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원의 ‘건축 오디세이’ <21> 독락당 - 〈40〉美 의회의 건축적 가치
이중원의 ‘건축 오디세이’ 건축가·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동아일보
2019-12-11
<21> 독락당
회재 이언적의 仁을 구하는 집
▲그림에 보이는 정자가 독락당의 절정 공간인 계정이다. 계정은 물길인 자계로 트여 있어 시원하다. 계정 앞 담장은 흙담인데, 흙 사이에 기와가 촘촘히 박혀 있다. 계정 뒤로 보이는 검은 산이 도덕산이다. 이중원 교수 그림
2019년이 저물고 있다. 올 한 해 건축계가 이룩한 쾌거 중 하나는 9개 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다. 서원은 우리의 보물일 뿐만 아니라, 이제 세계인들의 보물이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독락당이 서원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서원들과는 차별화된다. 독락당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독락당은 옥산서원에서 물길인 자계(紫溪)를 따라 700m 서북쪽에 위치한다. 옥산서원이 회재의 제자들이 회재 사후에 그를 기념하며 지은 건축(1573년)이라면, 독락당(1532년)은 회재가 살아 있는 동안 지은 건축이다. 그래서 독락당을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회재와 건축가로서의 회재를 동시에 볼 수 있다.
회재는 3번에 걸친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는 10세 때 아버지가 죽었고, 둘째는 41세 때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 관직을 박탈당해서 낙향했고, 셋째는 57세 때 ‘양재역 벽서 사건’(을사사화 2년 뒤 발생)에 연루돼 평안도 강계로 유배 갔다.
회재는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부친의 타계로 어려서부터 인간의 죽음 문제를 생각하며 자라 최상급 지성인이 되기 위한 밑바탕을 남보다 일찍 마련하였고, 낙향해서는 불후의 건축 명작 독락당과 계정(溪亭)을 지었고, 유배 가서는 유학사에 길이 남을 구인록(求仁錄) 등과 같은 명저를 썼다. 비록 유배지에서 죽었지만, 훗날 그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이라 불리며 성균관 문묘에 위패가 안치됐다.
건축적으로 독락당은 3가지가 돋보인다. 첫째는 산수다. 독락당은 동북쪽의 화개산을 주산으로, 서북쪽에 도덕산이 있고, 서쪽에 자옥산이 있고, 동쪽에 어래산이 있다. 산들은 독락당이라는 소우주를 감싸는 대우주다. 또 화개산에서 발원한 물길인 자계는 북으로 들어와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
독락당의 절정 공간인 계정이 위치한 곳에서 자계는 바위가 패어 널찍한 물웅덩이를 형성한다. 맑은 물이 판석에서 나오는 암분으로 오묘한 옥색(자계천은 옥류천이라고도 한다)을 띤다. 이를 관조할 수 있는 점이 이곳에 계정을 지은 직접적인 동기였으리라. 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회재가 물길을 따라 5곳에 지은 이름들이다. 옥산서원 앞 물웅덩이를 세심대(洗心臺)라고 지었고, 계정 앞 물웅덩이는 관어대(觀魚臺)라고 지었다.
둘째는 담장이다. 독락당 일곽은 눈 목(目) 자를 형성하며 3개의 마당을 가지고 있다. 앞마당에 행랑채가 있고, 중앙 마당에 회재의 독서 공간인 독락당이 있고, 안쪽 가장 깊숙한 마당에 휴식 공간인 계정이 있다. 마당을 구획하는 선들이 흙담인데, 앞마당과 중앙 마당 사이에는 다른 곳과 다르게 담장을 두 겹으로 두어 흙담 길이 만들어졌다.
이 점이 독락당을 ‘길(道)을 품은 집(家)’으로 보이도록 하고 있고, 더 나아가 사람(人)이 사는 집이 사람들(仁)이 모여 사는 마을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흙담 길 끝은 자계로 열려 있고, 개울로 나가기 전에 담장의 협문을 열고 모서리를 돌면, 독락당이 나오고, 더 들어가면 계정이 나온다.
셋째는 계정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그런지 회재에게 아버지 이번(李蕃)이 남긴 정자(현 계정 자리에 있었던 정자)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회재는 독락당 일곽이 계정에서 원심형으로 퍼져 나가도록 증축했다. 아주 귀한 손님이 와야지만 열어주는 계정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회재의 깊은 속마음같이 독락당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회재가 계정에 쏟은 정성도 남다르다. 물길과 가급적 가까워지도록 3칸 집을 계곡에 걸터앉게 디자인했다. 정자는 아주 작고 낮다. 하지만 자계를 향해 트여 있어, 전혀 답답하지 않다. 계정은 한 발은 뭍(세속)에 두고 있고, 다른 한 발은 물(탈속)에 두고 있는 경계의 건축인데, 회재는 자연과의 만남을 책과의 만남만큼이나 의미를 두었다.
구인록에 따르면 사랑(仁)을 구하는 사람은 하늘과 하나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없어도 많고, 죽어도 산 사람이다. 회재에게 계정은 그런 사람을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계정과 같은 구인(求仁) 건축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이유이다.
2020-01-01
<22> 미국 보스턴 펜웨이파크
야구장은 도시이자 민주주의고 자부심이다
▲보스턴 펜웨이파크 야구장.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그라운드인 이곳은 미국 1세대 야구장의 한 전형이다. 그림에서 왼쪽에 보이는 도로가 랜스다운 스트리트다. 그림 맨 위에 보이는 녹지가 보스턴 에메랄드 네클리스의 종점인 펜웨이파크다.
야구장. 그 안에는 재미, 긴장, 흥분이 있다. 그리고 9이닝이 끝난 뒤에는 하나 됨이 있다. 야구장은 건축이자 도시이고 전원이다. 들판에서 시작한 야구가 어떻게 도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그 기원은 신화처럼 매력적이다.
야구는 미국적 현상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산업도시로 변모하고 있을 즈음 초창기 야구장이 도시에 들어섰다. 야구는 잔디 들판에서 시작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기하(幾何)인 다이아몬드를 잔디 위에 그리며 행해지는 운동이었다. 기하의 각 변은 90피트(약 27.4m)였고, 꼭짓점은 베이스였다. 다이아몬드 위로는 아치를 그려 안쪽은 내야 바깥쪽은 외야라 했다. 들판에서 시작했던 야구가 나무 울타리와 객석을 만들 즈음, 야구장은 도시의 일부가 됐다. 도시 안에 있었지만 여전히 전원의 꿈을 갈망했다. 그래서 야구장은 해밀토니언(알렉산더 해밀턴) 도시면서 제퍼소니언(토머스 제퍼슨) 전원이었고, 이는 환언하면 도시의 유한함 속에서 전원의 무한함을 상징했다.
미국에서 야구장의 형태는 크게 세 번 진화했다. 1세대 야구장은 비정형이었다. 야구장 경계가 주변 도로 조건에 대응하며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화재 때문에 나무 야구장이 소실되자 재료는 철과 돌로 대체됐다. 남아 있는 1세대 야구장은 모두 1910년 이후의 것이다. 2세대 야구장은 원형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쇼핑몰처럼 야구장도 교외로 나갔다. 크기는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기념비적이었고 주변은 온통 주차장이었다. 도시와는 무관하게 외딴섬처럼 자기 과시적이고 자기 충족적으로 지었기에 경기가 없을 때는 썰렁했다. 1990년대부터 2세대 야구장에 대한 반성으로 3세대 야구장이 지어졌다. 교외에서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3세대 야구장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조각난 도시를 다시 이어주는 역할이었다.
보스턴 펜웨이파크(1912년 준공)는 1세대 야구장으로는 이제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이 야구장은 초록색 지붕과 붉은색 벽돌로 유명하다. 보스턴의 유전자 같은 재료들이었다. 스케일도 덩치가 크지 않게 분절했다. 건축가 제임스 매클로플린에게 뾰족 사다리꼴 대지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랜스다운 스트리트를 따라 있는 왼쪽 외야에는 객석을 둘 수 있는 폭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초록색 벽만을 높이 세웠을 뿐인데, 홈런을 꿈꾸는 타자들에게는 넘사벽으로 ‘그린 몬스터(초록 괴물)’였다. 준공 당시 관중석은 단층이었지만 1946년에 증축했고 이때 오른쪽 외야석도 만들었다. 관중석 증축 후에도 3만7000명 정도밖에 수용을 못 했지만 그 작음이 관객과 선수를 밀착시켜 다른 야구장에서는 가져볼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다.
산업도시의 도래로 보스턴도 이민자가 급증했다. 이들은 공장에서 저임금으로 장시간 일해야 했다. 누적된 피로를 날릴 건축적 장치가 필요했다. 보스턴 에메랄드 네클리스와 마운트 오번 묘지와 같은 도심 속 공원과 묘지공원은 그래서 태어났고, 야구장도 그 일환이었다. 야구장 이름을 구단주 성명을 따르지 않고, 펜웨이파크로 정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녹색 보석 목걸이처럼 보스턴을 휘감는 공원 끝단에 있는 녹지 이름을 따는 것만으로도 ‘서민 시설’에서 ‘계급 차별이 없는 시설’로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내 철로 보급으로 야구는 도시 안 경쟁에서 도시 간 경쟁으로 번졌다. 기차 스케줄이 대진 스케줄에 영향을 끼쳤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펜웨이파크 야구장은 운동과 경기를 넘어선 도시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이 됐다.
우리 야구장은 지을 때 수천억 원을 들이고 매년 천문학적인 유지 비용에 허덕인다. 외딴섬 야구장, 획일적 야구장이라 문제다. 어찌 보면 아파트처럼, 원조가 아닌 파생(미국 2세대 야구장)을 모방한 짝퉁이라 그렇다. 펜웨이파크 야구장을 보면, 야구장은 건축이자 도시고 전원이다. 골목길 재생 장치이자 도시 힐링 장치, 계급 차별 없는 민주주의 전당이다. 2020년에는 새로운 한국형 야구장을 꿈꾼다.
<23> 한국타이어 판교 본사
좋은 일터란 ‘연결과 소통’… 거장의 해답
▲한국타이어 판교 본사 내부. 입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타이어 모양의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오면 만나는 2층 로비. 위로 회전하며 상승하는 아트리움을 천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밝힌다
평생 사람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짧지 않다. 좋은 일터란 무엇일까? 개인의 하루 시간을 의미 있게 해주고, 공동체의 오랜 시간을 가치 있게 해줄 일터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건축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포스터는 새로운 일터 창조에 관심이 많다. 특히 그는 도시 공공공간과 건물 공적공간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 이어주기는 때로는 수평으로 소통하고, 때로는 수직으로 연결한다. 이 신비로운 공간 아케이드를 포스터는 구조로 수놓고 빛으로 밝힌다.
포스터는 어려서 지독히 가난했다. 신문 배달, 슈퍼 알바, 우유 배달 등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시청 심부름꾼으로도 일했다. 이때, 그는 점심시간조차 쪼개 아껴 썼다. 점심 샌드위치를 후딱 먹어 치웠고, 주변 공공건축을 스케치하러 다녔다. 포스터는 19세기 맨체스터 아케이드에 특히 매료됐다. 길은 굽어져 끝이 보이지 않아 호기심을 유발했고, 길 위 철골 구조 지붕틀은 꽃봉오리처럼 폈고, 구조 위 유리지붕이 태양 빛을 바닥까지 내리꽂았다. 그것은 밑바닥 인생을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숨겨진 일터(시장)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포스터는 평생 이를 잊지 않았다.
