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020/ [81] 주적을 주군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 [100] 거짓말은 모든 죄악의 근본

상림은내고향 2021. 2. 26. 17:27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소설가 조선일보 2020/ 

10.14

[81] 주적을 주군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누구 하나 그녀를 쳐다보거나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희생시키고 나서 더럽고 쓸모없는 물건처럼 내던진 무리들이 그녀를 멸시하고 있었다. 굶주린 이리 떼같이 그들이 먹어 치운 음식이 가득 담겨 있던 커다란 바구니가 떠올랐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애썼으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란을 다 먹은 민주주의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기 드 모파상 ‘비곗덩어리’ 중에서

 

지난 10월 10일, 북한이 노동당 창당 기념식을 했다며 뉴스마다 요란하다. 불과 며칠 전 우리 국민을 사살·소각한 김정은이 ‘사랑하는 남녘 동포’라고 했단다. 그게 감동이었을까,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없어 아쉬웠던 탓일까? 몇몇 방송사는 김일성 광장에서 야밤에 벌어진 괴이한 행사를 중계했다. 적에게 자국민이 총살당했는데도 종전 선언을 하자는 권력자 치하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1880년에 발표한 소설 ‘비곗덩어리’는 공짜로 누린 행운일수록 그 쓸모가 다했을 때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인간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 지역을 벗어나려고 마차에 탄 승객들은 엘리자베스가 비곗덩어리 소리를 듣는 매춘부임을 알고 껄끄러워하지만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싫다는 그녀를 적군 장교의 침실에 들여보낸다. 그 대가로 자유를 보장받게 되자 고마워하기는커녕 불결하다는 듯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음식조차 나눠 주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를 원한 건 장교가 귀부인들을 존중하는 신사이기 때문이라며, 자기들을 인질 삼은 적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들이었다. 민주주의 투사라는 사내야말로 휘파람을 불며 그녀의 희생과 눈물을 한껏 비웃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주적을 주군 모시듯 한다. 품 팔고 머리카락 팔아서, 사막과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피와 땀으로 지켜낸 풍요와 자유를 누린 자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인질들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 북한을 흠모한다. 헬조선이라는 조롱과 함께 내팽개쳐진 대한민국, 승객들을 살렸지만 경멸당한 엘리자베스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

 

[82] 권력을 얻으면 양심은 사라지는가?

- 데이비드슨은 위세 좋게 일어서서 말했다. “총독이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건 한심한 일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죄악은 죄악이 아닌 것처럼 그가 말했지만, 저런 여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미 치욕이며 다른 섬으로 넘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워싱턴에 영향력이 있으니 만일 일 처리에 불만이 남는다면 그에게 이로울 게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 서머싯 몸 ‘비’ 중에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권력과 비리가 무관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부동산 투기, 사모 펀드 비리, 권력 남용 등 정치인과 연결된 의혹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건 놀랍다. 국민은 이제 진실이 드러나고 범법자들이 처벌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최고 권력자와 그가 비호하는 전·현직 법무부 장관, 고위 관료들의 태산 같던 혐의가 묻혀버리는 걸 반복해서 보아온 탓이다

 

‘인간의 굴레’를 쓴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이 192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비’는 타인에게는 도덕적 잣대를 엄격히 들이대지만 자기 욕망을 제어하는 데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본질을 통렬히 보여준다. 장마 때문에 섬에서 발이 묶인 선교사 데이비드슨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새디가 문란하게 산다며 당국에 고발한다. 그를 원망하던 새디는 감금이 결정되자 겁을 먹고 영혼을 구원해달라며 매달린다. 매일 밤 그녀 방을 찾아가 함께 기도하던 데이비드슨은 어느 날 아침,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다. 모든 정황은 세상을 향한 새디의 절규에 담겨 있다. “사내들은 다 똑같아. 추악하고 더러운 돼지 새끼들!”

 

윤리적 우월함을 장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작은 죄는 부풀리고 없던 죄도 만들어 남을 단죄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속은 더 추한 법이다. 그래도 데이비드슨은 욕망을 이기지 못한 자신을 환멸해서 스스로 벌할 만큼의 양심은 남아있었다. 궁금하다. 인간은 힘을 갖게 되면 수치심을 잃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자기 성찰이 없는 자들이 권력에 취해 휘청거리다가 끝내 자멸하게 되는 것일까?

 

[83] 단 한 사람의 죽음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이유

“내가 죽음을 앞둔 아내에게 의지가 된 것처럼 그녀의 상냥함과 용기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도왔다. 아내는 우리의 지난날은 경이로웠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그 무엇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퇴색시킬 수 없으며 같이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의 유대를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강화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마르크 베르나르 ‘연인의 죽음’ 중에서

 

국민들이 자꾸 죽어간다. 북한군 총에 맞아 죽고 중국발 바이러스로 죽고 이젠 독감 예방주사를 맞고도 죽는다. 백신 접종 후 사망자 수가 단기간에 급속히 늘었는데도 질병관리청장은 별일 아니라며 접종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노년층 사망이 많은 데 대해 보건복지부 장관도 70세 이상 노인은 하루 평균 500명 이상 죽는다며 무슨 대수냐는 식의 발언을 했다.

