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1] [1] “티쿤 올람”… 유대인의 믿음, 팬데믹마다 백신 열매 맺었다 - [10]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美연준 탄생 역사 [上]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1]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1.01.05
[1] “티쿤 올람”… 유대인의 믿음, 팬데믹마다 백신 열매 맺었다
코로나 백신 만든 유대인
▲‘의학원리집’을 집필한 중세 최고 랍비 마이모니데스를 비롯해 유대인들은 의학에 헌신해온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하루 최소 9번 손을 씻는 종교적 습관, 음식 정결법 ‘코셔’ 등 위생 관리에도 철저했다. 중세 베네치아에서 페스트로 인구 3분의 1이 사망할 때 유독 유대인 희생자가 적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작자 미상의 18세기 그림 ‘전염병 피해자들을 방문하는 키지 추기경’. 이탈리아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 국립 고전 미술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화이자와 모더나의 mRNA(메신저 RNA) 백신 탄생에는 연구원 카탈린 카리코의 외롭고도 힘든 40년 헌신이 있었다. 그는 1976년 헝가리 대학에서 생명과학 강의를 듣다 mRNA 세계에 빠졌다.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템플대에서 mRNA 연구에 몰두했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아 쫓겨났다. 다행히 1989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의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의 연구 이론은 이렇다. 사람의 DNA에는 생명 구성 요소인 단백질을 만드는 방식이 들어 있다. 단백질 설계도 격인 DNA 유전 정보를 단백질을 만드는 리보솜까지 갖고 오는 전령이 mRNA이다. mRNA는 DNA의 메시지를 풀이해 단백질을 생산하도록 하는 생명체 소프트웨어이다. 그는 이를 활용하면 특정 단백질의 결핍이 원인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폐에 생기는 유해한 점액을 제거하는 기능성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요청한 연구 자금 지원은 번번이 거부당했다. 대학 측은 mRNA 연구의 현실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카리코에게 퇴직이나 직위 강등 중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더구나 1995년 당시 그는 암 투병 중이었다.
1997년 면역학의 대가인 유대인 드루 와이즈만 교수가 부임했다. 카리코는 와이즈만 교수에게 “저는 어떤 RNA도 만들 수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와이즈만 교수는 카리코 연구의 중요성을 즉시 알아보았다. 자신의 연구 자금을 쪼개 그를 지원했다. 이는 ‘와이즈만-카리코 프로젝트’로 이어져 코로나19 백신 연구로 연결되었다. 어려움도 있었다. mRNA 주사는 심각한 염증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연구를 거듭해 2004년 이를 극복했다. 그들은 세포 안으로 mRNA 정보를 집어넣는 기술을 특허 냈다. 화이자 백신은 카리코가 현재 부사장으로 있는 독일 ‘바이오엔테크’ 사와 공동 개발한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개발 주역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화이자 CEO 앨버트 불라와 백신개발팀을 이끈 미카엘 돌스텐이 유대인이다. 스웨덴 출신 돌스텐은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에서 1년 유학하면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원래 그는 의사였지만, 이스라엘에서 최첨단 면역학을 배운 뒤 신약 개발 쪽으로 돌아섰다. 의사로서 환자를 보살피는 임상도 중요하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면역학 연구가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카리코와 와이즈만의 연구를 주목한 사람이 또 있었다. 스탠퍼드대 연구원 데릭 로시는 그들의 연구 논문을 읽고 mRNA에 관심을 가졌다. 2010년 그는 하버드와 MIT 교수들과 함께 변형 mRNA를 이용한 백신을 개발하고자 모더나(Moderna)를 설립했다. 모더나의 최고 의료 책임자 탈 작스 역시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 출신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이 의학에 헌신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중세 랍비 중에는 의사와 무역상이 많았다. 당시 랍비들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다. 중세 최고 랍비 마이모니데스도 ‘의학 원리집’을 집필한 의사이자 이집트 술탄의 주치의였다. 1492년 스페인 왕국이 유대인을 추방할 당시 스페인 의사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의사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티쿤 올람(Tikun Olam)’ 사상 때문이었다. 티쿤 올람이란 ‘세계를 고친다’는 뜻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되 완벽하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창조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아우르는 사상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로 세상을 개선해 완전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병든 몸을 고치는 것도 티쿤 올람이라 생각한다. 유대인의 13세 성인식 때 랍비와 하는 문답이 있다. “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 “티쿤 올람에 기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처인 예루살렘 올드 시티 ‘통곡의 벽’ 인근에서 손을 씻는 정통파 유대인들. /사진가 보르하 가르시아 데 솔라 페르난데스
1347년 베네치아에 페스트가 창궐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으나 유대인 희생자는 유독 적었다. 그 비결은 철저한 손 씻기와 청결 의식에 있었다. 유대교는 거룩한 장소에 임할 때는 반드시 손을 씻으라고 명한다. 그래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출 30:20~21). 유대인들은 가정을 가장 중요한 성소로 여긴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다. 하느님이 임재하신다고 믿는 식탁에 앉기 전에도 손을 씻어야 한다. 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만진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번 씻을 때 3회 이상 철저히 씻었다. 그들은 하루에 3번 기도할 때도 정결한 컵에 물을 담아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4번 이상 씻었다. 일종의 정결 의식이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최소 아홉 번 손을 씻는다. 또한 ‘코셔(Kosher)’라는 음식 정결법을 지켜 위생 관리에 철저했다.
현대 면역학을 개척한 두 유대인 거장이 있다. 대식 세포를 발견한 프랑스의 엘리 메치니코프와 매독 치료제를 개발한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다. 메치니코프가 이끄는 프랑스 의학계와 에를리히가 이끄는 독일 의학계는 면역계 실체를 두고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다. 결국 두 진영의 면역 이론이 모두 옳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메치니코프와 에를리히가 공동 수상했다. 이들 덕분에 유대인들의 백신 개발이 잇달아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발데마르 하프킨이 콜레라 백신을 만들었고, 미국에서는 유대인 조나스 솔크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21세기 들어 바이오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해 거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유대인이 면역학에 강한 이유이다.
▲'코로나 백신'에 공헌한 사람들. 왼쪽부터 드류 와이즈만 전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 카탈린 카리코 ‘바이오엔테크’ 부사장, 알버트 불라 ‘화이자’ CEO, 미카엘 돌스텐 ‘화이자’ 최고 과학 책임자(CSO), 탈 작스 ‘모더나’ 최고 의료책임자(CMO).
코로나19 백신은 크게 세 가지다. 미국과 독일의 ‘mRNA’ 방식, 영국과 러시아의 ‘바이러스 전달체 방식’, 중국의 ‘불활성화’ 방식이 있다. 이 중 mRNA 백신은 바이러스 병원체를 주입하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의 일부 단백질을 인체 스스로가 만들어내도록 하는 유전자(mRNA)를 투입하는 방식이다. 우리 몸은 이에 대항하여 항체를 만든다. 바이러스를 증식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전통 방식 백신은 일반적으로 개발에 10년 이상 걸리지만 시험관에서 mRNA만 합성하면 되는 백신은 생산 속도가 놀라우리만큼 빨라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백신 개발 자체가 노벨 의학상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이 가져올 미래이다. mRNA 백신 기술을 토대로, 원하는 기능성 단백질을 만들어 암과 유전병을 이겨낼 날도 멀지 않다.
우리나라 의료진과 의료 시스템, 의료 보험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편이다. 특히 의대는 수재들이 몰리는 곳이다. 그런데 의학 연구나 신약 개발에 헌신하는 의사는 소수다. 우리나라도 의사들이 의학 연구와 신약 개발, 의공학 분야에 뛰어들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절실하다. 꿈과 열정이 있는 젊은 의사들이 관련 창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의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어내길 바란다. 이는 ‘티쿤 올람’ 사상 못지않은 우리의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왜 유대인을 알아야 하나]
역사에 촘촘히 박힌 그들의 경제 파급력… 단점은 반면교사로
유대인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민족도 없다. 장단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세계 경제는 유대인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근대 초 네덜란드에서 중상주의의 꽃을 피워 세계 곳곳에 무역 네트워크를 건설한 주역이 유대인이었다. 당시 투자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이 채권 시장을 활성화해 연 15%인 시중 금리를 2~3%대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유대인의 자본력 덕분이었다.
▲기초 학문과 정밀 과학 분야의 세계 최고 연구 기관으로 손꼽히는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 /퓨처런닷컴
유대인의 단점 또한 명확하다. 팔레스타인 문제, 미국의 금권 정치,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인 소득 불평등과 빈부 격차의 중심에 그들이 있다. 단점은 반면교사로 삼고 그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제조업을 뛰어넘어 유대인이 주도하는 금융 산업 등 서비스 산업에서 결판을 보아야 한다. 유대인을 알아야 할 이유이다.
[2] 바이든 세 사돈 모두 유대인… 루스벨트 뉴딜은 ‘주딜’로 불렸다
美권력은 ‘Jew’로 통한다
20일(현지 시각) 취임하는 바이든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친(親)유대 성향이 가장 강한 것 같다. 핵심 요직에 유대인을 대거 발탁했을 뿐 아니라 자녀 3명 모두 유대인과 결혼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남편도 유대인이다.
▲나라 없이 떠돌았던 유대인들은 역사의 굴곡마다 학살과 추방의 참극을 경험했다. 15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통일 왕국을 세운 스페인 가톨릭 세력이 유대인들을 국외 추방했고, 이들 중 다수가 네덜란드에 정착한 뒤 전쟁 자금을 대며 정치 권력에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중세 톨레도에서 벌어진 유대인 집단 학살을 그린‘구세주의 발 아래 - 중세의 유대인 살해’(1887년作), 스페인 화가 비센테 쿠탄다 토라야(1850~1925), 스페인 사라고사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미국 대선은 정치 후원금과 언론의 지지 여부가 관건이다. 선거 자금이 워낙 많이 들어 개인 힘으로는 치를 수 없다. 미국 정치자금 추적 민간 단체인 ‘책임정치센터'는 지난 선거 비용을 총 140억달러(약 15조3800억원)로 추산했다. 그렇다 보니 대선 후보들은 유대인을 잡아야 당선될 수 있다고 불문율처럼 인식해 왔다. 그들이 선거 후원금과 언론의 지지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후원금도 바이든이 10억7000만달러를 모아 트럼프의 7억3000만달러를 앞섰다. 또 바이든 지지 언론 매체가 트럼프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119 대 6이었다. 유대인 75% 이상이 바이든을 지지했다고 이스라엘과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렇게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만든 세력 중 하나가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미국 권부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매년 3월 워싱턴D.C.에서 유대인 총회(AIPAC)가 열린다. 이 총회에 연방 의원 대부분이 참석한다. 왜 유대인 총회에 미국 의원들이 얼굴을 내밀까? 이 총회의 하이라이트가 롤콜(roll call) 행사로,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의정 활동을 한 의원 명단을 200위까지 발표한다. 이는 정치 후원금과 언론의 지지에 비례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정치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역사적 유래가 있다. 1492년 유대인들이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당한 이후 그들은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 저지대에 정착했다. 그러고 다시는 정치권력에 배척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지휘하는 빌럼 3세를 적극 도왔다. 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전쟁 채권 시장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빌럼 3세를 영국 의회가 영국 왕으로 추대하자 유대 금융인 8000명이 그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갔다. 네덜란드의 빌럼 3세가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된 이 사건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해서 ‘명예혁명’이라 부른다.
