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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 이야기5/ 청룡영화상 역사 신성일 별세 김지미 인터뷰 송해 이야기

상림은내고향 2019. 12. 20. 17:57

1963년 제1회 청룡상 시상식




1965년 제3회 청룡상



1970 제7회 남자 인기상



1970 제7회 청룡상 여자 인기상



1970 제7회 청룡상



1973년 제10회 청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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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4 연합뉴스

영화계 큰 별이 지다..'국민배우' 신성일 별세(종합)

 

강신성일 '손가락 하트'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끝)

 

강신성일 '손가락 하트'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김승욱 기자 =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밝게 빛난 '별'이 안식에 들었다.

 

'국민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30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 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끝내 숨을 거뒀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고(故)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사용했으며, 이후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김승호 주연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을 남기며 독보적인 스타 자리에 올랐다.

 

출연작품 편수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레드카펫 밟는 강신성일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끝)

레드카펫 밟는 강신성일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아울러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강신성일 '신사의 품격'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끝)

강신성일 '신사의 품격' (부산=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강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2018.10.4 scape@yna.co.kr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며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려졌다. ☎ 02-3010-2000(대표번호)

kind3@yna.co.kr

 

 

밝은모습의 신성일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배우 신성일이 18일 오후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한국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申)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17.11.18       jin90@yna.co.kr  (끝)

밝은모습의 신성일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배우 신성일이 18일 오후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한국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申)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17.11.18 jin90@yna.co.kr

 

 

배우 신성일(강신성일)이 4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 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새벽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끝내 숨을 거뒀다.



 

고인의 젊은시절./온라인커뮤니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고인은 1937년 경북 대구 태생으로 본명은 강신영이다. 도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경북중을 거쳐 경북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면서 고교 졸업후 상경해 호떡장사 등으로 학비를 벌며 서울대 입학을 노렸지만 실패한 후 배우의 꿈을 꾸게 된다.

어렵게 연기학원을 다니며 배우 데뷔를 노리던 중 1957년 당시 최고의 영화제작사였던 신필림의 신인연기자 공모에서 2640 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이후 신필름의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을 담고 신성일(申星一)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본명과 예명을 합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고인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후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청춘 멜로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국민배우 지위를 누렸다. 고인은 한동안 대한민국 대표 미남배우로 군림하며 ‘세기의 미남’으로 불린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과 비교돼 ‘한국의 알랭 드롱’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고인의 대표작 ‘맨발의 청춘’ 포스터. 고인은 이 영화에서 일생의 짝이 될 엄앵란과 연기했다./조선DB

 

실제 고인이 남자주연을 맡은 횟수만 약 510회로 이는 광복 이후로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전성기 시절 한 해 동안 65편이나 주연으로 출연한 적도 있었다. 1960년대 초 고인의 출현으로 한국 영화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사랑, 캠퍼스, 뒷골목 건달 이야기 등을 다룬 ‘청춘물’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단 18일 만에 만든 맨발의 청춘(1964년 개봉)은 당시 관객 동원 23만명이라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안개' '만추'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길소뜸' 등이 고인의 대표작이다. 전성기 고인이 출연했던 영화는 대부분 흥행했고 주제가도 덩달아 히트곡이 됐다. '하숙생' '동백아가씨' '별들의 고향'과 같은 곡이 유명하다.



 

  고인이 1980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연합뉴스


고인은 전성기였던 1964년 당대의 톱스타 엄앵란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결혼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를 비롯해 ‘아낌없이 주련다’ ‘청춘교실’ ‘새엄마’ 등 9~10편의 영화에서 상대역은 아니었지만 호흡을 맞췄던 한 살 연상의 엄앵란과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작품은 ‘배신’이었다. 키스신 촬영에서 엄앵란에게 실제로 입을 맞춰 자신의 마음을 처음 알렸던 그는 이후 촬영 도중 벌어진 화약 폭발 사고로 얼굴을 다친 엄앵란을 극진히 간호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하객과 모여든 일반 시민의 수가 3400여명에 달했고, 초청장이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되는가 하면 결혼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호텔 측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결혼식은 당시 외신에도 보도됐으며 지금까지도 ‘세기의 결혼식’으로 회자되고 있다.

