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水地理2/ 김두규의 國運風水2/ 2015.01.17 徐福이 불로초 찾아 왔다는 제주 - 2016.12.10 神明의 땅에서 잡신의 신명터로 전락한 청와대
風水地理2/ 김두규의 國運風水2/
2015.01.17 徐福이 불로초 찾아 왔다는 제주, 시진핑 등 中지도부가 訪韓때 들른다는데…
/지난 2008년 제주도 서귀포시 서복공원에서 열린 태산석 제막식.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친필휘호 '서복공원'이 새겨져 있다. / 조선일보 DB
일본에 복(福)자가 들어간 일곱 개의 성(姓)이 있다. 후쿠오카·후쿠시마·후쿠야마·후쿠다·후쿠하타·후쿠카이·후쿠즈미(福岡·福島·福山·福田·福畑·福海·福住)가 그들인데, 원래 서복(徐福)의 일곱 아들 이름이었다고 한다.
의약·천문·지리에 능하였던 서복은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에게 글을 올렸다. "신선이 사는 동해의 섬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진시황의 허락을 얻은 그는 동남동녀(童男童女) 수백 인을 데리고 출항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정착해 농업·어업·의술 등을 전파하여 일본 문화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일본에는 관련 유적이 많다. 서복의 최초 상륙지와 무덤, 서복을 모시는 신사, 서복학회 등이 수십 개 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한·중·일 3국 전문가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일본 정사(正史)인 고지키(古事記)·니혼쇼키(日本書記) 등에 서복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일본이 서복 전설을 확산시키는 것은 자기네 문물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직접 전래되었음을 강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서복의 일본도래설(日本渡來說)을 일축한 '역사적 사건'이 지난해 발생했다. 다름 아닌 중국의 '천자' 시진핑 주석에 의해서이다. 시 주석은 2014년 7월 4일 서울대에서 특별 강연을 했다. 그는 머리말에서 한·중의 역사적 우호 관계를 상기시키면서, 그 첫째 사건으로 '신선을 찾아 동쪽 제주로 온 서복'을 언급하였다. 서복의 제주도래설(濟州渡來說)을 '공인'한 셈이다.
시 주석은 서복의 제주도래설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주석이 되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2005년 시진핑은 저장성(浙江省) 당서기였다. 그는 그해 7월 서울을 방문했다. 이때 한·중친선협회 이세기(장관 및 국회 문광위 위원장 역임) 회장이 시진핑 일행을 환영하는 모임을 열었다. 환영 모임이 끝날 무렵 이 회장이 시진핑에게 한국에서의 나머지 일정을 묻자 그는 "제주도에서 하루 쉬고 귀국한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이 회장이 시진핑과 동행하여 제주에 가서 서복공원을 안내했다. 시진핑은 서복공원이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관할지 저장성 닝보(寧波)가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2차 항해를 시작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제주도에서 서복공원을 보게 되니 기쁠 수밖에! 놀람은 또 있었다.
시 당서기는 제주 감귤이 '원래 중국 저장성 원저우(溫州)에서 온 밀감'이란 설명문을 공원 벽면에서 우연히 찾아 읽었다. 희한한 인연에 얼마나 기뻤을까. 제주 서복공원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서복공원이 제주에 세워졌을까? 1997년 당시 국회 문광위 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세기 의원에 의해서였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정치학자였던 그는 한·중수교(1992) 이후 중국 지도층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의 동선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많은 주요 인사가 제주도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을 발견했다.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리펑(李鵬)·류윈산(劉云山)·차이우(蔡武) 등 예외 없이 제주도를 방문했다. 시진핑 당시 저장성 당서기도 마찬가지였다.
풍수사(風水史)적으로 제주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은 서복뿐만 아니다. 송나라 때의 풍수 호종단(胡宗旦·고려 예종 때 귀화해 풍수 관리로 활동)도 제주와는 밀접한 인연을 맺는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주도에 대한 중국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확인한 이세기 당시(1997년) 문광위 위원장은 문광부와 서귀포시를 설득해 국비로 서복공원을 조성케 한다. 서복공원이 조성된 이후 더 많은 중국인이 제주와 이곳을 들렀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중국의 지도자들이 제주도를 다녀간 이후 승승장구한 일이 아주 많다"고 이세기 전 위원장은 술회했다. 승승장구한 중국 지도자들의 구체적인 이름은 지금도 현직에서 활동 중이기에 밝히지 않는다.
01.31 청와대 터는 吉地인가 凶地인가? 세종대왕은 명당이라고 했는데…
청와대 터는 풍수상 길지인가, 흉지인가? 최근 청와대 터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대개 흉지라는 답변을 듣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통령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것과 연관돼 있는 것 같다.
흉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대통령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았음을 근거로 든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것과 한류 문화 대국이 된 것은 우리 민족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물이지만 대통령들의 통치력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일부였으므로 경복궁 터를 풍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북악산을 중심축으로 한 청와대 본관과 약간 동쪽으로 비켜 중심축을 잡은 경복궁. / 김두규 교수 제공
경복궁 터에 대한 풍수 논쟁은 오래됐다. 흉지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1433년(세종 15년) 당시 풍수 학인(學人) 최양선이었다. 그는 경복궁 터가 아니라 현재 가회동 일대가 '혈처(집 짓기에 좋은 곳)'라고 임금에게 아뢴다(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이 가회동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최양선의 주장에 대해 세종은 영의정 황희 등 대신들과 풍수 학인들로 하여금 남산과 북악산을 직접 올라가 살피게 한다. 의견은 경복궁 터가 길지라는 다수파와 흉지라는 소수파로 나뉜다. 그런데 소수파가 승복하지 않자 며칠 후 세종이 직접 북악산을 올라가 살핀다. 세종은 "오래 살피고, 찬반양론을 듣고, 또 반복해서 살핀 결과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명당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이렇듯 경복궁 명당론이 '확정'되었음에도 흉지론이 떠도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풍수학자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발언을 오해한 데서 비롯했다. 최 교수는 경복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청와대 터가 '신들의 거처'라고 평한 적이 있다. 단지 큰 교회·사찰·성당이 들어서면 더 좋았을 곳이란 뜻이었는데 이를 사람 살기 적합지 않은 곳이라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호지무전미(好地無全美)'라는 풍수 격언이 있다. 제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최양선이 말한 대로 경복궁 터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조선 초 이곳에 궁궐을 짓던 건축가들(정도전·김사행 등)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풍수적으로 보완했다.
우선, 경복궁 중심축을 북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비켜 잡았다. 왜냐하면 북악산이 동쪽으로 약간 고개를 돌린 데다 험석(險石)이 많아 그 바로 아래 건물을 세우면 위압적이고 권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몇백 년 후 서울을 찾은 서양 건축학자도 같은 의견이었다. 1986년 경복궁을 찾은 독일 하노버대학교 건축학과 란트체텔(Landzettel) 교수는 북악산과 경복궁의 입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악산은 궁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에게 불운이었을 것이다. 뾰족한 산 모양이면서도 동시에 좌우 반듯한 대칭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험한 산 아래 궁궐을 지은 조선 건축가의 위대함을 보았다. "뾰족한 북악산과 동쪽으로 길게 흐르는 능선을 감안해 궁궐 터를 (약간 틀어) 잡은 것은 탁견이었다"고 평한다.
또 다른 풍수적 보완책도 있다. 북악산처럼 험한 바위가 많은 곳은 소나무를 심어 그 강기(剛氣)를 완화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 송악산에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동시에 왕기를 키웠다는 건국 설화와 맥을 같이한다. 되도록 많은 소나무를 심는 게 좋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청와대 본관을 증·개축(또는 신축)하는 날이 온다면 풍수적 지혜를 활용해 콘크리트 건물을 소나무를 활용한 한옥으로 바꾸는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마음도 편해질 수 있다.
건물에 따라 사람 마음이 바뀔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말했다. "우리가 건물을 짓지만 건물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집이 길하면 사람이 영예롭다(宅吉卽人榮)'는 풍수서 '삼원경(三元經)'과 같은 말이다. 청와대가 한옥으로 지어지면 거침없이 확산하는 한류 수출 품목에 한옥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02.14 진주·자수정·오팔… 보석은 穴土의 순수응결체, 저마다 몸에 좋은 氣를 품었다는데…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보석 사랑이 대단했다. 그녀의 보석들은 크룹 다이아몬드·라 페레그리나·웨일스 황태자·타지마할 다이아몬드 등 역사와 전설을 가진 것이었다. 그녀가 훌륭한 것은 보석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테일러는 "누구나 보석을 사랑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면서 보석이 자신에게 준 환희와 사랑의 감동 때문에 잠시 감상할 뿐이라고 했다.
/16세기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아내인 영국의 메리 여왕에 선물했던 물방울 진주. 1969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남편이 그녀에게 선물로 사줬다.
보석은 땅에서 나는 결정체다. 당연히 풍수와 보석의 관계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의 관계를 알려면 우선 혈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풍수에서 가장 좋은 기가 뭉친 곳을 혈(穴·무덤이나 집터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혈을 중심으로 사방의 산이 감싸고 그 사이에 맑은 물이 흐른다. 우리가 흔히 좋은 땅을 '길지'라고 하는데, 이 길지의 특징 중 하나가 혈토(穴土)이다.
풍수고전 '금낭경'은 "혈토는 고우면서도 단단해야 하고… 옥을 간 듯해야 하고, 다섯 빛깔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또 "금·옥·상아·용뇌(龍腦)·산호·호박·마노(瑪瑙)·자수정 등과 같다"고도 했다. 따라서 혈토를 품은 땅은 아름답기 마련이다. 중국의 옛 시인 육기(陸機·261-303)는 "옥을 품은 바위산은 광채가 나고, 진주를 품은 하천은 아름답다(石蘊玉而山輝, 水懷珠而川美)"고 노래했는데 길지가 바로 그런 땅이다.
풍수 관점에서 보면 혈토는 보석이 되기 이전의 '가능태(可能態)'이다. 보석이라고 하는 '현실태(現實態)'로의 전이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 혈토는 돌도 아니고 흙도 아닌 비석비토(非石非土)의 상태이다. 반면에 보석은 혈토의 순수 응결체이다.
보석도 아름답지만 혈토 또한 아름답다. 사람들이 길지를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과 기쁨 때문이다. 화교 출신의 세계적인 보석 디자이너 리팡팡(李芳芳)은 "아름다운 보석과 진주는 대자연이 만들어낸 신비한 작품"이라고 했다.
좋은 땅의 기운이 천차만별이듯 보석들도 기운이 저마다 다르다. 사람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과거 유럽인들은 보석마다 특정한 기(氣)가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자수정을 몸에 지니면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속설이 있다. 자수정 와인잔이 만들어짐은 당연한 일.
오팔(opal)은 시력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패용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 스톤(eye stone·눈의 돌)'이란 별명이 생겨났다. 대도(大盜)들이 '거사(?)'를 감행할 때 오팔을 패용했다. 토파즈(topaz)도 오팔과 비슷하다. 위급 상황에 토파즈를 지니면 투명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더 강한 힘을 준다고 한다. 대도들뿐만 아니라 귀족 출신 장군·기사들이 좋아했다. 또 불면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 잠 못 이루는 귀부인들이 몸에서 떼지 않았을 것이다.
