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아트22/ 국가별 사진작품6/ 프랑스2/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쟁 사진) - 예프랑소와 로버트( 인간의 뼈로 만든 사진)
포토 아트22/
프랑스2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 Cartier Bresson
1908년 8월 22일 파리 인근에서 출생. 매그넘 창시자
결정적 순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1946.브룩클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근대사진의 완성자로 불리우며,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위대한 사진가이다.
그는 "소형카메라는 내 눈의 연장이다"라고 주장하며, 그 누구보다도 일상의 귀중함을 감동적 영상으로 보여준 사진가였고, 캔디드의 대가, 노 트리밍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한 사진가였다.
인간의 눈높이에서, 인간의 시선으로 세상과 만났기 때문에 인간다운 시선, 가장 인간다운 삶의 정취가 배어 나는 표준렌즈만을 고집했다. 또 자연의 빛, 찰나의 빛 아래서만 사진을 찍었고, 결코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았다.
촬영 당시의 느낌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원래의 느낌과 달라지는 어떠한 변형, 조작, 왜곡 행위도 용인치 않았다.
늘 카메라를 삶과 마주한 눈의 연장(延長)으로 생각했으며, 사진을 일기이자 삶의 메모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을 때 한 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이고,
찰라에 승부를 거는 이유는 사진의 발견이 곧 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가 남긴 이 말은 그의 사진예술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서,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붙잡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이다.”
MEXICN NOTEBOOKS
"사진에는 새로운 종류의 조형성이 있는데 그것은 촬영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간적인 윤곽의 생성에 있다."
세계사진은 모든 사진적 철학이 내재된 그의 '결정적 순간'을 사진의 교과서로 받아들였다. 브레송이 사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삶의 한순간을 예리하게 관통하는 의식과 인식의 교호작용이며, 사진가와 대상간의 찰나적으로 하나가 되는 생의 순간이다. 이것들을 오늘날까지 세계사진은 가장 높이 평가한다.
Aquila, the Abruzzi, Italy, 1951
"나의 삶의 행위를 통하여, 자아의 발견은 우리를 정형화하고, 또 우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주변세계의 발견과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하나는 우리의 내면세계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 밖에 있는 외부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떤 균형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안된다. 끊임없는 상호 과정의 결과로서 이들 두 세계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 앙리 카르티에_브레송 -
A PROPOS DE PARIS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CB)은 1908년 8월 22일 파리 인근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부농인 카르티에(Cartier) 가문과 제조업자인 브레송(Bresson) 가문의 혼인으로 탄생한 카르티에 브레송 (Cartier-Bresson) 가문은 대대로 면사 제조공장을 운영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는데, 20세기 초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집집 마다 카르티에 브레송 상표의 실을 사용했을 정도였다.
프랑스해방의 기쁨을 생생한 사진으로 남기면서 본격 포토저널리즘 입문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세 번이나 연거푸 낙방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예술 쪽 진로를 모색하기로 작정, 저명한 미술교육가인 앙드레 로트에게 2년간 개인지도를 받으며 예술적 재능을 계발하였다.
1931년에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를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물을 촬영한 것이 본격적으로 사진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에 구입한 신제품 라이카 휴대용 카메라는 크기가 작고 조작이 간편해서 그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으로 평가된다.
1933년 브레송은 한 잡지사의 요청으로 스페인을 취재함으로써 전업 사진작가의 길에 접어들었고, 미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고국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는다.
그러나 HCB는 이 시점에서 갑작스레 사진을 그만 두고 영화 쪽으로 진로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이후 그는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 밑에서 조감독으로 제작실무를 배우는 한편, <게임의 규칙>을 비롯한 몇 편에서는 작은 배역도 맡아 출연한다.
1936년에 HCB는 인도네시아 출신 무용수 라트나 모히니와 결혼했고, 스페인내전 당시에는 영화감독 신분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삶의 승리'를 제작한다.
Seville, Spain, 1933
Alicante, Spain, 1933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징집된 HCB는 종군 사진작가로 활동하다가, 1940년 6월 22일에 독일군 포로가 되어 하이델 베르크 인근의 수용소에 수감된다.
1943년 2월 10일 HCB는 세 번째 시도 끝 탈출에 성공, 귀국하여 도피 생활에 들어간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HCB는 환희와 감격의 순간을 생생한 사진으로 남기며 본격적으로 포토저널리즘의 세계에 입문 한다.
1946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HCB의 회고전이 열렸는데, 원래는 미술관측 관계자가 HCB가 제2차 세계대전중에 전사한 줄로 잘못 알고 ‘유고전’을 준비한 것이 계기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그의 사진예술관을 가르키는 대명사, '결정적 순간'
1947년, 뉴욕 맨해튼에서는 <Magnumphotos>라는 이름의 사진전문 에이전시가 창립된다.
