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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水地理3/ 김두규의 國運風水3/ 2017.01.21 반기문의 선영·생가 찾아가 요란 떠는 풍수 술사들 - 12.23 길지 중 길지인 왕릉 이전… 풍수 문제라기보다 고도의 정치 행위

상림은내고향 2021. 3. 19. 21:45

風水地理3/ 김두규의 國運風水3/ 월간조선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풍수 이야기》《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2017.01.21 반기문의 선영·생가 찾아가 요란 떠는 풍수 술사들

에른스트 아이텔(1838~1908)이라는 독일인이 있었다.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복음주의 루터 교단'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파견됐다. 1896년 홍콩을 떠나기 전까지 30년간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런 그가 1878년 '풍수: 혹은 중국에서의 자연과학의 근원(Feng-shui: or The rudiments of natural science in China)'이라는 책을 영어로 출간했다. 서구 유럽에 풍수의 본질을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반기문 공원 ‘평화랜드’(위)와 반기문 부친 묘 입구에 최근 세워진 정자 / 김두규

 

그가 풍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풍수라는 것을 알고부터였다. 주택·무덤·관공서·도로에서 광산 개발에 이르기까지 풍수가 관여하지 않는 데가 없었다. 백성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풍수에 '절대적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미신'을 반박하기 위해 그는 풍수를 공부했다. 그런데 처음 의도와 달리 점차 그는 풍수에 빠져들기 시작하며 그것이 하느님 말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는 풍수를 "하늘과 땅을 잇는 조화의 이론으로서 중국적 자연과학"으로 정의했다. "풍수의 목적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읽어내는 것"이며 그 부산물로서 대지 위에 거주하는 피조물의 길흉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대의 운명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 가르침을 인정하라. 첫째, 하늘(하느님)이 땅을 지배한다. 둘째, 하늘과 땅이 모든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것의 활용 여부는 그대에게 달려있다. 셋째, 운명은 그대의 착한 의지와 돌아가신 조상의 영향력에 좌우된다." 세 번째 문장과 관련하여 저자는 "후손이 돌아가신 조상을 진심으로 공경하면 조상의 혼령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이텔의 이러한 주장은 풍수행위와 풍수신앙을 전제하고 있다. 풍수행위란 풍수설을 바탕으로 땅을 고르고 건물을 짓는 행위를 말하며, 풍수신앙이란 그를 통해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말한다.

 

최근 정치권과 정치 평론가들에게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이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다.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집단 못지않게 반 전 총장에게 관심을 갖는 집단이 풍수 술사이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반 전 총장의 생가와 선영이다.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대형버스를 동원해 선영과 생가를 찾는 이들은 나침반(패철·쇠)을 놓아보기도 하고 추(펜듈럼)를 돌려보기도 한다. 또 기를 측정한다는 L字 모양 쇠막대기를 양손에 들고 무덤과 생가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대통령이 나올 자리이다, 아니다"라고 갑론을박한다. 가관(可觀)이다.

 

필자가 10년 전 그곳을 찾았을 때는 한적한 산촌의 평화가 깃든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많이 바뀌었다. 마을 뒷산 꼭대기엔 정자가 세워졌고, 비닐하우스가 있던 자리에 생가가 복원됐다. 문전옥답은 큰 연못이 되었고, 다른 한쪽에는 만국기 휘날리는 '평화랜드' 공원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다. 부친 묘 입구에 새로운 정자가 지어졌고 또 다른 선영에는 부모를 위한 가묘(假墓)가 있다(부친 묘가 2개인 셈이다).

 

이것은 '풍 수행위'가 아니다. 땅에 대한 파괴이자 사람에 대한 우상화이다. 풍수 술사들이 보고 말하는 것은 10년 전의 땅일까, 아니면 지금의 그 땅일까? 풍수 고전 '발미론'은 "산천을 만드는 것은 하늘이지만, 그것을 마름질하여 좋게 만드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반 전 총장의 생가와 선영이 아니다. 반 전 총장의 의지가 충분히 착한가 여부이다

 

■02.11 1300년 동안 도굴 막아낸 측천무후 무덤의 비밀

풍수사들이 지도자들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하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다. 무슨 까닭인가? 제왕지기를 읽어내기 위함이었다. 나라를 번영시킬 진정한 지도자를 알아내기 위함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의 풍수관을 보면 그 사람됨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전제에서이다. 중국 여자 황제 측천무후(624~705)의 이야기이다.

측천무후의 음란함은 전무후무했다. 황제가 된 뒤에 수많은 남첩을 거느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당시 신하 주경측이 "폐하께서 총애하는 장역지와 장창종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최근 후상 등이 자신의 성기가 크다며 폐하의 시봉을 들고 싶다는 말을 한답니다"는 간언을 올렸을까! 측천무후의 음란함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주술에 빠져 명숭엄이라는 마법사를 가까이 두기도 했다. 또 여성 강장제를 즐겨 찾아 돌팔이 약장사 풍소보를 궁궐로 끌어들여 설회의라는 중으로 변장시킨 뒤 권력을 휘두르게 하였다. 이것은 여인의 사생활이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여인의 머리에 해당하북쪽 산(사진 위)에는측천무후의 묘가, 남쪽에는 좌우로 봉긋하게 서있는 여인의 두 젖가슴과 같은 쌍유산(雙乳山)이 자리하고 있다. / 김두규 교수

 

음란하였으나 그녀는 위대한 통치자였다. 역사상 여자 임금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모나 남편의 유고로 인해 권력을 승계한 경우이다. 측천무후는 이들과 달랐다. 말단 재인에서 출발, 후궁을 거쳐 황후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황제가 되었다. 또 남편(고종)의 나라 당(唐)을 없애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황제로서 그녀는 존경받을 만했다. 첫째, 인재를 발굴하고 간언을 용납했다. 앞에서 소개한 주경측의 불경스러운 발언도 벌주지 않았다. 둘째,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652년 380만호의 인구가 705년 615만호로 증가하였다. 셋째, 여성과 약자 보호 및 문화 융성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넷째, 국가 안보에 힘써 당태종 때보다 더 많은 영토를 확보했다. 고구려·백제가 멸망한 것도 그녀의 집권 때였다. 백제의 패장 흑치상지를 중국에서 받아준 것도 그녀였다.

풍수에서 그녀는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 첫째, 그녀는 도읍지를 관중[西安]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풍수상 관중이 지기가 쇠했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제로는 땅이 좁고 인구는 많아 새로운 도읍지가 필요함을 안 것이다. 안다고 모두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많은 통치자가 천도를 시도하지만 대부분 기득권 세력에 의해 좌절된다.

둘째, 자신과 남편의 무덤 입지 선정에서 보여준 탁월함이다. 당대 최고의 풍수사 원천강과 이순풍을 활용했다. 이들이 택한 땅은 여인이 대지 위에 누워 있는 형국의 길지였다. 무덤이 자리하는 북쪽 산이 머리 모양이고 남쪽에 좌우로 봉긋하게 솟은 산이 여인의 젖가슴 형상이었다. 그녀는 평지에 관곽을 놓고 흙을 쌓아올리는 기존의 무덤 형식을 버리고 산을 뚫어 그 속에 관곽을 놓는 이른바 산을 능으로 삼는 '산릉(山陵)' 제도를 택했다. 이를 통해 공사 기간과 경비를 대폭 줄였다. 무덤이 조성된 산은 흙산이 아닌 돌산이었다. '돌산에 장사 지내지 말라'는 풍수 금기를 무시하고 땅의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택하였다. 또한 광중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돌로 메우고 그 틈을 쇳물로 때운 뒤 입구를 완벽하게 위장했다.

반란군 지도자 황소가 40만 대군을 동원하였으나 도굴에 실패한 것을 포함, 17번의 도굴 시도들이 헛되었다. 20세기 초 국민당 소속 손련중 장군이 폭약으로 깨뜨리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리하여 1300년 동안 측천무후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았다. 후세 풍수가들은 이러한 위대한 여성 지도자를 "살아서 천하를 정복하고, 죽어서 역사를 정복하였네!(生前征服天下, 死後征服歷史!)"라고 찬양했다.

 

■03.25 대통령 집무실 옮긴다면 경희궁이 제격인 까닭

쫓겨날 때는 쫓겨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광해군 이야기이다. 풍수가 문제였다. 부왕 선조는 생전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풍수설에 따라 잡았다. 그러나 아들 광해는 다른 풍수설을 근거로 아버지를 다른 곳에 모셨다. 한양의 지기가 쇠했다는 이유로 교하(파주)천도론을 고집하여 조정을 흔들었다. 천도론이 실패하자 인왕산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닌 세 개의 궁궐을 동시에 짓게 했다. 백성은 힘들었고 나라는 병들었다. 성난 민심은 그를 임금 자리에서 쫓아냈다. 그의 개혁 정책과 명과 후금(청) 사이의 균형 외교도 빛이 바랬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복원하지 않은 것도, 인왕산에 궁궐을 지은 것도 풍수설 때문이었다. 술사들의 호시절이었다. 공인 풍수 관료도 있었고(박상의·이의신), 귀화한 중국인도 있었다(시문용). 풍수 상소로 벼슬을 얻은 이도 있었다(김일룡). 성지라는 중은 당시의 '라스푸틴(러시아 황실을 어지럽힌 예언가)'으로 악명이 높았다.

1617년, 광해군 9년 때의 일이다. 술사 김일룡이 "왕기가 서렸다"는 말로 새문동에 궁궐을 지을 것을 청한다. 그곳은 광해군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터였다. 2년 전인 1615년 정원군의 둘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아들 잃고 집까지 빼앗긴 정원군은 술병으로 죽었다(1619년). 정원군 집터에 궁궐이 완공되던 해(1623년) 광해군은 쫓겨났다. '왕기 서린'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했다.

지금의 경희궁이다. 광해군을 이어서 임금이 된 이는 정원군의 큰아들 인조였다. 땅 주인(정원군과 그 아들 인조)에게 궁궐만 지어준 셈이다. 인조 임금은 자기 집터를 빼앗게 한 김일룡이 미웠다. 그의 목을 쳐서 긴 장대에 꽂았다.

이후 경희궁은 어찌 되었을까? 김일룡은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정원군은 사후 임금(원종)으로 추존되었고, 이후 열 명의 임금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영·정조의 치세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조선이 망한 뒤 일본인 자녀들이 다닌 중학교(경성중)가, 해방 이후엔 서울고가 자리하여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최근 경희궁 일부가 복원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전임 대통령들도 불행했다. 물론 청와대 터보다는 사람이 문제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협소한 대통령 집무실, 몇백m 떨어진 부속 건물(비서실·수석실·관저) 공간 배치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문제가 되어, 집무실을 고층 건물로 지을 것을 제안한 적도 있었다"(정재문 전 국회외교통상위원장). 문재인 후보도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공약했고, 안철수·안희정·남경필·유승민 후보도 집무실 이전을 주장한다. 크게 세종시로 옮기는 것과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옮기는 방안이다. 전자의 경우 노무현 대통령 때처럼 국론 분열이 예상된다. 후자의 경우 보안상의 문제도 있지만 입주한 기존 부처들의 재배치도 쉽지 않다.

온 세계가 한류에 열광한다. 기존 궁궐을 활용해 대통령 집무실로 쓰는 것도 한류를 확산시키는 방법이자 국격을 높이는 방법이다. 경희궁을 추가 복원하되 내부를 현대식으로 고치면 집무실로 쓸 수 있다. 경희궁 동쪽에 거대한 지하 벙커가 있다. 일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조금만 손보면 거주와 집무가 가능하다. 경희궁 뒤쪽 나지막한 언덕은 대통령의 사색 공간으로 좋다. 광해군이 이 터를 유난히 눈독 들인 것은 "거처는 반드시 양명하고[疏明] 넓게 트인[開豁] 땅을 취해야 한다(居處必取疏明開豁之地)"는 조건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땅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투명한 소통[疏明]과 만백성을 열린 마음으로 포용[開豁]하는 군자의 마음이기도 하다. 경희궁 터가 바로 그러하다. 대통령궁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

 

■04.22 중원을 지향하던 중국인들, 왜 요즘들어 변방을 기웃거리나

독일어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우리 학자들은 흔히 생활공간·생존공간·생활권 등으로 번역한다. 엄밀히 그것은 한 민족의 생존을 위한 '미래의 영토'를 의미한다. 독일의 지정학자 라첼(F. Ratzel)과 군인출신 학자 하우스호퍼(K. Haushofer)가 개념화하는데, 이것을 문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그림(H. Grimm)의 '영토 없는 민족(Volk ohne Raum·1926)'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1920년대 독일의 암울한 정치·경제 문제 해결책으로서 외국 땅을 생존공간으로 획득(점령)할 것을 주장한다. 이 소설은 당시 독일의 베스트셀러로 히틀러의 든든한 이론적 배경이 됐다. 따라서 레벤스라움은 이데올로기적 용어이다.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도 바로 이 레벤스라움을 차용한 것이다. 레벤스라움을 주창한 하우스호퍼가 1909년부터 2년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장교들을 교육한 결과물이었다.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도 레벤스라움적 발상이다. 당시 힘이 약한 유비가 북쪽의 조조, 동쪽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가진 뒤 훗날 중원(中原)을 도모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다. 중국인들에게 중원은 '천하의 한가운데에 있는 들판'으로서 중화문명의 핵심지이며 그 주체 세력은 한족(漢族)이었다. 따라서 "중원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中原者得天下)"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 변방은 '오랑캐'들이 사는 곳이었다. 당연히 우리 민족도 '동쪽 오랑캐[東夷]'에 지나지 않았다.

10세기 이후 지금까지 중원을 차지한 왕조는 송(宋)·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중화인민공화국 등이다. 이 가운데 한족이 주체가 된 국가는 송과 명 그리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뿐이며, 그 나머지는 거란족·몽고족·여진족 등 변방 민족이었다.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정사인 25사(史)에 이들 역사를 중국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이민족이라도 중원을 차지하면 중국의 역사로 받아들였다. 천하의 중심국으로 중국이 존재해왔던 이유였으며 대국인다웠다.

그런데 최근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의 새로운 실크로드 경제권)'와 같은 국가 전략으로 새로운 레벤스라움을 제시하고 있다. 중원 지향적이 아닌 변방 지향적 영토 관념이다. 요 몇 달 사드 배치를 두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애꿎게 방해하고 있다. 전통적 대국인 모습과 다르다.

몇 년 전 중국이 추진하던 '동북공정'이 떠오른다. 동북공정이란 만주 땅(동북 3성)을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었다. 만주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에 편입된다. 이전까지 그곳은 고조선의 후예인 기마 유목 민족의 터전이었다. 부여·고구려·발해·거란·금·청 등이 명멸하였지만 모두 고조선의 후예들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우리와 동족"(조선상고사·1931년 조선일보 연재)임을 주장한다. 단재만의 주장이 아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란 역사서가 있다. 청 건륭황제의 지시로 1777년 편찬되었다. 만주를 터전으로 삼았던 부여·삼한·백제·신라·발해·여진 등을 서술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든다. 우리 민족 이야기 같은데 대청제국을 건국한 여진족 이야기이다. '만주원류고'는 "당나라 때 계림(鷄林)으로 일컬어졌던 곳은 길림(吉林)이며 신라·백제 등 여러 나라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적는다. 우리 민족의 터전이 백두산 이남이 아닌 만주 땅임을 청제국의 관찬서가 밝히고 있다. 우리 민족의 레벤스라움이 무엇일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만주원류고'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필요한 때이다.


■05.06 한국을 비상시킬 龍이 있나, 대선 후보들 선영과 생가 살펴보니…

"재위 48년 가운데 나중 30년을 궁궐 깊은 곳에 숨어 살았다. 내각의 우두머리인 수보(首輔)조차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는 평생 침상에 누워 아편만 피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죽고 20여 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망국은 그로부터 시작했다."

명나라 황제 신종(1563~1620)의 이야기이다. 그의 유일한 업적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조선을 구해준 일이었다. 그래서 중국이 아닌 '조선의 황제'라는 비웃음을 샀다.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관왕묘는 그의 친필과 하사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지도자로서 한 개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한 까닭에 '제왕의 땅[帝王之地]'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풍수상 제왕이 되려면 2가지 전제조건, 즉 풍수행위와 풍수신앙이 충족되어야 한다. 좋은 땅에서 태어나고 좋은 땅에 묻혀 그 가문의 DNA를 끊임없이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풍수행위이며, 그렇게 해서 '자신과 세상을 완성하겠다[成己成物]'는 군자의 굳건한 믿음이 풍수신앙이다.

생가와 고향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중국의 정치·사상가 양계초(梁啓超·1873~1929)는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그 땅의 바람을 듣고[聞其風] 그 땅의 물 흐름을 따라서[汲其流] 인생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얻는다면 우뚝 자신을 세울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 땅의 바람[風]과 물[水]의 의미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선영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매장·화장·수목장·호화 분묘의 문제가 아닌, 죽은 자의 집을 어디에 어떻게 짓고 돌보는가의 문제이다. 돌보는 문제는 우리가 일본보다 훨씬 처져 있다. 도심 혹은 마을에 조성된 묘원을 찾는 일본인의 정성스러운 모습에서 죽음을 저 멀리 밀어내지 않고 공존하는 모습을 본다. 조상과 후손의 끊임없는 대화를 엿보며, 조상에서 후손으로 이어지는 생명 사슬(chain of life)의 연면함, 즉 영생을 본다. 무덤은 죽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후손의 염원이 담겨 있는 집이다. 이 문제는 바로 그 집을 어디에 어떻게 짓느냐로 연결되며 그 집안의 품격이 된다.

 

▲명나라 황제 신종의 친필과 하사금으로 세워진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동관왕묘. / 문화재청

대선이 다가오자 많은 이가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며 그들의 선영과 생가는 어떤가에 관심을 보인다. 제왕지지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풍수고전 '금낭경'은 제왕지지를 "산세는 만 마리의 말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하고, 산봉우리들이 큰 물결처럼 겹겹이 밀려오는 듯한 땅"으로 묘사한다. 필자는 1990년대부터 역대 대통령 혹은 대권을 꿈꾸는 잠룡들의 생가와 선영을 지속적으로 답사했다. 위대한 후손의 탄생을 염원하는 곳들을 종종 보아왔다. 그 가운데 용이 된 집안도 있었고 이무기로 머문 곳도 있었다. 땅이 좋아도 때[時]가 맞지 않으면 이무기로 주저앉는다.

이번 대선 후보들의 선영과 생가는 어떠한가? 그저 편안한 자리일 뿐 위대한 탄생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후보자 부인들의 생가와 선영을 살피고자 하였으나 후보자들이 꺼려했다. 돌보지도 준비되지도 못한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서일까? 어느 관상·풍수가는 모 신문에 대선 후보들을 '고양이·염소·소·능구렁이·개구리' 등으로 표현하였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하등 짐승으로 표현함은 인간에 대한 예의도 풍수의 본질도 아니다. 하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본질은 국운을 향상시킬 지도자를 찾는 것이다. 방송인 곽수종 (경제학)박사는 이번 후보들을 '어린 이무기들'로 평한다. 언젠가 이무기가 되겠으나 아직은 '카리스마가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세계 강국으로 비상시킬 위대한 용[飛龍]을 원하는 것이다

 

■06.03 김훈의 소설 속에선, 산과 물이 살아 움직이며 말한다

최근 출간된 김훈의 '공터에서'를 읽었다. 그가 의미하는 '공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풍수의 핵심 주제가 '터'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들은 다 읽었다. 심지어 그의 부친 김광주가 쓴 무협소설 '정협지'까지 읽었다. 이렇게 김훈 소설에 관심을 갖는 것은 풍수적 이유에서이다. 소설 속에 묘사된 바람·물·불·흙 등이 하나같이 살아 움직인다. 작가가 개안(開眼)의 경지에 이른 풍수사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혹시 김훈 가문에 풍수와 어떤 인연이 있지 않을까.

풍수에서 '개안'이란 산과 물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이는 단계를 말한다.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인격체이다. 김훈 소설 속의 산과 물들이 그렇다. '멀어져야 비로소 완연해지는 산이 사람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움직이는 산이다. 움직이는 산이 사람에게로 다가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자리 잡는다. 그렇게 해서 산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생애의 일부가 된다.'('자전거 여행')

문장 하나로 너무 쉽게 판단한다고 핀잔 줄지 모르겠다. 그의 단편 '뼈'의 첫 대목이다. '야윈 산들이 비틀려 있었다. 마을을 가운데 놓고 산들은 달아나듯이 흩어졌다.(…)산들은 불러서 거느리지 않았고 조아려서 맞지 않았다. 봉우리들은 고개를 돌려서 외면했고, 산과 산이 겹치는 언저리가 차갑고 축축했다.(…)게으르고 무례한 산들이었다.(…)물은 수계(水系)를 가늠할 수 없이 난잡하고 초라했다.(…)방자하고도 아둔한 물길이었다.' 작중 인물은 이 마을을 '×같은 동네'로 평한다. 풍수사가 이 마을을 평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산을 보는 것을 간산(看山), 물을 보는 것을 관수(觀水)라 한다. 간(看)은 눈 위[目]에 손[手]을 올려놓고 사물을 보는 것, 관(觀)은 나무 속에 숨은 올빼미가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한다(觀자 속의 '口口'는 올빼미 눈이다). 둘 모두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간산과 관수의 참뜻이 김훈의 소설 속에 드러나고 있었다.

