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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35] 은둔의 땅 진천과 판화가 김준권 - [50] 소년 임금 살인사건과 영월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

상림은내고향 2021. 3. 25. 21:05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35] 은둔의 땅 진천과 판화가 김준권

충북 진천은 은둔자의 땅이다. 19세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진천 땅으로 숨어들었다. 경기도 안성과 맞붙은 백곡은 숨어 살기에 좋았다. 사통팔달 길이 뚫려 있으되 얕은 산속에 숨으면 관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속에서 교도들은 숯을 굽고 옹기를 구웠다. 가마가 쉬는 날이면 교도들은 가마 속에서 성경을 읽고 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대한민국 숯 70%는 진천 숯이고 그중 70%는 백곡 숯이다. 1992년 그 백곡 은둔지에 김준권(60)이 숨어들었다. 김준권은 판화가다.


은둔한 판화가 김준권

/은둔한 판화가 김준권.

 

김준권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60년대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판잣집에 살면서 부모가 돈을 버는 동안 김준권은 그림을 그렸다. 반대를 뿌리치고 홍익대 미술대에 들어갔다. 75학번 미술학도는 1984년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라는 참여작가 전시회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가 압수를 당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리고 1989년 전교조에 가입했다가 해직됐다.

 

 \ 3년 동안 전업 활동가로 인생을 살았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사망사건 걸개그림을 비롯해 웬만한 시위 현장 걸개그림은 다 그가 그렸다. 판화로 찍으면 동료들이 복사를 해서 초대형 걸개그림으로 만들었다. 인생은 화가에서 판화가로 흘러갔다. 소위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시작한 판화가 업이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우리가 거리로 나가는가. 민족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가. 미술로 공동체를 실현할 방법은 따로 있다'. 또 생각했다. '판화라는 장르가 이 엄한 시대 유행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우리 인쇄는 거의가 목판이었다. 팔만대장경도 목판인쇄가 아닌가.' 전쟁과 산업화로 초토화돼 버린 미술적 맥락을 잇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2년 김준권은 사회운동을 떠나 진천 백곡면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가깝되 숨어 살기 딱 좋았다. 천주교도들이 숨어든 이유와 동일했다. 남의 땅 빌려 움막을 짓고 목판을 새겼다. 왼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칼을 놀린 덕분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엄지발가락처럼 넓적하고 커졌다. 그 기형적인 손으로 스쿠터를 몰고서 김준권은 진천 곳곳을 쏘다녔다. 그가 말했다. "세상은 단색이 아니었다. 한국, 정말 컬러풀한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1980년대 날카로운 단색을 버리고 채색 판화를 택했다. 복사꽃 핀 진천 들판을 그렸고 대숲 가득 부는 바람을 그렸다.

 

/花雨-2011 133×93cm 유성목판화 2011년 김준권 작품.

활황이던 1990년대 김준권은 잘나가는 판화가 반열에 올랐다. 중국에서 3년 동안 공부도 했다. 일본 공방에 가서 6개월 동안 일본 판화 우키요에도 공부했다. 결론을 내렸다. "한국적인 판화를 한다."

서양 유성 잉크를 원판에 발라 서양 판화지에 찍어내는 서양식 판화 말고 한지(韓紙)에 수성 먹()으로 찍는 수묵 판화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먹은 번지고 한지도 번졌다. 먹이 종이 속으로 스며들면서 생기는 은근한 효과는 기존 판화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세계였다. 민족공동체와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진천 첩첩산중에서 완결된 것이다.


24
년 전 그가 만든 작품과 지금 작품을 보면 도저히 같은 작가가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여유와 화려함, 너그러움과 관용이 날카로운 비판을 대체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올바르게 돌아갔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천 땅에서 판화가는 여유를 얻었고 날카로움이 무뎌졌으며 직설과 투쟁 대신 은유와 여백을 얻게 되었다.

 

어은마을 은둔자, 송강 정철

351년 전인 1665년 문인(文人) 하나가 죽어서 진천으로 왔다. 호는 송강이고 이름은 정철이다. 정철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가사문학의 선구자요 정치가다. 그는 지금 진천 문백면 어은마을 환희산 기슭에 묻혀 있다. 연유는 이렇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 정철은 정치가였다. 술을 좋아하고 문()에 능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가사들은 대입 시험 필수 암기사항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말 곧게 하는 덕택에 좌천도 여러 번 당했다. 선조 임금이 '항상 이만큼만 부어 마시라'며 내려준 은잔을 정철은 크게 늘려서 마셨다고 한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결국 선조가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 그곳에서 죽었다. 죽어서 묻힌 곳은 선산이 있는 경기도 고양이었다.

 

진천 환희산에 있는 정송강사에는 400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무렵 송강 정철이 경기도 고양에서 이곳 진천으로 이장됐다. 느티나무 왼편으로 정철이 잠든 무덤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박종인 기자

1665년 손자인 정양이 진천현감으로 부임했다. 정양은 성리학 거두 우암 송시열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괴산으로 낙향하던 송시열이 진천을 지날 때 정양이 말했다. "할아버지 묘소에 물이 차서 골치다. 묫자리를 봐주시게." 그때 송시열이 봐준 터가 문백면 환희산 기슭이었다. 그해 정양은 아버지 정종명과 함께 정철을 어은마을로 이장했다. 정철 사당 정송강사가 그때 세워졌다.


정송강사에는 신도비와 후대가 세운 시비가 있다. 신도비 앞에는 400년을 산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산소로 가는 길은 땀을 제법 내야 하는 깔딱고개다. 산소 터는 무식한 사람이 봐도 명당이라 부를 만큼 온종일 양지바르고 아늑하다. 정철이 잠든 곳 이름은 어은(漁隱) 마을이다. 어부가 숨은 땅이다.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숨었으니, 송시열은 정철로 인해 성리학과 노론의 부활을 꿈꿨을지 모를 일이다.


은둔지를 잇는, 농다리와 보탑사

진천에는 농다리가 있다. 고려 말에 세워진 농다리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고종(12131259) 연간에 권신 임연이 고향 마을에 세웠다고 하니 근 800살을 먹은 다리다. 한·일 강제합방과 6·25 전쟁 때 다리가 울어대 주민들이 잠을 못 잤다는 말도 전한다. 다리 한편에 있는 초평저수지는 1958년 만들어졌다. 21세기 들어 농다리에서 호수 주변으로 나무 데크가 깔려 보기 드문 산책로가 생겼다.

 

▲견뎌온 진천 농다리

농다리에서 나와서 시계 방향으로 남진하면 정송강사가 나오고 김유신 탄생지가 나오고 보탑사가 나온다. 정송강사와 나이가 같은 노거수(老巨樹)의 위용에 사람들은 놀란다. 김유신이 진천 사람이라면 또 놀란다. 만뢰산 산중에서 경주 황룡사 구층탑을 재현한 웅장한 보탑사 대웅전을 만나면 다시 놀란다. 순식간에 우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신라로, 신라에서 현대로 시간대를 뒤섞은 여행을 한 것이다. 그게 진천이다.

 

[진천 여행수첩]

 1. 한국목판문화연구소: 김준권 화백 작업 공간. 오는 21() 오후 3시 오픈스튜디오 행사가 예정돼 있다. 작업실 견학, 목판화 시연과 작품 관람 및 판매, 다과회가 준비돼 있다. 주차는 물안뜰체험관 주차장에. 백곡면 사송2 66-1, (070)7644-5592


2.
물안뜰체험관: 참숯찜질방과 숯제품 판매, 민박, 카페테리아, 식당도 있다. 목판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백곡면 백곡로 964www.baekgok.co.kr, (043)536-0411


3.
정송강사: 송강 정철 영정을 모신 사당. 옆에 묘소도 있다. 묘소로 가는 길은 제법 급한 오솔길이다. 송강로 523, (043)532-0878


4.
농다리와 초평호: 농다리 전시관을 지나 주차장 넓다. 다리 건너 초평호 전망대와 하늘다리로 연결되는 데크산책로가 좋다. 농다리로 1032-11, (043)539-3862
5.
김유신 탄생지: 도로변에 공원과 복원한 생가가 있다. 생가 앞 풀밭은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공간이다. 생가 뒤로 산 정상 김유신 태실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김유신길 170-4, (043)539-3840
6. 보탑사: 경주 황룡사 구층탑을 모델로 한 목조 대웅전. 60m에 이르는 목조건물이 압권이다. 진천읍 김유신길 641, (043)533-0206

[36] 인연 찾아 떠난 양평과 민기남-사충성 부부

섬부리 오지 마을엔 작은 기차역 石佛驛이 손님 맞고
어비계곡 물가에는 소박한 부부 인연이 숨어 있어
용문산 사나사에는 진한 전쟁 흔적이 곳곳에…
올곧게 살다 간 한음 이덕형은 목왕리에 잠들어

경기도 양평 지평면에는 망미리(望美里)가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논리와 섬부리와 신대리를 합쳐서 지은 이름이니 오랜 지명은 아니다. 중심 마을은 섬부리다. 섬부리는 '석불리(石佛里)'가 바뀐 지명이다. 예로부터 마을 어딘가에 돌부처가 있다고 했으나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1967
11 15일 마을에 철도역이 생겼다. 이름은 석불역(石佛驛)이다. 이용 주민이 줄어들면서 석불역은 2010년 열차가 서지 않는 무정차역으로 변했다. 첫차를 타고 서울 경동시장으로 가서 야채를 팔던 농민들과 그 돈으로 학교에 다니며 자라난 농민의 아이들이 반대했다.

 

/폐쇄 위기에서 부활한 양평 석불역.

 

2012 2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아비의 아비와 그 아비의 아비들이 소문만 듣고 자랐던 그 돌부처가 망미산 기슭에서 발견된 것이다. 잊혔던 돌부처가 환생한 데 이어 2013 12 28일 원색 페인트칠을 한 장난감 같은 석불역 새 역사가 문을 열었다. 부처와 역이 돌아오더니 하루 네 차례 석불역에 서는 열차에서는 앙증맞은 석불역을 찾는 여행자들이 쏟아졌다. 부처님 가피라고 해도 좋고 주민들 애정이라고 해도 좋고, 관계 당국의 주민 위주 행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땅과 땅 이름과, 땅에 사는 사람들이 맺은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因緣, 어비계곡 민기남과 사충성

민기남은 경기도 가평 설악면 가일리 여자고 사충성은 서울 남자다. 1948년생 동갑이다. 두 사람은 지금 양평 옥천면 용천리 어비계곡에 산다. 어비계곡은 '물고기가 날아다니는(魚飛)' 계곡이다.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남편과 아내를 떠나보낸 두 영혼이 부부가 된 지 24년이다.


어릴 적 민기남은 등산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일부러 산에 간다고? 나는 먹고살려고 나물 캐러 저 험한 산을 헤맸어. 여기가 전쟁터였잖아. 산에 가면 지뢰밭인데 그것도 모르고 막 다녔어. 빨간 지뢰밭 표시판 보면 쓰레받기 삼겠다고 서로 뜯어서 가곤 했지. 그러다 지뢰 터져서 허벅지며 넓적다리 잘라진 애들 많았어. 그런데 그 산을 놀러 간다고? 성렬이 아버지는 저기 바위 옆에서 호랑이를 만났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배 물고 천천히 집으로 도망왔더니 바지에 똥이 한 바가지더라나, 호호호."

 

삶은 둔탁했다. 모진 시련도 없었고 날카로운 행복도 없었다. 이북에서 피란 온 아버지는 나이 오십에 외동딸 민기남을 낳고서 딸이 열세 살 때 하늘로 갔다. 민기남은 엄마 손 잡고 양평장에서 소금이랑 간고등어 사서 집으로 걸어올 때 정도가 행복했다. 남자를 만나 사랑도 해봤고 살림도 꾸려봤지만 삶은 시종일관, 고단했다. 그러다 1992년 서울에서 얼굴 시커먼 남자가 민기남을 찾았다. 남자 이름은 사충성이다.


사충성이 말했다. ", 젊은 날 좀 놀았다. 영등포에서 이름 좀 날렸지. 그때 아내가 죽었다. 세상 별건가 싶어서 검은 시절 청산하고 양평에 사는 친구한테 갔다. 거기에서 이 여자를 만났다. 이 여자 아니면 안 되겠다 싶더라." 훗날 민기남이 말했다. "딱 보니까 몸 함부로 굴려서 얼마 못 살겠더라. 그런 남자 살려내면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여자와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마흔넷에 사랑을 했다. 가일리에서 산 너머 나오는 양평 땅 어비계곡 물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여전히 여자는 지뢰밭에 올라가 나물을 캤다. 남자는 개를 키웠다. 여자는 오가피며 당귀며 몸에 좋은 온갖 것들 캐 와서 가마솥에 펄펄 끓여 병든 남자에게 먹였다.


그러다 1994년 인생이 바뀌었다. 민기남이 말했다. "나물을 다듬고 있는데 등산객 부부가 집에 와서 밥 좀 달란다. 그래서 닭도리탕 드시라 했더니 내 몰골을 빤히 보더라. 머리는 산발에, 먼지로 얼굴은 새카맣게 해서 식칼을 들고 있으니, 나라도 못 믿었겠지." "정말 맛있냐"는 거듭된 물음에 "잡숫고 맛없으면 그냥 가시라"고 답하곤 부부는 닭 한 마리를 잡아서 내놨다.


먹으면서 남자가 웃고, 여자가 웃었다. 그걸로 둔탁했던 삶은 멈췄다. 어느 틈에 주말이면 '닭도리탕' 달라는 사람이 쇄도했다. 사람들이 그저 '민기남집'이라 부르기 시작한 부부네 산중 살림집에서 연일 닭들이 죽어나갔다.

 

남자가 말했다. "젊을 때는 '(주먹) 한 방에' 모든 일을 해결했다. 무책임했다. 내 나이 이제 칠십인데, 절반은 책임 있게 또박또박 살아왔다. 이 여자 덕이다." 봄비 내리는 계곡에서 여자가 숲을 바라봤다. "저 새싹들 봐라. 평생 저 숲을 보고 살았다. 참 지루했었는데, 지금은 사랑스럽다. 다 이 남자 덕이다." 서로가 서로를 덕이라 하니, 과연 인연이다.


임진왜란, 6·25, 사나사(舍那寺)

어린 소녀 민기남이 헤매고 다녔던 지뢰밭은 6·25 전쟁 때 생겨났다. 양평은 전쟁 때 최대 격전지였다. 용문산전투와 지평리전투는 1951년 각각 국군과 미·프 연합군이 거둔 최대 승전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양평에서는 대규모 의병 활동이 벌어졌다. 이후 1907년 일본군은 용문산 기슭에 있는 고찰 사나사(舍那寺)를 의병 본거지로 찍어 불태웠다.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따르면 일본군 토벌 작전에 용문산 일대 많은 사찰과 양평읍 시가지가 전소됐다.

 

▲양평 용문산 기슭에 있는 신라 고찰 사나사(舍那寺).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 6·25전쟁까지 사나사는 여러 전쟁을 겪어야 했다. 봄비에 만물이 푸르고, 절은 초파일을 준비 중이다. /박종인 기자

 

어찌 된 셈인지, 사나사는 전쟁과 인연이 깊다. 사나사는 신라 시대인 923년 창건된 절이다. 고려 때인 1367년 태고왕사 보우가 중건한 이 절은 200년 뒤인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됐다. 그리고 구한말 다시 한 번 일본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나사는 6·25 전쟁 용문산전투에서 세 번째 초토화됐다. 절에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에는 화상 흔적이, 보우를 기리는 원증국사 비와 석탑에는 총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사바세계 만물을 치유하고 중생을 보듬어야 할 대가람에 이리도 흉터가 깊다. 흉터들은 역사가 되었다.


한음 이덕형, 그리고 양평

석불역 남쪽으로 구둔역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마을 산에 군사 아홉 부대가 있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구둔(九屯)이다. 1940년에 문을 연 구둔역은 결국 폐쇄됐지만 등록문화재 46호로 보존 중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몇 장면을 이곳에서 찍기도 했다.


임진왜란 초기 문경새재를 무혈 진군하고 탄금대에서 신립 부대를 궤멸시킨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양평을 휩쓸고 동대문을 통해 한양으로 입성했다. 9개 조선 부대도 소용없었다. 고니시 부대와 경쟁을 벌이던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용인을 거쳐 몇 시간 뒤 남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양평과 용인은 쑥대밭이 됐다. 기록에 따르면, "한양은 텅 비어 있었다". 1933년 일본 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통해 자기네 조상이 통과한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 2호로 지정했다.

 

▲평생을 올곧게 산 한음 이덕형 묘소. 당쟁 와중에 공적을 박탈당해 낙향해서 죽었다. 양평 목왕리에 있는 묘소는 명나라 풍수가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고니시 부대가 진군한 양평에는 이덕형이 살았다. 호는 한음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도 일본도 협상 대상으로 이덕형을 꼽았을 정도로 존경받는 협상가요 합리적인 정치가였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 이덕형은 세 차례 영의정에 올라 전쟁과 정치를 주도했다. 명으로 달려가 원군을 불러온 이도 이덕형이었고 왜군과 단신으로 협상을 한 사람도 이덕형이었다. 선조는 모친상을 당한 이덕형에게 끝까지 귀향을 허락하지 않고 옆에 뒀다.


그런데 광해군 때 이덕형은 당쟁 와중에 모함을 받고 모든 공적을 박탈당하며 양평으로 낙향했다. 낙향 한 달 만에 이덕형은 기력이 쇠하여 죽었다. 백사 이항복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고 그를 기렸다. 1759년 영조는 후손에게 대대손손 제사를 허락하는 '불천위(不遷位·사당에서 위패를 치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를 허용했다. 이덕형은 지금 양평 목왕리에 묻혀 있다. 묫자리는 명나라에서 온 풍수가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묘소 가는 길은 짧되 숨 가쁜 산길이다. 묘소에서는 양평 땅이 한눈에 보인다. 바다에서 이순신이 나라를 살렸다면 이덕형은 더 큰 프레임 속에서 전쟁을 주도했다. 한음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일찌감치 패한 전쟁이었다.

 

카페와 러브호텔만 보이던 양평 땅에 이런 인연이 숨어 있다. 계곡에는 남 보기에 시시껄렁하되 우리네 민초들에겐 소중한 인연이 숨어 있고 산기슭에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감사해야 할 오랜 인연이 잠들어 있다. 석불역에서 천년 고찰 사나사까지, 천지 사방에 귀하지 않은 것 하나 없는 여행이었다.

 

[37] 농민의 땅 고창(高敞)과 보리밭 주인 진영호

고창 들녘에 보리가 익어갑니다

관찰사 이서구, 선운사 미륵불 열다가 날벼락 맞을 뻔
망하고 또 망하고… 14만 평 보리밭 일군 농부 진영호
조병갑 학정에 들고일어난 농민군… 고부까지 진군해
동진강변에는 학정 상징하는 만석보 기념비 서 있고…
 

도통(道通)한 전라감사 이서구

 

실학자 이서구(1754~1825)는 기인이었다. 우의정을 지내고 1793년에 이어 1820년 두 번째로 전라관찰사로 부임한 이서구는 곳곳에 전설을 남겼다.

 

고창 선운사에 있는 마애미륵불. 배꼽에는 미래를 알 수 있는 비결이 있었다고 전한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보고나 받았으면 모르되 이서구는 남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백성들 삶을 눈으로 확인했다. 선정(善政)이 많다 보니 공적비도 많고 전설도 많다. '물은 30장을 내려가고 땅은 30장을 오르리'라고 예언했다는 부안 바다는 새만금 간척지가 되었다. '이 누각 앞으로 화마(火馬)가 다니리'라 예언한 전주 한벽루 앞에는 기차 터널이 뚫렸다.

 

만물에 관심이 많던 이서구인지라, 고창 선운사 마애미륵불을 지나치지 않았다. 미륵불 배꼽 복장에는 세상을 바꿀 비결이 감춰져 있다고 했다. 부임한 지 며칠 만에 이서구가 사다리를 타고 복장 뚜껑을 열고 비결을 펼쳐 보았다. 첫 장을 펼치자 이리 적혀 있었다. '이서구가 열어 본다(이서구개탁·李書九開坼).' 날벼락이 몰아치고 이서구는 비결을 쑤셔 넣고선 회로 봉해버리고 물러났다.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지러운 조선을 어찌 일신해보려는 뜻도 있었을 터다. 더군다나 비결이 있는 곳은 미륵불, 바로 중생을 구원하는 미래불 배꼽이 아닌가. 자그마치 567000만년 뒤에 찾아올 부처다. 그 세월이 하도 길기에 이서구는 복장을 열어 보려다 죽다 살았다. 마애불로 오르는 선운사 산길은 지금, 초록이 눈부시다.


