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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12/ 정치4/ 고건 편1/ 탄핵 그리고 대통령 대행 ① - (30) 처음 맞부딪친 현장

상림은내고향 2021. 4. 24. 20:12

 

비하인드 다큐12/ 정치4/ 고건 편1

 

고건의 공인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13-02-15 중앙일보

"2007년 지지율 1위때 불출마 선언한건…"

국무총리 두 번, 서울시장 두 번, 장관 세 번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관료 세계에서 어지간해선 도달할 수 없는 ‘기록’들이다. 그래서 그에겐 ‘행정의 달인’ ‘최고의 재상’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고건(高建·75·얼굴) 전 국무총리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에서 노무현 대통령까지 그를 기용했던 7명의 대통령은 나라가 순탄하게 잘 돌아갈 때보다는 위기상황이나 비상 시국이었을 때 그를 가까이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공직에 나가고 다시 돌아오기를 일곱 번 되풀이했다. 그를 ‘우민(又民)’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다시 백성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7명의 대통령을 보좌하는 동안 30년은 공직에 몸 담았고, 20년은 민간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공직 인생에 대해 그는 지금껏 입을 열지 않았다. 공직자는 그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중앙일보를 통해 공인으로 살아온 50년 인생의 비화(秘話)를 털어놨다. "더 이상 공직이나 현실 정치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
역대 정부마다 부름을 받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거 하나는 제 특징이에요. 중앙과 지방을 세 번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니까 중앙에만 있던, 탁상에서 행정만 하던 사람과는 행정 감각이 다르다고 할 수 있죠. 또 하나는 민()과 관()을 일곱 번 왕복하면서 시각 조정을 또 해요. 이렇게 일곱 번 왕복을 하면서 말하자면 실사구시하는 행정 마인드가 생긴 거죠. 그런 행정 스타일이 소용 닿을 때가 있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불려 들어가고 문제가 해결되면 나오고 이렇게 반복한 거죠.

 - 총리의 자격은 뭐라고 보십니까.
 “도덕성, 국민과 소통하는 능력은 필요조건이고. 헌법이 규정한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능력, 바꿔 얘기하면 국무를 조정하는 능력이 총리의 역할이자 자격이죠. 저는 국무조정 총리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역점을 뒀어요. 그런 국무총리의 역할을 보장해 주기 위해 헌법에 국무위원 인사제청권과 해임 건의를 인정하고 있어요.

 -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셨나요.
 “김영삼 대통령이 한보 사태를 수습할 역할을 나한테 맡기면서 총리를 제의했을 때 제가 조건으로 장관 해임제청권을 달라고 했어요. 노무현 정부 초대 총리를 맡을 때도 문서 제청서를 만들어서 장관 임명제청권을 행사했어요. 실질적으로 인선을 한 거죠.

 정부 수립 후 총리를 두 번 지낸 인사는 모두 네 사람이다. 그중 김종필 전 총리와 고 전 총리가 대비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던 김 전 총리는 스스로 정당을 만들어 대권을 노렸던 정치인 총리다. 그에 비해 고 전 총리는 행정가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그도 한때 대권 출마를 염두에 둔 적이 있다. ‘재상’에서 ‘제왕’을 꿈꾼 것이다.

 17대 대선을 앞둔 2007 1월 그는 당시 이명박·박근혜·정동영·손학규 등 여야의 경쟁자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돌연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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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불출마한 이유가 뭡니까.
 “난 중도 실용개혁을 표방하고 대안 정당을 만들려고 했어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의원들에게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대안 정당을 만들자고 했는데 호응이 미약했어요. 당시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도 만났는데 (기성 정당을) 재건축하는 식의 새로운 신당을 만들자고 했어요. 그러나 문 의원은 (열린당의) 법통을 계승하는 리모델링 정도로 가자는 입장이었는데, 난 그러면 필패라고 봤지요.


 -난관을 극복해 가는 과정, 그게 정치 아닐까요.
 “난 호남 출신이기 때문에 천시(天時) 지리(地利) 중에 지리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천시가 맞아야 하는데 당시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보다는 보수의 잃어버린 10, 영남의 잃어버린 10년의 정서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천시도 안 맞았어요.

 - 대선 때 안철수 현상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안철수 후보는 천시도 좋고 지리도 좋았다고 봐요.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지 못한 제3 후보의 좌절이란 점에서는 나랑 공통점이 있는데 그 사람은 5년 후에 다시 할 수 있는 사람이고, 5년 후인 지금은 75세가 됐거든요. 그때 다섯 살만 젊었어도 (대선에) 나갔을 거예요(웃음).

 이 대목에서 그는 여태껏 공개하지 않은 뒷얘기를 소개했다.

 “뜻을 접고 나서 3일 동안 남도를 방황하다가 상경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특사로 보냈어요. ‘번의를 하고 다시 나와라’는 얘긴데 일종의 지지 표시란 말이에요. 근데 제가 고사했어요. 새 정치를 표방하는 사람이 DJ의 말 한마디로 기존 정당의 후보가 된들 그 체제 가지고는 당선이 어렵다고 봤어요. 공천권 지분이나 즐기는 직업 정치인이라면 나갔겠죠. 근데 난 직업 정치인은 아니잖아요.

 -아쉬움은 없습니까.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미련 없이 결단을 내렸어요. 12월이 선거인데 왜 1월 초에 그만두느냐, 국민의 선택권을 보장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지만 질질 끌면 안 된다고 생각해 연초에 결정을 내린 겁니다.

 -항간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대권의 꿈을 다졌다는 얘기가 나돌았었어요.
 “그건 반대예요. 탄핵 심의 기간 중에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탄핵으로 의결이 되면 그때는 권한대행을 하는 현직 총리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얘기가 있습니다’라고 알려주더라고요. 일언지하에 노(NO)했어요. 내가 권한대행으로 국가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는 사람인데 누구한테 맡기고 내가 입후보를 하느냐, 말도 안 된다고 했지요. 그게 국가에 대한 의무이자 소명이죠. 그걸로 인해서 욕심이 생겼다. 그건 아니지. 욕심이 있었다면 그전부터 있었죠.

 -대통령의 꿈이 있었나요?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고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37세 때 전남지사로 발탁해 고속 출세의 기반을 마련해 준 이가 박 전 대통령이었다. 내무부 시절 새마을운동의 주무국장인 지방국장을 맡아 초기 새마을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 10·26 땐 박 대통령 장례식을 치렀는데요.
 “총무처 장관이 공석인 상태에서 10·26이 났어요. 그러니까 행정수석인 내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죠. 국장을 치르고 서재를 정리해 유족에게 남길 거, 총무처에 넘길 거, 각 부처로 보내줄 거를 정리하고 제가 ‘모두 죄인 아니냐. 일괄 사표를 내자’고 해서 일괄 사표를 내게 됐죠.

 - 당시 박근혜 당선인과는 자주 만났나요.
 “그때는 큰 영애를 만날 기회가 없었고요. 그 전에 전라남도 도지사를 할 때인데 새마음운동 총재 자격으로 전남을 방문해 만난 일이 있어요. 그러고는 국회의원 하실 때 테니스를 한 번 쳤어요.

 - 박근혜 정부의 시대적 과제는 뭘까요.
 “(박 당선인이) 스스로 내세운 대통합과 민생이죠. 그런데 통합을 위해서는 탕평인사도 중요하지만 국정을 통한 일상적인 소통이 중요합니다. 고령화 사회로 들어가면서 저성장 경제에 복지 수요는 많고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민생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걸 이끌어 가려면 사회적 대타협, 국민적 합의가 필요해요.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내려면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갈림길이라고 느꼈던 적은 .
 “(96년 총선을 앞두고) 명지대 총장으로 있을 땐데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티타임을 하자더니 ‘전국구 위 순위를 줄 테니 같이 정치를 하자’고 해요. 그때 박찬종씨는 영입됐고 이회창씨는 아직 영입 결정이 안 됐을 땐데, 총장 임기가 남아 있어서 제가 고사했어요. DJ (95) 1기 민선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로 오라는 제안을 했어요. 권노갑씨가 두 번이나 사무실로 왔는데 다섯 가지 이유를 대 사양했어요. 나 대신 조순씨가 후보가 됐죠. 그때 받아들였더라면 아마 직업 정치인이 됐을 거예요. 그게 두 번의 갈림길이야.

 -결국 YS 정부에서 총리, DJ 정부에선 민선 2기 서울시장을 하셨는데.
 “그땐 받아들일 여건이 됐죠. YS DJ나 한 번씩은 거절했고 한 번씩은 받아들였죠 .

 - 평생 공인으로 살아왔는데 후회는 없습니까.
 “공직자로 30, 공인으로 50년을 살았어요. 지금도 지하철 타서 많은 승객이 이용하는 걸 보면 ‘그때 내가 2기 지하철을 만드느라고 이렇게 했지. , 이게 공인의 보람이다’ 그런 생각을 해요.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보람을 찾았으니 공인으로서의 생활에 회한은 없어요.
이정민 정치부장

◆ 고건 전 총리는

1938년 서울 출생(75) ▶경기고·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고등고시(13) 행정과 합격 ▶75년 전남지사 ▶80년 교통부 장관 ▶81년 농수산부 장관 ▶85년 국회의원 ▶87년 내무부 장관 ▶88년 서울시장 ▶94년 명지대 총장 ▶97년 국무총리 ▶98년 서울시장(민선) 2003년 국무총리 ▶2004년 대통령 권한대행 ▶2009년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장

 

중앙일보의 인기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의 공직 인생 50년을 조명하는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건의 공인 50-국정은 소통이더라’라는 제목으로 연재될 이번 이야기에선 박정희 대통령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7명의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행정의 최고봉을 이룬 고 전 총리의 공직관과 인생관이 진솔하게 펼쳐집니다. 국무총리 두 번, 서울시장 두 번, 그리고 세 차례 장관을 지내 ‘행정의 달인’으로 불렸던 그가 대권에 도전하려다 철회하는 과정에서 겪은 흥미진진한 비사(秘史)도 처음 공개됩니다. 백선엽 장군,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가수 패티김 등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사들의 회고담으로 인기를 모았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고건 전 총리편’은 설 연휴 뒤 다음주부터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탄핵 그리고 대통령 대행 ①

2013.02.12 00:52 / 수정 2013.02.12 06:30

설마 했던 대통령 탄핵 … 국방장관부터 서둘러 찾았다

 

2004 3 12일 날씨는 맑았다. 이날의 폭풍을 나는 예감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날 서울에 없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남에 가 있었다. 국회에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기세가 등등했고 집권당에서 하루아침에 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고 측근 비리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노 대통령은 ‘설마?’ 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예정됐던 행사니 가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탄핵 소추안이 통과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점거한 단상 아래서 한나라당이 탄핵 사유를 읽는 정치적 선언만 하고 마치려니 했다. 표가 당연히 모자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전날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 사건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놨다.

 오전 1110분쯤.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총리 집무실 별실에서 TV 생중계를 통해 여의도 국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장석 주변에선 여당과 야당 의원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시루떡 같았다. 여당 의원 한 겹, 야당 의원 한 겹 뒤섞여 있었다. 여든, 야든 한 당이 똘똘 뭉쳐 의장석을 지켰던 이전 단상 점거와는 달랐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한 상태였다. 국회 경위들이 우르르 달려가 국회의장 단상 주변을 가로막고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통과되겠네.’ 내가 처음으로 위기를 직감한 것은 그때였다.

 “어. . 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직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야 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올 수 있겠다 싶었다. 놀라움에 맥박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별실 서가에 있던 『헌법학 개론』 책부터 집어 들었다.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면 그 이후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것은 국무총리인 나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통령 탄핵에 대비한 국정 위기 관리 매뉴얼 따위는 없었다. 직감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때가 오전 1130분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하나하나 되뇌기 시작했다.

 ‘만약 통과가 된다면 이거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안보가 중요하니까 우선 조영길 국방장관을 찾아야겠다. 조 장관에게 전화를…. . 내가 아직 대통령 권한대행이 아닌데…. 그럼 청와대 비서실에 양해부터 구해야겠구나.

 바로 인터폰으로 지시했다.

 “김우식 비서실장 연결해줘요. 빨리.

 시간이 없었다. 김 실장에게 왜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통과될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요.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렇게 하시죠.

 김 실장은 이날 노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도 TV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터였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내 마음도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비감(悲感)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었다.

 오전 1140, 서둘러 비서실에 말했다. “조영길 국방장관 연결해요.” 조 장관과는 통화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을 수행해 행사에 참석하느라 통화할 수 없다는 비서실의 답이 돌아왔다. 대신 유보선 국방부 차관과 통화했다.

 “만일 탄핵안이 통과되면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춰야 하는데 뭘 내려야 하는 거요? 데프콘 같은 전군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해야 합니까?

 “총리님, 그것까지는 아니고요. 군 지휘관들을 정위치하도록 하는 전국 지휘경계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요. 만일 탄핵안이 통과된다면 바로 지휘경계령을 발동하세요. 그리고 국방장관에게 바로 보고하도록 해요.

 이어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에게 전화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비상근무 태세를 갖춰주세요.

 국방 다음은 외교였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찾았다. 반 장관과 휴대전화로 연결됐다. 주한 외교 사절들을 데리고 대전행 KTX 시승 행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주재 대사들 모여 있죠?
 “네. 곧 내려서 오찬 행사를 할 겁니다.

 “점심 행사하면서 이 얘기를 꼭 해주세요.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안보·경제정책에 추호의 변화는 없다.’ 이렇게 말입니다. 각 대사에게 분명히 알리세요. 똑같은 내용을 해외 주재 공관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도 전달하도록 하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아, 특히 6자회담에 참가하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4개국 외무장관에게는 직접 전화를 걸어 이런 내용을 알려야 합니다.
 “네. 총리님.

 오전 1157. TV에서 박관용 의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195표 중 가() 193, () 2표로 헌법 제65조에 의해 탄핵안이 가결됐음을 선언합니다.

 탄핵안이 통과됐다. 이제 분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로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면 헌재로 넘어간다. 과도기가 길어선 안 된다.

 “심의기간을 가급적 단축시켜 주십시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처음 있는 일이라서 저도 잘 모르겠네요.

 윤 소장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묻어있었다. 그에게도 예상치 못한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전화했다.

 “전국 경찰의 경계태세를 강화하십시오.

 경제·외교·안보 관계 장관회의를 오후 130분 소집하겠다고 비서실에 지시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눈앞이 캄캄했다. 내 인생 가장 길었던 63일의 시작이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역사 속 그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국회가 2004 3 12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의결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이 ‘선거 중립 의무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 108,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탄핵 소추안을 발의·의결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12개월 만에 직무 정지됐고 당시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정을 꾸려 갔다. 그해 5 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 소추안 기각을 결정한다. 노 대통령은 직무 정지 63일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2 "그때 강금실 한 마디만 더 했다면…"

입력 2013.02.13 00:50 / 수정 2013.02.13 08:35

강금실 돌출발언, 한마디만 더 하면 물러나게 하려 …

2004 3 15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국무총리 집무실에서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주재하는 공명선거 관계장관회의가 열렸다. 탄핵 사태가 있고 3일 후 일이다. 사진 오른쪽부터 고 권한대행, 안병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강금실 법무부 장관. [중앙포토]

 

점심으로 도시락이 배달됐다. 입맛이 있을 리 없었다. 젓가락을 몇 번 들지도 못했다. 다시 전화를 걸고 받고…. 내내 수화기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비서실은 행사 중이라 통화가 어렵다고 했다. 2004 3 12일 낮 1220분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불렀다.

 “해외 공관과 외교 채널 연락은 반기문 장관에게 지시해 조치했습니다. 이 부총리께선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됐지만 우리 정부의 외교·안보·경제정책에 변화는 없다’는 메시지를 외국인 투자자에게 보내주십시오. 대외 신인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네. 그렇게 하죠.

 오후 130분 경제·외교·안보 관계장관 회의를 열었다.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총리 집무실 안의 직사각형 회의 탁자에 장관들이 둘러앉았다. 모두 말없이 시선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어야 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데 대해 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비상상황인 만큼 행정 각부가 흔들림 없이 국정 수행에 임해주기를 당부드립니다.

 모두발언이 끝나고 장관들이 돌아가며 보고를 했다. 노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조영길 국방부 장관을 대신해 유보선 국방부 차관이 첫 보고를 맡았다.
 “ 감시와 경계태세를 강화할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군사 대비태세 강화 지시를 이미 전 군에 하달했습니다.

 다음은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차례였다.
 “NSC 상임위원회 등을 조속히 개최하겠습니다. 노 대통령의 각종 외교 일정을 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보고했다.
 “13일 아침 경제장관회의를 개최해 부처별 당면 경제현안을 점검하고 대응책을 강구하겠습니다.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의 보고가 이어졌다. “ 경찰 비상경계령을 발표했습니다. 13일 시·도 행정부시장, 부지사 회의를 소집해 민생 안정대책을 당부할 계획입니다.

 위기 속에 실낱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모든 부처가 기민하고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회의는 길지 않았다. 30분 만에 끝났다.

 오후 2시 미리 정리해 놓은 총리의 입장을 발표했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데 대해 개탄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국민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급한 일은 더 있었다. 박관용 국회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이 진해 행사에 가 계십니다. 오후 5시는 돼야 오십니다. 탄핵안 의결서는 5시 이후에 보내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법적으로 의결서가 청와대에 도착하는 순간 대통령 직무는 정지된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없는 상태에서 직무가 정지되는 사태를 막아야 했다. 노 대통령은 진해에서 급거 상경 중이었다. 도대체 대통령이 돌아오면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감정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오후 3시 위기관리 내각의 첫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1시간30분 전 경제·외교·안보 관계장관 회의에서 논의한 조치를 공식화하기 위한 절차였다.

 “전 세계가 걱정과 우려를 갖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 국무위원 모두 일체의 동요 없이 시급히 처리돼야 할 국정 현안을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서둘러 정리한 최우선 국정 현안 10가지를 차례로 말했다. 국정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대외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먼저 남북관계의 평화적 발전, 한·미 동맹·6자회담의 성공적 추진을 포함해 대북 정책과 대미 정책, 외교 정책의 일관성을 차질 없이 유지해야 합니다. 둘째로 군은 이번 사태에 흔들림 없이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함으로써 국가 안보에 추호의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로 ….

  말을 마쳤다. 국무위원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그런데 토론의 흐름과 맞지 않는 돌출 발언이 나왔다.

 “권한대행은 대통령의 권한을 소극적으로 대행하는 것이지 적극적인 대행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었다. 나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강 장관은 며칠 후 또 “가능하다면 (17대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취하하는 게 현재로선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발언했다. 야당의 반발과 선거 중립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3 1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정치 사안에 대해 발언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달라”고 말했다. 강 장관을 겨냥한 경고였다. 사실 강 장관이 한 번만 더 그런 언행을 한다면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무회의를 끝내고 청와대로 이동했다. 오후 430분 국무위원 간담회가 열렸다. 20여 분이 지나 비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통령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노 대통령은 담담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법적인 판단과 국민의 판단이 남아 있어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결과를 겸허히 기다리고 정책과 국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학습에 전념하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말을 마치고 청와대 본관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나와 같이였다.

