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4/ 대통령2/ 역대 대통령 이야기2/ 1 國父 李承晩 - 3 박정희(朴正熙) - 5 전두환(全斗煥)
대한민국4/ 대통령2/ 역대 대통령 이야기2/ 국부 이승만 영웅 박정희는 위인전에 별첨
1 國父 李承晩 1875.03.26 - 1965.07.19
1대 -3대 1948.08.15 - 1960.03
1875년(고종 12)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두 아들이 일찍이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4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으며,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하였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1919년 3월 21일 수립)에 의해 국무 급(及)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창호와 갈등을 빚었지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고,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곧 다가올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토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력한 반공주의로 인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1946년 1월 8일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 ‘4당 캄파’에 반대하였다. 1946년 2월 8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때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장면(張勉)을 주미한국대사로 임명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협력하였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농지개혁을 추진·실시하였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군의 증강을 제한하였으나 미국의 도움 없이 직접 공군 창설을 지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대전에 도전한 후 전쟁경과에 대한 특별방송을 통해 현 전선을 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을 촉구하는 내용을 공표했다. 1951년 11월 19일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하였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하였고, 같은 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지지로 재차 당선되었다.
미국의 정전협정 추진에 반대하며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정전협정에 반대하지는 않되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타협하였다.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하였다. 195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 관할 하에 두는 대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는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였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56%의 득표로 당선,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해 1956년 경제개발계획을 미국에 제출하였지만, 미국 정부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 하였고, 1958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를 위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산업개발위원회는 1960년 1월 산업개발 3개년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곧 이은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 하였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승만(오른쪽)과 부친 이경선(가운데)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1910)
/상해교민단에서 개최한 이승만 대통령 상하이 도착 환영회(1920. 12. 28)
/워싱턴회의에 참가한 이승만 ・ 정한경(1921)
/외교활동을 위해 제네바로 간 이승만
/재미한국외교부협찬회(워싱턴, 1944. 5. 28)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행사(1948. 8. 15)
/재미한국외교부협찬회(워싱턴, 1944. 5. 28)
이승만(오른쪽)과 부친 이경선(가운데)
1948.7.17. 국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
/1948.7.20 이승만 초대 대통려의 취임사를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
/이승만 가족
우남 이승만 전기 - 복거일
/복거일 작가는 이번 소설 ‘이승만’ 연재에 어렸을 때부터 공부해 온 역사 지식을 총동원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관련 문헌을 읽으면 그의 심리가 읽힌다”고 말한다. [신인섭 기자]
우남(雩南)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다. 건국이냐 정부 수립이냐 하는 논란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움직일 수 없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다. 독립운동, 건국, 경제발전 토대 마련 등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생애 마지막의 10년 독재가 그의 90년 인생 전체를 삼켜버렸다. 그는 비난 이전에 망각의 대상이다. 이 대통령의 본모습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보수 논객으로 유명한 복거일(69) 작가가 월간중앙 2016년 1월호에 소설 ‘이승만’ 연재를 시작했다. 광복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까지의 과정을 3년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따진다면 공이 9.5 과가 0.5”
-초·중·고 시절에 대통령은 오로지 이승만 박사였나.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모습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있다. 친근감 면에서 또 ‘저분이 있어야 나라가 유지된다’는 신뢰감에서 차이가 난다.”
-4·19 때 고등학생들도 데모를 했는데.
“저도 데모했다.(웃음) 데모는 데모대로 하고.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칭찬할 때는 칭찬하고 욕할 때는 욕하고.”
-이승만은 어떤 사람이었나.
“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남은 평생 ‘협박’을 하고 산 사람이었다. 그분은 협박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옳다고 확신한다. 당신이 내 말을 반박해 봐라. 반박 못하겠으면 선택하라. 나를 꺾기 위해 큰 비용을 치를 것이냐. 나와 협력할 것인가 나를 밟고 갈 것인가’. 미국 사람들에게 잘 통했다. 미국인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계산이 빠른 문화다. 대표적인 예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남과 타협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자 미군 장성들이 흔들렸다. 그는 대만의 경우처럼 제주도로 옮기는 척하며 미국을 협박했다. 또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는 질량(mass)이 매우 큰 분이었다.”
-작품 세계에서 이번 소설이 갖는 의미는.
“이게 제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 고칠 수 없는 큰 병을 얻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제발 좀 병이 더디게 진행돼 작품을 마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우남 묘소를 참배했다. 마침 벚꽃이 졌다. 마음이 울컥했다.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가 각하 일생을 소설로 담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대한민국에 그 작업을 할 사람이 저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기로 했습니다. 각하 인생을 담으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3년이 걸립니다. 제가 제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한 해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두 해는 각하께서 책임지십시오’. 이렇게 협박했다. ‘내 수법을 써먹느냐’ 하며 각하가 웃으셨을 것이다.
첫 실명 소설이다. 그런 소재를 원래 안 다룬다. 하지만 하도 그분이 폄하 정도가 아니라 오욕을 뒤집어써서 오욕을 좀 거둬낸다는 의미에서 나서게 됐다. 전기로 다룬 경우는 있으나 최초의 본격 소설이다. 전기 작가가 어찌할 수 없는 틈(lacuna)을 ‘소설적인 진실’로 메울 수 있다. 이 점에서 소설을 따를 수 없다. 설이 여러 가지가 있을 때 전기 작가는 소수 설까지 일일이 나열해야 한다. 소설은 그럴 필요 없이 일관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가 우남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감탄하게 되는데, 제가 작가니까 다른 사람들과 다른 면을 본다. 그분의 심리를 읽고 빙그레 웃을 때가 있다. 우남의 생각의 결이 보인다. 실용적인 차원에서도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우남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은 다 나와 있다. 독자들이 같이 웃고 분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허구가 들어가면 ‘미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을까.
“우남의 경우는 적이 많아 제가 아무리 공정하게 써도 비난이 나올 것이다. 문단에서 제게 가하는 타격이 클 것이다. 제가 겪어봐서 안다. 전체 문단의 공적이 돼 아직까지 공격받고 있다. 하지만 이제 국민이 성숙했기 때문에 우남을 긍정적으로 다룬 소설이 나올 때가 됐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원숙해졌지 않았나.”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치밀한 연구·조사가 필요한데 새로 발견한 게 있다면.
“잘 안 알려진 면 중 하나는 시장경제에 대한 그의 신념이다. 왕조 시대의 농업경제, 일제강점기의 통제경제에 대해서만 친숙했지 당시 시장경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글자 그대로 한 사람도 없었다. 그로 말미암아 시장경제의 토대가 놓였다. 원자력 연구 지시, 교육 사업, 농지개혁 같은 우남의 선견지명 있는 정책으로 5·16 이후 5~6년 만에 경제가 급성장하게 됐다.”
-공과(功過)는 7대 3 정도로 보면 되나.
“9.5대 0.5라고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미워하고 평가절하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실이 있는데도 못 바라보는 까닭이다. 독립운동 이야기는 빼더라도 그는 건국의 아버지였다. 6·25 때 이승만이 있었기에 안 무너졌다.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 그분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면 우리나라 역사가 뒤틀린다.”
-그렇다면 0.5%는 뭔가.
“나이가 너무 많았다는 게 문제였다. 신격호 회장같이 뛰어난 기업가도 나이가 드니 어떻게 됐는가. 우남은 70세였던 1945년에 귀국했다. 보통 은퇴할 나이였던 것이다. 노쇠해서 아랫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도 무투표 당선이었기 때문에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다 이룬 사람이었다. 부통령 선거가 문제였다. 워낙 뛰어난 분이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못 믿었고 자신의 후계가 안 보인다는 함정에 빠졌다. 이분이 노쇠하게 됐을 때 범한 사소한 잘못이 그의 위대함을 가리고 있다.”
-부정선거, 양민학살, 측근 부패 같은 논란의 여지 자체가 없는 과오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아직 도덕이 서지 않고 인프라가 하나도 없는 신생 국가에서 어떻게 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것인가. 미군처럼 군기가 엄하고 민간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군대가 없다. 하지만 베트남전에서 미라이 학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나. 사건의 책임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울 것인가. 평시에도 지도자가 다 알고 있을 수는 없다. 전쟁 중에는 더더욱 군대 일은 모른다.”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내용은.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없었고 프란체스카가 없었으면 이승만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한번은 어느 경상도 할머니가 떡을 가지고 이화장을 찾아와 ‘호주댁 보이소’ 하니까 ‘호주댁은 무슨 호주댁, 나는 한국댁인데···’라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남편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손가락이 짓무르도록 타자를 쳤다. 한때 저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주인공으로 이승만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뮤지컬을 구상하기도 했다.”
-건국이냐 정부 수립이냐는 문제가 있는데. 건국은 단군왕검이 하신 것 아닌가.
“좌파·우파 사이에서 싸움이 심각해지면서 양쪽 다 굉장히 이 문제를 중시한다. 제 생각에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차이도 별로 없다. 정말 중요한 논의를 안 하고 있다. 제가 우파니까 우파 입장에서 말하겠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건국이고 남한은 정부 수립이다. 속이 뒤집히는 일이다. 아이들도 ‘북한이 뭔가 제대로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것은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이미 건국한 상태라면 ‘독립운동’이라는 이름을 왜 붙이는가.”
-스스로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저는 ‘지식의 지도 제작자’다.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지식인이 드물다. 해박한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또 저는 사회의 정서를 따르는 사람이다. 즉 보수다.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풍속적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사회에 해가 안 된다면 동성애·매매춘·춘화·마약도 허용해야 한다고 본다. ‘생태적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저는 다른 종들에 대해서도 인간이 후견인(guardian)이 돼야 하며 앞으로 로봇과도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저는 개인의 가치를 높인다. 사회적 가치를 높인다고 하면 프로파간다가 된다.”
-선생에 대한 최대의 오해가 있다면.
“오해는 오해이기 때문에 풀 수가 없다. 오해가 아니라 악의적인 경우도 있다. 댓글로 약 올리려는 사람들도 있다. 별의별 욕이 다 나온다. 하지만 별로 약 안 오른다.”
-회사를 다니다 전업 작가가 되려고 83년 그만뒀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좀 무모하지 않았나.
“제가 좀 무모하다. 첫 작품을 발표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출판이 될지 또 팔릴지 기약이 없었다. 원래는 시인 지망생이었는데 이 시대는 시가 아니라 구호를 바란다는 것을 깨닫고 소설가가 됐다.”
-국론 분열이 심하다. 중도파가 많아지면 문제가 덜해질까.
“이념에서 중도적인 것은 없다. 자신이 중도적이라는 말하는 것은 ‘나는 관심 없다. 그게 그거다’라는 뜻이다. 좌우 한쪽에 서야 한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를 깨트리려고 하는 사회주의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사회에는 정설이 있고 이설이 있다. 정설을 따라야 한다. 지금 문제는 좌우 양쪽에서 극단주의자들이 설친다는 것이다. 좌파 극단주의는 DJ·노무현 대통령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한다. 우파도 지나친 얘기가 많다. 예컨대 유신을 미화하는 것이다. 어떻게 유신을 칭송할 수 있나.”
-충남 아산 출신인데 ‘충청도 대망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이념적으로는 우파, 지역적으로는 비영남에서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영남 좌파’는 최악의 조합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과가 어떻게 되나.
“7대 3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달리 그에겐 JP라는 대안이 대기하고 있었다. 매끄러운 승계가 가능했다.”
-우리나라 야당을 유럽에 갖다 놓으면 좌파가 아니라 중도우파라는데.
“DJ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고 공산주의자는 당연히 아니다. DJ는 우리 정치사의 통과의례였다. 대통령 한번 하실 분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민주화 과정에서 DJ에게 역할을 줬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유분방한 성격상 좌파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참모 중에는 또 모른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과 40년생 동갑이다. 저도 상고를 나왔다. 그래서 상고 출신이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잘 안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 동문회가 다 ‘잡아먹는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다. 한데 공부를 안 하셨다. 지적 훈련이 덜 됐다는 게 아쉽다. 저는 우리 야당이 왜 왼쪽에 울타리를 안 치는지 모르겠다. 몰아내야 한다. 몰아내지 않고서는 집권이 어렵다. 물론 좌파가 집권하면 좋은 점도 있다. 좌파가 오히려 우파적인 개혁을 쉽게 하는 경우도 많다.”
-사회주의의 문제는.
“허울만 좋은 문제(specious problem)를 만든다는 점이다. 필요 없는 문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복거일은…
194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시인·시사평론가다. 서울대 상과대학 상학과를 졸업했다. 87년 첫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발표했다. 한국적 과학소설(SF)의 지평을 연 작가로 손꼽힌다. 봉건주의·포퓰리즘을 비판하며 ‘열린 민족주의’를 주창한다.
중앙일보 김환영 논설위원
사진=신인섭 기자
2 윤보선(尹潽善)1897년08월26일 - 1990년 07월 18일
4대 1960.6.13 - 1962.12.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해위(海葦). 충청남도 아산 출생. 아버지는 치소(致昭)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활동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실시일 | 선거 | 구분 | 선거구 | 정당 | 득표율 | |
1967년 | 낙선 | 제6대 대통령선거 | 대통령 | 대한민국 | 신민당 | 40.9% |
1963년 | 낙선 | 제5대 대통령선거 | 대통령 | 대한민국 | 민정당 | 45.1% |
1960년 | 당선 | 제4대 대통령선거 | 대통령 | 대한민국 | 민주당 | 82.2% |
1960년 | 당선 | 제5대 국회의원선거 | 국회의원 | 제1선거구 | 민주당 | 81.9% |
1958년 | 당선 | 제4대 국회의원선거 | 국회의원 | 제1선거구 | 민주당 | 63.2% |
1954년 | 당선 | 제3대 국회의원선거 | 국회의원 | 제3선거구 | 민주국민당 | 32.4% |
1948년 | 낙선 | 제1대 국회의원선거 | 국회의원 | 제18선거구 | 한국민주당 | 14.2% |
1897년 8월 26일 출생해 유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10세때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에 일출(日出)소학교 5학년에 편입해 졸업했다. 졸업 후 도쿄로 건너가 1913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다가 다시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正則學園高等學校)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마치지 않고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 상하이에서 돌아온 여운형(呂運亨)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대한임시의정원(大韓臨時議政院)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글라스고의 스캘리시라는 학교와 우드부르크 대학, 옥스퍼드 대학에 다녔고, 다시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해 고고학을 전공했다. 유학 6년만인 1932년 귀국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하기보다는 국내의 상황에 관심을 가졌으며 일본 총독통치에 관여 또는 협조하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게 되자 해외에서 공부한 보수적인 인사들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창당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이어 미군정청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사들을 행정요직에 등용하게 되자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일하게 되었다.
국내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주로 한국민주당의 인사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맡았던 중요한 직책은 한영협회 회장과 민중일보사 사장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서울시장으로 발탁되었으며 곧이어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중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의 일을 맡았으며 상이군인신생회 회장의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단체를 통하여 사변기간 동안 전재아동(戰災兒童)과 상이군인들을 위한 원호활동에 노력하였다. 이어 1953년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7년 당시 이승만(李承晩) 독재에서 야당의 위치에 있었던 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다시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다음해 민주당 최고의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신익희(申翼熙)·조병옥(趙炳玉) 등 구파의 핵심인사들이 죽고 난 뒤였기 때문에 김도연(金度演)과 함께 사실상 구파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부가 물러나고 새롭게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민주당의 신·구파 사이에는 집권을 위한 갈등이 심하게 표출되었는데, 이 때 구파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신·구파의 협상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자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선임하였으나 국회인준 획득에 실패하자 신파의 장면(張勉)을 다시 국무총리로 지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신·구파는 사실상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은 헌법에서 내각책임제를 선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원수로서 단지 의전과 명목상의 위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장면정부에 대하여 질책성의 의견발표도 하였으며, 국민적 의사를 올바르게 대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이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정면 대립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 뒤 이 말을 두고서 박정희의 군사정변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상당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군사정변 이후 한때 국가의 정통성 계승과 외교관례를 고려하여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1962년 3월 23일 국가재건노력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곧 하야하였다. 그 때부터 군사정변을 일으킨 세력과 맞서서 민정회복을 주장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된 대통령선거에 민정당(民政黨) 후보자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대결하였는데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 선거의 결과에 대하여 부정선거와 관권선거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해서 “내가 사실상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본격적인 야당의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였으며 이어서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고, 당시 야당을 통합 신민당(新民黨)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 때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거듭되는 야당 창당과 통합은 당시 군사정부의 야당분리정책으로 인한 이른바 선명논쟁으로 인하여 격렬한 자유민권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가]
1970년대에는 이른바 유신하에서도 야당투쟁의 지도자로 일해왔으며 민권투쟁에 앞장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타협보다는 언제나 선명성을 강조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1979년 야당인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에 취임하였으나 실제로 정치일선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특히, 1980년대 초부터는 비교적 은둔적인 생활로 들어갔다.