카메오(cameo·각종 보석에 양각한 장신구)를 패용하면 그 조각된 인물이나 사물과 닮는다는 믿음 때문에 많은 귀부인이 좋아했다. '보석의 여왕'으로 불리는 진주는 위장·심장병 등에 좋다고 알려졌다. 중풍을 막아준다는 호박은 노귀족들이 선호했을 것이다(한복 마고자·조끼 단추로 호박이 사용되는 것도 이와 유사한 것 아닐까?).
한편, 동양의 풍수에서 바라보는 혈토관과 서양인들의 보석관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서양인들은 혈토의 응결체로서 '작은 돌멩이(보석)'를 귀하게 여겨 그것을 몸에 지니고자 했다. 소유자 개인의 기쁨과 행복이 목적이었다. 동양인들은 혈토의 기운으로 가득한 공간(길지)에 거주함으로써 집단(가족 혹은 공동체)의 발복을 꿈꿨다.
05.02 한국과 마주보는 日간사이, 이토 히로부미·아베 배출한 야마구치 세력 본거지라는데…
일본 아베 총리가 가는 길은 거침이 없다. 독도 영유권·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한국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아베 총리의 이러한 정치철학은 일부 일본인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그들은 "세계 각국 수반들이 일본을 방문하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데 한국과 중국만이 신사참배를 반대한다"(오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 국학원대학 교수)고 말하거나, 한국과 중국의 신사참배 반대는 "후안무치한 내정간섭"(고보리 게이치로·小堀桂一郞 동경대 명예교수)이라고 말할 정도다. 반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등은 상처를 준 주변국에 대한 무한한 사과를 촉구한다. 일본 내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음이 분명하다. 도대체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과 일본인의 본질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명쾌하다.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 1865-1917)이란 유명한 역사가 겸 평론가가 있었다. 그는 풍토와 인간과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산골내기는 기상은 강건하나 자칫하면 성질이 비뚤게 흘러… 촌놈 근성을 부리며 분수를 모르고 으스대는 자가 많다. 평지에 살며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오간 사람들은 영리하여 슬기롭고… 기상이 너그럽고 크며 조화로운 이가 많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일본의 남과 북을 논한다. "일본 북쪽은 육지의 나라이며 주로 말(馬)이 교통수단이며 보수적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그 대표 세력이다. 반면 남쪽은 바다의 나라이며 주요 교통수단은 배(舟)이며 진보적이며 그 대표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야마구치(山口)에 있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묘. 그는 아베 총리의 정신적 스승이자 지주였다.
야마지는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무력을 가진 자가 그 무력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강한 일본이 문약(文弱)한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과 일제의 조선강탈을 정당화한다. 반면 그는 '산골 촌놈'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은연중 무시한다.
야마지가 언급한 일본의 남과 북은 다름 아닌 간사이(關西)와 간토(關東)를 말한다. 그의 말처럼 두 곳의 지역감정은 너무 대조적이어서 어떤 이는 한반도의 영·호남이 아닌 남·북한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간사이 지방은 우리와 동·남해를 공유하여 이른바 '한우물'을 쓰는 반면, 간토 지방은 태평양을 접하여 우리와 접촉이 없다.
한우물을 쓰다 보면 애증관계가 생기게 마련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세력은 바로 도요토미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 세력이었다. 당시 도쿠가와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 세력은 조선침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발생한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1600년)에서 간토 세력이 승리한 후 도쿠가와 정권(德川幕府)이 들어선다. 이후 260년 동안 조선과는 평화공존의 시대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간사이 세력(도요토미 후예)은 그 후 어찌 되었을까? 일본의 서쪽과 남쪽 변방으로 쫓겨나 숨죽이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1860년대 발생한 메이지(明治) 유신은 본질적으로 이들의 도쿠가와 세력에 대한 반격이었다. 이후 권력을 쟁탈한 히데요시 후예들은 바쿠후(幕府·정권)가 아닌 총리내각제를 통해 지금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 핵심 가운데 하나가 야마구치(山口)세력이다.
초대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거쳐 지금의 아베총리를 배출한 곳이다. 이들 모두의 영원한 스승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인데 그도 이곳 출신이다. 아베는 총리가 된 뒤 요시다 쇼인 무덤을 참배하였다(2013년).
요시다 쇼인은 당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에게 "조선을 꾸짖어 옛날 왕성했을 때처럼 공납하게 하라"고 가르친 인물이다. 훗날 정한론(征韓論)의 맹아가 되었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260여 년 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이었다. 다시금 간토 세력이 새로운 '바쿠후'를 세우지 않는 한 간사이 세력의 조선 욕심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05.30 풍수적으로 좋은 터는?… 살았던 집주인들의 幸·不幸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전원생활을 꿈꿔본다. 귀농과 귀촌은 우리 시대의 솔깃한 관심사다. 필자가 일주일에 절반을 머무는 산촌에도 최근 귀촌으로 두 집이 더 늘었다. 700만명으로 추산되는 베이비붐 세대 인구 가운데 10%만 도시에서 빠져나가도 농촌 살리기와 도시 주택, 청년 실업 문제 해결에 숨통이 틜 수 있다.
귀농·귀촌·주말 전원생활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귀농은 기존의 직업을 버리고 농사를 짓는 것이며, 귀촌이란 농촌으로 내려가 사는 것을 말한다. 주말 전원생활이란 도시에 집을 두고 가끔씩 내려가 취미 삼아 텃밭 정도 가꾸는 '반농반도(半農半都)'를 말한다. 그런데 귀농·귀촌·전원 생활 모두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다.
첫째, 기존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이를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로 표현했다. "지금(시골 생활)이 옳고 어제(도시 생활)가 틀렸음을 깨닫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농촌 생활은 도시 생활보다 훨씬 어렵다. 많은 사람이 "산 너머 행복이 있다"고 믿어 농촌으로 가지만 실망과 원망만 안고 회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가장인 경우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없다. 필자도 지방 대학에 임용될 당시 도시 생활이 아닌 시골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아내의 동의가 없어 지금의 '반농반도' 삶이 되고 있다.
둘째, 터를 잡는 문제다. '똑똑한 새는 좋은 나무를 골라 깃든다'고 했다. 한번 터를 잘못 잡으면 말년을 망친다. 터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그냥 지나칠 곳(可行者),한번 바라볼 만한 곳(可望者·명승지 등),자적(自適)할 만한 곳(可遊者),살 만한 곳(可居者)이 있다"(중국 북송 시대의 산수화론인 '임천고치' 중). 자적할 만한 곳은 주변에 정자를 짓고 전원생활을 즐길 만하고, 살 만한 곳은 귀농이 가능한 곳이다. 그런데 자적할 만한 곳과 살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풍수적으로 터를 보는 방법은 많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이미 검증된 터를 활용하는 것이다. 농촌의 빈집(빈터)을 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새로 땅을 사서 인·허가를 얻어 집을 지으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빈집을 구하거나 빈터에 농막(農幕·컨테이너 등)을 놓고 살다가 터에 대한 확신이 들 때 리모델링 혹은 신축을 하면 된다. 그렇다고 빈집(빈터)이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다. 터마다 나름의 무늬(터무니)가 있고 그 위에 살다간 사람들의 내력이 있다. 이전에 살았던 주인들의 행불행(幸不幸)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압선·축사·대규모 비닐하우스 등이 있는 곳을 피함은 당연한 일). 터가 좋으면 이웃과의 관계도 편안해진다.
필자가 처음 어느 산 아래 빈집을 발견하였을 때(1990년대 중반) 이웃들이 그 집터를 "제비집터(연소혈·燕巢穴)로 훈김 도는 곳"이라고 하였다. 또 집 바로 뒤에 작은 샘이 있었다. 자적할 만한 곳이었다. 그 집을 빌려 일주일에 절반가량 5년 넘게 살았다.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떠난 집주인이 다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즈음 인근에 또 한 채의 빈집이 매물로 나왔다. 1970년에 지어진 민가인데 보존 상태가 좋았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내력을 물으니 거기서 태어난 자녀들이 무탈하게 자란 뒤 대처로 나가 잘 산다고 하였다. 이곳을 구입하여 10년 넘게 살고 있다. 역시 자적의 땅으로 텃밭 가꾸기에 알맞다. 그렇지만 몇 년 후 퇴직을 하면 새로운 곳으로 옮길 생각이다. 이번에는 "살 만한 곳"을 구할 것이다. 집 앞뒤로 300평의 논과 50평의 밭이 있는 곳을 꿈꾼다. 그 정도면 홀로 농사를 지어 식량 자급을 할 수 있다. 이렇듯 풍수는 삶의 형태에 따라 터 잡기가 달라짐을 전제한다
06.13 北 황병서의 조상묘로 알려진 회문산 명당… 지세를 보니 武人·권력지향적
명당발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리학 대가이자 풍수에 능했던 정자(程子·1033~1107)는 "땅이 좋으면 조상의 신령이 편안하여 그 자손이 번창하는데 마치 나무 뿌리를 잘 북돋워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葬說)라고 설명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잘 가꾸어야 거목이 되는 과정과 같다. 좋은 터를 잡기 위하여 적선과 정성을 몇 대에 걸쳐서 쏟았다는 이야기를 명문가들은 하나쯤 가지고 있다.
고창에는 평해(平海) 황씨가 대대로 명문을 이루며 살았다. 호남이 배출한 18세기 큰 학자 황윤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황윤석뿐만 아니라 그 윗대 조상과 후손들이 모두 풍수설을 숭상했다. 황윤석의 무덤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화순 천운산, 증손자인 황중섭의 묘가 순창 회문산 오선위기혈, 그리고 이 평해황씨 선영들이 도처의 길지에 자리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유기상 전 전북도청 기획실장·전북대 사학과 박사과정).
필자의 호기심을 끈 것은 회문산 오선위기혈이다. 어린 시절 순창 고향집 사랑방에 임씨 성을 가진 떠돌이 지사(풍수쟁이) 한 분이 머물곤 하였다. 필자가 물심부름을 하였는데 가끔씩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조선 말에 흥선군이 있었는데 회문산에 오선위기란 천하의 명당이 있다는 걸 알았지. 그런데 그 명당이 절터에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 절을 빼앗아 무덤을 썼고 그 명당발복으로 그 아들이 임금이 되었단다." 당시 어린 필자가 제대로 이해할 리 없었다. 나중에 국사를 배우면서 '흥선군이 아버지 남연군묘를 예산 가야산으로 옮길 때 가야사를 불태우고 무덤을 썼던 사건'을 그 지사가 잘못 이해한 것으로 여겼다.
/북한의 2인자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조상묘로 알려진 황중섭묘. 전북 순창 회문산에 있다.
