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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은내고향 2021. 5. 2. 21:42

餘談2/ 2021

01.01 물먹는 소에게 할머니는 손을 얹었다… 고맙구나

[2021 신년특집 - 辛丑年, 소를 말하다]
일만 하는 시시한 삶 같았지만 발잔등 부어도 말없이 물만 마셔
노고 끝 함께 적막 견뎌내는 존재 

/일러스트=이철원

 

어렸을 때 나는 띠가 열두 개밖에 안 되는 게 불만이었다. 세상에는 동물들이 그리 많은데 겨우 열두 개라니. 공작띠, 홍학띠, 독수리띠…는 왜 안 되는가. 소풍으로 동물원을 가면 나는 띠가 서른 개쯤 되는 세상을 상상해보며 구경을 하곤 했다. 그러면 세상은 더 즐겁고, 더 왁자지껄하고, 더 복작복작해질 것만 같았다. 그중에서 내가 되고 싶은 띠는 기린띠였다. 기린이 걷는 걸 보면 우아하다는 게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기린이 기다란 목을 어떻게 하고 잠이 들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소띠라니. 소라면 궁금한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흔하고 흔해 빠져서 신비로운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소설가 윤성희

 

나는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쥐띠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때 쥐띠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이거였다. 열두 동물이 달리기를 해서 띠 순서를 정하는데 쥐가 소 등에 앉아서 왔다는 이야기. 그렇게 결승전까지 몰래 소 등에 올라탔다가 결승선 앞에서 폴짝. 그래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들을 쥐띠 친구들은 종종 말하곤 했다. 그 에피소드는 쥐의 영리함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소의 둔함에 관한 이야기로 들렸다. 바보 같은 소. 미련한 소. 등에 누가 앉아 있는 것도 모르고 달리기만 하다니. 그렇게 1등을 빼앗기고도 우직하다는 칭찬에 속고 있는 소. 어린 시절, 나는 그 에피소드가 먼 미래의 내 운명 같아서 싫었다. 한여름에도 일만 하는 소. 그렇게 일을 하고도 풀만 먹는 소. 단지 띠일 뿐이지만 나는 내가 소인 것처럼 억울했다. 외갓집에는 외양간이 있었다. 마루에서 외양간이 마주 보였는데, 그래서 마루에 누워서 외양간 쪽을 보면 어쩌다 소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나는 소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으이구, 바보 같은 놈. 일하기 싫다고 화를 내란 말이야. 착하게 살지 말란 말이야.

 

스무 살이 넘어 문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런 시를 읽게 되었다.

 

묵화(墨畵)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 위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냈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전생에 이런 경험을 한 늙은 노파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풍경이라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았다. 문학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즈음 외갓집은 더 이상 소를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외양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빈 외양간에 서서 이제는 없는 소들을 상상하곤 했다. 소가 없어도 거기에는 소가 있던 풍경이 겹쳐져 있었다. 빈 외양간을 보며 나는 부재의 풍경들을 상상했다. 봄에 여름이 겹쳐지고, 일곱 살의 내가 스무 살인 나와 겹쳐졌다. 부재의 풍경들을 내 안에 포개다 보면 언젠가 내 삶도 풍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빈 외양간을 보며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소띠인 게 좋아졌다. 나는 발잔등이 부어도 말없이 물을 마시는 저 소처럼 늙고 싶다. 그저 눈만 끔뻑끔뻑하면서. 그건 시시한 삶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하루의 노고 끝에 오는 적막을 같이 견뎌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참, 이제 나는 동물들이 띠 순서를 정하기 위해 달리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소가 2등을 할 리가 없다. 범도 있고 말도 있는데 말이다.

조선일보 소설가 윤성희

 

01.02 어느 ‘대깨문’의 일기

‘환상의 콤비’가 될 수 있었던 문 대통령과 열성 지지자들
맹목적 지지와 거듭된 실정이 서로를 해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 극성 지지자를 뜻하는 ‘문빠’ 혹은 ‘대깨문’은 이 정권 내내 많은 이들에게 공포 혹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는 ‘인증서’를 받은 후 이들은 현실 세계와 온라인을 가리지 않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양념질’을 했다.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찬양을 강요하고,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에겐 테러를 일삼았다. 어느 반찬 가게 주인은 대통령에게 “경기가 거지 같다”고 한마디 했다가 마녀사냥을 당했다. 한 친정부 성향 잡지 편집장은 페이스북에 “덤벼라, 문빠들”이라고 썼다가 불매운동을 맞고 “노여움을 거둬달라”고 백기 투항한 뒤 회사를 떠났다. 잡지 표지에 실린 대통령 사진이 지지자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고작 그런 이유였다.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보고서를 냈다가 집단 린치에 시달린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몇 달간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토로했다. 온라인에서도 지지자들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와 맘카페 등을 장악한 채 기사 댓글에 좌표를 찍어 추천 수를 조작하거나 SNS로 몰려가 무더기로 악플을 달았다. 그들 스스로는 대통령의 든든한 우군이자 ‘깨시민’이라고 여겼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광신도 혹은 홍위병의 광기를 봤다.

 

대통령의 임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하늘을 찌를 듯하던 ‘대깨문’의 위세도 예전만 못해졌다. 전·현직 민주당 의원들이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갈등에서 윤 총장 편에 섰고, 최장집·강준만·홍세화 등 진보계 원로들은 집권 세력을 향해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싸가지 없는 ‘민주건달'들이라고 쏘아붙였다. 민주당 2중대로 불렸던 정의당조차 공수처법과 가덕도 신공항에 대해 “명분도 실리도 없다”고 비판했다. 다들 ‘대깨문’ 눈치 보느라 숨죽였던 정권 초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결국 이 정부의 거듭된 실정(失政) 때문일 것이다. 소득 주도 성장, 탈원전, 일자리, 저출산, 남북 관계, 검찰 개혁, 사회 통합, 방역 등 어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 보니 지지자들조차 이 정부의 업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걸 마땅히 찾지 못한다. 하다 못해 집권 4년이 다 되도록 ‘세월호의 진실’조차 인양되지 않았다. 부동산 정책 실패는 너무나 처참해 웬만한 지지자뿐 아니라 대통령 본인조차 입을 닫았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현실과 온라인 세상에서 점점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은 “임기 초에는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지만, 요즘엔 아직도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한때 대통령 찬양으로 가득했던 여러 사이트에는 대통령과 지지자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넘쳐난다. 지지자들 스스로 만들어 자랑스럽게 사용했던 ‘대깨문’이라는 용어는 이제 멸칭이 됐다.

 

강력한 지지 기반은 언제나 정치인에게 최고의 자산이고, 문 대통령과 지지자들은 ‘환상의 콤비’처럼 여러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맹목적인 지지자들에게 취해 잘못된 길만 골라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고, 지지자들은 대통령만 믿고 있다 정말로 머리가 깨질 처지가 됐다. 얼마 전 누가 보내준 ‘대깨문의 일기’는 이렇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전세를 살던 대깨문 김모씨는 종부세 인상 뉴스에 투기꾼 놈들 잘됐다며 박장대소를 했다. 5개월 후 전셋집 재계약 날 월세 200만원을 내라는 집주인 말에 영문도 모르고 경기도로 쫓겨나게 됐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빨간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그의 이어폰에선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흐르고 있다.” 너무 현실적이라 더 안타깝다.

조선일보 최규민 기자

 

01.02  해가 뜨려면 저녁놀이 져야 하듯

‘저녁노을이 종소리로 울릴 때, 나는 비로소 땀이 노동이 되고, 눈물이 사랑이 되는 비밀을 알았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詩)는 이어령의 것입니다. ‘종이 다시 울려면 바다의 침묵이 있어야 하고, 내일 해가 다시 뜨려면 날마다 저녁노을이 져야 하듯이, 내가 웃으려면 오늘 울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라는 대목에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시대를 비평하고 미래를 예견해온 지성인 이어령이 이렇듯 감성적인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어령 선생에게 놀란 적이 또 있습니다. 아직 암이 발병하기 전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자기더러 지성이니 석학이니 하지만 수학과 셈은 젬병이라고 털어놓더군요. 특히 외국 출장을 가면 양복 주머니에 매일같이 동전이 수북이 쌓였다고 합니다. 셈이 서툴고 귀찮으니 물건을 살 때 무조건 지폐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왔기 때문이죠. 한번은 동전 꾸러미를 호텔 방에 던져놓고 잠시 나갔다 왔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답니다. 청소부가 팁인 줄 알고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면 수학에 매진하겠노라 해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가장 큰 ‘반전’은 아내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입니다. 함경도 태생으로 이어령과 서울대 국문과 동기인 그녀는, 충청도 양반집에 시집왔다가 남한엔 ‘소박맞다’는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어리둥절했다고 합니다. “내 발로 나가면 나갔지 왜 쫓겨나요?” 천하의 이어령도 꼼짝 못 하는 사람이 아마 강 관장이었을 겁니다. “저 양반은 발이 땅에서 동동 떠 있어. 전구도 하나 갈 줄 모른다니까요” 하며 껄껄 웃던 이 여인이 한 살 연하의 남편을 한국 지성의 큰 산맥으로 우뚝 서게 한 진짜 주역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사진작가 김아타가 이어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갔다고 합니다. 이 선생은 “그게 나의 영정사진이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생의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내일의 해가 뜨려면 저녁놀이 붉게 져야 해. 슬퍼할 게 뭐 있어. 그게 섭리인 걸.” 여전히 호기로운 남편을 무연히 바라보던 아내의 표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주말 섹션을 맡았다고 하니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님이 경상도 말로 ‘아무튼’이 ‘우얬든동’이라고 문자를 보내오셨네요. 우얬든동,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선일보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세밑, 영정사진을 찍었다… 이어령 “죽음 코앞까지 글 쓸 것”

#암 투병 중인 노(老)학자가 마루에 쪼그려 앉아 발톱을 깎다가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렸다. 멍들고 이지러져 사라지다시피 한 새끼발톱, 그 가여운 발가락을 보고 있자니 회한이 밀려왔다. “이 무겁고 미련한 몸뚱이를 짊어지고 80년을 달려오느라 니가 얼마나 힘들었느냐. 나는 왜 이제야 너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냐.”

 

#햇볕 내리쬐던 가을날, 노인은 집 뜨락에 날아든 참새를 보았다. 어릴 적 동네 개구쟁이들과 쇠꼬챙이로 꿰어 구워 먹던 참새였다. 이 작은 생명을, 한 폭의 ‘날아다니는 수묵화’와도 같은 저 어여쁜 새를 뜨거운 불에 구워 먹었다니···. 종종걸음 치는 새를 눈길로 좇던 노인은 종이에 연필로 참새를 그렸다. 그리고 썼다. ‘시든 잔디밭, 날아든 참새를 보고, 눈물 한방울.’

 

▲마지막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웠을 때 이어령은 작은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참새 한 마리를 보고, 발톱을 깎다가, 코 푼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다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 소회를 짧은 글로 적고 간혹 그림도 그렸다. 췌장암 투병 중 올해 미수를 맞은 이어령은 "어떤 고통이 와도 글을 쓰고 싶다. 그 의지가 나를 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 “죽음이 목전에 와도 글을 쓰겠다”

췌장암 투병 중인 이어령(88) 선생을 만난 건 지난 10월 말이다.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체중이 50㎏대로 내려왔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해온 그는 살아갈 날, 아니 견딜 수 있는 날들이 6개월에서 3개월, 다시 1개월로 줄어들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최근 분신과 다름없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의 문을 닫았다.

 

1주일에 한 번 기(氣) 치료만 받는다는 그가 “심심할 때마다 병상에서 끄적였다”는 낙서장을 가져왔다. 시 같고 짧은 산문 같은 글들이 거기 있었다. 일기 쓰듯 매일 낙서를 하다 ‘눈물 한 방울’이라는 다섯 글자를 떠올렸다고 했다. “늙으니 춤을 출 수 있나, 남을 대신해 노동을 할 수 있나. 늙고 병든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회한의 눈물 담긴 시(詩) 한 줄뿐이더군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을 펴낸 바 있는 이어령이 새해 시제(詩題)로 삼은 ‘눈물 한 방울’은 병상 위에서 사위어가는 한 노인의 푸념, 넋두리가 아니다. ‘디지로그’ ‘생명자본’ 등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해온 이 석학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화두가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어요.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눈물, 즉 박애(fraternity)예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어요. 대한민국만 해도 적폐 청산으로, 전염병으로, 남북 문제로 나라가 엉망이 됐지만 독재를 이기는 건 주먹이 아니라 보자기였듯이 우리에겐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절실합니다.”

 

▲이어령 선생이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지난해 10월부터 두 달간 선생을 4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장련성 기자

 

프랑스 학자이자 마르크시스트인 자크 아탈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부른 것이 이기적 생존 경제라면 이제 인류는 이타적 생명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령은 그보다 10년을 앞서 ‘생명이 자본이다’ ‘정보화 다음은 생명화 시대’라고 선언했다.

 

“나는 눈물 없는 자유와 평등이 인류의 문명을 초토화시켰다고 봐요. 우리는 자유를 외치지만 코로나19는 인간이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줬지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릴 보고 비웃어요. ‘너희들은 짐승이야. 까불지마. 나만도 못해. 난 반생명 반물질인데도 너희들이 나한테 지잖아? 인간의 위대한 문명이 한낱 미물에 의해 티끌처럼 사라지잖아?’ 하고 말이죠.”

 

이어령은 오늘의 재앙을 끝내는 길, 몸과 더불어 영혼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눈물을 갈구하는지는 최근의 트로트 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나 유발 하라리 같은 지식인들이 외치는 백마디 말이 트로트 한 곡이 주는 위로를 당하지 못해요. 무대 위 가수의 노래를 듣고 우는 객석의 청중을 보고 시청자들이 다시 울지요. ‘아직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막간 세상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에···. 분노와 증오, 저주의 말이 넘쳐나는 시대, 누군가는 바보 소리를 들을지라도 날카롭게 찔리고 베인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어령의 ‘눈물족자’를 그림으로 그려보겠다고 한 건 화가 김병종(67.서울대 명예교수)이다. 6년 전 ‘생명 그리고 동행’이란 제목의 시화전을 이어령과 함께한 그는 “선생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게 될 흔적을 예술로 승화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주말’ 연재를 제안하자 이어령이 빙그레 웃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과 연재를요?” 다만, 죽음이 목전에 오더라도 펜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글을 쓸 수 있다면, 성경의 욥처럼 죽는 날까지 반석 위에 이 고통을 새길 수 있어요. 그 의지가 내겐 혈청제예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요.” 세밑이던 29일, 그는 영정사진을 찍었다.

 

◇ 이어령은 누구?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으로, 시인이자 문화부 장관으로 종횡무진 활약한 한국 지성의 큰 산맥이다. 스물두 살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등단, 서정주 등 문학계 거물들과 논쟁하며 저항문학을 탄생시킨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이 자본이다’ 등 숱한 명저들을 통해 급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굴렁쇠 소년’을 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01.07 피의 보복 1721년, 새 인재 등용 1781년… 올해는 어떤 신축년 될까

경종 1년 정권 잡은 소론, 대대적인 정치보복 ‘피바람’
정조 5년 싱크탱크 규장각 세우고 유능한 인재 발탁
지도자 비전과 국가경영 능력에 따라 파국·도약 갈라져

올해는 신축년(辛丑年)이다. 조선 역사에서 신축년은 아홉 번 있었다. 1421년(세종 3년), 1481년(성종 12년), 1541년(중종 36년), 1601년(선조 34년), 1661년(현종 2년), 1721년(경종 1년), 1781년(정조 5년), 1841년(헌종 7년), 1901년(고종 38년)이다. 이 중에서 1721년과 1781년을 살펴본다.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신축년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이철원

 

1721년 신축년엔 ‘신임옥사’라고 하는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소론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듬해인 임인년(1722년)까지 8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노론 숙청이 일어났다. 실록을 보면, 1721년 8월 당시 영의정이었던 노론의 김창집은 갑자기 왕의 이복동생인 연잉군(나중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려 한다.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밖에 안 된 34세 젊은 국왕의 건강 문제와 아들 없음을 이유로 대권 후보자를 정해놓자는 이 요청을 경종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생모 장희빈의 죽음을 어려서 목도한 경종에게는 영의정과 좌의정을 비롯해 온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 신하들과 맞서 싸울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사태를 반전시킬 기회는 두 달 후에 왔다. 새로 책봉된 세제에게 국가 사무를 대신 처리하라는 왕명을 놓고 신하들은 고민에 빠졌다. 김창집 등 노론 신하들은 ‘대리청정 절목’ 등을 올리는 등 연잉군으로의 권력 이양을 기정사실화했다. 이 대목은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전위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를 연상시킨다. 민무구 형제는 전위 선언이 왕의 ‘정치적 함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도, 양녕대군으로의 전위를 서둘렀다.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하나같이 눈먼 사람이 된다.

