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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역사11/ LG - SK - posco - kakao

상림은내고향 2021. 5. 10. 21:05

기업의 역사11/ LG - SK - posco - kakao

■LG 창업주 구인회

고정일 작가

13세에 결혼하고 이병철, 조홍제와 같은 학교를 다니며 친구가 돼

LG 창업주 구인회는 한국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된 ‘화학’과 ‘전자’ 두 산업을 개척해낸 선구자이다. 그는 광복을 맞아 락희화학·금성사·호남정유를 설립하며 산업근대화의 초석을 이루었다. 인재난에 시달렸던 산업화 초기에 주류를 이룬 ‘가족경영’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해냈으며, ‘동업으로 일궈 합작으로 키웠다’는 특유의 성장모델을 구축, 글로벌 LG의 토대를 닦았다. 특히 2005 3월 불협화음 없이 이루어진 GS LS, LG 계열 분리는 한국 근대경영사상사에서 이상적인 결별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한번 사귄 사람과 헤어지지 말고,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 이 말은 후손들을 훈육하고 ‘인화(人和)’를 경영이념과 가훈으로 삼았던 구인회가 남긴 유산이라 하겠다. 그가 싹을 틔운 LG의 경영철학과 기업문화는 오랜 기간 쌓아온 사업 경험과 통찰력, 그리고 기업인으로서 자긍심이 한데 모여 축적된 결과물이다. 인화·신용·근검절약·정도경영·기술혁신·인재존중·국제화로 압축되는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은 2대 구자경과 3대 구본무로 계승되면서 변화·발전해 오늘날 ‘글로벌 LG’를 일구는 토대가 되고 있다.

구인회는 1907 8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홍문관 교리로 일한 할아버지 구연호의 외아들 구재서와 진양 하씨 사이의 맏이로 태어났다. 구인회는 13세 때인 1920,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허만식의 장녀 허을수와 혼례를 올린다. 이렇게 구씨와 허씨는 무려 8건의 겹사돈으로 맺어지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갔다. 구인회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운 뒤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 이병철 삼성 회장과 조홍제 효성 회장도 지수보통학교에 다녔다. 구인회는 세 살 아래 이병철과 함께 수업을 듣기도 했고, 한 살 위 조홍제와는 같이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을 간 축구시합을 하며 교우가 되었다.

 

/구인회 LG 창업주. /주간조선

 

구인회는 20세에 이르러 새로운 세상에 크게 느낀 바 있어 서울 중앙고보 2년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엄격한 유교 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한다고 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몹시 반대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구인회는 먼저 승산리 협동조합 일을 맡았다. 이때 마을에는 무라카미라는 일본인이 잡화류와 문구류, 석유 따위를 독점하여 큰돈을 벌고 있었다. 구인회는 무라카미에 대응키 위해 1929년 지수협동조합을 세워 석유·비누·광목 등을 공동구매해 마을 주민들에게 팔았다. 이렇게 하면 일본인 가게에서 개별적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무라카미의 사업은 위축되고 구인회는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한편 구인회는 동아일보 진주 지국장을 맡았다. 여기엔 중외일보를 경영하던 손위 처남 허선구의 영향이 컸다. 그는 대중매체에 대한 식견을 넓혀 나갔다.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때여서, 라디오를 열심히 들으며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1931
, 24세가 된 구인회는 기울어져 가는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가 고향집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 구재서는 2000원을 내주며 “세상을 절대 얕보지 말고 남하고 화목하게 지내라, 신용을 얻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부친의 이 한마디는 오늘날 ‘인화단결’로 상징되는 LG그룹 경영이념으로 굳어졌다. 구인회는 동생 구철회와 함께 자본금 3800원을 만들어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그러나 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 첫해에 무려 500원의 손실을 보고 말았다. 이듬해 다시금 아버지를 설득하여, 고향마을 300석지기 논 문서를 담보로 8000원을 빌려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은 구인회의 편이 아니었다. 그해 장마 때 억수로 큰비가 내려 가게의 물건들이 모조리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러나 구인회는 이에 좌절하지 않았다. ‘장마가 든 해에는 풍년이 들어 살기가 좋아질 것이다.’ 그는 굳게 믿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다시 거금 1만원을 빌려 포목사업을 벌였다. 그의 예측대로 그해 가을에 풍년이 들어 혼례 수요가 크게 늘자 포목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37년부터는 경성방직에서 생산되는 태극성표 광목을 대량으로 취급했다. 손아래 처남인 허윤구가 경영하는 조선물산에도 투자해 서울과 만주를 오갔다. 구인회로서는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기였다.

이 무렵 구인회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저 포목을 파는 것만이 아니라 고객 취향에 맞춰 비단이나 인조견직물에 수를 놓거나 날염을 해서 파는 것이었다. 기존의 대량생산된 문양과 더불어 맞춤식으로 가공된 별도 문양을 제공함으로써 상품의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구인회상점의 별색(別色) 맞춤형 문장은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뒤 구인회는 청과물·수산물·식료품 도매에까지 발길을 넓힌다. 그는 직접 발품을 팔며 수집한 고객의 목소리를 제품에 반영했고 시장 상황을 예측해 고객이 원하는 것을 미리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구인회상점은 다른 포목점을 제치고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구인회는 늘 강조했다.

“싸게 만들기는 쉽지요. 그러나 제품이 성공하려면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상품은 잘 팔리는 법이에요. 또 제품이 잘 팔린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값을 흐리지 말 것이며, 한때 잠깐 팔아치울 생각은 절대 금해야 합니다. 고객과의 꾸준한 관계만이 기업의 생명이지요.<②편에 계속> 
 

 

LUCKY 화장품은 락희(樂喜)에서 나왔다.

 <①편에서 계속>
그즈음 유림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안희제와 구인회는 교분을 이룬다. 구인회보다 스물두 살 위인 안희제는 부산 중앙동에 포목을 거래하는 ‘백산상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산상회는 포목점 간판은 명목뿐이었고, 실제로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자금 제공처였다. 김구가 광복을 맞은 조국에 돌아와서 먼저 안희제의 유가족 안부부터 물었다는 사실은 안희제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했던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안희제가 어느 날 구인회를 찾아와 독립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요청했다. 쌀 한 가마에 250전 하던 시절이었다. 구인회는 두말없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돈 1만원을 만들어 안희제에게 내주었다. 그즈음 독립운동자금을 주고받는 일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구재서도 독립운동가 구여순을 통해 5000원이라는 큰돈을 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보낸 바 있다. 구인회는 청년 시절 구인회상점을 통해 경영자로 성장한 뒤 1941년 ‘주식회사 구인상회’를 발족하여 본격적인 사업가로서 운수 및 무역업에 뛰어든다. 그는 이어 광복을 맞아 1945 9월 새 출발을 결심하고 귀환 동포와 미군 진주로 북적이는 부산으로 사업 터전을 옮긴다.

 

/1954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치약인 ‘럭키치약’. /주간조선

 

구인회는 부산 서대신동에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가옥을 사들여 1945 11월 ‘조선흥업사’를 설립한다. 조선흥업사는 미 군정청이 승인한 무역업 허가 제1호 업체였다. 그즈음 광복된 한국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각종 생활필수품이고, 그것들을 외국이나 타 지방에서 교역을 통해 가져오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6 1월 구인회의 장인 허만식의 6촌인 허만정이, 자신의 셋째 아들 허준구(뒷날 LG 명예회장)를 데리고 부산으로 구인회를 찾아왔다. 허만정은 사업자금을 내놓으며 아들 허준구에게 경영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고 구인회 또한 도쿄 유학생 출신의 허준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허준구는 그때 24세였는데, 이미 구인회의 동생 구철회의 맏사위였으므로 남도 아니었다. 이것이 LG의 두 집안 로열패밀리인 구씨·허씨 체제의 시발점이 된다.

광복을 맞아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기업들 대다수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설비와 기술을 그대로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탓에 원료가 부족하고 직공들이 숙련되지 못해 상품은 무척이나 조악했으며 그마저도 넘치는 수요와 부족한 공급으로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그러나 구인회는 달랐다. 제조업에 뛰어든 이래 설비와 기술을 하나하나 자력으로 마련해 가며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으로, 이어서 전자산업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즈음 구인회의 동생 구정회가 흥아화학공업사 화장품 기사 김준환을 알게 된다. 김준환은 그 무렵 화장품업계의 최고 기술자로 손꼽혔다. 그를 통해 구정회는 흥아화학이 도청 상공과 지정업체에 크림과 머릿기름 등 화장품을 공급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구정회는 이 일을 구인회에게 알렸다. 이미 사업가로서 원숙기인 40대에 접어든 구인회는 화장품 사업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는 먼저 흥아화학과 손을 잡고 화장품을 받아 전국에 팔았다. 그런데 흥화화학에서 김준환이 퇴사하자 구인회는 그를 영입하여 아예 화장품 제조에도 뛰어든다. 자금 마련을 위해 고성 땅 300마지기는 물론 정성 들여 키워 온 구인상회도 과감히 정리했다.

1947
1 5일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를 창립함으로써 LG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화장품 이름도 상호와 같은 발음으로 ‘럭키(LUCKY)’라고 지었다. 구인회는 1949년 서울 장충동에 화장품 연구실을 차려 셋째 동생 구태회(LS전선 명예회장)와 넷째 동생 구평회(E1명예회장)에게 화장품 연구를 맡겼다. 뒤이어 초등학교 교사인 장남 구자경(LG그룹 명예회장)이 합류하여, 지방산에서 화장품 원료를 추출하는 방법과 화장크림이 부드럽게 잘 발라지는 방법을 개발하는 등 자체 연구로 난관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이때 자체 연구개발로 만들어낸 투명크림은 유명한 미국 여배우 ‘디아나 다빈’을 모델로 해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 럭키크림은 그때 화장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 메이쇼쿠크림을 시장에서 밀어내고 ‘해외에서 들여온 외제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경쟁 제품들이 1타스에 500원 남짓 할 때 럭키크림은 그 두 배인 1000원이었지만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여기에는 품질우선주의를 고집한 구인회의 확고한 경영철학이 밑바탕이 되었다.

1950
6·25전쟁이 일어나자 구인회는 락희화학을 부산으로 옮겨 사업을 이어간다. 구인회는 구자경에게 혹독한 경영수업을 시켰다. 구자경은 근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배웠다.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벽 사이로 모래바람이 들어와 자고 나면 온몸이 모래투성이였다. 겨울에는 찬바람이 몰아쳐 침낭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야 했다. 허름한 야전점퍼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기름을 묻힌 꼴이 영락없는 공장 근로자였다. 주위에서 후계자를 왜 그렇게 고생시키는지 묻자 구인회는 이렇게 말했다.

“대장장이는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에도 담금질을 되풀이해 무쇠를 단련하지요. 내 아들이 귀하니까 저렇게 일을 가르치는 것이오.
<③편에 계속>

 

한국최초로 만든 플리스틱 빗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하다

<②편에서 계속>
덕분에 구자경은 현장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데 곧 문제가 생겼다. 화장품 품질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운반 과정에서 용기 뚜껑이 부서지기 일쑤여서 소비자들의 불만과 반품이 날로 늘어났다. 구인회는 미군 PX에서 보았던 플라스틱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1951년 구인회는 플라스틱 가공산업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깨지지 않는 화장품 용기 뚜껑’ 말고도, 일본·홍콩·마카오 등에서 밀수품으로 흘러들어 오는 칫솔·비눗갑·빗 등 생활용품을 국산화하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1947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화장품 ‘럭키크림’. /주간조선

 

그때는 6·25전쟁의 불길이 날로 격해지던 시기였다. 다른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계획은커녕 일본으로 터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때, 구인회는 가진 돈 3억원을 몽땅 털어 미국에서 최신형 플라스틱 사출성형기 두 대를 들여왔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이듬해 4월에 부산 범일동 공장을, 11월에는 부전동 공장을 각각 세워 나갔다. 그해 9월부터는 ‘오리엔탈’이라는 상표로 플라스틱 가공제품인 빗·비눗갑·세숫대야·식기류 등을 생산하기 시작해 국내 시장에 본격적인 플라스틱 시대를 열어간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피란 와 있었다. 상공부 장관 이재형은 락희화학에서 국내 처음으로 개발 생산한 ‘플라스틱 빗’을 국무회의 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 국내 최초 생산 플라스틱 제품을 대통령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재형이 보고했다.

“각하, 이제 이런 제품을 한국에서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것이 한국에서 만든 것이오?” 이승만은 직접 빗을 하나 집어 하얀 백발머리를 빗었다. 그러고는 감격해 하면서 말을 이었다. “상공부 장관, 나 이거 하나 주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만한 일화이지만, 이처럼 락희화학의 플라스틱제품 생산은 한국 화학산업의 한 획을 긋는 쾌거였다.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구인회는 사출성형기 넉 대와 칫솔제조기를 더 들여왔다. 플라스틱 사출의 성공은 구인회가 산업 분야로 한발 더 힘차게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구인회는 초기 성공을 계기로 새로운 아이템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했다. 휴전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1954 10월에는 본격적인 플라스틱 사업을 위해 부산 연지동에 10만㎡(3만평) 대단위 공장을 건설했다. 이듬해인 1955년부터 연지동 공장이 본격 가동되어 비닐원단과 플라스틱 제품이 대거 생산된다. 구인회는 국산 치약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배합기, 충전기와 튜브제조기를 들여오고, 동생 구평회를 미국에 보내어 제조기술을 배워 오게 했다. 구평회는 콜게이트사는 물론 듀폰·다우케미컬·허큘리스 등 대형 화학회사들을 8개월 넘게 수없이 드나들며 정확한 배합 기술을 알아냈다. 락희화학 개발진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일 년 가까이 실험하여 콜게이트 치약과 거의 똑같은 치약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구인회는 고개를 저었다.

