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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11/ 정치3/ 최규선 게이트. 김계원(金桂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 생전 인터뷰 - 10.26 이야기

상림은내고향 2021. 4. 22. 21:25

비하인드 다큐11/ 정치3/ 

2016.07.28 최규선 게이트

■주인공 ‘숨겨진 게이트’를 열다, "DJ에게 ‘팽’당한 후..."

⊙ “나는 불사조不死鳥가 되고 싶다… 전경련 회장 되는 게 꿈”
⊙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하고도 잇단 스캔들로 구치소행
⊙ 마이클 잭슨·알 왈리드 왕자·조지 소로스에 이어 넬슨 만델라까지 동원
DJ에게 ‘팽’당한 후 이회창씨 진영에 들어가려다 거부당해
1.03평 구치소에서 재기 다짐… 정치쪽엔 눈 안 돌리겠다

▲최규선 썬텍·썬코어 회장이 월간조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규선(崔圭善) 썬코어·썬텍 회장(56)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무렵이다. 당시 그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새정치국민회의 권노갑(權魯甲) 고문 사무실에 있었다. 권 고문은 한화갑(韓和甲)씨와 함께 ‘투갑스’로 불리며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이름에 똑같이 갑() 자가 들어간 것을 언론이 영화 〈투캅스〉를 본떠 지어 준 별명이었다.

동교동계 좌장이던 권 고문 방은 조선일보 정치부 여당 출입기자였던 내가 반드시 체크해야 할 장소였다. 당시 최규선씨가 1997년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공을 세운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나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분명한 것은 권 고문 사무실과 그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기자들이 내 인생 망쳐”

그 후 나는 사회부로 복귀했고 최씨는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됐다. 한국의 5대 게이트 중에 하나라는 ‘최규선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그런 그와 처음 대화한 것이 16년이 지난 올 6월이다. 최씨는 언론에 원망이 많았다. 최규선 게이트는 최씨 운전기사의 폭로로 시작됐으나 단초를 연 것은 조선일보였다.

한 기자와 나눈 이야기가 대서특필됐기 때문이며, 김대중 대통령의 격노(激怒)를 부른 것은 동아일보 기자가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비무장지대(DMZ)에서 평화 콘서트를 열 것이라는 사실을 김 대통령이 발표하기 전 터뜨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한참 언론을 원망하더니 ‘평생 소원’이라며 색다른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조선일보에서 90년사()를 보내 왔어요. 왠줄 아세요? 제가 조선일보 1면에 많이 등장했다는 거예요.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조선일보는 저를 항상 악당(惡黨) 취급만 합니다. 조선일보가 절 악당으로 만들었으니 인터뷰를 해 줬으면 합니다.” 그의 과거 보도를 살펴보니 제대로 된 것이 없이 대개 추측 수준이었다.

인터뷰를 수락하자 그는 불교도처럼 두 손을 합장(合掌)하더니 여의도 전경련회관 17층에서 만나자고 했다. 사무실이 전경련회관에 있다는 것이었다. 약속 당일 그곳으로 가니 ‘케이티롤’이라 불리던 회사 이름이 ‘썬텍’으로 바뀌어 있었다. ‘선코어’가 아닌 ‘썬코어’에, ‘선텍’이 아닌 ‘썬텍이었다.


— 썬코어, 썬텍의 ‘썬’이 최규선의 ‘선’입니까.
“케이티롤이라는 사명(社名) 6월 말에 변경했어요. 최규선의 ‘선’일 뿐 아니라 태양(Sun)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태양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잖아요.

— 밖에 있는 경호원이 건달 같아 보이는데.
UFC 무제한급 챔피언 출신인데 성격은 무지 착합니다.

— 최 회장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온통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王子) 이야기뿐이더군요.
“왕자님(최 회장은 항상 그를 이렇게 불렀다)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이에요. 마이클 잭슨이 소개해 줬습니다. 1997 11월에 IMF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두 사람이 우리나라를 살렸습니다. 12월에 마이클 잭슨이 내한해 김대중 대통령 손을 들어 줬고 알 왈리드 왕자가 내한해 ‘한국에 투자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한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의 물꼬를 텄지요.

— 알 왈리드 왕자가 그때 얼마를 투자했습니까.
2억 달러요. 당시 환율로 3000억원가량 됐습니다. 제가 최규선 게이트로 ‘의왕대학원’을 다녀온 뒤 이라크 쿠르드 유전사업에 진출했을 때도 왕자님이 도와주신 겁니다.
 


“왕자님은 삼성전자 투자하려 했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대우 투자 권유”

▲사우디의 알 왈리드 왕자는 지금 최규선씨를 지지해 주는 가장 큰 배경이다.
 

— 당시 알 왈리드 왕자가 한국의 어느 기업에 투자했습니까.
“왕자님은 삼성전자에 투자하고 싶어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 주가가 4만원 정도 했어요. 지금 삼성전자 주가가 140만원을 넘으니 삼성전자 주식을 사 놨더라면 대박이 났겠지요.

—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께서 ‘대우에 투자시키라’고 해서 대우에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 왕자가 쫄딱 망했겠네요.
“김 대통령께서 ‘삼성은 우리를 그간 도와준 것이 없다’고 하셨어요. ‘김우중(전 대우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된다’는 말도 하셨고요.

— 알 왈리드 왕자가 원망하지 않던가요.
“왕자님은 별말 없으신데, 아직도 주변 인사들이 수군댄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 알 왈리드 왕자가 ‘최규선 게이트’를 모릅니까.
“다 소상히 아시죠. 최규선 게이트 때 선처를 부탁하는 탄원서도 내 주셨는데요.

— 그런데 왜 알 왈리드 왕자가 최 회장을 아직도 믿나요.
“글쎄요 …. 왕자님과 저의 지난 20년 우정을 돌이켜 보면 카르마(KARMA : 운명이라는 불교용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겠네요. 저는 남녀뿐만이 아니라 남남(男男)관계에 있어서도 천생연분이 있다고 믿습니다.

— 지금 알 왈리드 왕자와 최 회장이 하는 사업은 구체적으로 뭡니까.
“제다 프로젝트.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 1008m 높이의 200층 건물을 짓는 ‘킹덤타워’와 그 주위에 두바이 3배 규모의 ‘킹덤시티’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알 왈리드 왕자가 왜 그런 고층 건물을 짓는 겁니까.
“그분은 자기 생애의 마지막 역작(力作)으로 킹덤시티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지요. 제다를 중동의 관광허브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제다 아시나요?

— 들어보기만 했습니다.
“사우디의 수도가 리야드인데 제다는 구() 수도입니다. 이슬람 최고의 성지인 메카와 차로 30분 거리고요. 홍해(Red Sea)와 인접해 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한국의 저뿐 아니라 중국 투자도 끌어올 계획인데 저를 대 중국 연결고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알 왈리드 왕자 역시 중국에 투자한 금액이 많지요.?
“뱅크 오브 차이나(BOC) 30억 달러, 프랑스에 있는 유로 디즈니에 이어 최근 개장한 상하이(上海) 디즈니에도 지분을 갖고 계십니다.

— 그렇다면 중국에도 요인(要人)들을 많이 알고 있을 텐데 왜 최 회장을 개입시켰습니까.
“중국 시티뱅크 회장이나 BOC회장 등을 물론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중국인도 아니고 중국통도 아닌 이 최규선이에 의해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해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리셴녠 중국 전 주석 딸 통해 리커창 총리 접견 기회 잡아”

 

5 16일 알 왈리드 왕자가 4시간 동안 한국에 체류한 뒤 최 회장과 함께 중국으로 갔지요?
“저를 위해 일부러 들르신 거예요. 중국 권력의 심장부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도 국빈 면담장소인 자광각(紫光閣)에서 리커창 총리, 왕이 외교부장을 만나셨습니다. 저도 참석했습니다.

— 아까 최 회장 스스로 말했듯이 중국통(中國通)도 아니면서 그런 자리를 마련한 비법이 뭡니까.
“왕자님의 말씀이 있으신 후 작년 8월부터 제가 중국에만 38번 들어갔습니다. 제가 리셴녠(李先念) 전 국가주석의 따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도움이 컸습니다.

— 중국에서는 ‘최규선 게이트’를 모르던가요.
“중국 측이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해 저에 대해 신원조회를 했는데 스캔들 관련 부분만 문서로 2~3페이지가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절 웰컴(Welcome)했습니다.

— 그럼 중국은 제다의 킹덤시티 어디에 투자하는 겁니까.
“킹덤시티가 총 1500만 평 규모인데 그중 100만 평을 차이나타운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 썬코어나 썬텍은 뭘로 돈을 벌고요.
“조명시설, 무인(無人) 모노레일, 전기 셔틀버스 등의 시행사(Developer) 자격이지요.

— 최 회장 관련 사업을 검색해 보니 제다 프로젝트 외에 국내에서 전기버스 사업도 하더군요.
“중국 BYD라는 회사가 전기차 분야에서 미국의 테슬라를 제치고 1등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K9이라는 전기버스를 도입해 시범 운영하려 합니다.

