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5/ 대통령3/ 역대 대통령 이야기3/ 6.노태우(盧泰愚) - 7 김영삼(金泳三) - 8 김대중(金大中) - 9 노무현(盧武鉉)
대한민국5/ 대통령3/ 역대 대통령 이야기3/
6.노태우(盧泰愚) 1932.12,04 -
13대 1988.2 - 1993.2
성장기
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병수는 노태우의 8살때 교통사고로 사망해, 가계는 가난했다. 노태우는 숙부 노병삼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노태우는 1939년 3월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6킬로나 떨어진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공산소학교를 졸업한 후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와 경북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의사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참전하게됐다. 학도병으로 있던 중 대구의 헌병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정규 육사 1기생이 됐다.
사관생도 시절에 전두환, 정호용 등과 친분을 맺었으며 럭비부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노태우는 1955년 육사를 졸업하고 소대장으로 임관한 뒤 이듬해 봄에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보병사단의 사단장이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정규 육사 출신인 노태우를 각별하게 대했고 점심에 초대하거나 함께 오리사냥을 가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노태우는 육군 중위 재직중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본가를 자주 출입하다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을 만났다. 김옥숙은 1959년 5월 31일 노태우는 김옥숙과 결혼했다. 같은해 전두환 등 여타 장교들과 함께 6개월동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랙기지로 군사유학을 가서 심리전 학교, 특수전학교 두 과정을 수료했다. 1960년 초에는 북극성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노태우는 1960년 대위로 진급해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가 됐다. 1961년 전두환 등과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요원이 되고 서울대 학군단 교관이 되어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인 장교후보생을 교육했다. 이때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지지 행진'에 참가했다.
박정희는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 정보과에 배속시켰다. 노태우는 국군 방첩부대 정보장교를 거쳐 1966년에는 육군본부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동향을 수집했다. 1962년에는 하나회의 모태가 되는 북극성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1967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대장으로 파견됐다. 노태우는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68에 귀국한 뒤에는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수도경비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70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장교가 됐다. 1971년에 보병연대장을 거쳐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4년간 공수특전여단 여단장을 지냈다.
정치 시작
노태우는 1976년 박종규, 차지철 등에 발탁되어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됐다. 1978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 그 해 전두환이 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 등의 후원 하에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전격 발탁됐다.
노태우는 하나회의 모태가된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에서 1962년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전두환을 중심으로 조직된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다. 그는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1979년 3월 전두환이 재기에 성공하여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복직된 뒤 육군 제 9보병 사단장으로 전임됐다.
1979년 3월 노태우는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9보병 사단장이 되어 전방으로 발령났다. 같은해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고 12월 12일에 전두환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며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제거했다.
12.12 당시 노태우는 자신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김옥숙의 사촌동생 박철언에게 가족을 부탁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정승화·김재규 등을 군부에서 축출하고 정승화 체포작전을 진행하였다.
12.12 반란에 성공한 후 노태우는 수도경비 사령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동조해 핵심세력이 됐다. 국가보위입법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1980년 8월 중장으로 진급, 전두환의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이 됐다 .1981년 7월 대장 진급 후 예편했다.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노태우는 정계에 입문해 전두환의 후원에 힘입어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이 됐다. 1981년 7월 16일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됬으며 같은해 11월에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를 순방했다.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 한국 방문을 간청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1982년 통일원에서 북조선에 남북고위급 회담을 제의하자 같은해 2월 25일부터 정무2장관으로 1982년 남북한 고위급 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정무 2장관 당시 외교 안보 담당 특보를 겸해 1988년 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1982년 3월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고 같은해 4월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됐다. 1986년에는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아시안게임을 주관했다.
1985년 2월에는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로 입후보해 번호 3번으로 당선됐다. 의원에 당선되고 곧바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됐다. 총재인 전두환은 서울 서대문구 출마를 권했으나 전국구 의원을 요구했다는 후일담이다.
1987년 6월 민정당 내 경쟁자였던 노신영과 정호용 등을 제치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노태우는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6.29 선언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1985년 총선 이후 줄기차게 개헌을 주장해온 야권과 재야세력은 반발했다. 이 와중에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며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됐다. 시위는 학생 뿐 아니라 교수, 회사원까지 참여하며 전국으로 확산됐다.
민정당 대표위원인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에게 하는 건의 형식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 김대중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해다.
노태우는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통령 후보는 물론 당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민정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노태우의 제안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추인했다. 전두환은 7월 1일 특별담화를 통해 노태우의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먼저 직선제 수용을 결정한 뒤, 노태우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노태우가 건의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다수다. 전두환은 자신이 먼저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검토해보라고 제안했다고 밝혔고, 노태우는 선언 이후에 청와대를 방문해 사후에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직선 개헌
1987년 10월 29일 여야합의로 헌법이 개정·공포됐다. 헌법 개정 논의는 민정당과 민주당을 대표하는 '8인 정치회담'이 이 과정을 주도했다. 이들은 7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 총 48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헌법 전문 수정 △헌법재판소 설치 △대통령 직선제 부활 △대통령 권한 축소 △국회 권한 강화 등을 결정했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고 국민에 의한 직접 선거의 원칙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1987년 대통령 선거는 1972년 유신 이후 최초로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치러졌다.
1987년 대통령 선거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통일한국당의 신정일 등 6명이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노태우는 36.6%(828만표)의 득표율을 확보해 당선됐다. 김영삼은 28.0%(633만표), 김대중은 27.1%(611만표)를 얻었다.
이른바 '양김'이라 불리는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은 노태우가 당선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됐다. 1987년 7월 9일 사면 복권된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두고 김영삼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재야단체와 정치권 등에서는 김영삼·김대중의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끝내 결렬됐다. 10월 10일 김영삼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자,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11월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노태우는 선거에서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 슬로건은 6월 항쟁으로 분출한 시민 대중의 요구에 부합해 김영삼, 김대중이 주장하던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구도를 뒤집는데 일조 했다는 평가다.
또 노태우는 6.29선언을 내세워 스스로를 정치적 안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홍보하고 상대 후보에는 색깔 공세을 취했다. 특히 선거 18일 전인 11월 29일 KAL858기 폭파 사건이 벌어지며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비행기 폭파범인 김현희가 선거전날인 12월 15일 압송되고, 그 장면이 TV 방송으로 생중계 됐다.
당시 노태우는 인천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공약을 많이 내놓았다. 또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내놓았고, △밀폐수사 금지 △토지 공개념 확대 △출자총액제한 △재벌의 소유·경영 분리 △작전 지휘권 재조정 등도 제시했다.
노태우는 13대 대통령으로 1988년 2월 25일 취임했다.
집권 초기
노태우는 집권 초기 전두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6공화국이 아니라 5.5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열흘 만인 12월 26일에 군 인사를 단행해 최세창, 고명승, 최평욱 등 자신의 친위 세력을 군 요직에 앉혔다. 또 당선자 노태우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인선작업에 관여했다.
노태우는 장관에서 가급적 군 출신을 배제하려 했으나 전두환에 의해 5명의 군 출신 장관이 기용됐고, 5공 시절 장관을 했던 사람이 8명이나 포진해 있었다. 군의 요직도 모두 전두환 세력이 차지했다. 전두환 자신도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어 의장이 됐다.
노태우는 1988년 2월 25일 취임한 직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규모를 축소했다. 같은해 실시되는 4.26 총선에 출마할 이들을 뽑는 민정당 공천에서 권익현, 권정달, 김상구 등 5공 핵심 세력을 배제했다. 또 전두환의 동서이자 하나회 회원인 이재형 국회의장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도 뺐다. 대신 노태우는 최측근이자 인척인 박철언이 이끄는 월계수회 회원들을 대거 공천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을 각종 비리와 부정축재를 벌인 혐의로 구속했다. 전경환은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을 맡으며 5공화국 내내 숱한 권력형 비리와 추문을 낳은 인물이었다. 전두환은 4월 13일 연희동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명예총재직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5공 청문회
그러나 민심은 노태우 정권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1988년 4.26 총선 결과 민정당은 299석 중에 절반에도 못미치는 125석을 얻는데 그쳤고,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등 야당이 174석을 차지했다. 국회가 여소야대 정국이 됐다. 이때 야권과 시민사회에선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과 12.12사건과 5.17사건 진상 해명 등 '5공 청산 요구'가 높았다. 학생들은 전두환 체포조를 만들어 연희동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국회의 주도권은 제1야당인 평민당을 이끄는 김대중이 가지고 있었다. 국회는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광주특위)와 제5공화국 비리조사특위(5공특위)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열었다. 김대중은 꾸준히 전두환의 천문회 증언을 요구했다.
1988년 10월 17일 노태우가 미국 순방길에 올랐을 때, 검찰은 전두환의 친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전우환을 구속하고, 처남 이창석도 구속하는 등 전두환의 친인척을 대거 구속했다. 전두환은 11월 23일 TV 생중계로 대국민 사과문을 읽은 후 백담사로 떠났다.
노태우는 12월 13일 검찰에 '5공특별수사부'를 설치하도록 하여 47명을 구속했다. 야당 측은 검찰의 축소수사라며 정호용 ·이원조 · 이희성 · 장세동 · 허문도 · 안무혁 등 5공 비리의 핵심 6인을 사법 처리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방정책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가 수립한 새로운 대외정책을 지칭한다. 소련과 중국을 포함해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새롭게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과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해내는 정책을 뜻한다. 북방정책의 목표는 '7.7 선언'을 통해 드러난다.
7.7 선언
노태우는 1988년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이른바 ‘7·7 선언’을 내놓았다. 이 선언은 노태우가 6개 항의 대북정책으로 북한·중국·소련에 대한 개방을 표명하고 있다. 이 선언은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7.7선언의 6개항은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자유로운 남북왕래를 위한 문호 개방 △ 이산가족의 서신왕래 및 상호방문 적극 지원 △ 남북간 교역을 위한 문호 개방 △ 비군사물자에 대한 한국의 우방과 북한간의 교역 찬성 △ 남북간의 소모적인 경쟁대결외교 지양 및 남북대표간의 상호협력 △ 북한과 한국 우방과의 관계 개선 및 사회주의 국가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상호협조를 할 의사가 있음 등이다.
같은해 10월 18일 노태우는 제43차 유엔총회에서 한 기조연설에서 7.7 선언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남북한이 한민족으로서 번영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후 노태우는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한 1991년과 1992년에도 유엔에서 연설을 했다.
북방외교
당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혁 · 개방을 모토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흐름에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6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 헝가리와의 수교를 성사시켰다. 이후 폴란드 및 유고와 1989년 11월과 12월 각각 수교를 맺었으며 1990년 3월에는 체코, 불가리아 및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또 아시아지역에서 몽골과도 1990년 3월 수교했다.
또 당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있던 소련에도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1990년 9월 30일 한-소 국교정상화를 선언하고 외교관계를 맺었다. 중국과의 수교는 중국이 요구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 등의 문제로 인해 한-소 수교보다 2년 늦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남북은 1989년 2월 남북고위급회담의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일련의 회담을 진행했다. 1991년 9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12월 13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또 남북은 1991년 12월 31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92년 2월 19일에 발효했다.
하지만 미국의 부시 정권은 영변에 있는 2개의 시설이 핵시설로 의심된다며 이곳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은 핵문제 해결이 남북관계 개선에 앞서야 한며 특별사찰을 주장했고 북한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남북관계는 다시 냉전으로 전락했다.
공안정국 조성
노태우의 7.7 선언 이후 재야단체 등에서는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륙 주장이 대두됐다. 그러나 정부는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엄금했으며 문익환, 임수경 등의 방북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1989년 3월 18일 일본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한다고 발표하고 베이징을 거쳐 3월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어 닷새만인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남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대담했다. 문익환은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허담과 4.2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통일 방식으로는 연방제 안을 택하고 정치와 군사 문제 및 교류 협력 문제를 추진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좌경용공세력을 색출한다'며 안기부·검찰·보안사 합동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국가보안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며 재야와 학생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이과정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지도부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벌어졌다. 문익환은 4월 13일 구국하자 공항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
이러한 와중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1989년 6월 30일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 외국어대 4학년 임수경을 전대협 대표자격으로 보냈다. 임수경은 47일간 평양에 머무르며 북측 학생대표와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귀국할 때는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판문점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고, 정의구현사제단에서는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해 임수경을 데려오도록 했다. 이들은 단식 등을 벌인 끝에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귀환 직후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임수경이 방북하기 사흘 전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1988년 7월 사흘간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기부 등은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이 관련되었는지 여부에 수사를 집중했고, 김대중을 불고지죄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공판에서 서경원 의원은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안기부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3당 합당
노태우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비밀리에 '3당 합당'을 추진했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청와대에서 전격 회동을 갖고 3당 합당과 함께 민주자유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무려 216석을 가진 거대 여당 민자당이 탄생했다. 13대 총선을 통해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은 여대야소로 바뀌었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게됐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 기록 공개
1990년 10월 4일 육군 보안사 소속 이병 윤석양이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기록을 공개했다. 정치인 등 주요 인사 1600여 명에 대한 불법 사찰 실태가 드러났다. 야당과 재야단체는 10월 13일 공동 집회를 열고 노태우와의 관련성을 조사하고 만약 관련이 있다면 대통령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보안사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로 개편됐다.
범죄와의 전쟁
노태우는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린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1990년 11월엔 '범죄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새질서 새생활 운동' 캠페인을 시작하고 전국의 공무원들을 동원해 운동을 전개했다.
분신정국
학원 자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사복 경찰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와 대학생들의 분신으로 이어졌다. 4월에는 전남대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치사 사건과 공안정치 분쇄를 주장하며 분신했고 5월에는 안동대 학생 김영균과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등 모두 11명이 분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분신 배후설을 유포했고,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로 분신을 비난했다. 박홍 서강대 총장은 김기설의 분신자살에 대해 죽음의 블릭리스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며 강기훈을 붙잡아 구속했다.
노태우 정부의 분신배후설은 대학생과 재야 세력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유서대필 사건은 조작 사건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은 재심 상고심을 거쳐 24년 만인 2015년 5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김씨의 유서 필적이 강씨의 필적이라고 판단한 1991년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신빙성이 없다며 강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민자당 탈당
200석을 넘는 의석을 확보했던 민자당은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총선에서 참패해 과반수에서 한 석 모자라는 149석으로 줄어들었다.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합당한 민주당은 97석,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은 31석을 차지했다.
노태우는 충남 연기군수 한준수의 '관권 선거 폭로'로 위기를 맞았다. 그는 민주당 원내 총무실에서 14대 총선이 유례없는 관권 부정선거였다며 '중앙'에서 내려온 문서 15종과 수표 다발을 공개했다.
이에 노태우는 1992년 8월 28일 민자당 총재직에 사퇴했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9월 17일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태우는 '중립내각' 구성을 선언하고 한림대 총장 현승종을 국무총리로 하는 '거국 중립내각'을 출범시켰다.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된 이후 노태우는 1993년 2월 24일 청와대를 떠나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퇴임 이후
1995년 노태우의 비자금 문제가 불거졌다. 10월 19일 국회의원 박계동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태우가 비자금 4000억 원을 조성했다고 폭로하고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128억 2700여 만원의 예금 조회표를 증거로 제시했다. 다음날 정부가 비자금 수사 방침을 밝혔다. 사흘 뒤 관계자들이 검찰에 출두하고 조사가 시작되며 비자금의 실체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10월 27일 사과문을 내 재임 중 5000여 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퇴임 시 1700여 억 원이 남았다고 말했다. 이후 검찰은 삼성, 현대, 대우, 한보를 비롯한 34개 재벌총수들에 대한 소환 조사를 진행했다.
당초 검찰 수사는 비자금에 대한 것으로 한정됐으나 '12.12 사태와 5.18 내란에 대해서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국회가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했고 검찰은 형법상 내란죄에 대해서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수사결과 총수들은 30억원에서 250억원까지 뇌물을 줬으며노태우의 비자금은 41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태우는 1995년 11월 16일 구속됐다. 1996년 8월26일 1심 재판부는 징역 22년6월과 추징금 2838억9600만원을 선고했다. 당시 전두환은 사형과 추징금 2259억5000만원이 선고됐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2심 재판부가 판결한대로 ‘전두환 무기, 노태우 징역 12년’을 확정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이들을 모두 특별 사면했다.
노태우는 김옥숙과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아들 노재헌은 신정화와 결혼하고, 딸 노소영은 SK그룹 회장 최태원과 결혼했다. 노태우는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으로 투병 중이다.
7 김영삼(金泳三) 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
14대 1993.2 - 1998.2
/김영삼 1993년 대통령 취임 선서
■ 최연소·최다선 의원, 최연소 야당 총재 등 기록의 사나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 줄곧 ‘민주투사’로 한 길을 걸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말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대변했다.
◇기록의 사나이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경남중 재학시절 하숙집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붙이고 대통령 꿈을 키웠다. 김 전 대통령은 “일제시대 때는 소설가가 되려 했지만 해방된 후 대통령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가 발발, 1951년에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1951년 장택상 총리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당시 나이 26세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았다. 제3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1980년대 정치규제 조치로 출마하지 못한 11,12대 총선을 제외하면 1992년 총선까지 모두 아홉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것도 최다선(最多選) 기록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야당생활은 1990년 3당 합당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정참여 제의를 거절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군정연장 반대 시위 참여로 구속됐다. 그는 “당시 구속 때는 면회도 많이 와서 할만 했는데 1980년대 가택연금 때는 답답해 못하겠더라”고 회고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벌어졌던 1965년 민중당 원내총무를 시작으로 야당에서 대변인 2회, 원내총무 5회를 지내며 정치적 체급을 키웠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2차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경선 결과에 승복했고 이는 '아름다운 승복'으로 후일까지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1978년 6월 17일 국회 외무위에 참석한 김영삼 의원과 이철승 의원이 냉냉한 태도로 나란히 앉아있다.
1974년 당시 최연소였던 47세 나이에 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반유신(反維新)’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었다. 신민당을 개헌추진본부 체제로 전환해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전개했다.
1976년 당 총재 경선에서 이철승에게 패했지만 1979년 5월 다시 당 총재로 복귀했다. 야당 총재로 반유신 운동을 지휘했던 김 전 대통령은 YH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 이후 총재직을 박탈당했고 의원직에서까지 제명되는 등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그의 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그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로 유신시대는 막을 내렸다.
◇목숨을 건 반독재 투쟁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을 지냈지만 김 전 대통령은 1980년 신군부의 ‘5.17 조치’로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가택연금 당했다. 1983년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의 출국 권유에 “나를 해외로 보내려면 시체로 만든 뒤 보내라”며 거절했다.
/1983년 5월 신군부의 정치 규제에 항의해 단식투쟁 중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부인 손명순 여사가 돌보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만들고 1985년 신민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민주투사’로 정치 전면에 나섰다. 신민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직선제 개헌 범국민운동을 주도하며 반독재 투쟁을 전면에서 지휘했고 직선제 개헌을 위한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다.
그렇게 쟁취했던 대통령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단일화에 실패,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2위(28%)로 낙선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단일화 실패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 압력을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88년 총선에서 각각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을 이끌며 영남과 호남 지역의 맹주임을 확인하며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에 밀린 ‘제2야당’이 됐고 이런 정치적 상황은 그를 1990년 3당 합당의 결단을 내리게 했다.
정우상 기자
■하나회 숙청 등 문민 개혁, 임기말 IMF 외환위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정치 인생 전반기를 ‘야당 투사’로서 보냈다면, 후반기에는 대한민국 보수 정당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그가 1993년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이름 붙여진 ‘문민(文民)정부’는 민주화 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말처럼 쓰여졌었다.
◇3당 합당 통해 집권 성공
김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내내 군사 정권과 싸워 왔었다. 그런 그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는 결단을 내렸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에도 밀려 제3당으로 내려앉은 뒤 정치적 반전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른바 '3당 합당'이었다.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당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차분히 키워가면서 군사정권 세력이 중심이던 ‘민정계’를 압박했다. 민정계에서는 “3당 합당의 전제 조건을 YS가 깨려 한다”며 ‘내각제 합의 문서’를 공개하기도 했지만, 민심을 등에 업은 YS는 92년 민자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종찬 후보를 꺾고 12월 대선에 나섰다. 그리고 평생의 숙적인 DJ와 경제 신화의 주인공 정주영 후보와 맞붙은 3파전에서 DJ를 193만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김영삼 민자당후보가 1992년 12월19일 이른 새벽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될 무렵, 중앙당사에 들러 박수로 환호하는 당직자와 사무처요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등 연이은 개혁
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자신이 취임사 때 약속했던 ‘변화와 개혁’을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였다. 취임 당일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는 조치를 시작으로 이틀 뒤인 27일에는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17억7822만원)을 전격 공개했고 “이것은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를 추진했다.
곧이어 청와대와 당·내각을 자신의 사람들을 채운 뒤 취임 1주일이 지나서는 ‘금융실명제’ 계획도 발표했다. 그리고 3월6일에는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등 군부의 핵심인 하나회 세력을 일거에 축출하는 인사를 단행한다. 당시만 해도 '군부 쿠데타'를 걱정하던 시대였다. 국방부를 비롯해 전 정부가 보름동안 밤샘 비상 대기를 하며 군부 동향을 살폈다.
YS는 이후에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문민화’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치기도 했다. YS의 재임 초기 개혁 조치는 그 이후로도 부동산 거래 실명제, 지방자치 선거 실시 등으로 이어지면서 취임 초 국정지지도가 90%를 넘어서는 등 국민적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임기 중반인 95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세상에 드러내고 곧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이어가면서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분으로 모두 구속시켰다. 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1980년 쿠데타에 가담했던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이 기소하지 않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해서 결국 전원을 법정에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는 3당 합당에서 시작됐던 군사정권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96년 2월에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경복궁 앞에 일제가 세웠던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분을 앞세워 허물기도 했다.
◇북한 문제와 임기말 IMF
내정에서는 연이은 개혁 조치로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냈지만 대외 문제는 그리 잘 풀리지 않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YS를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라고 하면서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기도 했지만, 이후 북한 핵 문제가 터지면서 한미관계가 삐걱댔다. 클린턴은 북한과 직접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풀려고 했고, YS는 “핵을 가진 집단과 대화할 수 없다”고 했다.
93년 취임 초 YS는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하고, 남북고위급 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를 준비했다. 그러나 회담을 목전에 두고 1994년 7월에 김일성이 갑자기 죽으면서 남북관계는 임기 내내 풀리지 않았다. 94년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도 연출됐고, 96년에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한일관계도 갈수록 악화돼, YS가 일본을 향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기도 했다.
임기 4년차인 96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탄탄하게 정권을 유지했던 YS는 96년 12월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인기가 떨어졌다. 곧이어 97년 초 아들 김현철씨가 구속되면서 YS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쇠락했다. 경제적으로도 기아차 사태 등 대기업 연쇄 부도가 이어지면서 결국 11월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국가부도 상태에서 김영삼 정부는 막을 내리게 됐고, 자신의 평생 정적이던 DJ가 후임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996년 회동을 갖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퇴임 후에도 영향력 상당
YS는 98년 2월 퇴임한 뒤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줄곧 지냈다. 비록 ‘IMF 대통령’이라는 라는 족쇄가 있었지만 ‘민주화의 대부’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정치적 식솔들인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이후로도 상당히 이어졌다. 퇴임 직후에는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회 명예위원장, 일본 와세다대 특명교수 등으로 대외 활동도 자주 했다. 그러던 중 99년 6월 김포공항에서 얼굴에 달걀을 맞는 ‘테러’를 당하고, “독재자는 눈을 노린다”는 말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한동안 구심점이 없던 보수 정치권의 중심 역할을 잠시 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 때는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을 지원,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근혜 현 대통령에 대해선 줄곧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나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힘을 모아야 한다”며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 보수 진영을 결집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2012년 대선 전 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스탠트 수술을 받기도 했던 그에 대해 옛 상도동계 출신 관계자들은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것을 본 뒤 이젠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갑자기 기력이 크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그가 남긴 '言言言'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그동안 활동하면서 여러 화제의 말을 남겼다. 주로 직선적인 화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YS는 1978년 7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당시 국회 연설을 통해 "정부는 안보를 빙자해서 억압 정치를 할 명분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를 위해서 민주 회복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YS의 유명한 발언은 그다음 해인 1979년 10월 나왔다. 그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던 자신에게 해외 출국을 권유하던 전두환 정권을 향해서는 1983년 5월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했다.
1990년 1월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이를 놓고 비판도 있었지만, YS는 오히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했다.
199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YS는 그다음 해 2월 취임사를 통해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청렴성을 강조한 그는 1993년 3월 기자회견 등에선 "정치 자금은 한 푼도 받지 않겠다. 임기 중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했다.
그해 8월 시·도지사 간담회에선 집단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정통성을 확립한 문민정부는 국민에게 요구할 것은 단호히 요구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YS는 "우째 이런 일이…"라는 말도 유행시켰다. 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 의혹이 터졌을 때 반응이었다.
1994년 서울대 졸업식 치사에서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다.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고 말한 것도 화제가 됐다.
대북(對北) 문제에 대해선 1994년 1월과 4월에 각각 "임기 내 남북 연합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것" "김일성 주석과 언제든지 만나겠다. 북한에 줄 수 있는 쌀이 있다"고 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치겠다"는 말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그 당시 에토 다카미 일본 총무청 장관의 "식민지 시절 일제가 한반도에 좋은 일도 했다"는 망언(妄言)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1997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던 LA다저스의 박찬호 선수에게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임기 말에 차남 현철씨를 둘러싼 의혹과 외환 위기 등을 겪었던 YS는 1998년 2월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말을 남겼다.
대통령 퇴임 뒤인 1999년 6월 김포공항에서 70대 남성이 던진 달걀(붉은색 페인트가 들었음)에 눈 부위를 맞았을 땐 "독재자는 눈을 노린다"고 했다.
2000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에는 "독재자에게 노벨평화상은 어불성설,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2003년 12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특검 수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을 때는 최 대표를 찾아가 "나도 단식을 해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 실하다"고 했다.
2008년 11월 우석대 초청 강연에선 재임 시절 업적이었던 '하나회 청산'에 대해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YS는 2009년 8월 DJ 서거 땐 "우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였다"고 DJ와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 '민주 vs 反민주' 시대의 종언
민주화 투쟁의 상징 YS도 서거… 與野 새로운 어젠다 제시해야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지난 50년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정치인이었다. '반(反)독재 민주화'로 '양김(兩金) 시대'를 이끌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그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 정치는 '민주화 시대' '87년 체제'와는 완전히 다른 출발선에 서게 됐다.
/평생 동지이자 라이벌 - 김영삼(왼쪽)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 동지이자 평생에 걸친 정치 라이벌이었다. 유신 시대가 끝나고 '서울의 봄'이 찾아든 1980년 3월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 /조선일보 DB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이후 '민주 투사'로서 민주화 투쟁의 최일선에 늘 서 있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을 때 일부 인사는 "민주화 진영을 배신했다"고 했지만, 그는 이후에도 늘 자유민주주의의 확대를 자신의 정치 지표로 삼았다. 좌파 진영에선 민주화의 역사를 자신들의 자산(資産)으로 독점하려 했고, 산업화·민주화 세력이 연합한 현재의 우파 진영은 '반(反)민주 세력'이라는 공세 앞에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그런 상황에서 YS의 존재는 우파 진영의 도덕성에 큰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이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오면서 보수 정권을 연속 재창출했던 것도 YS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세력의 절반이 동참함으로써 가능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민주화 시대'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DJ가 서거한 이후 '민주 대 반민주'의 정치 구도는 더 이상 효용이 없어졌다고 했지만 YS가 있음으로써 그 시대적 상징성은 일부 남아 있었다"며 "이제 YS까지 떠나면서 대한민국 정치에서 '민주화'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87년 체제는 공식적으로 저물었다"고 말했다.
YS와 DJ는 개인적으로도 우리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와 함께 했던 다른 정치인들을 포함한 '세력'으로서도 의미가 컸다. DJ는 지역적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동교동계와 현재의 야당 세력을 상징했다. 반면 YS는 지역적으로는 PK(부산·경남)를 중심으로 상도동계와 새누리당 일부 세력의 대부였다. 그러나 크게 보면 민주화를 기치로 내건 정치 세력은 일부 종북(從北) 세력을 제외하면 보수와 진보 모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양분 속에 성장해왔다. 진보·좌파 일부는 김 전 대통령을 '기득권 세력'의 울타리 안으로 가두려 했지만 이는 우리 민주화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현재 야권의 저변부에는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라는 '양김 시대'의 시대착오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제 이런 관념 속의 '민주 대 독재'라는 구도 대신 새로운 정치적 어젠다를 여야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다. 경희대 윤성이 교수는 "인물 중심으로 전개됐던 '양김 정치'가 끝났지만, 아직 우리 정치는 시스템에 의한 선진 정치로 도약하지 못하고 있다"며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대안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연소·최다선 '기록의 정치인'… 의원제명·단식 '反독재 투쟁'
경남중 때부터 대통령 꿈… 1951년 자유당 정계입문3선改憲 반대하다 초산테러… 新군부 가택연금 맞서 1983년 23일간 단식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 줄곧 '민주투사'의 한 길을 걸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말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대변했다.
◇기록의 사나이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어장주인 아버지 김홍조(金洪祚·2008년 작고)씨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1960년 작고)씨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제2중학교(현 경남중) 재학시절 하숙집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이고 대통령 꿈을 키웠다. 김 전 대통령은 "일제시대 때는 소설가가 되려 했지만 해방된 후 대통령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가 발발, 1951년에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대학 2학년 때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장관상(2등)을 받은 것이 정계 진출의 계기가 됐다. 당시 인연을 맺은 장택상 외무장관이 1950년 5월 총선에 출마하며 YS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51년 장택상 의원(훗날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YS는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당시 세운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제3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1980년대 정치 규제 조치로 출마하지 못한 11·12대 총선을 제외하면 1992년 총선까지 모두 아홉 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것도 최다선(最多選) 기록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야당 생활은 1990년 3당 합당 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정 참여 제의를 거절했던 YS는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시위 참여로 구속됐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DJ), 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2차 결선투표에서 DJ에게 패했지만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경선 결과에 승복했다.
1969년 6월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를 당했다. 그는 이 사건을 '신민당의 개헌 반대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보복'으로 규정,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1974년 당시 최연소였던 47세 나이에 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반유신(反維新)'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었다.
1979년 김 전 대통령은 YH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을 계기로 가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이를 "반국가적 언동"이라며 YS의 의원직 제명안을 가결했다. 이때 그가 남긴 말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 그의 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그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로 유신 시대는 막을 내렸다.
◇목숨을 건 반독재 투쟁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5·17 조치'로 서울 상도동에서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러자 1983년 5월 광주항쟁 3주기를 맞아 '민주화 5개항'과 야당 인사 석방을 요구하며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의 출국 권유에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거절했고 이를 계기로 민주화 세력은 총결집했다. 이듬해 그는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고 1985년 신민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민주투사'로 정치 전면에 나섰다. 신민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이는 1987년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은 DJ와의 단일화에 실패했다. 결국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2위(28%)로 낙선했다.
YS와 DJ는 1988년 총선에서 각각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을 이끌고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에 밀려 '제2야당'이 된 YS는 1990년 3당 합당이란 결단을 내리게 된다.
정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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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초년생’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67년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민주당 구파인 유진산계 주도로 설립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선거유세를 벌이고 있다. 여기서 당선된 이후 김 전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면서 제7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김 전 대통령(오른쪽)의 중학교 재학 시절 모습
▲ 젊은날 김영삼 전 대통령은 27세에 역대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9선을 거듭하면서 각종 기록을 쌓았다. 젊은 날의 김 전 대통령이 중절모를 쓴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1951년 9월 29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할 당시 이화여대에 재학 중인 손명순 여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두 사람은 1951년 3월 6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당시 손 여사는 재학생의 결혼을 금지하는 이화여대 교칙 때문에 퇴학 위기를 무릅쓰고 비밀 결혼을 올렸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하는 김영삼
/1954년 민의원에 당선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1970년대 초 최형우 전 장관과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1986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접견.
/신민당 총재 시절 부산 방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하는 김영삼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건배하는 김영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APEC 지도자회의 참석한 김영삼
/김영삼 전 대통령 첫 국무회의 후 칼국수 오찬
/대통령 퇴임 이후 산책하는 김영삼
/ YS가족 - 왼쪽 부터 장녀 혜영63세, 차녀 혜경61세, 삼녀 혜숙54세, 차남 현철56세, 장남 은철59세, 부인 손명순86세 15.11.26
8 김대중(金大中) 1924.1.6 - 2009.08.18
15대 1998.2 - 2003.2. 김대중
/김대중 1998년 대통령 취임식
성장기와 정치 입문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8·15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떠나자 이 회사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목포일보〉 사장(1948~50)을 지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는 해상방위대 전라남도지구 부대장(1950),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1951), 흥국해운·대양조선공업 사장(1951)을 역임했다.
1954년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제4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데 이어 2차례 더 낙선했으며, 1961년 5월 14일 4번째로 도전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이틀 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강제해산되는 바람에 의원등록조차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6·7·8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대변인(1960), 통합야당 민중당 대변인(1965),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1966), 신민당 대변인(1967)을 지내며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고난의 행로
마침내 3선개헌 다음해인 1970년 9월 김대중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되었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의원이 함께 출마해 3파전으로 진행된 이 전당대회에서 소수파인 그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에 밀려 2위에 그쳤으나 2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의 김영삼 지지에 반발한 이철승이 지지표를 몰아줌으로써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선거과정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유권자들의 선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공공연하게 벌어진 선거부정을 빗대어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졌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1973년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 중이던 1973년 8월 8일 그가 일본 도쿄[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다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해 대일관계가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에 합의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되었다.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이듬해 3월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신정권은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가택연금시켰다. 그러나 그는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그는 1980년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2·12사태(1979)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도발에 대한 우려는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통해 현실화했다.
이때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었다.
정부군의 학살행위에 대항해 시민군이 무력으로 맞선 5·18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일본·독일·프랑스를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했다.
집권과정
김대중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는 그가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이 제12대 총선에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데서 잘 나타났다. 그는 이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자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그의 사면복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29선언으로 후퇴했다. 비로소 사면복권된 그는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독자 출마로 방향을 돌려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당초부터 없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그는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이듬해(1988)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는 다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은 정국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호남 고립화 전략으로 요약되는 이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 1991년 4월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준비위원회(약칭 신민연)와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해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합당했다.
1992년 12월 18일 그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의원직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그의 지지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충격적이고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1995년 6·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7월에는 정계은퇴를 번복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 이를 기정사실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빗발치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애써 무시하며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야당의 지위를 굳히자 그는 오직 제15대 대통령선거를 향해 질주했다.
19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여권후보의 분열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의 정부
김대중의 당선은 정부수립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과정에서 공언한 '준비된 대통령'답게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하였다. IMF 관리체제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개혁 등의 정책을 펴서 IMF에서 빌린 부채를 예정보다 앞선 2001년 전액상환하였다.
한편,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함으로써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협력 확대, 경의선·동해선 연결 및 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 등을 통해 남북관계를 화해·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국민기초생활법 제정, 여성부 신설, 정보통신(IT)산업 기반정착 등 인권과 복지분야에서 개선을 이룩해냈으며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민주당에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제를 도입해 젊고 개혁적인 정치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퇴임 이후
김대중은 2003년 2월 퇴임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새천년민주당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을 때나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중 탄핵당했을 때 등 주요 정치상황마다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였고,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국외로는 유럽 및 미국, 세계식량계획(WFP) 등의 국가 및 기구를 순방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노벨위원회·세계보건기구(WHO) 등에서 연설하는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하였다. 서거 직전인 2009년 6월 11일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하여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인한 한반도 위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및 민주주의의 위기 등을 내용으로 하는 연설을 통해 이명박 정부와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국민에게는 '행동하는 양심'이 될 것을 당부하였다.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8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서거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는 6일장 국장으로 정해졌고, 북한의 조문사절단을 비롯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11개국에서 조문사절단이 들어왔으며, 42개국에서 조전을 보내왔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국가유공자 제1묘역 하단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사이에 위치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최순영(崔淳永)으로부터 대한생명 뺏으라고 내가 결정”
金大中 대통령은 KBS와의 특별대담 중 “옛 소유자(최순영)로부터 대한생명을 뺏어 가지고 새로 살린다”는 말을 하면서 ‘빼앗아’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는지 ‘빼~’라는 말을 하면서 잠시 주춤거린 뒤 그대로 ‘뺏어 가지고’라고 말했다.
⊙ 1999년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22개 보험사에는 1년6개월 동안 경영정상화 기회를 준 반면
대한생명에는 고작 11일간만 줘.
⊙ “법치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께서 대한생명을 뺏으라고 얘기해 충격받아” (최순영 회장)
/신동아그룹 해체의 진실을 밝혀 줄 결정적 증거가 드러났다. 진실을 밝힌 당사자는 뜻밖에도 金大中(김대중) 정권의 국정 최고 책임자였던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다.
김 대통령은 1999년 12월 19일 당선 2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KBS 특별대담-거실에서 만난 대통령’에 출연해 신동아그룹의 주력기업이었던 대한생명 해체의 결정적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날 대담에는 洪性奎(홍성규) 당시 KBS 보도국장, 소설가 金周榮(김주영)씨, 정신과 의사 李那美(이나미)씨가 출연했고, 김 대통령은 사전 원고도 없이 얘기를 풀어 나갔다.
특별대담이 방영됐던 1999년 연말은 ‘옷로비 사건’에 대한 特檢(특검)과 검찰의 수사 종료를 앞둔 시점이었다. 2000년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Y2K(연도를 마지막 두 자리로 표기하는 컴퓨터가 2000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2000년대와 1900년대를 구분하지 못해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혼란을 뜻함)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 불안감도 퍼진 상황이었다.
憲政(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된 ‘옷로비 사건’은 당시 검찰총장 부인과 통일부장관 부인, 崔淳永(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이 연루돼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대담이 방송된 다음날 특별검사팀은 옷로비 사건의 수사를 종료했고, 열흘 뒤인 12월 30일은 大檢(대검)도 수사를 종결했다.
특검팀은 ‘최순영 회장의 부인이 남편을 위해 고위층 부인들에게 시도한 실패한, 포기한 로비’라고 결론을 냈고, 대검은 ‘자작극으로 촉발된 실체 없는 로비’라고 발표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확인되지 않자 여론은 김대중 정권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특검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와 검찰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는 정황이 드러났고, 김 대통령에게 허위보고서가 제출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KBS 특별대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IMF 극복 과정과 경제 살리기를 위한 국정최고 책임자로서 노력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려 했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내 책임”
/1999년 12월 19일 KBS 특별기획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신동아그룹 해체의 비밀을 실토했다.
김 대통령은 “요즘 잠은 잘 주무십니까”라는 대담자의 첫 번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잠은 그저 잡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고민이나 걱정은 많습니다. 그보다 요새 소위 옷로비 사건으로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이렇게 대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구나 20세기를 보내는 마당에 당선된 후 2년 동안 무슨 일을 했고, 또 오늘을 계기로 앞으로 모든 것을 투명하고 엄정하게 처리해서 깨끗이 청산하고 새해를 맞이했으면 합니다.”
대담자가 “요즘 대통령의 지지도가 당선 때보다 많이 떨어져 걱정이다”라고 하자 김 대통령은 ‘옷로비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김 대통령의 답변이다.
“생각지도 않은 일들 가지고 국민들을 걱정시키는 것들을 보면 나도 한탄이 절로 나오고, 이게 무슨 팔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옷로비 사건 얘긴데, 부인들이 청문회 나가서 하는데 제가 보고서 아내한테 얘기했어요. 네 분(편집자注: 옷로비 사건 관련 당사자들) 중에 한 사람도 국민에게 이렇게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냐고요. 대통령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서도 사과했는데,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옷로비 사건이란 말하자면, 로비해서 대한생명 신동아그룹 총수의 구속을 면하고 재산을 보존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처리는 제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들의 불건실한 태도, 떼 지어서 고급 의상실을 다닌다든가, 거짓말을 한다든가, 또 정부의 책임 있는 입장에 있는 검찰의 고위직에 있는 분이 문서를 상대방들 피의자 측에 유출한다든가, 이런 상식이 없는 일 때문에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고,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참, 물론 모두 내 책임이지요. 나는 대통령이 된 후 과거에 하지 않은 일을 하나 했습니다. 장관이나 고위직 사람을 임명할 때 꼭 부인을 오라고 해서 같이 임명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부인들로 하여금 내조를 잘해야 남편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부탁하기 위해 당신더러 오라고 한 거다, 이런 말도 했습니다. 그런 것이 아무 효과가 없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지금 솔직한 이야기로 참 안타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국민에게는 볼 면목도 없고, 그런 심정입니다.”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발언
/대한생명 퇴출의 진실은 세 번째 질문에 대한 김 대통령의 답변에서 나온다. 대담자로 나선 소설가 김주영씨는 이렇게 물었다.
