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18-34)2016.01.06 겨울 가평과 흑자(黑磁) 장인 김시영 부녀 - 04.27 마의태자 루트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18-34
2016.01.06 겨울 가평과 흑자(黑磁) 장인 김시영 부녀
강변에는 파리한 裸木이… 도공(陶工) 작업실엔 뜨거운 가마불이…
노름을 하다가 잃은 사람에게 "옜다, 먹고 떨어져라" 하고 던져주는 돈을 '개평'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개평이 경기도 가평에서 온 말이라고 우스개를 던진다. 가평이 하도 먹을 게 없어서 떡 하나를 만들어도 맛이 없었으니, 떡 사러 온 사람이 맛없다 하기도 전에 장사치가 미리 알아서 몇 개 더 얹어주던 관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평, 가평 하다가 개평으로 변했다는 이야기. 뒤집으면, 가평은 가난은 해도 모질지는 못해서 이방인에게 인심을 베푸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이다. 1000년 전 망해가던 나라 고려 공민왕은 그 가평 땅에 잠시 몸을 의지했다. 명필 한석봉이 가평군수로 재직할 때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또 가평 땅을 찾아와 학문과 예술을 꽃피웠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예술이 있고 학문과 철학이 있고 여행이 있다. 검은 도자기를 만드는 21세기 도공(陶工) 김시영과 두 딸 자인, 경인은 가평 사람이다.
공민왕과 홍건적과 가평
우왕, 창왕과 공양왕에 앞서 고려 왕위에 올랐던 공민왕(1330-1374)은 예술가였다. 예술을 추구했다는 뜻이 아니라 정치에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망해가는 원나라에 대항해 요동 정벌도 하고 초기에는 내치(內治)에도 충실했지만 원나라에서 장가들었던 노국공주가 1365년 아이를 낳다가 죽은 다음에는 반 폐인으로 살았다. 개혁 국사(國事)는 승려 신돈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기가 그린 공주 영정을 안치할 궁궐 신축 공사에 몰두했다. 공사장 주변에 "쓰러져 죽은 소가 길가에 널려 있을" 정도로 인력과 비용을 써댔다. 노국공주가 죽기 4년 전 홍건적이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젊은 시절 패기는 다 잃고 남쪽 안동까지 달아나고 말았다.
개경을 떠나 남하하던 왕은 미원(迷源) 땅에 이르러 궁궐을 지었다. 궁궐 근처 산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궁궐이 있는 곳은 왕터산이고 그 아래 고개는 도성재이며, 왕이 올랐던 산은 국망봉이다.
궁궐을 지었다는 미원이 지금 경기도 가평이다. 국망봉은 수도권 산꾼들 단골 산행지로 변했다. 어가 행렬이 지나갔던 북한강변은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다. 1000년 전 피란길 강변은 청평댐으로 호수가 됐고 떠나가는 길이 아니라 찾아가는 관광지로 변했다. 세월은 무상하다.
검은 도자기를 만드는 김시영
흑유(黑釉) 또는 흑자(黑磁)는 한·중·일 3국에서 널리 만들던 검은 도자기다. 청자가 우아하고 백자가 질박하다면 흑유는 우아함과 질박함이 공존하는 화려한 그릇이다. 철분이 든 유약을 발라 굽는 방식에 따라 광채가 나기도 하고 빨아들일 듯 칠흑 같은 어두운 검은색이 나오기도 한다. 가마 속에서 불길이 닿는 시간에 따라 기기묘묘한 무늬가 나오기도 한다. 이를 요변(窯變)이라고 한다. 김시영(58)은 그 흑유를 만든다.
가평읍내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서울로 유학 간 김시영은 하숙집에서 예술을 접했다. 하숙집 주인 두남 이원영은 서예가였다. 재일교포였던 두남은 아이에게 한국이 잊고 있던 흑유를 알려주며 "크면 꼭 흑유를 만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당부했다. 일본 다녀올 때면 아이에게 줄 장비와 재료를 한 보따리씩 사왔다.
용산공고 금속과와 연세대 금속공학과에서 불과 철을 배웠다. 77학번이다. 집안이 워낙 힘이 장사여서, 잠시 모스크바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를 꿈꾸기도 했지만 도자기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대학교 3학년 때 산악회에 들어가면서 산꾼으로 인생 행로를 또 한 차례 틀 뻔했다. 진짜 산꾼이 돼버려? 그러다 훗날 아내가 된 산악회 선배 홍옥주와 화전민터에 갔더니 발에 채는 게 까만 사금파리가 아닌가. 어떻게 도자기가 까맣지?
군대를 다녀와서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시험소 연구원으로 신소재를 연구했다. 일 때문에 만난 경기도 이천 도공들은 도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청자 가마터에 가면 어김없이 까만 파편들이 있다고 했다. 잊고 있던 단어가 떠올랐다. 흑유. 연대 대학원 세라믹공학과에 들어갔다. 졸업하고선 직장을 때려치웠다. 1991년 고향으로 돌아와 가마를 열었다. 이름은 가평요다. 공학도로 배운 철과 불과 흙이 예술로 합쳐질 차례였다. 김시영이 말했다. "흑유는 불길의 성격에 따라 색과 무늬가 크게 달라진다. 유약과 흙이 변성이 되면서 삼라만상이 창조되는 것이다. 몇 번 맛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학이라는 문을 통해 도자기에 접근하니 어렵고도 쉬웠다. 감(感)이 아니라 많은 시행착오에서 얻은 데이터를 근거로 하니 쉬웠고, 감으로는 완성됐다 느껴지지만 더 최적화된 데이터를 얻느라 실험을 반복해야 하니 어려웠다. 가마 온도가 1270도일 때, 1300도일 때, 그릇 위치가 앞일 때 뒤쪽일 때 기타 등등 변수가 많았다.
10년 동안 뇌 속에 데이터가 축적되더니 온 몸이 계측기로 변했다. 지금 김시영은 가평 고령토와 규석과 장석과 모래를 어떻게 배합해야 하는지 느끼게 됐고, 불 색깔을 보고 온도를 알게 됐고, 흙을 몇 번 두드려야 그릇이 될 정도가 되는지 손으로 알게 됐다.
검은색, 검은빛은 무한하다. 시선을 흡수하는 흑색, 반사하는 검은빛, 그리고 그 검은빛과 색 위로 화염이 만들어낸 온갖 무늬들. 그 세계가 김시영이 만드는 흑유 위에 창조돼 있다. 한국보다 일본이 김시영을 먼저 알게 됐다. 2009년 일본 컬렉터들이 작품 구매 때 참조하는 일본미술구락부 '미술가명감'은 가평요 말차다완(抹茶茶碗) 가격을 97만엔이라고 감정했다.
도공의 두 딸, 김자인과 김경인
산악회 선배 홍옥주와 결혼한 김시영에게 산은 또 다른 목표였다. 첫딸 자인이 백일을 맞았을 때 두 사람은 북한산 암벽을 올랐다. 배낭에는 백일 된 자인이 들어 있었다. 유전과 환경은 무섭다. 자인과 동생 경인은 각각 검도와 유도를 배웠다. 경인은 고등학교 때 로체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다녀왔다. 지난 12월 31일 아버지는 동해바다로, 큰딸은 청계산으로, 둘째딸은 소백산으로 뿔뿔이 떠났다.
두 딸은 이화여대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나와서 지금 도자기를 만든다. "밤새 작업실에 있다가 아침에 흥분한 목소리로 우리를 깨우는 아빠가 존경스러워서"(자인) "멋져보여서"(경인) 아빠에 대한 존경심에 물려받은 재주와 취향이 결합해 두 딸은 가평요 2대 도공이 되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언감생심이었는데, 자기들이 흑유를 한다니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맏딸 자인이 흑유 다구로 차를 만들면 부녀는 다실에 앉아 논쟁을 벌인다. "최근에 아빠가 커다란 흑유 달항아리를 만들었는데, 굽 높이가 파격적이라 우리가 반대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한 컬렉터가 바로 그 항아리를 구입하는 바람에 두 딸은 입을 꾹 다문다. "아빠가 우리보다 실험적이라 우리가 제동을 걸 때가 많다. 아마 우리는 강단에서 배운 게 기초이면서 굴레일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는 그릇 만들기만 하고 굽는 건 해보지 않았으니, 아빠가 우리 스승이다." 요즘 김시영이 만드는 검은 달항아리 시리즈는 3000만원을 호가한다. 느낌이 강렬하고 깊다.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자인과 경인은 생활자기도 만든다. 자본주의 시대에 예술가도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 세상이 흑유를 접할 수 있도록 두 딸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소품들을 함께 만든다.
2008년 공학도 김시영을 산과 흑유로 안내했던 홍옥주가 하늘로 갔다. 큰딸 자인이 그리움과 아픔을 숨기며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좋으니 얼른 새장가 가시라"고 채근해도, 김시영은 가마불만 지폈다. 그러다 2년 전 제자였던 공예가 최병랑이 하늘로 간 그녀의 빈터를 채웠다. 새롭게 구성된 도공 가족은 지금 늘미재 너머 홍천 길곡리에 도요지를 세웠다. 이름은 여전히 가평요다.
공민왕 몽진길, 그리고 가평 드라이브
왕이 난리를 피해 도주하는 행위를 몽진(蒙塵)이라고 한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공민왕은 개경에서 가평으로, 파주를 거쳐 월악산과 울진을 지나 안동으로 몽진을 떠났다. 하나하나가 21세기 유명 관광지다.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을 지나 가평으로 가는 길은 속칭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두 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지나 북한강 줄기를 따라 북상하는 도로변은 사계절 아름답다. 청평면 상천역에서 복장리 마을회관까지 12㎞ 산중 도로는 특히나 아름답다. 일교차가 심한 이즈음 이 길에는 시도때도 없이 나목(裸木)에 상고대가 핀다. 공기 중 수증기가 눈꽃으로 얼어붙는 현상이다. 운 좋으면 양평~가평~춘천 경춘가도변에서도 상고대를 만날 수 있다. 잣 산지답게 가평에는 늘푸른 잣나무숲이 있다. 축령산 잣나무숲이다.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피톤치드를 원없이 흡입할 수 있는 숲이다.
문제 하나. 과연 공민왕은 그 관광지를 즐기며 피란을 했을까? 답은 '그렇다'다. "왕은 영호루에 가서 배를 타고 풍광을 구경한 후 강가에서 활을 쏘았다. 안렴사가 왕을 위해 잔치를 열자 구경꾼이 빽빽이 모여들었다."(고려사) 살림살이 어렵고 우울한 이 시대 모처럼 나들이 떠난 우리도 겨울을 즐길 권리가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곳이 개평 잘 주는 인심 후박한 땅 가평이라면.
[가평 여행수첩]
1. 축령산 잣나무숲 3월까지 입장료 없음. 너른 잣나무 숲 속에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눈이 남아 있어 운치가 있다. 아침고요수목원 가는 길목. 정식 명칭은 '잣향기 푸른 숲'. 가평군 상면 행현리 922-1
2. 쁘띠프랑스 지난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도 매니저가 천이슬을 공중부양시킨 장면을 찍으며 일약 인기 폭발한 곳. 프랑스를 테마로 한 벼룩시장, 기념품점, 공연 등. 2월 말까지 오후 8시 폐장. www.pfcamp.com, (031)584-8200.
01.13 충주 역사 순례와 '기와 검사' 유창종 - 中原 땅 한가운데 칠층탑 하나, 석양에 침묵한다
입석마을 이야기
"금의환향하겠다"고 고향을 떠났던 김재문은 1967년 12년 만에 귀향했다. 고향 입석마을은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게 산다고 천대받던 마을이었다.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다. 쌀 대신 고추를 심고 외상으로 모래땅 사서 하우스 농사 지어서 팔았다. 올빼미처럼 밤에도 일했다. 1969년 가을 고추 800근을 팔았더니 쌀 100가마보다 소출이 좋았다. 땅값도 갚고 집도 잘살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김재문을 이장으로 뽑았다. 아이들은 꽃밭을 가꾸고, 여자들은 모래와 자갈을 나르고, 남자들은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리를 세우고 하수구를 만들었다. 1972년 8월 15일 광복절 날, 입석마을이 새마을운동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나흘 뒤 단군 이래 최악의 홍수가 남한강 유역을 덮쳤다. 쉰한 집 가운데 스물한 집이 물에 잠겼다. 갓 세운 다리 두 개와 하수구, 농로도 사라졌다. 논과 밭 80%가 떠내려갔다. 고난 극복 이야기는 생략하자. 4년 뒤인 1976년 3월 마을은 재건됐다. 다리와 하수구와 농로와 논밭은 복구됐다.
입석마을 기적은 마을 사람들이 만든 기적이었다. 기적을 만든 사람들은 큰 비석에 '七顚八起(칠전팔기)의 마을'이라 새긴 뒤 정체불명의 고비(古碑)가 서 있는 입구에 세웠다. '입석(立石)'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 고비에서 유래했다. 그날 마을 여자 정순택이 고비 위에 백설기를 얹고서 고사를 지냈다. 기적은 쉽게 찾아오지 않지만 쉽게 끝나지도 않았다.
3년이 갔다. 서른네 살 먹은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 검사 유창종이 동료들과 함께 마을을 찾았다. 1979년 2월 24일 석양 무렵이었다. 사흘 전 정순택이 고사를 지내고 간 백설기가 고비 위에 하얗게 얹혀 있었다. 사각(斜角)으로 비치는 햇빛 속 비석을 살펴보다가 일행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글자다!" 지금은 충주 고구려비라 개칭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기적처럼 발견된 순간이었다.
아주 복잡했던 먼 옛날 중원 땅
남한강변 충주 일대를 통칭 중원(中原)이라 한다. 한강 뱃길과 육로와 기름진 평야와 철광산을 차지하려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살벌한 전쟁을 벌였다. 중원 전쟁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한다.
371년 평양으로 진군한 백제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죽였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한성에 쳐들어가 아신왕을 무릎 꿇렸다. 백제와 임나가야, 왜 연합군이 고구려와 신라에 복수전을 펼치자 광개토왕은 연합군을 패퇴시키고 내친김에 신라와 임나가야까지 쳐들어갔다. 475년 장수왕이 한성에서 백제 개로왕을 죽였다. 한강 유역은 고구려 땅이 되었다. 481년 장수왕은 신라 북쪽을 차지한 뒤 중원에 국원성을 설치했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합동복수전을 벌여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죽령 이북을 차지했다. 고구려 장수 온달은 죽령 이북을 수복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590년 단양에서 신라군 화살에 죽었다. 진흥왕은 단양에 적성비를 세웠다. 내용은 "협조하면 상을 준다"였다. 진흥왕은 곧바로 칼을 백제로 돌려서 한강 하류를 빼앗고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다.
신라는 훗날 국원성을 중원경으로 개칭했다. 고려 때는 예성이라고도 했다. 신라는 강변에 절도 지었고 귀족들 공동묘지도 만들었다. 절은 사라졌지만 절에 있던 칠층석탑은 위풍당당하게 남한강을 굽어본다. 전설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이 걸음 속도가 똑같은 사내 둘을 신라 땅 남과 북에서 중앙으로 걷게 해 그들이 만난 곳에 탑을 세웠다. 그래서 탑 이름이 '중앙탑'이라고 했다. 국보 제6호인 탑 주변은 훌륭한 산책 코스다.
탑에서 자동차로 남쪽 10분 거리에 신라 귀족들 무덤, 누암리 고분군이 있다. 북쪽으로 10분을 가면 입석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고구려비전시관이 있다.
검사와 답사 모임 예성동호회
1945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유창종은 지금 아내 금기숙과 함께 서울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 공동관장인데, 그 전에는 검사였고 어릴 적에는 교과서를 철석같이 믿는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4·19 학생혁명이 터졌다. "선거로 뽑은 대통령을 물러가라고 데모하는 대학생 형들을 왜 착하다고 하는가?" 담임이던 수학교사 박수철이 이 당돌한 아이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도시락을 두 개씩 싸와라." 선생은 방과 후 아이에게 역사를 가르쳤다.
새벽 두시에 일어나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며 공부한 끝에 대전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더니 5·16 군사쿠데타가 터졌다. 4·19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생들에게 또 질문했지만 "공부나 해서 성공하라"며 혼쭐만 냈다. '성공? 데모 잘하는 고려대를 가려 했는데 육사를 가야 하나?' 답을 주지 않으니 스스로 찾겠다고 작정했다.
시내 고교생들을 모아 철학 서클을 만들었다. 이름은 '한다발 철학'. "남녀 간 우정이 존재하나"라는 유치한 질문부터 우주의 근원까지 자문하고 자답했다. 인생 진로도 자문자답했는데, 서클 회원들은 유창종 인생 진로를 서울대 법대로 정해줬다. 유창종이 말했다. "어린 마음에 모두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먼저 깨인 사람들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원들이 정해준 대로 서울 법대에 들어가서도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검사가 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1978년 2월 청주지검 충주지청으로 발령이 났다. 그해 식목일 아내 금기숙과 함께 부여에 있는 골동품상에 들러서 민화를 구입하고 기와 두 점을 개평으로 받았다.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있던 터라, 삼국이 쟁패했던 중원 땅에 발령나니 그 역사가 궁금했다. 그래서 역사 답사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해 8월 5일 중앙탑 앞에서 주운 와당 한 조각에 그만 이상한 인생길이 활짝 열렸다.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 특성이 와당 하나에 조합돼 있는 게 아닌가. 청자며 백자는 언감생심인데 개평으로도 주는 와당에 이렇게 역사가 적혀 있으니, 얄팍한 평검사 봉급에 수집품으로는 딱이었다. 유창종은 "검사 직업에 충실하게, 역사를 추리하면서 답사를 다녔다"고 했다. 답사지 선정도 범죄집단 훑듯이 충주를 열두 지역으로 나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9월 초 답사를 마치고 어느 음식점에 들렀더니 큼직한 식당 댓돌에 연꽃이 새겨져 있었다. 돌은 기록에만 전해오던 예성(蘂城) 성돌로 밝혀졌고,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얼떨결에 답사 모임은 '예성동호회'로, 회장은 유창종으로 결정돼 버렸다. 이후 유창종은 기와검사로 불리게 되었다. 유창종과 충주북여중 국사 교사 장준식, 중원군 문화공보실장 김예식이 주축 멤버였다. 바로 이 예성동호회가 고구려비를 발견한 것이다.
중원 땅 역사 밝혀준 고구려비
1979년 2월 24일 예성동호회는 의정부로 발령난 유창종의 송별 답사를 떠났다. 유창종이 말했다. "중원 땅이니 만큼 틀림없이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웠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순수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날 동호회는 "입석마을이라고 있는데, 그 어귀에 고비가 하나 있다"는 회원 김예식의 말을 따라 입석마을로 갔다.
백설기를 머리에 인 비석에 석양이 비치고, 눈과 손으로 희미한 한자를 확인해가며 회원들 온몸은 조금씩 소름으로 뒤덮였다. 유창종이 말했다. "우리는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국내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비를 우리가 찾아낸 게 아닌가."
학계 연구 결과 고구려가 신라를 '아우' 혹은 '동이(東夷)'라고 불렀고 의복을 '하사'했으며 신라 '영토(國)'가 아닌 '땅(土)'에서 고구려 관리가 주민들을 '소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구려가 중원 땅을 차지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였으니, 고대사의 수수께끼 하나가 마침내 풀린 것이다. 며칠 뒤 찾아온 학자들 앞에서 정순택이 마지막으로 비석에 고사를 지내고 비석은 마을 창고로 옮겨졌다. 비석은 2012년 마을 앞 충주고구려비전시관으로 안전하게 옮겨져 전시 중이다.
