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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5] [41] 겉으론 엄숙, 실제는 문란...권력자의 이중 생활 - 〈50〉독재 정권 유지 수법...내편과 敵으로 갈라치기

상림은내고향 2021. 4. 7. 18:22

[송재윤의 슬픈 중국5] 조선일보

[41]  겉으론 엄숙, 실제는 문란...권력자의 이중 생활

<1950년 많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모택동/ 공공부문>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김정일 등 20세기 공산정권의 권력자들은 이중인격의 연극배우로서 정신분열적 인생을 살다 갔다. 혁명의 “광장”에서 공산정권의 권력자들은 “천리혜안의 예지와 해박한 식견”을 갖추고 “신비한 판단력과 무비(無比)의 담력”을 가진 완전무결한 “불세출의 천재”들로 미화됐지만, 밀실 속의 그들은 기껏 추레하고 나약한 병든 영혼일 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20세기 공산 전체주의는 불완전한 인간이 절대 권력자가 되어 인격신의 배역을 연기해야만 하는 허술한 플롯의 부조리극이었다.

 

최고영도자의 여성편력 “집요하게 정욕을 드러냈다”

2003년 7월 9일 중국 칭화대학을 방문한 고(故)노무현 대통령은 “마오쩌둥 주석을 존경한다”고 발언했다. 그가 존경한 “마오쩌둥”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1980년대 운동권 서적들에 그려진 혁명신화의 영웅일 뿐이었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마오쩌둥은 혁명신화 속의 영웅처럼 고매하지도 숭엄하지도 않았다. 현실의 그는 극심한 편집증, 의심증, 불안증, 과대망상증, 불면증, 발기부전증 등을 앓는 병약하고 위태로운 한 명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인격신을 연기해야 하는 늙은 배우의 중압감 때문일까? 만년의 마오는 병적인 여성편력을 보였다.

 

22년간 마오쩌둥을 따라다닌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에 따르면, “마오의 사생활은 경악스러웠다. 겉으론 엄숙하고 장중하고 자상하고 친절한 노신사 같았지만, 그는 노상 여인들을 노리개 삼았다. 특히 만년에 마오의 생활은 극도로 문란했다. 그에겐 다른 오락이 없었다. 여인들을 완롱(玩弄, 끼고 놀며 희롱)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마오의 경호를 책임졌던 중앙경위국장] 왕동싱(汪東興, 1915-2015)은 말했다. ‘인생 막판에 한몫 보려 했나? 아니라면 어떻게 그토록 집요하게, 그토록 큰 정욕을 드러낼 수 있나?’” (李志綏, <<⽑澤東私⼈醫⽣回憶錄>> [台北市 : 時報文化出版企業有限公司, 1994]).

 

“부르주아 퇴폐 문화”...인민들은 연애도 못해

최고영도자가 맘껏 젊은 여인들을 완롱할 때, 중국의 대다수 인민들은 성적 자유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연인사이의 성적 접촉은 물론, 청소년의 풋풋한 연애감정까지도 부르주아 퇴폐문화의 잔재로 비판당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방송, 언론에 날마다 등장하는 단발머리, 뿔테안경, 군복차림의 장칭(江靑, 1914-1991)은 혁명적 숭고미의 심벌이었다. 여성이라면 모두가 장칭을 닮아야만 하는 정치적·문화적 강제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한 강퍅한 혁명의 문화 속에서 여인들은 머리손질도, 몸치장도, 화장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여성적 아름다움’(feminine beauty), 여성의 자기치장(self-adornment)은 부르주아 사회 성차별의 결과라 교육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예뻐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일부의 여성들은 여성미가 공산당의 이미지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정치적 명분을 만들어서 미모를 가꿨다.

 

<“우리들의 문학예술은 인민대중을 위한 것이다. 우선 노동자, 농민 병사를 위해야 하며, 노동자·농민·병사를 위해 창작하고, 노동자·농민·병사에 이용될 수 있어야만 한다. - 마오쩌둥.” “문화혁명의 기수 장칭 동지를 따라 학습하자!”/ 공공부문>

 

그 어떤 전체주의 정권도 인간의 연애감정과 성적 욕구를 막을 수는 없다. 정치적·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숨어서 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은밀한 로맨스가 드러나면 사회적 매장과 정치적 파멸을 면할 수 없었다. 혼전성교, 혼외정사 등 일체의 성적 일탈은 반혁명적 유맹(流氓) 행위로 철저히 비판됐다. 동성애자들에 대해선 일체의 관용도 없었다. 특히 남자동성애자들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고, 낙인찍히고, 투옥됐다. 문혁 시기부터 중국형법 106조에 따라 남자동성애자들은 정기적으로 구속됐다.

 

중국공산당의 집단주의적 인간관에 따르면, 개개인의 신체적 에너지는 집산화의 현장에서 전체적인 생산량의 증진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했다. 성적 방종 혹은 성적 일탈은 곧 집체적 노동력의 손실을 의미했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개개인의 성적 욕구를 통제하는 상황은 극심한 인간소외를 야기했다.

 

“젊음을, 이상을, 희망을, 사랑을 강탈당했다”

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겐 견디기 힘든 정신적·육체적 억압이었다. 문혁 이후 출판된 수많은 홍위병들의 회고록에는 사생활 침해를 고발하는 원한 서린 기록들이 많다.

 

“우리는 젊음을, 이상을, 희망을, 사랑을 강탈당했다.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비판당하고, 공격당하고, 투옥되기도 했다. 사랑에 관한 책은 모두 포르노물로 취급됐다. 사랑노래는 저속하다 비판됐고, 사랑에 빠진 남녀는 부랑인 취급을 당했다.” (章德寧, 岳建一, <<中國知靑情戀報告>>(光明日報出版社, 1998) “서문”에서)

 

구체적 사례를 몇 개 살펴보자.

사례1) 농촌에서 수년 간 살고 학교로 복귀한 한 고교생 소녀는 어느 날 러브레터를 받았다. 별 생각 없이 그 사실을 친구에게 말했을 뿐인데, 주변 학생들은 그녀를 따돌리며 책상에 침을 뱉거나 분필로 욕설을 적고, 자전거 바퀴에 구멍을 내기도 했다.

 

사례 2) 홍위병들과 여행한 후 임신한 15세의 소녀는 가족의 질타, 주변의 시선, 동료들의 가십을 견디지 못하고 “부끄러워서 살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맸다.

 

사례 3) 16세 소년에게 러브레터를 받은 한 소녀는 답장을 보내 “계급의 적들이 날뛰는 지금 어떻게 그토록 수치스러운 짓을 할 수 있냐?” 따지면서 그를 “반혁명분자”라 비판했다.

 

사례 4) 문혁이 이미 종언을 고하고 2년 쯤 지난 1978년 즈음 쓰촨성의 한 대학에 발생한 사건. 학교 당국이 몰래 연애하던 커플에게 당장 헤어지라 명령을 내렸다. 커플이 저항하자 학교 당국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정학 조치를 내렸고, 졸업할 땐 각각 서로 멀리 떨어진 도시 반대편 지역에 직장을 배정했다.

 

<영어로 저술되거나 번역되어 구미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문혁 시대 “잃어버린 세대”의 상흔문학(傷痕文學) 작품들>

 

여성 혐오 폭력... “반동 분자 마누라에게 자유는 없다 "

1967년 4월 10일, 왕광메이는 새벽 6시에 칭화대학에 끌려가서 6시 반부터 정강산 병단 홍위병들에 둘러싸여 “심문(審問)”을 당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비투 직전까지 진행된 중구난방의 “심문” 녹취록을 보면, 홍위병의 “심문”은 우격다짐과 윽박지름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정신적 고문에 가까웠다.

 

심문이 막 시작될 때 홍위병들은 왕광메이 앞에 치파오을 던져 놓고 당장 입으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1963년 인도네시아 방문 시 입었던 짧은 소매의 화려한 무늬 없는 흰색 개량 치파오였다. 왕광메이는 완강히 저항했다. 홍위병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당신이 입었던 바로 그 옷”이라며 압박했지만, 왕광메이는 당시 자카르타는 무더운 여름이었다고 반박했다. 홍위병들이 “오늘은 바로 당신에 대해 투쟁하는 날”이라 소리치자 왕광메이는 “죽어도 입을 수 없다”며 버텼다. 홍위병들이 거칠게 다그치자 왕광메이는 정색하고 말했다.

 

“너희들은 내 인신의 자유를 침범할 수 없어!”

이에 홍위병들은 “인신의 자유”를 외치는 왕광메이에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곧 왕광메이를 향해 쏘아붙였다.

 

“당신은 삼반(三反)분자의 마누라며, 반동적 자산계급분자, 계급이기분자일 뿐이다. 대(大)민주를 말하지 말라! 소(小)민주도 베풀 수 없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오늘은 당신에 대해 전정(專政, 독재)하는 날이다. 당신의 자유는 없다!”

 

홍위병들은 그렇게 왕광메이에게서 인신의 자유를 강탈했다. 인민에겐 민주를, 인민의 적에겐 독재를 행한다는 마오쩌둥의 ‘인민민주독재’ 원칙 그대로였다. 이미 계급이기분자로 낙인찍힌 왕광메이에겐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1966년 4월 문혁 직전 미얀마 방문 당시의 류샤오치와 왕광메이의 모습. 문혁사가들은 해외방문 시 왕광메이의 화려한 의상이 장칭의 시기심을 촉발했다고 추측한다./ 공공부문>

 

1967년 4월 10일 칭화대 “비투대회”(비판투쟁 대회)에서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에게 몸에 꼭 끼는 흰색 치파오를 입히고, 챙이 큰 모자를 쓰게 한 후, 탁구공 목걸이를 하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단상 위의 의자에 올라서게 했다. 30만 군중 앞에서 왕광메이를 모욕주고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그 밑바탕엔 분명 문혁시대 특유의 여성혐오증(misogyny)이 깔려 있었다.

 

원자물리학 석사였던 왕광메이는 외국어에도 능통해서 국공내전 발발 직전 미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Marshall, 1880-1959)이 충칭에 직접 와서 평화협상을 주재할 때 중공 측 통역관으로 참여했던 발군의 인재였다. 또한 왕광메이는 장칭보다 일곱 살 연하인데다 출중한 미모로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마오쩌둥이 류샤오치를 시기했듯, 장칭은 왕광메이를 질시했다. 다수 문혁 연구자들에 따르면, 중앙문혁소조의 장칭이 바로 그날 왕광메이의 비투 복장의 디테일을 직접 지시했다. 아마도 그날 왕광메이에 가해진 여성혐오증의 폭력은 장칭의 시기심에 기인했던 듯하다. <계속>

 

<1967년 4월 10일 비투 현장의 왕광메이/ 공공부문>

 

[42] 정의를 위한 투쟁? 본질은 시기, 질투, 탐욕, 증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1962년 초 “7천인 대회” 추정/ 공공부문>

 

트로이 전쟁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의 질투에서 시작됐다. 피비린내 나는 10년 전쟁도 결국 감정의 미망에서 시작됐음을 일깨워주는 고대 그리스신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사회의 모든 갈등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한다. 그들의 이론이 과연 그리스신화보다 설득력이 있을까? 류샤오치에 대한 마오쩌둥의 공격이 계급투쟁이었나? 왕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시기가 계급감정이었나? 인간의 갈등을 설명함에 있어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은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정치투쟁, 명분 내세운 막장 드라마

정치투쟁은 본질적으로 멜로드라마다. 권력자들이야 노상 심각한 척 거대 명분을 들먹이지만, 속임수, 거짓말, 허언이 아니라면 어쭙잖은 변명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그들은 시기, 질투, 탐욕, 증오 등 어두운 감정의 노예가 되어 싸움을 한다. 늙어도 권력자들은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어른 연기에 달통한 ‘못된 악동’일 뿐이다. 인류의 비극은 다수대중이 너무나 쉽게 ‘못된 악동’의 어른 연기에 현혹된다는 점이다.

 

정적의 제거를 위해 ‘못된 악동’은 함정을 파고 그물을 친다. 권력자들은 소설가 못잖게 이야기를 잘 지어낸다. 개연성 없는 드라마는 외면당하며, 허술한 정치모략은 금방 들통이 날 수밖에 없다. 해서 역대의 권력자들은 허위날조, 문서조작, 통계왜곡, 증거인멸, 위증교사, 공갈협박, 음해공작, 중상모략, 선거개입, 린치테러, 암살명령, 위장자살, 법관매수, 언론장악, 전쟁협박, 무력도발, 존속살해, 대량학살 등등 온갖 암수범죄와 권모술수를 써서 치밀한 정치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짠다. 다수대중을 완벽하게 속여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 반역자” 찾아 이미지 덧씌우기

1959년 마오쩌둥의 양위(讓位)로 국가주석의 지위에 오른 류샤오치는 1962년에서 1966년까지 실제적으로 중국을 지배한 실무정치의 핵심인물이었다. 천하의 마오쩌둥이라 해도 그런 인물을 함부로 쉽게 칠 수는 없었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 따위는 전혀 아니었다. 격정에 휩싸여 허술하게 류샤오치를 제거할 경우, 7억 5천만의 인민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 혹시나 인민이 류샤오치를 지지하거나 동정하게 된다면, 더 큰 낭패는 없을 터였다.

