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2/ 2015.08.25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 한국기업史 명장면 10 -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기업의 역사2/
2015.08.25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경제의 열린 통로 구로공단이 없었다면....
구로공단은 가난에 찌들어 살던 우리 국민이 인간답게 살도록 만들어준 번영의 통로였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삶의 가치를 높인다. 구로공단은 일이 없던 시절에 일자리를 제공해준 기회의 땅이었다. 더 나은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준 가난으로부터의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열린공간이었다.
구로공단의 역사적 의미
지금은 구로공단은 없다. 더 이상 구로공단으로 불리지 않고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을 변경했다. 성격도 과거 제조업 중심에서 벤처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우리는 경제성장을 이룬 성공한 국가다. 우리의 경제 발전 역사 속에서 그 뿌리가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면 바로 '구로공단’에 있다. 산업발전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농업국가에서 산업공업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당시 80%에 해당하는 국민들이 농업에 종사했었다. 말이 농업이지 실질적으로 생업이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들이 산업 현장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구로 공단이었다. 당시에 구로공단은 기회의 땅이자 새로운 삶을 제공하는 터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67$의 최빈국에 속해 있었는데 제조업 형태의 생산현장에서 새로운 노동방식으로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선진국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우리나라처럼 유휴 노동력이 많고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국가에서는 섬유, 봉재, 가공 등을 중심으로 보통 산업이 시작된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3~6개월 정도의 견습과 수습만 거치면 바로 노동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분야다. 그런 노동을 위한 현장을 제공한 것이 바로 구로공단이며, 당시 박정희 정부는 수출산업단지를 만들어 그 효율성을 높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기술을 축적해 나갔다.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산업의 기술자로 역량을 키웠으며, 제조업 강국의 길을 걸었다.
수출산업단지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정부가 수출을 중심 목표로 하는 공업단지를 조성한 일은 그 자체로 시장에 친화적인 결정이었다. 국제 시장에 파트너로서 참여하고 국제적 분업 사회에 편입해가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정부주도의 경제활동도 시장친화적이고 국제시장의 개방화에 부합한다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정부가 시장에 순응하고, 시장의 요구에 부흥한다면 성과는 크다. 국제 분업에 부합하도록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기업이 해외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터전을 제공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4마리의 용을 비롯한 후발 개도국들은 자유무역에 동참하여 수출 및 개방을 통해 성장한 나라들이다. 후진국이 내수 시장만으로 크게 성장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세계 경제와 맞닥뜨리는 개방과 그 격차를 빨리 쫓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개방화를 받아들이는 국가에게는 국제 사회와의 격차는 오히려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더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실례로 아프리카의 경우, 국제사회와의 생산성 및 사회 격차가 더 크다는 점에서 성장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20%정도의 성장률을 20년째 이어오고 있는 나라도 있다. 이러한 면을 고려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개방화를 통해 국가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한 뛰어난 리더였고, 세계적으로도 그 위대함을 인정받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에 성공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핵심 이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이나 대만의 경우 예외적으로 성공한 경우이고, 그런 계획을 세운 대부분의 나라들은 실패했다. 이 계획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얼마나 시장 친화적으로 개혁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재화가 제공될 수 있는 시장경제의 발판을 마련했느냐가 중요하다. 5개년 계획을 통해서 전략적으로 자원을 얼마나 활용했느냐의 문제는 '시장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개방화의 측면에서 수출산업단지라는 것은 적절하게 해외시장과 국내 노동력이 서로 연결하여 윈윈의 성과를 내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경제는 수출을 늘리면서 세계 시장과 교류를 하게 되었고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했다.
산업의 역군으로써 '공순이’들은 어떻게 조명되는가
구로공단에는 당시 젊은 여공들이 중심이 되어 생산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해 '20살 이하의 아이들이 공부를 해야지 무슨 공장에 가서 일을 해?’라면서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경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일이다. 시대적 여건은 그랬다. 당시 많은 섬유 공장들은 공장 옆에 기숙사 및 학교를 두어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도록 했다. 못사는 나라에서 생계 이전에 교육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풍요로운 교육은 잘 살게 된 결과이다. 교육도 나라의 경제적 상황이 개선되어야 질적으로 개선 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산업이 발전하고 교육시스템이 마련되고 그에 따라 그들도 고등교육을 받게 된다. 따라서 지금의 관점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로공단 근로자들은 야간에 교육을 받으며 지식에 대한 열정을 해소했다. 우리 경제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내는 그들의 열정이 꽃을 피우고, 그들이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더 큰 성취를 이루었다.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은 사람들은 지금 중산층이 되어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구로공단은 당시 기회의 땅이었다. 농촌을 벗어나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지금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여기며 노동하기 위해 오는 많은 외국인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내부에 이런 기회의 땅을 만들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기회의 땅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 노동을 저임금의 장시간 근로라며 노동을 착취했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시각도 존재한다. 의문스러운 것은 그들은 개성공단을 같은 논리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북한의 노동자들은 우리 노동자에 비해 상당히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올바른 시각은 무엇일까. 노동시장에서 공급과 수요를 따져보면 임금이 생산성과 어느 정도 비례하여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생산성에 비해서도 그렇게 낮은 임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찾기 어려운 좋은 일자리였다. 비슷한 논리가 있다. 제3세계에 있는 어린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면 안 된다며 노동현장을 폐쇄하게 된다면 그들은 소중한 일자리를 놓치게 되어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나와 몸을 팔기도 하는 극단적 상황에 다다를 수도 있다. 가난한 나라가 어린이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제성장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구로공단도 당시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전전긍긍하며 오히려 더욱 열악한 상황에서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착취 현장’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했으면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삶의 현장을 제공해 준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우리는 힘들었던 시기 독일로 파견 나가 힘들게 노동을 했던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렇다면 국제시장 근로자와 구로공단 근로자가 어떻게 다른가? 동일하다! 한마디로 국제시장에 편입된 근로자의 역할을 한 것은 외국 시장에 노동을 제공한 것이고 구로공단은 해외 수요자를 향한 생산을 위한 국내 시장에 노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다시 말해 두 경우 모두 국제 시장의 노동 수요에 부합해서 노동을 제공한 것이고 그러한 것들은 우리나라 경제에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해 주었다.
국가가 계속 번성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노동자들이 독일에 팔려 나간 사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기는 했지만 이는 지금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더 많은 노동자들이 해외 시장에 참여하는 것이 국제시장 원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현재는 과거보다 양질의 일자리에 우리 노동자들이 팔려간다. 류현진 선수도 그렇고 추신수 선수도 국제 시장에 참여한 것이다. 그들은 몇 년간 소득으로 천억원 대의 몸값을 받고 있다. 그런데 '팔린다’는 표현보다는 '교류’를 한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물론 스포츠선수들 중심의 노동 수출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서비스업 분야 등에서 국제화된 시장에 나아가야 한다. 물건뿐만이 아닌 문화, 서비스 등을 활발히 교류해야 우리나라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구로공단 관련해서 노동운동적 사고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노동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에 대해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도 여전히 반세계화에 대한 시각이 존재한다.
구로공단은 세계 시장과 접속하는 하나의 해방구, 탈출구 역할을 했으며 그러한 연결통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것을 세계와 교류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근로자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했고 그들이 성공한 만큼 대한민국은 번성했다. 그들은 개인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선배로써 삶의 귀감이 될 수 있다. 민간경제가 더욱 활성화되면서 나라가 큰다는 것은 그런 과정이다. 국가는 세계 시장과 교류할 수 있는 터를 제공하고 국민 개개인은 그 기반 위에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런 개인의 성공이 곧 나라의 성공이다.
현재 우리 정부가 할 일은 과거 구로공단이 한 것처럼 세계시장과의 연결통로를 확충하는 일이다. 세계시장에서 떨어져 있는 분야에는 분명 문제덩어리가 있다. 그 괴리를 만들고 있는 칸막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세계 시장과 더욱 활발히 교류할 수 있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 개개인이 성공의 삶을 갈 수 있도록 개방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 바로 미래로 나아가는 일이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조선일보
09-10 쓰레기통서 장미? 전세계 비아냥 딛고… 풀밭서 조선소 신화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70돌 맞아 책낸 신동식 해사기술회장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은 “진수회의 역사가 곧 한국 조선산업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국내 조선(造船)산업의 주역이라고들 하죠? 그 말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 동문들도 조선업 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해 왔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우리 동문의 삶이 곧 한국 조선업의 역사지요.”
9일 만난 신동식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83)은 자부심에 가득 차 이렇게 말했다. 정 전 회장이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을 설득했다는 것은 신화 같은 역사다. 하지만 신 회장은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동문이라는 밑거름이 없었다면 한국이 지금 세계적인 조선 강국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 학과 동창회 이름은 ‘진수회’다. 새로 만든 배를 물에 띄울 때 치르는 진수식에서 비롯됐다. 진수회가 학과 창립 70주년을 맞아 최근 ‘진수회 7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출간했다. 현재 26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위원장으로 다음 주 출판기념회를 앞둔 신 회장은 동문들이 김연아보다 자랑스럽다고 했다. 진수회 회원들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에서 주요 보직을 맡아 한국 조선업을 이끌고 있다. 신 회장 본인이 현역 최고령 조선인(造船人) 중 한 명이다. 그가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에 입학한 건 1951년. 부산으로 피란 간 후 그는 부두에서 탱크 대포 등을 실은 미군 수송선 뱃짐을 점검하는 일을 했다. 산더미만 한 배를 매일 바라보며 ‘바다를 정복하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교육 환경은 열악했다. 교수도, 번듯한 교재도 없었다. 졸업 후 스웨덴으로 가 현지 조선소에 취직했다. 현장은 혹독했다. 기능공 양성소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꼬박 5개월을 강행군했다. 설계도 보는 법, 철판을 자르고 붙이는 법 등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고생은 빛을 발했다. 그는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미국선급협회 등 국제기구로부터 한국 최초의 검사관으로 선발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외국에 있던 그를 ‘호출’했다. 당시 국내 조선업 상황은 아주 열악했다. 기술 고문으로 방문한 부산의 대한조선공사 조선소에는 풀이 허리까지 자라 있었고 거미줄이 무성했다. 직원들은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해 고철을 쌀로 바꿔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는 총체적인 산업계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예상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국행을 택했다.
얼마 뒤 그는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돌아왔다. 해사(海事)부문을 담당하게 된 그는 ‘한국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대형 선박을 만들 자본도 없는 상황. 그의 계획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됐다. ‘쓰레기통에선 장미가 피어나지 않는다’란 냉소적인 외신까지 나왔다.
그래도 그는 “인구가 증가하면 그만큼 해상 유통량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정교한 거대 선박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득해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신 회장은 “국가 차원의 추진력 그리고 동문들의 땀방울이 있었기에 한국 조선업이 30∼40년 만에 독일 영국 일본을 제치고 조선업계 제1의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늙어 죽기 전까지 열심히 뛰어다니며 조선업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나같이 열정적인 늙은이도 한 사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최지연 기자 lima@donga.com
2015-08-16 한국기업史 명장면 10 동아일보
폐허에 뿌린 땀방울…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꾼 혁신…
《 ‘아시아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기적(Asia‘s Latest Miracle).’
2010년 11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한국의 경제 성장을 보도하며 이 같은 제목을 뽑았다. 1945년 광복 이후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던 나라가 70년 만에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의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이 성장을 이끈 주역은 기업이었다. 광복 직후 맨주먹으로 시작해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 1980년대의 정치 불안정, 1990년대의 외환위기 등 안팎의 시련을 극복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한국 기업들의 ‘70년 명장면’을 꼽았다. 》
○ 광복, 전쟁, 그리고 성장
현재는 세계 제일의 전자기업으로 도약한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정미소와 양조장, 무역을 하는 삼성상회를 운영했다.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피란지 부산에서 고철과 탄피를 수출하고 의약품과 생필품을 수입하는 무역에 뛰어들어 큰 수익을 올렸다. 이어 제당, 모직 등 ‘제조업’이라는 새 길을 택했다.
창업주의 뒤를 이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인물이다.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며 질(質) 중심의 개혁을 주문한 신경영 선언을 가장 역사적인 장면으로 꼽고 있다. 그 후 삼성은 본격적으로 세계적 기업과 경쟁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고향 진주에서 포목상과 식료품점을 하다 부산에서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차려 화장품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화장품은 용기 뚜껑이 잘 깨져 반품 소동이 자주 있었다. 깨지지 않는 소재를 찾다 플라스틱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995년 ‘LG’ 브랜드 출범 후 지속적 성장을 일궈냈다. 1994년 30조 원대이던 매출은 지난해 5배로 늘어난 150조 원대가 됐다.
GS라는 이름은 한국 기업사에서 2004년 7월에서야 탄생했다. 하지만 그 뿌리는 LG와 함께한다. 락희화학공업사는 구인회 씨와 허만정 씨가 함께 세웠기 때문. 그 후 두 가문의 ‘아름다운 동행’이 60년 가까이 이어졌고 GS가 2005년 LG에서 계열 분리하면서 이별했다. 그 당시 지분 등을 둘러싼 잡음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한편 광복 직후 중국 톈진(天津), 다롄(大連) 등지의 중국 상인들이 일본군이 버리고 간 농산물과 화공약품, 공산품 등을 인천에 가져와 팔았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광복 후 트럭을 한 대 구입해 인천에 ‘한진상사’란 운송 겸 무역회사를 차리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육상과 해상 운송으로 폭을 넓혔다. 급기야 1969년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고 항공운송업에까지 진출하면서 육해공 전방위 물류전문 기업으로 거듭났다.
○ 1970년대 중화학공업 시대를 열다
1960년대가 경공업 시대라면 70년대는 중화학공업의 시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을 결심하고 1971년 11월부터 국산 병기 개발에 나섰다. 이때 성장한 기업이 한화다. 이에 앞서 한화그룹의 창업주 김종희 회장은 1958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했다. 다이너마이트 국산화는 폐허가 된 국토의 전후 재건사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각종 항만 도로 대교 건설 등에 큰 공헌을 했다.
또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 개발 5대 전략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1970년 포항제철소를 착공했다. 포항제철소 건립으로 대한민국 전체에 좋은 품질의 철강재를 공급하면서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제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현대중공업도 1970년대에 두각을 나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만한 선주를 찾아 나섰다. 조선소 부지로 점찍어둔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 한 장과 5만분의 1 지도, 그리고 영국 ‘스콧 리스고’ 조선소에서 빌린 26만 t급 유조선 도면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리스 선주로부터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그 돈으로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 문제를 해결했다.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 본사에서 ‘애틀랜틱 배런’호 명명식(命名式)이 열렸다.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수주해 온 배로, 국내 조선업계의 상징성을 띤 선박이다.
1967년 12월 정부가 현대에 자동차산업 진출을 허가하면서부터 현대는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다. 그 후 1976년 2월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가 탄생한다. 포니는 해외에까지 수출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세계 5위의 자동차업체로 일어선 현대자동차는 역사적 명장면으로 2010년 현대제철의 당진제철소가 가동된 것을 꼽고 있다. 이 덕분에 현대차는 전 세계 완성차 업체로는 유일하게 철판 생산에서 완성차 생산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룰 수 있었다.