“이 사건의 큰 줄기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옷로비 사건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심각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대통령님께까지 거짓이 보고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짓이 보고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국민들이 상당히 분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담자가 언급한 ‘거짓보고’란 옷로비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 사직동팀과 검찰 등이 사건의 진실과 다르게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을 말한다. 김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건에는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씨가 자기 남편의 구속을 피하고 검찰총장을 음해하려고 자작극을 벌였다. 구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김 대통령의 재가가 난 다음날 최순영 회장은 검찰에 연행·구속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담자의 ‘거짓보고’라는 말에 약간 흥분한 듯 질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답했다. 김 대통령은 대한생명의 해체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쑥 말을 꺼냈다. 김 대통령의 말이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서 저도 알고 있고, 또 만일 거짓이 보고되었다면 그것은 아주 큰일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니까. 지금은 수사 중이니까 곧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큰 줄거리를 말하자면, 대한생명에 대한 여러 가지 비리, 그리고 이것을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구속방침, 그리고 대한생명은 완전히 이것이 부실화되었기 때문에 퇴출시켜서 새로이, 말하자면, 옛 소유자로부터 빼~, 이것을 뺏어 가지고 새로이 살려 나가야 한다, 이런 줄거리는 전부 보고가 되어 있고, 또 그것도 전부 내 결정·승낙을 받아서 실천한 것입니다. 그중의 상당부분은, 그래서 큰 줄거리는 다 보고가 된 겁니다.(하략)(09분 57초)>
편집되지 않고 전국에 퍼져 나간 김 대통령의 말
/김 대통령은 ‘옛 소유자(최순영 회장)로부터 대한생명을 뺏어 가지고 새로 살린다’는 말을 하면서 ‘빼앗다’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는지 ‘빼~’라는 말을 하면서 잠시 주춤거린 뒤 그대로 ‘뺏어 가지고’라고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한생명은 완전히 부실화되었고 이것을 소유자(최순영 회장)로부터 뺏은 다음 새로 살려야(경영정상화) 한다는 보고가 내게 전부 이뤄졌고, 그것(실행 여부)도 전부 내가 결정했고 내 승낙을 받아서 (관련 기관이) 실천한 것입니다.”
‘대한생명을 정상화하기 위해 회사 오너로부터 경영권을 뺏어서라도 처리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던 당시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김 대통령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대한생명의 오너에게서 경영권을 빼앗아 회사를 국영화시킨 후 민간에 매각하겠다는 정부의 사전 계획안이 있었고, 그 모든 것을 김 대통령 자신이 진두지휘했다는 뜻이 된다. 김 대통령의 발언은 국정책임자로서 해서는 안될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 대통령의 발언이 편집도 되지 않은 채 공중파를 탄 이유는 무엇일까.
추론컨대 당시 대한생명은 부실덩어리로 간주됐고, 그룹 오너인 최순영 회장은 外貨(외화)를 해외로 빼돌리는 악덕 기업인으로 낙인 찍혀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생명은 1999년 2월 12일 금융감독원의 특별검사가 있은 후 세 차례에 걸쳐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돼 정부 소유(국영화)로 있다가, 2002년 12월 한화그룹으로 매각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TV 대담에서 밝힌 대로, 금융감독원이 1999년 2월 11일 대한생명을 상대로 특별검사를 실시한 것도 청와대에 미리 보고됐고 승낙을 얻은 후 집행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금융감독원의 특별조사가 있기 하루 전인 2월 10일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은 검찰에 연행·구속됐다.
신동아그룹, 손보기로 한 첫 번째 그룹
최순영 회장은 2009년 月刊朝鮮 3월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그룹 해체까지 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까.
“정치적인 이유였죠. 그룹 총수를 구속시킨 상태에서 주력기업인 대한생명을 국영화하고 그룹 전체를 공중분해시킨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돼요. 1997년 大選(대선) 때 김대중 후보 측에 선거자금을 안 낸 기업으로 지목되면서 정치보복을 당한 겁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權魯甲(권노갑)씨 등 당시 동교동계 실세들로 구성된 9인의 비선조직 모임에서 ‘손 좀 보기로’ 한 첫 번째 그룹으로 지목된 게 신동아그룹이었어요. 비선조직의 실체는 아태재단 출신 황○○ 장로의 傳言(전언)으로 알게 됐지요. 이 비선조직은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정권 초기에 필요할 때마다 모여 중요사안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그룹 해체는 DJ 정권의 시나리오에 의해 실행된 거였어요.”
―어떤 근거로 사전 각본이 있었다고 판단하는 겁니까.
“1999년 세상에 알려진 옷로비 사건을 먼저 말씀 드려야겠군요. 이 사건의 본질은 통일부 장관 부인이 저의 처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자기의 이익도 챙길 겸 당시 검찰총장 부인인 연정희씨에게 접근해 라스포사 의상실에 가서 외상으로 옷을 사게 하고 그 옷값을 저의 처에게 대신 내도록 한 것입니다. 저의 처는 도를 넘는 일이라 거절했어요. 그게 다입니다.
실체적 진실은 옷로비 사건이 아니라 ‘옷값 대납 요구 거절 사건’이지요. 옷값 대납 요구는 제가 구속되기 6개월 전인 1998년 가을 무렵 있었어요. 검찰총장 부인이 연결돼 있으니 검찰총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신경을 썼죠. 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가깝다고 알려진 조풍언씨에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조풍언씨는 저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근데 조풍언이가 얼마 후 ‘이 문제는 내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고 전해 왔어요. 그러던 와중에 저와 교회활동을 하며 알게 된 김○○ 전 고려대 총장이 ‘김대중 정권이 조만간 신동아그룹을 손볼 것’이라며 실세 중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전해 주더군요. 그 얘기를 한 사람은 비선조직에서 활동했던 황○○ 장로였습니다.
(중략)나중에 황○○ 장로로부터 직접 들었는데 ‘권노갑씨보다 이수동씨가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해요. 이수동씨가 비선조직 모임에서 ‘(대선 때) 정치자금도 안 내고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손 좀 보자’고 했다는 겁니다. 그가 주도했다고 해요. 비선 모임은 이수동씨 집에서 모이기도 했고, 효자동 한식당에서 모이기도 했답니다. 신동아그룹 문제로 말이죠. 이들은 다른 문제도 서로 논의하곤 했답니다. ‘○○은행장은 누구를 시키자’, ‘한전 사장은 누구를 시키자’는 등의 인사문제를 논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런 사람들이 모임을 유지하면서 자기들 몫을 챙겼다는 겁니다.”>
대한생명 부실기업 만들기
그렇다면 과연 1999년 당시 대한생명은 회생 불가능한 부실덩어리였을까. 김대중 대통령이 TV 대담에서 “대한생명은 부실화됐기 때문에”라고 말한 대목을 검증해 보자.
금감원은 1999년 3월 23일 대한생명의 자산·부채 평가 및 특별검사 결과를 발표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 대한생명에 대해 2월 11일부터 3월 13일까지 자산·부채 평가 및 특별검사를 실시한 결과, 1998년 12월 말 현재 同社(동사)의 부채대비 순자산부족액이 2조9000억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순영 회장의 회사자금 횡령, 계열사 등에 대한 부당 대출, 책임준비금 과소적립, 외화유가증권 부당 투자 등의 위법 부당한 사실을 적출하였다.
대한생명의 현재 재무상황으로는 보험사업을 정상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어, 조속한 시일 내에 대한생명의 자본 충실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국내외 경쟁입찰을 통해 자본유치가 이루어지는 시점까지 회사 가치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정상영업을 유지시키는 한편, 회사운영 전반에 대한 관리감독을 실시하기 위해 99년 3월 23일자로 대한생명에 대해 관리명령을 내리고 보험관리인을 선임하였다.>
금융감독위원회(이하 금감위)는 그해 5~7월, 대한생명의 공개매각을 세 차례 추진했지만 유찰된다. 한 달 뒤인 8월, 금감위는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자본금 감소 명령을 취했다.
최순영 회장을 비롯한 대한생명 측은 서울행정법원에 ‘금감위의 부실금융기관 결정 취소’ 청구 소송을 내 승소한다. 행정법원은 대한생명이 부실금융기관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금감위가 행정법원에 이의를 제기, 대한생명의 영업상 대출분을 부채로 산정해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확정한다.
금감위는 1999년 9월 3일 대한생명 측에 ‘대한생명에 대한 부실금융기관 결정 및 자본금 감소 명령 등 관련 사전 통지 및 의견제출 요청’이라는 공문을 보낸다. 공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금융감독원이 실시한 대한생명의 자산·부채 평가결과, 동사는 99년 6월 30일 기준으로 부채가 자산보다 2조6753억원을 초과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보험영업 부문에서의 적자 확대, 해약률의 증가, 신규보험 영업에서의 부진 및 직원과 영업조직의 동요로 정상적인 보험사업의 영위가 어려운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 위원회는 동사에 대해 ‘부실금융기관 결정 및 자본금의 감소명령’ 처분을 사전에 통지하오니 의견이 있으면 99년 9월 10일까지 당 위원회에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2개 보험사는 1년6개월, 대한생명은 단 11일뿐
금감위는 대한생명 측에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며 일주일의 시간을 줬다. 대한생명 측은 서둘러 자구방안을 마련했지만 시간은 금세 지나가 버렸다. 마침내 금감위는 그해 9월 14일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자본금 감소(주식 소각)를 통보했다.
금감위가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貴社(귀사)에 대한 경영상태를 실사한 결과 부채가 자산을 2조6753억원(99년 6월 말 기준) 초과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 명백하므로, 귀사를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또한 해약의 증가, 수입보험료의 감소, 영업조직의 동요와 이탈 및 유동성 부족 등으로 영업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인정되어 귀사의 조기 경영정상화를 위해 예금보험공사에 공적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주주 책임분담 원칙에 따라 동사의 기존 주식 전부를 無償(무상) 소각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
금감위는 대한생명 측에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할 예정이라는 통지서를 보낸 지 11일 만에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로 인해 최순영 회장이 갖고 있던 지분을 포함해 모든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다. 보름 뒤인 1999년 10월 1일 예금보험공사는 대한생명에 1차 공적자금 500억원을 투입했고, 최순영 회장의 품에 있던 대한생명은 정부로 넘어갔다.
대한생명에 대한 금감위의 전격적인 조치는 당시 22개 생명보험사를 처리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형평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IMF 직후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금감위는 1998년 5월, 22개 생명보험사에 대해 경영정상화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한다. 그로부터 1년6개월 후(1999년 12월 30일) 이들을 대상으로 몇몇 기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했다. 타 보험사의 경우, 회사 정상화 기간이 1년6개월 동안 주어진 반면, 대한생명에는 고작 11일이란 시간만 주어진 것이다.
최순영 회장이 1999년 2월 구속될 당시 대한생명은 자산 규모 14조6800억원의 대규모 생명보험회사였다. 최 회장은 금융감독위원회의 대한생명 부실금융기관 처분에 대해 “법적 절차와 형평성을 무시한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月刊朝鮮(2009년 3월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생명 유동성 부족은 터무니없어
“단지 부채가 자산을 초과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기존 주식 전부를 무상 소각시킨 것은 신동아그룹을 공중분해시키려는 계획된 시나리오였음이 분명해요. 당시 대한생명은 유동성자금 3조5900억원을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 이후로도 매월 3조5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확보했죠. 유동성 부족으로 공적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에요. 특히 동종 회사인 삼성생명은 고객이 해약할 때 접수 후 3일 후에 해약금을 이체하는 방법으로 유동성을 관리했는데, 대한생명은 보험금을 요구하는 고객의 요청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대한생명의 유동성 부족이 공적자금 투입의 원인이라면 현금을 투입해 유동성을 개선해야 하는데, 당시 정부는 현금을 투입하지 않고 채권으로 자산부족분을 보전했어요.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 채권은 2002년 6월까지 대한생명 금고 안에 그대로 보관돼 있었어요. 현찰이 있으니 채권을 현금화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이는 대한생명에 유동성 위기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공적자금은 국민의 세금입니다. 세금을 그냥 떼먹으면 당장 형무소行(행)이니까 공적자금을 묘하게 받아 뒷돈을 빼먹은 거예요. 그게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대한생명 현금 3조5500억원으로 만들어진 공적자금의 허구성
/1999년 9월 14일 예금보험공사가 작성한 문건. 부실하다던 대한생명의 돈으로 공적자금을 만들었다
대한생명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1차 500억원(1999년 10월 1일), 2차 2조원(1999년 11월 16일), 3차 1조5000억원(2001년 9월 5일) 등 세 차례에 걸쳐 총 3조5500억원이 투입됐다.
문제는 공적자금 투입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공적자금은 재정 상태가 부실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정부 자금이 대부분 현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대한생명에 들어간 공적자금 3조5500억원은 본래 대한생명의 돈이었음이 月刊朝鮮이 입수한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 문건에 의해 처음으로 드러났다.
‘예보 문건’은 최순영 회장이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현금을 투입하지 않고 채권으로 자산부족분을 보전했다”고 한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문건이다. 예보 문건과 당시 상황을 종합하면, 정부는 대한생명의 돈을 공적자금으로 둔갑시켜 대한생명에 투입한 후 회사 경영권을 박탈, 국유화시킨 것이다.
다음은 月刊朝鮮이 입수한 예보 문건 <대한생명보험에 대한 출자안 및 예금보험기금채권 발행안>의 주요 부분이다. 이 문건은 예보가 대한생명에 1차 공적자금 500억원을 투입하기 직전인 1999년 9월 14일에 작성된 문건이다.
< 1. 의결주문
대한생명보험(株)에 대한 출자안을 본문과 같이 의결한다.
2. 제출이유
금융감독위원회는 99년 9월 14일 대한생명보험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동사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동사의 현재 수권자본금 800억원 중 납입자본금 300억원을 제외한 500억원을 우선 출자해 줄 것을 요청해 온 바 예금자보호법 제38조에 의거, 출자하고자 운영위원회에 부의하는 것임.
3. 의결본문
가. 출자
·출자방식: 대한생명보험에서 신주인수권을 부여할 경우 출자참여
·출자금액: 500억원
·출자방식: 현금출자
나. 출자재원 조달
·예금보험기금 채권 발행
·발행금액: 500억원
·인수기관: 대한생명보험(이하 생략)>
이 공문에 따르면, 예금보험공사는 ‘예금보험기금 채권’ 500억원을 발행하고 대한생명이 이를 인수한다. 대한생명은 채권 인수대금으로 500억원을 예보에 입금한다. 예금보험공사는 그 돈을 다시 대한생명에 현금출자한다. 대한생명에 세 차례 투입된 공적자금 3조5500억원은 모두 이와 같은 방식으로 들어갔다.
유동성 자금 충분했던 대한생명
/금융감독위원회가 작성한 1999년 9월 3일자 문건(왼쪽)과 9월 14일자 문건. 금감위는 대한생명 측에 경영정상화 기회를 고작 11일간만 부여했다. 9월 14일자 문건은 최순영 회장이 갖고 있던 대한생명 경영권을 박탈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동성 부족을 이유로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된 대한생명이 실제로는 예금보험공사 채권을 매입할 정도로 자금 사정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금감위와 예보는 공적자금 투입 대상이었던 대한생명에서 현금을 받아 예보 채권을 구입하도록 한 후, 그 자금을 대한생명에 도로 집어넣었다. 상황을 종합하면, 당시 대한생명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직후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 상황이 있었지만 1998년 이후에는 유동성 부족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한생명에 들어온 예보채권도 금고에 5년 이상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대한생명이 현금화할 수 있는 자금으로 3조5000억원 이상 보유하고 있었기에 채권을 매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금보험공사가 대한생명에 1차 공적자금 500억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날(1999년 9월 14일)은 공교롭게도 금융감독위원회가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한 날이다.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같은 날에 이뤄졌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연이거나, 아니면 대한생명을 국영화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확고했거나 둘 중 하나다.
김대중 대통령의 TV 발언대로, 금감위와 예보는 “대한생명의 경영진이 회사를 살리겠다”는 자구노력을 제대로 듣지 않고 대한생명의 경영권을 ‘뺏어간’ 셈이다.
예금보험공사의 내부자료에 따르면, 예보는 2001년 5월 공적자금을 추가 투입하기 위해 향후 5년간 예상되는 대한생명의 당기순이익을 발표했다. 그런데 예보는 예상 순이익을 실제 순이익보다 훨씬 적게 발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한생명의 예상되는 순이익이 적어야 ‘부실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공적자금이 추가로 투입될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예보는 2001년도 대한생명의 예상 당기순이익을 65억원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순이익은 8684억원이었다. 2002년도의 예상 순이익은 1200억원이었으나 실제 순이익은 9794억원이었다. 2003년도의 실제 순이익은 6150억원, 2004년에는 5366억원, 2005년에는 3749억원의 순이익이 났다. 예보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의 예상 순이익을 1조3600억원으로 잡았으나 실제로는 3조3700억원의 순이익이 발생했다. 당초 예측한 수치와 무려 2조원 이상의 차이가 난 것이다.
당시 예금보험공사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조카인 李亨澤(이형택)씨가 전무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동화은행 영업부장(이사대우)으로 있다가 1999년 1월 예금보험공사 전무이사가 됐다. ‘예보 전무’는 공적자금 집행을 총괄하는 막강한 자리다. 퇴출당한 동화은행 부장이 하루 아침에 예보 전무가 되자 당시 언론은 ‘파격 인사’라고 보도했다. 이 전무는 2002년 보물섬 사건과 신앙촌 개발 비리 사건에 연루돼 사법처리됐다.
大選 일주일 전 대한생명 매각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은 김대중 정권의 끝 무렵인 2002년 12월 12일 한화그룹에 넘어갔다. 대통령 선거(2002년 12월 19일)가 있기 일주일 전이었다. 한화는 대한생명 주식 51%를 1주당 2275원, 총 8236억원에 인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헐값 매각 논란 등 적잖은 정치·사회적 갈등이 야기됐다.
당시 재계에서는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하기 직전에 대한생명을 서둘러 매각한 데는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의 남다른 속사정이 있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최순영 회장이 1999년 2월 구속될 당시 신동아그룹은 22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었다. IMF 직후라 모든 기업이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신동아그룹은 善戰(선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 회장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대한생명을 비롯해 동아제분·신동아건설·신동아화재·한일약품·호텔송도비치·태흥산업·삼풍산업·대생상호신용금고·우정상호신용금고 등이 그룹의 대표회사였지요. IMF라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 계열사가 부도 없이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1999년도 그룹사의 총자산이 약 19조7000억원이었고, 매출액은 9조2000억원가량 됐어요. 대한생명이 주력회사였는데 1999년 2월 현재 자산 규모가 14조6800억원에 달했어요. 현금·예금액이 1조원, 언제든지 팔아 현금화할 수 있는 유가증권이 2조5000억원 등 매월 3조5000억원 이상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죠. 5만여 명의 우수한 영업조직과 450만명의 계약자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매월 5000억원 이상의 수입보험료를 냈습니다.”
―신동아그룹은 당시 재계 서열 몇 위였습니까.
“한국의 실력 있는 기업이라 하면 삼성·현대·엘지·대우 등 5대 그룹을 들 수 있겠죠. 나머지 그룹은 서로 비슷비슷했어요. 신동아그룹은 서열상 24~25위 정도였습니다.”
―그룹사 총자산이 20조원 정도면 작은 회사는 아니죠.
“물론 그렇죠. 그런데 정치적으로 사건이 터지니까 하루아침에 계열사가 날아가 버리더군요. 정치적인 사건은 정치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대처하는 방법이 좀 미숙했어요. 또 정권이 설마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8개월 동안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보석으로 밖에 나와 보니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계열사 중에 대표적인 회사가 대한생명이었어요. 그룹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회사가 공중분해돼 가는 거예요. 물론 구치소 안에 있을 때부터 간접적으로 ‘그룹을 포기하라’는 의사를 전달받았죠. 저를 면회하러 온 사람이 정부 측 뜻을 가지고 와서 ‘정부가 대한생명, 동아제분 주식을 포기하라고 한다’고 전해 줬는데 ‘나는 포기 못 한다’며 반발했죠. ‘너희가 정정당당하게 기업을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봐라. 이유가 상당하다면 내가 포기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버텼죠. 그래도 계속해서 포기하라는 압력이 있었어요. 결국 포기 안 했죠. 포기를 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대한생명 뺏으라고 얘기한 것 보고 충격받아”
/최순영 회장은 최근 서울 온누리 교회에서 지난 10년간의 고난을 신앙으로 이겨냈다는 간증을 했다.
―압력은 어느 쪽에서 들어왔습니까.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이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돼 있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제가 구속된 그 다음날 금감원이 그룹사에 특별검사를 나왔어요. 이게 있을 수 있습니까. 주식 포기를 종용한 대표적인 사람이 금감위 담당 국장이었어요. 물론 그 사람은 위에서 시키니까 그랬겠죠. 실무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만이 아니에요. 여러 루트를 통해 주식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들어왔어요. 뒤늦게 ‘아, 이 정권이 회사를 통째로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8개월 만에 나오니까 그때는 정권이 사실상 대한생명을 다 가져간 상태였어요. 눈 뜨고 빼앗긴 셈이죠. 신동아건설·공영사·동아제분·프린스호텔·삼풍도 다 팔아먹었어요. 제 승인도 없이, 8개월 만에 다요. 별 볼 일 없는 것만 남아 있더군요.”>
최순영 회장은 月刊朝鮮 3월호와의 인터뷰 이후 여러 곳으로부터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 그는 CTS 기독교 TV, CGN TV, 극동방송 등에 출연해 “지난 10년 동안 있었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한국 기독교지도자 협의회가 주최한 ‘나라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비롯해 금란교회·강남교회·할렐루야교회·평강교회·온누리교회·명성교회·강남금식기도원 등에서 연사로 초청돼 강연과 간증을 하고 있다.
최순영 회장에게 “1999년 KBS가 방영한 ‘김대중 대통령 특별대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다. 최 회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대담 진행자로 나온 김주영 작가가 김 대통령에게 옷로비 사건과 관련해 ‘거짓보고’가 있었다고 말한 대로, 제 아내가 남편의 구속을 면하기 위해 자작극을 꾸몄다는 보고서는 거짓입니다. 그런 잘못된 정보로 대통령이 저와 신동아그룹에 나쁜 감정을 가졌는지 모르죠. 아무튼 김 대통령 본인이 직접 말한 것처럼, 대한생명을 비롯한 신동아그룹 전체를 나라에 빼앗겼습니다. 저의 구속이 정치적으로 이뤄졌다는 차원에서 억울한 점도 없지 않고요.
이제라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실세 노릇을 했던 분들은 김 대통령이 살아 계시는 동안 사죄하고 진실을 밝혀야 해요. 대선 때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안 줬다는 이유로 ‘신동아그룹을 손볼 것’이라는 소문을 익히 듣고는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께서 이렇게 대한생명을 뺏으라고 얘기한 것을 보고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正義가 강물같이 흐르는 나라가 되길”
―이번에 드러난 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원·예금보험공사의 문건에 따르면, 당시 대한생명은 타 생명보험사에 비해 경영정상화 기간이 불과 11일밖에 안됐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당시 대한생명에 절차에 따라 실질적인 자구기회가 주어졌다면, 공적자금이 투입되지 않고도 경영정상화는 충분히 가능했어요. 결국 신동아그룹 해체는 절차와 형평성을 무시한 정치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대한생명을 포함한 신동아그룹의 강제 해체 사건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정확한 진상이 밝혀져야죠. 신동아그룹 퇴직 임직원 1918명이 서명한 탄원서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명의의 탄원서가 청와대에 제출됐어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사가 이뤄져야 해요. 저는 요즘 간증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병상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까.
“그동안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뤄낸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루빨리 쾌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대한생명 매각 과정
▲1999년
2월 11일: 최순영 회장 강제연행, 구속
2월 12일~3월 13일: 금융감독원의 대한생명 자산-부채 특별검사
3월 14일: 금융감독위원회, 메트라이프의 MOU 효력 소멸선언
3월 23일: 금융감독원 특별검사 결과 발표. 대한생명에 경영관리명령 부과
5월 8일~6월 28일: 금융감독위원회의 대한생명 3차례 공개매각 입찰
7월 23일: 금감위의 대한생명 공개매각 유찰 발표
8월 6일: 금감위는 대한생명에 대하여 부실금융기관 결정 및 자본금 감소 명령
8월 31일: 금감위의 부실금융기관 결정 등 처분 취소 판결(행정법원 제13부)
9월 3일: 금감위는 대한생명에 대해 부실금융기관결정 및 자본금의 증가-감소명령 등과 관련 사전통지 및 1999년 9월 10일 기한으로 의견제출 요청
9월 14일: 금감위는 대한생명에 대해 부실금융기관 결정 및 자본금의 증가-감소명령 통보
10월 1일: 관리인들은 대한생명의 기존발행주식 전부를 무상 소각시키고 예금보험공사에 신주 1000만주를 발행해 인수토록 결의(예금보험기금 채권 500억원 출자)
11월 26일: 예금보험공사는 2조원 추가 출자(예금보험기금채권)
▲2001년
2월 19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출범
2월 27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대한생명 매각추진 의결
9월 6일: 예금보험공사, 대한생명 1조5000억원 추가출자(예금보험기금채권)
12월 24일: 한화컨소시엄(한화 60%·일본 오릭스 33%·호주 맥쿼리 7%) 및 메트라이프를 인수협상 대상자로 공동선정
▲2002년
3월 21일: 메트라이프, 대생 인수의사 철회. 한화컨소시엄 투자제안서 제출
6월 27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한화컨소시엄을 대한생명 인수 우선협상 대상자로 조건부 선정
9월 23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우선협상 대상자인 한화컨소시엄을 대한생명 인수자로 최종 승인
10월 28일: 예금보험공사, 대한생명 가치를 1조6150억원으로 평가. 한화컨소시엄에 대한생명 지분 51%를 8236억원에 매각
12월 12일: 한화컨소시엄, 2차 인수대금 4118억원 납부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 글=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백승구 기자]
2017.04.18 최순영 전 신동아 회장, "신동아그룹 해체는 정치자금 안낸데 대한 정치보복"
“그들(DJ정권 실세)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20조원짜리 회사를 뜯어먹었다” "정경유착 병폐 반드시 근절해야...",
20여 년 전의 일이다. 1998년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다. 최근 자서전을 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당시는 대통령 선거와 같은 큰 선거가 있을 때면 정치권과 재계의 정치자금 거래가 은밀히 있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얼마 후 첫 번째로 그룹이 해체된 재벌이 있었다. 바로 63빌딩으로 상징되던 신동아그룹. 지금 기준이라면 당시 정권 또한 탄핵감이라 할 수도 있겠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권태신 상근부회장은 4월 17일 한 언론인터뷰에서 정경유착 금지를 강조했다. 그는 “기업에 조세부담 외에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소위 ‘정경유착 금지법’을 만들어 달라고 국회에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그로 인해 오는 5월 9일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김대중 정부 당시 그룹해체 수모를 당했던 신동아그룹의 최순영 회장이 《조선pub》에 직접 이런 견해를 밝혀왔다.
“당시 신동아그룹이 해체된 것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자금을 안줬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법적 절차와 형평성이 무시한 채 신동아그룹은 강제로 해체됐습니다. 한마디로 공중분해된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정치 보복 사건이었습니다.”
최 회장은 이번 대선을 통해 “이제는 정경유착의 병폐를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면서 “그래야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신동아그룹의 공중분해와 같은 정치적 보복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대선을 통해 정경유착의 병폐가 반드시 근절돼야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월간조선》은 2009년 3월호를 통해 최순영 회장의 인터뷰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최 회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그룹 해체 이후 10년 동안 가슴 속에 묻어뒀던 숨겨진 진상을 털어놨다. 최 회장은 인터뷰에서 “그들(DJ정권 실세)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20조원짜리 회사를 뜯어먹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래 기사를 통해 그 진상의 전모를 알아보자.
[10년 만의 격정 토로] 崔淳永 前 신동아그룹 회장
“그들(DJ정권 실세)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20조원짜리 회사를 뜯어먹었다”
지난 10년간 가슴 속에 묻어뒀던 신동아그룹 해체 진상을 털어놓다!
2001년 8월 박某 부장검사, 최 회장에게 ‘기소유예 처분해 줄 수 있으니 조선일보와 관련된 비리자료를 달라’고 요구
“대한생명은 1999년 2월 현재 자산 규모 14조6800억원이었다. 매월 3조5000억원 이상의 유동자금이 있었고, 매월 5000억원 이상의 수입보험료를 걷어들였다. 3조5500억원의 公的자금을 투입한 것은 국민혈세 낭비였고, 그 과정에서 金大中 정권 사람들이 각종 이득을 챙겼다.”
⊙ 1992년 大選 때 金泳三 후보 측에 선거자금 100억원 전해
⊙ 1997년 대선 때 金大中 후보의 핵심인사가 와서 ‘최소 1992년 김영삼 후보에게 준 돈 이상을 주셔야겠다’며 선거자금 요구.
⊙ 김대중 정권 실세 9인으로 구성된 비선조직에서 신동아그룹 손 보기로 논의…
이수동 아태재단상임이사가 주도
⊙ 장관들과 식사하며 용돈으로 1억원씩 줬다
⊙ 金宇中 대우그룹 회장에게 속아 4000억원 떼이기도
⊙ 정·관계 비자금으로 1800억원 사용… ‘최순영 리스트’ 있다
⊙ 구속되기 6개월 전 옷로비 사건 터져.
실체적 진실은 옷로비 사건이 아니라 옷값 대납요구 거절 사건
⊙ 대한생명 국영화는 법적 절차 위반, 매각은 특혜매각. 8개월 만에 20여 개 계열사 사실상 다 팔아 치워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eaglebsk@chosun.com〉
“잠깐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1999년 2월 10일 오전 7시, 서울시 한남동 崔淳永(최순영·70) 신동아그룹 회장 자택에 검찰 수사관 3명이 들이닥쳤다. 최 회장과 신동아그룹에 狂風(광풍)이 불어닥친 순간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오. 영장을 보여주시오.”
“가보시면 압니다.”
최 회장은 영문도 모른 채 검찰로 연행됐다. 이튿날 그는 외화밀반출, 계열사 불법대출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그는 검찰조사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자산규모 20조원의 신동아그룹이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구속은 ‘그룹 해체’라는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는 신호탄이었다.
두 차례의 구속. 평생 일군 회사와 사회적 지위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치욕뿐이었다. 그는 그룹 총수치고는 꽤나 긴 2년6개월간 구치소 신세를 졌다. 구속 8개월 만인 1999년 10월 보석으로 석방됐다가 2005년 1월 다시 법정구속됐다. 해를 넘겨 2006년 9월 건강악화로 구치소에서 쓰러지자 병원으로 실려갔다. 몸은 밖에 있었지만 지루한 법정공방은 계속됐다.
“신앙의 힘으로 참고 견뎌”
李明博(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8월, 그는 광복절 特赦(특사)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세상까지 그를 자유인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은 부도덕한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세상은 그의 사면을 ‘특혜’로 봤다.
그래서 그는 큰 마음을 먹었다.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10년간 묻어뒀던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됐다고 용기를 낸 것이다.
취재진은 서울시 양재동에 있는 횃불선교재단을 찾았다. 최순영 회장은 선교재단 이사장실 옆 작은 방을 얻어 쓰고 있었다. 10년 만에 언론과 만나는 탓인지 그의 얼굴은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에 “신앙의 힘으로 참고 버텨왔다”고 했다. 10년 만에 터진 말문은 질문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할 때는 격정적으로,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임직원들에게는 용서를 바라는 죄인의 심정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10년이라는 세월 때문인지, 올해 일흔이 된 나이 때문인지, 그는 세상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
“10년 동안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동안 재판하느라, 구치소 들락날락하느라 하는 동안 정권이 두 번 바뀌었네요. 정치적으로 엮인 사건은 사회적 여건이나 개인의 희망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치가 경제를 앞질러 가고 있어요.”
그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딱 10년 전이네요. 1999년 2월 10일 아침 7시쯤이었어요. 회사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건장한 수사관들이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영장도 없이 강제로 연행당했죠.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그룹 회장에서 순식간에 범죄자가 됐습니다.”
―그동안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5년이면 정권이 바뀌잖아요. ‘정권이 바뀌면 할 말을 할 수 있겠구나’고 생각했지요. 정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아무리 내 입장을 들어봐 달라고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기다렸죠. 그런데 제 마음대로 안 되더군요. 盧武鉉(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을 가졌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어요. 反(반)기업 정서가 강한 정권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요. 그러고 또 5년을 기다렸죠.”
다행히 정권이 교체됐지만 그의 나이가 벌써 70이 되어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청와대나 국회에 친구들도 많고 知人(지인)도 많았어요. 10년이 지나니까 그 사람들이 안 보여요. 과거에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10년이 지나니까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세월보다 더 빨리 변하는 게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해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느낌”
/대한생명 본사가 있는 63빌딩.
―연행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당시 한남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울지검 특수1부 소속 수사관 세 명이 왔어요.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이라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요. 노○○라는 수사관이 신분증을 보여주며 ‘가자’는 겁니다. ‘영장을 보자’고 하니까 ‘임의동행 형식이니 가서 말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한참 실랑이를 벌였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그렇게 끌려갔죠.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 가듯 집 앞에서 저를 채 간 겁니다. 아무도 내가 끌려간 걸 몰랐지요. 검찰에 가서 보니 무역하면서 외화 밀반출이다, 계열사 불법대출이다, 별의별 것을 다 뒤집어씌우더군요. 그중에서 외화 밀반출 부분을 집중적으로 캐 물었어요. 아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그렇게 들어갔다가 1심 재판이 끝날 무렵인 10월 22일 보석으로 나왔어요. 8개월 만에 나온 셈이죠.”
―연행될 때 직감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없었습니까.
“구속되리라 생각도 안 했어요. 검찰이 주장하는 외화 밀반출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이 실제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시 김○○이라는 무역업 전문가를 사장으로 채용했는데, 그게 문제가 됐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그룹을 운영하면서 보험업과 건설업 등에 주력했어요. 무역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 러시아 무역 전문가로 자처하고 제게 접근한 김씨를 뽑은 게 화근이었어요. 그 사람의 계획적인 사기행각으로 엄청난 재산상의 손해를 봤어요. 김씨는 그룹 계열사인 ‘신아원’이라는 무역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회사를 상대로 가짜 서류를 만들어 오일거래를 한 것처럼 위장해 650만 달러를 빼돌렸어요. 이른바 ‘미야림 오일 사기사건’이었죠.”
사기행위를 숨기려고 위장무역을 실행한 主犯(주범)이 김○○임에도 최순영 회장이 주범으로 몰렸다고 한다.
“그룹 계열사가 은행권으로부터 무역금융을 받아 해외로 송금한 부분은 전액 국내로 반입됐어요. 은행 대출금도 개인적으로 연대보증한 상태라 전액 상환됐고, 금융권에는 부실채권으로 인한 피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튼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지만 검찰 수사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됐어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어요.”
최순영 회장이 구속될 당시 신동아그룹은 22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었다. IMF 직후라 모든 기업들이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신동아그룹은 善戰(선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한생명을 비롯해 동아제분·신동아건설·신동아화재·한일약품·호텔송도비치·태흥산업·삼풍산업·대생상호신용금고·우정상호신용금고 등이 그룹의 대표회사였지요. IMF라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 계열사가 부도 없이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1999년도 그룹사의 총자산이 약 19조7000억원이었고, 매출액은 9조2000억원 가량 됐어요. 대한생명이 주력회사였는데 1999년 2월 현재 자산 규모가 14조6800억원에 달했어요. 현금·예금액이 1조원, 언제든지 팔아 현금화할 수 있는 유가증권이 2조5000억원 등 매월 3조5000억원 이상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죠. 5만여 명의 우수한 영업조직과 450만명의 계약자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매월 5000억원 이상의 수입보험료를 냈습니다.”
―신동아그룹은 당시 재계 서열 몇 위였습니까.
“한국의 실력 있는 기업이라 하면 삼성·현대·LG·대우 등 5대 그룹을 들 수 있겠죠. 나머지 그룹은 서로 비슷했어요. 신동아그룹은 서열상 24~25위 정도였습니다. 삼성이나 현대에 비하면 작은 회사였죠.”
―그룹사 총자산이 20조원 정도면 작은 회사는 아니죠.
“물론 그렇죠. 그런데 정치적으로 사건이 터지니까 하루아침에 계열사가 날아가 버리더군요. 정치적인 사건은 정치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대처하는 방법이 좀 미숙했어요. 또 정권이 설마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8개월 동안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보석으로 밖에 나와보니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계열사 중에 대표적인 회사가 대한생명이었어요. 그룹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회사가 공중분해돼 가는 거예요.
물론 구치소 안에 있을 때부터 간접적으로 ‘그룹을 포기하라’는 의사를 전달받았죠. 저를 면회하러 온 사람이 정부 측의 뜻을 가지고 와서 ‘정부가 대한생명, 동아제분 주식을 포기하라고 한다’고 전해줬는데 ‘나는 포기 못 한다’며 반발했죠. ‘너희들이 정정당당하게 기업을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봐라. 이유가 상당하다면 내가 포기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버텼죠. 그래도 계속해서 포기하라는 압력이 있었어요. 결국 포기 안 했죠. 포기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이 정권이 회사를 통째로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압력은 어느 쪽에서 들어왔습니까.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이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돼 있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제가 구속된 다음날 금감원이 그룹사에 특별검사를 나왔어요. 주식 포기를 종용한 대표적인 사람이 금감委(위) 담당 국장이었어요. 물론 그 사람은 위에서 시키니까 그렇게 했겠죠. 그런데 그 사람만이 아니에요. 여러 루트 통해 주식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들어왔어요. 뒤늦게 ‘아, 이 정권이 회사를 통째로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8개월 만에 나오니까 그때는 정권이 사실상 대한생명을 다 가져간 상태였어요. 눈 뜨고 빼앗긴 셈이죠. 신동아건설·공영사·동아제분·프린스호텔·삼풍도 다 팔아먹었어요. 제 승인도 없이, 8개월 만에 다요. 별 볼 일 없는 것만 남아있더군요.”
―검찰에 구속될 때 계열사 불법대출 혐의를 받았는데요.
“IMF 외환위기 당시 은행들이 계열사에 대한 대출금 상환을 압박하고 있었어요. 이를 방치하면 궁극적으로 대한생명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사전에 차단하려 했죠. 당시 계열사의 부도를 방지해 그룹 전체의 신인도를 유지하면 이것이 결국 대한생명을 비롯한 그룹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당시 IMF 경제위기 상황을 맞아 모든 기업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외자를 유치해 계열사 대출금을 정리하려 했어요. 1998년 6월 8일 미국 생명보험회사인 메트라이프 뉴욕 본사에서 대한생명 주식 50%를 매각하는 조건으로 1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는 MOU(양해각서)도 체결했죠. 메트라이프는 200여만 달러에 달하는 경비를 지불하며 인원 60여 명을 투입해 1998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대한생명을 정밀 실사했어요. 협상이 원만히 진행돼 투자협상 막바지 단계에 와 있었는데 제가 구속되는 바람에 외자유치 협상이 물거품이 돼 버렸죠.”
“金大中 정권이 조만간 신동아그룹 손 볼 것”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이수동 아태재단 상임이사.
―구속 당시 일부 시민단체가 최 회장의 부도덕성을 거론하며 신동아그룹을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진실은 뭡니까.
“IMF 외환위기 당시 재벌기업들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최고조에 달했던 상황에 편승해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 등이 음해성 투서와 모함을 바탕으로 저를 헐뜯었어요. 해외에 호화별장이 있다느니, 자가용 비행기가 있다는 등 허무맹랑한 내용을 언론에 흘려 저를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만들었죠. IMF 사태에 따른 국민적 분노를 풀게 만드는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검찰조사에서 허위사실로 판명났어요. 아직까지 일부에서는 제가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아요.”
―1999년 IMF라는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계열사들이 선방을 하고 있었다면 그룹 해체까지 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까.
“정치적 이유였죠. 그룹 총수를 구속시킨 상태에서 주력기업인 대한생명을 국영화하고 그룹 전체를 공중분해시킨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돼요. 1997년 대선 때 金大中(김대중) 후보 측에 선거자금을 안 낸 기업으로 지목되면서 정치적 보복을 당한 겁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權魯甲(권노갑)씨 등 당시 동교동계 실세들로 구성된 9인의 비선조직 모임에서 ‘손 좀 보기로’ 한 첫 번째 그룹으로 지목된 게 신동아였어요. 비선조직의 실체는 아시아태평양재단 출신인 황○○ 장로의 傳言(전언)으로 알게 됐지요. 이 비선조직은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정권 초기에 필요할 때마다 모여 중요사안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그룹 해체는 DJ 정권의 시나리오에 의해 실행된 거였어요.”