 

▲김용택 시인 고향을 흐르는 섬진강의 여울. / 김두규

 

이태 전 지인에게 김훈 선생과의 만남을 부탁 드렸다. 땅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갖게 된 비결을 알고 싶어서였다. 만남이 이루어져 인사동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그때 김훈 선생께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물들을 잘 살려내십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오랫동안 잘 관찰하면 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잘 관찰하는가이다. 그런데 그가 되물었다. "김용택 시인의 고향 마을 앞 섬진강 물이 어떻더이까?" 그는 김 시인 친구로서 그곳에 오래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필자는 김 시인의 고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기에 가끔 그 앞을 지나간다. 그래서 그 섬진강 물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다. 물을 어떻게 보는가, 즉 관수(觀水)에 대해서 필자에게 되물은 것이다.

맹자는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다. 반드시 그 여울을 보라(觀水有術 必觀其瀾)"고 하였다. 여울[瀾]의 크기나 소리에 따라 근원과 깊이를 알 수 있다. 자세히 볼 수밖에 없다. 보다 보면 물은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김용택 시인 옛집에 '관란헌(觀瀾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지금은 회문재로 바뀜).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관수(觀水) 덕분이 아니었을까?

산과 물을 자세히 보려고 노력한다. 자세히 보려면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단순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뒤처진 삶은 아니다. 4대강 사업에 섬진강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늘 다행으로 생각했다. 옛 물길이 그대로 있고 다양한 여울 물결들을 가끔씩 볼 수 있어서이다. 섬진강으로 초대한다. 필자가 말하는 섬진강은 임실군 덕치에서 순창군 동계 사이를 흐르는 강을 말한다.

 

■06.17 부친 묏자리로 富貴 얻고… 자신은 납작 엎드릴 곳 찾은 정인지

아버지와 아들의 무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세계관이 전혀 다른 자리인데 한 사람이 잡은 자리이다. 정인지(1396~1478)와 아버지 정흥인의 경우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충남 부여 능산리에 정흥인 묘가 있다. 입구에는 와영담(蛙泳潭), 즉 개구리가 헤엄치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개구리 수영장'이 만들어진 것은 무덤터가 큰 뱀[長蛇]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큰 뱀이 개구리를 쫓는 장사축와형(長蛇逐蛙形)의 땅이다. 뱀이 개구리를 추적함에 그치지 않고 아예 개구리들로 하여금 집단 서식하도록 연못을 만들었다. 개구리는 뱀의 먹이가 된다. 얼마나 먹거리가 풍부하겠는가? 세조 때 조선의 4대 부자[四富] 가운데 하나인 정인지가 그 아버지(정흥인)를 위해 잡은 무덤 자리이다. 당시 사부(四富)는 박종우·윤사로·윤사윤·정인지였다. 이 가운데 정인지만이 한미한 출신이었다. 정인지 스스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왕실과 겹사돈을 맺었다. 증손녀가 중종의 아들 덕흥군에게 시집을 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선조 임금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왕실은 정인지의 외손들로 이어진다.

 

▲정인지의 아버지 정흥인 묘와 그 옆에 조성된 호수 ‘와영담(蛙泳潭)’(좌). 정면에서 찍은 정인지 묘 (우). / 김두규

 

정인지는 조선 풍수학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풍수학에 관여하게 된 것은 경복궁과 태종의 무덤(헌릉) 논쟁 때문이었다. 경복궁과 헌릉이 길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풍수학을 강습하게 한다. 이때 정인지가 총책임자(풍수학제조)로 임명된다. 그만큼 정인지는 풍수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는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세조와 막역했다. 언젠가 세조가 정인지를 위해 술잔치를 벌였다. 대화 주제가 풍수로 바뀌었다. 물 만난 정인지가 풍수에 대해 현란한 말을 이어갔다. 흥이 다했던지 세조를 보며 마무리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풍수의 심오한 것까지 들어가면 전하께서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 순간 주변이 썰렁해지고 대신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세조 자신도 대군 시절 부왕의 명으로 풍수 공부를 깊게 하였다. 왕실 풍수를 직접 주관할 정도로 세조도 나름 자부감이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세조는 "그대가 뭐 그리 잘나서 남을 깔보느냐?"라고 질책하고 잔치를 깨뜨렸다(정인지 18대손 정찬문 충북대 교수 증언). 정인지 탄핵 상소가 올라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세조는 "취중 실수"라는 이유로 용서하였다. 심지어 한번은 취중에 정인지가 세조를 "너"라고 불렀다. 그때도 탄핵 상소가 빗발쳤지만 "취중 실수"라고 세조는 용서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다.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인지였다.

그러나 그가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로 산 것이 흠이다"고 늘 자성하면서 후손들에게 3가지 훈계를 남겼다. 첫째, 태평 시절이든 난세이든 늘 근신하라. 둘째, 세상이 다할 때까지 명당(풍수)을 지켜라. 셋째, 정인지의 자손임을 명심하라. 유훈으로 남길 만큼 풍수는 그에게 중요했다.

정인지 무덤은 충북 괴산 외령리에 있다. 아버지 무덤과 멀리 떨어져 있고 연고가 없던 곳이다. 충청도 관찰사 시절 이곳을 지나면서 우연히 잡았다. 이유가 정인지답다. 무덤 자리는 늙은 쥐가 내려오는 형국인데 그 앞산이 고양이 산[猫山]이다. 게다가 정인지 자신이 쥐띠이다. 고양이 앞에 쥐는 몸을 낮출 수밖에 없다. 한미한 출신으로 최고의 권력과 부를 이룬 자의 처세술이다. 아버지 묏자리를 잡을 때는 부귀를 쟁취하기 위하여 뱀의 먹이가 풍부하도록 개구리 연못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원하는 바를 이룬 뒤 그는 납작 엎드릴 곳을 찾았다. 정인지의 창업과 수성의 풍수이다.

 

■07.02 작은 산들이 저마다 자기주장하는 밀양이 배출한 인물들

우리나라 큰 도시들은 쉽게 중심축을 가늠할 수 있다. 서울은 삼각산과 북악산이 중심축이 되어 도시가 형성되었고, 광주는 무등산이 중심축이 됐다. 흔히 주변 다른 산들을 압도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하면서 그 도시를 진호해준다는 진산(鎭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밀양에 들어가면 진산을 가늠하기 어렵다. 주변 산들이 그리 높지는 않으나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며 저만치 떨어져 사방에서 밀양을 지긋이 바라본다. 강물이 영남루를 지나 작은 섬 삼문동을 환포(環抱)하여 흘러간다. 지금 삼문동은 밀양시 중심이다. 영남루에 오르면 쉽게 그 지세를 볼 수 있다. 주변에 용두교·용두연유원지·용궁사 등이 용과 관련 있다. 그래서 작은 섬 삼문동을 여의주, 주변의 큰 산들을 용으로 본다면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의 땅이라고 말해도 좋건만 기록이 없다.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도 고개를 갸웃한다.

밀양을 형용하려는 시도는 최근에도 있었다. 영화감독 이창동은 밀양을 'Secret Sunshine'이라고 했다.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비밀스러운[密] 햇빛[陽]이라 해야 할까? 시인 고은은 "조선팔도에 여기만큼 고비 많은 데 없음"('만인보')이라 하여 저항의 땅으로 풀었으나 풍수학인에게 실감되지 않는다. 오룡쟁주의 땅이 아니라면 옛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고려 지식인 성원도는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늘어선 산봉우리들이 거듭 감싸는(大江橫流列岫重圍)" 형국으로 보았다. 이것이 더 적절하다. 풍수에서 '산은 인물을 주관하며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山主人水主財)'하였다. 인물과 재화가 넉넉한 땅이란 뜻이다.

 

▲경남 밀양 세종고등학교 교패. 프랑스 국기인 3색기를 상징한다. / 김두규

 

문제는 이와 같은 땅이 도대체 어떤 인물을 배출하는가이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 정유재란의 영웅 사명대사, 의열단 단장 김원봉 등을 위시하여 셀 수가 없다. 인물 없는 고장은 없다. 그러나 밀양의 경우 특정 프레임(이념과 문화)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들이 많다. 밀양의 산[龍]들이 저마다 자신을 주장하듯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인'임을 주장하는 인물상이다.

밀양강변에 세종고등학교가 있다. 1952년에 인가되었다. 교명이 세종인 것은 우리말과 글로 교육하여 새 세상을 만들자는 교육 이념에 부합한 인물이 세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명과 달리 교모와 교패가 특이하다. 기사도를 상징하는 방패 위에 청·백·홍, 즉 프랑스의 3색기를 연상시키는 교패이다. 프랑스 혁명 이념인 자유[靑]·평등[白]·박애[紅]를 교육 이념으로 내세운 것이다. 초대 교장 황용주의 작품이다. 황용주는 밀양 출신으로 '대구사범→일본 유학→학도병으로 중국 파병→광복군→귀국'이라는 운명을 겪는다. 귀국 후 정치를 포기하고 교육계에 투신한다(그러나 운명은 그를 다른 곳으로 이끈다.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였다. 그 인연으로 그는 훗날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황용주에 이어 2대 교장은 안병준, 3대 교장은 신학상이었다. 신학상은 인문학자 신영복 교수의 부친이었다. 그리고 안병준은 얼마 전 법무부장관 후보에서 낙마한 안경환 교수의 부친이다. 황용주·안병준·신학상은 비슷한 세계관을 가졌으되 모두 특정 프레임에 가둘 수 없는 인물이었다. 돈독한 우의를 맺어온 신영복과 안경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 교수는 법학·문학·영화 등에 대한 저서만 아니라 '동물농장' 등 영문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또 황용주·조영래(인권변호사)·이병주(소설가)에 대한 평전을 통해서 시대 문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풀고자 하였다. 낙마 과정에서 인문학자로서 그가 쌓아온 학문세계까지 세상이 무화(無化)시킨 것 같아 안타까웠다.

 

■07.07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대통령이 가장 먼저 가는 곳이자 마지막으로 가는 곳

⊙ 조산(관악산) → 주산(서달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국가유공자 제1묘역) → 혈(창빈 안씨 묘) → 명당(일반 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
⊙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혈()은 선조의 할머니 창빈 안씨의 묘
⊙ 이승만 묘는 약하지만 내룡 있어… 자식의 번창과 명예를 가져다줄 땅

⊙ 박정희 묘는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冷穴)…, 자손들에게 안 좋아
⊙ 김대중 묘는 창빈 안씨 묘 범장(犯葬)한 것
⊙ 김영삼 묘에서 돌 나온 것은 ‘봉황 알’이 아니라 돌산에 장사 지냈기 때문

 

▲ 1959년 현충일에 국군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를 참배하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 이곳에 국군묘지를 잡은 그는 6년 후 이곳에 묻혔다.

 

2017년 5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다음날인 5월 10일 오전 10시 문 대통령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한 뒤 국회로 가서 취임식을 하였다. 이렇듯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1956년 문을 연 이후 순국선열들의 영면처였다.


그런데 최근 국가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군인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반면, 전직 대통령이나 정부 요인들이 간간이 이곳에 묻히면서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들의 무덤이 풍수상 명당이라는 식의 비본질적인 것이 뉴스가 되고 있다. 앞으로 퇴임할 대통령들도 대전현충원이 아닌 이곳에 안장될 것인가? 그것도 풍수적인 이유에서? 그렇다면 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는가?


또 하나,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이곳을 참배할 정도로 이곳은 국가의 상징이다. 그런데 ‘국립현충원’이 공식 명칭이다. 전통적으로 임금과 그 부인 무덤을 능(陵), 태자(세자)와 태자빈(세자빈) 무덤을 원(園), 그리고 일반인 무덤을 묘(墓)라 부른다. 따라서 순국선열의 무덤을 중국과 북한은 ‘혁명열사릉’이라 부르고, 일본도 임금 무덤을 ‘능’이라 표기한다. 우리도 마땅히 ‘능’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창빈 안씨의 묘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창빈 안씨의 묘.
이곳의 원주인인 창빈 안씨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의 혈(穴)에 해당된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원래 주인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昌嬪安氏)다. 창빈 안씨는 연산군 5년(1499년)에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년) 궁녀로 뽑혔다. 스무 살 때 중종의 총애를 입어 영양군·덕흥군·정신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고, 1549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의 계비(繼妃) 문정왕후는 창빈과 자녀들을 가까이 챙겼다. 그 후광으로 명종이 죽고 자식이 없자 창빈의 손자 하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그가 선조다. 선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후궁의 손자로서 임금이 된 경우이다. 안씨가 창빈으로 추존(追尊)된 것도 선조가 임금이 되고 나서였다. 이후 조선의 왕족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었다.


원래 이곳은 ‘동작릉’이라 불릴 수 없다. 왕과 왕비의 무덤만이 능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곳을 능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선조의 할머니 무덤이라는 이유 때문에 존칭하여 후세인들이 ‘동작릉’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창빈 안씨와 이곳 국립현충원은 풍수상 무슨 관련이 있는가?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아들 덕흥군(선조의 아버지)은 경기도 장흥에 시신을 모셨다. 그런데 그곳이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1년 만에 이곳으로 이장(移葬)한다. 당시 이곳은 과천의 작은 마을이었다. 안장된 지 1년이면 육탈(肉脫)이 거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길지(吉地)를 찾아 과감하게 이장을 한 것이다. 지금은 이장하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그 당시에 이장을 한다는 것은 새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 같았다. 많은 재물과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기에 웬만한 가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상주(喪主) 입장에서 새로 옮기게 될 터가 분명 명당인가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한다. 명당발복(明堂發福)을 이루고자 한다면 풍수행위와 풍수신앙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풍수상 길지를 찾아 그곳에 터를 잡는 것이 풍수행위이며, 그렇게 했을 때 집안과 후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이 풍수신앙이다. 창빈 무덤 이장 사유가 풍수라는 것은 신도비(神道碑)에 나타난다.


〈양주 서쪽 장흥리에 예장하였으나 후에 택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천 동작리 곤좌원(북동향)으로 이장하였다(禮葬于楊州治西長興里. 後以宅兆不利. 移葬于果川銅雀里坐坤之原).〉


중국 풍수사들에게 매달렸던 선조

이장한 지 3년 만인 1552년 선조가 태어났다. 그리고 1567년에 임금이 되었다. 길지를 찾아 이장한 지 20년이 채 안 되었다.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할머니묘 명당발복 덕분에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조선의 호사가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로 인해 조선에 ‘풍수붐’이 불었다. 겸재 정선의 〈동작진(銅雀津)〉은 바로 이곳을 그린 것이다.


훗날 선조와 그 아들 광해군이 풍수를 맹신하였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특히 선조는 임진왜란·정유재란 와중에서도 풍수에 집착하여 당시 명나라 군대를 동행한 중국 풍수사들을 우대하였다. 선조는 풍수사 섭정국(葉靖國)을 지나치게 우대해 많은 폐해를 낳기도 했다. 명나라조차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 섭정국을 강제 소환시킬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선조가 중국인 풍수들에게 쩔쩔매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위(선조임금)에서도 또한 이치로 결단하지 못하고 섭정국과 이문통 등에게 와서 살펴주시기를 간청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上亦不能以理決斷, 懇請葉靖國·李文通等, 往來看審而莫適所從).〉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무덤 자리를 찾는 데 중국인 풍수 섭정국과 이문통이 협조를 하지 않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이 당황했다는 말이다.


창빈묘(세칭 ‘동작릉’)를 찾아가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국립현충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좌측에 있는 주차장에 ‘창빈 안씨 묘역’이란 안내표지가 보인다. 조금 올라가면 창빈의 신도비가 나온다. 20m쯤 더 올라가면 창빈 무덤이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창빈 안씨 묘가 혈(穴)에 해당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풍수상 어떤 곳일까? ‘동작릉’ 주산(主山)은 서달산이다. 서달산이 좌우로 두 팔을 벌려 현충원을 감싸면서 흑석동 쪽의 산이 좌청룡(左靑龍)이 되며, 사당동 쪽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서달산은 이곳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서달산 능선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묘역을 살짝 비켜 내려오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 봉우리 하나를 만든다. 장군봉이다. 현재 장군들의 묘(장군1묘역)가 조성된 장군봉은 풍수상 현무정이라 부른다. 주산의 강한 기운을 잠시 머물게 하였다가 다시 조금씩 흘려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장군봉에서 다시 중심 산줄기[來龍]가 내려와 창빈이 안장된 곳에서 멈춘다. 땅기운이 오롯이 뭉친 곳인데 이를 혈(穴)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곳의 전체적인 산세 흐름은 조산(관악산) → 주산(서달산) → 현무정(장군봉) → 내룡(국가유공자 제1묘역) → 혈(창빈 안씨 묘) → 명당(일반 사병 묘역) → 수구(현충원 정문) → 객수(한강)로 이루어진다.


창빈 묘역 우측(정면에서 볼 때) 가까운 곳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이 있다. 이곳은 장군봉에서 하나의 작은 곁가지가 뻗어 내려온 곳으로 창빈 묘역을 보호해 주는 내청룡(內靑龍)에 해당된다. 창빈 안씨 묘역은 안온하면서도 조용하다. 창빈 묘역 좌측으로(정면에서 볼 때) 불과 10여 미터 지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안장되어 있다. 즉 이승만・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은 창빈 묘역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중심지는 창빈 묘역이다. 이곳이 길지였음은 그 손자가 임금이 되었다는 것 말고도 후손의 번창이 말해준다. 창빈 사후 130년 만에 그녀의 후손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조선이 망하기까지 역대 임금들은 모두 창빈의 후손들이었다. ‘창빈의 조선’이었다.


이승만 묘소에는 약하지만 내룡(來龍) 있어

창빈 무덤 우측(정면에서 보아)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가 있다. 장군봉(장군묘역)에서 희미하게 능선(내룡)이 내려와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에서 작은 흙덩어리[토괴·土塊]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희미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약룡(弱龍)이라 부른다. 내룡은 자손의 번창을 주관한다.


서달산에서 장군봉

(장군묘역)을 거쳐 창빈 묘역에 이르는 산줄기가 중심이 된 중심룡(정룡)이라면, 이승만 대통령 묘역으로 이르는 산줄기는 곁가지인 방룡(傍龍)에 해당된다. 다른 전직 대통령인 박정희·김대중 묘역은 내룡 자체가 없음에 반해 이곳은 약하기는 하지만 내룡이 있다. 자식의 번창과 명예를 가져다줄 땅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아들이 없는데 무슨 자식 번창과 명예를 가져다줄 땅이라고 하는가? 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은 박씨 부인과 사이에 아들 태산이 있었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가버리자 훗날 부인 박씨가 인편을 통해 미국으로 보냈다. 태산이 일곱 살 때였다. 그때 이승만은 아들을 키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동보육시설에 맡겨진 태산은 이듬해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4・19 때 독재자라고 쫓겨났으나 최근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그를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은 이 터 덕분이라고 술사들은 풀이한다.


과연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소는 풍수에 입각해서 잡힌 자리일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이승만 장례식 때 읽은 ‘조사(弔辭)’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또 박사(이승만)에 대한 영원한 경의로 그 유택(幽宅)을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길지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 잡았을까? 술사 지창룡(1922~ 1999)씨였다. 지씨는 또 다른 풍수사 손석우씨와 풍수계의 쌍벽이었다. 1965년 이 전 대통령이 위독해지자, 정부는 그의 장지(葬地)를 동작동 국군묘지로 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곳이 국군묘지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군인이 아닌 이상 묻힐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군묘지를 국립묘지로 바꾸는 법안을 올려 국회 승인을 얻어낸다. 대통령과 국가유공자들도 여기에 안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해 7월 이 전 대통령은 이곳에 안장된다.

 

편집자 주

1)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1965년 3월 30일이고, 이승만 박사가 서거한 것은 그해 7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7월 26일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죽기 전 이승만 박사가 입국하는 것을 막을 정도로 이승만 박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승만 박사가 위독해지자 그를 국립묘지에 모시기 위해 미리 관련 법령을 개정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2) 국군묘지는 군묘지령(대통령령 1144호)에 의해 설치되었고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국립묘지령(대통령령 2092호)에 의한 것으로 국회 승인이 필요 없다. 2016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 자리를 잡은 지씨의 생전 평이다.

“한강물을 눈앞에 굽어보는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았다. 국립묘지의 많은 묘역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랄 수 있는 자리이다.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으로 목마른 거북이 한강물을 바라보고 내려가는 길지였다.”


지씨의 평가와 현장은 대체로 부합한다. ‘양지바른 언덕’은 혈이 형성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전직 대통령 묘역도 모두 길지인가? 모두들 풍수설을 근거로 하여 잡았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풍수에서 말하는 혈이 동작동 현충원 곳곳에 많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 혹은 두 개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능선이 천 리를 뻗어가도 혈이 맺히는 곳은 겨우 하나 있다(千里來龍僅有一席之地)”라는 풍수 격언이 말해주듯, 한 곳에 여러 혈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박정희·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는 풍수와 무관한 것인가? 아니다. 모두 풍수설을 믿어 정해진 자리이다.