보리의 땅 고창과 진영호

학원농장 주인 진영호.

 

고창 옛 이름은 모양성이다. 모양은 보리 모()에 볕 양()이다. 백제 때는 털 모()자를 썼다. 땅이 척박하다 보니 고창은 옛날부터 보리농사를 지었다. 눈은 더 많았다. 워낙 폭설이 잦아서 사람들은 고창(高敞)이 아니라 설창(雪倉)이라 불렀다. 진영호는 그 고창에서 태어나 지금 고창에 산다. 직업은 농부다. 14만 평짜리 보리밭을 가는 어마어마한 농부다. 농장 이름은 학원농장이다.

 

 함평 대지주 집안에서 시집온 어머니 이학은 꿈이 농장이었다. 1963년 진영호가 중학교 때 이학은 시집이 있는 고창 황무지 6만 평을 샀다. 마을 사람들이 땔감용으로 소나무며 잡목들 베어내는 쓸모없는 돌밭이었다. 50년 만에 6만 평이 14만 평이 되었고, 돌밭은 1급 농경지로 변했다. 사연이 간단하지 않다. 진영호가 말했다.

"
어머니와 영화를 보러 다녔다. 영화라는 게 늘 '자이언트' '에덴의 동쪽'이었다. 하나같이 미국 텍사스 대농장이 배경이었다. 농장주가 되는 게 어머니 꿈이었다." 진영호는 당연히 농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랐고, 농장을 경영하려면 당연히 농경제학과를 가야 하는 줄 알았고,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들어갔다. 주말이면 과 친구들과 고향에 내려와 밭을 갈았다.

1971
년 졸업과 동시에 진영호는 일제 경운기 하나 사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창군 내에 경운기가 10대가 채 없던 때였다. 뽕나무 심고 누에를 쳤다. 당연히 망했다. 터가 너무 넓었고 잠업(蠶業)에 대한 실무적 이해가 없었다. 경운기 고치려면 광주까지 나가야 했다. 그가 말했다. "이론과 실제는 전혀 달랐다."

 

바보 농부 진영호는 1년 반 동안 돈 다 까먹고 대기업 금호그룹에 입사해 20년을 살았다. 이란과 일본에서 상사맨으로 뛰다가 이사를 끝으로 고향으로 복귀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때가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1992년이었다.


황무지가 보리밭이 될 때까지

언덕에는 수박을 심었다. 길 건너 언덕에는 카네이션과 백합 비닐하우스를 차렸다. 수박밭 6만 평을 수확하니 이익보다 인건비가 더 들었다. 망했다. 카네이션 팔아서 벌충하려 했더니 원예시장이 개방되면서 중국산 카네이션이 절반 가격으로 들어왔다. 망했다. 그가 말했다. "손대는 작물마다 망해나갔다. 갖고 왔던 돈은 없어지고 빚만 늘어가더라. 경험 없는 초보 농부가 처음에 농사를 잘한다. 지가 천재라 그런 줄 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다. 다 땅이 주고 하늘이 주는 거다. 내가 그랬다. 자만심 가득한 초짜 농부."

1990
년대 초, 대한민국 농민들이 대부분 그랬다. 농업시장이 개방되고 전통적인 내수시장은 쪼그라들고 있던 때였다. 분기탱천한 다른 농부들이랑 서울 여의도에서 죽창 들고 화염병도 던져봤다. "막다른 길을 가고 있지 않나, 안 될 걸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오기가 나고 용기가 없어서 버릴 수가 없었다."

 

전북 고창 학원농장 보리밭이 누렇다. 봄에는 보리가, 여름에는 해바라기가, 가을에는 메밀꽃이 14만 평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운다. 눈 즐거운 경관 뒤에는 농부들의 피와 땀이 숨어 있다. /박종인 기자

1994년 갈아엎은 수박밭에 보리를 심었다. 이문은 적어도 인건비가 덜 드는 작물이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갔다. 그 사람들이 뿌리고 간 돈이 제법 되었다. 신기했다. 그래서 2003년 보리를 수확한 밭에 콩 대신 메밀을 심어봤다. 무려 20만명이 소금 같은 메밀꽃을 보러 몰려왔다. 진영호가 말했다. "짜증이 났다. 농사에 방해가 될 정도였으니까." 그때 군청 농업진흥과 직원 김가성이 말했다. "진 사장, 이거 축제로 만들자."

그리되었다. 수확을 포기하고 관광으로 발상을 전환하니 짜증이 사라지고 돈이 보이는 게 아닌가. 긴가민가하며 부둥켜안고 있던 카네이션 비닐하우스는 그해 겨울 고창을 뒤덮은 폭설로 100% 전파돼 버렸다. 그가 말했다. "하룻저녁에 전부 사라졌다. 그때 받은 보상금으로 하우스 다 철거하고 빚 갚았다. 폭설이 없었다면 지금도 질질 끌려와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한번 이름이 나고 나니 이듬해 봄 언덕을 뒤덮은 보리밭에 30만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6월에 보리를 베고서 메밀을 뿌렸던 그해 가을, 고창 전역에 교통 체증이 발생해버렸다.

2006
년에는 보리와 메밀 사이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한겨울을 제외한 1 365일 농장 일대는 꽃만큼이나 사람이 몰려들었다. 소위 '경관 농업', 수확보다 미관을 중시하는 농업이 탄생했다.

진영호가 말했다. "쫓겨 쫓겨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내가 봉이 김선달이지. 신기하고 이상했다. 의도해서 기다리지는 않았다. 굳이 내 자랑을 하자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새로운 방법으로 앞날을 꿈꿨다는 정도?"

모든 혁명은 미래를 꿈꾼다. 신세계를 세우려는 파천황(破天荒)을 꿈꾼다. 이서구를 위시해 18~19세기 실학자들이 꿈꿨던 이상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그 꿈이 민초들에게는 전설과 설화로 변했고, 종교에서는 메시아와 미래불로 연결됐다. 뽕나무밭 말아먹고 상사맨으로 뛰던 초보 농사꾼이 수박 말아먹고 카네이션 말아먹고 폭설에 풍비박산 나고 마침내 보리와 메밀로 먹고살게 된 내력도 기실은, 혁명(革命)이다.


동학과 고창, 그리고 만석보

학원농장에서 서쪽으로 10분만 가면 동학혁명 발상지가 나온다. 공원으로 꾸민 이 작은 터에서 농민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죽창을 들었다. 1894 2월 사방에서 몰려든 농민군은 죽창으로 무장해 고부로 북상했다. 고부는 정읍에 있다. 그때 고부 군수는 조병갑이었다. 가렴주구로 익산으로 쫓겨 갔다가 뭐가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돌아와 학정을 펴던 탐관오리였다.

 

정읍 동진강변에 있는 만석보터. 동학혁명을 촉발시켰다.

조병갑은 백성들을 옥에 가두고 돈을 처먹고, 자기 아비 송덕비 건립 비용을 징수했다. 배들평야에 물을 대는 동진강 물을 만석보로 막아버리고 물세를 받아먹기까지 하자 혁명이 터졌다. 고부로 진군한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부숴 쌀 창고를 열었고 만석보를 뚫어 물을 풀었다. 이후 정세는 역사에 기록돼 있다. 청과 일본이 동학군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와 전쟁을 벌였고 조선은 훗날 사라져버렸다. 그 흔적들은 고창과 정읍 곳곳에 남아 있으니, 학원농장 보리밭에 얽힌 사연보다 그 사연은 더 깊고 처연하다. 고부 관아도 사라지고 만석보도 사라졌다. 관아는 학교로 변했고 동진강 변 만석보 자리에는 낡은 말뚝들과 유지비가 서 있다.


전주로 도망갔던 조병갑은 1898년 대한제국 시절 판사로 복귀해 동학 접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006년 당시 정부 고위직이던 그 증손녀는 "우리 (조병갑) 할아버지는 동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김해에는 선정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파천황의 꿈은 사라졌다. 미륵불은 현신하긴 할 것인가. 이서구가 채 못 읽은 비결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38] 조각가 이일호와 운염도와 모도

섬 사이 바다가 뭍이 되더니 몇백 톤짜리 날틀이 뜨고 내리는 비행장이 되었다. 인천 영종도와 용유도 이야기다. 영종대교 아래에 있는 운염도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운염도와 이웃 소운염도, 매도 사이 바다가 메워지더니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20분이면 서울로 가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운염도에서 태어난 서른여섯 살 먹은 사내 양현호가 말했다. "1998년으로 기억한다. 평생 옆 섬도 배를 타야 갈 수 있던 우리가 차를 타고 집 밖을 나갔다. 아버지 입에서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천지개벽한 운염도

평생 배를 몰았던 아버지 양정복은 매도 사람이다. 올해 일흔이다. 1960년 매도가 군부대에 수용되면서 이웃들과 함께 운염도로 집단 이주했다. ''은 작은 돌섬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할아버지는 돛 단 목선을 몰았고 아버지 양정복도 목선을 몰았다. 바지락을 잡았고 굴을 캤고 수많은 물고기를 잡아 아이들을 키웠다. 목선은 철선으로 바뀌었다. 돛은 엔진으로 바뀌었다.

 

바다가 뭍으로 변하고, 뭍은 사막으로 변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영종대교 아래 운염도 갯벌에는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는 낯선 공간이 있다. /박종인 기자

바다가 매립됐다. 바지락은 사라졌다. 굴은 줄어들었다. 어획량은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다. 길 났다고 좋아했던 주민은 모두 떠났다. 섬에는 세 집 남았다. 양정복은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57년 살아온, 섬 아닌 섬을 떠나지도 않을 작정이다. 양정복은 입에 달고 산다. "아이들 다 키웠다. 내 집이 별장이고 낙원이다." 늙은 어부의 집으로 가려면 길이 험하다. 매립 공사가 진행 중인 다리 아래 황톳길을 뚫고 한참을 가야 한다. 험하되, 갈 가치가 있다.


어부 양정복의 집

다리 아래에 길 두 줄기가 평행으로 나 있다. 다리 왼쪽으로는 황량한 칠면초와 함초 초원이 펼쳐져 있다. 저어새 같은 희귀조들이 그 밭에서 목격된다. 길 끝 초원 한가운데에 원두막이 서 있다. 벽 없는 집, 기둥과 지붕만 있는 집이다. 낭만적이며 고독하다. 집이 보일 무렵 길이 오른쪽으로 비켜 나가고 그 길 끝에 어부가 사는 집이 나온다. 집은 누렁이와 뚱보와 그 친구, 이렇게 개 세 마리가 지킨다.

 

갯벌 저편 벽 없는 집과 청년들.

 

갯벌은 호화롭다. 누워 있는 목선, 선착장으로 난 작은 돌길과 그 끝에 놓인 신발 한 켤레, 그 옆에 서 있는 깡마른 나목 숲이 보인다. 나목 숲은 잡은 물고기를 꿰어놓고 말리는 덕장이다. 따가운 바다 햇볕에 풍경이 녹는다. 트럭 오가는 황톳길 끝에 이런 비현실적 풍경이 있다니.

그 풍경에 홀린 외지인들이 어부네 집을 제 집처럼 휘젓는 바람에 속이 상할 때도 있다. 덕장 앞에서 포즈를 잡으라고 머슴 부리듯 구는 작가님들, 가재도구를 이리저리 맘대로 옮겨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가님들이 얄밉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촬영을 다 마치고서 이렇게 묻는 것이다. "갯벌이 어디예요?" 이 비현실적 풍경마저 시시하게 만드는 초현실적 공간이 운염도에 숨어 있다는 말이다.


사막으로 변한 갯벌

뭍으로 변한 갯벌이 말라갔다. 꾸들꾸들해진 갯벌을 붉은 함초와 칠면초가 덮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도록 말라만 가던 갯벌이 터지기 시작했다. 가뭄에 갈라졌다가 해갈되면서 원상복귀하는 논밭 정도가 아니었다. 갈라진 조각 형상 위로 비가 퍼붓고 밀물에 물이 스며들면서 담금질을 당한 단단한 사막이 되어버렸다.

사진가들은 세상 좋은 풍경은 귀신처럼 찾아낸다. 운염도 사막에도 어느덧 육중한 카메라로 무장한 무리가 나타났다. 어부의 아들은 "주중에는 하루 서너 명, 주말에는 말도 못 하게 많이 와서 길을 묻는다"고 했다.

운염도 사막은 영종도로 나가는 일방통행 둑길 너머에 있다. 차는 중간에 있는 갈래길에 대야 한다. 물이 덜 빠진 갯벌에는 미니어처 세상이 펼쳐져 있다. 화성 표면 같기도 하고 타클라마칸 사막 같기도 하다. 물길은 사막에 난 외길 도로처럼 보인다.

쫙쫙 갈라진 건조 지대는 낯설고 아름답다. 회색 혹은 고동색 혹은 소금이 말라붙은 흰색 땅에 푸르고 붉은 염초들이 생명을 잇고 있다. 흐린 날 운염도와 매도와 영종도 산등성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곳은 지구가 아니다.


풍경에 취했던 조각가 이일호

조각가 이일호.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신도로 간다. 신도는 믿을 신()에 섬 도(). 주민들은 신실한 섬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신도와 시도와 모도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영종도 군부대에서 활쏘기 훈련을 할 때 과녁으로 삼았다고 시도(矢島), 그물을 걷으면 물고기보다 띠풀이 많았다고 해서 띠염이라 불리다 모도(茅島)가 됐다. 시도에서 모도를 건너는 다리 왼편에는 달려가는 청년과 앉아 있는 소녀 조각상이 있다. 조각을 한 사람은 이일호(70).

이일호는 중견 조각가다. 죽음과 삶, ()을 초현실주의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가다. 그가 말했다. "풍경에 취하면 예술을 하지 못한다. 창작을 하려면 멋대가리 없는 풍경 속에 살아야 하는데, 실수였다."

이일호, 보통 사람이 아니다. 회화, 조각, 음악, 글 따위 온갖 분야에서 끼를 발산하는 예인이다. 전인권이 부른 '맴도는 얼굴'(원제는 '헛사랑'인데 무슨 그런 불손한 사랑이 다 있냐고 금지곡이 됐었다)을 지었고 영화 시나리오도 만들었고 글도 쓰는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말은 유치한데 작품은 천재적"이라고 한다.

2003
년 서울에 살던 이일호는 친구 초청에 모도 옆 장봉도에 갔다가 모도에 반했다. 산허리를 구불구불 넘어가야 나오는 배미꾸미 해변 황량한 갈대밭에 반했다. 남들이 보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땅이었지만 그 황량한 바다가 좋았다. 땅을 사고 이듬해 작업실을 차렸다. 만든 작품은 갈대밭 옆 모래밭에 아무렇게나 세워뒀다. 그 무렵 TV드라마 '풀하우스' 세트장이 인근에 건설되고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어떻게 찾아오는지, 세트장을 구경 온 사람들이 작업실까지 찾아와서 작업실을 기웃대고 작품들을 기웃댔다. 작은 섬 시도가 외지인으로 북적이고 작업실은 필수 코스에 포함됐다.


예술가가 떠난 섬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가족을 먹여 살린 형을 따라, 보령에서 군산으로, 평택으로 옮겨다니며 큰 사내였다. 이일호는 슬그머니 북한산 자락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모도 작업실은 주변 권유로 공원으로 만들었다. 예술가가 떠난 해변에 예술이 흔적으로 남았다.

 

▲배미꾸미 조각공원에 있는 이일호의 초현실주의 작품 '버드나무'.

이일호가 말했다. "풍경에 홀려서 눌러앉았는데, 그 풍경이 나를 떠나보냈다. 어쩔 수 있나. 바다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바다는 공()이다. 그걸 내가 좋아했으니." 예술가는 속이 상했지만 사람들은 즐겁다. 영화감독 김기덕이 찾아와 이곳에서 영화 '시간'(2006)을 찍은 이후 외국 관광객이 많다. 다만 에로티시즘을 담은 작품을 보며 감상 대신 희화화하는 사람들이 아쉽다고 했다. 배미꾸미 조각공원 비빔밥은 일품이다. 해초와 야채를 버무리고 땅두릅과 구기자, 질경이와 소라, 도토리묵과 파래를 반찬으로 낸다. 아침 노을과 쏟아지는 별 아래 묵는 펜션도 있다. 예술가는 떠났지만, 이 작은 섬 모도에 기대 않던 풍경은 남아 있다.


조각공원 길목 버스정류장에는 불망비(不忘碑)가 서 있다. 조선 말 경기도 암행어사 영재 이건창(李建昌·1852~1898)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건창은 모도 주민을 수탈하던 관리들을 처단했다. 그 앞에는 작은 논이 있다. 1987년 이곳 소녀로부터 "개구리 소리를 듣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서 이곳을 찾은 당시 내무부 장관 노태우가 제방을 세우고 만들어준 논이다. 신도와 시도와 모도는 '삼형제 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로 연결돼 있다.

시인 정현종이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전문)

모든 섬은 외롭다. 운염도도 모도도 외롭다. 쨍쨍한 여름날, 섬으로 틈입해본다. 비현실 속으로 숨어 본다.

 

(39) 궁장 현중순과 천년 역사가 공존하는 연천

궁수(弓手)에서 궁장(弓匠)으로

올해 쉰다섯 먹은 현중순은 정미소 주인이다. 경기도 연천 전곡에 산다. 정미소는 가업이다. 할아버지도 정미소를 했고 아버지도 정미소를 했다. 이북 땅이던 중면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직접 물레방아를 만들어 방앗간을 했다. 전쟁이 나고 남쪽으로 몇십㎞ 피란 와서도 정미소를 열었다. 시간이 나면 활을 만들어 산에서 꿩이며 돼지를 사냥하며 놀았다. 그 손자 현중순이 정미소를 물려받았다.

손자는 "쌀가마 옮길 힘도 기를 겸, 남에게 맞기 싫고 담력도 기를 겸" 합기도를 배웠다. '아무도 몰래 공중 부양도 해 본다'는 공인 4단이다. 쌀가마 짊어지다 허리 디스크가 나가서 헤매고 있을 때, 합기도 도반들 권유로 국궁을 배웠다. 나무에 물소 뿔을 덧대 만든 각궁(角弓)을 배웠다. 공인 5단이다.

그런데 "각궁이 다 좋은데 너무 비싸고 쉽게 망가지더라"고 했다. 비를 맞으면 접착제로 쓴 아교가 녹아내렸고, 잘못 다루면 활이 부러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손재주가 근질거렸다. 2003년 현중순은 자기 손으로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 다섯 트럭을 이러저러하게 허비한 끝에, 2016년 현중순의 신풍정미소는 대한민국 실전 궁사들 성지로 변했다. 현중순은 궁수요 목궁장(木弓匠)이다.


기씨의 꿈

결혼기념일을 사흘 앞둔 2015 2 28, 인천 강화도에서 사업을 하는 기남용(64)은 꿈을 꾸었다. "공장장이 나더러 짐승 한 마리 키우시라고 했다. 그러마 했더니 커다랗고 하얀 짐승을 또 주면서 '병든 놈 하나 더 키우시라'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기남용은 5000원짜리 로또 복권 두 장을 사서 지갑에 넣고는 잊어버렸다. 눈 내린 결혼기념일 아침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서 연천에 있는 조상 할머니 묘 터로 찾아갔다. 경운기가 뚫어놓은 길 따라 덤불까지 갔더니 길섶 눈틈으로 하얀 돌이 나와 있었다. 작대기로 파보니 무덤 앞에 흔히 있는 석양(石羊)이 아닌가. 온전한 석양 한 마리와 부서진 석양 한 마리를 찾았고, 달려온 동생이 한 마리 더 찾았다. 텅빈 구릉 주소는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 145. 당첨되지 못한 로또 복권을 꺼내며 기남용이 말했다. "지금이야 텅 빈 구릉이지만 이곳은 우리 할머니, 고려 말 원나라로 시집갔던 기황후(奇皇后)가 묻힌 터다."


왕들의 사냥터, 연천

연천은 번화한 도시였다. 고려 수도 개경에서 직선거리가 서울-일산 신도시보다 가까운 80리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때 화신백화점 분점도 있었다. 분단만 아니었다면 연천은 지금도 번성했을지도 모른다.

임진강과 용암이 만든 험한 산세는 연천을 군사 지대로 만들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만든 요새들을 빼앗으며 혈투를 벌였다. 분단 현실 속 연천 노변 풍경은 지금도 살벌하다.