 

소론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소론의 김일경은 국왕의 구언(求言) 요청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김창집 등이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탄핵했다. “삼강 중에 으뜸이 군위신강(君爲臣綱)이고 오륜 중 최고는 군신유의(君臣有義)인데” 노론 신하들이 불충의 큰 죄를 짓고 있다고 비판했다. 벼르고 있던 경종은 그 탄핵을 받아들였고, 김창집 등 노론 대신들은 권좌에서 밀려났다. 다음 해(임인년)에는 아예 국왕 시해 음모라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대다수 노론 신하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1721년 신축년의 정권 변동(換局·환국)은 정치의 중심이 사라진 가운데 일어났다. 당시 경종은 인재를 뽑거나 키우는 노력, 대립하는 당파를 중재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가뭄 피해가 극심했지만 민생을 살피는 정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당시 정치 세력은 오로지 대권을 차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해에 일어난 전국 각지의 민란은 정치 실종의 결과였다.

 

또 하나의 신축년은 1781년(정조 5년)이다. 이해는 경종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왕위에 오른 지 5년째인 정조는 정치 보복 요구를 최대한 억제했다. 영의정 서명선이 왕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비난한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2월). 당시 정치적으로 실각한 홍국영 지지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언관들에게도 “지금의 급무는 진정하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鎭安]”이라며 다독였다. 정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사안들이 어전 회의에 올라오는 것을 최소화했다. 대신 경상도 지역 수재 대책 마련 등 민생 문제로 의제를 돌렸다.

 

이 시기 정조가 주력을 기울인 것은 인재 양성이다. 그는 문신을 선발하는 시험을 친히 주관하고, 무예 인재 선발 방안을 마련케 했다(4월). 소외된 서북쪽(평안도 지역) 인재들을 정책적으로 등용했다(6월). 무엇보다 규장각 전용 도서관을 세워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게 했다(5월). 그때까지 왕실 도서관에 불과하던 규장각이 명실상부한 싱크탱크로 거듭난 것은 이러한 노력에 힘입었다. 초계문신제라는 공무원 재교육 시스템을 도입해서(2월) 젊고 재능 있는 인재를 발탁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정약용 등 인재 총 138명이 초계문신 과정을 거쳐 유능한 일꾼으로 성장한 것은 이미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무엇이 두 신축년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1721년 한 해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극심한 정치 보복으로 얼룩졌다. 그 이듬해에 초래된 역사상 보기 드문 정치 숙청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1781년의 신축년은 젊은 인재들을 꿈꾸게 한 미래 준비의 시간이었다. 지도자의 비전과 국가 경영 능력에 따라 한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기도 하고, 도약의 기회를 맞기도 한다는 것을 실록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조선일보 박현모 여주대 교수

 

01.08 손재형은 왜 세한도를 지키지 못했나

가슴 뜨거웠던 한 사내의 삶과 그의 애장품을 생각하며 새해 첫 주를 맞았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컬렉터이자 뛰어난 서예가였고 정치에 투신했던 소전 손재형(1903~1981) 얘기다. 지난해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의 ‘세한도(歲寒圖)’ 기증 소식을 취재하면서 그에 대해 궁금증이 커졌다.

 

/20세기 중반 촬영한 소전 손재형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이 걸작의 파란만장한 소장사(史)에서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간 세한도를 되찾아온 주인공이다. 1943년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도쿄로 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도쿄는 밤낮 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손재형은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쓰카 집을 매일 찾아가 “세한도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한다”고 애원했다. 100여일 만에 후지쓰카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세한도를 내주었다. 그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한 줌의 재로 변했을지 모른다. 석 달 뒤 후지쓰카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널리 알려진 얘기. 이후 손재형은 정치에 참여하면서 소장품을 저당 잡히고, 세한도는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 소유가 된 뒤 아들 손창근 선생에 의해 국민 품에 안겼다. 우리나라 문화재 역사에 길이 남을 경사다. 그런데 한편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목숨 걸고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은 왜 끝까지 애장품을 지키지 못했을까.

 

/추사 김정희 '세한도'. 그림: 23.9x70.4cm, 글씨: 23.9x37.8cm. /국립중앙박물관

 

손재형은 전남 진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재력이 상당했던 할아버지 손병익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다. 양정고보 시절부터 추사 작품에 심취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추사의 ‘죽로지실(竹爐之室)’을 천원에 낙찰받았다. 당시 경성에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그가 학생 모자를 쓰고 광화문 비각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알아보고 골동 중개인들이 따라 나섰을 정도”(월전 장우성 회고록)로 일찍이 수집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당대 최고 서예가인 김돈희와 이한복에게 글씨를 배우면서 추사의 서화에 더 몰두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도 글씨체를 갈고닦아 개성적인 소전체를 완성했다. 우리가 쓰는 ‘서예’라는 용어도 그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열정적인 컬렉터였다. 195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100주기 전람회 출품작 중 절반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을 거치면서 반평생 모은 컬렉션이 흩어지게 된다. 셋째 아들인 손홍 진도고등학교 이사장이 자세한 얘기를 들려줬다. “자유당 시절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면서 이미 자금을 많이 썼고 1960년 선거에 또 나서면서 돈이 급박해졌다. 풍랑을 맞아 진도에서만 선거가 열흘 연기되는 바람에 급전이 필요해 세한도를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혔다. 선거만 끝나면 되찾아올 생각이었지만 낙선했다. 갖고 있던 목포의 극장과 서울 효자동 집, 배와 염전까지 내놓고 급한 불을 끈 뒤 찾으러 갔지만 이미 그림은 일곱 사람을 거쳐 새 주인에게 넘어간 뒤였다.”

 

아들은 “세한도가 넘어간 뒤 아버지는 골동에 대한 애착을 잃었다”며 “누가 와서 감정해달라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같은 명품이 호암미술관으로 흘러간다. 이병철 회장에 이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부가 30대 나이에 최초로 구입한 미술품이 손재형의 소장품이었다. “정치에 입문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분신처럼 여겼던 세한도도 지켰을 테고.” 다행히 작품은 눈 밝은 주인을 만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됐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01.13 김치 훔치러 왔는데 문 열어주나

‘김치 따귀’는 막장 드라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김치를 자국 문화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황당한 ‘김치 공정(工程)’이 노골화하자,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나섰다. “김치를 중국 염장 채소 ‘파오차이’(泡菜)로 번역한 문화체육관광부 훈령 제427호를 바로잡아 달라”고 관계 부처에 11일 요청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한다고 공식 인정하면 안 되듯, 중국이 김치를 ‘파오차이’라 칭한다고 이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부 태도가 안이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문체부가 제정한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 지침’(영어·중국·일본어)에 따르면 “중국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음식명의 관용적 표기는 그대로 인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 예시로 ‘김치찌개’를 ‘泡菜湯’(파오차이탕)이라 번역해놓은 것이 문제가 됐다. 정부가 앞장서 ‘김치 공정’의 구실을 준 셈이 됐기 때문이다. 파오차이는 중국 쓰촨 지역 채소 절임으로, 김치와는 별개 음식이다. 논란이 거세지자 문체부는 이날 해명 자료를 내 “향후 김치의 중국어 번역에 대한 국민 정서 등을 고려해 농림축산식품부 및 전문가 협의를 통해 훈령을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문체부 관계자는 “당시에는 관용적 표현이라 판단했으나 이제는 ‘독도’처럼 정책적 고려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파스타(Pasta)를 비빔국수, 피자(Pizza)를 빈대떡이라고 표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김치는 그저 김치다. 영어 번역으로도 ‘Kimchi’일 따름이다. 한국외대 강준영 교수는 “설명 편의를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고유명사까지 양보할 필요가 있느냐”며 “중국의 반칙이 ‘김치’에 그치지 않을 것이기에 이번에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중국인은 김치뿐 아니라 최근 한복과 판소리 역시 중국 고유 문화라는 억지 주장을 펴 논란을 빚었다.

 

김치 종주국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의 대처가 너무 느긋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국 관영 매체 환구시보는 지난해 11월 “중국 김치 제조법이 국제 김치 시장의 기준이 됐고 한국이 굴욕당했다”는 거짓 기사를 내보내고,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 바이두 백과사전이 “한국 김치는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하는 사실도 적발됐다. 정부 대신 민간이 오류를 바로잡고 있다. 한 네티즌은 “유형·무형 문화재도 국력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고 썼다. 넋 놓고 있다간 또 따귀를 맞게 된다.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01.14  "韓 진보, 민주주의서 자라나지 않았다"

4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를 만났다. 올해 한국 나이로 102세다. 1920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정권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지금까지 몸소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왔다. 궁금했다. ‘100년의 눈, 100년의 인생’으로 바라보면 보일까.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 돼버린 ‘진보와 보수의 무조건적 대립과 갈등’. 그에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혜안을 물었다.  

좌파냐 우파냐 흑백논리는 안돼
냉전시대식 사고가 낳은 잔유물
현실에는 100% 흑도 백도 없다
선진국가, 진보·보수 공존 경쟁

 

한국 사회가 너무 시끄럽다. ‘100년의 눈’으로 바라보면 근본 이유가 뭔가.   

“한마디로 말하면 ‘흑백 논리’ 때문이다.” 

 

흑백 논리, 더 구체적으로 풀어달라.   

“물리학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빛의 삼원색이 있다. 빨강, 녹색, 파랑이다. 삼원색이 꼭대기로 올라가면 삼각형의 정점이 된다. 그 꼭대기를 ‘백색(白色)’이라고 한다. 그런데 꼭대기의 백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그 반대도 똑같다.”

 

그 반대는 뭔가.     

“삼원색이 아래로 좁혀지면서 쭉 내려간다. 그럼 아무 색도 없는 ‘흑(黑)’이 된다. 백(白)은 모든 게 다 있는 꼭대기이고, 흑(黑)은 아무 색도 없는 바닥의 끝이다. 그런데 백과 흑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 실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없는 색이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건 뭔가.    

“회색이다. 꼭대기 백에서 출발해 바닥의 흑으로 가는 중간에는 회색만 있다. 백에 가까운 회색, 아니면 흑에 가까운 회색만 있을 뿐이다. 그럼 우리는 모두 어디에 있는가. 중간에 있다. 그런데 흑백 논리에 빠진 사람은 그걸 못 본다. 백이냐, 흑이냐. 그것만 본다.“

  

김 교수는 예를 하나 들었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더라. ‘김형석 교수는 존경할 만하다. 우리가 뒤따라 갈 만한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완전한 사람이다. 그런데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보통은 부족한 게 더 많다. 또 누가 나쁘다고 하면 100에 대한 0으로 나쁜 사람은 없다. 좋은 게 하나도 없는 사람도 없고, 나쁜 게 하나도 없는 사람도 없다. 우리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에서는 어떤가.  

“여당 사람들은 우리 편이 하는 건 선(善)이고, 야당이 하는 건 악(惡)이라고 본다. 똑같은 일도 우리가 하면 선이고, 상대방이 하면 악이다. 너희가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가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0과 100은 존재하지 않는다. 40과 60중에 더 나은 걸 택할 뿐이다. 흑백 논리에 빠지면 이걸 못 본다.”

 

한국의 현대사 100년을 몸소 체험했다. 그런 흑백 논리의 뿌리가 뭔가.    

“나는 해방을 맞은 1945년부터 47년까지 북한의 평양에서 살았다. 그때 2년간 공산주의 치하를 직접 경험했다. 그건 흑백 논리의 사회였다. 우리와 같으면 되고, 우리와 다르면 안 되는 세상이었다. 거기에는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은 있어도, 미소를 짓는 사람은 없었다.”

 

억지웃음은 있어도 미소는 없었다. 왜 그런가. 

“서로 경계하고 서로 배척하니까. 독일 통일 전이었다. 1962년에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간 적이 있다.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관광이 가능했다. 동독 사람들 얼굴에도 미소가 없더라. 흑백 논리의 사회는 분열은 있어도 화합은 없다.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도 흑백 논리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런 흑백 논리가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냉전 시대가 뭔가. 강의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적대시하는 사회다. 하나는 남고, 나머지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 사실 그로 인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냉전 시대는 없어졌다. 더 이상 좌파와 우파로 나뉘지 않는다. 좌파는 이제 진보로 남고, 우파는 보수로 남게 됐다.”  
 

‘좌파와 우파’랑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다른가.   

“모든 선진국가를 보라. 흑백 논리의 좌우 대립은 없어졌다. 대신 진보와 보수가 함께 살게 됐다. 더 이상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어야 하는 세상이 아니게 됐다. 같이 살면서 누가 더 앞서느냐 경쟁하는 사회가 됐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좌만 남지, 우는 있을 수가 없다.”

 

한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렸지만 서로 적대시하지 않나. 마치 냉전 시대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의 진보 세력는 주로 운동권 출신이다. 군사정권하에서 주사파 혹은 사회주의 혁명론에 젖줄을 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라난 진보가 아니다. 냉전 시대 이후, 그러니까 선진국가에서 자라난 진보가 아니다. 그들의 사고는 아직도 냉전 시대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그건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그걸 극복하는 해법은 뭔가.   

“그 열쇠가 영어 문화권의 앵글로 색슨 사회에 있다. 그들은 600년 전부터 경험주의 사상을 가지고 살아왔다. 거기에는 흑백 논리가 없다. 선해도 비교적 선하고, 악해도 비교적 악하다. 왜 그렇겠나. 경험주의는 실제 우리의 삶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백도 없고 흑도 없다. 회색만 있다. 서로 더 나은 회색이 되기 위해 경쟁할 따름이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결법은 투쟁이 아니라 대화다. 의회민주주의는 대화를 기본으로 한다.”

 
김 교수는 “영국 계통 사람들은 대화를 하고, 독일이나 프랑스 계통은 토론을 하고, 공산주의는 투쟁을 한다”고 강조했다. “환자가 있을 때 영국 사람은 약을 먼저 준다. 그래도 안 되면 주사를 놓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한다. 이게 경험주의 사회의 정치관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사람은 토론을 통해 좀 더 빠른 걸 선택한다. 그래서 먼저 주사를 놓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한다. 공산주의는 다르다. 그들은 처음부터 수술을 한다.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가 ‘혁명’이다. 문재인 정부도 ‘촛불 혁명’을 내세운다. 그동안 많은 정책을 내놓지 않았나. 그게 왜 현실에서 먹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수술을 자꾸 하면 어찌 되나. 

“환자가 마침내 죽고 만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가 무너졌다. 남이 무너뜨린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 무너졌다. 19세기는 좌파와 우파 중 하나만 남으라는 절대주의 사회였다. 20세기 중반에는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며 같이 가는 상대주의 사회가 됐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건가. 종교와 정치와 민족이 서로 달라도 여럿이 함께 사는 사회, 즉 다원주의 사회가 올 거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권력만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수 의석을 가졌다고 뭐든지 힘으로 된다는 생각, 버려야 한다. 그건 권력 사회다. 군사 정권이 그랬다. 그런데 지금 여당도 그렇지 않나. 본질적으로 국민을 사랑하는 것보다 정권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김형석 교수는 누구

김형석 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는 시인 윤동주와 같은 반 친구였다. 학창 시절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서 감명을 받기도 했다.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조치 대학 재학 시절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동창이었다.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로 꼽힌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했다. 1960~70년대에는 사색과 서정을 아우르는 문체로 『고독이라는 병』『영원과 사랑의 대화』등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최근에는 『백년을 살아보니』『예수』『김형석 교수의 백세건강』등을 출간했다.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01.15  스님에 "당신 지옥 갈것"···3000명 모은 최바울 종말론 정체  

 #풍경1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코로나 비상 시국에 약 3000명이 모여서 1박 2일간 집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인터콥 선교회 소속의  ‘BTJ열방센터’ 입니다. 방역 차원에서 50인 이상 모임이 금지된 상황이었을 때도 무려 2797명(중앙방역대책본부가 파악한 인원)이 모였습니다. 게다가 BTJ열방센터 방문자 중 662명(13일 기준)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선교단체 인터콥을 설립한 최바울 선교사는 종말론을 강조한다. [유투브 캡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BTJ열방센터 방문자의 상당수가 자신이 다니던 각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럼 코로나 집단감염이 각 교회를 통해 더 확산될 위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 엄중한 코로나 시국에 어떻게 2797명이나 모여서 집회를 할 수가 있었을까요. 집회 참가자들도 코로나 감염의 위험성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이유가 있습니다.  
 
