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3/ 대한민국의 수출과 생산, 40년간의 발자취 - 한국인 年代記 WHO IS WHO
기업의 역사3/
2015.12.04 대한민국의 수출과 생산, 40년간의 발자취
오는 12월 5일은 '무역의 날'이다.
무역의 균형 발전과 무역입국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1964년 11월 30일을 기념해 이 날을 '수출의 날'로 지정해 매년 기념일 행사를 치러 오다가, 1990년부터 '각종 기념일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무역의 날'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1년 12월 5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2012년 10월 '무역의 날'을 12월 5일로 변경하였다.
/'1965년 성창기업 수출용 베니어합판 공장'
/1967년 하동환버스회사의 베트남 수출버스 하역작업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수출전시품 관람
/'1972년 박정희 대통령 내외 마산수출단지 공장 시찰'
/'1976년 마산수출자유지역공단 한국실리콘 공장'
/'1972년 해외수출공업단지 가발공장'
/'1976년 GMK 덤프트럭 수출선적'
/'1978년 포니 수출
/'1977년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우표'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방문'
/'1993년 제30회 무역의 날 기념식'
/'제32회 무역의 날'
국가기록원은 '제52주년 무역의 날'을 맞아 1950년~90년대 우리나라의 수출진흥 관련 기록물 총 30건(동영상 8, 사진 19, 문서 2, 우표 1)을 오는 4일부터 누리집을 통해 제공한다.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2016-10-09 억척으로 엮어낸 자동차산업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1)...시발, 새나라, 신진 자동차
[수출 5강에 어린 땀과 눈물]
지난해 우리나라는 프랑스를 제치고 수출 5강에 안착했다.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세계 4위이다.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출발한 우리 경제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중심에 자동차가 있었다.
1976년 7월 에콰도르에 다섯 대의 포니 수출을 시작으로 우리 자동차산업은 수출의 역군으로 커왔다. 지금은 세계에서 자동차 생산 톱 5에 올랐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었다. 자동차산업의 출발과정부터 살펴보자.
시발 자동차의 등장
우리 자동차산업 역시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출발했다. 전쟁이 끝난 뒤 솜씨 좋은 한국인들에 의해 자동차 재생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파괴된 자동차들의 부품을 활용해 운행 가능한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자동차 외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군이 버린 폐기된 차에서 쓸만한 엔진과 부품을 골라내어 재생하고. 모자라는 나머지 부품들은 직접 제작하여 우리 손으로 차를 만들어냈다. 겁도 없이 망치 들고 자동차를 만든 격이다. 외국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한국인의 손재주 하나만은 알아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최초의 자동차 이름은 ‘시발자동차’였다. 자동차 생산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뜻으로 ‘시발’(始發)이라 명명했다.
해방 이후 서울 을지로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 혜성, 순성 3형제가 설립한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에서 미군 지프를 개조하면서 자동차산업이 태동했다.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는 미군으로부터 불하 받은 지프나 트럭 등 폐차를 재생하여 민수용으로 활용했던 ‘국제공업사’에서 비롯되었다. 폐차 처리를 하면서 기술을 익혀 한국전쟁 직후에 프레임(frame)이라 불리는 차대 제작에 성공했다.
그 뒤 엔진 제작에 착수하면서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로 바꾸고 민수용 차량을 만들면서 1955년 8월에 ‘시발’자동차 제작에 성공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인 시발은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다. 엔진은 일본에서 엔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영삼이 제작했다. 그가 없었다면 시발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다. 폐기 처리된 미군 지프의 부품들을 떼어다 갖다 붙이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일일이 망치로 두들겨 가며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한 대 만드는데 4개월 정도 걸렸다.
사장 최무성은 “주요부품을 미군 차량에서 가져왔지만 실린더 헤드 등 엔진부품을 한국기술자가 공작기계로 깎아 만드는 등 국산화율이 50%가 넘어 국산차의 원조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정비회사가 을지로2가 공터에 있었다. 천막을 쳐서 공장으로 삼고, 사무실은 미군이 버린 버스를 개조해 사용했다.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차를 만들다 보니 초기에는 천막에서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사장 최무성은 전 재산을 차량제작에 투자했다. 하지만 시발 차의 가격이 8만환으로 비싼 편이어서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시발 자동차를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4만점이 넘는 전시품 가운데 이 자동차가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았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자동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상공부 장관으로 하여금 매주 시발자동차의 제조와 판매 현황을 보고토록 했다. 이렇게 대통령이 이 차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자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구매를 문의하는 전화가 전국에서 걸려왔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천막공장에는 시발 차를 사가려는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가격도 하루아침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한 달도 못되어 1억 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이 돈으로 주물공장을 인수하여 양산의 발판을 마련하고, 회사를 서울 종로구 관수동으로 옮기고, 공장은 용산구 문배동 외 3개소로 늘렸다. 제법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 양산체제로 돌입했다.
시발택시의 등장
시발자동차는 택시 회사에서 관심을 가지자 500대가 택시로 팔렸다. 그 뒤 1956년 군용트럭에 사용되었던 6기통 엔진을 참고로 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고, 1958년에는 세단형 9인승 자동차도 생산해 냈다.
시발자동차가 인기를 누리자 버스, 트럭, 트랙터 제작에도 손을 뻗었다. 시발자동차는 인기가 높아서 생산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얼마 뒤 시발 투기 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 사이에선 "시발계"까지 성행해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시발자동차의 몰락
/1958년 중앙청에서 세종로까지 도로 전경
그러나 이런 시발자동차에도 어둠이 닥쳤다. 5·16 이후 일본 이스즈와 제휴하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조립생산하려고 무리하게 투자하는 바람에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 그 뒤 정부보조금이 중단되었고 1962년 1월 '시발'에 지원키로 예정되었던 정부융자마저 무마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군사정부가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음에도 국산차 키우기를 택하지 않고 일본 자동차의 조립, 생산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1962년 재일교포가 설립한 '새나라자동차'가 닛산에서 수입, 조립한 산뜻한 모델을 내놓자 시발자동차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정부에 제출한 외자유치 건의도 반려되면서 결국 1963년 5월에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시발자동차 3천여 대를 만들어 팔았다.
오원철 공장장 경제수석으로 발탁되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개발한 기술과 기술자들은 훗날 우리 자동차산업의 주춧돌이 되었다. 특히 오원철 공장장은 1960년에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변 당시 관료로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에 취임했다. 그 뒤 1971년에는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방위산업 육성의 총책을 맡았다.
하동환 버스의 등장
1951년 전쟁 통에 정부는 피난민 수송을 위해 60여 대의 버스와 트럭을 이용한 운수영업을 허가했다.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꼬불꼬불 국도를 타고 험한 고개를 넘나들어 서울 부산을 잇던 그 고생길의 요금은 3만 4천환이었다. 쌀 한 가마니에 8만환 할 무렵이었으니 요즘의 비행기 값 정도로 비쌌던 셈이다. 미군이 버리고 간 트럭을 개조하고 두드려 맞춰 만든 버스가 귀한 대접을 받으며 거리를 누볐다.
최무성이 드럼통으로 짚차를 만들 때 드럼통으로 버스를 만들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 ‘드럼통 버스 왕’이라 불렸던 하동환이 그 주인공이다. 1955년 쌍용 자동차의 모체인 '하동환 자동차제작소'가 설립됐다. 자동차 정비공장의 기술자로 일하던 하동환은 미군이 쓰다 버린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드럼통과 망치, 재생부품을 이용해 버스를 만들었다.
하동환자동차제작소는 규격화 된 버스를 대량 생산해 1960년대 국내 제일의 버스메이커로 성장했다. 그가 만든 버스는 당시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1968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베트남에 버스 20대를 수출했다. 하지만 지프 및 버스 등에만 사업영역이 국한되었던 하동환의 동아자동차는 성장이 부진하게 되면서 1986년 쌍용에 매각되어 쌍용자동차의 밑거름이 되었다.
1962년 새나라 자동차
/박정희 의장의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 참석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정부는 국가재건 방안의 하나로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말만 보호육성법이지 정반대로 시행되었다.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에 명시된 외산자동차 및 부품의 수입금지가 골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해외자본의 국내투자라는 명목으로 재일교포 박노정에게 닛산 자동차를 반제품으로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는 새나라 자동차의 설립을 허가했다
옛 국산자동차 공장을 부지로 해서 공사가 착공되기도 전에 정부는 새나라 자동차에 닛산 블루버드 완제품 400여대의 면세수입을 허가했다. 400대중 150대는 외국인관광용, 250대는 일반관광용으로 면세 수입되었으나 당초 목적과 달리 들여와서는 전량 택시로 전환되었다.
이후 ‘새나라 자동차’는 일본 닛산과 손잡고 1962년 8월 경기도 부평 지금의 GM자동차 공장 부지에 연산 6천 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조립공장을 세웠다. 현재 한국GM의 전신이다. 여기에서 1962년 11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새나라는 닛산의 블루버드 부품을 도입해 조립한 차였다.
이 수입 차는 모처럼 우리 손으로 자라나던 국산 자동차산업을 붕괴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새나라 자동차는 제3공화국의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지목되면서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다. 당시 공화당을 창당한 군사정권은 정치자금 조달 목적으로 새나라자동차에게 한국 내 자동차 판매에 대한 특혜를 약속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새나라자동차는 1년 만에 퇴장당하는 비운의 차가 되고 말았다. 1963년 5월까지 2천700여대를 생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자동차 2천 여 대를 관세 없이 수입해 시중 업자에게 팔아 넘겨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수입 가격은 1대에 13만원인데 25만원에 팔아 약 2억 5천만 원의 이익을 취했다. 물론 이 돈은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새나라 사건이 자동차산업에 미친 부작용도 컸다. 오원철에 따른면, "자동차공업도 수공업적으로나마 버스나 '시발'차가 국산화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왔으니 국내에는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일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일본에 내주어야 했고 우리나라는 상당기간 자동차산업의 불모지가 되어 버렸다."