군사 문화는 효율적이다. 적진(敵陣)을 점령하면 무기든 진지든 성곽이든 최대한 재활용한다.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처럼 지금 남아 있는 성터에는 시대별로 유적과 유물이 뒤섞여서 튀어나온다. 평화가 오면 군사 요충지는 어김없이 관광 명소로 변해서, 잔디 뗏장을 입힌 옛 성터는 사시사철 나들이객이 찾아온다.

사냥꾼의 땅이기도 했다. 연천에는 활쏘기가 흔했다. 조선조 왕실 사냥터도 연천에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도 활쏘기 대회가 열리곤 했다. 어릴 적 현중순도 수수깡에 못 박고 군용 통신전선인 삐삐선으로 활줄 만들어 활쏘기를 하고 놀았다. 맹수들이 사라지고 수렵 문화도 사라졌다. 활꾼도 사라졌다.


경주에 묻히지 못한 경순왕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번지에는 경순왕릉이 있다. 21세기 들어서 민간인 출입이 자유롭게 된 땅이다. 경순왕은 고려에 나라를 바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그래서 시호도 '공손하게 따른(敬順)' 왕이다. 그가 연천에 묻혀 있다. 고려 태조 왕건보다 35년 더 산 경순왕은 서기 978년 개경에서 죽었다. 신라 유민들이 들고 일어날까 걱정했던 고려 왕실은 '왕릉은 수도에서 100리 밖을 넘지 못한다'는 규정을 꺼내 귀향을 막았다. 그게 경순왕이 고랑포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연천에 묻힌 이유였다. 왕릉은 이후 새까맣게 잊혔다가 1747년 후손들이 찾아냈다. 그때 영조 임금이 "제사를 지내게 해달라"는 후손들 청원을 수용해 비석을 세웠다.

, 비석을 본다. 비석에 농축된 이 땅 역사를 본다. 무덤 주인공은 신라 임금이요, 왕릉은 고려 무덤이다. 비석은 조선 때 세웠다. 그리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 6개가 선명하다. 뒤를 돌아보면 묘 앞 너른 터에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이 작은 비석이 여행객들에게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읽어보시라"고 책갈피를 활짝 펼쳐놓고 있지 않은가.


궁장, 기황후 그리고 용암

활꾼 현중순은 연천 산하를 헤매며 목궁을 연구했다. 물푸레나무도 써보고 느릅나무도 써보고 구지뽕나무도 써봤다. 태워도 봤고 삶아도 봤고 땅에 1년 묻어도 봤다. 두 종류 나무를 덧붙여도 봤다.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활꾼들을 찾아가 노하우도 배웠다. 활을 알아야 활을 만드니, 궁술을 연마했다.

정미소에 있는 작업실에는 현중순이 만든 목궁들이 전시돼 있다. 각궁에 비해 길이도 길고 직선에 가깝다. 그가 말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병사들에게 근거리 사격술과 속사법이 보급됐다. 이동하는 목표를 타격하는 궁법도 보급됐다. 그 기본은 각궁이 아니라 목궁이다." 명상을 하는 궁도가 아니라 실전 병술이라는 말이다.

마당 한쪽에 있는 궁터에서 그가 활을 쏘았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 나온 것처럼, 활을 30도 비틀고 화살집에서 순식간에 화살을 꺼내더니 그보다 더 빨리 활을 쏘아댔다. 각궁처럼 입술에 활줄을 대고 쏘는 지중해식이 아니라 눈꼬리까지 손을 올려 쏘는 몽골식 사법(射法)이다. "몇 배는 더 정확하고 몇 배는 더 파괴적이다"라고 그가 말했다. 함께 시범을 보인 아들 승환은 "화살 종류에 따라서 멧돼지는 그냥 관통한다"고 했다. 대위 예편을 앞둔 승환 또한 육군참모총장기 전국궁도대회에서 우승한 궁사다. 아들과 사라졌던 활 문화, 무사 문화는 일단 이 정미소 주인에 이르러 부활 조짐이 보인다.

그렇다면 기황후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꿈을 꾼 후손 기남용이 말했다. "할머니 고향이 행주다. 유목민인 원나라에는 죽으면 고향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할머니도 아마 고향에서 죽게 해달라고 청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향으로 가던 길에 죽었거나 아니면 변고가 있었거나."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기황후릉터는 앞에 '()'자가 붙어 있다. '~카더라'는 뜻이다. 연천문화원 향토사료연구위원장 이준용이 말했다. "기남용이 발견한 석양 셋과 기존에 발굴한 석인(石人)들은 재질은 물론 양식도 원나라 형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기황후 묘와 석인, 석양, 석물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제 석물만 찾아내면 이 '()'자를 뗄 수 있다." 석양과 석물은 지금 연천문화원에 옮겨져 있다. M1 소총으로 경순왕릉 비석보다 더 참혹하게 깨뜨려놓은 비석 하나도 볼 수 있다.
*
궁사가 찾아낸 목궁과 후손의 꿈이 찾아낸 할머니 무덤과 어린이 놀이터가 된 왕릉은 모두 연천 땅에 있다. 아득한 태초에 연천은 용암 지대였다. 용암은 모든 역사를 끌어안는다. 연천 북동쪽 재인폭포는 용암이 만든 미학의 극치다. 폭포수가 말라 있어도 즐겁다. 오각, 육각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주상절리(柱狀節理) 기둥들은 땅 위로 솟은 용암이 굳어서 생긴 무늬들이다. 그 용암이 땅을 녹이며 흘러간 흔적이 한탄강이다. 평화와 전쟁과 긴장과 나른함이 혼재된, 한탄강이 연천에 흐른다. 궁장의 꿈, 기씨 후손의 꿈도 함께 흐른다.

 

[연천 여행수첩]
1.
경순왕릉: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오전 9시 개방. 반드시 비석을 살펴보라.
2.
호로고루: 고구려 군사요새 터. 경순왕릉에서 가깝다. 임진강 너머 풍경도 좋다.
3.
전 기황후릉터: 연천읍 상리 산 145. 텅 빈 구릉.
4.
연천문화원: 마당과 로비에 전시된 석물들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라. (031)834-2350,cafe.daum.net/ycclove
5.
재인폭포: 권력과 탐욕에 얽힌 상반된 전설 이야기를 들어보라.
6.
국궁문화연구회(신풍정미소): 목궁을 포함해 국궁에 관심이 있다면 필수. 판매는 하지 않는다. 연천군 전곡읍 은대로2. 현중순 궁장 이메일은 8322729@naver.com

 

 [40] 김신조가 지나간 파주와 초리골 나무꾼 우성제

전쟁 상처 덮으며 江이 흐릅니다

동파리에서 초리골까지… 김신조 부대 침입 루트 
나무꾼 4형제 붙잡혔던 초리골은 생태관광지로 변해 
초평도 보이는 동파리는 체험마을 해마루촌으로 변신 
민통선 안쪽 '동의보감' 허준 묘도 일반인에 개방

장파리 이야기

 

조용필은 가수 레이 찰스와 밴드 벤처스에 빠져 살았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교육자 집안이 반대했다. 1968년 서울 경동고 졸업과 함께 조용필은 경기도 파주 파평면 장파리로 가출해버렸다. 장파리 미군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했다. 주로 흑인 전용 클럽 블루문홀에서 했다. 백인 클럽 라스트찬스에서도 했다. 김태화, 윤항기도 라스트찬스에서 음악을 했다. 장파리에 있던 클럽은 메트로홀, 럭키바, 나이트클럽, DMZ홀과 라스트찬스와 블루문홀 여섯 군데였다.


장파리에는 미군이 뿌린 '딸라'가 흘러넘쳤다. 미군은 장파리에 재건학교를 지어줬다. 시외버스 종점도 장파리에 있었고 이발소와 다방과 극장과 정미소도 외지인들 덕에 성업을 했다. 쌀 한 가마가 3500원 할 때, 가수 이미자는 장마루극장에서 세 곡을 부르고 6만원을 개런티로 받았다. 세월이 흘러 조용필은 가왕(歌王)에 등극했다. 미군은 장파리를 떠났다. 블루문홀은 사라졌다. 라스트찬스는 카페로 바뀌었다. 장파리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한다.


감악산 백비(白碑)

/감악산 정상에 있는 백비.

 

1951 4 23일 영국 글로스터 대대는 감악산 설마리에서 밀려오는 중공군과 혈투를 벌였다. 사방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글로스터 대대는 1개 중대를 제외한 530여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전술적으로는 패배였지만, 사흘 동안 중공군 공격을 지연시키는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그들이 지켜낸 감악산 꼭대기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법륜사를 스치며 오르는 등산길은 밑도 끝도 없이 오르기만 하는 행군 수준 산길이다. 꼭대기에는 헬기 착륙장과 군부대가 서 있다. 거기에 백비(白碑)가 있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 비석이라고도 하고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고도 한다. 하지만 비문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어서 그저 백비라 한다. 서쪽 임진강변 장파리부터 동쪽에 솟은 감악산까지, 파주 역사에서 전쟁 흔적을 지우면 파주는 이해 불가능이다.


김신조와 초리골과 나무꾼 우성제

장파리에서 도로로는 11, 직선거리로는 5㎞가 못 미치는 임진강변에 고랑포 나루가 있다. 삼국이 임진강변을 쟁패하던 시대, 고구려는 고랑포 위 절벽에 호로고루 성채를 건설했다. 서기 978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언덕배기에 묻혔다. 1968 1 19일 북한 특수부대원 32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얼어붙은 고랑포 여울목을 건넜다. 속칭 김신조 부대다. 훗날 군이 파악하기로, 기관단총 31, 실탄 9300, 권총 31, 대전차 수류탄 252발과 방어용 수류탄 252, 단검 31정으로 중무장한 특수부대였다.

부대는 고랑포를 건너 파주 법원읍 법원리 삼봉산에서 1차 숙영을 했다. 동지섣달 산속 기온은 영하 15. 날고 기는 특수부대가, 응달에 은폐한다는 원칙을 깨버리고 따뜻한 바위 앞에 짐을 풀었다. 첫 번째 실수였다. 그날 오후 1시 산 아래 단양 우씨 집성촌 초리골에 살던 우씨 형제가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올라왔다. 네 명이나 올라왔다. 이름은 각각 희제, 경제, 철제, 성제였다. 6, 8촌 사이였던 네 형제는 희제가 서른 살, 막내 성제는 스무 살이었다. 우성제가 말했다.

 

/김신조 부대와 만난 나무꾼 우성제.

 

"겨울에 해 먹을 게 뭐 있어. 점심 먹고 낫이랑 지게 메고 땔감 구하러 갔지. 나랑 쌍둥이처럼 같이 자란 6촌 철제 형이랑 갔는데, 앞에 방한모자를 쓴 남자 셋이 앉아 있는 거라. , 산 너머 갈봉리 애들이 초리골 나무 훔치러 왔구나. 나중에 뺏어야겠다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쳤어." 우성제가 산 아래 20~30m 내려가 나무를 베고 있는데, 위에서 철제 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손짓에 올라갔더니, 군인 너덧이 서 있는 거라. 아이쿠, 죽었구나 했지. 소위, 하사, 사병 계급을 붙여놨는데 딱 봐도 국군이 아니야. 개머리판 없는 AK소총에 권총에 수류탄에 지도에 주렁주렁 매달고…." 소위가 성제에게 물었다.


소위: 너희들 네 명인데 둘은 어딨나.
성제: 내려갔다. (도망가려고) 가서 데려오겠다.

소위: 됐다. 너는 학교 어디까지 나왔나.
성제: (형을 보며) 국민학교 2학년 나왔다(사실은 중학교 졸업했다).

소위: (철제에게) 너는?
철제: (성제를 보며 우물쭈물) 국민학교 졸업했다(사실은 중학교 졸업했다).

소위: 서울은 가봤나.
철제: 창경원 가봤다.

소위: 청와대는?
철제: 그게 뭐하는 곳인가.


척하면 척하는 쌍둥이 같은 형제들이었다. "똑똑한 청년들"이라며 숙영지까지 같이 가자는 소위에게 형제가 대답했다. "이 나무 장에 갖다 팔아야 내일 아침에 부모님 보리죽이라도 드신다. 여기서 얘기하면 안 될까." 소총으로 툭툭 치며 소위가 말했다. "거기 낫 내려놓고 따라와라." 가보니 공비들이 바글바글했다. 공비들은 사발엿과 오징어를 줬다. 이름 안 적힌 담배와 이름 없는 캐러멜도 줬다.

 

김신조 부대한테 잡혀 죽을 뻔했던 우씨네 집성촌 초리골 마을. 우씨들은 초리골을 생태 친화적 마을로 변신시켰다.

"우리가 누군가."


"26
사단에서 훈련 나왔지? 수고 많다. 우리 집 가서 따뜻한 국이라도?"

"
우리는 지하혁명당 소속이다. 일 끝내고 이북으로 복귀하는 길이다."

"
? 어떻게 북에서 올 수 있나."

"
믿어라. 우리 당원이 경기도에 5만 명, 의정부에만 5000명이다. 6개월 뒤에 남조선이 해방된다. 김일성 태양님 햇빛 받아 거지 없이 다 잘산다. 지상낙원이 온다." 성제가 맞장구를 쳤다. ", 우리는 죽지 못해 사는데. 벼 열 가마 거두면 자본가들이 세금 가져가 끼니도 못 때운다. 그런 나라, 우리도 살고 싶네." 소위가 유식한 척 말했다. "그게 바로 현물세라는 거다."

우성제가 말했다. "나무하러 갔으니, 옷도 구멍 뚫린 작업복이었고 시골에서 세수는 무슨, 머리도 안 감고 갔으니 우리 말을 다 믿더라." 그때 집에 내려갔던 맏형 희제와 경제가 도로 올라왔다. ", 너희 토끼 잡냐." 네 형제 몽땅 잡혔다.

밤이 왔다. 투표에 의해 형제들 운명이 결정됐다. 딱 반반씩 살리고 죽이자고 나왔다. 대장이 살린다고 결정했다. "땅이 얼어붙어서 죽여도 묻을 수 없다"는 의견이 이겼다. 우성제가 말했다. "선물이라면서 조잡한 일제 시계를 줬다. 물론 나무할 때는 당연히 차지 않았지만, 우리는 날짜랑 요일이 나오는 세이코 시계가 있었는데." 그러고 집으로 내려와 종갓집 어르신 우종하의 집에서 전화로 신고하고 파출소로 가니 오후 9시였다. 척척 죽이 맞는 형제들 기지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공비들은 '해병대도 이해 못 할 초고속으로' 능선을 질주해 서울로 들어가 난리를 피웠다.

초리골은 이후 3년 동안 군부대가 주둔했다. 단양 우씨들은 초리골을 알뜰하게 지켰다. 종갓집 장손 우능제는 대학을 나와 초리골을 생태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20년 전 그가 말했다. "여기는 2층 이상으로는 개발 금지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리되었다. 공비들 침투로는 왕복 6시간짜리 등산로로 변했다. 땔감으로 벌거벗었던 산은 온갖 나무들이 밀림을 이뤘다. 풀이 무성해 조금만 걸어도 풀독이 올랐던 계곡 아래 풀밭에는 아담한 펜션과 식당이 군데군데 들어섰다. 목사가 된 김신조는 가끔 초리골에 찾아와 우씨들과 만난다. 막내 나무꾼 우성제는 이후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김신조와 동파리와 조봉연

임진강에는 좁은 여울이 두 군데 있다. 김신조 부대가 원래 건너려던 여울은 동파리 초평도 여울이었다. 동파리에 사는 조봉연(59)이 말했다. "물이 빠질 때면 초평도 여울이 아주 거세다. 그래서 고랑포로 갔다."

조봉연이 사는 동파리는 동녘 동()에 언덕 파() 자를 쓴다. 뜻은 아름다운데 발음이 억센지라, 훗날 이장이 된 조봉연은 마을을 해마루촌으로 개명했다. 해마루촌은 민통선 북쪽에 있다. 출입하려면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공간이다. 정식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다. 김신조 부대는 마을에서 30분 거리 철책을 뚫고 고랑포로 틈입했다.

조봉연 집안은 대대로 진남면 합포리에 살았다. 해방이 되고 진남면은 이북 땅이 됐다. 전쟁이 끝나고도 진남면은 민통선으로 묶였다. 1952 11월 미군에 의해 주민이 남쪽으로 소개된 뒤 주민들은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인민군 탱크부대가 주둔했던 동파리는 지뢰밭이 됐고 합포리는 미군 사격장이 됐다. 조봉연의 아버지 조남희는 고향에서 죽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

 

구글 어스로 본 해마루촌 모습. 높은음자리표와 닮았다
.

1997년 조남희가 하늘로 갔다. 1년 뒤 파주시는 동파리 지뢰를 제거하고 마을을 건설하겠다고 결정했다. 복잡한 행정절차와 민·관·군 갈등을 거쳐 2003년 동파리 마을이 재건됐다. 인터넷 구글 어스에서 보니, 동파리 구조가 음악 높은음자리 기호와 똑같았다. 지금 마을 중앙통 이름도 '높은음자리길'이다.


조봉연은 그 첫 입주자다. "고향이 뭐라고, 아버지가 왜 그리 고향 고향 했는지 내가 알아보려고" 입주했다고 했다. 진남면에 연고를 둔 실향민 출신에 민통선 안에 농경지가 있을 것 따위 조건을 갖춘 60가구가 입주했다. 실제로 어릴 적 동파리에 살던 노인 4명도 포함됐다. 조봉연이 말했다. "농사지으러 들어와 보니 군에 땅이 다 수용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 때 농촌체험마을을 만들고, 이명박 정부 때 생태체험마을을 만들었다. 먹고살려고." 조봉연은 마을에 이로운 일이면 서울로 나가서 데모도 하고 국방부에 시청이며 도청까지 들락거렸다. 연천 경순왕릉도 민통선에서 제외시키고 해마루촌 출입 규정도 완화시켰다. "간첩 나오면 신고도 못 한다"며 인터넷과 전화선도 끌어들였다.

 

▲파주 진남면 민통선 안에 있는 허준 부부 묘. 왼쪽이 허준 묘고 위쪽은 모친 묘다.

수십 년 사람 손 안 탄 땅이니 식물부터 동물까지 온갖 생태가 보존돼 있다. 민통선을 넘는다는 호기심도 방문욕을 부른다. 남북관계가 좋으면 마을은 붐비고 나쁘면 한가하다. 해마루촌 부근에 있는 허준 묘가 개방되면서 방문객이 더 늘었다. 1993년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가 허준 후손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찾아낸 묘소다. 진남면 하포리 언덕에서 '陽平' '聖功臣' ''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진 동강 난 비석이 나왔다. 허준 문중 기록과 일치하는 비석과 묘소 지형이었다.

 

2008년 해마루촌 주민들 요청에 의해 허준 묘 또한 관광 코스로 개방됐다. 마을에서 2㎞ 떨어진 덕진산성 또한 답사객이 잦다. 백제가 만들었고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사용했으며 6·25 이후 최근까지 국군 벙커가 있던 성채다.

 

▲파주 진남면 덕진산성에서 바라본 초평도와 임진강 풍경. 수십년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순수한 자연이 보존돼 있다. /박종인 기자

덕진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초평도 풍경은 근사하다. 농사도 짓지 않는 무공해 밀림과 초원이 펼쳐져 있다. 동파리와 초평도 사이 여울은 6·25 때 피란민들이 건넜던 길이요, 공비들이 포기했던 루트다.

아득한 옛날부터 전쟁터였던 곳들이 사람 살기 불편한 곳이 됐는가 하면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잉태하기도 했다. 무장공비 부대에 뚫렸던 진격 루트들은 하나같이 관광지로 변신했다. 이 어찌 기이하지 않다 할 수 있는가. 하여, 여기 조선일보에 글과 사진으로 그 기이한 파주 역사를 기록해둔다.

 

[파주 여행수첩]

1. 초리골: 김신조 루트(왕복 6시간) 등산로초호쉼터는 잔디구장과 카페, 방갈로, 회의실이 있는 종합시설이다. 단체만 받는다. 1 66000원에 숙박, 바비큐, 조식, , 음료 무한www.chohopark.com, 법원읍 초리골길 134, (031)958-0029 초리골펜션은 초계탕, 막국수, 펜션 운영www.초리골.kr, (031)958-5295.
2.
해마루촌: 40인 이상 단체에 한해 생태 및 농촌 체험 프로그램 운영. 예약 필수.