▲16일 백악관 인선을 발표하는 조셉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왕이 된 윌리엄 3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유대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유대인들은 막대한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전쟁 기금 모금 기구’를 만들어 윌리엄 3세에게 모은 자금을 빌려주고, 그 모금 기구를 영란은행으로 전환해 왕의 채무 증서를 토대로 은행권을 발권했다. 이때부터 국채와 화폐 발행이 연계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들이 워싱턴 장군이 독립 전쟁을 지휘할 때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미국의 독립과 함께 유대인이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된 이유다.
맨해튼을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개발하기 시작한 이래 뉴욕 건설의 주역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무역과 금융업을 주도했다. 돈이 도는 곳에는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다. 정치 후원금도 월스트리트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내자 정치가들도 월스트리트로 모여들었다. 자연히 월스트리트가 금융 중심지뿐 아니라 정치 중심지도 겸하게 되었다. 연방 의회 의사당 페더럴홀이 월스트리트에 들어서 1789년 뉴욕이 미국 최초의 수도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상원과 하원이 페더럴홀에서 개원했고, 4월에는 조지 워싱턴이 페더럴홀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유대인들의 본거지 월스트리트가 미국 정치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미국 금권정치의 씨앗이 이때 잉태되었다. 하지만 수도가 너무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남부의 반발로 양당 간 정치적 거래가 이루어져 수도가 필라델피아를 거쳐 워싱턴D.C.로 이전하게 된다.
유대인들을 본격적으로 중용하기 시작한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그는 싱크탱크를 처음으로 활용한 대통령으로, 가까운 브레인에 유대인이 많았다. 재무장관에 유대인 모건소 주니어를 발탁했다. 당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과 수정자본주의를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이 유대인(Jew)이라 일부 언론은 뉴딜 정책을 주딜 정책이라 불렀다.
헨리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1973~1975년에 두 직책을 겸임해 외교와 안보 정책의 전권을 휘둘렀다.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 중국과 관계 개선,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 결제 통화로 달러만을 사용할 것을 이끌어낸 협상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후 재무장관과 국무장관에 유대인이 발탁되기 시작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백악관에서 열렸다. IMF 사태 와중인 1997년 12월 18일 김영삼 정부는 외환 보유액을 250억달러라고 발표했으나 실상은 39억달러에 불과했다. 한국 경제 파산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이튿날인 12월 19일 금요일 백악관 지하 벙커 상황실에서 클린턴 대통령 주재로 국가 안보 회의가 열렸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참석했다. 대통령을 제외한 네 명이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날 의제는 한국의 외채 만기 연장 문제였다. 우리나라 운명을 유대인들이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월가 출신의 루빈은 시장 논리를 들어 한국 채권의 만기 연장 문제는 민간 금융기관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론이 제기되었다. 코언 국방장관이었다. “한국은 미군 수만 명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총을 겨누고 있는 나라다. 한국의 경제 위기는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풀어가야 한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코언 장관을 거들고 나섰다. 이날 회의 결과는 한국의 파산을 막아주자는 결정이었다. 곧 한국에 대한 자금 지원을 조기에 재개하고, 각국 은행들의 외채 연장을 미국 정부가 나서서 적극 유도하기로 했다. 파산 직전의 한국 경제가 안보 논리로 해결되었다.
바이든 신임 대통령은 정부 핵심 요직에 유대인을 대거 등용했다. 30년 최측근인 유대인 론 클레인을 백악관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바이든은 그를 부통령 시절에는 비서실장(2009~2011)으로, 대선 캠프에서는 수석 참모로 기용했다. 바이든이 인선한 각료와 보좌관 내정자 명단에서도 유대인이 강세다. 국무장관 내정자 토니 블링컨, 재무장관 내정자 재닛 옐런, 국토안보부 장관 내정자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가 유대인이다. 바이든이 무게를 두는 기후 특사로 임명된 존 케리 전 국무장관의 조부도 유대인이다.
국가 안보 투톱도 유대인으로 내정했다. 국가정보원장(DNI)에 CIA 부국장을 지낸 애브릴 헤인스를 지명했다. 그는 FBI와 CIA 등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게 된다. 그와 호흡을 맞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는 유대인 제이크 설리번이 내정됐다.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이끄는 중책을 맡은 제이크 설리번의 풀네임은 제이컵 제러마이아 설리번(Jacob Jeremiah Sullivan)이다.
미국 국무장관은 각료 서열 1위이다. 그만큼 막중한 자리다. 바이든의 분신이라는 토니 블링컨은 대북 강경론자다. 그러나 국무부 부장관 시절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에는 반대했다. 국가 안보 투톱 역시 유대인이라 북핵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란의 핵 개발에 북한의 지원이 있을까 봐 이스라엘이 심히 우려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반긴 사람은 재닛 옐런이다. 그가 인선되자 주식시장이 먼저 환호했다. 옐런이 재무장관이 되면 재정정책을 확대해 돈이 많이 풀려 주식 등 자산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서민들 역시 그를 반기고 있다. 옐런이 저소득층 지원과 일자리 창출에 진력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누구를 말하나... 엄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
유대인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히틀러 때는 조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간주해 처형했다. 유대인은 이제 혈통으로 구별하지는 않는다. 2000년간의 디아스포라 생활에서 피가 많이 섞였기 때문이다. 세파르디(스페인계) 유대인이 검붉은 팔레스타인 중동계 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반면에 아슈퀴나지(독일계) 유대인들은 십자군 전쟁 때 슬라브족이 사는 동구와 러시아로 피신해 백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유대인은 혈통이 아닌 종교로 구별한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라도 유대교를 믿으면 랍비의 검증을 거쳐 유대인이 될 수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유대인을 받아들일 때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모두 유대인으로 인정했다. 그만큼 엄마의 종교적, 교육적 영향력이 절대적임을 인정한 것이다.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는 랍비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 바이든의 다섯 손주가 유대인인 것은 그들의 어머니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3] “모래 속에 보배있다” 모세의 축복… 유리·반도체 태어났다
3000년 시공 초월한모세의 축복과 반도체
한국 경제의 무역 의존도는 63.5%(2019년)다. 무역이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셈이다. 수출 품목 중 1등은 반도체다. 우리 수출의 5분의 1을 책임지고 있다. 반도체로 만드는 컴퓨터, 디스플레이, 휴대전화, 가전제품, 전기자동차 등 연관 제품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우리의 먹거리가 반도체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중략)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명기 33장 1, 19) 여기서 모세는 후손들에게 모래를 콕 찍어 가르쳐주며 축복했다. 실제로 모래는 이후 많은 기적 같은 일을 해낸다.
▲성경에 따르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神)은“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라”는 축복을 내렸다. 로마 시대 유대인 유리 세공업자들은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수출했고, 중세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는 독보적 유리 연마 기술로 안경·망원경·현미경을 만들었다. 현대에 이르러 모래의 주요 성분 규소로 반도체 기반의 증폭기‘트랜지스터’를 고안해낸 것은 미국의 유대인이었다. 19세기에 활동한 덴마크 화가 크리스토퍼 빌헬름 엑커스베르크의 유화‘홍해를 건넌 뒤 쉬는 이스라엘인들’. /위키피디아
가나안 사람들은 모래를 갖고 인류 최초로 유리를 만들었다. 유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1세기 로마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제36권에 쓰여 있다. “어느 날 천연 소다를 교역하는 페니키아 상인들이 시리아의 베리우스 하구 모래밭에서 천연소다석을 솥의 받침대로 사용하여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불을 피웠다. 불길이 너무 강해 소다석과 흰 모래가 한꺼번에 녹았다. 이게 다시 굳으면서 투명한 물체 유리가 만들어졌다.” 그리스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페니키아인이라 불렀다. ‘자주색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값비싼 유리 제품 수출로 번영을 누렸다. 모세가 말한 축복의 첫 실현이었다.
1세기 입으로 부는 대롱 불기 기법이 개발된 이후 유리 공예품이 대량생산되었다. 로마 시대 유대인 유리 세공업자들은 제조 기법 비밀을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 외딴 섬에서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고구려와 백제 유적에서는 나오지 않는 로마 유리 공예품이 신라 고분에서만 출토되는 것은 이 물건들이 실크로드가 아닌 해상 교역망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6~17세기 네덜란드 유대인 공동체는 보석 무역을 독점해 독보적인 보석 및 유리 연마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안경 직공 역시 많았다. 그들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이용해 망원경과 현미경을 만들어 눈에 안 보이던 많은 걸 보게 해주었다. 이로써 과학과 의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1608년 네덜란드의 안경 직공이었던 한스 리퍼세이다. 이듬해 개발된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쾰른의 4세기 로마 시대 유리컵. 고도로 발전된 로마 시대 유리 세공 기술을 보여준다. 뮌헨 유물컬렉션 소장. /위키피디아
1660년경 네덜란드의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오목렌즈와 대물렌즈를 이용해 100~300배 배율의 현미경을 만들어 미생물과 세균들을 관찰했다. 이후 현미경은 의학과 물리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60년 유대교 사회에서 추방된 스피노자는 렌즈 갈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광학에 관심을 가져 그의 철학에 과학적 사상이 반영되었다.
모래의 축복은 계속되었다. 모래의 주요 성분인 실리콘(규소)으로 반도체가 만들어졌다. 실리콘은 지구 지각에서 산소 다음으로 풍부한 원소이다. 1930~40년대 라디오, TV 등의 진공관은 부피가 크고, 전기 소비가 많고, 자주 꺼져 수시로 교체해야 했다. 미국 최대 통신회사 AT&T는 진공관을 대체할 깨지지 않고 오래가는 전자 증폭기를 원했다.
이를 해결한 과학자가 바로 유대인 윌리엄 쇼클리였다. 그는 반도체 기반의 증폭기 곧 ‘트랜지스터’의 기본 개념을 고안해내 1948년 벨연구소에서 진공관을 대체한 트랜지스터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원료가 게르마늄에서 실리콘으로 바뀌면서 트랜지스터가 대량생산되었다. 쇼클리와 그의 동료 2명은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뒤 쇼클리로부터 독립한 페어차일드사가 트랜지스터 회로를 실리콘웨이퍼에 집적시킨 ‘실리콘 집적회로’를 개발했다. 이후 반도체는 정보화 시대를 열었다.