그가 한국 현대정치사에 미친 영향은 민간정부의 민주주의적 정치를 위한 노력에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부정적인 평이 지배적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각 부분의 엘리트들을 연합하여 정국 안정을 모색하기 보다는 민주당 신파와의 갈등에만 몰두했다는 평이다. 그러한 그의 리더십을 “회전문 리더십”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960년 윤보선 대통령 취임식 방탄차
1960년 8월 13일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습니다. 사진은 서울 중구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윤 대통령이 의전 차량을 타고 경무대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당시 윤 대통령이 탄 차량은 1956년 생산된 미국 제너럴모터스의 캐딜락 프리트우드 62 세단입니다. 이 차량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때부터 사용했던 방탄차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전 차량도 캐딜락이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은 링컨 콘티넨털 리무진을 의전 차량으로 사용했습니다. 또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은 벤츠 S600을 탔고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 벤츠를 타다 BMW 시큐리티 760Li로 교체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초로 취임식 때 국산 에쿠스 방탄차를 이용했습니다.
사진=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글 = 김구철 기자 kckim@munhwa.com
3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10.26
5대 - 9대 1963.12.17 - 1979.10.
박정희의 비전...최초로 헌법에 ‘대한민국 경제질서는 자유시장경제’라고 명시하다!
‘자기 나라와 세계를 바꾼’ 20세기의 정치가들
나는 최근 20세기를 통틀어 ‘자기 나라와 세계를 바꾼’ 정치가들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1) 그들은 한결같이 비전을 제시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이를 집권 연대순으로 간략히 요약한다(괄호 안은 통치기간).
∙리콴유(1959∼1990): 싱가포르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겠다’며 초일류국가로 만들다.
∙박정희(1963∼1979.10.26.): ‘수출만이 살길이다.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며 대한민국을 10대 경제대국으로 이끌다.
∙덩샤오핑(1978∼1999): ‘가난이 공산주의는 아니다’며 굶어죽는 나라 중국을 G2로 이끌다.
∙마거릿 대처(1979∼1990): 구조개혁 성공으로 세계를 시장경제로 이끌다.
∙로널드 레이건(1981∼1989): 핵전쟁을 종식시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다.
∙넬슨 만델라(1994∼1999): ‘인종분리정책’ 폐지를 이끌어 남아공을 인종차별 없는 나라로 만들다.
박정희는 자유시장주의자였는가?
나는 ‘박정희는 자유시장주의자였는가?’라는 자문(自問)을 놓고, 20여 년 동안 고심해 왔다. 제한된 연구와 자료를 바탕으로 박정희가 자유시장주의자였다는 주장을 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민정 이양 후 독재정치를 했을 뿐만 아니라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계획경제’까지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1948년 제헌 헌법부터 1987년 전면개정 헌법까지 헌법의 개정 과정과 개정 내용을 자세히 비교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기회를 통해 마침내 대답을 찾게 되었다. 헌법은 제정이나 개정에서 통치자의 철학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흔히 통치자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제정 헌법을 ‘이승만 헌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헌법’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그동안 10차례에 걸쳐 일부 또는 전부 개정되었고, 이는 ‘헌법 제1∼10호’라는 이름으로 일컫는다.
‘박정희 헌법’의 <경제 조항>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고 2년 남짓 통치하다가 민정 이양 후 선거를 통해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정희는 군사정부 시절인 1962년 12월 26일에 기존 헌법을 전부 개정하여 ‘헌법 제6호’를 남겼고, 이어 민간정부 시절인 1969년 10월 21일과 1972년 12월 27일에 각각 일부 개정하여 ‘헌법 제7호’와 ‘헌법 제8호’를 남겼다. 이하 논의에서는 ‘헌법 제6호∼제8호’를 ‘박정희 헌법’이라 칭한다. ‘박정희 헌법’에서는 사실상 ‘헌법 제6호’만 언급된다.
우리나라 헌법 제1∼10호에는 한결같이 <제ㅇ장 경제>라는 조항이 있다. ‘박정희 헌법’에서는 <제4장 경제>로 되어 있다. 이를 모두 인용한다. 밑줄은 ‘박정희 헌법’이 새롭게 도입한 조항임을 드러내기 위해 필자가 친 것이다.
‘박정의 헌법’ <제4장 경제> (헌법 제6호, 1962.12.26., 전부 개정)
제111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
제112조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수산자원·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채취·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할 수 있다.
제113조 농지의 소작제도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금지된다.
제114조 국가는 농지와 산지의 효율적 이용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
제115조 국가는 농민·어민과 중소기업자의 자조를 기반으로 하는 협동조합을 육성하고 그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다.
제116조 국가는 대외무역을 육성하며 이를 규제·조정할 수 있다.
제117조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에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
제118조 ①국민경제의 발전과 이를 위한 과학진흥에 관련되는 중요한 정책수립에 관하여 국무회의의 심의에 앞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경제·과학심의회의를 둔다.
②경제·과학심의회의는 대통령이 주재한다.
③경제·과학심의회의의 조직·직무범위 기타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박정희, 최초로 헌법에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자유시장경제’라고 명시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박정희 헌법’은 이전의 헌법을 ‘전부’ 개정하여 ‘경제’ 관련 세 가지 조항을 새롭게 도입했다. 이 가운데 여기서는 제111조 제①만을 이야기한다. 이를 다시 인용한다.
“제111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인용한 ‘박정희 헌법’ 제111조 제①항은 1962년 12월 26일에 개정된 후 현행 헌법(1987.10.29., 전부 개정)까지 글자 한 자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이 조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 또는 경제체제는 ‘자유시장경제’임을 천명(闡明)한 것이다.
자유시장경제란 무엇인가?
그러면 ‘자유시장경제’란 무엇인가? 그 원리를 보자. 자유시장경제는 여덟 가지 원리가 바탕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것은 ①교환자유 원리, ②사적재산권 원리, ③자유기업 원리, ④경쟁 원리, ⑤인센티브 원리, ⑥자기책임 원리, ⑦작은 정부 원리, ⑦법치 원리. 이들 원리는 ‘박정희 헌법’의 제111조 제①항에 직·간접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경제 활동에서 ‘개인이나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가 바탕이 되는 경제가 자유시장경제인 것이다.
나는 ‘자유’ 가운데서 ‘개인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고, ‘기업의 창의’가 우대받는 자유시장국가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강조한다.
개인의 자유는 인류 발전의 원동력
개인의 자유는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인류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개인들은 자유의 토양 속에서만 자신들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개인들은 자유의 토양 속에서만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다. 자유의 토양 속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기업가정신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 예를 들면 종교계, 언론계, 학문계 등에서도 발휘될 수 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가 허용되고 우대받는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
빌게이츠는 개인의 창의를 발휘한 대표적인 기업가
빌 게이츠를 보자. 그는 “나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나름대로 앞날의 세계를 점치고 내가 옳다고 여긴 방향에 나의 미래를 걸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판단은 옳았다”고 썼다.3) 그는 소프트웨어 ‘윈도우’를 개발하여 세계 사람들이 인터넷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했고, 1994년 이후 사실상 세계 1등 부자이고, 부부가 함께 ‘빌 & 멜린더 게이츠재단’을 세워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이 베풀어 오고 있다. 빌 게이츠는 개인의 자유가 허용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고, 역사상 대표적으로 창의성을 발휘한 기업가다.
한 마디로, 미국의 힘은 개인의 자유와 기업가의 창의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 살게 한다
인류의 사상 가운데 핵심적 가치를 개인의 자유에 두고 발전해 온 사상이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자본주의 발달에 힘입어 중세적 사회 특성을 근대적인 것으로 변혁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 후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은 개인의 자유 보장에 필요한 제도 도입의 기반을 마련했고,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자유주의 발전과 개인의 자유 확대에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하여 지구의 약 3분의 1 지역에서 70여 년 동안 실험했지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탓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자유주의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발전해온 자유주의의 실천적 측면인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 같은 자유시장경제 이념을 헌법에 최초로 명시함으로써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비전을 가진 통치자다.
박동운의 박정희의 비전 - 조선일보 2017.05.31
각주
1) 박동운(2015), 『대한민국 가꾸기』, 선.
2) 공병호(1996),,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자유기업원.
3) Gates Ⅲ, William H.(1995), The Road Ahead, Microsoft Press.
4 최규하(崔圭夏) 1919.7.16 - 2006.10.22
10대 1979.12.21 - 1980.8.31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 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된 이후, 정부수립 후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외무부로 발탁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말레이시아 대사로 임명된 후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며 귀국 이후 1967년에 외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장관으로 재임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 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됐다.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10월 27일부터 1979년 12월 5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1979년 12월 6일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군부 실권하의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그의 대통령 재직 시기에는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재직 초반부터 하나회가 반란을 일으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에는 민주화 시위가 터지기도 했다. 서울의 봄 이후에도 계속 통치하다가 1980년 8월 16일 대통령 직에서 퇴임했고 퇴임 후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은 이승만 다음으로 최규하가 꼽힌다
출생과 가계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현,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836-2에서 최양오(崔養吾)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효경〉 등을 시작으로 하여금 〈소학〉·〈논어〉·〈맹자〉·〈대학〉·〈중용〉·〈통감〉 등을 읽었다.
1928년 3월 10세 때 원주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1932년 2월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한문과 예절을 배우는 가정학습은 계속되었다. 1932년 3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4학년 때인 1935년 11월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洪炳純)의 세째 딸 홍기(洪基)와 결혼을 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원주를 떠나 서울로 상경하여 학교를 다녔다. 종로구 단성사 뒤 봉익동의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한다. 사교성이 좋은 민관식은 최규하가 사는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1937년 2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33기로 졸업했다. 그의 경성제1고보 졸업 동기생은 이영섭 대법원장 등이 있다. 낙제를 하여 1년 유급되어 복학생이 된 민관식은 최규하와 함께 졸업장을 받았지만 그의 고교 1년 선배였다. 후일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 그의 동창인 이영섭은 대법원장이었고, 졸업 동기인 민관식은 국회의장 직무대행 자격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어학 실력에 뛰어났던 그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했던 이승만 다음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대통령으로 꼽히기도 한다.
교육 활동과 공직 진출
그 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해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 2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3월 만주로 건너가 만주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2월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에 취임하여 교단에 섰다. 서울대 사대 교수로 재직 중 1946년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면서 공직에 투신, 농림행정에 종사하게 됐다. 1947년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이 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는 농림부로 보직되어 양정과장이 되었으며,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됐으며,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농림부차관 정흥구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외국어 구사능력과 국제회의 대표로서의 활동력을 인정받아 인재의 적재적소 보임을 주장하던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 의해 발탁됐다. 이후에는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집을 마련했는데 짧은 청와대생활 외에 계속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있던 그의 생가는 그가 1994년 원주시에 기증하였고, 원주시립박물관 부지가 되었다.
공직 생활
일본 대사관 생활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재직 중 1951년부터 1952년까지 ECAFE 무역진흥회의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왔다.1952년 7월 17일 도쿄의 주일대한민국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하여 1957년 5월 16일 주일한국대표부 참사관(參事官) 등을 지냈으며, 그해 12월에는 재일교포체육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4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제4차 한일회담의 한국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나 배상액수에 대한 한일 양국간 입장차이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59년 3월 20일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ECAFE) 제11·12·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그 해 귀국하여 1959년 9월 12일 외무부차관이 됐다. 1960년부터는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하다가 4·19혁명 후인 1960년 5월 12일 외무부 차관직을 사임했다
군사 정부에 참여
1960년 6월 3·15 부정 선거에 관련되었나 여부에 대해 경찰의 수사대상에 올랐으나 혐의 없음으로 밝혀져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당 내각의 각료라 하여 1961년 1월 공민권 제한 대상자의 한 사람에 선정되고 그해 2월 재수사를 받았지만 혐의없음 처리 되었다.
1962년 1월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5.16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인 1961년 8월에 김종필은 민정인수 구상의 하나로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화당 사전조직은 박정희의 재가를 얻은 김종필의 새 정당 창당구상 연구팀으로, 책임자는 예비역 육군중장 최영두이고, 윤천계(고대), 김성희(서울대), 강상운(중앙대) 교수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유호선, 김정렴,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62년 1월 이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종로 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1962년 아시아반공연맹 총회에 참석하여 민족반공연맹임시총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반공연맹 총회에 다녀온 뒤 외무부장관 고문으로 복귀하고1962년 7월 새로 개최되는 한일회담의 고문이 되었다. 1963년 외무부 본부 대사를 거쳐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됐으며,1964년 주말레이시아 한국 대사(1964년 11월 ~ 1967년 6월)를 지내고 귀국하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됐다.
외무부 장관 시절
그는 직접 외국을 다니며 외국을 상대로 북한측과 외교 논전을 벌였다. 당시에는 북한과의 외교전이 한창이라 외무장관들은 스스로 해외에 나가 유엔에서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담판을 짓는 일이 흔했다. 이때 최규하 외무장관은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외교 전쟁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장관으로 재임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1968 제19차 콜롬보계획자문위원회 각료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때 자문위원회 각료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9년 6월 2일 미국의 패카드 국방차관을 만난 뒤 6월 3일과 6월 4일에는 연례 한미 국방각료회의에 참석하였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무총리 서리와 총리 재직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 했다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에 기용되었다. 박정희는 그의 '과묵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부족한 점을 높이 평가해 그를 국무총리로 발탁했다'고 한다. 1977년 7월 25일 및 26일에는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제10차 안보 연례협의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최규하는 서종철 국방부장관, 해롤드 브라운 미국 국방부장관, 노재현 대한민국 합참의장, 조지 에스 브라운 미 합참의장, 그리고 양국 정부의 고위외교 및 국방관리들과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1977년 7월 26일에는 해롤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이 찾아와 면담하였다. 이어 제10차 한미안보연례회의에 국방부 장관 서종철, 합동참모본부의장 노재현을 데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선출됐다. 국무총리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1979년 6월 30일과 7월 1일 한국 대통령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간에 한미정상회담이 서울 청와대에서 개최되었다. 최규하는 당시 한국측 각료의 한 사람으로 배석하였다. ] 이 회담에 한국측으로부터는 최규하 국무총리, 박동진 외무부장관,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용식 대사가, 그리고 미국 측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 지브류 브레진스키 국가 안보담당 보좌관, 리처드 홀부르크국무차관보 및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가 배석하였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피습을 받고 살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직무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받았다. 비상국무회의에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10.26 사태 전후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박정희가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날 11시의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유고를 발표한다. 박정희가 살해당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최규하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유신 헌법을 따라 대통령을 뽑은 뒤 개헌하겠다는 정치 일정을 발표하였다.
10월 27일 새벽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그는 박정희 피살사건의 조속한 수사를 명령하고, 10월 28일 비상회의에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10월 27일자로 소급해임했다. 육군대장 정승화가 계엄사령부 사령관이 되었고, 육군소장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 11월 3일암살된 박정희의 빈소에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명칭 변경)을 추서하고, 국장(國葬)을 결정, 박정희대통령국장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국장을 주관했다.
처음에는 차지철로 보고받았다가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범이라고 보고받은 최규하는 10월 28일, 전날 부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장직을 면직하고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하여 수사를 지시한다.
