32년 만인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됐다. 1978년 이후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연평균 9.5%)에 비춰볼 때 중국이 신(新)냉전으로까지 간주되는 미국과의 무역전쟁에도 불구하고 2030년대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의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은 중국은 ‘중국몽(中國夢)’이라는, 명나라 전성기와 같은 조공 질서 구축을 꿈꾸고 있다. 1인 우위 체제를 구축한 시진핑의 중국몽은 한족 중심 중화제국 구현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워크(framework)로 해석된다.
2006년 11월 중국 관영 CCTV는 ‘대국굴기(大國崛起)’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 등이 강대국으로 성장한 원인을 객관적 시각으로 분석했다. 이는 중국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말해준다.
△초대국 중국 △세계제국 미국 △군사강국 러시아 △해양강국 일본은 한반도 남쪽만을 겨우 차지한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굴기에 대응해 돌궐과 백제, 왜(倭)를 적절히 활용했듯, 우리도 인근 강대국의 대외정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
중국이라는 太陽 중심으로 돌아간 行星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유한 고구려가 신(新), 동한(東漢), 위(魏), 오(吳), 공손연(公孫燕), 서진(西晉), 연(前·後燕), 북제(北齊), 수·당(隋·唐) 등과 줄기차게 싸운 것처럼, 한반도 남쪽의 우리도 싫든 좋든 같은 민족 북한은 물론 인근 강대국과 부대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및 강대국들과 부대끼면서도 우리가 자주독립을 유지해나갈 길은 현재의 국제정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손오병법(孫吳兵法)에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란 말이 있다.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현재를 더욱 잘 알고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동아시아의 과거에 대해 잘 알아야 현재 동아시아 질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중심 동아시아 질서는 19세기 말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그 이전 긴 세월 몽골, 만주, 한반도, 베트남, 일본, 서역 등의 행성(行星)은 중국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중국 문명은 기본적으로 농경 문명이고, 수용적(受容的)이며, 내향적(內向的)이다. 한족이 거란(요)과 탕구트(서하), 여진(금) 등에 의해 굴복을 강요당한 남송(南宋) 시기에 탄생한 성리학(주자학)은, 몽골 지배기를 거쳐 한족 국수주의적이던 명나라 시대에 크게 발전했다. 성리학은 반동적(反動的) 성격을 띠고 있다.
이황, 이이, 송시열, 권상하, 정약용, 최익현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성리학 사대부들은 한족의 명나라를 숭앙했다. 조선 사대부들의 명나라 맹종에 따라 자주 의식이 약화되고 결국 개화에 성공한 일본의 조선 병탄으로 이어졌다. 조선 사대부 지배층은 ‘그 어떤 민족도 교조적 원리에 묶여 있다면 진보할 수 없고, 생명력을 잃어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19세기 말 청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체제 내적으로는 조선, 일본, 베트남 등 소중화를 자처하던 세력의 급격한 이완·이탈 △체제 외적으로는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국가들(imperialists)의 공격이 원인이다.
흔들리는 美國의 동아시아 지배 체제
/1943년 11월 5일 대동아회의에 참가한 각국 수뇌부가 일본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바 마우, 장징휘, 왕징웨이, 도조 히데키, 완 와이타야쿤, 호세 라우렐, 수바스 찬드라 보스. [위키피디아]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중국 중심 동아시아 질서에 도전자로 등장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베트남과 더불어 중국 중심 중화체제 내에서 중층적 소중화체제를 유지하던 일본은 19세기 말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체제 변혁에 성공했다. 일본은 영·미(앵글로·색슨)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냄으로써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했다. 이로써 일본의 시각은 베이징이 아닌 런던, 베를린 또는 워싱턴을 향하게 됐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 침공 이후 동아시아의 패자(覇者)가 됐다. 일본은 영·미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독일의 생활권(Lebensraum) 이론의 영향을 받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일본 주도 동아시아 건설을 추진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이 주변국 자원을 약탈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다.
미국은 1853년 페리 함대를 도쿄만(東京灣)에 진입시킨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 행위자가 됐다. 미국은 20세기 초 영국과 함께 일본을 지원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했으며, 만주에 대한 영향력 부식을 시도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후 한국, 일본, 타이완, 남베트남,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 등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 자본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위성국가군을 체제 내로 편입해 새로운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세계 최강 미제국(American Empire)은 새로운 지배 체제를 △자유·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시장 개방을 통한 경제적 이익 확보 △군사협력을 통한 동맹으로 발전시켰다. 미국은 이들 위성국에 미국식 체제 수용을 요구하는 한편,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전쟁 때에는 파병까지 했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시작된 탈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제국이 동아시아를 성공적으로 통제해온 것은 압도적 우위의 군사력과 기축통화(Key Currency)로 상징되는 금융 지배력 외에 한국, 일본, 호주 등 위성국들의 강고한 지지와 함께 패권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도 가졌기 때문이다.
미제국은 양자 간 동맹을 통해 간접 통제하는 체제 내 통합 방식을 채택하고, 세계 3위(2010년 이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을 수석위성국으로 삼아 영향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추구해왔다. 미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이 추구하던 대동아공영권의 경제적 연계 네트워크를 부분적으로 부활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이 부상하면서 경제·군사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시대에 들어와 미국의 동아시아-서태평양 지배 체제는 더욱 동요한다.
재정립된 중화제국과 위기의 한반도
/2017년 9월 8일 주한미군이 경북 성주 사드기지에서 발사대 배치 작업을 위해 차량을 이동하고 있다.
중국은 북방민족에 점령당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팽창해왔다. 한족이 세운 서진(西晉)에 비해 선비족이 세운 수·당은 영토, 경제력 등에서 최소 2~3배로 커졌다. 흉노, 선비, 저·강, 사타돌궐,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 중원을 지배한 북방민족 국가는 중원 바깥에서 기원했지만 통치의 중심을 중원으로 옮기고, 한족 출신을 대거 기용하는 등 중원 왕조를 지향했다.
특히 중국은 북방민족 지배 시기에 끊임없이 외부로 팽창했다. 탁발선비 북위(北魏)는 몽골고원의 유연(柔然)을 정복하고자 수십 차례 출격했으며, 호한(胡漢)체제의 수나라는 줄기차게 고구려와 돌궐 정벌을 추진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돌궐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로 팽창했다. 몽골 지배기 중국은 북베트남과 티베트, 바이칼호 이북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원나라는 자바, 수마트라, 일본 열도 등 해양으로까지 손을 뻗쳤고, 만주족의 청나라는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 타이완, 사할린을 영토로 삼았다.
중국은 청나라가 만들어준 영토 가운데 연해주 일대와 사할린, 타이완, 외몽골, 카자흐스탄과의 국경 지역인 일리강 유역 등 변경 일부 외연(外延)을 제외한 핵심부를 그대로 영유하고 있다.
한족 민족주의는 청(淸) 멸망 이후 중화제국 개념으로 재정립됐다. 중화제국은 동으로는 만주, 서로는 타클라마칸, 남으로는 남중국해, 북으로는 고비(내몽골) 범위 내에 있는 모든 민족과 국가는 중화에 속한다는 정치·문화적 개념이다. 중국의 동북아공정, 랴오허문명탐원공정 역시 중화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공식 국경과는 무관하게 역사·문화·인종적으로 만주와 내몽골, 신장, 티베트 등은 중국과는 별개 권역에 속한다. 만주는 한민족이 포함된 퉁구스족의 땅이며, 내몽골은 몽골족, 신장은 투르크족, 칭하이-티베트 고원은 티베트족의 땅이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경제력을 활용해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이름으로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으려 한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강력해진 중국 앞에서 한반도는 위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국몽과 일대일로 정책은 중국의 유라시아 헤게모니 장악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민족의 위기를 한층 더 심화시킬 것이다.
민족주의로 무장한 중국의 浮上
중국 기업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축적한 기술·자본을 바탕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스리랑카,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스, 헝가리, 세르비아,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지에 진출했다. 또한 미국과 독일 등 서방 첨단기업에도 투자해 이들이 확보한 과학기술을 흡수하려 한다.
산업혁명 진전 단계를 분석해볼 때 중국의 부상(浮上)은 필연이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패해 경제가 경착륙할지라도 관리, 학자, 기업인, 전문가가 갖고 있는 노하우는 사장되지 않는다. 중국의 기술 발전 속도가 한국의 그것을 따라잡을 때 산업구조에서 한·중 관계가 역전된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중국 경제의 한 부분처럼 운용될 것이다. 최근 심화한 원화(圓貨)의 위안화(元貨) 동조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타이완 경제는 교역과 투자, 사회 교류 등 여러 면에서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이 심화돼 중국 경제에 통합돼버릴 상황이다.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앞으로 중국의 요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잦아질 것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간 상호 의존 심화는 중국 우위의 동아시아 경제통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이, 유교적 가치관 등 동아시아 국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 체계로 스스로를 혁신할 경우 흡인력은 한층 커질 것이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들과 외교관들이 중국의 분열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긴 역사를 관찰해보건대 중국은 분열되든, 외부 세력에 정복당하든 내부에서 융합한 스스로의 에너지를 갖고 분열을 치유하고 정복 상태를 끝낼 힘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중국 위협론’은 음모론이 아니라 닥쳐올 가능성이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 현상이다. 민족주의로 무장한 중국의 위협은 물리적 위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군사적 점령은 단기간 내 끝날 수 있으나, 인종적 요소를 포함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진출은 저항할 수단이 빈약하다. 예방 불가능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2006년 10월 완공된 칭하이-티베트 고산철도는 티베트를 중국화하고자 하는 중국의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시진핑 시대 중국은 쓰촨-티베트 고산철도도 건설하고 있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지속하든, 경제성장 정체에 기인한 격심한 혼란 끝에 국수주의(國粹主義)를 택하든 우리에게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
패권국 미국이 도전자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은 국가 규모 측면에서 중국에 비해 열세다.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유럽연합(EU)이 무역자유화를 주장하는 것은 경쟁력이 약화된 미국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다.
중국 긴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독자적 세계관, 군사력·경제력 갖춰야
/중국 광둥성 주하이와 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대교가 10월 23일 개통됐다. [신화=뉴시스]
분단된 우리는 사면에 적을 맞은 사면수적(四面受敵) 상황에 처해 있다. 중국은 본토를 잇몸으로, 만주를 이빨로, 한반도를 입술로 본다. 우리가 진정한 자주독립을 확보하려면 중국이 더 부상하기 전에 적어도 남북 경제공동체를 수립해야 한다. 중화체제를 복구하고 난 중국은 만주의 울타리인 한반도마저 영향 아래 두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제스, 마오쩌둥 모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중 간 신냉전, 양극화(bi-polarization)는 한반도의 분단 고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통일로 가는 구심력 회복과 함께 외교 공간을 넓히는 것이다. 미·중이 대립하는 지금의 동아시아 구조는 한민족 생존에 불리하다. 대규모 전쟁만이 한 나라, 한 민족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비커 속의 개구리가 수온(水溫)이 서서히 높아져 몸이 익어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죽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의 은근한 흡인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앞두고 급히 숨을 몰아쉬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준비해야 한다.