포스터가 설립한 건축회사(F&P)는 이제 쟁쟁한 글로벌 회사다. F&P는 홍콩과 베이징 요르단에 국가 대표 국제공항을 설계했고, 프랑크푸르트와 도쿄 런던 뉴욕 등에 고층 타워를 설계했다. 우리 건축계도 오랫동안 포스터의 건축을 국내에서 보기를 고대했다.
한때 대우가 국내 처음으로 포스터가 디자인한 본사 타워를 서울에 지으려고 했지만 부도로 물거품이 됐다. 만약 원안대로 지어졌다면 아시아 오피스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2016년 한국타이어가 대전에 포스터가 디자인한 ‘테크노돔’을 선보였다.
이 건물은 직원 1000명을 수용하기 위해 연면적 9만6347m²를 두 동으로 나눴다. 원형 연구동과 원통형 기숙사동이었다. 글로벌 건축 팬들에게 회자된 일터는 수평적인 연구동이었다. 반사하는 원형 수면 조경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잎맥처럼 펼쳐지는 각 동을 잎사귀 모양의 거대한 지붕이 하나로 덮는다. 180m 길이의 중앙 아트리움은 아케이드처럼 4층까지 관통하고, 거대 원형 지붕 천창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은 내부를 밝힌다.
한국타이어는 경기 성남시 판교 본사도 포스터에게 의뢰했다(국내 창조건축과 협업). 2020년 개관하기 위해 지금 한창 공사 중이다. 이 건물은 판교로와 대왕판교로 교차점에 위치하는 10층 타워인데, 퇴근길에 이를 바라보는 테크노밸리 젊은이들의 눈빛은 반짝인다. 타이어 모티브를 디자인 곳곳에 차용했다. 1층 천장도 타이어 모양이고, 건물 내 모든 조명도 타이어 모양이다. 1층 타이어 모양 유리 천장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뚫고 올라가면, 이 건물의 클라이맥스인 2층 로비에 도달하는데, 이곳에서는 운동하는 타이어를 본다.
사각형 콘크리트 바닥을 타이어 모양으로 3층부터 중앙에 도려냈는데, 이런 바닥이 위로 올라갈수록 나사처럼 회전하며 상승한다. 2층 로비 바닥에 서서 위를 바라보면, 내부 아트리움이 스크루바처럼 운동하고, 그 끝에는 태양 빛이 운동 궤적을 직선으로 꿴다. 팔방으로 트이며 소통하는 공간이다. 대전 테크노돔 일터가 포스터의 수평 아케이드라면, 판교 본사 일터는 그의 수직 버전이다. 2016년 대전에 선보인 수평적 일터를 보고 놀랐는데, 2020년 판교에 선보일 수직적 일터를 보고도 놀랄지 궁금하다. 3일 후면 음력설이다. 올 한 해는 더욱 새로운 일터 창조에 매진하자.
<24> 호수와 강의 도시 시카고
‘불’로 망했지만 ‘물’로 일어섰다
▲시카고 세계 박람회. 회색 음영을 칠한 부분이 물길, 오른쪽 아래가 미시간 호수다. 가장 큰 건물 왼쪽 물이 박람회 중심 물길인 ‘코트 오브 아너’다. 그림 이중원 교수
그 도시에는 바다처럼 큰 호수가 있어 늘 적당한 습도의 맑은 바람이 분다. 또 걸어서 건너가기에 적당한 폭(약 30m)의 강이 도심을 관통한다. 호반을 따라서는 잔디밭이 펼쳐지고, 강변을 따라서는 마천루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호수는 그 도시의 동쪽 경계를 이루고, 호수에서 발원한 강은 그 도시의 북쪽과 서쪽 경계를 이룬다.
시청은 도시 한가운데 있고, 도서관과 박물관은 호반 따라 펼쳐지는 푸른 잔디 광장 위에 있다. 이들 공공건축은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며, 격자형 도로망에 이정표 역할을 한다. 군데군데 광장을 두어 격자 도로를 이완한다. 그 도시의 호수와 강은 자부심이고, 수변은 긍지이며, 공공건축과 광장은 명예다. 도시의 이름은 시카고다.
시카고는 어쩌다 이런 멋진 물의 도시가 되었을까. 그 도시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도시가 되었을까.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1871년 대화재와 1893년 세계 박람회와 건축가 대니얼 버넘에 이른다. 대화재로 시카고 도심은 전소했다. 절망이었다. 하지만 시카고는 금세 일어섰고,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며 도시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박람회의 성공과 그 영향으로 시카고만 백색 고전주의 양식의 도시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워싱턴과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백색 도시가 됐다. 박람회는 건축 도시 조경 측면에서 할 이야기가 많지만 세 가지가 돋보인다. 첫째 물길, 둘째 수변, 셋째 공공건축.
버넘은 박람회장(242만8113m² 규모)에서 바다만 한 미시간 호수와 기존의 크고 작은 석호를 다듬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물길을 만들었다. 그 결과, 물과 뭍이 깍지 낀 두 손 관계가 되어 베네치아처럼 다리가 생겼고, 수문 건축이 생겼다. 수변을 따라서 상큼한 조경과 넉넉한 보도를 줬다. 또 섬에는 숲을 조성했다. 수변은 선적인 조경이었고, 섬은 면적인 조경이었다. 이 두 조경은 건축과 하나가 되어 물의 형태와 경계를 완성했다. 이를 보면, 수변은 공공재라는 생각과 수변을 따라서는 보행 정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배어난다.
끝으로 버넘은 물길 축을 따라 땅의 위계를 부여했고 공공건축을 세웠다. 특히 ‘코트 오브 아너(Court of Honor·그림)’ 주변에 박람회 주요 앵커시설을 세웠다. 남쪽의 뱃길(낭만)과 북쪽의 철길(현실)은 대중교통 체계로 중심과 접속했다.
박람회가 끝난 후, 버넘은 건물 설계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시카고 설계에 15년간 천착했다. 그리하여 1909년 ‘시카고 플랜(Plan of Chicago)’을 출판했다. 박람회에서 발아한 3가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시카고에 적용시키자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시카고 도시 디자인 바이블이다. 관전 포인트는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다.
첫째, 도시 흐름이다. 버넘은 찻길과 철길에도 주목했지만, 무엇보다 물길에 주목했다. 둘째, 수변의 활성화다. 그는 수변을 공공재로 인식했고, 그래서 호반 간척을 통해 도시 수변 길이를 늘여 공공공원을 두었다. 셋째, 시청과 박물관과 도서관과 극장과 수족관과 역사(驛舍)와 우체국 등과 같은 공공건축의 기념비적인 건설이다. 로마시대 기념비처럼 웅장하게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에게 공공건축의 외부는 도시의 상징이어야 했고, 내부는 경외감을 불러야 했다. “작은 플랜은 버려라. 그것은 사람의 피를 휘젓는 마법이 없다.” 버넘의 입버릇이었다.
시카고는 대화재로 세계 박람회와 도시 비저너리 버넘을 발굴했다. 위기가 호기였으며, 이를 통해 시카고의 청사진이 나왔다. 그 청사진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도시의 성공 비결은 물길(흐름)과 물가(수변)와 (공공)건축이다.
〈25〉뉴욕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
2500개의 별이 뜬 뉴욕의 관문… BTS도 섰다
▲미국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내부. 바닥은 테네시 대리석으로 마감했고, 천장은 2500개의 작은 조명을 박아 밤하늘 별자리를 연출했다. BTS는 이곳에서 4집 앨범 신곡 ‘온(ON)’을 처음 공개했다
지난주 방탄소년단(BTS)이 새 앨범 신곡 ‘온(ON)’을 미국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공개했다. 지난 연말연시 자정에도 BTS는 세계인들을 상대로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공연했다. 반응은 모두 뜨거웠다. 두 곳은 뉴욕에서 어떤 곳일까. 타임스스퀘어를 이해하면 뉴욕의 ‘지도’가 보이고,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이해하면 뉴욕의 ‘영혼’이 보인다.
뉴욕은 오이처럼 뾰족하고 긴 섬이다. 섬 중앙에 직사각형 모양의 센트럴파크가 있다. 뉴욕의 남북 도로는 애비뉴, 동서 도로는 스트리트다. 도시의 모양 때문에 애비뉴는 넓고 길며, 스트리트는 좁고 짧다. 애비뉴가 스트리트보다 사랑 받는 이유다. 뉴욕은 애비뉴와 스트리트가 만드는 바둑판 문양의 도로를 가진 도시다. 격자 문양의 도로체계는 질서와 규칙을 상징한다. 다소 딱딱할 수 있는 규칙을 대각선 길 하나가 관통하며 변칙을 발생시키는데, 이 도로가 그 유명한 브로드웨이다. 브로드웨이와 BTS는 상통한다.
4개의 애비뉴가 뉴욕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 센트럴파크 동쪽 5번 애비뉴와 서쪽 8번 애비뉴, 그 사이에 있는 6, 7번 애비뉴가 중요하다. 브로드웨이는 5∼8번 애비뉴와 교차하며 X자형 광장들을 만든다. 이들이 매디슨스퀘어(5번), 헤럴드스퀘어(6번·코리아타운), 타임스스퀘어(7번), 콜럼버스서클(8번)이다. 이 중에서도 타임스스퀘어가 미래지향적인 미디어 광장으로 뉴욕에서 가장 핫하다.
4개의 애비뉴만큼이나, 뉴욕 복부에는 중요한 스트리트들이 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 있는 42번 스트리트와 펜 스테이션이 있는 33번 스트리트다. 이들은 20세기 기차역으로 뜬 역세권 도로다. 요새 한창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허드슨 야드 개발이 바로 펜 스테이션 철로 위의 공중권을 활용하여 개발한 대형 프로젝트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건축오디세이 2월 12일자 참조)의 성공으로 미국 도시에서는 백색 도시 운동이 일어났다. 펜 스테이션과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뉴욕판 응답이었다. 두 역은 보자르(고전주의) 양식으로 우아하고 거대하게 지어졌다. 문제는 펜 스테이션의 원작은 1963년에 철거되었고, 현재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만 달랑 남았다.
뉴욕에서 이 역을 처음 방문하게 되면, 바깥에서는 펜 스테이션과 쌍둥이로 태어났다가 혼자 남은 신세가 짠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이 기습적인 놀람의 원인이 거대한 기둥, 섬세한 장식, 호텔 로비 같은 마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간을 두고 음미해 보면 훨씬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것에서 기인함을 깨닫는다. 이는 다름 아닌 길이 140m, 폭 40m의 방을 45m 높이에서 덮고 있는 아치 천장 때문이다. 이 넓은 스팬(지점과 지점 사이의 거리)을 저 높은 곳에서 돌로 둥글게 마감한 것이 놀라움의 원인이다. 초록색 아치 천장은 경쾌하고, 또 천장 곡면을 따라 촘촘히 박은 2500개의 작은 별자리 조명들로 우아하다.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려 군왕처럼 뉴욕에 입성하길 원했을 테고 건축가가 이를 이뤘다. 근사한 도시 관문이다.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장을 지낸 프랑스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는 이곳을 “내가 뉴욕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번 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이곳은 방의 규모가 커져서 도시만 하고, 또 그 도시만 한 방은 BTS의 댄스처럼 경쾌하고 우아하다. 타임스스퀘어는 뉴욕 간판 광장이고,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뉴욕 대표 공공건축이다. BTS의 세계적인 명성도 이에 못지않기에 두 곳에서 공연했다. BTS의 차기 뉴욕 공연 장소는 어디가 될지 궁금하다. 코로나19로 위축된 요즘, BTS의 4집 앨범 ‘영혼의 지도’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생기를 부어주길 기대해 본다.