— 어디서 운행할 계획인가요.
“부산버스조합에서 올해 10대를 운행할 계획입니다. 내년에는 추가로 스무대를 더 들여올 예정이고요. 우리나라의 미세먼지로 인한 환경오염이 OECD 38개국 가운데 최악입니다. 전기버스를 더 들여와야 하는데 환경부 기준에 문제가 좀 있어요. 2시간 충전해서 60~80km를 달려야 환경부가 인증을 해 주는데 우리 K9 4시간 충전해서 300~500km를 주행할 수 있거든요.

— 전기버스 사업이 돈이 됩니까.
AS센터 운영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버스가 내연기관 버스보다 AS가 간단하고 비용 면에서 크게 절감됩니다. 서울에 내연기관 버스가 1만여 대, 부산에만 2500여 대가 운행되고 있는데 대체한다면 전망이 밝습니다.

— 그 버스를 사우디의 제다에서도 운행한다?
“이슬람 라마단이 7 5일에 끝나는데 이슬람은 라마단 이후 2주 동안 휴식을 취합니다. 제가 왕자님을 8월 초쯤 만나 사업계획을 발표할 겁니다.

— ‘최규선 게이트’를 기억하는 기업·단체장들이 최 회장의 버스를 선뜻 구매할까요.
“그래서 제가 명예회복을 하고 싶은 겁니다. 한국 사회는 한 번 실패하면 무조건 그 사람을 험담하고 부정적으로만 봅니다. 한 번 실패했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하면 외국에선 격려를 해 주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지요. 테슬라의 일런 머스크가 화성을 식민지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환호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누가 그런 소릴 했다면 바로 매도해 버렸을 겁니다. 또라이라고.


“최규선 게이트는 ‘결재권자’가 없는 이상한 게이트”

— 그 소리는 최규선 게이트가 억울하다는 뜻입니까.
“최규선 게이트를 사람들이 잘 몰라요. 최규선 게이트는 최규선과 김대중 대통령의 셋째아들 김홍걸씨가 스포츠토토 사업에서 타이거풀스라는 회사가 사업자가 되도록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사건 기록 어디에도 ‘누구에게 힘을 썼는지’가 안 나와요. 문체부 장관이나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이나 누구에겐가는 영향력을 행사해야 될 거 아니에요? 결재권자, 그게 없는 이상한 게이트였죠.

— 그렇게 억울하면 왜 26개월간 복역했습니까.
26개월이 아니고 2년이었어요. 당시 저는 청와대 인수위원회에서 나와 백수 상태였습니다. 타이거풀스를 운영하던 송재빈씨가 허주(虛舟·고 김윤환 의원)의 사위였는데 사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DJ재단 이사로 있는 이수동씨가 타이거풀스의 경쟁자를 지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이수동씨를 찾아가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데 조심하시라’고 한 적은 있어요. 김홍걸씨한테도 그 사실을 말했어요. ‘사실 이런 일이 있는데 당신이 얘기 좀 해라. 영향력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 그럼 타이거풀스에서 한푼도 안 받았습니까.
“받긴 받았지요. 주식으로 30억원어치.

— 그럼 게이트 맞네, 그 주식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다 휴지조각 됐지요.
“김홍걸씨 진짜 마이클 잭슨인가 확인하러 미국에 와… 그때부터 인연”

 

 

— 김홍걸씨와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1996년 미국 LA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마이클 잭슨을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조세형씨 같은 분들이 극구 반대했어요. ‘최규선이는 사기꾼’이라고요.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짝퉁 마이클 잭슨이 수십 명 있는데 최규선이가 짝퉁 가운데 한 명을 데려올 것이다. 그러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김대중 대통령께 직접 들었어요. ‘규선이 이런 이야기가 있네’라고 말해 주시더군요. 김 대통령께서는 제가 진짜 마이클 잭슨을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김홍걸씨를 보낸 겁니다.

— 최 회장 관련 기사가 제각각이더군요. 지금부터 주민등록 조사 좀 하겠습니다. 몇 년생입니까.
1960년생이요.

— 고향은?
“전남 나주입니다.

— 전남고를 중퇴했습니까.
“고3 초에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와 종로학원에서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 서반아어과에 들어갔습니다.

— 대학 3학년 때 미국으로 갔지요?
“위스콘신대로 갔습니다.

— 집안에 돈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선친께서 원래 복싱을 하셨어요. 목포사범학교를 나와 한국 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내시다 초등학교 교사가 됐고 나중에 교장까지 하셨어요. 재테크를 잘하셔서 나주에서 세금을 두 번째로 많이 낼 정도가 됐습니다. 땅을 사 놓은 것이 터미널 부지가 됐거든요.

— 복싱선수에서 교사로, 다시 갑부(甲富)로 대단하시네요.
“제 선친께서 이철승(李哲承) 전 의원과 함께 한국 반탁(反託)운동의 대가였습니다. 돈을 모으신 게 흥미로운데 당시 월급을 받으면 쌀을 사 놓으셨대요. 쌀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 논을 샀는데 그게 개발이 된 거죠.

UC버클리대에서 평화와 분쟁학을 전공했습니까.
“그게 정치학과에 소속된 겁니다.

— 석사·박사 학위가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말이 많던데.
“전 학사 학위밖에 없어요. MBC 2580’의 PD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주장한 겁니다. 사실 확인도 안 해 보고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만 한 거죠.


“스칼라피노 교수는 진짜 내 스승”

 

— 최 회장이 스승이라고 주장한 스칼라피노 교수도 사실은 스승이 아니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내 참, KBS가 한국에 온 스칼라피노 교수에게 던진 첫 질문이 ‘최규선씨 박사 학위가 있습니까?’였어요. 스칼라피노 교수께서 게이트 때 탄원서를 제출하셨으며 그 탄원서 내용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또한 지난 2010년 스칼라피노 교수님의 회고록인 《신동방견문록》을 제가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이때 교수님께서 서문을 써 주셨고, 그 서문에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 일부 보도를 보니 최 회장이 스칼라피노 교수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알고 미리 한국으로 와 스칼라피노 교수가 묵을 호텔의 옆방을 잡아 놓고 우연히 만난 것처럼 했다더군요.
“아주 소설을 쓰라고 하세요.

— 최 회장이 마이클 잭슨을 알게 된 게 아들에게 색동옷을 입힌 뒤 마이클 잭슨 집 주변에서 1주일을 서성대자 마이클 잭슨이 불쌍하게 여겨 만나 줬다는 보도도 봤습니다.
“마이클 잭슨 집 주변에는 1년 내내 미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제가 서성댄다고 눈에 띄겠습니까? 그리고 애를 데리고 기다렸다니, 제가 아동학대자입니까? 그보다 더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내가 경복궁 배경으로 양치질한다는 헛소문까지 버젓이 보도”

 

— 뭡니까, 그게.
“채널A에 톱텐 뉴스라고 있는데 우연히 제가 그 방송을 보다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경복궁 앞에서 잠옷차림으로 양치질을 하면서 사진을 찍은 뒤 ‘이게(경복궁이) 우리 집이다’라고 허풍을 쳤다는 거예요. 코미디입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사의 씁쓸한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고요.

— 또 어떤 보도에는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에게 차를 사 줘서 환심을 샀다던데.
“제가 차를 사 준 게 아니라 마이클이 제게 롤스로이스 팬텀을 선물했지요. 돈이 필요할 때 팔아 버렸지만.

— 그럼 마이클 잭슨은 어떻게 만난 건데요.
UC버클리대학에서 ‘약물남용 방지 교육(Drug Abuse Resistense Education)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주정부는 물론 LAPD(로스앤젤레스 경찰국)도 후원하는데 행사에 한국인으로는 제가 유일하게 참석했습니다. 기금을 모으기 위한 갈라 디너 행사가 LA 센트럴호텔에서 열렸는데 거기 마이클 잭슨이 참석했습니다.

— 그래서요.
“제가 마이클 잭슨의 광팬이었습니다. 1 때 처음 산 LP가 잭슨 파이브 시절의 ‘마리아’였어요. 마이클 잭슨이 앉아 있던 헤드테이블로 갈 수 있는 사람은 다 사전에 순서가 정해져 있어요. 제가 목이 빠져라 그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마이클 잭슨의 경호원이 제게 와 묻더군요. Are you korean?(너 한국인이니)’ 해서 맞다고 했더니 마이클 잭슨이 오라고 손짓을 했어요. 가자마자 마이클 잭슨이 이러더군요. I know how to spell Seoul.(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스펠링을 안다)’ 당시 미국사람들은 Seoul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마이클 잭슨 알게 된 것은 한국인 출신인 그의 형수 때문”

▲IMF 당시 방한한 세계적인 거물 투자가 조지 소로스 회장이 김포공항에서 최규선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마이클 잭슨은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형수, 즉 제키 잭슨의 아내가 한국에서 입양된 분이었대요. 마이클 잭슨이 어렸을 때 그 형수가 어머니처럼 마이클에게 잘 대해 줬다고 합니다. 형수가 돌아가셨는데 그리움이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마이클은 경호원에게 제 연락처를 적어 놓으라고 했어요. 그로부터 두 달 뒤 저희 가족을 샌타바버라에 있는 ‘네버랜드’(Never Land ; 피터팬에 나오는 늙지 않는 낙원이라는 뜻)로 자기 생일파티에 초대했고요. 모든 비용까지 부담해 가면서요. 그게 1989년의 일입니다.