고인은 정치활동도 했다. 1978년 제10대 서울특별시 용산·마포 중선거구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박경원 전 내무부 장관의 특별보좌역으로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2000년 대한민국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돼 4년간 활동했다. 2001년에는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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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2011년 자서전 출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인은 옥고도 치렀다. 국회의원이던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옥외 광고물 업체 수의계약과 관련해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2005년에 징역 5년에 추징금 1억 8700만원을 선고받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됐다. 2007년 특별사면됐다.

고인은 2011년 본인의 불륜 관계를 담은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를 출간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불륜을 저지른 유명인의 실명을 공개해 비난에 휩싸였다. 고인은 이후 불륜 폭로 발언이 자서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부인 엄앵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고인은 최근까지도 투병중인 몸을 이끌고 대중앞에 모습을 보였다. 올해 3월 문화방송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해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을 다독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드러냈다. 이어 올해 10월에는 건강 악화 속에서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는 등 끝까지 영화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고인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20대 국회 강석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고인의 조카다.





  

고인이 올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고 있다./OSEN

조선일보 김문관 기자




11.05 원조 꽃미남, 그의 이름은 '靑春'이었다

신성일 별세, 빈소에 조문 줄이어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의 신성일 빈소에는 동료 영화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60~70년대 활동했던 원로 영화감독과 배우의 조문이 4일 오후 이어졌다. '밀회' 등 신성일과 20편이 넘는 작품을 함께한 정진우 감독은 "배우 학원에서 만난 신성일의 눈빛에서 불량스러움을 봤고, 젊은이의 고뇌를 그릴 최적의 얼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며 "당시 그는 완벽한 흥행 보증 수표이자 영화 감독에게는 가장 쓸모있는 배우였다"고 했다.

이날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배우 최불암은 "우리 또래 연기자로 더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반짝 별이 사라졌다"며 "생전 농담을 아주 좋아하고 솔직해 가끔 나보다 철이 없어 보일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배우 이순재는 "1960년대 영화 발전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며 "그가 남긴 자료가 영화를 공부하는 후학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4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신성일. /송정헌 기자

 

 

후배 영화인들은 '스타들의 스타'였던 그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온 배우 김수미는 "얼마 전 같이 찍은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를 내 유작으로 하려 했는데, 선생님의 유작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며 "불과 한 달 전 통화할 때 '암을 이겨낼 수 있다'며 자신 있어 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배우 안성기는 "1960~70년대 수많은 스타가 있었지만 신성일이라는 별빛을 따라갈 이는 없었다"며 "갑자기 떠나셔서 허망하다"고 말했다. 배우 박상원은 "배우가 스타라 불리며 대중의 주목받는 영광의 시대를 연 선배"라며 "추억이 있는 고향을 잃어버린 심정이다"고 했다.

1990년대까지 꾸준히 영화에 출연했던 신성일은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작품 활동을 거의 접었다. 2013년 18년 만에 영화 '야관문'에 주연으로 출연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거센 비난을 받으면서도 아내 엄앵란과 별거하는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난 사실을 떳떳이 공개하기도 했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소설가 김홍신은 "당시 성일이 형은 저와 함께 국회 회의 시작 전 도착해 끝나야만 일어나는 '국회 바보클럽' 일원으로 유명했다"며 "남한테 욕먹고 비난받을 것을 알면서도 바보처럼 자기 줏대를 꺾지 않는 이 시대의 걸물(傑物)이었다"고 했다.

