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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10/ 정치2/ 이기택 편 - 야당 지도자들의 맨얼굴. 김상현 편 - 박정희 전두환 등 비하인드.. 권익현 편. 김진선의 이명박·박근혜 前 대통령과의 秘史

상림은내고향 2021. 4. 22. 19:39

비하인드 다큐10/ 정치2

■이기택 전 신민당 부총재 / 작심토로 10시간,「야당 지도자들의 맨얼굴」

"YS는 폭이 넓고 용기가 있지만 속이 허한 사람"

⊙ 신민당 총재로 만들어 줬던 김영삼(金泳三)
『폭이 넓고 용기가 있지만 속이 허한 사람』

⊙ 민주당 공동대표 함께 한 김대중(金大中)
『돈 문제는 귀신, 정계복귀 때 내게 매달렸다』

⊙ 「꼬마 민주당」시절 핵심 참모 노무현(盧武鉉)
『의원시절 정서불안, 그의「어두운 절반」을 못 봤다』

2002년 大選 때 손잡은 이회창(李會昌)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양김(兩金) 청산을 외쳤지만 역부족이었어. 아쉬워, 아쉬워…』

이기택(李基澤)
1937
년 경북 포항 출생. 부산中·부산商高, 고려大 상과대학 졸업. 고려大 학생위원장으로 4·19 혁명 주도. 7·8·9·10·12·13·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부총재, 통일민주당 부총재 겸 원내총무, 민주당 총재 및 공동대표,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 민국당 최고위원 역임. 저서로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한국야당사」,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 등.

송승호 전 월간조선 취재팀장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사진이오봉

 

평생 야당

 

평생 배고픈 야당 노릇만 했다. 7選의 李基澤(이기택·70) 前 민주당 총재. 식객들을 데리고 외고집과 외곬으로 황량한 한국 정치사를 헤쳐 갔다. 1990 3당 통합 때 金泳三(김영삼·YS) 前 대통령과 결별, 스스로 「민주당」의 총재가 됐고,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한 金大中(김대중·DJ) 前 대통령과 갈라서 풍찬노숙의 길을 걸었다.
  
 
겁도 없었고 굶주림도 몰랐다. 몇 명 안 되는 의원을 이끌며 거대한 집권 여당과 싸웠다. 盧武鉉(노무현) 대통령 역시 한때 그의 수하에서 「고집의 정치」를 보고 배웠다
  
  1997
년 大選(대선) 직전 자신이 이끌던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쳐져 李會昌(이회창)씨를 大選후보로 밀 때 잠시 여당이 되었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2000년 한나라당에서 烹()당할 때는 虛舟(허주·故 金潤煥)와 함께 초막과 다름없는 야당(민국당)을 창당했다. 지난 大選 직전 盧武鉉 후보가 찾아와 도와 달라기에 지지를 선언, 여당이 되는가 싶었다.
  
 
盧대통령이 민주당을 깨고 열린당을 만드는 바람에 자연스레 야당으로 돌아왔다. 盧대통령 역시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지, 그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권력과 편한 길은 그와 인연이 없었다.
  
 
평생 야당의 자갈밭 길을 걸었던 老정객은 그러나 아직 죽지 않고 우리 정치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19일과 131일 서울 방배동 李 前 총재 자택에서 그의 회고담을 10시간 동안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기개가 묻어 있었고, 건강해 보였다. 일주일에 두 번씩 골프를 치며 틈만 나면 걷는다고 했다
  
 
『글쎄, 뇌 검사를 하니 40代 머리라고 해요. 의사 이야기가 평생 중풍이나 고혈압 걱정은 하지 말라는구먼』 했다. 당장이라도 불러 주기만 하면 정치 일선에 복귀할 수 있다는 투였다.  

  
  
『제대로 야당 노릇을 했다』 

李 前 총재는 『평생 정치인으로 살면서 「제대로」 야당 노릇을 했다』고 자부했다. 「제대로 야당을 했다」는 말 속엔 평생을 非주류로 머물며 끊임없이 兩金 체제 전복을 시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묻어났다.
  
 
李 前 총재는 우리에게 높임말과 낮춤말을 번갈아 썼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살렸다.
  
 
40여 년의 정치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냐」고 물었다. 老정객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정치규제에 묶이고, 정당들을 만들고, 反독재 투쟁만 평생 해온 그가 「행복한 시절」을 퍼뜩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다.  


  
『길이 아닌 곳엔 가지 말라…』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물었더니, 1초도 뜸 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朴正熙 대통령이 3選 개헌을 할 때 내 주변사람이 다 핍박받으니까 어려웠고, 1979년 신민당 5·30 전당대회에서 평소 모시던 李哲承(이철승)씨를 밀지 않고, YS(金泳三) 손을 들어줬을 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3당 통합할 때 안 따라간 것도 어려웠고, 정계 복귀하는 DJ(金大中) 손을 뿌리친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 온통 가시밭이었어요』
  
 
「야당 지도자論」을 말해 달라고 하니 『길이 아닌 곳엔 가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은 평생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정치행로를 분명하게 하고 도덕성을 갖춰야 돼. 야당이 권력이 있어, 뭐가 있어? 오직 명분밖에 없잖아. 올곧게 한 길을 가야 돼. DJ와 함께 야당 대표를 할 때 동교동계 의원이 100여 명일 때가 있었어. 날고 긴다는 金相賢(김상현)·權魯甲(권노갑), 趙世衡(조세형) 같은 사람들과도 큰 소리로 다투지 않았어. 그게 리더십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 사람들보다 탁월하거나 돈이 많은 게 아니고 늘 옳은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야』 
  
 
그는 이번 大選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집권해야 한다』며, 『올해 최대 과제가 그것 아니야? 左편향 정권의 계속 집권을 막아야지』 했다. 지난 大選 직전 盧武鉉 후보를 밀었지만 실망한 모양이다.
  
 
『안 되는 거지. 더 이상의 左派(좌파)성향 정권은 안 돼. 북한이 核()을 보유한 이상 對北정책에 대한 기본정책을 바꿔야 해. 核을 지닌 이상 남·북한 군사균형이 깨진 것 아니야? 정권교체해서 기본부터 바꿔야 해요
  
 
韓美관계를 복원해야 합니다. 일방적 親美는 안 되지만, 국제사회에서 우리 위치를 위해서 관계복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복원을 위해선 지금 정권 가지곤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게다가 양극화니 사학법, 거기다 부동산 문제까지 저마다 실패했다고 봐야지. 실패하면 국민의 심판을 받아 물러나야 되고. 그래서 선거를 하는 거지. 이번만은 정권교체를 해야지』 


  
李基澤과 盧武鉉

 

李基澤 前 총재는 3당 합당에 나선 YS와 결별, 1990년 「민주당」을 만들었다. 이 정당에 盧武鉉 의원이 합류했다. 1995년 지방선거 직후 金大中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 정계복귀를 하자, 민주당에 있던 동교동계 의원들이 집단 탈당했지만, 盧武鉉은 따라가지 않았다. 당시 위치로 볼 때 李 前 총재는 盧대통령이 까마득히 올려다봐야 할 사람이었다.
  
 
―「민주당」 시절 盧武鉉 의원은 어땠습니까.
 
『자기 주장이 강하고 회의에서 동의를 못 받으면 휙 떠나고, 이해관계가 없는 회의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 불안정한 성격을 이전부터 지니고 있었지. 조직이나 시스템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지요. 사실 당 전략이나 정책을 짤 때 깊이 머리를 맞댄 적은 없어요.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대화를 해도 신뢰감이 별로 없어 믿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언행이 가벼웠나요.
 
『생뚱한 말을 많이 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어요. 말하는 것을 보면 머리가 좋은 것 같고, 그런 점을 좋은 곳에 활용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되고 나서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내가 알았던 「盧武鉉」보다 더 도가 지나쳐요. 옆에서 바른 소리를 안 해주는 건지…』
  
  1997
년 大選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이 해체될 무렵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盧武鉉은 『신한국당의 장기집권을 막는다』며 DJ에게 합류했고, 李基澤은 『3金 정치 종식』을 외치며 李會昌씨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2002년 大選 직전 李會昌씨에게 烹당해 상심해 있던 그는 정치후배 盧武鉉 후보를 지지, 짧게나마 다시 손을 잡았다. 그는 大選 막판에 왜 盧武鉉 후보를 지지했을까?
  
 
『大選 직전 盧武鉉씨가 제게 두 번 찾아왔지요. 제 측근들이 여러 날 토론 끝에 盧武鉉 후보를 밀자고 합의했어요. 사실 李會昌씨를 지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李會昌씨 측근인 이정우 변호사가 찾아왔지만 돌려보냈어요. 정치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잖아요. 나는 盧대통령의 성장과정을 볼 때, 실용적 개혁을 할 사람으로 기대했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니 완전히 틀렸더라구. 말하고 행동이 달라…』
  
 
―盧武鉉 후보가 찾아와서 어떤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던가요.
 
『선배 모시고 좋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지 뭐. 盧武鉉이라는 사람은 야당 같이 할 때 나의 의지고 용기였어. 기발한 사람이어서 너무 튄다고 할까? 절반의 장점만 봤던 거지. 「저 정도만 가지면 과거 대통령보다 잘할 수 있다」고 인정했던 겁니다. 대통령되고 나서 그 사람에게서 보지 못했던, 어두운 나머지 절반을 발견한 거지』

 

▲민주당 공동대표 시절의 이기택. 맨 왼쪽이 盧武鉉 당시 최고위원이


  
『탄핵, 지금 생각해도 옳은 일이었다』

▲1996 64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총재 경선에서 승리한 후 홍성우 후보의 손을 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盧武鉉 대통령 탄핵 당시 어떤 느낌이셨나요.
 
『한나라당이 탄핵案 냈을 때 굉장히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탄핵을 성공시켜서 새 대통령을 뽑아 3년 정도 왔다면 국가가 여기까지 안 왔을 것이야』
  
 
―아무리 그래도 盧武鉉 대통령을 大選 막판에 지지했으니 지금 같은 국정 혼선 초래에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게 심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盧대통령을 밀었던 죄 없는 우리들의 마지막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잘 해줬으면 좋겠고,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늦었지만 깨달아서 남은 임기라도 좀 잘 해줬으면 좋겠어』 
  
 
―盧대통령은 입만 떼면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해 왔습니다. 평소 소신이라고 보시나요.
 
『지역갈등을 논할 자격이 없어.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된 것은 가깝게는 DJ, 멀게는 호남표 때문 아닙니까. 대통령이 된 뒤 「이제는 지역감정이 좁혀지겠구나」 생각했어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盧武鉉씨가 새천년민주당을 깬 것을 이해 못 합니다. 호남 국회의원만 딱 떼놓고 자기 정당을 한다? 불만족스런 세력이 있다고 해도 끌어안아야 하는 게 대통령의 의무 중 하나야
  
 
盧武鉉 정권의 제1의 실패는 민주당을 깬 데서 나온 거라고 봐요.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참모들과 국민들이 따라가야 성공하는데, 민주당을 등지고 그렇다고 경상도를 끌어안는 것도 아니어서 중간에서 붕 떠버렸잖아
  
 
그런데 욕심은 많아서 혁신도시다 뭐다 남발해서 비극이 생긴 겁니다. 호남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90%나 지지했는데, 당을 쪼개니 허탈감이나 원성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盧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가 뭐라고 보시나요.
 
『지지율이 10%대라면 자기가 취직시켜 준 사람만 지지한다고 봐야지. 「저 사람이 대통령인가. 대통령이 저런 말 해도 되나」고 걱정할 지경이에요. 그 현상을 지금이라도 직시하고 깨달아야 되는데, 참 안타까워요. 양극화나 계층갈등도 그렇고, 민주당 분열시켜 지역 간 갈등을 불러일으켰지요. 젊은 386 등용해 세대갈등을 낳았고, 사회의 갈등이 증폭됐잖아요. 결국 중산층이 무너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어요』  


  
全敬煥, 「여당 조직 맡아 달라」

―함께 정치를 하셨던 정치인들의 인물평을 좀 해주세요.
 
