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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13/ 정치5/ 고건 편2/ (31) 주말 한우 농가 순례 - <70> 85년 첫 여의도 입성

상림은내고향 2021. 4. 24. 20:25

비하인드 다큐13/ 정치5/ 고건 편2

(31) 주말 한우 농가 순례

1968년 전북 식산국장으로 행정이 펼쳐지는 현장에 처음 뛰어들면서 맡은 일에 관해선 누구보다 전문가가 되자고 마음을 먹었다. 한우단지사업을 추진하면서 소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가 읍·면사무소에 우적(牛籍)대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읍·면사무소에 가면 두 가지 대장이 있었다. 사람의 호적대장과 소의 우적대장이다. 키우는 사람의 이름과 소가 태어난 달, 암수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소의 인상착의(人相着衣), 아니 우()상착의가 적혀 있었다. 털 색깔, 가마의 좌우 위치, 뿔의 모양을 표기했다. 같은 누렁소라도 지문처럼 코와 입 주위 털색이 달랐다. 그 내용까지도 우적대장에 꼼꼼히 적혀 있었다. 읍·면사무소를 찾아 대장 한 부를 다 보고 나니 소의 생김새를 구분하는 법이 대강 보였다.

 사실 농민을 위한다고 중앙부처에서 만들어 시행했지만 지방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이 적지 않았다. 식산국이 맡고 있는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의 시책 중 하나가 농가 한 호마다 소 다섯 마리를 살 수 있도록 장기저리로 융자해 주는 한우증식단지 사업이었다. 부농이 아니라면 농가당 소 한두 마리를 갖고 있는 게 보통이다. 다섯 마리를 한 농가에서 키우기는 어려웠다. 융자를 받아 소를 다섯 마리 사놓고는 결국 그중 몇 마리를 파는 집이 많았다. 부적절한 시책이지만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새는 융자금을 막아야 했다.

 주말마다 운동화를 신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한우 관리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려고 농가 이곳저곳을 찾았다. 어느 주말 남원군 운봉읍으로 갔다. 마을 이름이 대개 ‘쟁기골’ ‘소머리골’ 등으로 옛날부터 목장으로 유명했던 지역이다. 오전에 몇 개 마을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 다른 마을을 다녔다. 농가에 있는 소머리를 보고 가마가 어디 있는지, 코와 입 주변 색깔이 어떤지 살펴봤다. 그랬더니 오전에 아랫마을에서 본 소가 보이는 게 아닌가. 융자금을 받아놓고 소를 팔아치운 것을 숨기려고 다른 마을의 소를 빌려온 거였다. 그걸 지적했더니 희한한 소문이 났다.

 “새로 온 젊은 국장이 소 얼굴을 다 외운다. 소 관상까지 본다더라.

 시간이 흘러 2004 4 16. 딕 체니 당시 미국 부통령이 한국을 찾았다.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그를 맞았다. 북핵 문제에 이라크 파병, 주둔 미군 재배치 등 다뤄야 할 엄중한 사안이 많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회담이 끝날 무렵이 다 되자 체니 부통령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일본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조속히 수입을 재개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산 소를 둘러싼 광우병 논란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식산국장 때 일이 떠올랐다. 소에 대한 각별한 국민감정을 생각한다면 안 될 일이었다.

 “광우병에 대한 한국민의 우려는 아직 큽니다. 지금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논의하기엔 적절치 않습니다.

 통역사가 오역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mad cow disease(광우병)’란 단어는 직접 영어로 말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촛불시위가 일었다. 안타까움이 컸다. 호적과 우적을 같이 관리할 만큼 소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는 남다르다. 그런 정서를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정책을 결정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농특사업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지역별 풍토에 맞는 특산물을 키워 농어촌의 소득이 늘어나게 정부가 지원한 정책. 농촌에서 사과·감귤·단감 등 경제작물을 키우고 양잠·축산 등을 하도록 지원했다. 어촌에선 백합·김·미역 등 양식을 하도록 도왔다. 1968년부터 71년까지 1차 계획 기간 중 정부는 459억원의 예산을 지원했고 41만 호 농어가가 참여했다. 72년부터 86년까지 2차 계획이 실시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역점 시책이었다.

 

(32) 전북은행 탄생 비화

1968년 전북 식산국장으로 일할 때 보리를 하곡수매(가격 안정 차원에서 정부가 농산물을 사들이는 제도)하는데 농민들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하곡수매를 독려하려고 각군 읍·면을 돌았다. 읍·면 직원들은 하나같이 하곡수매 실적이 좋지 않다고 했다. 시중가보다 정부에서 사들이는 가격도 약간 높고 조건도 좋았다. 그런데도 호응이 없는 이유가 궁금했다. 현장에 나가 직접 물었다.

 “가격이 좋은데 왜 농민들은 하곡수매에 참여 안 하나요.

 “보릿겨(맥강)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집마다 보통 돼지를 두세 마리 키웠다. 주로 먹이는 사료가 보릿겨였다. 하곡수매에 응한다고 보리를 다 넘겼다가는 보릿겨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정부는 하곡을 도정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보릿겨를 배합사료업자에게 팔았다. 그러면 농민들은 다시 보릿겨 사료를 업자들에게 되사는데 그 비용이 부담이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현장에 나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그래서 전국 최초로 ‘녹색카드’ 제도를 만들었다. 하곡수매로 보리를 정부에 넘기면 그 양에 맞춰 보릿겨를 돌려준다는 일종의 증서였다. 농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곡수매 실적을 수월하게 채웠다. 보리 10가마를 찧어 2~3가마의 보릿겨가 나온다고 치면 실비만 받고 녹색카드를 가져온 모든 농민에게 보릿겨를 반환했다.

 애써서 정책을 만들었는데 현장에서 호응이 없는 일이 많다. 행정편의주의에 물들어있는 공직자는 정책 지연만을 걱정한다. ‘왜 국민들이 따라주지 않나’ 전전긍긍하고 밀어붙이기까지 해서 혼란을 부추긴다. 정책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못한다. 호응이 없다면 잘못되고 불합리한 정책이다. 바꿔야 한다. 물론 답은 현장에 있다.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 농민에게 묻고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면 더 나은 정책을 만들 수 있다.

 전북은행을 창설하는 과정에서도 그 원칙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67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은행을 설치하라며 ‘1 1은행’ 정책을 추진했다. 그해 대구·부산은행이, 68년 광주·충청은행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전북만 답보 상태였다.

식산국 산하에 상공과가 있었다. 전북은행 창립이라는 과제가 식산국장인 나에게 떨어졌다. 이환의 전북도지사와 함께 도내 기업가를 찾아다니며 출자를 권유했다.

익산 거부인 지태순씨를 직접 찾아가 2000만원 출자 약속을 받아냈다. 고마운 마음에 그에게 큰절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고판남씨도 거금을 냈다. 백화양조, 전주제지, 삼양사 등을 찾아다니며 500~1000만원씩 자본금을 모았다. 은행을 설립하려면 수권자본금 3억원이 필요했다. 납입자본금(수권자본금 중 입금이 완료된 자본금) 15000만원을 채워야 하는데 돈이 모자랐다. 약속한 사람들이 납입금의 일부만 낸 탓이었다.

 다시 벽에 부딪혔다. 도청을 출입하던 이치백 기자 등 언론인들과 소주를 마시며 하소연을 했다. 그 자리에서 ‘도민 1 1주 갖기 운동’을 벌이자고 의견을 모았다. 향토은행을 내자는 운동에 도민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69 12 10일 드디어 전북은행이 문을 열었다.

 외환위기 때 전국의 많은 지방은행이 도산하고 통폐합 됐다. 하지만 전북은행은 외환위기를 견뎌내고 지금도 건재하다. 도민 1 1주 운동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33) 전주 북중 시절 도원결의

젊은 나이에 전북 식산국장이 됐다. 도청에 다니다 보니 고민이 생겼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같은 사람을 부하 직원으로 둬야 하는 문제였다.

 어느 날 복도를 걷다 보니 저 멀리 결재 서류를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낯이 익었다. 전주 북중학교 동기동창 이두복이었다. 반가웠다. 다가가 인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두복이가 나한테 공손히 목례를 했다.

 “야, 두복아. 왜 그래? 오랜만이다.
 본 지 오래라 어색해서 그런가.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물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어느 과에 있냐.

 그런데 두복이가 존댓말을 쓰며 답을 했다. 국장인 나는 행정서기관이었고 그는 행정서기였다. 직급으로 치면 4단계 정도로 차이가 꽤 났다. 서기관과 서기의 어색한 만남이 돼버렸다. “도청 안에서도 친구처럼 지내자. 존댓말 쓰지 말고 서로 반말 쓰자”라고 했는데 “도리가 없다”며 잘 응해주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되겠는데….’ 신경이 쓰였다.

 고민을 하다가 조용히 알아보니 도청에 북중 동기가 세 명, 군청에 한 명이 있었다. 이들을 포함해 7~8명 동기동창을 대폿집인 ‘이화집’에 불렀다. 의자도 없이 드럼통을 가운데 두고 둘러서서 토끼 고기, 도루묵을 구워 먹는 집이었다. 처음 모여 보니 꽤 어색했다. 막걸리 여러 잔이 오갔다. 일 얘기는 안 하고 반말로 옛 추억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오르고 왁자하게 추억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북중 시절 동기동창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조형익이었다. 나는 6·25 전쟁 피란길에 서울의 중학교에서 전주 북중으로 전학을 갔다. 전란 때문인지 중학교 1~2학년 때 키가 자라지 않고 154㎝였다. 또래에 비해 작은 덩치였다. 그런데도 ‘서울내기가 왔다’며 결투 신청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피할 수 없어 방과 후 학교 뒤 언덕배기로 가서 응전은 했다. 하지만 전투력이 문제였다. 스파링 상대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나를 스파링 상대로 삼았던 북중 학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형익이었다.

 사실 북중 최고의 주먹, 어깨 중 우두머리는 지상수였다. 요새 아이들 말로 ‘일진’쯤 되겠다. 스파링 상대로 계속 맞기만 하다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우두머리인 지상수를 노리기로 했다. 나와 비슷한 신세였던 북중의 친구 김하영과 김기철을 불러 모았다.

 “지상수, 그놈을 혼내주자.” 도원결의를 했다. 셋이 좁은 골목길 옆에 숨어 지상수를 기다렸다. 지상수가 지나갔다. 내가 앞으로 나가 말했다. “너 버릇 없어. 한판 붙자.

 전략은 성공적이었지만 아쉽게도 전술에서 실패했다. 좁다란 골목길이다보니 나만 홀로 앞에 나선 꼴이 돼버렸다. 혼자 지상수에게 맞기만 했다. 투닥투닥 하다가 넓은 장소로 나왔는데도 연합군 두 사람은 무기력인지, 배신인지 뒤에서 관전만 하지 참전하지 않았다.

 내 전투력만으로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엄청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 이튿날 ‘고건이 지상수를 패주려고 도전했다’는 소문이 북중 안에서 날개를 달았다. 다들 나를 외경스러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다시는 결투 신청이 없었다. 도원결의 형제들과 지상수와는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는다.

 어쨌든 도청 안 북중 동기들과 이런 얘기를 웃으며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후 동기동창 이화집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가졌다.

 처음 부딪힌 숙제는 이렇게 풀었지만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을 하면서부터 대학·고시 선배나 동기를 부하로 두는 일이 잦아졌다. 선배가 부하 직원이면 차라리 나았다. ‘선배’라고 모시고 예의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학교 동기나 고시 동기와 상하 관계로 얽히니 꽤 난감했다. 전남도지사 때는 국장 전부가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다.

 공직 생활을 하며 늘 고민하던 숙제였다. 나보다 나이 어린 상사를 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4> 71년 광주대단지 사건 ①

1971 8 10일 시간은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새로 발령받을 내무부 소속 부이사관급 직원 등 40여 명이 청사 대회의실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 속에 지역개발담당관(이후 새마을담당관)으로 내정된 나도 있었다.

 3년여 만의 내무부 복귀였다. 오치성 내무부 장관은 나를 장관 직속 민원담당관(이사관)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손수익 지방국장은 지역개발담당관(부이사관)으로 같이 일하자고 했다. 한 직급 낮은 자리였지만 난 손 국장의 제안을 선택했다. 장관 측근보다는 현장을 찾아다니며 일하는 자리에 끌렸다.

 그런데 그날 사령장을 주기로 한 오치성 장관은 한 시간이, 두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청와대로 보고하러 갔다고 하는데 소식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후 배달된 석간 신문을 봤더니 의문이 풀렸다. 경기도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일대) 사건 때문이었다.

 60년대 후반 서울에 개발 광풍이 불었다. 계기판 없는 불도저식 개발이었다. 무허가 판잣집에 살던 주민들은 최소한의 생계 지원책도 보장받지 못하고 시 외곽으로 쫓겨나듯 이전해야 했다. 철거민들을 거여·상계동과 시흥 등지에 강제이주시켰지만 땅이 부족했다.

 

68 5월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에 이주민을 위한 주택·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년 만인 69 5월 바로 철거민 등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입주, ()투자란 명목 아래 ‘실어다가 들이붓는’ 비인간적인 이주 대책이 시행됐다. 이주 2년여가 지나자 인구는 웬만한 시·군 규모인 14만 명으로 늘어났고 누적됐던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71 8 10일 오전 양택식 서울시장이 광주대단지 현장을 찾아 주민과 직접 대화할 예정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양 시장은 나타나지 않았고 갑자기 비까지 쏟아졌다. 야외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은 격분했고 결국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60~70년대 수도권 철거 이주사에서 대표적 비극으로 꼽히는 광주대단지 사건은 그렇게 발생했다.

 난동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지자체 관할이었던 광주단지 업무를 내무부로 이관했다. 지역개발담당관, 바로 나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사령장도 안 받았지만 그날 밤을 새우면서 실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웠다. 정식 발령을 받고 전석홍 내무부 도시개발관(이후 도시지도과장)과 광주단지로 향했다. 지역개발담당관 산하 도시개발관이 실무를 맡고 있었다.

 단지 내 광주군 중부면 출장소를 먼저 찾았다. 현장은 참혹했다. 도로나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곳에 천막과 판잣집만 빼곡했다.

 당시 도시개발관이었던 전석홍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은 현장을 목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도시 생활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장지대를 만들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완공되기 전이어서 일거리가 거의 없었어요. 서울과의 거리는 12㎞ 정도로 멀지 않았지만 교통이 워낙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먹고살 길이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에 일하러 가고 낮에 판잣집이나 천막 안에는 노인이나 아이들뿐이었죠. 당시 북한에서 기자들이 남쪽에 오게되면 광주단지를 취재하겠다고 밝혔다는 설까지 돌았습니다. 광주대단지 문제를 자기들의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고 말입니다. 당국자로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때부터 전 개발관과 함께 매일 현장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현장 일을 맡으면 제일 후미진 곳까지 가보는 게 내 버릇이다. 하루는 남한산성 너머 산 중턱에 있는 한 마을을 찾았다. 광주대단지 내 철거민 이주촌 중 하나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영세민들이 연고도, 변변한 일자리도 없는 곳에 쫓겨왔다. 당연히 빈곤 문제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치안도 형편없어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안내하던 사람이 나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마을에서 굶주림 때문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돕니다.
 비통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민심이 흉흉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35> 71년 광주대단지 사건 ②

1969 5월부터 71 8월까지 서울에 살던 철거민 126215명이 경기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일대)로 강제 이주됐다. 인구는 14만 명으로 불어났다. 전체 주민의 80% 정도가 실업자였을 만큼 가난은 심각했다. 도로, 전화, 상하수도 뭐 하나 변변하게 만들어진 게 없었다.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이었던 나는 전석홍 도시개발관과 일주일에 몇 번씩 출근하듯 광주대단지의 마을 곳곳을 찾았다.

 열악한 생활 환경만큼 부동산 투기 문제가 심각했다. 철거 이주민들에게 분양한 땅 넓이는 가구당 평균 약 40(12)에 불과했다. 건물 한 채 짓기엔 턱없이 모자란 땅이었다.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사람들은 분양지(딱지)를 헐값에 다시 팔았고, 삭막한 광주대단지에 복덕방만 110여 개에 달했을 만큼 투기 바람이 불었다.

 묻지마 개발의 부작용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행정·치안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한 지 20여 일 만인 71 9 1일 경기도에서 직할하는 성남출장소를 설치했다. 부이사관급에게 소장직을 맡겼다. 9 4 4개였던 파출소를 8개로 늘렸다. 개발 업무는 서울시가 아닌 경기도로 일원화해 책임지도록 했다.

 당장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주민을 돕는 일도 중요했다. 현장 주민들에게 긴급 구호품을 지급하고 월동 연료를 지원했다. 72 8 5일 광주대단지(성남시) 종합개발계획을 확정했다. 광주군 4개 면과 용인군 수지면을 아우르는 132㎢ 구역을 20년에 걸쳐 15만 명 규모의 서울 위성도시로 개발하는 내용이었다. 오치성 전 장관은 71 10 7일 항명 파동으로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이 계획을 재가한 사람은 후임인 김현옥 장관이었다. 문제가 된 68년 광주단지 이주 계획은 김현옥 장관이 서울시장일 때 만들어졌다. 일종의 결자해지(結者解之·일을 저지른 사람이 해결함)였다. 그렇게 광주대단지는 성남시로 서서히 모습을 갖춰 갔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우리나라 도시 개발 과정에서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선()개발, ()입주 원칙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죠.

 나와 같이 광주대단지 사태를 수습하느라 고생했던 당시 도시개발관, 전석홍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의 설명이다. 나에게도 의미가 큰 일이었다. 98 12월 임명직으로 처음 서울시장을 맡게 됐을 때 달동네 주택 재개발 사업 문제에 직면했다. 해결점을 찾아가는 데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쌓은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조금 다른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넘어갈까 한다. 71 9월께였다. 성남시 도시 계획을 세우려고 오치성 내무부 장관을 수행해 경찰 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 비행기에서 지형을 살피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땅 밑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아, 이렇게 좋은 땅이 서울 바로 바깥에 있었던가. 옛날 같으면 도읍으로 정할 만도 하구나.

 남한산성·청계산·관악산을 잇는 산줄기가 둥그렇게 땅을 감싸고 있었고 안은 넓은 평야였다. 먼 훗날 크게 쓸 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도시 계획을 세울 때 이미 개발된 지역을 제외한 광주대단지 땅의 92.6%는 유보 녹지로 뒀다.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못했다. 노태우 정부 때 200만 호 주택건설 사업이 추진됐다. 성남시에는 분당신도시가 들어섰다. 내가 눈여겨본 그 땅 위에 말이다.

 지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꼭 그곳을 아파트 단지 위주로 개발해야 했을까. 연구단지와 주거지가 복합된 테크노폴리스 형태의 생산적인 주거단지로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금 성남시는 옛 광주대단지와 분당·판교신도시를 아우르고 있다. 그 땅을 밟고 사는 사람 중에 40여 년 전 광주대단지 사태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철거 이주민과 충분한 소통도 없이 행정 권력으로 개발을 밀어붙여 발생한 참사였다. 지금의 성남시가 있기까지 철거 이주민의 눈물과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그만큼 소통은 중요하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 광주대단지 사건

서울시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경기 광주군으로 강제 이주된 철거민이 1971 8 10일 벌인 대규모 시위. 경찰 81명과 주민 20여 명이 다쳤고 버스 10여 대가 반파됐다. 사망자는 없었다. 관공서에 불을 지르고 관용차 등을 부순 주민 20명은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36>치산녹화 ①

1960년대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아래로 일본의 울창한 숲이 보였다. 푸르다 못해 검었다. 숲은 같은 빛깔인 동해로 이어졌다. 하네다와 서울공항을 잇는 하늘길을 따라 내려다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한국의 산이 경남 울주군 농소면 (지금의 울산시)과 경북 월성군 외동면 (경주시)에 걸쳐 뻗어 있는 동대본산이었다. 지금이야 푸르지만 그때는 시뻘건 민둥산이었다. 검푸른 일본의 숲과 누렇다 못해 붉은 한국의 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자존심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67 11 11일 박 대통령은 “저 형편 없는 산을 사방공사(모래나 흙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하는 공사)로 녹화하라”고 경상북도에 지시했다. 경상남도·경상북도와 산림청은 매년 봄에 사방사업을 했지만 장마가 닥치면 그때마다 산은 무너져내렸다. 박 대통령은 72 9 18일 수해가 난 현장을 찾았다가 산사태로 엉망이 된 동대본산을 목격했다. 김현옥 내무부 장관에게 “산비탈과 계곡을 복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새마을 부서에서 하라 그래 봐.