 

때문에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 인민을 영구히 갈라놓을 수 있는 치밀한 숙청의 드라마를 준비했다. 늦어도 1963년 초부터 마오쩌둥은 이너서클(inner circle)의 모사꾼들을 총동원해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그 최초의 포탄은 상상도 못할 극비의 기지에서 발사됐다.

 

1963년-1964년 중국의 역사학계엔 난데없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 1823-1864)에 관한 일대 논쟁이 일어났다. 1963년 8월 <<역사연구>>제4기에 발표된 32세의 선전원 치번위(戚本禹, 1931-2018)의 역사비평 “이수성 자술 비평”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수성이 누구인가? 왜 갑자기 그가 역사논쟁의 핵으로 부상했나?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天京, 남경)에서 청군에 포위된 이수성은 왕세자를 데리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하지만, 사흘 후 생포되고 말았다. 그는 옥중에서 5만자에 달하는 “이수성 자술(自述)”을 집필했다. “태평천국”의 역사를 소상하게 까발린 생생한 사료다. 놀랍게도 “자술”에서 이수성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증국번(曾國藩, 1811-1872)에 아첨하는 발언까지 남겼다. 그럼에도 1864년 8월 7일, 이수성은 남경에서 처형됐다.

 

<태평천국의 충왕(忠王) 이수성이 체포된 후 직접 썼다는 “이수성 자술(自述)”/ 공공부문>

 

당시 중국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이수성을 구국영웅이라 칭송했다. 장렬한 옥쇄(玉碎) 대신 위항(僞降, 거짓 투항)을 택하여 태평천국의 잔존병력에 대한 청군의 공격을 지연시켰다는 해석이었다. 주류의 역사해석을 비판하면서 치번위는 이수성을 반역자라 단정했다. 학술계와 문예계의 전문가들은 치번위의 비평에 격렬히 항의했다.

 

중공중앙 선전부에선 저우언라이의 주재 아래 20명의 역사학자들이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다. 관영매체의 선동가 치번위는 본래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치번위의 역사왜곡과 논리비약을 질타했다.

 

그렇게 논쟁이 종결되나 싶었는데, 마오쩌둥이 슬그머니 개입했다. 논쟁을 예의주시하던 마오쩌둥은 심복들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마오의 부인 장칭이 치번위에게 귀띔했다. “주석께서 지지하시니 걱정 말라!” 치번위는 1964년 <<역사연구>>4기에 이수성을 반역자라 단정하는 두 번 째 비평을 실었다. 마오의 의중을 짚은 치번위는 100년 전의 이수성을 다시 불러내 광장의 사형대에 세웠다. 이로써 이수성은 돌이킬 수 없는 반역자가 됐다. 더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심(毛心)을 따라 움직이며, 모풍(毛風)이 일면 바싹 엎드리는 잔풀처럼 연약했다.

 

<문혁 당시 마오쩌둥을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핵심인물들: 왼쪽부터, 장춘차오(張春橋), 장칭(江靑), 저우언라이, 야오원위안(姚文元), 마오쩌둥, 치번위(戚本禹), 왕리(王力), 관펑(關鋒), 무신(穆欣)/ 공공부문>

 

국민당서 출옥한 61명의 반도(叛徒) 집단

1963년 갑자기 이수성을 불러내 반도(叛徒)의 낙인을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1936년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출옥을 위해 “허위로 자수했던” 61명의 혁명가들을 모조리 반역자들로 몰아 단죄하기 위함이었다. 문혁 개시 3년 전부터 마오는 여론의 호수에 독을 바른 밑밥을 뿌리고 있었다.

 

61명 모두 1930년대 국민당이 지배하던 이른바 백구(白區, 백색지구)에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하던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백구에서의 혁명운동은 위험천만의 활동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활약하던 혁명가들은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면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끝까지 저항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최대한 신원을 숨긴 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출옥하는 게 가장 현명한 생존의 전술이었다.

 

1930년대 중공중앙은 백구 혁명가들의 허위투항에 관해 꽤나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1936년, 일본의 침공을 앞둔 상황에서 국민당 감옥에 갇혀 있던 보이보(薄一波, 1908-2007), 류란타오(劉瀾濤, 1910-1997), 안자문(安子文, 1909-1980) 등등 61명의 신변이 중요한 이슈로 급부상했다. 당시 북방국 총책이었던 류샤오치는 중공중앙 총서기 장원톈(張聞天, 1900-1976)에 이들이 국민당이 요구하는 자수의 절차를 밟고 출옥할 수 있도록 윤허해 달라 요청했다. 장원톈은 흔쾌히 류샤오치의 요청을 수락했다.

 

비밀리에 당의 뜻을 전달받은 61명은 국민당의 요구에 따라 이른바 “반공계사(反共啓辭)”를 작성한 후 출옥했다. 그들이 작성한 전향의 문서는 국민당 관판언론 <<화북일보(華北日報)>>에 게재됐다. “반공계사”는 공산당 활동을 했던 과거를 참회하고, 반공의 의지를 표명하고, 일체의 반동행위를 규탄하는 자수(自首)의 선언문이었다

 

<반혁명수정주의분자 보이보(薄一波) 투쟁대회. 문혁 당시 보이보는 136번이나 비투를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어 8대원로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인물. 보이보는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 숙청된 보시라이의 부친/ 공공부문>

 

출옥에 성공한 61명은 이후 형식적인 자아비판과 심문의 과정을 거쳐 공산당에 다시 입당했다. 이후 류샤오치는 61명 “자수분자”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돼주었다. 61명 중 41명이 문혁 당시까지 건재했는데, 그중 22명은 중앙위원회에 진출해 있었다. 마오쩌둥으로선 다수의 “자수분자”들이 류샤오치의 지원을 얻어 중앙 정치에 진출해 있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는데, 그들을 일시에 모두 반역자로 단죄하기도 쉽지 않았다.

 

1966년 11월 말, 톈진 난카이(南開)대학의 두 홍위병 집단들은 경쟁적으로 학내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과거의 신문들을 샅샅이 뒤져서 1936년 국민당에 허위로 자수했던 류란타오의 “반공계사”를 찾아냈다. 위항을 위해 국민당이 내민 자수의 양식에 서명만 했을 뿐이지만, 날마다 비투의 빌미를 찾는 홍위병들에겐 반역의 스모킹 건이었다. 홍위병이 발견한 류란타오의 “반공계사”는 곧 국무원 총리실까지 보고됐다. 저우언라이는 이미 심의를 거친 과거사이므로 덮고 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마오쩌둥은 무심코 “조판(照辦, 그렇게 하라!)”이라 비시(批示)했는데······. 당내 반역자를 색출하는 홍위병 집단의 자발적인 혁명투쟁을 저지할 마오가 아니었다.

 

1967년 2월 3일 알바니아 사절단과의 접견식에서 마오는 처음으로 국민당에 투항했던 “61명 반도집단”에 관해 언급한다.

 

“[반혁명분자들 중엔] 국민당에서 물려받은 자들도 있소. 그들 중엔 국민당에 체포됐던 공산당원들도 있소. 그들은 당을 배신한 후, 신문에 반공선언을 게재했었소. 그때 우리는 그들이 반공분자들임을 간파하지 못했소. 그들이 대체 어떤 공적 절차를 거쳤는지 몰랐죠. 이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때 그들은 국민당 편에 서서 공산당에 저항하고 있었소.”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7302, 윌슨센터 디지털 아카이브)

 

류샤오치를 반역자로 몰기 위해서

상식적으로 포위 상태에서 적군에 투항해서 아군의 병력을 살린 장수는 변절자일 수 없다. 조조의 관영에서 장시간 후한 대접을 받았던 관우를 배신자라 부를 사람도 없다. 레닌(1870-1924) 역시 “좌익공산주의 소아병”(1920)에서 “자동차 강도에겐 돈, 여권, 리볼버, 자동차를 다 주고” 생명을 구하는 타협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1930년대 백구에서 위항(僞降, 허위투항)의 전술을 써서 국민당의 손아귀를 벗어난 혁명투사를 반역자로 단죄할 근거는 희박했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미 1963년부터 이미 이수성의 이마에 반역자의 낙인을 찍어 놨음이 분명하다. 물론 단지 “61명 반도집단”만을 비투(批鬪, 비판투쟁)하기 위함이라면 이수성을 반역자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마오의 목표는 초지일관 국가원수 류샤오치였다. 그를 잡기 위해서 마오는 촘촘한 그물을 짰다.

 

이제부터 최후의 정적에 3중의 올가미를 걸어서 천천히 목을 조여 파멸시키는 잔혹한 권력자의 정치 멜로드라마가 시작된다. 3중의 올가미란 바로 류샤오치에 들씌워진 반도(叛徒), 내간(內奸, 내부간첩), 공적(工賊, 노동계급의 도적)의 누명을 이른다. <계속>

 

[43] 영국 대사관에 불지른 홍위병들...중 정부는 묵인

<1967년 8월 22일, 베이징의 영국대사관에 모여 시위하는 홍위병들. 그날 밤 10시 20분경부터 홍위병들은 관사의 창문을 깨고 진입하기 시작했다./ 공공부문>

 

2021년 1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전화통화에서 “시진핑 주석의 견고한 지도”를 칭송하고 “중국공산당 창립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이구동성으로 중국공산당의 관료주의, 언론통제, 인권유린, 패권외교를 비판하고, 대규모 소송까지 예고한 시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언론이 한국의 “아첨” 외교를 놓칠 리 없다. 중국의 관영매체는 대대적으로 문 대통령의 시 주석 칭송을 대서특필했다.

 

문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단순한 외교수사가 아니라 일관된 저자세 친중 외교의 연장이다. 2017년 12월 15일 베이징을 방문한 문 대통령은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칭송하면서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에 동참”하겠다는 발언까지 했다. 외교사에 전례를 찾기 힘든 과공(過恭)의 비례(非禮)였지만, 중국지도부는 열 끼니 중 두 끼만 밥을 같이 먹는 모욕적인 대통령 홀대를 연출했다. 심지어 기자단을 폭행하는 반문명적 폭거까지 감행했다.

 

굴종적 대중외교, 엎드리면 밟힌다!

중국은 지금도 아편전쟁 이후 산산이 조각난 과거 중화중심주의 “조공질서”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국(大國)” 앞에서 작은 나라가 먼저 “소국(小國)” 의식을 드러내면, 큰 나라는 오히려 그 작은 나라를 더 무시하고 조롱하고 짓밟는다. 현대 외교 프로토콜의 기본원칙은 국가 간 상호평등이다. 바로 그 기본원칙을 영리하게 활용하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쥐고 흔들고 쩔쩔 매게 하는 외교의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중국 외교의 검은 역사를 꿰고 있어야 한다. 가령 1967년 8월 22일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영국 대사관에 난입해 불을 질렀던 바로 그런 사건을·······.

 

비틀즈 노래 “혁명(Revolution)”의 암시

“하지만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니면, 결국 누구와도 뭐 하나 이룰 수 없을 걸!” (But if you go carrying pictures of Chairman Mao, you ain’t going to make it with anyone anyhow!)

 

1968년 출시된 비틀즈 명반 더블앨범 “The Beatles”(일명 “화이트”)의 제4면 첫 곡 “혁명1번 (Revolution No.1)”에 담긴 가사다. 마오쩌둥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작사자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은 당시 좌파세력의 반발을 샀지만, 이 노래는 지금까지 팝음악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레넌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왜 레넌은 그들에게 “마오 주석의 사진들을 들고 다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1967년 8월 22일 밤 베이징 홍위병들의 영국대사관 테러사건을 파헤쳐야만 한다.

 

https://youtu.be/BGLGzRXY5Bw

 

<영국 록밴드 비틀즈의 명곡 “혁명(revolution)”엔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시위대의 얘기가 살짝 등장한다. 문혁의 절정에서 영국 대사관 방화를 계기로 당시 영국에서는 반중 감정이 일어났다. 폭력투쟁 대신 평화적 시위를 주장했던 레넌은 이 노래를 통해 당시 서구 지식문화계에 퍼져 있던 마오주의의 모순을 풍자했다.>

 

베이징 영국대사관, 불길에 휩싸이다

주중 영국 부대사 도날드 홉슨(Donald Hopson, 1915-1974) 경의 현장 보고서는 대충 다음과 같다. 1967년 8월 22일 1만 명의 홍위병 시위대들이 베이징 영국대사관 건물 앞에 운집했다. 그들은 커다란 조명등과 확성기를 설치한 후, 집회를 시작했다. 홍위병들은 대사관저 앞에 설치된 간이 무대에 올라 구호를 외치고 혁명가곡을 제창하고 연설을 이어갔다. 그날 밤 10시 20분경부터 홍위병들은 대사관저 바로 코앞까지 몰려가서 영국 대사관의 호위병들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건물 내부에 있던 23명의 영국인들은 즉시 건물 맨 아래층으로 피신했다.

 

홍위병들은 창문을 깬 후, 불붙인 짚단을 건물 안으로 던져 넣었다. 겁에 질린 영국인들은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렸고, 곧 건물 안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11시 10분경 홍위병들은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국 대사관 직원들은 격하게 돌진해 온 홍위병들에게 머리를 뜯기고 넥타이를 잡힌 채로 벌벌 떨었다. 홍위병들은 영국인들을 걷어차고 때렸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다가 무릎을 꿇리고 사진을 찍었다. 또 그들은 영국인들의 손목시계를 빼앗고, 셔츠를 뜯고 바지까지 찢어버렸다. 함께 있던 영국인 여인들은 성적 모욕까지 당했다.