실리콘밸리 탄생 이면에는 6.25 전쟁이 한몫했다. 당시 스탠퍼드 대학에는 2차 대전 때 하버드대 전파연구소를 이끌었던 프레더릭 터먼 교수가 있었고, 대학 인근에는 방위산업단지가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스탠퍼드 대학은 유명 대학들을 물리치고 군과 협력하는 전파연구소가 대학 내에 설치되었다. 당시 미군은 소련 비행기와 잠수함 그리고 핵무기를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레이더 정보 수집 등 전자전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랜지스터’개념을 고안한 유대인 엔지니어 윌리엄 쇼클리(위 왼쪽)와 실리콘밸리 탄생의 주춧돌을 놓은 스탠퍼드대 프레더릭 터먼(위 오른쪽 ) 교수. 아래 사진은 놀라운 단결력으로‘페이팔 마피아’로 불렸던 실리콘밸리 젊은 사업가들의 2007년 모습. /위키피디아, 포천 홈페이지
미국 정부의 막대한 연구 자금을 지원받은 스탠퍼드 대학은 실리콘밸리를 조성하는 첫발을 내딛는다. 1953년 80만평 부지의 스탠퍼드 연구단지가 건립되었다. 터먼 교수는 학생들에게 창업을 장려했다. 그는 대학 소유 지식재산권을 창업하는 학생에게 과감하게 이양하는 정책을 단행해 학생들이 대학 소유 기술을 이용해 창업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터먼 교수의 정책 덕에 벤처 기업들과 벤처캐피털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성장하면서 터먼 교수 제자가 만든 휴렛패커드(HP)를 비롯한 IT 기업들이 설립되어 실리콘밸리 탄생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미국 반도체 회사 45개 가운데 페어차일드, 인텔 등 40개가 실리콘밸리에 모여들었다. 실리콘밸리는 신기술을 주도해 정보화 시대를 열었다. 모세의 축복이 실현되고 있는 곳이 실리콘밸리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개발 차관과 과학연구소 설립 원조를 제의했다. 한국정부는 스탠퍼드 산업단지의 성공을 한국에서도 실현하기 위해 터먼 교수를 초청해 1971년 한국과학기술원과 대덕연구단지를 설립했다.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이병철이 1983년에 선언했지만, 그 뿌리는 1974년 이건희에게서 시작되었다. 당시 30대의 이건희는 반도체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반도체 산업 진출을 건의했으나 무산되자, 사재 4억원을 털어서 파산 직전의 한국 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이건희는 아버지에게 반도체의 미래에 대한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이병철이 18년 만에 미국 나들이를 할 일이 생겼다. 이건희는 실리콘밸리 견학을 주선해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이병철이 충격받은 것은 휴렛패커드 사무실이었다. 직원들이 컴퓨터 하나로 계산, 기획, 보고까지 거의 모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정신이 확 들었다. 컴퓨터와 반도체가 예상보다 빠르게 핵심 산업으로 클 것을 직감했다. 이병철은 결심했다. “반도체 사업은 나의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의 대들보가 될 사업이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병철은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인재를 끌어모아 1983년 2월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그해 말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D램 개발에 성공했다. 공장도 지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모래에서 추출한 실리콘이 반도체를, 반도체가 실리콘밸리를 만들었고, 실리콘밸리의 구글, 페이스북 등 많은 유대인 기업이 주축이 되어 인류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의 축복은 현재진행형이다. 축복의 과실을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 한국인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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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일군 IT기업들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나 크게 성장한 구글, 페이스북, 페이팔 등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유대인 젊은이들의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들 이외에도 유대인 젊은이들이 일군 IT기업들은 많다. 오라클, 이베이, 썬마이크로시스템, 링크트인, 트위터, 퀄컴, 델, 넷스케이프, 왓츠앱, 옐프, 야머, 징가, 세일즈포스닷컴, 텀블러, 슬라이드 등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그들은 성공 후 벤처 기업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사도 많이 만들어 창업 새싹들을 지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서로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공동체 정신, 곧 단결력이 놀라우리만큼 강하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그들을 마피아라고 불렀겠는가. 페이팔에 참여했던 피터 틸과 맥스 레브친, 제러미 스토플먼, 리드 호프만, 데이비드 삭스, 마크 핀커스 등 유대인 창업 멤버들이 이베이에 회사를 매각한 후 다시 각자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서로 강력하게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언론이 붙인 이름이 ‘페이팔 마피아’였다. 이후 그들은 기업 가치가 10억달러 이상인 ‘유니콘’ 기업을 다수 탄생시켰다.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벤처 기업 수는 84개로 유럽 전체 77개(2019년 1월 기준)보다도 많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유대인 기업들이 이스라엘의 벤처 기업들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될성부른 새싹을 조기에 발굴하여 물질적인 자금 지원뿐 아니라 정보 제공, 인맥 연결, 글로벌 마케팅과 상장(IPO) 지원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헌신적으로 지원해 성공시킨다. 이를 ‘헤세드 정신’이라 한다. 히브리어로 ‘자비’ ‘은혜’라는 말로 ‘보상을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돕는다’는 뜻이다.
[4] ‘무슬림 음료’ 커피를 세계화… 스타벅스 성공神話도 유대인
유럽 전파 후 1천년 커피史 주도한 그들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날로 커지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은 2018년 기준 353잔으로 세계 평균 132잔의 2.7배였다. 지난해 커피 수입량은 18만6000톤으로 2018년 대비 12.5% 늘어났다. 한국인의 카페(커피 전문점) 사랑도 남다르다. 2018년 한국 커피 전문점 매출액은 43억2000만달러로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2019년 7월 기준 전국에서 커피 전문점 7만1000곳이 영업 중이다. 단위 면적당 커피 전문점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추정된다.
▲168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문을 연‘파란 병 커피집(The Blue Bottle Coffee House)’의 내부 풍경을 묘사한 그림. 유럽을 침공한 오스만튀르크가 빈을 포위했을 때 전공을 세운 한 병사가 튀르크군이 패주하며 남기고 간 커피콩으로 카페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처음엔‘이슬람 음료’로 배척됐던 커피는 계산속 빠른 베네치아 유대인 상인들의 독점 무역을 통해 유럽인의 기호 음료로 자리 잡게 된다. 1900년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유화‘푸른 병’. /위키피디아
경제사에서 소금, 후추, 설탕 등이 끼친 영향은 역사를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이 상품 대부분을 유대인이 유통시켰다. 커피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근세 초기 커피는 유대인이 최초로 대량 재배해 유통시켰다. 지금도 커피 유통의 중심에 그들이 있다.
양대 종교를 대표하는 커피와 와인
와인과 커피는 양대 종교 문화를 이끈 쌍두마차다. 기독교 문화 어디서나 와인을 마실 수 있었던 것처럼 이슬람 문화 어디서나 커피 향이 가득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며,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인간을 취하게 만드는 와인을 혐오했다. 이성과 절제를 추구하는 무슬림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를 애호했다. 무슬림에게 커피는 종교였다. 커피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전해 준 음료였기 때문이다.
12세기 십자군전쟁 때 커피가 처음 유럽에 들어왔으나 기독교도들은 커피가 이슬람 음료라 하여 배척했다. 하지만 비잔틴에서는 커피가 기호 식품으로 자리 잡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 정복되면서 커피가 들어와 1475년 세계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그곳에 문을 열었다. 이렇게 커피가 기호 식품으로 비잔틴 이슬람 세계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반이다.
그 무렵 예멘의 유대인 공동체와 교류했던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커피를 밀반입했다. 커피를 마셔본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톨릭 사제들은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칭하며 커피 음용을 금지해 달라고 탄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커피를 맛본 교황은 그 맛에 반해 오히려 커피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커피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네슬레'의 설립자 앙리 네슬레(왼쪽)와 스타벅스 성공 신화를 이끈 경영자 하워드 슐츠.
유럽에서 커피를 모카라 불렀던 이유
이처럼 커피 수요가 급증하자, 커피를 수출하던 예멘의 유대 상인들은 커피를 독점 공급하려고 커피의 수출 항구를 한 곳으로 한정했다. 그곳이 아라비아반도 남단의 모카 항구였다. 예멘의 유대인 수출상들은 다른 지역에서 반출하는 일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에티오피아 커피까지 모카로 가져와 모카에서만 수출했다.
그 무렵 예멘을 중심으로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유대인 3만명가량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당시 커피는 매우 비싼 상품이었다. 그 뒤 모카의 유대인들은 무려 300년간이나 커피 무역을 독점했다. 이렇게 커피가 모카 항구만을 통해 커피 자루에 모카 글자가 크게 찍혀 유럽 각지로 수출되다 보니 유럽 사람들은 커피를 모카라 불렀다.
아랍은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커피나무 반출을 철저히 막았다. 17세기 유럽에서 커피가 비싸 아무나 마실 수 없었는데도 품귀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 상품이었다. 그러나 기후 조건 때문에 아라비아 땅 이외에서는 커피가 잘 자라지 않았다. 그 무렵 서구 커피의 독점 수입을 주도한 사람들 역시 유대인이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그들이다. 당시 교황이 기독교도의 이슬람 접촉을 금해,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이슬람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자유롭게 오가며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커피 농장을 세우다
그 뒤 근대 들어 유럽으로 커피를 처음 대량 수입하기 시작한 것은 유대인이 주도하여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이 이야기는 ‘인도판 문익점’에서 비롯된다. 인도의 이슬람 승려 바바부단은 1600년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집트에 들러 그곳 커피 농장에서 종자 몇 개를 몰래 갖고 인도로 돌아왔다. 이 씨앗을 인도 남부의 카나타가에 심어 재배에 성공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황금 알을 놓칠 리 없었다. 1616년 인도에 커피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인도로 밀파한다. 스파이는 인도에서 커피 원두와 묘목을 밀반출했고, 네덜란드로 건너온 커피 묘목을 따뜻한 식물원 온실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커피는 특성상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25도와 남위 25도 사이에서 자란다. 이를 ‘커피벨트’라 부른다.
▲연회에서 커피를 마시는 무슬림 남성들을 그린 17세기 그림. 이슬람 신자들에게 커피는 머리를 맑게 해주는 종교적 음료였다. /Simurgurum/위키피디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1658년 커피 묘목을 적도 부근 스리랑카(실론)로 가져가서 대규모 농장 재배를 시도했다. 그러나 커피나무는 1670년 해충 때문에 다 죽어버렸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이번에는 재배 장소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본거지인 인도네시아로 옮겼다. 마침내 1696년 인도네시아 자바의 바타비아에서 해충을 이겨내고 대규모 커피 농장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커피를 최초로 대량 재배하기 시작한 곳은 중남미가 아닌 아시아였다.
마침내 유대인들이 커피 재배와 교역을 동시에 주도하게 되었다. 그 뒤 70년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를 대량 재배했다. 1740년에는 커피 재배지가 자바에서 필리핀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커피는 네덜란드의 가장 인기 있는 음료가 되었다.