결국 '새나라'에 악전고투하던 '시발'마저 같은 해에 회사 간판을 내리게 되어, 이후 기술자립의 싹이 잘린 한국 자동차산업은 1990년대 초.중반까지 기술 의존의 길을 걷게 된다. 이로써 '새나라'자동차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악역이었다는 오명을 안게 된다.
신진자동차
신진자동차는 1955년부터 1984년까지 존재한 최초의 대규모 자동차회사였다. 1955년에 김제원-김창원 형제에 의해 부산 신진공업사로 시작하면서 미군으로 부터 불하받은 폐차 새시를 재생하여 버스를 만들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1960년에는 전포동 버스공장을 완공했으며, 1962년에 나온 신진 25인승 마이크로버스는 일명 노랑차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엄청난 판매고를 자랑했다.
1963년에 미군 지프 폐차 부품을 이용해서 새나라 자동차의 닛산 블루버드 외형을 모방하여 만든 ‘신성호’라는 세단은 신진자동차 최초의 승용차였으나 재생부품을 사용하다보니 조악한 품질과 새나라 자동차보다 비싼 가격으로 판매가 매우 부진했다.
이후 신진자동차는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특혜 시비로 망하면서 한일은행의 관리 하에 있던 새나라 자동차의 인천공장 곧 지금의 한국GM 인천공장을 1965년에 인수했다. 그곳에서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코로나(1966년), 크라운(1967년), 퍼블리카(1967년) 같은 승용차를 생산했다.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1966년 5월 처음 생산한 승용차 코로나는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차 값은 83만 7,000원으로 당시 대통령 월급이 7만 8,000원, 쇠고기 한 근 200원, 택시 기본요금 60원 다방커피 40원이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비쌌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디자인이 예쁘고 한국의 도로사정에 잘 맞는 자동차로 부각되면서 국내 승용차 시장을 싹쓸이했다. 코로나는 1966년 5월 ~ 1972년 11월까지 44,248 대가 생산되었다.
그 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자동차의 자체 개발1호로 유명한 중형차 "크라운" 을 조립, 생산하여 우리나라 고급차 시장의 문을 열었다. 소형차 "코로나"를 최고의 차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보다 차체가 크고 고급스러운 크라운은 큰 화제였다. 특히 1967년의 뉴크라운은 디자인을 네 번이나 바꾼 마지막 모델로 그야말로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집 한 채 값이 70 ~ 80 만원 하던 시절에 차 값이 무려 310만원이었다. 디자인이 당시로서는 초현대적이어서 재벌총수, 장관, 국회의원 등의 자가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1967년 5월~1972년 7월까지 총 3,840대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주은래 4원칙"을 발표하자 중국 진출에 뜻을 둔 도요타자동차가 1972년 우리나라에서 철수했다. 이로 인해 기술과 부품공급이 끊어지면서 신진자동차는 더 이상 도요타의 차를 만들 수 없었다. 외국 메이커에 의존한 기술은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였다. 그때 도요타자동차가 철수하지 않고 계속 우리 시장에 남아있었다면 우리 자동차산업이 지금처럼 독자적으로 꽃피기 힘들었거나 많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2018.05.29 월간조선 문갑식의 발로 쓴 한국인 年代記 WHO IS WHO
월간조선 06월 호 문갑식 편집장
〈1〉동학농민군 정읍 접주 차치구 4대
“동학 접주는 보천교주를 낳고 독립군을 도운 보천교주의 아들은 국보를 지킨 호국영웅이 되었으며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을 토벌한 장군의 아들은 영혼과 대화하는 法師가 되다”
⊙ 열혈남아 차치구와 전봉준의 만남은 水魚之交
⊙ 동학농민군 패퇴한 뒤 끝까지 전봉준 지키다 자기가 살려준 현감에게 사형당해
⊙ 경상도 사람이 만든 동학에 전라도가 열광한 것은 시대의 이면… 미륵에 바라는 것이 달랐다
⊙ “세상 사람은 차(경석)씨를 일개 미신가이며 또한 무식한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잡지 《개벽》의 인물평
⊙ 김좌진부터 조만식 선생까지 독립운동 지원의 54% 담당한 보천교
⊙ 차경석의 아들 차일혁은 남부군사령관 이현상 토벌한 호국영웅
⊙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차길진은 영혼 전도사로 활동… 1년 전 인터뷰서 “차기 대통령은 통일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언
▲고창읍성은 국내에 산재해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나는 죽을 뿐이다. 더 이상 심문하지 마라”
- 차치구
이 땅에 기인(奇人), 이사(異士), 술사(術士), 도사(道士)들이 즐겨 찾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충청남도 계룡산과 전라북도 모악산(母岳山)이다. 둘 다 천하명당으로 각종 예언서에 가히 도읍이 될 만한 곳이라고 꼽혀왔는데 차이가 있다. 계룡산의 주인공은 신선(神仙), 단군, 정도령(鄭道令)인데 모악산의 주인공은 단연 미륵부처라 하겠다.
모악산 인근은 정이 반을 낳고 다시 합치는 정반합(正反合) 변증법을 19세기 말 보여줬다. 양반의 폭압이 민중혁명을 낳고 나라가 망해 고된 세월 끝에 민주국가로 재탄생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낭자하다. 전북 정읍시 입압면 대흥리에서 태어난 차치구(車致九·1851~1894)는 빈농 집안이었지만 키가 180cm나 될 만큼 기골이 장대했다.
▲해마다 정읍 일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맨 앞이 녹두장군 전봉준이며 두 번째가 손화중이다.
이 장한(壯漢)은 성격도 불같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주변 이웃들이 고리대금에 신음할 때면 앞장서 풀어주고 관리들이 묘지를 빼앗아가면 제가 나서 되돌려주고 송사(訟事)가 있으면 피하지 않았다. 이런 차치구가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1854~1895)과 조우한 것은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라 할 것이다.
차치구는 정읍두령이었는데 그 부대는 ‘녹두장군’의 직할부대와 같았다. 1차 봉기 때 조병갑의 학정(虐政)의 온상이었던 고부 관아 습격을 모의한 핵심 멤버 스무 명이 있었는데 당연히 차치구도 그중 한 명이었으며 2차 봉기 때 그 휘하에 농민군 5000명이 있었다.
동학혁명군이 점령지에 설치한 게 집강소다. 당시 고창 현감은 윤석진이었는데 배포가 대단했던 것 같다. 농민군 집강소 설치를 한사코 거부한 것도 모자라 동학군 고창접주 고영숙(1871~1894)을 옥에 가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차치구는 한걸음에 농민군을 이끌고 고창으로 달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윤 현감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차치구는 “굳이 죽일 것이야 없지 않으냐”는 고영숙의 만류에 그를 살려주고 만다. 태인전투 패배 후 동학혁명군 지휘부는 뿔뿔이 흩어져 관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차치구는 전봉준을 자기 집에 숨겼지만 1894년 12월 28일 체포되고 만다. 차치구 역시 ‘대역’을 꾀한 죄인을 은닉해 줬다는 혐의로 관군에 체포된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돼 차치구는 재판도 받지 못하고 목이 베이는 신세가 됐다. 그가 살려줬던 고창군수 윤석진은 ‘차치구’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부득부득 갈아왔던 것이다. 칼로 내려치기 전에는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개 패듯이 그를 두들겨 팼는데 차치구는 한마디만 했다고 전한다. “나는 죽을 뿐이다. 더 이상 심문하지 마라.”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조선-중국-일본을 아우르는 나라가 탄생하는데 내가 그곳의 天子가 될 것이다”
- 차경석
▲고창은 넓은 들로 유명하다. 사진은 청보리로 유명한 학원농장의 전경이다.
이 풍요로운 대지에서 양반들은 민초들을 압박했고 견디다 못한 민초들은 낫과 곡괭이를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차치구는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다. 순서대로 경석, 윤경, 윤칠, 윤덕이었다. 차경석(車京石·1880~1936)은 아버지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고 한밤중에 30리 길을 달려갔다. 그의 나이 열네 살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컸던 그는 동학혁명 당시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볐다. 아버지가 숨진 지 4년 뒤 차경석이 ‘일’을 냈다.
18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고창 흥덕 관아를 습격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뜻하는 영학계(英學契)의 계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동학농민군의 잔존 세력이었다. 이 일로 체포된 차경석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인품에 감동한 한 관리가 몰래 도주할 길을 열어줘 구사일생, 목숨을 보전하게 되고 그것은 반도를 들썩인 종교를 낳았다.
여기서 잠깐 경상도 경주 사람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창시한 동학이 왜 전라도, 그것도 정읍-고부-김제 등 전라북도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동학의 뿌리를 캐들어가다 보면 불교의 미륵신앙이 나온다. 미륵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 뒤에 온다는 미래의 부처다.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 때부터 널리 퍼졌는데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미륵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한때 경주 사람 5만이 숯불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볼 때 현생(現生)이 행복했다. 그러기에 그들이 미륵에 빈 것은 미륵이 산다는 이상향 ‘도솔천’에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패망한 백제가 자리했던 전라도의 사람들에겐 현생이 지옥 같았다. 하루빨리 미륵이 강림해 모두가 평등하게 살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이렇게 희망의 강도(强度)가 달랐기에 전라도 일대에는 미륵신앙의 현장이 경상도보다 많다. 하루아침에 천 개의 미륵불과 천 개의 탑이 세워졌다는 화순 운주사나 미륵신앙의 본산인 김제 금산사가 대표적이다.
