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7/ 대통령5/ 역대 대통령 이야기5/ 이런저런 이야기 - 영수회담 - 영부인들의 활동 - 정상회담 비하인드 - 정상외교 선물전 - 역대 대통령 검찰 소환사
대한민국7/ 대통령5/ 역대 대통령 이야기5/
이런저런 이야기
■ 이런저런 이야기
□신년하례
/신년하례 - 이승만 1959
/1967 박정희
/1986 전두환
/1989 노태우
/2000 김대중
/2012 이명박
□ 대한민국 정부 과거 영수회담 기록
/1988년 5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후 야당대표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4자회담을 가졌다.
입력 : 2016.11.14 14:45
/1988년 5월 18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야3당 영수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종필공화당, 김대중평민당, 김영삼민주당총재(왼쪽부터)가 손을 맞잡고 협조를 다짐하고 있다. 3자가 한자리에 모여 정치현안을 본격 논의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5년 5월 21일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가졌을 때 모습.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에게 먼저 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1996년 4월 18일 낮 청와대에서 5년만에 단독으로 만나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이 1997년1월21일 낮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영수회담에서 국민회의 김대중,자민련 김종필총재,신한국당 이홍구대표와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야기된 노동계 파업 등 시국 타개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2001년 10월 9일 청와대에서 여야영수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2008년 5월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9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영수회담에서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일보
□ 역대 영부인들의 활동
입력 : 2015.08.05 11:36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미국에서 보내온 학용품을 어린이들에게 전달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58년 2월
대한민국의 어머니, 역대 대통령 영부인들 그녀들의 일상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총 10명의 영부인을 맞았다. 모두 대통령의 옆에서 국가운영을 잘 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고 각별한 내조를 펼쳤으며 민생시찰 및 봉사활동 등을 통해 국민들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영부인 공덕귀 여사가 대전 시찰을 하고 있다. /안전행정부제공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울시 동대문구내의 근로자합숙소를 찾아 근로자들에게 사인해주고 있다. 1971년 12월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부인 홍기 여사가 새마을 이웃돕기 상품 전달식에 참석해 상품을 전달하고 있다. /안전행정부제공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해양경찰청 경비함 진수식에 참가했다. 1981년 8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부인 김옥숙 여사가 바로셀로나 장애인올림픽 선수단을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김옥숙 여사가 경기용 소총을 살펴보고 있다. 1992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부인 손명순 여사(오른쪽)가 국군장병과 해안 경찰대원들에게 보낼 사랑의 선물을 만들고 있다. 1995년 12월 6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서울 명동 신세계 백화점에서 열린 '99 수재민 돕기 사랑 나누기 바자회'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 1999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장애인 날 특집방송 녹화를 위해 찾아온 장애우들과 함께 쌀 과자를 만들고 있다. 2008년 4월
사진/조선일보DB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
/고아에게 구호물자 전달하는 프란체스카
/윤보선과 공덕귀
/박정희와 육영수
/고아에게 선물하는 육영수 여사
/최규하 홍기
/이웃돕기 홍기 여사
/전두환 이순자
/이순자 여사
/노태우 김옥순
/김옥순 여사
/김영삼 손명순
/손명순 여사
/김대중 이희호
/이희호 여사
/이명박 김윤옥
/김윤옥 여사
■ 왜 頂上會談인가 - 비하인드 정상회담
치밀한 연출속 ‘선물’과 ‘압박’ 오가는 ‘국제외교의 꽃’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집권 전인 1959년 “벼랑에서 만나는 것보다 정상에서 만나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정상회담’의 중요성을 간파한 말이다. 각국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정상회담은 국제 외교의 ‘꽃’이다. 하지만 그 꽃은 저절로 피는 게 아니다. 끝없는 ‘밀당’(밀고 당기기)과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치밀한 연출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은 연애와 비슷하다. 성공하면 아름다운 결실을 보지만 실패하면 그보다 잔인한 것도 없다.
8일 청와대 충무실에서는 한국을 방문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를 환대하는 만찬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호주산 쇠고기와 호주산 와인 투 레프트 피트(Two Left Feet·두 개의 왼쪽 발)를 내놓았다. 이 와인에는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담겨 있다. 포도주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부는 처음 데이트를 할 때 남편이 하도 긴장을 해 춤을 추면서 계속 부인의 발을 밟았다고 한다. ‘두 개의 왼쪽 발’에는 연애 초 설레는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다.