#풍경2
개신교계는 최바울 선교사가 창시한 선교 단체인 인터콥이 ‘기독교 시온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봅니다. BTJ열방센터의 ‘BTJ’도 ‘백 투 더 예루살렘(Back to the Jerusalem)’의 약자입니다. 이들은 1948년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한 것이 성경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최 선교사는 신약성경 중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온갖 비유와 상징과 숫자가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분위기가 전편에 깔려 있고 예언적 성향이 강한 계시 문학입니다.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신앙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불거집니다. 최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근거해 세상 끝날이, 예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줄기차게 강조합니다

 

/선교단체 인터콥 회원들이 집회에 참석해 양팔을 든 채 기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최 선교사가 설교에서 주장한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우리의 DNA(유전자) 조작이 가능하다”라거나 “빌 게이츠가 투자한 게 DNA 백신이다. 백신을 맞으면 그들의 노예가 된다”는 발언이 모두 종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입니다.  
 
#풍경3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코로나 시국에, 다들 몸을 사리는 와중에, 어떻게 BTJ열방센터 집회에 2797명이나 모일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최 선교사의 종말론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날이, 예수의 재림이 코앞에 닥친 상황인데, 이까짓 코로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코로나를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환란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최 선교사의 해석과 관점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요한계시록’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기독교 이단 단체들이 자주 써먹는 ‘단골 메뉴’이기 때문입니다. 신ㆍ구약 성경을 통틀어 신천지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도 ‘요한계시록’입니다. 신천지 측은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는 곳은 오직 신천지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신천지 역시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말세론과 예수의 재림을 주장합니다. 이외에도 기독교 이단사의 숱한 단체가 말세와 구원의 논리를 펼칠 때 ‘요한계시록’을 중점적으로 써먹었습니다.  
 

/인터콥은 이스라엘과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해외선교를 하다가 분란을 빚기도 했다. 인터콥 집회 장면. [중앙포토]

 

 

#풍경4
인도 북부의 보드가야에는 마하보디 사원이 있습니다. 이 사원에는 오래된 보리수가 한 그루 있습니다. 2600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마하보디 사원은 불교 신자들에게는 ‘성지 중의 성지’로 꼽힙니다. 가보면 전 세계의 불교 신자들이 찾아와서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는 곳입니다.  
 
2014년 이곳에 한국인 대학생 3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마하보디 사원의 계단에 앉아서 기타를 치며 기독교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사원이 무너지길 기원하는 ‘땅 밟기’와 축복 기도까지 했습니다. 이웃 종교에 대한 존중은커녕, 오히려 ‘배타적 테러’를 가한 셈입니다. 이들을 알아본 한국인 스님이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말리자 대학생들은 “당신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인터콥 수련회에 참석한 학생들이었습니다.  

 

/최바울 선교사는 각종 설교에서 "마지막 때가 왔다"며 종말론을 유독 강조한다. [중앙포토

 

 

#풍경5
기독교의 본질과 지향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게 뭘까요.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예수입니다. 몸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에고의 눈, 이념의 눈, 교리의 눈, 신념의 눈으로 만든 모든 패러다임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 모든 우상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던 자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내 안의 틀, 내 안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우리는 무한한 그리스도의 속성 안으로 녹아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바울 선교사의 인터콥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때가 왔다. 마지막 때가 왔다”며 종말론과 예수의 재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강고한 패러다임을 오히려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걸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걸었던 길, 예수가 품었던 영성, 예수가 가리킨 지향. 그 모두로부터 인터콥은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경고했던 ‘우상 숭배’는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01.29  김형석 "100년 살아보니 알겠다, 절대 행복할수 없는 두 부류"

#풍경1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올해 102세가 됐습니다. 다들 ‘100세 시대’라지만, 지금 100세를 넘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소 조심스러웠습니다. 코로나 시국에다 연세가 있으셔서 ‘혹시라도’ 싶어 인터뷰 자리가 걱정되더군요
.  
 


이달 초 커피숍에서 만난 김 교수는 의외로 의연했습니다. 뭐랄까요. 1세기를 송두리째 관통한 사람의 ‘굵직한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삶에 대한 깊은 관조와 함께 말입니다. 지난 인터뷰에서는 ‘이 시대의 진보와 보수’를 다루었습니다. 이번에는 그에게 ‘행복’이란 두 글자를 물었습니다. 모든 이의 삶에서 화두가 되는 키워드이니까요. ‘100년 넘게 살아봤더니 다른 게 행복이 아니더라. 바로 이게 행복이더라.’ 그런 식의 답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풍경2

다들 찾습니다, 행복. 어떡하면 찾을 수 있습니까.    

“지금껏 살아보니 알겠더군요. 아무리 행복해지고 싶어도 행복해지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복하고 싶은데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누구입니까.      

“크게 보면 두 부류입니다. 우선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 가치가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으니까요. 가령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과연 행복하게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물건을 가지게 되면 오히려 불행해지고 말더군요.”

   

돈이나 권력, 혹은 명예를 좇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행복을 찾습니다.   

“솔직히 거기서 행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 명예욕은 기본적으로 소유욕입니다. 그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이 마릅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항상 허기진 채로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꼭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만족’입니다.”  

     
‘만족’을 알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는 사람은 만족을 압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더군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명예나 권력이나 재산을 거머쥘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불행해지더군요. 명예와 권력, 재산으로 인해 오히려 불행해지고 말더군요. 지금 우리 주위에도 그러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실감했습니다. 김형석 교수의 메시지는 참 묘한 매력이 있더군요. 언뜻 들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행간을 곰곰이 씹다 보면 확 달라집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진한 국물이 우러납니다. 그건 100년의 삶, 100년의 안목으로 우려낸 삶에 대한 묵직한 통찰이겠지요
.    
      

           
   #풍경3
행복하고 싶은데 행복할 수 없는 삶. 아, 그건 정말 비극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모르고 있는 걸까요. 내가 바로 그 비극의 주인공일 수 있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류를 물었습니다. 건너고 싶어도 행복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 그게 누구인지 말입니다.  
 
“두 번째는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뜻밖의 진단이었습니다. 다들 자신을 챙깁니다. 나 자신을 챙기고, 내 이익을 챙깁니다. 그걸 위해 삽니다. 왜냐고요? 그래야 내가 행복해지니까요. 그런데 김형석 교수는 이기주의와 행복은 공존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이기주의와 행복, 왜 공존이 불가능합니까. 

“이기주의자는 자신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인격을 못 가집니다. 인격이 뭔가요. 그건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선한 가치입니다. 이기주의자는 그걸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인격의 크기가 결국 자기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 그릇에 행복을 담는 겁니다. 이기주의자는 그릇이 작기에 담을 수 있는 행복도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끝에 김형석 교수는 자신의 경험담을 하나 꺼냈습니다.    
 
“제가 연세대 교수로 갈 때 몹시 가난했어요.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월급이 오르거나 보너스가 나오면 무척 좋아했어요. 동료 교수들도 다들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고생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이라는 사람이 자기 월급 올랐다고 좋아한 겁니다. 그건 교육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행복하질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행복은 공동체 의식이지, 단독자인 나만을 위한 게 행복이 아니더군요.”
 
김 교수는 자기가 먼저 큰 그릇이 되어야 큰 행복을 담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풍경4
김형석 교수는 최근 지방 출장차 김포공항에 갔습니다. 예약자들에게 발권 표를 다 나눠주는데 김 교수만 빠졌습니다. 문의를 했더니 항공사 직원이 “이상하다”며 급히 매니저를 불렀습니다. 달려온 매니저가 김 교수에게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컴퓨터상에 나이가 ‘1살’이라고 떴습니다. 1920년생인 김 교수는 올해 만으로 101세입니다. 컴퓨터가 두 자리 숫자만 읽게끔 설정돼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대한항공 비행기만 930번 이상 탔어요. 그런데 직원이 보니 1살짜리가 930번 비행기를 탄 겁니다. 사람들이 종종 물어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이상하죠. 저도 나이 생각이 없어져요. 내 나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1살이라고 하니 올해는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살려고요. 하하”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다들 100세 인생을 기대합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연세대 교수로 처음 갈 때 30대 중반이었어요. 그때는 환갑이 되고 정년이 되면 내 인생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인생을 두 단계로 봤어요. 30세까지는 교육을 받고, 나머지 30년은 직장에서 일한다. 그럼 인생이 끝난다.”

 

막상 살아보니 어땠습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가장 일을 많이 하고, 행복한 건 60세부터였어요. 내가 살아보니까 그랬습니다. 글도 더 잘 쓰게 되고, 사상도 올라가게 되고, 존경도 받게 되더군요. 사과나무를 키우면 제일 소중한 시기가 언제일까요. 열매 맺을 때입니다. 그게 60세부터입니다. 나는 늘 말합니다. 인생의 사회적 가치는 60부터 온다.”

         

그럼 60대 이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60을 넘어 90까지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회적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럼 90 이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되는 사람도 있고, 안 되는 사람도 있더군요. 주로 건강 때문입니다. 의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혈압, 당뇨, 치매는 주로 60세 이후에 찾아옵니다. 그걸 60, 70, 80세가 돼서 관리하려고 하니까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50세부터 잘 관리하면 됩니다. 그럼 90까지는 다 간다고 합니다. 90세까지는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의술이 발전하니까 40~50년 후에는 100세까지도 다들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요.”  

 
#풍경5
대화를 나눌수록 놀랍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지팡이를 짚지 않습니다. 제가 놀란 건 육체적 건강 때문만이 아닙니다. 100세 넘는 연세에도 정신력과 기억력, 사고력과 판단력이 놀랍습니다. 유연하고 열린 사고 역시 젊은이들 못지않습니다. ‘100세의 건강’ 못지 않게 ‘100세의 정신’도 궁금하더군요.    
             

100세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사람은 항상 공부를 해야 합니다. 뭐든지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늙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몸이 늙으면 정신이 따라서 늙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자기 노력에 따라 정신은 늙지 않습니다. 그때는 몸이 정신을 따라옵니다.” 

 

그때는 퇴직하고 한참이나 지난 뒤입니다. 공부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강연차 지방에 갈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럼 거기서 지방 유지들을 만납니다. 장관 지낸 사람, 교수 지낸 사람들도 만납니다. 이야기를 해보면 다들 나보다 정신이 늙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 봤습니다. 결국 장관직 끝내고, 정년퇴직하고 일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겠더군요. 일과 공부를 안 하면 몸도 마음도 빨리 늙습니다.”

 

일과 공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꼭 직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공부가 따로 있나요. 독서 하는 거죠. 취미 활동하는 거고요. 취미도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100년을 살아보니 알겠더군요. 일하는 사람이 건강하고, 노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있고, 건강은 일을 위해서 있습니다. 내 친구 중에 누가 가장 건강하냐. 같은 나이에 일이나 독서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가장 건강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겨울 공기가 상쾌했습니다. 참, 값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00세의 언덕’에서 우리들 각자에게 던져주는 지혜의 알갱이들이 말입니다. 누구에게는 30년 뒤, 누구에게는 50년 뒤, 또 누구에게는 70년 뒤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모두에게 오게 될 그 언덕에, 미리 서 볼 기회를 주고 있으니까요.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01.29  "당직사병이 아들" 지인에도 숨겼다…秋와 달랐던 그 엄마 1년

“하고 싶은 말, 많았죠. 그렇다고 제가 국회에 나갈 수 있나요, 기자를 부를 수가 있나요.” 

 

‘당직사병의 어머니’ A씨(53)는 1년 여간 가슴에 쌓아둔 말이 많다고 했다. 그의 아들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28)씨의 군 휴가 관련 의혹을 제기한 당직사병(27)이다. A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한 27일 경기도 과천 법무부 정부청사에선 추 전 장관의 이임식이 열렸다.

 

엄마는 아들이 '당직사병'인 줄 몰랐다

“군 복무 중 서씨가 휴가 복귀를 하지 않아 부대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아들의 증언으로 정치권과 사회는 떠들썩했다. 추 전 장관은 2019년 12월 법무부 장관 후보자 신분으로 열린 청문회에서 아들 관련 의혹이 제기되자 “외압을 행사할 이유도 없고, 하지도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엄마가 공인이어서 군대를 자원해서 간 아이”라고도 했다. “가족 신상털기”라고 항변했다.
 
추 전 장관이 자신의 아들을 지키고 있을 때 A씨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들이 뉴스에 나오는 ‘당직사병’이라는 사실을 지난해 7월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을 먼저 안 남편이 TV에 나오는 아들을 보며 말해줬다고 한다. A씨는“아들이 지난해 1학기가 끝나고 집에 내려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간 날이었다”며 “뉴스를 찾아보고 바로 전화했는데, 담담하게 ‘서울에 막 도착했다’고만 얘기하더라”고 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씨의 군 휴가 미복귀 의혹을 최초로 제기했던 당직병사 A씨가 지난해 10월 서울 송파구 동부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접수하고 있다. 뉴스1

 

엄마의 아들 걱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A씨는 “아들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했다. “TV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높은 사람에 관해 안 좋은 얘기를 했으니….”


A씨는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서울에 있지 말고 집에 내려와라. 아니면 내가 서울로 가겠다”고도 했지만, 아들은 늘 “걱정말라”고만 했다고 한다.

 

추 전 장관은 TV에 나와 아들을 지켰다. “제 아이는 군 복무를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히 했다”, “아이가 굉장히 화나고 슬퍼 눈물을 흘리고 있다.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9월 17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선 A씨의 아들을 언급했다. 추 전 장관은 “아들과 다른 중대 소속으로 이른바 ‘카더라’다”라며 “군인은 다른 중대 사람을 ‘이웃집 아저씨’라고 칭한다고 한다. 이웃집 아저씨의 오인과 추측을 기반으로 한 제보”라고 주장했다.
 

“내 아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나도 엄마다”

A씨는 추 전 장관이 아들을 지키는 발언과 보도를 모두 봤다고 했다. 아들이 당직사병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A씨가 할 수 있는 건  오전 8시부터 잠들기 전까지 뉴스를 보는 것이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로 포털에서 기사와 댓글을 찾아보는 게 일상이 되면서 시력도 나빠졌다.
 
그는 “추 전 장관도 엄마니까 아들을 보호하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면서도 “편을 들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우리 아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하느냐. 나도 엄마다”라고 말했다.
 

“아들에 피해 갈까 봐 댓글도 못 써” 

추 전 장관이 “그냥 소설이 아니고 장편소설”이라고 말하고, 서씨의 변호인단이 “당직사병의 모든 말이 허위 사실이다.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마치 경험한 것처럼 만들어 옮기는 전형”이라는 입장문을 배포할 때도 A씨는 지켜만 봐야 했다. A씨가 ‘일베 회원’이라는 허위사실도 돌았다. A씨는 “처음엔 일베가 뭔지도 몰랐다. 나중엔 ‘사실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댓글을 다냐’고 반박하는 댓글을 썼다 지웠다 했다”고 말했다. “혹시나 그 댓글이 아들한테 피해가 될까 봐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했다.
 
서울동부지검은 추 전 장관의 아들을 무혐의 처분했지만, 아들이 말한 내용은 모두 사실로 인정했다. 휴가 행정처리가 사후에 이뤄져 일반적이지 않았고, 추 전 장관의 보좌관이 군 간부에게 휴가와 관련해 연락한 사실도 드러났다.
 

아들 부패신고자 지위 인정받아  

/당직병사 A씨와 김영수 국방권익연구소장(전 국민권익위원회 국방담당 조사관)이 지난해 10월 12일 서울 송파구 동부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아들은 김영수 국방권익연구소장의 도움을 받아 국민권익위원회에 부패신고자로 인정해달라는 신고를 했고, 지난해 11월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권익위는 A씨의 아들이 공익신고자에 준한다고 판단했다. A씨는 “황희 의원이 ‘공범 세력이 있는지 규명해야 한다’는 글을 쓴 뒤 아들이 정말 힘들어하던 때에 김 소장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며 울먹였다.  
     