역사에서 배운다
신라 진흥왕은 가야로부터 항복을 받고서 가야 유민들을 중원으로 몰아냈는데, 그중 한 명이 악성 우륵이었다. 우륵은 지금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고 곡을 짓곤 했다. 남한강과 달천을 굽어보는 탄금대 또한 훌륭한 산책 코스며 답사 코스다. 임진왜란 때 장군 신립은 "훈련 안 된 우리 조선군은 배수진을 쳐야 죽기 살기로 싸울 수 있다"며 천혜의 요새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문경새재에 당도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텅 빈 새재 앞에서 당황했다. "아무도 없다"는 보고를 거듭 듣고 나서야 고니시는 "하늘이 도왔다"며 진군했다. 신립 부대는 전멸했고, 신립은 탄금대에서 투신자살했다. 군사학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죽을 각오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탄금대에서 배운다.
유창종은 마약검사로 이름을 날리다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평생 모은 와당 1873점을 기증하고 이듬해 퇴직했다. 2005년 일본 와당 수집가 이우치가 소장한 조선 와당 컬렉션을 전 재산을 털어 환수해왔다.
2008년 서울 부암동에 유금와당박물관을 열었다. 환갑인 2005년부터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해 중국과 일본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의 중이다. "좋은 옷, 비싼 음식 탐내지 말고 옛 문화 속에서 지혜를 배우며 20년, 30년 뒤를 설계하고 그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지혜를 탄금대에서 배운다. 선인(先人)의 흔적을 보듬어낸 입석마을 어른들에게 배운다. 그게 중원 땅이다.
[충주 여행수첩]
1. 중앙탑공원 통일신라 때 세운 칠층석탑은 국보 제6호다. 남한강변에 공원이 잘 조성돼 있다. 가끔 훈련 중인 전투기와 백로가 탑 위로 교차 비행하는 신기한 풍경도 볼 수 있다.
2. 누암리 고분군 이정표에는 '루암리 고분군'으로 돼 있다. 신라시대 고분들이 집단으로 서 있다.
3. 탄금대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고 가야금 다섯 곡을 완성했다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 장군과 부대를 기리는 탑도 서 있다. 풍광을 구경하며 산책하기 좋은 장소.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01.20 목포 다순구미 마을과 토박이 할머니 황순자 "그래도 그 골목은 따숩고 정겨웠으니…"
100년 전 일제강점기 시가지가 그대로 남았고 다순구미 골목엔 가난한 조선인 애환이 보인다
경찰관 구종명 불망비
1906년 10월 25일 목포에 살던 일본인 후지키 히로스케(藤木弘助)가 오경오라는 사람을 때려죽였다. 빚을 갚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아들 오수민이 찾아가 후지키 배를 칼로 갈라 죽이고 창자를 볏짚에 담아 무안경무서에 자수했다. 무안경무서는 1897년 개항한 목포 치안을 맡은 관청이다. 격분한 일인과 조선인 사회 사이에서 경찰관 구종명(具鍾鳴)이 "서로 죽이고 죽였으니 이걸로 끝"이라고 중재했다. 나라 꼬라지가 엉망진창이던 그때 목숨을 건진 조선인들은 경무서에 의인(義人) 구종명을 기리는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구종명이 근무한 경무서는 죽동에 있었다. 죽동은 유달산 북쪽 기슭이다. 개항 후 대한제국이 외국인에게 토지를 경매할 때 일본은 바다와 맞닿은 산 남쪽 기슭을 차지했다. 훗날 '해 뜨는 언덕을 먹었다'고 기록한 이 땅에 일본은 네모 반듯한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조선인은 산 북쪽 공동묘지 터에 거주지를 만들었다. 하수도도 상수도도 없었다. 그저 집들이 무계획, 무질서, 무분별하게 산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1980년대까지 초가집들이 그 기슭에 붙어 있었다.
그런 마을 가운데 하나가 다순구미였다. 올해 여든여섯 된 황순자는 다순구미에서 태어나 86년째 다순구미에서 산다. 유달산 남서쪽, 일본 신시가지 서쪽 비탈에 있는 다순구미는 개항 이전부터 존재한 마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 황순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도대체 몇 대째 자기네가 다순구미에 살아왔으며, 도대체 자기가 죽기 전 다순구미를 떠나기나 할는지. 섬에서 온 뱃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개항 후 부두 노동자들도 섞여 살았던 달동네, 이 가난한 골목길에 지금은 외지인 발길이 잦다.
목포 이야기
목포의 '목'은 여울목, 길목 할 때 그 목이다. 목포는 서해와 남해 바닷길 길목에 있는 포구였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뻘이 깊어 사람 살기보다는 군사 요충지로 역사가 오래다. 그래서 목포 역사는 매립의 역사다. 바다를 메워 집을 짓고 뻘을 덮어 큰 배가 정박할 항구를 만들며 목포가 성장해왔다. 목포 땅 80%는 바다였다. 호남선 목포역 또한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신시가지 꼭대기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군량미로 보이게 만든 노적봉이 있다. 일본인들은 그 아래에 영사관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윗덩이에 속아서 300년 전에 조선을 먹지 못했구나!" 영사관 신축 이후 100년이 흘렀다. 도로 구획은 물론 주요 건물들도 그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그대로 서 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식 건물들은 보는 이에게 낯선 충격을 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영사관은 목포시청, 목포도서관으로 쓰였다가 근대역사박물관이 되었고 한 블록 건너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도 역사박물관으로 변했다. 영사관 건물 앞에는 국도 1, 2호선 기점 기념비가 서 있다.
일본 갑부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가 지관을 시켜 고른 길지에 만든 정원도 남아 있다. 목포 기업인 이훈동이 해방 후 구입해 보존한 이 정원은 호남에서 가장 큰 일본식 정원이다. 정원에는 향나무가 주종인 숲이 있고 조선 팔도에서 모은 석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드라마 '모래시계' '야인시대'를 이 정원에서 촬영했다.
일본 목사가 지은 당시 교회는 창고로 쓰이고, 골목길마다 보이는 크고 작은 일식 주택들은 방앗간, 카페, 공예점으로 변했다. 조선과 일본 건달들이 맞붙곤 했던 오거리 일본 불교 사찰 동본원사는 교회로 쓰이다 문화원으로 변했다. 석조 건물 자재는 대부분 목포형무소 죄수들이 캐서 공급했다. 그 거리를 걷는 경험은 낯설고 참신하다. 대부분 1990년대 사라질 뻔한 건물들인데 '부끄러운 역사 또한 우리 역사'라는 공감대로 살아남았다.
100년 전 건설된 계획도시가 지금 봐도 제대로 정비된 도시라 선진 일본 기술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테랑 문화해설사 조대형이 말했다. "20년 되도록 목포 역사를 안내하지만 미워도 감탄스러운 일본인들"이라고. 하지만 시가지 기본 설계는 조선 정부가 용역을 준 네덜란드 기사 스테든이 했다. 도로 폭 또한 8~15m 네 종류로 엄격하게 구분했고 택지 또한 엄격하게 용도와 매립 여부를 구분했으니, 꼭 주눅 들어 감탄만 할 이유는 없다. 어찌 됐든 목포에 가면 우리는 역사 교과서에서 읽어본 그 역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다순구미와 째보선창
다순구미는 달랐다. '다순'은 '따숩다'는 말이고 '구미'는 여진족 말로 '움푹 들어간 후미'라는 뜻이니 다순구미는 해변에서 푹 들어간 양지 마을이라는 뜻이다. 뜻을 한자로 적어 온금동(溫錦洞)이라고도 한다. 가난한 조선인들 마을이다.
바다와 맞닿은 갯벌을 다순구미 사람들이 남부여대하며 매립해 땅으로 만들었다. 땅 한가운데를 디귿자로 파내고 배들 정박시킬 선창도 만들었다. 일직선으로 뚫린 길이 선창에서 마을 쪽으로 90도로 꺾어져 다시 나왔다. 사람들은 "언청이랑 비슷하다"며 선창을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 째보선창은 1981년 소년체전 때 매립됐다. 도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뭍이 된 그 바다에 집들이 들어서고 뱃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다순구미 아랫마을 사람들이다. 째보선창에서 멀리 마을 뒷산 여근바위에 기도를 한 뒤 바다로 간 뱃사람들은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물때가 나쁜 조금사리가 되면 남정네들은 집으로 와 아랫목에 몸을 뉘었다. 다순구미 사람들은 그때 생겨난 아이들을 '조금새끼'라고 불렀다. 생일이 똑같거나 비슷한 조금새끼들은 어른이 되면 또 바다로 갔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면 며칠 뒤 다순구미에는 같은 날 여러 집에 제사가 열렸다.
윗마을 사람들은 조선소에 다녔다. 남자도 다녔고 여자도 다녔다. 황순자도 다녔다. 다섯 아이 어릴 때는 바느질을 했고 애들 다 크고서 조선소에 나갔다. 이른 아침 아이들 밥 해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몸뻬바지 차려입고 출근했다. 하루 온종일 철선과 목선에 '뼁끼칠' 하고서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는 꼴로 집으로 와서 1922년 정인호라는 사람이 만들어준 아랫마을 우물 '큰샘'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밥을 하고 아이들을 먹였다. 아이들 얘기가 나오면 황순자는 눈물이 난다.
"내가 맏아들이랑 맏딸 친구들을 보면 눈물이 나. 걔들은 국민학교밖에 못 보냈거든. 그러면 걔들이 그래. '엄니, 대학 간 친구들도 백수들 많아요'라고. 그러면 더 눈물이 나." 큰아들은 엄니랑 같은 조선소 다니며 용접일로 돈을 벌었다. '지들 위해 썼으면 부자 됐을' 돈을 벌었지만 동생들 학교 보내느라 저축도 못했다고 했다. 세 칸 집에 일곱 식구 살다가 차례차례 시집 장가보내고 황순자는 지금 혼자 다순구미에 산다. 대문 기둥에는 연전에 하늘로 간 영감 문패가 그대로 걸려 있다. '막내아들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해서' 떼질 못한다.
다순구미 골목에 그 눈물이 발목까지 찰랑거린다. 젊은이들 다 떠나고 마을은 빈집투성이다. '바삐 오면 숨이 왔다갔다하는' 깔끄막이(비탈)에는 노인들 잡고 다니라고 스테인리스 난간이 설치돼 있다. 가끔 마주치는 소방전 박스와 박스 위에 붙여놓은 무의미한 '주차 금지' 스티커에 놀라기도 한다. 무계획, 무질서로 페인트칠한 담벼락은 각양각색이라 더 놀랍게 예술적이다. 에게해(海) 어느 섬을 닮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 여든 넘은 황순자는 두 무릎 관절 다 버리고 인공으로 박아넣었다. 그녀가 말한다. "애들 학교 보내고 할 때가 좋습디다. 힘들었는디, 옹기종기 살 때 그때가 좋긴 좋았어. 먹을 거 있으면 고구마, 김치 다 나눠 먹고. 멀리는 못 나누고 윗집 아랫집 세 집이서. 지금은 쓸쓸하지. 그래도 여기 계속 살고 싶어.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 자식들이랑 안 살 거여." 이 땅 그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 짐 되려 할까. 지금 다순구미에서는 그런 우리들 어머니들이 추억을 먹고 산다.
그래서 목포를 찾는 사람들은 다순구미를 빼놓지 않는다. 번듯한 볼거리 없지만 어느 틈에 예술이 돼버린 골목길에서 불쑥불쑥 마주치는 '엄니'들, 그 엄니들이 들려주는 포장 안 된 민낯의 역사를 다순구미에서 듣는다. 이미 확정된 재개발 계획이 시행되면 몇 년 사이에 폭삭 무너져내릴 우리네 가슴 먹먹한 옛 기억을 듣는다. 번듯한 원도심 신시가지에서 다순구미 추억까지 걸어서 30분이다.
100년 전에 멈춰진 시간
21세기 들어 하당 지역이 매립되고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일본인들 살던 원도심과 유달산 북쪽 구도심에 흐르는 시간은 멈췄다. 한 도시에 여러 작은 도시들이 칼로 자른 두부처럼 섞임 없이 공존한다. 그 100년 전과 50년 전과 21세기 현재 사이 물리적 공간 거리는 불과 30분이다. 다순구미에서 일본 영사관이 30분이고 영사관에서 삼학도가 30분이다. 삼학도에서 하당신도시 평화광장이 또 30분이다. 그 30분 국경을 넘지 못해 다섯 아이 키워낸 황순자는 86년째 유달산 양지 바른 기슭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가슴에는 몇백 광년 저 멀리 하늘로 간 영감이 웃고 있을 터이고.
[목포 여행수첩]
1.원도심 개항 이후 일본이 개발한 거리. 일본 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대표적. 성옥기념관도 필수. 추사를 비롯한 각종 옛 작품들. 예약하면 그 뒤에 있는 이훈동 가옥 정원도 견학 가능. 월, 공휴일 휴관. www.sungok.or.kr , (061)244-2527
2.다순구미 다순구미 골목길들과 입구에 있는 조선내화공장 건물.
3.각종 박물관 신안 보물선 유적이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자연사박물관과 남농 선생 작품을 모아놓은 부설 문예역사관 필수.
01.27 천안 아우내장터와 無名氏 先人들 - 先人들 흔적 품은 천안 들판에 해가 솟았다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 장이 섰다. 음력 3월 1일이었다. 이날 오후 장터에 맞붙어 있는 헌병 주재소에 40여 명이 몰려갔다. 맨 앞에 있던 유중무가 두루마기 허리끈을 풀어 일본인 헌병 목을 졸랐다. 제지하는 조선인 헌병 보조원 맹성호와 정수영에게 그가 일갈했다. "너희는 어찌 왜놈들과 함께 일을 하는가. 함께 만세를 부르라." 몇 시간 전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3000여 명 가운데 많은 이가 일본 헌병대 총에 숨진 상황이었다. 유중무의 형 중권은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죽었다. 형수 이소제도 함께 죽었다.
열일곱 먹은 조카딸이 주재소로 달려와 주재소장 고야마(小山) 멱살을 흔들었다.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찌하여 내 민족을 죽이는가." 군중이 1000명으로 불어나자 헌병대는 이번에도 사격으로 응대했고 군중은 흩어지거나 죽거나 끌려갔다. 그날 장터에서 일본 헌병 총검에 죽은 사람은 19명이었고 옥사(獄死)하거나 고문으로 훗날 순국한 사람은 29명이었다. 무명씨(無名氏)는 셀 수 없다. 아우내 만세를 주도하고 주재소장 멱살을 잡았던 소녀도 감옥에서 죽었다. 이름은 유관순이다. 1987년 8월 15일 아우내장터 서쪽 흑성산 아래에 대한국인 30만명이 모였다. 시간은 68년이 흘렀고 공간은 장터에서 7㎞ 서쪽으로 이동한 그날 그 자리, 사람들 앞에서 독립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두 강이 흐르는 병천과 유관순
잣밭내(栢田川)와 치랏내(칡밝내·葛田川)가 모인다고 해서 아우내라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을 이르는 충청도 말이다. 강원도에서는 아우라지라고 한다. 강이 모이니 교통이 좋아 아우라지와 아우내에는 대개 장이 열렸다. 지금은 한자로 병천(竝川)이라고 부른다.
길이 사통팔달인 천안은 '천안 삼거리'가 유명할 정도로 교통 요지였다. 큰 전투나 전쟁을 치렀다는 기록도 별로 없다. 그래서 천안, 하늘(天)처럼 평안한(安) 땅이었다. 1919년 그날까지는.
1902년 12월 16일 아우내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용두리에서 유관순이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선각자였다. 아버지는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인 조인원과 함께 교회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용두리 교회는 1905년 을사늑약 의병 때 한 번,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 한 번 이렇게 두 번 일본에 의해 불탔다.
관순이 열세 살 되던 1915년 유중권은 딸을 서울 이화학당으로 유학 보냈다. 열일곱 살에 용두리로 시집 왔던 김원숙은 다섯 살짜리 관순을 이렇게 기억했다. "귀밑머리, 황새머리, 조랑머리로 머리를 세 갈래로 땋고 사내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먼 조카 유제한은 이렇게 기억한다. "장난을 하면 반드시 우두머리가 되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한사코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어른들도 능히 그 뜻을 굽히지 못하였다." 영민한 이 소녀는 '무쇠 돌격 청년 남아야' 같은 창가를 즐겨 불렀다.
천안, 천안 사람들
천안에는 인재도 많았다. 진주성 전투를 이끈 장군 김시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철기 이범석, 상해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천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도 이곳 사람이다. 조병옥 박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지식인들이 허황한 형이상학에 빠져 있을 때 과학과 경제를 실학자들에게 설파한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도 천안에서 나고 죽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선인(先人)들이 태어난 곳이 정확하게 파악돼 있다. 홍대용 선생은 무덤은 물론 생가 주춧돌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느낌이 더 깊다. 이 선인들 생가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들은 파란색 교통 안내판만큼이나 많이 볼 수 있으니, 이 냉혹한 겨울날 천안 여행길은 감사의 순례길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험로(險路)였다. 초인적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길이었다. 이동녕은 누구인가. 나이 서른에 북간도에 학교를 세우고 조선에서 신민회를 만들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나이 쉰에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해 풍찬노숙하며 임시정부를 지켜낸 인물이다. 1940년 중경(重慶)에서 숨진 뒤 광복 후 서울 효창공원에 묻혔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남을 헐뜯기도 하고 핀잔도 주고 질투도 하며 '시시하게' 소시민적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유관순과 무명씨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전 서울에서 기미만세운동을 경험한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고향으로 흩어졌다. 아버지와 동네 어르신들에게 상황을 고한 유관순은 장이 열리는 음력 3월 1일 장터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태극기를 만들고 교회를 돌아다니며 정당성을 역설했다. 양력 3월 31일 매봉산 봉화로 연락을 주고받은 주동자들은 이튿날 오후 1시 장터에서 연설을 통해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일본 주재소는 무차별 사격으로 응대했다.
시신을 둘러업고 주재소로 몰려간 조선인들에게 헌병대는 또 총을 쐈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은 총에 맞아 두개골이 박살 났다. 아들에게 달려와 통곡하는 어머니 최씨도 칼에 찔려 죽었다. 유관순 부모도 총과 칼에 맞아 죽고 오빠도 끌려갔다. 공주교도소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만세 운동을 하다가 고문 끝에 이듬해 9월 28일 숨졌다. 그렇게 순국한 사람이 모두 48명이다. 병천면에 있는 순국자 추모각에는 "신원 미상인 순국자가 다수 있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병천면 매봉산 기슭에는 아우내장터 순국자 추모각이 서 있다. 1969년 유관순 추모각이 세워졌고 2009년 다른 순국자들 추모각이 세워졌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다가 일제가 군용지로 개발한다며 갈아엎어 사라져버린 유관순 묘는 이곳에 초혼묘로 되살아났다. 이들이 있었기에 아우내장터는 이제 전국 최고라는 병천순대거리로 변신해 미식가들이 침을 흘리며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일제에 의해 전소됐던 용두리 교회는 훗날 유관순 기념 교회로 바뀌었다. 이름은 매봉교회다. 그 옆에 유관순 생가가 있다. 생가는 일제가 불태워 사라졌고, 지금 있는 초가집은 복원한 집이다. 교회 외벽에는 봉화를 올리는 소녀 청동 조각이 걸려 있다. 역사적 의미는 물론 건축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교회다. 그 뒷산에 유관순이 봉화를 올렸던 봉화 터가 있다.
68년 뒤 1987년, 독립기념관
1987년 8월 15일 아우내장터에서 직선거리 7㎞ 서쪽 목천에 독립기념관이 개관했다. 전국에서 찾아오기 쉬운 입지에 위에 언급한 숱한 선인들 흔적이 있는 땅이었다. 1982년 식민 정책에 관한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으로 독립기념관 설립 운동이 벌어진 지 5년, 기공식 4년 만이었다. 건립 결정은 1982년 8월 28일, 경술국치 72년 하루 전날에 발표됐다. 즉각 토지가 수용되고 이주민 131가구도 기꺼운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기공식 후 4년'. 성급한 세월이었다. 500억원에 달하는 국민 성금으로 건축된 독립기념관은 공기를 2년이나 단축하며 지어지다가, 1986년 8월 4일 저녁 9시 20분 380볼트짜리 전력선을 110볼트짜리 전구에 연결하는 바보 천치 같은 실수로 천장이 불타버렸다. 국보 1호 남대문 화재보다 더 충격이 컸다. '빨리빨리' 증후군을 중증으로 앓고 나서야 독립기념관은 이듬해 8월 15일 개관했다. 그래도 나았다, 없는 것보다는. 말만 나오다 사라지곤 했던 독립기념관이 광복 42주년에야 생긴 것이다. 2016년 소시민으로 살고 있는 우리를 있게 한 선인들 자취가 거기 모여 있으니, 이 엄동설한에도 독립기념관에는 아이들 손잡고 눈밭을 걷는 가족이 많다.