『金泳三씨는 폭이 넓고 용기가 있어. 좋은 점 많은 지도자지. 그런데 속이 허한 사람이야. 李會昌씨는 사고나 행동이 모두 귀족적이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와는 원래부터 안 맞는 사람이야. 그것 때문에 대통령이 못 된 거야.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약속도 지키지 않았어』
  
 
―정치행로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까.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 동생인 全敬煥(전경환)씨를 내게 보냈어. 1980 5·17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로 정치규제를 당한 때였지. 어느 한정식 집이었는데, 먼저 기다리던 全씨가 「여당 사전조직의 모든 책임을 맡아 달라」고 말했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어』  

  
  
朴正熙에 대한 평가  

―정치규제 기간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신군부가 「정치규제를 하는 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유서를 적어서 제출하라」고 하더군. 신민당 부총재인 나는 사유서를 안 쓰기로 하고 李敏雨(이민우) 총재를 만나러 집을 나서는데 동아일보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어. 나는 「어떻게 저들에게 정치생명 연장해 달라고 하냐. 난 안 낸다」고 했어
  
 
李총재를 찾아가 「저는 사유서를 안 쓰기로 했습니다. 신민당號가 침몰하는데 우리 총재단도 함께 침몰합시다」고 했더니 「그래 그래,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시더군요. 그런데 며칠 뒤 신문을 보니 李총재는 사유서를 냈어』
  
 
그는 우리 정치사에 획을 그은 4·19 세대의 주역이다. 고려大 재학 시절 4·19 혁명을 주도했다. 신민당 당수이자 은사인 兪鎭午(유진오) 박사는 「4·19 대표」 케이스로 1967 5월 그에게 전국구 배지를 달아 주었다. 李 前 총재는 29세 때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朴正熙(박정희) 前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세요.
 
『내가 4·19 주역이잖아. 3·1 운동 보다 더 한국의 위상을 높인 게 4·19 혁명이야. 하지만 5·16으로 빛을 잃어버렸어. 朴대통령이 원망스럽지. 산업화를 하다 보니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인권은 탄압받게 된 것이야
  
 
하지만 경제성장 속에 민주화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이 있었겠나?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것은 비판받아야 되고, 어쨌든 경제성장을 시켜서 가난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은 인정할 일 아니야? 


  
태광산업을 인질로 삼은 金炯旭의 협박

 

신민당 시절 그는 朴正熙 前 대통령의 3選 개헌을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원내와 원외 인사들을 모아 「3선개헌저지 4·19-6·3범청년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집에다 등사기를 갖다 놓고 밤을 새워 전단을 만들어 시위 장소에 뿌렸다.
  
 
3선 개헌 때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날 공화당으로 끌고 가기 위해 남산으로 데려갔어. 당시 자형이 운영하던 회사(태광산업)가 일본 外資(외자)를 빌리려고 했던가 봐. 경제기획원에선 도장을 찍었는데 청와대 결재가 남았던 거야
  
 
金炯旭이가 나에게 「저 서류 봐라. 경제기획원에 있어야 할 서류가 왜 여기 있지?」 그래. 공화당에 오면, 外資를 승인해 주겠다는 협박이지. 그래서 내가 「兪鎭午(유진오) 선생이 야당 당수하실 때 태광산업 영업과장 하던 나를 4·19 대표로 전국구 국회의원을 시켜 줬다. 내가 변절하면 4·19 세대 전체가 변절자가 된다. 내가 공화당 가면 다른 사람 눈에 썩어빠진 이기택이 될 텐데, 그러면 공화당이 욕먹는다」고 했지. 그래서 못 데려간 거야』
  
 
태광의 창업주인 故 이임용 회장과 李 前 총재는 처남·매부 사이다. 이임용 회장의 부인이 李 前 총재의 누나다. 태광이 어려움에 처하면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수습했다. 朴正熙 정권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태광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10·26 나기 전 날, 朴대통령의 조카인 朴在鴻(박재홍) 의원을 만났어. 그때도 태광이 문 닫을 판이었어. 朴의원이 고려大 후배잖아. 붙잡고 통사정을 했어. 「네 삼촌(朴正熙 대통령)이 나 때문에 태광을 죽이려고 한다」며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니 朴의원이 대통령을 찾아간 거야. 그런데 朴대통령이 빨간 줄을 그어 내려보낸 거니까 씨알도 안 먹혔다고 해
  
  10
·26 나던 날 아침, 朴의원이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태광을 살려 달라」고 했더니, 金載圭가 「대통령 지시사항이니 못 한다」고 말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대통령에게 차트를 만들어 설명을 하라」고 조언을 했다고 해요. 그렇게 말한 金載圭가 朴대통령을 계획적으로 시해했다고 생각지 않아. 10·26은 우발적이라고 믿어』
  
 
李 前 총재는 13代 총선(1988)을 앞두고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YS 밑에 들어가 부총재 겸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그러나 1990 3당 통합으로 YS와 갈라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3당 합당을 위한 청와대 모임에 참석해 운신이 명쾌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함께 정치를 해봤던 YS DJ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는 민정·민주·공화당을 합당했던 YS의 정치 행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DJ가 정계 은퇴했다가 복귀한 것도 아직 이해를 못 합니다. 대한민국 언론도 이해 못 합니다
  
  DJ
와 저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하지만 「정계 은퇴한다」고 국민께 약속해 놓고 복귀한 것은 국민에게 부끄러워서 용납할 수 없었어요』 


  
3당 통합 거부하고 민주당 창당

1996 61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野3당 부정선거백서 발간 보고회에 참석한 (오른쪽부터)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 이기택 민주당 총재.

 

3당 통합을 거부했을까. 金泳三씨를 따라갔으면 하루아침에 배고픈 야당에서 집권당 차기주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야당을 고수했다. 1990년 민주당을 창당하고 처음으로 「총재」라는 직함을 가졌다. YS가 없는 야당에서 그는 DJ 다음가는 야당 지도자였다.
  
 
1990 118일 민정당 원내총무였던 鄭東星(정동성) 의원이 나를 찾아왔어. 불쑥 봉투를 내미는데, 盧泰愚 대통령의 친서라면서 YS에게 전해 달라는 겁니다. 「미쳤나. 내가 니 심부름꾼이야」라고 발끈했지
  
  3
당 통합을 선언할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어요. 청천벽력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와 참모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니 의견이 반으로 갈려요
  
 
다음날 상도동에 YS를 찾아갔지요. 굉장히 반가워하더군요. 뻔히 알면서 모른 척 「평소와 달리 굉장히 들뜬 것 같네요」라고 쏘았어. YS가 「우리 여당 한번 합시다」 해요
  
 
나는 「명분이 너무 없다. 지금까지 군정종식시키고 민주화하자고 야당을 해왔는데 어떻게 군사정권이 만든 정당과 통합하느냐」고 했어
  
 
처음엔 통합에 반대한 이들이 盧武鉉·李哲 같은 소장파를 빼고도 김현규·신상우·황낙주·최형우·조홍래·서청원 등 10여 명이었어요. 최형우는 먼저 안 가겠다고 했는데 가버렸어. 「원래 안 가려 했는데 의리 때문에 간다」는 거창한 말을 남겼어. 갑자기 의리 있는 사나이가 된 거지
  
 
황낙주·신상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쪽에 남았다가 갔고, 나는 남겠다는 사람까지 「죽는 길인데 오지 마소」라고 돌려보냈어요
  
 
내가 통일민주당 시절 YS 밑에서 부총재 겸 원내총무를 했어. 야당사에서 겸임한 전례가 없을 정도로 YS와 내가 통했고, YS 역시 나를 필요로 했어. 하지만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갔어. 자고 나면 야당에서 여당이 되는데 그 꿀단지를 버리기가 쉬운가』
  
 
YS와 결별하고 통일민주당 잔류파 의원들과 무소속 박찬종·이철 의원을 끌어들여 「꼬마 민주당」을 창당하셨죠.
 
『盧武鉉·金正吉 의원 등이 우리집에 몰려와 당 만들자고 하더군요. 그 패들 등쌀에 당을 일찍 만든 것이 제일 오판한 것 중의 하나야. 작은 민주당을 만들어 DJ하고 합당했잖아.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치방학이 길었으면 하는 게 후회로 남아』
  
  1991
916일 金大中의 신민당과 李基澤의 민주당이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李 前 총재는 3당 통합에 반대한 이후 독자정당을 만들었고, 국회의원 12명밖에 안 되는 정당으로 원내 70석의 제1야당과 1 1 통합을 이뤄 낸 것이다. 金大中이 李 前 총재에게 손을 내민 것은 1992년 大選에 대비한 세력 불리기의 일환이었다. 어쨌든 그는 통합민주당을 계기로 DJ와 같은 반열의 제1야당 공동대표로 급상승하는 행운을 잡았다
  
 
3당 통합을 하니 야당은 DJ밖에 없었는데 99%가 호남이야. 민정당은 대구·경북당이고, 부산·경남의 야당세를 갖고 있던 YS까지 합세했어요. 충청도에 깃대만 꽂아도 된다는 JP까지 가버렸습니다. 이 판국에 부산 출신인 내가, DJ와 손잡고 정치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보라고 봐요? 나는 정치 안 할 각오였어』
  
 
―결국 DJ와 합당해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셨죠.
 
DJ가 김관석 목사를 내세워 합당을 부추겼어. DJ는 전라도만 가지고는 야당 구실을 할 수 없고 우리하고 합해야 전국 정당이 가능했지. 내 생각은 3당 야합으로 집권여당은 공룡처럼 거대해졌고 야당은 형편없었거든. 또 차제에 한국정치의 병폐인 지역갈등 해소를 위해 통합하기로 결심했어. 정말 어려운 결단이었어. 경상도가 키운 이기택이 DJ하고 손잡으면 정치생명은 끝장이었어. 그러나 선택은 옳았다고 지금도 확신해』
  
  1992
년 치러진 14代 총선 당시 그는 선거결과가 뻔한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로 배지를 달았다


  
金大中의 정치기술

 

  DJ와 공천은 어떻게 협의했나요.
 
『당직이나 공천, 전국구까지 4 6의 원칙을 지켰어. 심지어 DJ와 전국구 24명을 공천하는 데 3등분으로 나눴어. 영입할 사람 8, 헌금받아 공천시킬 사람 8, 당 유공자 8명 식으로 말이야. 그때 DJ의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어』
  
 
DJ의 기술이라뇨.
 
『공천발표를 앞두고 DJ가 朴智元(박지원)씨를 시켜 각 신문사 편집국장들을 불러 술을 돌려요. 그러면서 「우리가 헌금 받고 전국구 팔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거야. 이런 식이지. 「총선하려면 실탄이 있어야 하는데 야당이 무슨 실탄이 있냐. 돈도 있으면서 자격 갖춘 이를 영입하는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그러면 「국회의원 팔아먹었다」는 보도는 한 줄도 안 나와』
  
 
DJ와 정당을 같이할 때 당 운영자금은 누가 댔나요.
 
『거의 DJ가 다 했어. 나한테 오픈 안 하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 1992년 大選 때는 DJ가 돈을 많이 썼어』
  
 
―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요.
 
DJ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자마자 국회 재정위원회 언저리에만 있었어. DJ가 돈 문제에선 귀신이야. 은행 부정대출 같은 의혹이 있으면 전국에 있는 호남사람들이 다 정보를 갖다 줘.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DJ한테 걸리면 죽는 거야. 그러면 뒤에서 돈 가지고 거래하는 것 아니야? 돈 가져오면 오케이. 거기다 호남사람들이 DJ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구두닦이에서 좌판 아줌마들까지 돈을 보탰어』  

  
  
『허리가 휘지, 빚 속에서 사는 거지』

▲月刊朝鮮 기자와 대담 중인 이기택 前 총재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하면 정치자금도 오가나요.
 
YS DJ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그런 것 없었지만, 盧泰愚 정권 시절만 해도 있었다고 봐요. 사실 국회의원 선거할 때는 대통령이 직접 돈을 줬잖아. 청와대에서 돈을 많이 썼지. 全斗煥·盧泰愚 정권 때는 연이 닿은 야당의원에게는 정치자금 명목으로 조금씩 줬을 거야. ? 나는 뭐 그런 거하고 너무 거리가 뭐니까』
  
 
―야당 대표를 하려면 많은 돈이 들지 않나요? 식객 거느리려면 돈이 많이 들텐데 어떻게 돈을 만드나요.
 
『허리가 휘지. 빚 속에서 사는 거지. DJ는 호남사람들이 도왔을 것이고, YS는 개인이 정치자금을 구해서 썼어. 경남高 동창 중에서 돈 내는 사람이 있었고, 수산업자들도 헌금을 했을 거야. 언젠가 내가 5共비리 특위위원장을 할 때 옥포조선을 정치자금 조사대상에 넣었더니 YS가 「이것 좀 빼」 하기에 무조건 빼버렸어. 당 총재가 말하는데 빼야지. 그런 것 보면 대우에서도 돈 좀 얻어 썼을 테고…. 쌍용그룹 창업주였던 김성곤씨가 과거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할 때에는 야당에도 돈을 보태주고 했어』
  
 
―정작 본인은 어떻게 돈을 구했나요.
 
『나도 민주당 총재로 5~6년 있었는데, 어떻게 돈을 끌어 댔는지 꿈만 같아. 3당 합당에 불복, 민주당을 창당할 때 노무현·김정길·박찬종·김광일·장기욱·김현규·홍사덕씨가 있었지만 그 친구들 돈 한 푼 안 내고 내가 다 했어. 큰 데(기업) 가서 돈 얻은 적도 없고 집사람 결혼반지까지 팔아 비용을 댈 정도였어』
  
 
정치권에는 『태광이 李基澤의 든든한 자금줄』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눈물 젖은 빵」을 먹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DJ와의 大選후보 경선과 결별

1992년 大選을 앞두고 DJ와 大選후보 경선을 벌였죠.
 