―어떤 근거로 사전 각본이 있었다고 판단하는 겁니까.
“1999년 세상에 알려진 옷로비 사건을 먼저 말씀드려야겠군요. 이 사건의 본질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인사의 부인이 저의 처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자기의 이익도 챙길 겸 당시 검찰총장 부인인 연정희씨에게 접근해 라스포사 의상실에 가서 외상으로 옷을 사게 하고, 그 옷값을 저의 처에게 대신 내도록 한 것입니다. 저의 처는 도를 넘는 일이라 거절했어요. 그게 다입니다. 실체적 진실은 옷로비 사건이 아니라 ‘옷값 대납요구 거절 사건’이지요. 옷값 대납요구는 제가 구속되기 6개월 전인 1998년 가을 무렵 있었어요. 검찰총장 부인이 연결돼 있으니 검찰총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신경을 썼죠. 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아울러 저에 대한 이상한 얘기도 돌았어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가깝다고 알려진 조풍언씨에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조풍언씨는 저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근데 조풍언이가 얼마 후 ‘이 문제는 내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는 답변을 전해왔어요. 그러던 와중에 저와 교회활동을 하며 알게 된 김○○ 전 고려대 총장이 ‘김대중 정권이 조만간 신동아그룹을 손볼 것’이라며 실세 중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전해주더군요.
그 얘기를 한 사람은 비선조직에서 종교분야를 담당했던 황○○ 장로였습니다. 그당시 황 장로의 이름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어요. 비선조직에는 軍(군), 교육, 종교 등 분야별로 담당자가 따로 있었고, 국회의원이나 30년 가까이 김대중씨와 정치를 같이했던 동교동계 실세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권노갑씨였지요. 그들 중에서 신동아그룹 문제에 직접 개입해 좌지우지한 사람은 이수동씨였어요. 아태재단 상임이사를 지낸 분이지요. 그는 김대중씨의 오랜 지인으로 30년간 DJ 집사 역할을 했습니다(이수동씨는 현재 미국 체류 중-편집자 注).”
“비선조직이 신동아그룹 문제 논의”
―이수동씨가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겁니까.
“나중에 황○○ 장로로부터 직접 들었는데 ‘권노갑씨보다 이수동씨가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해요. 이수동씨가 비선조직 모임에서 ‘(대선 때) 정치자금도 안 내고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손 좀 보자’는 것이었답니다. 그가 주도했다고 해요. 비선 모임은 이수동씨 집에서 모이기도 했고, 효자동 한정식집에서 모이기도 했답니다. 신동아그룹 문제로 말이죠. 이들은 다른 문제도 서로 논의하곤 했답니다. ‘○○은행장은 누구를 시키자’, ‘한전 사장은 누구를 시키자’는 등의 인사문제를 논의했다고 해요. 그런 사람들이 모임을 유지하면서 자기들 몫을 챙겼다고 해요.”
―황○○ 장로라는 분은 신동아그룹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그분이 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비선 모임에서 저를 옹호했나 봐요. 당시 황 장로는 대통령 부인의 집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분은 종교계의 여론을 수집해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종교계 인사들로부터 ‘(최순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다’는 얘기를 듣고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해요. 황 장로는 저에 대해 좋은 인상은 아니지만 최소한 나쁜 인상은 갖지 않았나 봅니다. 황 장로는 李姬鎬(이희호) 여사에게 ‘(신동아 문제를) 신중히 해야 된다. 지금처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해요.
황 장로가 너무 그러니까, 그가 오히려 위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황 장로가 최순영한테서 20억원을 받아 챙겼다’는 투서가 영부인에게 전달됐어요. 이희호 여사가 황 장로를 불러 ‘최 회장에게서 돈을 받았느냐. 20억원 얘기가 왜 나오느냐’고 물었다고 해요. 황 장로는 펄쩍 뛰면서 ‘그 사람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받느냐’며 부인했다고 해요. 저는 그 사람에게 돈을 준 적도, 줄 이유도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황 장로와 일면식도 없었죠. 그런 음해성 투서가 영부인에게 전달될 정도였으니 그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만합디다.”
최순영 회장은 “황 장로는 비선조직과 행동을 같이해 그쪽 움직임에 정통했다”고 했다.
“비선조직은 수시로 모여 자기네 이해관계에 얽힌 일들을 협의하곤 했습니다. 거기에 나중에 끼어든 사람이 金泰政(김태정)씨였어요. 검찰총장이니까 비선조직에 들어갈 리가 없었는데 부인의 ‘고급 옷’ 얘기가 자꾸 흘러나오고 하니까 두어 번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김태정씨는 나를 적극 구속하는 쪽으로 일을 진행했죠.
비선모임에서는 정치자금 문제도 거론됐다고 해요. 당연히 정치자금을 안 낸 제가 좋게 보일 리 없었겠지요. 저는 1992년 대선 때 DJ에게 돈을 주지 않았어요. 1997년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죠.(웃음) 비선모임에서 ‘김영삼이한테는 거액을 주고 우리한테는 단 한 푼도 안 준 회사를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고 해요. 완전히 괘씸죄에 걸린 거죠. 나중에 황 장로에게 들은 얘기지만 신동아그룹을 공중분해시키는 데 대해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해요. 아무튼 그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은 후진국의 典型(전형)이었어요. 기업하는 사람은 정치자금을 당연히 내야 했습니다. 대선자금도 줘야 했고.”
“너희 회장 왜 연락없어” 하면 정치자금 달라는 얘기
―1992년 대선 때 金泳三(김영삼) 후보 측에 얼마를 건넸습니까.
“그때는 좀 특수한 상황이었는데 김영삼씨에게 100억원을 줬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도보다 훨씬 많이 전달했습니다. 그게 소문나면서 문제가 됐어요.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핵심인사가 내게 와서 ‘최소 1992년 김영삼 후보에게 준 돈 이상을 주셔야겠다’며 선거자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0원도 안 줬어요.”
최순영 회장은 역대 정권 때 제공했던 정치자금을 솔직히 털어놨다. 정·관계 인사들에게 선거자금 또는 인사치레로 돈을 전달한 사실을 담담히 얘기했다. 그는 “한국에서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政·官界(정·관계)에 돈을 주는 게 관례였다”고 했다.
―정치권에서 어떤 형식으로 돈을 요구합니까.
“직접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간접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당에서 했지요. 비서실장을 통해 ‘야, 너희 회장 왜 아직 연락 없어’ 이런 식으로 압력을 넣습니다. 부드럽게 얘기할 때는 ‘아직 소식이 없군요’라고 하지요. 액수는 얘기 안 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과거 누구한테 얼마를 줬는지 다 알아요. 그래서 그보다 더 많은 액수를 은근히 기대해요.”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씨에게는 얼마를 줬습니까.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큰 돈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정치자금을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아요. 전두환 정권 때 63빌딩을 지었어요.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요. 63빌딩 신축허가를 받으려고 육군본부 근처에서 군 고위 관계자 황○○씨와 저녁 한 그릇을 먹었어요. 그게 로비의 전부입니다. 식사값 말고는 돈 한 푼 들어간 게 없어요.
사람들은 저와 관련해 두 가지를 잘못 알고 있어요. 63빌딩 지을 때 정권에 돈을 많이 갖다 바친 것으로 알아요. 사실이 아닙니다. 또 제가 축구협회 회장을 5대 연속으로 8년간 했는데 ‘축구 좋아하는 전두환에게 잘보여서 회장을 오래 한다’는 시각이 많았죠. 그것도 잘못 알려진 겁니다. 저는 1979년부터 축구협회장을 하고 있었어요. 전두환씨가 축구를 좋아해요. 저도 전두환씨와 호흡이 일부 맞았고요. 그러다 보니 자주 만났고 그래서 축구협회장을 계속한 겁니다. 그 사람들(전두환·노태우)에게는 정치자금 준 거 없어요.”
“노태우 대통령에게서 1700억원 받으면 갚겠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100억원이라는 거액을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양반(김영삼)하고 아는 사이였습니다만, 사실 크게 도와줄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씨 측근이 제게 와서 ‘지방 유세를 가야 하니 도와달라’고 해요. 그 당시 유세라는 게 쉽게 말하면 지방에 가서 돈을 쓰는 일이죠. 전국을 한번 쭉 돌면서 지방조직에 선거자금을 주는 거죠. 근데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김영삼씨가 돈 없는 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그랬죠. 그 측근이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후보에게 선거자금을 주기로 했는데 그 돈을 안 준다’고 하더군요. 그게 대략 1700억원 정도 됐다고 해요. ‘정권 계승자금’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건 당신들 얘기지 나하고 뭔 상관이냐’고 했더니 ‘돈이 지난주에 들어오기로 했는데 아직 안 들어왔으니 유세를 못할 형편이다. 지금 사정이 급하니 꼭 도와 달라’는 겁니다. 김영삼씨는 자신의 측근을 삼성, 현대, 대우 이런 큰 기업에 모두 보냈어요. 각 기업에 100억원씩 해서 500억원을 만들 요량이었나 봐요. 측근에게 제가 그랬어요.
‘당신 정말 제 정신이오. 그 사람들(삼성·현대·대우그룹 총수)이야 돈이 있지만, 나는 없어요. 같은 액수(100억)를 요구하면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그 측근이 ‘돈은 나중에 갚을 테니까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급하기에 ‘빌려달라’고 그러겠습니까. 할 수 없이 대한생명에 차용증을 써 주고 개인 자격으로 돈을 빌려 건넸지요.”
―돈은 어떻게 전달했습니까.
“선거가 한창때였는데 김영삼씨가 남산 하얏트호텔 특실에다 방을 잡고 기다리고 있더군요. 100억원을 현금으로 가져가는 건 불가능해 수표로 바꿔 가져갔죠. 수표 양도 많더라고요. 저녁을 같이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달했어요. ‘고맙다’고 하더군요.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이런 얘기를 한 게 기억이 나요. SK하고 사돈지간인 노태우 대통령이 정권 말기에 SK 측에 이동통신 허가를 내줬어요. 그게 특혜 어쩌고 하며 난리가 났어요. 근데 김영삼씨가 그걸 뒤집겠다고 했어요. SK에 불똥이 떨어졌죠. 저랑 저녁을 먹으며 김영삼씨가 제게 이동통신에 대해 물어보더군요. ‘최 회장, 이동통신 허가인가 뭔가가 얼마만큼 중요한 거요’라고 해요. 김영삼씨가 경제를 모르긴 정말 모르더군요. 제가 그랬죠.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많은 어려움을 당할까 봐 SK가 반납을 한 겁니다. 그거 어마어마한 이권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미 허가를 해줬으니 대통령에 당선되면 회복시켜 줘야 합니다.’
제 얘기를 듣고 김영삼씨가 ‘그 정도냐. (허가를 다시) 해줘야겠구먼’ 하더군요. 나중에 제가 SK 회장을 만나 생색을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어요.”
“장관들에게 용돈으로 1억원 줘”
―다른 그룹 총수들도 김영삼씨에게 비슷한 액수를 냈습니까.
“비슷하게 줬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분수에 넘치는 돈을 줬어요. 당시 제 수준이라면 대략 20억~30억원 정도를 줬어야 해요. 무리하게 돈을 주다 보니 소문이 나 버린 겁니다. 1997년 대선 때 그 얘기가 다시 나왔고, 당시 李會昌(이회창)씨나 김대중씨도 최소 그 액수보다 많이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1997년 대선 때 이회창씨에게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했어요. 1992년 전례를 다시 밟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사실 제가 1976년 선친으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았을 때 부채를 많이 떠안았어요. 선친께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너한테 빚만 남겨주고 가는구나’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회사를 인수할 때 계열사들이 참 어려웠어요. 개인적으로 쓸 돈도 없었지요.”
―돈이 없었음에도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군요.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지만 10년 전의 정치상황은 완전히 후진국 스타일이었습니다. 정치자금을 안 주고는 살아날 기업이 없었어요.”
―구속 당시 시중에 ‘최순영 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돈을 받은 정치인들 리스트는 없었습니까.
“그때는 안 밝혀졌지만 그게 왜 없겠어요. 그런데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더군요. 저를 조사하던 검찰이 그 리스트를 굉장히 의식하더라고요. 제게 엄청난 돈을 횡령했다고 몰아세우면서도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썼느냐’고는 묻지 않아요. 당연히 물어봐야 되잖아요. 한번도 안 물어봤어요. 기가 막히더라고. 검찰이 수사의지를 안 보이는데 얘기를 해봐야 뭘 하겠어요. 그래서 안 했죠.”
―그동안 정·관계 인사들에게 준 돈은 얼마나 됩니까.
“관료들의 경우 주로 장관들을 만났는데 용돈 조로 1억원은 줬지요. 그건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겁니다. 뭘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용돈으로 쓰라고 주는 게 그 정도는 됐습니다. 국장급은 계열사 사장들이 주로 만났지요. 돈의 규모도 회사 규모에 따라 차이가 났죠.”
돈 안 낸 기업총수 구속
―다른 그룹도 비슷한 상황이었겠군요.
“현대는 어떻게 했는지 들어봤더니, 鄭周永(정주영) 회장이 직접 안 하고, 각 계열사 사장이 알아서 했다고 해요. 현대 계열사는 모두 튼튼하니까 계열사 사장들이 부처를 배분해 전담한 겁니다. 정주영 회장은 잠수함 수주를 놓고 대우 김우중 회장과 경쟁하다가 정권이 김우중 회장을 밀어 수주에 실패하자 화가 나 대통령에 출마한 측면도 있어요.”
―지금도 기업인들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돈을 준다고 봅니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한 가지 경험담을 알려드리죠. 어느 정권이든 권력 實勢(실세)들과 이야기해보면 5년 중 최초 2년간은 실세건 공무원이건 절대로 돈을 안 받아요. 대개 중반 지나야 받지요. 처음엔 청렴하려고 애쓰다가 정권 후반기 가서 일이 벌어지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때가 그랬어요. 김영삼 정권 때는 그 시기가 빨라졌죠. 1년 반 정도 지나면서 실세들이 돈을 받더군요. 김대중 정권 때 와서는 굶주린 이리떼처럼 1년도 안 된 초반부터 파먹더군요. 앞뒤 눈치 보지 않고 말이죠. 그러니까 ‘큰 잔치 벌였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거죠.”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에게 돈을 안 준 이유는 뭡니까.
“제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입니다. 공산당에 대한 생각이 아주 나빠요. 실향민 거의가 그래요. 실향민들이 김대중씨에 대해 갖는 선입견은 매우 안 좋아요. 그런 이유로 안 줬어요. 솔직한 얘기로 그냥 주기 싫었죠. 기업을 하려면 그런 걸 뛰어넘어 싫어도 줘야 했는데….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맞는 말입니다. 제가 미련한 짓을 했죠. 小貪大失(소탐대실)이었어요.(웃음) 김대중 사람들은 나중에 제 회사를 통째로 가져갔습니다.”
―돈을 안 준 기업이 또 있습니까.
“대한항공, 대신증권, 금호그룹도 안 냈어요. 대신증권과 금호그룹은 총수가 호남 쪽 인물이라 살아남았죠. 선거 끝나고 별도로 챙겨준 걸로 압니다. 끝까지 안 낸 대한항공은 나중에 趙亮鎬(조양호) 회장이 구속됐지요. 조직이 크고 사람이 많다 보니 회장이 구속된 대한항공은 경영에 큰 차질이 발생하지 않았어요. 회장 뒤에 수많은 경영진이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신동아그룹의 경우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정·관·재계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제가 구속되니까 누구 하나 손 쓸 겨를이 없었죠. 제가 회사를 잘못 경영한 탓이죠. 회사는 완전히 마비됐어요.”
―비자금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기업을 하다 보면 비자금이 꼭 필요해요. 그룹 회장이라면 국회의원, 정부부처 장관, 정권 실세들을 만나 밥도 먹고 용돈도 주는 일이 회장의 중요한 업무였어요. 근데 저는 회사를 인수할 때부터 비자금이 없었어요. 비자금을 만들려고 회사 돈을 빼돌릴 생각도 없었어요.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려고 했죠. 할 수 없이 대한생명에 개인적으로 돈을 빌리는 방법을 택했죠. 제가 가지고 있던 대한생명 주식을 팔아서라도 갚을 요량이었습니다. 물론 영수증을 썼어요. 1976년부터 1999년까지 빌린 돈을 계산해보니 1800억원이나 됐어요. 이 돈을 정·관계 비자금으로 사용했지요. 빌린 돈을 회계장부에 꼼꼼히 다 기재했습니다.
그건 횡령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횡령으로 몰더라고요. 차라리 비자금을 만들어 썼으면 문제가 안 됐을 수도 있었겠죠. 그 부분이 문제가 돼 소송까지 갔는데 대법원은 저의 손을 들어줬어요. 대여금(빌린 돈)으로 판단했죠. 그런데 나중에 이자를 왜 안 냈느냐, 이렇게 싸움을 걸어와요.”
―회사에 빌린 돈을 갚을 노력은 했습니까.
“물론이죠. 한두 번 갚기도 했어요. 돈이라는 게 이상해요. 쓰기 시작하면 더 모자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IMF 직후 대한생명 주식의 절반을 팔아 회사에 빌린 돈 1800억원을 갚고, 계열사 증자도 하기로 했죠. 그렇게 작심하고 1998년 6월경 미국 뉴욕으로 갔어요. 공교롭게도 김대중씨도 외화를 확보하려고 방미 길에 오른 날이었어요. 물론 비행기는 각자 따로 탔죠. 저는 메트라이프생명 회장을 만나 ‘회사 지분 50%를 내놓겠다. 10억 달러 내라’고 했어요. 당시 10억 달러는 굉장한 돈이었어요. IMF 직후였으니까. MOU를 체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998년 연말부터 DJ 정권이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어요.”
金重權·김하중, 최순영 구속 반대
/김중권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하중 전 의전비서관(1999년).
―결국 외자유치를 못하고 주식처분도 실패로 돌아갔군요.
“제가 메트라이프와 1999년 1월 본계약을 맺으려 하니까 저를 빨리 구속하려 했던 것 같아요. 10억 달러가 들어오면 아무리 문제가 있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구속까지는 못 시켰을 겁니다.”
최순영 회장은 자신의 구속과 이른바 ‘옷로비 사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1998년 연말 당시 옷로비 의혹 첩보가 청와대를 중심으로 사정·정보기관에 입수되자 부인이 연루된 김태정 검찰총장이 저를 구속시키려 했어요. 구속은 검찰총장이 결재하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통령한테까지 구속 품의서를 올렸던 거예요. 1998년 12월 그리고 1999년 1월, 두 번이나요. 이게 청와대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어요. 그때 결재판을 대통령에게 가져간 사람이 金重權(김중권) 청와대비서실장과 金夏中(김하중) 당시 의전비서관이었어요. 그분들이 대통령에게 ‘IMF 상황이라 기업이 어려운데 그룹 총수를 구속하면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고 김대중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구속이 안 되자 정권 실세 비선조직이 당황했다고 해요. 어느 정권이나 대통령이 된 사람은 처음에는 국가를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청와대 사직동 팀이 움직였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朴柱宣(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이 김태정 총장을 돕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박주선씨가 ‘옷로비 사건의 실체를 밝혀라’고 사직동 팀에 지시했어요. 이 같은 내사 관련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보고됐는데 그게 공개됐어요. 나중에 김태정씨와 박주선씨 간에 공문서를 줬냐 안 줬냐 하며 다툼이 벌어졌죠. 아무튼 저와 집사람을 구속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됐고 마침내 허위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전달됐어요. 결국 대통령의 ‘구속’ 裁可(재가)가 났지요. 결재가 난 다음 날 검찰이 저의 집 앞까지 와 저를 잡아간 겁니다.”
‘우리 큰 잔치 하나 벌였다’
최순영 회장은 ‘대통령의 애국심’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경험담을 잠시 들려줬다.
“전두환씨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였어요. 어느 식사자리였는데 대통령이 된 소감을 솔직히 털어놓더군요. 그에게서 ‘4시간 강의’를 들었죠. 그중 기억나는 말이 있어요.
‘최 회장, 대통령이 되면 말이오, 애국자가 안 될 수가 없구먼. 국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국민들도 잘살아야겠고, 수출도 많이 해야겠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책임감이 따라오니까 애국자가 안 될 수 없어요.’
그분이 힘으로 권력을 빼앗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보였어요. 전두환씨는 취임 후 장관보다 국장이 더 나은 거 같아 국장들과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해요. 경제공부도 국장들에게서 배웠답니다. 김대중씨도 국가 책임자로서 IMF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인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결국 최 회장의 구속에 동의한 것 아닙니까.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으면 실제로 나쁜 놈으로 보이겠죠. 그런데 문제는 김대중씨의 실세 비선조직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김대중씨 밑에서 야당생활을 하며 30년을 굶은 사람들이에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기업을 뜯어먹은 겁니다. 대표적인 게 신동아그룹입니다. 대한생명, 신동아건설 팔아먹으면서 오죽 했겠어요? 1000원짜리를 아는 사람에게 반값에 주기도 하고 100원에 팔면서 400~500원 받아먹고, 별의별 짓을 다 한 거예요. 회사 매각 처분이 잘못됐다고 조사해 달라고 수없이 이야기해도 馬耳東風(마이동풍)이었어요. 지금이라도 조사해야 해요.”
1977년 설립된 신동아건설은 2001년 시공능력 평가액이 2815억원으로 업계 42위를 차지(한때 28위 기록)한 중견 건설회사였다. 신동아건설은 당초 매각 대상이 아니었는데 김대중 정권 들어 급부상한 일해토건에 전격 매각됐다. 일해토건은 DJ 정권 당시 관급공사를 대거 수주해 1999년 916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급성장한 무명의 토목건설업체였다. 일해토건은 신동아건설 주가를 주당 1원으로 평가해 1억7700만원에 인수했다(채무 870억원 승계).
최순영 회장은 “여권 실세들과의 친분관계를 이용한 로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참으로 이상한 매각이었어요. 특혜였죠. 계약시점을 실제보다 6개월이나 앞당겨 신동아건설이 2001년 3월 보유하고 있던 현금자산 400억원을 변칙으로 처리해 대출금과 상계처리했어요. 대한생명의 경우도 채무액 4037억원 가운데 채무액의 80%에 가까운 3167억원을 조건 없이 탕감 받았어요. 당시 여권실세들과의 친분관계를 이용한 로비의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다 동교동 실세들에 의해 이루어졌어요. 정부가 임명한 이○○씨가 대한생명 회장으로 와서 신동아건설 등 계열사 매각을 주도했지요. 그 사람이 혼자 매각업무를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권 실세들과 연결돼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황○○ 장로가 비선조직 사람들을 만나니까 ‘우리 큰 잔치 하나 벌였다’고 그랬답니다. 신동아그룹 해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그러더라는 거예요. 제 속이 얼마나 뒤집히겠어요. 그 소리를 듣고 큰 상처를 받았어요.
회사를 인수한 쪽은 호남계열이었어요. 좋은 조건으로 매각하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자기편 사람에게 매각한 겁니다. 소위 프○○그룹이라는 데가 한 예입니다. 어마어마한 비리가 많은데 조사가 안 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노무현 정권도 같은 통속이라 조사가 제대로 안 됐어요.”
―‘큰 잔치를 벌였다’는 말은 신동아건설 매각을 두고 하는 얘기입니까.
“그 회사를 포함해 그룹 전체를 해체시키면서 큰 잔치를 벌였다는 얘기죠. 삼풍산업도 마찬가지예요. 인수한 쪽은 은행 차입금으로 구입했는데 거의 공짜로 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법적 절차와 형평성 무시한 잘못된 판단”
/정형근 전 의원은 2002년 국회에서 대한생명 매각과 관련해 청와대 김현섭 비서관과 김승현 한화그룹 회장의 통화 내용을 도청한 국정원 도청자료를 공개했다
―지금의 신동아건설이 횃불선교재단을 상대로 390억원의 청구소송을 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신동아건설이 지금 제가 있는 이곳 횃불선교센터를 지었어요. 그런데 신동아건설이 2001년 9월 일해토건으로 인수된 후 건축대금 미지급 잔액 390억원을 횃불재단에 내라고 소송을 건 겁니다. 일해토건은 신동아건설을 인수한 후 횃불선교회관으로부터 2002년 1월 15억원, 2002년 3월 135억원 등 총 230억원을 받아갔어요.
이는 받을 수 있는 확정된 미수채권으로서 매각 진행과정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채무조정 시 이를 감안해 채권금액을 상향조정하고 부채 탕감액을 축소시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대주주였던 대한생명은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일해토건에 거액의 부채를 탕감시켜 주었어요.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은 보다 많은 채권확보를 통해 대출금을 회수해 손실을 줄여야 했지만, 받을 수 있는 확정된 채권조차 제대로 받지 않고 거액의 부채를 탕감해 줌으로써 국민 혈세인 공적자금을 낭비하게 된 겁니다.”
최순영 회장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세 시간 동안 입에 물 한모금을 대지 않았다. 개인 비서가 과일 몇 조각을 내놓아도 마찬가지였다. 2인용 작은 소파에 앉은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을 이어갔다. 일흔 노인치고는 대단한 체력이었다. 대한생명 매각과정을 묻는 대목에서 갑자기 그의 말이 빨라졌다. 대한생명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이 강한 듯했다.
그가 구속될 당시 대한생명은 자산 규모 14조6800억원의 대규모 생명보험회사였다. 그러나 1999년 9월 금융감독위원회는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했다. 예금보험공사가 신주를 인수토록 하는 자본금 증가 명령과 기존주식을 무상 소각하는 자본금 감소 명령도 동시에 내렸다. 금감위는 “부채가 자산을 2조9080억원(98년 12월말 기준) 초과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 명백하고, 해약 증가·수입보험료 감소·영업조직 동요와 이탈·유동성 부족 등으로 영업을 지속하기 어렵다”며 부실금융기관 처분이유를 밝혔다.
최순영 회장은 이에 대해 “법적 절차와 형평성을 무시한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단지 부채가 자산을 초과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기존 주식 전부를 무상 소각시킨 것은 신동아그룹을 공중분해시키려는 계획된 시나리오였음이 분명해요. 당시 대한생명은 유동성자금 3조5900억원을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 이후로도 매월 3조5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확보했죠. 유동성 부족으로 공적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에요. 특히 동종회사인 삼성생명은 고객이 해약할 때 접수 후 3일 후에 해약금을 이체하는 방법으로 유동성을 관리했는데 대한생명은 보험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어요. 대한생명의 유동성 부족이 공적자금 투입의 원인이라면 현금을 투입해 유동성을 개선해야 하는데, 당시 정부는 현금을 투입하지 않고 채권으로 자산부족분을 보전했어요.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 채권은 2002년 6월까지 대한생명 금고 안에 그대로 보관돼 있었어요. 현찰이 있으니 채권을 현금화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이는 대한생명에 유동성 위기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공적자금은 국민의 세금입니다. 세금을 그냥 떼먹으면 당장 형무소行(행)이니까 공적자금을 묘하게 받아 뒷돈을 빼먹은 거예요. 그게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순이익 내고 있던 대한생명
―다른 목적으로 공적자금이 들어갔다는 얘기군요.
“네. 이거 완전히 사기친 겁니다. 일일이 다 확인해봐야 해요. 그런데 당사자들은 지금 다들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어요. 그렇게 장난들 쳐놓고는…. 필요 없는 공적자금을 집어넣고 억지로 한화그룹에 매각한 겁니다. 전 과정을 조작한 거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만들었어요. 보험회사 생리를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생명보험업은 현대자동차와 같은 제조업체와 회계방법이 전혀 달라요. 제조업은 엄연하게 자산과 부채가 뚜렷이 구분되지만, 보험업은 어떻게 보면 100%가 부채예요. 계약자가 맡겨놓은 돈이 회사 돈은 아니잖아요. 자산이니 부채니 하는 개념은 보험회사에 없는 거예요. 전문가한테 물어보세요.
그러면 뭘 기준으로 하느냐.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당시 백악관이 AIG를 포함한 몇 개 보험회사에 구제금융을 재빨리 지원했어요. 왜 줬느냐? 미국 정부는 자산과 부채를 따지지 않고 대규모 계약해지 時(시) 유동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취했던 겁니다.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죠. 당시 우리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의 모든 보험회사를 국영화해야 합니다. 논리가 안 맞아요. 결국 당시 정권의 실세라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기업의 운명이 왔다갔다 했습니다.”
최 회장은 “당시 금감원이 발표한 부실자산 내역도 잘못됐다”며 “정부는 부실자산 규모를 3조639억원이라고 했으나, 잘못 평가된 1조4541억원을 제외하면 실제 부실 규모는 1조6098억원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 대한생명의 가치는 메트라이프가 산정한 것을 보면, 4조6143억원이었어요. 또 63빌딩으로 상징되는 국내 최초의 생명보험회사로서 54년간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영업조직을 가지고 있어 최소 3조원 이상의 영업가치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죠. 이 같은 대한생명의 가치를 금감원이 정당하게 반영하지 않아 결국 부실기업으로 평가 받았고 이후 거액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어요. 예금보험공사가 작성한 대한생명 당기순이익 현황을 보면, 정부기관의 불법행위 전모가 드러납니다.”
필자가 확인한 예금보험공사의 내부자료에 의하면, 대한생명은 2001년 한해 동안 8684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2002년에는 9794억원, 2003년에는 6150억원, 2004년에는 5366억원, 2005년에는 3749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최순영 회장의 말이다.
“당시 예금보험공사는 대한생명을 부실회사로 보이려고 당기순이익을 축소 발표해 2001년 추가로 1조5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어요. 불필요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셈입니다. 1999년 11월에 투입된 2조원 규모의 공적자금도 필요 없는 돈이었어요.
당시 부실 생명보험회사의 구조조정 과정은 ‘경영정상화 계획서’를 받은 후 이행각서를 제출 받고, 충분한 자구기회를 부여한 후 결과에 따라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했죠. 그런데 유독 대한생명에 대해서만은 사전조치 없이 곧바로 부실금융기관으로 판정했어요. 대한생명의 국영화는 다른 생명보험회사의 구조조정 절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평성을 잃었고, 실질적인 자구 기회를 박탈당한 채 신속하게 매각이 진행된 겁니다. 엄청난 국민 혈세가 낭비되는 결과를 가져왔죠. 관련자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청와대 朴智元 비서실장 통화 도청한 국정원
총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은 김대중 정권의 끝 무렵인 2002년 12월 한화그룹에 인수된다. 문제는 매각과정이었다. 적잖은 정치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한화는 대한생명 주식 51%를 1주당 2275원, 총 8236억원에 인수했다. 당시 대한생명에는 공적자금 3조5500억원이 투입됐는데 매각 때까지 2조7000여 억원을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자 특혜 논란이 일었다. 우선 인수 당사자의 자격 문제가 터져나왔다. 한화그룹은 대한생명을 인수하기 전 한화종금, 충청은행의 부실경영으로 3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8000억원대의 분식회계를 만들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적이 있다.
李鍾九(이종구) 한나라당 의원 등 국회의원 29명은 2005년 2월 대한생명 매각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청구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의원은 감사청구안에서 “2002년 대한생명을 한화컨소시엄에 매각하면서 정부는 공적자금 회수 실적과 매각지연에 따른 대외신인도 하락만을 우려해 인수자의 자격요건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아, 과거 금융기관을 부실화시킨 전력이 있는 한화그룹에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정상화한 대한생명을 넘겼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또 2002년 대한생명 매각을 주관한 공적자금관리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에 대한 전반적인 감사도 요청했다.
인수과정에서 한화그룹은 ‘인수당사자는 보험사가 반드시 포함돼 있어야 한다’는 투자요건을 맞추기 위해 해외 생명보험회사인 맥쿼리와 비밀리에 이면계약까지 체결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화그룹은 생명보험회사를 컨소시엄 구성원으로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면계약을 체결해 맥쿼리를 참여시켰다. 이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정한 투자자 자격요건을 위반한 것이다. 한화와 맥쿼리 간 체결한 이면계약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한화그룹은 맥쿼리사의 대한생명 인수자금과 참여에 따른 제반 비용 전부를 대신해 부담하고 맥쿼리사 인수지분은 인수 후 1년이 경과한 시점에 한화건설에 매도하기로 한다. 맥쿼리의 대한생명 인수지분은 3.5%(매각가격 기준 565억원)이다. 한화그룹은 이면계약의 대가로 맥쿼리에 대한생명 운용자산의 3분의 1에 상당하는 자산의 운영권을 보장한다. 한화그룹은 이 계약에 따라 곡물 중개무역을 통해 주식매수 금액에 상당하는 곡물을 외상으로 맥쿼리에 매각한다. 맥쿼리는 곡물을 처분한 대금으로 주식인수 대금을 납부하고, 1년 후 이 지분을 인수가액에 제반 경비를 가산해 한화건설에 매각한다.>
이종구 의원은 2005년 당시 田允喆(전윤철) 감사원장에게 보낸 공개질의서에서 “대한생명은 한화그룹에 불과 8236억원이라는 헐값에, 그것도 2회 분납으로 매각했다. 이로 인한 손실은 6조4165억원에 달한다. 이는 김대중 정권 말기에 자행된 권력형 비리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종구 의원 등 국회의원 14명은 2008년 11월 국회에 대한생명 매각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청구안을 다시 냈다.
“한화그룹, 대한생명 인수 위해 政·官界 로비”
한화그룹은 대한생명을 인수하기 위해 정·관계 인사들에게 금품로비까지 벌였다. 한화그룹은 2002년 대한생명 매각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공적자금관리위원장인 전윤철씨를 상대로 국민주택채권 15억원을 뇌물로 건네려다 실패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與野(여야) 의원들에게는 거액의 돈을 건넸다.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과정에서 ‘김대중 청와대’가 깊숙이 관여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鄭亨根(정형근) 전 의원은 2002년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도청자료를 토대로 이렇게 폭로했다.
“2002년 9월 2일 한화그룹 金昇淵(김승연) 회장이 청와대 金賢燮(김현섭)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를 조기에 매듭짓기 위해 朴智元(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인수작업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했다. 같은 날 박지원 실장은 재경부 윤모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생 매각 문제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윤 차관이 책임지고 9월 5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회의에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가 매듭지어질 수 있도록 조치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국정원 도청자료는 실제상황을 녹음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순영 회장은 “대한생명 매각과정에서 상당한 규모의 로비가 자행됐다”고 주장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김대중 정권 사람들에게 얼마를 준 겁니까.
“그건 모르죠. 그걸 알면 뭐 이거 다 해결하게요. 구체적인 액수는 알 수 없지만 거액의 돈이 건네졌어요. 단순히 푼돈 얼마 가지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죠. 국민 세금이 그들에게 건네진 겁니다. 돈을 줬다는 확실한 근거를 대죠. 대한생명을 인수하려던 한화는 당시 한나라당 중진이었던 徐淸源(서청원)씨에게 10억원을 줬어요.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되는데 도움을 달라고요. 그리고 노무현 측 인사인 李在禎(이재정)씨에게도 거액을 건넸어요. 전윤철씨에게도 거액을 주려다 퇴짜 맞았어요. 그게 로비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을 받는 데 그런 돈을 썼으니 실제로 대한생명을 인수한 후에는 얼마가 건네졌겠습니까. 실무자들한테 준 돈이 그 정도였으니 그 위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건네졌다고 봐야죠.
예금보험공사가 작성한 자료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대한생명은 매년 수천억원의 이익이 났어요. 그런 회사에 3조원이 넘는 세금을 쏟아부은 후 한화가 인수했으니 잔치를 벌일 충분한 여건이 돼있었던 겁니다. 이거 기가 막힌 얘기예요. 관련자들을 모두 업무상 배임죄로 처벌해야 해요.”
‘3500억원이 소요되는 거로 하시오’
최순영 회장은 “한화그룹이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만회하기 위해 거액의 비자금을 메우려 한 정황이 있다”고 했다.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한 후 은행권 출신인 고○○씨를 초대 사장으로 앉혔어요. 얼마 뒤 김승연 회장이 그 사장한테 ‘건설한 지 20여 년이 돼 가는 63빌딩 건물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라. 비용은 3500억원이 소요되는 거로 하시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대한생명 사장은 리모델링 비용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 같아 실제 견적서를 받아 봤죠. 1000억원대 비용이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사장은 김승연 회장에게 ‘그렇게 비자금을 만들면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김 회장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사장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어요.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 더 재미있어요. 김승연 회장으로서는 그 사장에게 약점이 잡힌 셈이죠. 그걸 무마하기 위해 얼마 전까지도 연봉을 그대로 주고 있다고 해요. 그 사장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니까 고위직 장관을 지낸 지인과 술을 마시며 ‘한화의 김 회장이 말도 안 되는걸 시켜서 내가 안 한다고 해 회사를 그만뒀더니 연봉을 지금도 주고 있다’고 털어놨답니다.”
최 회장은 기업을 되찾기 위해 감사원 감사 청구를 계획하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감사원 감사 청구를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일들이 마음대로 되는 거는 아니죠. 제가 하나님을 믿지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만 삽니까. 죄도 짓고, 잘못된 일을 하기도 하죠. 그래도 큰 길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올바른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분이 바른 길로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저 때문에 2000여 명의 임직원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중 25명의 임원들은 지금의 대한생명 측으로부터 소송까지 당했어요. 임원 중 두 분은 소송 스트레스 때문에 세상을 떠났어요. 또 10여 명은 살고 있던 집까지 경매 처분됐어요. 법정에서 ‘임원들은 죄가 없다. 모두 내가 시켜서 했으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는데도 재판 결과는 달리 나왔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이 많아 가슴이 아파요. 좋은 날이 오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최순영 회장은 2006년 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 추징금 1575억원 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현재 체납액만 1100억원(국세 1073억원, 지방세 37억원)에 달한다. 집은 물론 집안 가재도구까지 경매처분돼 현재 빈털터리다.
“소파와 냉장고까지 경매처리됐어요. 그것도 길거리에서요. 38세금기동대가 세 번 와서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저도 추징금 체납액을 내고 싶어요. 그런데 방법이 없어요. 제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걸요. 구치소에서 나와보니 회사가 완전 공중분해돼 없어졌는데…. 회사를 되찾으면 국가에 내야 할 추징금을 반드시 낼 겁니다. 김우중씨는 노무현 정권 때 사면됐는데…. 그 얘기는 그만하죠.
제가 지금 사는 곳은 횃불선교재단의 사택입니다.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사택인데 제가 아내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는 겁니다. 딸은 미국으로 시집갔고, 두 아들은 집도 없이 살아요. 아들은 저 때문에 어디 취직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취직을 하면 그 회사가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이죠. 며느리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요. 제가 재산을 미리 해외로 빼돌려 돈이 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갑갑해요. 돈이 있으면 좋겠어요. 집 사람 명의로 돼 있는 땅이 조금 있는데 그걸 팔아 먹고살아요.”
前 법무차관이 사무실까지 따라와 “조선일보 비리 자료 달라”고 요구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과거 기업을 운영할 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까.
“그분은 경기高(고) 2년 선배입니다. 대우그룹은 당시 분식회계를 너무 많이 해 정부가 손을 댈 방법이 없었습니다. 1998년 하반기였습니다. 대우그룹이 20조원에 가까운 분식회계를 한 사실을 전혀 몰랐죠. 하루는 (김우중 회장이) 제게 ‘최 회장 급한데 5000억원 좀 빌려줘’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제가 ‘회장님 5000억이 애들 이름도 아니고 담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고 했더니 ‘담보야 충분하지. 대우 회계장부를 줄 테니 분석해봐’라고 해요. 장부를 보내왔기에 대출담당 직원에게 ‘살펴보라’고 했지요. 대출담당 직원이 ‘이거 하자 없습니다. 빌려줘도 됩니다’고 해요. ‘그럼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장부상으로는 대우가 연 10조원 정도 흑자를 내고 있는 것으로 돼 있는 겁니다. 기가 막히게 잘돼 있는 거예요. 1년에 10조원 흑자가 나면 5000억원 빌려주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던 거죠. 앞서 1000억원과 3000억원을 더해 총 4000억원을 대출해줬는데 3개월 만에 떼인 겁니다. 분식회계를 한 사실을 제게 숨긴 겁니다. 할 말이 없더군요. 그 이후 김우중 회장을 재판과정에 만났더니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사기 대출을 받은 이유를 안 물어봤습니까.
“그거 물어봐야 뭐 합니까. 이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던 때였는데요. 그렇게 4000억원이 공중에 날아갔습니다.”