 

프랑스 작가 마르크 베르나르가 197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연인의 죽음’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의 마지막을 지키는 남편의 이야기다. 그는 수명이 두세 달밖에 남지 않은 늙고 병든 아내를 포기하지 않는다. 수십 년을 해로했지만 그들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아내는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2년을 더 살다 떠난다. 남편은 그제야 아무런 회한 없이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인다.

 

삶에서 가장 깊이, 크게 깨우치는 순간은 죽음을 앞두었을 때일지 모른다.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느끼고 일생을 정리하고 가족과 마지막 인사도 나눠야 한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죽음이란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고 슬픔이며 존중받아야 하는 삶의 마지막 과정이다.

 

누구도 영문 모르고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 죽음을 강요해서도, 방치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국가가 있고 경찰이 있고 부검도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인생과 생명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늙었든 젊었든, 잘났든 못났든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아들이고 딸이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는 부서와 수장이라면, 누구의 죽음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84] 집에 대한 그 오만한 편견

- 베넷 부인은 몹시 비참했다. 그녀는 샬럿을 보는 것도 싫었다. 저 애가 이 집의 상속자라니, 하며 질투 어린 증오심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샬럿이 찾아오면 이 집을 차지할 날을 고대하고 있는 거라 단정했다. 콜린스씨에게 속삭이기라도 하면 롱본의 저택과 토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베넷씨가 죽으면 자기와 딸들을 집에서 쫓아낼 거라고 믿었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중에서

 

 

새가 둥지를 짓듯 사람도 집을 갖고 싶어 한다. 안락한 나만의 장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족의 공간을 원한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쾌적하고 더 안전하게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다. 애써 일하고 살뜰히 돈을 모으는 이유, 집을 갖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1813년에 발표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아름답고 당당한 성격의 엘리자베스, 그리고 부와 교양을 갖춘 다시(Darcy)의 사랑 이야기지만 그들의 주변 인물들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콜린스 목사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샬럿과 냉큼 결혼한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받아들인 친구를 엘리자베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예쁘지도 않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는 샬럿에겐 계산이 있었다. 딸은 유산을 상속할 수 없다는 당시 법에 따라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죽으면 친척인 콜린스가 후계자가 된다. 그와 결혼하면 많든 적든 베넷가의 집과 재산이 그녀 소유가 된다는 의미다. 베넷 부인은 그런 샬럿이 얄밉기만 하다.

 

샬럿이 속물로 보인다면 그 또한 오만한 편견일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집을 갖기 위해 청춘과 사랑과 인생을 희생한다. 크든 작든, 가격이 얼마든 저마다 능력껏 꿈이 실현되도록 제도적으로 돕는 것이 정상적 국가다.

 

정부가 곧 24번째 부동산 대책을 내놓는단다. 집권 후 정책 스물세 번이 실패했다는 뜻이다. 이젠 집을 사고팔기 어렵다. 전세 찾기도 힘들다. 행복 추구권, 사유 재산권, 거주 이전의 자유가 사라져간다. 날개 돋친 듯 세금만 오른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매번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건 세금 걷느라 눈이 벌건 정부인걸

 

[85] 진실을 향한 열정, 거짓을 이기는 가장 큰 힘

“나는 근본적인 것, 진실을 알아야겠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사십일 년이란 세월을 견디었겠나? 나는 믿을 수 없는 형제, 도망간 친구였던 자네를 기다린 게 아닐세. 희생자인 내가 재판관이 되어 피고가 된 자네를 기다린 거라네. 마침내 내 앞에 자네가 앉아 있는 지금, 나는 묻고 피고는 대답해야 하네.” - 샨도르 마라이 ‘열정’ 중에서.

 

샨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에서 헨릭은 4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친구와 마주 앉는다. 사냥이 있던 오래전 그날, 형제처럼 믿었던 친구는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가 겁먹은 생쥐처럼 달아나버렸고 아내는 입을 꼭 다문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친구와 아내는 그를 배신한 것일까? 의심과 복수의 불길에 휩싸여 젊음을 보내야 했던 헨릭은 여든 살을 앞두고서야 친구에게 묻는다. “자네가 날 죽이려 했던 걸 내 아내가 알고 있었나?”

 

진실, 그 자체는 아무 힘도 없는 것 같지만 아내는 진실을 말할 수 없어 속병 들어 죽었고 헨릭은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의 고독을 홀로 견뎠다. 비겁하게 떠났던 친구가 노년에 돌아와 헨릭과 마주 앉은 것도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진실을 발설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2년에 발표한 ‘열정’은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작가가 헝가리를 떠나 세계를 떠돌게 되면서 출간이 금지되었다가 소련이 해체된 후 세상에 알려진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기보다는 고통을 안고 죽을지언정 진실을 직시하겠다는 인간의 결연한 선언이 담겨 있다.

 

옵티머스·라임 펀드 사태, 원전 조기 폐쇄 과정, 법무부 장관의 검찰 특수 활동비 남용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과 백신 접종 사망자 논란 등, 그 속에 감춰진 거짓과 진실은 무엇일까? 어느 나라, 어느 정당,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든 다르지 않다. 정직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어떤 거짓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똑바른 재판관의 마음으로, 진실을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열정이야말로 거짓된 세상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힘이다.

