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1/ 2016-07-07 창덕궁 샹들리에, 근대의 두 얼굴 - 12-29 싱거 미싱과 이매방의 춤
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1/ 동아일보 2016
07-07 창덕궁 샹들리에, 근대의 두 얼굴
/창덕궁 인정전 내부의 샹들리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창덕궁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은 인정전이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이다. 인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임금이 앉는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 놓여 있다. 어좌 위로는 화려한 장식의 닫집(보개·寶蓋)이 펼쳐진다.
그런데 인정전엔 경복궁 근정전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인정전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샹들리에다. 조선시대 궁궐에 서양식 전등이라니.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1907년 즉위와 함께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고는 이듬해 창덕궁의 수리를 명했다. 순종이 명했다고 하지만 실제 작업은 일제가 맡았다. 인정전의 샹들리에는 그때 유리창, 커튼과 함께 설치되었다. 일제는 실내 바닥의 전돌도 걷어내고 일본식 나무마루로 바꿨다. 공사는 1909년 봄 마무리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샹들리에였다. 인정전 샹들리에는 자못 화려하고 육중하다. 노란 천으로 휘감은 뽀얗고 큼지막한 전등들. 샹들리에 틀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무늬를 디자인해 넣었다. 샹들리에 전깃불은 첨단 서양문물이었고 근대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 전기가 도입된 것은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처음 전깃불이 들어왔다. 에디슨이 전구를 활용한 이후 불과 8년 만이었다. 현재 건청궁 앞에는 ‘한국의 전기 발상지’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 전깃불이 20여 년 뒤 창덕궁에도 들어왔고 샹들리에까지 설치한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 사는 공간도 변하는 법. 궁궐 전각에 전등을 설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0세기를 살아가는 임금님이 꼭 19세기 스타일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샹들리에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창덕궁의 밤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창덕궁의 샹들리에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인정전을 수리하고 샹들리에를 매단 것은 결국은 일본의 의도가 반영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전기 공급이 원활치 않아 전구가 자주 깜박였고 그로 인해 수리비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전구가 제 역할을 못한 것이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 모습이 마치 건달 같다고 해서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깜박깜박하는 전등. 당시 우리의 국운과 비슷했던 것일까. 1910년 8월 그곳 창덕궁에서 조선의 500년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20세기 초 신문명을 상징했던 창덕궁의 전깃불 샹들리에. 우리는 그렇게 근대와 만났다.
07-14 공세리 성당과 이명래 고약
/1922년 건축된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불리는 곳, ‘태극기 휘날리며’ ‘사랑과 야망’ ‘아내가 돌아왔다’ 등 7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한 곳.
바다에 인접한 충남 내포(內浦) 땅 아산에 가면 공세리 성당이 있다. 내포는 한국 천주교의 요람. 이에 걸맞게 공세리 성당의 역사도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 공세리에 공소(신부가 상주하기 전 단계의 소규모 천주교회)가 생겼고 1895년 프랑스인 에밀리오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1897년 한옥 성당을 신축했고 이어 1922년 직접 설계해 지금의 공세리 성당을 지었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공세리 성당은 우아하면서 단정하다. 그런데 언뜻 보면 근대기에 지어진 다른 성당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그럼, 이 성당이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이유는 뭘까. 건물의 외관도 외관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주변 경관과의 조화다. 수령 350여 년의 느티나무를 비롯해 건물 주변엔 고목이 여럿이다. 그 고목과 서양식 건축물의 조화가 압권이다. 성당 마당엔 순교자 32위의 넋을 기리는 공간도 있다. 순교의 흔적이 찾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이 성당엔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1900년 전후, 아산 지역엔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모습을 안타까워한 드비즈 신부는 나름대로의 의약 지식을 활용해 종기 퇴치 약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통하게 종기는 곧 나았고 화제가 되었다. 당시 공세리 성당에서 심부름을 하던 10대 소년 이명래가 있었다. 소년은 드비즈 신부로부터 열심히 고약 조제법과 치료법을 배웠다. 그러다 1906년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아산에 ‘명래한의원’을 개업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명래 고약’은 공세리 성당에서 그렇게 탄생했다.
성당 한쪽엔 박물관도 있다. 사제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꾼 것이다. 박물관엔 성당과 순교의 역사, 성당 건축 과정, 이명래 고약 등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드라마 가운데 대표작의 관련 영상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공세리 성당은 언제 가도 아름답다. 뜨거운 여름 태양에 빛나는 붉은 벽돌도 좋고 건물 외벽에 드리운 고목의 그림자도 좋다.
07-21 홍릉과 유릉, 좌절된 자주권의 열망
/일제의 식민지배 의도가 담겨 있는 유릉의 석물들
경기 남양주시 금곡에 있는 조선 고종의 홍릉(洪陵)과 순종의 유릉(裕陵). 이곳은 조선의 다른 왕릉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침전(寢殿·왕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곳) 사이 신도(神道) 양옆에 줄지어 선 석물(石物·돌조각)들이다.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등의 석수(石獸)를 두 줄로 도열하듯 배치해 놓았다.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보통 조선왕릉의 석물은 침전 앞이 아니라 침전 뒤쪽 봉분 주변에 둘러서 있다. 석수는 호랑이 말 양이 전부였다. 그런데 홍릉 유릉에선 석물을 세운 위치도 달라진 데다 전례에 없던 코끼리 낙타 기린이 등장한다.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런 것일까.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청나라와 대등한 나라를 만들고 근대화를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은 황제였기에 자신의 무덤도 중국의 황제릉처럼 만들고자 했다. 능의 구조를 직접 구상했을 정도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승하했고, 황제릉에 대한 고종의 의지는 홍릉에 반영되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홍릉 옆에 유릉이 조성되었다. 유릉의 석물은 홍릉의 것보다 더 크다. 동물 조각은 더욱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문석인, 무석인도 이목구비가 뚜렷해 서구 조각 분위기다. 유릉 조성은 일제가 주도했고 석물도 일본인 조각가들이 제작했다. 그들은 근대적 조각술을 조선왕릉에 적용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왕릉 석물을 제작해 오던 방식과 달리 모형을 떠서 그것을 토대로 작업하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의 예술품은 영 쇠멸하였고, 신생기가 도래하여 그 시대의 예술작품을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조선의 전통 문화와 미술을 폄하하는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고종에게 대한제국은 근대로 가는 과정이었다. 조선의 위상을 회복하고 자주권을 되살리기 위한 열망이었다. 살아서 대한제국을 잃었지만 죽어서 황제릉이 조성되었으니 어쩌면 그 열망이 이뤄진 것일까. 아니다. 유릉에 이르러 근대의 꿈은 무너졌다. 일본인들이 만든 석물은 근대 조각이기에 앞서 조선의 전통과 왕실에 대한 훼철이었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홍릉과 유릉. 초입에서 두 줄로 도열해 사람을 맞아주는 석물들. 언뜻 보면 당당하지만 그 내력을 생각하면 마음이 쓸쓸해진다.
07-28 영등포공원 담금솥과 맥주의 역사
/1933년부터 맥아와 홉을 끓이는데 사용했던 오비맥주 담금솥.