그런데 최근에야 그 지사의 이야기가 전부 틀린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회문산 오선위기혈은 만일사라는 절터에 있었다. 평해황씨 후손이 황윤석의 글 '이수신편'을 흥선대원군에게 바치면서 만일사 터를 간청하였고, 흥선대원군이 허락하여 마침내 증손인 황중섭이 그 자리에 안장되었다."(유기상) 하나의 명당을 얻기 위하여 황씨 문중이 몇 대에 걸쳐 적선과 정성을 기울인 결과이다. 명당발복은 이러한 오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황씨 후손들은 이곳이 오선위기혈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황중섭 묘는 풍수상 어떤 곳일까? 주산과 청룡·백호가 빼어남은 다른 길지와 다를 바 없다. 두드러진 특징은 혈처(기가 모이는 곳) 끝 부분에 바위가 튀어나왔고, 저 멀리 앞산에 투구처럼 생긴 큰 바위가 사방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혈처 끝 부분의 바위와 투구바위, 그리고 무덤의 향(向)이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풍수에서 향은 자손의 미래를 주관한다고 본다. 땅의 전반적 특징은 무인(武人)적이며 권력지향적이다. 혈처 끝부분에 솟은 바위에는 한 자 남짓의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복원향화만세(伏願香火萬世)'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엎드려 바라노니 만세에 걸쳐 향불이 끊이지 않기를"이란 뜻으로 후손이자 서예의 대가였던 황욱(작고)이 쓴 글이다.
지금 이 무덤의 후손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2인자로 등장한 황병서 총정치국장도 이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도선국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풍수 비서(秘書) '옥룡자유세비록(玉龍子遊世秘錄·최창조 교수 소장본)' 회문산 편에 이 자리를 염두에 둔 한 문장이 나온다는 점이다. 국한문 혼용 고어(古語)이기에 이 대목 일부를 풀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중턱의 저 장군! 갑옷 입고 투구 쓰고, 진(陣) 밖을 나와 저 홀로 분주하네. 투구 벗어 팔에 걸고 사생(死生)을 맹세하니, 장군 모습 완연하네.'
과연 이곳이 전해지는 대로 북한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선영이라면 이곳 풍수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풍수학자로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다.
06.27 서양風水 원칙은 '끌어당김'과 '비움'…
서양에도 풍수가 있는가? '펑쉐이(Fengshui)'라는 이름으로 서양인의 생활 속에 수용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풍수 서적이 번역·소개되면서이다. 최근에는 '동아시아의 풍수'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풍수 이론을 개발하여 건축·조경·실내장식 등에 활용하고 있다.
독일인 건축사 브로트라거(I. Brottrager)는 동양과 다른 유럽 풍수론을 주창한다. 영국인 킹스턴(K. Kingstern)의 풍수서 '풍수로 잡동사니 치우기'는 전 세계에서 100만부 이상이 팔렸다. 본격 풍수서는 아니지만 동아시아 풍수 관념을 수용한 '비밀(The Secret)'이란 책도 선풍적 인기를 일으켰다.
서구인들이 풍수를 호의적으로 수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만물을 키워내고 다시 거둬들이는 어머니로서 대지(mother earth)'라고 하는 낭만주의가 그들의 무의식 속에 흐르기 때문이다. 일종의 풍수적 관념이다. 이 때문에 풍수에 관한 한 동서양 간에 문화적 충돌이 생기지 않는다. 본래 서양인들이 갖고 있던 '풍수적 관념'은 어떤 것일까? 독일 속담이 하나 있다. "그대가 어떻게 거주하는지를 말해주시라. 그럼 나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말해 드릴 터이니!" 한 사람의 집과 이를 받치고 있는 땅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집은 그 사람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고까지 말한다. 좋은 옷과 화장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꾸미듯, 집도 꾸며야 한다. 왜냐하면 집은 가족을 안아주고 키워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생활 풍수 원칙 가운데 핵심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끌어당김 법칙(law of attraction)'이다. 우주에는 다양한 기운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끌어 쓰면 된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부자들과 가까이하고, 그들의 행동을 습관화하라! 큰 정치인이 되고 싶은가? 큰 정치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고, 그들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고 따라 하라. 결혼을 원한다면 침대에 베개를 하나가 아닌 두 개를 놓고, 옷장도 미래의 배우자를 위해 반은 비우라. 이러한 끌어당김 법칙은 풍수의 동기감응(同氣感應)론의 변용이다.
동기감응론이란 '조상의 기와 자손의 기운이 서로 감응하고(묘지 풍수), 주변의 기와 나의 기가 서로 감응한다(주택 풍수)'는 주장인데, 서양인들은 이 가운데 후자를 중시한다. 노부부 집이라면 유명 화가 그림이 아닌 손자·손녀들의 순진무구한 그림 한 점을 걸어두라. 더 많은 기쁨과 건강을 줄 수 있다. 추상화나 조화롭지 못한 그림은 스트레스를 줄 뿐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집은 밝은 색을 활용하면 집 안이 환해지고 가족도 명랑해진다. 수정석(水晶石)은 대지의 영혼을 전해주는 전령사이다. 잘 보이는 곳에 수정석을 놓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 부드럽고 친근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가? 소리가 좋은 풍경(風磬·작은 종)을 문에 달아라.
거울은 필수품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큰 거울은 분산·반사 기능이 있어 좋지 않다. 침실에 있는 스탠드 거울도 또 다른 나를 만들기에 좋지 않다. 현관의 대형 거울은 더더욱 좋지 않다. 들어오는 복을 쫓아낸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는 집이라면 좋은 향수를 뿌려보시라. 금방 팔릴 것이다.
둘째, 비움 원칙이다. 장기간(최소 1년) 쓰지 않는 물건(가구·옷·책·주방용품 등)을 버려라. 번민할 때 마음을 비우고 몸이 좋지 않을 때 단식으로 몸을 비우듯 집도 가끔은 비워야 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가. 쓰지 않는 물건들을 치워보시라. 비움은 '불편했던 과거'와 '나쁜 기운'을 몰아내 준다. 비워진 자리는 새로운 미래와 행운으로 채워질 것이다.
서양의 생활 풍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바꿀 수는 있다. 끌어당김과 비움 원칙을 활용함으로써!'
09.19 가뭄·화재에 취약한 수목장… 화재 위험 없고 벌초할 필요도 없는 암석장이 대안
추석이 다가오면서 여기저기 벌초하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깔끔하게 단장된 묘역들이 이 산 저 산 숨어 있다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산 사람도 사람이고 죽은 사람도 사람'이라는 관념이 우리 민족의 생사관이다. 그러한 생사관은 산 사람에게 집(양택)이 필요하듯 죽은 사람에게도 집(음택)을 만들어드려야 한다고 상념하게 하였다. 명절이 오면 음택 역시 깔끔하게 한다는 의식행위가 벌초이다.
필자 역시 일 년에 벌초를 두어 번 한다. 한식 즈음 갓 자라기 시작하는 잡풀만 손으로 뽑고 장마가 끝날 즈음과 추석 전에 벌초를 한다. 그런데 쉬운 일이 아니다. 작년 이맘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봉분이 하나 더 늘었다. 낫질은 이력이 나 어려운 일이 아니나 몇 개의 산소를 혼자 감당하기가 어렵다. 예초기 구입을 생각해보았지만 그만두었다. 기계치인데다가 여름날 예초기 작업은 너무 힘들다. 할 수 없이 아는 분에게 벌초를 부탁하고 필자는 옆에서 갈퀴로 깎인 풀들을 긁어내는 일로 직접 벌초 못함을 갈음한다.
그런데 걱정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조상님 산소를 관리하겠지만 그 이후는 누가 할까?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시골과 선산은 낯선 곳일 뿐이다. 그렇다고 선산을 놔두고 조상묘를 공원묘지로 옮길 수도 없는 일이다. 일부 문중들이 조상묘를 납골당(묘)으로 모시는 것을 본다. 그러나 곳곳에 난립하는 납골당들이 훗날 전 국토를 뒤덮는다면 이 또한 문젯거리이다.
최근 유행하는 수목장을 생각해보았다. 수목장이 요즘 꽤 유행하는 장법(葬法)이긴 하나 꼼꼼히 따져봐야 할 점들이 있다. 원래 수목장은 독일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리 오랜 장법이 아니다. 전 국토의 30% 이상이 숲인 독일의 경우 숲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일 문학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독일의 여름은 덮지 않고 겨울 또한 춥지 않다. 필자가 공부했던 곳이 독일 뮌스터이다. 그곳 사람들이 뮌스터의 특징으로 하는 말이 있다. "뮌스터에 오면 비가 내리거나 종이 울린다." 성당의 종소리가 자주 울리는 것과 비가 자주 내리는 것을 말한 것이다. 독일 기후조건의 한 단면이자 독일에 숲이 발달하고 수목장 문화가 싹튼 배경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겨울은 몹시 춥고 봄가뭄이 심하다. 나무가 일년 내내 고르게 자랄 수 없으며 산불이 자주 난다. 자기 선산에 수목장을 하고 주변에 화소(火巢·산불방지를 위해 묘 주변을 빈터로 남겨 놓은 것)를 만든다면 모르되, 산불위험은 상존한다.
주요 수종인 소나무는 전국으로 확산 중인 재선충병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산불과 병충해로 나무가 죽거나 훼손된다면 후손으로선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또 있다. 역사학자이면서 풍수전문가이기도 한 김기덕 교수(건국대)의 비판도 새겨들을 만하다. "수목장은 기존의 매장제도와 화장제도에 대한 새롭고 아름다운 대안으로 등장하였으나 지나치게 비싸며 넓은 공간을 차지하여 또 다른 호화분묘가 되고 있다."실제 수목장 1기가 수천만원에 달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풍수적 관점에서 다른 대안은 없을까? 다름 아닌 암석장(巖石葬)이다. 우리민족의 암석장 전통은 이미 고조선에서부터 시작한다. 고인돌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석(박힌 돌) 밑이나 근처에 유골을 평장(平葬)하는 것이다. 뒷동산 너럭바위도 좋고, 시골 밭 구석에 박힌 돌도 좋다. 풍수적으로 좋은 바위는 속발(速發·빠른 명당발복)과 강발(强發·강력한 발복)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주먹만한 돌이 금과 옥보다 더 귀하다(拳石勝彼金玉)'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할 정도이다. 바위 그 자체가 비석이 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화재의 위험이 없다. 벌초할 필요도 없는데다가 풍수적 이점이 있으니 일석오조(一石五鳥)이다. 산에 바위가 많은 우리나라의 장법으로 적절하다. 필자는 진지하게 암석장을 고려하고 있다.
10.03 단재가 한민족 첫 正史로 소개한 '神誌?詞'… 조선시대 禁書목록에 오른 까닭은
/1931년 6월 10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일보 학예란에 기고를 시작한 ‘조선사’.
1931년 6월 10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일보 학예란에 '조선사' 연재를 시작한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는 명문장으로 '조선사'는 시작한다. 그해 10월까지 103회가 연재되면서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고 훗날 책으로 간행되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조선상고사'이다.