2016년 겨울 천안벌
독립기념관 서쪽에 흑성산이 있다. 해발 519m인 이 산 정상에는 산성이 있다. 삼국시대에 만든 성이다. 산성은 지금 KBS 중계소로 쓰인다. 성곽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해발 454m 조망점이 나온다. 동쪽과 서쪽이 속이 후련하도록 다 보인다. 부디 이른 아침 해 뜰 무렵 가보시기 바란다. 동쪽 산 너머 해가 솟을 때면 아래쪽 독립기념관부터 병천 아우내장터 뒤쪽까지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운무가 끼어 있으면 황홀할 정도다.
그 풍경을 잘 읽어야 한다. 고속도로에 트럭이 분주히 달리고 공장 굴뚝에 연기가 솟고 벌판 여기저기에 풍경을 해치는 아파트 단지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읽어야 한다. 무명 선인들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곳, 천안 여행이다.
[천안 여행수첩]
1.독립기념관 입장료 없음. 경부고속도로 목천IC에서 나와 직진. 입구에 셔틀버스가 있다. 철거된 중앙청 폐기물로 만든 공원도 가 본다. '일본을 홀대하는 방식으로 지하 5m를 파고' 만들었다는 공원 설계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볼 것. www.i815.or.kr
2.흑성산 독립기념관 입구 오른쪽 길로 가서 'KBS 중계소' 이정표를 따라갈 것. 길이 좋으면 정상까지 차가 가지만 눈밭인 요즘은 걸어갈 것. 1시간.
3.유관순/순국자 추모각과 생가 내비게이션 키워드 동일. 생가 옆에 있는 유관순 기념 교회인 매봉교회도 꼭 가 본다. 지하 기념관에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4.이동녕선생기념관과 생가 독립기념관 부근. 마당에 앉아 있는 선생 조각상이 쓸쓸하다.
5.홍대용선생 묘와 생가 수신면 장산리 462-22.
6.광덕사 호두시배지.천연기념물로 지정된 400살 먹은 호두나무가 대웅전 앞에 있다. 광덕면 광덕리 641-7
천안시청 관광 사이트 www.cheonan.go.kr/tour.do
02.03 대부, 선재, 영흥도 세 섬과 동춘서커스단 량윈(梁云) - 겨울 바다 위, 작은 섬 하나 문을 열었다
올해 스물여섯 살이 된 량윈(梁云)은 황관(晃管)에 능했다. 황관은 가로세로로 겹쳐 쌓아 놓은 원통 위에 널빤지를 올리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다. 한국에서는 '맘보'라고 한다. 량윈은 중국 광시성(廣西省) 위린(玉林)시 보바이현(博白縣)에 살았다. 열 살 되던 2000년 량윈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 저 TV에 나오는 기예 배우게 해주오." 농사짓던 아비는 군말 없이 량윈을 보바이현 청소년기예단에 데리고 갔다. 칭찬도 듣고 꾸중도 들으며 량윈은 기예를 배웠다. 일곱 가지를 배웠다. 황관을 특히 잘했다.
2007년 겨울 기예단이 한국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초청 공연을 했다. 열여덟 살짜리 기예 신동을 알아본 동춘서커스단 단장 박세환이 량윈을 스카우트했다. 이듬해 봄 량윈은 동춘 단원이 되었다. 새로운 기예도 배웠다. 생사륜(生死輪), 거대한 금속 바퀴 두 개를 동료와 함께 허공에서 돌리며 묘기를 펼치는 기예다. 16년 차 기예꾼 량윈은 지금 고향 보바이현에서 2300㎞ 떨어진 대한민국 안산시 대부도에 산다. 하루에 두 번씩 량윈은 대부도 동춘서커스단 상설 공연장 무대에서 목숨을 건다. 대부도는 섬이다. 탄도방조제와 시화방조제가 생기면서 뭍과 붙었다. 서쪽 선재도와 영흥도도 다리가 생기면서 모두 붙었다. 대부도는 경기도 안산이고 선재도, 영흥도는 인천 옹진군이다. 섬에는 이야기가 많다.
섬나라 옛이야기
고려 말 왕족 왕기(王琦)는 나라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자 개경을 떠나 영흥도로 은신했다. 나라가 바뀌고 후손은 성도 옥씨(玉氏)나 전씨(全氏)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 익령군(翼靈君) 왕기를 살려준 섬이라 해서 이후 이름을 연흥도(延興島)에서 영흥도(靈興島)로 바꿨다. 후손은 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목동으로 살았다. 1751년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도 '목장에서 말을 치던 영흥도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도도 목장이었다. 규장각이 소장한 1872년 대부도 지도에는 대부도와 선재도, 영흥도가 사복시(司僕寺) 소속으로 표기돼 있다. 사복시는 조선시대 말과 목장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대부도에는 조선시대 군마 훈련 육영장 터가 남아 있다. 지금도 대부도에는 대규모 승마장과 승마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대부(大阜)는 큰언덕이라는 뜻이다.
전쟁도 섬나라를 피해 가지 않았다. 1270년 원나라와 항쟁하던 삼별초 집단은 전남 진도로 진영을 옮기면서 영흥도에 70일 동안 웅거했다. 옛 지도 영흥도 서쪽에는 또 '洋船過去水路至永宗(양선과거수로지영종·서양 배가 이 물길을 따라 영종도에 닿았다)'이라고 적혀 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와 미국 배가 영흥도를 지나갔다는 기록이다. 한가롭게 말을 키우던 섬 옆에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철선이 지나갔으니, 물정 모르는 옥씨, 전씨 목동들은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
1950년 영흥도에 전화(戰禍)가 덮쳤으니, 6·25전쟁이다. 그해 8월 20일 국군 기동 함대가 인민군이 점령한 영흥도를 탈환했다. 상륙 지점은 북쪽 십리포에 있는 산돌뿌리 해변이었다. 이어 국군과 미군 첩보 부대가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던 9월 13일 인민군이 재점령한 섬을 해군과 주민들이 재탈환했다. 14명이 전사했다. 이 정보를 토대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미군 전사에 따르면 인천상륙작전 후 9월 16일 영흥도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북한군에게 희생당한 주민 50여 명 시신을 발견했다. 십리포 해변에는 이들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고 영흥면사무소 옆 함상 공원에도 전적비가 있다. 십리포 오른편 산길로 올라가면 최초 상륙지인 산돌뿌리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십리포는 관광지가 되었다. 산돌뿌리로 가는 길은 걷기 좋은 숲 속 산책로로 변했다. 조개껍데기와 자갈이 깔린 산돌뿌리 해변은 잠시 앉아 낙조를 보기 좋은 곳이다.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
방조제 건설과 매립으로 탄도와 선감도도 대부도와 하나가 됐다. 서쪽에 있는 선재도와 영흥도도 잇따라 다리가 놓였다. 옛 역사도 묻혀갔다. 삼별초도 익령군도 흔적 없다. 양선이 지나간 수로에는 갈매기들이 한가롭다. 피비린내 나는 현대사 비극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북적인다. 뭍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숙박 시설과 식당, 유흥가와 땡처리 물건을 파는 상가가 큰길가에 가득하다.
시화방조제에서 시작한 나들이 길은 조력문화관과 방아머리항구, 동춘서커스단과 그랑꼬또(Grand Coteau·큰 언덕) 와이너리, 탄도항으로 이어진다. 다리를 지나면 선재도와 영흥도도 금방이다.
시화방조제 조력문화관 전망대에서는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전망대 유리 바닥으로 보이는 바다는 아찔하다. 항구에서 맞는 일몰과 탄도항 풍력발전기 뒤로 순식간에 떨어지는 낙조 앞에서 사람들은 애가 탄다. 해풍 맞은 포도로 빚은 달콤한 대부도 그랑꼬또 와인은 국제 대회에서 두 차례 상을 받았다.
대부도에서 꼭 봐야 하는 동춘서커스단은 한국에 하나뿐인 서커스단이다. 세련된 공연이 아니라 추억을 봐야 하고, 보게 되는 곳이다. 2009년 '경영 악화로 폐업한다'고 인터넷에 부고장을 올렸다가 "문 닫게 하면 유인촌 문화부 장관을 무인촌으로 만들겠다"는 시민들 으름장에 부활한 곡예단이다. 동춘은 전국을 떠돌다 2011년 대부도에 정주했다. 여름에는 관중석 400석이 만원이요, 이 추운 겨울 평일에도 50~60명은 꼬박꼬박 관람한다.
단원 대부분이 휴가를 떠난 이 계절, 겨울을 지키는 단원 27명은 모두 중국 사람이다. 어른들 틈에 끼여 공연을 하는, 한눈에 봐도 어리디어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을 보면서 관중은 실수에 관대해지고 박수에는 아낌이 없다. 광속(光速)으로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안전끈 하나 없이 지상 10m 허공에 몸을 날리는 어린 광대들을 상상해보라. 시인 정현종이 읊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중략)/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략).'(정현종 '방문객') 저 젊은 영혼들은 하루에 한 번씩 일생을 허공에 던진다. 그래서 상가로 번잡한 섬마을 풍경에 속이 상했다가도 동춘에 들러 애잔한 섬나라와 인생을 반추하며 다시 섬을 떠나가는 것이다.
그 동춘에서 광시성 청년 량윈이 공연을 한다. 스물여섯 살. 서커스를 하기에는 몸이 늙었다. 누구보다 잘하는 황관과, 특출나게 뛰어난 생사륜 두 종목만 공연을 하고 이제 무대 뒤에서 조명을 감독한다. 미래는 깊게 생각해본 적 없다. 설 연휴 때는 TV에도 출연한다. 가끔씩 관객 중에 팬레터 메일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두 달 뒤 고향으로 가면 2년째 열애 중인 애인을 데려와 같이 살고 싶다. 순회공연하면서 재미나게 놀았던 에버랜드는 꼭 데려갈 작정이다. 하고 싶은 기예를 이 나이 되도록 할 수 있고 고향집 부칠 돈도 벌고 있으니, "동춘에 살아서 행복하다"고 이 청년이 말했다. 열여덟 살에 이역만리로 떠난 그가 정주한 땅은, 섬이다.
섬나라 가는 길목, 목섬
대부도에서 선재도로 가려면 선재대교를 건너야 한다. 선재대교 왼편으로 작은 섬 하나가 보인다. 목섬이다. 한자로 목덜미 항 자를 써서 항도(項島)라고도 한다. 전남 완도 청산도에도 목섬이 있고, 경남 남해에도 목섬이 있다. 길목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전남 목포(木浦)의 '목'도 기실은 길목 할 때 목이다. 선재도 새끼 섬인 목섬도 길목에 있는 섬이다.
2012년 미국 케이블 채널 CNN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에 섬이 3358개 있는데, 그중 으뜸은 목섬이다. 썰물이 되면 어미 섬에서 목섬까지 바다가 갈라진다. 국제공항이 있는 인천에 이런 비경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했으랴." 기준과 관점 차이는 있으나, 목섬은 그만큼 묘하다. 물이 빠지면 다리 아래에서 섬까지 넓고 긴 길이 생긴다. 삽시간에 생기고 삽시간에 사라진다. 길 이름은 목떼미, 즉 목덜미다. 대부, 선재, 영흥도 세 섬 가운데 선재도, 그중에서 목섬이 가장 아름답다. 낙조 때 가장 아름답다. 해거름이면 수평선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하늘과 바다가 파스텔톤으로 하나가 된다. 그 무렵 물이 밀려들면 길이 사라지고 섬은 바다로 돌아간다. 뭍을 떠나온 사람들은 겨울 섬으로 틈입해 목숨을 건 중국 청년 량윈 기예를 보며 추억을 구입하고 바다를 바라본다. 문득 섬이 문을 닫는다.
[대부~영흥도 여행수첩]
1. 동춘서커스단 주중 오후 2시, 토요일 2시, 4시 30분, 7시, 일요일 2시, 4시 30분 공연. 어른 2만5000원. 홈페이지로 예매하면 1만3000원. circus.co.kr, 010-5442-2315
2. 유리성 유리공예 전시 및 체험관. 미술관과 시연장, 아트샵,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다. 어른 1만원. 월요일 휴관. www.glassisland.co.kr, (032)885-6262
3. 조력문화관 시화방조제 한가운데. 전망대에 식당, 기념품점이 있다.
4. 그랑꼬또 와이너리 1954년 대부도에 첫 식재한 캠벨얼리 포도로 만든 와인 제조 및 판매. 쓴맛과 떫은맛은 줄이고 단맛을 부각시킨 와인이다.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1011-3, www.grandcoteau.co.kr, (032)886-9873 5. 탄도항 풍력발전기가 서 있는 누에섬. 누에를 닮은 조형물과 전시관이 있다. 썰물 때 길이 열린다.
02.10 두루미 날아오는 철원과 컨테이너 스님 도연 - 얼어붙은 철원 들판에 두루미 가족 훨훨 난다
강원도 철원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 포천 지장산 기슭에 암자가 하나 있다. 이름은 도연암이다. 법도 도(度)에 못 연(淵), 도연암이다. 암자에는 같은 법명을 가진 스님 도연이 산다. 밥 짓는 공양보살도 없고 처사도 없이 혼자 산다. 속세 나이 올해 예순셋이다. 도연에게는 별명이 두 개 있다. 먹고 자고 예불을 올리는 법당과 요사채를 모두 컨테이너로 지었으니 '컨테이너 스님'이요, 진박새며 쇠박새며 동고비, 곤줄박이에 딱따구리까지 겁 많은 산새들이 스님 머리와 안경다리에 제멋대로 내려앉아 인사를 하고 가니 '황새 스님'이다. 담장도,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는 허허(虛虛)한 절에서 그가 말했다. "새들은 손이 없으니 무소유(無所有)요 날개가 있어 훨훨 나니 자유(自由)라. 새들이 하는 말씀이 바로 경전(經典)이더라."
평화의 땅 철원
도연이 사는 도연암에서 5분만 북상하면 철원 땅이다. 전쟁 전 북한 땅이었던 철원은 그 짧은 기간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을 경험했다. 전쟁 때는 전사(戰史)에 또렷이 기록된 숱한 전투들이 철원평야에서 벌어졌다. 폭격으로 골격만 남은 노동당사는 그 상징이다.
생태학 관점에서는 평화의 땅이기도 하다. 민통선 안과 밖으로 인간 출입이 엄중하게 통제된 동안 자연은 그 전흔을 덮고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인간 족적이 끊기니 숲과 벌판이 부활했고, 건강을 되찾은 그 땅에 크고 작은 새들이 찾아왔다. 도연이 말했다. "생태계가 회복되면 새들이 가장 먼저 안다"고.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철원 동송읍 양지리 주민 백종한은 농부이며 동시에 생태운동가다. 홍천이 고향인 백종한은 철원 6사단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철원에 정착해 농부가 되었다. 그때 두루미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한 해에 두세 마리씩 두루미를 봤다. 몸통 하얗고 정수리가 빨간 단정학(丹頂鶴)도 보았고 몸통이 잿빛인 재두루미도 보았다. 한 번만 봐도 무병장수한다는 귀한 새를 많이 보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새들은 농부들에게 불쾌한 존재다. 수확하고 남은 낟알을 먹고 사는 두루미 같은 겨울 철새는 그렇지 않았다. 철원을 찾는 두루미는 많게는 한 해에 100마리가 넘었다. 여느 농부들처럼 먹고사는 데 바빠 들판에서 청년기가 갔다. 1993년부터 백종한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겨울에 낟알을 들판에 뿌렸다. '청치'라고 덜 여물어 푸른 빛깔을 띤 쌀알은 사료업자들에게 팔면 돈이 되는데, 이 청치를 그냥 들판에 뿌렸다. 새들이 좋아했다.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일본으로 날아가던 새들이 철원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백종한은 "철원 자체가 새들에게 이로워 월동지로 선택됐겠지만, 사람들 노력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믿는다"고 했다.
세상이 먹고살 만해지고 새 보러 다니는 생태여행이 돈이 되는 시대가 왔다. 지자체가 그냥 놔둘 리가 없다. 2000년 농부들이 사료업자들에게 평당 120원씩에 팔던 볏짚을 철원군이 99원에 수매해 논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1000평에서 거둔 볏짚에서 두루미 80마리가 하루 먹을 청치가 나왔다. 볏짚을 잘게 썰어 논에 뿌리니 그 속에 숨어 있는 청치가 새들을 불러들였다. 2015년 가을 그렇게 볏짚을 흩어놓은 논 30만 평에 자그마치 두루미 5000마리가 찾아왔다.
그래서 철원 토박이가 된 홍천 사람 백종한은 뿌듯하다. "쓸데없는 짓 한다며 욕도 많이 먹었고, 보호구역 생기면 농사 못 짓는다고 비난도 많았다. 지금은 다르다. 새들 쫓는 농부 못 봤고 새 죽이는 농부 못 봤다. 다들 새들, 두루미들 귀히 여기고 아낀다." 백종한은 2003년 두루미보호협회철원지회를 만들어 역사를 잇고 있다. 역사는 작은 손길이 창조하는 것이다.
새들이 준 깨우침, 자비와 배려
도연은 중학교 때 미술 시간이 제일 좋았다. 그림을 잘 그렸다. 직장을 다니다 문득 딴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경쟁이니, 이를 어이할꼬. 가족들 반대가 심했지만 도연은 산문(山門)을 택했다. 열네 살 때 큰형님이 월남전 참전했다가 사온 야시카 카메라도 산문으로 들고 갔다. 자유를 원해 출가했는데, 절에서도 규율이 싫었다. 그래서 전국을 돌아다니다 지장산에 컨테이너를 올리고 암자를 지었다. 다음 날 자전거를 몰고 철원 들판으로 가니 기러기 떼 25만 마리에 두루미 수백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얽매여 있는데, 새들은 자유였다. 법문이 따로 있나, 저들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면 되지." 그리 생각하며 사진을 찍었다. 새를 찍으려니 새를 공부했다. 새를 공부하려니 식물을 공부해야 했고 곤충을 공부해야 했고 애벌레를 공부해야 했다. 경전보다 더 많은 생태학 책을 읽었고 그만큼 많은 사진 서적을 탐독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촬영장비를 사들였다. 어느 틈에 속세에서는 도연을 스님보다는 생태사진가로 알게 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내가 정말 중(僧)이 맞나? 지식을 논하고 장비를 논하고 두루미 사진 찍어서 예술을 논하는, 이 내가 진짜 내가 찾던 그 존재인가?' 섬뜩한 깨달음에 2006년 도연은 비싼 장비들을 다 처분해버렸다. 촬영해 놓은 슬라이드필름 2만 컷을 버리고 남은 필름은 불태웠다. 지금은 오로지 기록을 위해 사진을 찍는다.
2005년 일본에서 인공번식에 성공해 자연 속으로 방사한 황새 'J0051'과 'J0092'가 한국으로 왔을 때, 도연은 봉순이와 제동이라 이름 붙인 황새를 따라 팔도를 유랑했다. 두 황새 이동경로는 국제학회에 꼬박꼬박 보고됐다. 2년 전 도연은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에서 열린 국제황새학회에 참관했다. 두 번 놀랐다고 했다.
"'한국에도 이런 황새 보호운동가가 있다'는 소개말에 놀랐고, VIP석에 앉은 사람들이 학계나 정계 유지가 아니라 거기 어린이들이라 또 놀랐다." 한국이 얼마나 조류 보호 후진국 취급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일본 사회가 현재보다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다.