일본 삿포로 도심엔 ‘삿포로 팩토리’가 있다. 1876년 세운 삿포로 맥주공장을 교외로 이전하고 1993년 공장 건물 일부와 굴뚝을 살려 생활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흉물 같았던 공장 굴뚝은 삿포로를 상징하는 명물이 되었고 삿포로 시민과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1876년이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맥주가 들어온 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맥주 마시는 사람이 늘어났고, 1933년 우리나라에도 맥주 회사가 생겼다. 그해 대일본맥주가 조선맥주를 세웠고, 기린맥주는 서울 영등포에 맥주공장을 짓고 소화기린맥주를 설립했다. 조선맥주는 하이트맥주로, 소화기린맥주는 동양맥주 오비맥주로 이어졌다.
서울 영등포역 바로 옆 영등포공원은 오비맥주의 공장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가면 커다란 담금솥이 있다. 오비맥주 공장에서 맥아와 홉을 끓이는 데 사용했던 대형 솥을 공원에 전시해 놓은 것이다. 1933년 솥을 만들어 1996년까지 사용했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제조용기인 셈이다. 나사가 몇 개 빠지고 약간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오비맥주 영등포공장이 1997년 경기 이천으로 이전하자 서울시는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 맥주공장의 터라고 하기엔 썰렁하기 짝이 없다. 맥주공장의 다른 흔적들은 온데간데없고 담금솥 하나만 공원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열차를 타고 영등포를 지날 때 늘 차창 밖으로 스쳐갔던 맥주공장의 풍경. 우리 일상의 음식문화 가운데 하나로 굳건히 자리 잡은 맥주. 그 역사를 영등포 공장 터에서 제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공장 건물도 몇 개 남겨 놓고, 여기에 기념관과 박물관도 꾸미고 이런저런 맥주 체험공간도 마련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맥주공장의 굴뚝 한두 개도 살려 놓았다면, 지금 멋진 풍경이 되었을 텐데. 1997년 이천으로 공장을 옮길 때 공장의 굴뚝을 남겨 놓으려 했지만 안전상의 문제로 철거했다고 한다. 안전도 안전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인식 부족, 의지 부족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흔적을 너무 쉽게 없애고 훼손해 왔다. 영등포공원에서 만나는 담금솥 하나로는 우리 맥주의 역사를 제대로 체감할 수 없다. 담금솥은 그래서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삿포로 팩토리가 부러운 까닭이다.
08-04 경천사터 10층 석탑, 100년의 유랑
/근대기 수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천사터 10층 석탑.
훤칠하고 세련된 자태의 국보 86호 경천사터 10층 석탑(고려 1348년·높이 13.5m). 현재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중앙홀 맨 안쪽에 우뚝 서 있다. 원래 경기 개풍군(지금의 북한 개성시) 경천사에 있던 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1907년 2월, 무장한 일본인 인부 130여 명이 개성 경천사터를 급습했다. 이들은 10층 석탑을 막아서는 개성 주민들을 위협하면서 석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해체한 부재들을 달구지 10여 대에 옮겨 실은 뒤 개성역으로 향했다. 경천사 탑 약탈 사건이다. 그 배후는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야키였다. 순종의 결혼식 참석차 한국에 온 그는 고종이 경천사 탑을 하사했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였다. 그러곤 인부를 동원해 탑을 해체해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밀반출한 것이다.
이 만행을 처음 폭로한 사람은 영국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이었다. 그는 그해 3월 대한매일신보에 이 사실을 보도했다. 선교사이자 고종 황제의 외교 조언자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도 발 벗고 나섰다. 헐버트는 일본의 영자신문을 통해 약탈 사실을 알리고 반환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자 1918년 다나카는 결국 이 탑을 한국에 반환했다.
천만다행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탑은 이미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별다른 보존 조치 없이 포장된 상태로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고, 세월이 흘렀다. 탑을 수리한 것은 1960년. 보수한 탑은 개성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경복궁 야외에 세웠다. 그 후 풍화작용과 산성비 등으로 인해 탑은 더욱 훼손되었다. 1960년 보수복원이 엉성했던 것도 훼손을 부채질했다. 급기야 1995년 해체 보수에 들어갔다.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 10년에 걸친 수리 복원을 했고 2005년 새로 개관하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
개성-도쿄-서울-대전-서울. 탑을 해체하고 다시 쌓기를 몇 차례. 경천사 탑의 최근 100년은 우리 근대사의 상흔 그대로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통일이 되면 이 탑이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을까. 헐버트의 기일(5일)을 앞두고 자꾸만 경천사 탑의 수난사가 떠오른다.
08-11 장항제련소와 굴뚝의 추억
/거대한 미술 조형물을 연상시키는 옛 장항제련소 굴뚝
서해 바다와 금강이 만나는 곳,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옛 장항제련소다.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장항제련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제가 제련소를 세운 것은 우리의 금과 동 등 금속을 수탈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광복을 거치면서 장항제련소는 비철금속 제련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장항제련소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 만큼 인기가 높았다. 장항 사람들은 “예전에 제련소가 먹여 살렸지요”라고 말한다. 제련 공정은 1989년 중단되었다. 2000년대 초엔 주변 지역 환경오염과 이로 인한 주민의 건강 문제가 불거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제의 수탈, 근대화 산업화, 환경오염…. 영욕이 섞여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1930년대 함께 세워진 국내 3대 제련소 중 북한의 흥남제련소, 진남포제련소가 이미 사라졌기에 장항제련소의 흔적은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옛 장항제련소에서 두드러진 것은 굴뚝이다. 1936년 제련소 설립 당시 굴뚝도 함께 세웠다. 지금의 굴뚝은 1979년 재건립한 것이다. 검은 연기를 쏟아내는 장항제련소 굴뚝의 모습은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 사진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해발 120m 바위산에 우뚝 솟은 굴뚝. 높이 90m, 지름 7.5∼9.5m에 달한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조형미술품 같다. 1989년 제련 공정 폐쇄 이후 굴뚝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굴뚝의 위용은 여전히 당당하다. 굴뚝에 이어져 있는 100m 정도의 연도(煙道)는 독특한 경관을 자랑한다. 굴뚝이 있는 바위산에 올라가면 바다 건너 군산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 장항제련소와 굴뚝을 근대의 흔적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옛 제련소 건물을 다양한 문화창작 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굴뚝을 박물관이나 산업기념관으로 조성하면 좋을 것 같다. 굴뚝 주변에 전망대를 만들면 그것도 효과적이다. 또한 굴뚝에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한다면 바닷가를 배경으로 멋진 야경을 연출할 것이다.
옛 장항제련소와 굴뚝은 지금 사유재산이다. 그러나 그 의미와 가치는 사유재산의 영역을 넘어선다.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함께 기억해야 할 소중한 흔적이다.
08-18 순종 어차와 오얏꽃
/순종 어차인 1918년식 캐딜락. 원 안은 어차 문에 도금으로 장식한 대한제국의 상징 오얏꽃 무늬.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1900∼1901년경으로 추정된다. 초창기 자동차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미국인 버턴 홈스가 쓴 기행문에 ‘1901년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여행했다’는 내용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략 이즈음일 것으로 추정한다.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순종 황제 부부의 어차(御車)가 있다. 순종이 탔던 1918년식 캐딜락(미국 GM사 제작)과 순정효황후가 탔던 1914년식 다임러(영국 다임러사 제작)다. 현재 전 세계에 캐딜락 1918년식 차종은 20대, 다임러 1914년식 차종은 3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순종 부부 어차는 국내에 현존하는 자동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이 어차들을 언제 어떻게 들여왔는지, 순종 부부가 어떻게 타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의 제작연도나 상황으로 보아, 순종은 1920년대에 이 캐딜락을 탔을 것이다. 1926년 순종은 세상을 떠났고, 이 어차는 창덕궁에 보관되어 왔다. 세월이 흘러 차에는 녹이 슬고 부품은 훼손되어 갔다.