〈26〉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
‘돈의 신’을 모신 뉴욕의 신전
▲왼쪽 그림은 17세기 뉴암스테르담. 북쪽과 서쪽에 방어용 성벽을 쌓았고, 남쪽에 포대를 두었다. 북쪽 성벽 자리가 오늘날 월스트리트이다. 오른쪽 그림에서 삼각형 지붕이 있는 건물이 뉴욕증권거래소다. 그림 이중원 교수
코로나19로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우리는 감염 확진자가 완만한 증가세였고, 미국과 유럽은 가파른 증가세였다. 지난주 국내 개인투자자들은 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수했고 외국인은 패대기쳤다. 다우존스의 등락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월스트리트. 한국어로는 ‘담길’. 어쩌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금융시장의 대명사가 담길이 됐을까? 17세기에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벤치마킹하여 모스크바 대신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을 만큼 세계적인 운하와 해양 무역 도시였다.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에 강자였고, 영국인보다 앞서 인디언들의 ‘마나하타’(맨해튼 어원)를 식민지화했다. 훗날 영국인 요크(York) 공작은 이 땅을 힘으로 빼앗고, 이곳을 자기 이름을 따라 ‘뉴욕’이라 개명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맨해튼섬 남단에 암스테르담처럼 강에 직각이 되게 운하를 내륙으로 팠고, 북쪽과 서쪽으로 성벽을 쌓았고, 남쪽 끝에는 포대를 두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인디언들이 썼던 넓은(Broad) 도로인 브로드웨이는 그대로 두었다. 이는 북쪽 성벽을 관통하는 유일한 대로였다. 오늘날 월스트리트는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북쪽 성벽(Wall)에서 유래한다. 마찬가지로 배터리 파크는 남쪽 포대(Battery)에서 유래한다. 브로드웨이와 월스트리트 교차점 안쪽에 세계 금융 파워하우스, 뉴욕증권거래소(1903년)가 있다. 뉴욕 주식거래 규모는 1896년(다우존스 지수 사용 원년)부터 1901년까지 6배 증가했는데, 이는 18세기 파리, 19세기 런던에 이어 뉴욕이 20세기 세계 금융 수도가 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전 건물로는 성장하는 거래 규모를 수용하기가 불가했기에 새로운 증권거래소가 공모전에 나왔고, 건축가 조지 포스트가 당선됐다.
포스트는 노력파 건축가였다. 뉴욕대를 졸업한 그는 당시 파리 유학파 건축가 1호였던 리처드 모리스 헌트를 사사했다. 포스트는 헌트로부터 원조 고전주의 양식을 습득했다. 포스트는 전통 건축양식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던 엘리베이터 기술과 유리벽 기술에도 열려 있었다.
포스트는 1860년에 독립해서 개업했다. 10년 만에 그는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됐다. 특히, 1889년에 그는 많은 뉴욕 건축가들의 선망이었던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뉴욕 주택 설계권을 거머쥐면서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증권거래소 설계 공모전 당시 심사위원들의 핵심 관전 포인트는 도전적인 대지와 새로운 건물 프로그램의 해결방식이었다. 대지는 북서쪽으로 경사가 심했고 모양은 비정형이었다. 이곳에 거대 트레이딩룸을 넣어야 했다. 포스트는 경사를 숨길 수 있는 기단부를 만들었고, 그 위에 로마신전 같은 외관을 얹었다. 16m 기둥 6개 뒤에 거대한 채광용 유리벽(약 가로 15m, 세로 30m)을 설치했다. 그 뒤에 트레이딩룸(가로 43m, 세로 33m, 높이 22m)을 두었다.
열주와 유리벽 경계에서 우리는 포스트의 건축철학을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것과 옛것의 만남이다. 대규모 트레이딩이 새 시대의 요구라면, 이를 로마식 외투로 입히는 것이 포스트의 형식이다. 물론 이 점이 훗날 진보적 미국 건축가들에게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지 못해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시대정신은 포스트의 방식이 대세였다. 포스트는 1913년에 사망했다. 시대정신의 풍향이 바뀌어 포스트가 지은 수많은 월스트리트 마천루들은 20세기에 대부분 철거됐다. 그래서 증권거래소는 포스트의 소중한 유작이다. 오늘날까지 그의 유작은 월스트리트의 힘과 부를 상징하고, 또 그 안의 다우존스의 등락은 지난주처럼 세계 주식 투자자들의 마음을 천국과 지옥을 들락날락거리게 한다.
04-15
〈27〉마천루 도시 상하이
서구 열강의 흔적, 브랜드가 되다
▲황푸강과 우쑹강 교차점에서 남쪽을 바라본 번드(와이탄)의 1930년대 모습. 오른쪽 피라미드 꼭대기를 가진 마천루가 캐세이 호텔, 왼쪽 시계 꼭대기를 가진 마천루가 관세청, 그 옆 돔 지붕 건물이 HSBC 마천루다. 이중원 교수 그림
상하이는 21세기 마천루 도시다. 한국의 명동에 해당하는 난징루(난징동루) 지하철역에 내려 동쪽으로 걸어 나가면 와이탄이 나온다. 이곳 수변에 서서 황푸강 건너 푸둥을 보면 꽃 모양의 진마오타워(420m)와 병따개 모양의 세계금융센터타워(492m), ‘스크류바’ 모양의 상하이타워(632m)가 솟구친다. 상하이는 20세기 초에 이미 세계적인 마천루 도시였다. 그 시작은 어땠을까.
와이탄의 옛 이름은 ‘더 번드(The Bund)’였다. 번드는 영국인들이 봄베이(오늘날 인도 뭄바이)에서 인도인들에게 배운 힌두 공사용어로 ‘성토한 수변(워터프런트)’이었다. 영국은 식민지 국가에 내륙 수도의 ‘안티테제(반대 또는 상반되는 것)’로 수변도시를 즐겨 세웠다. 본래 중국의 전통 무역항은 광저우였다. 아편전쟁에서 이긴 영국 동인도회사의 휴 린지는 양쯔강과 태평양이 만나는 번드의 지리적 장점을 간파했다. 여기에 새로운 마천루 도시를 세우면 중국인들에게는 선진 과학기술 문명 소개라는 명분이 되고, 자신들에게는 양쯔강을 따라 전개되는 중국 거점 도시들과 무역할 수 있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은 치외법권, 무역관세, 항구 개방 등을 꼼꼼히 문서에 적었다. 돌아보면 1842년 난징조약은 ‘번드 건설 청사진’이었다. 홍콩과 마카오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영국은 번드를 황푸강(동쪽)과 우쑹강(북쪽)이 만나는 교차점에 세웠다. 영국 공사관은 사방으로 트인 번드 북쪽에 자리 잡았다. 우쑹강을 기준으로 남으로는 영국인 땅이었고, 북으로는 미국인 땅이었다. 영국인 땅 남쪽으로는 프랑스인 땅이었다. 번드에서 약 800m 아래에는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옛 읍성이 있었다. 19세기 중반 서양인들이 제작한 지도를 보면 중국인 읍성을 ‘차이나타운’이라고 명기했다. 마치 본토 중국인을 해외에서 건너온 이민자 취급을 한 주객이 전도된 이름이었다. 번드의 겉모습은 영광이었지만 속사정은 치욕이었다.
초기 번드 건축물들은 홍콩에서 데려온 건축가들이 홍콩 건물처럼 외부 조망용 베란다를 넓게 가진 마천루를 지었다. 이후 몇 번의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번드에 어울리는 건축은 런던, 뉴욕, 파리에 있는 고향 건축이란 것을 알았다. 번드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 마천루를 세우느냐에 따라 런던의 고딕주의, 파리의 고전주의, 뉴욕의 기능주의로 나뉘었다. 글로벌 마천루 도시의 서막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추종했던 사람들이 조정의 칼날을 피해 번드로 몰려들었다. 급증한 주택(리룽 근대주거 개발) 수요로 부동산은 초호황을 맞았다. 적게는 15배에서 많게는 60배까지 올랐다. 마천루는 더 많이, 더 높이 솟았다. 백인들은 번드에 새로운 유형의 권력기관인 백인 중심 시청(Shanghai Municipal Council·1854년)을 만들었고, 상하이 최초의 영자 신문(1850년)을 발행했으며, 커피하우스와 클럽(1864년), 호텔과 경마장(1863년), 공공 공원 등의 백인 전용 문화시설을 지었다. 가스등, 전기, 상수도, 전차도 도입했다.
새로운 정치기구와 정보 유통, 문화는 마천루들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무섭게 중국인을 흔들었다. 특히 한족(漢族) 출신의 지식인들과 상인들에게는 여진족 청나라 황실을 뒤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번드는 개혁과 개방의 산실이 됐지만 동시에 중국의 방대한 철도권과 광산개발권 문제로 열강의 시한폭탄 관계를 감내하는 그릇이 됐다. 이후 번드는 숱한 혁명과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불황과 호황을 거듭했다.
마천루 도시로서 번드의 찬란한 영광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기 전인 1930년대였다. 이때 번드는 미국 밖에서 가장 빛나는 글로벌 마천루 도시였다. 1930년대 번드 스카이라인을 지배했던 마천루는 3개다. 런던 빅벤을 흉내 낸 시계탑 관세청 건물, 거대 돔과 대리석 로비를 가진 홍콩상하이뱅크(HSBC) 건물, 그리고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종루 캄파닐레타워를 벤치마킹해 지은 캐세이(Cathay) 호텔이다. 오늘날 상하이는 번드의 20세기형 초기 마천루들과 푸둥의 21세기형 초고층 마천루들이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부르는 합창으로 도시 브랜딩을 한다.
〈28〉아칸소주 가시면류관 채플
▲ 채플 내부에서 숲을 바라본 모습. 공사할 때 숲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얇은 나무 각재를 손으로 운반해 와 채플을 지었다. 숲속에 있는 하나의 건물이자, 숲과 하나인 건물이다. 그림 이중원 교수
코로나19가 지나고 간 상흔은 선명하다. 근무하는 건물에는 확진자가 나오고, 동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 A 씨는 망한다고 걱정이고,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학과 교수는 코로나19로 운명한다. 좌절과 슬픔이 사방을 채운다. 현재 전 세계에 필요한 것은 ‘최대한의 압박’이 아니라 ‘최소한의 위로’이다. 지금은 위로의 시간이다. 위로의 건축, 이는 가능한가?
미국 시골에 있는 작은 건물 하나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답한다. 이 작은 건물은 미국을 호령하는 뉴욕주나 캘리포니아주에 있지 않고 중부의 시골 주인 아칸소주에 있다. 건물은 유레카 스프링스(eureka springs) 숲속에 위치한다.
이 건물의 건축주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정년퇴임을 한 짐 리드는 도시와 동떨어진 숲속에 자기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은 채플을 짓고자 했다. 리드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영혼의 평안과 느긋함을 얻어가길 소망했다.
리드는 건축가 유인 페이 존스를 찾아갔다. 당시 존스는 글로벌 스타 건축가는 아니었지만 충실히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건축가였다. 리드의 요청에 따라 그는 깊은 숲속 암반 위에 작은 채플을 짓되 숲의 나무를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존스는 토목 장비와 구조 크레인을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장비를 필요로 하는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 대신 인부들이 숲 사이로 구조재를 손으로 운반할 수 있게 작은 사이즈의 나무 각재를 구조로 사용했다. 문제는 지붕이었다.