 

바로 다음날 런던 타임즈(The Times)나 가디언(The Guardian) 같은 영국의 대표적 언론은 물론, 영미권의 거의 모든 언론이 톱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예를 들면, 미국 인디애나주 퍼트남 현(縣) 그린캐슬(Greencastle)의 지방신문 <<데일리 베너>>도 제1면 왼쪽 상단에 “베이징 영국대사관, 불타고 약탈당하다!”(British Embassy, Burned and Sacked in Peking)란 제목으로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미국 인디애나 그린캐슬의 지방신문에까지 보도된 1967년 베이징 영국대사관 방화사건.>

 

영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이 사건이 “중공정부가 고의적으로 교사한 잔악무도하고 반문명적인 행위”라 규탄했다. 8월 30일 외무부장관 브라운은 중국의 외무부장관 천이(陳毅, 1901-1972)에 공식적인 항의 서신을 보내 외교관계의 유지와 외교사절단의 잠정 철수를 요구했지만, 홍위병의 공격 하에 있었던 천이는 중국 외교 특유의 “전술적 무응답”으로 화답했을 뿐이었다.

 

홍위병들이 영국대사관을 급습하기 이틀 전(1967년 8월 22일), 중공정부는 48시간 이내로 홍콩정부에 친중 언론의 폐간 조치를 철회하고, 구속된 친중 언론인을 즉각 석방하라는 최후통첩을 발송했다. 최후통첩의 발송주체는 베이징 정부였지만, 방화 테러의 주체는 홍위병들이었다. 홍위병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관민합작의 외교 테러였다. 물론 베이징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1967년 8월 22-23일, 홍위병들에 의해 불타버린 영국대사관 공관 내부/ https://roomfordiplomacy.com/beijing-3-1950-1972/ >

 

중국공산당의 전략적 고립주의

1960년대 초부터 중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고독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래 마오쩌둥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속적인 중소관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963년 이후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될 때, 중국은 소련과 더불어 북베트남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1965-66년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세력 숙청 당시 많은 중국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대륙에서 일어난 문혁의 광풍은 곧 국경 너머 마카오와 홍콩에 몰아쳤다. 1966년 12월 3일 마카오에선 친중 집단에 의한 대규모 정치투쟁이 일어났다. 1967년 봄부터 홍콩에도 격렬한 문혁의 돌풍이 일어서 5월엔 174개 친중 노동조합들이 파업에 나섰다. 파업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친중 세력의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1967년 5월 22일 홍콩정부는 167명을 구속했다. 또 용공 출판물을 전면 금지시키고 친중 세력의 교육기관을 폐쇄하는 조치를 이어갔다. 7월 1일엔 최소 8명의 친중 시위자들이 경찰에 총살당하고 맞아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7월 8일엔 광둥성의 민병(民兵)을 포함한 수백 명의 무장집단이 국경을 넘어 홍콩 북부의 샤타우콕(沙頭角) 지역으로 침입해 경찰서를 습격해 다섯 명을 사살하고 11명에 중상을 입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산세력은 지하로 스며들어 도시 곳곳에 사제 폭탄과 유인물을 설치하는 본격적인 게릴라 작전을 전개했다. 홍콩 경찰과 영국 병력은 도시 전역을 샅샅이 뒤지며 8천 개의 사제폭탄을 제거했지만, 1967년 10월까지 홍콩에선 폭탄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문혁이 홍콩으로 번지면서 실제로는 저강도의 중영전쟁으로 비화됐지만, 중공정부는 역시 완벽한 면책특권을 누렸다. 중공정부는 언제나 혁명군중의 자발적 반제투쟁이라 둘러댈 수 있었다.

 

주중 외교공관을 공격하라!

문혁 당시 재외 중국대사관 직원 중 3분의 2는 본국 송환되었다. 외국에 남은 중국인들은 현지 경찰 및 시민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해외 중국인의 정치투쟁은 본국의 홍위병들과의 교감 속에서 전개됐다. 예컨대 1967년 1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몰려간 중국유학생들이 소련경찰과 충돌한 후, 모스크바 시민들은 중국대사관의 건물을 일부 훼손했다.

 

이에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소련대사관에 몰려가서 인(人)의 포위망을 쳤다. 파리의 중국유학생들이 소련대사관에서 시위하다 파리 경찰에 제지당하자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차에서 내리는 프랑스 대사의 부인을 에워싸고 무려 여섯 시간 동안 구호를 외쳐댔다.

 

1967년 6월, 추방령을 받고 공항으로 가던 인도대사관 직원들이 홍위병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967넌 8월 29일 런던에선 20명의 중국공사관 직원들이 야구방망이, 곤봉, 유리병, 도끼 등을 들고 영국 경관을 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영국 경관들은 경찰봉과 쓰레기통 뚜껑을 들고 방어해야만 했다. 이 놀라운 사건은 1967년 8월 30일자 런던 타임스 1면을 장식했다.

 

<1967년 8월 30일, 영국의 런던 타임즈 제1면. 1967년 8월 29일 런던의 중국공사관 앞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영국의 경찰과 충돌하는 중국공사관 직원들의 모습. >

 

로이터 통신원 영국인 안쏘니 그레이(Anthony Grey, 1938- )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 27개월간 구금상태에 있었다. 중공정부는 그레이를 붙잡고서 홍콩의 친중 언론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인질 흥정을 이어갔다. 석방 후 출판한 <<베이징의 인질 (Hostage in Peking)>>(1970)에서 그레이는 베이징 주재 11개 외교공관이 홍위병들의 시위에 휩싸이는 과정을 상세히 고발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외교공관을 향한 홍위병의 테러는 다음 단계로 진행됐다. 1) 외교 공관 담벼락에 빼곡히 대자보를 붙이고 정치 구호를 휘갈긴다. 2) 공관 근처에 간이 화장실이 설치된 후, 차와 빵을 파는 행상들이 들어서고, 이어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몰려든다. 3) 모여든 군중은 곧 정연한 대오를 갖추고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강력한 시위를 전개한다.

 

그레이의 관찰에 따르면, 베이징의 시위는 동원된 군중의 “숫자와 철통규율에서 세계 그 어떤 시위와도 구분됐다······. 과격하게 성난 군중의 시위일 경우, 고도로 효율적인 주동자들이 불과 사흘 만에 외교공관 앞으로 1백만의 시위대를 행진시킬 수 있다.”

 

이 모든 사태는 정부의 묵인 혹은 은밀한 지시 아래서 일어났다. 겉으로는 홍위병들의 “자발적인” 테러였지만, 그 배후엔 언제나 정부가 있었다. 다시 말해, 최고영도자는 “반제투쟁!”의 기본원칙만 외쳐댔을 뿐이었다. 모든 구체적 집단테러는 “창의적인 혁명군중”의 자발적인 운동이라 포장됐다.

 

요컨대 중공정부는 군중을 움직여 베이징의 외국공관을 공격한 외교적 폭거의 전력이 있다.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과공(過恭)은 곧 파멸의 비례(非禮)다. 작은 나라가 먼저 바싹 엎드리면 큰 나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밟아버린다. <계속>

 

<1967년 여름 홍콩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친중 시위대. 홍콩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 연기”를 경고하고 있다. / 공공부문> 

 

[44]  권력은 칼날...세게 쥐고 휘두르다 스스로를 벤다

<문혁 시기 중공중앙의 3대 영도자. 왼쪽부터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공공부문>

 

“권력은 칼날이다. 가볍게 쥐어야 한다.” 작가 복거일(卜鉅一, 1946- )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권력자가 서슬 퍼런 칼날을 세게 잡고 난폭하게 휘두르면, 그 칼끝이 어디로 향할까? 결국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치고, 가슴을 찌르고, 팔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다. 칼을 쥔 권력자는 그 칼을 온전히 제 것이라 여기지만, 인간의 손아귀는 결코 흉포한 검(劍)의 진동을 견딜 수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제멋대로 권력의 칼날을 휘두르다 스스로를 베고 파멸한 인물들이 즐비하다. 권력은 부메랑이다. 가볍게 날려야 한다.

 

권력은 부메랑: 몰락하는 권력자들

문혁 초기 마오쩌둥의 발밑에서 살살거리며 권력의 충견으로서 맘껏 칼날을 휘둘렀던 인물들은 어김없이 정치적 파멸에 이르렀다. 중공 서열 제2위로 급등하여 전군(全軍)을 지휘하며 승승장구하던 린뱌오(林彪, 1907-1971)는 1971년 9월 3일 일가족과 도망 중 몽골의 오지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마오쩌둥 사후 채 한 달도 못 된 1976년 10월 4일 4인방은 전격 체포되어 이후 사형, 종신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문혁 초기 시가 퍼레이드를 하는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모습. 문혁 시기 마오의 후계자로 인식됐던 권력 서열 제2위의 린뱌오는 1971년 반란음모의 혐의를 쓰고 소련으로 망명 중 비행기 추락사한다./ 공공부문>

 

린뱌오나 4인방처럼 극적으로 파멸하진 않았지만, 왕리(王力, 1922-1996), 관펑(關鋒, 1919-2005), 치번위(戚本禹, 1931-2016) 역시 정치적 단명을 면치 못했다. 문혁 초기 마오의 총애를 받고 홍극(紅極)의 일시(一時)를 풍미했던 극좌권력의 핵심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마오쩌둥 사상의 대변인들로서 날마다 펜과 입을 놀려댔다. 세간에선 이들 세 명을 “문혁 3대 필간자(筆杆子, 붓대)”라 불렀다. “5.16통보,” “문혁 16조” 등 문혁 초기 모든 강령성의 문건들이 이들의 손에 쥐어진 붓대로 작성됐기 때문이었다.

 

문혁 초기 마오쩌둥은 이 세 명을 정치선동의 첨병으로 내세워 성난 군중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미 <39회>에서 살펴봤듯 1967년 4월 1일 <<인민일보>>1면에 실린 치번위의 “애국이냐, 매국이냐?”는 홍위병이 류샤오치를 공격하는 이념의 흉기로 쓰였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느닷없이 이 세 명의 충성스런 마오주의 극좌 선동가들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계획을 세웠다. 1967년 8월부터 이 세 명은 격리(隔離) 상태에서 잔혹한 심사(審査)를 받아야만 했다. 이듬해 1월부터 그들은 차례차례 정치범 수용으로 악명 높았던 베이징 창핑(昌平)의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됐다

 

중국의 역사학자 푸웨이화(卜偉華, 1950- )의 표현을 빌면, 이들은 “무산계급 사령부의 상방보검(尙方寶劍, 절대 권력의 상징)을 휘두르며 전국에 큰 호령했던” 당대의 권력자들이었다.

 

“호랑이의 위세를 훔친 여우처럼 (狐假虎威)

미친 듯이 망령스레 만행을 저지르고 (狂妄蠻橫)

턱짓으로 지시하고 기세로 [하인들을] 부리며 (頤指氣使)

그 시대 모두를 업신여겼지! (不可一世)”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휘두를 땐, 그들은 전혀 몰랐던 듯하다. 서슬 퍼런 권력의 칼날이 자신들의 목덜미에 꽂히는 부메랑이었음을. 왕·관·치 3인의 몰락은 문혁의 전 과정에서 가장 기묘하고도 난해한 정국 전환의 신호탄이었다.

 

<아홉 명 중 맨 중간에 선 마오쩌둥 우측으로 치번위, 왕리, 관펑, 무친. 마오쩌둥 좌측으로 야오원위안, 저우언라이, 장칭, 장춘차오/ 공공부문>

 

문혁은 정부의 대민 테러였다

문화혁명은 흔히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혁명군중이 부패 관원(官員)을 바로잡는 “민정관(民整官)”의 드라마로 묘사되곤 한다. 중국의 비판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관찰에 따르면, 이는 중공 관변학자들이 만들어낸 착시의 효과일 뿐이다. 문혁은 본질적으로 관원이 인민을 때려잡는 “관정민”(官整民)의 정치탄압이었다. 홍위병과 조반파 노동조직이 맘대로 날뛰며 “주자파 " 색출의 미명아래 정·관·학계의 권력자들을 단죄하던 기간은 기껏 1년 남짓이었다. 그 이후 문혁은 정부가 군중을 감금, 취조, 고문, 모욕, 타살하는 정치적 잔해(殘害)의 과정이었다.

 

문혁 전 과정에선 크게 세 차례의 거대한 정치탄압이 일어났다. 1) 1천만 명을 조사해 10만을 죽음으로 내몬 “5.16반혁명집단” 사건 (1967년 8월-1972년 말), 2) 3000만-3600만 명을 박해하고 그중 75만-150만 명을 학살한 “청리(淸理) 계급대오”(1968년 초-1970년 초), 3) 최대 20만 명을 희생한 “일타삼반(一打三反)” 사건 (1970년 1년간)을 꼽을 수 있다. 문혁의 미망과 정치투쟁의 야만을 들춰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사건을 집중적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다.

 

문혁 시기 정치 숙청 중에서 “청사 5.16운동”은 최장시간 광범위하게 진행된 정치운동이었다. 1967년 8월 시작된 청사 5.16운동은 1970-1971년 고조기를 거쳐 1972년 실질적으로 끝이 나지만, 그 여파는 1976년까지 이어졌다. 1천만 명이상이 조사를 받아 1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광적인 정치몰이였다.

