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4] <31회> 20세기 공산주의 정권, 1억명 학살 - <40> 30만 군중의 집단 모욕...국가원수 영부인의 수난
[송재윤의 슬픈 중국4] - 문화혁명 이야기 조선일보
<31회> : 20세기 공산주의 정권, 1억명 학살
우리는 선, 상대는 악...공산주의가 1억명 학살한 수법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철저하게 자산계급 사령부를 깨부수자!” 1967년 8월 베이징 광업학원의 조반파 병단에서 제작한 포스터인데, 왼쪽에는 “문투(말과 글로 투쟁)를 하자! 무투(무력투쟁)를 하지 말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1967년 중국 전역에 무투의 광풍이 몰아닥칠 때, 베이징의 조반파들 사이엔 평화 시위를 주장한 세력도 있었음을 방증.>
20세기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대략 1억 명이 학살됐다. 희생자의 수치를 살펴보면, 중국 6500만, 소련 2000만, 북한 200만, 캄보디아 200만, 아프리카 170만, 아프가니스탄 150만, 베트남 100만, 동구 100만, 남미 15만 명이다. 프랑스 지식계의 기념비적 저작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에 제시된 수치다. 인간평등과 노동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 정권들이 대체 왜 그토록 잔혹한 대량학살을 자행했을까?
1978년 12월 중공중앙에서 폭로된 정부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문화혁명 10년 동안 1억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 중 중국의 농촌에서는 대략 520여만 명이 “비투(批鬪)”를 당했고, 그 중 120만 명이 비자연적(非自然的) 사망에 이르렀다. 1960년대 낙후된 중국의 농촌사회에서 과연 누가, 왜, 어떻게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나?
<199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공산주의 흑서”의 영역본>
우리 편 아니면 적...적의 제거가 선의 실현
공산정권의 대량학살은 엉터리 삼단논법(syllogism) 하에서 자행됐다.
1. 대전제: 공산주의는 (인류를 구원하는) 절대선이다.
2. 소전제: 반대세력은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절대악이다.
3. 결론: 절대선(=공산주의)을 위해 절대악(=반대세력)은 제거돼야만 한다.
따져 보면, 대전제 자체가 경험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유사(類似) 종교적 믿음일 뿐이다. 공산정권이 사용한 대량학살의 삼단논법은 결국 그릇된 믿음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엉터리 논증이다. ‘계급학살(classicide)’의 합리화일 뿐이다.
반대세력의 이름은 반혁명분자, 부르주아지, 주자파, 제국주의자, 수정주의자, 수구세력, 우경분자, 친일파, 친미파, 극우파 등등이다. 반대세력이 뭐라 불리든, 대량학살의 논리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우리 편이 아니면 바로 적”이라 낙인찍고, “적의 제거는 곧 선의 실현”이라 미화하는 소아병적 억지주장이다. ‘비아즉적(非我卽敵), 살적즉선(殺敵卽善)!’
“마오쩌둥 사상”이 바로 “공산주의는 절대선이다”를 대전제로 삼는다. 그 대전제 위에서 마오는 반대세력을 절대악으로 몰고 갔다. 1950년대부터 마오쩌둥은 전체인구의 95%는 선량한 인민이지만 5%는 반혁명분자들이라 예단했다. 5%의 반혁명분자들 때문에 공산유토피아의 실현이 지체된다는 발상이었다. 8억 인구 5%, 곧 4000만 명만 제거하면 중국의 땅에 공산유토피아가 도래할 수 있나?
1950년대 내내 중공정부는 반대세력을 숙청했지만, 그 결과는 대기근의 참상이었다. 반대세력의 제거는 공산유토피아가 아니라 공포정의 디스토피아로 귀결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문혁의 현실에서 대량학살의 삼단논법은 상상 이상의 강력한 효력을 발휘했다.
<”마오쩌둥 사상 만세!” “마오쩌둥 사상이 전 지구를 널리 비춘다!” 문혁 시기 마오쩌둥 사상은 인류를 구제하는 “절대선”으로 칭송됐다. 마오쩌둥 사상의 절대화는 반대세력 모두를 제거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만들었다.>
후난성 다오현의 킬링필드: 66일간 조직적인 대학살
후난(湖南)성 남부 끝 광둥성과 광시성 접경에 다오현(道縣)이 있다, 북송 도학(道學)의 태두 주돈이(周敦頤)를 배출한 2000년 역사의 문명 고현(古縣)이다. 1967년 8월 13일에서 10월 17일까지 다오현에선 66일 간 대규모의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1984년 5월부터 1986년 말까지 400여명의 조사단이 2년 반에 걸쳐 극비리에 심층조사로 밝힌 바에 의하면, 1967년 다오현에선 4193명이 학살당했고, 326명이 자살에 내몰렸다. 117호의 민가는 철저히 파괴됐다. 곧이어 인근의 10개 도시와 현에서도 4000여명이 도살되었다. 모두 9000여 명의 생명을 앗아간 조직적인 대학살이었다. 다오현 인구의 1.2%가 희생됐는데, 70대 노인들과 갓 태어난 영유아도 섞여 있었다.
정부 공식의 명칭은 “다오현 문혁살인사건”이다. 민간에서는 난살풍(亂殺風) 혹은 살인풍(殺人風)이라 부른다. 난살이란 잔인하고 어지러운 학살을 의미한다. 주로 총, 칼, 몽둥이, 폭탄 등을 써서 대량학살을 저질렀지만, 물에 빠뜨리거나 바위틈에 내던지거나 생매장하거나 불태워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의 90%는 흑오류(黑五類)과 그 가족들이었다. 흑오류란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파괴분자, 우파 등을 이른다. 이미 건국 이전 토지개혁운동 때부터 지주와 부농은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사실상 빈농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정치적 박해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천대에 시달리는 계급천민이었다. 1967년 여름, 건국 후 18년이 됐는데, 다시금 흑오류는 조직적 대량학살의 희생자가 돼야 했다. 문화혁명이 ‘계급학살’로 귀결되는 참혹한 모멘트였다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말자!” 중국의 한 농촌 마을 건물 벽에 적힌 문혁 시절의 구호>
관료 행정 마비...조직들 간 무장투쟁
1967년 1월 상하이 조반파 노동자들이 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인민공사를 창건했다. 상하이 조반파의 탈권 투쟁은 실시간으로 방송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다. 흥분한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위시한 전국의 조반파들을 향해 탈권을 촉구했다. 상하이의 투쟁에 자극받은 군중은 다양한 조직을 구성해 권력쟁탈의 투쟁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군중집단이 직접 나서서 지방정부를 장악하는 코뮌 형식의 탈권 투쟁을 상상했지만, 이념성향과 투쟁노선이 다른 여러 군중조직이 난립하자 곧 군중집단들 사이의 패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마오는 1월 말 군대를 파견해 “좌파 군중”을 지원하라 명령한다. 군부의 대원수들은 중앙문혁소조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집단적으로 항거했다. 덕분에 이후 탈권투쟁의 결과 지방에 건립된 혁명위원회의 주도권은 인민해방군이 쥐게 된다.
1967년 초부터 지방의 관료행정은 마비상태였다. 여러 조직들이 난립하면서 무력충돌이 빈번해졌다. 조직들 사이의 패싸움은 곧 무장투쟁으로 비화됐다. 한 연구에 의하면, 1967년 말부터 1968년까지 100만 점의 총기가 민간인 군중의 손에 넘어갔다. 군중조직이 자체 무장을 통해 ‘지방무력’으로 등장하는 상황이었다.
<문혁 당시 무장세력의 사진. 무장투쟁의 초기 단계에선 도시의 홍위병 및 조반파 조직이 농촌의 농민조직과 맞부딪히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례가 많았다. 중국의 비판적 지식 저널 “염황춘추(炎黄春秋)” 2014년 11기에 실린 딩쉐량(丁學良)의 “문혁 중 나와 총의 다섯 가지 관계”에서 발췌>
농민 주축 홍련, 학생 중심 혁련에 복수극
1967년 여름, 다오현의 군중조직들은 크게 두 개의 조직으로 나뉘었다. 혁련(革聯)과 홍련(紅聯)이었다. 혁련은 주로 과격파 학생들로 구성돼 있었다. 홍련의 주축은 빈농(貧農)·하농(下農)·중농(中農)들이었는데, 혁련과는 달리 홍련은 당간부 및 군대와 연결돼 있었다.
8월 8일 혁련이 현에 주둔하던 부대사령부에 쳐들어가선 무기를 탈취하고, 홍련을 압박해서 농촌으로 내쫓는 사태가 발생했다. 곧 이어 8월 13일, 유혈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다시금 혁련의 승리였다. 앙심을 품고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홍련은 혁련 중에 흑오류가 섞여 있음에 착목했다.
문혁 당시 중국 전역에서 등장한 조반파 중에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무리도 포함돼 있었다. 계급성을 의심받고 있었기에 그들은 더욱 과격한 행동으로 혁명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다오현의 혁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홍련은 지방군부와 결탁하여 농촌의 흑오류와 그 식구들을 잡아 죽이는 대학살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는데·······.
다오현엔 곧 악성 유언비어가 퍼졌다. 타이완의 장제스가 대륙침략을 획책하고 있고, 흑오류들이 이에 호응해 모반(謀叛)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계급적인들이 흑살단(黑殺團)을 조직해” “9월 대폭동, 10월 대도살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먼저 당원들을 죽이고, 간부들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빈농, 하농, 중농의 절반을 도살하려 한다!” 거짓 소문은 심리전의 시작이다. 유언비어는 대량살상의 무기다.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32) 학살 가해자는 이웃이나 친구...대부분 동조하거나 방관했다
<문혁기 흑오류의 공개처형을 포착한 역사적인 사전/ 공공부문 photo by Molihua>
“존재는 지각(知覺)이다(esse est percipi).” 영국경험론의 창시자 버클리(1685-1753) 주교의 명언이다. 아무리 큰 사건도 기록이 없다면 망각의 블랙홀로 빨려들고 만다. 600만 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의 참상도 연합군에 의한 영토점령, 현장검증, 물증확보, 사건조사, 증언 채록, 피해자 규명, 책임자 처벌, 법정 기록, 실시간의 언론보도, 실증적인 역사기록이 없었다면, 흔적도 없이 소멸됐을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기록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인식한다. 역사는 지각이다.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1927년 8월 7일 국공내전 개시 직전 마오쩌둥의 발언. 1968년 제작된 이 포스터는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군중조직의 군사화와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공부문>
다오현 학살 사건, 한 기자의 방대한 기록
1978년 12월과 1984년 5월 중공정부는 조사결과를 발표했지만, 문혁 피해의 진상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1984년 중공중앙의 발표에 따르면, 문혁시기 비자연적 사망자수는 172만8000명에 이른다. 그밖에도 최소 45만에서 최대 300만에 이르는 다양한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집단학살은 학살주체와 피해자에 따라 다음 세 시기로 나뉠 수 있다. 1) 1966년 8월-12월, 홍위병식 비판투쟁 및 베이징 다싱(大興)구 “홍팔월” 대학살극, 2) 1967년 1월-1968년 말, 군중조직의 탈권 투쟁, 무장투쟁 및 후난, 광시, 광둥 지역의 대량학살, 3) 1968년 가을-1970년 초, 군·경의 공권력에 의한 무력진압 및 대량학살이다. [1]
1984년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은 1967년 다오현의 학살사건을 조사하라 명령했다. 그 후 2년에 걸쳐 1300여 명의 관원들이 진상을 파헤쳤다. 당시 개혁적 관방언론 ‘개척(開拓)’지의 기자 탄허청(譚合成)도 다오현에 현장 취재를 나갔다. 그는 정부조사 결과를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수많은 피해자 유가족들과 직접 인터뷰를 이어갔는데······. 1986년 말 갑자기 중국의 정치기류가 급변하면서 진상조사는 중단됐다. 비판적 언론인의 입엔 재갈이 물렸다. 탄허청의 르포는 출판될 수 없었다.