혼자 싸워야 했던 아들이 공익신고자로 인정받은 이후에야 A씨는 친한 지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뉴스에 나온 당직사병이 내 아들이야.” 행여나 아들이 다칠까 봐, 가족 외엔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02.01  강원래 “장애인 돼 겪은 삶보다 지난 1년이 더 힘들었다”

정부 방역 비판해 곤욕치른 댄스그룹 클론 출신 강원래

댄스그룹 클론 출신 강원래(52)씨가 지난달 “K팝은 세계 1등, 방역은 꼴찌”라는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지난 20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마련한 간담회에서 나온 그의 발언은 자영업자의 울분을 담은 것이었다. 2018년 서울 이태원에 주점을 연 그는 코로나가 덮친 지난 1년간 장사를 고작 20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문 성향 네티즌들의 비난이 폭주했고 그는 발언 하루 만에 “국민과 방역 관계자, 의료진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SNS에 올렸다. 설화(舌禍) 일주일 만에 만난 강씨는 “평생 먹을 욕을 이틀간 다 먹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비판하고자 한 건 과학적 근거도 전문성도 없이 희생양 찾기가 돼버린 사회적 거리 두기 정책”이라고 했다. 태풍급 삭풍이 몰아쳤던 지난 28일, 이태원역 근처 강씨의 가게에서 휠체어를 탄 그를 만났다

 

/이태원에 가게를 연 지 3년 차였던 2020년은 강원래씨에겐 악몽 같은 한 해였다. 그는 정부를 향해“사방을 막아버려 놓고는 어떻게 가야 할지 알려주지조차 않느냐”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할 말 했다'는 반응도 많았을 텐데?

“이태원 상인들은 ‘너무 착하게 얘기하면 아무도 우리 목소리에 관심 없다. 어디 화염병이라도 던지자’고 할 만큼 분노에 차 있다. 직장인들은 그 고통을 모른다. 예컨대 회사가 코로나 사태를 이유로 ‘회사 나오지 마라. 단 그 기간 월급은 못 준다. 세금도 각자 알아서 내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지난 1년간 우리가 그런 처지였다. 가게 문은 닫았지만 월세와 인건비 같은 고정비에 세금도 내야 했다. 우리는 지금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다.”

 

강씨는 2018년 이태원에 ‘문 나이트(Moon Night)’라는 주점을 열었다. 인생 첫 장사였다. 가게 이름은 90년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춤꾼들이 모여들었던 동명의 클럽에서 땄다. 박남정·이주노 같은 스타들이 춤사위를 자랑하던 그 시절 문 나이트는 룰라·듀스·영턱스클럽 같은 유명 그룹의 산실이기도 했다. 강씨는 “옛 문 나이트는 없어졌지만 댄스계의 ‘쎄시봉’ 같은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가게를 열었다”고 했다.

 

하지만 강씨는 2020년 한 해 내내 사실상 휴업해야 했다. 코로나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차원에서 유흥 업소는 수시로 집합 금지 명령 대상이 됐다. 식당, 카페 등과 달리 유흥 업소는 거리 두기 2단계부터 아예 영업 금지였다. 거리 두기가 완화됐던 작년 10월에도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 자발적으로 문을 닫았다. 강씨는 그 사이 월 880만원, 하루 30만원꼴 임대료는 꼬박꼬박 내야 했다. 그는 “작년 10월 이후부터는 보증금 1억원에서 월세는 삭감하고 있다. 앞으로 5개월이면 그마저 다 까먹는다”고 했다. 강씨는 결국 작년 11월 가게를 내놨다.

 

-자영업자의 피해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불가피한 면도 있지 않은가?

“이태원 상인들도 아이가 있고 부모님이 있다. 방역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정부가 하라는 대로 다 했다. 그래서 지금 확진자가 줄었나. 1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닥친 건 문을 연다는 기약 없는 또 다른 한 해다. 정부의 거리 두기 정책이 정말 똑똑한 전문가들이 모여서 만든 것인가 묻고 싶다. ‘아예 문을 닫으라'거나 ‘몇 시이후로는 모이지 말라’는 정도의 정책은 우리 같은 사람도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내일 모레까지만 기다려달라’ ‘2주만 더 참자’는 식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모르는 정부 당국자들을 향해 ‘(당신들도) 월급 안 받고 일해보라’고 항변하고 싶다.”

 

“정부 하라는대로 다 했지만 결국 보증금 1억마저 다 날리게 돼”

 

-이태원 클럽을 찾은 일부 젊은 층의 행태도 문제였는데?

“지난 5월 근처 한 클럽에 코로나 확진자가 다녀가면서 이태원은 깊은 낙인이 찍혔다. 이곳에서 30~40년 장사한 분들은 ‘이태원 가면 에이즈(AIDS) 걸린다’던 80년대 말~90년대 낙인 이후 최악의 사태라고 한다. 어떤 노력도 무용지물이었다. 술 마시는 곳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 많이 움직이는 곳인지 과학적으로 따지지 않고 나오는 ‘이태원발 코로나’라는 식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힘겨웠다.”

 

-정부가 어떻게 해야 했나?

“우리에겐 생존이 걸린 영업 제한을 하면서 정부는 명확한 근거나 분석을 제시한 적이 없다. 도대체 일반 식당과 유흥 주점, 지하철과 교회 등이 감염 위험 면에서 얼마나 다른가. 그저 어디선가 감염자가 나오면 ‘우리는 열심히 하는데 그 집단 때문’이라는 식의 남 탓, 희생양 찾기 아니었나. 차라리 대한민국 전체가 한 석 달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으면 지금쯤은 장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강씨는 “지난 한 해 구청 등에서 단속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나왔지만 피해 현장 조사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나는 그래도 집이라도 있어 길거리 나앉을 처지는 아니지만 7~8년씩 종업원으로 일하다 사채까지 빌려 개업한 젊은 친구들은 집세를 낼 수 없어 가게에서 먹고 자며 하루하루를 발버둥 치는 상황”이라고 했다.

 

“세계 최고 지도자 보유했다는 그들, 우리 방역 정책이 정말 최고라 생각하나”

 

-그런데도 왜 발언 하루 만에 사과를 했나?

“그날 간담회에서 서울 다른 지역 자영업자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감정이 격해졌다. 기약도 없이 장사하지 말라고만 하는 정부나 지자체의 ‘방역 정책’을 비판하려던 게 단어 선택을 잘못했다. 내 말 한마디 탓에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묻히고 (발언이) 정치적으로 해석될까 봐 걱정됐다. 외국 보상 방역 정책 등을 사례로 제시하며 더 똑똑하게 말했어야 했다.”

 

강씨가 사과 결심을 한 데는 “너 큰일 난다”는 지인들의 걱정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강씨는 KBS 제3 라디오 장애인 방송을 14년째 진행 중이다. 그는 2000년 11월 서울 강남의 한 사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좌회전하다 불법 유턴하던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당대의 댄스 스타가 하루아침에 두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장애인의 눈높이에서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고정 수입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강씨는 “짧지 않은 세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정치·종교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이번 일로 라디오 MC에서 잘릴까 봐 걱정하는 친구가 많았다”고 했다.

 

-비난 메시지를 얼마나 받았나?

“기사 댓글들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내 휴대폰에만 100건 넘는 메시지가 왔다.”

 

-어떤 내용이었나?

“단순한 욕설은 드물었다. ‘세계 최고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네가 뭔데…’ ‘대통령께서 나라를 얼마나 잘 이끌고 계신데 너까짓 게…’ ‘안철수 지지하지 말고 대통령님 사랑하라’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긴 메시지도 많았다. 광복 때부터 시작해 이승만은 잘못됐다며 대한민국 현대사 강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가게 이름이 왜 하필 문 나이트냐’며 시비 거는 이도 있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싶어 링크된 그들의 페이스북 페이지 등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진을 배경으로 하는 게시물이 많았다. ‘아 이런 사람들이 언론에서 말하는 대깨문인가’ 싶었다.”

 

-의사, 간호사란 분들의 비판은 없었나?

“한 번도 없었다.”

 

-사과하니 비난이 잦아들던가?

“한동안 계속됐다. 아내(김송)도 메시지 많이 받았다. ‘사과할 일 아니다’라는 격려나 응원도 많았다. 나한테 비난 메시지 보낸 사람들한테 과연 우리나라의 방역 정책이 세계 최고인지 묻고 싶다.”

 

강씨는 인터뷰 다음 날인 29일 소셜미디어에 중국 당나라의 재상 누사덕(婁師德)이 남긴 ‘타면자건(唾面自乾)’이라는 사자성어를 올렸다.’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강씨는 누사덕을 인용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침을 뱉은 것은 나에게 뭔가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 자리에서 침을 닦으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상대는 틀림없이 더욱 더 화를 낼 것이다. 침 같은 건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말라 버리니 그런 때는 웃으며 침을 받아 두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안철수 후보의 간담회였다는 점에서 정치적 해석도 있는데?

“주변 상인들이 ‘강원래씨나 홍석천씨 같은 이가 나서야 기사도 나오고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나갔다. 야당에 입당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도 하는데, 나는 정치의 정(政)을 한자로도 못 쓰는 사람이다. 전혀 관심 없다.”

 

“아내에게도 비난 메시지…난 정치의 정(政)자도 모른다”

 

-조국·추미애씨를 비판했던 가수 JK김동욱씨가 방송을 그만두게 됐다.

“그런 이유로 교체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 경험해보니….”

 

올해 쉰둘인 강씨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볼 때면 돋보기를 써야 한다. 하지만 댄스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이태원에 가게를 연 뒤 2019년 명지대에서 실용 무용 석사학위를 땄다. ‘K팝과 포인트 안무에 관한 고찰’이라는 석사 논문을 썼고 ‘대한민국 댄스뮤직 100년사’라는 책도 냈다. 박남정·이주노·룰라·김완선 등 현재 K팝 세대의 선배 세대를 인터뷰해 그 역사를 정리했다. 아내 김송씨는 “남편이 밤샘도 많이 했다”고 했다. 강씨는 올해 박사과정에 도전할 생각이다.

 

-정부·여당이 자영업자를 위한 영업손실보상법을 만든다는데, 가게를 다시 열 생각 있나?

“다시는 장사 안 한다. 쓸데없는 희망 고문에 더 이상 시달리기 싫다. 이제 5개월 뒤면 남은 보증금도 다 날아간다. 지금이라도 가게를 하겠다는 분이 있다면 임차료 5개월치 다 드릴 생각이다. 지난 20년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깨달았다. 일부러라도 많이 웃자는 것이다. 하지만 빈 가게를 하릴없이 지켜야 했던 지난 1년은 처음 장애인이 돼 맞닥뜨린 낯선 삶보다 더 힘들었다.”

조선일보 이길성 기자

 

02.02 살아보니 人生, 무승부더라

저는 1939년생 독거 할머니입니다. 선대로부터 조선일보 독자였고, 팔십줄 접어든 지금도 신문은 저의 가장 좋은 친구요 가족입니다.

 

보잘것없는 소포로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이것저것 정리하던 중 장롱 속에서 이 꾸러미를 발견했습니다. 문학소녀 시절 당대의 작가들께 습작을 보내고 받은 편지인데, 버리자니 아까워, 애독하는 조선일보에 무턱대고 보낸 것입니다.

 

/일러스트=이철원

 

저 살아온 얘기는 뭣 하시게. 초라한 여인의 일생이지요. 경남 밀양, 요즘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떵떵거리고 살았냐고요. 웬걸요. 해방 후 토지 개혁으로 땅은 죄다 빼앗기고요, 소작농들이 은행원 아버지를 북으로 끌고 가려 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지요.

 

한차례 회오리 지난 뒤 아버지는 읍내에 작은 정미소를 차렸어요. 병으로 세상 떠난 엄마 대신 대가족 건사할 새어머니 맞은 것도 그 무렵이지요. 새어머니는 열세 식구 아침밥을 다 해 먹이고 설거지까지 해야만 막내인 저를 학교에 보냈어요. 문학에 빠져든 게 그때부터예요. 책 읽고 글 쓸 땐 외롭지 않았으니. 시골에 살지만 이 생에 작은 발자국 하나 남겨야겠다, 다짐도 했지요.

 

마침 이복동생들이 학업 위해 부산으로 나가면서 저도 새어머니 굴레를 벗어났어요. 동생들 밥 해주는 틈틈이 이태준의 ‘소설작법'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공부했지요. 이호철·송병수 등 서울 작가들께 습작 한번 봐달라며 편지를 썼으니 참 당돌하지요? 그걸 휴지통에 안 버리고 일일이 답을 주셨으니 얼마나 큰 은덕인지요. 김정한 작가는 “이 실력으론 안 된다. 결혼해 착한 어머니 되는 게 상책이다” 면박을 주시면서도 “진주에서 박경리가 나왔으면 밀양에선 아무개가 나와야지” 하며 격려해 주셨지요. 그 가르침을 지상명령으로 여기고 열심을 다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필력은 나아지지 않고 한 해, 한 해 나이만 먹었어요.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올라와 한남동 직업학교에서 자수 기술자격 2급을 땄지요. 작은 수예점도 내고 어찌어찌 앞가림하며 살아가는데 동네 들락이던 ‘미제 장사 아줌마’가 중매를 섭니다. 아내와 사별한 남자가 있는데 알부자이니 고생은 안 할 거라며.

 

막상 시집을 가보니 알부자 아니고 빚 부자입니다. 아이들은 넷이나 되고요. 게다가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퇴직을 해서 제가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지요. 눈앞이 캄캄했지만, 살아봐야지 어쩌겠어요. 구멍가게 차리면 본전은 안 까먹는대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개포동에 열었는데, 글재주보단 돈 버는 재주가 있었는지 20년을 억척으로 꾸려서 네 아이 모두 대학에 보냈어요. 고생이야 말도 못 하죠. 허리가 다 망가졌는걸요. 장사 잘되니 가게를 빼라는 건물주와도 맹렬히 싸웠어요. 우리 식구 밥숟갈이 다 여기 붙었다, 송장 되기 전엔 못 나간다 버텼지요.

 

친엄마 잃은 설움 누구보다 잘 아니 아이들에겐 말 한마디, 표정 하나 함부로 짓지 않았어요. 어디서도 주눅들지 않게 따뜻이 입히고 먹이고요. 지금은 저마다 일가를 이뤄 명절 되면 감귤 한 상자씩 들고 찾아와요. 전화 목소리 시원찮으면 반백이 다 된 아들이 놀라서 “엄마~” 부르며 달려오고요. 참, 고맙지요.

 

남편 떠난 뒤 작은 셋집으로 이사했어요. 소파며 침대는 구청에 보내고, 밥솥이랑 옷가방만 들고 나왔어요. 가끔 지팡이 짚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는데, 앙상한 나무들 보고 있자니 옛일이 떠올라 혼자 웃어요. 시골 처녀가 겁도 없이 기차를 타고 광화문 신문사로 습작을 내러도 갔고요. 언양 산다는 오영수 선생 댁도 물어물어 찾아가고요. 무례하다 안 하시고 “아내가 장에 가 점심도 못 차려줬다”며 단편집 ‘고개’에 사인해 건네시던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그 책도 동봉합니다.

 

이호철 선생은 “이 탁한 서울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문학은 외로워야 하고, 행복보다는 불행의 산물입니다”라고 편지에 쓰셨지요. 행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일까요?

 

살아보니 인생은 무승부. 부자나 가난한 이나 향할 곳은 오직 한 군데이고,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더군요.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죽기 전 남편이 “당신이 내 구세주였소” 한 말로 큰 상(賞) 받았다 치려고요. 저 하늘에 가면 울 엄마도 ‘잘했다’ 쓰다듬어주실까요.

 

늙은이 넋두리가 길었습니다. 환란을 많이 겪은 세대라 말이 많아요, 호호! 경제가 잘돼야 하는데 위정자들 세상 보는 안목이 못 배운 우리 할머니들보다 짧아서 큰일이지요. 걸핏하면 친일, 친일. 그런 논리면 왜정시대 수돗물 먹고 전기 쓰고 기차 탄 사람은 다 친일이게요. 또 딴소리…. 모쪼록 이 편지가 새 주인 만나 귀히 쓰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일보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02.05  김혜리 대신 나라가 했어야

/김지환씨와 딸 사랑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터뷰 기사가 나가는 주말 아침이면, 긴장해서 오전 6시부터 눈이 떠진다. 이 사람을 제대로 소개했는지, 혹 오해받을 문장은 없는지 독자 반응을 살핀다. 지난 주말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딸 사랑이(7세)를 키우는 김지환씨 인터뷰도 그랬다. 이 아빠는 ‘혼인외 출생자의 (출생) 신고는 모(母)가 하여야 한다’는 법에 막혀 1인 시위부터 소송까지 온갖 분투를 치른 사람이다. 미혼부란 말 때문에 악성 댓글이 달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이름 석 자를 보고 기우였음을 알았다. 김혜리. 얼굴 보면 누구나 알 만한 미스코리아 출신 중년 여배우다.

 

김혜리씨는 2014년 초부터 약 6개월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사랑이를 돌봤다. 아이 키워 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이 반나절의 시간 동안 아이 맡길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사랑이 아빠가 그랬다. 출생신고가 안 된 아이는 어린이집에 갈 수 없다. 아기 띠 하고 청소하고, 유모차 밀며 택배 배달했던 사랑이 아빠는 결국 아이 때문에 번번이 잘렸다. 김혜리씨가 사랑이를 봐주면서, 사랑이 아빠는 김씨 집 근처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다. 김지환씨가 사랑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1인 시위하는 모습을 김혜리씨가 우연히 봤을 뿐이다.