이날 만찬의 하이라이트는 가야금 연주였다. 애벗 총리가 구슬픈 가야금 소리에 흠뻑 젖어있을 때 연주된 곡은 다름 아닌 호주의 전통민요 ‘왈츠를 추는 마틸다(Waltzing Matilda)’였다. 애벗 총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국과 호주는 2006년 12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시작한 지 7년 4개월 만인 이날 협정서명식을 열었다. 양국 정상 모두 취임 이후 처음 서명한 FTA였다. FTA 타결에는 정상 간 이런 유대감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정상의 실력이 드러나는 정면승부의 장
애벗 총리도 박 대통령의 감성을 흔들었다. 그가 준비한 선물은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했을 때 육영수 여사, 영애 시절의 박 대통령과 함께 기념식수를 하는 사진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아버지를 따라 처음 해외 순방에 동행했다. 16세 소녀의 눈에 호주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박 대통령은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당시의 추억을 적어놓았다.
두 정상은 11월 호주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다시 만난다. 그곳에서 또 어떤 드라마를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당장 다음 주에도 다른 드라마 한 편이 예고돼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5일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박 대통령과는 세 번째 만남. 더이상 탐색전은 없다. 서로의 구애(求愛)에 어떻게 화답할지 지켜볼 일이다.
정상회담은 각국 정상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면승부의 장이다. 아무리 참모들이 준비를 많이 해줘도 현장에서 대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순전히 정상의 몫이다. 정상회담도 비즈니스 협상과 다르지 않다.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상대의 호감을 얻는 게 우선이다. 정상회담에 앞서 상대의 기호(嗜好)를 세세하게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상대가 ‘파격적 예우’를 받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도 필수다. 정상회담을 ‘배려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파격의 달인’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2011년 10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초청한 오바마 대통령은 만찬 장소를 백악관이 아닌 외부 식당으로 잡았다. 그것도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 주에 있는 한식당 ‘우래옥’으로.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까지 식사를 하러 간 것이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불고기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비빔밥을 시켰다. 식사 도중 미 의회에서 한미 FTA 이행법안을 통과시키는 ‘깜짝 선물’도 안겼다.
지난해 5월 박 대통령을 초청했을 때는 국빈방문이 아닌데도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경호를 지원했고 백악관 영빈관인 ‘블레어하우스’를 숙소로 내줬다. 영빈관에는 1965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명록 서명이 놓여 있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오찬장으로 이동하기 직전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배석자를 물리고 잠시 백악관 로즈가든을 산책하자고 제안해 두 사람만 10여 분간 사적인 대화도 나눴다.
당신이 행복할 때까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회고록 ‘마이 라이프(My Life)’에서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7월 방한 당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청와대 연무관에서 수영을 하는데 스피커에서 자신의 애창곡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수영하는 동안 엘비스 프레슬리부터 재즈까지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나왔다. 한국의 후한 환대의 사례”라고 적었다. 외교부에서 사전에 클린턴 대통령의 애창곡까지 세심하게 챙긴 결과였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파격 예우’가 화제였다. 두 정상은 예정에 없던 특별오찬을 포함해 무려 7시간 30분을 함께 보냈다. 지난달 독일 작센 주 드레스덴 방문에서는 스타니슬라프 틸리히 작센 주 총리가 박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다시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전체 일정을 수행해 한국 측을 놀라게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동북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 외국에서 호감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순방 기간에 방문국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을 반드시 찾는 것도 친밀감을 높이려는 의도다. 올해 1월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인도 독립의 성지(聖地)이자 세계문화유산인 레드포트를, 지난해 6월 중국 방문 때는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의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을 찾았다.
박 대통령의 ‘드레스코드’도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항상 방문국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색상을 택한다. 프라나브 무케르지 인도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을 때 박 대통령의 한복은 녹색 치마에 노란색 계열의 저고리였다. 인도 국기와 같은 색상이었다. 그러자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부인은 “인도 분위기(Indian touch)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박 대통령은 순방 시 의상을 직접 고른다고 한다.
‘감성 터치’가 먹히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두 차례 통역이 필요 없는 정상회담을 열었다. 바로 북한이다. 2000년과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은 여느 정상회담과 전혀 달랐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말 북한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과 비료 제공을 맞바꾸는 비밀회담을 시작했다. 이듬해 협상이 타결되면서 대북 비료 지원이 시작됐다. 그해 말부터는 북한이 여러 채널로 한국에 경제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어떤 의제를 논의할지 정하지 못했다. 아니,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정상회담에 앞서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두 차례 평양으로 가 청와대가 생각하는 정상회담 의제와 남북공동선언 초안, 일정과 경호, 의전 등에 관한 주문사항을 전달했으나 평양은 침묵했다.
뜻밖에도 김 위원장은 공항까지 ‘깜짝 영접’을 나왔다. 파격 예우의 중요성을 알았던 걸까. 김 대통령은 전용 1호차에 타지 않고 김 위원장과 동승하는 ‘충격’(경호의 관점에서는)도 연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차 회담에서 카메라가 빠지자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에게 “섭섭한 말씀을 드려야겠다”며 운을 뗐다. 당시 한국 일부 대학의 인공기 게양 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했다. 김 위원장은 “이런 분위기에서 회담을 할 수 없다”며 “환대 받는 것에 만족하고 푹 쉬었다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7년 정상회담도 어렵사리 남북공동선언까지 채택했지만 전말은 순조롭지 않았다. 외교 의전상 정상회담은 서로 녹음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파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남북 간에는 서로 녹음을 한다.