건물의 길이(18.3m)와 폭(7.3m), 높이(15m)가 작지 않아 나무 각재로 지붕 구조인 트러스(truss·나무 각재를 삼각형으로 반복해서 뼈대를 짜는 방식)를 짜야 했는데 존스는 그런 실용적인 해법이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포기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나온 작은 구조 디테일이 이 집의 주제가 되었다.
채플 중앙 통로에서 위를 바라보면(그림 참조) 보이는 X자형 나무 구조재 중앙에 그 디테일이 있다. 속이 빈 마름모를 중앙에 두고 그 도형 각 변에서 철판이 두 개씩 뻗어 나와 나무 각재를 붙잡는다. 이 X자형 나무 지붕 구조 단위는 중앙 통로 방향을 따라 반복하며 지붕을 지지하고 높은 벽이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
십자형 나무 구조가 모이고 반복하며 지붕 얼개를 만드는 모습이 건물 밖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나무가 아닌 부분은 425개의 유리로 채웠다. 그로 인해 유리 너머의 숲과 소나무 내부가 하나가 된다.
태양 빛이 십자가 지붕에 부딪혀 느슨해지며 의자 위에 않은 사람 머리 위로 금가루처럼 떨어지고, 또 빛이 숲의 잎사귀에 반사해 채플 벽을 은가루처럼 반짝인다. 이곳이 ‘위로의 건축’인 이유는 이런 신비함 때문만은 아니다. 숲이라는 환경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건축가의 섬세함 때문이고, 자기 퇴직금을 탈탈 털어 여러 사람에게 위로를 전달하고자 하는 건축주의 따스한 마음 때문이다.
시공 중간 즈음에 시공비가 부족해 공사가 올스톱했다. 주변 친구들과 은행은 이 사정을 외면했다. 리드는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일주일 뒤에 시카고에 사는 어느 한 부인이 편지 봉투에 꼭 맞는 돈을 넣어 보냈다. 이 훈훈한 뒷이야기도 ‘가시 면류관 채플(Thorncrown Chapel)’을 위로 건축의 걸작이 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지난 40년간 700만 명 이상이 이곳을 방문해 위로를 받았다.
요새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헬스장 주인 임차인들이 매출이 미미해 건물주들을 찾아가 대면하고 사정을 이야기 하면 임대료를 50% 깎아 주는 건물주가 있는가 하면 관리비까지도 50% 깎아 주는 건물주도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위로의 건축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 훈훈하다. 건물주가 다수인 대형 리츠형 건물의 경우도 두세 달간만이라도 이런 위로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
〈29〉판교 테크노밸리
대한민국의 미래로 통하는 게이트
▲판교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마주하게 될 알파돔 광장 모습. 저층부 도넛 모양 상업시설과 고층부 큐브 모양 업무시설. 3층 투명 스카이 브리지가 저층에서 흩어진 건물을 공중에서 이어준다. 그림 이중원 교수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PTV)는 대한민국 간판 4차 산업혁명 전진기지다. 2006년 첫 삽을 뜬 후 지난 15년간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PTV는 혁신, 고용, 매출 측면에서 실로 괄목할 만한 성과와 기대가 있다. 그렇다면 건축적으로는 어떨까? PTV의 시작점은 판교역이다. 아침마다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힘차게 출근한다. 이들은 신분당선 판교역 북쪽 게이트인 1번 출구로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북상한다. 조금 걷다 보면 좌측에 첫 랜드마크 코트야드 메리어트 호텔(2014년 준공)이 나온다. 부드럽게 파도치는 유리 외관이 일품이고, 8층 로비 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의 PTV 조망도 일품이다. 운중천과 PTV와 금토산이 겹겹을 이루며 아득하게 멀고 넓게 펼쳐진다.
호텔에서 더 북상하면 운중천 보행교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NC소프트 본사(2013년 준공)가 보인다. 이 건물은 ‘판교 게이트’라는 별명답게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있다. 두 개의 수직적인 타워가 양 끝에서 아주 넓은 상층부를 지지한다. 마치 우주선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착시를 이룬다. 구조적 도전이 달성한 시각적 트임이다. 저녁에는 건물 로비 미디어 스크린에서 게임 캐릭터 애니메이션이 빠르게 흐르며 가로를 밝힌다.
운중천에서 조금 더 북상하면 동선의 축이 바뀌며 동서 방향의 PTV 중심 광장이 나온다. 광장 북측 경계가 그 유명한 판교로다. 이곳은 글로벌 스타 건축가들의 건축이 밀집한 도로다. 하나하나가 모두 다 수작이지만, 특히 3개의 건물이 유명하다. 동측 끝에 차바이오컴플렉스(2014년 준공·이탈리아 알레산드로 멘디니 디자인)와 서측 끝에 DNA 사슬을 건축화한 코리아바이오파크(2011년·한국 무영 디자인)가 있고, 중앙에 삼양 디스커버리센터(2016년·일본 니켄세케이 디자인)와 미래에셋 벤처타워(2011년·한국 삼우 디자인)가 있다. 네 건물 모두 역동적인 로비와 실험적인 외피가 빼어나다.
국내 최고 바이오 벤처 집합지인 코리아바이오파크는 제1 PTV의 종점이다. 이곳에서 대왕판교로를 따라 올라가면 지금 제2 PTV가 지어지고 있다. PTV의 시작점인 판교역 알파돔은 벌써 지어졌어야 했는데 이제 한창 골조 공사 중이다. 2008년 금융위기로 늦춰져서 그렇다. 알파돔은 시애틀 아마존 캠퍼스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과 실리콘밸리 삼성 설계로 유명한 시애틀 건축회사 NBBJ가(국내 희림과 컨소시엄) 디자인을 했다. NBBJ는 시애틀 건축설계사무소다. 미국에서 워싱턴주 시애틀과 오리건주 포틀랜드 건축가들은 ‘태평양 북서부 지역주의 건축’을 구사한다. 이는 자연(산과 숲)과 공생하는 건축을 존중하고, 인간을 디자인 중심에 두며, 원활한 흐름과 투명한 소통을 유도하며, 형태와 외장에서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추구한다.
알파돔이 기대되는 큰 이유는 NBBJ 건축철학이 건물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NBBJ는 덩치일 수 있었던 대형 건물을 잘게 썰어 네 동으로 분절시켜 팔방으로 퍼지는 골목길을 광장에 선사하고, 이로부터 파생하는 사이공간은 고층 사무공간에 태양광을 골고루 선사한다. 3층에 매달린 유선형의 투명 스카이 브리지는 허공에 매달려 분절된 네 동을 공중에서 손잡아 준다. 판교역 광장은 알파돔으로 신나게 될 참이다. 앵커 테넌트(핵심 유명 상권)로 카카오와 네이버가 대거 들어올 것이라고 하니, 알파돔 준공(2021년)에 거는 기대가 크다.
또 알파돔은 메리어트 호텔 같은 실험적인 외피 디자인이 있고, NC소프트 같은 구조적 실험이 있고, 판교로의 글로벌 건축가들이 지은 랜드마크 건축물 같은 역동적인 로비가 있다. 그래서 PTV 시작점인 알파돔은 이후 전개될 판교 랜드마크 건축물들의 전조라는 점에서도 제격이다.
<30> 서울 마천루 타령
‘높이’는 도시의 자랑이자 위엄이다
▲왼쪽은 삼성역 GBC 타워, 오른쪽은 잠실 롯데타워. 전자는 마천루가 사각형 모양으로 상부에서 끝나 지상에서 보면 평평하고(모더니즘), 후자는 붓 모양이라 뾰족하다(포스트모더니즘). 그림 이중원 교수
서울 마천루 시장은 지난 20년간 급속히 성장했다. 9·11테러 이후 그라운드 제로 재건 국제 공모전에서 당선작을 낸 미국 유대인 건축가 대니얼 리버스킨드는 일약 스타가 되어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았다. 국내에도 해운대아이파크(2011년 준공·높이 292.1m·국내 6위)와 용산 마천루 계획안을 선보였다.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 횃불을 모티브 삼아 마천루 군을 디자인했다면, 용산에는 신라시대 왕관을 모티브 삼아 마천루 군을 디자인했다. 3개의 용산 마천루가 눈길을 끌었다.
첫째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의 620m 높이의 중심 마천루, 둘째 미국 건축가 에이드리언 스미스의 ‘댄싱 드래건’(용산 지명에서 따옴) 마천루, 셋째 네덜란드 건축설계사무소 MVDRV의 ‘구름’ 마천루였다. 마천루의 혁신적 형태도 멋졌지만, 리버스킨드의 한강변 마리나 파크와 야외 보행 쇼핑몰이 있어 세 마천루가 더욱 빛났다. 2008년 금융위기로 세 마천루와 한강 수변 파크가 무산된 것은 못내 아쉽다.
강 건너 여의도에는 다음 달 영국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의 파크원(333m·국내 3위)이 준공된다. 하이테크 건축가로 1990년대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로저스는 엘리베이터를 투명하게 외부로 빼고, 마천루 기둥을 유리 밖에 두는 마천루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파크원도 그럴 예정이다. 로저스가 공공을 위해 신경을 쓴 점은 여의도 공원과 IFC(2012년 준공·285m·국내 8위) 마천루 군을 단절 없이 이어주는 것이다. 내부에서 반원을 그리는 쇼핑몰 동선 체계가 바로 그 해결책이다. 로저스는 이곳에서 가벼운 케이블 천장 구조를 선보인다. 천창에 스미는 자연광이 경쾌한 철의 조형미를 밝힐 참이다.
사실 용산과 여의도는 공항에서 차를 타고 들어오면 서울 초입이다. 서울의 국제적 위상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대문이다. 따라서 이 두 곳의 마천루는 패기와 힘의 결집이어야 하며, 자부와 자존의 결정체여야 한다. 마천루 땅으로는 용산이 여의도보다 낫다. 왜냐하면 한강은 W자형을 그리며 흐르고, 태양은 하루 중에 남쪽에 걸려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강 변곡점에 세워지는 마천루들이 랜드마크가 될 확률이 높고, 남향 땅에 세워지는 마천루들이 태양의 반사효과를 톡톡히 본다. 그러니 ‘용이 비상하는 땅(용산·龍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마천루를 세워야지 용이 고꾸라질 건물들을 이곳에 세워서는 안 될 일이다. 잠실 롯데타워(2016년 준공·555m·국내 1위)는 이제 사방에서 보인다. 멀리 성남에서도 보이고, 강 건너 부암동에서도 보인다. 그래도 타워 조망의 백미는 퇴근 시간 강남 남부순환도로상이다. 이 시간에 타워는 석양을 받는다. 형태는 위로 갈수록 모아지고, 어느 높이에서부터는 양파처럼 껍질이 벗겨지고 숨은 껍질이 드러난다. 푸르고 붉은 노을 아래서 두 껍질 사이로 태양과 인공조명이 서로 교차하며 교체한다. 건축설계사무소 KPF의 겹겹이 건축외피 미학의 정수다.
삼성역 한전 부지에 세워지는 GBC 타워도 이제 착공에 들어간다. KPF의 경쟁사인 SOM 디자인이다. GBC 관전 포인트는 롯데타워와 사뭇 다르다. GBC의 묘미는 5454m² 정도의 정사각형 평면이 위로 갈수록 크기의 감소 없이 569m까지 똑바로 올라가는 점이다. 이 타워의 구조적 도전은 궁금하다 못해 아찔하다. GBC는 마천루의 끝이 평평하고, 롯데타워는 뾰족하다. 강남 하늘은 두 푯대 사이에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에 지어질 마천루들은 세간에서 말하는 ‘마천루의 저주’일까 아니면 ‘마천루의 축복’일까? 마천루는 호황에 착공하고, 불황에 준공하기 때문에 마치 전자가 불변의 진리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호황기와 불황기가 모두 지나고 나면 마천루는 도시의 사랑과 자랑으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노래하듯 주문하자. 솟아라 솟아라 서울이여, 천지인을 살리며 솟아라.