DJ하고 싸웠잖아. 해보니까 자신 있더라고. DJ계보에 非호남 지구당위원장들이 많았다고. 그 사람들이 내가 후보가 돼야 한다고 했어. 나중에 대화가 다 되니까, 돈 가져오라고 해. 「우리가 넘어가려면 대의원들 술 사먹여야 되고 돈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때 내 친구가 어느 재벌회사 자금담당을 했는데 5억원만 빌려주면 자신 있다고 했어. 3일 뒤 「안 된다」고 연락이 왔어. 그렇다고 중도하차할 수 없어 끝까지 갔는데 DJ 6 4로 졌어. 합당할 당시의 양쪽 지분이 고스란히 표로 연결됐어. 우리 표가 한 표도 이탈하지 않은 거지』
  
 
DJ와 어떻게 결별하게 됐나요
 
1995 6·27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후보 문제로 DJ와 갈등을 빚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정계복귀와 맞물려 있어. 당시 내가 밀던 張慶宇(장경우) 의원과 DJ가 밀던 안동선 의원이 표 대결을 했는데 DJ가 질 것 같으니 투표함을 열지 못하게 막았어. 중앙당으로 투표함을 가져오라 했는데 DJ 쪽에서 흥정을 해와. 「경기도 하나만 봐달라」는 거야. 나는 거절했어. 「사전에 얘기하면 모를까 대의원들이 투표까지 했는데 공명정대하게 해야 한다」고 우겼어
  
 
결국 개표를 하는데 張의원이 6표차로 이겼어. 그런데 도지사 선거 무렵 DJ가 「이번 지자체 선거가 끝나면 정계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했어. 심지어 張의원이 연설도 못 하게 했고 호남향우회를 통해 한 표도 주지 말라고 했잖아. 자기 이익과 배치되면 당에 대한 배신행위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어요』
  
  1995
년 지방선거가 끝나고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었던 DJ는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민주당 총재였던 그는 DJ에게 자리를 내줄 수 없었다. 그러자 DJ는 동교동계 의원 대부분을 데리고 당을 떠났다. 李基澤의 민주당은 DJ와 합치기 전의 「꼬마 민주당」보다 더 작은 「꼬마」로 남게 됐다.
  

1991 910일 오전 김대중(신민당), 이기택(민주당) 총재가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양당의 통합선언을 한 뒤 두 손을 치켜들어 단합을 과시하고 있다. 

 

 『언론의 책임이 크다』

DJ의 정계복귀를 왜 받아들일 수 없었나요.
 
『정계 복귀할 무렵 DJ가 내게 매달렸어요. 그때 눈 질끈 감았으면 지금의 盧武鉉 대통령이 아니라 내가 대통령이 됐을지도 모르지. DJ의 복귀를 반대하니까 동교동 쪽에서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워 끈질기게 설득했어
  
  DJ
쪽에서 나와 친한 姜昌成(강창성)·朴恩台(박은태) 의원이 찾아와 「이번에 DJ를 도우면 나중에 너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밀어 주자」고 했어. 하지만 거절했어요. 정치 안 하겠다며 울고 떠난 사람이, 어디 가능한 일이야? 더군다나 대권 4수에다 내일 모레 팔십 살 먹은 사람이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했어. 나는 옳은 일 아니면 안 갔어』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를 한 달 남짓 앞두고 동교동계가 李基澤 총재의 백기투항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DJ의 정계복귀를 반대하며 민주당에 잔류했던 정치인으로는 盧武鉉 대통령과 김원기·이부영·제정구·김정길 의원 등이 있었다.
  
 
『언론이 나를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붙였어. DJ가 은퇴했다가 다시 나올 때, 가능하다고 생각 못 한 내가 바보지. 별별 조건을 제시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했는데 대한민국 언론이 다 넘어가데. DJ는 그런 재주가 있었기에 대통령을 했겠지만, 지금 나라꼴을 생각하면 언론의 책임이 커
  
 
야당 다 팔아먹고 군정종식하자던 사람들이 야합해서 대통령이 된 것 하며, 정계를 떠나겠다고 한 사람이 은근슬쩍 다시 나오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게 盧武鉉씨를 낳고 국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죄지. 진실되게 正道(정도)를 걸은 사람은 언론이 외면하고 盧武鉉씨처럼 이상한 발언을 하는 사람만 영웅이 됐으니…』
  
 
李基澤은 DJ와 결별한 뒤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1996 15代 총선 당시 부산 해운대 기장甲에 출마해 떨어졌고, 이듬해 731일 고향인 경북 포항北 보궐선거에 나가 또다시 떨어졌다.  


  
趙淳에 대한 인물평

민주당은 1996 15代 총선에서 참패했다. 부산에서 李基澤과 盧武鉉, 전라도에서 김원기, 서울에서 홍성우·이철·유인태·강창성·성유보, 대전에서 김원웅 의원이 줄줄이 낙마, 줄초상이 났다. 게다가 15代 총선의 참담한 실패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李基澤계와 범민주연합파가 당권투쟁을 벌였고, 이탈파가 생겼다. 결국 趙淳 前 경제부총리를 영입, 총재로 삼고 자신은 이선으로 물러났다.
  
 
―趙淳씨를 민주당 총재로 영입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趙淳 당시 서울시장 쪽에서 몇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하더군.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 성사되고 8개항의 합의를 거쳐 대선 총재로 추대하기로 했어요. 그 이후로 전화연락조차 없더라고』
  
 
趙淳씨는 1997 8월 민주당 총재가 된 뒤 신한국당과 합당, 그해 1121일 한나라당 총재가 된다. 李會昌씨는 大選후보, 李基澤씨는 공동선대위 의장을 맡았다.
  
 
―신한국당과 합당해서 李會昌씨를 후보로 민 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1997년 大選을 앞두고 11월 합당을 했어. 자리 챙기는 것은 趙淳씨가 다 해버려 우리 조직이 시끄러웠어. 하지만 기왕에 양보한 것, 李會昌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보자고 했어. 득볼 것도 없지만 그렇게 大選을 치렀어요』
  
 
―李會昌씨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얼마나 졸렬한지, 첫 大選후보 연설회를 경남 김해 지구당에서 가졌어. 지지연설을 해달라고 해서 도와줬지. 경주 보문단지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김해로 떠나기로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李會昌 그룹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어요
  
 
할 수 없이 터덜터덜 김해로 내려가 일정표를 봤더니 따라갈 필요도 없게 만들었더군요. 연설도 안 시켜. 마지막 연설을 부산 서면 로터리에서 하는데, 여기서도 나를 빼고 崔秉烈씨를 넣더라구. 「그런 법이 어딨냐」고 따지니, 중앙당이 결정한 것이라고 해요. 「어떻게 날 빼놓고 (李會昌씨가) 그럴 수가 있나」하고 생각했지』  

  
  
총재권한대행 시절 국회 정상화

2002 26일 이기택 前 한나라당 총재대행 아들 결혼식에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찾아와 두 사람이 악수하고 있다.

 

李基澤 前 총재는 1998 8월 趙淳 총재의 뒤를 이어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을 맡은 적이 있다. 전당대회까지 한 달 남짓 짧은 기간이었지만 「권한대행」의 지위를 마음껏 누렸다. 그가 총재대행을 맡은 것은 趙淳 총재가 그를 지명했기 때문이다.
  
 
『大選 패배에다 IMF 외환위기로 金大中 정권이 출범부터 시끄러웠어. JP가 총리로 지명되고 국회 인준 과정이 어려우니까 개표중단 사태가 생겼어. 그래서 JP는 총리서리가 된 거야. 위헌시비가 붙고 국회등원 거부 사태가 벌어졌어. 이 과정에서 趙淳씨가 물러나면서 그간에 미안했는지 나를 대행으로 지명했어. 1998 86일이었는데 30일 전당대회까지 맡았지』
  
 
―짧은 총재권한대행 시절, 국회 정상화를 일구셨더군요.
 
『지금도 꿈같은 얘기야. 기막힌 일을 했다고 생각해. 당시 한나라당의 요구는 총리 再지명과 DJ의 사과였어. 중앙당 간부들을 소집했더니 金守漢(김수한)·김명윤·김윤환·이한동 의원과 당3역 등 20여 명이 모였어.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데 국회를 거부하자는 게 절대 다수였어
  
 
徐廷和(서정화) 의원이 「마지막으로 李총재 의견이나 들어 보자」고 하기에 내가 말했지. 「오늘의 국회 중단 사태는 전적으로 DJ 책임이다. 하지만 IMF로 나라가 어려운데 국회를 몇 달간 문닫고 있으면 야당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대통령 사과나 총리서리가 무슨 대수냐,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정치결단이지」라고 했어. 金守漢 의장이 책상을 치며 「李총재 결단에 따르겠다」고 했어
  
 
회의장 밖에는 기자들이 많았는데 마감시간 때문에 김철 대변인이 결론을 듣지 못하고 「李총재는 정상화 의사가 있으나 만장일치로 국회 거부를 고수키로 했다」고 엉터리로 발표해 버렸어. 나중에 내가 기자들에게 「정상화하기로 했다」고 하자 난리가 났어. 기사 고친다고 전화통 붙들고 법석을 떨었지』 


  
烹당한 이야기

1997 812일 포항 보궐선거 패배 직후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호주로 장기휴가를 떠나기 전 환송 나온 당직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기택씨.

 

1998 8·30 전당대회에서 李會昌씨가 총재가 된 뒤 어떻게 대하든가요.
 
『李會昌씨가 처음에는 내게 애정이 있었다고 봐. 나와 손잡고 청와대까지 간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믿어. 한 달에 두서너 번은 꼭 호텔에서 만나 밥을 샀어. 내게 고집부린 일도 없고 진지하게 충고하면 「총재님, 선배님 맞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그랬어. 진짜야. 얼마나 예의바르게 구는지…돌이켜 보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해. 내가 총재권한대행으로 당론을 거중 조정해서 국회를 정상화시키니까, 벅차다고 생각했던 게지. 그래서 눈 질끈 감고 없애야 한다고 결론내린 것 같아』
  
  16
代 총선을 앞둔 2000 2월 그는 공천에서 탈락한다. 이른바 「2·18 공천 대학살」 때문이었다. 그에겐 악몽 같은 일이었다. 李會昌 총재가 당내 최대계파 보스였던 虛舟와 李基澤을 제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趙淳 명예총재까지도 공천을 반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이들 역시 한나라당을 탈당, 민국당을 급조했다. 하지만 虛舟나 李 前 총재 모두 선거에서 패했다.
  
 
―李會昌씨에게 烹당할 것을 예상하셨나요.
 
『꿈에도 그런 생각 못 했어. 당시 공천 때문에 어수선했어. 나는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4 6으로 합당했으니 공천도 그 룰을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李會昌씨가 「같은 식구인데 도저히 안 될 것 같다」고 했어. 그래서 「알아서 공천심사위를 구성하라」고 크게 양보했어. 하지만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은 쪽지에 써서 심사위에 전했어
  
 
姜昌成(강창성) 의원이 그 역할을 맡았지. 그런데 姜의원이 「자꾸 보류한다」고 해. 공천발표 시점이 됐는데 姜의원조차 모르겠다고 하는데, 기자들이 내게 「李총재 이름이 없다」고 하더라고. 기가 막혀 李會昌씨를 63빌딩에서 만났어』


  
파자마 바람의 虛舟

 

―뭐라고 하던가요.
 
『어찌된 일이냐고 따지니 한참동안 말을 못 하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구먼. 그 순간 내 입에서 좋지 않은 얘기가 나갔어. 그때 내 앞에 놓여 있던 주스 잔이 아직도 기억에 선해. 항간에는 윤여준씨가 주도했다고 하는데 안 믿어. 李會昌씨가 했겠지. 2002년인가 아들 결혼식에 왔더라구. 측근을 통해 「가도 되느냐」고 묻는데,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오라고 했어』
  
 
―烹당하신 뒤 민국당을 만드셨어요.
 
『虛舟 집에 갔더니 虛舟가 파자마 바람으로 나오더라구. 기가 막힐 노릇이지. 맥이 빠진 듯 「이게 무슨 일이오. 남부끄러워 밖에 못 나가겠고…」라며 다 죽어 가는 말로 얘기해요. 내가 「우리가 뭐 잘못 했노. 목 친 李會昌이가 잘못됐지」라고 얘기했지. 당 만들기로 하고 힘을 모았는데 이수성·김상현 등 인물들이 처음엔 많았어. 그런데 한나라당 바람이 무섭데. 虛舟까지 구미에서 지고…』


  
『아쉬워, 아쉬워』

YS DJ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나름의 길을 모색하려 했던 李 前 총재는 이후 오랜 침잠의 시간을 보냈다. 여백의 시간이 4년이 넘는다. 그동안 우리 정치가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떠난 야당은 과거의 낭만도, 카리스마도 없어졌다.
  