동학의 열풍이 일순 꺾인 뒤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 증산교(甑山敎)를 창시한 것도 동학이 생겨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강증산을 따랐던 제자들에 의해 증산교는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고부파, 도리원파, 김병선교단 등 9개 교파로 갈라졌는데 초대 보천교주가 된 차경석이 강일순을 만난 게 1907년 음력 5월 16일이다.
차경석은 강증산 사후 보천교를 만들면서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조선-중국-일본을 아우르는 나라가 탄생하는데 내가 그곳의 천자(天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동학이 탄압받고 강증산마저 없는 세상에 차경석의 사자후는 식민지 치하 백성들에겐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1920년대 기록에는 보천교 신도가 700만명이라는 얘기도 있다.
▲차경석의 보천교는 독립운동자금의 원천이 됐으나 일제의 간계에 말려 차경석은 분노 속에 숨을 거뒀다.
1921년 4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차경석을 교주로 삼아 은밀히 국권회복을 도모하되 교도가 5만5000명에 달하며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비밀음모단체로서 주모자는 조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도 모집에 분주하여 특히 산간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력이 매우 성대했다.”
2000만 백성 중 700만이면 과장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조선총독부 집계로도 170만명에 달했으니 그 교세를 짐작할 만하다. 여기서 보천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1923년 8월에 발행된 《개벽》 제23호 차경석의 인상기(印象記)를 보면 차경석의 인물 됨됨이의 일단을 어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진주 출신의 필자는 보천교에서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는 까닭에 가짜 상투를 달고서 겨우 차경석과 만났다. (그의 외모에 대해) 머리에는 통천관을 쓰고 의복은 순전히 조선에서 난 것만 입고 있으며, 과연 인격이 있어 보여 여럿이 받들 만하다. (중략) 세상 사람은 차씨를 일개 미신가이며 또한 무식한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비록 현시대의 지식은 모자란다 할지라도 구시대의 지식은 상당한 소양이 있다. 그의 엄격한 자태와 정중한 말은 능히 사람을 감복게 할 만하다. 그는 한갓 미신가가 아니라 상당한 식견이 있다.”
이런 기사를 낸 잡지 《개벽》은 보천교와 경쟁관계였던 천도교의 기관지였다. 앞서 말했듯 동학과 증산교와 보천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리는 것이 이 기사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보천교는 1920년부터 20년 동안 147번이나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줬는데 이것은 전체 독립운동자금 지원 건수의 절반이 넘는 54%나 됐다.
차경석의 도움을 받은 독립운동가 중에는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金佐鎭·1889~1930)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선 고당 조만식(曺晩植·1883~1950)까지 다양했으며 육당 최남선이 운영하던 《시대일보》를 인수한 것도 차경석이었다.
차경석은 1936년 사망했는데 강증산은 생전에 차경석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너는 집을 크게 짓지 마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된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르려는 듯 차경석은 1925년 1월부터 보천교의 중심교당 십일전(十一殿) 건설에 나섰다. 당시 민간에는 《정감록》 등의 비결과 예언서가 널리 퍼져 가고 있었다.
특히 《정감록》 《징비록》에 실린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의 구절은 기사년(己巳年·1929년)에 일어날 일로 믿어졌다. 진사년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십일전 신축과 맞물려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에 새로 지은 궁전에서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소문이 날개를 단 듯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십일전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만여 평(33만m2)의 부지에 건평 350평(1155m2), 높이 99척(30m), 가로 30m, 세로 16.8m에 이르러 패망한 조선왕조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두 배나 크고 화려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그 건물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일제가 1929년 십일전이 완공된 후 건물 사용을 불허했던 것이다.
1936년 3월 10일 차경석은 세상을 떠난다. 당시 아홉 살로 임종을 지켜본 3남 차봉룡은 한 언론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일제가 교를 억압하고 눈앞에 교당을 다 지어놓고도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수족을 잘라 조선이 망할 때와 똑같은 형국이었습니다. 화를 삭이지 못해 병이 들더니 별 말씀을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 차일혁
▲지리산 화엄사의 중심 건물인 각황전이다. 각황전 오른편이 그 유명한 홍매화다. 하도 붉어 흑매(黑梅)라고도 불린다. 이 귀중한 문화유산이 6·25 때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불타 없어질 뻔했으나 호국영웅 차일혁의 기지로 살아남았으니 그것도 인연일 것이다
홍매화 보러 들른 전남 구례 화엄사에 한 경찰관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사연은 1951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라북도에 새로 주둔한 8사단(당시 사단장 최영희 준장)과의 군경합동회의에 참석한 인물 중에 차일혁(車一赫, 호적상 이름 차갑수, 족보상 이름 차용철·1920~1958)이 있었다. 당시 그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 소속이었다.
경찰 측 대표는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신상묵이었으며 군 대표는 최영희 사단장 및 8사단 참모들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에 우려를 표했다. 명령을 받은 8사단 예하 18대대장은 방득윤이었으며 차일혁은 그의 관할하에 있었다. 차일혁이 고민하는 상관에게 꾀를 냈다.
▲화엄사 경내에 있는 차일혁 경무관의 일화를 알리는 안내문이다.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 태우자”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이 명령은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이니 문짝만 뜯어내 태워도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고 했다. 이에 방득윤이 동의해 화엄사는 소실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때 차일혁이 한 말이 남아 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차일혁 경무관이 화엄사 일주문 앞에 서 있다.
차일혁 덕분에 살아난 절은 또 있다.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문화유산을 살린 대가로 ‘명령 불이행’에 따른 감봉 처분을 받기에 이른다. 이런 차일혁이 차경석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난 차일혁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했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치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악명 높던 일본 경찰 간부가 그때까지도 ‘미군정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귀국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보고 1945년 11월 2일 원남동 네거리에서 그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일본 경찰 간부 사이가(齊加七)가 임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돼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했다. 70명의 병력으로 2000명의 빨치산을 격퇴한 정읍 칠보발전소 전투, 1953년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1906~1953) 사살 등,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이현상 토벌에 투입된 부하들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정작 지휘관인 그는 제외됐다.
이현상을 사살한 뒤 그의 시신을 화장해 하동 섬진강에 뿌린 게 윗사람들에게 밉보인 것이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록 적이지만 죽은 뒤에 빨갱이가 어디 있고 좌익이 어디 있느냐.” 그는 1954년 충주경찰서장 재직 시에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해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도솔산 선운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도들이 비결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선운사가 미군의 폭격을 받을 뻔했으나 역시 차일혁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됐다.
차일혁은 충남 공주서장으로 발령받은 뒤인 1958년 금강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에 타계했는데 좌익에 온정적이었던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보는 상부에 실망해 자살을 택했다는 설(說)도 있다. 2008년 문화재청은 차일혁에게 감사장을 추서했고 경찰청은 2011년 8월 총경이었던 그에게 경무관을 추서했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서훈했으며 2013년 전쟁기념사업회는 차일혁 경무관을 고려시대 최무선 장군을 비롯한 62명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호국의 인물에 경찰이 포함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2016년 국립대전현충원은 ‘9월의 현충인물’로 6·25전쟁에서 칠보발전소를 사수하고 지리산을 장악한 빨치산 남부군 섬멸 전투를 지휘한 차일혁 경무관을 선정했다.
“이번 대통령은 통일 대통령 될 것”
- 차길진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다. 바로 뒤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차길진(車吉辰·1947년생)이 아버지의 죽음(익사)을 목격한 것은 12세 때였다. 그 이후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영혼을 보거나 대화하고 미래를 예지(豫知)하는 것이었다. ‘생명치료사’ ‘영혼전도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글을 쓰고 오페라를 만들고 심지어 프로야구단 구단주로도 활동했다.
그가 도통한 인물인지 아닌지 단언할 수는 없다. 2006년 동양학자 조용헌은 《조선일보》에 차길진 집안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은 “요즘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인가?’이다. 무슨 일이든지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따라붙기 마련이다. 이 수요에 대한 공급 방법은 대략 세 가지가 있다”로 시작된다.
“… 첫째는 여론조사다. 선거를 하기 전에 여론조사 해보면 누가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정치분석가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언가들이다.
요즘 국내 언론에서 가장 활발히 소개되는 예언가는 차길진 법사다. 큰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적중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내년 대선에 대해서는 ‘홀연히 상서로운 빛이 무궁화 동산에 비치고, 밝은 달에 학이 날아올라 부를 날을 맞이하네’라는 알 듯 말 듯한 예언을 하였다. 필자는 차 법사를 보면서, ‘이 세상에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차 법사는 어떻게 하다가 이처럼 독특한 직업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차 법사는 뿌리 깊은 예언가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빨치산 토벌대장을 지낸 차일혁이지만, 할아버지뻘 되는 인물은 그 유명한 보천교(普天敎) 교주인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고, 차경석의 부친은 전봉준의 핵심 참모였던 차치구(車致九)였다.
전북 정읍의 입암산(笠岩山) 아래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족종교 단체였다는 것이 보천교 전문가인 안후상씨의 주장이다. 한때는 신도가 300만명에 육박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면서 호남 지역에서는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던 호남 인심을 다독거리면서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차경석이었다.
경상도에서도 많은 사람이 입암산 아래로 이사를 왔고, 독립운동가들도 비밀리에 보천교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근래에 독립훈장을 추서 받은 탄허(呑虛) 스님의 부친 김홍규는 원래 보천교의 5대 요직 가운데 하나인 목방주(木方主)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차경석은 본인을 ‘천자(天子)’라고 자칭했기 때문에 일제의 조직적인 감시와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마자 보천교는 강제로 해산되었고, 그 본부 건물이던 십일전(十一殿)이 해체되어 서울의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 되었던 것이다. 차 법사의 인생 행보를 보면서 집안 내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차길진은 2017년 1월 “차기 대통령은 통일대통령이 될 것이며 통일이 무르익었다”고 예언했다.
차길진은 2017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년 반 전의 예언인데 요즘의 정치상황과 연관시켜 읽으면 좋을 것이다.