“버터 먹는 미국 사람 치약과, 김치 먹는 한국 사람이 같은 치약을 쓸 수 있겠소? 한국 국민의 입맛과 취향에 맞춰야 하오.

락희화학 개발진은 여러 향료회사들과 접촉하여, 마침내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톡 쏘는 맛과 은은한 맛의 중간 맛을 내는 치약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외국 치약에 밀려 지지부진했으나, 국군부대에 납품하게 되면서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군복무 중에 럭키치약을 썼던 사람들은 전역 뒤에도 버릇처럼 럭키치약을 쓰게 되었다. 마침내 럭키치약은 출시 3년 만에 콜게이트 치약을 몰아내고 국내 시장을 석권, LG화학 간판상품으로서 소비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럭키치약이 시장을 독점하자 임직원들은 값을 올리거나 값싼 원료를 써서 이윤을 늘리자는 말도 있었다. 그러자 구인회는 호통을 쳤다.

“소비자들이 잘 사준다고 값을 올려 받자는 거요? 몇 푼 안 남아도 좋으니 봉사하는 자세를 지켜나가면, 럭키의 신용이 소비자의 머릿속에 남게 되고 결국 그것이 진실로 돈을 버는 길이 되는 것이오.

구인회는 창업 초기부터 형제와 친척 중심의 경영체제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구할 때에는 철저히 지연과 학연에서 벗어나 기업을 키울 대목을 찾는 데 노력했다. 1956년 락희화학은 서울대 공과대와 법대에 우수 졸업생 추천을 의뢰하여, 필기와 면접을 거쳐 3명을 채용했다. 이듬해 봄에는 공개채용 신문광고를 낸 뒤 구름처럼 몰려든 응시자 가운데에서 7명을 뽑았다. 구인회는 합격자들을 서울과 부산에 골고루 배치해 밑바닥부터 일을 익히도록 했다. 사전 전문지식이 있건 없건 일선에서 어려움에 부딪히며 배워야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구인회는 함께 회사를 일궈나간 직원들을 부를 때는 ‘한 형, 박 형’ 하며 존칭을 사용했다. 그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했으며, 특히 그때 전무로 일하던 구자경에게는 ‘장남으로서 책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곤 했다.

 

■LG구인회 下 

50년대에 전자사업을 바라본 구인회

 

락희화학은 1950년대를 기술혁신과 사업확장으로 달려왔다. 1956 11월에는 3차로 생산시설을 확장해 PVC파이프를 국내 최초로 생산했고, 1957년에는 비닐장판과 폴리에틸렌필름을, 1959년에는 스펀지 레진을 개발해낸다. PVC파이프는 전후 복구사업과 맞물려 수요가 크게 늘었으며, 국내 최초로 개발한 스펀지 레진과 비닐장판은 혁신적인 제품으로 위치를 점했다. 1959년에는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하고 1960 4월부터 화장비누와 세탁비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락희유지공업을 세운 것은 치약 원료인 글리세린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 글리세린을 만드는 유지공장을 설립하다 보니 자연히 비누를 만들게 되었다.

6
·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끝 무렵, 전자사업은 그때까지 한국의 어느 기업도 시도하지 않은 분야였다. 1957년 어느 날 구인회는 락희화학 기획실장 윤욱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욱현은 전축 매니아였다. 마침 전축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구인회가 물었다.

 

/1967 2월 호남정유 기공식 행사 후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환담하는 구인회(오른쪽 끝). /주간조선


“전축이라는 게 그렇게 좋다니, 우리가 그거 만들 수 있을까?

윤욱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안 될 거야 없지요. 다만 기술 수준이 낮아서 어렵겠지요.

그 말에 구인회가 무릎을 치며 대꾸했다.

“그럼 문제가 없구먼, 기술은 외국에서 배워 오거나, 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를 초빙하면 되지. 윤 실장, 어디 한번 해봅시다.

구인회는 형제들과 장남 구자경을 불러놓고 말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제 PX 물건만 사 쓰고 라디오 하나 못 만들어야 쓰겠소?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 아니오! 먼저 시도하는 사람은 고생이 심하겠지만, 하다 보면 일본의 내쇼날이다, 도시바다 하는 것들만큼 안 될 게 어디 있소?

구인회는 전자공업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개척자 정신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는 어려움과 초창기의 시련들을 헤쳐나가자고 당부했다. 구인회 사장의 열정에 찬 말에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이날부터 모든 임직원은 발로 뛰기 시작했다. 기본사업계획서를 만들고, 필요한 생산시설과 연차 생산품목 및 생산량, 기술요원 확보대책 등을 마련했다. 먼저 기계시설 도입을 위해 1차로 85195달러의 예산을 확보했다. 그즈음 한국에 와 있던 독일 기술자 ‘헨케’를 2년 계약으로 기술고문 및 생산책임자로 채용했다. 회사 이름은 ‘금성사(金星社)’로 정해졌다. 금성은 지구처럼 화려하고 신비한 천체이며 무궁한 수명을 상징하고 있어 전자제품 이미지에 더없이 잘 맞았다. 1958 10 1일 한국 최초 전자공업회사 금성사가 첫발을 내디딘다.<②편에 계속>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LG그룹의 기틀을 닦아

<①편에서 계속>
구인회는 먼저 국산 라디오 개발을 지시했다. 진공관 라디오 설계를 맡은 사람은 엔지니어 김해수였다. 1923년생인 그는 도쿄고등공업학교 졸업반이던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인천 조병창 전기주임으로 발령되었으나 탈출하여 강원도 산골에 숨어 광산 전기책임자로 일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 뒤 미군 PX의 라디오 수리점을 운영했으며, 1958년 공채로 금성사에 입사했다. 산업기반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라디오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시제품을 힘들게 완성해도 부품이 거의 수입품인지라 생산단가가 비쌌다. 결국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직접 부품을 제작해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설계 작업과 부품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져 나갔다. 금성사는 창립 1년 만인 1959 11월 첫 국산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을 자체기술로 만들어내 한국 전자산업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라디오에는 금성사의 상징인 왕관 모양 마크와 ‘Goldstar’ 로고도 함께 찍혔다. 미제 제니스(Zenith) 라디오가 한국 시장을 한창 휩쓸던 때였다.

/1959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라디오인 ‘A-501’ 모델. /주간조선


그러나 금성사는 예상치 못한 시련에 맞닥뜨렸다. 수요층 대부분이 외제만 선호하는 데다 밀수품의 기승으로 판매가 부진했다. 3년 연속 적자에 허덕이던 금성사는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더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구인회를 비롯 금성사 직원 모두가 자포자기 절망뿐인 심정이었다. 그런데 1961 9월 어느 날 부산 연지동 금성사 라디오공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침 생산과장 김해수는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군인의 얼굴을 바라본 그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는 박정희 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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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군사정변의 주역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부산에 내려왔다가 시간을 쪼개어 라디오공장을 둘러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김해수는 부품가공실, 라디오 조립실, 검사실을 안내했다. 시설을 꼼꼼히 살펴본 박정희는 김해수에게 제조과정에 대한 설명까지 들었다.

“공장의 기계시설은 어느 나라 것이오? 부품의 국산화는?
“김 과장은 어느 학교를 나왔소?
“하루에 몇 대나 생산하오?

박정희가 잇따라 질문을 쏟아냈다. 김해수는 왠지 모르는 진지한 이끌림에 차근차근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다.

“이래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내가 무얼 도와주면 좋겠소?

순간 김해수는 울컥 울음이 치밀어 오르는 심정으로 하소연했다.

“회사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품의 질과 직원들 사기는 보장합니다. 밀수품과 면세품의 유통을 막아야 전자산업이 살아납니다.

“알겠소! 기다려보시오. 곧 좋은 소식이 올 거요.

다음 날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구인회는 박정희의 예고 없는 부산 공장 방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최고 권력자의 깜짝 방문에 금성사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이 발표되면서 금성사 라디오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더불어 공보부 주관으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주문전화가 빗발쳤다. 그 결과 한 해 1만대에도 못 미치던 금성라디오 판매량이 1962년에 들어서며 137000대로 늘어났으며 1961 89만여대였던 라디오 보급 대수가 1962년 끝 무렵에는 134만대로 늘어났다. 시인 김수영은 아내가 A-501을 사온 것을 소재로 ‘金星라듸오’라는 시를 썼다. 한 기업의 제품이 광고나 홍보가 아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라디오가 그만큼 서민들의 삶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구인회는 화학과 전자산업을 두 축으로 LG그룹의 기틀을 닦아 나아갔다.

럭키치약 못지않은 대히트 상품인 ‘하이타이’ 개발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구인회는 1962년 락희유지 상무 허신구를 일본·홍콩·동남아시아로 보내 시장개척 아이디어를 얻어오게 했다. 출장을 마치고 온 허신구는 간부회의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태국 방콕에 가 보니, 강가에서 무슨 가루를 뿌려 빨래하는데 희한하게 때가 다 빠지더군요. 합성세제라 하는데, 아직 양잿물로 끓이고 방망이질하는 한국에서 생산하면 아주 잘 팔릴 것 같습니다.

그때 이미 럭키빨랫비누가 나와 아주 잘 팔리고 있었다. 기존 상품의 수요를 깎아먹을 수 없었으므로 일단 가루세제 아이디어는 접어야 했다. 그 뒤로도 허신구는 집안사람들이자 경영층을 1년 넘게 설득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구인회는 마침내 허락했다.

“그토록 집념을 갖고 해보겠다니, 나름대로 확신이 있나보구먼. 좋네, 자네를 한번 믿어보겠네.

최초의 합성세제 ‘하이타이’가 개발되자 영업사원들은 전국 곳곳에서 세탁 시연을 해보이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타이는 주부의 필수품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장 시설을 두 배로 늘려야 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샴푸도 개발하여 큰 인기를 모은다. 그전까지 비누로만 머리를 감던 사람들에게 샴푸는 한마디로 문화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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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일

 

2018.05.21 [구본무 회장 별세]

"큰 별이 졌다" 일제히 애도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20일 숙환으로 별세하자 “대한민국 경제의 큰 별이 졌다”며 경제단체들이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현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구본무 회장은 회장 취임 후 ‘노사(勞使)’를 넘어 ‘노경(勞經)’이라는 새로운 노사문화를 통해 정도경영을 추구했다. 당면 현안을 노경이 함께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가치창조의 노사관계를 구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구본무 회장의 정도 경영에 따른 노경화합은 혁신 활동의 기반이 돼 LG그룹이 험난한 구조조정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며 “고인의 빈자리가 너무 크지만, 경제계는 앞으로도 고인의 뜻을 이어나가 하루 빨리 우리 산업 현장에 선진 노사관계가 정착되고, 이를 통해 지속적인 국가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전경련은 “구 회장은 대혁신을 통해 화학, 전자, 통신 등의 산업을 세계 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도적인 기업가였다. 정도경영으로 항상 정직하고 공정한 길을 걸었으며 늘 우리 기업인들의 모범이 됐다”고 했다.

 

이어 “구 회장은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지역의 농촌자립을 돕고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의료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의인상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 만들기에 힘썼고 젊은이들의 앞날을 위해 교육·문화·예술 지원에 헌신한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다”며 “우리 경제가 재도약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훌륭한 기업인을 잃은 것은 나라의 큰 아픔과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조문·조화 행렬없는 소탈한 빈소...이재용·장하성 조문(종합)

 20일 오전 952분 숙환으로 별세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빈소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향년 73.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고인의 빈소지만, 장례 첫날 분위기는 주요인사의 조문 행렬이 이어지는 통상의 재벌가 빈소와는 사뭇 달랐다. 조화 행렬도, 주요 인사의 연이은 조문도 없었다. 가족 위주의 조문이 이어졌다. 다만, 저녁 이후에는 정·재계 인사들이 빈소를 찾기도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구본무 회장은 회장 취임 후 ‘노사(勞使)’를 넘어 ‘노경(勞經)’이라는 새로운 노사문화를 통해 정도경영을 추구했다. 당면 현안을 노경이 함께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가치창조의 노사관계를 구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구본무 회장의 정도 경영에 따른 노경화합은 혁신 활동의 기반이 돼 LG그룹이 험난한 구조조정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며 “고인의 빈자리가 너무 크지만, 경제계는 앞으로도 고인의 뜻을 이어나가 하루 빨리 우리 산업 현장에 선진 노사관계가 정착되고, 이를 통해 지속적인 국가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전경련은 “구 회장은 대혁신을 통해 화학, 전자, 통신 등의 산업을 세계 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도적인 기업가였다. 정도경영으로 항상 정직하고 공정한 길을 걸었으며 늘 우리 기업인들의 모범이 됐다”고 했다.