심지어 2007년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측 대표단의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에서는 도청장치가 7개나 발견됐다. 정부 당국자는 “숙소에 카펫이 아닌 장판이 깔린 것이 이상해 걷어내니 도청장치가 있었다”며 “일부러 북측에서 들으라고 ‘이건 뭐야’라며 소란스럽게 뜯어냈다”고 말했다. 남북 간 합의문 초안을 만들 때도 혹시 몰래카메라에 찍힐까 봐 실내에서 우산을 쓰고 작성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긴장의 연속, 아찔한 순간
박 대통령의 참모들에게 외국 방문에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을 물으면 누구나 주저 없이 ‘꽈당 사건’을 꼽는다. 지난해 11월 6일 영국 방문 때 박 대통령이 런던 시장 주최 만찬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다 넘어진 사건만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는 것이다. 당시 박 대통령은 “드라마틱한 입장(Dramatic Entry)”이라는 재치 있는 말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의전과 경호에 큰 허점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청와대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올 1월 말 청와대 경호실 수행부장이 교체된 데 이 사건이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고 나온다.
순방 기간에 가장 긴장하는 참모는 아무래도 통역일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최악의 정상회담 중 하나로 꼽히는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의 한미 정상회담은 ‘통역의 실패’라는 지적도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평화체제 논의가 가시권에 왔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부시 대통령은 이와 유사한 얘기를 했지만 통역이 그 뜻을 충분히 노 대통령에게 전하지 못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종전(終戰) 선언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다시 한번 부시 대통령을 ‘졸랐고’, 부시 대통령은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역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자 노 대통령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해 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더이상 어떻게 분명히 말하느냐”고 받아쳤다.
박 대통령의 통역은 정반대 경우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오히려 박 대통령이 통역 내용을 바로잡아주기 일쑤다. 1월 스위스를 방문해 평생교육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통역은 평생교육을 ‘Lifelong education’으로 전달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Continuing education’이라고 수정했다.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를 박 대통령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3월 독일에서는 박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전당대회 때 통화했다는 얘기를 통역이 옮기면서 전당대회를 ‘Party congress’라고 하자 이번에도 박 대통령은 ‘Party convention’이라고 직접 바로잡았다.
여러 정상이 모이는 다자회의에서 이뤄지는 양자회담은 매우 긴박하게 일정이 잡히는 일이 많아 정상의 순발력이 중요하다. 3월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열린 한중 정상회담은 출국하기 이틀 전 회담 날짜가 정해졌다고 한다. 다행히 두 정상이 오랜 인연으로 친분이 두터워 30분 예정된 정상회담은 1시간 2분간 진행됐다. 박 대통령은 준비한 얘기를 가능한 한 전부 하는 스타일이고, 시 주석은 통 크게 화답하는 일이 많아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세계 역사의 전환점에는 언제나 정상회담
‘정상(summit)’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다. 냉전시대인 1950년 2월 14일 영국 에든버러 연설에서 소련 최고위층과의 회담을 제안하며 “정상에서의 회담으로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1953년 5월 11일에는 “각국이 정상에서 평화의 의지를 다지자”고 호소했다. 이 무렵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여덟 번째 도전 만에 정상을 정복했다. 미국 국무부는 1955년 등산용어였던 ‘정상’이란 표현을 정식 외교용어로 처음 채택했다. 물러설 곳 없는 정상에서 지도자들끼리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이란 용어는 적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이란 용어가 1950년대에 등장했다고 해서 그전에 정상회담이 없었던 건 아니다. 369년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의 지도자인 아타나리크를 다뉴브 강에서 만나 고트족의 이주를 허락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정상회담은 제국의 국경을 이루는 강에서 주로 열렸다는 점이다. ‘정상회담’의 저자인 데이비드 레이놀즈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역사학과 교수는 “그곳이 누구의 땅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행기와 미디어의 발달은 정상회담의 패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현대적 의미의 정상회담을 개척한 사람은 네빌 체임벌린 전 영국 총리다.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 광기를 잠재우고자 1938년 히틀러에게 독일 뮌헨 회담을 은밀히 제안한다. 히틀러의 별장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회담을 어떻게 진행할지부터 논의했다. 의제까지 세심하게 정하고 만나는 지금의 정상회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뮌헨 합의서’를 체결하고 귀국한 체임벌린 전 총리의 일성은 “유럽에서 전운(戰雲)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확히 1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현대 정상회담은 이처럼 암울하게 시작됐다.