1800년대 들어 커피 수요가 늘어나자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농민들에게도 돈 되는 커피, 사탕수수, 인디고(염료)를 강제로 경작시켰다. 그리고 이를 거둬들여 유럽 시장에 팔았다. 그 수익은 1850년대 네덜란드 재정 수입의 30% 이상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갖고 운하와 도로를 건설했다. 반면 커피 생산국은 경제적으로 힘들게 된다. 커피나무는 옥토의 지력을 빨아먹고 크는 작물이라, 커피 농장 땅은 7~8년이 지나면 죽은 땅이 된다. 원주민들은 당장 돈이 되는 커피 재배에만 힘을 쏟다 식량 재배를 못 해 결국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중남미로 퍼져 나간 커피 농장
커피 생산의 선두 주자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커피를 전파했다. 1715년에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 묘목을 가이아나(Guyana)에 옮겨 심음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에 커피나무가 최초로 전파되었다. 이후 수리남과 카리브해의 식민지로 옮겨 심어 커피 재배에 성공했다.
한편 콜롬비아와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사연은 로맨틱하다. 프랑스령 가이아나의 총독 아내가 화려한 꽃다발 속에 커피 묘목을 숨겨 잘생긴 스페인 연대장에게 선물함으로써 그 묘목은 콜롬비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것이 브라질로 퍼져 나갔다. 콜롬비아와 브라질로 보낸 커피는 최상의 재배 조건에서 잘 자라 두 나라를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커피 생산국, 소위 ‘커피 벨트’는 주로 적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는 반면, 소비국은 대부분 북반구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교역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멀리 떨어진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를 이어주려 세계의 바다를 오가며 유대인 특유의 독과점 체제를 구축했다.
이렇듯 커피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네슬레를 유대인 앙리 네슬레가, 스타벅스를 유대인 하워드 슐츠가, 3세대 커피라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인테리젠시아와 스텀프타운은 유대인 요한 아담 벤키저가 탄생시킨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英서 ‘토론의 場’ 자리잡고 佛서 카페문화로 꽃피웠다]
유럽 최초 카페는 1629년 커피가 처음 들어온 관문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선보였다. 이어 1650년 유대인 제이콥(야곱)이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옥스퍼드 대학 도시에 열었고 1652년에는 런던에 ‘파스카 로제’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 뒤 ‘커피하우스’는 대영제국을 지배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술을 즐긴 영국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덕분에 카페 수가 선술집을 넘어섰다. 런던 사람들이 ‘동전 대학’(Penny Universities)이라 부르면서 카페는 싼값에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카페 문화는 프랑스가 선도했다.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 레 듀 마고’에는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 예술가들이 모여 열띤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혁명 사상과 예술혼이 카페에서 무르익었다. 1880년 무렵 파리에만 카페가 약 4만5000곳 있었다.
[5] “약자 돌봐라” 2000년 이어진 가르침… 美 고액기부 30%가 유대인
민족 역경 이겨낸 힘… 기부·자선의 일상화
최근 우리나라에도 기부 행렬이 잇따르고 있다.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범수가 재산 10조원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배달 앱 창업자 김봉진은 재산 1조원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선언했다. 김봉진은 세계 억만장자 기부클럽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에 219번째 기부자로 등록되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다. ‘더 기빙 플레지’는 10억달러 이상 자산가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선언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유대인은 나라 없이 떠돌았던 오랜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가난한 동족의 생존을 보살피기 위해 유대 회당에 모금함을 두고 모으는 구호 기금‘쿠파’와 이방인을 돕기 위한‘탐후이’등 다양한 자선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오늘날에도 미국 인구의 2%인 유대인은 매년 발표되는 50대 기부자 명단의 평균 30% 이상을 차지한다. 프란스 프랑켄 더 영거의 그림‘7가지 자비로운 행동’(1605), 베를린 독일역사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기빙 플레지’ 서약자 중 3분의 1이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수입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칼라일 그룹 공동창업자인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은 개인 재산 30억달러의 87%를 기부했고, 래리 엘리슨 역시 재산의 95%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비즈니스위크’가 매년 발표하는 50대 기부자 명단을 보면 미국 인구의 2%에 불과한 유대인이 평균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탈무드 1장 ‘씨앗’ 편은 추수를 다 하지 말고 남겨두며, 땅에 떨어진 낱알은 거둬들이지 말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이런 정신이 삶 속에 살아있다. 지금도 유대인 가게는 안식일을 맞이하는 금요일 오후에 상품들을 봉투에 싸서 가게 앞에 내놓고 문을 닫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돈은 한곳에 고이면 썩기 때문에, 심장을 타고 피가 흘러 인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듯, 돈도 계속 흘러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생각을 갖는다.
시너고그(회당) 헌금 바구니 ‘쿠파’
유대인들에게 기부와 자선이 일상화한 것은 그들의 오랜 공동체 규범 덕분이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해 뿔뿔이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이산) 기간에 가난한 동족을 위한 복지 제도를 강화했다. 그들은 가난한 동족의 기본생존권을 보장해주려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유대 회당의 쿠파(kuppah) 제도가 대표적이다. 유대 회당 어느 곳이나 ‘쿠파’라 불리는 헌금함이 있다. 이는 가난한 유대인을 위한 모금함으로, 유대인 복지 공동체가 축으로 삼는 구심점이다.
▲친구에게 웃어주는 사람이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는 탈무드의 가르침은 물질적 기부에 그치지 않고 남을 위한 모든 봉사 활동을 장려하는 유대인의‘체다카’(공의) 정신을 드러낸다. 오스트리아 화가 카를 슈나이더의 1860년대 작 유화 '랍비의 방'
유대인에게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지난날 성전에 희생물을 바치던 것을 대신하는 일로서 하느님에게 감사를 표하며 화해를 구하는 수단이다. 경건한 유대인은 의무적인 최소액 이상을 내놓곤 했다. 그래서 생활이 넉넉한 이는 수입의 5분의 1을, 보통 가정은 10분의 1을 바쳤다. 쿠파에 의한 모금은 자발적인 기부지만, 유대인 계율에 따라 강제적이기도 했다. 공동체 회당마다 쿠파 관리인이 있어 부자가 헌금하지 않으면 소유물을 압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인 것을 당일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시적인 구호가 필요한 사람은 위급을 면할 만큼, 영구 구호가 요구되는 사람들은 일주일 치 열네 끼니를 받았다. 이 구호 기금을 ‘쿠파’ 곧 ‘광주리 기금’이라고 불렀다. 이방인을 위한 구호 모금도 있다. 이를 ‘탐후이(Tamhui)’ 곧 ‘쟁반 기금’이라 불렀다. 대체로 동족을 구제하는 사업을 쿠파라고 했고, 다른 민족을 구제하는 것을 탐후이라고 했다.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2000년 가까이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했음에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공동체 정신 덕분이다. “너희는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보호자다. 너희는 모두 한 형제다.” 유대인은 고대부터 이를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유대인에게는 고난의 디아스포라를 이겨낸 사상이 있다. 바로 “능력껏 벌어 필요에 의해 나누어 쓴다”는 공동체의 생활 규범으로 공동체 내의 약자를 돌보며 험난한 역사의 질곡을 극복해 왔다.
체다카의 의미, 약자를 돌보다
유대인의 율법 정신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하나는 체다카고 또 다른 하나는 미슈파트다. 히브리어 ‘체다카’는 공동체 내의 약자를 돌보는 정신인데 정의, 또는 공의로 번역되며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미슈파트’는 세상의 통치자는 하느님 한 분이며,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식이다.
▲10억달러 이상 자산가로 재산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선언한 사람들의 모임‘기빙 플레지’의 3분의 1은 유대인이다. 멤버인 칼라일 그룹 공동 창업자 데이비드 루벤스타인(71·위), 오러클 공동 창업자 래리 엘리슨(76·가운데). 투자가 조지 소로스(90·아래)는 자산 500억달러 중 430억달러를 기부했다.
유대인에게는 어린 자녀에게 저금통 두 개를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돈을 모으는 체다카 저금통으로 이를 히브리어로 ‘푸시케’라 부른다. 푸시케는 자녀가 가장 처음으로 하는 자선 행위이며 평생의 기부 습관을 만들어준다. 또 다른 하나는 본인의 미래를 위해 저축 습관을 길러주는 저금통이다. 유대인 부모는 보통 안식일에 자녀에게 용돈을 주며 그중 일정 부분을 가장 먼저 푸시케에 넣도록 훈련한다. 그리고 자녀에게 용돈을 3가지 용도로 쓰라고 가르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나를 위해”.
입으로 남을 도우라고 가르치는 일은 쉽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래서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야 한다. 유대인 부모는 자녀에게 돈 쓰는 법을 몸소 본을 보이며 가르친다. 중세의 유명한 랍비 마이모니데스는 기부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보다 얼마나 자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기부를 단발성 자선 행위가 아닌 생활 습관으로 체화하라는 이야기다. 만일 우리가 1년에 한 번 큰돈을 기부하면 그만큼의 대의명분을 얻지만, 소액이나마 매일 기부한다면 우리의 손이 곧 베푸는 손이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체다카는 물질의 기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을 위한 모든 봉사 활동이 체다카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미소 짓는 것도 체다카가 될 수 있다. ‘탈무드’에서는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 “하느님은 명랑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린다. 낙관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밝게 만든다”고 했다.
체다카의 상징, 석류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년인 나팔절(9월 말~10월 초)에 석류를 먹는 전통이 있다. 이는 석류 열매 안에 촘촘히 박혀 있는 석류 알맹이만큼이나 하느님이 각자에게 주시는 수많은 은총이 충실히 열매 맺기를 소망하는 것이자, 1년 365일 매일이 석류 알처럼 체다카를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석류는 성경에 30회 이상 소개되는 성스러운 식물이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석류는 풍요와 사랑의 상징이다. 석류는 많은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에 풍요를 상징한다. 유대인들은 석류가 613개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곧 율법의 개수인 613개에 해당했다. 따라서 석류는 율법의 정신인 ‘체다카’, 곧 의(義)의 상징이기도 했다. 랍비들은 많은 석류 알을 ‘사람이 수많은 선행을 하는 것’에 비유했다.
[이 유대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지 소로스의 기부]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우리말이 있다. 이 말에 딱 들어맞는 유대인이 바로 조지 소로스다. 그는 환 투기로 여러 나라를 외환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500억달러에 이르는 거대 재산을 모아 그중 86%를 사회에 환원한 ‘기부 천사’이기도 하다. 그는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기부를 했다. 액수도 액수지만, 삶 고비 고비에서 만났던 어려움과 고마움이 있는 곳에 기부함으로써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들을 세워나갔다.