“통일의 기운은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와서 다시 백두대간의 기운을 따라 올라가는 중이다. 평창 올림픽이 그냥 열리는 게 아니다. 국운의 기운이 그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기운을 받은 사람이 큰 인물이 되며, 통일을 이룰 것이다.
차기 대통령은 통일 대통령이다. 통일 대통령은 후천개벽 ‘수(水)의 시대’와 맞아떨어진다. 수의 시대는 음(陰)의 시대다. 후천개벽 이전의 세상이 ‘불(火)의 시대’이자 ‘양(陽)의 시대’이며, 그 대립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말이다.
YS는 거제도, DJ는 하의도, 노무현은 진영・김해, 이명박은 포항 등으로 전부 물과 관련이 있다. 수의 시대의 상징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자로서 음이다. 수와 음의 기운이 맞아떨어지는 형국이다.
수의 기운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파문과 같다. 이른바 인터넷 세상과 같다. 조그만 파문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수의 세계는 순간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이 음인 것은 음양오행에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의 기운은 산(山)의 기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산수가 항상 같이 가기 때문이다. 음양이 같이 간다는 이론과 같은 맥락이다. 큰 인물은 반드시 산의 기운을 받아야 가능하다.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백두대간의 기운이 지리산까지 미쳤다가 다시 북으로 상승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받은 기운은 한국의 삼성・금성・효성과 같은 3개 거대 기업을 낳게 했다. 실제로 이들 창업주의 고향은 모두 지리산 언저리에 있다. 대권을 거머쥘 인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7월 호
<2>인화와 인내의 기업을 일군 LG그룹 具仁會 4대
“진주 청년은 생필품에서 시작해 전자와 화학산업의 초석을 놓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기업을 세계적으로 키웠으며 손자는 평생 사람을 아끼며 구설수에 한 번 오르지 않았다. 이제 4대가 시작됐다”
⊙ 구교리댁 장남 구인회의 사업보국
⊙ 포목상에서 화장품–플라스틱–전자산업–석유화학산업까지 ‘한강의 기적’의 큰 물줄기가 되다
⊙ 손해를 봐도 인화를 위해 견디는 리더십이 오늘날 LG그룹의 문화를 만들었다
⊙ 백만장자이면서도 승합차로 출퇴근하고 다방에서 5환까지 꼭 챙겨온 노랑이지만 독립운동 자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내놓은 인물
⊙ 2대 구자경은 교사 지내다 공장생활… 한국 플라스틱 산업의 역사가 그에게서 시작됐다
⊙ 3대 구본무는 경영난에도 해고 안 해… 노사 협력의 모범을 보였다
⊙ LG그룹에서 반도체를 빼앗아간 김대중 정권의 강제 ‘빅딜’ 때 구본무 전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
⊙ 養子 4대 회장 구광모는 어떤 경영스타일 보일까 주목
▲의령 관문 앞 남강에 있는 솥바위다. 구한말 한 도인(道人)이 이곳을 지나며 솥바위 사방 이십 리에 한국을 대표할 부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삼성그룹, LG그룹, GS그룹, 효성그룹 창업주들이 모두 이 솥바위 근처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智水面) 승산리(勝山里)라는 곳이 있다. 물을 알고 산을 이긴다는 뜻이니 이름에서부터 명당(明堂) 티가 나는데 눈으로 봐도 예사로운 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 방어산(防禦山), 동산(東山), 사브랑덤, 보양재가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은 온통 허씨(許氏) 천지인데 그 복판에 능성 구씨(具氏) 집이 콕 박혀 있다.
승산리는 원래 승내리(勝內里)였다가 이름을 바꾼 것인데 여기 자리한 허씨 집안은 근검과 절약으로 마을을 조선 땅에서 손꼽히는 부촌(富村)으로 일구고 말았다. 이른바 만석꾼이 두 집, 천석꾼이 열두 집을 헤아렸으니 지금의 GS그룹이 바로 여기서 연원(淵源)한 것이요, 삼성그룹-LG그룹-효성그룹이 이 허씨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
▲LG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허만정 선생의 생가다.
허씨 문중의 만석꾼이 얼마나 돈을 아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짚신을 신었지만 남이 안 보는 데서는 신발이 닳을까 아까워 맨발로 다녔고 담뱃대에 담배를 재우기는 하지만 입에서 연기처럼 내뿜는 것은 입김일 뿐 실제로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았고 부채는 혹시 상할까 봐 펴고 있지만 부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LG그룹의 창업주 蓮庵 具仁會
앞서 말한 능성 구씨 집안은 원래 구교리댁으로 유명했다. 만회(晩悔) 구연호(具然鎬) 공은 어렸을 적부터 예닐곱 문장을 척 봐서 암기할 정도의 천재였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대과에 급제하고 임금 앞에서 경전을 강하는 홍문관 시독(侍讀)까지 승진했을 때 그의 이름은 서부 경남에 자자했고 유림(儒林)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
순종 원년에 홍문관이 폐지되자 만회 공은 고려 유신(遺臣)들이 두문동에 들어간 것처럼 낙향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보였다. 벼슬길은 막히고 나라는 망할 지경인 상황에서 만회 공의 유일한 낙은 독자(獨子) 재서가 낳은 장남 정득(丁得)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는데, 정득이 바로 LG그룹의 창업자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1907~1969) 선생이다.
연암이 진주에 포목점인 구인회 상점을 낸 것이 1931년, 그로부터 87년이 흐르는 동안 LG그룹은 구자경(具滋暻)-구본무(具本茂) 시대를 거쳐 4대 회장 구광모 시대를 맞게 됐다. 인화(人和)와 인내(忍耐)로 요약할 수 있는 LG그룹의 정신과 행동은 모두 구인회 창업주 시대 때 형성된 것이다. 구씨 4대를 20가지 에피소드로 살펴본다.
#1. 부당하게 주지도 부당하게 갖지도 않겠다
일 전짜리 한 닢을 두고 두 소년이 다투고 있었다.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다, 퍼뜩 이거 놔라.” “무신 소리 하고 있노, 네나 내나 똑같은 임자 아이가?”…. 한참 싸우던 중 키 큰 소년이 지친 듯 동전을 포기했다. 동전을 차지한 소년은 그를 데리고 동네 앞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으로 가 성냥 두 갑을 샀다. 그러곤 한 갑씩 나눠 가졌다. 부당하게 주지도 않고 부당하게 갖지도 않겠다는 LG그룹의 정신이 여기서 태동한 것이다.
#2. 허씨 가문의 사위가 되다
14세 때 구인회는 바로 담 너머에 사는 천석꾼 허만식(許萬寔)의 장녀 을수(乙壽) 양과 혼례를 올렸다. 신랑보다 두 살 위였다. 만회 공의 3녀가 허만식의 차남 인구(仁九)에게 시집갔다가 얼마 안 돼 사망했으니 양가는 기껏 맺었던 인연이 아까워 다시 인연을 맺어보세 하고 둘을 연결시킨 것이다. 신랑은 나이 많은 신부에게 말을 놓을 수 없었다. 기껏 ‘임자’ ‘이녁’ 또는 ‘보소’라고 했는데 평생 단 한 번도 ‘자네’ ‘하게’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후 비로소 구인회 창업주는 정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인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3. 지수보통학교 입학
▲구인회와 이병철이 다녔던 지수초등학교.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도 이 학교를 나왔다.
신식 바람이 지수면까지 불어닥쳤다. 구인회는 쓰고 다니던 초립을 벗어 던지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곤 지수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수초등학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구인회의 장남 자경이 다닌 학교인데, 교정에 머리를 맞댄 소나무를 두고 사람들은 구씨·허씨의 관계, 구인회와 이병철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4. 일본인 교장의 차별에 맞선 동맹휴학
일본인 교장 아들과 정진화라는 학생이 싸움을 벌였다. 선생들은 정진화만 교무실에 불러 꿇어앉히는 벌을 줬다. 다음날 정진화의 아버지 정 진사가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교장이 사는 사택의 유리창을 박살 냈다. 몸을 피한 일본인 교장은 다음날 정진화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구인회를 비롯한 학생 대표 10명은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도지사, 군수, 장학사 등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한 달이 지나자 결국 도에서는 손을 들고 일본인 교장을 산청(山淸)으로 전근 보냈다. 동맹휴학을 주도한 죄로 구인회 등 10명은 나중에 나쁜 성적을 받게 된다. 구인회는 서울의 중앙고보를 다녔고 2학년을 마친 후 학업을 중단했다.
#5. 협동조합 결성
▲효성그룹 조홍제 창업주의 생가다. 함안에 있다
생활고로 중앙고보를 중퇴했으나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당시 지수면의 상권은 눈깔사탕 등을 팔며 사세를 넓힌 일본인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것을 본 구인회는 학교에서 배운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조합을 세우고, 전무를 거쳐 이사장까지 오른다.
구인회는 마산, 진주 등에서 석유와 일용품을 사다 놓고 팔기 시작했다. 일본인 문방구상이 쌓아놓은 기반이 싸고 실속 있는 허인회 협동조합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구인회는 주판을 놓기 시작했다. 지출을 분명히 하고 단 한 푼도 틀리지 않게 정리를 하는 버릇이 그때부터 생겼다.
#6. 진주에서 포목점을 연 후, 첫 좌절
▲진주 촉석루 쪽에서 본 남강이다. 아래 있는 것은 임진왜란 때 적장과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은 논개의 사당이다. 이 강물이 범람해 포목점을 차린 청년 기업인 구인회는 막대한 손실을 봤다.