신성일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다소 엇갈리지만, 그가 1960~7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별들의 고향'을 연출한 이장호 감독은 "신성일은 한국인이 한국 영화를 보게 만든 배우"라며 "외국 영화와 비교해서 한국 영화는 질적으로 뒤처진다 여겼던 당시 대학생들도 '신성일 나오는 영화는 봐야 한다'며 영화관을 찾았다"고 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성일 회고전을 열었는데, 작품이 500개가 넘어 선정하는 데 진땀을 뺐다"며 "전 세계 영화사에도 이런 기록은 없다"고 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화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신성일은 내년 이장호 감독과 안성기와 함께 영화 '소확행'을 제작할 예정이었다. 아내를 잃은 남자(안성기)와 옛날 물건에 집착하며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장인어른(신성일), 그리고 이와 반대로 디지털 세대를 사는 딸의 세대 갈등을 아내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AI 프로그램을 통해 풀어간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복수하고 잔인하게 서로 죽이는 막장 영화가 아니라 따뜻한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기획을 시작했지만, 결국 출연하지 못하게 됐다.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를 보고 각색까지 참여하셨다"며 "근래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동안에도 영화 얘기만 계속했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열정적이었다"고 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6일 오전 11시. 유족으로 아내 엄앵란, 아들 석현·경아·수화씨가 있다. (02)3010-2230








조선일보  표태준 기자  이영빈 기자

 

 

2019.10.07 

한국의 여배우 김지미 - "누구도 날 능가하지 못해" 이 오기가 60년 영화인생의 힘!

'김지미' 한국 영화 100년과 함께한 여걸
'김지미를 아시나요' 토크쇼 위해 부산국제영화제 찾아 팬들 만나
"요즘 한국영화 예술성 떨어져… 오락·폭력에만 치우쳐 안타깝다
영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 돼야"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안 지고 살아남아서 오늘의 김지미가 있지. 누구도 나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 오기, 그 자존심 하나로 여기까지 버틴 거야."

한국 영화의 영원한 뮤즈, 김지미(79)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클라이맥스였다. 여든을 앞둔 배우는 본능적으로 기승전결 흐름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약속 시간 10분 전 도착해 카페라테 한 모금을 마셨고, 흡연실로 들어가 구두를 벗고 느긋이 담배 한 개비를 태운 다음, 몸을 털고 나와 꼿꼿이 의자에 앉았다. 질문 들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그는 "올해는 유독 좀 쓸쓸한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부산영화제에 오면 동년배들끼리 뭉쳤는데, 이젠 다들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건강 문제 때문에 영화제를 못 오니까. 많이 낯설지."

 

김지미는 “더는 영화 안 한다”고 못 박았다. “감각이 깨어 있어야 해요. 우리 시대 감각으론 젊은 세대 호응을 못 받아, 나는 당당한 선배로 머물다 갈 거야.”

 

김지미는 “더는 영화 안 한다”고 못 박았다. “감각이 깨어 있어야 해요. 우리 시대 감각으론 젊은 세대 호응을 못 받아, 나는 당당한 선배로 머물다 갈 거야.” /김동환 기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100년을 기념해 준비한 관객과의 토크쇼 '김지미를 아시나요'를 위해 부산을 찾은 그다. 지난 4일부터 배우 안성기·전도연, 감독 정진우 등과 부산 남포동 야외 무대에서 대담을 나눴다. 100년을 맞은 오늘의 한국 영화를 바라보는 소감이 어떨까. 김지미는 기자에게 오히려 도발적으로 물었다.

 

"요즘 나오는 영화가 예술적이라고 봐요?" 그는 이어서 "갈수록 오락·폭력 영화로 가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다시 인식하고 의미를 찾는데, 요즘 그런 느낌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흥미만 있어요. 너무 치우치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독립영화들에서 가끔 작지만 힘 있는 영화들이 나오는데 그건 고맙게 생각하거든. 그 외 투자회사들이 만드는 건 이익을 위해서이지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하는 건 아니라고. 능력 있는 후배들이 거기에 말려들면 그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김지미는 배우를 열일곱에 시작했다. 본명은 김명자. 서울 덕성여고 재학 당시 작은엄마가 운영하는 명동 배꽃다방에 들렀다 김기영 감독의 눈에 들었다. "그땐 배우가 뭔지 털끝만큼도 몰랐어." '지미'라는 예명은 김기영 감독과 투자사에서 지어줬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이름이었다. 1957년 '황혼 열차'로 데뷔, 7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영화사 '지미 필름'을 세워 영화 제작도 했다. 남자들이 쥐고 흔드는 충무로에서 살아남은 독보적인 여성 제작자였다. 1990년대엔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았지만 2000년 6월 영화인들과의 갈등 끝에 이사장직을 내려놓고 미국 LA로 떠났다. 김지미는 "영화진흥위원회라는 게 영화 발전을 위해 기금을 써야 하는데 어느 때부터 변색했다고 느꼈다.