 

수십 년간 문화혁명을 탐구해 온 중공 중앙당교(中央黨校)의 진춘밍(金春明) 교수는 이 사건이야 말로 문혁 최대의 미스테리라 말한다. 마오쩌둥은 왜 갑자기 그토록 지지하고 성원했던 조반파 혁명군중을 극좌 맹동(盲動)주의 반혁명분자로 몰아 단죄하기 시작했을까? 1980년대부터 심층 연구를 위해서 진교수는 국가문서의 열람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국가기밀이 풀리기 전까진 확실한 내막을 알 순 없지만, 이 사건은 바로 <43회>에서 다뤘던 베이징 영국대사관 방화사건의 뒤처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 시작은 왕·관·치 세 명의 숙청이었다

 

<1966년 11월 23일, 공자(孔子)의 고향 산둥성 취푸(曲阜)에서 공묘(孔廟)의 문물을 파괴하는 홍위병과 조반파(造反派)의 모습. 불태우는 현판에는 공자를 기리는 문구 “만세사표(萬世師表)”가 적혀 있다/ 공공부문>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명령 수행하는 노예”

<39회>에서 보았듯 1967년 7월 14일 마오쩌둥은 새벽 3시 반 열차를 타고 우한으로 향했다. 마오는 두 달 지나 9월 23일에 귀경했다. 마오가 베이징을 비운 두 달 사이 저우언라이는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 속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무정부적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1966년 12월 말 마오쩌둥이 예감했듯 1967년은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연속이었다.

 

그간의 사태를 되짚어 보면, 1월 초 상하이 노동자들이 일어나 시정부를 무너뜨리는 상하이 코뮌을 수립했다. “상하이 1월 혁명”은 전국에 탈권(奪權, 권력탈취)의 광열을 확산시켰다. 노동자·농민 계급이 가세하면서 문화혁명은 무장집단의 충돌로 확전됐다. 비상사태의 수습을 위해 마오쩌둥은 즉각 “인민해방군”을 투입시켜 군부의 지휘 아래 혁명위원회를 건립하려 했지만, 군부의 개입은 오히려 혁명군중의 군사화를 촉진했다.

 

그해 여름 후베이의 우한에서는 기관총, 수류탄, 장갑차로 무장한 혁명군중이 조반파(造反派)와 보황파(保皇派, 보수파)로 양분되어 실제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정치혼란은 당연히 경제대란으로 이어졌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신경제 개혁 아래서 활기를 되찾던 국민경제는 곧 후퇴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경제질서가 무너져 내렸다. 교통, 운수(運輸)가 막혀버렸다. 특히 수도와 남방을 잇는 장거리 철도 운항은 마비상태였다.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중공중앙 공식서열 3위의 권력자였지만, “황제(皇帝)” 마오쩌둥 앞에선 심복(心腹) 형의 비서관일 뿐이었다. 마오쩌둥이 즉흥적으로 큰일을 저지르면, 뒷수습은 언제나 저우언라이의 몫이었다. 마오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의하면,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명령을 맹종하는 “노예”였다. “많은 사람들이 저우총리가 인민을 보호했던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가 취한 조치는 모두 마오의 명령일 뿐이었다.”

 

장칭 “저우언라이, 나 아니었으면 당신은 벌써 타도됐어!”

수도에선 단 하루도 바람 자는 순간이 없었다. 중공중앙의 핵심 기관이 밀집된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는 이미 류샤오치의 타도를 외치는 수많은 조반파 혁명군중에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도 베이징은 실제적인 무정부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43회>에서 살펴봤듯 8월 22일 홍위병들은 영국 대사관으로 쳐들어가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된 홍위병의 영국대사관 방화사건은 중공중앙엔 커다란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영국대사관에 대한 홍위병의 최후통첩에 승인을 했던 장본이었다. 중국정부는 미증유의 외국공산 테러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유보하고 있었다. 책임자 처벌도 공식 사과도 없었지만, 저우언라이는 당시 중국을 찾은 외빈(外賓)에게 사적으로 큰 유감을 표하기도 했었다. 그로선 외교부까지 닥친 탈권의 광풍을 방치할 수 없었다.

 

<장칭과 저우언라이. 중앙문혁소조의 핵심 인물이었던 장칭은 내부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를 노골적으로 압박하며 모욕을 주곤 했다./ 공공부분>

 

중앙문혁의 팽두회(碰頭會, 수뇌회의)에 참가했던 공군(空軍)사령관 우파센(吳法憲, 1915-2004)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저우언라이는 늘 우울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저우언라이를 몰아세우며 험구를 마구 놀렸다. “당신 저우언라이, 절대로 잊지 마! 내가 감싸주지 않았으면 당신은 벌써 타도됐어!” 그런 모욕에 시달리면서도 저우언라이는 인욕(忍辱)의 시간을 보내며 자구책을 마련했다.

 

저우언라이는 조반파 혁명군중 앞에서 왕리가 행한 8월 7일 연설을 정국(政局) 전환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왕리가 조반파 혁명군중을 교사해서 영국대사관 방화사건을 일으킨 배후의 검은 세력이라는 시나리오였다. 저우언라이가 작성한 시나리오의 초안은 상하이에 체류 중인 마오쩌둥과의 은밀한 교신을 통해 치밀하게 짜여졌다. 이로부터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내세워 조반파 혁명군중의 “좌파 맹동(盲動)주의”를 척결하는 대규모 정치숙청의 돌개바람이 일었다. <계속>

 

[45] 권력에 기생하는 어용 지식인, 사냥개의 운명

<문혁 초기의 비판투쟁(批判鬪爭)) 장면/ 공공부분>

 

인텔리겐치아는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 모습이 백열등에 몸을 부딪치며 날개를 퍼덕이는 부나방을 닮았다. 권력을 동경하는 지식인의 정치적 야망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혁명은 지식인의 정치적 상상력이 정치권력과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됐다.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꿈”을 팔아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 한다면 정치혁명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나 맹자처럼 모든 시대의 지식인들은 권력자를 향해 치국(治國)의 요체와 경세(經世)의 묘책을 외쳐댄다. 문제는 지식인이 권력자에 아부하고 기생할 때 발생한다.

 

진시황 도와 천하통일 이룬 이사(李斯)의 최후

가령 고대 중국에서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시황(秦始皇, 재위 221-210 BC)의 뒤에는 순경(荀卿, 3세기 BC, 순자)의 문하에서 치국(治國)의 책략을 탐구했던 초(楚)나라 하급관리 이사(李斯, 280-208 BC)가 있었다. 어느 날 곡간에서 배불리 지내는 쥐들을 본 후, 이사는 자신이 굶주린 뒷간 바닥의 쥐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이후 그는 권력의 곡간을 찾아 진나라로 옮겨갔고, 법가의 치술을 팔아서 권력의 핵으로 들어갔다.

 

이사의 꿈은 지방 군웅의 침략전쟁을 종식하고 영구평화의 기반을 닦는 중앙집권적 군현제와 사상통일의 실현이었다. 바로 그 꿈으로 이사는 진시황을 사로잡았고, 법가의 천하통일을 달성했지만······. 황제가 죽자 이내 환관 조고(趙高)의 계략에 빠져 일신을 망치고 말았다. 기원전 208년 여름, 이사는 이마에 문신 새김을 당하고, 코를 베이고, 다리를 잘린 후, 광장의 군중 앞에서 허리를 절단하는 요참(腰斬)을 당했다. 그의 삼족(三族)도 모두 도륙(屠戮) 당했다.

 

<진시황의 목숨을 노렸던 자객 형가(荊軻)의 이야기를 묘사한 동한(東漢)의 부조. 형가(왼쪽)가 던진 단도가 기둥에 박혀 있다. 오른쪽의 진시황은 옥쇠를 들고 있고, 맨 왼쪽의 병사가 진시황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공공부문>

 

마오 “진시황은 고작 유생 460명 묻었을 뿐이잖아”

마오쩌둥은 역사의 악인으로 인식돼온 진시황의 재평가를 시도했다. 1958년 중국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 2차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직접 청중 앞에서 말했다고 전해진다.

 

“진시황이 뭘 했다고. 고작 460명 유생들을 매장했을 뿐이잖아. 우리는 4만6천명의 유생을 묻었잖아. 우리가 진반(鎭反)운동을 할 때 반혁명분자들을 제거했잖아. 너희 지식분자들은 우리를 진시황이라고 비난을 하는데, 틀렸어. 우리가 진시황을 100배는 넘어섰지.”

 

문화혁명 당시 관방 학자들은 진시황의 법가주의 혁명을 칭송했다. 홍위병들이 공자의 고향에 달려가 공묘의 문물을 파괴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유가는 봉건지주계급의 이념이라 폄하됐다. 반면 법가는 대일통(大一統)의 중앙집권적 제국을 구축한 진보사상이라 칭송됐다.

 

마오쩌둥은 분명 진시황의 권위를 넘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길 원했다. 1936년 연안의 토굴에서 마오쩌둥이 직접 지었다는 운문 “심원춘·설(沁园春·雪)”에는 진시황에 대한 그의 평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진시황과 한무제는 아쉽게도 문채가 부족했네! (惜秦皇汉武,略输文采)”라는 구절이다. 혁명의 관점에서 문채(문학적 풍류)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전선동의 기술을 말한다.

 

진시황이 “위대한 법가혁명”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 혁명의 이론을 갖추지 못했었다는 지적이다.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달성했지만, 후대의 중화제국은 모두 법가대신 유가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법가가 이룬 천하통일의 혁명이 유가에 의해 하이재킹(hijacking)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마오쩌둥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교한 이론의 계발이 없인 공산혁명이 성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오주석님, 만세, 만만세!” 마오쩌둥은 실제적인 황제로서 늘 진시황에 비견됐다./ 공공부문>

 

이념전선의 전위부대, 마오 선집 편찬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마오쩌둥은 집권초기부터 권력을 바라고 구름처럼 모여든 수많은 인텔리들 중에서 발군의 인재를 선별해서 이념전선의 전위부대를 조직했다. 이들 개개인의 이력을 추적해 보면 대부분 영웅을 꿈꾸며 일찍이 공산혁명에 투신한 권력지향의 인물들이었다.

 

예컨대 마오쩌둥의 최측근 톈자잉(田家英, 1922-1966)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 독학으로 문장을 읽혀 불과 13세에 문예지에 수십 편의 시가(詩歌)를 출판했던 쓰촨(四川)성의 문학 신동(神童)이었다. 그는 1938년 공산당에 입당한 후, 중앙선전부 등에 배속되어 곧 문재를 드러냈다. 1948년 이래 그는 마오쩌둥의 비서로 근무했다. 그는 훌륭한 문장력을 발휘해서 헌법 제정에도 참여했으며, 마오쩌둥의 시사(詩詞) 작품을 손질하고, 연설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승승장구하던 톈자잉은 1960년대 초반 후난성 답사 후, 기근의 실태에 관해 보고서를 올리면서 마오의 눈 밖에 났다. 문혁이 개시되던 1966년 5월 22일 오전, 우경분자로 몰렸던 톈자잉은 스스로 목을 맸다. 그에게 들씌워진 죄목 중엔 “마오쩌둥 저작”의 조작 혐의가 섞여 있었다.

 

마오는 1950년부터 20대의 톈자잉을 “마오쩌둥 선집”의 편찬에 참여시켰다. “마오쩌둥 선집 편찬”은 마오가 이념의 전위부대에 맡긴 최초의 임무였다.

 

<마오쩌둥과 그의 비서 톈자잉의 모습. 마오쩌둥은 쓰촨성의 신동 톈자잉을 발탁해서 비서로 삼았지만, 이후 텐자잉의 직언이 이어지자 정치적 박해를 가했다. 텐자잉은 문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966년 5월 22일 자살한다./ 공공부문>

 

스탈린 “마오쩌둥은 동굴의 마르크시스트”

1949년 12월 말 난생처음 소련을 방문해 2개월 간 체류했던 마오쩌둥은 스탈린에 “마오쩌둥 선집”의 편찬 계획을 알렸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동굴의 마르크시스트라 조롱했다. 마오쩌둥은 게릴라 전사의 이미지를 벗고 공산주의 이론가의 반열에 편입되길 갈망했다. 마오는 스탈린에게 중국공산당은 무장투쟁에 몰두한 결과 이론적 무장이 부족하다 실토한 후, 소련의 이론적 자문을 부탁했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의 대표적인 철학자 파베 유딘(Pave Yudin, 1899-1968)을 주중대사로 파견했다. 유딘은 1953년 12월 3일부터 1959년 10월 15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면서 중국의 학자들을 이론적으로 지도했다.

 

1950년 시작된 “마오쩌둥 선집” 편찬 작업은 한국전쟁 때문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1.4후퇴로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간 후, 1951년 2월 말부터 정식으로 재개됐다. “마오쩌둥 선집” 편찬의 총책임자는 다름 아닌 류샤오치였다. 류샤오치는 중공의 일대표적 이론가이자 문필가였던 천보다(陳伯達, 1904-1989)를 편집장으로 임명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후차오무(胡喬木, 1912-1992)와 톈자잉에 편집의 실무를 맡겼다. 26개 언어로 번역된 “마오쩌둥 선집”의 발간 총수는 3억 부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 출간된 마오쩌둥 선집의 영역본. / 공공부분>

 

중공 기관지 ‘홍기(紅旗)’ 논객들의 몰락

“마오쩌둥 선집”을 출간한 후, 마오쩌둥은 한층 더 혁명의 이론화에 박차를 가했다. 1958년 6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마오쩌둥의 제의에 따라 <<홍기>>지를 창간했다. <<홍기>>지는 1988년 6월 16일 <<구시(求是)>>로 개명될 때가지 30년 간 매달 2회씩 출간된 대표적인 중공의 이론지였다.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공식입장은 거의 대부분 <<홍기>>지의 사론(社論=사설)을 통해서 발표됐다. 마오쩌둥이 직접 권두언을 쓰는 경우도 적잖았다.