당시 진주는 유명한 소비도시였다. 가을이 되면 농사를 마친 일꾼들이 자식들을 혼인시켜 포목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착안, 구인회는 진주에 포목점을 차렸다. 그런데 1936년 저 유명한 병자년 대홍수가 진주를 덮쳤다. 남강이 범람해 구인회 상점의 포목을 모두 젖게 만들었다. 아버지에게 빌리고 땅을 담보 잡아 사들인 포목이 모두 못 쓸 지경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구인회는 돈을 빌려야 했다.
원창약국을 운영하던 원준옥이라는 사람은 돈을 빌려달라는 구인회의 말에 두말없이 큰돈을 내놓았다. 어렵사리 잡은 기회, 구인회는 재기했고 홍수 때 입은 손실을 복구하고도 큰돈을 모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했다. 포목점에 안주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7. 20일 단식
구인회는 위장이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약을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누군가로부터 위장을 고치는 데는 단식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단식이 위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출발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는 단식을 시작했다. 나흘째까지 괴롭기 그지없었으나 닷새째가 되자 정신이 맑아지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단식은 20일째에 들어 끝이 났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새사람이 됐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구인회가 얻은 소득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의지를 확인하고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어진 것이 위장을 고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 이후 구인회는 진주청과류조합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생선 도매를 시작한 것이다.
#8. 독립운동 자금을 대다
▲구인회 창업주의 생가다. 허씨 집성촌 한가운데 있다.
가게로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의령군 부림면, 지금은 입산리로 이름을 바꿨으며 흔히 설뫼라 불리는 동네에 사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는 당대의 걸물이었다. 일본인들이 백야 김좌진, 백범 김구와 함께 가장 두려워한다는 삼백(三白)의 1인이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열어 부를 일군 뒤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는 독립운동가가 된 그다.
백산이 구인회에게 말했다. “자네 참으로 오래간만이네. 길게 얘기할 시간도 없고 자네의 안전을 위해 오래 이 자리에 머무를 시간도 없네. 일제의 패망은 이제 시간문제일세. 그만큼 우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는 마지막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네. 그러니 자네도 1만원 정도는 기부해 주어야 하겠네.”
구인회는 결연히 답했다. “선생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고초를 다 겪으시는 선생과 행동은 같이 못 할망정 제힘이 미치는 한 재력으로나마 힘껏 도와드려야지요.” 그 길로 구인회는 은행으로 가 1만원을 찾아 백산에게 건넸다. 백산의 예언은 3년8개월 후 조국의 광복으로 현실이 됐다. 당시 백산이 국내에서 모은 돈은 20여만원이나 됐다.
백산은 1943년 8월 3일 만주 목단강에서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숨을 거뒀다. 해방 후 귀국한 백범은 제일 먼저 의령의 백산이 살던 집으로 가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한다. 구인회와 백산의 해후는 조국에 바친 최상의 영예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9. 부산 진출과 조선흥업사, 럭키의 탄생
해방 후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구인회는 조선흥업사라는 무역업체를 차렸다. 조선흥업사는 목탄을 사들여 팔거나 농기구를 수입하는 일을 했다. 그때 고향의 만석꾼 허만정(許萬正)이 셋째 아들 허준구(許準九)를 데리고 와 “사돈은 사업 역량이 있으니 이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오. 사돈에게 출자(出資)도 좀 하겠소”라며 돈을 내놓았다.
허준구는 구인회의 동생 구철회(具哲會)의 사위였다. 구씨와 허씨 가문의 동업이 이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때 조선흥업사는 사업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인회의 아우 구정회(具貞會)가 당구장에서 흥아화학공업사라는 화장품 공장 기술자인 김준환을 만나면서 구인회는 화장품업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처음에 화장품을 도매로 사와서 서울에서 팔던 구인회는 김준환이 흥아화학공업사를 그만두자 피마자기름, 스테아린산, 글리세린 등의 화장품 제조 원료를 대량으로 사들인 뒤 직접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화장품에 붙인 상표가 행운을 뜻하는 ‘럭키’, 그 아이디어를 낸 것은 구정회였다. 한문으로는 樂喜(락희)를 사용하기로 했다.
#10. 플라스틱 시대를 열다
화장품 장사로 재미를 보았지만 구인회의 열정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남들이 안 하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그것이 그의 기업신조였다. 플라스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화장품 뚜껑이 자주 깨지는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안 깨지는 화장품 뚜껑을 만들려고 백방으로 뛰다 보니 미군 피엑스에서 흘러나온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구인회는 즉각 미국에서 플라스틱을 만드는 기계와 원료를 도입하기로 했다. 기계는 들여오자마자 형형색색의 빗과 화장품 뚜껑, 비눗갑과 칫솔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튼튼하고 예쁜 제품을 먼저 구하려고 상인들이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돈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범일동 아파트 공장이 좁아 부전동으로 공장을 옮겨 증설했다.
#11. 국내 최초로 치약을 만들고 다시 비누로
6·25전쟁 중 구인회의 집안은 화를 입지 않았다. 공장도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터라 오히려 부(富)는 늘어만 갔다. 당시 사람들은 가루치약을 사용했고 돈깨나 있는 집안에선 미제 콜게이트 치약을 썼다. 구인회는 치약 생산하는 임무를 동생 구평회에게 맡겼다. 구평회는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청년상공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미국에 들렀다.
그에게 형이 내린 명령은 세 가지였다. 첫째, 콜게이트 치약의 제조법을 알아와라. 둘째, 원료를 중간상인 거치지 않고 직접 구입하는 길을 알아봐라. 셋째, 미국에서 최근의 조류가 어떤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구평회는 정보요원처럼 콜게이트 치약의 원료와 배합비율을 알아냈다. 말이 정보원이지 실제론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럭키치약을 만들어낸 구인회는 다시 비누 생산으로 관심을 돌렸다.
#12. 전자공업에 눈을 뜨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지수면의 전경이다. 뒤로 방어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구인회가 전자공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스카우트한 부하 박승찬이 LP레코드를 듣는 전축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소리를 내는 재래의 전축과 달리 하이파이 전축을 틀면 소리가 웅장하고 마치 눈앞에서 오케스트라가 공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구인회는 “그게 전자공업인가” 하고 묻더니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손을 안 댔나” 하고 묻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산업에서 선두가 된 구인회는 내부 기기만 만들면 라디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라디오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金星社)다. 금성사는 라디오를 필두로, 전화기, 선풍기, 세탁기, 텔레비전을 쏟아냈고 그에 따라 전선(電線)과 세제(洗劑)도 만들기 시작했다.
때맞춰 혁명정부가 들어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농촌에는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라디오를 들으려면 전지(電池)가 필요했다. 필요는 생산을 낳는 법이다. 한때 라디오가 팔리지 않아 문을 닫을 위기까지 맞았던 금성사는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기사회생의 전기를 잡았다.
#13. 승합차를 타고 다니는 사장, 같은 보신탕집 3일 내리 찾은 사장
당시 구인회의 숙소는 창신동에 있는 동생 구태회의 집이었다. 당시 신설동에 살던 김계홍 상무가 승합차로 출근하는데 동대문에서 구 사장이 차에 오르는 것이었다.
“아니 사장님, 택시를 이용하시든지 하시지 왜 이걸 타십니까?”
“나는 왜 이걸 탈 자격이 없는가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노랑이라 할 것이오. 그렇지만 생각해 보소. 내 자식 있고, 아우 있고…. 그것도 한두 명이오? 내가 앞장설 수밖에 더 있겠소? 내가 이러면 무언(無言)의 교도(敎導)가 안 되겠소.”
구 사장은 보신탕을 좋아했다. 그것도 허름한 집만 골라 다녔다. 김 상무는 3일 내리 점심시간 직전에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개장 먹으러 안 갈라요? 어제 그 집 맛있지요?” 그러나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법, 3일째 되던 날 김 상무가 사장에게 한마디 했다. “사장님 좋아하셔서 그런 데 가시는 줄은 알지만 그런 데는 저희가 가서 먹는 데지 사장님이 가실 데는 못 됩니다.” 이때 구 사장이 내놓은 답이 있다. “왜요? 무엇이 어때서? 몇천원짜리 한정식보다도 스테이크보다도 싸고 맛있는데 그것을 안 먹고 뭘 먹어요? 쓸데없는 걱정 마소.”
#14. 거스름돈 5환을 기다리는 재벌
구인회는 고향 어른들을 자주 챙겼다. 그렇지만 결코 돈을 풍성풍성 뿌리고 다니지는 않았다. 한번은 고향 어른들과 다방에 들렀을 때였다. 계산을 하자 여종업원이 “5환을 거슬러드려야 하는데 잔돈이 없어서 아래 가서 바꿔가지고 와야겠십니더”라고 했다. 구 사장은 묵묵히 5환이 올 때까지 기다렸고, 그 모습에 고향 어른들은 놀랐다.
“백만장자가 5환 가지고 너무하지 않느냐. 5백환 팁을 놓고 가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래서 부자가 안 됐나? 우리한테 교훈을 준 기라. 푼돈을 아끼라고”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기생집을 가서도 남보다 적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팁을 줬다고 한다. “이거면 됐제?”라는 말과 함께.
#15. 신의를 위해 손해를 감수한다
▲이병철 회장 생가 뒤편에 있는 바위다. 마치 쌀가마니를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구인회 사장은 평생 세 번 삼성그룹에 속았다. 처음에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원당 수입을 동업으로 하자고 할 때 거절했던 것이다. 훗날 원당은 큰 문제를 일으켜 구 사장도 곤욕을 치를 뻔했다. 두 번째는 삼성과 라디오서울, 동양TV를 합작할 때였다. 성격이 다른 두 기업은 번번이 부딪쳤다. 처음에는 삼성이 라디오서울, 럭키가 동양TV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는데 삼성이 출자금 인수를 거절한 것이다.
이때 구인회는 동경에서 이병철과 담판을 지었다. 다음은 그들이 나눈 대화다.
