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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시선]2020/ 01.03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 11.23 기저질환이 된 습관성 말 바꾸기

상림은내고향 2021. 1. 1. 19:12

[이정민의 시선] 중앙일보  2020/

01.03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붕괴는 투표장에서 일어난다.’ 

민주주의 붕괴하면 국가도 추락
상대편 인정하는 상호관용 중요
권한 신중히 사용하는 자제 필요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일갈이다.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투표장’과 ‘독재’의 패러독스를 통렬하게 파헤친다. 저자들은 냉전 종식 이후의 새로운 독재는 총부리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에게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심판을 매수하고(사법부 장악) ▶상대편 주전이 뛰지 못하게 하거나 ▶게임의 룰을 바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방식(야당 무력화)으로 이뤄진다는 주장이다.
 
국회의 3연속 날치기를 보며 책을 다시 빼들었다. 예산안·선거법에 이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까지 들러리 야당을 동원해 일사천리로 밀어부친 초유의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형해화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경고음이다.
 
공수처법은 형사사법 장악의 정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법관·헌법재판관을 우리법연구회 출신등 친정부 성향의 인사로 바꿔 사법부를 재편한데 이어 논란많은 공수처 인사까지 장악하게 됐다. 대법원·헌법재판소·검찰에다 공수처 인사까지 맘대로 주무르게 된 것이다. 원안에 들어있지도 않던 내용을 공수처법에 슬쩍 끼워넣어 사실상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못하도록 변질시킨 건 범죄행위에 가깝다. 이로써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검찰을 개혁하자는 취지는 물건너갔다. 그런데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조국 전 법무장관) 기쁘고, “심장이 터질 듯”(박원순 서울시장) 기쁘단다. 통제력을 상실한 심판이 휘두르는 칼춤이 정적을 탄압하는 도구로 둔갑할 때의 비극을 통탄했던 그들과 이들이 같은 부류인지 의아할 정도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국가 추락을 동반한다.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의 추락과 ‘술탄’ 경지에 오른 에르도안 대통령이 통치하는 터키의 추락은 닮은꼴이다. 마두로와 마찬가지로 전임자 차베스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민주 지도자였다. 차베스는 집권후 곧바로 판사들을 ‘적폐’로 단죄하고 대법원을 무력화한뒤 친 차베스 인사들로 ‘사법비상위원회’라는 2중대 사법기구를 만들며 독재자가 된다. ‘매수된 심판’은 권력의 입맛에 맞는 판결로 국회·언론을 탄압하는 충견이 됐다.
 
심판 매수의 유혹은 놀랍게도 민주주의 선진국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민적 영웅이 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법원이 뉴딜정책을 좌파 정책이라며 반대하자 대법관 숫자를 늘리는 ‘대법원 재구성’ 계획을 시도한다. 헌법에 대법관 숫자 규정이 없는 걸 이용해 9명 체제의 관행을 깨고 친위세력들로 사법부를 채우려 했다. 의회가 제동을 걸어 무산시키지 않았더라면 ‘20세기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란 찬사는 사라졌을지 모른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저자들은 민주주의는 헌법·법률의 완전성으로 지켜지는게 아니라 “법적 권한을 신중히 사용하려는 ‘제도적 자제’와 상대편을 통치할 자격을 갖춘 경쟁 상대로 인정하는 ‘상호관용’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결론내고 있다. 야당을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의 파트너로 받아들이는게 민주주의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어떤가. 적폐몰이와 야당 패싱으로 일관해 온 집권세력은 결국 게임의 룰까지도 야당을 배제한채 밀실에서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선거법이 누더기가 된 건 어떻게든 자유한국당이 1당이 되는 걸 막으려는 ‘불관용’ 의 결과다. 그러다보니 내가 찍은 표가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난수표가 돼버린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제대로 된 플레이가 이뤄질리 없다. 문제는 페어 플레이가 무너질 때 민주주의도 같이 붕괴한다는 사실이다.
 
자칫 “또다른 군주제로 흘러갈 수도 있는 위험으로부터 미국식 대통령제의 초석을 닦았다”는 찬사를 받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스스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실천했다. 두차례 연임후 미련없이 시민으로 돌아갔고, 집권 8년동안 국회에 대한 거부권을 딱 두번 행사했다. 대신 “내 생각과 많이 달랐지만 입법부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여러 법안에 서명했다”는 말을 남겼다.
 
문 대통령조차 “볼썽사납다”고 한 난장판 국회를 뒤로하고 새해가 밝았다. 2020년 벽두, 문 대통령의 첫 업무는 추미애 법무장관 임명 재가였다. 국회의 인사청문 보고서 없이 임명된 장관(급) 수는 23명으로 늘었다. 집권 32개월 동안의 기록이다.
 
문 대통령이 했다던 “인사청문회 때 많이 시달린 분들이 일을 더 잘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의 주인공 나폴레옹이 연상돼서다.

 

01.24  메시아는 없다

계속되는 시위로 곤혹을 치르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한국에선 상종가다. 보수 정권 10년의 ‘적폐’와 적폐 청산을 주문처럼 외며 집권해 ‘신 적폐’를 쌓은 진보 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청량제가 되고 있다

국민의 희생 설득하는 게 지도자
메시아인 양 포장하는 건 기만
포퓰리즘으로 부강해진 나라 없어

마크롱은 2017년, 문재인 대통령과 나흘 차이로 취임했다. 그는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중도 사퇴하고 ‘앙 마르슈(전진)’를 창당, 단박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좌도, 우도 아닌 중도를 표방해 돌풍을 일으켰다. “지난 수십년간 좌·우파 정치인들은 공공 지출을 증가시켜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겨버렸다. 현실에 맞설 용기가 없어 아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떠넘기는 비겁한 행위를 했다.” 프랑스를 저성장·고실업의 늪에 빠뜨린 정치권의 무능을 공격하며 ‘프랑스병’ 치유를 장담한 39살 청년의 패기에 유권자들은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웅변’이 아닌 ‘실천’에서 드러났다. 집권하자마자 부유세 폐지, 법인세 인하, 복지예산 삭감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더니 2018년엔 유류세 인상까지 단행했다. 파리 교외에 살며 자동차로 출퇴근해야 하는 중산층·서민들이 유류세 인상에 반발했다. 자동차 사고에 대비해 차안에 의무적으로 비치하게 돼있는 형광빛 노란조끼를 입은 성난 운전자들의 시위는 마크롱 퇴진 운동으로까지 번졌다. 지지율이 20%대로 곤두박질쳤다. 실업이 줄고 경기가 반등하면서 그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집권초 ‘해고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었더니 기업의 고용이 살아난 것이다.
 
이번엔 연금개혁에 올인하고 있다. ‘더 일하고 덜 받는’ 연금 개혁은 역대 정권이 모두 실패한 뜨거운 감자다.  저항은 전 국민적이다. 프랑스 철도 노조는 역대 최장 파업기록을 갈아치우고 연일 기록 경신중이다. 마크롱은 퇴직후의 대통령 특별연금(월 2500만원)을 포기하는 배수진을 치며 노조 설득에 나섰다. 문제를 피하지 않는 소통의 리더십은 ‘노란조끼’ 시위 때도 발휘됐다. 국가 대토론회를 열어 노조와 머리를 맞댔다. 자신을 ‘친 기업’이라고 공격하는 노동자들 앞에서 거침없이 희생을 요구했다. “일을 덜 하면서 돈을 더 벌수는 없다. 세금을 줄이면서 정부 지출을 늘릴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기업을 지키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크롱 개혁의 성패를 예측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표 떨어질 걸 감수하면서,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지도자의 당당함과 리더십이 그를 빛나게 한다. 선거가 아닌, 국가의 내일을 생각하는 정치가(statesman)다운 품격이다. 미국의 국부격인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경구가 생각난다. “이 시대의 근원적 위기의 징후는 국민에 대해 희생을 요구하는 지도자가 나올 수 없게 된 데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자신을 희생하는 일에 기꺼이 나설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모두 희생을 거부한다면 공멸할게 뻔하기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다. 모두 죽는 것 보다 나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걸 이끌어야 하는 게 지도자의 숙명이다. 
 
4월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 장밋빛 공약이 넘친다. 공공 무료 와이파이로 데이터 0원 시대, 만 20세 청년 전원에게 3000만원씩 출발자산 지급, 반의 반값 아파트 공급…. 가까스로 짜맞춰서 겨우 2% 성장하는 형편엔 무리한 포퓰리즘 공약이다. 그런데도 “좋은 포퓰리즘” “부모 찬스가 없으면 사회 찬스라도 써야 한다”며 당당하다. 메시아 강림을 믿기라도 하는걸까. 표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뻔뻔함과 무책임의 극치다. 사악함마저 느껴진다.
 
타다 금지법을 발의한 민주당이 내건 벤처 4대강국 실현 공약은 모순을 넘어 ‘초현실적’이다. 벤처 강국 운운하기 이전에 타다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내는게 정치가 할 일이다. 그랬더라면 벤처·스타트업계 대표들이 ‘규제개혁비례당’ 을 창당하겠다고 나서는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타다 금지법을 놔둔채 벤처 강국 운운하는 건 총선을 노린 말장난에 불과하다. “택시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혁신적 영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말도 그렇다. 여기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깔렸다. 그러나 책임있는 지도자라면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모두를 만족시킬 해결책은 없다고 말해야 옳다. 조금씩 희생하고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게 진짜 지도자다.
 
‘유권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조삼모사 식의 현란한 눈속임과 달콤한 레토릭에 속아넘어가 부강해진 나라는 없다. 자신이 메시아인양 포장한 정치인의 포퓰리즘이야 말로 배격해야 한다. 국민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영속성 마저 위협하기 때문이다. 

 

02.06. 4·15 총선 읽기

전문가들은 선거를 좌우하는 세가지 요소로 대통령 지지율, 선거 구도, 민심(시대정신)을 꼽는다. 건국 이래 20차례 치러진 총선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집권 중반을 전후해 치러지는 총선은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강하다. 이럴 경우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 고전한다. 

시대정신 간파하는 정당 나오면
총선도 대선 못잖은 파장 일으켜
무당층 기권땐 현 정치구도 유지

선거 파장이 대선급이었던 총선이 몇번 있었다. 극적 반전으로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꿨던 경우다. 10대(1978년), 12대(1985년), 14대(1992년) 총선이 그랬다. 보수정권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16대 (2000년)총선에선 야당 한나라당이 집권 민주당을 상대로 133석 대 115석으로 승리해 정국을 요동치게 했다.
 
10대 총선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폭발한 선거였다. 집권 공화당(득표율 31.7%)은 친위 세력인 유정회(국회의원 77석) 도움 등으로 의석의 우위는 지켰지만 득표율에서 제1야당인 신민당(32.8%)에 1.1%를 졌다. 결국 이듬해 10·26이 일어나면서 유신체제 몰락으로 이어졌다.
 