탄허청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상을 규명하는 연구 작업을 이어갔다. 마침내 2010년 홍콩에서 605쪽의 방대한 그의 저작 ‘혈의 신화(血的神話): 1967년 후난 다오현 대도살 기실'이 출판됐다. 2017년 영역본이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에서 번역·출판되면서 다오현 대학살의 진상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탄허청의 저작은 현재 중국에선 유통·판매될 수가 없다. 대도살의 진상은 결국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직격탄이기 때문이다.
<2011 홍콩에서 출판된 탄허청의 “혈의 신화”의 제2판 (왼쪽)과 2017년 옥스퍼드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된 영역본 (오른쪽)>
몽둥이로 이웃 때려죽이고 “아주 좋다!”
1967년 가을 추석 즈음 후난성의 한 작은 농촌마을의 트랙터 운전수 35세의 샤카이츄는 같은 마을의 무장집단에 끌려가 읍내 집회에서 가혹한 비투(批鬪)를 당했다. 1952년 이미 처형된 그의 부친이 지주라는 이유였다. 중공군 지원병으로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그는 “나라를 위해 전쟁터서 싸웠다”며 혜량을 구했지만, 그는 다섯 명 지주의 자식들과 함께 몰살당했다. 그를 직접 몽둥이로 때려죽인 자는 바로 옆집의 정멍쉬였다. 정은 몰수된 샤의 가택에 살고 있었음에도 샤를 때려죽인 후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아주 좋다!”를 외치며 마을로 돌아갔다 한다.
문혁기 중국 농촌 사회의 대학살을 탐구한 양쑤(Yang Su) 교수가 당시 그 마을에 살고 있던 노부부에게서 직접 채록한 증언이다. 이 사건은 1967년 늦여름에서 1968년 말까지 후난성, 광시성, 광둥성에서 대규모로 발생한 집단학살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희생자들은 오로지 출신성분 때문에 학살당했다. 둘째, 농촌의 학살에선 농기구 등을 사용한 원시적 타살(打殺)의 방법이 사용됐다. 총알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셋째, 대부분 학살은 이웃, 친구 등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났다. 넷째, 학살은 공개된 장소에서 발생했고, 주변엔 수많은 동조자 및 방관자가 있었다.
후난성 다오현의 대학살도 마찬가지였다. 1967년 8월 13일에서 10월 17일까지 66일에 걸쳐 다오현과 그 주변에선 9000여 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는데, 피해자의 90%는 대지주와 부농 등 이른바 흑오류(黑五類)와 그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토지와 가옥을 다 몰수당한 빈농들이었지만, 그들의 가슴엔 계급천민의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그대로 이어진 사회주의 신분제의 유습이었다. 그들은 순전히 출신성분 때문에 같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살인의 방법으로 수많은 방관자의 목격 하에 공공연히 처형당했다.
학살 가담자 1만5000여명 대부분 20대 청년들
세계사 대학살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학살 주체에 따라 관판(官辦) 학살과 민판(民辦) 학살로 구분할 수 있다. 10개월에 걸쳐 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793년 프랑스 대학살은 당시 혁명정부의 명령에 따라 조직적으로 이뤄진 관판 학살의 대표적 유형이다. 반면 국가권력의 부재 때문에 발생하는 무법상황의 집단린치 등은 민판 학살이라 할 수 있다. 다오현 대학살의 주체가 중국공산당 정부라 할 수 있을까?
정부조사에 따르면, 학살 행위에 직접 관계한 인수는 1만5050명에 달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다오현의 공산당 간부들이거나 당원들이었는데, 대부분 20대의 청년들이었다. 나머지 절반의 가해자는 정부와 직접 관련이 없는 군중집단이었다. 발발 과정을 보면 다오현 지방정부를 장악한 군사조직 인민무장부(武裝部)의 개입이 두드러진다. 인민무장부는 인민해방군 지방부대의 밑바닥 조직이었다. 명령체계상 군부의 관할이었지만, 관리체계상 지방정부의 지휘를 받았다. 기묘한 반군반민의 조직이었다. 당시 다오현에선 인민무장부의 주요 인물들이 현(縣)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967년 1월 상하이 탈권 이후, 중국 전역에서 군중집단에 의한 지방정권의 탈권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다양한 집단이 경쟁적으로 출현하자 마오쩌둥은 중공중앙, 중앙군사위, 국무원, 중앙문혁소조의 명의로 “혁명적 좌파군중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후 중앙정치의 상황은 전국을 혁명의 광열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1967년 1월 초부터 국가주석 류샤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를 향한 홍위병의 공격이 거세졌다. 1967년 7월 18일 중공중앙 본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류샤오치를 공격하는 군중집회가 개최됐다. 그해 7월부터 1959년 파면당한 전직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역시 군중집회에 불려나가 계속 공격을 당했다. 급기야 1967년 8월 5일 톈안먼 광장의 백만인 대회에선 류샤오치, 덩샤오핑, 타우주(陶鑄, 1908-1969) 등이 비투당했다. 그날 인민일보는 한 해 전 작성됐던 마오의 대자보 “사령부를 폭파하라!”를 게재했다. 중앙권력의 교체를 공식화하는 수순이었다.
<“류샤오치, 덩샤오핑, 타오주, 당 중앙에서 쳐서 쫓아버리자!”/ chineseposters.net>
“혁명적 좌파 조직을 지원하고 계급 천민을 소탕하라”
중국현실에서 지방은 중앙의 풍악에 맞춰 춤을 춘다. 1967년 다오현엔 이미 두 개의 군중조직이 대립하고 있었다. 혁련(革聯)은 청년, 교사, 수공업자, 하층지식분자들이 주축을 이룬 조반파 조직으로 지방권력의 탈취를 노리고 있었다. 반면 홍련(紅聯)은 현지의 기득권 세력으로 지방정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오현 인민무장부는 홍련과 결탁하여 “혁명적 좌파군중 조직”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계급천민”을 소탕하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후난성 다오현의 위치/ maps.google.com>
다오현 집단학살의 구체적 계획은 1967년 8월 2일-5일 인민무장부의 핵심 간부회의에서 가장 처음 논의됐다. 무장부 정위(政委) 류스빈(劉世斌)은 타이완의 장제스가 대륙침공을 획책하고 있으며 다오현의 반혁명세력의 탈권의 기회를 노린다는 민간의 소문을 근거로 계급 적인(敵人)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그는 혁명적 군중을 규합해 흑오류 반동세력에 대한 대규모의 비판투쟁을 개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를 본격적인 ‘군중독재’의 발동이라 표현했다. 지방정부가 직접 군을 풀어 대민살상을 하기 보단, 군중독재의 원칙에 따라 혁명적 좌파군중이 반동세력을 제압하는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계속>
[1] Andrew G. Walder, “Rebellion and Repression in China, 1966–1971,” Social Science History , Vol. 38, No. 3-4 (Fall/Winter 2014), pp. 513-539.
(33) “인간이 아니다, 죽여도 돼” 젊은층에 증오 심어주자 500만 학살
<문혁 당시 중앙문혁소조는 계급 적인에 대한 무장 투쟁을 고취했다. 10대의 청소년들이 총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위의 사진은 당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다./ 공공부문>
얼마 전 한국의 한 유명작가는 특별법을 제정해서 “150-160만의 친일파를 전부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해방 당시 15세 소년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만 90세의 노인이다. 해방 전 20-30대의 적극적 친일분자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이미 100세-110세의 고령이다. 결국 이 주장은 연좌제 소급입법으로 “친일파”의 자손들은 모조리 “친일파”로 몰아 단죄하자는 위헌적, 시대착오적, 반문명적 발상이다.
주중대사를 역임했던 청와대 비서실장은 방역의 명분으로 특정 집회 참석자들을 “살인자”라 불렀다.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정부의 방역 지침에 항의하는 대규모 군중 시위가 벌어졌다. 그에 앞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선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렸다. 정치성향에 따라 이 두 시위에 대해선 찬반과 호오가 갈릴 수밖에 없다. 다만 독일이나 미국에서 중앙행정부의 핵심인물이 방역을 핑계로 시위 군중을 “살인자”라 칭했다면, 당장 직위를 박탈당하고 집단소송에 휘말릴 수밖에 없으리라.
문혁 시기 중국의 집단학살을 이해하기 위해선 위의 두 사건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화혁명 시기 집단학살의 희생자 대부분은 오로지 출신성분 때문에 학살당했으며, 문화계 권위자들과 집권세력의 핵심인물들이 공적 매체를 통해 집단학살의 논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계급적 증오로 무장하고 학살 벌여
문화혁명 기간 내내 중앙문혁소조와 관영매체는 날마다 반복적으로 특정집단을 악마로 몰아가는 선동선전에 몰두했다. 우귀사신(牛鬼蛇神), 독초(毒草), 정치천민, 반혁명세력, 반동집단, 우경분자 등등 무시무시한 폭력의 구호가 중국의 전역에서 도심의 고층빌딩, 산간벽지의 토담까지 나붙었다. 꼭두새벽부터 농촌 마을 곳곳에선 커다란 확성기를 타고 “조반유리, 혁명무죄,” “계급투쟁, 권력탈취”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당시의 정치구호들은 들춰볼수록 섬뜩하지만, 그 당시 평범한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1949년 “해방” 이후 부단히 이어지는 정치운동의 연속일 뿐이었다. “해방” 이전부터 중공정부는 쉴 새 없이 정치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18년 동안 중국의 “라오바이싱”(老百姓, 평범한 사람들)들은 일상적으로 정부 주도의 캠페인에 동원됐다. 정치집회에 참여한 인민은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계급의식을 고취했다.
계급의식이란 결국 적대세력을 향한 계급적 증오심을 이른다. 문혁이 일어났을 때 특히 25세 미만의 젊은이들은 계급적 증오심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후난성 다오현의 집단학살을 고발한 “혈의 신화”의 저자 탄허청(譚合成)은 말한다. “[지주, 부농과 그 자식들은] 인간 이하로 취급됐기 때문에 [상부의] 명령이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쉽게 죽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졌다.”
장시간 중공정부의 선전선동 결과 당시의 중국 인민들은 계급천민의 제거를 당위로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군중조직, 지방정부 및 지방군대가 결탁해 암세포 도려내듯 특정집단의 학살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흑오류 계급 적인에 대한 농촌 마을의 비투 장면/ 공공부문>
‘암세포' 인민의 적 도려내야...학살의 정당화
장이머우(張藝謀, 1951- ) 감독의 명작 “인생”(活着)의 주인공 푸구이(富貴)는 해방 직전 전 재산을 도박으로 날렸기에 운 좋게도 빈농이 돼서 계급학살을 모면했다. 만약 그가 집안 재산을 도박으로 날리지 않고 중공 정부에 고스란히 몰수당했다면, 그는 해방 직후 처형당하고 처자식은 가까스로 연명하다 문혁 시기 몰살당했을 수 있다. 원작가 위화(余華, 1960)가 고발하는 출신성분 신분제의 웃지 못할 패러독스다.