“호암 이래서는 안 되겠네. 결손이 큰 TV국만 이쪽에 넘겨주려면 라디오서울의 청산차액을 빨리 인수해 주게. 양가(兩家)의 불화설이 장안에 퍼지고 있으니 창피하고 모처럼 손을 댄 방송사업이 저 모양이니 또한 창피하네. TV국까지 할 생각에서라면 마저 인수하게. 양가에서 태어난 우리 손자의 장래를 생각해서일세.”
묵묵부답이던 이병철은 이렇게 나왔다. “그대로 같이 해보지?”
구인회가 답했다. “자네가 같이하자는 제안은 내가 거절하겠네. 자네가 다하게. 자네 생각대로 말일세.”
말이 없던 이병철은 현관까지 구인회를 배웅하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결정해 주어 고맙네.” 이후 삼성은 금성사에 이어 삼성전자를 만들었다. 금성사의 핵심 기술자들을 빼내기 시작했는데 이때도 구인회는 인내했다. 인화를 위한 인내였다.
#16. 정유업에 도전하다
1967년 2월 20일 전라남도 여수에서 여수공장 기공식이 있었다. 다음은 박정희 대통령과 구인회가 나눈 대화다.
“영남분(구인회)이 오셔서 호남을 개발하게 되셨군요.”
“이렇게 됐으니 아예 호남 사람이 돼버리겠습니다. 앞으로 경전선(慶全線)이 개통되면 영남이고 호남이고가 있겠습니까, 어데.”
“맞습니다. 우리나라 이 좁은 땅에서 지역 가려서 뭘 합니까. 일일생활권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놔야죠.”
“각하께서 그래 안 하고 계십니까.”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구인회 사장을 꼭 ‘선배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7. 나는 경영자 자격이 없지 않나
1968년 구인회 총수가 산하 회사의 사장과 중역을 모아놓고 고려대 경영학과 조익순 교수를 불러 세미나를 열었다. 조 교수는 “독창력이 없으면 기업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구 총수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지금 럭키그룹의 회장 자리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도 내 아이디어 가지고 해본 적이 없는데요? 크림통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자고 한 것은 내 동생 태회의 생각이고 금성사를 세워서 전자공업을 해야 됩니다, 한 것은 저기 앉아 있는 윤욱현 상무의 아이디어고, 석유시대가 올 것이니 호남정유를 세우자고 한 것도 내 동생 평회가 끌어온 이야기니 나는 아무것도 독창한 것이 없으니까 기업가 될 자격이 없는 셈 아닙니까?”
이에 조 교수가 말했다. “그 말씀은 그럴싸합니다만 참모들의 아이디어를 정확하게 받아들여서 즉각 실천에 옮겼다는 것도 사실인즉 창작이며 독창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구 회장께서는 과히 실망 마시고 계속 분투해 주시기 바랍니다.”
#18. 거인의 퇴장과 長子 승계의 확립
구인회 총수는 1969년 12월 30일 뇌관종양으로 사망했다. 그룹 총수 자리가 비자 세간에서는 승계를 둘러싸고 잡음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구 총수가 사망하기 직전,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의료진의 판정이 나오자 첫째 동생 철회가 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형의 큰아들 자경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19. 공장을 집으로 삼다
2대 회장 구자경은 원래 교사를 하다 가업에 뛰어들게 된다. 부산 범일동의 아파트 공장 시절, 공장을 밤낮으로 지킨 두 사람이 있다. 구자경 회장과 허준구의 형인 허학구(許學九)였다. 두 사람은 공장에서 자고 공장에서 일하며 자나 깨나 공장 생활이 전부였다. 그들은 한국 최초의 플라스틱 인젝션에 누구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익히고 기술을 몸에 배게 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다다미방에서 미군 군용 슬리핑 백에서 지내며 하루걸러 숙직을 했다. 아침 7시 반이면 어김없이 아버지 구인회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누구 왔나” “배당대로 줬나” “누구는 어떻더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까다롭다는 사람이 나오면 구인회는 말했다. “그 꽤 까다롭다는 사람, 푸대접 말아라. 머지않아 우리 상품을 많이 소화할 사람이다.”
#20. 구자경 회장과 구본무 회장의 업적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故 구본무 회장. 구자경 명예회장은 아들에게 LG그룹을 물려준 후 천안 수향농장으로 낙향했다.
한국경제사학회는 2대 회장 구자경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안정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둘째, 기업을 공개하고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셋째, 석유화학공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1925년생인 구 회장은 지금도 생존해 있다.
그 뒤를 이은 3대 구본무 회장이 최근 아까운 나이로 별세했다. 그와 관련된 보도는 많았지만 인간 구본무를 보여주는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고(故) 구본무 회장은 어린 시절 진주의 조부모 집을 오가며 자랐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물 동냥 왔다가 소년 구본무와 마주쳤다. 스님은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허, 저기 돈 보따리가 굴러다니네.” 부자들로 넘쳐나는 재계에서도 그의 얼굴상은 으뜸으로 쳐줬다. 허영만의 만화 《꼴》에서도 돈이 따라붙는 만석꾼 관상으로 등장한다. 스님의 관상풀이대로 구 회장은 평생을 돈 보따리를 끌어안고 살았지만 겸손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다. 무조건 20분 전엔 약속 장소에 나가는 습관이 유명했다.
음식점 종업원에겐 만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여주곤 했다. 골프장에 가면 직접 깃대를 잡고 공을 찾아다니며 캐디를 도와주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옳은 일을 한 의인(義人)이 나타나면 개인 재산을 털어 도와주었다. LG 의인상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선대 회장들처럼 유교적 가풍(家風)을 이어받았다. 10년 전 금융위기 때 그가 내린 지시가 화제였다.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휴대폰 사업이 거액 적자를 냈을 때도 LG전자는 감원 없이 버텼다. 덕분에 그의 회장 취임 후엔 노사분규가 거의 사라졌다.
그는 평생 책을 딱 한 권 기획해 펴냈다. 《한국의 새》라는 조류 도감이다. 그의 탐조(探鳥) 취미는 유명했다. 여의도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틈만 나면 한강변 철새들을 관찰했다. 새를 통해 그는 바람에 순응해 하늘을 날듯 순리를 좇는 삶의 방식으로 일관했다. 남과 다툴 일을 만들지 않았고 그 흔한 비리나 구설수 한 번 없었다.
아직도 생존해 있는 구자경 회장과 고 구본무 회장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이 고 김대중 대통령이다. IMF 때 강제 ‘빅딜’로 반도체 사업을 빼앗기던 날 밤 구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痛飮)했다고 한다. 이런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거쳐 구광모 4대 회장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3) 세계 최고의 화장품 기업을 일군 아모레퍼시픽 徐成煥–徐慶培
2대
“개성상인 어머니는 화장품 사업의 문을 활짝 열었으며 그 아들 서성환은 화장품업계의 황제가 된 후 우리 茶를 되살렸고 손자 서경배는 세계의 여성들을 매혹시켰다”
⊙ 제주도와 전남 월출산 차밭은 프랑스 와인로드에 못지않은 名勝
⊙ ‘女中君子’ 윤독정은 화장품 자가 제조로 개성 상권 장악
⊙ 소년 시절부터 어머니 도운 서성환은 강제 징집과 6·25 거치면서도 태평양을 장악하겠다는 雄志를 잃지 않았다
⊙ 임원들의 반대에도 끊어진 한국 차문화의 명맥 되살린 진정한 농업왕
⊙ 공장에 제 집처럼 지낸 아들 서경배는 ‘현장 중시 경영’
⊙ 미술·음악·건축에 조예 깊은 ‘다빈치 형’ 기업가
⊙ 손에서 책 놓지 않고 직원들에게도 일일이 책 선물… “모든 것은 책 속에 있다”
⊙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 가장 좋아해… “세계 여성의 핸드백 속에 우리 립스틱을 넣자”는 포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사진=조선일보DB
차(茶)가 처음 들어온 곳은 경상남도 하동이다. 하동 쌍계사 입구에 ‘차 시배지(始培地)라는 표지가 있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로 알려진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가는 길이 온통 차밭이다. 지리산 산비탈에 융단처럼 깔린 차밭을 한 줄기 산상(山上) 도로에서 바라보는 광경이 장관(壯觀)이다. 프랑스 보르드의 ‘와인로드’ 못지않은 ‘티(Tea) 로드’가 여기 숨어 있다.
전라남도에도 초대형 차밭이 두 군데 있다. 보성(寶城)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 강진(康津) 가는 월출산 아래다. 강진 근처 영암에 가면 근육질의 울퉁불퉁한 월출산(月出山)이 떡 버티고 있다. 월출산 오르는 길은 천황사 코스가 유명하며 일본에 논어를 전했다는 백제 왕인 박사의 고향인 도갑사 코스가 있으며 경포대 코스라는 곳도 있다.
경포대(鏡布臺)는 강원도 강릉의 경포대(鏡浦臺)와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월출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모습이 무명 베를 길게 늘어뜨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여름철에는 천혜의 피서지다. 이 경포대 쪽 매표소 왼편을 바라보노라면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것이다. 주변이 온통 차밭이고 초대형 선풍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故 서성환 회장.
이 월출산 경포대 차밭은 한국 현대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거인(巨人)이 직접 그린 거대한 스케치다. 고 서성환(徐成煥·1924~2003)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다. 그는 1924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성장했다. 초창기 한국 기업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데 하필이면 개성(開城)에서 성장해 한국 기업사에 유명한 ‘개성상인’의 대표라 하겠다.
그의 호가 ‘장원(粧源)’이다. ‘장’은 꾸민다는 뜻이다. ‘원’은 근본이라는 뜻이다. 호의 뜻만 봐도 그가 이제는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화장품 재벌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임을 알 수 있겠다. 서성환 창업주는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 창업주의 가족은 1930년에 개성으로 이사갔다. 서성환이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다. 그가 살던 곳은 개성시 동현동으로 서울 가는 길목이었다. 여기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어머니 윤독정씨였다. 윤씨는 잡화를 취급하다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개성은 인삼의 고장이었다. 당연히 주민들의 소득이 높았으니 여성들이 몸단장에 남달리 신경을 썼다.