학생 운동 세력의 시위
1979년 11월 서울 학생 운동가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는 시위가 터져나왔다. 최규하는 계엄령을 풀지 않고 지켜보았다. 1979년 11월 24일 재야 세력들은 국민 대회를 열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재야 세력들은 당시 상황을 10년 넘게 각계 각층 민중이 고난에 찬 반독재 투쟁을 벌인 결과로 보면서 참된 국민의 합의에 기초를 둔 민주 헌정을 서둘러 출범시키라고 요구하였다. 최규하는 유신 잔당으로 몰리면서도 당분간 방침에는 변화가 없을 것임을 선언하고 10.26 사건에 대한 수사에 전념하였다.
1979년 대통령 선거
대통령 박정희가 김재규 의사에 의하여 피살된 후, 권력공백에 따라, 우선 헌법 제48조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현행 헌법을 존속시키면서 제8대·제9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11월 6일 최규하는 유신 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이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한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 윤보선은 즉시 그에게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윤보선의 부탁에 대한 답변은 회피하였다.
최규하의 담화가 나오자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11월 12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히고, 민주헌법을 3개월 이내에 제정하고 빠른 시일 내에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에 대한 응답을 회피하였다.11월 13일 동아, 조선투위 등에서도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11월 22일 서울대생들도 조기 개헌,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1월 24일 서울 YMCA 강당에서 4백여 명이 집회를 갖고 '통대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을 발표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통대)에 의한 체육관대통령 선출을 강력히 비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 국민의 적극적 참여로 헌법을 확정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함석헌, 윤보선, 백기완 등이 참여하였으나 경찰의 연행으로 저지되었다.
당시 헌법 때문에 야권의 입후보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무소속인 최규하가 단독으로 출마하였고, 12월 1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96.7%(2,465표)의 득표율을 얻고 당선되었다. 특이한 점은 무효표가 무려 84표나 나온 것이 특징이었다.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2월 6일 통대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의결하였다. ] 12월 10일 최규하는 총리직을 사직하고 신현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이후 12월 21일 취임식을 갖고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12.12 사태
최규하가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10.26사건을 수사중이던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는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10.26 사건 당일 사건현장에 있었으며 사건발생 전후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와 상황에 대한 협의가 있었음을 파악하고 12월 12일 오후에 정승화 체포작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와 관련된 일련의 상황을 12.12사태라고 한다.
12.12사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전두환 합수부장이 오후 06시에 올린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건의 재가를 미루었는데 결국 최규하 대통령의 결재는 정승화가 체포되고 노재현 장관이 나타난 이후인 12월 13일 오전 05시 10분에 사후 승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한남동 국방장관 공관 옆에 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공관에서 12월 12일 오후 07시 20분경 총소리가 나자 바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신하였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자신은 육군본부, 한미연합사 사령부 등으로 피신다니다가 12월 12일 오후 10시 10분 한미연합사 상황실에서 최규하 대통령과 통화가 이루어지자 대통령이 들어오라고 지시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후 김영휴 국방차관 등의 거듭된 대통령 면담 권유에도 움직이지 않다가 12월 13일 오전 03시 50분경 국방부로 노재현 장관을 찾으러 간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설득에 의해 최규하 대통령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대통령 재임시
집권 초기
1979년 12월 21일 취임식을 갖고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국론분열 방지와 정치안정을 강조했다. 12월 21일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이틀 후 긴급조치 관련자 561명이 특별사면되고, 1,330명이 석방되었다. 또한 제적학생 759명이 복학되고, 해직교수 19명이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유신 정권의 국무총리였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된 만큼, 그의 정권은 정당한 정권으로서의 권위를 누릴 수 없었다 또한 최규하는 공직 생활 중에 독자적으로 자기 세력, 자기 파벌을 형성하지 못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최규하는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사실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 의해 퇴임할 때까지 허수아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제4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이 된 최규하는 비상조치를 해제하면서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새 정부 출범을 국민들에게 약속하고 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8개월만에 사임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최단기 집권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1980년 2월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한다. 그는 이한빈 등을 발탁하여 경제부처를 운용케 했다. 1980년 상반기에는 국제 원유가 인상 등으로 소비자의 물가의 상승률이 30%에 달했다. 1980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경식대훈장,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경식대훈장을 특별히 선물로 수여받았다.
그는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장기집권을 하던 박정희의 암살로 국민들은 유신헌법의 폐지를 통한 민주화를 원했다. 국가원로들과 전 대통령 윤보선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 체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선거로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조치를 해제해 금지됐던 헌법 개정 논의를 허락했다. 한편 그는 경호수행 절차를 무시하거나 행사 시 곧잘 엉뚱한 행동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권 없는 대통령
그러나 하나회와 신군부 등 일부 정치군인들이 12.12 군사 정변을 일으키면서 국방부 고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붙잡아 감금시키고 군부를 장악한 뒤,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은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생존한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이 의장으로 피선됐다. 1980년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수여받았다. 2월 29일 최규하는 윤보선, 김대중 등 재야인사를 687명을 복권했다.
1980년 4월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최규하는 전두환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직함은 대통령이었지만 실속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내각에서 조차 자신의 뜻을 제시하지 못했다. 내각이 구성된 지 두 달 가량이 지날 즈음부터 청와대에서 장관들 얼굴을 보기 조차 힘들어졌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할 무렵에는 청와대에는 인적이 그쳐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나마 최규하가 장관들을 불러 회의를 한 것은 몇 안되었으며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위한 대책회의 등 몇 개가 채 되지 않았다.
전두환과의 갈등
1980년 4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고 국보위의 부위원장을 하면서 사실상의 집권자 역할을 하자 전국 각지에는 학생들의 데모가 발생했다. 5월 1일부터 15일간 전국의 대학생들은 서울역 광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했고, 16일 민주화 요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대학생들은 해산했다.
1980년 5월 신군부는 집권시나리오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23] 5월 16일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국수습방안'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최규하는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에게 "헌정질서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 한번으로 족하다. 모든 일은 법테두리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여 신군부측의 `시국수습방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했지만, 군부의 잇따른 강요에 5월 17일 오후 일단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방안만 받아들였다.
5월 18일 정오 신군부는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군병력으로 점거해 폐쇄했다. 김종필, 김대중, 김진만 등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여 보안사로 연행했고, 이어 김영삼, 이철승, 이민우, 유치송 등을 가택연금에 처분했다. 이는 5월 18일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서울의 봄 시기에 학생운동권에서 최규하 책임론이 제기됐다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고려대학교 회장이었던 신계륜은 "최규하 쪽이 문제가 아니다. 군부가 문제라고 봤다. 라고 반박했다.
신군부의 권력 장악
1980년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상무대에 와서 담화문만 발표하고 사태 수습을 외면하고는 서울로 되돌아갔다. 26일 오후 6시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 주영복 등을 대동하고 광주에 왔으나 전남,북 계엄분소장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뒤 상대방 쪽은 면담도 하지 않고 형식적인 담화문을 밤 9시 KBS 방송으로 내보냈을 뿐이었다. 그날 밤 10시에 속히 서울로 되돌아왔다.
5월 27일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이 됐다. 신군부는 권력 접수 시나리오대로 국가비상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5월 26일 최규하에게 재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규하는 이들의 비상기구 설립 요구를 회피하며 하루 동안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것이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됐다. 국보위는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 였다.. 광주민주항쟁 이후 전두환 등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토록 했다.
최규하는 이를 두고 오래도록 고민하였다. 한편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은, 박정희의 전례에 따라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역한 다음 유신체제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최규하는 일년 사이에 전두환의 어깨에 두 별을 달아주었다.
1980년 7월 30일 경기도 수원의 새마을 연수원을 시찰했다. 1980년 7월 30일 신군부의 부탁을 받고 김정렬은 청와대로 찾아가 최대통령과 5시간 담판을 하여 최대통령을 하야를 요구했다. 8월 16일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퇴임
8월 16일 대통령직과 일체의 공직을 모두 사임했으며, 대통령 권한대행은 총리서리인 박충훈이 임시로 맡게 되었다. 전두환이 1980년 9월 1일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때 새 대통령 취임식장에 최규하 내외가 초청되었는데 그의 부인 홍기 여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1981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기금을 기부했다. 1985년 1월 17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낙준의 추모 예배에 참석했다. 87년 6·29선언 이후 12.12와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에 출석, 증언하라는 야당과 국민여론의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진술을 거부했다.
1988년 이후 10월 전두환이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자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을 다시 맡았다. 그해 11월 국회에서는 5공 청산을 이유로 최규하의 국정 증인 채택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최규하는 출석을 거부했다. 1988년 11월 19일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과 최규하의 국정 증언은 회피했지만, 전두환 형제 등을 비리 혐의로 구속했다. 전경환 처벌과 전두환 백담사행을 빌미로 그에 대한 증언 출석 요구는 철회되었다.
1991년 이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제3대 의장을 지냈다.
민간 정부 시절
한편 1989년 12월 삼청교육대 피해자인 이택승 등으로부터 고소를 당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이택승 등은 1989년 12월 최규하, 전두환, 이희성,김만기(당시 국보위 정화분과위원장) 등을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뒤인 1992년서울지검으로부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받았다.
1993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로부터 의장 연임 건의가 들어왔으나 사양하고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을 후임으로 내정했다.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명예의장에 추대되어 2006년까지 재임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로부터 신군부가 사법처리의 대상에 올라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지만, 이때에도 그는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했다.
1999년 6월 최규하는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사망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467-5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오전 7시 37분에 사망했다. 향년 88세였다.
생전 그의 엄격할 정도의 청렴함은 서거 이후에 월간조선 등을 통해 알려졌다. 1973년 서교동 사저로 이사한 이후 서거할 때까지 연탄을 사용했다. 국무총리 시절 강원도 장성광업소에서 광부들과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즐겨 신던 태화고무신은 밑창이 달면 고무타이어 조각을 붙여 신었고, 청와대 시절 사용했던 가구를 폐기하지 않고 사저로 가져와 사용했다. 지독히도 무더웠던 1953년 갓 태어난 셋째딸(최종혜)을 위해 장만한 나쇼날 선풍기 또한 2006년 서거할 때까지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주황색 플라스틱 재질의 이쑤시개 또한 닦아서 계속 재활용하였고, 달력 뒷면을 오려 이면지로 이용하였다. 안경 또한 그의 청렴함을 대변해주는 소재다. 연지색의 로이드 뿔테 근시 안경은 화동 경기고 재학 시절부터 외무부차관을 재임한 1960년까지 사용하였고, 이후 말레이시아 대사 시절부터 대통령 사임에 이르기까지 반뿔테 근시 안경과 뿔테 원시 안경을 겸용하였다. 사임 이후 서교동 시절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부터 사용한 반뿔테 근시 안경(현재 초당대학교 안경박물관 소장, 안경다리가 부러짐), 서거 전까지 사용한 반뿔테 근시 안경 등이 그것이다.
사후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루어졌으며,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이 참여했다.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 생가는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소재하며 현재는 원주역사박물관내에 있다. 2010년 12월 3일 그가 다녔던 원주초등학교에 최규하 기념관이 세워졌다
2012년 10월 2일 최규하 기념사업회가 강원도 원주에서 조직되었다.
논란과 의혹
진술 거부 문제
그는 오랫동안 12.12나 5.18에 대한 증언 진술을 거부하였다. 그는 진술 거부에 대해 '그 사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 이라며 진술 거부의 이유를 피력하였다. 그가 침묵과 인터뷰 거절, 면담 거절로 일관하자 당시 만화에서는 그가 손으로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것을 풍자하여 최규하 요가연구소 개설 이라는 풍자만화들이 나돌기도 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논란
제10대 대통령 재임 당시 스스로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해 논란이 있다. 특히 친일 행적이 의심되어 논란이 가중되었다.
대통령 하야과정 논란
1980년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는 과정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최규하가 대통령 재임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김정렬에게 부탁하여 김정렬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 하야를 종용했다는 의혹도 있다. 최규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았던 신현확 전 총리는 1995년 12월 16일 검찰 진술에서 "81년 김정렬씨에게 최대통령에게 하야를 적극 권유한 사실이 있다고 분명히 들었다"고 진술했다. 실제 김정렬씨는 최대통령이 설악산으로 하계 휴가를 떠나기 직전 청와대를 방문하여 그와 독대하였다.
5 전두환(全斗煥) 1931. 1.18 -
11대 - 제12대 1979.12.21. - 1980.8.31.
2013.08.21 전재국의 '한없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1980년 10월 1일 조선일보에 특이한 글<사진>이 실렸다.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필자는 3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례적인 글을 기억하고 있다. 전두한(剪頭漢·머리 자르는 자―당시 대학생들은 전두환을 그렇게 불렀다)의 아들이 쓴 글이었다. 그때 필자의 느낌은 이랬다. 이 혐오스러운 인물에게도 자식이 있구나, 그 자식이 나와 동갑인 대학생이구나, 그 자식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구나…. 그 아들의 이름은 전재국이었다.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 문제가 다시 불거진 뒤에 갑자기 재국씨가 썼던 그 글이 생각났다. 조선일보 인터넷 사이트에 그 글이 남아 있었다. '젊은이 발언대'라는 코너에 실린 글의 제목은 '한없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해당 기사 PDF 보기)였다.
재국씨는 대학 교정에서 벌어진 '剪頭漢 화형식'을 지켜본 심정을 썼다. 모멸감과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지만 담담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집에는 늘 일찍 들어가 대학생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고 썼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도 욕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소리도 했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 추징금 때문에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재국씨일 것이다. 아버지는 고령이고 자신은 장남이다. 재산도 재국씨가 제일 많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재국씨가 33년 전에 자신이 썼던 그 글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읽어 보았으면 한다.
재국씨 글에 따르면 12·12 사태가 난 그 겨울날 밤, 전 전 대통령은 집을 나서며 가족에게 "나는 시골 빈농에서 태어나 군 장성이 되었으니 내 인생에 결단코 후회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시골 빈농 출신이 죽어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성공했는데 무엇이 아쉬워 돈 때문에 이 치욕을 당하는가.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순간에 아내와 자식들을 바라보며 했던 그 생각으로 돌아간다면 이 모든 문제는 한순간에 끝난다. 재국씨는 "이제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아집과 사심 없이 국가에 봉사하시길 바란다"고 글을 맺었다. 그런데 지금 전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게 남은 것은 아집과 사심뿐인 것으로 보인다.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1980년 10월 1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재국씨는 1980년 4월에 전 전 대통령이 술 취해 집에 돌아와 울었다고 했다. "네 친구들이 내 화형식을 한다며…"라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는 것이다. 재국씨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 눈물의 뜻을 평생 헤아려 보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 맹세한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린다면 벌하여 주십사 하고." 재국씨는 그때의 그 맹세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1년 전에조차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도 어쩌다 보니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신을 향한 국민의 분노를 보고 아들 앞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대통령이 되어서 돈을 많이 받고 나중에 그 돈으로 떵떵거리며 잘살아야겠다는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도 국민으로부터 분노의 대상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식들까지 욕을 먹게 하겠다는 것도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재국씨는 그 눈물의 뜻을 평생 헤아리며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 맹세를 다시 떠올리면 몇천억 재산은 한낱 종잇조각일 뿐이다.
지금 전 전 대통령에게 '당신의 인생은 무엇이었나?'고 물어보면 "대통령이었다"고 하기보다는 "군인이었다"고 답할 것 같다. 재국씨와 필자가 젊었던 시절 자주 불렸던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있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라고 부른다.
최근 만난 한 현역 군인은 재국씨 얘기가 나오자 "군인 아들이 어떻게 부자냐?"고 했다. 군인 아들도 사업을 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재국씨는 한 군인이 던진 이 소박한 의문에 담긴 뜻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 의문은 재국씨에게 '당신은 자랑스러운 군인의 아들이냐'고 묻는 것이다. 좋은 옷 맛난 것을 탐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하루빨리 형제자매가 모두 모여 전 재산을 조건 없이 국가에 헌납했으면 한다.
이 상황에서 비자금으로 번 돈이다, 아니다를 따져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법을 어긴 것이 있다면 처벌도 받겠다고 했으면 한다. 재국씨가 33년 전에 스스로 맹세한 대로 그 눈물의 뜻을 잠시 잊었던 것에 대한 벌로 생각했으면 한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 86세가 넘었다. 그 모든 사태와 사건을 뒤로하고 늙은 군인으로 돌아가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라고 노래했으면 한다. 그래서 재국씨가 "나는 군인의 아들이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위원
2016.08.01 “전두환 전 대통령 고향이 전라도라고?”