더 이상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판단에 따라 1997년 수리 복원에 들어갔다. 차의 외양 부분은 영국의 고(古)자동차 전문 복원업체인 윌대사에서, 엔진과 섀시 부분은 현대자동차가 맡았다. 수리 복원은 2001년 마무리됐다. 복원을 마치면 이 차들을 실제로 운행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안전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에 따라 이 계획은 접어야 했다.
순종 부부 어차는 초창기 자동차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일단 외형이 이국적이고 고풍스럽다. 근대기를 다룬 영화에 나올 법하다. 차체는 철제가 아니라 목제이고 차체 외부는 칠(漆)로 도장을 했다. 내부는 황금색 비단과 고급 카펫으로 꾸몄다. 문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화·李花) 무늬를 도금으로 부착했다. 오얏꽃 무늬로 보아 주문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얏꽃을 붙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때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지금 고궁박물관에서 만나는 순종 어차는 신차처럼 깨끗하다. 수리하고 복원한 것은 좋았는데 너무 깨끗하다 보니 시간의 흔적, 식민지의 상흔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약간 빛바랜 모습으로 복원했으면 어땠을까. 금빛 오얏꽃의 번쩍거림이 오히려 식민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08-25 강화도 소창과 기저귀
/가내공업 형태로 소창을 짜고 있는 인천 강화군 은하직물.
천 기저귀는 소창 면직물로 만든다. 소창은 기저귀뿐만 아니라 행주, 이불솜 싸개 등으로 사용되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했던 옷감이었지만 지금은 소창 자체가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인천 강화군에 가면 지금도 소창을 생산한다. 비록 가내공업이지만 10여 곳에서 직조기가 돌아간다. 현재 소비되는 소창의 대부분은 강화산이다.
강화는 직물의 도시였다. 1916년 강화에 직물조합이 결성되면서 소창과 비단 등의 생산이 본격화됐다. 강화의 직물산업은 1960,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1960년대 강화지역의 가정집엔 손발로 천을 짜는 수직기가 6000여 대, 직물공장엔 역직기가 1000여 대 있었다고 한다. 직물공장 종업원이 강화읍에만 4000여 명. ‘강화 비단’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강화 소창은 짜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러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인조 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직물 짜는 사람들도 떠났다. 게다가 소창의 소비까지 줄었다.
몇 년 전 ‘백년의 유산’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3대째 국숫집을 운영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그 드라마를 찍은 곳은 강화의 조양견직 공장 터. 바로 소창을 생산했던 곳이다. 1933년 지어진 공장 건물들은 현재 폐가처럼 방치돼 있다. 강화 소창 100년의 부침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네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강화 소창. 그 흔적이 사라지게 해선 안 된다. 쉽지 않겠지만 가내공업을 잘 유지하고, 소창의 부가가치를 높여 다양한 상품으로 개발해야 한다. 조양견직의 건물도 되살려 활용해야 한다. 조양견직 건물들은 외관과 내부 공간이 다양해 그 가치는 더욱 높다. 이곳에서 강화 소창 100년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강화 남문 옆 소창 공장 터를 되살린 카페에서도 소창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려운 여건이지만, 그래도 100년째 쉼 없이 돌아가는 강화의 소창 짜는 기계. 강화 골목길을 가득 채웠던 그 직조기 소리를 되새겨 본다.
09-01 석굴암의 재발견, 그 찬사와 상처
/1910년대를 거치며 한국미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은 석굴암.
우리나라 최고 문화재의 하나로 꼽히는 석굴암. 우리는 언제부터 석굴암을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한국미의 대표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까.
1907년경 경주 토함산 깊은 곳에서 석굴암이 ‘발견’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인들의 눈에 띈 것이다. 당시 석굴암은 적잖이 무너진 상태였지만 일본인들은 석굴암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놀랐다. 소식을 전해들은 소네 아라스케 통감이 1909년 석굴암을 순시했다. 그는 건축가 세키노 다다시에게 현지 조사를 의뢰했다. 세키노는 석굴암을 걸작으로 높이 평가했고 이후 1910년대 석굴암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조선미술대관’ ‘조선미술사’와 같은 책, 국학자 안확의 글 등에서 석굴암이 부각되었고 민예이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영원의 걸작”이라고 상찬했다. 이에 힘입어 1920년대 석굴암 여행 붐이 일었다. 대중이 석굴암에 매료된 것이다.
당시 우리가 석굴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물론, 석굴암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석굴암을 답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1907년 당시 석굴암은 무너진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은 석굴암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음을 의미한다. 그 석굴암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고 1910년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인 감상의 대상, 미적인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석굴암은 이렇게 한국의 대표 문화재로 자리 잡아갔다. 석굴암의 재발견이다.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네 통감은 석굴암을 통째로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불국사∼석굴암 구간의 도로, 석굴암∼감포 구간의 철도를 건설하고 감포항을 확장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계획은 백지화되었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1913∼15년 석굴암을 해체 수리했다. 그 과정에서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콘크리트 돔 구조물 설치였다. 자연과 함께해왔던 석굴암을 자연으로부터 차단한 것이다. 석굴암 내부에 물이 흐르고 이끼가 끼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돔은 부끄럽게도 우리에게 무비판적으로 이어졌다. 1961∼64년 우리가 실시한 석굴암 수리 공사에서 일제의 콘크리트 돔을 철거하기는커녕 2중으로 덧씌우는 우를 범했다.
국운이 쇠하던 1907년, 석굴암은 무너진 채 우리와 다시 만났다. 그 존재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였지만, 석굴암은 크나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09-08 당인리 화력발전소와 마포종점
/1930년부터 전기를 생산해온 서울 당인리 화력발전소.
‘강 건너 영등포엔 불빛만 아련한데/…/저 멀리 당인리의 발전소도 잠든 밤/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1960년대 말∼1970년대 은방울자매의 히트곡 ‘마포종점’의 가사 일부다. 당인리 발전소는 현재 서울 마포구 당인동 한강 북단에 위치한 서울화력발전소, 마포종점은 1968년까지 운행됐던 전차의 종점을 말한다.
당인리 발전소는 1930년 11월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다. 90년 가까이 수도권 전기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이 발전소는 한강변에 위치했기에 더욱 명물이 되었다. 우뚝 솟은 굴뚝, 강물에 비친 불빛은 근대기 서울의 상징이었다. 1970년대 한강의 풍경을 그린 그림에 당인리 발전소가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호기(1930년), 2호기(1935년), 3호기(1956년), 4호기(1971년)가 열심히 전기를 생산하다 모두 폐기되었고 지금은 5호기(1969년)가 가동 중이다. 5호기도 2017년 가동을 중단하고 발전설비는 지하에 건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지상과 4, 5호기를 공원,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옛 서울역(1925년)도 현재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이 많다.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되살리긴 했지만 이곳에서 서울역의 흔적과 기억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곳이 기차를 타고 내리는 역이었는지, 근현대사의 영욕과 애환이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지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서울역이라는 공간의 역사와 본질적 기능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다른 전시공연 공간과 별 차이가 없다.
