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 2020-07-06 해야 할 일을 하는 분들께 - 12-28 딱 너의 숨만큼만
[내가 만난 名문장] 동아일보 2020
07-06 해야 할 일을 하는 분들께
“자네하고 나는 그런 날을 보기 전에 죽겠지. 그런 날이 와도 내 이름은 완전히 잊혔을 걸세.”
―스티븐 존슨 ‘감염 도시’ 중에서
19세기 영국 런던에도 전염병이 돌았다. 콜레라가 창궐해 세 블록에서 100명 이상이 죽었다. 대도시 자체가 콜레라균의 산파였다. 도시는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기존에 없던 산업과 활력이 생긴 대신에 용변의 총량도 늘어났다. 공공위생 시스템이 없는 채 인구밀도가 높아지니 세균이 인간에게 퍼지기도 쉬웠다. 당시 사람들은 냄새가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의학 지식이 부족해 아주 작은 바이러스라는 게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존 스노라는 의사만 소수 의견을 냈다. 그는 냄새에 끌리는 대신 통계를 분석했다. 지역 우물과 권역별 사망자 데이터를 보고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임을 추론해 위험 지역의 우물을 폐쇄시켰다. 그때 그의 말을 들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냄새는 코에 닿지만 세균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존 스노는 세상이 자기의 발견을 알아주지 않을 때 ‘질병의 전파 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질병 박멸의 수단이 될 것이다’란 말만 남겼다.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감염 도시’에 나온 이야기다. 지금 우리의 상식이 된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는 존 스노의 발상에서 왔다.
21세기의 최신 전염병은 최신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스케일만 커지고 양상은 비슷하다. 서울을 비롯한 세계의 대도시에 전염병이 퍼진다. 마음속 공포와 혼란이 무수한 ‘포스팅’이 되어 SNS를 타고 모두의 스마트폰 터치스크린에서 번쩍거린다. 하지만 도시 속 어딘가에 이 시대의 존 스노가 있을 거라 믿는다. 온갖 신형 플랫폼에서 예언자 지망생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높여도 그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SNS 같은 건 할 여유도 없는 채로. 그런 사람들을 응원한다.
박찬용 작가·칼럼니스트
07-13 길을 잃어라
‘길을 잃어라. 강제된 실수와 적당한 불안이 최고의 안내원이다.’ ―안드레 애치먼 ‘알리바이’ 중
그날 나는 시차 때문에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피렌체 대성당이 나왔다. 전날 성당 사정으로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던 터라,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때 한 노신부님이 다가왔다. 얼른 문을 열어드리며 나도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 하셨다. 곧이어 눈앞에 나타난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순간 알았다.
사방이 부드러운 적막으로 휩싸인 가운데 돔 꼭대기에서 흘러든 햇빛에 천장화의 인물들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빛 속으로 빨려들 듯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순간을 잡아두기 위해 숨을 참는 것밖에 없었다. 그 장엄하고 영적인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후에 그것에 대해 남에게 설명하기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안드레 애치먼은 ‘알리바이’에서 로마를 여행하며 ‘길을 잃어라’고 썼다. 작가는 ‘몸속 나침반에 절반쯤은 매혹된 채’ ‘로마가 눈앞에서 빙빙 돌도록’ 거리를 돌아다닌다. 요즘은 마음처럼 떠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구글맵을 켜서 그가 떠돌던 곳을 눈앞에 띄워봤다. 스페인광장, 캄포데피오리, 판테온 신전….
장소를 저장하려다 관뒀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다시 갈 수 있다면 나 역시 ‘지도를 무시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트레비 분수를 맞닥뜨리고 싶으니까. 내가 원하는 여행은 ‘거북이 분수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거북이 분수를 예기치 않게 발견하는 것’이며, 그 생경한 감각 속에서 피렌체 대성당과 같은 잊히지 않는 순간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익숙한 곳을 떠나 ‘다른 곳’에 당도했음을 실감할 것이다. 책 제목 ‘알리바이’는 라틴어로 ‘다른 곳에’라는 뜻이다.
“자네하고 나는 그런 날을 보기 전에 죽겠지. 그런 날이 와도 내 이름은 완전히 잊혔을 걸세.”
―스티븐 존슨 ‘감염 도시’ 중에서
19세기 영국 런던에도 전염병이 돌았다. 콜레라가 창궐해 세 블록에서 100명 이상이 죽었다. 대도시 자체가 콜레라균의 산파였다. 도시는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기존에 없던 산업과 활력이 생긴 대신에 용변의 총량도 늘어났다. 공공위생 시스템이 없는 채 인구밀도가 높아지니 세균이 인간에게 퍼지기도 쉬웠다. 당시 사람들은 냄새가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의학 지식이 부족해 아주 작은 바이러스라는 게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존 스노라는 의사만 소수 의견을 냈다. 그는 냄새에 끌리는 대신 통계를 분석했다. 지역 우물과 권역별 사망자 데이터를 보고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임을 추론해 위험 지역의 우물을 폐쇄시켰다. 그때 그의 말을 들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냄새는 코에 닿지만 세균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존 스노는 세상이 자기의 발견을 알아주지 않을 때 ‘질병의 전파 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질병 박멸의 수단이 될 것이다’란 말만 남겼다.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감염 도시’에 나온 이야기다. 지금 우리의 상식이 된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는 존 스노의 발상에서 왔다.
21세기의 최신 전염병은 최신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스케일만 커지고 양상은 비슷하다. 서울을 비롯한 세계의 대도시에 전염병이 퍼진다. 마음속 공포와 혼란이 무수한 ‘포스팅’이 되어 SNS를 타고 모두의 스마트폰 터치스크린에서 번쩍거린다. 하지만 도시 속 어딘가에 이 시대의 존 스노가 있을 거라 믿는다. 온갖 신형 플랫폼에서 예언자 지망생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높여도 그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SNS 같은 건 할 여유도 없는 채로. 그런 사람들을 응원한다.
박찬용 작가·칼럼니스트
07-13 길을 잃어라
‘길을 잃어라. 강제된 실수와 적당한 불안이 최고의 안내원이다.’ ―안드레 애치먼 ‘알리바이’ 중
그날 나는 시차 때문에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피렌체 대성당이 나왔다. 전날 성당 사정으로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던 터라,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때 한 노신부님이 다가왔다. 얼른 문을 열어드리며 나도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 하셨다. 곧이어 눈앞에 나타난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순간 알았다.