 

 [41] 문학의 땅 장흥과 시인 이대흠

탐진강에서 득량만으로 흐르는 문학의 향기

작가 이청준, 한승원 잉태한 문학의 땅 장흥
동학 농민군이 숨어들고 신문물 일찌감치 수용한 너그러운 땅
득량만, 천관산과 들녘에는 생명이 넘치고
폐쇄된 장흥교도소는 문학적 상상력 불러
그 모든 풍경과 삶이 문인들 작품에 녹아 있다


이대흠은 시인이다. 전라남도 장흥 사람이다.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지 22년 되었다.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같은 시집과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을 썼다. 올해 마흔아홉 살이다.

몸속에 끼가 득실거리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대흠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며 담배를 즐겼다. 자취집으로 찾아오는 담임선생에게 "예고하고 오시라"며 술을 먹고 시를 썼다. 결국 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얄구지게 가난하다. 시인 지망생들도 가난을 각오하고 시인이 되려고 한다. 시인이 된 이후 이대흠 또한 대처(大處) 광주로 나가서 카페도 운영하고 이러구러 살다가 고향 장흥으로 돌아와 산다. 왜 장흥인가, 물으니 그가 이리 대답한다. "장흥은 문화의 수도다."


득량만으로 숨어든 농민군

장흥 앞바다 득량만은 식량()을 얻는() 바다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보성에 있는 군량창고를 탈환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득량만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다. 보성 차밭도 벌교 꼬막도 모두 득량만에서 생명을 보충한다. 낙지는 어찌나 많은지, 장흥군청 공무원 전희석은 "뻘에 기어 다니는 낙지가 눈에 보일 정도라, 뜰채만 있으면 낙지 잡는다"고 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장흥 산하를 뒤집어놓는 바람에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흥 바다와 산과 들에는 먹거리가 흘러넘친다. 시인 이대흠은 "맛을 찾는 지주(地主)가 많고, 교통이 발달해 먹는 문화가 더 발달했다"고 말했다.

 

득량만에 있는 남포 마을 포구에 물이 밀려들었다. 마침 떠오르는 햇살에 소등섬이 반짝이고 섬으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은 자취를 감췄다. 이청준이 소설 '축제'를 쓰고 임권택이 영화 '축제'를 찍은 곳이다. /박종인 기자

1895년 수많은 동학꾼들이 득량만으로 틈입했다. 1894년 갑오년 서울로 진격하던 농민군은 세 줄기로 남하하는 일본군에게 패해 후퇴했다. 득량만까지 쫓긴 농민군은 장흥에서 결사항전을 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이후 동학꾼들은 득량만 일대 섬으로 숨어들었다.


동학꾼이 숨어든 그 섬과 바다에 개신교가 전파됐다. 장흥에는 100년 넘은 교회가 네 군데다. 지금이야 보성과 강진에 땅을 나눠주고 인구도 적지만, 장흥은 20세기 초까지 남도 중심지였다. 조선 말 군()과 행정기관이 장흥에 밀집해 부패를 일삼았다. 동학 전에 이미 전임 군수가 백성들과 패를 지어 관에 맞섰을 정도였다. 거기에 동학과 기독교 사상이 전파됐다. 이대흠은 말한다. "그 중심지에 파고든 개혁 사상과 신문물은 장흥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정신적인 풍요와 물질적인 풍요가 합쳐져 지금 장흥이 되었다.


한승원과 한강, 이청준

 21세기 장흥은 문학의 땅이다. 5만 명 되지 않는 장흥 주민 가운데 등단한 소설가, 시인이 100명이 넘는다. 소설가 한승원이 쓴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일찌감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승원은 장흥 사람이다. 동학꾼이 살았던 득량만 덕도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문학가가 된 사내다. 딸 이름은 한강이다. 최근 영국 맨부커 상을 받은 소설가다. 한강은 어린 시절 방학 때면 고향으로 내려와 덕산리 큰집에서 김 기르는 김발을 고르고 책을 읽었다. 아버지 한승원은 "강이는 내 작품이 아니라 자기 엄마 작품"이라고 했다. 한강 외가는 진목마을이다. 진목마을에는 이청준이 살았다. 이청준은 소설가다.

이청준.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목마을은 득량만을 끼고 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다. 동학과 기독교가 무의식을 지배한다. 일제 강점기 이래 간척된 논에서는 쌀이 나고 바다에서는 해물이 난다. 가난했어도 영혼과 육신이 굶을 걱정 없는 땅이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 부자가 있으면 빈자도 있는 법이어서, 이청준은 젊은 시절 내내 가난에 빠져 살았다. 광주로 가서 공부를 할 때도 집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어릴 적 하늘로 여읜 아버지와 형, 시집가며 여읜(전라도 사투리로 '헤어진'이라는 뜻이다) 누나는 울지 않던 씩씩한 이청준을 울게 만들었다. 풍요한 주변과 극빈한 자신 사이 모순이 그를 작가로 이끌었다.

 

▲소설가 이청준의 고향 진목마을에서 바라본 득량만.

쫄딱 망한 어미와 아들이 눈 내린 새벽녘 산길을 걷는 풍경, 소설 '눈길'은 가난과 풍요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진목마을에서 대덕읍 삼거리까지 산길을 넘어 아들을 배웅하는 어미, 그리고 툴툴거리며 어미와 무심하게 작별하는 다 큰 아들. 공동묘지를 지나 해 뜰 녘 산길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무언가 되뇌는 어미…. 그때 어미는 이리 회상한다. "…그런데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 되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고자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진목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소설이 그대로 보인다. 그가 살던 생가, 그가 걷던 골목, 산 너머 사라지는 읍내 가는 길이 모두 소설 속에 구현돼 있다. 이청준은 그 마을 입구에 잠들어 있다. 눈길 배경이 된 산길은 문학 산책로로 변했다.

 

평화마을 고영완 고택 입구.

 

진목마을에서 산길을 거쳐 바다로 더 내려가면 선학동이 나온다. 이청준 작품 '천년학'을 영화로 찍은 곳이다. 오두막집 세트가 둑방에 남아 있고 봄이 되면 들판에는 유채꽃이 핀다. 관음산 아래 있다고 '산저마을'이던 이름은 천년학을 계기로 선학동으로 개칭됐다. 문학에 맞춰 현실을 바꾼 마을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개척한 논인데, 저걸 모두 (컴퓨터그래픽으로) 다시 바다로 만들어놨구나!"하고 울었다고 했다.

문학을 따라 가는 현실은 이어진다. 해안 따라 북상하면 정남진(正南津)이 나온다. 세련된 전망대가 솟고 거기가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 끝이라고 했다. 이대흠은 "그 옛날 '남끄테'라 부르곤 했던 곳 주변이니 제 이름을 찾은 곳"이라고 했다.

그 북쪽으로 남포마을이 있다. 작은 포구에 주민들이 제사를 올리는 작은 소등섬이 있는 마을이다. 이청준이 소설 '축제'를 쓰고 있을 무렵 영화 감독 임권택이 영화화를 제의했다. 두 장인은 강원도 두메를 헤매며 촬영장소를 물색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모두 포기하고 장흥으로 돌아온 날, 무심코 들른 남포마을에서 임권택이 말했다. "이 선생은 어찌 고향에 이 좋은 데를 놔두고 헤매게 만드셨소." 물 빠지면 걸어 들어가는 소등섬이 있고 마을은 한산하다. 거기에서 이청준은 소설을 썼고, 임권택은 영화를 찍었다.


문학의 주변, 장흥의 미학

해거름 혹은 해 뜰 녘 남포에서 밀물을 만나면 운수대통이다. 반짝이는 공기와 그만큼 반짝이는 물 위로 공중부양하듯 조심조심 발을 떼며 섬에 다가가는 이적(異蹟)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남포에서 더 올라가면 나오는 득량만 여다지해변 갯벌은 낙지와 조개 천지다. 처연할 정도로 시뻘건 여다지 석양은 꼭 보아야 한다.

그러다 여행자는 숲으로 간다. 조림가 손석영이 1958년부터 억불산 황무지에 심은 편백나무가 진득하게 피톤치드를 내뿜는 숲이다. 숲만 찾아도 장흥에 들른 본전을 찾는다. 그 옆에는 해방 정국 때 좌와 우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은 지주 출신 정치가 고영완이 살던 고택이 있다. 배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작은 인공호수가 반기는 마을 이름은 평화리다.


장흥 북쪽 신라 고찰 보림사도 가봐야 한다. 이 땅에 선종(禪宗)이 첫발을 디딘 가람이요,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철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신라 석탑의 전범(典範)인 석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화려하되 절제미 가득한 보조선사탑도 반드시 본다.

 

폐쇄된 장흥교도소 외벽. 이 높은 벽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곤 했다.

기이하게도, 다른 곳으로 이전된 옛 장흥교도소에 그 모든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빈한함과 풍요로움, 동학 패전과 신문물 흡수라는 모순된 현실과 이상이 이 폐쇄된 감옥소에 압축돼 있다. 장식 하나 없이 하얗게 칠해놓은 두꺼운 시멘트 외벽을 주목한본다. 거대한 벽이 구분해놓은 공간 이쪽과 저쪽 삶과 고뇌, 고민을 생각하며 기념사진 한 장. 그때 시인이 이리 묻는 것이었다. '울며 바닥을 혀로 기어본 적 있느냐?/ 강이 묻는다'(이대흠 '강이 묻는다' 전문) 문득, 장흥 이었다.

 

 [42] 문경새재와 아리랑을 부르는 송옥자

신충원 이야기

충주 사람 신충원(辛忠元)은 문경새재 한가운데에 성벽을 쌓았다. 지금 조곡관이라 부르는 문경새재 2관문이다. 신충원은 충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왜군과 맞선 의병이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그저 새재 개울 앞 매바위 길목만 지키면 적은 병력으로도 나라를 지키리라 믿었다. 매바위 앞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 육군 4만 병력이 무혈로 통과한 길목이었다. 성을 짓네 마네 하고 관료들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신충원은 사람을 모아 성을 쌓았다. 신충원을 찾아가 의지하는 전라·충청도 피란민들로 산중이 가득했다. 1594, 임진왜란이 터지고 2년 뒤 이야기다. 역사는 이후 황당하게 흘러갔다.


영남대로와 문경새재

개국과 함께 조선 정부는 전국에서 한양에 닿는 고속도로 9개를 건설했다. 이 가운데 부산에서 한양까지 380㎞ 길을 영남대로라고 불렀다. 경부고속도로보다 48㎞ 짧았다. 걸어서 보름이 걸렸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고개였다. 억새가 무성해 새재라고 했고 새도 넘기 어렵다고 해서 새재라고도 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아무도, 아무것도 없던 이 새재를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무혈로 통과했다. 이후 조선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박종인 기자

 

다양한 삶이 새재를 넘었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도 있었고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보부상도 있었고 지방 출장을 떠난 공무원도 있었다. 선비들은 고개 중턱에 있는 책바위에 돌을 던지며 합격을 빌었다.


아리랑 부르는 송옥자

주흘산, 조령산 자락에는 물박달나무가 많았다. 재질이 단단하되 가지가 가늘고 크지 못한 물박달은 쓸모가 적었다. 부러지면 버리고 다시 깎아 망치 머리에 끼워넣는 연장 자루 정도? 그런 정서는 새재 사람들이 흥얼대는 아리랑 가락에도 남아 있다.

 

▲문경새재 아리랑을 복원한 송옥자.

 

새재 아리랑을 노래하는 여자, 송옥자(65)가 말했다. "낙락장송 좋은 나무는 잘 다듬어져 경복궁 만들었다. 몇 백 년 가도 안 썩는다. 우리 물박달은 경복궁 만들 때 연장 자루로 썼다.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갔다. 양반들에게 대들지도 못하고 항의도 못 하니, 저 물박달 신세와 내 신세가 뭐가 다른가."

대전 여자 송옥자는 1972 1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살다가 문경으로 시집을 왔다. 한 해 제사가 열 번이 넘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라디오도 없는 촌구석에서 송옥숙은 베틀을 돌리며 우울증을 앓았다. 심하게 앓았다. 죽겠다고 농약도 먹었다. 1986년 마을 스피커 방송에서 문경 사람 송영철이 부르는 문경새재 아리랑을 들었다. 나훈아의 문경새재, 송춘희의 문경 아가씨, 조용필의 강원도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송옥자가 말했다. "운명을 받아들였다. 노래로 한풀이하겠다고."

송옥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배웠다. 시조에서 시작해 경기 민요로 넘어갔고, 아리랑에 정착했다. "문경에서 내 존재감 되찾고 이름 석 자 남기려면 아리랑밖에 없었다." 그리되었다. 송영철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고, 가사를 짓고, 노인들을 찾아가 가사를 채록했다. 세월이 흘러 2016년 송옥자는 문경새재 아리랑 전승자가 되었다. 새재 중턱에는 송영철과 송옥자가 복원한 문경새재 아리랑 기념비가 서 있다. 송옥자는 노래를 하며 여러 번 울었다. 연장 자루처럼 산 인생이 어쩌면 새재 아리랑 가사와 그리 똑같은지!


문경새재와 탄금대와 서울 남대문

1592 4 26,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2만 일본 육군이 문경에 도착했다. 부산에 상륙한 지 열사흘 만이었다. 문제는 고모산성 토끼비리와 문경새재였다. 목이 좁고 외길이라, 자칫하면 병력 손실은 물론 패전까지도 우려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수색을 갔다 돌아온 척후병 보고는 "조선 병사 단 한 명도 없음"이었다. 계략이라 의심한 고니시가 몇 번이나 거듭 척후병을 보냈어도 마찬가지였다. 징비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적장이 '하늘이 도왔다'며 춤을 추며 지나갔다." 조선 정부는 북방 오랑캐를 무찌른 장군 신립에게 중앙 정예 부대를 주고 새재 방어를 맡겼다. "… 모두가 새재를 이용해 적을 막자고 했으나 신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 했다. 아군은 대패(大敗)했다. 신립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선조실록)

 

▲맨발로 걷는 문경새재

 

새재는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마저도 두려움에 떨며 머뭇대던 요새였다. 그런데 평야 기마전에 익숙한 신립은 산성을 버리고 충주 달천변 들판을 택했다. 논투성이 들판은 말이 달릴 수 없었고, 배후에는 탄금대 절벽이 버티고 있었다. '땅을 진동하는 총소리와 하늘 가득한 먼지에'(징비록) 조선군 8000명은 전멸했다.

"
토끼비리와 새재 사이에 활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시켰어도 능히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험한 요새를 버려둔 채 평지에 나와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징비록) "대장 신립(申砬)은 조령을 지키지 않고 달천(達川)으로 물러나 주둔하여 한 차례 접전에 1만 군사가 섬멸되었으니, 말을 하자면 참혹하다."(선조실록)

고니시 부대는 그길로 양평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했다. 탄금대 전투를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용인을 거쳐 같은 날 한양에 입성했다. 342년 뒤인 1934 8 27일 조선 총독부는 두 부대가 입성한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 고적 1·2호로 지정했다. 당시 여행 가이드북 '趣味の朝鮮の旅'에는 이렇게 소개돼 있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경성에 들어갔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대한민국 국보 1, 보물 1호다.


새재를 걷다

전쟁이 끝나고 새재 고개에 평화가 왔다. 문경에 부임한 현감들도 태평천국을 누렸다. 현감이 떠나며 백성들은 선정비를 세웠다. 아니, 많은 현감이 재임 기간에 돈을 걷어 선정비를 세웠다. 그러니까 선정비라기보다 악정비다. 전국에 있는 많은 선정비가 부서져 있다. 원님이 떠나고 주민들이 한풀이를 한 흔적이다. 경상감사 이취임식이 벌어지던 새재 교귀정 옆에는 선정비가 여럿 서 있다. 이모(李某) 현감 선정비와 애휼비는 한풀이를 피하려고 아예 큰 바위에 조각으로 새겨놓았다.

 

의병 신충원이 축성한 문경새재 2관문 조곡관. 임진왜란 발발 2년 뒤인 1594년에 세웠다.

 

신충원이 2관문을 세우고 근 200년이 흐른 숙종 대에 1관문과 3관문이 축성됐다. 구한말 문경에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 토벌대가 새재를 휩쓸었다. 그때 2관문과 3관문이 무너졌다. 1관문은 6·25 때 전화(戰禍)를 겪었다. 2관문 부근 소나무 밑동에는 일제강점기 후반 군용 연료로 송진을 채취한 V자 상처가 남아 있다.

관문들은 1974년 대대적 보수 끝에 복원됐다. 1976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청년 시절 교사로 있던 문경을 찾았다. 그때 포장도로로 계획된 문경새재 개발이 전면 백지화됐다. 지금 새재길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남아 있다. 새재길은 관광공사가 선정한 '걷고 싶은 길' 1위에 늘상 오른다.


다시 신충원 이야기

유성룡에 따르면 새재에 관문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일본군 통과를 저지한 신충원의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충원이 모집한 사람 중에 노비가 많았는데 노예를 잃은 주인들 비방이 자자했다. 신충원 또한 지나치고 거슬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 때문에 끝내 금부에 잡혀 형을 백여 차례 받고 사면이 있어도 풀려나지 못했다." 이후 신충원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없으니, 그 인생이 새재 골짜기에 무성한 물박달나무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오늘, 새재를 걸었다. 역사를 걸었다. 답습해선 아니 될 역사 속을 걸었다.

 

[43] 충남 아산과 세계꽃식물원 남기중 가족

이순신… 김옥균… 이지함… 아산에서 만나는 세 사내의 꿈

어라산 중턱 송림 속 충무공 묘에선 장엄한 그의 꿈 느껴져
미완의 혁명가 김옥균, 능지처참당한 후 시신 일부 아산에 묻혀
'토정비결' 저자 이지함, 아산 현감 때 선정 베푼 흔적도
꽃 가꾸는 농부 남기중 가족 꿈도 활짝

 

이지함은 조선 중기 학자요 정치가다. 말년에 두 번 군수를 지냈다. 이순신은 조선 중기 군인이다. 전쟁 때 죽었다. 김옥균은 구한말 정치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중국 상해에서 죽었다. 충남 아산에 가면 인연 없어 보이는 이 세 사내 흔적을 만난다. 사내들을 만나기 전 만날 사람이 있다. 이름은 남기중이고 직업은 농부다. 딸이 둘 있는데 그녀들 또한 농부다.

 

꽃세상, 농부 가족의 꿈

아산 사람 남기중(59)은 꿈을 꾸었다. 과수원집에서 태어난 어릴 때부터 똑같은 꿈을 꾸었다. "어른이 되면 나는 섬을 하나 사서 꽃밭을 만들 거다. 꿩도 사서 기르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가서도 꽃과 흙에 미쳤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고등학교 안 가고 꽃 배우겠다고 했다고 얻어맞았다. 고등학교 강제로 입학하고 산에 다녔다. 에베레스트 가겠다고 설치다가 또 맞았다. 신구전문대 원예과에 들어간 1976년 4월 5일, 정신이 잠깐 돌아와서 산을 끊었다. 대신 꽃에 더 미쳤다. 학교 농장에서 먹고 자며 꽃을 배웠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듬해 건국대 원예과에 들어갔다. 군 제대 후에 평생 같이 살 여자를 만났는데 신구대 선배였다. 이름은 윤석원이고 두 살 위였다. 피터팬처럼 환갑 앞두고도 꽃밭에 꿈을 키우며 살 수 있게 해 준 여자, 고향 아산에 세계꽃식물원이라는 거대한 꿈을 개화하게 해준 여자다.

 

 

남기중은 88올림픽 직전 고향 땅에 화훼단지를 만들었다. 성화 봉송길 주변 가로 화단용 국화 5억원어치를 주문받았다가 취소가 됐다. 돈은 150만원 남았고 유치원생 딸 슬기와 기어다니는 딸 빛나가 있었다. 공부나 하라고, 그 여자 윤석원이 남자를 호주로 보냈다. 돈 없는 남기중은 청소만 원 없이 했다.

귀국해서 꽃병이 재발했다. "꽃도 팔고, 원예용품도 팔고 식물원도 만든다." 겁 없고 황당한 꿈을 또 윤석원이 지원했다. 1994년 영농조합 만들고 정부 돈 지원받아 45억원짜리 사업을 시작했다. 3년 뒤 IMF가 왔다. "인생이 거덜났다"고 했다. 꽃은 사라지고 비닐하우스 2800평은 텅텅 비었다. 채권단에 읍소하고 설명해서 완전 파산은 면했다. 대신 비닐하우스에 식물원 지어서 빚 갚겠다고 소리쳤다.