○ 미지의 길, IT에 도전하다
직물과 석유화학을 주업종으로 하던 SK는 정보통신 분야를 차세대 성장사업으로 정했다. 1994년 민영화 대상이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4271억 원에 인수했다.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SK그룹은 “미지의 기술에 도전해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선택한 모험이었고 이를 통해 얻은 자신감이 한국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KT는 원래 당시 체신부의 일부분이었다가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로 정부에서 분리됐다. 1970년대 극심한 전화 적체현상을 보인 유선전화는 80년대 중반 국산 전전자(全電子)교환기 TDX의 개발로 대규모 전화 보급이 가능해지면서 1996년 100명당 전화 보급률 42.7명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하게 됐다. TDX 개발은 당시 미국, 영국 등 통신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10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1>삼성 1993년 신경영 선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로 삼성 임원진들을 긴급 소집해 자신의 신경영 구상을 밝히는 모습. 삼성그룹 제공
“지금부터 내 말을 녹음하세요. 내가 질(質) 경영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게 그 결과입니까? 나는 지금껏 속아 왔습니다. 사장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모이세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설 겁니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서울 비서실로 전화를 건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현 삼성전자 회장)의 불호령에 200여 명의 삼성 수뇌부가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이 회장이 그토록 화가 난 건 삼성 사내방송인 SBC의 한 고발 프로그램을 보고서였다. 방송에는 세탁기 뚜껑이 불량인데도 라인 작업자가 태연하게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대충 조립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에 모인 임직원들 앞에서 이 회장은 작심하고 호통을 쳤다. “세탁기만 저런 게 아니다. VCR(비디오카세트리코더) 불량은 내가 몇 번을 경험했다. TV는 영화 보는 도중에 퓨즈가 나가더라. 불량이 나오면 100명 중 50명은 다시는 사지 않는다. 양이 아닌 질로 가라고 했는데 아직도 여러분은 양을 외치고 있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회장은 1987년 12월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꾸준히 품질 개선을 주문해 왔다.
“모든 제품의 불량은 암이다”라고 지적한 적도 있고 “삼성은 3만 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적인 집단”이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신경영 선언이 나오기 1년여 전인 199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삼성은 1986년 이미 망한 회사”라며 “우리 제품은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아직 멀었다. 2등 정신을 버려야 한다”고 혹독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변화와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15만 명이 넘는 거대한 조직을 단숨에 바꾸긴 쉽지 않았다.
1993년 6월 4일 이 회장은 일본 도쿄(東京) 오쿠라호텔에서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 당시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과 함께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이어지는 밤샘회의를 벌였다. 후쿠다 고문은 당시 삼성 디자인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목한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이 회장에게 전달했다.
도쿄를 떠난 비행기 안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몇 번이고 정독한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순간 보고된 불량 세탁기 고발 프로그램이 그를 다시 한번 격노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그해 8월 초까지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 일본 도쿄로 이동하며 주요 사장단과 국내외 임원, 주재원 등 1800여 명을 대상으로 ‘신경영’ 특강을 이어갔다. 임직원들과 나눈 대화 시간은 350시간, 이를 풀어 쓰면 A4용지 8500장에 이른다. 당시 이사였던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서운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이 회장 말씀을 들을수록 그 위기감이 절절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나부터 바꾸자. 마누라, 자식만 빼놓고 다 한번 바꿔보자”는 말로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성의 신경영 선언은 이후 그룹 전반의 체질을 바꿨다. 문제가 됐던 세탁기 생산라인은 가동을 아예 중단하고 불량 원인을 찾아낸 뒤 재가동시켰다. 이후 삼성전자는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생기면 일단 라인을 정지하고 불량 발생 원인을 해결한 뒤 재가동하는 ‘라인 스톱제’를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1993년 삼성전자의 불량률은 제품별로 전년 대비 많게는 50%까지 줄었다.
“지난 20년간 양에서 질로 대전환을 이루었듯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합니다. …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초일류 기업을 향한 첫발을 내딛고 다시 한 번 힘차게 나아갑시다.”
2013년 6월 7일 신경영 선언 20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 회장이 전 임직원에게 보낸 메시지다. 삼성의 신경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2>현대車 2010년 일관제철소 설립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이 2010년 1월 5일 충남 당진의 현대제철 1고로의 화입(火入)식에 참석해 고로 아래쪽의 풍구(風口)로 횃불을 밀어 넣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하나, 둘, 셋∼.”
2010년 1월 5일 충남 당진시 송악읍 북부산업로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현대제철 임직원의 구호에 맞춰 고로 아래쪽 풍구(風口)로 횃불을 밀어 넣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와 축포가 터졌다. 정 회장의 얼굴에는 희비가 교차하는 듯한 엷은 미소가 번졌다.
이날 행사는 현대제철이 철광석과 코크스가 들어 있는 고로 하단부에 처음 불씨를 넣는 화입(火入)식. 본격적으로 고로의 가동을 알리는 날이자 현대차그룹이 산업의 기초인 고로(高爐) 쇳물부터 제조업의 대표적 제품인 자동차까지 모두 생산하는 세계 유일의 회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철광석 등 원재료를 녹인 쇳물로 각종 철강제품 전체를 만들 수 있는 일관제철소의 건설은 정 회장의 아버지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때부터 이어져온 염원이자 부자(父子)의 꿈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과거 제철소 건설에 나섰다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제2의 제철소를 만든다고 하니까 다들 정신 나간 생각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조선소를 만들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 뒤처져 있다고 출발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아무 일도 못 하게 된다.” 정 명예회장은 평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의지를 다져 나갔다.
2대에 걸친 숙원 사업은 칠순을 넘긴 정 회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서초구 헌릉로 현대차그룹 본사와 당진제철소를 쉴 새 없이 오가면서 결국 이뤄냈다.
일관제철소 건설과 함께 현대차그룹이 꼽는 역사적인 순간은 2011년 현대건설 인수에 성공했을 때다.
같은 해 4월 정 회장은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 15층 회장 집무실에 첫발을 들이면서 감회가 남달랐다. 정 회장은 형제 간의 경영권 갈등으로 그룹이 쪼개지면서 수십 년간 출근해온 계동 사옥에 한동안 발길을 끊었었기 때문이다. 1983년 5월 준공된 계동 사옥을 두고 정 명예회장은 “현대는 이곳에서 세계 경제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계동 사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현대가의 정신이 그대로 깃든 곳이다. 당시 정 회장을 지켜본 한 임원은 “집무실에 들어가던 정 회장의 눈빛이 흔들려 보는 이들도 마음이 짠했다”고 회상했다.
현대차그룹은 일관제철소 건설을 마무리한 데 이어 현대건설을 성공적으로 인수하면서 자동차와 철강, 건설로 대표되는 그룹의 3대 핵심 성장축을 완성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제철을 통해 철판을 공급받는다.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은 공장을 건설하고 현대모비스는 자동차 부품을 만든다. 현대제철과 현대모비스 등으로부터 강판과 부품을 공급받은 현대·기아차는 완성차를 생산한다. 생산된 완성차는 현대글로비스가 운반한다. 또 자동차 할부나 중고차 판매는 현대캐피탈과 현대글로비스가 맡고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러한 수직계열화는 전 세계 어느 자동차 업체도 갖추지 못한 것”이라며 “현대차그룹은 안정적인 원가구조를 구축함과 동시에 생산효율을 높여 수익성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대·기아차가 BMW 등 프리미엄 자동차 업체에 견줄 수 있는 높은 영업이익률을 올릴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현대차그룹은 친환경 자원순환형 사업구조도 갖춰 나가고 있다. 현대제철이 생산한 자동차 강판을 자동차 생산에 사용하고 수명을 다한 자동차 차체는 자동차 리사이클링 센터에서 폐차 처리된다. 폐처리된 철강은 현대제철이 생산하는 철근과 H형강 등 건설용 제품 원료로 재활용돼 현대건설이 활용하고 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4 >LG, 1995년 그룹명 변경
▲1995년 1월 3일 구본무 당시 럭키금성그룹 부회장(현 LG그룹 회장·오른쪽)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새로이 바뀐 그룹 명칭인 ‘LG’가 적힌 사기(社旗)를 구자경 당시 회장(현 명예회장)에게서 넘겨받고 있다. LG그룹 제공
“격변의 시대를 맞아 부담을 무릅쓰고 내린 중대한 결단입니다.”
1995년 1월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 LG트윈타워 대강당에서 열린 럭키금성그룹 시무식. 구자경 당시 럭키금성 회장(현 LG그룹 명예회장)의 발표에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구 명예회장은 이날 그룹 명칭을 ‘LG’로 바꾼다고 전격 선포했다. 그룹 명칭이 바뀌면서 ㈜럭키는 LG화학으로, 금성사는 LG전자로, 럭키금성상사는 LG상사로 바뀌는 등 계열사의 이름도 일제히 바뀌게 됐다. 한국 재계 순위(현재 기준) 4위의 LG그룹이 탄생한 순간이다.
LG는 1947년 구인회 창업주가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돼 1983년 럭키금성으로 그룹 명칭을 변경한 이후 12년간 유지해 왔다. LG라는 이름을 내걸면서 화학분야의 ‘럭키’와 전기·전자·통신 분야의 ‘금성사’를 중심으로 분산돼 있던 그룹 정체성이 하나로 통합됐다. 단순한 그룹 명칭 변경을 넘어 LG가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을 가속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LG 고위 관계자는 “당시 그룹 안팎에서 ‘굳이 잘 알려진 그룹명을 바꿔야 하는가’라는 반대가 많았지만, 당시 부회장이던 구본무 현 LG그룹 회장이 뚝심 있게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이미 구 명예회장은 구 회장에게 경영을 승계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룹 명칭 변경의 결정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승계는 LG 브랜드 출범 후 약 한 달이 지난 2월 22일 공식화됐다. 구 명예회장은 이날 “다가올 21세기에는 젊고 의욕적인 세대가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며 퇴임의 이유를 밝혔다. 구 명예회장의 은퇴는 아직 경영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물러나기로 과감히 결단을 내림으로써 경영 승계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한국 10대 그룹 중 첫 3세 승계이자 ‘무고(無故) 승계(사망 전 승계)’로 주목받았다.
구 명예회장은 이임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혁신은 종착역이 없는 여정이며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다.” 구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취임한 구본무 회장은 이런 선대 회장의 조언을 받들 듯 취임 이후 과감한 사업 구조 개편에 나섰다. 주력 사업인 전자와 화학·부문에 집중 육성하면서 동시에 디스플레이와 2차전지, 통신·서비스 사업에 전격 진출했다. 2003년에는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재계 관계자는 “LG는 주요 그룹 중 대기업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는 순환출자 고리를 가장 먼저 끊었다”며 “사업자회사가 오로지 본연의 자기 사업에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선도적으로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1995년 1월 LG 브랜드 출범 후 20년간 LG그룹의 매출은 30조 원대에서 150조 원 규모로 5배로 커졌다. 특히 해외 매출이 10조 원 규모에서 100조 원을 넘어서며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임직원 수 역시 10만 명에서 22만 명 규모로 증가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뒀다.
2003년 LS그룹, 2005년 GS그룹 등 여러 계열사가 LG그룹에서 분리돼 나갔음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특히 LG와 GS의 분리는 반세기 넘게 3대에 걸쳐 지속되어 온 구(具)씨와 허(許)씨 양가 간 화합과 신뢰의 동업 관계가 ‘아름다운 이별’로 유종의 미를 거둔 것으로 기록됐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5>GS, 2005년 LG와 계열분리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2005년 3월 31일 서울 강남구 논현로 GS타워에서 열린 GS경영이념 및 CI 선포식에서 그룹 사기(社旗)를 흔들고 있다. GS그룹 제공
2005년 3월 31일 서울 강남구 논현로 GS타워에서 열린 GS그룹 출범식.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GS의 경영이념은 고객과 함께 내일을 꿈꾸며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며 새로운 시작을 선포했다. 이후 낯익은 인물이 축사에 나섰다. 직전까지 한 식구였던 구본무 LG그룹 회장이었다. 구 회장은 이 자리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LG와 GS는 한 가족으로 지내며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함께 이겨냈다”며 “1등 기업을 향한 좋은 동반자가 돼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허 회장에게 ‘비구상화’ 한 점을 선물했다. 한 달 전 ‘LG브랜드 출범 10주년’을 맞아 허 회장이 풍경화를 선물한 데 대한 답례였다. 재계에서는 GS그룹이 이후 10년간 순탄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LG그룹과의 ‘아름다운 이별’에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구(具)씨와 허(許)씨 집안의 동업은 1947년 LG그룹 모체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창립부터 시작됐다. 1세대 구인회-허만정, 2세대 구자경-허준구, 3세대 구본무-허창수로 이어지면서 별다른 분쟁 없이 기업을 이끌었다. 2004년 7월 1일 GS홀딩스(현 ㈜GS)가 설립되면서 57년간 이어진 동행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GS홀딩스는 이튿날 이사회를 열어 허창수 LG건설 회장, 허동수 LG칼텍스정유 회장, 서경석 LG투자증권 사장 등 3명을 사내이사로 선임했다. 2004년 초 GS홀딩스 설립 태스크포스(TF)의 일원이었던 GS그룹 고위 관계자는 “수십 개 계열사와 주주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푸는 게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잡음도 나오지 않아 오로지 출범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두 집안이 반세기 이상 동업을 유지하면서 3대째에 이르러서는 100명이 넘는 후손들이 각 계열사 지분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완벽한 계열 분리를 위해서는 사업영역에 따라 구씨와 허씨 일가 간 복잡한 지분 교환이 이뤄져야 했다. 계열사 간 지분 정리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2012년 11월 LG상사가 GS리테일 지분을 모두 처분하면서 그룹 출범 7년 만에 모두 마무리됐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계열분리 직후 “새로운 사업을 하더라도 LG와 사업영역이 겹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LG그룹 역시 GS그룹의 주력사업 중 하나인 건설부문 진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GS그룹은 GS칼텍스, GS리테일, GS홈쇼핑, GS건설 등 15개 계열사로 출발했다. 2004년 기준 자산 규모 19조 원, 매출액 23조 원이었다. GS그룹은 이후 10년간 적극적인 인수합병(M&A)과 공격적 투자에 나섰다. 10년 만인 지난해 자산 58조 원, 매출액 63조 원으로 성장했다. 또 매출액 대비 수출 비중도 같은 기간 30%에서 54%까지 올라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 됐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6>포스코 1970년 제철소 착공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현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에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포스코그룹 제공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포스코)가 설립된 지 7개월여 지난 1968년 11월 12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경북 영일만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초가집을 밀어내고 잔해를 태우면서 생긴 연기와 모래먼지 속에서 박 전 대통령은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박태준 당시 사장은 제철소를 기필코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5개국 8개 회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은 “경제성이 떨어진다”며 약속한 1억 달러(약 1190억 원)를 빌려주지 않겠다고 등을 돌렸다. 결국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가 포항제철소에 투입됐다. 박 명예회장은 당시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우향우해 저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우향우 정신’은 지금까지도 포스코의 도전정신으로 내려오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철강 산업은 경제가 자립하기 위한 필수 산업이라고 인식했다. 이렇게 제철소 건설은 양질의 철강재로 국가에 기여한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 의지로 시작됐다.
당시 포항제철은 각종 민원에 시달렸다. 박 명예회장은 민원에 대한 압력 배제, 설비 공급업자 선정에 대한 재량권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전 대통령은 후일 ‘종이 마패’로 불린 이 메모에 친필 사인을 해 민원을 차단해줬다.
마침내 1970년 4월 1일. 영일만에서 연산 103만 t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착공식이 열렸다. 1973년 6월 9일엔 국내 최초의 용광로를 준공하며 쇳물을 뽑아냈고, 7월 3일엔 1기 설비를 준공했다. 통상 4, 5년 걸리는 제철소를 포항제철은 3년 3개월 만에 건설했다. 제철소 설립을 통해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는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1978년 포항제철은 제2제철소 사업자로 선정됐다. 포항제철 임직원들은 전남 광양만에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 험한 파도, 매서운 바람과 싸우며 바다를 메우고 설비를 올렸다. 광양제철소는 1992년 10월 2일 1140만 t 규모 일관제철소로 준공됐다.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제철소다. 광양제철소 준공을 계기로 포항제철소는 고급강 위주의 다품종 소량 생산에 집중하고, 광양제철소는 열연·냉연제품 위주의 소품종 대량생산에 주력할 수 있게 됐다.
영일만, 광양만의 기적으로 포스코는 지난해 연결 기준 연매출 65조 원, 연간 조강 생산량 세계 5위(4142만 t) 철강사로 성장했다.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7>한진, 1969년 대한항공공사 인수
▲1969년 3월 6일 김포공항에서 열린 한진그룹의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당시 대한항공공사가 보유한 비행기는 거의 수명이 다하거나 임차한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가 전부였다. 한진그룹 제공
1968년 여름,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은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적자투성이였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무렵 조 회장은 정부 당국자의 같은 부탁을 세 차례에 걸쳐 거절한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기업인으로서 당연한 처사였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동아시아와 동남아 지역 11개 항공사 중 11위를 하는 항공사였다. 가지고 있던 항공기는 8대. 하지만 대부분 좌석 수 30∼40석 규모의 프로펠러기로, 좌석을 다 합해도 요즘 점보기 한 대에 해당하는 400석도 채 안 되는 규모였다.