 

이어 “구 회장은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지역의 농촌자립을 돕고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의료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의인상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 만들기에 힘썼고 젊은이들의 앞날을 위해 교육·문화·예술 지원에 헌신한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다”며 “우리 경제가 재도약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훌륭한 기업인을 잃은 것은 나라의 큰 아픔과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빈소. 오른쪽은 구 회장의 장남인 구광모 LG전자 상무 /LG그룹 제공

 

그룹은 장례를 조용하고 간소하게 치르기를 원했던 고인의 뜻대로 비공개 3일 가족장으로 하기로 했다. 구 회장의 빈소는 서울대학교 장례식장 3 1호실에 마련됐는데 입구에는 ‘소탈했던 고인의 생전 궤적에 따라 차분하게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외부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조화는 LG임직원 일동, 허창수 GS그룹 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구자원 LIG 명예회장,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것 5개 뿐이었다. 구 회장 유족 측은 외부 조화도 받지 않기로 해 홍석조 BGF 회장 등이 보낸 조화는 다시 돌려보내졌다

구 회장은 대기업 총수로서 승부욕은 강했지만, 매우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물로 평가받았다. 주요 행사에 참석하거나 해외 출장 시에도 비서 한 명 정도만 수행하도록 했으며 주말에 경조사에 갈 경우에는 비서 없이 홀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대기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구본무 회장의 장남이자 앞으로 LG그룹을 이끌어갈 구광모 LG전자 (97,300원▼ 700 -0.71%)상무가 부인인 정효정씨와 오후 2 40분 빈소에 도착했고, 이후 가족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승계가 공식화된 후 구 상무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 상무는 살짝 목례만 하고 곧바로 3층 빈소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곧바로 탔다. 구 상무는 다음 달 29 9시 임시 주주총회에서 그룹 지주회사인 ㈜LG의 사내이사로 선임되면 그룹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전망이다

구 회장의 첫째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오후 330분쯤 빈소에 도착했다. 구본능 회장은 구본무 회장이 한국경제에 기여한 점에 대해 한말씀 부탁한다는 취재진의 말에 "아무것도 묻지마세요"라며 말을 아끼고 곧바로 빈소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구본무 회장이 양자로 입양한 구광모 상무의 친아버지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구광모 LG전자 상무,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자용 LS네트웍스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20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구본무 회장 빈소에 방문했다. /안상희 기자, 조지원 기자

 

가족 중심으로 조문이 이어졌다. 구본준 LG그룹 부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구자극 엑사이엔씨 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구본완 LB휴넷 대표, 구본천 LB인베스트먼트 사장, 구자용 LS네트웍스·E1 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구자학 아워홈 회장, 구본걸 LF 회장, 구자철 예스코홀딩스 회장,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 구본혁 LS니꼬동제련 부사장 등이 조문을 마쳤다. 구 회장의 여동생 구미정씨의 남편인 최병민 깨끗한나라 회장도 조문했다. 

57년간 동업했던 허씨 가문에서는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 허윤홍 GS건설 전무,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허세홍 GS글로벌 사장이 빈소를 찾았다. 해외 출장 중이던 허창수 GS그룹 회장 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구 회장의 별세 소식에 추도문을 통해 "믿기지 않는 비보에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고인은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킨 혁신적인 기업가였다"고 했다. 그는 구 회장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급거 귀국길에 올랐고 조만간 빈소를 찾아 조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장이지만, 한국 경제사에 큰 역할을 해왔던 구 회장 타계 소식에 정·재계 주요 인사 일부는 저녁 시간을 전후로 빈소를 찾았다.

재계 총수 가운데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49,650원▲ 250 0.51%)부회장이 오후 4시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오후 520분쯤,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이 오후 648분쯤 장례식장에 왔다. 이 부회장은 10여분간 조문했는데 구 회장과의 인연, 심정을 묻는 말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LG그룹과 삼성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1957년 고() 구인회 LG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차녀 이숙희여사가 결혼해 사돈관계를 맺었다. 구 회장은 이 여사와 결혼 후 호텔신라와 중앙개발삼성그룹(현 에버랜드) 대표로 근무했다. 최근에는 범LG가 구자용 회장의 장녀 구희나씨와 범삼성가 홍석조 보광훼미리마트 회장 장남인 홍정국씨가 결혼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을 대신해서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빈소를 찾았다. 장 실장은 "문 대통령은 '존경받는 재계의 큰 별이 이렇게 갑자기 가셔서 안타깝다'고 말하셨다" "다른 재벌과 달리 2003년부터 지주회사 체제를 정립하며 선도적인 역할을 하신 분으로 조금 더 하셨다면 좋은 성과가 있었을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하루 뒤인 오는 21일 북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미 순방길에 오르는 점을 감안해 장 정책실장을 대신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설명했다.

강유식 전 LG경영개발원 부회장, 변규칠 전 LG상사 회장(LG 부회장), 이문호 전 LG 부회장, 이상철 전 LG유플러스 부회장, 남용 전 LG전자 부회장 등 구 회장과 함께 일했던 과거 경영진도 조문 행렬에 합류했다. LG그룹 사장단 등 임직원들은 21일 조문할 예정이다

이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양승태 전 대법원장,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의원, 신희철 서울대 의대 박사도 빈소를 찾았다. 전 축구 국가대표인 박지성 대한축구협회 유스전략본부장은 밤 10시 넘어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는 고인과의 인연을 묻는 말에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경제단체들도 "대한민국 경제의 큰 별이 떨어졌다"며 애도를 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구 회장은 회장 취임 후 ‘노사(勞使)’를 넘어 ‘노경(勞經)’이라는 새로운 노사문화를 통해 정도경영을 추구했다" "고인의 빈자리가 너무 크기에 그 슬픔을 이루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전경련은 "우리 경제가 재도약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훌륭한 기업인을 잃은 것은 나라의 큰 아픔과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대한상의는 "구 회장은 미래를 위한 도전정신으로 전자·화학·통신 산업을 육성했고, 정도경영을 통해 고객에 신뢰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다. 한국무역협회는 "구 회장은 LG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확고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애도했다.

유통 업계에서도 애도의 뜻을 전해왔다.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은 이날 "신동빈 회장이 계셨다면 대한민국 재계를 대표하는 참된 경영자로 존경하는 분이어서 조문을 갔을 텐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해 너무 안타깝다" "현재 재계가 국내외 여러 힘든 도전에 직면해 험로가 예상되는 시기에 경륜과 경험이 많은 맏어른의 혜안과 지혜가 절실한데, 너무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도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영면하시기를 기원한다" "개인의 삶은 소탈하고 겸손하게 살아오셨지만, 기업 경영에서는 화합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셨다"고 했다.

구 회장은 작년 4월 뇌종양이 발견돼 몇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치료를 받았다. 작년 9월엔 서울 마곡지구에 있는 LG사이언스파크 공사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으나 최근 건강이 나빠지면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그룹의 전반적인 업무를 동생인 구본준 LG그룹 부회장에 맡겨왔다. 구 회장은 1년간 투병을 하는 중에 연명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평소 뜻에 따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중에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

 

LG의인상·상록재단… "베풀며 살아라" 어머니 뜻 평생 지켰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를 실천해온 대기업 오너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은 더 이상 속일 데가 없다"면서 정직을 강조했다. 고인은 물론 LG그룹도 불미스러운 구설에 오른 적이 거의 없었던 것도 고인이 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기업 경영에서 '정도(正道)'를 실천한 결과다. "편법·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 하겠다"는 게 고인의 지론이었다.

구 회장은 LG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과정에서는 '냉철한 승부사' 기질을 보였지만, 평소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반한 온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신용을 쌓는 데는 평생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을 자주 했던 고인은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꼭 지켰다. 공식 행사든 사적 약속이든 늘 20~30분 정도 먼저 도착, 상대방을 기다린 것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승용차가 갓길을 운행하거나 적당히 위반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직원을 아낀 인재 경영은 고인의 철칙 중 하나였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규모 적자가 났을 때도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면서 인위적 감원을 하지 않았다. 고인이 취임한 뒤 LG그룹에서는 '노사 분규'라는 단어가 생소해졌다. 그는 협력업체 대해 "우리는 '갑을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권위주의와 담을 쌓고, 검소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대기업 총수에 대한 편견을 바꿨다. 연세대 재학 중에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보병으로 만기 전역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저녁 자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먼저 보내고,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하기도 했다. 큰딸 연경씨나 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의 결혼식도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치렀고, LG 경영진에게도 '작은 결혼식'을 권했다. 신문에 회사 직원들이 부고 내는 것도 금지하고, 협력업체에서는 경조금도 받지 못하게 했다. LG 고위 인사는 "아랫사람 누구에게도 반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불필요한 격식도 싫어했다. 주요 행사에 참석하거나 해외 출장 때 비서는 꼭 필요한 한 명만 수행하도록 했고, 주말에 있는 지인의 경조사 등 개인적인 일을 할 때는 비서 없이 혼자 다녔다. LG그룹이 매년 여는 인재 유치 행사에서 400명이 넘는 참가 학생 모두와 일일이 악수를 하고, '셀카' 요청에도 흔쾌히 응하며 격의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구 회장은 2016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는 '소신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당시 '앞으로도 (박근혜 정부 때처럼) 명분만 맞으면 정부 요구에 돈을 낼 것이냐'는 국회의원 질문에 "불우이웃을 돕는 일은 앞으로도 지원하겠다"고 했고, '앞으로도 이런 자리(대통령 면담)에 나올 것이냐'는 물음에는 "국회가 입법으로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질문자였던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청문회장에서 만난 그분은 이 시대의 큰 기업인이었다"고 했다.

고인은 "남들에게 베풀고 살라"는 어머니 고() 하정임 여사의 뜻을 평생 실천했다. "국민이나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면 영속할 수 없다"면서 LG복지재단, LG연암문화재단, LG연암학원 등 복지·문화·교육 분야 공익재단 이사장 및 대표이사로 사회 공헌 활동에 투자와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고인은 특히 2015 "세상이 각박해졌어도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義人)에게 기업은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 'LG의인상'을 만들었다. 그동안 소방관·경찰관·고교생·크레인 기사·선장 등 72명이 의인상을 받았다. 작년 강원도 철원에서 빗나간 총탄에 아들을 잃고도 "어느 병사가 총을 쐈는지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고 한 아버지나, 2015년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사고를 당한 병사는 사재를 내어 도와줬다.

새와 숲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고인은 "후대에 의미 있는 자연유산을 남기고 싶다"면서 1997 12월 국내 최초로 환경 전문 공익재단인 LG상록재단을 세웠다. 공익사업으로 경기도 곤지암에 5만여 평 규모의 '화담숲'을 조성해 수목 보전과 연구 지원에 힘썼다. 화담숲의 '화담(和談)'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으로, 구 회장의 아호(雅號)이다. 새 울음을 듣거나 날아가는 모습만 보고도 새 이름을 척척 맞혀 '새 박사'로 통했다. LG 트윈타워 빌딩 집무실에 대형 망원경을 설치해 여의도 밤섬 새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2000년 조류학자들과 함께 국내 최초의 조류도감인 '한국의 새'라는 책도 펴냈다.

 

새와 자연을 사랑한 CEO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대기업 총수로는 드물게 ‘탐조(探鳥)’를 취미로 즐겼다. 탐조는 자연 상태에 있는 새가 놀라지 않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구 회장은 평소 자연·환경에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구 회장은 ‘한국에도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조류도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2000년에 ‘한국의 새’를 발간했다. 일반 조류도감과 달리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을 적용해 새들의 세세한 특징과 구별방법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만들었다. ‘한국의 새’는 출간 1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탐조를 위한 필수 지침서로 꼽힌다.

 

 구본무 회장 /LG제공

 

구 회장은 1995년 회장 취임 이후로 LG 트윈타워 30층 집무실에 망원경을 놓고 밤섬에 있는 새를 관찰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그는 “여의도 사옥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 밤섬은 겨울이면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찾아오는 도심 속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입니다”라며 “가끔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철새가 떼 지어 드나드는 밤섬을 바라보며 자연에 매료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여유도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라고 했다.

새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이 남겼다. 구 회장은 밤섬을 관찰하다가 1996년 독수리 일종인 천연기념물 243호 흰꼬리수리가 물고기를 낚아채는 장면을 최초로 발견했다. 천연기념물 323호 황조롱이가 트윈타워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자 사옥 전체에 특별 보호령을 내리기도 했다. 황조롱이는 무사히 새끼를 부화시키고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구 회장은 정원 가꾸는 취미도 가지고 있다. 서울 한남동 저택에 있는 정원을 원추리, 비비추 등 한국 자생꽃으로 직접 가꿨다. 곤지암리조트 이끼공원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 발언을 보면 평소 자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대상을 주도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이 아닌 그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존중하고 보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라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공존과 상생의 관계, 이것이 자연사랑과 인간사랑의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럭키→LG'로 바꾸고 세계로 진출

 ()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5 2 22일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인 1994년부터 그룹의 명칭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내부에서는 “럭키금성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굳이 바꿔야 하나”란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구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명칭 변경이 꼭 필요하다고 보고 뚝심 있게 밀어부쳤다. 어떤 언어를 쓰더라도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고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995 2 22일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본무(가운데) LG그룹 회장이 구자경(왼쪽) 명예회장으로부터 ‘LG’를 넘겨받고 있다./LG 제공

 

LG의 상징인 ‘미래의 얼굴(사진)’도 구 회장이 직접 선택했다. 당시 여러 안이 나왔지만, 구 회장은 ‘미래의 얼굴’이 세계·미래·젊음·인간·기술 등의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경영이념(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을 가장 잘 형상화했다고 판단했다

구 회장은 ‘LG’ 회장으로 취임한 뒤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등 3대 핵심 사업군을 육성하면서 자동차부품, OLED(유기발광다이오드·Organic Light Emitting Diode), 에너지, 바이오 등 신성장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LG의 상징인 ‘미래의 얼굴’

 

디스플레이 사업 분야는 과감한 결단과 투자로 세계 1위로 성장했고, 2차전지 사업도 20년이 넘는 연구개발 끝에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이 결과 1994년말 30조원대였던 그룹 매출은 GS, LS, LIG, LF 등을 계열분리하고도 작년에 160조원대로 성장했고, 이 기간에 해외 매출은 약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구 회장은 LG 브랜드를 선보인지 만 10년째인 2005년에 ‘LG 웨이(Way)’를 선포하며 LG만의 기업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구 회장이 강조한 LG 웨이는 그룹의 경영이념을 정도경영으로 달성하자는 것이다. 궁극적인 지향점은 ‘1 LG, ‘시장선도 기업’으로 제시했다. 1 LG’는 고객이 신뢰하고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기업, 경쟁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배우고 싶어하는 기업이 되자는 의미다