2004년 3월 19일 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남은 돈은 0원이었고 채워넣을 식물도 변변찮았다. 소문을 들은 주변 친구들이 꽃들을 보내줬다. 할머니 한 분은 "오래도 봤다"며 19년 키운 나무를 보내줬고 어떤 이는 이집트에서 몰래 가져온 씨앗을 싹 틔운 10년 된 난초를 보내줬다. 비닐하우스에 꽃 사태(沙汰)가 났다. 이름은 세계꽃식물원이라고 지었다.

12년 세월이 흘렀다. 과수원집 아이가 낳은 딸들과 아들은 식물원집 아이들로 자랐다. 젖먹이 빛나(29)는 미국에서 첼로를 전공하다 돌아와 허브를 기르고 제품을 개발한다. 첫째 슬기(32)는 일찌감치 농장일을 하다가 작년에 KAIST MBA를 마치고 식물원에 재합류했다. 막내아들 귀현(23)은 농수산대학교에서 화훼를 전공 중이다. 남기중은 결국 백합 재배 기법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식물원을 찾는 사람은 한 해에 20만 명이 넘는다. 식물원 대표가 된 딸 남슬기가 말했다. "일만 저지르는 우리 원장님(아빠를 그리 부른다), 우리 엄마 없었으면 어찌 됐을까." 꽃 세상 속에서 피터팬과 같이 사는 엄마 윤석원은 아무리 찾아도 볼 수가 없었다. "절대로 앞에 나서는 법이 없다"고 했다.


기인 이지함의 꿈

새해가 오면 고단한 삶들은 주술에 의지해 한 해 희망을 점치곤 했다. 정초 사람들이 들춰보는 비결은 토정비결이다. 비결을 쓴 사람은 토정이다. 토정은 호고 이름은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정치를 했다. 정치를 펼친 곳은 충남 아산이다.

이지함(1517~1578)은 서울 마포 사람이다. 조선 중종 때 사람이다. 토정은 흙 토(土)에 집 정(亭)이다. 흙집이다. 마포 강변에 흙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성리학은 물론 의학과 천문과 지리와 수리를 공부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어릴 적부터 더위도 추위도 타지 않았다. 돈에 관심이 없고 남 돕기를 잘했다. 갓에 구멍이 뚫려 망가지자 집에 있는 쇠솥을 철모(鐵帽)로 만들어 쓰고 다녔다.

 

▲농부 남기중 가족이 만들고 있는 꽃 세상, 세계꽃식물원 입구. 겉은 초라하지만 속은 별천지다. 바로 위쪽은 토정 이지함 흔적이 남은 아산 향교 앞에 그려진 매화 벽화다. 이지함은 말년에 아산 현감으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왼쪽 사진은 혁명가 김옥균이 묻힌 무덤 앞 석물. 찾는 이 드문 야산에 미완의 혁명가가 잠들어 있다.

 

평생 공부만 하다가 말년에 경기도 포천 현감으로 추천받았다. 그때 임진강 범람을 예견하고 백성들을 피신시켜 칭송을 받았고 선정 또한 칭송을 받았다. 2년 뒤 아산 현감으로 추천받아 아산에 부임했다. 그때 그가 관아 한쪽에 걸인청을 만들었다. 떠돌아다니는 거지와 노약자들을 모아 체력에 따라 일감을 주고 일한 만큼 재물을 주었다. 그 흔한 선정비도 없이 포천을 떠났고 아산을 떠났다. 포천에서 떠날 때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가는 길을 막았다. 그가 한 선정과 기행이 후대까지 전해져 작자 미상의 토정비결 또한 그가 지은 책으로 세상은 알고 있다.

기인 토정 이지함이 선정을 베푼 관아터는 영인초등학교다. 학교 앞에는 관아 입구인 여민루가 남아 있다. 그가 이전시킨 아산향교도 인근인데, 이전한 연유는 알지 못한다. 향교 앞에 흐르는 개울 담벼락에는 사군자와 소나무 벽화작업이 한창이다. 평생 검약하게 살며 구휼과 선정으로 일관한 사내, 그가 이루려 한 세상이다.


풍운아 김옥균과 덧없는 꿈

김옥균은 풍운아다. 바람처럼 살다가 구름처럼 일순간 사라져버린 사나이다. 김옥균은 죽어서도 정처(定處) 없이 떠돌았다. 아산은 그 꿈이 흔적으로 남은 곳이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급진개화파의 거사가 갑신정변이었다. 주도자는 김옥균이었다. 1851년생이니 정변 때 나이 33세였다. 1884년 10월 17일 서울 종로 우정국 개국잔치에서 시작된 거사는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타도 대상이던 민씨 세력이 청나라 위안스카이 군대를 끌어들였고, 정변을 후원하던 일본 세력은 꼬리를 내렸다. 정변 세력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김옥균은 섬과 북방을 떠돌며 연금생활을 했다. 그러다 1894년 3월 청나라 상해로 망명했는데, 그곳에서 민씨 세력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시신은 조선으로 운반돼 서울 양화진에서 또 한 번 형을 당했다. 죽은 다음에 다시 한 번 온 몸을 찢어버리는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조각난 시신 가운데 머리는 일본인 친구가 거둬서 일본으로 가져가 장례식을 행하고 도쿄 청산영원에 묻었다. 1914년 그가 복권된 뒤 아산 군수로 재직하던 양아들 김영진이 그 묘에서 손톱과 발톱, 입고 있던 옷을 가져와 아산에 묘를 만들었다. 바람과 구름처럼 살던 혁명가가 정처한 곳, 아무 연고가 없는 이곳 아산이었다.

선정을 실천한 기인 이지함의 흔적과 미완의 혁명가 김옥균이 잠든 곳은 걸어서 10분 거리다.


이 땅에 평화-이순신과 공세리성당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가세가 기울며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에서 자랐다. 이곳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과거에 급제해 무관이 되었다. 얼토당토않은 모함에 계급장 뜯기고 고문을 당했어도 끝까지 반역을 꾀하지 않고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전사했다. 1598년 11월 19일, 54세였다.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모신 유해는 이듬해 이곳 아산 금성산으로 왔다가 16년 뒤인 1614년 응봉면 어라산 덕수이씨 선산으로 이장됐다. 현충사에서 그가 남긴 행적을 볼 수 있다면, 그가 잠든 유택에 가면 그를 느낄 수 있다. 송림에 에워싸인 충무공 묘소가 장엄하다.

 

▲아산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현충사가 있다. 현충사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이충무공 묘소는 찾는이가 적다. 충무공의 생애를 보려면 현충사로 간다. 그의 장엄함을 느끼려면 반드시 묘소로 가야 한다.

 

해거름이 찾아올 무렵 공세리로 북상했다. 조선시대, 충청 땅에서 나라에 쓸 재화를 그러모아 한양으로 보내던 공세창이 있던 곳이다. 그 창고가 있던 언덕에 1895년 성당이 섰다. 언덕으로 오르는 얕은 오르막길과 고딕양식 본당 주변 노거수(老巨樹), 본당을 에워싼 십자가의 길 모두 아름답다.

 

▲공세리성당 풍경. 성지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 신자보다 관광객이 더 많이 찾아온다.

 

공세리성당 본당이 서기 전, 구한말 박해기에 신도 31명이 순교했다. 신도 가운데 이명래는 신부한테 배워서 고약을 만들었다. 지금도 공세리 마을 주민은 대부분 천주교도다. 지금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홀려 이 성지(聖地)를 찾는다. 주말이면 공세리마을 중앙통은 교통경찰이 나올 정도로 붐빈다. 그래서 성당 사람들은 아쉽다. 성지가 그저 볼거리로 전락했다고. 하지만 어쩌랴, 세상은 궁벽함을 벗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궁벽하니 그 마음 위로해줄 곳이 드문 탓이다.

이상이 아무 인연 없는 이지함과 이순신과 김옥균이 아산 땅에서 인연을 맺게 된 연유이고 성당에 나그네들이 잦게 출몰하는 이유였다. 그들로 하여 착하고 못됐고 찌질하고 용감한 우리네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아산에서 농부 가족이 꽃세상을 꿈꾸고 있고.

 

[44] 종이 만드는 채권병 부부와 제천 청풍호반

금월봉 너머 청풍호반에서 억겁 세월을 보았다

모든 일은 그리되었다.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바둥바둥 살다 보니 그 흔적이 혹은 땅에 남아 기념물이 되고 혹은 우주 속 먼지로 변해 천지 만물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딱히 거창한 의도나 계획 없이 살다 보니 생이 만들어지고 완성이 되었다. 이 찌는 여름날 충북 제천 청풍호반을 한 바퀴 돌며 깨친 우리네 인생살이 이야기다.

66000년 전 점말동굴 사람들

동굴 속에 살던 그들도 그랬다. 아비들은 사냥을 나갔고 어미들은 동굴 입구 빗장 단단히 여며놓고 아이들 젖을 먹였다. 양지 바른 굴 앞쪽 작은 평지에서 아이들은 흙을 가지고 놀았다. 샘에서는 물이 솟았다. 능선 너머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면 어미들은 아이들을 둘러업고 굴속으로 숨어들었다.

 

소리는 코뿔소이기도 했고 원숭이이기도 했다. 들소, 동굴곰, 하이에나에 영양과 사향노루도 소리 주인공이었다. 사냥 나간 아비들이 코뿔소라도 잡아내면 동굴 마을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66000년 전 동굴에 살던 한반도 가족은 그렇게 살았다. 66000년이 흘러 그 땅에 대한민국 제천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점말동굴

 

7만년前 구석기 가족들 살던 동굴엔
신라 화랑들 흔적이

닥나무숲 물에 잠긴 청풍호반엔
한지 만드는 장인 고집이

山中 사찰 고산사엔
석조 나한 염화미소가

옛 사람 살던 치열한 흔적은
모두 여행 목적지로…

 

1967 6월 제천군 약재상에 용()의 뼈가 나돌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약재다. 소문이 서울 사는 고고학자 손보기에게도 들렸다. 연세대박물관 고고학자 손보기는 1973 6 10일 제천 사학자 조석득과 함께 용뼈가 나온 동굴에 당도했다. 동굴 앞에 살던 거지들을 이주시키고 동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는 태고적 가족들이 먹고 남긴 짐승뼈, 짐승뼈로 만든 도구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공주 석장리와 함께 대한민국에 구석기(舊石器)가 존재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국사 교과서는 전면 개정됐다.

 

화랑들의 순례지

그런데 동굴 벽에 한자(漢字)가 무더기로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사람 이름도 있었고, 관직명도 있었다. 동굴 앞 작은 공터를 뒤지니 돌로 만든 석가모니 탄생불도 나왔다. 기와 파편도 나왔다. 2009년 조사 결과가 나왔다. 각자(刻字)는 신라 화랑(花郞)이 순례지마다 새겨넣은 자기네 이름과 관등명이었다. 경남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새겨진 이름과 똑같은 이름도 있었다. 석기시대 가족들이 살던 그 동굴이 신라 청년들에게는 신성한 공간이요, 순례지였던 것이다.


이게 제천에서 봐야 할 첫 번째 흔적이다. 어떤 이는 동굴에서 가족을 부양했고, 어떤 이는 동굴에서 성스러운 의식을 치렀고, 어떤 이는 동굴에서 용뼈를 주워가 가족을 먹여 살렸고, 어떤 이는 동굴에서 그 모든 흔적을 찾아냈다. 발굴팀 또한 동굴 입구에 시멘트 박석을 설치하고 발굴 날짜를 새겨놓았다.


점말동굴로 오르는 길은 한적하다. 찾는 이가 없다. 동굴이 보일 무렵부터 분위기는 신비하게 변한다. 오로지 동굴 앞 공터에만 햇살이 내린다. 그 뒤 30m 높이 암벽에 동굴들이 뚫려 있다. 왜 구석기 가족이 이곳에 마을을 지었고, 왜 화랑들이 이곳을 신성시했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 땅 모든 흔적의 시원(始原)이 방치돼 있다는 느낌도 가질 수 있다. 아니, 천시받아서 신비하게 남아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풍지(淸風紙)와 종이 만드는 채권병

▲종이 만드는 채권병-정연희 부부.

 

청주 사람 채권병(59)은 종이를 만들고, 아내 정연희(58)는 남편이 만든 한지로 공예를 한다. 채권병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종이 공장 하다가 고생 끝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종이 꼴도 보기 싫다며 공장 처분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내가, 제약회사 외판사원 하던 내가 지금 종이를 만들고 있다."


어느 왕조를 막론하고 중국에서 종이 하면 고려지(高麗紙)였다. 비단처럼 얇고 윤기가 나는 데다 먹이 스며드는 정도가 적당하여 명나라 문인 도융(屠隆) '지묵필연잔(紙墨筆硯箋)'이라는 저서에서 "4세기 명필 왕희지가 사용한 종이가 바로 고려지"라고 추정했다. 도융은 "고려지는 비단처럼 누에고치로 만든다"고까지 했다. 채권병은 그 고려지가 다름 아닌 제천 청풍지라고 믿는다.


충주댐이 완공되기 전 제천에는 닥나무가 무성했다. 제천 사람들은 그 닥을 거둬서 종이를 만들었다. 제천읍내 제천중학교 앞에 넋고개가 있었다. 지금은 번화가가 됐지만 지난 세기 말만 해도 고개 좌우로 종이 공장이 많았다. 6·25가 끝나고 가난한 넋고개 가족들은 닥을 벗겨 찌고 삶아 종이를 만들었다. 한 집 건너 종이집이었다. 만든 종이는 남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팔려나갔다. 하루에 화물선이 수십 척씩 떠서 종이를 날랐다. 제천에서 만드는 그 종이를 청풍지라고 했다. 제천 옛 지명은 청풍이다. 제천 사람들은 충주호를 청풍호라고 부른다. 고집이고 자존이다. 호수가 생기고 닥숲이 수몰됐다. 청풍지 만드는 사람들도 차츰 사라졌다.

 

▲옥순대교에서 바라본 청풍호. 오른쪽이 퇴계 이황이 아꼈던 옥순봉이다.

 

종이에 대한 역대 왕조 관심은 대단했다. 세종은 이리 명했다. "왜국 종이는 단단하고 질기다 하니, 만드는 법도 배워 오도록 하라"(倭紙堅 造作之法亦宜傳習·세종실록 41권 세종 107 1). 이후 제지 기술은 쇠퇴했다. 조선 중기 이후 종이는 불경을 자체 제작하는 절에서 만들어 민과 관에 보급했다. 이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전북 부안 땅에서 시서화로 이름을 날리던 기생 매창이 죽자 그녀의 글을 모은 문집이 나왔다. 부안 개암사에서 종이를 만들고 목판을 만들어 찍었다. 문집이 불티나게 팔렸다. 종이값을 대지 못해 파산 직전에 이른 개암사는 목판을 불살라버렸다. 그만큼 관에서는 종이에 무심했다. 찬란한 고려지 품질이 그리 쇠퇴해버렸다. 채권병이 말했다. "전주·원주·가평에도 종이가 있지만 제천 청풍지가 품질이 최고다. 고려지라면 당연히 청풍지다. 지금도 전국 웬만한 종이 장인들은 제천 출신이다."

 

문 닫은 종이 공장에 단골들이 출몰해 종이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모습 어릴 적부터 봐온 채권병은 우연히 청풍지라는 말을 듣고 취미로 종이를 만들었다. 그 종이로 메모지를 만들어 약국에 선물했고, 1988년 천연염색을 취미로 하던 고교 교사 정연희와 결혼하면서 업()이 되었다.


청풍지를 찾아 제천으로 터를 옮기며 아내는 눈물보가 터졌다. 남편은 돈도 되지 않는 종이를 만들어 그나마 족족 남에게 선물하고 자랑질을 했다. 2013년 여름날 살림에 보탬 되지 않는 남편에게 정연희가 선언했다. "이제 끝." 다음 날 제천역 광장에서 채권병이 정연희 옷깃을 잡고서 무릎 꿇고 울었다. "마지막 놀이터 한 번 만들게 해주시게." 여기까지가 다음 달 청풍문화재단지 뒤쪽에 한지체험관이 문을 열게 된 내력이다.

 

금월봉과 청풍문화재단지

 알고 보면 여행이란 흔적을 찾는 길이다. 제천에는 사람들 눈길을 끄는 흔적이 몇 군데 더 있다. 금월봉(錦月峰)을 본다. 1993년 한 시멘트 공장(아시아시멘트라고도 했고 한일시멘트라고도 했다) 굴착기가 시멘트 원료인 점토를 채굴하다가 바위에 부딪혔다. 필요한 점토를 골라골라 파내고 보니 위 사진처럼 장엄한 돌산이 나타났다. 보는 사람 넋을 나가게 하는 웅장한 모습에 이 석회암봉은 그대로 보존됐고 '금성면 월굴리' 이름을 따서 금월봉이라 명명했다. 청풍문화재단지는 어떤가. 1978년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주변 61개 마을이 물에 잠겼다. 그 흔적 가운데 문화재급 흔적들을 모아 언덕 위로 옮겼다. 보물 2, 지방문화재 9점을 비롯해 마을 하나 규모가 원형대로 이전됐다. 고택도 있고 고인돌도 있으니 수천 년 남한강변 삶의 흔적을 언덕 위에서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1993년 시멘트 공장 사람들이 점토를 캐내다가 땅속에서 바위산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바위산에 금월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먼지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대장엄(大莊嚴)이 지상에 현현했다. 청풍호반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옛 흔적 가운데 하나다. /박종인 기자

 

▲미륵리사지 돌부처의 침묵과 고산사 석조 나한의 미소.

 

그러고 보니 보였다. 옥순대교를 건너면 퇴계 이황이 감탄한 옥순봉이 햇살을 받고, 산중 작은 절 고산사로 오르니 석조 나한 여섯 분이 마음 편하게 웃는다. 월악산 산중에는 마의태자가 만든 거대한 미륵석불이 천년째 수행 중이다. 호숫길을 떠나니 또 다른 흔적들이 그리 보인다. 채굴 완료하고 용도 폐기해도 무방했을 돌산이 저리 장엄하게 서 있고, 아득한 옛날 가족들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굴은 신비한 공간으로 부활했다. 물에 잠긴 닥나무 숲을 찾아 채병권은 오늘도 종이를 만든다. 모두 그리되었다.

 

[제천 여행수첩]

1.미륵리사지: 마의태자 전설이 있는 절터. 현재 석축을 보수공사 중이라 조금은 어수선하다.

2.고산사: 깊은 산중에 있는 작은 절. 응진전에 있는 석조 나한을 반드시 만나실 것.

3.옥순봉: 옥순대교에서 바라보는 전망.

4.청풍문화재단지: 수몰되는 마을을 통째로 이전한 마을. 청풍면 물태리 산6-20, (043)641-5532.

5.금월봉: 청풍문화재단지와 남제천IC 사이.

6.구석기인이 살았던 점말동굴: 마을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산길로 1. 7.청풍호 모노레일: 비봉산 정상 전망대까지 오르는 모노레일. 왕복 3. 온라인 예약. 8000. tour.jecheon.go.kr

 

 [45] 고인돌이 있는 화순과소설가 정찬주

바위 속 根源을 찾아 화순으로 갔다

고개 초입 바위 따라가니 고인돌이 무려 596
방랑시인 김삿갓은 적벽 아름다움에 취해 화순땅에서 말년 보내
주자 증손자 주잠이 박해 피해 망명한 땅
화순 사는 소설가 정찬주 "隨處作主立處皆眞" "어디든 가는 곳에 진리가"

 

화순 사내 이영문과 고인돌

 전남 화순 땅 도곡면에서 춘양면으로 가는 고갯길 이름은 보검재다. 길이는 5㎞ 정도다. 보검재에는 바위가 많았다. 태곳적 무등산 폭발로 생긴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이다. 효산리 쪽 입구 언덕에도 큼직한 바위가 있었다. 높이 3m에 폭은 3.6m, 길이는 5.3m나 됐다. 괴바우라고도 했고 누구는 괸바위라고도 했다. 1995 12 15일 오전 목포대 고고학과 교수 이영문이 제자들과 함께 효산리 입구에 당도했을 때, 이영문은 "범상치 않았다"고 했다.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깎여 있는 바위는 작은 굄돌(지석,支石)들 위에 놓여 있었다. 시작이었다. 이영문은 수풀을 헤치고 보검재 속으로 들어가 길섶을 샅샅이 훑었다. 마흔두 살짜리 젊은 교수가 가시 비죽한 잡목을 헤치고 언덕을 기어올라 바위 밑동을 보면, 또 어김없이 굄돌이 놓여 있었다. 훗날 발굴 조사가 끝나면서 모두 세어보니 5㎞ 고갯길 양쪽에 고인돌이 모두 596개나 됐다. 채석장으로 쓰였던 감태바위(감투바위)에서는 조선시대 돈치기 놀이를 했던 상평통보가 나왔고 청자 부스러기도 나왔다. 200t에 이르는 핑매바위에는 1929년 새겨놓은 여흥 민씨 세장산(世葬山) 비석이 보인다. 무덤, 제단으로 쓰인 고인돌은 물론 채석장까지 갖춘 청동기 흔적에 세월을 초월한 각 시대 손길이 남아 있다. 2002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감투바위 혹은 감태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무리는 청동기 시대 채석장이었다. 이곳에서 캐낸 돌로 그 옛날 화순사람들은 고인돌을 만들었다. 화순 보검재 고개에는 1995년 젊은 학자 이영문이 발견한 고인돌 596개가 서 있다. /박종인 기자

 

방랑시인 김삿갓과 화순

 이영문은 고향 화순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정주하는 사내다. 김병연(18071863)은 달랐다. 평생을 떠돈 유목민이었다. 세간에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은 고향이 경기도 양주였다.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죄로 집안이 멸족돼 강원도 영월 땅에 숨어 살았다. 살다가 영월 백일장에 '김익순의 죄를 논함'을 글제로 일등을 했는데 알고 보니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였다. 역적 가문이요 조상을 능멸한 죄책감에 김병연은 팔도를 방랑했다. 세상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렸다.