동아시아 질서가 흔들릴 때 한반도는 항상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갔다. 서한 무제의 흉노전쟁, 흉노의 서진 정복, 수·당의 중국 통일, 거란의 흥기, 몽골의 부상과 쇠퇴, 만주의 흥기, 일본의 굴기, 공산당의 중국 통일, 중국의 부상 등 큰 파도가 발생할 때마다 한반도는 피해를 입었다. 우리가 피해를 당한 것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베트남, 타이완과 함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의 긴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유지해나갈 방법은 태평양 너머 최강대국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의 북한과 같은 억압과 빈곤의 대외고립은 더욱이 아니다. 미·중 신냉전 시대를 맞이해 우리가 살길은 독자적 세계관과 함께 외부 침공을 방어할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를 통합하는 것이다. 내부를 통합해야 민족통합도 이룰 수 있다. 민족통합을 달성해야 중국, 일본 등과 진정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안정적인 평화도 누릴 수 있다.
自强의 길
우리가 자강(自强)을 이뤄낼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인구 100만 명에 불과한 칭기즈칸의 몽골이 유라시아를 제패했다. 인구 10여 만에 불과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만주를 통합하고, 거대한 명나라를 쓰러뜨렸다. 고주몽이 이끌던 예맥인(濊貊人) 수천 명이 수·당에 맞선 대제국 고구려를 세웠다. “스스로 강해지려 하지 않는 나라에 밝은 미래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길 때다
2017.12.28 월간조선 12월 호
■“삼전도(三田渡)의 치욕, 을사조약보다 못한 저자세 대중(對中)외교”
⊙ “소방(小邦)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보낸 국서)
⊙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시어도어 루스벨트)
⊙ 병자호란, 을사조약 당시 조선에는 제대로 된 군대 없고, 동맹도 없었지만, 지금은 60만 최강 국군과 세계 최고의 한미동맹 있어
⊙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스러운 국가안보, 외교정책의 재앙”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10월 30일 국정감사에서 사드 추가 배치 불가 등의 입장을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0월 30일 국회에서 “사드 추가 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고 미국의 MD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 한·미·일 3국 간의 안보 협력이 3국 간의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했다. 중국 정부와 언론은 이를 ‘3불(不) 약속’이라고 대서특필했다.
다음날 한중 양국은 ‘한중관계 개선 관련 양국 협의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서 중국은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했다. 한국은 그간 우리가 공개적으로 밝혀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의 부당한 ‘사드 보복’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 고위 외교관 출신 인사는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스러운 국가안보, 외교정책의 재앙”이라고 했다. 조갑제 전 조갑제닷컴 대표는 “동맹과 국격(國格)과 국익(國益)을 해친 합의를 한 이 정부가 과연 이완용을 욕할 수 있나?”라고 했다. 조선시대 ‘삼전도의 굴욕’이나 이완용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길 당시와 지금이 어떻게 다르기에 이런 비유가 나올까?
삼전도의 굴욕
1636년 12월 9일 청군(淸軍)의 선봉인 4000여 철기(鐵騎)가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은 요충지에 자리한 산성들을 무시하고 한양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조선군의 최정예였던 평안도 방면의 군대는 12년 전 이괄의 난 때 반군 편에 섰다가 소멸된 지 오래였다.
전방에서는 봉화가 잇따랐지만 황해도 황주 정방산성에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이를 무시했다. 김자점은 뒤늦게 청군이 평북 안주를 지났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의 보고는 12월 13일에야 조정에 도착했다. 영의정 김류는 경기도 일대의 군대를 소집하고 강화도로 피란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청군이 깊이 들어올 리가 없다”면서 좀 더 추이를 지켜보자고 했다. 조선은 조기(早期)경보와 정보 분석에서 모두 실패했던 것이다. 다음날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인조는 역대 선왕(先王)들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과 왕자들을 강화도로 서둘러 피란시켰다. 9년 전 정묘호란 때에도 인조는 강화도로 몸을 피했었다.
그날 저녁 인조 일행이 숭례문에 이르렀을 때 청군이 이미 양철령, 즉 지금의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강화도로 갈 기회를 놓친 인조는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는 병력도, 군량도 없었다.
이후 인조는 도원수 김자점을 비롯해 각 도(道)의 관찰사, 병마사들에게 병력을 이끌고 도우러 오라고 거듭 촉구했다. 남한산성으로 온 것은 조선군이 아니라 청군이었다. 12월 19일 청군의 좌익 주력군 2만4000여 명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전쟁을 모르는 군대 조선군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청군에 패했다. 사진은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12월 24일은 성절(聖節), 즉 명(明)나라 황제의 생일이었다. 인조와 신하들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북경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조선이 이렇게 지극한 사대(事大)의 예를 올렸지만, 명은 조선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청군이 이미 북경 인근까지 진출했고 전국 곳곳에서 이자성 등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조선군들 또한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출동한 근왕병(勤王兵)들이 경기도까지 진출했지만 청군에 패했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 인근에서 벌어진 쌍령전투였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병은 초전에는 선전(善戰)했다. 허완의 부대는 초전에 병사들이 무턱대고 총을 쏘아대다가 실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패했다. 민영의 부대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병사들에게 화약을 지급하다가 폭발사고가 일어나 자멸했다.
전라병사 김준룡이 이끄는 전라도 근왕병은 1월 5일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군량과 화약이 떨어지자 수원 이남으로 철수했다.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이끄는 평안도 근왕병은 1637년 1월 26일 강원도 김화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홍명구와 유림은 작전에 대한 이견 때문에 각자 진을 쳤다. 홍명구의 부대는 청군에게 패했고 홍명구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유림의 부대는 청군의 추적을 뿌리치고 2월 3일 가평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후였다.
조선군이 참담한 실패를 거듭한 것은 장수도, 병사도 전쟁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장수들은 대국적 차원에서의 전략은커녕 정찰의 필요성도, 어디에 진을 쳐야 하는지도 몰랐다. 군량과 화약 등 병참에도 어두웠다. 병사들은 총을 쏘아야 할 때와 말아야 할 때를 몰랐고 적이 쳐들어오면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청 태종의 조롱
/청 태종 홍타이지.
남한산성은 이렇게 고성(孤城)이 돼버렸다. 이러는 사이에 청군은 태종 홍타이지가 이끄는 본진 5만4000명,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우익군 2만2000여 명으로 계속 증강됐다. 성을 포위한 적군이 나날이 늘어가는 데도 조선군들은 날씨가 추워 손이 곱아 활시위조차 당길 수 없었다. ‘방한복’이라고 할 수 있는 가마니조차 병사들에게 충분히 나누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37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1월 12일 최명길을 통해 보낸 국서에서 조선은 “소방(小邦)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라며 한껏 고개를 숙였다.
홍타이지는 이에 대해 1월 17일 보내온 국서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조정의 주장은 엇갈렸다. 최명길이 항서(降書)를 쓰자 김상헌이 이를 찢어 버리며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이때의 일이다.
항복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치욕의 현장에는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1월 19일 청군이 쏜 홍이포의 포탄이 남한산성에 떨어져 사상자가 발생했다. 1월 22일에는 강화도가 함락됐다. 강화도 방위사령관 격인 검찰사 김경징은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었다.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다. 강화도에 들어간 후 김경징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것만을 믿고 방어 준비를 게을리하다가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산성에서는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1월 23일과 26일, 하급 군관과 병사들이 행궁(行宮) 앞으로 몰려와 “척화신(斥和臣)들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을 사주(使嗾)한 것은 신경진, 구굉, 홍진도 등 고위 장수들이었다.
1월 26일 강화 교섭차 청군 진영을 찾은 최명길은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의 저항의지는 이로써 끝장났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1월 30일 인조는 청군이 삼전도에 마련한 수항단(受降壇)으로 나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했다.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인조가 돌아온 서울에는 백골이 뒹굴고 있었다. 최명길이 명나라 도독 진홍범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청나라로 끌려간 피로인(被虜人)은 5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6년 후인 1642년의 호구(戶口)수가 약 165만명, 이를 바탕으로 추정한 당시 인구는 1076만명가량이었다.
조선은 대륙의 정세 변화에 눈을 감고 쇠락해 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만을 강조했었다.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西人) 정권은 이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전쟁 준비는 게을리했다. 전쟁을 모르는 문신들이 군대를 지휘했고 병사들은 초보적인 전투지식도 없었다. 반면에 청나라는 여진부족들은 물론 인근 몽골까지 끌어들였고 명나라에서 소외된 학자와 무장(武將), 장인(匠人)들을 폭넓게 포섭했다.
동맹도, 군대다운 군대도 없었던 나라, 스스로 말하기를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던’ 나라는 결국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종말
/한일합병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조약 서문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원하여, 상호간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하기 위해서 이 목적을 달성코자 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함이 가장 좋은 길임을 확신…” 운운하고 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넘겼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때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해 6월에는 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감옥 사무와 사법권은 1909년 7월에 일본에 빼앗겼다.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되고 각 부처 차관으로 일본인들이 임명됐다.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 8월에는 재정권이 넘어갔다.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에 한일의정서를 맺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권한과 군사기지를 설치할 권한을 획득했다. 대한제국은 이때부터 국권(國權)을 차례로 일제에 빼앗긴 것이다.
고종의 애소(哀訴), 이토의 협박
/을사조약 당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왼쪽). 오른쪽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주한일본군사령관.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의 정점(頂點)은 1910년의 한일합병이 아니었다.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국권을 상실했다.
일본 천황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0일 고종 황제를 만난 자리에서 “두 제국 간의 결합을 한층 공고히 하는 것이 극히 긴요하다”면서 “그 방법은 외교를 귀국 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우리 정부 스스로 이를 대신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종은 “일이 중대하니 지금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정부 신료에게 자순(諮詢)하고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며 시간이라도 벌어보려 했다. 이토는 “정부 신료에게 자순하심은 당연하지만, 일반 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운운의 말씀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이토는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 다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하는 소위 전제군주국이 아닙니까? 인민의 의향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시라 추측된다”고 압박했다.
