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談24-1/ 阿Q의 시 읽기7/ 〈44〉 폴 엘뤼아르의 ‘자유’ - 〈50〉이문길·김세환·김기덕·권영옥의 新作
阿Q의 시 읽기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20 월간조선
07월 호
〈44〉<46을 착오?> 폴 엘뤼아르의 ‘자유’
자유여! 민주여!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 ‘자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전개하며 발표한 저항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닮은꼴
⊙ ‘쓴다’는 의미는 대상을 절실하게 그리워할 때 하는 행위
▲시인 폴 엘뤼아르.
자유
폴 엘뤼아르
나의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내 책상 위에,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의 페이지 위에
흰 종이 위에
돌과 피,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부(富)의 허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 위에,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낮에 먹는 흰 빵 위에
약혼 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남빛 헌 누더기 옷 위에
태양이 지루하게 머무는 연못 위에
달빛이 환히 비추는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파괴된 내 방공호 위에
무너진 내 등대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소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하고,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
오, 자유여.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프랑스 루브르미술관, 260×325㎝.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연상케 한다.
LIBERTE'
Paul E'luard
Sur mes cahiers d’e' colier
Sur mon pupitre et les arbres
Sur le sable sur la neige
J’e' cris ton nom.
Sur toutes les pages lues
Sur toutes les pages blanches
Pierre sang papier ou cendre
J’e' cris ton nom
Sur les images dore' es
Sur les armes des guerriers
Sur la couronne des rois
J’e' cris ton nom
Sur la jungle et le de' sert
Sur les nids sur les gene^ ts
Sur l’e' cho de mon enfance
J’e' cris ton nom
Sur les merveilles des nuits
Sur le pain blanc des journe' es
Sur les saisons fiance' es
J’e' cris ton nom
Sur tous mes chiffons d’azur•’
Sur l’e' tang soleil moisi
Sur le lac lune vivante
J’e' cris ton nom
(중략)
Sur mes refuges de' truits
Sur mes phares e' croule' s
Sur les murs de mon ennui
J’e' cris ton nom
Sur l’absence sans de' sirs
Sur la solitude nue
Sur les marches de la‵ mort
J’e' cris ton nom
Sur la sante' revenue
Sur le risque disparu
Sur l’espoir sans souvenir
J’e' cris ton nom
Et par le pouvoir d’un mot
Je recommence ma vie
Je suis ne' pour te connal^tre
Pour te nommer
Liberte' .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
‘자유(LIBERTE')’는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1895~1952)의 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며 발표한 저항시이자 참여시다. 엘뤼아르는 전후(戰後)에는 ‘평화·자유·독립’을 위한 강연을 많이 하였다. 이 시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매우 강렬하다.
1연의 시적 화자는 가장 순수한 시절(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자유를 생각한다. ‘노트’ ‘책상’ ‘나무’ ‘모래’ 등으로 상징되는 동심의 세계가 바로 자유의 본질이자 순수의 시절이다. 2연의 화자는 자신의 모든 것과 자유를 연관 짓는다. 쌓아온 지식과 경험, 앞으로 펼쳐질 모든 역사의 장면 위에, 무생물과 이미 사멸한 것에 이르기까지 자유라는 이름의 세례를 퍼붓고 싶다는 화자의 간절한 열망이 드러난다.
이 시에서 ‘너’는 유년의 모든 바람이나 소망보다 귀중한 존재다. 추상적인 것과 과거의 모든 추억보다 소중하다. ‘나’는 현재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귀중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너’는 바로 ‘자유’다. 자유는 의인화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시는 ‘○○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라는 문장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비약과 과감한 생략도 보인다. 경쾌한 리듬과 함께 이미지가 점차 선명해지고 시적 감정이 고조된다.
이 시는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시인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김지하 시인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아직 동트지 않은 도시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이해인의 ‘살아 있는 날은’
/김지하 시인.
엘뤼아르의 시 ‘자유’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닮아 있다. 이 시는 동명의 시집(1982)에 실렸다.
화자는 ‘푸르른 자유의 추억’과 ‘피 묻은 벗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리며 ‘치떨리는’ 분노로 간절하게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 어두운 도시 뒷골목 같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가 되살아날 아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는 것은 지금은 민주주의를 잃어버려 서툴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신념과 용기로 희망을 꿈꾸는 행위를 ‘쓴다’로 표현한다. ‘쓴다’야말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역설적 의지다.
이 시에서 ‘너’는 민주주의를 의인화한 것이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여서, 오직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대상이다. ‘너’는 현재는 부재하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단념할 수 없는 갈망의 대상이다.
김지하와 엘뤼아르 시에 등장하는 ‘쓴다’의 의미는 대상을 절실하게 기다리거나 그리워할 때 하는 행위다. 또한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다질 때도 그런 행위를 하게 된다. 이해인 수녀의 시 ‘살아 있는 날은’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의 시 ‘살아 있는 날은’에도 ‘쓴다’는 행위가 등장한다. 이 시는 《내 혼에 불을 놓아》(1979)에 실렸다. 수도자인 그에게 ‘쓰는’ 행위는 곧 신에 기도하는 삶과 같다. 올바른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이고 지우며 쓰듯,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고자 염원한다.
화자는 꼿꼿한 연필처럼 바르고 정직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어둠보다는 빛나는 희망의 말을 쓰기를 소망한다. 죽는 날까지 정결한 태도로 오직 절대자를 위한 글만을 쓰다가, 언젠가는 향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조용히 소멸하겠다는 다짐을 드러낸다
/이해인 수녀의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이해인의 ‘살아 있는 날은’ 전문
‘쓰다’의 시, ‘읽다’의 시
겨울 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 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런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 중턱에 걸터 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 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고영민의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전문
/고영민 시인의 시집 《악어》.
쓰는 행위를 의인화한 시도 있지만 읽는 행위를 시화(詩化)한 경우도 있다. 고영민의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는 산행 중에 갑자기 배가 아파 용변을 보는 내용이다. 시집 《악어》(2012)에 실렸다.
배낭 속에 휴지가 없어 할 수 없이 시집의 낱장을 찢어 닦는다는 내용인데 의미가 가볍지 않다.
딱딱한 시집 낱장을 부들부들해질 때까지 구겨야 간신히 쓸 수 있다. 화자는 구길 수밖에 없음에 미안한 나머지 시를 정성껏 읽는다. 그리고 낱장의 종이가 온전히 한 장의 휴지로 변할 때까지 구기고 구긴다. ‘정성껏 읽는다’는 행위와 ‘구기고 구긴다’는 행위는 정반대의 역설이지만 의미가 통한다. 가장 고귀한 시의 언어와, 가장 지저분할 수 있는 대변의 행위와, 그리고 한 편의 시는 바로 ‘읽다’라는 동사로 연결돼 있다.
똥과 관련한 시 한 편을 더 보자. 곽재구의 ‘누런 똥’은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배설물의 이미지가 아니다. 풋고추, 열무 쌈을 먹고 누는 똥이다. 나중 애호박을 누런 호박으로 자라게 하는 거룩한 똥임이 틀림없다.
‘힘주어 똥을 누다 보면 해 지는 섬진강이 보인다. 아름다운 절경이 보인다’는 의미다. 마지막 두 행이 인상적이다. ‘사는 일 바라거니 이만 같거라/ 땀나고 꽃피고 새 거름 되거라’고 염원한다.
풋고추 열무 쌈 불땀나게 먹고
누런 똥 싼다
돌각담 틈새 비집고 들어온 바람
애호박 꽃망울 흔드는데
이쁘구나 힘주어 누런 똥 싸다 보면
해 지는 섬진강 보인다
사는 일 바라거니 이만 같거라
땀나고 꽃피고 새 거름 되거라.
-곽재구의 ‘누런 똥-평사리에’ 전문
똥 이야기 두 편
/이희국 시인의 시집 《파랑새는 떠났다》
시(詩)전문 잡지 《시문학》 6월호에 실린 이희국 시인의 ‘거꾸로 가는 시계’에도 똥이 등장한다. 그 똥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눈 똥이다.
네 살 아들의 똥을 어머니가 치웠듯이, 어느새 중년의 아들로 자란 시인은 정신의 유년으로 돌아간 어머니의 똥을 치운다. 역설 속에서 새삼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발견하며 지린내 나는 어머니의 바지를 시인은 소리죽여 빤다. 소리죽여 울면서.
네 살 때 나는 가끔 오줌, 똥을 쌌다고 했다
별일 아닌 듯 그것을 치웠을 어머니
당신의 기억에 안개가 덮이고
나 몇 살이니?
백 살이니? 여든아홉이니?
아들에게 묻는다
어머니,
그때의 내 나이가 되셨다
잠시 전 기억도 슬쩍 지워버리는
저 지독한 지우개
깜빡 정신들 때,
마지막 품위를 지키려 빨던 바지를 놓아두고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방으로 갔다
거름 주던 배추밭처럼 화장실이 난장이다
가족이 잠든 밤
그 옛날 어머니처럼 지린내를 삼키며
문을 꼭 닫고 소리죽여 바지를 빤다
어머니가 나의 네 살을 빨던 것처럼
-이희국의 ‘거꾸로 가는 시계’ 전문
/이문길 시인의 시집 《하늘과 허수아비》.
이문길 시인의 ‘똥’은 겨우 2행으로 이뤄졌다. 단순한 시지만 느낌은 불편하다. 시집 《하늘과 허수아비》(2015)에 실렸다.
세상이 똥통과 같다. 똥통의 도가니다. 똥통 속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도 똥처럼 보인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고되도 똥일 뿐이다. 슬픔도 기쁨도 그저 똥과 같다. 똥이니 희로애락에 목맬 필요가 없다.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체념할 필요가 없다. 나만 똥 같지 않으니까. 모든 이가, 모든 세상살이가 똥 같으니….