‘범장(犯葬)’한 김대중 묘역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는 억지로 조성하다 보니 자리가 매우 옹색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많은 역경과 거듭된 대선(大選) 실패의 원인을 주변에서는 풍수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전남 하의도에 있는 선영(先塋)을 경기도 용인 이동면 묘봉리로 옮겼다. 김 전 대통령이 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거주지를 동교동에서 일산 정발산 아래 단독주택으로 옮긴 것도 동교동에 거주하면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측근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생전에 그는 용인 선영에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만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사후(死後) 선영으로 가지 않고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왜 그랬을까? 유가족들은 참배의 편의성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풍수술사 황모씨가 소점한 자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심지어 수년 전 영남대에서 ‘이 자리가 왜 명당인가?’에 대한 학술대회까지 개최되었다. 그만큼 풍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문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가 창빈 묘역을 침탈한다는 점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품계(品階)에 따라 묘역 간의 거리를 정하고 있다. 왕실 종친의 경우 100보, 6품 이하의 경우 50보 안을 침탈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이 조선왕조가 아니기에 창빈 묘역으로부터 100보를 떨어져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창빈 무덤에서 불과 10여 보 떨어진 곳에 무덤을 쓴 것은 명백한 ‘범장(犯葬)’이다. 남의 묘역을 침탈하다 보니 자리가 매우 옹색하다. 입구도 정면으로 낼 수 없어 묘역 좌측 위를 한참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묘 앞이 협소하다 보니 큰 암석들로 석축을 쌓아 억지로 묘역을 만들어 놓았다. 옹색하고 불편한 터가 되어 버렸다.


대안(代案)은 무엇일까? 용인 선영 아래 신후지지 혹은 대전현충원 대통령 묘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용인 선영의 산세는 웅장하며 전망 또한 아름답다. 대전현충원도 국세(局勢)나 땅의 아름다움이 이곳보다 훨씬 좋다.


장군봉에 안장된 장군들

▲채병덕 전 육군참모총장 등의 묘가 있는 제1장군묘역은 원래 장군봉으로 불렸다.

 

김대중 묘역을 나와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샛길이 있다. 그 길을 조금 걸으면 국가유공자 제1묘역이 나온다. 정일형·이태영 부부, 역사학자 이선근, 시인 이은상, 백두진·장택상 전 국무총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장군봉 꼭대기에 이른다.


우뚝 솟은 봉우리인 장군봉은 전망이 좋다. 장군들과 그 배우자들이 매장되어 있다. 일반 사병들 묘역보다 훨씬 넓다. 살아서 계급이 죽어서도 그대로 반영된 불평등이다. 대통령 → 장군 → 사병묘역 순으로 위치와 규모가 달라진다.


장군봉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채병덕 장군 묘’이다. 채병덕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6·25 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북한의 남침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남침 다음날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死守)를 공언했다. 또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러다가 서울을 빼앗겼다. 거듭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7월 하동전투에서 전사(戰死)했다. 일설에 의하면 적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아군에 의해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적탄을 맞으면 가슴에서 등으로 탄환이 통과하면서 등 쪽이 더 크게 뚫리는데, 가슴 쪽에 더 큰 구멍이 났다는 것이다. 전사할 때 그는 35세였다.


박정희 묘역은 냉혈(冷穴)인가?

▲삼우제 당시에 본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묘. 오른쪽에 제1장군묘역이 보인다.

 

장군봉에서 주산 서달산을 바라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묘가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 묘에 대해서는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冷穴)의 땅”이란 소문이 오래전부터 전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 소문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냉혈 소문의 근원지는 어디였을까? 한때 ‘육관도사’로 유명했던 손석우(작고)씨였다. 이 땅에 대한 그의 평이다.


“여기 이 자리는 음양의 교구(交媾)가 안 되는 자리이고 냉혈입니다. 냉혈이니 시신이 썩지 않고, 음양교구가 안 되니 자손이 끊어집니다. 딸이라도 시집을 가서 살 수가 없게 됩니다.”(《터》)


왜 이런 냉혈 논쟁이 나왔을까? 사건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피격되었을 때의 일이다. 청와대는 지창룡씨와 손석우 두 사람에게 장지 자문을 구했다. 이 둘은 라이벌이었다. 다음은 손씨의 증언이다.


“청와대의 부탁으로 현장에 도착해 보니, 지창룡씨가 먼저 와서 육 여사(그리고 훗날 박정희) 자리를 현재의 이곳으로 정해놓았다. 동행한 청와대 관계자가 나(손석우)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이라고 답변했다. 반면에 지창룡씨는 ‘이곳에 영부인(육 여사)을 묻으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남북통일을 이루고, 그 아드님은 만주까지 지배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터》)


물론 손씨의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지씨의 주장은 다르다.

“내가 묘역 조성에 관여를 하긴 하였으나 직접 잡은 자리는 아니다. 육 여사가 저격을 당했을 때 고향집에 있었다. 한밤중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 육 여사 유택을 봐달라고 하였다. 다음날 현장을 갔더니 묘지 관리소장 이주호씨가 안내를 하였다. 나를 기다리다 지쳐 최 풍수와 남 풍수라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광중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청와대 관계자는 내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현장 작업을 내가 지휘하고 육 여사를 안장했다. 그리고 나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를 당했을 때는 무덤 뒤 약한 용세가 마음에 걸려 수백 트럭의 흙을 날라서 비보(裨補)를 했다.”(《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결국은 당대 최고의 술사로 알려진 손씨와 지씨 모두 이곳이 길지가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 이곳은 누가 잡았을까? 손씨는 지씨가 잡았다 하고, 지씨는 최 풍수와 남 풍수가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런데 최 풍수와 남 풍수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원한 미스터리가 될 듯하다.


김영삼 묏자리에서 나온 바위는 ‘봉황 알’?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 조성 중에는 7개의 ‘봉황 알’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2015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한 뒤 큰 뉴스가 되었던 것은 그의 무덤 풍수였다. 묘지 조성 과정에 광중에서 7개의 바위가 나왔는데 그것이 봉황의 알이라는 것이었다. 봉황이 알을 품는 길지, 즉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의 결정적 증거로 내세우면서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를 소개했다. 이에 대해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는 “봉황이 알을 낳다가 항문 파열이 될 것”이라고 반박을 하였고, 안영배 《동아일보》 기자는 “전형적인 뻥풍수”라고 비난하였다.

 

동작동 현충원을 봉황에 비유한 것은 술사들이 이곳 지명 동작(銅雀)을 오해한 데서 비롯한다. 본디 동작의 어원은 조조(曹操)가 업(鄴)의 북서쪽에 누각을 짓고 그 위를 ‘구리로 만든 봉황[銅雀]’으로 장식한 데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곳 현충원의 본래 지명은 ‘동재기’이다. 주변에 검붉은 구릿빛 색깔을 띤 돌들이 많은 데서 유래한다. 봉황과 전혀 관련이 없다. 훗날 문자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작(銅雀)’이란 한자로 바꾸었다. 토질이 ‘구릿빛 색깔을 띤 돌’이 많았음은 동작동 옆의 지역 흑석동에서도 알 수 있다. 흑석동의 옛 땅이름은 ‘검은돌 마을’이었다. 구릿빛 돌(동작)이나 검은 돌(흑석)이란 지명은 이곳에 돌이 많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곳에서 땅을 파면 돌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봉황’ 운운은 술사들의 말장난이다.

 

그런데 광중을 파는 과정에서 큰 돌이 7개가 나왔다. 조선조 지관선발 필수서인 《금낭경(장서)》은 “기는 흙을 의지하여 다니므로, 돌산에 장사 지내서는 안 된다(石山不可葬也)”고 하였다. 이곳을 소점한 술사는 당황하였으리라. 변명을 해야 한다. ‘봉황포란형’으로 풀이하면 그럴듯하다. 봉황이 알을 낳았으니 이 후손 가운데 또 대통령이 된다고 풀이하면 얼마나 좋은가? 마치 1970년대 지창룡씨가 육 여사 묘를 두고 “그 아드님(지만)이 만주까지 지배할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혹자는 말할 것이다.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풍수설을 믿지 않았고, 자택이 근처 상도동에 살고 있기 때문에 후손들의 참배 편의를 생각해서 그곳에 무덤을 쓴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에 풍수사에게 길지를 찾아줄 것을 직접 부탁을 했다.


국립현충원의 ‘리모델링’이 필요한 때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풍수설에 따라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기를 원했다. 그러다 보니 국립현충원의 공간 배치가 어그러졌다. 또한 그들의 소원대로 길지에 안장된 것도 아니었다. 창빈과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술사들의 말장난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대안이 무엇일까?


첫째, 대전현충원에 국가 원수 묘역이 마련되어 있다. 최규하 대통령만이 현재 이곳에 안장되었다. 아름답고 편안한 땅이다.

 

둘째, 풍수상 길지를 원한다면 그들의 고향과 선영만큼 좋은 땅이 없다.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기 때문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풍수상 길지로 알려진 선영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에 안장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향과 선영에 안장한다면 그곳은 새로운 명소가 된다. 대통령을 위한 묘지 풍수 대안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사후 자기 고향이나 생전에 인연이 깊은 곳에 안장된다. 그러면 그곳은 관광명소가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범사례이다. 봉하마을은 이제 관광명소가 되었다. 지역분권화가 절로 된다.


셋째, 현재 현충원의 묘역 공간 배치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지금은 대통령·애국열사·장군·일반사병 등 생전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묘역의 넓이와 위치, 그리고 화장과 매장 등 장법이 다르다. 일원화해야 한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이 사병 곁에 안장된 것이 모범이 될 수 있다. 봉분의 양식도 대통령과 장군 그리고 사병의 것이 각각 다르다. 이 또한 좀 더 깔끔하게 일원화해서 디자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충원’을 ‘원’ 아닌 ‘능(陵)’으로 승격시켜야 한다. 중국과 일본 심지어 북한조차도 ‘원’이 아닌 ‘능’이란 명칭을 쓴다. ‘원’은 국가 스스로가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며, 순국선열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7월호

 

■07.15 풍수家 의존하다 몰락한 저우융캉… 박 前대통령이 '오버랩'되는 까닭

▲경기도 용인에 있는 최태민의 묘(사진 아래). 위에 있는 부모묘 중 부친 최윤성의 묘비에는 ‘독립유공자’라고 적혀 있다. /김두규

 

2015년 6월 11일 중국 톈진시 인민법원은 정치국 상무위원인 저우융캉(周永康)에 대해 뇌물수수죄·직권남용죄·국가기밀누설죄 혐의를 적용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정치국 상무위원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가는 수치로 보면 쉽게 이해된다. "중국 공산당 당원은 약 8700만이다. 이 가운데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 출석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앙위원은 200명 안팎이다. 200명에서 25명이 정치국 위원으로 뽑힌다. 25명 중에서 7인이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 13억 인구 가운데 7인으로 뽑힌다는 것은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구속되었다. "권력남용 등 여러 가지 이외에도 공무상 기밀누설" 혐의가 구속의 핵심 사유이다. 한·중 권력자 구속 사유가 공통적으로 '기밀누설'이다. 중국 재판부는 "저우융캉이 6부의 비밀문서를 열람 자격 없는 차오융정(曹永正)에게 보여줬다"며 유죄 판결을 내렸다. 어떤 문서들이었으며, 차오융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차오융정은 1959년생으로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교사·출판인·사업가 등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동시에 풍수사로 활동했다. 1997년 저우융캉이 중국석유천연가스 총경리로 재직할 때 비서의 소개로 차오융정을 만난다. 차오융정은 저우융캉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당신은 5년 후 형부상서(장관급), 10년 후에는 전각대학사(승상급)가 될 것입니다." 저우융캉은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 아내와의 불화, 이혼, 부인의 사고사, 이로 인한 아들의 일탈 등 불운이 계속됐다. 이때마다 저우융캉은 차오융정에게 의지했고, 차오융정은 끊임없이 그에게 언젠가 크게 되리라고 '예언'하고 '세뇌'시켰다.


얼마 후 저우융캉은 국토자원부 부장(장관급)이 된다. 이때부터 저우융캉은 일거수일투족을 차오융정에게 맡긴다. 저 사람을 만날까 말까? 만난다면 언제 어디서 만나야 할까? 오늘 회의에 참석할까 말까? 이러한 질문이 있을 때마다 차오융정은 해당 인물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다. 관련 자료를 받은 차오융정은 이를 치밀히 분석하고―그는 정치학을 전공했다―저우융캉에게 '답'을 주었다. 저우융캉은 아무리 중대한 회의일지라도 차오융정이 참석하지 말라면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기밀누설죄는 다름 아닌 저우융캉이 자신과 관련 있는 '주요 정치인들 및 주요 회의 내용을 차오융정에게 보여준 것'이었다(차오융정은 2016년 7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행은 영세교 교주 최태민(최순실 아버지)에서 비롯한다.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육 여사 뒤를 이을 지도자, 궁극에는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예언'하고 '세뇌'시켰다(허호익, '한국의 이단 기독교'). 그 결과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흔들리지 않고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는 절대적 신뢰를 품었다. 흔히 최태민을 하찮은 사이비로 치부하지만, 풍수학인의 눈에는 간단히 보이지 않는다. 그가 부모와 자신을 위해 잡은 묏자리를 답사하다 보면 허투루 정한 곳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광인(狂人)'이 아니라 나름의 내공을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이 최태민의 '도참(圖讖)'에 빠진 것은 아닐까.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는 "도참이란 흥망성쇠를 예언하는 것을 말하는데, 영웅호걸들을 자극하고 영향을 주어서 실제로 사실로 나타난 적이 많다"고 했다. 저우융캉과 박근혜도 그러한 도참의 결과로 빚어진 '영웅호걸'일까?

 

 

월간조선 8월 호

 

■계급독재’와 조선의 풍수

성군(聖君)과 반(反)풍수 대신(大臣)과의 풍수논쟁

 

⊙ ‘고려는 숭유숭불숭풍(崇儒崇佛崇風), 조선은 숭유억불숭풍(崇儒抑佛崇風)’
⊙ “나라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니다”(정도전)
⊙ 주자는 《산릉의장(山陵議狀)》 지을 정도로 풍수 신봉했지만, 조선 사림들은 풍수 배격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1947)에서 “독재 중에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라 하였다. 백범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지만, 동시에 조선의 주자학도 계급독재로 규정하였다. 조선의 주자학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 규정하는 독재”였으며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되었다고 단언한다.

풍수 역시 그러한 ‘계급독재’에 의해 질식되고 왜곡되면서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로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풍수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사상이자 문화가 된단 말인가? 이에 대해 이한우는 우리 역사 속의 풍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고려는 숭유숭불숭풍(崇儒崇佛崇風), 조선은 숭유억불숭풍(崇儒抑佛崇風)이었다’(《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2012). 즉 고려는 유학·불교·풍수를 숭상하였고, 조선은 유학과 풍수를 숭상한 반면 불교를 배척하였다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 1000년 우리 민족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풍수였다.


“풍수는 조선 사회의 특질”

/《조선의 풍수》 등을 지은 무라야마 지준.

 

우리 민족의 풍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다. 1931년 그가 펴낸 《조선의 풍수》에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풍수는 조선 사회의 특질(特質)로서 멀리 삼국시대부터 신라·고려·조선이라고 하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왔으며 그 영향력은 미래에도 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조선의 습속》 《조선의 귀신》 《조선의 풍수》 《조선의 무격(巫覡)》 등과 같은 저서를 20여 년(1919~1941)에 걸쳐 출간하여 조선학(한국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의 활동이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이뤄졌다는 이유에서다. 해방 이후 한국학자들은 그를 인용하면서도 제대로 그를 평가한 이들은 없다. 일부러 무시하려 한다.

 

그가 1931년에 출간한 《조선의 풍수(일본어)》는 85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당시 이 책이 출간되자 그 어떤 책보다 많이 팔렸다. 복사판들이 풍수술사들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 사이에 나돌았다.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할 즈음 이 책이 긴급히 수배되었다. 도로를 내면서 잘리게 될 수많은 산맥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하여서이다. 많은 사람에게 풍수 교과서 역할을 하였으며, 필자 역시 번역본이 나오기 전부터 일어판을 복사하여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이 ‘풍수고전’으로 지속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가지 이유이다.


첫째, 책의 내용이 충실하여 풍수입문으로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없다.


둘째, 우리 민족이 본래 갖고 있던 풍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무라야마는 조선 문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풍수임을 단언한다.


“반도 어디를 가더라도 믿지 않은 자가 없다”

“조선 문화의 이면적 근저적(根底的) 형상의 하나가 풍수라는 것이다. 이 풍수라는 것은 현재 표면적 문화형상만을 가지고서 조선 문화를 논하려는 많은 사람, 이른바 신세대 가운데에서는 ‘구세대의 누습, 문맹자 사이에서 지지되는 미신’이라 하여, 이것을 조선 문화의 하나로 추가하는 것을 꺼리는 자가 있으며, 비교적 진지한 조선 문화 연구가들조차도 이를 옛 시대의 풍습이며, 민도 낮은 자들에 의해 형성된 문화라는 이유로 그다지 중요시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풍수라는 것은 적어도 십수 세기의 장기간 조선 민속신앙계에 그 지위를 점해 왔고,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반도 어디를 가더라도 믿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일반에게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므로 다른 문화에 비해 그 지지의 강고함과 광범위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그 특질이 멀리 삼국시대로부터 신라·고려·조선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그 심원한 깊이와 강한 보급력은 앞으로도 생활상에 영향을 충분히 약속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삼국시대부터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풍수는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과 같이한다. 그 최초 우리 민족의 ‘풍수서’는 《신지비사(神誌秘詞)》이다. 《삼국유사》 《고려사》 및 조선 초기까지 인용되는 《신지비사》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우리 민족이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적어도 3000여 년 전에 제작된 조선 고대의 국문”(《조선상고사》)으로 보았다. 일종의 역사서이면서 국토 전반을 아우르는 국역풍수서였지만 아쉽게도 몇 문장 이외에는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앞에서 이한우는 고려와 조선이 공통적으로 풍수를 숭상하였다고 하였지만, 풍수 내용은 전혀 다르다. 고려에서는 《신집지리경》 《유씨서》 《지리결경》 《경위령》 《지경경》 《구시결》 《태장경》 《가결》 《소씨서》 《도선기》 《옥룡기》 《삼각산명당기》 《삼한회토기》 《해동비록》 등이 주요 ‘풍수교과서’였다. 조선에서는 《청오경》 《장서(금낭경)》 《호순신(지리신법)》 《명산론》 《지리문정》 《감룡경》 《착맥부》 《의룡경》 《동림조담》 《탁옥부》 등이 ‘풍수교과서’였다.


《신지비사》에서 출발한 풍수가 왕조를 달리하면서 풍수교과서가 달라진 것은 시대문제를 해석 혹은 대응하는 논리가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풍수는 10학에 포함된 국학이었다. 그러한 풍수를 집요하게 없애려고 한 세력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주자학 독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그 처음은 조선 개국 직후였다.


정도전의 ‘억불억풍(抑佛抑風)’

/풍수를 비판했던 정도전. 그의 무덤은 서초구청 인근에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라기보다는 공동창업자였다. 그는 고려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의 필연성을 통찰하였다. 낡은 제도와 이념을 버려야 했다. 고려가 취했던 ‘숭유숭불숭풍(崇儒崇佛崇風)’ 가운데 ‘숭유’만 취하고 ‘억불억풍(抑佛抑風)’을 하였다. 불교와 풍수를 배척하였다. 그는 왜 불교를 배척해야 하는지 《불씨잡변》에서 이같이 말한다.


“저 불씨는 사람이 사악한지 정의로운지 올바른지 그른지는 가리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부처에게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풍수도 그에게는 제거 대상이었다. 당시 풍수가 문제가 된 것은 도읍지를 옮기는 문제에서였다. 예부터 나라를 세운 창업자들이 가장 먼저 하였던 것은 새로운 도읍지 선정이었다. 불가피하게 기존 도읍지를 쓴다 할지라도 전 왕조의 궁궐을 쓰지 않았다. 허물고 다른 곳으로 옮겨 지었다. 왜 그러했는가?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忽必烈)의 일등공신은 유병충(劉秉忠)이었다. 유병충은 풍수에도 전문가였다. 새로운 제국 도읍지와 관련하여 그는 말한다. “옛날부터 나라를 세움에 있어, 가장 먼저 지리의 형세를 이용하여 왕기를 살려서 이를 바탕으로 대업을 성취한다.”


이 말은 나라를 세운 이들에게 금과옥조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 지금 내가 계룡산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태조 2년, 1393년)


‘나라의 다스림은 사람에게 있는 것’(정도전)

천도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394년 8월 8일부터 8월 13일 사이였다. 그것도 조정에서가 아닌 당시 도읍지 후보로 떠오른 무악(현 연세대 일대)과 한양(현 경복궁 일대)이란 현장에서였다. 무려 6일간에 걸쳐 현장에서 벌어진 풍수논쟁이자 천도논쟁이었다. 이때 천도에 대해 개국공신들과 풍수관리들 대략 세 파로 나뉘어 의견을 달리한다.


첫째 부류는 천도론 찬성론자들이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지식인들 가운데 음양·풍수의 3대가로 알려진 권중화·하륜·무학이 그들이다. 권중화는 이성계에게 계룡산을, 하륜은 무악(현 연세대)을 추천할 정도로 풍수에 정통하였다. 특히 하륜은 자신의 풍수설로 계룡산 도읍지 불가론을 주장하면서 개국 직후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무학은 이성계가 천도를 결정할 때 최종적으로 의견을 물었던 인물이다.


둘째 부류는 대부분의 풍수관리, 즉 서운관(書雲觀)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풍수설에 따르자면 개경이 최고의 길지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풍수설을 내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후원 세력이었던 전 왕조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상의 큰 틀을 읽어내지 못한 기능인들이었다.