―얼마 전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부인이 高價(고가)의 그림을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에게 상납했다는 의혹이 일면서 최 회장의 부인 이름이 또 거론됐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옷로비 사건의 실체는 전혀 없어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잖아요. 집 사람이 갤러리를 운영한 적이 있지만 그림 로비 같은 건 없었어요.”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항변하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 와서 얘기해 봐야 뭐 합니까. 정작 필요할 때는 언론이 외면했고요. 2004년 11월 11일자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 광고면을 보시면 잘 알 겁니다. 제가 ‘검찰총장님께 호소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저의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검찰이나 언론이 일절 반응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추가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죠. 2005년 1월 제가 법정구속된 것도 2004년 11월 광고 때문에 보복을 당한 겁니다.
제가 검찰조사를 받을 때 저를 공격하는 시민단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적이 있어요. 참여연대가 저를 완전히 저질 기업인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세요? 당시 제가 서울지검 특수부 11층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인데 어느 날 5층 어떤 검사가 저를 부른대요. 그래서 가 봤더니 ‘참여연대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거 취하하라’는 거예요. ‘안 된다’고 일주일 동안 싸웠지요. 그랬더니 나중에 검사가 ‘취하 안 하면 당신 사건에 막대한 지장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하더라고요. 결국은 취하했죠.”
최순영 회장은 “여러 차례 검찰조사를 받으면서 ‘조선일보 비리를 알려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2001년 8월경이었어요. 제가 법원 2심 판결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을 때였죠. 검찰이 생각했던 것보다 형량이 적다고 판단했나 봐요. 그래서 또 무언가를 걸며 저를 오라 가라 하더군요. 한번은 정치검사로 알려진 박 모 부장검사가 저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어요. 소환당하는 날 아침 우연히 조선일보의 김대중 칼럼(편집자注-2001년 8월 11일 ‘공은 政權의 손으로’·당시 검찰은 조선일보 세무조사 고발사건을 수사 중이었다)을 봤는데 내용이 ‘검찰에서 나를 소환해 구속하려고 한다. 자꾸 오라고 소환통보가 오는데 내가 죄도 안 지었는데 왜 들어가느냐’는 거였어요. 속으로 ‘김대중 기자도 뭔가 억울한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검찰청에 갔지요.
저를 부른 부장검사실에 갔더니 그 자리에 법무부 차관을 지낸 법조인이 와 있는 거예요. 무슨 얘기를 하더니 갑자기 부장검사가 ‘최 회장, 기소유예 처분을 해 줄 수 있으니 조선일보와 관련된 비리자료를 달라’는 겁니다. 검찰이 조선일보와 김대중씨를 손보려고 하는데 결정적 증거자료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이놈들 정말 죽일 놈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검찰청에서 나와 횃불선교재단으로 오는데 그 법조인이 재단 사무실까지 따라왔어요. 제가 ‘차관님, 이러지 마십시오. 그런 자료 가진 것도 없고, 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라며 돌려보냈죠. 부장검사와 차관 둘 다 같은 호남사람인데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요. 세상이 그렇습디다. 완전히 (죄가) 없는 생사람을 잡아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검찰이 협박을 했다’고 왜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관례적으로 어떤 조직이 저지른 일에 대해 조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 ‘대한생명을 한화에 팔아먹은 과정이 잘못됐다. 이면을 캐라’고 하면 나를 잡으려고 개입했던 국세청이나 금감원이 어떻게 나오는 줄 압니까?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오히려 옹호해요. 정권이 바뀌어도 그게 제대로 안 돼요. 검찰의 잘못을 얘기해도 자기네 식구들을 감쌉니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담당관이 저한테 하는 얘기가 ‘최 회장을 잡아넣었던 검사가 추가로 기소할 것이 있는지 샅샅이 찾아내라고 지시했다’고 해요. 걸릴 게 뭐 없나 하고 육법전서를 갖다 놓고 조사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정치검사들이 장난질을 심하게 했단 말이죠. 유일하게 안 한 기관은 민간조직을 다루지 않는 감사원뿐이죠. 감사원이 대한생명의 매각과정을 전부 조사하면 모든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요.”
‘1억원씩 너도 가져, 너도 가져라”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신동아그룹 계열사를 팔아먹으면서 돈을 빼먹은 것은 곧 제 돈을 빼먹은 것과 같아요. 계열사들을 제대로 값을 쳐서 받았다면 저의 부채도 많이 줄어들 게 돼요. 다 빼먹고 최소한도로 적게 해서 ‘1억원씩 너도 가져, 너도 가져라’ 하고, 자기 뒷돈은 별도로 챙기고…. 필요 없는 공적자금은 또 추가로 들어오고…. 솔직히 말해 대한생명이 매각될 당시 1년에 8000억원씩 흑자가 나는 회사는 대한생명과 포스코를 포함해 몇 군데 없었어요. 그런 회사를 연 수익이 65억원밖에 안 난다고 정부가 판단해 공적자금 투입하고 매각한 것 아닙니까. 조작을 해도 적당히 해야죠. 이 사회가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김대중씨의 처조카 李亨澤(이형택)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구속되기 한달 전에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임명됐죠. 그 사람은 공적자금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나중에 처벌받았죠. 그런 사람이 공적자금에 관여하는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있었으니 할 말 다했죠. 예금보험공사가 대한생명을 팔아먹을 때 경영권 프리미엄이라는 것을 전혀 안 붙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건 아니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해 2조5000억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였죠.
당시 공적자금관리위원회에 제가 아는 성균관대 교수가 민간위원으로 들어가 있었어요. 제가 성균관대 총동창회장을 8년간 했어요. 교수들을 다 알죠. 그래서 그 성균관대 교수에게 사람을 보내 ‘당신이 어떻게 대학 교수로서 그렇게 부정직한 일을 하느냐’고 항의했지요. 그랬더니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그 교수를 해촉하고 대한생명 문제를 처리하더군요. 그런데 일이 끝나자 곧바로 그 교수를 다시 위원으로 복직시켰어요.
그당시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위원장이 전윤철씨였죠. 그 사람은 ‘나는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대한생명이 그런 식으로 매각되는 걸 보면 그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서 압력이 있었다고 봐야죠.”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닌가’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가능할까요.
“회사를 팔아먹은 건 아직 시효가 남아있어요. 대한생명이 매각된 게 2002년이니까 2012년까지 공소시효가 살아있습니다. 시효가 지난 것이더라도 진실은 밝혀져야죠.”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와 관련해 김승연 회장은 전혀 관련이 없었던 걸로 압니다.
“한화 부회장이 대한생명 인수를 총괄했다고 하더군요. 김승연 회장은 맥쿼리와의 이면계약 등 자세한 사항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걸 사실이라고 믿을 사람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이 밝혀야죠. 그런 걸 가지고 덮어두면 대한민국이 올바른 나라가 아니죠. 李健熙(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아들 재용씨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편법을 썼다가 김용철이라는 사람이 폭로하니까 결국 법정에서 재판까지 받은 거 아닙니까.”
―그룹이 공중분해되는 과정을 어떻게 지켜봤습니까.
“아무리 제가 하나님을 믿는 장로라고 하지만 인간인데 차마 못 견디겠더군요. 몇 달을 구치소에서 울었어요. 머리를 벽에 치며 자살도 생각했지요. 다행히 자살방지용 고무가 사방에 붙어 있더군요.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몸도 약해졌죠. 먹지도 못하고.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게 맞아요. 분한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기도도 안 되더군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니 몸이 많이 상하더군요. 집안 내력인데 다들 심장이 안 좋아요. 선친도 그렇고, 저와 두 아들도 모두 심장수술을 했어요.
구치소에 있는 동안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공포가 밀려왔어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게 낫다는 생각에 화를 참고 또 참았죠. 기도를 열심히 했죠. 사람이 잘못되는 근원은 모두 욕심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께 ‘제가 돈이 많았다가 없어졌다고 해서 죽는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죠. 포기하니까 차츰 마음이 편해집디다.”
최순영 회장은 요즘 신앙간증과 선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그는 신동아그룹 회장으로 있을 때도 종교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광림교회, 경동교회, 온누리교회 등 교회 건물 신축에 재정적 후원을 했고, 극동방송국 사옥을 지어 기부했다. 1980년 초에는 경영난에 빠져있던 영생학원을 인수해 전주대·전주비전대학 등을 기독교대학으로 만들었다. 1995년에는 195개국 4000여 명의 세계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이른바 ‘기독교의 올림픽대회’인 ‘GCOWE 95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하는 데 노력했다.
63빌딩 레스토랑에서 발견한 안기부 도청기
그는 “신동아그룹을 잃은 후 오히려 신앙심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편해요. 이제 억만금이 들어와도 저를 위해 쓰지 않겠다고 기도하죠. 요즘 대한생명의 자산이 50조원이라고 합디다. 어마어마한 돈이죠. 하나님이 제게 ‘너 나이 칠십인데 그 많은 돈을 가져다 뭐 할래’라고 질문하시는 것 같아요. 그걸 가지고 제가 뭐하겠어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어요.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셔도 하나님 뜻이니까 감사하고…. 제 얼굴을 보세요. 편안해 보이지 않아요? 구치소에 있으면서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었어요. 진실은 밝히되, 김대중 정권의 실세들이 나쁘다, 김태정 총장이 나쁘다, 이런 생각은 안 해요. 이젠 다 접어놔야죠. 2006년 김태정씨로부터 사과도 받았고, 국세청에서 만난 사람들도 사과하겠다고 해요.”
―김대중 정권의 인사들이 사과한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몇 년 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지원씨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자주 찾아왔다면서요.
“박지원이라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에요. 자기는 관련 없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 사람도 당시 비선조직 실세들과 동조한 사람이지요. 제가 나중에 자기들한테 보복이라도 할까봐 앞에서는 좋은 말로 그러는데 개의치 않아요. 복수, 원망, 미움을 다 내려놓았어요. 그 사람들과 저와는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대한생명이 있는 여의도 63빌딩에 요즘 갑니까.
“갈 일이 없죠. 건물 자체를 빼앗겼는데 가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 건물을 제가 지을 때 정말 심혈을 기울여 세웠어요. 건물 골조, 건축자재를 최상급으로 했지요. 계단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건물을 올렸지요. 100년 동안 크게 손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런 건물을 한화가 인수한 후 왜 갑자기 리모델링하려고 했을까요. 한화는 몇 년 지나서 결국 리모델링했는데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아보세요.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최 회장은 63빌딩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건물 보안이나 고객 편의를 건립 때부터 고려했다. 그는 63빌딩 고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안기부 직원들이 도청하려다가 혼난 사례를 들려줬다.
“그러니까 1995~96년경이었어요. 제가 외부에서 이상한 정보를 들어 당시 레스토랑 지배인에게 ‘안기부 직원들이 오면 움직임을 유심히 봐라’고 일러뒀지요. 특급식당에는 점심, 저녁으로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자주 왔는데, 안기부 직원들이 식사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그랬습니다. 예약자 중에서 대화를 들어볼 필요가 있는 사람이면 예약한 방에다 도청기를 달았던 거예요.
제가 지배인에게 특별지시를 한 지 한달 만에 안기부 직원이 식당 룸에 설치한 도청기를 찾아냈어요. 안기부에서 난리가 났죠. 계장, 과장이 와서 ‘도청기 달라’고 하기에 ‘도청업무 최고 책임자가 직접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일주일 만에 ○○○이라는 정보국장이 찾아왔어요. 그가 ‘애들이 일주일 전에 장난하다가 뺏긴 모양인데 그거(도청기) 주십시오’라고 해요. 제가 ‘그냥은 못 주겠다’고 하니까 사과를 하더군요.
‘도청기를 빼앗기고 일주일만에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혹시 도청사실을 기자들한테 알릴까봐 일주일 동안 최 회장 전화를 도청했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없어 안심하고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도청기를 주면서 ‘당신들이 어디서 뭘 하건 상관없는데 63빌딩에서는 철수해달라. 도청 사실이 알려지면 장사가 안 된다’고 했지요. 그 다음부터는 안기부 직원들이 63빌딩에는 얼씬도 안 했어요.”
―전주대 기부금 반환소송은 어떻게 된 겁니까.
“1980년대 초 전주에 있는 영생학원이 당시 41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부도가 나 지역경제가 혼란에 빠졌어요. 경영자가 사채를 썼대요. 학원 안정화가 시급한 상황에서 청와대에서 저를 부르더군요. 전두환 대통령과 金滿堤(김만제) 재무부장관, 權彛赫(권이혁) 문교부장관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통령이 ‘이거는 최대한 도와주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63빌딩 건축허가로 정권에 신세를 지고 있었죠. 그래도 400억원이 넘는 돈을 대기가 어려워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대통령이 그래요. 그 말에 귀가 솔깃해 ‘그러면 전주대에 의과대학과 공과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했죠. 그 당시 의과대학 허가 안 할 때였어요. 대통령이 권이혁 장관한테 ‘그거 되죠?’ 하며 물으니까 권 장관이 ‘됩니다’고 해요. 신입생 증원도 허락 받았죠.”
최 회장은 대한생명을 통해 자금지원을 약속하고 영생학원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청와대 미팅이 있은 지 일주일 뒤 권이혁 장관을 찾아가 ‘장관님, 이번에 신입생 몇 명 주시겠습니까. 한 500명 주셔야죠’고 했더니 권 장관이 ‘아, 최 회장,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라는 거예요. 제가 ‘네? 장관님, 청와대에서 500명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되물었더니 ‘지금 때가 어느 땐데 500명이 말이나 되느냐. 서울대가 몇 명인지 알아봐요’라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티격태격했어요. 결국 ‘안 된다’고 해서 돌아왔죠.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어요. 그때는 이미 영생학원 인수를 위한 절차가 끝난 상태였어요.”
대한생명은 기부금조로 학원재단에 18년 동안 400여 억원을 댔다. 그런데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한 후 기부금 반환청구 소송을 낸 것이다.
“대한생명이 낸 기부금을 제가 개인적으로 떡을 사먹었으면 할 말도 없지요. 학교법인에 기부한 것을 이자까지 더해 반환하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대한생명은 횃불선교재단에도 기부금 반환소송을 해 2008년 12월 원금과 이자를 포함해 350억원이 넘는 돈을 빼앗아 갔어요. 그 돈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개념으로 기부한 돈이었어요.”
―횃불선교재단 운영은 어떻게 합니까.
“건물은 온누리교회와 신학대학원 측이 사용합니다. 운영권은 사실상 온누리교회에 넘긴 셈이죠. 능력이 안 되니까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열심히 살아야죠. 회사를 되찾으려는 것도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이태훈
▣ 崔淳永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누구인가?
1939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했다. 1976년 부친으로부터 신동아그룹을 물려받아 63빌딩을 건립하는 등 대한생명을 국내 최고 보험회사로 만들었다. 1986년 제3세계 보험회의(TWIC)에 생·손보사 대표로 참석해 보험문화상을 수상했다. 8년여 동안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5대(39~43대) 연속 재임하면서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4강 신화를 만들었고, 멕시코월드컵 본선진출권도 획득했다. 국내 최초로 프로축구팀인 할렐루야축구단을 창단하는 등 체육봉사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韓佛(한불)친선협회 이사와 韓美(한미)친선회 우정사절단장을 지냈고, 코스타리카 명예총영사를 지냈다. IMF 직후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고, 2005년 1월 다시 법정구속됐다. 2006년 7월 징역 5년, 추징금 1575억원형을 선고 받았다. 2008년 8·15 광복절 특사로 형집행이 면제됐다. 그는 아직도 추징금을 못 내고 있다.
▣ 옷로비 사건이란?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인사의 부인에게 高價(고가)의 옷을 사주며 로비를 했다는 사건이다. 이런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형자씨는 경위서를 통해 “김태정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씨가 고급 의상실에서 구입한 뒤 옷값을 내게 대신 지불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연정희씨는 이형자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이형자, 연정희씨를 포함해 의상실 사장, 통일부장관의 부인 배정숙씨 등 상류층 부인들이 관여돼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당시 국회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청문회를 도입했으나 관련 당사자들의 허위 증언으로 1999년 10월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됐다. 당시 특별검사는 최병모 변호사였다.
특별검사팀은 연정희씨가 호피무늬 반코트를 받았고 신동아그룹 로비스트 박시언에게 수사기밀을 알린 위법사실을 밝혀냈다. 또 검찰과 청와대 사직동 팀이 연정희씨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999년 12월 특별검사팀은 옷로비 사건이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부인들에게 시도한 실패한 로비’라고 결론 냈다. 그러나 1999년 12월 연말 당시 검찰은 이형자씨의 자작극으로 촉발된 ‘실체 없는 로비’라고 발표했다. 2001년 대법원은 “이형자씨의 로비는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연정희씨에 대해서는 위증죄로 처벌했다.
▣ 신동아그룹 略史
ㆍ1953년: 조선제분 설립(동아제분으로 상호변경), 동아제분을 모체기업으로 출발(창립자 최성모 회장)
ㆍ1960년: 공영사 설립
ㆍ1961년: 태흥산업 설립
ㆍ1968년: 부산수산냉동회사·삼풍산업 설립, 신동아화재보험 인수
ㆍ1969년: 대한생명과 대한플라스틱 인수, 최성모 회장 대한생명 사장 취임
ㆍ1971년: 한국 콘티넨탈 식품 설립
ㆍ1976년: 최순영 회장 취임
ㆍ1977년: 신동아건설 설립
ㆍ1979년: 최순영 회장, 대한축구협회장 취임
ㆍ1980년: 전주 영생학원(전주대·비전대학) 인수
ㆍ1982년: 대생·우정상호신용금고 설립
ㆍ1983년: 호텔송도비치 설립(인천시 특급호텔)
ㆍ1984년: 대생기업·대생개발·63쇼핑 설립
ㆍ1985년: 63빌딩 준공
ㆍ1997년: 한일약품 인수
ㆍ1999년: 그룹사 총자산 20조, 매출 9조2000억원
ㆍ2000~2002년: 그룹사 공중분해
▣ 대한생명 매각 진행 과정과 문제점
[1998년]
ㆍ6월 8일: 대한생명, 미국 메트라이프와 10억 달러 투자의향서 체결.
ㆍ7월 20~9월 20일: 메트라이프의 대한생명 실사.
[1999년]
ㆍ2월 11일: 최순영 회장 강제연행, 구속
ㆍ2월 12~3월 13일: 금융감독원, 대한생명 자산·부채 특별검사
ㆍ3월 23일: 금융감독원 특별검사 결과 발표. 대한생명에 경영관리명령 부과
ㆍ9월 14일: 금감위, 대한생명에 부실금융기관 결정 및 자본금의 증가 감소명령 통보
ㆍ10월 1일: 관리인들, 대한생명의 기존발행주식 전부를 무상 소각하고 예금보험공사에게 신주 1000만 주를 발행해 인수토록 결의(예금보험기금 채권 500억원 출자)
ㆍ11월 26일: 예금보험공사, 2조원 추가 출자(예금보험기금채권)
[2001년]
ㆍ2월 19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출범(민간측 5명, 정부측 3명). 매각심사 소위원회 설치(위원 5명)
ㆍ9월 6일: 예금보험공사, 1조5000원 추가출자(예금보험기금채권)
ㆍ12월 24일: 한화컨소시엄(한화 60%, 일본 오릭스 33%, 호주 맥퀴리 7%) 및 메트라이프를 인수협상대 상자로 공동 선정. 한화그룹과 맥쿼리 간 1차 이면계약서 작성
[2002년]
ㆍ9월 23일: 공적자금관리위, 한화컨소시엄을 대한생명 인수자로 최종 승인
ㆍ10월 28일: 예금보험공사, 한화컨소시엄과 본계약 체결. 대한생명 가치를 1조6150억원으로 평가하고 한화컨소시엄에 대한생명 지분 51%를 8236억원에 매각. 한화그룹과 맥쿼리 간 2차 이면계약서 작성
ㆍ12월 12일: 한화컨소시엄, 2차 인수대금 4118억원 납부
[매각 이후 공론화된 문제점]
ㆍ헐값 매각: 총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 투입해 정상화. 2001년 8684억원, 2002년 9794억원, 2003년 6150억원, 2004년 5366억원, 2005년 3749억원의 순이익 발생. 그러나 지분 51%를 8236억원에 매각
ㆍ정부측 공모: 금감원 등이 한화에 유리한 유권해석. 공자위 매각소위 위원들의 매각반대에도 불구, 사무국서 별도의 보고서 제출해 매각 결정
ㆍ대선자금 비리 연루: 한화그룹, 대한생명 헐값 인수 위해 2002년 이부영씨 3000만원, 서청원씨 10억원 제공. 2002년 10월, 김연배 한화 부회장이 전윤철 당시 공적자금관리위원장에게 15억원 전달 시도 (월간조선 2009년 3월호)
출처 | 월간조선 2009년 3월호
9 노무현(盧武鉉) 1946.9.1 - 2009. 5. 23,
16대 2003.2 - 2008.2
노무현은 8·15해방 이듬해에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환경은 향학열을 자극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에 일찌감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가정교육을 통해 불의에 대한 저항감을 물려받았다. 입학금이 없어 외상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3·15부정선거, 1960)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그는 백지동맹을 선동하다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한 해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쳤으며, 지방 명문이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마지막 학업을 마쳤다.
이후 농업협동조합 입사시험에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해 곧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고시 준비생 시절 사상범 권오석의 딸 권양숙과 결혼(1973)했으며,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이듬해에 법복을 벗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인터넷 대통령’ 노무현·문재인과 ‘댓글 민주주의’의 비극
노무현, 퇴임 후 ‘민주주의 2.0’으로 ‘인터넷 대통령’ 고수하려다 실패
⊙ 노무현, 2002년 대선 당시 ‘온라인 전사’ 노사모의 도움으로 대통령
⊙ 문재인, ‘문각기동대’ ‘문꿀오소리’ 조력으로 탄핵 전부터 인터넷 대통령
⊙ 박근혜 탄핵, ‘문빠’와 40대 이상 ‘노사모 세례자들’의 조직적 SNS 활동의 결과
⊙ 2010년 천안함 폭침은 남북한 첫 사이버심리전 … 인터넷서 거짓 주장과 음모론 난무
⊙ 2010년 이후 친북·종북 SNS 계정 96개 발견 … 향후 대북 사이버심리전 패배 우려
2003년 2월 24일 영국 신문 《가디언》은 한국의 대선결과를 분석하는 기사를 실으며 흥미로운 제목을 붙였다.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하다.(World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인터넷 공간에서 ‘노사모’라는 온라인 전사들의 조력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던 그는, 자살이란 비극적 로그아웃(log out)으로 생을 마감했으나 생전 그가 불을 지핀 ‘인터넷 정치참여’는 한국정치의 새 물결이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2000년 4·13 총선에서 부산 지역구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낙선하자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www.knowhow.org)에 전국 네티즌들이 모여들면서 결성됐다.
결성 초기 500명이던 노사모 회원 수는 1년 사이 4000명으로 늘었고 2002년 8월에 5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해 말 대선 막바지에는 8만명이 넘었다.
노사모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전사들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 정권 내내 일사불란하게 야당과 보수 세력의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2006년 국회 법사위의 용역 보고서(인터넷 정치참여 현황 및 활성화 방안 연구)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 재임 중 노사모 회원 수가 최대 10만5472명(2005년 기준)에 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노사모는, 노사모와 비슷한 온라인 전사의 결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식(We-feeling)’을 가진 집단의 배타적 구획들이 확장된 사례였다. 또 다른 노무현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cafe.daum.net/nosamoim) 회원은 2005년 당시 1만8373명(2002년 3월 결성)이었다.
이외에도 같은 기간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cafe.daum.net/vipcorea) 1만2377명(2002년 8월 결성), ‘함께 가자 대한민국’(cafe.naver.com/antihannaradang.cafe) 4026명(3004년 3월 결성), ‘바보 노무현’(cafe.daum.net/supportno) 2428명(2000년 5월 결성) 등이 팬클럽을 자처했다.
노무현을 꼭짓점으로 바퀴살처럼 펼쳐진 온라인 전사 수가 14만2676명이나 됐다. 이들 중 일부는 중복 가입했을 것으로 추정해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개중에는 민주당 당원들도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2005년) 이명박 팬클럽인 ‘명박사랑’(www.mblove.org)은 회원 수가 5924명(2005년 2월 결성)에 불과했다.
최근 국정원 개혁위원회를 통해 드러난 원세훈 국정원 시절 심리전단 산하에서 활동한 댓글부대는 30개 팀(외곽팀장 48명)에 약 3500명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3500여 명 중에는 사립대 교수, 대기업 간부, 퇴직 국정원 직원 모임인 양지회의 전직 간부가 포함됐다. 정확한 정보는 없으나 연령층은 대개 중년층 이상으로 파악된다. 구속된 국정원 심리전단장 장모씨는 53세, 양지회 기획실장 노모씨는 63세였다. (기자는 여론을 왜곡시켜 정치적 선택의 결과마저 왜곡시키려 한 국정원의 댓글공작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노무현, 2002년 대선 전부터 사실상 온라인에선 대통령과 다름없어”
수년 전 사정(司正)과 정보 업무를 담당하다 퇴직한 A씨를 만났다. 그의 말이다.
“당시 노사모에서 활동하는 이들 가운데 30대가 가장 많았고 20대 중반에서 30대 후반까지 연령층이 전체 70%에 달했습니다. 20대와 50대 비율이 비슷했는데, 노사모가 나름 전 연령대에 포진했다는 뜻이죠.”
20~30대를 기반으로 한 노사모 회원들은 정치적 이익(노무현 당선)을 목표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온라인에 머무르지 않고 오프라인 활동까지 병행했다. A씨의 말이다.
“2002년 대선기간 중 노무현 후보 홈페이지의 일일 평균 접속이 30만 클릭에 달했습니다. 당시 모바일이나 SNS가 활성화되기 전이었음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죠.”
그는 “노사모 온라인 공동체의 위력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었다”며 “2001년 12월 민주당이 국민경선제 논의와 함께 노사모가 온라인 선거를 주도했다”고 했다.
“노무현과 노사모에 대한 홍보 글을 퍼나르거나 퍼오는 등 인터넷상에서 지지 분위기를 확산시키려 노력했죠. 반면 상대후보를 향해 네거티브 여론을 만들어 깎아내리기에도 앞장섰어요.
‘희망돼지’라는 저금통을 만들어 노사모 회원들에게 분양하고 이를 수거해 노무현 선대위에 전달하는 등 오프라인 움직임도 빼놓을 수 없었죠. 1인당 100명의 국민경선 신청서를 받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심지어 국민경선 선거인단을 대상으로 편지쓰기, 전화하기 운동도 폈어요. 아주 집요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전부터 사실상 온라인에선 대통령과 다름없었다. 노사모 회원들은 노란 풍선을 들고, 노란 목도리를 두르며 선거바람을 일으켰다. 이들 온라인·오프라인 전사들이 지금의 문재인 ‘달빛기사단’ ‘문각기동대’ ‘문꿀오소리’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된 A씨의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후 태극기 집회를 주도한 이들이 누군가요? 바로 팬클럽인 박사모 회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작년 최순실 게이트 전후, 그리고 촛불집회로 박근혜를 무너뜨린 배후에 ‘문빠’(문재인 지지자)와 40대 이상의 노사모 유경험자가 있어요.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탄핵 전부터 온라인에선 이미 인터넷 대통령과 다름없었고 그의 말 한마디가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죠. 마치 2002년 대선 당시 노사모의 등에 올라탄 노무현처럼 말이죠.”
“‘민주주의 2.0’이라는 온라인 정치참여 사이트를 개설하려 하지 않았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사모’라는 온라인 기사단을 통해 권력자가 됐지만 실제 컴퓨터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집권 절반을 막 지났을 무렵인 2005년 8월 25일 KBS와의 대담에서 “임기 중 가장 성공한 정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국민들이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정부혁신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통령비서실 업무관리 시스템인 이지원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그냥 기분이 좋습니다.”
‘이지원’(e知園)은 청와대 내부의 업무관리 시스템 이름이다. 청와대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공간인 ‘녹지원’과 ‘사용하기 쉽다’는 영어 표현(easy one)을 함께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처음 150만원으로 시작된 개발비가 나중 6000만원짜리 프로젝트가 됐고 결국 2억원 규모로 불어났다. 노 전 대통령은 컴퓨터 프로그램 원리와 종류, 그리고 데이터베이스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이지원을 만들었다. (참조 《이지원, 대통령의 일하는 방식》, 행복한책읽기)
2008년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은 이지원 시스템을 통째로 복사해 고향인 봉하마을 사저로 옮겼다. 그러나 국가기록이 정부에는 없고 봉하마을에는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명박 정부와 갈등이 빚어졌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없는 대신 봉하마을로 가져갔던 이지원 시스템에서는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은 이런 신문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노 정권 청와대 직원들, 내부자료 불법 유출, 정권 말기 조직적으로 200만건 이상 컴퓨터 복사’(《조선일보》 2008년 6월 12일자), ‘북핵 기밀문건 봉하마을엔 있고 청와대엔 없다’(《중앙일보》 2008년 7월 7일자)라며 노 전 대통령 측을 비난했다.
결국 국가기록원은 이지원 복제와 관련, 노 전 대통령을 형사고발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명박의 청와대가 고발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에 파견 근무했던 공직자 B씨의 말이다.
“당시 청와대는 무척 당혹스러워했어요. 광우병 파동으로 기가 꺾인 상황이기도 했어요. 노 전 대통령 측이 이지원을 통째로 복사해 봉하마을로 옮겨 놓고서 정치토론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을 개설한다는 계획이 알려진 것이죠.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여전히 온라인 기사단(노사모)을 데리고, 계속 인터넷 대통령을 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었어요.”
당시 노 전 대통령 측은 “미리 양해를 구하고 기록물 사본을 갖고 나왔다”고 주장했으나 청와대 측은 “사전 양해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논란이 이어지자 노 전 대통령은 이지원 서버 하드디스크를 모두 반환하고 말았다. 그러나 누가 언제 서버에 접속했는지, 어떤 자료를 봤는지 알 수 있는 ‘로그기록’은 제출하지 않았다. 계속된 B씨의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이지원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지원 시스템을 봉하마을 사저로 옮기지 않았다면, 퇴임 후 ‘민주주의 2.0’이라는 온라인 정치참여 사이트를 개설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권에서 노 전 대통령 일가의 ‘640만 달러’ 뇌물수수 의혹도 터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의 비극적 죽음도 없었을지 몰라요.”
천안함 거짓 루머, 지방선거 앞두고 민주당에 의해 증폭
2012년 12월 11일 국정원 여직원 김○○이 서울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댓글공작’을 하는 현장이 민주당에 의해 발각됐다. 민주당은 앞서 그해 10월 29일 문재인 후보를 국정원 직원이 비방하는 불법 댓글공작을 벌인다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국정원과 정부기관이 조직적으로 여론을 왜곡시키려 한 댓글공작은 국가범죄지만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로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일어난 천안함 폭침 사건이다.
천안함 폭침 이후 인터넷에선 ‘아니면 말고’ 식의 터무니없는 음모론과 의혹 주장이 난무했다. 거짓 주장이 인터넷에 오르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댓글이 서로 엮이고 섞이면서 더 큰 의혹으로 증식됐다.
가장 무서운 것은 온라인과 SNS의 ‘퍼나르기’였다. 비슷한 자료가 수백 수천 번 옮겨져 쌓이고 또 쌓였다. 인터넷 포털 등에선 이런 주장이 재인용되고 퍼 날라진 자료들이 더 쉽게 검색되고 노출됐다. 포털의 검색기능과 블로그, 웹문서 등 저장창고 사이의 자료 환류의 고리 때문이었다.
실제 천안함 피격 이후 6개월(2010년 3~9월) 사이 인터넷상의 유언비어 1324건에 대한 삭제와 폐쇄 요청이 이뤄졌고 불법행위자 77명에 대해 수사가 이뤄졌다. 이들 중 상당수가 기소돼 재판을 받아야 했다.
천안함 전쟁실록인 《스모킹 건(Smoking Gun)》을 펴낸 이종헌(당시 청와대 천안함TF 책임자)씨의 말이다.
“당시 경찰청이 단속한 유언비어의 주요 내용은 천안함의 미군함 충돌 주장, 지방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하기 위한 정부 자작극 주장, 1번 글씨 조작 주장, 남한의 선제공격으로 강제 징집령이 내려졌다는 내용 등이 대표적이었어요.”
천안함 폭침과 관련한 거짓 루머는 6·2 지방선거를 앞둔 야당에 의해 또다시 증폭됐다. 야당인 민주당은 천안함 피격이 북한 소행으로 밝혀질 경우 선거에 불리할 것으로 우려했다. 당시 유시민 경기도지사 후보는 “북한이 한미합동훈련 중에 소리도 없이 타격을 하고 갔다는 이야기냐?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도 “천안함 침몰 조사결과 발표는 ‘북풍’을 의도하기 위한 명백한 선거개입”이라며 시청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시작했다.
이종헌씨는 “천안함 의혹제기는 야당의 정부심판론 소재가 됐다. 민관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대한 부정과 계속된 의혹제기가 선거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심어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천안함 의혹 제기가 국내외 종북좌파 세력의 주장과 다르지 않아
2010년 초반, 한국의 트위터 가입 인구는 10여만명, 페이스북 가입자는 50만명 정도였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 이후 가입자 수가 급증, 그해 6월 트위터 가입자가 70만명이나 됐다. 본격적인 SNS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북한은 남한의 사이버 공간이 확장되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명의의 트위터를 개설하고 SNS를 이용한 사이버심리전에 뛰어들었다. 이씨는 “2008년과 2009년까지 SNS 친북·종북 계정은 1건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2010년 이후 1년 7개월 동안 친북·종북 SNS 계정 96개가 발견되어 모두 차단됐다”고 했다.
천안함을 둘러싼 의혹은 북한의 대남공격과 야당 지지자, 친북·종북 성향의 일부 네티즌, 합리적 의심을 품은 네티즌까지 합세해 의혹제기가 혼재되어 나타났다. 북한의 주장이 국내외 의혹세력의 주장과 다르지 않았고 이들 의혹은 곧 북한의 주장이 되었다. 그해 치러진 6·2 지방선거는 누구에게 유리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한나라당은 천안함과 같은 초대형 안보이슈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진보·좌파 성향의 일부 세력들은 인터넷과 SNS를 통해 ‘1번 찍으면 전쟁난다’는 문자를 퍼나르는 상황이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6석, 민주당은 7석, 자유선진당 1석, 무소속 2석이었다. 한나라당은 서울과 경기에서 승리했지만 사실상 참패였다. 이씨의 계속된 주장이다.
“천안함 폭침은 남북이 SNS를 본격 활용하여 맞붙은 사이버심리전의 첫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북한은 사이버 공간을 적극 활용, 대남심리전을 통해 군과 정부를 흔들었고 이념과 진영논리에 근거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야당과 친북·종북 세력에 의해 인터넷은 의혹과 루머의 공간이 됐어요.”
이명박의 청와대는 천안함 폭침과 왜곡된 루머의 확산을 목도하며 2010년 창설된 국군사이버사령부를 이듬해 7월 국방부 직할 부대로 승격시켰다. 이명박의 국정원 역시 천안함 도발 등 안보 이슈를 적극 제기하고 나섰다. 또 청와대에 ‘천안함 대책회의’에 이어 천안함 사이버 의혹 대응을 담당할 ‘천안함 관련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꾸려졌다. 이씨는 “당시 첫 대책회의에서 ‘국가 사이버전 대응능력을 높이고 컨트롤타워를 정하는 법률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때 군사이버사령부와 국정원이 나서지 않았다면, 이명박의 청와대가 정부기관 간 유기적 협력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면 사이버공간은 북한과 진보·좌파 세력에 지배됐을지 모른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온라인 정치참여’로 이뤄낸 결과였다. 당시 온라인 전사로 나섰던 노사모와 진보 세력의 흐름이 문재인 지지자와 ‘달빛기사단’ ‘문각기동대’ ‘문꿀오소리’로 이어졌다. 이를 두고 혹자는 전자 민주주의의 승리라 부른다.
한국 전자 민주주의의 비극
그러나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댓글공작 의혹과 댓글부대 운용 사실이 검찰수사 결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정부기관이 여론을 왜곡시키려 한 것은 큰 범죄다. 익명성과 비대면성, 즉자성과 같은 온라인 특성이 낳은 한국식 전자 민주주의의 비극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2010년 천안함 폭침 당시 북한이 노골적으로 사이버심리전을 폈고 국내 진보·좌파 세력의 의혹제기가 혼재되어 사이버 공간이 불신의 공간으로 변했다.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군사이버사령부가 없었다면 인터넷은 북한의 주장만이 통용되는 ‘붉은 공간’으로 변했을지 모른다.
송영무 국방장관은 10월 12일 열린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군사이버사령부를 완전히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우리의 사이버전장의 여건이 매우 불리하게 됐다. 또다시 천안함 폭침과 같은 안보 이슈가 터진다면 남북한 사이버대전은 남한의 참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11월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노무현, 맹탕 수준의 역사인식
평양 만수대 의사당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이 그곳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는 글귀를 남겼습니다. 남포 서해갑문에서는 <인민은 위대하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저는 "남이나 북이나 '인민'들이 참 지지리도 지도자 복이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콱 막혔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무슨 죽을 죄를 지었기에 이런 시련을 주실까요. 21세기 개화된 세상에 상식을 가진 지도자를 만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요.
노 대통령은 예전에 “모택동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어느 시절인가 모택동에 관한 책을 읽은 모양입니다. 노 대통령은 모택동이 인민(농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해 가는 과정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나 봅니다. 노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방명록에 ‘인민’ 운운하며 글을 쓴 것도 아마 당시 읽었던 모택동 관련 책의 영향이 은연중에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싫던 좋던 지금의 노무현은 개인 노무현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위임된 권력을 행사하면서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몸짓과 말 한마디 한마디를 헌법과 합치되게 행동해야 하며, 나아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때문에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속으로 아무리 입이 근질거려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설사 자기 눈에 북한 인민이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할 말 안할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과 북이 이념을 놓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념 때문에 피를 나눈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인 것입니다. 북한은 국호에 ‘인민’이란 단어를 집어넣었고, 그 군대는 ‘인민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바로 ‘인민’의 이름 하에 벌어진 것입니다. 전쟁 후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북한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악랄한 독재국가로 만들고, 주민을 노예상태로 만들면서 갖다 붙인 구실도 바로 '인민을 위한다'는 한 가지 명분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우리 남한에서는 ‘인민’이란 단어 사용에 대해 매우 신중을 기해 왔습니다. 인민이란 단어는 이 말이 본래 가진 뜻이 좋고 나쁘고 하는 국어적 차원을 넘어서 이념을 내포한 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민이라는 단어는 ‘동무’라는 단어하고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 '동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은 6.25 전쟁 때 인민군이 아무나 보고 “동무 동무” 하고 불렀기 때문에 기피 단어가 된 것일 뿐이지, 이 단어는 '인민'이란 단어처럼 특별한 이념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노 대통령은 자기가 '인민' 운운하는 방명록 글을 적으면 북쪽 사람들이 대단히 감격해 할 줄 알았나 봅니다. 북한 사람들이 속으로 ‘별 쓸개 빠진 ×’이라고 욕을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부모를 욕하고 다니면 듣는 사람은 겉으로는 동의할 지 몰라도 속으로는 “미친 놈”이라고 욕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심리적 배경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호로자식이라도 자기 부모를 욕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욕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할말과 하지 않을 말을 가리게 됩니다.
개인의 신념이나 이념과 역사인식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신념이나 이념이 강해도 역사에 대한 인식은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신념이나 이념이 너무 강해서 거부할 수 없는 양심의 발로에 따라 북한에 가서 김일성 시신에 참배를 할 수 있고, 인민이 위대하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6.25 때 미군이 우리를 도운 것을 "통일 방해"라고 주장하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칭송한 강정구 같은 이가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헌법과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동의하도록 되어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인민이 어쩌고' 했다는 것은 이념과 신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고, 역사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다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길가는 고등학생에게 아무 감투나 씌워서 북한에 보낸다고 해도 그 고등학생이 자기 위치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도의 사리구분은 할 줄 알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제대로 된 역사인식만 가지고 있었다면 환영나온 북한 인민들에게서 "제발 우리를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처절한 절규를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도자가 그 정도의 단계만 되어도 그 사람은 민족전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가 방북행사 자체를 즐기면서 위세 잡는데 기쁨을 느끼고 왔다면 정말 비싼 차비만 날린 것 밖에 안됩니다.