 
『계보정치가 그 시절엔 필요했어. 집권여당에 맞서 저항하려면 자기 부대들을 끌고 다녀야 해. 당시 야당하기란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야. 계보 보스가 있어 그나마 당세가 모일 수 있었어. 솔직히 계보정치가 없었다면 한국 정치가 온전할 수 없었고, 야당이 강력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해』
  
 
그 역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에 밀려 평생을 非주류로 지내온 게 아닌가. 끊임없이 싸워 兩金을 극복하려 했지만 兩金의 견제에 고통받아야 했고, 또 그들의 계보에 가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兩金을 극복해야 되는데 역부족이었어. 호남맹주, 영남맹주인데 내가 호랑이 앞에 웃통 벗고 맨날 兩金 청산을 외쳤지만 힘이 못 미쳤어. 그때 兩金이 분열하지 않았더라면 全斗煥·盧泰愚 시대는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盧武鉉도 없었을 것이야. 우리의 정치 역시 지금보다 훨씬 성숙해졌을 것이고, 국민의 고통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쉬워, 아쉬워』●
  
사진 : 이오봉

출처월간조선 2007년 3월호

 

 

2018.04.19(월간조선 05월호) 

■김상현 편 - 박정희 전두환 등 정치 비하인드

김상현과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여야대화 제의하자 바로 청와대로 부른 박정희, 서빙고에서 고문 후 술자리 마련한 전두환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의 중 김대중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상현 의원. 두 사람은 만남과 결별을 되풀이 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6선 의원을 지낸 원로정치인 김상현 전 의원이 4 18일 저녁 타계했다. 향년 83

 

기자는 2001년과 2012년 김상현 전 의원을 인터뷰했었다. 첫 번째 만났을 때에는 스트레스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취재지원하고 있던 이동욱 기자가 동석(同席)했다. 기자의 취재가 끝난 후 김 전 의원은 이동욱 기자에게 1968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하던지 마치 내가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만남이 끝날 무렵 기자는 그에게 "지역감정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책임이 더 크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2012 11 1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 그의 이야기를 싣기 위해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김상현 전 의원을 다시 만났을 때, 기자는 깜짝 놀랐다. 발을 끌면서 들어오는 모습, 작고 기운 없는 목소리…. 전에 만났던 김 전 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직후였다. 그래도 그는 성심껏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두 번째 만남은 12 3일이었다. 김상현 전 의원은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DJ에게 누가 될 만한 얘기는 삼갔다. DJ에게 서운한 건 없느냐?”고 물으면 “이젠 그런 얘기 할 나이는 아니지 않소”라며 말을 돌렸다. 다만 민추협이나 2·12총선 당시의 이야기를 할 때, 중간중간 서운함이 느껴졌다. 자신과 DJ와의 관계를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나는 개인적으로는 DJ를 형님으로 모셨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등한 동반자였다. DJ를 맹종(盲從)한 동교동 가신들과는 다르다’하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식(舊式)정치인, 그러나 상쾌한 구식정치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그렇게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일관되게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주장해 왔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우리 정치풍토에서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라고 하는데, 그런 시련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신념을 놓지 않은 그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왕사꾸라’였다. 그리고 그가 우리 정치판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사꾸라’가 활짝 피었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는 이토록 삭막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 소개했던 이야기 가운데 고인과 박정희-김대중-김영삼-전두환 전 대통령과 관련된 몇 장면을 소개한다.

 

#1. 박정희와의 만남

- 박정희, 정국경색 풀기 위해 대화 제의하자 바로 청와대로 불러

 

1967 6 8일 치러진 제7대 총선에서 정부와 여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공화당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129석을 차지했다. 야당 의석은 신민당 45, 사회대중당 1석을 합쳐 46석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이 이렇게 무리수를 둔 것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민당의 부정선거 규탄 투쟁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는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발생한다.

  

  나는 안팎의 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여야(與野) 영수(領袖)회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야당 안에서는 정권과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로 몰리는 풍조가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3 6일 유진오 당수를 만나 영수회담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 당수는 “내가 영수회담을 제안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받아주겠느냐?”면서 회의적(懷疑的)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럼 제가 먼저 국회의원 입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유진오 당수의 비서인 박찬세씨를 통해 이후락(李厚洛) 청와대비서실장에게 대통령 면담신청을 넣었다.

  

  다음 날 나는 서울시청 인근 뉴서울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전 11시경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내 앞으로 연락이 온 것이 없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그 시절에는 그런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는 “청와대에서 이후락 실장이 아침부터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빨리 연결시켜 달라고 재촉이 심했다”고 말했다. 아내가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이후락 실장이 직접 받았다.

 

  “아이고, 김 의원님. 왜 이렇게 통화가 어렵습니까? 각하께서 김 의원님의 면담신청을 받고 바로 만나자고 하십니다. 2시까지 들어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청와대로 갔더니 이후락 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나를 안내했다. 집무실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확대경으로 무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김 의원, 이거 좀 보시오. 김신조가 얘기한 비행장 시설을 고공(高空)촬영한 것이오. 비행장 시설 하나는 참 잘해 놓지 않았소?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자리에 앉았다. 이후 나는 박 대통령과 정치 현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석유세법 통과 등 정부정책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여야 관계의 경색 등에 대해 박 대통령이 여당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일방적인 보고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박 대통령에게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김 의원을 만나고 있는 것 아니오? 오늘 오전 시민회관에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고 나오는데 이 실장이 김 의원의 면담신청에 대해 말하기에, 12시부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지금 나에게 면담신청을 해놓은 여당 의원이 62명이오. 그걸 제쳐놓고 김 의원을 만나기로 한 겁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여야 영수회담 얘기를 꺼냈다.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영수회담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박 대통령은 흔쾌히 응낙했다.

  “좋습니다.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야당 편한 대로 하세요. 내 쪽에서 회담을 먼저 제의하는 형식으로 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고, 유 당수 쪽에서 먼저 제의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장소도 꼭 청와대가 아니라 우이동 같은 데도 좋습니다.

 

  옆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거들었다.

    “각하. 김상현 의원이 각하께 면담신청을 한 것은 오늘날 야당 분위기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사꾸라로 몰려서 정치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대통령은 “김 의원 입장이 그렇다면, 오늘 김 의원이 오신 건 비밀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내 임기가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소. 만약 앞으로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시오.

 

  “만에 하나라도 그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각하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헤어지기 전 박 대통령은 말했다. “김 의원이라면 문을 열고 기다릴 테니 언제든지 연락하시오.

 

   박 대통령은 이후락 실장에게 뭐라고 귀엣말을 하고 난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 실장은 잠깐 자기 방에 들렀다 가라며, 2층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 실장은 “각하께서 드리는 것”이라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받으면 내가 여기 온 뜻이 없어진다”며 사양했다.

 

  내가 정계에 입문할 때, 민주당 원로인 이상철 전 국회부의장이 “정치를 하자면 돈이 필요한데, 정치자금을 받을 때는 생선 먹듯 하라”고 한 적이 있다. 가시 있는 생선을 먹으면 목에 걸리고, 부패한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 나중에 탈이 날 수 있는 돈은 받지 말라는 얘기였다.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이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발표하자 난리가 났다. 이발을 하다 말고 달려온 유진오 당수에게 나는 “이번은 첫 영수회담이니만큼 무엇을 한번에 얻겠다고 하기보다는 시국 전반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그런데 다음 날 유진오 당수 댁으로 갔더니, 그의 안색이 안 좋았다. 그는 “다 틀렸소, 다 틀렸소”라며 탄식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 중진들이, 만약 영수회담을 하면 사꾸라로 몰려 내 정치생명이 죽는 것은 물론, 우리 신민당까지 큰일 난다고 합디다.

 

  나는 모처럼 열린 박정희 정권과의 대화 창구가 막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이후 보름 동안 유진오 당수 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영수회담 수용을 권했다. 하지만 유 당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당내에서는 “김상현이 지가 뭔데 대통령과 면담을 하느냐?”는 성토의 소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중앙당 부·차장단에서 내 화형식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김상현이가 체구는 작지만, 화형식에 사용할 허수아비만큼은 좀 큰 것으로 해달라”고 전했다. 화형식은 유야무야됐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유진오 당수의 영수회담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이런 야당을 보면서 ‘저런 야당에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 2. 김대중의 71년 대선 출마

- 대선 출마 제안하자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3선 개헌을 막지 못한 야당은 무력감(無力感)에 빠져들었다.

이를 깨고 나온 사람이 김영삼(金泳三) 원내총무였다. 그는 1969 11 8,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40대 기수론(旗手論)’의 막이 오른 것이다. 김영삼 의원의 출마선언은 광복 이후 60대 장로(長老)들이 지배해 온 야당 풍토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뉴서울호텔에서 김대중 의원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김영삼 의원이 대선출마 선언을 했는데, 형님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하십시오.

 

  김대중 의원은 깜짝 놀랐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출마선언을 한단 말인가?

 

  김대중 의원은 그때까지 출마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1953 3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민중당·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한 김영삼 의원과는 달리, 김대중 의원은 의정(議政) 능력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대변인 이외에는 별다른 당직을 맡지 못했었다. 내가 말했다.

 

  “출마선언이 곧 준비의 신호탄 아니겠습니까? 출마선언을 하면 사람도 모이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출마선언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하게 됩니다.

 

  “생각해 볼 테니, 하루만 시간을 주소.

 

  다음 날 우리는 뉴서울호텔 인근 한식집 풍림에서 만났다. 김대중 의원은 대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김대중 의원은 1969 11 18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듬해 2 12일에는 이철승(李哲承)씨가 출마 의사를 피력했다.

 

  결국 1971 4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 후보는 6342828(득표율 53.2), 김대중 후보는 5395900(득표율 45.2)를 얻었다.

 

  선거 결과가 나온 후 나는 김대중 후보에게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성명을 내고 박 대통령에게 축하화분을 보내주라고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화를 벌컥 냈다.

 

  “이 사람아, 자네 말을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라며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데, 박정희의 당선을 인정하면 어떻게 하나?

 

  “부정선거를 못 막은 것도 우리의 능력 부족입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합시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대통령 취임식은 꼭 참석하라고 권했다. 김대중씨도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 1일 아침,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자 김대중씨가 전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아니 취임식에 안 가고 왜 형님이 전화를 받으십니까?

 

  김대중씨는 불쾌한 목소리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박 대통령과 김대중씨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씨의 앞날이 걱정됐다. 나는 택시를 타고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사가 끝나려는 참이었다. 공화당의 길재호, 김성곤씨가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아이쿠, 김 의원이라도 와줘서 정말 고맙소.

 

#3. 전두환, 권총으로 자기 가슴 겨누며 “나는 아무 야심이 없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9 11 24, 재야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유신헌법 철폐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최규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것이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다. 나는 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됐다. 보안사 요원들은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내가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깨운 후 다시 팼다. 보안사에서는 DJ YWCA 사건의 배후조종자, 나를 조직책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잡혀 들어가, 제일 많이 얻어맞았다. 그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왼쪽 시력에 이상이 왔다. ‘타박성 백내장’이었다. 옆방에서 박종태 전 의원이 매를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YWCA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연행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았다. 연행된 지 6일째 되는 날,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李鶴捧, 민정수석비서관·안기부2차장·13대 국회의원) 대령이 찾아왔다.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못 만날 것 없지요.

 

  하도 맞아서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나를 좌우에서 두 사람이 부축해서 이학봉 수사국장의 방으로 데려갔다. 점퍼 차림의 전두환 사령관은 조니 워커와 오징어 등 마른안주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 의원께서 약주를 좋아하신다기에,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장군이 말했다.

 

  “조사를 해보니, 윤보선씨가 이번 사건을 주동했더군요. 즉각 연행해서 철저히 조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때 윤보선씨가 김지하 시인에게 자금을 대준 것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검사가 그때 안국동 윤보선씨 댁으로 가서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갖춰 조사했지, 수사기관으로 연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아, 그랬습니까?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두환 장군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점퍼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권총을 뽑더니, 자기 가슴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안사령관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오늘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다른 야심이 없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전 장군은 내게 시국수습방안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920분쯤 시작된 대화는 3시간 정도 계속됐다. 나는 최규하 정권을 강화시키고, 각계각층의 대타협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해야 하며, 군부의 정치개입은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다음 날 이학봉 수사국장이 찾아와 어제 전두환 사령관과 나눈 이야기를 문서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연행된 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20여 일쯤 지났을까. 이학봉 국장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1차 술자리를 마치고 2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국장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김대중씨와 손을 끊으세요. 그래야 형님이 삽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누구와 손을 끊는다는 게 세수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 줄 아나?

 

#4. 민추협과 YS DJ

- DJ, 신한민주당 창당 당시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

 

1982 8, 나는 23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듬해 5 18, YS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23일간 계속된 그의 단식은, 1980 5·17비상계엄확대 이후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운동세력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계기가 됐다.