신한민주당 돌풍을 일으킨 12대 총선은 야권의 두 거목 김대중·김영삼을 정치규제로 발묶은 상황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두 정치9단은 대리인을 내세워 판을 뒤집었다. 여당인 민정당에 기울어진 운동장(지역구 득표 1위 정당이 비례대표 3분의 2를 차지하는 선거법), ‘민정당 2중대’라는 비난을 받으며 선명야당 노릇을 포기했던 제1야당 민한당을 외면한 민심을 공략했다. 총선을 보름 앞두고 창당된 신한민주당은 서울에서 출마자 전원을 당선시켰다. 그야말로 돌풍이었다. 민한당은 와해됐고, 신한민주당이 103석의 제1야당으로 우뚝섰다. 여기서 나타난 민의는 전두환 5공 정권이 직선제 개헌(6·29선언)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4대 총선은 여권의 분열과 야권의 통합이란, 좀체로 볼수 없는 구도로 진행됐다. 여소야대의 13대 총선 결과를 3당 합당으로 뒤집고 200석을 넘겼던 공룡 민자당은 개헌선(180석) 확보를 장담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과반에 모자라는 149석에 그쳤다. 당내 계파 갈등으로 비주류에 대한 공천 학살이 벌어지자 탈락 후보들이 통일국민당과 무소속으로 출마해 보수표를 분산시켰다. 반면 야당은 신민주연합과 꼬마민주당이 연합해 민주당 단일 대오로 뭉쳐 골리앗을 쓸어뜨렸다.
 
70일 남은 4·15총선은 어떤 선거로 기록될 것인가. 민주당은 적폐세력 심판을, 한국당은 무능정권 심판을 내세우고 있다.
 
여론조사의 종합적 신뢰도가 점점 떨어져가는 상황이긴 하지만, 한국갤럽 조사(1월 28~30일)에 따르면 2주전에 비해 대통령의 지지율은 45%에서 41%로, 민주당 지지율은 39%에서 34%로 하락했다. 그럼에도 한국당 지지율(22%→21%)은 오르지 않는다. 무당층이 27%에서 33%로 덩치를 키우고 있을 뿐이다. 국민 10명중 3명이 여야의 기득권 정당에 등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국 사태에 이은 검찰 개혁 파동, 잇단 인사 실패, 곤두박질치는 경제 같이 어둡고 답답한 터널을 지나는 국민에게 정치권은 여야할 것 없이 무능과 독선, 기득권 지키기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 결과다. 
 
정치에 실망한 무당층이 투표장에 가지 않고, 민주당과 한국당의 견고한 지지층만 투표하는 상황이 되면 현재와 별반 다를바 없는 구도가 유지될 것이다. 정치는 지금과 큰 변화가 없게 된다. 21대 국회가 20대 국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된다면 국민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유권자의 표심은 안개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잉태돼 있다. 이 정치적 갈망은 ‘시대정신’을 간파, 흐름을 짚어낼줄 아는 정당과 정치인과 만날 때 예상을 깨고 메가톤급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이변을 낳았던 앞선 몇차례의 선거처럼 정치를 질적으로 변환시킬 것이다.
 
지금 여의도는 인재 영입 경쟁이 뜨겁다. 그런데 시중의 반응은 거의 무관심에 가깝다. 폄하하는 것은 아니나 지난 선거에서 영입 인사들이 일회용으로 소모된 다음 폐기되는 것을 거듭 목격했다. 인재 영입은 당권파들의 내 사람, 내 세력 늘이기를 위한 쇼라는 것을 이제는 다 안다. 

 
이벤트에 몰두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은 놓치거나 방치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대표적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 사태를 대하는 여야의 자세는 놀라우리만큼 소극적이거나 무지하다. 국민에게 절실한 문제는 이런 것들일 테다. 나와 내 가족의 건강과 생명은 안전한지, 경제는 튼튼한지, 외교와 국방을 믿고 맡길 수 있는지, 그리고 번영된 대한민국이 유지될 것인지… 이런 문제에 답하는 게 시대정신이다.

 

02.27  중국만 빼고…

마음 속에 성역과 금기(禁忌)를 갖고 있으면 행동이 위축되게 마련이다. 나랏일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같다. 세월호 참사,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참모들이 감히 대통령 관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걸 보면 말이다. 쏟아질 질책이 두려웠던가. 그들은 결국 ‘세월호 7시간’ 미스테리의 공범이 됐고, 지워지지 않을 역사 속 오점으로 남게됐다. 

중국 눈치보기 급급, 방역 실패
한국은 되레 역병국가 취급돼
‘운명 공동체’ 망상서 벗어나야

역사책에 기록될 또 하나의 사건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정부의 무능과 방역 실패가 초래한 재앙이다. “머지않아 종식될 것” “세계의 모범사례”라는 자화자찬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한국은 확진자 수 세계 2위의 코로나 국가라는 오명을 얻게 됐다.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제한하는 나라가 37곳이다. 코로나 피해국에서 순식간에 가해국으로 역전됐다. ‘구명조끼 입고 그대로 있으라’는 황당한 지시를 따랐다가 화를 당한 세월호 희생자와 다를 게 뭔가.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중국만 빼고’다. 대통령은 입으론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강력한 조치” “전례없는 강력한 대응”을 거론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중국 봉쇄 조치는 내리지 않고 있다. 잠가야 할 빗장은 열어둔 채 대구·경북(TK), 신천지가 진앙지라도 되는 양 ‘강력 봉쇄’ ‘전수 조사’를 입에 올린다. ‘우한 폐렴’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면서 보도 자료엔 버젓이 ‘대구 코로나19’를 올리는 정부다.
 
봉쇄를 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치 않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 사태의 원인”(박능후 복지장관), “중국의 영향은 크지 않다”(박원순 서울시장)고 주장할 뿐이다. “중국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한 문 대통령의 발언에 열쇠가 있다고 본다. 한·중 운명 공동체론은 집권층 내부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역사 인식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의 성장이 한국 경제에 위협이 될 것이란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생각이 다르다”며 “양국은 일방의 번영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운명 공동체”라고 강조했다. 한국을 ‘소국’으로 폄하하며 “중국몽과 함께할 것”이라고도 했다.
 
운명 공동체 인식은 친중 반미 역사관과 뿌리가 같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역사관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작고한 이영희 교수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신중국의 탄생을 찬양한 반면 미국은 제국주의 속성을 들어 비판한, 그의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등은 19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였다. 문 대통령도 “대학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이영희 선생이었다”고 밝혔다. 자서전 『운명』에서다. “미국을 무조건 정의로 받아들이고 상대편은 무찔러버려야 할 악으로 취급해버리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겨주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베트남전에서 누구도 미국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을 시기에 미국의 패배와 월남의 패망을 예고했다. 적어도 글 속에서나마 진실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읽는 나 자신도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교수는 훗날, 당시 자료의 빈약함 등으로 문화대혁명을 미화한 부분의 오류를 인정했다. 그러나 현 집권세력 내부의 친중·반미의 도그마는 바뀌지 않은 것같다. 이 정부들어 유별난 대중국 저자세와 눈치보기로 사달이 난게 한두번이 아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한 3불 입장표명 강요, 한한령(限韓令), 대통령 방중때의 혼밥 등 외교결례, 한국 취재진에 대한 중국 경호원 폭행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코로나 사태 와중의 도를 넘는 중국 눈치보기로 국민들은 또 한번 모멸과 치욕감을 느끼고 있다. 환구시보엔 “상황이 가장 엄중한 나라는 한국이다. 중국은 한국의 역병이 중국으로 넘어오는 걸 막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글이 게재됐다. 코로나를 퍼뜨린 중국이 오히려 한국을 역병국가 취급한 것이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애당초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문제는 과학과 실용의 논리로 접근했어야 했다. 그런데 시진핑 방한이나 총선 같은 정치, 이념적 논리로 풀어가려다 철퇴를 맞은 셈이다. 이제와서 누굴 탓하겠는가. 용도 폐기된 낡은 이념의 환상에 사로잡혀 민주 대 반민주, 친미 아니면 친중의 이분법에 가두고 있는 얼치기 진보의 이념 편향이 정상적인 판단을 방해하고 있다. 정치적 수사(修辭)는 될지언정 국익을 지키려 다투어야 하는 국가간 관계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운명 공동체’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다.

 

03.19  코로나 의병들에게 갈채를

대구가 코로나 사태의 고통을 겪은 지 한 달을 넘어섰다. 아직 온전히 터널을 벗어났다고 보긴 이르다. 오히려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터널의 한 켠에서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공동체적 삶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하며 위대한 시민성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물 빠진 갯벌에 온갖 퇴적물이 드러나듯 코로나19 사태의 어둠이 쌓아온 부유물의 형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정부, 방역모범국 생색낼때 아냐
사태 악화 막은건 의료진 헌신
바이오 강국 향한 물꼬 터줘야

#의료 코리아
 

중국발 감염원 차단과 초기 방역 실패로 궁지에 몰렸던 정부가 자화자찬으로 돌아섰다. “전면적 입국 금지의 극단적 선택 없이도 방역에 성공했다.”(문재인 대통령) “한국이 세계 방역의 모범 사례.” (박능후 복지부장관) 과연 그런가. 방역 모범국이란 찬사는 초기에 빗장을 걸어 잠가 피해를 최소화한 대만(67명 확진·1명 사망)과 싱가포르(243명 확진·사망자 없음)에 돌아가야 맞다. 그래도 한국이 모범국으로 칭송받는다면 그건 순전히 시민들의 몫이다. 무엇보다 우수한 의료 인력과 인프라, 의료진의 헌신의 공이 크다. 초반 방역에 실패한 4국(중국·한국·이탈리아·이란) 중에서 한국만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은 건 의료진의 기민한 대응 때문이다.
 
대구는 코로나 대응의 전범 도시로 통한다. 이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한 인사의 전언이다. “코로나 초기, 신천지 교회를 중심으로 하루 확진자가 수백명씩 나오자 민간이 발 벗고 나섰다. ‘메디 시티’를 위해 대구는 이미 의사·한의사·치과의사·약사·간호사 등 의료 5단체가 ‘메디시티협의회란’걸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협의회가 산(産)·관(官)·학(學)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대구 시내 병원들이 자발적으로 코로나 대응에 참여하도록 일사불란한 대응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병원 병상으로는 환자를 다 수용할 수 없는 문제에 부닥쳤다. 연수원 같은 병원 외 시설을 써야 하는데, 생활치료센터라는 게 따로 법규가 없다 보니 정부와 지자체가 선뜻 나서지 않으려 했다. 의료진이 밤샘 토론을 벌였다. 그래도 결국 이 방법밖에 없었다. 권영진 시장도 건의를 받아들였다. 코로나 사태의 영웅은 시민들이지 정부가 아니다.”
 