— 마이클 잭슨의 생일파티는 어떤가요.
“영화배우 말런 브랜도, 소피아 로렌부터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거성(巨星)들이 다 모였어요. Dreamworks SKG에서 지금도 활발히 활약하고 있는 데이비드 게펜(David Geffen), 제프리 카젠버그(Jeffrey Katzenberg) 등도 있었어요. 네버랜드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으면서 황홀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게 내린 은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 후론 어떻게 마이클 잭슨의 환심을 샀습니까.
“독서광인 마이클에게 한국 관련 책들을 보내 줬지요. 탈춤·민요·승무(僧舞) 같은. 책을 보내 주면 항상 비서실장을 통해서 고맙다는 편지가 왔어요. 그게 인연이 돼 1996 10 2일 잠실운동장에서 역사적인 마이클 잭슨 공연이 열리게 된 겁니다.

— 알 왈리드 왕자나 조지 소로스를 소개해 준 것도 마이클 잭슨이라면서요.
“소로스는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서 소개받았어요. IMF가 터졌을 때 소로스가 한국에 오느냐 마느냐가 관심거리였습니다. 그가 오는 게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에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거든요. 소로스는 원래 겨울 휴가차 스키 타러 갈 예정이었는데 한국에 왔습니다.

— 알 왈리드 왕자는 어떻게 소개받았습니까.
1995년이었습니다. 왕자님의 하나뿐인 아들 칼리드가 마이클의 팬이었는데 자기의 생일파티 때 마이클을 초대해 달라고 왕자님을 조른 겁니다. 왕자님은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당시 ‘팝의 황제’로 불리던 마이클 잭슨을 왕자님 소유의 LA 포시즌스 호텔에서 아들 칼리드와 친구 몇십 명을 불러 파티를 열었으며 마이클 잭슨이 잠깐 참석해 생일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왕자님도 처음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는 한국의 현대나 동아건설 같은 회사의 브로커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마이클이 절 소개시켜 줬을 때 왕자님이 한 첫마디가 ‘너 직업이 뭐냐(What do you do?)’였어요. ‘학생’이라고 하자 ‘아주 재밌네(So funny)’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현대나 동아도 안다’라고 하셨어요. 그때 왕자님은 한국의 IMF를 예견했습니다. 한국에 투자할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지금은 아니라면서 ‘한국이 세계 경제 동향에 안이하게 대처한다’고 했어요.

— 알 왈리드 왕자와 마이클 잭슨이 마지막엔 안 좋게 헤어졌지요.
“왕자님께서 2억 달러를 투자하고 마이클은 자기 콘텐츠를 제공하는 합작사업을 했는데 틀어졌어요. 마이클은 밤낮이 바뀐 경우도 있고 취침 시간이 일정치 않았어요. 그래서 왕자님 전화도 여러 번 놓쳤다고 합니다. 통화가 돼도 잠결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요. 왕자님은 철저한 비즈니스맨이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인격적으로 모욕 받았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왕자님이 제게 그러더군요. ‘최, 마이클은 사업가가 아니라 꿈을 꾸는 사람이야’라고요. 마이클이 정도 많고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졌지만 제겐 왕자님이 절실히 필요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미 고인이 된 마이클에게 무척이나 미안합니다.


1982년 미국 망명 시절 김대중 대통령 처음 만나”

 

— 마이클 잭슨과 알 왈리드와 소로스와의 인연은 알겠고 김대중 대통령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1982년 위스콘신대학에 다닐 때 DJ 어르신(최 회장은 DJ를 꼬박꼬박 DJ 어르신이라고 호칭했다)께서는 미국에 망명 중이었습니다. 그분 강연에 갔는데 ‘내 시대는 갔다. 이제는 여러분의 시대가 왔다’는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손을 들고 ‘선생님, 대한민국 역사의 발전을 위해 꼭 대통령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했어요.

DJ의 기분이 매우 좋았겠네요.
“당시 문동환 목사께서 함께 있었는데 강연이 끝나고 저를 부르시더군요. ‘자네를 보자고 한다’면서. 그 자리에 안기부 요원들도 있었는데 그런 발언을 한 절 보고 ‘자네 용기에 놀랐다’며 좋아하셨어요.

DJ가 최 회장을 항상 ‘자네’라고 불렀습니까.
“호칭이 달라졌어요. 최군, 최동지, 최보좌역으로 부르다가 나중엔 ‘규선이’라고 하셨죠.

— 그 이후 DJ와 어떻게 인연을 이어 갔습니까.
“미국에 계실 때는 워싱턴에 가서도 뵙고 1985년 한국으로 들어와 동교동에 가택연금됐을 때도 자주 찾아뵀어요.

— 경찰이 들여보내 주던가요.
“누구냐고 묻길래 ‘미국 유학생’이라고 하니까 문을 열어 줬어요. 1991년 대선을 1년 앞두고는 마이클의 어머니인 캐서린 잭슨이 서울에 오셨는데 제가 여기저기 구경시켜 드렸고요. 가수 이선희씨도 만났으며 그때 DJ 어르신께서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캐서린 잭슨은 인권운동가라고 호감을 가졌어요.

— 그럼 1997년 대선 직전까지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이우영상이라고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관여했습니다. 짐 캐리가 주연한 〈마스크〉라는 영화도 들여왔고요.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사장과도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 어르신께서 절 호출하신 겁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딸과 사위도 내가 초청”

— 마이클 잭슨, 알 왈리드, 조지 소로스의 힘으로 DJ가 대통령이 된 셈인데 왜 쫓겨났습니까.
“그뿐 아니라 몇 명 더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딸과 사위를 한국으로 부른 거지요. 넬슨 만델라는 DJ 어르신께 오랫동안 자신이 차고 다니던 시계를 선물했고 DJ께서는 만델라에게 당신께서 미국 망명 기간 내내 애용하셨던 낡은 손가방을 선물했습니다. 세계적인 인권운동가, 세계적인 투자가, 세계적인 팝가수가 다 DJ 어르신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신 겁니다. 제가 몇 가지 잘못을 했어요. 삼성 이건희 회장을 뵙고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삼성자동차에 투자하라는 역할을 제가 했거든요. 왕자님을 뵈러 사우디의 리야드에 갈 때 한남동 이 회장 자택으로 가 친서도 받았어요. 삼성 전용기도 이용했고.

— 그 뒤 삼성을 위해 브루나이로 갈 때도 삼성 전용기를 탔죠.
“브루나이에 갔다 오니 사직동팀에서 절 불렀어요. 사직동팀은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는 곳인데 왜 절 부르나 궁금했어요. 그와 동시에 최재승 의원이 급히 보자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만나 보니 최 의원이 제게 ‘규선아, 너 이제 죽었다. (김대중 정부가) 재벌개혁 한다는데 넌 이건희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라며 ‘너는 이제 골로 갔다’고 했어요.

— 어떻게 보면 DJ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인데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저처럼 권력의 정점으로 들어간 사람도 없을 겁니다. 대통령께서는 항상 절 제일 먼저 찾으셨어요. 그러다 보니 동교동계 사람들도 절 미워했지요. 처음에는 대통령께서 절 비판하는 목소리를 전부 막아 줬습니다. ‘정치바닥은 냉혹하다’는 조언도 해 주시고 ‘자네(최규선)가 나보다 훌륭한 점이 많다’며 다른 사람이 있는데도 드러내 놓고 칭찬도 해 주셨습니다.


“삼성 전용기 2번 이용한 게 눈밖에 나게 된 이유”

DJ의 눈밖에 나게 된 데는 삼성그룹의 전용기 이용뿐 아니라 다른 사건도 있었지요.
“왕자님과 소로스의 방한과 관련해 시사저널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 DJ께서 불쾌해했습니다. ‘공은 나한테 돌려야 하네’라고요.

— 그러다 결정타가 된 게 마이클 잭슨의 DMZ 공연이었죠.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얘기한 게 1면 톱으로 보도됐어요. 북한 어린이돕기 공연을 할 거라는. 얼마나 쇼킹한 뉴스였는지 북한 방송에서 그날 저녁 반응을 보였을 정도입니다. 그때 대통령께서 불같이 화를 냈어요. ‘내 귀에 수십 번 말이 들어와도 자네를 옹호했는데 동아일보 기사가 뭔가. 자네 나의 3단계 통일론을 읽어 본 적이 있나. 남북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이 북에 대해서 뭘 알아’라면서요. 그 일이 있기 직전에도 절 험담하는 보고서가 자주 전달됐다고 들었습니다.

— 요지는 DJ가 ‘한 건’하려다 놓치니 화를 낸 거네요.
“뭐, 그건 ….

— 최 회장을 험담하는 보고서에는 무슨 내용이 있었습니까.
“제가 루이 13세만 마신다, 여자 연예인을 만나고 다닌다, 도로에서 경광등을 켜고 다니면서 위세를 부린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 미움받을 짓만 하셨네.
“결국 청와대에 들어가기로 다 돼 있었던 게 저만 못 들어가는 결과가 됐습니다. 청와대 다이어리, 수첩도 다 받은 상태였는데. 김중권 비서실장이 절 불러 제 나주 시절부터 싹 조사한 보고서를 보여주더군요. 그러면서 ‘1기에는 (청와대에) 못 들어가지만 2기에는 꼭 넣어 주겠다’고 절 달랬습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될 뻔하다가 막판에 좌초”

— 그때 들어갔다면 무슨 일을 맡기로 돼 있었습니까.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었죠.