그럼에도 20세기 세계 역사의 전환점에는 늘 정상회담이 자리하고 있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모두 네 차례 정상회담을 열었다. 레이놀즈 교수는 네 번의 정상회담이 ‘유화→억제→긴장 완화→변모’의 패턴을 밟았다고 진단했다. 가장 극적인 미소 간 정상회담은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회담이다. 냉전 종식의 물꼬를 튼 역사적 회담이었다. 레이놀즈 교수는 “데탕트(긴장 완화)를 넘어 냉전 세계를 변모시킨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이상가 고르바초프의 재촉을 받은 ‘과격한 냉전의 전사’ 레이건이었다”고 말했다.
▼ 이승만 “일본과는 상종안해” 美 국빈방문때 ‘호통회담’ ▼
‘호통 외교’로 출발한 대한민국 정상회담
▲1952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오른쪽)가 이승만 대통령이 선물한 태극기를 받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6·25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이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아일보DB
대한민국 최초의 정상회담은 1949년 8월 방한한 장제스(蔣介石) 대만 총통과 이승만 대통령의 회담이다. 하지만 이보다 주목해야 할 회담은 1954년 7월 미국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이다. 헌정 사상 처음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외교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이른바 ‘호통 외교’다.
발단은 한미 정상회담 뒤 발표할 공동성명서의 초안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로서…’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해 동아시아에서 미군이 원활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한일 간 불편한 관계로 미국이 골머리를 앓은 것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 대통령은 참모들을 불러 폭탄선언을 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지!” 이 대통령은 참모들의 거듭된 설득에 회담장에 가기는 했지만 10분 지각했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일 국교 수립 얘기를 꺼내자 이 대통령은 폭발했다. “내가 사는 한 일본하고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화를 벌컥 내며 옆방으로 가버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가까스로 화를 삭이고 회담장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이 대통령이 일어났다. “외신기자클럽에서 연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니 먼저 갑니다.” 후손들이야 통쾌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당시 한국 참모들이나 미국 측의 표정은 어땠을까.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의 해외 순방은 △이승만 6회 △박정희 8회 △전두환 7회 △노태우 12회 △김영삼 14회 △김대중 24회 △노무현 28회 △이명박 49회다. 정부 관계자는 이런 기하급수적 증가가 “한국 위상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한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원하는 나라가 끊임없이 방문을 요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다자회의 참석도 많아졌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1년 2개월간 7차례에 걸쳐 13개국을 방문했다. 모두 방문국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사용한 경비는 약 33억3000만 원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5년 동안 사용한 순방 비용은 약 1200억 원으로 한 번 출국할 때마다 평균 24억5000만 원을 썼다.
이것이 바로 ‘정상회담 의전’
국제적으로 상석은 오른쪽이다. 문화적 종교적으로 왼쪽을 불결하게 여기는 전통의 흔적이다. 따라서 손님이 오른쪽에 선다. 박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면 방문국 정상 오른쪽에, 외국 정상이 한국을 찾으면 박 대통령이 외국 정상 왼쪽에 서는 것이다. 국기는 보통 엇갈려 놓는다. 외국 정상 뒤에 태극기를, 한국 정상 뒤에 상대국의 국기를 놓는 식이다. 러시아 등 일부 국가는 방문하는 국가의 국기를 예우 차원에서 오른쪽에 놓기도 한다.
정상의 방문은 △국빈방문 △공식방문 △실무방문 △사적방문 등 네 가지로 구분된다. 국가마다 방문 형식에 따른 의전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한국은 국빈방문 시 정상회담을 열고 대통령 주최 만찬을 제공한다. 또 외국 정상과 공식 수행원 10명의 체재비와 차량 6대를 지원한다. 경찰 사이드카는 17대를 동원한다. 한국은 국빈방한을 대통령 임기 중 국가별 1회로 제한한다. 다만 재선하면 예외적으로 재차 국빈방한이 가능하다.
미국은 해외 순방 때 대통령 방탄차(비스트)를 미국 현지에서 공수해온다. 필요하면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마린 원)까지 가져온다. 수행원 규모가 경호원을 포함해 700여 명에 이르다보니 호텔 한 곳을 통째로 빌리기도 한다. 대통령 숙소를 기준으로 위아래 여러 층을 비워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정상은 서울시내에서 하얏트호텔을, 일본 정상은 신라호텔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빈방문 때는 공항에 내리면 21발의 예포를 쏜다. 왜 21발일까. 예포는 싸움에서 이긴 쪽이 패한 적에게 무장해제의 표시로 탄환을 모두 소진하는 17세기 영국 해상 관습에서 유래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함정에 적재하는 표준 포의 수가 7문이라는 점에서 7발을 쐈다. 하지만 당시 화약은 해상보다 육지에서 보관하기 쉬웠다. 해상에서 1발을 쏠 때 보통 육지에서는 3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해상에서 7발을 쏠 때 육지에서는 21발을 쏠 수 있었고, 그 관행이 굳어져 예포가 21발이 됐다는 얘기다.