1949년 당시 중공정부는 전 인구를 도시거주민과 농촌거주민으로 양분한 후 다시 근로계급, 착취계급 및 기타로 분류했다. 전체인구의 76.8%가 빈하중농(貧下中農)으로, 4.5% 정도가 지주, 부농, 자산가 등 착취계급으로 분류됐다. 마오쩌둥이 직접 조어(助語)한 “빈하중농”의 범주엔 빈민, “부유하지 못한” 하층 중농이 속했다. 결국 중국 농촌거주민의 대다수가 빈하중농이었다. 요컨대 근로대중과 기타에 속하는 전체 인구의 95.5%는 “인민(人民)”이며, 착취계급에 속하는 4.5%는 적인(敵人), 곧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었다. 바로 이러한 통계를 근거로 마오쩌둥이 틈만 나면 5%의 반혁명세력을 운운했다. 문제는 바로 그 5%의 착취계급이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계급구분은 1949년 해방 직전 호주(戶主)의 출신성분에 따라 결정됐다. 삼대(三代)가 같은 집에 사는 경우, 가장인 조부(祖父)가 지주로 분류되면 그 아래 식솔들은 줄줄이 지주의 낙인을 받게 됐다. 해방 이전 지주, 부호라 해봐야 빈한한 농촌에 거주하는 중소지주에 불과했다. 만주 지역의 경우 당대에 맨손으로 땅으로 개간한 개척농민들이 다수였다. 결국 해방 이전 좀 넉넉했다는 이유 때문에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숙청되는 야만적 계급 보복이었다.
홍콩대학의 디퀘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50년대 “계급 적인”으로 처형된 인구는 최소 500만 이상이다. 가장이 지주로 몰려 처형된 후에도 그 집안의 자손들은 지주, 부농, 흑오류(黑五類), 사류(四類), 계급천민, 적인(敵人)의 멍에를 쓰고 살아야만 했다. 1979년에야 중공중앙은 “지주”와 “부농” 등 출신성분에 따른 정치적 신분 구분을 영구 폐기했다. 출신성분 때문에 이미 수백만 명이 학살당한 후였다.
1950년대 ‘인민의 적'이라며 최소 500만명 처형
오늘날 중국의 각 지방정부는 전근대 중화제국의 전통을 이어서 지방의 역사, 문화, 현황을 담은 지방지(地方志)를 편찬한다. 2010년 현재까지 중국 각지의 지방정부는 도합 2213개 시(市)와 현의 지방지를 출간돼 있다. 이 지방지들엔 문화혁명 당시 집단학살이 소략하게나마 기록돼 있다. 광시성에의 단 두 사례만 살펴보면······.
1967년 10월 3일, 삼강(三江) 공사에서 민병(民兵) 영장(營長) 황톈후이(黃天輝)가 부대원을 이끌고 학살을 개시했다. 그들은 대대(大隊)에 속한 과거의 지주, 부농 및 그 자식들 76명을 끌고 가서 뱀 모양의 골짜기 절벽에서 밀어서 추락시켰다. 7월부터 10월까지 같은 현의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및 불량분자 등 사류(四類) 집단의 850명을 총살했다. (광시 취안저우현지[全州縣志] 발췌)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와 ‘군중독재’의 이름으로 현의 전 지역에서 무차별 학살이 발생했다. 1968년 7월 중순부터 8월까지 1991명을 “암살단,” “반공애국단,” “흑방” 세력으로 몰아서 학살됐다. 그들 중엔 간부 326명, 노동자 79명, 학생 53명, 보통 도시거주자 689명, 농민 547명, 사류(四類)분자 및 그 자녀 918명이 있었다. (광시 린구이현지 [臨桂縣志] 발췌)
<문혁 당시 반혁명분자에 대한 농촌 마을의 비투 장면. 어린 아이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뒤의 음향장비는 간첩활동의 증거물로 압수된 듯. 문혁 이후 정부 조사에 의해 간첩 사건은 대부분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다./ 공공부문>
물론 이러한 지방지의 기록은 억압의 틈새를 뚫고 툭 삐져나온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공정부는 더욱더 삼엄하게 문혁 집단학살의 기록을 봉폐(封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방지에 산일된 파편적인 학살의 실상은 철저한 현장취재 및 질적 조사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앞으로 목숨을 걸고 진실을 밝히는 중국 내 소수 지식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계속>
(34) 보편가치, 사법독립...중국에서 절대 말하면 안될 7가지
<“자유롭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겠노라!” 1989년 6월 4일 군대가 투입돼 해산하기까지 7주간 진행됐던 톈안먼 민주화 투쟁 당시의 한 장면. 사진/ Catherine Henriette/AFP>
“칠불강(七不講).” 오늘날 중국에서 “절대로 논해선 안 되는 일곱가지” 금지된 주제를 이른다. 보편가치, 언론자유, 시민사회, 시민의 권리,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과오, 권력층 자산계급, 사법독립 등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1971년 10월 25일 유엔에 가입한 이래 줄곧 유엔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누려왔다. 유엔 상임이사국이 유엔의 헌장에 명시된 자유, 인권 등 인류의 “보편가치”를 논하지 말라며 인민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이다.
유엔 헌장 뿐만 아니라 중국의 헌법도 자유, 민주, 인권, 법치를 공공연히 선양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중국 전역에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를 써붙이고 “부강, 민주, 문명, 화해” “자유, 평등, 공정, 법치” 등의 가치를 강조해 왔다. 중국의 헌법은 자유, 인권, 법치를 “보편가치”로 내걸고 있는데, 중국공산당은 대체 어떻게 “보편가치”를 논하지 말라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나? 일당 독재의 자기모순이자 인민독재의 이율배반이다.
<중국에서 대학 및 전문학교 교사들에 내린 “칠불강.”/ BBC 중문웹>
독재에 항거하는 대륙의 자유인들
중국공산당의 탄압 때문에 다수가 침묵하고 있지만, 영리한 중국의 지식인들이 보편가치를 억압하는 중국공산당의 불합리와 비논리를 모를 리 없다. 2013년 5월 중공중앙이 하달한 “칠불강”의 내부문건을 전 세계에 폭로한 장본인은 상하이 화둥(華東) 정법대학의 장셰충(張雪忠, 1976- ) 교수였다.
2013년 당시 중국 지식계에선 중국 헌법의 이론적 모순과 수정방안을 둘러싼 “헌정” 논쟁이 한창이었다. 중국 국내외의 저명한 법학자, 철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들이 “헌정” 논쟁을 벌였다. 1920-30년대 출생한 원로 지식인들의 참여가 두드려졌다. 1958년 반우파운동 때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뚜광(杜光, 1928) 선생은 “일체의 권력은 인민에 속한다”는 중국헌법 총강 제2항과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강조하는 중국 헌법 서언의 모순을 지적했다. 아울러 헌법 총강 제1조에 명시된 “인민민주독재는 중국의 헌법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중국 헌법 자체의 논리적 모순에 예리한 메스를 들이댔다.
<2012년 홍콩 신세계 출판사에서 펴낸 뚜광 선생의 저서 “민주로의 회귀” 표지. 뚜광 선생은 중국 헌정 개혁의 방안으로 크게 “경제 시장화, 정치민주화, 문화 자유화, 사회 평등화” 등 네 가지의 테제를 제시한다. 중공정부는 출판 정지를 요구했으나 뚜광 선생은 굴하지 않았다.>
세계 중국학의 석학 프린스턴 대학 명예교수 위잉쓰(1930- ) 교수 역시 헌정 논쟁에 참여했다. 2013년 8월 절묘한 시기에 발표된 “민주와 민족주의 사이”라는 시평에서 위잉쓰 교수는 민국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 1866-1925)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내재하는 “민족”과 “민권”(民權, 곧 민주) 사이의 긴장에 착목해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제기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경우 “국민국가”의 형성이 곧 민주주의의 발판이 되었지만, 오늘날 중국은 “민족국가”의 이념이 민주주의를 잠식하는 전형적인 독일 제3제국의 전체주의를 답습하고 있다는 예리한 비판이었다. 위잉쓰 교수의 통찰에 의하면, 근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서구의 과학과 민주를 수용하는 열린 이성의 “사법서방(師法西方, 서방을 배우고 본받음)”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는데, 오늘날 중국의 민족주의는 폐쇄적인 반(反)서방주의(anti-Westernism)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그 즈음 칠불강을 폭로한 장쉐충 교수도 헌정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특히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과오를 거론조차 말라는 칠불강의 제 5항을 조롱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중국에 레닌-스탈린 방식의 독재체제를 건립했다. 대규모의 폭력과 전방위적 공포를 주요 통치 수단으로 삼는 이 체제는 무지몽매한 반인류적 특성을 보여준다.”
<2013-16년 당시 중국의 헌정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비판하고 유가 전통의 긍정적 가치를 포용하는 새로운 헌정적, 민주적 비전을 제시한 위잉쓰(余英時, 1930- ) 교수. 1930년 중국 톈진 출생으로 20대 홍콩을 거쳐 도미, 이후 미국 하버드대, 예일대, 프린스턴대 교수를 역임했다./ 사진: dwnews.com>
중국공산당의 이념 공세와 정치 탄압
2013년 헌정 논쟁에 위협을 느낀 중공정부는 중앙 당교(黨校)의 이데올로그들을 풀어 마르크스-레닌이즘과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들은 근대 입헌주의가 자산가 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라 정의한 후, 서구식 “헌정”의 칭송은 곧 “반혁명”의 일탈이라 부르짖었다.
전형적인 “중화민족주의”의 관방 이론가들은 “헌정”을 외치는 지식분자들을 서구추종자들이며, 외국산만 선호하는 “나라이주의(拿來主義, ‘가져와’ 주의, 루쉰의 용어)”로 몰아부쳤다. 결국 자유, 인권, 법치, 권력분립 등의 가치는 중국을 파괴하는 서구적 음모라는 정도의 반격이었는데,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이론적 한계와 국수주의적 자폐성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논리의 허술함 때문이었을까? 중국공산당은 곧이어 자유 지식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장쉐충 교수는 상하이 둥화 정법대학에서 파면 조치를 당했고, 2019년엔 법률가의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2014년 10월 이후 중공정부는 위잉쓰 교수의 저작을 금서 목록에 올려 놓고 있다.
지식인 장쉐충, 자유와 인권 담은 미래 중국의 헌법 제시
놀랍게도 장쉐충 교수는 지금도 법적, 정치적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인 2020년 5월, 그는 중공중앙의 거수기로 전락한 전국 인민대표대회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미래 중국을 위한 “중화통일공화국”의 헌법 초안을 제시했다. 그의 헌법 초안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으며, 자유, 평등, 인권, 법치라는 인류의 보편가치를 헌정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2019년 인권운동가와 인권변호사를 옹호한 혐의로 법률사의 자격을 박탈당한 장쉐충 전 화둥 정법대학 교수/ 사진: Kim Kyung-hoon/ Reuters>
중국공산당과의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장셰충 교수를 그저 돈키호테형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현재의 상황에서 그의 투쟁은 일개 지식분자의 고립된 몸부림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바로 오늘날 중국에는 장 교수의 투쟁을 지지하는 헌법학자들, 인권운동가 및 비판적 지식인들이 중공정부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에 맞서 꾸준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베이징대 법과대학의 장치판(張千帆, 1964- ) 교수와 칭화(淸華)대 법과대학의 쉬장룬(許章輪, 1962- ) 교수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입헌주의의 논리에 정통한 헌법학자들이며 사법적 훈련을 거친 중국 최고의 법률가들이다. 장치판 교수는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중국내 이른바 “헌정 민주(constitutional democracy)”의 담론을 이끌고 있는데, 2019년 중공정부는 그의 저서 ‘헌법학 도론(導論)’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비판하고 중국 실정에 맞는 “헌정 민주”의 실현을 주장하는 중국의 대표적 헌법학자 전 칭화대 법과대학 쉬장룬 교수/ 사진 twitter>
역시 근대 입헌주의의 전통 위에서 중국의 정치사상을 아우르는 대표적 헌법학자 쉬장룬 교수는 2018년 시진핑 정권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는 예리한 시평으로 일대의 파장을 일으켜 2019년부터 출국 금지된 상태다. 2020년 2월 쉬교수는 코로나 사태의 발발에 대한 중공정부의 책임을 묻는 시론을 발표했다. 2020년 7월 6일 그는 베이징의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처해졌고, 곧 이어 칭화대에서 해고된 상태다.