여기서 단재는 우리 민족 최초의 정사(正史)를 '신지비사(神誌�詞)'라고 소개한다. 단군조선 때 신지라는 사관이 쓴 비사이다. 단재는 '신지비사'가 우주창조·단군조선의 건국·산천지리 등을 노래한 것으로 훗날 고려 때의 '해동비록'에 일부 내용이 요약 정리돼 포함되었다고 말한다. '해동비록'은 1106년 예종의 명에 의하여 당시 풍수서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신지비사'는 역사서이자 풍수서이기도 한 셈인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지비사'에서 단재가 주목한 것은 삼경설(三京說)이다. 저울대·저울추·저울판 이 세 개가 갖춰져야 저울이 제 기능을 다하듯 나라도 세 개의 수도(삼경)가 있어야 나라가 번성하여 주변 70개국이 조공을 바칠 거란다. 저울대·저울추·저울판설은 중국의 그 어떤 풍수서에도 등장하지 않는 우리 민족 고유의 풍수설이다. 그 흔적은 고구려의 삼경제·고려의 삼경제 등에서 드러난다.
'신지비사'가 말하는 삼경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고려의 풍수관리 김위제는 평양·개성·한양을 꼽았다. 그러나 단재는 하얼빈(哈爾濱)·안시성(安市城)·평양이라고 반박하였다. 아울러 단재는 고대 우리민족이 활동했던 드넓은 영토를 망각하고 후세인들이 '도깨비도 뜨지 못하는 땅 뜨는 재주를 부려 만주 땅에 있던 지명들을 한반도로 옮겨 스스로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하로 축소시켰음'을 비판하였다.
'신지비사'는 그 후 어찌 되었을까? 고려왕조까지 은밀히 전해지다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금서가 된다. 조선의 태종·세조·성종은 고려의 수많은 풍수·음양서·비기(�記)들을 금서로 지정하여 소각하거나 비장시킨다. 그 가운데에서도 '신지비사'는 금서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예컨대 태종은 1412년 8월 충주사고에 비장된 비결들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신지비사'만큼은 그 누구도 보지 말고 밀봉한 채 가져오게 할 정도였다. 태종은 '신지비사'를 직접 펼쳐본 뒤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하고 근거 없는 주장들"이라고 하면서 불태우게 한다. '신지비사'가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시점이다(단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았다).
왜 조선왕조는 그토록 '신지비사'를 없애고자 하였을까? '신지비사'는 우리 민족의 활동 주요 무대를 만주로 보았으나 조선은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남으로 한정시켰다.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론을 부정하고 세워진 나라이다. '신지비사'는 우리 민족이 70개국의 조공을 받는 동아시아 최강국을 표방함에 반해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신지비사'가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가 이 책의 내용을 알까 두려웠다.
이후 '신지비사'는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역사학계의 태두인 이병도 박사 소장설이 나왔다. 이병도 박사가 '진단학보' 창간사에서 "신지가 썼다는 비사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훗날 박성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역사학)가 이 박사와의 언론사 인터뷰에서 '신지비사' 소유 여부를 물었다. 그때 그는 묘한 표정으로 답변을 회피했다고 한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문헌 고증을 중시하였던 이병도 박사이고 보면 어디엔가 비장하고 있지 않았을까. 언젠가 '신지비사'가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드넓은 만주 땅에서 활동하였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다시 쓰일 것이다.
10.31 개는 富를, 고양이는 가난을 부른다?… 中과 독일의 일맥상통 동물 풍수
/효종이 시집간 딸 숙명 공주에게 보낸 편지. 첫 문장에 딸이 지나치게 고양이만 사랑하여 아이가 생기지 않음을 에둘러 꾸짖는 내용이 담겨 있다. 숙명 공주는 시집가서 6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다가 이후 아들 둘을 낳았다. / 김두규 교수 제공
인간만이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이 아니기에 풍수에서도 이웃 짐승과 맺은 관계를 종종 다루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택소육축다론(宅小六畜多論)이다. 집이 작은데 여섯 가지 짐승(육축·六畜)이 많으면 집안이 번창한다는 주장이다. 과거 농경·유목사회에서 짐승은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육축이란 말·소·양·돼지·개·닭을 뜻한다.
육축론(六畜論) 말고도 짐승과 관련하여 그 길하고 흉함을 따지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묘쇠견왕설(猫衰犬旺說)도 그 하나이다. '고양이는 가난을 부르고 개는 부자를 만든다(묘초궁구래부·猫招窮狗來富)'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식육 가능성, 호신용, 사냥 수단 등 실용적인 점이 제시될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미신적 관점에서 묘쇠견왕설이 힘을 받는다. 개는 '왕왕' 하고 짖는데 가운(家運)을 왕성하게 해준다는 '왕(旺)' 하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에 길한 반면, 고양이는 한자 발음(묘·猫)과 울음소리가 멸(滅·멸망)·몰(沒·몰락) 등을 연상시켜 불길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이야기이다.
2011년 국립청주박물관이 발간한 '숙명신한첩'은 효종의 딸 숙명공주가 왕실에서 받은 편지 모음이다. 여기에 효종이 딸에게 주는 편지 한 통이 있다. "너는 시집에 가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찌 고양이를 품고 있느냐…." 시집을 간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아기가 생기지 않자 남편에게 정성을 바치지 않고 고양이만 품고 사는 딸을 에둘러 꾸중하는 말이다.
독일 민간에서도 짐승들이 터 잡기에 참고가 되었다. 개·말·소·돼지·양·제비·황새 등이 사는 곳은 사람들도 살기 좋은 터로 보았다. 제비를 길조로 보는 것은 우리와 같다. 우리 조상이 처마 밑에 제비가 집 짓는 것을 반긴 것과 같다. '흥부가 제비 덕분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나 '황새가 갓난아이를 가져온다'는 독일의 전설도 좋은 터 덕분에 집안이 번창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반면에 고양이·토끼·올빼미·뱀·개미 등의 서식지는 인간의 삶터로서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이 선호하는 터는 되레 인간의 수면·건강·기분을 나쁘게 한다는 주장이다. 고양이가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흥미롭다.
동물마다 좋아하는 서식지가 다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어 왔다. 지하 수맥, 땅의 단층, 지질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는데 이러한 터를 찾는 전문가(루텐겡어·Ruteng nger)와 도구(뷘셸루테·W nschelrute)가 이미 15세기부터 있어왔으며, 지금도 직업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독일의 주무 관청과 관련 학회들이 루텐겡어나 이들이 활용하는 도구가 과학적이라고 공인한 적은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것들(수맥·단층 등)이 동물과 인간의 길흉에 영향을 끼친다는 속설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애완동물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동물을 사랑한 나머지 생활 및 수면 공간을 함께하거나 마치 자식이나 친구처럼 품고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간과 동물이 소중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같으나 그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 삶의 방식과 터전이 다를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유학자들의 논쟁, 즉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기현 교수(전북대·퇴계학)는 말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랑함이 인간에 대한 것과 같을 수 없다.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며 그에 따라 그들의 거처가 달라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과 동물의 올바른 공존을 위한 풍수 논리이기도 하다.
11.28 天子를 꿈꿨던 장제스는 왜 집무실 책상을 北西向으로 놓았나
최근 롯데 측은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제2롯데월드 최고층으로 집무실을 옮길 계획인데 "그만큼 안전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회장님 집무실은 몇 층 어느 방향으로 해야 할까? 새 지도자가 취임할 때 측근 참모가 은밀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문제를 푸는 열쇠는 지도자의 권위와 영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위치와 좌향(坐向)'이다.
풍수적 관점에서 최고 지도자의 집무실 배치는 몇 가지 원칙에 따른다. 첫째, 깊숙한 곳(심처·深處): 왕이 거주하던 구중심처(九重深處). 둘째, 높은 곳(고처·高處): 심리적·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곳(사옥의 고층). 셋째, 벽에 등을 댐(배벽·背壁): 책상은 벽을 등져야 하며 창문에 등을 대서는 안 된다. 넷째, 북서쪽(건좌·乾坐): 북서쪽은 팔괘상 건좌로서 하늘·임금·아버지를 상징. 물론 이러한 원칙은 총론일 뿐이다.
/중국 난징에 있는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의 집무실 내부. 일반적인 최고 지도자 집무실 배치 원칙과 반대로 책상이 동남쪽 모서리를 등지고 있다. / 김두규 제공
장제스(蔣介石) 총통 이야기이다. 중국 난징(南京)에 가면 1949년까지 그가 집무했던 총통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총통 집무실 위치와 책상 배치다. 집무실은 건물 2층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데, 책상도 집무실 내 동남쪽 모서리를 등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풍수사들이 말하는 임금 자리인 북서쪽(건좌)과 반대되는 곳에 위치한다. 풍수 총론과 사뭇 다른 배치다. 장 총통 고유의 풍수설 때문이다.
장 총통이 풍수설을 선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21년 어머니 왕씨가 죽자 장제스는 당시 상하이에 머물던 샤오쉬안(肖萱)이라는 풍수사를 찾아가 묘지 선정을 부탁한다. 샤오쉬안은 장제스와 함께 고향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진에 가서 길지를 잡아준다. 이후 여러 군벌을 제압하고 권력을 강화한 장 총통은 이것이 명당 덕이라 생각하여 더욱더 풍수를 굳게 믿는다.
총통부 건물 동남쪽에 집무실을 정한 것은 바로 선영의 명당 기운을 받으려 함이었다. 선영은 난징 동남쪽 수백㎞ 떨어진 시커우진에 있다. 또 책상이 집무실 동남쪽 모서리를 등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때 책상이 바라보는 쪽(向)은 북서쪽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좌(坐)는 등쪽(뒤쪽)을 말하며 향(向)은 앞쪽을 말한다. 좌는 과거·어른·조상의 기운을 주관하며, 향은 미래·아랫사람·후손의 기운을 주관한다. 책상이 북서쪽을 향하고 있음(건향·乾向)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를 말한다. 팔괘상 건(乾)은 하늘·임금 등을 상징한다고 이미 말했다. 장 총통이 장차 천자가 되겠다는 뜻이자, 동시에 북서쪽에 있는 홍군(마오쩌둥 군대)을 진압하겠다는 의도였다. 장 총통은 이러한 풍수 행위를 공공연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은 조상의 명당을 매개로 하여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 즉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국민에게 심어주고자 함이었다.
"그렇게 명당 발복을 받은 장 총통이 왜 타이완으로 밀려났는가"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 경제학 교수였으며 주역·풍수, 중국 권력사 등에 조예가 깊은 장화수 전 중앙대 교수는 의견을 달리한다. "장 총통은 분명 명당 덕을 보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승승장구하여 1945년 8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타이완을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뒤를 이음으로써 2대 제왕의 집안이 되었다."
풍수적으로 회장 집무실을 사옥의 몇 층 어느 방향으로 하느냐에 대한 각론은 없다. 회장의 철학이 반영되어 구성원들로 하여금 회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부심을 갖게 함이 중요하다.