세 번째 부류는 정도전을 비롯한 일부 유학자들이다. 무악과 한양 그 어디도 마땅치 않게 여기며 개성(송도)을 고집한다. 토목공사로 쓸데없이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다가 주자학의 사상적 기반에 바탕을 둔 신념, 즉 ‘나라의 다스림은 지세가 아니고 사람에게 달렸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정도전은 임금 앞에서 말한다.


“신은 음양술수(풍수)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라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태조 3년, 1394년)


이에 태조 이성계는 화를 내며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으며, 의심스러운 것은 소격전에 가서 결정하겠다”며 논란을 매듭짓는다. 소격전에 가서 점을 쳐 결정, 즉 신탁(神託)에 따르겠다는데 정도전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4년 뒤인 1398년 정도전은 죽임을 당한다. 반면 이성계 천도론에 찬성하였던 하륜·조준·김사형·무학 등은 천수를 누린다.


풍수를 반박한 어효첨

/세종이 묻힌 경기도 여주의 영릉.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풍수의 효능을 인정했다.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지 50년쯤 지난 뒤의 일이다. 새 나라 조선은 안정되었고, 도읍지 한양은 인구가 2배 이상 늘어났다. 주민들이 배출하는 쓰레기가 명당수인 개천(청계천)을 오염시키는 문제가 생긴다.


집현전 관리이자 풍수에 능했던 이선로가 “개천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여 물이 항상 깨끗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임금에게 건의를 한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대제학 정인지 이하 주요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를 하게 한다. 논의 결과 ‘여러 관청이 성내 각 집들을 분담하여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개천에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


왜 임금과 대신들이 개천 물 관리에 그토록 진지했을까? 풍수적 이유이다. 조선조 풍수학 고시과목 《지리신법》의 명당에 흐르는 물(명당수)에 관한 대목이다.


“대개 산은 사람의 형체와 같고 물은 사람의 혈맥과 같다. 사람은 형체를 갖고 있는데, 사람의 생장영고(生長榮枯)는 모두 혈맥에 의존한다. 이 혈맥이 한 몸 사이를 순조롭게 돌아 일정한 궤도가 있어 순조롭고 어그러짐이 없으면, 그 사람은 편안하고 건강하다. 일정한 궤도를 거슬러 절도를 잃으면 반드시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운명은 한양의 명당수(개천)를 잘 관리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어효첨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풍수를 논하는 소(論風水疎)’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서였다. 다음은 그 핵심 문장이다.


“명당수(청계천)에 더러운 물건을 던져 넣지 못하도록 금하기로 했다 합니다. 신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도읍의 땅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번성하게 사는지라, 번성하게 살면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쌓이게 됩니다. 반드시 소통할 개천과 넓은 시내가 그 사이에 종횡으로 트여 더러운 것을 흘려내야 도읍이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물은 맑을 수가 없습니다.”


어효첨이 도성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한 반면, 임금과 주요 대신들은 풍수설을 바탕으로 나라와 왕실의 운명을 우선한다. 그런데 어효첨은 “무릇 운수의 장단과 국가의 화복은 모두 천명과 인심의 유무에 달린 것이고, 실로 풍수지리와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풍수를 거부한 김종직

/어효첨의 아버지의 묘. 풍수에서 말하는 좋은 요건은 다 갖추었다고 정인지는 말했다.

 

당연히 세종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옆에 있던 정인지에게 물었다. “어효첨의 주장이 그럴듯한데 그가 부모를 장사지낼 때 풍수지리설을 따르지 않았는가?”


난처한 정인지가 절묘하게 대답한다.


“일찍 제가 명을 받아 함안에 가서 어효첨이 그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을 보았는데 풍수지리에 현혹되지 않은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룡·백호·주작·현무 등 전후좌우에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풍수에 현혹되지는 않았으나 사신사가 구비된 땅에 장사지냈다’는 뜻이다. 세종은 어효첨으로 하여금 더 이상 왕실과 국가풍수에 관여치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너그러운 세종 임금이었다. 그러나 아들 세조는 달랐다.

 

/풍수 등 잡학을 배척했던 조선 주자학의 종장 김종직과 그의 묘.

 

1464년 세조 임금은 훗날 사림파 종장(宗長)으로 추앙받게 될 34세의 김종직을 파직한다. 이유는 “임금이 문신들로 하여금 유학 말고도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을 함께 공부하게 함은 마땅치 않다”고 직무보고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언급된 잡학들 가운데 지리·음양·복서는 사주와 풍수로 표현할 수 있으니 김종직은 이것들을 율려·의약과 함께 배제시키라고 주장한 것이다.


“지금 문신들로 하여금 천문·지리·음양·율려·의약·복서·시사(詩史)의 7학을 나누어 닦게 합니다. 시사는 본래 유학자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이야 어찌 유학자가 힘써 배워야 할 학이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세조는 김종직을 파직시킨다(그 이듬해 복직됨).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잡학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


조선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유학뿐만 아니라 잡학도 함께 써야 한다는 주장과 유학(특히 주자학)만으로 충분하다는 두 주장이 충돌한 것이다. 오너 CEO 세조 입장에서는 미래 전문 CEO가 되어야 할 김종직이 유학만 고집하는 것이 경박하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게 느껴졌다. 세조는 잡학도 학문으로 인정하여 그 실용성을 취할 것을 신하들에게 요구하였다. 반면 김종직은 주자학 하나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학문의 경직화 그리고 주자학 이외의 모든 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는 결과를 야기한다. 훗날 김종직이 사화의 주인공이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한 것도 그의 이런 경직된 사고에 의해서였다.

 

주자는 풍수설 신봉

/주자학을 개창한 주자는 풍수신봉자였다

 

대개 나이가 들면 세상에 대해 유연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종직은 달랐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485년(성종 16년)의 일이다. 대구부사를 역임하고 병조참지란 현직을 지닌 최호원이 황해도를 다녀와 아홉 가지 일을 보고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도선풍수를 되살려 활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신이 가만히 황해도의 산천 형세를 살펴보니, 안악·신천은 모두 후덕한 산으로 형세가 단정하고 두터워 … 나쁜 병이 생기지 않음이 당연합니다. 반면 황주와 봉산은 돌산이 높게 솟아서 모두 뾰족하며 험악한 모양이며 … 물길이 이리저리 찢어져 흘러갑니다. 산천에 독기가 없을 수 없어 질병과 여귀가 생김은 마땅한 것입니다. … 청컨대 도선의 비보(裨補)풍수설에 의거하여 다스리는 법을 밝히소서.”


이 상소는 임금과 조정대신들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온건론부터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의견이 다양했다. 그 가운데 김종직도 있었다. 당연 강경론자였다. “최호원이 이미 비보풍수설로 글을 올려 한 나라(一國)를 현혹”시켰는데 겨우 “세 사람 이상의 대중을 현혹시킨 율”에 따라 처벌함이 불가하다며 엄벌을 주장한다. 김종직에게 풍수는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술(邪術)이었다. 주자학만이 유일한 진리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림파들이 유일한 진리로 숭상하였던 주자학의 주인공 주자는 풍수설을 신봉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송나라 황제인 영종(寧宗)에게 《산릉의장(山陵議狀)》(1194년)을 올려 풍수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밝힐 정도였다. 이 《산릉의장》은 중국과 조선의 사대부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풍수서가 된다. 유독 주자학만 숭상하던 사림파들이 주자의 풍수설을 취하지 않은 것은 조선만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주자학만을 고집하던 사림파의 이율배반을 지적한 것은 정조 임금이었다.


정조와 이현모의 풍수논쟁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
홍릉 오른쪽의 빈자리는 영조가 유언한 자리라고 한다.

 

1776년 정조가 임금에 오른 직후 황해도사 이현모(후에 이철모로 개명)를 관직에서 내쫓았다. 원래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는 생전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정해 놓았다. 영조의 첫째 부인 정성왕후가 1757년 죽자 지금의 서오릉 홍릉(弘陵)에 안장한 뒤, 그 오른쪽을 자신의 무덤 자리로 정해 놓았다. 영조의 수릉(壽陵)이었다. 영조가 죽자 조정대신들은 당연히 그 자리로 안장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풍수설을 내세워 다른 곳을 찾게 한다. 당장 반박 상소가 올라온다. 그 첫 번째 상소를 올린 이가 이현모였다.


“홍릉 오른쪽 비워놓은 자리는 곧 대행대왕(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입니다. …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풍수설은 주공이나 공자와 맹자가 말하지 않은 바입니다. 어버이 장사를 주공·공자·맹자처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과 함께 벼슬에서 내치도록 지시한다.

“술사(풍수사)들을 많이 불러 널리 명산을 찾는 것은 이미 정자(程子)·주자가 정해 놓은 논의가 있었으니, 어찌 성인들이 말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 마땅히 엄하게 조처해야 할 일이다마는 (풍수)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인 듯하니, 그의 상소를 돌려주되 돌아가 주자의 《산릉의장》을 연구하게 하라.”


이현모가 공자·맹자를 인용하자 정조는 정자·주자를 인용하여 받아쳤다. 정조가 주자말고도 정자를 인용한 것은 정자 역시 풍수설을 깊게 신봉하여 〈장설(葬說)〉이란 풍수론을 남겨 중국과 조선의 풍수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 풍수 배격 심해져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였고 세종·세조·정조는 문화를 융성시킨 위대한 임금들이었다. 그들은 풍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풍수학을 연구하게 하였고, 세조 역시 부왕(父王) 세종의 명으로 풍수를 공부하였다. 정조 임금은 세손 시절부터 15년 넘게 풍수 공부를 한다. 자신이 어떻게 풍수 공부를 하였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조는 방대한 기록을 남겨 지금도 《홍재전서》에 수록되어 전한다.


국가 경영에 성리학만이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임금들과 달리 성리학만이 조선을 다스릴 유일한 진리라고 강조했던 주자학자들은 풍수를 철저하게 배척했다. 이른바 백범이 말한 ‘계급독재’였다. 정작 주자학의 주인공인 정자나 주자도 풍수를 수용하였는데,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정자와 주자가 남긴 〈장설〉과 《산릉의장》까지 애써 무시하려 들었다. 조선의 모든 유학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퇴계학자 김기현(전북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조선 중기 이전은 사림파(주자학)와 같은 권위주의가 없었다. 학문 풍토가 그리 경직되지 않았다. 훈구파는 부국강병책과 외교의 유연성을 가졌다. 반면에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는 성리학 이외에 그 어떤 학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학문의 경직화는 사문난적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을 처형하기까지 이른다. 사림파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말한다.”


주유야풍(晝儒夜風)

풍수는 분명 조선의 국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자학 강경파에 밀려 풍수는 더 이상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주유야풍(晝儒夜風)’이었다. 낮에는 유학을 논하고 밤에는 풍수를 논한다는 말이다. 특히 정조 죽음 이후 풍수는 더 이상 국가기관이나 인식력이 뛰어난 문신들에 의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는다. 국역풍수는 말할 것도 없이 묘지풍수이론조차도 제대로 전수되거나 강습되지 않아 풍수는 하찮은 잡술로 타락하였다. 거의 사라질 조선 풍수의 원형을 조금이나마 복원한 이가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였다. 역사학자 이병도의 명저 《고려시대연구》는 고려시대를 풍수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인데 이는 해방 후의 일이다(1947년).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정원은 일본정원이다. 일본정원의 고전 《작정기(作庭記)》에는 풍수가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한때 금지되었던 풍수가 ‘복권’되면서 중국에서 풍수는 마천루와 도시 건설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생태학과 환경학의 기본 바탕으로 차용된다. 우리에게 지금 풍수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직도 대선(大選) 후보들의 선영(先塋)이나 찾아다니면서 ‘제왕지지(帝王之地)’ 운운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풍수이다.⊙

 

 

9월 호

■조선의 산수화와 풍수 - 풍수로 복을 부르는 산수화 고르기

 

⊙ 곽희, “산수화를 보면 그 그림을 그린 후손들의 길흉화복까지 알아맞힐 수 있다”

⊙ 황공망, “그림에도 풍수가 있다”

⊙ 동기창, “북종화가들은 단명하였으나 남종화가들은 오래 살았다”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목멱조돈(木覓朝暾)〉.
남산이 실제보다 뾰족하게 그려져 있다.

 

모든 장르의 그림에 적용할 수 없으나 산수화만큼은 그 본디 목적이 풍수와 같다. 산수화와 풍수의 출발점이 같기 때문이다. 좋은 땅이 있듯 산수화에도 좋은 산수화가 있다.


1000원권 지폐 앞면에는 퇴계 이황의 초상화가 뒷면에는 산수화 한 폭이 담겨 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시냇가 위에 조용히 사는 그림)〉이다. 2007년 새 지폐가 발행되면서 퇴계의 초상화와 〈계상정거도〉가 앞뒷면에 실렸다. 이때 말이 많았다. 〈계상정거도〉에 묘사된 것이 도산서당(훗날 도산서원)이 아니라는 주장과 겸재의 그림이 아닌 위작이라는 주장(이동천 박사 주장)이 일었으나 모두 근거 없는 주장으로 판명됐다. 이동천 박사는 지금도 “〈계상정거도〉엔 광기도 천재성도 없다”고 혹평한다. 그러나 후술하게 될 정기호(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1000원짜리 지폐에 담긴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겸재가 이 그림에 ‘溪上靜居’라고 쓴 것은 자기 창작이 아니고 퇴계가 쓴 시 가운데 ‘계상시정거 임류일유성(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시냇가 위에 비로소 거처 정하고, 흐르는 물 바라보며 날로 반성하네)’이라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다(현재 이 시는 퇴계종택 앞 시비에 새겨져 있다). 겸재는 진경산수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대상은 어디이며, 어디에서 그 실물을 확인할 수 있을까? 안동 도산서원에 들어서면 입구에 주차장이 있다. 그 오른쪽에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시멘트 포장길이 있다. 겨우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잠수교가 강을 가로지른다.

 

/시사단에서 본 도산서원. 1000원권 지폐 속 〈계상정거도〉의 그림과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강 건너에는 ‘시사단’이 있다. 시사단은 조선 정조 때 지방별과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시사단을 등지고 강 건너 도산서원을 바라보면 1000원권 지폐 속의 그림과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림 속에는 소나무들이 뚜렷하게 우뚝 솟아 있으나 지금은 잡목들과 혼재한 데다가 숲이 우거져 달라 보인다. 식생의 자연천이 때문이다. 그러나 산과 물의 흐름은 흡사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똑같지는 않다. 특히 강물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수량이 풍부하게 그려져 있으며 실물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정기호 교수는 일종의 ‘포토숍’이며 “2개의 시점장(視點場)을 합성하여 그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천하의 길지도 완벽하게 아름답지 않다’

/정선이 그린 〈동작진(銅雀津)〉 그림에는 관악산(뒤)이 뾰족하고 높게 나타난다.

 

진경산수화라고 하면 실물과 똑같아야 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겸재는 실물을 바탕으로 하였으되 그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에 변용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겸재가 그린 남산(목멱산)도 실물보다 더 뾰족하게 그려져 있다.”(정기호 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


다른 대표작 〈동작진(銅雀津)〉도 마찬가지다. 동작대교 건너 이촌동 어느 지점에서 그렸을 〈동작진〉 그림에는 관악산이 뾰족하고 높다. 겸재가 시점(視點)을 취했을 동부이촌동에서 강 건너 관악산을 바라보면 그림처럼 뾰족하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정 교수는 아직까지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풍수적 관점에서는 다르다. 겸재가 화폭에 담은 곳들은 명승지들이다. 풍수상 ‘살 만한 곳(可居地)’이나 ‘노닐 만한 곳(可遊地)’들이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곳은 없다. “성인도 전능할 수 없듯 천하의 길지도 완벽하게 아름답지 않다(聖人無全能, 亦山無全美)”는 것이 풍수 격언이다.


그러한 현실을 작품 속에서 완벽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작가의 몫이다. 창작의 자유이다. 불완전한 땅을 그림 속에서 완전하게 나타낸다. 비보(裨補)풍수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좋은 산수화에는 작가의 입장에서 완벽한 길지가 구현되고 있다.


산수와 풍수는 출발이 같다

왜 산수화를 그리는 것일까. 왜 산수화를 소장하며 이를 감상하는 것일까? 특히 풍수에서는 다른 장르의 그림보다 산수화를 중시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명나라의 화가 문진형(文震亨·1585~1645)은 그 이유와 좋은 산수화의 조건을 설명한다. “그림 가운데 산수화가 제일이고, 대·나무·난초·돌이 그다음, 인물·짐승이 또 그다음이다.… 산수와 임천(林泉)은 맑고 한가롭고 그윽하고 넓어야 하며, 가옥은 깊숙해야 하며, 사람이 건널 외다리가 있어야 한다.… 산세는 높고 냇물의 흐름은 시원스러워야 한다.”(《장물지(長物志)》)


풍수에서 산수화를 이렇게 중시하는 데는 오랜 전통과 내력이 있다. 종병(宗炳·375~443)의 이른바 ‘와유론(臥遊論)’이다. ‘산천을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잘 그려진 산수화를 보면 눈이 감응하고 마음 역시 통하여 산수의 정신과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사람이 응당 눈으로 보고 마음에 통하는 경지를 이(理)라고 하는데, 잘 그려진 산수화의 경우는 눈도 동시에 응하게 되고 마음도 동시에 감응하게 되어서 응하고 통함이 정신을 감동시키면 정신이 초탈하여 이(理)를 얻을 수 있다.”(《화산수서》) 풍수의 핵심이론인 동기감응, 즉 같은 기운이 서로 감응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종병에 이어 왕미(王微·415~443)는 산수를 그린다는 것은 “산수의 정신을 그리는 것(寫山水之神)”이며 이를 통해 “신명이 강림(明神降之)”하는 것으로 보았다(《서화(敍畵)》). 따라서 그림을 바라보면 그림 속의 정신이 사람에게 전해진다는 것이 그의 ‘와유론’이자 ‘전신론(傳神論)’이다.


특히 왕미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풍수에도 능하여 중국의 《송서(宋書)》 ‘왕미전(王微傳)’은 “서화에 능하고 음악·의술·음양술에 밝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음양술이란 풍수를 말하는데 그는 양택(주택) 풍수의 초기 고전인 《황제택경》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까닭에 《황제택경》을 《왕미택경》이라고도 한다(조셉 니담, 《중국과학기술사》).


산수화와 풍수의 상관관계는 중국 송나라 때 더욱 구체화된다. 송대에 집필된 풍수고전 《명산론(明山論·산의 이치를 밝히는 책)》은 조선조 지리학 고시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하는데, 이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흙은 살이 되고, 돌은 뼈가 되고, 물은 피가 되고, 나무는 모발이 된다. 그러므로 혈을 이루는 곳에서는, 그곳의 흙은 풍성하고, 그곳의 돌은 이상한 것이 많고, 그곳의 물은 여러 곳에서 모여들고, 그곳의 나무는 무성하다.”(《명산론》)

 

“살 만한 곳을 산수화로 표현해야 좋은 그림”

/송(宋)나라 이성(李成)이 그린 〈청만소사도(晴巒蕭寺圖)〉.

 

동시대의 산수화가 곽희(郭熙: 11세기 인물)는 화론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과 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산은 큰 물체(大物)이다.… 물로써 혈맥을 삼고, 덮여 있는 초목으로 모발을 삼으며, 안개와 구름으로써 정신과 풍채를 삼는다. 그러므로 산은 물을 얻어야 활기가 있고, 초목을 얻어야 화려하게 되며, 안개와 구름을 얻어야 곱게 된다. … 바위란 천지의 뼈에 해당한다.”


산수화의 기능은 무엇일까? 곽희는 말한다.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취지가 어디에 있는가? 산림과 정원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천품을 수양하는 것은 누구든지 언제나 그렇게 거처하고자 하는 바이고 샘물과 바위에서 노래하며 자유로이 거니는 것은 누구든지 언제나 그처럼 즐기고 싶은 바일 것이다.… 실제로는 눈과 귀가 보고 듣고 싶은 것이 단절되어 있는 형편이므로 지금 훌륭한 솜씨를 가진 화가를 얻어 그 산수 자연을 왕성하게 그려낸다면 대청이나 방에 앉아서 샘물과 바위와 계곡의 풍광을 한껏 즐길 수 있다.… 이 어찌 남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완전하게 사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


좋은 땅에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들에게 산수화는 그 대체품으로 기능한다. 곽희는 산수화를 보면 그 그림을 그린 후손들의 길흉화복까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 “살 만한 곳(可居者)”을 산수화로 표현해야 좋은 그림이 된다면서 모범 사례로 이성(李成·919~967)의 〈청만소사도(晴巒蕭寺圖)〉를 꼽는다.