지식인 차이샤 “시진핑은 검은 세력 우두머리, 공산당은 인류의 공적”
2020년 9월 12일,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차이샤(蔡霞, 1952- ) 전(前)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의 교수는 중국의 현실에 맞는 “헌정 민주”를 실현하기 위해선 “거습(去習), 비공(非共), 변혁, 화평”의 네 단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거습”이란 “시진핑의 제거”를 의미하며, “비공”이란 공산당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의미한다. 차이샤 교수는 시진핑을 “흑방(黑幇, 검은 세력)의 두목”이라 비판하면서 “중국공산당”을 “인류의 공적,” “정치적 강시(僵尸)”라고 폄하했다.
<2020년 9월 12일 차이샤 교수는 “헌정 민주”의 실현을 위해 시진핑 퇴진, 공산당 부정, 변혁, 화평의 네 단계를 제시했다./ https://www.rfi.fr/cn/>;
문혁 시절 “흑방”은 지주, 부농, 자산가, 반혁명분자, 수정주의자 등 비판·투쟁의 대상으로 지목됐던 이른바 계급 적인(敵人)을 부르는 단죄의 단어였다. 다름 아닌 국가주석 류샤오치가 홍위병 집회에서 “흑방의 우두머리”로 비판당했다. 1967년 여름, “차이샤”는 열다섯 살, “시진핑”은 열네 살의 홍위병들이었다.
2020년 9월 30일 중공정부는 차이 교수의 당적을 박탈한 후, 흡사 문혁 때처럼 전국의 당교 조직망을 통해 대비판을 개시했는데······. 화교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다수의 중국 네티즌들은 차이 교수의 편을 들고 있었다. 50-60년대 부친이 지방 군대의 간부를 역임해서 차이 교수는 고위 간부의 자식에 해당하는 소위 “홍이대(紅二代)” 중 한 명이었다. 중국공산당을 “인류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시주석을 “흑방의 우두머리”이라 부름으로써 차이 교수는 이미 당을 버리고 선을 넘었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홍이대의 자유 투쟁이 개시되었다. <계속>
(35) “천하대치 위해 천하대란 필요”...마오, 좌파 무장을 주문하다
<문혁 시기 군중조직의 무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진. 1967년 8월 충칭 추측/ 공공부문>
1966년 12월 말 마오쩌둥은 전 중국에 곧 전개될 광란의 일대혼란을 예감하고 있었다. 게릴라 전사 마오쩌둥은 투쟁 없인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주자파 수정주의 반혁명세력이 창궐하는 당시의 중국에선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위한 천하대란”이 필요했다.
천하대란은 기존 정부 조직을 뒤흔들고 무너뜨리는 전면적 권력해체의 과정이었다. 천하대치란 표면상 군중조직, 혁명적 간부, 인민해방군의 삼결합(三結合)에 기초한 신생 혁명정권의 창출을 의미했는데, 마오의 의도와는 달리 전국 각지에선 “포탄이 터지고 화염이 치솟는 “포굉화소(炮轟火燒)”의 급변상황이 전개됐다. 결국 1968-69년 지역사회에선 행정, 사법 등 정부의 전권을 군대가 장악하는 군부독재가 펼쳐졌다.
<문화혁명 시기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선전 포스터/ 공공부문>
마오쩌둥 “노동자와 학생을 무장시켜라”
과연 마오쩌둥이 그 상황을 미리 내다봤을까? 관변 이데올로그들은 무장투쟁의 모든 책임을 사인방(四人幇)에 들씌우곤 한다. 예컨대 무장투쟁은 1967년 7월 21일 장칭(江靑, 1914-1991)이 직접 좌파군중을 향해 던진 “문공무위(文攻武衛),” 곧 “말과 글로 공격하되 무력으로 방어하라!”는 발언이 결정적 계기였다는 정도의 주장인데, 설득력이 없다.
중공중앙의 회의록을 보면, 이미 7월 18일 마오쩌둥이 우한군구의 사령관들을 불러 대담하는 자리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이 무장을 하면 왜 안 되지? 내가 보기엔 그들을 무장시켜야만 한다!”고 발언했다. 최고영도자가 군중집단의 군사무장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명령했음을 보여준다.
“반혁명 우파 척결” 대규모 군사작전
또한 1967년 8월 4일 장칭에게 직접 보낸 서한에서 마오는 이미 무장한 좌파집단도 더 본격적인 제2의 무장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서 “75%의 군대 간부들이 우파조직을 지원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당면한 문혁의 주요문제는 바로 좌파의 무장”이라고 적었다. 물론 장칭은 마오쩌둥의 서신을 중공중앙에 전달했다.
요컨대 좌파군중의 군사적 무장은 마오쩌둥의 뜻에 따라 1967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무장한 좌파군중은 반혁명세력과 “우파” 조직을 색출해 척결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에 동원됐다고도 볼 수 있다.
1967년 5-6월 후베이성 우한에서 발생한 무장투쟁을 시작으로 8월 상순부터 장쑤성의 난징, 지린성의 창춘, 랴오닝성의 선양(瀋陽), 쓰촨성의 충칭(重慶), 후난성의 창사(長沙)에서 비슷한 시기 대규모의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이미 앞서 두 차례 다뤘던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17일까지 9000여 명을 몰살한 후난성 다오현(道縣)과 그 주변의 대규모 집단학살극 역시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문혁 시기 무장투쟁 희생자들, 담장에는 “피로 피를 돌려주고, 목숨 바쳐 목숨을 되갚고!”란 구호가 보인다. 사진/ www.picturechina.com.cn>
무장투쟁 사상자 726만7000여명
군대와 경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해 장시간 평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로선 1967년 문혁 당시의 “무장투쟁”이 대체 어떤 상황인지 감조차 잡기 힘들다. 일단 피해자 규모를 짚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문혁 시절 무장투쟁의 피해자에서 대해선 세 가지의 “불완전한 정부 통계”가 있다. 1) 1978년 12월 13일 중공중앙 공작회의 폐막식에서 최고위 장성 출신 “국가원수” 예졘잉(葉劍英, 1897-1986)은 문화혁명 시기 무장투쟁 사망자를 23만7000명이라 폭로했다. 2) 1982년 12차 전회 1차 대회에서 예졘잉은 다시 4300건의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했으며, 사망자의 수는 12만3700명이었다고 발표했다. 사망자 수가 처음 폭로 때의 52.2%로 축소됐는데, 3) 1984년 5월 중공중앙은 2년 7개월에 걸친 전면적 조사 결과 무장투쟁의 사망자는 23만7000명 (“비정상” 사망자 172만 명의 13.7%), 불구가 된 피해자가 703만 여명이라 발표했다. 요컨대 중공정부 공식 통계 상, 문혁 시기 무장투쟁의 사상자(死傷者)는 726만7000여 명에 달한다.
화포, 총기, 수류탄...대규모 내전
무장투쟁에서 사상자가 무려 700만이 넘었다면, 그 자체로 문화혁명은 대규모 내전이었다. 당시 사용된 무기를 보면, 내전의 실상을 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중공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969년 9월까지 군중집단에 “탈취된” 각종 총기는 187만 7216 자루, 각종 화포 1만 266점, 실탄 4억 4271만 개, 각종 포판 39만 642개, 수류탄 271만 9545개 등이다. 당시 공영매체는 무기가 “탈취됐다”고 보도했지만, 과연 “적수공권(赤手空拳)의 평범한 백성들이 군부대의 무기를 탈취할 수 있겠는가?”(중국의 비판 지식인 양지성[楊繼繩]의 질문) 실제로는 마오쩌둥의 “좌파 지원” 명령에 따라 군대가 직접 군중집단에 무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마오쩌둥이 예감했던 “천하대란”이 사상자 700만을 낳은 거대한 규모의 내전이었을까? 그가 처음부터 내전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군중조직이 분열돼 내전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자 허둥지둥 군대를 투입해 상황을 수습하려 했던 혐의가 짙다.
문혁 시기 무장투쟁의 한 장면/ 공공부문>
마오 “인민해방군은 좌파 군중을 지원하라”
1967년 봄부터 후베이성 우한에서 대규모 군중조직이 군부와 결탁돼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최대규모의 지역 내전이 발생했다. 1967년 5월 중순 후베이성의 우한에선 53개의 군중조직들이 마구 생겨나더니 6월 3일 조직원 120만을 자랑하는 백만웅사(百萬雄師)의 사령부가 결성됐다. 백만웅사엔 정부 관원, 노동조합, 청년 단체, 노동자, 군인들까지 가세했다.
이에 맞서 과격파 노동자, 농민들로 구성된 공인총회(工人總會) 역시 대규모 연합체를 결성한 후, 관공서의 점거농성, 집단 단식투쟁 등 강력한 조반(造反) 활동을 전개했다. 우한시의 위업 계승과 질서유지를 주장하는 백만웅사와 달리 공인총회는 상하이 1월 혁명의 모델을 따라 지방권력의 전면적 교체를 요구했다.
상호비방, 흑색선전 등 말싸움에서 시작된 양측의 분규는 곧 몽둥이, 창칼을 든 집단의 패싸움으로 커졌다. 5월 말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후, 무력충돌은 더욱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문혁 시기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무장 청년들의 모습/ 공공부문>
1967년 6월 6일, 마오쩌둥은 문혁 시절 최고권위를 갖춘 중공중앙 발인의 문서 “중발(中發) [1967] 178”을 반포해서 무장투쟁의 금지를 지시하지만, 무장투쟁은 수그러들 기미조차 없었다. 1967년 6월 24일, 중공중앙은 다시 가두시위 및 무장투쟁 억제, 구속 남발의 자제, 도로·철도·항만 점거 금지, 무기 탈취 및 총기 발포의 금지를 명령했음에도 바로 그날 백만웅사는 공인총회의 사령부로 쳐들어가 25명을 살해하고 사령부를 탈환하는 기습작전에 성공했다.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이후, 군의 투입을 결정한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은 혁명적 좌파군중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문제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난립하는 수많은 군중조직들 중 하나를 딱히 “좌파”라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마오쩌둥의 호위를 부르짖고, 마오쩌둥 사상을 선양하고, 반혁명세력의 척결을 외치면서 불타협의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준(準) 내전의 상황에서 우한 군구(軍區)의 사령관 천차이다오(陳再道, 1909-1993)는 조반파 공인총회 대신 백만웅사를 혁명적 “좌파”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군사지원을 결정하는데······.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36) 위헌적 특별법을 만든다? 법치가 무너지는 신호
<2016년 중국 신장 지역 위구르 시위의 한 장면/ Wikimedia commons>
문명은 법치(法治, rule of law)다. 인치(人治, rule of man)는 반(反)문명이다. 인치의 상황에선 다수 인민이 통치자의 감정기복과 정치판단에 지배당한다. 최고영도자 한 명이 국가적 중대사의 최종결정권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일인에 집중되면 보편적인 법의 정신이 훼손된다. 불편부당한 법의 지배가 무너진다.