 내가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이었다. 72 9월 말부터 경주시내 여관에 숙소를 잡고 전석홍 내무부 도시개발관과 함께 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동대본산은 악산 중 악산이었다. 토질이 문제였다. 평소엔 바위처럼 딱딱하지만 여름철 비만 오면 흙이 곤죽처럼 흘러내렸다.

 ‘매년 실패를 거듭한 방법이 아니고 다른 공법을 강구해야 하는데….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여관으로 전화가 왔다. 부산의 한 전문대 토목공학과의 아무개 교수라고 했다.

 “지역신문을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동대본산 녹화사업을 맡고 계시다고….
 “네. 그렇습니다만.
 “그런 특수 토질에선 일반 산지사방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특수사방 공법을 써야 합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바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묵고 있던 경주 여관으로 그 교수가 찾아왔다. 보자마자 물었다.

 “특수사방 공법이 뭔가요.
 “ 뭐 타고 내려오셨습니까.
 “새마을호 타고 왔는데요.

 “철도 타고 내려올 때 터널도 지났을 텐데, 터널 입구 양 옆에 보면 콘크리트 옹벽도 있고 석축도 있고 사이사이 나무를 심어놨죠? 수로도 있고. 그게 특수사방 공법입니다.

 “아. 그래요. 동대본산에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장마가 오더라도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물길을 유도하는 수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안에 가느다란 철근을 넣더라도 콘크리트 수로를 만들어야 산비탈이 무너져내리지 않습니다.

 ‘옳다. 이거다’ 싶었다. 그 자리에서 동대본산 사방공사 구역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의 설계를 부탁했다.

 

“현장을 보시고 직접 사방공사 설계 스케치를 해주십시오. 설계한 모델을 가지고 다른 지역도 그에 준해 설계하겠습니다.

 콘크리트 수로를 설치하는 일명 ‘심줄 박기’ 공법을 현장에 적용했다. 그리고 경상남도 부지사와 경상북도 부지사를 현지에 불렀다. “특별교부세 예산을 투입할 계획입니다. 양 도가 분담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공사를 추진했으면 합니다.

 동대본산이 도계(도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특성을 이용해 2개 도의 경쟁을 붙인 거다. 72 11 1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전 연락도 없이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 내려 현장을 찾기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년반 만에 동대본산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실패를 거듭했던 동대본산 녹화사업이 드디어 결실을 봤다.

 부산의 그 교수 덕분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 교수의 이름과 대학명이 생각나지 않는다. 직접 만나 고마움을 다시 전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은 80대 중반의 연세일 것이다. 혹시 이 글을 보고 본인이나 그분을 아는 사람의 연락이 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경남과 경북 경계에 있는 동대본산 비탈에 콘크리트 수로를 만드는 특수사방 공법을 적용했다. 공사 1년여 후 민둥산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왼쪽은 공사 전인 1972, 오른쪽은 공사 후인 73년 동대본산의 같은 지역 모습이다. [사진 고건 전 총리]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전석홍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79.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며 공직에 들어섰다. 71~73년 내무부 도시개발관(이후 도시지도과장)으로 고건 당시 새마을담당관과 함께 일했다. 이후 내무부 새마을담당관, 광주시장, 내무부 차관보, 전라남도 도지사를 지냈다. 국가보훈처장과 15대 국회의원으로도 일했다.


<37> 치산녹화 ②

1972년 동대본산 사방사업 경과 보고서를 올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나를 불렀다.

 “대통령 주재 경제동향보고회에서 그 내용을 직접 보고해요. 청와대 지시야.

 깜짝 놀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월례 경제동향보고회가 있었다. 경제상황을 정리해 매달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경제장관급 회의였다. 이 회의에 동대본산 녹화사업을 보고 안건으로 택할 만큼 산림녹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집념은 컸다. 또 경제 각료에게 국토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공부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떨리는 마음을 안고 슬라이드와 설명 자료를 챙겨 서울 광화문에 있는 경제기획원으로 향했다. 대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는 오전 10시에 시작했다. 내가 보고할 차례가 되자 회의장의 불이 꺼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프로젝터로 슬라이드를 바꿔가며 공사 전후 산의 모습을 비교해 설명했다. 프로젝터가 말썽을 부려 떨리는 손으로 슬라이드를 허둥지둥 갈아끼웠던 기억도 난다.

 발표를 시작한 지 10분쯤 흘렀을까. 얼마나 긴장했던지 그제야 4~5m쯤 앞 회의장 가운데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의 첫 대면이었다. 20~30분간의 보고가 끝났다. 발표를 주의 깊게 듣고 있는 박 대통령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살았다’. 발언대에서 내려오며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막중한 업무가 내게 맡겨졌다. 나에게 A4용지 반만 한 크기의 작은 종이 한 장이 전달됐다.

 ‘내무부 장관 귀하.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 보고할 것’.

종이 위쪽에 그려져 있는 봉황 무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대통령의 친필 지시 메모였다.

 1~2개월 전국의 여러 산을 찾아다니며 성공·실패 사례를 연구했다. 산림청 범택균 육림과장과 김인표 조림과장은 산림 전문가로서 많은 조언을 해줬다. 특히 손수익 산림청장으로부터 두 차례 자문을 받았다. 손 청장은 내무부 지방국장을 거쳐 경기도지사로 일하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산림청장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추진력과 기획력이 뛰어났다.

  국토조림녹화 계획안을 마무리해서 김현옥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김현옥 장관은 바로 청와대에 보고하러 갔다. 그날 오후 4시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열리는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국토조림녹화 계획안을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그때는 커다란 갱지 전지에 손으로 직접 써서 차트를 만들었다. 70~80장에 달하는 차트를 써야 했다. 정신 없이 보고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불렀다. 장관실 옆에 소접견실이 있었다. 그곳에 김현옥 장관, 정상천 차관, 새마을담당관인 나를 비롯해 기획관리실장, 지방국장, 치안국장, 행정담당관, 재정담당관 등 7~8명이 모였다. 보통 메뉴는 추어탕인데 김현옥 장관의 기분이 좋았는지 생선회가 차려져 있었다. 김 장관은 즐겁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보고는 고 담당관이 맡도록 해.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특수사방 사업의 결과를 보고하기는 했지만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안을 설명하는 것은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다른 차원이었다. 범부처 차원의 중장기 계획을 부이사관급이 보고한 전례가 없었다. 직속상관인 김수학 지방국장이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김수학 지방국장님이 맡아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야. 그건 계획을 작성한 사람이 직접 보고해야지.
 다시 사양했다. “그래도, 제가 하는 건 아무래도 아닌….

 장관 지시에 세 번이나 토를 달았다. 내 잘못이었다. 갑자기 김현옥 장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갑자기 내 귀 옆으로 뭐가 ‘휙’ 하니 지나간 뒤 벽에 부딪쳤다.

 “쨍!

 유리 재떨이였다. 내일 보고를 해야 하니 얼굴을 정면으로 맞추진 않았나 보다. 그래도 내 쪽을 겨냥하고 던진 건 분명했다. 보고는 결국 내 몫으로 돌아왔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김현옥

김현옥(1926~97)=군인 출신 행정가. 육사 3기로 육군 수송학교 교장, 항만사령관을 지낸 그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1962년 부산시장으로 발탁했다. 부산시장으로 일하면서 ‘불도저’란 별명을 얻었다. 한번 결심하면 빠른 속도로 밀어붙이는 추진력 때문이었다. 66년 서울시장에 임명됐다. 청계고가도로, 남산 1·2호 터널, 광화문·명동 지하보도 등 수많은 공사를 추진했다. 속도전은 부실공사로 이어졌다. 70 4 8일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 발생해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났다. 71~73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81년 교육자로 변신했다. 부산 장안중·제일고 교장을 지냈다.

 

1972 11 1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경남과 경북 경계에 걸쳐 있는 동대본산의 사방사업 현장을 찾았다. 박 대통령이 가운데 의자에 앉아 공사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구자춘 경상북도 도지사다. [고건 전 총리 제공


<38> 치산녹화 ③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하는 일은 결국 내 몫이 됐다. 차트사가 밤을 새웠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보고 시간인 오전 10시에 임박해 차트를 완성했다.

 청와대 회의실 앞에 도착하니 예정 시간보다 10분이 더 지났다. 계장과 함께 갔지만 경호원 제지 때문에 혼자 차트를 둘러메고 보고 장소에 들어갔다. ‘감히 대통령 보고회에 10분이나 늦다니.’ 덜덜 떨며 회의장에 들어섰다. 박 대통령과 국무총리, 관계부처 장관 모두가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정신에 차트를 걸고 했는지 모르겠다. 심호흡을 하고 인사를 했다.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보고드리겠습니다. 기본 방향을 국민조림, 속성조림, 경제조림 세 가지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첫째, 모든 국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참여하는 국민조림을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지금 홍수와 산사태가 반복되고 있으니 우선 속성녹화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셋째, 장기적으로 경제조림을 추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 쪽을 훔쳐보니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준비한 대로 찬찬히 브리핑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고 중간중간 대통령은 여러 번 질문을 하고 많은 얘기를 했다. 산림 녹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이 느껴졌다.

 국토조림녹화 1 10개년 계획은 속성조림에 중점을 뒀다. 이에 맞는 10대 수종을 정했다. 이탈리아포플러, 은수원사시나무, 리기테다소나무, 그리고 연료림 수종인 아까시나무가 10대 수종의 앞자리를 차지했다.

 10대 수종에 대한 설명을 끝마치자마자 박 대통령이 사단장 시절 얘기를 꺼냈다. 부대 순시 길에 플라타너스 가지를 지팡이 삼아 꺾고 짚고 다니다가 무심코 거꾸로 꽂아놓고 귀대했는데 나중에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다 보니 거꾸로 꽂힌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다고 했다.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했다고 말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면서 질문을 던졌다.

 “플라타너스 나무는 왜 속성수종에 안 들어있지?
 대통령 말씀이라고 ‘네, 추가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각하, 플라타너스는 평지 가로수용으로는 적합한데 산지조림 수종으로는 아직 검증이 안 됐습니다.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은 이 자리에서 국가정책으로 결정됐다. 농림부 소속의 산림청을 새마을 주무부인 내무부로 이관하는 방침도 이 자리에서 정해졌다. 조림녹화사업을 새마을운동에 의한 국민조림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산림청을 내무부에 빼앗기게 되자 김보현 농림부 장관은 얼굴이 벌개지며 준비해온 반대 논거 자료를 펴들려고 했다. 김 장관은 내무부 초임 사무관 때 보고 배웠던 나의 멘토이기도 했다.

 자료를 뒤지고 있는 김 장관에게 박 대통령이 말을 건넸다.

 “김 장관, 지금 농림부는 국가적으로 제일 중요한 식량 자급에 매진해야 하는데 산림녹화까지 하기엔 힘이 버거워요. 1차 계획기간만 산림청을 내무부에 빌려줬다가 1차 계획이 끝나면 돌려받도록 하시죠.

 그가 쓴 ‘버거워요’란 표현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목소리도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었다. 김 장관의 위신도 세워주면서 설득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군 출신 대통령의 일방적 명령이 아닌 사범학교 교사 출신다운 설득의 리더십이었다.

 며칠 후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의 명칭은 박 대통령에 의해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림청 역시 내무부 소관으로 넘어왔다. 치산녹화 계획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시·도지사, 시장, 군수, 산림관계관 회의를 열어 계획을 시달하는 업무는 내가 직접 맡았다.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그렇게 출발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39> 치산녹화 ④

1973 3 10일 내무부는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10년간 전국의 100만㏊ 넓이 산지에 나무 213200만 그루를 심고 화전민 203000가구를 이주시킨다는 유례없는 대규모 조림계획이었다.

 “우리의 후손들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10년 동안 고생을 해서 울창한 산림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도록 합시다. 1973 4 5일 경기 양주군 백봉산(지금의 남양주시에 위치)에서 열린 식목일 기념 나무심기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이었다.

 최고 통치권자인 박 대통령의 국토 조림에 대한 집념, 새마을운동에서 나온 국민적 에너지, 치밀한 행정력. 치산녹화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가지가 통합적 시스템으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1년에 3억 그루 안팎의 나무를 심었다. 대대적인 국민 식수 운동으로 이어졌다. 양묘(묘목 키우기)와 조림을 마을 소득으로 연결시킨 전략이 주효했다. 묘목은 각 마을 안에서 키웠고 묘목 값은 정부가 치렀다. 묘목을 마을의 앞산과 뒷산에 심는 일은 다시 주민들 몫이었다. 마을 산을 푸르게 가꾸면서 수입도 생긴다고 하니 새마을지도자들이 앞장섰다. 조림하는 주체별로 기관(機關)조림, ()조림, 산주(山主)조림, 마을조림을 추진했는데 마을조림의 비중이 가장 컸다.

 행정 장악력과 동원력을 극대화했던 당시 김현옥 내무부 장관과 손수익 산림청장의 리더십도 성공의 주요인이었다. 나무가 제대로 뿌리내렸는지 검사(활착 검사)하는 일은 공무원이 맡았다. 매년 25000~3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 데 산림청 공무원 인력만으로는 안 됐다. 전국 공무원을 총동원했다. 또 지역별로 교차해서 검목(檢木)을 했다. 경기도에 심은 나무는 강원도청 공무원들이 현장에 나가 나무 하나하나를 검사하도록 했다. 각 시·도와 시·군의 산림국과 산림과를 이때 새로 만들었다.

 나는 치산녹화계획을 수립했을 뿐이다. 현장에서 지휘하고 실천한 사람은 손수익 산림청장이었다. 한 해 10만㏊가 넘는 산지에 3000~4000개 마을이 나서 나무를 심는 일은 손 청장이 이끄는 산림청의 임업 기술력이 있어 가능했다. 1970년대 후반 고속도로를 지나갈 때 볼 수 있었던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란 표지판도 손 청장의 작품이었다.

 물론 모든 정책에 부작용은 있다. 치산녹화 계획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산통제 규정과 연료 대책이 문제가 됐다. 연탄이 농촌 전역에 보급되기 전이다. 땔감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농민들의 반발이 컸다. 산에서 나물이나 약초 등을 캐서 사는 사람의 생계 문제도 있었다. 경찰이 맡았던 입산 단속은 마을 단위에서 자율적으로 하도록 규정을 고쳤다. 그리고 아카시아 연료림을 세 배로 늘려 조림했다.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의 성과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공식 보고서에서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 중 최단기에 산림녹화에 성공한 모범국가”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는 국민조림, 속성조림엔 성공했다. 하지만 치산녹화의 세 가지 원칙 중 마지막 하나인 경제조림은 아직 미완이다. 1차 치산녹화 계획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토질에 맞는 경제수종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다.

 김기운 초당대 이사장 겸 백제약품 회장은 1970년대부터 사재를 털어 전남 강진군에 1000㏊ 규모의 ‘초당림’을 조성했다. 초당림에서 성공한 외래수종인 백합나무를 나라에서 경제수종으로 권장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한반도 토종 경제수종은 언제쯤 육종할 것인가. 한반도 북쪽의 황폐산지를 우리 경험을 살려 녹화할 때 10대 속성수종으로 무엇을 정할 것인가. 토양 개량과 연료림을 겸하는 북한형 아까시나무 수종으로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나.’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대 이경준 교수가 아까시나무 5개 수종을 평양 순안공항 주변 지역에 심은 뒤 그 생육 경과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요즘도 기후변화센터에서 윤여창 교수, 손요환 교수, 이우균 교수 등과 함께 ‘북한 나무심기’ 계획을 다듬고 있다. ‘한반도의 녹화(그린 코리아)’ 완성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닌가.
정리=조현숙 기자

손수익=81.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전남 나주와 경기 파주·부천의 군수를 지냈다. 내무부 지방국장을 거쳐 경기도 도지사, 산림청장, 충청남도 도지사, 내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81~83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83~86년 교통부 장관으로 일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내려가 94년 ‘장흥학당’을 열었다. 여러 분야 강사를 초청해 연찬회를 여는 일종의 공부 모임이다.

 

<40> 70년 새마을운동 첫발

1970년대 초 한국의 농촌은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보릿고개에 시달렸고 농촌 주택의 80%는 초가집이었다. 전기가 들어오는 지역은 20%에 불과했다.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절반에 달했다. 대부분 마을 안의 길은 경운기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빈곤 탈출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그 뿌리는 어린 시절 겪은 가난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79년 어느 날 저녁의 일로 기억한다. 난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관이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들을 자주 불러 저녁을 했다. 그전엔 한 달에 한 번 만찬을 했다는데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고 나서는 수석들과의 저녁 자리가 한 달에 두세 번으로 늘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박 대통령은 어렸을 때 얘기를 꺼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일이 있어. 동네에 대지주가 있었는데 모내기를 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가서 일을 해. 집에서 점심을 지어줄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애들도 다 따라 나가. 나도 그랬지. 모내기에 따라 나가면 샛밥을 줘.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니 숫자가 많아. 당연히 그릇이 모자라지. 그래서 찐 호박잎에 주먹밥 한 덩이 그리고 구운 간고등어 반의 반 토막을 얹어줘.

 박 대통령은 이 대목에서 말을 잠깐 멈추고 군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혔어. 아직도 잊지 못하겠어.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박 대통령은 농촌의 빈곤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집념을 갖고 있었다. 자조적 농촌 개발을 목표로 새마을운동을 제창한 이유였다.

 61년 군사정부는 5·16으로 정권을 잡자마자 빈곤 탈출을 목표로 재건국민운동을 추진했다. ‘톱다운(top-down·위에서 결정해 아래에 전파)’ 방식의 관 주도 국민운동이었던 탓에 호응은 적었고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시작부터 달랐다. 어느 한 사람이 고안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때 이미 경북 청도의 신도리, 영일의 문성동(지금의 포항), 전남 담양의 도개마을 등 스스로 잘 가꾸는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농촌 곳곳을 다니던 박 대통령은 이런 변화를 목격했다.

 70 4 22일 박 대통령은 부산에서 열린 한해(旱害·가뭄 피해) 대책 지방 장관회의에서 이런 변화를 전국 마을에 전파하자며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재건국민운동과 반대로 현장에서 출발한 운동이었다. 그해 10월 정부는 전국 33000여 개 마을에 각각 335포대의 시멘트를 지원했다.

 마을마다 335포대를 지급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시멘트 수요가 엄청나던 시기다. 기간산업으로 시멘트 산업을 육성했다. 그러다 보니 시멘트 양이 부족한 해도, 넘치는 해도 있었다. 69~70년 시멘트가 과잉 생산됐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었던 김성곤 쌍용양회 회장은 박 대통령에게 시멘트 재고를 처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사용처를 마련해줬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어떻게 추진할까 고민하던 박 대통령으로선 ‘마침 잘됐다’ 싶었을 거다. 그는 시멘트 재고를 사들여서 마을마다 나눠주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전체 시멘트 재고량을 33000여 개 마을 수로 나눴더니 단순히 335포대란 계산이 나왔을 뿐이었다.