 “자주 보고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

 노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그는 나와 악수를 나누고 청와대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 에 올라탔다. 차 문은 내가 닫았다. 경호원이 닫는 게 관례였지만 그때만큼은 내 몫 같았다. 떠나는 차 뒤를 지켜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밀려왔다. ‘아, 이제 내가 대한민국을 관리해야 하는구나’. 1962년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5·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그리고 두 번의 국무총리. 많은 일을 겪었다. 긴장을 먹고사는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거운 마음이었다.

 청와대 현관에 함께 서 있던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적을 깼다.

 “앞으로 주 1회 청와대에 오셔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해 주셔야겠습니다.

 “….

 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리=조현숙 기자

◆ 역사 속 지식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사태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통령을 대신한 권한대행이 어느 범위까지 업무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는 헌법 제71조 문구뿐이었다. 사태 직후 학계와 정부 안팎에서 토론이 이어졌고 개략적인 범위가 제시됐다. ▶갑작스러운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처 ▶시급한 외교적 사항의 결정 등 대통령에게 부여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아 민주적 정당성이 약하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도 단기간에 이뤄진다. 대통령의 통상 직무범위 내에서만 권한을 행사하는 게 옳다는 결론이었다.

 

盧 탄핵반대 촛불 만류에 "한번만 더 하고…"

청와대에서 나와 국무총리실이 있는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5분이 지난 5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대한민국이 내 어깨에 얹혀 있었다. 하지만 감정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대통령 탄핵으로 한국 경제가 정치적 격랑 속에 빠져들고 있다.(워싱턴포스트)
 “외국 투자자들에게는 정치 불안이 북한 핵 위기보다 더 심각한 불확실성의 원천이 됐다.(파이낸셜타임스)

 외신은 분주하게 한국의 위기를 타전했다.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2004 3 12일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2.43% 급락한 848.8로 마감했다. 오후 550분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정세현 통일부 장관을 총리 집무실로 불렀다. 반 장관에게는 “정부 방침이 해외에 제대로 전파됐는지 확인하라”고, 정 장관에게는 “남북관계 상황 관리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반드시 해야 할 일도 남아 있었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 전화 통화였다. 오후 615분이었다.

 “헌정의 비정상 운영을 초래한 탄핵 소추에 대해 깊은 유감입니다. 전 국무위원의 뜻입니다. 하지만 국정 현안을 일체의 동요 없이 추진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수화기 너머 최 대표는 잠깐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답했다. “국정운영에 한나라당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199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는 국민회의 후보로, 최 대표는 한나라당 후보로 맞붙었다. 6년이 지나 나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최 대표는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의결을 이끈 야당의 대표로 다시 만났다. 통화는 짧았다.

 오후 8 1급 이상 간부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나서야 공식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이날 밤 극도의 피곤이 몰려 왔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그래도 13일 아침은 왔다. 오전 9시 중앙청사 총리실 브리핑룸.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섰다.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저는 헌법에 따른 국정의 관리자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비상한 각오로 국가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는 것을 다짐 드립니다.

 오전 930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주재한 첫 공식 회의였다. 30분 뒤 경제·외교·안보장관회의를 개최했다. 오후엔 톰 리지 미 국토안보부 장관을 만났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러 한국에 왔지만 권한대행인 나와 마주 앉아야 했다. 대통령을 대신한 첫 외빈 접견이었다.

 “탄핵 소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상황은 안정돼 있습니다.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 외교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나의 말에 리지 장관은 답했다.
 “현재 한국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대외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4일 오전 충남 논산으로 향했다. 폭설 피해를 본 농가 현장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분초를 다투는 위기 상황이지만 ‘한국 국정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는 게 중요했다. 폭설 현장 점검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귀경했다. 서울에서 시민단체 주요 인사들과 점심이 예정돼 있었다. 약속 시간인 오후 1시를 한참 넘긴 오후 2시쯤 인사동 밥집 ‘산호’에 도착했다.
“아이고,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현장에 다녀오느라….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 이세중 전 변호사협회장,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 한덕수 국무조정실장, 그리고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가 나를 맞았다. 그들을 만난 것은 탄핵 소추 가결 반대 촛불 시위 때문이었다. 당시 촛불 시위는 문화행사로 진행되고 있었다. 법으로 시위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양해부터 구했다.

 “이미 탄핵 소추안 가결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와 국민의 뜻은 충분히 표현됐다고 봅니다. 더 이상의 촛불 집회는 반대편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4·15 총선이 코앞에 닥친 지금 상황에서 시위를 자제하는 게 현명할 것 같아요.

 최열 대표가 입을 열었다. “다음 촛불 시위 날짜와 장소는 이미 정해져 공고됐습니다. 모든 준비도 마쳤고요. 한 번만 더 촛불 시위를 하고 더 이상은 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줘 고마웠다. 5년 전 환경운동연합에서 나와 이세중 전 협회장은 공동대표로, 최열 대표는 사무총장으로 함께 활동했다. 신뢰와 우정이 있어 가능했다 생각한다.

 숙제는 남아 있었다. 13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조순형 민주당 대표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 3당 대표가 만나 18일 임시국회를 소집하겠다고 합의했다. 이날 나에게 시정연설을 하라는 요구도 했다. 탄핵 정국의 정치게임이었다. 나도 정치적으로 응수했다.

"원내 4당이 합의를 해오면 시정연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금융시장도 챙겨야 했다. 탄핵 사태 첫날 월가에서 한국의 외평채 가산금리가 급상승했다. 우리 국가신인도에 대한 해외시장의 평가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반 장관에게 연락이 왔다.

 “중·일·러 장관과는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미국 장관과는 통화를 못했습니다.

 “왜 통화를 못합니까?
 “시차 때문인지 연결이….
 “새벽이라도 깨워서 연락하세요.

 한국 시간으로 다음날인 3 13, 미국시간으로 12일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미 동맹은 여전히 강력하고 안정적이며 긴요하다”고 밝혔다. 요동치는 금융시장을 가라앉히는 단초가 됐다. 반 장관이 애쓴 덕분이었다.

 월요일인 15일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12일보다 0.4% 오른 852.26으로 마감했다. 급등했던 환율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폭풍 같은 나흘이 지났다. 눈을 감았다. 2002 12월 말 당선자 신분이었던 노 대통령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몽돌과 받침대….
정리=조현숙 기자

◆ 역사 속 지식

외평채 가산금리

외국환평형기금은 원화를 노린 투기자본의 공격에 맞서고 원화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쌓아놓은 자금이다. 이 기금을 모으려고 발행하는 채권이 외평채다. 채권의 특성상 투자자에게 금리를 얹어줘야 한다. 경제 상황에 따라 가산금리( 기준금리에 덧붙는 금리)가 달라진다. 한국경제가 탄탄할 때는 금리를 낮게 매겨도 채권이 팔리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 그 위험만큼 높은 금리를 얹어야 한다. 외평채 가산금리는 한국 대외신인도가 어느 수준인지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외평채 가산금리가 급등한다는 것은 한국경제를 보는 외국인 투자자의 시각이 그만큼 부정적이란 의미다.

 

(4) 몽돌과 받침대 ① 고건 찾아온 盧 "법무는 생각해둔 사람이…"

2002 12 21. 대통령 선거가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난 이틀 뒤였다. 당선인 비서실장인 신계륜 민주당 의원의 전화를 받았다. 만나자는 거였다. 나는 축하 인사를 건네며 사흘 후 오찬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신 의원은 다급히 말했다.

 “하루빨리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당장 시간을 내주십시오.

 대선 기간 중 내 개인 사무실로 찾아온 민주당 중진 김원기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나를 초대 총리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지 선언을 해달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는 두 가지 요청 다 사양했다. 하지만 나를 총리로 앉히려는 노 당선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12 22일 서울 대학로 일식집 ‘석정’ 에서 신 의원과 마주 앉았다.
 

“시장님, 당선인께서 초대 총리를 맡아줘야겠다고 하십니다.
 신 의원은 나를 시장이라 부른다. 1998년 민선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을 때 비서실장으로 선거를 도와줬다.

 “아이구. 그런 말 하지도 마세요. 못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새로운 사람 이 해야 하는데 나 같은 ‘올드 보이’가 왜 총리 재수를 해요?

  거절 이유를 쭉 설명했다. 신 의원은 안절부절못했다. 밖에서 통화하고 다시 방에 들어오길 두세 번 반복했다. 제주도에 내려가 있다는 노 당선인과 통화하는 듯했다. 난처한 얼굴을 한 신 의원은 최후 통첩과 같은 말을 꺼냈다.

 “당선인께서 내일 서울에 올라오는 즉시 시장님 댁으로 찾아뵙겠다고 합니다.

 큰일났다. 넓지 않은 혜화동 집에 대통령 당선인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당선인과 함께 올 수행단과 경호원들은…. 기자들이 몰려들면 어떻게 하나. 무엇보다 집까지 찾아온 대통령 당선인에게 총리직 거절 의사를 밝힌다는 것은 큰 결례였다.

 

대선 직후인 2002 12 25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을 만날 때 고건 전 총리가 가지고 갔던 자필 메모. 단락 앞에 A부터 E까지 순서를 매겼는데 A~B는 노 당선인을 만나기 전 미리 써뒀던 글이다. 5년 전에 총리를 한 사람이 다시 또 총리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란 문구가 보인다. 나머지는 대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오른쪽 아래 ‘이종찬 국정원장’이라고 적혀 있다. 고 전 총리가 노 당선인이 제안한 인수위원장 직을 거절하면서 “전 정부에서 인수위원장이 총리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사례로 든 인물이다. 이전 원장은 김대중 정부 시작에 앞서 인수위원장을 지냈다. [고건 전 총리 제공]


 “엇, 안 됩니다. 제가 밖에서 당선인을 만나겠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십시오.

 12 25일 크리스마스 저녁 신라호텔 전망 좋은 방에 노 당선인, 신 의원 그리고 나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나는 준비한 대답을 했다. 정가(政街)에서 말은 늘 불씨로 작용하는 일이 많다. 이런 경우를 많이 본 나는 할 말을 미리 정리해 적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먼저 당선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새 얼굴을 총리로 내세워야 합니다. 5년 전 총리를 한 사람은 새 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제 자신도 부담스럽습니다.

 노 당선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개혁 대통령’을 위해선 ‘안정 총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제가 몽돌처럼 생긴 돌이라면 총리는 그 돌을 잘 받치도록 나무 받침대처럼 안정적인 사람이어야 짝이 잘 맞습니다.

 몽돌은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해서 잘 굴러다니는 돌을 말한다. 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신의 기질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리고 노 당선인이 말한 받침대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노 당선인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럼 제가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새 정부 출범까지는 두 달이 남아 있습니다. 당선인께서도 널리 다른 총리 후보자들을 구해 보십시오. 그래도 없으면 연락 주십시오.

 선택권을 노 당선인에게 넘겼다. ‘조건부 수락’이었다. 팽팽했던 긴장은 이 대화로 어느 정도 풀렸다. 인수위원장 직도 맡아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총리 자리도 조건부 수락한 마당에 인수위원장을 할 순 없었다. 술은 반주 한 잔 정도가 오갔다. 분위기는 한층 누그러졌다.

 자연스레 대화는 내가 김영삼 정부 마지막 총리로 임명되던 때 얘기로 옮아갔다. 나는 국무위원 해임 제청권 행사를 전제로 김 전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를 조건부 수락했던 일을 얘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노 당선인이 거기서 한발 더 나갔다.

 “해임 제청권뿐만 아니라 아예 실질적인 내각 인선까지 맡아서 해주시죠.” 잠시 뜸을 들이다 한마디 더 꺼냈다. 계면쩍어하면서 “다만 법무장관만은 제가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는데…”라고 했다.

  누구인지 노 당선인은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강금실 변호사였다.

  바로 장관 인선 기준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덕성을 기초로 해서 각 부처에 맞게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광범위한 데이터 베이스를 가지고 탕평 인사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눴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무거운 생각을 놓지 못했다. ‘한 번 더 총리를 하는 게 맞을까.’ 쉽게 끝날 고민이 아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그 인물

신계륜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59. 4선 의원이다. 2002년 대선 직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간 단일화 협상을 성사시켰다. 1998년 서울시장 선거에 국민회의 고건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비서실장을 맡았다. 고 후보 당선 이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다. 2012년 대선에선 민주통합당 문재인 캠프 특보단장으로 활동했다.

 

<5> 몽돌과 받침대 ②

2003 1월 해가 바뀌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과 만난 지 일주일 뒤 언론인들과의 점심식사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친목 모임이었다. 중앙일보 성병욱 전 주필, 송진혁 전 논설주간, 동아일보 남중구 전 주간 그리고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와 밥집에 둘러앉았다. 세 명 언론인은 대학 후배였고 송 교수는 동기였다. 대화 주제는 총리 임명설로 흘렀다. 이미 언론에서 총리 후보로 내 이름이 오르내리던 터였다.

 “선배가 새 정부 초대 총리가 된다는 얘기가 계속 돕니다.
 “아. 그래요?

 노 당선인을 만났다는 얘기는 물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직 ‘총리 재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내 입장을 솔직히 설명했다.

 “서울시장이야 내가 겁도 없이 벌여놓은 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재수했지만, 총리는 재수할 명분이 없어요.

 즉각 대답이 튀어나왔다. 모두 하는 얘기가 같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만은 고 선배가 총리를 맡아야 합니다.
 “겁이 난다” “불안하다”는 얘기였다. 노 당선인에 대한 불안이었다. ‘이 시대가 나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있구나’라고 느꼈다. 이 모임에서 나는 총리직을 받아들이기로, ‘몽돌의 받침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1 22일 노 당선인은 나를 총리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몽돌’ 대통령과 ‘받침대’ 총리의 시작이었다. 노 당선인은 총리직을 제안하며 했던 약속을 지켰다. 신계륜 비서실장을 통해 당선인과 국무위원 인선에 대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노 당선인과 나 사이 ‘밀고 당기기’가 있긴 했다.

 내가 총리로 공식 지명도 받기 전인데 장관 후보라는 사람들의 이름이 자꾸 언론에 오르내렸다. “정 이런 식으로 하면 총리 못한다”고 말했다.

 초대 국무조정실장(장관급)으로 최종찬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을 내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 수석도 경제관료 출신의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국무조정실장은 총리를 지근(至近)에서 보좌하는 자리다. 인선 과정에서부터 청와대의 관여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절대 원칙이었다. 청와대가 내정해 놓은 최 수석을 국무조정실장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김영삼 정부 총리 때 같이 일했던 이영탁 전 총리 행정조정실장(당시 국무조정실장)을 불렀다. 국무조정실장은 내가 임명한다는 원칙은 그 이후에도 지켰다. 후임인 한덕수 국무조정실장도 내가 직접 인선했다.

 최 수석은 국무위원 후보 가운데 유일한 강원도 출신이었다. 지역 안배가 중요했던 첫 인선이었던 만큼 청와대도 그를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최종찬 수석은 건설교통부 장관직을 맡게 된다. 졸지에 원래 건교부 장관 후보였던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낙마하게 됐다.

 김 전 장관을 건교부 장관 후보로 처음 제안한 것은 노 대통령이었다. 나는 “환경하던 사람이 건설하면 좋다. 친환경 건설, 친환경 교통 하지 않겠느냐”라며 흔쾌히 찬성했던 기억이 난다. 건설 위주의 국토 관리는 한계가 있었다. 건설 중심에서 국토 보존, 환경 보존으로 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김 전 장관의 국토부 장관 후보직 낙마는 국무조정실장 인선은 총리가 해야 한다는 내 생각과 지역 안배가 맞물려 나온 결과일 뿐이었다. 인선 과정은 그만큼 내밀하면서도 신중했다.

 2 27일 오전 청와대. 노 대통령으로부터 총리 임명장을 받았다. 바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로 가 취임 기자회견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내각의 진용을 최종 확정했습니다. 그 전에도 실질적인 협의 조정 과정이 있었습니다. 도덕성을 기초로 해서 균형감 있는 개혁성향을 인선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다. “책임총리로서 어떻게 내각을 운용할 것입니까”

 “헌법에 규정된 총리의 권한과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국무위원 제청권도 실질적으로 행사할 생각입니다. 대통령께서도 오늘 아침 ‘청와대는 핵심 국정 과제에 집중하고 통상적인 국정 전반은 내각이 책임지고 운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할 것입니다.

 그날 오후 2시를 갓 넘긴 청와대 춘추관. 나는 노 대통령과 함께 다시 기자들 앞에 섰다. 먼저 내가 19명 신임 장관을 차례차례 소개했다. 경력과 인선 이유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바통을 이어받아 인선 배경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다.

 우리나라에선 처음 선보인 방식이었다. 신임 장관을 임명할 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설명하는 것은 미국 백악관에서나 하던 방법이었다. 그 전까지는 공보수석이나 대변인이 조각 발표를 맡았었다.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노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참여정부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여론의 시선은 불안했지만 일단 출발은 순조로웠다. 선장인 노 대통령도, 키를 잡고 있는 나도 저 멀리서 다가오는 태풍을 전혀 짐작조차 못한 채 말이다.

 

<6> 청문회의 아이러니

인사청문회 얘기를 하고 넘어갈까 한다. 2003 1 22일 노무현 대통령은 나를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정식 임명까지 인사청문회와 국회 동의란 관문이 남아 있었다. 1997년 김영삼 정부 총리로 임명될 때는 인사청문회를 하지 않아도 됐다. 총리 인사청문회 제도가 2000 6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두 명의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하는 것을 봤다. 청문회를 앞두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2003 2 20일부터 이틀간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두 가지 평가가 맞섰다. ‘전문 행정가로서 국정 운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혁신·화합형 인물’이란 찬성론이 있었지만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았다. ‘좌고우면(左顧右眄·좌우 눈치를 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하면서 부담 가는 일은 시작도 하지 않는 무사안일의 표본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위원회나 만들어 결정과 책임을 피해 가는 처세의 달인이다’.

 나의 30여 년 공직 생활 전부가 평가의 대상이 됐다. 무엇보다 도덕성이 가장 큰 관심이었다. 그런데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고건의 7대 불가사의’를 다시 들고 나왔다. 98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갔을 때 상대였던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 쪽에서 했던 주장이다. 신문 광고까지 하며 대대적 공세를 펼쳤었다. 명백한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그때 최 후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선거에서 이긴 후 “승자의 아량을 보이라”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소를 취하했다. 소송을 끝까지 해서 진위를 가렸어야 했다. 후회가 됐다.

 

 나는 청문회에서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삶까지 거의 발가벗겨지다시피 하는 공직자의 고통을 잘 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란 옛말도 떠올랐다. 세 사람이 ‘광화문에서 호랑이를 봤다’고 하면 없던 호랑이도 사실이 되는 세태를 뼈저리게 느꼈다. 야당에서 내세운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태 이후 내가 3일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의혹이다.