이것은 고종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국제(國制)는 제1조부터 9조까지 황제의 권한과 존엄만을 강조했을 뿐, 국민의 정치 참여나 권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토는 “이를 승낙하시거나 혹은 거부하시거나 폐하의 마음이지만, 만약 거부하시면 제국 정부는 결심한 바가 있어 그 결과는 과연 어느 곳에 이를지…”라고 협박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불러 ‘한일협상조약’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11월 17일 덕수궁에서 회담이 열렸다. 궁궐 밖은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었고 궁궐 안에도 일본 헌병들이 들어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참정대신(총리) 한규설은 “그 내용에 있어 어떻게 규정되더라도 굳이 반대하지 않겠지만, 다만 그 형식에서만이라도 조금 여지를 남겨둘 것을 희망한다”고 사정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입장은 완강했다. 결국 그날 밤 조약은 체결됐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만이 반대했다. 조약에 찬성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을사오적’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을사년의 춥고 쓸쓸했던 기억은 국어사전에 단어를 하나 남겼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그것이다.
고립무원이었던 대한제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에 고종은 국권을 보존, 회복하기 위한 비밀외교를 벌였다. 1905년 9월 미국 의원들과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방한했을 때에는 ‘공주’로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한규설과 민영환은 한성감옥에서 청년 이승만을 꺼내 미국으로 보냈다. 이승만은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앞두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태프트 육군장관과 가쓰라 타로 일본 총리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후였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사회진화론 신봉자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나는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는 걸 반드시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국무장관 존 헤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보듯 당시 대한제국은 고립무원이었다. 당시 세계 제1의 강국 영국과 태평양의 신흥 강국 미국은 러시아 견제와 만주 및 중국에서의 이권을 위해 일본을 응원하고 있었다.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이라는 고립주의 외교의 전통을 깨고 1902년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을 맺었고, 1905년에는 이를 갱신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한반도에서 손을 뗐다.
군사력도 형편없었다. 최근 한 대학교수는 “1901년 이미 한국군은 일제 외에 아시아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3만 대군의 ‘신식 군대’였다”고 주장했다. 군사(軍史)연구가들에 의하면 1900년 이래 장부상 병력은 중앙군이 7500명, 지방군이 1만8000명이었다. 이들은 독일・프랑스・미국 등에서 수입한 소총과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한제국군의 훈련 모습. 을사조약 당시 장부상 병력은 7731명에 불과했다
1904년 2월 9일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아시아 2위의 신식 군대’는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했다. 그나마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강요로 병력을 감축, 1905년 무렵에는 장부상 병력이 7731명으로 줄어들었다. 지방군은 매천 황현이 “군대가 해산됐다고 하자 백성들이 반겼다”고 할 만큼 최소한의 기율도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설사 ‘3만 대군’이었다고 한들 ‘아시아 1위’와는 격차가 너무 컸다. 일본군이 러일전쟁 당시 뤼순전투에서 낸 사상자만 5만9000명에 달했다.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어도, 동맹도, 군대도 없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은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과 다를 바 없었다.
2017년 한중 외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0월 30일 국회에서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우리 정부는 사드 추가 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고, 미국의 MD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며 “한·미·일 3국 간의 안보 협력이 3국 간의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중국 외교부와 《인민일보》 등 중국 매체들은 이를 ‘3불(不) 약속’이라 표현하면서 환영했다. 우리 정부는 ‘약속’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중국 측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중국 외교부는 ‘3불 약속’이라는 표현을 피했지만, 중국 매체들은 여전히 ‘3불 약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날 외교부는 지난 10월 31일 ‘한중관계 개선 관련 양국 협의 결과’를 발표했다. 양국 간 협의에는 한국에서는 남관표 국가안보실 제2차장이, 중국에서는 쿵쉬안유 중국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차관보)가 나섰다.
〈● 한국 측은 중국 측의 사드 문제 관련 입장과 우려를 인식하고,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는 그 본래 배치 목적에 따라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 것으로서 중국의 전략적 안보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중국 측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를 반대한다고 재천명하였다. 동시에 중국 측은 한국 측이 표명한 입장에 유의하였으며, 한국 측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기를 희망하였다. 양측은 양국 군사당국 간 채널을 통해 중국 측이 우려하는 사드 관련 문제에 대해 소통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 중국 측은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하였다. 한국 측은 그간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혀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하였다.
● 양측은 한중 관계를 매우 중시하며, 양측 간 공동문서들의 정신에 따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발전을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양측은 한중 간 교류협력 강화가 양측의 공동 이익에 부합된다는 데 공감하고 모든 분야의 교류협력을 정상적인 발전 궤도로 조속히 회복시켜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
/중국의 사드보복 이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 나붙은 중국어 안내판. ‘이해합니다. 그래서 기다립니다(因爲理解所以等待)’라는 글귀에 중국에 숙이고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우선 양국 대표의 격(格)이 맞지 않는다. 우리 측에서는 국가안보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안보실의 차관급 인사가 나섰다. 우리 국가안보실에 상응하는 중국의 기관은 국가안전위원회이다. 중국의 외교부는 대외관계에서 발언권이 약한 부서다. 그런 부서의 부부장(차관)도 아니고 조리(차관보)를 국가안보실 2차장이 상대한 것부터가 중국에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중국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를 반대한다고 재천명’하고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했다. 자기들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다는 얘기다.
반면에 한국 측은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는 그 본래 배치 목적에 따라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 것으로서 중국의 전략적 안보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 측의 사드 문제 관련 입장과 우려를 인식’하고, ‘그간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혀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하였다’고 했다. 중국의 무도한 ‘사드 보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한 고위 외교관 출신 인사는 “한국이 성급하게 해결하려고 미래의 안보 주권까지 넘긴 치욕적 합의”라면서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할 때는 동맹도, 대안(代案)도 없었지만 한미동맹도 있고, 중국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미리 항복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수치스러운 국가안보, 외교정책의 재앙”이라고 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이 말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맹과 국격(國格)과 국익(國益)을 해친 합의를 한 이 정부가 과연 이완용을 욕할 수 있나? 이완용 또한 동맹도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역부족으로 나라를 넘긴 것 아닌가? 동맹도 대안도 있는데 국익을 헐값에 넘겼으니 이 정부는 인조보다, 이완용보다 더 타락한 것 아닌가? 삼전도보다 더한 치욕적・사대주의적 외교의 결정판이다.”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긴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고 성안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을사조약 때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덕수궁 안팎을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는 명나라는 쇠락해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을사조약이나 경술국치 때는 대한제국에 믿을 만한 동맹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다.
병자호란이나 을사조약 때는 변변한 군대가 없었지만, 지금은 60만 대군을 갖고 있다. 한국군은 세계 최강인 미군과 한미연합사령부를 통해 하나로 묶여 있다. 미국은 최근에도 한반도 주변 해역에 3개 항공모함 전단을 배치했다. 한국은 미국이 내미는 손만 잡으면 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국회 발언이나 한중 합의를 보면, 대한민국은 국익과 국격을 위해 제대로 말을 한 것 같지 않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12년 전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고 했지만, 지금 우리는 입도 벙긋 못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맹자》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무릇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기고, 집안도 반드시 스스로 망한 후에 남이 망치고,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후에 남이 공격한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3만 자 분량의 시진핑 연설문 정밀해부]
‘시황제’ 시대 한중(韓中)관계 대응전략은 바로 이것!
⊙ 중국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철저히 학습·대비하고 ‘탈(脫)중국’ 해야 안보·경제 두 마리 토끼 잡을 수 있다
⊙ 중공(中共)은 중국 다스리는 핵심… 중공 움직이는 주체는 바로 시진핑임을 세계에 선포
⊙ 시진핑, 13개 주제 총 3만2390자 분량의 연설문 3시간30여 분 동안 쉬지 않고 읽어
⊙ 시진핑 연설문의 핵심 키워드는 ‘신(新)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 중국공산당이 모든 역할을 독점적으로 하되 그 핵심은 ‘시진핑 사상’이고 이 사상은 곧 ‘시진핑’
⊙ 시진핑의 ‘대국(大國)외교’의 두 방향은 신형국제관계의 건설과 인류운명공동체의 건설 추진… 국방 현대화와 군(軍) 현대화를 통해 강군(强軍) 건설 나설 듯
김상순
1963년생. 명지대 중문과 졸업, 타이완대 사회학 석사, 베이징대·칭화대 CEO e-MBA 및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박사 / 한국정책재단 상임이사, (사)한반도개발협력연구소 운영이사, (사)아시아문화경제진흥원 자문위원, 통일부 교육위원 및 북경협의회 회장 / 중국 차하얼학회(察哈尔学会) 연구위원, 봉황위성TV 국제패널리스트, 봉황왕대학문 특약교수, 봉황왕 특약사회자 / 《동아시아의 미래: 통일과 패권전쟁》 출간, 《창조적 개입: 중국의 글로벌 역할의 출현》 번역, 《시진핑 신글로벌 전략과 한반도의 미래》 편저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연설을 통해 중국을 다스리는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
지난 10월 18일, 세계가 주목하던 중국공산당(이하 중공·中共)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이하 19차 당대회)가 개최됐다. 시진핑(習近平) 중공 총서기는 연설을 통해 ‘신(新)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키워드로 시진핑 2기 시대의 개막을 세계에 선포했다.
변화된 모습의 첫 사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중(訪中) 때 나타났다. 지난 11월 8일 오후 2시36분(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의 일환으로 도쿄, 서울 다음으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2박3일의 방중 일정의 백미는 자금성 만찬이었다. G2의 두 황제가 중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옛 황제의 궁궐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중국의 ‘신형국제관계’와 관련해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아부를 서슴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시 주석과 2535억 달러(약 282조원) 규모의 경협 계약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정작 미국 외교의 최대 이슈인 북핵 문제나 자유민주주의 리더십 관점에서는 그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진핑의 기세에 트럼프가 눌렸다는 분석도 있다.
시진핑은 이번 당대회를 통해 중국이 추구해야 할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사실은 ‘시진핑 신(新)사상’ 혹은 ‘시진핑 사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모두 13개 주제 총 3만2390자에 달하는 장문의 연설문을 3시간30여 분 동안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간 시진핑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 시진핑 연설문에 기초한 시진핑과의 가상(假想) 인터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진핑 연설문을 근거로 시진핑 총서기와의 가상 인터뷰를 구성,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1921년 탄생한 중국공산당이 ‘시대적 요구’였다고 연설문에서 정의했는데 그 이유는 뭔가.
“봉건통치와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는 중국 인민들의 격렬한 투쟁운동이 전개될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중국에 유입돼 중국의 노동운동과 결합한 것이 중국공산당 탄생의 ‘역사적 배경’이다. 당시 중국문제를 해결할 출구를 발견하는 것이 ‘시대적 요구’였다.”
― 중공(中共)이 1949년 중국을 건국한 이유는 뭔가.
“수천 년의 봉건독재정치를 깨고 인민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 중공과 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돼 있나.