사방이 부드러운 적막으로 휩싸인 가운데 돔 꼭대기에서 흘러든 햇빛에 천장화의 인물들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빛 속으로 빨려들 듯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순간을 잡아두기 위해 숨을 참는 것밖에 없었다. 그 장엄하고 영적인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후에 그것에 대해 남에게 설명하기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안드레 애치먼은 ‘알리바이’에서 로마를 여행하며 ‘길을 잃어라’고 썼다. 작가는 ‘몸속 나침반에 절반쯤은 매혹된 채’ ‘로마가 눈앞에서 빙빙 돌도록’ 거리를 돌아다닌다. 요즘은 마음처럼 떠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구글맵을 켜서 그가 떠돌던 곳을 눈앞에 띄워봤다. 스페인광장, 캄포데피오리, 판테온 신전….
장소를 저장하려다 관뒀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다시 갈 수 있다면 나 역시 ‘지도를 무시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트레비 분수를 맞닥뜨리고 싶으니까. 내가 원하는 여행은 ‘거북이 분수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거북이 분수를 예기치 않게 발견하는 것’이며, 그 생경한 감각 속에서 피렌체 대성당과 같은 잊히지 않는 순간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익숙한 곳을 떠나 ‘다른 곳’에 당도했음을 실감할 것이다. 책 제목 ‘알리바이’는 라틴어로 ‘다른 곳에’라는 뜻이다.
이지수 일본어 번역가
07-20 사랑과 신뢰의 동심원
“인간이 인간답고, 그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도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럴 때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될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 ‘경철 수고’ 중
회색 활자 속에서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두통 속에서도 공부가 즐거웠다.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는 특히 사람다운 사람,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를 고민했던 젊은 사상가가 이후에 토해 낼 사유의 씨앗들이 푸른빛으로 들어 있었다.
사랑에도 돈이 든다. 꼭 두른 것이 화려하고 고가의 선물을 하는 연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구김 없이 자라난 사람, 자신의 호기심과 취향을 가난 때문에 납작하게 질식시킬 필요가 없었던 사람, 그래서 풍부한 경험으로 자신을 알록달록하게 빚어낸 사람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돈만큼 사랑을 망가뜨리고 인간관계를 뒤트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인간이 인간다울 때, 그런 세상에서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되돌려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로부터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따뜻한 관계를 경험한다. 선물이라고 내미는 아방가르드한 종이배며, 유치원에서 열심히 따 모았다고 불쑥 내미는 토끼풀 꽃다발, 머리에 꽂아준다는 걸 사양하고 싶은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깃털. 아이들이 내게 들고 오는 것들을 다 받으면 거지왕 김춘삼 부럽지 않을 고물상이 될 테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신뢰를 알기에 나는 달콤하고 환하게 받는다.
사랑도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세상에는 알알이 맺는 사랑과 돌탑처럼 쌓아 올리는 신뢰로만 교환될 수 있는 가치도 있음을 배우길 바라며. 이런 관계를 경험한 아이는 또 다른 관계에서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인간적인 동심원의 고리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며.
이진민 정치철학박사·작가
07-27 팔다리를 좀 더 쓴다면
“어린이는 팔다리에서 왕성하게 휘두르는 것 외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 않지요. 아마 우리도 팔다리를 좀 더 쓴다면 행복해질 겁니다.”
―윌 듀랜트,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중
남편은 일곱 살 아들을 ‘다리미’라고 부른다. 아들은 시종일관 조잘거리고, 내키는 대로 춤추며, 별것도 아닌 일에 깔깔거린다. 그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고 영화 ‘기생충’의 대사를 따라 하며 “어쩜 구김살이 없어. 대리미네, 대리미” 하다가 생긴 별명이다. 놀이터에 가보면 그런 해맑은 아이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다. 때로는 토라지고 아옹다옹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비하면 그곳은 파라다이스이다. 아이들은 놀이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몸이 붕 떠오르거나 미끄러지는 것이 재미날 뿐이다.
어른들의 삶도 이렇게 단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른스러움’은 사회의 한구석에 내 자리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시작되었다. 생각이 좀 더 나아가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윌 듀랜트는 ‘경험과 감각에서 느껴지는 유쾌함, 그리고 기쁨’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원래 태어날 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어 도대체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는 지경에 놓였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부인하려 애쓰면서 비합리적인 신념과 독단적인 확신까지 만들어낸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다’는 경직된 신념과 확신을 뒤흔드는 사건은 매일 일어난다.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 생각을 멈추고 아이들처럼 팔다리를 더 많이 움직여 보자.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생생하게 느껴 보자.
남보라 이음심리상담센터 부소장
08-03 치유의 과정
‘음악을 배운다는 것은 치유의 과정과 유사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서두를 수 없다는 말이다.’
―앨런 러스브리저 ‘다시, 피아노’
잠깐의 노력과 반짝 운으로 큰 성과가 나오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을 들여야 윤이 나고 의미가 쌓여 가는 것들에 마음이 간다. 그게 ‘진짜’임을 점차 깨닫는 중이다. 책을 읽는다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 꾸준히 영혼을 쏟아부어야 가능한 행위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인간적인 것은 모두 내 마음을 움직인다네, 왜냐하면 나도 인간이기에”라고 썼는데, 이 문장은 늘 내 마음을 흔든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 편집국장이 전쟁 같은 일상에서, 매일 20분씩 짬을 내 쇼팽의 ‘발라드 1번’에 도전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도 혀를 내두른다는 난곡(難曲) 아닌가. 굵직한 보도를 총괄하는 편집국장의 일상에 고급 만찬이나 골프 회동이 아닌 피아노가 등장한다. 매일 아침 피아노 연습이 업무 효율을 높인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피아노 연습은 ‘치유의 과정’이다. 그렇게 1년을 퍼부어 결국 쇼팽 발라드 1번이라는 고지에 이른다. 당장 성과를 낼 수 없었기에 더 소중하고, 다른 사람이나 사물로 대체할 수 없는 온전한 내 노력의 결과물이라 의미가 있다.
책을 읽는 행위도 피아노 연습과 유사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은 없다. 그 시간에 돈 냄새를 좇는 게 득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에게 독서는 영혼의 치유다.