“그림에도 관상법이 있다”

“그림에도 관상법이 있다. 예로 이성의 자손이 번성하고 잘되었는데 그가 그린 산기슭과 지면이 모두 혼후하고 넓고 크며 위로는 빼어나고 아래로는 풍만함이 후손이 번영하는 상(相)과 합치하였다.”(《임천고치》)


풍수의 두 가지 핵심이 산과 물이듯 곽희의 산수화의 핵심도 산과 물이다. 곽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산은 큰 물체(大物)이다. 그 형상이 솟아 빼어난 듯, 거만한 듯, 조망이 널찍하여 툭 터져 있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듯, 다리를 펴고 앉아 있는 듯, 둥그스름하게 큰 듯, 웅장하고 호방한 듯, 정신을 전일하게 한 듯, 엄중한 듯, 눈이 예쁘게 뒤돌아보는 듯, 조회에서 읍하고 있는 듯, 위에 덮개가 있는 듯, 아래에 무엇을 타고 있는 듯, 앞에 의거할 것이 있는 듯, 뒤에 기댈 것이 있는 듯해야 한다.… 물은 살아 있는 물체(活物)이다. 그 형상이 깊고 고요한 듯, 부드럽게 매끄러운 듯, 넓고 넓은 듯, 빙빙 돌아 흐르는 듯이 살찌고 기름진 듯, 용솟음치며 다가오는 듯, 격렬하게 쏘는 듯, 샘이 많은 듯, 끝없이 멀리 흘러가는 듯해야 한다.”(《임천고치》)


주산은 높아야 하고 물은 넉넉하면서 힘차게 흘러가야 함이 그 핵심이다. 이를 근거로 10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겸재의 〈계상정거도〉와 〈동작진〉 그리고 이성의 〈청만소사도〉를 감상한다면 그 말하는 바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어떤 그림이 좋은 산수화인가

 

중국의 산수화와 풍수와의 밀월관계는 계속된다. 원나라의 4대 화가 가운데 한 명이 황공망(黃公望)이다. 그는 “산언덕은 집을 앉힐 수 있는 지세여야 하며 물 가운데는 작은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의 수량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의 지세에서 생기(生氣)가 있다(山坡中可以置屋舍. 水中可置小艇. 從此有生氣)”고 하였다.


따라서 “그림에도 풍수가 있다(畵亦有風水存焉)”라고 화론 《사산수결(寫山水訣)》에서 단언한다. 그의 그림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자신의 풍수관이 반영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부춘산에 살고 있는 그림’, 즉 살 만한 땅이 그려진 것이다.


황공망은 풍수가 반영되는 “산수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수구(水口)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山水中惟水口最難畵)”고 하였다. 이 문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음 그림 한 점을 소개한다. 그림은 민화풍의 산수화이다. 산과 물이 있고 그 사이에 집이 한 채 들어섰다. 마당 좌우로 흐르는 두 물줄기(하얀 선)가 합쳐져 앞산 밖으로 감싸 돌아나간다. 두 물이 합쳐지는 지점이 수구이다. 황공망은 수구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였는데 화가는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바로 오리 두 마리를 그려 넣음으로써 이 그림에 생기가 돌게 하였다.


황공망은 “산 아래에 연못이 있으면 이를 일러 뢰(瀨)라고 하는데, 이것을 그리면 생기가 있다(山下有水潭謂之瀨. 畵此甚存生意)”고 말한다. 홍성담 화가의 그림에서 두 물이 합쳐지는 수구가 바로 그 연못[水潭]이며, 수구 그리기의 어려움을 오리 두 마리로서 해결한 것이다.


당인, 산수화 그릴 때 꺼릴 것 3가지

겸재의 〈계상정거도〉 역시 황공망의 ‘부춘산에 사는 그림(부춘산거도)’과 비슷하게 ‘시냇가 위에 조용히 살고 있는 그림’이란 뜻이다. 〈계상정거도〉를 자세히 보면 좌우 산으로 감싸인 언덕에 작은 집이 하나 들어섰고, 그 아래 강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다.


또 수구는 어떻게 그렸을까? 집과 배 사이에 냇물(명당수)이 흐르고 있다. 그 사이에 작은 다리 하나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다리를 통해 수구 처리를 하고 있다. 이성의 〈청만소사도〉 역시 다리를 가지고 수구 그리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그와 같은 곳이 생기가 있음을 알고 자신의 산수화를 통해 이를 살려낸 것이다.


명나라 화가 당인(唐寅·1470~1524)은 산수화를 그릴 때 꺼려야 할 것 3가지, 즉 “기맥이 없는 산(山無氣脈)”과 “흐르는 물이 없는 것(水無源流)” 그리고 “출입할 길이 없는 것(路無出入)”을 꼽았다. ‘산은 인물을 주관하고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山主人水主財)’는 풍수 발복론에서 보면 당연히 피해야 할 땅이자 그림이다.


1000원권 지폐에 실린 〈계상정거도〉를 보면 산의 기맥이 저 멀리서부터 연면히 이어져 내려옴을 볼 수 있다. 서당 앞을 흐르는 명당수가 객수(낙동강)와 합류하여 흘러감을 볼 수 있다. 산기슭을 따라 서당으로 이어지는 길 또한 볼 수가 있다. 당인이 요구하는 3가지 요건을 충족시킴을 알 수 있다.


좋은 산수화와 인간의 수명

산수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명과의 상관관계론이다. 명나라 화가 동기창(董其昌·1555~1636)의 주장이다. 동기창은 중국의 산수화를 북종화와 남종화로 구별 짓고 북종화가들은 단명하였으나 남종화가들은 오래 살았다고 주장한다.


‘북종화가들은 판에 새기듯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그림으로써(각화세근·刻畵細謹) 조물주의 부림을 받게 되어 수명이 단축되고 만다. 반면 남종화가들은 기화위락(寄畵爲樂)으로 인해 장수를 한다.’ 기화위락은 그림에 의지함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뜻인데,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감상하는 것 자체도 즐거움이 되어 심신에 유익함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종화가들이 대개 60을 넘기지 못했으나 남종화가인 황공망(85세), 심주(沈周·82세), 문징명(文徵明·89세), 미우인(米友仁·80세) 등은 모두 80을 넘겼다. 동기창 자신도 80 넘게 살았다. 남종화를 즐기는 이들이 “정신이 온전하고 질병 없이 살다가 간 것은 그림 속에서 자연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동기창은 덧붙인다.


겸재도 70세를 넘겨(1676~1759) 당시 기준으로 보면 장수를 한 셈이다. 그런데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뉘는 것은 화풍이나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땅의 차이, 즉 산수의 차이 때문이다. 청나라 때의 화가 심종건(沈宗騫·1736~1820)의 주장이다.


“천지의 기(氣)는 지방마다 다르고 사람 또한 그에 따른다. 남방의 산수는 넓고 조용하면서 물결이 굽이쳐 돈다. 사람이 그 사이에 태어나 바른 기를 획득하면 품성이 온화하고 윤택하며 화목하고 우아하게 된다.… 북방의 산수는 기이하고 뛰어나면서 웅장하고 두텁다. 사람이 그 사이에서 태어나 바른 기를 얻으면 강건하고 시원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고, 기가 편중되면 거칠고 굳으면 횡포한 사람이 된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다.”(《개주학화편(芥舟學畵編)》)


산수의 차이에 따라 사람의 성정뿐만 아니라 수명에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황공망과 허련

 

소치(小痴) 허련의 스승으로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를 언급한다. 이 둘이 진도의 한미한 허련을 조선의 위대한 화가로 키워낸 것은 분명하다. 정작 소치의 마음속 스승은 누구였을까? 황공망의 호가 대치(大痴)였다. 대치를 염두에 두고 허련은 소치란 호를 지었다.


소치 스스로 “그림으로 삶을 의탁하고 그림으로 삶의 낙을 삼은 것은 황공망이 처음 개창한 것이다(以畵爲寄, 以畵爲樂, 黃公望始開此門庭耳)”고 자서전 《소치실록》에서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다. 소치가 낙향하여 터를 잡고 말년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던 화실 이름이 ‘운림산방(雲林山房)’이었다. 운림(雲林)은 원나라 4대 화가 예찬(倪瓚·1306~1374)의 호였다. 또 그의 “예찬의 죽수계정도를 모방한 그림(倣倪雲林竹樹溪亭圖)”도 그가 중국의 산수화가들을 스승으로 삼았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치는 중국의 남종화가들처럼 풍수를 진지하게 수용하였을까? 겸재의 산수화부터 이야기하고 소치의 산수화를 풍수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글머리에서 〈계상정거도〉를 소개하였다. 〈계상정거도〉의 실제 현장인 도산서당은 퇴계가 직접 터를 잡고 설계하였으며 현재의 ‘퇴계종택’ 역시 퇴계가 세 번의 이사 끝에 잡은 자리이다. 그의 무덤도 생전에 그가 잡은 자리다.


풍수에서 터를 볼 때 ‘근삼원칠(近三遠七)’을 강조한다. 멀리서 보는 것이 7할, 가까이에서 보는 것을 3할로 하라는 말이다. 멀리서 바라볼 때 그 터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드러난다. 도산서원도 강 건너 시사단에서 봐야 하고 퇴계의 종택도 시내 건너에서 바라볼 때 터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모두 풍수상 아름다운 곳이다. 화가는 그 아름다운 곳을 그렸고 그림을 보는 이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는다.


‘노닐 만한 곳’과 ‘살 만한 곳’

/퇴계가 직접 터를 고른 퇴계종택.

 

겸재의 대표작 〈경교명승첩〉은 한양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들을 모아놓은 화첩이다. 앞에서 언급한 곽희는 좋은 그림의 대상지에 대해 2가지를 꼽았다. “산수에는 한번 지나가 볼 만한 것(可行者), 멀리 바라볼 만한 것(可望者), 자유로이 노닐어볼 만한 것(可遊者),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可居者) 등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지금의 산천 지형을 보면 비록 수백 리를 걸칠지라도 자유로이 노닐어볼 만하고 그곳에서 살아볼 만 곳은 10군데 중에 서너 곳도 안 된다. 반드시 살아볼 만하고 자유로이 노닐어볼 만한 품격을 가진 곳을 취하는 것은 군자가 임천을 갈망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곳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임천고치》)


겸재의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그림들은 ‘노닐 만한 곳’과 ‘살 만한 곳’이 그려진 것이다. 그곳에 살면 더 좋은 일이나 그렇지 못할 때 그림을 통해서 그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겸재는 〈경교명승첩〉을 “천금물전(千金勿傳)”, 즉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팔지 말라고 후손들에게 유언한다(아쉽게도 유언은 지켜지지 못한다).


소치의 경우 어떠한가. 장소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그의 스승 김정희가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을 모범으로 하여 18세기 이후 조선 화단의 주요 흐름 중 하나였던 진경산수화풍을 비판”(김상엽, 《소치 허련》)함에서 겸재와의 화풍에 차이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정희와 그 제자 소치가 모범으로 삼았던 중국의 남종화가들은 황공망의 〈부춘산거도〉의 예에서처럼 실경을 위주로 하였다. 반면에 소치는 중국 남종화가들을 모범으로 철저하게 도식화 및 관념화하였기에 실경이 아닌 경우가 많다.”(화가 홍성담)


풍수적 관점에서는 관념화된 산수화가 아니라 실제 기운생동하는 장소들이 그려지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왕미가 주장하는 “산수의 정신을 그리고(寫山水之神)” 이를 통해 “신명이 강림(明神降之)”해야 그 “그림 속의 정신이 전해질 수 있는 것(傳神)”이 가능해진다. 이 점에서 본다면 소치보다 겸재의 산수화가 풍수의 본래 목적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산은 높되 단정해야 하며 저 멀리 높고 높은 산에서 연달아 이어져 내려와 집 뒤에서 좌정해야 한다. 장엄한 소나무들이 뭇 잡목을 거느려야 한다. 산기슭에 집이 있어야 하며, 그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야 한다. 시냇물이 흐르고 그 시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있어야 한다. 강물이 산을 감싸 돌며 흘러가야 한다. 강에는 배가 떠 있어야 한다. 좋은 산수화가 갖추어야 할 기본 요건들이다. 1000원권 지폐에 실린 〈계상정거도〉가 그 모범이 될 수 있다. 비싸다고 좋은 그림이 아니며, 유명화가의 작품이라고 복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09.09 국운 바꾼 치산녹화의 상징…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입장료 유감

/고건 전 총리가 전남도지사 시절 조성한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입장료를 받기 시작해 논란이 일고 있다. /김두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가 선가(禪家)에 오랜 화두로 전해지지만, 풍수에서도 산과 물은 화두이다. '산주인정 수주재(山主人丁 水主財)'라는 말이 있다. '산은 인물을 주관하고, 물은 재물을 낳는다'는 뜻이다.

모든 산이 다 그렇지는 않다. 민둥산[童山]은 초목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돌산[石山]은 흙 한 줌 제 몸에 실어주지 못하게 한다. 당연히 그 계곡에 물이 흐르지 못한다. 인물도 재물도 나올 수 없는 땅이다. 지금 북한의 산과 물을 보면 그 운명을 알 수 있다. 산은 민둥산이요 개울은 말라 있다. 재물과 인물 나오기가 어렵다. 산도 물도 말라 있으니 성정은 강퍅해질 것이다. 핵무기 수천기를 보유했던 소련이 1990년대 초 해체된 것도 결국 '항산(恒産·먹고사는 일)'이 문제였다. 핵무기가 나라를 지켜주지 못한다.

 

행정의 달인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한때 대권 후보로까지 거명된 고건 전 총리 이야기다. 현재 그는 북한 산림 복원 지원 사업을 위해 '아시아녹화기구'를 만들어 북한에 양묘와 조림 사업을 하고 있으나 최근 남북 경색 때문에 소강상태다. 왜 고건 전 총리는 북한 산림 복원에 관심을 기울일까?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치산녹화를 큰 국정 과제로 삼았다. 6·25 전쟁으로 산들이 불타버리고 이후 땔감으로 솔잎 하나까지 빗자루로 쓸어다 때던 시절이었다. 산에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었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큰물이 나면 산은 물을 품지 못하고 그대로 흘려보내 산사태와 물난리가 해마다 반복되었다.

박 전 대통령의 치산녹화 사업에 실무를 맡은 이가 내무부 고건 과장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직접 브리핑하며 산림 복원을 추진했다. 해박한 산림 지식과 안목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조경·산림·도시계획 등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때 만난 이들이 오휘영·양병이 등 현 조경학계의 원로 교수들이다. 치산녹화와 땔감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곧 19공탄 연탄이 전성기를 맞는다. 이렇게 해서 남한은 1970년대 산림녹화 기틀을 잡았다. 풍수적으로 국운이 바뀐 것은 치산치수가 이뤄진 이즈음이다.

능력을 인정받은 고건은 1975년 전남도지사로 임명된다. 37세 최연소 도지사였다. 이곳에서 3년 넘게 도지사직을 수행한 흔적 가운데 하나가 전남 담양 명물 '메타세쿼이아길'이다. 이곳에 메타세쿼이아가 심겨 명물이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고 지사가 이 수종을 좋아했다. 속성수이며 위로 쑥쑥 잘 자라는 모습이 좋았던지, 이후 서울시장직을 수행할 때도 메타세쿼이아를 곳곳에 심었다. 순창에서 담양으로 이어지는 국도는 비포장인 데다가 주변 논과 높낮이에 차이가 없었다. 눈이 오면 도로와 논과 구별되지 않았다. 그때 메타세쿼이아가 표지목 역할을 해주었다. 또 메타세쿼이아는 물에 강하다. 그래서 한자명이 수삼(水杉)이다. 논과 도로 사이 농수로 물이 메타세쿼이아를 잘 자라게 했다.

얼마 전부터 담양군이 이 길 입장료를 받아 논란이 되고 있다. 근처 순창에 집이 있는 필자는 가끔 담양 관방제림(官防堤林)을 찾는다. 메타세쿼이아길보다 더 걷기좋른 데다가 국숫집들이 즐비하다.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메타세쿼이아길을 지나 지근의 석당간과 석층탑을 둘러보고 순창행 버스를 탄다. 메타세쿼이아길엔 입장료 징수 이후 더 이상 가지 않는다. 최근 순창군도 이웃 담양군과 공조해 메타세쿼이아길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10~20년 후 이곳도 입장료를 징수할까? '가지 않는 길'이 되는 것은 아닐지.

 

■09.23 제사는 장손이, 추석엔 성묘… 퇴계도 朱子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추석에 제사 지내지 말고 성묘하지 말자. 조상님 차례 안 지내고 성묘 안 가겠다는 게 아니다. 이치를 드러내 밝혀보고자 할 뿐이다. 필자는 증조부모·조부모·부모 제사를 모신다. 20년 전 제사를 모실 때 일이다. 당시 증조부의 막내딸(왕고모)이 생존해 있었다. 증조부 제사를 모실 때마다 '증손자인 나보다 당신의 막내딸이 제사를 모셔야 더 애틋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고모는 100세 넘게 살다 돌아가셨다. 또 조부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생각한다. 당신의 아들(숙부)과 딸들(고모)이 생존해 있으니 손자보다는 그들이 제사를 모심이 마땅하지 않은가? 제사를 회피하려는 게 아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가 차린 제사상. 와인을 비롯해 가족이 먹고 싶은 음식을 제물로 올린다. / 김두규 제공

 

그런데 최근 퇴계(이황)와 고봉(기대승)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글에서 이 문제를 논하는 대목을 발견했다. '4대(고조)까지 모셔야 하느냐, 3대(증조)까지 모셔야 하느냐'는 문제도 언급되었다. '집안이 가난하면 어떻게 4대까지 모시겠느냐' 했다. 또 '윗대 어른이 살아계신데 이를 무시하고 장손 혹은 증손이 제사 지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윗대가 생존해 있으면 마땅히 그 일족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야 한단다. 맏며느리(종부)에게 제사를 모시게 하는 것도 이치가 아니라 했다. 본디 맏며느리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함은 그녀가 과부로 내쳐지는(혹은 홀대받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 근본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왜 아들만 제사를 모시고 딸은 제사를 모시지 않는가?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사와 차례는 다르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추념함이 제사(祭祀)이다. "祭는 사람과 귀신이 서로 교제한다[際]는 뜻이며, 祀는 似(사·같다)의 뜻이다. 즉 돌아가신 조상의 혼령과 만남[際]을 갖는 것과 비슷한 것[似]이란 뜻이다. 만날 듯 말 듯한 조상과 후손과의 은밀한 교감 행위이다. 따라서 제사는 제물을 많이 장만하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이의 정성이 중요하다."(김기현 전북대 명예교수·퇴계학)

제사상에 무엇을 올려야 하는가? 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사상 음식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탕·전·생선을 올리지 않은 지 오래다. 냄새가 심한 데다 아무도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참석자들로 하여금 먹고 싶은 것을 추천하게 한다. 초콜릿·과자·피자·치킨 등은 아이들이, 와인은 필자가 좋아하는 제물이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는 할 일이 줄고 제사 음식 낭비가 없어 좋단다. 필자의 독단이 아니다. 이른바 '향벽설위(向壁設位)인가 향아설위(向我設位)인가'에 대한 본질적 문제이다. 향벽설위란 벽을 향해 음식을 차려놓은 것을 말하며, 향아설위는 나(후손)를 향해 음식을 차리는 것을 뜻한다. 후손이 맛있게 먹고 마시면 조상님도 기분이 좋다. 왜 그러한가? 내(후손) 안에 조상이 계시기 때문이다. 조상과 후손 사이 동기감응(同氣感應)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제사와 달리 차례를 지내는 추석(그리고 설)은 무엇인가? "그날은 가족이 오붓하게 함께 음식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속절(俗節)이다. 옛날에는 없었으나 후대에 생겨 온 가족이 제철 음식을 마련하여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날 어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돌아가신 부모님도 함께하십사' 하는 마음의 발로가 차례이다. 예의 올바름이 아니나[非禮之正] 인정상 그럴 수 있다." 성리학자 주자(朱子)의 말씀이다.

더구나 성묘(省墓)는 추석날 할 일이 아니다. 전국의 도로가 주차장이 되는 날 무슨 성묘인가. 성묘는 평소에 조상님 무덤[墓]을 둘러보는[省] 일이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좋고(지내도 좋고), 성묘를 하지 않아도 좋다(평소에 자주 하면 더 좋고). 온 가족이 추석(설)을 즐기면 조상님도 좋아하신다.

 

■10.14 文대통령에 영향 준 풍수… 生家보다 사저를 봐야 보인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 생가(경남 거제시 명진마을)에 관광객 출입이 차단됐다. 극성스러운 방문객이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이다. 필자는 그곳 주인 배영철씨를 두 번 인터뷰한 적이 있다(2012년과 2017년). 다음은 필자의 수첩에 적힌 5년 전 배씨의 말이다.

 

"이곳이 문재인 후보(2012년 당시) 생가라 하지만 실제 태어난 곳은 아니다. 어머니(추경순)가 그때 임신을 하고 있었기에, 한 집에서 동시에 출산하면 안 된다 하여 문재인 모친은 이웃에 가서 출산하였다." 그런데 올해 5월 그를 만났을 때는 "태어난 곳이 맞는다"고 하였다. 거제시도 생가 복원을 추진한다는데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서다. 게다가 풍수술사들까지 '명당 만들기'에 나선다. 억지도 보통 억지가 아니다. '인물 나고 명당 난다'는 말이 있다. 길지라서 인물이 난 것이 아니라, 인물이 나니 그곳을 길지로 둔갑시킨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 담장(축대)의 큰 돌이 특징이다. / 김두규 제공

 

양산 사저는 매곡마을에서 한참 더 산골로 올라가야 한다. 외길이며 자동차 하나 겨우 지나간다. 작은 내를 따라 1㎞ 넘게 구불구불 가파르게 올라가면 사저가 나온다. 구곡심처(九曲深處)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 또 앞만 빼꼼 트였지 3면의 높은 산이 짓누른다. 주변 세력들이 나를 위압한다. 하지만 "산도 땅이 솟아서 된 것이니 겸허의 정신으로 나아가면 아름다운 마침이 있다[君子有終]"고 했다(주역).