 대신 정부는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단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첫째, 가구마다 개별적으로 쓰지 말고 마을 공동사업에 사용하라. 둘째, 어떤 공동사업에 쓸지 마을 사람들이 합의해서 결정하라’. 농민들이 스스로 마을 개발사업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어디에 어떻게 쓸지 위에서 미리 정해주던 이전 사업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은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사실 초기 여론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재건국민운동의 재판(再版)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다음 해인 71 8월 나는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으로 임명됐다. 냉소적인 여론을 돌리는 일이 급했다.

 

1972년 새마을운동 사업으로 지급받은 시멘트로 하수로를 만든 충남 논산군(지금의 논산시) 동산리

 

<41>  새마을운동 점화

난 관운(官運)이 좋은 사람이다. 관운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거다. 나에게 관운은 시대적으로 중요한 국가적 과제를 맡는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으로 일하며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직접 수립하는 기회를 얻었고 새마을운동을 담당하게 됐다.

 1971 8월 나는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으로 임명됐다. 새마을운동이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막 싹트기 시작할 때였다. 초기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여론을 돌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는 사업 전과 후 달라진 마을의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만들어 짊어지고 곳곳에 설명을 하러 다녔다. 가장 먼저 언론사 사회부장들을 오찬 간담회에 초청해 설명했다. 그 다음 한국 YWCA 연합회에서 요청이 왔다. 그때 YWCA 모임을 주재한 사람이 박영숙 전 안철수재단(현 동그라미재단) 이사장이었다.

 모교인 서울대에 가서도 설명회를 열었다. 권위주의 통치체제하에 관료가 대학에 가서 강연을 한다는 것은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총학생회장 출신 선배가 설명회를 한다고 그랬는지 다행히 학생회에서 도움을 줬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 자리에 서울대 대강당이 있었다. 후배 학생 500명 정도가 강당에 모였고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슬라이드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농촌의 초가집이 소박한 정취가 있는데 왜 지붕 개량을 해야 합니까.

 답을 했다.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해마다 초가집 지붕을 갈려면 짚이 많이 필요하고 힘도 듭니다. 그 짚을 소의 사료나 가마니, 새끼 등 고공품(짚을 엮어 만든 생활용품)으로 쓰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요.

 시간이 갈수록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는 단체가 늘어났다. 농촌 현장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70년엔 전국 33000여 개 마을에 똑같이 시멘트와 철근을 지급했지만 다음 해에는 절반인 16600여 개 마을만 지원했다. 공동사업에 쓰지 않고 집마다 시멘트, 철근을 나눠 가진 마을은 제외했다. 우수한 마을에 우선 지원한다는 새마을운동의 원칙은 이때 윤곽이 잡혔다. 그랬더니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받지 못한 마을 중 6000여 곳에서 스스로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은 ‘새마을운동’으로 진화하게 됐고 72 3월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새마을운동의 공식 출범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빈곤 탈출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이는 점화제 역할을 했다. 그때 같이 유행한 말이 ‘신바람’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농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주무 담당관인 나의 업무도 늘어났다. 지역개발담당관이란 내 직명도 새마을담당관으로 바뀌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 등장한 한글 관직명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로고에 관한 일화도 하나 소개할까 한다. 72년 새마을담당관으로 한창 일할 때다. 새마을 배지와 기를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현상 공모를 했다. 예비심사를 했는데 응모작이 하나같이 빈약해서 재공모를 해야겠다는 결과가 나왔다. 외부 공모만 하다가 새마을담당관실 직원도 공모에 응할 수 있도록 했다. 새마을담당관실의 이봉섭(1934~2009·전 전라북도 부지사) 사무관이 2~3명 계원과 함께 팀으로 응모를 했다.

 이 사무관팀은 배지 문양으로 세 개의 싹이 돋은 초록색 잎을 노란색 원이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려 제출했다. 노란색(황금색) 원은 소득(), 초록 잎 세 개는 근면·자조·협동을 뜻한다는 설명도 따라붙었다. 깃발은 배지와 같은 문양을 가운데 넣고 바탕은 초록색으로 만들었다. 깃발의 네모난 초록색은 넓고 기름진 평야를 상징한다고 했다. 보기에도 좋고 의미도 좋았다.

이 사무관팀의 응모작은 예비심사와 본 심사를 거쳐 최종작으로 선정됐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로고는 그렇게 탄생했다. 상금은 10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돈으로 100만원 정도 되려나. 고맙게도 이봉섭 사무관팀은 상금 전액을 새마을 성금으로 냈다. 대신 내가 수고한 이들에게 저녁을 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주민들이 다리를 만들고 있는 모습. 왼쪽에 새마을운동 로고가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중앙포토]

 

<42> 새마을운동 오해와 진실 ①

오는 22일이면 새마을운동이 43주년을 맞는다. 새마을운동의 의미를 놓고 많은 해석이 있었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명과 암이 갈렸다. 1970년대 내무부 새마을담당관과 지방국장,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며 새마을운동의 시작에서부터 뿌리내리는 과정까지 체험했다. 새마을운동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2회에 걸쳐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어봤다. 내 나름의 답이다.

 

- 관이 주도한 운동 아닌가.

“관이 주도한 게 아니라 관이 유도한 민·관 협력사업(民·官 協力事業)이었다. 정부가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지역사회 개발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전신인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어떻게 농민의 자율적 참여를 유도하는가’였다. 시멘트를 지급하면서 동기를 유발했다. ‘시멘트로 무슨 사업을 할 것인가’를 마을 사람들이 총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결정하라고 했다. 마을 공동의 숙원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걸 두고 토론을 하고 사업계획을 짜고 추진하도록 했다. 새마을운동은 동기 유발의 과정이었고 민과 관이 협력해서 일하는 방식이었다. 5·16 직후 추진한 재건국민운동은 관이 주도했다. 농민의 참여를 강제했고 실패했다. 새마을운동이 관제운동이었다면 10년은 물론 5년도 못 갔을 것이다. 재건국민운동처럼 2~3년 내에 사라졌을 것이다.


 - 정부가 농촌의 노동력을 새마을운동이라는 포장 아래 무상으로 이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근대적 부역이었다는 비판이다.

“정부는 자재를 지원하고 마을은 인력을 투자한 민·관 협력사업이 새마을 사업이다. 자기 마을의 사업을 마을 주민 스스로 해냈다. 압력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였다. 자기 집 앞의 눈을 치우는 것이 부역인가. 국도 등 큰 도로를 건설하는 데 사람들을 동원했다면 부역일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후 공공사업도, 민간사업도 아닌 두 개가 걸쳐진 사업 영역을 뜻하는 ‘제3섹터’란 유사한 개념이 생겼다. 이 역시 민·관 협력 방식의 하나다.


 - 전국적으로 획일화된 농촌개발을 부추기지 않았나.

1970년대 초 몇 년에 걸쳐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가 대통령 주재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에서 소개됐다. 보고된 수십 개 마을 가운데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초기부터 사업 선택권을 마을 주민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각 마을의 특성에 따라 가장 절실한 사업부터 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모델을 놓고 따라 하라고 하지 않고 다양한 성공 사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업의 큰 흐름은 생활환경 개선사업으로 시작해 생산환경 개선사업, 그리고 소득증대사업으로 이어졌다.


 - 새마을운동 때문에 품앗이 등 전통문화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래 우리네 마을엔 품앗이를 넘어선 향약, 두레 등 마을 공동체적인 협동 관행이 있었다. 몬순(계절풍) 기후에서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특징이다. 새마을운동은 두레, 향약 같은 전통적인 마을 협동의식을 존중하고 권장하고 활용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사업 단위를 협동의 관행이 있는 마을 단위로 정했다는 점이다. 면이나 리·동 등 대규모 행정구역 단위로 했다면 협동의식을 기대하기 힘들었을 거다. 새마을운동은 오히려 전통의 협동문화를 활용했다. 마을과 마을 간에 경쟁과 협력이 있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이뤄진 것 중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교량이 많았다. 한 걸음 나아가서 더 넓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마을 간의 협동사업으로 확대됐다. 그런 형태를 당시 협동권 새마을 사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지식 - 재건국민운동

1961 6월부터 정부가 벌인 국민의식 개혁운동. 협동과 단결, 자조와 자립을 강조했다. 5·16 직후 등장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설치됐고, 행정구역마다 지부가 만들어졌다. 관 주도의 운동으로 국민의 호응이 적었고 64 8월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문을 닫았다. 민간 주도로 재건국민운동을 계속할 목적으로 그해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설립됐다. 역시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고 운동은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43> 새마을운동 오해와 진실 ②

새마을운동을 둘러싼 오해가 많다. 지난 회에 이어 그 진실에 대해 적어본다. 문답 형식을 빌렸다.


 - 10월 유신을 뒷받침하기 위한 운동 아니었나.

 “10월 유신이 있기 2~3년 전에 새마을 가꾸기 운동(새마을운동의 전신)이 시작됐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다. 그러나 한 시대에 오버랩(overlap·하나의 장면이 끝나기 전 다른 장면에 겹쳐 떠오르는 방식)되는 일이긴 하다. 새마을운동이 농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유신시대의 국정 지지도가 올라가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 새마을운동이 일본 신촌(新村·아타라시이무라)운동의 복사판이라는 역사적 비판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의 신촌운동, ‘아타라시이무라 스쿠리 운도(新村作り運動·새마을 만들기 운동)’의 의미는 다르다. 우리의 읍면동처럼 일본엔 기초지방자치단체 단위로 시정촌(市町村)이 있다. 일본의 시정촌은 소규모 단위로 수천 개에 이른다. 영세한 시정촌 단위로 도서관, 공회당 등 공공복지시설을 만들려고 하니 비경제적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선 수십 년에 걸쳐 시정촌 합병을 추진해왔다. 그걸 아타라시이무라 스쿠리 운도라고 했다. 새마을은 순수 우리 말이다. 신작로 옆에 새로 만들어졌거나 깨끗이 정비된 마을을 ‘새말’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새마을운동은 일본의 신촌운동과 어원도, 내용도 다르다.


 -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잘살게 됐다는데 왜 사람들은 농촌을 떠났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농촌 개발을 위한 특별 대책이 없었다면 수출 경제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도농 격차는 더 커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제 발전과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상호보완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또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등 선진국의 농촌 인구 비중은 한국보다 적다. 농촌이 빈곤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원조는 어디인가.

“원조는 한 곳이 아니다. 1970~71년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에 성공 사례로 여러 마을이 보고됐다. 새마을운동의 전신인 새마을 가꾸기의 원조가 그렇다는 얘기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 2년차 때 전해의 절반 규모인 16600여 개 마을에만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했다. 성과가 좋지 않은 마을엔 지원을 하지 않았다. 지원 대상에서 빠진 마을 가운데 6000곳이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 자진해서 뛰어들었다. 정부 지원 없이 스스로 마을 공동사업을 시작했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 새마을운동으로 진화하게 된 계기다. 굳이 새마을운동의 원조를 따지자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 6000개 마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새마을운동본부에서 많은 비리가 발생하기도 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새마을운동을 명확히 분리해서 봐야 한다. 70년대 새마을운동에서 마을에 있는 새마을지도자 이외의 다른 조직은 의도적으로 기피했었다. 거대한 중앙 조직이 만들어져 이권화·관료화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조직이라고 하면 새마을지도자 협의회밖에 없었다. 그런데 80년대 5공화국이 들어서며 새마을운동본부가 생겼다. 본부가 생기면서 새마을운동은 변질됐다. 당시 김포가도를 차로 가다가 ‘새마을 헤드쿼터’란 간판을 봤다. 새마을운동에 헤드쿼터가 어디 있나. 외국인이 봤다면 군대 조직인 줄 알았을 거다. 그때 ‘새마을의 종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 개발도상국에 대한 새마을운동 전파, 잘 되고 있는 건가.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 새마을운동중앙회, 경상북도 등이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지에 새마을운동을 전수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근 지역에 나가면서도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각개 약진하고 있다. 새마을 정신이 근면·자조·협동이다. 외국에 나가서 새마을운동을 하는데 협동이 안 되고 있다. 또 새마을운동의 핵심은 동기 유발과 자조 협동의 과정이다. 중요한 부분은 빠지고 건설회사 시켜서 다리를 놔주고 회관을 지어주는 해외 원조 사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생선을 사서 주고 있는 셈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44>  새마을지도자

정부는 스스로 돕는 마을을 돕는다.’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며 정부가 고수한 ‘우수 마을 우선 지원’ 원칙이었다. 성과가 뛰어난 마을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헌신적인 새마을지도자가 있었다.

 마을마다 남녀 한 명씩 두 명의 새마을지도자를 뽑았다. 보수는 없었지만 새마을 사업의 기획자로, 집행자로 열심히 뛰었다. 주민을 설득하고 의견을 조정하는 일도 그들 몫이었다.

 유엔은 1960년대를 ‘지역사회개발연대(Community Development Decade)’로 설정했다. 당시 농촌지역사회개발의 일반이론에 따르면 저개발국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 훈련 받은 외부의 지도자(social worker)를 농촌 마을에 투입할 것을 권고했다. 전국의 실태를 조사했더니 새마을 사업 성과가 좋은 마을엔 이미 헌신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정부는 외부에서 지도자를 투입하는 대신 마을 내부에서 새마을지도자를 뽑아 양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1972 1 31일 경기도 고양의 농협대학 부설 독농가연수원에 각 지역에서 선발한 140명이 입교했다. 새마을지도자 교육과정의 출발이었다. 2주 간의 교육과정은 가나안농군학교(교장 김용기)와 안양 농민교육원(원장 김일주)의 훈련 과정을 참고해 만들었다. 농협대 김준 교수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교육 받을 사람이 늘면서 그해 경기도 수원의 농민회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정식 출범을 했다.

 교육은 성공한 새마을지도자의 경험을 듣고 그 사례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75년에는 새마을지도자와 사회 지도층, 공무원이 함께 합숙교육을 받으면서 상승 효과가 났다.

 김준씨에 이어 2대 원장을 했던 정교관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농촌지도자는 흙색, 부녀지도자는 하늘색, 사회지도자는 회색으로 각자 다른 색 옷을 입었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농민뿐 아니라 장·차관, 대학교수, 기업인, 대학생, 문학인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왔지요. 강제 교육 아니냐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원하면 도중에라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농촌의 새마을 성공사례를 듣고는 감명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전남 담양의 정회원, 전북 임실의 정문자, 충북 청원의 하상돈, 경북 영일의 홍성표, 충남 당진의 임광묵, 강원 삼척의 박재명…. 대통령 주재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성공 사례로 발표됐던 훌륭한 새마을지도자들의 이름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무보수지만 자기 마을을 새마을로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한 새마을지도자가 있어서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다.

 달마다 새마을국무회의가 열렸고 새마을 사업의 추진 상황, 문제점과 안건 보고는 내무부 지방국장인 내 몫이었다.

 새마을운동의 큰 방향은 박정희 대통령이 제시했지만 새마을 정신을 현장에서 몸소 실천한 사람은 새마을지도자들이었다. 새마을지도자들이 무보수이면서 헌신적으로 쏟은 열정에 대한 보상은 정부의 표창과 사회적 인정감밖에 없었다. 아마도 제일 큰 보상은 자기 마을의 변화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새마을지도자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던 김준·정교관 전 원장 외에도 새마을운동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숨은 조력자가 많았다. 현장을 누비고 청사에 돌아와서도 밤을 새우고 토론하며 함께했던 내무부 동료인 전석홍(현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김형배(전 강원도지사)·강우혁(전 국회의원)·이효계(전 숭실대 총장)·최인기(전 행정자치부 장관). 정종택(전 환경부 장관)·김종호(전 국회부의장)·송언종(전 체신부 장관) 등 청와대팀도 열정을 쏟았다.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연구했던 교수단도 빼놓을 수 없다. 원로로 농협대 학장을 했던 박진환 청와대 특보, 소장 교수로 이질현 서울대·김대환 이화여대·김유혁 단국대·정영채 중앙대·류태영 건국대 교수 등이 새마을운동 초기에 함께 했었다. 모두 새마을운동에 젊음과 열정을 바쳤던 분들이다.

 

<45> 두 번째 멘토 홍성철

1974 5월 어느 날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간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다가 민관식 문교부 장관을 만났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민 장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고 국장, 다음 달 새마을국무회의 때 문교부가 하고 있는 새마을 교육운동을 안건으로 해서 보고해주면 어떻겠나.
 “네. 이달은 안 되겠고 다음 7월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으로 일하던 나는 73 10월 강원부지사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부지사로 부임한 지 43일 만인 12 10일 다시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불려왔다. 대한민국 정부 3대 국장으로 내무부 지방국장과 치안국장, 재무부 이재국장을 꼽던 시기다. 요직인 지방국장으로 젊은 나이인 내가 승진해 임명됐을 때 ‘예외의 인사’란 평이 나올 만큼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지방국장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새마을국무회의의 안건을 정하고 보고하는 일이었다. 일반 국무회의는 총리가 주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새마을국무회의는 대통령이 직접 주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장·차관들은 자기 부처 정책을 새마을국무회의 안건에 올려달라고 심심찮게 민원을 넣었다. 4년째를 맞은 새마을운동의 열기는 대단했다. 학교 새마을운동, 직장 새마을운동…. 모든 정책에 ‘새마을’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매달 열리는 새마을국무회의에서 나는 지난 한 달 동안의 새마을 사업 성과와 문제점, 각 부처의 필요 지원 사항, 다음 달의 추진 방향을 슬라이드로 제안하고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관계 부처가 새마을운동에 협력하고 지원하도록 조정해줬다. 또 향후 새마을운동의 방향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줬다.

 나를 지방국장으로 발탁한 사람은 홍성철 내무부 장관이었다. 새마을담당관일 때 그는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다. 실무 담당관으로서 전해준 새마을운동에 대한 생각과 지방의 실태, 문제점을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옮겨줬다. 또 박 대통령의 말과 생각도 있는 그대로 전해줬다.

 그는 청와대 정무수석에서 내무부 장관으로 옮기며 나를 지방국장으로 불렀다. 홍 장관 덕분에 새마을담당관으로 맡았던 업무를 지방국장 자리에서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

 홍 장관은 나의 두 번째 멘토였다. 공직자로 갖춰야 할 인화와 협력을 그에게서 보고 배웠다. 해병대령 출신인 홍 장관의 별명은 ‘홍코’였다. 성이 홍씨이기도 했지만 코가 크고 붉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붉은 코에서 알 수 있듯 술자리를 즐겼다. 아주 소탈했다. 직원들이 편하게 ‘홍코’라고 별명을 부를 만큼 아랫사람과 스스럼없이 자주 어울렸다.

 내무부 장관이라고 판공비가 넉넉했을까. 그래도 자주 직원들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일과를 마치면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여러 명 직원을 이끌고 서울 무교동의 ‘호반’이란 음식점으로 향했다. 황해도식 순대를 파는 소박한 식당이었다. 황해도 출신의 홍 장관은 고향 맛이 그리웠는지 그 집을 자주 찾았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며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탈하고 인정이 넘쳤다. 구성원 각각의 특성을 알고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북돋웠다. 다른 정부부처와 업무를 조율할 때도 그의 장점이 발휘됐다. 관계 부처의 협조를 얻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인화를 바탕으로 행정조직의 생산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생산적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점을 그에게 배웠다.