— 지금도 후회가 됩니까.
“당시, 제가 뭘 모르는 상태에서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후회가 되지 않습니다. 그 길은 제가 갈 길이 아니었으니까요.

— 옆에서 지켜본 DJ는 정말 존경할 만한 정치인이었습니까.
“매사에 철두철미하셨습니다. 극한의 자기 절제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저에게 독서의 중요성도 가르쳐 주시고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애증(愛憎)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제 눈에 비친 국민회의의 내부 모습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당 운영은 너무나 독재적이었습니다. DJ 어르신 앞에서는 전부 두 손을 모으고 있고 그분을 신성시(神聖視)했습니다. 제가 그런 데 적응 못해 회의 때 혼난 적도 있어요.

— 왜요.
DJ께서 말하면 다들 받아적는데 저만 안 적었거든요. DJ께서 그게 못마땅하셨는지 ‘왜 자네는 메모를 안 하나’라고 하시더군요. 전 ‘필요한 건 다 적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런 모습도 보기 못마땅하셨을 겁니다. 게다가 이상한 사람도 많았고.

— 누가 이상합니까.
“실명으로 말하긴 그렇고 대북 관련 장관을 지낸 분인데 아무리 봐도 이쪽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피아(彼我) 구분이 안 된다고 할까?


“권노갑 고문이 마지막으로 불러 ‘우리와 인연 끊자’ 통보”

— 여하간 여러 실수로 DJ에게 ‘팽’당한 건 맞지요.
DJ 어르신께서 ‘외국에 나가 있어라’라고 했어요. 너무 억울해 일본에 있던 권노갑 고문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문 편집장이 절 본 게 그때일 겁니다. 권 고문 사무실에 나갔거든요. 재기하나 싶었는데 2001 1월경 눈이 엄청나게 내리던 어느 날 권 고문이 평창동 자택으로 절 부르더군요. ‘대통령님 지시인데 홍걸이와의 관계를 끊어라. 우리하고도 인연을 끊어라. 정치하려고 해도 우리 당에서는 공천을 안 주니 포기하라’는 요지의 말을 들었습니다. 대통령의 직접 메시지라면서요. 권 고문은 홍걸씨에게도 당부했어요. ‘홍걸이 너도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내 사주 보니 정치와는 안 맞아”

▲사우디 리야드에서 최규선 회장과 밥 호크 전 호주 수상, 알 왈리드 왕자가 대화하고 있다.

 

— 그 소리만 하고 내보내던가요.
“몇 푼의 돈을 쥐여주더군요. 그간 고생한 대가였겠지요.

— 액수가 얼마나 됐나요.
“그걸 밝히긴 그렇고 그 돈으로 선산(先山) 땅을 샀습니다. 전남 영암에. 그런데 그게 또 언론에 나온 거예요. ‘불법으로 묘지를 조성했다’고.

DJ당에서 쫓겨나 이회창씨 진영으로 가려 했었죠.
“너무 열을 받아 윤여준 의원과 당시 이회창 총재 특보를 하던 유승민 박사를 만났습니다. 유승민 의원이 위스콘신대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이회창씨 진영에서 여러 가지를 검토해 보더니 ‘노(No)’라고 거절하더군요.

— 그리고 최규선 게이트가 터졌고.
“의왕대학원 1.03평 구치소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나 자신을 잃어 버리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종이에 내가 잃은 것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적어 봤어요. 결론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게 더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재기할 수 있다’고 마음먹게 됐어요.

— 돈을 얼마나 벌고 싶습니까.
“전후 이라크 재건사업으로 1700만 달러를 벌었는데 10배는 더 벌어야죠.

— 앞으로의 꿈이 뭡니까.
“전경련 회장이 되는 겁니다. 보란듯이 재기할 겁니다.

— 혹시 사주(四柱)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의왕대학원에서 나온 뒤 조용헌씨 소개로 용하다는 명리학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저는 센 물이기 때문에 흙땅(정치권력)을 치면 흙탕물이 된다고요. 흙은 권력인데 제가 흙탕물로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어요? 정치하지 말라는 소리지요.”⊙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2016.08.05. 44년 전 ‘8·3조치’서 배울 점…시장원리 벗어난 빚 탕감은 곤란

▲1972 8 3일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공포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낙선 상공부 장관, 태완선 부총리, 남덕우 재무부 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 [중앙포토]

 

1972 8 2일 밤 11 40. 당시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근는 굳은 표정으로 대통령 긴급명령을 공포했다.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15호’, 이른바 8·3 사채동결 조치(이하 8·3조치).

 

▲박정희 정부의 기업 사채 동결 조치를 다룬 1972 8 3일자 중앙일보 1. 기사는 당시 30대 초반의 중앙일보 경제부 기자였던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장이 썼다.

 

박정희 대통령의 밀명을 받아 김용환 당시 청와대 외자담당 비서관이 1년간 비밀리에 추진한 8·3조치는 시장경제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법적 결정이었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8 3 0시를 기해 기업이 쓴 사채 이자를 월 1.35%( 16.2%)로 내리고 상환 날짜는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으로 조정한다.’ 당시 시중 사채 금리는 연 40~50%였다.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형식을 빌려 기업의 사채 이자 부담을 3분의 1로 줄여준 셈이다. 1970년대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15%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무이자 특혜였다

 

▲1972 8·3조치가 발령된 날, 은행 앞에 모인 시민들이 안내문을 읽고 있다.

 

8·3조치로 드러난 지하경제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사채 자진 신고기간(72 8 3~9)에 접수된 사채 건수는 4677, 액수로는 3456억원이었다. 당시 통화량의 80%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5월 말 기준 국내 통화량(M2) 23128000억원. 지금으로 따지면 1840조원의 사채가 지하에서 돌고 있었던 셈이다. 사채에 짓눌려 있던 기업, 특히 대기업에 8·3조치는 ‘희년(year of jubilee, 禧年)’과도 같은 것이었다. 희년은 50년마다 죄를 사면하고 빚을 탕감해주는 옛 이스라엘의 의식을 말한다.

‘과다 차입’ 파산 몰린 기업 살리기
시장경제서 유례 없는 극약처방
경기는 띄웠지만 후유증도 심각
구조조정 원칙, 청산→연명 전환
부채 탕감 논의 정치권은 기억해야

 빚만 탕감받은 게 아니다. 박정희 정부는 사채 동결 조치와 함께 2000억원이 넘는 긴급자금을 시중금리의 절반도 되지 않는 8% 이자로 기업에 공급했다. 현재가치로 치면 40조원(44년간 평균 7% 금리를 복리로 계산)을 수혈한 셈이다. 기업들은 시쳇말로 죽다 살아났다

 

▲1972 8 9일로 예정된 사채 신고 마감일이 다가오자 사채를 쓴 기업과 사채권자들이 은행창구와 세무소로 몰려들었다.

 

8·3조치는 동결됐던 사채 상환이 마무리된 80 8 3일 사실상 해제됐다. 그러나 8·3조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8·3조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부실하고, 한국경제에 남긴 영향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본지가 44년 전 8·3조치를 되돌아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8·3조치는 국가가 개인재산권을 침해하면서 특정 집단의 빚을 탕감해준 정책이었다. 반시장적이면서 동시에 친기업적 정책이었다. 8·3조치에 관여했던 고위 관료들은 훗날 한결같이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국내 기업들은 대규모 차관과 고리사채로 재무구조가 취약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 닉슨 대통령이 달러 약세를 노린 금 태환 정책 포기를 선언하면서 환율이 급등했고 국내 기업들은 파산 직전에 몰렸다. 결국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던 김용완 경성방직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사채 동결을 요청했고, 박 전 대통령이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 8·3조치였다.

 

성과는 있었다. 8·3조치는 국내 금융시장의 전환점이 됐다. 사금융이 양성화되면서 제2금융권이 탄생했다. 기업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직접금융시장도 본격적으로 열리게 됐다. 경기는 급반등했다. 72 7.2%였던 실질 경제성장률은 이듬해 14.8%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불가피론’을 내세운 극약 처방은 훗날 한국경제에 지울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다.

 

『대통령의 경제학』저자인 이장규 서강대 부총장은 “기업의 연쇄 도산 사태를 정부가 선제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막았을 뿐 아니라 그 뒤에 불어닥친 1차 오일쇼크도 견뎌냈고 중화학투자로 이어질 수 있었다”면서도 “시장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해 부작용이 두고두고 심각했다”고 강조했다. 8·3조치가 1998년 외환위기의 씨앗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퇴출당했어야 할 부실기업이 관치금융의 그늘 속에서 차입경영을 지속했고 정경유착과 재벌체제가 구축되면서 위기 대응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위기가 오면 정부가 살려준다는 모럴 해저드가 시장에 뿌리깊게 박힌 계기가 됐다는 지적도 있다.