소로스는 소년 시절 독일군과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시가전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후 잔혹한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의 가족은 전쟁 통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가난의 수렁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암시장, 담배 사업 등 여러 일을 했지만 생활은 늘 궁핍했다. 그는 야반도주를 감행해 런던으로 탈출했다. 런던에 가서도 오랜 기간 생활고에 시달리며 철도 짐꾼 등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그럼에도 자신이 소년 시절을 보냈던 헝가리를 잊지 못했고, 동구권이 민주화되어 다시는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는 게 그의 꿈이었다. 소로스는 1979년 자선 단체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을 설립하여 옛 동구권의 체제 전환을 위해 매년 3억달러를 지원했다. 현재는 인권 보호와 보건 그리고 교육의 접근성을 개선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의 생활 속 기부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는 2020년까지 430억달러를 기부했다.
[6] 와이파이·블루투스 원천기술 발명한 헤디 라마
과학계서도 빛난 할리우드 스타… “그녀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구글은 2015년 헤디 라마(Hedy Lamarr·1914~2000)의 101번째 탄생일을 맞아 헌정 영상에서 이렇게 추모했다. 헤디 라마는 1930~1940년대 유명 여배우이자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등의 원천 기술을 발명한 과학자였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유대인 배우 헤디 라마(1914~2000). 영화 '삼손과 델릴라'(1949)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둔 화려한 이미지의 여배우였지만, 동시에 과학과 발명에 천재적 소질을 보였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을 도울 방도를 고민하다 수중 무선 유도 어뢰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주파수 도약 기술을 개발했는데, 이 기술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퀄컴의 CDMA(부호분할 다중접속) 기술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휴대전화, 와이파이, 블루투스, GPS 등의 원천 기술로 적용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헤디 라마는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유대인 은행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디의 부모는 어린 시절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피아노와 발레 등을 배우게 했다. 어린 헤디는 작은 무대를 만들어 혼자 동화를 연기하곤 했고, 기계의 작동 원리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인형이 춤추는 뮤직박스의 원리를 알기 위해 이를 분해한 후 다시 조립하기도 했다.
연기하기를 즐겼던 헤디는 16세에 영화계에 진출해 1933년 19세 때 체코슬로바키아 영화 ‘엑스타시’에 출연, 섹시한 장면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헤디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사색과 토론을 즐기는 성격이자 과학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배우가 된 뒤에도 외모보다 두뇌를 활용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그는 뛰어난 실용 발명가였다. 신호등 디자인 개선,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되는 알약 개발, 거동 불편한 사람이 욕조에서 쉽게 나올 수 있게 해주는 장치 등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발명에 몰두했다.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이 낸 주파수 도약 기술 특허 신청서.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에서 불행한 결혼 생활과 나치 치하의 유대인 박해에 시달리던 헤디는 영국으로 탈출했다. 거기서 미국 MGM 영화사 설립자 루이 메이어를 만나 다시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루이의 권유로 이름을 바꾸었다. 유대인 ‘헤드비히 키슬러’에서 미국 배우 ‘헤디 라마’가 되었다. 당시 영화 제작자이자 가장 빠른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던 하워드 휴스에게 사각형 날개 대신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는 유선형 날개로 바꾸라고 조언해준 사람이 헤디였다.
헤디는 1938년 영화 ‘알지어즈’의 히트로 유명 스타가 되어 히트작을 연속으로 쏟아냈다. 많은 영화를 찍다 보니 강행군하기 일쑤였다. 헤디는 가급적 유대인 신분을 감추려 했지만 유대인의 적인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키자 자신이 연합군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1940년 여름 피란민이 탄 영국 여객선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의 어뢰에 맞아 격침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70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293명이 사망했다. 독일 잠수함 유보트는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연합군을 이기게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헤디를 지배했다.
이런 시국에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돈을 번다는 게 불편했다. 연합군을 도울 방도를 고민하던 헤디는 혼자서라도 독일 잠수함 어뢰를 능가하는 성능의 어뢰를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해 연구에 뛰어들었다. 헤디의 아이디어는 방해받지 않는 무선조종 어뢰였다. 헤디는 잠수함이 수중 무선 유도 어뢰를 발사할 때 적함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파수 혼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하나의 주파수로 신호를 전달하면 적이 그 주파수를 찾아내 교란할 위험이 있지만, 주파수를 여러 개로 분산시키면 적군이 이를 알아낼 수 없다는 점에 착안했다. 이렇게 되면 어뢰 명중률은 100%가 될 게 확실했다.
헤디는 피아노의 공명 원리에 착안해 작곡가 조지 앤틸과 함께 함선과 어뢰가 주파수를 바꿔가면서 통신을 주고받는 ‘주파수 도약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이 혁신적인 이유는 설사 적군이 메시지의 일부를 도청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미 새로운 주파수를 통해 정보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42년 특허를 출원했다. 헤디는 특허가 나자 이 기술을 발명가협회를 통해 미 정부에 기증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이 기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품으로 만들 능력도 없어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그녀가 미국 시민이 아닌 외국인 신분이자 연합군의 적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특허 자격마저 몰수했다. 해군에 제출된 특허는 일급 비밀로 봉해져 발명가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이를 쓰지 못하게 금지하여 전쟁 기간에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해군은 헤디에게 발명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미국을 돕고 싶다면 전쟁 채권을 팔라고 권했다. 헤디는 좌절하지 않고 전쟁 채권 판매 투어에 참여하여 채권도 잘 파는 한편, 야광 개 목걸이, 콩코드 항공기 설계 개선 등 발명 활동도 계속했다.
전쟁이 끝난 후 헤디가 주연으로 출연한 ‘삼손과 델릴라’(1949년)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헤디는 44세 은퇴할 때까지 클라크 게이블, 로버트 테일러 등 유명 배우들과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빛 보지 못하던 그녀의 특허 기술은 1950년대 후반부터 재조명됐다. 1957년 펜실베이니아 전자공학 시스템국 기술자들이 라마의 특허 기술을 보안 시스템에 응용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때도 다시 응용됐다. 헤디 라마의 도청 방지 아이디어를 이용한 전화기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총리가 통화를 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전화 접속이었다. 헤디의 주파수 도약 기술과 이를 응용한 보안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 전송과 이동통신 연결망, 더 나아가 인공위성, 휴대폰, 무선인터넷이 탄생했다.
▲세실 B 드밀 감독의 1949년작 영화‘삼손과 델릴라’에 '삼손'역 빅터 마추어(왼쪽)와 함께 '델릴라'로 출연한 헤디 라마. /파라마운트픽처스
미군이 헤디의 주파수 도약 기술을 비밀 문서에서 해제하면서 누구나 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발명품은 전자 시대가 열리면서 통신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주파수 도약 기술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퀄컴의 CDMA(부호분할 다중접속) 기술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6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최초로 이 기술을 상용화했다. 주파수 도약 기술은 오늘날 휴대전화, 와이파이, 블루투스, GPS 등에 원천 기술로 적용되고 있다. 해커로부터 컴퓨터를 보호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헤디 라마는 특허로 아무 금전적 이득도 얻지 못했다.
헤디는 은퇴 후 플로리다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발명을 뒤늦게 알아본 사람들이 온라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자 헤디의 업적은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1997년 헤디 라마와 조지 앤틸은 CDMA 기본 원리를 발명한 공을 인정받아 미국 전자개척재단으로부터 ‘개척자 상’을 받았다. 헤디의 수상 소감은 단 한마디였다. “때가 왔군요.” 같은 해 말 헤디는 발명가를 위한 오스카상인 ‘BULBIE 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3년 후 2000년 헤디는 8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유언에 따라 유골은 아버지와 함께 걷던 빈 숲에 뿌려졌다. 2004년 독일은 헤디의 생일인 11월 9일을 공식적으로 ‘발명가의 날’로 선포했다. 에디슨처럼 잘 알려진 발명가들뿐 아니라 헤디 라마처럼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했던 이들을 함께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2014년 헤디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오름으로써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과 ‘발명가 명예의 전당’ 두 곳에 모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유대인 아빠의 밥상머리 교육과 베갯머리 이야기]
헤디 라머의 아버지는 은행 일로 바빴지만 틈만 나면 어린 딸을 데리고 숲속을 거닐면서 또는 도서관 난로 옆에 앉아서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줬다. 어린 헤디와 산책하면서 주변 물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작동 원리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인쇄기가 어떻게 작동해 글이 인쇄되는지, 가로등에 불이 어떻게 켜지는지, 자동차 엔진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차는 어떻게 길 위를 달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유대인 아빠들은 자녀가 어렸을 때 절대 외식하지 않고 집에 들어와 자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또 자녀가 잠자리에 들면 베갯머리에서 15분 이상 책을 읽어준다. 이는 자녀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려는 뜻도 있지만 자녀가 무엇에 호기심을 보이는지 알아내려는 의도도 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각자의 영혼에 걸맞은 달란트를 같이 주셨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녀가 자신의 ‘달란트’를 찾아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유대인 아빠들이 성인식(남자 13세, 여자 12세) 이전 자녀들에게 밥상머리 교육과 베갯머리 이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이유다.
[7] 인류 문명과 소금史… 곳곳에 유대인 숨결
소금 상권 장악한 유대인, 근대 첫 주식회사 설립… 자본주의 열었다
세계 4대 문명을 비롯해 모든 문명이 발전한 곳에는 예외 없이 소금이 있었다. 소금 덕분에 도시와 나라를 이룬 곳이 많다. 인간뿐 아니라 생명 활동을 하는 모든 동물은 다 소금을 필요로 한다. 야생 염소는 절벽에 붙어 있는 소금을 핥기 위해 수직 암벽을 기어오른다. 염소는 염분이 모자라면 이빨과 발톱이 약해져 먹이를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신체 활동 능력도 떨어져 천적들에게 잡아먹히기 쉽다. 목숨 걸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이유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이 물, 식량, 땔감, 소금이다. 보통 문명은 강 하류에서 탄생하는데, 그곳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4대 자원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됐다. 소금의 역사 곳곳에는 유대인의 자취가 서려 있다.
▲소금은 '불변의 약속'… '최후의 만찬'서 유다의 소금그릇 엎어져 '배신' 상징 - 구약성경은 신과 사람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룩한 인연을‘소금의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예수와 제자들의‘최후의 만찬’에서, 돈주머니를 움켜쥔 유다 앞에는 소금 그릇이 엎어져 있다(빨간 원 안). 유다가 곧 예수를 배신할 것임을 쏟아진 소금으로 상징한 것이다.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됐고, 소금의 역사 곳곳에는 유대인의 자취가 서려 있다.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베껴 선명하게 그린 작품. 원화는 색상이 바래 육안으로 구분하기가 어렵다. /위키피디아
가나안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 ‘예리코’ 탄생
사해는 죽음의 바다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에는 생명의 바다였다. 소금을 구할 수 있는 사해 인근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오아시스와 종려나무 덕분에 사해 위 예리코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 그들은 요르단강과 샘물로 밀과 보리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계곡 길이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잇는 교통로이자 통상로로 그 요충지에 예리코가 있었다.