 79 10 26일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오후 8시쯤.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관이었던 나는 비상연락을 받았다. 청와대 근처인 서울 효자동 음식점 ‘유선’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때였다. 수석비서관 중에선 가장 먼저 청와대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나는 꼬박 이틀 밤을 새우면서 청와대 본관에 빈소를 차렸고 국장 준비를 했다. 당시 총무처 장관이 공석이어서 그 역할을 대행하다시피 했다.

 10·26 사태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노재현 전 장관이 2 21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나왔다. 사태 직후 나를 보지 못했다는 증언을 하게 하려고 한나라당 측에서 내세운 증인이었다. 증인에게 질의를 할 때 총리 후보자는 자리를 비워야 했다. 국회 속기록 내용으로 그때 상황을 대신한다. 강운태 새천년민주당 의원이 질문했다.

 ▶강운태=79 10·26 당시에 고 후보자를 본 기억이 없다고 증언하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노재현=저는 청와대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강운태=청와대에 아예 들어가신 적이 없다….
 ▶노재현=. 그러니까 못 본….

 ▶강운태=고건 (당시) 정무수석이 국장에 참여했는지 안 했는지는 원천적으로 알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이시군요.
 ▶노재현=그렇습니다.

 청문회장에서 ‘와’하는 웃음이 터졌다고 한다. 그날 청와대 본관 빈소에 처음 찾아왔던 사람이 통일원의 이용희 장관과 동훈 차관이었다. 이 전 장관은 이미 고인이었고 동 전 차관이 빈소에서 나를 봤다는 증언을 하러 청문회장으로 왔다. 하지만 노 전 장관의 발언으로 동 전 차관은 증언대에 설 필요가 없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문회를 통해 7대 불가사의의 진실이 자세히 설명됐다. 일단 이번은 고건의 7대 불가사의 중 한 토막만 짚어봤다. 나머지 6개 불가사의와 그 진실에 대해선 앞으로 틈틈이 그리고 소상히 설명해 나갈 것이다.

 어쨌든 투표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여소야대 상황이라 낙관할 수 없었다. 국회의원 모두에게 전화를 돌렸다. “불가피하게 총리 재수를 하게 됐다”고 일일이 설명했다. 국회의원 수첩을 펼쳐 의원 한 명 한 명 이름 뒤에 ‘O, , X’ 표시를 한 기억이 난다. 전화를 반기며 긍정적으로 대답하면 ‘O, 미적미적한 반응이면 ‘△’였다. 직접 전화한 총리 후보자를 타박한 의원은 없었다. 여러 번 전화해도 아예 받지 않는 의원은 있었다. 그러면 ‘X’ 표시를 했다. 다행히 ‘O’가 많았다.

 2 26일 오후 730분쯤 총 투표수 246표 중 찬성 163, 반대 81, 무효 2표로 국회에서 총리 임명 동의안이 통과됐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의원 3분의 2 가까운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인사청문회

대통령이 지명한 고위 공직자가 제대로 자격을 갖췄는지 국회가 공식 임명 전에 검증하는 제도. 2000 6월 인사청문회법 제정과 함께 시행됐다. 2000년 법 시행 때는 국무총리와 대법원장, 대법관, 국무총리, 감사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헌법재판소장 등 국회 동의가 필요하거나 국회에서 선출하는 공직자가 대상이었다. 총리 등 국회 동의가 필요한 자리의 경우 국회 본회의에서 과반수 출석,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 있어야만 임명동의안 통과가 가능하다

 

(7) 대통령의 종이 한 장

오랫동안 많은 대한민국 총리가 대독(代讀)·방탄(防彈) 총리로 불려왔다. 대통령 대신 자리에 참석해 청와대가 써준 연설문을 읽거나 대통령이 받아야 할 비판을 대신 받는 게 본업(本業)이라는 일종의 야유였다. 그 틀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 얘기를 잠깐 해보려고 한다.

 1997 3 5일 나는 김영삼 정부 마지막 총리가 됐다. 마지막 내각에는 출범 초기와 같은 기대 섞인 환호가 없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는 것처럼 힘든, 뒤처리 전담반의 노역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한보 사태’ 때문이었다.

 이날 오전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청와대에서 서둘러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호출이었다. 대통령 집무실 회의탁자를 사이에 두고 김 대통령의 오른쪽 옆에 앉았다. 그는 한 장짜리 서류를 들고 있었다.

 “개각을 해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종이에 적힌 명단을 읽어 나갔다.

 “경제부총리 강경식, 통상산업부 장관 임창열, 건설교통부 장관 이환균….

 난 받아 적기 바빴다. 그래도 임명제청권을 행사할 총리인데, 명단이 적힌 종이 한 장 더 뽑아주면 될 것을. 대통령 비서실 관행이 고약하다 싶었다. 다 읽은 김 대통령은 서류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떻나? 괜찮나?’ 하는 눈빛이었다.

 “경제개각만 하셨네요.
 “그래요.

 “한보 사태 수습이 급선무입니다. 시중 여론에서 대통령도 경남, 한보 회장도 경남, 법무부 장관도 경남, 검찰총장도 경남, 중수부장도 경상도. 전부 경상도라 한보 사태 수사가 제대로 될 것이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정국을 수습하려면 안우만 법무부 장관은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

 즉석에서 해임 제청권을 행사했다. 김 대통령은 판단이 빨랐다.

 “그럼 누가 좋겠어요?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람으로 최상엽 전 법제처장, 그리고 아무개가 있습니다.

 김 대통령은 바로 인터폰 버튼을 ‘삑’ 눌렀다. 비서실에 최 전 처장을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그에게 “법무장관을 맡아달라”고 했다. 전화기에서 “아, , 알겠습니다”란 답이 흘러나왔다. 휴대전화가 귀하던 시절이다. 최 전 처장이 전화기 옆에 없었다면 두 번째 후보에게 법무장관 자리가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YS식’ 개각은 그만큼 순식간에 진행됐다.

 통화를 마친 김 대통령은 다시 물었다.

 “그럼 다 된 건가요?
 “네. 다 좋습니다. 다만 이번에 꼭 안 해도 되지만 곧 대통령 선거를 관리해야 합니다. 선거 주무장관이 내무부 장관인데 지금 한나라당 현역 서정화 의원이 맡고 있습니다. 중립성 문제도 있고 선거 전 적당한 시기에 바꿔야….

 말을 맺기도 전 김 대통령은 답했다.
 “언제 또 개각하노. 그럼 내무장관으로 누가 좋겠어요?

 1안으로 호남 출신 아무개, 2안으로 강운태 전 농림부 장관을 얘기했다. 김 대통령은 다시 인터폰 버튼을 누르더니 “강운태 전 장관 연결하라”고 했다. 강 전 장관도 전화기 옆에 있었고 신임 내무부 장관으로 낙점됐다.

 김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다 됐습니까?
 “하나 더 있습니다.

 짜증 낼 만도 한데 김 대통령은 그러지 않고 차근히 내 얘기를 들었다.

 “경제팀은 경제부총리 중심으로 팀워크가 맞아야 합니다. 강경식 경제부총리 내정자를 불러서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 이하 명단을 알려주고 의견을 확인해야 합니다.

 “옳은 얘기지. 그럼 발표를 언제 하면 되겠어요?
 “지금 제가 3부 요인 예방 일정이 있어서. 오후 1시 반에서 2시 사이 전화드리겠습니다.

 김 대통령은 인터폰 버튼을 다시 한 번 꾹 눌렀다.
 “개각 발표 오후 2시로 미루세요.

 총리 집무실로 돌아와 오전 11시 강경식 경제부총리 내정자를 불렀다.

 “부총리로 내정된 것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경제부처 신임 장관들은 누군지 아세요?
 “그건 모릅니다.

 나는 신임 경제부처 장관 내정자 이름을 쭉 불러줬다. 그리고 물었다.

 “어때요? 신임 장관들과 팀워크가 잘 맞을 것 같습니까?
 “네.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오후 2시를 조금 남긴 시각. 3부 요인 중 한 명인 윤관 대법원장을 만나는 일정이 끝났다. 대법원의 청사 별실 하나를 비워달라고 미리 부탁해뒀었다. 1층의 그 방으로 들어가 김 대통령에게 전화했다.

 “강경식 경제부총리 내정자가 경제부처 신임 장관 후보들과 팀워크를 잘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그대로 개각 발표하시면 되겠습니다.

 김 대통령은 흡족해했다. 오후 2시쯤 개각 명단이 발표됐다.

 그리고 1년이 지난 98 3 3. 대통령 집무실 같은 장소에 내가 있었다. 회의 탁자 앞에 앉은 대통령만 바뀌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류 한 장을 들고 앉아 쭉 읽어나갔다. 새 정부 내각이다 보니 명단이 길었다.

 물론 내 앞에 명단이 적힌 종이는 없었다. 대통령 비서실의 고약한 버릇은 여전했다. 하지만 듣는 나는 1년 전보다는 훨씬 여유로웠다. 명단에 있는 이는 나와 일할 사람이 아니다. 받아 적을 필요가 없었다. 김 대통령이 읽어 내려가는 후보자 면면을 떠올리며 ‘아, 이 사람은 JP 지분이로구나. 함께 일할 JP와 인선 협의가 됐구나’라고 혼자 생각했다. 난 형식적 임명 제청을 맡을 뿐이었다.

 김종필 총리 후보는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국회 임명 동의를 아직 받지 못했다. 서리 신분으로 임명 제청한 장관들이 행한 업무는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 내가 DJ정부 일일 총리로서 장관 임명 제청을 맡게 된 사연이다. 명단을 다 읽은 김 대통령은 내 얼굴을 쳐다봤다.

 “고심하셨네요.

 내 할 얘기는 그뿐이었다. 김 대통령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면 제청해 주시는 겁니까?
 “아, 제가 제청해야죠.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제청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아, 정말 고맙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의 첫 단독 면담은 그렇게 짧게 끝났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 개각을 떠올리면 대통령이 홀로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이 생각난다. 그동안 대통령과 총리 간 장관 인선 논의가 ‘협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게 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달랐다.
정리=조현숙 기자

 

YS 재임 중 함께했던 총리들과 만찬 1998 1 7일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중 임명했던 총리들을 불러 만찬을 했다. 왼쪽부터 이홍구(94 12~95 12), 이영덕(94 4~12), 황인성 전 총리(93 2~12), 김 대통령, 이수성 전 총리(95 12~97 3) 그리고 고건 당시 총리(97 3~98 3). 그때 한나라당 명예총재였던 이회창 전 총리(93 12~94 4)는 참석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8>총리의 종이 한 장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 장관 인선 작업은 청와대의 내부 인사위원회가 맡았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차관급)이 실무를 챙겼고 나와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위원회 멤버였다. 인사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관련된 청와대 수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고위 공무원의 경력 관리를 맡고 있는 인사위원회(법정조직)와는 별개였다. 이렇게 새 정부의 장관 인선 시스템이 갖춰졌다.

 정부가 출범하고 5개월이 지난 2003 7 16일의 일이다. 김영진 농림부 장관이 사표를 냈다. 행정법원의 새만금 공사 중단 결정에 대한 항의 차원이었다.

 후임 인선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농림부 장관 후보로 청와대는 민병채 전 양평군수를 추천했다. 민 전 군수는 친환경 농업 전문가다. 농림부 장관으로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세계 농업시장을 놓고 각국이 외교전을 펼치고 있던 때다. 국제협상 무대에서 밀리지 않을 능력이 농림부 장관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난 허상만 전 순천대 총장과 박상우 전 농림부 차관을 천거했다.

 7 23일 청와대 내부 인사위원회는 비공식 장관 청문회를 했다. 국회에서도 총리 청문회는 있었지만 장관 청문회는 없던 시절이다. , 청와대의 문 비서실장, 정 보좌관과 유인태 정무수석, 문재인 민정수석 등 5명이 면접을 맡았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별다른 형식은 없었다. 한 명씩 따로 불러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었다. 요지는 이랬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한 도하 라운드 무역협상 체제로 가면서 농업 개방은 현실이 됐습니다. 우리 농업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내부 청문회는 꽤 밀도 있게 이뤄졌다.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그리고 내부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면접 결과를 바탕으로 위원회는 박상우 전 차관과 허상만 전 총장 2명을 추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허 전 총장을 택했다.

 인선이 마무리됐다. 초대 내각을 꾸릴 때 인선 협의가 잘됐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서면으로 제청권을 행사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헌정 사상 처음 등장한 서면 제청서다. 제청 서류를 봉투에 넣어 밀봉한 뒤 탁병오 총리 비서실장 편에 직접 청와대로 보냈다. 7 24일 청와대는 허 전 총장을 농림부 장관으로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초대 내각을 꾸릴 때는 서면 제청서를 쓰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장관이 바뀔 때마다 이 서식을 썼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2004 5월 총리에서 물러나고 이렇게 서면으로 임명제청한 일은 다시 없었던 걸로 안다.

 내부 청문회도 허 장관 임명 때 한 번만 하고 안 했다. 후보자에 올랐다가 낙마하는 사람도 있는데 불러서 인터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청와대에서 부정적이었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서면 제청서든 내부 청문회든 이제는 모두 사라진 유산이다.

 노무현 정부 총리로 일하며 각료 해임제청권은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최낙정 해양수산부 장관 이렇게 두 번 행사했다. 윤 부총리 해임 건의는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도입을 둘러싼 교육계 분열이 발단이었다. 교육부 장관 경험이 있는 안병영 연세대 교수를 후임 교육부총리로 발탁했다. 당시 나이스 문제 등 교육계 갈등이 심각했다. 그래서 부총리직 인수인계 과정을 내가 직접 입회해 챙긴 기억이 난다.

 이런 복잡한 장관 교체 과정에서도 내가 잊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다. 개각 발표 직전 물러나는 장관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말하는 일이다. 여기에 얽힌 사연이 있다.

 1982년 전두환 정부 시절 내가 농수산부 장관으로 일할 때다. 5 21일 모내기 현장 확인차 지방으로 가고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막 경기도 양평을 지나던 때 라디오에서 개각 발표가 흘러나왔다.

 “…국방부 장관 윤성민 합참의장, 농수산부 장관 박종문 강원도지사….

 “…!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사전 언질은 물론 없었다. 그때의 황당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잘린 장관 마음은 잘려본 장관이 안다고 했던가. 분초를 다투는 장관 교체 과정에서도 내가 꼭 당사자에게 미리 연락을 하게 된 이유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 도하 라운드

2001 11월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시작한 무역 자유화 협상.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WTO 4차 각료회의에서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고 해서 도하 라운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식 명칭은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산물, 공산품은 물론 서비스 같은 무형의 상품까지 협상 대상이었다. 상품을 수입할 때 물리는 관세를 크게 낮추거나 아예 없애서 전 세계가 무역을 자유롭게 하자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자유무역협정(FTA) 1 1 또는 몇 개 국가가 뭉쳐서 하는 반면 도하 라운드는 WTO 회원국 대부분을 아우르는 협상이다. 하지만 무역에서 경쟁력을 갖춘 선진국과 그렇지 못한 개발도상국 사이에 의견 차가 커서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장관을 임명제청할 때 썼던 서면 제청서양식. 고건 전 총리는 ‘국무위원(國務委員)’이라고 쓰인 자리 옆 빈 공간에 임명제청할 사람의 이름을 쓰고 아래 서명을 했다고 한다. [고건 전 총리 제공]

 

<9> 현장에 답이 있다

2003 2 27일 국무총리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내려가려고 자동차나 기차편이 아닌 항공편을 택했다.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은 취임식도 하루 뒤(28)로 미루고 나와 같이 대구로 갔다. 나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대구 지하철 참사 합동분향소가 있는 대구시민회관을 먼저 가자고 했다.

 보좌진은 말렸다. “유족들이 한창 농성 중이라고 합니다. 가셨다 괜히 봉변 당하실 수 있습니다. 안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난 “무슨 소리냐? 유족들과 얘기하는 게 먼저”라고 했다.

 분향소라기보다는 시위 현장 같았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울분에 찬 유가족의 외침이 분향소에 울렸다.

 사고가 난 뒤 현장 관리와 대책이 엉망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것은 2 18. 서둘러 화재 현장을 정리한 게 화근이 됐다.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피해자 신원을 확인하려면 현장 보존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대구지하철공사 직원들은 서둘러 현장부터 정리했고, 피해자 시신 일부와 유류품을 지하철 차량기지로 옮기기까지 했다. 유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습한 시신 가운데 대부분(149)의 신원이 이때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가족이 방화 사고로 숨진 일도 억울한데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사태라니.

 조해녕 당시 대구시장이 설명한 그때 상황은 이랬다.

 “지하철 화재가 일어난 중앙로역을 조기에 청소한 것은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은 가능한 한 가장 빨리 재운행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화재 차량은 이미 사건 당일 화재 진압 과정에서 차량기지로 견인돼 있었기 때문에 역사 정리가 범죄 현장 훼손이라는 인식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고의 축소 은폐 기도라는 돌이킬 수 없는 의혹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뢰를 잃고 수습 불능의 국면을 초래했습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현장 대책을 세우는 일은 시장의 몫이다. 하지만 이미 대구시는 그런 행정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1997 8월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 때가 생각났다. 김영삼 정부의 총리 시절, 새벽 4시쯤 정부종합청사 당직 사령의 전화를 받고 사고 소식을 들었다. 엄청난 사고였다. 오전 630분 비상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한 뒤 이환균 건설교통부 장관을 현지에 급파했다. 이 장관이 조양호 대한항공 사장과 함께 현지 분향소를 찾았다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환경부 장관을 지낸 당시 이만의 내무부 관리관을 유족대책 지원단장으로 현지에 파견해 사건을 수습했던 기억이 났다.

 이런 대규모 인적 재난은 매뉴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현장 감각을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사안의 문제점부터 파악하고 피해자 유가족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소통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무릎을 맞대고 유족들의 얘기부터 들었다.
 “대구시를 못 믿겠습니다. 중앙에서 직접 수습해 주십시오.

 피해자 유족과 대구시민이 갖고 있는 불신, 실종자와 피해자 신원 확인 그리고 안전 시스템 문제. 이 세 가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차관이나 차관보급을 단장으로 하는 중앙정부 차원의 특별지원단을 만들겠습니다. 사고 수습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구에 상주시키겠습니다.

 유족들의 요구를 십분 받아들이는 게 중요했다. 책임자를 처벌해 달라는 요청에 “사건 경위 등을 객관적으로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했다. “실종자 인정 사망 심사위원회를 실종자 가족 측과 대책본부 측 동수로 해달라”는 요구에도 “중앙지원단이 그런 원칙을 갖고 일처리를 하겠다”고 답했다.

 한발 더 나아갔다.

 “내일 대구 지하철 사고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요청을 바로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분향소를 나와 지하철 화재 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폐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냄새.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비통한 현장의 기억을 품고 귀경했다. 총리 취임 첫날 오후는 그렇게 대형 참사의 현장 속에서 보냈다.