 

더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대통령을 찾아가 “고리사채로 기업이 다 망할 판”이라고 읍소하던 대기업 경영자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당시 신고된 사채 중 1137억원(33%)은 기업주가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 사채놀이를 한 돈이었다. 위장 사채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에 대한 조치와 처벌을 미뤘다. 기업들은 환호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기업 오너의 위장사채나 부동산 투기 등은 처벌했어야 했다”며 “결국 기업가들은 정부와의 관계에 따라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지적했다

 

 

44년 동안 한국경제는 상전벽해로 변했다. 그러나 정부·정치권의 인식은 8·3조치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8·3조치를 발표하기 전 몇 해 전 박정희 정부는 강도높은 부실기업 정리, 즉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원칙은 단호했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기업은 청산하고 재기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재무구조를 개선시켜 살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8·3조치로 구조조정의 원칙은 무너졌다. 이후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은 부실기업 청산보다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연명시키는 방향으로 흘렀다. 최근 진행중인 조선업 구조조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위 관료 몇 명이 비밀리에 청와대 서별관에 모여 나라의 큰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44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부채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말 현재 가계부채는 1224조원에 달한다. 역대 정부는 수차례 가계부채 대책을 내놨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일까. 최근 정치권에서는 부채 탕감 얘기가 스멀스멀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 때 부채 탕감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탕감으로 부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많은 후유증과 부작용을 남긴다는 것을 8·3조치는 말해준다.

 

 박태균 교수는 “경제개발 초기였기 때문에 8·3조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지만 시장원리를 정상적으로 적용하면서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방안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위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교훈 삼아 시장 원칙에 근거한 정책 결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2016.12.05 고(故) 김계원(金桂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 생전 인터뷰

『김재규는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다 내 방을 한참 바라보았다』

편집자注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자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장면인 1979년 ‘1026’을 지켜본 김계원(金桂元•93)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12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김 전 실장은 1026 발생 직후 비서실장으로서 직분을 다했다는 입장이었으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내란 목적 살인 등을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아 1980년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몇 차례 감형을 거쳐 1988년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됐다. 1923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김 전 실장은 연희전문학교와 군사영어학교(1)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육군 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월간조선》은 김 실장을 두 차례 인터뷰했다(1987 9월ㆍ2005 12). 김 전 실장은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벌어진 ‘1026’의 그날 밤 상황을 두 번째 인터뷰에서 상세히 설명했다.《월간조선》2006 2월호에 보도된 두번째 인터뷰 기사를 전재(全載)한다.

10·26 일주일 전 朴대통령이 실연(實演)을 했다. 식사 중에 朴대통령이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테이블 밑에 누워 나를 쳐다봤다』

■『(궁정동 시해 현장에서)내가 김재규의 손을 쳐서, 권총이 불발됐다. 그 권총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다. 전방 근무시절 그걸 알았다. 10·26 당시 내 말을 믿지 않아 진술하지 못했다』


■『내가 심문받던 옆방에서 김재규가 고문받는 소리,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형받으러 나가는 김재규가 천천히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내 방을 바라봤다』


■『쿠데타를 할 군()병력은 차지철이 보유하고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차지철의 심복이었고,(차지철이) 하나회다 뭐다 뒷돈을 대주었다. 김재규는 쿠데타할 능력이 없었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
1923
년 경북 영주 출생. 연희전문학교 졸업. 육군 참모총장(대장), 중앙정보부장, 駐대만총영사관 대사,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現 원효실업 회장.

 

▲ 사진설명: 《월간조선》 1987 10월호에 실린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첫 번째 인터뷰 기사

 

꿈틀꿈틀 살아나는 궁정동 현장

  

김계원(金桂元·83) 前 청와대 비서실장은 1979 10·26 당시 궁정동 만찬장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생존자다. 이후 무려 27년이 흘렀지만 10·26은 현대사의 모진 미스터리로 여전히 살아 있다. 2005 1월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개봉된 뒤 10·26은 또다시 숱한 화제와 논란을 낳았고, 결국 송사(訟事)로 이어졌다. 朴대통령의 아들 지만(志晩)씨는 영화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金 前 실장은 1987 916일 월간조선과 만나 朴대통령의 마지막 순간을 처음으로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18년이 흐른 뒤 다시 월간조선 기자와 만났다.


 
간혹 金 前 실장의 근황이 언론에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토막소식 정도였고 어느 것도 그가 겪은 고통과 부채의식을 담아 내진 못했다.


 
그는 한 해가 저무는 지난 1228일 기자와 만나 작심하듯 기억을 다시 꺼냈다. 27년 전 궁정동 만찬장이 마치 살아난 듯 꿈틀꿈틀 재연됐다.


 
먼저 『「그때 그사람들」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金 前 실장은 『다 못 보고 15분 정도만 잠깐 봤다』며 『난 별로 흥미가 없어서 봐도… 옛날 회상을 하니 기분이 나빠서』라고 했다. 재차 『조금 본 인상은 어떠냐』고 묻자, 『아 글쎄, 조금 보다 그만뒀다니까』라고 손사래를 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기자는 10·26이 일어나던 해의 대통령 면담일지 복사본을 金 前 실장에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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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치 대통령 면담일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1979 6월에서 9월까지의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일지를 보면 대부분 車智澈(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 독대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또 배드민턴을 자주 치고 자유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차지철이 金실장보다 먼저 대통령과 만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경호 관계니까 차지철이 먼저 보고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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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실장이 보고할 때는 먼저 청와대 비서실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경호실장은 비서실의 허가가 없어도괜찮았어요』

  
 
대통령을 못 만나는 중정(中情)부장

▲金桂元 비서실장이 1978년 朴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고 있다. 金실장은 6년간의 駐대만 대사 생활로 인해 국내 정세에 매우 어두웠다. 이것이 비서실장으로서 金載圭와 車智澈의 권력투쟁을 조정·통제하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 자료를 보면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당시 정보부장과 만난 횟수보다 차지철을 만난 경우가 더 많아요
  (김재규가 대통령과 만난 경우가) 별로 없죠. 자꾸 (차지철이) 제한을 하니…』
  
  朴대통령에게 누가 먼저 보고하느냐는 것은 파워게임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하느냐와 상관이 있다. 차지철이 김재규의 대통령 접근까지 가로막은 전횡은 결과적으로 10·26의 불행한 씨앗을 낳은 셈이다


  -
그건 이상합니다. 대통령의 접근권은 의전수석이나 비서실장에게 있는데, 정보부장이 경호실장 허가를 받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대통령의 뜻이니…


  -
그게 바로 문제의 발단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어떨 때는 오히려 제가 답답해서 김재규에게 「꼭 대통령을 만나고 싶으면 내게 찾아오라」고 말해 만남을 주선한 일도 있어요


  -
金실장이 정보부장으로 계실 때도 경호실장이 대통령과의 접견을 막았습니까
 

金 前 실장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1969 10월부터 1970 12월까지 중앙정보부장(5)을 맡았고, 1971 2월 駐대만 대사로 임명됐다


  『아닙니다. 마음대로 대통령을 만났어요. 한밤중에 서슴없이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또 그래야 했고요. 그런데 비서실장을 맡고 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김재규는 경호실장 허가 없이는 일과시간에도 대통령과 접견할 수 없었어요』
  

  - 1979년 당시 대통령께서 지나치게 차지철에게 의존하려 한 것 같아요. 귀찮은 것은 모두 그에게 맡기고…
  『朴대통령께서는 당시 저하고 잡담이나 하며 지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뭐 일을 잘합니까. 駐대만 대사로 6년이나 외국에 나갔다 왔는데 저를 비서실장으로 기용했어요. 저를 곁에 둔 것은 그냥 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金載圭), 『그놈(차지철)이 자리가 없다고 나를 밀어 버렸다』

▲趙甲濟 기자가 보여주는 朴대통령 면담일지를 보며 당시를 기억해 내는 金桂元씨  

 

1026일 오전 1030분 청와대內 헬기장에서 석 대의 헬리콥터가 이륙한다. 헬기는 곧장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으로 날아갔다. 앞서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헬기에 동승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차지철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기분이 상한 김재규는 승용차로 직접 현장에 내려갔다.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진 않았다. 대신 이날 새로 건립된 KBS 對北 방송 송신소로 향했다. 거기서 金실장과 조우한다.


  -
김재규가 헬기를 못 탄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제게 전화를 해왔어요. 「가려고 했는데 그놈이 자리가 없다고 밀어 버려서 전 자동차로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 「밀어 버렸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떠밀어 냈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金부장은 청와대 헬기장에 오진 않았어요』
  

  - 그럼 金부장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지 못했겠군요.
『아닙니다. 가긴 갔어요. 삽교천엔 안가고 송신소에 갔어요. 그날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對北 송신소 개소식이 함께 열렸기 때문입니다』
  

   - 그 자리에서 김재규를 분명히 봤나요?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만났어요. (김재규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헬기에 못 탔으니까.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어요. 제가 朴대통령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차지철은 당시 경호실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김재규를 핍박해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나 저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밑에 꿇어 엎드리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軍수뇌부와 함께 한 車智澈 경호실장. 앞줄 왼쪽부터 黃汀淵 해군참모총장, 周永福 공군참모총장, 車智澈 경호실장, 李世鎬 육군참모총장, 陳鍾埰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은 차지철의 심복이었다

- 쿠데타할 생각은 없었다고 봅니까.
 『글쎄… 있었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김재규 하고 싸울 때 차지철이 (쿠데타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차지철이 쿠데타를 한다면 동원할 무력이라도 있었나요.
『될 겁니다』
 

  - 우선 청와대 경호실과 30단이 있을 테고….
  『그것 말고도 軍에 심복이 있었습니다. 全斗煥 장군도…. 「하나회」다 뭐다 뒤에서 돈 대준 것 아닙니까』
  