 

  그해 6월부터 옛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조연하·김록영·박성철(김대중 후보 경호실장)·예춘호·박종태·양순직·박종률·김창환(金昌煥, 8대 국회의원)·최영근(崔泳瑾, 5·6·13대 국회의원)씨 등이었다. 우리가 모임을 가질 때면 안기부나 경찰에서 나와 감시를 했다.

 

 나는 “후광(後廣·DJ)이 없는 이상, 거산(巨山·YS)과 대화를 해서, 거산을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반대했다. YS 1979 5·30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가 된 후 동교동계를 소외시켰던 일, 1980 5·17조치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침묵했던 일 등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YS는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회장은 이민우(李敏雨, 4·5·7~10·12대 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전 국회부의장, 대변인은 김덕룡(金德龍, 13~17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였다. 나와 조연하·김록영씨도 이사로 되어 있었다. 나는 김 전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항의했다.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는데, 민주국민회의 이사라뇨? 동교동과 상도동이 힘을 합쳐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신뢰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민주국민회의부터 해체하십시오.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YS는 민주국민회의를 해체하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동교동과 상도동 사이에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 논의가 시작됐다. 동교동에서는 나와 조연하·김록영·예춘호씨가, 상도동에서는 YS·이민우·최형우·김동영(金東英, 9·10·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씨가 나왔다.

  

  1984 5 18일 출범을 선언한 민추협은 그해 7 12일 민추협 사무실 개소식을 열었다

 

  YS는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하는 국민연합 같은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인들만으로 조직을 꾸리자고 주장했다. 재야와 정치인의 조직이 일원화(一元化)되면 투쟁방법에 경직성을 가져오게 된다, 정치인과 혁명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때 이미 재야 일각에서는 남북교류나 통일,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해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정치인과 재야가 연합할 경우, 이런 문제에 대한 이견(異見)으로 조직이 표류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러한 걱정은 후일 전통 야당이 재야세력을 대거 영입하면서 현실화됐다.

 

  조직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도 논란이 있었다. 나는 ‘민주화추진간담회’를 주장했다. YS는 ‘민주구국투쟁동지회’라는 명칭을 주장했다. “투쟁을 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간담회가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과거에 구호만 과감하고 거창했지 행동이 따르지 못해 국민들을 실망시키곤 했잖습니까? 명칭이야 온건하더라도 투쟁을 과감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YS는 ‘구국’과 ‘투쟁’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나는 타협안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내놓았다. YS도 동의했다. ‘민추협’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제 지도부를 구성할 차례였다. 나는 YS를 찾아가 김대중 위원장-김영삼 부위원장 체제를 제안했다. “김대중 선생은 미국에 계시지만 투쟁은 국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김 총재(YS)께서는 부위원장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위원장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큰 바둑을 두십시오.

  

하지만 YS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는 김영삼-김대중 공동의장 체제를 제안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DJ를 공동의장으로 할 경우,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일일이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DJ를 고문, YS를 공동의장으로 하되, 동교동에서 공동의장을 내기로 했다.

 

  동교동계에서는 누구를 공동의장으로 하느냐를 놓고 논의 끝에 조연하 전 의원이 나를 추천했다. 김록영·박종률 전 의원도 찬성했다.

 

 동교동계에서도 나이가 어린 축이었던 내가 공동의장으로 추천되자 상도동에서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DJ가 아닌 동교동 인사가 공동의장을 맡는 것은 YS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공동의장제에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나는 공동의장이 아니라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다음 날 YS는 ‘공동의장 권한대행’도 곤란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럼 민추협을 깨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의장-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낙착을 봤다.

 

   1984 5 18,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민추협 출범식이 열렸다. 정보기관원들과 전투경찰들이 회의장 주변을 에워쌌다. 민추협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기관의 협박을 받고 그만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모 회사에서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있어서 참여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한 모씨의 경우는 그나마 양심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가석방 중이던 내게도 다시 수감하겠다고 위협했다.

 

  민추협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50 50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도, YS가 한 번 하면, 다음에는 내가 한 번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내가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YS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저런 놈하고 같이 공동의장이 되었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할 때에는 꼭 이렇게 발표했다.

 

  “고문 김대중, 공동의장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씨가 돌아오면 공동의장을 맡기기로 하고,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김 총재(YS)께서 사회도, 기자회견도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교동계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조연하·김록영·박종률·박성철 씨 등이 “왜 김영삼이 혼자서 회의를 진행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형님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쪽 사람들이 모두 팍 찌그러진 인상들인데, 이거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소화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김 총재보고 다 하라고 했소.

 

 나는 민추협을 하는 동안, 한번도 내가 YS와 동렬(同列)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식회의 석상이 아니면, 뒷자리로 물러나 앉았다.

  

  민추협을 만들면서 나는 미국의 DJ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공작이 끼어들 수도 있어, 일이 잘못될 경우, 그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DJ도 나의 진정을 알아줄 것으로 믿었다. 그와 3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나는 늘 그런 생각으로,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민추협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교동계는 소극적이었다. 미국에 있는 DJ도 ‘김영삼씨와 함께하는 민추협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그래서 민추협은 ‘정치인들의 조직’이라는 원칙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교동 가신(家臣)들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동교동계 정치인들 중에서도 박영록·박종태·양순직·최영근 전 의원 등은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이 참여한 것은 1985 DJ 귀국 이후였다. 전반적으로 DJ나 동교동계는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니까 어쩔 수 없이 민추협 활동에 끌려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정치적·인간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김상현이가 김대중 선생과는 관계없는 사조직(私組織)을 만들고 있다”, “김대중 계보를 김영삼에게 팔아먹었다”는 얘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정보기관 돈을 받고 하는 짓이다”라느니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하는, 전두환 앞잡이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1985 2·12총선을 앞두고 재야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총선에 참가하는 것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총선을 보이코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관제(官製)야당인 민한당(민주한국당)을 대신하는 선명야당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後者) 쪽이었다.

 

   조연하 전 의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신당(新黨)을 만들어 만석(晩石·조윤형)을 당수로 밀자”고 했다. 나도 기꺼이 동의했다.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아들로 7·8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윤형 전 의원은 유신선포 직후 보안사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3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민주투사였다.

 

  당시 조윤형 전 의원은 민한당 입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얘기를 듣고 난 후 그는 민한당 입당을 재고(再考)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 민한당 입당을 강하게 권한 사람은 DJ였다. 이때 민한당행()을 택한 조 전 의원은 2·12총선 후 잠깐 민한당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이후 민한당이 신민당에 흡수된 뒤 정치적으로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미국에 있던 DJ가 미국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 활동을 하고 있던 심기섭씨를 보내왔다. 평창동 북악파크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DJ의 장남 김홍일씨가 동석했다. DJ의 메시지는 강경했다.

 

  “김대중 선생은 신당 창당을 중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절교한다’고 통지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번에도’라는 것은 DJ의 소극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민추협 결성을 밀어붙인 것을 말했다. 나는 “‘국내 정세를 감안해서 대처하고 있으니, 그 점은 내게 맡겨달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DJ의 방침에 따라 권노갑씨 등 동교동 가신들은 2·12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DJ는 조윤형·정대철씨 등의 민한당 입당에 주안점을 두면서, 나를 통한 신당 추진, 민주헌정연구회 등을 통한 재야활동 등 3트랙(track) 전술을 썼던 게 아닌가 싶다.

 

#5. 에피소드-김상현과 YS DJ

정치권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


<1987
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통일민주당에서 탈당,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자 김상현 전 의원은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노태우 정권 초기, 한번은 DJ YS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국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DJ가 말했다.


"
거기 후농(김상현)이 있지요? 그 사람, 이름 석자만 빼고는 다 거짓말인 사람이니 조심하시오."
YS
는 짓궃게도 이 이야기를 김상현 전 의원에게 했다. 그러자 김상현 전 의원은 바로 받아쳤다.

"DJ는 이름 석 자도 거짓말인 사람입니다!">

 

정계원로인 P 전 의원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그거 맞는 얘기요"라고 했다. "그 현장에 내가 있었거든. 후농(김상현 전 의원)과 함께  YS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 올라갔는데, 마침 YS DJ와 통화하면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직접 들었지."


김상현 전 의원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김 전 의원은 "에이, 그런 일 없어요"라고 부인했다. 정계도 은퇴한 마당에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 느껴졌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5.12.01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권익현(權翊鉉) 전 민정당 대표

  ▲1951년 어느 날, 아버지가 신문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이거 한번 가보면 어떻겠느냐?
  
 
신문에는 4년제 정규 육사(陸士) 1(육사 11)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와 있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어차피 군대에 갈 거면 육사에 진학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령수학》 《요령영어》 같은 수험서를 구해서 일주일 동안 공부했다. 시험을 치는데, 내가 공부한 내용들이 그대로 나온 것 같았다. 아마 전쟁통이라 달리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시험 출제관도 내가 공부한 것과 같은 책을 보고 문제를 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후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 면접관 중에 키가 작고 얼굴이 새카만 대령이 하나 있었다. 육군정보학교장 박정희(朴正熙) 대령이었다. 그가 물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무얼 했나?
 
“웅변을 했습니다. 
  
 
“상()을 받은 적이 있나?
 
“조재천(曺在千) 경북지사상을 받았습니다.
  
 
“그래? 한번 해봐라.
  
 
나는 2~3분 정도 웅변을 했다. 박 대령이 “됐어”라고 했다. 그분이 10년 후에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고 18년이나 이 나라를 이끌게 될 줄, 그리고 내 인생이 그분과 얽히게 될 줄은 그때는 생각도 못 했다.
  
  1951
10 31일 정규 4년제 육사가 진해에서 문을 열었지만, 개교 기념식이 열린 것은 이듬해 1 20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80 연령에 이르러 이러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게 된 것을 생각할 때 그 감상이란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식장을 떠나면서 “이제는 마음 놨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8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생도들은 모두 200명이었다. 생도들은 2개 중대로 편성됐다. 1~100번까지가 1중대, 나머지가 2중대였다. 교번 106번을 받은 나는 2중대였다. 1중대에는 정호용(鄭鎬溶·육군참모총장, 내무
국방부 장관 역임), 2중대에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등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입교한 나는 동기생들보다 두세 살 어렸다.
  
  1955
10, 드디어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4년제 정규 육사’라는 말에 끌려 지망하기는 했지만, 정말 사관학교에서 4년 동안 교육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언제든 전선에 투입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입교한 생도는 200명이었지만, 임관한 사람은 156명이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90여 명.
  
  2
사단 26연대 7중대 1소대장이 내 첫 보직이었다. 당시의 군대는 부정부패가 말도 못 했다. 분위기도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정규 육사 1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군내(軍內)에 청신한 분위기를 일으켜 보려 노력했다.  


  
하나회 탄생

육▲군 작전교육국 차장 시절의 박정희 대령(오른쪽). 이후 박 대령은 육군정보학교장으로 나갔다. 왼쪽은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

 

516 전이었을 것이다.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예하 병기기지사령부 감찰장교로 근무하다가 경북 영천으로 발령이 났다. 우연히 2군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 “영천으로 간다”고 했더니, “거기는 뭐 하러 가나? 6관구로 가”라고 했다. 서울 영등포에 있던 6관구 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지방 근무 발령이 났다. 얼마 후 516이 일어났다. 이후 나는 경기도지사 박창원(朴昌源) 장군의 보좌관,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감찰과장, 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정보처장 등을 지냈다.
  
  5
16군사정권 말기,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사건, 파친코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이 불거져 나왔다. 김종필(金鍾泌·JP)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권력형 비리였다. 국민들은 물론 군내에서도 비판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孫永吉·예비역 육군 준장, 수경사 참모장 역임) 등과 함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비판적인 여론을 전했다. 박정희 의장은 “너희가 뭘 좀 만들어보라”고 했다. 아마 JP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군내에서 자신을 도와줄 세력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하나회였다. 거기에 무슨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 단지 박정희 의장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뿐이었다

  
  
1개 사단분의 장비 노획

맹호부대 대대장 시절. 월남전에 참전,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69년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월남에 갔다. 채명신(蔡明新) 사령관이 떠나고 이세호(李世鎬) 사령관이 왔다. 부대는 1969 11월 ‘창군기념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단위의 대규모 작전을 벌였다. ()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을 포위하고 일주일 동안 작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사단 전체가 전혀 전과(戰果)를 거두지 못했다. 모두 당황했다. 장병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우리의 작전구역 바깥 지역은 미 공군이 일주일 동안 폭격을 했다. 그곳은 조용했다. 어쩐지, 그곳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육사 동기생인 사단 작전참모에게 “미군이 폭격한 지역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했다. 그는 미군과 연락을 해보더니 “미군이 못 들어간다고 한다. 그곳은 월맹군 사단사령부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들어가고 싶어졌다.
  
 
“미군이 일주일을 폭격했는데, 어떻게 견디겠나? 아마 이미 궤멸했을 것이다. 들어가 보겠다.
  