똥통 속에
똥같이 살아 간다
-이문길의 ‘똥’ 전문⊙
08월 호
〈45〉 보들레르의 ‘독자에게’
위선의 독자여, 내 同類여, 내 형제여!
⊙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현대시 운동의 근원이자 새로운 문학사조의 출발
⊙ 이상의 ‘오감도’는 언어의 일상성이 파괴된 ‘독자를 엿 먹이는’ 시
/현대시 운동의 근원이 된 샤를 보들레르.
독자에게
보들레르(번역 金鵬九)
어리석음, 과오, 죄악, 탐욕이
우리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 괴롭히며,
또한 거지들이 몸에 이·벼룩 기르듯이,
우리의 알뜰한 회한을 키우도다.
우리 죄악들 끈질기고 참회는 무른고야.
고해의 값을 듬뿍 치루어 받고는,
치사스런 눈물로 모든 오점 씻어내린 줄 알고,
좋아라 흙탕길로 되돌아오는구나.
홀린 우리 정신을 악의 베갯머리에서
오래오래 흔들어 재우는 건 거대한 〈악마〉,
그러면 우리 의지의 으리으리한 금속도
그 해박한 연금사에 걸려 몽땅 증발하는구나.
우릴 조종하는 끄나풀을 쥔 것은 〈악마〉인지고!
지겨운 물건에서도 우리는 입맛을 느끼고,
날마다 한걸음씩 악취 풍기는 어둠을 가로질러
혐오도 없이 〈지옥〉으로 내려가는구나.
(중략)
우리 뇌수 속엔 한 무리의 〈마귀〉떼가
백만의 회충인 양 와글와글 엉겨 탕진하니,
숨 들이키면 〈죽음〉이 폐(肺) 속으로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콸콸 흘러내린다.
폭행, 독약, 비수, 방화 따위가 아직
그 멋진 그림으로 우리 가소·가련한
운명의 용렬한 화포(畵布)*를 수놓지 않았음은
오호라! 우리 넋이 그만큼 담대치 못하기 때문.
허나 승냥이, 표범, 암사냥개,
원숭이, 독섬섬이, 독수리, 뱀 따위
우리들의 악덕의 더러운 동물원에서,
짖어대고, 포효하고, 으르릉 대고 기어가는 괴물들,
그중에도 더욱 추악 간사하고 치사한 놈이 있어!
놈은 큰 몸짓도 고함도 없지만,
기꺼이 대지를 부숴 조각을 내고
하품하며 세계를 집어삼킬 것이니,
그놈이 바로 〈권태〉! - 뜻 않은 눈물 고인
눈으로, 놈은 담뱃대 물고 교수대를 꿈꾸지.
그대는 알리,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위선의 독자여,- 내 동류(同類)여,- 내 형제여!
(*화포: 그림을 그리는 바탕천)
Au lecteur
Charles BAUDELAIRE
La sottise, l’erreur, le pe' che' , la le' sine,
Occupent nos esprits et travaillent nos corps,
Et nous alimentons nos aimables remords,
Comme les mendiants nourrissent leur vermine.
Nos pe' che' s sont te^ tus, nos repentirs sont l^aches ;
Nous nous faisons payer grassement nos aveux,
Et nous rentrons gaiement dans le chemin bourbeux,
Croyant par de vils pleurs laver toutes nos taches.
Sur l’oreiller du mal c’est Satan Trisme' giste
Qui berce longuement notre esprit enchante' ,
Et le riche me' tal de notre volonte'
Est tout vaporise' par ce savant chimiste.
C’est le Diable qui tient les fils qui nous remuent!
Aux objets re' pugnants nous trouvons des appas;
Chaque jour vers l’Enfer nous descendons d’un pas,
Sans horreur, a` travers des te' ne`bres qui puent.
(중략)
Serre', fourmillant, comme un million d’helminthes,
Dans nos cerveaux ribote un peuple de De' mons,
Et, quand nous respirons, la Mort dans nos poumons
Descend, fleuve invisible, avec de sourdes plaintes.
Si le viol, le poison, le poignard, l’incendie,
N’ont pas encor brode' de leurs plaisants dessins
Le canevas banal de nos piteux destins,
C’est que notre a^me, he' las! n’est pas assez hardie.
Mais parmi les chacals, les panthe' res, les lices,
Les singes, les scorpions, les vautours, les serpents,
Les monstres glapissants, hurlants, grognants, rampants,
Dans la me' nagerie infa^me de nos vices,
Il en est un plus laid, plus me'chant, plus immonde!
Quoiqu’il ne pousse ni grands gestes ni grands cris,
Il ferait volontiers de la terre un de'bris
Et dans un ba^illement avalerait le monde;
C’est l’Ennui! - l’oeil charge' d’un pleur involontaire,
Il re^ve d’e'chafauds en fumant son houka.
Tu le connais, lecteur, ce monstre de'licat,
- Hypocrite lecteur, - mon semblable, - mon fre`re!
/보들레르의 《악의 꽃》(1857) 프랑스어판(사진 왼쪽)과 한국판(사진 오른쪽).
샤를 보들레르(1821~1867)가 살던 당대 낭만파 시인들은 ‘거창한 독백’을 통해 불안을 사치스럽게 발산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아온 보들레르는, 그러나 그들과 달리 ‘마음의 참회소’를 마련하고 인간 내면의 세계를 탐험했다.
보들레르는 깊은 상상력과 예민한 감각으로 상징주의 문학을 꽃피웠다. 그의 시집 《악의 꽃》(1857)은 프랑스 상징파 시의 선구적 작품이다. 현대시 운동의 근원이자 새로운 문학사조의 출발로 손꼽힌다.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 세대인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김병국 외 4인 《한국 교육 미디어 문학》 중에서)
보들레르의 詩, 이상의 詩
《악의 꽃》에 실린 서시(序詩) ‘독자에게’는 시인의 인생 여정이 압축돼 있다고 전한다. 그 여정은 절망적이다. ‘어리석음, 과오, 죄악, 탐욕이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을 괴롭힌다’고 첫 연에 썼다. 죄악은 악착스럽게 반복되고, 참회는 ‘무르다’(의지가 굳지 못하다는 의미). 어리석게도 ‘죄를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면 죄(오점)가 씻어지리라’고 믿었을 정도다.
심지어 보들레르는 인간의 머릿속에 ‘한 무리의 〈악마〉떼가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시각이 어둡고 비관적이다.
시적 화자는 (시를 읽는) 독자를 시인처럼 권태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치부한다. 독자를 ‘내 동류(同類)’이자 ‘내 형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독자를 자신(시인)과 같은 위선적인 존재로 비하한다고 할까.
보들레르의 ‘독자에게’를 읽노라면 이상(李箱·1910~1937)의 시가 떠오른다. 1934년 7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烏瞰圖)’가 연재되자 독자의 항의가 쇄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감도’는 철저히 독자를 엿 먹인다.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구체적이지 않다.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13인’ ‘질주한다’ ‘막다른 골목’ ‘무섭다’ ‘무서운’ 등의 낯선 시어들뿐이다.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 ‘오감도’는 철저히 독자를 엿 먹인 시다.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구체적이지 않다.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오감도’ 전문
/이상 시인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당혹스럽다. 언어의 일상성(日常性)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시인이 경험한 ‘일그러진 현실’ 탓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분열적 표현, 혹은 불안과 광기, 공포가 시에서 낯설게 느껴진다.
시 ‘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15회 연재됐는데, 원래는 30회 연재를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의 항의로 결국 중단됐다. 이때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인 이태준(李泰俊·1883~1921)은 사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연재를 고집했다고 전한다.
대표적인 항의 내용으로, “오감도는 조감도(鳥瞰圖)의 잘못이 아니냐” “그게 어쩌자는 시냐” “시 중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냐” “아니면 일제 때의 13도(道)를 의미하느냐” 등이 있었다고 한다.
시인에 대한 평도 극과 극이었다. ‘피해망상,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라는 혹평과 ‘최초의 모더니스트이자 현대문학의 기수’라는 극찬까지 다양했다.
시인 이상은 “모두가 문명화, 근대화라는 덧없는 망상 속에서 허둥댈 때,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문명의 메커니즘을 보고, 시대의 이면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비상(非常)한, 비상(飛上)을 꿈꾼 지식인”(오선민 문학평론가)이었다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 → 차렷, 열중쉬엇, 차렷
/박남철 시인
박남철(朴南喆·1953~2014)이란 시인이 있다. 1953년 경북 포항 출신으로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나왔다. 1979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연날리기’ 등으로 시단에 등장했다.
그의 시는 야유와 풍자, 욕설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비틀린 세계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언어인 과감한 형태 파괴적인 시로 독자와 평단을 놀라게 했다. 시 ‘독자놈들 길들이기’는 보들레르가 ‘독자에게’에서 경고하듯이, 혹은 이상의 ‘오감도’에서 독자를 당혹시키듯 독자를 힐난한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 혹독하게 ‘차렷, 열중쉬엇, 차렷’ 하고 구령을 불러댄다. 그리고 ‘느네들 정말 그 따위들로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하며 일갈한다. 그러나 소심하게 속(괄호의 뜻이 그렇다)으로만 호통치고 있다. ‘독자놈들 길들이기’는 시집 《지상의 인간》(1984)에 실렸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따위들로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박남철의 ‘독자놈들 길들이기’ 전문
‘박남철 비평시집1’이란 타이틀을 내건 시집 《용의 모습으로》(1990)에서 시인은 아예 독자의 입장에서 다른 시인의 시를 감상한다. 이런 시를, 시라는 장르로 묶을 수 있을지 헷갈린다.