G7 국가인 이탈리아에선 왜 대구 방식이 먹히지 않았을까.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는 이탈리아의 의료사회주의에 해답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탈리아의 의사·간호사는 모두 국가 공무원이다. 진단·치료·입원이 모두 무료다. 방역 실패의 원인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한경 다산칼럼)  
 
트럼프 대통령도 화제로 삼을 만큼 관심을 끈 드라이브 스루 검진 역시 병원과 지자체에서 시작된 아이디어다. 하루 1만건 정도를 소화해내는 빠른 검진은 씨젠·솔젠트 같은 진단키트 개발업체의 발 빠른 대응이 주효했다. 

#코로나 의병  

의사·간호사 등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자원봉사자는 일손 부족을 메운 ‘코로나 의병’들이다. 정부가 시진핑 방한 같은 정치논리에 빠져 봉쇄의 유불리를 저울질하고, 일본과 부질없는 기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의병들은 땀 흐르는 방호복을 입고, 벤치 한켠 쪽잠을 자며 일손을 보탰다. 고글 자국 선명한 이마, 방호복 갈아입을 때의 상처에 덧댄 얼굴 붕대 자국은 생명을 건져낸 자랑스러운 상처다. 이들에게 기꺼이 무료 도시락을 싸 나른 시장 상인들의 손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민들은 외출을 자제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마치 잘 짜인 거대한 2인3각 경주를 보는 듯하다. 대구를 찾은 ABC기자는 “이곳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정적과 고요만 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위기에 더욱 강인해지는 불굴의 DNA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꿔온 원동력이란 걸 말이다.
 
코로나 사태도 언젠가 종식될 것이다. 하지만 시련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국민들의 노력과 희생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의료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방역 모범국으로 인정 받은 걸 생색 낼 주인도, 그 때도 아니다. 규제의 벽을 허물지 못해 바이오 강국으로 뻗어나가지 못한 부분을 과감히 뜯어고쳐 이참에 물꼬를 터줘야 한다.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산 민간의 선진 의료 인프라와 우수한 의료 인력은 이미 입증된 터다. 무엇을 망설인다는 말인가. 관념과 이상에 치우친 권력의 이념은 한순간에 국민의 목숨과 재산을 위험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인식을 과감히 바꿔야 할 때다. 그게 코로나 사태의 교훈이다.

 

04.09  좀비 정치 퇴출의 날

2019년 한국인이 가장 많이 봤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좀비가 된 왕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왕의 후광을 업고 세도를 누려온 외척 조학주(영의정)는 권력에 대한 탐욕을 놓지 못하고 죽은 왕을 되살리려 생사초를 먹인다. 죽지 못한 왕은 ‘해가 뜨면 잠이 들고, 해가 지면 깨어나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는 끔찍한 역병’에 걸려 좀비가 된다.

‘코로나 이후’ 새 도약 하려면
진영 대결, 탐욕정치 벗어나야
주권자인 유권자 판단에 달려

제작자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조선판 좀비 영화는 ‘좀비 정치’의 추악한 구석을 꽤 잘 묘사하고 있다. 권력 그 자체를 탐해 국정을 농단하는 게 좀비 정치다. 조학주는 죽은 왕을 좀비로 만들어 권력을 도둑질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해내지도, 전국으로 번져가는 역병을 다스리지도 못한다. 왕위 승계 1순위인 세자 제거에만 혈안이 될 뿐이다.
 
정치가 권력에 대한 탐욕과 맹목적 집착에 빠질 때 그것은 폭력에 다름 아니며,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꼭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21대 총선이 엿새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감염병 사태 속에 치러지는 이번 총선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선거’가 될 판이다. 우선 투표용지부터 좀 기이하다. 기호 1, 2번이 빠진채 3번부터 시작되는 비례대표 투표용지라니. ‘한국판 좀비 정치’가 낳은 기형적 권력다툼의 산물이다. 35개 정당명이 적힌 비례 투표용지는 길이가 48.1㎝에 달한다고 한다.
 
어쩌다 이런 괴상한 투표용지가 만들어졌는지 되돌아보는 것은 이 시점에서 중요하다. 퇴출시켜야 할 좀비 정치의 단초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곗바늘을 되돌려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선거법·공수처법 공방으로 돌아가보자. 공정과 정의로 치장됐던 가림막을 거둬내자 위선과 꼼수, 추악한 권력 다툼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사표(死票)를 막고 다당제 정치를 열겠다고 선전했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사기극’으로 끝났다. 미래통합당에 이어 민주당마저 위성 비례정당 창당에 뛰어들면서 군소 정당들의 입지는 더 쪼그라들게 됐으니 말이다. 이럴 바에야 비례대표제를 없애자는 말이 나올 정도니, 개악도 이런 개악이 없다.
 
민주당과 정의당의 뒷거래 논란이 무성했던 공수처법의 미스테리도 벗겨지고 있다. 나라를 두동강 냈던 조국(전 법무장관) 사태에도 대통령은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 없었다. 드러내놓고 조국 무죄를 외치는 위성 정당(열린민주당)에 여권 핵심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것과는 무관한 것일까. 이 와중에 살인 전과 등 중범죄를 저지른 후보까지 공천장을 준 어떤 정당은 8억원이 넘는 선거보조금을 따내 누더기 선거법의 ‘과실’을 챙겼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러려고 몸싸움에 날치기까지 하면서 선거법을 밀어부쳤단 말인가.

 

좀비 정치는 권력이 주권자인 국민에게서 잠시 위임받은 한시적 권한이란 걸 잊을 때 기승을 부린다. 이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너른 광장이 아니라 달빛 음습한 밀실을 선호한다. 민생이나 국익이 아니라 이분법적 진영논리와 맹목적인 당파성을 강요한다. 권력 싸움엔 기세를 올리다가도 민생이나 눈앞의 현실 문제를 푸는 데는 무력하다.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니, 대안은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만 되풀이한다. 퇴출돼야 할 좀비적 행태다.
 
전 지구적인 코로나 사태로 세계는 문명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종식되더라도 세계는 이전과 절대 같아지지 않을 것”(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란 전망이 아니더라도, 감염병이 인류 역사의 물길을 바꾼 사례를 찾는건 어렵지 않다. 유럽 인구 3분의 1을 절명케 한 흑사병은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하던 중세에 종지부를 찍고 근대의 문을 여는 단초가 됐다. 채무국이던 미국이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패권국으로 올라선 계기를 스페인 독감의 전파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코로나가 바꿀 미래 현상으로 원격의료, 원격근무, 온라인 교육, 감시·추적의 일상화와 함께 반세계화의 확산등을 꼽았다. 한국은 세계화의 흐름을 낚아채 자유무역의 수혜를 받아 성장했다. 코로나가 바꿀 문명의 대전환이란 조류에 올라타야 새로운 도약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시대착오적인 진영 대결정치와 탐욕의 정치로는 안될 일이다.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는 퇴행적 좀비 정치가 계속된다면 오히려 생존이 위협받게 될지도 모른다. 권력을 위임했던 주권자인 유권자가 좀비 정치 퇴출에 나서야 한다. 다시 ‘유권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04.30  보수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

‘문재인 정권이 야당 복 하나는 천복을 타고났다’는 속설은 공식이 됐다. 21대 총선도 결국 미래통합당의 참패로 끝났다. 180석 대 103석. 궤멸 수준이다. 주권자들은 반성과 변화를 보이지 않는 통합당에 4연속 선거 참패란 참담한 성적표를 안겼다. 

선거용 가짜 보수와 결별하고
공동체 위한 포용적 대안 절실
보수→실용·미래가치 앞세워야

코로나 탓할 게 아니다.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고 변화의 물결을 거스르며 역주행을 거듭해온 대가다. 지난 4년여, 통합당의 모습을 복기해보자. 입만 열면 ‘보수’ 타령이었다. 인명진 비대위가 가장 먼저 한 일도 당헌 당규에서 사라졌던 ‘보수’라는 용어를 되살린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 출범의 견인차가 됐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폐기됐고, 자유 시장경제와 자유 통일을 다시 전면에 내걸었다. 간판도 자유한국당으로 바꿨다.
 
홍준표 체제는 한술 더 떴다. 대중의 감수성과 동떨어진 천박한 시대인식을 드러내며 품격 잃은 막말로 보수를 희화화했다. “뇌물 먹고 자살한 사람” 같은 선동이 보수층을 결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겠지만, 결과는 보수의 텃밭이던 PK(부산시장·경남지사)마저 민주당에 내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2018년 지방선거에서 통합당이 당선된 곳은 대구시장·경북도지사뿐이다)
 
황교안 체제는 애당초 확장성의 한계를 잉태하고 있었다. 탄핵과 선거 패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원인 분석이 있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법무장관·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인물을 간판으로 내세울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통합당은 탄핵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징적 인물을 ‘보수의 아이콘’으로 둔갑시켰다. 삭발한 머리에 붉은 띠 두른 강경투사의 이미지가 투영될 때마다 국민들 뇌리엔 탄핵의 기억이 더욱 또렷하게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통합당은 무조건 싫다’는 비호감도가 60%나 나오는 것 아닌가. 애지중지해온 ‘보수’는 ‘주홍글씨’가 됐다.
 
“지키기 위해 개혁한다”(에드먼드 버크)는 말은 보수가 계승해야 할 정신의 요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걸 핵심 가치이자 미덕으로 삼는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공동체의 안전과 이익이 붕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혁신하는 게 진짜 보수다. 자유가 주는 거대한 힘이 사회와 국가발전의 토대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만 열면 ‘보수’를 외쳐온 통합당은 자신의 이익에 민감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데는 둔감했다. 코로나 사태속 치러진 선거에서 코로나 국난 극복이란 의제를 외면하고 정파적 이익을 앞세운 정권 심판만을 부각했다. 성장만 강조했지 성장의 과실이 공동체에 고루 퍼지도록 하는 분배 문제에 침묵했다. 소외되고 낙오된 약자를 위한 포용적 대안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냉전적 사고에 빠져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보수는 기득권과 가진 자의 대변자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제 가짜 보수, 선거용 보수와 결별해야 할 때다. 통합당은 4·15 총선으로 ‘영남+강남당’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민주당 지지율이 신장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남3구의 민주당 의석수는 줄었지만 득표율(43.6%)은 20대 총선(40.7%)때보다 2.9%포인트 높아졌다. 영남에서 범진보 진영의 의석수(7명)는 절반으로 줄었지만, 민주당의 득표율은 모두 올랐다. 부산은 37.8%→43.5%, 경남 29.8%→37.1%, 대구도 24.4%→28.5%로 높아졌다. “딱 4월 15일까지만 통합당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던 대구 시민의 말이 엄포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보수를 대체할 키워드는 ‘실용’과 ‘미래’가 돼야 할 것이다. 4차산업 혁명이 초래한 초지능·초연결 시대에 불어닥친 코로나 효과로 세상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신천지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생산과 소비패턴의 변화,AI가 바꿔놓을 노동·교육 현장, 정부와 국가의 역할 변화를 진보-보수의 프레임으론 감당할 수 없다. 더더욱 기득권 보수가 차지할 자리는 없다.
 