 다음 날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유족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김두관 장관과 강금실 법무부 장관, 최종찬 건교부 장관, 김화중 복지부 장관,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 등이 참석했다. 청와대에서 문재인 민정수석, 권오규 정책수석이 나왔다.

 “어제 현장을 방문한 결과, 사고가 수습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조속히 사태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 강금실 장관에게 지시했다.

 “유가족들이 수사 상황을 믿지 못하고 있어요. 대구지검과 대구경찰청에서 맡고 있는 수사를 대검찰청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철저한 수사를 당부하는 검찰총장의 특별지시도 필요합니다.

 또 이날 회의에서 유가족이 추천하는 변호사·법의학자 등이 참여하는 ‘인정 사망자 심사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전날 유족들의 요청을 그대로 반영했다.

 지하철 피해를 복구하는 데 국비로 366억원을 지원했다. 전국 지하철 내장재를 불연성 재질로 바꾸고 국가 재난관리체계도 전부 뜯어고치기로 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은 그렇게 어렵사리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부상자와 유가족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얼마나 오래갈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대구 지하철 참사

2003 2 18일 오전 953분 대구 중앙로역 지하철 안에서 발생한 방화사건. 지하철에 타고 있던 김대한(2004년 복역 중 사망)은 휘발유를 담은 페트병에 불을 붙인 뒤 던졌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맞은편에서 달려와 역에 섰던 지하철에도 옮겨 붙었다. 출근시간이라 역사는 혼잡했고 기관사와 역무원이 초동 대응을 잘못하면서 인명 피해를 키웠다. 192명이 목숨을 잃고 151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참사였다. 방화범 김대한은 지적 장애가 있었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10) 4·3 진상규명위원회

제주 4·3 추모식 가는 길 돌우박이 쏟아졌다

“뭐, 이런 회의가 다 있어요?

 2003 3 21일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초안에 대해 토론하는 회의 자리. 분위기는 초반부터 심상치 않았다.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 기획단장은 지금의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였다. 박 단장이 초안을 읽어나가자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나왔다. 유보선 국방부 차관, 김점곤 경희대 명예교수 등이 소리치며 불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나치게 과잉 진압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내용에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보수와 군경 측 인사들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아예 회의장을 떠나려 했다.

진보단체와 피해자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상 규명 취지와 다르게 국방부가 지나치게 군 입장만 강조하고 있어요!

 회의의 주재는 국무총리로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내 몫이었다. 나가려는 위원들을 간신히 붙들어 앉힌 다음 말했다.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해서 조정할 건 조정하겠습니다. 저를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어 여러분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반영하겠습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 조영길 국방부 장관과 민간의 중립적 학자·전문가를 소위원회에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하며 겨우 상황을 수습했다.

 총리가 되자마자 큰 과제를 떠안았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유족은 군경에 의해 가족이 희생됐다는 이유만으로 연좌제에 얽매였었다. 당국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도 제약을 받아야 했다. 위원회에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엄중한 숙제가 떨어졌다.

 이후 내가 직접 세 차례 소위원회를 개최했다. 의견 대립은 격렬했다. 557쪽 길이의 진상보고서 가운데 30여 건, 100여 쪽 내용을 수정해야 했다. 그리고 3 29 7차 위원회 회의를 개최했다. 김점곤 교수는 전날 위원직 사퇴서를 내고 참여하지 않았다.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도 개인적 이유로 불참해 총 18명의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상보고서를 조건부로 채택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 보고서는 이렇게 ‘두 개의 사실’로 정리됐다.

 보고서를 최종 채택하는 시기는 6개월 후로 미뤘다. 내 아이디어였다. 보고서를 공개한 뒤 제기되는 새로운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내용을 수정하거나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대립하고 있는 두 시각을 하나로 수렴하는 일이다. 신중해야 했다.

 그런데 4 1일 추미애 민주당 의원이 성명을 냈다. “총리가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진상조사의 결실을 훼손하거나 왜곡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그 의도를 경계한다.” 보고서 최종 채택 시기를 6개월 늘린 것을 문제 삼았다. 바로 위원회 명의로 “6개월 시한부 수정 의견은 위원 전원 동의하에 나온 것”이란 반박 자료를 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조건부 채택이긴 했지만 진상보고서가 나왔다는 사실을 흔쾌히 여겼다. 위원회 민간위원들을 불러 청와대에서 오찬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은 남아 있었다. 4 3일 제주 4·3사건 55주년 추모 기념식이 제주도에서 열렸다. 진상보고서 최종 채택이 6개월 연장됐기 때문에 노 대통령은 내려가지 않고 대신 내가 참석했다. 국도에서 식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차가 섰다. 경찰이 안내했다.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시면 되겠습니다.

 식장까지 걸어서 1㎞ 남짓 꽤 먼 거리였지만 맞는 의견이다 싶었다. 추모하는 자리니 차를 타고 식장까지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게 100m쯤 걸어가니 뭐가 휙 하니 날아왔다. 돌이었다. 길 옆 야트막하게 솟은 언덕에 시위대가 숨어 있었다. 진상보고서 최종 채택을 6개월 연기한 것을 두고 반발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의 소행이었다. 그렇게 돌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씌워준 방패 너머로 돌이 부딪히는 ‘퉁탕퉁탕’ 소리가 울렸다. 방패로 간신히 피하며 걸어갔다.

 다치진 않았지만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길 주변은 집 한 채 없이 밭만 펼쳐져 있었다. 지나가던 시위대가 우연히 나를 보고 돌을 던졌을 리 없었다. 내가 그 길로 걸어간다는 정보를 미리 빼내 계획했던 게 분명했다. 경찰과 시민단체 사람들이 짜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의심을 전부 떨쳐버리지 못했다. 제주 4·3사건 추모 기념식에 현직 총리가 참석한 것이 처음인데 돌우박은 심하다 싶었다. 다행히 추모식장 안은 환영 분위기였다.

 그 후 6개월 유예 기간 중에 20여 기관·단체·개인으로부터 376건에 달하는 수정 의견이 쏟아졌다. 여기서 추려 33건 내용을 고쳤다. 10 15일 진상보고서가 최종 채택됐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제주도를 찾아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국가권력의 잘못”이라고 제주 4·3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제주 4·3사건은 한국의 아픈 역사다. 극명한 대립은 사그라졌다 해도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이다. 역사인 만큼 열린 결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나는 진상보고서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 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 회복에 중점을 둬 작성됐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사건

제주 4·3 사건

 

1947 3 1 3·1절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48 4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 선거에 반대해 관공서를 습격했다. 이를 주도한 김달삼이 그해 8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려고 제주도를 탈출한다.

 군경이 이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진압하는 작전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희생된다. 특히 군 9연대의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 이어 2연대의 ‘북촌 사건’의 경우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비극적 사건으로 꼽힌다. 48 4 3일부터 54 9 21일까지 6년여 동안 수많은 제주 양민이 죽었다. 신고된 희생자 수는 14028명이지만 여러 사료와 인구 변동 통계를 감안하면 실제 인원은 25000~3만 명으로 추산된다.

 

 (11) 행정 각부를 통할하다

“차 한잔 하시죠” … 그것은 청와대 별실 독대 신호였다

 

오래된 집을 허물려면 먼저 이사 갈 집부터 구하는 게 순리다. 머물 새집도 구해놓지 않고 낡은 옛집을 부쉈다가는 풍찬노숙(風餐露宿·바람 맞으며 먹고 이슬 맞으며 자는 것) 신세가 될 뿐이다. 출범 100일을 맞은 새 정부 상황이 꼭 그랬다.

노무현 정부는 탈()권위주의를 내세웠다. 권위주의 정권 때 만든 시스템은 사라졌지만 새 시스템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다. 수십 가지 민원과 갈등이 터져나왔고 이를 해결할 공식 창구가 급했다.

 20035월 중순의 일이다. 노 대통령과 주례 오찬이 있었다.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 이정우 정책실장과 이영탁 국무조정실장이 함께 자리했다.

 노 대통령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회적 갈등을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권위 있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어요. 이정우 실장이 지금 그 일을 맡아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었다. 전교조 연가투쟁(교사들이 일제히 연차휴가를 내고 시위)에 화물연대 운송 거부 사태까지…. 연구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리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현안 해결이 급합니다. 우선 국무총리가 관계부처 장관과 청와대 관계 수석비서관 등을 모아서 정책을 조율하고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하겠습니다.

 내 얘기를 들은 노 대통령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그렇게 하시죠.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문희상 실장이 나에게 말했다.
 “저도 끼워주십시오.
 “아. 환영합니다.

 오찬이 끝날 무렵 나는 못을 박기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아까 말씀 드린 정책조정회의는 주 2회 열도록 하겠습니다.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회의체였다. 지금 국가정책조정회의의 시초다. 첫 회의는 5 21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현안정책조정회의란 이름으로 열렸다. 비공개였다. 나와 강금실 법무부 장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 이영탁 국무조정실장이 참여했다. 첫 안건은 전국공무원노조 문제였다. ‘원칙대로 대응한다’는 결론을 냈다.

 일주일이 지났다. 5 27일 청와대 세종실. 국무회의를 마치고 장관들과 노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을 나와서 노 대통령과 함께 걸으며 조용히 말했다.

 “차 한잔 주십시오.
 “…. 그러시죠.

 국무회의와 주례 오찬, 대통령이 주재하는 관계 장관회의에 국정과제회의까지. 노 대통령과는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났다. 따로 할 말이 있으면 나는 그에게 ‘차 한잔 달라’고 했다. 그도 나에게 할 말이 있을 때 ‘차 한잔 하자’고 했다. 노 대통령과 나만이 통하는 ‘긴히 논의해야 할 일이 있다’는 신호였다.

 국무회의는 청와대 오른쪽에 있는 큰 회의실인 세종실에서 열린다. 거기서 나오면 복도 왼쪽에 작은 별실이 있다. 우리는 ‘차 한잔’이 필요할 때마다 그 방으로 갔다. 마주 앉은 우리 앞에 비서진이 녹차를 내려놨다. 노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떤 일 때문이십니까?
 “NEIS(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태가 이상하게 표류하고 있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조목조목 얘기했다. 심각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던 노 대통령이 답했다.

 “이 문제는 교육인적자원부에만 맡겨 놓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네요. 총리가 맡아서 수습해 주셔야겠습니다.

 노 대통령의 재가(裁可)가 떨어졌다. 현안정책조정회의란 이름을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로 바꾸고 6 3일 총리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 회의체에 대해 공식 발표했다. 다음날 열린 국가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NEIS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다. 여기서 이 문제를 직접 챙기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6 18일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교육부총리 소관이었던 교육행정정보화위원회를 국무총리 직속 자문기구로 격상하기로 결정했다. 이 위원회는 NEIS 문제와 관련한 협의기구 역할을 했다. 이세중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교육·인권·정보·시민·언론, 학부모에 종교계까지 각 분야를 대표하는 20명 위원을 위촉했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사실상의 신설이었다.

 전교조 연가투쟁, 학생부 CD 제작·배포 논란 등 진통은 있었지만 NEIS 사태는 해결의 기미를 보였다. 교육행정정보화위원회에서 수차례 회의를 하며 조금씩 합의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2 15 9차 교육행정정보화위원회에서 NEIS를 도입하되 27개 영역 중 교무·학사, 보건, 전학·입학 등 3개 영역을 전국 단위가 아닌 시·도 단위로 관리한다는 합의안을 내놨다. 교사, 학부모, 교원단체 간의 의견을 수렴해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는 2003 5월부터 1년 동안 67번 열렸다. 경부고속철 천성산 구간과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 터널 구간 논란과 화물연대 집단 운송 거부 사태, 5일제 등 333개 안건이 회의를 거쳤다. 문희상 실장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와 회의에 힘을 실어줬다. 문재인 민정수석도 거의 모든 회의에 참여했고, 이광재 국정상황실장도 배석했다.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는 헌법에 정한 총리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지금의 국가정책조정회의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리=조현숙 기자

◆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 거친 주요 안건

▶사회적 쟁점 조정
5일 근무제, 외국인고용허가제, 군 가산점
▶공공 갈등 조정
NEIS
사태,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 터널 구간 건설
▶범정부 대응 시스템 마련
사스(SARS) 방역
▶탄핵정국 수습

◆ 이야기 속 사건

NEIS (나이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의 약자. 학교 생활 정보를 모아 온라인으로 통합 관리하는 제도. 인터넷을 통해 학생, 학부모와 교사, 대학이 함께 이용하도록 했다. 교육부가 2003 4월 제도를 실시하려 했지만 정부와 전국 시·도교육청, 전교조, 한국교총, 학부모 단체 등 간에 찬반이 엇갈리면서 시행 시기가 늦춰졌다. 전교조는 개인정보 유출, 학생 인권침해라며 NEIS 도입을 반대 했다. 그해 5월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다”며 보완을 권고했다. 1년간 논의 과정을 거쳐 2005 3월부터 1년간 시범 운영에 들어갔고 2006 3월 본격 시행됐다. 지금은 1만여 개 초·중·고와 특수학교, 178개 교육지원청, 16개 시·도교육청 등에서 활용하고 있다.

 (12) 칼국수·설렁탕 오찬

우리나라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정기적으로 만나 점심을 먹는다. ‘주례 오찬’이라고 부른다. 법에도, 어느 훈령에도 나와 있지 않는 비공식적인 자리다. 하지만 굵직굵직한 정책 현안이 여기서 판가름 나기도 한다. 지난번 다룬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지금의 국가정책조정회의)도 주례 오찬 자리에서 탄생했다. 물론 직분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총리나 대통령이나 외롭고 힘든 자리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총리를 두 번 하며 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과 여러 번 주례 오찬을 했다. 난 누구의 가신(家臣)이 돼 본 적이 없다. 누구를 나의 가신으로 만들어본 적도 없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신이었다면 그들의 집을 드나들며 식사하고 만났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총리로 일하면서도 사적인 자리를 따로 만들어 대통령과 회동하거나 한 적은 없다. 그렇다 보니 이 주례 오찬이 가장 지근(至近)에서 대통령을 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본다.

 노 대통령은 가리는 음식이 별로 없어 보였다. 대부분 약식 한정식이 나왔다. 샐러드, , 나물에 탕, 밥까지 순서대로 나오는 형식이었다. 언제나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과 이정우 정책실장을 데리고 나왔다. 나도 이영탁 국무조정실장과 함께 갔다. 둘만 점심을 하는 일은 없었다. 비공식 오찬이라고 하지만 반은 공식적인 분위기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달랐다. 늘 독대(獨對)였다. 김 대통령은 언제나 나를 볼 때면 가장 먼저 “춘부장 안녕하시지”하고 따뜻한 말투로 물었다. 선친(고형곤)은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김 대통령이 철학과를 다닐 때 아버지가 교수였다고 한다. 김 대통령 본인을 둘러싼 학력 논란이 신경 쓰였는지 늘 자신과 내 아버지와의 관계를 강조하곤 했다. 한 번은 김 대통령이 아버지와 안호상 박사 등 은사들을 청와대에 초대해 오찬을 대접한 일이 있다. 아버지는 면을 못 드셨다. 그런데 그날도 칼국수가 식탁에 올랐나 보다. 다녀온 아버지에게 “어떠셨느냐”고 물었더니 “굶고 왔다”고 답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정권 초기에는 칼국수가 주로 나왔다고 하는데 난 정부 말기 총리였다. 주례 오찬이면 항상 설렁탕 상차림이었다. 찬은 간소했다. 설렁탕과 밥, 깍두기. 그게 전부였다.

 김 대통령은 식사가 나오자마자 바로 공기를 뒤집어 들고는 설렁탕 그릇에 ‘툭’ 하니 밥을 부었다. 그러곤 깍두기 국물을 조금 넣고 휘휘 젓고 나선 들기 시작했다. 어찌나 속식(速食)이던지. 총리가 이런저런 일을 보고라도 해야 하는데 겨를이 없었다. 식사 속도를 따라가느라고 분주히 숟가락을 들어도 내가 밥공기를 채 반도 비우기 전 김 대통령은 식사를 마치곤 했다. 그럼 김 대통령 앞으로 과일이 들어왔다. 그제야 얘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한 번은 김 대통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드십니까.

 그러자 김 대통령은 학생 때 일을 풀어놨다.
 “내가 하숙할 때 여러 명이랑 함께 살았어요. 밥상에 전부 둘러앉아서 먹는데 국은 한가운데 큰 그릇에 하나만 있고 각자 앞에 밥공기가 하나씩 놓여 있는 거예요. 국물을 한 숟가락이라도 빨리 많이 먹어야 이기는 거야. 그때 경쟁하다가 속식이 됐어요.

 거제에서 귀하게 자란 인물이겠거니 했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다.

 단둘만 보는 자리다 보니 비공식적인 대화가 많이 오갔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김 대통령이 고민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질문했다.

 “아, 요새 상황이 복잡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이회창과 이인제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하게 답했다. “대선에서 엄정 중립의 원칙을 지키십시오.

 내 조언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김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나름의 중립을 지킨 것으로 안다. 결국 15대 대통령 당선인 자리는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에게 돌아갔지만.

 물론 김영삼 대통령과 주례 오찬에서 정책 얘기를 더 많이 나눴다. 한 번은 “수능과 관련해 사교육 문제가 심각하다”며 대책을 주문했다. 그의 말을 듣고 와서 당시 안병영 교육부 장관과 함께 EBS 수능 위성방송 정책을 만들어 시행하기도 했었다.

 노 대통령과도 비공식적인 식사 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4 1 25일 일요일, 노 대통령이 “등산을 가자”고 했다. 내외간에 함께하는 등산으로 권양숙 여사도 같이했다. 나와 국무위원, 청와대 수석비서관 30여 명이 함께 숙정문을 거쳐 산을 오르고 군부대도 들렀다. 평창동으로 내려와 갈비 집에서 식사를 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제3당 자리에 머물고 있는 때였다. 마냥 웃고 즐길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잠시 고민을 잊었던 것 같다. 거기서 내가 소주 칵테일을 만들어 돌렸고 분위기가 매우 흥겨웠던 기억이 난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15대 대선

 

15대 대통령을 뽑으려고 1997 12 18일 치른 선거. 한나라당의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국민신당의 이인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등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김대중 후보가 10326275(득표율 40.3%)를 얻어 당선됐다. 이회창 후보는 9935718(38.7%), 이인제 후보는 4925591(19.2%) 2·3위에 머물며 낙선했다.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 소속이었으나 이회창 후보와의 경선에서 탈락하자 탈당했고, 국민신당을 만들어 출마했다

 

(13) 전쟁 같았던 방역 작전

2003 2월 중국과 홍콩에서 폐렴과 비슷한 괴질이 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괴질로 중국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수백 명이고 공포 때문에 검증 안 된 온갖 민간요법이 판을 친다는 내용이었다. 외신에 소문처럼 간간이 나오는 얘기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사실로 드러났다. 3 1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이 괴질에 정식 이름을 붙였다.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 바로 사스(SARS)였다. 사스 공포는 한국까지 덮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스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월 사스 환자를 치료하던 홍콩 의사가 죽었다는 보도를 봤다. 감염자가 전 세계 수천 명에 치사율도 높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심각하다 느꼈다. 직접 챙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4 23일 관계차관 대책회의를 열었다. 보건복지부는 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가동시키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보건원의 사스 전담 인력은 4~5명에 불과했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중화권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관광객, 유학생 등이 하루 7000명을 넘던 때다. 공항은 사스 방역의 최전선이다. 해외에서 밀려오는 외국·한국인 관광객 중에 감염자 한 명이라도 공항을 벗어나 국내로 들어온다면 큰일이다.