▲ 2015년 6월 29일, 황교안 총리가 취임 인사차 예방할 당시의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최근 《조선일보》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뿌리가 전라도라는 기사가 나왔다. 강호 동양학자를 자처하는 조용헌씨 칼럼에서다. 글은 이렇게 시작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의 광주를 방문하고 싶어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성으로 파악하기 힘든 업보의 순환고리를 느꼈다. 추적해 들어가면 전두환의 뿌리는 전라도이기 때문이다. …〉
조용헌 “전두환 집안은 천안 전씨 대대로 전북 고부에 뿌리내려” 주장
조씨의 글을 더 인용해 보기로 한다. 〈천안 전씨(天安全氏)인 전두환의 집안은 대대로 전북의 고부(古阜)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진원지가 바로 고부 아니던가. 천안 전씨였던 전봉준(全琫準)이 앞장을 섰고 씨족사회였던 당시의 관습에서 전씨들은 동학에 적극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윗대는 전봉준과 같은 집안이었다. 증조부나 조부가 전봉준의 참모를 했는지도 모른다.
동학이 실패한 후 처절한 보복이 뒤따랐다. 일본군과 관군이 합동으로 동학 가담자들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참혹하게 살육하였다. ‘일본군이 동학 집안 사람을 죽여 창자를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동학 후유증으로 전라도의 뿌리가 해체되어 버렸다.
전두환 집안은 고부에서 살 수가 없었다. 일단 20리쯤 떨어진 전북 부안군의 줄포(茁浦)로 피신했으나 여기도 안전하지 않았다. 결국 섬진강을 건너 경상도 합천(陜川) 산골로 도망갔던 것이다. 동학의 중심지인 전북 고창(高敞)에는 고려 말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던 70여 개의 성씨(姓氏)가 있었으나 동학 이후에 약 70%의 성씨가 사라져 버렸다. 멸문(滅門)이 되거나 상대적으로 안전한 경상도로 도망가거나 성씨를 바꿔 버렸던 것이다.〉
조용헌씨 “전씨 일가 동학혁명 때 경북 고령으로 피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뿌리와 관련된 조씨의 글은 매우 단정적이다. 다음 부분을 보면 더 그렇다. 〈필자(조용헌)가 파악한 바로는 경북 고령(高靈)에 살고 있는 고창 오씨들도 이때 피신한 것이고 지금도 상주에서 천도교를 신봉하는 서묵개(徐墨价) 집안도 고창의 미당 서정주 집안이었지만 동학 때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동학의 김개남(金開南) 장군은 정읍의 도강 김씨(道康金氏)였는데 24명의 이 집안 동학 접주가 몰살당하였다. 후손 중에는 성씨를 바꿔 박씨로 살다가 1955년에야 다시 김씨로 복귀한 사례도 있다. 국회의장을 지낸 김원기, 정읍시장 김생기가 겨우 살아남은 ‘도강 김씨’들의 후손이다. 전두환은 정권 잡고 나서 동학군의 첫 전승지인 정읍 이평면(梨坪面)에다가 ‘황토현기념관’을 세웠다. 왜 전두환은 광주와 악연을 맺게 되었을까?〉
조씨의 글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 방법은 전 전 대통령측에 문의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이런 질문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안은 전 전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자료에서 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인데 의외의 해법이 나왔다. 1981년 1월 출간된 《인간 전두환-창조와 초극(超克)의 길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천금성씨로, 1941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뒤 선장을 지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돼 등단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그가 쓴 《황강에서 북악까지》는 용비어천가형 자서전의 전형으로 이런 스타일의 자서전을 써 달라는 요청이 다른 작가들에게도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 “천금성씨에게 온갖 인물 다 찾아와”
/소설가 천금성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에 전 전 대통령 집안 내력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을 펴낸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천금성씨는 광화문 인근 서린호텔에 머물며 집필을 했는데 찾아오는 이가 하도 많아 글 쓸 시간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전두환’이라는 새 권력자가 등장하자 너도 나도 전두환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책에 한 줄이라도 이름이 들어가길 바라는 군상(群像)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는 당시로는 구하기 힘든 비싼 양주를 수시로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때문에 《황강에서 북악까지》에 나오는 전두환씨 관련 이야기는 상당 부분 윤색되거나 미화된 것인 데 비해 전두환씨 집안과 관련된 팩트(fact)는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 본인은 물론 여러 사람의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 책 33페이지에는 전두환씨의 부친과 장인이 우연히 만나 나누는 대화가 나온다. 여기에 바로 전두환씨의 집안 내력이 나오며 이것이 조용헌씨가 제기한 ‘전두환의 고향은 전라도’라는 설에 대한 답이 될 듯해 그대로 인용해 본다.
〈전두환의 장인(이하 장인)-“여보게 젊은이 길 좀 묻세.”
젊은이(전두환의 부친)-“천지못(합천 황강 근처)으로 가시는 어르신들이시지요? 제가 모시지요. 저도 마침 산 위 삼나무 밭에 나가신 어머니에게 가는 길입니다.”
장인-“젊은이의 이름자는?”
젊은이-“저는 완산(完山) 인왕 전씨인 중시조 집(潗)자 어른신네의 22세손이 되는 상우(相禹, 또는 相祐)입니다.”
장인-“완산 전씨면 완산 전씨지 완산 인왕 전씨라니?”
젊은이-“사람들은 대개 완산 전씨라고 하면 들 입(入)자 아래 임금 왕(王)을 넣어 씁니다(全). 그러나 완산 전씨의 전은 사람 인(人) 아래 임금 왕을 넣어 써야 합니다.온전 전과 인왕 전은 다릅니다.”
장인-“그럼 시조 어른께서는 뉘신지?”
젊은이-“시조 집자 어르신네는 도시조(都始祖) 섭(聶)자 어르신네의 30세손이십니다. 도시조께서는 백제 온조왕의 공신입니다. 중시조 섭자 어르신네는 고려 공민왕 때 중랑장으로 계실 무렵 홍건적을 소탕한 공로로 삼중대광첨의 문하시중 평장사에 오르시고 완산군에 봉해지시면서 완산 인왕 전씨의 중시조가 되셨습니다.”
“고려 망하자 완산 전씨가 경상도로 이주했다”
/1982년 4월 10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생가를 방문했다
장인-“그래 어느 대부터 이 고을에 자리를 잡았는가?”
젊은이-“(합천) 내동에 자리 잡은 것은 이조 첫 무렵이니 500년이 좀 넘었습니다. 스무 대째입니다. 고려 왕조가 쓰러지고 이씨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조 때 경상도 목사였던 사(思)자, 흠(欽)자 어르신께서 애매한 정화(政禍)에 헛되이 목숨을 잃을까 보아 은거하시기로 하고 고령(高靈)고을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 뒤 좀 더 깊은 지방에 은거하시는 것이 나을 듯싶으셨던지 바로 이 앞 황강 너머 쌍책면 하신리로 옮기셔서 번성하셨다 합니다. 이씨 조선의 기틀이 잡히고 모진 바람이 사라지자 집안은 다시 번성하여 치(致)자, 원(遠)자 어르신네는 기사관(記事官)을 지내셨습니다. 바로 이 조상께서 내천리 천지재의 천지못을 보시고 이곳 앞들이야말로 터를 잡을 곳이라고 말씀하시며 황강을 건너오셨다고 합니다. …”〉
이것을 조용헌씨가 제기한 ‘전두환 고향 전라도설’에 대한 답이 될 것으로 보고 이후의 대화 인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월간조선 2016년 8월호 / 글=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2017-03-24 자서전 낸 전두환 前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22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동아일보-채널A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78)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청와대에서 나온 1988년 2월 이후 약 30년 만이다. 동아일보-채널A는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출간한 그를 22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회색 투피스 정장 차림에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온 그는 건강해 보였다. 2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세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마지막 인터뷰를 한 지 30년도 넘어 떨린다”고 했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이야기를 죽 이어갔다.
인터뷰가 진행된 접견실은 5공화국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한쪽 벽면 전체는 전 전 대통령의 취임사를 담은 대형 액자로 채워졌고, 반대쪽 벽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부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2세와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책장에도 그 시절의 사진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는 “역사 속에서 당사자들의 얘기를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자서전 발간 취지를 밝혔다. 이날 인터뷰에선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대한 질문도 이뤄졌지만 이 여사의 답변은 사실 확인이 필요한 일방적 주장일 수 있어 기사에는 담지 않았다.》
○인터뷰=강수진 편집국 부국장
―전 전 대통령은 자서전 보고 뭐라고 하던가.
“‘아따, 기억력 좋다’고 하더라. 원래 상중하권으로 했는데 출판사 하는 아들(큰아들 전재국 씨)이 ‘어휴, 어머니 남의 얘기 다 보려면 지겨우니까 좀 줄이세요’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대통령께서 탄핵되고 탄핵 문제로 수개월간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돼 안타깝다. 여성 대통령으로서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쳤으면 했는데 잘잘못을 떠나 아쉽다.”
―2013년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한 것에 대해 “어떻게 박정희의 딸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나”라고 책에 썼던데….
“우리가 존경하고 모셨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이 그렇게 했다는 것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나는 진짜 죽으려고 했다. 이렇게 몰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보복 심리도 있었다.
둘째 아들의 이혼한 전처 집까지 가서 돈 될 만한 것을 다 가져갔다. 가져간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게 비자금과 관계있는 건지 실사는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노역장 유치 중인) 둘째 아들 면회는 자주 가나.
“한 번 갔다. 자주 못 간다. 눈치 보이고 하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는 전 전 대통령이 혼자서 찾았는데 일부러 안 간 건가.
“빈소 같은 데는 보통 남자만 가지 않나? 평상시 부부 동반해서 모임 했던 것도 아니니까. 감정 표현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서전과 인터뷰 도중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이 언뜻언뜻 보였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제일 편안하게 살았던 것 같다. 매 분기 전직 대통령을 청와대로 불러주셨다. 얘기를 전할 수 있는 언로를 터주시고. 우리 집 양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어떤 말씀을 하셨나.
“전직 대통령 모였을 때 전 전 대통령이 계셔서 분위기가 좋았다든가, 자식들을 잘 키운 것 같다든가. 전 전 대통령은 남자답다는 얘기를 했다고도 들었다.”
―이희호 여사에 대해 존경한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설, 추석 그이 생일, 내 생일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난하고 장뇌삼을 보내주시는데 꼭 사인을 한 편지를 주신다. 전직 대통령 부인으로 본받을 점이라고 생각한다.”
―김옥숙 여사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책에 썼던데….
“그 대목은 백담사 갔을 때가 서운한 게 클라이맥스였으니 그렇게 썼고,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최근에도 (김옥숙 여사가) 다녀갔다.”
자서전에는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후 두 부부끼리 만난 축하 자리에서 김옥숙 여사가 싸늘하게 “민정당이 얼마나 인기가 없던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고 말해 놀랐다고 썼다. 그는 ‘40년 지기’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를 ‘애증관계’라고 표현했다.
“두 분이 바둑이라도 두고 다시 친구가 되면 얼마나 좋나. 그러나 편찮으셔서 우리가 간들 아나, 온들 아나. 속상하다. 어휴,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야.(웃음)”
―사치스럽고 나서기 좋아하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땐 코디니 뭐니 그런 것도 없었다. 소장 아내 하다가 마흔두 살에 갑자기 청와대 들어가 힘들어 6개월 사이 6kg이나 빠졌다. 너무 말라서 양장을 하면 대통령 부인 같지 않아 한복을 입었는데 하필 그때 컬러TV가 나와 너무 화려하게 보였다.”
―당의(唐衣)도 입었던 모습이 기억난다.
“전문가 말 듣다 망한 케이스다. 미국에 나갈 때 이화여대 의상학과 교수한테 의뢰했더니 당의를 입으라고 해서…. 내 돈 내고 산 옷인데 아까워서 계속 입었더니 하루는 김경원 비서실장이 ‘영부인님, 그 옷 입으시니 일어날 때 뒤가 구겨지니까 안 입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아, 말이 많구나’ 싶어 그 다음부터 안 입었다.”
자서전에는 전두환 정권을 흔든 장영자 사건도 언급했다. “당시 미안해서 별거까지 생각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장영자 사건을 알아보라고 했는데 거꾸로 피해를 봤다. 그 사건 이후로 별의별 악성 소문이 다 돌았다. 내가 장영자와 빨간 바지를 입고 빨간 모자 쓰고 강남 부동산을 보러 다닌다고 하고. 전 전 대통령과 별거까지 생각했다. 민심도 좀 안정되고 경제도 목표치에 가고 있는데 엉뚱한 데서 발목을 잡으니 내가 남편 볼 낯이 있었겠느냐.”
내란죄로 금고 이상의 실형이 확정된 사람은 전직 대통령이라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 전 전 대통령은 이후 사면·복권됐지만 이에 대한 규정이 없고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사후 국가장(葬)이 치러지면 안장 자격이 주어진다.
―국립묘지 안장에 대해선 아직 국민적 저항이 있다.
“사후에 어디로 가느냐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사치다. 옹졸해서 안장을 해주지 않는다면 달리 방법은 없다. 그 양반은 ‘만약에 그렇게 되면 나를 화장해서 이북이 보이는 곳에 뿌려 달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과거 ‘전두환 표창장’을 받았다고 해 논란이 됐는데….
“그이가 대통령 되기 전의 일이고. 표창 받은 사람은 그 당시 뭐든 잘했기 때문에 전 아무개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받은 거다. 그걸 가지고 전 아무개가 줬으니까 집어던져야 한다는 것은 편협한 생각 아닌가.”
이 여사의 자서전에 이어 4월 초에는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될 예정이다. 1200여 쪽 3권 분량의 이 책이 나오면 이들 내외는 다시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설 것으로 보인다.
―전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부분도 담기나.
“물론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고 솔직하게 썼다. 그이가 (퇴임 이후) 30년 동안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전혀 없다. 그 책이 나가면 오해가 다 풀릴 것이다.”
▼ 자서전에 어떤 내용 담았나 ▼
12·12사태, 6·29선언 등 현대사 핵심사건 언급… 출판사 운영 장남이 줄이라고해서 719쪽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은 총 23장, 719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 여사는 자서전에서 전 전 대통령을 ‘그이’나 ‘그분’으로 지칭했다. 연애 시절 전 전 대통령이 ‘절교 선언’을 했던 일화도 자세히 소개했다. 박봉인 초급 장교 신분에 결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순자는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야. 나같이 무능한 사람 말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했다. 이 여사는 이를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받아들여 운명을 맡겼다고 적었다.
전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도 정작 개막식에 초청받지 못한 데 대한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5공 청산’ 분위기 속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둘도 없는 친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 여사가 눈시울을 붉히자 전 전 대통령은 “집에서 TV로 보니 더 잘 보이고 아주 좋은데 뭘 그러시오”라며 다독였다고 한다.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6·29민주화선언, 군사반란 및 내란죄 재판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도 이 여사의 관점에서 적었지만 논란의 여지가 커 보인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퇴진했다는 논란과 관련해 이 여사는 “오히려 최 전 대통령이 남편에게 후임이 돼 줄 것을 권유했다”고 주장했다. 또 “남편이 처음에는 고사하다가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당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지도력을 갖춘 사람은 전 사령관뿐’이라는 최 전 대통령 판단의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1996년 재판 당시 이 여사가 한 스님에게 했다는 발언도 국민의 인식과 괴리가 크다. 당시 5·18 희생자 224명의 영가천도(靈駕薦度·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 기도를 올려달라고 하면서 “저희 때문에 희생된 분들은 아니지만, 아니 우리 내외도 사실 5·18사태의 억울한 희생자이지만, 그런 명분이 그 큰 슬픔 앞에서 뭐 그리 중요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선 ‘악성 정치 보복’이라고 규정하며 “YS는 노 전 대통령에게 3000여억 원의 비자금을 받아 썼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YS의 차남 현철 씨는 “사실관계가 의심스러워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 국정
2016.05.06 全斗煥이 美國을 도와준 방식
1981년 2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탄 전세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기내 집무실에는 관계 부처에서 준비한 회담 관련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깐 뒤적거리다가 자료들을 덮었다. "세세한 의제(議題)는 실무자들이 알아서 잘할 테고…."