 
미군 측에서는 “위험을 각오하고 들어가겠다면, 들어가라”고 했다. 박민식 대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헬기를 타고 월맹군 사단사령부가 있다는 적지(敵地)로 들어갔다. 교전(交戰)이 벌어졌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용했다. 박 대위에게 “이상 없느냐”고 했더니, “이상 없다”고 했다. “뒤져보라”고 했다.
  
 
적 사단사령부에는 각종 중화기를 비롯한 1개 사단분의 장비와 1년치 식량 등이 있었다. 적군은 모두 도망쳐서 아무도 없었다. 부상병 한 명만을 사로잡았을 뿐이었다. 노획한 전리품(戰利品)을 가져오려는데, 방법이 없었다. 공병 1개 중대를 요청해 헬기 착륙장을 만든 후, 일주일 동안 전리품을 실어 날랐다. 총알 한 방 안 쏘고, 한 명의 사망자, 부상자도 없이 거둔 전과였다. 사실은 거저주었다는 편이 옳다고 할까. 응우옌 반 티에우 월남 대통령을 비롯해 월남군, 미군, 한국군 요인들이 전리품을 보러 왔다. 이 일로 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대대장이 무공훈장 중 2등급에 해당하는 을지무공훈장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1970
년 귀국한 후 나는 서종철(徐鐘喆) 육군참모총장의 보좌관이 됐다. 내 전임자는 전두환 대령이었다. 이어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보직과장을 맡았다. 원래 이 자리는 고참 대령들이 맡는 자리였는데, 갓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이 보임(補任)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윤필용 사건 

  1972년 제26사단의 연대장으로 나갔다. 연대장을 맡은 지 1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갑자기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윤필용(尹必鏞)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5사단장으로 있을 때 군수참모로 인연을 맺었고, 이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방첩부대장(국군기무사령관), 맹호사단장 등을 거쳐 1970년 수도경비사령관이 됐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는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보안사령부와 함께 권부(權府)로 꼽혔다. 윤필용 장군 밑에는 육사 동기생인 손영길 준장이 참모장으로 있었다.
  
 
윤 장군은 ‘군부 실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합참의장이 그에게 세배를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서울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는 ‘필동 육본(육군본부)’이라고 일컬어졌다.
  
 
윤필용 사건은 1972 10월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이미 연로했으니, 더 노쇠해지기 전에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박 대통령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벌어졌다고 한다. 대로(大怒)한 박정희 대통령이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지시했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다고 알려진 장교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하지만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윤필용 장군은 군인으로서 훌륭한 분이었고, 그래서 존경했던 것은 사실이다. 남들에게는, 내가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냈고, 그분이 맹호부대장이었을 때 휘하 대대장이었으니, 그분 인맥(人脈)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 사건에 엮여 들어갈 정도로 그분과 가까운 사이였거나 무슨 일을 도모한 것은 없다. 나는 솔직히 그때도 영문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1973
4월 육군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내게 적용된 죄목은 ‘명령위반’이었다. 내가 무슨 명령을 위반했다는 것인지…. 그냥 사람을 잡아넣겠다고 만든 죄목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1심에서는 법정최고형인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2심인 고등군법회의에서는 선고유예로 형이 낮아졌다. 대법원은 무죄(無罪) 취지로 고등군법회의에 파기환송(破棄還送)했다. 손영길 준장은 2011년 재심(再審)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나는 사건 당시에 이미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든 군복을 벗어야 했다.  


  
이병철 회장의 예언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이건희 당시 부회장

 

군복을 벗은 내게 권철현(權哲鉉) 연합철강 회장이 고문(顧問) 자리를 제안해 왔다. 권 회장은 같은 집안이기는 했지만, 촌수가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1977
년 연합철강의 경영권이 국제그룹으로 넘어갔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부회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와 만났더니, “삼성에 와서 일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삼성으로 가겠다”고 했다.
  
 
당시 삼성 등 대기업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령 예편한 사람에게는 부장 자리를 주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나를 상무로 발령냈다. 삼성으로 출근한 지 사흘쯤 지났을 때였을까? 이건희 부회장이 나를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 회장은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얘는 우리 회사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닌데….
  
 
처음 출근해서 일 좀 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얘는 삼성에 오래 있을 애가 아니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앤데….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3년 후 나는 삼성을 떠나 정치에 투신하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그걸 미리 내다본 것일까?
  
 
삼성 본관 회장실 옆에는 회장 전용식당이 있었다. 임원들은 대개 거기에 불려갔다 오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서 임원들은 회장 전용식당에 불려가면 ‘죽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신입 임원임에도 자주 이 회장에게 불려갔다. 어느 날 이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네.
  
 
그룹의 총수가 일개 신입 상무인 내게 ‘부탁’이라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회장님께서 제게 부탁이라니요…. 제게 부탁하실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삼성에 임원이 200여 명이 있지만, 내가 특별히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들어주겠나?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회장이 말했다.
  
 
“자네가 카메라를 맡아줘야겠네.
 
“카메라라니요?
  
 
“자동차공업은 10분의 1mm 수준의 정밀가공기술이 있으면 할 수 있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카메라를 만들려면 100분의 1mm 수준의 기술이, 반도체를 만들려면 1000분의 1mm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카메라를 만들지 못하고 있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지금 반도체를 생산(당시 삼성은 반도체에 투자해 초기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해 내다 팔려고 해도 외국인들은 ‘카메라도 못 만드는 한국이 어떻게 반도체를 만든단 말이냐?’며 인정을 해주질 않고 있어. 그러니 자네가 카메라를 맡아서 해주게.
  
 
“저는 카메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카메라를 합니까? 
  
 
“자네에게 카메라로 돈을 벌어오라는 게 아닐세. 반도체를 살리기 위해서 한국에 우선 100분의 1mm 수준의 정밀가공기술이 있다는 걸 인정받기 위해 카메라를 만들라는 것일세. 이건 기술자 몇 명으로 되는 일이 아닐세. 자네가 꼭 해주게.

  
  
삼성 미놀타 카메라의 탄생

“제가 기계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요. 기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술을 조금 아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지 못하네. 기술을 모르는 자네가 적임자야.
  
 
회장이 그렇게 간곡하게 청하는데,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해보기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일을 맡았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6개의 카메라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제휴를 요청했다. 모두 대가(代價)를 엄청나게 불렀다. 100년 동안 장사를 해도 본전도 못 찾을 액수였다. ‘카메라 공장이 도쿄에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카에는 미놀타 카메라가 있었다. 그 회사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메라를 사러 왔는데,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당시 미놀타 카메라에는 두 가지 기종이 있었다. 그 기종을 각각 5만 대씩 10만 대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미놀타 상무는 무척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카메라는 우리나라에서 수입금지 품목입니다. 완제품으로 들여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제품(半製品)으로 들여가서 녹다운 방식으로 생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만드는지 기술지도와 검사도 해줘야겠습니다.
  
 
그래서 창원에 있는 삼성정밀 공장에서 카메라를 생산하게 됐다. 일본에서 과장급 직원이 나와서 기술지도를 했다. 그는 설계도를 갖고 왔으면서도, 007가방에 넣어두고 우리에게는 일절 보여주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일껏 생산은 하면서도 기술은 이전받지 못할 판국이었다. 설계도를 입수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리고 결국은 설계도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카메라 부품을 생산해야 할 단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국내에서는 카메라 부품을 만들어서 미놀타에 납품하는 회사가 있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부품 공급을 하지 않으면, 일본 공장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다. 미놀타 관계자에게 “우리나라에서 부품을 만들어서 너희는 포장만 해서 파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미놀타 관계자는 “그런 일 없다”고 잡아뗐다. “우리나라에서 부품 수출을 하지 않으면, 당신들 공장은 어떻게 되느냐? 부품만 있으면 이제 우리도 카메라를 생산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그러고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일본 미놀타에서 공급받는 가격으로 우리도 국내 부품업체로부터 부품을 받아서 미놀타 브랜드로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이 바람에 우리는 대번에 카메라의 국산화율을 70%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삼성 미놀타’ 카메라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우리나라 업체가 생산한 최초의 카메라였다.
  
 
하지만 일본 측은 자신만만했다.
  
 
“한국이 다른 건 다 만들어도 렌즈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렌즈를 팔면 된다. 
  
 
카메라 렌즈를 자세히 보니, 렌즈를 만든 회사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렌즈 생산 기계를 만드는 회사 이름을 알아냈다. 그 회사에서 기계를 사다가 창원공장에 설치했다. 한국이 렌즈는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일본인들에게 “그런 소리 마라. 우리도 다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창원공장을 돌아보던 그들은 자기들의 렌즈 생산 기계와 같은 기계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걸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오늘날 삼성이 만드는 스마트폰은 세계시장을 제패(制覇)하고 있다. 스마트폰에는 고성능의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간다. 그 기초를 닦는 데 나도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세지마 류조의 訪韓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상사 회장

 

내가 창원에 가 있는 3년 동안 군대에 남은 전두환 장군은 경호실 작전차장보, 1사단장을 거쳐 국군보안사령관이 됐다. 노태우 장군도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거쳐 9사단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동기생들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1979 1026사태에 이어 1212사태가 일어났다. 외신에서는 ‘전두환 장군이 한국의 실권자’라고 했다.
  
 
이듬해 5
16비상계엄확대 조치가 나왔다. 이어 518광주민주화운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 친구들이 “너도 정부에 들어와서 일해보라”고 권했다. 삼성정밀 전무(창원공장장)를 끝으로 삼성을 떠나 차관급인 무임소장관 보좌관이 되었다. 장관은 없었다.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 작업을 물밑에서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 무렵 이병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지마 류조(
島龍三) 일본 이토추상사 회장과 고토 노보루(五島昇) 도큐그룹 회장이 한국에 오는데, 전두환 장군을 만나게 해줄 수 있겠소?
  
 
세지마 류조 회장은 일본 대본영 참모 출신으로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의 모델이 된 인물. 이 무렵에는 얼마 후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를 비롯해 일본 정계(政界) 인사들에게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그를 한국에 보내, 새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성격을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나는 이병철 회장의 뜻을 전두환 장군에게 전했다. 그해 6월 방한(訪韓)한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노태우 장군을 만났다.
  
 
나는 세지마 류조 회장 일행에게 제3땅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세지마 회장은 땅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나침반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는 곡괭이가 팬 방향과 나침반 바늘의 방향을 대조해 보더니, “이건 북한이 판 게 맞다”고 말했다.
  
 
후일 국회의원이 된 후에 세지마를 만났더니, 그는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올림픽을 유치하라’고 권했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나고야가 올림픽 유치를 하려는데, 한국에 올림픽 유치를 권하다니, 그러면 일본에서 욕을 먹지 않습니까?
  
 
“그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1988년 올림픽은 한국이 하는 게 이익입니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을 치른 바 있습니다. 올림픽을 치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일본이 올림픽을 하겠다고 나서면 국제사회에서 욕을 먹습니다.
  
 
세지마 회장과 방한했던 고토 회장은 일본 체육계의 거물이었는데, 서울이 올림픽 개최를 놓고 나고야와 경합을 벌이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원래 나고야올림픽 유치위원이었는데도, 세지마 회장과 함께 서울올림픽 개최를 지지했다.  

  
  
김해공항에서의 비밀 교섭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취임 후 첫 방문국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1981년 국회의원이 되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 행정관리청 장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세지마 회장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만나보라”고 했다. 나카소네 장관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대 일본 총리들은 총리가 되면 첫 방문국으로 미국을 택했습니다. 나는 총리가 되면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이를 환영하겠습니까?
  
 
“물론 환영할 것입니다.
  
 
사실 나카소네는 자유민주당 내 소수(少數)계파의 수장(首長)으로 당시만 해도 총리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때문에 나카소네의 방한 의사를 외무부나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인 1982 11, 나카소네는 정말 일본 총리가 됐다. 이어 그는 세지마 회장을 통해 방한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노신영(盧信永·안기부장, 국무총리 역임) 외무부 장관을 만나 그 뜻을 전했다. 우리 정부도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양국 간 최대 현안은 경제협력자금 제공 문제였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직후 한국이 공산주의의 방파제(防波堤)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본이 안보 무임(無賃)승차를 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기여해 달라는 논리를 내세워 일본에 100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요청했었다. 이후 양국은 액수와 구성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나, 일본에서는 세지마 회장이 역할을 했다.
  
  1982
12 8일 나는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세지마 회장을 만났다. 이때 나는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서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언론의 관심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서울에서는 세지마 회장을 만날 수 없어서 시골에 볼 일이 있어 내려간다는 핑계로 김해공항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그때쯤에는 경협 규모는 40억 달러로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여 있었다. 다만 공적개발원조(ODA)와 수출입은행의 상품차관 규모를 각각 어느 정도로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우리는 ODA 규모를 늘리려 했고, 일본은 수출입은행 차관을 늘리려 했다. 논의 끝에 나는 세지마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경협자금 요구는 우리의 일방적 요구였습니다. 일본이 이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푼도 안 해도 좋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이 정치인으로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은 역사가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후 양국 간 교섭이 좀 더 진행된 끝에 경협자금 문제가 타결됐다. 이듬해 1 11일 나카소네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頂上)회담을 가졌다. 세지마 회장은 나를 좋아했다.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에게 반했소. 나나 일본과 가까우면 뭔가 부탁이 있을 법도 한데, 당신은 한 번도 업체를 위한 부탁을 한 적이 없소. 당신은 애국심 이외에는 생각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좋아하는 거요.
  