1952~58년 영국의 캐슬린 케니언 박사가 이끄는 발굴단이 예리코 샘 옆에서 돌을 쌓아 만든 제단과 뼈로 만든 용기를 발견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만2000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 수메르 도시보다 4000년 이상 앞선 도시 예리코 언덕 위에 4m 높이의 성벽 흔적이 있었다. 성벽은 마을이 생기고 대략 3000년 후인 9000년 전에 건설되었다고 발굴단이 판정을 내렸다. 성벽과 탑은 발전된 사회 조직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리코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다. 성 길이 300m, 너비 160m에 불과했다. 인구는 2000~3000명으로 추정되었다. 문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던 시대에 도시가 발견된 것은 고고학적으로 대단한 성과였다.
가나안 사람들, 소금으로 장거리 해상무역의 기원을 열다
가나안 사람들이 지중해 해상무역을 석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소금이었다. 경제사를 추적해보면 문명 간 교역에도 소금이 숨어있다. 기원전 3000년경 가나안 해안에 살던 사람들은 열악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해야 했다. 그들 뒤에는 해발 300m의 거대한 레바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남은 길은 바다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사람의 최초 수출 품목들은 지역 특산물인 올리브유, 포도주, 건어와 소금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사해 소금 이외에도 이집트 소금호수 밑바닥에 생긴 소금 덩어리 조염을 사와서 이를 끓여 불순물을 제거한 소금을 만들어 지중해 지역에 내다 팔았다. 지중해 연안은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모래톱 해안이 대부분이어서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는 갯벌이 거의 없다. 또 북부 유럽은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아 소금 생산이 어려웠다. 그만큼 소금은 매우 귀했던지라 비싼 값에 팔렸고, 멀리 갈수록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장거리 교역의 기원이 되었다. 현대에도 천일염은 전체 소금 생산의 3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땅속에서 파내는 암염이다.
▲사해도 고대엔 '생명의 소금' 바다 -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라는 의미로 '사해(死海·Dead Sea)'로 불리지만, 고대에는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을 구할 수 있는 생명의 바다이기도 했다. 소금 결정으로 뒤덮인 사해의 암석 너머로 호수 물에 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일보 DB
소금이 청동기시대를 만개시키다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스트라본에 의하면, 기원전 2000년경 가나안 사람들은 멀리 영국 남부 콘월까지 가서 소금을 주석과 바꾸어왔다. 이로써 유럽 대륙에 대량의 주석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청동기시대가 만개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장거리 해상교역을 위해 중간중간에 보급품을 조달받을 수 있는 식민 도시들을 건설했다. 이 식민 도시들이 후에 주요 도시국가들로 크게 된다. 그중 하나가 로마를 위협했던 카르타고였다.
가나안에는 소금을 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래가 활발하고 시장이 발달한 곳에는 경제가 빨리 발전하기 마련이다. 당시는 암염 광산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라 소금 생산이 가능한 곳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참고로 그리스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자주색 옷을 입고 다닌다 하여 그들을 ‘페니키아’, 곧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다윗 왕의 소금 계곡 쟁탈 전쟁
다윗 왕 시대의 히브리 왕국은 지금 이스라엘 영토의 다섯 배일 정도로 크고 막강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소금 교역이었다. 유대 광야를 통과해 사해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연결된 도로 중 룻기에서 읽을 수 있는 ‘소금길’이 있었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다윗 왕이 남쪽 에돔 왕국을 복속시킨 것은 군사적인 면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큰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에 보면, 다윗 왕이 사해 밑의 염곡(소금 계곡)을 차지하기 위해 에돔 왕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염곡 전투에서 에돔 사람 1만8000명이 죽었고, 전투 후에도 다윗 왕은 에돔에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소금은 목숨 바쳐 싸우고 지켜야 할 중요 자원이었다.
▲'인류 첫 도시' 예리코 유적 -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예리코 유적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사해와 인접한 예리코에는 일찍부터 고대인들이 정착해 요르단강과 샘물로 밀과 보리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예리코는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잇는 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DYKT Mohigan/위키피디아
베네치아 유대 상인의 동방무역
중세 베네치아가 동방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힘도 소금에서 나왔다. 베네치아는 5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피란민들에 의해 탄생한 도시이다. 피란민들이 늘어나자 늪지에 인공섬들을 만들어 오늘날의 베네치아가 되었다. 8세기에 해수면이 1m 낮아져 9세기부터 갯벌에서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 귀한 소금을 동방으로 가져가 비단과 향신료 등 진귀한 상품들과 바꾸어 왔다. 염전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소금의 독점권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소금 확보를 위해 1250년부터 120년 동안 4차례나 전쟁을 했다. 십자군 전쟁 때 교황은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했다. 당시 동방무역을 위해 이슬람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기독교 상인이 아닌 유대 상인들이었다.
소금 상권 장악한 유대인, 근대 첫 주식회사 설립
1492년은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이해에 신대륙이 발견되고, 이슬람이 유럽 대륙에서 쫓겨났으며, 스페인 왕국에서 유대인 추방령이 있었다. 이때 추방당한 유대인 37만 명 중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 저지대로 올라갔다. 그들이 척박한 땅에서 주목한 것은 절임 청어였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독일 북부의 한자동맹 상인들이 공급하는 암염으로 절임 청어를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값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들여와 암염을 퇴출시켰다. 이후 유대인들은 소금 상권을 장악한 여세를 몰아 절임 청어 산업도 주도하게 된다.
그 뒤 청어 수요가 늘어나자 유대인들은 어선을 건조하면서 화물선도 함께 만들었다. 당시 화물선의 통행세는 갑판 넓이에 비례해 받았다. 유대인들은 통행세를 적게 물기 위해 갑판 넓이를 줄이고 화물 싣는 선복을 늘린 배불뚝이 플류트선을 개발했다. 이 배는 비교적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유선형 배에 비해 건조비가 적게 들었다. 그리고 돛대에 처음으로 복합 도르래를 설치해 선원 수를 3분의 1로 줄일 수 있었다. 이로써 경쟁국에 비해 화물 운송료를 낮추어 플류트선들이 유럽 화물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이후 암스테르담은 물류 기지가 되어 중계무역이 크게 발전했다.
무역이 발달하니 이를 지원하는 금융과 보험이 발전했다. 유대인 주도로 1602년 근대적 의미의 첫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탄생했다. 이후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주식거래소’가 설립되었다. 각 나라에서 모여든 1000여 개의 주화들을 길더화 지폐로 통일시킨 ‘암스테르담 은행’이 이때 만들어졌다. 소금이 탄생시킨 자본주의의 씨앗들이다.
[소금은 신뢰의 상징, 최후의 만찬 유다의 소금 그릇은 왜 엎어져 있나]
고대 유럽에선 귀한 손님이 오면 소금으로 조리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 앞에 소금 그릇을 놓아 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에서 배신자 유다는 돈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다. 그 앞에 놓인 소금 그릇은 엎어져 있다. 유다가 예수와의 약속을 어기고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엎어져 있는 소금 그릇으로 상징한 것이다. 소금은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불변의 약속을 상징하여 세례 때 소금을 썼던 때도 있었다. 구약성경의 ‘민수기’에는 신과 사람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룩한 인연을 ‘소금의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인류가 지금처럼 자유롭게 소금을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고려 충렬왕 14년(1288)에 소금 전매 제도가 시행된 이래, 전매 제도에서 풀린 게 1961년이니 소금이 자유롭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60년 남짓이다. 기원전 7세기 시작되었던 중국의 소금 전매제가 풀린 것은 2014년이고 소금 가격이 자율화된 것은 2016년이었다. 소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한 상품이었다. 모든 문명은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발아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사에서 빛을 보았던 도시나 국가들이 소금에 힘입어 번성한 곳이 많았다.
[8] 유대신화의 인류 첫 여성… 神과 남성에 맞선 릴리트
아담 첫 아내는 이브 아닌 릴리트, 인류 최초 페미니스트였다?
유대 신화에 의하면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했다. 아담(Adam)과 릴리트(Lilith)다. 릴리트가 아담의 첫 번째 아내였다는 주장이다.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성서’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라고 쓰여 있다. 중세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를 신봉하는 랍비들은 이 구절을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든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어진 2장에는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각각 따로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
▲19세기 英화가 존 콜리어의 '릴리트' - '릴리트'는 유대 신화에서 남자 '아담'과 동시에 창조된, '이브'보다 앞선 첫 번째 여인으로 전해진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이 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순을 없애려 고안한 해석으로도, 가나안에서 숭배받던 다산의 여신을 차용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1970년대 유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며, '릴리트'는 남성과 신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최초의 여성으로 재조명받았다. 존 콜리어, ‘릴리트’(1889), 영국 사우스포트 앳킨슨 아트갤러리 소장. /위키피디아
이 모순을 없애기 위해 유대교 랍비들은 처음 구절은 ‘릴리트’를, 두 번째 구절은 ‘이브’를 만든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이야기는 7~10세기 유대교 문헌 ‘벤 시라의 알파벳’에 처음 나온다. 11세기 카발라 문헌 ‘조하르’(빛의 책)에도 신이 아담을 위해 동반자를 창조했고 그 최초의 여자가 릴리트라고 기록되어 있다.
릴리트에 대한 또 다른 설이 있다. 아담의 첫 번째 아내 릴리트 이야기는 초기 유대교를 만든 사람들이 수메르 신화를 유대 신화에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릴리트는 당시 가나안에서 추앙받던 다산의 여신으로, 뱀과 교합하는 밤의 마녀였다. 기원전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수메르 점토판에는 릴리트 여신이 새의 날개와 발톱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외에도 수메르 신화의 차용 예가 더 있다. 히브리 성서(구약 성경)의 에덴동산은 수메르 신화 ‘딜문’ 동산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딜문은 ‘정토’ ‘밝은 세계’란 뜻으로, 병도 죽음도 없는 생명의 땅이었다. 딜문동산 신화에서는 창조주가 여신이었는데 에덴동산 신화로 넘어오면서 창조주는 남신이 된다. 모계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부계사회로 바뀌는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노아의 대홍수도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홍수 이야기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길가메시 서사시' 점토판은 고고학자 레어드가 1851년 니네베 궁전 지하 서고에서 발견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의하면, 길가메시에 의해 릴리트 여신은 쫓겨나고 이난나(난나) 여신이 등장한다. 이난나는 밤을 지배하는 달의 신으로, 풍요와 지혜의 여신으로 숭배받아 부엉이로 상징되었다. 이난나 역시 자신의 성적 매력으로 남자들을 홀리고 다닌 뒤 싫증나면 버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난나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로마 신화에서 비너스로 거듭난다. 이후 릴리트 이야기는 문학에서도 부활한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 릴리트가 아담의 첫 아내로 등장한다.