 그는 2004년 작고했다. 허름한 순대집에서 소주를 한 잔 마시며 호탕하게 웃던 홍 장관.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그와의 술자리를 이제는 가질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홍성철

홍성철(1926~2004)=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다. 1950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부대에서 통역 장교로도 활동했다.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한 62년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발탁됐고, 66년부터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 내무부·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88년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90년부터 국토통일원(지금의 통일부) 장관으로 북한과 막후 교섭을 진행했다.

 

홍성철 전 국토통일원 장관(오른쪽)은 노태우 정부 때 남북총리회담이 성사되도록 막후에서 활동했다. 1990년 열린 1~3차 남북총리회담에도 참여했다. 사진은 남측에서 열리는 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90 12 11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에 도착한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운데)와 그를 안내하고 있는 홍 장관. 연총리는 환영 나온 박예진(왼쪽)양이 건넨 카네이션 화환을 목에 걸고 있다. 당시 10세였던 박양은 현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포토

 

<46> 75년 전남도지사로

내가 지방국장으로 만 2년이 되던 1975년 ‘황룡강 사건’이라 불린 뇌물수수 사건으로 전남도지사가 물러났다. 박경원 내무부 장관이 지방국장인 나를 조용히 집무실로 불렀다.

 “전남도지사 인사안을 작성해서 갖고 와요.

 지방국장은 지방 행정관료 인사를 맡고 있었다. 부지사 선까지는 전부 내가 기안했다. 하지만 도지사 인선은 소관 밖이었다. 그런데 나더러 도지사 인사안을 올리라니. 일종의 암시였다. 내무부 지방국장은 도지사 임용 ‘0순위’였다. 나는 늦더라도 아버지의 고향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전북도지사로 가길 내심 희망했다.

 그래서 전남도지사 1안은 전남 출신인 손수익 산림청장, 2안은 역시 전남 출신인 모 인사, 3안은 지방국장 고건이라고 내 이름을 써넣었다. 박 장관이 인사안을 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갔다. 박 대통령은 3안에 동그라미 2개를 쳤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고시 동기 중 가장 빠른 승진 기록이기도 했다. 37세로 군인 출신을 제외하고는 최연소 도지사 기록이었다.

 언론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여와 업적을 보상한 인사’라고 평했지만 난 박 대통령의 의중은 다르다고 봤다. 치산녹화 사업을 맡고 있던 손수익 청장을 도지사로 보내기보다는 좀 더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치산녹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집념은 그만큼 컸다. 박 대통령 뜻대로 손수익 청장은 국토녹화 사업의 총감독 역할을 3년여 더 했다.

 그렇게 1975 11 11일 나는 전남도지사로 발령이 났다. 다음 날 전남으로 향했다. 도지사로 간다는 설렘은 잠깐이었다. 전남으로 가는 길 눈이 내렸다. 차창 밖 흩날리는 눈을 보면서 ‘웅도(雄道) 전남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전라남도를 경상북도와 함께 웅도라고 불렀다. 인구도 많고 면적도 넓었기 때문이다. 섬만 1965개였다. 우리나라 전체 섬의 62%가 전남에 몰려 있었다. 절경에 관광지로 유명한 섬도 많지만 행정 하기엔 어렵고 부담이 컸다. 황룡강 사건으로 흉흉한 도내 민심을 달래는 일도 걱정이었다.

 역시 상황은 심각했다. 감사원으로부터 특별감사를 받게 돼 있었다. 취임 초에 수십 명 직원의 사표부터 받아야 할 처지였다. 당연히 물러나야 할 사람도 있었지만 처벌이 과하다 싶은 직원도 적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이석제 감사원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그래도 20여 명의 공무원은 그만둬야 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쌀 한 가마니씩 차에 싣고 사표를 받은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김모 전 과장의 집에 갔다.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요직에 있었던 탓에 주목을 받았고 특별감사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단칸방에 김 전 과장과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부인은 얼마 전 사별했다고 들었다. 쌀 한 가마니 가지고 무슨 위로가 될까. 그 가족을 바라보면서 연민도 고뇌도 아닌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어렵사리 황룡강 사건을 수습했지만 또 다른 난제가 있었다. 전남도지사로 일하기 시작하며 인사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정치인이나 지역 사회 유력 인사에 의해 정실 인사가 이뤄진다는 게 문제였다. 인사 청탁부터 차단해야 했다. ‘누구를 어느 자리에 기용해달라’는 부탁이 있으면 일단 “아, ,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해보겠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도지사가 주재하는 월례 직원 전체회의 때 청탁 대상인 사람에게 과제를 줘서 발표하라고 시켰다. ‘담당 업무 개선 방안을 제출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인사를 청탁하는 사람치고 일 잘하는 이는 없었다. 발표 역시 시원찮았다. 물론 청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절 알리지 않았다. 본인은 알았을 거다. 몇 번을 그랬더니 도청 안에서 얘기가 돌았나 보다. 인사 청탁이 점점 줄기 시작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 황룡강 사건
1975
년 사업비 5299만원인 전남 장성군의 황룡강 제방보수공사를 계약하는 과정에서 광주 한일건설 대표와 임직원이 전남도청 공무원 수십 명 각각에게 10~100만원의 뇌물을 뿌린 사건.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은 한일건설이 경쟁 입찰 없이 수의계약으로 공사를 따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사건으로 도청 공무원 25명이 구속·해임·좌천됐다.

 

1975 11 12일 신임 고건 전라남도 도지사(오른쪽 셋째)가 세종로 청사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왼쪽)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악수하고 있다. 김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대신해 임명장을 수여했다. 임명식에 참석한 박경원 내무부 장관(오른쪽 둘째)과 유기춘 문교부 장관(오른쪽)이 보인다. 당시 고건 지사는 정통 관료 출신으로는 최연소( 37)로 도지사에 임명됐다. [사진 국가기록원]

 

<47> 거절의 수사학, 박인천

이 책상은 누구 자리입니까.

 신임 도지사로 전남도청 안의 위치도 익히고 업무도 파악할 겸 각 부서를 돌았다. 관광운수과를 갔더니 과장 책상 옆에 빈 책상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자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모두 머뭇거리기만 할 뿐 답을 하지 않았다.

 호통 비슷하게 목소리를 높여 다시 물었다. “누구 책상입니까.
 그제야 대답이 나왔다. “아, 그게…. 광주고속 직원의 책상입니다.

 관광운수과는 전남의 버스 노선을 결정하는 부서였다. 어느 노선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운수업체의 수익이 갈렸다. 큰 이권이 걸려 있는 만큼 업체와 공무원 간 유착이 없도록 1년마다 인사를 했다. 하지만 노선을 정하는 일은 지리와 교통량, 이전 노선의 역사 등을 알아야 하는 상당히 어려운 업무였다. 해마다 바뀌는 직원이 전담하기 어려우니 노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광주고속의 고참 직원이 나와 도움을 주는 게 관행이 됐단다. 당연히 수익이 많이 나는 황금노선은 광주고속에 몰렸다. 바로 직원들에게 야단을 쳤다.

 “이게 말이 되는 얘깁니까. 당장 내쫓으세요.

 그 일이 있고 2주쯤 지난 어느 날 밤 9시쯤 광주고속 대표가 지사실에 찾아왔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인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이었다.

 “아, 이게 제가 지나가다 보니까 밤늦게까지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이 많은 것 같아서. 직원들 불고기라도 사주십시오.

 그러면서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직원들 불고기 값이라는데 거절할 수가 있나.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 뜻을 제가 정확히 전달하겠습니다.

박인천 (1901~84)

 다음 날 오전 간부회의 자리. “어젯밤 금호그룹의 박인천 회장이 지사실에 와서 야근하고 고생하는 도청 직원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고 가셨습니다. 이걸 어떻게 썼으면 좋겠습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간부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황인동 감사계장이 손을 들었다.

 “도청에 직장 새마을기금이 있습니다. 거기에 주십시오.
 “그래요. 일리 있네요. 그러면 주신 분의 뜻대로 썼으면 합니다. 답장도 보내 드리십시오. 고맙다고 말입니다.

 황인동 계장은 한 발 더 나아가 감사 편지에 영수증까지 첨부해 금호그룹 회장실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지방장관회의가 있어 서울에 올라오게 됐다. 서울에서 첫째 날 각 부처를 다니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전화가 왔다. 박인천 회장이었다.

 “제가 서울에서 점심을 모시겠습니다.

 박 회장은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한 달의 절반 정도는 서울에서 지내는 듯했다. 잊고 있었던 ‘불고기 금일봉’ 건이 떠올랐다.

 “아, . 제가 시간 봐서 연락을 드리죠.
 “아니요. 지금 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니, 일정 때문에….
 “아니, 제가 지사님 일정을 보니 모레쯤 점심이 비어 있습니다.

 나도 외우지 못한 내 일정을 박 회장이 꿰고 있었다. 관광운수과에 있던 직원은 쫓아냈지만 도청에서 자리 없이 암암리에 활약하는 광주고속 직원이 더 있었나 보다. 당황스럽지만 부인할 수도 없었다.

 “아아, 네…. 그런 것 같네요.
 “외교구락부에서 점심을 모시겠습니다.

 서울 중구 남산 중턱엔 양식당인 외교구락부가 있었다. 정치·외교·경제 분야의 굵직굵직한 일이 많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약속한 날 점심, 외교구락부 별실에 박 회장과 나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정리=조현숙 기자

 

<48> 거절의 수사학, 김한수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역대 지사들 제가 뒷바라지를 다 했는데, 그걸 뭐 또 영수증까지 보내시고…. 지사 업무를 하시려면 판공비도 많이 필요하실 텐데. 하하하.

 박 회장은 흰 봉투를 책상 위에 꺼냈다.

 “네, 맞습니다. 도지사로 일하려니 야근하는 사람들 밥값도 주고 술도 사주고 해야 하는데 가친께서 매월 판공비를 보내주십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박 회장은 봉투를 내가 앉은 쪽으로 밀었다. 지난번은 500만원 현금이었다. 봉투가 그때보다 얇은 것을 보니 수표 같았다. 나는 봉투 위로 손을 얹어 박 회장 쪽으로 밀며 다시 말했다.

 “아닙니다. 아버님이 매월 판공비를 주십니다.
 “아닙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렇게 봉투를 두고 세 번을 서로 밀기를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 공직 수칙을 이해해 주십시오.

 박 회장은 봉투를 옷 안에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렇게 헤어지고 돌아오니 마음이 영 불편하고 미안했다. 박 회장은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도의 원로가 아닌가. 며칠 후 박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광주에 오시는 날에 맞춰서 제가 점심을 모시겠습니다. 전에 점심도 사주셨고. 광주관광호텔에서 어떠신지요.

 다행히 박 회장은 내 청에 응해줬다. 그 다음부터 매달 박 회장과 점심을 가졌다. 도내 원로 경제인인 그와 의견을 나누는 좋은 시간이었다. 물론 밥값은 그와 내가 월마다 번갈아 가며 냈다. 광주고속과의 일은 그렇게 잘 마무리됐다.

 하지만 반대의 사례도 있었다. 1979년 중순 내가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관으로 일할 때다. 서울 용산구 정수직업훈련원을 찾아 총경 출신인 이기일 원장을 만났다. 이 원장에게 운영상 어려움이 없는지 물었다.

 “원생들이 열심히 기능 훈련을 하는데 운동장이 너무 좁아서 점심시간에 운동도 못하고 보기에 딱합니다. 훈련원 위쪽 산에 있는 미군 부대가 이전하는데 그 땅 주인이 운동장 부지로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수직업훈련원에 관심이 많았다. 박 대통령에게 그 일을 직접 보고했다.

 “정수직업훈련원의 애로 사항으로 점심 때 원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운동장이 없다고 합니다.
 “도리가 없잖아.

 “마침 훈련원의 운동장 부지를 그 땅 주인이 희사하겠다고 합니다.
 “어. 그래. 그거 고마운 일이네.

 박 대통령은 결재 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러곤 물었다. “그 지주가 누구지.
 “김한수 한일합섬 사장입니다.

 김 사장은 청와대와 정치적으로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던 김택수 공화당 의원의 형이었다. 박 대통령이 잠시 정색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결재는 이미 끝났다.

 돌아와서 김한수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게 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업훈련생들도 정말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내가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다. “각하께서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김 사장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30분도 채 안 돼서 청와대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봉투를 꺼냈다.

 “(땅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땅을 준 사람에게 고마워해야지 내가 감사받을 일은 아니었다. 돈봉투를 물리며 다시 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드려야 할 일이지요.
 그렇게 두어 번 거절을 하다가 언성이 높아졌다.

 “제 공직 철학도 받아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서로 얼굴을 붉힌 채 사무실에서 헤어졌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8·15 경축식이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렸다. 청사 안 로텐더홀에서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청와대 수석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저 멀리 김한수 사장이 보였다. 그때 일도 미안하고 해서 손을 들고 ‘그리로 가겠다’는 신호를 했다. 사람을 헤치고 갔더니 김 사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를 피한 거였다.

 마음이 불편했다. 돈을 거절하다 잘못하면 인간 관계가 끊기고 불필요한 긴장이 생길 수 있겠다 싶었다. 거절의 수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온 나름의 해답은 이렇다. 1단계는 ‘정말 고맙다. 하지만 뜻만 받겠다’고 하는 거다. 그렇게 해서 통하는 경우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아닐 때면 2단계로 넘어간다. ‘제가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판공비가 있어 어려울 게 없습니다. 판공비가 필요하면 그때 요청하겠습니다’. 대부분 2단계에서 웃으면서 해결이 된다. 물론 당장의 대가성이 없어 보이는 소위 ‘떡값’에 한해서다. 한보 사태 때 정태수 회장처럼 명백한 대가를 바라고 뇌물을 건네는 것은 나를 모욕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때는 야단을 치면서 물리쳤다.

 

1975 11 15일 부산 기계공고를 찾아 훈련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왼쪽). [중앙포토]

 

<49>  읍·면장과 주파수 맞추기

전라남도지사가 되자마자 읍·면장 230여 명과 함께 공무원연수원에서 23일 합숙 연수를 했다. 도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읍·면장들과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주파수는 코드와는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코드는 일방통행의 닫힌 채널이지만 주파수는 열린 채널이다. 누구나 참여해 의견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다.

 도정을 꾸려 가려면 읍·면장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했다. 전남 도정의 책임자로서 내 행정 원칙과 철학을 알리고 협조를 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보고보다는 내실, 서류보다는 현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장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데 주력하는 현장주의 행정을 강조했다.

 잘못된 행정 관행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주문했다. 무엇보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지키겠다고 했다. 읍·면장들에게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점을 말해 달라 부탁했고 열심히 들었다.

 합숙 마지막 날 저녁 불고기로 회식을 했다. 읍·면장에게 소주 한 잔씩을 따랐다. 처음 10명 정도는 따라주는 대로 받기만 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받는 시늉만 하며 조금씩 먹었는데도 230여 명과 돌아가며 마시려니 꽤 많은 양이었다. 소주 50잔 정도는 먹은 듯했다.

읍·면장과 주파수를 맞추려는 노력은 효과를 봤다. 도지사 생활을 하는 3년 동안 그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읍·면장과 주파수는 그렇게 맞췄지만 지역사회와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남아 있었다. 전북은 아버지의 고향이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전북엔 연고가 있지만 전남엔 없었다. 초임 도지사면서 광주·전남 지역사회의 신입 회원이기도 했다.

 전남매일 이강재 논설위원과 고귀남 전 의원, 박윤종 전남 도정자문위원장(전 의원) 등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강재 논설위원은 나중에 전남매일 주필 자리에까지 올랐다. 고귀남 전 의원은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박윤종 전 의원은 79 10 26일 서울 효자동 한식당 ‘유선’에서 밥을 먹다가 10·26 사건 연락을 받을 때 함께 자리에 있었던 인사 중 한 명이다. 전남과 전혀 연고가 없는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역사회 원로와 지도층 인사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다녔다. 농촌마을로 가면 노인정에 꼭 들렀다. 새파랗게 젊은 도지사를 보는 어르신들 표정이 좀 서먹해 보였다. 넙죽 큰절부터 했다. 반가워는 했지만 어르신들과의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고민이 됐다. 머리카락 색이 희끗해지면 어르신들이 친근하게 느낄 것 같았다. 숙지황이란 한약재를 무와 함께 달여 먹으면 머리색이 하얘진다고 누군가 귀띔했다. 전국에서도 질이 가장 좋다는 전북 정읍 감곡면의 숙지황을 구했다. 숙지황에 무를 넣고 열심히 두어 달 달여 먹었다. 안타깝게도 효과는 없었다. 새치 두어 개가 났을 뿐이었다.

 

<50> 기우제

전남도 내에 육·해·공군을 합쳐 장성이 12명 정도 있었다. 이들은 휴일에도 임지를 떠날 수 없었다. 대신 주말이면 광주 송정리에 있는 공군비행장 안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며 ‘휴식 반, 대기 반’ 상태로 지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도지사가 군 장성 골프 모임을 주관해줬으면 한다는 얘기가 몇 사람을 거쳐 내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도내 기관장들과 함께 ‘무등구락부’라는 월례 골프 모임을 만들어 군 장성들과 1년 넘게 어울렸다.

 그들과 골프를 치기로 약속한 어느 토요일 오전. 나는 곧 골프장에 나갈 생각에 설레며 도지사실에 앉아 있었다. 가뭄이 들 기미가 보이던 1977년 초봄의 일이다.

 범택균 농정국장이 지사실로 들어왔다. 한해(旱害·가뭄으로 인한 재해) 비상근무령 발령안을 내밀었다. 이 서류에 결재를 하면 그 순간부터 지사도 비상근무에 돌입해야 한다. 자동으로 군 장성과의 골프 약속은 물 건너간다. 한창 ‘보기 플레이어(90타 정도 치는 수준)’로 골프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때였다.

 “그거 오늘 토요일인데 꼭 해야 하나. 월요일에 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범택균 국장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근무시간이 끝나고 퇴청한 나는 바로 관사로 향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차를 타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골프장이 있는 송정리 공군비행장으로 가는 길목에 극락교가 있었다. 다리에 못 미쳐 교통사고 현장을 봤다.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차에서 내려 사고 현장으로 갔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다. 전동 양수기를 싣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농민이 택시와 살짝 부딪혔고 두 사람이 다투던 중이었다.

 “아….”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벌써 한해가 시작된 것이다. 농민이 전동 양수기를 자전거에 싣고 분주히 다닐 만큼 말이다. 골프장에 가서 경기를 시작만 해놓고 장성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지사실로 돌아왔다. 범택균 국장을 다시 불러 한해 비상근무령 발령안에 결재를 했다. 나는 그 후로 골프채를 다시 잡은 일이 없다. 바로 한해 비상대책에 돌입했다.

 전남은 해마다 한해에 시달렸다. 평야 지역에 가뭄이 안 들면 산간부가 말랐고, 평야와 산이 괜찮으면 섬 지역에 한해가 닥쳤다.

 10년 전에 파 놓은 인력관정(人力管井·사람 힘으로 판 우물)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훨씬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는 타설관정(打設管井·기계로 두드려 판 우물)으로 모내기용 농업용수를 개발했다. 신안군민들이 만든 소형 착정기계 신안 1호기와 2호기는 아주 실용적이었다. 대량 생산하기 위해 설계를 화천기공사에 맡겼고 신안 1·2호기를 모델로 한 착정기계는 전국적으로 보급됐다.

