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2] <11회> 만민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가 '최고 존엄' 숭배 - <20> 편가르기와 흑백논리로 인민을 장악하라새창으로 읽기
[송재윤의 슬픈 중국2] - 문화혁명 이야기 조선일보
2020.06.27
<11> 만민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가 '최고 존엄' 숭배
◇ 20세기 공산주의는 선의로 포장한 파멸의 길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정의를 부르짖는 권력자가 불의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금욕이 파산을 부르기도 한다. 탐욕이 빈민을 구제하기도 한다. 이타심이 빈곤의 악순환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기심이 번영과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파시즘을 낳고, 권위주의가 민주화의 초석을 놓기도 한다. 인간의 현실은 복잡하고, 역사의 궤적은 난해하다. 단순한 일반화는 어리석다. 섣부른 예측은 위태롭다.
시경(詩經)에 적혀 있듯 지혜로운 사람은 “살얼음 위에 올라선 듯(如履薄氷)깊은 물 앞에 선 듯(如臨深淵)” 조심조심 돌다리를 두드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격정이 실패를 부르고 모험이 파멸을 초래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유럽의 속담대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과연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은 선의로 포장된 파멸의 길이었다.
20세기 동구 및 아시아의 공산주의 정권들은 드라마틱하게 실패했다. 공산주의 명령경제는 미증유의 권력 집중과 비효율적 자원 배분을 초래했다. 사적 소유권을 박탈당한 개개인은 국가의 농노로 전락했다. 그들은 경제활동의 자유를 빼앗겼다. 수천 년간 개개인은 머리를 써서 유용한 상품을 만들어내고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키려 했다. 이제 그들은 코뮌의 우리에 갇힌 가축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경제활동의 지혜와 진취적 개척의 정신은 파괴됐다.
<1991년 11월 13일 구동독 지역 베를린의 레닌광장에서 해체되는 레닌의 석상. 129조각으로 쪼개진 이 석상은 모래둔덕에 매장됐다
◇ “인민은 당의 명령에 복종하라” 공산주의 정권의 인격 숭배 강요
공산혁명으로 중국 전 국토의 모든 재산이 중앙정부에 귀속됐다. 중앙정부의 모든 권력은 고작 3백~4백 명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에 집중됐다. 중공중앙은 다시금 정치국 상무위원 7~9명에 종속됐다. 정치국은 최종적으로 최고영도자의 지휘 아래 놓였다. 만민평등과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권인데, 일인지배의 극적인 불평등이 나타났다. 이율배반의 모순상황을 봉합하기 위해 20세기 공산정권들은 예외 없이 ‘인격숭배’를 추진했다.
공산정권의 인격숭배가 어떻게 가능할까?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을 역사적 합법칙성을 발견하고 공산혁명의 전략을 제시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라 칭송한다. 과학기술의 복잡한 원리를 몰라도 인민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몰라도 인민은 인간해방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 혜택의 최대화를 위해 인민은 무조건 당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무조건적 복종이 바로 혁명적 자기헌신으로 미화된다. 인민 개개인은 “나쁜 머리”를 써서 자발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묘하고도 천재적인” 혁명적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가축처럼 우직하게 일을 하라는 주장이다. 결국 인격숭배는 노예의 도덕이다. 플라톤 철인통치 모델의 조악한 복사판이다. 전체주의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백전백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만세!” /공공부문>
◇ 인격신이 된 마오쩌둥…세뇌 당한 추종자들 “마오는 태양!”
마오쩌둥 인격숭배는 문화혁명의 이념적 기둥이었다. 1950년대 초부터 중공정부는 지속적으로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하고 선전했다. 1951년부터 1977년에 걸쳐 ‘마오쩌둥 선집’은 다섯 권의 정본으로 출판됐다. 이 선집은 1925년 이래 마오쩌둥이 남긴 소논문, 팜플릿, 연설문 등 모든 저작의 집대성이다.
1964년 1월 5일 국방장관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의 정신무장을 위해 ‘마오쩌둥 어록’을 출판한다. 이 책은 중국에서는 “홍보서(紅寶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팜사이즈(palm-size) 작은 책자라서 서구에서는 “작은 붉은 책(A Little Red Book)”이라 불렸다.
최초에는 23개 주제 아래 200개 어록을 채록한 이 책자는 곧 25개 주제 267개 어록으로, 이후 33개 주제의 427개 어록으로 증보됐다. 공산당, 계급투쟁, 대중노선 등 공산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청년, 여성, 문화예술, 학습 방법 등 사회발전과 자기향상의 교안까지 담긴 마오쩌둥 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편찬자 린뱌오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수많은 대중이 이해하는 순간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이 되고 무한한 권력의 정신적 핵폭탄이 된다!” 과연 홍보서는 문화혁명의 바이블이 되었다.
<1967년 경 단체로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있는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1950년대까지 공산권에선 1937년 편찬된 스탈린의 “소련공산당사: 속성코스”가 가장 널리 보급된 관제 베스트셀러였다. “마오쩌둥 어록”은 그보다 수백 배를 웃도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1967년 5월경이면 “마오쩌둥 어록”은 공산권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후 이 책자는 전 세계적으로 65억 부 정도가 유포됐다. 성경에 버금가는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소홍서”의 편찬과 출판을 관장한 린뱌오는 군에서부터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개시했다. 머잖아 마오는 살아 숨 쉬는 불멸의 인격신이 된다. 1964년 이후 그는 중국 전역의 방방곡곡에 “태양”으로 강림했다. 당·군·민 모두 날마다 마오의 어록을 읊조렸다. 마오는 혁명의 지도자를 넘어 인생의 스승이 되었다.
밤낮으로 “마오쩌둥 주석 만세!”를 외쳐대는 수억의 인민대중이 없이 문화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중공정부의 선전 전략에 의해 날마다 체계적으로 훈련되고 조정되고 세뇌당한 마오쩌둥의 추종자들이었다. 요컨대 문화혁명은 인격숭배의 결과다. 인격숭배가 낳은 관제의 대중운동이다.
◇ 마오의 ‘건망증’ 지적한 언론인 덩퉈, 결국 스스로 목숨 끊어
1962년 비판적 언론인 덩퉈(鄧拓, 1911-1966)는 “건망증 전문치료”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건망증을 보이는 사람은 늘 식언을 해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심지어는 타인에게 그 사람이 일부러 미친 척하고 바보 시늉을 하지 않나 의심케 한다. 절대로 신임할 수 없다! <중략> 극심한 증상이라도 드러나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며 아무 일도 해선 아니 된다. 억지로 말을 하고 일을 하면 대란을 일으킬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라면 이 글이 마오쩌둥 비판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마오쩌둥 1957년 사상의 다양성을 옹호하며 지식계의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한 후, 곧바로 “반우파운동(1957-1959)”을 일으켜 50여만의 지식인들을 솎아내 숙청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무서운 “건망증”이 아닐 수 없었다.
1965년 11월 30일 문혁의 뇌관이 된 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 비평”이 ‘인민일보’에 게재된다. 그 문제의 글을 게재하면서 ‘인민일보’의 편집자는 마오쩌둥의 1957년 3월 12일 연설문을 길게 인용한다. “마오 동지가 말씀하셨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과학, 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보증이 된다. 만약 옳게 쓴 글이라면, 그 어떤 비평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당시 인민일보의 편집권은 베이징 시장 펑전이 쥐고 있었다. 결국 펑전이 마오쩌둥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춰내 마오쩌둥의 모순을 지적하는 소극적 저항이다.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 제 5면. 요문원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 바로 위에는 1957년 모택동의 연설문을 인용하여 “학술연구”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편집인의 견해가 실려 있다.>
언론인의 저항은 그러나 문혁의 쓰나미 앞에선 작은 집채도 못되었다. 반 년 동안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며 역사학자 우한을 변호했던 덩퉈는 결국 인격살해의 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1966년 5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펑전은 곧 홍위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오쩌둥 치하 중공정부는 중앙권력의 권력집중을 지속하기 위해 인격숭배를 강요했다. 만민평등의 사회주의 이념이 어떻게 인격숭배와 공존할 수 있나?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의 정신적 타락이며 이념적 파산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평등을 내건 사회주의 정권이 “최고 존엄” 운운할 순 없다. “최고 존엄”이란 전체주의 전제정의 독재 유지 수단일 뿐이다. 마오이즘의 가장 어두운 단면이다. <계속>
<12> "지주·부농·반혁명세력·파괴분자·우파는 다섯 부류 검은 무리(黑五類)"
◇ 혁명 투사 다수도 반혁명·수정주의·우경분자로 몰려
정치투쟁은 인간의 숙명인가. 열혈 공산당원들끼리 모이면 다시 그들은 좌우로 나뉘어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다. 1960년대 중공중앙의 핵심인물들은 모두가 빛나는 혁명의 이력을 자랑하는 “붉디붉은” 투사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다수는 문혁 당시 “반혁명” “수정주의” “우경분자”로 몰려 숙청되고 말았다.
1927년 12월 11일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는 2만 병력을 투입해 광둥성 광저우(廣州)를 점령하지만 불과 이틀 후 국민당군에 궤멸당하는 참패를 초래한다. 리리산(李立三, 1899-1967) 역시 1930년 7월 후난성 창사(長沙)를 점령하나 며칠 후 국민당군의 반격으로 패주하고 만다. 이어서 왕밍(王明, 1904-1974)을 위시한 모스크바 유학파 “28명의 볼셰비키”가 당권을 장악하는데, 그들의 무모한 군사전략은 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
1930년대 마오쩌둥은 취추바이의 맹동(盲動, 맹목적 행동)주의, 리리산의 모험주의, 왕밍의 교조주의 등을 대표적 “좌의 착오”라 비판했다. 예컨대 1937년 7월 발표한 “실천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좌’익 공담(空談)주의에 반대한다. 그들의 사상은 객관적 과정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넘어 환상을 진리로 간주하고, 또 먼 미래에나 실현가능한 이상을 억지로 당장 지금 적용하려 든다. 대다수 사람들의 당면한 실천에서 유리되고, 당면한 현실을 벗어난다. 이들의 사상은 행동 상 모험주의로 표출된다.”
<1935년 1월 구이저우 쭌이(尊義)회의. 대장정에 오른 마오쩌둥은 왕밍 등 소련파의 좌익 모험주의를 비판하면서 당권과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게 된다.>
1930년대 마오쩌둥은 현실을 벗어난 일체의 공상, 맹동과 모험을 따옴표를 붙여서 “좌”라 불렀다. 20년 쯤 지나 1955년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좌”를 비판한다.
“좌”란 무엇인가? 시대를 초월하고 당면한 눈앞의 상황을 무시한 채 정책과 방침에서, 또 행동에서 모험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투쟁의 문제에서, 쟁론을 일으키는 문제에서도 어지럽게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좌”다. 좋지 않다.