도로와 집을 감싸는 주변 산들도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집을 받치고 있는 대지이다. 대지에서 눈에 띄는 것이 담장(축대)의 아름드리 바위들이다. 이끼가 짙다. 주변에도 큰 바위들이 보인다. 사저 100여m 후방에 통방사란 절이 있다. 오래된 절은 아니다. 본채인 '법화대전' 뒤쪽에 무덤이 하나 있다. 관리가 잘되어 있다. 무덤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있다. 바위를 중심축으로 하여 묏자리가 잡혔다. 법화대전 앞마당 아래에 또 무덤이 있다. 단정하게 벌초한 무덤이다. 그 무덤 터를 거대한 암반이 받쳐주고 있다.

바위 아래 무덤이 있고, 무덤 아래 절이 있고, 절 아래 무덤이 있고, 무덤 아래 바위가 있고, 그 100여m 아래 대통령 사저가 있다. 바위가 사저를 받쳐주고 있다. 바위를 매개로 음택(무덤)과 절과 양택(집)이 동거한다. 무덤 터가 되기엔 무겁고 절이 자리하기에는 가볍고, 집터로서는 좀 비장하다.

구곡심처 숨어 들어간 곳에서 조우한 것이 바위였다. 청마 유치환이 노래한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소리하지 않는 바위"였다.

그런데 풍수에서 바위는 양인지검(兩刃之劒), 즉 양날의 칼로 해석한다. 사람을 죽이는 나쁜 돌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 좋은 바위도 있다. 바위는 권력의 기운을 주관한다. 대통령이 찾은 곳은 절처(絶處)였고 그곳에서 조우한 것이 바위였다. 그것은 그에게 권력 의지를 북돋워주었다. 이른바 절처봉생(絶處逢生)의 땅이다. 절처봉생은 절로 되지 않는다. "길인천상(吉人天相)"을 전제한다. "길인은 하늘이 도우니, 절처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다. 대통령 사저에 대한 풍수 독법(讀法)이다

 

■10.19 신문에 나는 ‘오늘의 운세’는 ‘한국 인문학의 위기’가 낳은 귀태(鬼胎)

사주와 풍수 그리고 한국학

 

⊙ 사주술은 송나라 때 지배학문이었던 성리학과 농업경제 발전과 관련
⊙ 원래 사주팔자는 고칠 수 없는 것이었으나, 명나라 이후 사주팔자도 고칠 수 있다는 이론 등장
⊙ 조선시대 ‘관학’의 일부이던 명과학(命科學)이 조선 망한 후 ‘길거리 동양철학’으로 전락

 

조선시대 명과학은 현대에 들어오면서 ‘오늘의 운세’를 봐 주는 ‘길거리 동양철학’으로 전락했다.

 

‘오늘의 운세’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주요 신문들이 싣는 ‘오늘의 운세’도 그 유령이다. 일요일자 신문은 배달되지 않기에 토요일자가 친절하게 일요일 운세까지 미리 실어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단 하루로 사람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루하루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말하였다.

“사람의 일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任重道遠·맡은바 책임은 중하고 갈 길은 멂) 결코 서두르지 말 것!”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 옆에는 그의 좌우명이 적힌 팻말이 있다.
“사람의 일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결코 서두르지 말 것.”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말이다. 일본을 통일하여 새로운 막부를 연 이에야스가 금과옥조로 여긴 말이기에 새겨들을 만하다.

문제는 ‘거리의 동양철학자’들이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조급증을 부채질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양철학자’들은 크게 네 부류인데 대개 풍수·작명·관상을 겸한다.

첫째, 사주 공부 후 개업하여 그 상담기록을 바탕으로 자기 홍보를 하려는 부류이다.

둘째, 사주를 하나의 담론(‘동양학’의 일부로서)으로 삼아 전설적인 사주 대가들의 기행(奇行)과 기담(奇談)들을 과장・신비화하는 부류이다.

셋째, 사주 공부를 위해 중국의 사주서적들을 번역·출판하는 부류이다. 사주 공부를 함과 동시에 그 책이 출간될 경우 ‘사주전문가’로 인정을 받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다.

넷째, 일부 학원강사·증권전문가·부동산전문가·대체의학자·일탈한 종교인들이다. 증권전문가들이 사주를 배워 고객들에게 돈이 되는 종목과 시기 등을 상담한다. 입시학원 강사들이 사주를 배워 수능과 대입을 앞둔 학부모들을 상대로 진로상담을 해주고 있다. 부동산업자들은 사주를 배워 고객들에게 투자해야 할 땅과 시기를 상담해 준다. ‘대체의학자’들은 사주로 사람의 체질과 질병을 상담하며 ‘약’을 팔기도 한다. 포교를 목적으로 사주를 이용하는 종교인들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사주·풍수·관상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만큼 그렇게 많지 않다.


운세와 운명

▲홍콩(왼쪽)과 일본의 점집. 우리나라만큼 많지는 않다.

 

알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궁금해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그리하여 운명에 관한 수많은 명언이 생겨났다.

- 운명이란 못하는 짓, 안 하는 짓이 없다.
- 운명은 화강암보다 더 단단하다.
- 운명은 나쁜 놈이지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지 지혜가 아니다.
- 운명이란 바람과 같은 것.
- 운명은 자기 갈 길을 걸을 뿐이다.
- 운명의 판결은 재심이 불가하다.
- 그 누구도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
- 운명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운명은 인간보다 더 상상력이 풍부하다.


글머리에서 ‘운세’를 이야기하다가 ‘운명’으로 주제어가 바뀌었다. 운세와 운명은 어떻게 다른가? 운세(運勢)란 운(運)의 흐름[勢]을 말하고, 운명(運命)이란 운과 명(命)의 합성어이다

 

/《논형》을 지은 왕충.

 

명이란 무엇인가? 2000년 전 중국의 지식인 왕충(王充·27~97년)이 명확히 해놓았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었던 그는 당시의 수도 낙양의 책방을 돌며 책이란 책은 모두 읽었고, 한 번 읽은 책은 그대로 암기를 할 정도로 천재였다. 그러나 배경이 없던 그는 벼슬길에서 터덕거렸고 가난에 절망하였다. 불우한 처지에서 그는 《논형(論衡)》을 쓴다. 《논형》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지식인들에게 읽힌다. 찬탄을 금치 못하는 명저이다.

 

왕충은 여기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부정한다. 자신보다 200여 년 앞서 살다 간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도 그는 거부한다. 여기서 음양오행설과 천인합일설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오늘의 운세’를 말할 때 사용되는 사주술의 근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명론을 부정하였던 그가 명(命) 앞에 항복하여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사람들이 윗사람의 마음에 들거나 해를 입는 것은 모두 명(命)에 의한 것이다.

삶과 죽음, 장수(長壽)와 요절(夭折)의 명이 있고, 또한 귀천과 빈부의 명이 있다. 왕에서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성현에서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머리와 눈이 있고 혈기를 지닌 동물이라면 명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빈천해질 명이라면 부귀하게 해주더라도 화를 만나고, 부귀해질 명이면 비록 비천하게 해도 복을 만난다. … 그러므로 부귀에는 마치 신령의 도움이 있는 것 같고, 빈천에는 귀신의 재앙이 있는 것 같다. 귀하게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은 남들과 함께 배워도 홀로 벼슬을 하고, 함께 관직에 나가도 혼자 승진한다. … 빈천의 운명을 지닌 사람은 이와 상황이 다르다. 어렵게 벼슬에 이르고 겨우 승진하며, 어렵게 얻고 일을 성취하지만 잘못을 저질러 죄를 받고, 질병으로 뜻하지 않게 재산을 잃게 되어 지녔던 부귀마저 상실하고 빈천해진다. … 따라서 일을 처리할 때의 지혜와 어리석음, 행실의 고결함과 비속함은 본성과 재질에 의하며, 관직의 귀천과 사업의 빈부는 명과 때[時]에 달렸다. 명과 때는 억지로,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때(時) 때문일까, 명(命) 때문일까

/남명 조식의 무덤과 비석. 그의 선배 성운이 비문을 지었다.

 

왕충이 위에서 말한 때는 운의 다른 표현이다. 명과 운을 자동차와 도로에 비유할 수 있다. 명이 자동차라면 운은 도로에 비유된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命]라도 도로[運]가 나쁘면 성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학자가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대에 큰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까워한 선배 성운은 남명을 위한 비문에서 “때 때문일까 명 때문일까(時耶命耶)?”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오늘의 운세’는 그날 운의 흐름, 즉 지극히 짧은 구간의 도로 상태만을 이야기한다. 또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동갑·同甲]은 모두 운이 같다는 것이 문제다. 동일한 연식의 차종이라도 제각각 달리는 위치나 노선이 다르듯 동갑내기라고 모두 똑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다. 예컨대 필자는 돼지띠이다. ‘오늘의 운세’는 돼지띠 동갑은 같은 운세를 갖는다고 말한다. 가당키나 한가?

문제는 또 있다. 신문들이 싣는 같은 날의 ‘오늘의 운세’는 내용이 대동소이해야 할 터인데 상반된 내용들이 더 많다. 길하다고 말하는 신문도 있는가 하면, 불길하니 외출을 삼가라는 신문도 있다. ㅅ·ㅈ·ㅊ 성씨 가진 사람을 경계하란 신문이 있는가 하면, 그 성씨들이 귀인(貴人)이란 ‘오늘의 운세’도 있다.


운명해독술로서 사주술

‘오늘의 운세’ 뿌리는 무엇일까? 사주팔자술에서 유래한다. 사주팔자란 무엇인가? 2017년 10월 1일 오전 10시에 태어난 아이가 있다 하자. 이 아이의 사주팔자는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십간·십이지[간지·干支]로 시간을 표기하였다. 간지로 이 아이의 태어난 연월일시를 표기하면 정유(丁酉)년·기유(己酉)월·신유(辛酉)일·계사(癸巳)시가 된다. 〈표1〉과 같다.

즉 태어난 연월일시를 간지로 표기한 것을 기둥[柱]이 넷[四]이라 하여 사주(四柱)라 하고, 글자[字]가 여덟[八] 개라 하여 팔자(八字)라고 하였다. 즉 사주와 팔자는 같은 말이며, 태어난 시간만 빠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주술에서는 이것을 ‘명’이라 하고 이 명을 갖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스쳐가는 시간의 흐름을 운이라고 한다. 운은 10년, 1년, 1개월, 1일 단위로 쪼개어 살핀다. ‘오늘의 운세’는 바로 1일 단위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문제는 위와 같은 사주팔자, 즉 태어난 연월일시를 보고 어떻게 그 사람의 운명을 해독하는가이다. 간단하다. 사주팔자를 음양오행으로 환원한 뒤 그 구성을 보고 판단한다(〈표2〉).

즉 2017년 10월 1일 오전 10시에 태어날 아이의 사주는 음양을 살피면 전부 음(陰)으로 구성되었고(음이 8개), 오행을 살피면 금(金)이 4개, 수(水)가 1개, 토(土)가 1개, 화(火)가 2개로 구성되었다. 이 자료를 음양오행의 속성을 바탕으로 풀이하는 것이 사주팔자술이다.

음양오행이란 무엇일까? 음(陰)은 언덕[阝]에 달[月]이 떠 있는 상태를 말하며, 양은 언덕[阝]에 해[日]가 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오행은 지구[土]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있는 수성·금성·화성·목성을 표현한 것이다. 한 주를 ‘일·월·화·수·목·금·토요일’로 표기한다. 다름 아닌 해[日]와 달[月] 그리고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음양오행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사주술을 인정한 주자(朱子)

/주자도 사주술을 인정했다.

 

음양오행과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송나라 성리학자 주자(朱子)가 이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연월일시는 오행의 기운이 아닐 수 없다. 갑·을·병·정(甲·乙·丙·丁)도 또한 음과 양의 기운에 속하니, 모두 음양의 기운과 오행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기운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맑은 것을 얻은 사람도 있고 탁한 것을 얻은 사람도 있다. 귀하거나 천하고 장수하거나 요절하는 것도 모두 그런 까닭이니, 서로 엇갈려서 그렇게 가지런하지 않다. 성인이 윗자리에 있으면 그 기운은 적절히 조화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기운은 치우치게 운행한다. 그래서 맑은 기운을 얻어서 총명하지만 관직이 없는 사람도 있고, 탁한 기운을 얻어서 지혜가 없지만 관직이 있는 사람도 있다. 모두 그 기운의 도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가 사주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운명을 엿보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주자가 살았던 송대(宋代)와 필연적 관계가 있다. 앞서 왕충은 천인합일설과 음양오행설을 부정하였지만 결국 운명 앞에 ‘항복선언문’을 발표하였음을 보았다. 그런데 주자는 운명이란 존재를 인정하고 그 구체적 사유(思惟)체계가 사주술임을 밝힌다. 왜 그랬을까?


사주술은 시대문제 해결 위한 ‘담론’이었다

사주와 풍수의 특정 유파(이기풍수·理氣風水)는 송나라 때 오늘날의 모습이 완성된다. 송나라가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유교, 특히 그 가운데 성리학과의 밀월 덕분이었다. 한대(漢代) 동중서가 유가(儒家)와 음양가(陰陽家)를 고리로 천인합일설을 정치이념으로 제시하였는데, 이를 정자(程子)와 주자가 수용하여 새로운 유학으로 거듭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新)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하늘[天]을 이(理)로 규정하고, 이(理)는 인간에게 있어서 성(性)으로 보았다. 인간의 도덕의식[性]과 하늘의 법칙[理]과의 일치,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상으로 여긴다. 주자와 정자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학자와 사대부들이 풍수와 사주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김기현 전북대 명예교수·퇴계학)

단순히 송나라가 국교를 유학으로 택한 이유 때문에 사주이론이 수용된 것은 아니다. 송대(특히 남송)의 사회경제와 관련이 있다. 송대에는 농업이 중시되어 많은 개간사업이 이루어진다. 특히 강남 지역은 저지대가 많아 개발이 용이했다. 이것은 인구 증가와 논농사[水田農業] 발달을 가져오는데, 농경사회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를 아는 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연월일시에 대한 관념이 중시되었다. 사주이론은 이러한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발달된다.


원나라 때는 점성술 유행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사주술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그 대신 점성술[星命]이 유행한다. 몽고족이 주체세력이 된 원나라는 유목(遊牧)문화에서 벗어나려 하였지만 몽고족 고유의 본능을 바꿀 수는 없었다. 또 원나라는 유교와 유학자들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보인 반면, 불교의 일파인 라마교와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全眞敎)를 신봉하였기에 사주가 수용될 수 없었다.

농경세력이 아닌 유목·해양세력의 활동에는 밤하늘의 별이 중요하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점성술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사주가 음양오행, 즉 해와 달, 그리고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만을 중시한다면, 점성술은 그것 말고도 밤하늘 수많은 별(북두칠성·남극성·북극성 등)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전제한다.

실제 항해와 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별들이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샤 왕자” “저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등의 노랫말도 이러한 관념의 흔적들이다. 역마살·고신살(홀아비살)·과숙살(과부살)·원진살·도화살 등 흔히 민간에서 말하는 단어들도 점성술의 흔적이다. 송왕조와 원왕조의 운명예측술의 차이는 고려와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려에서는 별점이, 조선에서는 사주술이 주류를 이룬다.


사주팔자는 고칠 수 있다!

원나라에 이어서 명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사주술이 유행한다. 송대의 사주술보다 진일보한다. ‘명(命), 즉 사주팔자는 고칠 수 없다’는 이전의 명제는 바뀐다. 인간의 운명(특히 수명)은 고칠 수 있다는 새로운 시대상이 반영된다.

중국의학 고전인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1596년)》과 우리나라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1610년)》이 명대(明代)에 나왔던 것은 이시진과 허준이라는 개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때까지의 집적된 연구 및 임상의 결과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명대에서 새로운 사주이론인 ‘병약설(病藥說)’이 추가된다. 사주팔자는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여덟 글자[八字] 가운데 병이 되는 것과 약이 되는 글자를 찾아내면 운명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병약설의 핵심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설 즈음 세계는 또 많이 바뀐다. 명나라 말엽부터 유입된 유럽의 과학문물들은 청대에 더 많이 유입된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서양문물을 접한 것도 그 무렵이다.

과거의 사주술로는 서구과학으로 계몽되어 가던 당시의 고객들(황실과 귀족 그리고 사대부)을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체계적이며 자연과학에 가까운 사주술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신상품이 출시된다. 다름 아닌 조후론(調候論·계절론)이다. 예컨대 나무[木] 기운을 갖는 날[日]에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태어난 계절이 다르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같은 씨앗일지라도 봄 파종이냐 가을 파종이냐에 따라 그 생장 결실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어떤 계절 어떤 시각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차가워질 수도[寒] 따뜻해질 수도[暖] 건조해질 수도[燥] 습해질 수도[濕] 있다는 것이 조후론의 핵심이다. 이렇듯 사주술은 시대의 변화에 대한 대응논리였다.


《토정비결》에 담긴 서민들의 꿈

원나라 영향권이었던 고려는 점성술이 주류였다. 고려왕조에서 유명 운명예언가는 13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오윤부와 14세기 박상충이었다. 특히 오윤부는 원 세조에게 불려가 별점을 쳐 그 능력을 인정받을 정도였다.

왕조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운명예측술에 큰 변화가 온다. 농경사회와 유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사주술은 천인합일·종법(宗法)·남존여비(男尊女卑)·관존민비(官尊民卑) 등의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유교를 국교로 그리고 농업이 기반인 조선왕조에 부합하는 내용이다. 중국의 주자·정자처럼 조선의 유학자(특히 훈구파 계열)들이 사주와 풍수에 빠진 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조선왕조의 운명예측술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진다.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에 명과학(命課學・점치는 분야)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조선의 명과학 고시과목들은 다음과 같다.

1차시험(初試): 원천강(袁天綱)·서자평(徐子平)·응천가(應天歌)·범위수(範圍數)·극택통서(剋擇通書)·경국대전(經國大典)

2차시험(取才): 원천강(袁天綱)·삼신통재(三辰通載)·대정수(大定數)·범위수(範圍數)·육임(六壬)·오행정기(五行精記)·극택통서(剋擇通書)·자미수(紫微數)·응천가(應天歌)·서자평(徐子平)·현여자평(玄輿子平)·난대묘선(蘭臺妙選)·성명총화(星命總話)


사주술이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에 수용되었다 하나 그것은 왕실과 사대부에 국한되었지 백성들에게까지 파급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왕실종친이나 실력자의 사주를 보았던 행위’를 문제 삼는 기록(몇몇 역적모의 적발 구실 가운데 하나)이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언급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사주 보는 행위’는 일종의 ‘천기누설’과 같은 것이었다. 천기를 누설한다는 것은 왕실권력의 향배를 누설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백성들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 궁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빈천한 현실 속에 처해 있기에 더욱더 요행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온 것이 《당사주(唐四柱)》와 《토정비결(土亭祕訣)》 등이다. 이 둘은 조선 후기 이름 없는 지식인 및 종교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운명해독서이다. 《토정비결》과 《당사주》 텍스트를 분석해 보면 점괘가 불길한 것보다 길한 내용이 더 많다. 당연 점을 치는 이들은 이 점괘를 통해 희망을 얻는다. 이러한 사주 아류(亞流)들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갖고 유지된 것이다. ‘오늘의 운세’ 역시 그 아류이다.


‘오늘의 운세’는 ‘인문학의 위기’가 낳은 귀태(鬼胎)

/서울 탑골공원 옆에 늘어선 점집들.

 

조선시대의 사주술은 명과학 소속의 교수들로부터 강의를 받고 1차·2차 시험을 통해 선발되어 국가와 왕실의 주요 사건들을 점쳐야 했던 만큼 교육 내용도 정밀했다.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사주술은 더 이상 관학(官學)으로 공인받지 못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사주술은 뒷골목으로 밀려난다. 조선시대처럼 관리[國卜]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는 ‘미신’에 젊은 지식인들이 매달릴 까닭이 없었다. 그러면서 사주술은 학습능력을 갖추었으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였거나 또는 어떤 사유로 좌절된 인생들 혹은 사이비 종교인들의 포교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전후하여 신문사 문화센터와 대학 사회교육원 그리고 2000년도 이후 몇몇 특수대학원이 사주술을 전공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다. 대학입시생 감소로 폐과(廢科)위기를 맞는 일부 특수대학들이 그 빈틈을 사주나 풍수로 메워보려는 추세이다.

여기에 진학하는 이들 중에는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학력세탁’을 위해 그러는 경우가 많다. 강의 내용도 조선시대의 명과학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천박하다.

문제는 ‘오늘의 운세’가 기존의 사주술의 변천이 보여준 바와 같은 시대문제에 대한 해결 혹은 대응과 같은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전통적으로 인문학을 ‘문·사·철(文史哲, 문학·역사·철학)’이라 하였다. 오늘의 한국 인문학이 조선시대의 문학·역사·철학을 국학(國學) 차원에서 논하고자 하였다면 음양오행설·사주·풍수도 포함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학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결과 또 다른 거리의 ‘동양철학’이 생겨났다. 그 ‘동양철학’은 ‘오늘의 운세’라는 신상품으로 대한민국 주류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와 길거리 ‘동양철학의 성행’과는 동전의 양면이다. ‘오늘의 운세’는 인문학의 위기가 빚어낸 귀태(鬼胎)이자 ‘길거리 동양철학’의 적자(嫡子)이다. 송·원·명·청 그리고 고려와 조선이란 사회가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였듯, 21세기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운명담론’이 만들어져야 한다. 한국 인문학(한국학)의 과제이다.⊙

월간조선 10월호

 

■11.10 노무현 봉하마을 사저 지을 때 ‘황천살(黃泉煞)’ 보여 만류했지만...