구 회장은 그해 신년사에서 “LG 브랜드가 명실공히 최고의 브랜드로서 세계 곳곳에서 명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자”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신뢰 못 얻는 기업은 영속할 수 없다" 그의 말말말

 1995 2 22 LG그룹의 신임 회장이 된 구본무 회장은 “저는 LG를 반드시 ‘초우량 LG’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LG,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최고를 성취해왔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고 저력입니다”라며 초우량 LG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평소 임직원들에게 늘 혁신과 도전을 주문하며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1997 3 27 LG 창립 50주년 행사장에서 그룹 깃발을 힘차게 흔들고 있다./LG 제공

 

구 회장은 서울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재학 중에 미국 애쉬랜드대학교와 클리블랜드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1975년 럭키에 과장으로 입사한 구 회장은 LG전자 임원 시절 일본지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는데, 해외에서 공부하고 근무한 경험 때문인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는 “글로벌경영에서는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 신규사업은 시작하면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 1등은 경쟁사보다 우수한 핵심 스킬을 보유했을 때에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구 회장은 사람에 대한 욕심이 많아 평소에도 세계적인 수준의 인재를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1996년 신년사를 통해 “‘제2의 혁신’은 창의적으로 도전적이며 뛰어난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필요로 한다. 우수한 인재라면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과감히 확보해 세계최고 수준의 인재집단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90년대말 외환위기로 사업을 구조조정할 때도 “최고 인재의 적극적인 확보 및 육성과 핵심 기반기술의 습득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최고 인재, 핵심 기술은 포기하지 않았다

구 회장은 세계적인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거의 매년 직접 해외 출장도 다녔다. 이 자리에서 석·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며 LG 입사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2011 9 LG인재개발대회에서 “좋은 인재를 뽑으려면 유비가 삼고초려 하는 것과 같이 CEO가 직접 찾아가서 데려와야 한다. 좋은 인재가 있다면 회장이라도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본무(오른쪽 두번째) LG그룹 회장이 2016 2 18일 열린 LG 테크노 콘퍼런스에서 참가자들과 얘기하고 이다. 이날 행사에는 국내 이공계 석·박사 과정에 있는 360여명의 인재가 참가했다./LG 제공

 

인재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데도 신경썼다. 구 회장은 2012 4월 미국에서 열린 LG 테크노 콘퍼런스에서 “LG의 미래는 R&D에 달려 있다고 항상 강조하고 있다. 앞으로도 R&D에 대한 투자는 한층 강화해 훌륭한 인재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했다

구 회장은 정도(正道)경영을 강조하고 몸소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95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LG는 공정·정직·성실을 바탕으로 하는 정도경영을 통해 철저히 고객을 만족시키고 고객은 물론 사원·협력업체·주주·사회에 대해서 엄정히 책임을 다하는 참다운 세계기업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LG는 창업 이후 지금까지 총수 일가 관련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이 거의 없었다. 이는 창업주의 경영정신을 후대가 계승하고 더 발전시켜온 덕분이다. 구 회장은 2010 1 27일 신임 임원과 가진 만찬 자리에서 “경영자에게는 신의가 생명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작년 신년사에서는 “기업은 국민과 사회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얻지 못하면 영속할 수 없다. 우리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취재단
 

 

05-21 구인회 → 구자경 → 구본무 → 구광모… LG, 유교적 가풍 따라 4대째 장자 승계

[시동걸린 LG 4세 경영]친인척들 퇴진하거나 계열분리

경영권 갈등 소지 사전에 차단 20일 구본무 LG그룹 회장 별세로 아들인 구광모 LG전자 상무가 40세 나이로 LG그룹 총수에 오르게 되면서 LG 가문의 ‘장자 승계’ 전통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LG는 유교적 가풍에 따라 창업 이래 철저한 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왔다. 친인척들이 물러나거나 독립해 계열분리를 함으로써 경영권 갈등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고 마찰 없이 그룹 승계를 이뤄왔다 

1969 12 31일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세상을 뜨자 동생이자 창업멤버였던 구철회 사장은 이듬해 1월 경영 퇴진을 선언하고 구인회 회장의 장자인 구자경 당시 금성사 부사장( LG그룹 명예회장)을 그룹 회장으로 추대했다.

구자경 명예회장 역시 만 70세가 되던 1995 1월 럭키금성그룹의 사명을 LG그룹으로 바꾼 뒤 자신의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겨줬다. 당시 LG반도체를 이끌던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그룹 내 유통사업을 담당하던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등 구자경 명예회장의 두 형제는 1970년과 마찬가지로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 조카에게 물려줬다. 

 

구본무 회장이 외아들을 잃은 뒤 2004년 친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구 상무를 양자로 들인 것 역시 장자 승계 원칙에 따르기 위해서였다. 재계에선 지난해부터 형을 대신해 총수 대행을 해왔던 구본준 LG그룹 부회장도 집안 전통에 따라 독립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2015-09-01 '형제경영'의 힘 SK 최종건과 최종현 上 ①-④

어린나이 사업자금 융통위해 부모님 땅문서를 훔칠계획도 세워

 최종건은 1926 1 30일 경기도 수원 평동에서 유생인 아버지 최학배, 어머니 이동대의 8남매 가운데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아래인 둘째아들 최종현은 1929 11 21일 태어났다. 이재에 밝았던 최학배는 평동에서 대성상회를 열어 수원잠업시험장에 볏짚과 왕겨 등을 납품하고, 인천의 미곡거래소와 거래하면서 착실히 재산과 농토를 불려나갔다. 최종건은 48년 짧은 생애 동안 용기와 집념, 끈기와 열정, 결단력과 추진력, 시대 흐름과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SK를 창업, 발전시킴으로써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다.

최종건은 신풍초등학교 졸업 뒤 스스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에 진학, 졸업하고 아버지 주선으로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선경직물은 일본 기업인 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세운 회사였다. 그는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18세 어린 나이에 생산부 2조장 자리에 올라 100여명의 종업원을 이끌며 생산계획과 품질관리까지 도맡았다.

1945
년 광복이 되자 생산부장 자리에 오른다. 선경직물은 1946년부터 정상 가동되기 시작하여, 직물업계 호황을 바탕으로 생산활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무렵 최종건은 실질적인 공장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 모든 공장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공장 건물은 형체만 남았고, 보유 직기 100여대 중 수리해 쓸 수 있는 것은 겨우 30대도 채 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에서는 선경직물을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건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SK그룹의 창업자 고 최종건 회장(가운데)과 박정희 전 대통령. /주간조선

 

최종건은 관재청에서 나온 선경직물의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받았다. 매각 대금은 130만환으로 그때로서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자금이 없었던 최종건은 고민 끝에 아버지를 찾아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아버지 최학배는 동생 최종현의 유학비라며 거절한다. 그는 또다시 고민 끝에 시집간 첫째누나 최양분을 찾아가 아버지 몰래 땅문서를 훔쳐 달라고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사업 재건에 대한 신념에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자금을 마련해 준다.

최종건은 1953 10 1일을 ‘선경직물 창립일’( SK네트웍스 창립기념일)로 공식 선포했다. 계약서에는 매수대금을 10년간 분할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1956 3월 매수대금 잔액을 일시에 납부, 자본금 500만환 규모 선경직물㈜을 출범시킨다. 이때 ‘선경’ 상호는 일제강점기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의 앞글자를 따서 지었으나, 이제 그 뜻은 전혀 다른 빛날 ‘선()’과 클 ‘경()’의 크게 빛날 ‘선경’을 나타낸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인수해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던 고향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되찾아 주겠다는 신념으로 혈혈단신 공장 재건에 힘썼다. 그는 창업 첫 목표로 직기 20대를 조립·설치했다. 그 무렵에는 직기 20대가 최소 경제운영단위이기도 했다. 마침내 1954 7월에 제1공장을, 1955 7월 제2공장 복구를 완성한다.

선경직물은 ‘닭표(Rooster)’ 안감이 국내 양복 안감 시장을 석권하면서 섬유업계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닭표 안감은 다른 인조견들과는 달리, 재단 전에 물에 빨아서 다림질하는 작업을 하지 않고도 바로 재단해서 쓸 수 있어 획기적이었으며, 조직이 조밀하고 표면이 매끄러워 양복 안감으로는 최고로 꼽혔다. 닭표 안감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유사상품 수십여 종이 잇따라 출시되었다. 가짜 닭표 안감이 활개를 치자, 동대문시장의 직포 도매상들은 정부와 선경직물 측에 단속을 요구할 정도였다. 닭표 안감은 1955 10월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인조견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선경직물은 3만달러 외환을 배정받고 산업은행으로부터 500만환 기업육성자금을 융자받게 되었다. 최종건은 이 돈으로 선경직물 매수대금 잔금 완납, 소유권 이전 등기 완료, 1956 7월 제3공장을 마련해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1958년에 생산된 ‘봉황새 이불감’이 대성공을 거두어 선경직물의 이름을 드높였다.

5
·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에 기초한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전략이 추진되었다. 창립 7년이 넘어선 선경직물은 그동안 다진 기반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눈부시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박정희는 열정과 집념으로 기업의 성장에만 온 힘을 기울이는 최종건을 눈여겨보았다. 1961 9월 박정희는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돌아보며 최종건과 직원들을 격려하고, 대통령이 된 뒤 1964 10월에도 다시 한 번 방문한다. 이 일은 선경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홍보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동행했던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청와대 갑사’라 불리며 널리 알려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최종건은 수출시장을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정식으로 무역회사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1962
8월 최종건은 선경산업㈜을 설립했다. 첫 수출 뒤 홍콩 광흥공사와의 거래가 이어져 그해 46000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이어서 1963 8월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대표해서 한국 직물업계 발전에 기여하고 직물업계 최초로 홍콩에 수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는 민간기업 대표로는 건국 이래 최초 수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64년에 이르러 최종건은 한국직물공업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이 무렵 그는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과 각별히 지냈다. 최종건은 그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며 1950~1960년대 어려운 시기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이겨냈다.

최종건은 수출 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인견사 한 품목만으로는 수출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레폰(1963), 앙골라(1964), 조제트 ‘깔깔이’(1965) 등 여러 제품 개발에 진력했다. 1972년 ‘10월유신’ 뒤 최종건은 1972 11월 ‘서해개발’을 설립, 이듬해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기업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선경그룹의 주요 회사 서울사무소들이 입주해 있던 퇴계로 입구의 대연각호텔이 화마에 휩싸여 모든 서류가 불에 타버린 것이다. 피해는 막심했지만 선경은 신용제일주의 영업방침을 지향해 온 덕에 자진해서 거래관계를 성실히 신고해온 거래처가 많았다. 여기에 1972년 정부에서는 워커힐을 민간기업에 불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건은 이를 대연각 화재로 인한 손해를 보충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며 워커힐 인수에 들어간다. 그는 워커힐을 정부의 내정가격보다 비싸게 인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호텔로 만들어 달라”면서 이를 수락했다. 1973 3월 최종건은 ‘선경개발㈜ 워커힐’을 설립, 정식으로 호텔 업무에 착수한다.

1973
년 초 일본의 ‘데이진’과 ‘이토추상사’는 공동투자 형식으로 1일 생산 15만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설립하기로 선경과 합의, 1973 7월 선경석유㈜가 설립되었다. 선경석유의 설립은 정유업계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날의 창립 기념사는 최종현 부사장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종건은 워커힐을 인수한 직후 폐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1973 10월 제4차 중동전 발발 때문에 제1차 석유위기가 닥쳐 원유 가격이 몇 배로 올랐다. 끝내 최종건의 거대한 야심인 정유사업은 불발로 끝나고 마는가. 아니, 오히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처럼, 무릇 기업을 일으키기는 쉬워도 국민경제에 이바지하는 알찬 기업으로 키워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뒤로 최종건의 유지를 최종현은 훌륭하게 이루어 나간다. 최종현은 1950 5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화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바로 6·25전쟁이 일어난다. 그는 한국에서는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해 훌륭한 칼럼니스트가 되거나 또는 무역업계에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최종현은 서울대학교 3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54 6월 위스콘신대학 생화학과 3학년에 편입해 1956 6월 이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59 3월 시카고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2
년에 들어서며 선경직물은 창업 이래 가장 심각한 경영난을 겪는다. 누적적자가 쌓이는 가운데 종업원들의 체불임금이 늘어났다. 창업 10년에 이른 선경직물은 직기 160여대, 종업원 400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성장했지만 거듭되는 공장 증축과 생산설비 증설로 극심한 경영난에 허덕였다. 최종건은 특유의 저돌성과 자금조달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해 왔지만 그것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이는 선경직물이 질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종건은 동생 최종현의 귀국을 종용했다. 마침내 최종현은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 1962 11월 곧바로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한다. 형의 저돌적인 추진력과 아우의 치밀한 기획력의 결합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최종현은 가장 먼저 회사 운영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그때 선경직물의 월 매출액이 3000만원인 데 비하여 부채총액 3200만원은 과중했다. 매출액 3000만원도 생산원가를 무시한 업계의 치열한 판매경쟁으로 그 이윤 폭은 10%를 밑돌았다. 공장의 직기는 300여대가 되었으나 가동 중인 것은 160대쯤이고 나머지 낡은 직기들은 새 직기로 대체 중이었다. 최종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경영평가를 해본 결과, 6500만원의 자산규모는 최악의 경우 부득이 부도수표를 내더라도 부도 총액이 자산규모의 절반을 넘지 않아 파산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처럼 최악의 경우 대비책은 물론 회사를 살릴 비상수단 전략을 형제가 함께 모색했다.