“사회주의적 민주정치의 발전이란 인민의 의지를 구현하고, 인민의 권익을 보장하며, 인민의 창조적 활력을 격려하고, 제도로써 인민이 주인임을 보증하는 것이다.”
― 당신이 생각하는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노동자·농민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 전제정치(專制政治·despotism)의 사회주의 국가다. 물론 국가의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있다.”
― 중국이 말하는 ‘사회주의 민주’란 무엇인가.
“중국식 ‘사회주의 민주’는 인민을 위한 이익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최대한 진정으로, 최대한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민주국가’를 의미한다.”
― 신시대 중국 사회의 주요 ‘모순’이란 뭔가.
“인민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요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요구와 현실 사이에 불균형, 불충분한 모순이 존재한다.”
―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진핑 사상’을 강조했다. 왜 그런가.
“새로운 시대에서 어떤 형태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인지, 또 이것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시진핑 신사상’이다.”
시진핑은 “인민 중심의 발전 사상을 유지하고 인민의 전반적인 발전과 공동의 부를 끊임없이 촉진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신사상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이 말하는 ‘민주’와 서구사회에서 말하는 ‘민주’는 완전히 다르다. 한마디로 중국의 민주는 “모든 권력은 중앙으로, 중앙에 모인 권력은 다시 중공 총서기로 집중되는 민주집중제”다. 요약하면 중공이 중국을 건국하고, 중공이 중국을 다스리는 주체라는 뜻이다.
시진핑 1기의 10대(大) 성과와 7대 난제 해법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7년 10월 25일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6명과 함께 베이징 인민대회당 내외신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시 주석 뒤로 리커창 총리, 리잔수 당 중앙판공청 주임, 왕양 부총리, 왕후닝 당 중앙학습실 주임, 자오러지 당 중앙조직부장, 한정 상하이 당서기 순으로 입장해 당 서열을 알렸다
지난 5년간의 시진핑 1기 성과는 무엇일까? 시진핑은 전임 후진타오(胡錦濤)의 ‘4위일체(四位一體)’, 즉 경제·정치·문화·사회건설에 생태문명건설을 추가해 이른바 ‘오위일체(五位一體)’와 ‘사개전면(四個全面)’을 달성했다고 강조했다. 즉 완전한 샤오캉 사회 건설(全面建成小康社會), 완전한 개혁 심화(全面改革深化), 완전한 의법치국(全面依法治國), 엄격한 당 관리(全面從嚴治黨)에 대한 유기적인 통합으로 10대 성과를 달성했다고 자평(自評)했다.
10대 성과는 1)경제 건설 2)완전한 개혁심화 3)인민민주 법치 건설 4)사상문화 건설 5)인민생활 개선 6)생태문명 건설 7)강군(强軍) 부흥의 신국면 개막 8)홍콩·마카오·타이완 정책의 새로운 진전 9)철저한 전방위 외교 포석 전개 10)엄격한 당 관리 등을 역사적인 성취로 선정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중국이 현재 처한 상황이 아직은 발전이 더 필요한 저개발국 수준이고 사회주의 체제도 초급 단계”라며 “여러 난제와 도전이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시진핑은 향후 도전을 통해 1)불균형과 불충분한 발전문제 2)민생문제 3)사회문명의 수준 제고 4)국가의 통치체계와 통치능력 강화 5)국가안보의 새로운 위기 6)미진한 개혁과 정책문제 7)당의 취약한 활동문제 등의 해결을 강조했다.
시진핑 사상과 중공의 5대 투쟁방향
시진핑은 “중공이 주도하지 않으면 민족부흥은 필연적인 공상에 불과하다. 역사가 이미 이를 증명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증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진핑은 중공의 위대한 신시대 투쟁 방향으로 1)모든 당원의 당 지시와 사회주의 제도 고수 2)자발적 인민 이익 보호 3)자발적 개혁과 창조 시대에 대한 헌신 4)자발적 주권 안보와 발전 이익 수호 5)각종 위험에 대한 자발적 대비를 제시했다.
시진핑은 ‘시진핑 사상’의 ‘전체 구성’과 ‘전략적 포석’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노선·이론·제도·문화의 ‘4대 자신감(四個自信)’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전면심화개혁(全面深化改革)을 위한 목표 설정 ▲법에 의한 통치, 즉 ‘의법치국(依法治國)’의 전면적 추진 ▲신시대 공산당의 강군 등을 3대 ‘전체 목표’로 설정했다.
이처럼 ‘시진핑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공산당이 모든 중심적 역할을 하되, 그것도 독점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시진핑 사상이 있고, 이 사상은 곧 ‘시진핑’ 자신이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시진핑 사상의 대국외교(大國外交)와 14개 기본 방침
/2017년 11월 8일 중국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에서 도널드 트럼프(왼쪽에서 둘째)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맨 왼쪽) 여사가 사진을 찍으려고 포즈를 취하자 시진핑(맨 오른쪽) 주석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웃고 있다. 중국 CCTV는 “시 주석이 자금성의 역사와 건축, 문화를 소개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했다
중국 외교와 관련해 시진핑은 ‘대국외교’의 두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 ‘신형국제관계의 건설’이다. 중국이 언급하는 신형국제관계는 주로 ‘중미(中美)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중미관계가 G2로 부상한 중국의 굴기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돼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인류운명공동체의 건설 추진’이다. 시진핑은 지난 1기 집권에서 ▲일대일로(一帶一路)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브릭스(BRICS)은행 ▲실크로드기금 등을 제시했다. ‘대국외교’를 강조한 시진핑 2기 시대의 외교전략은 전통적인 방어 전략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시진핑은 ‘인류운명공동체’ 건설을 위해 1)평화발전노선 수행 2)글로벌 협력관계의 발전 3)대외개방정책 유지 4)협치의 ‘글로벌 거버넌스 관념’ 주도라는 4대 외교정책을 제시했다.
시진핑은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 방침으로 1)공산당 주도 2)인민 중심 3)완전한 개혁 심화 유지 4)새로운 발전 이념 유지 5)‘인민이 주인’ 관점 유지 6)의법치국 유지 7)사회주의 핵심가치 체계 유지 8)민생 보장과 개선 유지 9)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생 유지 10)총체적 국가안보관 유지 11)공산당의 인민군대 절대적 지휘 유지 12)‘일국양제(一國兩制)’ 유지 13)인류운명공동체 건설 추진 14)엄중한 공산당 관리 등을 제시했다.
시진핑은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건설의 새로운 여정 개막’이라는 주제로 1)2020년까지 ‘샤오캉 사회’의 실현 2)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까지 더욱 발전·번영하며 조화로운 수준의 국가 건설 3)건국 100주년(2049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실현이라는 ‘3단계(三步走) 전략목표’를 제시했다.
시진핑은 2020년부터 21세기 중엽까지 두 차례에 걸쳐 ‘15년 종합목표’를 설정했다. 제1차는 2020년부터 2035년까지로, 완전히 건설된 ‘샤오캉 사회’의 기초 위에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제2차 15년 계획은 2020년부터 2035년까지로, 중국을 부강한 민주문명국과 조화로운 사회주의 강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시진핑은 현대화 경제체제의 건설을 위해 1)공급자의 구조적 개혁 심화 2)창조형 국가건설 독려 3)농촌진흥 전략 시행 4)지역협동 발전 전략 시행 5)신속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개선 6)전면 개방의 새로운 구조 형성 추진 등의 6대 전략목표를 제시했다.
통일과 강군(强軍) 현대화를 위한 시진핑의 명령\
/시진핑 주석은 국방 현대화와 군(軍) 현대화를 통해 강군(强軍) 건설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인민해방군 홍콩 주둔 부대를 사열하는 시진핑.
시진핑은 연설에서 “홍콩(1997년 7월 1일)과 마카오(1999년 12월 20일)가 중국에 반환된 이래,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통해 홍콩·마카오 문제를 해결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타이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국양제’는 중공이 홍콩·마카오·타이완에 제한된 자치권을 포함하는 경제적 이익과 붉은 혁명사상이 주도하는 정치적 이익을 서로 맞교환하자는 일종의 ‘빅딜(big deal)’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홍콩과 마카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타이완은 고민에 빠진 상태다.
2013년 제1차 국방개혁의 목표로 ‘부국강국의 꿈’과 ‘해양강국의 꿈’을 설정했던 시진핑은 이번 제2차 국방개혁에서 ‘강군의 꿈’을 위한 목표로 ‘국방 현대화’와 ‘군대 현대화’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2035년에는 세계 일류의 군대로 성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붉은색 혁명의 유전자로 무장해 싸울 줄 아는 군대, 싸우면 이기는 군대가 되라”는 시진핑의 명령이 전군(全軍)에 떨어졌다. 시진핑은 1)당의 군대로서 부여된 신시대 사명 임무 준비 2)강군 현대화로 ‘강군의 꿈’ 성취 3)붉은색 혁명 유전자로 강군의 중책 담당 4)싸우면 이기는 군대 5)부국(富國)과 강군의 통합 전략 추진 등 5대 명령을 하달했다. 향후 시진핑이 군을 크게 양성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을 단번에 장악한 시진핑의 두 가지 비결
시진핑은 어떻게 당대회의 분위기를 휘어잡았을까? 필자는 두 가지를 주목했다.
첫째, 시진핑은 중공 당원의 ‘초심’과 ‘사명’을 강하게 요구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는 이 말에는 단결을 유도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다. 필자는 초심과 사명의 요구를 ‘제2차 창당’ 선언으로 이해한다. 그 속에는 ‘위대한 혁명과 건국의 지도자’로서 거역 불가의 대상인 마오쩌둥(毛澤東)을 자신이 이어받는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둘째, ‘샤오캉 사회’의 완성을 선포했다. 이는 곧 ‘마오쩌둥’과 함께 거역 불가의 지도자로 존경받는 ‘위대한 개혁개방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목표를 달성했다는 의미이다. 시진핑은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강력한 추진을 통해 덩샤오핑의 ‘샤오캉 사회’를 넘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중국의 꿈을 실현하자고 강조했다. 이는 ‘제2차 개혁개방’의 추진을 의미하고, ‘제2의 덩샤오핑’을 의미한다. 그의 의지대로 시진핑은 분명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있다.
시진핑은 이번 당대회 연설을 통해 약 9000만 전체 중공 당원과 9000만의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단원 및 13억 중국 인민들에게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계승자’이자 ‘추월자’라는 의미를 충분히 전달했다.
시진핑은 ‘시진핑 사상’으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중국의 꿈을 성취하자고 호소했다. 한때 중국을 호령했던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를 포함한 노(老)간부들조차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시진핑 1인 천하’의 개막 연설을 3시간30여 분 동안이나 꼼짝없이 앉아서 지켜봐야 했다.