 

▲김삿갓 초장지(初葬地)

 

김병연은 1841년과 1850, 1857년 이렇게 세 번 화순을 찾았다. 마지막 6년 살던 동복면 구암마을에 둘째 아들 익균이 찾아왔지만 막무가내였다. 1863년 김병연이 구암마을 선비 정치업의 사랑채에서 죽었다. 정치업은 김병연 시신을 거둬 마을 뒷산 무연고 묘지에 초장(初葬)을 치러줬다. 묘지는 동산(洞山) 혹은 천한 놈들 묻었다고 똥묏등이라고 불렀다. 3년 뒤 익균이 찾아와 아비 시신을 거둬 영월에 묻었다. 화순 구암마을에는 초장지 표석과 김병연이 죽은 정씨 사랑채가 복원돼 있다.

 

관광객을 부르는 적벽과 운주사

화순 사내 이영문은 화순으로 돌아와 고인돌을 찾아냈고 정처없던 김삿갓은 화순에서 죽었다. 말년에 구암마을에서 보낸 6년 세월은 가장 긴 정주 생활이었다. 20세기 학자는 화순에 집착하며, 19세기 시인은 어이하여 아들을 뿌리치고 화순에서 눈을 감았을까.

 

▲화순적벽

 

동복면 동복호반에는 적벽(赤壁)이 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유배된 신재 최산두가 중국 장강에 있는 적벽을 빗대서 지은 이름이다. 물 위로 80m 솟은 수직절벽이 사시사철 아름답다. 지금은 동복댐으로 수위가 올라 절벽 높이가 30m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최산두도, 정약용도, 김병연도 적벽이 곱고 웅장하다고 다들 한마디씩 노래했다. 오랫동안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던 이 적벽이 2014년 가을 개방됐다. 난리가 터졌다. 팔도 사람들이 굳이 화순 땅으로 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운주사 와불. 최근 운주사가 원래 도교 사원이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다른 이유는 운주사다. 경내 곳곳에 석불이 서 있고 바위에 기대어 있고 땅바닥에 뒹군다. 탑마다 있는 기하학적 문양과 원형 탑, 북두칠성 배치를 닮은 산기슭 칠성바위 그리고 민짜 석불…. 최근에는 이 절이 불교가 아니라 도교사원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불상들 손 모양이 부처상이 가진 수인(手印)과 전혀 다르고 탑 배치와 문양이 천문학적이라는 근거를 든다. 김삿갓이 운주사에 들렀을까? 그 천재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려고? 그럴 리가 없다.

 

떠나온 주잠과 떠나간 정율성

그렇게 화순 땅에 세월이 흐른다. 1224년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서던 무렵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 학자 주희의 증손자 주잠(朱潛·11941260)이 망명을 감행했다. 일곱 학자와 경호원과 가족을 데리고 황해 건너 도착한 곳이 능주, 지금 화순이었다. 주잠은 신안 주씨 시조다. 주잠은 원나라 첩자들을 피해 이름을 덕적으로 바꾸고 무등산으로 들어가 살았다. 외동딸과 경호 무사 구존유가 결혼을 했다. 지금도 신안 주씨와 능성 구씨는 쉽사리 통혼을 하지 않는다. 만대창성을 기리며 본관도 바꾸고 전국으로 흩어져 살던 신안 주씨는 조선조 고종 때 본관을 통일하고 지금 13만 명이 넘는 대가문이 되었다.

 

▲주잠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시대가 되었다. 화순 땅에 주희를 기리는 주자묘(朱子廟)가 웅장하게 섰다. 2014년 서울대를 찾은 중국 주석 시진핑은 "주잠은 원나라가 해외 파견한 교수"라고 했다. 주자묘를 지키는 주잠 26세손 주형식은 피식 웃는다.

 

주자묘에서 지석천을 건너면 108년 전 개교한 능주초등학교가 나온다. 정율성(1914~1976)은 이 학교가 있는 능주면 관영리 사람이다. 정율성은 세 살 무렵인 1917년부터 6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이 학교를 다녔다. 기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앞 신청(神廳)에서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933년 중국으로 가서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의열단의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국 팔로군 행진곡을 비롯해 숱한 항일투쟁가를 지었다. 팔로군행진곡은 지금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다. 정율성은 중국 3대 혁명음악가로 추앙받는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이름 꺼내기도 금기였던 사내. 그를 기리는 정율성 교실이 이 학교에 재현돼 있다. 옛 교문 입구에는 그 동상이 서 있다. 누구는 망명지로 화순을 택했고 누구는 혁명을 위해 화순을 떠났다. 떠난 자도 택한 자도 지금 모두 화순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 정찬주가 던진 화두

▲화순에 사는 소설가 정찬주.

 

그 모든 인연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에 정찬주에게 물었다. "왜 그리 다들 화순에 머물고 화순에서 죽고 화순을 찾는 건가요?" 정찬주는 소설가다. 2001년 잡지 샘터사 기자를 끝으로 도시를 떠났다. 보성이 고향인데, 고개 너머 나오는 화순 땅 쌍봉사 앞에 집을 짓고 산다. 15년째다. '귀 씻어서 성불하겠다'며 집 이름은 이불재(耳佛齋)라 지었다. 사랑채는 생전에 법정 스님이 '무염산방(無染山房)'이라 지어줬다.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말했다. "때로는 가두고 때로는 풀어주려면 일단 스스로 가두려고 화순으로 내려왔다. 만족한다." 도시를 향하던 그리움은 완전히 정리됐고, 이제 도시에 가면 이틀을 머물지 못한다. 대신 사람들이 찾아온다. 정찬주 글을 보고 작가를 찾아온 사람, 책 들고 처마 밑에 비를 긋고 있는데 알고 봤더니 그 책을 쓴 작가 집이라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 별 사람 다 있다.

 

그가 말했다. "왜 화순이냐고? 사람들이 명당 명당 하는데, 명당이 따로 있나? 잘살면 명당이라 부르는 게지. 명당은 터 덕()이 아니라 인덕(人德)이오 인덕." 그래도 또 물었다. 왜 고개 너머 고향이 아니고 화순이냐고. 그가 답했다. "임제선사가 말했다.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고. 어디든 무슨 상관인가. 어딜 가든 주인이 되어 살면 그곳이 진리거늘." 이 찌는 염천(炎天) 1 2일 꼬박 화순 땅을 헤맨 나에게 여긴들 어떠하고 저긴들 어떠하냐라니. 이불재 맞은편 쌍봉사 앞마당에 앉으니 돌좌탁에 이따만 한 공룡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게 아닌가. 발톱자국까지 선명한 발자국에 나는 고인돌을 발견한 이영문과 화순에서 죽은 시인과 화순에 은둔한 작가를 망각해버렸다.

 

[화순 여행수첩]

1.적벽: 매주 수, 토 개방. 예약 필수. 1만원.

2.김삿갓 종명지와 공원: 동복면 구암마을. 종명지터 위편 마을 뒤쪽에 초장지가 있다.

3.능주초등학교 정율성 교실: 학교 후문 쪽 동상과 역사관에 있는 정율성 교실.

4.주자묘: 능주초등학교에서 지석천 건너. 아직 공사 중이라 조금 어수선. 근처에 있는 영벽정도 꼭 가볼 것. 5.운주사와 고인돌 공원, 쌍봉사: 화순 남쪽. 쌍봉사는 목탑형식 대웅전과 뒤편 철감선사 부도탑을 꼭 볼 것.

 

[46] 신평양조장 김용세와 당진~태안, 내포(內浦) 이야기

가야산에는 권력의 흔적… 몽산리에는 民草의 돌부처

뭍과 바다 뒤섞인 충청남도 서쪽 內浦 지역
토정·율곡과 교류하며 임진왜란 예언한 기인 김복선 전설도
83
년째 한자리에서 술 빚는 김용세 양조장
황제 집안 되려고 절 불태우고 이장한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영탑사 석탑과 몽산리 돌부처에는 민초들 정성이 가득

충청남도 북서쪽 홍주, 결성, 해미, 태안, 서산, 면천, 당진, 덕산, 예산, 신창을 합쳐서 내포(內浦)라고 한다. 1751년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나오는 말이다. 이 열 마을은 모두 '가야산 앞뒤에 있다'고 했다.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항구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역이다. 항구와 뭍이 뒤섞이다 보니 신문물도 일찍 들어왔고 사람들도 신문물에 개방적이었다. 이를 내포 문화라 부른다. 조선 선조 때 사람 김복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태어난 지 적어도 400년이 됐지만 워낙에 이인(異人)이라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문도 있다. 김복선처럼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 흔적을 찾아 내포로 간다.


기인 김복선과 당진

토정비결을 쓴 토정 이지함이 내포 지역 당진 땅 옆 아산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천문과 수리에 능한 이 이인(異人)이 살펴보니 내포 일대가 곧 물에 잠길 참이었다. 이에 놀라 백성을 모두 대피시키는데 봇짐장수 하나가 말을 듣지 않고 지게를 땅바닥에 세우곤 주저앉는 것이었다. 과연 하늘에서 큰물이 내리고 바다에서 더 큰 물이 밀려왔지만 딱 지게를 꽂은 거기까지만 물이 차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김복선이었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 토정의 명성과 성품을 익히 알던 김복선과 천민이되 지혜로운 김복선을 알아본 토정은 친구가 되었다. 마침 내포 땅에 은둔한 유학자 송익필과 교류하던 율곡 이이가 김복선을 찾아와 토정과 함께 나랏일을 걱정하게 되었다. 어느 날 토정과 율곡이 훗날 왜구와 벌어질 전쟁을 걱정하자 김복선이 이리 말했다. "두 분 선생은 인신년상사(寅申年喪事)인데 어이 임진년 일을 걱정하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김복선은 "내가 나서면 임진년 전쟁은 3년이면 끝나나, 내가 천민이니 나라가 쓸 리 만무하고, 이순신이라는 장수가 7년 만에 전쟁을 끝낼 것이오." 과연 토정은 무인년(1578)에 죽었고 6년 뒤 갑신년에 율곡이 죽었다. 그리고 1592년 임진년에 전쟁이 터졌다. 김복선이 두 사람을 배웅한 곳은 해발 64m짜리 망객산(望客山)이다. 김복선이 오줌을 눈 오줌바위도 있고 그가 개간했다는 논도 남아 있다. 망객산은 신평면에 있다.


신평면에 사는 김용세

▲술 빚는 김용세.

 

김용세는 술 만드는 사내다. 올해 일흔세 살이다. 대학교 졸업하고 대학원 졸업하고서 아버지 김순식으로부터 신평양조장을 물려받았다. 1960년대 행정학 석사가 됐다고 딱히 고관대작이 될 확률이 큰 것도 아니어서 아픈 아버지 도와서 가업을 잇는 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조장은 1933년에 문을 열었다. 그가 말했다.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게 술도가였으니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론과 실제는 달라서 난감했다. 그래서 술 제조법을 공부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책이 없는 것이다. 아주 난감했다."


왕실에서는 실록이다, 일기다 하며 기록을 이어갔지만 민간에서는 술 만드는 법조차 가문의 비밀로 기록을 꺼렸다고 했다. 오죽하면 짚신 못 팔아먹는 아들에게 아비 짚신 장수가 죽을 때에야 귓속말로 "아들아, 짚신 팔아먹으려면 터럭을 잘 다듬으면 된다"고 비밀스럽게 제조 노하우를 구전(口傳)했을까. 그래서 일본인이 만든 탁주·청주 제조법 책자를 섭렵하고, 실전에서 수없이 응용한 끝에 술맛을 해독했다. 그가 말했다. "책대로 만들면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실험해서 제 술맛을 찾고 보니 책이 맞더라."


수덕사 스님들에게 배운 다도(茶道)를 응용해 백련(白蓮) 잎을 막걸리에 넣으면서 김용세식 술맛이 완성됐다. 2007년 연꽃 향이 은근하게 밴 신평양조장 막걸리는 청와대와 삼성그룹 건배주로 선정됐다.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 김동교가 아버지 일을 돕다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3대 술도가 주인으로 들어왔다. 1933년 문을 연 양조장은 그때 그 자리에 서 있다. 술맛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 대를 잇는다. 83년째다.


농촌 개혁의 꿈, 심훈과 필경사

신평양조장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가면 필경사(筆耕舍)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무슨 글을 대신 써주는 곳이 아니다. '상록수'를 쓴 소설가 심훈이 살던 집이다. 4년 동안 살았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난 심훈은 3·1운동을 거쳐 중국으로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와 소설을 썼다. 영화도 만들었고 출연도 했다. 그러다 1932년 장조카 심재영이 사는 당진으로 내려왔다. 사랑채에 묵으며 글을 쓰다가 인세를 모아 집을 지었다. 집 이름이 필경사다. '붓으로 밭을 간다(以筆爲耕)'는 뜻이다.


이곳에서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탈고했다. 상록수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당진 내포 땅에서 나왔다. 장조카 심재영은 박재영으로 등장했다. 박재영은 농촌 개혁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이다. 심훈은 조카와 함께 직접 농촌을 체험하며 상록수를 쓰고,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필경사는 이후 교회로 쓰이다가 장조카 심재영이 사들여 당진시에 기증했다. 지금은 심훈기념관으로 쓰인다. 경기도 안성에 있던 심훈 묘도 이곳으로 이장했다.


예산 남연군묘

잠시 당진을 떠나 남하하면 예산 땅이 나온다. 예산에는 수시로 대형 승용차가 나타나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사라지는 무덤이 하나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다. 정적(政敵)들 눈을 피해 파락호 생활을 하던 이하응은 어느 날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명당'이란 얘기를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묘 이장을 결심한다. 그런데 충남 가야산 자락에 있는 그 명당 터에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는 게 아닌가. 흥선은 주지를 매수한 뒤 사람을 시켜 절을 불태워버렸다.

 

▲내포 지역에 속하는 충남 예산 가야산에는 남연군 묘가 있다. 천하제일 명당이라는 곳이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선친 묘를 이장했다. 이후 고종과 순종 황제가 나왔고 나라는 망했다. /박종인 기자

 

그 무렵 형제들 꿈에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귀신이 출몰하자 흥선은 "즉 진짜 명당이라는 말"이라며 이장을 감행했다. 과연 아들은 고종 황제가 되고 손자는 순종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2대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 명당 자리에 가면 풍수에 일자 무식한 사람도 감탄이 나온다. 과연 어디에 무엇이 모자라 2대 만에 나라가 망했는지 설은 분분하되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영탑사 칠층석탑과 몽산리 석불

권력욕이 가야산 자락에 흔적을 남겼다면 아미산 영탑사와 태안 몽산리 석불에는 민초의 무한한 애정이 숨어 있다. 영탑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유리광전 뒤편 언덕에는 칠층석탑이 있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절을 중건하면서 오층석탑을 세웠다. 이후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석탑을 유리광전 뒤편 언덕으로 옮겼다. 그리고 1911년 신도들이 2층을 더 올려 7층 석탑으로 지었다. 일곱 층짜리 석탑 하나 만드는 데 1000년이 넘게 걸렸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울 때 살아남은 석탑을 옮겨왔다는 말도 있다. 어느 이야기든 상관없다. 느껴지지 않은가. 석탑에 대해 민초들이 품고 있는 애정이.

 

▲민초들이 정성들여 보듬은 태안 몽산리 석불. 못 생겼으되 애정이 가득하다.

 

▲당진 아미산에 있는 영탑사 칠층석탑. 신라 말 도선국사가 세운 뒤 1911년 주민들이 중수할 때까지 1000년이 걸린 탑이다.

 

태안 몽산리 야산에서 만나는 석가모니 석불은 더하다. 철저하게 훼손된 돌부처를 주민들이 정성 들여 수선해놓았다. 미적 감각이 없는지라 사라진 눈과 코와 입은 시멘트로 발라 그려넣었다. 옛 석물들을 모아 아담한 돌탑도 복원해놓았다. 지독하게 못생겼고 엉성하지만 돌부처에 대한 애정이 가슴 뭉클하게 읽힌다. 이게 내포 문화다.

 

▲안국사지석불. 황량한 여타 절터와 달리 안국사지는 화려하고 아늑하다.

 

김대건은 내포 당진에서 태어나 천주교를 받아들여 조선 첫 신부가 되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솔뫼성지다. 고려시대 절터 안국사지에는 커다란 석불 3기가 서 있다. 지금 주지 원상 스님 10년 넘도록 그 앞에 돌로 만든 정원을 꾸미고 산속에 별세계를 꾸미고 있다. 대개 사라진 절터는 황량하고 허무하지만, 안국사지에서는 오히려 미래가 보이니 이 또한 내포 땅이 가지고 있는 적극성과 개방성이다. 영탑사가 있는 아미산 자락에는 젊은 예술가 부부가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아미미술관이 숨어 있다. 교실마다 귀한 작품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전국 팔도에서 그 미학을 보려고 당진으로 몰려온다. 강산이 수십 번 바뀌고 세월은 여러 겁 흘렀지만 내포(內浦) 땅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든다.

[47] 달이 머무는 영동과 당재터널 무명씨(無名氏)들

산에는 달이 머물고 폭포에는 피리소리가 스쳐갔네

당재터널 이야기

 

 충북 옥천과 영동 사이 경부고속도로 공사 이야기다. 긴 터널을 뚫을 기술이 없던 때라, 산과 산 사이를 골라 굴을 뚫었다. 금강IC와 영동IC 사이는 고속도로라고 부르기에는 쑥스러운 곡선투성이였다. 1970년 고속도로 완공을 앞두고 마지막 남은 구간이 이곳 당재터널이었다. 터널 앞과 뒤를 흐르는 금강 구간에는 거대한 다리를 놓았다. 산 사이를 뚫다 보니 뚫으면 무너지고, 무너지면 사람이 죽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기간 사고로 죽은 사람이 일흔일곱 명이었는데, 열한 명이 당재터널을 뚫다가 순직했다.

 

터널 개통을 끝으로 고속도로가 완공됐다. 그해 7 7일 대구에서 열린 개통식 다음 날 대통령 박정희는 금강휴게소 옆에 있는 순직자 위령탑에 와서 조문을 했다. 2003년 잔뜩 휘어 있는 이 구간 직선화 공사가 완료됐다. 폐기된 당재터널 상행선 구간은 저온 저장고가 되었다. 한 시대 한 나라를 이끈 터널이었다. 터널을 떠받치는 아치형 콘크리트 기둥마다 현대사가 읽힌다.

 

대한민국 성장에 경부고속도로가 끼친 영향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굳이 터널을 보기 위해 갈 필요도 없겠고 순직자 77명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을 찾기 위해 일부러 금강휴게소에 정차할 이유도 없겠다.

 

▲경부고속도로 위령탑에 있는 순직자 명단.

 

폐쇄된 당재터널엔
고속도로 순직자 흔적이

노론 거두 송시열은
달 머문 월류봉에서 와신상담

세조가 문수보살 만난
반야사 개울가…

악성 박연이 찾던 옥계폭포…

  영동을 목적지로 떠난 여행길이라면, 반드시 찾아본다. 당재터널 무명씨(無名氏)들이 없었다면 우리네 필부필부들은 지금 어찌 살고 있었을까. 터널이 이끄는 영동 땅 옛사람들 삶도 그러하다.