더 큰 문제는 재정 상황. 누적 적자는 차치하고 금융 채무만 당시 27억여 원인 회사였다. 실제 정부는 항공공사를 두 차례 공매에 부쳤지만 당시 기업가치가 자본금의 절반 수준으로 평가돼 응찰자가 아무도 없었다. 조 회장의 측근들은 정부의 인수 요구에 대해 “한진이 베트남에서 힘들게 번 돈을 밑 빠진 독에 부으라는 것”이라며 거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 회장도 이에 수긍하며 다시 거절할 생각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앞서 조 회장은 1961년 ‘한국항공’을 세웠다가 5·16 후 혁명 정부의 방침에 따라 사업을 접어야 했던 쓰라린 경험도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뒤 조 회장과 독대했다. 그리고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 꼭 들어 달라며 말을 이었다. 박 대통령은 “재임 중에 별도의 전용기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며 “월남에서 휴가를 나오는 우리 장병들이 외국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장병들 사기도 문제려니와 귀중한 외화가 낭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회장이 계속 묵묵부답으로 있자 박 대통령은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에는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냐”며 재차 요청했다. 대통령이 국가의 체면까지 거론하며 요청하자 조 회장은 결국 항공공사 인수를 약속한다. 조 회장은 이 자리에서 “수임 사항으로 알고 맡겠다”고 했다. 경제성보다는 국익을 위한 임무로 생각한 것이다.
회사로 돌아와 반발하는 중역들에게 조 회장은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설득했다. 또 당시 해운을 먼저 육성하려던 계획을 바꿔 항공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1969년 3월 6일,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이 열렸다.
극동지역의 협소한 분단국가라는 지정학적 약점으로 모두가 한국의 민항 사업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조 회장은 과감하게 프로펠러기가 아닌 최신 제트기를 서둘러 도입하며 이름에서 ‘공사’를 뗀 대한항공의 체질을 바꿔 나갔다. 올해 창립 46주년을 맞은 대한항공은 현재 보유 항공기 154대, 임직원 수 2만870여 명으로 수송능력 기준 전 세계 14위 대형 항공사로 성장했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8·끝> 현대重, 1972년 조선소 착공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주한 각국 대사, 울산 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이날 기공식은 우리나라 조선업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뛰어들었음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그룹 제공
“현대가 조선사업에 성공하면 내가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
1968년 현대중공업이 조선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자 한 정부 고위 관료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1년 7월 조선사업계획서를 완성했지만, 여전히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 한국 조선업계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1%에도 못 미쳤다.
조선소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외자 확보였다. 현대는 당시 영국 최고의 은행이던 바클레이은행과 4300만 달러(약 510억 원)에 이르는 차관 도입을 협의했다. 하지만 바클레이 측은 현대의 조선 능력과 기술수준이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1971년 9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수소문 끝에 바클레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인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롱바텀 회장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회장은 재빨리 지갑에서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펴보였다.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있었는데, 산업화가 늦어져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이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오.”
롱바텀 회장은 현대건설 등을 직접 둘러본 뒤 추천서를 써서 바클레이에 건넸다. 바클레이가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이번엔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ECGD는 선박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증명을 갖고 와야 승인하겠다고 통보했다.
즉시 선주를 찾아 나섰지만, 선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울산 미포만의 사진 한 장과 5만 분의 1 지도, 26만 t 유조선 도면 한 장이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 ‘선 엔터프라이즈’의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계약을 체결했다. 대형 유조선 2척 수주에 성공하며 ECGD의 승인을 받았다.
1972년 3월 23일 오후 2시,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정 회장과 주한 각국 대사, 울산 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정 회장은 이날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工期) 내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밝혔다.
2년여 뒤인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이 TV로 생중계됐다. 국내외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고 세계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소 기공식을 가진 지 11년 만인 1983년, 건조량을 기준으로 조선부문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동아일보 100년 맞이 기획/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2019-12-09
<1> 위기 때마다 등장한 리더십
세계는 못할거라 했지만… ‘반도체-철강-포니차’ 보란듯 해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청진에 가자. 어디 가서 어떤 노동을 해도 지금보다야 못하겠는가.”(정주영 동아일보 에세이 ‘나의 기업 나의 인생’ 중)
1931년 강원 통천군 시골마을의 배고픈 열여섯 살 소년은 구장집이 받아보는 동아일보에 실린 구인광고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드릴 땔감 값을 1, 2전씩 빼돌려 가출 자금을 모았다. 첫 번째 가출은 아버지에게 덜미 잡혀 실패로 끝났다. 세 번째 가출도 동아일보에 난 부기학원 광고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훔쳐 서울로 야반도주해 부기학원을 다녔다. 몇 달 뒤 아버지가 찾아와 “종손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하소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번째 가출은 성공이었다. 서울 쌀가게의 배달원 정주영은 특유의 바지런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주인과 손님의 신용을 얻었다. 주인이 쌀가게를 넘겨준 1937년, 22세의 청년 정주영은 서울 신당동 일대 ‘경일상회’ 사장이 됐다. 이 쌀가게는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을 탄생시킨 사업 밑천이 됐다.
○ 기업가 정신으로 일군 한국 기업 100년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100개를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상위 20개 가운데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장면만 6개였다. ‘한국 최초의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1976년·3위), ‘현대차 설립’(1967년·6위), ‘현대중공업 1호선 진수 및 인도’(1974년·8위) 등이 해당된다.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등장한 신문, 철도, 산업화 등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자동차·건설 강국을 일궈낸 정 회장의 삶 자체가 한국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위 중 삼성과 관련된 장면도 6개다. 1위인 ‘이병철 도쿄 선언’(1983년)을 비롯해 ‘삼성전자 설립’(1969년·4위), ‘이건희 신경영선언’(1993년·7위) 등이다. 포항제철 건설과 관련된 ‘포항제철 첫 쇳물 생산’(1973년·2위), ‘박태준의 하와이 구상’(1969년·15위)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미국에서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하와이에서 목 놓아 울다가 대일청구권 자금 활용 아이디어를 떠올려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그 장면이다.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정부가 먼저 중화학산업 육성책을 내놓았고 기업이 이에 발맞춰 경제성장을 이뤘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불가능한 과제를 가능케 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들의 출현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19년 첫 근대식 주식회사로 꼽히는 경성방직(경방)이 등장한 이후 창업가 정신으로 뭉친 기업인들이 농업 한국을 경공업 한국으로, 이어 중화학공업 한국, 첨단 전자산업 한국으로 퀀텀점프시키는 주역이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국이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세계는 비웃었다. 투자나 기술 자문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대차 설립이 1967년인 것은 마침 미국 포드가 1966년 한국에 진출할 목적으로 사업 파트너를 찾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사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포드가 기술 이전이 가능한 합작사 설립에는 발을 빼자 현대차는 독자 생존밖에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포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자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창립요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1968년 세계은행이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종합제철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 공업 개발을 우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 5년 만의 쾌거였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한국에 전자산업을 뿌리내린 혁신적 기업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TV, 세탁기, 냉장고는 모두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나왔다. 한국인의 일상을 바꾼 화장품(럭키크림), 하이타이(최초의 합성세제) 등도 LG의 작품이었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기업가 정신이 오늘의 한국 일궈내” ▼
○ 한국을 넘어 세계로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선언’은 한국이 ‘품질 경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한 획기적 순간이다. 시작은 일상에서 비롯됐다. 삼성 사내방송인 SBC가 한 프로그램에서 세탁기 뚜껑이 불량인데도 라인 작업자가 태연하게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대충 끼워 맞추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 독일로 출장길에 올랐던 이 회장은 기내에서 이 소식을 듣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비서실로 전화해 200여 명의 삼성 수뇌부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아내와 자식만 빼놓고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명언이 이때 나왔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이 일본 견제에 나서면서 ‘엔고’ 시대가 열렸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값이 비싸지면서 1990년대 초반 한국 상품은 잘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량품을 칼로 깎아 억지 제품을 만드는 수준의 품질로는 일류기업 근처에도 못 간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 학장은 “1990년대 삼성의 혁신적 경영방침, 조직개편 등은 많은 다른 기업에 영향을 줬다. 품질경영 선언 역시 재계로 확산돼 한국 기업의 체질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00년 이후 글로벌 정상에 오르는 한국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2000년 한국 조선산업이 수주량, 건조량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휩쓸었다. 2006년 삼성전자 TV는 소니를 이기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1999년 미국에서 실시한 파격적인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아 자동차 5대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1986년 ‘엑셀’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지 13년 만이었다.
○ 이동통신·인터넷·뉴 키즈의 등장
1990년대 인터넷과 이동통신, 386 기업인의 등장은 한국 경제의 지형을 또 한 번 바꿨다. 현재 재계 3위인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정부 출범 둘째 해인 1994년 인수했다. 1996년 세계 최초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은 통신강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1995년 한메일이라는 e메일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다음의 등장(19위)과 1999년 네이버 서비스의 시작(12위)은 ‘뉴 키즈’ 기업인 시대를 예고했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는 27세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32세에 회사를 차렸다.
한국 기업사의 주요 명장면 중에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허무하게 사라진 ‘대우 해체’(1998년·10위)도 있다. 세계 경영의 자부심, 외환위기의 아픔, 어떤 기업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장면이었다.
▼ 자문위원 30명, 5개분야 나눠 사건 중요도 평가 ▼
퀀텀점프 100장면 어떻게 뽑았나
동아일보가 내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은 취재팀이 자문위원 30명과 함께 자료 수집, 설문, 분석 등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국 기업사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1차 선정한 후 이를 △한국 기업사 △기술혁신 △거시경제 사건 △인수합병(M&A) △혁신 상품 및 브랜드 등 5가지 분야로 나눠 자문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제·경영학을 비롯한 이공계 분야 대학교수, 국책연구소, 경제단체, 전직 관료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은 중요한 장면에 순위를 매겼고 취재팀은 이를 바탕으로 총 100개를 확정했다.
자문위원 명단(30명·가나다순)
△ 권오경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한국공학한림원 회장 △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겸 대외부총장 △ 김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 김승우 순천향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경영부총장 △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나정효 충남대 전기공학과 교수 △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서승원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 서영경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이니셔티브(SGI) 원장 △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 신민수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 양현봉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 △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 기획실장 △ 장영재 KAIST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 △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 △ 정희철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장 △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 최원식 맥킨지 한국사무소 대표 △ 하영원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 한상만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
김현수 kimhs@donga.com·염희진·황태호 기자
<2> 기술강국 넘어선 세계최초 제품들
“日보다 먼저 개발하라” 가보지 않은 길에서 이룬 ‘반도체 독립’
“일본보다 먼저 개발하라.”
1990년 4월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장(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은 당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주름잡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한 번도 일본을 앞선 적이 없었다. 권 부장이 개발팀을 막 꾸리기 시작할 때 히타치가 이미 시제품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완제품을 놓고 ‘분초를 다투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5개월 뒤인 1992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삼성전자는 집적회로의 전체 셀에 완전하게 작동하는 64Mb(메가비트) D램 시제품을 자체 개발했다고 25일 발표했다. 아직 선진국의 반도체 생산 업체들도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삼성전자 측은 설명했다.”
반도체 산업 주도권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왔음을 세계에 알린 뉴스였다. 한국이 아시아 변방 국가에서 국내총생산(GDP) 12위 경제대국이 된 바탕에는 이처럼 기업 100년사 곳곳에 포진한 결정적 기술혁신의 순간들이 있었다.
○ 드라마 같은 반도체·엔진 개발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선정한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주요 기술혁신’ 부문 상위 10위에는 64Mb D램 세계 최초 개발(1위)을 포함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과 관련한 장면 3개가 들어있다. 1983년에 있었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도쿄 선언’ 이후 6개월 만에 삼성전자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b(킬로비트) D램을 개발했다. 이후 256kb, 1Mb, 4Mb D램을 거쳐 1990년에 개발된 16Mb D램은 일본 도시바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후 64Mb D램에서 마침내 세계 최초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국내 처음 독자 개발한 자동차 엔진인 현대자동차 알파엔진 개발(1991년·3위)도 반도체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1984년 4월 제너럴모터스(GM)의 선임연구원이던 이현순 전 현대차 부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집요한 설득 끝에 현대차로 출근하면서 시작됐다. 전 직장인 GM의 당시 연구 인력은 약 2만5000명. 첫 출근일에 정 회장은 이 전 부회장에게 5명의 직원을 소개하면서 말했다. “자, 엔진 개발을 시작하게.”
그때부터 현대차는 경기 용인시 마북리에 연구소를 짓고 인력을 뽑으며 엔진 개발에 나섰다.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특히 현대차에 기술을 제공하던 일본 미쓰비시의 견제가 심했다. 알파엔진을 세상에 내놓은 다음 날 누적된 피로 때문에 이 전 부회장은 입이 돌아가는 구안와사가 왔고, 이 병은 두 달이나 지속됐다.
○ 가보지 않은 길에서 이뤄낸 혁신
1992년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제2이동통신의 단일 표준화 기술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을 택한 건 모험이었다. 당시 CDMA는 아무도 쓰지 않는, 퀄컴이라는 작은 미국 벤처기업의 기술일 뿐이었다.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적재적소에 기지국을 설치하고 단말기도 개발해야 하는데, 어떤 한국 기업도 경험이 없었다.
상용화 작업을 주도한 서정욱 전 SK텔레콤 사장은 “위험 부담이 큰 선택을 필요로 할 때가 많아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종종 되새겼다”고 했다. 1996년 1월 1일. “일반전화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네요”라는 최초 가입자 정은섭 씨의 소감이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 성공(2위)을 알렸다.
1982년 5월에는 ‘삐익 삐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서울대 연구실과 경북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사이 초당 150글자가 오가는 한국 최초의 인터넷 통신(6위)이 이뤄졌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였다. 당시 연구팀을 이끌었던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는 “가난한 나라의 비가 새는 서울대 연구실에서 이뤄진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대만과 싱가포르 등에서 1992년쯤 인터넷 연구가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프로젝트 시작이 늦었을 경우 한국의 인터넷 개발 역시 1990년 이후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 결정적 순간들, 산업대국 시금석 됐다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이후 삼성전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메모리반도체 강자로 자리 잡았다. 1994년 뒤늦게 뛰어든 낸드플래시도 8년 만에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2002년·9위).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성공 DNA’는 한국을 반도체 산업뿐만 아니라 전자산업 대국으로 올라서게 한 주춧돌이 됐다”고 평가했다.
독자 엔진 개발로 자동차 원천기술을 확보한 현대차는 세계 5대 자동차 제조사로 발돋움했다. 현대차에 기술을 주던 미쓰비시는 2005년부터 현대차에 ‘기술료’를 낸다. CDMA 상용화는 올해 ‘세계 최초 5G 상용화’(5위)로 이어지는 ‘통신강국’의 초석을 닦았다. 남보다 빠른 인터넷 통신 개발은 다음, 네이버 등 포털 서비스와 넥슨 ‘바람의 나라’(1996년 출시·19위) 등 온라인 게임 산업을 키워냈다.
▼ 현대차 엔진개발 확인한 미쓰비시 회장… 日 돌아가 “기술 배우러 한국 갈 판” 호통 ▼
이병철 ‘반도체 도쿄선언’ 내놓자… 日 ‘성공못할 5가지 이유’ 보고서
세계 첫 256Mb D램 개발에 침묵
한국 기업들의 기술 혁신에 대한 해외의 시선은 비웃음에서 경계로, 그리고 탄식으로 변해갔다.