정상회담 상대는 취임한 지 열흘도 안 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은 초청받은 첫 외국 원수였다. 강대국들을 제치고 한국 대통령을 제일 먼저 만나는 것 자체가 빅뉴스였다.
전두환은 이번 회담 성사를 위해 비선(祕線) 라인을 가동했다. 정통성 취약한 5공(共) 정권이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서둘렀고, 수감 중인 김대중씨의 형 집행 면제(免除)를 해주는 대가로 얻어냈다는 설이 돌았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실상은 좀 다르다. 회담의 핵심 의제는 안보(安保)였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흔들리는 한·미 관계 복원에 있었다.
전임자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7년 취임하자마자 "향후 4~5년 내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를 통보해왔다. 요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등장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지 않으면"이라고 조건을 달았다면, 땅콩농장 주인 카터는 한국의 인권 상황을 거론했다. 카터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에 반기를 든 존 싱글러브 당시 주한미군 참모장은 즉각 해임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철군할 테면 해보라"며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최악의 한·미 관계였다. 카터와 박정희 간에는 인간적 반감도 깊었다.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나던 카터는 '이 자가 2분 안에 입을 안 닥치면 방을 나가겠다'는 쪽지를 건넸을 정도였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법안은 의회의 승인을 얻는 데 실패했다. 철군은 일단 보류 상태가 됐다. 몇 달 뒤 박정희는 시해됐고, 1980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는 낙선했고 레이건이 당선됐다. 전두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행(行)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그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꿀릴 게 없다. 레이건은 백악관 주인이 된 지 열흘도 안 됐다. 내가 회담을 이끌어갈 거다. 미국이 우리의 안보와 경제에서 결정적인 버팀목인 것은 분명하나 미국도 세계 전략상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비행기가 일본 상공을 지날 때 군(軍) 출신답게 그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계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어떻게 이런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됐나. 국제 공산 세력의 팽창 전략으로부터 한반도가 저지선이 돼준 덕분이 아닌가. 6·25의 특수(特需)까지 톡톡히 누리지 않았나. 따져 보면 일본의 평화와 번영에 대한 비용을 우리가 대신 지불해온 것 아닌가.
그의 상념은 현실적인 계산으로 이어졌다. '안보 무임승차를 해온 일본은 최소한 주한미군 2개 사단의 5년치 주둔 경비는 내야 맞다. 1개 사단 1년 유지 비용이 약 10억달러니, 모두 100억달러를 받아내자. 이걸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하자.'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그때까지 15년간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경협 차관(借款) 총액이 13억달러였다. 그런 마당에 그는 배짱 좋게 '100억달러 안보 협력 차관'을 구상한 것이다. 관료나 직업 외교관 출신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백악관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한국의 안보는 동북아 안정에 기여하고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소련은 극동 지역에 주둔시키고 있는 군대를 유럽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세계 전략도 수정될 수밖에 없다"라는 그의 설명에 레이건도 동의했다.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백지화됐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재확인됐다.
회담이 끝날 무렵 전두환은 "사실 이번 방문 목적은 갓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을 좀 도와드리기 위한 것"이라며 운을 뗐다. 미국 측이 관심을 보였다.
"한국은 GNP 600억달러의 6%를, 일본은 1조1600억달러의 0.09%만 국방비로 부담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은 동북아의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이 덕분에 일본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제 일본이 한반도 방위비의 일부를 부담하는 게 도리다. 일본을 설득해서 안보 차관을 받게 해주면 그걸로 국방력 강화를 위해 미국 비행기와 탱크를 사겠다.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겠나."
레이건은 "이견이 없다(No disagreement)" 며 큰 몸짓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2년 뒤 한국은 협상 끝에 일본으로부터 40억달러의 안보 차관을 받아냈다.
세간에는 부정적 이미지로만 먹칠 돼 있지만, 이런 전두환 케이스는 장차 트럼프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지도자는 어떻게 마음먹고 돌파해야 하는지, 어떻게 국면을 우리 국익에 유리하게 끌고 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미 있는 답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 12·12 사태의 진실
2014-12-11 12·12 실황… 장군들의 현장 육성 - 김성동 조선pub 기자
▲ 12.12무렵 서울시내에 진주해 있던 계엄군과 탱크/ 조선DB
12·12 사건 관련 장군들의 육성증언은《월간조선》 1995년 9월호에 실렸다. 12·12사건 당시 녹음된 장군들의 녹취록은 《월간조선》 본문에 게재하는 한편 녹음테이프는 같은 호 별책부록으로 발매했다. 국내 최초로 인쇄매체와 청각매체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필자는 녹취록을 입수한 우종창(禹鍾昌) 기자와 녹음테이프를 입수한 김기철(金基哲) 기자(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가 공동으로 해설과 정리를 맡았다. 이 호가 발행된 날 모든 방송매체가 12·12사건 당시 당황한 장군들의 육성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이 테이프는 12·12 당시 3군(軍)사령관으로 신(新)군부 측에 맞섰던 이건영(李建榮) 장군을 존경한 기무사 직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됐다. 그는 통화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를 듣다가 “병력 출동하지 말라”고 용감하게 외치는 이건영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그 테이프를 기념으로 이 장군에게 넘겼던 것이다.
인쇄매체와 청각매체가 결합한 《월간조선》 95년 9월호는 30만 부가 발행됐다. 군사반란의 물증이 된 이 테이프는 검찰의 12·12사건 재수사에 가속도를 붙게 하였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의 기폭제 중 하나가 됐다. 이 기사의 가장 큰 제목은 “아!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되는 건가…”이다. 12·12 발생 다음 날인 13일 새벽 2시 전두환 장군 측의 1공수여단이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진입한 후 장태완(張泰玩) 당시 수경사령관과 나눈 이건영 3군 사령관의 절박한 음성 녹취 내용이다. 녹취록의 내용만 200자 원고지 200장 분량이다. 다음은 12·12 사건 관련 장군들의 육성증언 기사 요약이다.
16년 만에 현장의 긴박한 분위기가 복원되다
《월간조선》은 최근 12·12사건 당시 보안사에서 신군부 측의 군사반란에 맞서 대항했던 육본 측의 통화내용을 감청한 녹음테이프를 극비리에 입수했다. 이 자료는 주로 3군사령부와 육본 및 예하 각 군단, 사단 지휘관들과의 통화내용을 담고 있다.
12일 오후 8시50분 윤성민(尹誠敏) 참모차장으로부터 육참총장 연행 소식을 전해듣는 순간부터 13일 오전 3군사령관이 국방부장관의 호출을 받고 국방부에 출두해 연행되기까지 약 10시간 동안 긴박하게 전개된 당시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는 녹음기록이다.
한마디로 12·12 군사반란(검찰 측의 법률적 판단) 실황 녹음중계라고 할 수 있다. 군사반란의 과정이 관련자들의 현장육성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육군본부 윤성민 참모차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 통화
(12일 오후 8시50분)
윤:에, 지금 혼선이 상당히 벌어지는데….
이:내 여기 부관한테 잠깐 얘기 들었는데 말씀 좀 하세요.
윤:그래서 7시40분경에 권정달 대령하고….
이:권영달?
윤:권정달… 권정달 정보처장하고 우경윤 대령.
이:우경윤?
윤:범수단장. 그래서 아마 총장님을 납치해 갔다 이렇게 됐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제 약간 확인해 보니까 그 안가(安家)사건 때문에 한번 조사하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다…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려봐야 사건 내용을 알겠습니다.
이:그렇더라도 총장님이 어떻게…. 그래서 내가 말이오, 지금 모든 부대들은 부대 이동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허가하기 전에는 동원하지 말아라, 그리고 검문소에다 전부 지시를 해가지고 총장님 싣고 가는 게 있으면 붙들어라. 그렇게 지금 헌병한테 지시를 해놨는데….
윤:총장님은 어디 가 있느냐 그러니까 보안사령관이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이:보안사령관이 그래요?
윤:예, 나하고 통화했습니다.
이:지금?
윤:예.
이:그럼 그렇게 뭐할 필요 없나요.
윤:예.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진돗개’는 그것을 취소하라고 했습니다.
이:난 아직 ‘진돗개’ 내리지 않고….
윤:예, 내리지 마세요.…
이:음.
윤:그건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지금 어디 계신 건 확실하구먼.
윤:예, 제가 지금 b-2 벙커입니다.
이:그렇더라도 장관님한테 허가도 안 받고 어디 그럴 수 있나….
윤:예, 지금 또 어디서 전화 왔습니다.
이:알았습니다. 전화받으시고.
윤:예, 들어가십시오.
3군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12일 오후 10시16분)
이:응.
장:그러니까 헌병감이 턱 들어오더니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총장이 뭐라고?
장: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렇게 탁 돼 가지고 그래 제가 확 나가면서 총장님 공관에 전화를 딱 걸으니까 공관의 경호대위 김 대위가 탁 나오더니 “사령관님, 지금 빨리 앰뷸런스를 좀 보내주고… 총장님이 피습당했습니다” 이렇게 아주 경황없이 이야기를 해요. 알았다, 그러면서 제가 전화를 딱 끊고 바로 거기서 제가 차를 몰고 부대에 들어오면서 바로 부대 출동 태세를 갖춰놓고 APC하고 병력을 총장 공관으로 우선 급파를 시켰지요. 그러고 앰뷸런스를 보내고 동시에 총장님을 빨리 구출하기를 이렇게 하고 그러고 지금 제가 여기 와서 대략 상황을 보니… 파악이 안 되는데 우선 총장님 문제만 생각해서 갔더니 거기 가서 보니 해병대 애들하고 우리 헌병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놈들이 우리 헌병 들어간 놈이 총장님을 피습한 건지 원래부터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해병대가 총장을 피습했는지 그건 모르겠는데… 아무튼 해병대가 우리 헌병을 그 안에 한 50명 있는 것을 포위해 가지고 마이크로 버스에서 안 내보내고 있어요.
이:우리 헌병이?
장:못 나오고 있어요.
이:해병 헌병 때문에.
장:해병 헌병이요, 우리 ○○니까.
이:응.
장:육군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났기 때문에 자기네는 무조건 안 내보낸다 이거죠. 그래 마침 해군 헌병감이 오고 이러는데…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와 있다… 이래서 나를 자꾸 찾는다 이래서 예감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지가 빨리 상황실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가지고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있다고 해서 전화를 바꾸니까 이미 오래된 것처럼… “왜 유 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예감이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 장 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 “이리 오기는 어딜 와. 당신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랄하고 있어. 쏴 죽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한테 전화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인데 왜 그래 이리 와…”, “아니 왜 이라십니까. 왜 그 우리 좋은 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 가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러면 내 죽여” 했더니 “차규헌이도 와 있고 다 와 있는데 마 이리 와…”, “무슨… 혼자 다 해먹어. 임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해놓고 바로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이:응, 그러면 말이야.
장:보니깐 조그만 이놈들이 장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화를 올리는 것은 총장님은 납치돼 가지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그라는데요. 참모차장하고 모두 저짝에서 전화가 오기를 “어떻게 됐느냐”, “어떻게 되긴 나는 딴 것 없다. 쳐들어간다. 30단이고 다 쏴 죽인다” 했더니… 그라면서 달라지는 무슨 연유가 있을 테니 하여튼 3군사령관님하고 상의를 하셔 가지고 나쁜 놈들 썩어빠진 놈들 사단이 들어오는 것 있으면 차단하도록 해주십시오. 서울 내부는 내가 하겠습니다. 이렇게 정병주 장군한테 제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거 우리가 같이 왔는데 임마들이 장난하는 건데… 당신하고 나하고 꾐에 빠진 것 같은데….”
이:그렇지.
장:“OK, 장태완이 무슨 소리 하느냐. 이놈의 새끼들 다 죽이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정 장군은 자기 부대에 돌아가 있나?
장:자기 부대 다 장악하고 있어요.
이:완전히 다 장악하고 있어요? 완전히 장악돼 있지.
장:예.
이:그럼 말이야, 30단이 장 장군 명령권 내에 있는 거 아니야?
장:그런데 거기에는 제가 자극을 안 하는데요. 거기에 몽땅 모여 있는 것 같은 데 말입니다. 그 새끼들 거기 모여 있으면 뭐합니까. 제가 단장한테 전화를 걸어가지고 이리 오너라 하든지 지시하든지…. 처음에는 단장보고 금마들 당장 쏴 죽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단장이 모두 그놈아들한테 누질려 있는 것 같아요.
이:그런데 현재는 말이야. 다른 30이나 33이나 부대동원에 대해서는 각각 지휘관들한테 내 명령 없이 출동하지 말라고 지시는 해놔 있어요.
장:지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그래서 여기선 부대는 하나도 동원 안 하는데 쌍방이 충돌이 없이 잘 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불상사가 생겨.
장:그까짓 거 충돌이고 뭐고 몇 놈 죽어도…
이:글쎄 잘못된 놈은 죽어도 좋은데.
장:하여튼 내부에선 제가 죽든 살든 할 테니까요. 사령관님은 바깥을 좀 해주십시오.
이:그렇게 해요. 이거, 뭐 좀 불순한 장난이 있는 것 같아.
장:예, 완전히 장난이라요. 전두환이하고 이놈아들이 모두 ○○해 가지고 장난인 것 같아요.
이:응.
장:그리고 여기도 보니까 단장들이… 몇 놈들이 자취를 감추고 없는데요. 그놈아들한테 전부 사전에 공작을 해서 한 모양인데…. 중대장들도 다 있고 참모장 다 있고 부지휘관 다 있기 때문에 완전히 장악하고 전차고 뭐고 다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알겠어요.
장:30단 하나 빼놔두고요.
이:그런데 그 육군상황실에 말이야 거기 지휘부에 합참의장님이나 장관님이 모두 계실 것 아닌가.
장:거기 보니까 국방차관 계시고요. 저하고 전화를 통했는데 말이죠. 그라고 그다음에 연합사 부사령관하고 그 다음에 저하고 윤성민 장군과도 통화했습니다.
이:응.
장:그런데 제가 제 본의를 얘기했습니다. 제가 당장 돌파하겠다고 하니 “상황을 좀 봐 가지고 하라” 하여튼 그건 제가 아까 부대 출동 준비가 덜 돼서 그런데 그건 당신들 명령도 받지 말고 해결된다… 앞으로 저에게 명령이 필요 없습니다. 지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놈의 새끼들 다 죽여야 되겠어요.
이:알겠어. 이게 뭐 굉장히 불순한 장난이 있어 큰일이야.
장:안에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이랬다가 북괴한테 큰일 나요.
장:사령관님은 바깥에서 잘 해주십시오.
이:알겠어요.
장:저는 안에서… 이놈의 새끼들 다 죽이든지 해버릴 테니….
이:하여튼 빨리 수습을 좀 하도록 해. 이거 굉장히 불행한 사태야.
장:알겠습니다.
이:OK, 전화 줘 고마워요.
▶3군사령관과 윤성민 참모차장 (13일 오전 2시32분)
윤:예, 그런 상태입니다.
이:아직도….
윤:예.
이:그런데 저쪽에… 그 저쪽에서 이쪽에다 무슨 요구를 하거나 제의를 하거나 그런 것도 없습니까.
윤:예, 지금 장관님실에서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장관님실에서… 아….
윤:예.
이:장관님하고 모두 다 모여가지고.
윤:예, 국방부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국방부에서.
윤:예.
이:장관님은 거기 계시는 거죠. 그러니까.
윤:예, 그렇습니다.
이:그럼 거기 장관님한테 누가 갔을 것 아닙니까. 이쪽에서.
윤:그러니까 저쪽에서 점령이 다 됐지요.
이:됐는데 저쪽 대표가 누가 갔을 것 아닙니까.
윤:예.
이:음. 알겠습니다. 뭐 여기 부대는 우리가 잘못되면 전방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윤:예, 전방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되지요.
이:그러니까 그걸 꺼내올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난 부대 이동을 못 시킵니다. 저쪽에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알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윤:저희도 결론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이:예.