방문국의 초청을 받아들여 순방 일정이 정해지면 통상 두 달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팀장으로 한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가 꾸려진다. 여기서 3, 4차례 회의를 거쳐 세부 의제와 일정 등을 조율한다. 한 달 전에는 의전 경호 홍보 담당자들이 현지답사에 나선다. 훈장이나 선물 교환 여부, 경호용 총기류와 통신장비 반·출입 절차, 비표 운용 계획 등도 꼼꼼히 논의한다.
대통령 순방 행사는 보안 유지를 위해 코드명을 붙인다. 지난해 5월 미국 방문 때 코드명은 ‘새시대’였다. 같은 해 6월 방중 때는 ‘서해안’이란 코드명을 붙였다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급히 변경하기도 했다. 코드명은 보통 세 글자로 붙인다.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할 때는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만난다고 해 각자 이름의 앞 글자를 따 ‘노고산’이라고 붙였다.
이재명 egija@donga.com ·조숭호·윤완준 기자
■ 정상외교 선물전
역대 대통령의 선물과 유품
■정상외교 선물 특별전 '대한민국에 드립니다.'
2018년 5월 2일
▲2일부터 청와대 사랑채에서 정상외교 선물 특별전 '대한민국에 드립니다'가 열린다. 이번에 공개하는 정상외교 선물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각국 정상과 주요 인사들로부터 받은 실물 70여 점이다. 사진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평양에서 개최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선물한 '거북선' /연합뉴스
▲청와대는 오는 2일부터 6월 30일까지 정상외교 선물 특별전 '대한민국에 드립니다.'를 사랑채에서 개최한다. 사진은 미국, <시베리아 호랑이> : 2018년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증정한 선물이다. 이 작품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1983년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의 동물 10종을 주제로 제작한 판화 작품 중 하나이다 /뉴시스
▲사진은 중국, <바둑 세트> : 2017년 12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서 받은 선물로 바둑판은 홍목으로 제작되었으며, 청옥과 백옥으로 만든 바둑돌로 구성돼 있다 /뉴시스
▲사진은 작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바티칸시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선물 받은 '청동 올리브 가지' /연합뉴스
▲사진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진달래꽃 상감청자 반상기'로 고려청자를 계승한 것으로 진달래꽃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합뉴스
▲사진은 작년 5월 일본에서 열린 제7차 한중일 정상회의에 참석했을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선물한 '쌍안경' /연합뉴스
▲사진은 2017년 12월 중국 방문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에게서 받은 '분마(奔馬)' 이 작품은 중국 화가인 한메이린이 그린 것으로 말이 질주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양국 국민이 행복하고 나라가 번영하며 한중 간 우호가 끊임없이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8년 12월 뉴질랜드 방문 당시 팻시 레디 총독에게서 받은 '은빛 고사리 브로치'. 은빛 고사리는 뉴질랜드 전역에 서식하는데 '실버펀'이라고도 불리며 뉴질랜드를 상징한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7년 12월 중국 방문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 부인 펑리위안 여사에게 선물 받은 '중국 민가'. 이 CD에는 국민가수로 불렸던 펑리위안 여사가 직접 부른 노래가 녹음되어 있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7년 11월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방한 당시 선물한 '레기스탄 광장 모형'. 고대 유적지로 유명한 사마르칸트에 레기스탄 광장이 있으며 레기스탄은 '모래의 땅'을 의미한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7년 11월 인도네시아 방문 당시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게서 받은 '은쟁반 세트'. 인도네시아의 은세공품은 자바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이 식기는 수공예품으로 설탕통과 주전자가 세트를 이룬다 /연합뉴스
▲사진은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2018년 9월 방한 당시 선물한 '아르주나와 스리칸디'. 이 인형은 인도네시아 인형극에서 사용되는 꼭두각시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왼쪽은 아르주나이고 오른쪽은 그의 아내 스리칸디이다. 이 둘은 모두 용맹한 전사였다고 한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8년 7월 싱가포르 방문 당시 리센룽 총리에게 받은 '페라나칸 타일 액자'. '페라나칸'은 중국계 이주민과 말레이인으로 형성된 인종과 문화를 일컫는 것으로 이 타일은 페라나칸 문화에서 주로 사용되며 용이 장식되어 있다 /연합뉴스
▲사진은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가 2018년 4월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했을때 선물한 '찰스 디킨스 찻주전자'. 이 주전자의 몸체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뚜껑은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일부분을 펼쳐놓은 것이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8년 11월 파푸아뉴기니 방문 당시 피터 오닐 총리에게서 받은 '조개 화폐'. 이것은 조개로 엮은 파푸아뉴기니의 전통 화폐로 토라이족 등은 지금도 이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8년 11월 인도 방문 시 사비타 코빈드 인도 대통령 부인에게서 받은 '시타르'. '시타르'는 인도 북부에서 발달한 전통 현악기이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8년 10월 프랑스 방문 당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서 받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개요'. 이 책은 1820-1822년 판으로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합뉴스