한중(韓中)관계, ‘3대 기본원칙’과 ‘4대 전략적 국가협력’ 필요
필자는 베이징에서 시진핑의 이번 연설을 지켜보며 두 가지를 떠올렸다.
첫째,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위해 강력하게 리드할 수 있는 ‘1인 천하 체제’를 완성했다. 둘째, 어찌 되었든, 중국은 이번 제19차 당대회 이후 자국(自國)의 국경을 넘어 세계로 진출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한중관계의 위상은 앞으로 어떻게 재정립돼야 할까?
시진핑은 한중관계에 있어 ‘사드화해’의 출구전략을 선택했다. 물론 이번 선택은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으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주원인이다. ‘셈법 계산’에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중국의 고심이 이번 선택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이번 한중 간 사드 합의에는 ‘3대 원칙의 회복’, 즉 ▲구동존이(求同存異) ▲정경분리(政經分離)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에 대한 회복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를 계기로 한중관계는 실질적인 ‘전략적 국가협력’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필자는 구체적으로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 ▲전략적 정치협력 ▲전략적 안보협력 ▲전략적 경제협력 ▲전략적 문화협력 측면에서 한중관계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판단한다.
한중관계는 한국의 ‘신(新)북방정책’과 ‘신(新)남방정책’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실크로드)’와 만나 초대형 국가전략 협력을 이룰 수 있고, 경제·문화·사회·정치·외교 및 안보 영역에서도 양국은 전방위적 공동이익을 함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드문제’로 발견된 ‘3대 부족 현상’, 즉 상호간 ▲이해부족 ▲소통부족 ▲신뢰부족 현상에 대한 해결부터 시도해야 한다. 특히 가장 민감해 회피했던 ‘안보영역’에 대한 소통을 강화시켜야 한다.
시(習)황제 시대 제2의 사드보복 예방을 위한 3대 조건
그렇다면 시(習)황제(?) 시대에서 우리는 어떤 중국 전략을 수립해야 할까? 향후 한중관계에 있어서 또다시 중국의 일방적 보복이 발생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우리의 국가이익과 국민의 안전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다음 세 가지를 철저히 학습하고 준비해야 한다.
첫째, 중국에 대한 기대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을 이해하고 알았다고 판단했던 착각에서 벗어나, 중국이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철저히 학습하고 대비해야 한다. 사드보복이 비열하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중국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8색 가면을 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번 중국의 사드보복으로 충분히 이 같은 교훈을 경험했다.
둘째, 중국에 대한 우리의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 수교 당시와는 달리, 중국은 이제 우리의 경제적 발전 경험이 그다지 필요 없다. 양국의 경제관계는 제한적 협력과 치열한 경쟁의 시대를 맞이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국익에 필요한 대 중국 협상력을 높이는 국가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셋째, 중국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발전 전략에서 중국은 중요한 나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인식과 이에 맞는 현실적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신(新)남방정책’을 통해 아세안 10개국과의 교역을, 현재의 중국 교역량만큼 발전시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은 시의적절한 대안이다. 이는 대중(對中) 협상력을 높이는 실천적 수단이 될 수 있다. 안보는 한미동맹 강화와 자주국방 강화라는 ‘투트랙’으로 하고, 경제는 다양화시켜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이 점을 우리 스스로 자각하고 중국에도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이 ‘3대 조건’이 기초가 돼야 비로소 제2의 사드보복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또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3대 기본원칙’과 ‘4대 협력방향’을 통해 전략적 협력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문화강국을 꿈꾸는 중국에 한국은 중요한 협력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급할 필요는 없다. 친구가 필요한 것은 오히려 중국이다.⊙
■11월 28일 中 사드 집착은 韓 길들이기 수단
오승렬 한국외대 중국외교통상학부 교수
지난달 말 사드 합의 불구하고
시진핑도 나서 추가 조치 압박
北核 무방비인 한국 입장 외면
韓中은 價性比 높은 협력 상대
사드 보복 ‘朝貢질서’ 의심 자초
小失大貪의 ‘대국 품격’ 보여야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집착이 지나치다. 10월 말 한·중 양국의 이른바 ‘3불(不)’ 발표문으로 일단락됐다던 사드 문제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달 초 베트남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있었던 양국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굳이 사드를 다시 거론했고, 지난주 베이징(北京)을 방문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굳은 표정의 중국 왕이(王毅) 외교부장으로부터 같은 말을 또 들어야 했다.
북한 위협에 대응한 주한 미군의 미사일 요격용 무기 한 포대(砲隊)를 그리도 우려해서야 어찌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신형 대국’으로서 ‘중국의 꿈’을 이루겠는가. 아무리 봐도 중국의 사드 집착은 그 본질을 떠나 한국 길들이기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달 초 중국을 방문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방중 기간에 2500억 달러를 웃도는 규모의 풍성한 경협 보따리를 선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정말 사드를 미국의 중국 견제용 포석으로 우려한다면, 당사자인 미국과 진지하게 이 문제를 다뤘어야 했다. 미국에는 경협으로 포장된 저자세를 보이면서 북한의 위협에 직면한 한국에는 그리도 집요하게 사드 약속을 받아내려는 중국을 보면서 주변국을 자기중심적 ‘조공(朝貢)’ 질서에 묶어두려 했던 역사 속의 중국을 떠올리게 된다. 아직도 ‘기술적 전쟁 상태’인 정전 체제에 머물고 있는 한반도에서 북한 핵 위협에 대응한 방어 수단 하나 없다면, 한국 국민의 심리적 안정과 평화로운 일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전략적 득실이나 배치 여부를 둘러싼 국내 논란이 있었지만, 사드 문제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주권 사항이지 중국과의 협의 사항이 아니다.
중국에 근접한 북한 동창리와 풍계리에서의 탄도미사일 실험과 핵실험을 막기 위한 행동에는 그리도 신중한 중국이다. 북한의 위협으로 한반도 주변 해역(海域)과 공역(空域)에 미국의 가공(可恐)할 핵 전력자산이 수시로 드나드는 요즘, 그에 비해 ‘별것 아닌’ 사드에 ‘올인’하는 중국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아무래도 12월 중순에 있을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투자 부문 후속 협상, 한·중 어업협정 등 일련의 한·중 관계 처리 과정에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전략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사드의 본질은 북핵 문제와 미국의 서태평양 전략인데, 중국은 이를 단지 한국을 상대하기 위한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중 관계는 결코 상대의 손실이 내 이익이 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중국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추구하는 ‘소비 주도형’ 성장과 ‘도시화’를 통한 현대화 과정에서 한국은 ‘가성비(價性比)’가 뛰어난 협력 상대다. 중국 내륙 산업 경제의 노후한 설비 및 기술 수준과 상품 생산 구조로 봐서 기술 소화 경험과 경영 노하우를 갖춘 한국의 효율적 기업은 중국 경제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꼭 필요한 파트너다. 미국과 독일, 일본의 최첨단 기술이나 다국적 기업 경영 방식은 중국의 현실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한 중국의 의존도가 더 높아질 경우, 중국이 그토록 원하는 ‘국제질서의 개선’이나 ‘발언권’의 확대가 어려울 수 있다. 중국은 주한 미군의 사드가 아니라, 미국의 다국적 기업과 트럼프 미 행정부의 보호주의 강화에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북한과 인접한 중국 동북지역은 중국과 동아시아 지역의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다. 러시아의 자원과 중국의 공업 기반, 유라시아대륙의 연결 허브로서 지니는 이 지역의 발전 잠재력을 깨우기 위해서는 북핵 위협 해소가 필수적이다. 한국에 대한 사드 압박을 통해 자국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려는 중국의 근시안적 외교 전략은 중국 동북지역의 성쇠(盛衰)를 결정할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없다. 오히려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는 한·중 관계의 깊이와 상호 배려 및 협력만이 북한을 정상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
모처럼 풀려가는 한·중 관계에 중국이 대국으로서의 품격(品格)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한국 정부 역시 성과에 대한 조급증으로 중국의 외교 전략 행보에 휘둘리기보다는 원칙에 입각해 한·중 관계의 미래를 위해 ‘소실대탐(小失大貪)’하는 전략적 의연함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12.02 중국의 三戰에 당한 줄도 모르나
중국은 상대 국가 다룰 때 심리전 여론전 법률전 써
사드 三不은 법률전에 해당… 習와 회담 때도 당할까 걱정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참모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장은 중국 부상을 경계하는 책 '웅크린 호랑이'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2003년 중요한 전투 방식 중 하나로 '삼전(三戰) 전략'을 공식 승인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삼전이란 심리전·여론전·법률전(문서전)을 뜻하는데, 총 한 발 안 쏘고 안보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전략이다. 심리전은 경제·외교 압력, 유언비어 등으로 상대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2011년 중·일 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 때 중국이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막은 것이 대표적이다. 여론전은 국내외 여론을 조작해 사람들이 공산당 주장을 무심결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중국의 모든 TV·신문·잡지는 물론 인터넷까지 통제하고 있다. 14억 중국인은 공산당이 조종하는 여론에 따라 흥분하고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법률전은 각종 문서나 지도, 국제 규약 등을 끌어들여 분쟁 상황을 중국에 유리하도록 왜곡하는 방식이다. 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 등 각종 분쟁에서 모호한 역사적 근거와 국제법을 내세워 전략적 이익을 굳히려 한다.
중국은 한반도 사드 문제를 다루면서도 '삼전 전략'을 그대로 썼다.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그룹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한국행 관광객을 차단하는 등 경제 제재는 심리전이다. 대중(對中) 경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을 두려움과 혼란에 빠뜨리겠다는 계산이다. 이어 모든 관영 매체를 동원해 반한(反韓) 분위기를 조성하는 여론전을 펼쳤다. '소국(한국)이 대국(중국) 이익을 크게 침해했다'는 공산당 선전술에 흥분한 일부 중국인은 한국 상품을 불태우고, 반한 시위에 나섰다. 중국 내 교민들은 신변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공산당은 이 모든 과정을 조작해놓고도 '중국 인민의 자발적 불만 표출'이라며 딱 잡아뗐다.