그가 평소 북한 인민의 고통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가슴을 열고 생각해 보았다면 만수대 의사당에서 '인민 주권이 나오는 전당'이라는 거짓말은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노 대통령은 김정일의 노예나 다름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주권이 있는 듯이 거꾸로 이야기 했으니, 북한 동포들의 가슴에 대못질을 한 것은 몰론, 그 자신도 독재자에게 잘보이기 위해 진실을 속인 결과가 되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북한 인민의 상태가 어떤지 몰랐을 리 없다고 보기에 '인민 주권' 운운한 이 글귀는 더욱 잔인하게 다가 오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이 부적절한 방명록 글귀에 대해서 국내 언론은 침묵하고, 오직 중앙일보에서 ‘분수대’라는 칼럼을 통해 두루뭉실하게 지적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안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서해갑문은 인민군이 맨 손으로 만들다 시피 했고, 그 과정에 많은 군인이 죽었습니다. 굳이 쓰려면 "인민군은 위대하다"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후기: -----------------------------------------------
이번 노 대통령의 방북을 보자니 참으로 목불인견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무슨 임금님 행차도 아닌데 바쁜 경제인까지 대동한 요란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가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보기가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방북단의 활동을 보니 황제 알현하는 조공 사절단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상회담을 한답시고, 상대방 정상을 불러놓고 공식 환영 만찬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정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 정상이 안 나오는 환영 만찬장이라면 노 대통령도 당연히 격을 맞추기 위해 그런 만찬장에는 나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상대국 정상을 불러놓고 자기 졸개를 내보냈다는 것은 김정일이 노무현 대통령뿐 아니라 남한 국민을 자기 하수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날 환영 만찬을 진행한 우리 쪽 행사 담당자들은 전부 징계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담 마지막 날 백화원 영빈관 환송식장에서 김정일과 악수하면서 “제가 내려가지 전에 한번 더 만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김정일은 “여기가 마지막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명색이 정상회담을 하면서 상대편 정상의 공식 스케줄이 우리 쪽 수뇌부에게조차도 전혀 통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에 가면서 김정일이 나올지 안 나올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방북을 결정했고, 일정에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일반 국민들이야 김정일이의 공식일정을 몰라도 되지만, 최소한 남쪽의 정상회담 당사자는 김정일이 다음 행사에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정도는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합니다. 김정일이 “너희들끼리 행사를 진행 하고 있어라. 혹시 기분 내키면 들르마”하는 식으로 나왔는데도, 우리가 일정을 그대로 진행했다는 것인데, 세상에 이런 굴종적이고 엉터리 정상회담도 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방북 마지막 날 대국민 보고라는 것을 하면서 “개성공단이 잘되면 북측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개혁과 개방은 북측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개성공단을 통해서 북한이 개혁과 개방이 될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조심성 없는 말이 된 것 같다”는 등등의 말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무심코 내뱉은 개혁 개방이란 말에 김정일이 단단히 화를 낸 모양입니다.
국내에서 국민들과 보수 인사들에게 ‘별놈’이라는 욕을 퍼붓고, 장성들에게 “별달고 거들먹거린다”고 비아냥대던 때하고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모습입니다.
물론 김정일 뒷돈 대주고 퍼주기로 일관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펴면서 "햇볕정책의 목적은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개혁 개방은 북한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 용어조차 적절치 않다”고 하니 우리 국민은 이제 정부가 대북정책을 왜 추진하는 그 목적조차 알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개혁 개방이 대북 정책의 목적이 아니면, 천년만년 독재 잘하라고 지원하는 게 목적이란 것인지요. 이런 황당한 경우를 두고 속된말로 '골 때린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면,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란 자는 10월4일 북한에서 내려오자 마자 피곤했을 몸을 이끌고 KBS와 SBS의 심야토론에 잇다라 참여해서 열심히 방북 성과를 홍보했습니다. 그는 다음날인 10월5일에 아침에는 KBS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TV 토론과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재정 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당신께서...”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지칭할 때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서는 ‘당신’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재정 씨는 도대체 김정일에게 무슨 대단한 은혜를 입었기에 방송에서 김정일을 보고 ‘당신’이란 극존칭을 용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입니다.
조선일보
2016.09.24 노무현이 만든 영농법인과 봉하마을 주민들이 다투는 까닭
고(故)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이 어수선하다. 봉하마을에 농지를 가진 주민(지주)들과 영농법인 (주)봉하마을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갈등은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봉하마을 농지에 대한 농업진흥구역 해제와 관련해 양측의 입장이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6월 30일 전국의 농지 8만5000ha에 대한 농업진흥구역 해제를 발표했다. 농지 이용 가능성이 작거나 도시화가 진행된 곳을 풀어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취지였다. 정부는 지난해 한국 농어촌공사에 농업진흥구역 실태조사 용역을 주고, 이를 바탕으로 농업진흥구역 해제 대상지를 선별했다.
농업진흥구역이란, 농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보전하기 위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정하는 규모로 농지가 집단화돼 농업 목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는 지역을 말한다. 농지법상 농업진흥구역에서는 농업 생산이나 농지 개량과 무관하게 토지를 이용할 수 없다. 한마디로 농업진흥구역에선 농사만 지어야 한다는 얘기다.
(주)봉하마을 이의 신청으로 주민들의 지가 상승 기대 사라져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업진흥구역 해제 기준으로 ▲3ha 이하 자투리 지역이나 홀로 남은 농업진흥지역 ▲도시 지역 내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아 농업적 가치가 떨어지는 지역 ▲혁신도시, 산업단지 편입으로 제외 대상인 지역 등을 제시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일원 95.6ha도 경지 정리가 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포함됐다. 이 중 43.3ha는 제초제를 쓰지 않는 친환경 농법으로 이른바 ‘봉하쌀’을 생산하는 농지다. (주)봉하마을은 이의 제기를 했고, 농림축산식품부는 봉하마을 일원 농지에 대한 농업진흥구역 해제를 8월 말까지 보류했다. 봉하마을 농지 지주들은 반발했다. 농업진흥구역에서 해제되면 건폐율 20% 내에서 농업용 시설을 지을 수 있는 농지로 변경돼 땅값이 오른다. 이렇듯 개발 제한이 한 번 풀리면 향후 이런저런 명목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개발도 기대할 수 있다.
봉하마을 주민에 따르면 농업진흥구역 해제 예고 이후 거래된 봉하마을 소재 논의 거래가는 평당 30만원이었다. (주)봉하마을의 이의 제기 후 해제 보류 결정이 난 후의 평당 거래가는 13만원에 불과했다. 1/2로 떨어진 것이다.
봉하마을 지주들은 (주)봉하마을의 독단적인 행태에 분개하면서 ‘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땅 한 평 없는 (주)봉하마을은 농업진흥구역 해제를 반대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고, 정부에 해제 보류 철회를 촉구했다. 일부 지주들은 논에 제초제를 살포하고 ‘친환경 농법 포기’를 선언했다. 트랙터를 동원해 (주)봉하마을 사무실을 봉쇄하기도 했다.
8월 23일, 봉하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에는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경수 의원은 왜 고인(故人)을 이용, 현 정부를 탓하면서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 하는가?”란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숱하게 방문했지만, 봉하마을에서 ‘친노(親盧)’를 규탄하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마을 어귀로 다가서자 “농민에게 이익 없는 친환경은 거부한다”고 적힌 현수막이 있었다. “진흥 지역이 해제되지 않을 시 친환경 영농을 끝낸다” “실패한 친환경 농업 때려 치워라!” 등을 적은 현수막도 있었다.
마을 안에는 수십 장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명성 팔아 연명하는 (주)봉하 영농법인을 청산하라!” “박살내자 (주)봉하 영농법인, 몰아내자 김정호” “마을 주민을 무시하는 (주)봉하 영농법인 대표는 조용히 떠나라!” 등 주로 (주)봉하마을과 대표 김정호씨에 대한 불만을 적은 것들이었다. 다음은 당시 걸린 현수막 글귀 중 일부다.
〈“대통령님의 소신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 가고, 봉하 들녘 농민은 다 죽어 간다!”
“사람 사는 세상이 봉하 농민 죽이고 간신배들 배를 불리는 사업장인가?”
“농민, 경작인을 우롱하는 봉하 친환경 영농법인 해체하라!”
“적자만 실현한 (주)봉하 영농법인 때려 치워라!”
“영농법인 적자를 해결하고, 주주와 주민을 무시하는 영농법인 해산하라”
“부실 (주)봉하 영농법인 경영 상황을 공개하라!”〉
봉하마을 농업진흥구역 해제에 반대하는 친노 세력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현수막도 많았다.
〈“이해찬, 김경수 의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
“권력을 잡은 김경수 국회의원은 나쁜 일에 협조하는 것만 배웠나?”
“돈 없고, 힘없는 약자인 농민을 우롱하는 국회의원 김경수는 각성하라!”
“선거할 때 고개 숙이지 말고 평상시에 잘해라!”〉
노무현, (주)봉하마을 만들고 이사로 참여
(주)봉하마을은 봉하마을 일대의 친환경 벼농사와 쌀 유통을 위한 영농법인이다. 이는 사실상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들었다. 그는 대통령 퇴임 전 “우리 세대가 아이들한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어릴 때 개구리 잡고 가재 잡던 마을을 복원시켜서 물려주는 것이다. 그런 일을 대통령 마치고 하고 싶다”고 밝혔었다. 퇴임 후 고향에 내려간 그는 친환경 농업을 강조했다. 봉하마을을 친환경 농업 단지로 만들어 환경을 보전하면서, 농가 소득도 올리겠다며 ‘오리 농법’을 들고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친환경 농업을 조직화하기 위해 (주)봉하마을을 설립했다. 노 전 대통령의 참모들이 2억원, 봉하마을 유지들이 2억원을 출자했고, 노 전 대통령은 이사로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 사후 그의 부인 권양숙 여사도 3년(2009.11~2012.11) 동안 이사직에 이름을 올렸다.
법인 등기부등본에 따른 (주)봉하마을의 설립 목적은 ▲농산물 유통·가공·판매 ▲농작업 전부 또는 일부 대행 ▲영농 자재 생산·공급 ▲종묘 생산과 종균 배양 ▲농기계 및 장비 임대·수리·보관 ▲소규모 관개시설의 수탁 관리 등이다.
(주)봉하마을의 대표는 김정호씨다. 법인 설립 이후 지금까지 그는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김씨는 1984년 부산대 재학 중 부산시 민주정의당 지구당사를 점거하려다 구속됐다. 당시 김씨의 변론을 맡은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김씨는 이때부터 시작된 인연 덕분에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국정기록비서관을 지낸 바 있다.
김정호씨는 봉하마을 농지는 경지 정리가 완료된 곳으로 정부가 언급한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봉하마을 농지에 대한 농업진흥구역 해제를 추진한 건 정치적 음모가 있다는 식으로도 얘기한다. 다음은 김씨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을 정리한 것이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업인 친환경 생태농업, 묘역 공원화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추모·기념사업이 추진된다면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국민들이 더욱 많이 봉하마을을 방문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이렇게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박근혜 정권과 그 하수인 농축산식품부가 교묘하게 농업진흥구역 해제 대상에 봉하마을 들판을 끼워넣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봉하마을에서 모든 추모사업의 기반이 되는 친환경 생태농업을 흔들어 이를 방해, 저지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면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조처다. 적어도 농업진흥구역 해제나 개발을 찬성하는 지주들과 농업진흥지역 보존이나 친환경 생태농업의 지속을 바라는 노무현재단과 농업회사법인을 이간질하고, 서로 대립과 갈등을 야기할 얄팍한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이런 의심이 기우이기를 바란다.”〉
“전직 대통령 묘지 한 기 때문에 피해 본다”
(주)봉하마을 측의 주장에 대한 봉하마을 지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봉하부락 농업진흥지역 해제에 따른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이모씨를 만났다. 봉하마을에 약 4000m2 상당의 논을 가진 이씨는 마을에서 발언권이 센 ‘유지’다.
어릴 때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고, 권양숙 여사와도 가깝다.
이씨는 기자와 만나고 일주일 후 전화해 “노○○이 자신을 죽이려고 공작을 하고 있다”며 익명을 요청했다.
이씨 주장에 따르면 봉하마을의 농지는 (주)봉하마을이 얘기한 것과 달리 경지 정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경사가 없고, 필지 경계가 직선형으로 돼 있어 언뜻 보면 경지 정리가 돼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지만, 필지 모양이 제각각이고 면적도 1m2부터 수천m2까지 들쭉날쭉해 한 필지도 동일한 면적이 없다는 것이다.
경지 정리가 된 논은 용·배수로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봉하마을 농지엔 용·배수로와 농로에 접하지 않은 필지가 많아 호스나 경운기로 물을 끌어다 쓰는 논이 많고, 농로가 없어 남의 농지로 통과하는 등 농사를 짓기에 불편한 점이 많다고도 했다.
한참 동안 (주)봉하마을의 주장을 반박하던 이씨는 ‘봉하부락 농업진흥지역 해제에 따른 대책위원회’ 명의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펼쳤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다음은 관련 내용이다.
〈우리 농민은 전직 대통령 묘지 한 기 때문에 이렇게 피해를 보고 있다. 노 대통령께서 유언으로 일반 시민과 같이 작은 비석 하나 세워달라고 했는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를 어기고 대규모 호화 묘지를 설치했다. 민주사회에선 대통령이라도 국민의 공복에 불과하다. 죽은 자 때문에 농민을 죽이고 피해를 주는 것은 고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차라리 다른 대통령처럼 국립묘지로 옮겨 농민들에게 누를 덜 끼치고, 국가 관리를 받게 하고, 농민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도록 국가에서 막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와 관련, 이씨는 “대통령이 유언으로 이렇게 호화찬란하게 하라고 했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노 대통령 묘지 바닥에 깔린 박석이 1만5000개입니다.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낸 거지만, 하나에 5만원만 잡아도 그게 얼마입니까. 그럼 족하지. 저렇게 대규모로 해놓고도 뭐가 더 부족해 남의 땅을 갖고 말이야. 자기들 마음대로 하니, 못하니 말이야. 그래 놓고 완전히 우리 주민을 갖다가 아주 개발 이익을 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만든 봉하마을을 훼손하려고 한다, (언론에) 이렇게 부각하는 거야.”
“박근혜 정부가 노무현 대통령을 탄압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 (주)봉하마을이 이의 제기를 하기 전 마을 주민들과는 전혀 상의하지 않았습니까.
“없었어요. 이의 제기를 하기 전에 거짓말이라도 마을 주민들한테 우리 계획은 이러니까 이렇게 하면 소득도 늘 거다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장 큰 이해관계자가 주민 아닙니까. 왜 주민한테 상의도 없이….”
— 마을 주민들이 쌓인 게 많은 것 같네요.
“자기들이 여기 땅이 있나, 뭐가 있나. 살지도 않으면서 그동안 마을의 모든 걸 장악하고 주민들 의견은 무시하니까 폭발한 거야. 집 지으려니까 못 짓게 하고, 창고도 못 짓게 하고, 점방도 못 짓게 하고, 행사 때도 마을 주민 자리 하나 안 만들고…. 그래서 현수막을 건 겁니다.”
— 김정호씨는 농업진흥구역 해제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자신들과 주민들을 이간질하려는 음모라는 식으로 얘기하던데요.
“박근혜 정부가 노무현 대통령을 탄압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거는 정치적으로 지어낸 거야. 정부는 규제 완화 차원에서 한 거야. 이걸 해제해서 경제를 활성화하겠다 그거야.”
— 권양숙 여사와 가깝죠?
“대통령이 나한테 ‘네가 나보다 우리 집사람하고 더 안 친하나?’ 이렇게 얘기했었죠.”
— 권 여사한테 한 번 얘기해 보시죠.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요. 대화가 안 돼요.”
현재 봉하마을 농업진흥구역 해제 여부는 농림축산식품부 손에 달렸다. 경상남도가 ‘해제 승인 최종의견서’를 농림축산식품부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상당한 후유증이 있을 것이다. 봉하마을 농지가 농업진흥구역에서 해제되면 친노들은 박근혜 정부를 탓하면서 정치적 공격을 할 가능성이 크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봉하마을을 비롯한 소위 ‘친노 단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제하지 않는다면 봉하마을 주민들은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앞선 이모씨에 따르면 ‘봉하부락 농업진흥지역 해제에 따른 대책위원회’는 만약을 대비해 현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출처 |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 <한국 대통령 이었던 노무현의 대외적 발언>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 (북한 만수대 방명록)"
"인민은 위대하다"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이던 용산 미군기지"
"나는 모택동을 가장 존경 한다"
"미국이 실패했다고 말하면 안 되냐?"
"김정일은 호쾌한 지도자"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 쳐도 괜찮다 "
"미국 좀 안 갔다고 반미냐, 반미면 또 어떠냐"
"미국 엉덩이 뒤에 백 쓰서 숨지마"
"NLL은 땅 따먹기 할 때 줄 그어 논 것뿐이다"
"북한이 달라는 대로 다 줘도 남는 장사"
"북한이 발사 하는 것은 핵이 아니라 인공위성일 수도 있다"
"핵 실험이 판명 됐으나, 성공여부는 모른다"
"대포동 미사일이 미국에 가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북핵 발사는 위협이 아니다. 단서도 없다"
"일본과 각박한 외교전쟁도 불사"
"다케시마와 평화의 바다 (동해 이름을 평화의 바다로 바꾸
자며)"
"다케시마에 관해서는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기로 하고..."
"북핵은 북한 입장에서 생각해야함"
"북한이 개혁 개방 단어 싫어하니까 쓰지 않겠다"
"87년 이후 북한은 테러를 자행한 적이 없다"
<한국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대내적 발언>
"국보법 그거 썩어빠진 퇴보법"
"그럼 코드가 안 맞는 인사를 쓰라는 것이냐?"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죠" (전국 평검사와의 질의 응답에서)
"어느 분야를 봐도 옛날보다 위험을 가중시킨 곳이 없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다"
"나보고 아내를 버리라는 말인가?
(장인 빨치산 권오석에 대해 묻자)"
"6.25 전쟁은 내전이다"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중 빨간 불이 켜진 곳이 없다”
"도둑을 맞으려니 개도 안 짖더라"
"대통령 못 해 먹겠다"
"권력 통째로 내놓을 수도"
"대못을 박고 나가겠다"(정권 인수위가 심기를 건드린다고...)
"태초에 정치가 태어날 때 거짓말로 태어났다"
"아내를 잡으려면 밥상을 엎어야 한다"
"여자는 뺑뺑이 용과 오솔길 용은 있어야 한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지나가는 여성에게 오줌을 갈기며 희롱했다"
"정치인은 약속을 지키기 보다는 결과만 좋으면 된다"
"우리 국민은 욕심이 많아서 잘하고 있어도 계속 때린다"
"한국은 경제상황 좋다"
"국내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기는 건 대통령이 열심히 해서다"
"정치 승부에 있어선 내가 최고"
"군대 가서 썩지마라"
"캬, 토론 하고 싶은데 그놈의 헌법이.. "
"대한민국의 최대 걱정거리는 태풍과 대통령이다"
"나의 새 역할 모델은 세종대왕이다"
"부동산 말고는 꿀릴게 없다"
"한전 광주 이전 직접 챙기겠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부동산만은 직접 챙기겠다"(직접 챙기겠다는 것만 백가지가 넘는다)
"한국 사회 말 안 통해 어렵다"
"이 정도면 괜찮은 대통령, 국민이 영 눈이 높아 안 쳐준다"
"나는 하늘이 내려 보낸 지도자"
"이회창 후보 공약 보고 홧김에 성장률 1% 더 올렸다"
"내가 동북아 균형자"
"요즘 뭐 깜도 안 되는 의혹들이 춤을 춘다 (신정아 사건)"
"좋은 학교 나오신 분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머리 조아리고 돈 주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기자들이 너무 앞서 나간다"
"인사 청탁하면 패가망신을 시켜주겠다"
"강남 사람하고는 밥도 먹지 말라!"
"참여정부 실패론은 정신이상"
"퇴임 후 임대주택에서 살 테니 다들 집팔고 전세로 가라"(그리고 바로 봉하궁으로 입성)
"개*새*끼*들, 절반은 잘라야 돼" (민원담당 공무원들과의 대화)
"난데없이 굴러온 놈"
"속된 말로 통박을 굴린다"
"불법자금 규모가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 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
"총선에서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 꼴이다"
"인공기와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것은 유감이다"
"국민들은 경제와 외교 잘 할 거라 나를 뽑은 게 아니다"
"별 놈의 보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을 길게 하니 맛있게 먹은 밥도 소화가 안 되더라"
"죽지도 않은 경제를 무슨 수로 살린다는 거야?"
"여러분! 내가 언제 경제 살린 댔습니까?"
"경제 그거 내가 얼마나 신경 쓴 건데"
"종부세 낼 돈이 없으면 이사 가면 될 거 아니야"
"기자 여러분! 내 쌍꺼풀 예쁩니까?"
■ 놈현 유머
노무현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강물에 빠졌다.
다들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데
지나가던 학생이 물에 뛰어들어 노무현을 구했다.
노무현이 말했다.
“살려줘서 고맙다.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 줄 테니 소원을 말해라.”
“내가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어 주십시오.”
“앞길이 창창한 학생 소원이 왜 하필이면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이냐?”
“제가 노대통령을 살린 것을 사람들이 알면 전 틀림없이 맞아 죽을 겁니다.
제가 죽거든 꼭 국립묘지에 묻어주세요.”
2 ..............
노무현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강물에 빠졌다.
수행원도 지나가던 행인들도 아무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한 사람이 물었다.
“사람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왜 구경만 합니까?”
“대신 4,000만이 살기 때문이오.”
3 ...............
노무현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전복이 되었다.
지나던 농부가 발견하고 잘 묻어 주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나와 농부에게 물었다.
“틀림없이 죽은 것을 확인했습니까?”
“아직 안 죽었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4 .................
노무현과 이해찬이 헬기를 타고 순시에 나섰다.
노무현이 말했다.
“천 원짜리 한 장 떨어뜨리면 주운 사람이 되게 좋아할 거야.”
이해찬이 말했다.
“만 원짜리 떨어뜨리면 더 좋아할 겁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조종사가 말했다.
“두 사람이 뛰어내리면 4,000만이 다 좋아할 겁니다.”
5 ................
노무현이 자신의 얼굴이 담긴 우표를 발행하라고 지시하고
판매 현황을 알기 위해 우체국을 방문했다.
“요즘 내 우표 잘 나갑니까?”
“인기가 없습니다. 우표가 잘 붙지 않는다고 고객들 불만이 큽니다.”
그 말을 듣고 노무현이 직접 우표 뒤에 침을 발라 붙여봤다.
“아주 잘 붙는데요?”
우체국 직원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고객들은 앞면에다 침을 뱉습니다.”
6 ..................
노무현이 밤참을 사러 나갔다가 강도를 만났다.
“가진 돈 전부 내놔!”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그러자 강도가 말했다.
“그럼 내 돈 돌려줘.”
7 ................
노무현이 이해찬과 모든 장관과 같이 골프를 치러 가다가
사고가 발생해 병원으로 긴급후송되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어 병원장에 물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살릴 수 있습니까?”
“가망이 없습니다.
“이해찬은 살릴 수 있습니까?”
“그도 가망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를 살릴 수 있습니까?”
“국민을 살릴 수 있습니다.”
8 ..................
노무현이 정신병원으로 시찰을 나갔다.
모든 환자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외쳤다.
“노무현 대통령 만세!”
그런데 환자 하나가 무표정하게 노무현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노무현이 병원장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나를 환영하지 않소?”
“저 환자 상태는 오늘 아주 정상입니다.”
9 ..............
어떤 사람이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외쳤다.
“노무현은 바보다! 노무현은 거짓말쟁이다!”
경찰들이 와서 즉시 체포해서 20년 형을 선고해 감옥에 넣었다.
그의 죄목은 2개였다.
국가원수모독죄 2년, 국가기밀누설죄 18년.
10 ...................
노무현이 일본 천황과 만났다.
일본 천황이 자랑을 했다.
“내가 손만 한번 흔들어도 시민들이 환호한다.”
노무현이 자랑했다.
“나는 온 국민을 환호하게 할 수 있다.
내가 행동에 옮기면 아마 그 날이 국경일이 될 것이다.”
천황이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나?”
노무현이 말했다.
“내가 대통령을 그만 두면 그렇게 된다.”
11 .................
박세리가 한국에서 개최하는 골프대회에 참석했다.
아버지가 박세리에게 조언을 했다.
“시합을 하다가 상대방에게 이 말을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뭐라고 하나요?”
“노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아주 잘한다고 말해라.”
“그러면 이길 수 있나요?”
“그래도 잘 안되면 이 말을 해라.
노무현 임기가 늘어 대통령을 5년 더 하게 되었다고 말해라.
그러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다.”
12 ..............
노무현이 호를 하나 짓기 위해 작명가를 찾았다.
작명가가 말했다.
“좋은 호는 다 나가고 딱 2개가 남았는데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노무현이 2개의 호를 보고 고민을 하다가 그냥 돌아갔다.
다음날 노무현이 다시 작명가를 찾아갔다.
작명가가 말했다.
“어제 누가 와서 하나를 가져 갔네. 이젠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네.”
“그새 누가 왔다 갔습니까?”
“유시민이 왔다 갔다네.”
“무엇을 가져 갔습니까?”
“꼴값을 가져 갔다네.”
“그럼 남은 게 육갑뿐입니까?”
“그래 그게 자네 호일세.”
13 ...................
역대 대통령에게 소를 한 마리씩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다.
“이 소는 미제군.”
박정희 대통령이 말했다.
“소를 이용해 농사를 져서 국민들을 살려야겠군.”
전두환 대통령이 말했다.
“잡아 먹어야겠군.”
노태우가 말했다.
“뒷방에다 숨겨놔야겠군.”
김영삼이 말했다.
“어디에다 써야할지 모르겠군.”
김대중이 말했다.
“북한에 줘야겠군.”
노무현이 소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니 그 쌍카풀 어디서 했노?”
14 .....................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쌍커풀 수술을 한 것을 보고
전효숙도 쌍커풀 수술을 하기로 했다.
틀림없이 서울대 의사에게 시술을 받았다고 생각한 전효숙은
서울대 의사들을 모아 놓고 누가 시술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한 의사가 손을 들고 말했다.
“우리 중 아무도 시술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수의사에게 시술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효숙이 의아하여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의사가 말했다.
“노무현이 소에게 쌍커풀 수술 어디서 했느냐고 묻는 걸 내가 봤습니다.”
15 ..................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에게는 풍산개가 한 마리씩 있었는데
도둑이 와도 도무지 짖지를 않았다.
개에게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두환 개 : 우리 주인 재산이 달랑 28만원인테 짖을 게 뭐 있나?
김대중 개 : 우리 주인이 왕도둑인데 어떻게 짖나?
노무현 개 : 우리 주인이 시도때도 없이 짖어대는데 나까지 짖으란 말인가?
■ 검찰, ‘봉하이지원’서 NLL 대화록 발견
2008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봉하마을로 가져갔던 복제된 이지원시스템(봉하이지원)에서 대화록을 발견했다고 2일 밝혔다. 또 참여정부 당시 이관기록물로 지정되지 않고 삭제된 또 다른 버전의 대화록을 복구하는데도 성공했다.
검찰은 이 대화록이 반드시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됐어야 할 자료였다며 법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부장검사 김광수)는 이날 "참여정부 당시 회의록이 삭제된 흔적을 발견했고 이와 별도로 회의록이 이관되지 않은 채 봉하이지원에 탑재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그 경위를 수사 중"이라고 전했다.
검찰은 "분석결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이관대상 회의록으로 분류되지 않은 상태로 삭제가 됐다"며 "삭제 흔적을 발견해 복구하는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지 않은 회의록이 있다. 원래 삭제된 것과는 다른 것"이라며 "최종본의 형태로 봉하이지원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정식 이관기록이 저장된 서버에는 삭제 흔적이 남지 않지만 봉하이지원은 이지원시스템 전체를 복사한 것이어서 삭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검찰은 두 대화록에 대해 "삭제됐다가 복구된 것은 초안같은 것이고 새로 발견된 것은 그걸 수정한 것"이라며 "발견된 대화록은 국정원이 공개한 것과 동일하다"고 밝혔다. 다만 검찰은 삭제된 흔적이 남은 자료가 2008년 남북정상 대화록 하나 뿐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검찰은 이지원시스템 등 참여정부가 이관한 문서 755만건을 확인한 결과 "정식으로 이관된 기록물 중에는 회의록이 없다"고 밝혔다. 즉 참여정부가 정식으로 사용한 문서저장시스템과 이를 통해 퇴임 후 이관한 자료 중에는 회의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경위로 해당 대화록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사저로 가져간 복사본에는 존재한다는 것이어서 논란이 될 전망이다. 검찰은 오후 추가 설명을 통해 "대화록은 반드시 이관돼야 하는 자료이고 이관이 안됐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만약 삭제가 됐다면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검찰이 법적 문제제기를 한 만큼 향후 기록물 유실·삭제 책임과 관련한 검찰수사 가능성이 제기된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후 자서전 집필 등을 이유로 대통령기록물인 이지원을 복사해 사저인 봉하마을로 가져갔다가 기록물 관리법 위반이라는 논란이 일자 반납했었다. 검찰은 이번 수사과정에서 공식 이관물을 살펴보는 한편 비공식 기록물인 봉하이지원에 대해서도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살펴봤다. 검찰 관계자는 앞서 국가정보원이 공개해 논란이 됐던 대화록과 비교해 "큰 내용은 다 똑같다. 다만 버전이 다르다"며 "근본적인 내용이 다르진 않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발표한 내용이 원본과 다르다는 야권의 주장을 일축한 셈이다. 이어 "회의록이 '국정원본', '삭제본', '발견본' 등이 내용상으로는 원본에서 다르게 돼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차이는 크게 보면 별 거 아닌 차이고 차이가 별로 없다고 보는 것도 맞다. 내용적 차이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분량도 세 버전이 모두 같다고 덧붙였다.
다만 문제가 됐던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과 관련해서는 "그건 내용을 얘기하기가 좀 그렇다"며 추후 발표하겠다고 했다. 수사결과 발표 시점 논란을 의식한 듯 검찰은 "정치권에서 수사 공정성을 훼손하려는 것이 있어서 (중간 발표를 하게 됐다)"라며 "이것은 진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내용이라 (수사 결과를) 흔들 수가 없다. 그래서 적기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분석을 마친 검찰은 내주부터 참여정부 청와대 관계자 30여명을 소환해 해당 대화록이 삭제된 경위 등에 대해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만약 대화록을 누군가 고의로 삭제된 정황이 발견될 경우 처벌 여부에 대해서도 검토할 예정이다.
한편 이같은 검찰수사 내용 발표에 대해 참여정부 비서관 출신인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지금은 우리(참여정부 관계자)와 함께 이건 뭐고, 저건 뭔지 밝혀야 할 시점"이라며 "정치적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참여정부 관계자들은 검찰수사 발표에 대한 대책 논의를 진행한 뒤 수사 협조 방침 철회 등 대응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뉴스1]
■ 盧 정부, 전자정부 설계도 가져다 뭘 했는지 궁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말 청와대가 국가 전자정부시스템의 설계도를 가져갔다가 새 정부 출범 후 돌려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노무현재단은 참여정부 역점사업의 진척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전자정부사업 산출물을 외장하드로 제출받아 ‘참고’한 뒤 돌려줬다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외장하드 속의 콘텐츠는 아무리 복사해도 접속한 기록조차 남지 않는다. 국가시스템의 ‘유전자 지도’라 할 수 있는 핵심 자료가 한동안 정부의 통제범위 밖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대한 보안 사고다.
노 전 대통령 측이 가져갔던 전자정부시스템 설계도에는 외교정보전용망, 국가재난관리정보시스템, 통합보안관제시스템, 전자투표시스템 등 정부 부처와 국회에서 쓰는 36개 주요 국가기간망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만일 제3자에게 넘어가 전자정부시스템의 보안에 구멍이 뚫린다면 큰 문제다. 보안업체 관계자는 “자료가 돌고 돌아 1%라도 불순세력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면 국가 전자정부시스템 전체를 다시 구축해야 할 수도 있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최악의 경우 정부통합전산센터를 해킹하거나 투표 결과 같은 주요 정보를 교란하는 이적(利敵)행위에 쓰일지도 모른다.
한국정보사회진흥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이 2008년 1월 ‘전자정부 로드맵 과제 산출물’을 제출하라는 청와대 요청을 처음에는 거부한 것도 ‘국가 보안’ 때문이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직인이 찍힌 공문을 다시 보내오자 진흥원은 외장하드에 넣어 보내라는 청와대의 요구에 따랐다. 어제 노무현재단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하지 않은 데 대해 “송구하다”고 밝혔다. 전자정부시스템 설계도를 가져가 ‘국가 재산을 사유화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안전행정부는 이 자료가 외부로 유출됐을 경우를 상정해 36개 전자정부시스템이 사용하는 인터넷주소(IP)에 대해 전수 조사를 벌이고 5년 전과 같은 IP를 쓰고 있다면 변경하겠다며 후속 보안대책을 밝혔다. 그 정도로는 안심하기 어렵다. 노 전 대통령 측이 집요하게 이 자료를 요구하고 굳이 보안장치가 없는 외장하드로 제출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밝혀내야 한다. 당국은 자료 반납 전 복사 여부, 사용 내용과 경위 등도 조사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2015-04-27 노무현 대통령 형제의 「권력형 투기 의혹」 내막과 형 건평 씨의 전력(前歷)
2007년 말 노무현 정부에서 이루어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사면과 관련, 이명박 대통령의 형님인 이상득 씨와 노무현 대통령의 형님인 노건평 씨 간의 형님 라인이 있었다고 오늘자 <중앙일보>가 MB의 핵심 측근 증언을 통해 보도했다. 노건평씨는 노무현 정부시절 말단 공무원 출신의 힘없는 '시골의 별 볼일 없는 대통령 형님' 이미지로 부각됐으나, 사실은 정권의 숨은 최고 실세 역할을 해왔다는 증언인 셈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 시절 대우건설 사장이 노건평 씨에 대한 로비가 들통나 노무현 대통령의 공개적인 비난을 받고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국세청 공무원 출신인 노건평 씨는 수뢰로 구속되고 파면된 전력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건평 씨 간의 권력형 투기 의혹을 추적 보도한 월간조선 기사를 소개한다.
김근보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운영해 온 생수 판매전담회사 「(주)오아시스 워터」(초대 대표이사 안희정)를 2000년 10월27일 매입한 「(주)오아시스」의 대표이사다. 매입대금은 4억5000만원. (주)오아시스 워터는 盧대통령이 생수회사(장수천)의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盧대통령은 이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김근보씨가 영업권을 인수할 당시, (주)오아시스 워터의 자산은 생수통이 전부였다고 한다. (주)오아시스 워터에 생수를 공급하던 생수회사가 1999년 수해(水害)로 산사태가 나 관정의 수질이 나빠지는 바람에 샘물 생산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근보씨는 생수통을 4억5000만원에 매입한 셈이다.
「(주)오아시스」와 김근보 대표이사의 이름은 지난 5월28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대국민 기자회견 때 처음 거론됐다. 盧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근보 대표이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盧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끝난 뒤 청와대 측이 배포한 별도의 자료에는 「(주)오아시스 워터를 (주)오아시스(대표 김근보)에 매각했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나와 있다.
「(주)오사시스」 회사의 법인등기부 등본에는 김씨의 주민등록 번호가 「600920 -1******」으로 기재 돼 있다. 주민등록上 주소지는 「충북 천안시 쌍용동 모란아파트 1동 8**호」로 돼있다. 기자가 행정기관 등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김근보씨는 이 주소지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생수회사에 근무했던 직원도 김근보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생수회사(장수천)와 (주)오아시스 워터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김근보」라는 사람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김근보씨는 「(주)오아시스」의 실질적 대표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 샘물 생산업계의 한 관계자도 『김근보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기자는 김근보씨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행정기관과 관련업계 관계자 수십 명을 만났으나 『김씨가 금융기관에 근무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주)오아시스」 측은 「(주)오아시스 워터」를 인수할 당시 충남 천안시 영성동에 있던 본점을 2003년 1월 충남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로 옮겼다.
강금원 씨: 『盧대통령은 생수회사를 나라종금 측에 팔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후원자인 부산 창신섬유 회장 姜錦遠(강금원)씨는 6월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盧대통령이 운영하던) 생수회사(장수천)를 1999년 나라종금 측에 팔려고 했고, 실제 매매교섭이 오갔다』고 말했다. 姜회장은 盧대통령 측근 安熙正(안희정·現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씨가 1999년 7월 나라종금으로부터 받은 2억원도 『생수회사 주식 일부를 양도하려고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수회사를 나라종금에 매각하려고 나라종금 측과 교섭을 했다는 시기는 나라종금으로서는 生死를 결정짓는 중요한 때였다. 부실한 나라종금 측이 盧대통령의 부실한 생수회사를 인수하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도덕성 문제가 제기된다.
한나라당 이주영(李柱榮) 의원은 『盧武鉉 대통령의 후원자인 강금원(姜錦遠) 창신섬유 회장이 「생수회사 의혹의 본질은 이 회사를 나라종금에 매각하려 했던 것」이라고 밝힌 점으로 미뤄 볼 때 김근보씨는 나라종금과 연관이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나라종금과 김근보씨가 연관이 있다면, 나라종금이 김씨를 내세워 盧대통령이 운영해 온 「(주)오아시스 워터」를 인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盧대통령이 나라종금의 퇴출저지를 위한 노력을 해줬고, 그 대가로 나라종금은 盧대통령의 생수판매 전문회사를 인수해 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생수회사 리스 보증채무 39억5000만원(원금 18억원과 이자 포함)을 측근이나 후원자들의 돈으로 상환했다. 盧대통령이 운영했던 생수회사가 1997년 한국리스여신(주)로부터 리스 18억원을 대출받는 과정에서 盧대통령을 포함해 형 건평(健平)씨, 이기명(李基明) 전 후원회장 등 5명이 보증을 섰다.
盧대통령은 리스 보증채무 상환을 위해 자신의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에게 이기명 前 후원회장 소유의 경기도 용인 땅 2만여 평을 매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매입가격은 28억5000만원이었다. 姜회장은 2002년 8월29일 이기명 前 후원회장과 용인 땅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강 회장은 2003년 2월까지 이 씨에게 19억원을 지불했다. 이기명 씨는 강 회장에게 받은 용인 땅 매각대금 19억원 전액을 盧대통령의 생수회사 리스 보증채무를 상환하는 데 사용했다. 즉 盧대통령 형제가 보증을 선 채무까지 대신 상환해 준 것이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이기명 前 후원회장이 용인 땅 매매계약을 맺은 시기는 盧대통령이 민주당 大選 후보로 결정(2002년 4월)된 이후다.
이기명 씨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2003년 2월 강금원 회장과의 매매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李씨는 姜회장에게 계약금 및 중도금으로 받은 19억원 중 17억원을 지금까지 되돌려 주지 않고 있다. 姜회장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17억원을 굳이 되돌려 받을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姜회장이 미회수금 17억원을 되돌려 받지 않는다면, 姜회장은 간접적으로 이 돈을 盧대통령에게 제공한 셈이 된다. 이 경우 盧대통령은 정치자금법과 소득세법(증여세 포탈)을 위반한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金文洙 의원 : 『측근을 앞세운 노골적인 권력형 비리』
한나라당 金文洙(김문수) 의원은 이기명 씨 소유 용인 땅 거래과정에 대해 『盧대통령이 자신의 측근들을 앞세워 땅을 서로 사고 파는 것처럼 꾸며 이 과정에서 자금을 조성, 자신의 리스 보증채무를 갚은 이른바 「노골적인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력가인 태광실업(경남 김해 소재) 박연차 회장은 노견평 씨의 부탁을 받고, 건평 씨 소유 거제도 구조라 별장 일대 부동산을 매입했다. 매입가격은 5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매입시기는 盧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확정(2002년 4월27일)된 직후인 2002년 5월이었다. 朴회장은 지난 5월27일 경남도로부터 김해골프장(27홀 규모) 사업계획 승인을 받았다. 朴회장의 딸은 盧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다.
朴회장은 건평 씨의 구조라 별장을 사주는 대신 자신이 추진해 온 김해골프장 사업승인을 받았고, 딸도 청와대에 취직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수회사에 리스 채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리스여신(주)은 2000년 7월께부터 본격적으로 채권회수 작업에 나섰다. 이 회사는 盧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했는데도, 盧대통령의 월급에 대한 압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盧대통령은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해수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한국리스여신(주)는 생수회사 보증인 중 한 명인 노건평 씨 소유의 거제도 구조라 별장 일대 부동산에 대해서도 압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건평 씨는 이 부동산을 1994년 매입했다.