한가지 희망은 민주화 이후 작동해온 민심의 균형추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득표율은 민주당 49.9%, 통합당은 41.5%였다. 2017년 대선 때 범 진보득표율(47.3%)과 이번 비례대표의 범 진보득표율(48.19%), 그리고 2012년 문재인 후보 득표율(48.02%)이 엇비슷하다. 통합당으로선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셈이다.  
 
2012년 대선때 박근혜 후보는 당헌당규에서 ‘보수’를 지움으로써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니 ‘보수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는 건 이미 입증된 보수 집권전략 아닌가. 

 

05.18  세종 치세를 꿈꾼다면…

긴급재난지원금이 시중에 풀리기 시작했다. 시행 닷새만에 지급대상 가구의 절반 가량인 997만 가구가 신용·체크카드로 지원금(6조6732억원)을 신청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었거나 가계 수입이 크게 줄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사람들에겐 가뭄의 단비다. 

반대파 황희 발탁한 용인술
실용적 리더십이 성군의 비결
이젠 ‘코리아 드림팀’ 만들어야

아직 사용처 집계가 나오지 않아 이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원금이 골프용품·고가 와인이나 명품백 등 사치품, 피부과·성형외과 시술같은 용도로 쓰였을 개연성이 보여서다. 이런 소비를 탓하자는게 아니다. 고가품·사치품도 많이 팔려 경기 회복의 마중물 노릇을 한다면 ‘좋은 소비’가 될 것이다. 문제는 재난지원금(12조2000억원)중 3조4000억원이 적자 국채를 찍어 충당한 돈이란 점이다. 적자 국채가 뭔가. 미래에 쓸 돈을 미리 가불해 쓰는 거다. 단순하게 말하면, 자녀·손자 세대가 낼 세금을 미리 당겨서 명품 백 사고 성형시술 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랏돈 쓰는 데 우선순위를 정하는 건 아주 전문적 ‘기술’이다. 기획재정부가 애초에 소득 하위 50% 지급을 주장하고 나선데는 논리적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전 국민 지급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고 100% 지급을 밀어붙이면서 스텝이 꼬였다. 세수 구멍이 생기자 ‘가진 자’들이 자발적 기부를 하라며 느닷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고나왔다. 무능 혹은 과욕을 부린 데 대해 쏟아질 화살을 물타기하려는 꼼수라는 비난을 들을만하다. 애당초 기재부 안대로 했으면 됐다. 재난지원금은 저소득층에 한정하고, 남은 재정여력으로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의 파산으로 인한 실업 사태를 막는 데 집중 투입하는 게 효율적이고 근본적인 처방이었다.
 
진짜 큰 돈 쓸 일은 지금부터 많아진다. ‘한국판 뉴딜’을 표방한 정부는 고용보험 확대, 공공 일자리 100만개, 전국민 기본소득 지급 같은 아이디어 꾸러미들을 하나씩 풀어놓고 있다. 공동체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는 필요한 정책들이다. 다만 재정 건전성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면서 돈을 써야 하는, 그야말로 고차 방정식이란 데 어려움이 있다. 정책 효과가 크지 않은 데 허투루 쓰이는 정부 지출과 보조금을 줄이면서 재정을 효과적으로 쓰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정교한 플랜을 짜고 상처 부위만 날렵하게 도려내는 숙련된 ‘집도의’가 절실하다. 그러려면 두가지 일에 착수해야 한다. 우선 집권층 내부에 만연한 고질적인 비주류 의식을 용도폐기하는 일이다. 비주류의 눈으로는 세상을 반쪽 밖에 보지 못한다. 세상을 진보와 보수, 친일과 반일, 정의와 불의로 편가르다 보면 자신은 정의의 편이라는 자기검열적 의식에 매몰되기 쉽다. 이런 대결적 사고로는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제위기를 뛰어넘을 창의력도,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선도할 리더십도 기대하기 어렵다. 
 
다음으론,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를 발탁해 드림팀을 꾸리는 일이다. 때마침 여권에서 세종 치세 담론이 나오고 있다.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거나 “(문 대통령의)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참모로서의 바람”이란 발언이 화제를 낳았다. 친 노무현, 친 문재인계 인사들이 대거 당선된 4·15 총선의 압승을, 세종이 선정을 펼 수 있도록 형제와 정적들을 제거해준 태종에 견주기도 한다.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건 태종의 악역 때문만은 아니다. 박현모 세종리더십 연구소장은 “최고의 인재를 모아 드림팀을 꾸린 세종의 용인술이야말로 태평성대를 연 비결이었다”고 분석한다. 황희 정승의 발탁이 좋은 예다. 조선조 최장수,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는 18년동안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 으로 있으면서 세종을 보좌한 국정의 2인자이자 정치 멘토였지만 처음부터 세종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파였다. 세자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해 태종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장관(이조판서)에서 잘리고, 세종(충녕)을 왕세자로 책봉하는데 반대해 귀양길에 오른다. 세종 입장에서 보면 야당이요, 정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세종은 국정 능력과 인물 됨됨이를 보고 황희를 발탁해 인사·군사같은 중대사를 맡겼다. 세종시대 농업·과학기술·외교·국방·문화예술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며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처럼 최고의 인재를 알아볼 줄 아는 세종의 안목과 실용적 리더십 때문이었다. 세종때 같은 태평성대의 도래를 마다할 국민이 있겠는가. 말의 성찬 요란한데 현대판 황희·맹사성·김종서·장영실·박연 등으로 짜여진 환상의 드림팀 소식이 들리지 않으니 의아할 뿐이다. 

 

06.08  30년 위안부 운동이 이렇게 끝나선 안된다

검찰 수사를 받는 윤미향 국회의원과 의원직을 사퇴하라고 절규하는 이용수 할머니. 피맺힌 위안부 역사만큼 구슬프고 비극적인 장면은 기부금 횡령 의혹과는 별개로 위안부 운동 30년에 근원적이고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정의연 몰래 보상금 받은 할머니
피해자 배제 위안부 운동의 반증
윤미향 의원 사퇴해 비극 막아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이 국경을 넘어 평화 여성인권 운동을 선도하는 세계적인 인권단체로 세를 불려가는 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는 배상됐는가? 위안부 운동 명망가들이 줄줄이 국회의원, 장관, 청와대 비서관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동안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은 회복됐는가?
 
굳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권을 폭력적으로 유린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범죄 해결의 중심엔 당사자가 서는 게 마땅하다. 피해에 대한 배상과 해원(解冤)을 건너뛴 위안부 인권 운동은 정의롭지 않다. 정의연의 위안부 운동이 국민적 지지 속에 확장될 수 있었던 것도 피해자와 운동가의 확고한 결합으로 응어리진 한이 풀리길 바라는 소망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 출발이 그랬다. 위안부 운동은 두 용기 있는 여성에 의해 발화됐다. 윤정옥 전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1925년생)와 고(故) 김학순 할머니(1924년생)다. 윤 전 교수는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 학생 시절, 일본군에 끌려갈 게 두려워 자퇴서를 내고 지방에 은거했던 경험이 있다. 또래 집단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노(老)교수를 위안부 연구자의 길로 이끌었다. 10여년 간 일본·대만·미얀마·태국 등지를 찾아 피해 사례를 조사했다. 자신의 연구실 한켠에 ‘한국정신대연구소’를 차렸다. 정의연 전신인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모태다. 한국 여성학의 효시인 이효재 전 이화여대 교수, 박순금 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이 힘 합쳐 설립한 정대협(1990년)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발과 결합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위안부 운동가 윤미향’의 변신은 이번 사태를 부른 원인이다. 그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대리인이자 조력적 운동가에서 위안부 운동의 대표자로 올라섰고, 정보를 독점·통제하며 권력화했다. 정부 관료들은 그에게 찍혀 인생 망칠까 두려웠고(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 피해자 할머니들은 배신자로 몰려 불이익을 받을까 무서웠다(위안부 피해자 증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된 정의연이 위안부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속에서 위안부 피해 화해·치유재단(2015년), 일본 총리의 직접 사과를 내용으로 하는 사사에(佐佐江) 안(2012년), 아시아여성기금(1995년) 제안이 번번이 무산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일본 돈 받으면 배신자 취급했다”는 고(故) 심미자 할머니의 무궁화회 파동, “윤미향이 전화 와서 일본 돈 받지 말라고 했다”는 피해자 할머니의 폭로는 귀를 의심케 한다. 이런 피해자 중심주의도 있단 말인가.
 
피해자를 위한다는 단체의 눈을 피해 몰래 피해 보상금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는 정의연의 대표성이 얼마큼 왜곡됐는지를 반증한다.(아시아여성기금 500만엔 수령자 61명, 화해·치유재단 기금 1억원 수령자 35명)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정의연)이 챙겼다. 30년 동안 위안부 팔아먹었다”(이용수 할머니)는 30년 동지의 폭로가 예사롭지 않은 이유다. 
 
사퇴 압박이 거세지자 윤 의원은 “국회에 들어가 피해자와 국민의 불신을 초래한 한·일 합의를 해결하는 것이 저의 과제”라며 사퇴론을 일축했다. 30년 몸담아온 위안부 운동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발언이다. 어쩌면 이 말이 이용수 할머니의 감정선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대 정부가 과잉 대표된 정의연에 가로막혀 풀지 못했던 위안부 갈등을 국회의원이 돼 풀겠다는 건 그럴싸해 보이지만 궤변과 다름없다. 진정성이 남아있다면 당장 사퇴하는 게 운동가다운 자세다. 국회의원보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정의연 이사장 자격으로 양국 정부를 상대하는 게 더 효과적일 테니 말이다.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240여명(정부 등록 기준)이던 위안부 피해자 중 살아있는 할머니는 17명뿐이지 않은가.
 
국민 70%가 윤 의원의 사퇴를 원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엊그제는 정의연이 운영하는 쉼터의 소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결단을 내릴 시간이다. 30년 위안부 운동의 유산이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건 누구보다 윤 의원 자신이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본의 우익이 반길 일 아닌가. 위안부 운동은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을 넘어 전시 성폭력이라는 인권의 문제로 이어져야 한다. 시대와 진영을 뛰어넘는 존엄한 가치를 생각한다면 스스로 거취를 정리하는 게 맞다.

 

07.02  볼턴 회고록과 조기숙의 페이스북

백악관을 발칵 뒤집어놓은 존 볼턴(전 국가안보 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있었던 방』은 세계 최강 미국의 권좌, 그 깊숙한 곳에서 벌어진 기밀과 비사(祕史)가 담긴 정보의 보고(寶庫)다. 책은 많은 부분을 외교와 국제관계에 무지해 참모들로부터도 조롱받는 트럼프의 좌충우돌과 기행(奇行)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국익을 우선해야 할 외교조차 자신의 재선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 추악한 사익 추구 정상외교의 현장을 고발한다. 