정혜윤 작가는 ‘아무튼, 메모’라는 책에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 같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내라”는 마술적 주문을 품고 산다고 썼다. 보르헤스는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라고 말했다.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바꾸는 능력은 ‘진짜’를 곁에 두는 노력과 닮아 있다. 그 노력 덕에 세상이 덜 지옥 같을 테니.
조민선 리딩리딩 대표
08-10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저한테 한정 없이 잡고 있으라면 한 책을 갖고 끝도 없이 고칠걸요?”
―정영목,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중
사소한 한마디에 꽂혔다. 그냥 지나쳐도 좋을, 모르긴 몰라도 저자 스스로도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말했을 그 말 앞에 멈춰 섰다. 자신이 번역한 책들 중 개정해 번역하고 싶은 작품이 있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는 ‘전부 다’라고 대답하며 위와 같이 덧붙였다.
‘끝도 없이’는 영원하다는 뜻이다. 그가 쓱 내뱉은 한마디에서, 자신의 업(業)을 ‘영원히’ 떠맡은 한 사람의 소명의식을 엿본다. 얼른 일을 끝내고 쉬고 싶은 게 아니라, 이 일을 완벽히 해내려면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함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뭇 비장한 선언처럼 들린다. 한편 ‘허락한다면, 끝도 없이 고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건, 그가 어느 지점에선가 타협해 일을 마쳤음을 상기시킨다. 그 지점이란 계약 기간일 수도, 육체적 한계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계 앞에서의 체념은 그를 겸허히 다음 작업으로 인도하고, 나아가 더 훌륭한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저 한마디가 품은 업에 관한 모순된 두 가지 태도는 내게 이렇게 조언하는 듯하다. “네가 더 잘할 수 있다고 해도 너는 어디에선가 멈춰야 한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다. 네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영원히 네 일을 해라.”
나는 이 책을 서점 ‘번역’ 서가에 한 권, 그리고 ‘장인정신’ 서가에 한 권 꽂아두었다. 누군가 ‘장인정신’ 서가 앞을 서성이다가 “웬 번역 책이 여기에?” 하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책이 잘못 꽂힌 것 같다며 내게 일러준다면 뭐라고 설명해드리는 게 좋을까. 밤이 오면 문을 닫고, 다시 아침이 밝으면 문을 연다. 매일 아침엔 그날의 새로운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곳이 내가 멈춰 서는 곳이다. 한정 없이 하고 있으라면 한 책을 갖고 끝도 없이 여기 꽂았다 저기 꽂았다 반복할 테니까.
김영건 속초 동아서점 운영자
08- 17 나침반 바늘처럼
“나침반은 당신이 선 곳에서 북쪽을 가리킬 것이오. 하지만 그 길에서 만날 늪과 사막과 협곡은 알려주지 않소. 장애물에 주의하지 않고 목적지로 내달리다 늪에 빠져버리면 정확한 방향을 안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영화 ‘링컨’ 중
흔히들 삶을 길에 비유하곤 한다.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꽃길’만 걸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인생이라는 길엔 분명 늪도, 사막도, 협곡도 존재한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링컨의 삶에도 수많은 늪과 사막이 존재했다. 두 번의 사업 실패와 일곱 번의 낙선을 경험했고, 유년기에는 어머니를, 청년일 때는 누이와 약혼녀를, 중년에는 둘째와 셋째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정치 생활 내내 엘리트들에게 무시와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링컨은 늘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렇듯 시련으로 점철된 링컨의 인생에서도 가장 큰 시련이자 도전은 남북전쟁의 종전과 노예제의 폐지였다. 이는 분열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문제이기도 했다. 이 중대한 사명 앞에서 고뇌하는 링컨에게 급진개혁파의 수장 새디어스 스티븐스 의원은 강경한 대응을 요구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는 국민에게 이상과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밀어붙이는 것이 지도자의 마땅한 역할이라며….
위 대사는 그에 대한 링컨의 답변이다. 링컨은 ‘신념’의 가치를 이해하면서도, 맹목적인 추구는 경계했다. 무엇보다 신념을 성취 가능한 ‘현실’로 바꾸기 위해선 이해와 설득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일까. 영화 내내 그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종전과 노예제 폐지라는 과업을 이루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도 19세기 미국 못지않게 분열된 사회를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의 나침반을 확인해야 한다. 내 신념만 맹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틀렸을 가능성은 없는지, 늘 경계해야 한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방향을 찾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이민규 미국 뉴욕주 검사 작가
08-24 속삭임이 좋은 이유
“바그너는 자신의 감정에 음을 실었지만, 쇼팽은 음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었다.” ―앙드레 지드 ‘쇼팽 노트’ 중
처음에는 그저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어볼수록 의미가 새롭다. 음악세계에서 완벽한 대척점이었던 두 사람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앙드레 지드니까 가능했던 촌철살인이다.
음악사에서 바그너만큼 문제아로 꼽히는 인물은 없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를 숭배하거나 혐오한다. 오만과 독설, 사치벽, 편견과 증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도덕 불감증까지. 그야말로 파락호가 따로 없다. 그래도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그에 비해 쇼팽은 지질해 보이는 남자다. 놀라운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소심해서 대규모 청중 앞에서는 연주조차 못 했고, 아무리 화가 나도 욕은커녕 큰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겨울마다 걸린 감기 치레는 중병처럼 심하게 앓았고, 자기가 쓴 곡조차 원하는 만큼 세게 칠 힘이 없었다. 작곡도 대규모 오페라나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피아노곡에만 집중했고 그나마 대부분 소품이다.
그러나 피아노 소품들만으로 쇼팽은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 강렬한 소리는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 적격이지만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다. 선동과 조작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일이 많으니 말이다. 화려하고 큰 소리가 강력해 보이지만 정작 사람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은 조용하고 섬세한 소리이다.