예컨대 시 ‘만화책’은 최석하 시인의 시 ‘만화책’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곤 이어서 자신의 감상평을 천연덕스럽게 적어놓았다. 이게 시인지 아닌지, 박남철은 기꺼이 시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비현실적인 문학주의의 무지몽매를 일깨우는 힘이야말로 해체의 또 다른 에너지라고 믿는다”거나 “문학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십 원에 세 권씩 봬 주는 우리집에서
십 원에 네 권씩 하는 데로
아무리 멀어도 아이들은 가 버린다.
가게 전셋돈이라도 뽑아 달라고 빚장이들 몰려와
울 내외 멱살을 한바탕 잡아채다 뜨고
마른 하늘의 제비 한 마리 옆집 텔레비 안테나 위로
좀 조용 조용히 하란 듯이 내려앉았네
창살 너머 바라다뵈는 저 꽁지 긴 새 배경엔
흰 구름장이 곧장 철새 떼 같이 떠가고
개학날 곧 되면 놀이터가 돼 온 이 빈터 가겟벌이도
천생 하루 일이천 원이 고작일 게다
날마다 신간 만화책들이 스물 한 권씩 쏟아져 나오니
그것들만 사들이재도 하루 이천백 원씩 있어야겠으나
우린 워낙에 딴집에서 열흘썩이나 묵은 것들을
단돈 오백에다 꼬박꼬박 들여 놓고 있다
제비는 아지쥬지 파르르 파릴 불어 대고
진똥을 하나 금시로 짤기더만
창살을 향해 달려들 듯 용히 날아가는구나
우주 여행 편을 보고 있는 한 아이가
마뜩은 책 한 권 훔치려는 겐지 두 눈이 자꾸만
허공에서 허공에서 반짝거리고 있고.
(최석하, ‘만화책’, 《바람이 바람을 불러 바람 불게 하고》, 문학과 지성사, 1981)
2
짓궂을 정도로, 서정시의 본령을 비웃는 듯한 태도로 이제 곧 거덜이 나게 된 변두리 삼류 만화 가게 주인의 넋두리를 천연덕스럽게 늘어 놓고 있는 최석하의 ‘만화책’을 읽다 보면 우선 웃음부터 절로 나온다. 보라.
‘마른하늘의 제비 한 마리 옆집 텔레비 안테나 위로/ 좀 조용 조용히 하란 듯이 내려앉았네’
또 보라.
‘제비는 아지쥬지 파르르 파릴 불어 대고/ 진똥을 하나 금시로 짤기더만/ 창살을 향해 달려들 듯 용히 날아가는구나’
그리고 또 보라.
‘우주 여행 편을 보고 있는 한 아이가/ 마뜩은 책 한 권 훔치려는 겐지 두 눈이 자꾸만/ 허공에서 허공에서 반짝거리고 있고.’
물론 약간 장황할 정도로 필자가 위의 시구들을 인용한 까닭은 이 구절들이 특히 재미있을 정도로 우습다거나 사물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투명한 관찰에 의한 변칙적인 서정성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필자가 인용된 시구들에서 놀라울 정도의 웃음과 변칙적일 정도의 서정성 다음으로 느끼는 것은 형광등 켜지듯이 충격되는 비애감 섞인 ‘홍부와 놀부’ 모티프에 대한 배반 또는 왜곡인 것이다.
-박남철의 ‘만화책’ 전문
‘고상한’ 시 파괴하기
형식 파괴의 시는 서정시라는 틀을 해체한다. 시란, 혹은 문학이란, 고상하고 촘촘한 의미망을 담아 그럴 듯하며 아름다움을 지향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시도 인간의 다양한 모습처럼 경박할 수 있고 냉소적일 수 있으며 추(醜)한 모습까지 담을 수 있다고 선언한다.
장정일(蔣正一) 시인의 ‘하숙’은 서구의 물질문명을 비판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당대 젊은이들의 경박한 세태를 비꼰다. ‘리바이스, 켄트, 셀렘, 플레이보이, 파이오니아,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클랩튼, 코카콜라, 조니 워커’ 등을 길게 나열한다.
녀석의 하숙방 벽에는 리바이스 청바지 정장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만 사립대 영문과 리포트가 있고 영한사전이 있고
재떨이엔 필터만 남은 켄트 꽁초가 있고 씹다 버린 셀렘이 있고
서랍 안에는 묶은 플레이보이가 숨겨져 있고
방 모서리에는 파이오니아 앰프가 모셔져 있고
레코드 꽂이에는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클랩튼이 꽂혀 있고
방바닥엔 음악 감상실에서 얻은 최신 빌보드 챠트가 팽개쳐 있고
쓰레기통엔 코카콜라와 조니 워커 빈 병이 쑤셔 박혀 있고
그 하숙방에,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 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
-장정일의 ‘하숙’ 전문
화자는 ‘녀석’의 하숙방에 널려 있는 서구 문물과 혼곤히 취해 자는 모습을 시시콜콜 묘사한다. 1~9행에서는 ‘~있고’로 끝내다가 10행에서만 ‘~않고’로 변화를 준다. 1~8행에서는 방 안에 널려 있는 서구 문물에 초점을 두고 있고, 9행과 10행에서는 ‘녀석’의 취한 모습에 초점을 둔다. 이 시는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에 실렸다.
오규원(吳圭原·1941~2007) 시인의 ‘프란츠 카프카’도 흥미로운 시다. 정신적 가치가 상품화되는 것을 메뉴판 형식으로 표현했는데 자조적·반어적인 어조가 느껴진다.
메뉴판에는 저명한 예술가, 철학가의 이름이 나열돼 있고 각각 금액이 적혀 있다. 인문학이 지닌 정신적 영역의 가치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풍자한다. 어쩌면, 정신적 가치가 무너진 현실에서 물질적 가치로 치자면 별 볼일 없는 시를 공부하는 것은 미친 짓일지 모른다.
마지막 행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는 반어적 표현이다. 카프카는 인간의 부조리성, 인간 존재의 불안을 날카롭게 통찰한 작가다. 그런 카프카를 ‘가장 값싸다’고 표현한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인간 부조리를 다룬 카프카가 ‘가장 값싼’ 취급을 당하는 현실이 기가 막힌다. 이 시는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에 실렸다.
ㅡ MENU ㅡ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의 ‘프란츠 카프카’ 전문⊙
09월 호
〈46〉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 자취가 적은 그 길
⊙ ‘두 갈래 길’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선택의 기로를 뜻해
⊙ 윤동주, 김기림, 나태주, 배창환, 반디(재북작가) 등 많은 시인이 ‘길’을 노래해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모습과 그의 시 ‘가지 않은 길’.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 걸은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으므로 해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입니다,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적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더라고.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한국인이 애송하는 시다. 시적 화자는 노란 숲 속 두 갈래의 길 중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 걸은 자취가 적은 길을 택하겠노라고 말한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1874~1963)의 시 ‘가지 않은 길’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고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서양시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1연에서 시적 화자(詩的 話者)는 두 갈래의 길 앞에 서 있다. 삶이란 늘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한 길만을 택해야 하는 게 인생이다. 선택은 늘 책임이 따른다. 길이 끊임없이 이어진 인생의 행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두 갈래 길’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선택의 기로를 뜻하는 것이다.
‘사람 걸은 자취가 적은 길’이란 말 그대로 처녀지다. 사람들이 도전하지 않는 길, 미개척 분야를 뜻한다.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와 실수는 불가피하다. 어쩌면 사람들이 피하는 길일지 모른다. 그러나 리스크가 큰 만큼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
현대시에서 ‘길’은 수많은 상상력을 낳는 소재다. 길은 ‘도로’라는 의미 외에 방법, 수단, 과정, 방향, 도리, 미래, 전망 등의 추상적 의미를 지닌다. 이 시에서 길은 ‘삶의 길’, 즉 인생을 의미하는 말로 새로운 인생의 도전을 의미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한번 가기로 작정한 인생의 길이라면 후회 없이 그 길을 떠나야 한다. 뒤돌아볼 필요가 없다. 발가락 끝에 언제나 새로운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의 ‘묻지 말아라’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1993)에 실렸다. 이 길을 따라 끝없이 가면 ‘번듯한 신작로(큰길)’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조봇한(조금 좁은 듯이 좁다랗고 봉긋한) 길, 오밀조밀한 고샅길(좁은 길)이 나올 뿐이다. 남들이 외면하고 마다하는 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에 생나무 울타리가 있고 복사꽃, 살구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다.
좁고 작은 길이지만 들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길이다. 그런 길, 그런 인생에 한때 ‘봄이 있었음을’ ‘깨끗한 새벽이 있었음을’ ‘하늘하고 놀던 시절 있었음을’ ‘땅하고도 숨 쉬던 시절 있었음’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큰길이 아닌 조봇한 길, 고샅길에 진짜 인생의 길이 숨어 있다.
이 길을 따라 끝없이 가면
조봇한 길이 나서고
오밀조밀한 고샅길과 고샅길
생나무 울타리 황토흙 담장 너머
복사꽃 살구꽃 어우러져 피어나는
봄이 있었음을
묻지 말아라
그 마을 한 귀퉁이 어디엔가는 분명
누군가의 슬픈 혼령인 양 맑은 샘물이 솟고
별의 눈빛과 이슬의 가슴을 가진 처녀애들
물동이 이고 물 길러 오는
깨끗한 새벽 있었음을
묻지 말아라
봇물 철렁 고인 포강배미
두엄 더미 져다 버린 자리에
미꾸라지 우렁이 송사리
더러는 버들붕어 득실거리고
맨발을 벗고서도 발 시려운 줄 모르는 아이들
비 오는 날이면 토란잎을 따서
비를 가리고
해뜨는 날이면 아주까리 잎을 따서
해를 가리고
하늘하고 놀던 시절 있었음을
땅하고도 숨쉬던 시절 있었음을
묻지 말아라
묻지 말아라.