그렇게 입으로는 극좌의 위험에 경종을 울렸지만, 만년의 마오에게 절제된 균형 감각이나 중용의 미덕 따위는 기대할 수는 없었다. 특히 1957년 이후 마오쩌둥의 정치적 행보는 좌경화의 극단이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는 더욱더 왼쪽 끝으로만 달려갔다. 성마른 혁명분자의 강박증을 흔히 좌익 소아병(krankenheit)이라 부른다. 젊은 시절 그는 좌익 소아병을 앓는 극좌의 맹동과 모험을 비판했다. 그는 늙어서야 좌익 소아병을 앓았던 듯하다. 그 병증의 표출이 바로 문혁이었다.
◇ 극좌 저격수들, 사상 자유 옹호하는 지식인 ‘반혁명’으로 몰아
1965년 12월 중국의 지식인들은 좌·우 사상전에 돌입했다.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을 옹호하는 지식인들은 학술토론의 독립성과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언론 지면을 장악한 극좌의 저격수들은 그들을 단숨에 “반혁명분자”로 몰아갔다.
우한은 1960년대 역사극 ‘해서파관’의 극본을 직접 썼다. 그 경극이 성공하자 그는 더 큰 명성을 얻었고, 1965년 당시 그는 베이징시의 부시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해서파관’은 문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해서파관’의 내용을 되짚어 보면, 분명 마오쩌둥에 대한 풍자로 읽힐 수 있다.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1507-1567)는 직언하는 충신 해서를 파면했다.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대기근의 참상에 관해 직언하는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를 파면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해서를 칭송하고, 해서를 닮으라며 우한에게 ‘해서파관’의 대본을 쓰게 했다.
직언을 꺼리는 간부들을 경계하고 질타하는 순수한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극중의 가정제는 간신들의 요설에 속은 잘못 밖에 없다. 마오 역시 간부들의 허위보고에 속았다면, 대약진의 오류는 거짓을 유포한 자들에게 귀속된다. 마오는 면죄부를 얻을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 해도 충신 해서는 펑더화이의 화신이었다. 해서를 파면한 후 사약을 내린 가정제는 바로 마오가 된다. 펑더화이는 충신이며, 마오쩌둥은 기껏 혼군(昏君)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과연 그가 그 함의를 몰랐을까?
주치의 리즈수이의 회고에 의하면, 그 역시 마오의 계략일 수도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미리 함정을 팠다. 이후 해서를 칭송했던 자들은 문혁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는 “인사출동(引蛇出洞)”의 전술이다. 거듭되는 마오의 양모(陽謨)였다는 얘기다.
<문혁 당시 베이징의 전통의 베이징 역사극은 폐기되고 혁명성을 고취하는 혁명적 현대극으로 바뀐다. 경극의 혁명화 및 현대화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주도했다. 1964년 상연된 “홍색낭자군”은 중국식 발레로 8대 양판희(樣板戱, 모범적인 연극)로 꼽힌다.>
◇ 마오 비판한 우한, 자유주의 사상가 후스의 제자라는 이유로 반동 몰려
극좌의 저격수들은 실로 많은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문혁 당시 지(地)·부(富)·반(反)·괴(壞)·우(右) 흑오류(黑五類)가 인민의 공적이 되었다. 지주, 부농, 반혁명세력, 파괴분자 및 우파, 이렇게 다섯 부류의 검은 무리를 의미한다. 덧붙여 국민당반동파와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 당권파(當權派)가 문혁 당시 집중적인 타도 대상이 되었다.
역사학자 우한은 저장(浙江)성 이우(義烏)의 빈농 출신이었다. 1940년대 후반 그는 중국민주동맹(이하 민맹[民盟])에 참여했다. 민맹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서 1949년 9월 말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한 제2의 민주당파였다. 출신성분과 정치이력에서 그는 결격 사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극좌의 저격수들은 우한을 그의 인격을 살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1965년 12월부터 극좌의 저격수들은 후스(胡適, 1891-1962)와 우한의 사승관계를 부각시키는 전술을 쓴다.
<1958년 타이베이. 후스와 장제스
후스는 백화운동을 주도한 5.4운동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지도를 받은 철학자였다. 1928년 우한은 상하이의 중국공학(中國公學)에 입학하는데, 당시 그 대학의 총장이 바로 후스였다. 곧이어 후스는 베이징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고, 우한은 후스의 추천을 받아 칭화(淸華)대학에 입학해 명대사를 연구한다. 이후 우한은 칭화대학의 교수가 되고, 학장을 역임한다.
국공내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우한은 스승 후스에게 공산주의로의 전향을 설득하지만, 후스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간다. 우한은 그렇게 후스와 사상적으로 확연히 다른 길을 갔다. 그럼에도 저격수들은 우한을 후스의 추종자로 몰아세운다. 1965년 12월 8일 발표된 치번위(戚本禹, 1931-2016)의 “혁명을 위한 역사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1920-30년대 후스가 제창했던 “초(超)계급”의 순수객관의 실증사관이야 말로 자산계급의 관점이라 비판한다. 1966년 봄 우한과 후스를 엮는 정치적 비방이 점점 더 고조됐다. 급기야 1966년 6월 1930-1932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간문을 근거로 후스와 우한의 이념적 연대를 주장하는 비평문까지 등장한다.
후스는 공산주의 대신 자본주의를, 마오쩌둥 대신 장제스를 선택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였다. 후스와 우한의 사상적 유대관계를 증명하는 순간, 우한은 국민당반동파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저격수의 총탄이 그의 심장에 명중한 셈이었다. 이미 우한은 소생불가능의 상태에 내몰렸다. 3년 더 연장된 그의 목숨은 잔혹한 형틀에 묶인 삶일 뿐이었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우한으로선 억울한 일이었다. 문혁의 광기 속에서 좌를 우로 몬 극좌의 비극이다. <계속>
<1935년 우한, 부인 위안전(袁震, 1907-1969), 딸 우샤오옌의 모습. 위안전은 1969년 3월 18일 강제노역에서 풀려난 직후 사망한다. 60일 후 우한은 감옥에서 가혹행위를 당하다 병사한다. 딸은 강간당하고 투옥된 후 1976년 9월 23일 자살한다. 4인방이 체포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공공부문>
<13> 표현의 자유 잃은 중국, 독재는 비판여론 탄압으로 시작됐다
◇ 독재의 시작은 비판여론 탄압, 그 끝은 체제 바꾸는 헌법 개정
독재의 알파는 비판여론의 탄압이다. 독재의 오메가는 헌법 개정이다. 독재자는 문인의 입을 틀어막는다. 시민의 대자보를 단죄한다.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기사를 범죄시한다. 실상을 드러내는 학술논문은 죄악시한다. 독재자는 반대를 반동(反動)으로, 비판을 반역(反逆)으로, 풍자를 신성모독으로 몰고 간다. 공포에 질려 모두가 입을 닫으면, 독재자는 헌법을 뜯어고쳐 국체(國體)를 바꾸려 든다. 독재의 합법화가 독재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1965년 11월 10일 돌연히 신예의 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의 긴 글이 상하이의 문회보(文滙報)에 게재됐다.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이념적 독초(毒草)라 혹독하게 공격하는 일종의 문예비평이었다. 그 후 2주에 걸쳐 그 글은 저장성의 절강일보(浙江日報), 산둥성의 대중일보(大衆日報), 장쑤성의 신화(新華)일보, 푸젠성의 복건(福建)일보, 안후이성의 안휘(安徽)일보, 장시성의 강서(江西)일보 등에 전재(轉載)됐다. 심상찮은 이념전쟁의 조짐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18일 동안 수도 베이징에선 단 한 언론에도 그 글이 실리지 않고 있었다.
<무산계급 혁명파여, 대권을 장악하라! 1967년 포스터
◇ 베이징 시장 펑전, 마오 어록 인용하며“사상 다양해야” 저항
당시 베이징 시장은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펑전(彭眞, 1902-1997)이었다. 펑전은 베이징의 모든 언론들에 그 글의 게재불가를 명했다. 전국이 벌겋게 물이 드는데, 베이징만 아슬아슬 사상의 해방구로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펑진이 저항하자 상하이 시위원회는 야오원위안의 비평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해서 전국에 유포하려 했다. 11월 24일 상하이의 신화(新華)서점은 전국의 지점에 출판의사를 물었는데, 오로지 베이징의 신화서점만 답신을 미루다가 닷새 후인 11월 29일 못이긴 듯 동의서를 전송한다. 결국 11월 30일 인민일보의 ‘학술란’에 야오원위안의 문장이 실린다. 11월 28일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완강하게 저항하는 펑전을 직접 만나 야오원위안의 글을 신속히 게재하라 독촉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우언라이는 펑전에게 이 사태의 배후가 마오임을 알렸다.
마오의 압력으로 야오원위안의 글을 인민일보에 전재하게 되었지만, 펑전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단 그는 신문의 ‘학술란’에 지면을 할애해서 글의 게재 목적이 “학술”적임을 분명히 밝혔다. 아울러 “편집인의 견해”를 통해 그는 1957년 마오가 제창한 “백화제방”을 인용하며 사상의 다양성을 옹호했다. 마오의 압박에 저항하기 위해 마오 자신의 어록을 들이민 격이었다.
이후 인민일보는 한 달여에 걸쳐 좌·우파 논쟁의 포럼을 이어갔다. 펑전은 논쟁을 통해서 불합리한 이념공세를 물리치고 사상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 마오쩌둥, 속내 감추고 펑전의 보고서 ‘2월 제강’ 승인
1965년 2월 펑전은 무익한 논쟁을 종식하기 위해 “5인 소조(五人小組)” 회의를 수집한다. “5인 소조”는 1964년 7월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구성된 중공중앙의 특별조직으로 문예계의 정풍(整風) 및 학술 비판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장은 펑전이었다. 부조장은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앙선전부 부장 루딩이(陸定一, 1906-1996)였다. 나머지 세 명은 문예계의 거장 저우양(周揚, 1908-1989), 신화사 사장 겸 인민일보의 편집장 우렁시(吳冷西, 1919-2002), 문화부부부장 캉성(康生, 1898-1975)이었다.
그 중 1940년대부터 비밀정보 총책으로 활약한 캉성은 자타공인 마오쩌둥의 오른팔이었다. 캉성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문혁 발발 직후 잔학한 정치적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문혁 기간 내내 캉성은 “4인방”과 더불어 극좌파의 지략가로 활약한다. “5인 소조”에 박아둔 심복 캉성을 통해서 마오는 실시간으로 그들의 은밀한 대화를 도청하듯 훤히 전해 듣고 있었다.
“5인 소조” 회의에서 펑전은 노골적으로 우한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해서파관” 논쟁은 순수한 학술토론일 뿐이며, 우한과 펑더화이가 조직적으로 연계돼 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 주장한다. 마오의 심복 캉성은 그 자리에서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는다.
다음날 루딩이는 선전부를 통해 그동안 전개된 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2월 5일 펑전은 세 차례에 걸쳐 수정한 보고서를 들고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보고한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중앙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당권파(黨權派)들은 펑전의 보고서를 승인한다. 2월 7일 최종본이 우한의 고급 빌라에 체류하는 마오에 타전된다. 펑전의 보고서는 이후 “2월 제강(提綱)”이라 불린다.