작은 소리가 큰 소리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비단 음악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속삭임만큼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잠자는 아이의 쌔근대는 소리가 주는 평안함은 또 어떤가. 크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작은 것이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하니까.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08-31 죽음의 교훈
“하지만 이제 죽음은 무엇인가 추상적인 것이 돼 버렸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죽음을 마치 미지의 우주처럼 대합니다.” ―롤란트 슐츠 ‘죽음의 에티켓’ 중
독일 저널리스트 롤란트 슐츠가 쓴 책 ‘죽음의 에티켓’은 중간중간 읽기 불편한 책입니다. 독일인 특유의 건조한 문장으로 집요하게 그리고 매우 구체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어쨌든 당신이 바라는 것보다는 일찍 죽게 될 것’이라는 다소 냉소적인 말부터, ‘서른 살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8년에 한 번씩 다음 연도에 죽을 확률이 두 배로 높아진다’는 알고 싶지 않은 통계도 나옵니다. 정확한 죽음의 순간과 다양한 장례식의 풍경을 읽다가 보면 나의 죽음을 한 번은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죽음이 탄생한 순간부터 반드시 있게 될 끝맺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죽음을 접하면서 다시 기억해 냅니다. 장례식장을 나서면서 떠난 자들에 대한 추모와 더불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고민,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타임지가 2016년에 ‘성공한 자녀들의 비밀(Secrets of Super Siblings)’이라는 기획기사를 낸 적이 있습니다. 각계각층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형제자매들의 가족을 심층 취재한 내용이었는데, 그중에 인상 깊은 주제는 ‘죽음의 교훈’이었습니다. 가족의 죽음을 어린 나이에 겪은 사람들이 그 슬픔과 더불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죽기 전에 무슨 일을 해내고 말겠다는 절박함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 그리고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은, 오늘을 분명 더 가치 있게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하는 삶이 아닌, 나답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힘들고 지치는 요즘 나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지금의 삶을 조금 빛나게 했으면 합니다.
이재운 홍콩중문대 교수
09-07 조심하세요, 꼭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모른다. 밖은 어두워지고 휴일이 지나가는데 소희는 조금만, 조금만, 하며 울듯이 앉아 있다.” ―권여선 ‘손톱’ 중
달력을 보니 어느덧 9월. 여름이 다 지나간 듯하다. 당신의 여름은 어땠나요, 묻고 싶다. 봄은요, 또 이전의 겨울은요. 타인의 지나간 계절이 궁금해 불쑥 울고 싶어질 정도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쫓기듯 흘러와 버리고 말았다는 걸 안다. 집 안에만 머물고, 멀리 이동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들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허둥대며, 오래 인내하며, 어제를 살고 오늘을 맞이하는 일상. 내일도 또 같은 자세로 살아 나갈 것이다.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모르는 마음으로 묵묵히 그러나 막막히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밖은 어두워지고 휴일이 지나가는데 조금만, 조금만, 하며 울듯이 앉아 있’는 대다수의 ‘우리’가 있을지도.
‘손톱’의 주인공 ‘소희’는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일하다 오른손 엄지손톱이 부러져 나간 채로, 비싼 치료비에 깜짝 놀라 다신 안 온다, 절망하며 병원을 나선다.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뭐? 내가 뭘?” 따져 묻고 싶은 건 소희만이 아닐 것이다. 바이러스 감염 위험으로, 긴 장마로, 태풍으로 피해 입고 낙심한 너무나 많은 ‘소희’들이 있을 것이다. 소희는 휴대전화 매장에 놓인 작은 대바구니에서 사탕을 꺼내 먹다가 ‘어느 갈 곳 없는 할머니’에게서 “조심해야지”라는 말을 듣는다. 손이 왜 그래, 묻기에 다쳤어요, 하니 돌아온 대답. 무심한 듯 다정한 그 말이 혼자인 소희의 외로운 마음을 흔든다.
요즘엔 우리 모두가 그런 말밖에는 하지 않고 또 할 수밖에 없는 무력을 느낀다. 조심하세요, 네. 꼭. 부디 조심하시고요. 진심 어린 당부를 전한다. 어두운 밤은 곧 지나가고 다시금 찾아드는 새로운 계절은 다시 자유로이 숨 쉴 수 있는 나날이기를 소원하며.
염승숙 소설가·문학평론가
09-14 행복한 시작
난 매번 지금이 제일 행복해, 그렇게 노력하는 거지.’
―김지수 ‘자존가들’ 중
책 ‘자존가들’의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작업 구상보다 원고 읽기에 더 몰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원고 속에 꿀단지 같은 명언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경험과 과정에서 비롯되었고 그들의 현재 모습으로 증명되고 있기에 그 명언들에 더욱 신뢰가 갔다. 배우 신구의 ‘난 매번 지금이 제일 행복해, 그렇게 노력하는 거지’ ‘최고의 연기자는 최고의 성실을 가진 자예요. 재능은 큰 차이가 없어’, 특히 이 두 문장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노력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고,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성실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실 속에서 체험해가고 있다.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 신입으로 디자인을 할 때, 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팀원을 이끌 때, 결혼 후 엄마로서 신생아를 케어할 때, 십여 년의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프리랜서로 독립할 때. 시작은 늘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 힘들었어, 다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가 아니라 ‘그런 때도 있었구나’라는 뿌듯함과 좋은 기억들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사회생활을 오래하면 어떤 일도 두렵지 않다는 사람도 있던데,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분명 노련해지기도 하지만, 이후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기까지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언젠가부터 다시 일어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을 하기까지 시간이 단축되었는데, 침울해하는 나를 향해 위로 삼아 건네신 어머니의 단호한 한마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라는 걸 알아야 해.’
얼마나 쉬운 말인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짧은 그 말이 나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처방약이 되었다. 프리랜서 3년 차, 완벽하지 않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여전히 많다. 행복한 과거가 되기에 충분히 행복한 오늘이다.
석윤이 그래픽디자이너
09-21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 더 하기 힘든 것은 없다”
―제니 오델 ‘아무것도 안 하는 방법’ 중
작가이자 아티스트, 교수로 바쁘게 살아온 저자가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기’, 즉 ‘유의미 해 보이는 무언가를 안 하기’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2016년 미국 대선 직후부터였다. 본인이 옳다고 믿었던 가치에 혼란을 느끼면서 열심히 살 의욕을 잃어 멍하게 걷거나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평소 눈에 안 띄었고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고 상상하게 된다.
올해 3월 이전에 내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면 아마 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수업이 전면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격리 수준의 몇 달을 보냈다.