12.26 수많은 인재 배출한 吉地 古宅들… 어느덧 주인 잃고 빈집으로
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 옛 어른들은 말했다. "여자는 울타리를 얻고, 남자는 일꾼 하나를 얻는 것이 결혼이다." 지극히 실리적인 사고다. 결혼을 하였으되 자녀를 낳아야 하는가? 무자식이 상팔자라던데! 그러나 맹자는 말한다. "가장 큰 불효는 후손이 없는 것이다(無後爲大)." "후손을 통해 자기 존재가 이어지는데 후손이 없음은 자기 존재의 소멸이라는 불안과 공포를 야기한다. 이것을 맹자는 불효라는 개념으로 도덕화한 것이다."(김기현 전북대 교수·퇴계학)
/조선 정조 때 ‘태교신기’를 쓴 사주당 이씨 묘의 앞모습과 뒷모습. 경기도 용인에 있다. /김두규 교수 제공
자녀를 낳되 하나가 좋은가, 많은 게 좋은가? 이에 대해서는 미국의 경제학자가 명쾌한 답변을 준다. 라이벤슈타인(H. Leibenstein)은 자녀의 3가지 효용을 말한다. 첫째, 자녀 그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되는데 이것이 소비 효용이다. 둘째, 자녀가 커가면서 가져다주는 노동과 소득이 있다. 이것이 노동 효용이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노후를 자식들이 뒷감당하는데 이것이 바로 연금 효용이다. 자손이 많을수록 집안 번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풍수에서도 다산을 큰 덕목으로 여긴다.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손이 끊기는 자리, 즉 절손지지(絶孫之地)였다. "맥이 잘리거나 파괴된 곳, 초목이 자라지 않는 곳, 바위가 나오는 곳에 집을 짓거나 무덤을 쓰는 것"이라고 '청오경'은 말한다. 다자녀가 좋다. 그러나 "자손의 선악, 귀천, 빈부, 장수와 요절 등이 모두 터의 탓"이라고 '명산론'은 주장한다. 훌륭한 자녀를 두어야 한다. "영웅호걸이 태어난 곳은 산천 정기가 오롯이 모였기 때문이다"라고 '의룡경'은 적고 있으며, "흉지를 쓰면 당대에 망한다"고 '착맥부'는 말한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에 이와 같은 터 잡기를 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훌륭한 자녀를 두기 위한 '원 포인트 레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태교신기(胎敎新記)'를 권한다. 이 책은 사주당(師朱堂) 이씨(1739~1821)가 쓴 것으로 내용의 훌륭함을 보고 정인보 선생이 발문을 썼다. 1932년에 이미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 여자중학교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사주당은 말한다. "그러므로 스승이 10년 가르치는 것이 어머니가 열 달을 배속에서 기르는 것만 못하고, 어머니가 열 달 기르는 것이 아버지가 하루 낳음만 못하다." 풍수와 관련된 것은 "아버지가 하루 낳음(父一日之生)"이란 대목이다. "아버지가 하루 낳음"이란 부부가 자녀를 갖기 위한 잠자리를 뜻한다. 좋은 장소에서 좋은 시간에 잠자리를 갖는 것을 말한다. 어떤 곳이 좋은 터인가는 상대적으로 주관적일 수 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때와 장소가 있다.
천둥벼락 칠 때, 술 취했을 때, 화났을 때, 큰 병 앓은 후, 부부싸움 직후 등등의 시간은 피해야 한다. 들에서 잠자리를 갖는 것은 야합(野合)이라 하여 피하게 하였다. 큰 바위 밑, 신을 모신 사당 근처, 막다른 골목집, 공동묘지와 전쟁터, 망해 나간 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곳, 고압선과 냇물이 인접한 곳, 암괴가 있는 곳들도 피해야 한다.
전국에 길지 고택들이 많다. 한때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터들이다. 도시화와 이·탈농으로 주인을 잃고 빈집으로 남은 곳이 많다. 이러한 곳들을 신혼부부를 위한 잠자리로 제도화함도 하나의 방법이다. 허니문 베이비를 염두에 두고 신혼여행을 갈 때(특히 해외여행의 경우), 여행지가 좋은 곳이어야 함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다자녀도 좋고 훌륭한 자녀 한 명도 좋다. 모두 집안과 국가를 흥하게 하는 귀중한 자원이다
2016.03.26 정치판 줄서기를 보며 풍수 라이벌 목효지와 문맹검을 떠올리다
'배신은 낙천, 줄서기는 공천.' 최근 국회의원 공천 심사를 보면서 떠오르는 단상이다. 배신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으나 줄서기의 한자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줄서기는 아부(阿附)의 다른 말이다. 언덕[阿]에 기댄다[附]는 뜻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이한우 '아부의 즐거움'). 정치판을 보면 무엇이 배신이고 무엇이 아부(줄서기)인지 혼란스럽다. 조선 풍수사(風水史)를 통해 이를 분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목효지와 문맹검이란 인물에게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둘은 라이벌로 세종과 세조 사이에 활동한 풍수들이다. 둘의 운명은 세조의 즉위와 더불어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목효지는 교수형을 당하였고 문맹검은 원종공신이 된다.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목효지는 단종 편에 줄을 섰고, 문맹검은 수양대군(세조)에게 줄을 섰다. 아부, 즉 줄서기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목효지는 300여년 후인 1791년 정조 임금에 의해 신원된다. 문맹검이 현실에서 승리한 반면, 목효지가 역사의 승자처럼 보인다. 목효지는 진정 충신이었고 문맹검은 배신자였을까? 풍수사적 관점에서 보면, 목효지가 옳았고 문맹검이 틀렸다고만 말할 수 없다.
목효지는 본디 노비였다. 세종 23년(1441년) 세종의 며느리 권씨가 왕자(훗날 단종)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죽는다. 장지가 안산(현재 안산시 목내동)으로 정해졌다. 이때 목효지가 '그 땅은 장차 후손이 끊길 땅'이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훗날 그 예언은 적중한다). 또 문종이 죽자 장지를 태종과 세종의 무덤(현재 서울 서초구 헌인릉) 부근으로 정한다. 이때 목효지는 그 땅이 주인(임금인 단종)은 약하고 손님(당시 실세인 수양대군)이 강하게 될 이른바 "주약객강(主弱客强)의 흉지"라고 주장한다(그의 예언은 곧바로 사실로 증명되는데 광중에서 물이 솟았기 때문이다). 목효지는 실로 풍수 고수였다. 그런 그가 왜 죽임을 당했을까? 그는 '풍수 확신범'이 되어 임금의 통치행위를 무시하려 들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불당(佛堂) 설치 불가론이었다. 세종이 경복궁 뒤에 불당을 설치하려 하자 목효지는 격렬하게 반대한다. 풍수적 관점에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세종의 역린을 건드릴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세종은 그를 다시 노비로 환속시켜 버린다.
그의 라이벌 문맹검은 어떠했을까? 두 가지가 그를 원종공신이 되게 한 배경이다. 첫째, 그는 임금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불당 설치를 찬성하였고 터잡기에 직접 참여한다. 왜냐하면 임금의 통치행위에 풍수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국토 및 도시 관리 차원에서 풍수를 논한다. 당시 한양 도성의 풍수 취약점이 있지만 그것은 비보풍수로 해결할 수 있는 자잘한 문제로 보았다. 대신 그는 한양은 중국의 도읍지에 버금할 수 있는 삼원(三垣·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천문이 반영된 최고 길지)의 땅이라고 하여 왕실과 백성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고자 하였다.
이처럼 목효지와 문맹검의 풍수는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목효지가 묘지풍수만을 전부로 알고 자신만이 최고의 술사라고 고집을 부렸다면, 문맹검은 임금의 통치행위와 국역 관점에서 풍수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아부는 좋은 것이며 배신은 나쁜 것인가? 목효지의 아부는 단견이었고, 문맹검의 배신은 왕실과 국가를 염두에 둔 풍수적 배신이었다. 분명한 것은 확연대공(廓然大公·마음을 넓게 하여 크게 공평무사함)을 전제하는 배신은 배신이 아니며, 소아(小我·사적 욕망에 사로잡힌 자아)에 집착한 아부는 진정한 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04.09 先塋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
지난 3월 말 중국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답사 때 저장대학 백승호 교수(역사학)가 동행하였다. 조선족 출신의 중진학자다. 처음 만난 필자에게 그는 "풍수는 미신인가 과학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중국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그의 입장에서 '풍수가 미신'임을 전제한 질문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질문이다. 결코 증명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주제다.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풍수는 과학도 미신도 아닌 아주 오래된 전통문화이다.
/경남 함양군에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조부 묘(위)와 서울 우이동 김 대표의 부친 묘. / 김두규 제공
한 가문에도 다양한 문화가 켜켜이 쌓여 가풍을 이룬다. 가풍에 따라 집안의 흥망성쇠가 달라진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공공기관 지방이전 특별법에 따라 해양경찰학교가 전남으로 이전해야 했다. 최종 결정에 앞서 당시 이승재 해양경찰청장은 필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후보지들을 개관하고, 다시 땅에 내려 현장을 보면서 비교평가를 했다(최종 결정된 곳은 여수 오천동으로 지금은 해양경찰교육원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친해진 이 청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청장의 집안은 윗대에서부터 3대에 걸쳐 한 번씩 선영을 길지에 잡는 전통이 있다고 했다. 이럴 경우 그 집안의 터 잡기에 일정한 특징이 드러난다. 클라이언트가 선호하는 땅과 지관의 실력이 결합하여 드러나는 특징이다. 아름다운 바위를 의지하여 잡기도 하고 산턱을 취하기도 하고 산자락에 쓰기도 한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필자는 청장께 선영 구경을 부탁했다. 예상대로 그 집안 고유의 터 잡기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그 집안의 가풍이다.
벌써부터 2017년 대선후보들의 미래가 궁금해서인지 호사가들의 발길이 바쁘다. 대형 관광버스를 동원하여 유력 후보들의 선영들을 찾을 정도이다. 풍수는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선영의 입지 선정과 관리를 통해 드러난 집안 고유의 가풍을 통해서이다.
총선 후 대표직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대선 가도를 달리겠다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의 선영은 경남 함양군 함양읍 신천리(고조부모)·이은리(증조부모)·유평리(조부), 그리고 서울 우이동(조모 및 부친) 등에 있다. 모친의 경우 익산 영묘원(원불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모친이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까닭이 바로 "조상님 뼈가서 묻힌 곳"(김소월 시 '고향')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 가문의 두드러진 풍수 특징은 증조부모·조부·조모 묘가 거의 똑같은 형세를 취한다는 점이다. 동일 지관 혹은 계보가 같은 지관과 특정 후손의 풍수관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이에 대해 올해 전북대에서 '조선 후기 호남파 실학자의 풍수인식'으로 학위를 취득한 유기상(전 전라북도 기획관리실장) 박사의 간산(看山·묏자리를 구하려고 산을 돌아봄) 평이 흥미롭다. "비룡입수(飛龍入首)를 좋아하고 인작(人作·묘역 조경)으로 명당을 만들어가는 점이 김 대표 집안의 특징이다." 지맥(來龍·내룡)이 주산에서 한번 푹 꺼졌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 듯 치솟은 산턱에 무덤을 쓰는 것을 비룡입수라고 한다. 용이 하늘로 승천(飛龍上天·비룡상천)하기 위한 전 단계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2항은 유승민 의원 때문에 온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가? 잠룡(潛龍)들 사이에서 권력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선영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권력 의지이다. '30시간의 법칙'이란 별칭을 얻게 된 김 대표가 비상하는 용이 될지….