 4 25일 인천공항으로 갔다. 먼저 사스 발병 지역인 홍콩에서 온 항공기 입국장을 방문했다. 감염 의심자 채혈 현장도 찾았다. 방역 창구 직원들은 고생이 많았는지 다들 피곤해 보였다. 24시간 교대로 일하고 인력이 부족해서 힘이 든다”고 했다.

 바로 메모지에 내 사무실 팩스 번호를 적어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간호사에게 줬다. “모든 애로사항은 여기 총리 사무실 팩스로 직보해 주십시오. 바로 처리 하겠습니다.

 현장을 다녀오니 사태가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지부 주도의 사스 방역대책본부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대규모 방역은 한 부처의 힘만으로 안 된다. 상위 부처인 국무조정실이 나서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해야 했다. 조영길 국방부 장관을 불렀다.

 “사스 방역도 국가를 방어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군의관과 군 간호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군 의료진 70여 명을 공항 사스 방역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날 국무조정실 차원의 상황실을 만들라는 지시도 했다. 박철곤 복지노동심의관에게 실무 책임자 역할을 맡겼다. 여러 부처나 이해당사자가 복잡하게 얽힌 일을 잘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4 28일 범정부 차원의 사스 정부종합상황실이 출범했다. 당시 복지노동심의관으로 상황실 부실장을 맡았던 박철곤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의 설명이다.

 “사스 방역의 1차 목표가 국내 유입 차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항 현장에 가봤더니 입국자 체온을 측정하는 열 감지기가 1대뿐이었습니다. 일일이 체온을 재기엔 입국자가 너무 많았죠. 복지부에 예비비를 지원했고 서둘러 이동식 열 감지기 10대를 구입했습니다. 6대는 인천공항에 설치했고 김해·제주공항은 물론 중국 베이징의 공항에도 1대 보냈습니다. 또 착륙한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내리지 못하도록 막고 나서 직접 기내로 들어가 열 감지기로 체온을 재고…. 곳곳을 다니며 정말 전쟁하듯이 사스를 막았죠.

 물론 정부만으로도 안 됐다. 민간의 협력도 필요했다. 4 28일 오전 김광태 대한병원협회장, 김재정 대한의사협회장, 강문원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장 등 민간 의료단체 대표를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이어 낮 12시 오찬을 겸한 사스 관계장관 회의를 열어 “대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관련 부처 모두가 나서 대응하라”는 주문을 했다. 그리고 오후 2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정부는 사스 의심 환자를 10일간 강제 격리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필요 시 자택 격리나 병원 격리 조치에 지체 없이 동의해 주십시오.

 그렇게 사스 방역을 전쟁처럼 치렀다. 상황실로부터 하루 두 번 보고를 받으며 직접 챙겼다. 의심 환자는 있었지만 확진 환자는 1명도 내지 않으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도 사스에 뚫렸지만 우리나라는 달랐다. 2003 6 19일 상황실 해단식이 열렸다. 고생한 직원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해단식 자리에서 강조했다. “지난 55일간 상황실 직원들, 국립보건연구원 직원들, 일선 검역요원들, 군 인력 등이 24시간 밤잠 설치며 열심히 방어해준 덕분에 사스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WHO는 우리나라가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내놨다.

 7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립보건원을 찾았다. 사스 방역 평가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이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같은 조직을 만드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그전 노 대통령과 주례 오찬에서 ‘한국판 CDC’가 필요하다는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의 건의를 전달했는데 받아들여졌다. 다음 해인 2004 1 19일 정식 출범한 질병관리본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방역망이 뚫리면서 우리나라가 구제역 청정구역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3년 생각이 났다. 그때 우리는 사스와 1차 전투는 이겼을지 몰라도 전염병과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왜 그전과 같은 열정이, 치열함이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사스(SARS)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인이다. 정확한 감염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로 환자가 기침을 했을 때 나오는 침방울 등이 바이러스를 옮기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잠복기는 길게는 7일 정도로 발병하면 폐렴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중국·홍콩 지역에서 확산되기 시작했고 2002년 말부터 2003 7월까지 전 세계에서 8000여 명이 넘는 감염자와 77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공식 확인된 수치가 이 정도고 실제 환자 수는 더 많을 수 있다.

 

 (14) 실용주의 외교

2003 5 9일 경기도 의정부 미군 2보병사단 사령부. 한국의 국무총리인 나는 미 2사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서 있었다.

 “빠라밤, 빠라밤, 빠라밤.” 군악대 나팔이 세 번 울렸다. 사단 병사들이 일제히 경례를 했다. 나도 웃으며 경례로 답했다.

 24년 만의 미 2사단 방문이었다. 1979,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수행해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관 자격으로 부대를 찾았던 적이 있다. 20여 년이 지나 우리나라 총리로는 처음으로 미 2사단을 방문하게 됐다.

 청와대 내부에서 반미 기류가 강하던 시기다. 하지만 난 나름의 원칙대로 움직였다. 난 철저한 용미(用美)주의자다.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면 미국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의다. 친미(親美)도 반미(反美)도 아니다. 실용주의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미군 부대 방문 계획을 따로 보고하지 않았다. 매주 국무조정실(지금의 국무총리실)에선 총리 일정을 청와대에 보낸다. 방문 일정을 사전에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별다른 회신이나 반응은 없었으니 나름대로 ‘OK’ 사인이 내려왔다 생각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던 때다. 노 대통령도 이런 ‘외교적 제스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당시 난 두 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미 관계를 어떻게 복원하나.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 전쟁 억지력을 어떻게 유지하나’.

 2002 6월 발생한 ‘효순·미선양 사건(미군 장갑차에 치여 두 여중생이 사망한 사건)’의 후폭풍은 여전했다. 국민 여론은 들끓었고 대선 과정에서 촛불시위가 이어졌다. 새 정부는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동시에 해외 주둔 미군의 재배치 전략이 추진되고 있었다. ‘용미주의자’ 총리로서 고민은 깊어졌다. 2사단 방문도 그런 고민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한미군 주둔 여건과 훈련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도 했다. 효순·미선양 사건도 따져보면 미군 부대 주변 도로 상황이 열악한 것이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사건 발생 후 한국에서 제대로 사건 조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미군이 사고를 일으킨 운전병을 본국으로 보내버린 게 사태를 악화시킨 근본적 원인이었다. 그 문제도 미국 측 인사를 만날 때마다 수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사태의 실마리는 하나하나 풀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2사단을 방문했을 때 약속한 대로 ‘주한미군 주둔 여건 개선 중앙협의회’를 5월 만들었다. 그리고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리언 러포트 주한미군 사령관, 마크 민턴 주한 미 부대사, 랜드 스미스 주한미군 부사령관, 찰스 캠벨 미 8군사령관 등을 초대했다.

 러포트 사령관은 한국어로 건배사를 했다. “함께 갑시다.” 따라서 모두 소리쳤다. “함께 갑시다.

 그전, 총리로 취임한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다. 2003 3 6일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 대사가 나를 찾아왔다.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리가 되기 전 에드윈 퓰러 헤리티지재단 이사장이 왔을 때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주한미군 재배치의 세 가지 원칙입니다. 첫째 북핵 문제가 처리된 다음에 기지를 재배치해야 한다. 둘째 대한민국의 전쟁 억지력이 훼손돼선 안 된다. 그리고 셋째가 북한이 남침을 하면 미군이 자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인계철선(tripwire) 원칙입니다.

 허버드 대사는 나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인계철선은 폭발물과 연결된 철선으로 건드리면 폭탄이 자동으로 터지는 장치를 말한다. 한·미 상호 방위조약의 자동 개입 조항을 다르게 표현하는 속어로 쓰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거부감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난 인계철선이란 용어를 ‘프런트라인 파트너십(frontline partnership)’으로 바꿔 썼다.

 퓰러 이사장이나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부 장관,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 대사 등 한·미 현인회의 멤버는 나를 종종 찾아와 한·미 관계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총리가 되기 전 이들을 만났을 때도 같은 내용의 주한미군 재배치의 3대 원칙을 강조했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버 액션(Overaction)’이었다. 국군 통수권자(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인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결례였다. 노 대통령과 이 문제를 사전에 논의한 적은 없었다. 총리로서 권한 범위를 넘어선 발언이었다. 하지만 내 지론이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앞둔 5월 어느 날,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열렸다. 라종일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겸 NSC 사무처장이 나에게 물었다.

 “허버드 대사를 만났을 때 3원칙 얘기를 하셨더군요.
 “아, ,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제 지론이었어요. 퓰러 헤리티지재단 이사장을 만났을 때나 총리 청문회 때도 했던 말입니다.

 “….

 라 보좌관이나 회의 석상에 같이 있던 노 대통령이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10년이 지났다.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됐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으로 남북 긴장은 한층 고조됐다. ‘함께 가자’는 용미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정리= 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리언 러포트(Leon J. Laporte)

 

2002 5월부터 2006 2월까지 주한미군 사령관을 지낸 뒤 전역했다. 고건 전 총리는 2003년 당시 러포트 사령관에게 ‘라포도(羅鋪道)’라는 이름을 지어준 뒤 합죽선에 한자로 써 선물했다. “한·미 간에 실크로드를 깔자는 의미였다”고 고 전 총리는 설명했다. 합죽선 글씨는 이면영 홍익대 이사장에게 부탁했고, 홍익대의 한 교수가 부채에 써줬다고 한다.

 

(15) 받침대 총리의 동분서주

2003 7 21일 오후 5시 국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정균환 총무와 야당인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와 마주 앉았다.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안, 근로기준법 개정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안 등의 처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민생 안정과 사회 갈등 해소, 국가 신인도 제고를 위해 꼭 필요한 법안입니다. 정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7월 임시국회 회기 내에 꼭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몽돌’ 대통령과 ‘받침대’ 총리의 역할 분업은 시간이 가면서 진화했다. 중장기 개혁 같은 큰 그림은 노무현 대통령이 맡아 그렸고 일상적인 국정 운영은 내 몫이었다. 이날도 국회 관문을 넘지 못한 법안의 처리를 부탁하러 국회를 찾았다.

 현안은 쌓여 있는데 청와대에서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모든 부담이 나에게 넘어왔다. 정치적 권력이나 지분이 없는 총리가 국회를 상대로 쓸 수 있는 수단이 별다른 게 있겠는가. 설명과 설득, 때로는 읍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대형 암초를 만났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민주당과 통합신당(열린우리당의 전신)으로 쪼개졌고, 9 29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을 탈당했다. 여소야대 정국보다 더 험난한 ‘무당적(無黨籍) 대통령’ 사태를 맞았다.

 민주당과 통합신당 간 날 선 기싸움을 바라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해외 국정감사에 참석하려고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가 일본으로 떠나자 김원기 통합신당 창당주비(籌備)위원장과 김상현 민주당 고문이 각자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정 전 대표를 상대로 한 영입 경쟁 때문이었다. 양측의 설전도 치열했다.

 “노 대통령은 재산을 모으자 조강지처 버리고 새장가 가듯 단 한마디 의논도 없이 민주당을 배신했습니다.(박상천 민주당 최고위원)

 “자기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도저히 해선 안 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민주당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김원기 통합신당 위원장)

 ‘국정은 어떻게 하나.’ 고민을 거듭했다. 초유의 상황이니 초유의 해법으로 돌파해야 했다. 이틀 후인 10 1 4당의 원내총무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초청했다. 한나라당 홍사덕·민주당 정균환 총무, 통합신당 김근태 원내대표, 자민련 김학원 총무가 참석했다.

 “제가 오늘 네 분을 모신 것은 노 대통령이 당적을 갖지 않은 현 상황에서 국회가 정부를 잘 좀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산적한 민생 현안을 처리하려면 국회와 정부 간 협력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민주당 정균환 총무와 통합신당 김근태 대표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없진 않았지만 네 사람 모두 내 의견을 수용해 줬다. 야당이면서도 내 제안에 적극적으로 응해 준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의 도움이 컸다. 정부와 여당이 하던 당정협의를 대체할 4당 국정협의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한 달 2~3, 총리공관과 국회 귀빈식당을 오가며 협의회를 열었다. 4당의 정책위원회 의장단과 하는 정책협의회도 함께 가동했다.

 태풍 ‘매미’ 피해복구를 위한 3조원의 추경(추가) 예산안, 한·칠레 FTA 비준안, 이라크 추가 파병안 등 굵직굵직한 법안이 4당 국정협의회를 거쳐 갔다. 물론 국정협의회에서 4당이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해도 관문은 남아 있었다.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 등 세 고비를 넘어야 했다. 중요하고 시급한 법안이 막혀 있다면 최전선인 국회에 직접 갔다.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상임위원장실도 찾아가고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실에 가기도 했다. 총리는 본회의나 예결위, 당정협의 출입만 한다는 전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2004 2 16일 오후 한·칠레 FTA 비준안의 본회의 의결 직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한나라당 박희태·이상배 의원 등과 직접 담판을 벌였다. 박 의원은 FTA를 반대하는 농어촌 의원들의 대표 격이었다. 고시 동기라 친하고 말도 통하는 사이였지만 이때만큼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정부가 119조원 규모의 농업지원 종합대책을 내놓고 금융대책도 추가했지만 본회의에서 다시 가로막혔다. 고심 끝에 마지막 양보를 했다. 1600억원으로 정한 FTA 지원특별기금의 올해 예산을 5000억원으로 늘리겠습니다.”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오후 2시 본회의에서 한·칠레 FTA 비준안은 가결됐다.

 전화도 유용한 수단이었다. 국회 회기가 얼마 남지 않은 2004 3월 김기춘 법사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건=시급한 법안이 있습니다.
 ▶김기춘=무슨 법안이 그렇습니까.

 ▶고건=개인채무자 회생법안입니다. 지금 카드채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번 회기를 넘기면 큰일 나겠습니다.
 ▶김기춘=,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해보지요.

 전화로 한 부탁은 효과를 봤다. 개인채무자 회생법안은 국회 회기의 ‘막차’를 타고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 법안 통과가 늦어져 국정 수행에 큰 지장을 받은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총리가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동안 청와대에선 아무런 도움도, 말도 없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사건

()4당 체제와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 42명이 민주당을 나와 2003 9 20일 ‘국민참여통합신당’을 만들었다. 민주당 내 노무현계 의원들(신당파)과 그렇지 않은 의원들(구당파·잔류파) 간 갈등이 원인이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2개 당으로 쪼개졌고, 한나라당·민주당·통합신당·자민련의 4당 체제가 됐다. 과거 민정당·민주당·평민당·공화당의 4당 체제와 구분해 신4당 체제라 불렸다.

 통합신당이 출범하자 노 대통령은 신당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 발언을 민주당과 야당에서 문제 삼자 9 29일 노 대통령은 “나의 당적 문제가 정치 쟁점화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민주당적을 포기하겠다”며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후 재신임 정국, 탄핵소추 사태의 불씨가 됐다.

 

 (16) 청와대의 폭탄 선언

2003 10 10일 오전. TV를 보고 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11시에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는 속보가 떴다. ‘나에게 별말 없었는데 설마….’ 오전 1050. 그때까지도 청와대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5분 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집무실에 앉아 TV를 지켜봤다. 단상에 선 노 대통령의 모습이 화면에 비춰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습니다.

 “….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로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속으로 되뇌기만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한 거지.

 단 한마디도, 귀띔도 없었다. 생각을 더듬어 봤다. 그래…. 불안함을 느끼긴 했다. 지난 5월부터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말을 종종 꺼냈다.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노 대통령 측근의 비리 의혹도 연일 터져 나오고 있었다.

 4(한나라당·민주당·통합신당·자민련) 체제가 시작되고 노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통합신당(열린우리당의 전신)의 출범에 노 대통령은 힘을 실어줬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9 26일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일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승부사적인 기질이 나타났다. 내가 먼저 살고 나서 적을 칠 궁리를 한다는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바둑 용어). 그에게 통하지 않은 논리였다.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비서진이 나에게 보고했다.
 “청와대 오찬이 열리는데 참석하시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비서진에 말했다.
 “국무위원 전원과 통화해야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차례로 연결해 주세요.

 국무위원 거의 전부와 통화를 했다. 말한 내용은 같았다.

 “기자회견 보셨죠. 내각이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습니다. 국무위원 전원이 사표를 내도록 합시다. 오찬 때 대통령을 뵙기로 했습니다. 사표를 직접 거둘 시간은 없으니 일단 사의 표명에 동의해 주시죠. 그럼 제가 대표로 국무위원 전원의 사의를 대통령께 직접 전달하겠습니다.

 다들 반응은 비슷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참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시라”는 답을 했다.

 이날 낮 12시 청와대 오찬장. 노 대통령이 먼저 말을 꺼냈다.
 “총리의 부담을 커지게 했습니다. 힘드시게 했네요. 사전에 상의를 못해서 미안합니다.

 준비했던 대답을 했다.
 “저희 내각이 잘 못 모셔서 이런 재신임 상황까지 말씀하시게 됐습니다. 국무위원 전원이 일괄 사표를 내기로 했습니다. 일단 제가 국무위원 전원 사의의 뜻을 모아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뜻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노 대통령은 내 말에 놀라는 듯했지만 바로 표정을 추스르고 답했다.

 “미리 상의를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각의 문제는 아닙니다. 사의는 반려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뜻을 다른 국무위원에게도 전달해 주세요. 사표는 받지 않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말했다.
 “이런 때일수록 내각이 중심을 잡고 국정의 공백이나 차질이 없도록 해주세요.

 무슨 별다른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총리로서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만 국정 운영에 추호도 차질이 없도록 내각을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했다. ‘왜 대통령이 재신임 발언을 했는가.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나. 이미 대선 전부터 여소야대 상황이 아니었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명확하게 상황 인식이 안 됐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의 재신임을 물어 책임질 일이 있으면 물러나는 것도 민주정치사의 발전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었다. 그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며 진검 승부를 택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난 문제가 생기면 각계 원로를 불러 만찬 회의를 하곤 했다. 그날 강원용 목사, 김수환 추기경, 박영숙 한국여성기금 이사장, 남덕우 전 총리, 송월주 스님, 이세중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등을 만났다.

“너무 놀랐다” “안타깝고 당혹스럽다”는 얘기가 오갔다. 결론은 “국정에 공백이 없어야 한다. 내각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말을 난 주로 듣기만 했다. 저녁 자리에서 돌아온 뒤 비서진에 얘기했다. “내일 아침 일찍 국무위원 간담회를 소집하겠어요. 각 부처에 연락하세요.

 다음 날인 10 11일 오전 730분 국무위원들이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모였다. 모두 말없이 굳은 얼굴로 회의장에 들어선 뒤 자리에 가 앉았다. 내가 먼저 말을 했다.