‘대체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여기저기 펴서 읽다 보니, 내가 가장 창의적이 되는 순간은 아무 생각 없이 조깅할 때, 혹은 멍하게 자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효율과 생산이라는 것이 반드시 한 방향의 직선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 삶의 태도는 모두가 모두로부터 격리된 이 시점에 그다지 효율적이거나 생산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목록에 있던 많은 것들이 ‘유의미할지도 모르는 것’들로 격상됐다.
시간과 돈만 허락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었던 때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답답한 시기가 우리의 동네, 도시의 이모저모를 다시 둘러보게 하고 조금이라도 돌아서 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해 준다면 이 불편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수업이 끝나면 강아지 마리를 데리고 집을 나선다. 마치 퇴근하듯이, 다리의 움직임에 머리를 맡기고 집 근처를 30분 정도 걷는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오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로 마음먹으며.
김정윤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교수·조경가
09-28 사슴과 말
“정의는 특수촬영 히어로물이나 소년지에만 있는 거라고 생각해.”-일본 드라마 ‘리갈 하이’ 중
드라마 속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는 석가여래도 격분할 독설을 숨 쉬듯 내뱉는 냉혈한이자 매사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는 아웃사이더이다. 어느 날 후배가 ‘선량한 다수의 보편적 정의’를 묻자 그런 건 소년만화에나 있다며 일침을 가하더니 말문이 막힌 후배에게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야.”라고 충고한다. 과연 코미카도 선생은 부도덕과 부정의의 화신으로 비난받아 마땅할까.
변호사 일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세간의 지탄을 받는데, 대개 “어째서 저런 못된 자의 이익을 대변하느냐”며 부도덕과 부정의를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 목숨을 예사로 거둬가던 살인마를 변호할 때나 들을 법한 소리 같지만, 평범한 사람 사이 금전관계를 다투는 민사소송에서도 종종 이런 욕을 먹는다. 내가 장수하기를 비는 마음이 다소 거칠게 표현되었구나 싶다가도 돌이켜보면 찜찜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이른바 ‘보편적 정의’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소송전에서 서로가 보편적 정의의 입장에 있다며 상대방의 부정의를 비난하지만 따져보면 지극히 주관적으로 원하는 결론을 정의, 그와 배치되는 결론을 부정의로 규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보편적 정의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을지 모른다. 정의는 진리와 같지 않고 오히려 비탈길을 구르는 동전과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떤 면을 보이느냐에 따라 정의 혹은 부정의가 되고, 종래의 평가를 180도 바꿔놓기도 한다.
소송 당사자 각자의 정의가 이러할진대 그를 돕는 변호사의 정의인들 다를 리 없다. 의뢰인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해도 그것이 위법이 아닌 한 변호사에게 사슴은 말이 될 수 있다. 변호사가 실체도 불분명한 보편적 정의론에 따라 의뢰인의 정의를 재단한다면 이는 선을 넘은 것이고 직업윤리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이따금씩 날아드는 삿대질을 피해 가며 이렇게 해명하곤 한다. “‘못된 자의 부정의’를 돕는 게 아니라 ‘생각이 다른 자의 정의’를 돕는다.”
박준형 변호사·작가
10-05 벨 에포크
“아름답지 않아요? 전 그때가 가장 좋아요. 모든 게 완벽했던 때.”―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중에서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 시절 만들어진 회전목마를 바라보며 과거를 꿈꾼다. 어쩌면 2019년이 그녀가 말하는 세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황금시대의 마지막. 오늘날 우리는 모두 아드리아나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인간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과거가 될 현재를 만들어가는 주체 또한 지난날로부터 남은 흔적들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과거를 동경하는 일은 매우 보편적이고, 또 필연적이다. 최근 1990년대풍 혼성그룹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그리움과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990년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나를 이끌었던 것은 그때의 감성이지 그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현재 우리를 자극하는 것은 그리움이나 호기심이 아닌 시간 그 자체다. 마스크를 벗고 길거리를 누비고, 거리낌 없이 반가움으로 포옹하던 시절로 돌아가길 간절하게 바란다. 우리를 여기까지 내몬 것은 바로 두려움일 것이다.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 하루에도 몇 번씩 블루와 레드의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극 중 헤밍웨이는 진정한 사랑은 죽음에서 오는 두려움도 잊게 해준다고 말했다. 우리가 절망적인 시간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과거가 현실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그것이 마음을 다독여 주는 향기가 되었든, 사랑하는 이의 따뜻한 품 안이 되었든 말이다. 우리가 꿈꾸는 것이 미련이 아닌 다가올 미래의 희망이기를 바란다. 주인공 길이 과거의 무상함을 깨닫고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인연을 만난 것처럼.
김태형 조향사
10-12 불가능하다는 안도감
상실이 주는 안도감이 기요아키를 위로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움직였다. 잃어버리리라는 공포보다도 실제로 잃어버렸음을 아는 편이 훨씬 견디기 쉬웠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 ‘봄눈’ 중
얼마 전 초역된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소설 ‘풍요의 바다’ 1권 ‘봄눈’에 나오는 구절이다. 다이쇼 시대가 시작된 일본의 1912년, 천황의 권역에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는 귀족사회의 한복판에 젊고 아름다운 두 남녀 기요아키와 사토코가 있다. 오로지 감정만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열아홉의 미소년 기요아키는 사토코를 갈망하면서도 완벽한 형식에 집착하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거짓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고, 마음을 숨기고 뒤집고 꼬아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기요아키가 사토코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는 두 사람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다. 천황이 사토코와 황족의 결혼에 대한 칙허를 내리고 사랑이 금기이자 위반이 되자, 기요아키는 그제야 진실을 증명하려는 듯 사토코와의 깊은 관계에 얽혀 들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요아키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일구려 움직이지만, 마쓰가에 후작 집안과 아야쿠라 백작 집안이 천황과 얽혀 있는 긴 역사 안에서 그 의지는 그저 무상한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안도하는 마음이란 실패에 대한 방어기제이자 연약한 자기보호 본능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각이 비로소 의지를 추동하기도 하고, 그렇게 추동된 의지가 오히려 비극을 몰고 오기도 한다. 이미 잃어버렸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찾기 시작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자마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모순. 아름다움은 무상하게 사라지고 역사는 무정하게 흘러간다. 그런 비겁함과 덧없음과 아름다움이 한데 뒤엉겨 있는 형식이 소설이자 인생일 것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10-19 소설의 맛
그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하늘나라는 다 같이 만나는 곳. 생전에 우리가 알던 사람뿐만 아니라 모르던 사람까지.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만 그곳에 없다더라,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제임스 설터, ‘올 댓 이즈’ 중
한여름을 소설의 성수기로 보는 게 출판계의 관행이지만 소설을 허구 이상의 것으로 보는 내게 소설이 더욱 애틋해지는 건 지금처럼 계절이 스산할 때다. 마음껏 풀어져도 됐던 한창때를 뒤로하고 춥고 막막한 마음이 들어앉는 시기. 아흔 살에 작고한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의 유작에 나오는 저 문장이 이맘때 위로가 되는 건 지난날 마음껏 풀어지지도 못했고 앞날 막막함이 가시지도 않을 한 인생이 이대로 끝은 아닐 거라는 기대를 줘서다.