사진작가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공조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저명한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주도로, 그의 친구인 브레송과 침(데이비드 세이무어)이 의기투합해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후 필립 할스만, W. 유진 스미스 같은 저명한 사진가들이 속속 가담함으로써, 'Magnumphotos'은 당대 최고 사진가들의 공동체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48년 1월 30일, 인도에서 취재 중인 브레송이 간디를 만나고 돌아온 지 불과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간디 암살사건이 벌어진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간디의 장례식을 취재함으로써, 브레송은 물론 그의 사진저작권을 관리하는 <Magnumphotos>의 주가도 껑충 뛰어오른다.
이후 HCB는 파키스탄과 버마(미얀마)를 거쳐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중국을 취재하고 돌아왔으며, 3년간의 아시아 체재는 국제적으로 HCB의 명성을 확립시킨 계기가 되었다.
Gandhi 1948
단식투쟁중인 간디 1948
1952년 HCB는 20년간 찍은 사진중 126장을 골라 '재빠른 이미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며, 여기에 ‘결정적 순간(L'instant décisif)’이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였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의 진수라 할 만한 순간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서문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진예술론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다.
나아가 이 책의 미국판이 아예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면서, '결정적 순간'이란 개념은 HCB와 그의 사진예술관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냉전시대에 HCB는 프랑스국적자라는 점을 적극 활용하여 외부와 단절된 공산국가를 연이어 방문했다.
A PROPOS DE PARIS. 1952
A PROPOS DE PARIS. 1952
1954년에 서방 사진작가 최초로 소련을 방문했고, 1958년에는 다시 중국을, 1963년에는 쿠바를 방문했다.
그 와중에 매그넘 포토스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로버트 카파와 침이 전장 취재 도중에 연이어 사망하자, 유일한 생존 창립멤버가 된 HCB가 자연스레 매그넘의 좌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하지만 매그넘 내부에서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조화와 공존에 관한 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1966년에 이르러 HCB는 결국 매그넘을 탈퇴하고 만다.
이 당시에는 그의 사생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30년간 함께 살았던 부인 라트나와 합의 이혼하고, 매그넘 소속의 사진작가인 마르틴 프랭크와 재혼한 것.
1970년에 HCB는 사진작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한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물론 그의 주머니에는 항상 라이카가 들어 있었지만, 예전처럼 공식적으로 사진작품을 발표하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
대신 그는 젊은시절의 관심을 되살려 데생작업에 전념했고, 비록 사진만큼의 격찬은 받지 못했지만 개인전을 여는 등 나름대로는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The seats opposite, Romania, 1975
A PROPOS DE PARIS. 1974
romanstreet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위대한 사진가
HCB가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길에 뛰어든 1930년대에만 해도 사진은 아직 완전한 예술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HCB는 만 레이, 앙드레 케르테즈, 외젠 앗제 등의 뒤를 이어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역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미술사가 E.H.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 사진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수록된 HCB 작품 <아킬라 데글리 아브루치> (1952)를 가리켜 “많은 공을 들여서 부지런히 그린 그림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영혼의 시선>의 서문에서 제라르 마세는 HCB를 가리켜 “자(尺)를 지니지 않은 기하학자임과 동시에 사격의 명수”라고 단언했다. 하나 같이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HCB의 능력을 강조한 표현이다.
Trastevere, Rome, Italy, 1959
피에르 아술린은 한술 더 떠서 “사진작가는 소매치기”라고 주장한다.
“그는 드라마 현장에 슬그머니 잠입해서 생생한 모습을 포착한 후, 자기가 영혼을 빼앗을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뒷걸음 친다. (…) HCB는 심지어 정물사진을 찍을 때조차 발끝으로 살그머니 접근한다.”
일각에서는 HCB가 포착한 ‘결정적 순간’이 그저 행운의 소산이라고 깎아 내리는 주장도 있었다.
가령 간디가 암살되기 직전에 인도에 있었고,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기 직전에 중국에 있었으며, 그 외에 수없이 많은 ‘결정적 순간’들을 포착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지 않았더라면, 그의 사진이 지금처럼 각광받지는 못했으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술린은 HCB의 ‘행운’보다 ‘노력’에 주목하라고 지적한다.
“그가 보이는 집중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훈련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는 재능보다 노력을 믿으며, 다재다능한 재주꾼을 불신하는 사람이다.”
가령 어느 행인이 빗물로 생겨난 웅덩이를 훌쩍 뛰어넘는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HCB는 카메라를 들고 그 근처에서 하루 온종일 잠복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그의 독특한 사진에서 ‘행운’의 입김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술린 말마따나 HCB의 진정한 탁월함은 언제 찾아올 지 모를 그런 ‘행운’을 움켜 쥐기 위해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노력’했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간혹 만족스럽지 않아 뭔가 일어나길 꼼짝 않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모든 일이 엉망되어 사진 한 장도 찍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지나가면 카메라 파인더로 그의 행적을 쫓아가다가, 기다리고 기다려서 마침내 찰칵! 그러고는 가방에 뭔가 채워 넣었다는 느낌을 갖고 떠난다. 나중에 사진에서 셔터를 누른 바로 그 순간 본능적으로 정확한 기하학적 구도를 고정시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항시 구성에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순간 그것은 직관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일시적 순간을 포착하려 애쓰는데, 연관돼 있는 모든 상호관계는 항상 움직이는 것이니 말이다.”