비상한 머리와 남다른 사업감각을 갖춰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불렸던 윤씨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아 재미를 보자 1932년부터 민간에서 내려오던 미안수(美顔水)를 손수 만들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는데 여기 소년 서성환은 ‘심부름꾼’으로 가세했다.
윤씨는 아예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사업이 본격화되자 서성환도 바빠졌다. 그는 아침에 도시락 세 개를 자전거에 싣고 일을 시작했다. 해 뜨기 전에 개성에서 출발해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 오는 일을 한 것이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는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자전거로 화장품을 팔았다.
판매를 하며 그는 유통에 눈을 떴다. 10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전거로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와 글리세린과 향료, 빈 병을 사서 다시 개성으로 가져갔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 백화점’에 입점했다. 백화점에 코너를 개설해 자기 화장품뿐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까지 위탁판매했다.
심부름부터 시작해 판매, 유통까지 익힌 서성환은 마침내 화장품 제조법까지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가열 정도, 가성소다의 비율에 따른 미묘한 차이까지 익힌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스물한 살이던 1944년 강제징용된 것이다. 천운(天運)이 있었는지, 일제가 망하면서 서성환은 1년 반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개성으로 돌아온 서성환은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바꿨다. 태평양만큼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雄志)가 그 이름 속에 숨어 있다. 서성환은 1947년 서울 회현동으로 이사왔다. 모조품과 위조품이 판치던 시절이었으나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값에 팔 수 있다”며 품질을 강조했다.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이 태평양 1호 제품이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하던 차에 6·25가 터졌다. 그는 피란하면서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갔다. 화장품업계는 ‘원료확보=고급제품’이란 등식이 성립할 때여서 원료만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전쟁은 누구에겐 기회가 된다는 말이 있다. 광복 직후와 달리 미군이 들어오면서 질 좋은 원료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관건은 판매조직이었는데 서성환은 생산과 판매를 분리했다. 이러면 생산파트는 연구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는데 마침 ‘대박제품’이 탄생했다. ‘ABC포마드’다. ABC포마드는, 돼지기름이 원료여서 바르면 뻣뻣하고 광택도 안 날 뿐 아니라 머리를 감아도 끈적거리는 다른 제품과 달리 식물성 피마자기름을 써 광택도 뛰어나고 세척도 편했다.
서 창업주는 여기에 일본제 고급 향료까지 배합해 경쟁제품을 압도했다. 서성환은 1954년 환도(還都) 때 후암동으로 왔다가 1956년 한강로로 회사를 옮겼다. 우리 기업사에서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전자왕(電子王)’,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건설왕(建設王)’이라면 서 창업주는 ‘농업왕(農業王)’ ‘미학(美學)의 제왕’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용산 구사옥에서 서 창업주는 일본 시세이도(資生堂)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구용섭을 초대 연구실장으로 기용했다. 그는 정부 파견 연구원으로 독일 유학을 한 뒤 프랑스 코티(Coty)사와 기술제휴를 해 그 유명한 ‘코티분’을 생산하는 것으로 회사에 보답한다.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할 때 서성환은 향수로 유명한 프로방스 남부 도시 그라스를 방문했다.
이것은 그의 일생을 바꾼 여행이 됐다. 향수의 원료가 되는 식물을 재배하는 모습에 서성환은 감명받아 죽을 때까지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이 훗날 강진과 제주도에 초대형 차밭을 만든 계기가 됐다. 화장품산업의 기반을 다진 서성환이 차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제주도 농장에서 남국(南國)에서나 자란다는 바나나 재배에 성공한 무렵이라고 한다.
/故 서성환 창업주가 다원을 개발할 때의 사진들이다.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담긴 차 대접을 받으면서 서성환의 머릿속에서는 “왜 우리에게는 그런 문화가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한 것은 선덕왕 때인데 《삼국사기》 흥덕왕 3년, 즉 서기 828년에 이런 기록이 등장한다.
〈이해 1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케 했더니 당의 문종은 일행을 인덕전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져오니 임금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 있었으나 이때 이르러 성행하게 됐다.〉
차 문화는 고려시대 들어 더 융성해졌다. 안타깝게도 상류층이 즐겼던 고려의 차 문화는 농민들을 괴롭히는 몹쓸 식물이었다. 조선 건국 후 차 문화는 탄압받았다. 차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나갔고 불교와 관련 있던 차 문화가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녹차가 재배된 것은 오자키라는 일본인이 광주 무등산 자락에 만든 무등다원이 최초다.
1940년 ㈜간사이페인트가 보성에 다원을 조성했는데 이것이 1957년 대한다업으로 바뀐다. 서성환이 차 재배를 시작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그는 한국제다 서양원 대표를 만나 “차를 해 보고 싶은데 중역들이 싫어해서…”라며 “개인재산으로 해 보고 싶으니 아이디어를 달라”고 부탁했다. 훗날 서양원 대표는 “서성환 회장은 차 농가의 은인이고 희망이었다”고 회고했다.
/월출산 경포대 국립공원 입구쪽에 있는 차밭이다. 설록차가 여기서 생산된다
서성환은 월출산 부근과 제주도 도순·서광지역을 사업 부지로 정했다. 1980년 제주도 서귀포 도순의 2만5000평 대지에서 개간이 시작됐다. 도순은 땅이 돌투성이로 소문난 악지(惡地)였지만 눈물겨운 노력 끝에 차밭을 일구는 데 성공한다. 서성환이 월출산을 택한 것은 다산과 초의선사의 숨결이 남아 있는 강진·해남이 차 문화의 본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출산 밑 월남리 백운동은 한국 최초로 제품명을 갖고 생산한 녹차 ‘백운 옥판차’와 ‘금릉 원산차’가 제조된 곳이다. 당시 일부 월출산 인근 주민들은 서성환의 차밭 개간을 땅 투기로 오해했지만 설득 끝에 이해를 받아 냈고 지금의 차밭이 만들어진 것이다. 서성환의 일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18만평에 달하는 제주도 한남다원 개간사(開墾史)다.
한남다원은 1995년 1차로 4만평, 1997년 2차로 9만평 등 단계적으로 개간됐는데 경영진이 오너에게 제동을 걸었다. “투자는 엄청난데 수익은 초라하다”는 논리를 앞세운 경영진은 “외국에서 원료를 들여오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창업주를 압박했다. 서성환이 “외국보다 우위에 있는 다원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아무리 오너라고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결국 2년간 개간이 중단됐는데 서성환은 훗날 “경영진의 반대 때문에 사업을 중단한 게 천추의 한이 된다”고 한탄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서성환 전 회장이 만든 설록차는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고 세계 명차대회에서 이름을 날렸다. 서성환 전 회장은 2003년 1월 9일 타계했다. 그는 고향 개성에서 지척인 경기도 벽제에 잠들어 있다.
고 서성환 창업주는 2남4녀를 남겼다. 네 딸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장남 서영배, 차남 서경배(徐慶培)가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서영배는 태평양개발 회장이며 서경배가 아모레퍼시픽 회장이다. 서경배 회장이 아모레퍼시픽을 물려받은 것은 IMF 직전 과감한 구조조정을 해 태평양그룹이 외환위기를 무탈하게 빠져나온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론에는 서경배 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능가하는 부자라는 등의 기사가 여러 차례 보도됐는데 의외로 언론과 본격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그의 인생과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최근 출간되긴 했는데 채 1시간도 안 돼 독파했다. 다음은 서경배 회장의 삶을 15가지 에피소드로 정리해 본 것이다.
# 서경배가 가장 좋아하는 말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이 말은 미국 소설가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 국내에서는 《갈매기 조나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번역된 바 있는 작은 소설책에 나온다.
順天休命(순리를 따라서 자신의 삶을 즐긴다.)
美化人生(누군가 묻는다면 내가 받은 하늘의 명은 사람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型 인간
/서울 용산에 새로 지은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그는 매우 다재다능하며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첫째, 그의 취미는 프라모델 만들기다. 둘째, 대단한 독서가이며 주변에 책 선물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셋째, 음악과 미술과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다. 중학교 시절부터 LP판을 수집했으며 그래서인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안목이 높다. 뒷골목 헌책방 순례를 자주 했고 한때는 “경영인이 안 됐으면 미술평론가가 됐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한 바 있다. 용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그런 그의 다방면에 걸친 관심의 소산이다.
# 서경배의 소탈한 생활습관
그의 삶을 다룬 책에는 중국 출장을 갔을 때 호텔 음식에 질린 일행을 보고 그가 거리의 싸구려 음식점에서 아침식사를 한 장면이나 집에서 손수 라면을 끓여 가족과 함께 담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 그의 소박한 단면을 보여주려는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
# 서경배의 배움에 대한 집념
서경배 회장은 출장갈 때마다 현지에 대한 역사를 철저하게 공부한다.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국 출장가기 전) 점심식사 때 동양사학과 교수는 가방에서 논문집을 꺼내 모두에게 나눠줬다, 일반 책 두께 정도의 분량이었다. 제목은 ‘병자호란과 천연두’. 이들은 청나라를 공부하기 위해 칭다오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되어 있었고 이 자리는 여행 전 예비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다 읽기 어려우시겠지만 저희가 이번에 가는 곳을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몇몇은 혀를 내둘렀고 서경배와 몇몇은 반겼다.