 

[86] 부당한 세상을 바꾸는 건 자유로운 개인뿐

 

“네 방탕도 이쯤에서 끝내. 더는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세상의 실체는 어디에 있나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카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너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중에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1948년에 발표한 소설 ‘인간 실격’은 소심하고 예민한 청년 요조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내향적인 성격을 감추려고 광대 짓을 하거나 술과 여자에 빠져 동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는 친구를 화나게 하는 것도 싫어서 진땀이 나도록 속으로만 대꾸할 뿐, 생각을 말하지 못한다. 그는 끝내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물거품처럼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미국, 독일, 소련, 프랑스 등 여러 나라 작가들을 이야기할 때와 달리 일본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일본에 절대 지지 않겠다며 토착 왜구, 친일 적폐로 낙인찍어온 정책 탓에 반일 감정에 짓눌린 사회 분위기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내년에 있을 도쿄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며 북한의 김정은을 동반하려고 궁리 중이란다. 제2의 평창올림픽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세계인들 앞에서 남북이 포옹하는 꿈이라도 꾸는 것 같다. 남의 나라 잔치에 숟가락을 얹겠다는 욕심을 넘어 주인 행세를 할 모양이다. 그동안 외쳐온 사과하라, 배상하라, 죽창을 들자는 구호와 염치는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궁금하다.

 

최근 일본 패션 브랜드 매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고객들은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렸고 어떤 제품들은 금세 완판되었다. 값싸고 좋은 제품을 사려는 소비자 개인의 욕구가 강요된 반일감정을 앞지른 현상이다. 도둑질과 살인이 아닌 이상 자기 뜻을 포기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은 요조처럼 인간 자격을 스스로 상실하는 일이다. 부당한 전체를 이길 수 있는 건 누구나 자유로워야 한다는 걸 깨닫고 행동하는 개인뿐이다.

 

[87] 법의 횡포는 어떻게 개인을 파괴하는가?

 

“법원의 배후에 거대 조직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조직은 뇌물을 밝히는 감시인과 생각이 모자라는 감독관, 그리고 수준 낮은 판사들을 먹여 살리며 수많은 서기와 경찰관 등 보조 인력을 거느립니다. 그들은 죄 없는 이들을 체포하고, 아무 성과도 없는 소송을 벌이지요. 이렇게 무의미한 일만 하니 조직이 부패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 프란츠 카프카 ‘소송’ 중에서.

 

인권 변호사 출신의 최고 권력자와 사회주의자 전 법무부 장관을 포함, 요즘 세상을 가장 시끄럽게 하는 자들은 법을 전공한 고위 관료와 정치인이다. 검찰 개혁을 하겠다는 법무부 수장과 그를 거부하겠다는 검찰청 우두머리 간 난투극이 한창이다. 면담하자, 거부한다, 감찰하겠다, 불법이다, 특활비를 썼느냐, 금일봉을 돌렸느냐, 날마다 뉴스 머리를 장식하며 편을 갈라 싸운다. 화환을 받았느니, 꽃바구니를 받았느니 뽐내며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탁구 시합을 관전하듯 국민이 왼쪽, 오른쪽으로 나뉘어 응원도 하고 야유도 하지만 모두가 한 뿌리, 한 가지에서 갈라져 나온 같은 이름의 나뭇잎.

 

1925년에 출간된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은 법의 횡포가 한 개인을 얼마나 쉽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평범한 시민 요제프 K는 이유도 모르는 채 기소당한다. 그 후 법의 이름으로 감시당하고 사유재산을 강탈당하며 자유를 빼앗긴다. 공정한 재판이 무죄를 입증해 줄 거라 믿었던 K는 끝내 법의 하수인들에게 살해당한다. 그것이 법의 최종 판결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K가 깨달은 것은 세상이 법원에 속해 있으며 거짓이 세계 질서가 되어버렸다는 것. “개 같군!” 죽어가던 K가 치욕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꽹과리처럼 요란한 활극이 저 위에서 벌어지는 사이 권력 무죄, 평범 유죄, 친북 무죄, 친한국 유죄, 친정권 무죄, 반정권 유죄의 판결이, 악질 범죄는 선처하고 경범죄는 강력 처벌하는 관례가 국민 통제 수단이 되고 있다. 법이 제 손안에 있다고 믿는 조직들이 원수처럼 싸운다고 부패가 사라지고 개혁이 이루어질까, 묻고 싶다.

 

[88] 국민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개를 팔 때도 새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 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 집을! 태곳적부터 하겐슈트림가는 우리의 적수야. 그 늙은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속였어. 운명의 장난이라고? 그건 부덴브루크가는 끝났다, 결국 망해서 물러난다, 그 자리에 하겐슈트림가가 시끌벅적하게 들어선다는 의미야. 안 돼, 토마스. 난 그를 결코 이 집에 들여놓지 않을 테야.” -토마스 만 ‘부덴브루크가의 사람들’ 중에서.