   - 비서실장 입장에서 보면, 당시 全斗煥 보안사령관도 차지철 밑에 있다고 보신 겁니까.
『네, 왜냐면 경호실 차장이니 뭐니 차지철이 갖다 놓은 것 아닙니까』
  

  - 차지철 밑에서 작전 차장을 한 게 노태우, 全斗煥, 김복동씨가 있었고 수경사령관도 차지철 사람이었습니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 당시 하나회 존재를 아셨습니까.
『그땐 몰랐습니다. 제가 불행한 것이 비서실장 하기 직전에 6년간 駐대만 대사로 갔다 와서 국내 사정은 전혀 몰랐어요』
  

   - 그 때문에 비서실장 자리를 고사하셨다지요.
『네, 못 하겠다고 하니 朴대통령이 「괜찮아.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줄 테니 걱정마라」 하시더군요』
 

  -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비서실장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줘야지, 왜 대통령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을까요.
『軍 시절부터 朴대통령과 관계가 있으니… 제게 그런 말씀하실 수도 있죠』
  

   - 朴대통령과 軍 시절 어떤 인연이 있나요.
『과거 朴대통령께서 보병으로 계셨는데 진급이 안 돼 소외되셨어요. 제가 미국 가서 포병학교 교육을 받고 오니 轉科(전과)를 하셨더군요. 그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는 있었어요. 고향이 같으니까. 포병으로 오니 반갑다고 했어요』
  

   - 군단 포병단장을 같이 하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선임이었습니다. 제가 포병감을 하고, 朴대통령은 군단 포병사령관을 하셨습니다』
  

   - 사실상 朴대통령이 직속부하셨군요.
『직속은 아니지만 방계라고 할까요? 그리고 제가 포병학교 교장을 하고, 그 다음다음에 교장을 하셨습니다』
  
  朴대통령이 宮井洞(궁정동) 나棟에 도착한 것은 오후 65. 궁정동은 중앙정보부장 공관 옆에 있는 비밀 식당으로 몇 달 전에 지어진 새 건물이었다. 만찬장에는 직사각형 식탁이 있었다. 식탁 안쪽에 朴대통령이 혼자 앉았고 그 맞은편엔 김계원, 김재규가 착석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왼쪽 측면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대화가 부마사태, 金泳三씨 문제, YH사건 등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김계원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TV를 켜는 등 애를 썼지만 되레 험악해졌다.
 


  『중정부장과 경호실장을 바꾸려고 했다』

 

  - 당시 상황을 보면 朴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김재규를 나무라는 자리였습니다.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나요
『그래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안 돼요. 그래서 TV를 틀라고 했어요. 「삽교천 행사 뉴스가 나올 겁니다」라고 대통령께 말씀드렸어요』


  -
뉴스를 보고서도 또 이야기가 그 쪽으로 흘렀지요. 왜 그런가요. 朴대통령이 화가 많이 났습니까.
  『차지철이 자꾸만 바람을 넣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계속돼야만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니…』
 

  - 따지고 보면 죽은 자리를 朴대통령과 차지철이 만든 셈입니다. 계속 김재규가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나요.
『네, 사실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데… 낮에만 해도 (朴대통령의) 기분이 좋으셨는데…』
  

   - 당시 법무장관이던 金致烈(김치열)씨 이야기를 잠깐 할게요. 10·26이 있기 며칠 전 그가 朴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불려갔다고 해요. 대통령이 시국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정보부장으로 내정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1026일 발령이 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김재규는 자신이 물러날 줄 알고 그날 「결행」을 한 것은 아닐까요? 당시 실장께서 김재규에게 人事(인사) 이야기를 하셨나요.
『그런 얘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내심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자리를 바꾸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기회가 오면 朴대통령에게 건의하려 했지요. 하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 김재규에게 혹시 인사가 날 거라고 정보를 준 사람은 없었을까요.
  『글쎄요. 절대 그런(인사)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요』
  

   - 인사에 대한 느낌은 받았나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재규도 그 자리가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시해할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나 쿠데타 계획이 있었다면 저에게 귀띔 정도는 했을 거라고 믿어요. 김재규, 前 국방장관 李鍾贊(이종찬·1916~1983), 朴대통령, 저 이렇게는 정말 가까운 사이입니다』
  

   - 5·16 이전의 말씀이지요.
  『네, 심지어 여자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할 정도예요. 김재규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면 먼저 제게 귀띔했을 겁니다』
  
  만찬석상에서 시국수습 방안을 두고 朴대통령과 차지철에게 혼이 나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金 前 실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재규가 그날 뭔가 달랐다면, 그 자리에 권총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물도 아니고, 총을 가져오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식당 2층 자신의 사무실에 얼마든지 총을 숨겨 놓을 수 있었을 텐데 뭐하러 허덕거리며 옆집에 갔을까요?』라고 했다.
  
  김재규는 당시 만찬장을 빠져나와 50m를 걸어 인근 본관으로 갔다. 식당으로도 쓰이는 1층 회의실 문을 여니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2차장보가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눈 김재규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책장 선반 뒤에 감추어 두었던 권총을 꺼내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김재규는 자포자기 심정에서 朴대통령 사살』

   

- 시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권총을 지녔을 텐데, 도중에 권총을 가지러 간 게 이상하긴 해요.
  『그렇지요. 처음에는 계획이 없었다고 봐요』
  
  그날 저녁 740분쯤 김재규가 쏜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쪽 팔목을 꿰뚫었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김재규는 다시 朴대통령을 겨냥한다. 총알은 朴대통령의 가슴에 꽂혔다


  -
朴대통령이 총에 맞은 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피신했습니다. 왜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고 생각하나요.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순간, 「이젠 나는 죽었다. 이러나 저러나 차지철을 죽였으니 용서 못 받을 것이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 1탄과 2탄 사이에는 약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또 김재규가 차지철은 앉아서 쏘고 朴대통령은 서서 쐈습니다. 엉겁결에 차지철을 쐈는데, 朴대통령도 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시간차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김재규의 권총이 고장이 났습니다. 왜 불발이 됐나요.
『불발이 난 것은 제가 김재규의 손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 권총(독일제 월터PPK)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어요. 전방 근무 시절 경험이 있습니다. 권총이 나뭇잎에 걸려 불발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이 총은 테러용으로 못 쓰겠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쳤기 때문에 불발이 난 겁니다. 그런데 제 말을 믿질 않아 당시 말을 못 했어요』
  

   - 朴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고 「난 괜찮아」라고 하셨는데, 같이 있던 두 명의 아가씨(심수봉·신재순)에게 피하라는 뜻이었나요.
  『그것보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성들이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하니, 「나를 너무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 그때 朴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나요. 보통사람 같으면 몸을 피하려고 했을 텐데, 가만히 계셨습니다.
  『朴대통령께서 비스듬히 쓰러지셨는데 저는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1975 10월 영동-동해 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의 朴대통령.  

  
  「궁정동 피습」을 예감한 박정희(朴正熙)

  당시 만찬장 테이블 밑은 日食집처럼 다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파였다.
  
  10·26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인가, 朴대통령이 제가 보는 데서 實演(실연)을 했어요. 식사 중에 朴대통령께서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테이블 밑에 누워 저를 쳐다보셨어요』
  

   - 그런데 막상 일이 나자 피신하지 않고 조용히 계시니…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죠. 옆으로 누우셨지요』
  

   - 어쨌든 피하진 않으셨잖아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하게 돼 있거든요. 차지철은 도망갔고요. 朴대통령은 오히려 체념한 듯한 행동을 했어요.
  『사실 朴대통령 스스로도 자기가 총에 맞았다고 느끼지 못하셨을 겁니다. 통증보다는 뭐랄까… 정신적 쇼크가 더 컸을 거예요』
  
  김재규는 차지철과 朴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입힌 뒤 권총이 고장 나자 만찬장에서 뛰어나가 정보부 의전과장인 朴善浩(박선호)의 권총을 받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문갑을 잡고 피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복부를 향해 권총을 쐈다. 그러고 나서 식탁 왼쪽으로 돌아 50cm 앞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정분을 끊고」 朴대통령의 머리를 쏘았다.
  