당인리 화력발전소 프로젝트는 의미 있는 변신이다. 그러나 전시공연 창작체험 공간 그 이상이어야 한다. 4, 5호기 건물의 모습을 유지하고 거기 어딘가에 기념공간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전향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근대의 흔적을 보존 활용하는 데 있어 그것이 늘 공연전시체험 공간일 필요는 없다. 핵심은 당인리 발전소의 정체성과 본질이다. 우리 전기와 빛의 역사, 마포종점의 아련함, 환경오염이라는 오명까지. 힘겹게 건너온 20세기 일상의 흔적을 가감 없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전시공연 공간도 좋지만 당인리의 역사와 본질을 기억하고 체현하는 일, 그것이 당인리 발전소에 대한 예의다.
09-22 춘포역, 그 낭만과 상흔
/1914년에 건립된 전북 익산의 춘포역.
김제·만경 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곳, 전북 익산에 가면 춘포역이 있다. 익산역(옛 이리역)에서 갈라져 나와 동익산역과 삼례역 사이에 위치한 전라선의 간이역. 1914년에 건설된 춘포역은 현존하는 기차역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대부분의 간이역이 그렇듯 춘포역은 단출하다. 전문가들이 보면 겹처마나 차양 등 이런저런 세부 요소들이 눈에 들어오겠지만, 보통 사람에겐 육면체 건물에 삼각 모양의 박공지붕을 얹은 형태다. 앞면 뒷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하다. 그러나 1914년 처음 지어졌을 당시엔 평야 한가운데에 제법 우뚝 솟은 모양새였을 것이다.
춘포역은 애초 대장역(大場驛)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은 대장촌(大場村) 마을로 불렸다. 쌀을 모아두는 큰 마당이라는 의미였다. 김제·만경 평야에서 거둔 곡식을 군산항으로 옮겨 수탈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가 담겨 있는 지명이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1996년 대장촌리를 춘포리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대장역도 춘포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흔히 간이역을 낭만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춘포역 또한 그러하다. 눈여겨보면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외관은주변 풍광과 잘 어울린다. 요즘 같은 가을날 기차는 황금들녘을 지났을 것이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그대로 멋진 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생긴 소규모의 역들은 대부분 수탈의 수단이었다. 춘포역도, 가까운 군산의 임피역도 모두 곡물 수탈의 통로였다.
춘포역은 2007년 역으로서의 기능을 마감했다. 춘포역에 가면 실내에 역의 옛 모습 사진, 주민들의 메모와 그림 등이 걸려 있다. 시민들과 함께하는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간이역박물관으로 활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해바라기를 심어 여름철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 같은 노력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대목이 있다. 옛 철길이 사라진 점이다. 2011년 전라선 복선 전철화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옛 철길을 철거한 것이다. 새로 난 전철 길은 옆의 고가 위로 지나가고, 춘포역 앞의 옛 철길은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춘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곡물 수탈의 상흔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驛舍) 하나만으론 부족하다. 100m 정도만이라도 철길을 복원해 놓으면 어떨까. 철길이 있어야 춘포역을 좀 더 제대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09-30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부산야행
/1925년 지어져 6·25전쟁 시절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부산 동아대박물관.
쫙 펼쳐진 붉은 벽돌의 외벽, 창문의 질서 정연함과 거기 숨겨진 리듬감, 고풍스러움과 현대적 분위기의 절묘한 조화…. 부산 도심 한복판 부민동에 있는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전국의 박물관 가운데 건축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의 하나다.
애초 이 건물은 1925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길 때 도청 건물로 지어졌다. 이어 6·25전쟁의 와중에 대한민국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다. 전쟁 이후 다시 경남도청으로 돌아갔고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 간 뒤엔 부산지방법원, 부산지방검찰청으로 이용되었다. 그러곤 2002년 동아대가 인수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의 90여 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6·25전쟁기가 아닐 수 없다. 전쟁 발발 약 두 달 후인 1950년 8월부터 1953년 8월까지 만 3년 동안 이 건물은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청사였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을 몽진(蒙塵)이라고 했다. 몽진은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의미다. 당시 공식적인 천도(遷都)는 아니었지만, 대통령이 서울을 떠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몽진 3년,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부산의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했다. 대통령과 관료, 정치인들이 모두 부산에 모였다. 대학들도 부산으로 옮겨 와 공부를 했다. 피란민도 늘어나 40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00만 명에 달했다. 시인 소설가 화가들은 전란의 와중에도 부산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부산은 대한민국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 부산의 중심은 지금의 동아대 박물관 건물이었다. 현재 박물관 근처엔 임시수도 시절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던 옛 경남도지사 관사 건물도 있고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국제시장도 있다. 박물관 옆에는 부산지역에서 1968년까지 운행되었던 전차도 전시되어 있다. 이 전차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전차 3대 가운데 하나다. 임시수도 정부청사 건물은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도 매력적이다. 건물을 복원하며 내부 곳곳엔 옛 흔적을 살려 놓은 점도 좋은 볼거리다.
30일과 10월 1일 동아대 박물관을 중심으로 ‘부산야행’이 열린다. 부산 도심에 산재한 근대의 흔적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임시수도 정부청사, 동아대 박물관을 통해 부산 임시수도 시절 3년의 역사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10-06 강경의 갑문과 젓갈
/금강과 강경천이 만나는 곳에 1924년 건축된 강경갑문.
명란젓 새우젓 조개젓 낙지젓 갈치속젓 아가미젓 창난젓 황석어젓 꼴뚜기젓 밴댕이젓 토하젓…. 충남 논산의 강경 포구에 가면 지천이 젓갈이다. 이곳에서 식사 때 나오는 조기도 염장(鹽藏)한 것이다.
젓갈의 고장, 강경. 예로부터 강경 포구엔 서해 밀물이 금강을 따라 내륙으로 깊숙이 밀려 올라오고 이를 따라 각종 해산물과 교역물이 들어왔다. 해산물들은 전국 곳곳으로 공급되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포구는 번성했다. 1920, 30년대는 강경의 전성기였다. 이후 50년 가까이 성어기에는 하루 100여 척의 배가 포구에 들어와 산더미처럼 생선을 쏟아냈다. 매일 2만여 명씩 상인이 몰렸다. 그 덕분에 강경은 광복 전후까지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꼽혔다.
그 핵심은 젓갈이다. 팔고 남은 생선을 오랫동안 보관해야 했고 자연스레 염장법과 수산가공법이 발달했다. 강경 젓갈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강경 젓갈시장 바로 옆, 금강과 강경천이 만나는 곳엔 갑문(閘門)이 있다. 강경갑문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에 생겼다. 당시 갑문이 있는 곳은 강경과 인천뿐이었다. 갑문을 통해 강경읍내 한복판까지 해산물을 실은 배가 들어왔다. 그 주변으로 젓갈시장이 형성되었다. 갑문이 젓갈시장의 번성에 한몫 단단히 한 것이다. 강경 포구가 성시를 누리던 시절, 강경갑문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90년 금강하굿둑이 생기면서 물길이 막혔다.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고 갑문은 기능을 상실했다
사실, 근대유산으로 치면 강경만 한 곳도 드물다. 젓갈시장 주변엔 근대유산들이 즐비하다. 한때 젓갈 창고로 사용되었던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1913년), 포구 노동자들의 근거지였던 옛 강경노동조합(1925년)을 비롯해 옛 연수당 한약방, 옛 강경상고 교장 관사, 중앙초등학교 강당, 옛 강경성결교회 등. 모두 젓갈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지난주 강경을 찾았을 때 젓갈시장은 다소 한산했다. 물론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주 발효젓갈축제가 열리고 김장철이 되면 시장은 북적일 것이다. 지금도 120여 곳의 젓갈 상점이 영업 중이다.