▲사진은 2018년 10월 바티칸 시국 방문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받은 '평화의 메달'. 이 메달은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6주년을 맞이해 제작되었으며 '평화와 함께하면 아무것도 잃지 않지만, 전쟁에서는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2019.04.02 조선일보
▲세계에서 온 정성 - 1969. 8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단독정상회담에서 증정받은 '아폴로 11호 달착륙 기념패'
▲1980. 5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을때 할리드 빈 압둘 아지스 알 사우드 국와으로부터 증정 받은 '고리가 있는 사미터'
▲1984. 6월 포르투갈 마리오 소아레스 수상이 국빈방문을 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선물한 '포르투갈 고역상선 모형'
▲1992. 11월 한국을 방문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증정한 '꽃잎 무늬가 있는 화채 그릇 세트'
▲1994. 3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국 공식방문 시 장쩌민 국가주석으로부터 선물 받은 '중국 명조 5대 황제 재임기 제조 붓'
▲1999.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 참석차 뉴질랜드를 공식 방문했을 때 한국전참전용사회 테리 세뮤얼 회장으로부터 받은 '카우리로 만든 벽시계'
▲2006. 2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압둘 칼람 인도 대통령이 전 노통에게 증정한 선물 '은상감 나무 코끼리 조각'
▲2010. 8.12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기니 오비앙 은게마 음바소고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증정한 '아프리카 사람 조각상'
■ 역대 대통령 검찰 소환사
▲1995년 11월 15일 노태우 前대통령을 태운 검은색 그랜저승용차가 취재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희동을 떠나고 있다.
입력 : 2017.03.21 08:27 | 수정 : 2017.03.21 08:37
지난 1995년 검찰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기업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전직 대통령들을 수사했다.
그 해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전직 국가원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검찰에 출석해 17시간의 조사를 받았고 재소환 끝에 구속 됬다.
한 달 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검찰 소환을 거부하는 골목성명을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곧바로 구속됬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징역 12년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이 확정됬지만, 두 사람 모두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로부터 14년만인 2009년 4월 박연차게이트에 연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혐의로 대검찰청에 나와 조사를 받았다. 대검 중수부는 강도높은 조사를 진행한 뒤 구속영장 청구여부를 고심했는데, 그러는사이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수사는 종결됬다.
헌정사 최초로 탄핵심판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네번째로 검찰에 소환된 전직대통령으로 기록된다.
▲1995년 11월 15일 검찰로부터 두번째 소환 요청을 받은 노태우씨가 대검찰청 입구로 들어서고 있다.
▲1995년 11월 15일 검찰에 재소환된 노태우 前대통령이 침통한 표정을 지은채 대검청사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1995년 12월 2일 오전 연희동 자택앞에서 5.18 및 12.12수사와 관련한 검찰의 소환요구에 불응,현정권에 정면도전의사를 밝히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1995년 12월 11일 검찰소환에 불응한 최규하 전대통령 집앞에 재야단체와 학생들의 시위에 대비해여 전경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12.12, 5.18재판 증인으로 1996년 11월 14일 강제구인된 최규하 전대통령(왼쪽에서 두번째)이 지팡이를 짚고 서울고법 417호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출두하기 위해 봉하마을을 떠난 2009년 4월 30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을 배웅한 친노인사들이 사저를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으로 출두하기 위해 2009년 4월 30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택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자들 앞에서 "국민께 면목이 없다.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있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소환조사를 받기위해 김해봉하마을에서 버스로 대검청사에 도착 포토라인에 서있다.
조선일보
2017.03.22 전두환-노태우 수사 김기수 전 검찰총장 비화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검찰 조사를 마친 후 삼성동 자택으로 들어서고 있다. / photo by 뉴시스
3월 21일 오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될 때 교통통제와 휴식용 침대 마련 등 검찰이 ’과잉 예우’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박 전 대통령의 검찰행 때문에 강남 일대 출근길 교통이 마비됐고, 서울중앙지검 도착 후 검찰 관계자의 마중을 받으며 미소짓는 표정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과정은 일반인 수사와는 다소 다를 수밖에 없다. 불시에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철저하게 방지해야 하고,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낼 수 있도록 전략을 짜야 한다. 어느 정도 예우를 하지 않으면 지지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을 수 있고, 피의자가 진술을 거부할 가능성도 있다.