1983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도쿄 선언’을 발표한 직후 비웃은 건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했던 미국 인텔만이 아니었다.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기업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을 이유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1992년 64Mb D램 개발을 성공했을 때만 해도 일본은 ‘세계 최초’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도시바도 비슷한 시기에 개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1994년 8월 29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b D램을 개발하자 세계 언론들은 ‘일한 역전’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일본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12년 2월 27일. 일본의 ‘마지막 D램 기업’ 엘피다가 도산했다. 다음 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삼성전자는 시황이 악화했을 때 오히려 대규모 투자로 기술력을 높였지만 일본은 가격 하락을 피하려 투자를 줄였다. 결국 한국에 추월당하고 말았다”는 탄식 섞인 보도를 냈다.
고 구보 도미오 전 미쓰비시자동차 회장과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알파엔진 개발을 둘러싸고 나눈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쓰비시자동차는 현대차에 엔진 기술을 제공하고 있었다. 구보 전 회장은 1985년 정 회장에게 “자동차 엔진은 수많은 엔지니어가 해도 될까 말까”라며 만류했다. 정 회장은 듣지 않았다. 2년 후 다시 만난 그는 알파엔진 개발을 총괄하던 이현순 전 부회장을 일컬으며 “그놈 사표를 받아오면 로열티를 절반으로 깎아주겠다”면서 경계심을 드러냈다. 현대차가 알파엔진 개발을 사실상 완료했던 1989년 한국을 방문해 이를 확인한 구보 전 회장은 일본으로 귀국해 곧바로 아이치현의 연구소로 가서 퇴근중지 명령을 내렸다. 연구원들을 불러 모아 호통을 치며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너희들 지금처럼 설렁설렁 하다가는 곧 기술 배우러 현대차에 가야 할 거다. 정신 차려라.”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3> 국민 일상을 바꾼 ‘혁신템’
“자가용족이라는 새로운 계층 등장”… 마이카 시대 활짝 연 포니
“세상도 변해서 요즘은 시골길을 터덜대며 달리는 마차에 사람이 가득 타는 미풍(美風)을 볼 기회가 드물어졌다. 그 대신 차차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 이른바 ‘마이-카’다. 자가용족이라고 하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동아일보 1977년 10월 6일자 ‘횡설수설’에서)
1976년 현대자동차가 선보인 최초의 독자개발 국산차 포니는 1970년대 말 한국의 거리 풍경을 바꿨다. 출고된 해에만 1만700대가 팔린 포니는 ‘마이카 시대’를 열었다. 포니 출시 전 1975년 1만8000대였던 국내 자동차 시장 규모는 1979년 8만9000대로 급성장했다. 교통체증과 주차난이 신문기사에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포니는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선정한 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주요 혁신상품’ 부문 상위 10위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 일상을 바꾼 ‘혁신템’
동아일보와 자문위원단이 선정한 주요 혁신상품의 공통점은 국민의 일상을 바꿨다는 것이다. 포니처럼 이동수단을 비롯해 의식주 분야에 등장했던 혁신상품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상품 카테고리를 만들어냈고 소비자 일상에 파고들며 생활습관을 바꿨다.
1950년 이후 탄생한 혁신상품 대부분은 전쟁 후 식량난으로 굶주리던 한국사회의 아픔 속에서 탄생했다. 최초의 국산 조미료 ‘미원’(1956년·6위)은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가 광복 후에도 여전히 일본 조미료가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개발했다. 오사카의 한 조미료 공장에 취업한 그는 어깨너머로 제조법을 배운 후 미원을 개발했다. 이후 1956년 국내에서 판매된 미원은 ‘한 꼬집’만으로 감칠맛을 낼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주부들의 필수품이 됐다.
최초의 국산 라면인 ‘삼양라면’(1963년·4위)도 1960년대 초 미군이 먹다 남긴 음식을 한 데 모아 끓인 ‘꿀꿀이죽’이 발단이 됐다. 가난한 노동자가 꿀꿀이죽을 먹으려고 긴 줄을 선 것을 보고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는 식량난의 해결책으로 라면을 떠올렸다. 일본 묘조식품에서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을 내놓았는데 초창기 소비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밥이 주식이던 식습관이 밀가루로 바뀌는 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1965년 보릿고개를 극복하기 위해 ‘혼분식(混粉食) 장려책’을 추진하면서 삼양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식량난 해결의 역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최초의 즉석밥인 ‘햇반’(1996년·9위)은 치밀한 계획 아래 개발됐다. 1989년 CJ제일제당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면서 간편식 선호도가 높아졌고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가 대중화됐다. ‘밥은 직접 해먹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쉽지 않을 거란 우려와 달리 7년간 개발한 끝에 출시된 햇반은 판매한 지 2주 만에 2억5000만 원어치가 팔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전자레인지에 2분만 데우면 완성되는 햇반은 밥을 소비하는 방식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 세계 최초의 혁신
하루에 한 잔씩 마시는 커피의 대중화 시대는 세계 최초로 출시된 커피믹스(1976년·8위)가 열었다. 동서식품이 커피, 크리머, 설탕을 배합해 만든 일회용 커피믹스는 커피를 마시는 시공간을 바꿨다. 휴대와 보관이 간편해진 커피믹스 덕분에 커피는 따뜻한 물과 종이컵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마실 수 있게 됐다.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최원식 맥킨지 한국사무소 대표는 “커피믹스는 세상에 없는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며 커피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며 “여기에 해외로 수출하는 효자 노릇까지 했다”고 평가했다.
LG전자의 의류관리기 스타일러(2011년)도 출시 당시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가전이었다. 세탁소에 주로 맡겼던 양복이나 니트 등을 집에서 새 옷처럼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개념 가정용 의류관리기를 내세우면서 등장한 스타일러는 ‘집 안의 세탁소’로 불리며 실내 가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주차 확인 스탬프에서 영감을 받아 세계 최초로 개발된 아모레퍼시픽의 쿠션 팩트(2008년)는 자외선 차단제와 메이크업베이스, 파운데이션 등을 스펀지 재질에 흡수시킨 멀티 메이크업 제품으로 전 세계 여성들의 화장 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기여했다.
○ 가상공간의 혁신
인터넷 업체 다음커뮤니케이션이 내놨던 ‘한메일 서비스’(1997년·10위)는 ‘인터넷 무주택자에게 주소를 거저 나눠 주는 사업’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획기적이었다. 무료로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전자우편 주소를 제공했고 인터넷만 접속하면 어디서나 메일을 열어 볼 수 있었다. 한메일의 수익은 전자우편물에 집어넣는 인터넷 유료 광고물에서 발생했다. 새로운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가상공간에 등장한 혁신상품의 공통점은 거창한 아이디어가 아닌 생활의 작은 불편을 해결하는 데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iN’ 서비스(2002년·7위)는 소비자의 사소한 궁금증을 해결해줄 방법을 찾다가 시작됐다.
모바일 메신저로 출시된 ‘카카오톡’(2010년·3위)도 무료로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카카오톡은 출시 이후 1년 만에 1000만 명, 이듬해 4000만 명으로 이용자가 늘며 국민 메신저가 됐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4> 한국경제 흔든 위기와 기회
“나라를 새로 건설하자”… 성장기반 닦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무 부처는 경제기획원(EPB)이었지만 초반 설계 작업은 건설부가 맡았다. 당시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이 ‘나라를 적극 건설하자’는 취지의 부처를 임시로 만들어 초기 계획을 짜도록 한 것. ‘한강의 기적’ 이면에는 경제의 틀 자체를 바꾸려 했던 ‘큰 정부’가 있었다.
# 1997년 한국은행 핵심 부서에서 근무했던 A 씨는 외환위기 전까지 정책 및 통화당국이 안이하게 대응한 측면이 있었고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 협의도 잘 몰랐다고 했다. A 씨는 “당시 한국 경제는 여러모로 실력이 부족했다”고 했다. 위기를 계기로 경제의 민낯이 드러난 셈이다.
경제 자문위원 30명은 기업 100년사에 영향을 준 대표 정책으로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꼽고, 최대 사건으로 1997년 외환위기를 들었다. 나라를 새로 건설하려 한 전면적 속도전 덕에 고도성장을 이뤘지만 무리한 차입과 선단식 경영으로 부실이 누적돼 위기를 초래한 과정이 한국 기업의 부침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 민간자본 대신한 ‘큰 정부’의 시장 개입
기간산업 확충을 목표로 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년)부터 안정적 성장기반 정착을 목표로 한 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86년)까지 경제의 주도권은 정부가 쥐고 있었다. 신흥독립국 개발이 붐을 이룬 ‘개발 연대’에 한국이 최대 성공사례가 된 것은 정부의 개입이 적지 않은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정부의 ‘보이는 손’이 시장에 개입한 또 다른 사례가 1972년 8·3 사채동결 조치다. 재산권을 침해한 조치라는 비판이 있지만 그 덕에 기업의 부도를 막고 경제성장률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었다.
1973년 중화학공업 추진 선언으로 한국 경제에 관치(官治) 경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공업의 한계와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 극복, 자주국방을 위해서라면 중화학공업 육성이 필수적이라는 정권의 판단이 있었다. 과잉투자와 비효율의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있는 반면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부문의 경쟁력을 키웠다는 평가도 많다. 양현봉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민간에 자본이 없고 기업가의 의지도 부족한 초창기 정부의 개입이 산업화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정책, 퀀텀점프의 동력
한국 기업이 퀀텀 점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정책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사업 시작 전 여론의 압도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전문가집단은 고속도로를 이용할 여객과 화물이 별로 없을 것으로 봤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의 아우토반을 보고 경부고속도로가 물류 혁신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도로는 국내 지역 간 교류를 늘려 성장과 고용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2012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반대여론을 설득하고 대국민 홍보에 나선 덕이다.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노무현 전 대통령, 2006년 6월 포털 관계자 오찬간담회서)
경제에 부정적이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1993년 전격적으로 실시한 금융실명제는 한국 사회의 투명성을 한 단계 높인 계기였다. 민감한 이슈와 관련해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고 돌파구를 마련하는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 한국 경제 민낯 드러낸 위기
1997년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의 문제점이 노출됐다. 동남아시아에서 위기의 쓰나미가 몰려들면서 한국 대기업집단의 차입경영과 지배구조의 한계가 노출됐고, 그 과정에서 거시금융정책의 한계가 드러났다. 정부는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시장경제가 제 역할을 하도록 구조조정했다. 부실 금융기관 정리와 재벌 간 빅딜 등 성과를 냈지만 노동 유연성과 공공 부문의 효율성이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점에서 미완의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외환위기 이후 9년 만에 닥친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한국 경제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국내에 외국인 비중이 과도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미국발 신용경색의 파도가 국내로 밀려들면서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한국을 빠져나갔다. 이때부터 대외리스크 관리는 경제정책의 핵심 축이 됐다.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정부는 기업의 애로를 해소하고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지원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봤다. 이필상 서울대 초빙교수는 “정부 개입으로 시장기능이 위축되거나 산업발전이 더디게 진행되면 국제 경쟁의 대열에서 뒤처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최혜령 herstory@donga.com / 황태호 기자
<5> ‘위기의식’으로 기회 만든 삼성
실적 호황때도 “우리는 위기” 성찰… 세계1위 도약 디딤돌 됐다
“국가로 보나 삼성그룹으로 보나 보통의 위기가 아닙니다. 정신 안 차리면 구한말과 같은 비참한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1993년 8월 4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6월 ‘신경영 선언’ 두 달 뒤 동아일보 기자와 만났다. 신경영 선언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강도 높은 품질경영 방침을 대내외에 알린 사건이었다. 기자가 “품질경영은 경영의 기본인데 왜 지금 강조하는지”라고 물었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곳이 삼성인데 삼성은 분명히 이류입니다. 3만 명이 만든 물건을 6000명이 하루에 2만 번씩 고치고 다니는 이런 비효율 낭비적 집단은 지구상에 없어요. 이걸 못 고친다면 구멍가게도 안 돼요.”
이 회장은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년)에서 신경영 선언 전 극심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썼다. 위기감이 신경영 선언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불고기를 3인분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식가인 내가 식욕이 떨어져서 하루 한 끼를 간신히 먹을 정도였다. 그해(1992년)에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 퀀텀 점프 기반 된 ‘위기의식’
하지만 임직원들은 이 회장의 위기의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바 ‘3저 호황’ 직후 한국 경제도, 삼성도 상승세였다. 1993년 한국 수출액은 전년 대비 49.0% 늘었고, 삼성전자 매출(개별 기준)도 33.6% 늘었다. 이어지는 반도체 호황으로 1994, 1995년 삼성전자 매출은 연속해서 40% 이상 증가율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이 회장 눈에는 해외 대리점에서 먼지 쌓인 채 굴러다니는 TV, 11.8%에 달하는 휴대전화 불량률이 보였다. 근본적인 품질 경쟁력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지 않으면 언젠가 호황이 끝날 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절박감이 컸다.
반도체 실적에 취한 조직이 변하질 않자 이 회장은 ‘애니콜 화형식’으로 불리는 드라마틱한 조치를 취했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 ‘100% 양품만 만들겠습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고 직원들은 ‘품질은 자존심’이라고 쓴 띠를 둘렀다. 운동장에는 휴대전화, 무선전화기, 팩스 불량품 15만 대, 약 500억 원어치의 제품이 쌓여 있었다. 직원들이 망치로 부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웠다. 이를 지켜보던 임직원 2000여 명 중에는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조직 구석구석까지 위기의식이 퍼지게 된 순간이었다. 직원들 눈빛까지 달라진 삼성은 17년 후인 2012년 마침내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를 차지했다.
삼성 특유의 위기의식은 1997년 말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는 바탕이 됐다. 당시 삼성전자도 자본잠식 위기에 이르는 등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고, 1998년 7월 삼성전자 최고경영진 20여 명은 10시간이 넘는 마라톤회의 끝에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동시에 윤종용 당시 사장을 포함한 참석 임원 모두 사표를 썼다. 구조조정에 실패하면 모두 사임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이듬해 말, 윤 사장은 사임 대신 미국 주간지 비즈니스위크 표지를 장식했다. 삼성이 어떻게 1년 만에 위기 탈출에 성공하고 더욱 강해졌는지 분석하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1999년 삼성전자의 당기순이익(개별 기준)은 전년 대비 10배 뛰었다.
○ 결단을 내릴 땐 과감하게
삼성전자가 2006년 소니를 이기고 마침내 TV 시장 세계 1위에 올랐을 때에도 이 회장은 축포를 터뜨리지 않았다. 당시 삼성 경영진이 일본 언론과 1위를 자부하는 인터뷰를 하자 대로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일본으로부터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자극하면 안 된다며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본 정재계에서 ‘삼성 때리기’ 조짐이 보였다. 삼성 측이 일본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일이 힘을 합쳐 부상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서로 반목할 때가 아니다”라며 설득해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삼성 리더십의 위기의식은 세계 경제 흐름에 대한 집요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때로는 기회를 발견해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86년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반도체 불황 중에 용인 기흥 3라인을 건설하라며 “돈 걱정 말고 서둘러야 한다. ‘미국의 보복’이 생각보다 빨라질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이 창업회장은 일본의 공세에 미국 D램 업체들이 도산하면서 ‘제2의 진주만 공습’이란 말이 나오는 데다 일본 기업이 당시 소련 잠수함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판매한 사건을 신문에서 보고, 미일 무역 마찰을 예상한 것이다. 그 예상은 맞아떨어져 삼성은 3라인 건설을 바탕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이 1987년 4Mb D램 개발 당시 반도체 설계 공법을 결정한 일도 유명하다. 웨이퍼에 쌓느냐(스택형), 웨이퍼를 파느냐(트렌치형)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삼성은 당시 주류가 아닌 스택형을 택하는 모험을 했다. 이 결정은 1992년 삼성이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오르는 디딤돌이 됐다.