 가뭄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이어졌다. 광주 시내의 원로들은 “도지사가 무등산 산정 서석대에서 기우제라도 올려야 한다”고 걱정했다. 10년 전 한해 때 “지사 이름 ‘김보현(金甫炫)’에 불 화()자가 들어가서 가뭄이 든다”고 걱정하던 원로들이다. 광주·전남 지역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낮에는 현장에 나가고 밤에는 한해 대책을 세우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였다. 무등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낼 시간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무등산 서석대가 아닌 서석동 지사실에서 기우제를 지내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비가 올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사실에서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9일이 지났다. 야전침대가 영 불편해 지사실 바닥에 요를 깔고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3시쯤 잠결에 희미한 빗소리를 들었다. 침엽수인 히말라야 시다 나뭇잎에서 튕긴 빗물이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박차고 일어나 창문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으로 꽤 굵은 빗방울이 느껴졌다. 얼마나 기쁘던지. 서석동 지사실에서의 기우제는 9일 만에 마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고흥에만 비가 안 왔다. 모내기를 독려하려고 밤에 고흥으로 현장 시찰을 나갔다. 달도 안 뜬 깜깜한 밤, 밖이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논 옆에 차를 세운 뒤 창을 열어 귀를 기울였다. 모내기용 물을 댄 논에는 개구리가 모여 울고 있었다.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없으면 모내기가 안 된 거다. 나만 아는 모내기 현장 확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근본적 대책이 필요했다. 전남의 젖줄인 영산강 유역을 개발하는 데 속도를 내야 했다

 

<51> 영산강 유역과 광주권 개발

영산강엔 전남도민의 애환이 서려 있다. 매년 한해(旱害·가뭄 피해)와 수해(水害)를 번갈아 겪었다. 비가 오면 홍수가 나고 비가 안 오면 가뭄이 들었다. 영산강 유역을 개발하는 일이 시급했다.

 전남도지사로 부임한 1975년 영산강 유역 개발사업은 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강 상류에 장성·담양·광주·나주댐을 만들고 하류에 하굿둑과 방조제를 짓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한·수해로 농민이 고통받는 현장을 목격한 나는 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차질이 없도록 현장을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열심히 공사를 챙겼다.


 76 10월 드디어 영산강 상류에 4개 댐이 준공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장성댐 현장에서 준공식이 열렸다. 4개 댐으로 26500t에 달하는 용수를 확보했고 총 1353㎞ 길이의 용·배수로가 34500㏊ 농경지에 거미줄처럼 깔렸다. 전남 농민들은 매년 반복되던 한·수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4개 댐이 완성된 76, 바로 2단계 사업에 들어갔다. 영산강 하류에 하굿둑과 방조제를 짓는 내용이었다. 2단계 사업으로 영산호라는 담수호가 생기면서 25400t의 수자원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불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목포 경제권이 개발됐다. 2단계 사업의 일환으로 81 12월 영산강 하굿둑이 준공됐을 때 농수산부 장관이었던 나는 전두환 대통령과 현장을 찾았다. 도지사 시절 첫 삽을 뜬 사업의 성과를 5년이 지나 농수산부 장관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영산강 2단계 개발사업부터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 으로 추진했다. 광주권 개발사업도 IBRD 차관으로 진행했다. 낙후된 전남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하남공단, 여수 신항, 목포·순천 간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SOC)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진도·돌산 연륙교(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도 그 일환으로 추진했다.

 얽힌 일화가 있다. IBRD의 사업 타당성 조사에서 돌산 연륙교 건설 계획은 쉽게 통과됐다. 하지만 “진도 연륙교는 교통량이 적어서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외국인 5~6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식사 자리에 초청했다. 통역을 가운데 두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진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없으니 당연히 교통량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건설하면 교통량은 늘어나게 돼 있습니다. 교통의 공급은 수요를 창조합니다. 경제학에서도 공급이 수요를 창조한다는 ‘세이의 법칙’이 있지 않습니까.

 한참이나 내 얘기를 듣던 조사단은 “재조사를 해보고 다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문창수 도청 기획관리실장에게 재조사 안내를 맡겼다. 재조사하기로 한 날을 알아낸 뒤 동원할 수 있는 차량을 다 모아 조사 지역에서 왔다갔다 하도록 했다. 꼼수이긴 했지만 진도 연륙교가 도민에게 유용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재조사 결과는 합격이었다. 진도 연륙교는 명량대첩이 있었던 울돌목 위를 지나게 설계됐다.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로 84년 준공됐다. 지금의 제1 진도대교다.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교통 수요는 계속 늘었고 2005년 제2 진도대교가 세워졌다. 교통의 공급이 수요를 창조한다는 이론이 현실이 된 것이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지식 - IBRD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세계은행(World Bank)으로 부르기도 한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개발도상국을 지원할 목적으로 1946년 문을 연 국제금융기구다. 55년 회원국이 된 우리나라는 60~80년대 IBRD로부터 자금을 빌려 철도·고속도로·항만·상하수도·주택단지 등을 건설했다. 영산강 유역·광주권 개발을 비롯해 영동·동해 고속도로 건설, 경주관광단지 조성사업 등이 IBRD 차관으로 추진됐다. 우리나라는 90년대를 기점으로 IBRD로부터 융자를 받는 수혜국에서 개도국에 돈을 빌려주는 공여국으로 변신했다. 현재 IBRD는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 총재가 이끌고 있다.

 

1976 10 14일 전남 장성군 장성댐 현장에서 영산강 유역 개발 1단계 사업 준공식이 열렸다. 영산강 상류에 장성·담양·광주·나주댐을 만드는 대규모 개발사업이었다. 사진은 준공식에 참석하려 장성댐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고건 전남도 지사(오른쪽 둘째)와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사진 고건 전 총리

 

<52> 헬기 지사

전라남도엔 섬이 많다. 그중에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300여 개다. 웬만한 큰 섬은 한 개 면 단위다. 도지사로 일하며 면 소재지가 있는 섬은 거의 한 번씩 들렀다. 그중 절반 이상은 도지사가 방문한 일이 처음이라고 했다. 섬에 갈 때는 헬리콥터를 자주 이용했다. 배로는 한계가 있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부두 접안 시설이 부실해서 배를 댈 수 없는 섬이 많았다. 내가 타고 다녔던 헬기는 ‘재일전남도민호’였다. 일본에 사는 전남도민 출신 교포들이 모금해서 사준 농약 살포용 헬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 전남은 전국의 식량기지 역할을 했다. 봄마다 모내기를 제때 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당시 전남도지사의 주요 업무였다. 모내기 실적은 면장이 군수에게, 또 군수가 도지사에게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보고가 관습적으로 이뤄졌다. 현장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어제 10%라고 보고했으니 오늘 11%로 하자’는 식이었다.

 그래서 수를 냈다. 헬기를 타고 모내기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사진도 찍었다. 헬기를 타고 군청에 가면 군수가 모내기 실적을 보고했다. 그러면 내가 위에서 본 모내기 현장 얘기를 했다. 헬기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해 봉투에 넣어 겉에 ‘아무개 군수 귀하’라고 써서 보내기도 했다. 보고한 모내기 실적과 현장에서 확인한 실적은 차이가 났다. 사진을 받은 군수는 당황하면서도 뒤늦게나마 모내기 독려에 나섰다. 몇 번 그 일을 반복했더니 헬기를 타고 군청이나 면사무소 위를 지나갈 때면 헬기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나온 직원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군청이나 면사무소 주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군수나 면장을 찾아 ‘지사 헬기가 떴다’고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늘 타고 다니던 헬기가 나주에서 추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농약 살포용 헬기라 크지 않았고 사고에 취약했다. 급한 일정 때문에 헬기를 타지 않는 날이면 조종사는 본업인 농약 살포를 했다. 한창 농약을 뿌리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놀란 마음에 현장으로 바로 갔다. 조종사가 무사한지 확인하러 논두렁 사이로 급하게 뛰어갔다. 다행히 조종사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안도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마침 일이 있어 헬기를 이용 안 했는데. 내가 탔었다면….

 헬기와 얽힌 사연은 또 있다. 도민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전남 사람이 잘 먹는 음식 두 가지를 열심히 먹었다. 홍어와 꼬막이었다. 모두 칼슘이 많은 음식이다. 다정(多情)도 병이라고 했다. 전남 사람들과 정을 쌓으려 막걸리와 꼬막, 홍탁을 부지런히 먹었더니 정말 병이 생겼다. 신장결석이었다. 통증이 심했다. 헬기를 탈 때 가장 괴로웠다. 기체가 흔들리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 덮쳤다. 도지사가 아프다는 얘기가 소문 나선 안 된다. 입이 무겁다는 광주 강내과의 강종남 원장과 상담을 했다.

 “개복 수술을 해야 합니다. 치료를 마치려면 한 달 정도 걸립니다.
 지금이야 치료가 간편하지만 당시 의술로는 어쩔 수 없었다.

 “바쁜데 무슨 수로 한 달이나 시간을 냅니까.
 “통증이 심하면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진정제 처방을 해드리겠습니다.

 당시 전남의 섬 지역에 가뭄이 들었다. 농산물이 땅에 있던 염분까지 빨아들여 하얗게 말라붙었다. 현장을 챙겨야 했다. 강 원장이 처방해준 진정제를 호주머니에 넣고 통증을 참으며 헬기를 타고 다녔다. 20여 일 지났을까. 그날도 헬기를 타고 나니 통증이 심했다. 그날 밤 신장에서 방광으로 결석이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 원장에게 물었더니 “흔들리는 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물리치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근육이완제를 처방해주면서 요령을 알려줬다.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만큼 마시고 요의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으세요. 그리고 놋대야를 두고 소변을 보시면 아마 신석(腎石)이 빠져나온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강 원장이 시킨 대로 했다. 그랬더니 놋대야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얼마나 기뻤던지 화장실 바깥에 있는 아내에게 들리도록 “돌이 나왔다”고 소리를 쳤다. 전남도민과 어울리기 위해 먹어댄 홍어와 꼬막으로 생긴 결석을 가뭄의 고통을 분담하느라 헬기로 돌아다니다가 치료했다. 다정 때문에 생긴 병을 다정 덕분에 고쳤다고나 할까.
정리=조현숙 기자

 

<53> 낚시와 행정

낚시를 좋아했다. 당시 낚시는 중·하위직 공무원에게 거의 유일한 주말 취미 활동이었다. 낚싯대만 있으면 돈이 거의 안 들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스트레스도 풀고 평소에 가기 어려운 벽지도 둘러볼 수 있었다. 언론인, 동네 이장과 도정에 대해 허물 없이 얘기도 나눴다. 대신그 곳의 군수에게는 낚시를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느 주말 전남일보·전남매일 편집국장, 김영진 도청 기획관리실장과 함께 광산군 서창면 매월리(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일대)의 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 주인 격인 김씨 성을 가진 이장이 안내를 맡았다.

 한창 낚시에 빠져 있는데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정공진 전남매일 국장이 갑자기 일어나 소리쳤다.

 “어. 내 낚싯대, 내 낚싯대!

 낚시에 서툴러 벌어진 일이었다. 제때 채임질을 못해서 붕어가 낚싯대를 끌고 달아났다. 꽤 큰 놈이었는지 낚싯대를 저수지 가운데까지 끌고 갔다. 난감해하던 김 이장이 마침 제방 밑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동네 청년을 불렀다.

 “너 헤엄 잘 치지. 저것 좀 건져와라.
 “저 헤엄 잘은 못 치는데요.

 김 이장은 낚싯대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저 정도까지는 갈 수 있잖아.

 머뭇거리다가 청년은 겉옷을 벗고 저수지로 들어갔다. 그는 15m쯤 헤엄쳐 낚싯대를 찾아 가슴에 걸었다. 다시 제방 쪽으로 헤엄쳐오기 시작했다. 그때 청년의 수영 동작이 힘 없이 느려지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차’ 싶었다. 낚시 바늘이 수초에 걸린 상태에서 낚싯대의 탄력 때문에 청년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가슴에 걸친 낚싯대를 떼어버려야 하는데 청년에겐 그럴 힘이 없었다.

 그 순간 김 이장과 내 눈이 마주쳤다. 청년을 물속에 들어가라고 한 책임 때문인지 김 이장이 저수지로 뛰어들었다. 난 김 이장에게 소리쳤다.

 “낚싯대부터 떼어버리세요.

 김 이장이 낚싯대를 청년에게서 떼어놓는 데 성공했다. 힘이 빠진 청년을 옆에서 끌고 나오는 김 이장에게 외쳤다.

 “이장님, 이제 괜찮죠?
 “안되겠는데요. 지사님, 들어오셔야겠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지사가 동네 청년을 낚시터에서 익사시켜…’. 순간적으로 신문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겉옷과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청년의 뒤로 가서 그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7~8m를 밀고 또 헤엄치면서 제방에 닿았다. 겨우 뭍으로 나온 청년은 물을 토해냈다.

 그날 낚시는 일찍 파했다. 광주 시내 충장로 매운탕집으로 가서 언론인들과 소주 한잔을 마시려는데 뭔가 허전했다. “어, 내 안경이 없네.” 낚시터에 떨어뜨리고 온 것 같았다. 기사에게 찾아오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기사가 찌그러진 안경을 내밀었다. 어제 잃어버린 내 안경이었다. 얘기를 듣고 동네 청년들이 횃불을 들고 저수지를 다 뒤졌다고 했다. 저수지 바닥을 발로 밟으며 찾다가 안경이 찌그러졌단다. 고마우면서도 어찌나 미안했는지. 나중에 낚싯대를 건진 그 청년이 3대 독자란 얘기를 전해 들었다.

 2005년 유원지로 바뀐 매월리 저수지 터에 다시 가서 3대 독자 청년을 김 이장과 같이 만났다. 30여년 세월이 흘러 청년은 초로(初老)의 모습이었다. 전남대 경영학부 2학년이라는 아들과 함께였다. 그때 상황을 떠올리며 한참이나 웃고 얘기했다. 낚시가 만들어준 기분 좋은 추억이다.

 나는 낚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정치와 행정은 낚시와 닮은 점이 많다. 낚시를 하려면 먼저 붕어가 좋아하는 미끼를 정성스레 만든다. 정치·행정도 국민의 수요에 맞춰 정성을 다 쏟아야 한다. 붕어가 물지 않고 돌아가면 다시 미끼를 정성스레 갈아준다. 정치에서도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려면 시대정신에 맞게 정책을 손질해야 한다. 미끼를 문 붕어를 낚아 올릴 때는 채임질 타이밍이 생명이다. 정책도 한 박자 늦거나 빠르면 실패로 끝난다. 붕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면 낚싯줄과 낚싯대의 탄력이 중요하다. 행정이 낚시에서 배워야 할 점은 바로 그 탄력이다. 정성을 들이고 타이밍을 맞추고 탄력으로 이끄는 점에서 낚시와 행정은 공통점이 많다.

 낚시꾼과 정치인은 거짓말을 잘하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낚시꾼의 거짓말은 자기가 잡은 물고기의 크기를 과장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인의 거짓말은 나라와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54> 78년 청와대로 떠나며

1978 12월 청와대로부터 정무 제2수석비서관으로 내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른일곱 나이에 전남도지사로 부임한 지 32개월. 나는 땀을 쏟았고 도민에게서 뜨거운 정을 듬뿍 받았다. 서울로 떠나기 전 고마운 사람들에게 밥을 샀다.

 지역 언론사 간부와 도정자문위원들이 모인 저녁 자리. 일어서서 감사 인사를 했다. “도와주신 덕분에 도정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정을 듬뿍 받고 갑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심상우 전남매일 사장이 갑자기 일어서서 내 옆에 섰다. 쥐고 있던 숟가락을 마이크마냥 내 입 가까이 대며 물었다.

“전남의 도민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말해 주십쇼.

 돌발 질문에 당황했다. 3년 전 서울의 괜찮은 중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을 광주로 전학시켜서 우리가족은 1149일 동안 전남 도민으로 살아왔다. 도민으로 살면서 느낀대로 얘기했다. “한마디로 정()과 오기(傲氣)라고 생각합니다.

 설명을 덧붙였다. “전남인은 정이 뜨거운데 일단 오기가 나면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정만 뜨겁게 많이 받아가지고 갑니다.

 “아하하.” 좌중에서 웃음과 박수가 터졌다.

 광주·전남 사람들은 정이 많다. 아낌 없이 상대방에게 퍼붓는다. 하지만 그 정을 제대로 받지 않고 쭈뼛거리면 뜨겁던 정이 오기로 바뀐다. 오기가 한번 발동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 선거 때마다 ‘광주·전남의 민심이 어떻다’ 얘기가 많다. 마음 가는 상대에게 아낌 없이 정을 주지만 한번 틀어지면 돌이키기 힘든 게 광주·전남의 민심이다.

 질문을 던진 심상우 사장은 내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맞다, 맞어”라며 껄껄 웃었다. 심 사장은 재담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다.

 그와 인연은 도지사 초기 때 시작됐다. 1976년 봄 도청 직원들과 함께 전남 광산군(지금의 광주시 광산구)으로 모내기 지원을 나갔다. 마침 그날 현장에서 6㎞ 정도 떨어진 곳에 광주지역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5명이 모내기 봉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막걸리 한 말을 들고 점심 때 그곳으로 갔다. 논 근처 마을 정자에 앉아 그들에게 막걸리 한 잔씩을 돌렸다. 대의원 중 한 사람이었던 심상우 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고 지사님,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멈 성씨가 뭔지 아십니까.
 “모르는데요.

 심 사장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고씨에요. 고씨. 하하하”


 아니, 뺑덕어멈이 고씨라니 확인할 길이 있나. 사실 여부를 떠나 심 사장이 나를 한바탕 골리려고 한 말임은 분명했다. 술잔이 한 바퀴 돌고 나자 내가 반격에 나섰다.

 “심 사장님, 그럼 심씨는 심봉사 후손이네요.
 “아, 그렇겠죠.
 “심봉사는 딸 심청이 하나를 뒀는데 그렇다면 심씨는 여자인 심청이 성씨를 따랐네요.

 “….

 그 일 이후로 심 사장과 나는 재담을 나누는 친한 사이가 됐다. 가끔씩 저녁에 전화를 걸어 “ 신작(新作)이 있다”며 재담을 풀어놔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뛰어난 입담으로 좌중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쓴소리를 잊지 않았다. 지역의 여론을 가감 없이 나에게 전해줬다.

 시간이 흘러 내가 미국 하버드대학에 가 있었던 1983 10 9일 미얀마에서 아웅산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대학 친구인 김재익·서석준·이기욱을 그곳에서 잃었다. 당시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수행했던 심 전 사장도 타계했다. 너무 안타깝고 슬펐다. 당 총재 비서실장이 대통령 순방에 동행하는 일은 드물다. 그의 뛰어난 언변을 높이 사서 대통령이 해외 순방단에 포함시켰었나 돌이켜 추측해본다. 대학교 클래스메이트였던 세 분과 심 사장. 그들의 30년 전 모습을 회상하면서 마음 속으로 추모한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1983 10 9일 미얀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참배하려고 서있는 서석준 부총리(오른쪽부터), 이범석 외무·김동휘 상공·서상철 동자부 장관, 이계철 주버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심상우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이기백 합참의장. [중앙포토]

 

<55>  대통령의 운동

청와대 근무 첫날 박정희 대통령의 서재로 가서 부임 신고를 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방의 현장 실정을 잘 아니까 내가 발탁을 했지. 아니 징발했어.

 박 대통령이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근데 뭐 그렇게 급히 올라왔어? 유지들하고 이야기도 좀 나누고 천천히 오지 그랬나.

 “그래서 제가 밥을 사주고 왔습니다.

 박 대통령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순간 느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오는 대신 목포·순천·여수에도 가서 지역 지도층 인사들과 정담을 나누고 와야 했는데 젊은 내가 서툴렀다.