 

건강보험료가 또 올랐다. 집권 후 납부 대상이 아니던 사람들을 지역 가입자로 전환한 것도 모자라 몇 차례나 금액을 인상하더니 11월분부터 많은 가구에게 기존 납부액의 두세 배를 더 내라 한다. 국민은 금과 은을 쏟아내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발로 걷어차면 동전을 토해내는 고장 난 자판기도 아니다. 공시지가만 올랐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손과 발이 다 묶였는데 어디서 돈을 만들어 내라는 것인가?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외국인에게 지출된 건강보험 급여액은 3조4000억원, 그중 중국인에게 지급된 금액만 2조4000억원이다. 현 정권 들어 평균 지급액이 두 배 이상 늘었다니 이번에 증액될 600억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다. 중국인의 건강을 위해 대한민국 국민의 허리가 부러질 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토마스 만이 1901년에 발표한 소설 ‘부덴브루크가의 사람들’은 4대에 걸친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곡물상을 크게 일으키고 발전시킨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를 지나 창업 100주년을 맞은 부덴브루크 집안은 멸문의 길로 들어선다. 장녀 토니는 대대로 살아온 저택을 적수라 여겼던 자에게 넘겨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지만 돌이킬 방법은 없다. 장남 토마스 혼자 애를 썼으나 가족들은 돈을 쓸 줄만 알 뿐, 가업을 이을 후계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가정이든 국가든 남 퍼주기만 좋아하면 넉넉했던 살림살이도 거덜 나기 마련이다. 개를 팔 때도 새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는 법인데 우리는 대체 이 나라를 누구에게 넘긴 것인가? 그들은 국민을, 국민의 피와 땀을 누구에게 팔아넘기고 있는 것인가?

 

[89] 어두운 상점들 거리를 지나면 빛이 보일까

“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황량했고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올 때보다 더 어두웠다. 경찰관은 여전히 맞은편 인도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경찰관이 순찰을 돌고 있는, 인적 없는 광장이 보였다. 건물의 모든 창이 천천히 내리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검은 창문들은 여기에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해주었다.”―파트리크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중에서

 

오래전 등화관제를 시행했다. 북한 도발 시 적기가 불빛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커튼을 치고 불을 끄고 암흑과 정적을 견디는, 야간 공습을 대비한 훈련이었다. 통행금지도 있었다. 사람들은 신데렐라처럼 괘종시계가 열두 번을 치기 전에 집에 들어가느라 뛰었다. 시간을 넘기면 파출소에서 하룻밤을 신세 져야 했다.

 

그때보다 더한 시대가 왔다. “서울을 멈추겠다. 도시의 불을 끄겠다”고 서울시가 선포했다.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저녁 9시부터 모든 경제 활동을 금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통제한다. 2주 예정이라지만 빌딩과 상가의 공실률은 더 높아지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폐업은 늘어날 것이다. 감염 가능성보다 겁나는 건 생계의 막막함인 것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201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가 197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과거를 추적하던 중 한때 살았던 아파트를 찾아가 캄캄한 거리를 내려다본다. 희미한 과거와 표류하는 현재, 불투명한 미래가 보일 뿐, 불빛 하나 없는 거리에서 그는 섬뜩함마저 느낀다.

 

9시 통금의 목적은 방역인가, 절전인가? 중산층 몰락과 경제 붕괴는 아닌가? 유리한 과거는 미화하고 불리한 역사는 지우려는 권력자, 결핵보다 치사율이 낮은 바이러스가 전쟁과 빈곤보다 무섭다는 정치인,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서 꼼짝 말라며 두려움을 과장하는 그들이 바라는 미래는 어떤 세계일까? 불 꺼진 도시, 인적 없는 텅 빈 상가, 검문하는 경찰들만 서성이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지나면 눈부신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의심과 불안이 깊어지는 시절이다.

 

[90] 영도자님 새집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과테말라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 언론인, 외교관인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로살레스가 쓴 '대통령 각하 (El Señor Presidente)' 표지

“우리가 지금 모시고 있는 분은 가장 유능한 정치가이며 가장 위대하고 슬기로운 자유주의자, 사상가, 그리고 민주주의의 신봉자이십니다. 영도자로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것은 국가의 운명을 위기에 몰아넣는 일입니다. 만약 감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위험천만한 정신병자로 취급받아야 할 것이며 법이 정한 대로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심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대통령 각하’ 중에서

 

부동산을 잡겠다고 큰소리쳤던 정권이 치솟는 집값은 나 몰라라,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공공주택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퇴임 후 살 곳이라며 1000평 가까운 땅을 매입한 사람이 못 하나 마음대로 박을 수 없는 전용면적 13평 임대 아파트가 아늑하다, 아이들 키우며 사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흡족해했다. 수행한 국토부 장관은 중산층까지 임대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196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과테말라의 작가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소설 ‘대통령 각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와 그의 비위를 맞추며 부와 권력을 누리는 고위 관리들, 그 밑에서 신음하다 죽어가는 국민의 처참한 실태를 그린다. 권력자를 찬양하는 공지문이 발표되면 대중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정신병자나 반역자로 몰려 죽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시민들은 희생되고 최측근이던 주인공도 권력자의 눈 밖에 나자 비참하게 버려지고 참혹하게 죽어간다. 지난가을, 북한의 김정은이 수해 지역에 새로 지은 주택단지를 돌아보며 대만족했다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검게 그을리고 비쩍 마른 주민들은 한복까지 입고 나와 마을 잔치를 벌였고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님, 새집을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내 집 마련의 꿈을 비웃듯 임대주택을 권하며 흐뭇해하는 정책 수장들의 모습은 ‘사회주의 마을에 인민의 기쁨과 행복의 웃음이 끝없이 넘쳐난다’던 북한 방송과 묘하게 겹친다. 평생 월세를 내야 하는데도 ‘이렇게 좋은 집을 임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울먹이는 입주자의 연출된 찬양을 뉴스에서 곧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쓸데없이 걱정만 앞선다.