법치 붕괴의 첫 징후는 위헌적 특별법의 제정이다. 무슬림의 종교행위를 제약하는 중국의 특별법은 중국 헌법조항에 비춰보면 다분히 위헌적이다. 과거의 한 사건만을 특정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특별법의 제정은 정치적 입법의 혐의가 짙다. 인치란 결국 특별법이 일반법을 저촉하고 보편가치를 훼손하는 헌법파괴의 상황을 이른다.
인치에 대항하여 근대 입헌주의자들은 “법의 지배”를 제창했다. “짐(朕)의 명령”이 곧 “특별법”이 돼버리는 전제주의(despotism)를 비판하면서 입헌주의자들은 언론, 집회, 결사, 양심의 자유 등 보편가치를 수호하는 “보편 입법”의 원리를 설파했다.
인류 근대사에서 법치의 확립은 인간해방의 정치혁명이었다. 입헌주의 정치혁명의 결과, 오늘날 대다수 현대국가의 헌법에는 인권선언과 자유권 조항이 명시돼 있음에도······. 당리당략에 빠진 권력집단은 엉터리 특별법을 만들어 헌법의 기본정신을 무너뜨린다.
민주집중제 내세워 일당 독재 합리화
오늘날 중국은 입헌주의 정치혁명을 부정하는 세계 최대의 “예외적” 국가다. 중국헌법에 명시된 인민민주독재와 민주집중제는 일당독재를 합리화하고 일인지배를 정당화하는 반문명적 권력집중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1949년 10월 1일 건국 이래 1976년 9월 9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철저하게 법치가 파괴된 전제적 일인지배의 과정이었다.
마오쩌둥이 “인민공사가 좋다!”라 한 마디 하자 전국엔 독버섯처럼 죽음의 인민공사가 돋아났고, 그 결과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이 발생했다. 그가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하자 전국의 청소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가상의 적인(敵人)들을 향한 홍색 테러를 저질렀다. 그가 “사령부를 폭파하라!” 명령하자 전국에선 탈권(奪權, 권력탈취)의 기치를 내건 군중조직들이 마구 출현해 총칼을 들고 맞부딪히는 무장투쟁이 전개됐다.
<마오쩌둥의 대자보, “사령부를 폭파하라!” 1966년 8월 5일 마오가 작성한 대자보는 이후 전국적인 “탈권” 운동의 불씨가 됐다./ 공공부문>
실제적 내전의 수습을 위해 마오는 군을 파견한 후 “군은 좌파군중을 지원하라!” 명령했지만, 모든 조직들은 자신들이 “좌파”라 주장하며 반대편을 “우파”로 몰아가는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 좌우가 헷갈리고 시비가 엇갈리는 정치적 카오스였다. 그 모든 혼란은 결국 통치자가 절대권위를 갖는 반문명적 전제주의와 인격숭배의 불합리에 기인했다.
1967년 우한, 무정부적 혼란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1967년 여름 후베이성 우한에서 펼쳐졌다. 1966년 11월부터 1967년 1월 초까지 우한에는 조반파(造反派)와 보수파(保守派) 양 진영에서 수십 개의 군중조직이 출현해 난립하며 상호 격돌하는 무정부적 혼란이 심화되고 있었다. 1966년 11월 초 우창(武昌)에 최초의 노동자 조직이 결성된 후, 한커우(漢口), 칭산 등의 철강 단지에도 대규모 조반파 공인조직이 출현했다. 이들은 대부분 마오쩌둥 사상을 선양하며 지방정부의 권력교체를 부르짖는 “탈권(권력 탈취)” 투쟁의 조반파였다.
이에 대항하는 “보수파” 노동자 조직들도 생겨나서 40만의 조직원을 확보했건만, 베이징의 불승인이 떨어지자 1967년 1월 첫째 주 “보수파” 조직은 해산되고 말았다.
“보수파”가 물러서자 “조반파”는 더욱 거세게 지방정부의 권력을 빼앗는 “탈권” 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물론 당시 우한의 상황은 1967년 “상하이 1월 혁명” 이후 인근의 지방정부는 마비상태가 되는 전국적 상황과 맞물려 돌아갔다.
마오가 군중조직의 대연합을 촉구했음에도 군중 조직들 사이의 좌우대립은 내전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에 마오는 군의 개입을 결정한 후, “좌파 군중” 및 “혁명적 간부들”과 연대해서 혁명위원회를 결성하라 촉구했지만, 문제는 군대가 중앙문혁소조의 눈에 “우파”로 보이는 군중집단을 “좌파”라 인정하고 지원했다는 점이었다.
1967년 2-3월 우한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陳再道, 1909-1993)는 잔뜩 위축돼 있던 우한의 “보수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군대의 지원을 받자 보수파 군중조직은 순식간에 거대한 규모로 급성장했다. 1967년 3월 17일, 우한군구는 공인총부회를 불법조직이라 선언하고 485명의 대표들을 전격적으로 구속했다. 사흘 후, 사령관 천자이다오는 우한의 전역에 공인총부를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당 정책 따르면 좌파, 법과 질서 어기는 자들이 우파”
“누가 좌파인가? 누가 우파인가? 당의 정책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 ‘좌파’다. 법과 질서를 어기면서 탈법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이 바로 ‘우파’다······. 부르주아지도 조반파들처럼 야만적이진 않다. 그들이 보수파라 부르는 집단이 실제로는 진정한 좌파세력이다.”
<“[우한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의 개 대가리를 잘라서 우리들 열사의 영웅적 혼령에 제물로 바치자” 문혁 시절 포스터를 보면, 투쟁 대상의 이름자를 뒤집고 엑스자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 1967년 우한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를 비판하는 조반파 공인총부의 포스터/ 공공부문>
군부에 의해 “우파”의 낙인을 받은 우한의 공인총부는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군대의 지원을 받은 군중조직은 120만의 조직원을 자랑하는 백만웅사(百萬雄師)로 급성장했다. 인민해방군, 혁명적 군중조직 및 혁명적 간부집단의 3결합이 완성되는 듯했지만······. 바로 이때 최고영도자 마오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다시금 급반전됐다.
1967년 2월 말, 군부의 최고위 장성들이 집체적으로 문화혁명의 법질서 파괴를 비판한 “2월 역류(逆流)”라는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 군부에 대한 반격으로 마오는 1967년 4월 6일 중앙군사위원회 “10조 명령”을 반포했다. 군부의 “지좌(좌파 지원)” 원칙을 구체적으로 밝힌 “10조 명령”은 군중조직을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거나 반혁명세력으로 몰아 체포하는 군부의 자의적 개입을 최소화했다. 마오가 군부를 제약하자 기사회생한 우한의 조반파는 다시금 전면적 투쟁에 나섰다.
우한 군구의 저항도 완강했다. 천자아다오는 특별조사단을 조직해 조반파 공인총부가 반혁명세력임을 증명하는 법적 투쟁에 돌입했다. 3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우한 군구는 공인총부를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했다. 군의 지원을 받은 “보수파” 백만웅사는 공인총부를 해체하고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이에 맞서 “조반파” 공인총부는 조직의 복원과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결사항전에 나섰다.
<1967년 여름 희생자의 시신을 운구하는 우한의 군중세력. 사진/ 중국인터넷>
우한의 학살극...마오쩌둥, 비행기로 피신하다
그해 5-6월 우한의 무장투쟁은 악화되어 잔혹한 학살극이 이어졌다. 어린 소년들이 돈을 받고 조직적 학살에 가담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반파가 제시한 통계에 의하면, 1967년 4월 29일에서 7월 말까지 174번의 무력충돌이 벌어져 158명이 죽고, 1060명이 부상을 입었다. 후베이성 전역에서 18만 4000명의 사상자를 초래한 본격적인 내전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1967년 6월 14일 중앙문혁소조는 우한군구에 무력 사용의 중단을 촉구한 후, 좌우 양측의 대표단을 베이징에 초빙해 사태를 수습하는 대타협의 출구를 제시했다. 7월 10일, 저우언라이는 회의 장소를 우한으로 바꾼 후, 7월 14일 사태의 수습을 위해 우한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공안부장 셰푸치(謝富治, 1909-1972)와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 1922-1996)가 따라갔다.
1967년 7월 무장투쟁이 쓰촨, 윈난, 후난, 장시, 허난, 허베이 지역까지 번지고 있었다. 당시 전국의 상황을 “당파 전쟁”이라 규정한 마오는 극비리에 호화열차를 타고 우한으로 달려갔다. 우한 사태를 수습해서 평화적 분쟁 종식의 모델을 제시하려 했던 듯한데······.
1967년 7월 20일, 왕리가 호텔로 급습한 군인들에 붙잡혀 군부대로 질질 끌려가 폭행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그날 새벽 2시 우한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급히 도망가듯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야만 했다. 중공중앙은 최고영도자의 항공 여행 자체를 금지해 놓은 상태였다. 천하의 마오가 늘 타던 기차에 오를 여유도 없이 스스로 극구 꺼리던 비행기를 타고 피신해야만 치욕의 순간이었다. 대체 그날 우한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계속>
<37> 정적 제거하는 특별기관의 창설... 독재의 출발점
1967년 우한 백만웅사의 붉은 수장(袖章). 중앙문혁소조에 의해 우파로 낙인찍혔던 백만웅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오쩌둥 사상”을 보위하는 “우한 지구 무산계급 혁명파”를 자처했다./공공부분
시대가 바뀌고 제도가 변해도 인간의 권력투쟁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스미스(Paul J. Smith)의 관찰에 따르면, 구폐(舊弊)의 혁파를 내걸고 등장한 중국 북송(北宋, 960-1127)의 신진세력은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대체로 다음 5단계를 거쳐 갔다.
1) 파죽지세로 정권을 탈취한 후 주요 정부기관을 점령한다. 2) 역사적 선례가 없는 정체불명의 특별기관을 창설한다. 3) 무리한 비상수단을 써서 정적(政敵)을 제거한다. 4) 저항세력의 무력화를 위해 집요하게 추종세력을 규합한다. 5) 정변의 합리화를 위해 황권(皇權)의 절대화를 꾀한다.
이중 특히 “특별기관의 창설”은 어김없이 독재의 출발점이 된다. 독재정권은 흔히 비상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특별기관을 창설한다. 법적 제약을 최소화하고 반대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함이다. 중립, 공정, 정의실현, 구악철폐 등 혁명의 미사여구로 치장하지만, 권력독점의 잔꾀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독재정권의 특별기관은 얼마 못가 구악(舊惡)의 상징물로 전락하고 만다.
1967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있는 중앙문혁소조의 멤버들: 왼쪽부터, 장춘차오, 장칭, 저우언라이, 야오원위안, 마오쩌둥, 치번위(戚本禹), 왕리(王力), 관펑, 무친(穆欣)./공공부문
문혁의 특별기관, 중앙문혁소조와 혁명위원회
문화혁명 과정에서도 정규 정부조직 밖에 특별기관이 생겨나 큰 권력을 행사했다. 중공중앙의 핵심에서 비상대권을 행사한 중앙문혁소조와 전국에서 지방행정의 전권을 장악했던 혁명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이 두 특별기관의 창설은 곧 정상적 중앙행정의 마비와 지방권력의 교체로 이어졌다.