최종현은 정부 방침에 따라 수출상품 생산체제로의 전환을 형에게 권한다. 1963 1월 정부는 수출진흥책 일환으로 외화수입을 증대하는 한편, 소득의 누출현상을 가져오는 비생산적인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입의 역조현상을 방지할 목적으로 수출실적에 국한해서 수입을 허가하는 이른바 수출실적 링크제 실시를 발표했다. 수출하는 만큼 수입하게 한다는 정책이었다. 최종현은 그해 3월 홍콩으로 가서 한 달 동안 현지에 머물며 끈질긴 상담 끝에 레이온 능직 300만마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300만마는 선경이 전년도에 수출한 10만마의 30배에 달하는 물량이었다.

 

/古 최종현 회장. /조선일보 DB

 

수출단가도 마당 14.2센트로 일제 레이온 능직 단가 15센트에는 다소 못 미치는 가격이었으나, 선경의 전년도 수출단가인 11.3센트에 비하면 2.9센트가 높은 것으로서 수출계약 총액은 전년도 실적의 무려 37배가 넘는 426000달러에 달했다. 10만달러 인견사 수입공매물 매입과 구상무역에 의한 9만달러 상당의 나일론 원사 수입으로 일거에 8000여만원을 벌어들인 최종현은 그동안의 체불임금을 비롯한 누적부채 2000여만원을 해결하고, 이때 한국 재계 중심지였던 소공동에 자리한 북창빌딩 3층에 선경산업 서울사무소를 열었다. 최종건 회장이 1963 8 15일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일과 선경이 그처럼 오랜 경영난에서 헤어나와 업계의 샛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아우 최종현의 경영능력과 형 최종건의 뚝심에서 비롯하였다고 평가된다.

1966
년부터 1970년까지는 선경의 원사생산시대 도약기로 대규모 섬유기업집단으로 떠오른 시기이다. 이 무렵 최종현은 국내 922개 직물공장 사장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한 원사 제조업체의 꿈을 안고 원사공장 건설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들을 남몰래 찾고 있었다. 이때 선경은 아세테이트공장 건설 착공, 선경합섬 설립,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건설 착공 병행추진, 민간기업 최초 외환자금 융자 실현 등으로 마침내 원사 제조업체 선두주자로 나아간다.

선경직물은 부사장 최종현을 중심으로, 1966년 일본 데이진 측과 폴리에스테르 제조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다. 처음에 데이진은 소규모 업체인 선경을 그리 신용하지 않았다. 이에 친분 있는 일본 기업가들과 최종현의 측근들도 모두 데이진은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도요보사()와 기술제휴를 해보라고 권했으나 최종현은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폴리에스테르 기술에 관한 한 세계적 업체인 데이진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당장 급하다고 해서 아무 기술이나 살 수는 없어요. 기업의 생명은 내일의 전망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뜻밖에 데이진에서 기술이전 협의를 해보자고 연락이 왔다. 곧바로 일본으로 간 최종현은 데이진과의 기술이전 협의서에 서명하는, 믿어지지 않는 일을 해내고 말았다. 더욱이 그때 데이진은 친분이 있던 다른 한국 업체와 기술이전 협의를 하던 상황이었다. 데이진의 계약 당사자였던 이나가키 전무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의 장래를 생각하고 기술 수준을 선별하는 혜안의 경영자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어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④편에 계속>

 

<③편에서 계속>

이 일은 최종건 뚝심경영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결심한 경영계획과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거기에 최종현의 뛰어난 경영능력과 자금동원능력이 더해져 선경은 마침내 한국 원사제조업체 일인자 자리에 올랐다. 1969 7 1일 선경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이 선경화섬으로부터 분리, 선경합섬으로 출범했다. 이처럼 원사 제조업체인 선경합섬·선경화섬을 비롯, 선경직물과 울산직물 및 완제품 생산업체인 해외섬유와 선산섬유로 이루어진 선경그룹은 일찍이 한국 기업사(企業史)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직적 기업 결합을 이룩한 국내 유일한 섬유기업집단이었다. 그 무렵 선경의 발전은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경제성장률과 속도를 훨씬 앞질렀다. 선경의 기적 같은 성장은 형 최종건 회장의 추진력과 아우 최종현 부사장의 뛰어난 지략이 한데 어우러져 무에서 유를 이루어낸 조화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다.

1970
12 30일 선경산업을 선경직물에 흡수·합병하고 최종현 부사장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최종현은 선경직물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각오하고 먼저 종업원의 감원조치를 단행할 것을 결심했다. 경영진단 결과 인건비 비중이 너무 커서 적자요인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력정비위원회를 구성하여 2300명을 1200명으로 감축했다. 이 결과 생산성 향상률을 30% 이상 제고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장의 작업 분위기와 공장 조직의 재편으로 공정관리에 체계화가 이룩되었으며, 감원에서 제외된 우수한 인력들이 생산성 향상에 분발해 적자가 흑자로 전환되는 경영합리화가 성공적으로 진전되었다.

1973
11 15일 최종건 회장이 4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선경의 멈춤 없는 전진을 위하여 같은 달 24일 선경직물 최종현 사장이 선경그룹 회장으로 경영 대권을 인수한다. 새로 그룹 총수가 된 최종현 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한 장기적 포석을 펼쳐나갔다.

1960
년대를 지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기업들은 경영규모에 따르는 인력관리가 당면과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업들은 인적자원 개발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와 달리 최종현은 인적자원 개발만이 우리의 자산이며, 선경이 경영경쟁시대에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75 3 7일 한국 최초로, 기업 경영능력과 인재개발을 위한 사원교육 요람인 SK연수원을 개원한다. 이는 선경이 국제적 대기업으로 발돋움하려는 구체적 시발점이었다.

1976
11 23일 선경㈜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상공부 고시 제10607)받았다. 최종현은 선경의 종합무역상사 진출은 한국 경제성장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말했다. 선경은 완구 및 운동용구, 가정용 통신기기, 동·식물성 원료, 기계부품 생산업체를 계열화하는 한편, 해외지사망을 16개로 확장하는 등 총력전을 펼친 끝에 그해 종합무역상사 지정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11000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 선경합섬에서도 8226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렸다.

종합무역상사로 출범한 선경은 1977년 전년 대비 89%가 증가한 21469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렸다. 이는 곧 선경이 국가 수출목표의 50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한국 경제 성장에서 선경의 기여율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지를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1977년 수출금융이 감축되고 신규대출이 억제되는 등 정부의 잦은 금융지원정책 변동으로 가중되는 자금압박 속에서 이루어낸 성과로, 이로써 최종현의 뛰어난 수출전략 방안을 감지할 수 있다. 선경의 수출대상국은 80개 국가에 달했으며, 특히 수출취약지역으로 다른 6개의 무역상사가 꺼리던 중동지역 수출에서 전년대비 180%의 높은 신장률을 기록하고, 중남미 지역에서도 전년대비 689%의 수출신장을 이룩하여 업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다, 치밀한 수출전략 아래에서 신용과 품질제일주의로 밀고 나가면 반드시 목표 이상의 수출실적이 달성된다”는 신념을 보여준 좋은 사례를 남겼다.

고정일 소설가 

 

■포스코, 100년 기업을 꿈꾸다 

(上) 창립 25년 만에 총 2080만 톤 조강생산 

창립 25년 만에 총 2080만 톤 조강생산 능력 갖춰 세계 철강업계의 신화를 쓰다

 ⊙ “對日청구권 자금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사용… 선조의 피 값으로 건설 중”(박태준)
⊙ 첫 삽 뜬 지 32개월 만에 용광로에서 쇳물 콸콸
⊙ 포항제철소와 바다 위에 건설한 광양제철소를 양대 축으로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터지던 날 포항제철 임직원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

 

  1968 4 1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3. 39명의 임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가 공식 출범했다.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이 비장한 목소리로 창립사를 낭독했다.
  
 
“포항종합제철의 모든 성공 여부는 지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사명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잘못은 영원히 기록되고 추호도 용납될 수 없으며, 가차 없는 문책을 받아야 합니다.
  
 
박 사장의 말 속에서는 포항제철의 창립과 성공 여부가 앞으로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결정짓는다는 강한 믿음이 녹아 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흘렀다. 포스코는 국내를 대표하는 간판 기업으로 우뚝 섰다. 첫 쇳물이 생산된 1973 416억원이었던 매출은 지난해 285538억원으로 686배 늘었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 1968 198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 2016년에는 27539달러로 140배 늘었다. 포스코가 성장하고 철강 생산이 늘어나면서 자동차, 조선 등 국내 산업이 꾸준히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포스코가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철강 제품을 생산하면서 자동차·조선 등 국내 제조업은 양질의 철강재를 싸게 국내에서 공급받아 안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국내 자동차 생산 대수는 400만 대에 육박해 세계 5위권의 자동차 수출국이 됐으며, 조선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게 됐다. 연간 449000톤이었던 포스코의 조강생산량(1973) 3720만 톤(2017)으로 늘었다. 일본 철강 회사들의 도움으로 처음 일관제철소를 지어야 했던 포스코는 40여 년 만에 독자적으로 해외에 일관제철소를 지을 만큼 성장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염원하던 ‘영일만의 기적’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지난 4 1일 포스텍 체육관에서 창립 50주년 행사를 가졌다. 권 회장은 기업 포스코의 새로운 미션으로 ‘한계를 뛰어넘어, 철강 그 이상으로(Unlimit the Limit: Steel and Beyond)’를 내세웠다. 포스코는 창립 100주년을 맞는 오는 2068년에는 연결 매출 500조원, 영업이익 70조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주력 사업인 철강 외에도 트레이딩·건설·에너지·ICT·에너지저장소재·경량소재 등에 집중할 방침이다. 포스코가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이고, 포스코와 함께 대한민국은 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 1965년 코퍼스 포이 회장 만나 제의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 날.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왼쪽).
  

  한국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은 1958년이었다. 연간 선철 20만 톤 생산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자금 부족, 정국 혼란과 국내 언론의 반대 등으로 무산됐다. 5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모두 무위로 끝났다.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 보다 구체화한 것은 1961년부터다. 당시 정부는 조국 근대화를 통해 빈곤에서 탈피하고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철강산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최우선 역점 사업은 종합제철 건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존슨(Lyndon B. Johnson)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차에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Inc)의 포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外資)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1966 12,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 발족했다.

 

/포항제철 창립 현판식.

 

정부는 1967 6, 조강 연산 3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지역으로 월포·포항·삼천포·울산·보성을 후보지로 선정했다. 지원시설과 투자 면에서 가장 유리한 포항을 건설 예정지로 결정했다. 종합제철 건설사업의 실수요자로 대한중석㈜이 선정(1967 9)됐다. 효율적인 내자 조달이라는 실무 차원의 고려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뛰어난 리더십과 경영 능력을 보유한 박태준 사장을 위시해 기업체 근무 경험이 풍부한 관리직 사원, 해외연수를 마친 기술직 사원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서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68 4 1일에 박태준 사장을 비롯해 39명의 임직원이 창립식을 가졌다.
  
 
당시 정부는 기업의 안정성과 순조로운 건설을 위해 특별법에 따라 정부의 재정 지원과 조세 감면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공사(公使) 형태로 출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포스코는 해외 철강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경영의 자율성과 조직의 기동성이 보장되고, 철저하게 책임 경영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상법상 주식회사 형태를 고집했다


  
국내외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

/포항제철소 제1 입화. 포항제철소 건설현장 사무소 롬멜하우스(오른쪽).

 

종합제철소 건설이 시작의 닻을 올렸지만, 국내외의 온갖 회의적인 시각과 반대여론, 주요 기관들의 잇따른 타당성 부인 등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일부 언론은 제철소 건설 사업은 외자 부담이 크고 생산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수입 강재를 쓰는 것보다 국민 경제에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농촌 출신 국회의원의 80%는 농수산 부문 개발 용도로 사용될 자금이 종합제철 건설사업으로 전용되면 자신들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
  
 
세계은행(IBRD) 1968 11,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은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내 우리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도 부정적 의견서를 냈고,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 총회에서 굿 맨 의장은 “한국의 제철 사업은 중단기 외채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외화의 획득분보다 상환부담이 더 커서 국내 자본 축적을 해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1966 11월부터 오로지 일관제철소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관료들이 주도해 온 KISA를 통한 자금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박태준 사장은 1969 1월 말, 한일국교정상화 협상단 참가 때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가 남아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대일청구권의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하는 구상을 하게 된 것이다. 박태준 사장은 일본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 선생과 야기 노부오(八木信雄) 한일문화협회 이사장을 만나 협력을 요청하고, 이들의 소개로 일본 철강 연맹 이사장인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야와타제철 사장,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 후지제철 사장, 아카사카 다케시(亦坂式) 일본강관 등 철강업체 지도자들을 만나 부탁했다. 이와 함께 지바 사부로(千葉三郞) 전 노동상, 이치마다 히사토(一萬田尙登) 자민당 해외경제협력위원장 등 정계 지도자들을 만나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결국 박태준 사장은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9 8월 제3차 한일각료 회담에서 일본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실패하면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

/포항3기 불량 구조물 폭파 모습.

 

포항제철은 창립 2주년을 맞은 지난 1970 4 1,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건설 현장에서 조강 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종합착공식을 거행하고 대역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제철소 건설은 원칙적으로 제품이 생산되는 순서에 따라 제선-제강-압연공장 순()으로 건설하는 포워드(Forward) 방식을 택하나, 포항제철소는 제품생산공장부터 건설하는 백워드(Backward) 방식을 택했다. 이는 건설 공정이 짧은 압연 및 제강공장을 먼저 완성해, 수입한 반제품으로 완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생기는 이윤을 나머지 공장 건설에 투자하면서 제철소를 완성한다는 계획 때문이었다.
  