그래서 도연은 그림동화책을 썼다. '할머니와 황새'. 일본에서 제주도로 온 황새 제동이와 제주도 할머니에 얽힌 우화다. '새가 살아야 사람이 산다'는, 어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도연이 사는 도연암은 새들의 낙원이다. 겁이라곤 애시당초 유전자에 없어 뵈는 새들이 사람들 주변에서 짹짹거린다. 도연이 나타나면 이번엔 먹을 거 뭐 갖고 왔수, 하며 스님 주변으로 집결한다. 경전 대신에 도연이 귀를 기울이는 새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도연이 말했다. "월동하며 새끼를 보호하는 나비도 있다. 콩새와 되새라는 토종 새는 생태계 교란종으로 낙인찍힌 외래종 단풍잎돼지풀 씨앗을 제일 좋아한다. 이거 없이는 겨울을 나지 못한다. 황소개구리는 황새에게 둘도 없는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 따로 없다. 자비와 배려와 관용이 불교 가르침이라면, 나는 새들한테서 다 배웠다." 두루미가 사는 철원 들판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 산기슭에 기이한 방식으로 도를 깨우친 승려가 산다.
두루미 전망대와 도연과 백종한
백종한이 사는 양지리와 이길리 사이 한탄강 여울은 대표적인 철새 월동지다. 북한 미사일 발사로 출입이 금지된 토교저수지 옆이다. 백종한이 활동하는 두루미보호협회 철원지회는 여울 한쪽 둑 갈대와 잡목을 베어내고 전망대를 만들었다. 위치는 귀한 새를 보려고 몰려드는 인간들 호기심과 사람들 손때를 피하려는 새들 두려움 한가운데다. 겨울에는 여울 모래밭에 먹이를 뿌린다. 도연이 말했다. "철원 두루미는 낟알을 먹고 산다. 연천 두루미는 연천 특산 율무를 주워 먹는다. 강화도 두루미는 갯벌에서 갯지렁이와 조개를 먹고 산다. 해마다 두루미 한 가족이 내려앉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 거기에 먹이를 줘야지 지금처럼 한곳에 집중하면 결국 영토 싸움에 전염병까지 감염될 우려가 있다." 백종한이 말했다. "새들을 보호하면서 사람들을 맞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다. 또 잡목 속에 숨은 삵과 들고양이들이 두루미를 숱하게 공격해, 갈대숲을 베지 않으면 두루미들이 위험했다."
삶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새를 바라보는 눈도 하나가 아니었고, 두루미에 대한 사랑법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겨울날, 철원 두루미 사랑을 권한다. 굳이 전망대가 아니어도 좋다. 철원 북쪽을 가로지르는 464번 지방도 주변 얼어붙은 논밭을 보면 마치 아프리카 초원 사파리처럼 낟알을 줍는 우아한 두루미 가족을 목격할 수 있다. 폐농가와 창고, 축사 담장 아래에서 불로불사 십장생을 무심하게 친견하다니, 이런 가당치 않게 평범한 낙원이 어디 또 있다는 말인가.
농부 백종한의 목격담으로 글을 맺는다. "이른 아침, 민통선 속으로 들어가면 잠에서 깬 새들이 날아오른다. 단언컨대, 단 한 마리도 북쪽으로 가지 않는다. 먹을 게 없는 걸 다 아는 게지." 북쪽에서 날아온 미사일은 남쪽 바다로 사라졌다. 북쪽에서 날아온 두루미는 철원에서 평화롭게 낟알을 줍는다.
[철원 여행수첩]
〈두루미 탐조 정보〉
1.도연암: 포천에서 철원으로 가는 87번국도로 포천 북쪽 끝에 있다. 지장산 기슭. 홈페이지는 www.hellonetizen.com
2.두루미전망대: 두루미보호협회 철원지회 doorumi.or.kr에서 관리. 원래는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해야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다. 이용료 1만원은 먹이 구입과 마을 부녀회비로 사용. 지금은 현장에서도 입장료를 내면 가능하지만, 올해 안으로 현장 입장은 금할 예정이다.
3.두루미 탐조 루트: 철원 북쪽 464번 지방도는 두루미가 월동하는 논과 밭을 지나간다. 굳이 망원경이 없어도 두루미를 볼 수 있는 '사파리' 루트다. 단 되도록이면 차에서 내리지 않고 큰 소리도 내지 말 것.
4.철새 보는 집: 농부이자 조류 보호운동가 백종한이 운영하는 민박집. 전망대 바로 옆이다.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277-11, (033)452-3145
02.17 1930년대 한옥마을 北村과 미스터리 애국자 정세권 (1)
北村에 가시거든 애국자 정세권(鄭世權)을 찾아보십시오
사진 한 장이 있다. 1949년 6월 12일 '십일회' 기념사진이다. '십일회'는 1942년 10월 1일 벌어진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모임이다. 맨 앞줄 왼쪽에서 둘째 자리에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다. 외국 관광객으로 붐비는 서울 종로 북촌(北村)에 가면 반드시 떠올려야 할 사람이다. 세간에서는 '전형적인 조선 양반 마을'로 알고 있지만, 21세기 눈앞에 보이는 북촌은 조선 시대와 관계가 없는 1930년대 개량 한옥 마을이다. 그 한옥 마을 전부를 한 사람이 만들었다.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미스터리의 애국자 정세권
지난 15일은 일제 강점기 최대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창립 89주년이었다.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 회장은 당시 조선일보 사장인 월남 이상재였다. 그때 정세권은 신간회 경성지부 재무부원이었다.
4년 뒤인 1931년 4월 20일 오후 4시 30분 경성 종로 낙원동 300번지에서 조선물산장려회 회관 기공식이 열렸다. 1923년 '조선인은 조선 물산을 만들고 쓰자'는 취지로 지식인과 상공인들이 만든 운동 단체였지만, 재정 불안으로 사무실조차 없던 차였다. 4층 양옥 건물 1층은 사무실, 2층은 물산 진열관, 3층은 식당, 4층 옥상은 가정집이었다. 정세권은 옥상 집에 살았다. 회관 부지와 건설비는 모두 정세권이 댔다.
1929년 정세권은 물산장려회 재무이사로 선출됐다. 1929~1930년 물산장려회 총예산은 1866원53전이었고 이 가운데 그가 지출한 사비(私費)는 65.4%인 1220원이었다. 당시 한옥 한 채가 500원이었다. 훗날 만해 한용운이 쓴 글 제목은 이렇다.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하는 정세권씨께 감사하라.'
1935년 3월 15일 경성 종로 명월관에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이 창립됐다. 민족운동가들이 '길사(吉事), 흉사(凶事)에 함부로 돈을 써버리지 말고 그것을 영구히 기념되게 유익한 도서 출판을 하게 하자'며 만든 출판사 겸 도서관이다. 사무실은 종로 화동 129번지 2000평 땅에 있던 2층 건물이었다. 역시 땅과 대지는 정세권이 기증했다.
세월이 흘러 1942년 8월 '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고 적힌 함경남도 항흥영생고보 여학생 박영옥 일기장이 조선인 형사 안정묵, 일본명 야스다(安田)에게 발각됐다. 그해 10월 1일 경성 화동에 있는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한글학자 33명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증인 48명도 끌려갔다. 사람들은 몽둥이로 맞는 육전(陸戰), 물을 코와 입에 퍼붓는 해전(海戰), 공중에 매달아 패는 공전(空戰) 고문을 당했다. 정세권 또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화동(花洞)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관은 땅도 건물도 그가 기증한 재산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이렇게 기억한다.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며 좀 검고 뚱뚱한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하지만 그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기이하지 않은가. 경제 자립과 민족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 문화운동에도 그가 나온다. 북촌을 포함해 익선동·봉익동·성북동·창신동 등 청계천 북쪽 땅과 서대문·왕십리·행당동에 조선인 마을을 건설하고 그 돈을 민족 운동에 아낌없이 퍼부은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2016년 서울 북촌(北村)
경복궁과 창덕궁·종묘 사이에 있는 동네를 북촌이라고 한다. 삼청동과 가회동, 재동과 계동이 북촌에 포함돼 있다. 한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북촌은 큰 길가는 물론 골목길에도 크고 작은 공방과 기념품 가게가 숨어 있어 관광객들 눈과 발을 바쁘게 만든다. 기와 처마 선이 중첩돼 있는 가회동 31번지 언덕길은 과장하면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광객이 붐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정서가 남아 있는 골목길이다. 나무 대문마다 '주민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주민들은 골치지만 한국인에게는 추억을 주고 외국인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서울 종로구가 펴낸 '북촌' 유인물에는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고 돼 있다. 서울시 자료 '북촌 산책'에는 '조선 시대 양반들이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 이곳은 당시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길과 물길들의 흔적, 그리고 한옥들을 만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사람들은 북촌 초입 관광 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이 두 자료와 지도를 따라 골목길을 걷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살던 집들"이라고. '전혀' 사실과 무관하다.
1930년 경성 북촌 재개발
조선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경성은 일본인과 지방에서 몰려드는 조선인으로 만원을 이루었다. 일본인은 청계천 남쪽 남촌에 자리를 잡고 일식 가옥을 지었다. 조선인은 북쪽 북촌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북촌은 원래 고관대작들이 살던 언덕이었다. 나라가 사라지면서 조선 시대 사대부 집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성삼문·박규수·홍영식과 김옥균 집이 그랬다. 가회동 31번지는 대부분 명성황후 친족인 민대식 가문 땅이었다. 민대식이 두 아들에게 지어준 인사동 쌍둥이 집은 한 채는 뜯겨나가 주차장으로, 한 채는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상상해보라, 저 넓은 언덕배기에 드문드문 서 있는 대저택들을. 세종대왕 스승이었던 맹사성은 그 가회동 꼭대기에 살았다. 경복궁으로 출퇴근하면서 언덕을 넘었는데,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다녔다. 그 언덕을 맹현(孟峴)이라고 했다. 지금 가회동 31번지에 있다.
1920년대 인구가 폭발하면서 총독부는 이 땅들을 거둬 주택 건설업자에게 불하했다. 남촌이 밀집되면서 북촌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업자들에 맞서 조선 건설업체들은 경쟁하듯 북촌 땅을 매입해 거대한 필지를 수십 개로 나눠 대청 유리문과 처마 함석챙이 있는 '똑같은' 표준형 한옥들을 줄 맞춰지었다. 상하수도도, 전기도 없이 초가집에 살던 조선 서민들에게 편의 시설이 있는 '마이홈'이 생긴 것이다. 여러 업체 가운데 정세권이 운영하던 건양사는 2등 없는 1등이었다.
정세권과 북촌을 연구 중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경민은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 개발을 조선인이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주한 삼청동의 모습은 대량의 적산 주택 단지이지 한옥 집단 지구가 아닐 수 있다." 정세권과 함께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던 법조인 최태영(작고)은 "서울 전체에 집을 물산 장려한 사람"이라고 했다.
김경민이 찾아낸 정세권의 건축 철학은 명쾌하다. '건축비, 유지비와 생활비 등의 절약에 유의함이 본사의 사명인가 합니다. 재래식의 행랑방, 장독대, 창고의 위치 등을 특별히 개량했고, 중류 이하의 주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부, 월부의 판매 제도까지 강구하여 주택난에 대해서는 다소의 공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정세권 '건축계로 본 경성' 1925) 정세권의 딸 정정식(작고)은 김경민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옛 양반 대저택이 남아 있다면 경관은 좋았겠으나, 1930년대 북촌 개발은 필연이었다. 우리 눈앞에 있는 북촌 한옥은 90%가 그때 정세권이 지었다. 한창수 집터가 있던 큰길 건너 가회동 11번지 한옥촌도 그가 건설했다.
후배 건축가 황두진과 정세권
건축가 황두진은 북촌 한옥 마을 중건사업이 시작되던 2000년대 중반 정세권이 만든 가회동 31번지와 11번지 한옥 여덟 채를 중건했다. 서울 토박이인 황두진은 서울대 건축과를 나오고 예일대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전형적인 서양식 건축가인 그에게 건축주가 한옥을 맡겼을 때 장난인 줄 알았다. 대학에서는 한옥사는 배웠지 한옥은 배운 바가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한옥을 고치면서 정세권을 알게 됐다. 그가 말했다. "1930년대는 대호황기였다. 소규모 개량 주택을 짓지 않으면 폭발하는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정세권이 북촌을 이렇게 개발하지 않았다면 한옥의 맥도 끊겼을 수 있다. 1930년대 한옥은 그 자체가 근대 건축물로 큰 의미가 있다. 북촌에서 제일 오래된 한옥은 윤보선 집인데, 1870년 건물이다."
많은 건축가가 그를 '무명 집장사'로 깎아내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한옥 마을로 사람들을 북촌으로 끌어들이는 서울과 종로구는 아예 정세권이라는, 건양사라는 이름을 그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금도 '조선 시대'라는 환상 속 향기를 맡으며 북촌을 걷고 있다.
정세권은 청계천 북쪽 개발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을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경제 독립을 주장하는 물산장려회에, 문자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어학회에 쏟아부었다. 고문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총독부에 땅도 다 빼앗겨버렸다. 교수 김경민이 말했다. "조선 서민들의 생활 개선을 실천한 사람이다. 물산장려운동도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계몽 사업이었다."
암울한 식민 시대에 자기 이름을 걸고 애국 운동을 한 인물, 정세권이 북촌을 만들었다. 아니, 정세권이 바로 북촌이다. 그 북촌을 오늘 걸어가 보시라.
〈다음 주는 '미스터리 애국자 정세권'2편〉
02.24 1930년대 한옥마을 北村과 미스터리 애국자 정세권 (2)
北村 골목길엔 그의 흔적이 숨어 있다
1930년대 근대 한옥 마을인 서울 북촌(北村)에 가면 떠올려야 할 사람이 있다.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집 팔아 번 돈으로 물산장려운동과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그리고 조선어학회를 지원한 애국자다. 〈본지 2월 17일자 A19면 참조〉
1935년 7월 12일 화동 129번지
"경성부 낙원동 300번지에 있는 장산사 사장 정세권씨가 화동 129번지에 있는 시가 4000여 원 되는 이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조선일보 1935년 7월 13일자) 회관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 가옥 근처 길모퉁이에 있었는데, 지금은 '조선어학회 터'라는 표석만 남아 있다.
정세권은 '집 장수'였다. 건양사라는 주택 건설 회사를 운영하며 일제강점기 중반인 1930년대 청계천 북쪽 지역 땅을 사들여 중소 규모 근대 한옥 단지를 건설한 업자였다. 정세권의 셋째 아들 정용식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어학회 회장이던 이극로 선생이 아침이면 세수하러 나오는 것도 봤다. 집에 놀러도 오곤 했다." 1989년 홍익대 건축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김란기(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와 가진 인터뷰에서다. 훗날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 정용식은 광복 후 경북 문경 광산촌 사택 단지를 시공했으나 6·25전쟁이 터지며 파산했다. 손자 정희영은 "친척들 빚도 갚지 못해 이리저리 작은 집으로 이사하며 살았다"고 했다.
궁궐보다 높은 마을 북촌
조선어학회 회관이 있던 안국동을 비롯해 재동과 원서동, 가회동, 삼청동 일대를 '북촌(北村)'이라 통칭한다. 가회동은 지리적으로 그 중심이다. 특히 1930년대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일대는 1930년대 근대 한옥이 집단으로 보존돼 있어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골목길 양쪽으로 담장을 나누며 들어선 기와지붕과 나무 대문, 돌담…. 한국인보다 중국·일본인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가회동 31번지와 붙어 있는 삼청동 35-62번지에는 북촌 전망대가 있다. 1980년 대구에서 올라온 장옥희(88) 가족이 운영하는 사설 전망대다. 장옥희가 말했다. "집과 집 사이가 하도 좁아서 부엌에서 부엌으로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여섯 채마다 동서로 큰 도로가 하나, 두 채마다 남북으로 도로가 나 있는 네모 반듯한 마을이니." 그녀가 한마디 더 했다. "전망대를 찾아온 풍수가들이 그랬다. '옛날에는 궁궐을 내려다보는 곳에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고". 질서정연하게 집들이 붙어 있으니 양반집일 리가 없고, 풍수가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1910년 경술국치와 조선 귀족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날 일본은 고위급 조선인 76명에게 작위를 하사했다.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따위를 받은 귀족들은 은사 공채와 토지도 받았다.
일제강점기 초기 가회동 31번지 소유자는 이재완이었다. 가회동 33번지는 민영휘, 11번지 소유자는 한창수, 95번지는 한상룡이다. 1번지 소유자는 박영효다. 이들의 이력은 각각 이렇다.
이재완(1855~1922): 후작. 은사 공채 33만6000엔.
민영휘(1852~1935): 자작. 은사 공채 5만엔.
한창수(1862~1933): 남작.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유학 보냄. 은사 공채 2만5000엔.
한상룡(1880~1947):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 일본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종신 의원.
한상룡이 지은 집은 훗날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가 사들여 지금 민속자료로 지정돼 개방돼 있다. 연전에 서울시장 관저로 쓰려다 무산된 그 집이다. 한창수가 지은 집도 남아 있지만 개방은 하지 않는다. 가회동 1번지 땅은 민영휘와 은사 공채 28만엔을 받은 후작 박영효 공동 소유였다.
경성 인구가 폭발하던 1920년대 이들 자제인 이달용, 민대식, 한상억 등이 이 땅을 팔아치웠다. 그 땅에 가회동 북쪽 한옥 마을이 건설됐다. 2000년대 초 모 재벌이 빌라촌과 저택을 지은 1번지를 제외하면 나머지 11·31·33·95번지가 현재 관광객으로 붐비는 북촌 한옥 마을 핵심이다. 거기에 정세권이 등장한다.
정세권, 북촌을 건설하다
정세권은 1888년 경남 고성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면장이 되었다가 경술국치를 맞았다. 1919년 정세권은 경성으로 올라왔다. 막내딸 남식(88)이 말했다. "고향 초가집을 다 기와집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나라가 망하면서 면장직을 사임했다. 더럽고 가난한 경성을 보고 아버지께서 저걸 다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정세권은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명동 일본인 빵집에서 배달한 빵과 우유로 식사하고 현장으로 나가 작업을 감독했다. 딸 남식은 그 빵이 먹고 싶어서 새벽마다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정세권의 회사 건양사는 이후 1940년대 초반까지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해갔다. 익선동을 시작으로 가회동과 삼청동, 봉익동, 명륜동과 혜화동, 성북동, 왕십리까지 영역을 넓히며 근대 한옥 지구를 건설해갔다. 이 지역 조선인들은 주로 초가집 또는 토막(土幕)이라는 움막집에 살고 있었다. 딸 남식이 말했다. "삼청동에 소나무숲이 있었는데, 아침마다 가난을 비관해 목매달고 죽는 사람이 있었다."
정세권은 다른 주택업자와 달랐다. 정세권이 지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작지만 마당이 있는 '살 만한 집'이었다. 그리고 한옥이었다. 딸 남식이 말했다. "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신도 늘 한복을 입고 새벽에는 시조를 읊곤 하셨다."
1989년 북촌과 정세권을 연구한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 김란기 박사는 "정세권은 서민층을 위해 월부, 연부라는 제도를 도입했고, 집 규모 또한 서민에게 부담이 작은 소규모로 설계했다"고 했다. 춘원 이광수의 세검정 집도 그가 시공했고 배재학당 대강당도 그가 지었다. 정세권은 큰돈을 벌었다. 춘원 이광수는 소설 '무정'에서 그를 '건축왕'이라고 불렀다.
야밤에 찾아온 임정 요원
막내딸 남식은 소학교 1학년 어느 날 아침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933년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어젯밤에 상해에서 김구(金九)씨 심부름꾼이라는 사람이 와서 군자금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 집 몇 채 판 돈이 있어 통째로 내줬다고 하셨다."