바로 다음 날 펑전은, 루딩이, 강성, 우렁시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우한으로 가서 마오를 알현한다. 이미 중공중앙의 승인을 얻은 펑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마오에게 “2월 제강”의 내용을 전한다. 마오를 앞에 두고 펑은 “실사구시의 정신”을 강조하며 “진실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말한다. “마오쩌둥 사상”을 마오 자신에게 확인시켜 준 셈이다. 마오가 물었다. “우한이 당과 사회주의에 반대하는가? 또 우한은 펑더화이와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는가?” 펑전은 두 가지 점을 모두 부인한다.
그 짧은 접견에서 마오는 속내를 철저하게 감춘 채 별일 없다는 듯 “2월 제강”을 승인한다. 닷새 후 (1966.2.13.) 중공중앙은 “2월 제강”을 인쇄해서 기밀문서의 형식으로 당내에 배포한다. 그 문제의 “2월 제강”을 중공중앙의 당권파가 공식적으로 승인했음을 의미한다.
<1967년 6월 13일 홍색전보. “‘2월 제강’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흑(黑)사령부를 철저히 분쇄하라!>
◇ 마오의 공격 “反공산당·反사회주의·反마오사상 三反분자 척결”
2개월 간 펑전은 학술논쟁을 용인하고 최소한의 사상적 다양성을 지키고자 발버둥 쳤다. 학술토론의 방어선은 그러나 곧 무너지고 만다. 이후 두 달 동안 마오는 당권파를 향한 이념공세를 이어간다. 마오의 지시에 따라 직접 행동에 나선 주인공은 바로 그의 아내 장칭(江靑, 1914-1991)이었다. 1966년 4월 10일 중공중앙은 린뱌오의 요청에 따라 장칭의 주재로 개최된 군부대의 “문학·예술 공작 좌담회의 기요(紀要)”를 반포한다. 이 문건에는 다음 구절이 삽입되었다.
“건국 이래 우리는 마오쩌둥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공산당, 반사회주의 세력의 독재 아래서 살아왔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이 중공중앙의 당권파 모두를 “독재세력”으로 규정한 셈이었다. 최고영도자가 중공중앙을 독재의 기구라 단정했다. 그 근거는 고작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반대였다.
돌이켜 보면, 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 비평은 마오가 깔아놓은 밑밥이었다. 그 밑밥을 먹기 위해 호수의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마오는 촘촘하게 짜인 큰 그물을 던졌다. 펄떡거리던 물고기 떼가 일시에 그물에 걸려드는 순간이었다.
캉성의 일지에 따르면, 마오는 1965년 여름부터 치밀하게 그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있었다. 혁명의 시나리오에 따라 마오는 11월 초 호화열차를 타고 유유히 베이징을 떠나 남방으로 갔다. 이후 그는 항저우와 우한의 고급빌라에 머물면서 문혁의 불길을 당겼다. 1966년 7월 중순 우한의 장강(長江)에서 수영하는 장면을 연출한 후, 마오가 무려 8개월 만에 베이징에 복귀했을 때, 문혁의 불길은 이미 활화산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계속>
<“삼반분자 펑전” 홍위병 집회에서 비투(批鬪)당하는 펑전. 홍위병들이 펑전의 이름자에 비판의 의미로 X를 그어놓았다. 삼반이란 反공산당, 反사회주의, 反마오쩌둥사상을 의미한다.>
<14> 권력자들은 정권 장악을 혁명으로 미화한다
◇ “정권은 반대세력 진압하는 도구…집권하면 노동인민 획득”
혁명은 큰 유혹이다. 일시에 한 사회를 뒤바꿀 수 있다면 마다할 자 누구인가? 오로지 반혁명세력 밖에는 없다. 반혁명세력만 제거되면 “혁명”이 완성될 수 있나? 역사의 경험을 돌아보면, 대답은 “노!”다. 프랑스혁명은 자코뱅의 테러정치(1789-1794)를 몰고 왔다. 러시아혁명은 스탈린의 대숙청(1936-1938)으로 귀결됐다. 중국공산당 혁명은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1958-1962)을 초래했다.
특정 세력의 집권 그 자체를 “혁명”이라 이를 수 없다. 집권이 불가역적 사회체제의 변동으로 이어질 때에만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혁명이란 단어를 오용하고 남용한다. 특히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집권 그 자체를 혁명으로 미화한다. 집권이 곧 혁명으로 인정되는 순간, 그들은 통치의 전권(全權)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정변”이 혁명으로 미화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1966년 5월 18일 중국의 국방부 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다음 발언을 한다.
“혁명의 근본문제는 바로 정권의 문제다. 정권을 얻으면 무산계급 노동인민은 일체를 획득한다. 정권을 잃으면 일체를 상실한다. <중략> 정권은 무엇인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압박하는 도구다. 정권은 [반대세력을] 진압하는 권력을 말한다.”
일찍이 1927년 3월 마오쩌둥은 “혁명은 한 계급이 봉기를 통해 다른 계급을 무너뜨리는 폭력 행위“라 규정한 바 있다. 마오쩌둥의 이 명언을 원용해서 린뱌오는 “정권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압박하는 도구”라 단언한다. 분명 그는 무산계급의 정권 획득 그 자체를 혁명의 완성이라 생각하고 있다. 혁명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정책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다.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아 국방부 장관의 지위에 오른 린뱌오는 문혁 초기 중공정부의 2인자로 급부상했다. 그런 린뱌오가 바로 이 시점에서 “혁명은 곧 정권의 탈취”라 규정한 구체적인 까닭이 있다. 바로 이틀 전 중공중앙 확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의 개시를 알리는 이른바 “5.16통지”가 채택됐기 때문이다
<“문화혁명 대군을 검열하는 마오주석!” “그대들은 국가의 대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철저하게 진행시켜야 한다.” 문혁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판화 작품. 이 작품 속에서 마오쩌둥 옆에 선 인물이 바로 린뱌오이다. 1969년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 되지만, 1971년 9월 13일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다 추락사한다. 공공부문>
◇ 만장일치 통과 ‘5.16통지’, 무산계급 문화혁명 포고
만장일치의 거수로 통과된 이 “5.16통지”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포고문이었다. 3개월 전 베이징 시장 펑전은 마오쩌둥에 이른바 “2월 제강”을 제출했다. 중공중앙의 승인을 얻은 “2월 제강”을 통해 펑전은 역사학자 우한의 역사극 “해서파관”을 옹호하면서 “진실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도발적인 테제를 주장한다.
5.16통지는 마오쩌둥의 수족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비밀정찰의 귀재 캉성(康生, 1898-1975), 중공의 이론가로서 “붓대”라 불리던 마오의 유령작가 천보다(陳伯達, 1904-1989), 이후 4인방으로 맹활약하는 인물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2월 제강”의 10대 죄악을 지적하면서 펑전 등을 반혁명분자로 몰아간다.
<1966년 5월 16일 배포된 중공중앙의 2급 비밀 문서 중발 267. 이후 “5.16통지”로 알려졌다. 이 문서는 1967년 5월 17일 인민일보에 게재된다.>
마오쩌둥의 의도를 간파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는 1966년 5월 21일 총리 정치국 회의에 “문화대혁명은 지방이 아니라 중앙, 국제정세가 아니라 국내정세, 당외가 아니라 당내, 하급관료가 아니라 고급관료에 집중된다!”고 발언한다.
상황이 급변하자 “2월 제강”에 동조한 인사들은 서둘러 발뺌을 한다. “2월 제강” 자체가 反사회주의, 反 마오쩌둥, 反공산당의 증거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공중앙에 “똬리 튼” 네 명의 핵심 인물이 가장 먼저 문혁의 형틀에 올랐다. 베이징 시장 펑전, 중앙군사위 연합참모부장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 중앙선전부의 핵심인물 루딩이(陸定一, 1906-1996), 중난하이(中南海)의 실무를 관장하는 중앙 판공청(辦公廳) 주임 양상쿤(楊尙昆, 1907-1998)이었다.
◇ “반혁명 꾀하는 펑-뤄-루-양 4대가족을 몰아내라”
1966년 5월 18일 린뱌오의 연설문에 따르면, 펑전은 중앙서기처를 쥐락펴락했다. 뤄뢰이칭은 군권을 장악했다. 루딩이는 문화·사상 전선의 지휘관이었고, 양상쿤은 국가의 기밀, 정보 및 정부의 연락망을 관장하던 인물이었다. 린뱌오는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선 신문, 방송, 문학, 영화, 출판 등 선전매체와 군대를 동시에 장악해야” 하는데, 바로 이 네 명이 정부를 장악하고 반혁명의 정변을 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오쩌둥은 이미 1965년 11월 중순 베이징을 떠날 때 양산쿤을 파면하고 대신 심복 왕동싱(汪東興, 1916-2015)을 앉힌 바 있다. 이어서 린뱌오는 그의 부인 예췬(葉群, 1917-1971)을 사주해 뤄루이칭을 보좌하던 중앙군사위 부비서관 샤오샹롱(肖向榮, 1910-1976)을 공격한다. 마오쩌둥은 펑전을 잡기 위해 우한을 공격했고, 린야오는 뤄루이칭을 잡기 위해 샤오샹롱을 먼저 잡았다.
대부분 눈치조차 챌 수 없었지만, 그러한 조치들이 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 비판과 정교하게 맞물리고 있었다. 반년 전부터 마오는 겉으로는 우한의 “해서파관”을 비판하면서 물밑에선 군부의 거물을 몰아내는 투 트랙의 작전을 짜고 있었다. 노회한 영도자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짜낸 정변(政變)의 모략이었다.
1966년 6월부터 “펑-뤄-루-양 4대가족”을 향한 지독한 인민재판이 전개되었다. 중난하이에서는 중공중앙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이들을 규탄하는 첫번 째 집회가 열렸다. 곧 이어 베이징 전 지역에서 집회가 이어졌다.
<1966년 홍위병의 집회에 끌려 나와 비투당하는 펑전, 루딩이, 뤄루이칭, 양상쿤의 모습/ 공공부문>
◇ 홍위병들, 욕설 퍼붓고 침 뱉으며 ‘제트기’ 고문
뤄루이칭은 결국 건물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쳐 불구가 되고 만다.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부인이 대신 집회에 불려나가 “비투”(비판투쟁)를 당해야만 했다. 연말부턴 홍위병들은 뤄루이칭을 들것에 싣고 가서 “비투”의 단상에 올렸다.
비투는 한 개인의 인격을 산산이 짓밟는 잔혹한 집단린치였다. 홍위병들은 끌려온 “반혁명분자”들의 머리에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씌우고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단상에 올라온 피해자의 팔을 양옆에서 잡아 비틀고 머리채를 잡아 누르는 이른바 “제트기” 자세의 고문이 행해졌다.