 1978 12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그런데 여당인 공화당이 31.7% 득표로, 야당인 신민당(32.8%) 1.1%포인트 뒤졌다. 79년 정국은 격동기로 접어들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10개월간 보좌했다.

 나는 주로 행정을 관할했다. 내무부에 있으며 담당했던 새마을운동과 치산녹화 사업도 관장했다. 내가 맡았던 업무 가운데 박 대통령은 문화재·사적지 복원과 자연 보호, 그리고 기업 내 야간고등학교와 창원기능대학 설립 등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다. 그는 77년 시작한 의료보험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 특히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 격변기였지만 옆에서 보기에 박 대통령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에 몰두했다.

 그때쯤 박 대통령은 자주 치던 골프를 그만뒀다. 골프장에 나가려면 경호원과 비서실 등 많은 수행원이 따라붙는다. 대신 청와대 안에서도 즐길 수 있는 배드민턴으로 종목을 바꿨다. 청와대 수석들에게도 배드민턴 채를 하나씩 사줬다.

 일요일 새벽 청와대 녹지원에서 작은 배드민턴 운동회가 열렸다. 멋들어진 반송(盤松)이 가운데 있고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두세 그룹으로 나눠 둥그렇게 둘러서서 셔틀콕을 주고받았다.

한 달쯤 후 시합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과 부속실 여직원이 복식으로 팀을 꾸렸다. 상대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부속실 다른 여직원이었다. 한참 경기가 무르익었다. 갑자기 차 경호실장이 뛰어올라 스매싱을 날렸다. 셔틀콕은 박 대통령 얼굴 쪽으로 내리 꽂혔다.

 “어어어!” 놀란 보좌진 입에서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박 대통령이 라켓으로 셔틀콕을 막아냈다.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시합을 속개했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차 실장이 박 대통령의 얼굴을 겨냥하고 친 게 분명했다. 더구나 경호실장이 대통령에게….

 매일 오전 730분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김계원 비서실장 주재로 수석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나면 오전 8시에서 830분 사이 김 실장은 회의 결과를 요약해 서재에 가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보고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면 담당 수석이 따라 나섰다. 어느 날 내가 보충 설명을 하러 김 실장을 수행해 서재로 갔다.

 서재 대기실에 도착했더니 황당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뒷짐을 지고 서재 문 앞에 서 있었다. 차 실장은 선착순으로 보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경호상 급한 사안이 아니라 정무 보고인 것 같았는데도 그는 순서를 양보하지 않았다. 4성 장군 출신(김 실장)과 대위(차 실장) 출신의 기묘한 조합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속으로 혀를 찼다.

 10·26이 터졌을 때 청와대 보좌진이 사태 초반 ‘차지철이 사달을 냈다’고 집단 착각에 빠져든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차지철

차지철(1934~79)=군인 출신 정치인. 1961년 대위로 5·16에 참여했다. 62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6~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74년부터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일했고 79 10 26 10·26 사태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숨졌다.

 

1978 8 31일 경상남도 진해 휴양지에서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왼쪽)과 팀을 이뤄 탁구를 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이 시기 박 대통령은 많은 수행원이 필요 없는 배드민턴과 탁구를 즐겼다고 한다. [사진 국가기록원]

 

<56> 박 대통령의 술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들과 자주 저녁을 했다. 반주는 막걸리 아니면 양주였다. 막걸리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의 일반 양조장에서 만든 보통 막걸리였다. 양주는 시바스 리갈 12년산이었다.

 1979년 봄께의 일로 기억한다. 그날 반주는 막걸리였다. 주흥이 오르자 박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비탁 한잔 하자.

 옆에 서 있던 검식관이 알아듣고 쏜살같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왔다. 노란 주전자 안에 이미 막걸리가 채워져 있었다. 박 대통령이 맥주병을 들더니 그 안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마침 박 대통령 바로 옆에 앉았던 내가 말했다. “제가 (맥주를) 넣겠습니다.
 그는 잘라 답했다. “아니, 이 사람아. 자네는 비법을 모르잖아.

 박 대통령은 적당히 맥주를 부어 넣고 나서 일회용 나무젓가락 하나를 집었다. 쪼개더니 손으로 비볐다. 나무젓가락을 쓸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나무젓가락 하나를 양은 주전자에 담갔다가 꺼냈다. 젓가락에 묻은 술을 입으로 맛보고 나더니 말했다. “으음. 됐네.

 비어(맥주)와 탁주를 섞어 만든 비탁이 완성됐다. 모두 한 잔씩 따라 마셨다. 맛이 기가 막혔다. 옛날 시골에선 겨울이면 밀주를 담가 먹었다. 처음 술이 익어 용수를 넣으면 기포가 소리를 내며 올라온다. 한 잔 떠서 마시면 최고였다. 꼭 그 맛 같았다. 박 대통령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문경에서 초등교사로 하숙 생활을 할 때 동료 교사들 모두 맥주가 먹고 싶은데 그때 월급 가지고는 가당치가 않아. 맥주 두어 병을 사서 막걸리와 섞어서 비탁을 만들어 가지고 여럿이 나눠 마셨지.

 세월이 지나 박 대통령 옆에서 곁눈으로 배운 비탁을 몇 번 만들어봤다. 그런데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비법을 몰라서인지, 입맛이 변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다.

 1979 7~8월 즈음. 박 대통령은 평소처럼 청와대 수석들과 함께 반주를 들며 저녁을 먹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박 대통령이 옆에 있던 검식관에게 말했다.

 “어이, 내 침대 머리맡에 보면 술병이 하나 있어. 그거 좀 가져오게.

 검식관이 술병을 가지고 왔다. 처음 보는 술이었다. 병이 도자기로 돼 있었다. 21년산 로얄 살루트다. 검식관이 들고 내려올 때부터 이미 3분의 1 정도는 비어 있었던 것 같았다. 박 대통령은 술병을 들더니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한 잔씩 따르고 나에게 술병을 넘겼다. 멀리 앉아 있는 사람들에겐 내가 돌아가며 술을 따랐다.

 자리에 돌아가 한 잔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혀에 닿는 감촉과 술맛이 그만이었다. ‘이야. 이런 술도 있구나.’ 한 잔으로는 영 아쉬웠다. 머릿속으로 분주하게 계산을 시작했다. ‘아까 술병을 들어보니 3분의 1쯤 남았던데. 대통령과 경호실장·비서실장·수석까지 해서 10명 정도니. 잘 하면 나에게 한 잔이 더 돌아오겠구나.

 박 대통령은 자기 혼자 그 술을 즐겼던 게 멋쩍었는지 해명을 했다.

 “이거 박준규(당시 공화당 의장 서리)가 외국에 다녀오다 사다 줬는데 내가 이걸 침대 머리맡에 두고 밤에 잠이 안 올 때마다 한 잔씩 따라 먹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 김계원 비서실장이 두 손으로 병을 들었다. “아, 각하. 이걸 올려다 놓겠습니다.

 검식관이 그 병을 받아서 나갔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뭐. 그럴 거 있어. 그냥 들지”라고 말하면서도 검식관을 말리지는 않았다. 어찌나 아쉽던지.

 그 황홀한 술을 다시 만난 건 3년 후였다. 1982년 김종호 건설부 장관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일행은 김 장관과 나, 김용휴 총무처 장관, 이범준 의원 네 명이었다. 바로 그때 그 술 로얄 살루트가 나왔다. 김 장관이 가져온 술이었다. 그날 넷이서 두 병을 마셨다. 이제 이 술이 그렇게 흔해졌나 싶어 놀랐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는지도 모른다.

 

1978 9 20일 충북 옥천의 고() 육영수 여사 생가에 들러 쉬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오원철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왼쪽)이 박 대통령에게 막걸리를 따르고 있다. 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최광수 의전 수석비서관이고 박 대통령의 옆에 둘째 딸 근영씨가 앉아 있다. [중앙포토]

 

<57> 긴급조치 10호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그를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일을 하며 만났을 뿐이다. YH무역 사건 강경 진압은 중앙정보부의 결정이었고 밀고 나간 인물은 김재규 부장이었다. 나는 치안본부 유흥수 치안감(전 의원)과 함께 경찰진입을 반대했지만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성향을 저돌적이라 단정하기도 어려웠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10·26 사태가 있기 두 달 전인 1979 8월께 일이다. 청와대 본관에서 회의를 소집한다는 연락이 왔다. 본관 소회의실에서 박 대통령과 신직수 법률담당 특별보좌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유혁인 정무 제1수석과 정무 제2수석인 나까지 6명만 참석하는 내밀한 회의였다.

 나는 청와대 정무 2수석이었지만 행정을 담당했다. 후에 행정수석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정무와 관련한 업무는 정무 1수석 관할이었다. 정무 1수석만 참석해야 할 회의였는데 정무수석을 불러야 한다고 하니 정무 2수석인 나한테까지 연락해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안건은 ‘긴급조치 10호 안’이었다. 제안한 사람은 김재규 부장이었다. 김 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이미 서면 보고를 한 상태였다. 회의 시작과 함께 박 대통령이 김 부장에게 말했다.

 “김 부장, 취지를 얘기해보세요.

 김 부장은 10분 정도 긴급조치 10호 안에 대해 설명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취지는 이랬다.

 “긴급조치 9호는 효력을 다했으니 더 강력한 긴급조치 10호가 필요합니다.
 김 부장의 말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신직수 특보를 보며 말했다.
 “신 특보가 사전에 검토를 했는데, 검토 내용을 보고해 보시죠.

 신 특보는 긴급조치 10호 안 법률 검토 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10분가량 설명이 이어졌다. “긴급조치 10호를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김 부장으로부터 사전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10호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신 특보에게 법률 검토를 시킨 후 부결시키는 모양새를 취했는지도 모른다. 회의는 20~30분 만에 끝났다. 김 부장이 참석한 이날 수뇌회의는 더 이상 긴급조치 10호는 안 된다는 결론을 확인하는 걸로 마무리됐다.

 당시 김 부장의 교체는 시간문제란 소문이 대세였다. 언론에서도 얘기가 오르내렸다. 중정부장은 대통령 다음의 제2 권력자 자리다. 중정부장이란 자리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인사 조치가 권력 유지의 ‘ABC’였을 텐데…. 박 대통령은 상당히 오랫동안 제2 권력자의 인사 교체를 불확실한 상황에 뒀고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중정부장 교체보다 중정부장에 의한 10·26 사태가 먼저 왔다. 내가 느낀 10·26 전야(前夜)의 수수께끼다.

 ‘이건 아니다’란 생각을 한 일은 더 있었다. 1979 10 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정회(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추천으로 선출된 국회의원이 모여 만든 정당에 준하는 조직) 연회가 열렸다. 유정회 국회의원이 모여 10월 유신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였다.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던 시기다. 부마 민주항쟁이었다. 청와대 수석들은 10월 유신 연회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연회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유정회 의원 몇몇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덕담을 했다. 연회다 보니 국악과 한국 가요가 흘렀다.

 유신을 반대하는 시위가 부산과 마산에서 번지고 있는데 청와대 영빈관에선 유신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속으로 씁쓸하게 되뇌었다. 9일 후의 일은 꿈에도 모른 채.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긴급조치 9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이 국가위기 상황이라고 판단될 때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을 근거로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발동한 9번째 긴급조치를 말한다. 집회와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유사시 군 병력 출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79 10·26 사태 1년 후인 80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됐다. 지난 3 21일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1, 2, 9호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다”며 위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58> 10·26사태 ①

1979 10 26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행사를 마치고 오찬장이 있는 충남 도고온천의 한 호텔로 이동했다. 그런데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 3대 중 1대가 고장을 일으켜 뜨지 못했다. 경호원 가운데 일부는 차로 이동해야 했다.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다.

 그 시간 나는 청와대 사무실에 있었다. 서석준 청와대 경제 제1수석이 삽교천 행사에 따라갔다. 경제 담당이 아니었던 나는 수행할 필요가 없었다. 늦은 오후 박 대통령이 서울에 도착했다. 대통령이 지방 순시를 갔다가 건의 사항을 들으면 행정을 담당하는 정무 제2수석인 나에게 바로 지원 대책을 지시했다. 수행하지 않을 때는 대개 전화로 지시를 받았다.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있을지 몰라 나는 사무실에 앉아 전화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났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본관으로 올라가봤다. 의전실에 당직인 정기옥 비서관이 있었다. 정 비서관에게 물었다.

 “대통령은 어디에 계신지….
 “지금 샤워 중이실 겁니다.

 ‘오늘은 지시 사항이 없겠구나’ 싶었다. 본관을 걸어서 나왔다. 굽어진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모퉁이에 키 큰 백합나무가 보였다. 그때 갑자기 나무 위로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깍, , .

 까치 우는 소리에 나무 위를 쳐다봤다. 까치떼가 싸우고 있었다. 창덕궁과 청와대 숲 사이에서 벌어지는 까치떼 싸움은 많이 봤는데 청와대 본관 앞에선 처음이었다. 15~16마리의 까치가 두 무리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은 불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수석 사무실이 있는 청와대 신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 사무실로 가서 서둘러 잔무를 정리했다. 서울 효자동 근처 한식집 ‘유선’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인 저녁 7시를 훨씬 넘겼다. 서둘러 서류 가방을 싸들고 승용차에 탔다.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유선의 김선영 사장이 다가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에서 금방 이상한 총소리가 났어요. 못 들으셨어요?
 “아니요. 지금 제가 그 쪽에서 오는 길인데….

 총소리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귓전으로 흘려버렸다.

 음식점 방 안으로 들어가니 광주에서 온 반가운 손님들이 나를 맞았다. 박윤종 도정자문위원장, 김기운 백제약품 회장, 이을호 전남대 교수였다. 즐겁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막 홍어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려는데 내 차를 운전하는 심판근 기사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차내 자동경비전화로 청와대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비상소집령이 내렸다고 합니다.

 들었던 수저를 내팽개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10분도 채 안 걸려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 비상소집령을 받은 사람 중에 내가 제일 가까운 장소에 있었나 보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본관 현관 앞에 검은색 정장 차림의 김계원 비서실장이 서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수석들 다 모일 때까지 일단 기다리세요.

 어떤 일로 비상소집령을 내렸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더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었다. 일단 나는 본관 현관 안쪽에 있는 의전실 옆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이재전 경호실 차장이 현관에 도착했다. 김 실장은 이 차장을 기다리느라 현관 앞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재전 경호실 차장. 두 사람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2층 비서실장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서너 걸음 떨어진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워낙 작은 목소리라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다 오를 때쯤 이재전 차장이 놀란 목소리로 던진 한 마디가 내 귀에 꽂혔다.

 “그러면 친위쿠(측근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를 뜻하는 친위 쿠데타의 준말)가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그때는 정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후 사건을 재구성해보니 김 실장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병력 충돌을 막기 위해 이 차장을 불러 얘기한 것 같았다.

 

1979 10 26일 오전 11시 충남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왼쪽 둘째)이 삽교천 방조제의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왼쪽부터 이규홍 농업진흥공사 사장, 박 대통령, 이희일 농수산부 장관, 손수익 충남도지사. 그날 저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 사태가 벌어졌다. [중앙포토]

 

<59>  10·26사태 ②

최규하 국무총리, 구자춘 내무부 장관, 김치열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수석비서관들이 속속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 최 총리, 구 장관, 김 장관이 먼저 비서실장실로 들어갔다. 수석들은 실장실과 붙어 있는 전실(前室)에서 기다렸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최 총리와 두 장관이 비장한 표정으로 실장실에서 나왔다. 그다음 나를 포함한 수석들이 실장실에 들어섰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통령께서 유고입니다.

 우리 모두 충격으로 넋 나간 얼굴이 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임방현 공보수석이 정적을 깨고 질문했다.

 “유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임 수석은 기자 출신이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하다가 청와대로 왔다. 김 실장은 임 수석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 수석들은 청와대를 지켜 주십시오.

 그 말만 하고 김 실장은 사무실을 떠났다. 그는 최 총리 일행을 따라 육군본부로 향했다. 김 실장이 떠난 사무실에 수석들만 남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들 짐작도 못한 채 비통하고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임방현 수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계원 실장의 검은색 정장 윗도리에서 핏자국을 본 것 같아요.

 다른 수석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검정 옷의 얼룩을 언론인 출신인 임 수석은 놓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충격과 비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수석들은 문제를 일으킨 인물을 차지철 경호실장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석들이 청와대 사무실만 지키고 있을 순 없었다. 수석 중 한 사람을 육본으로 보내 유고의 내용을 알아보기로 했다.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유혁인 정무 제1수석이 대표로 육본에 갔다. 시간이 지나 새벽 3시쯤 김계원 실장이 청와대로 돌아왔다. 그때야 김 실장은 우리에게 유고의 내용을 설명해줬다. 청천벽력과 같은 내용이었다.

 국장(國葬)을 담당하는 부처는 총무처였다. 심의환 총무처 장관은 10·26 사태가 있기 불과 나흘 전인 1979 10 22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장관이 공석이라 청와대 내에서 총무처를 관장하고 있는 내가 불가피하게 총무처 장관 직무대행 비슷한 일을 해야 했다.

 10 27일 아침 청와대 본관 소접견실에 빈소를 급히 만들었다. 제일 처음 빈소를 찾은 문상객은 통일원 이용희 장관과 동훈 차관 일행이었다. 곧이어 빈소는 대접견실로 옮겨졌다. 국무회의를 여는 큰 회의실이다. 대접견실의 양옆과 뒤 세 면에 의자를 쭉 둘러 벽에 붙도록 배열했다.

 조문객들이 많았다. 그들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밤을 새웠다. 모두 삼삼오오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나눴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였다. ‘앞으로의 정국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까.’ 삼면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는 돔 비슷한 구조의 천장에 부딪혀 집합적으로 반사되며 공명음을 냈다. ‘웅성웅성’ ‘사각사각’. 아니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소리였다. 나는 빈소에서 잊을 수 없는 그 기이한 소음을 들으며 이틀 밤을 새웠다.

 빈소를 한창 지키고 있을 때 김태호 청와대 행정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결재 서류가 많이 밀렸습니다. (사무실로) 안 내려오십니까. 신관으로 내려와서 처리해 주셔야겠습니다.

 엄중한 시기에 웬 한가한 소리인가 싶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김 비서관. 지금 무슨 서류에 결재할 게 있죠?

 실무자 얘기로 치부해 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이 일이 내가 10·26 때 청와대를 이틀간 비웠다는 낭설로 와전되지 않았나 짐작된다.

 대통령의 생활공간인 청와대 본관 2층에선 박씨, 육씨 그리고 조카사위인 JP(김종필 전 총리) 세 집안이 모여서 장례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여기서 결정된 의견을 모아 비서실에 전달하는 일은 주로 JP가 했다. 9일장으로 결정됐다.

 

1979 10 27일 청와대 본관 대접견실에 고() 박정희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졌다. 문상객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60> 박 대통령의 서재

() 박정희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지 이틀 만에 나는 JP(김종필 전 총리)가 그린 영구차 디자인을 받아 들고 신관 내 사무실로 왔다. 관청 메모지에 그려진 영구차 디자인은 버스 양편에 밖에서 투시할 수 있는 유리창을 가로로 길게 만든 모양이었다. 나는 수석실의 행정관에게 이 메모지를 주면서 총무처에 전하라고 했다.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기 때문에 제작 중인 버스를 개조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버스 조립공장의 공장장과 전화 통화를 했다. 마침 조립대에 올라간 버스 차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영구차로 개조할 수 있도록 유예해달라고 조치를 부탁했다. 영구차는 총무처에서 발주했다.

 그리고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광장에 가서 분향소 설치 현장을 챙겼다. 그때 한 실무자가 내게 다가왔다. “수석님, 저 그때 물에서 건져준 문영철입니다.