 “대통령께서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게 된 데 대해 총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들은 국민과 대통령 앞에 책임을 통감합니다. 대통령께 그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의 뜻을 모아 전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내각은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당면한 경제와 민생 안정을 포함한 국정 운영에 추호의 차질이 없도록 빈틈없이 소관 업무를 챙겨 나가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께도 한 치의 동요 없이 정부의 모든 정책을 믿고 따라줄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그렇게 재신임 정국을 맞았다. 탄핵소추 사태의 전조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사건

재신임 정국

 

2003 10 10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기자회견을 하며 시작된 정치적 국면. 측근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로부터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발단이 됐다. 다음날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 사임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결과에 따라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도 있다”고 했다.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다가 11 27일 헌법재판소는 재신임 국민투표에 대해 “헌법소원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각하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이 각하 의견을 냈는데, 이들 5명 가운데 4명이 “대통령의 신임 여부는 국민투표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재신임 국민투표는 실시되지 않았지만 2004 3 12일 국회가 노 대통령 탄핵소추를 의결하는 실마리가 됐다.

 

(17) 총리 겸 변호사

2003 10 17일 오전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 질의. 나는 변호사가 아니다. 그런데 변호사인 노무현 대통령을 변호하러 국회에 서 있었다. 재신임을 얘기한 사람은 노 대통령인데 국회에 나가 매 맞는 역할은 내가 해야 했다. 대정부 질의 분위기는 초반부터 심상치 않았다. 한 의원이 물었다.

 “재신임 정국과 관계없이 책임을 지고 총리로서의 능력에 한계가 왔다고 봅니다. 즉각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총리 자리에 있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든지 물러나겠습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지금인데!

 그의 발언에 의원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꾹꾹 눌러왔던 화가 터졌다. 큰 소리로 외치듯 답했다.

 “여러분이 모두 원하시면 언제든지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나 현 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국정 운영에 차질이 없어야 합니다. 그 역할을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화를 잘 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국정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국정은 나라를 운영하는 일이다. 그 엄중함을 잊어선 안 된다. 난 행정가다. 정치인이 아니었다. 정치에 국정이 흔들리는 일을 더는 두고 보기 힘들었다. 질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원들의 발언 수위가 높아졌다. 나를 편드는 사람은 이해찬 의원 등 이른바 ‘노무현계’ 그룹 몇몇뿐이었다.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이 질의했다.

 ▶안상수=총리, 대통령하고 총리의 코드가 맞나. 국민들은 코드가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건=저는 누구와도 코드를 맞추는 일은 없다.

 ▶안상수=대통령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고건=다만 대통령과는 공개적인 주파수를 맞춰 놓고 있다. 누구든지 소통할 수 있는 개방적인 사이클이다.

 코드 공격에 주파수론으로 받아쳤다. 국정을 운영하면서 주파수를 개방해 놓고 누구와도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10 21일 경제 분야 대정부 질의가 국회에서 열렸다. 주제는 나흘 전 정치 분야 대정부 질의나 별다를 바가 없었다. 박종근 한나라당 의원이 물었다.

 “오늘의 불안한 사태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입니까, 집권세력입니까, 아니면 국회·야당·언론입니까.

 또 그런 질문이다. 숨을 잠시 고른 뒤 답했다. “노 대통령과 측근과 정부의 책임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흘 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물러나겠다’고 답한 나다. 책임을 어디로 미루려고 한 대답이 아니었다. 대통령과 측근은 물론 나를 포함한 정부 각료 모두가 책임져야 할 엄중한 상황이라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재신임 정국의 책임을 노 대통령과 그 측근에게 돌리는 발언으로 비쳤나 보다. 앞뒤 자른 언론 보도만 보면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후폭풍은 컸다. 유연하게 의원들의 답을 피해가던 내가 변했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정치권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특히 청와대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제는 나를 변호해야 했다. 그날 국회에서의 질의·답변 내용을 정리해 청와대에 보냈다. 같은 내용의 문건을 나도 보관했다. ‘오해하지 말라’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국회와 청와대 사이에서 그렇게 살얼음을 걸으며 국정까지 챙겨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피로감은 극에 달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11 11일 통합신당은 열린우리당이란 이름으로 공식 창당했다. 17대 국회의원 선거(2004 4 15)를 앞두고 노 대통령의 선거운동 논란이 번졌다.

 2004 2 16일 정치 분야 대정부 질의. 한나라당의 남경필·박진·박종희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남경필=현재 대통령은 당적이 없다. 그럼에도 열린우리당은 스스로를 정신적인 여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 친노단체인 ‘노사모’가 어느 당에 우호적이겠나.
 ▶고건=현재 ‘노사모’나 ‘국민참여 0415’나 아직은 법에 위반되는, 특정한 정당이나 특정한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모든 시민단체의 선거 참여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철저히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박진=노무현 정권 자체가 거대한 불법 선거조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와 걱정이 있다.
 ▶고건=내각은 엄정 중립의 입장에서 17대 총선을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가장 깨끗한 공명선거로 관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국회에 불려나가길 거듭했다. 힘겹기만 한 ‘총리 겸 변호사’ 생활이었다. 덕분에 선거법 전문가가 다 됐다. 국회 답변을 준비하느라 연구한 법전과 서류가 책상 위에 한 가득이었다. 중립내각을 만들어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를 하는 일은 정치적·법적 공방 속에 없던 일이 됐다. 대신 더 큰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왔다.

 3 11일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돌출 발언을 했다.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 소식이 이어졌다. 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3 9일 국회에 발의된 상태였지만 의결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3 12일 오전 9시 국무조정실 간부회의에서도 “폭설 피해 종합대책을 잘 챙겨야 한다”며 일상적인 지시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는 예고 없이 나에게 닥쳐왔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열린우리당


2003
11 11일 창당했다. 새천년민주당의 42명 의원이 그해 9월 탈당해 통합신당을 만들었고 11월 열린우리당으로 이름을 바꿔 공식 출범했다. 노무현계 의원들이 중심이 됐다. 2004 4 15일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의 역풍을 타고 152석의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2003 9월 민주당을 탈당한 노 대통령이 총선 이후인 2004 5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열린우리당은 2007 8월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면서 39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 청와대 관저의 대통령

“저만 1 2역을 할 뿐입니다. 달라질 게 없습니다.

 2004 3 13일 오전 서울 정부중앙청사 총리 집무실. 한덕수 국무조정실장·김대곤 비서실장을 비롯해 1급 이상 간부들이 앉아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된 지 20시간 정도 지났다. 밤새 고민하며 준비한 말을 했다.

 “국무조정실은 종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해 나가시면 됩니다. 총리로서 해야 할 일은 예전처럼 보좌해 주십시오. 권한대행으로서의 일은 청와대 비서실에서 맡아 보좌할 것입니다. 15일 예정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겠어요. 앞으로도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그 결과만 나한테 보고하면 된다고 청와대에 전하세요. 16일 국무회의는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도록 하겠습니다. 청와대와 정부청사에서 번갈아 하던 국무회의는 앞으로 모두 정부청사에서만 할 계획입니다. 제 결정에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전날 저녁 청와대 본관의 현관. 노 대통령을 태우고 떠난 자동차 뒤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서있던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앞으로 주 1회 청와대에 오셔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해 주셔야겠다”고 말했다.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회의에 참석하고 말고를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을 대신하는 권한대행의 역할과 업무 범위를 정해야 하는 일이다. 대통령 탄핵은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참고할 법전도 규정도 없었다. ‘상식과 원칙….’ 두 가지 기준을 되뇌며 결론을 내렸다.

 몸 낮춘 행보를 선택했다. 직무가 정지됐다 해도 노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에 머물고 있다. 불필요한 긴장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총리 역할도 하고 대통령 권한대행도 하고, 나만 1 2역을 하면 됐다. 그 구분은 철저히 하려고 노력했다.

 3 17일 공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이 열렸다. 행사를 앞두고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설문을 담당하는 보좌관이 원고를 가져왔다. 그런데 총리실 연설 담당 보좌관이 원고에 손을 댔다. 내가 평소 하는 연설 화법에 맞춰 문장을 수정했다. 당장 “원본을 가져오라”고 했다. 청와대에서 써온 원래 연설문에서 딱 두 글자만 고쳤다. 그만큼 신경을 썼다.

 63일 동안 권한대행으로 일하면서 청와대에 출입한 일은 단 한 번이었다. 3 25일 그리스·아프가니스탄·쿠웨이트·태국 등 신임 주한 대사들로부터 신임장을 제정 받기 위해서였다. 청와대가 아닌 총리실이나 외교부에서 행사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국에 대한 외교 의전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청와대로 갔을 뿐이었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고 청와대는 한동안 혼란에 휩싸였다. 노 대통령에 대한 청와대 참모들의 보고 범위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저로 떠나는 노 대통령에게 “자주 보고 자료를 올리겠다”고 했다. 대통령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고 사흘 후 박봉흠 청와대 정책실장이 첫 보고를 하러 왔다.

 “앞으로 국정 연속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항은 대통령이 계속 파악할 수 있도록 하라”고 교통정리를 해줬다. 북한 정세 등 안보 관련 정보가 핵심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는 보고가 아닌 친전(親展) 형태로 노 대통령에게 매일의 상황을 알려줬다. 박 실장은 국무회의와 부처 업무보고 자리에 배석하고 관저에 머물고 있는 노 대통령에게 국정의 흐름을 전했다. 정무 기능이 강한 비서실 대신 정치색 옅은 정책실에 ‘채널’ 역할을 맡긴 것이다.

 박 실장에게 당부한 뒤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씀 드렸던 대로 보고 자료를 자주 올리겠습니다. 박봉흠 정책실장을 통해 서면 자료를 전달하겠습니다. 북한 정세 등과 같은 안보 자료도 NSC 사무처에서 일일 자료를 올릴 것입니다.
 “네, 그러시죠.

 통화는 간단했다. 63일간 권한대행으로 일하며 노 대통령과 세 번 통화했다. 이번이 첫 번째였다. 일주일여 지나 사면법 개정안 등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기 전 노 대통령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거부권 행사는 일상적인 국정 업무라고 보기 어렵다. 이례적인 결정을 하기 전에 노 대통령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 용천역 폭발 사고로 인도적 지원을 결정할 때도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내 문제가 아닌 대외 관계에 대한 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용천역 폭발 사고와 관련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권한대행 기간 중 노 대통령과 한 마지막 통화였다. 전화할 때마다 그는 “좋습니다” “그러시죠”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세 번의 통화는 모두 짧았다. 탄핵 소추 기간 얼굴을 맞대고 만난 일은 물론 없었다.

 권한대행에서 물러나자 “왜 노 대통령과 따로 만나 얘기도 나누고 하지 않았느냐. 몰래 만나 소회도 묻고 하지 그랬느냐”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가한 질문이었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을 의결했고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됐다. 공식적으로 보고를 할 수 없었다. 노 대통령과 내가 따로 만나 국정에 대해 깊이 의논한다면 법을 어기는 일이 된다. 사적 만남이라도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이 나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는 오해를 받는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 있다. 대통령에게도 크게 누가 되는 행동일 뿐이다. 박봉흠 실장을 통한 서면 보고, 간단한 전화 통화. 모두 고심 끝에 택한 행동이었다.

정치권과 법조계는 물론 청와대에서 나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고달프기만 한 권한대행 생활이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사건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의 권한

 

고건 전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일할 때 법무부에서 ‘권한행사 정지된 대통령의 지위’란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어 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은 외교권, 공무원 임면권, 국군통수권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다만 관저 생활, 관용차·전용기 이용, 경호 등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예우는 변함이 없다. 총리, 국무위원 등 공무원으로부터 대통령 권한행사와 관련한 보고를 받거나 그들에게 지시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업무 연속성 유지 차원에서 비공식 보고는 받아도 된다는 법적 해석이 있지만 공무상 비밀 누설 등의 문제가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19) ‘고난대행’인 권한대행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사태가 일어나고 2주 정도가 지난 어느 주말 오후. 전화가 울렸다. 손자(당시 8)였다. ‘아,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피로와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전화로 낭랑한 손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왜 전화 안 하셨어요? 두 번이나 빼먹으셨는데. 그래서 제가 전화 드렸어요.
 “어, 그래. 할아버지가 잊고 전화를 못 했네. 미안, 미안.

 바쁜 총리 생활이었지만 틈틈이 손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손자에게 전화를 해서 새로 배운 사자성어를 물어봤다. 그리고 내가 더 설명을 해주곤 했다. 총리라는 직분을 잠시 내려놓고 손자 목소리도 듣고 정도 나눌 수 있는, 나에게는 나름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매번 주말마다 한 번씩 빼먹지 않았는데, 이번엔 2주일이나 건너뛰었다.

 “바빠서 할아버지가 깜박 했구나. 그래, 이번 주는 어떤 사자성어를 배웠지?
 손자가 자신있게 소리쳤다.'


 “고난대행.
 “….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곳이 쓰렸다. 여기저기 언론에서 ‘권한대행이 고난대행’이란 기사가 실렸다. 8살 어린 손자도 그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나 보다. 고난(苦難)대행. 그랬다. 매일이 고난이었다.

 “할아버지 많이 힘드시죠. 맨날 할아버지가 TV에 나와요. 그런데 고난대행하면서 월급은 얼마나 더 올랐어요?

 수당 한 푼 더 얹어주지 않는 ‘고난대행’ 생활이었다. 웃으며 답했다. “하나도 안 올랐다. 그러니까 네 용돈도 못 올려준다. 하하.

 이렇게 잠깐이라도 웃을 거리가 있다면 운 좋은 날이었다. 책임감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안보가 걸렸다. 갑작스레 권한대행이 되고 나서 가장 걱정한 것은 우발적으로 남북 간 긴장 상황이 발생하는 일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북한은 연평해전을 일으켰다. 대통령 탄핵 소추 정국을 틈타 국지적인 군사 충돌을 감행할 위험이 있었다. 북한에 도발의 구실을 줘서도 안 됐다.

 2004 3 22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국무위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겸한 서해접경해역 조업질서 확립대책 회의를 열었다. 궁리 끝에 나온 방안이었다. 봄 꽃게잡이 철을 맞아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회의를 개최했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북한의 무력 도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북방한계선(NLL) 경계를 강화하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회의 시작 부분만 언론에 공개하고 핵심 보고 사항은 비공개에 부친 이유도 거기 있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장승우 해양수산부 장관, 조영길 국방부 장관, 이승재 해양경찰청장이 참여했다. 안상수 인천시장과 조건호 옹진군수까지 배석하도록 했다. 사흘 전인 3 19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관계부처 대책회의 결과를 종합해서 공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먼저 보고했다.

 “3 28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방중 기간 각종 외교채널을 활용해서 실효적 단속 조치를 강구해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장승우 해수부 장관이 현안과 조치사항을 설명했다. 이어 조영길 국방장관의 차례였다.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상황을 고려해 대응 전력을 증강 배치하겠습니다. 또 중국 어선의 NLL 진입을 차단하고,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즉각 나포 및 퇴거 조치를 하겠습니다.

 조 장관의 핵심 보고 사항은 그 다음 내용이었다.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을 불허하고 대응 지침에 의거해 NLL을 수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어선 단속 과정에서 남북의 우발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습니다.

 이승재 청장의 보고까지 끝나자 준비했던 당부 사항을 말했다.

 “NLL에서의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이 없도록 대책을 마련하세요. 그와 동시에 만반의 대비 태세를 확립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걱정했던 남북 긴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촉발됐다. 2004 4 22일 북한 평안북도에서 발생한 경의선 용천역 폭발사고였다

 

(20) 용천역 폭발사고

저녁을 먹고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돌아왔다. 관저 거실 안 흔들의자에 앉아 버릇처럼 TV 뉴스 채널을 켰다. 저녁 8시쯤 됐을까. 북한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는 CNN 속보가 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방문을 마치고 특별열차편으로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동시에 거실에 있던 팩스의 소리가 분주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국방부 등에서 급하게 보낸 정보보고였다.

 ‘2004 4 22일 하오 1시께 북한 평양 북방 약 150㎞ 정도 떨어진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 발생.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탄 특별열차가 사고 지점을 지났는지 여부와 통과 시간은 현재 확인되지 않음. 폭발사고 규모와 원인은….

 팩스 종이를 쥔 손이 떨렸다.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외교안보 라인에 전화를 돌렸다.

 “김정일 신변이 어떤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본 뒤 즉시 보고하세요.

 그날 밤, 누워봐도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관저의 거실로 나가 흔들의자에 다시 앉았다. CNN 채널을 켰다 껐다 했다. 그때까지 확실한 것은 없었다.

 ‘폭발사고로 김정일이 만약 죽었다면, 그럼 친()중국 군사정권이 들어설 수밖에 없다. 남북 간 긴장 관계가 심해지면 어떻게 되나.

 김정은이 등장하기 한참 전의 일이다. 후계 구도는 윤곽도 드러나지 않은 때다. ‘김정일의 사망이라고 하는 급변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쓸 수 있는 수단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남북 간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시기는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1947년 유엔 총회의 결의 사항을 내세워 남북 총선거를 하자고 제안해야 하나. 그 조항이 지금도 유효한가.’ 심지어 고민은 거기까지 치달았다.

 밤을 새면서 ‘제발 김정일이 안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에서 뿌옇게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오전 4시쯤 기다리던 소식이 CNN 속보로 보도됐다. 엇비슷한 시간 팩스로 들어온 정보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 도착. 신변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

 그제야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23일 오전 용천 재해대책 관계장관 회의를 소집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조영길 국방부 장관, 정세현 통일부 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은 물론 이헌재 경제부총리 등 경제 장관까지 불렀다. 내가 먼저 발언했다.

 “우선 인도적 지원을 합시다. 북한의 요청이 있든 없든 상관 없습니다. 동포애로 접근해야 해요. 의약품 등 구호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전달하도록 합시다. 북한이 희망한다면 시설 복구까지 해주도록 합시다.

 그리고 반기문 외교부 장관에게 물었다.

 ▶고건=지원 금액은 얼마로 하는 게 좋겠습니까.
 ▶반기문=30만 달러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건=좀 부족한 것 같은데요.
 ▶반기문=50만 달러 정도는 어떨까요.
 ▶고건=중국은 어느 정도로 할까 모르겠네요. 그래, 100만 달러로 합시다.

 나중에 따져보니 100만 달러는 잘한 결정이었다. 중국이 96만 달러 물품을 지원했다. 외교부가 쓸 수 있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기문 장관이 큰 예산을 선뜻 내놓기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30~50만 달러를 지원했다면 같은 동포국가로서 체면이 안 설 뻔했다.

 회의는 1시간 만에 끝났다. 경제부처 장관들은 회의실에서 내보냈다. 통일·외교·국방장관과 국정원장에게만 “잠깐 앉으시라. 회의를 조금만 더 하겠다”고 했다. 긴히 물어볼 게 있었다.