대권 주자들과 풍수

 

⊙ 안철수, 선영 알려달라고 하자 “전통문화는 잘 모른다”며 거절
⊙ 노무현의 봉하마을 사저 지을 때 ‘황천살(黃泉煞)’ 보여 만류했지만 결국 그곳에 집 지어
⊙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 “자연환경과 역사성 중시”

▲ 2002년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최근 경상남도 거제시 명진마을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 생가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다. 생가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 주인이 극성스러운 탐방객 때문에 사생활이 침해받는다는 이유로 집 앞을 트랙터로 막았다는 기사였다.

 

이곳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금년 5월 10일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부터였다.

필자도 문재인 대통령 당선 다음 날 그곳을 찾았다. 그 터를 살피기 위함이 아니라 방문객과 마을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이미 생가 옆 공터에 천막을 치고 잔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최측은 민주당의 그곳 ‘면당조직책들’이었다. 어디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다. 그저 “구경하러 왔다”고 하면 되었을 것을 솔직한 대답이 화근이었다. “직업은 교수이고, 목적은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국운풍수’ 글을 쓰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대뜸 한 사람이 “《조선일보》와 상대하지 않으니 나가세요!” 한다. 무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멀리서 온 손님에게 무슨 예의입니까?”라고 받아쳤다. 중간에 말리는 이가 있어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생가에 거주한다는 배영철씨도 다시 만났다. 5년 전에 이곳을 답사하였고 그때도 만났다. 5년 전 인터뷰를 하였을 때 필자가 들은 기억과 기록이 있었다.

“이곳이 문재인 후보(2012년 당시) 생가라 하지만 실제 태어난 곳은 아니다. 어머니(추경순)가 그때 임신을 하고 있었기에, 한집에서 동시에 출산하면 안 된다 하여 문재인 모친은 이웃에 가서 출산했다. 물론 우리 집에서 여섯 살까지 살았던 것은 맞다.”

이번에 갔을 때는 그 집이 태어난 곳이 맞다고 했다. 거제시도 생가복원을 추진한다. 관광객 유치를 위함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생가복원에 난색을 표한다. 6살까지 이곳에서 자랐으니 고향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셋방살이하였던 이곳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떤 잔영을 남겼을까? 오히려 대통령이 되기 전 집을 짓고 살았던 양산 매곡 사저가 문 대통령의 풍수관을 엿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 ‘용’들은 서울에만 거주하려 하는가?

/경상남도 거제시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생가 (흰 자동차 앞 집). 문재인 대통령이 어렸을 때 셋방살이를 했던 집이다

 

왜 사람들은 ‘용(龍)’들의 거주지에 관심이 많을까? 태어난 터와 그 사람과의 동기감응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풍수관념 때문이다.

풍수학인으로서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의 대지관과 건축관이다. 잠룡(潛龍・대선후보)과 비룡(飛龍・대권을 거머쥔 자)들의 풍수관 추적하기를 20년 넘게 했다. 조금씩은 달랐으나 크게 보면 다르지 않았다. ‘진부’했다. ‘진부’함이란 선영(先塋)이 좋지 않다 하여 이장(移葬)을 한 잠룡과 비룡들의 행태였다. 김대중·이회창·이인제·김종필·한화갑·정동영·김무성 등 거물들이 풍수설을 좇아 대선(大選) 전후로 선영을 옮겼다. 이 가운데 J씨는 조상묘를 이장했다가 다시 ‘원위치’시키기도 했다. 수년 전 일이다. 그들의 대지관과 풍수관은 한마디로 ‘천박’했다.

그들의 건축관은 어떠한가? 현행 헌법상 5년마다 새로운 비룡이 나타나고 더불어 은룡(隱龍・퇴임한 대통령)이 생기게 된다. 잠룡이 비룡 되었다가 은룡이 되면 그들이 머물 곳은 어디가 마땅할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전 내곡동 사저를 지으려다 대통령답지 못한 처신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최순실은 퇴임 후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평창에 ‘기획부동산’을 도모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파면당한 후 삼성동에 머물다가 구속 중에 뜬금없이 내곡동으로 이사를 했다. 큰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이자 산 아래 막다른 골목집이다. 파면을 당했다지만 한때는 대통령이었다. 왜 갑자기 그곳으로 갔는지 궁금하다.

퇴임 후 전직 대통령들은 대개 서울에 사무실을 내고 출근하며 ‘상왕(上王)’노릇을 하다가 죽어서는 대전 현충원이 아닌 서울 현충원 비좁은 곳으로 ‘끼어들려’ 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답지 못하다. 은룡들이라면 그들이 머물고자 하는 땅과 사저 건축에 대해 최소한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특히 보수를 자처하는 ‘용’들일수록 전통문화를 품격 있게 체화(體化)시켜야 했다. 애당초 진보를 자처하는 용들은 전통사상으로서 풍수를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은룡들에게 귀향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향을 떠나지 않는 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촌놈’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좋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도 ‘군자(君子)’라 할 수 없다. 외국 대통령과 총리들이 퇴임 후 지역사회로 내려가 사회봉사를 하며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퇴임 후 워싱턴을 배회하지 않았다. 그들이 죽어 묻히는 곳도 국립묘지보다는 생전에 인연이 깊었던 곳이나 고향에 안장된다.

‘은룡’들이 저마다의 연못[淵]으로 되돌아간다면 권력분산과 지방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 귀향하지 않고 서울을 배회하는 은룡들이나 퇴직 후 귀향하지 않고 탑골공원 앞으로 ‘출근’하여 서성이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손학규, 선영 알려달라고 하자 가족회의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사저.

 

금년 3월 하순경의 일이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확정하자 잠룡(대선후보)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당시 유력한 잠룡 가운데 하나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풍수관을 알아보고 싶었다. 국민의당 중진을 통해 본가나 처가의 고향과 선영 소개 혹은 안 의원과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지인은 안철수 의원(당시)에게 의견을 전달했으니 직접 연락을 해 보라며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하였으나 받지 않아 메모를 남겼다. 아무 연락이 없었다. 얼마 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 의원에게 필자의 부탁을 거듭 전하였더니 특유의 무표정으로 “전통문화는 잘 모른다!”라는 무색한 답변을 주더란다.

수년 전 당시 유력한 잠룡으로 부상하던 손학규(당시 경기도지사) 측에 안 대표에게 했던 것과 같은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얼마 후 “가족회의 결과 선영을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게 무슨 가족회의를 할 만한 일인가? 고향과 선영조차 세상에 알리기 싫은 사람들이 어떻게 비룡이 될 수 있을까?

비슷한 시기에 이미 고인이 된 김근태 의원 사무실로 연락을 취한 적이 있었다. 바로 답변이 왔다.

“고향과 생가는 부천인데 이미 도시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선영은 어찌어찌하여 현재 찾을 수 없다.”

 

솔직한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솔직한 비룡 노무현

/필자(왼쪽)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을 앞둔 2006년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오른쪽 끝), 친구 이재우씨(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을 만나 노 전 대통령 생가의 풍수를 살펴보았다.

 

또 하나의 솔직한 비룡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2년 초에 모(某) 월간지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아 그해 12월 대선을 준비하는 잠룡들의 선영과 생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잠룡들의 고향과 생가는 어떻게 찾을 수 있으나 선영 찾기는 매우 어렵다. 고향 뒷산에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찾아가기도 하지만, 문자 그대로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 잠룡들의 지인이나 친척이 알려주지 않으면 답사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노무현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만은 달랐다. 빠르고 간결한 답변이 왔다. “고향에 가서 ○○○를 만나면 안내해 줄 것이다.”

봉하마을에 도착하여 만난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인 이재우 당시 진영조합장과 형인 노건평씨였다. 선영과 생가 그리고 봉하산 정상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답사 안내가 끝나자 멀리서 왔으니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했다. 인연은 그것이 전부인가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당시 “퇴임 후 임대주택에 살다가 귀촌하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에 민감하게 움직인 곳이 주택공사(현재 LH로 통합됨)였다. 당시(2005년) 주택공사 한행수 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였기에 책임감이 강했던 것 같다. 기존의 임대주택으로 입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택공사가 가지고 있던 땅 위에 새로 임대주택을 지어서 입주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때 주택공사가 가지고 있던 땅들 가운데 임대주택을 지을 만한 곳은 판교·청계산·수유리·연희동·일산 등 다섯 곳이었다. 주택공사에서 풍수 강연을 하였던 인연으로 위 후보지들을 둘러보고 자문을 하게 되었다. 다섯 후보지에 대한 의견을 제출했다. 그런데 얼마 후 대통령은 퇴임 후 바로 귀향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가 귀향하여 집을 짓고 살고자 한 곳은 생가 터였다. 그러나 그때 생가는 남의 소유였다. 집 주인이 팔려 하지 않았다(나중에 매입). 하는 수 없이 생가 뒤에 있는 단감나무 밭을 사저(私邸) 부지로 계획하고 있었다.


봉하마을 노무현 사저의 풍수

2006년 6월 어느 토요일 필자는 청와대 관계자 10여 명 및 건축설계를 맡은 정기용 선생과 현장답사를 했다(김포공항에서 김해공항으로, 그리고 봉하마을로 움직였다). 당시 총괄책임은 정상문 총무비서관이었다. 그날은 마침 노건평씨의 자녀 결혼식이 있는 날이어서 오전에는 노건평씨가 현장에 동행하지 못했다. 사저 예정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 개진이 있었다. 필자의 차례가 되어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① 고총(古塚·주인 잃은 무덤)이 있는 곳이라서 집터로서 부적합하다.
② 봉하산 쪽 바위가 지나치게 강하다.
③ 사저 예정지 바로 옆(봉하산 쪽)으로 냇물이 흐르는데 그쪽으로 골바람이 분다. 방위상 북동쪽으로 풍수에서는 황천살(黃泉煞)이라 하여 꺼린다.


‘③’항의 말을 듣던 경호실 담당자가 “이곳은 경호상에도 문제가 있다”라고 거든다. 이에 또 다른 행정관이 “여사님(영부인)께서도 ‘여기가 왠지 무섭다’고 하셨어요”라고 덧붙인다.

필자는 속설(俗說) 하나를 더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것은 풍수설이 아니었기에 꺼내지 않았다. 다름 아닌 “집 뒤로 이사 가지 않는다”는 속설이다. “집을 물려 앉히지도 않는다” “굴뚝 뒤로 이사 가면 안 된다” “부엌 뒤로 이사 가면 안 된다” 등과 같은 뜻의 속설인데 사저 예정지가 바로 이에 해당되었다.

총무비서관은 “그럼 어디가 좋겠는가?”라고 대안을 물었다. 일행은 사저 예정지에서 내려와 생가와 마을을 지나 마을 입구(진영읍 방향) 산자락 부근으로 움직였고, 근처의 단감나무 밭을 지목했다. 마을과 조금 떨어져 진입이나 경호도 좋을 뿐만 아니라 멀리 봉하산도 덜 위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들판 건너 앞산인 ‘뱀산’이 유정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삼병일약설(三病一藥說)’

정상문 총무비서관과 다른 일행은 먼저 떠나고 건축가 정기용 선생과 행정관 한 명이 남았다. 정기용 선생이 점심을 산다 하여 택시를 타고 인근의 어느 횟집으로 이동했다. 정기용 선생은 그날 처음 만났다. 프랑스 유학 출신으로 파리에서 건축 사무실을 운영한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건강이 안 좋은지 얼굴이 수척했다. 그럼에도 소주 한잔을 나누며 필자의 이야기를 더 듣고자 했다(2011년 지병으로 작고). 다음 날(일요일)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께 사저 건축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라면서 필자의 이야기를 전달하겠다고 했다. 건축과 풍수와의 관계를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가 ‘전통 집짓기 예술’로서 풍수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대주의에 경도된 한국 건축계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이었다. 그는 ‘삼병일약설(三病一藥說)’을 말했다. “한국 건축계에 세 가지 병[三病], 즉 건축과에 들어오면 막연하게 문화인이 된 듯 착각하는 문화병, 서양 대가의 건축만을 건축으로 아는 대가병, 자신의 프로젝트만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착각하는 유토피아병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치유하기 위해 ‘한 가지 약[一藥]’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 현실의 구체성 속에 우리들의 문제와 해법’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서양건축사에 가장 오래된 고전 《건축십서(建築十書》를 남긴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건축가는 기후·공기·토지의 적합도, 물의 이용과 관련된 의학 지식을 구비할 필요가 있는바, 이것들을 도외시하면 쾌적한 주택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비슷한 건축관이다. 정기용 선생은 ‘지금 여기 현실의 구체성’의 하나로 전통 풍수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보았다.

흔히 한국의 풍수술사들은 풍수(風水)를 정의할 때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의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이는 구체성이 결여된 개념이다. 이 문장은 풍수고전 《청오경》이 출전으로 풍수이론이 형성되던 초창기의 부실한 내용일 뿐이다. 풍수서적의 많음을 ‘한우충동(汗牛充棟)’이란 사자성어로 대변한다.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는다’는 뜻이다. 그 수많은 풍수서적들이 공통적으로 정의하는 풍수 개념을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살 만한 터를 잡고(卜之), 건물을 짓고(營之),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補之・조경행위), 그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주고(名之), 거주하기(居之)까지의 일련의 행위들이 길한가 흉한가를 사전에 점쳐 보는 것(占之)을 포괄하는 행위”가 풍수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들의 주체는 그곳에 살게 될 주인이다. 건축가는 의뢰를 해 온 고객(주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함이 중요하다. 전통사상으로서 풍수가 당당하게 서양철학과도 만날 수 있음은 바로 이 부분이다. 서구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집짓기에 관한 성찰은 동양의 풍수와 유사한 관념구조를 갖는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풍수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집 문제에 본질적 질문을 던진 것은 2차 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부흥하는 과정에서 주택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면서이다.

“우리의 거주(wohnen)는 주택 부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거주는 상황이 좀 다를지언정 노동에 의해 휘둘리고, 이익과 성공만을 추구함으로써 끊임없이 동요하고, 또한 오락과 레저산업에 매료되어 있다.”

부동산, 특히 아파트를 축재의 수단으로 여겨 아파트 가격관리가 국토교통부의 핵심과제가 되고, 강변과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전원주택을 지어 성공의 상징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대한민국 졸부들의 천민성(賤民性)에 그대로 적용되는 발언이다.

하이데거는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을 다르게 생각한다.

집짓기 행위의 본질을 하이데거는 〈집을 지음 살아봄 생각함(BAUEN WOHNEN DENKEN)〉(1951년)이란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생각은 동양의 풍수관과 흡사하다. 하이데거는 대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본질적으로 동양의 풍수관과 친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BAUEN WOHNEN DENKEN〉이란 논문 제목은 기존의 독일어 문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이데거 특유의 문장이다. 제목을 보면 명사처럼 쓰였지만 3개의 동사를 쉼표(,)를 찍지 않고 이어서 표기하여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다. ‘집을 짓고 거기에 살아보고 사유하는 것’, 이 셋이 각자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것이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는 말한다.

“땅을 구원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그 땅 위에 살 수 있다. 땅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 땅을 파괴나 폭력적 개발 위험으로부터 구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고유한 본질에 자유롭게 존재케 하는 것이다.”

땅 자신의 재능과 본질을 드러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역량을 자유롭게 발휘케 하는 것이다. 아무 데나 터를 잡지 않고, 아무렇게나 집을 짓지 아니하고, 조경에는 자연이 요구하는 일정한 원칙이 있고, 집의 이름을 짓는 데는 그 땅과 건축주의 철학이 반영되어야 비로소 그 땅과 건물이 길(吉)하다는 점(占)이 나온다. 풍수에서는 ‘점’이라 하였고, 하이데거는 이를 ‘구원’과 ‘자유’로 표현했다.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풍수관’과 집짓기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
사진=안도 다다오 사무소 제공

 

건축주는 자신이 터잡기와 집짓기에 정확한 지식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특히 ‘용’들의 경우 국격(國格)을 대변하기에 더욱더 그렇다. 그렇지 못함이 문제이다.

흔히 건축가는 자신이 전문가라는 이유로 건축주를 무시하려 든다. 잘못된 관행이다.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의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주장에 건축가들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필자는 2016년 2월 일본 오사카 그의 사무실에서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인터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음에 안 들면 인터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최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준비하여 갔다. 인터뷰는 1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한국의 건축계와 풍수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핵심 질문과 답변이다.

〈필자 : 클라이언트(건축주)에게 의뢰를 받고 건물을 지으려 할 때 그 지어질 땅을 보게 될 터인데, 땅을 볼 때 어떤 원칙을 갖고 보십니까?

안도 다다오 : 클라이언트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가 나에게 전달하는 마음과 생각을 제일 우선시합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건축하고자 하는지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건축은 개인 작업이 아니라 공동으로 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건축은 지은 뒤 그냥 두는 것이 아닙니다. 건축물은 앞으로 계속 남아 이용되기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변 자연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성입니다. 건물 자체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장소에 대한 역사성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지역 풍토나 그 지역의 오래된 건축물에 대한 책도 많이 읽으면서 건물을 완성해 나갑니다.〉

앞서 정기용 선생과 점심을 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거의 비슷한 대지관이자 건축관이었다.


노무현, 결국 생가 뒤에 사저 지어

/2006년 무렵의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앞에 있는 초가)와 사저(뒤의 양옥 건물).

 

정기용 선생과 점심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앞으로 가끔 찾아뵙겠다고 했다. 그때 동석했던 청와대 행정관에게도 풍수적 의견을 써 주었다. 행정관은 “앞으로 자문 받을 것이 많겠다”고 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필자는 다시 봉하마을로 왔다. 자녀 결혼식을 마치고 귀가한 노건평씨와 이재우씨를 만났다. 수년 전(2002년) 월간지 취재 때 만난 인연과 월간지 기사 그리고 그 사이 간간이 통화를 하였던 기억을 되살려 내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생가 뒤 예정지와 마을 입구 쪽 산자락 두 곳을 다시 살폈다. 후자는 지금 단감 밭이 되어 있지만 일제 때 일본인이 살았던 곳이며, 이재우씨가 아는 사람의 소유이기에 구입에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며칠 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통령은 ‘봉하산 바위가 보이는 곳에 거실과 안방이 있는 사저를 짓기를 원한다’ 하니 원안대로 생가 뒤밖에는 대안이 없을 것 같소.”

노 전 대통령에게 생가와 봉하산은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인용한 하이데거는 집짓기와 관련하여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Dichterisch wohnet der Mensch)”고 했다. 시적인 태도란 사물들(산·바위·들판·다리 등)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 사물의 성스러운 신비를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집을 짓은 것은 생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건물을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살아가게 될 땅과 바위 그리고 그 존재이유를 환히 드러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고향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여러 용들 가운데 노 전 대통령만이 생가터·봉하산·부엉이바위가 갖는 사물의 존재이유를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분명 풍수설을 믿지 않았다. 속설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철학을 극대화하여 관철하고자 했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봉하마을 그 이후

그 후 봉하마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1년 즈음 권양숙 여사가 사저를 떠난다는 짤막한 언론보도가 있었다. ‘권 여사가 무섬증을 타시는구나’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이후 여사는 이곳을 나와 인근 다른 곳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이 흘러 금년 9월 다시 봉하마을을 찾았을 때 마을은 완전 ‘도깨비시장’이 되어 있었다. 식당·가게·장터 등등이 마을을 덧칠하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 늘어선 각종 음식점과 술집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이것이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었던 농촌 마을 모습이었을까?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가 여러 용들 가운데 이 땅에 태어나 ‘집을 짓고 거주하고 사유함’을 실현하고자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잠룡·비룡·은룡이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나 안도 다다오와 같은 건축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이 되려면 전통 대지관과 건축관에 나름의 확고한 철학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월간조선 11월 호

 

12.09 (12월 호)

■청와대가 흉지(凶地)라고?

⊙ 조선 초부터 경복궁이 길지(吉地) 아니라는 주장 있어
⊙ 세종, 백악산에 올라본 후 “보현봉의 산맥이 곧게 백악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명당”
⊙ 조선왕조 500년 지속, 대한민국의 발전 등을 보면 경복궁·청와대는 길지
⊙ 대통령 집무실 이전시 정부과천청사나 경희궁 등이 좋을 듯

▲청와대 전경. 조선 초부터 경복궁과 지금의 청와대 자리가 풍수상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
사진=조선일보DB

 

올해 10월 25일 승효상 건축가가 청와대 공부모임인 상춘포럼에서 강연을 했다. 이날 강연 내용 중에는 ‘청와대 터가 풍수상 문제가 되니 옮겨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2013년 3월 《조선일보》 ‘국운풍수’에서 필자는 갓 취임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을 주제로 ‘덕담’ 삼아 다음 글을 썼다.