그 임정 요원은 굳이 밤에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정세권은 이미 1927년 설립된 좌우 합작 민족 단체 신간회 경성 지부 재무부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1930년 대홍수가 나자 정세권 가족과 건양사 직원들은 조선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수재민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1931년에는 물산장려회 재무이사로 낙원동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짓고 사비로 장려회를 이끌고 있었다. 만주동포구제회를 만들어 김좌진 장군 유족을 비롯해 만주에서 순국한 조선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민족 지사들이 양사원이라는 인재 양성 학교를 만들자 여기에도 참가해 큰돈을 출연했다. 1939년에는 고향 덕명리에 덕명간이학교를 세웠다. 초등학교로 바뀐 학교는 1993년 폐교됐다.
그리고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졌다. 학자 33명과 정세권을 포함한 증인 48명이 함흥경찰서로 연행됐다. 일본 경찰은 정세권이 양사원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자양동 고아원 부지 3만평을 빼앗고 정세권을 석방했다. 이듬해 총독부는 건양사 건축 면허를 취소해버렸다. 집 장수 정세권은 광복 때까지 집을 짓지 못했다. 땅과 기업을 빼앗긴 정세권은 몰락했다. 가난한 조선인을 위해 근대 한옥을 짓고, 번 돈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한 대가였다.
2016년 가회동과 정세권
정세권은 지금 고향 하이면 덕명리에 잠들어 있다. 196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에 마련된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한글학자 최현배였다. 덕성여대 명예교수인 손녀 정희선이 말했다. "존경하는 집안 어르신이요 세상에 자랑스러운 큰 어른이다."
가회동 31번지 골목 옆에 한적한 길이 하나 있다. 길 주소는 가회동 33-39번지다. 지금도 등기부에는 이 길이 정세권 명의로 되어 있다. 정세권과 그 후손 명의로 남아 있는 도로가 가회동과 삼청동에 열 군데가 넘는다. 그가 만든 조선어학회 회관 터 표석에도 정세권 이름 석 자는 없다. 안내판 하나 없지만, 북촌에는 이렇듯 정세권의 흔적이 깊다.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 정세권과 그가 만든 마을 북촌 이야기였다.
[새로 쓰는 북촌 역사]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하지만,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989년 당시 홍익대 건축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던 김란기(현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가 쓴 '한국 근대화 과정의 건축제도와 장인 활동에 관한 연구' 논문에 정세권이 등장한다. 김란기는 "건축학계는 집장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아 논문 통과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2005년 북촌이 한창 개발 중일 때 서양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황두진(사진)이 북촌 한옥 다섯 채를 중건했다. 황두진은 "한옥이 생소할뿐더러 나 또한 업자들이 만든 주택단지를 그다지 높이 생각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정세권 같은 인물이 1930년대 한옥을 짓지 않았다면 근대 한옥은 맥이 끊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익선동 한옥 지역을 조사하던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경민은 찾는 자료마다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 아예 연구 방향을 정세권으로 틀어버렸다. 가장 늦었지만 김경민은 실질적으로 정세권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김경민은 "국회도서관까지 뒤져 자료를 모아보니 정세권은 단순한 집장수가 아니라 잊힌 애국 기업가였다"고 했다. 김경민은 '경성의 건축왕 정세권(가제)'을 집필 중이다.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역사는 땅에 각인된다. 북촌 역사가 다시 쓰이는 중이다.
03.02 눈 내린 서산 부석사와 대마도에서 온 금동불 - 눈 내리는 부석사는 천수만 검은돌을 바라본다
검은돌, 검은여
적돌만에 물이 밀려와도 바위들은 머리끝이 바다 위에 솟아 있었다. 바위는 검었다. 사람들은 '검은여'라고 불렀다. 뜬 돌이라고 하기도 했다. 한자로 부석(浮石)이라고도 했다. '여'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말한다. 망망한 바다에 돌이 쌓여 있으니 바다 이름도 쌓을 적(積)에 돌 돌(乭), 적돌만이었다. 천수만이라고도 불렀다. 바닷가 갈마리 마을 사람들은 바다에 떠 있는 돌무리를 숭배하며 풍어제를 지내곤 했다.
1984년 현대건설 회장 정주영이 폐기된 유조선으로 방조제 마지막 물길을 막으면서 방조제 안쪽은 뭍이 되었다. 검은여도 뭍으로 올라왔다. 검은여는 서산간척지B지구 개펄에 비죽 솟은 돌더미가 되었다. 개펄 한가운데에 있어 제사를 올릴 수도 없었다. 주민 이정복이 현대건설에 청원을 올렸다. 분주히 기관들을 오간지 3년 만인 1989년 검은여 앞에 '검은여, 부석(浮石)'이라고 새긴 입석이 섰다. 이후 지금까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사람들은 해마다 4월이면 검은여에 모여 풍어제를 올린다.
만공 스님이 공부한 부석사
검은여를 바라보는 산에는 절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이 절과 바다 위 검은여가 지맥(地脈)이 연결돼 있다고 믿었다. 산 이름은 도비산(島飛山)이고 절 이름은 부석사(浮石寺)다. 섬이 날아와 산이 되었다는 산 이름도, 뜬 돌이 만든 절이라는 절집 이름도 유별하다.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와 이름도 창건 설화도 똑같다. '…당나라로 유학 간 의상대사가 자기를 흠모하는 여자를 뿌리치고 귀국해 절을 지으려니, 창건을 반대하는 무리가 훼방을 하자 공중에서 바위가 날아와 무리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절을 지었고, 그제야 돌이 내려앉더라…'는 이야기. 서산 부석사 주지 원우 스님은 "서산에 인접한 당진(唐津)이 당나라로 가는 포구였으니 서산 부석사 창건설화도 일리가 있다"고 했다. 조선 말 숭유억불 정책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불교계에 경허와 경허의 제자 만공 두 승려가 나타났다. 만공은 이 부석사에 토굴을 짓고 공부를 했다. 대한민국 불교는 이 걸출한 두 스님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융성하지 못했다.
절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가파르지도 평탄하지도 않은 걷기 딱 좋은 산길 중턱에 절이 있다. 근세에 지은 누각과 찻집, 그리고 세월이 보이는 절집들, 간척지가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조망, 그리고 산신각과 만공 토굴로 오르는 오솔길까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욕심부리지 않고 산에 묻어 사는 아담한 절이다. '템플스테이'도 이 부석사에서 시작됐다.
관세음보살 좌상 이야기
2012년 10월 2일 오후 8시 일본 대마도 서쪽 고즈나(小網) 마을에 있는 작은 절 간논지(觀音寺)에 도둑이 들었다. 3인조 도둑은 열쇠보관함에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서 키 50cm짜리 불상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다시 문을 잠그고 사라졌다.
해가 바뀌고 2013년 1월 절도단이 모두 붙잡혔다. 불상도 발견됐다. 절도범들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불상은 마산에 있는 자금책 냉동창고에서 발견됐다. 불상은 1330년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봉안된 고려시대 금동 관음보살좌상이었다. 일본 나가사키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난리가 났다. '빼앗긴 보물이 돌아왔으니 절대 반환 불가'였고, '훔쳐간 장물이니 반드시 반환'이었다. '장물이니 일단 돌려주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축구 경기를 해도 반드시 '타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두 나라이니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결국 3년 전 부석사가 제기한 반환금지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지금 불상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14세기 서산을 휩쓴 왜구
왜구(倭寇). '14~16세기 한반도와 중국 연안과 해상에서 약탈과 납치,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던 일본 해적단'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지만, 그 300년 동안처럼 수시로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해적행위를 한 역사는 없었다. 왜구들은 수도 개경 인근까지 쳐들어와 백성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고려가 망해갈 무렵인 15세기에는 온 나라에 왜구가 활개를 쳤다. 고려사 최영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적들이 동성현에 이르자, '아무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낙토(樂土)로다'라고 떠들었다." 동성현은 지금 경기도 김포 땅이다.
그 당시 서산은 3면이 바다였다. 서산은 뭍으로 오른 왜구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훗날 조선이 개국하고 태종은 아들 세종과 함께 도비산에서 군사훈련을 했고 성종은 1491년 서해안 방어를 위해 인근 해미에 읍성을 세웠다. 젊은 장교 이순신이 이 해미읍성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산 지역은 모두 7차례 왜구 침입을 받았다. 중원대학교 초빙교수인 전 튀니지대사 김경임은 "이때 부석사 관세음보살상을 비롯한 서산 일대 사찰 불상들이 약탈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무쿠리 고쿠리 온다'
대마도를 비롯한 규슈지방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이 있다. '자꾸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는 한국말과 비슷한 뜻이다. 대마도 옆 이키섬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인형도 있다. 무쿠리는 몽고, 고쿠리는 고려사람을 뜻한다. 김경임이 말했다. "13세기 여몽연합군이 왜구를 조직화하는 데 영향을 줬다."
'서산 부석사 관음상의 눈물'이라는 책에서 김경임은 이렇게 주장한다. "1274년 10월 6일 몽고군 2만5000명, 고려군 8000명이 전함 900척을 타고 대마도에 도착했다. 8일 동안 마을들을 약탈하고 방화하고 살상하고 은광을 파괴했다. 포로 수백 명을 잡아갔는데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밧줄로 꿰어 데려갔다." 김경임은 "그 이후 본토에서도 버림받은 대마도 사람들이 주저 없이 왜구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고 했다.
불상이 있었던 간논사는 1527년 여몽연합군과 맞섰던 고노 미치아리의 후손 고노 모리치카가 세웠다. 일본 규슈대 교수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는 1978년 '대마 미술'이라는 학술논총에서 "고노씨가 창립한 간논지에 1330년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일방적 청구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고 했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검찰에 제출한 조사보고서도 "왜구에 의해 약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 이상근이 말했다. "구입 또는 취득 경로가 정당해도 그 전 과정이 불법임이 확인되면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게 국제 관례다. 비록 절도범이 훔쳐왔지만 그 이전 모든 과정이 불법이니 우리가 받는 게 옳다."
대검 마약부장을 끝으로 검찰에서 은퇴한 유금와당박물관 관장 유창종은 이렇게 말했다. "안 돌려주는 것은 감정적 하수에 불과하다. 좀도둑이 훔쳐온 불상을 부석사에 모셔놓는 것은 떳떳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협상을 통해 일단 반환하고 일본으로부터 귀환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대마도에 있는 한국 불상은 190여 점이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불에 타거나 훼손돼 있다. 정상적으로 건너간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석사 주지 원우 스님이 말했다. "내가 만들지도 않았고 내가 빼앗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슨 인연인지 내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다. 그 인연만으로도 불상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산을 여행하는 또 다른 방법
섬이 날아와 솟은 산, 도비산 부석사에 눈이 내렸다. 아랫마을 진눈깨비는 일주문부터 폭설로 변했다. 주지 원우 스님이 말했다. "이렇게 예쁠 수가!" 일희일비를 삼가고 구도에 침잠해야 할 성직자 입에서 터진 감탄사이니, 뜬금없이 설경을 만난 등산객들은 오죽 흥분했으랴.
천수만에 뜬 돌, 검은여는 이제 뭍에서 흰 눈을 맞는다. 뜬 돌이 세운 절 부석사도 온통 희디 희다. 부석사 찻집에 앉아 궁리를 해본다. 관세음보살이 머물 곳은 어디인가. 천지사방이 분별없이 찬란하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서산 여행수첩]
1. 도비산과 부석사: 절 입구까지 시멘트포장길이 있다. 주차장도 넓다. 등산로도 평탄하다. 만공이 수행한 만공토굴까지 길도 걷기 좋다. 맑은 날에는 서산 간척지까지 조망도 좋다. 템플스테이도 한다. www.busuksa.com
2. 해미읍성: 15세기 성곽을 세운 읍성. 1578년에 이순신이 군관으로 열 달 동안 근무했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도 수백명이 이곳 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처형됐다. 하도 처형할 사람이 많으니까 개울에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기도 했고 돌다리에 패대기쳐서 죽이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프란시스코 교황이 해미읍성을 방문하기도 했다.
3. 천주교 상흥리공소: 박해를 피해 천주교도들이 피난 와 집단으로 산 곳. 1903년에 본당이 건축됐다. 지금 남은 건물은 1909년에 사제관으로 세운 건물이다. 한식 목구조로 팔작지붕을 얹은 특이한 건축양식이다.
4. 개심사: '조경'으로 도를 닦음이 분명한, 정원이 아름다운 절. 절집들도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한 기둥을 썼다. 절로 가는 오솔길이 아름답다.
03.09 남사당패의 땅 안성과 여자 어름사니 서주향 - 봄이 오면 바우덕이는 줄을 탑니다
어린 광대 서주향
서주향(24)의 가족은 1996년 경기도 성남에서 안성으로 이사했다. 서주향이 네 살 때였다. 숫기도 없고 끼도 없는 평범한 계집아이였는데, 안성으로 오면서 대략 인생 경로가 정해지게 되었다. 바로 이웃집에 살던 최순칠이라는 사람이 원인이었다. 최순칠은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보존회 열성 회원이었고, 몸집 작고 가냘픈 계집아이 운명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날이면 날마다 최순칠은 주향네 집에 찾아가서 "주향이 풍물 한번 시켜보자"고 졸랐고 화물차를 몰던 아버지 서영석은 "절대 불가"를 외치며 물리치곤 했다.
주향이 초등학교 입학을 한 달 앞둔 1997년 봄 최순칠은 "그러면 구경이라도 시켜주겠다"며 주향을 데리고 보존회 사무실로 갔다. 갔더니 길가 공터에 컨테이너 사무실이 있고 거기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주향은 "서울 한옥마을 놀이마당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주향을 보고 보존회 누군가가 말했다. "얘, 무동 태우자." 주향은 얼른 공연복으로 갈아입고서 또래 친구 한 명과 언니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공연을 했다. 무사히 공연이 끝나고 할아버지들이 주향에게 1만원을 쥐여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주향아 다음에 또 하자."
19년 전 일이니 공연 장면은 기억나지 않고 집에 오다가 만원짜리 지폐를 잃어버려 엄마한테 혼날까 봐 공포에 떨었던 기억밖에 없다. 서주향은 가끔 일흔 살을 훌쩍 넘긴 최순칠 할아버지를 만나면 부둥켜안고 운다. "내 모든 것을 만들어준 할아버지가 이렇게 늙어버려서, 이젠 내가 돌봐야 할 때가 되었으니…" 서주향은 경기도 안성 남사당패의 어름사니다. 높이 2m가 넘는 외줄에서 재주를 넘고 만담을 펼치는 광대다.
경복궁 중건과 요절한 바우덕이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이래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의 중건을 시작했다. 경비를 보충하려고 원납전을 찍어내 벼슬을 팔고 세금을 올리고 조선 팔도 목재란 목재는 죄다 가져와 궁궐을 지었다. 서낭당을 지키는 큰돌과 재목도 공출하고 양반집 가족묘에서도 거목들을 베어다 썼다. 공사 이듬해에 기름을 칠해놓은 목재더미에 큰불이 나 목재와 전각이 불탔다. 대원군은 "산과 묘 주인 허락 여부는 상관하지 말고 벌목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관리들은 "차라리 벌을 내리라"며 거부했다. 지금 서 있는 찬란한 경복궁은 그런 우격다짐 위에 완성됐다.
대원군은 자진해서 부역을 하는 백성들에게 위로금을 주고 짬짬이 농악 공연을 베풀어 피로를 풀게 했다. 팔도에서 동원된 사람들인지라, 고향에서 올라온 공연단이 인기였다. 공연단은 동향인 노동자들 앞에서 고향에서 불렀던 노동요를 부르며 작업을 독려하곤 했다.
안성에서 온 사당패인 개다리패는 우두머리가 열일곱 먹은 여자였다. 미모가 출중한 명창이었다. 이름은 김바우덕이였다. 한자로 김암덕(金岩德)이라고 썼다. 천민(賤民)이었지만 용모는 경국지색에 노래와 춤은 천하제일이었다. 바우덕이가 이끌던 개다리패는 팔도 제일가는 사당패였다. 본거지는 안성 서운산 아래 불당골에 있었다.
1865년 중수식 때 벌어진 경연대회에서 개다리패가 우승을 했다. "바우덕이가 하도 춤을 잘 추어 대원군이 손을 잡아 주었고 바우덕이는 그 손을 명주에 싸고 다녔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노래를 잘했으면 44년이 지난 1909년 황성신문은 '비취(翡翠)'라는 명창을 소개하면서 "안성 바우덕이가 와도 쥐구멍을 찾겠더라"라고 비유했을 정도였다.
세상이 바뀌었다. 20세기 바다 건너 유성기가 들어오고 일본에서 곡마단이 들어왔다. 춤과 노래가 위주이던 사당패 공연은 경쟁이 되지 않는 희한한 유흥거리가 팔도를 휩쓸었다. 여자 단원이 절반이었던 사당패는 도태됐다. 대신 화려한 기예로 무장한 남성 사당패거리가 등장했다. 이들이 바로 '남사당패'다. 바우덕이는 1870년 남사당패의 시대가 오기 전 폐병으로 죽었다. 스물두 살이었다. 개다리패 동료들은 젊은 우두머리를 개울가에 묻었다.
남사당패와 서운면 불당골
안성장은 조선 3대 시장이었다. 한양과 거리도 적당히 멀고, 교통도 편했고 물자도 많았다. 돈을 따라 떠도는 사당패에게 안성은 낙원이었다. 안성 개다리패는 전국 최고였다. 사당패들이 부르는 민요 가사들에는 '안성 청룡에 가자'는 내용이 나온다. 개다리패, 그리고 개다리패를 이어받은 남사당패는 안성 서운면 불당골에 뿌리를 두고 전국을 유랑했다.
불당골 청룡사는 남사당패의 후원자였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규모를 보면 옛 영화가 예사롭지 않다. 광대들은 이 절에서 만든 부적을 팔아 수입 일부를 절에 기부했고 절은 이들에게 신분을 보장하는 사찰 신표를 내줬다. 공생하는 사이였다. "청룡사가 주동이 되어 어린 무동을 양성해 각처로 보냈다"는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도 있다.
바우덕이는 청룡사에서 산 하나 너머 개울가에 묻혀 있다. 개울에 휩쓸려갔는지, 지금 무덤은 가묘다. 묘비에는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치마만 올려도 돈 나온다/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는 이 지역 민요가 적혀 있다.
사당패도 사라졌고 후예인 남사당패도 사라졌다. 세상이 서양에서 건너온 화려한 볼거리를 즐기고 있을 때, 그 후손의 후손의 후손인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보존회가 1989년 경남 마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대원군으로부터 상을 받은 지 100년 하고도 24년 만에 바우덕이가 부활한 것이다. 이후 안성에는 시립남사당풍물단이 생기고 바우덕이는 안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활했으며 상설공연장 객석은 늘상 만원사례다. 바우덕이가 살았던 불당골에는 광대로 천대 받다 요절한 이 여자를 위해 아담한 사당이 서 있다.
미리내 성지
불당골에서 광대들이 천대 속에 사는 동안 자동차로 30분 거리 북쪽 양성면 미산리에서 천주교도들은 이상향을 건설했다.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때 경기도와 충청도에 살던 천주교도들이 숨어들었다. 그때 골짜기에 밤이면 반짝이는 인가 호롱불 불빛이 은하수 같다고 해서 교도들은 미리내라고 불렀다.
1846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이 한양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은 나무에 상투를 묶인 채 목에 칼을 열두 번 맞고서 목이 잘렸다. 미리내 교도들이 한 달 보름 만에 시신을 수습해 미리내로 가져왔다. 1928년 미리내에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성당이 섰다. 이후 미리내는 성지가 되었다.