달이 머무는 황간

 터널에서 30㎞ 동쪽으로 가면 영동군 황간면이 나온다. 물은 많아서 땅 이름도 누를 황()에 시내 간() 황간이었다. 가도 가도 첩첩산중이니, 숨어 살기에는 딱 좋은 땅이다. 농사는 거칠었고 경치는 좋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황간은 층층한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동남쪽 모든 물이 그 아래로 꺾여 서쪽으로 가는데, 돌에 부딪히면 거문고와 비파, 피리 같은 소리가 주야로 끊어지지 않는다. 고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두어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가운데 청학굴(靑鶴窟)이 있다. 그윽하고 깊으며 연기와 안개가 아득하여 지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조선 초기 악성(겦聖) 박연은 고향 충북 영동 옥계면에 있는 옥계폭포에서 음악을 익혔다. 셋째 아들이 역모에 연루돼 벼슬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죽었다. 뜨거운 이 여름날 폭포수는 실처럼 가늘게 흘렀다. /박종인 기자

 

인간세가 아닐 정도로 깊었으니 꼭꼭 숨어서 살기에도 좋았고 경치 구경하면서 즐기기에도 좋았다. 승람이 '두어 봉우리'라 적은 그곳 이름은 월류봉(月留峰)이다. 달이 머문다는 뜻이다. 얼마나 아름답길래 달도 승천하지 못하고 머물렀을까.


우암 송시열과 월류봉

 송시열(1607~1689)이 숨어 살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 중기 집권 세력인 보수파 노론의 태두였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대륙에 청나라가 섰을 때, 조선이야말로 명나라를 계승하는 소중화라 생각했던 학자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무릎을 꿇었다. 젊은 송시열은 외가가 있던 옥천 옆 이곳 월류봉 아래에 은둔하며 오랑캐 징벌을 꿈꿨다. 숱한 동료들이 찾아와 함께 꿈을 꾸었다. 다시 조정으로 불려 간 뒤 청나라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자 대놓고 북벌론을 외치며 중화 부활을 이끌었다. 효종이 죽었다. 동아시아 초강대국과 맞짱을 뜨겠다는 의지는 좌절됐다.

 

▲달이 머문다는 월류봉. 우암 송시열이 한때 이곳에 은거했다.

 

그가 죽고서 영동 일대 제자들이 그가 살던 집터에 그를 기리는 한천서원을 지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한천서원도 철폐됐다. 이후 후학들이 그 자리에 한천정사를 세웠다. 월류봉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우며 건립 연대를 이리 적었다. '崇禎紀元後百三十六年.'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다. 1644년 대륙에서 사라진 나라 연호를 송시열 유허비는 136년째 잇고 있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 비석들은 상당수가 '숭정 기원후'를 고집했다. 기이하지 않은가.

 

금강 지류들이 백화산과 지장산을 감싸며 흐르다 야트막한 다섯 봉우리 앞에서 크게 휘돈다.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풍경 규모도 적당하여, '한 폭 산수화'라는 상투적인 비유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춘하추동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 눈 덮인 겨울이 더 아름답다는 사람도 많다. 해 질 녘 월류봉 앞에 닿으면 달과 함께 놀아볼 준비를 한다. 달이 떠도 좋고 별들이 떠올라도 좋다. 그 천체들이 과연 봉우리를 떠나지 않고 밤새 함께 놀 요량인지도 확인해보자.


세조와 반야사 배롱나무

 월류봉 아래에서 만나는 강줄기 하나는 석천(石川)이다. 월류봉에서 석천을 따라 6㎞를 가면 백화산이 나온다. 백화산에는 반야사가 있다. 불교 용어로 반야는 깨달음이다. 반야사는 문수보살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수양대군 세조(1417~1468) 이야기를 품고 있다.

 

▲500세 된 반야사 배롱나무와 삼층석탑.

 

통일신라 시대인 851년 무염대사가 창건했다는 말도 있고 통일 전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반야사 기원은 문수보살 신앙이다.

 

세조는 문수보살과 관계가 깊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뒤 얼마 지나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현몽했다. 왕후가 "이 더러운 놈!" 하고 침을 뱉고 사라진 뒤 세조는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생을 했다. 명산, 명찰은 다 돌아다니며 기도를 하고 몸을 씻었다. 양양 낙산사도 갔고 오대산 월정사도 갔다. 오대산에서 몸 씻어준 아이에게 "임금 몸 봤다 말라" 했다가 "그대는 문수보살 봤다 하지 말라"는 답을 들었다. 똑같은 전설이 반야사에도 있다. 세조 10년 반야사가 크게 중창을 하고 임금을 초대했다. 법회를 마친 세조가 강변에서 아이에게 이끌려 몸을 씻었다. 드디어 부스럼이 치유되었고, 아이는 절벽 위로 올라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곳에 문수전이 서 있다.

 

문수전으로 오르는 길은 고행길이다. 안내문에는 '가벼운 10분 산행'이라 돼 있지만, 거짓말이다. 힘들게 내려와 절을 다시 보면, 극락전 앞에는 오백 살 먹은 배롱나무가 새빨갛게 꽃을 달고 있고, 그 앞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서 있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백화산 중턱 너덜지대에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발톱을 세우고서 용맹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름날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드는 절이었다.


폭포, 그리고 악성 박연

 영동의 서쪽 끝 옥계면에는 옥계폭포가 있다. 역시 세조와 관계가 있다. 고려 말 이곳 영동에서 박연(1378~1458)이 태어났다. 박연은 고구려 왕산악, 가야 우륵과 함께 3대 악성이라 불린다. 성리학이 중시하는 예()와 악() 가운데 박연은 악을 집대성했다. 사회를 규율하는 덕목이 예이고 악은 통합하는 덕목이다. 세종 임금 아래에서 박연은 조선 궁중 음악을 체계화했다. 피리에 능해서 그가 피리를 불면 새들도 화답했다고 했다.

 

그러다 셋째 아들 박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자 함께 사형을 받게 되었다. 세조가 이를 보고받고서 "세 임금을 섬겼으니 벌을 깎으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죽음을 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81세로 죽었다. 그곳이 영동 옥계면이다. 그가 음악을 익힌 자리가 바로 옥계에 있는 옥계폭포다. 폭포를 본다. 폭포수 양쪽 웅장한 암벽에 푸른 나무들이 붙어 있다. 염천(炎天) 더위에 폭포수는 말랐다. 가끔 아랫물을 펌프로 끌어 올려 수량 많은 폭포수를 볼 때도 있다. 무엇보다 저 바위 위에 앉아서 피리를 불며 악상을 정리했을 이 음악가를 상상해본다.

 

폭포에서는 피리 소리에 맞춰 산짐승들이 모여들었다. 동쪽 월류봉에서는 달이 놀았다. 피부병을 앓던 권력자가 강변 절을 찾아와 심신을 치유받았다. 다시 서쪽으로 가면 태곳적부터 산으로 서 있던 자리에 누군가 무명씨들이 땀 흘린 터널이 남아 있다. 산이라고 그저 산이 아니었다. 물이라고 그저 물이 아니었다.

 

[영동 여행수첩]

1.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상행선 쪽 언덕. 휴게소에 차를 대고 걸어갈 수 있다.

2.당재터널: 금강휴게소에서 하행 톨게이트를 나와 금강 강변 우산로를 지나 금강로로 2.8. 터널 옆에 주차 공간 있음.

3.월류봉과 한천정사: 내비게이션 검색어는 월류봉. 새벽 혹은 저녁이 좋다. 한천정사는 개방돼 있지만 볼거리는 없다. 정사 건너편 텃밭 언덕에 월류봉 바라보는 송시열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옆에 새겨진 '숭정 기원' 연호를 찾아볼 것.

4.반야사: 극락전 앞에 있는 500년 된 배롱나무 두 그루와 삼층석탑, 세조와 문수보살 전설이 얽힌 문수전. 문수전 산행은 약간 극기 훈련과 비슷한 가파른 계단 길이다. 극락전 옆 백화산에 보이는 호랑이 형상 너덜지대도 볼 것. 템플스테이도 운영한다. (043)742-4199, www.banyasa.com 5.옥계폭포: 주말에 수량이 부족하면 폭포 아랫물을 끌어 올린다. 물이 없어도 장관이다.

 

[48] 방태산 순환드라이브와 정감록 사람들

구룡령과 조침령을 넘어 우리는 방태산으로 숨었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충격을 받았다. 전화(戰禍)를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황해도에서 경북 풍기로, 풍기에서 신도안으로 떠돌다가 충남 공주 명당골에 자리 잡은 노인이 이리 말하는 것이다. "자본(資本)이 명당이외다. 돈만 많다면 아들 사는 도시로 나가 살지 미쳤다고 여기에서 살겠나." 예언서 '정감록'에 의지해 피장처(避藏處)를 찾아 팔도를 떠돌았던 노인이 칠순 넘어 털어놓은 비밀이었다. 최창조가 묻는다. "전쟁이 태평성대와 난세(亂世)를 가르는 기준이던 시절, 사람들이 전쟁을 피할 곳은 군사적으로 가치가 없는 산골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방태산과 피장처

강원도 방태산 주변에는 '정감록'에 나오는 피장처가 많았다. 방태산은 닿을 수 없는 오지였다. 20세기 말까지도 그랬다. 북쪽으로 418번 지방도와 남쪽으로 56번 국도가 방태산 언저리를 지나가지만, 방태산을 잇는 조침령과 구룡령은 섣불리 넘어갈 수 없는 아득한 고개였다.

많은 사람이 전쟁을 피하려고 이 오지로 숨어들었다. 80종이 넘는 '정감록' 판본 가운데 필사본 하나가 방태산 주변 피장처를 삼둔사가리라고 불렀다. 홍천에 있는 살둔, 달둔과 월둔, 인제에 있는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 명지가리다. 달둔에 사는 한 노인이 말했다. "정감록? 허… 나 젊을 때 울진에서 무장공비가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 우리가 몽땅 강제로 쫓겨났었는데."

 

▲강원도 인제와 홍천에 걸쳐 있는 방태산은 꽃 방()에 별 태(), 꽃별산이다. 그 산중에 숨어 있는 폭포 이름은 ‘이 폭포 저 폭포’다. 세상이 어찌 됐든 개의치 않겠다는 달관한 작명(作名)이다. /박종인 기자

 

천지가 개벽했다. 자본과 돈이 전쟁을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418번 지방도가 산 북쪽으로 뚫리고 56번 국도가 남쪽으로 양양까지 뚫렸다. 2006 12월 진동과 양양을 잇는 조침령 터널이 뚫리면서 마침내 방태산을 한 바퀴 도는 110㎞ 길이 순환 드라이브 코스가 완성됐다. 길 막히지 않는 날, 두 시간 반이면 서울에서 닿는 신천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정감록' 피장처라 주장하는 숨은 장소들을 찾아가 돈을 뿌리고 대신 휴식을 구입한다. 땅은 변함없으되 그 쓰임과 용도가 이리도 격변했으니, '정감록' 예언이 21세기에 실현된 게 아닌가.

이 여름날 큰 산 방태산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다. 살둔계곡, 미천골계곡, 구룡령, 조침령, 진동계곡, 방동계곡. 이름 하나하나 의미심장한 은둔지들을 만나본다. 은둔지를 잇는 길도 하나같이 아름답다.


인제 상남에서 살둔까지 20

상남면에서 살둔계곡까지 자동차로 30분이 걸린다. 도로 번호는 446번 지방도다. 미산계곡이 길 내내 뻗어 있다. 내린천이 휘돌아 흐르는 첩첩산중에 평평한 땅이 보인다. 누가 보아도 정감록을 떠올릴 풍경이다. 오지였던 시절, 살둔에 있는 산장은 산꾼들 아지트였다. 한옥도 일옥도 아닌 희한한 목조 산장에서 사람들은 풍월을 읊고 놀았다. 길이 뚫리고 누구나 살둔을 찾는 지금, 산장은 만인을 위한 펜션으로 변했다. 야영장으로 변한 폐분교 주변에 차를 대고 계곡을 즐겨본다.


살둔에서 구룡령까지 25

구룡령으로 가는 길목 13㎞ 지점에 칡소폭포가 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수량이 풍부하다. 폭포 위쪽은 을수계곡이다. 내린천 발원지다. 여름에도 나무 그늘이 시커멓고 물은 냉수다. 폭포 앞에서 내린천과 계방천이 만난다. 차갑기 그지없는 내린천 줄기에서 양지바른 계방천 줄기로 몸을 옮기면 순간 온탕에 들어왔다는 착각에 빠진다. 칡소폭포에서 2.5㎞를 가면 홍천 내면이 나온다. 내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달둔계곡이다. 역시 정감록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홍천 내면 광원리에 있는 칡소폭포. 56번 국도와 붙어 있다.

 

영동고속도로에 교통량을 빼앗긴 후 56번 국도는 쓸쓸했다. 2010년 이 달둔계곡에 숨어 있던 은행나무숲이 대중에 개방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아내 병 고치러 달둔을 드나들던 사내 류기춘이 아예 은행을 심고 살다가 20년 만에 개방한 숲이다. 10월만 되면 달둔계곡 앞뒤 10km에 차량 사태가 나고 전직 금융인 문제경 부부가 숨어들어와 만든 펜션 티롤에서 은행나무숲까지 길섶에 장터가 선다. 다른 계절에도 아름답다. 내린천이 흐르는 계곡 풍경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과 동일하다.


길이 서서히 상승한다. 구룡령으로 간다. 구불구불 구부러진 고개를 과장해서 아홉 구비라 했다. 아홉 구비가 훨씬 넘지만, 고개 이름을 십룡령, 이십룡령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구룡령을 넘는 56번 국도 구간은 일제 강점기 임도였다. 그 길을 포장해서 1990년대에 완공된 도로가 56번 국도다. 고개를 넘을 때는 가랑비가 뿌렸으면 좋겠다. 고개 아래는 비가 오지만 고개는 운무에 뒤덮인다. 양편 그리고 앞뒤 산자락이 운무에 사라진다. 그 몽환(夢幻), 잊기 힘들다.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 25

구룡령 아래 마을 이름은 갈천이다. 화전민들이 칡뿌리 갈아 먹던 마을이라 개울에도 칡가루가 부유했다. 그래서 갈천(葛川)이었다. 마을에 있는 약수 이름도 갈천이다. 약수터로 오르는 1.5㎞ 산길은 꼭 올라가 본다. 온갖 활엽수에 에워싸인 약수터는 신비하고 춥다. 교통량이 줄어들면서 구룡령휴게소는 문을 닫았다.

 

미천골 휴양림은 빼놓을 수 없다. 입구에서 7㎞까지 차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계곡이다. 입구에 있는 절터는 선림원지다. 절집 사람이 하도 많아서, 밥을 할 때마다 계곡수가 하얗게 됐다고 미천(米川)이다. 휴양림 안에는 예쁜 펜션도 많고 밥 먹을 식당도 있다.

 

미천골에서 나와 서림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길은 418지방도로 바뀐다. 조침령이 나온다. 새도 하룻밤을 자고 넘었다는 악명 높은 고개다. 그 고개 아래에 터널이 뚫렸다. 2006년 일이다. 방태산 자락이 1145m짜리 터널 하나로 순환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양양으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야 했던 진동마을 사람들은 신천지를 맞았다.


조침령에서 방태산 18

피장처를 찾아 진동마을 두메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에게는 비보(悲報)였다. 조침령은 마지막 남은 오지였다. 언론, 방송 할 것 없이 진동계곡을 찾아 '천혜의 비경'을 찬미했다. 그래도 좋았다. 쉰여섯 먹은 사내 김시륜은 서울에서 사륜구동차를 타고 물 좋은 계곡만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23일 동안 계곡에서 내 손으로 밥을 해먹은 적이 없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밥이며 삼겹살을 나눠줬다. 대한민국, 아직 살 만하다." 김시륜의 담배연기 너머 물가에서 청년들이 꺽지 낚시에 한창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 속에서 웃음소리가 끝이 없었다.

 

▲진동계곡 솔밭 옆 내린천에서 만난 낚시꾼들.

 

문득 방태산이었다. 이 모든 현대판 피장처를 품고 있는 큰 산이었다. 계곡 끝에 폭포수가 쏟아졌다. 10m 높이 위쪽 폭포와 3m 높이 아래쪽 폭포를 합쳐서 '이 폭포 저 폭포'라 부른다. 휴양림 입구에 있는 방동약수를 한 모금 마신다. 음나무 무성한 숲 속에 철분 가득한 탄산수를 마신다.

 

방태산 옆 고향집에는 최균택과 박순옥 부부가 산다. 예순여덟 살 먹은 최균택과 세 살 연하 박순옥은 인제군 현리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그리고 혼인을 하여 지금껏 현리에 산다. 박순옥이 만드는 두부가 하도 맛있다고 마을 사람들이 호들갑이라, 25년 전 집에 두부집을 열었다. 그 이름이 '고향집'이다. 두부 싫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들도 이 집 두부를 먹고 나면 맛있다고 호들갑이다. 개명천지가 아닌 주술의 시대였다면 "인육(人肉)을 넣었다"는 괴소문이 떠돌 법할 정도로 맛있다.

 

110㎞ 방태산 자락 끝에서 두부 만드는 부부를 만났다. 현리에서 태어나 현리에서 자라나 현리에서 사랑을 하여 현리에서 혼인을 했고 현리에서 늙어가는 부부다. 그들에게 '정감록'은 덧없고 의미 없다. 하여, 묻는다. 당신의 피장처는 어디인가.

 

[방태산 여행수첩]

〈드라이브 순서〉 상남면-살둔계곡-칡소폭포-티롤-갈천약수-미천골자연휴양림-조침령-진동계곡-방태산자연휴양림-방동약수-고향집

1.칡소폭포: 주차장 반대편으로 개울 내려가는 길. 개울 물놀이도 가능.
2.
갈천약수: 구룡령휴게소 건너편 마을 소로로 들어갈 것. 산길 1.5.
3.
미천골휴양림: 발굴 작업 중인 휴양림 초입 선림원지 석탑을 볼 것. 휴양림 길이는 7.
4.
방태산휴양림과 방동약수: 휴양림 끝 '이 폭포와 저 폭포'. 방동약수는 휴양림 입구에서 왼쪽 도로.

 

[49] 화천 파로호와 비수구미 여자 김영순의 삶

고단한 삶은 끝나고… 사람들은 호숫가를 걸으며 안식한다

파로호 호숫가 삶은 모질었다. 화전민 부부 장윤일과 김영순도 모질게 살았다. 칠십이년째 장윤일은 생각 중이다. 왜 나는 고단하게 살고 있을까. 뱀도 잡아봤고 송이를 캐고 낚시꾼들 수발 들며 네 아들딸 휼륭하게 키워냈지만, 부부는 다람쥐 꼬리만 한 비수구미 계곡을 벗어나지 못했다. 장윤일과 김영순은 파로호변 숨은 곳,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 비수구미에 산다.


미륵바위와 461번 지방도

 화천읍 대이리 북한강변에는 바위가 다섯 개 있다. 구만교에서 읍내로 가는 길목에 있다. 어찌 된 것이 볼품없는 그렇고 그런 바위들에게 사람들은 미륵이라 이름하고 제사를 지낸다. 미륵은 미래불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관장하는 이 영험한 바위에 기도를 하며 징글맞은 현실을 잊는다. 미륵바위가 서 있는 이 도로 이름은 461번 지방도다.


파로호 이야기

 깨뜨릴 파()에 오랑캐 로(), 호수 호()이니, 파로호는 '오랑캐를 깨부순 호수'라는 뜻이다. 6·25 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을 이곳 파로호에서 궤멸(潰滅)시켰다. 1951 5월 경기도 양평 용문산 전투에서 화천까지 패퇴한 중공군은 철원으로 퇴각 중이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은 '사상자 10만명, 포로 1만명을 기록한 미증유의 참패'를 당했다.

 

파파로호는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6.25 전쟁 때 피비린내 나는 전투장이었던 호수가 이제 사람들을 부르는 낭만적인 산책길로 변했다. /박종인 기자

 

그 퇴각로가 461번 도로였다. 퇴각로가 막힌 중공군 병사들은 호수를 헤엄쳐 건너다 익사했다. 국군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대대를 생포했다는 기록도 있다. 도로는 물론 주변 능선과 계곡에는 중공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작전 차량들은 중장비로 시체들을 길섶으로 치우며 전진했다.