-나태주의 ‘묻지 말아라’ 전문
배창환의 ‘길’과 반디의 ‘길’
/배창환 시인의 시집 《잠든 그대》
배창환 시인의 첫 시집 《잠든 그대》(1984)에 실린 ‘울고 싶은 밤’은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들길’에서 시가 시작된다. 시적 화자는 ‘너’를 만나고 돌아오다 들길 풀밭에 퍼질러 앉는다. 자신의 삶이 당당하지 못하다고 느껴서다. ‘멀쩡히’ ‘정말 큰 흉터 하나 없이’ 산다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상처뿐인 스무 몇 해의 너’를 만나면서다.
내 삶이 부끄러워 ‘엉머구리가 피창이 터질 듯’ 울었지만, 그렇게 ‘넘어지고 자빠져’ 울어도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터져 오는 내 울음’에 귀 기울인다. 어쩌면 이 ‘울음’이 시인을 훗날 해직 교사로 만들고, 전교조 활동에 뛰어들게 했는지 모른다.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들길 풀밭에 퍼질러 앉아
나는 담배를 깊이깊이 빨아들였고 한 번씩 빨 때마다
또 엉머구리가 피창이 터질 듯 울었다.
개구리도 입 모아 개골거리며 달 없는 밤을 깊게 했다
꽃 피는 4월을 부르다 취해서 취해서
몇 번이나 넘어지고 자빠라져 울 때
왜 이리 취기는 재빨리 씻은 듯 사라지는지
나는 조용히 터져 오는 내 울음에 귀 기울인다
오늘도 상처뿐인 스무 몇 해의 너를 만났다
바람에도 쓰러질 듯 그러나 건강한 웃음 털어놓고
한 시대의 폭력적인 어둠과 맞서는 그를 보면
왜 자꾸만 이렇게 멀쩡히, 그리고 정말 큰 흉터 하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부끄러운지
모른다 조금씩 이렇게 쉽게 몰락해 가는 것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삶의 한 방식이던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엉머구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짖어대는 달 없는 밤
(이하 하략)
-배창환 ‘울고 싶은 밤’ 일부
/재북시인 반디의 《붉은 세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재북(在北)작가 반디의 시 ‘차잡이 나그네’를 보자. 이 시는 시집 《붉은 세월》(2018)에 실렸다. 반디는 평생을 지옥과 같은 시대를 살며 분노와 저주의 언어가 아닌 따스한 서정의 언어로 노래한다. “서정을 통해 시적 생명력을 획득하고 있다”(시인 정호승).
‘차잡이 나그네’는 길을 떠나려는, ‘붉은 이 땅’을 떠나려는 이야기다.
시인은 아무리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자 걸어서 길을 나선다. 생명과 자유를 찾기 위해서다. 때마침 차가 온다. ‘운전사 아저씨 차 좀 세워요’라고 말한다. 차비 대신 ‘바트담배 탕교담배 별담배’(중국 동북지역에서 생산하는 담배 별칭)를 주겠노라 흥정한다.
또 ‘팔랑팔랑 지폐’를 꺼내며 이렇게 노래한다. ‘날 태우고 가 줘요 아주 가 줘요/ 역겨운 빨간 이 땅 아주 가 줘요’라고.
운전사 아저씨 차 좀 세워요
바트담배 탕교담배 별담배야요
숨죽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백리길을 걸어 떠난 이 몸이라오
운전사 아저씨 같이 가자요
팔랑팔랑 이 돈이 안보이나요
찬서리 밝히는 타향의 밤길
걸어 걸어 백리길 언제 가라오
온 세상이 택시와 비행기 탈 때
이 땅에만 차잡이 웬말인가요
날 태우고 가 줘요 아주 가 줘요
역겨운 빨간 이 땅 아주 가 줘요
-반디의 ‘차잡이 나그네’ 전문
윤동주의 ‘길’과 ‘푸른 하늘’, 김기림의 ‘길’과 ‘강’
/윤동주 시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에 실린 윤동주(尹東柱·1917~1945)의 ‘길’은 담담하면서도 뭉클한 시다. 시인은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 ‘길’은 답답한 현실의 꽉 막힌 공간이자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성찰의 공간이다. 또 이 ‘길’은 돌담으로 분리돼 있다. 담의 이쪽과 저쪽이 단절돼 있는데 이 담(장애물)이야말로 암울한 현실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 담을 통해 이상적 자아(自我)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어둠’을 통해 ‘빛’이 더 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시에서 시작 화자가 길을 걷는 행위는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이상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자아 성찰의 과정이다. 그 과정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다시 ‘저녁에서 아침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기에, ‘돌담을 더듬을 수밖에 없어’ 시적 화자는 절망감에 빠져 눈물짓는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 쳐다본 ‘푸른 하늘’이 있어 희망을 꿈꾼다.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의 길을 다시 걷고자 다짐한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의 ‘길’ 전문
/김기림 시인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자매지인 《월간 조광》(1936)에 실린 김기림(金起林·1908~?) 시인의 ‘길’은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다. ‘길’의 추억은 늘 그렇듯 아프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답다.
어머니는 ‘길’을 따라 돌아가셨고, 첫사랑의 여인도 ‘길’ 위에서 만났다가 조약돌처럼 떠났다. 시인은 혼자서 ‘길’을 넘어 ‘강’을 찾아간다. 그런데 ‘강’ 역시 ‘길’과 다르지 않다. ‘강’에 갔다가 ‘노을에 함뿍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자줏빛’이란 색깔이 슬픔과 그리움을 연상시킨다. 시인은 마을 밖 버드나무 밑에서 떠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움의 눈물을 짓는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혼자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자매지인 《월간 조광》(1936)에 실린 김기림(金起林·1908~?) 시인의 ‘길’은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다. ‘길’의 추억은 늘 그렇듯 아프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답다.
어머니는 ‘길’을 따라 돌아가셨고, 첫사랑의 여인도 ‘길’ 위에서 만났다가 조약돌처럼 떠났다. 시인은 혼자서 ‘길’을 넘어 ‘강’을 찾아간다. 그런데 ‘강’ 역시 ‘길’과 다르지 않다. ‘강’에 갔다가 ‘노을에 함뿍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자줏빛’이란 색깔이 슬픔과 그리움을 연상시킨다. 시인은 마을 밖 버드나무 밑에서 떠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움의 눈물을 짓는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혼자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김기림의 ‘길’ 전문⊙
10월 호
〈47〉 세르반테스의 ‘불가능한 꿈’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 소설 《돈키호테》의 시를 뮤지컬 〈라 만차의 사람〉에서 ‘불가능한 꿈’으로 노래
⊙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것, 이것이 나의 여정’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
그것은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의무.
아니!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노라.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중에서
Es la misio´n del verdadero caballero. Su deber.
No! Su deber no. Su privilegio.
Son˜ar lo imposible son˜ar.
Vencer al invicto rival,
Sufrir el dolor insufrible,
Morir por un noble ideal.
Saber enmendar el error,
Amar con pureza y bondad.
Querer, en un suen˜o imposible,
Con fe, una estrella alcanzar.
- 《Don Quijote de La Mancha》 written by Miguel de Cervantes
/스페인 광장에 세워진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1547~1616)가 쓴 《돈키호테(Don Quixote)》(1605)에 나오는 시다. 핍박받는 자들의 편에 서서 자신의 이름을 ‘알폰소 키하노’ 대신 ‘돈키호테’라고 고치고 ‘산초 판자’와 함께 길을 나선다. 그의 여행이 어처구니없고 황당할지라도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오직 믿음을 갖고 별을 향해’ 길을 떠난다.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이 시에는 돈키호테의 황당무계하지만 아름다운 이상주의가 담겨 있다. 영어의 ‘키호티즘(Quixotism)’이라는 단어가 있다.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성품이나 경향을 일컫는 말인데 돈키호테에서 파생되었다.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고, 양떼를 교전 중인 군대로 생각하며,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인 돈키호테를 떠올려보라.
훗날 소설 《돈키호테》를 각색한 뮤지컬 〈라 만차의 사람(Man of La Mancha)〉에서 극중 돈키호테가 부르는 ‘불가능한 꿈(Impossible Dream)’은 앞서 시에서 느껴지는 장중함을 넘어 달콤하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고(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번역이다.
이루지 못한 꿈을 꾸고
쳐부수지 못할 적과 싸우며
견디지 못할 슬픔을 견디고
용감한 사람도 가기 두려워하는 곳에 가고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사랑하고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것,
이것이 나의 여정이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여도,
아무리 길이 멀어도,
정의를 위해서 싸우고
천상의 목표를 위해서는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영광의 여정에 충실해야 나 죽을 때 평화로우리
그리고 이것 때문에 세상은 더 좋아지리
아무리 조롱받고 상처 입어도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노력한다면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위해
- 장영희가 번역한 ‘불가능한 꿈’ 중에서
‘지옥에서 쫓겨나도 당신을 만나 사랑할 것이다’
/국내 공연된 《돈키호테》를 각색한 뮤지컬 〈라 만차의 사람〉. 배우 조승우가 돈키호테로 열연했다.
매력적인 표현들로 가능하다. 희망이 없어 보이고 길은 멀어도, 조롱받고 상처 입어도 오직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향해 떠나는 여정! ‘불가능한 꿈’을 읽자니 문득 《논어》의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발분망식(發憤忘食)’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열심히 노력(발분·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근심도 잊으며 하는 일이 즐거워질까. 돈키호테처럼 저 별을 향해 근심, 걱정을 잊고 삶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꿈’ 구절 중에 ‘천상의 목표를 위해서는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라는 말이 있다.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라는 표현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당신을 찾아서》(2020)의 23쪽에 있는 시 ‘지옥은 천국이다’가 떠오른다.