 

그만큼 절대의 권위를 가졌기에 <<홍기>>지의 편집위원들은 드라마틱한 정치적 영욕(榮辱)을 겪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70년까지 <<홍기>>지의 발행을 주관했던 천보다는 결국 반혁명분자의 오명을 쓰고 숙청됐다. 지난 회(44회)에서 조명했던 문혁의 “3대 필간자” 왕리, 관펑, 치번위가 바로 <<홍기>>의 대표 논객들이었다. 마오쩌둥은 세 사람이 글을 지어 발표할 때마다 적극 지지를 표했다. 마오의 승인을 얻는 세 사람의 평론은 한 편 한 편 혁명군중을 격동시키는 문혁의 불길이 됐다.

 

절대권력자의 비호 아래서 펜대를 놀려대던 세 사람은 1968년 1월 재판의 절차도 없이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됐다. 왕리와 관펑은 1982년에 석방됐지만, 치번위는 1980년 옥중에서 체포되는 형식을 거쳐 1983년 18년 형을 선고받은 후 1986년에야 18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만기 출소했다.

 

<문혁 초기 권력의 핵심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치번위, 왕리, 관펑의 모습/ 공공부문>

 

이사는 독특한 법가사상으로 진시황을 지배했다. 비록 그의 몸은 비참하게 찢겼지만, 그가 고안한 통일정책은 2천년 중화제국의 기틀이 되었다. 반면 왕·관·치는 마오쩌둥에 이용만 당했던 꼭두각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설파한 게 아니라 마오쩌둥 사상만을 선전했던 허깨비 지식분자였다.

 

독창적인 사상으로 권력자를 사로잡은 인텔리는 정부의 실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 반면 권력자에 기생하는 인텔리는 헐떡이며 토끼를 잡아와선 삶기고 마는 사냥개와 다르지 않다. <계속>

 

[46] 무능한 권력자가 선한 동기로 일 벌일 때 재앙이 닥친다

<1969년 4월 베이징에서 중공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진행될 때, 중국의 농촌에선 농민들이 모여서 마오쩌둥의 어록을 읽고 있다. 초상화 밑의 문구: “경국 당 9차 대회 개최 승리! 새롭게 드높이 철학을 선양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활용하자!”/ 공공부문>

 

정치가 과연 선악의 대결일까?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진영이든 스스로 옳다고 믿기에 목숨 걸고 싸움을 한다. 한 진영에 속해서 다른 진영을 보면 모두가 악의 무리로 보일 수도 있다. “착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나쁘다” 욕하며 싸우는 아이러니다. 정치는 어쩌면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선의(善意)의 충돌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권력자의 선한 동기’를 맹신하고 칭송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권력자의 선한 동기’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무능한 권력자가 선한 동기만 믿고, 무책임하게 검증도 없이, 역사의 교훈도 전문가의 조언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신나서 큰일을 벌이면 곧 재앙(災殃, disaster)이기 때문이다.

 

‘선한' 영도자의 조급증이 가장 위험

1950-60년대 중공중앙 통치의 키워드는 한 마디로 “더 빨리!(多快)”였다. 특히 대약진운동(1958-1962)이 시작되던 1950년대 말 마오쩌둥은 단기간 큰 성과를 내야 한다는 병적인 조급증에 시달렸다. 최고영도자가 인민의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선한 동기로 조급증을 부렸기에 중앙정부는 거세게 지방정부를 압박했다. 상부의 비위를 살피는 지방의 관료집단은 경쟁적으로 비현실적인 목표치를 제시했다. 피라미드 관료구조의 낙수효과에 따라 책임은 단계적으로 하위 조직에 전가됐다.

 

결국 맨 밑바닥의 간부들이 총대를 멨다. 상부에서 떨어지는 생산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현장의 생산 대중을 모욕주고 구타하고 혹사시켰다. 최대 4500만 명을 희생시킨 인류사 최대의 대기근은 바로 마오쩌둥의 조급증에서 비롯됐다. 홍콩 대학의 프랑크 디퀘터 교수가 대약진운동의 참사를 기록한 저서를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이라 명명한 이유다. 대기근의 원인이 바로 “마오”라는 이야기다.

 

<“고도 생산의 위성이 영원히 하늘에서 날도록 하자!” 대약진운동 당시 단기 발전의 조급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공공부문>

 

“대약진”이 “대기근”으로 귀결됐음에도 마오쩌둥은 변하지 않았다. 막후에서 치밀하게 문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후, 마오쩌둥은 곧 “더 빨리!”를 외쳤다. 그는 조반파 혁명대중이 들고 일어나 중공 “사령부”의 “수정주의 주자파 당권파(黨權派)”를 축출하면, 곧 문혁을 종식할 생각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1967년 “천하 대란”을 일으켜서 ‘주자파 수정주의 당권파”를 몰아낸 후, 1968년부터 천하 대치(大治)를 이룬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그는 “[1966년] 제1년차에 문혁을 개시하고, 제2년엔 기초를 놓고, 제3년차엔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3개년 속성 혁명의 비전을 제시했었다. 그는 늘 그렇게 단기(短期) 혁명의 강박증에 시달렸다.

 

마오의 반격 “조반파를 타도하라!”

상황은 그러나 쉽게 풀리지 않았다. 1967년 봄부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또 곳곳에선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경제는 곤두박질치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해 7월 우한의 “7·20사태” 현장에서 마오쩌둥은 보수파 대중조직 백만웅사(百萬雄師)의 폭력 시위를 피해 급히 피신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8월 22일 베이징의 조반파 홍위병에 의해 영국 대사관이 불타는 사태까지 겹쳤다.

 

<“중국을 자게 내버려두라. 일어나면 세계가 애석해 하리니, 나폴레옹” 1958년 12월 1일 타임(Time) (왼쪽). “혼돈의 중국,” 1967년 1월 13일 타임(오른쪽).>

 

이미 1년 전부터 마오는 장장 8개 월 간의 외유를 마치고 베이징에 복귀 즉시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외쳤다. “반란이 정당하다”는 이 한 마디는 10대 홍위병의 심장에 불을 질러 베이징 홍팔월(紅八月)의 학살극을 직접 초래했다. 로봇 병정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마법사의 주문(呪文)과도 같았다. 그 이후 1년 간 무정부적 혼란이 이어졌다. 사분오열된 “혁명군중”이 무장투쟁에 돌입했고, 군대가 투입되자 더욱 광범위한 대중조직의 군사화가 전개됐다. 당시 중국의 여러 곳은 실제적인 내전이었다. 마오가 예견했던 “천하대란”은 무정부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마오는 그가 직접 키운 조반파를 쓰레기 처분하듯 버리기로 했다. 실로 무서운 계략이었다.

 

극좌세력 제거 플랜 ‘청사(淸査) 5.16운동'

삼장법사(三藏法師)는 관음보살에게 “정심진언(定心眞言)”을 전수받았다. 삼장법사가 “정심진언”을 욀 때면 제멋대로 날뛰던 손오공(孫悟空)의 머리에 묶인 긴고아(緊箍兒)가 조여졌다. 이른바 긴고주(緊箍呪=정심진언)는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다스리는 비장의 심술(心術)이었다.

 

1967년 8월, 마오쩌둥에게도 긴고주가 필요했다. 손오공처럼 날뛰는 조반파를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수 문혁사가들은 마오쩌둥의 긴고주가 바로 “청사 5.16 운동”이었다고 해석한다.

 

1967년 8월부터 시작되어 1970-71년 최고조에 달했던 “청사 5.16 운동”은 1972년 일단 멈춰 섰으나 그 여파는 1976년까지 이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1천만 명이 조사를 받고, 그 과정에서 10만 명이 박해당해 사망했다. 왕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1천만 명 중에서 350만 명이 구속됐다.

 

그 규모에 비해 이 정치운동의 시작은 미약했다. 1967년 5월 17일 중앙 기관지에는 “5.16통보”가 실렸다. 바로 1년 전 베이징 중공중앙이 채택한 문혁의 강령성 문건이었다. 어쩐 일인지 1년 만에 극비에 부쳐졌던 “5.16통보”가 공개되자 베이징 철강학원엔 “5.16 병단”이 형성됐다.

 

<1967년 5월 17일 중공의 대표적 기관지 <<인민일보>>, <<해방군보>>, <<홍기>>에 1966년 5월 16일 채택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른바 “5·16통지”의 전문이 게재됐다.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통과된 이 통지는 문혁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적 선언문이었다. 이 통지의 게재를 정치적 신호로 인지한 베이징의 조반파는 “5.16병단”을 조직하고 저우언라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이미 밀려난 후,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다음 표적으로 삼아 공격을 개시했다. 베이징 외국어 학원의 “6.16병단”이 저우언라이를 군부 장성들의 중앙에 도전했던 이른바 “2월 역류(逆流)”의 검은 배후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곧 “수도 5.16 홍위병단”이라는 연합체를 구성한 후 본격적으로 저우언라이를 수정주의로 몰아가는 정치투쟁에 나섰다.

 

이들의 활동은 8월 초까지 이어졌다. 1967년 8월 8일 이들은 베이징시의 주요 중심가에서 다섯 가지의 전단을 뿌리면서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소규모 군중조직이었다. 게다가 그해 7년 8, 9월 “수도 5.16 병단”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구속됐다. 9월 10일, 공안부장 셰푸즈(謝富治, 1909-1972)의 발언에 따르면, “5.16병단”은 불과 50명 정도였으며, 그 중 진짜 악당들은 10여명 정도며, 배후에 주자파가 있을 수도 있는” 그저 작은 사건일 뿐이었다.

 

마오의 ‘손오공 옥죄는 삼장법사의 긴고주(緊箍呪)’

지난 <45회>에서 우리는 중공 기관지 <<홍기(紅旗)>>의 편집위원으로 맹활약했던 문혁 3대 선동가 왕리, 관펑, 치번위의 처참한 몰락을 보았다. 1966년 가을 마오는 극좌의 선동을 이어가던 이 세 명을 치밀한 계획에 따라 차례로 날렸다. 그들은 문혁 초기 마오쩌둥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던 공식적인 마우스피스(mouthpiece)였다. 마오의 입장에선 절묘한 한 수였다. 왕-관-치가 반혁명분자로 몰리는 순간, 그들의 극좌 선동에 놀아나던 조반파 혁명군중은 자동적으로 반혁명세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즈음 마오쩌둥은 베이징 시정부에서 베이징 사범대학의 조반파가 “5.16분자”일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받았다. 마오쩌둥은 “이건 좋아!”라는 한 마디 의미심장한 비시(批示)를 내렸다. 마오가 앞장서서 그 조반파 혁명군중을 버리는 순간이었다.

 

<1966년 가을 톈안먼 광장에 결집해서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들고 흔들고 있는 홍위병의 모습. 문혁사가들은 흔히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관계를 삼장법사와 손오공에 비견한다./ 공공부문>

 

삼장법사가 긴고주를 욀 때마다 손오공은 깨지는 두통을 느끼며 데굴데굴 굴렀다. 마오가 “5.16분자들”에 대한 저주를 쏟아내자 조반파 혁명군중은 “5.16분자”의 낙인을 받고 정치적 죽음 또는 생물학적 사망에 내몰렸다. 손오공의 장난을 제지하는 삼장법사처럼 마오는 “극좌 행위를 선동하는 검은 마수의 반혁명 세력을 경계하라!” 부르짖었다.

 

문혁 때도 마오는 “더 빨리!” 모든 일을 해치워야만 한다는 혁명가의 조급증에 시달렸다. 그는 전 인민을 이끌고 정치실험을 이어갔고, 그 실험이 재앙을 불러오자 오류를 덮기 위해 추종자들을 “5.16분자”로 몰아서 숙청했다. 그럼에도 중국 밖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은 아직도 마오의 선의를 맹신하며 그를 “중국의 붉은 별”이라 칭송하고만 있다. <계속>

 

[47] 이념 주입해 맹목적 지지층의 정신을 지배하는 독재자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든 어린 홍위병들의 모습/ 공공부문>

 

노회한 권력자는 순진한 청소년을 이용해서 권력의 영속을 꾀한다. 열광적 팬덤을 거느린 문화계의 슈퍼스타처럼 권력자는 맹목적 추종세력과 열광적 지지층을 규합해 권력의 기반을 다진다. 전체주의 정권의 독재자들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매스컴을 장악하고, 문화예술계를 점령한다. 여릿한 청소년의 뇌수에 획일적 이념을 주입해야만 그들을 좀비처럼, 병정처럼, 포로처럼 사로잡고 부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어김없이 청소년의 정신을 이념적으로 지배하려들며, 정교한 감시망을 구축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홍위병, 마오 숭배하며 ‘상상의 혁명'

문혁 당시 중국의 홍위병들은 이미 17년 이상 중공 선전부의 강력한 “아지프로”(agitprop)에 세뇌당한 혁명의 신세대였다. 홍위병의 정신세계를 깊이 탐구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궈빈 양(Guobin Yang) 교수는 1966년-1968년 문혁 초기 청소년들은 경쟁적으로 폭력을 통해 혁명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상상의 혁명”(imaginary revolution)에 빠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950-60년대 중국사회를 휩쓸었던 전쟁영화, 혁명가극, 혁명가곡, 혁명신화와 전쟁영웅들의 전기를 일상적으로 접하며 자라났다. 또한 그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졸졸 암송하며 마오쩌둥을 태양처럼 숭배했다. 바로 그러한 이념적 세뇌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공산혁명의 동화” 속에서 계급전쟁에 헌신하는 혁명적 낭만주의자들(revolutionary romantics)로 길러졌다.