 

아이 둘 키우는 평범한 엄마라는 네티즌이 댓글을 남겼다. ‘자기 자식도 돌보지 않는 세상에서 남의 자식까지 돌보셨다니, 제가 다 감사합니다.’ ‘수십억 기부한 것보다 더 감동적’이란 댓글도 있었다. 이런 댓글이 기사에 1000개 넘게 달렸다. 취재 요청이 쇄도하자 김혜리씨는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썼다. “사랑이로 인해 더 큰 선물을 받은 건 저와 제 딸이었어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사랑이 아버님의 모습은 가끔 힘들다고 투정 부리며 현실을 회피하고 싶던 제게 반성하는 마음과 용기를 줬습니다.” 그 역시 혼자서 딸을 키우는 싱글 맘이다.

 

사랑이 아빠가 노량진 고시원으로 밀려났을 때, 고시원 주인은 “돈은 있는 만큼만 내라”고 했다. 함께 살던 3명의 고시생 또한 불평 한마디 안 했다. 사랑이 돌잔치도 이 고시생들이 케이크 사 와서 해줬다. 1인 시위 할 때 “필요한 것 사라”며 30만원을 건넨 무속인도 있었다. 김씨가 돈 되는 건 다 팔았는데도 분유와 기저귀 값이 없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할 때였다.

 

그는 “내가 딸을 키울 수 있었던 건 내 능력도,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도 아니었다”고 했다. “아주 운 좋게 매우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라고. 김혜리, 고시생, 무속인이 한 선행은 나라가 했어야만 했던 일이다.

조선일보 남정미 기자

 

02.19  각하, ‘태조 왕건’ 83화를 보시옵소서

직언한 승려 처형한 폭군 궁예, 對언론 ‘징벌적 손해배상’ 떠올라
대신들 눈 질끈 감고 자리 보전… 궁예는 길바닥서 백성 손에 죽었다

정상혁 기자

/드라마 '태조 왕건' 83화 속 폭군이 된 궁예(위)와 그에게 간언하다 죽임당하는 승려 석총. /KBS

 

“저 자는 지금 마구니의 더러운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다…. 내군들은 무엇을 하느냐? 저 입을 철퇴로 으깨주어라.”

 

이 장면은 KBS 드라마 ‘태조 왕건’ 83화에서 미륵을 자처하며 ‘쇼’를 벌이던 궁예가 입바른 소리를 한 승려 석총을 처형하는 장면이다. 일개 백성은 죽기를 각오하고 일인자에게 고한다. “소승은 어려서 불문에 입문하여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미륵만 배워왔사오나 폐하와 같은 미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오늘날 거짓을 말하고 계시오이다. 낙원도 없고 극락도 없소이다. 거리엔 굶어 죽은 시체들과 오갈 데 없는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고 있소이다.”

 

나는 아직도 이 드라마를 밤마다 케이블채널에서 재방송으로 다시 보곤 한다. 이것은 사극(史劇)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풍자극이다. 20년 전 방영돼 시청률 60%를 넘긴 이 드라마는 여전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순위 상위권에 포진해있고, 인기에 힘입어 유튜브 전 회차 유료 생방송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화 전체를 서른 번 넘게 봤다”는 가수 박완규뿐 아니라, 만화가 기안84 등 연령을 초월해 광팬 인증이 속출한다. 공영방송에서 대하 사극이 실종돼 볼거리가 줄어든 탓도 있을 것이나, 당대와의 시차 없이 정확히 권력의 속성을 겨누는 스토리텔링 때문일 것이다.

 

특히 83화는 이미 정신이 돌아버린 궁예와 간언하는 석총의 긴장 구도 탓에 특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최근 여당에서 ‘가짜 뉴스’ 운운하며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에 언론사와 포털 사이트를 포함하는 입법 진행 소식이 나온 직후인지라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석총은 외친다. “조정에 사악한 간신들만 들끓고 있으니 어찌 폐하의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막히지 않겠사옵니까…. 폐하, 나라가 이미 깊이 병들어있사옵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직도 저 요원한 ‘북방(北方)의 세계’를 논하지 마시고 죽어가는 백성과 나라를 구하시옵소서. 그 길만이 살길이옵니다…. 더 이상 백성을 속이지 마시옵소서!”

 

철퇴를 맞고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석총보다 보기 괴로운 것은, 궁예가 정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참담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숙이는 고관대작들이다. 그들은 그저 눈을 질끈 감음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보전한다. 죽기 전 석총은 마지막으로 내뱉는다. “거짓 미륵이시여, 그대의 세상은 이미 끝났소이다. 이미 새로운 미륵이 나타나 내일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소이다. 거짓 미륵이시여, 저주를 받을 것이외다.”

 

‘태조 왕건’의 주인공은 물론 왕건이지만, 실상 드라마 정국을 주도하는 건 궁예다. 드라마는 그의 광기를 통해 말세 의식 속에서 태어난 권력, 종교로서의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드러낸다. 궁예는 애꾸이고, 한 쪽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는 지도자로서의 치명적 약점을 상징한다. 그리고 되레 비판 세력을 꾸짖는다. “네가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봉사가 되었기 때문이야.” 궁예를 연기한 배우 김영철은 “원래 양쪽 모두 시력이 2.0이었는데, 궁예 안대 분장 탓에 한쪽 눈의 시력이 0.2까지 떨어졌다”며 “그 후 회복이 안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나는 정사(政事)와 관련한 고도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궁예는 116화에 이르러 죽는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흐흐흐….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이렇게 가는 것을….” 드라마는 그의 최후를 아름답게 포장한다. 중역(重役)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길바닥에서 백성의 손에 명이 끊겼다.

조선일보

 

03.03 대한민국 울린 ‘치킨 한 접시’

‘우동 한 그릇’의 감동, 33년전 일본 강타했듯<br>‘치킨 한 접시’의 사연 오늘 대한민국을 울려<br>착한 갚음의 연쇄반응… 거기 우리 미래 있다!

 

 

# 3월 들어 비록 날은 여전히 쌀쌀하지만 그래도 감출 수 없는 봄기운 마냥 가슴 따뜻한 소식을 접하며 마음이 울컥했다. 서울의 한 치킨집 주인과 조실부모한 형제 사이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33년 전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던 ‘우동 한 그릇’의 감동 같다고나 할까? 망조(亡兆)가 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나라 안팎의 모양새지만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준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 서울 서교동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젊은 박씨. 그날 따라 코로나 때문에 정말 장사가 너무 안됐다. 그래서 혼자 가게 앞 골목에 나와 밤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치킨, 치킨” 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골목 안에 들어선 어린 초등학생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그 옆에는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형이 입을 앙 다문 채 주먹을 꽉 쥐고 서 있었다. 형은 어렵사리 입을 열어 치킨을 5000원어치만 먹을 수 없겠냐고 물었다. 동생이 치킨을 먹고 싶어 하는데 형은 사줄 돈이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상황을 감지한 치킨집 주인은 형제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 메뉴판도 내보이지 않은 채 그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심정 하나로 푸짐한 치킨 세트를 콜라 두 병과 함께 내놨다. 마침 홀 안에는 손님이 없어 형제는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맘 편하게 치킨을 먹을 수 있었다.

 

# 형은 수중에 있는 돈이 단돈 5000원이라 내심 불안하면서도 치킨을 보자 행복해하며 허겁지겁 먹는 동생을 보니 자신도 아무 생각이 없어져 주린 배를 채우듯 치킨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그는 어릴 때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하지만 이젠 나이 들어 몸 불편하신 할머니와 일곱 살 어린 동생의 생계마저 떠맡은 소년 가장이었다. 얼마 전까지 돈가스집 알바를 뛰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그나마도 그만둔 뒤 나이를 속여가며 택배 상하차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철없는 동생이 치킨 먹고 싶다고 울며 떼를 쓰니 마음이 짠했지만 편찮으신 할머니 보기도 뭣해 일단 밖으로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치킨집만 보면 들어가자고 조르는 동생이 너무 안돼 집 근처 치킨집에 들어가 염치없게도 5000원어치만 줄 수 없냐고 물었지만 문전박대만 당했다. 다른 곳에서도 매 한 가지였다. 결국 홍대 근처 서교동까지 걸어가서 ‘수제치킨 전문점’이란 작은 간판이 걸린 치킨집 앞에서 다시 쭈뼛거리다 이를 지켜보던 치킨집 주인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 얼떨결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채는 동생 먹이려고 5000원어치만 달라고 한 것인데, 주인은 2만원 상당의 푸짐한 치킨 세트를 내놓고 콜라 두 병까지 내어 줬던 것이다. 내심 형은 치킨집이 장사가 워낙 안되니 주문도 하지 않은 비싼 것을 내어놓은 후 억지로 바가지라도 씌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치킨을 보자 환호하는 동생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치킨집 주인이 내놓은 것들을 모두 허겁지겁 먹어치웠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주머니 사정이 뻔한 형은 막상 계산하려니 앞이 캄캄해져 동생 손을 잡고 잽싸게 도망이라도 쳐야겠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작 그 치킨집 주인은 맛있게 먹었는지 물은 후 이런저런 이야기만 나눈 뒤 돈은 다음에 내라고 하고선 되레 사탕을 쥐여주는 것이 아닌가. 형이 수중에 있던 5000원이라도 내겠다는 것을 한사코 받지 않더니 급기야 그 형제를 내쫓듯 가게 밖으로 내보냈다. 형은 다음 날 다시 찾아가 계산하려 했지만 치킨집 주인은 오히려 꾸짖듯 하며 돈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형에게 그것은 진짜 꾸짖음이 아니라 정말이지 얼마 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는지 모른다.

 

# 그 후에도 어린 동생은 형 모르게 그 치킨집을 찾아갔고, 그때마다 치킨집 주인은 동생에게 배불리 치킨을 먹였다. 코로나 때문에 매출도 반 토막이 나서 가게 월세도 밀리고 식자재 발주마저 미룰 만큼 형편이 어려웠지만 말이다. 심지어 어느 날은 치킨집 주인이 동생을 데리고 자신의 단골 미용실에 가서 덥수룩한 머리를 자르고 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미용실 주인 역시 치킨집 주인이 데리고 온 초등학생이 자식이나 조카가 아닌 것을 알았기에 따로 돈을 받지 않고 동생의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 뒤늦게 그것을 알게 된 형은 죄송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들어 더는 치킨집 주인을 직접 찾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근 일 년이 지나 코로나 때문에 소상인 자영업자들이 가장 힘들다는 뉴스를 접한 후 그 치킨집 아저씨가 잘 계신지 궁금하고 걱정이 돼 그 치킨집의 프랜차이즈 본사 앞으로 비뚤비뚤한 글씨로나마 꾹꾹 눌러 쓴 손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편지엔 그간의 사정과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런 다짐으로 편지를 마무리 지었다. “처음 보는 저희 형제에게 따뜻한 치킨과 관심을 주신 (치킨집) 사장님께 진짜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앞으로 성인이 되고 돈 꼭 많이 벌어서 저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살 수 있는 철인 7호 홍대점 사장님 같은 멋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도움 받은 것을 도와준 이에게 되갚는 것을 ‘페이 잇 백(pay it back)’이라 하고 도움 받은 것을 또 다른 이에게 갚는 것을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라고 한다. 치킨집 주인의 선행과 처신이 한 청소년 가장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갚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게끔 만들고 전국적으로 착한 갚음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대한민국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로 거기 우리 미래가 있다!

조선일보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03.04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물 세계의 숨은 이야기

판다(panda)는 느려 터지고 게으른(be slow and lazy) 동물로 알려져 있다. 수줍어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be famously coy). 그러나 실제로는 하루에 40차례 성관계를 갖는다고(have sex 40 times a day) 한다.

 

암컷은 수컷 여러 마리로 하여금 자신의 취향에 맞게 경쟁을 시킨다(have several males compete for her favors). 나무 껍질에 누가 제일 높이 오줌을 싸는(urinate highest on the bark of a tree)가도 따진다.

 

상어(shark)가 입을 벌리고 미친 듯이 헤엄치는(swim like crazy with their mouths open) 것은 아가미에 산소가 들어가게 하기(allow oxygen to reach their gills) 위해서다. 산소를 흡입하려면 계속 움직여야(move constantly to take in oxygen) 한다.

 

 

공작새를 ‘peacock’이라고 하는데, 수컷만을 일컫는(only describe the males) 단어다. 암컷은 ‘peahen’이다. ‘cock’은 수컷, ‘hen’은 암컷을 의미한다. 수컷·암컷 통칭하자면 조류(鳥類)를 뜻하는 ‘fowl’을 붙여 ‘peafowl’로 해야 한다.

 

낙타(camel)는 ‘사막의 배’로 불린다. 짐을 실어나르는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걷는 모양이 배를 젓는 것처럼 독특한 방식(distinctive way)이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몸체 왼쪽과 오른쪽 앞·뒷다리가 동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비(butterfly)는 대롱 모양의 긴 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맛을 느끼는 부위는 주둥이가 아니라 발이다. 꽃에 날아 앉는 순간, 알을 낳아도(lay their eggs on) 될 지, 애벌레(caterpillar)가 먹고 살 수 있는 종류인지 발로 감지한다.

 

토끼는 귀를 270도 회전시킬 수 있다. 거의 모든 방향으로(in almost every direction) 약 3㎞ 이상 떨어진 소리도 탐지한다. 그런데 토끼 귀에는 다른 귀중한 용도(valuable purpose)도 있다. 열을 발산하는(shed heat) 역할이다. 토끼는 사람처럼 땀을 흘리거나(sweat like humans) 개처럼 숨을 헐떡이지(pant like dogs) 못한다. 토끼가 여름에도 뛰어다니는 건 귀 덕분이다.

 

기린(giraffe)의 혀는 진보랏빛(deep purple)이다. 강한 햇볕 아래 하루종일 잎파리를 뜯어먹다가(munch leaves all day long) 화상을 입지 않게 보호해주도록(protect them from sunburn) 진화한 것이다.

 

새우는 해부학적으로 말해서(anatomically speaking) 아주 유별난 생물(uniquely odd critter)이다. 다리가 척추 역할을 하며, 뇌, 심장, 위, 생식기관이 모두 머리에 들어있다.

 

문어(octopus)는 심장(heart) 3개, 뇌(brain) 9개를 갖고 있다. 심장 3개 중 2개는 아가미에, 다른 하나는 몸체 나머지 부위에 피를 퍼준다(pump blood to the remainder of its body). 뇌 9개 중 하나는 중앙관제센터 역할을 하고, 다른 8개는 8개 다리에 각각 붙어 독립적으로 반응한다. 문어 지능은 개의 수준을 넘어 영장류(primates)에 가깝다고 해서 개고기처럼 식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03.12 유튜브 알고리즘, 내 삶의 알고리즘

조회수 늘리는 비법?
정의 실종된 시대에 시청자 몫까지 운다
국민은 불공정에 지쳤다

/스마트폰으로 유튜브의 정치 콘텐츠 알고리즘을 조사하는 장면. /이태경 기자

 

알고리즘 알아내기가 유행 같다. 생활 이런저런 곳에 이 말을 쓴다. 로또 당첨 번호를 예측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있는가. 주가(株價) 변동을 알아맞히는 알고리즘, 카지노 블랙잭에서 고객이 딜러에게 돈을 딸 수 있는 알고리즘은 있는가.

 

알고리즘이란 뭔가. ‘문제 해결을 위한 절차나 방법’을 말한다. 당연히 수학과 컴퓨터 과학에서 주로 쓴다. 그 방법을 프로그램 계산식으로, 논리적 문장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좀 유식하게 말하면 그런 ‘명령어들의 유한 집합’이라고 한단다.

 

필자는 3년째 매일 유튜브 방송용 영상을 올리고 있다. 주로 시사 뉴스를 다룬다. 시청자 반응이 뜨겁다. 한 에피소드에 댓글이 1000건 넘는 날도 숱하다. 그중 많은 반응이 “가슴을 뻥 뚫어 주어 시원합니다”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고맙고 무섭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가슴 답답하면 7~10분짜리 말 몇 마디에 “가슴이 뻥 뚫렸다”고 할까.

 

시사 유튜버에게 조회 수를 늘리는 알고리즘은, 다시 말해 시청자를 모으는 명령어는 “무조건 ‘최고 실력자’ 혹은 ‘국민 밉상’을 단골 소재로 삼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렬하게 비판할 때 속이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대통령·법무장관·민정수석, 이런 이들이 소재가 됐다. 혹은 그들과 대결하는 감사원장·검찰총장을 거론하는 것도 ‘조회 수 알고리즘’이 됐다.