06.04 서울의 명당이 바뀌고 있다… 권력과 돈줄도 따라 움직일까
/서울 태평로1가 프레스센터 앞에 있었던 금융위원회 표지석 모습(위)과 최근 경기도 양평으로 옮겨진 모습 / 두규 제공
"서울의 명당 구조가 바뀌고 있다." 직관에 관한 한 독보적 능력을 가진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최근 필자에게 들려준 말이다. 명당이란 사람이 활동하는 일종의 '판(field)'이다. 명당 구조가 바뀐다는 것은 판이 바뀐다는 뜻이다. 판이 바뀌면 권력과 부(富)의 판도 바뀐다. 서울의 명당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극히 작은 변화 혹은 사소한 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지난 5월 중순 주요 신문들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프레스센터에 입주하고 있는 금융위원회가 정부서울청사로 이전하면서 금융위원회 표지석이 폐기 처분의 위기에 처했다. 김석동 전 위원장이 이를 가져가기로 했다. 훗날 정부가 요청하면 되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바위에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 그것은 혼(魂)을 갖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에 관한 책은 11세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사쿠테이키(作庭記)'이다. 풍수 핵심 내용을 또한 담고 있어 풍수의 중요 고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정원 조성의 3대 요소로서 산·바위·물을 꼽는다. 그런데 '사쿠테이키'는 세 요소를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의인화한다. 산은 임금으로, 바위는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로 그리고 물은 인민으로 본다. 바위(신하)는 산(임금)을 지탱하고 물(인민)의 흐름을 조절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김 전 위원장이 표지석의 의미를 알고 있었음일까?
표지석 사건은 언뜻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나의 작은 사건일 뿐이다. 점(占)에 관한 최고 경전 '주역'의 기본 정신은 "작은 변화(낌새)를 보고 다가올 변화를 대처함(견기이작·見機而作)"이다. 중국 갑부인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회장이 풍수를 신봉한다고 이전 글(5월 7일자)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풍수의 제일 원리는 변화에 주의해야 함(風水的第一 原理,改變千萬要注意)"이라고 하였다. 표지석 사건도 하나의 작은 낌새이다.
처음 금융위원회 사무실은 서울 반포에 있었다. 이후 여의도와 프레스센터를 거쳐 서울정부청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부부처 이동은 흔한 일이기에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풍수학인의 눈에는 이러한 정부부처 이동은 단순한 집무실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의 변화로 보인다. 특히 금융위원회가 민간 경제 돈의 흐름에 절대적 영향을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수도 한양의 핵심(core) 명당(판)은 사대문 안이었다. 권력과 부의 중심이 사대문 안에 있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본질적 변화는 없었다. 청계천 상류에 관공서와 언론사, 중류에 대기업 그리고 하류에 중소기업들이 포진하였다. 조선과 대한민국의 권력과 부는 바로 이 청계천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서울의 외연이 한강을 넘어서까지 확대되었다. 주요 정부부처와 사옥들이 사대문 안을 벗어나 이쪽으로까지 진출함이 그 방증이다. 이들의 이동은 힘의 이동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동과 분포를 보고서 미래 권력과 부의 이동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풍수논리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불변의 것은 산과 물이며, 변하는 것은 길(도로)이다. 북악산(인왕산)과 청계천이라는 산과 물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길은 바뀐다. 길이 바뀌면 그 길 따라 관력과 부가 움직인다. 한때 대기업 사옥들이 남대문―태평로―세종로 혹은 서소문로―태평로―세종로 주변에 포진했던 것도 서울역과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바뀌는 것은 또 바뀔 수 있다. 불변의 산과 물에 잔류 혹은 새로 진입하는 세력이 미래 권력과 부의 주역이 될지, 아니면 신작로를 따라 움직이는 쪽이 미래의 주역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06.18 대선 가까워지면 조상 묘 이장하는 정치인들 많이 봤지만…
/서울 우이동에 있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묘의 모습(위)과 경남 함양으로 이장하고 난 뒤 모습. /김두규 제공
독일 문학에서 풍수학으로 전공을 전환한 게 2000년 가을 학기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주요 월간·주간지에 풍수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풍수 글쓰기 경력은 햇수로 20년이 넘는다. 우리 풍수의 변천사를 기록함이 필자의 관심사이다. 우리 풍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잠룡(潛龍)들이 종종 조상 묘를 이장한다는 점이다. 김대중·이회창·김종필·이인제·김덕룡·한화갑 등이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그랬다. 혼령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타향에 묻히는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권력과 풍수'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2010년 8월 어느 날이었다. 어느 풍수술사들의 논쟁을 지켜볼 기회를 가졌다. 사연이 자못 흥미로웠다. 2007년 야당 대선 후보로 나선 J씨 선영 이장을 둘러싸고 풍수술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필자가 '참관인'이 된 계기였다. 당시 현장에는 풍수술사들과 J씨의 처남이 있었다. 필자는 그에게 "왜 이장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대선에서 실패하고 당내에서도 제대로 힘을 펴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정치철학이 빈곤해서 떨어졌지 어찌 풍수 탓일까요"라는 말이 엉겁결에 필자 입에서 튀어나왔다. 말하고 보니 주제넘은 짓을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한국 정치인들과 재계인들의 풍수관은 사뭇 다르다. 풍수 이해도에서 정치인들은 기업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또 정치인들은 성급함과 공격성을 노골화하는 반면, 기업인들은 수성(守城)을 위해 원만함을 중시한다.
그런데 최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선영 이장 사건'이다. 언론들은 김무성을 이장의 주체로 보고 있지만 무엇인가 이상하다. 이번에 서울 우이동에서 경남 함양으로 이장된 당사자는 김용주(전남방직 회장)로 해방 이후 정·재계의 원로였다. 그는 큰딸·큰아들·둘째 아들 그리고 셋째 김무성 전 대표 등의 자녀를 두었다. 김 전 대표가 잠룡이기는 하나 그의 누나와 형들도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실력자들이다. 셋째 아들인 그가 선영 이장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이동에 김용주 회장이 인연을 맺은 것은 1963년의 일이다. 김 회장 어머니가 1963년 돌아가시자 명풍수 박중구(작고)가 묘를 잡아주면서이다. 이후 김 회장도 그 옆 지맥에 묻혔다. 이곳을 답사한 정기호(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는 "포근한 땅이자 풍수 이론에 부합하는 터"라고 평한다. 김 전 대표 집안에서 이장 이유로 내세운 것이 인근 개발로 인한 소란스러움이지만, 울타리가 쳐진 데다가 관리인의 상주로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다. 또 할머니(김용주 모친) 묘를 함양에 있는 할아버지 묘 옆으로 옮기라는 유언을 이장 이유로 내세웠지만, 유언처럼 옆에 묻히지도 않았다.
풍수학인의 눈에 무엇인가 분명치 않다. 우이동 기존 선영은 잘 가꿔진 묘지정원이었다. 반면 함양 선영은 성묘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데다가 보안에도 어려움이 있다. 또 조상 묘 아래 무덤 쓰는 것이 조선 후기 관습인데, 조상 묘 뒤로 이장을 하여 이른바 역장(逆葬)을 하였다(역장이 풍수상 잘못은 아니나 드문 일이다). 그뿐만 아니다. 풍수사들은 산 능선이 끝나는 지점을 선호하는데, 새로 이장한 두 기의 묘(김무성 부친 및 할머니 묘)는 산 능선 중간 부분, 즉 과룡(過龍)에 쓰고 있다.
김 전 대표 집안일이기에 누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다만 대권을 꿈꿨던 이전 정치인들의 행태와 닮았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은 '풍수집의(風水集議)'에서 말했다. "명당발복을 염두에 두고 이장을 하였으되 부모의 뜻이라 둘러댄다면 그 변명은 병든 세상의 논의이다." 풍수에 관한 한 다산이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병든 세상[病世]'은 아닌지!
07.02 서거정은 정인지의 묘비문에 왜 사주를 적어넣었을까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가면 쉽게 정인지(鄭麟趾) 묘를 찾을 수 있다. 정인지는 조선 초 정치가·성리학자·한글학자·역사가로서 그의 학문 세계는 넓고 깊었다. 아들과 손자 둘이 부마(임금의 사위)가 되었으며, 증손녀는 선조 임금의 생모가 된다. 정인지 가문이 얼마나 크게 번창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정인지 묘는 멀리서 보아도 범상치 않다. 묘역을 밟다 보면 땅 기운의 충만함이 풍수 고전 '금낭경'이 요구하는 '바람이 가득 찬 가죽 주머니를 두드림과 같음(약탁지고·若槖之鼓)'을 충족시킴을 확인할 수 있다.
정인지 가문의 번창과 명당 무덤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묘역 앞에 세워진 신도비의 한 대목 때문이다. '丙子十二月辛丑二十八日戊戌乙卯時生(…)四柱與蘇內翰子瞻相同'이란 문장이다. '(정인지는) 병자년 신축월 무술일 을묘시생으로(…) 사주(四柱)가 송나라 한림학사 소동파와 같다'는 뜻이다. 비석에 사주가 새겨진 것은 조선과 근현대를 통틀어 극히 드문 일이다.
비문을 쓴 사람은 서거정으로 정인지와 동시대인이다. 비문에 사주를 써넣은 일은 그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음은 서거정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내 일찍이 문성공(정인지) 묘비를 썼는데 그 비문에 '사주가 소동파와 같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면서 '비문을 지을 때 마땅히 도덕을 말해야지 점복[卜命]을 논해서는 안 된다'고 비웃었다."('필원잡기') 서거정이 비문을 지을 때 자기 마음대로 짓지 않았다. 정인지의 세계관을 최대한 드러내고자 하였다. 정인지는 세종 임금 당시 집현전 풍수학 총책임자로 활동할 정도로 풍수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는 역학(易學)에 심취하여 호를 '역을 배운다'는 '학역재(學易齋)'로 할 정도였다. 그는 조선의 이데올로기인 유학에 구애받지 않은 진정한 인문학자였다.