〈31〉강남 마천루 길
‘소통’이 마천루를 랜드마크로 만든다
▲왼쪽 그림에서 사선이 있는 마천루가 DB금융센터다. 오른쪽은 포스코P&S타워
서울 강남역에서 시작하는 테헤란로는 탄천을 건넌 후 이름이 올림픽로로 바뀐다. 도로명으로는 두 도로지만 물리적으로는 한 도로다. 건축적으로는 강남역에서 삼성역은 마천루 길이고 삼성역에서 잠실역은 100층 이상 건축이 둘이나 세워져 초고층 건축 길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강남 마천루 길은 동서 방향이다.
마천루라고 해서 모두 다 랜드마크 마천루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마천루가 랜드마크가 되기 위한 성공 조건은 무엇일까? 뉴욕의 경우를 보면, 세 가지다. 첫째는 상업성. 크라이슬러 빌딩처럼 주요 역세권에 있을 때다. 둘째는 상징성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도시에서 가장 높을 때다. 셋째는 바로 록펠러센터처럼 ‘소통’할 때다.
강남 마천루 길의 시작점인 삼성타운(2008년 준공)은 첫째에 해당하고 종결점인 롯데월드타워는 둘째에 해당한다. 대개 성공하는 마천루 길에는 길의 시작과 끝을 붙잡아주는 북엔드 마천루가 필요한데 삼성타운과 롯데타워가 강남 마천루 길에서 그 역할을 담당한다. 두 마천루 모두 미국 KPF건축사사무소가 디자인했다. 이 길에는 세 번째 성공 조건을 충족하는 KPF 마천루가 두 개 더 있다. 하나는 DB금융센터(옛 동부금융센터·2002년 준공)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코P&S타워(옛 포스틸타워·2003년 준공)다. 전자는 하늘과 소통하고, 후자는 땅과 소통한다.
DB금융센터의 관전 포인트는 동측 입면이다. 보통 건물은 앞태에 멋을 내고 옆태는 밋밋한데 이 건물은 옆태가 눈을 끈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삼각형과 한 개의 평행사변형이 4개의 사선을 만든다. 마천루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사선에서 긴장감이 돈다.
마천루의 도로면 평행사변형 볼륨을 가로에서 보면 아래는 얇고 위는 두꺼워 마천루가 앞으로 넘어질 것 같은 착시를 유발한다. 이 시각적 위태위태함이 땅에 머물러 있던 시민들의 시선을 하늘로 인도한다. 발꿈치를 든 발레리나처럼 마천루로 하여금 중력을 이기고 하늘로 치솟게 한다.
이에 반해 포스코P&S타워는 땅과 소통한다. 마천루의 저층 유리 껍질을 앞으로 잡아당겨 가로를 덮는다. 로비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공간을 외부화해 공공에 내어준 보기 드문 마음씨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영락없이 공공을 위한 큰 투명우산이 된다. 이 널찍한 투명 경계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생기가 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마천루의 모서리 철 공예가 철을 다루는 회사답게 거리를 살린다. KPF는 철 다루는 솜씨가 아주 빼어난 건축디자인 회사인데 그 점에서 포스틸이라는 철 회사와의 만남은 천생연분 찰떡궁합이다. 역삼역 3번 출구로 나와 걸으면 거대한 철침이 마천루 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보는 이의 눈앞에서 멈춘다. 그 궤적을 따라 하늘에 있던 빛이 스키 선수처럼 활강하여 땅에 다다른다.
KPF는 1980년대 초 시카고강 변곡점에 세운 333 왜커 드라이브 마천루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 후 10년 주기로 변신하며 글로벌 마천루 디자인 시장에서 강자가 되었다. 서울 중구 플라토미술관과 인천 송도 포스코타워송도(옛 동북아무역타워)도 KPF 손길에서 나왔으니, KPF와 우리의 인연은 각별하다. KPF 디자인은 2000∼2010년대에 정점을 찍었는데 그들의 걸작 4개가 강남 마천루 길인 테헤란로에 서 있다.
강남 마천루 길에는 KPF의 북엔드 마천루로 삼성타운과 롯데타워가 있고, 두 타워 사이에 아코디언의 칸막이처럼 DB금융센터와 포스코P&S타워가 있다. DB금융센터가 하늘과 소통하는 사선이라면 포스코P&S타워는 땅과 소통하는 덮개다. 회사 사옥 마천루라 할지라도 마천루라면 먼저 전자처럼 스카이라인을 살리고 후자처럼 스트리트스케이프(가로 경관)를 살려야 한다. 그래야 세계적인 마천루 길이 탄생할 길이 열린다.
〈32〉수변도시
22세기 서울, ‘그린벨트’보다는 ‘블루벨트’다
▲좌측은 시애틀 수변. 알래스칸 웨이 고가 고속도로가 도심과 수변을 단절시킨다. 회전차가 있는 곳이 피어 57, 그 앞이 수족관이다. 우측은 밴쿠버 수변. 도심과 수변을 단절시키는 고속도로가 없다. 수상 비행기장 위 건물이 컨벤션센터다. 그림 이중원 교수
그린벨트 해제 논란이 뜨거웠다가 흐지부지 식었다. 그린벨트는 19세기 산업 도시의 무분별한 팽창과 대기 오염을 막기 위해 20세기 중반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서울은 1971년에 그린벨트를 만들었다. 문제는 지난 반세기(1971∼2020년) 동안 서울 인구는 580만 명에서 950만 명으로 늘었고, 가구 수는 110만 가구에서 420만 가구로 늘었다. 땅 대비 주택 공급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이다.
최근 영국 건축도시학자 마이클 배티는 ‘미래 도시를 발명하다’(Inventing Future Cities·MIT출판사·2018년)를 출간했다. 그는 2100년 세계 인구는 100억 명이고, 100만 명을 넘는 도시는 1600개,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도시는 85개, 인구 1억 명이 넘는 도시는 3개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중 1억 명이 넘는 도시가 아시아에 2개 출현할 것이라고 한다. 중국 광저우(현재 4500만 명)와 일본 도쿄(3300만 명)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이 둘과 경쟁해야 하는 서울의 적정 규모는 얼마일가? 사실 이 질문이 ‘서울 집값을 어떻게 잡을까?’보다 더 미래지향적이다. 서울은 현재의 틀로는 1억 명을 담을 수가 없다. 서울은 더 팽창해야 한다. 서울은 동-남-북으로 산들이 겹겹이다. 이들이 서울 그린벨트인데, 엄밀히 말하면 이 산들이 서울 수평 팽창의 걸림돌이다.
그러면 서울 그린벨트는 본래 목적에 부합하고 있을까? 서울 그린벨트는 대부분 산지형 녹지라 런던 평지형 녹지에 비해 노인과 임산부와 장애인의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린벨트치고는 다소 차별적이다. 또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산에 송전 타워들이 무차별적으로 횡단해서 ‘왜 그린벨트에 저 시설은 되고, 이 시설은 안 되지?’ 하는 의문도 든다.
산지형 그린벨트가 평지형 그린벨트에 비해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그 대신 풍부한 물길이 있다. 서울은 그래서 하천이 런던과 뉴욕에 비해 훨씬 풍부하다. 도시로서 서울의 미래는 산보다는 물길에 있다. 주말에 마음먹고 등반해야 하는 산지형 ‘그린벨트’보다 일상에서 바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평지형 ‘블루(물길)벨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필요가 있다.
블루벨트 측면에서 미국 시애틀과 캐나다 밴쿠버는 시사점이 있다. 두 도시는 차로 3시간 거리에 있어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그만큼 경쟁적이다. 두 도시를 발생시킨 지리적 조건이나 도시경제 진화 과정이 유사하나 수변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둘 다 해안가 경사지에서 시작했고, 벌목을 통한 목재산업으로 도시경제가 일어나 골드 러시로 번성했다. 하지만 물가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시애틀은 20세기 중반 ‘알래스칸 웨이’라는 고가 고속도로를 해안가에 지어 도심과 수변을 단절했다. 골드러시 때 사용한 부둣가(피어 57)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고, 회전차를 설치하고, 수족관을 만들지만, 단절은 개선되지 않는다.
반면 밴쿠버는 수변에 공공공원을 만들었다. 수상 비행기가 물을 활주로 삼아 가뿐히 이륙하고, 컨벤션 센터는 물가에 서서 형태가 파도친다. 구도심 개스타운에서 시작하는 수변공원은 스탠리파크에서 절정을 이룬다. 도심과 수변은 하나다.
시애틀은 요새 고가 고속도로를 철거하고 지하화해 수변을 도심과 이으려는 공원 공사가 한창이다. 현 서울의 한강과 안양천과 중랑천과 도림천의 수변 상황은 어떠한가? 시애틀과 유사하다. 20세기 중반 자동차 중심의 미국식 도시계획 기법이 비판 없이 이식되어 고속도로가 수변을 달린다.
시간을 두어 수변을 더 살리자. 서울의 블루벨트를 살려 그린벨트로부터 자유로워지자. 22세기 서울이 광저우와 도쿄와 경쟁하려면 블루벨트를 살리고, 서울이라는 그릇은 더 커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산하기보다는 응집할 때이고, 퍼지기보다는 솟을 때이다. 또 낮은 산은 평탄화하고, 이러고도 모자라면, 산자락에서 나와 바닷가로 가자.
〈33〉시카고 매그마일의 주인공
천천히 지어 올린 건물의 가치
▲왼쪽은 리글리 빌딩, 오른쪽은 트리뷴 타워이다. 미시간 애비뉴 다리가 리글리 빌딩 앞에 있다. 그림은 1950년대 모습이다. 요새는 유리박스형 모더니즘 마천루가 주변으로 빼곡하다. 그림 이중원 교수
최근 미국 시카고 ‘매그니피선트 마일’(매그마일)이 폭동과 약탈 문제로 뉴스를 달궜다. 매그마일은 시카고 최고 번화가다. ‘매그마일’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건축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시카고에서 시카고강과 미시간 애비뉴가 건축적으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히 크다. 사람들이 북적일 뿐만 아니라 강과 거리가 건축으로 살아 있다. 강은 시카고의 동서축을 형성하고, 애비뉴는 남북축을 형성한다. 둘은 ‘십(十)’자로 교차한다.
이 교차로 코너에 들어선 1920년대 마천루 4개를 시카고 사람들은 ‘포 코너스(Four Corners)’라 부르며 각별히 사랑한다. 이 중 북쪽 코너에 있는 두 마천루가 1924년 준공된 리글리 빌딩과 그 이듬해 준공된 트리뷴 타워다. 여기서부터 시카고 명품 마천루들이 두루마리 영상 필름처럼 하나하나 펼쳐진다.
시카고강 북쪽 미시간 애비뉴의 1마일 길이의 길인 ‘매그마일’은 1920년 미시간 애비뉴 다리(DuSable Bridge) 건립으로 태어났다. 강이 도시의 팽창을 막고 있다가 다리가 연결되면서 도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매그마일은 리글리 빌딩과 트리뷴 타워에서 시작해 1867년 준공된 워터타워와 1969년 준공된 존 행콕 타워에서 끝난다. 매그마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워터타워이고, 제일 높은 건물은 존 행콕 타워(100층·344m)다. 거리에서 나이와 높이도 중요하지만, 이 거리의 진짜 주인공은 리글리 빌딩와 트리뷴 타워다.