▼ 한발 앞선 리더십의 원천은 ‘끊임없는 공부’ ▼
이병철, 美-日 경제전문가 조언 듣고 1년 넘게 연구한 뒤 반도체 진출
이건희 ‘일본 프렌즈’ 등 인맥 탄탄… 글로벌 경제 흐름에도 항상 촉각
삼성 특유의 위기의식과 과감한 의사결정의 바탕은 최고위 경영층이 미국 일본 기술 ‘고문’으로부터 듣고, 공부했기 때문이라는 게 삼성 안팎의 중론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83년 삼성이 반도체에 뛰어든다는 ‘도쿄 선언’ 전 1년 이상 반도체 관련 자료를 모아 연구했다. 반도체 선언에 결정적 요인이 된 것도 일본과 미국 경제 전문가의 조언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이건희의 일본 프렌즈(LJK)’와 같은 글로벌 정재계 인맥을 쌓는 동시에 기술 디자인 품질 전문가를 삼성 고문으로 중용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의 도화선이 된 ‘후쿠다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의 디자인 전문가 후쿠다 다미오 씨는 삼성 고문으로서 삼성의 문제를 조목조목 정리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40년사’에서 1987년 반도체 설계 공법을 결정했을 당시 “사실 나도 100% 확신할 수 없었기에 운이 좋았다 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삼성 안팎의 젊은 엔지니어들의 주장을 신뢰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회장은 글로벌 경제 흐름에도 관심이 높았다. 2003년 신년사에서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의 늪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른바 중진국 트랩에 빠지지 말고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같은 결론을 내기 위해 약 1년 동안 비서진에 주요국 1인당 국민소득 자료를 꾸준히 요구했다고 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로 가는 데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연구한 것이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늘 ‘나는 임원들보다 시간이 있고, 많은 전문가를 안다’고 말했다. 미래의 위기와 기회를 엿보고, 의사결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운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시간이 날 때마다 글로벌 정재계 및 과학계 전문가를 만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올해에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등을 만났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6> ‘품질’로 승부해온 현대차그룹
美도 놀란 ‘10년간 10만마일 무상보증’… 품질경영으로 세계 질주
“카니발을 당장 집으로 가져오세요.”
1999년 3월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기아자동차 임원들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정 회장 자택 마당으로 카니발이 소환된 이유는 잦은 결함 때문이었다. 1998년 출시된 후 ‘제2의 봉고차’로 불리며 반응이 뜨거웠던 미니밴 카니발은 각종 결함으로 리콜 조치가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정 회장은 서울 여의도 기아차 본사의 품질회의실로 임원들을 다시 불렀다. 분필을 손에 쥔 그는 슬라이드 도어 위쪽 창문, 시트 밑, 문틈에 일일이 동그라미를 쳐가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기아차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정 회장의 품질회의는 이 무렵부터 시작됐다.
○ ‘품질은 현장에서 만들어진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 설립 후 최초의 국산차 독자 모델인 ‘포니’를 개발하고 소형차와 중형차 시장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던 배경에는 기회를 포착하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배짱과 뚝심의 DNA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차가 한 단계 더 높은 질적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 회장은 그 부족한 2%를 채울 수 있는 게 ‘품질’이라고 여겼다. 현대차가 오늘날 글로벌 브랜드로 우뚝 선 데는 정 회장의 ‘생산과 품질 향상에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품질경영 철학이 깔려 있다.
품질경영의 토대가 만들어진 결정적 계기는 1998년 9월 미국 시장에 도입한 ‘10년간 10만 마일 무상보증’ 조치였다. 당시 포드와 GM은 3년 3만6000마일, 도요타는 5년 6만 마일을 보장했다.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두고 단기적 시장점유율을 늘리려는 마케팅 무리수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 조치는 미국 소비자의 현대차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승부수로 작용했다. 정 회장은 이후 일주일에 두 차례씩 실무담당자로부터 개선 사항을 직접 보고받았다. 실제 품질이 비약적으로 좋아졌다고 평가받은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정 회장의 품질경영 씨앗이 하루아침에 꽃피지는 못했다. 예기치 않은 결함이나 문제가 발견돼 번번이 발목을 잡자 정 회장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2002년 기아차 오피러스 수출 차량을 손수 시험주행하다 미세한 소음을 발견하자 선적을 40일가량 올스톱 시키고 “엔진의 잡소리를 잡으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런 부단한 노력 끝에 미국 소비자조사업체인 ‘JD파워’ 신차품질조사(일반브랜드 부문)에서 1998년 꼴찌였던 현대차는 2006년 사상 첫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가 8년 만에 품질을 기록적으로 개선한 것은 JD파워가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 한발 앞선 비전 제시의 힘
엑셀, 쏘나타, 그랜저, 제네시스…. 새로운 모델이 하나씩 출시될 때마다 현대차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로서의 밑그림을 하나씩 구체화해 나갔다. 1981년 비밀리에 떨어진 ‘X카 프로젝트’는 그 출발이었다. 1000여 명으로 구성된 개발팀은 3년 만에 시제품을 생산했고 수출에 대비해 캐나다에서 혹한 테스트까지 마쳤다. 이렇게 완성된 X카가 바로 ‘포니엑셀’이다. 1986년 1월 엑셀이란 이름으로 미국에 처음 진출한 후 포니엑셀은 첫해에만 16만8000여 대가 팔렸다. 미국에서도 신기록이었다.
포니엑셀의 성공으로 세계 곳곳에서 한국차가 누비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 됐다. 태국의 시내버스가 현대차 브랜드로 채워졌고 이탈리아 로마에선 피아트를 제치고 엑셀이 순찰차로 활용됐다. 하지만 1990년대 미국의 경기침체와 원화가치 상승 등이 겹치며 가격경쟁력을 잃은 한국차는 수출에 비상이 걸렸다. 싸구려 차라는 이미지도 굳어져 갔다. 이 무렵 구원투수로 등장한 게 1999년 미국에 진출한 EF쏘나타였다. 1999년 2월 동아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구입하던 차가 면모를 일신했다’며 미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를 인용 보도하기도 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발 앞선 비전을 제시해 오던 정 회장은 2000년 신년사에서 ‘글로벌 톱5 메이커’라는 목표를 처음 밝혔다. 1999년 당시 현대·기아차가 213만 대 생산으로 세계 11위를 했으니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현대차는 2010년 포드를 제치고 실제로 글로벌 판매량 5위에 올랐다.
이어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이 선보인 2015년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는 글로벌 브랜드 경쟁력을 높인 또 한 번의 파격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제네시스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 말은 현대차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화 시절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정신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 (현대차에는) 더 많은 자산과 기반이 있습니다. 도전해야 변화하고, 바뀌어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7> 글로벌 SK 이끈 ‘인간중시 경영’
선진 경영원리 기틀된 ‘SKMS’… 잇단 초대형 M&A 성공 이끌어
“설비 경쟁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부터는 ‘경영전쟁’의 시대다.”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1975년 새해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임직원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국내 선진 경영문화의 효시로 꼽히는 ‘SK경영관리체계(SKMS·SK Management System)’가 태동한 순간이다.
이때 시작된 SKMS 정립 프로젝트는 1979년 첫 결실을 거뒀다. 그해 3월 열린 선경(현 SK) 임원 세미나에서 최 선대 회장은 “주먹구구식의 낡은 경영 방법으로는 치열한 경쟁에 대처할 수 없다. 세계 일류 기업이 되려면 경영 관리 수준이 일류가 돼야 한다”며 4년에 걸쳐 마련한 SKMS를 소개했다.
당시는 2차 석유파동으로 모든 기업이 하루하루 버티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 선대 회장은 ‘위기 속에서도 기업은 영구히 존속 발전해야 하며, 그 주체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SKMS에 담았다. 이후 SKMS는 ‘사람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정의되는 ‘수펙스(SUPEX)’ 추구라는 경영 철학으로 이어졌고, 지금까지 40년 동안 그룹 고비의 순간마다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 성공한 대형 인수합병(M&A) SKMS가 기반
1980년 유공 인수는 SK그룹을 중견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결정적 계기였다. 1980년 정부가 유공 민영화 방침을 세우고 시장에 내놓자 삼성, 남방개발 등 쟁쟁한 기업들이 인수전에 참여했다.
선경이 낙점된 것으로 발표되자 “경험도 없는 선경이 공기업의 알맹이만 빼먹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특히 유공 내부 인력의 동요가 심했다. 하지만 최 선대 회장은 파격적 조치로 이런 우려를 잠재웠다. 유공에 투입하는 인력은 사장인 자신과 수석부사장을 포함해 5명 내외로 한정하고, 이권 및 구매 관련 청탁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SK 고위 관계자는 “인수 초기 선경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유공 엘리트 인력을 ‘사업 동지’로 확보하고, 나중에 이들을 그룹 내 요소요소에 배치했다”며 “최 선대 회장의 인간 중시 경영철학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 당시에도 마찬가지다. ‘비효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국영기업을 인수하여 어떻게 민간기업(제2이동통신사)과 경쟁해 이길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최 선대 회장은 당시 최고 통신전문가로 꼽히던 서정욱 박사를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하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서 전 부회장은 1996년 세계 최초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를 시작으로 한국 통신 산업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서 전 부회장은 “최종현 회장에게 하겠다고 보고하면 한 번도 ‘정말로 되는 거냐’라고 묻지 않고 지원했다”고 말했다.
2012년 최태원 SK 회장이 SK하이닉스를 인수할 때도 이런 경영철학은 이어졌다. 2013년 권오철 SK하이닉스 사장의 임기가 끝나자 최 회장은 이 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연구개발(R&D)을 한 박성욱 당시 부사장을 CEO로 발탁해 6년간 재임하도록 하는 등 기존 인력에 전폭적 신뢰를 보냈다.
하영원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M&A 이후 항상 따라붙는 게 기존 조직과 새 기업의 갈등”이라며 “인간 위주의 경영을 원칙으로 못 박은 SKMS가 M&A에 따르는 불확실성을 없애고, 이종 산업들을 흡수해 SK를 중심으로 일체화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 확신 있으면 끝까지 판다
한 번 확신을 가지면 ‘끝’을 보는 SK의 DNA도 그룹의 모태인 석유화학사업부터 바이오사업까지 이어지고 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라고 표현되는 국내 최초의 석유화학사업 수직계열화 작업은 20년 넘게 밀어붙인 결과로 나왔다. 1969년 최종건 창업주가 시작한 국내 최초의 폴리에스터 국산화 작업이 시작점이다. 1973년 회사를 물려받은 최종현 회장은 본격적인 수직계열화에 착수했다. 1978년엔 당시로선 초고도정밀 기술이 필요했던 폴리에스터 필름 생산에 성공했다. 그리고 유공 인수로 정유사업에 진출했고, 북예멘 마리브 유전 인수에 성공(1984년)하며 원유 개발에 뛰어들었다. 1991년 울산콤플렉스 준공으로 원료에서 최종 제품 생산까지 전 공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가 완성됐다.
SK의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으로 떠오른 바이오도 마찬가지다. 최종현 회장은 1993년 당시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던 유공의 화학연구소 산하에 대덕신약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바이오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최태원 회장은 아버지 뜻을 이어 지속 투자를 했지만 처음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가 2008년 출시를 앞두고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이 좌절되는 쓰라림을 맛봤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26년 만인 지난달 SK바이오팜이 독자 개발한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성분명 세노바메이트)가 FDA 판매 허가를 받아냈다. 한국 기업이 해외 기업의 손을 빌리지 않고 신약 후보물질의 발굴부터 FDA 허가까지 독자적으로 이뤄낸 건 처음이다. ‘대를 이은’ 꾸준한 투자가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 “경쟁력 원천은 사람”… 고등교육재단 46년째 지원 ▼
최태원 회장 “올드 비즈니스 탈피”… ‘사회적 가치 추구’ 새 비전 선언
고 최종현 SK 회장은 1980년대 초반 장학퀴즈 500회 특집이 방영될 무렵 임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SK가 그동안 투자한 돈이 얼마냐”고 대뜸 물었다. 1973년 광고주를 찾지 못해 폐지 위기에 놓인 장학퀴즈를 SK는 홀로 후원해오던 터였다. 한 임원이 “150억 원 정도”라고 답하자 최 회장은 “그럼 선경(현 SK)이 번 돈은 얼마냐”고 되물었다. 답을 못 하자 최 회장이 내놓은 대답이 “7조 원”이다.
당시 최 회장은 자신의 셈법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선경이 장학퀴즈를 단독 후원하면서 거둔 기업홍보 효과가 1조∼2조 원, 인재를 키우고 교육한 효과가 5조∼6조 원이다.”
최 회장은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이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고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는 “우리는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는 철학을 꾸준히 강조했다. 장학퀴즈 후원에 이어 1974년에는 세계적인 학자 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3700명에게 유학비와 체재비를 아무 조건 없이 지원했다.
최태원 현 회장은 이런 부친의 의지를 경영 시스템으로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경제·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새로운 SK 원년을 만들자”며 사회적 가치 추구 경영의 본격화를 선언한 것이다. 최 회장은 “SK가 지난 20년간 그룹 이익이 200배 성장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여전히 ‘올드 비즈니스’를 개선하는 수준”이라고 진단한 뒤 사회적 가치를 경영지표에 반영하는 ‘더블보텀라인’을 경영의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다.
이후 SK 전 계열사가 재무적 이익과 함께 사회적 가치 성과를 금액으로 환산해 공개하고 있다. 또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해 인센티브로 환원해 주는 ‘사회성과인센티브’라는 유례없는 모델도 시행 중이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8> 글로벌 LG 이끈 ‘인화경영’
고객중심과 만난 기술혁신… 세탁기-냉장고, 국민 삶을 바꾸다
1926년 19세 소년 구인회는 서울 유학 후 고향인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 돌아왔다. 서울 중앙고 독서클럽에 가입해 서양 책도 섭렵한 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후였다. 고향에서 일본 상인에 대항해 마을 협동조합을 조직한 그는 값싸게 생필품을 팔아봤다.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을 맡아 매일 신문을 읽으며 더 큰 세상을 꿈꿨다.
“뭐라고? 유교 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한다고?”
시내로 나가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자 집안 어른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하지만 조부는 고심 끝에 손자를 믿어주기로 했다. 부친도 모아놓은 돈 2000원을 내놓고 “네 생각대로 잘 해 보거라. 남과 화목하게 지내며 신용을 얻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1931년 부친이 준 2000원에 동생 철회가 조달한 1800원을 얹어 진주시에 포목점인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유가의 청년이 사업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포목점은 훗날 LG그룹 창업의 기반이 됐다.
○ “남이 손대지 않은 것을 해라”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이 포목점에서 배운 것은 고객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는 것, 하나를 팔아도 더 좋은 제품을 팔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저 옷감을 떼다 팔던 그는 어느 날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손님이 좋아할 만한 수를 놓고 염색을 해보면 어떨까?’ 포목점은 대박이 났다. 기술을 혁신하고 고객 중심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LG그룹에 뿌리박히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1947년 구 회장은 부산에 락희화학공업(LG화학)을 세우고 럭키크림을 만들었다. 구 회장과 동생들은 일제, 미제 화장품을 넘겠다는 각오로 어렵사리 고급 향료를 구하고, 화장품 기술자를 영입했다.
럭키크림은 인기 만점이었지만 화장품 통이 문제였다. 자꾸 깨져 불량이 났다. 수소문 끝에 플라스틱 관련 서적 6권을 얻어 연구한 구 회장은 1952년 전쟁통에 플라스틱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게 만들어 내는 일도 애국하는 길이다.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업을 성공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락희화학공업이 만든 플라스틱 빗이 인기를 얻자 주력 품목은 화장품보다 플라스틱, 합성수지가 됐다.
다음은 전자제품이었다. “화학이나 잘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은 다시 모험을 감행했다. 1958년 설립한 금성사(현 LG전자)는 1959년 한국 최초의 라디오(금성 A-501)를 만들었다. 부품 국산화율이 60%에 이르는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이어 한국 최초의 ‘눈표 냉장고’, ‘백조 세탁기’, ‘금성 TV’ 등을 줄줄이 내놓았다. 1967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19인치 금성 TV를 타깃으로 한 전문 털이범이 등장할 정도였다. 세탁기, 냉장고, TV가 있는 ‘현대식 가정’도 속속 늘어갔다.
○ 인화와 만난 기술혁신주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1995년 2월 구본무 당시 LG그룹 회장이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그룹 총수가 된 소감을 말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 한 대답이다. 당시 재계는 LG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정정한데도 70세가 되자 아들에게 회장직을 물려줬기 때문이다. 회사명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며 글로벌 지향점을 더 분명히 했다.