  그러나 金실장은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이 총질을 해대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 金실장께서 비판받는 부분인데… 김재규가 총을 들고 들어왔을 때 문 밖에 있지 않았나요? 朴대통령 머리에 확인 사살할 당시 말입니다. 안에서 朴대통령을 보호해야 하는데, 밖에 계셨습니다.
  『당시 朴善浩가 김재규에게 현관에서 총을 주는 것을 본 것 같아요』
  

   - 덮쳐서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그때 대통령이 총에 맞았는지 잘 몰랐어요』
  

   - 차지철을 쏜 뒤 朴대통령을 쏴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시지 않았나요.
  『대통령이 쓰러진 것은 본 것 같아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기보다 식탁 밑으로 들어간 줄만 알았습니다』
  

   - 아니 그것보다 김재규가 총을 들고 있어 겁이 나 들어갈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있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朴대통령이 총에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金실장은 中情(중정) 요원이 모는 차의 뒷좌석에 朴대통령을 무릎 위에 비스듬히 누이고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갔다. 1987년 그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 朴대통령 체구가 아주 작고 가벼웠어요.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서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죠. 처음엔 좀 신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내 양복에 피가 많이 묻었는데 그것도 몰랐어요. 병원에 가서 얘기 들으니까 「이미 절명하셨습니다」 그래요>
  

   - 朴대통령을 안고 가시다가 숨이 넘어가는 때를 기억합니까.
  『몰랐어요』
  

   - 살아 있다고 봤습니까.
  『네』
  

   - 두 분의 키가 비슷하시지요.
  『네, 朴대통령과 제가 누가 크냐고 서로 물을 정도였습니다』


「육본(陸本)으로 오라」는 김재규 전화에 최규하(崔圭夏) 총리 벌떡 일어서 『갑시다

 

 - 朴대통령의 키는 164cm였어요.
  『제가 162cm인데… 저보다 크셨네요』
  

   - 10·26 당시 崔圭夏(최규하) 총리가 처음 청와대로 왔을 때, 「차지철과 김재규가 싸우다 김재규의 잘못된 총에 각하가 돌아가셨다」고 정확하게 말씀드렸나요.
  『네, 그렇게 알았으니까요』
  
  당시 朴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범행현장을 떠나 육본 벙커를 향한다. 그때가 저녁 85분쯤이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朴대통령 시해 사실을 듣고 1군과 3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한 뒤 국방장관·합참의장·해군총장·공군총장·연합사 부사령관 등을 육군 벙커로 오도록 연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金실장은 육본으로부터 걸려온 김재규의 전화를 받았다.
  

   - 崔총리와 몇몇 장관에게 육본으로 가자고 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재규가 육본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의심이 가능한 게 아닙니까. 김재규가 金실장에게 전화로 육군 벙커로 오라고 했을 당시 崔총리는 어떻게 했나요.
  『崔총리가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 「갑시다」고 했어요』
  

   - 당시 崔총리의 판단이 중요한데, 왜냐면 김재규가 범인인 줄 알았는데 김재규가 벙커로 오라고 해서 가겠다는 것은 좀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 김재규가 朴대통령을 쏘아 죽였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닙니까.
  『알았죠


  박근혜(朴槿惠),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

 

  - 알았으니, 김재규가 육본에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軍을 동원해 쿠데타를 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김재규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육본에 갔다고 하더라도 軍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봤어요. 또 내가 말하면 들을 것으로(쿠데타를 돌릴 것으로) 봤어요』
  

   - 金실장께서 朴槿惠(박근혜)씨에게 朴대통령 시해를 전했을때 반응이 어땠나요.
  『특별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朴槿惠를 보니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말을 못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라고 했어요』
  

   - 朴槿惠씨가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뜻이네요.
  『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은 당시 朴대통령의 有故(유고)만 밝힌 채 사건의 진상에 대해 함구했다. 金실장은 崔총리에게 『국가안보를 위해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힌 뒤 내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인을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金실장은 김재규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1029일 연행된 뒤 구속돼 김재규의 공범으로 발표되었다. 1979 1220일 「김계원 피고인」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종사 미수죄였다.
  
  1980 524일 새벽 김재규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金실장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했다.
  

   - 金실장에게 김재규가 깍듯하게 대했지요.
  『네, 김재규가 사형당하는 날 제 방 쪽을 한참 봤어요』
  

   - 그때 마지막 표정은 어땠나요.
  『복도가 어두워 표정은 못 봤습니다. 제 방 위치를 아니까 천천히 걸으며 이쪽을 봤어요』
  

   - 육군 구치소 안에서 만난 적은 없나요.
  『없어요. 간수가 한 명씩 붙어 있었으니까요』 
  

   - 김재규가 사형 당하러 가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나요.
  『전날 제 담당 간수가 「내일 아침에 갈 겁니다」라고 그래요. 밤에 잠이 와요? 그렇게 있으니 새벽에 웅성웅성 거려요』
  

   - 金실장은 그 당시 무기징역이 확정된 상태였습니까.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 사형선고 받은 뒤 얼마 만에 무기가 됐나요.
  『나흘인가 닷새 뒤에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사형수 상태로 며칠 있었죠』
  

   - 감형될 것이라고 예상했나요.
  『당시엔 제가 크리스천이니 기도만 했어요


  사형수(死刑囚) 생활

   

- 사형수의 느낌은 어떤가요.
  『글쎄요. 당시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죽을 때 내 모습이 어떨까. 총알이 내 이마를 뚫을까, 가슴을 뚫을까」라고 생각했지요』
  

   - 한국전쟁을 겪었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적었을 텐데….
『마찬가지예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누구나 똑같아요』
  
  金실장은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된 지 이틀 뒤 안양교도소로 이감됐으며, 1982 51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 李一順(이일순·당시 80세·1982 18일 사망)씨의 부고를 접해야 했다.
  

   - 조사를 받으실 때 고문을 당하셨나요.
  『직접적인 고문은 없었고 잠을 재우지 않았어요. 잠이 들라치면 깨워요』
  

   - 조사받을 때 김재규를 봤나요.
  『못 봤어요. 다만 고문당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또 우리 집사람 목소리가 옆방에서 났어요. (그 소리를 들으니) 아주 괴로웠어요. 집사람을 고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 김재규 소리가 많이 났나요.
  『네, 비명도 들리고』
  

   - 그때 간이 좋지 않았다는데… 김재규가 간이 안 좋아 제대로 집무를 못 본 사실을 압니까.
  『네, 그때 그런 얘기가 많았죠. 얼굴도 시커멓다 하고…』
  

   - 김재규가 軍장교 시절 자동차 추락사고가 났을 때, 그를 업어서 병원까지 데려갔었죠. 그 이후 가까워졌지요.
  『그렇죠. 그때부터 저를 은인으로 생각했어요』
  
  1960년 金桂元 당시 소장이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총장이던 김재규와 인연을 맺었다. 그 즈음 김재규의 지프차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金桂元이 중상을 입은 그를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신민당 전당대회

/육군보안사령관 시절의 金載圭.  

 

- 1979 5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중요한데, 全大 전에는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全大를 계기로 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나요.
  『비서실장으로 와 보니 둘 사이가 이미 나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두 사람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어요. 이미 청와대 비서실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신민당 全大에서 김재규의 對野(대야) 공작이 실패해 이철승씨 대신 金泳三씨가 총재로 당선됐어요. 그날 저녁 全大를 놓고 식사하면서 朴대통령이 신문지를 둘둘 말아 김재규 머리를 치면서 나무라셨다고 하던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실은 차지철도 공작을 했죠.
  『네, 제도 「朴대통령이 왜 저렇게 하실까」 하고 느꼈어요. 공작을 여러 사람에게 맡기니 혼선이 일었어요. 두 사람을 통하지 않고 朴대통령이 직접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야당 정치인을 불러 (공작을) 지시했어요』
  

   - 全大 이후 눈에 띄게 차지철이 김재규를 욕하고, 朴대통령도 김재규를 무능하다고 보는 것을 느꼈습니까.
  『그렇게 느끼진 않았는데… 성격상 두 사람은 안 되겠다,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빨리 바꿨어야 했는데….
『이틀 늦은 것 같아요. 삽교천에 다녀오자마자 바로 했어야 했는데…. 청와대 의전수석인 최광수에게도 몇 번 이야기했어요. 「요 다음에 대통령께 보고할 때 나도 하겠지만 너도 건의 드려라. 둘이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최광수를 믿고 좋아했어요.


  박정희(朴正熙)와 카터의 감정 폭발

신민당 全大 한 달 뒤인 629일 카터 대통령이 訪韓(방한)한다. 카터가 도쿄에서 김포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밤에 남의 나라를 방문한 것도 결례인데 보안상을 이유로 도착시간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바람에 朴대통령은 미리 나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인 630일 청와대에서 두 사람은 頂上회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국내 안보를 일방 강연하듯 쏟아 내며 카터를 무안스럽게 만들었다. 화가 난 카터는 옆자리에 앉은 밴스 美 국무장관에게 『이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는 이 방에서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써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 카터와 만났을 때 배석하셨죠.
  『네. 朴대통령이 우리 실정을 오래 말씀하셨어요. 15분쯤 하셨나요?
  

   - 15분이면 통역시간과 합쳐서 30분 정도는 되겠네요.
  『네, 「주한 미군철수는 안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 인권문제에 대한 지적은 없었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만날 때 많이 고민을 하시던가요.
  『그런 것 같아요. 혼자 방에서 골똘히 생각하셨어요』
  

   - 카터 대통령의 인상은 어땠나요.
  『무뚝뚝하고… 두 분이 서로 잘 안 맞았어요』
  

   - 「朴대통령 카터에게 엿 먹이는 구나」 하는 느낌을 받진 않으셨나요.
  『그렇게는 안 느꼈고… 「자기 열성을 다해 카터를 설득시키려고 애쓰시는구나」하고 생각했어요. 朴대통령은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반박하는 식이 아니었고 이해시키려 하셨습니다』
  

   - 그 자리에서 카터가 발언을 하지는 않았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어요』
  

   - 자기 고집은 좋은데 손님을 불러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잘못된 거지요. 술술 부드럽게 해야되는데…』
  

   - 우리 쪽에서 안 말렸나요.
  『대통령이 그렇게 하실 줄 누가 알았나요』
  

  - 그렇게 하려면 참모들하고 먼저 논의를 했을 텐데…
  『통역을 맡았던 최광수가 말을 부드럽게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을 겁니다』
  

   - 카터 등장 이후 미국이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로 압박해 오니 朴대통령이 꽁하고 벼르고 있지 않았나요? 마치 「너도 내 욕 많이 했으니 내가 할 이야기는 하겠다」는 식이 아니었나요.
  『사실 카터도 잘못이에요. 남의 나라에 국빈으로 와서 비행장에 내려 軍 숙소로 바로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악수만 하고 바로 미군 숙소로 가버렸어요. 그런 불미스런 일이 어딨나요. 화가 더 났죠』
  

   - 평소 朴대통령이 카터를 이야기할 때 「땅콩장사나 하던 사람」 정도로 얘기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하지만 과히 좋지 않게 생각 했어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직설적으로 욕한 적이 있습니까.
『기억에 없는데… 뭐 있었을 겁니다. 회담을 마치고 본관 앞에 나가 보니 카터가 탄 리무진이 안 떠나요. 朴대통령과 제가 옆에서 기다리는데 당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리무진에 탔다 내렸다를 반복해요. 한참 있어도 떠나지 않아요. 10m쯤 갔다가 다시 멈춰 서요.
  