 

[91] 정권의 자유는 무제한, 당신의 자유는 불필요

▲바를람 샬라모프의 소설 '콜리마 이야기' 표지. 작가는 구소련 시기 반스탈린 운동 혐의로 구속, 시베리아의 콜리마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매일 16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하며 17년을 견뎠지만, 이 소설을 완성한 뒤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모든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결정되었다. 더는 삶의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고, 빵 조각을 위해 싸울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깊은 안도감마저 느꼈다. 이제 그들은 타인의 뜻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천천히 그들을 수용소로 데리고 가는 이 철로에서 방향을 바꿔 다른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기차는 겨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를람 샬라모프 ‘콜리마 이야기’ 중에서.

 

대북 전단 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유엔은 과도한 제약이라고 비판했지만 통일부는 민의에 따른 민주적 개정이라며 재고 요청에 불만을 표했다. 외교부 장관도 미국의 한 방송에 출연해 “자유는 제한될 수 있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며 금지법안을 옹호했다.

 

1978년에 출간된 ‘콜리마 이야기’는 구(舊)소련 당시 반스탈린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구속, 시베리아의 콜리마 강제 노동수용소에 억류되었던 작가가 석방 후 힘겹게 완성한 소설이다. 그는 숨 쉴 자유조차 없는 극한의 수용소에서 멀건 죽과 딱딱한 빵 조각으로 연명하며 매일 16시간의 노동으로 혹사당하면서도 17년을 견뎠다. 하지만 뼈만 남아 있던 그의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때의 끔찍했던 경험과 기억은 마음도 무너뜨렸다. 끝내 정신병원에 수용된 그는 쓸쓸히 생을 마쳤다.

 

장관의 말대로 자유는 생존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유가 제한된 곳에서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 굶주림과 채찍의 공포에 질린 인간은 차라리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노예의 삶에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 없는 인간은 우리에 갇힌 짐승과 같다. 자유가 제한된 사회일수록 권력의 중심에서는 자유의 독점 현상이 나타난다. 내 입은 와인 파티, 네 입은 마스크, 내 집은 수백 평, 네 집은 13평, 나는 다 소유, 너는 무소유.

 

자유를 탄압하는 독재라고 데모하던 사람들, 사람이 먼저라며 부르짖던 인권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촛불 집회 당시 무한한 표현의 자유로 집권 기회를 마련한 정권이 내 자유는 무제한, 너의 자유는 불필요라는 취지의 발언과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이것이 독재가 아닌가, 국민은 혼란스럽다.

 

[92] 절망이 무르익어야 희망은 현실이 된다

▲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 ‘별’(Les étoiles)이 수록된 소설집 ‘풍차 방앗간 편지’(Lettres de mon moulin) 표지.

 

“아가씨는 날이 밝아 하늘의 별들이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내게 가만히 기대고 있었습니다.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나는 아름다운 생각만을 보내주는 별의 보호를 받으며 아가씨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별들이 양 떼처럼 조용한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지요. 나는 생각했습니다. 저 별들 가운데서 가장 곱고 가장 빛나는 별이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 위에서 잠든 것이라고.” - 알퐁스 도데 ‘별’ 중에서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분노하며 발만 동동 구른 1년이었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 법조, 교육, 문화 등 세상은 이미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주의화했다. 부동산 세금 폭탄, 청년 부채율 상승, 1가구 1주택법 발의, 거리 두기 3단계 검토, 5인 이상 모임 금지, 이웃 신고 급증. 뉴스 제목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가 1869년 출간한 ‘풍차 방앗간 편지’에 실린 짧은 소설 ‘별’은 몇 주가 지나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는 산골짜기에서 양을 치는 외로운 목동의 사랑 이야기다. 아름다운 스테파네트는 산에 올라왔다가 폭우를 만나고, 계곡물이 불어 마을로 돌아가지 못한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 방울 소리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아가씨는 목동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잠든다.

 

“이런 데서 살고 있군요. 어머나, 가여워라.” 아가씨가 안타까워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목동에게, 남몰래 사랑하는 주인집 딸은 밤하늘 별만큼이나 머나먼 사람이다. 그런데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이 기적을 일으켰을까. 뜻밖에도 목동은 평생 간직할 아름다운 별밤을 선물받는다.

 

희망은 척박한 대지에서 싹이 트고 별빛은 한겨울 허허벌판, 짙은 어둠 속에서 가장 맑게 반짝인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먼 별조차 우리의 몸과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을 때 별은 곧 내가 되고 당신이 된다. 새해는 깊은 어둠을 깨우는 샛별 같은 날들로 채워지기를. 해가 저물고서야 별이 빛나듯, 절망이 무르익고서야 희망은 현실이 되리니.

 

[93] 꿈꾸고 애쓰면 이루어지는 새해이길

 

그는 우연히 대학 생활을 화려하게 그려낸 소설을 읽었다. 훌륭한 청년이 고학하며 우등상을 타고 친구들과 재미있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새벽까지 소설을 읽은 예순네 살의 액셀브로드는 대학에 갈 결심을 했다. 예전에 하루 18시간씩 밭에 나가 일할 때처럼 입학 준비에 매진했다. 그는 하루에 12시간씩 공부하며 어려운 과목들을 마스터해갔다.” - 싱클레어 루이스 ‘늙은 소년 액셀브로드’ 중에서

 

5인 이상 모임 금지 명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고통은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는 K방역만 홍보하느라 1년 내내 국민 손발을 묶어놓고 한 달 운영비도 되지 않는 지원금을 주는 대신, 방역 지침을 준수하고 저마다 자립하도록 지나친 규제와 엄격한 제재를 풀어주어야 한다.