 

1955 11 18일 대통령 이승만이 이곳 육군 6사단을 방문했다. 대한뉴스는 "대통령 각하께서 파로호라고 명명하신 화천 저수지의 명명 기념비 제막식이 11 18일 현지에서 거행되었다"고 보도했다. '파로호비'는 지금 안보전시관 위쪽 숲 속에서 파로호를 내려다본다.

 

▲이승만 대통령 친필을 새긴‘파로호비’.

 

파로호는 1944년 일본 총독부가 수도권 군수공장 전력 공급용 발전소를 만들며 생긴 인공호수다. 원래는 파로호가 아니었다. 대붕(大鵬) 호였다. 이후 7년 만인 1951년 호수 이름은 파로호로 바뀌었다. 대붕호라는 이름은 금세 잊혔다.

 

1987 4월 호수 북쪽에 평화의 댐 건설이 시작됐다. 호수 물이 빠졌다. 화천댐 옆에서 비석 하나가 발견됐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大明鳥堤 昭和 十九年 十月 竣工(대명제 소화 십구년 시월 준공)'. 대붕이 사는 호수가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초명새가 사는 뚝방이라고? 간악한 일제 꼼수에 화천이 발칵 뒤집혔다. 과연 그럴까. 초명새(明鳥)는 남쪽 세계에 사는 전설 속 새다. 물에 감응하는(至水之感) 신조(神鳥). 봉황보다 초명새가 호수 이름에 더 어울리고 '간악' '꼼수' '만행'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작법이다.


장윤일과 김영순

 원주 사람 장윤일은 나이 스물에 화천 비수구미로 흘러들었다. 화전(火田)으로 먹고살리라 호수로 숨어들었다. 일찌감치 춘천에서 들어온 윗집 처녀 김영순을 만나 혼인을 했다. 김영순은 열일곱이었고 장윤일은 스물셋이었다. 1965 4 7일이었다.

 

▲김영순, 장윤일 부부와 맏아들 장복동. 오른쪽은 2013 5월 결혼 48년만에 찍은 웨딩사진.

 

일곱 남매 장녀 김영순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도 착하다고 해서 결혼했다. 밥 하나 안 시킨다더니 밥 안 시키긴, 다 시켰어, . 이 사람이 거짓말을 그렇게 잘해." 남자가 말했다. "… 그러지 않으면 여자들이 안 오거든. 누구나 다 그런 거야." 김영순이 말을 잇는다. "? 밭 양쪽에 내 사진 걸어놓고 김 한 번 맬 때마다 내 사진 보면서 살겠다고? 얼마나 근사해? 그 말에 속아서 내 나이 열일곱에 이 남자랑 결혼했다. 어이구,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하고 살았네."그 삶은 이러했다.

 

혼례 열흘 만에 남편 장윤일이 입대했다. 제대를 한 달 남기고 맏아들 복동이 태어났다. 돌아온 남편은 단양 탄광촌 잡부로 떠났다. 온통 새까만 세상에 질려, 아들을 둘러업고 따라간 아내는 40일 만에 남편을 끌어내 비수구미로 돌아왔다. 낚시꾼들 수발 들며 돈을 벌었다. 남편은 나물 뜯으러 가고 아내는 밥을 했다. 조각배 저어가며 낚시꾼들 심부름을 했다. 비가 오면 물 퍼내며 노를 저었다. 살림집에는 손님 재우고 부부는 비닐하우스에 살았다. 눈을 뜨면 밤새 내뿜은 숨결이 이불이며 옷가지를 적셔 놓았다. 장작불에 옷가지를 말리며 밥을 짓고는 조각배로, 산으로 달려갔다. 산으로 간 남편은 비탈을 굴러 피투성이로 돌아오곤 했다. 뱀에게 물려 죽을 뻔도 했다. 그럴 때면 아내 김영순은 이리 말했다. "애들 안 가르치고 그냥 당신하고 나하고 그냥 우리 식구가 다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다음 날이면 애들 가르치는 게 합당하다고 자동으로 마음이 변하곤 했다. 하여 뱀에게 물리고 비탈을 굴러 내려오는 삶이 반복됐다. 김영순이 말했다. "살아온 생각 하면 혼자 자면서도 웃는다. 내가 맹추라, 그게 사는 건 줄 알고 살았다."


평화의 댐과 비수구미

 겨울 넉 달 호수가 얼면 건넛마을까지 걸어서 마실을 다녔다. 밤새워 화투 치며 놀았다. 날이 새면 함께 다음 집으로 가서 또 놀았다. 보름밤이면 계곡 위로 올라가 후라시 비추며 메기를 잡았다. 딱 먹을 만큼만 잡았다. 1987년 그 이름도 유명한 평화의 댐 공사가 시작됐다. 계곡 꼭대기 해산령에 터널 공사가 시작됐다. 계곡 아래 마을까지 작업도로가 생겼다. 대단히 많이, 삶이 바뀌었다. 장윤일이 말했다.

 

평평화의 댐 아래‘비목공원’.

 

"트럭 기사들이 차 밧데리로 메기를 잡은 거라. 그 많은 트럭이. 한 시간에 비료 포대로 2개를 잡았느니, 3개를 잡았느니 소문이 나서 터널 공사 2년 내내 밧데리로 계곡을 지져놓은 거라. 나중에는 개울에 약을 풀어서 집 앞에까지 고기들이 떠올랐어." 충직하던 누렁이도 두 번 차로 쳐서 둘러업고 가버렸다. '귀한 생명들이니 먹을 만큼만 잡으라'고 네 남매에게 들려주던 교훈은 무색해졌다. '에티켓이라곤 전혀 없는 도시 사람들' 손에 고추밭은 짓밟히고 익지도 않은 배나무는 가지째 꺾여나갔다.

 

이리로 가기도 하고 저리로 흐르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길이 마을 어귀까지 뚫렸다. 무례한 도시 사람들이 비수구미에 돈을 뿌리고 갔다. 부부가 던져대는 날것 그대로 인생 이야기에 그 사람들이 울고, 또 찾아온다. 김영순이 말했다. "내 살아온 역사가 너무 힘들었는데, 남에게는 재밌나 봐."

 

▲평화의 종 위, 날개 잃은 비둘기.

 

그 돈으로 부부는 네 남매 어엿하게 키워 시집 장가 보냈다. 전기밥솥에 밥 안쳐놓고 밭에서 일하다가 집에 가서 먹고 싶다던, 문명화의 꿈도 실현됐다. 김영순 표 산나물밥 식객들이 팔도에서 몰려든다. 밥값 깜박하고 갔다가 입금해주는 손님들을 보면 "그래도 우리나라는 살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순이 말했다. "댐 공사 전에는 70리 뱃길뿐이었는데, 꿈같은 얘기였는데… 여기 길 날 줄 누가 알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면허증을 딸걸. 어디 가고 싶어도 누가 데리고 가야 갈 수 있으니 이거 원, 더러워서." 목소리에 물기가 비쳤다.


평화의 댐, 미륵바위와 꺼먹다리

 화천읍에서 461번 도로를 거쳐 평화의 댐으로 북상해본다. 화천댐을 건설할 때 만든 다리가 나온다. 목재 상판과 난간을 콜타르로 칠해 꺼먹다리다. 발전소에서 그 옆에 콘크리트로 또 다른 다리 기초를 만들다가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소련이 그 위에 교각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상판을 올려 다리를 완성했다. 세 나라가 합작한 다리 이름은 구만교다.

 

▲미륵바위 앞에 있는‘숲으로다리’. 소설가 김훈이 작명했다.

 

더 북상하면 비수구미를 격변시킨 해산터널이 나온다. '아흔아홉구비'라는 표현이 절대로 과장이 아닌 험한 길(내비게이션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끝에 평화의 댐이 나온다. 옆에는 공원이 있다.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수집하고 기부 받은 탄피 1만관(37.5)을 녹여 종을 만들어놓았다. 평화의 종이다. 9999관으로 종을 완성했다. 1관은 따로 비둘기 오른쪽 날개를 만들어놓았다. 통일이 되는 날, 종 위에 날개 없이 앉아 있는 비둘기 한 마리에 날개를 붙일 계획이다.

 

공원 아래쪽에는 비목공원이 있다. 가곡 '비목(碑木)'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1960년대 ROTC 장교 한명희(전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는 화천 비무장지대에서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했다. 1967년 그가 쓴 시에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붙인 가곡이 비목이다. 10년이 지난 1977 2 17일자 경향신문은 "이 노래가 실린 음반 판매량은 이미자의 음반 '동백아가씨'(15만 장)를 크게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공원에는 비목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철조망이 설치돼 있다. 마음이 먹먹하다.


낭만적 공간으로 바뀐 파로호

 2009 4 25일 김영순이 환갑을 맞았다. 시동생 장윤옥이 비수구미 계곡 7㎞를 걸어내려와 형수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아궁이 앞에서 뜬눈으로 밤새우기 일쑤였던 나날들… 긴 세월 모진 세월 뒤로 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모두 울었다. 거짓말쟁이 남편도 울었다. 김영순은 "가보(家寶)"라고 했다. 2013 5 10, 결혼한 지 48년 한 달 3일 만에 김영순은 평생 소원이던 웨딩사진을 찍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리 답한다. "너는 왜 했냐. 나도 여자다."

 

461번 도로변은 단장됐다. 주민들은 미륵바위에 기대어 미래를 꿈꾼다. 소설가 김훈이 '숲으로다리'라 명명한 낭만적인 다리가 숲으로 사라진다. 비수구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작업도로는 산책로가 되었다. 화천 사람들은 그 길을 선로(仙路)라고 부른다.

 

그 길에서 화전민 아들 장복동(49)에게 물었다. "당신은 비수구미에 살 것인가." "죽을 때까지." 또 물었다. 20년 뒤 비수구미에 와도 반기겠냐고. "죽을 때까지." 부부가 떠나고 없을지도 모를 그 작은 계곡에서, 나는 칠십 노인 장복동과 재회하는 꿈을 꾸었다. 모진 삶 다 끝나고 훨훨 나는 꿈을 꾸었다.

 

[50] 소년 임금 살인사건과 영월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

559년 전 청령포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평온하게() 지나가는() , 영월(寧越)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한번 들어가면 큰 화() 없이 무탈하게 살 수 있는 땅이다. 하나 559년 전 열일곱 먹은 소년이 영월에 가고 살고 죽은 내력은 그 누가 보아도 평온할 수 없었다. 소년 발걸음 닿은 곳은 빠짐없이 21세기 관광지요, 인문 기행 목적지가 되었다. 소년 이름은 이홍위요, 그가 죽고 나서 200년 뒤 붙은 이름은 단종이다.

 

강원도 영월과 이홍위, 노산군, 단종

1457 6 22(이하 음력) 조선 7대 임금 세조는 내시 안노를 화양정으로 보내 영월로 떠나는 조카 홍위를 배웅했다. 자기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멀쩡하게 임금으로 있는 눈엣가시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앉히고 왕이 된 지 햇수로 3년 만이다. 그 전날 세조는 조카를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유배를 명했다. 화양정은 지금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있던 정자다. 세종 임금이 만들고 이름 지은 정자다. 1911년 큰 벼락을 맞고 부서져 터만 남아 있다. 나흘 뒤 세조는 형수이자 노산군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묘를 파헤쳐버렸다.

 

어미 묘가 어찌 됐는지 알 턱 없이, 열일곱 살 소년은 양주·양평·원주를 거쳐 일곱 날 만에 영월에 도착했다. 주천을 지나 영월로 들어가는 입구 배일치 고개에서 소년은 서쪽 한양을 향해 큰절을 했다. 영월에 다다르자 큰 고개가 나왔다. 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군졸 쉰 명은 노산군을 서강 건너 청령포에 가뒀다. 궁녀들도 함께였다. 서강이 360도 휘어들고 한쪽은 절벽인 담벼락 없는 감옥이었다. 청령포를 유배지로 고른 사람은 영월 수령을 지냈던 신숙주였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서강이 석회암 지대를 흐르며 만든 물돌이동이다. 559년 전 이 절경 속에 열일곱 살 먹은 소년 이홍위, 단종 임금이 두 달 동안 유배됐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했다. /박종인 기자

 

수양대군에 왕위 뺏긴
어린 임금 단종

영월 유배 넉 달 만에
사약 받고 시신은 버려져

  세조는 옷 열 벌을 보내고 사시사철 제철 과실이 끊이지 않도록 배려도 했다. 청령포에 우물이 없다고 하니, 우물도 급히 뚫으라 자상하게 지시도 했다. 매달 영월 수령에게 조카 문안을 드리라고 엄명도 내렸다. 가뭄이라 전국에 술을 금했으나 청령포만큼은 술을 바치도록 일러두었다. 석 달 뒤 역모를 계획하던 금성대군 무리가 발각됐다. 10 21일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 죽었다. 나라에서는 예로써 장사 지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실록에 세조 3 6 22일부터 10 21일까지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은 하나같이 단종이 1457 10 24일 사약을 먹고 죽었다고 적고 있으니, 실록 기록자는 단종의 죽음을 사흘 전에 예언했다는 말인가. '예로써 장사 지냈다'는 기록 또한 세간에 전하는 기록과 영월 땅에 남은 흔적으로 볼 때 터무니가 없다. 역사는 기록이고 거울이며 교훈이며 반()교훈이다. 그릇된 기록은 교훈도 반교훈도 될 수 없다.


역사를 기록하는 고명진

▲미디어기자박물관 관장 고명진.

 

1980년대 이래 고명진은 최루탄을 맞고 살았다. 1984년부터다. 고명진은 사진기자였다. 주간시민, 경향신문, 선데이서울, 한국일보, 통신사 뉴시스까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고명진은 카메라로 세상을 기록했다.

 

은퇴했으면 세상 구경이나 하고 동무들과 앉아서 음풍농월하는 인생도 즐거웠겠다. 그런데 기록하는 습성은 떨쳐내지 못해서 은퇴 이듬해 고명진은 현역 때 그러모아 둔 온갖 기록 싸 들고 영월에 내려와 미디어기자박물관을 열고 말았다.

 

기억하는가. 1987 6월 부산에서 대형 태극기 앞을 웃통을 벗고 뛰어가며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던 사내 사진을. 비폭력을 상징하는 이 사진은 1999 12 31일 미국 AP통신사가 발표한 '금세기 최고 사진 100'에 선정됐다. 이 사진을 비롯해 그가 민주화 시위 때 찍은 사진들은 지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명진이 말했다. "역사는 기록이다. 거대한 역사가 전부가 아니다. 작고 세밀한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나는 그 역할을 했다." 겁에 질린 노인의 눈망울, 돌멩이를 쥔 대학생의 주먹이 역사라고 그가 말했다. 박물관에는 그가 현역 시절 쓰던 카메라, 필름, 신분증, 출입증, 동료가 기증한 출입국 기록, 신문, 완장, 고명진이 촬영한 역사적 사진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최근 유행 중인 드론 촬영 교육도 하고, 사진을 통해 초등학생들에게 잔잔하되 거센 역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왜 영월에, 왜 박물관인가. 그가 말했다. "원래는 단양에 가서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누라 친구가 영월 놀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문 닫은 박물관이 두 곳 있다는 게 아닌가. 귀신한테 홀렸다." 장터에 가다가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단양으로 가려던 고명진의 발길은 잠시 영월에 멎어 있다.

 

▲서강이 만든 ‘한반도 지형’. 이 지형이 있는 땅 이름은 한반도면이 됐다.

 

박물관 옆에는 서강이 흐른다. 서강에는 한반도 생김을 똑 닮은 물돌이동이 있다. 서강이 360도 휘돌면서 만든 지형이다. 영월 땅은 지질이 석회암이다. 물살이 땅을 갉아내며 흘러가 그런 지형을 만들었고, 그걸 용케 찾아내 사람이 몰린다. 사람이 몰리니 돈이 몰리고, 그리하여 2009년 박물관이 있는 서면(西面)은 한반도면(韓半島面)으로 공식 개명했다.


방랑 시인이 잠든 영월

방랑 시인 김삿갓이 그랬다. 홍경래의 난 때 역적질을 한 할아버지 탓에 파락한 집에서 태어난 삿갓 김병연(1807~1863)은 고향 경기도 남양주를 떠나 황해도로, 강원도로 떠돌았다. 영월에서 살면서 장가도 가고 아들도 낳았지만 역적 집안이요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보인 모멸감에 팔도를 떠돌았다.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녔고, 손길 가는 대로 시를 썼고, 눈길 가는 대로 여자를 건드리고 파락호로 살았다. 그러다 전라도 화순 동복에서 죽었는데, 3년 후 그 아들 익균이 시신을 모셔 와 묻은 곳이 바로 영월이었다.

 

▲김삿갓면에 있는 방랑시인 김삿갓 묘.

 

불과 150년 전 이야기이나 세간에서는 망각됐던 삿갓은 영월 사학자 박영국에 의해 부활했다. 김삿갓을 찾아다니던 박영국은 1982년 영월 창절서원 원장인 안동 김씨 김영배를 만났다. 그가 박영국에게 말했다. "우리 증조부가 한양 가서 김병기라는 친척을 만났지. 그 친척이 김병연 삿갓 묘가 양백지간, 영월과 영춘 사이에 있으니 돌봐달라고 했대." 그리하여 1982 10 24일 박영국과 김영배는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 영월과 영춘 사이 좌표를 찾아 헤매다 와석골에서 무덤과 생가 초석과 기둥을 발견했다. 그때 3대째 살고 있던 와석골 이장이 이리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삿갓 무덤이라고 알고 있었고, 왜정 때 이미 일본 기자들이 여러 번 다녀갔어." 지금 김삿갓 무덤이 있는 계곡은 김삿갓계곡이 되었다. 계곡이 있는 하동면은 김삿갓면이 되었다.


청령포와 엄흥도와 정사종

, 다시 단종 이야기다. 청령포로 유배된 지 두 달 뒤 폭우가 쏟아졌다. 궁녀 6명과 섬 아닌 섬에 갇힌 소년 모습을 상상해보자. 죽음은 예견된 운명이지만, 익사는 아니었다. 한양을 향한 서쪽 절벽까지 올라가 크게 울어도 보고 두 갈래로 갈라진 거송(巨松)에 앉아 울어도 보았지만 하릴없었다. 유배 두 달 만에 노산군은 읍내에 있는 객사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거기에서 다시 두 달 만에 사약을 받은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찌 자발적으로 독약을 먹을 수 있으랴. 어찌 스스로 목을 매 죽을 마음을 먹을 수 있으랴. 하여 '공명심에 불타는 하인이 숨어 있는 소년을 찾아내 활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말이 나왔다. 사인은 불명이지만 최소한 실록처럼 자살은 아니었다.

 

▲소년 임금 단종이 묻힌 영월 장릉.

 

실록에는 "스스로 죽었다"
"
예를 갖춰 장례 지냈다"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
"
작고 정직한 기록이 역사"

 예로써 장사를 지낸 것도 아니었다. 얼어붙은 서강변에 버려진 시신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날 밤 엄흥도라는 영월 하급 관리와 영월 유배 소식에 군위현감으로 있다가 영월에 와 있던 정사종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관에 넣고 장례를 치렀다. 엄흥도가 지게에 관을 지고 한 언덕 위에 묻으니, 이 무덤이 200년 뒤 숙종 때 단종 왕으로 복위시키며 지금 보는 장릉이 되었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도대체 누구인가.

 

왕실 정통성에 결정적 흠집인 단종 사건은 이때에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숙종은 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어제시(御製詩)를 영월 땅에 내려주었다. 시를 현판으로 내건 정자는 사라졌고, 이후 영조와 정조가 잇따라 글을 덧붙여 내리니, 지금 영월 초입 요선정에서 그 현판을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소년 이홍위, 영월과 단종에 얽힌 이야기다.

 

[영월 여행수첩]

1. 요선정: 반드시 강물 아래 요선암을 둘러볼 것. 정자에 붙은 세 임금의 현판도 의미 있음.
2.
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 관장으로부터 설명을 들을 것. www.ywmuseum.com, 5000. 월·화 휴관.
3.
한반도 지형: 숲 속으로 난 오솔길 즐기기.
4.
선돌/소나기재: 선돌 앞에 주차장. 소나기재 내리막길이 낭만적.
5.
장릉/관풍헌: 왕릉 어귀에 있는 정령송의 애틋함.
6.
청령포: 관음송이 주는 먹먹함. 도선료 3000.
7.
김삿갓계곡: 무덤 앞 시비 공원과 위쪽 생가. 하루 나들이라면 김삿갓계곡은 일찍 해가 지니 서두를 것.◎

 

박종인의 땅의 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