지옥은 천국이다
지옥에도 꽃밭이 있고
깊은 산에 비도 내리고
새들이 날고
지옥에도 사랑이 있다
나 이 세상 사는 동안
아무도 나를 데려가지 않아도
반드시 지옥을 찾아갈 것이다
지옥에서 쫓겨나도
다시 찾아갈 것이다
당신을 만나
사랑할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지옥은 천국이다’ 전문
시인에게 지옥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꽃밭이 있고 깊은 산이 있으며 그곳에 비가 내린다. 새들이 날고 또 사랑이 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가 지옥에 있다. 사랑하는 이를 찾으러 지옥에 가야 한다. 지옥에서 쫓겨나도 다시 찾아간다. 찾아가고야 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무시무시한 지옥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랑을 잊어야 할까.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할까. 아니면 그 사랑을 찾아 불길 지옥에라도 뛰어들어야 할까.
정호승 시인의 ‘별’, 김남권 시인의 ‘별’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돈키호테는 믿음을 갖고 별에 닿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정호승 시인은 별의 시인이다. 별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1990)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돈키호테에게 삶의 여정은 별을 쫓는 것과 다름 아니다.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고 뭇매를 맞아도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이 돈키호테가 꿈꾸는 삶이다.
정호승 시인에게 별은 ‘위로’의 상징이다.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그래서 삶을, 죽음마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늘에는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시인의 ‘별들은 따뜻하다’ 전문
김남권 시인은 감성의 시인이다. 잔잔하지만 밝고 아름답다. 그중에서 ‘별의 노래1’은 특별나다. 별에 수도꼭지가 있다. 저녁이면 말끔히 세수를 하고 ‘나’를 기다린다. 말똥말똥한 별빛을 저녁 하늘에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모든 별에는 수도꼭지가 있어
이른 저녁이 되면
말끔히 세수하고 나와 나를 기다리네
내가 부르지 않아도 서낭당 느티나무 정자를
베고 누워
나를 올려다보네
노을과 몸을 바꾸는 아홉시가 되면
아침의 노여움도 어둠 속에 둥지를 틀고
바람의 표정을 바꾸네
모든 별들이 우주의 눈을 밝히는
자정이 되면
수선화처럼 푸른 어깨를 내밀어
숨 막히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네
늦은 세수를 하고 다시 보아도
너는 호수에서 막 깨어난 듯 눈이 부셔
가슴에 손을 얹고 눈 감을밖에
-김남권 시인의 ‘별의 노래1’ 전문
‘노을과 몸을 바꾸는 아홉시’ ‘별들이 우주의 눈을 밝히는 자정’을 지나 별들이 ‘숨 막히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지막 3행이 압권이다. ‘늦은 세수를 하고 다시 보아도/ 너는 호수에서 막 깨어난 듯 눈이 부셔/ 가슴에 손을 얹고 눈 감을밖에’ 없다. 늘 우리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별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도 반짝이게 만든다. 그런 삶에 ‘가슴에 손을 얹고 눈 감을밖에’.
차동엽 신부의 ‘참 좋은 당신’, 간디의 따뜻한 마음씨
고(故) 차동엽 신부의 유고시집 두 권이 나왔다. 첫 번째 시집 《참 소중한 당신》(2020)에 실린 ‘참 소중한 당신’은 작고 소박하며 평범하지만 신(神)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당신’을 노래한다. ‘한 잎’ ‘아주 작은 생명’ ‘오물거리는 몸짓’ 같은 자그마한 존재가 ‘나’이자 ‘당신’이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나’(이자 ‘당신’)는 신비로움이 가득한 저 먼 별을 바라보며 내일의 비상을 노래하고, 부러진 나래에서 희망을 속삭인다. 시 속 ‘별 하나’는 돈키호테의 여정에서 마주한 ‘별’과 다르지 않으리라.
한 잎 의미로 피어나기 위해 미소 짓는 당신,
아주 작은 생명의 움에서 소중함의 함성이
오물거리는 몸짓에서 소중함의 얼굴이
남몰래 훔치는 눈물에서 소중함의 목마름이
그대로 우리 품에 스며듭니다.
당신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한 자루 사랑이 되기 위해 생애를 태우는 당신,
거짓의 꽃밭 속에 진실의 씨앗을 심을 때,
얼어붙은 마음들에 따스함의 밑불을 지필 때,
바람처럼 스치는 인연에 가슴을 여밀 때,
벗을 위해 목숨 바친 님 모습이 스칩니다.
당신의 믿음은 소중합니다.
별 하나 바라보며 내일의 비상을 노래하는 당신,
부러진 나래에게 희망을 속삭이매,
깜박이는 심지에 격려의 기름을 부으매,
이른 새벽에 이슬 모아 홀로이 기도하매,
미명을 뚫고 찬란한 태양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꿈은 소중합니다.
-차동엽 신부의 ‘참 소중한 당신’ 전문
언젠가 차 신부는 ‘참 소중한 당신’을 이야기하며 인도의 국부(國父)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탔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어서 그 신발을 주울 수 없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다.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차 신부는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씨가 필요하다”고 했다. ‘참 소중한 당신’은 간디같이 ‘따스함의 밑불을 지피는’ 마음씨를 가진 이가 아닐까.
‘인공위성’과 ‘별’의 차이
/왼쪽부터 정호승 시인의 시집 《당신을 찾아서》, 《별들은 따뜻하다》, 이창기 시인의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김남권 시인의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차동엽 신부의 유고시집 《참 소중한 당신》.
누구나 돈키호테 같은 순수한 열정으로 별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1984년 문학 계간지 《문예중앙》의 등단작인 이창기의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에 나오는 친구 ‘둘째고모’의 눈에 비친 별은 돈키호테가 바라보는 별과 다르다.
친구의 둘째고모는 정부미를 일반미라 속여 판다. 사기꾼의 눈에 비친 별은 별이 아니라 별처럼 생긴 인공위성일 뿐이다. 별과 인공위성이 비슷할지 몰라도 둘은 절대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순수하지 않은 꿈은, 결코 ‘불가능한 꿈’을 이룰 수 없다.
정부미 상품(上品)을 일반미라 속여 파는
둘째고모를 가진 친구가 봉천동 비탈길
이마 위에 떠 있는 늘 부지런한 별을 보고
자꾸 인공위성이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별이 별이 아니라는 물증(物證)을
확보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지만
인공위성이 아니라는 이 해외 토픽에도
밤 아홉시 뉴스에도 나지 않았다 그 겨울의
별은 찬밥처럼 부정적으로 빛났다 (하략)
-이창기 시인의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일부
별을 바라보며 꾸는 꿈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력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꾸는 꿈만큼 성장한다.
일본인들이 많이 기르는 관상어 중에 ‘고이’라는 잉어가 있다. 놀랍게도 이 잉어는 작은 어항에 두면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큰 수족관에 넣으면 15~25cm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큰다. 고이는 자신이 사는 환경에 따라 성장한다는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생전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생각이 잉어 고이가 처한 환경과 같다면, 우리가 더 큰 생각을 품고 더 큰 꿈을 꾸면 더 크게 자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생각의 크기는 제한을 받지 않는다. ‘불가능한 꿈’도 반드시 이룰 수 있다.⊙
11월 호
〈48〉 아폴리네르의 ‘가을’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 佛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가을’… 지난여름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농부의 슬픈 콧노래
⊙ 삶이 담긴 가을 시… 천상병의 ‘들국화’, 박노해의 ‘가을볕’, 김지하의 ‘가을’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가을
기욤 아폴리네르(황현산 역)
안개 속으로 멀어진다 안짱다리 농부와
암소 한 마리 느릿느릿 가을 안개 속에
가난하고 누추한 동네들 숨어 있다
저만치 멀어지며 농부는 흥얼거린다
깨어진 반지 찢어진 가슴을 말하는
사랑과 변심의 노래 하나를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안개 속으로 회색 실루엣 두 개 멀어진다
Automne
Guillaume Apollinaire
Dans le brouillard s’en vont un paysan cagneux
Et son bœuf lentement dans le brouillard d’automne
Qui cache les hameaux pauvres et vergogneux
Et s’en allant la`-bas le paysan chantonne
Une chanson d’amour et d’infide´lite´
Qui parle d’une bague et d’un cœur que l’on brise
Oh! l’automne l’automne a fait mourir l’e´te´
Dans le brouillard s’en vont deux silhouettes grises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전북 전주시 전주향교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시 ‘가을’은 민음사에서 펴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의 시집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황현산 역·2016)에 실렸다.
이 시를 읽으면 회화(繪畫)의 장면처럼 머릿속이 밝아진다. 다리가 굽은 농부가 암소를 끌고서 안개 속을 걷는다. 뿌옇게 가난한 마을이 보이고 농부는 콧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슬픈 사랑의 노래. 그 콧노래는 사랑으로 뜨겁던 지난(죽은)여름과 스산한 가을이 느껴진다. 그렇게 소와 늙은 농부의 실루엣이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이 시의 또 다른 번역이 있다. 기자는 역자(譯者)를 알지 못한다. 소개하면 이렇다.