워터타워는 오스카 와일드가 ‘과다한 후추통’ 외관이라고 혹평할 만큼 별 볼일 없다. 다만 1871년 시카고 대화재에서 혼자 살아남아 ‘불사조’라는 애칭을 얻었고, 현재는 시카고의 중요 문화재다. 존 행콕 타워는 모더니즘 유리박스 타워로 준공 당시 94층 전망대에서 바다만 한 미시간 호수의 조망과 빼곡한 마천루 풍경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두 건물은 매그마일의 종착점으로 괜찮은 랜드마크다.
하지만 리글리 빌딩과 트리뷴 타워는 건축적 평범함을 넘어선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하자 시카고는 개선문의 성격으로 리글리 빌딩과 트리뷴 타워를 세웠다. 미국의 껌 회사이자 당시 시카고 컵스의 구단주였던 리글리 가문은 시카고 건축 르네상스에 관심이 많았고, 시카고트리뷴지는 시카고 메이저 언론으로 시카고 발전을 위해 여론을 결집하고 리드했다.
건축 양식적으로 리글리 빌딩은 고전양식 타워고, 트리뷴 타워는 고딕양식 타워다. 양식은 다르지만 시카고강과 매그마일을 향한 목적의식은 같았다. 시카고에서 가장 중요한 교차로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리글리 빌딩의 평면이 많은 것을 말한다. 시카고강은 여기서 물 흐름이 꺾인다. 그래서 다리도 비스듬하다. 그 결과 리글리 빌딩의 평면이 사다리꼴이다. 도형 코너에서 예각들이 나오면서 건물 코너가 접힌다. 수직성을 향한 재료와 빛도 남다르다. 건물 외장을 수직적으로 분할해 저층 백색 테라코타는 짙은데 아주 미세하게 위로 갈수록 밝아진다. 그 덕에 마천루가 위로 갈수록 경쾌해지고 상승감이 산다. 리글리 입면 인공 조명장치는 강 속에 두었다. 저녁에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강 수면 물결 문양이 고스란히 건물 입면에서 백색으로 빛난다. 눈이라도 오는 밤이면 그 모습은 한 편의 시(詩)다. 건축은 자연을 지렛대 삼아 일어설 때 가장 높이 선다.
트리뷴 본사 국제 마천루 공모전은 오늘날 뉴욕 그라운드 제로 공모전만큼이나 당시 쟁쟁했다. 트리뷴 타워는 도시 스카이라인의 주체가 중세 교권에서 현대 상권으로 이양되었음을 상징한다. 저녁에 마천루 고딕 왕관은 화로 숯불처럼 붉게 타오른다.
리글리 빌딩과 트리뷴 타워는 서울 한강변에 어떤 마천루를 세워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싸게 빨리 지으면 대부분 쉽게 철거하고 금방 잊힌다. 하지만 시대의 재능을 담은 건물을 돈과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지으면 그 가치는 오래가고, 또 아주 가끔은 세상을 흔든다. 그때 길과 수변은 지속적으로 번영한다. 지금의 매그마일과 시카고 강변처럼 말이다.
〈34〉 보스턴 공공 도서관
도서관을 청와대보다 잘 지어야 하는 이유
▲보스턴 공공 도서관 로비. 두 사자상이 있고, 벽화가 있다. 사자상은 남북전쟁에 자진 참전한 보스턴 젊은이들을 기억한다. 벽화는 왼쪽부터 천문학, 역사학, 화학을 상징한다. 로비 벽면과 사자상 재료는 시에나 대리석이다. 그림 이중원 교수
가을이다. 책들의 도시 도서관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미국을 대표하는 공공 도서관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역시 보스턴 공공 도서관(Boston Public Library)이다. 건축가는 찰스 매킴이다. 보스턴 도서관은 보스턴의 ‘명동’ 격인 코플리 스퀘어에 있다. 이곳에는 도서관 말고도 보스턴 건축 문화재인 트리니티 교회(1877년 준공·건축가 헨리 리처드슨)가 있다.
보스턴은 미국을 대표하는 아크로폴리스로 성장했다. 1870∼1900년 사이 터프츠대, 매사추세츠공대(MIT), 보스턴 칼리지, 보스턴대, 노스이스턴대, 웰즐리대, 뉴잉글랜드 컨서버토리 등 많은 대학들이 보스턴에 새로이 섰고, 하버드대는 대대적인 증축을 단행했다. 당시 보스턴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이자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였다. 보스턴 도서관은 그런 보스턴의 부상을 대표하는 지식의 파르테논이자 판테온이었다.
보스턴 도서관은 외관과 중정과 리딩룸도 좋지만, 그중에서도 로비가 빼어나다. 매킴은 로비 계단실에 부착할 대리석으로 금색 노란 빛깔이 도는 ‘몬테 리테(Monte Riete)’를 지정했다. 이 이탈리아 대리석은 수도원 소유의 채석장에서 고식(古式) 채굴법으로만 생산이 가능했다.
매킴은 시에나 대리석을 실제 공사에 필요한 양보다 10배나 많이 주문했다. 로비 벽에 부착할 대리석 판은 위로 갈수록 미묘하게 어두워져야 했고, 또 완벽에 가까운 문양과 질감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물량을 세심히 골라 나머지는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로비 대리석 벽면은 계단을 오를수록 어두워진다. 방문자의 눈은 대리석 질감에 집중하고 사자상과 벽화로 눈이 이동한다. 로비에서 리딩룸으로 내려가면 어둠이 밝음으로 반전한다. 어찌 보면 로비는 리딩룸을 준비하는 예비 공간이자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변두리 공간인데 매킴은 이곳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인지 남들은 버리는 코너에서 매킴의 정신이 오롯이 돋아난다.
2개의 보스턴 도서관 로비 사자상은 미국 조각가 루이스 세인트고든스가, 8개의 벽화는 프랑스 화가 피에르 퓌비 드샤반이 만들었다. 매킴은 드샤반에게 대리석 샘플을 보냈다. 72세 거장 화가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기보다 부드러운 톤이 배어나게 배려했다. 이 밖에도 보스턴 도서관은 많은 아티스트들의 협업의 산물이다.
매킴은 도서관을 짓기 바로 직전에 아내를 잃었다. 그들은 신혼부부였다. 줄리아는 키가 크고 아름답고 똑똑한 ‘보스턴 브라민(보스턴 귀족가문)’ 사람이었다. 줄리아는 출산 중에 사망했다. 매킴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보스턴 마운트 어번 공공 묘지에 묻었다. 매킴은 줄리아 사망 후 그 어떤 여인과도 다시는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도서관 로비는 매킴이 이런 개인적인 비통한 시간을 통과하는 가운데 탄생한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건물뿐만 아니라, 불멸의 건축정신과 건축을 대하는 자세를 세상에 선보인다.
보스턴 도서관은 공공 도서관의 품위와 격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또 도서관을 왜 청와대보다 더 잘 지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21세기 우리 공공 도서관은 19세기 보스턴 도서관보다 더 격조가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느 날 우리도 우리 도시를 향해 에머슨이 자기 고향 도시 보스턴을 향해 말했던 것처럼 말할 수 있으리라.
“보스턴(서울)은 우연이 아니다. 술집도 역사(驛舍)도 풍차도 아니다. 그렇다고 군 요새가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 혹은 요행을 잡아, 풍요로운 도시가 된 것이 아니다. 보스턴(서울)은 지식과 원칙의 기준점이며, 정서에 순종하고, 감정의 향방을 충실히 걸었을 뿐이다.”
〈35〉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거룩한 죽음’을 위로하는 건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하늘정원. 이곳은 지하 3층에서 지면까지 뚫린 땅속 마당으로 벽과 바닥이 모두 적벽돌 마감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조각상들은 천주교 순교자 44명을 버려진 철로의 침목으로 조각가 정현이 조각했다. 그림 이중원 교수
긴 추석 연휴 기간 어디를 다녀오면 좋을까. 경복궁의 경회루나 종묘의 정전이 나쁘지 않다. 가을 하늘이 맑아 돌기둥 위에 서 있는 정자 건축 경회루나 서울에서 가장 긴 전통 건물인 정전이 제격이다. 현대건축을 하나 추천해 보라고 한다면, 서소문역사공원을 추천하고 싶다.
이 공원에는 순교를 주제로 하는 박물관이 하나 있다.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다. 건축가 윤승현 이규상 우준상이 설계했다. 서울역 북쪽 철로변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특이하다. 공원만 보이고 건물이 눈에 안 보인다. 지하건축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이 박물관을 보면 두 개의 적색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적색 정사각형 성큰 가든(땅속 마당)이다. 공원에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간다. 경사로의 양측 벽은 모두 벽돌 벽이다. 밑으로 내려가므로 벽돌 벽들은 높아지다가 종점에서 첫 번째 성큰 가든과 만난다. 주출입구 성큰 가든이다. 높은 벽돌 벽 성큰 가든은 하늘로 열려 있고, 벽은 코너에서 곡선으로 유연하게 돈다.
곡선 벽 아래에 있는 유리문으로 슬라이딩해서 들어가면 건물의 로비와 만난다. 질박한 격자형 콘크리트 보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천장이 마감되어 있는 보통 박물관과 차별된다. 천장재를 매달지 않고 구조를 있는 그대로 노출했다. 조명 메탈 박스들은 십자형으로 디자인하여 격자 보에 부착했다.
앞으로 전개될 공간이 구조미와 상징미하고 무관하지 않을 것을 예고하는 도입부다.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 3층에서 이 박물관의 클라이맥스인 두 개의 큐브와 만난다. 하나의 큐브는 천장에 매달린 검은색 큐브(콘솔레이션 홀)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이 박물관의 두 번째 벽돌 성큰 가든(하늘 광장)이다.
검은색 큐브가 놀라운 것은 상당한 길이와 높이와 두께(1.5m)의 벽인데 지면으로부터 2m 떠 있다는 점이다. 기둥을 바닥에 두어 지지하지 않고 천장에 크고 두툼한 벽을 매달았다. 이 벽은 내외 마감이 다르다. 밖은 짙은 메탈 마감인데 안은 극장과 같은 스크린 월 마감이다. 이곳에 순교를 기념하고 영생을 상징하는 음악과 동영상이 흐른다. 천주교인이 아닐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벤치에 앉아 명상에 잠기게 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을 수 있는 것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메탈 벽 아래 가운데에는 일종의 제단이 있다. 순교자들이 자기 스스로를 산 제물로 바친 신유박해와 병인박해를 상징이라도 하듯 제단은 부활의 색인 백색을 하고 있고, 이곳에서 한 줄기 바닥 조명이 쭉 뻗어나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정원인 붉은 성큰 가든으로 나간다.
어두웠던 내부가 밝은 외부로 연결되며 눈이 부시지만 높은 벽도 벽돌, 넓은 바닥도 벽돌인 거대한 벽돌 방과 만난다. 천장이 없는 방이라 푸른 하늘이 천장을 대신한다. 지하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유형의 공간인데 건축가는 이를 스케일과 단일 마감재로 극대화했다. 이곳에는 잡음은 뒤로 빠지고 정말 들어야 하는 한 소리만 침묵 속에서 나오는데, 이는 순교자들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굿 뉴스’, 곧 복음이다.