인류 최초의 부부 싸움
유대 신화에 의하면, 아담과 릴리트는 성교 문제로 싸움을 시작했다. 릴리트는 성관계할 때 늘 남성 상위 체위를 하는 것과 아담이 원하면 무조건 성관계에 응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릴리트가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왜 나만 당신 밑에 누워야 하느냐?”며 항의했다. 아담은 “나는 너보다 윗사람이니, 너는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릴리트는 “우리는 둘 다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동등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거룩한 여호와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며 홍해 근처 동굴로 도망가 악마 루시퍼의 연인이 되었다. 아담은 이 사실을 여호와에게 하소연했다. 여호와는 천사 3명을 보내 릴리트를 데려오도록 했으나 그녀는 귀환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 이야기는 성관계에 대한 불만으로 비치지만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시대를 앞선 릴리트의 진보적인 사고였다.
▲17세기 플랑드르 화가 조르다엔스의 '아담과 이브' - 루벤스와 반 다이크 이후 17세기 대표적 플랑드르 화가였던 자코브 조르다엔스의‘아담과 이브’(1642). 뱀의 유혹도 필요 없어 보일 만큼 탐욕스럽게 선악과를 따 먹는 이브와,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팔을 내민 아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스페인 톨레도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렇듯 원래 유대 신화에 의하면, 남녀는 평등하게 태어났다. 릴리트의 추방은 신의 뜻이 아니라 아담의 윽박과 구박 때문이었다. 릴리트는 오늘날 페미니스트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녀가 도망간 뒤, 여호와는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이브를 만들었다. 이브는 릴리트와는 달리 순종적이고 희생적이었다. 이런 아담의 갈비뼈 신화 때문에 유대 문화에는 철저한 남존여비 사상이 존재한다. 남녀 사이에 태생적 상하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한 이브의 유혹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죄질이 무겁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 벌로 여자는 해산의 고통과 남편에 대한 복종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 여자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성인의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시너고그(유대회당) 의무교육에도 참가할 수 없어 여자아이는 보통 집에서 엄마가 가르쳤다. 여자는 예배에서도 배제되었다. 지금도 정통파에서는 여자가 남자와 함께 앉지 못하고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가족 사업에서도 제외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여자를 집안 사업에 참여시키지 않은 이유다. 율법도 남자처럼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여자, 곧 신부(新婦)는 단지 거래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철저한 가부장제를 지켜, 집안의 가장은 남편이며 가장의 자리에는 그 누구도 앉을 수 없다. 심지어 이스라엘 초정통파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삭발하고 가발을 써야 한다. 유부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외간 남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음모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해석하는 유대 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부에서 여성에 대한 지독한 차별이 아직도 존재한다. 물론 유대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개혁파에서는 이러한 관습이 많이 개선되어 남녀평등이 지켜지고 있다.
릴리스(릴리트) 콤플렉스
유대교에서 파생된 기독교에서도 여자는 남자보다 죄의식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 깔려 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이브를 근거로 ‘남편은 모든 여자의 머리’라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위를 강조했고, 여성 교육을 금지했으며, 여성들에게 침묵을 지킬 것을 명했다. 성 오거스틴도 이브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그 형태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아담에게 봉사하도록 지어진 부수적 존재라고 했다.
이브는 가부장적 기독교 문화에서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여성상으로, ‘남편에게 복종하는 현모양처, 모성애가 강해 육아와 집안일을 좋아하는’ 반면 릴리트는 ‘남녀 동등권을 주장하며, 성생활을 즐기고, 모성애를 거부하는’ 여성이다. 사실 여성의 내면에는 두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남성 지배적 문화 구조는 일방적으로 이브의 미덕만을 인정하고 찬양했다. 여기서 유래된 용어가 ‘릴리스(릴리트) 콤플렉스’이다.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거나, 성적으로 적극적이거나, 아이를 원하지 않는 본능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문화 현상을 말한다. 특히 여성에게 모성애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여성이 전적으로 육아를 담당하게 하고, 그러지 않으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만들었다.
[페미니즘 운동의 아이콘 릴리트]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선언으로 출발한다.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여성 억압의 상태와 원인을 설명하고 여성 해방을 위한 해법을 제시하는 이론이다. 페미니즘 운동가 중에 유독 유대인 여성이 많다. 그만큼 유대인 사회의 남성 우월주의가 심했다는 반증이다.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는 물론 신에 맞섰다는 이야기 자체가 강렬했기 때문에 릴리트가 페미니즘 운동의 아이콘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1970년대 유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재조명되었다. 유명한 신학자이자 유대 페미니즘 운동가인 주디스 플라스코가 책 ‘릴리트의 탄생’을 펴내며 전설 속의 악마와 요부로 취급되던 릴리트를 남성과 신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최초의 여성으로 만들어냈다. ‘여성 인권저널’을 창립해 평생을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워왔던 유대인 대법관 루스 긴즈버그는 이런 말을 했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 달라는 것뿐이다.”
유대인 사회의 남성 우월주의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2017년에 폭로된 혐오의 실체는 놀라웠다. ‘반지의 제왕’ 등을 히트시킨 유대인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하비 와인스틴은 100건이 넘는 성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그간 비밀 유지 각서 등의 교묘한 장치를 통해 여성을 억압해온 자였다. 그의 성추행 사건이 뉴욕타임스 기사를 통해 폭로되자 ‘나도 당했다’는 미투(Me too) 운동이 본격적으로 촉발하였다. 그 뒤 미투 운동은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가며 연예계를 넘어 재계와 정치계로 그 범위가 확대 중이다. 이제 여성 누구나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에 맞서는 릴리트가 되어가고 있다.
[9] 청어잡이서 태동한 근대 자본주의
‘청어 재테크’로 쌓은 유대인 자본, 17세기 은행·주식회사 밑천 됐다
▲동인도 탐사 뒤 귀향하는 네덜란드 선박들 - 기독교 왕국이 세워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상당수가 플랑드르 지방을 거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 이들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의 천일염을 독점 수입하며 절임 청어 산업을 주도했고, 청어 잡이와 포경 산업 호황은 조선업 발달로 이어졌다. 네덜란드가 국제 해운 업계를 평정하며 물류 중심지가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세워졌으며, ‘주식회사’ ‘중앙은행’ ‘증권거래소’ 등 자본주의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16~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헨드릭 코르넬리스 프롬의 그림 ‘두 번째 동인도 탐사 뒤 암스테르담으로의 귀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37만 명의 유대인 중 많은 사람이 종교의 자유가 있고, 영국에서 추방당한 동족들이 사는 플랑드르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지금의 벨기에 북부 지역이다. 유대인들은 부르게 항구에 정착해 보석 장사와 무역을 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무렵 불운이 닥쳤다. 강의 수로가 침전물로 막히면서 부르게는 항구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유대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앤트워프 항구로 옮겨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부흥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용병들의 반란으로 1576년 6000명의 시민이 살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로써 그들은 플랑드르 시대를 마감하고 척박한 네덜란드 저지대의 환경에 맞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유대인들은 호수와 바다를 메우는 간척 사업을 하는 한편 암스테르담을 무역항으로 개발했다.
유대인, 막강한 한자동맹 물리치고 상권 장악
네덜란드 저지대는 바다보다 4m 이상 낮은 소금기가 많은 늪지로 농사짓기 어려워 먹을 것이 귀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를 해도 자신의 먹을거리를 스스로 책임지는 ‘더치 페이(Dutch pay)’가 발달했겠는가. 그 무렵 네덜란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청어 잡이에 나섰다. 네덜란드 인구 100만 명 중 30만 명이나 청어 잡이에 종사했던 걸 보면, 청어는 그야말로 네덜란드 전 국민의 밥줄이었다. 그들은 청어를 소금에 절여 절임 청어를 만들어 팔았다. 절임 청어를 만드는 데 소금은 너무나 중요했다. 당시 소금은 북부 독일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암염을 공급받았다.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란 중세 독일 북부와 발트해 연안 도시들에서 결성된 상업동맹이다.
이런 환경에서 유대인들은 절임 청어에 쓰이는 소금에 주목했다. 그들은 암염 대신 자기들이 살았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값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수입하여 독일산 암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유대인과의 소금 유통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의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 체제를 이루어 소금 상권을 장악한 뒤 자연스레 절임 청어 산업도 주도했다. 그들은 청어를 처리하는 데도 ‘분업과 표준화’를 도입해 숙련공은 1시간에 2000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낼 수 있었다. 절임 청어 생산량은 획기적으로 늘었고, 유대인 상인들은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유대인들은 1년 이상 보관이 가능한 절임 청어를 해군과 상선들에 정기 공급하는 한편 전 유럽에 판매했다.
운송비 경쟁력으로 세계 해운업계 평정
청어 잡이와 포경 산업이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배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는 자연스레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져 네덜란드 선박 수는 2000척이 넘었다. 대부분이 70~100톤의 청어 잡이 어선이었고 일부가 대형 상선과 포경선이었다.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고기잡이 배뿐 아니라 화물선 제작 능력이 좋아졌다. 16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선박은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17세기 그림 속 청어 -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헤릿 다우의 그림 ‘한 노파와 청어를 가져온 소년’. /위키피디아
그 무렵 발트해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 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 배는 양옆으로 많은 대포를 장착하고 다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예 대포를 없애거나 최소한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했다. 대신 가벼운 나무로 화물 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그 무렵 화물선 제작에 유대인의 지혜가 더해졌다. 2~3개의 대형 마스트에 큰 돛들을 달았다. 마스트 높이는 당시 선박 중 가장 높았는데 이는 빠른 속도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이나 풍속이 바뀌면 재빨리 돛들의 방향과 높낮이를 조절해 줄 선원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돛대에 최초로 ‘복합 도르래’를 설치하여 선원 수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영국의 동급 선박 승선 인원이 30명이라면, 유대인들이 만든 배는 10명으로 운항할 수 있었다.
이 배를 ‘플류트(Fluyt)선’이라 불렀다.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과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선박 건조비도 싸게 먹혔다. 표준화로 건조 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라 발트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화물 운송비를 경쟁국 대비 3분의 1까지 낮추어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후반에 이미 북방 무역의 70%를 장악했다. 어선 2000척 이외의 상선 숫자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 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자본주의 싹이 피어나다
그 무렵 네덜란드 선주들은 동양을 향한 원양 항해에 나섰다. 이런 회사들이 몇 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이 문제였다. 스페인, 영국 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의회가 나서서 하나의 회사로 합병을 유도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당시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각자의 투자로 충당했다. 약 645만 길더, 곧 금 64톤이 모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이렇게 주식회사라는 형태를 통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일컫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네덜란드에서 청어를 먹는 법 - 네덜란드 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청어를 잘게 썬 양파와 함께 먹는다. /위키피디아
그 뒤 해운업의 발전은 네덜란드를 물류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물류산업 발달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를 중계무역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 무역업의 발전은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과 보험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싹들이 네덜란드에서 피어났다.