 13살 때 일이 떠올랐다. 전북 군산 임피면에 피란을 가 있던 겨울.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가는 길에 저수지에 빠진 이웃 마을의 내 또래 아이를 구한 일이 있다. 그 아이가 사는 동네가 문씨 집성촌이란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총무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반가웠지만 만난 장소가 마침 박 대통령 분향소였다.

 1979 11 3일 박 대통령의 국장이 끝났다. 그의 서재를 정리하는 일이 나에게 맡겨졌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비서실장으로 최광수 의전 수석비서관이 임명됐다. 어느 날 최광수 실장이 “서재로 같이 가자”고 나에게 말했다.

 최 실장과 나, 그리고 김태호 비서관과 정병호 행정관 등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벽에 조그만 금고가 있었다. 최 실장이 금고를 열었다.

 “아무것도 없군요.

 최 실장의 말대로 금고 안엔 몇 장의 종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본 서재 안 금고는 비어있었다.

 금고를 확인한 최 실장은 나에게 말했다. “고 수석 책임 하에 서재를 정리해주세요.

 비서실 행정관 2~3명과 함께 박 대통령의 서재를 정리했다. 2~3일이 걸렸다. 세 가지로 분류해 처리했다. 각 부처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는 총무처를 통해 해당 부처로 돌려보냈다. 개인적인 물품은 유족에게 전했다. 일부는 서재에 그대로 보관하기로 했다.

 유독 나의 눈을 끈 것은 빛 바랜 신문 기사 묶음이었다. 역사학자 하현강 교수의 한국사 연재물을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스크랩한 것이었다. 살펴보니 비서실에서 올려 보낸 신문 스크랩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직접 손으로 스크랩한 것 같았다. 기사 여기저기 빼곡하게 줄이 쳐져 있었다.

 박 대통령의 국장과 서재 정리로 분주하게 보내던 어느 날 퇴근한 나를 아버지가 불렀다. 야당 국회의원으로 국회만 열리면 박 대통령을 비판했던 가친이다. 그런데 이번엔 나를 꾸짖었다.

 “불난 집에 도둑이 든다는 말이 있는데 꼭 그 모양이 됐지 않느냐. 비서실 수석들은 도대체 뭐한 거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렸다. 아버지의 질책을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이제 일괄 사표를 냅시다.

 수석과 특보 모두 사표를 냈다. 내가 쓴 두 번째 사표였다.

 그리고 나는 칩거를 시작했다. 한 달 이상을 집에 머물며 두문불출했다. 미뤘던 독서를 했다. 예전 사뒀던 『열국지』를 그때 읽었다. 12·12 사태는 그사이에 벌어졌다. 칩거하고 있던 나는 내막을 전혀 몰랐다. “한남동에서 총성이 있었다”는 얘기를 친구를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다.

 12·12 사태 직후 청와대는 비서실 조직을 감축했다. 정무 제1·2수석을 정무수석으로, 경제 제1·2수석을 경제수석으로 통합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정무 2수석이었던 나에게 정무수석 자리를 맡겼다. 사실 처음엔 주저했다. 최 대행에게 “저는 행정 전문이라 정치까지 맡기엔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최 대행은 “정치에 정통한 인사를 찾아 인선을 이미 끝내놨다”고 했다.

 79 12 18일 나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임명됐다. 언론인 출신인 이원홍씨가 정치 분야를 맡는 민원수석으로 발령이 났다. 이 수석은 정치, 특히 신군부와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에 주력했다. 자연스레 나는 정치 제도 부문을 담당하게 됐다.
정리=조현숙 기자

 

1979 11 28일 촬영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재. 왼쪽 벽에 붙어있는 달력의 날짜는 10 26일에 멈춰있다. 서재는 10·26 사태 이후 한 달 넘게 보존됐다. 사진은 서재를 완전히 치우기 직전에

 

<61>  짧기만 했던 80년 서울의 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새로운 구상을 내놨다. 각계 원로가 참여하는 국정자문회의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실무는 청와대 정무수석인 내가 맡았다. 헌법개정심의위원회와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 허정 전 과도내각수반, 이재형 전 의원 등을 직접 찾아가 국정자문위원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1979 12월 말 서울 명동성당 주교관에 가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가톨릭의 국정자문회의 참여를 부탁했다. “국정 상황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설명에 김 추기경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나의 요청을 들어줬다. 가톨릭이 국정에 참여한 첫 사례다. 그러면서 김 추기경은 말을 꺼냈다.

 “고 지사, 부탁이 하나 있어요. 자문회의에 참여하는 조건은 아니고….
 김 추기경과는 전남도지사로 일할 때 인연을 맺었다. 그는 나를 고 지사라고 불렀다.

 “이번에 김대중씨를 좀 복권시켜주세요.
 “…. 김대중씨는 선동적인 정치가로 인식돼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이때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오. 내가 지난주 미사 때 김대중씨를 만났는데 이제 많이 원숙해졌어요.
 김 추기경은 ‘원숙’이란 표현을 썼다. 그의 진지한 요청에 어떻게 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제 선에서 다룰 일은 아닙니다. 최규하 대통령께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청와대로 돌아가 최 대통령에게 김 추기경이 가톨릭의 국정자문회의 참여를 승낙했다는 보고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김 추기경께서 김대중씨의 복권을 부탁했습니다.
 “음….

 최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사무실로 돌아와 3대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에 김대중씨의 복권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 2~3일 후 3곳에서 보고서가 올라왔다. 복권의 장단점을 분석해 적었을 뿐 결론이 없었다. ‘아무도 책임지기 싫다는 얘기구나. 결국 내가 결정을 내려야겠구나.’ 고민이 시작됐다.

 그때 청와대를 출입하는 성병욱 중앙일보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던 류근일씨의 복권을 부탁했다. 그와 얽힌 옛 기억이 떠올랐다.

 57 12월 서울대 문리대에서 필화 사건이 일어났다. 정치학과 학생 류근일이 학보 『우리의 구상』에 쓴 ‘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로의 지향’이란 논문이 문제가 됐다. 국가체제를 부정한다는 혐의를 받았고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였다. 문리대 서클 ‘신진회’가 배후로 몰렸다.

 신진회는 영국 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순수 이념 연구 서클이었다. 지금 동아리의 원조쯤 되겠다. 회장은 4학년생인 김지주였고 나와 류근일·한영환·최서영 등 15~16명이 활동했다. 류근일을 신진회에 가입하도록 추천한 사람은 나였다.

 김지주와 류근일이 구속됐다. 수사의 칼날이 나에게도 향했다.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나에게서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경찰서에 찾아와 보증을 섰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너 류근일이 아버지가 누군지 아냐. 류응호 교수다.

 류 교수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대 문리대 교수를 지냈다. 월북해 김일성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58 4월 법원은 신진회를 순수한 학술단체라고 규정했고 류근일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는 다른 공안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80 2 28일 검찰의 한 국장이 복권 대상 명단을 내 사무실로 가지고 왔다. 김대중·류근일씨의 이름은 없었다. 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도록 했다. 복권 명단 서류를 들고 최 대통령의 집무실로 갔다. 김대중씨의 이름을 넣었다는 보고를 했다. 아무 말 없이 최 대통령은 서류에 결재를 했다.

 2 29일 김대중·류근일씨를 포함해 687명이 복권됐다. 23명 사회 각계 원로가 참여하는 국정자문회의가 출범했다. 헌법개정심의위원회도 기대 속에 출발했다. 서울의 봄이었다. 하지만 봄날은 너무도 짧았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인물]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스테파노·1922~2009)=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68년 대주교로 승품했다. 69년 한국인 최초이자 당시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에 서임됐다. 70~80년대 독재정권에 반대하며 민주화에 기여했다. 87 6·10 민주항쟁 때 명동성당에 모인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던 공안 관계자에게 “나를 밟고 넘어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9 2 16일 선종(善終·서거를 의미하는 천주교 용어)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은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62>  80년 5·17 쿠데타 ①

1980 4월 초순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오전 8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렸다. 회의를 주재하던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수석들에게 물어볼 게 있다며 말을 꺼냈다.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에 대한 의견을 구하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는 서로 견제해야 하는 정보 권력기관이다. 양쪽의 수장을 한 사람이 겸직하는 인사는 법적 문제를 떠나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의견은 분명했다.

 “법적으로 불가(不可)합니다.

 다른 수석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회의 전체 분위기는 겸직 반대로 모아졌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4 14일 전두환 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는 인사가 신문에 났다.

 서울의 봄은 길지 않았다. 5월이 되자 ‘안개정국’ 논란이 일었다. 학생시위가 번졌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라” “정치 일정을 단축하라” “아무개는 물러나라”. 주장과 구호가 난무했다. 난 시국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언론인 등 외부 인사의 의견을 주로 들었다. 각계 의견을 정리하는 일은 안치순 정무담당 비서관이 맡았다. 시국 건의서의 큰 줄거리는 이랬다.

 ‘과도기간을 길게 잡지 말고, 정치 일정을 단축하고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계엄령의 조건부 해제 기한을 발표하자. 전면 개각을 해야 한다.

 건의서를 쓰면서 최광수 비서실장에게 구두로 두 차례 정도 내용에 대해 중간 보고를 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5 10일부터 17일까지 8일간 일정으로 석유 외교차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순방을 떠나게 됐다. 순방 기간 중 학생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최 대통령은 예정한 일정보다 하루 빠른 5 16일 밤늦게 귀국했다. 공항으로 대통령을 마중 나가는 최광수 실장에게 시국 보고서를 전달했다. 최 대통령이 도중에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최 실장이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날 밤 11시 청와대 본관에서 최 대통령 주재로 회의가 열렸다. 신현확 국무총리, 관계부처 장관들, 최광수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인 나,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참석했다. 신 총리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국내 정세를 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회의는 30~40분 만에 끝이 났다.

 그리고 5 17일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소요는 없었다. 극에 달했던 학생시위는 소강 상태였다. 시위를 이끌던 각 대학의 학생회장들은 이화여대에 집결해 있었다. 대통령의 결단을 듣기 위해 모두가 잠시 침묵하는 느낌이었다. 오전 8시 평소와 마찬가지로 최 실장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렸다. 내가 건의한 방향과 비슷한 내용을 최 실장이 얘기했다. 회의는 짧았다.

 청와대 신관의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전날까지 며칠 밤을 새우며 일한 정무수석실 비서·행정관들을 오후까지 붙잡아둘 순 없었다. 모두에게 퇴근해 모처럼 주말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난 청와대 신관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올려 보낸 시국 보고서에 대한 최 대통령의 평가가 궁금했다. 그런데 오후 3시가 다 되도록 청와대 본관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차 적응 때문이신가.’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매주 주말이면 청량리에 있는 아버지 댁을 찾았다. 일이 바빠서 몇 주 걸렀다. 잠깐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오후 3시를 조금 넘긴 시각, 차로 청와대를 나와 청량리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막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청와대를 출입하는 성병욱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리였다. 그는 긴박한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냈다. “아니, 고 수석. 지금 군이 이화여대를 덮쳤습니다. 군이 진입해서 전국의 대학생 대표들을 연행해 가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알고 있습니까. 방침이 바뀌었습니까.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12·12 5·17

1979 10·26 사태에 따른 정국 혼란을 틈타 12 12일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80 5 17일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5·17 쿠데타다. 이에 반발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63> 80년 5·17 쿠데타 ②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성병욱 전 중앙일보 주필의 설명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 5 17일 오전 브리핑은 온건한 내용이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이긴 했지만 오후 잠시 마음을 놓았죠. 그런데 이화여대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에게서 급한 연락이 온 겁니다. 군대가 덮쳤다고. 청와대 대변인과는 통화를 했는데 고건 정무수석과 연락이 안 되는 겁니다. 정무수석실 백형환 비서관에게 전화했더니 ‘부모님 댁에 갔다’고 해서 번호를 물어본 뒤 전화를 한 거죠.

 1980 5 17일 오후 4시쯤 성병욱 중앙일보 기자(당시 정치부 부장대리)가 전화로 알려 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치듯 답했다.

 성 기자는 나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청와대에서 온건한 수습책을 모색할 것 같더니 왜 군이 학생회장들 모임을 덮쳤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잠시 부모님 댁에 들렀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청와대로 들어가봐야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청량리 부모님 댁을 나와 청와대로 향했다. 오후 5시가 다 된 시각 청와대 본관으로 올라가는데 차창 밖으로 장성용 군 지프차 한 대가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차에서 내려 황망히 본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 회의를 소집했다. 수석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 실장이 말했다. “군부의 건의에 따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10·26 사태 이후 비상계엄령은 제주를 제외한 지역에 내려졌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군정(軍政)’을 의미한다. 우리가 올린 시국 건의서 내용과는 정반대였다.

 최 실장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군부의 건의는 일단 유보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하는 임시국무회의가 저녁 9시에 열리니 거기에 참석하라”고 말했다.

 국무회의는 청와대 수석이 아닌 정무비서관이 배석하는 게 보통이었다. 정무수석의 국무회의 참여는 청와대가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찬성한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모양이 된다.

 이때 처음으로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덩어리를 느꼈다. 나도 모르게 아주 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내가 왜 거길 갑니까!

 최 실장을 비롯해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경식 경제수석이 서먹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말을 꺼냈다.

 “전두환 사령관이 말이야. 중정부장을 내놓으면 되는 건데.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솔직한 발언이었다.

 이 수석이 침묵을 깨자 최 실장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 정무 쪽의 비서관이라도 배석시키시죠.

 회의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청와대 본관을 나와 신관으로 내려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군정을 찬성할 수 없었다. 정무수석으로 계속 일한다면 군정에 동조하고 나아가 참여하는 입장이 된다. ‘물러날 수밖에 없다’.

 고심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내 사무실에 도착했다. 책상 앞에 앉아 사표를 쓰려고 용지를 꺼냈다. 그런데 국무회의에 비서관을 배석시키라는 최 실장의 지시가 생각났다. 어차피 그만두기로 한 마당에 그냥 떠나면 될 것을…. 직업 공무원의 한계다. 서둘러 국무회의에 배석할 비서관을 찾았다. 심재홍·안치순 비서관은 전화가 안 됐다. 세 번째로 김유후 법무담당 비서관에게 연락이 닿았다. 김 비서관에게 국무회의에 배석하라고 부탁하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아니, 고 수석 왜 거기 계십니까. 국무회의에 올라가지 않고.
 성병욱 기자였다.
 “내가 거기에 뭐 때문에 올라가요? 김유후 비서관이 갔습니다.
 

그에게 사표를 쓴다는 얘기는 안 했다. 가타부타 설명도 안 했다. 통화는 짧았다.
 다시 흰 종이를 쳐다봤다. 18년 공직생활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64>  5·18 광주

청와대 정무수석직 사표는 군부의 의지에 반하는 처신이었다. 사표를 철회하라는 강권과 압박이 있을 수 있었다. 전남도지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오면서 전별금 한 푼 받지 않을 만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다. 아무리 서슬 퍼런 군부라 해도 약점 없는 나를 잡아넣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버텨야겠다고 다짐했다. 펜을 들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한다’. 사직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리고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이제 정무수석으로 해야 할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사직하고자 한다. 사직 후에 지병인 신장결석 치료차 입원하겠으니 나를 찾지 말아달라’고 적었다.

 최광수 비서실장 앞이라고 봉투에 쓰고 사직서 1, 서신 1장을 넣었다. 비서실장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이송용 행정관이 받았다.

 “내가 아주 중요한 서류를 올려 보낼 테니까 내일 아침 비서실장님 출근하시는 대로 드리세요.

 사표라는 얘기는 안 했다. 내 차를 운전하는 신판근 기사를 불러 사직서를 넣은 봉투를 비서실장실에 올려 보냈다. 이 보좌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받았다”는 확인도 받았다. 내 공직생활 세 번째 사표였다.

 청와대 신관을 나섰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시간은 오후 9시를 넘어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차를 타고 경복궁 앞 정부중앙청사를 지났다. 탱크가 청사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차창 밖으로 봤다. 한없이 무거운 마음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김유후 청와대 법무담당 비서관은 군인이 막아 국무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서울 청량리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전말을 설명하며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위동 내 집으로 갔다. 도착하니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위동 집에서 다시 칩거를 시작했다. 『열국지』를 읽었다. 그런데 1~2일이 지나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를 지인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알게 됐다.

 5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하진 않다. 늦은 저녁 집으로 전화가 왔다.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고 지사,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 지사가 청와대에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전화 너머 김 추기경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했다. 추기경이 울고 있었다.
 “추기경님…. 전 사표를 제출하고 민간인 신분이 돼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데 목이 메었다. 수화기로 울먹이는 추기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울었다.

 17년이 흐른 1997 5 18일 광주 5·18 묘지(현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한 달 전 국무회의에서 5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정부 주관으로 기념 행사를 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묘역에 기념으로 나무를 심었고 향도 피워 올렸다. 그리고 국무총리로 연단에 올라 기념사를 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시민들의 궐기이며 항쟁입니다. 5·18 정신을 자유·정의·민주의 숨결로 부활시켜 후손들의 가슴에 담아주는 것이 영령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지금도 가끔 80 5월을 떠올린다. ‘만약 내가 그때 사표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동적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이 됐을 것이다. 광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분명히 현장으로 가 중재를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계엄군의 발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아쉬움만 남을 뿐.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 5월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집권과 비상계엄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이 주도했다. 5 17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계엄군은 시위를 무력 진압하기 시작했고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90년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 95 5·18 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되면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졌다.

 

<65>  남산재

1980 5월 말에 접어들자 고민이 생겼다. 연금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당장 다음달 생활비가 걱정이었다. 사표가 수리돼야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쯤 서석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이 청와대의 부탁으로 나를 찾아왔다. 사퇴 의사를 번의(飜意)해 달라 설득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사표를 제출하게 된 이유와 경위를 설명했다. 소신을 바꿀 수 없음을 말했다. 대학 동기인 서 실장은 자신의 임무가 있었을 테지만 내 입장을 이해해 줬다.


 며칠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최규하 대통령이 직접 면담하고 싶어 한다는 전언이었다. 청와대 본관의 서재로 갔다. 최 대통령과 독대를 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사표를 번의하고 다시 일해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사표를 수리해 주십시오.

 최 대통령은 답을 하지 않고 “으흠”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못마땅한 상황일 때 하는 그만의 행동이었다.

 “정 곤란하시면 제 사표를 수리함과 동시에 저를 연구기관에 보내주십시오. 제가 환경대학원에서 전공한 국토계획과 관련된 연구원에서 공부나 하겠습니다.

 그 말에 최 대통령은 감았던 눈을 떴다. 내 의견을 즉석에서 받아들여줬다. 마지막으로 말했다. “가까이에서 더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6 7일 사표가 수리됐다. 그리고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 고문직으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 22층 노융희 원장실 옆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유리창 밖으로 남산이 보였고, 그 밑에 수도방위사령부 연병장에 정렬해 있는 장갑차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 이름을 ‘남산재(南山齋)’라고 지었다. 군산에서 온 옛 친구들로부터 서예가 강암(剛菴) 송성용 선생이 남산재라고 쓴 편액을 선물 받았다. 이 액자는 지금도 내 사무실에 걸려 있다.

 난 요주의 인물이었다. 5·17 쿠데타 직후 신군부는 ‘삼김(三金,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체포하거나 연금했다. 그때쯤 내가 고급 정보를 야권 인사에게 유출해 연행됐다는 경찰 정보가 돌았다. 그 얘기를 전해듣자마자 전 언론사 정치부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사실무근이다. 스스로 사표를 썼고 내 발로 걸어나와 장위동 집에 칩거하고 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남산재를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옛 친구나 청와대를 출입했던 중앙일보 성병욱, 한국일보 윤국병 기자 등 몇몇 언론인뿐이었다. 극동빌딩 옆 골목 일식집 ‘성전’에서 함께 낮술을 마시곤 했다. 그때 나눈 대화와 정은 평생 잊지 못한다.