성지라고 인간사가 모두 성스럽지는 않았다. 미산리에는 약수터가 있었다. 약숫물을 먹으면 장님도 눈을 뜬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약산골이었다. 약산골에는 침 잘 놓는 고씨가 살았다. "앉은뱅이를 고쳐주고서 돈을 조금 주자 '아직 덜 고쳤다'며 다시 침을 놔서 도로 앉혀버린" 욕심 많은 침쟁이였다. 약산골 사람들은 고씨를 '천냥천냥 고천냥, 만냥만냥 고만냥'이라고 불렀다. 100년 전 이야기다. 인간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거닐어도 미리내 성지는 예사롭지 않다. 말 그대로 성지다. 성지임을 알고서 찾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공간이 되었기에, 공기에도 신성한 향내가 흐른다.
바우덕이와 서주향
멋도 모르고 할아버지 손잡고 공연까지 한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는 지금 스물네 살이다. 대학교도 졸업하고 지금 남사당 풍물단 정식 단원이다. 그녀가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줄타기를 배웠다. 민속촌에 가서 선생님한테서 배웠다. 재미나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그저 '하니까 되네?'하는 신기함에 빠져서 했다." 신기함에 매료된 어린 여자아이는 학교도 공식적으로 빼먹고 연습을 했다. 집-학교-남사당을 오갔다. 학생단원이니 공연할 때마다 1만원씩 용돈을 받았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이제 다른 일 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전국을 돌아다녔다. 수학여행도 엠티도 간 적 없다. 과외도 학원도 모른다. 그저 줄만 탔다. 그게 내 인생 전부다. 지금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학생단원에서 객원단원을 거쳐 서주향은 2년 전에야 정식단원이 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공연 한 번에 수고비 1만원을 받았다.
가냘픈 몸매에 온몸 다 까져가며 배운 줄타기가 인생이 되었다. 그래도 떨어질까 무섭다. 공연을 하다보면 관객들이 수군거린다. "여자다, 여자."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서주향을 보며 바우덕이를 떠올린다. 서주향이 말했다. "바우덕이가 누군지는 알지만 꼭 그리 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내 일이다 하고 할 뿐이다. 어름산이가 되지 않았으면 우리집 형편에 그 많은 해외공연은 어떻게 다녔을까. 최순칠 할아버지한테 고맙고 나를 인정해주는 아버지 어머니가 고맙다. 박수쳐주는 관객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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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에는 2003년 하늘로 간 시인 조병화 문학관이 있다. 조병화의 고향 양성면 난실리에 있다. 조병화는 어릴 적 떠났던 고향으로 만년에 돌아와 시와 그림을 만들며 살았다. 고향에 있는 문학관에는 그의 일생이 기록돼 있다. 거기 전시관에 그가 쓴 시가 적혀 있다. '살은 죽으면 썩는다 / 어머님 말씀.'('산다는 거' 전문)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전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 150년 전 바우덕이가 그러했듯, 줄 타는 여자 어름산이 서주향의 인생도 운명적이다. '철모른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다섯 살에 두 여자는 사당패에 들어가 인생을 그리 살았고 그리 살고 있다. 그래, 시인 말대로 살은 죽으면 썩는 법. 하지만 지금 안성으로 가보라, 그 뒤 무엇이 남아서 우리들 가슴을 울리는지 느껴보라.
03.16 원주 神林과 중국에서 온 옻칠장이 김성권
神이 사는 숲에 봄이 움튼다
중국에서 온 칠장(漆匠) 김성권
올해 스물여덟 살인 김성권은 옻칠장이다. 칠예(漆藝) 장인이라고도 한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팔가자진(八家子鎭)이 고향이다. 전주가 본관에 조상이 경상도에서 왔다는 사실만 알 뿐, 나머지 가족사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 김동철(金東哲·54)은 기관사였다. 어머니 김화(金花·52)는 공장 근로자였다. 김성권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는 아이를 친척에게 맡기고 러시아로 가 돈을 벌었다. 2년 뒤 돌아온 아버지는 한국으로 갔고 또 2년 뒤 어머니도 한국으로 갔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위해 두 사람은 인생을 바쳤다.
용정(龍井)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김성권은 "중국에서 대학 나온댔자 장래에 뭐 하겠는가"라고 생각했다. 2009년 3월 김성권은 부산 영산대학교 실내환경디자인학과로 유학을 왔다. 2012년 4학년 1학기 옻칠 거장 전용복(全龍福)이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난생처음 접한 옻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졸업식을 앞두고 김성권이 전용복에게 찾아가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나 제자 시켜 주시라." 세월이 4년 흘러 전용복이 말했다. "성권이는 1등이다." 거장(巨匠)이 인정하는 젊은 칠장이가 있는 곳은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 상지영서대학교 칠예연구소다.
귀신이 사는 성남리 神林
원주 남쪽에 신림면(神林面)이 있다. 신령한 숲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숲이 있다. 조선 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신림이 나와 있고 고려사에도 신림이 나온다. 숲에는 서낭당이 있어서 주민이든 보부상이든 사람들은 절을 하고 지나다녔다. 신림면은 치악산 국립공원 어귀에 있다. 귀신이 사는 숲 공식 명칭은 성남리 성황림이다.
지금은 대낮으로 바뀌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4월 초파일과 음력 9월 9일 밤 열두 시에 제사를 지냈다. 돌계단 위 당집 오른편 전나무에 제를 올리고 왼편 엄나무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태워 올렸다. 신목(神木)인 전나무와 엄나무는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무리 삼천을 끌고 강림한 태백산 신단수, 원형 신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우주 나무'와 같은 나무다.
제사를 마치면 마을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소 한 마리를 동네방네 나눠 먹고 술을 마셨다. 밭 태워 입에 풀칠하던 화전민(火田民)들도 당제 올리는 밤에는 제사에 끼어들어 덕을 나눴다. 성남리 주민들은 "소 대신 돼지를 올린 해에 송아지들이 울타리를 넘다가 죄다 다리가 부러져 제사를 다시 지냈다"고 했다.
들꽃을 닮은 김명진·곽은숙 부부
신성한 성황림 옆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김명진(54)과 곽은숙(45) 부부는 차를 팔고 음식을 팔고 들꽃을 심는다. 사는 집 이름은 '들꽃이야기'다. "남의 집 놀러 와 설거지를 하니 여자가 돼 보여서" "무한 긍정과 무한 지식에 홀려서" 서로에게 빠진 애니메이션 제작자와 국어 교사는 1998년 4월 24일 서울에서 성남리로 내려왔다. 낡은 막국수 집 사서 청주공항 건설 때 철거된 집들 목재를 날라다 황토집을 지었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 키우고 싶어서"라고 했다.
정민이와 정현이 두 딸 먹여 살리느라 찻집을 열었다. 하루 매상은 많아야 2만원이라 아예 가게 문 열어두고 산과 들 다니며 들꽃을 모아 뜰에 심었다. 2005년 마을 사람들은 젊은 김명진을 이장으로 뽑았다.
"글 몰라서 전화도 못 한다"는 마을 할머니들에게 한글도 가르치고, "평생 못 가봤다"는 극장도 모셔 갔다. 음악회도 열었다. 한글을 배운 송수분 할머니는 "글 배워 여한 없다"고 웃으며 한글학교 졸업하고 석 달 뒤 하늘로 갔다. 여든여섯 살이었다. 그때 할머니들이 쓴 글을 읽으면 지금도 부부는 가슴이 먹먹하다.
김명진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늘 말했다. 남 인심 얻으려면 내 인심 먼저 쓰라고. 사람들이 아끼고 배려하니 당숲도 저리 아름다운 게 아닌가. 무연고지에 새로 뿌리 내린 것, 후회하지 않는다." 사는 모습이 워낙 예쁜지라 들꽃이야기는 원주는 물론 전국 명소가 되었다. 그 사이 두 딸은 학원 한 번 안 가고도 영어면 영어, 역사면 역사, 체육이면 체육에 그림이면 그림에 큰 눈을 뜬 대학생과 고교생으로 자랐다.
1000년 세월 견뎌낸 원시림
영화 '신기전(神機箭)' 첫 장면을 이 숲에서 찍은 스태프들은 "비무장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원시림"이라며 놀라워했다. 2012년 조사 때 숲에서는 보호 식물이 나무와 풀 합쳐서 201종류가 발견됐다. 주민들은 "숲에 들어가면 발밑을 조심하라"고 꼭 말한다. 1933년 총독부는 이 숲을 조선보물고적명승 93호로 지정했다.
1962년 대한민국은 그 번호 그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이름은 '윗성남 당숲'에서 '성남리 성황림'으로 바뀌었는데, 송수분 할머니의 막내 아들인 향토사학자 고주환에 따르면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해마다 실개울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나무에 새싹이 움틀 무렵이면 땅에서는 샛노란 복수초가 '나 밟지 말아요' 하고 방긋방긋 속삭인다. 주민들이 가진 신심(信心) 덕분에 숲은 생태학적으로도 귀한 존재로 살아남았다. 신심이 영원을 만든 것이다.
용소막성당과 명주사
신림에 사는 모습은 묘하게 이름과 닮았다. 면사무소에 따르면 인구 3863명인 이 작은 면에 종교 시설이 서른세 군데다. 성당이 하나, 교회가 열네 곳, 절이 열여덟 곳이나 있다. 그 많은 종교 시설 가운데 용소막성당과 태고종 명주사는 꼭 가봐야 한다.
용소막성당은 용암2리에 있다. 1866년 병인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도 공동체가 이곳에 있었다. 성당 앞마을 이름은 종림마을이다. 종림에는 또 다른 신림인 시무숲이 있었다. 성남리 사학자 고주환이 말했다. "시무숲은 신림 전체를 지키는 당숲으로 보인다. 내 고향 성남리 당숲보다 더 오래되었다." 시무숲은 들판으로 변했고, 용소막 성당이 그 신성한 역할을 대신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용소막마을은 외국인 신부들이 총독부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줬다.
명주사는 어떤가. 군승(軍僧)을 지낸 한선학 스님이 세운 태고종 사찰이다. 절집마다 기와 대신 머리에 인 너와가 독특하다. 동시에 동서양 고판화 수천 점을 소장한 고판화 박물관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목판이 숱하다. 판화라는 장르가 '싸구려'가 아님을 확신한 스님의 신념이 만든 결과다.
후회하지 않는 칠장이 김성권
신성한 숲 옆 부부의 찻집에서 김성권이 말했다. "옻을 접한 순간 느낌이 왔다. '이건 내 운명'이라고." 옻은 안료를 섞으면 무지개색을 낼 수 있는 총천연색 도료요, 1000년을 간다는 견고한 도료다. 자개에 금속, 흙까지 웬만한 재료는 섞어서 쓸 수 있는 열린 도료다. 무덤에서 나온 800년 전 옻칠 관 속 연꽃 씨가 싹을 틔우는 기적의 방부제다. 그가 말했다. "세상은 옻을 경쟁력 없는 분야라 하지만 틀린 생각이다. 첨단 도료와 미학적 재료로 틀림없이 각광받으리라 확신한다."
옻을 배운 지 5년이 됐지만 한 점도 자기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배울 뿐이다. "스승 이름 더럽힐까 두렵고, 아직 수준이 안 돼서"라고 했다. 스승 전용복이 말했다. "인내심 없이는 옻 작업이 불가능한데, 성권이는 유전자에 옻칠이 돼 있는 거 같다." 제자 김성권이 말했다. "기쁘게 택한 내 운명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신성한 숲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신념과 믿음을 의탁한다. 젊은 칠장이도 후회가 없다고 했고 들꽃 심는 부부 또한 후회 없다고 했다. 지구상 65억 인구는 모두가 신성하다. 하지만 그 신성한 영혼에게 후회 한 번 어찌 없으랴. 그렇거들랑 당장 신림으로 가보라. 혹시 아는가, 우리가 모르는 신이 나타나 자기만 알고 있는 지혜를 깨우쳐줄지.
원주 여행수첩
1. 성남리 당숲: 개인적인 출입은 금지. 성황림마을 체험관에 물으면 숲 생태 체험을 할 수 있다. 홈페이지는 성황림.kr (033)763-7657. 성남리 고주환 선생에게 이메일로 연락하면 전문적 숲 해설을 받을 수 있다. 식물을 통해서 본 세상 이야기 '나무가 청춘이다' '나무가 민중이다'의 저자다. 이메일은 khk8926@naver.com
2. 용소막성당: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세운 천주교 교회. 당시 중국 기술자가 기둥 높이를 잘못 계산해 지붕 경사가 급하고 첨탑이 건물 규모에 비해 높다.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는 석양 무렵 실루엣이 근사하다. 용암리 719-2.
3.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 태고종 사찰. 아시아 각국 고판화와 희귀 목판을 감상할 수 있다. 5월 15일까지 '붉은 열정 손오공 특별전'. 박물관 입장료 성인 5000원. 템플 수련관에서 템플스테이도 한다. www.gopanhwa.com 신림면 황둔2리, (033)761-7885.
03.23 섬진강 꽃마을과 피아골 이장 미선이
어찌하여 봄은 항상 섬진강에서 오는가
섬진강변에 매화가 피고 지리산 자락에 산수유가 피었다. 백운산 옛 절터에는 동백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런 호강이 없다. 구례에서 광양까지, 꽃길 따라 남하해본다.
구례 산동마을과 백부전
전남 구례 산동마을에는 백부전이 살았다. 다섯 남매 중 막내였다. 해방 정국 때 밤에는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내려와 우익들을 죽였고 낮에는 토벌대가 좌익들을 죽였다. 둘째 오빠 남승이 그 와중에 죽었다. 큰오빠 남수는 일제 때 전쟁터에 끌려가 죽었다. 그녀가 열아홉 살이던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이 터졌다. 셋째 오빠 남극이 토벌대에 끌려가던 날 백부전이 말했다. "내가 간다. 오빠를 살려 달라." 백부전이 처형 직전에 시를 읊었다. 제목은 산동애가(山東哀歌)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 맺어놓고 /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하략)'
많은 사람은 '빨치산 여걸 백부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부른 노래'라고 알고 있지만 틀린 말이다. 오빠를 살려 집안 대를 이으려는 당시 시대정신의 실천자였을 뿐 이념과는 무관한 여자였다.
산동마을에 산수유는 관상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꽃이다. 노란 산수유가 지고 빨간 열매가 달리면 사람들은 그 열매를 따서 팔았다.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이 먹고살 만해지면서 생존을 위해 기른 이 산수유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리산을 향해 길게 펼쳐진 마을 골목과 개울, 담벼락이 온통 산수유다.
젊은 이장, 피아골 미선이
지리산 반대편 피아골은 원래 피밭골이었다. '피밭'에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빨치산과 토벌대 냄새를 맡는다. 사실과 다르다. 피아골 입구 연곡사 스님들은 벼농사가 불가능한 첩첩 산골에 피를 심었다. 그래서 이름이 피밭골이 되었다. 이 피밭골이 세월 속에 피아골로 바뀌었다.
직전마을은 피 직(稷)에 밭 전(田), 즉 피밭 마을이다. 원조 피아골 마을이다. 서른두 가구가 사는 이 직전마을에 미선이가 산다. 미선이는 직전마을 이장이다. 임기 2년짜리 이장을 세 번이나 연임 중인 '젊은' '여자' 이장이다. 김미선, 1985년생이다.
1983년 당시 거제도 대우조선 사원 김현덕(58)은 피아골로 휴가를 떠났다. 수녀를 꿈꾸며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던 여자 이영옥(55)을 보았다. 양가 반대를 물리치고 두 사람은 이듬해 마을 빈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첫딸 미선이 태어났다. "미선이 하나랑 벌 한 통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미선이가 돌이 지나고 결혼식을 올렸고 3년 뒤 지혜가 또 7년 뒤 애영이가 태어났다.
삶은 팍팍했다. 미선이 말했다. "다섯 살 때부터 자갈밭을 손톱으로 긁다시피 하며 일을 했다. 나, 그게 놀이인 줄 알고 자랐다. 고로쇠 물 받으러 갈 때면 엄마는 내 튼 손 보고 울었고 나는 엄마 손 옹이 보고 울었다."
자갈밭 골라 민박과 식당을 차렸다. 미선은 다섯 살에 된장과 장아찌를 만들었다. 손님들은 키가 허리춤에 닿는 아이들을 예뻐했다. 미선이네 식당에 자주 들렀던 관광버스 기사들은 "미선이 네가 그렇게 고생을 했더랬는데"하고 울곤 한다.
전주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고도 시간 날 때면 집을 찾았다. 피아골이 좋았다. 도시로 나가 돈을 벌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올까. 집을 택했다. 2005년이다. 학교 친구들이 말했다. "청춘 안 아깝냐. 무능력자나 시골 간다." 지금 그 친구들이 묻는다. "여기 들어와서 살려면 어떻게 하냐"고.
돌아온 고향은 바빴다. IMF 이후 빚보증 잘못 서 산더미처럼 불어난 빚은 여전했다. 미선은 엄마를 돕고 아버지를 도우며 식당과 민박을 꾸려갔다. 그리고 식품 명인들을 찾아다녔다. 장아찌를 배우고 장 담그는 법을 배웠다. 불쑥 찾아와 음식을 배우겠다는 어린 여자를 명인들은 하나같이 반겼다. 나중에 한 명인이 말했다. "이 년아, 네가 벌써 나를 뛰어넘었구나!"
살갑게 달라붙는 어린 미선이를 손님들은 좋아했다. 손맛도 좋아했다. 미선네 민박집과 식당은 피아골 여행객들에게 명소가 되었다. 2010년 동생 지혜가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으로 왔다. 2014년 막내 애영이도 합류했다. 2011년 공장을 지었다. 장류와 장아찌류를 만드는 공장이다. 이름은 '지리산 피아골식품'이고 브랜드명은 '피아골 미선씨'다.
2012년 6월 직전마을 사람들은 미선이에게 이장 임명장을 수여했다. 스물일곱 살 먹은 처녀가 산골 마을 이장이 되었다. 이장 미선은 전등 갈아 끼우고, 편지 부치고, 반찬 사오고, 은행 심부름을 하고, TV를 고치러 이모네, 할머니네로 스쿠터를 몬다. 그녀가 말했다. "어르신들마다 꽃꽂이, 영화 감상, 약초 같은 문화적 취향이 다 있었다. 이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주고 가난했던 삶을 치유해주고 싶다."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장이 잘돼서 식당을 때려치우고 싶다. 우리 집 손님들이 동네 친구들 집으로 골고루 갈 테니까. 아랫동네 좌판 할머니들 산나물까지 몽땅 사버리고 싶다. 더 많은 동네 이모들이 월급봉투 받고 웃을 수 있을 테니까.'
도선이 잠든 옥룡사지
전남 광양읍 북쪽에 있는 백운산에는 동백나무 숲이 빽빽하다. '끝이 없다'고 해야 한다. 숲 한가운데에는 너른 터가 하나 있었다. 정체를 몰랐던 이 터를 1997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했다. 결론은 '도선 국사가 주석하고 죽은 옥룡사지'였다. 사적 407호다.
도선 국사(827~898). 원효와 함께 이 땅 웬만한 절에는 도선과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한다. 묏자리를 잡는 흔한 풍수지리와 달리 도선은 모자라는 부분에 건물이나 숲을 채워넣는 비보(裨補) 풍수에 능했다. 도선은 옥룡사에 모자라는 부분을 동백나무 숲으로 채워넣었다.
지금 옥룡사지에는 동백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졌다. 300년 수명을 다한 나무들은 세월 속에 또 심고, 또 심어서 지금 숲이 되었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숲은 크고 깊다. 한꺼번에 피고 지는 다른 동백과 달리 이곳 동백은 시기를 두고 피었다가 진다.
황량한 절터를 지나 오른쪽 오솔길로 내려가면 경사 급한 작은 공터에 복원된 도선 국사 부도탑이 있다. 1997년 발굴 당시 부도탑지 아래에서 작은 통일신라시대 석관이 나왔다. 석관 속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60대 남자 유골이 나왔다.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선 국사 유골이라고 믿고 있다. 화장을 하지 않고 세골장을 지냈다는 것이다.