 

미국에 첫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싱클레어 루이스가 192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늙은 소년 액셀브로드’는 노년이 되어서야 삶의 여유를 얻은 액셀브로드가 65세 늦깎이 대학생이 되는 이야기다. 젊은 날 밭을 갈듯 열심히 공부한 그는 지성의 전당이라 믿었던 명문 대학에 입학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건 자기보다 마음이 더 늙은 청년들, ‘농장 헛간 뒤에서 떠벌리는 일꾼들의 수작’만도 못한 교수들의 작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에 꼭 맞는 학생을 만나 문학과 역사와 음악에 대해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꿈에 그리던 대학의 낭만을 만끽한다. ‘인생 70년을 살고 고향 떠나 1500마일을 달려온 목적이 바로 이거야.’ 너무도 행복했던 그는 만족감을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 젊은 친구에게 작별 편지를 남긴 뒤 미소를 지으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의 결정이 지혜로워 보이든 엉뚱해 보이든, 인간이 원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고 자유롭게 도전하고 마음껏 경험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세상이다. 하라, 마라, 된다, 안 된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도 꿈꿀 수 없고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 개인은 어리석지 않고 나약하지 않다. 건강한 욕망을 통제하고 자유를 박탈하며 생존을 가로막는 권력이 반드시 무너지는 이유이다.

 

[94] 눈이라도 잘 치워주길 바란다

▲川端康成 ‘雪国’. 영어번역본 제목은 Yasunari Kawabata ‘Snow Country’.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좌석의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의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외쳤다. “역장님, 역장님.” 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다가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을 감싸고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귀까지 내려 덮고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중에서

 

지난 6일 저녁,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눈이 내렸다. 제설 작업이 되지 않아 퇴근길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버스와 택시는 오지 않았고 전철은 승객들을 가둔 채 멈춰 섰으며 자동차들은 서로 뒤엉켜 다발 사고를 냈다. 방법이 없어 귀가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눈의 도시, 아니 눈의 아비규환이었다.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탄 첫 일본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앞에 인용한 첫 문장으로도 유명한 소설이다. 겨울이면 1~2m씩 눈이 쌓이는 온천지로 여행 온 시마무라와 그 지방에 사는 게이샤의 허무한 만남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엮어놓았다. 세상의 추한 것을 다 감싸도 봄이면 녹아 사라질 눈처럼 시마무라에겐 일도 사랑도 ‘헛수고’로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연속이 빚어낸 결정체가 삶이 아닌가.

 

여행지에서 만난 눈은 낭만적일 수 있다. 차 마시며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그러나 자연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도시의 자연은 잘 극복되고 다듬어지고 관리되어야 한다. 자연재해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시 당국과 정부에도 있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열심히 일하고 사무실을 나오자 눈의 지옥이었다. 집에 갈 걱정에 눈앞이 하얘졌다’로 시작하는 소설 같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인생에 닥쳐오는 문제들이 그렇듯 폭설은 미리 대비하고 퍼붓는 동안에도 치우고 녹여야 한다. 왜 헛수고를 하느냐며 손 놓고 있다가는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도 있다. 눈이라도 잘 치워주길 바란다.

 

[95] 말과 생각을 포기했다면 항복한 것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사람들은 ‘현실 제어’라 불렀지만 신어로는 ‘이중사고’라고 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뻔한 진실을 교묘하게 꾸며 거짓말을 하는 것, 모순되는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북한이 현 정권을 향해 ‘특등 머저리’라고 비난을 퍼붓자 ‘좀 더 과감하게 대화하자’는 뜻이라고 민주당 의원이 해석을 내놓았다.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했을 때 한 방송은 ‘애정이 있다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관심 있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대화를 청하고 싶다면 “특등 머저리씨,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일이군요”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이익 공유제, 소득 주도 성장, 포용 국가, 공유 경제처럼 한글로 표기했으나 우리말로 느껴지지 않는 용어도 난무한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신년사에서 언급한 착한 임대료 운동, 필수 노동자, 백신 자주권, 선도 국가, 가교 국가와 같은 말도 낯설기만 하다. 정부가 일찍이 내건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라는 표어도 국민이 기대했던 세상을 뜻한 건 아니었다.

 

1949년에 출간한 조지 오웰의 ’1984′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경고한 소설이지만 2021년 전후를 내다보고 쓴 미래 예언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새로운 단어의 목적은 사고 폭을 좁히는 데 있다.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된다. 2050년까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이해할 사람이 남아 있을 것 같은가?’라고 묻는다.

 

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단어가 삭제되고 의미가 왜곡되며 특정 이념을 담은 용어가 범람하는 건 위험하다. 미사일을 쏘며 서로 죽이고 땅을 빼앗는 것만 전쟁이 아니다. 말을 포기했다면 항복한 것이고 적의 입맛에 맞게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면 정복당한 것이다. 북한을 따르며 그들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말과 생각이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다.

 

[96] 제 배 불리며 남에겐 ‘공유’를 강요하는 사람들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 파티'.