이곳에는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와 근대화를 앞당긴 44명 순교자들의 조각이 군집을 이루며 서 있다. 바닥과 벽의 붉음은 가을 하늘의 푸름과 대비를 이루며 빛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짙은 음영을 떨구며 군집을 이루는 침목 조각상들을 위로한다. 그것은 순교는 거룩한 것이며 그 죽음은 죽었으되 산 것이라 말한다.
〈36〉일본 호류지 박물관
뉴욕 모마 관장을 매료시킨 도쿄 건축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있는 호류지 박물관. 박물관 앞에는 인피니티 풀이 있다. 넓고 얇은 지붕 처마를 높고 얇은 기둥이 지지한다. 처마 아래에 유리 박스가 있고, 처마 위로 돌 박스가 있다. 그림 이중원 교수
‘건축가의 건축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 건축가가 인정하는 건축가라는 말이다. 다니구치 요시오가 그런 건축가다.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에 가면 그의 걸작이 있다. 국립 도쿄 호류지 보물 박물관(The Gallery of Horyuji Treasures, Tokyo National Museum)이다. 이 박물관을 직접 보고서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모마)은 새로운 모마 박물관을 증축할 건축가로 쟁쟁한 글로벌 스타 아키텍트들을 뒤로하고 그때까지 무명이었던 다니구치를 선택했다.
도쿄 사람들에게 우에노 공원은 뉴욕의 센트럴파크 같은 곳이다. 근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유일한 일본 작품도 이 공원에 있다. 호류지 박물관도 이곳에 있다.
호류지 박물관 앞에는 큰 인피니티 풀이 있다. 수면 위로 사뿐히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다리 끝에는 박물관의 넓고 깊고 얇은 지붕이 맞이한다. 처마 아래에 유리 박스가 있고, 그 뒤로 돌 박스가 처마 위로 솟아 있다. 지붕 처마는 얇고 긴 4개의 기둥이 지지한다.
처마 아래는 처마의 깊이가 깊어서 한낮에도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 덕에 유리 박스 표면은 어두워져 거울처럼 주변의 숲과 구름과 하늘을 반사한다. 또 그 반사상은 인피니티 풀 위에서 다시 반사하며 일렁인다.
자세히 보면 처마와 돌 박스 경계에는 틈을 주어 천창(지붕에 설치한 창)을 달았다. 쨍쨍한 날 오후에는 자연광이 천창을 통과하여 돌 표면을 쓸어내린다. 유리 표면이 하늘하늘 가벼워 보이는 데는 얇아질 대로 얇아진 기둥과 처마도 한몫한다. 원기둥의 직경 대비 높이를 한없이 키워 기둥은 마치 이쑤시개처럼 얇아 보인다. 그래서 과연 이런 기둥이 저런 큰 지붕을 지지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처마도 기둥 못지않다. 처마를 넓고 깊게 뽑기 위해서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처마 껍데기 안의 뼈대가 두꺼워져야 하는데, 이곳의 수치는 한 뼘을 조금 넘는다. 이 한 뼘은 웬만한 선진국 건축기술로도 ‘넘사벽’이다. 일본 건축이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자주 석권하는 비밀이 그 얇은 수치에 숨어 있다.
호류지 박물관의 구조적 경이는 기둥과 처마에서 끝나지 않고 유리 박스로 이어진다. 보통 유리벽을 이 정도 높이로 올리면, 바람과 같은 수평 하중이 수직 하중보다 더 문제다. 이를 알았던 다니구치는 유리를 붙잡는 틀로 알루미늄 대신 철을 썼다.
철은 알루미늄보다 강도가 높아 더 얇게 쓸 수 있고, 장식재가 아닌 구조재로 사용할 수 있다. 건축가는 철을 루버처럼 수직적으로 잘게 썰어 유리도 붙잡고, 바람에도 대항하는 버팀대로 사용했다. 또한 자신의 신출귀몰한 철 놀림 실력을 과시라도 하듯, 1층에서는 철 틀 면적의 4분의 3을 지웠다. 그리하여 허공에 뜬 철 틀처럼 보여 얇은 기둥과 처마와 연합하여 건물의 가벼움을 가속화한다.
다니구치는 젊어서 히로시마에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밀물 시간이 되자 물이 밀려와 건물 기초를 잠수시켰다. 일몰의 빛이 수면을 따라 들어와 신사의 처마 밑면을 일렁이며 밝혔다. 이후 그는 평생 여러 작품에서 이를 재현하려 했고, 호류지 박물관에서 그 꿈을 이뤘다.
저녁이 되면 인공조명이 곳곳에서 켜진다. 천창에 심은 조명은 돌 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고, 유리 철틀에 심은 조명은 유리면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내린다. 건축가가 가장 신경 쓴 조명은 수면 아래 조명이다. 이 조명은 처마 밑면을 향하는데, 조명이 물 아래에 있어 처마 밑면이 일렁인다.
모마의 박물관장 글렌 라우리와 건축부장 테런스 라일리는 바로 이 점에 매료되어 다니구치를 21세기 모마 건축가로 택했다. 올해로 다니구치는 82세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작품이 한국에 하나 건립되면 좋겠다.
〈37〉 백색 도시 워싱턴DC
도시로 구현된 자유와 헌법의 가치
▲왼쪽은 미국 국회와 내셔널몰이다. 워싱턴기념탑은 가운데에 있다. 우측 사선 도로가 국회와 백악관을 잇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다. 오른쪽은 백악관과 워싱턴기념탑이고, 탑 위로 호수와 제퍼슨기념관과 포토맥강이 있다. 그림 이중원 교수
미국 대선으로 그 어느 때보다 세계의 이목이 워싱턴DC로 모였다. 워싱턴DC의 건축적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첫째는 랑팡 플랜, 둘째는 워싱턴 기념탑, 셋째는 맥밀런 플랜이다.
DC의 밑그림은 1791년 프랑스 건축가 피에르 샤를 랑팡이 그렸다. 그의 건축주는 당시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국무장관인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워싱턴은 제국의 수도가 물길을 따라 산업도시로 번영하길 원했고, 이에 반해 제퍼슨은 전원도시로 변화하길 원했다.
랑팡은 워싱턴을 따랐다. 랑팡이 그린 DC 기본 평면 구조는 포토맥 강가에 세운 삼각형이다. 두 꼭짓점에 국회(동쪽)와 백악관(북쪽)을 두었다. 둘을 잇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가 빗변이고, 국회 앞 녹지 광장이 밑변이다. DC는 랑팡 플랜에 따라 70년간 서서히 변모했다. 그러다가 남북전쟁이라는 위기가 왔다.
DC는 전쟁으로 인구가 줄었고, 포토맥강은 오염됐으며 전염병이 창궐했다. 제국의 수도는 허울뿐이었고, DC는 남부 소도시로 전락했다. 전후에도 남과 북의 갈등은 계속되어 수도를 미 대륙의 중부로 옮기자는 천도론이 솔솔 나왔다.
하지만 한 사람의 공으로 천도론은 잠잠해졌다. 그는 미 육사 출신 토머스 케이시였다. 그는 전쟁으로 멈춰 있던 워싱턴 기념탑 공사를 끝내라는 임무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공사 중간에 기념탑이 너무 단순하다는 비판과 제안이 일었다. 저층에 울타리 구조물을 넣자는 주장과 인물 조각상을 군데군데 더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흔들리지 않았다. 끝까지 기념탑의 단순함과 거대함과 웅장함에 집중했다. 기념탑의 무게는 8만 t이었다. 기초 시공은 당대 공법으로는 버거운 일이었다. 1884년 12월 7일 1360kg짜리 피라미드 모양의 머릿돌을 정상에 얹었다.
1885년 조지 워싱턴 생일에 가림막을 벗기자 비판은 사그라들었다. 형태의 단순함은 워싱턴의 극기와 금욕으로 해석되었고, 날카로운 모서리와 백색 얼굴은 빛에 민감히 반응하며 오직 거대한 수정체만이 뿜을 수 있는 추상미를 도시에 선사했다. 이는 국부(國父) 워싱턴의 독립 유지와 헌법수호, 자유보전 정신을 영구히 잊지 말자는 건축 메시지였다.
워싱턴 기념탑 준공에도 DC는 제국의 수도로서 미완이었다. 새 천년을 맞이하며 제임스 맥밀런 상원의원은 새로운 팀을 모았다.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대니얼 버넘, 찰스 매킴, 프레더릭 옴스테드 2세, 오거스터스 세인트고든스가 팀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파리의 루브르궁과 개선문 축이 만드는 도시의 권위와 위용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유럽에서 돌아온 맥밀런 팀은 루브르궁 대신에 국회를, 개선문 대신에 링컨 기념관을 잡았고, 그 사이에 기존 랑팡의 잔디 광장을 ‘내셔널 몰’로 늘려 도심 축을 제안했다.
맥밀런 플랜은 랑팡 플랜의 국회, 백악관, 워싱턴 기념탑을 잇는 삼각형 구조를 마름모 구조로 바꾸고, 남은 두 꼭짓점에 링컨 기념관과 제퍼슨 기념관을 제안했다. 이로써 불멸의 랜드마크 5인방이 완성됐다. 맥밀런 팀의 목적의식은 랑팡 플랜을 더욱 완성도 높은 보자르양식(고전주의)의 수도로 격상시키자는 것이었다.
랑팡 플랜과 워싱턴 기념탑과 맥밀런 플랜이 DC에 남긴 건축적 유산은 작지 않다. 건물들은 백색이고, 광장들은 녹색이며, 길들은 사선으로 뻗는다. DC는 순수하고 거대하다. 위엄과 위용이 흐른다. 두 달 뒤면 DC는 새 주인을 맞이한다. DC는 여름보다는 봄가을에 찬란하다.
<38> 간사이공항
바람 타고 나는 양탄자 같은 공항
▲왼쪽은 간사이 공항 조감도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부분이 공항 몸통이고, 이곳에서 얇게 양 날개가 뻗는다. 오른쪽은 공항 측면 지붕이다. ‘V’자 기둥과 보 가새들을 유심히 보면 중앙에서 부풀고 끝에서 모아진다. 그림 이중원 교수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이 발의됐다. 가덕도에 신공항이 생긴다면 그 공항은 여러모로 일본 간사이공항을 연상시킬 것이다. 수도권 공항에 버금가는 공항이라는 점이나 강가 아닌 바닷가에 위치한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 열도는 중앙에 있는 대형 호수(비와 호수·Lake Biwa)를 두고 동서가 간토(關東)와 간사이(關西)로 나뉜다. 간토의 대장 격은 도쿄와 요코하마이고, 간사이의 대장 격은 오사카와 고베다. 간사이는 수도권 간토에 필적할 국제공항이 필요했다.
간사이공항은 30년 전에 10조 원(약 1조 엔)을 들여 지었다. 육지에서 5km 떨어진 바다 위에 인공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었다. 1988년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가 선임됐다. 공항 형태는 중앙은 두툼하고 양 끝은 길고 얇다. 공항 지붕은 전진하는 파도 같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새 같기도 하고, 배에서 이륙하려는 비행기 같기도 하다.
디자인 초기에 피아노는 현장을 방문해 영감을 받으려 했다. 건축 용지가 들려주는 속삭임을 듣고자 오사카를 찾았으나 담당자는 피아노를 보트에 태워 바다로 나갔다. 피아노가 “대지는 어디 있죠?”라고 물으니, 담당자는 바다 한가운데 보트를 세우고, 물을 가리키며 “여기입니다”라고 했다. 건축가는 어안이 벙벙했다.