유골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부도탑 위치가 중요하다. 풍수학자 지종학은 '도선의 부도탑에 담긴 비보 사상(2012)'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반도 풍수의 비조로 불리는 도선국사의 부도는 일반적으로 명당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취약한 지점이다. 도선의 부도는 옥룡사 절터를 비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도선께서 평생 이루고자 했던 것이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구세도인(救世度人)이었음을 생각하면, 죽은 육신까지 바쳐 옥룡사를 통해 자신의 염원을 이루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와 상관없이 도선이 죽어서 말하려 한 바가 무엇인지 동백 숲에 물어보라.
매화, 섬진강 그리고 홍쌍리
동백나무 숲에서 산을 돌아 섬진강으로 간다. 매화마을이 나온다. 이미 광양 전역에 새하얗게 피어 있는 매화밭이 이곳 다압면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에서 발상했다. 광양시청 매화정책팀장 최연송이 말했다. "단언컨대 광양 매실은 오직 한 사람 홍쌍리에게서 비롯했다."
홍쌍리는 청매실농원 여주인이다. 남이 뭐라든 젊을 적 강변 야산 돌밭을 개간해 매실을 심고 매실로 매실청과 장아찌, 장류를 개발해낸 여자다. 최연송은 "매실은 그저 관상용이나 약용으로 쓰였을 뿐 홍쌍리가 매실 활용법을 보급하면서 농민들이 매실 농사를 짓게 됐다"고 했다. 지금은 아들 김민수가 농원을 꾸린다. 산수유마을처럼 외지인들은 꽃구경을 하러 매화마을로 온다. 이번 주말까지 축제다. 길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하지만 가볼 가치가 있다. 강변 공기에는 매화향이 가득하다. 아침이면 매화밭은 섬진강 물안개에 싸인다. 비가 오면 매화 비가 내린다. 비가 개면 푸른 하늘에 매화꽃이 봉긋 솟는다.
백부전은 집안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김미선은 마을을 위해 마을로 돌아왔다. 도선은 나라를 위해 스스로 악지(惡地)를 골라 묻혔다. 홍쌍리 덕분에 섬진강 농부들은 매실로 돈을 벌게 되었다. 이 봄날, 지리산과 섬진강 꽃 나들이에서 엿들어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볼거리〉
1. 옥룡사지: 도선 국사가 말년에 주석했다는 절터. 동백나무숲이 아주 근사하다. 오솔길에 있는 도선 국사 부도탑 이야기도 유의한다. 옥룡면 추산리 303.
2. 구례 산수유마을: 산동면에 있다. 마을 입구에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다.
3. 광양 매화마을: 광양 다압면에 있다. 청매실농원을 검색할 것. 주말까지 이어지는 축제 기간엔 길이 굉장히 혼잡하다. 농원 입구 장터는 소음이 심하다. 무시한다. 농원 안으로 갈수록 조용하고 분위기가 좋다. www.maesil.co.kr, (061)772-4066
04.06 봄이 내린 春川과 커피 볶는 여자 조수경 - 호수에 봄이 내렸습니다
올해 쉰여섯 살인 조수경은 춘천 공지천변에서 커피를 볶는다. 커피 볶는 집 이름은 이디오피아벳이다. '벳'은 집이라는 뜻이다. 어머니 김옥희가 1968년 11월 25일 문을 연 커피숍이다. 공지천은 청춘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48년 세월이 흘렀다. 허허벌판이던 천변에 벚꽃이 피어났다.
지금, 커피콩으로 소꿉놀이를 하고 대학시절 어머니 커피숍에서 DJ로 학비를 벌던 딸 수경이 원두를 볶는다. 가뜩이나 새치가 많던 조수경 머리는 벚꽃처럼 찬란한 백발이 되었다. 공지천에 봄이 왔다. 춘천에 봄이 왔다.
공지천과 '이디오피아'
춘천 효자동에 흐르는 작은 강 이름은 공지천이다. 오리배가 놀고 천변은 벚꽃 천지다. 이름에는 전설이 있다. 원래는 곰지내였다. 전설에 따르면 퇴계 이황이 춘천 외갓집에 놀러 왔다가 머슴을 시켜 여물을 곰지내에 버리니 여물 짚이 고기로 변했다. 그 물고기 이름을 공지어(孔之魚)라고 했고, 곰지내는 공지천(孔之川)이 되었다. 퇴계 외갓집이 있던 곳은 퇴계동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당시 이디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1세는 황실 근위부대를 파병했다. '하일레'는 '힘'이고 '셀라시에'는 '삼위일체'라는 뜻이다.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독교 구약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부대 이름은 캭뉴 대대였다. 칵뉴는 '적을 궤멸시키라'는 뜻이다. 1951년 5월 6일 부산항으로 들어온 캭뉴 대대는 253회 전투에 3517명이 싸워서 121명이 죽고 536명이 다쳤다. 대대는 전쟁이 끝나고도 1965년 3월 1일까지 구호활동을 벌였다.
캭뉴 대대가 주로 활동했던 춘천지역 사람들은 1968년 5월 19일 이디오피아참전기념비를 세웠다. 하일레 셀라시에1세 황제가 준공식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탑은 공지천변에 있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수행한 황제는 천변에 서서 김현옥에게 말했다. "여기에 이디오피아문화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대구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김현옥의 조카 김옥희는 우연하게 춘천에 놀러 왔다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전날 '국기를 온몸에 휘감고 서 있는 꿈'을 꾸고서 해몽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그녀였다. 김옥희가 외삼촌에게 말했다. "내가 짓겠어요."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난리가 터졌다.
이디오피아는 커피 역사가 시작된 땅이다. 전설에 따르면 카파(Kaffa)라는 마을에서 칼디라는 목동이 어떤 열매를 따먹고선 지치지 않고 펄펄 뛰어다니는 염소들을 관찰하다가 커피를 찾아냈다. 이디오피아문화관은 당연히 커피를 팔아야 했고, 1960년대 커피숍은 '물장사'를 뜻했다. 물장사. 술장사와 같은 말이었다.
시부모는 "그런 며느리 못 둔다"고 돌아앉았다. 역시 교사였던 남편 조용이는 "내 아이들은 내가 기른다"며 반년 동안 대구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며느리는 퇴직금 털어서 황제가 앉았던 천변 그 빈터에 집을 지었다. 그해 11월 25일 황제는 '이디오피아벳'이라는 친필 휘호와 이디오피아산 생두를 외교행낭으로 하사했다. 지금도 이디오피아집을 찾는 이디오피아인들은 현관문을 열면 그 자리를 향해 걸어가면서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춘다.
맹랑한 며느리이자 아내인 김옥희는 프라이팬에 원두를 볶고, 대사관을 찾아 로스팅을 배우며 커피를 팔았다. 방앗간에 가서 콩을 쪄와서 커피를 내리기도 했다. 기싸움에 패배한 남편도 학교에 사표를 내고 아이들을 끌고 춘천으로 왔다.
이디오피아-에티오피아
1974년 이디오피아가 공산화되자 당국에서 인테리어를 몽땅 철거하고 이름도 시비를 걸었다. "우리를 살려준 참전 국가다"라는 김옥희의 당당한 대꾸에 커피숍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공지천에 제대로 된 원두커피가 있다는 소문이 팔도에 퍼져 나갔다. 예인(藝人)과 개똥철학자와 청춘남녀들이 이디오피아집을 찾아갔다. 양희은과 박인희가 DJ를 봤고 소설가 이외수가 죽치고 앉아 글을 썼다. 춘천 여고생들은 이디오피아로 와서 위스키가 든 커피를 마시며 성년식을 치렀다.
딸 조수경이 말했다. "어머니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용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DJ를 봤다. 사람들이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영업이 끝나면 밤에 세 시간 동안 못에 꽂은 매출전표를 계산하곤 했다. 하루 1500잔도 팔아봤다." 가난하고 척박한 시절, 춘천과 공지천과 이디오피아집은 멋이요 낭만이었다.
그러다 부부가 늙어버렸다. 2009년 어느 날 김옥희가 서울에서 영화 특수분장을 하던 딸 조수경에게 전화를 했다. "내려오너라." 일주일 고민하다가 딸은 자기가 태어난 춘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디오피아집 주인은 조수경이다. 조수경이 말했다. "염색도, 손톱도, 화장품도 커피 향에 방해가 되는 일체 장식은 금물이다. 남는 이윤을 우리를 도왔던 이디오피아로 보내는 일도 여전하다. 부모님도 커피를 마시면 돈을 치른다."
커피숍 주소는 '이디오피아길 7번지'다. 강둑길로 명명됐던 천변 도로명을 2011년 개명했다. 조수경이 말했다.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이디오피아다. 이디오피아 사람 그 누구도 에티오피아라고 하면 화를 낸다. 왜 나라 이름을 멋대로 바꾸느냐고. 일일이 발음을 녹음해서 시청에 줬다. 그래서 길 이름을 제대로 찾았지."
이디오피아집에서 일하는 이디오피아 여자 베티가 말했다. "나는 이-디-오-피-아 사람"이라고. 이 글에서도 에티오피아를 이디오피아라고 부르기로 한다. 벚꽃이 한창인 지금, 해거름이면 공지천에는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커피 메카 강릉에서 커피를 마시고, 굳이 이디오피아집에 들러서 하루를 끝내겠다는 사람들이다.
봄이 흐르는 의암호
공지천은 의암호로 흐른다. 의암호는 1967년 11월 완공된 인공호수다. 옛 마을들은 호수 아래 잠겼다. 얕은 앞, 뒷산들은 중도와 붕어섬과 뱀섬이 되었다. 퇴계가 창조한 공지어는 간 곳 없다. 대신 연전에 풀어놓은 배스가 대량으로 잡힌다. 해마다 봄이 되면 의암호에는 카약 무리가 나타난다. 여러 물길을 따라 섬으로 변한 야산 주위를 돌아다닌다. 뱀섬은 박사 많이 나기로 유명한 서면 박사마을 앞에 있다.
늦은 봄 아침이면 호수에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중도유원지와 뱀섬 사이에 있는 물길은 무릉도원이 된다. 새소리가 그리 시끄러운데 카약에 탄 사람들은 오히려 고요함과 적요함을 느낀다. 위로는 하늘이요 주변에는 녹음에 아래는 푸른 물밖에 없다. 아예 카약을 서너 시간씩 빌려 타고 그 물길에서 책을 읽고 커피를 홀짝이는 사람도 있다. 의암호반에는 카약을 빌려주는 업체가 세 군데 있다.
구봉산 카페거리와 신숭겸 묘
이디오피아집 커피 향과 의암호 봄내음만 생각해도 춘천이 그립다. 그런데 춘천에는 봄날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더 있다. 구봉산 카페 거리다. 춘천 동쪽 넓은 신작로는 구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길 양편으로 잘 만든 건물들이 보이고 너른 주차장이 보인다. 모조리 카페에 레스토랑이다. 반드시 해거름에 가야 한다. 봄내음 짙은 저녁노을을 봐야 한다. 풍수지리학상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 너머 떨어지는 석양은 말 그대로 일품이다.
신숭겸 묘도 마찬가지다. 신라의 구원 요청에 대구 전투를 치른 왕건은 후백제 견훤 부대에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에 부하였던 장수 신숭겸이 왕건과 옷을 바꿔입고 적에게 돌진해 목이 잘려 죽었다. 훗날 왕건이 이를 비통해하며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도선 국사가 자기를 위해 점지해둔 춘천 명당에 그를 묻었다. 황금 머리를 도굴당할까 걱정해 묘는 세 개를 썼다. 서면에 있는 신숭겸 묘역은 기록과 전설 그대로다. 3000그루가 넘는 소나무 숲에 왕릉처럼 큰 묘 세 개가 앉아 있다. 이 봄날, 묘역에서는 산새들이 한가롭게 벌레를 잡는다.
춘천에 봄이 왔다. 천(川)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산과 석양으로 봄이 흐른다. 흐르는 봄 속에서 백발 성성한 여자 조수경이 커피를 볶는다.
[춘천 여행수첩]
1. 이디오피아집: 1968년 문을 연 원두커피집. 예약하면 이디오피아 전통 방식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춘천시 이디오피아길7, (033)252-6972
2. 신숭겸 묘: 서면 박사마을 안쪽에 있다. 소나무숲이 웅장하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부하, 부하를 아낀 주군 이야기를 알면 느낌이 다르다.
3. 구봉산 카페거리: 동면에 있다. 반드시 해질녘에 가도록 한다. 석양이 일품.
04.13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 - 찬란하였으되 너무도 허망하였느니라
그 마지막 날 풍경
찬바람이 부는 음력 8월 2일, 백제 수도 사비성 왕궁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서기 660년이었다. 대청마루 위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앉아 있었다. 마루 아래 땅바닥에는 백제 의자왕이 앉아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백제로 망명한 신라 장수 검일(黔日)이 포박된 채 앉아 있었다. 18년 전인 642년 7월 검일은 백제군에 포위된 대야성(大耶城)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검일은 성주인 김품일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한(恨) 풀이를 벼르던 사내였다. 그 전투에서 성주 김품일과 고타소랑(古陀炤娘) 부부가 죽었다. 고타소랑은 태종의 딸이고 김품석은 사위였다. 18년이 흘렀다.
태종이 말했다. "너는 죄가 세 가지다. 창고를 불질러 성 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고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며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한 죄." 신라 병사들은 검일의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어버리고 백마강에 던졌다. 백제 왕국 678년 역사도 끝났다. 7월 9일 금강 하구 기벌포에 상륙한 당나라 부대와 같은 날 황산벌에서 계백 부대와 맞붙은 김유신 부대가 사비성에 진군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고고학자 심상육과 궁남지(宮南池)
부여군립 백제고도문화재단 책임연구원 심상육은 1973년생이다. 백마강 지류인 왕포천 건너 장암면 정안리가 고향이다. 마을 주변에는 백제 시대 가마터가 있었고 선산에는 고분이 널려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배를 타고 강 건너 읍내로 소풍을 갔다. 옛 절터인 군수리사지에 오르면 궁남지(宮南池)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어찌 하다 보니 고고학자가 되었다"고 그가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634년 3월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성 남쪽에 20리 물길을 내 못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심고 한가운데에 섬을 만들었다. 4년 뒤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大池)에 배를 띄웠다"고 돼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서동이고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다. 두 나라가 피터지게 싸우는 와중에 벌인 사랑이라, 궁남지는 연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됐다. 부여를 상징하는 캐릭터도 서동과 선화공주요, 궁남지가 있는 곳 이름도 서동공원이다.
하지만 '궁 남쪽 연못'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이 연못이 궁남지라는 다른 근거는 없다. 부여에서 나고 자란 70대 김요한-원한 자매는 "지금처럼 정비돼 있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에도 궁남지 못가에서 놀았다"고 회상한다. 밤이면 연못가 버드나무 밑동에 조명이 켜지고, 작은 섬 위에 있는 정자도 불을 밝힌다.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백제가 망했다. 평화를 그리워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망했다.
7세기, 멸망으로 가는 나날들
백제를 둘러싼 7세기 동아시아 역사는 복잡하다. 시대순으로 짤막하게 언급을 해본다. 641년 의자왕이 즉위했다. 642년 의자왕이 신라 깊숙이 쳐들어가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사령관 윤충은 김춘추의 딸과 사위 목을 잘라갔다. 88년 전인 554년 관산성에서 성왕 목을 잘라간 신라에 대한 복수였다. 648년 딸을 잃은 김춘추가 나당연합을 제안하러 당나라로 떠났다. 그해 김유신이 옥문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야성 성주 김품석 부부 유해와 생포한 백제 장수 8명을 맞교환했다. 651년 당나라는 두 차례 벌인 고구려 공격에 실패하면서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하라고 요구했다. 백제는 이를 무시하고 655년 고구려, 말갈 연합군과 함께 신라 북쪽을 공격했다. 세상은 합종연횡이 한창인데, 백제는 유아독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655년 이후 백제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붉은색 말이 한 절 대웅전에 들어가 죽었다. 659년 2월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했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백제는 망한다"고 울었다. 대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의자왕은 개의치 않았다. 승리감에 취해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했고 왕궁 남쪽에 큰 정자를 세웠다. 왕비와 비, 궁녀들과 함께 술을 즐기며 충신들을 멀리했다. 이미 648년 김춘추가 맺은 나당동맹이 차근차근 진행돼 659년에는 백제를 칠 준비가 완료돼 있는 상태였다.
부소산성 삼충사와 의자왕
고고학자 심상육이 말했다. "백제사는 기록도 많지 않은 데다 그나마 있던 유물과 기록도 사비성이 약탈되면서 망국과 함께 사라졌다. 발굴되는 기와에는 음양각으로 도장이 찍혀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도 수수께끼다." 심상육은 "그래서 백제사는 알수록 애잔하다"고 했다. 기록이 드문 이유가 망국에 따른 철저한 유린과 약탈이라서 더 그렇다고 했다. "나는 부여 사람으로서, 고고학자로서, 부여 사적을 발굴하는 혜택을 받고 산다." 그의 말에도 애잔함이 배 있다.
해동증자로 존경받던 의자왕은 말년에 승리감에 도취해 충신들을 버렸다. 삼국사기는 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했다"고 평가했다. 주색에 빠져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656년 좌평 성충이 "정신차리시라"고 극간(極諫·목숨을 걸고 아뢰는 일)했다가 옥에 갇혔다. 성충은 "기벌포와 탄현을 지키시라"고 유언하고서는 "백제 망하는 꼴 안 본다"며 단식하다 죽었다. 660년 바른소리하다가 유배를 당했던 또 다른 충신 흥수도 같은 취지로 조언을 했다. "듣지 마시라"는 간신들 말에 왕이 혹하던 그 순간 나당연합군은 기벌포와 탄현을 장악하고 사비성으로 진군 중이었다. 계백이 탄현으로 나가 신라군에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오천 결사대도 목숨을 걸었지만 5만 신라군도 목숨을 걸었다.
신라군은 승리가 아니라 백제 멸망이 목표였다. 아무리 피해가 극심해도 무조건 최단 시간에 당나라 군사와 만나 사비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진군 거리는 하루 20㎞로, 6·25전쟁 때 인민군이 남진하는 속도와 비슷했다. 불과 한 달 만에 13만 당나라 대군과 5만 신라군에 백제는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백제를 지켰던 세 충신은 부소산성 삼충사 사당에 모셔져 있다.
100년 이어진 가문의 복수
의자왕은 옛 수도인 웅진(공주) 공산성으로 후퇴해 농성전을 노렸지만 성에 들어간 지 닷새 만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백성들 피해를 우려한 배려였다는 말도 있고 웅진 장수 예식(禮寔)이 왕을 강제 투항시켰다는 말도 있다. 먼저 투항한 왕자 융(隆)에게 신라 태자 법민(法敏)이 침을 뱉으며 쏘아붙였다. "네 아비가 내 누이동생을 부당하게 죽여 감옥 안에 묻었다. 나는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고 머리를 앓았다." 크게는 국가들이 벌인 전쟁이요 작게는 개인적인 복수심이 만든 전쟁이었다. 대야성 전투는 88년 전 할아버지 성왕이 참수당한 데 대한 복수였다. 대야성 성주가 저지른 패륜은 한 사내를 한(恨)을 품게 만들었다. 그 분노가 끝없이 증폭돼 20년 뒤 나라 하나를 치욕스럽고 급작스러운 멸망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2016년 사비성, 부여
당나라 병사들은 사비성을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다. 소정방은 도성 한가운데에 있는 오층석탑에 '대당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글을 새겨넣었다. 오랜 기간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리던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개명됐다. 왕궁이 있었던 관북리 왕궁터는 폐허가 됐다.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궁터 북쪽 부소산 낙화암은 그대로다. 당시 사비성 인구가 5만이었으니 궁녀가 3000명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다. 낙화암 가는 길목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두 팔을 붙이고 서 있다. 밑동에서 갈라졌다가 윗동에서 다시 해후한 기이한 나무다. 백제를 닮았다. 나당연합군이 진격한 사비도성 성곽은 발굴이 한창이다. 이 모든 곳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가장 찬란했고 가장 허망한 나날이 공존하는 유적들이다.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993년 12월 12일 사비성 동쪽에 있는 능산리 계곡 주차장 공사 도중 진흙 물구덩이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발굴팀은 "당나라 군대의 방화와 약탈을 피해 승려들이 황급히 숨겨두고 도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궁남지도 깔끔하게 정비됐다. 아무도 모른다. 제대로 된 발굴 작업 없이 정비된 이 연못이 과연 무왕과 선화공주가 노닐었다는 그 연못인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이 말했다. "나는 이곳을 궁남지로 알고 소풍을 다녔고, 어른이 되어서는 궁남지에서 사랑을 만났다. 이곳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 우리는 궁남지로 추정한다."