 

“전부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로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두다니, 뭘?” 조즈가 놀라서 큰 소리로 물었다. “물론 가든파티 말이지.” 그러자 조즈는 더 놀란 모양이었다. “파티를 그만두자고?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딨어?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는 없어. 또 아무도 그걸 기대하지 않는다고.” “이웃에 살던 사람이 죽었는데 파티를 할 수는 없잖아.”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 중에서

 

민주당 대표가 이익 공유제를 제안했다. 최고 권력자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바람직하다며 동의하자 정치권은 입법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지난 3년간 공무원을 9만명이나 늘려온 정부는 앞으로 8만명을 더 뽑을 예정이다. 그들이 꼬박꼬박 받는 월급은 국민 주머니에서 나가는 세금인데 공무원 연봉은 올해 0.9%, 대통령직의 연봉도 2.8% 인상된다.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감안, 고위 공직자의 인상분을 반납한다지만 기존의 소유와 이익은 손해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영국의 소설가 캐서린 맨스필드가 192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가든파티’의 로라는 이웃에 살던 가난한 짐꾼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티를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족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도 곧 드레스와 예쁜 모자로 치장한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어 파티를 즐긴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남은 파티 음식을 들고 조문을 가지만 난생처음 마주한 삶의 양면성, 즉 삶과 죽음, 풍요와 빈곤의 간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울먹인다.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오빠가 말한다.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니?”

 

동정심으로 남은 빵을 좀 나눈다 해도 남의 삶을 대신 살지 못한다. 가난과 고통과 죽음을 공유할 수도 없다. 세금 감면과 영업 제한 해제 대신 공동체 상생과 이익 공유를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제 것은 내놓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으며 더 갖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도 않는다.

 

토지와 노동과 자본을 공유하자는 것이 공산주의다. 소유를 죄악시하며 평등하게 못사는 사회, 공유를 강요하는 자들만 배부른 세상이 공산주의가 말하는 유토피아다.

 

[97] 슬픈 나라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슬픈 카페의 노래'.

라이먼과 마빈은 어밀리어의 귀중품을 몽땅 가져갔다. 카페의 테이블마다 무시무시한 욕을 새겨놓았고 사탕수수 한 통을 부엌 바닥에 온통 쏟아붓고 과일 잼이 든 병들을 다 깨뜨렸다. 그들은 증류기를 완전히 박살 내고 새로 산 커다란 응축기와 냉각기도 망가뜨린 뒤 오두막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파괴해버렸다. 그런 뒤 두 사람은 함께 도망쳤다. - 카슨 매컬러스 ‘슬픈 카페의 노래’ 중에서

 

영화 ‘판도라’를 관람한 뒤 “탈원전 국가로 가야 한다”고 말했던 현 정부는 2017년, 신규 원전 건설을 백지화하며 탈핵 시대를 본격 선포했다. 태양광 사업으로 국토는 깎여나갔고 한국전력은 심각한 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수많은 인재가 일자리를 잃었다. 그렇게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던 국가의 미래 사업 기반이 무너졌다. 그런데 북한에 원전 건설을 제안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문서가 발견돼 정권의 이적 행위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1951년에 출간된 미국 작가 카슨 매컬러스의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오갈 데 없던 꼽추 라이먼을 사랑한 어밀리어의 이야기다. 그녀는 라이먼을 집에 들이고 카페도 연다. 사람들은 저녁이면 들러 작은 행복을 누렸다. 하지만 라이먼은 어밀리어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전과자 마빈과 어울리게 되고 그녀의 인생 모두를 훔치고 부수고 불을 지른 뒤 달아난다. 어밀리어는 절망에 빠지고 그녀의 카페가 사라진 마을은 다시 황량하고 쓸쓸해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가 웃을까, 무엇을 주면 기뻐할까 고민한다. 주머니가 비면 빚을 내서라도 선물한다. 반면 과분한 애정을 받는 쪽은 감사는커녕 더 욕심내고 윽박지르고 빼앗으며 폭력을 일삼기도 한다.

 

일부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있는 정권은 이적 행위 의혹에 대해 터무니없다며 화만 내고 있다. 북한이 별별 욕설을 퍼부어도 침묵하는 그들, 자국민의 고통에는 끝없이 눈감는 정부는 주적에게 무엇을, 얼마나 더 주고 싶은 것일까? 일방적이고도 무한한 그들의 사랑이 ‘슬픈 나라의 노래’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98] 법을 지켜야 할 이들이 법을 외면하고 거짓말한다면

▲아라빈드 아디가 ‘화이트 타이거’ .

 

나흘 전에 법정에 갔었어. 판사가 무슨 명령을 내렸는데 변호사들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대놓고 그 명령을 거부하더라고. 아주 광적으로 변해서 판사를 끌어내리더니 마구 두들겨 패더라니까. 판사가 주재하는 바로 그 법정에서 말이야. 아니, 사람들이 판사를, 그것도 법정 안에서 두들겨 팬다면, 우리들의 미래가 도대체 어떤 꼴이겠는가? 아라빈드 아디가 ‘화이트 타이거’ 중에서

 

지난 4일 법관 탄핵이 국회에서 강행되었다. 해당 판사는 일찌감치 사의를 표명했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데다 며칠 후면 임기가 만료되는 터였다. 그런데도 탄핵이 가능했던 건 정치적 판세를 계산한 대법원장이 그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가 입맛 따라 대통령이든 판사든 마음대로 탄핵할 수 있는 권력 집단임을 또 한 번 세상에 각인시킨 사건이다.