…안개 속을 다리가 굽은 농부가 간다./ 하찮은 보잘것없는 마을을 감추는/
가을 안개 곳을 천천히 황소가 간다.//
저리 사면서 농부는 노래한다./ 사랑과 우정의 노래를/ 반지와 깨진 가슴을 노래하는 노래를.//
오!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안개 속을 두 개의 회색 그림자가 간다.…
위 시는 황현산의 번역보다 매끄럽게 읽히지만 어색함도 느껴진다. 산문 투의 ‘하찮고 보잘것없는’ 대신 운문 투의 ‘하찮은 보잘것없는’으로 이중수식 문장이다. ‘가을 안개 곳’ ‘저리 사면서’는 예스런 느낌이 드나 어색하다. 오타가 아닐까 생각이 들지만 역자 입장에서 음미해본다. 독자에 따라 ‘사면서’를 ‘살면서’로 해석하는 이가 있다. 기자는 ‘사라지면서(멀어지면서)’로 이해한다.
‘사랑과 변심의 노래’도 ‘사랑과 우정의 노래’로 번역해 느낌이 다르다. 포털 ‘네이버 파파고’로 번역하니 더 엉뚱(‘사랑과 불륜의 노래’)하다. 번역시마저도 아폴리네르의 시답다는 생각이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초현실주의, 다다 등 다양한 접근으로 문학의 길을 열었으나 어느 유파에 안착하지 않았으며 독창적인 길을 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자기 앞에 닥친 모든 것을 주제로 삼아 어디에서나 시를 읊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천상병의 ‘들국화’와 박노해의 ‘가을볕’
/천상병 시인. 의정부예술의전당 제공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테지
다시 올까?
나의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천상병 시인의 ‘들국화’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의 삶이 겹쳐진다. 1967년 ‘동백림 사건’(독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범한 일상조차 어려웠다. 행려병자로 발견되기도 했다.
시인은 어린 들국화를 보며 ‘가을은/ 다시 올테지’ 하고 읊조린다. 그러나 이내 ‘(가을이) 다시 올까?’라고 반문한다. 작은 들국화가 전하는 가을의 정감에 감동하지만, 문득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만신창이 삶이 두렵기만 하다. 훗날 그가 떠나고 사람들은 ‘애기들국화 같은 시인’으로 천상병을 기억한다.
/박노해 시인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박노해 시인의 ‘가을볕’ 전문
한때 뜨겁고 절절한 시를 썼던 박노해의 시 ‘가을볕’이다.
/가을볕에 고추를 말리는 모습. 전남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평상에서 말리던 고추를 살펴보고 있다.
화자(話者)는 붉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마당에 널어놓는다. 뜨거운 가을볕 아래 고추는 노란 씨가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문득 고개를 드니 바람에 흔들리는 흰 빨래가 눈부시다. 투명한 고추, 흰 빨래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한때의 슬픔과 상처 난 욕망이 일렁인다. 살아온 날들이 고추가 투명한 속(씨)을 보이듯 다 보인다.
백석의 추야일경과 노천명의 ‘가을날’
/ 백석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한국 현대시의 토속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구축한 시인이다. 평안북도 정주 태생인 시인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이 신문사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
신문사에서 일한 만큼 표준어에 능숙했겠지만, 자신의 시를 고향인 북방의 토속어로 가득 채웠다. 시 ‘추야일경(秋夜一景)’은 한국인의 정취가 느껴지는 따뜻한 시다. 어느덧 새벽이 밝아오지만, 안방엔 어둑하니(홰즛하니) 등불이 켜져 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박, 무, 호박 등을 썰며 정담을 나눈다. 문밖에서 물새 소리 들리지만, 토방에는 (고소한) 햇콩두부가 익어간다.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여 있어서들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눌을 다지고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양념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백석 시인의 ‘추야일경’ 전문
*오가리: 박, 무, 호박 따위의 살을 오리거나 썰어서 말린 것.
*석박디: 섞박지. 김장할 때 절인 무와 배추, 오이를 썰어 여러 가지 고명에 젓국을 조금 쳐서 익힌 김치.
/노천명 시인
노천명(盧天命·1911~1957) 시인의 ‘가을날’도 정겨운 시다. 겹옷 사이로 바람이 차다.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외길로 이어진 산길을 걷는다. 그때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쓸쓸한 가을의 서정을 느끼게 한다. ‘단풍 한 잎을 따 들고’ 가을 숲속을 걷는데 치맛자락이 이슬에 젖었다. 그때 기차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은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예저기 흩어져
촉촉이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들어 거닐어 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 마디엔
제철의 아픔을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 들고
이슬에 젖은 치맛자락
휩싸 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노천명 시인의 ‘가을날’ 전문
시인은 5연에 ‘애연히’라는 부사어를 썼다. ‘애연(靄然)히’의 사전적 의미는 ‘구름이나 안개 따위가 짙게 낀 상태’를 말한다.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귀뚜라미(풀벌레) 울음이 안개처럼 자욱하다는 뜻이다.
노천명 시인은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당시 피란을 못 가 인민군에 부역했다. 9·28수복 후 재판을 받고 20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여러 문인의 구명(救命)으로 출감했다. 이후 가톨릭에 입교해 영세를 받았다.
김지하의 ‘가을’과 이원규의 ‘단풍의 이유’
/김지하 시인
김지하(金芝河·1941~ ) 시인의 ‘가을’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시다. 병든 어머니를 만나고 집을 나선다. 어머니 걱정에 발걸음이 무겁다. 길에 떨어진 낙엽을 밟다가 문득 발바닥이 가볍고 부드럽게(살갑게) 느껴진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마치 ‘생(生)’을 외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어지럼증을 앓는 어머니 앞에
그저 막막하더니
집을 나서는데
다 시든 낙엽을 밟으니
발바닥이 도리어 살갑구나
-김지하 시인의 ‘가을’ 전문
/이원규 시인
이원규 시인의 ‘단풍의 이유’는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빨갛게 물든 단풍을 예찬한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면서 단풍잎이 비록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었지만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에’ 불행·불쌍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사랑해보라고, ‘한 번이라도/ 타오르라’고 권한다.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이원규 시인의 ‘단풍의 이유’ 전문⊙
12월 호
〈49〉 이바라기 노리코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다 /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하면 오래 살기로
⊙ 노리코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많은 작가에게 상상력 선물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유형진)
▲일본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난 멋 부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건네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해맑은 눈길만을 남긴 채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굳어 있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패했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 재즈가 넘쳐흘렀다
금연을 깨뜨렸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난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난 몹시도 불행했고
난 몹시도 엉뚱했고
난 무척이나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하면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영감님*처럼
말이지
(*프랑스 화가 겸 판화가 조르주 루오, G. Rouault 1871~1958)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茨木のり子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街々はがらがらと崩れていって
とんでもないところから
靑空なんかが見えたりした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まわりの人達が沢山死んだ
工場で 海で 名もない島で
わたしはおしゃれのきっかけを落としてしまった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誰もやさしい贈り物を捧げてはくれなかった
男たちは挙手の礼しか知らなくて
きれいな眼差だけを残し皆(みな)発っていった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わたしの頭はからっぽで
わたしの心はかたくなで
手足ばかりが栗色に光った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わたしの国は戰爭で負けた
そんな馬鹿なことってあるものか
ブラウスの腕をまくり卑屈な町をのし步いた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ラジオからはジャズが溢れた
禁煙を破ったときのようにくらくらしながら
わたしは異国の甘い音楽をむさぼった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わたしはとてもふしあわせ
わたしはとてもとんちんかん
わたしはめっぽうさびしかった
だから決めた できれば長生きすることに
年とってから凄く美しい絵を描いた
フランスのルオ-爺さんのように ね
▲MBC 드라마 〈내가 가장 예뻤을 때〉 포스터. 16부작으로 최근 종영됐다.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시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모순, 충돌하는 두 개의 시어를 한 문맥 속에 엮어내는 수사법이다. 반어(反語)라고도 한다. 전쟁으로 무수한 젊은이가 죽어갔을 때,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죽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멋 부릴 기회를 잃고’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며’ ‘해맑은 눈길만을 남긴 채’ 모두 떠나고 말았다. 불행했고 엉뚱했으며 무척이나 쓸쓸했던 시절을 보낸 뒤 화자(話者)는 결심한다. ‘가능하면 오래 살겠다’고. 끝까지 살아남아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증명하리라 다짐한다.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1926~2006)는 오사카 출신 의사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유년 시절, 교토와 아이치(愛知)현 등지에서 성장했다. 1945년 일본 패전 당시 19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과 전쟁의 비극을 응시한 글을 주로 썼다.
그는 식민지 청년 윤동주(尹東柱·1917~1945)의 청아하고 맑은 모습에 반했다고 전한다. 그 후 일본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를 찾아 읽었다. 훗날 노리코는 저서 《하나의 줄기 위에》에서 윤동주를 이렇게 기억했다.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순수했던 노리코의 슬픈 비망록이라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순수 그 자체의 시다. 난해함이 없는 산문체의 아름다운 동경(憧憬)을 담고 있다. ‘별’이야말로 윤동주가 즐겨 사용하던 이상적 이미지가 아닐까. 윤동주는 이상과 순수, 구원의 상징인 별을 헤면서 여러 상념에 젖는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중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을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하략)
-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일부
유형진과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유형진 시인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는 2001년 《현대문학》 등단작이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서 착안해 새롭게 변형했다.
화자에게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누가코팅 속 하얀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한 느낌의 공간(추억)이다. 그 공간을 따라가 보면 유년에서 사춘기로 이어지는 시인의 성장통이 느껴진다. ‘달콤한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듯이’ 말이다.
‘짝짝이 단화’를 신고,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던 시절에 길가 망초꽃은 모가지가 부러져 있고, 문득 해소천식을 앓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사막 바람처럼 4월 하늘에 뿌연 바람이 불면, 모래 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 리코더를 불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어느덧 훌쩍 자란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고 나선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 길은 아직도 쓸쓸하다’고 되뇐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는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2005)에 실렸다.