그 무렵 네덜란드가 세계 물류의 중심이자 중계무역 기지이다 보니 유통되는 화폐의 종류만 수백 가지가 넘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태어난 게 화폐 통일을 목적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 모태 격인 암스테르담은행이었다. 1609년 상인들이 만든 민간은행이었지만 시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고, 600길더 이상의 거래는 금화나 은화가 아닌 길더화 은행권을 사용하도록 의무화하여 화폐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증권거래소’가 1611년 세워졌다.
이렇게 자본주의 씨앗인 ‘주식회사, 중앙은행의 모태, 증권거래소’가 차례로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이후 암스테르담은행은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신용 대출을 선보이고, 2~3%대 저금리 대출을 시행해 해외 투자가 싹틀 환경을 구축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는 해외 투자를 주도해 세계 무역 네트워크를 완성하고 자본주의 중심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1776년에 펴낸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는 영토도 작고 인구도 적지만 영국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다. 네덜란드 정부는 연 2%에 돈을 빌릴 수 있다. 신용 좋은 민간인도 3%면 차입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청어가 조선업과 해운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중상주의를 활짝 꽃피워 자본주의의 씨앗들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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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근대는1492년이 가른다
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② 유대인 추방 ③ 이슬람 격퇴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이 된 ’1492년', 스페인으로서는 뜻 깊은 한 해다. 3건의 역사적 사건이 그해에 동시에 일어났다. 거의 800년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이슬람을 몰아내고, 이를 계기로 기독교 왕국을 선포하고 유대인을 추방하였으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경제사에서 1492년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유대인 추방은 네덜란드에서 중상주의가 꽃을 피우고 자본주의의 씨앗이 잉태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힘은 그대로 도버해협을 건너 영란은행을 탄생시켜 산업혁명과 대영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 연준이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세계 경제 질서를 탄생시킨 씨앗은 1492년에 심어졌다.
[10]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美연준 탄생 역사 [上]
영국이 해상권력 거머쥐자… 유대인의 돈도 도버해협을 건넜다
‘수출 규제’로 뒤바뀐 제국의 운명
달러 발행은 왜 국채와 연동되었을까? 그 연원을 살펴보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금은 긴 여행이다. 1913년에 설립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영국의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했다. 그렇다면 영란은행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17세기에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통째로 영국으로 옮겨온 과정과 영란은행 설립 배경을 알아야 한다.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도버 해협을 건넌 가장 큰 이유는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영국이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일이다. 어떻게 후진국 영국이 당시 최강국 스페인을 상대로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이번 칼럼에서 살펴보자.
수출 규제가 역사를 바꾸다
수출 규제가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019년 7월 1일 일본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기로 발표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 일대 타격을 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덕분에 우리 반도체 소재 산업이 대일 종속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됐을 뿐 아니라 소재 부품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스페인 왕 카를 5세
과거에도 수출 규제로 제국의 운명이 뒤바뀐 사례가 있었다. 16세기 영국과 스페인 제국 이야기이다. 영국 왕 헨리 8세 때 일로, 그 무렵 영국은 유럽 대륙에 비해 형편없는 후진국이었다. 국가의 주 수입원은 양털 판매와 해적질이 전부다시피 했다. 그나마 양털 수출도 유대 상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해적질에 필요한 대포도 모두 대륙에서 수입해 쓰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수입 대포를 주로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에 썼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스페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유대인 경제권인 플랑드르 공업지대의 영국 수출 금지를 단행해 영국은 더 이상 청동 대포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의 자급자족 정책, 철 대포를 개발하다
그러자 영국 왕 헨리 8세는 자급자족 정책을 서둘러 대포 자체 제작에 나섰다. 당시 청동 가격은 철의 4배에 달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는 철 대포 개발에 나섰다. 왕은 먼저 철광맥이 있는 서식스숲의 제철업자들에게 거액을 지원해 품질 좋은 철을 생산케 했다. 그 결과 1540년대 서식스 지역의 제철 공장은 50곳이 넘어 균질한 철 생산에 성공했다. 이는 훗날 산업혁명의 토대가 된다.
당시 영국은 효율적인 해적질을 위해서는 사거리가 긴 함포가 절실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륙의 청동 대포보다 포신이 긴 장거리 철 대포 개발이었다. 왕은 장인들을 끌어모아 마침내 장거리용 철 대포 개발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운도 따랐다. 서식스 지역 철광석에 포함된 인(燐)이 대포의 내구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철 대포 생산 원가는 청동 대포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후 영국은 연간 400톤이 넘는 철 대포를 생산했다. 이는 유럽 전체 대포 생산량의 70%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갤리언선의 포문과 평저선이 역사를 바꾸다
그런데 어렵게 개발한 장거리 함포의 명중률이 형편없어 문제였다. 함포 발사 때 배가 너무 흔들려 조준 사격이 소용없었다. 이를 극복한 게 평저선 개발이었다. 이는 영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함포 발사 시의 반동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선박의 밑바닥을 비교적 크고 편평하게 만들라는 아이디어는 당시 헨리 8세가 직접 냈다고 한다.
/영국 왕 헨리 8세
헨리 8세의 공은 또 있었다. 그는 철 대포 개발 이전에 이미 상선을 차용한 무장 상선이 아닌 본격적으로 전투를 위해 설계된 전함을 제작해 ‘포문’을 설치했다. 그 전에는 갑판에 함포를 적재함으로써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전복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함포를 적재할 수 없었다. 헨리 8세는 그러한 문제를 ‘포문’을 만들어 해결했다. 수면 바로 위에 위치한 아래 갑판에 경첩식 나무 창문을 만들어 이 포문을 통해 함포를 발사하도록 했다. 후발국 영국이 이후 당대 최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중을 낮춘 갤리언선과 평저선에 장거리 철 대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의 갤리언선 포문 설치와 평저선 개발은 이후 세계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을 탄생시키는 시발점이 될 줄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세계사를 바꾼 칼레 해전
그 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휘한 1588년 칼레 해상 전투 때 영국은 갤리언 전투선 34척, 상선을 무장 시킨 163척 이외에도 평저선 30척으로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와 맞섰다. 그 무렵 해전은 백병전을 위주로 하는 근접 전투였다. 보통 배와 배끼리 강하게 들이받은 후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상대 배에 내려 보병들이 건너가 싸우는 백병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영국 함대의 해군 선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반면 스페인 무적함대는 해상 백병전을 위해 해군 선원 8500명, 보병 2만명을 태운 엄청난 군사력으로 무장해 있었다. 무적함대 선박은 한 배에 보병만 350명씩 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칼레 항구에서 스페인 육군 3만명을 더 태워 영국 본토에 상륙시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상 백병전에서 세계 최강이던 스페인 무적함대는 속도와 회전력의 우위를 활용해 사거리 길고 명중률 높은 철 대포로 공격해오는 영국 해군 갤리언 전투선과 평저선 함대의 원거리 함포전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교황과 스페인 왕실 깃발을 단 맨 앞 가운데 함선은 무적함대 기함 ‘산 마르틴’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배는 영국 해군의 기함 ‘아크 로열’이며, 왼쪽은 전설적 해적이자 탐험가, 해군 제독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함대의 부사령관 기함 ‘리벤지’인 것으로 보인다. 뒤편으로는 공격당한 스페인 함선들이 침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자 미상의 16세기 영국 유화. 영국 해군과 스페인 무적함대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해전 ‘그레벨링엔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 그리니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영국의 갤리언 전투선은 무게중심이 낮고 길고 날렵해 철 대포가 200문 이상 있음에도 무적함대 배보다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게다가 무게중심이 낮아 안정되다 보니 대포의 명중률도 스페인 함대보다 높았다. 영국의 평저선 역시 함포 명중률이 스페인 무적함대의 첨저선보다 월등히 높았다. 더구나 평저선은 수심이 얕은 연안에 정박이 가능하여 인근 해안에서 보급품 나르기도 수월해 영국 함선들에 탄약과 식량 등의 보급이 원활해졌다. 특히 당시 칼레 항구는 수심이 낮아 흘수가 깊은 대형 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는데, 이런 조건에서 평저선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당시 영국 철 대포의 사거리는 평균 100미터였고, 스페인 무적함대 청동 대포의 사거리는 보통 60미터 내외였다. 영국 함선들은 근접 전투를 하지 않고 장거리 함포 덕분에 80미터 밖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괴롭혔다. 게다가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방향을 바꾸는 회전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영국 평저선은 단지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해 돛들을 재빨리 돌려 배를 회전시키면서 초승달 대형을 이루어 쳐들어오는 적선들을 향해 함포 공격을 자유자재로 하여 스페인 무적함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회전력이었다. 이로 인해 무적함대는 그들이 원하는 해상 백병전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쫓고 쫓기는 일주일간의 전투 끝에 지친 무적함대가 밤에 항구로 들어가 모두 정박해 있을 때 영국은 8척의 화공선을 기습적으로 상대방 진영으로 투입해서 폭발시키는 화공 작전을 폈다. 이에 놀란 무적함대 선박들이 밧줄을 끊고 달아나면서 아수라장이 됐을 때 함포 사격 총공세를 펼쳐 칼레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로 이어져
마침내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것이다. 이는 세계 권력의 이동이자 해상권 장악을 뜻했다. 그간 스페인 제국의 기세에 눌려 살았던 영국이 이를 계기로 중상주의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그들 영해에서만 스페인 배를 몰아낸 게 아니라 미국과 인도 항구에서도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쫓아내 버렸다. 이로써 이들은 북미에 식민지를 많이 건설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사의 분수령이었다. 스페인 제국이 지고 영국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항해조례를 통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 탄생 그리고 훗날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준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스페인 무적함대 꺾은 평저선]
밑바닥 편평해 회전 좋고 반동 줄여 함포 명중 높여… 임진왜란 때도 위력 발휘
우리나라 배는 고대부터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다. 중국, 일본 배들은 물살을 쉽게 가르기 위해 배 아래가 뾰족한 역삼각형인 첨저선이다. 유선형이기 때문에 평저선에 비해 속도가 빨라 다른 나라의 배는 첨저선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저선 같은 독특한 배가 탄생한 이유는 갯벌이 많다는 점이다. 배 밑이 역삼각형인 V자형 첨저선은 썰물이 나가면 갯벌에 쓰러진다. 그래서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고려 때 최무선 장군은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먼저 제조 방법이 유실되었던 화약 제조 기술을 복원했다. 그리고 대포를 만들어 평저선 위에 설치했다. 이로써 1380년 금강 하구 진포에 상륙한 왜선 500척을 섬멸하여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칼레 해전에 비해 200년 이상 앞선 이 진포 대첩이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다.
그 뒤 왜구들도 대포를 만들어 배 위에 장착했지만 우리 한선을 당해낼 수 없었다.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구의 배는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평저선은 안정감이 있어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첨저선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무리한 선회를 하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평저선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일등 공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