한나라당 이주영(李柱榮) 의원은 『건평 씨가 한국리스여신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에 가압류 등 법적 조치가 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법적 조치 직전에 자신의 처남에게 구조라 별장 일대의 부동산 명의를 넘긴 것』이라며 『이는 노건평 씨 등 보증인들과 한국리스여신 측과의 어떤 내통이 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한국리스여신 측은 『노건평 씨 등 보증인들의 재산에 대한 압류 조치를 취할 당시 건평 씨가 구조라에 별장 이외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법적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盧健平씨의 부동산 투기 前歷
노건평 平씨는 1969년 세무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 병역관계로 잠시 쉬긴 했지만 1978년까지 약 10년간 공직에 근무했다. 「건평 씨는 이후 고향인 경남 진영뿐 아니라, 부산, 마산, 창원, 창녕 등지의 땅을 수 차례 사고 팔았다」고 주간조선은 보도(1991년 10월6일字)했다. 주간조선은 「건평 씨가 1980년대 후반 40여 차례 부동산을 사고 팔았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주간조선의 보도가 과장됐다며 1991년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주간조선은 1심 재판 과정에서 「건평 씨가 40여 차례 부동산을 사고 팔았다」는 보도와 관련, 24건에 대한 건평 씨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1심 재판부는 「건평 씨가 거래한 부동산이 40여 건에 달한다는 주간조선 보도는 다소 과장된 것」이라며 원고(노무현 대통령)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과정에서 관심을 끈 부분은 경남 김해시 진영읍內 땅 1500여 평에 대한 판결이다. 건평 씨가 이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盧대통령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았고, 재판부는 이 땅의 3분의 1에 대한 소유권이 盧 대통령에게 있음을 인정했다. 건평 씨는 이 땅에 상가건물을 신축했다. 건평 씨는 盧 대통령의 생수회사 리스자금 대출시 보증을 섰고, 이후 리스 보증채무를 제때 갚지 못해 이 땅이 한국리스여신(주)에 압류돼, 경매에 붙여졌다. 이 건물은 건평 씨의 처남 민상철씨가 12억원에 낙찰받았다.
노건평 씨는 1994년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구조라 해수욕장 인근 임야 1800여 평을 매입했다. 이곳은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으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건평 씨는 199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부터 이곳에 2층과 1층짜리 건물(별장) 2채를 신축하기 위한 허가를 받았다. 건평 씨는 이곳의 도로와 접한 지역 부지 100여 평도 부인 민(閔)모씨 명의로 매입, 같은 해인 199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아 2층짜리 근린생활시설(카페) 및 주택을 건립했다. 카페 건물은 최근 閔씨 동생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대출받는 과정에서 담보로 제공됐고, 동생이 돈을 갚지 못하자 경매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명의가 넘어갔다.
반면, 한려해상국립공원 해금강 분소 측은 건평 씨의 2층짜리 별장과 카페 중간지역 부지 소유주인 정(鄭)모씨가 1998년 12월28일과 1999년 1월14일 두 차례에 걸쳐 신청한 단독주택 및 창고 건물 신축 허가는 반려했다. 자연경관을 해칠 우려가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건평 씨가 한려해상국립공원 해금강 분소로부터 구조라 별장 등 건물 세 채에 대한 허가를 받은 시기(1998년)에 해금강 분소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후배인 金모씨(42)였다. 金씨는 건평 씨가 신청한 2층 카페 증축 허가 신청시 현장 조사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 형제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져 나오면서 새삼 건평(61)씨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건평 씨는 경남 김해군(現 김해시) 생림면 사촌리에서 출생했다. 건평 씨는 1974년 결혼을 했으나, 3년 만인 1976년 부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건평 씨는 1년 뒤인 1977년 둘째 부인(46)과 재혼을 했으나, 1979년 합의 이혼을 했다. 셋째 부인 민 씨(47)와는 1983년 혼인신고를 했다.
노건평 씨는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1녀를,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1녀를, 셋째 부인 閔씨와의 사이에서는 1녀를 둔 것으로 호적에 등재돼 있다.
노건평 씨의 이혼한 둘째 부인은 현재 건평 씨와 같은 지역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內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이 전처는 현재 창원시 남양동에서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 부인 민 씨는 현재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화마을에서 건평 씨와 딸 세 명이서 살고 있다. 민 씨는 경남 창원군(現 창원시) 창원면 서상리에서 태어났다. 민 씨는 노건평 씨와 혼인신고를 1983년 1월14일에 했으며 1983년 12월14일에 봉화마을로 이전했다.
노건평 씨, 수뢰로 국세청에서 파면
노건평 씨는 동마산세무서에 근무할 당시인 1975년 7월 황(黃)모씨로부터 『부동산 투기 억제세가 부과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40만원을 받은 혐의가 1978년 4월에 드러나 검찰에 구속됐다. 이 당시 건평 씨에게 부탁을 했던 黃모씨는 1977년 결혼한 둘째 부인(1979년 이혼)의 어머니다.
당시 마산세무서 징계위원회가 작성한 노건평 씨의 징계처분(파면) 이유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75년 7월 초 마산시 소재 다방에서 黃모씨로부터 그 남편 吳모씨가 양도한 대지 1100여 평에 대한 부동산 투기 억제세를 부과 받지 않도록 해 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받고 돈 40만원을 받은 후, 관할 세무서로 발송돼야 할 부동산 투기 억제세 과세자료를 절취, 세금을 징수할 수 없게 했다>
당시 마산세무서장 명의로 된 보고서에는 「본건 수뢰사건의 내용을 볼 때 가정불화로 사건이 표면화된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한나라당 이상배 정책위의장은 6월10일 최고위원 회의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盧대통령의 스캔들은 날이 갈수록, 해명할수록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대통령은 법과 양심 앞에 자유로워야 한다. 지금은 분명히 숨기고 축소하고 조작하는 것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盧대통령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문책할 것은 문책해야 한다』●
송승호 전 월간조선 기자
2016.11.14 '노무현 탄핵 소추 사유' 중 하나였던 측근비리의 충격적 실상
[편집자주(注)] 지난 주말 대규모 시위를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얘기가 여당에서 나오고 있다. 최순실 사태 관련, 박 대통령의 불법행위 여부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도 조만간 나올 것이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대통령 리더십 부재(不在) 상황을 타개할 여러 가지 정국 수습 방안이 나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탄핵이다.
우리는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헌정(憲政)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을 경험했다. 노 대통령 탄핵 소추 사유는 ‘노무현 측근비리’와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성 위반’ 등이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심리하는 동안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졌다. 소추안이 발의되고 두 달 후 헌법재판소는 탄핵안을 기각했다.
이후 이른바 노무현 정권은 좌파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이에 실망한 애국세력은 2007년 대선(大選)에서 우파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다음은 탄핵의 사유 중 하나였던 노무현 측근비리를 집중 해부한 월간조선 2004년 4월호 기사다. 최순실 사건과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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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치면 다문 입에도 짠물이 들어간다. 盧武鉉 측근들은 아예 바닷속에 들어가 짠물을 마셨다』
● 盧武鉉 대통령, 자신이 실질적으로 운영한 「장수천」 부채 상환에 민주당 지방선거 잔금 2억5000만원 사용
● 盧健平씨, 대우건설 南相國 사장이 건넨 3000만원 받고 『추석선물인 줄 알았다』
● 盧캠프 대선자금의 「블랙홀」 安熙正, 불법자금 10억원 중 1억6000만원을 아파트 구입 중도금으로 유용
● 崔導術씨의 SK비자금 수수로 盧대통령이 재신임 카드 빼내는 결과 초래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한나라당의「7분의 1」선까지 육박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공약(公約)을 내걸고 정권을 잡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취임 1년 만에 친형 노건평(盧健平)씨 비리에 이어 안희정(安熙正)·이광재(李光宰)·최도술(崔導術)로 이어지는 측근비리로 인해 국회로부터 탄핵당하는 헌정 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됐다.
盧대통령은 지난 3월11일 특별 기자회견에서 자신과 측근들의 비리 연루 의혹에 대해 적극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 여당은 물론 국민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동안 측근비리는 「김진흥(金鎭興) 특검」에서, 대선(大選)자금 수사는 대검(大檢) 중수부에서 담당해 왔다. 측근 비리의 주역은 안희정 前 열린당 충남도지부 창당준비위원장, 최도술(崔導術) 前 청와대 총무비서관이다. 최근에는 여택수(呂澤壽) 청와대 부속실 행정관까지 가세했다.
이 측근들이 보여 준 비리(非理) 행태는 권력형 부정부패의 축소판이자 결정판이다. 집권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대통령을 지근(至近) 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진들이 앞장서 부정한 돈을 챙겼다가 구속된 것이다.
지난 3월8일 대검 중수부(부장 安大熙)는 『盧대통령의 측근 安熙正씨가 삼성그룹에서 30억원을 받은 혐의가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이 같은 내용의 불법 대선자금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安씨가 삼성에서 채권 15억원과 현금 15억원을 받은 혐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安씨가 태광실업에서 5억원, 확인이 안 된 기업에서 4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회창(李會昌) 캠프와 노무현 캠프가 받은 불법 대선자금 규모는 현재까지 각각 823억원과 113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로써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캠프 측이 모금한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훨씬 넘어 「7분의 1」 선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盧캠프에 대한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이 추가 확인될 경우, 불법자금의 격차는 더욱 좁혀질 전망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날 兩진영의 불법 대선자금의 총액을 공식 발표하지는 않았다.
SK비자금 수사 이후 검찰의 수사는 크게 세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이고, 다른 하나는 노무현 캠프의 불법 대선자금, 마지막 한 가지는 최도술 前 청와대 총무비서관 구속으로 촉발된 이른바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였다.
2003년 12월19일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와 다른 한 축으로 석 달 가까이 진행해 온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결과를 내놓았다. 당시 발표의 하이라이트는 盧대통령이 생수제조 회사인 「장수천」 빚 문제 해결에 직접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측근 비리」가 아니라 「대통령 비리」로 귀결된 셈이었다.
장수천은 盧대통령이 실소유주였던 생수 회사. 盧대통령과 권양숙(權良淑) 여사도 株主로 참여했었다. 특히 1999년 7월 장수천의 별도 판매법인인 「오아시스워터」는 안희정씨가 대표였고, 권양숙씨 명의의 서울 종로구 명륜동 빌라를 담보로 1억원을 차입해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수천이 영업부진에 IMF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빚만 잔뜩 진 채 망했다는 것이 사단(事端)이 됐다.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바람에 한국리스여신에서 빌린 장수천 채무는 30억원을 넘어섰다. 이때 노무현 대통령, 노건평씨, 오철주씨, 선봉술, 이기명씨가 보증인으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경남 김해의 이른바 「진영상가」가 2001년 경매로 넘어가 12억원에 팔렸다. 이 땅은 盧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와 장수천 前 대표였던 선봉술씨, 그리고 오철주씨 세 사람의 공동소유였다. 이들은 모두 장수천 부채의 연대보증인이기도 했다.
선봉술씨는 盧대통령의 고향친구이자 진영중학교 동창이다. 검찰에 의하면, 시가로 20억원 정도인 땅을 날린 宣씨와 吳씨가 2002년 7월, 『손해를 보전해 달라』고 盧대통령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검찰 수사결과, 선봉술씨는 2002년 12월 盧대통령의 후원자인 부산 창신섬유 강금원(姜錦遠) 회장으로부터 5억원, 안희정씨로부터 4억5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돈은 노건평·선봉술·오철주 세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던 진영상가가 장수천 채무로 한국리스여신에 의해 경매처분되자 손실 보전차원 명목으로 받았다는 것이 검찰 수사결과다.검찰은 안희정씨를 통해 선봉술씨에게 전달된 4억5000만원도 강금원 회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선봉술씨는 2002년 6월에도, 최도술씨로부터 장수천과 관련된 盧후보의 부채를 청산할 명목으로 2억5000만원을 받은 사실이 검찰 수사결과 드러났다. 崔씨가 宣씨에게 준 2억5000만원은 2002년 6월 실시됐던 민주당 부산市 선대위(選對委)의 지방 선거(부산시장 선거) 잔금(殘金) 중 일부였다고 검찰은 밝혔다. 당시 崔씨는 민주당 부산市 선대위 회계책임자였다. 검찰은 崔씨가 선대위의 자금 2억5000만원을 宣씨에게 지급한 것은 盧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선거자금을 개인빚 갚는데 사용한 것은 가장 罪質이 나쁘다』
민주당 김영환(金榮煥)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이와 관련한 논평을 통해, 『盧대통령이 선봉술씨에게 주어 장수천 빚을 갚도록 한 지방 선거잔금 2억5000만원은 명백한 민주당 공금』이라며 『대검 중수부가 밝힌 盧대통령의 혐의중 가장 罪質(죄질)이 나쁜 것은 선거 잔금을 개인 빚 갚는데 유용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돈은 盧대통령 개인이 민주당에 돌려줘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안희정씨는 盧대통령의 「동업자」이자 분신(分身)이다. 그는 지금까지 총 68억원에 달하는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것으로 밝혀진 노무현 불법자금의 「블랙홀」이다.
검찰 조사 결과 발표에 의하면, 그는 盧대통령의 장수천 채무를 갚기 위해 강금원 창신그룹 회장과 함께 이기명 前 盧대통령 후원회장의 용인땅을 위장매매하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이 계획에 따라 姜씨는 2002년 8월부터 2003년 2월까지 李씨에게 총 19억원을 제공했다. 그 뒤 姜씨는 계약을 파기했으나, 제공된 금액을 李씨에게서 돌려받지 않는 방식으로 盧대통령의 개인채무를 청산케 했다. 盧대통령은 安熙正씨와 강금원씨로부터 불법 위장매매 거래 계획을 사전에 보고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안희정씨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에도 총 5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 盧대통령의 경선자금으로 사용한 것이 검찰수사 결과 드러났다. 검찰은 안희정씨가 大選 당시 삼성으로부터 총 30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한 것으로 확인한 바 있다.
안희정씨, 1억 6000만원 개인 용도 사용
안희정씨는 2003년 3월에는 태광실업 朴淵次(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억원, 8월에는 부산지역 건설업체인 (주)반도 권홍사 회장으로부터 2억원, 2003년 3월에서 8월 사이에 강금원씨 조카 명의의 차명계좌로 6억원을 입금받는 등 총 10억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안희정씨는 강금원 회장의 조카 계좌에 맡겨 둔 불법자금 10억원 중 1억6000만원을 2003년 2월 경기도 일산 아파트 중도금 용도로 사용했고, 같은 해 6월 총선 출마 지역구 여론조사 비용으로 3억1000만원 등 총 4억7000여만원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대검 중수부는 지난 3월 초, 안희정씨가 대선 직전인 2002년 12월경 5大 그룹의 하나인 롯데그룹으로부터 수억원을 받은 혐의를 포착하면서 5大 그룹에서 「노무현 大選 캠프」에 건넨 돈이 처음으로 꼬리가 밟히기 시작했다. 역시 「창구」는 안희정씨였다. 安씨에게 전달된 액수는 6억원. 롯데 측은 이 돈을 한꺼번에 주지 않고 수차례에 걸쳐 건넸던 것으로 알려졌다.
盧대통령은 지난 3월11일 특별기자회견에서 安씨를 적극 「변호」했다. 盧대통령은 최도술, 안희정씨를 『15~20년 가까이 함께했던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라면서 『아직도 그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기 어렵고 그들이 보관했던 돈의 용도에 대해 善意를 믿고 있다. 치부(致富)나 축재(蓄財)를 위한 돈이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최소한 체면치레는 앞으로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알아서 관리했던 돈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은 특히 安씨가 불법자금 중 2억원 가량을 자신의 아파트 구입에 사용했다는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확인 결과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했다. 盧대통령은 『새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일시적으로 자금을 융통해 지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돈은 옛날 아파트를 팔아 다시 채워 놓았다고 한다』면서 『법적으로 보면 유용에 해당되지만 착복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며 安씨를 감쌌다.
최도술 前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2002년 10월15일 SK그룹으로부터 11억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검찰이 崔씨가 SK비자금 11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잡자 盧대통령은 2003년 10월7일부터 9일까지 3일간의 인도네시아 공식방문 중에 『눈앞이 캄캄했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再신임」불러온 최도술의 SK비자금
최도술씨에게 SK그룹의 비자금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이영로(李永魯)씨가 중간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로씨는 부산商高와 연세大 경영학과를 졸업했는데, 盧대통령과 최도술씨의 부산商高 8~9년 선배다. 게다가 이영로씨와 SK그룹 손길승(孫吉丞) 회장은 고향(경남 하동)이 같고 초등학교 때 친구로 알려졌다.
지난 大選 때 민주당보다 한나라당에 훨씬 더 많은 정치자금을 지원했던 SK그룹으로서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 이후, 盧대통령 측에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영로씨가 SK그룹과 盧대통령 측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崔씨가 SK에서 받은 돈 중 3억9000만원은 大選 때 빚을 갚는 데 사용했고, 1억원은 이영로씨 부인(배송자·신라大 식품영양학과 교수)의 연구지원비로 사용했고, 나머지 6억원은 李씨가 보관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崔씨에게 알선수재 및 정치자금법을 적용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도 『최도술씨가 국내기업체 등으로부터 받은 돈은 11억원이 전부가 아니며, 돈의 최종 목적지도 崔씨가 아니다』라는 의혹을 제기해 돈의 목적지가 盧대통령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SK비자금 사건은 盧대통령으로 하여금 재신임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최도술씨가 받은 불법자금은 총 21억3850만원이다. 그는 이 중 14억4350만원을 大選 이후에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최도술씨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경선이 있던 2002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盧후보의 경선자금 마련을 위해 차명계좌를 통해 총 1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것으로 특별검사의 수사결과 확인됐다.
최도술씨는 청와대 총무비서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삼성 등으로부터 4700만원을 수수했고, 청와대 공식계좌를 통해 불법자금을 세탁하기도 한 것으로 확인됐다. 崔씨는 총무비서관 시절 부인 계좌를 통해서도 돈을 받는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불법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崔씨는 또한 「검은돈」 2000만원을 현금으로 들고 대담하게도 자신의 부하인 청와대 경리과장을 찾아가 청와대 수표로 바꿔서 사용했다. 청와대 수표가 돈세탁의 도구로 이용된 셈이다.
총무비서관은 청와대 예산과 인사를 관리하는 막강한 자리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시절에는 총무수석비서관이 차관급이었으나 김대중(金大中) 정권에서 1급으로 낮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썬앤문으로부터 정치자금 받은 이광재씨
이광재(李光宰) 前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盧대통령을 20년간 측근에서 보좌해 왔다.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연세大 화학공학과(83학번)에 입학한 뒤 법학과로 전과(轉科)해 졸업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盧대통령의 선거캠프에 합류했고 당선된 뒤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냈다.
지금까지 총 1억여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 이광재씨는 2002년 11월9일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서 盧대통령이 문병욱(文炳旭) 썬앤문 회장과 조찬시 동석(同席)해 盧후보가 방을 나간 직후 文炳旭씨로부터 1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양길승(梁吉承) 前 청와대 부속실장은 2003년 6월 조세포탈, 공갈 및 살인교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던 이원호 키스관광나이트 사장으로부터 향응을 제공받고 수사무마 청탁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일반 국민들이 「대통령 부속실장」이라는 낯선 직제를 「문고리 권력」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金泳三 정권 시설부터다. 당시 청와대 제1부속실장 장학로씨는 재임 중 수십억원대의 부정한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부속실장은 비서실棟(동)이 아닌 청와대 본관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인물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양길승 제1부속실장이 「향응사건」에 연루돼 자리에서 물러난 데 이어 여택수(呂澤壽)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마저 비리에 연루됐다.
지금까지 총 3억3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것으로 밝혀진 呂澤壽 행정관은 지난 大選 때 盧후보의 수행팀장으로서 2002년 12월7일 盧대통령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썬앤문 문병욱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
또한 여택수씨는 롯데쇼핑 신동인(辛東仁) 사장으로부터 3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여택수 행정관은 2억원을 안희정씨에게 전달했고, 이 돈은 김원기(金元基) 열린당 의원 보좌관을 거쳐 열린당 창당자금으로 제공됐다는 사실이다. 呂씨는 盧대통령의 직접적인 지휘감독下에 있는 분신(分身) 같은 존재이다. 때문에 임의로 창당자금을 제공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여택수 행정관이 돈을 받은 시점이다. 직속상관인 양길승 前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연루된 「청주 키스나이트클럽 술자리 향응 사건」이 불거진 게 2003년 7월 말이었다. 그러나 呂씨는 바로 그해 8월, 롯데 측으로부터 3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았다.
문병욱씨는 부산商高 57회 졸업생으로 盧대통령의 4년 후배다. 그는 1980년대 말 노무현 당시 변호사에게 법률 조언을 구하면서 盧대통령 측과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산商高를 졸업하고 현대건설 경리부에서 잠시 근무한 뒤 목욕업으로 사업기반을 닦았다. 그는 1997년 종합레저그룹이라는 썬앤문을 세운 뒤 경기도 이천의 미란다호텔과 인천 송도비치호텔에 이어 2002년 강남의 뉴월드호텔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호텔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文씨는 1997년 세금감면청탁 과정에서 정관계(政官界) 「마당발」로 알려진 김성래(金成來·여·구속)씨를 영입, 사업 확장을 꾀했다. 특히 金씨는 2002년 국세청의 특별세무조사 당시 썬앤문에 추징된 171억원의 세금을 23억원으로 깎는 데 공을 세워 그룹 부회장에 올랐으며, 작년 1월 계몽사를 인수, 자신의 입지를 더욱 넓혔다. 文씨는 장수천 사업에도 참여, 1998년 4월 「(주)명수참물」을 설립해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이 회사는 장수천의 서울지역 판매회사로 알려졌다.
문병욱과 노무현의 거래?
지난 2월11일부터 13일까지 열린 국회 법사委 청문회는 김성래 썬앤문 부회장 등을 출석시켰다. 盧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썬앤문의 減稅(감세) 청탁을 받아 국세청에 직접 감세 청탁 전화를 해, 썬앤문의 세금 171억원을 23억원으로 감세받도록 해주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미 文炳旭씨로부터 『2002년 상반기 盧武鉉 후보가 국세청에 감세청탁 전화를 해주도록 安熙正씨에게 부탁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盧캠프의 자금 관리역으로 알려진 安씨는 大選 과정에서 李光宰씨로부터 文씨의 돈 1억원을 전해받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즉 文炳旭씨는 사업확장과 감세청탁을 위해 盧캠프에 「투자」했고, 盧대통령 측은 孫永來(손영래) 前 국세청장을 통해 171억원의 세금을 23억원으로 줄여 주도록 외압을 가했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주장이다.
이 밖에 盧대통령의 大選 캠프를 책임졌던 鄭大哲(정대철)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총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 일부를 대선자금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개인적으로 유용했다. 李相洙(이상수) 총무위원장은 총 7억원 이상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고, 李在禎(이재정) 유세본부장은 총 1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고 이를 盧武鉉 대선 캠프에 전달한 혐의로 모두 구속됐다.
『참모들은 이성을 잃은 듯…
盧대통령은 지난 3월11일 기자회견에서 『大選 때 선대위원장, 선대본부장, 유세본부장 등 나의 선거참모들이 모두 구속됐는데, 그분들을 위해 한마디 변론해 주고 싶다』고 했다. 盧대통령은 『횡령이 없었다는 것을 아주 놀랍게 생각하며, 이들이 비록 법을 어겼지만 선거를 위해 노력한 일이고 개인적으로 착복하거나 치부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盧대통령 측근 비리와 관련, 민주당 柳鍾泌(유종필) 대변인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大選 이후 돈벼락이 떨어지니 盧후보 참모들은 이성을 잃은 듯했다』고 했다. 그는 또 『파도가 몰아치면 입을 다물고 있어도 짠물이 들어가는데, 입을 벌리고 있었으니 얼마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崔導術씨와 관련, 『崔導術은 아예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짠물을 먹었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은 2003년 12월14일 청와대 정당대표 회동에서 자신의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검찰 중간수사발표 결과, 盧대통령 측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규모가 113억원에 달해 李會昌 후보 측(823억원)의 10분의 1을 이미 초과했다. 정확히 말하면 「7분의 1」 수준이다. 이것은 검찰 수사가 한나라당이 5大 대기업으로부터 받은 불법 대선자금에만 치중한 상황에서 나온 결과다. 최근 安熙正씨가 롯데 6억원, 삼성 30억원 등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속속 드러남에 따라 5대 대기업에 대한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될 경우, 盧대통령 측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盧대통령은 지난 3월11일 기자회견에서 『유용 혐의가 있는 금액 등 돈의 성격에 대해서는 검찰 발표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말해 청와대式 계산법이 있음을 시사했다.
盧대통령은 『대선자금끼리만 비교하면 야당의 10분의 1을 넘지 않는다』며 『大選 후에 측근들이 받았던 30억원 정도를 제외하면 73억원 수준으로 내려간다』고 해석을 달리했다. 『10분의 1은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한평생 정치하면서 이 차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라고도 했다. 盧대통령은 일단 安熙正씨가 삼성에서 받은 현금 15억원 등이 측근비리 수사결과 발표 당시 밝혀졌던 출처불명의 17억4000만원과 겹친다는 安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 부분을 빼야 한다는 논리를 편 듯하다. 이 돈은 아직 수사 중이어서 확정짓기는 어려운 상태다.
盧대통령은 또 『영수증을 변칙 발급한 것은 엄밀히 보면 신고됐고,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합산에서) 제외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SK와 현대자동차가 임직원 명의로 편법 지원한 16억6000만원 부분을 말한다. 검찰은 『李相洙 의원이 자금 전달 방법까지 제시했고, 고의성이 있다』며 李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 불법자금임을 분명히 했다.
민경찬과「봉하대군」노건평씨
盧대통령의 사돈이자 노건평씨의 처남인 민경찬(閔景燦)씨의 「653억원 펀드 모금 의혹」은 사실무근으로 결론 내려졌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지난 3월10일 『閔씨가 언론을 통해 「이미 653억원이 모금됐다」는 허위 내용을 퍼뜨렸다』며 『청와대 및 금감원 조사 과정에서 제기된 사전조율 의혹도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閔씨는 2002년 영안실 임대 등을 미끼로 17억7000여만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검찰은 이 사건이 盧대통령의 사돈이라는 「특수 신분」을 가진 閔씨를 보고 몰려든 인물들 간의 잘못된 만남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이 상황에서 모 주간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자 閔씨는 「653억원 펀드 모금」을 사실인 것처럼 지어냈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653억원이라는 액수도 閔씨가 구상만 했던 부산지역 재개발 사업에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 사업비와 일치할 뿐』이라고 밝혔다.
閔씨는 노건평씨의 부인인 민미영(閔美迎)씨의 남동생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민경찬씨는 부산 인제의대를 나온 뒤, 1990년대 말부터 각종 의료벤처사업에 뛰어들었으며, 2000년에는 의료계 파업으로 병·의원이 문을 닫자 「아파요닷컴」이라는 사이트를 개설, 인터넷으로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전을 발급하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하지만 서울 서초보건서가 이를 진료행위로 인정할 수 없다며 경찰에 고발하고 복지부에 의사면허 자격정지를 요청하자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기도 했다.
민경찬씨에 대한 관심은 원래 동생인 민상철씨가 대통령 친인척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은 데서 출발했다. 이 문제를 처음 꺼낸 한나라당 金文洙(김문수) 의원은 지난해 초 노건평씨 명의의 부동산 등기부 등본을 뒤지다가 수십억원대 부동산이 민상철씨 앞으로 명의 이전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金의원은 『특별한 소득이 없고 카드 연체로 신용불량 경력이 있는 사람이 수십억원대의 땅을 살 수 있겠냐』며 자금출처에 의혹을 제기했었다.
「민경찬」이라는 이름은 민상철씨의 최종 근무지가, 민경찬씨가 경기도 김포에서 운영하던 푸른솔병원이며, 그곳에서 「상무」로 근무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등장했다.
그러나 병원은 개업 1년 만인 2002년 5월 부도를 맞아 폐업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야당 의원들은 일제히 민경찬씨가 병원을 짓기 위해 은행을 포함해 50여곳으로부터 최소 70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사돈」이라는 신분을 이용한 것 아닌가 라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盧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사돈인 민경찬씨가 2002년 융자부탁을 했지만 자신이 거절했으며, 600억원 펀드 사건에 대한 청와대와의 사전 조율설을 부인했다. 盧대통령은 『뒷조사를 하니 불편을 느껴 우리 민정팀과 아주 갈등이 많았다』며 『그 사람에게도 사생활이 있기 때문에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방해할 수는 없다』고 했다.
노건평씨는 1969년 세무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 병역관계로 잠시 쉬긴 했지만 1978년까지 약 10년간 공직에 근무했다.
노건평씨는 1994년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구조라 해수욕장 인근 임야 1800여 평을 매입했다. 이곳은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으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健平씨는 199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부터 이곳에 2층과 1층짜리 건물(별장) 2채를 신축하기 위한 허가를 받았다. 健平씨는 이곳의 도로와 접한 지역 부지 100여 평도 부인 민미영씨 명의로 매입, 같은 해인 199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아 2층짜리 근린생활시설(카페) 및 주택을 건립했다. 카페 건물은 최근 閔씨 동생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대출받는 과정에서 담보로 제공됐고, 동생이 돈을 갚지 못하자 경매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명의가 넘어갔다.
반면, 한려해상국립공원 해금강 분소 측은 健平씨의 2층짜리 별장과 카페 중간지역 부지 소유주인 鄭모씨가 1998년 12월28일과 1999년 1월14일 두 차례에 걸쳐 신청한 단독주택 및 창고 건물 신축 허가는 반려했다. 자연경관을 해칠 우려가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건평씨가 한려해상국립공원 해금강 분소로부터 구조라 별장 등 건물 세 채에 대한 허가를 받은 시기(1998년)에 해금강 분소장은 盧武鉉 대통령의 부산商高 후배인 金모(42)씨였다. 金씨는 健平씨가 신청한 2층 카페 증축 허가 신청시 현장 조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盧대통령 형제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검찰에 따르면, 민경찬씨의 동업자 J리츠 대표 朴모(49)씨와 방모(60)씨는 작년 9월5일 경남 김해 진영읍 健平씨의 자택으로 남상국(南相國) 前 사장으로부터 받은 현금 3000만원이 든 쇼핑백을 들고 찾아갔다. 閔씨 소개로 이미 한두 차례 만나 아는 사이였던 이들은 『南사장이 연임할 수 있도록 힘을 써달라』는 청탁과 함께 쇼핑백을 건넸다고 한다. 워크아웃 중인 대우건설의 사장 자리를 결정하는 자산관리공사 등에 입김을 넣어 달라는 뜻이었다.
건평씨는 『추석 선물인 양주 정도로 생각하고 받았지만 돈이 들어 있어서 곧바로 돌려주려 했으나 어쩌다 보니 11월쯤 돌려주게 됐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健平씨는 南 前 사장의 사장 연임이 무산된 작년 12월3일쯤에야 朴씨와 방씨에게 돈을 南 前 사장에게 돌려주라고 했지만 「배달사고」가 난 것으로 조사됐다. 健平씨는 3000만원을 받은 두 달 뒤인 작년 11월, 南 前 사장이 朴씨와 방씨를 통해 전달하려던 현금 1억원은 거절했다고 한다.
건평씨에게 건네지려던 총 1억3000만원은 이번 수사 과정에서 사기 등 별도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朴씨와 방씨가 받아 써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방씨는 또 검찰 수사 와중에 健平씨 집을 네 차례나 찾아가 『閔씨가 공연한 인터뷰를 했으니, 盧회장께서 해결해 달라』고 구명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한편, 盧대통령의 친형 健平씨에게 3000만원을 준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아 온 南 前 대우건설 사장은 盧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거론한 직후인 지난 3월11일 낮 12시30분쯤 서울 한남대교 남단 올림픽대로로 내려가는 램프 입구 지점에서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盧대통령, 재산 2억6900여만원을 누락한 까닭은?
盧대통령이 2003년 2월 취임 당시 재산등록을 하면서 자택 매각 잔금 등 2억6900여만원을 누락했으며, 大選 후 취임 때까지 2개월여 동안 재산이 2억1000여만원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지난 2월27일자 관보를 통해 공개한 행정부 1급 이상 공직자 581명의 재산변동 내역에 따르면, 盧대통령은 본인 예금(1억5550만원), 배우자 예금(2억6967만원), 장남 예금(2371만원) 등이 늘면서 재산 총액이 지난해 2억552만원에서 4억4890만원 늘어난 6억5442만원이 됐다.
청와대 측은 盧대통령의 예금내역과 관련, 『취임 후 10개월간 봉급 1억2000여만원과 수당 및 직급보조비 등을 포함한 2억여원의 수입 중 세금 1430만원을 내고 남은 1억8500여만원 중 1억5550만원을 저축한 것』이라고 밝혔다. 세금 내고 남은 순수입 중 80% 이상을 저축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윤태영(尹太瀛) 대변인은 나머지 증가분 2억6900여만원과 관련, 『취임 전 거주하던 명륜동 소재 빌라를 매각하고 남은 잔금과 가족 명의 보험금 700만원이 취임 당시 신고에서 누락된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당시 이 일을 했던 총무비서관(최도술)이 왜 누락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盧대통령 취임 당시 재산은 신고액 2억552만원이 아니라 4억7929만원이었다는 것이다.
정병국(鄭炳國) 의원은 盧대통령의 취임 직후 재산공개의 누락과 관련, 『金대통령 시절에는 세무사·회계사 등 전문가들을 동원해 등기부 등본을 떼는 등 철저한 확인을 거친 후 신고했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고의성이 짙다』고 했다.
盧대통령은 2002년 11월 대선후보 등록시에는 재산을 2억6263만원으로 신고했었기 때문에 취임 당시 4억7929만원(실제 재산)과 비교하면 불과 2개월여 만에 2억1000여만원의 재산이 늘어났던 게 된다.
이에 대해 윤태영 대변인은 ▲빌라가 4억원으로 신고됐으나 4억5000만원에 매각돼 5000만원 늘었고 ▲나머지 1억6000여만원은 대통령 당선 후 아들과 딸 결혼 때 형 健平씨 등 주변에서 도와준 금액이라고 해명했다.
1년째 텅 빈 명륜동 빌라
한나라당 배용수 부대변인은 『작년 재산 신고 때는 명륜동 빌라 판 돈을 대부분 빚 갚는 데 썼고, 나머지도 아들 딸 결혼비용으로 썼다고 하더니, 이제는 그 돈이 실수로 신고에서 누락됐다고 한다』며 『혹시 당선 축하금 또는 결혼 축의금이 둔갑한 것은 아닌가』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민주당 김영창 부대변인은 『대통령이 봉급의 80%를 저축한 것은 실업과 경기 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의아함이 앞설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작년 2월 취임 당시 명륜동 빌라 매각 잔금 등 2억6900여만원을 누락했던 것을 추가한 데 대해 한나라당은 李相得(이상득) 사무총장 명의로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에게 盧武鉉 대통령의 재산 허위신고 및 공직자 윤리법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요구서를 발송할 예정이다.
李총장은 『취임 당시 집 한 채 없는 가난한 대통령으로 위장하기 위해 재산을 고의로 축소했거나, 장수천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은폐하기 위해 고의로 재산을 축소해 신고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자는 지난 3월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1가에 있는 盧대통령이 매각한 빌라(현대하이츠빌라)를 찾았다. 이 빌라는 지난해 1월에 매각된 뒤, 지금까지 1년여 동안 빈 집으로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빌라 경비원 최모(75)씨는 『盧대통령이 지난해 청와대로 이사 간 2월25일 이후부터 비어 있었다』면서 『방 안에는 가재 도구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종로 지역구 출마를 위해 1997년 2월 이 빌라를 부인 권양숙 여사의 명의로 5억원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차장과 차고를 포함, 약 65평형(전용면적 56평)이다. 그 뒤 건호(建昊)·정연(靜姸)씨 두 자녀와 함께 2003년 2월 이사하기 전까지 줄곧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등기부 등본에 의하면, 盧대통령은 이 빌라를 지난해 1월22일 박모(32)씨에게 4억5000만원에 매매한 것으로 돼 있다. 빌라 관계자는 『집주인은 젊은이가 아니라 60세 초반의 노인으로, 겨울에 보일러가 터질까 봐 한 번씩 집을 살피고 간다』며 『이사를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그는 『S大 병원에서 의사로 있는 둘째 아들을 위해 이 집을 샀다고 들었다』며 『집주인의 부인과 권양숙 여사가 친분이 있어 주변 부동산을 통하지 않고 직거래를 한 것 같다』고 했다.
한 빌라 주민은 『집주인은 매달 빌라 총무의 통장으로 관리비 20여만원을 꼬박꼬박 입금해 주고 있다』고 전했다.
盧대통령은 이 집을 융자 1억원(채권 1억2000만원 설정)을 낀 채 5억원에 매입했다. 5년이 지난 후 5000만원이 떨어진 가격으로 집을 판 것이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아파트처럼 가격이 오르지는 않지만, 현직 대통령이 살 던 집이라면 프리미엄이 붙는 것이 정상』이라며 매입시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측은 『일반적인 거래라면 매매 계약을 체결하는 즉시 잔금을 받는 것이 상식인데, 매입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매도 계약서를 작성한 지 2개월 후인 3월에야 돈을 받았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면서 『매입자도 잔금이 없었다면 빌라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거나 전세를 놓아야 할 터인데, 그냥 빈 집으로 두는 것은 명의신탁(名義信託)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말했다.●
출처 | 월간조선 2004년 4월호
2018.06.2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위 ‘논두렁 시계’
"원세훈 '논두렁 시계' 보도 지시…단, 노무현도 시계 받은 건 시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수수 의혹 수사를 지휘했던 이인규(60ㆍ사법연수원 14기)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25일 돌연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왔다. “노 전 대통령 수사 당시 ‘피아제 시계’ 보도는 원세훈 전 원장 재임 시절 국가정보원이 기획한 일”이라는 요지다. A4 용지 4장 분량의 입장문을 통해서다.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
A4용지 4장 입장문 보내와
“관련 보도는 국정원 작품”이라면서도
“시계 수수는 노 전 대통령도 시인” 주장
이는 최근 일부 언론이 9년 전 검찰 수사 당시 이른바 ‘논두렁 시계’ 보도를 기획한 당사자로 자신을 지목한 데 따른 해명이다. 지난 19일 한 진보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이 전 중수부장이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한 중식당에서 식사 중인 사진을 공개한 이후 이 전 중수부장을 둘러싼 책임론은 재차 불거졌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소환조사를 약 2주 앞둔 2009년 4월 14일 국정원 강 모 국장 등 두 명이 중수부장실에 찾아온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국정원 인사들은 원세훈 당시 원장의 뜻이라며 “부정부패 척결이 좌파 결집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불구속하되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도덕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검찰 수사 내용이 흘러나간 데 대해 이 전 중수부장은 그 자리에서 불쾌감을 표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직원들의 방문이 있고 나서 8일 뒤인 2009년 4월 22일 KBS는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 피아제 시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 전 중수부장에 따르면 당시 보도에는 국정원 대변인실이 개입했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달 30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올라와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 조사 약 2주 뒤인 2009년 5월 13일에는 SBS가 “노 전 대통령 측이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고 보도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해당 보도 열흘 뒤 5월 23일 서거했다.
이 전 중수부장은 검찰 수사 내용이 어디서 샜는지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입장문에서 “원세훈 원장이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노 전 대통령의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고도 폭로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다만 이 전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 부부가 피아제 시계를 수수한 것은 노 전 대통령도 인정한 ‘팩트’라고 주장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관련 내용을 진술하였을 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 역시 검찰 조사에서 “언론에 시계 수수사실이 보도된 이후 권양숙 여사가 밖에 내다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 전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 역시 관련 내용이 담긴 조서에 날인까지 했으며 해당 조서는 영구보존 형태로 검찰에 남아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1억원 이상의 고가 시계를 받는 행위는 뇌물수수죄로 기소되어 유죄로 인정될 경우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 질 수 있는 중대한 범죄"라고 덧붙였다.