/유형진 시인의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마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서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토끼의 집 위로는 먼 산이 흐릿했고 토끼 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십 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唾具)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마즘재 너머 큰집의 건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오가 있는 방이었다 그 방에서 나는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양희은의 ‘작은 연못’과 들국화의 ‘행진’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한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 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유형진의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전문
공선옥의 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도 노리코의 시를 모티브로 창작했다. 성장기 소설답게 씁쓸달콤한 추억이 담겨 있다. 소설 속 화자인 ‘해금’은 이제 스무 살. 열아홉과 스무 살의 생기발랄함 사이 광주 5·18의 비극이 찾아온다. 희극과 비극의 극적인 아이러니다.
아래에 인용한 글은 해금이 유년을 떠올리는 대목이다. 자매들의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정겹다. 귓불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진다. ‘그리움의 더께 같은 채석강의 퇴적층’(유형진)을 보는 것 같다.
소설가 공선옥은 1991년 《창작과 비평》에 중편소설 〈씨앗불〉로 등단했다. 여성의 운명적인 삶과 모성애를 뛰어난 구성력으로 생생히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집으로 《나는 죽지 않겠다》 《피어라 수선화》 등이 있다.
/공선옥의 장편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초등학교 오학년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갔는데 막내 영미 혼자 마루에 있아 그때 한창 유행하던 김추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애는 김추자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내려고 그랬는지 한 손으로는 코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입술을 두드려가며 노래를 부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가 저를 불러도 대답할 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를나코도라가신나으어먼니 그래도오막싸리당감방에서 행보커게지내쪼오 내가여스쌀되든해부터어거리에서노래불렀쪼오 노래드꼬내게던져주는동전으로아부지와사라쪼오…….”
“야이 가시내야, 노래를 부를라면 얌전히 좀 불러라. 그게 뭐냐. 염생이같이.”
나는 왠지 모르게 영미가 미웠다. 순금이, 정금이, 영금이, 해금이, 하고 금자 돌림으로 쭉 나가다가 갑자기 막내만 영미가 된 것도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할아버지는 첫 손녀의 이름을 순할 순(順)에 비단 금(錦)을 붙여 순금이라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비난 금자는 고정시켜놓은 채, 둘째 곧을 정(正), 셋째 꽃부리 영(英)까지는 옥편 찾는 성의 정도는 보이시더니 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또 딸입니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요.
하자 대뜸 그러셨다는 것이다.
“니무랄 것, 암꺼나 허라고 혀.”
세상에 ‘암꺼나 해’ 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아버지는 내 이름을 ‘암꺼나 해’자에 비단 금, 해서 해금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고모한테 들었다. 고모가 친정인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나보고 ‘어이 혀금씨’ 해대서 내가 나는 혀금이가 아니고 해금이라고 강력 항의하자 고모가 나를 앉혀놓고 내 이름의 내력을 말해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동회에 신고할 때 남의 이목도 있고 하니, 할 수 없이 즉석에서 떠오른 ‘바다 해(海)’를 붙여 비로소 내 공식 이름이 정해졌지만, 집안에서의 나는 여전히 혀금이 내지는 ‘암꺼나 해’자의 해금이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몇 년 있다가 또 딸을 나았을 때 아버지는 차마 할아버지한테 이름을 어찌할 것인지는 더 여쭐 수가 없어서 아버지 나름대로 아름다운 미(美)에 기존의 비단 금을 붙여 미금으로 정했는데, 이름 정한 사람이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라 만만했던지 엄마가 일언지하에 반대를 하더라는 것이다.
“안 돼야.”
“뒷이 안 돼야.”
“금자는 안 된다고.”
“좋네, 그럼 아름다올 미자에 큰놈 거 순자 좀 빌려와서 미순이는 어쩐가? 야한테서 금자를 빼불면, 즈그 언니들허고 아조 다른 종자 같응게 이오아이면 큰놈 이름자 중 하나인 순자를 붙여 주자고. 어쩐가?”
아버지는 원래 우격다짐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좋아하는 천상 민주주의자였다. 자신은 민주주의자가 확실한데 너희 엄마는 고집 센 것으로는 공산주의자, 맘대로 하는 것으로는 자유주의자라고 아버지가 우리 앞에서 엄마 흉을 본 적이 있다. 공산당과 자유당을 번갈아 오가신 엄마인지라 이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꼭 큰애 거를 붙일 필요는 없제. 기중 이쁜 꽃부리 영자, 미영으로 합시다.”
-공선옥의 장편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 p.19~21
성미정과 이원하의 ‘착한 구두’와 ‘제주에 부는 바람’
어쩌면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을 때가 아닐까.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구두를 좋아하게 그 안에 숨겨진 발을 사랑한다. 연인의 머리가 사랑스럽고,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곱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시선이 먼저 반응한다. 성미정의 시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는 연인이 가장 예뻤을 때를 떠올리는 시다.
/성미정 시인의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아직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저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성미정의 시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전문
자신이 가장 예뻤을 때는 ‘내’가 ‘나에게’ 바짝 다가설 때가 아닐까. 자기 내면과 대화하며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이 훌쩍 자랐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나’의 존재방식을 그제야 인정하고 세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원하의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는 혼자 제주에 살면서 자신을 발견한 이야기다. 화자는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라고 고백한다. 그러곤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다’며 텅 빈 자신과 마주한 고통스러운 일도 떠올린다. 세월에 홀라당 벗겨진 빈털터리 인생이지만,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라고 다짐한다.
/이원하 시인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이원하의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전문
주하림의 ‘작별’과 윤의섭의 ‘당신이 잠들었을 때’
사람이 가장 예뻤을 때는 혹시나 이별할 때가 아닐까. 이별의 고통 때문에 화들짝 놀라며 자기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주하림의 시 ‘작별’은 고통의 가장 정점에서 쓴 시 같다. 고통은 시를 가장 아름답게 빚는, 고통스럽지만 가장 만족할 만한(?) 재료다.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그때는 애인조차 떠날 때였다. 화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라고.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를 모두 지났다고 느꼈을 때 시인은 그제야 깨닫는다.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 바로 ‘너’였음을.
/주하림 시인의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주하림의 ‘작별’ 전문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장 예뻤을 때를 누구나 꿈꾼다. 마치 덮여 있는 책이 자기 몸을 읽듯, 서랍 속 오래 묵은 만년필이 스스로를 쓰고 있듯 말이다. 추억이 그렇다.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너무 아프다.
단기기억은 쉽게 사라지나 장기기억은 무섭게 살아 있다. 죽을 때까지. 윤의섭의 시 ‘당신이 잠들었을 때’는 무척 아름다운 시다.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2019)에 실렸다.
/윤의섭 시인의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덮여 있는 책은 자기 몸을 읽는 중이다
먼지 같은 묵독이었다
서랍 속에서 오래 묵은 만년필은 스스로를 쓰고 있다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너무 아프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을 걸으며 길은 자꾸만 눕고 싶고
죽다가 동사인 건 계속 죽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밤 유성을 보았고 장례식장에서 유년에 대한 잡담을 나눴다
언젠가는 아프지 않을 것이고
신의 길을 따라간 순례자가 도착한 곳이 이 별이라고 적혀 있는 경전대로
지구를 찾아 나설 것이고
누군가에게 잊히고 나면 끝없이 살 수 있다는 용서
당신이 잠들었을 때 잠은 잠을 자야 했고
깨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천문을 정독했고
생존이라는 말 쓸쓸하다
가로등이 꺼지는 시간
당신은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못해서
경전 어느 페이지쯤에선가 헤매는 꿈에 젖어 들고
나는 빨래 건조대를 비워 놓는다
-윤의섭의 ‘당신이 잠들었을 때’ 전문⊙
2021.07월 호
〈50〉 이문길·김세환·김기덕·권영옥의 新作
이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들길 산길 막힌 곳
⊙ 세월과 연륜의 깊이를 느끼게 만드는 신작 《헛간》과 《바람꽃》
⊙ T.S. 엘리엇의 《황무지》 이후 지상(紙上) 최대의 말잔치… 《빅뱅과 에덴》
/노(老)시인의 시는 삶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신간 시집은 너무 진지해 압도되고 만다.
시인은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 연륜은 시를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읽고 다시 꺼내 또 읽게 만든다. 시가 너무 진지해 압도되고 만다.
이문길(李文吉) 시인의 시집 《헛간》(북랜드 刊)이 나왔다. 1939년생이니 올해 여든셋. 꼭 1년 전 그를 만났는데 올해는 새 시집으로 다시 조우했다.(참조 《월간조선》 2020년 6월호 〈여든둘 감동 시인 이문길〉)
시집은 아무 장식이 없다. 흰 바탕에 제목과 시인의 이름이 전부다. 저자의 사진, 약력도 없다. 누구에게 시집을 소개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저 삶 그 자체를 시로 표현할 뿐이다.
시집은 전체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 실린 시들은 기자가 1년 전 시작노트에서 읽었다. 다시 읽어보았다.
/이문길 시인
산 뒤에 산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승 끝나면
저승이듯
산 뒤에 산이 있고
그 산 넘어 다시 산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문길 ‘말 없는 산’ 일부
이별한 아내를 산에 묻었다. 아내 무덤을 보기 위해 산을 넘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산을 넘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가도 슬프고 / 와도 슬픈 산길’
시 ‘봄’도 울림이 크다. 밤사이 산에 눈이 왔는데 집 마당에는 비가 왔다. 산과 집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는 듯하다. 이승과 저승처럼. 시인은 커튼을 걷고 하얗게 눈 내린 산을 바라본다. 마치 아내를 바라보는 듯하다.