 

최근 유튜브 전문가 한 분을 만났다. 그분한테 4시간 동안 집중 강의를 들었다. 유튜브의 성공 알고리즘은 무엇인가. 그분 결론은 ‘근면 성실 정직’, 이것이 유튜브 알고리즘이라고 했다. 무슨 중학교 교훈도 아니고...설마 했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나서 수긍이 갔다. ‘근면’이란 영상을 열심히 업로드하라는 것, ‘성실’이란 하루도 빼놓지 말고 개근하듯 하라는 것, ‘정직’이란 타인의 콘텐츠를 도용(盜用)하지 말 것 등이다. “좌든 우든 성실한 놈이 이긴다”는 원로 시인의 말씀도 생각났다. 어떤 해외 전문가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이렇게 말한다. ‘구독자 수, 조회 수, 영상 길이, 시청자가 그 영상에 머무는 시간과 비율, 시청자가 유튜브에 들어와 첫 영상으로 봤는가, 시청자가 그 영상을 보다가 빠져나갔는가’ 등이다.

 

TV조선의 ‘초대연기’(초대형 대박 연속 기획)인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미스트롯2’의 성공 알고리즘은 뭘까. 아이디어를 내서 제작을 지휘하고 디테일을 챙긴 총괄 PD와 작가 두 분은 도전자들의 생존 비결과 프로그램의 성공 알고리즘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신문사 동료는 오랜 내공이 느껴지는, 그러나 아주 색다른 칼럼을 썼다. “재미있으면 그만인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이 30%를 넘어가니 시청자들은 정의(正義)를 요구하고 있었다. 시중에서 실종되고 타락한 정의를 누가 노래 잘하나 하는 TV 프로그램에서나마 지켜주길 원하는 것이다.” 세상에 정의가 실종되다 보니 노래잔치에서 정의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시청자 투표 비율을 대폭 늘린 이유라고 했다.

 

필자가 찾아낸 이 프로그램의 성공 알고리즘은 ‘절박함’이다. 미스터트롯의 임영웅과 모친이 보인 인생 스토리에서, 미스트롯의 양지은이 부친에게 신장을 떼어드린 얘기에서 눈시울이 뜨듯해진다. 한때 인생의 벼랑 끝을 밟아보고 돌아온 사람의 데뷔 서바이벌 무대는 노래 실력과는 별개로 절박한 감동을 준다.

 

유튜브에서 필자의 알고리즘은 절규다. 정의 실종 시대에 곡비(哭婢)처럼 시청자 몫까지 운다. 단 한 분의 가슴이라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다. 차기 서울시장·대통령 선거에도 ‘당선 알고리즘’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공정함을 보여주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증명하면 된다. 국민은 불공정에 너무 지쳐 있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

 

03.20  어머니의 등

젊은 기업인 키워낸 어머니의 등
미나리 심는 영화 속 ‘순자'의 등
삶의 풍파 짊어지고 등 내어주신
어머니 너른 품이 오늘의 우리 만들었다

어미 등에 업힌 아이는 그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 냄새를 기억한다. 쓰으으윽 탁. 쓰으윽 탁. 청소 각솔을 미는 어깻죽지에 힘이 들어가는 걸 아이는 숨소리로 먼저 느낀다. 거뭇거뭇 때 묻은 계단 놋쇠(보통 신주라 불리는 것)가 말간 광채를 내기 시작한다. 방금 막 찍어낸 동전처럼 반짝이는 것도 잠시. 목덜미까지 흐르는 땀을 닦아보려 어미가 구부정한 자세를 고쳐 앉는 사이, 누군가의 발에 또다시 짓밟히는 계단. 뿌연 발자국이 선명하다. 회색 계단 바닥 돌을 잠시 짙게 물들이다 이내 사라지는 게 엄마의 땀방울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이는 알 수 없다.

 

마흔에 늦둥이를 낳았다며 한동안은 어미 얼굴에 수줍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는 그렇게 기억했다.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엄마 얼굴보다 뒷모습이 익숙했으니. 새벽부터 건물 청소를 마치면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며 다림질을 했다. 뜨거운 돌솥비빔밥이 한가득 든 커다란 상을 머리에 이고 지고 시장 배달을 하고, 또 밤에는 식당 주방일까지 하는 하루 일과를 아이는 업힌 등 뒤로 지켜보곤 했다.

 

아비가 있었지만 없는 것보다 힘들었다. 결국 아비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몇 년 뒤 가족을 등졌다. 시장에서 떡볶이, 튀김을 팔며 생계를 잇던 어미가 어느 날 험한 몰골로 집에 왔다. 뜨거운 튀김 기름이 머리 쪽으로 쏟아져 피부가 엉겨 붙었다.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형편에 어미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진물이 곪지 않도록 피딱지에 약을 발라주는 게 초등학생 아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중학생이 된 소년은 돈을 벌고자 했다. 신문 배달로 하루를 시작해 짜장면·피자 배달, 막노동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공부할 시간은 적었지만, 신문으로 세상을 읽었다. 돈의 흐름이 보였다. 어머니 등에 밴 흥건한 땀으로 체감했던 궂은 세상의 이면이 신문 위에 속속들이 펼쳐졌다.

 

아직 앳돼 보이는 30대 청년 기업인은 “이런 얘기까지는 가까운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때 어머니와 함께 집 없이 컨테이너에서 살았다던 그는 2008년 친구에게 빌린 돈 500만원으로 친환경 에너지 회사를 차린 지 10년 만인 지난 2019년, 최연소 코스닥 상장사 대표가 됐다.

 

그는 성공 비결로 교과서를 대신했던 신문을, 그에 앞서 ‘업어 키워주신 어머니’를 꼽았다. 서양에선 찾기 힘든 문화다. “어머니의 등에서 배운 거 같아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 고생이 제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으니까요. 어머니한테 부끄럽지 않은 사람 되어야겠다,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등을 내어준 어머니의 주름이 깊어지는 것을 우리는 살면서 몇 번이나 눈치챘을까. 곧고 반듯했던 어머니의 등이 어느새 굽이굽이 산등성이처럼 굽은 건 세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진통을 겪으며, 커가는 아이들의 무게를 견디며, 스스로 작아지는 걸 택했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다져진 삶의 의지는, 바다 건너 트레일러에서 살았던 이들의 삶과도 맞물려있는 듯하다. 최근 아카데미 영화제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미나리’에서 순자(윤여정)는 손자에게 미나리 심을 땅을 보여주며 허리를 굽혀 앉는다. 카메라는 순자의 등에 오롯이 초점을 맞춘다. 어머니의 등은 생명을 품는다. “미나리가 잘 자랄 거야.” 연노란 셔츠를 입은 순자의 등이 마치 대지(大地) 같다.

조선일보 최보윤 기자

 

03.27 저 거리의 암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신달자의 시 ‘저 거리의 암자’ 중 일부입니다. 설악산 큰 스님이자 시조 시인으로 유명했던 무산(1932~2018) 스님이 이 시를 읽고 감동해 시인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지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신달자는 불교도 모르고 무산 스님이 누군지도 모른다며 사양하다, 어느 동안거 해제 날 설악산 신흥사에서 마침내 스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절에 갔더니, 무산 스님이 200명 선승을 앉혀놓고 ‘저 거리의 암자’를 낭송하더랍니다. 그러고는 “여기서 석 달 앉아 수행한 것보다 이 시 한 편에 담긴 수행의 무게가 무겁다” 하더랍니다. 포장마차를 ‘한 채의 묵묵한 암자’로, 거기서 밤새 술잔 부딪치며 한풀이하는 군상의 풍경을 ‘하룻밤 수행’이라 표현한 시인의 통찰이, “도(道)는 사는 데 있지 산속에 있지 않다”는 무산 스님의 철학과 맞닿은 것이지요.

 

마침 지난해 ‘만해대상’ 문학 부문을 신달자 시인이 받아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그 시를 썼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남편이 병석에 누운 지 2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번엔 자신이 유방암 판정을 받아 투병하게 되었는데 그 고통과 공허함이 커서 매일 저녁 수서역 근처 포장마차에 갔다고 합니다. 하루의 고된 노동이 끝나면 어둠 내린 포장마차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플라스틱 작은 상에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는 풍경이 절망한 시인을 위로했다고 하지요. 그날부터 다시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 없는 집에 다섯째 딸로 태어나 생일이 두 날인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사월초파일, 그러니까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났는데, 또 딸이라 크게 실망한 아버지가 차일피일 미루다 출생신고를 한 날이 예수님 태어난 12월 25일이었답니다. 시인은 “병도 많고 슬픔도, 곡절도 많은 삶이라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나” 하고 웃으면서도 “그래도 이겨냈어요. 그렇죠?”라고 말해 저를 뭉클하게 했습니다.

조선일보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03.30  승자는 기품 있고 패자는 의연했다

고시엔 승패 결정된 후 3분간 절도 있는 움직임
역전패한 팀도 부동자세로 상대팀 교가 들으며 敬意

▲3월 24일 일본 효고(兵庫)현 한신(阪神) 고시엔(甲子園) 구장에서 열린 제93회 일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 첫 시합 32강전에서 교토국제고가 10회전 연장 승부 끝에 시바타고를 5-4로 이긴 뒤 한국어 교가를 듣고 있다. 교도 연합뉴스

 

지난주 한국계 교토국제고의 고시엔(甲子園) 시합을 두 차례 현장 취재했다. 처음 가 본 고시엔 구장에서 인상적인 것은 승패가 확정된 후 3분간의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지난 24일 교토국제고가 5대4로 승리했을 때다. 고시엔 첫 승리를 거둔 이 학교 선수들은 과도하게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환희에 찬 얼굴에 손을 높이 들어 올린 것이 전부였다.

 

시합 종료 사이렌에 맞춰 승리한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전통에 따라 홈 플레이트 부근에 전광판을 바라보며 일자(一字)로 섰다. 그러자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다. 패한 시바타(柴田)고 선수들은 일루 측에 부동자세로 서서 교토국제고 교가를 들었다. 승자는 과도하게 기뻐하지 않았고, 패자는 의연하게 상대에게 경의(敬意)를 표하는 게 돋보였다.

 

비슷한 장면을 27일 교토국제고의 16강전에서 다시 목격했다. 교토국제고는 9회까지 4대2로 이기다가 도카이다이스가오(東海大菅生)고에 5대4로 역전패했다. 그것도 9회 말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에서 역전타를 맞았다. 스트라이크 하나만 더 들어갔으면 8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패한 게 아쉽고도 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교토국제고 선수들은 그 감정을 억눌렀다. 이번엔 자신들이 삼루 측에 도열, 상대 팀의 교가를 들음으로써 승리를 축하해줬다. 퇴장할 때는 모자를 벗어서 대회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어린 선수들의 의식(儀式)에서 장엄함이 느껴졌다. 가족을 잃은 상가(喪家)에서도 오열하지 않는 일본 문화가 오버랩됐다. 미국에서 알게 된 스포츠 격언을 떠올렸다. “기품(氣品) 있게 이기고, 질 때는 영예롭게 진다(win with class, lose with honor).”

 

교토국제고의 박경수 교장은 “승리했다고 상대 팀을 자극하지 않고, 졌다고 분한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고시엔 전통이자 교육”이라고 설명해줬다. 승리 후 과도하게 그 기분을 표출한 팀이 경고받은 사례도 있다고 했다.

 

승패가 결정되면 미련 없이 결과에 승복하는 일본 문화는 경기장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박 교장은 27일 16강전에 앞서 교토국제고에 아깝게 진 시바타고의 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시바타고의 교장은 “오늘 열심히 교토국제고 선수들을 응원하겠다. 잘 싸워달라”고 격려했다. 이날 교토국제고가 석패한 후, 재일교포 응원단이 주차장에서 상대 팀 선수들을 만났다. 대부분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들은 이들에게 “축하한다”며 손을 흔들어줬다. 도카이다이스가오고 선수들은 깊숙이 고개 숙여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시엔은 선수들만 기품을 지키고 절도 있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에서 모여드는 응원단은 엄격한 규정하에 움직였다. 응원 버스는 고시엔 구장 바로 앞에 정차하거나 주차할 수 없었다. 약 1㎞ 떨어진 주차장에 모든 응원단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곳에 단체 버스가 흩어져서 입장하는 것도 금지됐다. 같은 학교의 버스는 반드시 열을 맞춰서 한 번에 입장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고시엔 구장 주변의 혼란을 막는 것은 물론, 대형 버스들이 마구 다녀 교통사고 위험이 커지는 것을 방지했다.

 

응원단은 고시엔 구장에 개별 입장할 수도 없었다. 안내원의 깃발하에 2열로 줄을 맞춰서 가야 했다. 1000명에 이르는 응원단이 수백m의 줄을 맞춰 이동하는 장면은 해외여행 당시 마주친 일본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행렬이 이동하는 동안 동네 자원봉사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엄격하게 통제했다.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열을 벗어나지 말아달라”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자전거를 탄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이들이 먼저 가도록 배려했다.

 

일본인이 종교처럼 여기는 고시엔은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한국 사회가 전체주의적, 후진적이라고 무시하는 일본의 전통과 질서는 고시엔을 통해서도 재생산되고 있었다.

조선일보  도쿄=이하원 특파원

 

04월 02일 능금과 사과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줄다 보니 ‘홍동백서(紅東白西)’와 ‘조율이시(棗栗梨枾)’는 책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말이 됐다. 제사상을 차릴 때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색 과일은 서쪽에 놓되 대추, 밤, 배, 감 순서로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과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과가 없다. 제사상에 올리기는 하는데 이 목록에 없고 심지어 다른 과일과 달리 이 과일을 가리키는 한 글자짜리 한자도 없다.


사과를 한자로는 ‘沙果, 砂果’로 쓰지만 본디 한 단어가 한 글자로 나타나는 한자의 일반적인 흐름에도 안 맞는다. ‘빈파(瀕婆)’ 또는 ‘평과(평果)’라고도 쓰지만, 이 역시 두 글자다. 이 과일을 가리키는 한자도 없지만, 우리 고유어에도 없다. 어찌 된 일일까? 사과의 원산지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이니 꽤 일찍 들어왔을 것 같은데 19세기 말에나 도입된다. 17세기에 이미 뉴턴의 머리 위에도 떨어진 사과가 이토록 늦게 전래됐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고 사과 비슷한 과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과의 또 다른 말, 혹은 사과의 고유어라고 알고 있는 능금이 그것이다. 사과와 능금은 생물학적으로는 다르지만,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능금은 야생이고, 사과는 과수용으로 개량된 것으로 이해된다. ‘능금’도 고유어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한자를 붙이기가 애매하다. 문헌에 능금은 ‘임금(林檎)’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능금이 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어쩌다 보니 이 과일의 영어 단어를 회사명으로 쓰는 이들이 정보통신기술의 선도자가 됐다. 우리는 일반명사 사과, 배, 대추 등을 고유명사로 쓰는 일이 드물어 어색하지만, 중국에서는 이 회사를 사과의 중국어 ‘핑궈’라고 부른다. 높은 기술력과 세련된 디자인은 인정받지만, 친절과 거리가 먼 서비스 때문에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들판의 능금은 만인의 것이고 과수원의 사과는 돈 주고 산 사람들의 것임을 되새겨볼 일이다.
문화일보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월간조선 04월 호

■도적이 정의를 훔쳐 의적 행세를 하면…

⊙ 좌익무리와 범죄집단의 간극은 종이 한 장
⊙ 홍길동·임꺽정·장길산, 작가들 덕분에 단순한 도적에서 3大 義賊으로 미화
⊙ 스탈린은 은행강도 행각, 마오쩌둥은 황건적 찬양…, 남민전도 강도짓
⊙ 작금의 현대판 三政문란의 원흉은 586 세도정치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現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오. 북대요?”
 
  1911년 경성감옥, 김(金) 진사(進士)는 김구(金九)에게 이렇게 물었다. 《백범일지》의 한 대목이다. 김 진사는 ‘삼남(三南) 불한당(不汗黨)의 괴수’로 유명하다는 자였는데 마침 백범의 감방으로 전방(轉房)을 오게 돼 말을 나누기 시작하던 차였다.

 

  백범은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백범이 미처 알아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103년 뒤 영화가 돼 나왔다. 2014년 작 〈군도: 민란의 시대〉라는 영화다. 