1966년 5월 문화혁명의 공식적 시작과 더불어 창설된 중앙문혁소조는 마오의 심복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조장 천보다(陳伯達, 1904-1989) 아래 정보통의 권력자 캉성(康生, 1898-1975),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1914-1991)이 요직을 점했다. 형식적으로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예속돼 있었지만, 중앙문혁소조는 1969년 자체 해산되기 전까지 실제적으로 중공중앙 최고의 권력기구로 기능했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 5인에는 마오쩌둥, 국방부장 린뱌오(林彪, 1907-1971),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함께 중앙문혁소조의 천보다와 캉성이 포함돼 있었다. 린뱌오는 마오의 총애를 받아 문혁 당시 당내 서열 제2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국무원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는 “황제” 마오에 충성하는 유약한 “충신”이었다. 결국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중앙문혁소조에 장악돼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중앙문혁소조는 문혁 과정에서 비상전권을 행사했다. 언론매체를 장악하고, 문예계를 관장하고, 문혁의 의제를 설정하고, 군중조직을 통어했다. 1969년 자체 해산 이후, 장칭이 이끄는 4인방은 1970년 “중앙 조직 선전조”를 형성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이 역시 마오 직속의 권력기구였다. 마오쩌둥은 그렇게 비상 특별기관을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1967년 4월 20일 베이징시 혁명위원회 성립 기념식./ 공공부문
중앙문혁소조가 중앙정치를 좌우할 때, 지방정부는 혁명위원회에 넘어갔다. 1967년 1월 31일 헤이룽장성에서 최초의 혁명위원회가 생겨났다. 이후 1968년 9월 5일 신장자치구를 끝으로 전국의 각성에 혁명위원회가 창설됐다. 혁명위원회는 인민해방군, 혁명간부 및 혁명적 좌파군중의 삼결합(三結合)을 표방했지만, 실권은 군부가 장악했다. 전국적으로 4만 8천 명을 헤아리는 혁명위원회 구성원 중 압도적 다수는 인민해방군의 장교들이었다. 특히 광둥, 랴오닝, 산시(山西), 윈난, 후베이 등지에선 현 단위 이상 혁명위원회는 81-98%를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장악했다.
마오쩌둥은 혁명군중의 자발적 기의(起義)와 탈권(奪權) 투쟁을 선동한 후, 수많은 군중조직들이 난립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곧바로 군대의 투입을 결정했다. 이로써 지방행정을 군대가 장악하는 기묘한 형태의 군부독재가 시작됐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중앙문혁소조와 지역 군부의 대립
마오의 뜻을 받들어 중앙문혁소조는 인민해방군에 좌파군중의 지원을 명령했지만, 질서 회복과 치안 유지는 군의 기본임무다. 군부는 소요와 파괴를 일삼는 조반파 혁명 군중을 적대시했다. 우한 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陳再道, 1909-1993)는 1967년 3월부터 “조반파(造反派)” 공인총부(工人總部)를 탄압하고, 지도부 485명을 체포한다. 같은 해 5월-6월 120만의 구성원을 자랑하는 “보수파” 군중조직 백만웅사(百萬雄師)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순식간에 군용트럭, 군용헬멧, 장모와 대검 등으로 무장한 준군사조직으로 성장했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들은 우한 군구가 조반파 군중집단을 진압하는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백만웅사는 조반정신을 결여한 보수파일 뿐이었고, 진정한 좌파 혁명군중은 조반의 소요를 이어가던 조반파 공인총부였다.
바로 그 점에서 1967년 7월의 “우한사건”은 중앙문혁소조와 지역 군부 사이에서 발생한 권력투쟁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오쩌둥과 중앙문혁소조는 우한의 사태를 “적대세력의 반격,” “반혁명 무장투쟁,” “중앙권력에 맞선 무장 세력의 도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천자이도가 우한의 보수세력과 결탁해 중앙문혁소조에 반기를 든다면, 새로운 “군벌시대”가 펼쳐질 수 있었다.
1967년 우한의 군중조직의 군사화./공공부문
군부의 착오, 마오의 친국(親鞫) 시작
극단 사태를 막기 위해서 7월 14일 새벽 3시 마오쩌둥은 베이징을 떠나 16시간의 기차를 타고 저녁 9시 경 우한에 도착했다. 이에 앞서 비행기를 타고 우한에 도착한 저우언라이는 마오가 체류할 둥후(東湖)호텔에 미리 가서 상황을 점검했는데, 놀랍게도 직원들 대부분은 백만웅사 소속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직원들을 모두 공인총부의 멤버들로 교체했다. 전 도시가 두 패로 갈라진 내전의 상황에서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조반파를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틀 후 7월 16일, 우한에서 비밀회의를 소집한 마오쩌둥은 단도직입적으로 우한 군구가 좌파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큰 착오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다음 날 아침 서남 지역 순방을 하다 호출을 받고 급히 달려 온 중앙문혁소조의 셰부치(謝富治, 1909-1972)와 왕리(王力, 1922-1996)와의 면담에서 마오는 우한 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가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할 경우 그를 타도할 필요까진 없다고 말한다.
7월 17일, 18일 이틀 간 저우언라이는 우한에 모인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과 군구의 영도자들과 함께 연속 회의를 열었다. 우한 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를 향해 저우언라이는 노선의 착오를 지적한 후 진정한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그는 백만웅사가 보수파이며, 공인총부가 진정한 좌파 군중조직이라 단정했다.
천자이다오는 굽히지 않고 우한의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의 해명에 따르면, 백만웅사야 말로 우한 지역 유일무이의 진정한 좌파 혁명군중 조직이었다. 그는 항변했다. “마오쩌둥 동지께선 언제나 대다수를 믿으라 하셨잖소! 간부의 대다수, 군구 전사들의 대다수, 군중의 대다수가 모두 백만웅사를 지지하고 있소!” 중앙권력과 지역 군부 사이에서 좌·우의 판단이 극적으로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결국 저우언라이는 천자이다오로 하여금 마오쩌둥를 알현(謁見)케 한다. 그때까지 마오가 우한에 있다는 사실은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비로소 우한 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에 대한 마오의 친국(親鞫)이 시작됐는데······. <계속>
2021.01.02
<38> 공정성 잃은 경찰과 군대...좌파의 혁명인가, 반란인가
<1967년 7월 20일 사건 당일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타고 진격하는 “백만웅사.” / 공공부문>
경찰이 공정성을 상실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군대가 중립성을 거부하면 어떤 상황이 야기될까? 경찰이 정권의 반대세력엔 철퇴를 가하고 우호세력엔 솜방망이를 쓴다면? 군대가 노골적으로 한 사회의 특정 세력만을 엄호하고, 지원하고, 나아가 병기를 배급해 무장시킨다면?
반(反)독재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군경(軍警, 군대와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생명으로 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공산주의는 군경의 계급적 당파성을 강조한다. “당이 총을 지배한다”는 마오쩌둥의 원칙에 따르면, 중국의 군대란 공산혁명의 무력 기반일 뿐이다.
1967년 1월 말, 수많은 군중조직이 난립하는 무정부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을 향해 “혁명적 좌파군중을 지지하라!” 지시했다. 1967년 1월 23일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국무원, 중앙군사위, 중앙문혁소조와의 공동명의로 이른바 지좌(支左, 좌파 지원)의 명령을 하달했다. 군대에 적극적으로 계급적 당파성을 발휘하라는 주문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좌파” 무장투쟁 격화
마오의 예상과 달리 혼란은 가중됐다. 군대가 한쪽 편을 “혁명적 좌파군중”이라 선언하는 순간, 다른 편은 반혁명적 우파의 낙인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기방어의 필요 때문에 좌·우파 군중집단 모두 “마오쩌둥 사상 만세!”를 외치고 “우리가 진정한 좌파!”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의 개입은 결국 무장투쟁을 증폭시키고 격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1967년 1월부터 이미 각지의 인민대중은 갈가리 찢겨서 반대세력을 반혁명집단이라 낙인찍는 극심한 내전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1967년 봄, 정치적 학살이 시작됐다. 1967년 7월에 이르면, 후베이(湖北), 장시(江西), 쓰촨(四川), 윈난(雲南), 후난(湖南), 허난(河南), 허베이(河北) 등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무장투쟁의 종식과 혁명적 좌파군중 영도 하의 ‘대연합’을 문혁의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67년 7월 초 마오쩌둥은 남방의 주요 도시를 순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한을 남순(南巡)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한은 동서남북으로 아홉 성(省)으로 이어지는 수륙(水陸)교통의 요충이며, 1911년 신해혁명의 발상지로서 정치적 상징성이 컸다. 1966년 7월, 마오쩌둥은 우한의 창장(長江)에서 노익장을 과시했었다. 1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창장에 들어가 건재함을 과시할 계획까지 세웠다.
<1967년 7월 15일 우한. “보수파” 백만웅사(百萬雄師)의 습격으로 사망한 동지들의 시신을 들고 시위하는 화궁(華工) 조반파 학생들의 시위 장면. 문혁 당시 무장투쟁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공공부문>
마오 “천자이다오, 노선 착오를 인정하라!”
마오쩌둥은 1967년 7월 14일 저녁 우한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밤 우한에서는 10명이 사망하고, 117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마오는 서둘러 공인총부의 복권, 구속자 전원 석방, 우한 군구의 공인총부 지지 등을 골자로 한 우한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곧 이어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지시에 따라 우한 군구의 책임자들을 불러서 나흘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이어갔다.
저우언라이는 우한 군구의 ‘노선 착오’를 지적하고, 우한 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와 정위(政委, 부사령관) 중한화(鐘漢華)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노선 착오’란 좌파군중 대신 우파군중을 지지한 오류를 이른다. 군구의 사령관이 “좋은 편”과 “나쁜 편”을 구분조차 못했다면, 중죄가 아닐 수 없었다. 천자이다오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7월 18일 저녁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앞에 천자이다오와 중한화를 데려갔다. 마오쩌둥은 우한 군구의 공과를 논하면서 “지공(支工)·지농(支農)의 공(功)은 인정되나 지좌의 착오는 과(過)”라 말했다. 노동자, 농민의 지원에선 성과를 보였으나 결정적으로 “보수파” 백만웅사를 지원함으로써 진정한 좌파군중을 억압했다는 비판이었다. 착오를 절대로 인정할 순 없다며 항변하는 천에게 마오는 문혁의 혼란 속에서 착오는 다반사이며, 조반파든 보수파든 대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천을 파면하는 대신 대연합의 대표로 쓸 뜻도 있음도 넌지시 내비쳤다. 잔뜩 긴장한 천에게 출구를 살짝 열어준 셈이었다.
7월 19일, 결국 천자이다오와 중한화는 우한 군구의 노선 착오를 인정하는 자아비판을 실시한 후, 곧이어 조반파 공인총부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는 파격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군부에 짓눌려 해체됐던 조반파 공인총부는 극적으로 소생했다. 그 사실을 접한 우한 군구의 부대원들과 백만웅사의 조직원들은 격분했다.
‘보수파' 백만웅사 격분...전면적 내란 상황
7월 20일 새벽 5시 10분, 8201부대의 군용트럭 21대, 선전차 6대, 지프차 3대, 세단 1대가 줄이어 둥후(東湖)빈관의 후문으로 들이닥쳤다. 백만웅사의 무장차 41대와 우한 공안(公安)의 대형 소방차 3대가 뒤를 따랐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 마오가 머물고 있음은 알지는 못했다. 그들의 표적은 국무원 부총리 셰푸즈(謝富治, 1909-1972)와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 1921-1996)였다. 백만웅사는 셰푸즈와 왕리가 간신배처럼 중간에서 우한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난 군인들은 결국 셰푸즈와 왕리를 체포해서 1.6킬로미터 밖의 우한 군구 사령부로 끌고 갔다. 그들은 공격적인 언사로 백만웅사를 모욕했던 왕리에 앙심을 품고, 그를 심하게 구타해 골절상을 입혔다. 지방의 군부대가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을 잡아서 고문을 하는 군사반란의 상황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에까지 보고된 후에야 군인들이 왕리를 풀어주면서 일단락되지만, 백만웅사와 성난 군인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게 이어졌다.