 

〈금강산·설악산·삼각산·팔공산·계룡산·모악산 등등의 산봉우리들은 북악산처럼 화강암으로 양명(陽明)하면서도 ‘웅(雄)’하고 ‘장(壯)’하다. 산 높고 물 곱고[山高水麗], 그 위를 비추는 아침 해는 선명하다[朝日鮮明]. 이런 터에 큰무당들이 몰려들고 큰 종교들이 자리를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큰무당은 여성들이며, 이와 같은 터에 쉽게 감응하는 것은 문화예술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우리나라 인물들 가운데 문화·예술·체육계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류는 우리 국토가 갖는 화기가 환희용약(歡喜踊躍·기뻐 날뜀)하는 현상이다. … 청와대 터는 문화융성과 더 궁합이 맞는다. 괴테(Goethe)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고양한다’고 했다. 물론 여성적인 것이 여성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대통령은 여성이기에 그 여성성과 문화를 통해서 세계대국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이 글을 쓴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계기로 ‘청와대 흉지설’이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역대 대통령들이 불운하게 될 때마다, 그리고 측근 비리가 터질 때마다 ‘청와대 터가 문제’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시해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구속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나라를 흔들어 놓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은 감옥에 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살했다.

집권 초기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언론사 간부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할 때, 유우익 당시 대통령실장과 김종구 《한겨레》 편집국장 사이에서 뜻하지 않은 ‘청와대 풍수 논쟁’이 붙었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다스’ 관련하여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못하고 파면당했다. 청와대 흉지설이 힘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통령 집무실을 정부서울청사(세종로청사)로 옮기겠다고 공약했었다.
사진=김두규

 

2017년 3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이 확정되자, 대선주자들의 공약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었다. 문재인·안철수·안희정·유승민 후보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19대 대선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이전의 대선 주자들 김영삼·이회창 후보도 대통령 집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했다. 공약은 실현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가운데 하나가 집무실을 정부서울청사(세종로)로 이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집무실 이전을 구체화한다는 뉴스가 간헐적으로 나오지만 언제 어디로 이전할 것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고교 동창 건축가 S씨와 전 문화재청장을 지낸 Y씨 등이 주도하고 있다는 소문뿐이다. 대통령 집무실뿐만 아니라 비서실과 경호실 등 부속기관이 동시에 움직여야 하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서울청사나 별관의 경우 공간의 협소함과 보안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정부서울청사를 대통령 집무실로 하고 다른 부속기관은 길 건너 고궁박물관을 쓰게 한다는 소문도 들린다.”(이창환 한국전통조경학회장·상지대 교수).

정부서울청사 및 별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길 경우 그들의 집무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이미 행정안전부는 세종시 이전이 확정되었지만, 그 밖의 광화문청사 내 부처도 연쇄이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역대 대선 후보자들의 공약이 되었는가? 몇 가지 이유가 거론된다.

첫째, 청와대 본관의 협소함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 측근이었던 정재문 전 외교통상위원장은 당시 대통령에게 청와대 본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고층건물을 지어 근무공간을 확대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둘째, 본관·비서실·관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여민관으로 집무실을 옮겼기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셋째, 청와대가 경복궁 뒤쪽에 푹 박혀 있어 ‘소통부족’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논의되는 것은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탈(脫)권위주의의 문제이지 터의 문제는 아니다.


청와대 흉지설

이러한 이유보다는 ‘청와대 흉지설(凶地說)’이란 찜찜한 소문이 더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청와대 흉지설을 처음 주장한 이는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다. 1993년에 최 교수는 “청와대 터의 풍수적 상징성은 그곳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들의 영주처이거나 신의 거처”(《한국의 풍수지리》)라면서 조선총독들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이 신적인 권위를 지니고 살다가 뒤끝이 안 좋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여기에 풍수술사들까지 덩달아 진지한 성찰 없이 그 내용을 확대시키면서 청와대 흉지설이 굳어진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필자 역시 비판 없이 그 내용을 수용했었다. 그 당시 즉 1990년대에는 청와대를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주변 답사도 제대로 못했던 필자의 미숙함이 원인이었다.

‘신의 거처’, 즉 큰 사찰이나 성당이 들어서려면 풍수상 2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첫째는 흙산[肉山]이 아닌 돌산[骨山]이어야 한다.

두 번째 조건은 터를 감싸는 좌우 산들이 완벽하게 감싸 주어야 한다. 즉 경복궁과 청와대의 내백호와 내청룡에 해당되는 경향신문사에서 조선일보사에 이르는 지맥(내백호)과 감사원에서 한국일보사로 이어지는 지맥(내청룡)이 좀 더 높고 길게 뻗어 나와 교차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두 지맥이 낮은데다가 서로 교차하지 못하여 내수구(內水口)가 벌어져 있다. 이곳이 신들의 거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종, “이곳은 물이 없는 땅”

이 일대가 왕궁 터로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000년 전 인 고려왕조 때다. 1101년 당시 숙종의 명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던 윤관과 최사추가 이곳을 추천한다.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라는 명을 받고 노원역(노원구 상계동), 용산(지금의 용산) 등 여러 곳을 살폈습니다. 모두 적당하지 아니하고 삼각산 북악 남쪽이 산 모양과 수세가 옛 문헌과 부합됩니다. 남향으로 하되 지형을 살려 도읍을 건설할 것을 청합니다.”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은 개경을 버리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곳을 정궁(正宮)으로 삼았다. 흉지설은 조선 초기에 잠시 대두됐다. 1404년 당시 임금 태종은 조준·하륜 등 대신들과 당대 최고의 풍수사 이양달·윤신달 등을 불러 이곳 터를 잘못 잡았음을 질책한다.

“내가 풍수책을 보니 ‘먼저 물을 보고 다음에 산을 보라’고 했더라. 만약 풍수책을 참고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참고한다면 이곳은 물이 없는 땅이니 도읍이 불가함이 분명하다. 너희가 모두 풍수지리를 아는데, 처음 태상왕(이성계)을 따라 도읍을 정할 때 어찌 이 까닭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 당시 원로 풍수관료들(이양달·고중안)은 길지(吉地)임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또한 경복궁 터에 회의적이었던 태종도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려 그의 재위 시절에 조선의 기틀을 완성시켰다.

이곳이 흉지라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어 논쟁이 된 것은 1433년(세종 15년)이다. 당시 풍수관리 최양선은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목멱산(남산)에서 바라보면 향교동(현재의 운니동 부근)과 이어지는 지금의 승문원의 자리가 실로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아니하고 북악산 아래에다 했을까요”라면서 경복궁 흉지설을 제기한다.

여기에 청주 목사 이진도 가세를 한다. 이진은 박학다식에 정치적 능력도 탁월하여 조정에서 신임을 받은 유신(儒臣)이었다.

“대체로 궁궐을 짓는 데 먼저 사신(四神)의 단정 여부를 살펴야 합니다. 이제 현무인 백악산(북악산)은 웅장하고 빼어난 것 같으나 감싸 주지 않고 고개를 돌린 모양이며, 주작인 남산은 낮고 평평하여 약하며, 청룡인 낙산은 등을 돌려 땅 기운이 새어 나가며, 백호인 인왕산은 높고 뻣뻣하여 험합니다.”


세종, 직접 북악산에 올라 판단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의 동상. 세종은 경복궁이 길지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이러다 보니 세종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승정원에 지시하여 풍수에 능한 자를 찾아 논의하라고 한다. 임금의 명을 받은 도승지 안숭선은 황희·신상 등과 함께 직접 남산에 올라가 경복궁 뒷산인 백악산 산줄기를 살핌과 동시에 풍수관리 최양선·이양달·고중안·정앙 그리고 풍수에 능한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를 하도록 한다. 이때 이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린다. 이양달·고중안·정앙과 같은 풍수관리들은 경복궁 길지설을 견지했고, 최양선 등은 흉지설을 주장한다. 경복궁 길지설을 주장하는 측의 의견이다.

“백악산은 삼각산 봉우리에서 내려와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평한 언덕 두어 리가 되었다가 우뚝 솟아 일어난 높은 봉우리가 곧 북악이다. 그 아래에 명당을 이루어 널찍하게 바둑판같이 되어서 1만명의 군사가 들어설 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이고, 여기가 곧 명당 앞뒤로의 한복판 되는 땅이다.”

결론이 도출되지 않자 세종이 직접 백악산에 올라가 지세를 살피면서 동시에 양측의 주장을 청취하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 백악산에 올라서 오랫동안 살펴보고, 또 이양달과 최양선 등의 양측 말을 들으면서 여러 번 되풀이로 살펴보니, 보현봉의 산맥이 곧게 백악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명당이다.”

이어서 최양선을 “미치고 망령된 사람으로 실로 믿을 것이 못된다(狂妄之人, 固不足信)”고 혹평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과 단종 역시 최양선을 싫어하자, 최양선은 고향 서산으로 은퇴한다.

세조가 집권하자 최양선은 다시 경복궁 흉지설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세조와 대면할 기회를 갖는다. 1464년(세조 10년)의 일로 그때 최양선 나이 80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후배 풍수관리 최연원에게 여지없이 논박당한다. 세조는 나이 많은 최양선을 벌하지 않고 웃으면서 의복을 주어 내보낸다. 이때 장면을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질이 우활하고 기괴하며 험악하여 자기 소견만이 옳다 하고 … 술법을 잘못 풀면서 음양·지리에 정통하다고 하니 천하의 미친놈(天下之妄人)이다.〉


“그곳에 살았던 3대를 보라”

결국 경복궁 흉지설은 최양선 한 사람에 의해 집요하게 주장된 셈이다. ‘터의 좋고 나쁨을 보려거든 그곳에 살았던 3대를 보라[欲知其吉凶, 先看三代主]’고 했다.

경복궁에서 통치했던 조선의 임금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태종에 이어 세종도 이곳 경복궁에서 집무하면서 우리 영토를 백두산까지 확장시켰다. 지금의 한반도 모습이 갖추어진 것도 이때였다. 또 세종 때 한글이 만들어졌다. 우리 문자를 만듦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자기의식’을 갖게 했다. 우리 민족사의 큰 업적이다. 광화문광장에 세종상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아들 세조는 왕권확립과 함께 문화를 크게 융성시켰다. 그의 손자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반포했다. 조선의 전성기는 바로 이때였고 그 활동무대는 경복궁이었다.

조선왕조가 이곳 때문에 망했다는 풍수술사들의 말도 있으나 세계 역사상 한 왕조가 500년이 지속된 것도 드문 일이다. 왕조 평균 수명이 200년 안팎이니 그보다 두 배 이상의 수명을 누린 셈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으면서 절대빈곤을 해결했고, 산업화에 성공하여 경제대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는 올림픽을 치러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월드컵 4강 신화가 만들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민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를 진일보시켰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켰다. 근대화에서 민주화로 그리고 세계화로 우리나라는 진보해 왔다.

대통령들의 말로가 불행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불행이었지 국가의 불행은 아니었다. 그들은 본래 ‘역사의 하수인’이었다. 이성(Vernunft)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공물로 삼지 않고 정열과 야망을 지닌 개인을 활용한다’는 것이 헤겔(Hegel)이 말하는 ‘역사의 하수인’론이다. 그들은 때가 되면 용도 폐기되어 가차 없이 버려진다. 알렉산더·카이사르·나폴레옹 등 세계적 영웅들도 결국 ‘역사의 하수인’일 뿐이다. 역사가 진보하는 과정 속에서 겪어야 할 대통령들의 운명이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정열과 야망을 가진 이들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땅이 두려워 집무실을 옮긴다면 지도자의 운명을 회피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행정수도 건설계획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공약 ‘광화문 집무’를 이행한다 하더라도 일러야 2019년에나 가능하다. 임기의 절반을 보낸 뒤의 일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지금의 여당이 재집권한다면 문제가 없으나 야당이 집권한다면 광화문 집무실을 활용할지 의문이다. 다시 청와대로 복귀할 것인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려고 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수도를 옮기고자 했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었다. 국운을 생각할 때 청와대를 옮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도 입지에 대한 고민은 진지했다. 그는 6·25전쟁 직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새로운 곳에 수도를 건설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고, 그 자신이 대덕 연구단지를 만들 때 그곳을 행정수도로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한 고민 끝에 1977년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발표했다. 그가 새로이 행정수도를 옮기고자 한 까닭은 인구집중, 국토의 불균형발전 등 복합적이었지만 북한의 사정거리 안에 서울이 들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기획단(단장 오원철)이 구성됐고, ‘백지계획’이란 암호 아래 준비가 진행되었다. 충남 공주시 장기면(현 세종시 장군면) 일대로서 그 진산은 국사봉이고 안산은 장군봉이었다. 국사봉 아래 김종서(세종 때 인물) 장군의 무덤이 있어 그 현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백지계획’은 문자 그대로 백지화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2002년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는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충청권에 ‘신행정수도건설’ 공약을 내세웠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신행정수도건설추진단(단장 이춘희)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행정수도 이전은 좌절되었다. 대신에 행정부처만 옮기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안’으로 축소·변경되어 지금의 세종시가 탄생하게 된다. 만약 박정희·노무현 전 대통령의 천도론이 실행되었더라면 지금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논의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과천으로의 이전 생각해 볼 수도

/세종시의 주산인 원수산 아래.
세종시로 수도가 이전되었다면 대통령 집무실이 지어졌을 자리다.

 

도읍지를 옮기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으나 대통령 집무실 이전도 간단하지 않다. 굳이 해야 한다면 몇 가지 전제하에서 그리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대한민국이다. 한류는 전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다. 이에 걸맞게 대통령 집무실도 국격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 남북통일 후의 수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셋째, 현재 과천·대전·세종 등으로 분산된 각 부처들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서울을 떠나 세종시로 옮기는 방안이다. 세종시에는 원래 대통령 집무실을 위한 공간이 지금도 빈터로 남아 있다. 세종시의 주산인 원수산 지맥을 받은 혈처(穴處)를 그대로 비워 두고 있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단 단장을 시작으로 처음부터 세종시 건설의 책임을 맡았던 이춘희 현 세종시장의 일관된 철학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수도이전이 위헌’이란 판결이 난 만큼 개헌에 가까운 큰 변화가 있어야 세종시로 옮길 수 있기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둘째, 정부과천청사를 대통령관저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하는 안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도읍이 될 만한 곳으로 묘사한 곳이기도 하다. 웅장한 관악산을 주산으로 그 아래에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이 들어선다면 경제대국에 걸맞은 공간배치가 될 것이다. 특히 정부과천청사 옆의 ‘중앙공무원교육원’은 그대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 활용할 수 있다. 원래 대통령 집무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행정구역이 경기도이기에 ‘천도론’ 논쟁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곳을 서울로 편입시킨다면 별 어려움이 없다.


4대문 안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찾는다면 …

셋째, 4대문 안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는 경우이다. 이 경우 몇 가지 후보지가 등장한다.

경복궁 동쪽에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10여 년 전까지 국군기무사령부가 자리하던 곳이다. 군사시설이었기에 지하시설도 완비되어 보안상 어려움이 없다. 이곳은 경복궁 내청룡에 해당되는 자리이다. 백호가 예술과 재물을 주관한다면, 청룡이 명예와 벼슬을 주관하는 기운을 갖고 있다.

이곳이 불가하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금 내려와 대한항공이 소유하고 있는 송현동 빈터(덕성여자중학교와 종로문화원 사이의 빈터)이다. 원래 국방부 소유에서 미국 대사관 숙소 부지로 주인이 바뀌었다가 대한항공이 사들인 곳이다. 7성급 호텔을 지으려다 허가를 받지 못한 곳이다. 이곳에 대통령 집무처가 새로이 들어선다면 경복궁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줄 수 있는 입지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기존 궁궐을 활용하는 방안이다. 경복궁을 대통령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광화문을 통해 당당하게 대통령과 관료들이 대통령궁으로 들어가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대통령과 사절들도 여기서 맞게 한다. 품격 있는 공간이 확보되면 그에 걸맞게 사람들이 채워진다.


경희궁을 대통령궁으로

/풍수적으로 논란이 된 적이 없는 경희궁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면 좋을 곳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 경희궁 활용이다. 경복궁·창덕궁·덕수궁에 비해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고, 인근의 주요 공공건물들(서울역사박물관·서울시교육청·기상청서울관측소)을 부속 건물로 활용할 수 있다.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년) 풍수술사 김일룡이 새문동에 새로 궁궐을 지을 것을 청하면서 시작한다.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곳은 원래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터였다. 광해군은 이복동생의 집터를 빼앗아 궁궐을 지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고 원래의 주인(정원군과 그 아들 인조) 차지가 된다.

조선이 망한 뒤 일본인 중학교로, 그리고 해방 이후 서울고등학교 터로 활용되다가 최근에 일부가 복원되었다. 풍수적으로 흉지라는 소문이 한 번도 없던 곳이다. 경희궁을 추가 복원하되 내부를 현대식으로 하여 대통령 집무실로 활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북한이 대치하기에 보안이 중요하다. 경희궁 동쪽 담장과 인접한 곳에 거대한 지하벙커(280평 규모)가 있다. 일제가 미군의 폭격을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피란시설로서 조금만 손보면 지금도 집무가 가능한 완벽한 지하 벙커이다.

경희궁 뒤쪽의 나지막한 언덕은 대통령과 참모 그리고 행정관들의 산책공간으로도 좋다. 광해군이 이 터에 유난히 눈독 들였던 것은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제로 그가 생각하는 거처의 이상 조건, 즉 “거처는 반드시 밝고 넓게 트인 땅이어야 한다[居處必取疏明開豁之地]”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풍수의 문외한이라도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앞에 서 보면 ‘밝고 넓게 트인 땅’임을 알 수 있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의 근원지로서 대통령의 집무실이 전통 궁궐양식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세계 경제대국이자 문화강국에 걸맞은 새로운 대통령궁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청와대 흉지론도 더 이상 풍수라는 이유로 언급되지 않기를 바란다. 땅이 무슨 잘못인가?⊙

 

■12.23 길지 중 길지인 왕릉 이전… 풍수 문제라기보다 고도의 정치 행위

/서울 내곡동에 있는 헌릉(태종 무덤). 국정원은 헌인릉 경내에 있다. / 김두규 제공

 

"국정원이 문화재청 산하에 있습니까?" 유네스코 자문기관 이코모스(ICOMOS) 중국 측 부위원장 왕리쥔(王力軍)이 조선왕릉을 현장 조사할 때 던진 질문이다. 생뚱스러운 물음이 아니다. 서울 석관동 의릉(경종) 경내에 안기부가 자리했고, 그 후신인 국정원이 내곡동 헌인릉(태종과 순조) 경내에 있기에 문화재청이 국정원을 관할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국정원(안기부)이 왕릉 안에 자리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이 국유지였기 때문이다. 또 터를 고를 때 보안상 최적지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왕릉 경내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역대 국정원장들의 말로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실종(김형욱)·사형(김재규)·구속의 운명에서 벗어난 전직 국정원장은 천운을 타고난 자이다. 터가 문제인가?

1450년 세종이 헌릉 서쪽에 묻혔다가 1469년 경기도 여주로 천장되었고, 1515년 중종의 첫 번째 부인 장경왕후 무덤(희릉)이 이곳에 들어섰다가 1537년 경기도 고양으로 천장된다. 또한 조선 풍수사에서 가장 오랜 논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1430년(세종 12년) 사람과 수레가 많이 넘나들어 지맥이 손상되니 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30년이 넘도록 논쟁이 지속된다(현재 '서울특별시어린이병원' 앞 고갯길). 그 과정에서 세종·문종·세조 임금 및 대신과 지관들까지 이곳을 찾으면서 '국가적 관심지'이자 '금단(禁斷)의 땅'이 되었다. 수년 전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인근에 사저를 지으려다 문제가 되어 비난을 받았다. 또 금년 4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권력자를 유혹하는 땅일까?

이곳을 처음 태종의 무덤(헌릉)터로 잡은 이는 이양달이었다. 고려 말 풍수 관료로 시작한 그는 '조선 초 도읍지 및 왕릉 선정에 공을 세웠고 나이가 80이 된 덕'으로 세종으로부터 서운관판사직을 제수받는다. 지관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이후 세종도 헌릉 국내(局內)에 묻히고 싶었다. 이때 논쟁이 된 것은 일국(一局) 내에 두 개의 혈이 맺히는가 여부였다. 이에 대해 집현전 풍수학 총책임자였던 정인지가 전문가들 협의를 거쳐 길지라 결론지었고, 그 주장이 채택되어 헌릉 서쪽에 영릉(세종)이 조성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세조가 집권하면서 영릉 천장이 논의된다. 이때 세조의 왕위 찬탈에 줄을 선 지관 안효례가 영릉 흉지설을 제기한다. 영릉 천장은 세조의 죽음으로 예종에게 미뤄지고, 세조는 안효례를 중용할 것을 유언한다. 천장은 예종 즉위 후 마무리되는데, 지금의 여주 영릉은 그 결과물이다. 이 자리를 소점한 이는 안효례였다.

헌릉과 구(舊) 영릉터는 흉지였을까? 천장을 위해 구 영릉을 열었을 때의 장면이다. "물기가 없었고, 관곽과 옷들이 새것과 같았다."('예종실록'). 흉지가 아니었음을 에두른 것이다. 궁금한 것은 또 있다. 그로부터 20년 전 구 영릉터가 풍수상 길지라고 주장했던 정인지가 새 영릉터까지 가보고 예종에게 길지라고 복명하면서도 구 영릉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풍수를 빌미로 한 정치 행위였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 입장에서 형 문종이 조성한 '구 영릉'을 인정할 수 없었다. 희릉 천장도 중종 당시 권력자 김안로가 정적(政敵) 정광필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다. 정광필이 이곳에 희릉을 조성할 때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천장이나 풍수 논쟁은 특정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 행위였다. 국정원장들이 줄줄이 구속된 것도 터의 문제가 아니다. 본분을 망각한 사람의 문제이다. 분명 헌인릉과 국정원은 길지에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