 

철저한 감시와 이념 압박 받은 홍위병

꽤 설득력이 있지만, 선전선동과 세뇌교육만으로 홍위병의 광적인 행동을 다 설명할 순 없다. 철학자이자 문혁연구가인 중국사회과학원의 쉬요우위(徐友漁, 1947- ) 교수는 홍위병의 정신을 구속하는 중공정부의 당안(檔案) 시스템에 주목한다. 당안이란 개개인의 가정출신, 사회관계, 정치활동, 주변 사람의 밀고 내용까지 적힌 신상정보의 기록부였다. 평생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개개인의 이력을 결정하지만, 완벽히 비밀에 부쳐져서 정작 본인은 절대로 그 내용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정치적 표적이 되는 순간, 당안의 기록은 인격 살해의 위력을 발휘했다. 학교를 점령한 홍위병들은 가장 먼저 당안의 기록을 모두 불태웠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전체주의적 감시와 정치적, 이념적 압박 때문에 다수 청소년들은 피치 못해 홍위병이 됐다는 설명이다.

 

<1966년 가을 톈안먼 성루에서 광장에 도열한 홍위병을 내려다 보는 마오쩌둥의 모습/공공부분>

 

교과 과목 수업은 뒷전, 마오 사상 교육

1967년 10월은 문혁의 분기점이었다. 마오쩌둥은 질서회복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강구했다. 그해 가을 마오쩌둥은 이른바 “5.16 병단”이라는 가공의 검은 세력을 향해 숙청의 산탄(散彈)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암 도려내듯 최측근을 축출한 마오의 단호한 조치에 관·정·군은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마오는 혁명위원회의 조속한 설립을 촉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29개 성급(省級) 행정구 중 불과 7개 지역에만 혁명위원회가 건립돼 있었다. 참여 세력들 사이의 마찰과 알력이 심해서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마오쩌둥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에도 1968년 9월이 되어서야 신장을 마지막으로 전국에 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혁명간부, 혁명군중의 3결합을 원칙으로 제시했지만, 결국 혁명위원회의 실권은 군부가 장악했다. 질서회복의 명분하에 사실상의 군부독재가 실시되었다.

 

1967넌 10월 마오쩌둥은 또한 문혁의 첨병으로 맹활약을 벌여왔던 홍위병들을 교실로 돌려보내는 계획을 세웠다. 1967년 10월 14일, 중공중앙은 “중발(中發) [1967] 316호” 문건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전국의 초·중·고 및 대학의 수업 재개를 명령했다. 덕분에 학생들은 실로 1년 반 만에야 교실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는데, 신설된 커리큘럼은 온통 마오쩌둥 사상을 고양하는 이념교육이었다. 수학, 과학, 외국어 등의 교과목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중공중앙은 각 학교 측에 “사심(私心)을 물리치고 수정주의를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견결히 수행하라!” 지시했다.

 

마오는 질서회복을 위해 교실 밖의 무력투쟁을 교실 안의 이념투쟁으로 전환시키려 했지만, 홍위병의 폭력투쟁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결국 1968년 7월 27일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는 홍위병 운동의 종언을 고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67년 10월 이후 교실에 복귀한 학생들이 마오쩌둥 어록을 함께 낭송하고 있다. 칠판 글씨: “녠쓰왕(年思旺, 1945- )을 배워서 사사로운 잡념을 단호히 물리치자!” 인민해방군 병사 녠쓰왕은 달려오는 기차 앞에 몸을 던져 철로에 놓인 46킬로그램의 큰 돌을 치운 살신성인의 영웅.>

 

홍위병 운동의 종말...마오 “내가 배후다”

1968년 봄, 칭화대학의 캠퍼스는 급진 조반파 “징강산(井岡山) 병단 총부”와 온건 조반파 징강산 병단 4.14 총부” 두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4월 23일에 시작된 전교 규모의 대규모 무장투쟁은 7월 말까지 100일 지속됐다. 사태를 관망하던 마오쩌둥은 마침내 7월 27일 칭화대 캠퍼스에 “공인(工人) 해방군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약칭 공선대)를 투입시켰다. 바로 그날 급진파와 공선대 사이에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 결국 공선대원 5명과 칭화대 소속 6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참사가 터졌다

 

<1967년 4월 10일, 칭화 대학 비투대회의 주동자 콰이다푸의 모습/ 공공부문>

28일 새벽 2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침실에 전화를 걸어 칭화 대학의 상황을 소상히 알렸다. 격분한 마오쩌둥은 “조반파가 진짜로 반란을 일으켰나!” 소리치며 일어났다. 그는 바로 그날 아침 일찍 인민대회당에서 홍위병 대표들에 급전을 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다섯 명 중 네 명은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 폭력 시위의 현장에서 분투하던 칭화대학 급진 조반파 대표 콰이다푸는 뒤늦게 연락이 닿았다.

 

콰이다푸야 말로 대표적인 “마오 키드”였다. 1966년 여름 칭화대학 캠퍼스에서 류샤오치가 파견한 공작조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1967년 4월엔 30만이 운집한 비투대회에서 왕광메이를 공격했던 조반파의 대표였다. 일개 대학생 콰이다푸가 국가주석 류샤오치에 맞서 놀랍도록 대담한 투쟁을 전개할 때, 그 배후에는 마오쩌둥이 떡 버티고 있었다. 정치적 리더로서 콰이의 지위는 100%로 마오쩌둥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마오에 의한, 마오를 위한, 마오의 괴뢰(傀儡)일 뿐이었다.

 

헐떡이며 회의장에 달려 온 콰이다푸는 마오쩌둥을 직접 알현(謁見)하는 순간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울먹이면서 “칭화의 학생들이 흑수(黑手)의 조정을 받는 공인들에게 공격을 당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하소연을 했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배후의 흑수가 바로 나”라며 콰이다푸의 면전에 말의 폭탄을 터뜨렸다. 홍위병 운동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1968년 4월-7월, 칭화대학 무장투쟁의 한 장면/ 공공부문>

 

도시 홍위병들 농촌으로 내쫓기다

곧 이어 마오쩌둥은 도시 홍위병들의 농촌 파송(派送)을 결정했다. 하방(下放) 혹은 지청(知靑, 지식청년)의 상산하향(上山下鄕, 산으로 오르고 마을로 내려감)이라 미화됐으나 실은 청소년의 인권을 짓밟는 집체적 유형(流刑)의 시작이었다. 학생들은 학업의 권리를 빼앗기고, 지적 연마의 시간을 잃고, 진학의 기회를 상실했다. 의료혜택도, 최저생계비도, 진로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그들은 낯선 오지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1965년 문혁이 개시되기 직전 중등학교(중·고교) 재학생은 모두 1천 만 정도였다. 1965년 당시 소학교(초등학교) 재학생들은 직접 홍위병 운동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이들 역시 문혁의 세례를 받았다. 그 인원수를 모두 합하면 1억 2천만 명까지 늘어난다.

 

<1968년 허베이성 스자좡(石家莊)에 도착한 지청의 모습/ 공공부문>

1966-68년 당시 67만 4천여 명에 달했던 대학 재학생들은 운 좋게도 하방의 광풍을 슬그머니 비껴갔다. 반면 1966-68년 당시 중학생과 고교생은 홍위병 운동을 참여한 후, 하방까지 당했던 불운한 세대였다. 1966년에서 1968년 사이 고교 졸업생들을 흔히 노삼계(老三屆), 중학교 졸업생들을 신삼계(新三屆)라 부른다.

 

1968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대규모 홍위병의 하방이 시작됐다. 이후 7년에 걸쳐 1천 2백만 명(전체 도시인구의 10% 정도)의 청소년들이 전국 각지의 농촌에 파송됐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농촌에 하방된 청년 인구는 1천 6백 47만 명에 달했다. 운이 좋으면 도시 변두리의 농촌에 배속됐지만, 베이징, 톈진, 항저우, 난징, 우한, 청두, 충칭 등 무장투쟁이 극심했던 대도시의 학생들은 네이멍구, 신장, 윈난, 헤이룽장 등 더 멀고, 더 힘든 오지에 던져졌다.

 

격리와 중노동의 고통 속에서 그들은 일기장에 깨알같이 기록을 남겼다. 실개울처럼 흘러 모인 지청들의 기록은 마침내 대하(大河)의 강줄기로 흘렀다. 문혁 이후 이들의 비망록이 수도 없이 출판되어 상흔문학(傷痕文學)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 이제 그들의 체험담에 귀 기울여 보자.<계속>

 

〈48〉 활한 권력자의 속임수에 앞길이 막혀버린 세대

<1968년 이후 상산하향(上山下鄕)의 구호 아래 농촌에 파송됐던 이른바 “지식청년”들의 모습/ 공공부문>

 

어느 나라 역사든 비참하게 희생당한 세대가 있다. 전체주의 정권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세대도 있고, 반독재 정치혁명의 과정에서 서글프게 산화(散花)한 세대도 있다. 무능한 정권의 허튼 정책 때문에 앞길이 막혀버린 세대도 있고, 교활한 권력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몸과 마음을 다치고 만신창이로 살아가는 세대도 있다.

 

그 중엔 “잃어버린 세대”의 주인공을 자처하면서 그 시절의 상처를 훈장처럼 과시하며 권력을 거머쥐고 치부하는 세력도 있다. 그들과 달리 “잃어버린 세대”의 참된 주인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치명적 내상을 딛고 일어나 가까스로 입을 연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과거의 홍위병들이 남긴 기록의 산더미는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과도 같다. 그 거울 속을 보면, 시대의 미망과 집단적 광기, 이성의 한계와 파괴적 본능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아울러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선한 본성도 엿볼 수가 있다.

 

상흔 문학, 잃어버린 세대의 기록

1967년에서 1980년까지 이른바 상산하향(上山下鄕)의 하방(下放)에 투입된 도시 청소년들은 1600만에서 1700만명에 달했다. 대부분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었다. 당시 매체들은 하방을 일제히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자발적인 실천 투쟁이라 미화했다.

 

실제로 이후 홍위병들의 체험담을 읽어보면, 하방 길에 오른 많은 홍위병들은 뜨거운 혁명의 열정과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컨대 1968년 12월 “지식청년(知識靑年, 이하 지청) 왕칭이(王慶一)는 지원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청년입니다. 도시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농촌은 노동력이 매우 필요하므로 저는 농촌에 가서 노동에 참여하고 저의 사상을 개조하고 사회주의 신(新)농촌을 건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방”은 이처럼 겉으론 자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 수많은 학생들이 진학을 포기한 채 낯선 농촌을 향해 자발적으로 떠났을까?

 

1968년 12월 22일 <<인민일보>>. 오른쪽 위 '마오주석 어록'란에 "자녀들을 향촌에 보내도록 동원하라"는 마오쩌둥의 말이 실렸다.

1968년 12월 22일 <<인민일보>> 제 1면 오른쪽 상단 박스 “마오쩌둥 어록”란엔 마오쩌둥의 최신 발언이 실렸다.

 

“지식 청년들이 농촌에 가서 빈·하·중농에게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도시의 간부 및 다른 사람들에게 초, 중, 고, 대학을 졸업한 그들의 자녀들을 향촌에 보내도록 설득해서 한번 다 동원해보라. 각지의 농촌 동지들은 마땅히 그들을 환영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이 발언에서 “한번 다 동원해보라(來一個動員)”는 평상적인 구어체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정부의 모든 상관 기관이 지청의 총동원에 나서라는 구체적인 주문이었다. 마오쩌둥이 직접 전국의 홍위병들에게 하방을 종용했음이 명백하다. 그 분위기는 실제로 전시의 총동원령을 방불케 했다.

 

개개인은 하방 지원서에 직접 서명을 했다지만, 실제로 당시의 분위기에서 어린 학생들이 하방의 압박을 견디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지청들의 실제 체험담에 등장하는 다음 두 사례를 살펴보자.

 

자원 노동인가, 강제징용인가

1969년 15세의 어린 소녀가 헤룽장(黑龍江)성 “북부의 거대한 황무지” 베이다황(北大荒)의 궁벽한 농촌마을에 왔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그 소녀는 “원숭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소녀의 집엔 동생 세 명까지 모두 여섯 식구가 살았는데, 부친은 박봉의 노동자였고, 모친은 병약한데다 정신이상증세까지 겹쳐서 일을 할 수 없었다. 집안일을 도맡았던 소녀는 중학 졸업 후 곧장 하향의 압박을 받았다. 부친은 학교에 달려가 집안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며 혜량을 구했지만, 간부가 일언지하에 그 부탁을 거절하며 말했다.