아래는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보내온 원문 전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위 ‘논두렁 시계’ 보도 관련(총 4장)
지난해 11월 7일 저는 언론에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하여 검사로서 소임을 다하였을 뿐이고, 수사에 있어서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일은 없었으며, 만일 제가 잘못한 점이 있어 조사 요청이 오면 언제든지 귀국하여 조사를 받겠습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저의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번 노 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 사건 보도와 관련하여 사실을 정리하여 말씀드렸음에도 노컷뉴스 등 일부 언론에서 마치 제가 논두렁시계 보도를 기획한 것처럼 왜곡하여 허위 내용을 보도하고 있어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노 전 대통령의 시계수수 범죄사실에 대한 검찰 수사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검찰 수사에서 ‘2006년 9월경 노 전 대통령의 회갑을 맞이하여 피아제 남녀 손목시계 한 세트를 2억원에 구입하여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를 통하여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였으며, 그 후 2007년 봄경 청와대 관저에서 노 전 대통령 부부와 함께 만찬을 할 때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감사 인사를 받았다.’는 취지로 진술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노 전 대통령은 2009. 4. 30. 변호인이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진 검찰 조사에서 ‘권양숙 여사가 그와 같은 시계 세트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자신은 KBS에서 시계수수 사실이 보도된 후에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았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검사가 박 회장으로부터 받은 피아제 시계를 증거물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자 ‘언론에 시계 수수사실이 보도되고 난 후에 권양숙 여사가 밖에 내다 버렸다.’고 답변하면서 제출을 거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조사 내용은 모두 녹화되었고, 조서로 작성되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작성된 조서를 열람한 후 서명 날인하였으며, 그 조서는 영구보존문서로 검찰에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가 1억원 이상의 고가 시계를 받는 행위는 뇌물수수죄로 기소되어 유죄로 인정될 경우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 질 수 있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수사 내용은 재판에 증거로 제출되기 전에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검찰은 수사 내용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증거 인멸 등 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에 있어서도 검찰은 언론의 치열한 보도 경쟁 속에서 수사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시계 수수 관련 수사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어 보도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나 검찰이 의도한 바가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노 전 대통령의 시계 수수 보도와 관련하여 원세훈 원장 등 당시 국정원 관계자들은 ‘저에게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을 뿐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자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노 전 대통령 수사 중인 2009. 4. 14. 퇴근 무렵 국정원 전 직원 강 모 국장 등 2명이 사무실로 저를 찾아와 원세훈 전 원장의 뜻이라며 ‘부정부패 척결이 좌파를 결집시키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하되,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노 전 대통령에게 도덕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저는 이러한 내용을 업무일지에 메모해 놓았습니다.
저는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 시계 수수 관련 수사 내용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의 언행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화가 난 제가 ‘원장님께서 검찰 수사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오전 기자 브리핑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려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겠습니다. 원장님께도 그리 전해 주십시오.’라고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이에 강 국장 등이 크게 놀라면서 ‘왜 이러시냐?’고 하기에 제가 화를 내면서 ‘국정원이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냐?’고 강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이에 강 국장 등 2명은 ‘자신들이 실수한 것 같다면서 오지 않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고 사죄한 뒤 황급히 돌아갔으며 저는 이러한 사실을 위에 보고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지난 번 말씀드린 내용과 같으나 덧붙여 말씀드릴 것은 원세훈 원장은 저에게 직원을 보낸 것 이외에 임채진 검찰총장에게도 직접 전화를 걸어 ‘노 전 대통령의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가 거절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후 일주일쯤 지난 2009. 4. 22. KBS는 저녁 9시 뉴스에서 ‘노 전 대통령의 시계수수 사실’을 보도하였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종로구 자하문 밖에 있는 중국집 하림각에서 과거 워싱턴 주미대사관에서 함께 근무하여 알게 된 정순영 국회 전문위원, 김영호 행정안전부 차관 그밖에 다른 부처 고위 공무원 등 5명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식사 도중 대검 관계자로부터 ‘KBS 9시 뉴스에서 노 전 대통령 시계 수수 사실을 보도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를 받는 순간 원세훈 국정원장의 소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국정원의 행태가 생각 나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원세훈 원장의 고등학교 후배인 김영호 차관에게 ‘KBS에서 노 전 대통령 시계수수 사실을 보도하였는데 이는 원세훈 국정원장이 한 짓이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저에게 사람을 보내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시가 2억원 상당의 피아제 남녀 손목시계 세트를 수수한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길래 제가 이를 거절하고 야단을 쳐서 돌려보냈는데도 결국 이런 파렴치한 짓을 꾸몄다. 정말 나쁜 X이다. 원세훈 원장은 차관님 고등학교 선배 아니냐. 원세훈 원장에게 내가 정말 X자식이라고 하더라고 전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김영호 차관은 ‘자기가 왜 그런 말을 전하느냐’고 말하면서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제가 계속하여 원세훈 원장의 욕을 하며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김 차관도 참으라고 저를 말리고, 그 자리에 있던 정순영 국회 전문위원 등 다른 사람들도 원세훈 원장을 비난하는 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서 저를 진정시켰습니다. 이에 제가 화를 추스린 다음 순간적으로 자제심을 잃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른 부처 공무원들에게 결례를 한 것을 깨닫고 이에 대하여 사과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확인해 보면 진실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 2009. 5. 8. 조선일보에서 국정원장이 검찰총장에게 불구속의견을 개진했다는 내용을 보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보도가 나오게 된 배경은 노 전 대통령의 시계수수 보도 개입 등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국정원에 대한 검찰 내부의 반발 기류로 생각됩니다. 조선일보 보도 직후 홍만표 기획관으로부터 ‘국정원 측에서 조선일보 보도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고 국정원의 요청이 너무 뻔뻔하고 어이가 없어 부인해 주지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자 국정원 측에서 법무부에 요청하였는지 며칠 뒤 법무부장관으로부터 국가기관끼리 다투지 말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라는 주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5. 13. SBS에서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저는 국정원의 소행임을 의심하고 검찰이 더 이상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그 동안의 보도 경위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4. 22.자 KBS 9시 뉴스 보도는 국정원 대변인실이 개입하여 이루어 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그 간 국정원의 행태와 SBS의 보도 내용, 원세훈 원장과 SBS와의 개인적 인연 등을 고려해 볼 때 SBS 보도의 배후에도 국정원이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고가 시계 수수 관련 보도는 유감스러운 일이나 저를 포함한 검찰 누구도 이와 같은 보도를 의도적으로 계획하거나 개입한 사실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018. 6. 25. 이 인 규 올림
중앙일보 김영민 기자
■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全文 주요 내용
국정원이 24일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록은 A4용지로 총 103페이지 분량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0월 3일 오전 1차 회의 때 131분, 점심 후 2차회의 때 115분간 대화를 나눴다. 다음은 본지가 입수한 전문 중 주요 내용이다.
2007년 10월 3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대화록 전문. 국가정보원이 24일 일반 문서로 재분류한 대화록을 본지가 입수했다.
▲노무현 대통령
나로서는 5년 동안 기다렸던 만남이고요. 미리 준비를 해놓은 것이 있어서 준비된 것을 가지고 또박또박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백화원 여기 뜰도 아주 아름답거니와 시설도 훌륭해서 모두가 마음이 편안하고 또 우리도 이런 것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런 부러움도 느끼고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 건물이? 그 이야기 들었습니다. 서울이 더 역사야… 비슷하잖습니까?
▲노 오늘 아리랑 공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고, 위원장님과 함께 볼 수 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장군님께서 일정이 바쁘시기 때문에…
▲김 일없어. 일없어. 진지하게. 오전에 다른 일정이 없으면 몰라도…
▲노 내가 상당히 긴장한 모양입니다. 내가 서류를 바꾸어 가지고…(웃음) 그동안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 현재 핵 문제는 관련 각 측의 노력으로 해결의 방향을 잡았으며, 이는 김 위원장께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도력을 발휘해 주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김 위원장께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문만 열어놓는다면 미국이 이에 상응한 관계개선 조치를 속도를 내서 취하도록 계속 재촉할 것입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을 출발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협상개시에 도움이 된다면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방식대로 3국 정상이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일의 NLL 인식] "바다에 종이장 그려놓은 지도와 같은 생억지 싸움 침범했다, 안했다… 물 위에 무슨 흔적이 남습니까"
▲김 남쪽 사람들이 자주성이 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자꾸 비위 맞추고 다니는 데가 너무 많다, 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주성이 없다고 하면 너무 인격 모욕하는 것 같은데 좀 이렇게 눈치 보는 데가 많지 않은가. 또 우리 민족 문제를 우리 자주적으로 우리 정상들끼리 조선민족끼리 해결한다고 하는 이런 좋은 모범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7.4 공동선언 때 우리 민족이 대단히 화해에 넘쳐나서 그걸 크게 기대를 걸었는데, 이런저런 정권의 교체와 정세 변화로 해서 빈종이짝이 되고 말았다. 근데 대통령께서 제기하는 모든 문제 또 우리가 합의 본 이 문제를 놓고 다시 문서화해서 내면 이게 또 빈종이짝이 되지 않겠는가. 조선전쟁에 관련 있는 3자나 4자들이 개성이나 금강산 같은 데서 분계선 가까운 곳에서 모여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공동으로 선포한다면 평화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은 이번에 모처럼 마련된 수뇌회담에서 조금 희망을 주고, 적대관계를 완전히 종식시킬 데 대한 공동의 의지가 있다고 보인다 하는 것을 하나 보여주자 하니까 서해 군사경계선 문제, 이 문제를 하나 던져 놓을 수 있지 않은가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생억지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에 종이장 그려놓은 지도와 같이 선도, 북방한계선은 뭐고 군사경계선은 뭐고, 침범했다, 침범하지 않았다, 그저 물 위에 무슨 흔적이 남습니까. 전번에 서해 사건 때도, 실제로 흔적 남은 게 뭐야? 대동강에 배 지나간 자리고,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자꾸 앙탈진다 생각하지 말고 공동수역 만들면 되지 않나.
▲노 예, 아주 나도 관심이 많은…
▲김 (김계관의 6자회담 결과 설명에 대해) 큰 나라 사람들의 의심과 주관주의는 우리 작은 나라 사람들보다 더하니깐. (중략) 정몽헌 선생이 나하고 단둘이서 담화하고 단둘이서 밥 먹으면서 앞으로 민족으로서 상징이 될 수 있는, 그 몽헌 선생이 구상력이 대단한데, 그대로 안 됐고. 내가 보기엔 개성공단이 더 빠른 길로 나갈 수도 있는데. 또 남측에서 의지가 있었으면 더 빨리 나가는데. 거기 정치가 관여됐고, 주변 나라들이 관여됐고, 내 의견은 그게 번영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솔직히 많이 느꼈습니다.
▲김양건 오후 일정은 식수 있고 그다음에 3대 혁명 전시관 중공업관 참관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저녁에 집단체조하고….
[노무현의 NLL 답변] "NLL 말만 나오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문제 되니 위원장과 내가 깊이 논의해볼 가치 있는 게 아니냐"
▲노 일단 그렇게 말씀드리고.
▲김 3대혁명 전시관 참관은 특별수행원들이나 하는 거... 대통령께서 3대혁명 뭐 보셔도 되고...(웃음)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좋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노 거 뭐 무슨 의제의 문제라기보다... 여기까지 와서 위원장하고 달랑 두 시간 만나 대화하고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까(웃음) 충분히 잡담을 하더라도 위원장하고 시간을 더 보내야 합니다. (중략) 영국도 보기에 따라 자주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은 그 수준으로 올려버리면 세상에 자주적인 나라가 북측에 공화국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덜 자주적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국에 의지해왔습니다. 그리고 친미국가입니다. 객관적 사실입니다. 남측의 어떤 정부도 하루아침에 미국과 관계를 싹둑 끊고 북측이 하시는 것처럼 이런 수준의 자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점진적 자주로 가자... 지금까지는 적어도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서시기 전까지는 점진적 자주에 대한 의지도 없었습니다.
['自主'에 대한 생각] 金 "남쪽 사람들이 비위 맞추고 다니는 데가 많다" 盧 "主敵용어 없앴고… 美의 작전통제권 환수 중"
▲김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라는 구호가 나오지 않았소?
▲노 그랬습니다. 그분 뭐 핵무기도 만들려고 하셨고... 했는데...
▲김 자조... 자조지요 뭐... 자조
▲노 근데 그것으로 실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주국방이라는 말을 이제 우리 군대가 비로소 쓰기 시작합니다. 주적 용어 없애버렸습니다. 그다음에 균형외교라는 말을 우리 정부에 와서 쓰고 있지 않습니까. 공공연하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 작전 통제권 환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은 주한미군 인계철선 얘기하는데 미국이 인계철선이 되면 우린 자주권을 가질 수가 없는 것 아니냐. 국방을 거기다 맡겨 놓고 어떻게 우리가 자주를 얘기할 수 있느냐... 그래서 2사단 철수한다는 것이 방침이었는데 마침 미국도 재배치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일치해서 용산기지를 이전하는 데 우리가 60억달러라는 돈이 듭니다. (중략) NLL 말만 나오면 전부 다 막 벌떼처럼 들고일어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데 위원장하고 나하고 이 문제를 깊이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게 아니냐.
▲노 남측에서 이번에 가서 핵문제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와라…주문이 많죠…근데 그것은 나는 되도록이면 가서 판 깨고…판 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주장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국민들이 또 그게 중요하다고 그래요. 우리 국민들에게 안심시키기 위해서 핵 문제는 이렇게 풀어간다는 수준의 그런 확인을 한번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안 그러면 (서울) 가서 제가 뭐 내가 해명을 많이 해야 되죠. 한 줄 들어 있으면은 가서 뭐 이렇게 간다. 이렇게 될 것 같구요….
▲노 BDA 문제는 미국이 잘못한 것인데, 북측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북측보고 풀어라 하고, 부당하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지지를 확보해야 됩니다.
▲노 나는 지난 5년 동안 내내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6자회담에서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왔고, 국제무대에 나가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내가 행동하면서, 미국하고 딱 끊고 당신 잘못했다고 하지 못한 것은 미국이 회담장을 박차고 떠나 버리면, 북측도 좋은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남측으로 봐서도 좋지 않습니다.
[北核문제] 盧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美와 싸워왔고, 국제무대서 북측입장 변호해 왔습니다"
▲노 말씀드릴 게 더 남았습니다. 아니면 위원장 말씀 그냥 한 시간 두 시간 듣는 것만이라도, 들어야 하니까요. 연일 줄여서 말씀하시니까.
▲김 양건 동무한테 얘기 들었는데, 우리 상임위원장이 너무 오래 설명했다고 그러더군요.
▲노 위원장 질문이나 말씀을 안 하시면, 내가 이것저것 질문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요. 오후 시간이나 잡아 주십시오.
▲김 오후에 일정이 괜찮겠어요?
▲김만복 아리랑 공연과 만찬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을 하고, 그 이전 행사는 우리가 유연성을 가지겠습니다. 그래서 두 분 정상이 이렇게 좋은 얘기를 하고 계시는데 좀 더….
▲김 뭘 더 얘기하지요? 기본적 이야기는 다 되지 않았어요?
▲노 올라올 때 오전에 확대 정상회담, 단독 정상회담 그렇게 알고 올라왔거든요. 아침에 얘기 다 했으니까, 오후에는 보지 말고 가라 이러면요….
▲김 아직 보실 게 많잖아요. 아까도 말씀한 거….
▲노 오후에 만남이 없으면요….
▲김 정례회담이라고 하는 거, 내가 스쳐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얘기하는데, 양 국가가 아닌 이상에는 한민족끼리니까 정례다, 정례합시다. 이런 것은 내가 꼭 아버지 집에 설날, 음력설에 찾아가는 거는 도덕이죠. 간다, 가야 된다, 딱 밝힐 필요 없죠.
▲노 수시로 보자고만 해 주십시오.
▲김 수시로? 문제가 있으면 그저 상호 일이 있으면, 호상 방문하는 거고….
▲노 일이 있으면… 일없으면 볼 일 없다 이렇게 느껴지니까. 그러지 마시고….
▲김 그 대신에 격식과 모든 것 다….
▲노 좋습니다.
[회담 연장·金위원장 답방]
盧 "질문 많으니까 오후 시간 잡아주십시오"
金 "뭘 더 얘기? 기본적 이야기 다 되지 않았어요"
盧 "남측 방문은 언제 해주실랍니까?"
金 "간다면 김영남 위원장이 수반으로 갈 수도"
盧 "우린 전부 金위원장께서 방문할 걸로 알고 있는데"
金 "미사일·核문제로 와락와락하는데 뭐하러…"
▲김 수시로 협의한다. 정례화라고 하면 우리 사람 다 이해 안 됩니다.
▲노 그렇게 해 주시고요. 그러면 남측 방문은 언제 해 주실랍니까?
▲김 그건 원래 김대중 대통령하고 얘기했는데, 앞으로 가는 경우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수반으로서 갈 수 있다. 군사적 문제가 이야기될 때는 내가 갈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가 돼 있습니다.
▲노 아 그렇게, 우리는 전부 김정일 위원장께서 방문하시기로 약속한 것으로, 우리 국민들은 전부 그렇게 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 미사일 문제요 핵 문제요, 지금 가자고 해도 전 세계가 놀라서 와락와락할 때 내가 뭐하러 가겠어요. 그래서….
▲노 그래서 재촉을 안 했습니다.
▲김 그래서 정세가 있고 분위기가 있고 또 남측도 정서가 있는 것인데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랑 너무 그렇게 나오는데, 우리가 뭐 하러… 호박 쓰고 어디 들어간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노 남측은 데모가 너무 자유로운 나라라서 모시기도 그렇게… 우리도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김 앞으로 모든 게 정상적으로 좋게 발전돼 나가면, 앞으로 못 갈 조건이 없지 않습니까. 앞으로 또 정세와….
▲노 오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 남쪽 사람들의 정서도 보아야 합니다. 정서를 봐야 되겠고…
▲김 (남북철도 연결 관련) 그러니까 그것도 지금 했다고만 돼 있지, 실지 운영하자고 달려들면… 앞으로 글쎄요. 올림픽 후에도… 베이징올림픽도 남측에서 요구한다고 하는데, 그 기차선 이용해서… 시간이 비행기로 가는 것보다 늦지요?
▲이재정 통일부 장관 그러나 의미로는 아마 대단히 큽니다.
▲김 의미는 무슨, 인기나 끌어서 뭐 하게….
[盧 "請 하나 드리겠습니다"]
盧 "임기 마치고 평양 자주 들락날락 할 수 있게 좀"
金 "우리야 언제든지… 침구 항상 준비해 놓겠습니다"
▲이재정 아닙니다. 남북이 함께 응원하기 위해서 같은 기차를 타고 간다는데 대단히 큰 의미가 있고, 위원장님의 결단에 따라서는 세계에 평화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절대적인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김 그것도 이번에 두 정상이 합의했다 하지요 뭐. 응원단은 그 기차를 한번 써봐라 하지요.
▲이재정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노 예, 아주 좋습니다. 그것이 북측의 이미지가 아주 좋아집니다. 공동, 이거 하면 사람들이 북측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투자라든지, 어쨌든 국제적인 모든 관계에서 응대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죠.
▲김 응원단은 가는 것만 상징적으로 한번 하고, 돌아갈 땐 비행기로 돌아오라 하지요. 그래야 되지 뭐….
▲김양건 예, 상징적으로 갈 때 그저….
▲이재정 위원장님, 이번 기회에 개성공단까지는 한번 열어주시면 개성공단 발전에도 대단한 기여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현대화 작업도 우리 대통령님 재임 중에 한번 계획을 세워서 일단 착수를 할 수 있다, 그러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 개성공단까지라고 하면, 서울에서 개성공단까지 온다는 거지요?
▲이재정 그렇습니다.
▲노 앞으로 개성공단의 제일 큰 애로는 물류 애로 발생입니다. 왜냐하면 원자재 들어가야죠, 제품 나가야죠, 물류 애로가 지금 곧 발생할 것이고요. 그다음 애로가 사람이 모자랍니다.
▲김 개성이 공단 때문에 도로 닦지 않았습니까. 그것 갖고 안 되겠어요?
▲노 지금 현실이 쌀 40만톤 6월 말부터 시작했는데, 11월 20일이 돼야 다 끝납니다. 배로 하니까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요, 우리 생각으로는 어떻게든 개성까지만이라도 물류를 할 수 있게 되고 현대화 작업을 한다면, 개성공단 발전에 기여할 것이고요.
▲노 그리고 우리 국민들도 두 번, 세 번, 네 번, 만나고 오라고 나한테 짐을 지워 보냈는데, 한 번 만나고 가면 노무현 쫓겨왔다 쓸 텐데, 위원장께서 날 그렇게 할 겁니까?
[개성공단 문제]
盧 "개성공단 일부 기업들 이미 중국서도 높은 수요… 노동자 생산력 높고 불량률 낮아 아주 큰 가능성 발견"
▲김 요즘 기자들은, 특히 남측 기자와 일본 기자들은 아주 영리스럽고, 시류에 민감하고 취재 활동에서는 정말 만민을 쥐었다 놨다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이제 기자가 아니고 작가입니다. 기자들이 모든 이야기를 다 꾸며내고, 저 사람들 보면 지금 기사야 작품이야 하고 내가 그러고 마는데요. 허위….
▲노 북측 기자들은 그런 기자들 없죠?
▲김 남측의 서해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요구는 무엇입니까?
▲노 남측의 요구라기보다는, 나는 그 부분이 우발적 충돌의 위험이 남아 있는 마지막 지역이기 때문에 거기에 뭔가 문제를 풀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NLL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말하자면 서해 평화지대를 만들어서 공동어로도 하고, 한강 하구에 공동개발도 하고, 나아가서는 인천, 해주 전체를 엮어서 공동경제구역도 만들어서 통항도 맘대로 하게 하고, 그렇게 되면, 그 통항을 위해서 말하자면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하거든요. 여기는 자유통항구역이고, 여기는 공동어로구역이고, 그럼 거기에는 군대를 못 들어가게 하고. 양측이 경찰이 관리를 하는 평화지대를 하나 만드는, 그런 개념들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지요.
▲노 (오후 회담 시각 관련) 2시 반 좋습니다. 2시도 좋습니다.
▲김 (김양건 부장에게) 내 회의도 저녁 시간으로 다 돌려라. 노 대통령님의 끈질긴 제의에 내가 양보해서 2시 반에 하는 걸로….
▲노 (오후 회담 시작) 충분히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일 큰 문제가 미국입니다. 나도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역사가 사실 세계, 세계 인민들에게 반성도 하지 않았고 오늘날도 패권적 야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해서 마음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저항감도 가지고 있고, 새로운 기회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군사력을 가지고 개입하고 시장에 대한 규제를 가지고 정치적 권력을 행사한다. 말하자면 미운 나라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한다든지 미국의 국내법만 가지고도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남측 국민들에게 여론조사를 해 봤는데, 제일 미운 나라가 어디냐고 했을 때 그중에 미국이 상당 숫자가 나옵니다. 또 동북아시아에서 앞으로 평화를 해롭게 할 국가가 어디냐, 평화를 깰 수 있는 국가가 어디냐 했을 때 미국이 1번으로 나오고 제일 많이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지목하고, 그다음은 일본을 지목하고 다음은 북측을 지목했습니다. 남측에서는 이 변화라는 것도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환경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또 남측의 지도자도 그러한 환경의 변화를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노 지금 개성공단의 일부 기업들은 이미 중국에서도 높은 수요를 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산력이 보다 높단 말이죠. 불량률도 훨씬 낮구요. 아주 큰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성공단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것이죠. 그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잖습니까? 단지 그 오늘 내 점심을 먹으면서 남측 수행원들보고 우리가 말을 조심하자, 우리식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사실 불신을 야기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방해가 된다, 개혁 개방을 유도하기 위해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제의 성과를 생각하는 것이죠. 우린 북측 체제를 존중하는 것이 약속일 뿐만 아니라 도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김 (서해)평화지대를 선포, 선언한다 그러고 해주까지 포함되고 서해까지 포함된 육지는 제외하고, 육지는 내놓고, 이렇게 하게 되면 이건 우리 구상이고 어디까지나 이걸 해당 관계 부처들에서 연구하고 협상하기로 한다.
▲노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것을 가지고 평화 문제, 공동 번영의 문제를 다 일거에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기에 필요한 실무 협의 계속해 나가면 내가 임기 동안에 NLL 문제는 다 치유가 됩니다. ▲김 그건….
▲노 NLL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김 평화지대로 하는 건 난 반대없습니다. (그러나) 서부지대는 바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카면 실무적인 협상에 들어가서는 쌍방이 다 법을 포기한다, 과거에 정해져 있는 것, 그것은 그 때 가서 할 문제이고 그러나 이 구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발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노 예 좋습니다. 실제로 한강하구에 골재 채취 문제도 다 포함된 것입니다. (이후 서해평화지대에 대해 길게 설명). 전체를 서해 평화협력지대로 선포를 하고 그 안에 한강 하구 개발, 해주공단…. 공단이라고 해도 좋고 특구라고 해도 좋고. 다 좋습니다. 그 안에 공동어로구역 만들고 북쪽에 생태평화공원까지 되면.
▲김 그건 아니…정전협정 문제가 우선…그게 풀어진 조건에서… 평화협정을…중간에 시범적으로 하고 그렇게 돼야지 지금은 아마, 아직 그 전 단계로서 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두 부장이 문서화하십시오
▲김만복 예, 알겠습니다
▲김 남측의 반응은 어떻게 예상됩니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노 없습니다.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만든다는 데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를 하면 하루아침에 인터넷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바보 되는 겁니다.
▲김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을 포함해)동북 4성이다. (중략)동북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4성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 정치인들보다도 인민들이 더 신경이 예민하다. 그런 측면에서는…
▲노 동북 5성으로 만들어 가지고 남측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부르라고 하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주도해 나갈 수 있습니다. 동북 3성과 연해주 이젠 뭐 연해주 쪽에 있어서 남북 협력도 장차로 구상해 볼 수 있어…
▲노 항상 남쪽에서도 군부가 뭘 자꾸 안 할라구 합니다. 이번에 군부가 개편이 돼서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평화 협력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군부라는 것은 항상…북측에서도 우리가 얘기 듣기로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 완고한 2급 보수라 할까요(웃음).
▲김 (중략)미국과의 문제가 우선 기초적으로 안정이 되면 국내적으로 쌍방이 대치하고 있는 분계선은 앞으로 점차 전환되지 않겠는가. 전환되는 걸로 전제로 하고 있으니까 군부가 아마 그래서 법석을 떠는 게 아닐까. 모든게 정황이 주변 정세가 안정이 되고 이렇게 되면 당연히 군부가 있을 자리가 없죠.
▲노 지난번에 일본 대사가 이임하면서 찾아왔길래…당신들 요구가 뭐냐 물었더니, 사람 돌려달라. 다 돌아갔잖냐 했더니 더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증거가 있냐 이랬더니, 하여튼 못 믿겠다 이런 얘기만 하는 겁니다.
▲김 없습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내가 없다고.
▲노 그렇기는 한데…하여튼 미일관계는 풀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납치문제가 있어 구체적으로 내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없고 나도 일본 측 주장을 들어봤지만 잘 못알아듣겠구요. (중략) 이번 차제에 미일관계 다 풀어 버리고 통상 세계에서 한번 적극적으로 진출해서…새로운 전기를 한번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상합의, 선언문 문제]
김양건 "그저 공동보도문으로 하는 게 좋지 않나요"
盧 "선언으로 해주십시오… 6·15 후속 선언이죠"
▲김양건 원래는 선언문을 좀 토론했는데…합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저 공동보도문으로 각기 표기하고 보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노 선언으로 해주십시오.
▲김 6·15 선언과 대등한 선언이란 뜻인지요?
▲노 그렇지 않습니다. 후속 선언이죠. 선언 많이 합니다. 중소간에도 선언했고 한중(韓中)간에도 선언하고. ▲김 선언(으로) 하는데…그저 오늘 합의된 것…그것 다 조항에 넣으시오.
▲김만복 예 그러겠습니다.
▲김 합의한 문제를 무게 있게 문장을 잘 만들어서 희망을 주고…
▲노 위원장께 청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제 뭐 임기 전에 또 올 일이 있으면 와야겠습니다만. 이제 다음 대통령 곧 뽑힐 것이니까 제대로 못할 것 같고…임기 마치고 난 다음에 위원장께 꼭 와서 뵙자는 소리는 못하겠습니다만, 평양 좀 자주 들락날락할 수 있게 좀.
▲김 우리야 언제든지. 침구는 항상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노 특별한 대접은 안 받아도….
▲노 내가 원하는 것은 시간을 늦추지 말자는 것이고 또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르니까 뒷걸음치지 않게 쐐기를 좀 박아 놓자….
▲김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대만족하고 있습니다.
▲노 그리고 참 내가 말씀드리려고 한 것 중에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내가 받은 보고서인데 위원장께서 심심할 때 보시도록 드리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김양건 저한테 주십시오.
▲이재정 위원장님 어떻게 좀 적당히 좋을 때 한 번 이산가족 고향 방문하도록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산가족들이 참 아주 애달프게….
▲노 이제 다음에 합시다. 오늘은 보따리가 넘쳐서 안돼요 (모두 웃음).
▲김 오늘 아주 수고 많았습니다. 정열적으로 많이 이야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임동원 선생 건강하지요? ▲김만복 예 건강합니다.
2007년 10월 정상회담 회의록
[당시 盧대통령 대국민 귀환 보고, 대화록과 어떻게 다른가]
자주적 정부라고 설명했다" → "우린 親美국가다" 발언 "金위원장 北核 폐기 분명한 의지 밝혀" → 직접 언급 안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돌아와서 경기도 파주시의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대국민 보고'를 했다. 전날 평양 백화원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한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이산가족·납북자·국군포로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제의를 했다"고 말했다. 이때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시급한 문제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며 "김정일 위원장도 '공감'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확대하고 영상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성과(成果)를 밝혔다. 납북자·국군포로 문제에 관해 노 전 대통령은 "납북자 문제 등은 양측의 입장 차이로 국민 여러분이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합의를 이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많은 대화'를 했다"면서 "이것이 다음에 이 문제를 풀어 가는 데 밑거름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에는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등에 대한 '많은 대화'는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자 원고지 25매, 5000자가 넘는 모두 발언 중에서 "과거 전쟁 시기와 그 이후에 소식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불행한 과거를 마무리한다는 차원에서 이번 기회에 큰 틀에서 해결이 되기를 바란다. 위원장의 결단을 간곡하게 요청드린다"고 단 두 문장을 말했다. '납북자'나 '국군포로'란 표현은 피했다. 4시간 6분간의 회담 중에 이 문제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고, 우리 측이 북한에 답변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또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보고에서 "다행히 김정일 위원장께서 아무 이의 없이 북핵 문제에 대한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를 성실히 이행한다는 점, 그리고 비핵화 공동선언을 중요한 선언으로 우리가 앞으로 지켜야 될 원칙으로 재확인한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며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북핵 폐기에 관한 분명한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화록에서 김정일은 6자회담에 참석했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불러 보고를 시켰을 뿐, 핵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김계관은 "조선 반도의 비핵화가 위대한 수령님의 의지"라고 말했지만, "핵 물질 신고에서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한다"면서 "우리는 지렛대를 명백히 물려놓은 것은 안 되면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핵무기를 국제사회로부터 숨기고, 일부 핵 프로그램을 포기했다가도 언제든지 다시 핵 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밝혔던 것이다.
대화록에서 "남측 방문은 언제 해 주실랍니까?"란 노 전 대통령의 질문을 받은 김정일은 "원래 김대중 대통령하고 얘기했는데, 앞으로 가는 경우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수반으로 갈 수 있다"며 "군사적 문제가 이야기될 때는 내가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보고에서 "김 위원장은 우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제안하고 본인의 방문은 여건이 성숙할 때까지 미루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대국민 보고 때 "한국 정부가 비자주적인 정부가 아니라는 점도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화록엔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국에 의지해 왔다. 그리고 친미국가다", "자주하기 어려운 현실적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고요", "비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는 이유가 사대주의 정신보다는 먹고사는 현실 때문" 등의 발언이 등장한다.
盧·金회담 우리측 배석자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의 우리 측 배석자였던 이재정<사진>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백종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북한 측 단독 배석자였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달리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못했다.
이재정 전 장관은 대통령의 참모 역할보다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간청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 총 29회 발언했던 이 전 장관은 오전 회담에서 김정일이 남북 간 육로 이동 시간을 묻자 "정말 위원장님께서 철길도 열어주시고 땅 길도 열고 하늘도 이젠 정기 항로를 만들어서 우리 시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은 "이번 기회에 개성공단까지 (철로를) 열어주시면 개성공단 발전에 대단한 기여가 될 것" "위원장님께서 (개성공단 철도 건설 문제에) 확답을 해주시면 남북에 굉장한 이득이 되고요"라고 김정일에게 간청했지만 김정일은 김양건을 보며 "좀 쉬고 이야기할까?"라며 딴전을 피웠다.
이 전 장관은 오후 회담에서도 개성공단과 관련, 우리 측 인원의 통행 자유와 통신 문제를 거론하며 "위원장께서 이 두 가지 문제는 꼭 해결해주시면…"이라고 했다.
이 전 장관은 이산가족 상봉문제와 관련, "상시 면회가 될 수 있도록 위원장님께서 해주시고" "이산가족이 9만3000명입니다. 서둘러 주십시오"라며 간청했다. 백종천 전 실장도 "이산가족들 편지 왕래는 할 수 있도록 요청드립니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즉답하지 않았다. 이 전 장관이 "어떻게 좀 적당히 좋을 때 이산가족 고향 방문하도록 허락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재차 부탁하자 이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음에 합시다. 오늘은 보따리가 넘쳐서 안 됩니다"라고 말릴 정도였다. 이 전 장관은 40년 동안 낮잠을 자지 않았다는 김정일에게 "대단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지시하면 "예, (합의서에) 넣겠습니다" "김양건 부장과 협의하겠습니다"며 지시를 수행하는 역할에 그쳤고, 권오규 장관과 백종천 실장은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다.
盧 前대통령 NLL 발언 논란… 정상회담 이후 北의 태도는]
2007년 국방 회담 北대표 "두 정상이 말한 기본 취지 南측이 이해 못한다" 공세 작년 9월, 당시 朴후보가 "기존 NLL 존중" 발언하자 北, 원색적인 비난 퍼부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이 공개된 이후 국내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이 실제 있었는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 직후부터 두 정상이 NLL 포기에 '합의'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北, 국방장관 회담에서 "약속 지키라" 주장
남북은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0·4 선언'에 따라 공동어로·평화수역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007년 11월 27~29일 평양에서 국방장관 회담을 열었다. 북측 단장인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회담 첫날부터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며 NLL을 거론했다. 그는 "남측이 불법적 북방한계선을 유지하려는 입장에 매달리는 것은 남북 정상 간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정상 간 약속을 지키라"고 반복해 얘기했다. 김정일이 회담에서 얘기한 대로 NLL과 북한이 주장하는 해상 경계선 사이에 평화수역을 설정하라는 요구였다. 우리 측 수석 대표였던 김장수 당시 국방장관은 1953년 설정된 NLL은 정전 당시부터 지금까지 남북 간 해상 경계선으로 유지됐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도 현재 관할 구역을 인정한다고 돼있다며 맞섰다.
둘째 날에도 김일철은 회담장에 앉자마자 "북측이 준비해온 평화수역과 공동어로구역 설정 지도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과 북측 최고사령관(김정일)에게 보고해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회담에 앞서 노 전 대통령에게 "(NLL에 관한 문제는) 마음대로 하고 오라"는 승인을 받은 김 장관은 "대통령과 국방위원장에게 추가적인 결심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김일철은 "북측의 방안을 양측 정상에게 보고해 결심을 받자"고 재차 말했다고 한다. 정부 소식통은 "당시 회담에서 북한이 정상 간 약속을 지키라고 거듭 요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번 회담록 공개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장성급 실무 대표 접촉에서도 북측은 정상회담 결과를 계속 거론했다고 한다. 북한 김영철(현 정찰총국장) 중장은 우리 측 정승조(현 합참의장) 중장에게 "쌍방 정상들이 말씀하신 기본 취지는 '서로가 주장하는 계선에서 물러나라'는 것인데도 남측(대표단)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선 직전에도 "NLL 고수는 無知의 표현"
북한은 대선을 80일가량 앞둔 작년 9월 29일에도 국방위 정책국 명의로 "10·4 선언 당시의 NLL 합의"를 거듭 강조했다. 북한은 "역사적 10·4 선언에 명기된 공동어로와 평화수역 설정 문제는 철두철미 '북방한계선' 자체의 불법 무법성을 전제로 한 북남 합의 조치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9월 13일 지방 일간지 공동 인터뷰에서 "기존 NLL이 존중된다면 10·4 선언에서 합의한 서해 공동어로구역 및 평화수역 설정 방안도 북한과 논의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당시 박 후보의 발언 중 '기존 NLL이 존중된다면'이라는 전제를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북한은 "북방한계선 존중을 전제로 10·4 선언에서 합의된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박근혜×의 떠벌림이나 다른 괴뢰 당국자의 북방한계선 고수 주장은 그 어느 것이나 예외 없이 북남 공동 합의의 경위와 내용조차 모르는 무지의 표현"이라고 했다. 북한이 박 대통령의 이름 뒤에 비속어를 붙여 비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이후로는 없었다.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서해 북방 군사분계선을 쌍방이 다 포기하는…" "그 옛날 선들 다 포기한다" 등 NLL '포기'를 수차례 언급했다. 김정일은 "그래 바다 문제까지 포함해서 그카면 이제 실무적인 협상에 들어가서는 쌍방이 다 법을 포기한다, 과거에 정해져 있는 것, 그것은 그때 가서 할 문제이고 그러나 이 구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발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고, 노 전 대통령은 "예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정통한 군 관계자들은 일부 야권 인사와 언론에서 노 전 대통령이 당시 NLL 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명균 "대화록 삭제 노무현 지시, 실무진에게 전달"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말 조명균(56) 당시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에게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이지원(e-知園) 시스템상의 대통령 보고 목록에서 삭제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조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의 지시를 청와대 담당 실무진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앙일보 7월 22일자 1면 >
지난 2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에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조 전 비서관의 진술 내용을 본지가 최근 확인한 결과다. 당시 검찰은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 등이 대선을 앞두고 제기했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등과 관련한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했다. 조 전 비서관이 실무진에게 전달한 지시가 그대로 이행됐다면 정상회담 대화록은 이지원 시스템에서 삭제돼 애초에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진다.
29일 정치권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조 전 비서관은 올해 초 검찰 조사에서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목록 삭제 지시를 받고 담당 청와대 실무진에게 이를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조 전 비서관 등 청와대 관계자들은 또 “노 전 대통령이 ‘대화록은 남북 관계 등을 고려해 다음 대통령도 봐야 하니 국정원에 두고 청와대에 두지 마라’고 지시했다”는 진술도 했다. 이와 관련, 이창우 전 청와대 제1부속실 수석행정관은 최근 “2007년 12월 대선 직전 (조명균) 안보정책비서관이 생산한 정상회담 대화록 최종본을 이지원 시스템 내에서 대통령폴더에 등록시킨 후 노 전 대통령이 그해 12월 말 대통령폴더에서 부속실폴더로 문서를 옮겼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곧바로 ‘지정기록물’로 분류해 문서 생산부서인 안보정책비서관에게 돌려보내 문서처리가 완료됐다”고 말했다.
한 관계자는 “이 전 행정관의 발언과 조 전 비서관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2007년 말 최종적으로 조 전 비서관 측에 돌려보내진 대화록이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이지원 목록에서 삭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이르면 이번 주 중 조 전 비서관을 불러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지시를 누구에게 전달했는지, 전달받은 사람은 지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등을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또 당시 청와대 이지원 관리 담당자들도 불러 노 전 대통령의 지시가 전달된 상황과 처리 과정, 이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조사할 계획이다. 당시 대화록 관리의 핵심 라인은 문재인 전 비서실장(민주당 의원), 김만복 전 국정원장, 임상경 전 기록관리비서관, 김경수 연설기획비서관 등이다.
중앙일보 이가영 기자
■ 검 "盧가 'NLL 주장 않겠다'했다는 발언, 허위 아니다"-조선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상호)는 21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이 담긴 비공개 대화록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해 민주통합당으로부터 고발된 정문헌(47) 새누리당 의원과 이철우(58) 의원, 박선규(52) 당선인 대변인을 불기소 처분했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전 대표,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원세훈 국정원장 등 이 사건으로 피소된 인사들도 모두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NLL 주장 안 하겠다’고 했다는 발언, 허위 아니다"
검찰은 국가정보원이 제출한 제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분석하는 등 사실 관계를 확인한 결과, 정 의원 등의 주장은 허구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므로 ‘혐의없음’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즉, ‘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정 의원의 발언은 허위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검찰은 또 ‘NLL 포기발언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라는 이 의원과 박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서도 “2007년 8월18일 노 전 대통령,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 김관진 당시 합참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정상회담 준비회의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NLL 평화정착방안이 의제로 상정됐고, NLL 관련 논의가 있었던 것이 확인됐다”며 “이 의원과 박 대변인의 발언도 허위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10월8일 정 의원은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구두 약속했다”고 말했다.