‘올 댓 이즈’는 한 남성, 필립 보먼의 일대기다. 편모 가정, 제2차 세계대전, 대학 졸업, 직장 생활, 한 번의 결혼, 한 번의 이혼, 몇 번의 연애, 그중 한 차례는 지독한 배반, 어머니와의 이별, 적당한 성공 뒤 맞는 노년. 이렇다 할 클라이맥스가 없었던 작가 자신의 삶을 닮은 이 소설은 그러나 삶을 어떤 연민도 허세도 없이 스케치하고, 어느덧 다리에서 노인 티가 나는 주인공이 장거리 여행을 맘먹는 것으로 끝난다.
공교롭게도 인생 중반을 넘긴 난 지난해 오랜 피고용자 생활을 끝내고 내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 하면 으레 짐작되는 경우의 수를 벗어나지 않는 인생이 전개될 것이다. 모험보단 추억을 아끼게 될 것이다. 세월과 함께 이별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체념과 불안이 덤벼들수록 난 작가가 노년에 쓴, 믿는 사람에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 말이 주술처럼 떠오른다. 믿는다는 건 아직 겪지 않았다는 뜻이고, 겪지 않았다는 건 가능성이 남았다는 뜻이다. 이 가능성으로 다른 삶을 기대하고 지금을 견디는 일, 역시 소설은 스산할 때 맛이 깊다.
이승학 섬과 달 출판사 대표
10-26 삶의 주인이 되는 법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미움 받을 용기’ 중
야구는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팀이 되어 만드는 단체 스포츠이면서 개인 스포츠이다. 예전에는 지도자 말을 잘 듣고 지시를 잘 따르는 선수가 좋은 선수라는 인식이 컸다면, 지금은 선수의 개성까지도 존중해주는 예전과 다른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착한 선수가 야구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착한 선수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지시 사항을 충실히 수행하는 수동적인 선수가 되어 간다. 특히 타격 기술과 피칭 기술은 선수의 창조적인 본능을 깨워야 발전할 수 있는 어려운 영역이다. 그 영역에서 내가 주체가 아닌 타인의 지시를 받아서는 발전이 어렵다.
중학교 1학년 야구 선수에게 타격 레슨을 한 적이 있다. 그 아이가 해오던 타격 방법에서 나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고 기존의 타격 이론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둘 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다행히 훈련이 거듭되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느끼기 시작했고 오랜 기간 훈련으로 힘든 과정을 묵묵히 이겨낸 선수는 올 시즌 프로야구팀의 지명을 받아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다.
지도자는 얼마든지 조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밀고 나가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몫이다. 변화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 대신 고통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되면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과정으로 바뀐다.
어떤 어려움도 내가 생각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19년간 한 팀에서 버티고 지금의 역할을 하기까지 끊임없는 변화와 좌절 그리고 성공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망과 두려움이 가득한 삶, 누구나 용기 있는 주인이 될 수 있다.
이종열 야구해설위원·국가대표팀 코치
11-02 따로, 또 함께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산다.”
―신경림, ‘나의 문학 이야기’ 중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예상치 못했던 혜택이 하나 생겼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맡게 된 다양한 역할과 활동 때문에 넘치는 만남과 행사로 점점 지쳐갔고, 이러다 언제 한번 쓰러지지, 하며 불안불안했는데 ‘이놈’ 덕분에 한동안 만남을 셧다운하고 혼자만의 재충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바야흐로 내향형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관계의 단절로 치닫게 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고립자들은 와이파이조차 터지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졌다.
이때 이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같이 있으며 또 혼자 있고 싶은 모순된 마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더불어 혼자’ 살아야 하는 모순된 삶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니 이건 모순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밸런스가 아닐까. ‘공동체의 유대’만을 강조한다거나, ‘어차피 인생은 혼자’라며 냉소하는 것 모두 삶의 밸런스를 무너뜨릴 뿐이다. 그리고 무너진 밸런스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고립되어 추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방문한 ‘느슨한 공동체, 재미있는 아파트’를 만들어 간다는 ‘위스테이’의 주민들이 직접 만든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혼자라면 어려운, 함께라면 할 수 있는 일.” 느슨하게 함께 존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속한 사회의 적절한 균형 속에 안전할 수 있다.
삶의 마지막 자락에서 “앞으로 ‘삶’을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는 이제 나 혼자 사는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더불어 사는 정서, 더불어 사는 어떤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의미들을 내 ‘삶’으로써 표현하겠습니다, 제발”이라며 후회하지 않겠다 되뇌어 본다.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
11-09 온전한 러브스토리
“35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중
14년째 나는 문학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의 원고를 받아 문장을 다듬고 제목과 표지를 입혀 물성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내 삶과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된 지 오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에도 내가 만든 새 책이 출간되었다. 무수한 가능성을 품은 채 내 손에 들린 이 책이, 모쪼록 오래오래 사랑받기를 바란다.
여기, 나와의 대척점에 선 채 손에 쥔 책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한탸, 폐지 압축공이다. 내 일이 책을 시작하는 거라면 그의 일은 책을 끝내는 것. 그는 쥐 떼가 들끓는 지하실에서 맨손으로 압축기를 다룬다. 천장에 달린 뚜껑 문으로 매일 끊임없이 폐지가 쏟아진다. 괴테와 니체의 작품들이, 더는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들이, 쓸모를 다한 혹은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책들이 그의 손에서 신속하게 압축된다. 그 노동의 과정에서 한탸는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는다. 지하에 고립된 채 지상의 세계를 읽는 현자가 된 것이다.