/충북 괴산에 있는 정인지 묘역 앞 신도비(神道碑) 모습. / 김두규 제공
역사는 반복된다. 500여년이 지난 최근의 일이다. 과학을 강조하는 학술 계간지 '한국 스켑틱(Korea Skeptic)'(2016년 6권)이 음양오행과 사주를 문제 삼았다. '합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려운 음양오행이라는 위험한 농담을 인문학으로 격상시키려 한다'면서 '농담을 진담으로 봐줄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어서 한겨레신문 6월 10일자는 '음양오행과 사주 명리도 학문일까'라는 문제 제기를 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인문학자 고미숙 박사의 사주담론서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고 박사는 서구 학문의 세례를 받은 진보 진영이 음양오행론을 신비와 미신 사이에 가두어 둔 반면 보수 진영과 상류 계급이 음양오행의 정수를 독점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본래 음양오행설의 주류는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술수가 아니었다. 유가(儒家)·묵가(墨家)·병가(兵家)·법가(法家) 등과 같은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법가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 병가를 통해 천하를 정벌하고, 음양가를 통해 백성을 복종시켰다. 사주나 풍수는 음양오행설의 '파생상품'이었다. 사이비 과학이 아니라 시대 문제를 해석하려던 노력이었다. 중국에 원수산(袁樹珊·1881~1952)이라고 하는 유명한 의사 겸 사주 전문가가 있었다. 의사 집안 출신으로 베이징대와 일본에서 공부를 한 지식인이었다. 그가 쓴 사주책 '명보(命譜)'는 '역학·문학·역사·의학·양생학·철학·윤리학 등이 망라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사주가 진정 인문학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평이다. 지금의 한국 음양오행설이 사이비 과학이라고 천시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이른바 '도사(점쟁이·지관)'들의 학문 토대가 빈약한 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인지나 고미숙처럼 사유의 폭이 넓고 깊은 인문학자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07.16 중국·유럽에서 풍수·치료 수단인 보석… 한국선 그냥 '사치품'
동양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도 보석에 질병을 쫓고 행운을 부르는 효험이 있다고 믿어 왔다.
"개성 여인들이 보석에 대한 안목이 있었다."(오윤선 호림박물관장) 왜 한양이 아닌 개성 여인일까? 도읍지를 개성으로 하던 고려는 국제무역 국가였다. 또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실로 시집오면서 공주와 수행원들이 가져온 문물 가운데 보석이 빠질 리 없다. 고려가 망한 지 몇백 년이 지났지만 그 후예들에게 보석 문화가 희미하게나마 전승된 까닭이다. 반면 한양(서울)을 도읍지로 한 조선은 유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한 폐쇄국가였다. '사치품'으로서의 보석 문화가 발달할 수 없었다.
우리와 달리 중국에서는 보석을 풍수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들은 풍수 소품으로 "첫째 옥, 둘째 수정(一玉二水晶)"을 꼽는다. 옥은 미용·귀신퇴치·진정작용·질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믿어져, "몸에 옥을 지니면 재앙도 복으로 바뀐다(身上有玉, 化禍爲福)"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수정 또한 두통·불면·가슴 두근거림을 다스리며, 가정의 행복과 재산 증식을 가져온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수정이 재물과 행운을 부르는 초재(招財)풍수 역할을 한다.
최근 서양에서도 보석은 풍수 소품의 주요 수단이 되고 있다. 미국의 건축·인테리어 디자이너 소린 밸브스가 펴낸 '영혼의 공간'(2011)은 집안을 흥하게 하려면 자수정이나 석영 원석 같은 것을 집안에 놓아두라고 권한다. 왜 그럴까? 독일의 실내 건축가 바바라 아르쯔뮐러가 쓴 풍수서 '영혼의 거울로서 우리 집'(2015)이 이를 설명한다. "보석들은 땅속 깊은 곳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지표면으로 나와 빛에 쪼이면 비로소 그 보석들의 강력한 힘들이 발산되기 시작한다.(…) 질병 치료와 장식으로 보석들을 활용하고자 한 시도들은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보석들 속에 잠재된 힘들이 실제로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중세 독일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라고 하는 수녀가 있었다. 귀족 출신으로 다방면에 박학다식하였던 그녀는 성인품에 들지 못했지만 지금도 독일에서 위대한 성녀로 추앙받는다. 그녀의 '보석을 이용한 질병치료론'은 유명하다. 그 출발점은 신학이지만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론과 비슷하다. 동기감응이란 같은 기운(진동)을 갖는 것끼리 서로 감응(공명)함을 말한다.
그녀는 말한다. "하느님은 보석이 갖는 빛과 힘들을 헛되이 버리시지 않는다. 보석들로 하여금 치료 목적에 봉사하기를 바라신다. 보석들은 대개 땅속 깊은 곳에서 강력한 압력이나 충격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때 그것들은 특정 진동을 얻게 되며 그 특정 진동은 다시금 다른 사물(사람)에게 전이될 수 있다. 따라서 보석 저마다의 특정 에너지가 인간의 특정 질병 치료에 이용 가능하다." 에메랄드는 해독 작용, 마노는 간질·몽유병·도둑 예방, 페리도트는 발열·심장병·복통, 호박은 복통, 수정은 갑상선·심장병·복통, 사파이어는 정신집중, 토파즈는 독이 든 음식물 탐지에 도움이 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처럼 중국과 유럽에서 행운과 힐링 수단으로 보석을 적극 활용한 것은 그들의 오랜 보석 문화 덕분이다. 반면 우리에게 보석 문화가 발달할 수 없었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런데 보석 전문가 강승기 박사(한국다이아몬드거래소)의 주장이 솔깃하다 . "보석산업에 대해서는 사치품이라는 편견 때문에 정부에서도 등한시했다. 그러나 미래 주요 성장산업이 될 수 있다. 친환경·도심산업인 동시에 무한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다. 브랜드 있는 보석 가공과 투명한 유통을 통해 중국과 인도 시장을 개척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류를 더욱 고급화할 수 있다." 여기에 풍수는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제공할 수 있다.
08.13 보석과 풍수의 힘으로 영생을 꿈꾼 서태후, 일생일대의 패착은
/서태후의 무덤인 ‘보타욕정동릉’의 전경(위), 내부(가운데)와 봉분(아래)의 모습.
지난 7월 중순, 중국 청동릉(�東陵)에 있는 서태후(자희태후·1835~1908) 무덤을 답사했다. 청동릉은 베이징 동북쪽 100㎞ 거리에 있는 청나라 황족들의 떼무덤이다. 서태후는 48년간 권력을 독점하면서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서태후의 무덤을 답사한 것은 그녀가 보석과 풍수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보인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32세 때인 1866년 서태후는 자신의 무덤 자리를 찾을 것을 명한다. 이듬해 자리가 정해지고 이에 대한 풍수 보고서가 제출된다. 그 가운데 '산세존엄(山勢尊嚴) 금성원정(金星圓頂) 결성돌혈(結成突穴)'이란 열두 글자가 핵심이다. '산세존엄'에서 존엄이란 북한 최고 통치자를 존엄이라 표현함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될 것이다. 금성이란 오행(五行) 가운데 쇠[金]를 의미한다. 쇠처럼 강한 지도자이면서도 그 덕성은 원만하고 후덕하다는 '금성원정'이다. '결성돌혈(結成突穴·돌혈을 이루었다)'에서 돌혈이란 혈처(穴處·무덤이 들어설 곳)의 모습을 말한다. 지맥이 푹 꺼졌다가 치솟아 오르면서 마치 용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 즉 비룡승천(飛龍升天)을 뜻한다.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태후 신분이되 황제로 군림하겠다는 의도이다. 서태후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대변해주는 땅이다. 보고서를 본 그녀는 현장에 직접 가보고 "만년 동안 지속될 길지(만년길양·萬年吉壤)"라며 좋아한다. 이후 1908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그녀의 지하 궁궐이 조성된다.
그런데 서태후의 무덤과 보석은 무슨 관계일까? 그녀의 보석 사랑은 동서고금 그 어떤 황후보다도 집요했다. 생전에 모은 보석 모두를 무덤으로 가져갔다. 이성무(李成武)가 남긴 '서태후 무덤에 묻은 보석 목록(자희장보도기·慈禧葬寶圖記)'이 종류·수량·가격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청나라가 지고 있던 빚을 다 갚고도 남을 가치였다.
그녀가 이렇게 풍수와 보석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보석과 풍수의 기운을 통해 영원히 썩지 않는 사후의 삶, 즉 영생(永生)을 얻고자 함이다. 보석 가운데 최고는 야광주(夜光珠)였다. 밤에도 스스로 빛을 내는데, 더위와 추위를 잊게 하며 죽은 자가 입에 물고 있으면 시신이 영원히 썩지 않는다고 한다. 소원대로 죽은 그녀의 입에 야광주가 넣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1928년) 군자금이 필요했던 군단장 손전영이 이곳을 도굴한다. 야광주를 빼내기 위해 서태후의 입을 찢었다(얼마 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에게 전해졌으나 이후 야광주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심지어 음부에 넣었던 보석들도 군인들로 하여금 모두 빼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군인들에게 시간(屍姦·시체 강간)을 당했다는 치욕적인 오명을 뒤집어쓴다.
천년 동안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보석들로 치장되어 만년 동안 영속될 길지에 안장된 그녀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권력자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부자가 되려면 도굴을 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도굴의 역사는 길며, 도굴을 위한 전문 기술이 발달했다.
서태후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언젠가 그 대비책을 물었다. 시종이 "능침을 영원히 보전하려면 부장 품을 적게 넣는 박장(薄葬)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아뢴다. 대청제국이 영속할 것이라 확신한 그녀는 "박장을 한 채 지하 궁궐로 간다면 대청제국의 체통이 서지 않을 것"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나 '영원한 제국'은 그녀가 죽은 지 3년 뒤인 1911년 사라진다. 권력에 취해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풍수와 보석만 믿었던 통치자가 사후에 겪을 예정된 운명이었다.
10.29 하륜이 극찬했던 천하 吉地에 자리 잡은 이화여대, 어쩌다가…
/이화여대 캠퍼스 내 계단식 광장(위)과 캠퍼스 입구 배꽃 문양 부조 앞(아래)에서 사진 찍는 중국 관광객들의 모습. /김두규 제공
최순실 모녀 때문에 이화여대가 시끄럽다. 물론 이전에도 유커(중국 관광객)들 때문에 시끄러웠지만 내용이 다르다. 이화여대는 몇 년 전부터 유커들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받는 곳이 되었다. 중국인들의 풍수사랑은 유별나다. 이들을 유혹한 것은 이화(梨花)라는 '이름 풍수'이다. 중국어 뜻과 발음상 재물[利]이 크게 핀다[發]는 리파(利發·이발)와 비슷하여 좋아한다. 그들이 박쥐[蝠·복] 문양을 좋아하는 것도 蝠이 복(福)과 발음이 같아서이다. 또 금붕어[金魚]를 좋아함은 金魚와 금옥(金玉)의 비슷한 소리 때문이다. 금붕어를 키우면 "금과 옥이 집안에 가득 찬다(金玉滿堂)"고 믿어 정원 연못에 금붕어를 키운다. 이대 입구 배꽃문양 조각 벽 앞에서 유커들이 사진을 찍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땅 이름은 때로 그 땅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화라는 교명은 개교 당시 흐드러지게 피던 하얀 배꽃과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정자에서 유래했다. 배가 잘되는 땅이다. 조경학자 이창환 교수(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의 의견이다. "이화는 이로운[利] 나무[木]의 꽃[花]이다. 꽃도 그렇거니와 배도 이로운 과일이다. 육회에 배 생채가 들어가는 것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해를 제어하려 함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화는 '세상의 모든 일을 이롭게 하는 꽃'으로 상징된다."