<우한의 “보수파” 백만웅사가 버스를 개조해서 무장투쟁에 사용한 장갑차. 장갑차의 옆에는 “백만웅사는 큰 강을 건넌다!”와 “우귀사신(牛鬼蛇神)을 다 쓸어버려라!”의 구호가 적혀 있다./ 공공부문>
8201부대는 성명서를 발표해 “공인총부는 반혁명세력이며, 백만웅사가 진정한 혁명적 좌파조직”이라 천명한다. 백만웅사 역시 긴급 호소문을 발표해서 8201부대와 함께 결사항전에 나서겠다 맹세한다. 우한은 전면적인 내란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 2시 경 마오쩌둥이 극비리에 숙소를 떠나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탈출해야만 했던 비상사태였다.
격정적으로 들고일어났건만, 백만웅사와 8201부대의 저항은 오래 갈 수 없었다. 1967년 7월 23일자 <<인민일보>> 제1면엔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한 셰부치와 왕리를 저우언라이, 장칭, 캉성 등 중앙정부의 거물들이 직접 공항에까지 나가서 환영하는 사진이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이었다.
<1967년 7월 23일자 인민일보 제1면. “셰푸즈와 왕리 동지가 영광스럽게 베이징에 돌아오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 장칭 등 중공중앙과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사들이 일제히 나가서 우한에서 고초를 겪고 힘겹게 귀환한 셰푸즈와 왕리를 환영하는 장면/ 인민일보>
그 한 장의 사진은 중공중앙, 특히 마오쩌둥의 의중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셰푸즈와 왕리의 귀환을 환영함으로써 <<인민일보>>는 그들을 억류했던 우한 군구가 반란집단임을 전 중국에 공표했다. 이후로도 계속 며칠간 <<인민일보>>는 백만웅사를 반혁명세력이라 낙인찍고, 우한의 군사반란을 규탄하는 사설과 기사를 연달아 내보냈다. “혁명적 좌파조직”을 자임하며 “마오쩌둥 사상의 보위”를 외치던 백만웅사는 중앙정부에 맞설 능력도, 의지도, 명분도 잃어버린 듯했다.
이로써 백만웅사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했지만, 조반파의 보복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후로 수개월에 걸쳐 후베이성 전역에서 폭행과 학살이 일어났다. 우한에서만 6만6000여 명이 상해를 입고, 600여 명이 학살됐다. 후베이성 전역에선 백만웅사에 연결된 18만4000여 명이 구타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계속>
<1967년 7월 우한 사건 당시 우한 군구를 비판하는 조반파의 구호. “우한 군구는 반드시 셰푸즈와 왕리 두 분 수장의 안전을 보장하라!”/ 공공부분>
<39> 군중을 이용해 정적을 제거한다...권력자의 수법
<홍위병 집회에서 접견식을 갖는 마오쩌둥, 1966년 10월 추정/ 공공부분>
정치는 비열한 게임이다. 정적의 제거를 위해서 권력자는 음모를 짜고 함정을 판다. 함정에 빠진 정적을 허울 좋은 법망으로 옭아맨 후에도 권력자는 한 치의 관용도 베풀 수가 없다. 권력의 시한이 다하는 순간, 죽은 정적이 산 권력을 제압하는 반전의 드라마가 허다한 까닭이다. 정적에겐 장엄한 자결도, 순교의 형틀도 허락할 수가 없다. 결국 권력자는 성난 군중을 선동해서 정적을 직접 처형케 하는 음모를 짠다. 군중의 제단에 올라간 정치의 희생물은 쉽게 부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6년 가을부터 마오쩌둥은 원한다면 언제든 류샤오치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류샤오치의 정치생명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생명까지도 마오쩌둥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마오는 정치적 식물로 전락한 류의 입에 인공호흡기를 장착했다. 과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시켜 그 호흡기를 뗄 것인가? 마오는 짐짓 모든 결정을 중국공산당 대중노선의 원칙에 따라 인민의 의지에 맡겼다. 홍위병을 이용한 정적의 처형은 정치적 불멸을 노린 마오의 한 수였다. 그의 한 수는 성공적이었나?
<“반도(叛徒), 내간(內奸, 내부간첩), 노동자의 적, 류샤오치 영구 출당!”/ chineseposter.net>
무서운 음모 “국가원수를 모독하라!”
1967년 7월, 중국 전역은 무장투쟁의 화염에 휩싸였다. 중국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7월 7일 쓰촨성 충징에서 발생한 무장투쟁에서 처음으로 군용소총이 사용됐다. 7월 8일 광둥성 남단에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300여명의 무력집단이 국경선을 넘어 홍콩으로 침입한 후, 샤타우콕(沙頭角) 경찰서를 습격해 다섯 명의 경관을 사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가장 큰 사건은 그러나 우한의 무장투쟁이었다.
1967년 7월 14일 새벽 3시 반, 마오쩌둥은 우한으로 향하는 호화열차에 올랐다. 우한의 무장투쟁을 종식시켜 남방의 혼란상을 정리하는 야심찬 남순(南巡)이었는데, 그에겐 숨겨진 계획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국가원수 류샤오치를 홍위병의 집단린치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음모였다. 당시 류샤오치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1967년 7월 13일, 베이징 건공(建工)학원 “81전투단”은 정식으로 중공중앙의 주요기관이 밀집된 중난하이(中南海) 서문 밖에 진지를 쳤다. 그들은 류샤오치를 밖으로 불러내서 혁명적 군중집단 앞에 세워 놓고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연출하려 했다. 군중 시위대는 공권력의 제재를 전혀 받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베이징을 떠남으로써 이들의 투쟁에 묵언의 지지를 표명했다. 물론 마오의 남순(南巡)은 극비리에 전개됐지만, 중공중앙과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들은 마오의 의도를 간파했다. 결국 류샤오치에 대한 홍위병의 공격을 방조하라는 시그널이었다. 22년 간 마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가 말했다. “마오가 [기차를 타고] 움직일 땐 늘 공격이 개시됐다”고.
국가원수 류샤오치의 고난
7월 14일 밤, 우한에 도착한 마오는 직접 현장에서 위태로운 무장투쟁의 광열을 실감했다. 7월 18일, 마오는 우한 군구의 사령관 천자이다오(陳再道, 1909-1993)을 불러와서 자아비판을 강요하며 우한의 무장투쟁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바로 그때, 홍위병들은 중난하이 안으로 밀려들어가 류샤오치의 숙소에 난입했다. 그들은 류샤오치와 왕광메이가 연금 상태로 머물고 있던 관저를 송두리째 깨부수고 더럽혔다. 젊은 학생들의 폭력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류샤오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의 땀을 훔치려 했지만, 홍위병 한 명이 난폭하게 손수건을 낚아챘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언어의 테러가 가해졌다.
바로 전날인 7월 17일, 중난하이 앞에 진을 친 홍위병들은 류샤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를 향해 “7월 22일까지 밖으로 나오라!”는 최후통첩을 발송했다. 건공 “81전투단”은 그날 밤 자정을 기해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들의 선언문을 보면 류샤오치에 대한 증오가 읽힌다.
“류적(劉賊, 도적 류샤오치)은 우리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마오주석을 보위하고, 당중앙을 보위하고, 무산계급독재를 보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고, 피가 흐르도록 끝까지 단식투쟁을 할 것이다. 류적이 중난하이를 나와서 전국, 전 세계의 인민들에 타도되고 박살날 때까지 우리들은 멈추지 않으리라 맹세한다!”
7월 22일까지 시한을 제시한 홍위병들이 왜 갑자기 류샤오치의 관저에 난입했을까? 마오의 지령이 있었다고 사료된다. 1967넌 7월 18일 베이징에선 중앙문혁소조가 류샤오치와 왕광메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밖에서 “류샤오치 타도!”를 외칠 때,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소수의 홍위병들이 류샤오치의 관저에 침입했던 것.
<홍위병에 비투 당하는 류샤오치 1967년 7월 18일 중난하이에서/ 공공부문>
당시 베이징의 모든 상황은 거의 실시간으로 마오에 보고됐다. 마오는 이미 이목(耳目, 정보요원)을 이용한 정교한 통신 시스템을 잘 구축해 놓고 있었다. 당일 류샤오치 비투 소식을 전해들은 마오쩌둥은 “부재 중 비투가 좋지 않겠냐?” 말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권력자의 연막일 듯하다. 류샤오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 바로 마오였기 때문이다.
류샤오치와 왕광메이, 수난의 역정
마오가 최대의 정적 류샤오치를 제거하는 과정을 되짚어 보기 위해 1966년 가을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미 1966년 10월부터 중공중앙에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자산계급 반동노선”의 대표라 비판당했다. 그해 12월 장칭은 공개적으로 류샤오치를 “당내의 흐루쇼프”라 비방했다. 12월 말, 베이징 전역에 “류샤오치 타도!” “덩샤오핑 타도!”의 구호가 난무했다. 1967년 초부터 류샤오치는 이미 정치권력을 모두 잃고 실질적으로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됐다.
중공중앙엔 특별수사대가 설치돼 류샤오치를 잡아넣기 위한 집중적인 표적수사를 개시했다. 40만 명을 동원한 대규모 조사로 류샤오치는 발가벗겨졌지만, 결정적 스모킹건은 나오지도 않았다. 류샤오치를 자산계급의 대표로, 왕광메이를 미(美)제국주의의 특수요원으로 몰고 가는 정치공작일 뿐이었다. 결론을 정해놓고 짜서 맞추는 정치쇼였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국가주석의 자리에 그대로 남겨 둔 채로 성난 군중의 표적이 되게끔 했다. 이미 중공 기관지들과 관영방송은 류샤오치에 “당내의 흐루쇼프”, “사회주의 배신자”, “주자파,” “수정주의 당권파,” “반역자,” “반동분자” 등등 매도와 비방의 낙인을 찍은 후였다. 그 중 1967년 4월 1일 “인민일보”의 제 1면에 대서특필된 “홍기(紅旗)”지의 부편집장이자 중앙문혁소조 성원 치번위(戚本禹, 1931-2016)의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가 결정판이었다.
<”반도, 내간(內奸, 내부 간첩), 공인의 적 류샤오치의 반혁명 수정주의 간부노선과 교육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라!” 1969년 추정 한 농촌의 풍경 / 공공부문
정적을 잡는 올가미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
치번위의 이 글은 표면상 1948년 영화 “청관비사(清宫秘史)”에 관한 비평문이었지만, 그 실내용은 류샤오치를 반혁명의 매국노로 낙인찍는 언어의 독화살이었다. 치번위는 류샤오치를 직접 거명하지도 않은 채로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내(黨內) 한줌의 당권파(黨權派)”를 향한 거친 공격을 퍼부었다. 특히 글의 마지막에 열거된 8조항의 질문은 인격살해의 흉기였다.
1) 왜 항일전쟁 전야에 생명철학, 투항(投降)철학, 반도(叛徒)철학을 선양했나?
2) 왜 항일전쟁 승리 이후 평화민주신당계의 투항주의 노선을 제출했나?
3) 왜 해방 이후 사회주의 개조에 반대했나?
4) 왜 계급투쟁 식멸론(熄滅論)을 선양하고 계급합작을 주장했나?
5) 왜 “3년 고난의 시기” 수정주의 노선을 고취했나?
6) 왜 1962년 이래 부패한 자산계급 세계관과 반동적 유심주의 철학을 선양했나?
7) 왜 사회주의 교육운동 중 기회주의 노선을 추진했나?
8) 왜 문혁 과정에서 당내의 한줌 주자파 당권파와 결탁해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취했나?