한탸의 자리를 거대하고 편리한 기계가 대신하는 것은 근대의 종말, 인간 소외 같은 말로 쉽게 표현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가 결국 압축기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끝냄과 동시에 완성하는 결말은 숭고하다는 말로도 부족해 보인다. 그저 소설이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결말을 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읽어보라고 말할 수밖에. 이 소설은 국내 소설가 50명이 ‘올해의 소설’(2016년) 1위로 뽑은 작품이며, 작가인 보후밀 흐라발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린다. 자신의 작품을 금서로 정한 고국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끝내 지키고자 했던 세계에 투신한 한탸처럼 말이다.
강윤정 문학편집자
11-16 선물의 쓸모
“서랍 속에 굴러다니다 불쑥 나타나는, 언제까지고 쉽게 버릴 수 없는 그게 만년필의 장점이지.”
―영화 ‘하나와 앨리스’ 중
‘가장 쓸모없을 것 같은 선물 사주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선물을 고를 때 쓸모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쓸모없는 물건을 고르기 위해서는 우선 쓸모 있는 물건이 뭔지 살펴봐야 한다. 가장 쓸모 있는 물건은 아무래도 생필품일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혹은 특별한 날을 기념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선물 같은 선물’을 찾는다. 적당한 가격과 비범한 느낌, 그리고 선물을 주는 의미들을 타협해 선물을 고른다.
‘하나와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따로 살고 있는 아버지와 오랜만에 재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남의 자리에서 앨리스의 아버지는 앨리스에게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만년필을 주는데, 써도 되냐는 앨리스의 물음에 아버지는 “잉크를 바꾸는 게 귀찮아 점점 쓰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서랍 속에 굴러다니다 불쑥 나타나는, 언제까지고 쉽게 버릴 수 없는 그게 만년필의 장점이지”라고 말한다. 비록 떨어져 지내지만 가족이란 사이는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불쑥 기억을 남기는 사이다. 앨리스의 기억에 언제까지고 남고팠던 아버지의 마음이 우회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쓸모없는 선물 주고받기’ 놀이로 주고받는 선물은 역설적으로 가장 선물다운 선물이 되어버린다. 받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큼 쓸모가 없고 하찮은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는 적당한 선물보다 더한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이 과정을 거쳐야 겨우 선물의 대열에 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 기억에 남길 수 있을 만한 것. 선물을 고르는 일이 골치 아프고 복잡하지만 때때로 단순히 즐거운 고민이 되기도 하는 이유다.
정수진 작가·취미원예가
11-23 극장, 삶의 공간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중
10년째 영화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영화를 극장에 개봉시키기 위해 작품을 알리고,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일인데, 코로나19와 함께 예정했던 개봉작들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영화 산업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깊숙한 두려움을 느낀다. 집 근처 극장으로 마실 나가듯 영화를 보던 일상, 보고 싶은 영화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며 족히 1시간은 걸리는 예술영화관을 찾던 간절한 기대. 디지털과 코로나19의 완벽한 컬래버레이션은 일상이어서 소중했던 영화적 경험을 완벽하게 앗아갔다. 다정한 암흑 속에 일시 정지와 1.5배속 빨리 감기가 없는, 스마트폰의 알람 없이 온전히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극장이 사라지면 한 편의 영화가 깊숙하게 파고들어 오는 충만한 경험은 어디서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인생의 한 부분을 잡아채고 휘둘리게 만드는 영화의 힘과 함께 감상의 본질은 관객의 삶에 있음을 밝힌다. 나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 만든 ‘톰보이’의 파란색과 짧은 머리, 축구를 사랑하는 10세 소녀 로레를 딱 나의 작고 편협한 세계만큼 이해할 수 있다. 덜컥 임신을 해버렸지만,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은 ‘애비규환’의 대학생 토일의 소란한 마음에는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의 경험만큼 영화를 이해하고 ‘억지네’, ‘지루하네’라고 단정하는 한 줄 평 인생을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화 안에서 더욱 삶을 버티고 살아내려고 한다. 나의 미약한 영역을 확장하고, 사랑하는 캐릭터들의 진심에 조금이나마 가닿고 싶으니까. 오늘은 집 근처 멀티플렉스도 좋고, 조금 멀리 독립예술영화관에 가보자. 아늑한 어둠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깊숙하게 만나고 이해해보려 애써보자. 영화와 인생이 서로에게 기대어 외로움을 달래줄 것이다.
최유리 영화홍보마케팅사 아워스 대표
11-30 텅 빈 노트
“때로는 빈 페이지가 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영화 ‘패터슨’ 중
버스운전사 패터슨은 자신의 수첩에 매일매일 틈나는 대로 시를 썼다. 반려견 ‘마빈’이 그 수첩을 갈가리 찢어놓기 전까지 말이다. 낙담한 패터슨은 산책길에 우연히 마주친 낯선 남자에게 새 노트를 선물 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 노트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장편만화를 만들고 있다. 몇 년째 붙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감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완성 후 출판이 약속된 것도 아니다. 그 불확실함 때문일까. 끝내주는 만화를 만들겠다는 초심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이거라도 해야지 하면서 작업실에 꾸역꾸역 출근하고 있다. 출근길에는 커피 없이 일할 수 없다면서 카페에 들렀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손을 푼다면서 스케치북에 낙서를 실컷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펼쳐 본 장편만화 원고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작업실에는 장편만화 원고를 갈가리 찢어 놓을 마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곁에 분명 있던 무언가가 없어진 것만 같았다. 원고는 텅 빈 노트처럼 아득해 보였다. 그제야 내가 너무 오래 손을 놓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들었고, 이미 만들어 놓은 원고도 몽땅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어느새 작업실로 끌고 와 책상 앞에 다시 앉혔다. 그건 패터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매일 아침 아내와 시시한 대화를 나누고, 버스를 운전하고, 혼자 점심을 먹고, 개를 산책시키던 패터슨에게 작업실은 곧 수첩이었다. 비록 아끼던 수첩은 사라졌지만, 그의 시는 수첩이 아닌 일상 곳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곳곳에 숨어 있다. 때때로 텅 빈 노트처럼 아득해 보이던 장편만화 원고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이유다.