 어느 날 고명승 대통령 경호실 상황실장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전북 부안 출신이고 나와 같은 고씨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가 “군부 핵심의 전언”이라며 말을 꺼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회에 참여해 주십시오.

 나는 거듭 거절했다. “전 행정이나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특별히 할 일이 없습니다.

 국보위 상임위원 명단에 며칠 동안 내 이름이 있었다고 들었다. 난 국보위에 참여한 적이 없다. 5 17일 전 만들어진 명단에 당연직으로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국보위 체제가 저물고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헌정 체제로 들어가면서 김경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부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받아들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교통부 장관 6개월, 농수산부 장관 1 2개월을 지냈다.

 ‘군정에 반대한 사람이 왜 5공 정부에서 장관으로 일했나’. 이후 공직에서 일하며 힐난 섞인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난 재야에서 반()정부 투쟁을 해온 사람이 아니었다. 공무원으로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천직으로 삼아온 전문 행정인이었다. 국보위 산하 군정 체제를 마감하고 헌정 체제로 돌아간 상황에서 나는 행정인으로 돌아갔다. 변명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솔직한 답이다. 그때 5공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재야 정치인이 됐을까, 아니면 학자가 됐을까. 모를 일이다.

 

<66>  80년 교통부 장관 첫 입각

1980 9 2일 난 교통부 장관에 임명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 주재로 만찬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 궁정동 안가의 저녁 자리에 가보니 천명기 보건사회부 장관과 김기철 체신부 장관이 와 있었다. 새로 임명된 13명 장관 중에 3명만 초청됐다. 천 장관은 신민당, 김 장관은 민주당 의원 출신이었다. 각료 인선을 하면서 발탁한 야권 인사였다.

 첫 장관직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고 그 전 경험을 바탕으로 교통행정 3원칙을 만들었다. 취임사에서 “생활교통·안전교통·생산교통 세 가지를 교통행정의 지표로 삼겠다”고 밝혔다. 임명된 그 주 일요일 경춘선 열차를 직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타봤다. 이후에도 틈날 때마다 열차와 버스를 이용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봤다.

 취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2시쯤 요란하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더니 잔뜩 화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렸다. “장관님, 지금 기차가 1시간 째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경북 안동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안동발() 050분 기차의 출발이 한참이나 늦어지자 화가 폭발한 승객이 장관 집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114로 전화해 ‘고건 교통부 장관 집 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면 친절하게도 안내해 주던 시절이다. 국민의 얘기인데 어찌 할 도리가 있나. 화를 달래주고 “바로 알아보고 조치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알아보니 열차가 고장 난 것도 아니었다. 이 시절엔 열차나 버스의 연발과 연착이 잦았다. 거스름돈을 제대로 주지 않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고도 성장기였던 만큼 원자재를 실어 나르고 물품을 운반하는 교통의 산업적 측면만 중요시 됐다. 국민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동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잠이 확 깼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호텔에서 본 ‘고객 불편·불만 신고카드’가 생각났다. 카드를 엽서로 만들었고 거기에 민원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바로 교통부 장관실로 배달되도록 했다. ‘교통불편신고엽서’는 그렇게 탄생했다. 열차에서 시작해 택시와 버스로 확대했다. 호응은 뜨거웠다. ‘버스 안내원이 밀어서 빙판에 넘어졌다’는 초등학생 항의부터 ‘경로석에 젊은이가 앉아서 양보를 안 한다’는 할아버지 글까지 1만 통의 엽서가 장관실로 쏟아졌다. 우선 국·과 단위에서 민원을 해결하도록 했다. 실무선에서 처리할 수 없는 민원은 직접 챙겼다. 장관이 직접 주재하는 주말 회의를 열어 해결책을 논의하고 마련했다. 그렇게 10주 연속 장관 주재 회의를 했더니 실무선에서 교통 민원을 해결하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

 택시에 대해 승차 거부, 부당 요금, 합승 강요 등 불편 신고가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개인택시 허가제도로 증차 수요를 맞췄다. 지금은 별 차이가 없지만 당시 개인택시가 회사택시에 비해 고객 서비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많았던 버스노선 정책도 손질했다. 버스업체들은 수익이 많이 나는 황금노선만 차지하려고 하고 돈이 안 되는 벽지노선은 결행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황금노선을 받은 회사는 벽지노선도 의무적으로 운행하도록 끼워서 배정했다.

 그런데 1981년 초 철도청에서 난감한 보고가 올라왔다. 손님이 적어 적자가 난다며 새마을호 호남선을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호남 출신 장관인 나에겐 뜨거운 감자였다. 황해중 철도청장과 함께 고민을 하다가 서대전역 이하 호남선 운임을 20% 할인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감사원 감사 때 문책을 받을 수 있다는 철도청 간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국무회의에 양해 사항으로 보고하고 장관이 책임지겠다는 내용을 회의록에 남겼다. 할인 정책은 효과를 봤다. 호남선 새마을호 손님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운행 횟수도 늘어났다. 적자 노선이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행정에는 작은 일, 큰 일이 따로 없다. 노자가 얘기했듯 나라를 다스릴 때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 같은 정성(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을 쏟아야 한다. 교통부 장관을 하며 깊이 새긴 교훈이다.

 

<67>  81년 농수산부 장관

 1980년 냉해가 심각했다. 4200만 섬 쌀을 생산하겠다고 계획했는데 실제 수확한 양은 절반 수준인 2466만 섬에 그쳤다. 10여 년 만의 대흉작이었다. 정권 초기에 흉년이 닥치자 전두환 정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식량난으로 민심이 나빠질 것을 걱정해서다. 외교력을 총동원해 각국에서 많은 양의 쌀을 수입했다. 결국 쌀 과잉 수입이 문제가 됐다. 당시 양곡 창고 시설이 좋지 않았다. 과잉 수입한 쌀을 기준 이상으로 창고에 겹쳐 쌓아놨다. 그대로 여름을 넘겼다가는 썩어버릴 게 분명했다.

 교통부 장관을 하다가 81 3월 농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당장 과잉 수입한 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을 만큼 농촌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 새로운 대책이 없을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양곡이 부족한 농가에 쌀 140만 섬을 무이자로 빌려주고 추곡수매 때 갚도록 했다. 수매가 인상폭만큼 농민들의 상환 부담이 줄어들었다. 농가들은 환영했고 여름이 오기 전에 남은 쌀을 모두 처분할 수 있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안정적인 쌀 자급 체제를 갖추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청와대·경제기획원(EPB)·경제학자와 농수산부 간의 전선이 형성됐다. 추곡수매가가 해마다 10%씩 인상되면서 양곡관리특별회계 적자 문제가 불거졌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비교우위론을 내세웠다. 쌀 자급은 어차피 어려운 데다 외국 쌀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니 수입하는 게 맞는다는 논리였다. 정부 내에서도 쌀 수입론이 우세했다. 농민단체와 일부 학자의 지지를 받긴 했지만 외로운 싸움이었다.

 80년 냉해로 흉년이 들어 쌀을 수입할 때 세계 곡물 메이저를 통했다. 이들 기업은 국제 시세의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폭리를 취했다. 쌀 자급을 하지 않는다면 흉년이 들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될 게 뻔했다.

 생각 끝에 ‘쌀 자급 7개년 계획’을 세웠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경제부처 장관이 없는 자리에서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쌀 등 주곡만은 자급해야 합니다. 식량은 안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식량안보를 세계적인 메이저 양곡 재벌기업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전 대통령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81 5 13일 쌀 자급 7개년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86년까지 연간 쌀 4100만 섬을 생산하고 87년엔 자급 목표를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목표 시기보다 1~2년 앞서 우리나라는 쌀 자급 국가가 됐다. 물론 벼 품종을 개량하고 1인당 쌀 소비량이 감소해서 가능했다.

 고개 하나를 넘었지만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수산부 장관 때 마늘 파동이 일어났다. 마늘은 수입 금지 품목이었다.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내리자 염장 마늘과 같은 마늘 가공식품의 탈법 수입 문제가 심했다.

 나는 윤근환 농촌진흥청장에게 다수확 품종을 찾아 도입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중국 하이난(海南)성에서 나는 난지(暖地)형 다수확 품종이었다. 벼를 수확한 뒤 논에 심으면 이모작이 가능했다. 하이난성과 같은 한자를 쓰는 전남 해남과 경남 남해(南海)에 심도록 했고 도입에 성공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마늘 파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지금도 식량 자급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기후변화로 인한 최대의 재앙은 식량 부족 사태다. 이미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일이 되면 한반도 전체의 식량 수급도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해서라도 주곡 자급을 지켜나가야 한다. 

 

<68> 하버드대 유람기

농수산부 장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12개월이 지난 1982 5월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 터졌다. 그 여파로 정부 쇄신 차원의 전면 개각이 이뤄졌다. 5 21일 모내기 현장으로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라디오로 내가 농수산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전에 청와대에서 연락은 없었다. 어찌나 황당하든지.

 20년의 공무원 생활이 끝나자 섭섭함과 함께 시원함이 밀려왔다. 늦은 나이긴 했지만 세계를 호흡해야겠다는 생각에 그해 미국 하버드대에서 객원연구원(visiting fellow) 생활을 시작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겔, 『문명의 충돌』 저자 새뮤얼 헌팅턴, ‘소프트 파워’의 주창자 조셉 나이 등 유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훗날 다시 국정을 맡았을 때 이들로부터 배운 지식은 소중한 자산이 됐다.

 하버드대에서 마주친 사람도 적지 않다. 중고가구를 구하러 시내에 다니다가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에서 최고경영자과정(AMP)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던 이헌재 전 재무부 심의관(전 경제부총리)을 만났다.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받던 한덕수 상공부 과장(현 한국무역협회장)과는 하버드 야드에서 마주쳤다. 조셉 나이 교수의 국제정치 강의실에선 반기문 외무부 과장(현 유엔 사무총장), 최홍건 상공부 과장(전 산자부 차관) 등과 함께 했다. 먼 타국에서 한국인, 그것도 같은 행정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21년이 지나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와 장관으로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초유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게 될 줄은 그때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복권된 김대중씨(전 대통령)가 나보다 6개월 늦게 하버드대에 왔다. 하지만 그와 하버드대 캠퍼스에서 마주친 일은 없었다.

 하버드대 안에서 거의 매주 세미나가 열렸다. 경제 관련 세미나에 가면 “한국은 경제성장의 모범사례”라며 칭찬을 받았다. 정치 관계 세미나에 가면 정반대였다. “민주화 후진국”이라고 비판받았고 한국 정치가 도마에 올랐다.

 한 번은 내가 새마을운동에 대해 주제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벌어졌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경제개발운동”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다양한 세미나에 참여하며 나의 공직생활을 되돌아보게 됐다. 한국 행정의 흐름을 정리하는 기회도 됐다. 우리나라 정부·행정이 걸어온 3단계 발전 과정을 나는 이렇게 구분한다. 우선 60~80년대는 개발행정에 의한 산업화 시대였다. 이 시기 나는 새마을운동·치산녹화·식량증산에 젊음을 바쳐 일했다. 80~90년대는 정치·행정의 민주화가 열린 시기였다. 나는 국회의원·임명직 서울시장과 김영삼 정부 총리로 정부의 민주화에 참여했다. 그리고 새천년인 2000년대 거버넌스 시대에 들어서서는 민선 서울시장, 노무현 정부 총리,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공직을 마친 후 2005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 포럼에 초청돼 한·미 관계에 대해 연설했다. 22년 전 강의실에서 본 에즈라 보겔 교수가 좌장을 맡아 하버드대 패컬티 클럽에서 극진한 오찬 간담회를 베풀어줬다. 그 자리에서 20여 명 하버드대 교수들로부터 한국 경제와 정치에 대한 극찬을 들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한국 행정 또한 한걸음 한걸음 발전해 왔다. 그 변화를 1983년과 2005년 하버드에서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전두환 대통령의 인척이던 사채업자 장영자씨가 남편 이철희씨와 함께 저지른 어음사기 사건. 장씨는 재무상태가 나쁜 건설업체에 돈을 빌려주고 대신 그 금액의 2~9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았다. 이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돈을 챙기는 수법을 썼다. 장씨 부부가 1981~82년에 사기를 친 어음 액수는 6400억원에 달했다.

 

<69> 83년 북한 아웅산 테러

미국 하버드대 생활에 한창 익숙해져 가던 1983 5월께 주미 한국대사관의 무관(武官)인 노 소장(少將)의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께서 잠시 들어왔다 가시라고 합니다.

 한창 강의와 세미나를 듣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당장 한국으로 오라는 뜻은 아닐 거라고 나름대로 짐작을 하고 답했다.

 “학기가 끝난 후 7~8월에 들어가 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상공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러 미국에 가 있던 서석준도 비슷한 시기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83 7 6일 전두환 정부에서 개각 발표를 했다. 서석준 전 장관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됐다. 최연소(45) 경제부총리였다. 대사관에서 온 연락의 의미를 그때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7월 말 한국으로 갔다. 2개월여 전에 미뤄 뒀던 전두환 대통령과의 독대 날짜가 잡혔다. 장세동 대통령 경호실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오전 1130분에 경복고등학교 앞으로 오십시오.

 약속시간에 맞춰 경복고 앞에 갔더니 사람이 나와 있었다. 그를 따라가니 청와대 경호실 숙소였다. 숙소를 통과하니 안가가 나왔다. 내가 청와대 수석을 할 때도 거기에 안가가 있는지는 몰랐다. 내밀한 장소였다.

 전 대통령과 단둘이 식사를 했다. 막국수가 나왔다. 그때 한창 유행하기 시작한 음식이었다. 전 대통령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전국을 다니면서 민심 동향도 살피고 해서 주기적으로 나한테 보고해 줬으면 좋겠어요.

 전 대통령은 내가 이미 유학을 끝내고 한국으로 완전히 들어왔다고 잘못 안 것 같았다. 난 공부를 당분간 더 할 생각이었다. 말 그대로 잠시 들렀다 가라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완곡하게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난 기사를 보셨습니까. 거기에 새 정부가 내각제 개헌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가 실렸습니다.
 “어, 그래. 난 못 봤는데.

 “그런 추측 기사가 나오고 있는 시점에 고 아무개가 1년 계획으로 하버드대로 간다고 했다가 도중에 들어와서 국내를 돌아다닌다고 하면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기사가 사실 아니냐는 오해도 받고 부작용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어, 그건 그렇네.
 “계획했던 하버드대 수업기간이 끝나면 한국으로 들어오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세요.

 전 대통령은 논리적으로 얘기하고 설득하면 받아들였다. 그의 장점이었다. 대통령과의 독대를 마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 보스턴에서 비보를 들었다.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폭탄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친구들인 김재익·서석준·이기욱이 순직했다. 한국 경제를 일으킬 재목들이었는데….

 한없이 비통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서늘했다. 5개월과 3개월여 전의 일이 생각났다. 전 대통령의 요청대로 미국 유학을 중간에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왔다면 나도 아웅산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보스턴 커먼 공원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아쉽게 스러져 간 친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2000 5월 고려대 정책대학원의 ‘제1회 정책인 대상’에서 행정 부문 수상자로 내가 선정됐다. ()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부문 수상자였다. 시상식에서 상을 대신 받으러 나온 김 전 수석의 부인 이순자 여사를 만났다. 17년 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수상의 기쁨만큼 ‘김재익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70> 85년 첫 여의도 입성

대학에 들어갈 때 정치학과를 지원했고 학생회장도 했다. 고향에서 군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등고시 합격 후 내무부에 지원했다. 모두 정치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5년 나는 정치인이 됐다.

 그해 2월 제12대 총선거가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나는 여당인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했다. 지역구는 전북 군산-옥구였다. 군산은 아버지의 고향이다. 옥구는 6·25 피란 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군산-옥구에서 아버지가 제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7년 의원직 임기를 마치고 정치를 접어야 했던 아버지는 18년 만에 아들이 총선에 도전한다고 하니 발 벗고 나섰다. 여든의 연세였지만 현장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2 12일 나는 47.5% 득표율로 제12대 국회의원이 됐다. 민주한국당 김봉욱 후보도 29.8% 득표로 함께 당선됐다.

 

1985 2월 제12대 총선거를 앞두고 전북 군산-옥구 지역구에 출마한 국회의원 후보자의 포스터가 나란히 벽에 붙어 있다. 민정당 고건 후보가 내세운 구호는 ‘우리 일꾼 고건 뽑아 군옥(군산-옥구) 지구 발전하세’다. [사진 고건 전 총리]

 

 당선 인사를 하러 재래시장을 찾았다. 시장 입구 좌판을 차려놓고 앉아있는 아주머니들부터 시작해 웃으면서 “고맙다”고 악수를 청했다. 눈을 맞추고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이도 있었다. 손을 내밀면서도 눈을 맞추지 않거나 “난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아예 악수를 피하기도 했다. 나를 안 찍은 사람들이다. 소박하면서도 솔직한 민심이었다.

 초선 국회의원인 나에게 당은 큰 과제를 맡겼다. 1961년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도를 20여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일이었다. 민정당 지방자치제도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고시 합격 3년여 만인 65년 처음 맡은 보직이 내무부 행정과 기획계장이었다. 그때 지방자치제를 공부하고 『지방자치백서』를 만들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지방자치제도 시행 방안에 대한 내각과 여당의 의견차가 컸다. 노신영 내각은 몇 개 지역을 표본으로 뽑아 시범 실시한 다음 전국으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여당인 민정당은 직할시(지금의 광역시)·특별시와 도 단위에서 시작해 시·군·구로 확대하는 ‘하향식’을 원했다. 11개 시·도에서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와 국민의 의견을 들었다. 공청회 결과는 내각과 여당이 내놓은 방안과 전혀 달랐다. 시·군·구에서 시작해 시·도로 지방자치제를 확대하는 ‘상향식’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아래에서부터 지방자치제에 대한 훈련을 하고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방법이 제도의 본질에 걸맞다는 이유에서였다.

 1986 8 18일 고위당정회의를 거쳐 ‘시·군·구 등 기초자치단체부터 지방자치제를 도입한다’는 쪽으로 방침이 확정됐다. 정부와 여당의 줄다리기 끝에 정당이 지방의회에 참여하는 안도 정해졌다. 나는 이 내용을 언론에 직접 발표했다.

 “모든 지역주민이 생활 주변에서 제기되는 지역 공동 관심사를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튼튼히 한다는 차원에서 시·군·구로 결정됐습니다. 정당이 지방의회에 참여하는 방안 역시 문제점이 있더라도 허용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길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제도 시행 시기를 정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1987 6·29선언을 계기로 대통령 선거제도를 직선제로 고치는 방안이 한창 논의되기 시작했다. 개헌 후 정치 일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지방자치제 시행 시기를 정하기로 했다. 지방자치제도 시행 방안을 만드는 일은 국정의 틀을 바꾸는 큰 작업이었다. 이후 세부안을 조정하고 합의하는 데 3년이 더 걸렸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됐고 그해 3 26일 첫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자치제는 그렇게 30년 만에 부활할 수 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지식] 지방자치제도

광역단체(특별시·광역시·도)와 기초단체(시·군·자치구)의 장과 지방의원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제도. 지방행정을 지역주민이 스스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가 있다. 1961 5·16을 계기로 중단됐다가 91년 다시 시행됐다. 지방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는 91, 자치단체장 선거는 95년 처음 실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