연좌제는 일상이었다. 루딩이 역시 부인과 함께 홍위병 집회에서 지속적으로 비투당했다.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세 명의 처제들까지도 각각 6-9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그의 장모는 감옥서 병사했다.
<부러진 다리로 홍위병에 들려 비투의 단상에 오르는 뤄루이칭의 모습/ 공공부문>
베이징 시장 펑전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거의 날마다 집회에 불려나가 비판, 모욕, 조롱, 고문당하는 형벌을 견뎌야만 했다. 물론 문혁의 칼바람은 펑전 한 명에 국한되지 않았다. 베이징 시위원회의 부시장 10명이 그해 6월 모두 파면되었다. 그를 보좌하던 81명의 관원들은 곧 쥐도 새도 모르게 구속되었다. 펑전의 사람들이 모두 축출된 후, 지방에서 새로 발탁된 당성 좋은 관원들이 베이징 시위원회의 요직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혁명은 결국 정변일 뿐이었다.
< 문혁 당시 홍위병들이 행했던 고문 “제트기 타기”의 한 장면/ 공공부문>
정변 속에서 자행된 가혹행위는 곧 수많은 사람들의 자살로 이어졌다. “5.16통지”가 반포된 다음 날, 역사학자 우한을 변호하던 언론인 덩퉈(鄧拓, 1911-1966)가 자살한다. 5월 23일엔, 장시간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비서로 18년간 활약했던 톈자잉(田家英, 1922-1966)이 자살한다. 6월 25일 국제 업무를 담당하던 베이징시의 관원이 “외국과의 불법 접촉”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시달리다 자살한다. 7월 10일 베이징시위원회 선전부장 리치(李琪, 1914-1966)가 자살한다. 7월 23일엔 2월 제강의 초안을 작성한 서기 한 명이 또 스스로 목을 맨다. 끝도 없이 자살의 행렬이 이어졌다. 문혁의 폭풍이 채 일기도 전이었다. <계속>
<15> 시민의 자발적 저항이란 탈을 쓴 국가 주도 캠페인
◇ 중공 “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것” 훗날 실토
표면상 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을 보위하는 혁명군중의 자발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이란 정부에 맞서는 자발적 시민의 저항을 이른다. 과연 문화혁명이 대중운동일까? 정부가 인민을 동원했다면 국가주도의 관판(官辦) 캠페인에 불과하다.
1981년 중공중앙의 결정문에는 다음 문구가 나온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문화혁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당, 정부, 인민이 겪었던 가장 극심한 후퇴와 과도한 상실을 초래했다. 문화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중공중앙이 문화혁명을 “마오를 위한, 마오에 의한, 마오의” 캠페인으로 규정하는 대목이다. 벨기에 출신 작가 피에르 릭만스(Pierre Ryckmans, 1935-2014)는 1970-80년대 마오주의 문화혁명을 흠모하는 서구의 좌익 인텔리들을 비판하면서 일갈한바 있다. “문화혁명은 대중운동이라는 허구의 연막 속에서 치러진 권력투쟁일 뿐이었다.”
여전히 큰 의문이 남는다. 마오쩌둥은 과연 어떻게 그 수많은 군중을 움직여 “천하대란”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행정의 실권에 상실한 최고영도자 마오는 과연 어떻게 “혁명적 군중”을 움직일 수 있었나? 왜 다른 지도자들은 마오처럼 대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없었나?
1960년대 중반 중국의 인구는 7억 5천만 명에 달했다. 그 거대한 대륙을 일순간 혁명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마오의 권력은 군중을 움직일 수 있는 그의 초인적 카리스마에서 나왔다. 물론 마오의 인격숭배는 정치적 선전선동의 결과다. 1940년대 초반부터 중국공산당은 마오를 구심 삼아 전일적 대중지배의 기술을 계발해 왔다. 그렇다 해도 대중이 그토록 마오를 추종하고 숭배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혁 당시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위대한 스승 마오주석에 대해선 마음에 ”충(忠)“자를 품고,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해선 격하게 ”용(用)“자를 꼭 붙들고!“/ 공공부문>
◇ 마오의 ‘몽상’에 대중 열광…포퓰리즘의 나락으로
마오의 카리스마는 그의 “거대한 몽상(夢想)”에서 나왔다. 그는 과격한 유토피아의 꿈을 꾸고, 대중에게 그 꿈을 실현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대약진 운동 당시 인민공사를 추진해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했건만, 마오는 코뮌의 구상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1966년 5월 7일 국방장관 린뱌오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인민공사 대신 “커다란 학교(大學校)”의 발상을 들고 나왔다.
“린뱌오 동지, 세계대전이 없는 조건 하에서 군대는 ‘커다란 학교’(大學校)가 되어야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이 커다란 학교는 전쟁 이외에도 다른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중략> 정치를 배우고, 군사를 배우고, 문화를 배울 수 있다. 농업 및 부업에 종사할 수 있다. 중소 규모의 공장을 세워 필요한 산품(産品)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자산계급을 비판하는 문화혁명에 수시로 참가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군학(軍學), 군농(軍農), 군공(軍工), 군민(軍民)이 모두 결합될 수 있다.”
<“마오주석 “5.7지시”의 광휘어린 대도를 따라 용맹스럽게 전진하세!“/ chineseposters.net>
이 서신은 문화혁명의 정신을 담은 이른바 “5.7지시”로 널리 유포됐다. 이 문건에서 마오는 1) 사회분업의 철폐, 2)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 철폐, 3) 상품교환이 소멸된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를 지향했다. 나아가 당과 정부의 통합, 의회와 행정의 합일, 삼권의 통합을 주장했다. 심지어는 상비군 대신 각 단위의 인민의 자위적 무장을 제시하며, 지방자치의 실현까지 부르짖고 나왔다. 직종별 분업도 없고 지역적 특화도 없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의 기본단위를 조급히 달성하려는 야심적 기획이었다. 대약진의 인민공사엔 공(工), 농(農), 상(商) 학(學), 병(兵)의 다섯 직종이 공존했는데, “커다란 학교”의 구상에선 상(商)까지 배제한다.
상품경제와 화폐제도까지 부정하는 공산근본주의자의 몽상이 아닐 수 없었다. 좌우를 떠나 근대국가의 경제 상식을 전혀 모르는 과격한 무식자(ignoramus)의 궤변이었다. 대기근의 참상을 빚은 마오는 더 과격한 유토피아의 망념을 대중 앞에 제시한 셈이다.
그럼에도 “혁명군중”은 그의 몽상에 열광했다. 그들은 밤낮으로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마오가 성취한 중국혁명의 위대함에 감동받고, 마오가 제시하는 이상적 비전에 도취했다. 마오의 가르침대로 그들은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 나려 노력하는 “순수하고 우직한” 혁명분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순수와 우직 속엔 잔악한 폭력이 내포돼 있었다.
요컨대 1960년대 중반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는 마오쩌둥 사상이 쉽게 발아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土壤)이었다. 홍위병의 열정이 마오의 몽상과 공명했던 셈이다. 포퓰리즘의 꿈은 언제나 달콤하다. 대중은 그 꿈에 현혹당하고 만다. 문화혁명은 결국 포퓰리즘의 나락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홍기를 높이 들고 우리의 군대를 마오쩌둥 사상의 커다란 학교로 만들자!” “우리는 반드시 마오쩌둥의 지시를 따라 잘 싸우는 군대가 됨과 동시에 잘 공작하는 부대, 생산하는 부대가 되어야 한다. 군학(軍學), 군농(軍農), 군공(軍工), 군민(軍民)을 모두 아우르는 마오쩌둥 사상의 대학교를 만들자! 문무(文武)와 공농(工農)을 겸하는 공산주의 신인을 배양하자!”/ 공공부문>
◇ 문혁의 도화선,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
1966년 5월은 천하대란의 시작이었다. 5월 7일 마오는 린뱌오에 보낸 서신에서 “커다란 학교”의 구상을 제시한다. 중공중앙은 5월 10일 베이징 시위원회의 인원을 전격 교체한다. 곧이어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5.16통지”를 채택한다. 이로써 문혁의 기본정신은 이미 분명하게 공표됐다.
마오는 지난 6-7개월 간 당·정·군의 반혁명분자들을 송두리째 잡아들이는 촘촘한 그물을 짜고 있었다.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해서파관”을 공격해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 1902-1997)을 무릎 꿇렸다. 군부의 장악을 위해 대원수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을 숙청하고, 중앙선전부의 루딩이(陸定一, 1906-1996)와 중난하이의 정보통 양상쿤(楊尙昆, 1907-1998)도 몰아냈다. 이제 열광적인 대중의 호응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1966년 5월 25일 베이징 대학 식당의 벽에 붙은 1400자 정도의 비교적 짧은 대자보가 나붙는다. 베이징대학 철학과 당서기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 등 7인은 총장, 대학부 부부장, 베이징대 당위원회 부서기 등을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는 수정주의자”들이라 비난하고 모독한다. 이 대자보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 마오는 “파리코뮌의 선언”이라 극찬하고, 신문과 방송은 뒤따라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라 선전한다. 그 결과 이 짧은 대자보는 문혁의 도화선이 되는데….
<1966년 6월 5일자 "인민일보"는 1면에 최초의 대자보 이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의 움직임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위대한 호소에 따라 베이징 대학에서 압박당하던 무산계급 혁명파가 일어났다! 그들은 총장 루핑을 영수로 하는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통치를 뒤엎는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음모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승리를 이어가고 있다. 자산계급 보황파는 광대한 군중에 포위되어 있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공허하다. 대자보는 “전국에 장렬하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는 이때, 베이징대는 군을 믿고 미동도 없이 냉담하게 싸늘하기만 기운만 감돈다”며, “수많은 교수와 학생들의 혁명적 요구를 압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아울러 “학교의 당 조직이 지도력을 강화해 맡은 바 직무를 고수해야 한다”는 대학본부의 지시를 반혁명적이라 공격한다. 결국 중공중앙의 516통보를 지지하면서 펑전의 퇴위를 정당하다고 하는 선언이다. 마지막으로 “일체의 혁명적 지식분자들이여, 전투의 시기가 왔도다!”란 절규와 함께 유명한 세 구절의 구호로 끝을 맺는다. “당 중앙을 보위하라! 마오쩌둥 사상을 보위하라! 무산계급독재를 보위하라!”