구본무 회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초우량기업으로 발돋움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도 “어른들의 뜻에 따라”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집무실에는 ‘경청(傾聽)’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서면서도 ‘인화’가 우선이라는 점을 늘 새기고 있었던 셈이다. ‘인화’는 창업 이후 꾸준히 내려온 모토다. 1945년부터 허씨 집안과 함께 경영을 하면서 더 필요한 덕목이었을 것이다. 2005년 GS와 계열 분리를 할 때도, 2018년 4세대인 구광모 ㈜LG 대표가 그룹의 새로운 총수가 되었을 때에도 잡음 하나 없었다.
이건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등이 쓴 ‘연암 구인회 연구’에 따르면 LG는 창업 초기부터 구씨와 허씨 집안이 함께 1인 3역씩 해가며 사업에 뛰어들어 모두가 창업자라는 마인드가 강했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흩어졌던 구씨, 허씨 가족들까지 부산으로 모여들면서 LG의 부산 공장은 가족이 경영자이고 직원이었다.
LG의 전직 고위 임원은 “집안 어른의 집단의사결정 체계 속에 ‘리더’에게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였다”며 “때로는 보수적으로 보이다가도 투자해야 할 곳이 있으면 과감하게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성장 기반을 닦아 왔다”고 말했다.
창업주의 기술혁신주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LG화학의 자동차 배터리 사업은 1992년 구본무 회장이 R&D를 독려하며 시작됐다. LG디스플레이가 내놓은 세계 최초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지난해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8’을 뒤흔든 돌돌 말리는 롤러블 TV도 혁신의 결과물이었다. 구광모 대표는 총수가 된 직후 첫 공식 행선지로 서울 강서구 LG사이언스파크를 택해 기술혁신주의를 이어갈 것을 선언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9> ‘기업보국’ 꿈 이룬 글로벌 롯데
“예술작품을 조국에 남기고 싶다”… 세계적 관광 인프라 실현
○ 위기 때 투자하라…원칙 경영 위기 속에 빛나
1967년 자본금 3000만 원으로 시작한 식품회사(롯데제과)가 식품, 유통, 화학, 건설, 호텔, 금융 등 총 87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5위로 퀀텀점프 한 배경에는 스스로 세운 경영 원칙을 어떤 위기에서도 밀어붙이는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한국 경제의 고비 때마다 사업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사업 시작부터 고수했던 무차입 경영이었다. 1970년대 국내 많은 기업들이 관행처럼 차입금에 의존해 사업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라는 창업주의 원칙은 경제 위기 속에서 빛을 발했다. 1997년 말 전국이 외환위기에 휩싸일 때 대부분의 계열사가 부채 비율 100%를 넘지 않는 건실한 재무구조 덕분에 롯데는 외환위기 이후 마트 시장 진출, 프리미엄 아웃렛 출점, 롯데케미칼 3PE 증설, 롯데제이티비 설립 등 대부분의 투자를 계획대로 추진했다.
2000년대 후반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내수시장도 장기 침체의 조짐을 보일 때도 롯데는 ‘글로벌 경영’으로 또 한번 사업의 보폭을 키워 나갔다. 2011년 회장으로 취임한 신동빈 회장은 특히 인수합병과 해외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책본부장으로 취임한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성사시킨 인수합병 건수가 40건에 달했다. 이를 통해 롯데는 고속성장을 이루게 됐다.
○ 집요한 열정으로 이뤄낸 기업보국의 꿈
창업주는 열정과 집념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랜드마크를 세우고 기간산업에 투자하고 싶다는 뜻을 이루며 기업보국의 꿈을 실현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고국으로 돌아와 줄곧 투자하고 싶었던 분야는 제철과 석유화학이었다. 기간산업이 부족한 고국에 국가 경제의 기틀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제철산업의 국유화가 추진되며 그는 잠시 뜻을 접고 식품회사(롯데제과)를 세웠다.
1978년 정부가 매각한 호남석유화학을 이듬해인 1979년 인수하며 신 명예회장은 마침내 기간산업에 투자하고 싶은 꿈을 이루게 된다. 이후 1970년대 롯데기공, 롯데파이오니아, 롯데건설, 롯데상사, 1980년대 대홍기획과 롯데물산 등의 계열사를 잇달아 세우며 회사의 몸집을 불렸다. 1995년 부산할부금융(현 롯데캐피탈)을 출범하며 금융 산업에 진출한 이후 롯데는 롯데카드, 롯데손해보험, 롯데캐피탈 등으로 금융사업의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먹을거리, 볼거리, 살거리, 놀거리를 만들어 고국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은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남아있다. 그는 “훌륭한 예술작품을 조국에 남기고 싶다”며 “해외에서도 한국을 찾는 세계적인 관광 인프라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시작은 특급 호텔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1974년 반도호텔을 인수했다. 인수한 호텔에 대한 공사 작업에는 5년이 걸렸고,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맞먹는 1억5000만 달러(약 1725억 원)가 투입됐다. 1979년 문을 연 롯데호텔은 국내 최고층 빌딩(지하 3층, 지상 38층)이었다.
그는 이어 1984년 서울 잠실 일대에 롯데월드, 호텔, 백화점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이른바 ‘잠실 프로젝트’는 임직원의 반대에 부딪혔다. 허허벌판인 잠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것 자체가 파격이고 모험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이제 한국의 관광산업은 볼거리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수준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1989년 문을 연 롯데월드는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테마파크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2017년 4월 문을 연 123층 롯데월드타워는 신 명예회장이 30년 이상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그가 잠실 일대에 부지를 매입한 시점이 1987년, 공사를 시작한 게 2010년이다. ‘노른자 땅을 놀리느니 차라리 아파트를 짓자’고 임직원들이 주장했지만 그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시설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123층 롯데월드타워는 관광객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 면세점-패스트푸드점 국내 처음 선보여 ▼
까르띠에-티파니-불가리 등 명품… 면세점에 유치한 건 세계최초 기록
1979년 서울 중구에 문을 연 롯데백화점 본점 매장 바닥에는 이탈리아산 고급 바닥재가 깔렸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환상적인 쇼윈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매장 내 각종 편의시설은 다른 백화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특히 국내 백화점에 처음 설치된 분수대는 ‘애천’이라 불리며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졌다. 국민의 의식이나 소득 수준에 비해 백화점 시설이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였다.
한국의 대표 유통기업인 롯데는 백화점을 비롯해 면세점, 호텔, 패스트푸드점을 통해 국내 최초의 다양한 시도를 했다. 1980년 1월 문을 연 롯데면세점은 당시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 종합면세점으로 개점과 동시에 화제를 모았다. 특히 ‘3대 명품’으로 꼽히는 루이뷔통, 샤넬, 에르메스 모두 유치한 것은 국내 최초였다. 까르띠에(1989년), 티파니(1991년), 불가리(1993년)를 면세점에 유치한 것은 세계 최초로 기록된다. 한곳에서 세계적인 명품을 원스톱 쇼핑할 수 있다는 점은 당시 일본인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1979년 10월 문을 연 롯데리아 1호점인 소공점은 한국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의 효시였다. 1970년대 말 국내에는 국내 산업 보호 정책에 따라 서구식 패스트푸드점이 전무했다. 이렇게 등장한 롯데리아는 큰 성공을 거두며 시내 곳곳에 가맹점을 열었다. 이후 웬디스, 버거킹 등 미국 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10> 포스코, 제철보국 이어 ‘기업시민’
‘우향우’ 정신… 스마트 용광로… 세계 ‘등대공장’ 우뚝
그가 1968년 쓴 보고서는 한국을 발칵 뒤집어 놨었다. 요약하자면 ‘한국에서 철을 생산해 봤자 쓰일 곳도 없다. 해외 차관에 의존해 제철소를 지으면 실패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서는 우리 정부가 보낸 차관 예비신청서에 대해 미국 측이 보내는 ‘거부’ 의사와 같았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상식적이겠지만 박태준 회장은 달랐다. 군인 출신인 그는 포항제철 주식이 한 주도 없었지만,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신앙처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박 회장뿐 아니라 당시 정부 관료들, 포항제철에 모인 신입 직원들은 제철소가 애국의 길이라는, 이상하리만큼 강한 진정성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진정성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해내 50여 년 뒤 포스코가 2019년 기준 재계 6위, 자산 78조 원이 넘는 글로벌 그룹으로 성장할 줄 그땐 아무도 몰랐다.
○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제철소에 인생을 걸었는데, 돈 1억 달러를 못 구해 이렇게 나자빠져야 하나. 고심 중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온몸에 강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1969년 초 차관을 거절당한 박 회장은 갑자기 대일청구권자금을 떠올린다. 농림수산 부문에 쓰기로 협약된 돈이라 그는 곧바로 일본 정계와 철강협회를 설득하러 일본으로 떠났다. 끈질긴 설득으로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박 회장은 이때부터 부실공사를 들킨 직원 등에게 ‘민족 반역자’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선조들의 피 값으로 건설하는 만큼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해 영일만(경북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고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우향우 정신’이 이때부터 포스코 문화의 근간이 됐다. 또 한정된 자원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란 박 회장이 내건 슬로건도 여전히 포항제철소 정문에 붙어 있다.
‘우향우’, ‘창의는 무한’ 정신은 첫 쇳물이 나오기까지 여러 번 빛을 발했다. 당시 정치권에서 제철소에 돈이 몰린다는 것을 알고 대놓고 대선 자금을 요구하거나 로비스트와 결탁해 설비 구매에 개입하려 했다. 박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박 대통령은 소신껏 설비를 구매하라는 취지로 박 회장의 건의사항이 담긴 메모지에 곧바로 서명해 줬다. 이 메모지는 훗날 ‘종이마패’로 불렸다.
박 회장은 또 “대체 제철소가 어디 있냐”는 호주 광산업계의 질문에 모래벌판 위 ‘제선공장’ 입간판 사진을 꺼내들어 집요한 설득에 나섰다. 결국 좋은 조건으로 철광석 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 자동차-조선업 발전 기반된 철
포항에 제철소 건설이 본격화된 1970년은 한국 경제사에 중요한 기점이었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1967년 현대자동차, 1969년 삼성전자, 1972년 현대중공업이 생겼다. 1973년 마침내 포항제철소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온 뒤에 자동차, 조선도 생산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철은 산업의 ‘쌀’이었기에 대통령부터 제철소 건설 근로자까지 ‘애국의 길’이라며 매달린 것이다. 포스코의 조강 생산량은 1973년 44만9000t에서 2017년 3720만6000t으로 약 83배로 뛰었다.
포스코는 ‘주인 없는’ 회사로 불리지만 전문경영인이 다른 기업의 오너 일가 못지않게 장기 투자를 감행해 왔다. 1973년 첫 흑자를 낸 이래 현재까지 개별 기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포스코는 2000년 민영화 이전에는 정부와 산업은행이 대주주였고, 2019년 9월 기준 국민연금(11.72%)이 대주주다. 한 포스코 관계자는 “정통 ‘포스코맨’ 전문경영인과 임원들은 우향우 정신을 바탕으로 ‘주인의식’이 강한 편”이라고 말했다.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 인수와 같은 대형 인수합병(M&A), 2007년 세계 최초 파이넥스 공법 상용화를 위해 15년간 연구개발(R&D)비 5000억 원 투자 등의 사례가 대표적인 장기 대형 투자 사례로 꼽힌다. 포스코의 새로운 성장동력인 리튬 2차전지 소재 산업도 정준양 회장 시절부터 권오준 회장을 거쳐 현 최정우 회장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올해 포항제철소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하는 등대공장(세계 제조업의 미래를 이끄는 스마트 공장)에 선정됐는데, 이는 2016년 알파고의 대국 장면을 지켜본 임직원과 연구원들이 힘을 합친 덕이 컸다.
○ 지역 사회 넘어 ‘기업시민’으로 발돋움
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올 7월 취임 1년을 맞아 새로운 포스코의 비전으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 ‘기업시민헌장’을 선포했다. 미래 100년 비전으로 삼겠다는 의지다.
지역과 함께 성장하겠다는 것은 박태준 창업회장 때부터 내려오는 정신이기도 하다. 포항제철은 1968년 서울 명동 유네스코 빌딩에서 창립총회를 한 뒤 YWCA 건물을 사옥으로 삼았지만 1973년 본사를 포항으로 이전해 버렸다.
박 회장은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영기업체 본사를 지방으로 옮기는 것은 인구 분산도 되고, 산업시설을 전국 곳곳에 두어 거기서 창출되는 소득의 균등 분배 효과도 있기 때문”이라고 본사 이전 배경을 밝혔다. 인재가 포항까지 가겠느냐는 우려에 직원들의 주택과 학교를 포항에 지어 지역과 함께 크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포스코는 이제 본사가 위치한 지역을 넘어 사회와의 조화를 꾀한다는 방침이다. 최 회장은 기업시민헌장을 발표하며 “의사 결정과 일하는 방식에서 기업시민헌장을 준거로 공생의 가치를 창출하면서 기업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11> 전후 폐허서 기간산업 키운 한화
다이너마이트 첫 국산화… 산업화 길뚫고 新성장 개척
‘노벨의 후예들’.
1959년 6월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과 당시 한국화약의 인천화약공장 작업반을 가리켜 주요 일간지는 이같이 표현했다. 전후 폐허가 된 인천화약공장의 복구를 위해 설계도를 확보하러 일본 전역을 돌고, 간신히 모은 화학 분야 인재들과 함께 연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의 꿈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1941년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한 청년 김종희가 처음으로 화약과 인연을 맺은 지 18년 만이었다.
○ 사업보국 길 걸은 ‘다이너마이트 김’
한화그룹의 모태는 인류 문명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발명품인 화약을 만드는 ㈜한화다. 화학의 핵심 용처는 군사에서 토목 분야로 옮겨지며 곳곳에 쓰여 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총포화약류취체령’으로 한반도 내에서 화약 생산을 금지하다 만주사변의 발발로 화약 수요가 폭증한 후에야 허가할 정도로 철저히 통제했다. 김 회장은 스무 살이 되던 해 5촌 당숙의 소개로 우연히 들어가게 된 조선화약공판에서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해 화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체험했다.
광복 후 ‘조국 화약계의 등대수’가 되기로 결심한 김 회장은 미군정, 6·25전쟁 와중에도 화약공판을 사수하며 화약산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인정받아 전쟁 중에 미8군 병참기지사령부 화학관리 용역을 따냈고, 이듬해인 1952년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를 설립했다.
1959년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한 한국화약(한화)은 1960년대 들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중책을 맡았다. 산지가 많은 국토에 도로를 놓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수적이었다. 김 회장은 이후 1965년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해 석유화학 산업으로 다각화를 시작했다. 이후 1980년 한국화성공업을 포함한 5개사가 통합된 한국프라스틱공업의 최종 인수를 통해 종합화학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현재의 한화케미칼과 한화첨단소재의 전신이다. 또 1964년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해 국가 경제의 최대 과제였던 기계공업을 육성하는 데 박차를 가했고 1969년에는 경인에너지를 설립해 에너지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별명이 붙은 김 회장은 늘 임직원들에게 “화약처럼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화의 기업사를 연구한 이광주 단국대 명예교수는 “김종희 한화 창업 회장의 삶은 사업보국의 정신으로 국가 기간산업에 전념한 기업가”라고 평가했다.
○ M&A 승부사, 제2의 창업
1981년 김 회장의 별세로 29세의 나이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자리에 올랐다. 김 회장은 곧바로 취임 이듬해에 한양화학(다우케미칼과 한국종합화학의 합작사)과 한국다우케미칼 인수에 나섰다. 당시 한양화학은 매년 수십억 원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김 회장은 유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울 기회라고 판단해 “젊은 경영자가 오기를 부린다”는 사내의 비난을 무릅쓰고 인수했다. 그리고 1년 만에 회사를 흑자 전환시켰다. 이는 한화그룹이 에너지와 석유화학 분야로 뻗어나가는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회장의 ‘인수합병(M&A) 승부사’ 기질은 이후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1985년 부실기업으로 판정된 정아그룹을 인수하며 현 한화호텔앤드리조트로 발전시켰다. 바로 이듬해에는 한양유통을 인수해 한화갤러리아로 키워냈다.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인수는 금융사업을 한화의 주력 사업 부문으로 전환시킨 한화 M&A사의 백미로 꼽힌다.