이곳은 600여 년 전에도 국가의 관심사가 되었다. 풍수 때문이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국호를 정하기도 전에 도읍지를 먼저 정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계룡산으로 정했으나 하륜의 풍수설에 의해 취소된다. 이후 조선이란 나라가 세워졌지만, 도읍지는 10여 년 동안의 풍수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한양·개경·무악 가운데 어느 곳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1394년부터 1404년까지 10년 넘게 논쟁이 벌어진다. 논쟁의 핵심인물은 하륜이었다.
태조가 무악에 와서 직접 살펴보고 일부러 하룻밤을 자보기도 하였다(1394년 8월). 1400년 정종이 천도를 고민할 때 무악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1404년 태종이 이곳에 와보고 "도읍지가 들어설 만하다"라고 평을 하지만 결정을 하지 못한다. 결국 그해 10월 한양·개경·무악을 두고 동전 점을 쳐서 한양으로 결정한다. 점을 친 후 무악을 아쉬워한 태종은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긴다. 무악은 현재 연세대와 이화여대 일대이다.
왜 하륜은 10년 넘게 줄곧 무악을 주장하였을까? 그는 세 가지 근거를 댄다. 첫째, 한강과 가까워 조운(漕運·현물 조세의 선박 운반)이 쉽다. 둘째, 우리나라 옛 현인들의 풍수 비기(祕記)들과 부합한다. 셋째, 중국의 풍수이론과도 서로 근접한다. 하륜의 발언은 우리 풍수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풍수의 두 가지 요소인 산과 물 가운데 하륜은 물을 중시[主水]하였다. 고려 건국 주체가 해양세력(왕건 등)으로 전성기에 멀리 아라비아까지 교역했던 것도 물을 중시한 개방적 풍수관 덕분이었다. 반면 조선왕조에서는 물보다는 산을 중시[主山]하는 폐쇄적 풍수관으로 바뀌게 된다. 역사적으로 물을 중시하는 자 흥했고, 산을 중시하는 자 망했다. 하륜의 두 번째·세 번째 주장은 우리 민족 고유의 터 잡기 이론을 바탕으로 중국 풍수를 참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대 신하들과 풍수 관리들은 하륜의 거대 풍수 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악 도읍지론을 반대한다. 그의 주장은 소수 의견으로 몰리고 만다.
이화여대 터는 무악 땅에서 풍수상 청룡에 해당된다. 풍수 고전 '동림조담'은 "좋은 청룡은 글 잘하는 이와 관료를 배출한다(靑龍主文才官業)"고 했다. 시끄러운 이화여대가 본래 그 땅의 성정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한다.
11.12 무속에 빠진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묘 4번이나 이장했지만…
/1.충남 보령에 있던 명성황후 부친 민치록의 묘 2.같은 묘가 2003년 이장되고 난 뒤 폐허가 된 모습. 3.경기 여주로 이장된 민치록의 묘 모습. /김두규 제공
왜 황후께서 무속과 풍수에 빠지셨을까? 민비 이야기이다. 흔히 민비가 임오군란(1882년) 때 충북 충주로 피신하면서 알게 된 무당 '진령군'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이미 왕후로 책봉된 그때부터였다. 한미(寒微)한 가문의 그녀가 갑자기 왕후가 되었기에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왕후가 되면서부터 열등의식과 혼란스러운 정세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렸다. 게다가 자식 복도 없었다. 오로지 의존하였던 것은 민씨 일가와 무속이었다. 무속에 빠졌음은 그녀의 편지와 그를 모셨던 신하 윤치호의 일기에서 드러난다. 진령군 이전에 그녀는 남정식이란 무속인에게 의존했다. 임금의 건강운이나 곁에 두어야 할 신하들의 운세 등을 물었다.
그녀의 몰락(그리고 조선의 몰락)은 풍수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1866년 왕후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친정아버지 묘 이장이었다. 1858년 친정아버지 민치록이 죽었을 때 여주 선영에 안장되었다. 비록 몰락하였지만 명문가 선영이라 지세가 좋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제천·이천·광주로 이장을 거듭한다. 그리고 1894년에는 경기도를 떠나 멀리 서해안 바닷가 충남 보령으로 이장을 한다. 이곳을 추천한 이는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였다. 그는 이 공로로 공조판서가 된다. 여주·제천·이천·광주의 땅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왕후가 올바른 풍수관·인생관·국가관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다. 왕후의 정성이 부족하였던지 저승에 계신 친정아버지의 '응답'이 없었다. 이장 다음 해인 1895년 그녀는 일본인들에게 시해된다.
이장을 거듭할수록 국고는 탕진되었고 백성들의 원한은 하늘에 뻗쳤다. 새로 무덤이 조성될 때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전답을 빼앗기고 정든 고향에서 쫓겨났다. 황후의 아들(훗날 순종황제)이 쓴 '행록(行錄)'을 살펴보자. "좋은 묫자리를 보령에 정했을 때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도 모두 자비로 하였으며 백성들을 하나도 동원하지 않았다. 묘를 쓰는 지역 백성들의 집을 철거하는 것과 상여가 지나가는 길옆 농작물이 손상되는 것과 조약돌 하나, 흙 한 삽에 대해서도 넉넉히 값을 치렀다." 이 말을 곧이들을 자 있을까?
20년 전 필자는 보령 현장을 답사했다. 그곳 촌로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당했던 고통과 원한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894년 보령으로 이장한 뒤 다시 110년 후의 일이다. 2003년 명성황후는 저승에서 친정아버지를 초장지(初葬地)로 되돌아가게 하였다(여주 가남읍 안금2리 마을 뒤). 다섯 번 이장하고 여섯 번 장사를 치른 이른바 '오천육장(五遷六葬)'은 조선 풍수사의 진기록이다.
박근혜 대통령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준 이는 최태민이었다. 그는 기독교·불교·무속·단군교 등 여러 종교를 전전하다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사이비 종교의 전형이다. 대개 이러한 사이비 종교들이 흔히 악용하는 것이 풍수·관상·사주·조상신 등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사교(邪敎)에 빠지지 않았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우연일까? 작년에 풍수 술사 황모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 묘를 재정비하였다. 자칭 "국장(國葬)을 두 번 주관"한 사람이라고 한다. 묘역 정비는 현충원 관리인들이 할 일이지, 굳이 풍수가 낄 일이 아니다. 황씨는 작년 말 김영삼 전 대통령 묘를 잡기도 하였다. 광중을 팔 때 돌들이 나왔다. 묘지에서 돌이 나오는 것은 풍수의 금기 사항이다. 그런데 이 돌들을 "봉황의 알"이라며 세상을 희롱했다. 이에 대해 풍수학자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봉황의 항문이 찢어질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묘역 정비에 굳이 술사를 동원한 이유가 무엇일까? 요즘 더욱더 궁금해진다.
2016.12.10 神明의 땅에서 잡신의 신명터로 전락한 청와대
최순실 게이트로 대통령이 탄핵 대상이 되자 또다시 '청와대 흉지(凶地)론'이 고개를 든다. 터가 나빠서 그렇다는 것이다. 땅의 내력을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조선 초 10년 사이의 일이다.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1394년 이곳으로 천도한다. 2년 후 그는 사랑했던 왕후 강씨를, 다시 2년 후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가 낳은 두 아들을 잃는다. 임금 자리마저 아들에게 빼앗긴다. "내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쓸쓸히 한양을 떠난다. 1404년 태종 이방원은 이곳을 궁궐터로 정했던 지관들을 불러내 그 가운데 최고참 이양달을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너는 도읍지를 정할 때 태상왕(이성계)을 수행하였는데 물이 없는 곳에 도읍을 해서는 안 됨을 몰랐더냐? (…) 살고 죽은 것이 천명이지만 그 후로도 계속하여 재변이 일어나고 한 번도 좋은 일이 없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청와대 터를 두고 바위산이 험하고 명당수가 없어 도읍지가 못 된다고 평했다. / 이진한 기자
임진왜란이 끝나고 임금이 된 광해군은 불타버린 경복궁을 버렸다. 불길한 터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270년 동안 이곳은 잡초에 묻혔다. 1867년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경복궁을 중창하였지만 그의 재정 낭비는 훗날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30년이 채 안 된 1895년 명성왕후가 이곳에서 일본인에게 살해된다(을미사변). 이후 고종과 순종은 덕수궁·창덕궁 등을 정궁으로 쓰고 경복궁을 애써 외면하였다. 청와대 터는 이렇듯 '버려진 땅'이었다. 버려진 땅에다 일제는 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지었다. 그들 입장에서 이만한 대체지가 없었다. 후세인들은 이를 두고 '일제의 풍수침략설'을 주장하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실이 버린 땅을 그들이 '주워 먹은' 것이다.
정말로 청와대 터는 나쁜 것일까? 애당초 좋은 땅 나쁜 땅은 없다. "전능한 성인도 없고, 완벽한 길지도 없다(聖人無全能, 好地無全美)"는 풍수 격언이 정언명령(定言命令)처럼 내려온다. 땅을 두고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자는 하수(下手)이다. 땅의 성격[地氣]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자가 고수(高手)이다. 청와대 터의 특징은 무엇일까? 태종 이방원은 이곳이 도읍지가 될 수 없는 까닭으로 "험한 바위산과 명당수가 없는 것(石山之險, 明堂水絶)"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용도는 무엇일까? 신명(神明)을 내는 땅이다. 무당들이 큰 바위 밑에 촛불 켜고 기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크게는 집단적 신명에서 작게는 개인적 신명을 낼 수 있는 곳이다. 노래와 춤으로써 신내림 받아 기뻐 날뛰는 것이 신명이다. 무당의 굿판이 개인적 신명이라면, 세종·세조·성종 임금이 경복궁에 재위하면서 조선의 문화를 창달시켰던 것은 집단적 신명이다. 광화문 앞 100만명 촛불의 거대한 흐름도 또한 집단적 신명이다.
얼마 전 홍성담 화백이 그림 한 점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최순실이 북악산 정상에 똥을 싸고 있는 그림이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항문이 빨갛게 탈장된 채 똥을 싸고 있다. 그 똥이 청와대를 뒤덮고 있다. 국민이 한숨 쉬며 그 똥을 치우려고 삽을 들고 모여든다.
이 그림의 '화룡점정'은 무엇일까? 최순실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대나무 가지이다. 대나무는 접신의 도구로서 무당을 상징한다. 그림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북동쪽은 귀신이 들어오는 귀문(鬼門)이다. 풍수상 좋은 그림은 기가 드나드는 구멍[氣口]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운생동(氣韻生動)한 그림이 된다. 이 그림은 대나무 가지로 귀문과 기구(氣口)를 동시에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 터의 성격을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아쉽고도 화가 난다. 그 좋은 집단신명의 터를 최순실이라는 잡신의 신명터로 만들어버린 것이!◎
김두규 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