 
포항제철은 1기 착공 후 경험과 기술 부족에도 가장 효율적인 설비를 구매하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권으로부터 들어오는 외압이었다. 1971 4월에 실시할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 재정위원장이 박태준 사장에게 정치자금을 요구하기도 했고, 또 다른 정치권 실력자는 설비 구매에 따른 리베이트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박태준 사장은 이런 외압에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바로 청와대로 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보고받은 메모지에 서명을 해주며 “소신껏 처리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박 대통령이 사인한 메모지는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종이마패’로 일컬어지면서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방어하는 정신적 힘이 돼 주었다.

 

/광양연약지반공사 모습.

 

  박태준 사장은 밤낮으로 건설 현장을 시찰하며 직원은 물론 수주업체와 건설업체 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 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선조의 피 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고 있다.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리 모두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
  
 
박태준 사장이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말이다. 박태준 사장의 의지는 모든 요원에게 큰 울림을 주어 현장에서는 ‘우향우 정신’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됐고, 현재까지도 포스코 사풍(社風)을 형성하는 원류가 됐다. 특히 19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 사무직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공사 현장에 투입시켜 공기(工期)를 성공적으로 만회했다. 이 같은 정신과 노력으로 103만 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예정보다 1개월 앞당긴 39개월 만에 준공했다. 임직원들의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지로 다른 회사들이 통상 4~5년 만에 건설하던 제철소를 포스코는 2~3년 만에 만들었다. 따라서 1기 건설에 소요된 톤당 투자비도 다른 회사의 톤당 500달러에 비해 절반 수준인 26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전통은 광양제철소 건설에도 지속됐다.

 
  
1973 6 9, 첫 쇳물 터져 나와 

 

1973 6 7일 포항제철 본관 앞 광장. 박태준 사장은 태양열로 원화를 채화해 원화로에 보존하고, 다음날 원화봉송 주자 7명이 원화를 제철공장으로 봉송해 화입식을 갖고 오전 1030 1고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21시간 만인 1973 6 9일 오전 730, 용광로에서 쇳물이 터져 나왔다.
  
 
“만세, 만세!
  
 
고로 제2 주상을 가득 메운 채 쇳물이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태준 사장과 건설 요원들의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국철강협회는 2000년에 이날을 ‘철의 날’로 지정했다. 이후 1973 7 3일 포항 1기 설비 종합준공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260만 톤 체제의 2기 설비를 준공한 1976 5월부터는 한국의 철강 생산 능력이 사상 최초로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포항 1기는 일반 강재, 소형 구조물 등 소재류, 포항 2기 때는 철골, 강관 및 대형 기중기 등으로 확대했다. 전체 기자재 중 국산화 기기 비중은 1 12.5%, 2 15.5%, 3 22.6%, 4 35.1%까지 확대해 국내 관련 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현재의 포항제철소

 

박태준 사장은 포항제철소를 지으면서 불량 시공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포항 3기가 건설 중이던 1977 8 1, 발전송풍설비 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중 박 사장은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의 불량을 발견했다. 설비가 공기 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박 사장은 이미 80%가 진행된 구조물을 망설임 없이 폭파했다. 완벽 시공에 대한 그의 의지는 임직원은 물론 참가 기업들에까지 전파돼 오늘날 포스코 설비 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포항제철소가 한창 지어지고 있을 무렵, 바깥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4차 중동전으로 인해 석유 파동이 생겼고, 1974년 말에는 철강 경기가 침체를 겪었다. 정부는 1977년에 제2 종합제철 건설을 다시 추진했다. 정부는 1980년대 철강 수요를 약 1200~1300만 톤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포항제철의 1,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연산 1000만 톤이 가능한 제철소가 필요했다. 2 제철 실수요자로 포스코가 확정됐다. 한 민간기업에서 중소 규모의 철강사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제철 사업을 추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포스코는 제철업을 민간 기업에 맡기면 부()의 편재가 극심하고, 부실하면 결국 포스코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정부를 설득해 포스코가 실수요자로 뽑혔다. 2 제철소의 부지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애초 경북 영해를 비롯해 아산만 등 여러 후보지가 검토됐지만, 1981 11월 광양만의 바다를 메워 제철소를 건설하자는 포스코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포스코가 1981년에 광양제철소를 건설할 때 포항제철소는 4기 체제(연산 850만 톤)가 가동 중이었다. 또 포항제철 공장은 100%를 넘는 가동률과 흑자 경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1978
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을 만났다.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줄 수 없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요시히로 회장이 말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덩샤오핑이 이 대답을 듣고 한동안 중국에서는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박태준은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 있는 교본”이라고 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와 의(), 그리고 렴()과 애(), 4가지 선비 사상을 행위 규범으로 실천한 현장의 선비”라고 칭송했다. 박태준 전기를 출간한 바 있는 소설가 조정래는 “한국의 경제 발전사 위에서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박태준 사장의 ‘우향우 정신’과 ‘제철보국’의 전통,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도전 정신, 책임의식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 이념은 글로벌 포스코의 정신적 자산으로 지금도 면면히 계승, 발전해 오고 있다

  
  
바다 위의 제철소, 광양제철소

 

포항제철의 성공적인 건설과 함께 포스코의 광양제철소 건설이 구체화한 것은 1981년이었다. 하지만 포스코의 광양제철소 건설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특히 포항제철소 건설을 위해 설비 공급과 기술협력을 제공해 온 일본 철강업계는 더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양국 철강 교역사상 처음으로 물량 면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자, 일본 철강업계는 큰 충격을 받아 1981년을 ‘부메랑 원년’이라고 명명했다. 신일본제철은 제철소 설비 설계에 필수 사항인 광양제철소 기본기술계획 검토 요청을 거부했다. 포스코는 일본의 협력 없이 광양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에 따라 설비구매처를 유럽과 미국으로 전환코자 설비제작업체를 잇달아 방문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도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광양제철소 건설에 대해 간접 협력 방식으로 기술협력을 하겠다고 나왔다. 결국 포스코는 미국과 유럽, 일본 업체들의 경쟁 입찰을 유도해 당시 세계 최신예 설비를 싼 가격과 유리한 조건으로 확보했다.
  
 
광양제철소는 국내 최초로 바다 위에 건설하는 공장이었다. 공장 배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했고, 단계별 확장을 감안해 부지를 확정했다. 제철소 부지 면적은 총 1488m2( 450만 평)였는데, 공장부지가 1015m2, 준설매립 시 불량토를 저장할 수토장이 263m2, 지원시설 기지 및 주택단지가 210m2였다.

 

/현재의 광양제철소

 

포스코는 1985 3 5, 광양 1기 설비 공사에 착공했다. 조강 연산 270만 톤 규모에 제품 구성은 앞으로 대량 공급 부족이 예상되는 열연 제품으로 정했다. 고생산성 추구, 자원절약, 품질향상, 공해방지를 위해 최신 설비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1987 4 24 1고로 화입식 후 시험조업 과정을 거쳐 같은 해 5 7일 종합 준공했다. 광양제철소 건설 당시에 우리나라는 철강업과 중공업이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는 건설, 조선, 자동차, 기계, 전기, 전자산업 등 철강 소비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이들 산업이 계속 커 나가기 위해서는 철강재의 안정적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소 2(1986.9.30~1988.7.12), 3(1988.11.1~ 1990.12.4)에 이어 4기 설비(1991.1.5~ 1992.10.2)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1968년 창업 이래 제철소 건설의 대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소(1140만 톤)와 포항제철소(940만 톤)를 합쳐 총 2080만 톤의 조강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어 세계 3위의 대형 철강 회사로 부상했다. 광양제철소는 단위 제철소별 생산 규모에서 1982년부터 9년간 세계 1위를 고수해 온 포항제철소를 추월해 최적의 생산 규모를 갖춘 세계 제일의 단일 제철소로 부상했다. 포항제철소는 고급강 위주의 다() 품종 소량 생산에 주력하고, 광양제철소는 열연코일 및 냉연코일 위주 소() 품종 대량 생산에 주력하는 등 제철소 특성에 맞게 제품을 구성했다. 생산원가 절감과 설비 효율 극대화를 달성해 국제 경쟁력을 갖게 됐다. 창립 이후 불과 25년 만에 이룩한 초고속 성장은 세계 철강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단 기간에 이룩한 것으로 세계 철강업계는 이를 신화라고 부른다


  
항구도시였던 포항시가 인구 52만명의 산업도시로

  포스코가 걸어온 연도별 경영 성과는 눈부시다. 설비가 본격 가동된 1973년에는 매출액 416억원, 영업이익 83억원이었다. 포항제철소 4 2차가 완공된 1983년에는 매출액 17500억원, 영업이익 2720억원을 기록했다. 광양 4기가 정상 가동된 1993년에는 매출 69209억원, 영업이익 1105억원을 기록했다.
  
 
양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포항제철소 건설 초기에 세계 생산 순위 46(1975)였던 포스코는 1983년에 처음으로 세계 10위에 진입했다. 이후 1987년에 세계 5, 1989~1992년에 3위로 급부상한 데 이어 1997~1998년에는 세계 최초로 1위를 기록했다.
  
 
포스코는 국가 경쟁뿐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에도 기여했다. 포항시는 포스코 창립 당시에 인구 69000명에 불과한 항구도시였으나, 지난해 인구 52만명의 산업 도시로 성장했다. 울산의 자동차, 조선산업, 구미의 전자산업, 창원의 기계산업과 긴밀히 연계되는 동남권의 산업 거점으로 변모했다. 광양은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인 1982년에 인구 78000명의 농촌 지역이었는데, 지난해 말 인구 15만명의 대표적 신흥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의 가동으로 세수가 늘어나고 관련 기업들이 늘어남에 따라, 포항시와 광양시의 재정자립도는 지난해 말 기준 37.1%, 35%로 경북도와 전남도에서 각각 2위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994년 국내 기업 최초로 뉴욕 증시 상장

/포항제철은 1994 10월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미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1990년대 포스코를 둘러싼 경영환경은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던 1970~1980년대와 달랐다.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함께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이 국제화되면서 개방이 급속히 진행됐고, 세계적으로 철강산업의 성장세가 크게 둔화됐다. 포스코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90년대 포스코가 가장 역점을 둔 지역은 1992년에 수교한 중국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우선 화베이, 화둥, 화난 세 지역에 생산 및 판매 거점을 구축한 후, 이 지역을 발판으로 중국 내륙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포스코가 가장 먼저 중국에 만든 회사는 톈진(天津)의 포철천진강재가공유한공사( POSCO-CTPC)였다. 1995년 천진코일센터를 만들어 연간 10만 톤 규모의 냉연 강재를 가공 판매하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화난 지역 중심인 광둥성 순더에 진출, 순덕포항도신강판유한공사를 만든 뒤 1998년 연산 10만 톤 규모의 공장을 가동했다. 1997년에는 양쯔강 하류 장자강에 장자항포항불수강유한공사를 만들어 연산 11만 톤 규모의 스테인리스 냉연 공장을 가동했다.
  
 
포스코는 1987년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철강을 비롯해 이공, 신소재, 경제,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선진 기술을 습득하고 그 기술을 자체 기술로 소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기술 개발로 응용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포스코경영연구소(1994 6 1), 포스코기술연구소(같은 해 7 1), 포스코개발기술연구소(12 1)를 각각 만들었다.
  
 
포스코는 1997 3월 국내 대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다. 전문 경영진의 책임 경영 체제를 강화하고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선진형 지배 구조 정착을 위해서였다. 종전의 포스코 이사회는 안건 심의와 승인을 주로 해왔다. 하지만 사외이사제도의 도입으로, 이사회가 최고경영자 육성과 보상, 기업가치 기준 설정, 위기관리 등을 할 수 있도록 역할을 대폭 강화했다
  
 
그즈음 포스코는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뉴욕 증시에 회사를 상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철강사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설비 증설 비용이 필수다. 포스코 경영진은 타인 자본에 의존할 경우 부채 비율이 상승하고, 국내에서는 대규모 증자(增資)를 하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했다. 그리고 1994 10 14일 오전 8(한국시각 오후 9),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조인서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뉴욕증시 상장이 이뤄졌다. 세계 금융 시장의 한복판인 월스트리트에서 포항제철 미국예탁증권(ADR)이 거래되기 시작했고, 포항제철은 이를 통해 약 3억 달러를 뉴욕 증시에서 조달했다. 포스코의 뉴욕 증시 상장은 한국전력, 삼성전자, 금성( LG), 유공( SK) 등 국내 기업들이 해외 증시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물꼬를 텄다.

  

 

주간조선 2511

□인선 기준은 대통령의 철학? 포스코 회장의 조건

연봉 25억원의 ‘철강왕’ 권좌(權座)에 앉을 주인공은 누구일까.