최초로 전직 대통령 수사(전두환, 노태우)를 지휘했던 김기수 당시 검찰총장을 박 전 대통령 소환 전날인 20일 서울 서초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전 총장은 19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소환,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을 검찰로 불러낸 검찰총장이다.
그는 같은해 12월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거부하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자 최환 서울지검장에게 “도주한 전씨를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해 체포했다.
▲김기수 전 검찰총장 / 사진출처=조선DB
한치의 틈도 없는 소환계획 필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한 검찰총장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직 구속가능성을 높게 보는 건 아닙니다. 제가 분석하기에 법적으로는 구속을 확신할 수가 없어요. 물론 검찰이 여론을 의식해 구속하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대선을 앞두고 있어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면 보수세력이 결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게 됩니다.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구속과 불구속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보입니다.”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노태우)을 검찰에 소환 조사한 검찰총장입니다.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 조사할 것인지 검찰도 고민이 클 텐데요. 당시엔 어떻게 조사를 지시했습니까.
“조사는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춰서 하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소환과정에서의 예우입니다. ”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의전 말인가요.
“파면된 대통령이니 의전이라고 하기엔 좀 부적절하고… 예우 정도로 말합시다. 예우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전직대통령인데 어느 정도 예우를 받지 못하면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첫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사고가능성입니다. 혹시라도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면 검찰수사는 완전히 망가지는 겁니다. 또 식사와 생리현상 등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검찰이 공격당할 가능성도 많아요. 그래서 한치의 틈도 없도록 완벽한 소환계획을 짜야 했습니다.”
전두환 체포당시 차에 실린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체포해 데려올 때는 어땠습니까.
“합천에서 오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중간에 식사나 생리현상을 거를 수 없는 시간인데 휴게소에 갈 순 없잖습니까. 휴게소에 가면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어떤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고 그분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준비를 다 하고 갔어요. 차에 소변통도 실어놓았고 간단한 식사도 준비해서 가져갔습니다. 차를 떠날 수 없도록 한 거죠.”
-전 전 대통령은 안양교도소로 바로 갔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검찰로 출두했죠.
“그때 사실상 ‘전직 대통령 검찰 소환 예우 매뉴얼’ 이 만들어졌다고 봐야죠. 그 이후 전직 대통령 소환때는 모두 노태우 전 대통령 소환당시를 참고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환 관련 계획은 누가 결정합니까.
“지금 박 전 대통령은 서울지검에서 조사받으니까 서울지검장이 할 겁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때는 중수부에서 수사를 했고 전직 대통령 조사가 처음이라 검찰총장인 내가 다 진두지휘했지요.”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전직 대통령이 검찰청사 내부를 잘 모르니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거물급 피의자가 오면 보통 담당 수사관이 데리러 나가서 안내를 하는데 전직 대통령은 검찰 일반직공무원 중 가장 높은 검찰 사무국장이 나가도록 했습니다. 조사 전 수사책임자와 티타임을 갖도록 했고요. 화장실 사용도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계획합니다. 모든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다 합니다. 식사도 미리 변호인측과 상의를 하는데, 도시락을 싸오겠다면 괜찮은데 검찰에서 제공하는 걸로 먹겠다고 하면 검찰은 부담이 많아집니다. “
-부담이 많아지다뇨.
“주변 식당에서 배달이나 포장을 해야 하는데, 맛은 둘째치고 조리과정은 물론 배달이나 포장, 운반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가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거든요.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일행이 직접 일식집에 가서 포장해온 도시락을 먹었기 때문에 검찰측의 부담은 덜했습니다. 제가 있던 시절은 아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때는 곰탕을 시켰는데, 수사관들이 검찰청 주변 식당 여러 곳을 돌며 맛을 점검했고, 당일에는 수사관이 가서 주방에서 끓인 곰탕을 먼저 맛본 후 대통령 식사용 곰탕을 같은 솥에서 퍼낸 걸 확인 후 가져왔다고 합니다.”
-식사 외에 음식물 반입도 괜찮습니까.
“식사를 의논할 때 간식도 이야기를 합니다. 전직 대통령들은 대부분 고령이기 때문에 중간 휴식도 필요하고 오랜 조사에 피곤해 간식이 필요한 경우도 많거든요. 또 밤늦게까지 조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간식이 꼭 필요합니다.”
첫 여성 전직대통령이라 부담 컸을 것
-이번에도 전직 대통령 소환조사 당시를 참고해 예우하면 되겠습니다.
“근데 여성은 처음이잖아요. 지금 검찰은 엄청나게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여성의 몸 상태나 생리현상도 고려해야 하고 여성수사관이 옆에서 밀착보조를 해야 할텐데 여성수사관이 많지도 않아요. 또 깔끔한 성격이라고 알고 있는데 낯선 환경에 적응이 안된다고 주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요. “
-박 전 대통령이 식사는 직접 가져올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점심 저녁 두 끼는 싸 올 수 있을텐데 조사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 간식도 준비할 겁니다. 혹시 직접 준비를 못 할 경우에 검찰측이 언제라도 해결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
-박 전 대통령은 남이 썼던 변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보도도 있었죠.