 
과분한 칭찬이었다. 나도 세지마 회장과 고토 회장이 베풀어준 후의(厚意)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민정당 사무총장이 되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현 일본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 일본 외무대신과 함께. 아베 신타로 외상은 한국을 이해하고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이였다.

 

나는 1981 3 26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거창-산청-함양 선거구에서 출마, 당선됐다.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맡아 공직에 뛰어든 이상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치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1982
5월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정의사회구현’을 모토로 내걸었던 당시 정권에 준 충격은 컸다. 그 여파로 5 20일 민정당 당직 개편이 있었다. 권정달(權正達·제11, 12, 15대 국회의원 역임) 사무총장이 물러나고, 내가 후임 사무총장이 됐다. 《조선일보》는 나를 “강직한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하면서 “어느 자리에서나 직언을 서슴지 않고 또 ‘상당한’ 보스 기질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그가 상처받은 당의 치유와 개혁주도 세력으로서의 민정당의 면모를 일신하는 이중의 과제를 어떤 솜씨로 풀어나갈지가 관심사”라고 평했다.
  
 
나를 사무총장으로 추천한 것은 이재형(李載瀅·국회의장 역임) 당시 민정당 대표였다고 한다. 그분과 개인적으로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분은 나를 눈여겨보았던 듯하다.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후임 사무총장으로 누가 좋겠느냐”고 하자 이 대표는 “권익현 의원이 좋겠다”고 추천했고, 전 대통령은 쾌락(快諾)했다고 한다


  
김영삼의 단식

1983 5월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 중인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이 되는 1983 5 18일 김영삼(金泳三·YS) 전 신민당 총재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실시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실을 직접 보도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단식은 곧 정국(政局) 초미(焦眉)의 관심사가 되었다. 나는 그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 병원으로 찾아갔다. 단식 19일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민주화운동을 하신다는 분이 정말 단식을 하다가 죽을 생각입니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벌써 19일이나 단식을 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습니다! 의사가 이제 처방을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정말 죽을 생각입니까?
  
 
“내가 죽기는 왜 죽어요?
  
 
나는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 이제 가만히 있어달라”고 설득했다.
  
 
내 설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YS는 나흘 뒤에 단식을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YS가 책을 하나 출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책의 원고를 보니 ‘빨갱이 책’이었다. YS 측에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황낙주(黃珞周·제8~10, 12~15대 국회의원, 국회의장 역임) 전 의원의 집에서 만났다. 내가 물어보았다.
  
 
“이 책을 총재님이 썼습니까?
 
“어느 대학생이 찾아와서 내 이름을 빌려 책을 쓰겠다고 해서 허락했소.
  
 
“책 내용을 보셨습니까?
 
“아니, 보지 않았소.
  
 
“이 책이 나오면, 총재님은 ‘빨갱이’가 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YS
는 그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그 책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있어서인지, 나중에도 YS는 나를 좋게 대해주었다.  


  
“부엌에서 일하다 보면 접시도 깨는 법”

  1984 6월 정래혁(丁來赫·국방부 장관, 국회의장, 9~11대 국회의원 역임) 민정당 대표가 부정축재를 했다는 투서가 언론사 등에 들어갔다. 투서를 한 사람은 같은 전남 출신으로 군 시절부터 경쟁관계였던 문형태(文亨泰·합참의장, 체신부 장관, 8~10대 국회의원 역임) 전 의원이었다. 문 전 의원은 내가 육사를 졸업한 후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사단장이었다. 결국 정 대표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내가 대표가 되었다.
  
  1985
년 제12대 총선이 다가왔다. 민심은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 민심을 우리도 모르지 않았다. 나는 ‘정상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선거구에서는 YS의 오랜 측근인 김동영(金東英·제9, 10, 12, 13대 국회의원, 정무장관 역임)이 출마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를 정치규제에서 해제하는 데 찬성했다.
  
 
총선을 앞두고 노태우 장관의 출마가 관심사가 됐다. 서울 서대문이나 대구에서 출마하느냐, 아니면 전국구(비례대표)로 나오느냐를 놓고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이 ‘권 대표와 의논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도 선뜻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고 했다. 그는 결국 전국구를 택했다.
  
 
12대 총선 유세가 시작됐다.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YS의 오른팔 김동영 후보는 전두환 정권이 잘못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을 하다 보면 접시도 깨고, 시끄러운 소리도 내고 그러는 법입니다. 방안에서 일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 시누이는 접시를 깨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정부가 그렇게 아무 일 안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 청중이 박수를 쳤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선출하던 시절이라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당선됐다. 김동영 의원은 유세장에서는 정권을 맹공했지만, 성품이 좋았다. 우리 부부와도 친하게 지냈다.  


  
“대통령이 국민과 싸울 일 있습니까?

대표 시절 어느 행사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얘기는 받아들이는 성품이었다

 

212총선에서 YS DJ가 후원하는 신한민주당이 약진했다. 민정당은 지역구에서 90석에서 3석 줄어드는 데 그쳤지만, 1야당이던 민주한국당(민한당) 57석에서 26석으로 쪼그라들었다. 반면에 신한민주당은 48석을 차지했다. 선거 결과를 5공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당 내외에서 비등했다. 그해 2 23일 전두환 대통령은 당직 개편을 단행, 노태우 의원을 당 대표로 임명했다. 나는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이에 앞서 2 1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노신영 안기부장을 임명하고, 장관급 13명을 교체하는 전면 개각(改閣)을 단행했다. 개각에 앞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전 대통령은 제12대 총선 때 서울 강남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태섭(李台燮·제10, 11, 13, 15대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의원을 입각(入閣)시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바로 반대했다.
  
 
“각하,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대통령이 국민과 싸울 일 있습니까? 이번에 이태섭 의원이 떨어진 것은 어찌됐건 그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을 바로 장관을 시킨다면,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미 이 의원에게 입각시키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취소하셔야 합니다. 그게 이 의원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1년쯤 지난 후 기회를 봐서 장관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알았다. 좋은 얘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음날 이태섭 의원이 나를 찾아왔다.
  
 
“대표님, 이번에 제가 입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들었어요. 대통령께 이 의원을 이번에 입각시키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의원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통령께 이 의원을 입각시키려면 1년쯤 지난 후에 하라고 말씀드렸어요. 이번에 이 의원이 입각하면 국민들이 반발합니다. 1년쯤 후에 들어가는 게 이 의원에게도 좋아요. 이번에 장관으로 들어가면, 이 의원은 다시는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없을 겁니다.
  
  1
년 반쯤 후에 전두환 대통령은 개각을 했다. 개각을 하기 전에 나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화를 넣었다.
  
 
“각하, 이태섭 전 의원, 기억하시지요?
  
 
전 대통령은 1년 반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이태섭 전 의원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이 전 의원은 제13대 국회에서 재기, 두 차례 더 국회의원을 지냈다.
  
 
흔히들 전두환 대통령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이 센 사람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고칠 줄 아는 분이었다.  


  
全斗煥, 일찌감치 盧泰愚 낙점

1987 8월 민정당 개헌안 토론 의원총회에서 노태우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권익현 당시 고문.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7년 단임(單任) 임기를 마치면 물러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었다. 하지만 과거 역대 대통령들이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꾀하는 것을 보아 온 많은 국민은 그 다짐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야당 인사들조차도…. 어느 날 전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권 대표, 야당 중진인 아무개 의원이 다녀갔는데, 그가 나보고 단임으로 물러나면 안 된다고 말합디다. 허허.
  
 
하지만 단임을 실천하겠다는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1987
3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주요 당직자들을 청와대 상춘재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당 고문인 나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모든 권한을 줄 테니 노태우 대표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노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6
2일 민정당 중앙집행위원과 당 소속 국회의장단을 상춘재로 초청한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노태우 대표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했다. 그동안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름이 거명되었지만, 내 생각에 전 대통령은 일찌감치 노태우 대표를 후계자로 낙점해 놓고 있었다.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기 위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6 10,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는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박종철 군의 죽음을 규탄하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나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는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던 정국은 노태우 대표가 6
29선언을 발표하면서 일거에 반전(反轉)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직선제 개헌이었다.  

  
  
8인 정치회담

1987 8 30일 여야는 개헌안에 합의했다. 민정당을 대표한 권익현() 의원과 통일민주당을 대표한 이중재 의원이 개헌안 합의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민정당 윤길중·최영철·이한동, 통일민주당 이용희·박용만·김동영 의원.

 

여야는 7 30 8인 정치회담을 만들어 개헌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민정당에서는 나, 윤길중(尹吉重5, 8, 11~13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민정당 대표위원 역임), 최영철(崔永喆10~1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체신부노동부 장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역임), 이한동(李漢東11~16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표위원, 국무총리 역임) 의원이, 통일민주당에서는 김동영, 박용만(朴容萬9, 10, 12, 13대 국회의원 역임), 이중재(李重載7~9, 12, 15대 국회의원 역임), 이용희(李龍熙9, 10, 12, 17, 18대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역임) 의원이 나섰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큰 원칙은 정해졌지만, 여야의 의견은 엇갈렸다. 민정당은 대통령 6년 단임을,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4년 중임을 주장했다. 민정당이 대통령 단임을 주장한 것은 중임은 곧 장기집권 욕망으로 이어지기 쉽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8인 회담은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인 8 31일 개헌안의 주요 쟁점에 합의했다.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은 우리 헌정사상(憲政史上)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합의개헌을 위해 정치권은 국회의원 임기 1년을 희생하는 용단을 내렸다. 합의개헌은 내 정치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후 평화적 정권교체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민주국가가 됐다. 우리가 만든 헌법이 그 후 28년이나 갈 줄은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 내각책임제 개헌을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의 실패가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컸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신파(新派)와 구파(舊派)로 나뉘어 갈등하다가 결국은 갈라섰다. 2공화국의 실패로 내각책임제는 우리나라에서 죽어버렸다. 요즘 다시 개헌, 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얘기들이 솔솔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제2공화국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극복했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친노(親盧)와 반노(反盧), 새누리당은 친박(親朴)과 비박(非朴)으로 나뉘어 시끄럽다. 지금과 같은 정당 정치로 내각책임제를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落薦, 그리고 再起

1987년 대선에서 YS DJ는 분열했고,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8
4, 13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공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부담 갖지 마십시오. 나는 국회의원이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습니다. 각하가 대통령을 하는 데 부담이 된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만두겠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그의 측근으로 거론되던 사람 두 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 사람들하고 좀 잘 지내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 사람들하고는 특별히 가까이할 일도, 멀리할 일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나는 5공 물갈이 차원에서 제13대 공천에서 탈락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나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측근들 때문에 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 나는 4년간 쉬다가 1992년 제15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로 의정(議政)단상에 복귀했다. 1996년 제16대 총선에서는 경남 산청-함양 선거구에서 출마, 당선됐다. 8년 만에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이다.
  
 
그 사이에도 여러 가지 큰일들이 있었다. 1992년에는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95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들이 부정부패와 군사반란죄, 내란죄 혐의로 법정에 섰다. 육사 동기생이기도 한 그들이 수의(囚衣)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을 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1997년에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가 몸담은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국회의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처음 건의한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완공된 것과 내가 주도해서 만든 국회 내 불자(佛子)들의 모임인 정각회(正覺會)가 자리를 잡은 것은 특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政界를 떠나다

/초선 의원 시절의 정의화 의원

 

그러다가 내가 정치를 떠나야 할 날이 왔다. 2000 1 6일 뇌출혈(腦出血)로 쓰러진 것이다. 그 전날 나는 지역구에 내려가 연설을 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곤 6일 저녁, 의원회관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나는 보좌관에게 “정의화(鄭義和·제15~19대 국회의원 역임, 현 국회의장) 의원을 부르라”고 했다. 의사 출신인 정 의원은 당시 초선(初選)의원이었다. 나와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 일주일 전쯤 내 사무실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전공이 뭐냐?”고 묻자, 그는 “골을 까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골을 깐다는 게 무슨 소리요?
 
“뇌수술을 말하는 겁니다.
  
 
“뇌수술하면 생존율이 어떻습니까?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생존율이 높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최창락(崔昌洛) 가톨릭 의대 교수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뇌수술을 많이 한 의사였다. 나는 농담을 했다.
  
 
“당신은 길을 잘못 택했소. 정치는 나처럼 아무 기술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요.
 
“저는 돈은 먹고살 만큼 벌어봤습니다. 이제 정치라는 걸 해보고 싶습니다.
  