당시 대한생명은 대주주의 전횡, 부실대출로 누적 결손금만 2조2906억 원에 달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 사무실을 직접 찾아 입찰 제안서를 제출할 정도로 의지가 확고했다. 한화 관계자는 “부실 금융사 인수로 그룹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김 회장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회’라며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이후 김 회장이 직접 대표이사를 맡아 정상화된 대한생명은 한화에 인수된 지 8년 만에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됐다. 한화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떠오른 태양광 사업 역시 2010년 솔라펀파워홀딩스와 2012년 큐셀(현 한화큐셀) 인수 등 시의 적절한 M&A로 성장세하고 있다. 2014년 삼성의 방산 및 석유화학 4개사 인수는 한국 기업사에 남을 ‘빅딜’로 기록됐다.
○ 구조조정 성공으로 이끈 ‘의리’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린 혹독한 시련이었다.” 김 회장은 1997년부터 2년간 이어진 구조조정을 뒷날 이렇게 표현했다. 외환위기 속에서 수족 같은 계열사들을 매각할 때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는다. 10여 개의 사업 부문을 매각하면서 한 번도 잡음을 내지 않아서다. 김 회장은 불가피하게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게 “지난 인연을 잊지 말고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는 위로를 잊지 않았다. 또 나중에 사내에 추가 인력이 필요하면 옛 한화 임직원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화의 기업문화인 ‘의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2대 연속 고등학교를 설립한 것은 부친과 김 회장의 대를 이은 사회공헌으로 꼽힌다. 김종희 창업 회장은 “그럴듯한 대학을 설립하는 게 낫지 않냐”는 주위의 조언에 ‘고등학교야말로 나라의 초석이 될 일꾼을 길러내는 진정한 육영사업’이라며 1976년 천안북일고를 설립했다. 20여 년 뒤인 1997년 김승연 회장은 천안북일여고를 설립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2020.01.01
<12> 안목경영 돋보인 GS그룹
내실 다지며 공격 경영… 에너지-유통-건설 강자로
65(구씨) 대 35(허씨).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의 거부(巨富)였던 허만정은 1946년 사돈이 된 LG 창업회장 구인회에게 35%의 비율로 창업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은 이듬해인 1947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우는 밑천이 됐다. 사업이 커지자 두 집안은 각자 낸 원금에 따라 비율을 정했다. 이 지분은 두 집안이 반세기 넘게 동업 관계를 유지해온 비결이 됐다. 2000년대 초 GS가 LG에서 계열 분리할 때도 복잡한 지분 관계를 놓고 어떤 잡음도 나오지 않았다.
LG와 ‘아름다운 이별’을 하게 된 GS는 2005년 정유·유통을 주력으로 하는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거듭났다. 분리된 지 15년 만에 GS는 에너지·유통서비스·건설을 3대 축으로 64개 계열사를 거느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매출 가운데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절반(36조 원)을 넘어섰다. 조용한 듯 공격적으로 사업을 펼치는 ‘내실 경영’과 신사업을 발굴해 적극 투자하는 ‘안목 경영’이 GS가 퀀텀점프 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꼽힌다.
○ 조용히 사업 넓히는 내실 경영
신문물에 적극적이었던 집안에서 자란 허만정은 셈에 밝았다. 돈 되는 사업에 투자하며 재산을 불려 다른 사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구씨와의 동업에 있어서는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경영은 구씨 집안이 알아서 잘할 테니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할 정도로 조용히 재무, 회계 등의 안살림에 집중했다.
내실을 다지면서 사업 영역을 넓혀온 허씨 집안의 가풍은 GS의 경영 철학으로 이어졌다.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이 2005년 그룹 출범식에서 제시한 슬로건은 ‘밸류(가치) 넘버원 GS’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모든 의사 결정이 이사회에서 이뤄지는 ‘이사회 중심의 자율 경영’과 ‘전문경영인 중심의 책임 경영’ 등을 강조했다.
외형 확장에는 좀더 공격적이었다. 2000년대 글로벌 경제위기로 불황이 길어지는 시기에도 GS는 공격적 인수합병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2009년 ㈜쌍용을 인수하며 출범한 GS글로벌은 해외사업 확장의 플랫폼이 됐다. 2012년 GS에너지를 설립한 이후에는 2013년 신평택발전, 청라에너지 등 활발하게 인수합병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발전사업에서는 ‘뚝심 경영’을 발휘했다. 2005년 LG에너지를 인수해 GS EPS를 출범시킨 GS는 이후 발전소를 늘려가며 2017년 민간 발전사 가운데 발전용량 1위에 올랐다. 허 명예회장이 “필요한 투자를 두려워하거나 실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한 성과다. 수익성을 중심에 둔 판단은 때로 과감히 포기하는 결정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2008년 대우조선 인수를 포기한 게 대표적인 예다. 2010년에는 편의점과 슈퍼에 집중하기 위해 GS리테일의 백화점과 마트 부문을 매각하기도 했다.
허 명예회장은 공격 경영의 하나로 글로벌 경영을 추진했다. 2011년 9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열린 GS그룹 사장단 회의는 그룹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서 열렸다. GS그룹 해외 사장단 회의가 GS의 글로벌 경영에 ‘마중물’ 역할을 해오면서 2017년 GS에너지와 GS글로벌이 ‘BSSR석탄광’ 지분 인수를 통해 인도네시아 석탄 생산광 사업에 진출했고 GS리테일의 슈퍼마켓과 편의점이 각각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 신사업 알아보는 ‘안목 경영’
지난해 말 허 명예회장의 뒤를 이은 허태수 그룹 회장은 해외시장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를 경영 전반에 반영하는 그룹의 ‘센서’ 역할을 해왔다. 그는 2007년부터 GS홈쇼핑을 이끌며 여러 통념을 뒤집은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2010년에는 GS홈쇼핑이 보유했던 케이블 방송을 모두 매각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이렇게 확보한 자금을 모바일 사업에 투자하며 홈쇼핑의 모바일화를 주도해왔다. 2007년 GS홈쇼핑 대표이사 취임 이후 홈쇼핑 업계가 저가 경쟁을 벌이자 과감하게 트렌드 리더 홈쇼핑을 내세우며 패션 중심으로 품질 경쟁을 주도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이런 안목과 과감한 결단으로 GS홈쇼핑은 2017년 12월 홈쇼핑 시장 최초로 취급액 4조 원을 달성했다.
허 회장은 평소 “기업경영이란 외부 생태계의 변화를 빠르게 인식하고 대응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의 이런 소신은 스타트업과 협력,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허 회장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지에 자회사 GSL 랩스를 설립해 직원들이 최신 실리콘밸리의 기술과 혁신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GS홈쇼핑 직원 위주로 시작된 이러한 혁신교육은 여러 계열사의 요청으로 그룹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13> ‘울산의 기적’ 일군 현대중공업
불도저 추진력-발상의 전환… 유럽-日 콧대 꺾고 조선 최강 ‘우뚝’
1974년 2월 15일 오전 1시경. 수문이 열리면서 바닷물이 독 안으로 차기 시작했다. 독 안에는 길이 344m에 이르는 26만 t급 초대형 유조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거대한 무쇳덩이가 과연 뜰 것인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날은 현대중공업의 역사적인 첫 진수식 날이었다. 한국 중공업 사상 처음으로 초대형 유조선이 실제로 물에 뜨는 날이었다. 항만청은 “엔진 시동 없이 배를 띄우는 것은 항해규칙 위반”이라는 웃지 못할 이유로 허가에 뜸을 들였고, 선장들은 방파제 입구가 좁아 배가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정 회장은 “배가 망가지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선장 대신 배 위로 올라가 지휘봉을 잡았다. 오전 5시 거대한 유조선은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독에서 벗어나 바다로 나아갔다.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콧등이 시큰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능공들 중엔 흑흑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불굴의 신념과 불철주야 초인적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해준 기능공들이 대견스러웠고 고마웠다.”
1991년 정 회장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기업 나의 인생’ 에세이에서 현대중공업의 첫 진수식에 대해 이같이 기억했다. 울산 어촌마을 미포만 일대가 세계 1위 조선 강국의 대표 중심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발상의 전환, 번뜩이는 아이디어
“외국에 나가서 고생하느니 몇천만 달러, 몇억 달러짜리 배를 수주해서 국내 조선소에서 우리 기술로 건조하면 해외 건설보다 안전할 것이다.”
정 회장은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해외 건설 사업이 베트남전쟁 등으로 갖은 고초를 겪자 조선업을 떠올렸다고 썼다. 정부가 중화학 육성책을 꺼내 들기 전부터 조선업 진출을 고민했다는 의미다.
문제는 돈이었다. 해외에서 4300만 달러를 빌려야 조선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는 1971년 우리나라 경제개발 예산의 15%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정 회장은 먼저 조선기자재 업체를 찾아가 “당신네 회사서 기자재를 살 테니 은행을 좀 움직여 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한 영국의 유력 조선 기술회사인 ‘애플도어’의 찰스 롱보텀 회장을 찾아갔다. 롱보텀 회장은 그가 내민 어촌마을 사진만 보고 난색을 표했다. 한국의 상환 능력을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우리 현대의 능력으론 이 사업이 무모하다는 평가인 듯했다. 나는 맥이 쭉 빠졌다. 지금 같으면 주요 인사와 면담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준비하지만 그때는 그럴 여유도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내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오백 원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정 회장의 유명한 ‘거북선 지폐’ 일화는 임기응변의 결과였다. “한국은 1500년에 이미 거북선을 만들었다”며 열정을 토하는 그를 보고 롱보텀 회장이 마침내 미소를 띠었다. 롱보텀 회장은 바클레이스은행과 연결해 줬을 뿐 아니라 그리스 선사가 싼 배를 찾는다는 귀띔을 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정 회장의 조선 사업을 지원했다.
○ 처음부터 세계와 맞서다
“조선업도 1969년 처음 시도했을 땐 일본 기업과 합작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경영에 간섭하려 하고, 또 생산 규모도 ‘너희 경제 규모를 봐서 5만 t급 선박을 만들 수 있는 시설 정도면 충분하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어느 조선소보다도 더 큰, 세계 제일의 생산능력을 갖춘 독을 계획해서 세계 조선사상 처음으로 배와 독을 동시에 완공했습니다.”
1991년 5월 정 회장은 옛 소련의 칼미크 자치국을 찾아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 연설을 하며 현대중공업이 왜 처음부터 초대형 26만 t급 유조선 건조로 시작했는지 설명했다. 사실 처음에 현대중공업은 일본과 합작사가 될 뻔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산업군이 그랬지만 기술도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 합작하는 게 조선업 진출에 유리해 보였다. 마침 미쓰비시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한국 경제 규모에 맞는 일이나 하라’는 태도를 보였다.
1970년 중국이 ‘미국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한국, 대만’과 거래하는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주 4원칙’을 발표하자 미쓰비시 측은 중국 눈치를 보며 합작을 못 하겠다고 했다. 현대중공업은 1993년 펴낸 20주년 사사에서 이 사건을 ‘새옹지마’라고 표현했다. 일본이 정한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세계와 맞서는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택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노렸기에 현대중공업은 빠르게 성장해 1972년 조선소 기공식 이후 11년 만인 1983년에는 건조량 기준 조선부문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또 40년 만인 2012년에는 세계 조선업계에서 처음으로 선박 인도 누적 톤수가 1억 GT(총톤수)를 넘겼다.
잘나가던 현대중공업도 2010년 이후 불어닥친 조선업계 불황의 여파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2015년에 1조 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낸 현대중공업은 감원과 자산 매각, 사업 재편 등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특히 1994년 국내 최초로 고부가가치 선종인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을 인도하는 등 기술 개발을 해왔던 LNG 시장이 커지는 것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M&A)을 위해 지난해 6월 중간지주사 격인 한국조선해양을 출범시키며 “세계 어느 나라도 넘보지 못할 기술력을 갖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며 앞으로도 기술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14> 40개 계열사로 성장 신세계그룹
“백화점은 패션이다”… 유통 신세계 개척
“첫 출근 때 아버지는 ‘서류에 사인하지 말라’ ‘어린이 말이라도 경청하라’ ‘사람을 나무 기르듯 길러라’라는 지침을 주셨는데 그것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2005년 5월 발간된 신세계그룹 사보에 남긴 글이다.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의 막내딸인 이 회장은 1979년 신세계백화점 영업본부 이사로 입사하며 아버지로부터 세 가지를 지키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 가운데 ‘서류에 사인하지 말라’는 경영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도 대주주인 이 회장은 큰 그림을 제시하고 계열사별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이 맡고 있다. 그룹 내에서 아들인 정용진 부회장이 마트와 복합쇼핑몰, 딸인 정유경 총괄사장이 백화점과 면세점을 맡고 있지만, 여전히 그룹 전체의 사업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이 회장이 내리고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고수하는 것 말고도 이 회장이 또 하나의 경영철학으로 삼는 게 있다. 바로 ‘백화점은 패션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패션의 속성은 구태의연해서는 안 되며 탁월하고 앞서가야 한다”고 강조해온 그는 남다른 안목과 세련된 감각으로 국내 유통업계에서 앞선 시도들을 해왔다. 그 결과, 19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 공식분리 선언 당시 백화점 2개 점포(본점, 명동점)와 조선호텔에서 출발했던 신세계는 이제 백화점뿐만 아니라 총 40개 계열사를 이끄는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이 회장은 백화점에 입사한 이후 자체 브랜드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해외여행을 다니거나 국제 행사에 참석할 때도 잘 팔릴 만한 상품이나 배워야 할 디자인을 보면 백화점 바이어에게 전달하곤 했다. 그가 수집한 패션 상품이나 자료들은 당시 상품개발팀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였다.
국내 최초의 대형마트인 이마트도 그가 미국에 체류하며 프라이스클럽이나 월마트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사업이다. 1993년 서울 도봉구 창동점으로 첫선을 보인 이마트는 개점일 하루에만 2만7000명이 몰리며 하루 매출 1억 원 이상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후 외환위기가 찾아왔지만 이마트는 오히려 부지를 매입하며 공격적으로 점포를 확장했다. 그 결과, 신세계는 월마트의 국내 점포 16개를 2006년 모두 인수하며 100호까지 점포를 확장했다. 토종 대형마트가 세계적인 ‘유통 공룡’인 월마트를 국내 시장에서 철수시킨 하나의 사건이었다. 단순히 싼 가격이 아닌, 품질과 서비스, 디자인 등을 고객 입장에서 생각해 차별화한 것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럭셔리 브랜드 매장을 갖춘 교외형 프리미엄 아웃렛도 신세계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유통 형태였다. 2007년 사이먼그룹과 손잡고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이런 시도는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서만 통한다는 게 업계 통념이었다. 하지만 여주점이 성공하며 현재는 파주점, 부산점, 시흥점까지 4개점을 운영 중이다. 2009년 3월 부산에 선보인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은 백화점이라는 유통시설에 찜질방, 골프레인지, 아이스링크 등 체험시설을 도입하는 파격을 시도하며 기네스협회로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으로 인증받았다.