 “제가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

 다들 표정이 이상했다. 왜 내가 잠을 못 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 혼자만 잠을 설쳤나 보다. 고민은 대통령 권한대행 혼자만의 몫이었나 보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김정일이 죽었으면, 급변 사태로 이어졌다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무슨 대책이라도 생각해둔 게 있습니까.

 “….

 회의장에 침묵만이 흘렀다. 한국의 외교안보를 책임지는 수장들이 입을 다물고 아래만 쳐다보던 그 풍경,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후 한국과 미국이 ‘작전계획 5029’를 내놓았지만 한반도 미래전략이 아닌 군사계획일 뿐이다.

 9년이 지났다. 한국의 외교·안보를 지금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한반도 미래전략이 있습니까.

 

(21) 거부권 행사와 ‘가족’의 실종

거부권. 대통령이 국회에서 통과한 법안을 다시 의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권한이다. 대통령도 거부권을 쓰려면 정치권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늘 어려운 일은 연거푸 닥치는 법이다. 2004 3 2일 국회는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을 제한하는 사면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결정하기 1주일 전 국회에 먼저 알려 의견을 듣는 법안이다. 헌법에서 정한 3(입법·행정·사법) 분립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무엇보다 특별사면 대상에 누구를 넣고 빼는지를 놓고 정치권에서 나눠먹기를 할 위험이 컸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마찬가지였다. 6·25 때 거창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사건의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전란에 휘말려 희생 당한 다른 지역 피해자와의 형평성도 문제였지만 막대한 재정 부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박정규 청와대 민정수석은 ‘특별사면권 제한 법안은 받아들여도 무방하지 않겠나’하는 검토 의견을 냈다. 그러나 권한대행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단을 내렸다. 2004 3 23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를 의결했다. “사면법 개정은 법리적으로 위헌 소지가 있고, 거창사건 보상 조치법은 유사 사건에 대한 파급 효과를 고려할 때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재의를 요구하겠습니다.

그리고 박관용 국회의장에게 전화했다. “법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습니다. 거부권을 행사하겠습니다.” 박 의장의 대답은 명쾌했다. “잘 알겠습니다.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에게도 전화했다. 지금 대통령인 박근혜 당시 대표다. 탄핵 소추 사태 후폭풍으로 최병렬 대표는 물러나고 한나라당이 천막당사에 있던 때다. “거부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 대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국회는 권한대행이 행사한 거부권을 받아들였다.

 대신 나는 법무부에 “정부로서 사면권을 남용한다는 지적을 유념해 사법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 사면권 행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사법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특별사면 심의기구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대법관 출신 등 권위 있고 독립성을 갖춘 인사들로 위원회를 꾸린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면심사위원회는 법무부 보조기관에 불과하다. 원래 구상과는 한참이나 차이가 있다. 지난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정치권과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별사면을 단행할 때 뒷맛이 씁쓸했던 이유다.

 어쨌든 국무총리는 시어머니 역할을 해야 한다. 건넌방에만 앉아 있지 말고 부엌에도 들러보고, 곳간도 돌아보고, 싫은 소리도 해야 한다는 거다. 그 얘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한다.

 탄핵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2003 10 22일 국무회의. 호주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내용을 찬찬히 보니 이상했다.

 “호주를 중심으로 규정한 ‘가족’은 어떻게 됐죠?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답했다. “민법상 호주 규정이 삭제되면서 가족도 자동적으로 삭제….

 “우리 사회에서 가족·가정의 해체가 고민스러운 문제인데 정부가 민법에서 가족을 삭제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은희 여성부 장관이 의견을 말했다. “호주제 폐지에 따라 불가피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호주제는 폐지돼야 옳다. 그렇다고 가족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놓지 않은 채 민법을 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안건은 일단 보류합니다. 가족을 되살리는 방안을 마련해 다시 상정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신문에 사설이 실렸다. 총리가 호주제 폐지를 반대해서 법안을 보류시킨 것처럼 적었다. 김덕봉 총리 공보수석를 통해 정정보도를 요구했다. 반론 보도문을 실어주겠다는 답이 왔다. 반론 보도문은 내가 직접 썼다. “저는 총리로서 호주제 폐지에 찬성해 왔다. 폐지되더라도 사회 기본 단위인 가족의 개념이 민법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가족은 살리면서 호주제 폐지를 추진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두 차례 관계장관 회의를 거쳐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는 민법 제779조가 만들어졌다. 실종됐던 민법상 ‘가족’의 규정을 되살렸다. 지금의 가족관계등록부·가족관계증명서는 그렇게 탄생했다.

 

(22) 대통령의 귀환

“총리님, 요즘 시중에 이런 얘기가 돕니다.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한 실장이 가지고 온 보고 서류를 읽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무슨 얘기 말입니까.

 2004 4월 어느 날.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총리 집무실엔 그와 나만 앉아 있었다. 누구 들을 사람도 없는데 한 실장은 목소리를 한껏 가라앉히며 답했다.

 “탄핵으로 재결이 나면 그때는 권한대행을 하는 현직 총리가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얘기가 있습니다.

 “절대 안 될 일입니다. 내가 권한대행으로 국가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는 사람인데 누구한테 맡기고 입후보를 합니까.

 “아,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국정 운영은 경제부총리한테 맡겨야 하는 겁니까.
 “말도 안 돼요. 위기 관리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내 소명입니다.

 탄핵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 정도 지났다. 2004 4 15 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무사히 치러졌다. 열린우리당의 승리였다. 탄핵 역풍의 영향이었다.

 이제 정치권의 시선은 헌법재판소로 몰렸다. 노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에 대해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대통령을 대신해 일을 하다 보니 TV 뉴스만 틀면 내 얼굴, 신문만 펴면 내 기사가 나왔다. 청와대 386 참모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 “청와대로부터 압박을 받는다”는 국무조정실 간부들의 보고가 자주 올라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헌재의 탄핵심판까지 시한이 남았지만 뭔가 총리의 향후 행보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한덕수 실장에게 이미 “총리에서 물러나고 미국에서 공부할 곳을 물색해 달라”고 요청을 해둔 터였다. 한 실장을 다시 불렀다.

 “긴히 부탁할 게 있어요. 전에 제가 부탁드린 미국의 대학, 알아보고 계시죠? 그 사실을 언론에 흘려 주셨으면 합니다.
 “…. , 알겠습니다.

 얼마 후 신문에 기사가 났다. 4 20일 기자단 만찬이 있었다. 당연히 그 질문이 나왔다.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고 ‘재수 총리’를 졸업한다는 것은 지난해부터 해온 얘기입니다. 그때의 역할이란 게 17대 총선의 공명 관리였는데 여기에 탄핵 정국이 붙었으니 그것까지는 끝나야 할 것 같습니다. 졸업 시기는 5월 중순에서 6월 이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5 14일 오전 10시 헌재는 노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을 “기각한다”고 결정했다. 63, 무거웠던 권한대행이란 짐은 그렇게 내려놓게 됐다.

 그날 저녁 630분 청와대 관저에서 만찬이 열렸다. 내가 청와대에 전화로 요청해 이뤄진 저녁 자리였다. 권양숙 여사, 청와대의 김우식 비서실장, 이병완 홍보수석이 참석했다. 권한대행 기간 중 국정 처리 사항을 정리한 사무 인계서를 준비해 갔다. 딕 체니 미 부통령 방한 결과와 최근 국내 경제상황, 특히 정부 초기 만든 6자회담의 진전 상황에 대해 구두로 설명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크고 답답하셨습니까.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총리께서 너무 큰 책임을 지셨던 것 같습니다. 훌륭히 국정 운영을 해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1 3개월간 열심히 하느라고 했지만 별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답을 한 뒤 본론을 꺼냈다. “저 스스로 1기 총리의 임기를 총선이 끝나고 새 국회가 개원하기 전까지로 생각해 왔고, 이제 그때가 됐으니 졸업을 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열심히 잘해 오셨는데 계속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노 대통령은 두 차례 만류했다. 진짜 거절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가 후임 총리로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후임 총리 지명 시기는 20일쯤이라는 분석도 따라 붙었다. 내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대통령이 큰 강을 건넜으니 말을 바꾸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새로운 국정 운영의 틀을 만드실 수 있는 편리한 시일에 졸업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노 대통령은 내 말에 공감했다. 모든 언론은 “대통령이 총리의 사의를 가납(嘉納·기꺼이 받아들임)했다”고 보도했다. 그렇게 잘 마무리 됐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이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23) 신임 각료 제청 거부

“차 한잔 하시죠.

 국무회의가 끝나고 청와대 세종실을 나오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건넸다. 차 한잔. 단 둘이 얘기를 나누자는 신호다. “네. 그러시죠.

 2004 5 18일 노 대통령이 복귀하고 처음 연 국무회의였다. 나흘 전 만찬에서 사의를 밝혔고, 그도 받아들였다. 이미 나는 물러나는 총리였다. 언론도 다 그렇게 보도했다. 집무실에서도 짐을 싸고 인수인계를 준비하는 게 주로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었다.

 별실에 마주 앉았다. 노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통일부 장관과 복지부 장관을 경질하는 인사를 하려고 합니다. 김근태 의원이 통일부 장관을 희망하고 있지만 복지부 장관으로 내정했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왜 나한테 개각에 대해 설명하는 거지?’ 의문은 바로 풀렸다.

 “새 장관들을 임명 제청해 주십시오.

 1998년 김대중 정부 조각 때 총리로서 각료 제청권을 행사했다. 김종필 서리의 총리 임명이 국회 반대로 늦어졌고, 국정 공백 사태를 방치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나섰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내가 제청을 하지 않더라도 국정 혼란이나 법적 다툼을 걱정할 일이 없었다.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물러나는 총리가 신임 장관을 제청할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난 다시 말했다.

 “새로 임명된 총리가 신임 각료들을 임명 제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래도 그걸로 결말이 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19일과 21일 나를 만나 “각료 제청권을 행사해 달라”는 노 대통령의 뜻을 다시 전했다. 그때마다 내 답은 “안 된다”였다.

 그 즈음 청와대가 총리에게 신임 각료 제청을 요구했고, 내가 거부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23일 김우식 비서실장이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줬다.

 더 이상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김덕봉 총리 공보수석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김우식 실장과 두 차례 만난 사실을 인정했다. “김 실장에게 ‘헌법상의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 제도의 취지에 비춰 물러나는 총리가 신임 장관을 임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고사했고 그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다음날인 5 24일 오전 1130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집무실에 있는데 김우식 비서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세 번째 면담 요청이었다. 노 대통령 나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세 번 찾아 간청함)였나 보다.

 “제가 총리실로 가겠습니다.
 “아니, 기자들이 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지 말고 공관으로 오세요.

 예정돼 있던 점심 약속을 서둘러 취소하고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갔다. 공관 뒷문을 열어둘 테니 그쪽 통로를 이용하라고 일러뒀다. 청와대 비서실장 관저에서 나오면 공관 후문으로 연결되면서 눈에 잘 안 띄는 길이 있다. 기자들의 눈을 피하는 게 가능했다.

 김우식 실장이 공관 집무실로 들어왔다. 장관 제청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정리한 문서 원본과 복사본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그에게 차근히 설명했다.

 “헌법학자·정치인·언론인을 두루 만나 제청권 행사에 대해 의견을 들었습니다. 한결같이 물러나는 총리가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어요. 사퇴하는 제가 새 장관을 제청하면 헌법 정신에도 어긋나고 국정을 편법으로 운영하는 게 됩니다.

 ‘대통령이 총리의 사의 표명을 가납(嘉納·기꺼이 받아들임)했다’는 보도가 며칠 전 대대적으로 나왔다. 굳이 사표를 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장관 제청을 계속 요청하는 상황에서 내 입장을 상기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직접 사표를 썼다. 사표 한 장과 장관 제청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적은 원본 한 장. 그렇게 두 장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어 김 실장에게 줬다.

 “대통령께 전달해 주십시오.

 공직 생활 30여 년을 마무리하는 일곱 번째 사표였다.
정리=조현숙 기자

김덕봉

고려대 산학협력단 R&D전략센터장.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민자당 정세분석위원회 수석상근연구위원을 하다 1992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무담당 전문위원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 행정쇄신비서관·국무총리실 행정쇄신위원회 행정실장을 맡았다. 이때 고건 총리와 처음 만났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조정실(현 국무총리실) 규제개혁조정관·대통령실 정책2비서관을 지냈다. 2000~2004년 총리 공보수석으로 일하며 고건 총리와 다시 만났다. 고건 총리가 물러나고 나서도 ‘입’ 역할을 했고 2006~2007년 대선 후보로 거론될 때 대변인 격으로 일했다.

 

(24) 마지막 사표

사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갔다.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사표다. 1962년 내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만두고 또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지만 공직에서 보낸 시간이 30여 년이다. 소신과 원칙, 두 가지로 버틴 세월이었다. 물러나는 국무총리가 각료 제청권을 행사한다면 헌법 정신을 어기는 일이 된다. 권한대행으로 일하며 원칙의 중요성을 더 깊이 새겼다.

 노 대통령이 왜 나에게 자꾸 장관을 제청해달라고 요청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둘러 개각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장관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청와대는 “정치 상황 변화에 따른 조기 개각”이라고 밝혔다. 집권 여당 내 정치 역학 구도에 따라 일시적으로 개각 수요가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법과 원칙을 무시해선 안 된다.

 김우식 실장 편에 사표와 함께 청와대로 보낸 문서도 문제가 됐다. 장관 제청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적었고 조언을 해준 사람을 ‘Y교수’ ‘여당 C의원’ 등 익명으로 표기했다. 청와대가 국가정보원 등을 통해 이들이 누구인지 색출에 나섰다. 국무조정실 사람 몇몇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총리를 그만두고 나서 전해들은 얘기다. 적잖이 마음이 불편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인 2004 5 25일 오전 850분쯤 청와대 세종실에 들어섰다. 천천히 한 바퀴 돌며 국무위원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자신이 매고 있는 넥타이를 들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오늘은 밝은 넥타이를 매고 와야 할 것 같았습니다.” 후임 총리가 임명될 때까지 총리대행을 하게 될 그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웃으며 말을 했다. “저에게 허락도 안 받고 그만둬도 되나요.

 재치 있는 사람이다. 나도 웃으며 답했다. “아…. 법무부 장관에게 허락의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세종실 입구로 걸어나갔다. 오전 9시가 다 되자 회의장으로 오는 노 대통령이 보였다. 그를 맞이한 후 나란히 걸어 회의실로 들어갔다. 총리석에 앉았다. 보통 총리가 국무회의 개회선언을 한다. 말을 꺼내기 전 고개를 들어 노 대통령 쪽을 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말했다.

 “인사 말씀을 하시죠.

 지금 이임 인사를 하란 얘기다. ‘그 시간이 왔구나.’ 이임사를 적어온 종이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펼쳤다.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목소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얘기했다. (노무현 정부) 첫 번째 총리로서 17대 총선을 관리하고 새 국회가 구성되는 직전 시점이 마칠 시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뜻을 대통령이 가납해주셔서 짐을 벗게 됐습니다.

 마지막 인사다. “저는 물러갑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30여 년의 공직생활은 이렇게 끝이 났다. 정치권과 언론에서 내가 정치를 할 거다, 아니다를 놓고 말이 많았다. 신경 안 썼다. 이번이 마지막 사표라는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무위원 모두가 같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등을 돌려 회의장 문을 향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공무원으로 일하며 겪은 많은 장면이 스쳐갔다. 공인 40, 공직 30. 긴 세월이었지만 어느새 흘러갔다. 사표를 쓰고 다시 공직에서 들어서고 7번을 반복했다.

 ‘첫 번째 사표….’ 그때를 떠올렸다. 내무부에 들어간 지 이제 막 3년이 지난 20대 중반, 나는 첫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정리=조현숙 기자

 

(25) 공인 첫발

1945년 광복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이 속속 귀국했다. 라디오와 신문에서 그들을 애국자(愛國者)라고 불렀다. 당시 애국은 지금처럼 거창한 단어가 아니었다. 늘상 쓰는 말이었다. 나랏일을 하면 바로 애국자였다. 소년 시절부터 나랏일을 맡는 애국자가 되고 싶었다.

 커가며 정치인을 꿈꿨다. 어머니는 의사가 되길 바랐고 아버지는 스스로 결정하라고 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하고 문리대 학생회장과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한 것도 정치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회장 출신이면 대개 정치 무대로 나갔다. 맘만 먹으면 국회의원 보좌관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때는 자유당 말기였다. 장기 집권과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됐던 시기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정치가 아니라도 나랏일을 하는 길이 있었다. 바로 행정이었다. 내무부로 들어가 군수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 고을을 책임지고 개발하면서 잘살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뒤늦게 고등고시로 방향을 돌렸다. 학생회장 일을 하느라, 연애를 하느라 공부가 부족했나 보다. 처음 도전한 제12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낙방했다.

 공부가 부족하면 착각하기 마련이다. ‘합격이 틀림 없다’는 예감에 대학생 때부터 사귀었던 동갑내기(조현숙 여사)와 결혼했다. 기세등등하게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짜도 고등고시 합격자 발표일로 잡았다. 동대문 대폿집에 신부를 기다리라고 앉혀놓고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 법대로 향했다. 그때는 합격자를 알리는 방이 법대 교정에도 붙었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이름이 없었다. 신부가 있는 동대문 근처 대폿집으로 돌아왔다.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취기가 한껏 오르자 동대문 사거리로 나가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이건 무효야, 무효”라고 소리쳤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실패였다.

 스물두 살 동갑내기 아내와의 신방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청량리 집에 차렸다. 그 집은 서울대 교수 관사였다. 집에 딸린 양계장의 닭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작은 방 둘을 들였다. 연탄 아궁이로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신혼방이었다. 졸지에 가장이 됐으니 생계를 꾸려야 했다. 남산무역회사에 입사했다. 낮에는 회사에 나가 일하느라 밤에 고시 공부를 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은 고달팠다. 시험 준비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회사에 사표를 냈다. 다행히 회사는 휴직 처리를 해줬다. 월급의 절반을 받았다. 반이나마 나오는 월급을 신부에게 생활비로 맡기고 수락산 중턱 흥국사란 절에 들어갔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절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고 61 10월 고등고시에 재도전했다. 배가 부른 아내는 돈암동 산원으로, 나는 성균관대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틀 동안 시험을 치고 돌아오니 첫 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그해 12 5일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자가 발표됐다. 1년 전 아픈 기억을 억누르며 서울대 법대 교정으로 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을 읽어 내려갔다.

 ‘제1부 일반행정…조재석, 최상엽, 고건…’

 내 이름이 있었다. 첫 아이 덕인가. 합격했다. 1년 가까이 미뤄왔던 군수의 꿈이 다시 부풀었다. 지방자치제와 지방선거제도가 시행되기 훨씬 전이다. 내무부 공무원이 군수로, 도지사로 임명되던 시절이다. 내무부를 자원했다. 정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군수에 매력을 느꼈다. 고시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62년 원했던 대로 내무부에 배정됐다.