 
아마 보좌관에게 정 의원을 부르라고 한 것은 그때 나눈 대화가 생각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정 의원은 의원회관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내 사무실로 올라왔다. 정 의원은 여기저기 진찰을 하더니,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여의도성모병원으로 달렸다. 최창락 박사는 노량진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성모병원에는 들여온 지 두 달밖에 안 된 MRI(자기공명영상) 기기가 있었다. MRI를 찍어보니 이미 머릿속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나처럼 일찍 뇌출혈 증상을 파악하고 수술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한다.
  
 
뇌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기억상실증이 왔다. 오래전 기억은 생각나는데 비교적 근래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기억력을 관장하는 뇌신경 일부가 다친 모양”이라고 했다. 16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정치를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치에서 물러났다. 수술을 받은 지 6개월쯤 지나고 나서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80평생을 살면서 여러 고비를 넘겼다. 정치를 하면서 그래도 지역구민들이나 국민들로부터 크게 욕먹지 않은 것이 고마울 뿐이다.

 

[취재 후기]

남에 대해 말을 아끼는 ‘大虎’

  10월 초 어느 날 선배인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가 “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가 병에서 회복되어 근래에는 골프도 치러 다니고, 여의도에도 모습을 나타낸다더라”고 했다. 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 하지만 기자가 고등학생 시절에는 민정당의 실세(實勢) 사무총장으로, 당 대표로 신문지상을 장식하던 이름이었다. 최병묵 편집장에게 이 이야기를 보고하자, 편집장은 바로 임태희(任太熙·제16~18대 국회의원, 고용노동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편집장은 임 전 실장과 함께 군대 생활을 한 사이였다. 며칠 후 편집장은 “권익현 전 대표가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연로해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렵다고 한다”고 했다.
  
  10
19일 권익현 전 대표를 자택 근처인 서울 마포구 도화동 마포가든 호텔 뒤 커피 전문점에서 만났다. 부인 신덕임 여사도 함께 나왔다. 모두 다섯 차례 권 전 대표를 만났다.
  
 
권 전 대표는 말을 아낀다는 느낌이었다. 12
12사태 이후 정치적 고비에서 자기가 한 일들을 내세우지 않았다. 윤필용 장군이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남을 평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훌륭한 분”이라면서 “세상에서 그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고 말했다. 신덕임 여사도 “사실 이순자 여사는 참 착하고 좋은 분인데,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고 거들었다. 노태우 대통령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나와 친했는데, 측근들 때문에 나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측근이 혹시 박철언씨 같은 사람을 얘기하는 거냐?”고 묻자, “그 사람도 있고…”라는 정도로 말했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삼성 미놀타 카메라 개발 얘기를 할 때는 “내가 우리나라에서 카메라를 처음 만든 사람이란 걸 아시오?”라면서 흥이 나서 얘기했다. 세지마 류조 이토추상사 회장 얘기를 할 때는 기자가 조금 아는 척을 하자 “젊은 사람이 세지마 류조를 알다니, 공부 좀 했구먼”이라면서 즐거워했다. 세지마 회장, 고토 회장에 대해서는 “고마운 분들”이라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권 전 대표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 신문에서 그의 별명이 ‘대호(大虎)’라고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아마 군() 출신이라는 배경에다가 호상(虎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나이 들어 정계에서 물러난 입장에서 남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얘기하지 않는 것, 남에 대한 좋은 기억만을 얘기하려 하는 것, 그리고 “정치를 하면서 그래도 지역구민들이나 국민들로부터 크게 욕먹지 않은 것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대호’였다.

출처 월간조선 12월호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9.02.11

■김진선 前 평창올림픽 유치·조직위원장

이명박·박근혜 前 대통령과의 秘史 공개

"MB, 이건희 赦免 대가로 삼성 뇌물 안 받아… 내 요청에 국익 위해 결단"

"평창올림픽을 유치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개회식에 초청받았으나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날 개최 선언을 했어야 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감 상태였다. 탄핵 안 됐으면 폐회식 날짜가 박 대통령 임기 끝나는 날이었다. 선출된 차기 대통령이 폐회 선언을 하는 걸로 맞춰져 있었다.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1년을 맞았지만 세간에선 관심이 없다. 평창올림픽 유치·조직위원장을 지낸 김진선(73) 전 강원지사가 출간한 '평창실록'도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이명박·박근혜와 관련한 미공개 비사(秘史)가 실려 있다.

 

▲김진선씨는“올림픽 조직위원장을 그만두는 상황까지 왜 전개됐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김 전 지사는 평창 오대산 아래 컨테이너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상경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이건희 회장의 사면(赦免) 대가로 삼성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 기소에는 삼성 뇌물 수수 혐의가 결정타였다. 검찰이 공개한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의 자수서(自首書)에는 '이건희 회장 사면(赦免)을 기대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 측에 다스 소송비용을 대납했다'고 나온다. 이건희 사면을 해주는 대가로 삼성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 책에서는 '이건희 사면 복권은 내가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제일 먼저 꺼냈고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강력하게 요청했던 것'이라고 했는데?
"이 대통령이 삼성과 거래해 이건희 회장을 사면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 이 회장을 사면하면 '대기업 봐주기' 여론으로 정치적 부담이 있었지만 국익 차원에서 마지못해 수용했다. 나는 이 대통령의 용단이었다고 평가한다."


―당신이 제일 먼저 이건희 사면 복권을 꺼낸 이유가 무엇이었나?
"올림픽 유치에서 IOC 위원의 역할과 활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올림픽 규정에 따라 공식 후보 도시는 IOC 위원들을 접촉할 수 없지만 각국의 IOC 위원은 다른 나라 IOC 위원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그룹 경영과 관련해 사법 처리가 확정되면서 IOC 위원 자격도 정지됐다. 3() 유치 도전 당시 우리 IOC 위원은 문대성 선수위원 한 명뿐이어서 큰 난관에 봉착했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처음 건의한 게 언제였나?
"이 회장의 사법 처리가 확정되고 한 달 뒤인 2009 9 11일 이 대통령이 강원도를 방문했을 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이건희 문제로 평창올림픽 유치 활동에 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자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응만 보였다."


―그건 어떤 뜻인가?
"의례적인 반응이었다고 본다. 며칠 뒤 청와대 체육 담당 비서관에게 '이건희의 활동 제약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대사가 달린 문제이니 특별 사면 복권을 생각해달라'고 하니 '대통령이 먼저 나설 수는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대기업 봐주기로 여론에 두들겨맞을 게 뻔한데, 대통령이 그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뒤 11 17일 당신은 강원도청에서 '이건희 회장의 IOC 위원 복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평창올림픽 유치를 하는 것이 내 소임이었다. 기자회견 뒤 이 대통령에게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특별 사면 복권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법무장관도 방문해 탄원서를 직접 전달했지만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이 많다'는 답변을 받았다. 어쨌든 이게 도화선이 됐다. 각계의 탄원이 이어졌다."


―정부 입장이 사면 검토로 바뀌었나?
"그때는 전혀 없었다. 사흘 뒤인 11 20일 평창 준비 상황을 보기 위해 방문한 이 대통령에게 또다시 '이 회장 사면을 적극 검토해달라. 사면에 대한 국민의 공감도가 높다'고 요청했다. 개최 도시 결정 여섯 달을 앞둔 12 29일에야 이 회장만 원포인트 사면을 해줬다. 국익을 고려한 이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당신은 이 전 대통령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훨씬 더 관계가 깊은 걸로 알고 있다. 평창올림픽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
"1998년 강원도지사 선거에 나섰을 때 내 부탁으로 선거 지원 연설 영상을 보내줬다. 유세차마다 박근혜 영상을 틀었던 게 선거에 많은 도움이 됐다. 동계올림픽 첫 유치 도전을 했을 때 전북 무주와 국내 경합을 벌여야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고 지역 간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박근혜 의원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니 '동계스포츠의 본고장인 강원도에서 당연히 해야 하지 않나'라며 소신껏 얘기해줬다. 평창 유치 과정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2011년 후반 천막 당사 시절의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총선에 출마하라'고 두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는데?
"그가 전화로 15분쯤 설득했다. 내가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잘하고 싶다'는 식으로 고사했지만 솔직히 미안했다. 그러자 얼마 뒤 청와대에서도 제안이 왔다. '조직위원장을 유지한 채 출마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뜻이었다. 내가 '겸직하면 정치와 올림픽 둘 다 전념하기 어렵다'며 고사했다. 이듬해 봄 새누리당에서 지명직 최고위원을 제안할 때는 안 받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말은 안 듣고 당(박근혜)의 말을 따른다'며 불쾌해했다고 한다."


박근혜 당선인이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국무총리 지명 카드가 무산되자 당신에게 총리직을 제안했던 것으로 책에 나오는데?
"2013 1월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방한했을 때 통의동 집무실에 있는 박근혜 당선인에게 소개했다. 공식 자리가 끝난 뒤 박 당선인과 독대했다. 내게 총리직을 제안해 순간 몹시 당황했다. 나는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첫 총리는 호남 출신 적임자를 찾아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지명을 단행하면 좋겠다. 1차 지명(김용준)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있었는데 이어 취임준비위원장인 나를 선택하면 또 비판과 공격을 받는다'고 고사했다."

 

2011년 남아공 더반에서 평창올림픽 유치가 확정됐을 때. 이건희 회장 모습이 보인다.

―그러자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는데, 당신을 얼마나 잘 봤으면?
"그쪽 캠프 사람처럼 개인적 인연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비서실장 제안에도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는데 저와 같은 시니어 멤버들이 주변에 있으면 신선함이 떨어진다.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사람을 쓰는 게 좋다. 평창올림픽도 대통령의 임기 끝을 장식할 중요한 과업이다'라고 말했다."


―그 뒤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는 정홍원 전 법무연수원장, 첫 비서실장은 허태열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발탁됐다. 어떤 고매한 인격자라도 권력의 자리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은데, 돌아보면 그때 받아들일걸 하는 아쉬움이 없나?
"개인적으로 영광이고 좋은 기회였지만, 박 당선인과 새 정부를 위한 내 판단이었다. 독대하기 한 달 전 박 당선인과 통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주변 인사들을 다 빼고 백지상태에서 조각(組閣)해 신선하게 출발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 적 있었다. 그는 '그렇게 쉽게 되겠느냐' 하는 반응을 보였다."


2013 7 '평창올림픽 유치 2주년'에 맞춰 청와대 담당 비서관에게 대통령 면담 요청을 했으나 한 달 되도록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른 일로 전화를 걸어온 정호성 부속비서관에게 면담 건을 얘기하니 "바로 시간을 잡아주겠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박 대통령을 만나니 '대면 보고 요청하신 걸 그간 몰랐다'고 하더라."


―그날 대통령 대면 보고에서 특기할 내용이 있었나?
"박 대통령에게 '북측도 빠른 남북 교류를 희망하는 것 같다. 동계올림픽과 관련한 남북 교류는 남북 정세와 별개 문제로 진행할 명분이 충분한 어젠다이므로 허락해주시면 통일부 장관과 협의, 진행해보겠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는 듣기만 했다. 오후에 전화를 걸어와 '남북 협력 문제는 현재의 남북 관계 추이를 봐야 하니 일단 진행을 유보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남북한 올림픽 교류 협력 문제는 중단됐다."


―어떤 정보에 근거해 '북측도 빠른 남북 교류를 희망하는 것 같다'고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나?
"두 달 전 러시아에서 만난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이 '올림픽과 관련, 남북 대화와 협력 방안 모색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 점에 동의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북한은 그 무렵 3차 핵실험을 했고, 2012년에는 두 차례 미사일 발사 시험을 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동계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나 경기별 분산개최를 제기했는데?
"동계올림픽 유치에 도전장을 던졌을 때부터 내가 그 구상을 갖고 있었다. 2006년 북한의 빙상 경기장과 스키장, 교통망, 숙박시설 등 인프라를 보러 갔다. 북한의 현실적 여건으로는 동계올림픽 경기를 여는 게 불가능했다. 이 의제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2014 7월 갑자기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그만둘 때 여러 설과 음모론이 있었는데?
"그해 5월 감사원 특별조사국 기동감찰과의 감사가 들어왔다. 고위직 비리를 감찰하는 부서인데, 조직위원회는 그런 대상도 아니었다. 명목은 조직위 사무총장의 비리 감찰이라는데, 과거의 시시콜콜한 관사 비품 유용까지 들췄다. 사무총장을 경질하면 감찰을 끝내겠다고 해서 나도 함께 물러나겠다고 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본인은 알지 않겠나? 청와대 실세의 견제를 받은 것인가?
"2013년 말 청와대 비서 관급 사이에서 '김진선 위원장이 박 대통령을 팔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으니 견제를 좀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왜 이렇게 전개됐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비공식 라인을 통해 '대통령에게 드리는 사직인사'를 보냈다. 그 편지가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 뒤로 박 전 대통령과는 통화할 기회도 없었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