의자왕은 항복 한 달 뒤 네 왕자와 귀족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두 달 만에 낙양에 도착한 의자왕은 며칠 뒤 죽어 북망산에 묻혔다. 2000년 부여군은 낙양시로부터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과 북망산 흙을 기증받아 능산리에 가묘를 만들었다. 가장 찬란한 시절, 가장 드라마틱하게 생을 마감한 사내가 귀향했다. 1340년 만이었다.
04.20 시화 대평원과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 - 대평원으로 변한 바다에 생명이 찾아왔다
화목했던 우음도와 윤수심
윤수심은 목포 여자다. '갯것' 많다는 소문 듣고 한 살 아래 남편이랑 우음도로 왔다. 60년 전이다. 우음도는 지금 경기도 안산과 화성 사이 군자만에 있는 섬이다. 남쪽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우음도 바다는 풍요로웠다. 궁살 앞바다에는 피조개가 널렸다. 구녕물 앞살에는 꽃게와 숭어가 잡혔다. 공새 뒤편 갯벌에는 바지락이 지천이었다. 대나무 막대 하나 들고 바다로 가서 조개를 잡아 부려놓으면 도매상이 트럭에 싣고 도시로 가곤 했다. 실한 물건에 기분이 좋았던 장사치들 덕에 우음도 여자들은 외지 관광도 하곤 했다. 남정네들은 밤새 화투판을 벌여 돈을 잃어도 개의치 않았다. 갯벌에서 담배 한 대 태우며 조개 한 지게 건져내면 그 돈 벌충하고도 남았으니까.
마을 앞바다에는 각시당이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신랑을 기다리던 각시가 물에 빠져 죽은 암초였다. 3년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은 굿을 올렸다. 갯벌 옆 나락부리 회나무에서 각시당을 향해 절을 하면 무당이 바위를 향해 초혼을 했다. 마을 안에 있는 회나무와 뒷산 꼭대기에 있는 당집에 제사를 마저 지내고, 사람들은 숲속 군웅당 당집에 모여 하루종일 놀았다. 회나무 아랫집에 이사 왔던 영감은 회나무가 성가시다며 가지를 잘랐다가 며칠 뒤 죽었다. 1979년 11월 1일 각시당 너럭바위 위에 군 초소가 들어섰다. 께름칙했지만 사람들은 참았다. 나라 위한 일이라니까. 몇 년 사이에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길로 왕복하며 근무를 서던 군인 여럿이 물에 빠져 죽었다. 초소는 폐쇄됐다. 어느 날 텃밭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자라났다. 갯벌에서 바지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바다에서는 썩은 내가 풍겼다. 윤수심이 말했다. "내 이름이 수심이니께, 수심 가득 살라는 거였제." 1987년 6월 시화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화'는 시흥과 화성에서 따온 말이다. 이후 시화호 주변 마을 남정네들은 화투판을 벌이지 않았고, 배를 타지 않았고, 평생 꼿꼿하게 펴고 살던 허리와 어깨는 순식간에 휘어버렸다.
분노한 사내 최종인
그 무렵 서울 살던 최종인이 안산으로 이사를 왔다. 안산은 우음도에서 뭍으로 더 들어가 있다. 최종인이 말했다. "나는 국민학교 졸업장이 전부다. 두 손으로 엿장수 가위를 치면서 고물상 하던 아버지 따라다닌 기억이 난다." 사업을 하다가 말아먹고, 1989년 정착한 안산 반월공단에서 시설 자동화 기사로 일했다. 마흔넷 먹은 사내는 삶이 팍팍할 때면 바다로 가서 망둥어 낚시를 했다. 푸른 바다에서 원 없이 낚시를 즐기고 조개를 줍고 새를 관찰했다. 그가 말했다. "반월천 상류 쓰레기매립장에 갔더니 까마귀들이 썩은 음식 먹고 있더라. 저놈들이 언제 죽을까 싶어 매일 가봤다. 어허, 죽기는커녕…. 그러면 인간도 저런 원리로 환경오염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어느 날 갯벌에서 악취가 나더니 조개껍데기가 갯벌을 뒤덮었다. 연원을 좇아 바다 끝까지 가보니 대부도 산 하나가 사라지고 그 토석으로 방조제가 건설되고 있었다. 공단에서 나오는 폐수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갇혀 버렸고, 갯벌과 물고기와 물속 식물들도 함께 썩고 있었다. 20세기 말 대한민국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시화호 사태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라에서 시행하는 초대규모 토목사업에 고물상 아들이 반기를 들었다. 최종인은 퇴근하면 시화호로 나갔다. 그가 말했다. "나를 위로해주던 바다가 지옥으로 변했다.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왜 네가 이런 짓을 하냐"는 아버지 최달봉이 말리면 아들은 이리 대들었다. "누가 하것소. 돈 가진 사람이 하것소? 내가 해야지."
폐수 방류, 썩은 바다, 죽은 물고기 떼와 갈매기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화호 사태 초기 사진들은 모두 그가 찍은 사진이다. 공청회에도 갔다. "시화호 바다는 경제성이 없다"는 환경 평가 전문가에게 "죽은 조개껍데기만 모아도 저 방조제를 만들 수 있다"고 사진을 내밀고 숫자를 내밀었다.
시화호의 사망 선고와 부활
1994년 1월 24일 12.7㎞에 달하는 물막이 공사가 완공됐다. 바다였던 시화 호수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물고기도 사라지고 물고기를 잡는 새들도 사라졌다. 포도밭과 배추밭은 말라붙은 갯벌에서 날아온 염분으로 초토화됐다. 1997년 여름 학자들은 시화호를 무생물대(無生物帶)로 선언했다. '단 한 마리, 단 한 포기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는' 4000만 평짜리 지옥이 바다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최종인은 그 과정을 사진과 글로 꼼꼼히 기록해 언론에 알렸다. 개발업자와 주민들로부터는 '개발 방해자' 낙인이 찍혔다. 시민단체들이 움직였다. 시화호를 둘러싼 안산시와 화성시, 시흥시가 반대로 돌아섰다. 정부는 그해 3월 방조제 갑문을 열어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언론은 최종인을 '시화호 지킴이'라고 불렀다.
1998년 7월 시화호 동쪽 섬에서 최종인은 딱새가 기어들어가는 붉은 바위 속에서 타원형 화석을 발견했다. 바위 생김도, 색깔도, 화석 생김도 희한했다. 최종인은 중생대 지층에서 공룡 화석이 나온다는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학자들에게 답사를 요청했다. 결론은 공룡 알이었다. 아득한 옛날 육지였던 시화호 일대는 공룡들 집단 서식지임이 드러났다. 건조한 갯벌 아래 무엇이 또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2000년 3월 문화재청은 공룡 알 화석 발견 지역 480만평을 천연기념물 414호로 지정했다. 그해 12월 정부는 시화호를 막으려던 계획을 공식 포기했다. 땅으로 변했던 바다가 환생(還生)했다.
자연이 스스로 치유한 상처
바다였던 시화호가 호수로 변했고, 절반은 이제 땅이 되었다. 땅과 호수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땅이 지금 전국 최대 규모 조류 서식지이자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노랑부리백로와 노랑부리저어새, 원앙, 황조롱이, 참매, 뜸부기, 수리부엉이 같은 천연기념물과 멸종 위기종이 흔하게 날아온다. 바닷물이 돌아온 호수에는 최종인 표현대로 "물 반 고기 반"이다.
소금기 먹고 사는 염생식물과 뭍에서 날아온 씨앗이 자란 육상식물이 공존한다. 세월이 가면서 염생식물에서 육상식물로 생태계가 바뀌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삵, 고라니 발자국과 사람 발자국이 공존한다. 군데군데 뿌리내린 나무들과 무성한 갈대와 띠풀이 만든 이국적인 풍경에 사람들이 몰려와 웨딩 사진을 찍고 작품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은 부모들과 함께 공룡 알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낸다. 도무지 10년 전 죽음의 땅이라 불렸던 곳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공룡알을 발견한 이듬해인 1999년 최종인은 안성시 환경과 공무원으로 채용됐다. 짬짬이 하던 시화호 감시 작업이 직업이 됐다.
최종인이 말했다. "새들이 돌아왔다. 모든 것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학자들이 30년이 걸린다고 했던 부활이 불과 10년 만에 이뤄졌다. 원칙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바다였던 땅을 바다에 돌려준 것뿐. 그다음은 다 자연이 스스로 치유했다."
땅의 사람들, 땅을 찾는 사람들
환갑을 맞은 2013년 최종인은 수리부엉이 둥지를 감시하다가 12m 절벽에서 추락했다. 목뼈가 부러지고 팔다리가 부러졌다. 새끼 두 마리가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서 녹음기를 꺼냈는데, "손가락이 부러져서 버튼을 못 눌렀다"고 투덜댄다. 전문계약직으로 전환된 최종인은 더 바쁘다. 동물이 늘어난 만큼 밀렵꾼이 늘었다. 지난 3월 그 수리부엉이 둥지를 귀신같이 찾아내 나무들을 베어내고 플래시까지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간 생태사진가님도 감시 대상이다. 밤 근무는 다반사다. "자살한 시신도 여러 구 수습했고 비 오는 밤에 호수를 수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귀신은 없다. 정말이다. 한 번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죽었는데 무슨 혼이 돌아다녀." 그 덕에 최종인은 귀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 공부 못 한 한은 자연에서 다 풀었다. 이 광활한 땅을 봐라. 이게 보물이다."
텃밭 메던 호미를 던지며 윤수심이 말했다. "떠날 데가 어딨어. 예서 살다 죽어야지. 근데, 옛날처럼 마을이 화목하들 못해." 굿당은 여전히 뒷산 꼭대기에 있다. 윤수심에 따르면 "노인들 열댓명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데모를 했지만" 코앞에 전망대가 들어서서 각시당을 볼 수가 없다. 우음도 쪽 간척지는 개발이 진행 중이다. 말끔하게 깎아놓은 사료용 초원에 하수종말처리장 공사가 한창이다. 각시당 초소에는 사진가들이 새벽부터 나타난다. 땅은 역사다. 지난 세기 말 나라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던 시화호 소동도 역사다. 그 역사 책 한 장(章)이 닫혔다. 이제 새로운 장에서 기록을 기다린다.
[시화호 여행수첩]
1. 공룡알화석산지 방문자센터: 시화호 간척지에 있다. 오전 9시~오후 5시. 공룡 알 화석지 출입은 오후 4시30분까지. 나무 데크 산책로가 있다. 센터는 월요일 휴관. 송산면 공룡로 659, (031)357-3951
2. 송산그린시티 전망대: 시화호 대평원과 호수를 360도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 뒤에 있는 당집을 꼭 볼 것. 오전 10시~오후 5시. 월요일 휴관.
3. 제암리교회: 공식 명칭은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 23명을 교회에 가두고 총을 쏜 뒤 방화한 사건을 기리는 공간. 지난주 처음으로 이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오전 9시~오후 5시. 월요일 휴관. 향남읍 제암길 50, (031)369-1663
4. 당항성(화성당성): 삼국시대 당나라와 교류하던 산성. 올 초 '唐'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됐다. 원효 대사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득도한 동굴도 이 부근으로 추정된다. 왕복 1시간 안 걸리는 산행길이 좋다.
04.27 마의태자 루트와 강원도 인제 -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인제 땅에서 무엇을 꿈꿨을까
쓸쓸한 사내 뒷모습
이 사내에 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사서(史書)에 한 대목만 나온다. 서기 935년 음력 10월 경주에서 벌어진 일이다. '왕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힘을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겠나이까." 그래도 왕이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자 왕자는 통곡하면서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아들 마의태자 이야기다. 사서 제목은 1145년 편찬된 '삼국사기'다. 저자는 김부식이다. 김부식에게 역사교과서 편찬을 명한 사람은 고려 왕이었다. 한 나라 태자가 눈물을 찔찔 흘리며 산속으로 들어가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정말 그랬을까.
미궁 속 행로
민초(民草)들은 자기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구전(口傳)으로 1000년 뒤 후손에게 전한다. 바로 지명과 전설이다. 한두 사람이 만든 창작물이 아니라 시간대를 초월해 구비 전승된 집단 기록이다. 식자(識者)들이 애지중지하는 기록보다 더 명징하다.
대한민국에는 역사책에 없는 마의태자 발자국이 곳곳에 찍혀 있다. 전설과 지명을 따라가면 사서에 없는 마의태자 북상 루트가 윤곽을 드러낸다. 그 지명과 전설은 이렇게 말한다. "태자는 눈물이나 흘리던 약한 사내가 아니라 신라 부흥을 꿈꾸던 군주였다"고.
경북 안동 용두산에는 국망봉이 있다.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가 경주를 돌아봤다는 봉우리다. 이 봉우리에서 3㎞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이름은 태자리(太子里)다. 산 정상 바윗돌 이름은 마의대다.
충북 충주 월악산에는 미륵대원사지가 있다.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을 꿈꾸며 세웠다는 절터다. 미륵 석불입상이 고고하게 서 있다. 절터 위치는 계립령이다. 계립령은 중원성을 거쳐 경주에서 북쪽으로 가는 대로였다. 전설은 계립령을 넘고 남한강을 건너 이어진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 용문사에는 1000살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마의태자가 지나가면서 꽂은 지팡이가 자라난 나무"라고 믿고 있다. 공작산과 수타사가 있는 홍천 노천리에는 지왕동(至王洞)이 있다. 왕이 당도했다는 뜻이다. 지왕동에서 고개를 넘으면 왕터가 나온다. 왕터를 건너면 바로 인제 땅이다. 지명과 전설을 따라가면 마의태자는 험준한 산과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서진(西進), 북진(北進), 동진(東進)을 했다. 금강산으로 도망가려 했다면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 그만인데, 패망한 나라 태자가 이 루트를 택한 이유가 수수께끼다.
군사요충지와 마의태자 루트
맑은 자연이 있는 곳은 군부대거나 아니면 관광지다. 역사 속 군사요충지는 모두 관광지로 변했다. 몰려드는 여행자들에게 맞서서 군부대들이 그 지역을 선점해버리면 여전히 군부대다.
마의태자 발자국이 있는 곳들은 100% 유명 관광지다. 100% 과거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계립령은 신라와 북쪽을 잇는 대표적인 교통로였다. 계립령 너머 중원성은 신라 제2 수도로 불렸다. 미륵대원사는 외부와 지리적으로 차단된 공간이었다. 태자는 군사 중심지와 요새(要塞)들만 골라 행군을 해갔다. 양평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수운 중심지였다. 인제는 고구려와 신라가 격전을 벌인 곳이다. 지금도 인제 땅 많은 부분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군사지역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자연이 많기에 관광객이 몰리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인제, 기록되지 않은 역사
인제에 남은 마의태자 흔적은 이렇다. '김부대왕로'라 개칭된 446번 도로를 따라 서쪽에서부터 중간다무리와 웃다무리 마을이 나온다. 김부대왕은 경순왕을 지칭하기도 하고 경순왕 아들 마의태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현대에 세운 다리 이름은 다물교(多勿橋)다. 삼거리 이름은 다물삼거리다. 다물은 고구려말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대규모 군사 훈련장이 있는 지역 이름은 김부리(金富里)다. 김부리 훈련장 속에는 김부대왕각이 있다. 마의태자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적혀 있다. 조금 더 동진하면 갑둔리(甲屯里)가 나온다. 군사가 주둔했다는 뜻이다. 갑둔리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알 수 없는 어느 때에 파괴돼 묻혀 있다가 발굴된 탑이다. 석탑에는 '김부 가족의 영원을 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부리에 있는 골짜기 이름은 맹개골이다. 마의태자를 따르던 맹장군 이름을 딴 지명이다. 맹장군은 양구에서 신라 부흥군을 훈련시키다 죽었다. 훈련 장소 이름은 군량리(軍糧里)다. 태자가 옥새를 숨긴 옥새바위도 있고 태자가 탄 수레가 넘어간 고개 수거네미도 있다. 사람들은 인제 김부리 일대가 신라 부흥을 꿈꾸며 태자가 세운 신라소국이었다고 믿는다. 아쉽게도 이 지명들이 있는 곳은 군부대가 관광객들과 경쟁에서 승리해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갑둔리 너머 용소마을에는 마의태자 전설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마의태자권역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마의태자 루트 안내소와 숙박과 식당이 여행자들을 맞는다. 마을 옆에는 희한하게 생긴 폭포가 있다. 이름은 용소폭포다. 하이힐 신고도 걸을 수 있는 나무데크 끝에 있다. 끝물을 맞은 봄꽃들이 암벽에 달라붙어 있고 하트 모양으로 뚫린 구멍에서 폭포수가 떨어진다.
한계산성, 그리고 장수대
신라 부흥을 꿈꾼 마의태자 무리가 정착한 곳이 한계산성이다. 한계령 서쪽, 설악산 국립공원 장수대 입구에 있다. 마의태자는 이곳 산성에서 부흥군을 이끌고 항려(抗麗) 투쟁을 벌였다. 산성은 험준하기 짝이 없다. 등산로도 통제돼 있다. '군사지역=관광지'라는 법칙은 여기서도 통한다. 장수대 입구에서 사방을 돌아보면 첩첩산중 암봉 무리가 좁은 44번 국도를 내려다본다. 고려군에 대한 방어도 공격도 쉬운 길목이다.
1000년 뒤인 20세기에도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인민군이 장악한 설악산을 수복하려는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이 승리해 설악산 지역은 대한민국 땅이 되었다. 도로 건너편에 낡은 한옥이 한 채 있다. 이 집 이름이 바로 '장수대(將帥臺)'다. 1959년 국군 3군단장 오덕준이 설악산 전투 전사자들을 추모하며 세운 산장이다. 홍수에도 무사했던 장수대는 지금 폐가로 변했다. 대청마루에는 쓰레기가 뒹굴고 방마다 자물쇠가 잠겨 있다.
민초들이 땅에 기록한 마의태자 행적은 여기까지다. 울분 가득한 태자가 신라 부흥을 꿈꿨는지, 아니면 공식 기록대로 금강산으로 갔는지 궁금하거든 인제 땅에 가서 봄날을 맞아보시라.
[인제 여행수첩]
1. 갑둔리 삼층석탑: 446번 도로로 상남면 쪽으로 가다가 군부대를 지나 왼쪽에 이정표가 나온다. 비포장 내리막길을 가다가 삼거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오른편 작은 언덕에 있다.
2. 갑둔리 오층석탑: 삼층석탑 입구를 지나 446번도로변 오른쪽에 이정표가 있다. 석탑으로 가는 오솔길이 운치 있다.
3. 용소마을(마의태자권역): 오층석탑에서 상남면 쪽으로 직진하면 나온다. 숙박시설과 식당이 있다. 숙박은 5만~15만원. 일대기를 기록한 작은 공원도 있다. 상남면 김부대왕로 2390, www.마의태자.net, (033)461-0228
4. 용소폭포: 용소마을 못 미쳐 다리 공사 중인 작은 삼거리에서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가 공사 현장 지나 직진. 나무데크 산책로가 잘돼 있다.
5. 한계산성과 한계사지: 설악산 국립공원 장수대에 있다. 출입은 금지. 건너편에 있는 폐가 수준의 낡은 한옥이 1959년에 건립된 장수대다.
6. 남전약수: 남면 남전리 산145. 2006년 홍수로 주변은 황폐하지만 물맛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