젓갈은 여전히 강경의 상징이고 우리의 일상이다. 그렇기에 그 역사와 흔적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강경의 젓갈, 젓갈시장, 근대유산을 유기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좀 더 깊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10-13 충무로 인쇄골목과 노가리 골뱅이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에 있는 한 인쇄업체의 사무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건 무얼까. 누군가에겐 스마트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늘 만나는 것이 있다. 치킨이나 피자 배달 전단지, 우편물 봉투, 택배 상자와 거기 붙이는 스티커, 행사 포스터, 명함…. 모두 인쇄물이다.
인쇄물을 가장 많이 쏟아내는 곳이 있다.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충무로 을지로 인현동 필동 일대다. 인쇄 관련 업체 5000여 곳에서 1만50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서울지역 인쇄업의 67%, 전국의 30%를 차지한다.
근대적 인쇄는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 1910년대 경성고등연예관, 경성극장, 중앙관 등의 영화관이 을지로에 등장하면서 영화 전단지를 찍기 위한 인쇄소들이 생겨났다. 6·25전쟁 이후∼1960년대엔 충무로로 확산되어 인쇄골목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1980년대, 근처 장교동의 인쇄업체 500여 곳이 충무로로 옮겨오면서 인쇄업은 성황을 이뤘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은 충무로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각종 선거가 급증하면서 선거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충무로에서는 단순히 종이인쇄만 하는 게 아니다. 디자인, 편집은 물론이고 코팅, 금박, 스티커, 제본 등 인쇄의 전 과정이 동시에 이뤄진다.
좁은 인쇄골목은 늘 분주하다. 종이와 인쇄물을 실은 오토바이, 지게차, 삼발이가 열심히 오가고 오래된 건물 안에서는 인쇄 기계가 부지런히 돌아간다. 저녁이 되면 이곳 사람들은 삼겹살을 구우며 종이 가루와 잉크 냄새에 지친 목을 달랜다. 노가리와 골뱅이를 안주 삼아 피로를 풀기도 한다. 인근 노가리골목과 골뱅이골목은 인쇄골목과 동고동락해왔다.
그러나 인쇄골목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임대료는 올라가고 미관상 좋지 않다며 재개발 얘기도 나온다. 경기 파주시나 서울 성수동 등지로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10년, 20년 뒤 이곳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재개발로 인쇄골목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수백 년을 이어온 서울 청진동과 피맛길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고 고층빌딩을 세운 것을 보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전 ‘세상을 찍어내는 인쇄골목, 인현동’이 열리고 있다. 전시 문구처럼 충무로는 “수십 년간 우리 삶을 인쇄해온 골목”이다. 이 골목이 청진동, 피맛길과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인쇄골목 100년 역사에 대한 예의다.
10-20 김환기와 달항아리… 백자의 재발견
/조선 백자 달항아리. 화가 김환기는 1950년대 초 달항아리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문화재청 제공
우리는 백자 달항아리를 참 좋아한다. 중국과 일본에도 백자가 있지만 이런 모습의 백자는 우리에게만 있다. 한국미의 상징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과연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둥글고 커다란 백자를 달항아리로 명명(命名)한 사람은 다름 아닌 화가 김환기(1913∼1974)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37년 귀국한 김환기는 1940년대 들어 백자에 빠져들었다. 1944년 서울에서 잠시 종로화랑을 경영하면서 골동상과 백자를 만났고 이후 수시로 백자를 사들였다. 그의 에세이 ‘항아리’의 한 대목. “한때는 항아리 속에서 산 적이 있다. 온통 집안 구석구석에 항아리가 안 놓여진 구석이 없었으니 우리 집을 일러 항아리집이라 부른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골동품 가게에) 들르면 으레 한두 개 점을 찍고 나오게 됐으니 흡사 내 항아리 취미는 아편중독에 지지 않았다.”
1940, 50년대 김환기는 부지런히 백자를 수집하고 백자 그림을 그렸다. 김환기의 그림을 보면 백자가 달인 듯하고 달이 백자인 듯하다. 백자와 달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김환기에 의해 백자와 달이 만난 것이다. 1950년대 서울에서 ‘구하산방’ 골동가게를 운영했던 홍기대는 이렇게 증언한다. “6·25전쟁이 끝난 1953년 무렵, 김환기는 커다랗고 둥근 백자대호를 백자 달항아리로 이름 붙였다. 달항아리로 부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의 이름은 달항아리가 아니었다. 크다고 해서 백자대호(白磁大壺), 둥글다고 해서 백자원호(白磁圓壺)라 불렀다. 달항아리라는 새로운 이름은 백자대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백자대호, 백자원호와 백자 달항아리는 동일 대상을 부르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와 정감은 사뭇 다르다. 백자대호, 백자원호라는 명칭은 백자의 크기와 형태만을 보여준다. 형식적인 이름이다. 이와 달리 달항아리라는 명칭은 둥근 형태뿐 아니라 달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예술적 철학적 이미지를 함께 연결시켜 준다. 훨씬 낭만적이고 감동적이며 깊이가 있다.
지금도 백자대호, 백자원호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크고 둥근 조선 백자를 좋아하는 데는 달항아리라는 이름이 절대적이었다. 피폐하고 음울했던 1950년대 초, 우리는 김환기와 함께 달항아리를 만났다. 근대의 또 다른 풍경. 두고두고 행복한 일이다.
10-27 포천아트밸리와 채석장의 추억
/경기 포천시 천주산의 옛 채석장.
경기 포천시 천주산은 아름다운 산이다. 그곳 한 자락에 아트밸리가 있다. 깎아지른 듯 좌우로 우뚝 솟은 암벽, 그 사이로 쫙 펼쳐진 푸른 호수. 이를 배경으로 공연과 전시가 펼쳐진다.
이곳은 원래 채석장이었다. 화강암 채석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부터. 국토 개발과 함께 토목건축 사업이 활발해지던 때였다. 산업자재로 화강암의 수요가 늘경기 포천시 천주산의 옛 채석장.어나자 아름답던 천주산 자락의 화강암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포천의 화강암(포천석)은 우리나라 3대 화강암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빛깔이 밝고 화강암 고유의 무늬가 아름다운 데다 재질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대법원, 경찰청, 인천공항, 복원 청계천 등 곳곳에 포천석이 사용되었다. 외화 획득을 위해 해외로 수출하기도 했다.
30년 넘게 채석을 하면서 포천석은 인기를 누렸지만 천주산은 황폐해졌다. 산 중간이 잘려 나가 암벽이 노출돼 경관이 망가졌다. 양질의 화강암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자 2002년 채석을 중단했다. 천주산 채석장은 한동안 방치되다 포천시의 노력으로 2009년 문화예술 공간 아트밸리로 다시 태어났다. 산업유산인 폐채석장의 변신은 매우 드문 일이다.