“이번 조사를 위해 새로운 변기를 설치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 그 얘기가 언론에서 그정도로 떠들썩했는데 모른척 할 순 없지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검찰에게 전직 대통령 수사가 얼마나 까다롭고 부담이 큰 일인지 내가 알기 때문에 하는 얘깁니다. 지나친 예우다 의전이다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검찰의 최대 목표는 제대로 된 진술을 끌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요. 물론 과잉의전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동시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교통통제 후 빨리 도착하게 한다거나, 식사제공에 만전을 기한다거나 하는 일은 수사상 필요한 일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1일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은 후 22일 아침에 귀가했다. 박 전 대통령은 진술을 거부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조사에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예우에 만전을 기한 검찰의 수사계획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2017-03-18 조사실밖 고성 새나온 노태우… 신문조서 3시간 살핀 노무현
전직 두 대통령의 검찰조사 비교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검찰에 출두할 예정이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것은 노태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3번째다. 두 노 전 대통령의 사례를 짚어보면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와 조사가 어떻게 이뤄질지 예상할 수 있다.
○ ‘첫 검찰 소환’ 전직 대통령 노태우
1995년 11월 1일 오전 9시 45분 대검찰청 청사 앞 포토라인에 선 노태우 전 대통령.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않다가 “한 말씀만 해 달라”는 취재진의 거듭된 요청에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청사로 들어갔다. 그는 재임 중 비자금 5000억 원을 조성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김유후 변호사(전 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와 함께 7층 중수부장실로 올라간 노 전 대통령에게 안강민 중수부장과 이정수 수사기획관이 대추차를 내놨다. 13분가량 이어진 티타임에서 안 중수부장은 “나라를 위해 깊이 생각하시고 결심하셔서 혼란을 해소할 수 있도록 조사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고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오전 10시경부터 대검 11층 서쪽 복도 끝 중수부 VIP 특별조사실(특조실)에서 조사가 시작됐다. 주임검사인 문영호 중수2과장과 김진태 검사의 질문은 직선적이고 날카로왔다. 노 전 대통령은 반발했다. 조사실 밖으로 고성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문 과장이 “5000억 원의 비자금 조성 과정을 상세히 밝혀 달라”고 하자 노 전 대통령은 “일국의 대통령으로 5년간 국정을 운영한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실무적인 부분을 일일이 기억해서 얘기하라고 요구하느냐”고 따졌다. 노 전 대통령은 점심으로 서울 강남의 한 일식당에서 만든 생선회 도시락을 먹었다.
조사는 16시간 동안 이어져 다음 날 오전 2시 20분경 끝났다. 검찰은 2주 뒤 노 전 대통령을 재소환해 밤샘 조사한 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구속 수감에 앞서 대검 청사를 나서며 “여러분 가슴에 안고 있는 불신 그리고 갈등, 이 모두 내가 안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형을 받은 뒤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 ‘360km 이동’ 노무현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0일 검찰에 출석했다. 사저가 있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조사 장소인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까지는 360km. 검찰은 헬기로 이동할 것을 권했지만 노 전 대통령 측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거부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경호실이 준비한 42인승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경호실 차량 2대가 에스코트를 했다. 또 사복 경찰관 20여 명이 탄 미니버스와 순찰차 2대가 따라붙었다. 버스는 출발한 지 5시간 17분 만인 오후 1시 20분 대검찰청에 도착했다. 청사 본관 앞에 내린 노 전 대통령은 포토라인에 멈춰 선 뒤 “면목 없습니다”라는 한마디만 하고 바로 청사로 들어갔다.
조사는 대검 중앙수사부 1120호 특별조사실에서 이뤄졌다. 주임검사인 우병우 중수1과장(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 혐의별 담당 검사 3명이 돌아가며 질문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전해철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변호인 자격으로 동석했다. 판사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은 조사 과정 내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가족과 측근이 돈을 받은 사실을 몰랐다”고 적극 해명했다.
이날 오후 6시 30분경 노 전 대통령은 조사실 옆 대기실에서 수행 참모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대검 인근 식당에서 배달해온 곰탕이었다.
조사는 오후 11시 20분까지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A4용지 80여 쪽 분량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3시간 가까이 꼼꼼히 검토한 뒤 이튿날 오전 2시 10분경 서명 날인했다. 이인규 중수부장이 조사실에 들러 “고생하셨다”고 인사했고, 노 전 대통령은 “최선을 다했다”고 답했다. 청사 밖으로 나온 노 전 대통령은 취재진에게 “최선을 다해 (조사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한 뒤 봉하마을로 향했다. ◎
권오혁 hy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