실정 수두룩한데 ‘문프’ 찬양 요란
전체주의로 가는지 의심해봐야
조 교수 글, 토론 여는 마중물되길

트럼프는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듯 으르렁대던 시진핑 주석과 만나 “중국이 콩과 밀 구매를 늘려주면 선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승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노골적인 로비전을 폈다. 심지어 시진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위구르족 탄압을 위한 수용소를 “매우 옳은 일이기 때문에 계속해야 한다”는 상식밖의 발언을 했을 정도다.
 
터키 기업인에 대한 미국 검찰의 수사를, 트럼프는 독재자 에르도안과의 뒷거래를 시도할 구실로 여겼다고 볼턴은 쓰고 있다. 이벤트만 풍성했을 뿐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미스터리도 절로 풀린다. 볼턴은 트럼프가 참모들에게 “회담은 보여주기 위한 거다. 알맹이 없는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승리를 선언하고 바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두 가지 의문이 피어오른다.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였던 이가 이리도 모질게 자신의 보스를 공개적으로 망신주고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볼턴이 “역사가 트럼프 대통령은 한 번의 일탈로 기록하기를 희망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듯이 트럼프의 재선 저지를 분명히 하고 있지 않은가.
 
고작 조국 법무장관 취임에 반대하고 공수처법안에 기권표를 던졌을 뿐인데 국회의원 공천에서 배제되고 징계까지 받는 나라,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꺼내 들자 검찰총장에서 물러나라며 십자포화를 퍼붓는 나라에서 보는 회고록 파문은 그래서 낯설고 몽환적이다.
 
한국이라면 이런 책이 출판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미국 정부는 국가 기밀이 담겼다며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연방 법원은 출판을 허용했다. 다만 법원은 “볼턴이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초래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출판은 인정했지만, 기밀 유출로 인해 국가안보에 위협을 초래했는가는 별도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취지다.
 
막고 겁주고 윽박지르기보다 토론과 법리 논쟁을 통해 흑백을 가리려는 합리적 이성이 부럽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인 청년이 건조물 침입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대학 관계자가 재판에서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이 문제가 재판까지 가야 할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진술했는데도 법원은 50만원의 벌금을 때렸다. 대북 전단을 살포하면 붙잡혀가고, 곧 광주 5·18의 역사를 다르게 왜곡하면 처벌받는 법이 통과될 참이다. 우리의 처지가 더 남루해 보이는 이유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것, 그래서 전체를 마치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구조화하는 것이 전체주의다. 
 
민주당 싹쓸이의 국회 원구성과 독주, 공론화 없이 밀어붙인 자사고·특목고의 일반고 전환, 부동산 투기 잡겠다며 되레 집값만 더 올려놓은 부동산 실책, 파탄 난 대북 정책…곳곳이 이렇게 망가지고 곪아 터져도 ‘문프(문재인 대통령)는 항상 옳다’는 주문과 충성 다짐만 요란하다면 전체주의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헌정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여당 독식·독주사태를 나무라거나 자성을 촉구하는 정치 원로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주장과 토론조차 사라져버린 이 고요와 적막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반역자’라는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의 분투가 외롭다. 노무현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낸 조 교수는 “문 대통령이 일본과 같이 우리도 집값이 폭락할 테니 집 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참모로부터 잘못된 신화를 학습했다” “대책을 내놔도 먹히지 않으면 다양한 의견을 청취해 정책 변화를 가져오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지적했다. 친문 성향의 사이버 부대들은 조 교수의 조상까지 들먹이며 저주에 가까운 댓글 테러를 퍼붓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대중이 똑같은 의견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똑같이 행동할 때 그들은 전체주의의 폭도가 된다”고 경고했다. 의미심장하다. 전체주의로의 폭주를 막으려면 토론을 허용해야 한다. 조 교수의 페북 글이 토론을 여는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07.23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전 비서가 폭로한 ‘시장님 심기 관리 매뉴얼’은 충격적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 세기 전 왕조시대로 회귀한 착각이 들게 한다. 낮잠 주무시는 시장님을 깨우고, 벗어놓은 젖은 속옷을 정리하고, 혈압을 재고, 주말 새벽엔 같이 조깅을 하는 게 여성 비서가 해야 하는 업무였다니…. 

‘6층 사람들’은 절대 권력의 상징
견제없는 권력 도취가 부른 비극
집권세력의 탐욕과 추태, 도넘어

서울을 스마트 시티로 만들겠다며 인공지능·빅데이터·블록체인 팀까지 두며 IT 전도사를 자처해온 그가 왜 낮잠 자고 깨는 단순한 일을 스마트폰 알람 앱 대신 비서에게 의존해야 했을까. 한글만 읽을 줄 알면 혼자서도 간단히 할 수 있는 혈압 측정을 왜 비서에게 시켰을까. 집무실에 달린 침실과 샤워실은 또 뭔가. 막노동꾼도 아닌 그가 굳이 한낮에 샤워를 해야 했다면 10여분 거리에 있는 시장 공관에 잠시 다녀오면 됐을 일 아닌가. 도무지 내 상식으론 납득이 가지 않는다.
 
서울시 직제표가 눈길을 끈다. ‘서울시장’보다 윗선인 최상층에 ‘시민’을 올려 놓았다. 생소한 이름의 젠더정책팀과 젠더 특보도 있다. 페미니스트 시장의 이미지를 노린 것이겠지만 그의 비극적 최후로 드러난 건 봉건왕조와 같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더 큰 권력을 향해 줄달음쳤던 제왕적 시장의 어두운 이면이다.
 
박 시장은 2011년 ‘안철수 현상’에 편승해 극적으로 서울시장을 꿰찼지만, 이후 3선 가도는 거침이 없었다. 견제와 경쟁이 사라진 그에겐 거칠 게 없었다. 같은 생각으로 무장된, 시민단체와 운동권 출신 동조자들이 서울시와 산하기관을 겹겹이 에워쌌다. 이들 ‘6층 사람들’은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쟁점이 됐다.
 
“… 그러니까 비선 실세니 6층 사람들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 거 아닌가” “시청 행정조직은 친목 단체가 아니다” “시 조직이 기형화되고 왜곡됐다” “서울시 산하 공사에서 박 시장과의 친분, 정치 성향을 잣대로 간부들의 성향을 분류하고 평가한 문건이 있다.”(2017년 국토교통위 국감)
 
‘6층 사람들’은 박원순 권력의 부상과 추락을 상징하는 동의어다. 9년간의 장기 집권, ‘원 보이스, 원 팀’의 패거리 사고로 똘똘 뭉친 그들은 비판과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무관용의 절대 왕국을 구축했다. 22일 있었던 피해자 측의 폭로가 이를 말해준다. “4년 넘는 동안 성 고충 전보 요청을 20명 가까이 되는 전·현직 비서관들에게 말해왔다. 그러나 시장을 정점으로 한 업무체계는 침묵을 유지하게 만드는 위력적 구조였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피해자의 호소를 “그럴 분이 아니다”는 한마디로 묵살할 만큼 권력에 도취해 자기들만의 성(城)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감시·견제해야 할 서울시 의회마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전체 110석중 102명이 민주당이다. 온통 ‘내 편’ 뿐인 탄탄대로가 역설적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한 독약이 된  셈이다. 새삼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고 한 액튼 경의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며칠 전 만난 한 원로는 임기 초반,박 시장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인사는 “오세훈 시장 사람들 중에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 이전 사람이라고 내치지 말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중용해라. 측근들만으론 서울시 같은 거대 조직을 절대 끌고 가지 못한다. 성공의 관건은 측근 참모들과 전문 관료들을 조화롭게 발탁해서 균형 있는 팀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 천금같은 충고다. 만약 박 시장이 이 원로의 충고를 실천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번 같은 비극적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권력에 도취한 건 서울시뿐 아니다. 행정·사법·지방권력에다 4월 총선으로 입법권력까지 거머쥐게 된 집권세력의 탐욕과 추태가 도를 넘고 있다.  
 
여당은 박 시장을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는 사람” “맑은 분”으로 칭송할 뿐 그의 성추행에 대해선 유감 표명조차 없다.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협치를 강조한 날, 민주당은 정보위원장까지 독차지해 18개 상임위 싹쓸이를 완성했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의 오기어린 부동산 대책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데도 사과 한마디 없다. 윤석열 검찰총장과 충돌해온 추미애 법무장관은 국회에서 보란듯이 윤 총장 아내와 장모 관련 자료를 꺼내 읽는 몰염치한 모습을 연출하고도 오히려 당당하다.  
 
절대권력에 취해 휘청대는 이들의 모습에서 라틴어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신은 멸망시키고자 하는 자에게 먼저 광기를 부리게 한다.”

 

08.10  부동산 문제는 자신있다더니…

행정·사법부에 이어 입법 권력까지 장악한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5명의 수석이 한꺼번에 사표를 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흔한 일이 아니다. 총사퇴 카드는 대개 궤멸 수준의 선거 참패나 권력형 비리로 국정이 마비 상태에 빠졌을 때 쓰는 극약처방이다. 

대통령 실장·수석의 집단 사표
권력 만능 사고가 시민 저항 불러
힘으로 밀어붙이는 폭주 멈춰야

그러나 국회 3분의 2에 육박(177석)하는 의석을 거머쥐고 주류 교체를 기념하는 축배를 든 지 채 넉 달도 지나지 않았다. 추미애 발(發) ‘검찰 개혁’도 완성단계다. 살아있는 권력에 감히 메스를 들이댈 ‘통큰 검사’도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정도면 물샐 틈 없는 권력 장악 아닌가. 그런데 권력 심장부의 대거 교체라니.
 
걸핏하면 야당 탓, 전 정권 탓, 재벌 탓, 일본 탓, 검찰 탓, 언론 탓…. 총론은 적폐 프레임, 각론은 국민 편가르기로 권력을 유지해온 정권이 호된 민심의 역풍을 맞고 있다. 집값 상승의 책임을 집 가진 임대인의 투기 탓으로 돌리려다 그만 시민들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말았다.
 
장대비 속,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성난 민심이 폐부를 찌른다. ‘임차인만 국민이냐 임대인도 국민이다’ ‘어제는 준법자 오늘은 범법자 내일은 과태료’ ‘전세 종말 월세 지옥’ ‘국민은 개돼지가 아니다’ ‘공공임대 좋으면 여당부터 임대 살라’…. 민심의 분노에 불을 지핀 다주택 보유 청와대 참모들의 사의 표명에 ‘너희도 못 하면서 왜 국민에게만 시키냐’는 일침도 이어졌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열쇠는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있다. 사실 부동산 보유세 인상, 공공주택 100만호 건설, 전월세 상한제 및 계약갱신청구권 도입 등은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이게 실현되면 집 없는 서민들이 안정적으로 임대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니 “부동산 문제는 우리 정부에서 자신 있다고 장담한다”(2019년 국민과의 대화)고 확신에 차 말했던 게 아닐까.
 