 

“올해부터 인력 배분에 통일된 정책이 시행됐어요! 이 정책에 따르면, 집안의 장남, 장녀는 무조건 하향을 해야 하고, 막내만 도시에 남아 있을 수 있어요. 일명 전국 산하 일편홍(一片紅)이라는 정책입니다.” (양뤠이 [楊瑞, 1950- ], <<거미를 먹는 사람들 Spider Eaters>> 중에서)

 

역시 같은 마을에 온 상하이 출신 리야는 음악, 미술, 문예 등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났고, 큼직한 반달모양의 눈망울이 매력적인 미모의 여성이었다. 밝고 구김살 없는 모습과는 달리 리야의 부모는 해방 전 부유한 자산계급 출신이었다. 리야는 친구들과 함께 “지식청년”에 지원했는데, 부모의 출신성분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했다. 격분한 리야는 부모에게 편지를 써서 절연을 선언했고, 나아가 대자보를 써서 집안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리야에겐 하방의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친구들을 배웅하러 기차역에 갔던 리야는 몰래 기차를 훔쳐 타고 화장실에서 3박 4일을 꼬박 숨어 있었다. 기차가 종착지 헤룽장성 북부의 후린(虎林)역에 당도하자 리야는 미리 써온 혈서를 꺼내들고 베이다황에 “안가낙호”(安家落戶, 영구정착)하겠다고 맹세했고, 그때서야 지도부는 감동을 받아 그녀의 하방을 허락했다.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하방의 자청했던 꿈 많은 소녀 리야는 11년이 지나서야 늦게 온 지청들의 틈에 섞여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고된 노동과 영양부족으로 이미 암 진단을 받았다. 수차례의 대수술을 받고 투병하다가 리야는 1993년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같은 책)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빈·하·중농에게 재교육을 받아라!” / chineseposters.net>

 

하방 거부하면 반혁명분자로 낙인

1968년 12월 22일 마오쩌둥은 인민일보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농촌에 지청들을 파견하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과정을 보면, 군대를 소집하듯 강제적인 징발령을 공포하지도 않았고, 경제적 반대급부로 젊은이들을 유인하지도 않았다. 형식적으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혁명참여를 고무했을 뿐이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다. 문혁의 사회분위기에서 하방을 거부하면 곧 반혁명분자의 멍에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교묘하고 강력한 대중동원의 전술이었다.

 

마오가 하방의 카드를 제시했을 때, 그는 의외로 쉽게 범사회적 암묵적 동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하방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지청들이 저항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오히려 많은 중국의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하방을 자청했다. 과연 어떻게 그 수많은 젊은이들을 오지에 추방할 수 있었을까? 마오의 계산속과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고려하면, 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중국 사회 각 분야의 기성세대가 질서 회복의 현실적 필요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사료된다. <47회>에서 보았듯, 1968년 7월 말까지 칭화 대학에선 둘로 나뉜 조반파가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홍위병들이 도시에 남아서 계속 소요를 일으킨다면, “천하대란”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시민들로선 일상생활이 무너지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바로 그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천하대치”를 모토로 내세워서 스스로 질서의 회복을 자임하고 나섰다

 

<문혁 당시 하방되어 일을 하고 있는 지식청년들의 모습/ 공공부문>

둘째, 하방의 과정을 보면, 계급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마르크시즘의 도식적 인간관이 큼 힘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제1명제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언행은 계급이익을 반영할 뿐이다. 아무리 입으로 혁명을 외쳐도 인텔리 집단의 혁명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농민과 달리 그들은 영원히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지식인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극심한 계급적 열등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스스로 오랜 시간 노동자·농민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바로 그 논리 위에서 마오쩌둥은 지청들에게 직접 농촌에 가서 고된 노동을 통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혁명의 정신을 배우라고 주문했고,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장기 정착을 맹세하고 오지로 들어갔다. 젊어서 혁명의 점수를 따야지만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게 또한 그 시대의 조건이었다.

 

셋째, 또한 하방은 도시 실업률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문혁의 광풍 속에서 중국의 국민경제는 다시금 거대한 위기에 봉착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이끌던 신경제의 활기는 순식간에 이미 사라진 후였다. 중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겐 취업의 기회가 막혀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하방이란 결국 교묘한 방법으로 도시의 학생들을 낙후된 농촌의 오지에 취업시키는 속임수였다.

 

<“지식청년의 세월을 기억하고 청춘의 노래를 작곡하라!” 산둥 영화사 출품작 “지청”의 포스터/ 공공부문>

 

오지로 하방된 청년 “우리는 함정에 빠졌다”

1970년 17세의 나이로 헤룽장성의 오지에서 청춘을 바쳤던 한 지청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마오쩌둥의 의도를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970년 나라의 경제는 파산지경이었다. 2천만 지청들에게 정부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었다. 젊은이들이 직업도 없이 도시에 체류하면 큰 소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농촌은 광활한 가능성의 세계!’라는 구호 아래 전국의 각지로 유배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됐다. 비록 우리는 비참하게 많은 곤경을 겪었지만, 국가도 감당 못 할 무거운 짐을 우리가 스스로 짊어져야 했다. 우리 지청들은 무너지는 나라의 기둥을 붙들어 전면 붕괴를 막았다. 진정 우리는 위대한 세대가 아닌가? 우리가 영웅이 아닌가? 물론 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Feng Jicai, <<십년의 광기 Ten Years of Madness>>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상흔문학(傷痕文學)을 살펴보지 않고선, 문화혁명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다. 실체험자의 증언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역사 탐구의 1차 사료(史料)이기 때문이다. <계속>

 

〈49 사람의 기본 욕구를 죄악시한 결과… 참극이 벌어졌다

<1977년 11년 만에 부활한 전국 대학입시 고고(高考)를 치르러 모여든 수험생들/ 공공부문>

 

20세기 사회주의 정권들은 왜 하나같이 처참한 몰락의 길을 갔는가? 이윤동기, 인정욕구, 경쟁의식 등등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죄악시했기 때문이었다. 이윤동기를 부정하는 사회에서 대다수 인민은 나태의 늪에 빠져 절망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누가 왜 자발적으로 일하겠는가? 경쟁의 기회가 막혀버린 사회는 최악의 인간소외를 초래한다.

 

경쟁을 통한 삶의 향상을 도모할 수 없었기에 사회주의 정권의 다수 인민은 국가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인민들 개개인의 상호 경쟁을 원천적으로 금지한 소수의 권력자들은 모든 기회를 독점해서 ‘노멘클라투라'가 되었다.

 

문화혁명 시기, 중국의 청소년들은 경쟁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1952년부터 실시돼 왔던 고고(高考, 고등고시, 전국 대학입학시험)가 전면적으로 폐지됐기 때문이었다. 학교성적이나 시험점수는 더 이상 대학입학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고고의 폐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실력 대신 출신성분이, 재능보다 “관시”(關係, 관계)가 중시되는 두터운 부패 구조를 낳았다.

 

마오 “농작물에 대해선 안 배우는...사람 해치는 교육”

문혁의 도화선에 이제 막 불이 붙어 날마다 언론에서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둘러싼 논쟁이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1965년 12월 21일 항저우에서 마오쩌둥은 당시 교육제도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현재 교육제도에 대해선 많은 회의가 생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16, 7년 혹은 20년 동안, 학생들은 벼, 콩, 보리, 기장 등 농작물에 대해선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노동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농민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상품이 어떻게 교환되는지 전혀 배우지 아니 한다. 또 공부만 한다고 몸까지 망가지니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교육이다.”

 

마오쩌둥은 문과대학은 아무 쓸모가 없다면서 학생들을 생산 현장에 보내서 공업, 농업,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공계생 역시 현장에 가서 실무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오는 대학의 전면 폐기를 주장하진 않았지만, 그 과정을 2년으로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의 파격적 제안에 따라 중공중앙의 고등교육부는 본격적으로 입시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문혁의 광풍이 점점 거세지던 1966년 4-6월 사이 교육제도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 일었다. 지덕체(智德體)의 균형 발전을 해치는 재래식 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당론이 일었다. 문혁이 공식화된 5월 중순 이후, 중고생 및 대학생들은 모두 교실 밖에서 혁명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입시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는 분위기였다.

 

<1967년 베이징 거리에서 행진하는 홍위병들/ 공공부문>

대학입시 제도 폐지...”개인 이익을 우선하면 안 된다”

마오쩌둥 사상은 인간의 이기심을 죄악시한다. <<마오주석 어록>>엔 개인적 입신영달을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에 대한 모멸감이 가득하다. 가령 1938년 10월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원은 그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이익을 앞에 둬선 아니 된다. 반드시 개인의 이익을 민족과 인민군중의 이익에 종속시켜야 한다. 따라서 자사(自私) 자리(自利), 소극적 태업, 탐욕과 부패, 봉두주의(鳳頭主義, 봉의 머리가 되겠다는 생각) 등등이 가장 경멸스럽다.”

 

이런 구절을 날마다 졸졸 암송하던 학생들은 언제나 마오쩌둥의 마음을 먼저 읽고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기민함을 발휘했다. 때론 모심(毛心)을 잘못 읽어 철퇴를 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들은 마오쩌둥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1966년 6월 6일 입시를 코앞에 둔 베이징 제1 여자 중등학교 “고3” 학생들이 마오주석 앞으로 “낡은 입시제도”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서신은 중공중앙이 고고 제도를 철폐할 수 있도록 학생들이 미리 쳐놓은 밑밥과도 같았다.

 

학생들은 당시의 입시제도가 “중국 봉건사회 과거제도의 연속이며, 낙후되고 반동적인 교육제도”라 비판했다. “청년들이 혁명을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입시를 위해 책 더미에 파묻혀 있고,” “이름을 날리고 집안을 이루는 착취계급의 반동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요지의 입시 폐지 요청서였다.

 

문혁이 막 시작돼서 베이징 전역이 술렁이는 시점이었다. 입시를 앞둔 학생들이 앞 다퉈 입시제도 자체를 비판하고 나서자 뜨거운 호응이 일었다. 최초의 공개서한을 읽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질세라 더 과격한 언사의 지지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1966년 6월 13일 중공중앙과 국무원은 그해 대학입시를 반 년 연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1952년부터 전국에서 통일적으로 시행된 고고(高考) 제도는 폐지됐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4개년 동안 중국 전국의 대학들은 신입생 선발을 하지 않았다.

 

<“주석어록을 위하여”의 악보를 들고 어코디언을 연주하며 군중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악대. 가사 내용: “마르크스주의는 수천 갈래로 갈라져도 결국 ‘조반유리(造反有理)’ 한 마디어라!’ / 공공부문>

 

“현장 노동자를 대학으로 보내라!”

1970년에야 일부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다시 받기 시작했는데, 과거처럼 입시 성적에 따른 선발이 아니라 “군중 추천, 지도자 비준, 학교 심사” 3단계의 추천제가 도입됐다. 중학교 이상 학력과 2년 이상의 실천 경험을 가진 공인(工人, 노동자), 농민, 군인에게만 입학의 자격이 부여됐다. 2년 이상 농촌의 현장에서 노동을 한 “지식청년”들은 이미 공인이나 농민과 같은 신분이었으므로 지원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공·농·병 학원(工農兵學員)”이라 불렸다. 학생요원으로서 이들은 “대학에 가서 대학을 관리하고 대학을 마오쩌둥 사상으로 개조하는”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공·농·병 학원”은 마오쩌둥의 고안물이었다. 1968년 7월 21일, 마오쩌둥은 상하이 선반 공장을 방문했다. 그 현장에서 그는 공장 노동자 중에서 직접 기술인원을 선발하는 이른바 마오쩌둥의 “7.21 비시(批示)”를 발표했다. 이 비시에 따라 “7.21 공인 대학”의 모델이 만들어졌다. 공장 노동자 중에서 인재를 발탁하여 2년 간 대학에서 위탁교육을 시킨 후 다시 공장에 돌려보내는 방식이었다.

 

1970년 6월,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은 “7.21비시”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치사상이 좋고, 신체가 건강하고, 3년 이상의 실천 경험을 갖고,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공인 및 빈하중농(貧下中農)” 중에서 신입생을 선발했다. 이 제도는 1977년 고고가 부활할 때까지 지속됐다.

 

입시 폐지, 새로운 부패 구조를 낳다

고고 폐지는 교육의 황폐화를 몰고 왔다. 첨단의 지식을 탐구해야 할 대학은 직업양성소의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추천제의 폐단이었다. 시험 점수라는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사라지자 뒷문이 활짝 열린 형국이었다. 신화사 기자로 그 시대를 직접 취재했던 칭화대 출신의 저명한 문혁사가 양지성(楊繼繩, 1941- )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추천을 받아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 소수의 특출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상당수가 아버지의 권세를 이용했다. 아버지의 관직이 높으면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관직이 한미할 경우 일반 대학에 들어갔다. 권력도 세력도 없는 경우엔 대학 진학의 추천을 받기는 지난했다.”(楊繼繩, <<天地飜覆>>하 577)

 

1973년 중공중앙의 내부 문건엔 다음 내용이 등장한다.