 
  

〈군도〉는 조선 말 철종 13년인 1862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조선 각지 70여 개 고을에서 연속적으로 민란이 발생한 해였다. 임술민란(壬戌民亂)이다. 이 민란들은 그해 내내 조선 천지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해를 넘기지는 못하고 진압되었다. 영화는 그때부터의 이야기다.
 
  “진압된 백성들은… 참수를 면치 못했으며 나머지 산으로 도망친 이들은 도적이 되어 생을 영위해야 했다.”
 
  주인공인 백정 돌무치는 민란 가담자는 아니다. 하지만 끔찍한 일을 당한 뒤 군도(群盜)에 합류한다. 그 패거리가 바로 ‘지리산 추설’이다. 〈군도〉는 이 ‘추설’ 무리가 임술민란 2년 뒤 나주에서 다시 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린다.
 
  《백범일지》에 이 추설에 대한 김 진사의 설명이 나온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老師丈)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고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되었다.”
 
  나름 규율도 갖추고 있었다 한다. 영화 〈군도〉에는 추설, 노사장 등 《백범일지》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의 민란들이 ‘추설’ 등 군도 패거리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862년의 임술민란 상황을 기록한 《임술록(壬戌錄)》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추설’에 대한 기술은 《백범일지》가 유일하다.
 
  한편 1862년 임술민란의 대표적인 민란은 3월 14일 발발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은 3개월 이상 삼남(경상·전라·충청) 일대를 휩쓴 연속적인 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영화 〈군도〉에서 추설 무리가 나주를 무대로 일으키는 봉기의 양상은 진주민란의 경우와 가장 많이 닮았다. 하지만 임술민란 때는 물론 그 2년 뒤에도 나주에서는 민란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 메시지는 실재(實在)보다는 기억되고 이야기되는 바에 의한다. 《백범일지》같이 후광(後光)을 품은 저술이 도적떼 패거리를 저항적 의적(義賊)처럼 서술하면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는 실재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경우에도 여러모로 허구적 변주를 한다. 실재 역사에 대해 애써 짚지 않으면 대개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뒤섞인 이야기는 그런 경향이 더하다. 야사는 추론(推論)을 넘어 상상을 허용하여 실재와 허구를 넘나들 수 있게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도적과 의적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은 그렇다. ‘로빈 후드’가 그렇듯 추설도 그런 경우일 터다. 우리의 또 다른 옛이야기들도 비슷하다. 홍길동·임꺽정·장길산 이야기다.


  조선의 대표적 도적 홍길동·임꺽정·장길산 3大 의적으로 미화

실학자 이익(李瀷·186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선의 대표적인 도적으로 홍길동·임꺽정·장길산 3인을 거론했다. 그에게 이 3인은 흉적(凶賊)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의적(義賊)으로 기억되고 회자된다. 조선조 당시에도 그런 기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더욱이 확연하다. 소설 등의 영향이 크다.
 
  우선 홍길동의 경우는 허균(許筠·1569~1618)의 《홍길동전(洪吉童傳)》 이래 의적의 대명사 격이 되었다. 홍길동이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그 무리가 발호했던 때가 조선조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 시절이었음과도 무관치 않다.
 
  하지만 사료상의 기록에선 의적다운 면모의 행적은 없다. 오히려 한동안은 “항간에서 욕을 할 때 홍길동의 이름은 그 대상의 하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서 정반대로 바뀌었다. 홍길동은 ‘구원자’의 이미지를 갖게 되고 활빈당(活貧黨)은 조직 모델이 되었다. 고종 때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건 무리가 발호했다는 기록도 있다.
 
  임꺽정(林巨正)은 조선 명종 때의 인물인데 3대 도적 가운데 그 행적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다. 활동 범위도 광범위하고 관군과 맞서 싸워 이기기도 하는 등 나름 세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임꺽정이 의적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민가를 습격하고 살상까지 일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종실록》은 임꺽정 무리가 자신들을 고발했던 어떤 이를 나중에 배를 갈라 죽이는 것으로 보복했다는 기사까지 남기고 있다. 이를 의도적인 악평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다음과 같은 반성적 평가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貪汚)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 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구전(口傳) 전승의 민담에선 임꺽정은 서서히 의적이 돼가고 있었다. 그러다 임꺽정도 홍길동 못지않은 대표적 의적으로 이름을 확고히 하게 됐다. 홍명희(洪命熹·1888~1968)가 일제(日帝)시대인 1928~1939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 《임꺽정》 덕이 컸다.
 
  홍명희는 해방공간 시기 월북(越北)하여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다. 물론 그 정치적 행적을 이유로 소설 《임꺽정》의 문학적 평가를 재단(裁斷)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의 임꺽정이 실재인물 임꺽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소설적 작화(作話)로 형상화된 이미지가 널리 회자되면서 그 인상은 실재처럼 굳어지게 됐다.
 

  실록 속의 장길산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장길산(張吉山)은 더욱이 그런 경우다. 장길산은 조선 시대 3대 도적 가운데 기록이 가장 적다. 장길산은 숙종 당시의 도적인데, 실록에는 그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빼고는 별다른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 시대 의금부(義禁府) 추국청(推鞫廳)의 수사재판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따르면 “말을 탄 병사 5000명과 걸어 다니며 싸우는 보병 1000여명이 있었다” 하니 그 패거리의 규모는 작지 않았던 듯하다
 
  특이한 대목이 하나 있긴 했다. 이영창(李榮昌)이라는 인물의 역모 행적 기록 부분에서 장길산의 이름이 나온다. 이영창은 운부라는 승려를 비롯한 전국의 승려 세력과 지방의 유력자를 포섭하였고, 장길산 집단과도 관계를 맺어 조선뿐 아니라 중국까지 점령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꾸며낸 이야기였다. 재판 결과 장길산의 이름을 집어넣은 것도 이영창이 자신의 계획을 과장하기 위한 것임이 밝혀졌다.
 
  장길산에 대해선 그 외에는 기록도 없을뿐더러 의적다운 민담도 별달리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장길산도 이제는 홍길동·임꺽정급의 의적이다. 역시 소설 덕분이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이다. 1974~1984년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1984년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그 시절 소위 386세대들에겐 민중문학의 총아(寵兒)로 받아들여지고 읽혔다.
 
  황석영 《장길산》의 허구적 작화의 정도는 《임꺽정》을 훨씬 넘어선다. 임꺽정에 대해선 그나마 사료도 비교적 풍부하며 민담 전승도 꽤 있는 편이지만 장길산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 문학평론가는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우선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찬사의 평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사실과는 거리가 먼 ‘구라’라는 얘기가 된다. 작가 황석영의 별명이 ‘황구라’라 하니 그 평에 어울린다. 

 

구라와 카타르시스

  그런데 《장길산》은 대단한 구라이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선 홍명희 작 《임꺽정》의 오마주(hommage·존경)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장길산》을 소개하며 “그 앞에는 홍명희의 《임꺽정》이 전범(典範)이며 영향원으로 우뚝 서 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홍명희의 《임꺽정》은 그가 월북 작가인 탓에 오랫동안 금서(禁書)였다가 1985년에 처음으로 출간됐다. 그러니 황석영이 《장길산》을 쓰기 전에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은밀히’ 유통되던 것을 접했을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장길산》은 《임꺽정》 이후 민중적 영웅담의 계보를 잇는 소설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이제 홍길동·임꺽정·장길산 3인은 우리 역사의 3대 의적이 돼 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은 물론 영화로 드라마로 때로는 만화로 각양각색으로 극화(劇化)되곤 한다. 대중은 그것을 보고 즐기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허구가 적잖은 이야기라 여기는 이들도 비슷하다.
 
  이런 현상 자체는 우리만의 특이한 경우가 아니다. 동서세계 도처에 그렇게 낭만적으로 소비되는 의적 신화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낭만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거꾸로 진행된 이야기도 있다. 의적이 도적이 된 경우다. ‘마피아(Mafia)’와 ‘삼합회(三合會)’의 경우다

 
  마피아와 가족주의

/마피아 영화의 대표작 〈대부〉.

 

 마피아는 기업형 범죄조직 일반을 칭하는 보통명사 마냥 사용되더니 지금은 의미가 더 확장되어 분야를 막론한 이익집단을 일컫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본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미국 범죄조직 명칭이다. 그 기원과 명칭의 어원에 대해선 다양한 설이 있다. 그러나 어떻든 일종의 의적으로 알려져 있다.
 
  시칠리아는 수백 년간 다양한 세력의 외침을 겪고 지배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시칠리아인들은 결사를 만들어 외세에 맞서기도 하고 하층민 집단은 귀족과 영주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19~20세기 초에는 뒤늦게 자본주의화도 겪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진 유럽 지역들과는 달리 산업화가 미약하여 농지의 집적을 통한 농업 자본의 형성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이었다. 그 때문에 대지주와 소작민, 자영농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살바토레 줄리아노〉(1962), 〈시실리안〉(1987)은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살바토레 줄리아노(Salvatore Giuliano·1922~1950)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빈농을 대변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그냥 정치 활동만 한 게 아니라 총을 쏘고 도둑질을 하며 조직을 이끌었다. 그러다 1950년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하지만 그는 의적으로 일컬어졌다.
 
  한편 미국으로 건너온 마피아는 확연하게 범죄조직화했다. 그런 가운데 마피아는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조직원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에 버금갈 만한 연고(緣故)가 있어야 했다. ‘출신 지역’이라든지 아니면 최소한 ‘누군가의 소개’가 필수였다. 일종의 확장 가족이었다. 특정 마피아 조직을 ‘○○ 패밀리’라고 한 것은 거기서 유래했다.
 
  마피아의 문화는 그처럼 무엇보다도 가족주의였다. 연고 패거리의 힘에 기반해 이권 공동체를 만들어나갔다. 그들은 근대 산업사회에 적응하여 그 기본적인 부문들에 자리를 잡지 않았다. 개신교 와스프(WASP·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가 주도하는 미국에서 이탈리아 가톨릭계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문화 자체가 달랐다는 것도 무관치 않다. 그들의 문화는 와스프적 근대성과는 결을 달리했다.
 
  마피아는 〈대부〉 3부작(1972~1990)을 비롯한 영화들 덕분에 낭만적 인상이 있다. 현대가 상실해가고 있는 가족 문화와 권위, 의리의 문화를 지키고 있는 듯한 이미지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금주법(禁酒法) 시대에는 주류 밀매, 그리고 매춘, 도박 나아가 마약까지도 그들의 사업 영역이었다. 그 이권을 지키기 위해 그들끼리 항쟁도 하고 그들을 방해하는 이들은 매수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처리도 했다. 살해였다. 마피아는 살인을 밥 먹듯 했다. 그 기원이 어떻든 마피아는 결국 범죄조직이다.


  三合會

  미국에 마피아가 있다면 중화권에는 삼합회(三合會)가 있다. 영어로는 ‘트라이어드(Triad)’라 불리는데 역시 범죄조직이다. 그런데 이것도 그 기원과 관련해선 의적 신화를 빠뜨리지 않는다. 삼합회는 천(天)・지(地)・인(人) 3요소의 조화를 일컫는 데서 유래한 명칭인데, 그 기원과 관련해선 다양한 설이 있다. 많이 오르내리는 얘기는 청(淸) 제국 시절 그에 맞선 저항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근현대사는 격렬한 굴곡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곡절과 상관없이 그들의 사업은 늘 일관돼 있었다. 아편 밀매는 처음부터 기본이었으며 도박, 매춘, 사채도 빠뜨리지 않았다. 인신매매에다 청부살인도 했다. 그리고 이 같은 사업에 대한 방해물은 그게 개인이든 단체든 제거가 기본이었다. 죽인 것이다. 그 기원이 어떻든 삼합회는 시종일관 범죄조직이었다.


  그런데 마피아의 경우처럼 삼합회에 대한 영화도 그 특유의 문화를 낭만적으로 그린다. ‘관시(關係)’ 문화다. 혈연이 아니라도 ‘다거(大哥·형님)를 중심으로 그 이상의 강한 결속을 보이는 의리가 아름답게 묘사된다. 그런데 관시 문화의 실체는 아름답지 않다. 삼합회뿐 아니라 중화권의 각종 범죄조직들의 조직적 기둥 노릇을 하는 게 관시다.
 
  마피아의 가족주의가 그렇듯 관시문화도 역시 근대에 적응하지 않은 전근대적 문화였다. 마피아의 가족주의, 연고주의가 그랬듯 그들의 관시문화도 근대적 경제 관계와 법치 원칙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했다. 그렇게 하여 마피아와 삼합회는 의적에서 도적이 됐다.
 
  도적이야기가 의적이야기가 된 것과는 다른 역설적(逆說的) 교차다. 그 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저 다른 종류의 이야기일 뿐일까 아니면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인간과 그 이야기’를 헤아려보자.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인간은 의미의 존재다. 삶은 과학이기보다는 의미의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는 우선적으로는 로고스(logos·논리)다. 고대 그리스어 로고스는 본래 말 자체를 뜻한다. 그런데 로고스는 동시에 이성적 원리다. 고대 그리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성적(理性的)이지 않으면 ‘말’일 수가 없었다. 논리를 뜻하는 로직(Logic)도 여기서 유래했다.
 
  하지만 삶이 그렇듯 이야기는 논리의 전개만이 아니라 의미의 박동(搏動)이다. 이야기는 전해지고 회자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전해질 수 있으려면 듣는 이의 감성이 공명해야 한다. 바로 파토스(Pathos·감성)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修辭學)》에서 로고스와 함께 파토스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파토스는 듣는 이의 마음이다. 대상의 실체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기대와 갈망이 먼저다. 갈망의 파토스는 로고스에만 만족하지 않고 미토스(Mythos)도 요청한다. 미토스도 이야기다. 로고스와는 또 다른 방식의 이야기, 신화와 전설 등이다. 미토스는 신화(Myth)의 어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로고스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기술(記述)하고, 로고스의 논리적 한계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미토스를 말했다.
 
  낭만적 영웅담은 거기서 형성된다. 대중의 파토스는 로고스적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미토스적 이야기를 요청한다. 없으면 찾고 기대에 미치지 않으면 윤색해나간다. 사실 자체가 아니라 갈망과 상상력이 더해진다. 대중의 갈망의 파토스와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의 결합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과도하면 탈선이 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의 신뢰할 수 있는 면모 에토스(Ethos·성품)라 결론지었다. 핵심은 윤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에토스에서 ‘윤리적’이란 의미를 지닌 ‘에티케(ethike)’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윤리(ethic)의 어원이다. 그런데 낭만이 이성을 압도하면 어느덧 에토스가 지루하고 허망해 보이게 된다.
 
  도적이 의적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는 그런 심리적 흐름이 동반된다. 그런데 역으로 의적이 도적으로 돼가는 타락도 마찬가지다. 그 둘 모두 윤리적 에토스가 힘을 잃고 감성적 파토스만 힘을 발하면서 이루어진다.

 

586 세도정치와 현대판 三政문란

  이야기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의 현실 정치에서도 그 같은 일이 벌어진다. 좌익 정치세력의 경우가 전형적이다. 좌익의 이념적 믿음의 출발은 의적 심리다. 그러나 타락이 온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독선이 부르는 필연이다. 의적이 도적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윤리적 에토스는 상관없다. 꾸미고 기만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감성적 파토스를 자극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선전・선동은 이제 그런 악적(惡的) 기술로 전락한다. 그렇게 하여 ‘빠돌이’를 만들어내고 그에 기대어 명백한 범죄 행각도 감성적 언사로 호도(糊塗)한다. 지금 한국의 현 정권 패거리들이 보이는 모습이다.
 
  홍길동 등의 의적과 민란들의 배경에는 삼정문란(三政紊亂)이 있다.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으로 조선 시대 국가의 재정 민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3대 부문이다. 이것이 파탄을 보이면서 조선은 몰락으로 치달아갔다. 이 같은 조선 시대의 삼정문란에 필적하는 국정문란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조선 시대의 삼정문란은 양반 특권정치와 세도정치로 인한 것이었다면 작금의 현대판 삼정문란의 원흉은 586세도정치다. 586세도정치는 그 파렴치하기가 조선 시대의 세도정치를 뺨친다. 범죄적이면서 뻔뻔하다. 숙명적 귀결이다. 좌익 이데올로기의 바탕에는 피해자 의식이 있다. 피해자 의식의 르상티망은 죄의식을 증발시킨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심리가 선을 넘게 만든다.
 


  좌익무리와 범죄집단

/젊은 시절 강도행각을 벌이던 무렵의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 경찰 자료.