윤:국가와 민족이 살아야 되겠다….
이:국가와 민족 살고 뭘 해야지. 우리가 이것 때문에 뭘 하다가 쥐 잡다 독 깨는 식이 돼서는 곤란하단 말이야. 그렇게 난 생각을 하기 때문에 병력을 안 내는 겁니다.
윤:예, 동감입니다.
이:알겠습니다. 뭐 좀 자주 소식이나 주세요.
윤:예.
2014-12-12 35년 전, 12.12 밤, 최규하 대통령은 잘 버티었다.
▲ 1979년 12월 21일 제10대 최규하 대통령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1995년 全斗煥 전 대통령은 , 1979년의 12.12 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후 검찰로부터 피의자 신문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인 대통령 재가 없는 鄭昇和 계엄사령관 연행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하였다.
'대통령 결재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지만, 저는 鄭 총장이 계엄사령관이기 때문에 예우 차원에서 재가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검사가 '그러면 왜 崔圭夏 대통령을 설득하여 재가를 받으려고 그날 밤에 그렇게 노력하였는가'라고 캐묻자 全씨는 '鄭 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하였다'고 답하였다.
12.12 사건 당시 全斗煥 소장은 계엄사령관 직속의 합동수사본부장 겸 국군보안사령관이었다. 그는 10.26 사건과 관계되는 인물은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이 누구든지 연행 조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다른 검사가 당시 국무총리 申鉉碻씨에게 '鄭 총장을 연행하려면 사전에 대통령 재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당연하지요. 鄭총장은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비상시국에 막중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범죄에 연루되었다 해도 대통령 재가 없이 연행한다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2.12 사건 수사기록을 精讀하면 崔圭夏 당시 대통령이 전두환 본부장이 들이민 鄭昇和 장군 연행 건의서에 서명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재가를 먼저 받아오라'고 했고, 親전두환 계열의 육군 장성들이 몰려가 재가를 호소하여도 국방장관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되풀이하였다. 그가 건의서에 서명한 것은 鄭총장이 연행되고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全斗煥 측 병력에 의하여 장악된 뒤인 12월13일 새벽 5시10분이었다. 崔 대통령은, 전두환 측이 노재현 국방장관을 끌고가다시피하여 서명하게 한 서류를 盧 장관으로부터 받아 거기에 일자와 시간을 기입하고 서명한 것이다. 崔 대통령이 시간까지 기입한 것에 대하여 申 전 총리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그 이유는 제가 국무총리 재직시에는 물론이고 12.12 사건 이후 여러 해가 지난 뒤 여러 차례 崔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崔 대통령께서는 그 당시 사전 재가 없이 鄭 총장을 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했고, 12월13일 새벽에 더 큰 혼란과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재가했지만, 事後에 재가를 했다는 점, 국방장관의 결재 등 정식결재 절차를 거쳤다는 점, 장시간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결재했다는 점 등을 서류상 명백히 하기 위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재가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申鉉碻씨는 당시의 전두환 장군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겁도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라고 평하였다.
全斗煥씨는 '박정희 장군이 집권한 과정과 피의자가 집권한 과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박정희 장군은 분명히 혁명을 하여 정권을 잡았고, 저는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을 뿐입니다.'
조갑제(趙甲濟)
2016.07.04 고(故) 朴俊炳 전 국회의원 생전 인터뷰, "12·12사태 당시 전두환 병력출동 요청 거절"
⊙ 5·16 당시 李翰林 1군사령관의 전속부관, 체포압송되는 이 장군과 동행했다가 한 달간 옥살이
⊙ 權翊鉉과는 육사 시절 의형제, 盧泰愚와는 陸大 졸업 후 인연
⊙ 3당 합당 후 내각제 각서 사본 보관하고 있다가 도난당해,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 발생
朴俊炳
⊙ 80세. 육사 12기 졸업.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졸업.
⊙ 사단장, 육군인사운영감, 육군인사참모부장, 국군보안사령관, 제12~14대 국회의원, 민정당 국책조정위원장·사무총장, 민자당 사무총장, 자민련 부총재 겸 사무총장. 現 서경대 석좌교수.
⊙ 상훈: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통일장·국선장.
박준병(83) 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이 6월 3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박 전 총장은 육사(陸士) 12기로 전두환 정권 때 보안사령관을 지내고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3선(選) 의원을 지냈다. 충북 옥천 출신인 반 전 총장은 이른바 '신(新)군부'의 핵심 인사였다. 김영삼 정부 때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가담했다며 기소됐으나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아래 2013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다.
어린 시절의 꿈은 공무원이나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할아버지는 내게 사범학교 진학을 권했지만, 나는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며 일반계인 대전중학교로 진학했다.
거기서 나는 평생의 친구 정상문(鄭相文·육사 12기)을 만났다. 인상이 깨끗해 첫눈에 호감이 가는 친구였다. 이현덕이라는 친구도 가까이 지냈다. 어느 날 우리 세 사람은 학교 뒤에 있는 보문산에 올랐다. 우리는 풀밭을 뒹굴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정상문이 말했다.
“나는 기다리며 살 거다.” 이현덕은 “인생이 별거냐. 나는 그럭저럭 살 거다”라고 말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밀려서 살 거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내 삶을 돌아보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육군 중령 추천장으로 고교 졸업장 대신해
/6·25 당시 자원입대해 위생병으로 근무하던 중 모교를 찾아가 교복 차림의 친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박준병
1950년 6·25가 터졌다. 밀양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나는 그해 9월 15일(이날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날이었지만,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제3육군병원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열일곱 살 때였다.
그해 11월 나는 육군본부 직할 의무후송대대로 전출됐다. 이후 나는 1년 반 동안 전후방 병원에서 전쟁을 치렀다. 직접 총을 들고 적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팔다리가 잘려나간 병사들과 죽어 넘어진 민간인들의 시체를 수없이 보면서 전쟁의 참상을 절감했다. 1952년 봄, 나는 대구 육군본부로 갔다가 정규 육사(陸士) 2기생(육사 12기) 모집공고를 봤다. 4년간 교육을 받은 후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는 얘기를 접하는 순간, 나는 주저 없이 육사 입교를 결심했다.
사관학교 시험 응시를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대전고(1951년 6년제 중학교가 3년제 중·고등학교로 분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옛날 담임선생님은 졸업증을 줄 수 없고 고교 2년 수료증을 발급해 주겠다고 했다. 군에 입대하지 않은 친구들은 대학 진학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자원입대한 것이 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행히 대대장 백창기 중령이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는 “박준병 병장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있음을 인정함”이라는 문서를 작성한 후, 대대장 관인(官印)을 찍어주었다. 엄밀히 말해 그게 법적으로 졸업장을 갈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게 통했다.
1952년 3월 육사 입학 시험에 합격한 나는 그해 7월 진해에 있던 육사에 입학했다. 내가 입교할 당시 교장은 안춘생(安椿生) 준장이었다. 1951년 4년제 정규 육사를 만들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李鍾贊, 국방부장관 역임) 장군은 국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6촌 동생인 안춘생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모든 게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다시 공부할 기회를 잡게 된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졸업할 때 군사학 성적이 가장 우수한 생도에게 주는 지상(智賞)을 받았다.
쿠데타에 반대하던 이한림 1군사령관
/국토건설사업 현장을 시찰하는 장면 총리(왼쪽)와 이한림 1군사령관(오른쪽).
1956년 6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나는 1년간 강원도 화천 북방의 9사단에서 소대장 근무를 했다. 이듬해 6월 나는 중위로 진급, 육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교장은 이한림(李翰林) 장군이었다.
전입(轉入)신고를 하는 자리에서 이한림 장군은 새로 생긴 위탁교육제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인재양성을 위해 인문계통은 서울대에, 이공계는 미국의 대학원으로 진학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기회를 만난 나는 서울대 사학과에 편입했다. 여기서 나는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전해종(全海宗)·고병익(高柄翊)·민석홍(閔錫泓)·한우근(韓劤) 교수 등 쟁쟁한 분들 밑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2년간 위탁교육을 마치고 육사로 돌아온 나는 육사 사학과 전임강사로 생도(20기)들에게 국사를 가르쳤다.
4·19로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張勉)이 들어선 1960년 10월, 이한림 육사 교장은 1군사령관으로 영전(榮轉)했다. 이듬해 4월 이 장군은 나를 전속부관으로 불렀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내가 이한림 장군의 부관으로 부임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한림 사령관은 당초에는 군(軍)의 정치적 중립 고수라는 관점에서 쿠데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령관은 임부택(林富澤) 소장의 1군단에 출동준비를 명령했다.
하지만 쿠데타 진압 명령을 내려야 할 장면 총리는 잠적한 상태였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비서관을 전방 지휘관들에게 보내 “국군끼리 충돌해 피를 흘리는 일은 피하라”고 설득했다. 결국 이한림 장군은 ‘쿠데타 묵인’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5·16 주체세력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5월 18일 아침 6시, 1개 소대가량의 병력이 사령관 공관을 포위했다. 작전처에 근무하던 엄병길(嚴秉吉) 중령 등 영관급 장교 3~4명이 내실로 들어갔다. 방에서는 고성(高聲)이 터져나왔다.
아침 7시경, 이한림 장군이 나를 불렀다.
“서울로 갈 테니, 지프를 대기시켜라.”
한 달간 감옥생활
공관 현관에 지프를 대기시켜 놓고 얼마 후, 이한림 장군이 엄병길 중령 등에 둘러싸여 나왔다. 지프에 오르기 전 엄 중령이 이한림 장군에게 권총을 풀어달라고 했다. 순간 이한림 장군이 호통을 쳤다.
“항장(降將)이라도 장군은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법이다. 대체 너희가 뭐기에 감히 권총을 달라는 것이냐?”
엄 중령 등도 물러서지 않았다. 곁에 있던 군수참모 박원근(朴元根) 준장이 이한림 장군을 설득, 권총의 실탄을 빼낸 후 빈 권총을 이 장군에게 돌려주었다. 엄병길 중령이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뒷자리에 탑승하려고 하자 이한림 장군이 만류했다.
“자네는 따라올 필요 없네. 여기 남아 있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이 장군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죽으러 가는 길이야! 자네가 뭐 하러 따라온다는 말인가? 남아 있어!”
“저는 사령관님의 전속부관입니다. 그곳이 어디든 모시고 가야 합니다.”
나는 이 장군이 더 이상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지프 뒷자리에 올랐다.
그날 정오 서울 덕수궁으로 연행됐던 이한림 장군과 나는 그날 저녁 중구 필동 헌병대로 옮겨졌다. 사흘 후 나는 다시 마포형무소로 이송됐다. 여기서 나는 한 달간 수감생활을 했다. 불러서 조사받는 일도 없이 무료하게 시간이 흘렀다. 이한림 장군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했다.
이한림 장군은 반(反)혁명으로 몰려 수감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기회만 있으면 관계 요로에 나의 구명을 호소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한림 장군은 후일 박정희 정권에서 건설부 장관, 주터키대사, 주호주대사 등을 지냈다. 이한림 장군은 2012년 4월 29일 91세로 별세했다. 이 장군의 아드님은 “말년에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박 장군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셨다”고 했다.
崔周鍾 장군의 배려
6월 15일 5·16 주체로 혁명검찰부장을 맡고 있던 박창암(朴蒼岩) 대령이 불렀다. 그는 이한림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있던 시절, 육사 생도대 부(副)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나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고생 많았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구속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혁명검찰부에서 일해도 좋고, 원대복귀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원대복귀를 택했다. 다행히 주위에서는 쿠데타라는 비상상황 아래서 내가 취한 태도를 좋게 봐주었다.
6월 말 나는 최주종(崔周鍾) 소장이 사단장으로 있는 8사단 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 장군은 이한림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 생도대장을 맡던 분으로, 5·16 주체 중 하나였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최 장군이 예고 없이 우리 중대를 방문했다. 최 장군은 병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나와 중대장실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중대를 떠나기 전 최 장군은 지프에 오르다 말고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위, 열심히 해! 누구든지 박 대위에게 시비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자리에는 연대장·대대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장교가 있었다. 내가 이한림 장군을 모시다 수감됐던 사실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하는 얘기 같았다. 고마웠다. 최주종 장군은 이후에도 종종 나를 찾아와 격려해 주곤 했다.
그해 말 나는 소령급이 맡는 핵심보직인 연대 작전과장을 맡았다. 파격이었다. 이 또한 최주종 장군의 배려였다.
이 무렵 나는 군인으로서 자신감을 얻게 됐다. 솔직히 육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군인으로서의 적성에 대한 자각이나 소명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교 친구 정상문의 소개로 알게 된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은 내게 의무복무기간 5년만 채우고 나오면 신문사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미국유학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한때 그 얘기에 솔깃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대장과 연대 작전과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나는 한눈팔지 않고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64년 소령으로 진급한 나는 이듬해 미국 포트 브래그(Fort Bragg)에 있는 특수전학교에서 6개월간 비정규전(非正規戰) 과정을 연수했다. 당시는 베트남전이 확대되고 있을 때여서 심리전(心理戰) 등 비정규전 과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포트 브래그에는 브라질, 필리핀, 태국 등에서 유학 온 장교들이 있었다. 모두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었다. 그들은 “코리아는 어디 있는 나라냐?”, “전쟁의 상처는 아물었느냐?”, “코리아는 가난한 나라라는데, 당신 월급은 얼마나 되느냐?” 등을 물으며 나를 괴롭혔다.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뢰 매설로 敵 爆殺
나는 1966년 12월 주월한국군사령부 민사심리처 요원으로 월남으로 파병됐다. 나를 좋게 본 채명신(蔡命新) 사령관은 이듬해 7월 나를 민사심리전대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사령부 정례 주간회의에서 ‘주월한국군 민사심리전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이라는 브리핑을 했다. 이 브리핑에는 포트 브래그에서 배운 최신 이론과 함께, 서울대에서 배운 역사학의 관점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정서를 정리한 내용을 담았다. 이 브리핑은 채명신 사령관의 극찬을 받았다. 나는 ‘육군에서 브리핑을 가장 잘하는 장교’라는 평을 들었다. 이러한 평가는 이듬해 중령으로 진급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1968년 7월 귀국한 나는 최전방 대대장직을 희망했다. 8월 말 나는 강원도 원통의 12사단 37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했다. 멀리 해금강이 보이는 건봉산 전방 1031고지 일대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그때 나는 중령 진급 예정자 신분이었다.
당시는 1·21사태를 비롯해 크고 작은 북한의 도발이 빈발하던 때였다. 나는 GP를 지키는 소대장·중대장들에게 적의 예상침투로에 대한 지형정찰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10월 20일 북한군이 침투해 우리 GP의 전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간 것 같다는 휘하 5중대장의 보고를 받았다. 며칠 후에도 북한군이 침투해 인접 GP 전방에서 묵고 간 것 같은 흔적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나는 두 차례 침투로의 교차지점에 M16 지뢰 두 발을 매설하라고 지시했다. 1
1월 1일은 내가 중령으로 진급하는 날이었다. 진급신고를 하기 위해 사단본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5중대장으로부터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며칠 전 지뢰를 매설한 지점에서 폭발음이 났다는 것이었다. 현장에서는 북한군 시체 7구가 발견됐다.
백문(白文) 사단장은 직접 우리 대대를 찾아와 내게 중령 계급장을 달아주면서 크게 칭찬을 해주었다. 백 사단장은 이 전과(戰果)를 직접 상세히 기록해 내 장교 인사기록카드 고과표에 별지로 첨부해 놓았다. 이는 내가 동기생들 가운데 선두로 대령 진급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해 준 부하들 덕분이었다.
盧泰愚 대령과의 만남
/대령 시절 육군본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모처럼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출근하는 박준병 대령을 배웅하는 가족들. 맨 뒤가 아내 김혜정.
1970년 초 나는 대대장 근무를 마치고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육대에서 공부하는 것은 원래 공부를 좋아하던 내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덕분에 육대를 수석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육대 수석졸업자는 육대 교관 요원으로 남아야 한다는 불문율(不文律)이 있던 것이었다. 최소한 2~3년은 육대에 남아야 했다.