   8년 연속 세계 철강 경쟁력 1위를 지켜온 포스코가 새 CEO(회장)를 찾고 있다. 포스코 이사회는 신임 회장을 선출하기 위해 지난 4월부터 5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된 ‘CEO 승계 카운슬(Council)’을 가동해왔다. 김주현 포스코이사회 의장과 박병원·정문기·이명우·김신배 사외이사로 구성된 승계 카운슬은 내부인사 10, 외부인사 8명 등 총 18명의 회장 후보 명단을 작성한 상태. 이 가운데 5명 내외를 추려 CEO추천위원회에 넘길 예정이다. 이사회 규정상 승계 카운슬 멤버였던 권오준 회장은 후임 회장 선정의 공정성을 기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카운슬 참여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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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사외이사 전원이 참여하는 CEO추천위는 5명 내외로 압축된 후보들을 상대로 심층면접 등을 거쳐 주주총회에 추천할 회장 후보 1인을 6월 말까지 선정하게 된다. 현재는 승계 카운슬에서 18명의 후보자 가운데 5명을 선별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자천타천으로 회장 후보에 거론된 인사들은 CEO추천위에 보고될 ‘5인 엔트리’에 들기 위해 물밑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 중 일부 인사들은 언론이나 정치권 및 재계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후보군 중 앞서가고 있다”거나 “정권과 가깝다”는 식으로 언급되면서 후보군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바른미래당에서 제기한 ‘청와대 장하성 정책실장의 포스코 인사 개입설’은 보이지 않는 전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바른미래당 김철근 대변인은 지난 6 4일 논평을 통해 “5 29일 아침 인천 한 호텔에서 포스코 전직 회장들이 모인 가운데 장 실장의 뜻이라며 특정 인사를 포스코 회장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전임 회장들의 협조를 요청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즉각 관련 의혹을 부인하고 나섰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며 “논평을 철회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법적 대응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민간 인사에 정부가 개입하지 말라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원칙이고, 문 대통령이 직접 이 원칙을 강조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김철근 대변인의 논평을 보도하면서 기사 말미에 현재 포스코 회장 후보로 거론되는 김준식 전 포스코 사장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이라는 점을 거론하기도 했다. 포스코 측은 이 논평에 대해 “전·현직 CEO들이 만나 후임 CEO 인선에 대해 논의했다는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지난 4월부터 가동 중인 승계 카운슬은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18명의 CEO 후보군 명단조차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포스코 내부 직원들도 “누가 후보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카운슬에 문의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누가 부상한다거나 앞서가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는 게 수상하다”는 반응이다. 승계 카운슬은 이번 CEO 후보군에 외국인도 포함될 것임을 시사한 바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름이 공개되진 않았다. 그럼에도 각종 언론을 통해 거명된 후보는 십수명에 달한다. 우선 포스코 내부 인사로는 오인환 사장(철강1부문장), 장인화 사장(철강2부문장), 이영훈 포스코건설 사장, 박기홍 포스코에너지 사장, 최정우 포스코컴텍 사장, 강태영 포스코경영연구원 전문임원 등 현직 사장급 인사들과 김준식·김진일·황은연·김응규 전 사장, 구자영 전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부인사로는 전윤철 전 감사원장, 오영호 전 코트라 사장, 이희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한 한국계 미국인 기업인 등이 포함됐다고 알려졌다.


   
연고주의 관행 끊을 적임자는?

   이들 후보군 중 누가 1차 관문을 뚫을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포스코 안팎에서는 이들 중 누가 어떤 이유로 감점을 당하고, 어떤 이유로 득점을 할지가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정도다. 설왕설래 속에 나도는 한 가지 선정 기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철학이다. “민간기업의 인사나 사업에 정부가 개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온 문 대통령은 포스코 차기 CEO 선정도 전적으로 이사회의 자율에 맡긴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에 ‘연고주의’는 깨졌으면 하는 바람인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주요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볼 때 ‘연고주의와 같은 관행이 민영화된 기업에서 재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고주의는 지역이나 학벌 중심의 인사, 기득권적 보신주의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포스코 주변에서는 차기 CEO 선정 과정에서 이러한 대통령의 국정운영 기조가 반영될지 주목하는 분위기다.
   
   CEO
추천위에 포함된 포스코 사외이사 7명 중 부산고와 경남고를 나온 소위 ‘부산 인맥’은 3명이나 있다. 박병원·이명우·김성진 이사는 부산의 명문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를 나온 인사들이다. 문 대통령이 부산 경남고 출신이고 연고주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인 것을 감안하면 차기 포스코 CEO 선정 과정에서 부산 명문고를 졸업한 이력은 장점이 아니라 감점 요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현 청와대 실세로 통하는 임종석 비서실장, 장하성 정책실장 등 호남 인맥과의 친분 과시도 지역주의적 행태로 보여질 소지가 있다. 앞서 유력한 CEO 후보 중 한 명인 김준식 전 사장이 장하성 정책실장과 가깝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마이너스’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3월 포스코 신임 사외이사로 추천됐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한 박경서 고려대 교수도 장하성 실장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중견 재벌기업과 친척 관계로 알려진 장인화 현 포스코 사장의 경우 장하성 실장이 나온 경기고 동문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문재인 캠프 또는 노무현 정부와 인연이 있는 인사들은 ‘낙하산’ 논란을 불러올 게 자명하다는 점에서 포스코 이사회가 중요하게 검토할 항목으로 손꼽힌다. 포스코를 떠난 지 4년 만인 지난 3월 포스코에너지 사장으로 돌아온 박기홍 사장의 경우 과거 참여정부 시절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박 사장 역시 부산고 출신이다. 외부 인사로 거론되는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문재인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인사다. 오영호 전 코트라 사장은 지난 2014년 포스코 CEO 후보 선정 때도 권오준 현 회장과 경쟁했던 인물이다. 그는 노무현 청와대의 산업정책비서관을 지냈기 때문에 현 정권에 가까운 인사가 꽤 있다
   
   
특정 대학·학과 출신이 포스코 고위직에 많이 포진한 것도 CEO 선정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권오준 회장을 비롯 포스코 내부 전·현직 고위 인사 상당수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이다. 그동안 특정 대학·학과 출신이 포스코 경영진에 유독 많다는 것은 업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구자영 전 SK이노베이션 부회장, 김준식·김준일 전 사장 등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인사들이다. 한편 현 CEO 후보군 중에는 미투운동과 관련해서 구설에 오르는 인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포스코를 이끌 적임자의 덕목 중 하나로 개혁성과 신사업 역량을 꼽고 있다. 철강 중심의 포스코 사업구조는 현재 중국·인도 등 후발주자에게 바짝 쫓기고 있다. 고급화 전략으로 철강 부문 체질을 전환해야 하는 숙제를 신임 CEO가 떠안게 된다. 동시에 60조원 안팎의 회사 외형을 유지하려면 비철강 분야의 신사업 개발에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철강 중심의 사업에 익숙한 직원들을 이끌어가려면 차기 CEO는 개혁성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50년 역사의 포스코 내부에서 구조조정과 개혁을 이끌기란 쉬운 과제가 아니다. 권오준 회장의 경우 정준양 전 회장 당시의 방만경영을 바로잡기 위해 구조조정 등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를 실무적으로 지휘한 최정우 포스코컴텍 사장에 대해서는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상당하다.
   
   
권오준 회장 연임 당시부터 차기 CEO로 거론되어온 황은연 전 사장의 경우 오랫동안 대관 및 홍보 업무를 담당해왔다는 점에서 포스코 안팎의 평판이 나쁘지 않다. 다만, 신사업 개발 등에서 역량을 발휘해본 경험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다.
   
   
정치적 바람을 원천 차단하고 포스코를 글로벌 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이번에는 외국인 CEO를 선임해야 한다는 주장도 주주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외국인 CEO 후보도 승계 카운슬의 CEO 후보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가 기간산업인 포스코에 외국인을 앉히는 게 과연 적절하냐는 문제제기와 함께 외국계 기업 출신 CEO가 국내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가 거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원로급 재계 관계자는 이번 포스코 CEO 선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 달리 정권 차원에서 누구를 지목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포스코의 개혁과 기존 관행을 깰 적임자를 찾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 같다. 한때 포스코를 흔들던 사람이 특정 인사를 민다거나 회사에 손해를 끼쳤던 인사가 CEO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을 재계에서 주목하고 있다. 포스코 정도의 기업 사외이사라면 이런 부분을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포스코는 공기업에서 민영화됐기 때문에 과거부터 외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사외이사들은 개인 자질보다 가급적 구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인사를 CEO로 선정해오곤 했다. 정준양 전 회장과 권오준 회장의 경우도 당시 정권과 가깝거나 대외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대기업의 수장이 이 정부 들어 처음 선정되는 사례가 포스코 회장이라는 점에서 이번에도 대외적 영향력보다 주주의 이익을 제고하고 회사 체질을 바꿀 인물을 이사진들이 선호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권오준 회장 전격 사의 배경

   포스코 새 사령탑 선출은 회장직 연임에 성공한 권오준 회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촉발됐다. 올해 1월 포스코 이사회는 최고경영자(CEO) 단수 후보로 권오준 회장을 추천했고, 2014 3월 포스코 회장에 취임한 권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권 회장 연임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포스코에 대한 사정기관의 조사가 잇따랐고 전임 정권에서 임명된 권 회장의 연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게 제기됐다. 차기 포스코 CEO를 노린 전·현직 인사들의 권 회장 체제 흔들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권 회장은 지난 4월 갑작스럽게 사의를 표명했고 이후 후임 회장 선출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포스코 안팎에서는 “창사 50주년을 앞두고 다양한 구상을 마련했던 권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의표명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뒷말이 아직도 적지 않다. 실제 권 회장은 사의 표명 일주일 전까지 신사업 추진 방향을 놓고 측근들과 회의를 갖는 등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때문에 포스코 내부에서는 “권 회장이 자리를 지킬 수 없을 정도의 특별한 사정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이 돌았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사임 배경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권 회장은 주주총회를 통해 차기 CEO가 확정될 때까지 현직을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김대현  기자

 

2017.01.12 카카오 10년이 바꾼 대한민국 24시

지난 2016 9 12일 경상북도 경주와 그 일대를 강타한 지진이 발생했다. 진도 5.8로 한국 지진 관측 사상 가장 강했던 이 지진은 경주는 물론 부산·울산 등 거의 모든 경상도 지역과 대전 등 충청도에서까지 흔들림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이후 석 달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수백 회가 넘는 여진이 계속되며 경주와 인근 지역 주민들의 공포감을 키우고 있다.

 

이 강진이 발생한 후 네이버, 다음 등 한국의 주요 검색·포털에서 예상치 못한 독특한 현상이 벌어졌다. 지진 직후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검색·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로 ‘경주 지진’이 아닌 ‘카카오톡’이 등장한 것이다. 검색어 1위뿐이 아니다.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 거의 모두가 ‘지진 피해’ 등 경주나 지진 관련 내용 대신 ‘카카오톡 장애’ ‘카톡 먹통’ 등 카카오톡 관련 내용이었다.

 

지진 발생 직후 경주 등 경상도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카카오톡 메시지 사용량이 폭증했다. 트래픽이 순간적으로 급증하면서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톡이 장애를 일으키며 먹통이 된 것이다. 놀랍게도 당시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는 진도 5.8의 지진 공포보다 트래픽 폭주로 두 시간 남짓 서비스가 멈춰버린 카카오톡 장애가 가져온 불편함이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카카오톡이 2016년 한국인의 삶 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실례ek.

 

한국에서 메신저계의 애플 혹은 국민 메신저로 통하는 카카오톡(Kakao Talk). 현재 카카오톡은 사용시간을 기준으로 한국 시장 점유율 95%(와이즈앱 자료)에 이른다. 단연 1위다. 네이버의 ‘라인(LINE), 페이스북 메신저(Messenger), 러시아산 텔레그램(Telegram) 등 미국·일본·유럽 등에서 대성공을 거둔 다른 유명 모바일 메신저들이 시장 경쟁자로 불리고는 있지만, 실상 이들의 한국 시장 점유율을 모두 합해도 카카오톡의 19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만큼은 사실상 그 어떤 모바일 메신저도 카카오톡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네이버 이해진과 결별한 김범수의 복귀작

이런 카카오톡을 세상에 만들어낸 기업이 ‘카카오(kakao corp)’다. 2016 12, 그 카카오가 세상에 등장한 지 꼭 10년이 됐다. 10년 동안 카카오는 어떻게 성장해왔고, 그들이 만들어낸 카카오톡은 한국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2006 12, 카카오는 ‘아이위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한게임 창업자로 이해진씨와 함께 네이버 대박을 이끌어내며 게임과 포털 산업계의 수퍼스타로 불리던 김범수씨(현 카카오 의장). 그가 자본을 대고, 대학 졸업 후 줄곧 벤처기업을 운영하던 이제범씨와, 또 지금은 잊혀진 왕년의 인기 포털 프리첼의 스타 개발자 이상혁씨 등이 뭉쳐 인터넷 서비스 기업을 만들었다. 바로 아이위랩이었다. 이들이 뭉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다리를 놔준 이는 김범수 의장의 친구인 서울대 산업공학과 박종헌 교수다. 박 교수가 졸업 후 벤처계에 뛰어든 이제범씨를 김범수 의장에게 소개해주면서 이들의 인연이 카카오로 이어졌다. 김범수 의장과 박종헌 교수는 이제범씨의 서울대 산업공학과 11년 선배다.

 

이들을 중심으로 네이버, 엔씨소프트 등 잘나가던 포털과 게임 기업을 뛰쳐나온 20여명이 뭉쳐 초기 아이위랩을 만들었다. 사실 아이위랩의 시작은 정교함이나 뚜렷한 목표가 제시돼 있던 기업으로 볼 순 없다.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아이위랩은 한국 시장이 아닌 미국 인터넷시장을 먼저 두드렸다. 네이버 이해진 의장과 갈라서기 전까지 네이버의 미국 사업을 맡았던 김범수 의장의 의지가 작용했다. 사진, 동영상 등이 담겨 있는 각종 블로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종의 공유 사이트 부루닷컴을 2007년 ‘김범수의 복귀작’이란 마케팅을 앞세워 미국 등 영미권 시장에 선보였다. 결과는 참패였다.