대자보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진 녜위안쯔는 문혁기간 제5인자의 지위에 올라 혁명투사로서의 경력을 쌓지만, 1978년 4월 투옥되어 1983년 반혁명행위와 모욕죄 등으로 17년 형을 언도 받고 1986년 가석방된다. 녜위안쯔는 이후 회고록에서 이 대자보의 작성에 외부의 간섭은 전혀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다수 연구에 따르면 이 문제의 대자보는 치밀하게 기획된 문혁의 불쏘시개였다. <계속>
<1966년 6월 5일자 "인민일보"는 1면에 최초의 대자보 이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의 움직임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위대한 호소에 따라 베이징 대학에서 압박당하던 무산계급 혁명파가 일어났다! 그들은 총장 루핑을 영수로 하는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통치를 뒤엎는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음모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승리를 이어가고 있다. 자산계급 보황파는 광대한 군중에 포위되어 있다!">
08.01
<16> "당중앙에 반대하는 자는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변"
◇ 음모와 배신, 비열과 잔인…‘막장 드라마’ 권력 투쟁
모든 권력투쟁은 일면 유치하다. 권력자들이야 거대 명분과 숭고한 가치로 권력투쟁의 당위를 선전하지만, 싸움의 진짜 이유는 열등의식, 공격본능 따위인 경우가 적잖다. 1960년대 중반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한 편의 막장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진부한 혁명의 구호들 대신 시기, 질투 등 인간의 어두운 파토스(pathos)가 정치투쟁의 진짜 이유일 수도 있다.
권력자들은 함정을 파고, 음모를 짜고, 배신을 일삼고, 대중을 기만한다. 명예를 걸고 정당하게 결투하는 중세의 기사도는 현실의 정치판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권력투쟁은 대부분 비열하고, 치졸하고, 지저분하고, 잔인하다. 목숨을 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면 권력자는 "도덕"의 분칠을 하고 "정의"의 가면을 쓴다. 대중은 권력자의 민낯을 절대로 볼 수가 없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가 목숨을 걸고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기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에 따르면 "불세출의 영도자" 마오쩌둥 역시 일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문화혁명의 정치투쟁은 치정(癡情)과 원한이 뒤섞인 한 편의 멜로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인간 마오쩌둥의 시기심과 증오심이 문화혁명의 직접적 동기였을 수 있다.
<1954년부터 22년 간 마오쩌둥의 개인 의사로 근무했던 리즈수이(李志绥, 1919-1995)는 미국 망명 후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집필했다. 직접 썼다 파기했던 일기를 되살린 이 기록은 최고 권력자 마오의 섭생, 생활습관, 여자관계,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진상을 기록한 심층적 증언록이다.>
◇ 권력 놓고 ‘대리 투쟁’ 벌인 마오·린뱌오·캉성의 아내들
마오쩌둥, 린뱌오, 캉성은 모두 정치투쟁의 대리인으로 "와이프"를 전면에 내 세우거나 뒤에서 은밀히 이용했다. 마오는 펑전을 잡기 위한 계략으로 장칭을 상하이에 보내서 문단의 좌파 비평가들과 결탁시켰다. 린뱌오는 군부의 거물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을 치기 위해 예췬(葉群, 1917-1971)으로 하여금 뤄의 심복 샤오샹롱(肖向榮, 1910-1976)를 공격하게 했다. 캉성은 베이징대학에 차오이오우(曹軼歐, 1903-1989)를 밀파해서 좌익 지식인들을 규합해 문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를 작성하게 했다.
와이프을 이용한 점에선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6년 6월 왕광메이(王光美1921-2006)는 류의 뜻에 따라 공작조(工作組)를 이끌고 칭화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그녀는 홍위병 집회에 불려나가 집요하게 성적 모욕을 당했는데, 장칭(江靑, 1914-1991)의 질투 및 증오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장칭은 1930년대 상하이 은막의 스타로서 옌안에서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정부인이 된 인물이다. 장칭은 7세 연하의 미인 왕광메이가 영부인이 되어 해외순방을 다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순방 시 양장에 진주목걸이를 했다는 이유로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의 목에 탁구공 목걸이를 달고 집회에 끌고 다니며 공공연히 성적(性的) 모욕을 가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영부인 하르티니 수카르노를 접견하는 장면. 왼쪽부터 마오쩌둥, 장칭, 그리고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 왕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질시는 문혁 멜로드라마의 심리적 배경이 된다./ 공공부문>
중공중앙 최고위 부부들은 거의 대부분 1940년대 옌안에서 만나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커플들이었다. 문혁 시절 그들이 펼친 “쌍쌍투쟁”은 숱한 가십거리를 남겼다. 1966년 5월 20일 중공중앙 확대회의에 배포된 린뱌오 명의의 문건이 단연 압권이다.
“나는 증명한다. 1. 나와 혼인할 때, 예췬은 순수한 처녀였으며 혼인 후에도 그녀는 줄곧 정조를 지켰다. 2. 예췬과 왕스웨이는 사랑한 적이 전혀 없다. 3. 라오후(老虎, 아들 리궈 [立果]의 별명)와 더우더우(豆豆, 딸 리헝[立衡]의 별명)는 모두 나와 예췬이 친자녀들이다. 4. 얜웨이빙(嚴慰冰, 1918-1986)의 반혁명적 서신에 적힌 내용은 모두 요설이다. 린뱌오, 1966년 5월 14일.”
왕스웨이는 연안 시절 정풍운동에 희생당한 비운의 문인이었다. 얜웨이빙은 중앙 선전부장 루딩이의 와이프인데, 린뱌오에게 예췬의 부정한 행실을 폭로하는 수십 통의 익명 서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루딩이와 린뱌오의 대립이 부인들 사이의 지저분한 싸움으로 표출됐다는 이야기다.
문혁 당시엔 극비였으나 치정에 얽힌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이후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권력자들은 근엄한 얼굴로 정치적 비장미를 연출하지만, 대중은 권력자들의 뒤를 캐묻고 그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희화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술자리 가십은 민심의 풍향계라 여겨진다. 독재정권 아래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린뱌오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린뱌오, 린리궈, 예췬, 린리헝. 1971년 내란혐의에 연루된 린뱌오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망명하다 사망한다. 이 중 린리헝만 현재 생존해 있다.>
◇ 최고 권력자에는 반대 못하는 ‘조반유리’, 모든 반란을 진압하라는 뜻
1966년 5월 25일 베이징 대학 식당 벽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가 붙는다. 베이징대 철학과 당위원회 서기 녜위안쯔 등 7인의 서명이 붙은 대자보는 문화혁명이 대중운동으로 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개 대학의 식당 벽에 붙은 대자보 한 장이 대체 어떻게 전국적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가 있나? 물론 관영매체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베이징 시장 펑전이 숙청된 이후, 관영매체는 최고 영도자 마오쩌둥의 손아귀에 온전히 들어왔다.
6월 1일 항주에서 마오쩌둥은 문제의 대자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신화사를 통해 이 대자보의 전문을 방송하고, 전국의 모든 일간지, 주간지 등에 그대로 발표해야 하오. 그럴 필요가 십분 있소. 베이징 대학에 이런 반동의 보루가 있다면, 바로 거기서 반동의 타파를 시작할 수 있소!” 흥분한 마오쩌둥은 동시에 캉성에 전화를 걸어서 이 대자보야 말로 "1960년대 베이징공사의 선언이며, 파리코뮌보다도 그 의의가 더 크다"고 소리쳤다.
<1966년 8월 16일 톈안먼 광장에서 녜위안쯔 및 좌파인텔리들을 맞이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왼쪽 앞 단발의 안경 낀 여성이 녜위안쯔/ 공공부문>
6월 1일 중앙방송은 녜위안쯔의 대자보를 집중 조명한다. 중앙의 관영매체에 대서특필되자 지방의 모든 신문이 곧 따라왔다. 전국의 이목이 거의 동시에 베이징 대학에 나타난 한 장의 대자보에 쏠리게 되었다. 곧이어 전국의 유수 대학들과 중고교에도 대자보의 물결이 이어졌다. 그해, 6월, 비로소 마오쩌둥이 밤을 지새우며 기획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인민일보 사설엔 이런 구절이 등장했다. "마오주석에 반대하고,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고,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지시에 반대하는 모든 자는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마오쩌둥의 보위가 곧 혁명이라는 선언이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선 현대 중국의 자유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은 일갈한다.
“어떤 이는 마오가 문혁 시기 군중에게 '민주'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 사설의 필자는 '민주'에 명확한 생사(生死)의 한계선을 긋고 있다. 마오주석, 마오쩌둥 사상 및 당중앙은 절대로 반대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오로지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造反)할 수 있었다. 마오의 면전에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이 가능했다.”
문화혁명의 키워드는 단연 "조반"이었다.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며 일어난 홍위병을 향해 마오는 그 유명한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부르짖었다. 반란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조반의 사전적 의미는 "반란을 일으키다, 반역하다, 반항하다" 정도이다. 반란이란 최고 권력에 대한 저항일 때 의미가 있다.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할 수 있다면" 결국 마오의 호위무사가 되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형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주장에 가깝다. 결국 문혁 당시의 "조반"이란 1950년대 내내 진행됐던 진반(鎭反)운동 내지는 숙반(肅反)운동과 다르지 않다. 마오가 제창한 '인민민주독재'의 원칙에 따라 인민이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억압하는 것!
문제는 이 대자보가 마오의 오른팔 캉성이 와이프 차오이오우를 사주해서 만들어낸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녜위안쯔는 2010년 90세의 나이로 그 대자보가 누구의 외압도 없이 7인이 합심하여 자발적으로 작성한 자발적 격문이라 주장했지만, 1966년 초 이미 차오이오는 공작조(工作組)를 이끌고 베이징대학에 들어가 활약하고 있었다. 중공중앙이 "5.16통지"를 발표한 직후, 군중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오가 요구하고 캉성이 기획하고 차오이오우가 실행에 옮긴 "조반"의 멜로드라마였다. <계속>
<문혁 당시 대자보를 작성하는 베이징 사범대학의 학생들. 큰 글씨로 쓴 "폭력혁명만세!"라는 구호가 인상적이다./ 공공부문>
<17> "혁명의 대상은 관료 최상층, 혼란을 두려워 말라"
◇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포르투나’의 시간
권력투쟁의 진흙창에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바뀔 수 있다. 절친했던 친구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기도 한다. 선악이 착종(錯綜)하고, 가치가 전도(顚倒)되고, 좌우가 번복(飜覆)된다. 바로 그러한 정치의 불확실성 때문에 권력투쟁에선 덕망, 실력, 지략, 용기 등 인물의 비르투(virtù)보다도 포르투나(fortuna)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는 성격이 변덕스럽고 장난스럽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 ‘자유의지’에 따라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1966년 중공중앙의 "5.16 통지" 이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공식적으로 개시된 후 최초의 50일간은 진정 포르투나의 시간이었다.
1966년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 나붙은 1400자의 길지 않은 대자보 한 장이 "천하대란"을 일으키는 문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자보를 대표로 집필한 인물은 베이징대 철학과 중국공산당 총지부위원회 서기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였다. 그녀는 1964-65년 사회주의교육운동(이하 사청[四淸]운동) 당시 교내의 혁명투쟁에서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이다.