이후 이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해서 나온 것”이라며 “당시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한 박사가 청와대의 지시로 ‘정상회담 시 NLL 등 평화정책방안’을 만들었고, 2007년 8월18일 청와대 회의에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 국정원장 등이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또 박 대변인은 지난해 10월15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분명히 했었고, 정상회담 여러 달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NLL 양보 발언이 사실이었다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해 ‘양보성’ 발언을 한 게 사실로 확인됐다. 검찰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주장한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에 대해 어제 무혐의 결정을 했다. 유사한 주장을 한 이철우 새누리당 대변인 등에 대해서도 같은 처분을 했다. 검찰은 국정원에 보관됐던 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보고 이 같은 판단을 했다.
이제라도 우리가 요구해 왔던 대로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여부가 규명돼 다행이다. 하지만 동시에 씁쓸함을 지우기 어렵다. 국가 정상이 영토 수호란 헌법상 제1 책무를 망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외교, 특히 정상외교는 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현 대통령의 발언이나 약속이 차기 대통령에게도 구속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노 전 대통령의 국익에 반하는 발언이 지속적으로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실제 북한은 그 이후 “남측이 불법적인 NLL을 유지하려는 건 남북 정상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해오고 있다.
차기 대통령들은 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국내 정치에서의 실수는 바로잡을 기회가 있지만 외교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깊이 새기고 외교적 발언엔 극히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국가 정상 간 회담 기록이 공개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 또한 지적한다. 국내 정쟁 때문에 회담 기록이 바로바로 공개된다면 어느 정상이 우리 대통령과 깊은 대화를 하려 하겠는가.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대통령이 빌미를 주는 어리석은 언행도, 정치권이 외교 문제를 과도하게 정쟁화하는 일도 없어야겠다.
그나마 이번 논란을 거치며 여야 모두 “NLL이 사실상 해양 경계선”이라고 공언하게 된 게 망외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남북 간엔 NLL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지만 적어도 국내에선 의견 일치를 봤다. “회의록에 염려할 게 없다”고 부인해 왔던 민주통합당이지만 NLL을 지키겠다는 다짐은 진심이라고 믿는다.
중앙일보
■ '봉하 이지원' 어떻게 유출됐나
검찰이 2일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이 삭제된 흔적을 발견한 '이지원(e-知園)'(서버와 하드디스크)은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임기 종료를 엿새 앞둔 2008년 2월 18일 봉하마을로 가져간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뤄진 이지원 불법 유출 사건 수사 결과, 문제의 이지원은 서버 7대로 구동되는 이지원 시스템과 대통령기록물 76만9000여건 등을 복제한 저장 장치(하드디스크와 백업 하드디스크 각 14개)로 구성돼 있다. 이지원 반출은 2006년 8월 "퇴임 후 이지원 시스템 활용 방안을 검토하라"는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실행됐다.
노 전 대통령 측은 퇴임을 2개월여 앞둔 2007년 11월 "대통령기록물을 유출하는 것은 전직 대통령의 열람권을 벗어난 것"이라는 행정자치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지원 반출을 결정했다. 당시 행자부의 반대로 정부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노 전 대통령 측은 사비(私費)를 들여 복제본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사비 출처를 놓고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기업인 K씨가 돈을 댔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가 노 전 대통령 측에 이지원 반환을 요구하면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 측이 "회고록을 쓰면서 집에서 대통령기록물 등을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자료 반환을 거부하면서 전·현 정권이 정면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거듭된 반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자 국가기록원이 검찰 고발 방침을 밝히고 나섰다. 결국 노 전 대통령 측은 그해 7월 19일 이지원 시스템에서 분리한 하드디스크와 백업 하드디스크 각 14개를 대통령기록관에 돌려줬다.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 측이 이지원 서버는 반환하지 않았다거나 상당 분량의 이지원 원본 하드디스크가 사라졌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기록원을 통해 노 전 대통령 등 10명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사거(死去)하면서 검찰 수사는 유야무야됐고 남은 의혹도 미궁에 빠졌다.
대통령기록물법 만들고 어기고
노무현 청와대는 '이지원(청와대 전자문서 관리 시스템)'과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제정을 노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강조해왔다. 2008년 2월 노무현 청와대 비서실은 '참여정부 비서실, 이렇게 운영했습니다'라는 책자를 내고 "이제야 조선왕조실록 볼 낯이 선다"며 자화자찬했다.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이 발행인으로 참여했던 이 책자는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제정에 대해 "실록 편찬이라는 우수한 기록 문화 전통을 현대 제도로 계승한 역사적 입법"이라고 했다. 대통령 기록물을 함부로 손 못 대고, 후대(後代)가 공동 자산으로 이용하게 했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퇴임과 함께 이지원을 통째로 봉하마을로 가져가 누구도 대통령 기록물을 유출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대통령기록물관리법(14조)을 어겼다는 논란을 자초하다 2008년 7월 이를 국가기록원에 반납했다. 또 노무현 정부는 정권 이양 과정에서 정상회담 대화록을 대통령기록관에 넘기지 않은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자기들이 만든 법을 스스로 어긴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게 됐다.
◇"전부 넘겼다" "삭제 기능 없다"
작년 대선 때 노 전 대통령의 서해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과 대화록 폐기 의혹이 불거지자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지원으로 모든 문서가 보고되고 결재돼 대화록만 폐기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7월 국가기록원에 정상회담 회의록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자 김경수 전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임상경 전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 등은 기자회견을 갖고 "(대화록을 포함해) 전부 다 넘겼는데 왜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상회담 회의록이 2007년 10월 국정원의 초안(草案) 작성 뒤 ▲그해 12월 이지원을 통해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2008년 1월 이지원과 연계된 국가기록원 시스템에 자동 이관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상회담 회의록이 없는 것은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기록물을 훼손했기 때문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검찰은 애초부터 대화록은 국가기록원에 넘어가지 않았다며 노무현 청와대 인사들 주장과 상반된 결과를 발표했다.
이지원의 문서 삭제 기능도 논란거리다. 검찰은 이날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가져갔다가 돌려준 '봉하 이지원'에서 정상회담 대화록이 삭제된 흔적을 발견해 복원했다고 밝혔다. 이지원 개발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이지원에는 삭제 기능이 없다"며 노무현 정부에 의한 대화록 삭제 가능성을 부인해왔지만, 검찰은 이날 "시스템 안에 삭제 기능은 없지만 삭제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 檢, 2008년초 靑회의 동영상 확인… 盧 ‘불리한건 지정물로 묶자’ 발언
盧 “삭제하든가 지정하든가” → 임상경 “이지원서 삭제안돼” → 盧 “삭제하란건 아니고…” 노무현재단 “터무니없는 주장”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등 기록물을 재분류하는 2008년 1월 청와대 회의에서 “(나한테) 안 좋은 이야기, 불리한 거는 지정물로 묶자”는 말을 한 사실을 검찰이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분류되면 15년간 사실상 열람이 불가능해진다.
9일 사정 당국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장면이 담긴 동영상 회의자료를 국가기록원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청와대에 보관 중인 기록물들을 △국가기록원에 넘길 것 △청와대에 남길 것 △봉하마을로 가져갈 것으로 분류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이 동영상 회의자료에는 노 전 대통령이 이지원(e知園·청와대 문서관리시스템)에 등재돼 있던 정상회담 회의록 등과 관련해 “삭제하든가 지정하든가”라고 하자 임상경 전 기록관리비서관이 “이지원에서는 삭제가 안 된다”고 했고, 노 전 대통령은 “삭제하라는 것은 아니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 정상회담 회의록은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지정기록물로 분류됐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조명균 전 안보정책비서관에게 “국가정보원에서만 회의록을 보관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2008년 1월 이지원에 삭제 프로그램이 설치된 뒤 회의록 최종본(수정본)이 삭제됐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검찰은 정상회담 회의록 이외에도 100여 건의 문건이 이지원에서 삭제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조명균 전 비서관이 이지원에서 삭제된 회의록 최종본을 별도의 파일로 보관하고 있다가 ‘봉하마을 이지원’에 따로 올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조 전 비서관은 회의록을 올리면서 노 전 대통령에게 ‘혼자만 보십시오’라는 메모를 첨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조 전 비서관이 정상회담 직후인 2007년 10월 4∼8일 국가정보원과 협의해 작성한 회의록 1차 완성본을 이지원을 통해 2007년 10월 9일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노 전 대통령은 ‘난 이렇게 이야기한 적 없는데 왜 이렇게 정리돼 있느냐. 내 의도와 다른 것 같다. 수정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10일 만에 결재한 사실을 확인했다.
노무현재단 측은 임 전 비서관이 기록물 재분류 회의에 참석한 것과 관련해 “임 전 비서관은 2007년 12월 대통령기록관장으로 임명돼 대통령비서관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기록물 재분류를 위한 회의였던 만큼 임 전 비서관이 참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이 불리한 내용을 지정기록물로 분류하려 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출처가 불분명한 자료로 노 전 대통령을 흠집 내는 행태는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對北 무장해제 실태
보안기능 무력화, 공안기능 축소, 안보수사관 사기저하
아무 대책도 없이 韓美 연합사 해체, 軍 복무기간 단축, 對北방송 중단….
“이는 나라를 敵에게 통째로 내주자는 마음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 1997년에 국보법 위반으로 검거된 사람은 877명, 2007년에는 39명. 10년 전의 22분의 1에 불과
⊙ “현재 검찰 내에 이적단체를 수사할 전문 수사검사 전무한 실정”
⊙ “미군이 한국 정부 불신하여 對北 정보 제공 안 해. 盧武鉉 정부 시절 韓美 간 정보교류 사실상 단절”
/2004년 6월 16일 남북장성급 군사회담부속합의서에 따라 서부전선 무력부대 오두산 전망대에서 군인들이 대북방송용 대형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다.
지난 10년은 ‘親北 左派(친북 좌파)’라는 惡性(악성)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의 몸속 곳곳을 누비면서 국가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려 온 시기였다. 執權(집권) 좌파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좌파적 정책들을 일관되게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극심한 南南(남남)갈등, 이념갈등을 겪었다.
한 보수우파 인사는 지난 10년에 대해 “좌파들이 정치, 경제, 문화, 언론계 전반을 장악하여 국민들의 의식을 통제한 후, 우파세력들이 다시는 再起(재기)하지 못하도록 끝장을 내려 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문제는 극심한 이념갈등을 불러온 대부분의 좌파적 정책들이 國家安保(국가안보)와 직결된 것이라는 데 있다. 柳東烈(유동렬)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6ㆍ15 공동선언 후 지난 10년 동안 ‘햇볕정책’이란 이름하에 여러 국가정책이 親北(친북)코드화되면서 국가안보 불감증과 대북 무장해제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梁東安(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지난 10년간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남한 내 ‘내부의 적’(사회주의 혁명세력과 從北세력)이 크게 성장하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同盟(동맹)인 미국보다 북한을 더 우선시하는 기류가 정착됐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지난 10년간의 非(비)정부간 남북교류는 북한정권의 통제를 받는 북한 주민과 남한 내 從北(종북)ㆍ親北(친북)세력의 차별적 교류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남북교류가 아닌 北-北(북-북) 접촉ㆍ교류였다”면서 “우리 정부가 이런 非(비)정부간 교류를 지원했고, 동시에 북한은 대남공작을 강화했기 때문에 남한 내에 내부의 적이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북한이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면 남한에서도 이를 그대로 복창하고, 북한의 핵무장이나 대남 도발, 인권탄압에는 침묵하면서 북한을 무조건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대북ㆍ안보 전문가들은 정권 최상부의 좌파적 역사관과 남한 내 확대된 친북 좌파세력들의 영향력이 결합하면서 韓美(한미)동맹 약화,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경찰ㆍ검찰ㆍ국가정보원ㆍ국군기무사령부의 보안기능 축소 같은 대북 무력화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될 수 있었다고 진단했다. 지난 10년간 친북 좌파정권의 국가안보 무력화 실태는 어느 정도였는가를 검증해 보자.
경찰 보안기능의 무력화
양동안 교수가 국정감사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1997년 우리나라 보안경찰은 약 4500명이었으나, 2008년 1월 현재 2000명 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현 정부 들어서도 보안경찰 인원은 200명이 더 감소해 10년 전에 비해 60%가 줄었다.
전국 지방경찰청 소속의 보안수사대는 1998년 44개(900여 명)에서 2008년 7월 현재는 34개(350명)로 감소했다. 또 一線(일선) 경찰서의 보안과가 폐지되고 정보과로 통합되면서 기밀유지의 어려움 등으로 경찰의 보안수사 역량은 더욱 약화됐다.
그나마 남아 있는 보안경찰 인력의 대부분은 내근요원이고, 외근요원(현장요원)의 60%는 탈북자 관리 업무에 투입되어 경찰의 실제 보안담당 수사인력은 1997년에 비해 4분의 1 이하로 줄어든 상황이다.
유동렬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보안경찰의 숫자가 국가안보 대응 능력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국가 안보시스템이 불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현재 지방경찰청 1개 보안수사대 평균인력이 10명 정도인데, 최소한 15명의 인력에 2개 수사팀이 운영되어야 정상적인 안보수사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10명 인원 중에서도 숙직자, 행정요원, 출장자를 제외하면 실제 활동인력은 3~4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찰에서 방첩수사 업무를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현직 경찰 보안과장인 A총경은 “좌파정권에서 경찰의 공안문제연구소를 없앰으로써 경찰 보안수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공안문제연구소는 경찰대학 부설기관으로 경찰, 국정원, 기무사 등이 의뢰하는 출판물의 容共性(용공성)이나 利敵性(이적성) 여부를 일차적으로 판별해 온 기관이다. 공안문제연구소가 사라짐으로써 경찰 공안수사의 이론적ㆍ전략적 지원 기능이 무력화됐다는 것이다.
A총경은 “공안문제연구소의 폐지로 현재 대공수사 문건은 민간연구소에 분석 의뢰를 하고 있는데, 민간연구소는 대공수사 업무의 전문성이 떨어지고, 분석한 문건이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안보 전문가들은 “2004년 12월 21일 북한 대남 공작기관인 한민전 대변인이 논평을 통해 ‘남한의 공안문제연구소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이듬해 해체됐다”면서 “결국 우리 정부가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검찰과 국정원의 공안기능도 축소
보안수사 인력 감축은 경찰뿐 아니라 국정원, 검찰, 기무사에서도 비슷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지난 10월 20일 張倫碩(장윤석) 한나라당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997년 대검찰청 공안부는 전체 인력이 70명이었지만, 2007년 말에는 44명으로 37%가 줄어든 것으로 밝혀졌다.
원래 검찰의 공안부는 1室(실) 4課(과) 체제로 운영됐으나, 1998년 공안 4과가 폐지된 후 2005년에는 공안 3과도 없어졌다. 2005년에는 서울 중앙지검 1개 공안과 등 전국 15개 지방검찰청의 공안과도 폐지됐다. 검찰 공안부 예산도 10년 전 24억원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국정원의 경우 지난 10년 사이 안보수사 인력의 46%가 감축됐고, 좌익전담 수사부서는 폐지됐다. 기무사의 대공인력도 10년 전에 비해 3분 1이 축소됐다.
공안검사 출신인 咸貴用(함귀용ㆍ전 서울동부지검 부장검사) 변호사는 “대공수사기관들이 1997~98년 무렵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한총련 등의 反(반)국가단체들을 사실상 와해시켰으나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을 거치면서 공안기능이 무력화되자 친북세력들이 다시 활개를 치게 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여당이 국보법을 ‘4대 惡法(악법)’ 중의 하나라며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상적인 대공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在獨(재독) 사학자인 송두율 간첩사건,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보법 위반 사건, 일심회 간첩사건 수사 때 국정원의 비협조와 청와대 내의 386세력과 좌파단체들의 견제로 검찰이 수사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안보 전문가들은 “지난 10년간 국가안보 수사인력을 절반이상 축소하고, 이들의 사기마저 꺾어버린 탓에 지난 정권에서 안보수사기관들은 사실상 불구상태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1997년에 국보법 위반으로 검거된 사람은 877명이었으나, 2007년에는 39명으로 10년 전의 22분의 1에 불과했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 軍內(군내)의 좌익사범 검거는 사실상 방치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金東聖(김동성)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0월 6일 국정감사 자료에서 1993년부터 1997년까지 5년간 군내의 좌익사범 검거 현황은 199명이라고 밝혔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인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지난 10년간 軍隊(군대) 내의 좌익사범 검거 현황은 54건으로, 이는 이전 정부 5년의 27%에 불과한 숫자다. 김동성 의원은 “이는 10년 전 560여명 수준이던 기무사의 대공인력이 현재 370여명 수준으로 감소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했다.
안보수사관들의 사기저하
지난 정권은 국가안보 기관의 수사인력을 절반 이상 줄였을 뿐 아니라, 이 분야에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어 놓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보안분야에서 경무관으로 승진한 인원은 단 3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의 다른 분야에서 1년에 1~2명이 경무관으로 승진한 것에 비하면 보안경찰의 홀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국정원 직원 581명이 일시에 해직됐다. 당시 강제퇴직을 당했던 강신호 前(전) 국정원 안보수사단장은 “581명이 해직될 때 국정원 안보수사관들이 상당수 포함됐다”면서 “다음해까지 합해 모두 1000명이 해직됐기 때문에 현재 국정원에는 대공수사를 알 만한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국정원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대공수사 전문요원 한 명이 탄생하려면 적어도 5~1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그런데 수사 능력이 있는 요원은 지난 정권에서 다 쫓겨 났고, 10년간 의도적으로 공안수사 요원을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오늘날 국정원 후배들이 대공수사 업무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강 전 안보수사단장은 “요즘 국정원 대공수사 요원들은 지난 10년 간 정시에 출퇴근하는 안일함에 물들어 있어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라며 “공안 기능을 정상화하려면 국정원, 검찰, 기무사 공안수사요원들의 정신교육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전 경찰청 보안국 수사대장을 지낸 후 1998년 퇴임한 임종길씨는 “나는 지난 32년간 경찰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는데 정권이 바뀐 후 도저히 정상적인 대공수사 업무를 할 수가 없어서 세 번이나 사표를 썼다”며 “나중에 상부에서 미안했던지 명예퇴직 처리를 해주더라”고 했다.
그는 “지난 정권은 우리의 안보수사 기능을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어 놓은 후 산소호흡기만 떼지 않고 그냥 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무사에서 방첩업무를 30년 간 담당한 후 퇴직했다는 한 전직 수사요원은 “좌파정권이 만든 과거사위원회에서 지금도 나를 포함해 70~80세가 넘은 전직 안보수사관들을 불러 조사를 하고 있다”면서 “전직 요원들 중에는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앓아 누운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검찰 공안수사의 맥이 끊어졌다”
/高永宙 국가정상화추진위원장. 공안 전문 검사였던 그는 金大中 정부 출범 후 ‘제거대상 검사 10걸’에 올랐었다
공안검사 출신인 高永宙(고영주) 변호사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제거대상 검사 10걸’이란 공안검사 명단이 나돌았다”며 “그 명단에 포함된 사람 중 나 한 사람만 김대중 정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고 변호사는 검사 생활 27년 대부분을 공안 분야에서 활동하다 2006년 서울 남부지검 검사장을 마지막으로 公職(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980년 초 대학가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전국학생총연맹(전학련)과 산하 조직인 三民鬪(삼민투)를 利敵(이적)단체로 기소했고, 한총련(5기)에 대해서도 이적 단체로 규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공안 경험이 전무한 검사들을 공안조직에 배치했다. 인권을 중시하는 새로운 공안정책을 추진하겠다며 검찰 공안조직을 이른바 ‘新(신)공안’으로 물갈이한 것이다. 고영주 변호사의 말이다.
“김대중 정권은 저를 내보내려고 저에 대한 개인 비리나 인권침해 사례 등을 찾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어쩌지 못하고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더군요. 검사들은 신분 보장이 되니까 그냥 쫓아내지는 못하고 승진을 시키지 않거나 좌천을 시키는 방법으로 옷을 벗깁니다.”
고 변호사는 “2003년 광주고검 차장으로 있을 당시 榮轉(영전)을 할 차례인데 대구고검 차장으로 좌천 발령이 났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국보법 위반으로 나에게 수사를 받았던 이들 중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와 정부 요직에 들어간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공산주의 세상이 오면 검사님이 도리어 우리한테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좌천 인사를 당한 후 ‘저들이 주장하던 공산주의 사회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내가 왜 저들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생각하니 심한 회의감이 들더군요.”
고영주 변호사는 개업 후 보수우파 인사들과 ‘친북 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현재는 이 단체를 확대 발전시켜 발족한 ‘국가정상화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고 변호사는 私費(사비)를 들여 가며 우파운동에 뛰어든 것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명예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과거사위원회 등이 간첩들을 민주화 인사로 둔갑시키면서 과거 공안수사기관에 있었던 사람들을 ‘물 먹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안수사관들은 평생 국가를 위해 자부심과 사명감 하나만 가지고 어려운 공안업무를 묵묵히 수행해 온 전문가들입니다. 지난 시절 제가 이루었던 명예가 저들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데 어떻게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 공안수사는 경험과 전문성이 생명인데 지난 10년간 검찰 공안수사의 맥을 끊어 놓아 제대로 된 대공 수사업무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현재 검찰 내에 이적단체를 수사할 전문 수사검사가 전무한 실정이에요.”
韓美연합사 해체
지난 10년간 경찰과 검찰, 국정원, 기무사의 보안수사 기능이 위축되면서 내부의 안보시스템이 무력화되는 한편에선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우리 軍(군)도 큰 시련을 겪었다.
국군통수권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군 복무를 ‘인생 썩히는 것’이라고 경멸하는가 하면, 북방한계선(NLL) 사수를 위한 군의 노력을 ‘땅 따먹기 놀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방보좌관을 지낸 金熙相(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 “지난 10년간 군복무의 신성함이 조롱당했다”면서 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가정통성 훼손 행위를 비난했다.
김희상 장군은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同盟(동맹)을 적대시하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을 조롱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긍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란 조직은 개개인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가의 핵심기능은 안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보는 유사시 군인들의 충성심과 전투의지에 크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군인의 명예와 처우에 큰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서해교전 때 6명의 우리 해군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금강산 관광이 계속되고, 국가는 그들의 죽음을 무시했어요. 국가를 위한 군인의 죽음이 이렇게 무시당하고 모욕당한 사례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 장군은 노무현 정부의 韓美(한미) 연합사 해체 시도에 대해 특히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北核(북핵) 위협에 대한 완벽한 대비책이 사실상 없는 실정입니다. 재래식 전력에 의한 전쟁예방 억제력도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 한미동맹 강화인데, 이 중요한 시기에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기로 했으니 이는 동맹에 결정적인 상처를 준 조치입니다.”
그는 “그동안 우리는 한미 군사동맹으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값싸게 지켜올 수 있었다”면서 “이스라엘이 GDP(국내총생산)의 8~10%, 싱가포르가 5~6%를 국방예산으로 투입한 데 비해 우리는 겨우 2.7%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 누구 덕분인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기적으로 중국의 위협까지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습니다. 한미동맹은 통일 이후의 상당한 시간까지 함부로 대체할 수 없는 가장 값싸고 효율적인 국방체제입니다. 이걸 파괴하는 것은 친북좌익 세력에게는 ‘승리의 神託(신탁)’과도 같은 조치입니다. 북한에게는 정말로 남한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어요. 이런 분위기만으로 국내 친북세력과 기회주의 세력에게 큰 힘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정권의 국가안보 정책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軍 복무도 돈 없으면 몸으로…
/김충배 한국국방연구원장(前 육사 교장).
金忠培(김충배) 예비역 육군중장은 2003~04년 육사 교장을 지낸 후 전역, 이후 2008년 4월까지 한국국방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육사 교장 재임 시절 육사 입학생을 상대로 한국의 主敵(주적)을 묻는 조사를 한 결과 ‘북한’이라는 응답은 33%인 반면 ‘미국’이라고 답한 응답이 34%에 이른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대안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육사 생도를 상대로 역사 교육을 실시했다. 김충배 장군의 설명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戰時(전시)에 우리 군의 작전통제권이 미국에 있어 우리에게 主權(주권)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는 북한의 주장과 같은 논리입니다. 전시작전권은 한미 양국의 대통령이 공동으로 행사합니다. 노 대통령이 굳이 ‘주권’이라는 말을 내세워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를 건드린 것은 국민을 현혹해서 좌파정권 재창출을 시도한 일종의 ‘對(대)국민사기’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김 장군은 지난 정권에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 안보를 훼손한 또 하나의 사례로 군복무기간 단축을 들었다. 군복무기간 단축 문제는 2006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언급한 후 이듬해 정식으로 발표됐다. 이에 따르면 군복무기간은 2014년까지 24개월에서 18개월로 줄어들고, 군 병력은 2020년까지 현행 69만명에서 50만명 수준으로 감축될 예정이다.
김 장군은 “내가 당시 국방연구원장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검토 결과 2020년에 가면 군사 可用(가용)자원이 모자라 18개월 군 복무로는 50만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군 복무 기간이 24개월이 되어야 겨우 50만명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의 표를 의식해 이런 조치를 발표한 것입니다. 여당도 야당도 표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청와대의 발표를 따랐어요. 정부가 병력 유지를 위한 대안으로 도입한 有給(유급) 지원병 제도는 결국 돈 많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일찍 제대하고, 돈 없는 사람은 몸으로 군 생활을 때우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군 내부 갈등이 커져 전투력이 현격히 저하될 것입니다.”
김 장군은 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 시절 무너진 한미 정보교류의 실상도 전했다. 김 장군은 육사 교장으로 발령 받기 전 2002년 10월 국방부 정보본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정보본부장에 취임한 후 곧바로 한미연합사를 방문했다. 당시 남북 간에 경의선 연결이 합의된 상황이어서 휴전선 일대에서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휴전선에서 공사중인 경의선 구간만 끝나면 경의선이 전부 연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미연합사에서 저에게 보고하기를 북한은 개성공단까지만 철도 공사를 하고 있고, 그 이후 노선은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애당초 경의선 연결 의도가 없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이 사실을 합참의장과 장관을 통해 대통령께 보고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군 수뇌부와 청와대, 정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더군요.”
對北방송 중단의 여파
김 장군은 “미군이 한국 정부를 불신했기 때문에 중요한 대북 정보를 넘겨주지 않았다”며 “미군이 정보를 주지 않으니 우리는 까막눈이나 마찬가지 신세였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 정부를 불신하게 된 데는 서해교전의 영향이 크다고 설명했다.
“서해교전은 명백한 의도적 도발이었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對北(대북) 통신감청 정보를 총괄하는 5679부대장 韓哲鏞(한철용) 육군 소장이 2002년 6월 13일 이미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 보고를 올렸지만 상부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해 10월 제가 정보본부장에 취임한 후 당시 관련 비밀자료를 보니 한철용 소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어떻게 한국 정부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후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한미 간 정보교류가 사실상 단절됐습니다.”
지난 10년간의 대북 무장해제 사례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대북 선전물(삐라 등)을 포함한 대북방송 중단을 들 수 있다. 2004년 휴전선의 대북 방송인 ‘자유의 소리 방송’을 담당했던 金漢奎(김한규) 국군교육방송 PD(前 국군심리전단 작전계획장교, 2004년 소령 전역)는 “엄청난 심리전 효과를 거두고 있던 우리 측의 우수한 대북방송 장비를 북한의 낡은 선전방송 장비와 동급에 놓고 철거에 합의한 것은 궁극적으로 적을 돕는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대북방송 중단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상호비방을 중지하기로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이때부터 정부의 공식 대북방송이던 KBS 사회교육방송(현 한민족방송)에서는 북한 체제 비판을 전면 중단했다. 2004년 6월에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때 상호 비방방송을 전면 중지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휴전선 일대에 울려 퍼지던 ‘자유의 소리 방송’도 중단됐다. 자유의 소리 방송은 휴전선의 확성기와 가청 거리가 50㎞인 FM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다.
김한규 PD는 “평상시에 전쟁을 하는 부대는 정보부대와 심리전 부대밖에 없다”며 “평시에 심리전을 벌이는 가장 큰 목적은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것인데, 지난 정권에서는 대북방송뿐 아니라 아예 심리전 부대까지 없애려고 시도했다”고 말했다. 김 PD는 “적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치던 자유의 소리 방송은 이후 국내 장병을 위한 교육방송으로 전환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분단 이후 군사적인 문제로 남북관계에 합의를 이룬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대북방송 중단은 너무나 쉽게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대북방송 폐지를 마치 대단한 업적인 양 내세웠어요.”
김 PD는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대북 선전물을 보내지 말 것을 가장 먼저 요구했다”며 “그에 따라 2000년 4월 27일부터 모든 대북 선전물 발송이 중단되었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이 죗값을 물을 날이 올 것”
/김한규 국군교육방송 PD(前 국군심리전단 작전계획장교).
대북방송과 선전물 발송 중단에 대해 탈북자들은 “북한 주민의 마지막 남은 희망조차 빼앗는 잔인한 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1999년 탈북한 金聖玟(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탈북자 동지회장)은 “나 자신이 북한에서 군 생활 할 때 대북방송을 많이 들은 것이 탈북을 결심하는 데 큰 계기가 됐다”며 “외부 세계와 완전하게 고립된 북한 주민에게 삐라와 대북방송이 유일하게 외부 세계의 소식을 알려주는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의 북한은 10년 전과 많이 다릅니다. 주민들이 모여서 공공연히 김정일을 욕하고 정권을 비난합니다. 변화가 이렇게 심한 시기에 10년간 우리가 주도적으로 북한 주민의 의식화 교육을 했으면 자체 민주화 운동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김대중ㆍ노무현이란 사람이 나타나 북한 인민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기는커녕 좌절과 고통의 세월만 안겨주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이 두 사람의 죗값을 물을 날이 올 것입니다.”
자유북한방송의 김금룡 국장은 3년 전 탈북한 후 한국에 왔다. 그는 북한군 간부로 있으면서 거의 매일 남한 라디오를 들었다고 말했다.
“부사관급 이상 군인들은 라디오를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이 남한 방송을 듣습니다. 저도 야간 근무 때는 밤새도록 남한 방송을 들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軍(군) 간부였지만 매일 남한 방송을 듣다 보니 김정일 정권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독재자라는 것과 자유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금룡 국장은 “남한의 대북방송에서 김정일 독재의 실상을 알려주고, 김정일을 가차없이 비판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리만족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금룡 국장은 대북방송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 사람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며 희망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남한마저 자기들을 버렸다는 생각에 남한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고 있어요. 남한 사람들은 독재에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야 합니다. 그러면 북한은 머지않아 내부에서 그냥 무너집니다. 戰時(전시)나 마찬가지인 분단국에서 심리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나라를 정상화하려는 노력
지난해 大選(대선) 때 보수우파에서는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했다. 보수우파들은 이 말 속에 국가정체성이 훼손된 10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보수를 대변한다는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잃어버린 10년이란 의미를 경제적 의미로 한정해서 받아들인 것 같다.
집권 후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주의를 내세워 좌파들과 타협을 시도했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것은 촛불시위였다. 촛불시위 후 지난 10년간 각계에서 좌파정권에 맞서 싸웠던 보수우파들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결성된 보수우파 단체만 해도 국가정체성 회복을 위한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공정한 언론 보도를 목표로 한 ‘미디어발전국민연합’과 ‘공정언론시민연대’, 전교조 해체를 기치로 내건 ‘反(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 등이 있다. 이들 단체의 목표는 하나. 좌편향된 대한민국을 바로잡는 것이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인 고영주 변호사는 “그나마 지금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기 때문에 지난 정권 시절에 애국운동을 할 때처럼 그렇게 답답하지는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에 의해 행해진 국가안보시스템 무력화, 좌편향 시각의 과거사 활동, 역사교과서 왜곡, 전교조의 좌편향 교육, 사회 전반의 친북세력 발호 등 광범위한 국가정체성 훼손 행위를 민간 차원에서 조사하고, 再(재)규명하여 비정상적인 대한민국을 조속히 정상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고 변호사는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좌편향 교육의 産室(산실)인 전교조를 견제하는 것”이라며 “가장 먼저 전교조 해체를 위한 투쟁에 전력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廣作(박광작)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정체성을 영구히 지키기 위해서는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작업도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독일의 공안체계를 소개해 국내 좌파들의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을 반박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온 인물이다. 박 교수의 설명이다.
“독일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危害(위해)를 가하는 사회단체는 곧바로 형법을 적용해서 해산할 수 있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해체된 단체는 유사단체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처럼 독일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법률적 정당성이 헌법을 통해 확보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대법원에서 반국가 단체로 판결 받은 단체조차 해체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동·서독 화해 진행될수록 공안기구 인력 더 확충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박광작 교수에 따르면 이념적으로 대결을 하고 있는 나라끼리는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간첩활동이나 기타 체제전복 세력이 늘어나기 때문에 공안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이 공안기능을 마비시키다시피 했는데, 박 교수는 “이는 나라를 적에게 통째로 내주자는 마음이 없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례로 독일의 공안기구라고 할 수 있는 헌법보호청 근무인력은 1977년 1800명이었으나 동·서독 화해가 진행될수록 그 인원이 늘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에는 5100명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치안정책연구소 유동열 연구관은 “우리나라의 안보시스템이 선진 외국에 비해 매우 후진적”이라며 “21세기의 다양한 안보 위해활동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안보법제’ ‘안보수사요원’ ‘안보의식의 선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이버안보 등 새로운 안보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선 사이버 안보법(가칭) 제정, 국가보안법 보완, 국정원법 개정 등 안보관련 법제가 정비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반안보적 사고에 젖어있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친안보적으로 선진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李東馥(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는 “지난 10년간 망가진 국가안보 시스템과 국가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부 안팎에 포진한 좌파적 인물에 대한 인적 청산이 先行(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권이 바뀌었으면 망가진 국가안보 기능을 점검한 후 이를 회복하는 것이 정상이나, 이명박 정부는 도리어 공무원 감축 원칙을 획일적으로 적용해 보안경찰 인원을 200명이나 더 줄였다”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部處(부처)의 수장이 바뀌지 않으면 대통령이 아무리 변화를 추구해도 절대로 아래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통일부, 국정원 같은 남북관계나 국가안보를 다루는 핵심 부처만큼이라도 좌파정권에서 활동했던 사람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동복 대표는 “지난 대선과 총선은 10년 동안 좌편향으로 가고 있던 우리나라를 유권자가 궐기해서 바른쪽으로 뒤집어 놓은 ‘선거라는 이름의 혁명’이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선거의 의미를 제대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적 상황이 전개됐으면 대응방식도 혁명적이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혁명적 에너지를 가장 먼저 좌파 인사 청산에 쏟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후 7개월 가까이를 ‘고소영 내각’ 시비와 親朴(친박)연대의 한나라당 복귀 문제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엄청난 혁명적 에너지를 허송세월로 소진시켜버린 것이죠. 그러자 그 에너지가 엉뚱하게 촛불시위라는 불만의 형태로 분출된 것입니다.”
이동복 대표는 “자유민주주의 사상 위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좌파적 이데올로기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며 “이제라도 이명박 대통령은 헌법정신과 건국이념에 기초해 대한민국을 정상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좌파는 우리 역사에서 非主流(비주류) 세력입니다. 주류세력은 건국과 산업화, 민주주의를 이룬 보수우파들이죠. 지난 10년은 비주류 세력들이 정치, 경제, 행정 전반을 장악한 후 주류세력을 변방으로 몰아냈기 때문에 이념적인 대혼란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남은 기간 나라의 방향을 바로잡아 놓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끊임없는 포퓰리즘과 정치불신, 이념 혼란으로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 것입니다.”⊙
월간조선
2016.01.11 노무현, 허위신고하겠다는 김계관에게, "현명하게 잘하셨구요."
우선 아래 통일부 자료를 읽어보자.
<2007년 2월13일, 6자회담은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의’(2·13 합의)에 따라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IAEA 감시·검증요원의 영변 복귀, 對北 중유 5만 톤 제공 등이 마무리되면서 초기조치가 완료되었다. 초기조치 완료에 따라 6자회담 참가국들은 2007년 9월 27일~30일간 중국 베이징에서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를 개최하여 ‘9·19 공동성명’ 이행의 다음 단계 진입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 합의(10·3 합의)’ 가 도출되었고 10월3일 6자회담 참가국들에 의해 최종 승인 되면서 6자회담 과정은 비핵화 2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10·3 합의’ 주요 내용
① 모든 북한 핵시설 연말까지 불능화
② 모든 북한 핵 프로그램 연말까지 신고
③ 북한 핵 물질·기술·노하우 이전 금지
④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과정 개시
⑤ 대 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추진
⑥ 미·북, 일·북 관계정상화 노력
⑦ 중유 100만 톤 상당 경제·에너지 지원
‘2007년 2월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 의’(2·13 합의)에 따라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IAEA 감시·검증요원의 영변 복귀, 대북 중유 5만 톤 제공 등이 마 무리되면서 초기조치가 완료되었다. 초기조치 완료에 따라 6 자회담 참가국들은 2007년 9월 27일~30일간 중국 베이징에 서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를 개최하여 ‘9·19 공동성명’ 이 행의 다음 단계 진입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 합의(10·3 합의)’ 가 도출되었고 10월 3일 6자회담 참가국들에 의해 최종 승인 되면서 6자회담 과정은 비핵화 2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합의의 핵심은 <모든 북한 핵 프로그램 연말까지 신고>였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있었다. 김정일은 북한의 6자 회담 대표 김계관을 불러 합의 사항을 설명하도록 하였다. 공개된 '김정일-노무현 회담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계관(북한 외무성 부상): 신고에서는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한다.
-모든 핵프로그램을 다 신고한다고 약속한 북한이 대한민국 대통령 앞에서 핵폭탄과 관련된 핵물질은 신고하지 않겠다고, 즉 핵심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盧 대통령의 반응이 놀랍다.
*노무현 대통령: 수고하셨습니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하셨구요. 나는 공개적으로 핵문제는 6자회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 바깥에서 핵문제가 풀릴 일은, 따로 다뤄질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남북간에 비핵화 합의 원칙만 한번 더 확인하고,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6자회담에서 같이 풀어나가자 이렇게 갈거니까요.
북한이 무기화된 핵물질은 신고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려도 노무현은 따지지 않고 오히려 "현명하게 하셨다"고 칭찬한다. 형사 앞에서 도둑이 "훔친 장물을 어디 팔았는지는 진술할 수 없습니다"고 해도 형사가 "현명하십니다"고 칭찬하는 꼴이다.
김정일 앞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핵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국정원 공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50회 넘는 정상회담을 했습니다만 그동안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중략).주적 용어 없애 버렸습니다. 작전통수권 환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외국군대가 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다… 보내지 않았습니까… 보냈고요… 나갑니다. 2011년 되면… 그래서 자꾸 너희들 뭐하냐 이렇게만 보시지 마시고요. 점진적으로 달라지고 있구나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작계 5029라는 것을 미측이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거는데… 그거 지금 못한다… 이렇게 해서 없애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2012년 되면 작전통제권을 우리가 단독으로 행사하게 됩니다. 남측에 가서 핵문제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와라 주문이 많죠. 그런데 그것은 되도록 가서 판을 깨고… 판 깨지기를 바라는 사람의 주장 아니겠습니까? (중략).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의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北核문제와 관련하여 敵의 입장에 서서 동맹국과 싸우고 국제사회에서 敵의 변호인 노릇을 했다는 노무현의 고백은 敵의 핵개발 비호, 즉 利敵旣遂(이적기수)의 증거이다. 그 利敵행위의 결과 敵은 수십 개의 핵폭탄을 보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敵의 핵개발을 저지하려면 동맹국인 미국과 긴밀하게 협조해야 하는데 敵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웠다는 것은 반역을 했다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 핵무장하지 않은 나라의 국군통수권자가 핵무장한 敵을 위하여 동맹국과 싸웠다고 敵將 앞에서 자랑한 것은 利敵을 넘어 정신의 정상성을 의심하게 한다.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장관이 그 직후인 2007년 11월에 노무현을 만났다. 김정일을 만나고 온 한 달 뒤였다. 게이츠 전 장관이 쓴 회고록에 의하면 盧 당시 대통령은 게이츠에게 "아시아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다"고 말하더라고 한다. 게이츠는 "나는 그가 반미주의자라고 결론내렸고 약간 돌았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노무현은 사실상 김정일의 핵무장을 도왔다. 시간과 돈과 물자를 주고, 방패까지 되어 주었다. 비유하면, 냉전 시절에 미국 대통령이 동맹국을 무시하고, 소련의 핵개발을 지원한 것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이다. 적어도 미국은 핵무장 국가였다.
10월3일의 합의는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 의무를 지키지 않아 이듬 해 파탄이 났다. 북한은 농축우라늄과 핵폭탄 제조에 들어간 핵물질을 빼고 플루토늄만 신고하여 미국 등과 갈등을 빚다가 2009년 제2차 핵실험으로 판을 깼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명하게 잘하셨다'고 칭찬한 행패의 뒷모습이었다.
조갑제 닷컴대표 조갑제
▲공산당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