‘유통시설은 물건만 파는 게 아니다’라는, 틀을 깬 생각은 스타필드에서 꽃을 피웠다. 2016년 9월 경기 하남시에 문을 연 스타필드는 국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쇼핑 테마파크였다. 스타필드는 쇼핑은 물론이고 먹거리, 엔터테인먼트, 휴식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복합쇼핑몰을 지향하며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스타필드 하남 개점식 현장에서 정용진 부회장은 “나보다 더 유통 전문가인 이 회장이 ‘지친 도시인들이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며 “스타필드 하남 사업의 아이디어 원천은 어머니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세계는 유통시설 매장에 예술 작품을 대대적으로 내세우는 예술 경영에도 앞장섰다. 대표적인 예가 숙원사업이던 신세계백화점 본관을 리뉴얼한 후 2005년 처음 선보였을 때다. 당시 신세계는 미술을 백화점 경영의 전면에 내세우며 다른 백화점과 차별화를 선언했다. 건물 각층의 주요 매장 통로와 벽 곳곳에 국내외 거장, 중견 작가들의 진품 사진과 그림들을 내걸었고 엘리베이터 벽이나 대기 공간도 화랑처럼 디자인하는 전례 없는 시도를 했다. 이어 신세계는 2011년에는 ‘살아 있는 피카소’로 불리는 제프 쿤스의 조각 작품을 신세계본점 공원에 설치하며 또 한 번의 파격을 감행했다. 300억 원이 넘는 작품을 백화점 휴식 공간에 놓는 시도 자체가 유통업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통업의 세련된 혁신을 추구해온 신세계는 온라인 쇼핑 환경에 걸맞게 사업을 재편하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신세계는 지난해 3월 신설 법인 SSG닷컴을 출범시키며 온라인 사업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4년 경기 용인시 보정에 첫선을 보인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 ‘네오’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신세계는 보정에 이어 2016년 1월 김포시에 두 번째 네오를 선보였고, 지난해 12월 세 번째 네오를 공개했다. 이 같은 신세계그룹의 노력은 외자 유치로 이어져 어피니티(Affinity), 비알브이(BRV) 등 2곳으로부터 외부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15> 위기를 기회로 바꾼 두산그룹
맥주→중공업→로봇-연료전지… 124년간 이어진 ‘변화 DNA’
“창립 100주년은 또 다른 100주년의 시작입니다.”
1996년 7월 31일. 박용곤 당시 회장은 창립 10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100년처럼 두산은 21세기에도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선도 기업의 역할을 다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당시 국내 대기업 중 창립 100주년을 맞은 곳은 두산이 최초였다. 두산은 1896년 박용곤 회장의 조부인 박승직 창업주가 서울 종로4가 배오개 인근에 ‘박승직 상점’을 연 것을 두산의 효시로 본다. 기네스협회도 인정한 한국 최고(最古) 기업 두산그룹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창립 100주년 기자간담회 후 20년이 지난 2016년. 두산은 또다시 한국 기업사에 최초 기록을 얹었다. 한국 대기업 최초로 4세 경영을 시작한 것이다. 2016년 3월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이 그룹 회장직에 오르면서 4세 경영이 시작됐다. 120년 동안 온갖 위기를 돌파하고 살아남은 기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에 따르면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은 1950년대 50년에서 최근엔 20년 이하로 줄어든 상태다. 재계는 두산의 ‘변화’ DNA와 이를 뒷받침한 두산만의 독특한 지배구조를 ‘장수’의 비결로 꼽는다.
○ 모태사업을 넘어 글로벌 제조기업으로
1998년 10월 외환위기 와중에 김대중 대통령은 두산을 비롯한 13개 기업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구조조정 모범 사례’ 기업으로 뽑혔기 때문이다. 당시 두산은 코카콜라 사업권 매각부터 두산의 모태사업과 다름없던 OB맥주마저 지분 매각에 나선 상태였다.
사실 100주년을 맞았던 1996년부터 두산은 위기 상태였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등으로 주력 사업이던 OB맥주의 시장 점유율이 경쟁사에 뒤처지고 있었다. 1993년 회장이 된 박용곤 회장은 위기를 벗어나려면 변화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명제인 “팔릴 물건을 내놔야 시장에서 제값에 팔린다”를 앞세운 건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다. 많은 대기업이 ‘대마불사’에 기대어 빈사 상태의 계열사를 시장에 내놓기 일쑤였던 때였다. 장사가 되던 네슬레코리아, 코카콜라코리아를 비롯해 위스키 사업 등을 접고 OB맥주 매각도 추진했다.
두산의 행보는 재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1952년 박승직 창업주의 장남인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이 옛 기린맥주 공장을 인수해 동양맥주를 설립한 건 두산이 근대 기업으로서의 출발을 알린 신호였다. ‘전쟁 통에 누가 맥주를 마시냐’는 주변의 반대 속에서도 전쟁 통에 폐허가 된 옛 공장을 사들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100년 동안 내수 위주 사업에 30여 개 계열사로 무거워진 두산은 과감한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1998년에는 계열사 매각 및 합병으로 계열사가 4개까지 줄어들기도 했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 시작한 두산의 구조조정은 뉴스위크 등 주요 외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 기술 중심 회사로 변신
팔릴 만한 물건을 내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한 두산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7년 밥캣(현 두산밥캣)을 인수하며 글로벌 기계·발전사업 회사로 변신했다.
박용곤 당시 회장이 10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신규 사업으로 메카트로닉스(기계 및 전자공학)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힌 대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소비재 기업에서 제조 기반 기업으로 변신한 결과 두산은 해수담수화 분야 세계 1위(두산중공업), 소형 건설장비 스키드 스티어 로더와 어태치먼트 분야 세계 1위(두산밥캣), 세계 건설기계 시장 글로벌 톱10(두산인프라코어)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난해 프랑스 케지 비즈니스스쿨 경영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두산의 변신 사례를 연구한 박태원 두산건설 부회장은 논문에서 ‘두산은 사업을 이어가는 것보다 기업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고 분석했다. 기업의 생존에 중점을 둔 두산은 경영진의 ‘집단 지성의 힘’이 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의미다. 4세 경영이 시작된 박정원 회장 대에도 두산은 박지원 두산그룹 부회장이 박 회장을 보좌하며 그룹 경영에 힘을 보태고 있다.
박정원 회장이 추진하는 두산의 변신은 디지털 전환이다. 2016년 취임 직후 최고디지털혁신(CDO) 조직을 신설한 데 이어 두산인프라코어의 무인 자동화 건설 솔루션 ‘컨셉트 엑스’, 스마트폰을 이용한 두산밥캣의 원격조종 기술 ‘맥스 컨트롤’ 등 디지털 전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협동로봇(두산로보틱스)과 수소연료전지 드론(두산모빌리티이노베이션·2019년) 등 신사업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기술을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가스터빈이 2023년 상용화되면 2030년까지 10조 원의 수입 대체 효과가 기대된다.
박정원 회장은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0’에 마련된 두산그룹 전시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두산은 최신 기술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도록 많은 고민과 실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16> 첨단전선으로 세계 진출 LS그룹
한국 전력산업의 대동맥, 25개국 ‘글로벌 電線’으로 뻗어나가다
1985년 10월 18일 금성광통신 안양공장 사옥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광섬유가 담긴 박스가 컨테이너에 실리는 순간을 보러 임직원들이 몰린 것이다. 이날은 미국 통신사 AT&T 애틀랜타 공장으로 첫 번째 광섬유 납품 물량을 보내는 날이었다. 광통신 기술의 본고장인 미국에 직접 만든 국산 광섬유를 역수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금성광통신은 금성전선과 AT&T가 1984년에 만든 합작사였는데 합작사를 설립한 지 1년도 채 안된 상태에서 수출계약을 맺어 화제를 모았다. 국산 광섬유가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쾌거였다.
LS전선의 전신인 금성전선이 미국에 발 빠르게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979년부터 한국 최초의 전선기술연구소를 세우며 광통신, 초고압 케이블 등 첨단 전선 분야의 국산 기술개발에 매달린 덕분이었다. 2005년 LS전선으로 재탄생한 회사는 연구개발(R&D)을 바탕으로 글로벌 영토를 확장해 LS그룹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구자열 LS그룹 회장은 위기 때마다 기술 혁신과 글로벌 진출을 강조해 왔다. 올 초 새로 승진한 임원들과의 만찬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 열쇠를 앞장서 찾아내는 모험가적 리더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 한국 전력산업의 대동맥, 글로벌을 꿈꾸다
사실 1980년대 한국과 일본, 미국 전선 기업과의 기술력 차이는 여전했다. 기술개발과 수출 둘 다 녹록지 않았다. 당시 전선 기업이라면 체신부나 한국통신을 중심으로 한 내수 전력 및 통신 인프라 사업에 의존하는 게 수익을 내기 더 쉬운 길이었다. 하지만 금성전선은 끊임없이 싱가포르 인도 예멘 등 새로운 수출 시장을 찾아다녔다.
당시 임직원들이 ‘수출 전사’로 나섰던 배경에는 창업 당시부터 새겨진 DNA가 있었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1962년 금성전선(첫 사명은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하며 ‘전선공업 진흥을 통한 경제발전에의 기여’를 경영이념으로 삼았다. 전력 공급에 기여함으로써 한국 산업의 ‘대동맥’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다.
구 창업주는 일본의 히타치전선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으면서도 언젠가 일본을 넘어설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일본이 부럽다고들 하지만 20, 30년 가면 저 사람들보다도 우리가 앞질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한국의 희망 아닌가.” 구 창업주는 1966년 한국케이블공업 안양공장의 첫 가동을 지켜보며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창업주의 꿈은 현실이 됐다. 50여 년이 지난 현재 LS그룹은 미국 중국 유럽 중동 등 전 세계 25개국 100여 곳에 현지 생산법인, 판매법인, 지사, 연구소 등을 두고 있다. LS전선은 초전도, 해저, 초고압 케이블 분야 글로벌 톱 수준의 기술을 자랑한다. 지난해 ‘꿈의 기술’로 불리는 초전도 케이블을 한국전력과 함께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기도 했다. LS산전은 글로벌 전력 기기 및 스마트 에너지 분야를 이끌고 있고 LS니꼬동제련은 단일 제련소 기준 세계 2위 규모다.
○ 평화로운 ‘사촌경영’의 힘
LS그룹이 LG그룹에서 분리된 것은 2003년 11월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LG전선(현 LS전선)을 중심으로 LG니꼬동제련(현 LS니꼬동제련), LG칼텍스가스(현 E1), 극동도시가스(현 예스코)의 계열 분리를 최종 승인했다. 구 창업주의 셋째 넷째 다섯째 동생인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 구평회 E1 명예회장,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을 일컫는 ‘태평두’ 삼형제가 독립경영을 알린 것이다.
태평두 삼형제는 그룹 설립과 동시에 2세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재계에서 보기 드문 ‘사촌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구태회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홍 회장(전 LG전자 대표)이 그룹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2013년 사촌인 구자열 회장(구평회 회장 장남·LG상사, LG증권에서 국제금융 전문)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2013년 1월에 열린 이임식에서 구자홍 회장은 “LS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만큼 더 역동적이고 능력 있는 경영인이 제2의 도약을 이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설립 당시 매출 7조3500억 원이었던 LS그룹은 2018년 22조9015억 원으로 덩치를 3배 키웠다.
최근 LS그룹은 디지털 전환을 통해 글로벌 경기침체, 코로나19 등 위기를 극복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구자열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미래 혁신을 위해 추진해온 디지털 전환 작업을 이제 본격적으로 추진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전통 제조업에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스마트에너지 기술을 접목해 디지털 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디지털 전환 작업은 구두회 명예회장의 외아들인 구자은 LS그룹 미래혁신단장(LS엠트론 회장)이 이끌고 있다. 구자은 회장은 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박람회 ‘CES 2020’을 참관하며 “디지털 시대에 업(業)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사업 영역이 재정의되고 있다”며 “미래를 위한 혁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17> 소재기술 개발 ‘54년 외길’ 효성
“품질이 아니면 못파는 세상 될것”… 3代 이은 ‘소재강국의 꿈’
‘독일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빨리 발전했을까.’
1954년 기계 발주를 위해 독일을 찾은 조홍제 효성 창업회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안됐는데도 눈부시게 돌아가는 공장을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 조 회장이 찾아낸 답은 기술력이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채 안 된 당시 한국은 공산품 기술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해 품질을 따지는 이도 적었다. 조 회장의 일화를 모은 책인 ‘늦되고 어리석을지라도’에 따르면 당시 조 회장은 “지금은 물건이 없어서 못 팔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른 뒤엔 품질이 아니면 못 파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착실히 준비해 나가는 것만이 기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1966년 효성의 전신인 동양나일론 설립 이후 5년 만인 1971년에 한국 최초로 민간 기술 연구소를 설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미국 독일에 의지하던 섬유 제조 기술을 한국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열망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조 회장의 장남 조석래 회장도 소재 원천 개발에 힘을 실으면서 효성은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에어백 원사, 안전벨트 원사 등 주요 소재 시장점유율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7년 취임한 조현준 회장은 중국 베트남 인도 등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탄소섬유와 폴리케톤 아라미드 등 신소재 사업을 발판으로 ‘100년 효성’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 “늦되어도… 조국의 샛별이 되자”
조홍제 창업회장의 호는 ‘만우(晩愚)’다. 스스로에게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의 호를 붙인 셈이다. 조 회장은 평생 늦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데 늦은 법은 없다’는 것을 실천해 왔다. 1906년 태어나 19세에 중앙고보에 입학해 신학문에 눈을 떴다. 서른에 대학을 졸업하고 마흔이 넘어 사업에 입문했다. 그리고 예순에 동양나일론 설립으로 효성그룹의 기틀을 닦았다.
‘효성’은 조 회장이 일본 호세이대 경제학부 유학 시절 고향 친구들과 ‘동방명성’을 뜻하는 모임인 동성사를 만들었던 데서 기원한다. 어둠을 밝히는 조국의 샛별이 되자는 뜻으로 모였던 당시의 뜻을 생각해 샛별이라는 뜻의 기업명을 지은 것이다.
조 회장은 기업이 기술을 키우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봤다. 섬유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기술개발에 매달린 효성은 1967년 ‘타이어코드’ 국산화에 성공했다. 1981년 조석래 회장이 효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더욱 사업 고도화에 힘을 실었다. 기술강국만 만들 수 있는 어렵고 까다롭지만 필요한 소재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 ‘프로젝트Q’로 탄생한 스판덱스
1990년 조석래 회장은 연구원들을 불러 모아 ‘스판덱스’를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구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고무실보다 쭉쭉 잘 늘어나고, 속옷 안감 겉옷 어디에도 잘 쓰이는 소재지만 만들기는 까다로워 독일 미국 일본만 만들 수 있었다. 뭐가 나올지 의문투성이라며 당시 스판덱스 개발 프로젝트 이름이 ‘Q(Question)’일 정도였다.
효성 내에서 ‘돈만 낭비하는 사업’이라며 개발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조 회장이 “실패를 두려워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사업”이라며 연구를 독려했다고 한다. 결국 만 3년여의 연구 끝에 세계에서 네 번째로 스판덱스 개발에 성공했다.
스판덱스는 타이어코드와 함께 효성에서 현금 창출원인 대표적 효자 사업이다. 2010년에는 스판덱스 부문 글로벌 1위가 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스판덱스 시장점유율 32%를 효성이 차지하고 있다. 타이어코드 역시 2000년에 세계시장 점유율 21.5%로 글로벌 1위에 처음 등극했고 현재는 시장점유율 45%로 부동의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 “신소재로 소재강국 이루겠다”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에서 세계 1위에 오른 이유는 소재부터 생산 공정까지 독자 개발해 경쟁사를 앞서겠다는 기술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소재 사업의 씨앗을 심기 위해 도전을 계속 해나가겠다.”
조현준 회장은 지난해 8월 전북 전주시 탄소섬유공장에서 이같이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탄소섬유 신규 투자 협약식’ 자리였다. 조 회장은 2028년까지 탄소섬유 산업에 총 1조 원을 투자해 2만4000t까지 생산 규모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수준이다. 효성은 올 초 2000t 규모의 탄소섬유 공장을 완공하고 생산에 들어간 상태다.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탄소섬유는 일본이 먼저 개발했고 현재도 도레이첨단소재가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효성은 2011년 국내 최초로 탄소섬유의 독자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탄소섬유는 수소자동차 연료탱크, 우주항공 등 첨단 미래 산업의 핵심 소재로 꼽힌다.
‘핵심 소재를 독자 개발해 한국 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54년 전 기업보국의 창업정신이 여전히 효성의 DNA로 이어져 온 셈이다. 지난해 협약식에서 조 회장은 “‘소재강국 대한민국’ 건설에 한 축을 담당하겠다”고 강조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