 

2008년에 출간된 아라빈드 아디가의 소설 ‘화이트 타이거’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인도의 정치계와 그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 신랄하게 들춰낸다. 운전기사 발람은 원하는 만큼 뇌물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청난 세금을 부과한 정치인들에게 현금 다발을 선물하러 다니는 주인을 모신다. 한번은 장관의 보좌관을 차에 태우게 되는데 그가 판사 구타 사건을 이야기하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더 많은 뇌물과 향응을 바라는 가장 썩은 정치인 중 하나일 뿐이다.

 

한때는 국회의원과 판사처럼 법과 관련된 사람들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도인 줄 알았다. 그러나 국회는 자기들에게 이로운 법만 만들고 법조인은 권력 앞에 엎드려 진실과 자긍심을 스스로 내던진 지 오래다. 그러니 소설 속 판사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진들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일부 법조인과 국회가 ‘사법부 바로 세우기’를 외친다지만 법의 이름으로 거짓말하고 진실에 침묵하며 혼란에 앞장선 건 그들 자신이 아니었는지. 눈앞의 손익에만 급급한 당사자들의 현실 인식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99] 걱정은 불안을, 긍정은 기적을 부른다

▲앤디 위어, ‘마션’.

 

기분이 참 묘하다. 어디를 가든 내가 최초가 아닌가. 로버 밖으로 나가면? 그곳에 발을 디딘 최초의 인간이 된다. 언덕을 오르면? 그 언덕을 오른 최초의 인간이 된다. 암석을 걷어차면? 그 암석은 백만 년 만에 처음 움직인 것이다. 나는 최초로 화성에서 장거리 운전을 했다. 최초로 화성에서 31일을 넘겼다. 최초로 화성에서 농작물을 재배했다. 최초로, 최초로, 최초로 말이다. - 앤디 위어 ‘마션’ 중에서

 

참 이상한 설날이었다. 햇빛이 봄처럼 밝아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가 새삼스러웠다. 5인 이상 모이면 불법이 되는 명절이기도 했다. 위반하지 않으려면 시간을 나눠 첫째네 가족이 부모님 댁에 들어가서 세배하고 나온 뒤 둘째네가 들어가고 그들이 떠나면 셋째가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더 이상했던 것은 중국을 향한 정치인들의 새해 인사였다.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축하했던 정권답게 국무총리 이하 국회의장과 경기도지사 등 일부 정치인들이 중국인에게 전하는 춘절 인사를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일본과 미국은 배척하면서 중국만은 살뜰하게 챙긴다. 그들은 정말 국익과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들인 걸까?

 

2011년에 출판되어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에서 우주비행사 마크는 우연한 사고로 화성에 홀로 남게 된다. 당장 먹을 식량과 물은 있었지만 구조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크는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 생존 방법을 찾아간다. 수없이 실패하고 절망하지만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희망도 놓지 않는다. 그는 결국 549일 만에 귀환길에 오른다.

 

언제부턴가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나를 깨달으며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이었나, 우울해진다. 그래도 화성에 장기 거주하는 최초의 지구인이라며 자신을 격려했던 마크에 비하면 운이 좋다. 마스크를 쓸지언정 숨 쉴 수 있는 지구에 있고 친구와 가족도 만날 수 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나라를 살아가는 최초의 한국인 중 하나라는 자부심도 필요하다. 걱정은 불안을 부르고 긍정은 기적을 부른다. 더 큰 목소리로 희망을 이야기할 때다.

 

[100] 거짓말은 모든 죄악의 근본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거짓말을 하고 거짓에 귀 기울이는 자는 결국 자기 내부에서도, 자기 주위에서도 어떤 진실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며, 자신은 물론 타인들도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껏 즐기고 기분을 풀자니 음욕에 탐닉하여 결국 짐승과 다름없는 죄악의 소굴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끊임없는 거짓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K방역을 자랑하며 백신 무료 접종을 장담한 정부는 이에 필요한 예산 4조6000억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세금이 최소 20조, 최대 100조원 든다는 4차, 5차 재난지원금을 논의하고 있다.

 

많은 국민이 5인 이상 모임 금지로 일상의 자유를 빼앗기고 생계마저 위협받고 있다. 명절에는 가족과 함께 성묘도 못 했고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 그런데 민주 투사가 죽었다며 수백 명이 모여 노제를 지냈다. 정계 인사들도 앞다투어 찾아갔지만, 장례식은 집회가 아니라며 제재하지 않았다.

 

백신은 안전하다면서도 최고 권력자가 실험 대상처럼 1호 접종자가 돼선 안 된다는 모순된 발언이 여당에서 나왔다. 코로나 경기 악화로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이 감소’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역대 가장 좋은 성과’를 냈다며 자축하는 정권도 현실과 바람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1880년 발표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원초적 탐욕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표도르의 죽음과 그의 아들들에 얽힌 장대한 서사다. 표도르의 비도덕적 성품을 알아본 수도원 장로는 거짓말이 모든 죄악의 근본이라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뒤늦게나마 조언을 새겨들었다면 부친 살해라는 비극적 사건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이 탄로 나 사퇴 요구까지 받은 대법원장은 사실과 다른 사과문을 내놓아서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보궐선거를 해야 하는 서울과 부산의 전 시장들처럼 현 정권 관련자들의 성 추문이 많은 것도 당연해 보인다. 장로 말대로 거짓이 만연한 탓에 자정 능력을 잃은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