잘려 나간 바위산은 세월의 풍화로 인해 오히려 독특하고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채석 작업으로 깊게 파인 땅은 지하수가 차면서 자연스레 초록빛 호수(수심 20m)로 변했다. 야간 조명을 받으면 더욱 환상적이다.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화강암과 채석장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화가 박수근은 강원 양구에서 태어났지만 1950, 60년대 서울 창신동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당시 창신동엔 채석장이 있었다. 박수근은 늘 채석장의 화강암을 보았고, 그 덕분에 바위의 질감을 화면에 구현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에서 ‘채석장 포성’에 놀라 밀려난 비둘기의 아픔을 노래했다.
채석장은 산업화시대 우리의 흔적 가운데 하나다. 포천아트밸리에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아트밸리 진입로 상공에 설치한 모노레일이다. 환경이 파괴된 지역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되살리면서 굳이 인공의 모노레일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을까. 상처를 딛고 새로운 문화경관으로 다시 태어난 천주산 채석장. 모노레일이 그 경관을 막아서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11-03 ‘뿌리깊은나무’와 잡지의 재발견
/‘뿌리깊은나무’ 창간호와 ‘샘이깊은물’ 창간호.
1976년 3월 한 월간지가 세상에 나왔다. 표지 제호는 훈민정음 글자체였고, 쌀을 담고 있는 농부의 거친 손이 표지사진으로 실렸다. 강렬하면서도 깔끔한 디자인은 보는 이의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한글만으로도, 가로쓰기만으로도, 우리의 전통과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이렇게 멋진 잡지를 만들 수 있구나. 사람들은 놀랐다.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은 한창기(1936∼1997)였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전공을 버리고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으로 일했다. 백과사전 팔아 번 돈으로 이 잡지를 만들었다.
그는 창간사에 이렇게 적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라고 믿습니다. 또 이 토박이 문화가 역사에서 얕잡힌 숨은 가치를 펼치어, 우리의 살갗에 맞닿지 않은 고급 문화의 그늘에서 시들지도 않고 이 시대를 휩쓰는 대중문화에 치이지도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야만 우리 문화가 더 싱싱하게 뻗는다고 생각합니다.’
근대화 산업화의 구호가 무성하던 1970년대, 한창기는 오래된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브리태니커 판소리회를 결성해 100차례에 걸쳐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한 것도, 목수 뱃사공 화전민 부보상 등 민중의 삶을 기록한 것도, 녹차와 찻그릇을 보급한 것도, 팔도 시장을 누비며 문화재를 열심히 수집한 것도 모두 이즈음부터였다.
그 마음과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잡지가 ‘뿌리깊은나무’다. 이 잡지는 상업문화가 득세하기 시작하던 시대에 전통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근대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성찰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한글로 잡지를 만들고 편집디자인의 새 역사를 썼다는 점에서 우리 잡지문화사의 일대 혁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뿌리깊은나무’는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었다. 한창기는 1984년 11월 그 후속격으로 월간지 ‘샘이깊은물’을 창간했다.
최근 서울 성북구의 한 작은 갤러리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렸다. 전시 제목은 ‘1976년의 봄과 1984년의 가을’.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의 전권(全卷)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 옆에는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있다. 한창기가 수집한 문화재를 소장 전시하는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을 만날 수 있다.
11-10 양화진 외국인묘지, 그 碧眼의 한국 사랑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호머 헐버트의 묘비.
양화진(楊花津). 버드나무 사이로 강물이 출렁였던 한강 나루터. 지금은 사라지고 자동차와 전철이 질주하지만, 이곳 서울 마포구 한강변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어니스트 베델,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독립운동에 몸 바친 호머 헐버트,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일가, 이화여대를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고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셔우드 홀, 백정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새뮤얼 무어, 고아를 위해 일생을 바친 소다 가이치, 배재학당을 창설한 아펜젤러, 배화학당을 세운 조지핀 캠벨…. 역사 시간에 한두 번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 19세기 말∼20세기 초 낯선 땅 한국에서 한국인을 위해 살아갔던 이방인들이다. 경치 좋은 한강변에 외국인 묘역이 처음 조성된 것은 1890년이었다.
묘원 초입엔 베델의 묘비가 우뚝 서있고 그 옆에 헐버트의 묘비가 있다. 1886년 스물셋의 나이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헐버트. 교육, 선교에 힘쓰다 점차 한국의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렸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이끌었다.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 그는 그곳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고 되뇌곤 했다.
1949년, 헐버트는 광복절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 86세의 노구였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한국행 선박에 올랐다. 7월 29일 한국에 도착한 그는 안타깝게도 여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8월 5일 서울 청량리위생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운명일까. 한국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꿈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헐버트가 양화진에 묻혔으나 묘비명은 비어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묘비명은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1999년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김대중 대통령의 글씨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 넣었다. 벽안(碧眼)의 이방인에게 진 빚을 50년 만에 갚은 것이다.
양화진외국인묘원은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긴다. 묘비를 둘러보면 간혹 6·25전쟁 총탄 자국도 눈에 뜨인다. 표면이 벗겨진 묘비도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이방인들의 흔적.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11-17 ‘신라의 미소’, 얼굴무늬수막새의 발견
/1932년 경주에서 발견된 신라 얼굴무늬수막새.
1932년 경북 경주 사정동 영묘사 터에서 독특한 와당(瓦當) 한 점이 발견됐다. 골동상들의 관심이 이 와당으로 쏠렸다. 얼마 뒤 경주시내의 일본인 골동상 구리하라에게 넘어갔다. 그때 경주의 야마구치 의원에서 공중의로 일하던 다나카 도시노부가 이 소식을 들었다. 신라의 와당은 연꽃무늬로 장식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니. 27세의 청년 다나카는 곧바로 골동 가게로 달려갔다. 그러곤 주저 없이 100원을 주고 구입했다.
2년 뒤 학술지와 조선총독부 기관지 등에 이 와당이 소개되었다. ‘여자의 웃는 얼굴을 조각한 회백색 기와…신라 와당 중에서도 아직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섬세한 문양이 특히 이색적’이라는 내용이었다. 그건 얼굴무늬수막새(7세기경)였다. 지금 우리가 ‘신라의 미소’라고 부르는 바로 그 와당.
1940년 다나카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얼굴무늬수막새도 함께 가져갔다. 하나밖에 없는, 멋진 수막새가 고향땅을 떠난 것이다.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1964년, 이 와당을 기억해낸 사람이 있었다. 박일훈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이었다.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이 와당을 소개했던 오사카 긴타로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와당의 소재를 찾았다. 오랜 수소문 끝에 다나카가 일본 기타큐슈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얼굴무늬수막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박일훈은 다나카에게 편지를 보내 얼굴무늬수막새를 기증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오사카도 옆에서 적극 도왔다. 드디어 다나카의 마음이 움직였다. 1972년 10월 다나카는 직접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와 와당을 기증했다.
이 얼굴무늬수막새는 볼수록 매력적이다. 살구씨처럼 생긴 시원한 눈매, 약간 큼지막한 콧대, 수줍은 듯 해맑게 미소 짓는 입…. 그 미소는 쑥스러운 듯하면서도 살짝 관능적이다. 수막새는 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쓰던 마감 기와다. 한번 상상해 보라. 건물의 지붕 처마에 죽 돌아가며 여인의 미소로 장식을 했다니. 낭만과 파격이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천년고도 경주에서 우리는 그렇게 신라 여인의 미소를 만났다. 일본인 의사 다나카가 당시 근무했던 경주의 야마구치 의원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경주경찰서 맞은편에 위치한 화랑수련원이 그 건물이다. 이곳 어딘가에 얼굴무늬수막새와 다나카의 흔적을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11-24 대한의원과 시계탑의 추억
/서울대병원의 옛 대한의원 본관 시계탑(1908년 건축).