중국은 마지막으로 사드 합의문을 통해 법률전을 구사했다. 그 결과 '삼불(三不·사드 불추가, 미국 MD 불가입, 한·미·일 3국 동맹 불추진)'을 문서에 넣는 데 성공했다. 우리 외교부는 삼불이 중국 주장처럼 '약속'이 아니라 '입장 표명'일 뿐이라고 하지만 중국 전략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을 잘 이해하는 게 중국이다. 관영 매체와 관변 학자를 총동원해 약속이라고 무한 반복하면 어느 순간 진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는 11월 29일 자 사설에서 "한국의 삼불 표명은 중국이나 해외에서 보기에는 약속"이라며 "사드가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는 한·중 관계의 새 장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중국은 '삼불 굳히기'를 넘어 사드 철수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야금야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삼불에 더해 일한(一限·배치된 사드 시스템 사용에 제한을 가하라)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를 두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최근 "중국은 한국의 사드 문제에서 총 한 발 쏘지 않고 이겼다"고 전했다. 한국의 삼불 합의는 중국의 삼전 전략에 완전히 당한 결과라는 평가다. '사드 봉합'이라는 청와대 발표와 달리 중국 최고 지도부가 잇따라 '적절한 사드 처리'를 압박하는데도 우리 정부는 "사드 협상은 우리가 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해 놓고도 당한 줄도 몰라서 이러는가.
바둑을 중국어로는 '웨이치(圍棋)'라고 한다. 주위에 있는 돌을 다루는 게임이란 의미다. 육지에서 열네 나라와 국경을 맞댄 중국은 바둑 두듯 외교·안보 전략을 짤 때가 많다. 상대의 포위를 피하면서 빈 곳을 공략해 상대 돌의 전략적 가치를 점점 약화시키는 수를 잘 둔다. 이달 중순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만난다. 사드 삼불 때처럼 또 중국의 삼전에 휘말려 동아시아 바둑판의 허약한 돌로 전락할까 두렵다. 안용현 논설위원
■12.07 "한국인은 어린애 같다"···그 137년 뒤 시진핑의 역사 공세
중국의 역사 DNA
대륙이 융성한다. 반도는 위축된다. 성쇠가 엇갈린다. 중국의 사드 공세는 집요하다. 고압적이면서 회유하듯 펼쳐진다. 그런 장면들은 19세기 중국(청나라) 외교관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 외교관은 일본 주재 공사 하여장(何如璋)이다. 그는 한국을 얕잡아봤다.
청나라 외교관의 경멸적 언사
중국 외교의 우월감 뿌리인가
시진핑의 역사책임·시련론은
“대국이 소국에 얘기하는 듯”
중화의 표리부동은 오랜 속성
“겉과 속 달라야 세련된 인간”
한반도 영향력 회복이 ‘중국몽’
자발적 사드 후퇴, 외교난조 낳아
문재인 방중은 지피지기 돼야
도쿄의 영국 공사는 이런 비밀 전문(1880년 11월)을 본국에 보냈다. “하여장은 조선인들이 어린애 같다고 설명했다. 조선인들에게 거친 수단은 소용이 없지만 힘을 적절히 과시하면서 친절하게 달래면(kindly and conciliatory) 쉽게 영향을 받고 따른다고 했다.” 발신(도쿄)=대리공사 케네디(J. Gordon Kennedy), 수신(런던)=외무장관.
하여장은 조선과의 수교를 영국 공사에게 권유했다. 거기에 조선에 대한 오만한 판단과 경험을 덧붙였다. 그 무렵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이 나왔다. 황준헌은 하여장 밑의 참사관이다. 그 책엔 하여장의 전략이 담겨 있다. 그 시절 대륙의 우월감은 반도의 좌절감이었다.
/중국의 한반도 관련 역사 인식들
중화(中華)의 교묘한 위압은 장구한 세월 단련됐다. DNA는 계승된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의 결례는 상습적이다. 그가 꺼낸 고사(故事)와 격언은 훈계조다. 사드 배치는 북한의 핵무장 때문이다. 한국 안보에 중대한 방어 무기다. 하지만 중국의 대북 제재는 소극적이다. 그 자세는 사드 문제와는 대조적이다.
지난달 11일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있었다(베트남 다낭). 시진핑의 언어 선택은 기묘했다. “중대한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 있어서 쌍방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歷史負責), 중·한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며, 양국 인민에 대한 책임을 지는 태도로 역사의 시련(歷史考驗)을 견뎌낼 수 있는 정책 결정을 해야 한다.”
중대한 이해는 사드 배치다. ‘역사에 대한 책임, 역사 시련’은 무엇인가. 시진핑은 직설을 피한다. 역사를 얹힌 표현을 구사했다. 그 방식은 이례적이다. 그런 말들은 우회적인 자극이다. 고상한 듯하지만 뒷맛은 고약하다.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중국 지도자들이 회담에서 그런 말을 쓰기도 한다. 이번 경우는 의미심장하다. 한·중 간 역사 인식은 민감하고 독특하다. 그 표현은 대국이 소국에 얘기하는 듯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역사는 시진핑식 수사(修辭)학의 장치다. 시 주석은 “역사는 가장 좋은 스승(最好的老師)이다. 역사는 한 국가의 지나온 발자취를 충실히 기록하고, 미래의 발전을 제시해 준다”고 했다(독일 쾨르버재단 연설, 2014년 3월). 언어가 역사에 기대면 달라진다. 함축과 격조가 생겨난다. 때로는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린다.
시 주석은 역사로 한국에 데뷔했다. 그의 2014년 서울대 강연은 강렬했다. “임진왜란 때 양국 국민은 적개심을 품고 어깨를 나란히 해 전쟁터에 같이 나갔다. 명나라 등자룡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순직했다.” 그 말들은 한국인의 역사적 감수성을 낚아챘다.
대다수 한국인은 친근감을 느꼈다. 박근혜 외교는 그 강연을 역사 연합의 발판으로 삼았다. 한국은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역사 도발을 공격했다. 하지만 역사동맹은 미련한 짓이다. 동북공정의 중국식 왜곡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는 냉정하다. 북한의 존재 가치를 잊지 않는다. 중국에 북한은 완충의 전선이다. 시진핑 언어의 선택은 정밀하다. “중국과 북한은 선혈로 응고된(鮮血凝成的) 관계다.”(7월 베를린 한·중 정상회담) 선혈은 동맹보다 단단하고 장렬하다.
시진핑의 언어는 바뀌었다. 지난 4월 그는 “한국이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고 했다. 그의 역사 인식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언론 공개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설명 내용은 심상치 않다. “(플로리다 회담에서) 시진핑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얘기했다. 수천 년 (세월)과 많은 전쟁에 대해 말했다. 10분 후 나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시진핑의 발언은 충격적이다. 불쾌하고 불길하다. 다수 한국인에겐 의심과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들은 시진핑에 대한 친밀감을 거두어버렸다. 우리 정부는 내막을 제대로 추적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에는 비겁함이 깔렸다. 대부분의 시민단체도 침묵했다. 아베·트럼프가 그런 식의 발언을 했다면 어땠을까. 미·일 대사관 앞은 시민단체 촛불로 넘쳤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그 발언이 동북아 질서 재편의 전환기적 성격을 담고 있어서다.
그 말의 후유증은 은밀하지만 깊었다. 한국인의 대부분은 중국을 다시 관찰했다. 그것은 역설적인 학습효과다. 중국인은 다중적이다. 김명호 성공회대 석좌교수(『중국인 이야기』 저자)의 지적은 실감 난다. “중국인 성향에 겉과 속의 다름이 있다. 중국인들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해야 세련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겉과 속이 같으면 동물이고, 예절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시진핑의 중국몽(夢)은 역동적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그의 꿈이다. 그는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고 했다(2014년 3월). 그 말은 나폴레옹의 경계심을 인용했다. 나폴레옹은 “잠자는 사자 중국이 깨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했다. 중국몽의 한반도 부분은 독점적인 영향력 회복이다. 중국은 청일전쟁(1894~95년) 패배로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그것은 오랜 중국 역사에서 첫 경험이다. 그 때문에 상실감은 크다. 복원은 중국 리더십의 역사적 비원(悲願)이다.
신중국 건설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렇게 다짐했다. “‘슬프다, 중국은 장차 망할 것인가’로 시작하는 책을 나는 기억한다. 그 책은 조선과 대만에 대한 일본의 정복, 중국의 종주권 상실을 쓰고 있다. 나라를 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의무라고 자각했다.”(에드거 스노 『모택동 자전』 『중국의 붉은 별』) 그 책을 번역한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는 “마오쩌둥의 역사적 의무는 한반도에서 종주권 회복”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내전 상대는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다. 1943년 11월 미·영·중 지도자의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장제스는 중국 대표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장제스 총통을 만나 보니) 종전 후 중국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야심(wide aspirations)을 가진 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그 감회는 미 국무부의 비밀 기록(FRUS)에 들어 있다. ‘야심’은 마오쩌둥의 염원과 같다.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자유독립 조항이 들어갔다. 루스벨트가 조항 삽입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장제스가 그 조항을 넣었다”는 상식은 과장된 전설이다. 장제스는 조연이었다. <카이로 회담 70주년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중앙일보 2013년 11월 16일>
시진핑은 다짐한다. “나라가 강대하면 패권을 추구한다(國強必霸)는 낡은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사드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선 그렇지 않다. 중국의 전략적 이득이 충돌하는 곳이다. 거기엔 패권적 위세가 넘친다. 중국 외교의 이해타산은 정교하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은 “한국인은 불의(不義)를 못 참는다, 중국인은 불이익(不利益)을 못 참는다”고 했다.
사드 논란에서 한국 외교의 선택은 후퇴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졸렬하고 부당하다. 우리 정부의 대처는 어수룩하다.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도 하지 않는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3불(不)’의 족쇄를 채웠다. 그 내용은 ▶사드 추가 배치 검토하지 않음 ▶미국의 미사일방어(MD)망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다. 하지만 중국은 사드 사용 제한의 ‘1한(限)’도 꺼낸다. 대국에 숙이면 계속 밀린다. 비굴하면 더욱 초라해진다. 중화의 전통적인 조공(朝貢) 기질이 되살아난다. 사드 갈등은 ‘봉인’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이 반복되면 외교의 난조와 패주로 이어진다.
중국의 경제·군사력은 강하다. 하지만 한국은 스스로 주눅 들어 있다. 30년 전 한국 사회의 주역들은 다부졌다. 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초기 세대다. 그 세대가 이룬 10년은 한· 중 관계에서 신화를 남겼다. 그 10년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부터 97년 IMF 외환위기 전까지. 88년 전후 공산권이 열렸다. 반도의 북방은 한국인의 변경(邊境)이었다. 북방외교는 공세적이었다. 기업인들은 진취와 도전으로 무장했다. 중국은 한국의 산업화를 배우려 했다. 베이징에서 한국인들은 조상들의 사대의식을 떨쳐버렸다. 그 풍경들은 중국과의 수천 년 관계에서 전무후무했다.
한국은 중국의 늪에 빠졌다. 한국 외교의 평판은 망가졌다. 홍콩 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은 한국의 사드 문제에서 총 한 발 쏘지 않고(without firing a shot) 이겼다”고 했다. 한국은 중국과 친근해야 한다. 하지만 당당한 우호여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다. 그것이 한국 외교의 도전 과제다.