<1967년 4월 1일, “인민일보” 제 1면, 치번위의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 人民日報>
류샤오치의 모든 정치적 이력을 문제 삼는 8개항의 질문은 실질적으로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치번위는 8개항의 질문에 자답(自答)했다. “답은 오직 하나다! 당신은 근본적으로 베테랑 혁명가가 아니라 가짜 혁명가다! 반혁명분자다! 당신은 우리 주변에 잠자는 흐루쇼프다!” 류샤오치의 심장에 말뚝을 박고 기름을 부어 불태우는 무시무시한 언어였다.
1967년 4월 9일 홍위병들은 중난하이의 류샤오치 관저를 방문했다. 그들은 류샤오치에게 치번위가 제기한 8개항의 질문을 들이대면서 해명을 요구했다. 류샤오치가 치번위의 비판이 오류라 항변하자 한 명이 마오쩌둥 어록 소홍서(小紅書)를 들고 류샤오치의 뺨을 때리면서 소리쳤다. “독을 퍼뜨리지 말라!”
1967년 4월 10일, 새벽 6시 30분 경, 홍위병들은 왕광메이를 차에 태워 칭화대학교의 캠퍼스로 끌고 갔다. 왕광메이를 30만 군중 앞에 세우고 비투하기 위함이었다.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에게 1963년 그녀가 영부인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방문시 수카르노에서 입었던 바로 그 화려한 의상을 입으라고 강요하는데······. <계속>
<1967년 4월 10일, 칭화대학 30만 군중대회에 불려나가 비투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방문 당시의 왕광메이의 복장에 진주목걸이 착용을 조롱하기 위해 홍위병들은 그녀의 목에 탁구공 목걸이를 만들어 걸었다./ 공공부문>
<40> 30만 군중의 집단 모욕...국가원수 영부인의 수난
<1967년 4월 10일 칭화대학에서 성적 모욕을 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 공공부분>
대다수 현대국가의 헌법은 누구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재판청구권을 보장하고 있다. 또한 공정한 재판의 보장을 위해 무죄추정의 원칙, 증거재판주의, 죄형법정주의를 기본전제로 명시하고 있지만······.
정치권의 음해공작, 언론의 허위날조, 대중의 마녀사냥, 법조계의 정치편향은 끊이지 않는다. 캥거루 법정의 원님재판, 킬링필드의 인민재판, “~카더라” 통신의 인격살해가 판을 친다. 누구든 인민재판의 피고가 되면, 재판도 받기 전에 만신창이가 돼버리고 만다. 특히 한 여성이 공격의 표적이 되는 순간, 잔악무도한 집단린치가 가해지곤 한다.
1967년 4월 10일, 중국 국가원수의 영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는 30만 군중 앞에서 집단 성희롱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1963년 인도네시아 방문 시, 멋진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진주목걸이를 착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왕광메이는 강제로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채로 수십 만 군중 앞에서 극심한 성적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
류샤오치를 향한 칼끝: “당권파를 타도하라!”
1967년 4월 10일 마오쩌둥의 명언이 늘 인용되던 “인민일보” 제1면 오른쪽 맨 위 박스엔 “문화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위의 결정”이 실렸다. “이번 운동의 중점은 바로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내 당권파(黨權派)의 숙정(肅整)이다.” 1면의 박스 바로 아래는 “투쟁의 큰 방향을 단단히 장악하라!”는 “해방군보(解放軍報)”의 사설(社說)이 실렸는데, 요지는 같았다.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한줌의 당내의 당권파들은 가장 주요한, 가장 위험한 적인(敵人, 인민의 적)들이다······. 우리는 군중을 믿고,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노선을 견지한다.”
<1967년 4월 10일자 인민일보 제1면, “투쟁의 큰 방향을 단단히 장악하라!”>
당권파의 우두머리는 바로 류샤오치였다. 당권파의 “자산계급 사령부”로부터 “권력을 탈취”해서 “무산계급 사령부”를 건설해야 한다고 선전하던 시절이었다. 이미 류샤오치는 권력을 잃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정치적 식물로 연명하고 있었지만, 그에겐 마지막 임무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인민재판에 회부돼서 비투(批鬪, 비판투쟁)당해야만 하는 임무였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은퇴하고 낙향하게 해달라는 류샤오치의 간청을 물리쳤다.
이날 중공중앙의 기관지 “인민일보”가 당권파의 타도를 문혁의 제1과제로 내세운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그날 중국 최고의 명문 칭화대학교의 캠퍼스에선 “왕광메이 비투대회”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칭화대는 왕광메이를 공격하는 비투의 현장으로서 최적의 장소였다. 문화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1966년 5월 16일부터 7월 말까지 50일간 류샤오치는 베이징의 주요 기관에 공작조를 파견해서 질서정연한 계급투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부인 왕광메이가 칭화대 공작조를 이끄는 주동적 인물이었다.
왕광메이에 의해 “우파(右派)”의 낙인을 받고 공개적으로 비판당했던 칭화대 공정(工程) 화학과의 콰이다푸(蒯大富, 1945- )는 몇 달째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왕광메이를 칭화대 캠퍼스로 불러서 모욕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짜릿한 복수의 활극은 있을 수 없었다. 중국의 비판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에 따르면, 문혁 당시 칭화대 캠퍼스는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각축장이었다.
<“혁명조반파여, 연합하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철저히 깨부수자!”/ chineseposters.net>
18시간 계속된 집단 테러
1967년 4월 10일은 왕광메이의 46년 평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 새벽 6시경 칭화대학 캠퍼스에 끌려온 왕광메이는 6시 반부터 칭화대 정강산 병단(井岡山兵團)에 둘러싸여 세 시간 동안 심문(審問)을 당해야만 했다. 오전 10시, 칭화대 캠퍼스에선 “왕광메이 비투(批鬪, 비판투쟁) 대회”가 개최됐다. 새벽부터 홍위병들에게 시달려 녹초간 된 왕광메이는 구름처럼 모여든 30만 군중 앞으로 끌려 나갔다. 2시간 40분 동안 진행된 비투는 오후 1시 경 막을 내렸지만, 1시부터 왕광메이는 제2차 심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3차 심문은 오후 5시 반부터 시작됐는데 밤 10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집단테러가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18시간 넘게 진행됐다.
3차에 걸친 홍위병의 심문 내용은 녹취록으로 전해진다. 녹취록의 분석에 앞서 우선 10시 경 거행된 “왕광메이 비투대회”를 살펴보자. 미국의 좌파 지식인 윌리암 힌턴(William Hinton, 1919-2004)은 “왕광메이 비투대회” 참여자들과의 심층 인터뷰에 근거해서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67년 4월 10일, 이른 아침부터 확성기를 단 대형트럭이 베이징 시가지 곳곳을 돌며 칭화대 캠퍼스에 예정돼 있는 ‘왕광메이 비투대회’를 알렸다. 대학, 중등학교, 공장 등등 300개가 넘는 단위(單位)들에 초청장이 뿌려졌다. 대표단만 따로 보낸 단위도 있었지만, 휴일을 선언하고 단체로 참가한 단위들도 있었다. 버스들이 밀려서 도로를 메우고, 인파가 길거리에 넘쳐났다. 캠퍼스 밖까지 확성기가 꽉 들어찼다.
네 개의 의자를 붙여 만든 단상에 왕광메이가 올라섰다. 수만 명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왕광메이는 높은 자리에 놓였다. 왕광메이는 영국 귀족들이 가든파티 때 쓰는 챙이 넓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군살이 삐져나오는 꽉 끼는 입은 치파오를 입고, 굽이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성난 군중은 분노의 구호를 외쳤다. 우귀사신(牛鬼蛇神)을 타도하라!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자!’ 수만 명이 동시에 외쳐대는 구호가 파도처럼 캠퍼스에 진동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탁구공 목걸이를 목에 걸고서 비틀거리는 왕광메이의 귓전을 때렸다.” (Hinton, Hundred Day War: The Cultural Revolution at Tsinghua University [Monthly Review Press, 1972])
<수십 만이 운집한 칭화대 본관 앞 비투의 단상에 올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성적 모욕을 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 공공부문>
류빙의 증언: “모든 것은 모함이었다!”
류빙(劉冰, 1921-2017)은 문혁 당시 칭화대 당위원회 제1 부서기였다. 자택 연금 상태에 있던 류빙은 그날 아침 9시경 붉은 완장을 찬 두 명에 양팔을 잡힌 채 범인 취급을 당하며 칭화대 본관 비투의 현장까지 끌려갔다. 끌려가는 과정에서 그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왕광메이 잡아왔어? 왕광메이도 안 잡아왔는데 무슨 대회를 하지?” 사람들은 홍위병에 끌려나와 모욕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 안달이 난듯했다.
류빙은 일단 본관 밑 지하실에 감금됐는데, 그곳에서 나무의자에 앉은 채 여러 명의 감시를 받고 있는 전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 1902-1997)을 보았다. 당일 비투의 현장에 왕광메이, 펑전 이외에도 루딩이(陸定一, 1906-1996), 보이보(薄一波, 1908-2007) 등 중앙정치의 거물들, 칭화대 총장 장난샹(蔣南翔, 1913-1988)과 류빙을 포함한 200여명의 칭화대 간부들이 함께 끌려 나왔다.
대략 오전 10시 전후 해서 “왕광메이 비투대회”가 선포됐다. 단상엔 펑전, 루딩이, 장난상 등이 모두 비투의 단상에 끌려올라갔다. 콰이다푸를 비롯한 홍위병들은 그들의 팔을 잡고 머리를 짓누르는 이른바 “제트기” 기합을 놓았다. 그들은 왕광메이에 모욕을 주기 위해 얼굴에 천박한 분칠을 했다. 현장에서 직접 비투를 당하면서 상황을 또렷이 목도했던 류빙은 31년 후 출판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가주석의 부인, 중앙정치국 위원, 국무원 부총리, 최고법원의 원장, 인민공화국 장관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내가 보기에 홍위병의 모든 발언을 죄다 모함일 뿐이었다. 진정 문자 그대로 ‘죄를 들씌우는데 구실이 없어 걱정하랴?’(欲加之罪, 何患無詞)” (劉冰, <<風雨歲月: 淸華大學 文化大革命 憶實>> 淸華大學出版社, 1998)
당시 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둥지친(董继勤, 1952- )은 자발적으로 왕광메이 비투대회에 참석했던 많은 학생 중 한 명이었다. 49년이 지나 2016년 중문판 “뉴욕타임즈”와 인터뷰를 할 때, 그는 어린 시절 그의 머리에 떠올랐던 “기괴한 생각”을 얘기했다. 당시 그는 다른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비투를 당하는데, 오직 왕광메이만 서있는 모습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왕광메이가 국가주석의 부인이라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1963년 인도네시아 방문 시 류샤오치와 왕광메이의 모습. 그해 4월 12일에서 5월 16일까지 동남아의 4개국을 순방했다. 이때의 복장 때문에 왕광메이는 군중 앞에 끌려나가 성적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 공공부문>
아마도 어린 둥치친은 홍위병의 의도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던 듯하다. 홍위병들이 왕광메이만 의자 위에 올라서게 한 이유는 멀리 있는 군중에게도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탁구공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단상 의자 위에 서 있던 왕광메이는 가장 수치스러운 성적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 화려한 의상과 세련된 몸치장이 반혁명적 행위라 단죄되던 시대의 미망이었다.
물론 그날의 비투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왕광메이는 그 후 12년의 긴 세월 동안 대다수 정치범이 수용되는 베이징 창핑구의 친청(秦城)감옥에서 독방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