<1964년 전국적으로 진행된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한 장면. 부농을 비판하는 농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농촌에선 사청운동으로, 도시에선 오반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모든 과정이 이후 사청운동으로 불리웠다. 사청운동은 흔히 문화혁명의 전조로 인식된다./ 공공부문>
◇ “베이징대는 反당·反사회주의·反마오사상의 기지”
1964년 11월 초, 중앙선전부 부(副)부장 장판스(張磐石, 1905-2000)가 이끄는 210명의 공작대(工作隊)가 베이징대학 캠퍼스에 진입한다. 이들의 임무는 바로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를 비판하는 계급투쟁의 개시였다. 이때 녜위안쯔 등 "좌파"가 선두에 나섰는데, 이들은 베이징 대학 총장이자 당서기 루핑(陸平, 1914-2002), 부서기 펑페이윈(彭珮雲, 1929- ) 등을 표적 삼아 표독하고도 집요한 계급투쟁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베이징대학이 “자본주의의 용광로"이며 "자산계급이 통치하는 학교"라는 게 그들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후 베이징 대학의 "계급투쟁"은 두 달 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장판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교 20개 장소에서 대면(對面) 투쟁이 일어나 “격렬하고, 첨예하고, 활발하고, 생동감 있게” 전개됐다. 대면 투쟁이란 크고 작은 대중집회에 반혁명의 혐의자를 잡아놓고 직접 혐의를 추공하고 단죄하는 “비투”(비판투쟁)의 인민재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녜위안쯔는 좌파투사로 급부상하지만, 역시 포르투나가 변덕을 부린다.
베이징 시장 펑전이 베이징 대학 사태에 개입한 것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루핑과 펑페이윈을 감싸고 돈 후, 베이징대학 사청운동의 과도함을 비판한다. 반격의 기회를 얻은 루핑은 1월 23, 24일 이틀 동안 공작대를 비판하면서 적극적인 자기항변을 이어간다. 마침내 2월 20일 중앙선전부의 루딩이(陸定一, 1906-1996)는 "루핑은 좋은 사람인데, 실수를 했을 뿐"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리고, 3월 3일, 덩샤오핑이 루딩이의 판단을 승인한다. 이로써 베이징 대학의 사청운동은 일단 수습되었다.
4월 29일 루딩이는 장판스가 이끄는 공작대를 해체하고, 중앙선전부 부부장 쉬리췬(許立群, 1917-2000)을 그 자리에 앉힌다. 이듬 해, 6월 29일 펑전은 베이징 대학이 “자본주의의 용광로"가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루핑을 공격하던 녜위안쯔 등 학내의 좌파세력은 이제 비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좌파는 우파로 몰리고, 우파는 다시금 좌파가 되어 극적으로 소생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1965년 출판된 “미신타파 괘도.” 벽에 걸어 놓고 보는 우화집. “신의 관념이 어떻게 나왔냐?”는 제명 아래 농촌의 인민에 사회주의적 종교관을 심어주는 계몽적 우화가 제시되어 있다. 전통적 신앙은 모두 미신이라는 마르크시즘의 종교관이 담겨 있다./ chineseposters.net>
루핑은 베이징 대학의 간부, 교사 및 학생들로 구성된 공작대를 조직한다. 농촌 지역 사청운동에 그들을 파견하기 위함이었다. 녜위안쯔는 철학과 서기직을 박탈당한 채, 베이징 근교의 화이러우(懷柔)현에서 사청운동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놀랍게도 1966년 2월 이후, 펑전과 루딩이는 삼반분자의 멍에를 쓰고 추락하고 만다. 얼마 후, “5.16통지” 반포되었다. 포르투나가 녜위안쯔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펑전과 루딩이는 이미 삼반분자의 멍에를 쓰고 만신창이가 되어 직무 해제된 상태였다. 녜위안쯔로선 눈이 번쩍 뜨이는 반격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마오쩌둥의 오른팔 캉성은 와이프 차오이오우를 사주해 베이징 대학에서 문혁의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차오이오우는 베이징 대학에서 녜위안쯔와 접선한다. “5.16통지"가 정치국 확대회의를 통과해서 중공중앙의 공식노선으로 채택되자 녜위안쯔는 차이이오우과의 협의를 거쳐 곧 행동에 나선다. 녜위안쯔는 6명의 좌파들과 함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를 작성한다.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를 “반당, 반사회주의, 반마오쩌둥 사상”의 기지로 규정하는 이 대자보는 순식간에 문혁의 돌풍을 일어난다. 위협을 느낀 대학 당위는 매일 밤 회의를 열고 수천 장의 대자보를 써 붙이며 반격을 시도하지만….
<1966년 6월 추정. 문혁시절 대자보의 홍수/ 공공부문>
◇ 관영매체, 문화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붓다
1966년 6월 1일 마오쩌둥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를 전국의 매체를 통해 발표하라 지시하고, 그날 저녁 중앙방송은 그 사건을 대서특필한다. 곧바로 전국의 공산당 기관지들이 문화혁명의 팡파르를 불어댔다. 관영매체의 선전선동은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했다. 문혁의 광풍이 일단 불자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대학 캠퍼스가 제일 먼저 요원(燎原)으로 화(化)했다. 전국의 대학에선 좌파 학생들이 학교의 당위원회에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 최고의 명문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의 캠퍼스엔 6월 동안에만 6만5000장의 대자보가 붙었다. 상하이 선전부의 통계에 따르면, 6월 18일 이전까지 무려 8만8000 장의 대자보가 붙었고, 1390명이 반혁명세력의 낙인을 받았다. 상하이 시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6월 첫 주, 270만 명이 순식간에 문혁의 물결에 동참했다.
마오쩌둥은 이미 문화혁명의 타깃은 관료집단 내부의 최상층이라 언급한 바 있다. 마오의 교시에 따라, 대학가의 투쟁은 우선 총장, 대학간부 및 교수들을 겨냥했다. 그해 6-7월 언론은 날마다 “반혁명 흑방(黑幇)”의 발본색원을 부르짖고 있었다. 관영매체의 선전선동으로 학생들의 투쟁은 점점 더 과격한 양상으로 치달아 6월 18일 급기야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6월 21일 중공중앙 확대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무정부주의 현상은 제지돼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는데….
<1966년 5-6월 베이징의 최고명문대학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에서 가장 먼저 문혁의 돌풍이 일어났다. 위의 사진은 칭화대학 홍위병 비투(批鬪) 집회의 한 장면. “반동학술권위를 타도하라!”>
◇ 마오쩌둥 “이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혁명의 폭풍이야”
문혁의 화마가 캠퍼스를 덮치자 중공중앙은 기민하게 베이징의 교육 및 문화 기관 곳곳에 7239명의 대규모 공작조를 파견했다. 6월 3일부터는 지방의 당위원회도 공작조를 내보낸 상태였다. 1950년대부터 대규모 정치투쟁이 전개될 때면 중앙정부는 공작조를 파견해 “질서정연하고 합법적인” 계급투쟁을 관장하게 했다. 공작조는 대부분 퇴역 장교들과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6월 9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항주로 간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알현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중공중앙을 지도해 달라 읍소하지만, 마오는 넌지시 그 부탁을 뿌리치면서 묘한 말을 남긴다.
“문화대혁명에 관해선, 그저 손을 떼야 해. 혼란을 두려워 하지마! 손을 놓아야 군중을 격동시킬 수 있어. 크게 일을 벌일 수가 있어. 그렇게 해야 우귀사신(牛鬼蛇神, 반혁명분자의 비유)들을 모두 끌어낼 수 있어. 공작조(工作組)를 꼭 보낼 필요도 없어. 우파들의 파괴행위도 두려워 말아.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한 장으로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타오르기 시작했어. 이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혁명의 폭풍이야!”
이미 류와 덩은 투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 사실을 훤히 아는 마오는 “혼란을 두려워 말라”며 “공작조를 꼭 보낼 필요도 없다”는 말을 한다. 과연 어떤 의도였을까? <계속>
<문화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학계, 문화계, 관계, 정부기관 등 모든 단위에서 권위에 도전하는 군중의 반란이 필요하다 주장했다. 마오쩌둥이 고안한 “조반유리”와 “혁명무죄”는 그 당시 중국의 집단의식을 드러내는 문혁의 키워드다./ 공공부문>
<18> "마오쩌둥이 무너지면 중국공산당이 무너진다"
◇ 스탈린처럼 ‘격하’ 되지 않으려 띄운 승부수
현실 정치에서 2인자는 영원히 1인자의 “꼬붕”으로 살아야만 하나? 정치투쟁의 링 위에서 2인자가 1인자를 제치고 권력의 정상으로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2인자는 흔히 1인자를 최고의 영도자로 만든 1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1인자가 무너지는 순간, 2인자는 바로 그 1인자를 옹립한 권력창출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정치판에서도 흔히 “꼬붕”이 “오야붕”에 종속되는 야쿠자의 생존논리가 관철된다.
문제는 1인자의 유고(有故)와 더불어 발생한다. 스탈린 사후 3년 후였다. 1956년 2월 25일,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 의회에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비공개 연설문 “인격숭배와 그 영향들”을 낭독한다. 이 연설문이 이스라엘 정보원에 의해 유출되자 거센 후폭풍이 일어난다. 스탈린의 고향 조지아에선 스탈린 추종자들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지만 이른바 “흐루쇼프 해빙”은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 등 공산권 전역에 자유화 물결을 일으켰다. 공산주의를 동경하며 스탈린을 칭송해왔던 서방의 좌파 지식인들도 혼란에 빠진다. 일례로 미국공산당은 순식간에 3만 명의 당원을 잃었다.
1957년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을 맞아 모스크바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홍루몽’의 한 구절을 인용해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를 치하한다.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東風壓倒西風)!” 이 구절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압도하는 의미로 여겨졌지만, 그 숨은 뜻은 중국이 소련을 압도한다는 의미였다. 마오가 “대약진”의 구호를 내걸고 무리한 집산화의 유혹에 빠져든 국제정치의 배경이었다. 스탈린처럼 “격하”되지 않기 위한 마오 최후의 승부수였다.
<195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간 마오쩌둥/ 공공부문>
◇ 2인자 류사오치, 마오를 거역할 수 없었다
중공중앙 서열 제2위의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꼬붕”이었다. 대약진운동이 대기근으로 귀결된 후에도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2020년 현재까지 중국에선 제대로 “마오 격하 운동”이 일어난 사례가 없다. 마오가 무너지면 중국공산당이 무너지고, 중국공산당의 붕괴는 중공중앙 베테랑 혁명가 모두의 몰락이기 때문이다.