한국 외교는 중국을 제대로 모른다. 그 때문에 오판은 크다. 청와대의 기대 수치는 심하게 어긋난다. 외교의 재구성이 절실하다. 출발점은 지피지기(知彼知己)다. 시진핑의 역사 공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따라야 한다. 중국의 역사적 비원을 정교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청와대·외교부의 긴급 숙제다. 문 대통령의 13일 중국 방문은 그런 자세로 진행해야 한다.
박보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2-07 中 "북핵 첫 타깃은 한국… 걱정말라"
北 인접한 지린성 기관지 '핵전쟁 대비 요령' 대대적 보도
中민심 동요에 환구시보 "핵오염 돼도 바람 한반도로 불어"
/중국 지린성 기관지 지린일보의 6일 자 5면. 기사와 삽화 등을 동원해 핵무기 관련 상식과 방호, 피폭 시 대응 요령, 전시 공습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지린일보
북·중 접경 지역인 중국 지린(吉林)성 정부 기관지(紙)가 6일 핵 공격 시 대비 요령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중국 네티즌들이 하루 종일 '전쟁 불안감'으로 술렁거렸다.
민심이 동요하자 관영 환구시보는 "전쟁이 나더라도 북한의 1차 공격 대상은 한국이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취지의 사설을 실어 논란이 일고 있다. "(핵 오염 상황이 오더라도) 지금은 겨울철로 한반도에 북서풍이 불어 중국에 유리하다"고도 했다.
사태의 발단은 지린일보(吉林日報)의 이날 특집 보도였다. 이 신문은 신문 1개 면을 털어 핵무기에 대한 상식과 방호, 피폭 시 대응 요령 등을 삽화를 곁들어 상세히 설명했다. 지린성의 북한 접경 지역은 북핵 실험장인 풍계리에서 거리가 100여㎞에 불과하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도발과 한·미 공군의 역대 최대 규모 연합 훈련 등이 맞물린 국면에서 전례 없는 기사가 실리자 네티즌들은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 등에 이 기사를 퍼 나르며 "성급 기관지가 이런 기사를 싣는 이유가 뭐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는 거냐"는 우려를 쏟아냈다.
민심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지린성 선전부 간부가 "특별한 의도가 없는 대중 계도성 과학 기사"라고 해명했다. 환구시보도 이날 오후 '지린일보의 핵무기 상식 소개는 뭔 일?'이라는 제목의 긴급 사설을 싣고 "이번 기사는 성(省) 인민방공판공실에서 제공한 정상적인 국방 교육 내용일 뿐"이라며 "한국과 일본도 이런 내용을 학교에서 배우고 평소 훈련도 한다"고 썼다.
문제는 다음 대목이었다. 환구시보는 "만에 하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가장 먼저 북한의 공격을 받는 것은 한국이고, 이어 일본 및 아·태 지역의 미군 기지일 것"이라며 "중국 땅이 직접 전화(戰禍)를 입을 가능성은 그보다 후순위"라고 했다. 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핵 오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지금은 북서 계절풍이 부는 겨울철이기 때문에 중국 동북 지역에 유리하다"고 했다. 설령 북한이 핵 공격을 한다고 해도 오염물질이 중국 쪽으로 날아올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잇따른 북핵 실험으로 불안해하는 접경 지역 주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중국 관영 매체가 한반도 전쟁 시 핵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한·일에 집중될 것이라고 보도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12-13 친중파라면 쓴소리하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남한에는 ‘북한 핵심과 선을 대고 있다’는 대북 소식통들이 백가쟁명을 이뤘다. ‘나한테 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보가 된다’는 이들에게 속아 오보를 한 기자들이 한둘이 아니고 돈을 날린 사업가들도 부지기수다.
최근 늘어가는 ‘중국 전문가들’에게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때가 많다. 자기의 ‘소스’는 공개하지 않으면서 중국 권부를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때로는 자신이 중국 당국자인 양 말하기도 한다. ‘저 양반이 만나는 중국인들은 별것 아니다. 내 것이 진짜’라면서 경쟁자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중국도 사회주의 독재국가요, 권력 내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일 수 있다. 어렵게 투자해 선점한 분야에서 살아남으려는 생존 본능도 이해가 간다. 문제는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중국 내 대한(對韓) 여론과 한국 내 대중(對中) 여론을 호도하고 나아가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2010년 대통령직속 자문기관인 민주평통이 전문가 10명을 동원해 북한 체제가 중국의 국가 이익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10가지로 조목조목 제시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자 친중파를 자처하는 한 여당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왜 엉뚱한 일을 해서 중국과의 관계를 어렵게 하느냐’며 관계자들을 질책했다. 7년이 흐른 지금, 양식 있는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는 비슷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사드 문제에 대한 한중 간 오해에도 소통 교란이 있었던 것 같다. 본보 화정평화재단과 일본 아사히신문, 중국 현대국제관계연구원이 지난해 서울에서 주최한 제14차 한중일 3국 심포지엄에 참석한 후지핑(胡繼平) 부원장은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막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기자의 호소에 “다른 한국인들은 ‘(우린 필요 없는데) 미국이 들여놓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던데 왜 다른 말을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만난 중국 측 인사들은 한목소리로 “한국인들이 북한 핵·미사일 개발에 관해 느끼는 불안감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한미의 사드 배치 결정 이후 한중 관계가 경색되자 일부 전문가는 중국을 배신하면 한국 경제가 거덜이 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경쟁력이 떨어진 기업들이 문을 닫고 유커들이 발길을 끊었지만 한국 경제는 거덜 나지 않았다. 대중 수출은 오히려 더 늘었다.
사드 갈등이 ‘봉인’(한국 정부 주장)된 후 한중 간에는 더 많은 소통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중국 측은 ‘단계적 해법’을 강조하며 사드의 한반도 철수를 계속 공론화하고 있다. 한국이 이른바 ‘3NO’를 약속했다고 우기고 있다.
합의를 하고 이를 왜곡해 선전하는 것은 강대국의 특성이다. 하지만 중국 측의 최근 행태는 좀 더 근본적인 대한반도 인식에서 나오는 것 같다.
최근 중국인들은 “한중이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고 한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이냐”고 질문하면 “형제가 아니라 부부 관계”라고 말을 바꾸곤 한다. 지난달 3일 베이징에서 다시 만난 후 부원장에게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6·25전쟁 도발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북-미 갈등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고 다시 쓴소리를 했다. 1년 전과 달리 부드러운 표정의 그였지만 “당시 이승만도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21세기 국가관계를 서열이 정해진 인간관계로 치환하고, 명백한 문서로 입증된 6·25전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를 상대하려면 그들과 소통하겠다고 나선 이들부터 결기를 가져야 한다. 작심하고 쓴소리 해야 겨우 본전이라도 찾을 수 있는 상대 아닌가.
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
■12.16 國賓을 대하는 '중국의 오만'
차관보급이 文대통령 공항영접
한국 기자들 집단폭행하고 장관이 文대통령 팔 툭툭 치고
사흘간 딱 한 끼 식사대접하며 中, 만찬 사진 1장 공개도 안해
국빈만찬 관련 보도, 中매체 한줄도 없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초청으로 방중한 문재인 대통령은 13~15일 사흘간 베이징에서 국빈(國賓) 방문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시종 '국빈 초청'의 외교적 관례를 지키지 않았다. 14일 정상회담 후 공동으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도 없었고 공개 만찬사도 없었다. 국빈 방문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만찬 행사는 만 하루 가까이 사진 한 장 공개하지 않다가, 한국 측만 뒤늦게 비공식 촬영한 사진을 언론에 공개했다. 중국 측은 문 대통령 국빈 방문 사흘 동안 딱 한 끼 식사를 대접하고서, 그 모습조차도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중국 측은 사전 협의 과정부터 사드 문제를 중국 입맛에 맞게 처리하라고 압박하더니, 문 대통령의 베이징 도착 때는 차관보급을 내보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정상회담장에서 '국빈'인 문 대통령과 악수를 한 뒤 '동격'인 것처럼 팔을 툭툭 쳤다. 자칭 '대국(大國)'다운 풍모를 보여주기는커녕, 국제사회의 일반적 외교 규범에도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이어갔다.
14일 국빈 만찬은 의전 관례상 시 주석이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와 함께 문 대통령 내외를 대접하는 자리다. 그에 상응하는 예우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양국 모두 국빈 만찬이 언제부터 얼마나, 어떻게 진행됐는지 밝히지 않았다. 중국 측은 정상회담 후 언론에 제공한 발표문에 '양 정상이 회담했다', '회담 전 시 주석과 펑 여사가 환영식에 참석했다'는 내용만 담고, 국빈 만찬에 대해서는 거론하지도 않았다. 중국 매체에서도 관련 보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 측은 통상 정상의 오·만찬 사진이나 영상 공개에 소극적이긴 하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다. 지난달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 방중 국빈 만찬 때는 관련 자료와 함께 사진을 공개했고, 국영 CCTV를 필두로 한 중국 매체들이 영상까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트럼프 외손녀가 중국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만찬장 대형 스크린에 나왔고, 이런 장면이 다 공개됐었다.
우리 청와대도 국빈 만찬 종료 후 20시간여 동안 보도자료·사진을 제공하거나 브리핑을 열지 않았다. 청와대는 "양 정상의 모두 발언이 없다"는 이유로 국빈 만찬장에 사진·취재기자 모두 대동하지 않았다.
15일 오후 국내 언론에서 '왜 만찬 결과를 알리지 않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자, 이날 오후 5시쯤에야 사진을 일부 공개했다. 그러나 "청와대 전속 사진사도 첫 기념사진만 찍고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면서 참석자들이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만 공개했다. 역대 우리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건배사와 참석자 등에 대한 자료를 당일 배포하고, 양 정상이 인사하는 사진도 공개했다.
양측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결과 발표도 각각 했다. 발표만 따로 한 게 아니라 내용도 달랐다. 한국 측 발표문은 원고지 16장 분량을 발표했다. 반면 중국 측이 14일 낸 정상회담 결과 발표문은, 공식번역본이 없어 정확히 비교는 안 되지만 절반 정도 분량이었다. 우리 측이 성과로 가장 앞세웠던 '한반도 평화·안전 4대 원칙'도 중국 발표문에는 명시되지 않았다. 시 주석이 문 대통령에게 '핵심 이익을 존중'하고 '수교의 초심을 명심'하며 '서로의 핵심 이익과 중대 우려를 존중'하라며 훈계하는 듯한 내용이 많았다. 또 시 주석의 역점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세 차례 명기됐지만 '평창'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았다. 보도문 제일 끝에 '회담 후에 양 정상은 경제무역, 녹색생태산업, 환경, 위생, 동계올림픽 등 각 영역에 대한 양자 협력 문건의 서명을 함께 지켜봤다'는 말만 있었다.