“뒷문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상당히 널리 퍼져있다. 고급간부 중급간부의 경우, 직권을 이용해서 자식들을 뒷문으로 넣는 경우가 더 많다. 위에서 행하니 아래서 본받는다. 노동자를 뽑든 학생을 뽑든 모두가 정치세력의 쟁탈전이다. ‘관직이 높으면 관기(官氣, 관의 기세)에 의지하고, 관직이 낮으면 관시(關係)에 의존하고, 관직이 없으면 완력에 의지한다.”

 

결국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곧이어 사인방이 체포돼서 투옥된 이듬해 1977년부터 다시 전국 고고 제도가 부활했다. 경쟁의 기회가 주어지자 억눌렸던 청년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바로 그해 고고를 치고 베이징 대학에 입학한 리커창(李克强, 1955- )은 현재 중국 국무원 총리이고, 베이징 제2외국어 학원에 입학한 왕이(王毅, 1953- )는 현재 중국 외교부 장관으로 재임하고 있다. 대학 입학 전 리커창은 안후이성의 펑양(鳳陽)현에 하방되어 지식청년으로서 당지부 서기직을 수행했다. 왕이는 1969년 헤룽장성 생산건설병단에서 8년 간 군 생활을 했다.

 

<문혁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는 시중쉰의 모습/ 공공부문>

고고의 부활로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한 두 사람과는 달리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1975년 군중의 추천을 받고 영도의 비준을 받아 칭화 대학에 입학했다. 일반적으로 시진핑은 흑방(黑幇)의 자제로 분류되어 많은 불이익을 당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한 “황토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勛, 1913-2002)은 1950년대 중공중앙위원으로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던 인물이지만, 1962년부터 반당행위의 혐의를 쓰고 박해를 받았으며, 문혁 기간 격리되는 고초를 겪었다. 1975년 5월 시중쉰은 격리 해제되어 뤄양의 공장에 배속되었다. 시진핑의 자서전에 따르면, 바로 그해 그의 부친 시중쉰은 7-9월 다수의 우파 인사들과 함께 복권됐고, 덕분에 그는 군중의 추천을 받고 지방 지도자의 비준을 받아 칭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계속>

 

〈50〉 독재 정권 유지 수법...내편과 敵으로 갈라치기

독재자는 국민의 분열을 먹고 산다. 민족/반민족, 혁명/반동, 무산계급/유산계급, 친일/반일, 반제(反帝)/친제 등의 비천한 2분법을 들이밀고서 개개인에 한쪽 진영의 선택을 강요한다. 강압 속에서 사람들이 한 쪽으로 쏠리면, 독재자는 재빨리 ‘다수’를 선점하고 ‘국민’을 참칭한다. 공동체를 양분하는 ‘갈라치기,’ 자기편을 전체 국민으로 둔갑시키는 ‘바꿔치기’야 말로 판에 박힌 독재자의 야바위 놀음이다.

 

실제로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대부분 정치범죄는 “다수 국민의 의지”를 내세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다수지배(majoritarian rule)의 결과였다. 역사사회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 1942- )의 분석에 따르면, 히틀러의 제3제국, 스탈린의 “대공포,”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폴 포트의 킬링필드,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등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정치범죄는 특정 계급이나 특정 종족이 전체 국민(인민, people)을 사칭한 후 소수를 비(非)국민(비인민, non-people)으로 몰아서 제거했던 “민주주의의 어둠”이었다.

<다수 군중이 소수의 적인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문혁 시기 인민재판의 광경. 조리돌림을 당하는 적인(敵人)의 목에는 “완고해서 교화될 수 없는 주자파” “대반도” 등의 표어가 걸려 있다./ 공공부분>

 

마오 “인민민주독재는 반동파의 발언권을 박탈하는 것”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석 달 앞둔 1949년 6월 30일,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28주년 기념식에서 “인민민주독재를 논함”을 발표했다. 그는 “인민민주독재”를 반동파의 발언권을 박탈하고 오직 인민에게만 발언권을 갖게 하는 것”이라 정의한 후, 다음과 같이 논의를 이어갔다.

 

인민이 누구인가? 중국의 현 단계에선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도시 소자산계급 및 민족 자산계급이다. 이러한 계급이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영도 아래 단결하여 자기의 국가를 이루고, 자신들의 정부를 선출한다. 자산계급의 주구인 지주계급, 관료자산계급 및 그러한 계급을 대표하는 국민당 반동파와 그 부역자들에 대해선 전정(專政)을 실시하고, 독재를 실행한다. 그런 자들을 압박하고 규율로 묶고, 그들의 망언망동을 금지시켜야 한다. 그들이 망언을 하고 망동을 부리면 즉각 체포하여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인민의 내부에 대해선 민주제도를 실행한다. 인민은 언론, 집회, 결사 등의 자유권을 갖는다. 인민에겐 선거권이 부여되지만, 반동파엔 어림없다. 인민 내부에 대한 민주 방식과 반동파에 대한 전정 방식이 상호적으로 결합된 양면의 제도가 바로 인민민주독재다.

 

그가 제창한 “인민민주독재”는 오늘날 중국 헌법 서언(序言, 전문)과 총강 제1조에 명시된 최고의 통치 원칙이다. 인민민주독재의 실행을 위해선 사람들을 인민과 적인(敵人, 인민의 적)으로 양분하는 ‘갈라치기’가 급선무다. 마오쩌둥은 다수 인민이 소수의 반동분자를 제압하는 인민의 독재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 굳게 믿었다. 소수자 인권보호, 다수폭력의 방지, 법 앞의 평등, 자력구제 금지 등 입헌주의의 기본 원칙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1949년 7월 1일자 인민일보 제 1면엔 1949년 6월 30일 마오쩌둥이 발표한 “인민민주독재를 논함”이 게재됐다. 인민민주독재는 1954년 중국 헌법에 삽입된 후, 현재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틈만 나면 사회주의 혁명을 저해하는 소수의 반동파를 색출해서 제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문혁 개시 4년 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가 없인, 군중을 발동시키지 않고선, 군중의 감독이 없다면, 반동분자 및 나쁜 무리에 대한 효과적인 독재를 할 수 없다. 그들을 효과적으로 개조할 수도 없다. 그들은 계속 소란을 피울 수 있으며, 심지어는 부활을 꾀할 수도 있다.”(1962.1.30. “확대 중앙공작 회의 강화”)

 

돌이켜 보면, 문화혁명의 전 과정이 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반동파를 제압하는 군중독재(mass dictatorship)의 역사였다. 문혁 초기엔 군중이 직접 나서서 인민의 이름으로 반동세력을 때려잡는 군중 반란의 과정이었다. 1968년 중순 이후부턴 군대가 이끄는 ‘혁명위원회’가 인민민주독재의 이름으로 가상의 반동분자들을 색출하는 마녀사냥의 광기가 이어졌다. 그중 가장 잔혹한 사례가 바로 “청리계급대오운동(1968-1976)”이었다.

 

마녀 사냥의 광기...’청리 계급대오 운동'

1968년 문혁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마오쩌둥은 질서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벌써 1년 넘게 중국 전역에선 군사적으로 무장한 군중 조직들이 서로 맞붙어 전투를 벌이는 실제적인 내전 상황이었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어려운 특수상황에선 비상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1967년 여름 이후 무장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비상조치가 필요한 특수상황이었다.

 

1968년 6월 3일, 6월 24일 중공중앙은 전국의 모든 군중 조직에 무장투쟁을 즉각 중단하라 명령했다. 아울러 지방의 군부에 폭도 진압의 전권을 이양했다. 군부는 일제히 무력을 동원해서 지방의 무장집단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유혈 진압의 포화 속에서 1968년 9월 신장을 마지막으로 전국에 혁명위원회가 건립됐다.

 

마오쩌둥은 혁명위원회를 통해서 인민의 내부에 숨어 있는 가상의 적을 깡그리 소탕하는 정치 캠페인을 개시했다. 1967년 말 상하이에서 개시된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 이하 청계)” 운동은 1968년 5월중공중앙의 공식 명령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청리계급대오”란 문자 그대로 무산계급의 조직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한다는 의미다. 운동의 명분은 문화혁명의 혼란을 틈타 관·정·군·민 전 기관에 잠입한 내부의 반동파를 색출해서 “투쟁하고, 비판하고, 개조하는” 전면적인 조직 정비의 목표를 표방했다. 여기서 반동파란 구체적으로 반역자, 특무 간첩, 자산계급, 국민당 잔당, 주자파 및 흑오류(黑五類) 등을 이른다. 이들을 때려잡는 “청계 운동”의 전권은 지방에 속속 들어선 혁명위원회에 부여됐다.

 

<혁명위원회의의 건립을 경축하는 인민 대회. 전광판 문구, “위대한 스승, 위대한 영수, 위대한 통수, 위대한 조타수 마오주석 만세!” 아래 “미제국주의 타도! 소련 공산당을 우두머리로 하는 현대 수정주의 타도!” 등의 구호가 보인다./ 공공부문>

 

어찌 보면 1940년대 이래 마오쩌둥이 줄곧 써온 정풍(整風)운동과도 유사했다. 다만 문혁의 와중에서 전국에 새롭게 건립된 ‘혁명위원회’에 전권을 부여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혁명위원회는 명목상 인민해방군, 혁명 간부 및 혁명 군중 등 관·정·민의 3결합을 지향했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은 지방 군부가 장악했다. 혁명위원회가 떠맡은 “청계 운동”은 문화혁명의 전 과정에서 최장 기간 최대 규모로 지속되면서 최다 희생자를 낳은 가장 가혹한 정치 캠페인으로 기록됐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 3천만 명 이상이 붙잡혀서 문책을 당하고, 50만 명 이상이 조직적 고문, 자백 강요, 인민재판, 강제 자살, 집단학살 등의 이유로 비자연적 죽음에 내몰렸다. 희생자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청계 운동”의 직간접 피해자의 규모는 대략 1억 명, 곧 전 인구의 8분의 1에 달했다.

 

5개월 사이 1만8000명 반혁명으로 몰아 학살

1968년 1월 1일에서 5월 11일까지 광시성(廣西)에선 1만 8천 명이 반혁명 조직원들로 몰려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마녀사냥의 광열은 곧 장시(江西), 랴오닝(遼寧), 헤이룽장(黑龍江), 산시(山西), 장쑤(江蘇)성으로 번졌다. 중국 2천 개 현(縣)에선 평균 100명 이상의 희생자가 속출했다.

 

캉성(康生)과 장칭(江靑) 등의 명령에 따라 1968년 1월부터 1969년까지 네이멍구자치구에서는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34만6000명(그중 75%가 몽고족)이 기소되어 1만6332명이 사망하고 8만7180명이 회복불능의 불구가 되었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70만 명이 누명을 쓰고, 4만 명이 사망하고, 14만 명이 불구가 됐다.

 

<문혁 당시 “흑룡강 일보”의 사진기자 리전성(李振盛, 1940-2020)의 사진기록. “반혁명 집단 주범” “살인범” 등의 죄목 아래엔 “사형 판결 즉각 집행”(判處死刑, 立卽執行)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1968년 4월 5일 하얼빈시 교외/ 李振盛, “紅色新聞兵”, 197쪽>

같은 시기, 허베이(河北)성에서도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국민당 잔당이 존재한다는 천보다(陳伯達)의 주장이 도화선이었다. 그 결과 8만4000명이 체포되어 가혹행위를 당하고, 그 과정에서 2955명이 죽고, 763명이 불구가 됐다. 윈난(雲南)성에서는 138만 명이 누명을 쓰고 가혹하게 심문당하다가 1만7000명이 죽고, 6만1000명이 불구가 됐다. 1968년 4월 30일, 광시성 군구의 9개 중대가 인근 닝밍(寧明)현의 군중조직을 공격해서 108명을 학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지방에서 시작된 “청계 운동”의 광열은 1968년 5월에 이르면 대도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해 5월 상하이에선 16만9405명이 억울하게 붙잡혀 심문을 당하고, 그 과정의 가혹행위로 5449명이 타살당하거나 강압에 못 이겨 자살을 하고 말았다.

 

숨어 있는 가상의 반동파를 색출해 처형하는 “청계 운동”은 초기 단계부터 과격하고도 가혹한 양상을 보였다. 억울한 희생자가 수도 없이 속출했음에도 마오쩌둥의 결심은 추호도 흔들림 없었다. 1968년 5월 25일 중공중앙은 전국 조직망을 통해서 “청계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명령하는 마오쩌둥의 비시(批示)를 하달했다. 중앙당의 공식적 지원 아래서 전개된 지방의 “청계 운동”은 걷잡을 수 없는 집단학살의 활화산으로 타올랐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참혹한 “청계 운동”의 실상을 파헤쳐 보자.

 

돌이켜보면, 마오쩌둥 방식 인민민주독재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다수 인민이 민주적 합의를 통해 소수의 적인(敵人)을 독재적으로 감시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혁명 군중을 부추겼다.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는 인민이 법 위에 군림하는 폭민정치(mobocracy)와 다르지 않다. 표면상 인민이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서 자발적으로 인민 주권을 행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정권이 군경을 동원해서 바로 그 인민을 감시하고 조정한다. 인민민주주의가 계급학살(classicide)과 인종청소(genocide)를 가능케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청계 운동의 사례가 증명하듯,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의 이름을 팔아 자행되는 인민독재이기 때문이다. <계속>

 

<1968년 여름, 하얼빈 교외에서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젊은이들. 마오쩌둥은 인민의 의식을 심층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인민민주”를 통한 “인민독재”에 성공했다./ 李振盛, “紅色新聞兵”,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