# 서경배가 보는 와인과 녹차
/우리나라의 차밭은 가꾸기에 따라 프랑스의 와인로드 못지않은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
“아버지(서성환 창업주)께서 녹차 사업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길래 와인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녹차를 공부해 보니까 와인산업하고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하다 보니 (와인에 대한 지식이)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차 문화는 아버지께서 반드시 복원하고 싶어하신 격조 있는 문화였어요. 일본의 차 문화가 사실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건데 그들은 다듬고 가꿔서 문화로 만들었잖아요.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 차 문화를 잘 가꿔서 보급하고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우리나라 차 문화와 부흥이 그분의 숙제였죠.”
“녹차사업을 시작한 지 스무 해쯤 지난 1997년에야 사업이 흑자로 전환되었어요. 4년 뒤에는 오설록 티 뮤지엄을 오픈했고 제주 서광다원에 차 전시관이 완공되었을 때는 아버지도 저도 뭉클했어요.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차 문화를 접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그곳이 바로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프랑스 보르도처럼 그렇게 차 산업도 자연스럽게 확장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프랑스 보르도가 와인을 제조하고 와이너리 관광을 통해 서비스 산업도 육성해 시너지를 내고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죠.”
# 서경배의 空間과 예술에 대한 어록
/미국 샌디에이고 솔크연구소.
“공간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생각 아래 연구원들이 조금 더 창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짓고 싶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경기도 용인시 기흥 아모레퍼시픽 제2연구동 ‘미지움’ 완공식에서)
“(미국에 안식년 휴가를 떠나는 지인 교수에게 샌디에이고 솔크연구소를 꼭 방문하라고 권하며) 네 맞아요. 그 솔크박사 연구소요. 연구소라고 해서 놀라셨죠? 하하. 수도원처럼 사색하기 좋은 곳이에요. 거기 가면 물길이 하나 있을 거예요. 해질 무렵에 그 물길이 시작하는 곳에 앉아 보세요. 앉으면 바로 바다가 보일 거예요. 노을이 드리워지는 바다야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감동 그 자체예요. 저는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할 때 그곳에 갔었어요. 처음에는 그 풍광에 감동했는데 이내 마음의 고요가 생기더라고요. 그 순간에 그 모습을 보려고 반나절 내내 그곳에 있었는데 참 잘했다 싶었지요. 공간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감동과 평온을 주던지.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단순히 작품을 모아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드는 공간이 되어야 해. 조금 더 살아 있는 공간,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창조한 동양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주는 그런 미술관이면 어떨까? 일반 미술관처럼 매번 전시 주제를 바꾸자. 그럼 사람들이 한 번 들러 관람하고서 다시 안 가는 곳이 아니라 매번 기대하는 곳이 될 거야. 그러려면 언제나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 마치 광장처럼! 예술이라는 게 살아온 시간을 목격하는 일이잖아. 사람들이 건조한 일상에 감성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지하1층 미술관을 건립하면서)
“우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건물, 공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그런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용산 신사옥 건설 때 임원회의에서. 서 회장은 법적으로 30층까지 지을 수 있었지만 설계 응모작 가운데 가장 낮은 21층 사옥안을 택했다. 많은 임원들은 이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고층 빌딩을 지어 임대 등으로 돈을 벌 기회를 내던졌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서경배의 현장 철학
‘태평양종합산업’, 지금의 ‘퍼시픽글라스’의 장항공장 건설 프로젝트가 서성환 창업주가 서경배에게 처음으로 맡긴 프로젝트였다. 그는 공장이 준공되기까지 1년8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다. 현장이 곧 숙소였다. 인부들과 함께 주말 밤에도 불을 켜 놓고 이 공장을 지었다. 공장이 준공된 후에는 까만 머리가 새치로 빼곡해졌을 만큼 그는 프로젝트 내내 긴장했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서성환 회장도 무리하는 아들을 보며 너무 힘든 일을 맡겼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회사가 힘들던 시기에 입사한 서경배의 시작은 다른 2세 경영자처럼 로맨틱하지 않았다. 서경배는 장항공장에서 시작해 경영관리실, 기획조정실, 재경본부 등 회사의 곳곳에서 업무를 하면서 자칫하면 망하겠다는 얘기가 오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온갖 궂은 일, 힘든 일을 몸소 겪었다. 그 덕에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쌓고 큰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
# 서경배의 꿈
“전 세계 사람들 핸드백 속에 우리 립스틱이 하나씩 있다면 진짜 좋을 것 같지 않아요?”(경기도 용인 신갈연구소 방문 자리에서 임원들과 환담하며)
# 서경배의 화장품에 대한 定義
“화장품은 문화제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화장품은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가장 쉽게 누릴 수 있는 ‘스몰 럭셔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의 경제력이 어떤 단계에 있는지 봐야 합니다. 직접 부딪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보일 거예요.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봅시다. 우리가 마음을 열면 길도 활짝 열립니다.”
# 서경배의 ‘이니스프리’와 제주도
이니스프리(Innisfree)는 아모레퍼시픽에서 출시된 화장품 브랜드다. 상호명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이라는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브랜드 리뉴얼 작업을 할 때 직원들은 그리스 산토리니 섬을 염두에 뒀다. ‘휴식의 섬’이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서경배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신비롭고 동경할 만한 곳, 이니스프리처럼 깨끗한 이미지를 담은 곳으로는 그리스 산토리니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합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게 상상 속의 섬, 휴식의 섬일수록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의 섬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면 어떨까요? 상상 속의 섬이 지상으로 떨어진 게 제주도가 되는 거죠. 이니스프리도 브랜드가 되고 제주도도 브랜드가 되는 겁니다. 제주도에서 나오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자연 원료들이 신비로운 섬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원료가 되는 거고요. 제주도의 좋은 이야기를 하면 이니스프리가 좋아지고 이니스프리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잘 알려지면 제주도도 전 세계에 더 많이 알려지는 거죠. 모두에게 특별한 섬이 되는 거예요.”
# 서경배와 無窮花
“무궁화를 연구해 봅시다. 힘이 있는 꽃이니 분명 뭔가 있을 거예요.”
“사람들한테 어떤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장미나 프리지어, 튤립을 말하죠. 벚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인데 국화다운 대접을 너무 못 받는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사람들은 무궁화에 벌레가 많이 있다고 싫어하는데 무궁화를 잘 몰라서 그런 거예요. 한여름에도 100일 동안 5000송이는 거뜬히 피워 낸대요. 역시 그런 강인한 생명력이 있어서인지 화장품으로도 제격이더라고요.”
# 서경배와 장떡
아모레퍼시픽 구내식당에서는 매년 1월 장떡을 내놓는다고 한다. 서성환 창업주가 기업을 일굴 때의 초심(初心)을 이 장떡을 먹으며 직원들이 되새긴다.
# 서경배의 해외수출전략
1994년 서성환 창업주가 서경배를 불러 이야기했다. “프랑스 사업이 계속 적자다. 네가 한번 맡아서 해결해 봐라.”
엉겁결에 사업을 넘겨받은 그는 바로 프랑스로 갔다. 가장 먼저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판매처를 방문했다. 그리고 약국 귀퉁이 선반에 내팽개치듯 쌓여 있는 태평양화학의 제품 ‘SOON’을 보았다.
“아니 왜?”
서경배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수입상의 말에 따라 피부가 민감한 프랑스인에게 맞게 저자극성 화장품을 수출했고 그들이 발음하기 쉽게 제품명도 순정에서 ‘SOON’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제품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SOON’의 프랑스 사업을 전면 철수했다. 모든 제품을 회수하고 반품처리까지 깨끗하게 마쳤다. 총 50억원의 손해를 봤다. 하지만 그는 분명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다른 나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진짜 제대로 된 조사가 필요해. 그들의 삶과 마음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돼.”
프랑스 사업에서 잃은 50억원은 더 큰 값어치로 돌아왔다. 그날의 일은 뿌리 깊은 교훈이 되었고 10년 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라네즈’라는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하였다. ‘더 철저히, 더 열심히 시장조사를 해야 해. 문화, 제도, 경제수준 등 모든 것을 다각도로 보고 직접 현장에 나가서 몸소 느껴야 돼.’
# 서경배의 ‘사람論’
“거북선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 나대용 장군이에요. 그분이 태종 때 만들었던 거북선을 다시 만들자고 제안했고 이순신은 그를 조선 최고의 선박기술자로 크게 아껴서 거북선을 만드는 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줬다고 합니다. ‘사람’이 해낸 거죠. 회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결국 회사의 경쟁력은 사람에게 있더라고요.”
“(서성환) 선대 회장님 때 코티분 개발한 이야기를 아세요? 당시 굉장히 혁신적인 제품이었잖아요. 제품 개발이 가능했던 것이 화장품을 제분하는 에어스푼을 도입했기 때문이거든요. 당시에 화장품 선진국인 유럽의 생산시설이나 원료 정보 등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께서 연구실장님을 독일로 유학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거죠. 좋은 인재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배움의 기회를 주어야 해요. 그래야 함께 성장하는 거죠.”
“(신사옥 2층에 어린이집을 만들기로 결정한 후) 결혼한 직장인의 최대 고민이 육아잖아요. 육아 때문에 항상 전전긍긍하고 결국 경력이 단절되고 심지어 아이 갖는 걸 피하고. 우리 직원들만큼은 편하게 마음 놓고 일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면 여성인력 활용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서경배 회장은 스키를 타다 다쳐 병원에 1주일간 입원했을 때 직원들의 인사카드 600장을 통째로 암기했다고 한다. 퇴원 후 그가 회의 자리에서 만난 직원의 이름을 부르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 서경배의 독서論
“모든 것은 책 속에 있어요. 많은 사람이 책 속에 있는 이야기는 누구나 하는 이야기, 뻔한 이야기라며 책 밖에 있는 것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책 속에 있는 대로만 해도 참 잘할 수 있거든요. 딴거 보지 말고 책을 보면 돼요. 책을 보면서 생각하고 질문을 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요. 가장 큰 지혜와 답은 책 속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