1959년 국가주석의 지위에 오른 류샤오치는 대기근을 수습하고 민생을 챙겨야만 했다. 1962년부터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했지만, 류샤오치는 정치 캠페인을 경시할 수 없었다. 마오가 제창한 사회주의 교육운동(1963-1966)은 류샤오치의 영도 아래 전개되었다. 대기근의 참상을 목도한 후 “역사가 우리를 단죄할 것”이라며 마오쩌둥을 압박했던 류샤오치! 그는 그러나 마오를 거역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었다. 마오가 그를 국가주석에 앉힌 정치적 “오야붕”이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중소분쟁의 결과, 전 중국은 “수정주의 반대!” “반수방수(反修防修,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자!)” 등의 구호로 뒤덮인 상황이었다. 실용적 경제개혁을 추진하던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으로선 자칫하면 수정주의의 멍에를 쓸 수도 있었다. 류샤오치로선 이념적 선명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스스로 수정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좌파”만이 “우파”의 방법을 차용할 수 있는 극한(極限) 정치의 아이러니였다.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가는 것은 반수방수의 백년대계다!”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을 농촌 벽지에 하방(下放)시키면서 지식청년이라 부른다. 반수방공은 문혁의 대표적 표어였다./ chineseposters.net>
◇ 1966년 6월 “숨어있는 우파를 색출해 단죄하라”
1965년 11월부터 1966년 5월 말까지 마오쩌둥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기반을 닦았다. 1966년 6월 9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항주로 날아가 마오에게 베이징으로 돌아와 달라 간청하지만, 마오는 슬그머니 그 요청을 뿌리친 채 계속 남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절대로 계급혁명을 잊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국적인 대중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왔다. 1966년 6월 드디어 대중노선의 광풍이 일어났는데, 혁명의 파도를 보면서도 마오는 입을 다문 채 시간만 끌고 있었다.
1966년 5월 말부터 중앙방송을 비롯한 전국의 모든 언론이 문혁의 바람을 일으키자 전국의 모든 대학에선 대자보의 물결이 일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문혁의 광풍은 곧 지방에도 몰아쳤다. 6월 첫 주, 상하이에 대자보의 홍수가 일어났다. 상하이 시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처음 며칠 동안 무려 270만 명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6월 18일까지 대략 8만 8000장의 대자보가 붙었고, 1390명이 비판당했다.
6월 초, 7239명의 공작조가 베이징의 교육문화 기관 및 언론사에 파견됐다. 거의 동시에 상하이 역시 40여개 대학에 공작조를 파견했다. 공작조는 대부분 퇴역 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1964년 이래 중국공산당 관료조직의 정치부 등에서 민간인으로 근무하던 인물들이었다. 지방의 공작대도 역시 각 지역의 군구(軍區)를 통해서 조직되었다. 중공중앙의 전통에 따라 현장에 투입된 공작조는 표면상 문화혁명을 영도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숨어 있는 우파의 색출 및 단죄가 본래의 임무였다.
그해 6, 7월 언론 지면에는 “반혁명 흑방(黑幇)”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했다. 과연 누가 “반혁명 흑방”에 속하는가? 그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작조는 부르주아 사상을 설파하거나 수정주의의 교수법을 확산한 교사들을 색출해 비판하라 지시했다.
<“반당 반사회주의 흑선(흑색 노선)을 향해 맹렬히 불을 지르자!” 문혁 당시의 풍경/ 공공부문>
◇ 베이징대 총장, 낙서 금지했다가 ‘반혁명분자’로 찍혀
학생들은 사소한 과거의 언행까지 문제 삼아 대학총장, 대학간부, 교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베이징 대학 총장 루핑은 기숙사벽에 낙서를 금지했다는 이유로 “반혁명 흑방”으로 몰렸다. 벽에 마오주석의 어록을 적고 싶어도 낙서 금지 때문에 적을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혁명의 잣대를 들이대면 모두가 구린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모두가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공격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처음엔 기세등등한 당권파의 자녀들이 문혁의 주체로 등장했지만, 이후 당권파가 반동으로 몰리자 그들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반혁명수정주의 분자로 몰려 비투(批鬪)당하는 베이징대학 총장 루핑의 모습/ 공공부문>
1966년 여름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류샤오치는 문화혁명의 진두지휘를 맡았다. 마오는 대규모 군중운동을 벌일 때마다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은 중앙서기처의 총서기 덩샤오핑의 작품이었고, 이미 언급한대로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류샤오치의 작품이었다. 물론 모든 캠페인의 배후는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황제”의 지위에서 관망할 뿐, 직접 나서지 않았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맡은 바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마오의 총애를 받았고, 덕분에 그들은 중공중앙 최고위의 당권파가 될 수 있었다. 행정의 실권을 쥐고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도 그들이 마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1966년 6월 3일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는 문화혁명의 기본원칙 8개 조항을 승인한다.
1. 대자보는 교내에만 붙인다.
2. 집회는 학습 및 공무를 방해할 수 없음.
3. 거리집회 불허
4. 외국인 학생 참여 금지
5. 비판 대상자의 집에서는 비판투쟁 금지
6. 각별한 안전주의
7. 구타 및 부당행위 금지
8. 투쟁의 수위 조절에 적극적 지도 필요
<“무산계급 혁명조반파여, 연합하라!” 문혁 당시의 포스터/ 공공부문>
문혁의 파도가 전국을 뒤엎는데, 마오는 7개월 넘게 지방에 체류하고 있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공작조를 파견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혁의 계급투쟁을 지휘하려 했지만…. 학생들은 이미 “혁명무죄 조반유리(造反有理)”의 암시를 따라 과격하고도 극렬한 문혁의 계급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공작조와 조반파가 격렬하게 맞붙기 직전이었다. 급기야 1966년 6월 18일 베이징 대학에선 대규모 폭력시위가 발생한다. 그해 여름, 노회한 게릴라 전사 마오의 시나리오대로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계속>
08.22
<19> 홍위병 폭력 옹호한 마오쩌둥 "혁명은 폭동이다"
혁명의 시대엔 불의(不意)의 공습(空襲)처럼 무차별 말[言語]의 폭탄이 떨어진다. 그 폭탄을 맞으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 가벼운 찰과상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제대로 맞으면 사망에 이른다. 1978년 12월 중공중앙의 발표에 의하면 문혁 “10년의 대동란” 과정에서 무려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정치적 타격의 양상은 복잡다단하지만, 피해자는 모두 공통적으로 언어의 폭격을 맞았다. 2020년 오늘도 “말의 폭탄”은 날마다 터진다.
언어중추의 발전은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적 특징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호모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이다. 인간은 언어로 세상을 인식하고,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바꾼다. 언어는 인류문명의 핵심이지만, 치명적 한계이기도 하다. “산(山)”의 실체는 “산”의 이름보다 한없이 크다. 산을 산이라 부르는 순간, 산을 안다 여긴다면 심대한 착각이다. 선방(禪房)의 경구처럼 “산은 산이지만, 산은 또 산이 아니다.” 일찍이 언어의 속임수에 빠진 어리석은 자들을 향해 노자(老子)가 말했다. “지자(知者)는 불언(不言)하고, 언자(言者)는 부지(不知)하다.”
<문혁 당시의 전형적인 비투(批鬪) 장면. 투쟁 대상의 목에 ‘이름’을 붙이고 적대적 투쟁을 이어가는 혁명 군중/ 공공부문>
◇ 정치투쟁은 ‘마타도어’… 상대를 악으로 모는 수법
혁명의 시대엔 언어적 착오(錯誤)가 인간세(人間世)를 지배한다. 정치투쟁의 기본은 마타도어(matador)다. 반대자에 “나쁜 이름”을 들씌워 악인으로 몰아가는 야비한 수법이지만, 인간은 실체와 이름을 쉽게 혼동하기에 정치꾼들은 그 틈을 파고 든다. 누군가 제 아무리 위대한 성취를 이뤘다 해도 흔해빠진 정치적 낙인만으로 그 개인의 인격을 파괴하고 정치적 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굴곡을 거쳐 온 인간 개개인의 정체가 고작 반혁명분자, 수정주의자 따위 단순한 오명(汚名)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반혁명분자”라는 주어엔 이미 “자산계급 대변자,” “국민당 잔당,” “제국주의 부역자” 등등의 술어가 줄줄이 내포돼 있다. 누군가 반혁명분자의 낙인을 받으면 항변의 기회도 없이 “제거돼야만 하는” “인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문혁시절 어린 홍위병들은 사방에서 잡아 온 “반혁명분자들”을 무릎 꿇리고 팔을 뒤로 꺾어 제압한 후, 얼굴에 침을 뱉으며 독침 같은 말의 폭탄을 쏟아냈다. 反당, 反사회주의, 反마오쩌둥사상, 反마오주석, 자산계급 대변자, 제국주의 주구 등등. 그 단어 하나하나가 그들의 과격한 행동을 정당화했다. 요컨대 문화혁명의 폭력성은 언어의 속임수에서 발생했다. 혁명의 말장난에 전 인민이 속수무책으로 놀아났던 셈이다.
<문혁 당시 사형에 처해지는 “반혁명 집단 주범”들의 모습. X자 쳐진 이름자 밑에 “사형에 처한다. 즉시 집행!”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공공부문>
◇ 언어의 속임수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난 인민들
문혁 초기의 일례를 살펴보자. 1966년 6월 15일 난징의 신화사(新華社)는 난징(南京)대학에서 발생한 한 사건을 보도한다. 다음 날 베이징의 인민일보에 게재되면서 전국에 알려진 기사다. 베이징대학에서 불기 시작한 문화혁명의 광풍이 전국 전역에 몰아치던 시점이었다. 1966년 6월 1일 중공 인민방송국에서 베이징 대학의 7인이 작성한 최초의 대자보에 대해 보도한 직후, 6월 2일 오후 난징대학엔 베이징대학에 호응하는 대자보가 붙었는데….
베이징 대학과 마찬가지로 난징대학의 혁명사생(革命師生, 교수와 학생)들은 “반당반사회주의의 반혁명분자” 쾅야밍(匡亞明, 1906-1996)의 “반동적 죄행”을 적발하고 단죄했다. 쾅야민은 난징대학 당위원회 제1서기이자 총장이었는데, “야비(野卑)하고 비루(鄙陋)하고 독랄(毒辣)한 음모적 수단으로 교내 혁명군중의 운동을 진압하고 반당·반사회주의의 반혁명노선으로 나아갔다”는 혐의를 썼다. 대자보는 또 쾅야밍이 문화혁명을 배반했다고 집중 공격했는데, 그 근거는 난징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했던 1930년대 좌파문학 관련 서적이었다.
<총장 쾅야밍을 공격하는 난징대학의 대자보/ 공공부문>
쾅야민이 그 책에서 “학술대토론에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원칙을 강조”했다는 이유였다. 1965년 12월 베이징 시장 펑전은 “학술토론”과 “실사구시”를 근거로 역사학자 우한을 변호했었다. 난징대학의 혁명사생들은 바로 그 점을 적시하여 쾅야민 총장을 베이징의 반혁명세력과 연계된 “철두철미한 수정주의자”로 몰고 갔다. 게다가 그가 “무의식”과 “객관성” 등 서구 자산계급의 철학 개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반당·반사회주의 흑색노선의 옹호자”라 비난했다. 쾅야민은 또 “자산계급의 대표적 존엄”이자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얼굴”이란 오명도 써야 했다. 그가 혁명사생에 “모멸, 저주, 협박을 가하면서” “광적인 반혁명활동을 전개했다”는 인신공격도 이어졌다.