송아람 만화가
12-07 미래를 이야기하는 ‘지금’
“지금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지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물리학 지식을 손에 넣었다.”
―리처드 뮬러, ‘나우: 시간의 물리학’ 중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경이로움보다 공포에 가까웠다. 마치 신비주의를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던 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된 상황과 비슷했다. 웹툰 콘텐츠를 기획하는 사람으로서 시간이라는 소재는 과학보다는 상상에 가까운 영역이었는데, 무려 ‘모든’ 지식을 획득했다고 선언하다니. 나는 멈춰 있는데 과거가 나를 지나쳐 빠르게 미래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보다 확장시켜 보면 ‘왜 지금 우리의 콘텐츠는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30년 전 우리는 2020년에 원더키디가 아빠를 찾아 우주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래는 현재가 되고 원더키디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화성에 인류를 보낼 준비를 하는 지금, 이제부터 30년 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예언적’인 작품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콘텐츠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했을 때, 미래에 맞닥뜨릴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를 상상하고 검토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블랙미러’는 인간의 정신을 디지털로 복제하거나 인간이 디지털 세계에 남겨놓은 기록을 기반으로 인공지능(AI)을 만들었을 때 그 존재의 인권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진다.
미래에 대해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준비 없이 미래를 ‘지금’으로 맞이하게 됐을 때 개인은 소외감을 느끼고 사회에는 긴장감이 팽배해진다. 콘텐츠의 역할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다.
박정서 다음웹툰 대표
12-14 우리가 절뚝일지라도
“우리가 날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절뚝거리면서라도 반드시 가야 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리 너머’ 중
사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18세기 독일의 시인이자 언어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뤼케르트다. 이슬람 문화의 황금기였던 11세기로부터 전해 오는 이슬람의 민간 설화집의 한 부분을 프로이트가 인용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심리학자였지만 그의 저서에는 문학, 인류학 그리고 신학에 대한 내용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생부터 히브리 성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공포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를 자신의 이론과 연결시켰다. 어쩌면 이 문장은 과학의 힘이 종종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주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어떤 장애물이라도 결국에는 반드시 극복해낸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왔다. 비록 목표를 향해 힘겹게 절뚝거리며 다가갔을지언정, 인류는 가장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결승점을 넘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시련을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질병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이는 백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최후의 항복을 받아내기 전까지 이 작은 괴물은 앞으로도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수년간 세계 경제를 불황에 빠뜨릴 것이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이 가혹한 시련을 끝낼 날개를 인류에게 달아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몇 번의 시도는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힘이 없어 보인다. 인간이 수많은 종류의 백신을 개발하며 발버둥을 쳐도, 이 바이러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깊숙이 꽂은 강철 발톱을 거두어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옛 시인들의 문구에서 용기와 영감을 얻으며 조바심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행보의 끝 어디엔가는 인류 모두가 갈망하는 결승선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절뚝임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팀 알퍼 작가·칼럼니스트
12-21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
불쾌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일 없이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성숙한 방어기제이며,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대부분 이것을 가지고 있다.’ ―조지 베일런트 ‘행복의 조건’ 중
방어기제는 감정적 상처로부터 마음의 평정심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 성격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 가장 흔한 방법은 ‘투사’다. 내가 경험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다른 대상에게 전가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면 일시적인 화풀이는 되지만 결국 쌓여서 더 커지고 우울증이나 알코올의존증이 될 수도 있다. ‘통제’는 자기 주변의 대상을 엄격하게 관리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회피할 수 있을지언정 결국 더 힘들어진다. 더 예민해지고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하버드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조지 베일런트는 1938년부터 서로 다른 집단 814명을 평생에 걸쳐 추적 관찰했다. 하버드대 법대 졸업생, 지능이 뛰어난 여성, 대도시 출신 고등학교 중퇴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스트레스는 행복한 삶에서 중요 변수가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을 긍정적인 태도로 넘기는 사람이 결국 더 행복했다.
앤서니 피렐리는 1941년 보스턴의 난방도 잘 안되는 초라한 집에서 알코올의존증이 있고 가정 폭력을 가하는 부모와 살았지만 47년 뒤 대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평생 ‘평온의 기도’를 한 덕분에 용기와 인내심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성숙한 방어기제를 가져보면 어떨까. ‘신이시여, 저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작가
12-28 딱 너의 숨만큼만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거라.”―‘엄마는 해녀입니다’ 중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다. 숨 멈추기. 삶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 나는 숨을 멈춰본다. 1분. 겨우 1분을 채 견디기가 힘들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솟는다. 숨을 멈춘 1분이 얼마나 길고 간절한 시간인지 실감하게 된다. 숨은 내쉬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들이쉬는 것부터 시작하면 숨이 엉켜버리고 마니까. 그림책 ‘엄마는 해녀입니다’에서 해녀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이런 당부를 전한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거라.”
나의 외할머니도 해녀였다. 예순다섯 해까지 날마다 바다에 나갔던 할머니는 숨을 기준으로 살았다. 바다 깊은 곳에는 전복이며 소라며 크고 탐스러운 것들이 많지만, 더 많이 가져오려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물숨이 들어 생명이 위험해진다. 할머니는 딱 자신의 숨만큼만 있다가 물 위로 올라와 숨비소리를 내쉬었다.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같은 그 소리는 위험하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내쉬는 방법이자 다시 숨을 쉬는 방법이었다. 숨비소리를 내쉴 때마다 할머니는 삶과 죽음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바다로. 평생을 바다에서 숨 쉬며 살았다.
숨을 쉬며 살아있는 힘을 ‘목숨’이라고 한다. 목으로 숨을 쉬느냐 쉬지 못하느냐. 거기서 삶과 죽음이 갈라진다. 죽음을 ‘숨이 멎다’ ‘숨지다’ ‘숨을 거두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숨이야말로 살아있는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숨을 멈춰보면 할머니의 삶이 성큼 가까이 느껴진다. 내가 얼마나 숨을 잊은 듯 쓸데없는 것들에 정신이 팔렸는지, 숨이 멎을 듯 과한 욕심을 부렸는지 깨닫는다. 온전히 숨을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소중하다.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거라.” 이 한마디를 간직하며, 오늘을 산다.
고수리 작가◎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