대령 진급을 앞두고 있던 나는 그보다는 서울의 육군본부에서 일하고 싶었다. 결혼 후 8년 동안 미국 유학, 월남 파병, 전방 대대장 근무 등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육사 1기 선배인 노태우(盧泰愚) 대령이었다. 당시 그는 육본 인사참모부 대령과장(大領課長)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가 육대 졸업생들을 면담하고 희망보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진해로 내려온 노태우 대령에게 나는 간곡하게 나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와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내 얘기를 들은 노 대령은 “걱정 말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노 대령은 육대총장 김익권(金益權)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 중령을 육대에 데리고 있으려면, 총장께서 책임지고 박 중령을 진급시켜 주셔야 합니다. 박 중령은 이번에 진급 케이스 아닙니까? 만일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서울로 보내 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육대에는 오랫동안 육대에서 근무해 온 고참 중령들이 많았다. 그들 외에 나의 진급까지 ‘책임’지는 것은 김익권 총장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김 총장은 나를 서울로 보내 주었다. 나는 노태우 대령의 재치 있는 일처리가 고마웠다.
全斗煥, 군내 하나회 활동 중단 지시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 선배 등은 이름만 들었을 뿐,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다만 11기 권익현(權翊鉉) 선배와는 생도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그와는 생도 시절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져서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다.
내가 하나회원이 된 것은 대령 진급 이후였다. 권익현 선배 등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영남 출신이 주축이 된 하나회에서 나는 회원으로 크게 활동한 것도, 그로 인해 진급 등에서 특혜를 받거나 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군내 하나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후일 12·12사건 재판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준병이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다”라고 했다.
1970년 가을, 나는 대령 진급 예정자로 선발됐다. 심사위원들은 내가 대대장 시절 침투하는 적을 지뢰로 폭살시킨 전과를 기록해 놓은 백문 사단장의 인사고과표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1971년 6월, 인사참모부 대령과장 권익현 대령이 찾아왔다. 생도 시절부터 나와 가까웠던 권 대령은 당시 군부(軍部) 실세였던 윤필용(尹必鏞) 수도경비사령관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나를 윤필용 장군의 측근으로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권 대령이 힘을 써준 덕분에, 나는 윤 장군과 아무런 인연이 없으면서도 수경사 인사참모로 발령이 났다.
내가 실제로 모셔본 윤필용 장군은 온후하고 인간적인 분이었다. 부양가족이 많은 나를 자주 사무실로 불러, “지난 주말 내기 골프해서 딴 돈이야”, “고스톱해서 딴 돈이야”라면서 수표를 쥐여주곤 했다.
당시 윤필용 장군의 수경사는 강창성(姜昌成) 장군의 육군보안사령부와 경쟁하는 권력기관이었다. 윤 장군과 강 장군은 육사 8기 동기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다투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임관 이래 육사, 야전군, 주월한국군에서 오래 근무했던 나로서는 그런 모습들이 생소했다. 5·16 당시 이한림 장군이 투옥됐던 일도 새삼 떠올랐다. 수경사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권력의 중심에 서면 알력이 심하다. 권력은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尹必鏞 사건의 禍 모면
/1973년 4월 29일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윤필용 사건 관련자들. 앞줄 오른쪽 끝이 윤필용 소장, 왼쪽 끝이 권익현 대령.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維新)을 선포했다. 당시 나는 수경사 작전참모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수경사령관은 한 달에 한 번씩 대통령에게 부대 현황을 보고하는 독대(獨對)를 했는데, 그 독대가 자꾸만 미루어진 것이다.
그해 11월경, 윤필용 장군과 절친한 사이인 김진구(金振九) 26사단장이 윤 장군을 만나러 왔다가 내 방에 들렀다. 26사단은 의정부에 주둔하는 6군단 예하 예비사단이었다. 그는 내게 사단 예하 연대장 자리를 제안했다. 좋은 기회였다. 윤필용 장군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12월 초, 다시 수경사에 들렀던 김진구 사단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내가 가기로 했던 연대장 자리에 보안사 소속 박모 대령을 추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내 인사문제 때문에 윤필용 장군과 강창성 장군이 대립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로 김진구 장군과 함께 윤 장군을 찾아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정규 육사 출신으로 동기 중 선두주자인 제가, 남들이 모두 가고 싶어하는 서울 근교 예비사단에 가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동부전선의 전방사단 연대장으로 가겠습니다.”
김진구 사단장이 고민하던 강창성 장군의 박모 대령 추천 건은 얘기하지 않았다. 윤 장군은 내 결심을 기특하게 여기고 “역시 박 대령은 우리 군의 간성(干城)”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1973년 초 나는 28사단 8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전방이기는 했지만,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연대장으로 나간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을 때, 육군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 발언이 발단이었다.
윤필용 장군과 그의 측근 장교들은 대역(大逆)을 꾀한 혐의로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은 후, 부정부패 등의 죄목으로 실형(實刑)을 선고받았다. 육사 11기인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孫永吉) 준장, 26사단 연대장 권익현 대령 등이 유죄판결을 받고 예편당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만약 내가 김진구 26사단장의 제안을 받은 후 26사단 연대장으로 나갔다면? 나 역시 윤필용 사건의 태풍을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윤필용 장군과 강창성 장군 사이에서 갈등의 요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사양한 것이 내게는 행운이 된 셈이었다.
대통령 有故 모르고 10·26 때 서울로 출동
/1979년 7월 30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소장으로 진급한 박준병 장군에게 별을 달아주고 있다.
1975년 1월, 나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대망(待望)하는 별을 달았다. 나는 제3하사관학교장, 육본 교육참모부 기획처장, 육본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 등을 지낸 후 1979년 8월 3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경기 양평의 20사단장이 내게 주어진 보직이었다. 나와 함께 동기생 가운데 처음으로 사단장이 된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체육부장관·안기부장 역임) 소장은 중부전선의 3사단장이 됐다. 동기 중 선두주자의 하나로 꼽히던 박희도(朴熙道, 육군참모총장 역임) 준장은 제1공수특전여단장으로 있었다.
3군사령부 직할 예비사단인 20사단은 유사시 서울로 출동하는 부대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 10·26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나는 육대 동기인 부관감(副官監) 조진희 준장과 사단장 공관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 8시40분경,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서울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듯하니, 전(全) 사단이 즉각 서울로 출동할 수 있게 준비하시오.” 나는 즉시 부대로 들어가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그날 밤 9시 반, 이건영 사령관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서울 태릉지역에 전개하고,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서울로의 출동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낡은 차량, 운전병의 운전 미숙, 도로 사정 등으로 인해, 우리 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서울 망우리 초소를 통과한 것은 10월 27일 새벽 4시였다. 육사 보안부대장 김동조 중령이 찾아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 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새벽 5시 육사교장실로 가서 육군본부 상황실에 상황을 보고한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유고(有故)’ 소식을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몇 년 전 방송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10·26 당시 내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으로 20사단을 서울로 출동시킨 것으로 방영했는데, 이는 명백한 사실왜곡이다.
12·12사태 5일 전 全斗煥과 만나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당시 우리 집은 연희동에 있었다. 계엄군으로 서울에 들어온 나는 우리 집에서 부대로 출퇴근을 했다. 12·12가 일어나기 닷새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12월 9일(일요일) 오전 10시에 전두환 장군이 자기 집에서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는데, 전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12월 9일 전두환 장군 집으로 찾아갔다. 전 장군은 무척 반가워하면서, “12일 저녁 6시 반에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張世東) 대령의 방에서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했다. 나는 11시부터 개척교회를 운영하는 장인과 함께 오전 11시 예배에 참석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터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2월 12일 30경비단에서 만나자는 이유라든지, 그날 누가 나올 것이라든지 하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12월 12일 저녁 6시20분, 경복궁에 있는 수경사 30경비단장실로 갔다. 유학성(兪學聖, 안기부장 역임) 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黃永時, 육참총장·감사원장 역임) 1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등이 와 있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배들이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전두환 장군을 기다렸다.
7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타났다. 그는 10·26사태와 관련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을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보냈는데,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모두 당황했다. 눈치를 보니 노태우 장군만이 그날 모임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 장군들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全斗煥처럼 대범한 사람 못 봐
/1980년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대장 진급을 축하하면서 보안사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부터 노태우, 전두환, 박준병. 뒷줄 오른쪽 두 번째는 김진영 대령(전 육군참모총장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 등이 전두환 장군과 우리를 군사반란집단으로 규정짓고 진압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부대로 복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남한산성 육군종합행정학교에 있던 사단본부의 참모장과 참모, 그리고 태릉 인근 등에 분산 주둔한 예하 연대의 연대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연행되면서 그 직무를 대리하고 있던 윤성민(尹誠敏) 육군참모차장은 부대 출동을 막기 위해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소준렬(蘇俊烈) 소장을 우리 사단에 보냈는데, 나는 참모장 등에게 그의 조치에 따르라고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전두환 장군이 옆방으로 나를 은밀하게 불렀다.
“박 장군, 20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해 주시오!”
순간 5·16 당시 고뇌하던 이한림 장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전두환 장군의 요청을 거부했다.
“20사단은 전쟁이 나면 전쟁터로 가야 하는 부대입니다. 그런 부대를 지휘계통 밖에 있는 사람의 명령을 받아 출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두환 장군은 내 말을 듣자 구구하게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노태우 소장의 9사단과 박희도 준장의 1공수특전여단 병력을 동원했다.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에 대해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사후재가(事後裁可)를 얻기 위해 전두환 장군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갈 때도 나는 동행하지 않았다. 밤늦은 시각에 사전 약속도 없이 현역 장성들이 군복 차림으로 찾아가는 것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결례(缺禮)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경비단에는 노태우 장군과 내가 남았다. 후일의 얘기지만, 이날 내가 취한 조치 때문에 나는 12·12 및 5·17사건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無罪) 판결을 받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부대 출동을 거부했던 내게 서운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 후 한 번도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간접적으로라도 그가 나에게 섭섭해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람을 쓸 때, 사람을 정확히 알려고 노력했고, 능력이 있으면 주저 않고 썼다. 나는 평생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대범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을 보지 못했다.
20사단, 光州로 가다
12·12사태 후 보안사령부로 권력이 쏠리는 것이 보였다. 연말연시가 되자 우리 부대로도 전보다 훨씬 많은 위문품이 들어왔다.
1980년 1월 하순, 나는 이희성(李熺性) 육참총장에게 부대를 양평으로 복귀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나는 계엄업무 수행 중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개선해 우리 사단을 유사시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부대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뜻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우리 부대는 1980년 5월 15일 다시 서울로 이동했다. 이틀 후 비상계엄령이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5월 20일 저녁,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황영시 육참차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광주(光州)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으니 1개 연대를 내려보내 윤흥정(尹興禎, 체신부장관 역임)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지시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작전계통을 통해 정식으로 명령이 내려왔다. 나는 김동진(金東鎭, 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 역임) 대령의 61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용산역에서 61연대의 출동을 확인하고 돌아온 밤 11시경, 다시 1개 연대를 추가로 파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병년(李丙年) 대령의 62연대에 출동을 지시했다.
나는 5월 21일 광주 송정리로 내려가 윤흥정 장군에게 부대 도착을 보고했다. 다음 날 60연대와 사단 포병사령부 병력이 공군수송기편으로 내려왔다. 이로써 사단 전 병력이 광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육로(陸路)로 이동해 온 우리 사단은 지휘용 지프 14대가 무장시위대에게 탈취당했으며 병사 1명이 실종됐다가 귀환했고, 두 명이 경상을 입었다. 5월 21일,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서 철수했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를 싹쓸이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에도 육사 출신 대대장들을 비롯해 장병의 20% 이상이 호남 출신이었다. 밤새 한잠도 못 잔 나는 다음 날 아침 7시, 중사 이상 간부들을 보병학교 연병장에 소집했다. 나는 그들에게 “광주시민의 명예를 지켜주고, 국민의 군대로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군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사단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휘하 장병 두 명 戰死
계엄사령부는 자위권(自衛權) 발동을 했지만, 나는 민간인에게 절대 선제(先制)사격을 하지 말고, 사격을 받더라도 최소한으로 대응하며, 부상자는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말고 신속하게 군병원으로 후송하라고 지시했다.
육군본부는 사태 초기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윤흥렬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을 경질하고(외양상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하기 위해 예편) 전남 출신인 소준렬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광주시 외곽을 포위, 통제하고 있던 우리 사단은 5월 27일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공수부대가 먼저 시내에 진입해 무장시민의 저항을 분쇄하면, 우리 사단을 비롯해 현지 향토사단인 31사단,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예하 부대들이 책임구역을 인수받았다.
광주사태 기간 중 우리 사단은 모두 세 차례 교전(交戰)을 벌였다. 우리 사단 장병 두 명이 전사(戰死)하고 11명이 부상했다. 민간인은 10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 국가적 비극이었다.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冥福)을 빈다.
나는 광주사태가 진압된 다음 날, 광주나 인근 지역이 고향인 장병들에게 외박을 주도록 했다. 참모들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나는 “자기 부모, 친척을 찾아가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300여 명의 장병들은 가족과 친지들이 싸준 떡이나 과일 등을 싸들고 무사히 귀대했다. 공수부대가 복귀한 후에도 나는 소준렬 사령관에게 건의해 20사단이 한 달가량 더 광주에 주둔하면서 시가지 정비, 농번기 대민봉사 등을 돕도록 했다.
6월 말 원대복귀한 후 나는 이희성 육참총장에게 “앞으로 국내 소요사태 발생시 군의 동원은 자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것은 광주사태를 겪은 많은 군 지휘관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이후 5공(共) 시절 시위진압에 전투경찰을 동원하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에도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은 광주사태의 교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나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1981년 7월 국군보안사령관이 됐다. 당시 보안사령관직은 전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장군이 거쳐 가면서 권부(權府) 중의 권부로 인식되고 있었다.
육사 동기생인 박세직 수경사령관이 보안사령관, 내가 수경사령관을 맡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상에서는 나와 박세직, 박희도 장군을 ‘쓰리 박(three Park)’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육사 17기 출신인 허화평(許和平) 정무수석비서관, 허삼수(許三守) 사정수석비서관, 허문도(許文道) 비서관 등을 ‘3허(許)’라고 부르면서, ‘3박’은 군부 내 온건그룹, ‘3허’는 강경개혁파로 지칭하기도 했다. ‘3박’이건 ‘3허’건 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다. 그런 식의 대립구도는 없었다.
어느 날 이희성 육참총장이 인사참모부장인 나를 불렀다. 그는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한 인사 초안의 보안사령관 직위에 내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보안사령관은 박세직 장군으로 결정된 것 아닙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당신을 지명하셨소.”
아마 전두환 대통령은 내가 보안사령관이라는 자리를 내세워 ‘엉뚱한 짓’을 하지 않고, 조용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나갈 사람으로 보았던 것 같다.
朴世直, “차기 대통령은 나” 발언으로 전격 예편
/1980년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대장 진급을 축하하면서 보안사 앞에서 찍은 사진.
보안사령관이 된 일주일 후,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세직 수경사령관이 미국에 있던 동기생 이규환 전 예비역 대령과 함께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즉시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조사해 보니 별일 아니었다. 7월 말 예하 부대를 돌아보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다. 마침 전두환 대통령도 남해안 휴양지에 가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전 대통령을 찾아가서 조사 결과를 보고할 생각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대통령께서 갑자기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내일 9시까지 청와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다음 날 청와대로 달려갔더니, 이미 주영복(周永福) 국방장관과 이희성 육참총장이 와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내가 이규환 대령 건에 대해 보고하려고 하는데,
전 대통령이 말을 잘랐다.
“보고할 필요 없소. 박세직 장군을 즉각 예편시키시오.” 장관과 총장은 이미 얘기를 들은 듯했다.
내가 말했다.
“가까운 친구로서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전방 부군단장으로 보내 반성할 기회라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역식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전 대통령은 이건 받아들였다.