부동산 시장이 임대인-임차인의 단순 관계로만 돼 있다면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동산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금융과 긴밀히 연계돼 있고, 금융은 국내 산업정책과 실물경제는 물론 국제경제의 흐름과도 연동돼 있다. 또 변화하는 라이프 스타일과 주거에 대한 의식도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고차 방정식을 풀려면 작은 생선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굽는 약팽소선(若烹小鮮)의 세심함과 정책적 절제가 필요하다. 그래야 왜곡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거꾸로다. 임차인을 선, 임대인을 악으로 구분 짓고 적대적 관계로 몰아갔다. 무절제한 폭력적 정책이 시장의 역습을 불러, 그토록 보호하려던 사회적 약자가 더 고통받는 지독한 왜곡을 겪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지금은 퇴직한 전직 언론인 A씨가 부동산 정책을 놓고 토론한 적이 있다고 한다. A씨가 “대통령이 추구하는 정책 목표가 무엇이냐. 기존의 집값을 떨어뜨리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집값 상승을 막겠다는 것인가”고 물었다. 노 대통령은 “사실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다”면서도 “집값이 급격히 떨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 자칫 금융이 위태로워져 시장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그 지적에 대해 깊이 토론해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나치게 솔직한 게 흠’이라던 노 대통령의 캐릭터가 묻어나는 일화다. 지금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면 현 정부는 뭐라고 답할지 궁금하다.
 
당시 정책실장이던 김병준 전 통합당 비대위원장의 기억도 일치한다. “노 대통령은 국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시대가 지났다는 걸 알았다. 의식과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법을 아무리 고쳐놔도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걸 절감한 것이다. 한·미 FTA를 추진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권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 시장의 압박으로 산업의 구조조정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23번의 부동산 대책을 쏟아내고도 추가 조치를 내놓을 수 있다는 오만은 권력이 시장을 이길 수 있다는, 권력만능적 사고다. 일방적으로 밀어 붙여온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사고·특목고 폐지 등이 본래의 정책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사태를 부동산 정책 실패로만 보는 건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다. 약자 보호를 내건 거칠고 선동적인 정책이 선거 때 재미 좀 보려는 득표 전략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양손 가득 거머쥔 권력의 힘으로 뭐든지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의 국정 운영방식과 결별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바로 직전 정권이 그랬다

 

08. 31 대통령 지지율의 역설

39%까지 떨어졌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다시 반등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주말 발표한 8월 넷째 주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47%. 2주 전보다 8%포인트가 올랐다. 더불어민주당(38%)과 미래 통합당(20%)의 격차(18%포인트)도 다시 벌어졌다.  

편 가르기로 지지율 반등 노려
지지율 높지만 업적은 잘 안 보여
“역사는 지지율 아닌 업적 논할 뿐”

코로나 2차 팬데믹이 가져온 반전이다. 정부는 K방역 성과에 도취해 자화자찬하며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바이러스의 기습을 당했다. 상처 입은 권위, 정권 안보의 위기에서 반전의 돌파구를 열어준 건 때마침 스스로 먹잇감이 돼준 8·15 광화문 집회와 이를 주도한 일부 교회의 비상식적 행동이다. 그래, 문제는 교회야!
 
분명히 해둘 건, 필자는 방역 지침을 거스르고 국민 불편과 혼란을 초래한 일부 극우 세력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일부 교회의 몰상식’ ‘엄청난 피해를 주면서 종교적 자유를 주장할 순 없다’고 훈계하는 장면에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용과 과학으로 풀어야 할 코로나 방역마저 일부 교회를 희생양 삼아 프레임 전쟁으로 몰아가려는 것인가. 광화문 광장에 울려 퍼진 ‘문재인 심판’ 구호와 대통령의 분노는 무관할 것일까.
 
코로나와의 전쟁 와중에 벌이는 의사와의 전쟁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건 그래서일 테다. 안에서 싸우다가도 밖의 공격을 받으면 집안싸움은 일단 멈추는 게 상궤다. 그런데 이 정부는 의사들에 대한 강경 대응의 수위를 되레 높이며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니 저잣거리는 ‘국민 안전과 생명을 볼모로 의사들을 압박하고, 방역에 실패하면 의사들 파업 탓으로 돌리려는 계산’이란 얘기로 흉흉하다. 특권층인 의사 대(對) 피해 받는 국민의 갈등 구도는 ‘부자 대 서민’ 구도의 판박이가 될 터다.
 
대결적 편 가르기 프레임은 이 정권 사람들 깊숙이 뿌리내린 DNA이자 위기 탈출의 만능 키다. 지난 3년여를 그렇게 허비했다.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으며 약자와 서민 편을 자처하던 조국 일가의 반칙과 불공정의 실체가 드러나자 느닷없이 ‘통제받지 않는 정치 검찰을 이대로 둘 것이냐’며 검찰개혁의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갔다. 일본과의 외교 갈등이 무역 분쟁으로 옮겨붙자 ‘죽창가’를 띄우고 일본산 불매 운동을 탈출구 삼았다.
 
비핵화 해법 없는 대북 화해정책의 문제를 비판하면 ‘그럼 전쟁하자는 말이냐’며 전쟁 대 평화의 프레임으로 역공한다. 소득주도성장의 부작용을 지적하면 재벌 대 서민의 프레임으로 응수하는 식이다. 부자 대 서민, 친일 대 반일, 조국 대 윤석열, 임대인 대 임차인, 서울 대 지방….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국민은 갈가리 찢기고 정책은 누더기가 되고 시장 왜곡은 심화했다. 싸움이 짙은 선홍색으로 물들수록 ‘지지율 상승’이란 반사 이익이 더 커진다. 위험한 반전이다.
 
정권 사람들은 요즘 “레임덕 없는 최초의 대통령”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민주당 20년 집권, 100년 정당론에 토 다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높은 지지율에 도취한 것일까. 누더기가 된 초라한 성적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하나하나 뜯어보자. 양극화 해소를 내걸었지만 소득·자산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일자리 정부를 자임했지만 실업률은 높아졌다. 정부가 업적으로 꼽는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로제는 어떤가. 원래 좋은 직장이었던 대기업·금융·공공 부문 근로자의 임금은 더 오르고 삶의 질이 개선됐지만, 정부가 그토록 보호하려던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중소 상공인은 직장을 잃거나 더 열악한 사각지대로 밀려났다. ‘저녁이 있는 삶’을 내세웠지만 오히려 ‘저녁 끼니가 있는 삶’을 걱정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도, 국민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도, 권력기관을 정치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약속도, 적재적소를 원칙으로 한 탕평 인사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50%에 육박하는 지지율과 176석의 여당 의석을 갖고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역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할까. 신기루와도 같은, 이 지독한 지지율의 역설을 말이다.
 
청와대 청원 38만명(30일 오후 현재)을 넘긴 시무7조의 주인공 조은산은 일갈한다. “역사는 군왕의 업적을 논할 뿐 지지율을 논하지 않는다.” 재치와 통찰력이 번득이는 구절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하는데 문 대통령의 취임사만큼 좋은 교과서가 있을까.

 

09.24  “국민이 지도자를 의심하는 나라, 발전 없어”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다. “특정 지역·특정 학교 출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상, 뿌리 깊은 특권 의식을 청산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하는 것은 소중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성공하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약자들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 성공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노무현 정신 계승한 문재인 정권
반칙과 특혜, 불·탈법 싸고돌아
노무현 정신 유린이며 국민 배신

지금 봐도 전율이 느껴지는 명연설이다. 그러나 그 역시 반칙과 특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통령이었다. 재임 중의 비리 사건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참모들이 전하는 에피소드 두 가지.
 
#노 대통령이 전직 관료 A씨를 청와대로 불렀다. 국토부 장관 지명을 통보할 참이었다. 조찬 회동 직전 대통령은 민정수석실로부터 서류 봉투 하나를 받는다. A씨가 해외 출장 때 가족을 대동한 횟수와 관련 기록이 들어있는 인사 자료였다. A씨를 적임자로 점찍어온 대통령은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못 본 척 슬쩍 넘어갈 수도 있었다. 심사가 복잡했을 대통령은 끝내 ‘장관을 맡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가족을 출장에 동반한 편법을 특권 의식과 반칙으로 본 것이다.
 
#대선 후보 시절, TV토론을 앞두고 한 참모가 방송사로부터 질문 개요를 입수했다. 일종의 관행이었다. 보고를 받은 노 후보는 “이건 반칙 아니냐. 나한테 알려주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 미리 귀띔을 받는 것조차 원칙을 벗어난 특혜로 여겼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평등·공정·정의로 압축되는 취임사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 정부를 자처했다. 그러나 3년 4개월이 지난 지금,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는 정적을 잡고 반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을 뿐이다. 자기편끼리 권력과 자리를 나누고, 반칙과 특혜에 눈 감으며, 심지어 불·탈법마저 감싸고 돈다.
 
고교 때 영어 의학논문 제1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허위 인턴활동 증명서로 명문대에 합격한 딸. 19일의 병가를 쓰고도 군에 복귀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휴가를 연장한 아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가진 특권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게 명백한데도, 부끄러워할 줄조차 모르는 이들이 연이어 ‘정의부(Ministry of Justice)’의 수장에 발탁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노무현 정신은 실종 상태다.
 
불공정과 특혜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자 집권당은 ‘옛날에는 이보다 더했어’라며 야당과 언론을 윽박지른다. 과연 그럴까. 국민 대다수가 헐벗고 가난하던 시대엔 공정 이슈가 지금만큼 민감하지 않았다. 고도성장으로 나눠 먹을 파이가 커지면서 낙수효과가 생겨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에게 두루 성장의 떡고물이 배분됐기 때문이다. ‘벼락출세’ ‘개천의 용’이란 말이 상징하듯 신분 상승과 계층 이동이 빈번히 이뤄졌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기회를 잡으면 누구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성장세가 둔화한 지금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가 교육의 기회를 결정짓고, 직업과 평생의 삶을 결정하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다. 출발점에서의 차이가 일자리와 삶의 격차를 벌어지게 하는 사회에선 절차와 과정에서의 공정성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 ‘돈도 실력이야’라고 뽐낸 최순실의 딸, 필기시험 한번 안 치고 대학에 간 조국의 딸, 전화 한 통으로 휴가를 연장한 추미애의 아들에 청년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병역기피에 비하면 편법적인 휴가 연장은 작은 불공정’이란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노무현은 이 점을 간파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사회적 신뢰 자본’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02년 민주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그는 “경제 성장과 번영도 원칙이 바로 서야 제대로 이뤄질 것이다. 지도자가 반칙하는 나라, 국민이 지도자를 의심하는 나라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고 외쳤다. 노무현 정신의 진수다.
 
문 대통령이 최근 37차례나 ‘공정’을 언급해 뒷말이 무성하다. 조국 사태 와중에 그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던 문 대통령은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며 우리 정부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라고 강조한 이튿날 추미애 장관과 나란히 회의에 참석했다. 국민 절반 이상(55.7%, 알앤써치 조사)이 사퇴를 요구하는데 추 장관에게 면죄부를 준 모양새다.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를 자처한 정권이 ‘지도자의 반칙을 용인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이 기막힌 역설은 노무현 정신의 유린이며,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다.