간사이공항은 외해(外海)가 아닌 내해(內海) 한가운데에 인공 콘크리트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세운 공항이다. 파도와 지진과 태풍과 해일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공사다. 얕은 바다 지반은 개흙과 같은 연약한 진흙 지반이라, 공항과 같은 대형 구조물 바닥으로는 무리다. 모래로 진흙을 바꿨는데 그 양은 무려 4억 m³로 파나마 운하의 두 배였다. 간사이공항 수혜를 볼 도시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산을 깎아 모래를 보급했다. 공항은 1994년 1차 준공했다. 공항은 1995년 고베 지진과 1998년 태풍에 끄떡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호물자 보급 플랫폼으로 사용됐다.
간사이공항의 핵심 관전 포인트는 1.7km 길이를 덮는 지붕 구조다. 지붕은 파도치는 아치 모양이지만, 날개 끝으로 갈수록 천장고가 낮아져 엄밀히 말하면, 앞뒤로도 휘고 양옆으로도 휘는 이중 곡면이다.
기둥과 보는 공룡 뼈대처럼 희고 얇게 디자인했고, 이를 감싸며 덮는 은색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을 사용했다. 지붕 아래의 유리벽은 처마 끝에 깊이 집어넣어 그림자가 지도록 했다. 표면을 짙게 처리하여 음영을 극대화했다. 그 덕에 세상에서 가장 긴 이 건물은 땅에 뿌리 내린 무거운 요새처럼 보이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나는 양탄자처럼 보인다.
건축가 피아노가 온 신경을 쏟은 것은 구조 부재들이 서로 만날 때다. 간사이공항의 구조 부재들은 우리나라 윷처럼 중앙에서 부풀고, 양 끝으로 갈수록 모아진다. 간사이공항의 남다른 탱탱함과 팽팽함은 거기서 비롯한다. 우리가 잊은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고식(古式) 지혜를 노장 건축가는 꿋꿋이 이어왔다.
공항은 한 나라의 대문으로 그것이 손님에게 남기는 첫인상은 강렬하고 오래간다. 간사이공항은 이 점에서 성공했다. 바다 위에 세운 공항은 지진과 태풍과 파도를 이기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 주고, 공항의 지붕은 작은 디테일에서부터 오롯이 빛나는 장인정신을 깨운다. 오사카 간사이공항은 도쿄 나리타공항을 디자인으로 능가한다.
앞으로 우리가 신공항을 짓는다면 간사이공항에서 세 가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간사이공항의 공사비 10조 원은 30년 전 예산이다. 둘째, 간사이공항은 외해가 아니라 내해에 지었고, 자연 섬이 아니라 인공 섬에 지었다. 셋째, 공항 건축은 국가의 대문이다. 따라서 거대한 이미지만큼 섬세한 디테일이 중요하다. 지을 거라면 제대로 지어 간사이공항을 능가하는 신화를 쓰자.
2020-12-24
〈39〉 美 보스턴 가드너 박물관
한겨울 보스턴서 만난 베네치아의 봄
▲베네치아 양식의 가드너 박물관은 편안한 단독주택처럼 지어졌다. 중앙 마당 정원이 박물관의 백미다. 이곳 식물은 박물관에서 30분 떨어진 별도 온실에서 가져온다. 매년 8차례 순회 계절 전시를 한다. 그림 이중원 교수
본격적인 겨울이다. 코로나19로 물리적인 추위에 심리적인 추위가 더해졌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주변은 그렇지 않다. 이런 시간에 생각해야 할 건축은 무엇일까? 겨울이지만, 봄을 연상하게 하는 건축은 무엇일까? 1903년에 완공한 미국 보스턴 이저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이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람은 계절마다 가고 싶은 곳이 다르다. 봄에 가고 싶은 곳이 있고, 여름에 가고 싶은 곳이 있고, 가을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겨울에는 추위 때문인지 야외보다 건물 실내가 좋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나들이를 못 할 때일수록 꽃이 가득한 온실과 같은 건축이 그립다.
미국 보스턴은 겨울이 길다. 심할 때는 4월에도 90cm의 폭설이 내린다. 첫눈은 낭만으로 시작하지만, 4월의 눈은 지긋지긋하다. 이런 도시에서 잠시 겨울을 잊게 해 주는 건축, 사람을 잠시 봄으로 초대하는 듯한 건축은 각별하다. 몸을 데우고, 마음을 터치한다. 보스턴 가드너 박물관이 그렇다. 건축주의 각별한 사연이 이런 건물을 탄생시켰다.
이저벨라는 어려서 지적이고 아름답고 왈츠를 즐겼다. 그녀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자기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뉴요커였던 그녀는 보스턴 사람 존 가드너와 결혼했다. 보스턴 상류층 여인들은 뉴요커 여자에게 보스턴 훈남을 빼앗겼다고 뒷말이 무성했다.
신혼은 아름다웠지만,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아들은 두 살 때 죽었다. 이저벨라는 비통함으로 앓아누웠다. 병은 곧 우울증으로 발전했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만난 예술과 건축 덕분에 6개월간 서서히 그녀는 회복했다. 특히 르네상스 미술과 베네치아 건축이 치료제였다. 귀국 후 그녀는 적극적인 예술 전도사로 전향했다.
시련은 다시 찾아왔다. 6년 사이에 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픔에 빠지지 않았고, 아버지와 남편이 남긴 모든 유산을 예술에 쏟기로 결심했고,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다. 이저벨라는 베네치아에 가서 최고의 석공을 영입해 왔을 뿐만 아니라, 건물에 들어가야 할 돌 자재와 유적에서 나온 조각 돌기둥 등을 직접 골라 사왔다. 그러고는 정성스럽게 내정을 가꾸었다.
오늘날 가드너 박물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겨울에도 봄과 만난다. 그것도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베네치아의 봄이다. 베네치아 특유의 세 잎 클로버 아치 창틀 아래로 돌계단이 있고, 계단 아래에는 정원이 펼쳐진다. 신선한 꽃들이 잔디와 나무 잎사귀 사이에서 꽃봉오리를 맺는다. 신선한 꽃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천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핑크색 돌 벽면을 쓸고 내려오고 중정에서 퍼지는 물소리는 중정 아치 회랑 너머로 퍼진다.
마당 중앙의 백색 모자이크 돌바닥 앞에 있는 기둥은 오이지처럼 생긴 기둥과 스크류바처럼 생긴 기둥이고, 마당 회랑의 아치들을 지지하는 기둥들도 생김새가 가지각색이다. 기둥 돌 표면에서 물기가 돈다. 정원에서 퍼지는 물소리와 기둥의 반들반들함이 겨울의 단단함을 녹이고, 마음의 각질을 벗긴다.
천창에서 쏟아지는 빛 입자는 꽃잎에 맺힌 물방울과 돌기둥에 맺힌 물방울에서 반짝인다. 이를 바라보는 이의 건조한 눈도 더불어 촉촉해진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과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이저벨라의 눈물이 시공을 초월해 맞이하는 치유의 촉촉함이다. 그래서 이곳은 물리적인 겨울과 심리적인 겨울이 멈추는 봄의 장소가 되었다.
건축적으로 가드너 박물관은 도심 속에서도 숲이 건축이 될 수 있고, 건축이 숲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또한 보스턴에서 베네치아를 만나게 하고, 현대의 시간 속에서 근대에 지은 중세의 시간을 목도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에 봄을 만나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 도시에 수많은 가드너 박물관들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2021-01-13
〈40〉美 의회의 건축적 가치
전통으로 우뚝 선 민의의 전당
▲캐피톨 돔의 입면도(왼쪽)와 단면도. 삼각형 신전 입면 위로 삼층구조의 돔이 솟는다. 돔의 구조는 주철 뼈대이다. 내부 돔 정상은 뚫려 있고 그 위로 반구형 프레스코화가 있다. 내부 돔과 외부 돔의 높이가 다른데 이는 각각 내부 공간감과 외부 도시적 위용을 반영한다. 그림 이중원 교수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 미 의원들은 불타는 숭례문을 바라보던 우리들처럼 충격으로 분개했다. 미 의회 건물인 ‘캐피톨(Capitol)’은 미국인들에게 어떤 건축물일까?
캐피톨은 워싱턴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일 뿐만 아니라 백악관과 더불어 초창기 연방정부 건축물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캐피톨은 미국 독립과 함께 태어났고, 미국 성장과 더불어 자랐다.
캐피톨은 지난 230년간 여러 일급 건축가들의 손을 거쳤다. 첫 번째 건물인 ‘노스 윙’(중앙 돔을 기준으로 북쪽 동)은 1793년 건축가 윌리엄 소턴이, ‘사우스 윙’은 1811년 건축가 벤저민 래트로브가 설계했다. 그러다가 1812년 미영 전쟁이 터졌다.
1814년 영국군은 캐피톨에 불을 질렀다. 다행히 기적처럼 내린 비로 건물이 전소하지 않았다. 미영 전쟁은 민족주의에 기름을 부었고, 먼로 선언이 나오게 했으며, 미국 체제를 출범시켰다. 민족주의 시대인 1815년에 건축가인 찰스 불핀치가 세 번째 건축가로 선임됐다. 불핀치는 중앙에 대법원, 북쪽에 상원, 남쪽에 하원, 또 대법원 위로 오래 기다렸던 돔을 완공했다. 하지만 불핀치의 캐피톨은 오래가지 못했다.
1850년 미국의 지속적인 영토 확장으로 캐피톨은 더 이상 늘어난 상·하원 의원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임된 건축가가 캐피톨의 네 번째 건축가이자 가장 중요한 건축가로 남은 토머스 월터다.
그는 북쪽 상원과 남쪽 하원을 더 길게 확장했다. 건물이 남북 방향 230m로 길어지자 불핀치의 돔은 늘어난 건물 길이에 견주어 볼 때 낮아 보였다. 월터는 자신의 방에 대형 돔을 완성한 모습의 그림을 벽에 걸어 놓았다. 이를 본 의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월터의 돔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오늘날 캐피톨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대형 돔이다. 월터는 돔을 수직으로 높이 세워야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돔의 높이를 극대화했다. 월터의 돔은 88m로 불핀치의 돔보다 3배 높았다. 월터는 산업혁명 시기에 짓는 돔인 만큼 돔의 뼈대로 콘크리트(로마 시대의 판테온 돔)나 벽돌(르네상스 시대의 브루넬레스키 돔) 대신 철을 사용했다.
월터의 돔은 외부 돔과 내부 돔이 있는 2중 돔 구조다. 외부 돔은 내셔널 몰에서 의회의 위용을 드러내고, 내부 돔은 중앙 홀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의회 내부의 원형 공간을 연출한다. 내부 돔의 정상은 뚫려 있다. 그 위로 반구형 프레스코화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그림 중앙에 신격화된 조지 워싱턴(그림명 Apotheosis of Washington)이 있고, 그 옆으로 13개 주를 상징하는 여인 13명이 있다. 돔 하단에는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돔처럼 아치로 만든 창들이 있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줄기가 돔의 무게감을 하늘하늘하게 만들어 준다. 남북전쟁 중에도 이 공사를 멈추지 않았다. 링컨은 분열보다 통합을 강조하는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불굴의 의지로 캐피톨을 완공했다.
그 후 뉴욕 센트럴파크를 완공한 조경가 프레더릭 옴스테드가 캐피톨의 서측 테라스 야외 계단 조경을 완성했다. 4년마다 치러지는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면 새로운 대통령 당선인은 이곳에서 취임 선서를 한다. 캐피톨은 쉽게 지어지지 않았고, 쉽게 지울 수 없다. 캐피톨은 미국의 전통으로 우뚝 서 있고, 또한 이곳에서 국민의 뜻을 받들어 만드는 법은 미국의 미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