밤사이
산에는 눈이 오고
우리 집 마당에는
비가 왔다
커튼을 걷고 내다본다
하얗게 눈 내린 산
-이문길 ‘봄’ 전문
시를 통해 삶의 정수를 보다, 이문길 《헛간》과 김세환 《바람꽃》
/이문길 시인의 신작 《헛간》.
시집 《헛간》은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삶의 고갱이가 보인다. 노(老)시인에게 전화를 하니 “마지막 시집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더 쓰셔야 한다”고 권했다. 그래서 더 울림이 크다.
시 ‘길’을 읽다 보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적막이 느껴진다.
길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더 못 간다
지난 일 잊어버리라고
보채는 물결이 있고
마음대로 바람이 오고 가는
길 없는 곳
바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들길 막힌 곳
산길 막힌 곳
-이문길 ‘길’ 전문
/김세환 시조시인
시조시인 김세환(金世煥·75)이 일곱 번째 시조집 《바람꽃》(학이사 刊)을 펴냈다. 시인은 오랫동안 천식을 앓아왔다. “날이 갈수록 병은 깊어지고 온갖 약을 다 써도” 차도가 없었다.
매일 기침으로 힘든 불면의 밤을 지내며 시조를 써왔다. 시인은 “작품 한 편 한 편이 삶의 간절한 기도와 같다”고 말한다.
지쳐 내친 내 명줄
조였다 풀었다 해도
미움의 맨살 비비면
속정이 돋나 보다.
남은 날
순종 배우며 함께 지낼 동반자.
-김세환 ‘동반자’ 전문
시인은 지금도 가슴을 찢는 듯한 기침으로 고통의 밤을 보낸다. 그러나 함께 같이 가야 할 병이어서 시인은 순종을 배운다. 어느 날 시인은 깨닫게 됐다. 잠들 수 없게 만든 천식이 ‘부끄러움 돌아보라는 소중한 하늘의 뜻’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시간을 알뜰하고 후회 없는 보람찬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거친 숨 달래가며 밤을 밝히는 건
부끄러움 돌아보라는 소중한 하늘의 뜻
남은 날
별빛에 피는
들꽃처럼 살리라.
-김세환 ‘남은 날’ 2연
/김세환 시인의 신작 《바람꽃》.
시인에게 시조는 그의 삶의 전부다. 시조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욕심이 솟아나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골 깊은 슬픔 죄다 태울 순종의 젖은 꽃잎’이기에 제 욕심의 꽃대를 꺾어야만 했다.
아직 남은 달빛으로
바람 비켜서서
며칠째 뼈를 깎아
불면의 불 밝히고
골 깊은 슬픔 죄다 태울 순종의 젖은 꽃잎.
고독한 담금질에
이젠 피멍이 들어
모두 떠안고서도
언제나 잔잔한 속
도도한 붉은 속울음 제 꽃대를 뚝 꺾다.
-김세환 ‘작은 슬픔에게’ 전문
《빅뱅과 에덴》, 紙上 최대의 말잔치
/김기덕 시인.
시집이 전체 576쪽이다. 크게 4장으로 이뤄진, 1번에서 1004번까지 이어진 시편들. 시집에는 문장 마침표가 없다. 마침표가 없다는 것은 종결이 없다는 의미다. 네버엔딩 스토리. 종결을 향해 끝도 없이 나아가는 기도의 언어, 고백만 있을 뿐이다.
김기덕(金起德·58) 시인의 신작 《빅뱅과 에덴》(문학공원 刊)이 출간됐다. 마치 창세기의 첫 장 같은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성경처럼 편집 제본됐다. ‘~했네’ ‘~하였어’라는 고백체 서사적 단문이 읽는 이의 눈에 쏙쏙 박힌다.
이 시에는 수많은 이미지, 시인이 경험한 다양한 사건(에피소드)이 등장하지만 모두 ‘영혼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됐을 뿐이다.
영혼의 세계란 ‘강 건너, 누드의 조각달이 허리 굽혀 기도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나룻배를 타지 않고선 건널 수 없는 세상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 하는데 ‘사공이 없는 배’를 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시인은 말한다.
‘사물을 믿고 여행하다 잘못되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불안의 시대에 진정한 선장이 필요하지’(225쪽)
‘진정한 선장’은 누구일까. 시인은 답을 정하지는 않는다.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어쩜 우주의 끝은 우리들 상상력의 끝이 아닐까’ 하고 정답의 문을 열어놓았다. ‘우주도 하나님도 내가 만들고 있어. 상상력 속에서 탄생하고 존재해’라고 말한다.
‘우주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상상으로 보는 거야’(371쪽)
/김기덕 시인의 신작 《빅뱅과 에덴》.
시인의 눈에 비친, 상상력 속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385쪽의 일화(逸話)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시인은 요로결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수많은 원숭이를 보게 된다. 술 먹고 실려 온 원숭이, 간호사에게 고래고래 욕하는 원숭이, 친구와 술 마시다 싸워서 피를 흘리는 원숭이, 길 가다 정신 잃고 주저앉았다며 히죽거리는 원숭이 등으로 가득했다. 시인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원숭이들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화가 덜 된 원숭이들이 사람들 무리에 섞여 살면서 진화하고 있어. 인간세계엔 진화하지 못한 원숭이가 있고 좀 더 진화한 인간이 있고 새롭게 거듭난 천사가 있어’(385쪽)
시인의 상상력은 ‘진화하는 원숭이’를 넘어 구원(救援)의 문제로 넘어간다. ‘구원’은 십자가와 만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고, 모든 사물 속에 숨겨진 상징을 발견하는 일이 신을 만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성경의 두께처럼 두툼한 시집 《빅뱅과 에덴》은 결코 하루아침에 쓰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경험과 사색 위에 언어와 문장을 입혀 완성되었다. 어쩌면 1908년 11월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 이런 시집은 처음일지 모른다. 이런 묵직한 무게의 시와 시집은 처음일지 모른다. 그런 만큼 이 시집은 그 자체로 오래 기억해야 마땅하다.
이 시집을 읽은 평론가 김순진은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T.S. 엘리엇의 《황무지》 이후 지상(紙上) 최대의 말잔치가 시작된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문덕수의 《우체부》의 맥을 잇는 쾌거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공자의 《시경(詩經)》,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론(詩論)》에 견줄 책이 생겼다.”
고통의 다양한 지층, 《모르는 영역》
/권영옥 시인
시인 권영옥의 신작 시집 《모르는 영역》(현대시학사 刊)은 풍성한 시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시를 읽으며 머릿속이 상상력으로 따스해진다. ‘고통의 다양한 지층에 대한 탐구’(오민석 단국대 교수)여서 더 시집에 손길이 간다. 독자도 시인을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상처받기 쉬운’ 생을 더듬어본다. 그리고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냉동의 시간을 견뎠던 나는 줄기에도 층계가 생겼다 바람의 무늬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새벽 굴착기에 들이 받쳐 뇌적층이 쿵 떨어진다 그 속에 들어있던 삼엽충이 나동그라지고 빙하기의 끝줄을 잡은 혈관에서도 벌레가 실눈을 뜬다
굴착기 소리는 점점 커진다 내 몸에 모르는 검은 무늬들이 소용돌이친다 예전의 나와 지금 나도 내가 아니다 (하략)
-권영옥 ‘고생대 고사리’ 일부
시인이 그리는 ‘고통의 지층학’은 은유와 비유가 가득한데 이미지가 익숙하지 않고 생생하며 살아 있다. 예컨대 ‘산다는 건 빈 둥지를 잡고 강풍을 견디는 것’이라고 표현하거나 ‘늦가을 미루나무에 걸린 구름을 둘둘 말아서 / 뼈 깊이 고독을 우려내는 자’를 고독의 모양이라 규정한다.
산다는 건 빈 둥지를 잡고 강풍을 견디는 것
고독이 바닥에 스며들 때까지
마음은 강준치가 되어 물바위에 머리를 치면서
동거
뱀잡이수리가 발밑에서 잠입하는 독사를 내려찍어
제 둥지를 지켜내듯
늦가을 미루나무에 걸린 구름을 둘둘 말아서
뼈 깊이 고독을 우려내는 자는
제 주변을 잘 지켜내는 것
-권영옥 ‘고독의 모양’ 일부
시집을 읽다 보니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부재(不在)에 대한 슬픔이 그리움에 담겨 있다. 그러나 지금 곁에 없지만 늘 ‘그윽한 눈동자’로 가슴에 있다. 없어도 있는 듯하고, 있는 듯하지만 없다는 사실은 일종의 ‘모르는 영역’이다.
산다는 일은 어쩌면 ‘모르는 영역’이 점점 더 많아지는 일이 아닐까. 어머니에 대한 그림이 커지면 ‘모르는 영역’도 더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그리움이 더 커진다. 시인의 표현으로 ‘파도의 기포들이 바글바글 들끓’는다.
/권영옥 시인의 신작 《모르는 영역》.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어떤 향기가 누르는 달꽃
우리 보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당신에게 왔다는 것이, 달의 비늘이었다는 것이
서로의 뺨을 비비는 일이죠
이 섬에는 달맞이꽃 향기가 나요
봄엔 집과 뜰에 이 꽃을 심어야지 생각하죠
달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당신
그윽한 눈동자를 가슴에만 넣고
이제 천 년 동안 잊고 살아가야 하는데
12월의 갈매기 눈빛도 젖어 있어요
당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기억하려는 찰나
바람이 섬의 끝자락으로 데려가네요
파도의 기포들이 들끓어요
바글바글
우리 수신호 해요 나는 기억의 향기로 날았다가
식은 향기로 말하다가 웃다가 찡그리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엄마 안녕!
같이 있고자 기적을 일으키려니 달이 보고 웃네요
-권영옥 ‘모르는 영역’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