  의전비서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하니 「카터와 글라이스틴이 이야기한다」는 정도만 얘기해요. 나중에 들으니 글라이스틴이 카터에게 욕을 얻어먹었던 것 같아요』
  
  회담 후 카터는 리무진을 숙소 입구에 세워둔 채 차 안에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회담 진행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朴대통령은 그간 카터에게 묻어 두었던 섭섭한 생각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해 720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朴대통령의 이날 압박이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최태민과 박근혜

  -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네, 朴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 朴槿惠씨도 朴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김재규와 차지철, 그리고 박정희

    - 이 문제 역시 朴대통령의 접근권 관리가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빨리 정보부장을 바꿨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朴대통령이) 두 사람 모두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어. 둘 다 좋아했으니까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좋아한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두 사람이 동향인 데다 육사 동기(2)고 초등학교 교사 경력도 같았다고 해요. 사실 확인은 안 했지만 김재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김재규는 朴대통령과 어릴 때부터 친분관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대할 때 동생처럼 대했지요.
  『네, 朴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어떻게 보면 朴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네, 맞아요』
  

   - 김재규도 朴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네, 그럼요』
  

   - 朴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을 朴대통령이 조장하거나 암묵적으로 악용해 권력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고 보진 않으십니까.
  『정치인으로 두 사람을 경쟁시켰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朴대통령 성격으로 볼 때 악의적으로 그렇게 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朴대통령은 두 사람 다 귀엽게 보셨어요』
  

   - 이럴 때 JP(김종필) 같은 분이 朴대통령을 만나 간언할 수 있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JP도 차지철을 상당히 경계를 했겠네요.
  『네』

 

  「박정희는 JP를 후계자로 고려 않았다

  - 朴대통령께서 신직수(청와대 법률특보)·김기춘(법률 비서관)씨에게 「언젠가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전에 JP를 총리로 임명해 자연스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던데, 그런 보고를 받았나요.
 
『그랬을까요? 누가 괜히 한 말일 겁니다』
  

   - 朴대통령의 지시로 그런 연구를 했다고 하던데요.
 
『저는 朴대통령이 어떤 계기가 있었다고 해도 JP에게 (대통령직을) 넘기진 않았을 것으로 봐요』
  

   - 그런 느낌을 받았나요? JP를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제가 육군참모총장 시절, JP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外相의 韓·日 청구권 협상 메모를 두고 학생데모가 심할 때였는데, 朴대통령에게 그 얘기했더니 짜증을 내시며 「그런데도 그 친구 왜 못 알아들어」라고 하시면서 저보고 「金장군이 JP와 가깝잖아. 나가라고 얘기해」라고 할 정도였어요. 제가 비서실장 시절에도 국내·외 사정이 한참 복잡해 웬만하면 JP를 불렀을 텐데 한 번도 부르지 않았어요』
  

   - 朴대통령이 1979년 당시 만난 사람을 보니 공화당 사람과는 거리를 두신 것 같아요.
 
『싫은 사람은 안 만나려 하셨어요』
  

   - 朴대통령이 김수환 추기경과 만나시지는 않았나요.
 
『제가 한번 만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과히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 그분들을 싫어하셨나요.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같은 분들 이름을 거명하면 그냥 머리를 흔들었어요』
  

   - 그분들이 곧잘 바른 소리를 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셨나요.
 
『저는 그런 분들과 朴대통령을 연결시키려 했는데 「그만둬」 했어요. 朴대통령이 김재규나 저를 보시면, 어린애처럼 생각하시고 「그만둬」, 「나둬」, 「싫어」라고 하셨어요. 물론 딴 비서관들에겐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셨어요』
  

   - 정승화 장군과 차지철의 관계는 어땠나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였어요. 그런데 차지철은 정승화를 좀 밑으로 봤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정승화는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경솔히 움직일 사람이 아니지요』 


 
사무라이 기질 있던 김재규

    - 김재규의 軍 시절 당번병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 눈에 비친 김재규는 사무라이 영화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김재규는 일제시대 일본군 소년 항공병으로 갔다 왔다고 하는데 그학교 교육이 사무라이 기질로 만드는 겁니다. 격하면 배를 가르는 것은 보통이고. 김재규가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 그가 사무라이 얘기를 자주 하지 않던가요.
  『그냥 일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기질이 있었다고 봐요』
  

  -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존경했던 이가 잘못되면, 그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한다고 봅니다. 김재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글쎄…』
  

  - 김재규는 평소 예절이 바른 사람이었죠. 차지철과 다르죠. 차지철은 교양이 없고 안하무인이고.
  『그럼요』
  
  - 그런데 김재규는 갑자기 폭발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던데… 누가 「김재규가 건설장관 시절, 국회 상임委 도중 갑자기 화를 내더라」고 기억하더군요. 10·26이 일어난 그날 밤도 그런 성격이 폭발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러니 옆 건물 2층까지 뛰어가 권총을 가져왔겠죠』


  朴正熙의 애창곡 

    - 金실장은 朴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모든 것이 깨끗하고 직선적인 사람입니다. 구질구질하게 말을 돌려서 하는 분이 아니셨어요. 그분을 두고 요즘 친일파라는 말이 많은데 그런 사람을 친일파라고 하면, 대한민국에 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요즘 과거사 문제로 떠드는데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나요


  -
朴대통령이 사석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뭐… 없어요. 일본 노래를 부른들 또 어떴습니까. 그걸 가지고, 그걸 부르면 친일파가 돼버리는 건가요?
  

   - 朴대통령이 어떤 노래를 주로 부르셨나요.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으악새 슬피우니~」 두 가지만 불러요. 트럼펫도 부셨는데, 잘은 못하셨지만 오르간도 치시고요. 사범학교 출신이니 음악 기초는 합니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에 들어가면 천재라고 했지요』
  

   -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金大中씨가 대통령 후보로 뽑힐 당시 정보부장을 하셨죠. 그때 정확하게 예측을 하셨나요? 아니면 金泳三씨가 후보가 된다고 보셨나요.
  『예측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잘못해서) 대통령께서 좀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웃음)
  

   - 오히려 朴대통령은 金泳三씨가 되면 경상도 표를 나누니까 오히려 金大中씨가 된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시진 않았나요.
  『글쎄요. 그때 그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당시 저는 정치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여를 안 했어요』
  

   - 정치는 다른 사람이 했나요.
  『그때가 제가 정보부장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나중에 공화당 쪽 사람에게 들으니 제가 그걸 잘못해서 잘렸다고 해요』
  

   -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가요,
  『大選을 잘못 예측해서…』
  

   - 大選이 아니라 전당대회가 아닙니까.
  『뭐든 「잘못해서 잘렸다」는 이야기를 그때 들었어요. (全大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 朴대통령이 김형욱을 사석에서 욕하신 적이 있나요.
  『농담처럼 이야기하시지, 그렇게 심하게 욕한 적은 없었어요』


  朴대통령, 부마(釜馬)사태 심각하게 안 봐

  - 권력자로서 朴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비정하다고 하지만, 행정하는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고 합리적인 분으로 보더군요. 권력자냐, CEO냐를 두고 시각차가 크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낀 적은 없나요.
  『별로. 당시에는 어느 정도 통치에 자신감이 있으셨다고 봅니다』
  

   - 1979년 釜馬사태 당시 비상계엄령은 과잉조치가 아니었나요.
  『저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김재규가 (부산에) 갔다 와서 「보통이 아니다」라고 해요. 저에게 「실장님,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해요. 차지철은 반대로 「괜히 (김재규가) 놀라서 저렇다」고 반박했어요. (두 사람의 시각차가)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국가안보회의를 열었지요. 당시 釜馬사태 분석보고를 했는데, 朴대통령이 釜馬사태를 계기로 국정쇄신을 하려 하셨지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 朴대통령은 釜馬사태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 평상시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닌데 작은 허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독재시대의 과잉이 사태를 키웠다고 봅니다. 조금만 뚫려도 김재규처럼 「큰일났다」고 과대평가한 것이지요. 지역도 한정됐는데 계엄령을 내리니 더 문제가 됐어요. 계엄령은 누구의 주장인가요.
  『차지철일 겁니다』 
  

   -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월간조선 2006 2월호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