당시 박세직 장군의 돌연한 예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박세직 장군이 큰 비리는 아니지만, 5공 정부의 개혁의지를 보이기 위해 일벌백계(一罰百戒)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실제로는 당시 박세직 장군이 각계 인사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차기 대통령은 나”라는 식의 언동(言動)을 한 게 문제가 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수경사 작전참모 김진영(金振永) 대령 등을 불러서 박세직 장군의 평소 언행 등에 대해 직접 알아보고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철저한 분이니, 충분히 알아보고 그럴 만하니까 그런 조치를 내리는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친구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했던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다.
나는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보안사가 권부로 인식되는 것을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일제(日帝)시대부터 써온 낡은 사령부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100억원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었지만, 반납하도록 했다. 그 무렵 신축한 사령관 관사도 매각하도록 했다. 때문에 ‘힘 있는 사령관’을 기대했던 부하들은 실망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轉役
/전두환 대통령은 예편하기 직전 박준병 보안사령관을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1983년 12월, 나는 박희도 장군과 함께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군사령관으로 나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해 12월 12일 오후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전두환 대통령은 조금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정이 생겼소. 민정당의 형편을 고려해서 1985년 2월 12대 총선에 고향인 보은·옥천·영동 지역구에 출마하는 게 좋겠소.”
나는 당황했지만 군인은 군 통수권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권력기관인 보안사령관을 오래한 내가 야전군으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런 내 모습이 좋았는지, 전 대통령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원하는 때까지 근무하라”고 말했다. 전역하기 일주일 전인 1984년 7월 1일에는 나를 대장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배려였다. 나는 육사에 입교한 지 32년 후인 1984년 7월 7일, 20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군복을 벗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전 대통령이 나를 전역시켜 국회의원으로 출마시키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권익현 사무총장의 건의 때문이었다.
1984년 12월,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야당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이용희(李龍熙) 전 의원, 이동진(李東鎭) 의원, 최극(崔極) 후보 등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는데, 설마 낙선하기야 하겠나’하는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낙선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1985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지역구 내 모든 마을을 직접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육군대장, 보안사령관이라는 관록은 잊어버리고 선거 하루 전까지 3개 군 900여 개 마을을 모두 돌았다. 결국 나는 2위 당선자인 이용희 후보보다 4배나 많은 8만8047표를 얻어 당선됐다. 득표율은 64.8%로 충북 괴산의 김종호(金宗鎬) 당선자에 이어 전국 2위였다.
국책조정위원장으로 주목받아
2·12총선은 1981년 5공 출범과 함께 형성된 정치구조를 통째로 흔들었다. 민정당은 노태우 대표위원을 얼굴로 내세웠다. 야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5공 정권을 거세게 압박했다. 그런 가운데 1985년 9월 3일 나는 국책조정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노태우 대표는 “전두환 총재가 직접 결정한 인사”라고 전했다.
민정당의 외곽기구였던 국책조정위원회는 ▲ 정국상황의 진단과 예측 ▲주요 정치현안에 대한 대책 수립 ▲ 국책평가위원회 및 유관 부서와의 협조 등이 주요 임무였다
해석하기에 따라 국책조정위원회는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내가 초선 의원에 불과하지만, 보안사령관을 지낸 군부 실세라는 인식 때문에 국책조정위원회와 나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 이상철(李相哲, 편집국장·월간조선 사장·서울시 정무부시장 역임) 기자는 《주간조선》(1985년 9월 22일자)에 어느 의원의 말을 인용해 “마침내 한 척의 핵잠수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썼다. 내가 전 대통령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그럴수록 나는 몸을 낮추고 조심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제했다. 국책조정위원회도 민주국가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최병렬(崔秉烈), 현홍주(玄鴻柱), 이종률(李鍾律), 김학준(金學俊), 김종인(金鍾仁) 의원 등은 후일 노태우 정권 등을 거치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黨 合黨으로 가는 길
/1988년 12월 22일 박준병 의원이 광주사태 관련 청문회에서 광주사태 당시 20사단의 역할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2·12총선 이후 격화된 민주화요구 시위는 결국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이를 수용한 6·29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1987년 12월 실시된 제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했다.
민정당과 청와대는 이듬해 4·26총선에서의 승리도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나의 느낌은 달랐다. 선거 일주일 전 새벽, 나는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도록 건의하라고 했다. 선거 결과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총선 후 당직 개편에서 나는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김윤환(金潤煥) 의원이 원내총무, 이한동(李漢東) 의원이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 여당 사무총장은 ‘실세(實勢)’였다. 여당의 조직과 자금, 인사를 장악하는 것 외에도 월(月) 1회 대통령과 독대하는 권한도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당 사무총장은 국무총리에 버금가는 요직’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야당은 ‘5공 청산’을 거세게 요구했다. 여야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자, 나는 윤길중(尹吉重) 대표에게 사의(辭意)를 표했다. 광주사태 당시 20사단장이었기 때문에 당에 정치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광주사태 관련 청문회에서 나는 당시의 일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89년 8월 20일 일본 여행 중이던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급거 귀국했다. 노 대통령은 내게 박철언(朴哲彦) 정무장관과 함께 야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보라고 했다. 여소야대의 극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더 나아가 보수대연합, 내각제 개헌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도 마음에서부터 동감하는 바였다.
물밑작업이 시작됐다.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에서는 황병태(黃秉泰) 부총재, 김덕룡(金德龍) 의원이 협상에 나왔다. 나와 박철언 장관, 황 부총재, 김 의원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났다.
내각제 각서 합의
89년 12월 15일 노태우 대통령과 세 야당 총재(김대중, 김영삼, 김종필)는 “5공 문제를 금년 내에 마무리 짓자”고 합의했다. 그해 12월 31일 백담사에 가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해 증언을 했다. 12·15합의 이틀 후인 89년 12월 17일 신라호텔에서 나, 박철언, 황병태, 김덕룡 네 사람이 만났다. 우리는 합당의 원칙, 당명, 당 지도체제 등에 대해 합의했다. 신민주공화당과의 접촉도 내가 맡았는데, 김용환(金龍煥) 의원이 상대였다. 우리 두 사람은 만난 지 두 번 만에 합의에 도달했다.
90년 1월 6일, 나는 다시 민정당 사무총장이 됐다. 1월 19일 나와 박철언, 황병태, 김덕룡 의원은 합당 각서에 서명했다. 다음 날은 나와 김용환 의원이 합당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YS) 총재, 김종필(JP) 총재는 3당 합당 선언을 했다. 당 이름은 민주자유당. YS가 제안한 이름이었다.
3당 합당의 연결고리는 사실 내각제 개헌이었다. 민자당 전당대회를 앞둔 90년 5월 5일, 나, 노재봉(盧在鳳) 대통령비서실장, 최창윤(崔昌潤) 정무수석, 민주계의 김동영(金東英) 원내총무와 김덕룡 의원이 당헌(黨憲) 초안을 검토했다. 쟁점은 3당 합당의 전제조건인 내각제 개헌을 당헌에 넣느냐 여부였다. 민정계와 공화계는 당연히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민주계는 완강히 반대했다.
결국 논란 끝에 내각제를 당헌에 포함하지는 않되, 노태우 대통령, YS, JP가 합의서를 만들어 서명하기로 했다. 초안은 노재봉 실장이 작성했고, 내가 최종안을 정리했다.
내용은 이렇다.
< 역사적인 민주자유당의 제1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우리 3인은 신뢰와 협조 아래 국가와 당의 발전을 위하여 합당정신에 입각,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1년 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
3. 이를 위하여 금년 중 개헌 작업에 착수한다.
1990년 5월 6일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
/1995년 10월 14일 자민련에 입당한 박준병(오른쪽에서 두 번째) 의원이 김종필(왼쪽에서 두 번째) 총재의 환영을 받고 있다. 왼쪽은 박철언 부총재, 오른쪽은 한영수 원내총무.
나는 5월 6일 낮 YS를 자택으로 찾아가 서명을 받았다. 그는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서명하지 않았다. 나는 “민정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30분 후 마지못해 서명을 했다. 이어 오후 4시경 김용환 의원과 함께 JP를 방문, 서명을 받았다. JP는 무척 기뻐했다.
그날 저녁 나는 서명한 원본을 최창윤 정무수석에게 주었다. 최 수석은 대통령의 서명을 받은 후, 다음 날 오후 그 사본 2장를 가지고 왔다. 그는 “YS, JP에게 사본을 전달해 확실하게 매듭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말도 전했다.
나는 내가 직접 전달하는 것보다는 김동영 원내총무, 김용환 정책위의장이 각각 YS와 JP에게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뜻을 들은 김용환 의장은 곧 사본을 가져갔으나, 김동영 원내총무는 오지 않았다.
나는 YS에게 전할 사본을 사무실 안쪽 내실(內室) 책상서랍에 넣고 퇴근했다. 다음 날은 일정이 바빠서 사본 전달을 깜박 잊었다. 그리고 5월 9일 사본을 찾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나는 보좌관과 비서들을 총동원해서 사본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며칠 후 봉투가 뜯겨진 상태로 누군가가 책상서랍에 넣어둔 사본을 발견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한번 뜯겨진 사본을 전달하기도 뭣해서 그냥 내가 보관했다.
그해 10월 25일 《중앙일보》는 내각제 각서의 존재를 폭로했다. 내각제 각서의 존재를 부인해 오던 YS는 난처해졌다. 나는 사무총장으로 각서 유출의 책임을 지고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29일 YS는 당무 거부를 선언했다. 다음 날에는 “내각제 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므로 추진할 수 없다”며 낙향했다. YS의 이런 저항에 결국 노태우 대통령과 JP는 손을 들고 말았다.
혹자는 내가 고의적으로 내각제 각서를 유출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일 노태우 대통령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박준병씨는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면서 “거꾸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측에서 그것을 유출시켜서 내각제를 깨버리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한테 들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내 사무실을 드나들던 대전고 후배인 박모 기자가 내각제 각서 사본을 습득해서 폭로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후 YS는 사사건건 노태우 대통령과 부딪히더니, 결국 민주자유당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박태준 최고위원이 후보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도중에 출마를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민정계의 이종찬 의원이 후보로 나섰지만, 그는 경선 과정에서 YS의 불공정한 행태를 문제 삼아 경선을 포기했다.
대통령이 된 YS는 과거와의 단절에 나섰다. 93년 3월 하나회 숙정(肅正)을 단행하더니, 95년에 접어들면서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섰다.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를 밀어내고, 민자당을 YS당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그 속에 있었다. JP는 여기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그해 6·27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충청권을 휩쓸었다.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DJ는 서울시장에 조순(趙淳)씨를 당선시킨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계에 복귀했다.
민자당을 탈당하게 된 계기
정국이 요동치자 내가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YS는 8월 중순 나를 청와대로 불러 탈당을 간곡히 만류했다. 나도 탈당할 생각은 없었다.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당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은 내 소신과는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 바로 세우기’의 칼날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사실 YS는 집권 초기만 해도 과거 정권들을 ‘군사정권’으로 매도하기는 했지만, 사법처리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검찰도 94년 12월, 12·12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김윤환 민자당 대표가 12·12사태에 대한 입장이 변화할 수 있다고 시사(示唆)하더니,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은 내가 민자당을 탈당할 경우 구속될 수도 있다고 공언했다.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 계속 민자당에 몸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95년 10월 14일 민자당을 탈당, 자민련에 입당했다.
내가 자민련에 입당하자 YS정권은 나의 모든 것을 뒤졌다. 하지만 나온 것은 없었다. 내가 민자당을 탈당한 지 닷새 후인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朴啓東)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했다. 이 폭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를 계기로 12·12 및 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遡及立法) 제정이 탄력을 받게 됐다. 그해 12월 19일 끝내 소급입법이 제정됐다.
나는 12·12사태에 참여해 ‘반란중요임무’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96년 2월 29일 구속 기소됐다. 예상했던 바였다. 이에 대비해 나는 이미 2월 13일 지역구를 어준선(魚浚善) 안국약품 회장에게 내주었다. 옥중출마(獄中出馬)해서 지역구민들에게 나의 결백을 호소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계은퇴
/자민련 시절 박태준 총재와 박준병 사무총장.
그해 8월 19일 나는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검찰은 내게 징역 10년을 구형했지만,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은 내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내가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의 성격이나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사실을 모르고 그 자리에 나갔고, 전두환 장군의 20사단 병력 출동 요청을 거절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2심과 3심에서도 무죄를 인정했다. 나는 12·12사태와 관련해 유일하게 무죄선고를 받았다. 5·18사태와 관련해서는 기소 자체가 되지 않았다.
대전고 동문인 김인섭 변호사, 신정철 변호사(전 대법관), 주재우 변호사, 민경식 변호사 등이 애써 주었다.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97년 11월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이 자민련에 입당했다. JP가 명예총재로 물러나면서 박태준 전 최고위원이 자민련 총재가 됐다. 그는 부총재로 있던 내게 사무총장을 겸임해 달라고 했다. 박 총재와는 그가 육사 교무처장이었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그는 이한림 전 1군사령관과 함께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군 선배였다.
이후의 정치는 내 개인이나 자민련 모두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98년 7·21보궐선거에서 당의 요청으로 서울 서초갑(甲)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0년 4·13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나도 낙선의 쓴 잔을 마셨다. 그해 5월 19일 박태준 총리가 부동산 명의신탁이 문제가 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나를 다시 정치에 몸담게 했던 박 총리가 물러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정치무대에서 내려왔다. 2002년 12월 나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밀려서’ 살아온 인생
생각해 보면 내가 정치생활을 한 시기는 우리나라 정치가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나는 나름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었다. 3당 합당 때에는 ‘이를 계기로 우리 정치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과거 민정당·민자당 사무총장 시절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정치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보다 강력하게 진언(進言)하지 못했던 것이 그렇고, 12·12재판이 끝난 후 바로 정계에서 깨끗하게 은퇴하지 못한 것도 아쉽다. 어린 시절 정상문·이현덕과 나눈 얘기처럼 ‘밀려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행복한 인생이었다. 나라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다. 나라 덕분에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내가 육사와 서울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장까지 올라갔다. 그 가난했던 나라가 이만큼 성장한 것도 고맙고 자랑스럽다.
지금 나는 서경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젊은이들에게 우리 세대의 경험과 내가 체험한 리더십에 대해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꿈꾸었던 대학교수의 꿈이 군인과 정치인이라는 먼길을 돌고 돌아 이루어진 셈이다.⊙
[취재후기]
학자가 어울리는 ‘충청도 양반’
작년 10월 말 이 글을 쓰기 위해 박준병 전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기억해 줘서 고맙다”면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했다. 작년 11월 1일 성남 분당 그의 집 인근 음식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음식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의 대학 시절, ‘박준병’이라는 이름 뒤에는 12·12사태나 광주사태, 혹은 ‘국군보안사령관’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막상 만난 그는 푸근하고 편한 인상이었다. 말은 조심스러웠다. 3선 국회의원을 했다고는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대중정치인과는 달랐다. 호쾌한 무골(武骨)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례차례 계단을 밟아 최정상까지 올라간 성실한 관료’ 혹은 ‘평생 상아탑 안에서 살아온 교수’라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 그가 갖고 있는 ‘서경대 석좌교수’라는 직함이 그의 언행이나 현재 그의 모습과 가장 어울리는 듯싶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충청도 태생의 특징에다가, 5·16 당시 이한림 1군사령관의 전속부관으로 있다가 한 달간 투옥됐던 경험, 그리고 윤필용 사건을 지켜본 데서 나온 경험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12·12사태나 광주사태, 하나회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자신이 그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과 관련해서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대전고 후배인 《중앙일보》 박모 기자가 유출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처음 듣는 일”이라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극찬을 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져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배인 김성동 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부터 추진해 오던 김상현 전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과 약속이 잡혔다는 얘기였다.
김상현 전 의장의 이야기가 실린 작년 《월간조선》 12월호 발매를 앞두고 박준병 전 의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와병 직후인 김상현 전 의장이 어렵게 시간을 내주어서 부득이 김 전 의장 이야기가 먼저 나가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시기적으로도 그의 얘기는 3당 합당이 있었던 달인 1월 말 발매되는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리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준병 전 의원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언제 나가든 상관없으니 개의치 말라고 하면서, 김상현 전 의장의 쾌유를 빌어주었다. ‘충청도 양반’ 모습 그대로였다.⊙
월간조선
12·12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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