성인영화 전용관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관뒀다. 여기 있다가는 사람 망가지겠구나 싶었다"고 했다. 후회는 없다. "예쁜 여배우로만 남지 않으려고 이런 짓 저런 짓 다 해보고 산 거니까."

 

지난 5일 오후 부산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토크쇼에서 배우 전도연(오른쪽)과 이야기 나누는 김지미. 아래는 1965년 작 ‘불나비’의 한 장면.   
지난 5일 오후 부산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토크쇼에서 배우 전도연(오른쪽)과 이야기 나누는 김지미. 아래는 1965년 작 ‘불나비’의 한 장면. /김동환 기자·한국영상자료원

 

김지미는 "영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이 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나, 제대로 돌아가고 있나, (현상) 이면엔 뭐가 있나. 그런 걸 알려줘야 해. (제작자로) '티켓'(감독 임권택)을 만든 것도 그래서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할 만큼 나라가 성장했는데, 한쪽에선 다방 레지들이 티켓을 끊고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어요. 말이 돼? 그런데 등급심의위원회에서 허가를 안 내줬어. 화나서 '다 불 질러버리고 없던 일로 하자'니까 그제야 문광부에서 쫓아와서 말리더라고. 결국 몇 장면 삭제하고 개봉했지."


미련은 없다. 허투루 명예를 팔지 않고 63년 건너왔다고 자부한다. "우리가 해방되고 6·25사변 겪고 얼마나 고생했어요. 그래도 정신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성장한 것이거든. 명예 를, 인기를 헛되이 팔지 말라, 그 얘기는 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까. 김지미가 웃었다. "안 해.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어. 내 성격에 그게 될까 모르겠지만." 훗날 묘비명으로 새기고 싶은 문구가 혹시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거침없이 답했다. "한 배우로서, 한 여자로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왔다!" 김지미는 끝까지 클라이맥스였다.
 

조선일보    부산=황지윤 기자        


 

  

2019.12.19   딴따라 송해, 끝나지 않는 노래

박정호 논설위원 

 

70년이 흘러가도 돌아갈 수 없구나~ 세월아 가지 말고 거기 섯거라.’ 

92세 최고령 음반 신기록
북녘 고향에 가고픈 마음
차별·구분 없는 세상 꿈꿔
스산한 세밑 달래주는 듯


올 아흔둘인 국민MC 송해가 지난달 발표한 새 노래 ‘내 고향 갈 때까지’의 일부다. 송씨는 지난해 7월 내놓은 앨범 ‘딴따라’에 이어 자신의 국내 최고령 음반 취입 기록을 다시 썼다. 노래를 들어봤다.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송씨는 나이를 잊은 듯 한 마디 한 마디 구성진 가락을 풀어놓는다. 가사는 평이하고 리듬도 화려하지 않지만 듣는 이를 아련한 그곳으로 이끌어간다.
 