이 같은 논란은 방중 내내 이어졌다. 문 대통령이 지난 13일 베이징에 도착할 때 중국은 차관보급인 쿵쉬안유(孔鉉佑)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를 영접자로 내보냈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빈 방중 때 영접한 장예쑤이(張業遂) 당시 외교부 상무부부장 겸 당서기는 장관급이었다. 또 문 대통령이 13~15일 베이징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 측과 식사한 것은 14일 국빈 만찬이 유일했다. 공식환영식장에선 문 대통령이 왕이 외교부장의 팔을 치며 인사를 건네자, 장관급인 왕 부장이 이미 한두 걸음 지나친 문 대통령의 팔 뒤쪽을 툭 치는 모습도 보였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형식 면에서 국빈 방문에 미치지 못한다"면서 "정부가 내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연내 방중이란 타임 스케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진명 기자
■12-16 시 주석에게 충성맹세한 주중대사의 굴욕
끊임없이 외세에 굴욕당했던 한국
지금도 북한 문제에 주도적으로 못 끼어
안보는 독립 지키는 마지막 보루… 진영에 갇히지 말고 나라 먼저 생각해야
나라는 배타적인 경계 안에서 공통의 가치와 이익을 함께 누리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기 위해 만든 제도다. 여기서 ‘배타적’이라는 말은 나라의 근본 토대를 표현한다. 배타적으로 확보되는 존재성이 바로 ‘독립’이므로, 독립은 나라의 존엄을 가리키는 가장 선명한 명제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자신의 ‘독립’을 조금이라도 침해하는 일에는 가장 예민하고도 과격하게 반응해야 한다. 얼마나 견결하게 영토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느냐가 ‘독립’을 지키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를 증명한다. 중국도 ‘핵심 이익’이라는 사항을 정해 놓고 국가로서의 위엄을 과시한다. 우리의 핵심 이익은 무엇인가? 핵심 이익에 관한 합의가 있기라도 한 것인가?
우리나라는 줄곧 강하지 못했다. 물론 강했던 때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길지는 못했다. 강하지 못한 결과 우리나라의 독립은 자주 손상됐다. 중국은 끊임없이 천자의 지위를 자칭하며 우리를 제후국으로 하대하였다. 주자학 이념에 갇힌 조선의 지식인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는 왕을 향해서 제후국의 왕이 천자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막아서곤 했다. 중국의 압력도 있었지만 스스로 제후국으로 자처하며 종속의 길을 선택한 점도 있다.
최근 영화 ‘남한산성’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우리나라 왕이 중국 청나라 왕 앞에 무릎 꿇고 나아가 머리를 땅에 찧었던 삼전도의 치욕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 뒤로 300년 후에는 일본에 아예 나라를 뺏겨 버렸다. ‘독립’은 사라졌다.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라 없이 살면서 어린 누이들은 위안부로 끌려가고, 젊은 사내들은 남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갔다. 중국과 일본은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다고 할 수 없이 우리의 ‘독립’을 끊임없이 손상시키려 시도하였고, 그들이 전략적으로 맘을 먹을 때마다 국내의 진영 논리에 갇혀 내부 싸움만 하던 우리는 속절없이 당해 왔다.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우리는 다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지금도 북한 문제를 미국과 중국이 논하고 미국과 일본이 논한다. 누구나 알듯이 이 사이에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핵공격에 대비하는 대피 훈련을 실시하고, 중국은 북-중 국경에 군사력을 증강할 뿐만 아니라 난민 수용소를 준비한다. 우리는 미군의 움직임에 겨우 따라붙을 뿐, 심지어는 대피 훈련도 없다. 이 상황을 자신의 문제로 보고 있기나 한 것인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기 문제로 감당하려는 용기가 있기는 한 것인가. 갖고 있는 것들을 잃을까봐 겁먹고 있지는 않은가. 중국의 국가주석이 미국의 대통령에게 “사실 역사적으로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해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위중한 발언인지도 모르고 그냥 눈만 껌벅이며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독립’이라는 최후의 명제를 의식이나 하고 있는가. 아직도 ‘독립’을 말해야 하는 슬픈 우리여.
경기 가평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종암(朝宗巖)이 있다. 소중화(小中華)의 성지다. 중국 명나라를 향한 숭배와 감사를 담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데, 조선 선조(宣祖) 대왕의 글씨 ‘만절필동(萬折必東)’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일을 조종(朝宗)이라 한다. 만절필동은 황허강의 강물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은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묘사하며 충신의 절개를 뜻한다. 의미가 확대되어 천자를 향한 제후들의 충성을 말한다. 남(南)이나 서(西)로 흐르는 강물을 가진 민족이 동쪽으로 흐르려 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사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날 방명록에 ‘만절필동’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한시적인 정권은 영속적인 국권에 봉사해야 한다. 진영에 갇히면 정권만 보이고 나라는 안 보일 수도 있다. 각자의 진영에 갇혀 나라의 이익을 소홀히 하는 일이 길어질 때 항상 독립이 손상되었다. 그 후과는 참혹하다. 지금 한가한 때가 아니다. 경제 이익으로 안보 이익이 흔들리면 안 된다. 안보가 ‘독립’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슬프고 둔감한 우리여, 작은 이익이나 진영의 이념을 벗고, 한 층만 더 올라 나라를 보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12.18 한·미 동맹과 국민 자존심에 상처 낸 訪中 외교
청와대는 17일 "우리의 안보적 이익을 확실히 보호했다" "사드에 따른 경제 문제가 해소됐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3박 4일간 국빈(國賓) 방중 성과를 자평했다. 청와대는 중국과 '북핵 4대 원칙'에 합의한 것을 성과라고 했다. 4대 원칙 중 한반도 전쟁 불용과 한반도 무(無)핵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등 세 가지는 1993년부터 중국이 24년째 되풀이하는 주장이다. 여기에 '남북관계 개선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추가됐을 뿐이다.
특히 '한반도 전쟁 불용'은 말은 당연한 듯 보이나 미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대북 군사 옵션을 포기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지금 중·러는 추가적 대북 압박을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미국이 군사 옵션마저 버리면 북한으로서는 장애물이 전부 없어진다. 북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리가 없다. 군사 옵션은 실제로 군사 행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을 압박해 핵을 포기케 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외교적 해법이 힘을 가지려면 군사 옵션이 뒤를 받쳐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중국이 말하는 한반도 무핵화는 설사 북이 핵을 실전 배치하더라도 한국은 핵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중국과 무엇을 합의했든 이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15일 베이징대 강연에서 "중국과 한국은 근대사의 고난을 함께 극복한 동지"라고 했다. 일제 침략에 함께 맞섰던 중국은 지금의 중국이 아니다. 지금의 중국은 6·25 때 수많은 우리 국군을 살상하고 통일을 가로막은 중국이다. 언제까지나 과거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의 중국과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든 국가든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문 대통령의 방중(訪中)이 난징 학살 80년 추념일과 겹친 것은 슬기로운 택일이 아니다. 우리가 일본과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할 이유가 없다. 시진핑 주석이 난징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대일(對日) 외교를 의식한 것이다. 그런데 직접 당사자 아닌 한국 대통령이 나섰다. 우리는 대일 외교가 필요 없는가.
청와대는 16일 중국 경호원의 한국 기자 집단 폭행에 대해 "중국 측이 최선을 다해 이 문제 해결에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선전기관은 16일 "이번 사건은 한국인(행사 주최 측)과 한국인(기자) 간의 싸움"이라며 "중국 정부의 잘못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 사과할 수 없다"고 했다. 언론 자유가 없는 중국이지만 국빈을 수행한 외국 기자가 처참하게 린치당한 사건은 전례가 없다. 중국이 문 대통령을 국빈으로서 정중히 예우하는 자세였다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청와대는 17일 "문 대통령은 중국에서 홀대당한 게 절대 아니다"는 취지로 말했다. 다친 국민 자존심이 이런 말로 위로받지는 못할 것이다.
문 대통령의 방중으로 사드 보복이 철회되고 중국 내 우리 기업의 압박이 해소될 계기가 마련된 것은 성과다. 그러나 이를 얻기 위해 잃은 것이 너무 많다. '한국은 중국 편에 섰다'는 미·일의 의구심은 더욱 커지게 됐다. 그렇다고 중국의 신뢰를 얻어낸 것도 아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국 문제가 한국 없이 결정되는 참사가 되풀이되지 말란 법이 없다.
조선일보 사설
■12.29 “대학생들, 반중(反中) 감정 높다”, 그 이유는?
얼마 전 젊은이들을 상대로 교양 교육을 하는 지인(知人)으로부터 흥미 있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반중(反中)감정이 높다”는 얘기였다.
반중감정의 원인은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사드 갈등’ 문제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이 우리에게 가해온 무분별한 압력과 고압적인 태도에 대해 대학생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대학에 유학을 온 중국인 학생들의 저열한 행태도 젊은이들의 반중감정을 자극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9월 말 기준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의 숫자는 6만8184명에 달한다. 국내 외국인 유학생 12만3858명의 절반을 훌쩍 넘는 숫자다. 입학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방대 중에는 중국 유학생들 덕분에 유지된다는 학교도 많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들은 캠퍼스 내에서 중국인 유학생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는데, 그들의 시끄러운 목소리, 공중도덕 무시, 안하무인 격 태도 때문에 반중감정을 품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지인은 “심지어 지난 대선(大選)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대학생들 중에서도 중국이라면 치를 떨면서 문재인 정부의 친중(親中)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기성세대는 ‘꼴 보기 싫어도 먹고살자면 중국과 잘 지내야 한다’고 하겠지만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 젊은 세대는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면서 “1980년대에 386세대가 반미(反美)로 흘렀던 것처럼 지금 젊은이들은 반중으로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12월 13일 문재인 대통령 방중(訪中)에 수행했던 한국 기자들이 중국 경호원들에게 구둣발로 짓밟혔다. 이를 말리던 청와대 춘추관 간부도 폭행을 당했다. ‘국빈 방문’이라면서도 문 대통령은 두 끼 연속으로 중국 측 요인과 식사를 하지 못하고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이건 중국의 의도적인 ‘한국 길들이기’다. 하지만 중국의 이런 작태는 안 그래도 반중감정을 품기 시작한 한국 젊은이들을 더욱 자극할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런 대접을 받는 데 대해 분노하지 않을 대한민국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2018.01월 호
■ 중국군 유해인도식 17.3.22 인천국제공항, 6.25 전쟁 중국군 전사자 28구 유해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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