 자신만만한 청년 고건으로 다시 돌아왔다. 앞으로 내 인생에 좌절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고등고시

 

행정·기술 부문 고위 공무원과 사법 부문 검사·판사·변호사를 뽑기 위해 실시했던 자격시험. 지금의 행정·기술·외무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과 사법시험에 해당한다. 1949년 시행했고 1963년 이후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일명 행정·외무·기술고시)과 사법시험(사법고시)으로 대체됐다.

 

 (26) 부친은 야당 국회의원

1961 12월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입영 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장이 나오면 군대를 다녀온 다음 발령을 받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각 사무처에서 통지문이 왔다. 공무원 임용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통지문을 들고 중앙청 인사과로 찾아갔다.

 “입영 영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무원 임용 신청을 등록해야 하나요. 아니면 군대를 갔다 와서 등록해야 합니까.

 인사과 담당 직원이 답했다.
 “입영을 기피한 사실이 없으면 지금 임용 후보자로 등록하세요.

 그래서 공무원 임용 후보자로 등록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있고 군사정권이 들어선 때였다. 병역을 기피했거나 다른 병역 문제가 있었다면 공무원으로 임용되지 못했을 거다. 병역을 기피한 사실이 없는 다른 고시 합격자들과 함께 62 2월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발령이 났다. 원했던 내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공직을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야당 정치를 시작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수습 행정사무관이었던 63 2월 말 일요일 서울중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지금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자리다. 5·16 군사 쿠데타 후 야권이 주최하는 첫 번째 민간 정치 집회가 열렸다.

 연사는 이인 전 제헌의원과 아버지인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이었다. 연설이 무르익자 L-19 비행기가 공중을 선회했다. 비행음 사이에서 아버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의(飜意·먹었던 마음을 바꿈)의 번의는 무엇입니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민정 선거에 불참하겠다고 해놓고 번복한 사실을 겨냥한 연설이었다. 아버지가 했던 연설은 다음날 신문 제목으로 고스란히 실렸다. 내가 연설장에 왔다 간 것을 아버지는 몰랐다. 인파 뒤에 서서 저 멀리 아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63 11 26일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아버지는 민정당(民政黨) 후보로 군산·옥구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정당에서 핵심 인사로 일했다. 정책위 의장과 사무총장을 지냈다.

 아버지가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고난이 닥쳤다.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내무부 지방국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꿈에 부풀었다. 16개월이 지나면 수습 꼬리표를 떼고 보직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동기들은 군수로도 나가고 각 부처의 계장(지금의 팀장) 자리를 받았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1년이, 2년이 지나도 나에겐 보직이 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강경 중에서도 강경으로 꼽히는 야당 의원을 아버지로 뒀다는 까닭에서였다. 상공부 상역국장이었던 형 고석윤은 63년 결국 공직을 그만둬야 했다. 국장인 형뿐만 아니라 말단 행정사무관인 나에게도 정치권의 서슬 퍼런 입김이 끼쳤다. 그 시절은 그랬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인

이인(李仁·1896~1979)=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 일제 강점기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3년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법정에 선 독립운동가를 무료로 변호했 다. 광복 후인 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됐고 그해 제헌의원으로 당선됐다. 61 5·16 이후 야당 원로로 활동했다. 정부로부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을 받았다.

 

(27) 첫 번째 사표 소동

1965년 초 보직 없는 사무관 생활을 한 지 3년이 지나고 있었다. 아마 신입 사무관이 보직 없이 3년 넘게 보낸 것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일 거다. 무보직 사무관으로 내무부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을 더 이상은 참기 어려웠다.

 아버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사표를 썼다. 사표만 내고 그만두긴 억울했다. 장관을 만나 따질 건 따지고 사표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겉에 사직서(辭職書)라 적은 하얀 봉투를 품고 다녔다. 보직 없는 평사무관이 장관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울 을지로 내무부 청사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국무회의에 다녀오는 장관을 만나 면담을 요청해 보자는 궁리를 냈다. 하지만 번번이 장관을 만나지 못했다. 허탕을 치고 돌아와 퇴근 후 대폿집에 동기들과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어느 날 취기가 올라 안주머니에 있던 사직서 봉투를 꺼내 들고 외쳤다. “나 사표 내기로 했어.

 동기들과 술자리에서 한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갔나 보다. 고 아무개라는 사무관이 사표를 품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내무부에 파다하게 번졌다. 얼마 후인 65 5월 행정과 기획계장으로 발령이 났다. 야당 의원의 아들이 보직도 못 받고 결국 사무관을 그만두게 된다면 국회에서 말썽이 날 수도 있다는 보고가 장관이나 차관에게 올라갔나 보다. 물론 나에게 속사정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짐작일 뿐이었다.

 무보직 사무관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인간적으로 철이 드는 숙성 기간이기도 했다. 3년 반 동안 외국 책을 구해 행정에 대해 공부도 했고 지방행정에 대한 기획안도 썼다.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중앙부처에서 입안한 정책이 지방 현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도 관찰하고 분석했다. 3년 반의 이런 공부는 기획계장으로 일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다가 중단된 시기였다.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국회에 나가면 의원들은 “지방자치를 왜 다시 시작하지 않느냐”고 몰아세웠다. 정 총리는 “다시 지방자치제도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국회의 추궁이 이어지자 정 총리는 “지방자치백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 일은 내무부 지방국 행정과의 기획계장인 나에게 돌아왔다. 노융희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지방자치 전문가들과 함께 백서를 만들었다. 3년 반 동안 서울 충무로 외국 전문서적 거리와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한 내용을 맘껏 활용했다. 공청회도 열었고 완성한 백서를 국회에도 보냈다.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국내 전문서적이 거의 없던 때였다. 이 백서는 이후 10년간 대학에서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교과서처럼 쓰였다. 3년간의 기획계장 시절 ‘도시문제’란 월간 잡지도 창간했다. 이호철 작가의 ‘서울은 만원이다’란 소설이 인기를 끌 만큼 도시화 문제가 심각했던 때였다. 그때의 경험과 공부는 이후 서울시장으로 일하면서 큰 도움이 됐다.

 후일담이지만 공직에 처음 나서며 품었던 군수의 꿈을 나는 이루지 못했다. 전북도청 식산국장, 내무부 새마을담당관 등을 거치면서 군수로 나가지 못했다. 딱 한 번 기회가 있긴 했다. 식산국장으로 일할 때 이환의 전북도지사가 날 군산시장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군산·옥구를 지역구로 둔 여당 국회의원인 차형근 변호사가 반대하면서 기회를 잃었다. 내가 군산시장을 했다가 국회의원에 도전할까봐 걱정했던 것 같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인물

정일권

 

정일권(1917~94)=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에서 복무했다.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조선국방경비대에서 근무했다. 33세 나이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며 6·25전쟁을 치렀다. 만주군에서 만난 동갑내기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5·16 이후 행정가로 변신했다. 주미 대사, 외무부 장관을 거쳐 64년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68개월 동안 일하며 역대 총리 중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다. 8~10대 국회의원, 9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3공화국 때 의문사한 정인숙씨의 아들이 91년 그에게 친자확인소송을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8) 첫 번째 멘토 김보현

보직 없이 보낸 공직 첫 3년 반. 힘들었지만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그때 멘토를 만났다. 김보현 전 농림부 장관이다. 1962년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내무부 지방국 행정과에 배정됐을 때 그가 행정과장이었다.

 내 자리는 계장 책상 옆에 인공위성처럼 붙어있었다. 보직이 없으니 계장 책상을 줄 수 없고, 명색이 사무관이니 계원 자리에 앉힐 수도 없어서다. 그때 기획계장이 초등학교 출신의 국세청장에 청백리로 이름을 알린 김수학씨였다. 일과가 끝나면 김보현 과장이 나에게 말했다.

 “맥주나 한 잔 마시러 가자.

 서울 을지로 내무부 청사를 나섰다. 그는 나를 이끌고 옛날 중앙우체국 뒤 샛골목으로 향했다. 충무로와 명동으로 잇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책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여러 분야의 외국책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 거리였다. 나에겐 신천지였다. 구하기 어려운 책도 주인에게 주문하면 살 수 있었다. 김 과장은 필요한 책을 찾아보고 샀다. 주로 지방행정에 관한 서적을 봤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를 주도한 엘리트 집단은 두 부류였다. 군인 출신과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기술관료 또는 전문관료)였다. 김 과장은 이후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했다.

 나도 그를 따라 지방행정에 대한 책을 섭렵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자주 들렀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촌락』도 그 곳에서 탐독했다. 우리나라 농촌지역의 현황과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였다. 6·25 전쟁이 불과 10년 전 일이었다. 농촌현실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국내 서적은 거의 없었다. 그 책자는 나중에 새마을운동을 기획할 때 귀중한 참고자료가 됐다.

 그렇게 서점가를 한참 둘러본 다음 원래 목적지였던 맥주집으로 향했다. 명동과 무교동에는 직장인들이 일과를 마치고 들르는 맥주집이 많았다. 요즘의 호프집과 같은데 그때는 ‘삐어홀(beer hall)’이라고 불렀다. 정종이나 막걸리는 대포집, 맥주는 삐어홀에서 마셨다. 저녁이면 넓은 홀이 양복쟁이 직장인으로 꽉 찼다. 맥주잔과 땅콩·오징어 같은 마른 안주를 앞에 두고 토론을 했다. 행정이 주제였다.

 ‘모든 행정에는 사각지대가 있다’,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있다’. 그에게 배운 명제였다.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때마다 한번도 잊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이 정책을 현장에 적용하면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까 생각하는 버릇은 이때 자리잡았다. 일종의 상상 속 정책 영향평가였다.

 즐거운 추억도 많았다. 그때 삐어홀에서 맥주는 1000cc 잔에도 나왔다. 동료들과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술값을 걸고 둘이 서서 누가 빨리 마시나 내기를 했다. 덕분에 내가 술값을 낸 적은 없었다. 취기가 오르면 야당 국회의원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보직을 받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김 과장은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었다. 광주사범을 나와 교사를 하다가 서울대 법대를 다시 들어갔다. 고시에 합격해 행정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고도 행정과장 밑 계장 생활을 7년이나 했다. 과장인 그가 내 처지를 해결해 줄 순 없었지만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줬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공직생활의 첫 멘토였다.
정리=조현숙 기자

김보현(1924~2006)=1944년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순천국민학교·광주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49년 서울대 법대에 다시 입학했고 51년 제2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 내무부 지방국 행정과장·지방국장을 거쳐 66년 전남도지사로 임명됐다. 이후 체신부·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동신화학 사장,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원장으로도 일했다. 68년 한해 극복에 기여한 공로로, 76년 수출의 날 기념으로 대통령 표창을 두 번 수상했고 90년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29) 부친이 내린 공직3계

내무부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첫발을 내디딘 1962. 아버지는 내게 ‘공직삼계(公職三戒·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세 가지)’를 내려줬다. 첫째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찍히지 마라’, 둘째 ‘남의 돈은 받지 마라’, 셋째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였다.

 먼저 아무개 사람이라고 찍혀선 안 된다는 것은 줄 서지 말고 실력으로 헤쳐가란 뜻이었다. 나는 공직 생활을 통해 인사 운동을 하거나 어느 정파에 줄을 선 일이 한 번도 없다. 대신 일로서 승부하려면 내가 맡은 일에선 최고의 전문가가 돼야 했다. 일이 주어지면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정치인을 그만두고 나서도 지킨 원칙이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다. 감천까지는 못돼도 감민(感民)은 하자는 ‘지성감민’은 그때부터 내 좌우명으로 자리 잡았다. 두 번째 뇌물을 받지 말라는 청렴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강경 야당 정치인의 아들로서 청렴은 나에게 생존의 법칙이었다. 그러다 보니 청렴이 체질화됐고 나중엔 경쟁력이 됐다. 권력의 판도가 바뀌고 사정(査正) 바람이 휘몰아칠 때도 떳떳이 내 소신대로 일할 수 있었다. 12·12 사태 이후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반대해 사표를 던질 수 있었던 것도 내 스스로 청렴을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1975 11월 전라남도 지사에 임명됐을 때 일이다. 37세 나이에 최연소 도지사였다. 의욕이 가득한 젊은 공직자 주변에 검은 돈의 유혹이 끼칠 만도 했다. 아버지는 일가친척을 긴급 소집했다. ‘비상계엄 가족회의’였다. 친척 모두에게 청탁이나 돈을 절대 받아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물론 도지사 생활을 하다 보면 돈이 아쉬울 때가 있었다. 9시가 넘어서도 불이 켜져 있는 도청 사무실이 적지 않았다. 그럼 사무실로 올라가서 야근하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 광주 충장로에 가서 대포 한잔을 같이 했다. 공식 예산은 부족했다. 나의 사정을 예감했는지 아버지는 도지사 생활을 할 때부터 그때 내 월급의 세 배 정도 되는 돈을 매달 부쳐줬다. 친척들에게 갹출해서 만든 돈이었다. 오랜 공직생활에서 청렴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술에 대한 아버지의 세 번째 조언은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체질 때문인지 술의 양에 대한 문제는 도리가 없었다. 물론 ‘술을 먹더라도 자세를 흩뜨리지 말라’는 계명이라면 어느 정도 지켰다. 동료 직원들과 소주와 막걸리를 자주 했다. 사무실에서 듣지 못하는 진솔한 얘기를 그 자리에선 들을 수 있었다. 도지사를 제대로 하려면 면서기와도 술 한잔을 같이해야 소통이 되지 않는가. ‘술 잘 먹는다’는 소문은 막을 수 없었다.

 대신 공직삼계 중 세 번째 수칙을 ‘일일신(日日新·매일매일 새롭게 함)’으로 바꿨다. 달라지는 행정 환경에 따라 스스로를 늘 새롭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세상이 바뀌면 행정 환경도 따라 달라진다. 여기에 맞춰 일하는 방식과 행정 사고 모두 늘 새롭게 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공직에 가든지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새롭게 고쳤다. 행정의 지속적인 혁신(Innovation)이 바로 일일신이다.

 내가 기획계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난 1967년 아버지는 6대 국회의원직 임기를 마치고 정치인의 생활을 접었다. 다시 학자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정치인의 길을 접으면서 내 앞에 행정가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나의 공직생활을 당신의 뜻을 펼치는 또 다른 방편으로 생각하셨다. 내가 수행하는 정책에 대한 건전한 비판자,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해주셨다. 내가 공직에 있을 때 아버지는 나의 파트너였다.
정리=조현숙 기자

고형곤(1906~2004)=동아일보 기자를 하다가 1938년 교수가 됐다. 연세대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54~55년 한국철학회 초대 회장을 지낸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59~60년 전북대 총장을 역임했고 제6대 국회의원(군산·옥구)으로도 활동했다. 정치인 시절 야당인 민정당의 정책위 의장과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30) 처음 맞부딪친 현장

1967년 아버지는 6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정치인을 그만뒀다. 다음해 승진의 기회가 왔다. 전북도청에 국장으로 오라는 제안이었다. 이호 내무부 장관 때인 68 3. 이환의 내무부 기획실장이 전라북도 도지사로, 손수익 기획예산담당관이 부지사로 임명되면서다. 기획계장이던 나는 광역시·도의 직제를 관장하고 있었다. 때마침 ‘식산(殖産·생산을 늘림)국’이 새로 만들어졌다. 원래 국장으로 있던 사람을 쫓아낼 필요 없이 전북 식산국장으로 갈 수 있었다. 행정 현장을 처음 몸으로 맞부딪치게 됐다. 식산국은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농특사업)을 맡고 있었다.

 농특사업은 일명 주산단지 사업이다. 산간지대엔 한우단지, 서해안엔 백합 양식단지, 또 어느 지역엔 화훼단지 등으로 특화했다. 농어촌 근대화와 빈곤 추방에 고심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역점 시책이었다.

 농특사업의 하나로 군산·부안의 해안에 백합 양식단지를 조성키로 했다. 한국산 백합은 일본에서 ‘조센 하마구리’라 불리며 비싼 값에 팔렸다. 일본에서 명절마다 먹는 고급 수산물로 인기가 높았다. 정부가 양식어민에게 4~5% 중장기 저리로 자금을 빌려줬다. 당시 은행 금리가 20% 정도였으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정부 지원의 혜택은 대부분 기업형 양식업자에게 돌아갔다. 보통 20정보( 20만㎡) 넓이 갯벌에다가 망을 치고 종패(種貝·씨조개)를 뿌려 키웠다. 양식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일반 어민들은 엄두도 못 냈다. 현장에 나가보니 문제의 심각성을 더 느꼈다. 금강 하구인 전북 옥구군 선연리(지금의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에 전국에 백합 종패를 공급하는 보호수면이 있었다. 1024㏊ 넓이의 갯벌에 펼쳐진 거대한 종패장이었다.

 어민들은 종패를 잡아 노임을 받고 파는 인부 노릇을 했다. 한마디로 불공정했다. ‘정부 시책은 공정한가’. 의문이 들었다. 중앙정부의 정책만 그대로 따르다가는 농어민의 소득을 고루 늘린다는 농특사업의 원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할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나는 갯벌 근처에 종패 위판장을 만들어 경매로 종패를 팔도록 하자는 생각을 했다. 김병식 군산어협조합장이 나서서 도왔다. 김 조합장은 1960년대 한·일 어업협정 회담을 할 때 민간대표단에 참여한 수산업 전문가였다. 경매를 하니 종패 가격이 올라갔고 어민의 소득도 따라 불어났다.

 지금도 대기업이 수출의 이득 대부분을 가져가는 일이 문제다. 규모만 다를 뿐 4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전주와 군산을 잇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목천포 다리가 나왔다. 그 다리 입구에 장어집이 하나 있었다. 68년 식산국장으로 일하며 출장길에 가끔 들렀다. 어느 날 가게 주인이 장어를 내오며 한마디 했다.

 “여기 주민들이 밤마다 만경강 하구에 나가서 초롱불 켜놓고 실뱀장어(장어 치어)를 잡는데 수출업자들이 받아가요. 근데 일당만 쳐주지 실뱀장어 가격은 제대로 안 주는 거 같아요. 수출업자들은 일본에 비싼 값에 판다고 하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선 장어 양식을 거의 안했다. 실뱀장어를 잡아 양식 기술이 있는 일본에 대부분 수출했다. 그런데 밤새 실뱀장어를 잡는다고 고생한 주민들은 몇 푼 일당만 받고 대부분의 이익은 수출업자가 챙긴다니 말이 안 됐다. 수산과장을 불러 대책을 만들라고 했더니 “방법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연안 지선 어민에게 어업 면허권을 주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관련 규정이 없어서….
 “그렇다면 면허권이 아닌 어업 허가를 주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우리는 뜰채와 같은 초망이라는 어구를 사용해 실뱀장어를 잡는 어민에게 초망어업 허가를 내주는 방법을 찾아냈다. 일당만 받던 어민들은 초망어업 허가권을 받은 후 ‘플러스 알파’의 소득을 올렸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수출로 벌어들인 이득은 공평하게 분배됐다. 실뱀장어 초망어업 허가권은 전에는 없던 제도로 내가 처음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