‘내 고향 갈 때까지’는 1987년 선보인 송해의 데뷔곡 ‘망향가’와 대구(對句)를 이룬다. 이른바 ‘38따라지’ 세대인 송씨는 고향(황해도 재령)을 떠난 아픔과 그곳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목메어 운다. ‘고향은 먼데 찬바람 불어오면 폭풍이 몰아치면 마음도 업니다.’ 코미디언·사회자로 주로 활동하고, 또 남의 히트곡만 불러온 송씨가 정식 가수로 일어선 순간이었다. 송씨는 그해 ‘백마야 우지 마라’ ‘애수의 소야곡’ 등 1세대 대중가요를 모아 ‘송해 옛 노래 1집’ 음반을 생애 처음으로 냈다. 만 60세 때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과 동의어다. 그가 없는 ‘전국노래자랑’은 상상하기 어렵다. 88년 첫 마이크를 잡은 이후 지금까지 32년째 방방곡곡을 돌며 동네 명물들이 맘껏 끼를 발산하도록 했다. 코흘리개 꼬맹이부터 머리 성성한 할아버지까지, 학교 못 다닌 촌부부터 박사 학위 빛나는 교수까지 그 앞에선 누구나 무장해제가 됐다. 남녀·재산·직업·신분을 뛰어넘는 한바탕 무대가 차려졌다. 출연자가 누구든, 그들의 몸과 마음에 자신을 맞추는 송씨의 진행 솜씨 덕분이다. 




 

한국 연예계의 산증인 송해. 1950년 황해도 고향을 떠나 서해 바닷길을 따라 피난을 내려오면서 본명 송복희를 잊고 송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중앙포토]

 한국 연예계의 산증인 송해. 1950년 황해도 고향을 떠나 서해 바닷길을 따라 피난을 내려오면서 본명 송복희를 잊고 송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중앙포토]


송해 하면 예능프로 MC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그의 출발점은 가수다. 어려서부터 흥얼대기를 좋아한 그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황해도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당시 북한에 있던 유일한 음악학교로,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양성학교다. 현란한 기교보다 배에서 우러나오는 통목소리가 특징인 그는 그때 노래의 기초를 닦았다. 1950년 12월 혈혈단신 부산에 내려와 국군 통신병으로 복무했고, 3군 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반면 ‘가수’ 송해는 더 이상 도드라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전역 후 55년 창공악극단에 들어가며 만능 엔터테이너 길을 걷었다. 유랑극단 생활을 하며 연기·사회·노래 세 가지를 병행했다. 단원 중 누구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를 채워야 했다. 지금도 옛 대중가요 수백 곡을 암기해 부르는, 노래방에 버금가는 레퍼토리를 갖췄지만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곡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서울 종로 송해길에 있는 노래비.

서울 종로 송해길에 있는 노래비.


하지만 어떤가. 대신 우리는 ‘전국노래자랑’의 송해를 얻게 됐다. 4년 전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를 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오민석씨는 “노래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인생 3할은 노래였다”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10할이 노래일지도 모른다. 노래자랑 무대에 오른 풋내기 가수, 그들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 관객을 아우르는 그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가 고단한 세상을 웃음으로 넘기는 큰 노래일 수 있다. 
 
오씨는 송해의 가장 큰 재산으로 사람을 꼽는다. 송해만한 사람 부자가 없을 것으로 본다. 행사장에서 만난 숱한 장삼이사(張三李四)를 말하는 게 아니다. 위·아래 따지지 않는 공평한 마음씨 덕분에 그에게는 안티 팬이 거의 없다. 심지어 구순 할배가 “귀엽다”고 한다. 이산·전쟁·가난 등을 두루 겪으며 터득한 지혜랄까. 분열과 대립이 들끓는 요즘, 차별과 구분을 무너뜨리는 그의 소통 방식이 빛나는 지점이다.
 
스산한 세밑이다. 아쉬움이 밀려든다. 헤어진 이들도 생각난다. 송해의 숨겨진 일화 하나. 그는 87년 뺑소니 사고로 금쪽같은 아들을 잃었다. 주변에서 가해자를 찾으라고 했지만 그는 추적을 포기했다. “트럭 운전수니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겠지. 그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 가족은 무슨 수로 생계를 유지하겠어”라고 했다. 그는 아픔을 딛고 노래자랑 마이크를 잡았다. 아들이 남긴 선물로 여겼다. 지금 어디선가 송씨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 내 곁에 있으니 괜찮아. 이만하면 괜찮아’(‘내 인생 딩동댕’)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한 인생. 나는 나는 딴따라.’(‘딴따라’)  
중앙일보  박정호 논설위원