 

10.09  “잘못 인정하는 게 리더,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능력 회복해야”

87년생 초선의원이 86세대에 던지는 고언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민주화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을 때,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과제를 청산하고 우리가 맞은 과제들에 용감히 부딪혀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변화의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자로 변해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돼버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방역-집회 자유 동시 보장 논의없어
드라이브 스루 불허는 우려스러워
도덕적 사안을 사법 영역으로 미뤄
패턴화·반복 되니 국민이 실망해
추 장관, 스스로 일 키워 더 정쟁화

지난달 국회 대정부 질문에 나선 1987년생 초선 의원의 작심 발언이 파란을 일으켰다. 정부와 민주당의 운동권 출신인 86세대를 정조준한 비판 발언에 ‘용기 있는 바른 소리’ ‘희망이 보인다’는 격려 글이 쇄도했다. 주인공은 올해 33세의 정의당 장혜영 의원(비례대표). 그 역시 불공정 이슈에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청년 정치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유독 불공정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장 의원은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을 계속 사법의 영역으로 미루고 있기 때문”이라며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능력을 회복해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게 리더의 가치인데,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는 결점을 감추려만 한다”는 쓴소리도 했다. 추석 연휴 직후인 지난 5일 그를 중앙일보의 서소문 구사옥에서 만났다.
 

▲장혜영 의원은 ’명문대 졸업해 돈 잘 버는 트랙을 달리면, 돈은 잘 버는데 제 시간의 주인공은 될 수 없겠다 싶었다“고 자퇴 이유를 설명했다. 장진영 기자

 

대정부 질문 발언이 화제다.

“국회의원 되고 첫 대정부 질문이었다. 이틀 동안 지켜보면서 좀 실망했다. 민생과 연관되는 중요한 정책들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여당은 너무 지나치게 (정부를) 감싸는 발언들만 하고, 그런 와중에 자리는 많이 비어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직격탄을 받은 사람들이 이 꼴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싶어 급히 원고를 수정하게 됐다.” 

 

86세대를 ‘기득권이 돼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이라고 비판했는데 어떤 모습에 실망했나.

“민주당이 불평등 문제를 말로만 할 뿐, 그때(80년대 민주화운동) 싸웠던 것처럼 뜨겁게 할 수 있는데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이제 사회 고위층이 된 일부 86세대가 과연 우리가 바랐던 모습인가? 도덕성 논란이 제기될 때마다 ‘위법은 아니다’ ‘진짜 더 나쁜 놈들도 있다’ 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도덕성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당당하게 자기 변호를 하는 걸 보고 이질감을 느꼈다. 그런 모습이 국민이 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같은 청년들의 정서를 잘 알 것 같다.

“또래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굉장히 체념하고 있고 분노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2017년에 매우 큰 사회 변혁에 대한 분위기가 있었고 저 또한 고무됐었다. 그러나 과연 일상에서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이 됐나 하면 그렇지 않다. 살기 좋아지지도 않았고,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친구와 대화하면서 아차 싶었던 게 있다. 우리가 코로나 대응에서 완전 거꾸로 했던 게 아닌가? 복지관이나 학교 등 공적인 시설이 제일 먼저 닫았지 않나. 사실은 반대가 돼야 했었는데. 그런 반성을 하게 되는데 (정부는) K방역에 대한 높은 평가만 내세우는 것 같다.” 

 

이 정부 들어 유독 불공정 논란이 잦다. 청년들은 왜 공정 이슈에 민감할까.

“문재인 정부가 먼저 들고나온 키워드가 공정이다. 그런 만큼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기대와 다르게 흘러간다. 공정 뒤엔 경쟁이 숨어있다고 보고, 각자도생에 익숙해진 청년들은 복지제도나 정책이 어떤 정의에 기여하는 것인가가 이해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조국 전 장관 등 상징적 인물들이 보여준 모습이나, 그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정부가 제시했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니 실망한다.” 

 

인천국제공항(인국공) 사태는 결국 사장 해임으로 이어졌다. 정부의 잘못은 뭘까.

“인국공 문제를 공정 이슈로 보는 것은 담론 바꿔치기에 가깝다. 진짜 근원적 해답은 좋은 일자리가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애당초 정규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비정규직으로 쓰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문 대통령이 37번이나 ‘공정’을 말했지만 공허하다고 반박했는데.

"공정 매트릭스에 빠져있다. 말이란 게 반복하면 할수록 의미가 또렷해져야 하는데 (대통령의 말이) 추상적이라는 느낌이다. 정부가 청년들을 생각하는 게 구체화하지 못한 채 반복을 통해서 비어있는 부분을 채우려 하는 것 같다. 공정이 중요하니까 무엇을 하겠다고 가야 하는데 구체적인 게 없다.” 

 

불공정 논란의 정점은 조국 사태였다. 추미애 사태에 이르기까지 집권당의 대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국 사태 때는 정치를 시작하기 전이었었지만, 저는 당연히 데스노트로 날려야 하는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의당의 대처는 저의 생각과 달라서 실망스러웠다. 정의당이라면 사회의 모순을 약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얘기했어야 했다. (추미애 법무장관이) 직접 전화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여당 대표로 있으면서 사적인 자녀 문제로 군에 연락했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꾸 위법은 아니라고 하니, 총리 말대로 민망한 일이다.” 

 

야당은 장관 사퇴를 요구한다.

"추 장관이 일을 키운 측면이 있다. 초반에 소상하게 밝히고 소명했으면 검찰까지 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었다고 생각한다. 초기 대응이 굉장히 부적절했고, 그래서 훨씬 더 정쟁화된 측면이 있다.” 

 

여당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도 불공정 블랙홀에 갇혀 중요한 국정 과제와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능력을 회복해야 할 것 같다.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을 계속 사법의 영역으로 미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과도하고, 패턴화되어서 반복되는 것 같다. 사람이 늘 잘할 수는 없지 않나. 자기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게 리더의 가치인데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는 결점을 감추려만 한다.” 

 

왜 민주당 내에선 그런 지적이나 자성이 없을까.

"(민주당이) 굉장히 위계 질서화되고 있다. 비판하는 사람은 내친다. 그런 본보기를 보고 누가 목소리를 내겠나.”   

 

개천절의 광화문 집회를 차벽으로 원천 봉쇄해 기본권 침해 논란이 일었다. 한글날 집회도 불허하겠다고 한다.

"방역을 지키면서 동시에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드라이브 스루 방식, 소규모 집회같이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원천 봉쇄하는 태도가 우려스럽다.” 

 

국민의힘 박결 청년위원장이 부적절한 홍보 문구를 쓴 게 논란이 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유독 청년 정치인들의 실수나 잘못이 크게 부각된다는 지적도 있다.

"그 벽을 누가 대신 깨주지는 않을 것 같다. 청년 정치인 당사자들이 뚫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신위원장 맡으면서 추진해온 청년 정의당 만드는 프로젝트도 그런 노력의 하나다.” 

 

조국 사태와 지난 총선 국면에서 정의당에 실망한 사람이 많다. ‘정의당에 정의가 없다’는 우스개까지 나온다.

"너무 아프게 말씀하면 속상하다. (웃음) 정의당의 정체성은 가장 불평등한 약자의 눈에서 정치하는 정당이다. 그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저도 당을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다. 저는 정의당이 지난 총선 때 인삼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인삼 농사는 한 번 짓고 나면 지력을 어마어마하게 빨아들여서 다음 해엔 농사를 못 짓는다.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선 객토도 하고 거름도 주어야 한다. 청년을 비롯해 더 새로운 사람들이 정의당에 새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과감한 혁신을 해야 한다. 이번에 새로 구성되는 지도부와 함께 정의당의 앞날을 위해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장혜영 의원

연세대 재학 중이던 2011년 교내에 이별대자보를 붙이고 중퇴, ‘SKY 자퇴생 사건’으로 명성을 얻었다. 장애인 시설에 보내진 여동생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을 만든 영화감독이자 인권운동가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에 영입,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됐다.

 

10.15  대한민국, 어디로 가고 있는가

퀴즈 하나. 핀란드·이스라엘·폴란드·대만, 그리고 대한민국의 공통점은? 

공무원 피살과 BTS 발언 파문
국가 존립, 지속가능성과 관련
쓰나미 오는데 경보 울리지 않아

 

정답은 ①한때 지도상에서 국가명이 사라졌었고 ②강대국의 패권 다툼으로 전쟁·혁명·학살의 비극을 겪었으나 ③희생과 좌절을 딛고 성장과 번영을 이룬 국가다.
 
1795년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협정에 의해 나라가 없어졌던 폴란드는 1918년까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 이후에도 러시아와 독일의 틈바구니에서 국민이 희생되고 영토가 분할되는 아픔을 겪었다. 핀란드는 1808년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점령당한 이래 1917년까지 100년 넘게 러시아의 땅이었다. 공산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내전에 휩싸였고, 이후 러시아와 두 차례 전쟁 끝에 영토를 회복했다.
 
‘전쟁으로 건설된 국가’인 이스라엘의 건국 스토리는 대하 드라마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부른 시오니즘의 열풍이 이스라엘 건국(1948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적대적인 이웃의 아랍국들과 4차례나 큰 전쟁을 치러 모두 승리했다.
 
대만과 우리는 유사한 수난의 역사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나란히 독립국이 됐다. 지도상에서 영영 사라질 뻔했던 나라들이 위기를 딛고 번영을 일굴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다. 시대의 조류를 읽을 줄 알았던 지도자들의 통찰력과 강인한 국민이 뭉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한결같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영토를 보존하는 것, 제 나라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주권을 지켜내는 것을 그 어떤 것과 맞바꿀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신성한 사명으로 여겼다.  
 
대한민국의 탄생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요즘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지금 국가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가,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의 미래가 과연 담보될 수 있는가 하는 깊은 우려와 회의를 갖게 한다.
 
해수부 공무원이 북한군의 총격을 받아 무참히 살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진 사건에서 정부는 부재 혹은 실종 상태였다. 우리 국민이 서해에서 30시간 넘게 표류하는 동안 정부는 사실상 구조를 위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북을 향했어야 할 책임자 처벌과 규탄, 재발 방지 요구는 북측이 보냈다는 사과 통지문 하나에 흐지부지돼버렸다.
 
집권세력은 가해자 격인 김정은을 “계몽군주”로 둔갑시켰다. 신형 무기를 과시하며 미국과 우리 국민을 공개 압박한 날도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두손 마주 잡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는 메시지에 반색하며 김정은 칭송 모드로 돌변했다. 제 국민의 죽음은 잊어버린 듯 적장을 찬양하는 해괴한 일이 하루가 멀다고 반복되고 있다. 국민의 목숨을 중요시하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존립할 수 있는가. 국민의 죽음에 대해선 입도 벙긋 못하면서 대화 카드를 흔들며 ‘종전선언’ 운운하는 건 국가가 어떻게 존립하는가를 망각한 위험한 사고이며 시대착오다.  
      