 

범죄조직도 마찬가지다. 범죄조직도 욕망 충족을 위해 수단에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좌익무리와 범죄집단의 간극은 종이 한 장이다. 시칠리아의 저항집단으로서 마피아는 결국 범죄조직 마피아가 된다. 삼합회도 정치적 저항을 내걸고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범죄조직화한다. 스탈린은 무장강도를 했다. 레닌의 지시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은 황건적(黃巾賊)을 찬양했고, 그 행각은 《수호전(水滸傳)》의 양산박(梁山泊) 무리를 빼다 박았다.
 
  김일성도 그랬다. 1935년 김구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韓民)》 제9호, 1936년 11월30일자는 김일성 부대가 만주의 동포들을 대상으로 비적(匪賊)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들은 촌리로 다니면서 곡식과 재물은 있는 대로 빼앗고 그래도 조금만 불만하면 집을 불사르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는데 금년 일 년 동안에 그들이 동포의 촌락을 습격한 회수가 428회요 피해자의 수효는 2204명이며 10월 한 달 동안에만 잡혀가서 인명의 손해 받은 것이 204명이라 한다.… 손해 받는 자는 가련한 한인뿐이다.”
 
  해방공간 당시도 그랬다. 남로당은 위조지폐를 만들어 뿌렸다. 그때만이 아니다. 1979년 남민전은 자금을 마련하겠다며 강도를 했다. ‘죽창가’를 작사하고 보수를 잡아 죽여야 한다고 한 김남주는 남민전 패거리였다. 그러나 한국의 좌익 정치 패거리들은 그런 일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허위의식의 이야기꾼

  대중의 파토스적 갈망은 본능이다. 그러나 이야기꾼의 경우는 작위(作爲)다. 그래서 윤리적 에토스를 상실한 이야기꾼은 악적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앞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詩人)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의 시인이란 그냥 시인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 함의는 에토스 없이 파토스만을 겨냥하는 이야기꾼이다.
 
  전쟁을 아는 군인은 전쟁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전쟁을 글로만 아는 이들이 종종 호기를 더 부린다. 칼을 만져보지도 않은 자가 칼잡이를 더 우상화하고, 주먹질을 모르는 자가 주먹에 더 낭만을 품는다. 콤플렉스가 낳는 허위의식이다. 이런 자들이 악적인 이야기꾼이 된다.
 
  의적 행세를 하려면 정의라는 장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타락으로 상실한 정의는 회복이 없다. 그래서 훔쳐야 한다. 허위의식에 젖은 먹물, 윤리의 고삐를 팽개친 선전・선동 이야기꾼들이 앞잡이가 된다. 이들이 끊임없는 ‘정의팔이’로 대중의 감성을 훔쳐 갖다 바친다. 그러나 그것은 반성과 회복이 아니다. 위장된 행세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기만적 행세가 통하면 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망(亡)으로 간다.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이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04월 09일 팝씨에서 파지까지

 

파 값이 금값이다. 그렇다 보니 삼겹살집 파절이나 반찬 가게 파지가 자취를 감췄다. 이게 다 팝씨 때문이다. 파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대부분의 방언에서 파로 나타나니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파절이 역시 채소를 절여서 곧바로 무쳐 먹는 겉절이의 일종이니 금세 이해가 된다. 그러나 파지나 팝씨는 어렵다.

 

파지는 전라도 지역에서 파김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묵은지가 묵은김치의 뜻이니 ‘지’는 곧 김치다. 그러니 ‘파지’는 파로 담근 김치다. 전라도 지역에서 ‘짓거리’는 김칫거리다. 갓을 짓거리로 삼았으면 갓지가 되고 파를 짓거리로 삼았으면 파지가 된다. 오이지의 ‘지’나 장아찌에 있는 ‘지’의 흔적도 결국 김치와 한가지다. 오이지는 소금에 절이기만 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지만 김치와 지는 본래 같은 말이다.

 

팝씨를 알려면 먼저 파꽃을 알아야 한다. 농부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파꽃을 아는 이가 드물지만 파꽃은 꽤 예쁘다. 쪽파 꽃은 날렵하고 색까지 곱다. 대파 꽃은 솜뭉치처럼 탐스럽게 피어난다. 식물에서 꽃은 씨앗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니 파꽃도 결국 씨앗으로 그 역할을 다하는데 그것이 팝씨다. 이팝나무가 흔해지다 보니 ‘팝’자가 덜 낯설어졌지만 언뜻 보면 콜라 상표명과 비슷해 보인다.


파의 씨가 왜 팝씨일까? 벼의 씨를 뜻하는 볍씨를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씨’ 첫소리는 ‘ㅄ’이었다. 오늘날은 단어 첫머리에 자음이 연속되는 일이 없으니 감이 안 오겠지만 굳이 비슷한 발음으로 설명하자면 ‘읍씨’에서 ‘으’를 가볍게 스치듯 발음하면 된다. 본래 ‘파읍시’처럼 발음되던 것이 오늘날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팝씨가 파지가 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린다. 짓거리뿐만 아니라 양념, 그리고 유통과정에서도 변수가 많다. 될성부른 팝씨를 잘 골라 정성스레 키워낸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할 일이다.
문화일보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04.13 매달 14일은 ‘특별한 날’, 내일은 ‘자장면 데이’

4월 14일은 한국에서만 기념하는 ‘자장면 데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애정을 표현한다는(express affection) 2월 14일 밸런타인 데이, 거꾸로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confess his love) 날이라는 3월 14일 화이트 데이, 이 화이트 데이가 지나도록 주지도 받지도 못한 친구들끼리 검은색 자장면을 먹으며 암담한 절망감을 달랜다고(comfort their black despair) 해서 ‘블랙 데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요즘엔 세태가 달라져서 이 ‘블랙 데이’에 검은 옷을 입어 ‘무소속’임을 자랑스러워하고(be proud of being ‘independent’) 블랙 커피 잔을 부딪치며 자유를 위한 축배를 하는(toast to freedom with mugs of black coffee)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

 

외신들은 한국에선 매달 14일이 연인들을 위한 기념일이라며 재미있어한다. 그도 그럴 것이 1월 14일부터 ‘다이어리 데이’로 시작한다. 새해를 맞이해 서로 연간 일정 다이어리를 사주며(buy each other yearly planners) 곧 있게 될 모든 데이트 내용을 기록하고(keep track of all their upcoming dates), 좋은 기억을 적어놓기로(write down fond memories) 한다.

 

5월 14일은 ‘장미 데이’ 또는 ‘옐로 데이’다. 꽃이 만발하는(be in full bloom) 시기에 때맞춰 노란 옷을 입고(put on yellow clothing) 장미 다발을 주고받는다. 장미도 가능하면 노란색으로 하고, 옷을 맞춰 입어(dress up in matching outfits) 연인임을 과시한다. 짝 없는 싱글들은 노란색 카레를 먹는다.

 

6월 14일은 ‘키스 데이’다. 한국 문화에선 공공연한 애정 표현(public displays of affection)을 남우세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그런 사회적 규범에서 탈피하는 구실(excuse to break free from the social norm)로 만들어진 날이다. 7월 14일은 ‘실버 데이’. 두 사람의 약속을 상징하는(signify the couple’s commitment) 은반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다짐한다. 반지에는 서로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engrave each other’s names).

 

8월 14일엔 초록 무성한 야외에서 소주 홀짝이는(sip soju outdoors) 날이라고 해서 ‘그린 데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린’은 우거진 녹음이 아니라, 재활용 편의를 위해(for the ease of recycling) 2009년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기로 합의한 녹색 소주병 색깔을 뜻한다.

 

9월 14일은 함께 사진 찍고 노래방 가서 둘이 목청 높여 노래 부르는(belt out duets) ‘포토 데이’ ‘뮤직 데이’이고, 10월 14일은 연인 관계의 숙성을 위해 포도주나 산딸기·오미자로 만든 핑크빛 술을 마시는 ‘와인 데이’다. 또 11월 14일은 영화를 함께 보는 ‘무비 데이’, 12월 14일은 날씨가 추워지니까 따뜻한 포옹(warm embrace)을 하거나 양말을 서로 선물하는 ‘허그 데이’ ‘양말 데이’로 기념한다.

 

한 외신은 매달 14일 이런 기념일이 있음에도 한국 연인들은 만남 100일, 200일, 300일 등은 또 따로 기념한다며(commemorate those anniversaries for good measure) “참 대단한 로맨티스트들”이라고 전했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04.23 ‘신사임당’이라는 굴레

‘운보의 아내’로 묻혔던 박래현
시대가 원하는 ‘현모양처’상에 화합하며 일과 가정에 안간힘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간 예술가였다

/우향 박래현의 추상 작품 ‘영광’(1966~1967). /국립현대미술관

 

봄날 주말, 청주 나들이에 나선 건 오로지 이 전시 때문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열리는 ‘박래현, 삼중통역자’(5월 9일까지). 지난해 서울 덕수궁관 전시를 놓쳐서 아차, 하다가 곧 청주로 내려간다는 걸 알고 벼르던 참이었다.

 

전시는 그간 ‘운보 김기창의 아내’라는 이름 아래 묻혔던 화가 박래현(1920~1976)의 작품 세계를 한껏 펼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케 하는 그의 초기작 ‘노점’이 전부터 좋았다. 맑은 색상과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색면, 이토록 세련되고 모던한 그림이 전쟁 직후인 1956년에 나왔다. 하지만 내가 얄팍하게 알고 있던 박래현은 여기까지. 그가 비슷한 시기에 남편과 함께 그린 합작품 ‘봄C’는 호방한 필선과 무르익은 자신감을 뿜어낸다. 굵은 등나무의 둥치를 박래현이 먼저 그린 후 김기창이 가지에 앉은 참새를 그렸다.

 

/박래현의 ‘노점’(1956년). /국립현대미술관

 

 

/박래현과 김기창이 1956년경 합작해 그린 '봄C'. 아라리오컬렉션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시기별 변곡점을 찍으며 그의 작품은 진화를 거듭한다. 이 모든 게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다. 1960년대 초반 형체를 지우고 색으로 에너지를 분출한 추상화 작업부터 박래현의 진가가 본격 발휘된다. 구불거리는 황금빛 띠에 가득 찬 생명력과 동양화 특유의 먹물 번짐 기법이 결합해 마치 수공예자가 짜낸 직물 같은 추상 회화를 만들어냈다. 쉰 나이에 떠난 미국 유학에선 판화라는 낯선 매체에 도전한다.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던 나에겐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판화 기술이 매혹적이었다”는 고백에서 새로운 기법을 만나 요동치는 예술가의 심장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박래현은 시대와 불화하지 않았다. 전시장엔 당시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추려는 안간힘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정오면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결혼 직후인 1948년 잡지에 쓴 수필에서 화가이자 아내, 엄마로서의 고충이 배어난다.

 

박래현이 국전을 통해 화단의 정상에 선 뒤에도, 세상은 청각 장애가 있는 남편에게 구화(口話)를 가르치고 네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한 ‘여성의 거울’로 그를 조명했다. 1962년 한 잡지사가 청탁한 글의 제목이 ‘남편 시중기’. 가족을 두고 7년간이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그가 귀국하자마자 ‘신사임당상’의 주인공이 됐다는 건 황당하기까지 하다. ‘예술하는 현모양처’라는 굴레를 씌우고 싶었던 게다.

 

하지만 작품 세계에 있어서는 그는 타협하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고 30평 남짓한 화실을 남편과 나누어 쓰며 작업에 몰두했다. 한 방에서 펼쳐지는 두 개의 세계.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무서운 대결”이라고 박래현은 표현했다. 1974년 귀국 판화전에서 발표한 작품들은 초보 단계에 머물던 한국 판화계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줬다. 그것은 ‘미래의 박래현’을 예고하는 팡파레처럼 강렬했지만, 그의 붓은 급작스레 꺾인다. 쉴 틈 없던 쉰여섯 생을 멈춰세운 건 간암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과로했다. 아내, 어머니, 예술가의 ‘삼중의 삶’은 그의 ‘삼중 통역’과 마찬가지로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모윤숙)

 

/미국에서 귀국한 박래현의 말년작 '어항'.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일과 가사, 내조와 육아를 모두 잘 해내려 분투했던 고단한 생이 짠하면서도, 그가 스스로 이뤄낸 성취에 울컥해졌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거장 남편이 독차지한 스포트라이트 옆 ‘누구의 아내’라는 굴레가 없었다면 화가 박래현의 위상은 지금쯤 어느 자리에 매김해 있었을까. 우리는 이 빛나는 예술가를 너무 빨리 잃었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04.30 ‘화성 헬기’ 지휘한 미얀마 여인

NASA 화성헬기 이끈 미미 아웅… 독재 미얀마 탈출, 우주 꿈 이뤄
男1위 수영선수는 올림픽 불참 “피로 물든 국기 대표할 수 없어”
꿈 잃은 한국, 누굴 키워내고 있나 

/그래픽=양진경

 

지난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화성에서 무인 헬기 ‘인저뉴어티(Ingenuity)’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 뉴스를 도배하길래 영상을 찾아봤다. 많은 게 예상과 달랐다. 헬기가 모기만큼 작아 보여 놀랐고, NASA 관제센터가 스타트업 회의실처럼 고작 노트북 몇 대에 빔 프로젝터 화면으로 화성 상황을 지켜봐서 또 놀랐다. 무엇보다도 “이제 우리는 인류가 다른 행성에서 비행체를 날렸다고 말할 수 있다”고 공식 발표하는 팀장이 검은 머리 아시아 여자라서 놀랐다. 미국 흑백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 흑인 여자가 계산한 궤도를 따라 인간이 달로 갔는데(영화 ‘히든 피겨스’가 다뤘다), 아시아인 증오 범죄를 멈춰 달라고 부르짖는 2021년에 아시아 여자가 화성 비행을 지휘하다니!

 

저 눈부신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졌다. 이름은 미미 아웅(Mimi Aung). 나이는 쉰 셋(이제부터 ‘미미 여사’로 부르겠다), 10대 고교생 자녀를 둘 키우는 버마계 미국인. 버마, 그러니까 미얀마 출신이다. 지난 2월 군부 쿠데타가 발발해 피가 낭자한 그 미얀마.

 

그의 부모는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유학하다 결혼해 1968년 미미 여사를 낳았다. 아버지는 화학 박사고 어머니는 조화함수(調和函數)로 졸업 논문을 쓴 미얀마 최초의 여성 수학 박사다. 미미 여사는 두 살 때 부모와 함께 귀국했다가 16세 때 혼자 미국으로 다시 왔다. 1980년대 미얀마는 독재자 네윈이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쇄국정책을 펼쳐 최빈국으로 전락했고, 부모는 딸의 앞날을 위해 어렵게 유학 비자를 얻어 탈출시키듯 내보냈다. 그도 일리노이대에서 전자공학 학·석사를 마쳤고 1990년 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 입사했다. 그리고 30여년간 우주 탐사 기술 연구만 했다.

 

과학에 과문한 까닭에 인저뉴어티의 의미를 자세히는 모른다. 여기에 900억원가량 투입됐고 JPL 소속 연구원 3500여명이 7년간 매달렸다니 기술 난이도가 어림짐작될 따름이다. 화성은 밤 기온이 섭씨 영하 90도까지 떨어지고, 공기 밀도가 지구의 100분의 1 수준이라 헬기를 띄우는 것 자체가 100배 이상 어렵다는데 작년 7월 발사된 로켓을 타고 2억7800만여㎞ 떨어진 화성으로 간 인저뉴어티는 미미 여사의 주문대로 야무지게 날개를 돌렸다.

 

미미 여사는 라이트 형제와 버금가는 쾌거를 해낸 것에 대해 “하고 싶은 일은 그냥 하면 된다. 남들이 뭐라 하든 꿈을 좇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가 미얀마를 안 떠나고도 자신의 잠재력을 100% 발휘하며 살았을지는 미지수다.

 

인저뉴어티가 화성 표면에서 날아오를 때 미얀마 수영 국가대표 윈 텟 우(26)는 도쿄 올림픽 불참을 결정했다. 선수단을 파견하는 미얀마 올림픽위원회(MOC)가 군사 정권의 꼭두각시라 “국민들의 피로 물든 국기를 대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미얀마 남자 자유형 50m·100m·200m 기록 보유자인 그는 2년 전 올림픽 기준 기록을 통과하고 맹훈련을 해왔다. 하지만 반(反)쿠데타 시위로 두 달 새 700명 넘게 죽고 5000명쯤 체포되는 아비규환 속에서 평생의 꿈을 꺾었다. “국민이 각자 노력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올림픽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

 

둘 다 미얀마 출신인데 50대 미미 여사는 노트북을 두들기며 화성을 향해 질주하고, 20대 수영 선수는 꿈을 빼앗겨 괴로워한다. 코인과 주식, 부동산 말고는 꿈 얘기가 사라진 한국 사회는 누구를 키워내고 있는걸까.◎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