체코 프라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가운데 하나는 천문시계탑이었다. 설계의 치밀함과 상징성에 놀랐고, 밀려드는 관광객의 물결에 또 놀랐다. 일본 삿포로 시내에 있는 시계탑은 어떠한가. 차가운 겨울 밤, 시계탑을 배경으로 끝없이 쏟아지는 폭설의 낭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의 빅벤, 독일 뮌헨 시청사 시계탑…. 세계 유명 도시엔 그곳을 대표하는 시계탑이 있다. 사람들은 이 시계탑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리움과 기억의 공간. 그래서 시계탑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늘 붐비고, 늘 급박하게 돌아가는 그곳의 한쪽에 고즈넉한 건물이 하나 있다. 1908년 대한제국의 국립병원으로 세워진 옛 대한의원의 본관이다. 바로크 양식에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품격을 자랑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의원과 경성제국대병원을 거쳐 광복 후 서울대병원 본관으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의학박물관과 의학역사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한의원 본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건물 중앙에 우뚝 솟은 시계탑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시계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현재 시계탑 벽면에 노출된 시계는 1981년에 새로 설치한 전자식 시계다. 건물을 지을 때 설치했던 애초의 시계는 2014년 작동 가능한 상태로 수리 복원해 시계탑 내부에 전시해 놓았다. 관람도 가능하다. 이 대형 탑시계는 기계식이다. 25kg의 대형 시계추를 10m 정도 끌어올리면 그 추가 중력에 의해 내려오는 힘으로 롤러를 일정하게 돌리면서 시계가 작동한다. 복원 수리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이 시계를 1907, 1908년경 영국에 주문해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한의원 건물이 들어선 이곳은 야트막한 언덕이다. 지금은 주변에 병원 건물들이 높게 들어섰지만 1908년 당시엔 시계탑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멀리서도 시계탑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럼 왜, 이 높은 곳에 시계탑을 설치했던 것일까. 근대기 이전, 시간에 관한 정보는 일종의 권력이었고 그래서 지배층이 이를 독점하고자 했다. 높은 곳에 시계탑을 설치한 것은 시간을 시민과 공유하겠다는 의미였다. 그건 결국 근대를 향한 대한제국의 열망이었다.
대한의원 시계탑 내부로 올라가려면 나무 계단을 밟아야 한다. 나무 계단의 삐걱대는 소리. 100년 넘는 시간을 건너가는 기분이다. 매력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12-01 예천 삼강주막과 외상장부
/예천 삼강주막과 부엌 흙벽에 표시한 외상장부(작은 사진).
얼마 전 서울 도심의 한 분식집에서 외상장부를 보았다. 수첩 크기의 옛날 공책 스타일에, 모나미 볼펜이 연결되어 있었다. 신용카드가 보편화된 요즘에 아직도 외상장부라니, 의외였다.
외상장부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옛 나루터.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내성천, 금천의 세 줄기 강물이 모인다고 해서 삼강(三江)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 100년 넘은 주막이 하나 있다. 1900년경 생긴 것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이다. 낙동강을 배경으로 500년 된 회화나무가 삼강주막을 감싸 안고 그 옆으로 낙동강이 넉넉하게 휘감아 돈다. 낙동강을 따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그 유명한 회룡포가 나온다.
삼강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1900년대 초까지 장날이면 하루에 30회 이상 나룻배가 다녔다. 소금배가 들어왔고 농산물도 이곳을 통해 대구, 서울로 향했다. 상인, 부보상, 뱃사공들이 드나들었다. 경치가 좋다 보니 시인 묵객의 발길도 이어졌다. 자연스레 주막이 생겼고 부보상과 사공들의 숙소까지 만들어졌다.
1960년대까지 삼강나루터와 주막은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다리를 놓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널 일이 사라진 것이다. 주막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삼강주막은 조선의 마지막 주막으로 불렸다. 이 주막을 지킨 사람은 유옥련 할머니이다. 열아홉 나이에 주모를 맡아 2006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 년 동안 주막을 지켰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동안 방치되었으나 2007년 옛 모습으로 복원해 주막의 정취를 이어가고 있다.
주막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외상장부다. 부엌의 안팎 흙벽을 유심히 보면 세로로 죽죽 그어놓은 선들이 있다. 부지깽이를 사용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 놓은 외상장부다. 짧은 줄은 대포 한 잔, 긴 줄은 대포 한 주전자. 외상값을 모두 갚으면 가로로 길게 줄을 그어 외상을 지웠다.
마지막 주모의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오래되어 선명함이 떨어진 데다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어 놓다 보니 먼지가 끼고 빛의 반사로 잘 보이지 않는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100년을 훌쩍 넘긴 삼강주막. 세월도 가고 주모도 갔지만, 외상장부가 남아 주막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12-08 하남 구산성당의 특별한 이사
한강에서 멀지 않은 경기 하남시 구산성당. 건물은 소박하지만 단정하고 품격이 있다. 1956년에 세웠으니 이제 60년. 6·25전쟁의 상흔 속에서 신자와 주민들이 인근 한강에서 모래와 자갈을 옮기고 벽돌을 쌓아 올려 함께 지은 것이다. 아름다운 외관과 역사성 덕분에 이곳에선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찍었다. ‘천사의 유혹’ ‘별을 따다줘’ ‘너는 내 운명’ ‘에덴의 동쪽’ ‘히어로즈’ 등.
구산성당이 현재 특별한 이사를 하고 있다. 건물을 통째로 들어올려 옮겨놓는 ‘원형 이동 복원’이다. 성당(면적 199m²)을 해체하지 않고 기존 위치에서 약 200m 떨어진 새 부지까지 레일을 깔고 그 위로 건물을 끌어당겨 옮기는 방식이다. 60년이나 된 건축물을 통째로 이동해 보존하는 시도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이렇게 시도하기까지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 구산성당은 미사강변도시 택지개발에 따라 올해 9월까지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철거일이 다가오자 신자와 주민들은 안타까워했다. 60년 된 성당 건물을 이렇게 없애버려야 한다니…. 논의 끝에 7월경 건물을 통째로 옮겨 보존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9월 들어 변수가 생겼다. 구산성당 측에서 재정 문제, 안전기술 문제 등을 들어 원형 이동 복원을 포기한 것이다. 성당 건물은 다시 사라질 위기에 처했고, 또다시 논란이 일었다. 결국 수원교구 차원의 결단에 따라 상황이 반전되면서 원형 이동 복원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9월 말이었다.
그때부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건물을 옮길 때 무너지지 않도록 구조물을 단단히 보강했다. 종탑은 안전을 위해 해체해 분리했다. 내부 마감재도 뜯어냈다. 건물 바닥을 지반에서 분리했고 이동로의 지반을 평탄하게 고르고 여기에 레일을 깔았다. 성당 건물에 6개의 와이어를 묶고 끌어당겨 레일 위로 움직여 이동하도록 했다. 이달 5일 드디어 이동이 시작되었다. 안전을 위해 하루 15m 정도씩만 끌어당긴다. 이동 작업은 다음 주말이면 마무리된다. 이어 종탑을 다시 올리고 내부를 복원하는 작업이 이어질 것이다.