   BTS(방탄소년단)의 6·25전쟁 발언 파문은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의 미래’의 문제와 닿아있다. 이번 사건이 일부 중국 네티즌들의 강성 발언에서 촉발됐고, 곧바로 중국 정부가 진화에 나서 더 큰불로 옮겨붙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다. 애플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도 네티즌들의 과잉 반응으로 곤욕을 치른 걸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갈수록 격렬해지는 미·중 패권 다툼이 우리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시진핑 주석의 과거 ‘속국’ 발언과 사드 보복으로 우리 기업이 입은 치명상은 신(新) 중화질서로의 편입을 요구하는 중국의 공세가 더 거칠어질 것을 예고한다.
 
문제는 눈앞에 쓰나미가 몰려오는데 누구도 경보를 울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치권은 정권 잡기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행정부와 사법부에 이어 입법부까지 장악한 집권 민주당은 해수욕 즐기러 나온 사람들마냥 태평하다. 자고 나면 터져 나오는 부패·비리 사건을 틀어막느라 에너지를 소진한 탓인가. 국회의석 3분의 2에 육박하는 176석을 갖고도 무엇 하나 성과를 내는 게 없다. 약자를 위한다는 구호는 요란한데 이 정부 들어 부(富)의 양극화, 부동산 양극화, 교육 양극화는 되레 심해졌다. 제1야당 국민의힘은 정치권 변방으로 밀려난 곁방살이 신세다. 실정을 따끔하게 혼내지도,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형국이다.
 
‘OECD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이 처참한 성적표는 목표를 잃고 표류하는 대한민국호(號)의 자화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1.05  민주화 세력의 도박에 저당잡힌 미래

문재인 정부의 속성을 강준만 교수가 잘 정리했다.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뒀다.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다.” 

‘독재에 맞서 싸운 세력’ 우상화
사라진 독재·친일 망령 소환
과거에 발묶인 정치는 희망 못줘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 얼굴에서 티끌을 찾고, 남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고 자신에겐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게 이 정권 사람들의 특징이다. 맥락 없는 사과와 감성을 자극하는 ‘악어의 눈물’을 보일 때도 있지만 끝끝내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 파렴치한 행태가 되풀이된다.
 
최근 벌어진 민주당의 ‘무공천’ 번복 사건을 보자. 민주당 소속 단체장들의 성범죄로 인해 다시 치르게 된 보궐선거에 대해 이낙연 대표는 “피해여성에게 사과드린다”고 했다. 입으로는 사과한다면서 행동은 정반대다. 무공천 하도록 돼 있는 당헌까지 고쳐가며 후보 출마의 길을 터놨다. 모두가 ‘위선’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책임정치’라고 우긴다.
 
지난해 딸의 논문 제1저자 등재, 표창장 위조 의혹 등이 불거졌을 때 조국 전 장관은 “주변에 엄격하지 못했던 점을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했다. 그러나 “권력기관 개혁이 제 마지막 소명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며 기어코 법무장관 자리를 꿰차는 ‘실력’을 보여줬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의혹투성이인 아들의 군 휴가 특혜 논란이 일자 오히려 야당과 언론을 공격하며 사과하라고 윽박질렀다. 자신은 무결점·무오류하다는 착각에 빠진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교만한 행동이다.
 
차가운 바다에서 북한의 총격에 의해 우리 국민이 피살됐을 때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국민에 송구한 마음”이란 발언이 나오기까지 6일이 걸리는 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 사과마저도 같은 날 북한에 화해의 손짓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빛이 바랬지만 말이다. 툭하면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라”며 야당에 날을 세우면서 자신들의 잘못엔 관대하고 비리에 눈감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보다 못한 운동권 선배인 정치 원로가 “왜 이리 명분보다 탐욕뿐인가”라고 개탄했을 정도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민주화 세력’의 위선과 타락을 몇 년째 지켜봐야 하는 건 슬프고 불행한 일이다.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잉태된 도덕적 우월감과 선민의식이 자신들을 시공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로 절대화시키는 독선과 오만을 낳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우상화한다. 지금도 거대한 폭력과 독재에 맞서 싸우는 탄압받는 순결한 세력이라는 신화 속에 자신과 국민을 가두려 한다.
 
세상을 민주-반민주 세력의 대결 구도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군사독재 정권이나 산업화 세력·친일파의 부재는 인정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있지도 않은 독재·친일의 망령을 소환해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려 한다. 독재 정권과의 ‘적대적 공생’이야말로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연장해주는 든든한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꾸 시계바늘을 과거로 되돌려놓으며 뒷걸음질 치려 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총애했던 환관 조고가 있었다. 시황제가 지방 순행 중 온량거에서 운명하자 그는 죽음을 숨기고 조칙을 날조해 막내아들 호해에게 왕권을 넘기는 흉계를 꾸민다. 진시황 없는 세상에서 장자 부소가 권력을 승계하면 자신의 운명도 끝장날 것이기 때문이다. 악취가 새나가 황제의 죽음이 들통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폐하의 명”이라며 거짓 명령을 내려 마차에 마른 생선더미를 싣고, 황제의 식사를 대신 챙겨 먹으며 시황제의 죽음을 숨기려 전전긍긍하는 ‘마차 속 조고’의 모습이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하다.
 
집권 3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은 검찰개혁·재벌개혁·친일청산·적폐청산 타령에 국민들은 질식할 지경이다. 편가르기 정치가 낳은 극심한 분열과 반목이 개인의 삶까지 파고들어 정치와는 무관했던 일상의 관계마저 망가뜨리고 있다. 지난해 조국 사태 이후로 “생각이 너무 달라 말을 섞지 않는 서먹한 사이가 돼버렸다”는 주변의 경험담을 심심찮게 듣게 된다. ‘꿈을 파는 직업’이라던 정치가 거꾸로 국민들에게 실망과 두려움만 안겨주고 있다. 그러니 “가수는 꿈을 파는 직업”이라는 나훈아에 열광하는 것이다.
 
뭐든지 야당 탓, 적폐 탓, 기득권 탓으로 돌리는 건 집권세력의 기저질환이 됐다. 문제는 기저질환이 심해지면 미래마저 암울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과거에 발 묶인 정치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런 나라에서 과연 희망에 찬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11.23  기저질환이 된 습관성 말 바꾸기

이 정권 사람들의 위선과 거짓말, 습관성 말 바꾸기는 기저질환이 된 지 오래다.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고, 한 입으로 두 말하는 데는 단연 금메달감이다. 그 사례는 차고 넘쳐서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세상이 두 쪽 나도 굳건히 지켜야 할 원칙, 소중하게 보듬고 가야 할 가치와 대의명분 같은 건 오래 전에 내팽개쳤다.    

“선 넘지마” 경고한 ‘대통령 복심’
정권 폭주가 ‘윤석열 현상’ 불러
브레이크 고장난 차에 누가 탈까

심지어 국가 백년대계를 좌우할 중요 국책 사업, 국민 앞에서 손가락 걸고 맹세한 정치적 약속조차 헌신짝 버리듯 뒤집어버린다.
 
헌법과 법률을 짓밟으면서 윤석열 검찰총장 몰아내기에 올인하고 있는 추미애 법무장관이 펼치는 기행(奇行)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의 검찰 버전이다. 윤 총장에게 “살아있는 권력에도 엄정하게 수사하라”(문재인 대통령)고 ‘당부하던’ 그 정권과 같은 정권인가 싶을 정도다.
 
추 장관의 공격은 맹렬하다. ‘윤석열 수사팀’ 공중분해, 사기 전과자의 말을 듣고 발동한 수사지휘권, 홍위병을 연상케 하는 검찰총장 직무배제와 감찰 지시로 윤 총장을 숨가쁘게 몰아세웠다. 그러나 광란의 질주가 낳은 건 아이러니하게 차기 대통령 후보 1위에 오르는 ‘윤석열 현상’이다. 그러니 ‘윤석열을 키운 8할이 추미애’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윤석열 현상은 자신들의 이익 추구에만 급급한 정권의 위선과 탐욕을 심판하는 민심의 소리없는 저항과 닿아있다. 검찰 개혁은 구호일 뿐, 임기말 정권의 보위와 사후 안전판 마련을 위한 자위적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걸 국민들이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윤건영 의원의 섬뜩한 경고문이 이런 의심을 증폭시킨다. 그는 월성 1호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를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며 윤석열 총장과 최재형 감사원장을 겨냥했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월성 1호기 폐쇄)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라고 주장했는데, 방점은 “경고한다. 선을 넘지 마시라”는 데 있는 것 같다. 정권에 대한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겁박이자 노골적인 수사 방해를 ‘민주적 통제’ ‘민주주의 원리’로 둔갑시켰다.
 
이 황당한 주장이 ‘참’이 되려면 이명박(MB)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대선 공약인 한반도대운하 사업을 염두에 둔 것이라며 반대하고, 집권 후 감사원이 감사하게 한 데 대해 먼저 사과했어야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MB의 대선 공약이던 행정중심복합도시 계획을 민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폐기시킨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 되는 건데 여기엔 묵묵부답이다. 전 정부를 대할 때는 정책 검증, 적폐청산이라며 합리화하고, 자신들의 잘못은 공약 이행이라며 수사를 막고 나서는 위선이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사고 있다.  
      
   4월 총선 때 민주당은 위성비례정당을 “위장 정당”“정치를 장난으로 만든다”(이해찬 전 대표)고 비난하더니 하루 아침에 “비례정당으로 미래통합당을 응징해야 한다”고 뒤집었다. 최근엔 ‘무공천’ 당헌을 바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은 아니며, 오히려 후보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 있는 공당의 도리”(이낙연 대표)라는 이유를 달았지만,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은 데 대한 반성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만 해도 현기증 날 지경인데, 새로운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추가하려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결정된 김해신공항 건설 사업을 백지화한 데 이어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밀어붙이려는 태세다. 검증위원회를 들러리 세워 자신들의 입맛대로 결론을 유도하는 수법도 월성 1호기 폐쇄 때와 비슷하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처리를 놓고 벌이는 여당의 행태는 조폭을 방불케한다. 민주당은 야당에게 공수처장 비토권을 주는 것을 미끼로 야당을 안심시켜 법을 통과시켜 놓고는, 야당 추천 위원들의 반대로 공수처장 후보를 확정짓지 못하자 다수 의석을 이용해 야당의 비토권을 없애려 들고 있다.
 
권력자의 입맛대로 그때 그때 법을 바꾸고 원칙을 뒤집는 ‘야바위 정치’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법치를 위협하고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같은 권력의 폭주가 도를 넘고 있다.  
 
문제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동차는 멈춰설 수도, 방향을 틀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누가 위험한 차에 타려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