(‘결정적 순간’ 중에서)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순간을 영원히 포착하는 단두대이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HCB의 사진은 이미 세계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질서가 우리 눈 앞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감동을 자아낸다. 아술란에 따르면 HCB는 일반적 사진보다는 이처럼 우연에서 비롯된 사진을 더욱 좋아했고, 연출된 사진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령 HCB는 미나마타의 참상을 고발한 W.유진 스미스의 유명한 사진 <목욕하는 우에무라 토모코>조차도 연출된 사진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테크닉보다는 스타일을 중시했으며, 컬러 사진보다 흑백 사진을 선호했고, 플래시를 “야만적인 행위”라며 지극히 혐오했으며, 카메라는 평생 라이카만을 고집했다.
HCB의 명성에는 그의 완벽주의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로버트 카파가 목숨 걸고 찍은 사진 대부분이 현상과정에서의 실수로 망가져서 겨우 11장만이 살아남았다는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당시로서는 사진작가의 실수보다도 현상기술자의 실수 때문에 사진을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HCB는 평생 가까운 친구가 운영하는 전문현상소에만 필름을 맡겼으며, 나아가 자신의 사진을 일부만 확대하거나 편집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했으며, 심지어 일부 사진에서는 내용의 왜곡을 방지하려 자신이 직접 쓴 설명(캡션)까지도 고스란히 싣도록 요구했다.
HCB는 초상 사진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정작 본인은 남의 사진에 찍히는 것을 극구 피했고, 심지어 자화상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항상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 사진작가로서는 이런저런 사진에 등장해서 얼굴이 팔려서는 안 된다는 특유의 지론 때문이었다.
2004년 8월 3일, HCB는 수많은 ‘결정적 순간’을 목격했던 그의 눈을 감고 평온히 숨을 거둔다. 96세 생일이 20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서,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붙잡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작품 들
INDIA
Punjab 1947
North India 1947
Punjab 1947
Palni 1950
Palni, south of Coimbatore, 1950
구걸하는 모습
Orissa 1980
Ahmedabad - 1966
Ahmedabad - 1966
Udaipur 1966
Delhi - 1966
Delhi - 1966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MEXICAN NOTEBOOKS
EUROPEANS
EUROPEANS
EUROPEANS
EUROPEANS
EUROPEANS
EUROPEANS
EUROPEANS
EUROPEANS
EUROPEANS
A PROPOS DE PARIS. 1952.
A PROPOS DE PARIS. 1952.
A PROPOS DE PARIS. 1952.
A PROPOS DE PARIS. 1953.
A PROPOS DE PARIS. 1953.
A PROPOS DE PARIS. 1955.
A PROPOS DE PARIS. 1959.
A PROPOS DE PARIS. 1965.
PROPOS DE PARIS. 1968.
The first paid holidays, France, 1936
The frist paid holidays, France, 1936
Pointe de Penmarch, Brittany, France, 1956
Simiane-la-Rotonde, France, 1969
Tralee, County Kerry, Ireland, 1952
Dublin, Ireland, 1952
Dublin, Ireland. 1952
The Dingle Pemomsi;a, County Kerry, Ireland, 1952
The Berlin Wall, federal Republic of Germany. 1962
The Berlin Wall, federal Republic of Germany. 1962
Moscow, USSR, 1954
Peter Paul Fortress, Leningrad, USSR, 1973
Basilicata, Italy, 1951
Scanno, the Abruzzi, Italy, 1951
Spain, 1950
Spain, 1953
Viana de Castelo, Alto Minho, Portugal, 1955
Brussels, Belgium, 1932
The interval at Glyndebourne, England, 1953
Near Linz, Upper Austria, 1953
Yann Arthus-Bertrand의 作品항공사진작가
하늘에서 본 아름다운 韓國
Yann Arthus-Bertrand
아리랑 교향곡
안 아르튀스 배스트랑 작
목화 더미 위의 노동자
아르헨티나
하트 - 프랑스 맹그로브 숲
프랑스
필리핀
한국 - 웃음 짓고 있는 무덤 - 경기도
모로코
사자 가족
습지
흑동고래
'하늘에서 보이는 땅'이라는 제목으로 연 전시회 작품이다
지상 30미터에서 3000미터까지의 고도에서 76개국의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들을 3천시간 동안 찍은 작품으로 2번째입니다.
예프랑소와 로버트
인간의 뼈로 만든 사진 - 전쟁을 중지하라 !!!
Stop the Violence : art made of human bones by Francois Robert
예프랑소와 로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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