하남지역 공동체의 삶과 신앙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드라마와 영화로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준 곳, 구산성당. 원형 이동 복원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국내 첫 시도인 데다 비용도 엄청나다. 그렇기에 이번 시도는 더욱 뜻깊고 아름다운 실험이 아닐 수 없다.
12-15 예산 수덕여관과 세 여인
/충남 예산군 수덕사 초입의 수덕여관
충남 예산 수덕사는 1960∼80년대 중고교생들의 수학여행지 가운데 하나였다. 학생들은 더러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 수덕여관에서 묵기도 했다. 얼마 전 수덕여관을 찾았을 때, 누군가가 “40년 만인데 하나도 안 변했어요”라고 탄성을 지르는 걸 보았다. 그의 얼굴 표정은 어린아이 같았다.
1937년 말, 나혜석이 수덕사를 찾았다. 4년 전 출가한 김일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일엽과 나혜석은 1896년생 동갑내기. 이들은 공통점이 많다.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뛰어난 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지녔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교유했고 남녀평등과 자유연애의 기치를 내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여성의 선두주자였다.
세상은 시대를 앞서간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김일엽은 몇 차례의 사랑과 이별을 거듭하다 홀연 1933년 수덕사로 출가했다. 나혜석 역시 가부장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심신이 피폐해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한 것이 출가였다. 일엽을 통해 수덕사의 만공 스님에게 귀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만공 스님은 “중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미련이 남았던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떠나지 않았다. 이곳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과 조각을 가르쳤다. 그때 이응노가 수덕여관으로 나혜석을 찾아왔다. 이응노는 나혜석으로부터 세상과 예술을 배우고 파리의 낭만을 동경하게 됐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나자 이응노는 1945년 아예 이 여관을 매입했다.
1958년, 이응노는 부인 박귀희를 수덕여관에 남기고 파리로 건너갔다. 그런데 혼자 간 것이 아니었다. 연인인 대학 제자와 함께 떠났다. 파리에서 제자와 결혼했고 박귀희와 이혼했다. 1969년 3월, 동백림 사건으로 2년 반 옥고를 치른 이응노는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수덕여관을 찾았다. 박귀희는 10여 년 만에 찾아온 이응노를 정성껏 돌봐주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이응노는 다시 파리로 떠났다.
김일엽은 1971년 수덕사에서 입적했고,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떠나 여기저기 전전하다 1948년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이응노의 첫 번째 부인 박귀희는 홀로 수덕여관을 지키다 2001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과 수덕여관을 잇는 끈은 예술이었다. 시대의 관습에 맞서며 예술에 청춘을 불살랐던 이들의 흔적과 아픔. 그건 이제 수덕여관의 역사가 되었다. 우리가 수덕여관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12-22 섬진강 포구 양조장과 정병욱 윤동주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윤동주의 육필시 원고를 보관했던 전남 광양시의 정병욱 가옥.
1940년 봄, 연희전문학교 3학년 윤동주는 평생의 지기를 만났다. 전남 광양에서 올라온 다섯 살 연하 신입생 정병욱이었다. 이들은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처음 만났고 종로구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기도 했다.
이들은 늘 함께했다.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둘은 가까운 인왕산을 산책하고 그 산골짜기 아무 데서나 세수를 하고, 전차를 타고 충무로에 나가 책방을 순례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음악다방이나 영화관에 들렀다.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세상을 걱정했다. 윤동주는 자신의 습작시를 정병욱에게 먼저 보여주었다.
윤동주는 우리말 시집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우리말 출판이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1941년 윤동주는 모두 19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하고 여기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만든 원고 3부 가운데 하나를 정병욱에게 건넸다. 원고 맨 앞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썼다. 이듬해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윤동주의 원고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해 달라”는 말씀과 함께 고향의 어머니에게 원고를 맡겼다.
정병욱은 다행히 살아서 광복을 맞았다. 서울대에서 계속 공부를 했고 뒤늦게 윤동주의 소식을 들었다. 광복도 보지 못한 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불귀의 객이 된 윤동주. 정병욱은 고향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보자기로 정성스레 싸놓은 원고를 내놓았다. 윤동주의 원고는 이렇게 살아남았고 1948년 1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출간되었다.
정병욱이 나고 자란 고향 집은 광양시 진월면 자그마한 망덕포구에 있다. 바로 앞으로 섬진강이 쉼 없이 흘러와 바다와 만나고, 봄이 되면 매화가 지천으로 핀다. 정병욱 고향 집은 1925년 지어진 일본식 목조 건축물. 아버지가 양조장을 운영했기에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단정한 건물 분위기가 포구 풍경에 잘 어울린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이 양조장 건물 깊숙한 곳 커다란 독에 윤동주의 원고를 정성스레 숨겨놓았던 것이다.
차갑고 암울하던 시절, 윤동주의 시는 매화처럼 겨울을 인내하며 이곳에서 봄을 기다렸다. 그건 정병욱(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과 윤동주의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가옥은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원고 보관 장소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12-29 싱거 미싱과 이매방의 춤
/춤꾼 이매방이 사용했던 싱거 재봉틀(1920년대)
이매방은 한 시대를 풍미한 전통 춤꾼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춤을 배워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살풀이의 예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지금까지 두 종목을 보유한 인간문화재는 그가 유일하다. 이매방이 2015년 타계한 뒤 최근 유족들이 그의 유품을 전북 전주에 있는 국립무형유산원에 기증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이 유품들을 토대로 ‘명무, 이매방 아카이브로 만나다’라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기증 유품은 공연 영상과 사진, 공연 의상과 소품, 각종 편지 등 다양하다. 그런데 그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오래된 재봉틀이다. 춤꾼과 재봉틀이라니. 이매방은 자신이 직접 무복(舞服)을 지어 입었다고 한다. 이매방 재봉틀은 1920년대에 생산된 ‘싱거(Singer)’ 모델이다. 이매방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니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들어왔을 것이다. 싱거는 재봉틀에 있어 세계 최고 브랜드의 하나로 꼽힌다. 그 역사도 깊다. 우리나라에 재봉틀이 도입된 건 1900년경 일본을 통해서였다. 예전엔 재봉틀을 미싱이라 불렀다. 재봉틀은 영어로 ‘소잉 머신(sewing machine)’. 일본인들이 여기서 소잉을 떼내고 머신을 미싱으로 불렀고 그게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지금은 집에서 재봉틀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재봉틀을 갖고 있는 가정이 적지 않았다. 재봉틀을 이용해 옷 수선은 기본이고 치마 바지 버선 등 일상복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도 많았다. 재봉틀은 생계를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그래서인지 재봉틀은 인기 있는 혼수품으로 꼽혔다. 6·25전쟁 때 재봉틀을 등에 지고 피란 간 사람도 많았다.
이뿐 아니다. 재봉틀은 1960, 70년대 봉제 섬유산업의 필수품이었다. 우리의 근대화 산업화의 숨은 역군이었던 셈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1989년)에 나오는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에 미싱의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매방은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잘했다고 한다. 그 재주로 싱거 미싱을 돌려가며 열심히 무복을 만들었다. 자신의 무복뿐만 아니라 제자들 것까지 만들어 주었다. 어찌 보면 재봉틀은 이매방 춤의 동반자였다. 그 덕분에 승무와 살풀이가 우리에게 잘 전해 올 수 있었으니, 흥미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