 

이 실패 후 2008년 아이위랩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번째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이번에는 일종의 집단지성을 활용한 사업 모델을 내놨다. 인터넷상에서 누군가 궁금한 내용을 질문하면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구조였던 ‘위지아닷컴’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시장을 선점한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와의 경쟁에서 밀렸다.

 

인터넷 업계 스타 김범수를 홍보·마케팅의 전면에 내세웠던 두 번의 김범수표 인터넷 서비스의 실패 후 아이위랩은 주춤했다. 아마도 일반적인 벤처기업이었다면 당시 두 번의 실패로 자금 압박과 인력 이탈, 심지어 존폐를 고민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위랩은 연이은 실패에도 이런 고민까지는 몰리지 않았다. 한게임과 네이버의 대성공을 통해 인터넷 재벌로 떠올라 있던 김범수의 힘이었다. 그가 아이위랩에 상당한 자금을 꾸준히 투입했기 때문이다.

 

아이폰, 카톡의 운명을 바꾸다

그렇게 버틴 아이위랩이 세상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혁명적으로 세상을 바꾼 기기로 평가받는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당시까지 세상에 없던 신세계인 스마트폰시장을 연 아이폰이 2009 11월 한국

 

아이위랩은 바로 아이폰에 집중했다. 기존에 구상했던 거의 모든 프로젝트를 접었다. 대신 아이폰에 최적화된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에 집중했다. 아이폰에 초점을 맞춘 세 개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한국 1위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의 시작이었다.

 

2009년 말, 아이위랩은 사람들이 모바일에서 그룹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모바일 카페 형태인 카카오아지트와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동영상, 글을 공유할 수 있는 카카오수다, 그리고 모바일 메신저인 카카오톡 개발을 시작한다. 초기 카카오 3총사로 불리던 이 세 형태의 카카오 서비스는 2010 2월부터 3월 사이 차례로 세상에 등장했고 이들 중 2010 3월 나온 카카오톡이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카카오톡은 등장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아이폰에 탑재되기 시작했다. 첫 출시 6개월 만인 2010 9 100만명이 카카오톡을 내려받았다. 여기에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 OS 기반의 스마트폰인 갤럭시폰을 내놓으며 카카오톡의 성장에 불을 붙였다. 갤럭시폰 등장 한 달 후인 2010 11월 카카오톡의 사용자는 500만명을 넘었고, 2011 4 1000만명을 돌파했다. 그리고 불과 석 달 후인 2011 7 2000만명을 넘어서더니, 2012 6월에는 한국 인구와 비슷한 5000만명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카카오톡을 내려받았다. 2013 7월에는 다운로드 실적이 1억건을 돌파했다. 카카오톡의 성공으로 아이위랩은 2010 9월 회사 이름을 지금의 ‘㈜카카오’로 바꿔 버렸다.

 

네이버 이해진 의장과 갈라선 후 인터넷과 웹 시장에 집중하던 김범수, 그가 경쟁자인 네이버 이해진보다 조금 앞서 모바일로 눈을 돌렸던 것이 카카오톡을 킬러 콘텐츠로 만들어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임과 포털업계의 스타였던 김범수가 그렇게 한국 모바일시장의 강자 자리를 움켜쥔 것이다. 카카오톡의 대박으로 모바일 강자가 된 카카오의 성공은, 늘 네이버 이해진과 비교 대상이었음에도 상당 부분에서 ‘그의 다음’으로 평가되던 김범수의 위상을 새롭게 한 전환점이 됐다.

 

김범수 의장 스스로 “카카오에서 내가 한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결정이 스마트폰 시대에 합류한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2010 3월 카카오톡의 등장과 성공은 카카오와 김범수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여기에 더해 ‘전화해’와 ‘문자해’로 대표되던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카톡해’라는 신조어로 통했을 만큼 당시 카카오가 내놨던 카카오톡은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과 모바일 사용 습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친구와 가족 간의 일상 대화를 넘어 회사 업무 지시는 물론 영업이나 사업 관련 사안에 대한 논의까지 많은 한국인이 카카오톡을 통해 해결한다. 이뿐이 아니다. 게임과 음악, 각종 콘텐츠를 내려받거나 공유하는 통로 역시 카카오톡을 활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이 늦은 밤 택시를 부르거나, 취객의 대리운전 요청, 또 미용실 예약까지 카카오톡을 실행시켜 해결한다. 내년 초는 카카오톡으로 주차장 예약까지 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내놓고 있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모바일 속 대화나 소통 통로 정도로 여겨졌던 메신저로서의 카카오톡이 어느 순간부터 한국인의 소소한 삶 곳곳에 침투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10년 만에 5조짜리 대기업 되다

카카오톡의 성공 이후 김범수 의장과 카카오는 기업의 덩치를 급속히 키워나갔다. 몇몇 기업을 사들였고, 각종 서비스와 사업을 확장했다. 그리고 2014 5월 네이버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포털시장 2위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을 선언하면서, 외형상 모바일과 인터넷의 결합 시대를 내세우며 다음커뮤니케이션과의 ‘합병’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카카오가 자신보다 10년 앞서 만들어진 다음(Daum)을 전격 인수한 것이다.

 

메신저 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던 카카오와 그 카카오 성공의 핵 김범수가 보여온 성장욕과 식성은 모바일 메신저의 성공과 포털업체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손에 넣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유명 내비게이션 업체 ‘김기사’를 626억원에 사들인 데 이어 2016 1월에는 무려 1877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음원 사이트 ‘멜론’을 운영하며 연예기획 사업도 하는 로엔엔터테인먼트까지 인수했다. 김범수·이제범 등 20여명이 시작한 카카오가, 그렇게 꼭 10년 만에 8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자산 52200억원에 2740여명의 직원이 있는 대기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일련의 덩치 키우기 과정에서 ‘문어발식 확장’과 ‘소수 경영진에 의한 폐쇄적 기업 운영’ 등 기존 대기업들의 병폐로 지적돼왔던 행태를 그대로 복제한 듯한 모습을 드러내며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어쨌든 카카오톡은 2010년 이후 한국서 가장 성공한 모바일 콘텐츠 중 하나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실 카카오톡 외에도 한국에서 경쟁하는 모바일 메신저는 매우 많다. 한국 최대 인터넷 기업 네이버의 ‘라인’, 세계 최대 SNS 페이스북의 메신저, 중국 시장을 등에 업은 텐센트의 위챗, 보안성을 내세운 텔레그램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즐비하다. 이들 사이에서 카카오톡이 한국 시장 점유율 95%로 단연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카오톡의 성공 이유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빠른 시장 진입 속도’와 ‘선점 효과’다. 카카오톡의 첫 등장이 2010 3월이다. 이때만 해도 아이폰과 함께 들어온 왓츠앱 등 외국산 모바일 메신저가 주류였고, 엠엔톡 등 소수의 국산 메신저가 막 시장에 등장할 때였다. 다르게 말하면 한국 시장에서만큼은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다는 의미다. 여기에 아이폰과 달리 안드로이드 OS를 쓰는 갤럭시폰이 2010 10월 등장하며 스마트폰시장을 확대해 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아이폰의 한국 출시 시점과 갤럭시폰 등장 시점에 카카오가 절묘하게 카카오톡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당시 다음의 마이피플, 네이버의 네이버톡, SK의 틱톡, 삼성전자의 챗온, 이동통신 3사가 연합해 만든 조인 등 다수의 대기업들이 엄청난 자본력을 앞세워 모바일메신저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카카오톡과의 차이 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진입 시점이다. 이들은 카카오톡보다 적게는 몇 달에서 많게는 1~2년 늦게 시장에 등장하며 이미 카카오톡을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 사용자들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이 시장 선점 효과가 한국인들에게 스마트폰시장이 형성되던 초기 카카오톡에 대표적인 인스턴스 모바일 메신저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더구나 이 이미지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함으로 자리 잡으며 사용자를 더 늘리는 확산 효과까지 이어졌다. 이런 현상들이 2010년 말 이후 소위 말하는 ‘대세 모바일 메신저’로 카카오톡의 위치를 굳혔다.

 

IT·인터넷 분야 전문기자 장윤희씨는 “자본력이 충분한 대기업들이 모바일메신저시장에 뛰어들며 서비스와 기능을 너무 완벽하게 만들려다가 진입 시점을 놓친 것이 카카오에는 행운이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카카오는 완벽한 서비스를 만들려다 타이밍을 놓치는 것보다 최소한의 기능에 집중해 경쟁자보다 먼저 출시한 후 시장 반응에 따라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게 수정해나가는 이른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전략을 폈다”며 “이것이 대기업들이 보여준 모바일 메신저 사업과 차별화로 부각되며 스마트폰시장 형성 초기 한국인들의 선택을 받게 된 이유”라고 분석했다.

 

카카오 관계자 역시 카카오톡 성공의 요인 중 시장 선점 효과가 매우 중요했음을 말했다. 카카오 이수진 커뮤니케이션 팀장은 “당시 경쟁자가 많지 않던 적절한 시기에 시장에 먼저 들어간 효과가 컸다”며 “특히 한국인에게 익숙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전화의 원리를 메신저에 그대로 구현했던 게 한국 스마트폰 사용자들의 선택을 끌어낸 원인으로 본다”고 했다.

 

공짜의 힘은 강했다

선점 효과와 함께 카카오톡 성공에서 빠지지 않는 요인이 ‘무료’다. 스마트폰시장 형성 초기만 해도 왓츠앱 등 모바일 메신저 상당수가 유료였다. 이동통신사가 제공하는 문자 서비스는 건당 10~20원에 이르는 고가 정책이 유지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카오는 ‘무료’ 서비스를 내걸었다. 누구나 공짜로 무제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 통신과 서비스 사용 요금에 특히 민감한 한국인의 정서를 공략한 것이다. 이 ‘무료’ 전략이 짧은 시간 동안 단숨에 수많은 사용자를 끌어모은 핵심 이유다.

 

선점 효과·무료 정책과 함께 메신저 서비스이던 카카오톡의 ‘플랫폼으로의 변신’ 역시 한국인이 카카오톡을 선택하게 하고 있는 이유다. 사실 메신저는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서비스 상품이다. 카카오는 카카오톡이라는 서비스 상품을 넘어 개발자와 사용자를 직접 연결해주는 플랫폼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게임 개발자가 자신이 만든 게임을 카카오톡에 공개하면 사용자는 이 게임들 중 원하는 게임을 카카오톡에서 쉽게 내려받을 수 있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게임은 물론 TV나 영화, 음악 등 각종 콘텐츠는 물론 회사 업무까지도 카카오톡을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준 것이 바로 카카오였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 사용자와 택시기사를 직접 연결해준 카카오택시나, 취객과 대리운전 기사가 카카오톡을 통해 만나는 서비스, 복잡한 시내에서 주차 공간 제공자와 차량 운전자를 연결해 주는 서비스 등 소소하지만 있으면 편할 것 같은 것들을 카카오톡이라는 한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게 해줬다. 이른바 메신저에서 플랫폼으로의 이 같은 변신 시도가 다른 모바일 메신저들과 차별화를 가져오며 시장지배력을 굳힌 결정적 요인이 됐다.

 

한국인 95% 끌어들인 플랫폼 변신

카카오톡의 플랫폼 변화 시도는 2010 12, 카카오톡 사용자들 간 선물하기 서비스가 나오면서 시작됐다. 일종의 커머스 플랫폼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카카오가 본격적인 플랫폼으로 변화를 꾀한 건 2012 7월 ‘카카오 게임’이 등장하면서다. 기존에는 ‘앱스토어’나 ‘구글플레이’를 실행시켜야만 게임 같은 각종 콘텐츠를 내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카오톡은 이 과정을 없애며 카카오톡 안에서 게임을 내려받을 수 있게끔 통로를 제공했다. 게임 개발사(개발자)와 스마트폰 사용자를 사실상 직접 연결해준 셈이다. 이 카카오 게임이 대성공을 거뒀다. 시장이 즉시 반응하며 카카오뿐 아니라 라인 등 다른 메신저들까지 카카오의 플랫폼 시도 모델을 그대로 복제했을 정도다.

 

카카오의 플랫폼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카카오페이로 불리는 간편결제와 금융서비스까지 카카오톡 채팅방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게임, 영화, 음악, 스포츠 등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쇼핑과 금융 결제까지 가능하게 되면서 카카오톡이 ‘서비스 플랫폼’의 기능을 더 강화하고 있다.

 

카카오 이수진 팀장은 카카오의 플랫폼 변신에 대해 “사실 ‘절박함’에서 나온 선택이었다”고 했다. 카카오는 많은 이들이 선택한 1위 메신저였지만 2010년과 2011년만 해도 수익모델이 없었다. 기업으로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김범수 의장의 자금력에만 의존하던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사람들이 모여든 서비스에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을 탑재해 보자’는 것이 당시 카카오톡 플랫폼화의 기본 개념이었다. 그리고 카카오 게임을 통해 무료 서비스인 카카오톡도 수익을 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카카오톡이 지금 같은 모바일 플랫폼으로 본격 변신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카카오톡의 이런 성공 포인트들이 2010년 이후 적절한 시점에 등장하며 95%에 이르는 한국 시장 점유율을 만들어냈다. 이제 카카오톡은 한국인들에게 없으면 불편한 존재처럼 굳어지고 있다. 카카오라는 기업이 등장한 지 꼭 10년이 됐다. 또 그들이 만들어낸 카카오톡 서비스가 등장한 지도 벌써 만 610개월이 지났다. 이 시간 동안 카카오는 벤처계의 신데렐라에서 시장 지배자로 성장했고 한국인의 일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 기사는 주간조선 2438호에서 발췌했습니다.> 조동진 기자 편집 이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