쾅야민이 맞았던 말의 화살을 열거해 보면…. 반당분자, 반사회주의분자, 반동분자, 반혁명분자, 흑방, 흑선(흑색노선) 수정주의자, 자산계급의 대표, 보황파의 얼굴, 우귀사신(牛鬼蛇神, 소머리 뱀 몸뚱이의 귀신) 등등이 있다. 그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독전(毒箭)이었지만, 그때까진 그래도 “말의 화살”일 뿐이었다. 문혁 최초의 본격적인 폭력투쟁은 불과 이틀 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났다.
◇ 언어폭력에서 신체폭력으로…성범죄도 저질러
1968년 6월 18일 베이징 대학에서 최초의 폭력적 혁명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베이징 대학에 파견된 공작조는 신속히 “난투 상황”을 수습한 후, 현장의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중공중앙에 올린다.
이 보고에 따르면, 6월 18일 오전 9시에서 11시 공작조가 전체회의를 하는 사이 베이징 대학 교정에선 화학과, 생물학과 등의 여러 단위에서 “난투(亂鬪)의 현상”이 벌어졌다. 대략 40-60여 명에 대한 폭력적인 비투(批鬪, 비판투쟁)가 발생했다. 과격분자들은 교내에 흑방(黑幇)분자들을 처벌하는 투귀대(鬪鬼臺)와 참요대(斬妖臺) 등을 설치한 후, 교내 주요 책임자들, 당 간부들, 교수들, 반동학생들에 대한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거행했다. 면상에 흑칠하기, 긴 모자 씌우기, 무릎 꿇리기, 옷 찢기, 주먹으로 때리기, 발로 차기, 유가(遊街, 가두행진), 유투(遊鬪, 가두 비투) 등등의 폭력행위가 자행되었다.
가해자 중에는 깡패, 부랑아도 있었고, 신원을 속이고 혁명대오에 잠입한 국민당원과 베이징대학 부속 고교 퇴학생도 섞여 있었다. 베이징 대학 학생들 중에도 영웅심에 빠져 폭력을 휘두른 극렬분자도 있었다. 그들은 투쟁 대상에 대한 폭력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가슴을 주무르고, 엉덩이를 때리고, 음부를 만지는 등” 성범죄도 저질렀다.
<문혁 시기, 베이징대학 부속 고교에서 학생들이 교장을 비투하는 모습/ 공공부문>
공작조는 바로 현장에 달려가 이들의 “난타난투”를 중단시킨 후, “진정한 좌파의 혁명 행동”을 촉구했다. “무산계급 혁명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의 투쟁은 공작조의 비준을 받아야 하며, 소수 극렬분자에 의한 난동(亂動)은 반혁명으로 간주한다는 엄격한 규정을 제시했다.
규율과 질서를 지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문화혁명이 과연 가능할까? 중공중앙의 당권파들은 비폭력의 합법적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특히 류샤오치는 6.18 사건에 관한 베이징 대학 공작조의 보고서를 “간보(簡報)” 형식으로 전국에 배포했다. 극렬분자의 과격행위를 제어하기 위한 선제조치였다.
물론 마오는 류샤오치의 조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40년 전 출세작 “후난 농민운동 고찰보고”에서 마오는 말한 바 있었다. “혁명은 폭동이다(革命是暴動)!” <계속>
<문혁 당시의 포스터. “무산계급 혁명 조반파는 연합하라!” “혁명 조반정신 만세!”/ 공공부문>
08.29
<20> 편가르기와 흑백논리로 인민을 장악하라
“편가르기”는 정치투쟁의 기본이다. 위기에 봉착하면 위정자들은 흔히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서 싸움을 붙인다.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대세력을 제압하려는 진부한 꼼수지만, 정치투쟁에서 그보다 더 효율적인 대중동원의 수단은 없다. 국민의 분열을 위해 그들은 어김없이 이분법과 흑백논리를 구사한다. 대부분 거짓선동과 흑색선전임에도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생업에 바쁜 군중은 쉽게 반복적으로 이분법의 트릭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 전체주의 정권의 이분법과 흑백논리
1949년 건국 이후 중공정부는 바이러스 퇴치하듯 인민의 의식을 소독해왔다. 인민의 의식에서 부르주아 잔재, 자유주의의 유혹, 자산계급의 유습을 도려내 세척한다는 발상이었다. 의식의 세척과 소독을 위해서도 역시 이분법과 흑백논리가 최고의 효력을 발휘한다. 혁명/반혁명, 무산계급/자산계급, 민족/반민족, 민주/반민주, 친일/반일, 친미/반미, 반제국주의/친제국주의, 친수정주의/반수정주의 등등.
1953년 마오쩌둥은 전체 인구를 95% 인민과 5%의 적인(敵人)을 나눈 바 있다. 문혁 당시에도 총인구의 5% 정도가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이라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분법은 소수에 대한 다수독재의 논리를 깔고 있었다. 다수의 혁명대중이 소수의 반당·반사회주의 세력을 독초 뽑듯 제거해야 한다는 이른바 “인민민주독재”의 발상이었다.
자유와 권리의 주장은 “제국주의자의 음모”로, 전통적 가치의 표출은 “착취계급의 봉건적 유습”으로, 동정심 따위 감정은 불순한 “부르주아 인도주의”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이분법과 흑백논리로 세뇌된 “혁명군중”이 없었다면, 문혁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
◇ 인민일보 “우귀사신(牛鬼蛇神)을 모두 쓸어버려라!”
1966년 5월 26일 베이징 대학에 마오쩌둥이 극찬한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가 나붙은 후, 중국의 대학가 및 중고교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 이어 1966년 6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1면 톱에 실린 “우귀사신(牛鬼蛇神, 반혁명분자의 폄칭)을 모두 쓸어버리라!”는 제명의 사설은 문혁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고조(高潮)가 이제 세계 인구 4분의 1의 사회주의 중국에서 흥기하고 있다!”는 격앙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사설은 공·농·병 “수억 명의 혁명적 군중을” 향해 “마오쩌둥 사상을 무기삼아 사상문화의 진지에 똬리 튼 다수의 우귀사신을 쓸어버릴 것”을 촉구한다. “혁명의 근본 문제는 정권의 문제”이며, “이데올로기, 종교, 예술, 법률, 정권” 등 이른바 상부구조에서 핵심은 바로 정권(政權)이라 규정하면서 사설은 “정권을 얻으면 일체를 얻고, 정권을 잃으면 일체를 상실한다”며 혁명군중의 총궐기를 촉구했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 제 1면 사설. “일체의 우귀사신을 쓸어버리자!”>
1965년 겨울까지만 해도 ‘인민일보’의 편집진은 “백가쟁명 백화제방”을 부르짖으며 사상의 다양성과 학술논쟁의 중립성을 옹호하던 베이징 시장 펑전의 지휘를 따르고 있었다. 그해 봄 펑전이 축출된 후 ‘인민일보’의 편집권은 마오쩌둥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였다. 날마다 모든 지면엔 마오쩌둥을 보위하고 칭송하고 절대시하는 인격숭배의 기사로 도배되었다. ‘인민일보’는 마오의, 마오를 위한, 마오의 기관지로 변질되었다. 1966년 6월 2일자부터 매일같이 ‘인민일보’ 제1면 우측 맨 위의 작은 박스에 “마오쩌둥 어록”이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하루도 끊임없이 마오 사후 1년 반이나 지난 1978년 3월 25일까지 지속됐을 정도였다.
<1966년 6월 2일자부터 1978년 3월 25일까지 “인민일보”는 우측 상단에 매일 마오쩌둥 어록을 게재했다.>
류샤오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혁명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마오쩌둥사상을 보위하는 대규모의계급투쟁이며 체제전쟁임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50일 동안 류샤오치는 국가원수로서 문화혁명을 총지휘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베이징을 떠나 있던 마오쩌둥은 비밀 채널을 통해 날마다 베이징의 상황을 보고 받고만 있었다. 게릴라 전술의 마스터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등 당권파를 몰아내기 위해 “편 가르기”와 “좌우 뒤집기”의 전술을 구사한다.
◇ 류사오치, 폭력 행위에 강경 대처
1966년 6월 초, 베이징의 대학가와 중고교는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사회 곳곳에 암약하는 자산계급 반혁명세력과 일대의 계급투쟁을 치러야만 하는 전시상황이 펼쳐졌다.
6월 중순, 중공중앙은 “문화혁명의 철저한 이행과 교육제도의 철저한 개혁을 위해 마오쩌둥의 지시와 군중의 요구에 따라” 신입생의 선발을 반년 늦추는 조치까지 취한다. 정규 과정이 마비된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는 혁명의 “난투난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급기야 6월 18일 베이징 대학에서 과격분자들의 폭력행위가 터져 나왔다.
류샤오치는 한시바삐 문혁의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개혁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미 경제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생산량은 목표치 미달이었고, 산업재해는 증가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대규모 공작조의 파견밖엔 없었다. 당시 중공중앙의 당권파들은 1957-59 반우파투쟁 때처럼 중공중앙이 대규모의 정치 캠페인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공작조는 캠퍼스에서 자행되는 “난투난동”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른바 반간요(反干擾, 소요행위 반대)가 공작조의 기본노선이 되었다.
◇ 마오 "류사오치가 혁명 군중을 억압했다"
1966년 6월 9일, 류샤오치의 지시에 따라 513명의 공작조가 칭화대학 캠퍼스에 진입했다. 당시 칭화대학엔 이미 문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캠퍼스는 온통 대자보 홍수였다. 주로 칭화대학 당위(黨委, 공산당위원회)의 부패를 폭로하고 교수들의 죄행을 지적하는 내용이 주였다. 베이징 시위원회를 비판하는 대자보도 있었으며, 그해 봄 파면되고 추락한 펑·루·뤄·양(彭陸羅楊) 네 명의 반혁명분자들을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베이징대학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칭화대학의 당서기 겸 총장 장난상(蔣南翔, 1913-1988)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수정주의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칭화대학의 당위원회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비판을 제약했고, 격분한 학생들은 공격의 수위를 높여만 갔다.
1966넌 6-7월 류샤오치의 특명을 받은 공작조는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1957-59년의 “반우파투쟁”을 재현한다. 공작조는 교수 및 학생 중에서 과격분자들을 색출해서 반혁명 우파의 멍에를 씌웠다. 공작조는 질서를 어기지 않는 합법적 권력투쟁을 실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과격분자들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그해 6-7월,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공작조는 무려 700여 명의 반혁명분자를 색출했다. 공작조의 취조에 못이긴 자공과(自控科)의 젊은 교수 스밍위안(史明遠)은 압박을 못 이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칭화대학의 학생들은 더욱 강경한 노선을 취한다. 마침내 공작조와 과격분자들의 갈등은 격렬한 내부의 투쟁으로 비화되는데….
7월 중순 마침내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곧 바로 “혁명 군중을 억압한” 류샤오치를 문책하기 시작한다. 류샤오치는 혁명군중을 억압한 반동분자로 몰릴 위기에 봉착했다. 당권파와 혁명군중을 분열시킨 후, 순식간에 공수를 뒤바꾸는 마오의 “편 가르기”와 “좌우 뒤집기” 전술이었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